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래할 생명권력론을 위해


사상, 2013년 2

2부 2장. 

인간과 동물의 문턱

조르조 아감벤에게서의 생명 개념 

히가키 타츠(槍垣立哉)

들어가며

생명정치의 장래를 향해 무엇을 써야 할까? 후기 푸코로 거슬러 올라가는 관리[통제]사회의 문제들, 즉 개인의 자유의지가 이미 문제거리조차도 안 되는 비참한 삶을 톺아내고, 거기서 희미하게 뭔가의 전망을 찾아내야 할까? 들뢰즈=가타리가 물론 어둠을 간직하면서도 보다 분명하게 미래의 생명을 그려냈듯이, 현재의 인간이나 그 사회의 해체를 함의하기도 하는 생명의 밝음을 부각시켜야 할까? 생명정치학의 개념이, 항상 이런 양면을 갖추고 있는 것은 사실일 것이다. 원래 미래가 어두운 것인가, 밝은 것인가라는 물음 자체가 무의미하기도 하다. 미래를 살아가는 것은 나도 아니고 우리도 아니다. 미래에서 그 가치를 판단하는 것은 지금 여기를 살아가고 있는 이 삶이 아니다. 미래라고 하면서 뭔가가 말해질 때, 나나 우리는 그것을 가치 판단할 능력을 전혀 가질 수 없다.

그런 물음에서 시작하지 않아도 좋을지도 모른다. 혹은 그런 몽상 같은 철학자의 말은 생명정치학이 현실적인 정치의 물음과 연관되는 한, 아무 쓸모도 없다고 생각될지도 모른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 인간의 신체와 생명을, 그 자연사적 깊이를 지닌 시계(視界)에서 재파악하는 것, 말하자면 법, 제도, 윤리, 말 등을 고작 2000년부터 3000년 정도로만 거슬러 올라갈 수 있을 뿐인 근원을 훨씬 뛰어넘어, 더욱 멀리 생명 자체에 뿌리를 내려 파악하려고 시도하는 것, 이것이 바로 생명정치학의 독자성 그 자체를 이루는 것이 아닐까?

이런 방향성에서 생명정치학의 광대함을 확실하게 파악하고 있는 사상가가 이탈리아의 조르조 아감벤이다. 아감벤이 세계적 사상의 무대에 등장한 것은 20세기도 끝나갈 무렵이다. 아우슈비츠의 남은 것(1998)호모 사케르 : 주권권력과 벌거벗은 생명(1995)이라는, 푸코의 생명정치학을 이어받아 쓴 작품군과, 거기서 제시된 벌거벗은 생명(la nuda vita)’이라는 개념은, 세간의 큰 주목을 받았다. 하지만 아감벤의 저작의 전모가 알려짐에 따라, 그와 생명정치학 자체의 관련이 결코 단순한 것은 아니라는 것이 여러 가지 논점에서 분명해졌다(일본에서는 우에무라 타다오(上村忠男), 오카다 아츠시(岡田温司), 다카쿠와 가즈미(高桑和巳) 등에 의한 이탈리아어로부터의 빼어난 번역과 해설이 극히 중요한 역할을 맡았다. 이탈리아라는, 철학지리학에서는 변방적인 사상가의 논의가, 프랑스 및 미국과 거의 동시에 일본에 영향을 주었던 속도성에서도, 위의 번역자들의 작업은 돋보이는 것이라 할 수 있다). 특히 거기서 감안되어야 할 것은 아우슈비츠의 남은 것호모 사케르만으로는 헤아릴 수 없는, 그의 고전적 소양의 광대함과, 종교나 법에 관련된 지식의 풍성함이다. , 하이데거의 세미나에 참석하면서도 벤야민을 애호하고(시대를 공유하는 이 두 사람의 사유는, 상식적으로는 거의 양립할 수 없을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도 기독교 역사도 곱씹으면서, 현재적인 정치의 논의에도 깊이 헤집고 들어가는, 그 독특한 사유법 자체이다(벤야민이 말하는 이질적인 것과의 접합이야말로 그의 모토인 듯하다).

확실히 오카다 아츠시가 아감벤의 종교신학을 강조하듯이,[각주:1] 특히 금세기에 양산된 작품군(세속화 예찬(2005), 왕국과 영광(2007), 벌거벗음(2010))은 생명정치라기보다는 종교성과의 연관이 매우 깊다. 그 때문에 아감벤을 생명정치학의 개념만으로 파악하는 것은 부당하다고 생각될지도 모른다. 철학의 영역에 한정해도, 푸코나 들뢰즈를 언급하는 논의는 어느 일정한 시기에 이뤄진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래도 굳이 아감벤의 논의를 생명정치학의 관점에서 독해하는 것은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우선 그가 주장하는 벌거벗은 생명이나 잠재력(potenza)’이라는 개념이 설령 우연의 결과일지라도 푸코나 들뢰즈가 논하는 유사 개념에 매우 접근하기 때문이다. 전자는 벤야민의 폭력비판론에서 (그것도 벤야민의 텍스트를 읽는 한 상당히 미묘한 논맥에서) 끌어낸 용어이다. 그래도 아감벤의 독창성은 벌거벗은이라는 개념을, 생물적 신체가 정치적 과제이게 되는 푸코의 논의와 관련시키고 벤야민적 논맥으로부터는 벗어난 의미를 끄집어냈던 것에 있다. ‘잠재력에 관해 말하면, 아감벤의 고찰의 원천은, 일관되게 아리스토텔레스적인 뒤나미스 분석에 있다. 그러나 이것도 잠재성(virtualité)을 논하는 들뢰즈와, 스피노자를 매개로 맺어지고 생명을 그러내는 주요한 위상에 놓인다. 양자 모두와 더불어, ‘생명신체를 사고하는 키워드 자체로서, 아감벤에 의해 강하게 부각되는 것이다.

 

하지만 동시에 아감벤은 푸코와도 들뢰즈와도 다른 생명정치학을 전개하고 있기도 하다. 그것은 법이나 말에 강하게 천착하는 데에서도 간파할 수 있다.

말할 것도 없지만, 아감벤은 생명정치학을 탐구하는 데 있어서 법과 언어를 중시한 논의를 펼친다. 그것은 푸코가 기본적으로 정신분석 비판을 염두에 두면서, 혹은 들뢰즈(들뢰즈=가타리)가 시니피앙 중심주의적 언어론에 대한 반발로부터 생명 개념과 그 질료성에 시선을 돌렸던 것과는 명확하게 대조적인 자세라고도 할 수 있다. 그러나 거기서 아감벤은 푸코 등이 비판했던 정신분석이나 법이라는 초월성을 회복시키는 것이 결코 아니다. 그는 생명에 파묻혀 있는 법이나 언어, 달리 말하면 생명을 반사하고 생명으로부터 반사되는 법이나 언어의 위상을 솜씨 좋게 세세하게 집어냄으로써, 생명정치학의 개념을 더욱 전개시키는 것이다. 이런 시도는 아렌트와 푸코 쌍방의 부족분을 연결시키는 호모 사케르의 서두 부분 등에서[각주:2] 두드러진 성과를 보이고 있다. 아감벤은 법과 언어의 경시 때문에 푸코도 (나아가 들뢰즈도) 비판하지만, 그러나 그들이 비판했던 대상의 의표를 찌르는 방식으로 논의를 전개하는 것이다.

여기서 생각해야 할 것은 생명정치학 속에서 꺼내진 언어와 법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생명과 어떻게 결부되어 있는가이다.

아감벤은 매우 견실한 지식으로 뒷받침된 역사학자로서 행동하면서도, 거기서의 종교의 파악 방식은, 앞서 말했듯이 시공을 종횡무진 횡단하고, 현대의 첨단적인 장면과 고대세계를 결부시킨다. 그의 자세는 역사를 논하면서도 역사 자체를 원리로 삼지 않는, 말하자면 근원을 논하면서도 근원자체를 허공에 매다는[중지시키는] 감각으로 넘쳐난다. 이는 오히려 푸코가 고대를 다룬[문제 삼은] 그 방식에, 혹은 레비스트로스가 신화를 분석하는 그 방법에, 나아가 들뢰즈(와 가타리)가 생태계적인 자연사를 그려내는 그 시각에 매우 가까운 것이 아닐까? ‘중지하다[허공에 매달다]라는 말이 아감벤의 핵심어의 하나이듯이, 거기에는 근원을 탐구하면서 근원을 탈근거화하는 지식의 방식이 모색되고 있는 것 같다. 그리고 그 행동 방식 자체가 생명정치학의 시도와 강하게 겹쳐진다.[각주:3]

이렇게 제시되는 아감벤의 독자적인 영역이란 바로 애매함이며 회색지대라고 할 수 있다. 거기서 아감벤은 생명에 독자적인 존재를 인정하는 동시에, 그 방식을 항상 언어와 연관시키고, 벌거벗은 질료성이 법이나 제도의 막간[틈새]으로서 기능한다는 것을 밝힌다. 이와 같은 이중의 방법에 의한 중간성이나 문턱의 존재가, 앞의 중지라는 방법론과 포개져 있다.

그러면 여기서 아감벤에게 생명 그 자체란 어떤 개념이었을까? 이 물음에 대답하기 위해 다루고자 하는 테마가 바로 인간과 동물의 관계이다.

아감벤에게서의 이 주제에 관해서는 열림(2002)이라는 저작, 특히 거기서 다뤄지는 하이데거의 동물론이 중요하다. 하지만 동물과 인간이라는 주제가 겨냥하는 것은 그것만이 아니다. 동물론은 절대적 내재성(사유의 역량, 2005년 수록)이라는 들뢰즈와 푸코의 관계를 논한 텍스트의 귀결이, 하이데거와도 맞물린 이 주제에 의해 도출됐다는 것과도 관련된 것이다.

여기서 아감벤은 들뢰즈의 생명 개념과 푸코의 생명 개념을 대립시키면서 생명론이 향하는 곳을 탐색한다. 그런데 약간 희화화되어 그려진 최후의 생명론의 계보도에서, 푸코와 들뢰즈는 대립되기는커녕 내재성의 라인에 똑같이 배분되고, 다른 쪽의 초월의 라인에 데리다나 레비나스 등을 적은 뒤, 굳이 하이데거를 그 중간 영역에 배치하고 있다. 이는 매우 기묘한 것이기도 하다. 생명을 논할 때, 그 중간적인 위상에 있어서도, 하이데거를 내재의 방향에 위치시키는 것은 꽤 모험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그는 해석학적 존재론과 존재의 언어를 논하는 자로서, 흔히 어디까지나 초월의 라인에 위치시켜야 할 사상가로 간주될 것이다. 아감벤은 하이데거의 어디에서 내재적 생명론에 대한 공헌을 보는 것일까?

더 나아가 이런 도식을 그려내는 아감벤은 자신의 시도를 어디에 위치시키는 것일까? 이것들을 생각할 때 문제가 되는 것이 푸코와도 들뢰즈와도 관련된 동물이라는 주제가 아닐까? 그것이 생명정치학의 사고에 있어서 새로운 문턱으로서 두드러지는 것이 아닐까?


아감벤에게서의 생명

논고 절대적 내재성은 푸코와 들뢰즈 둘 다의 생전의 마지막 텍스트가 각각 생명을 둘러싼 것이었음을 속시원하게 지적하는 것에서부터 시작된다. 양자에게 생명을 논하는 것은 유언의 차원에 속하는 것이었다고 한다.

그 텍스트란. 푸코의 경우 생명 : 경험과 과학[각주:4]이라는 캉길렘을 다룬 비교적 긴 논고이며, 들뢰즈의 경우 내재성 : 하나의 삶 …」(1995)[각주:5]이라는 아주 짧은 문서이다. 아감벤의 논의는 들뢰즈의 글 제목과 스타일 등에 대한 주석으로 시작되지만, 기본적으로는 솔직히, 푸코와 들뢰즈에 대한 아감벤의 사유의 위상이 제시된다. 아감벤의 벌거벗은 생명이 무엇인지를 두 사람과의 대비에서 서술하는 것이다.

이 텍스트를 검토하기 전에, 아감벤에게 벌거벗은 생명이 무엇이었는지를 잠시 다시 살펴보자.

호모 사케르의 서두에서 아감벤은 비오스조에라는, 이제는 주지의 바가 된 말을 사용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조에는 살아 있는 모든 존재(동물이든 인간이든 신이든)에 공통된, 살아 있다는 단순한 사실을 표현했다. 그에 반해 비오스는 각각의 개체나 집단에 특유한 살아가는 형식, 삶의 방식을 가리켰다.”[각주:6]

여기서 조에로서 말해지고 있는 것은 아리스토텔레스가 논한, 살아 있다는 사실과 관련된 잠재적인 힘이다. 그리고 후자인 비오스란 이른바 정치적인 삶,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는) 폴리스적인 삶을 모델로 한 것이다.

조에비오스라는 생명에 관련된 말하기 방식을, 현대정치와 관련시켜 얘기하는 아감벤의 주장은 그리 어려운 것이 아니다. ‘벌거벗은 생명과도 강하게 관련되는 조에가 그대로 정치의 주제로 간주되는 것, 혹은 말을 사용하여 행하는 폴리스적 사태에, 다만 살아 있을 뿐인 생명성인 조에가 침입해 오는 것, 이것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이런 사정이 18세기 이후의 근대사회의 성립에 있어서, 푸코가 생명정치학으로 논했던 것과 겹쳐진다.


폴리스의 영역에 조에가 진입한 것, 즉 벌거벗은 생명 자체가 정치화됐다는 것은 근대의 결정적 사건을 이루며, 고전적 사유의 정치적-철학적 범주가 근원적으로 변용했음을 부각시키고 있다.[각주:7]


이것에 덧붙여 중요한 것은, 이런 범주의 변용은 모종의 회색지대를 산출한다는 것이다. 거기서는 삶과 죽음, 공과 사, 우파와 좌파, 절대주의와 민주주의라는 대립 도식으로 말하는 것이 불가능한 정치적 장면이 형성된다.[각주:8]

, 생명정치학과 벌거벗은 생명의 정치화는 겹쳐 있지만, 근대에 특징적으로 현현한 독자적인 방식에 있어서, 근대를 지배했던 기존의 정치적 범주가, 모두 회색지대로 내몰리게 된다는 것이 아감벤의 주장이다.

아감벤이 아우슈비츠의 남은 것에서 살아 있으나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비참한 신체, 혹은 생물학적 인체 실험을 겪은 생체를 예로 든다는 것, 더 나아가 호모 사케르에서도 국가라는 법의 규제로부터 벗어난 난민, 삶과 죽음 자체를 규정할 수 없는 뇌사자를 대표적인 예로 들고 있다는 것으로부터, 이런 논의들이 근대 후기라는 시대성과 강하게 관련된 것으로 읽히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아감벤이 푸코와 의견을 달리하는 것은, 이런 회색지대가 현재화하는 것이 근대 후기였다고 해도, ‘조에비오스와 얽혀 있는 착종된 사정 자체는 정치적인 것이 출현하는 원리로서 당초부터 숨어 있었다고 하는 점에 있다.

그것은 호모 사케르의 모델 자체가 공동체로부터 배제된 방식으로 그것에 포함되는 신체를 다루는 로마 시대의 처벌에 있는 것으로부터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호모 사케르란 신성화된 사람들이지만, 그 신체는 살해 가능하지만, ‘희생물로 될 수 없다는 양의성을 갖추고 있다. 흔히 이 두 개의 특징은 병치될 수 없다. (뭔가의 형벌을 받은) 살해 가능한 신체(법으로부터의 폐기)는 손쉽게 희생화되지만(종교로의 포함), 여기서는 살해 가능성은 희생이라는 형식을 취할 수 없는 것이다. 그 때문에 거기에는 살해 가능성과 희생화 불가능성의 교점에 있어서, “인간의 법으로부터도 신의 법으로부터도 배제된 신체가 출현하게 된다. 이 신체가 벌거벗은 생명의 원상原像인 것이다.[각주:9]

그래서 이것은 법에 있어서 모든 의미에서의 예외이기도 하다. ‘은 신성화되지 않지만 죽여도 좋다는 의미에서, 스스로가 포함할 수 없는 것을 배제된 것으로서 포함해버린다. 그리고 주권이란 칼 슈미트가 말했듯이 예외상태에 대해 결정을 내리는 자라고 한다면, 이런 신체를 다루는 것 자체가 법을 주권적인 법으로 만드는 원리라는 것이다. 스스로가 배제하는 것은 배제로서 포함하는 것, 이것이 법을 성립시키는 원점에 있다.

배제와 포함이 서로를 맞아들이는 이런 사정이 바로 아우슈비츠로 나타나는 비참한 신체의 전형이라는 것이 아감벤의 주장이다. 그것은 법의 원리이면서도, 현실적인 무엇인가로서 출현하는 것이다. “호모 사케르의 벌거벗은 생명은 이리하여 우리와 관계가 있는 것이 되며 시민의 생물학적 생명과 일치하고자 한다[각주:10]는 시대 진단이 거기에 포개지게 된다.

여기서 우선 논의되는 것은 법이 초월적인 기관을 경유하지 않고, 생명 자체를 포함한다는 사정이다. 바타유적 살해가 초월화된 신성성을 묻는다면, 이것과는 정반대의 관점이 여기서 드러난다. 여기서 법은 시니피앙이 아니며, 또한 명령하는 것일 수도 없다. 법은 법이 포함할 수 없는 것을 배제함으로써 포함한다. 거꾸로 말하면, 법 자신이, 벌거벗은 생명이라는 예외상태에서의 규정 불가능성을 들이대는 것으로부터 성립한다는 것이다. 그런 한에서 아감벤에게서의 벌거벗은 생명은 그 벌거벗은이라는 방식에 있어서, 규정 자체를 가능케 하는 규정 불가능성이라는 것이다. 거듭 말하지만, 이것이 법의 원리라고 하는 것이다.[각주:11]

거기에는 조에비오스의 연관에 관해서도, 단순하지 않는 사태가 출현하게 된다. 살아 있는 신체란, 물론 조에인 동시에 비오스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것은 해당 신체의 특정한 동물적, 식물적 기능이 조에이며, 특정한 인간적 기능이 비오스라는 것이 아니다. ‘비오스비오스인 한에서 항상 조에를 기반으로 하는 것인데, ‘비오스에 있어서 조에란 어디에도 없는 것이며 또한 어디에도 있는 것이기도 하다. 말과 신체, 로고스와 물질, 이것들도 마찬가지의 배치에 놓이게 될 것이다. 이들 중에서 후자는 전자에 의해 배제됨으로써 포함되는 바로 그것이다. ‘예외상태라는 외부를 보여줌으로써 질서를 규정하는 것, 이것이 양자의 관계성이다.

벌거벗은 생명예외상태의 관점에서 보면, 그것들은 아감벤의 발상의 기본이라고 할 수 있는 이중관계를 이루는 것인 비오스조에는 마치 단순히 이층화되는 것이 아니다. 이것들도 배제와 포함을 둘러싸고 서로 얽혀 있는 것에 다름 아니기 때문이다.

이렇게 아감벤에게서 생명은 법이나 언어가 규정할 수 없는 예외성인데, 동시에 그것에 의해 법이나 언어를 가능케 하는 것이라고도 그려진다. 생명 자체가 아리스토텔레스적 식물적 생명이나 동물적 생명이라기보다도 언어화할 수 없는 것에 의해 언어를 떠받치는 무엇인가로서 제시되는 것이다. 이리하여 아감벤은 푸코나 들뢰즈가 법적, 언어적 위상의 초월성을 비판하는 것으로부터 생명의 위상을 끄집어낸 것과는 대조적인 위치에 선다. 그리고 마찬가지로, 법과 언어를 시니피앙적 초월로서가 아니라, 생명과의 역접적 관계에서 끌어내게 된다.


들뢰즈 및 푸코 비판

그러면 여기서 절대적 내재성의 논의로 돌아가보자. 이 글에서 아감벤은 푸코와 들뢰즈의 생애 마지막 텍스트가 모두 생명을 다뤘다는 기묘한 부합을 강조하면서, 두 사람이 논하는 내용을 다양하게 검토한다.

대부분이 들뢰즈를 향한 이 논고의 처음 소소한 부분에서 아감벤은 푸코를 언급한다. 그 소재가 되는 푸코의 캉길렘론은 푸코의 최후기의 다양한 사유, 즉 프랑스 철학에서의 인식론과 영성주의(spiritualism)라는 두 개의 계보의 구분이나, 계몽의 논의의 재검토를 이루고 있다는 점에서 극히 흥미롭다. 하지만 아감벤은 특히 푸코의 서술의 마지막에 눈길을 돌린다. 거기서는 생명의 중심에는 잘못[착오]이라는 문제가 있다고 써져 있지 때문이다.


생명의 가장 근본적인 수준에서 코드와 해독의 작동[기능]은 우연히 주어져 있다. 그것은 질병이나 결함이나 기형이 되기 이전의, 정보 시스템의 변조나 잘못 취함[오용]같은 것이다. 극단적으로 말하면, 생명이란 잘못할 수 있는 것이다.[각주:12]


그리고 그 후에 푸코는 이런 캉길렘의 생명에 관한 견해를, 시대적으로 그다지 멀지 않은 니체의 그것과 결부시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진리는 생명의 기나긴 연대기에 있어서 가장 새로운 잘못이다. 더 정확히 말하면, 참과 거짓의 분할이나 진리에 부여된 가치는 생명이 발명했던 가장 특이한 삶의 방식을 형성하고 있기 때문이다.[각주:13]


아감벤은 생명과 오류라는 주제는 푸코가 성의 역사1권 이후에서 보여줬던 논의의 흔들림에 영향을 줬을 것이라고 말한다(그것은 들뢰즈의 견해이기도 하다). 그러나 아감벤은 또한 푸코의 이런 생명에 대한 사유는 새로운 경험과도 같은 무엇인가, 생명이라는 지면에 뿌리내린 별도의 주체성을 향하기 위한 무엇인가를 끌어내는 것이기도 하다고 평가한다. 거기서는 그저 생명과 생명의 일탈과만 상관관계를 가진 인식[각주:14]이 진리를 향하는 것이 아니라 탐구되기 때문이다.

이것은 들뢰즈가 푸코(1986)에서 지식과도 권력과도 구분되는 3의 축으로 간주했던 것과 결부되어 있다고 아감벤은 지적한다. 이리하여 아감벤은 푸코의 최후기의 시도를 들뢰즈의 그것과 교차시킨다. 들뢰즈가 그려내는 생명의 권역으로부터, 새로운 주체의 모습을 (바로 최후기의 푸코가 행했듯이) 끌어내는 것이야말로 생명정치의 향후 과제라고 아감벤은 생각했던 것이다. 그 자신 아감벤의 고찰과 깊이 관계가 있을 것이다.

그러면 아감벤은 들뢰즈의 생명 개념에 관해서는 어떻게 평가하고 있을까? 그것을 감안한 다음, 푸코적인 주체의 논의를 구성해가는 라인은 어떻게 그어짓는다는 것일까?

아감벤은 들뢰즈 최후의 텍스트 내재성 ; 하나의 삶 …」의 표제에 있는 콜론에 강하게 집착한다. 여기서 중간에 배치된 콜론은 단순한 동일성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바로 생명과 내재성, ‘거리도 동일성도 아닌 일종의 통과, 아무런 공간적 변동도 없는 이행임을 나타내는 것이라고 한다. 내재성과 생명은 각각이 다른 것에 열려 있으면서, 생명은 생명에 내재한다는 형태로 그것과 관련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생명이 내재성이라기보다는 내재성을 불러일으키는 것이 생명이라는 것이다. 이런 일련의 논의는, 바로 들뢰즈의 내재성과 아감벤이 잠재력으로 말하는 것을 결부시킨다.

여기서 아감벤이 증거로 삼는 것은 철학이란 무엇인가(1991)의 들뢰즈이다. 이 저작에서의 내재성또는 내재평면(plan d’immanence)’의 논의야말로 여기서의 포인트가 된다. 이 텍스트에서 들뢰즈는 내재성이란 그저 자신에 대해 내재하는것뿐이며, “무엇에 대해 내재하는것이 아니라고 논한다(사르트르의 자아의 초월성에 대한 의미의 논리에서의 높은 평가를 여기서 참조하고 있다).[각주:15]내재성이란 의식에의 내재성도 자아로의 내재성도 아니다. 그것은 내재하는 것에의 내재인 것이며, 바로 자기 완결적인 운동성이다.

  

후기 들뢰즈의 텍스트를 여기서 끄집어내는 것에는 충분한 의미가 있다. 그것은 아감벤이, 여기서의 내재평면을 바로 (현실화한 생명체를 상정하는 베르크손적인 잠재성이 아니라) 스피노자적인 일의성으로 끌어당겨, 거기서 내재 그 자체를 해석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내재원리란, 존재의 초월을 모두 배제하는 일의성의 존재론을 일반화하는 것에 다름없다. 하지만 일의성을 절대화하면, 존재의 모든 점에서 존재 자체와 동등한 것이 되며, 관성과 부동성이 존재 위에 짓눌러오는 것 아닐까? 그런데 스피노자가 말하는 내재적 원인이라는 사유는, 행위자 자신에 대해서는 행위자 자체의 수동성이라는 것이며, 이 사유에 의해 존재는 그 의심에서 해방된다.[각주:16]


내재성은 바로 초월을 거부하면서 내재성자신이 내재하는 운동으로서 작동하는 가운데 있다고 간주된다. ‘내재성이 그 자체로, 초월이 아니라 작동을 갖는다는 것, 이것에 아감벤은 들뢰즈가 생명이라고 말하는 것의 원상을 보고 있다.

하지만 이에 대해 아감벤은 전면적으로 찬성하는 것은 아니라며, 다양한 반론을 가한다. 그것은 아감벤과 들뢰즈의 사유가 닿을락말락할 정도로 접근하고 있기 때문에 분간하기 어려운 것이지만, 그러나 결정적인 비판이기도 하다.

그 비판 중 하나는 들뢰즈가 이 텍스트에서 디킨스의 소설을 다루는 장면과 관련된 것이다. 그곳에서는 죽음에 처한 어떤 악당이 묘사된다. 죽어가고 있는 그에 대해, 주위의 누구나 상냥함을 드러낸다. 그에게 발견되는 것은 바로 벌거벗은 생명과 비슷한, 순수한 내재로서의 신체이다. 그런데 병에서 회복되면서, 악당은 단순한 생명이기를 그치고 다시 악당이 되며, 나쁜 짓과 욕지거리를 하기 시작한다. 주위 사람들도 다시 그에게서 멀어진다.

여기서 묘사되는 비인칭의 삶[생명]’은 바로 순수한 생명의 모습에 가깝다. 삶과 죽음의 협간에 있는 이런 중간지대의 묘사에 아감벤은 공명한다. 하지만 들뢰즈는 죽음에 가까운 이 장면에서, 삶을 개체 속에 가둬버리는 것을 거부한다. 들뢰즈는 또한 거의 분간되지 않는 아기의 웃음이라는 비인칭성도 언급한다. 비인칭적인 아기의 웃음은 아기가 개체화되면(, 거기에 개성이 출현하면) 사라지는 것, 개체에 속하지 않는 것이다. 그것은 죽어가는 인간에게서 나타나는 벌거벗은 존재방식과 평행적인, 원초적인 생명의 형상이며, 아감벤이 진술하는 중간영역 자체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에 대해 아감벤은 이렇게 논한다. , 여기서 제시되는 벌거벗은 생명이란 바로 아리스토텔레스가 영양섭취의 생명이라고 부른 것, 혹은 비샤가 우리에 갇힌 동물이라고 지목한 것, 즉 생명적 신체가 지닌 동물적인 혹은 식물적인 기능 방식에 매우 가까운 것이 아니냐고. 그러니까 여기서 질문되고 있는 것은 일면에서는 인간과 동물의 불분명함 아니냐고. 그 때문에 이들의 논의는, 정말로는 (들뢰즈 자신이 하고 있지는 않은) 이런 방향에서 생각되어야 하는 게 아니냐고. 그런데 이렇게 읽을 수 있는 서술이란, 내재를 생명이라는 영역으로 비켜 놓는 것에 관해서, 매우 위험한 토지속으로 들어가는 것이라고 아감벤은 말한다.

아감벤은 여기서 들뢰즈와 푸코의 차이도 선명해진다고 한다. 들뢰즈는 푸코가 성의 역사 1 : 지식의 의지에서 묘사한 권력론을 제대로 이해하기는 했다. 그러나 푸코가 생물학적인 실존이 정치 속에 들어온다는 것을 생명정치로서 파악한 반면, 들뢰즈는 푸코에서 이런 생명 자체란 무엇인가, 권력과의 관련에서의 그 의의는 무엇인가를 캐묻지 않고, “생명은 권력에 대한 저항이 되는바로 그것이라고 단적으로 정리해버린다. 하지만 그래서는 생명정치적인 갈등의 양의성을 논하기 위해서는, 충분한 논의의 방향을 제시하는 것이 되지 않지 않을까?[각주:17]

아감벤은 들뢰즈가 거론하는 내재의 생명에 실제로는 생물학적 요소가 거의 없다고 논한다(이것도 푸코에게서의 생명의 구체성과 대비를 이루는 사태이다). 최종적으로는 스피노자적인 내재의 지복에 이르는 들뢰즈의 에 있어서, ‘하나의 삶이란 절대적으로 무매개적이면서, 모든 생명에 깃든 무엇인가로서, ‘인식 없는 순전한 관조가 되고 만다. 그것은 들뢰즈 자신이 생기론에 두 가지 길을 찾아내려고 하면서도, 그 한쪽인 행동하는 이데아가 아니라 [다른 한쪽인] 순전한 내적 감각을 선택하는 것과도 포개져 있다. 들뢰즈가 논하는 것은 인식의 모든 대상주체의 저편에 있어서의 순전한 관조이며, 행동하지 않고 보존하는 순수한 잠재력이 아닐까.[각주:18]

이에 반해 아감벤은, 다음과 같은 의문을 던진다. 그렇다면 벌거벗은 생명, 생명이 깃든 불분명성의 지대에서가 아니라, 내재 자체의 위상에 가둬두는 것 밖에 안 되는 것 아니냐고 말이다. , 거기에는 아리스토텔레스적인 영양섭취의 생명과 반대의 것 밖에만 발견되는 것 아니냐고 말이다. 아리스토텔레스적(혹은 비샤적)인 생명이란 식물적인 생명/관계의 생명, 바깥의 동물/안의 동물, 식물/인간, 조에/비오스, 벌거벗은 생명/정치적인 삶이란느 다양한 구분선을 가능케 하는 것이었다(그리고 생명에 의거하는 푸코도, 아감벤과 간극이 있기는 하지만, 이 구분을 전제로 생명과 정치의 관계를 사고했을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들뢰즈의 생명이 절대적 내재에 이르는 것이라고 한다면, 이런 계층성이나 분리를 전혀 예상할 수 없는 것이다(그것이 일의성이 지닌 의미이기 때문이다). 들뢰즈의 생명 논의는, 스피노자적인 지복으로서의, ‘내재속의 운동에 머물러 버린다.[각주:19] 이것은 생명에 대한 취급방식으로서 정당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그리고 그것은 푸코가 말하는 생명정치학적인 상황에, 어떤 길을 제시하는 것일까?

아감벤은 바로 중간지대의 사상가로서, 다음과 같이 말하며 논의를 수습하려 한다.


푸코의 사유와 들뢰즈의 사유가 둘 다 극단적인 유언으로서 남긴 생명이라는 개념은, 도래하는 철학의 테마가 될 것임에 틀림없다고 우리는 서두에서 단언했는데, 어떤 의미에서 이런 단언을 할 수 있는가는 이제 분명하다. 이로부터 문제가 되는 것은 한편으로는 생명권력과 주체화 과정에 관한 최후의 푸코의 얼핏 보면 음울한 고찰과 다른 한편으로는 절대적 내재지복으로서의 하나의 삶에 관한 들뢰즈의 얼핏 보면 명랑한 고찰, 이 두 개의 고찰을 함께 읽어보는 것이다.[각주:20]


함께 읽어본다는 것은 물론 양자를 평균화시킨다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양측을 양측의 걸림돌로서 읽는 것, 양측을 양측에 대항시켜 읽는 것을 의미한다. 들뢰즈가 논하는 비인칭성의 일의성에는, 아감벤은 그 위상의 의미를 인정하면서도, 명확하게 이의를 제기하고 있다. 푸코의 주체화에 관해서도 최후기의 그것에 아슬아슬할 정도로까지 찬성하면서도 배제와 포함에 관한 논의의 부재를 계속 묻는 것이다.

그러면 이런 일련의 고찰을 마무리하는 데 있어서 아감벤은 앞서 말한 도식을 별다른 설명도 없이 제시한다. 일련의 논의가 푸코와 들뢰즈의 생명에 관한 개념의 애매함을 논의한 반면, 마지막에 놓인 이 도식에서는, 한편으로 푸코와 들뢰즈가 동거하는 내재의 선이 그려지고(그것은 스피노자와 니체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것에 대립시키듯이, 레비나스와 데리다의 초월의 선(후설이나 칸트로 거슬러 올라간다)이 설정된다(앞의 153쪽의 그림을 참조).

들뢰즈와 푸코의 유사성과 대비에 의해 전개되는 논의가, 완전히 다른 방향으로 나아가는 점은 여기서 따지지 말자. 이것 이상으로 문제인 것은, 이 양자의 선의 중간에 하이데거가, 아무런 설명도 없이 배치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 이상으로, 마치 하이데거를 축으로 초월과 내재라는 두 개의 선이 배치 가능한 것처럼 그려져 있다. 하지만 생명의 철학의 탐구의 마지막에, 왜 하이데거가 중요한 의미를 갖고 갑자기 도입되게 되는 것일까?

또 하나 생각해야 할 것은, 이 도식에서, 아감벤의 호모 사케르의 사유 자체는 어디에 놓이는가이다. 이에 대해서는 답변은 아마 한 가지밖에 없다. 아감벤은 항상 자신의 사유를 중간지대로 설정하려 한다는 것이리라. 그런 한에서, 여기서 아감벤은 자신과 하이데거를, 생명의 사유에 있어서 분명하게 포개놓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아감벤과 하이데거의 관련 : 동물과 인간

하이데거는, 여기서 이른바 아무런 예고도 없이, 생명의 문제의 초점을 맞추기 위해 끌어내지고 있다. 아감벤은 법이나 초월을 자명시하는 것은 아니지만, 법이라는 주제로 끌어들이고 생명을 논하는 한, 중간지대에 자신의 입장을 설정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아감벤이 본래 자신을 두어야 할 위치에, 하이데거의 이름이 적혀 있다. 그렇지만 하이데거는 바로 해석학적 현상학으로서 존재론을 구상하고, 언어에 존재가 깃들어 있다고 한 점에서 초월의 선을 대표하는 철학자가 아닐까? 하이데거의 어디에서 생명의 논의가 발견되는 것일까?

절대적 내재의 텍스트에서 하이데거의 이름이 제시되지 않은 것은 아니다. 들뢰즈의 내재와 사르트르의 논의의 가까움을 논하는 부분에서, 아감벤은 하이데거에 관해 다음과 같이 언급한다.


이렇게 들뢰즈는 의식이 가졌던 가치들을 정산하고 있는데, 이것은 어떤 철학자의 몸짓을 계속하는 것이 된다. 그 철학자의 작업을 들뢰즈는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으나, 20세기 현상학의 대표자 속에서는, 이 철학자가 적어도 이 점에 있어서는 들뢰즈에게 가장 가깝다는 것은 확실하다. 그 철학자란 하이데거, 그 멋들어진 알프레드 자리론에 등장하는 파타퓌직한 하이데거이다.[각주:21]


하지만 이것만으로는 설명이 충분하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파타퓌직으로서의 하이데거(들뢰즈, 하이데거의 알려지지 않은 선구자 알프레드 자리, 비평과 임상 수록)를 토대로 했다고 해도, 생명론적인 위상에는 아직 이를 수 없었을 것이다.[각주:22]

오히려 아감벤 자신의 하이데거론인 열림이 여기서의 논의와 더 깊은 연관을 갖고 있는 것으로서 검토해야 하지 않을까?

아감벤의 저작 열림으로 넘어가자. 이 책에서 아감벤은 인간과 동물이라는 부제에서 드러나듯이, 동물성을 둘러싸고 하이데거의 생명론이라는 문제계를 추적한다.

말할 것도 없으나, 존재와 시간(1927)에서의 하이데거는 생물학이나 생명의 철학에 대해 매우 엄격한 견해를 제시했다. 거기서는 자신의 존재론을, 당시 융성을 뽐냈던 생명의 철학으로부터 구분하는 것이나, 현존재의 논의가 생물학적인 생명의 주장과는 전혀 다른 것이라는 것을 확실하게 적고 있다.

하지만 이 단계에서의 하이데거도, ‘세계세계성의 개념에 이르는 직전에서라고는 하지만, ‘환경세계(Umwelt)’라는 윅스퀼의 술어에 중요한 지위를 부여한다. 윅스퀼의 환경세계론, 하이데거의 도구 존재로서의 세계를 묘사하기 위해 커다란 의의를 가진 것이었다.

그리고 이 테마를 생각할 때, 존재와 시간이상으로 중요한 것은 하이데거의 1929-30년의 강의록 형이상학의 근본개념들[각주:23]이다. 이 방대한 강의록에서는, 그 전반부에서 권태(Langeweile)’라는 (‘불안과는 다른) 정동성이 논의되고, 또한 후반부에서는 윅스퀼을 축으로 한 생물학적 논의가 주제화되며, 동물성을 둘러싸고도 상당한 서술이 이뤄진다. 거기서는 동물적인 생명은, “세계가 가난하다(Weltarmut)”고 규정되며, 돌이 세계를 갖지 않는 것(Weltlos)이나 인간이 세계(Welt)를 살고 있는 것과 대비되어 묘사된다.

이 하이데거의 강의록 자체가 수많은 문제를 포함하고 있을 것이다. 이 책의 전반부에서는 시간성을 노정시키는 근원적인 정서로서, 존재와 시간에서는 불안에 할당되었던 역할이, ‘깊은 권태[지루함]’로 대체된다(‘깊은 권태는 특정한 지루한 대상을 갖지 않는다는 점에서도 불안과 겹칠 것이다). 거기서는 불안이 죽음에의 선취로 현존재를 움직이게 하는 것과는 달리, 순간과 시간의 오랫동안(Langweile)의 관계가 논의되는 것이다.[각주:24] 심지어 이 깊은 권태(die tiefe Langweile)’의 논의가 전단계가 되어, 동물적 생명을 다루는 후반부로 향할 때, 현존재가 동물과 다른 것으로서 규정되게 된다. 이른바 하이데거 자신이 2년 전에 간행된 미완의 저서 존재와 시간, 다른 종류의 시각에서 재검토하는 것이다.

아감벤은 하이데거의 이 텍스트를 소재로 삼아, 열림의 논의를 밀고 나간다. 아감벤이 주목하는 것은, 특히 인간이 시간을 살아가는 형태로서의 깊은 권태라는 정동성과, 동물이 환경세계에 사로잡혀 있는 가난함사이의, 역설적인 결합 자체이다. 이 두 가지는 유사하지만, 인간(현존재)의 본질과 동물의 본질로서, 완전히 다른 종류의 사태이기도 하다. 하지만 아감벤은 하이데거의 논의에 있어서의 이 두 개의 착종된 관계에, 앞의 도식에서 초월과 내재의 선이 교차하는 지점을 찾아내고 있다.

아감벤은 다음과 같이 적는다.


하이데거에게서 초미의 과제는 동물의 세계의 가난함(Weltlos)’, 인간이 세계를 형성하다(weltbildend)’의 관계를 통해서, 현존재 세계--존재 라는 근본 구조 자체를 동물에 대해 위치짓게 되며, 그렇게 함으로써, 인간의 등장과 더불어, 생물 속에 나타나는 개시의 근원과 의미를 탐구하게 되는 것이다.[각주:25]


그렇지만 인간과 동물의 관계를, 예를 들어 이성적 동물이라는 방식으로, 동물적 생명에 무엇인가가 부가되도록 묘사하는 것은, 바로 존재와 시간에서의 하이데거가 계속 거부했던 것이었다. 여기서도 생물학적인 논의가 이뤄지지만, 그런 거절이 보이지 않는 것은 아니다. 달리 말하면, 여기서는 오히려 존재와 시간에서는 몇 줄로 처리되고 말았던 생물학과의 대결재부상하는 것으로 간주되어야 한다.[각주:26] 동물과 인간의 연관을 차이에 있어서 파악하는 것이, 현존재의 규정에 있어서 중요하다는 것이다.

하지만 왜 그럴까?

아감벤은 하이데거가 동물은 환경세계를 억지해제(das Enthemmende)한다고 표현하고 있는 것에 주목한다. 그것은 동물이 각각의 환경세계에서 고리를 이루면서도, 이로부터 열려져 있는 존재방식을 갖추고 있다는 것을 드러내는 것이다. “억지해제에 있어서는 동물이 그것에 에워싸여 있는 고리로부터 열려 있다.”[각주:27] 하지만 그런 동물의 존재방식은 또한 사로잡혀 있다=방심(Benommenheit)”고 말해진다. “사로잡힘=방심도 또한 환경세계 속에서, 열려지고 있으면서도, 몽롱한 상태에 있다는 것을 가리킨다. 존재 자체로의 열림(Offenbarheit)이 있는 것은 아니다.

이러한 사로잡힘=방심에 있어서, 동물은 어떤 지각을 행하는 것은 아니다. 꿀벌이 꿀을 빨고 있을 때에는, 오로지 그 대상 자체에 사로잡혀 있다[푹 잠겨 있다]. 거기서 자신의 신체가 절단돼도, 꿀벌은 꿀을 계속 빨고 있다.[각주:28] 이것은 주어진 환경성의 규정에 대한 사로잡힘=방심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동물의 행동거지는 억지해제로서, 열림에 대한 양의성을 갖추고 있다고 하이데거는 말한다. 그것은 하이데거의 다음의 문장에서 엿볼 수 있는 것이기도 하다. “방심 속에서는 존재자는 열려 있는(offenbar) 것이 아니며, 개시되는 것도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로 그 때문에, 닫혀져 있는 것도 아니다.”[각주:29]

동물은 존재자에게 열려있지만, 그런 존재자는 존재로서 노정되어 있는 게 아니다. 이런 매우 양의적인 사태가 여기서 강조되는 것이다.

그런데 동물이 환경세계 속에서 억지해제고리를 이루며 살고 있기 때문에 열림의 방향성을 갖는 것과, 그것이 사로잡힘=방심하고 있는 것 사이의 양의성은, 하이데거가 이 강의록의 전반부에서 논한 깊은 권태의 논의로 결부된다. 하이데거 자신이 동물의 사로잡힘=방심, 인간이 지닌 깊은 권태이라는 테마를, 그대로 연관시키고 있는 것이다.


이 점에 이르러서 하이데거는 강의의 1부에서 다뤘던 깊은 권태에 관한 논술을 불러일으키며, 동물의 방심과 깊은 권태라고 불렸던 근본적인 정서를 뜻밖의 형태로 공명시킬 수 있다.[각주:30]


깊은 권태란 하이데거에게서 인간적인 것이 동물적인 것으로 연결되는 장면 자체를 가리킨다. 하지만 그 방식은 어떤 것일까?


하이데거의 깊은 권태

이로부터 아감벤의 논의는 형이상학의 근본 개념들에서의 깊은 권태를 주제로 하는 것으로 향한다. 그것은 동물의 사로잡힘=방심과 매우 유사하지만, “사로잡힘=방심이 세계에 열려 있으면서도 스스로에 머물 수밖에 없는 것인 반면, ‘깊은 권태는 바로 인간이 시간을 살아가는 것의 근본에 있는 정동성이며, 그 때문에 닫혀 있으면서도 그 한가운데서 열려 있다는 점에서, 그 방향성을 정반대로 하는 것이다.

이러한 깊은 권태는 두 가지 특징을 갖는다고 말해진다. 우선 거기서는, 현존재가 거절되고 있는 존재자에게 건네지고[넘겨지고] 있다는 것이다. 이 계기는, 동물성이 지닌 억지해제고리’, 즉 닫혀 있으면서도 열려 있다는 존재방식과 흡사하다. 현존재는 보통은 존재자의 존재에 접근할 수 없다. 하지만 권태라는 존재방식 속에서, 그 닫힘 자체에 있어서, 인간은 존재자에게 건네지고 있다(ausfeliefert)는 것이다.

그리고 또 다른 깊은 권태의 특징은, “허공에 매달린 채로 있다[중지된 채로 유지된다](Hingehaltenheit)”는 것이라고 말해진다. “허공에 매달린 채로 있다[중지된 채로 유지된다]”는 것은 거기서 비활성인 채로 체류하는 것(brachliegende)이기도 하다고 얘기된다. 그것은 손에 넣지 못한 채 방치되고 있는 경작지를 의미하는 농경용어이기도 하다.

이것은 가능성을 가지면서 어떤 가능성도 현재화시키지 못하는 것으로서, 모든 가능성을 눈앞에 두는 것이기도 하다. 이런 사정은 아감벤이 잠재력에 의해 말했던 것과 강하게 겹친다. ‘깊은 권태특정한 구체적 가능성 전부를 중지시키고, 탈취하는 가운데, 근원적인 가능성(즉 잠재력)이 그 가치를 드러내는 체험[각주:31]이기 때문이다.

하이데거의 권태론은 특히 불안과의 연관에서 많은 논의해야 할 테마를 포함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당장은 아감벤의 논의에만 초점을 맞춘다면, 아감벤은 여기서의 논의에, 자신의 잠재력과 매우 가까운 어떤 것을 보고 있는가가 중요할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동시에 들뢰즈의 잠재성이나 내재라는 사고와의, 강한 결부를 시사하는 것이다. 거부함으로써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것. 거꾸로 아무것도 하지 않음으로써 가능성을 계속 갖는 것. 그것은 아감벤도 들뢰즈도 논의하는 바틀비(허만 멜빌), “하지 않는 편이 좋습니다[안 하는 게 좋습니다=안 하는 걸 좋아합니다](I would prefer noto to)라는 말과도 결부되면서, 무한한 가능성을, 모종의 무능력을 축으로서 끄집어내고 있는 것이다.[각주:32]

그러면 이런 깊은 권태는 동물성과 연관될까? 어떤 의미에서는 그럴 것이다. 이것은 현상적으로는, 동물이 환경세계속에서 사로잡힘=방심하는 것과 매우 가깝기 때문이다. 그리고 바틀비적인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는 무능력은, 들뢰즈라면 곧바로 bêtise=어리석음이라는 주제로 이어지며, 동물적인 무력함에 연관시키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감벤은 동물의 방심과 인간의 깊은 권태를 아슬아슬하게 접근시키면서 이것들을 동일시하지는 않는다.


방심에 있어서 동물은 억지해제하는 것과 직접 관계를 맺으며, 억지해제하는 것 속에 노출되고 마비됨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그런 것으로서 들통나게 하는 것은 결코 할 수 없었다. 바로 특정한 억지해제 영역과의 관계를 중지하고 비활성적인 것으로 하는 것을 동물은 할 수 없는 것이다. 그에 반해 깊은 권태는 세계가 가난하기 때문에 세계로, 동물환경으로부터 인간세계로 이행이 실현시키는 형이상학적인 조작인 것처럼 생각된다.[각주:33]


그래서 인간이란 동물성의 억지해제에 의해 성립하는 것이 아닌 것이다. 오히려 동물에게는 결코 할 수 없는 권태를 살아감으로써, 시간성의 무한의 가능성에, 그 비활성의 존재방식에 그칠 수 있는 존재자로서 그려질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인간은 동물에게는 불가능한 세계가능성을 찾아낼 수 있게 된다.

아감벤의 고찰의 귀결은, 이런 동물과 인간의 관계를 중립적으로 화해시키는 것이 아니다. 거기서 이뤄지는 것은 오히려 반대로, 이런 사정을 그대로 중지의 중지에 두는 것이다.


타원의 두 개의 초점

그러면 이런 형이상학의 근본개념들에 관한 논의는, 절대적 내재성에서의 아감벤에 의한 들뢰즈나 푸코의 독해에 무엇을 덧붙이는 것일까?

거기에서 하이데거가 맡는 역할은 명확하다. 하이데거가 생명의 사유의 계보 안에서 초월과 내재의 중간지점에 놓여 있다는 것의 의미는 열림에서 깊은 권태를 둘러싸고 제시된 매우 들뢰즈적인 내재성의 모습을 전제로 할 때에야 명확하게 드러날 것이다.

게다가 아감벤은 이렇게 파악되는 하이데거의 이중성, 즉 동물성에 있어서의 열림이면서도 돌파는 하지 않는 사로잡힘=방심, 인간에 있어서의 무능력으로서의 가능성인 깊은 권태, 대립하면서도 접하는 지점으로서 간주하는 것이다. 이렇게 묘사되는 타원 속에서, 들뢰즈와는 달리, 동물과 인간에 관해 생명 속에서의 본질적인 구분선을 탐색하는 것이 가능해진다. , 아감벤이 (들뢰즈적인 삶의 일의성에 반하여) 요청하는 벌거벗은 생명의 탐구의 다양성이 확보되는 셈이다. 이런 의미에서 아감벤이 해석하는 들뢰즈적인 내재가 갖추고 있는 불만이, 여기서 동물/인간의 분할선을 둘러싼 방식에서 다시 설정되고, 생명정치학적인 장면으로서 재파악된다.

여기서 아감벤은, 정당한 독해인지는 제쳐놓더라도, 하이데거의 생물론에서 배제와 포함을 둘러싼 자신의 논의와 가까운 것을 보고 있다. 그것은 내재를 둘러싸고 이루어지는 것인데, 인간적 초월의 편으로도, 다른 방향으로도 자리매김 되는 것일 수밖에 없다. 벌거벗은 생명은 동물성과 아주 가깝더라도, 하이데거의 권태쪽에 강하게 겹쳐진다. 무위가 지닌 가능성이 여기서는 논의의 요점이 된다.

포함과 배제를 둘러싼 아감벤의 사고는, “벌거벗은 생명을 생물학적인 논의로서 파악하는 것은 아니나, 하지만 거기서 생물성과 인간성을 역접적 연관 속에서 억누르려 하는 한, 하이데거의 시도와 아주 가깝다고 말할 수 있다. 언어나 법이라는 영역을 인정하면서, 중지에 있어서 깊은 권태를 노출시킨다는 전술은, 아감벤적인 양의성에 그대로 겹치는 것처럼 보인다. 다만 거기서 하이데거는 본래는 삶의 계보학의 중간이라기보다도 어디까지나 초월과 내재를 분할하는 선의 초월 쪽으로 기운 것으로 묘사되어야 할 인물이 아닐까? 그리고 아감벤은 하이데거와 똑같은 타원 내부에서 동거하면서도, 들뢰즈적인 내재에 가깝다는 점에서, 하이데거에 대해 약간 내재에 기우는 곳에 놓여야 할 것이다.

그러나 아무튼,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동물이라는 테마이다. 동물성을 고찰함으로써 가능해지는, 생명 속에서의 인간과 이것 이외의 존재자 사이의 분할선이다. 거기서는 동물과 인간이, 둘 다 생명이면서도, 배제와 포함을 반복하는 그 접점이 제시된다. 생명정치학의 논의가 인간의 동물화와 동시에 동물의 인간화(권리부여)와도 교차되면서 말해지는 의의도 여기에 있다.[각주:34] 인간과 동물을 둘러싼 타원, 하이데거와 아감벤이 동거하면서 두 개의 초점을 그리는 타원, 여기에 생명정치학의, 혹은 생명의 철학의 새로운 형상을 보는 것도 가능해지지 않을까? 아감벤의 들뢰즈 독해가 끄집어내는, 최대의 논점이 아닐까?


  1. 생명정치학의 측면에서는 얘기되지 않은 아감벤의 저술의 다양성에 대해서는 岡田温司, 『アガンベン読解』, 平凡社, 2011을 참조. [본문으로]
  2. Cf. Giorgio Agamben, Homo sacer : il potere sovrano e la nuda vita, Einaudi, 1995, pp.6ff. [본문으로]
  3. 푸코의 ‘고고학’ 및 ‘계보학’의 서술이 일관되게 단선적인 시간 배치에 의거하고 있지 않다는 것, 또한 ‘중지’라는 관점은 벤야민의 「역사의 개념에 대해」에서의 ‘중지상태의 변증법’에, 혹은 들뢰즈=가타리가 『철학이란 무엇인가』에서 논한 ‘부감俯瞰’이라는 관점 없는 관점과 매우 가깝다는 것 등을 고려해야 한다. 생명을 논하는 생명정치란 이런 “현실적인actual 관점”의 포기에 의해 바로 현실성이 될 수 있는 게 아닐까? [본문으로]
  4. Michel Foucault, «La vie: l’expérience et la science», in Dits et écrits, 1954-1988. tome IV, Gallimard. 1994. pp.763-776. [본문으로]
  5. Gilles Deleuze, «L’immanence: une vie …», in Deux régimes de fous : textes et entretiens, 1975—1995, Minuit 2003, pp.359-363. [본문으로]
  6. Agamben, Homo sacer, p.3. [본문으로]
  7. ibid., pp.6—7. [본문으로]
  8. ibid., p.7. [본문으로]
  9. 『호모 사케르』 2부를 참조. [본문으로]
  10. Ibid., p.127. [본문으로]
  11. 그러나 동시에 바타이유의 사유가 현대적 정치학 속에서 반복해서 다뤄지고 있다는 것을 봐도, 이런 초월을 목표로 할 뿐만 아닌 방향성, 즉 바타이유 자신이 “저열한 유물론”이라고 부른 영역을 어떻게 생각할 것이냐는 중요한 문제이기를 계속한다. [본문으로]
  12. Foucault, «La vie», p.774. [본문으로]
  13. ibid: p. 775. [본문으로]
  14. Giorgio Agamben, La potenza del pensiero: saggi e conferenze, Neri Pozza, 2005, p.386. [본문으로]
  15. Gilles Deleuze et Félix Guattari, Qu’est-ce que la philosophie?, Minuit 1991, pp.49-50. [본문으로]
  16. Agamben, La potenza del pensiero, p.393. [본문으로]
  17. ibid., pp.401ff. [본문으로]
  18. ibid., p.404. [본문으로]
  19. 그렇지만 이것에 이어진 「산보하다(pasearse)」라는 절에서, 이런 스피노자적 내재 자체에 있어서의 운동성에, 아감벤이 모종의 찬성을 보여주지 않는 것은 확실하다. 순수한 관조에 상응하는 ‘산보’에, 아감벤이 벤야민적인 산책자의 그림자를 보지 못했을리도 없다. 이 점은 아감벤 자신의 ‘애매함’을 잘 드러낸다. [본문으로]
  20. ibid., p.410. [본문으로]
  21. ibid.. p.392. [본문으로]
  22. 오히려 이 논고에서는 알프레드 자리를 끌어들여 기묘한 언어 사용으로서의 하이데거가 찬양된다. 하이데거에 관해서는 물론 『차이와 반복』에서의 각주(Gilles Deleuze, Différence et répétition, PUF, 1968, p.188) 등의 검토 재료가 있는데, 이 양자에서의 ‘생명’을 둘러싼 관계성은 아감벤에 의한 매개를 거치지 않으면 역시 사고하는 데 어렵다고 생각된다. [본문으로]
  23. Martin Heidegger, Die Grundbegriffe der Metaphysik : Welt, Endlichkeit, Einsamkeit, in Gesamtausgabe, Bd. 29/30, Vittorio Klostermann, 1983. [본문으로]
  24. 본 논고에는 직접 관련되지 않으나, 이 강의록에서의 시간론은 하이데거의 문맥에서도, 또한 그것 이외의 맥락에서도 많은 문제를 품고 있다. 특히 『존재와 시간』에서 논의되는데, 그 존재방식이 면밀하게는 기술되지 않은 “순간=찰나(Augen-blick)”이라는 주제가 “깊은 권태”라는 “시간의 사이가 길어지는 것”의 논의에 관련되어 재파악되고, 그것이 “순간의 첨단이 도망쳐 들어오는” 것으로 그려지는 점(33, 34절 등)은 시간과 순간, 현재의 본래성과 비본래성이라는 테마를 고찰할 때 간과할 수 없을 것이다. [본문으로]
  25. Giorgio Agamben, L’aperto: l’uomo e l’animale, Bollati Boringhieri. 2002, p.53. [본문으로]
  26. ibid., p.53. [본문으로]
  27. Heidegger, Die Grundbegriffe der Metaphysik, S.370-371. [본문으로]
  28. ibid., S.352. [본문으로]
  29. ibid., S.361. [본문으로]
  30. Agamben, L’aperto, pp.64-65. [본문으로]
  31. ibid., p. 70. [본문으로]
  32. 들뢰즈의 논의란 『비판과 임상』에 수록되어 있는 「바틀비 또는 상투어」이다. 아감벤은 이 책의 이탈리아어 번역본에 긴 해설을 붙여서 한 권의 책으로 냈다(Gilles Deleuze et Giorgio Agamben, Bartleby: la formula della creazione, Quodlibet, 1998). [본문으로]
  33. Agamben, L’aperto, pp.70-71. [본문으로]
  34. 인간의 동물화와 함께 동물의 인간화라는 반대 방향의 움직임도 발생하고, 거기서 ― 바로 아감벤식으로 말하면 ― 인간과 동물의 동일성과 차이의 문제가 다시 물어지고 있다는 것은, 삶을 다루는 여러 가지 논의의 구체성에 있어서 ― 동물윤리, 환경문제, 생물다양성 등 ― 이것들을 재차 형이상학적으로 사고하기 위해서도 필요한 것이리라. 이 점에 대해서는 小泉義之, 「人間の消失、動物の消失」, 『現代思想』, 2009년 7월호. ; 市野川容孝, 「動物の人間化、人間の動物化──バイオポリティクスの一断面」, 『現代思想』, 2009년 7월호를 참조. 두 논문 모두 양자의 구분이 애매해지는 교차점을 묘사한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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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틀비 혹은 우연성에 관하여

Bartleby o della contingenza

Giorgio Agamben  

 

Bartleby o della contingenza

Original Italian edition ⓒ 1993 by Giorgio Agamben.



1. 필경사 혹은 창조에 관하여


필경사로서의 바틀비는 어떤 문학의 성좌에 속해 있다. 이 성좌의 정반대에 있는 별은 아카키 아카키에비치Akaky Akakievich이며(“그에게 세계 전체는 어떤 의미에서는 그의 사본에 담겨 있었다. 그는 좋아하는 문자가 있었으며, 이 문자들과 만나기라도 할 때면 그는 거의 정신줄을 놓을 정도로 기뻐했다[이 필경사라는 작업에서 세계는 그에게 이른바 완벽하게 닫혀져 있었다. 몇 개의 문자를 마음에 들어했으며, 이것들과 마주치면 그는 뛸 듯이 기뻐했다]”), 성좌의 중앙은 부바르Bouvard와 페퀴체Pécuchet라는 쌍둥이별로 이루어졌으며(“두 사람 모두에게 남모르게 좋은 생각이 싹텄다 필사복사가 그것이다”), 이것들의 반대 극은 지몬 탄나Simon Tanner(그가 요구한 유일한 정체성[신원]나는 필경사다이다), 그리고 어떤 필체handwriting도 가뿐하게 복제할 수 있는 미쉬킨 공작의 하얀 빛으로[빛이] 빛났다. 조금 떨어진 곳에는 소행성대()처럼 카프카의 [소송에 나온 이름 없는] 법정의 서기들이 있다. 그러나 바틀비는 또한 철학적 성좌에도 속한다. 바틀비라는 형상의 수수께끼를 풀 암호를 담고 있는 것은 그 성좌뿐이며, 문학적 성좌로는 그 암호를 충분하게 추적할 수 없을 것이다.

 

1. 수다Suda라는 이름으로 통하는 후기 비잔틴 시대에 나온 사전은 아리스토텔레스라는 항목에 다음과 같은 정의를 담고 있다[특이한 정의를 전하고 있다]. Aristotelēs tēs physeōs grammateus ēn ton kalamon apobrekhōn eis noun, “아리스토텔레스는 자신의 펜을 사유 속에 담군 자연의 필경사였다.” 횔덜린은 소포클레스의 [오이디푸스왕] 번역에 붙인 노트에서 이 구절을 인용하는데, 그때 그는 분명한 이유도 제시하지 않은 채 약간의 정정을 가함으로써 이를 뒤엎어 버렸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자신의 호의적인 펜을 담군 자연의 필경사였다”(eis noun[사유 속에]eunoun[호의적인]으로 바꾼 것이다). 세빌랴의 성() 이시도루스[Isidore of Seville(c 570-636): 세빌랴의 대주교·학자·역사가]어원(Etymologies)은 똑같은 구절의 상이한 판본을 기록하는데, 이것은 카시오도루스Cassiodorus에게서 연원한다. Aristoteles, quando perihermeneias scriptebat, calamum in mente tingebat, “아리스토텔레스는 [오르가논을 이루는 기초적 논리학의 작품 중 하나인 아감벤] 명제론을 썼을 때 그의 펜을 정신[*영문에는 사유라고 되어 있으나 원문을 보면 정신이다] 속에 담궜다. 어떤 경우든 결정적인 것은 자연의 필경사라는 이미지가 아니라 (이런 이미지는 이미 앗티쿠스Atticus에게서도 발견된다) 누스nous, 즉 사유나 정신이 이 철학자가 펜을 담군 잉크병과 비교된다는 점이다. 쓰기 위해서 사고가 사용하는 잉크라는 이 어둠의 한 방울이 사유 자체인 것이다[펜이 쓰기 위해 사용하는 잉크라는 이 어둠의 한 방울이 바로 사유 자체인 것이다].

필경사라는 하찮은[볼품 없는] 복장[몰골]으로 [서양]철학전통의 근본적인 형상을 제시하는, 그리고 특별한 종류의 행위임에도 불구하고 글쓰기라는 행위를 사유에 빗대는 이 정의의 기원은 무엇인가?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작 전체에는 이와 유사한 이미지를 담고 있는 텍스트가 딱 하나 있는데, 어쩌면 이것이 카시오도루스나 미지의 작가[은유가]에게 은유를 위한 토대[실마리, 단초]를 제공했을 수도 있다. [다만] 이 구절은 논리학의 오르가논이 아니라 아리스토텔레스의 영혼에 관하여에 속한다. 3권에 있는 구절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누스, 즉 지성 또는 잠재적 사유[잠재적 지성 또는 사유]를 아직 거기에 아무것도 쓰여 있지 않은 서판에 빗댄다. “누스란 그 위에는 아무것도 현실적으로 쓰여져 있지 않은 서판[grammateion]과도 같다[서판이 현실적으로는 아무것도 쓰여져 있지 않은[그러나 잠재적으로는 글자가 쓰여져 있다고도 말할 수 있다] 것과 마찬가지가 누스에 관해서도 일어난다](영혼에 관하여, 430 a 1).

기원전 4세기의 그리스에서는 파피루스와 잉크가 기록의 유일한 수단이지는 않았다[파피루스 위에 잉크로 쓰는 것이 글쓰기의 유일한 수단인 것은 아니었다]. 밀랍을 엷게 바른 층으로 덮인 서판에 첨필stylus[문자를] 새겨넣음으로써 [글을] 쓰는 것이 훨씬 일반적이었고, 사적인 사용에서는 [사적인 용도로 사용할 때는] 특히 그랬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자신의 논고에서 결정적인 지점, 즉 잠재적 지성[사유]의 본성을, 그리고 지성[사유]이 지성화[지성]의 현실성으로 이행하는 양식을 고찰하는 지점에 이르러서, 이런 종류의 대상을 지시한다. 그것은 필시 그가 자신의 사유들을 그 순간에 기록하고 있었던 바로 서판 자체였을 것이다. 훨씬 나중에, 펜과 잉크로 적는 것이 일단 지배적인 관행이 되었을 때, 그리고 아리스토텔레스의[가 사용하는] 이미지가 케케묵은 것처럼 보일 위험이 있었을 때, 누군가가 나중에 수다에 기록된 의미로 이를 근대화했다[누군가가 이것을 시대에 맞게 새롭게 고쳤고 마침내 이 나중의 의미가 수다에 기록되었던 것이다].

 

2. 서양철학 전통에서 [] 이미지는 커다란 행운을 누렸다. ‘서판grammateion백지tabula rasa[처음으로 옮긴 영혼에 관하여] 라틴어 번역자는 이 이미지를 [새로운] 역사에 맡겼다. 이 역사는 [한편으로는] 로크의 백지에 이르렀고(“태초에 정신은 그 어떤 성격도, 그 어떤 이념도 없는 이른바 백지 같은 것이라고 가정해 보자”), [다른 한편으로는] 이탈리아어에서 백지로 돌아가다깨끗하게 일소하다’(far tabula rasa)라는 여전히 존재하나 어울리지 않는 표현에 이르렀다. 사실상 이미지는 애매했으며[애매함을 띨 가능성을 포함하며], 확실히 이 애매함이 이 이미지의 성공[이미지가 널리 퍼져 안착되는 데]에 기여했다. 아프로디시우스의 알렉산드로스Alexander of Aphrodisius는 철학자아리스토텔레스grammateion서판에 관해 말한 것이 아니라 보다 정확하게는 그것의 epitedeiotes, 즉 서판의 표면을 덮고 있는 엷은 밀랍 층에 관해 말해야만 했다고 지적했다. 바로 여기에다 첨필로 문자를 새겨넣는 것이다. (라틴어 번역자의 용어를 따른다면 ‘tabula rasa미끄러운 서판이 아니라 ‘rasura tabulae서판의 미끄러운 곳이다.) 알렉산드로스가 이렇게 주장할 특별한 이유를 갖고 있었던 고찰은, 하지만 정확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서판의 이미지를 통해 피하려고 애쓴 어려움은 사유의 순수 잠재성이라는 어려움이며, 사유의 순수 잠재성이 현실성으로 이행하는 것을 어떻게 인식할 수 있는가였다. 왜냐하면 만일 사유가 그 자체에 있어서 어떤 한정적인determinate 형식을 지닌다면, (서판이 하나의 사물이듯이) 사유가 항상 이미 어떤 것이라면, 그것은 이해 가능한 대상으로 필연적으로 보일 것이며, 따라서 지성intellection을 방해할 것이다. 이 때문에 아리스토텔레스는 누스잠재적이라는 것 외에는 다른 어떤 본성을 갖지 않으며, 사고하기에 앞서서 그것은 절대적으로 무이다”(De anima, 429 a 21-22)라고 특정하는 데 주의를 기울였다.

그러므로 정신마음은 사물[정해진 어떤 것]이 아니라 순수 잠재성의 존재이며, 거기에는 아무것도 쓰여져 있지 않는 서판이라는 이미지는 순수 잠재성이 존재하는 양식을 표상하는 기능을 한다.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있을[어떤 것일] 수 있거나 어떤 것을 할 수 있는 모든 잠재성은 항상 있지[어떤 것이지] 않을 수 있거나 어떤 것을 하지 않을 수 있는 잠재성(dynamis mē einai, mē energein)이다. 이것이 없으면 잠재성은 항상 이미 현실성으로 이행할 것이며, 그리하여 현실성과 구별될 수 없게 될 것이다(아리스토텔레스가 형이상학9권에서 명확하게 논박하고 있는 것이 바로 이러한 메가라파의 테제이다). ‘~이지 않을 잠재성[-잠재성, potential not to]은 잠재성에 관한 아리스토텔레스의 교설의 가장 중요한 비밀이다. 이 교설은 모든 잠재성 그 자체를 비잠재성으로 변형한다(tou autou kai kata to auto pasa dynamis adynamia모든 잠재성은 각각에 대응하는 비잠재성과 동일한 것에 속하며, 동일한 과정에 따른다)(형이상학, 1046 a 32). 건축가는 건축할 수 있는 잠재성을 현실화하지 않을 때에도 자신의 잠재성[잠재력]을 간직하고 있듯이, 그리고 기타라 연주자는 그가 기타라를 연주하지 않을 수 있기 때문에 기타라 연주자이듯이, 이와 마찬가지로 사유는 사고할 수 있는 잠재성과 사고하지 않을 수 있는 잠재성으로서 [동시에] 존재하며, 거기에는 아무것도 쓰여 있지 않은 [밀랍으로 덮여 있는] 서판도 이와 마찬가지다(이것이 중세의 철학자들이 말한 잠재적 지성potential intellect이다). 민감한 밀랍 층이 필경사의 첨필에 의해 갑작스럽게 긁히게 되듯이, 사유의 잠재성은 그 자체에 있어서는[즉자적으로는] 무이지만[아무것도 아니지만], 지성intelligence의 현실성이 발생할 수 있도록 허용한다.

 

3. 메쉬나에서 1280년과 1290년 사이에, 아브라함 아불라피아Abraham Abulafia는 카발라주의적 논고들을 편찬했는데, 유럽 각지의 도서관에 초고의 형태로 수세기 동안 묻혀 있었던 이 논고들은 20세기가 되어서야 비로소 (게르숌 숄렘과 모쉐 이델Moshe Idel에 덕분에) 비전문가들의 주목을 끌었다. 이 저작들에서 신적 창조는 글쓰기라는 행위[현실성]로 간주되는데, 이 글쓰기에서 문자는 «»의 창조적 말[신의 창조를 행하는 말] 자신의 펜을 끄적대는 필경사와 유사하다 이 피조물로 육화肉化되는 물질적 수단vehicle을 대표하는 것이라고 얘기될 수 있다. “모든 피조물의 기원에 있는 비밀은 알파벳 문자이며, 모든 문자는 창조를 지시하는 하나의 기호이다. 필경사가 펜을 손에 쥐고 자신이 물질에 부여하고 싶어 하는 형식을 마음속에서 생각하면서 펜을 사용해 잉크방울로 그려내듯이, 이와 유사한 행위가 창조라는 더 높은 영역과 더 낮은 영역에서도 수행된다(이 모든 몸짓에 있어서 필경사의 손은 물질과 형식의 지지체/담지자subject인 신체를 재현하는 잉크가 양피지로 흘러들도록 하는 도구로서 사용된 무생물인inanimate 펜을 움직이는 살아 있는 기관이다[이 모든 몸짓에 있어서 필경사의 손은 생명력 없는 펜을 움직이는 살아 있는 기관이다. 이때 펜은 물질과 형식의 지지체/담지자인 신체를 재현하는 양피지 위로 잉크가 흘러들도록 하는 도구로서 사용된다]). 이것은 지능을 가진 자라면 누구나 이해할 수 있다. 왜냐하면 이것 이상의 것을 말하는 것은 금지되기 때문이다.”

아불라피아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독자였으며, 당시의 모든 교양 있는 유대인과 마찬가지로, 아랍어 번역과 주석을 통해 철학자[아리스토텔레스]를 잘 알고 있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영혼에 관하여에서 약간 수수께끼 같은 문장으로 정리해버리는) 수동적 지성의 문제, 그리고 수동적 지성이 능동적 혹은 제작적 지성과 맺는 관계의 문제는 팔라시파falasifa(아리스토텔레스 신봉자들을 이슬람에서는 이렇게 불렀다)에 의해 예외적인 예민함을 가지고 다뤄졌다. 그리고 [그 자신이] 팔라시파의 황태자인 아비첸나는 세계의 창조를 신적 지성이 스스로를 사고하는 현실태로서 인식했다[그리고 바로 팔라시파의 군주인 아비첸나는 세계의 창조를 인식하는데 있어서, 세계의 창조를 신 자신을 사고하는 신의 지성이 현실성으로 이행한 것이라고 간주했다]. 따라서 달 아래 세상의 창조(아비첸나가 마음속에 품고 있던 유출론적 과정에 따르면, 이것은 최후의 천사인 지성의 작업으로, 아리스토텔레스의 능동적 지성agent intellect에 다름 아니다)는 스스로를 사고하는 사유의 모델을 따라서, 그리고 이런 식으로 피조물들의 복수성을 있게 하는 사유의 모델을 따라서 이해되었다. 창조의 모든 행위는[현실성은] (아비첸나의 천사들을 여성으로 바꿔버린 13세기의 연애시인들은 이것을 잘 알고 있었는데) 지성[지능]의 현실성[행위]이다. 그리고 거꾸로, 지성의 모든 현실성은 어떤 것을 존재하게 하는 창조의 현실성이다. 하지만 바로 영혼에 관하여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잠재적 지성을 거기에 아무것도 쓰여져 있지 않은 서판이라고 표상했다[제시했다]. 그 결과 중세인들이 자연학6권으로 알고 있었던 영혼에 관한 감탄할 만한 논고에서 아비첸나는 잠재적 지성의 다양한 종류나 수준을 묘사하기 위해 글쓰기라는 이미지를 사용한다. 언젠가는 쓰는 법을 틀림없이 배울 테지만 아직은 쓰기에 관해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의 조건과 닮은 잠재성이 있다(그는 이것을 물질적[질료적] 잠재성이라 부른다). 그 다음에는, 펜과 잉크로 쓰기 시작했으며 처음으로 글자를 적는 방법을 알게 된 아이에게 속하는 잠재성이 있다(그는 이것을 [손쉬운 잠재성 또는] 가능적 잠재성이라 부른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완성된 또는 완벽한 잠재성이 있는데, 이것은 쓰지 않는 순간에도 쓰기라는 기예를 완벽하게 소유한 필경사에게 속한다(potentia scriptoris perfecti in arte sua, cum non scripserit). 좀 더 나중에, 아랍의 전통에서 창조는 쓰기라는 현실성과 같은 것으로 간주됐다. , 수동적 지성을 조명하고[빛을 쪼이고] 이것을 현실성으로 이행시키는 능동적agent 지성 혹은 제작적 지성은, 따라서 ‘«»’(Qalam)이라는 이름의 천사와 동일시된다.

안달루시아의 위대한 수피인 이븐 아라비Ibn Arabi메카의 계시(The Illuminations of Mecca)라는, 죽을 때까지 헌신적으로 썼던 작업의 구상을 신성한 도시holy city에서 끌어왔을 때, 그가 2장을 문자의 학문ilm al-hurûf에 바치기로 결정한 것은 따라서 결코 우연이 아니다. 이 학문은 모음과 자음의 위계적 수준들뿐만 아니라 이것들이 신적인 이름들에 어떻게 조응하는가를 다루었다. 인식을 획득하는 과정에서, 문자의 학문은 표현할 수 없는 것에서 표현할 수 있는 것으로의 이행을 표시한다. 창조의 과정에서 이것은 잠재성에서 현실성으로의 이행을 가리킨다. 스콜라학파에게는 단순히 말로 형언할 수 없는 것이던 실존과 순수 «존재»를 이븐 아라비는 네가 그 의미인 문자라고 정의한다. 그는 잠재성에서 현실성으로의 창조의 이행을 둑투스ductus라고 표상한다[창조가 잠재성에서 현실성으로 이행하는 것이 둑투스라고 도해적으로 표상한다]. 이 둑투스는 알리프--alif-lâm-mîm이라는 세 개의 문자를 하나의 몸짓으로 묶는다. 이 서기소grapheme[書記素: 어떤 언어의 서기체계書記體系의 최소 단위, 영어 알파벳의 각 문자 따위]의 첫 번째 부분인 문자 알리프alif는 잠재적 «존재»가 속성으로 하강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두 번째 부분인 람lâm은 속성이 현실성으로 확장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세 번째 부분인 밈mîm은 현실성이 현시manifestation로 하강한다는 것을 나타낸다.

여기서 쓰기와 창조 과정의 등치[동일시]는 절대적이다. 쓰지 않는 필경사(바틀비는 이것의 마지막이자 소진된[쇠약해진] 형상이다)는 완전한 잠재성이며, 이것을 창조의 현실성으로부터 분리하는 것은 오로지 «»뿐이다.

 

4. 필경사의 손을 움직이게 하고, 그리하여 쓰기라는 현실성으로 이행시키는 것은 누구인가? 가능적인 것이 실제적인 것으로 이행하는 것은 어떤 법칙을 따라서 이뤄지는가? 가능성이나 잠재성과 같은 어떤 게 있다고 한다면, 이 어떤 것 안에서 혹은 바깥에서 이 어떤 것을 존재하도록 야기하는 것은 무엇인가? 이슬람에서 이 물음은 모테칼레밈motekallemim, 즉 수니파 신학자들과 팔라시파falasifa 사이의 분열의 주제를 구성했다[이슬람에서 모테칼레밈motekallemim이라 불리는 수니파 신학자들과 팔라시파falasifa 사이의 분열은 이런 의문을 둘러싸고 일어났다]. 팔라시파는 아리스토텔레스의[가 말하는] 서판에 시선을 고정한 채, «»의 마음정신이나 장인의 마음정신에 존재하는 가능적인 것이 창조적 현실성에 있어서 어떤 원칙과 법칙을 따라 발생하느냐 발생하지 않느냐를 탐구했다. 이들과는 반대로, 수니 정통파의 지배적 조류를 대표하는 아슈알리파Asharites는 원인, 법칙, 원칙이라는 개념 자체를 파괴할 뿐 아니라, 가능적인 것과 필연적인 것에 관한 모든 담론을 무효로 만들며, 그리하여 팔라시파의 탐구의 토대 자체를 무너뜨린다.

사실상 아슈알리파는 창조의 현실성을 기적과도 같은 사고(事故)를 끊임없이 순간적으로 생산하는 것이라고 인식한다. 이런 사고(事故)는 다른 사고에 영향을 끼칠 수 없으며, 따라서 모든 법칙과 인과관계로부터 독립적이다. 염색업자가 흰 천을 쪽빛 염료 통에 담글 때, 혹은 대장장이가 칼을 불에 달굴 때, 염료는 천을 색깔로 물들이기 위해 천에 침투하는 것이 아니며, 금속의 열은 칼날을 고온으로 발광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다[금속의 열은 칼날을 시뻘겋게 달아오르게 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 자신이 우연의 일치coincidence를 수립한다. 이 우연의 일치는 습관적인 것이지만, 그 자체로는 순전히 기적과도 같다. 이런 우연의 일치에 의해 천이 쪽빛 염료 통에 담그어진 순간에 천에는 색깔이 산출되며, 칼날이 불로 달궈질 때마다 매번 시뻘겋게 달아오른다.

 

그러므로 필경사가 펜을 움직일 때, 펜을 움직이는 것은 필경사가 아니다. 이 움직임은 신이 필경사의 손으로[손 안에서] 창조하는 사고(事故)일 뿐이다. 신은 손의 움직임이 펜의 움직임과 일치한다는 것을, 또 펜의 움직임이 쓰기의 산출과 일치한다는 것을 관습적인 것으로서 수립했다. 하지만 손은 이 과정에서 그게 무엇이 됐든 그 어떤 인과적 영향력도 갖고 있지 않다. 왜냐하면 어떤 사고(事故)는 다른 사고에 대해 작용할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펜의 움직임의 경우, 신은 네 개의 사고(事故)를 창조한다. 이 네 가지 사고(事故)는 결코 다른 사고의 원인일 수가 없으며, 그저 서로 공존할 뿐이다. 첫 번째 사고(事故)는 펜을 움직이려는 나의 의지이다. 두 번째는 펜을 움직일 수 있는 나의 잠재력이다[펜을 움직이려는 나의 의지를 움직일 수 있는 나의 잠재력이다]. 세 번째는 내 손의 움직임 자체이다. 마지막으로 네 번째는 펜의 움직임이다. 따라서 인간이 어떤 것을 원하고 이를 할 때, 이것이 의미하는 것은 첫째, 그의 의지가 그에게 창조되며, 그런 후에 움직이는 능력이 창조되며, 그리고 마지막으로 행동 자체가 창조된다는 것이다.

 

이것은 철학자들이 제공한 창조적 현실성과는 다른 창조적 현실성에 대한 인식이 아니다[여기서 문제가 된 것은 단순히 철학자들이 구상한 것과는 다른 창조적 현실성의 구상이 아니다]. 신학자들이 원하는 것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서판을 영원히 깨버리는 것, 세계로부터 가능성의 경험을 모조리 몰아내는 것이다. 그러나 잠재성의 문제는 인간 존재의 영역에서 축출되자마자 곧바로 신에게서 재등장한다[신의 영역으로 이행한다]. 이 때문에 가잘리Ghazali는 바그다드에 있는 고등학교madrasa의 총명한 교수였을 때는 철학자들의 자기파괴(The SelfDestruction of the Philosophers)라는 책에서 아슈알리파의 입장을 집요하게 유지했으나, 이후 예루살렘의 바위의 모스크mosque of the Rock in Jerusalem에서부터 다마스쿠스의 미나레츠[minarets, 회교사원의 뾰족탑]에 이르기까지 방황을 하는 동안에, 필경사라는 형상을 또 다시 곰곰이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종교학의 부활(Revival of the Religious Sciences)에서 신의 잠재력에 관한 교훈담apologue을 저술했다. 그것은 다음과 같이 시작되었다.

 

신의 빛에 의해 계발된 사내가 검은 잉크가 묻은 종이 한 장을 보고 이렇게 물었다. ‘너는 아까 눈을 멀게 할 정도로 새하얗는데, 어째서 지금은 검은 표시로 덮여 있는가? 왜 네 얼굴이 거무스름해진 건가?’ ‘네가 그렇게 말하는 것은 부당하다고 종이는 대답한다. ‘내 얼굴을 검게 만드는 것은 내가 아니기 때문이지. 잉크에게 물어봐. 아무런 이유도 없이 잉크 단지에서 나와서는 내게 쏟아졌으니까.’ 그래서 사내는 설명을 기대하고 잉크에게 말을 걸지만, 잉크는 펜에게 들으라고 대답한다. 자신을 조용한 거처에서 떼어내서 종이 위로 추방한 것은 그 놈이라는 것이다. 다시 사내가 펜에게 물어보자, 펜은 손한테서 얘기를 들으라고 한다. 자신을 움켜쥔 다음에 잔인하게 끄트머리를 둘로 쪼개고 잉크 단지에 담근 것은 손이 아니냐는 것이다. 손이 말하길, 자신은 비참한 살과 뼈에 불과할 뿐이며, 따라서 자신을 움직인 «잠재성»에게 물어보면 어떻냐고 사내에게 얘기한다. 하지만 «잠재성»«의지»에게 들어보라 하고, «의지»«»에게 물어보라 하며, 마침내 원인에서 원인으로 움직이면서 이 계발된 사내는 신적 «잠재성»의 칠흑 같은impenetrable 장막에 이르렀다. 거기서 무시무시한 목소리가 천둥처럼 내리꽂힌다. ‘신이 하는 일에 대해 신에게 이유를 묻지 마라. 네 행위에 대한 이유는 네게서 찾아라.’

 

그러므로 이슬람적 숙명론(강제수용소 수감자inhabitant 중에서도 가장 어두운 형상인 무젤만의 이름은 여기서 유래한다)의 뿌리는 체념의 태도에 있는 게 아니라, 그 반대로 신의 기적이 끊임없이 작동되고 있다는 해맑은 신앙에 있다. 그러나 모테말레밈motekallemim의 세계에서는 [그리고 기독교 신학자들에게는 이들에 상당하는 사람들의 세계에서는] 가능성의 범주가 모조리 파괴됐다는 것은 분명하다. 인간의 잠재성이 기반을 잃었다는 것도 확실하다. [이제] 신의 펜의 해명할 수 없는 움직임만이 있을 뿐으로, 그 움직임은 결코 예측될 수 없으며, 서판은 이 움직임을 예상할 수 있는 아무런 이유[근거]도 갖고 있지 않다. 세계의 이 절대적인 탈양태화demodalization 대립하여, 팔라시파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유산에 여전히 충실한 채로 있다. [사실상] 철학은 가장 깊은 의도에 있어서 잠재성의 확고한 천명assertion이며, 가능적인 것 자체의 경험의 구축이다. 사유가 아니라 사고할 수 있는 잠재력이야말로, 쓰기가 아니라 흰 종이야말로 철학이 모든 대가를 치러서라도 잊기를 거부하는 것이다.

 

5. 하지만 잠재성은 사고하기가 가장 어렵다. 왜냐하면 잠재성이 항상 무언가를 하거나 뭔가일 수 있다는 잠재력일 뿐이라면, 우리는 잠재성을 결코 그 자체로 경험할 수 없기 때문이다. 메가라학파가 주장하듯이, 잠재성은 현실성이 실현되는 그런 현실성에서만 존재할 뿐일 것이다. 잠재성 자체의 경험은 잠재성이 항상 또한 (어떤 것을 하거나 사고하지) 않을 잠재력일 때에만, 서판이 그 위에 적히지 않을 수 있을 때에만 가능할 뿐이다. 그러나 바로 여기서 모든 것은 훨씬 복잡해진다. 사고하지 않을 수 있는 잠재력을 사고한다는 것은 어떻게 가능한가? 사고하지 않을 수 있는 잠재력이 현실성으로 이행한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사유의 본성이 잠재적이라 한다면, 사고는 무엇을 사고하게 될 것인가?

형이상학9권의 신의 정신을 다루는 대목(1074b 15-35)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바로 이런 아포리아에 직면한다.

 

사고[누스]의 문제는 몇 가지 아포리아를 내포한다. 사고는 현상들 중에서도 가장 신적인 것 같기 때문에, 그 <존재>의 양태는 문제적인 것처럼 나타난다[문제적인 것을 내포하고 있다]. 사실상 사유가 아무것도 사고하지 않는다면[, 사유가 사고하지 않을 수 있는 잠재력을 유지한다면], 왜 사유는 존귀한 것일까? 사유는 잠자는 사람과 같은 것일 텐데. 그 반대로, 뭔가를 현실적으로 사고한다면, 사유의 <존재>가 현실성이 아니라 잠재성이기 때문에, 사유는 이 뭔가[현실성]에 종속될 것이다. 사유는 가장 고귀한 실재가 아니게 된다. 왜냐하면 사유가 탁월한 것은 현실성이라는 상태에 있는 사유 때문이라는 게 되어버리기 때문[사유는 잠재적이라는 사유의 고유한 본질이 아닌 다른 뭔가에 의해 결정될 것이다.] 그리고 둘 중 어떤 경우든, 즉 사유의 본성이 잠재적 사유[nous]이든 현실적 사유[noēesis]이든, 사유는 무엇을 사고하는가? 사유 자신을 사유하는가, 아니면 사유 자신과는 다른 뭔가를 사고할 것이다. 만일 사유가 사유 자신과는 다른 뭔가를 사고한다면, 사유는 똑같은 것을 항상 사고하거나, 아니면 때로는 이것을 때로는 저것을 사고할 것이다. 그러나 고귀한 것을 사고하는 것과 우유적인[임의의] 뭔가[대상]를 사고하는 것을 차이나게 만드는 것은 무엇인가?[그러나 선을 사유하는 것과, 임의의 대상을 사유하는 것 사이에 아무런 차이가 없다는 것인가?] 어떤 대상들을 사고하는 것은 부조리하지 않다는 것인가? 그렇다면 사유가 가장 신적이고 가장 존경할 만한 것을 변함없이 사유할 것이라는 점은 분명하다. … 그리고 만일 사유가 [현실적인] 사고가 아니라 사고할 수 있는 잠재성이라면, 그 사고의 연속성은 사유를 피곤하게 할 것이라는 게 [논리적으로] 뒤따라나올 것이다. 게다가 이 경우, 사유보다 더 고귀한[상위의] 뭔가, 즉 사유의 대상이 있으리라는 것은 분명하다. 실제로 사고와 현실적 사유는 [둘 다] 심지어 최악의 [가장 저열한] 대상들을 사고하는 것에 속한다. 만일 이런 일이 기피되어야 한다면 (사실상 보는 것보다 보지 않는 게 더 나은 것들이 있기 때문에) 현실적 사유가 가장 좋은 것일 수는 없다. 그러므로 사유가 모든 것들 중에서 가장 탁월하다면, 사유는 사유 자체를 사고한다. 사유는 사고의 사고이다.

 

여기서의 아포리아는 최고의 사유가 아무것도 사고하지 않을 수도 없고 어떤 것을 사고할 수도 없으며[무를 사고할 수도 없고 어떤 것을 사고할 수도 없으며], 잠재적인 채로 머물 수도 없고 현실적으로 될 수도 없으며, 쓸 수도 없고 쓰지 않을 수도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아리스토텔레스는 이 아포리아에서 벗어나기 위해, 사유 자체를 사고하는 사유라는 그의 유명한 관념을 정식화한다. 이것은 아무것도 사고하지 않음과 어떤 것을 사고함 사이의, 잠재성과 현실성 사이의 일종의 중간이다. 사유 자체를 사고하는 사유는 어떤 대상을 사고하는 것도 아니고 아무것도 사고하지 않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사고할 수 있는 잠재성과 사고하지 않을 수 있는 잠재성이라는) 순수한 잠재성을 사고한다. 그리고 자기 자신의 잠재성을 사고하는 것은 가장 신적이고 행복하다blessed.

하지만 아포리아는 해결되자마자 다시 되돌아온다. 사고할 수 있는 잠재력이 스스로를 사고한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순수한 잠재성을 현실성에서 사고한다는 것은 어떻게 가능한가[순수한 잠재성은 어떻게 현실성에서 스스로를 사고하는가]? 아무것도 적혀 있지 않은 서판은 어떻게 서판 자체로 다시 향해가고 스스로를 각인할 수 있는가?

영혼에 관하여에 대한 주해에서 백지tabula rasa의 수수께끼에 대해, 그리고 사유 자체를 사고하는 사유라는 수수께끼에 대해 성찰하고 있는 알베르투스 마그누스Albert the Great는 바로 이런 의문을 고찰하기 위해 발걸음을 멈췄다. 그는 아베로에스와 완전히 견해가 일치한다고 선언하는데, 그 아베로에스는 잠재적 지성[사유]을 모든 인간 존재에 공통적인 하나의 실체로 만들면서, 이것에 최고의 특권을 부여했다. 하지만 아베로에스는 이 결정적인 점을 꽤 성급하게 다뤘다. 지성 자체가 가지적이라고 하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진술은 임의의 어떤 대상이 가지적이라고 우리가 말할 때와는 똑같은 의미로 이해될 수 없었다. [사실상] 잠재적 지성은 하나의 사물이 아니다[특정한 상태의 사물이 아니다]. 그것은 어떤 것thing이 그것을 통해 이해되는 지향intentio에 다름 아니다. 그것은 인식된known 대상이 아니라 그저 순수한 인식 가능성knowability과 수용 가능성(pura receptibilitas)에 다름 아니다. 메타언어의 불가능성이라는 비트겐슈타인의 테제를 선취하면서, 알베르투스는 어떤 이해 가능성intelligibility[맥락상 인식 가능성]이 이해 가능성intelligibility 자체를 포착한다[이해한다]고 말하는 것은 이해 가능성을 메타-지성과 대상-지성으로 분할함으로써 이해 가능성을 사물화하는 것일 수 없음을 분명히 알아차렸다. 사유의 글쓰기는 부드러운 밀랍을 긁기 위해 첨필을 움직이는 외부적 손의 글쓰기가 아니다. 오히려 사유의 잠재성이 그 자신에게로 향해 돌아서는 지점, 순수한 수용성이 이른바 자신의 고유한 감각을 감각하는 지점에서, “마치 문자가 저절로, 서판 위에다 스스로를 쓰고 있는 것 같다”(et hoc simile est, sicut si diceremus quod litterae sciberent seipsas in tabula)고 알베르투스는 적었다.

 

6. 진부한 말이지만, 3대 일신교는 세계가 무에서 창조됐다고 설명하는 데서 일치한다. 그래서 기독교 신학자들은 무로부터의 제작operari ex nihilo인 창조를 장인의 현실성art에 대립시킨다. 장인의 현실성은 항상 물질로부터 만드는 것facere de materia이라고 간주된다. 다음과 같은 견해에 맞서서 랍비들과 모테칼레밈 사이에서 벌어진 논쟁에서도 이에 못지않게 결정적인 논점이 발견된다. 철학자들이 한 것으로 알려진 견해[억견]에 따르면, 신이 세계를 무로부터 창조했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무에서는 무가 만들어지기[무에서는 아무것도 만들어지지 않기]nihil ex nihil fit 때문이다. 각각의 경우에, 본질적인 것은 물질(즉 잠재적 «존재») 같은 어떤 것이 «»보다 앞서 존재할 수 있다는 관념 자체를 논박하는 것이다. 그러나 무로부터 창조한다는 것은 무엇을 뜻할까? 문제를 꼼꼼이 검토하자마자, 모든 것이 복잡해진다. , «»는 점점 더 어떤 것을 닮기 시작한다. 이 어떤 것이 어떤 특정한 종류의 어떤 것임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마이모니데스는 방황하는 자들을 위한 안내서Guide for the Perplexed에서, 무로부터의 창조의 진실을 주장했는데[창조를 역설한다고 표명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피르케 랍비 엘리에젤Pirke Rabbi Eliezer의 이름으로 알려진 권위 있는 미드라슈midrash의 한 구절을 잘 알고 있었다. 이 미드라슈는 신학자와 학자의 신앙을 크게 흔들어버린다.” 창조의 물질 [질료] 같은 어떤 것이 실존한다고 주장하기 때문이다[왜냐하면 거기에는 세계의 창조의 바탕이 된 물질을 생각하지 않고서는 이상한 뭔가가 묘사되어 있기 때문이다]. 미드라슈에서 이런 걸 읽는 것이다. “천국[하늘]은 무엇으로 창조되었는가? 신은 자신의 옷에서 빛을 취하고, 이것을 시트처럼 쭉 폈다. 그리하여 천국이 만들어졌다. 그것은 그는 옷에 감기듯이 빛에 몸을 감싸고 천국을 양탄자처럼 편다고 적혀 있는 것 그대로이다.” 게다가 코란의 시구에 따르면, 신은 우리는 네가 아무것도 아니었을[무였을](네가 하나의 무였을) 때, 너를 창조했다고 말하면서 피조물에게 말을 걸었다고 여겨지지만, 수피들에 따르면 이 시구는 신이 창조의 행위에서[현실성에 있어서] 있으라!”라고 말하면서 <무>를 전환했기[불러냈기] 때문에, 이무는 순수한 <무>가 아니었다는 것을 증명했다.

사실은 이렇다. 유대교, 이슬람교, 기독교의 신학자들이 무로부터의 창조라는 관념을 정식화했을 때, 신플라톤주의는 그로부터 모든 것들이 생겨나는 <무>를 최고의 원리로 이미 인식했다는 것이다. 신플라톤주의자[신학자]들이 이른바 위로부터 존재자들을 초월하는 <무>와 아래로부터 존재자들을 초과하는 <무>라는 두 개의 무를 구별하듯이, 신플라톤주의자들은 두 개의 물질을 구별했다. 하나는 육체적 물질이고, 다른 하나는 비육체적 물질이다. 후자는 가지적인 존재자들의 어둡고 영원한 배경[밑바탕]이다. 카발라학자들과 신비가들은 이 테제를 극한으로 끌고가 이들의 특징적인 급진성으로, 이로부터 모든 창조가 생겨나는 <무>가 신 자체라고 명확하게 진술했다. 신적인 <존재>(심지어 초hyper-<존재>)이란 존재자들의 <무>이며, 오로지 신이 <무>에, 이른바 푹 빠져들었기[내려갔기]에 신은 세계를 창조할 수 있었다. 요하네스 엘리우게나John Scotus Eriugena『신적인 자연에 대해De divisione naturae에서 창세기의 시구인 “그리고 대지는 형태가 없고 공허하며, 어둠이 심연의 면[얼굴]에 있다(terra autem erat inanis et vacua et tenebrae erant super faciem abyssi)에 주석을 달면서, 이것이 신의 정신 속에서 영원히 만들어지는 존재자들의 제1이념 혹은 제1원인을 가리킨다고 한다. “오로지 이 어둠, 이 심연으로 내려감으로써만 신은 세계를 창조하며, 이와 동시에 신 자신도 창조한다(descendens vero in principiis rerum ac velut se ipsam creans in aliquo inchoat esse)는 것이다.

사실상 여기서 쟁점은 가능성이나 잠재성이 <신> 속에 실존하는가라는 문제이다. 모든 잠재성은 또한 비잠재성(있지 않거나 하지 않을 수 있는 잠재성)이라고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이래, 신학자들은 신이 전능하다고 단언한 동시에 신에게서 있을[존재할] 수 있고 의욕할 수 있는 모든 잠재력을 제거할 수밖에 없었다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무엇인가를 할 수 있다는 잠재성은 이미 이것을 하지 않을 수 있다는 잠재성이기도 하다. 그 때문에 신학자들은 신이 전능하다고 단언함에도 불구하고 이것과 동시에, 신에 대해 존재할 수 있다는 잠재성, 의욕할 수 있다는 잠재성을 부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만일 신이 존재할 수 있는 잠재성을 갖고 있다면, 신은 존재하지 않을 수도 있으며, 따라서 이것은 신의 영원성과 모순될 것이다. 다른 한편, 만일 신이 자신이 원하는 것을 원하지 않을 수 있다면, 그는 비-<존재>와 악을 원할 수 있을 것이며, 이것은 니힐리즘의 원리를 신 속에 도입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그래서 신학자들은 이렇게 결론내린다. , 신이 자신 속에 무제한의 잠재성을 포함하고 있다고 하더라도, 신은 신 자신의 의지에 구속되며, 자신이 의지했던 것과는 다른 그 어떤 것을 할 수도, 원할 수도 없다. 신의 의지는 신의 <존재>와 마찬가지로 이른바 절대적으로 잠재성을 결여한다신의 의지는 신의 존재와 마찬가지로 절대적으로 잠재성이 없는 것이다.

이와 대조적으로 신비가들과 카발라학자들에 따르면, 창조가 전제하는 모호한 물질은 다름 아니라 신의 잠재성이다이와 반대로 신비가들과 카발라학자들이 창조에 선행하는 것으로 전제하고 있는 것이 바로 모호한 물질인 신적인 잠재성이다. 창조의 행위현실성는 신이 심연으로 하강하는 것인데, 이 심연은 신 자신의 잠재성과 비잠재성이며, 신의 있을 능력가능성과 있지 않을 수 있는 능력이다이 심연은 신 자신의 잠재성과 비잠재성 사이의, 신이 행할 가능성과 행하지 않을 가능성 사이에 열려진 심연에 다름 아니다. 1210년에 이단이라고 선고를 받은 디낭의 다비드David of Dinant의 급진적 정식화에서는, 신과 사유와 물질은 하나의 동일한 것이며, 이 무차이적인undifferentiated 심연은 이로부터 세계가 진행되는 <무>이며, 이것에 세계가 영원히 의존하는 <무>이다나아가 1210년에 교의가 이단선언을 받은 디낭의 다비드의 과격한 정식화에 따르면, 신과 사유와 물질은 하나의 동일한 것이며, 이처럼 차이가 없는 심연이야말로 그로부터 세계가 생겨나는 무이며, 세계는 이 심연에 영원히 의존한다. 이런 맥락에서 심연은 은유가 아니다. 야콥 Jakob Böhme이 명확하게 진술하듯이, <무>가 영원히 산출되는 것은 <신>의 어둠의 삶이며, <지옥>의 신적 뿌리이다. 우리가 이 타르타루스[바닥 없는 지옥]에 빠져들고 우리 자신의 비잠재성을 경험하는 데 성공할 때에만, 우리는 창조할 수 있게 되며, 진정으로 시인이 된다. 그리고 이 경험에서 가장 어려운 것은 많은 사람들이 여전히 그 안에 갇혀 있는 <무>나 그 어둠이 아니다. 가장 어려운 것은 이 <무>를 무화할 수 있는 것, <무>로부터 뭔가를 있게 만들 수 있는 것이다. 이븐 아라비Ibn Arabi는 메카 계시의 서두에서, “<무>로부터 사물들을 실존하게 만들고 무를 무화했기 때문에 신은 찬양된다고 적고 있다.

Posted by 상겔스 상겔스

Jacques Rancière, “The Thinking of Dissensus: Politics and Aesthetics”, Reading Rancière, eds., Paul Bowman and Richard Stamp, Continuum, 2011, pp.1-17.


* 아래의 글은 <말과 활> 9호에 수록된 것으로, 각주 등 잡지에서 삭제되거나 축약된 것을 그대로 옮긴 것입니다. 원래 <이미지의 운명> 후속 작업으로 예정됐던 것이다. http://multitude.co.kr/363 빨간 색은 위의 영어판 쪽수이다. 

주요 번역어에 대해 미리 알려둔다. dissensus(불어도 dissensus)disagreement(불어로는 mésentente)는 각각 불일치와 불화로 옮긴다. 두 개념의 차이에 대해서는 옮긴이의 말을 참조. sensesensory, sensible, sensibility 등에 대해 : 하나의 글에서 sensesensation이 같이 쓰일 경우, 전자는 대체로 의미, 후자는 감각(작용)으로 옮겨질 수 있다. 그러나 이 글에서 랑시에르가 사용하는 sense는 대체로 의미와 감각이라는 두 가지의 의미를 모두 가지면서도 의미를 포괄하는 감각이라는 뜻이 강하다. 따라서 sense를 일관되게 감각으로 옮긴다. 그리고 다소 편의적으로, sensory는 감각적, sensible는 감성적, sensibility는 감성능력(감수성) 등으로 옮긴다. sensory는 감관적, sensible는 감각적이라고 번역할 수도 있다. distributionpartition : distributionpartage의 영어 번역어인데, partage는 공유와 분할이라는 뜻을 둘 다 가지고 있다. 따라서 여기서 distribution은 대체로 두 가지 의미를 모두 갖고 있는 나눔으로 일관되게 옮긴다. 반면 partition분할로만 옮긴다. 그리고 영어의 divisionseperation과 마찬가지로 분리로 옮긴다. (re)framing‘(다시) 틀을 짜다라는 의미에 준하여 다양하게 번역했다. (re)configure, (re)configuration()배열하다, ()배열형태, 배열을 다시 하다, 배열을 다시 짜다 등으로 옮겼다. place(s)는 일관성 때문에 자리로 옮겼지만, 때로는 장소라는 말이 더 어울릴 수 있다. 읽을 때 참고하기 바란다

* 주요 번역어 중 incorporation은 '체내화'로 옮긴다(2017년 4월 14일 추가).




불일치를 사고하기 : 정치와 미학[주1]

자크 랑시에르

[303]

정치와 미학을 불일치라는 개념 아래에서 사고한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 분명히 불일치는 정치와 미학이 무엇에 관한 것인가에 관한 개념이다. 뿐만 아니라 불일치 개념은 정치와 미학 자체를 사유할 수 있는 이론적 무대를 설치하는 동시에, 정치의 대상과 미학의 대상들을 한데 묶는 관계의 종류도 설치한다. 가장 추상적인 수준에서 불일치란 감각과 감각 사이의 차이를 뜻한다. , 동일자 안에서의 차이를, 대립자의 같음을 뜻하는 것이다. 여러분이 정치를 불일치의 한 형태라고 간주한다면, 이것은 여러분이 불일치를 공동체의 어떤 본질에서도 연역해낼 수 없다는 것을 뜻한다. 여러분이 이 본질을 의사소통적 언어와 같은 공통적 특성의 성취[발휘]에 입각해 긍정적[304]으로 연역하든(아리스토텔레스), 아니면 만인에 대해 만인이 설정하는 파괴적 본능에 대한 응답에 입각해 부정적으로 연역하든(홉스) 말이다. 공통적인 것이 분리[분할]됐기 때문에, 정치가 있다. 이제 이 분리[분할]는 수준의 차이가 아니다. 감각과 감각 사이의 대립은 감성적인 것과 지성적인 것 사이의 대립이 아니다. 정치적 불일치는 기저에 깔린 사회적·경제적 과정을 현시하는 외양이나 형태가 아니다. 마르크스주의적인 개념규정을 참조한다면, 계급전쟁은 정치의 현행적 실재(actual reality)인 것이지 그 감춰진 원인이 아니다.

[주1] 이 텍스트는 2003916-17일 런던의 골드스미스 칼리지에서 영국정치학회의 포스트구조주의 및 급진정치와 마르크스주의전문가 집단이 조직한 컨퍼런스인 불화에 충실하기 : 자크 랑시에르와 정치적인 것(Fidelity to the Disagreement: Jacques Rancière and the Political)에 발표된 글을 약간 수정하여 옮겨 적은 것이다. 나는 이 컨퍼런스를 조직한 Benjamin Arditi, Alan Finalyson, James Martin에게 감사드린다

첫 번째 점에서 시작하자. 나는 불화에서 정치적 동물이란 말하는 동물이라는 저 오래된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의를 재검토했다. 어떤 비판가들은 이를 고전으로의 복귀라고 봤다. 그들에게 이것은 데리다의 탈구축이나 리오타르의 쟁론(differend)’을 무시하고 낡은 언어관과 낡은 주체 이론으로 회귀했음을 뜻했다. 하지만 이런 견해는 우리를 오도한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말하는 동물에서 출발한다는 것은 인간들이 정치적 삶에 대한 기질을 갖고 있다는 인간학적 정의로 회귀한다는 뜻이 아니다. 정치는 말하고 토론하는 인간 능력에 기초를 두고 있다는 관념으로 회귀하는 게 아니라는 얘기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런 능력을 쾌락과 고통을 표현하는 목소리라는 단순히 동물적인 능력에 대립시켰다. 아무튼 이와 반대로 나는 이 공통의능력이 아주 처음부터 균열되어 있음을 보여준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일러주는 바에 따르면, 노예는 언어를 이해하고 있으나 이를 소유하고 있지 않다. 불일치가 뜻하는 게 바로 이것이다. 말하는 것이 말하는 것과 똑같지 않기 때문에, 한 감각이 뜻하는 바에 관한 합의조차도 없기 때문에 정치가 존재하는 것이다. 정치적 불일치는 자신들의 이해관계와 가치를 놓고 대결하는 말하는 인간 사이의 토론이 아니다. 정치적 불일치는 말하는 자와 말하지 못하는 자에 관한 갈등이며, 고통의 목소리로서 들려야 하는 자와 정의에 관한 논증으로서 들려야 하는 자에 관한 갈등이다. 그리고 이것은 또한 계급전쟁이 뜻하는 바이기도 하다. 대립된 경제적 이해관계를 지닌 집단들 사이의 갈등이 아니라, 어떤 이해관계가 있는가에 관한 갈등, 스스로를 사회적 이해관계를 경영[관리]할 수 있는 자로서 수립하는 자들과 그들의 생명을 재생산할 수 있을 뿐이라고 추정된 자들 사이의 투쟁인 것이다.

[305]나는 정치란 공동체를 향한 인간의 소질을 발휘하는 것이라고 정의하는 철학자들로부터 [논의를] 시작했다. 왜냐하면 나는 이런 식으로 연역해내는 것이 불가능함을, 공통의 감각적 성질이 이미 불일치의 단계임을 보여주고 싶었기 때문이다. 이것은 내가 방법론적 언급을 하도록 이끈다. , 불화는 내 이론화의 대상일 뿐만 아니라 방법이기도 하다. 내게 어떤 저자나 어떤 개념을 제시한다는 것은 우선 불화를 위한 무대를 마련한다는 것을, 차이의 조작자[연산자]를 검증한다는 것을 뜻한다. 또 이것은 나의 이론적 조작이 항상 어떤 문제의 배열형태(configuration)의 틀을 다시 짜는 것을 목표로 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내가 고전으로 복귀한다고 의심하는 똑같은 비평가들은 내가 불화정치에 대한 열 가지 테제[자크 랑시에르, 정치에 대한 열 가지 테제, 정치적인 것의 가장자리에서, 양창렬 옮김, 도서출판 길, 2013(전면개정판)]에서 정치와 치안을 구별한 것이 정치의 순수성에 대한 탐구에 해당한다고 생각한다.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정치와 치안의 구별을 조직화 대 자발성이라는 포퓰리즘적대립의 잔여물로 간주하고, 해체론자들은 이 구별을 동일성의 낡은 형이상학으로의 무비판적 복귀라고 간주한다. 하지만 마르크스주의자나 해체론자들은 모두 내 논증이 갖고 있는 논쟁적 맥락을 놓치고 있다. ‘정치란 무엇인가에 관한 내 분석은 그런 순수성 관념에 도전하고 이것을 전복하는 것을 전적인 목표로 삼고 있었다. 내가 한 분석은 1980년대의 프랑스에서 우리를 거의 압도했던 이른바 정치적인 것의 복귀나 정치로의 복귀에 대한 응답이었다. 이 당시 우리는 도처에서 다음과 같은 모토를 들을 수 있었다. , 우리는 이제 정치적인 것이 사회적인 것에, 사회적 이해관계에, 사회적 갈등과 사회적 유토피아들에 종속되는 것으로부터 잘 빠져나왔다고 말이다. 그래서 우리는 정치의 진정한 의미란 공적 무대에서의 행위이다, ‘함께 있음의 현시이다, 공동선에 대한 탐구이다 등등으로 보는 견해로 복귀했다. 이런 복귀의 철학적 기반은 주로 두 명의 철학자들, 즉 레오 스트라우스와 한나 아렌트에게서 나왔다. 이 두 사람은 모종의 방식으로 그리스 철학의 유산을 근대의 통치적 실천에 끌어들였다. 두 이론가들은 공적 행동과 공적 말하기의 정치적 영역과 경제적·사회적 필연성[필요]의 영역 사이의 대립을 강조했다. 이들의 논점은 강력하게 부활했다. 심지어 이들은 경제주의자생주의라는 낡은 마르크스주의적 대립을 진정한 혁명적 실천으로 대체할 수 있었다.

이런 결합은 프랑스의 1995년 파업 동안에 명백해졌다. ‘노동조합주의에 대한 낡은 마르크스주의적 비난과 정치적인 것과 사회적인 것 사이의 혼동에 대한 아렌트적 비난이 한데 합쳐졌고, [이런 결합은] 파업가담자들이 옹호했던 낡은 특권에 맞서 공동선과 공동체의 미래를 담당하는 정부의 정치적 용기에 대한 하나의 동일한 지지의 담론이 되었다. 그러므로 정치적인 것의 순수성으로의 복귀는 사실상 정치적인 것을 국가 제도와 정부[통치]적 실천과 동일시하는 것으로 복귀를 뜻한다는 게 드러났다. 결과적으로, 내가 정치의 특정성[종별성]을 정의하려고 시도한 것은, 무엇보다 우선, 순수 정치로의 복귀라는 주류의 관념에 도전하려는 시도였다.

순수정치란 없다. 나는 정치에 대한 열 가지 테제(이하 열 가지 테제)를 주로 특정한 정치적 영역과 정치적 삶의 방식이라는 아렌트적 관념을 비판하기 위해 썼다. 열 가지 테제는 정치에 관한 그녀의 정의가 악순환을 이루고 있음을 증명하려 했다. 하지만 궁극적으로 볼 때, 이것은 그네들의 삶의 방식이 그네들을 정치로 이끌 운명에 처해 있던 자들의 삶의 방식을 정치와 동일시한다는 것을 뜻한다[옮긴이: 이 문장은 랑시에르가 곧바로 얘기하듯이 순환논법이다]. 그것은 아르케의 순환이며, ‘시작의 권력에 있어서, 권력을 행사할 소질이나 자격에 있어서 권력의 행사의 예상이다. 문제의 핵심은 바로 소질이나 목적지라는 관념에 놓여 있다. 정치적 삶과 비-정치적 삶 혹은 벌거벗은 생명사이의 대립이라는 관념에 놓여 있는 것이다. 내가 치안이라고 부른 것의 전제가 바로 이런 나눔[분배]이다. , 집단과 개인에게 특정한 능력에 따라 할당된 자리와 기능들을 갖고서 집단적 신체로서의 정치공동체를 배열(configuration)하는 것이다. 권력은 지배할 자격이라고는 아무것도 갖지 못한 자들에게 속해 있다고 단언함으로써 이런 전제가 깨질 때, 거기에 정치가 있다. 이것은 권력의 행사를 위한 기반이란 전혀 없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 정치를 위해 태어난 자들과 경제적·사회적 필연성의 벌거벗은생명을 위해 태어난 자들을 분리하는 경계선이 의문에 부쳐질 때, 거기에 정치가 있다.

이것은 정치적 삶이란 없으며 정치적 무대가 있다는 것을 뜻한다. 정치적 행동은 사회적’, ‘경제적혹은 가정적이라고 간주되었던 것이 정치적임을 보여주는 데 있다. 정치적 행동은 경계선들을 흐릿하게 만드는 데 있다. ‘가정적행위자들(가령 노동자나 여성)이 자신들의 다툼(quarrel)을 공통적인 것과 관련된 다툼으로 재배열할(reconfigure) 때마다, 즉 어떤 자리가 그것에 속하[307]는지 속하지 않는지에 관련된 다툼으로, 그리고 누가 공통적인 것에 관해 언표행위를 하고 시위를 할 수 있는지 혹은 없는지에 관련된 다툼으로 재배열할 때마다, 정치적 행동은 일어난다. 그러므로 분명해져야 하는 것은, 정치란 무엇인가에 관한 불화가 있을 때, 정치적인 것을 사회적인 것에서 분리하거나 공적인 것을 가정적인 것에서 분리하는 경계선이 의문시될 때, 정치가 있다. 정치는 정치적인 것을 비-정치적인 것으로부터 재-분할하는 방식이다. 이 때문에 정치는 일반적으로 자리를 벗어나서”, 정치적이라고 간주되지 않았을 터였던 자리에서 일어난다.

이 분석에서 몇 가지 귀결들을 끌어내보자. 첫째, 이것은 나의 정치관이 가치중립적이라는 것을 뜻하지 않는다[주2]. 확실히, 이것은 정치를 공통적인 것의 윤리적 관념 위에 정초하기를 거부한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이것은 행동 일반의 가치나 원리를 선언하는 심급으로 간주된 윤리가 일련의 실천들로서의 정치를 규제해야 한다는 관념을 의문에 부친다. 이런 관념에 따르면, 정치를 윤리 속에 정초하는 것을 잊어버리면 재앙과 공포가 생겨날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나는 거꾸로 말하고 싶다. 조지 부시와 오사마 빈 라덴의 시대에는 윤리적 갈등이 정치적 갈등보다 훨씬 더 폭력적이고 훨씬 더 과격하게 일어났다. 그러므로 정치는 윤리적 갈등의 폭력을 누그러뜨릴 수 있는 적대(antagonism)의 특정한 실천이라고 이해될 수 있다.

[주2] 이 점에 관해서는 Thomson, 2003을 참조

하지만 나는 정치를 단순한 경합적 도식(agonistic schema)으로 환원하지 않는다. 이 도식에서는 내용이 뭔가는 아무 상관이 없기 때문이다. 나는 적대에 관한 슈미트적 정식화와는 멀리 떨어져 있다. 정치는 자신의 보편을, 자신의 고유한 척도를 갖고 있는데, 그것이 바로 평등이라고 나는 주장한다. 척도는 결코 직접적으로 적용되지 않는다. 그것은 잘못(wrong)의 상연·연출을 통해서만 적용된다. 하지만 모든 잘못이 필연적으로 정치적인 건 아니다. 내가 제시한 테제에 맞서서, 피압제자들 사이에는 종교적 광신이나 민족적 동일성주의(ethnic identitarianism)와 불관용에 의해 형성된 반-민주적인 시위 형태들도 있다고 주장된다. 에르네스토 라클라우는 이것이 불일치에 관한 나의 개념규정이 갖고 있는 맹점이라고 지적했다(Laclau, 2005, p.246~). 하지만 내 견해에 따르면, 잘못이 정치적 행동의 토대를 상연·연출[주3]할 때, 잘못이 정치적이라는 점은 명백하다. 이때의 정치적 행동이란 평등의 단순한 우연성이며, 이것은 분명히 [308]피의 순수성이나 종교의 권력 등등을 요구하는 포퓰리즘적(popular)’ 운동에 해당되지 않는다. 하지만 나는 그 어떤 형태의 시위에 대해서도 포퓰리즘(populism)’이라는 이름의 낙인을 찍으려는 널리 퍼진 경향을 거부한다. ‘포퓰리즘이라는 개념은 구-마르크스주의자들과 젊은 자유주의자들이 복지[국가]체제를 유지하기 위한 투쟁과 인종적 혹은 종교적 폭동을 한 바구니 안에 한꺼번에 집어넣을 수 있게 해주는 꿀꿀이단지이다.

[주3] 이하 enactment는 상연·연출, enact는 상연·연출하다로 옮긴다. 이 영어 단어는 불어의 acte(r)에 해당된다. 따라서 법적 인정이나 법의 제정 등을 뜻한다. 그러나 랑시에르가 이 단어를 이런 의미로 사용하는 경우는 거의 없는 것 같다. 이는 특히 정치적인 것의 가장자리에서의 영역본에 자주 등장하는데, 대체로 상연, 공연이라는 뜻에 가깝다

인민은 두 개의 대립된 것들, 즉 데모스(demos) 혹은 에트노스(ethnos)에 대한 이름이다. 에트노스는 똑같은 기원을 갖고 똑같은 땅에서 태어나거나 똑같은 신을 숭배하는 사람들의 살아 있는 신체와 동일시된 인민이다. 다른 신체들에 대립된 신체로서의 인민이다. 데모스는 공동체의 부분들(parts)에 대한 보충(supplement)으로 이해된 인민이다. , 내가 셈해지지 않은 것의 셈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데모스는 여기나 저기에서 태어났다는 단순한 우연성의 기입이다. 이 기입은 지배하기 위한 그 어떤 자격부여와도 대립된다. 또 데모스는 그런 평등의 입증(verification) 과정을 통해, 불일치의 형태들의 구축을 통해 출현한다. 이제 분명한 것은, 차이가 단번에 주어진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데모스의 삶은 에트노스로부터의 그 점증적인 분화(differentiation)의 과정이다.

둘째, 이것은 내가 정치를 봉기라는 예외적이고 사라지는 순간들로 환원한다는 뜻이 아니다. 정치적 원칙의 단순한 상연·연출은 (순수성이 설령 있다손 치더라도) 그 순수성으로는 거의 나타나지 않는다. 오히려 정치는 많은 혼동된문제와 갈등 속에 존재하며, 정치는 기억, 역사 쪽으로 향해간다. 정치의 역사적 동학이라는 것이 있다. , 시간의 정상적과정을 깨뜨리는 사건들의 역사, 주체화의 기입과 형태들의 역사, 약속의 역사, 기억의 역사, 반복의 역사, 예견과 시대착오의 역사가 있다[주4]. 예외를 과정에 대립시키는 지점은 하나도 없다. 과거를 어떻게 개념규정할 것인가가 논란거리이다. 내가 그렇게 보듯이, 정치의 역사는 경제적·사회적 발전과 더불어 진행되는 연속적인 과정이 아니다. 정치의 역사는 그 어떤 운명적인[이정표적인]’ 플롯이든, 이런 플롯들이 펼쳐지는 것이 아니다.

[주4] 열 가지의 테제에 관한 논의에서 내가 믹 딜런(Mick Dillon)에게 한 응답을 보라(Rancière 2003a).

셋째, 정치와 치안의 대립은 정치가 그 어떤 고유한대상도 갖고 있지 않으며, 정치의 모든 대상은 치안의 대상과 뒤섞인다는 진술에 딱 들어맞는[309]. 예전에 쓴 어떤 텍스트에서 나는 정치의 과정과 치안의 과정의 마주침(혼동’)의 장에 정치적인 것이라는 이름을 부여하자고 제안했다(Rancière 1995를 보라). 내가 명백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어떤 상황의 틀을 다시 짜는 정치적 개입의 가능성은 그런 식으로 이해된 정치적인 것의 일정한 설정으로부터 취해져야 한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나는 마르크스주의가 실질적 민주주의와 형식적 민주주의를 대립시키는 것에 맞서서, 민주적 과정이 기입되어 있는 모든 것들, 즉 헌법전들에, 국가의 제도들에, 여론 기구들에, 언표행위의 주류 형태들 등등에 기입되어 있는 이 모든 것이 행하는 몫[부분]을 강조했다. 이것이 나를 몇몇 급진적인 정치사상가들과 명확하게 변별시켜주는 한 가지 점이다. 이들은 [정치를] 국가제도의 운용과 혼동하는 그 어떤 것으로부터도 정치의 근본성을 따로 떼어내고 싶어 한다. 민주주의를 우리네 서구 사회의 국가 형태와 삶의 방식으로 간주할 뿐인 알랭 바디우는 내가 그런 합의적 견해를 고수하고 있는 것 아니냐고 의심한다. 슬라보예 지젝은 급진적인 정치적 행위의 리스크를 다수파의 민주적 법에 의해 제공된 초월론적 보증인의 법률주의적 논리에 대립시킨다[주5]. 하지만 나는 민주적 과정을 우리 국가들의 기능과 결코 동일시하지도, 혹은 다수파의 법에 의해 제공된 기회주의적인 보험’(지젝)과 동일시하지도 않았다. 나는 민주적 과정을 정치적 보충과 동일시했는데, 이 보충은 이런 기능을 아무나(anyone)의 권력과 대결시킨다. 국가의 기능을 와해시키는 대가를 치르더라도 국가의 기능을 정초하는 아무나의 권력과 말이다. 불평등한 질서는 그 평등주의적 전제 없이는 작동할 수 없다. 거꾸로 평등주의적 투쟁 자체는 종종 공통적인 것에 관한 치안의 서술을 무기로 사용한다. 예를 들어 페미니스트적 투쟁에서 성적 상호보완성(complementarity)이라는 의학적·도덕적·교육적 표준이 맡았던 역할을 생각해보자. 혹은 노동자들의 투쟁에서 노동의 소유에 대한 참조가 했던 역할을 생각해보자. 평등은 자신의 고유한 어휘나 문법을 갖고 있지 않으며, 그저 시학만을 갖고 있을 뿐이다.

[주5] 알랭 바디우는 메타정치(Metapolitics, 2005)에서 나에 대해 이렇게 지적했다. ‘민주주의적 덫이라는 지젝의 비판은 정치에서 생명정치로 그리고 되돌아가기(From Politics to Biopolitics . . . and Back)(2004)라는 글에서 가장 명료하게 이뤄졌다

정치는 치안의 바깥에 있는 자리에서 유래하지 않는다. 이 점에서 나는 나에 대한 몇몇 반론가들과 견해를 같이 한다(Thomson 2003 참조). 치안의 바깥에는 [정치가 들어설] 그 어떤 자리도 없다. 하지만 그것이 할당하는 자리들을 가지고 뭔가를 행하는 갈등적인 방식이 있다. 자리들을 다른 곳으로 옮기거나 재형성[310]하거나 강화하는 것이 그것이다. 내가 열 가지 테제에서 상기시켰듯이, 그리스에서 민주주의의 공간은 이런 자리 옮김(displacement)에 의해 열려지게 됐다. 처음에는 구역을 의미했던 데모스가 정치의 주체의 이름이 되었을 때 말이다. 지리적으로 분리되어 있었던 세 개의 데모스들을 클레이스테네스가 하나로 합쳐서 아테네 부족들을 재형성했을 때, 그렇게 됐음을 우리는 알고 있다. 이것은 두 가지를 한꺼번에 하는 조치이다. , 그것은 정치적 공간의 자율성을 구성했던 동시에 귀족계급에게서 지역 기반의 권력을 빼앗았다.

여러 논평가들이 강조했듯이, 이것은 내가 공간적 범주들이나 은유들을 사용한 것에 관해 더 말할 기회를 제공한다[주6]. 민주주의의 공간에 관해 말하는 것은 단순한 은유가 아니다. 데모스의 경계획정은 물질적인 문제인 동시에 상징적인 문제이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그것은 물질적인 것과 상징적인 것 사이의 (분리)접속의 새로운 형태이다. 민주주의의 설립이란 새로운 위상학의 발명을 의미한다. 토지소유자의 물질적 특권을 전통의 상징적 권력과 접속시켰던 귀족제적 공간에 맞서서, 분리접속된 자리들로 이루어진 공간의 창출을 의미한다. 이런 분리접속이 정치와 치안의 대립의 핵심에 놓여 있다. 그러므로 공간이라는 쟁점은 나눔[분배]에 입각해 사유되어야 한다. 자리들의 나눔, 안에 있는 것이나 바깥에 있는 것의 경계선의 나눔, 중심적이거나 주변적인 것의 경계선의 나눔, 가시적이거나 비가시적인 것의 경계선의 나눔이 그것이다. 이것은 내가 감성적인 것의 나눔이라고 부른 것과 관련된다(Rancière 2004b를 보라). 이 말은 내게 위계의 상징화의 추상적이고 자의적인 형태들이 지각적인 소여로서 구현되는 방식을, 사회적 목적지가 지각적 우주, 존재방식, 말하기와 보기의 명증성에 의해 예견되는 방식을 가리킨다. 이런 나눔은 시간과 공간에 관한 어떤 틀짜기이다. 누구나 자신의 고유한 자리에 있기를 원한 플라톤의 국가공간적폐쇄는 시간적인 분할 자체이다. , 장인은 애초부터 그들의 자리와는 다른 곳에 있을 시간을 갖고 있지 않은 자들로 형상화되었다. 나는 해방의 핵심이 사회적 종속을 떠받치는 시간의 분할 자체로부터 이탈하려는 시도였음을 강조하기 위해, 노동자의 해방에 관해 내가 쓴 책을 프롤레타리아의 밤이라고 불렀다. 노동자들은 낮 동안에는 노동을 하고 밤 동안에는 잠을 잔다는 명백한 분할이 존재했다. 그러므로 밤을 정복하는 것은 사회적 해방의 첫 단계였으며, 사물의 주어진 상태를 [311]재배열하기 위한 최초의 물질적이고 상징적인 기초였다. 노동자들 자신이 공통의 세계를 공유하고 있고 그런 공통의 세계의 대상이자 참여자를 명명할 수 있다는 것을 말하기 위해서 노동자들은 자신들의 개인적생활을 재배열해야 했다. 모든 개인들에게 공통적인 것을 돌보도록 예정된 사람과 예정되지 못한 사람 사이의 분할을 예견했던 낮과 밤의 분할을 재배열해야 했다. 그것은 역사가들이 주장하듯이 재현의 문제가 아니었다. 그것은 감각경험의 문제였으며, 지각 가능한 것의 분할의 한 형태였다.

[주6] 2003년에 열린 골드스미스 컨퍼런스에서 Mustafa DikecMichael Shapiro의 기고문을 참조.

달리 말해서, 내가 공간에 관심을 가진 이유는 내가 미학에 관심을 가진 것과 똑같다. 나는 이미 역사와 정치에 관한 내 작업과 미학에 관한 내 작업 사이에서 일어났던 이동, 몇몇 논평가들이 지각했던 이동이 하나의 장에서 다른 장으로의 이동이 아님을 설명하려고 노력했다. 내가 정치에 관해 작업한 것은 정치를 미학적 사태로서 보여주려는 시도였다. 이 말로 내가 말하려는 것은 벤야민이 예술의 정치화에 대립시켰던 정치의 미학화[심미화]’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내가 말하려는 바는 권력의 행사나 권력을 위한 투쟁이라기보다는 정치가 특정한 세계, 특정한 경험 형태의 배열형태라는 것이다. 이런 특정한 것들 속에서 몇 가지는 정치적 대상으로 보일 수 있고, 몇 가지 질문은 정치적 쟁점이나 논점으로 보일 수 있으며, 몇몇 행위자는 정치적 주체로 보일 수도 있다. 나는 정치를 특정한 하나의 세계가 아니라 갈등적 세계로 설정함으로써 정치의 이런 미학적본성을 재정의하려 노력했다. , 경쟁하는 이해관계나 가치의 세계가 아니라 경쟁하는 세계들의 세계로서 재정의하려 한 것이다.

만일 내가 [먼저] 했던 작업의 그런 부분이 정치의 미학을 다뤘다면, 내가 나중에 한 작업은 미학의 정치를 다뤘다고 말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나는 미학의 정치라는 말로 예술과 정치의 관계에 대한 물음을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지각 가능한 것의 정치적 나눔에 있어서 어떤 특정 영역(미학의 영역)의 배열형태가 지닌 의미와 중요성을 이해한다. 내가 한 정치적작업에서 이미 나는, 정치적인 것의 실존과 미학적인 것의 실존이 어떻게 강하게 상호 연결되어 있는지를 증명하려고 노력했다. 플라톤의 국가에서는 공적인 무대로부터 데모스의 배제와 연극적 형태의 배제가 엄격하게 상호 연결되어 있다. 자주 말해지는 것과는 달리, 이것은 플라톤이 정치에 이[312]익이 되도록 예술을 배제했다는 뜻이 아니다. 플라톤은 정치 예술을 배제했다. 플라톤은 장인들이 그네들의 고유한작업장과는 다른 곳에 있을 수 있는 능력이라는 관념과 시인이나 배우들이 그네들의 고유한정체성과는 다른 정체성을 수행할(play) 수 있는 가능성, 이 둘 다를 배제했던 것이다.

또 나는 근대 민주주의와 근대 혁명이 어떻게 감성적인 것의 이 새로운 나눔과 연결되어 있는지를 보여주려고 노력했다. 이 새로운 나눔은 예술에 특정한 자리를, 미학적 감정이라고 불리는 특정한 감정을 묘사한다. 이것은 프랑스 혁명 당시에 미술관을 출현하게 만들었던 것과 단순하게 일치하는 것이 아니다. 또한 그것은 특정한 미학적 상태라는 실러의 관념에서 새로운 감각혁명이라는 횔덜린의 관념으로, 더 나아가 마르크스주의적인 생산자들의 혁명으로 나아가게 했던 단순한 현사실적 영향도 아니다. 근대 민주주의는 미학적인 것의 출현과 동시대적이다. 내가 미학적이라고 부른 것은, 다른 경험 영역들을 통치하는 지배의 형태들을 중지시키는 어떤 특정한 경험 영역을 가리킨다. , 그들의 감각경험의 구성 자체로부터 변별되는, 지배의 근거를 두 인류의 대립에 두는 형상과 질료, 이해와 감성(sensibility)의 위계를 가리키는 것이다. 경험 영역들의 이런 재-분할은 자리들과 몫들 일반의 물음을 재형상화하는(refiguring) 가능성들의 부분(part)이다. 우리가 알고 있듯이, 그것은 애매한 방식으로 그렇게 했다. , 인과적 이유 때문이 아니라 미학의 예외성 때문에 정치의 역설적 예외성을 복제했던 것이다.

정치의 예외성은 그 어떤 특정한 자리도 갖고 있지 않다. 정치는 사회적 쟁점, 치안 문제 등등을 고쳐 말하고 무대에 다시 올림으로써 치안의 공간에서 발생한다.’ 반대로 미학적 자율성은 특정한 자리들을 갖고 있다. 하지만 이 특정한 자리가 무엇인가에 관한 정의는 예술의 어떤 형태와 삶의 어떤 형태를 등치시키는 것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미학적 경험의 고독은 예술이나 정치가 더 이상 분리된 경험 영역들이지 않을 미래의 공동체의 약속과 처음부터 묶여 있었다. 이것은 미학이 처음부터 자신의 정치를, 내 용어로 말하면 메타정치를, 정치가 하는 것과는 다르게 정치를 하는방식을 갖고 있다는 뜻이다. 미학은 정치적 불일치의 실천과 국가권력의 변혁을 감각공동체의 메타정치적 기획과 대립시킨다. [메타정치로서의] 미학은 단순한 정치적혁명에 의해서는 항상 놓쳐지게 될 것, 즉 사유와 감각적 세계 사[313]이의, 신체들과 그 환경 사이의 새로운 관계 속에, 살아 있는 태도 속에 체내화된(incorporated) 자유와 평등을 성취하는 것이다.

이 기획은 아주 다양한 형태를 띠었으며, 결국에는 그 역전으로 이어졌던 많은 변형들을 겪었다. 이런 변형들에는 다음과 같은 것이 포함된다. 실러의 미학교육, 헤겔과 셸링과 횔덜린이 꿈꿨던 새로운 신화, 청년 마르크스의 인간혁명, 소비에트 예술가들과 건축가들의 구성주의적 기획, 뿐만 아니라 초현실주의적 전복, 아도르노의 근대작품의 변증법, 685월이 수동혁명이라는 블랑쇼의 관념, 드보르의 표류’, 혹은 리오타르의 숭고한 것의 미학 등.

여기서 나는 내가 리오타르의 후기 저작을 논할 때 무엇이 관건인지를 분명히 밝혀야겠다. 어떤 점에서 이것은 불화에서는 명료하게 제시되지 않았고, 그래서 후속 글들에서 이를 좀 더 개진하려고 했다(Rancière 2003b, 2004a, 2004d를 참조). 관건은 불일치에 관한 이해이다. 리오타르는 숭고한 것의 범주를 통해 불일치를 절대적 잘못의 새로운 형태로 전환시켰다. 쟁론(Le différend)[주7]에서는 그런 절대화가 드러나지 않지만, 그 다음에 발표된 책들에서는 이것이 점점 더 분명해진다. 리오타르를 포스트구조주의와 포스트모더니즘 개념을 통해 수용한 영미권에서는 이런 전회가 모호해졌다. 분쟁과 잘못에 관한 리오타르의 사고는 포스트구조주의적 주체 비판은 물론이고, 거대서사의 종언이라는 포스트모던적 지각과 너무도 쉽게 결합되었기에, 결국 언어와 문화의 다양성이라는 상대주의적 관점으로 귀결되었다. 그런 지각은 리오타르의 이론에서, 그리고 불일치를 사고하는 방식에 있어서 무엇이 관건인지를 감춰버린다. 리오타르의 후기 책들이 이런 점들을 전형적으로 보여주는 데도 말이다. 물론 그의 후기 책들은 내가 미학과 정치의 윤리적 전회라고 부른 것을 훨씬 더 폭넓게 특징짓고 있다[주8].

[주7] [옮긴이] 장 프랑수아 리오타르, 쟁론, 진태원 옮김, 경성대학교출판부, 2015. 

[주8] 2003년 골드스미스 컨퍼런스에서 한 발표문에서 Sam Chambers는 리오타르적 분쟁에 맞서서 내가 아리스토텔레스적 언어관을 지지했다고 주장했다. 이런 언어관을 취했기 때문에 나는 리오타르를 이해할 수 없게 됐을 뿐 아니라, 정치를 재사유하려는 나 자신의 기획도 완성할 수 없었다고 한 것이다. 하지만 내가 아리스토텔레스를 언급한 것은 인간/말하는 동물/정치적 동물이라는 고전적 등식의 핵심부에 놓여 있는 간극 혹은 잘못을 보여주기 위해서였다. 전체 문제는 우리가 이 잘못을 어떻게 인식하는가이다. Chambers, 2005를 참조

잘못의 절대화는 프롤레타리아가 보편적 희생자, 거대서사의 주체였던 근대 시대와 미시서사 혹은 국지적 서사라는 포스트모던적 시대 사이의 단[314]절이라는 이른바 포스트모던적 긍정과 더불어 사실상 시작됐다. [그러나] 이 단절에는 역사적 증거가 결코 없다. 나의 모든 역사적 탐구가 목표로 삼은 것은 이런 전제를 파괴하고, 사회적 해방의 역사란 항상 작은 서사들, 특수한 발화행위 등으로부터 만들어졌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러므로 거대서사와 보편적 희생자의 시대로부터 단절해야 한다는 논점은 내가 보기에 요점을 벗어난 것 같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이것이 사실상 절대적 잘못의 또 다른 서사 속에 내장되지 않는 한, 요점을 벗어난 것이었다. 그리고 내가 추정하기에 이렇게 내장시키는 것이 [리오타르의] 요점이었다. 리오타르가 했던 것은 희생자의 거대 서사로부터 단절하기가 아니었다. 그것은 희생자의 거대 서사를 새롭게 활용하기 위해 회고적인 방식으로 희생자의 거대 서사의 틀을 다시 짜려는 것이었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리오타르의] 하이데거와 유대인들(Heidegger and “the jews”, 1990)은 어쩌면 거기에 없었을 수 있고 확실히 시작에서는 명백하지 않았던 어떤 의미, 즉 서사의 대체라는 의미와 희생자의 대체라는 의미를 이른바 포스트모던적 논증에 제공하는 전환점으로 사고될 수 있다. 이 텍스트에서 <유대인들>은 근대성의 새로운 서사의 주체, 서구 세계의 새로운 서사의 주체가 되었다. 그것은 더 이상 해방의 서사가 아니었으며, 약속의 완수라는 일방통행식의 플롯도 아니었다. 오히려 그것은 또 다른 일방통행식의 플롯이었다. , 절대적 범죄의 서사인데, 이 서사는 서구 사유의 변증법 전체의 진리로서, <타자>, <길들여질 수 없는 것> 혹은 <갚을 길이 없는 것>[주9]과 관련된 사유의 근원적 부채를 잊으려고 하는 거대한 시대의 최종 결과로서 나타난다.

[주9] [옮긴이] ‘길들여질 수 없는 것‘the Untameable’의 번역어이다. 한편, ‘the Unredeemable’은 속죄할 수 없는 것, 죄의 사함을 받을 수 없는 것, 따라서 어떤 부채나 빚에 대해 갚을 길이 없는 것, 그리하여 구원될 수도 없는 것 등등을 의미한다. 이미지의 운명에서와는 달리 여기서는 갚을 길이 없는 것으로 일관되게 옮긴다

갚을 길이 없는 부채라는 관념은, 우리도 알다시피, 미학적 상태의 예외성의 변형에 있어서 마지막 단계이다. 리오타르는 미학적 예외성을 칸트적 숭고의 격자를 통해 해석한다. , 무능의 경험으로서 해석하는 것이다. 미학적 상태의 예외성은 감각과 사유의 근본적 불화를 뜻한다. <이성>의 관념을 제시하는 데 있어서 <상상력>이 무능하다는 칸트의 견해는 사고의 힘을 탈피하고 원초적 재앙을 증언하는 감각(aistheton)의 힘으로 뒤집힌다. 타자성의 법칙에 대한 정신의 먼 옛날부터의 의존, 정신의 노예화.’ <타자성>의 처음 이름은 ‘<사물>’, 즉 프로이트-라캉적 의미의 <사물Das Ding>이다. 그 두 번[315]째 이름은 <>이다.

이런 식으로 <>에 대한 유대인의 복종은 정신의 재앙이나 무기력화의 원초적 경험에 대한 복종과 똑같다. 그러므로 나치가 유럽의 유대인들을 절멸시키려 한 것은 원초적 재앙을 부인하는 데서 귀결되는 재앙으로 해석될 수 있다. <사물Das Ding> 혹은 <>을 제거하려는, 타자성에 대한 먼 옛날부터의 의존을 제거하려는 기획의 최종적인 달성으로 해석될 수 있는 것이다. 적합하게 말하면 이것은 미학적 경험을 윤리적 경험으로 해석한다는, 해방의 모든 과정을 금한다는 뜻이다. 이런 플롯에서는, 해방의 모든 과정은 정신을 타자성에 예속시키는 재앙을 부인하려는 재앙적인 시도라고 지각된다. 새로운 종류의 근본악에 관한 이런 사고는 오늘날 (적어도 프랑스 지식인들 사이에서는) 정치와 관련된 두 종류의 태도로 이어진다. 하나는 기권이고 다른 하나는 잘못의 다른 종류의 절대화를 지지하는 것, <>의 군대가 <>의 축에 맞서 벌이고 있는 현재의 전쟁을 지지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정치에 관한 내 연구에서 관건이고 또 이 관건을 미학에 관한 연구와 묶어주는 것은 불화로서의 정치의 특정성을 사고하려는 시도이며, 불일치를 잘못이나 재앙으로 절대화하려는 것에서 벗어나는 미학적 이질성의 특정성을 사고하려는 시도이다. 이것은 그런 예외성을 순수성의 플롯 바깥에서 사고하려는 시도이다. 리오타르의 마지막 작업에서 관건은 분명히 미학적 분리성에 관한 아도르노의 해석의 변형이다. 아도르노에게서 미학적 경험은 미학적 약속의 순수성을 지키기 위해서 분리되어야만 했다. 리오타르에게서 작품의 미학적 순수성의 본질은 <길들여질 수 없는 것>의 순전한 증언이라는 지위에 있다.

마찬가지로 정치적 삶과 벌거벗은 생명의 분리라는 아렌트적 관념은 예외상태에 관한 아감벤의 이론화에서 거꾸로 뒤집혔다. 예외상태는 정치적 삶을 벌거벗은 생명아래로 포섭하는 <근대성>의 거대서사가 된다. 이 포섭은 홉스의 이론뿐만 아니라 <인간의 권리들>에 대해서도, 프랑스 혁명의 인민의 주권이나 인종청소도 설명한다. 정치의 순수성이라는 관념은 그 반대로, 즉 그 애매한 행위자들을 일소함으로써 정치적 개입의 무대를 텅 비게 만드는 것으로 나아간다. 그 결과, 정치는 압도적인 역사적-존재론적 운명으로서 등장하는 권력의 행위와 동일시되기에 이른다. , 우리 모두는 처[316]음부터, 수용소의 동질적이고 편재하는 공간 속에 있는 난민들이며, 벌거벗은 생명과 예외의 상호보완성 속에 사로잡혀 있다(Agamben 1998; Rancière 2004c를 참조).

만일 1990년대 초에 내가 정치적인 것의 복귀라는 표준적인 이론들을 제기했었다고 한다면, [지금의] 나는 예외의 논리의 이런 무한화에, 정치적인 예외성과 미학적 예외성의 이런 이중적인 역전(reversal)에 점점 더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그리고 이 두 가지 예외성의 결합이 윤리적추세를 구성한다. 나는 이런 윤리적 추세에 대해, 순수성 관념과는 별개로 미학적·정치적 불일치성을 사고하는 하나의 방식을 대립시키려고 한다. 정치의 예외성이란 [정치가] 자신의 고유한 장을 갖고 있다는 것이 아니라 치안의 장에서 자신의 무대를 건설하는 실천의 예외성을 뜻한다. 그리고 미학적 체제에서 예술의 자율성은 그만큼 타율성이다. , 예술은 특정한 경험에 귀속되는 특정한 영역으로 설정되지만, 그 대상과 절차를 다른 경험 영역에 속하는 대상과 절차로부터 분리시키는 경계선은 전혀 없다.

내 작업의 전반적 논리는 순수 정치와 순수 미학이 무한한 잘못이나 무한한 악의 급진화 속에서 함께 전복될 수밖에 없음을 보여주는 것을 목표로 삼는다. 나는 불화를 해소될 수 없으나 그럼에도 불구하도 처리될 수 있는 잘못이라고 사고하려고 노력한다. 이것은 내가 예외, 잘못 혹은 초과에 관한 개념규정을 그 어떤 종류의 존재론과도 별개로 유지하려고 노력한다는 것을 뜻한다. 정치의 원리를 존재론적 원리로 거슬러 올라가지 않는 한, 정치를 사고할 수 없다는 것이 오늘날의 추세이다. 이런 것이 하이데거적인 차이, 네그리가 개념규정한 스피노자적인 <존재>의 무한성, 바디우의 사유에 있어서 존재와 사건의 극성(polarity), 아감벤의 이론에 있어서 잠재성과 현실성 사이의 관계의 재분절 등등이다. 내가 취하는 가정은, 이런 요구사항들이 어떤 역사적-존재론적인 운명적 과정을 위해서 정치의 해소로 나아간다는 것이다. 이것은 상이한 형태를 띨 수도 있다. 정치는 존재의 법칙에서 해소될 수도 있다. 마치 형식이 그 내용의 현시에 의해 찢겨져버리듯이 말이다. 하트와 네그리의 제국에서 <다중>은 제국을 폭파하게 될 제국의 진짜 내용이다. 공산주의는 승리할 것이다. 왜냐하면 이것이 존재의 법칙이기 때문이다. , <존재><공산주의>이다. 그렇지 않으면 모든 정치적 잘못은 기원적 잘못의 결과로서 등장할 것이며, 그리하여 <>만이, 혹은 어떤 [317]존재론적 혁명만이 우리를 구할 수 있다.

처음부터 내가 가진 첫 번째 관심사는 형이상학적 목적지[이정표]에 입각해 정치적 문제들을 분석하는 모든 분석들을 옆으로 치워버리는 것이었다. 이렇게 하기 위해 나는 그 어떤 시간적 목적론도, 차이·초과 혹은 불일치의 그 어떤 기원적 결정도 일축해버리는 것이 필수적이라고 생각한다. 이 때문에 나는 항상 초과, 차이, 혹은 불일치의 특정하고 제한된 형태를 정의하려고 노력했던 것이다. 나는 그 어떤 셈도 불가능하게 만들 수 있을 <존재>의 초과에 정치적 불일치를 정초하지 않는다. 나는 정치적 불일치를 특정한 계산착오와 연결한다. 데모스는 <존재>의 초과를 구현하지 않는다. 데모스는 무엇보다 우선 텅 빈 이름이다. 한편으로, 데모스는 어떤 필연성도 갖고 있지 않은 보충적 셈에 대한 이름이며, 다른 한편으로 이 자의적인셈은 불평등의 정당화 자체에 고유한 평등주의적조건을 상연·연출한다. 그 어떤 존재론적 간극도 없고, 평등의 우연성과 불평등의 우연성을 하나로 묶는 교착(twist)이 있다. 데모스의 역량은 존재의 그 어떤 원초적 초과도 상연·연출하지 않는다. 그것은 그 어떤 명명의 과정에도 고유하게 있는 초과를 상연·연출한다. , 이름들과 신체들을 한데 묶는 관계의 자의성을 상연·연출한다. 이름을 부여받고 공통적인 것에 관해 말하도록 운명지어지지 않은 자들이 이름과 신체들을 이용할 수 있도록 만드는 이름들의 초과를 상연·연출하는 것이다. 내게 차이란 항상 특정한 관계성, 통약 불가능한 것의 특정한 척도를 뜻한다.

바로 이 때문에 나는 분명히 데리다가 씨름했던 것과 똑같은 종류의 쟁점과 씨름해야만 했지만, 데리다의 유령성(spectrality)과 어느 정도 거리를 두게 된다. 예를 들어 유령들과 유령성이라는 데리다식의 문제틀은 두 개의 쟁점을 함께 묶는데, 이렇게 묶여진 매듭은 내게도 중요하다. 두 개의 쟁점이란 탈정체화와 시대착오의 지위이다. 그것은 내가 직면한 것과 똑같은 문제를 다룬다. , 우리는 비실존자(the inexistent)의 실존을 어떻게 사고하는가, 우리는 초감성적인 것-감성적인 것을 어떻게 사고하는가? 하지만 내가 보기에, 데리다는 비실존자에 너무 많은 현존을 부여하고 너무 많은 육신(flesh)을 부여한다. 정체성[동일성]을 탈구축하면서도 그는 항상 이타성(異他性)의 동일성이나 부재의 현전을 과장함으로서 동일성을 복귀시키려고 하기 직전에 있다. 그가 [318]마르크스의 유령들에서 말했듯이, 우리는 유령의 실재성(reality)에 관해서는 아무것도 모른다. 하지만 우리는 유령이 우리를 쳐다본다는 것, 유령이 우리를 보고 있고 우리에게 말을 한다는 것을 안다. 우리는 유령의 정체성은 모르지만, 유령의 시선을 견뎌내야 하고 유령의 명령에 복종해야 한다.

나는 우리를 우리 자신으로부터 분리시키는 타자성의 무게를 충분히 깨닫고 있다. 내가 거부하는 것은 타자성에 어떤 시선을 부여하는 것이고, 그 목소리에 어떤 윤리적 명령의 힘을 부여하려는 것이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나는 이타성의 형태들의 다양체를 <타자성>의 인격화를 통해 실체로 전환시키는 것을 거부한다. 이것은 궁극적으로 초월의 한 형태를 복귀시킨다. 똑같은 것이 시간적인 분리-접속(dis-junction)이라는 쟁점에도 해당된다. 또 나는 시대착오, 반복 등등의 쟁점도 다루었다. 하지만 나는 이런 쟁점들을 이음매에 어긋난 시간이라는 관념으로 통일시키는 것을 거부한다. 오히려 나는 이것들을 시간성의 형태들 및 선()들의 다양체들에 입각해 사고한다. 내가 그렇게 보고 있듯이, 불화의 논리에서 여러분은 분리-접속의 존재론을 구축하는 대신에 분리-접속을 접속(junction)의 특정한 형태로서 사고한다(그리고 접속을 분리-접속의 한 형태로서 사고한다).

나는 이 논점의 이면(裏面)을 잘 알고 있다. 만일 시간적 분리접속의 원초적 구조가 없다면, 어떤 해방적 완수의 지평을 생각하기란 어렵다. 달리 말하면, 만일 유령이 없다면, 메시아도 없다. 내가 메시아적 명제를 세속적(prosaic) 용어로 번역한다면, 다음과 같은 질문이 뒤따를 것이다. , 정치를 그 고유한 논리 위에 정초하는 것이 가능한가? 우리는 정치적 주체화의 과정에 의미를 부여하기 위해서 특정한 시간성의 틀을, ‘비실존적인 것의 실존의 시간성의 틀을 짜야 하지 않는가?

나는 어떤 미래의 틀을 짜는 것이 미래의 가능성의 조건이라기보다는 정치적 개입에 뒤이어 일어난다고 말함으로써 논점을 뒤집고 싶다. 혁명가들은 인민의 미래를 발명하기 전에 인민을 발명했다. 게다가 우리의 논의 맥락인 정치적인 것의 윤리화라는 맥락에서 우리는 우선 미학의 정치의 특정성에, 정치적 개입의 특정성에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데리다가 유령들을 효과성이념성의 이항대립과 대립시키면서 유령들에 관해 말했을 때, 나는 픽션[허구]에 관해 말하기를 더 좋아[319]한다. 내가 보기에 픽션이라는 이 용어는 똑같은 역할을 하지만 비실존자의 부분[]을 실체화하는 것을 막는다. 내게 비실존자는 무엇보다도 말들, 텍스트들, 픽션들, 서사들, 등장인물들이다. , 유령들의 삶이나 정신Geist의 삶이 아니라 종이의 삶(paper life)이다. 그것은 눈에 안 보이는 것(the unapparent)의 현상학이라기보다는 특정한 외양의 시적인 틀짜기이다. 그러므로 데리다가 존재론(ontology)보다 더 넓고 더 강력할 수 있는 유령론(hauntology)’의 틀을 짜자고 제안할 때, 나는 시학에 입각해 말하기를 더 좋아한다. 존재론 혹은 유령론은 어떤 정치적 개입이나 한 편의 시(poem)만큼이나 픽션적이다. 존재론은 정치, 미학, 윤리 등등에 어떤 기반을 제공한다고 주장하는 반면, ‘유령론은 이런 포부(pretension)를 탈-구축한다고 칭한다. [그러나] 내가 보기에, ‘유령론은 근본주의적 기획을 무너뜨리는 타자성을 실체화하는 것을 대가로 그렇게 한다. 이제 <타자성>의 실체화는 윤리적기획(enterprise)의 핵심에 있다. 나는 주류의 윤리적 추세와 이것의 명백히 반동적인 정치로부터 데리다를 분리시키는 거리가 무엇인지를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우리가 이 추세에서 [진정으로] 탈출하길 원한다면, 나는 타자성이 탈-실체화, -존재론화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것 덕분에 나는 내 작업의 의미나 내 담론의 지위를 둘러싼 몇몇 질문에 대답할 수 있게 됐다. 정초하거나 탈구축하는 대신에 내가 언제나 하려고 노력했던 것은 담론의 장르와 수준들을 분리시키는 경계선들을 흐릿하게 하는 것이다. 나는 역사의 이름들(1992)[주11]에서 지식의 시학이라는 개념을 제안했다. 지식의 시학이 기성의 지식(역사, 정치학, 사회학 등등)을 시적인 조작(묘사, 내레이션, 은유화, 상징화 등등)으로 거슬러 올라가 추적하여 이런 조작의 대상을 나타나게 하고 이런 조작의 명제에 의미와 적실성을 부여하려고 하는 한에서, 지식의 시학은 일종의 탈구축적 실천으로 보일 수도 있다. 과학적 담론을 시적인 계기로 이렇게 환원한다는 것은 과학적 담론을 말하는 존재들의 평등으로 환원한다는 것을 뜻한다는 점이 내게는 중요하다. 내가 자코토에게서 빌려온 지능의 평등이 지닌 의미가 이것이다. 그것은 지능의 모든 현시가 다른 무엇인가(any other)와 평등하다는 뜻이 아니다. 무엇보다도 이것은 똑같은 지능이 시적 픽션을, 정치적 개입을, 혹은 역사적 설명을 행한다는 것을 뜻한다. 똑같은 지능이 문장들 일반을 만들[320]고 이해한다는 것을 뜻한다. 정치사상, 역사, 사회학 등등은 그들의 대상을 가시적으로 만들기 위해, 그리고 그 대상들 사이의 연결을 창출하기 위해 언어적 혁신이라는 공통적인 힘을 사용한다. 철학도 그렇게 한다.

[주11] Jacques Rancière, Les noms de I'histoire: Essai de poetique du savoir, Paris: Seuil, 1992. [The Names of History: On the Poetics of Knowledge, H. White & H. Melehy (trans.). Minneapolis, MN: University of Minnesota Press, 1994. ; 역사의 이름들, 안준범 옮김, 울력, 2011.]

내게 이것은 철학이란 담론의 다른 형태나 합리성의 다른 영역을 정초하는 담론이 아니라는 것을 뜻한다. 모든 분과학문들은 경계선 내부에서 자신들의 객관성의 장의 특정성에 걸맞은 특정한 방법론이라는 가정 위에서 자신들의 권위를 진술하는데, [내게] 철학은 이런 경계선들을 해체하는 담론이다. 나의 철학 실천은 정치에 관한 내 생각과 나란히 이루어진다. 그것은 분과학문들과 담론적 능력의 특정성을 언어적 능력과 시적 발명의 평등주의적수준으로까지 거슬러 올라간다는 의미에서, -아르케적이다. 이런 실천은 내가 철학을 특정한 전쟁터로 받아들인다는 것을 함축한다. 아르케아르케를 탈은폐하려는 힘겨운 노력이 단순히 그 반대로 이어지는 장, 다시 말해 모든 아르케의 우연성이나 시적 성격을 탈은폐하는 것으로 이어지는 그런 장으로 받아들인다는 것을 내포한다. 만일 내가 한 작업의 상당수가 플라톤에 대한 재독해로서 정교화됐다면, 그것은 플라톤의 작업이 이 전쟁터의 가장 정교화된 형태이기 때문이다. 국가는 목적지의 불평등이 고귀한 거짓말이라고 말하며, 장인이 다른 곳에 있는 것을 막는 시간의 부족다른 곳 자체의 금지임을 이해할 수 있게 해준다. 파이드로스는 기록의 금지와 민주주의의 금지가 연결돼 있음을 보여준다. 그것은 매미-철학자들의 공간-시간과 노동자들의 공간-시간을 분리하는 근본적인 선을 그으며, 우리에게 <진리>에 관한 진리를 말해주겠다고 약속한다. 하지만 <진리>에 관한 진리는 신화로서 말해질 수 있을 뿐이다. 우화의 평등이 담론들과 입장들의 위계 전체를 뒷받침한다. 만일 철학의 특권이라는 게 있다면, 그 특권은 <진리>에 관한 진리가 허구임을 우리에게 일러주고, 또한 철학이 세우는 바로 그 위계를 해소하는 그런 솔직함에 놓여 있다.

내가 이해하는 바로는 철학의 평등주의적 실천이란 아르케아르케, 권위의 권위를 구성할 수 있는 시적 행위의 필연성인 정초의 아포리아를 상연·연출하는 실천이다. 나는 내가 이 과제에 헌신한 유일한 사람이 아님을 잘 알고 있다. 그렇다면 내 입장의 종별성[특정성]은 무엇일까? 그것은 내가 아포리아의 원리를 존재론화하기를 거부한다는 것이다. 어떤 사상가들은 [321]초월이라는 유령을 떠올리게 할 위험을 무릅쓰고 그것을 차이라고 말한다. 다른 사상가들은 그것을 <존재>의 무한성이나 <존재>의 다양체와 동일시한다. 나는 지금 하트와 네그리의 다중이나, <존재>란 순수 다양체라고 하는 바디우의 이론을 염두에 두고 있다. 네그리와 바디우 둘 다 권위의 해체(unbinding)[주12]를 해체(unbinding)로서의 <존재>의 법칙에 정초하려고 한다. 하지만 이런 지점에서, 내가 보기에 이 두 사람은 권위의 원리를 회복하는 몇 가지 교묘한 속임수를 대가로 해서야 실천의 특정한 영역들에서 해체하는(unbinding) 권력의 상연·연출을 완수할 수 있다. 나는 아포리아의 원리를 수립하거나 <평등>아르케로 삼고 싶은 것이 아니라, <평등>을 계속해서 입증되어야 하는 전제로 삼고 싶다. , 평등의 특정한 무대를 여는 입증이나 상연·연출로 삼고 싶은 것이다. 이 무대는 경계선들을 가로지름으로써, 그리고 담론의 형태 및 수준과 경험의 영역들을 상호 연결함으로써 세워진다.

[주12] [옮긴이] 이 글에서 의미가 석연치 않은 단어 중 하나가 이것이다. 영어를 최대한 불어와 가깝게 연결한다면 탈연결이나 탈유대(déliason)를 뜻하는 것이 아닌가라고 추정할 수 있을 뿐이다

내가 불일치를 사고하는 논리를 재구축하려 한 것은 우리가 어떻게 사고해야 하고 행동해야 하는가를 말하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나는 그저 내가 왜 그런 길을 걸었는지를 설명하려고 했을 뿐이다. 나는 나의 철학 실천이 내 작업에 대한 독해를 어렵게 만든다는 점을 깨닫고 있다. 이 때문에 나는 이에 대해 논의할 수 있게 나를 받아준 사람들에게 감사드린다. 마무리 할 겸, 요점은 내가 무엇을 썼는가를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강조하고 싶다. 오히려 요점은 오늘날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쟁점들에 관한 논의에서 우리가 함께 나아가고 있다는 점이다. 합의적 사고와 잘못의 윤리적 절대화 사이에 새로운 길을 엮어내려고 하는 사람들에게는 토론의 여지가 훨씬 더 많이 있다.

 

인용문헌

Agamben, Giorgio (1998), Homo Sacer: Sovereign Power and Bare Life, trans. Daniel Heller-Roazen, Stanford: Stanford University Press. [조르조 아감벤, 호모 사케르 : 주권 권력과 벌거벗은 생명, 박진우 옮김, 새물결, 2008.]

Badiou, Alain (2005), Metapolitics, trans. Jason Barker, London: Vers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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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존재론화로서의 랑시에르의 정치철학

 

이 글은 2003년에 발표된 것임에도 불구하고 시의성을 잃지 않고 있을 뿐 아니라, 오늘날의 이론 지형을 감안하면 그 중요성이 더 커지고 있다. 제목을 보면 미학과 정치에 대해 다루는 것처럼 보이나 사실은 정치에 대한 자신의 사유에 대해 가해진 비판에 대해 응답하고 아렌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