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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린 : 인간과 동

L’aperto

L’uomo e l’animale

 

 

조르조 아감벤

김상운 옮김

* 영어판으로 1.

인용은 금함


4. 분리접속의 미스터리[신비] Mysterium disiunctionis

 

우리 문화에서 생명[]’ 개념에 관한 계보학적 연구에 착수하려는 사람이라면 누구에게나 가장 초보적이자 가장 교훈적인 고찰[소견] 중 하나는 이 개념이 결코 개념으로서 정의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 정의되지 않은 채로 남아 있음에도 불구하고, 일련의 중간휴지caesurae와 대립을 통해 생명개념은 그때그때 분절되고 분할됐다. 철학, 신학, 정치학에서 시작해, 그리고 나중에서야 의학과 생물학에 이르기까지, 보아 하니 거리가 있는 듯한 분야에서 결정적인 전략적 기능이 중간휴지caesurae와 대립을 통해 이 개념에 투자됐다And yet, this thing that remains indeterminate gets articulated and divided time and again through a series of caesurae and oppositions that invest it with a decisive strategic function in domains as apparently distant as philosophy, theology, politics, andonly latermedicine and biology. , 우리의 문화에서 정의될 수 없으나 바로 그렇기 때문에 끊임없이 분절되고 분할되어야 했던 것이 바로 생명에 다름 아닌 듯하다That is to say, everything happens as if, in our culture, life were what cannot be defined, yet, precisely for this reason, must be ceaselessly articulated and divided.

서구철학사에서 생명 개념의 이런 전략적 분절은 어떤 정초적인foundational 순간을 갖고 있다. 그것은 바로 혼에 관하여에서 아리스토텔레스가 살아 있다라는 용어의 다양한 의미로부터 가장 일반적이고 식별할 수 있는separable[분리할 수 있는] 의미를 떼어낸 순간이다.

 

그 안에서 혼을 지닌 것[동물, l’animale]이 혼을 갖고 있지 않은 것[무생물, l’inanimato]과 다른 것은 생명[‘살아 있다는 것]을 통해서이다. 하지만 이 살아 있다는 용어는 한 가지 이상의 의미를 가지며, 이것들 중 어느 하나만이 어떤 것 속에서 발견된다고 가정하면 우리는 그것이 살아 있다고 말한다. 예를 들어, 사고하기, 감각작, 장소적 운동과 정지, 혹은 영양섭취라는 의미에서의 운동, 쇠약과 성장이 그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모든 식물종들을 사랑 있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이것들은 이를 통해 성장하거나 반대로 말라죽거나 하는 원리와 잠재성을 그 자체 속에 소유하고 있다는 게 관찰되기 때문이다. 이런 [영양섭취의] 원리는 다른 것들로부터 분리될 수 있으나[모든 원리들로부터 구별할 수 있으나], 그러나 [불사인 신과는 달리] 죽을 수밖에 없는 것에 있어서는, 다른 원리들은 이 원리로부터 구별될 수 없다. 이런 사실은 식물들에서 명백하다. 왜냐하면 이것은 식물들이 소유한 유일하게 혼적인 잠재성(potenza dell’anima)이기 때문이다[식물에는 이 원리를 제외한 그 어떤 혼의 힘도 없다]. 따라서 이 원리를 통해서 생명은 생명체living things[신체]에 속하는 것이다. 우리는 영양섭취적 능력(threptikón)이라는 말로 식물들에게도 공통적인 혼의 부분을 가리킨다. (Aristotele, 413a 20-413b, 8).

 

여기서 주목할 필요가 있는 것은 생명이란 무엇인지를 아리스토텔레스가 결코 어떤 식으로든 정의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 영양섭취 기능만을 분리함[따로 떼어냄]으로써, 아리스토텔레스 자신은 생명을 분해하는break down 머무는데, 이는[머물며, 이렇게 한 후에] 일련의 변별적이고 상관적인 능력들faculties이나 잠재성들potentialities[힘들](영양섭취, 감각작용, 사유)에 있어서 생명을 재분절화하기 위해서이다[재분절화하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유에서 무엇보다 특히 전략적 장치를 구성하는 근본원리가 작동하고 있음을 보게 된다. 이때의 근본원리의 본질은 어떤 것은 무엇인가에 관한 모든 물음을 어떤 것은 무엇을 통해서[무엇에 의거해서](dia ti) 다른 어떤 것에 속하는가와 관련된 물음이라고 재정식화하는 데 있다. 왜 어떤 존재는 살아 있다고 불리는가를 묻는다는 것은 살아 있다는 것이 어떤 근거foundation에 의해 이 존재에 속하는가를 탐구한다는 뜻이다. , 생명을 어떤 존재에 귀속시킬 수 있는 원리를 산출하기 위해서는 살아 있다는 용어의 다양한 의미 가운데서 한 가지 의미만이 다른 것들과 분리되고 철저하게 규명되어야 한다는 것이다That is to say, among the various senses of the term “to live,” one must be separated from the others and settle to the bottom, becoming the principle by which life can be attributed to a certain being. 달리 말해, 분리되고 분할된 것(이 경우에는 영양섭취적 생명[활동])이 바로 일종의 분할 통치(divide et impera)에 있어서 일련의 능력들과 기능적 대립들a series of functional faculties and oppositions로 이루어진 위계적 분절[절합]으로서 생명의 통일성을 구축할 수 있게 해준다.

(이미 고대의 주석자들이 식물적 생명이라고 불렀던) 영양섭취적 생명만을 분할한다는 이 격리[따로 떼어냄]The isolation of nutritive life는 서양의 과학에 있어서, 모든 의미에 있어서 하나의 근본적 사건을 구성한다. 몇 세기 후 비샤생명과 죽음에 관한 생리학적 연구에서 외부세계와의 관계에 의해 정의된 동물적 생명소화와 배설의 항상적 계기(繼起)habitual succession of assimilation and excretion”(Bichat, 61)에 다름 아닌 기질적(器質的) 생명organic life을 구별했을 때, 이때에도 고등동물의 생명이 그것으로부터 분리된 모호한 배경을 표시한 것은[거기에 있어서 두드러진 어슴푸레한 배경이 됐던 것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영양섭취적 생명nutritive life이다.

비샤에 따르면, 그것은 모든 고등 유기체에서 마치 두 마리의 동물”, 내부에 존재하는 동물외부에 살고 있는 동물이 함께 살고 있는 듯하다. 전자, 내부에 실존하는 동물l’animal existant au-dedans의 생명 비샤가 기질적organic 생명이라고 정의하는 것 은 이른바 맹목적이고 의식을 결여한unconscious 기능들의 반복(혈액, 호흡, 소화, 배설 등의 순환)일 뿐이다. 다른 한편 후자, 외부에 실존하는[살고 있는] 동물l’animal existant au-dehors의 생명 비샤에게는 동물적 생명이라는 이름값을 하는[명칭에 값하는] 유일한 생명 은 외부세계와의 관계를 통해 정의된다. 이 두 마리의 동물은 인간 속에서 함께 살고 있으나 서로 일치하지는 않는다. 내부의 동물(animale-di-dentro)의 기질적 생명은 태아에 있어서는 동물적인 생명보다 앞서 시작되며, 노화와 임종에 있어서는 외부의 동물(animale-di-fuori)의 사후에도 살아남는다.

식물적인 생명의 기능과 [외부세계와의] 관계적 생명의 기능 사이의 이런 쪼개짐[괴리]을 식별하는 것identification이 근대의학의 역사에서 지닌 전략적 중요성을 굳이 언급할 필요조차 없을 것이다. 근대과학과 마취의 성공은 바로 비샤가 말하는, 두 마리의 동물을 분할하는 동시에 접합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주춧돌로 삼았다. 그리고 푸코가 보여줬듯이, 근대국가가 17세기 이후부터 그 본질적 임무 중 하나로 주민(인구)의 생명의 돌봄[관리]을 포함하기 시작했을 때, 그리하여 그 정치를 생명권력으로 변형시켰을 때, 근대국가는 일차적으로 (이제 민족이라는 생물학적 유산과 일치하는) 식물적 생명이라는 개념을 점진적으로 일반화하고 재정의하는 것에 입각해서 자신의 새로운 소명을 수행했다. 오늘날에도 여전히, 임상적 죽음의 기준에 관한 법적(ex lege) 정의를 둘러싼 논의에서, 어떤 신체가 살아 있다고 간주될 수 있는가, 아니면 장기이식이라는 극단적인 대역전vicissitude에 내맡겨져야 하는가를 결정하는 것은, 이러한 모든 뇌 활동으로부터도, 또한 이른바 주관[주체]로부터도 절연된 벌거벗은 생명의 새로운 식별identification이다. 그러므로 생명을 식물적 생명과 관계적 생명, 기질적 생명과 동물적 생명, 동물적 생명과 인간적 생명으로 분할하는 것은 움직이는 경계선으로서 무엇보다 우선 살아 있는 인간의 내부로 이동하는 것이며, 이러 내적 분할선intimate caesura이 없으면, 인간이라는[인간적인] 것과 인간이지 않은[비인간적인] 것을 결정한다는 것 자체가 아마 가능하지 않을 것이다. 오로지 동물적 생명과도 같은 것이 인간의 내부에서 분할[분리]되기 때문에만, 동물과의 거리와 근사성proximity이 무엇보다 우선 가장 내적intimate이고 친근한 장소 속에서 측정되고 재인식되기recognized 때문에만, 인간을 다른 생물living things과 대립시키는 동시에 인간과 동물 사이의 관계들의 복잡한 항상 건설적이기만 한 것은 아닌 배분economy을 조직하는 것이 가능해진다.

그러나 만약 이것이 정말이라면, 즉 인간적인 것과 동물적인 것 사이의 분할선caesura이 무엇보다 우선 인간의 내부로 이행한다면, 새로운 방식으로 제기되어야 하는 것은 바로 인간 그리고 휴머니즘이라는 질문이다. 우리 문화에서 인간은 끊임없이 신체와 정신, 생체a living thing와 로고스, 자연적 (또는 동물적) 요소와 초자연적 (혹은 사회적 혹은 신적) 요소의 절합articulation과 접합conjunction으로서 사고됐다. 그러나 우리는 인간을 이런 두 가지 요소의 분단incongruity에서 비롯되는 것으로 사고하는 것을 배워야 하며, 접합conjunction의 형이상학적 신비가 아니라 오히려 분리의 실천적 및 정치적 신비를 탐구해야 한다. 만약 항상 인간이 끊임없는 분할division과 분단caesurae[균열]의 장소 이자 동시에 결과 라고 한다면, 인간이란 도대체 무엇인가? 이 분할과 씨름하는work on these divisions , 즉 어떤 방식으로 인간이 비인간으로부터, 동물적인 것이 인간적인 것으로부터 인간 내부에서 분리되었는가를 묻는 것이, 이른바 인간의 권리와 가치라는 거대한 쟁점에 관해 입장을 표명하는 것보다 훨씬 급선무이다. 그리고 어쩌면 우리가 신적인[성스러운] 것과 맺는 관계라는 가장 빛나는luminous 영역도 동물적인 것으로부터 우리를 분리한 훨씬 암울한 영역에 모종의 방식으로 의존하고 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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