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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음 제시문을 읽고 질문에 답하시오.

<가> 다른 문화에 대한 수년간의 경험은 복합적 사회가 시간을 구성하는 방식에는 적어도 두 가지가 있다는 사실을 밝혀주었다. 북유럽에서처럼 일을 각각 분리된 항목으로 나누어 ‘한 번에 한 가지씩’ 하도록 스케줄을 짜는 방식과 몇 가지 일을 한꺼번에 하는 지중해식 모델에 따른 방식이다. 이 두 체계는 논리적으로나 경험적으로나 완전히 구별되며 물과 기름처럼 서로 섞이지 않는다. 또한 모두 약점과 강점을 각각 지니고 있다. 나는 한 번에 많은 일을 하는 것을 폴리크로닉 타임(다원적 시간, Polychronic Time)으로, 한 번에 한 가지씩 하는 북유럽의 체계를 모노크로닉 타임(단일 시간, Monochronic Time)으로 명명했다.
폴리크로닉 타임은 미리 정해진 스케줄을 고수하는 것보다는 인간의 상호관계와 상호교류, 완성된 업무처리를 중시한다. 약속은 그다지 중요하게 여겨지지 않기 때문에 깨지는 경우가 많다. 폴리크로닉 타임은 모노크로닉 타임에 비해 실체가 없는 것으로 여겨진다. 폴리크로닉한 민족에게는 시간이 ‘소비(낭비)’되는 것으로 느껴지는 경우가 거의 없으며, 시간은 직선적인 끈이나 길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점으로 간주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그 점은 흔히 신성한 점이 된다. …<중략>…
북아메리카 사람들이 라틴 아메리카나 중동에 가면 종종 심리적 스트레스를 받을 수 있다. 지중해나 아랍 나라들의 시장, 상점, 수크(아라비아의 시장)에서 폴리크로닉한 환경에 들어가게 되면 한꺼번에 모든 손님을 상대하고자 하는 단 한 명의 점원의 주의를 끌고자 앞다투는 사람들로 둘러싸이게 된다. 거기에는 다음 차례가 누군지 하는 질서도, 마지막 차례는 누가 될지 하는 줄이나 순번도 찾아볼 수 없다. 북유럽인이나 미국인에게 그 장면은 혼란과 소동으로 비친다.
다른 맥락에서 지중해 국가들의 정부관료체제에서도 동일한 패턴이 작용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정부 고관 집무실의 전형적인 배치는 사적(私的)인 방의 바깥쪽에 넓은 리셉션 공간(손님 맞이용 공간)이 있는 경우가 많은데, 거기에서는 몇 그룹의 사람들이 기다리면서 장관이나 그 보좌관들을 만날 수 있다. 이 관리들은 이 반쯤은 공적인 장소에서 이 그룹에서 저 그룹으로 옮겨다니며 차례로 상담하면서 대부분의 업무를 처리한다. 반쯤은 사적인 이런 일처리는 시간이 얼마 걸리지 않으며 사람들은 상담을 원하는 장관이나 그 밖의 중요한 인물들을 직접 만난다는 느낌을 갖게 된다. 일단 이러한 패턴에 익숙해진 사람은 밀실(내실)에서 이루어지는 일련의 사적인 회담이 갖는 결점을 보완하는 이점이 많음을 분명히 알 수 있다. …<중략>…
그와는 대조적으로 서구세계에 사는 사람들은 모노크로닉 타임의 철통 같은 수중에서 거의 빠져나오지 못한 채 생활한다. 시간은 실존 그 자체와 함께 너무나 철저하게 짜여 있어서 우리는 시간이 숱한 미묘한 방식으로 타인과의 관계를 틀짓는 것을 포함하여 우리가 행동하는 모든 일을 어느 정도로 결정하고 조정하는지 거의 의식조차도 못한다. 사실 사회생활과 직장생활, 그리고 성생활조차 대개 스케줄에 의해 지배된다. 스케줄을 짜는 것에 의해 우리는 단편화된다. 이는 한 번에 한 가지 일에 집중하는 것을 가능하게 해 주지만 또한 맥락의 파악능력을 감소시키기도 한다.[사태를 전체적으로 보는 것을 방해한다.] 스케줄을 짠다는 성질 그 자체가 지각될 수 있는 것과 업는 것, 계획에 집어넣을 것과 빼버릴 것을 선택하는 일이고 일정 기간 내에 한정된 수의 일만을 허용하는 것이다. 스케줄에 넣는 것 자체가 사람과 일의 기능 모두에 대한 우선순위를 정하는 체계를 구성한다. 중요한 일은 우선적으로 취해져서 가장 많은 시간이 할당되고 중요하지 않은 일은 끝까지 남겨지거나 시간이 모자라면 생략된다.[중요하지 않은 것은 마지막으로 돌려지고, 시간이 없을 때에는 무시된다.]
모노크로닉 타임은 또한 실질적인 것이다. 우리는 시간에 대하여 절약한다, 쓴다, 허비[낭비]한다, 잃다, 애써 낸다, 기어간다, 깬다, 죽인다, 얼마 남지 않았다 등으로 말한다. 이러한 비유적 표현들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신중하게 고려해 봐야 한다. 모노크로닉 타임에 의한 스케줄은 생활에 질서를 부여하는 분류체계로서 이용된다. 그 규칙들은 탄생과 죽음을 제외한 모든 일에 적용된다. 스케줄 또는 모노크로닉 타임 체계 같은 것이 아니었다면 우리의 산업문명이 오늘날처럼 발달될 수 있었을지 의심스럽다는 점도 말해두지 않을 수 없다.
또 다른 결과들도 있다. 모노크로닉 타임은 한두 사람을 집단으로부터 분리시키고 다른 한 사람, 많아 봐야 두세 사람과의 관계를 강화시킨다. 이런 의미에서 모노크로닉 타임은 프라이버시를 보장하는 문이 달린 방과 같다. 유일한 문제는 스케줄에 따라 할당된 15분, 한 시간, 하루, 일주일 등등이 지나면 그 ‘방’을 비우고 다음 사람에게 자리를 내줘야 한다는 점이다. 다음 사람의 시간을 침범하여 비켜주지 않는 것은 극도의 자기중심주의나 나르시시즘의 표시일 뿐만 아니라 무례한 것이기도 하다.
모노크로닉 타임은 독단적이고 강제적이며, 말하자면 습득된 것이다. 그것은 아주 철저하게 습득되어 우리 문화 속에 완전히 통합되어 있기 때문에 생활을 구성하는 자연스럽고 논리적인 유일한 방식인 것처럼 다루어진다. 그러나 그것은 인간의 생물학적 리듬이나 창조적인 욕구에 내재하는 것이 아닐 뿐만 아니라 자연 속에 존재하는 것도 아니다. …<중략>…
사회조직을 생각할 때 이론적으로 폴리크로닉 타임은 훨씬 강한 통제의 집중화가 요구되지만 구조적으로는 오히려 얕고 단순한 것이 특징이다. 그 이유는 지도자가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항상 파악하고 있는 많은 사람들을 끊임없이 대하고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아랍의 농부는 자기 수장(首長)을 언제나 만날 수 있다. 사람과 수장, 사람과 신 사이에 어떠한 매개자도 없다. 정보의 흐름과 끊임없이 정보를 얻고 싶다는 사람들의 요구는 상호보완적이다. 폴리크로닉한 민족은 서로의 일에 깊이 개입하고 있기 때문에 접촉을 유지하는 데 강박관념을 가진다.[항상 접촉을 유지하지 않으면 불안을 느낀다.] 따라서 맥락 없는 단편적인 이야기라도 모아서 기억한다. 상대방에 관한 지식은 정말 놀라울 정도이다. 사람들간의 개입이야말로 그들 존재의 핵심이 된다.
이 점은 관료기구에서도 마찬가지다. 예컨대 관료 기구의 대표 임명이나 여러 관료적 수준의 교섭에는 많은 양의 서류가 필요 없다. 폴리크로닉한 유형의 관료기구가 지닌 주요한 결점은 기능이 증가함에 따라 소규모의 관료기구가 늘어난다는 것이다. 그것들은 실제적으로 외부인의 문제를 다루기 위해서 설치된 것이 아니다. 사실 라틴 아메리카나 지중해 나라들을 여행하거나 거기에 상주하는 외부인들은 관료체제가 일반적으로 번거롭고 마이동풍[답답할 정도로 굼뜨다]임을 겪었을 것이다. 폴리크로닉한 나라들에서 일을 진행시키려면 내부인이든지 아니면 ‘아는 사람’이 있어야 한다. 모든 관료체제가 그렇지만 특히 폴리크로닉한 유형의 관료체제는 내향적, 다시 말해서 배타적인 경향이 특히 강하다.
또한 행정이나 관리의 시행에 관해서도 이 두 시간체계에서는 흥미로운 차이점을 볼 수 있다. 중동이나 라틴 아메리카의 폴리크로닉한 민족들의 행정과 관리는 일종의 업무분석이다. 즉 행정이란 각 부하의 업무를 파악하고 그것을 실행시키는 작업활동을 확인하는 것으로 이루어진다. 그리고 나서 그 업무에 명칭을 부여하고 행정 책임자가 각 기능의 시행 여부를 확인할 수 있도록 자세히 만든 차트를 수시로 점검한다. 그런 방식으로 각 개인에 대한 완전한 관리가 이루어질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각 활동이 실제로 어떻게 그리고 언제 시행되는지에 관한 스케줄은 담당자에게 맡겨진다. 상관이 부하의 일에 관한 스케줄에 간여하는 것은 부하의 개성에 대한 전제적(專制的)인 침해, 즉 자아의 침해로 간주될 수 있다.
그와는 대조적으로 모노크로닉 타임의 사람들은 작업활동을 스케줄로 정하고 업무의 각 부분에 대한 분석은 개인에게 맡겨진다. 폴리크로닉 유형의 분석은, 설사 기술적 성격의 일이더라도 부하에게 자신이 맡은 업무가 하나의 시스템일 뿐만 아니라 보다 큰 시스템의 부분임을 끊임없이 상기시킨다. 그에 대해 모노크로닉 유형의 사람들은 단편화된 사고 때문에 자신의 작업활동을 보다 큰 전체의 부분이라는 맥락에서 생각하지 않는 경향이 있다. 그렇다고 그들이 ‘조직’을 의식하지 않는다는 의미는 절대로 아니다. 다만 업무 그 자체나 조직의 목표를 하나의 전체로서 파악하는 일이 드물다는 뜻이다.
                                                                                                               ― 에드워드 T. 홀, <생명의 춤>

<나> 우리는 시간의 추이라는 기반에 너무나 매몰되어 살아 왔다. 그것은 어쩌면 생각할 수 있는 모든 판단 기준, 변화를 보이지 않는 내재물, 매일 매일과 계절의 우주적인 순환, 개별적인 싸움과 자연재해, 탄생에 뒤이은 성장에서 노쇠, 죽음, 부패로 전력 질주하는 것처럼 보이는 생명의 정향성 등에 의해 특징지어지는 기반이다. 문화의 차이에 따라 다양한 해석이 떠들썩하게 나오고 있는 착종 상태 속에서 유대․기독교 문화는 역사의 본질에 관한 근본적인 이분법의 양극단을 오가면서 균형을 취함으로써 시간을 이해하려고 분투해 왔다. 그러한 전통 문화 중에서 우리는 어느 한쪽에만 주목해 왔다. 각각이 역사를 어떻게 이해하는가라는 논리 및 심리에 있어서 피하기 힘든 테마를 맡고 있기 때문에 그것은 필연적이었다. 그 테마란 시간의 매순간을 선으로 긋기 위한 독자성과 명료함을 초래하는 기반을 확립하기 위한 합법성을 동시에 채우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이분법의 한 끝에서, 내가 ‘시간의 화살’이라고 부르는 측에서는 역사란 반복되지 않는 사태의 일방향성의 연쇄이다. 각각의 매순간은 시간의 흐름 속에서 독자적인 지위를 차지하고 있으며, 모든 순간을 올바른 순서로 연결하면 관련된 사건이 한 방향으로 흘러가 하나의 이야기가 말해진다.
이분법의 다른 끝에서 내가 ‘시간의 순환’라고 부르는 측에서는 사태란 우발적인 역사에 인과적인 충격을 미치는 개별적인 사건으로서는 어떠한 의미도 갖고 있지 않다. 근본적인 상태는 시간에 내재 하며, 항상 존재하지만 결코 변하지 않는다. 외관상의 운동은 반복되는 순환의 일부이며, 다양한 과거가 미래에 다시 현실의 것으로서 반복된다. 그곳에서는 시간은 방향성을 갖고 있지 않다.
시간의 화살이란 성서에서 말해지는 역사에 관한 최상의 은유이다. 신은 단 한 번에 지구를 창조하고, 단 한 척의 배에 올라 단 한 번의 홍수를 극복하라고 노아에 명하며, 지금밖에는 없는 순간에 모세에게 십계명을 전했고,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 위에서 죽게 하고, 3일 후에 부활시키기 위해서 그 분을 한정된 시대의 특정 장소에 보냈다. 많은 학자들은 시간의 화살이 유대교 사상이 가져온 개념 중에서 가장 중요하고도 특유한 것이라고 단정해 왔다. 왜냐하면 시대의 선후와 무관하게, 유대교 사상 외의 사상 체계의 대부분은 직선적인 역사의 연쇄보다도 시간의 순환의 내재성을 중시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성서에도 시간의 순환이라는 저류(低流)가 있다. 일례로 이것은 <전도서>에 현저하게 나타나 있다. 여기에는 자연계의 상태에 내재하는 것과, 부와 힘의 허무함을 예시하기 위한 은유로서 태양과 물의 순환이 인용되어 있다. 부유한 자는 그를 둘러싼 세계 속에서는 타락할 수밖에 없다고, 너무도 허무한 것이라고 전도자는 말한다.
유대 기독교 문화의 일대 기록문서인 성서에서는 두 견해가 공존하고 있음이 뚜렷하게 나타나 있지만, 오늘날의 교양 있는 대부분의 서양인들은 시간의 화살이라는 견해에 친숙하기도 하며, 이것이 ‘표준적’이라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시간의 화살이라는 은유가 성서 그 자체를 지배하고 있으며, 이후 지배력을 증대해 왔을 뿐이다. 17세기 이후의 과학 혁명과 기술 혁명에 뒤따랐던 진보관이 그 은유를 특히 지지했기 때문이다. 리처드 모리스는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고대인들은 시간의 특질이 순환적이라고 믿고 있었다. … 한편으로 우리는 과거에서 미래로 향하여 계속 나아가는 것이 시간이라고 생각을 한다. … 시간이 직선적이라고 하는 사고방식은 서양사상에 깊은 영향을 미쳐 왔다. 이 개념이 없었다면 진보라는 관념을 생각해 내거나 우주나 생물의 진화에 관해 말하는 것은 어려웠을 것이다.”

시간의 화살이란 우리가 보통에 품고 있는 견해이라고 말하는 경우, 비가역적인 연쇄 속의 개별적인 순간은 명료함 자체의 전제 조건이라고 말하는 경우, 그것은 문화와 시간 모두에 속박되어 있는, 사물의 본질에 관한 사고방식에 대해 논하고 있다는 점이라는 것에 주의를 해 주었으면 한다. 근대에 있어서의 화살과 순환을 둘러싼 최대의 저작 <영원 회귀의 신화>에서 미르체아 엘리아데(Mircea Eliade,1907년 3월 9일 부카레스트 ~ 1986년 4월 22일 일리노이주 시카고)가 논하듯이, 대부분의 사람들은 역사를 통해서 시간이 순환한다는 견해에 사로잡혀 있기에 시간은 날아가 버리는 화살이라는 견해는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거나 가장 거대한 공포를 초래하는 원흉으로 간주하고 있었다. 대부분의 문화는 역사가 항구적인 안정을 구현하지 않는다는 사고방식이나, (전쟁이라는 행위로 치닫는) 인간이나 (큰 화재나 기아가 초래한 결과로서의) 자연현상이 시간의 본질을 반영하는 것이며, 축제나 의례에서 쫓아버리거나 위로를 얻을 수 있는 이상(異常)은 아닐지도 모른다는 사고방식에 대해 공포를 느껴왔다. 시간의 화살이라는 개념은 하나의 문화가 낳은 특이한 산물인데도 오늘날에는 전 세계에 퍼져 있으며, 적어도 숫자적․즉물적인 의미에서 두드러진 ‘성공’을 거두고 있다. “역사에서의 ‘비가역적’인 것과 ‘신기(新奇)’인 것에 대한 관심은 인간 생활에 있어서 최근의 발견이다. 그것과는 반대로 고대인들은 … 역사가 부과한, 모든 종류의 신기함과 비가역성으로부터 힘껏 자신의 몸을 지켰다.”
시간의 화살과 시간의 순환이라는 개념은 문화에 속박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복잡하게 뒤얽힌 다양한 태도를 정리해 넣어두기 위한 잡동사니 창고로서 단순화되어 있다는 것은 나도 알고 있다. 특히 엘리아데가 지적하듯이, 이러한 이분법의 양 극은 본질적으로 틀림없이 관련되어 있지만, 중대한 차이를 포함한 적어도 두 가지 관념이 합체되어 있다. 시간의 순환이라는 개념은 변화하지 않는 진정한 영속성이나 내적 구조를 가리키는 것이기도 하다면, 분리 가능한 사상(事象)이 빈틈없이 반복되는 주기성을 가리키는 것이기도 하다. 마찬가지로, 창조와 종말이라는 고정된 두 가지 시점들을 연결하는 단 한 번의 사건의 연쇄가 시간의 화살이라는 개념에 대한 고대 헤브루인의 견해인데, 이것은 내적인 방향성이라는 아득한 후세의 개념과도 아주 다른 것이다. 독자성과 방향성이라는 개념도 시간의 화살을 둘러싼 우리 현대인의 관념에 겹쳐져 있다. 그러나 그러한 것이 된 것은 각각 상이한 시대의, 더욱이 본질적으로 상이한 맥락에서였다.
시간의 화살과 시간의 순환은 바람직하고 ‘훌륭한’ 이분법이 된다. 왜냐하면 두 극을 차지하는 어떤 개념도 그 본질에서 말하면 역사를 이해하고 싶다고 바라는 서양인이라면 어떤 족이든 마음속에서 파고들지 않으면 안 될 정도의 지적인 (그리고 실제적인) 생활의 중심을 이루는 테마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시간의 화살이란 비가역적이고 개별적인 사건을 이해하는 것이며, 시간의 순환이란 시간을 초월한 순서와 법칙처럼 구조를 이해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에게는 두 가지 개념 모두가 필요하다. 
                                                                                     - 스티븐 제이 굴드, <시간의 화살, 시간의 순환>

<다> 불과 20년 사이에 컴퓨터는 우리 문화의 모든 곳에 파고들어 우리의 생활양식을 변화시켜 버렸다. 1990년이 되면 미국 전체 노동자의 50% 정도가 전자 단말기를 사용하게 될 것이다. 더욱이 사무실이나 공장, 학교의 약 3,800만 대의 작업 단말기가 온라인화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2000년까지는 약 3,400 만 가정이 홈 컴퓨터를 소유하게 되며, 그 밖에 700만대의 휴대용 단말기가 사용될 것으로 볼 수 있다. 컴퓨터는 아주 흔히 있는 것으로 급속히 될 것이며, 현대 생활의 곳곳에 파고들고 있다. 컴퓨터는 우리의 작업방식, 놀이방식, 의사소통이나 사교 방식을 바꾸며, 환경 자체, 그리고 환경과 인간의 관계를 바꾸고 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이것이 시간과 우리의 관계를 바꾸고 있다는 것이다.
컴퓨터는 시간에 대한 새로운 전망을 초래하며, 이와 동시에 새로운 미래관을 낳게 한다. 우리는 시계를 사용하여 시간을 재는 습관에 익숙해져 왔기 때문에, 우리의 마음은 지금까지와는 완전히 다른 시간계산법을 사용한다는 사고방식에 대해서는 당연하게 반발한다. 컴퓨터가 출현한지 아직 얼마 지나지 않은 현재에는 시계에서 컴퓨터로의 시간계산법의 변화의 영향을 완전하게 파악하는 것, 아니 그것을 상상하는 것조차도 곤란하지만, 이 새로운 시간계산의 독특한 특징을 잘 검토해 보면 향후 시간 의식에서 생겨나게 될 변화를 알 수 있는 실마리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우선 첫째로, 시계는 인간의 지각력과 관련되어 시간을 측정한다. 1시간, 1분 , 1초, 혹은 10분의 1초도 인간은 몸으로 느낄 수가 있다. 그러나 컴퓨터는 나노초를 기본적 시간계산 단위로 삼는 시간적 틀 속에서 작동한다. 나노초란 10억분의 1초이다. 이론적으로는 1나노초를 생각하거나 나노초 단위의 지속시간(duration)을 다루는 것도 가능하지만, 나노초를 체감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것은 인간이 시간과 관계하는 방법에 있어서 극히 현저하게 나타나는 전환점이다. 아직까지는 시간이 인간의 의식 영역을 넘는 속도에 기초하여 조직화되었던 적은 없었다.
우리가 5세대 컴퓨터나 6세대 컴퓨터의 시대에 진입하게 되면 이 새로운 시간관념은 여러 가지 문제를 일으키게 될 것이다. 21세기의 컴퓨터는 광범위한 활동에 관해서 다분히 나노초 단위로 의사결정을 할 수가 있을 것이다. 사회의 대부분의 의사결정이 인간의 의식 하에서 행해지게 되면, 시계로 측정되는 사회의 시간은 도움이 되지 않게 된다. 컴퓨터로 처리되는 안건은 우리가 절대로 체험할 수 없는 시간의 영역에 속한다. 새로운 “컴퓨터 시간”은 시간의 궁극적인 추상화를 나타내는 것이며, 시간이 인간의 체험과 자연의 리듬으로부터 완전하게 분리되었다고 이야기한다.
많은 사람들이 비디오 게임을 할 때 처음으로, 컴퓨터 시계와 시계의 시간의 차이를 경험한다. 사회학자 셰리 터클은 비디오 게임을 하는 사람들과 인터뷰를 했는데, 컴퓨터 게임의 매력으로 시간적 절박감, 긴장감을 거론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을 발견했다. 비디오 게임광이란 시계의 시간과 자신의 주관적 시간을 말살하고 비디오 게임의 시간의 세계에 몰입할 수 있는 사람이다. 비디오 게임광이라는 사람들은 비디오 콘솔 앞에서 몇 시간 동안이나 계속 앉아있을 뿐, 시계의 시간의 경과를 전혀 느끼지 않는 것이 보통이다. 임상심리학자인 크레이그 브로드에 따르면 “컴퓨터 기술자와 함께 살고 있는 사람들은 이구동성으로 시간에 관한 충돌이 양자의 불화의 주된 원인이라고 투덜거린다”고 한다.
장시간 컴퓨터를 사용하는 사람들에게는 두 개의 시간 세계를 끊임없이 왕래함으로써 병이 드는 예가 많다. 그들이 새로운 컴퓨터의 시간 세계에 관계하면 할수록, 재래의 시계 문화의 시간 기준에 재순응하는 것이 어려워진다. 그들은 두 개의 완전히 상이한 시간적 정위(타임 오리엔테이션)의 사이에 끼어 신형의 시간 정신분열증환자가 된다.
심리학자와 사회학자는 컴퓨터의 새로운 시간 개념이 개인과 사회 전체 모두에 대해 미치는 효과에 관한 연구를 개시했다. 그들의 견해는 아직 잠정적인 것이지만, 그것에 따르면 시간적 정위의 변화를 둘러싼 싸움이 21세기의 주요한 사회 문제가 될지도 모른다는 것을 알고 있다. 
                                                                                                 - 제러미 리프킨, <시간 전쟁> 발췌․정리


논제 : 위의 세 제시문은 모두 시대 및 사회 ․ 문화에 따라 ‘시간’ 관념이 얼마나 상대적으로 다양한가를 말하고 있다. 각 문장을 요약 정리한 후(<가>, <나>는 300자, <다>는 200자 내외), 현대 사회와 문화의 특징에 비춰볼 때 오늘날 ‘시간’의 의미와 역할은 무엇인지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1000자 내외(요약 분량 제외)로 논술하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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