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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감벤, ≪군림과 영광 ― 경제 및 통치의 신학적 계보학을 위하여≫(Giorgio Agamben, Il regno e la gloria. Per una genealogia teologica dell'economiae del governo, Vicenza, Neri Pozza, 2007.)
* 글쓴이 : 페데리코 루이제티(Federico Luisetti)
* 작성일 : 2008년 1월 21일
* 출 처 : http://site-zero.net/_review/neri_pozza_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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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옮긴이의 말 : 아감벤의 위의 책을 현재로서는 <군림과 영광>으로 옮기려는 듯이 보인다. 하지만 이 책의 영어판 독자가 남긴 코멘트에서도 regno는 kingdom으로 옮겨져 있고, 일본어판 역시 <왕국과 영광>으로 옮기고 있다는 점이 눈길을 끈다. 그래서 일단 "군림"이라는 용어 대신, 원래의 서평 제목을 존중하여 아래의 본문에서는 책 제목을 <왕국과 영광>으로 옮긴다. 나중에 아감벤의 이 책을 완전히 읽은 후에 번역어에 대해 다시 고민하도록 하겠다.
또한 이 책은 아감벤의 <경제신학> 프로젝트와 관련되어 있는 듯이 보인다. <오이코노미아>를 중심적으로 거론하고 있는데, 이런 점에서 아감벤의 또 다른 책자인 <세속화>와 교차하면서 읽어도 좋을 것으로 보인다. 내친김에 한마디 하지면 Profanazioni  역시 일본어판에서는 <涜神(독신)>이라 옮기고 있다. 그리고 아래에서도 보겠지만 본문에서는 아감벤이 이를 secularization(세속화)와 구별한다고 지적한다. 그리고 실제로 Profanity도 1) 신성모독, 불경 ; 2) 신성을 더럽히는 언행 ; 3) (종교적인 것에 반대되는) 세속적 학문을 의미한다. 이런 점에서 이 책 역시 "세속화"보다는 "신성모독"으로 옮기는 것이 더 나을 수 있다. 이런 사정을 감안하여 Profanazioni  역시 아래의 글에서는 <신성모독>으로 옮겨 놓았다. 물론 이것 역시 이 책의 내용 검토를 완료한 후에 재검토할 예정이다. (sanggels@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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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소개 : 이 서평은 페데리코 루이제티(1968~)가 이 사이트를 위해 새로 써 준 것이다. 그는 토리노 대학에서 박사학위(미학, 해석학)을 취득한 후, 노스캐롤라이나 대학교 조교수로 비교문학을 강의하고 있다. 그의 관심은 넓어서 아타나시우스 키르허(Athanasius Kircher)에서 베르그송, 들뢰즈, 계몽주의 학파, 현대 미술관 등, 바로크에서 오늘날에 이르는 예술과 철학에 관한 다수의 논고가 있다. 근래에는 특히 예술의 ‘장’에 관한 문제에 주목하여 지안니 바티모, 한스 빌팅(Hans Belting), 할 포스터 등이 공저한 ≪미술관 이후≫(Dopo il museo, 2006)의 편집자를 맡았다. 최근 일본에 방문하고 있을 때, 이탈리아 현대 사상에 대한 일본과 미국에서의 높은 관심이 화제가 되었을 때 이 사이트의 취지를 전달했는데, 기꺼이 서평을 맡아주었다. ≪호모 사케르≫에서 ≪신성모독≫이나 ≪사유의 역량≫을 경유하여 ≪왕국과 영광≫에 이르는 아감벤의 프로젝트를 솜씨 좋게 잘 부각시켜 준 루이제티 씨에게 감사드리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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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loria


≪왕국과 영광≫은 아감벤이 ≪호모 사케르>에서 착수한 야심찬 계획을 더 밀고 나간 속편에 해당한다. 계보학적 연구에 의해 서양사상을 떠받쳐 온 범주를 탈구축하는 것. 언어의 얼핏 보기에 견고함에 대해 시비를 걸고, 종교, 경제, 정치, 철학, 미학의 개념들을 넘어서 ‘불분명한/식별불가능한/구별불가능한 문턱’을 찾아내는 것. 이러한 기획에 걸맞는 방법은 ‘서양사상’의 대작들에 묻혀 있는 언어학적, 종교적 매트릭스가 지닌 복수성을 재활성화하는 것이다. 마치 관념들의 역사를 깨진 거울에 비치면 알기 힘들게 되듯이, 서양이 겉보기에 유지하고 있는 문화적 단일성은 고대 그리스 사상, 유대교, 기독교라는 경향으로 이루어진 만화경 속에서 굴절된다. 거짓된 내재라고도 해야 할 권위로부터 사유를 되찾음으로써 아감벤은 철학적 상상력의 공간을 재발견한다.

아감벤에 따르면 서양의 정치사에서 최대의 사건은 기독교의 삼위일체설에 ‘오이코노미아’ 개념이 삽입되었다는 것에 있다.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오이코노미아’란 가정의 경영을 전형으로 삼는 비정치적 영역을 가리킨다. 이런 한에서 ‘오이코노미아’는 규범이나 법에서 벗어난 것이며, 나아가 여러 가지 목적이 ‘무-정부’적이고 실천적으로 배정됨으로써 수행된다. 삼위일체와 ‘오이코노미아’가 접촉한 결과, 그노시스나 유대교에서는 엄밀하게 구별되었음이 틀림없는 ‘무위의 신deus otiosus’과 ‘활동의 신deus actuosus’은 어느 하나에서 다른 하나로 끊임없이 이행하게 된다. 근대 철학 사상의 최대 과오는 ― 아감벤은 그 책임을 루소나 자유주의에 귀속시키지만 ― 정치와 경제, 주권과 통치가 서로 겹치는 기독교적인 교착을 풀어버렸다는 점에 있다. 그 때문에 이러한 대치의 탈구축이 필요하게 되며, 이러한 작업에 의해서 정치와 경제의 신학적 불분명함이 계보학적으로 되찾아질 수 있을 것이다.

서양이라는 신학-정치적인 건축은 사실 그 기초를 텅 빈 상자 속에, 즉 ‘인간의 무위의 중심’에 놓는다. 이 텅 빈 중심은 ‘영광’(글로리아)의 속성에 의해 채워질 수 있다. 말하자면, “공허/텅 빔은 ‘영광’의 지고한 형상이다.” ‘영광’은 ‘결합해야 할 것을 끊임없이 분리하고, 그때마다 분리된 채로 있어야 할 것을 재차 결합시키며’ 이것에 의해 주권과 경제를 재편성한다. 이행(transit)의 장인 한에서 ‘영광’은 텅 빈 상자에 다름 아니다. ‘영광’을 고찰한다는 것은 서양 신학 기계를 탈구축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며, 그리고 바로 여기에 푸코적인 고고학을 베버, 슈미트, 레비트 등이 제기한 세속화에 관한 독일의 논의와 접속시키는 아감벤의 계획이 있다.

≪신성모독≫이라는 제목의 논문집[Profanazioni, Nottetempo, Roma, 2005.]에서 아감벤은 ‘세속화’를 ‘신성모독’과 대치시킨다. 전자의 경우 신학의 개념들이 세속의 어휘 속으로 이행한 것이며, 그 때문에 권력은 아무런 상처도 받지 않은 채로 있다. 이에 반하여 후자의 경우, 성스러운 것 ― 즉, 신학적 장치에 의해 격리된 것 ― 은 고유한 아우라를 상실하고 사용으로, 새로운 산 형식으로 다시 맡겨진다. 모독한다는 것은 성스러운 것의 범례에 무리하게 진입한다는 것이며, 나아가 이 차원을 인간의 경험으로 열면서도 침범할 수 없는 실재적인 핵이 있다는 전제를 받아들인다는 것을 의미한다. 세속화가 권력을 다시 발동시키는데 반해, ‘신성모독’은 권력의 기구를 작동불가능하게 만들어 버린다. 말하자면 신성모독은 창조적인 자기 전유를 행하는 동시에, 현실에서 격리되어 있는 것을 중성화시키는 것이다.

≪왕국과 영광≫에서도 아감벤은 세속화와 신성모독의 이러한 구분을 그대로 간직하면서 오히려 세속화 개념이 널리 원용되는 역사 서술의 패러다임 속에서 잠재적인 신성모독을 끌어낸다. 신성모독에서 재독해하면, 세속화라는 용어는 세속적인 것과 성스러운 것, 자본주의 경제와 삼위일체적인 ‘오이코노미아’를 단락시키는 도화선이 될 수 있다. 세속화와 관련된 어휘는 모든 부정적 함의로부터 해방되며, 하나의 ‘서명’으로 된다. ― 즉, 감추어진 해석 코드나 통약되지 않는 각각의 시대를 전략적으로 참조하면서 다양한 개념을 특징짓고 끌어내며 전도시키는 ‘감춰진 인덱스’가 된다. 푸코의 고고학적 지향은 눈도 현기증이 난 듯이 도주선으로 향하며, 그 결과 교부학, 찬송(dossologie, 신의 영광, 즉 글로리아를 기리는 싯구로 시작되는 찬송가), 박수갈채에 의한 채결(acclamazioni liturgiche), 천사들의 찬가(innodie angeliche, 예를 들어 아감벤은 가짜 디오니소스의 천사학을 참조한다) 등이 검토된다.

삼위일체적인 ‘오이코노미아’에 고유한 것인 행위와 통치의 형상을 유대교 사상 ― 특히 신비 카발라주의 전통 ― 이 신성성 속에서 나열될 수 없는 것이라고 한다면, 이 유대교 사상에는 메시아적인 임무를 지고 있는, 성스러운 무위와 ― 이 무위를 세계의 역사성에 종속시키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 마주 대하게 할 용의가 있다. 경제의 수수께끼가 ‘영광’이라면, ‘영광’의 눈부신 빛에 감추어진 ‘말할 수 없는 수수께끼’란 신적인 무위이다. 그렇다면 ‘구원을 초래하는 무위’란 어디에 있는가? 이 물음에 대한 답변은 경험/체험이다. 즉, 그것은 무위 그 자체의 경험이며, 아감벤이 한나 아렌트에 의해 이론화된 ‘관조적 삶’과 연결시키는 ‘메시아적 시간에서의 삶/생의 특질’이다. 사상의 임무란 주권과 경제의 저류를 중단시킴으로써 신학적 ‘오이코노미아’에 의해 저해된 언어의 형식을 다듬어내는 것이다. 확실히 바로 여기에는 유대교적 전통의 메시아적 조작이 있다. 결국 아감벤에게 있어서 정치는 무의의 영역으로 도달할 수 있는 에크리튀르의 미학으로 바뀐다. 역량/잠재성 개념과 문학의 실천이 맡는 중심성은 (특히 논문집 ≪사유의 역량≫[La potenza del pensiero. Saggi e conferenze, Neri Pozza, Vicenza, 2005.]에 현저한데), 확실히 이러한 관점에서 이해될 수 있다. 신성모독적인 조작은 말의 신비-문학적인 사용과 하나가 된다. 어떠한 진정한 정치도 사상의 정치이며, 말의 경험/체험 ― ‘카발라’와 시 ― 으로서의 사유의 경험/체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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