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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토바 아키히로(的場昭弘)*1)가나가와(神奈川) 대학 교수/ 사회사상
번역: 장화경 성공회대학교 교수/일본학과
진보평론

1. 들어가며

일본에서의 맑스 연구에 관해 이야기하는 것과 일본에서의 맑스주의 운동에 관해 이야기하는 것은 상당히 다르다. 바로 그 점이 일본에서의 맑스주의 연구의 커다란 특징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20세기 초에 출판된 『공산당선언』의 일본어역은 일본의 맑스주의 운동, 정확히 말하면 아나키즘 운동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었다. 가타야마 센(片山潛), 고토쿠 슈스이(幸德秋水), 오스기 사카에(大杉榮) 등이 초기 일본의 맑스주의 도입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그러나 1917년 러시아 혁명과 함께 시작된 제3인터내셔널의 영향은 그 당시까지의 맑스주의 운동을 근본적으로 변화시켰다. 제3인터내셔널과 일본공산당은 그 영향력을 무산대중뿐 아니라 전위인 지식인들, 구체적으로는 대학인에게 확산시켜 나갔기 때문이다. 다이쇼(大正) 데모크라시라고 불렸던 시대에 대학이라고 하는 제도 속으로 맑스주의가 침투해 가서 이미 1920년대에 정치나 운동으로부터 분리된 맑스 연구라는 아카데믹한 분야가 만들어졌다. 물론 1930년대부터 1945년까지 총력전 상황 속에서 공개적인 맑스주의 연구는 금지되어 있었지만, 학생과 교사에게 미친 영향력은 전후에 개화하게 된다. 전후에 맑스주의 강좌는, 공산주의 탄압(red purge)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면면히 이어져서 대학이라고 하는 공적인 장소에서 맑스 연구는 오랫동안 매우 융성하게 된다.

대학에서의 연구와 맑스주의를 표방하는 정치집단 및 학생운동 집단에 의한 연구는 어느 면에서 중첩되는 것이기도 했지만, 일단은 분리된 형태로 전개되어 갔다. 전후 맑스주의 연구에서 화제의 중심이었던 맑스의 가치론을 둘러싼 논쟁은 당초에는 '전후 일본의 경제성장이 민주적 사회를 실현시킬 것인가' 라는 폭 넓은 현실 문제에 비추어서 전개되어 널리 세상의 주목을 받았으나, 많은 맑스 연구는 그러한 문제로부터 동떨어진 『자본론』의 훈고학적 연구였다.

훈고학적 연구는 한편에서 학계에 맑스 연구라는 분야를 만들어 갔다. '『자본론』 성립사' 라는 훈고학적 연구 분야는 맑스의 초기 저작에 관한 문헌적 연구, 나아가서는 맑스에게 영향을 준 헤겔, 헤겔 좌파, 포이에르바흐 등에 관한 연구로 파급되어 갔고, 17세기·18세기의 존 로크, 홉스, 스미스 등과의 연관(context) 분석, 19세기 동시대의 사회주의자 푸르동, 푸리에 등의 연구로 파급되어 갔다.

그러나 사회운동과 분리된 맑스 연구는, 그 연구자들이 의식했든 아니든 관계없이, 맑스주의를 표방하는 소련과 동유럽 여러 나라의 존재에 의해 규정되었던 것도 사실이다. 그 때문에 지상의 낙원이라고 생각되었던 대학에서의 맑스주의의 극도로 치밀한 문헌해석학 연구는 베를린 장벽과 소련의 붕괴와 함께 우르르 한꺼번에 소멸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에서의 맑스 연구의 오랜 전통은, 소련과 동유럽 사회주의 국가가 소멸된 오늘날에도, 사회운동으로서보다는 그 아카데믹한 방법에서 국제적인 위치를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하긴 맑스 연구를 하고 있는 대학인도 사회운동과 전적으로 분리되어 있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맑스 연구는 사회운동과의 연결고리를 유지하면서도 과거의 아카데믹한 문제를 견지하면서 전개되어 왔고, 지금도 그렇게 전개되고 있다. 이 글은 이러한 사회운동의 배경에 관해서도 언급하겠지만, 기본적으로는 학술적인 맑스 연구에 관하여 다루기로 하겠다.

접어두기..

2. 최근 일본에서의 맑스 연구

1) 1991년까지의 이단파의 맑스 연구
여기에서 '최근'이라고 하는 경우, 그것은 맑스 연구에 있어서는 자동적으로 소련 붕괴 이후를 의미한다. 그만큼 연구 조건, 연구의 방향이 변해 버렸기 때문이다. 우선, 그 당시까지 세력이 있던 맑스 연구자의 다수가 침묵하거나 다른 분야로 옮겨갔다. 많은 대학의 경제학부에는 맑스 경제학을 가르치는 '경제원론'이란 강좌가 있는데, 그 강사의 다수가 전공을 바꾸거나 침묵을 지켰던 것이다.

그 결과, 당시까지 이단시되어 그늘에 숨어 있던 맑스 연구자가 한꺼번에 양지에 나오게 되었다. 이단이란 일본공산당계의 입김이 미치지 않는 통칭 신좌익이라고 불리는 사람들을 말한다. 1960년 안보투쟁을 앞두고 일본공산당에 비판적인 사람들이 동맹(Bund)을 만들었는데, 1970년 안보투쟁까지의 과정 속에서 다양하게 분화되어 간다. 맑스 연구자 가운데 당시에 주목을 끈 사람으로는 우노 코조(宇野弘藏), 히라타 키요아키(平田淸明), 히로마츠 와타루(廣松涉), 라치 치카라(良知力) 등이 있었다. 그들은 모두 이미 사망했지만 1991년 이후 맑스 연구를 이끌어가는 연구자의 다수는 대부분 그들의 제자들이다.

우노 코조는 이미 1950년대부터 우노파라는 독자적인 파벌을 도쿄대학 사회과학연구소와 경제학부를 중심으로 펼치고 있었다. 『자본론』을 경제원론으로 순화시키고 정책론이나 역사적 단계론을 거기(『자본론』: 역자)에서 삭제하는 우노의 접근방식에 대해 정통파 맑스 경제학자로부터 혹독한 비판이 전개되었다. 우노파는 제자인 후리하타 세츠오(降旗節雄), 야마구치 시게카츠(山口重克), 다쿠미 미츠히코, 이토 마코토(伊藤誠) 등을 중심으로 학파를 형성해 갔다.

히라타 기요아키는 개체적 소유론이라는 독자적 사회주의를 전개하고 시민사회와 사회주의 사회의 접합을 시도하였다. 사적 소유가 아닌 개체적 소유의 부활은 사회주의 사회에서의 비민주적인 정치를 비판하는 의도를 가지고 있었고, 서구적 전통에서 맑스를 해석하는 방향을 만들어 나갔다. 히라타는 요코하마국립대학, 나고야대학, 교토대학, 가나가와대학을 전전했는데 만년에는 조절이론, 그람시 연구 등을 전개하였고 많은 제자를 키웠다. 특히 우치다 히로시(內田弘), 야마다 토시오(山田銳夫), 야기 키이치로(八木紀一郞) 등이 애제자다.

히로마츠 와타루는 1970년 학생투쟁의 영웅이었다. 히로마츠 와타루는 『독일 이데올로기』의 편집문제를 계기로 『엥겔스론』(1969)을 발표하였다. 1845-6년에 쓰여져서 초고인 채로 방치되었던 『독일 이데올로기』의 편집상의 의문점, 특히 맑스와 엥겔스의 필적을 분석하여 초고가 쓰여진 당시까지는 엥겔스 쪽이 맑스보다 앞서 있었다는 '엥겔스 제1 바이올린설'을 주장하였다. 도쿄대학 교양학부로 옮긴 히로마츠의 주위에는 히로마츠파라고 불리는 그룹이 형성되어, 커다란 맑스 연구집단이 형성된다.

위에서 살펴본 세 사람에 비해 라치 치카라는 두드러진 존재는 아니었다. 그의 연구 스타일이 소박했기 때문이다. 라치 치카라는 호세이대학(法政大學)에서 히토츠바시대학(一橋大學)으로 옮긴 다음에도 초기 맑스의 치밀한 문헌 연구를 계속했다. 동독에 유학했던 라치 치카라는 할레(Halle) 부근에 있는 메르제브르크(Merseburg)의 경찰 자료를 세밀하게 조사하여 맑스와 당시의 노동자 운동의 관계를 극명하게 분석하였다. 라치 치카라계(系)인 오츠카 긴노스케(大塚金之介)의 학문 스타일은 서구 연구는 서구의 세밀한 문헌자료를 사용하여 해야 한다는 것으로서 라치 치카라뿐 아니라 『엘레노아 맑스』를 영국에서 출판한 츠즈키 츄시치(都筑忠七)를 포함한 히토츠바시학파의 한 특징을 이루고 있다.

1960년대 후반부터 1970년대 전반에 일어난 맑스붐을 유지시켰던 것은 정통파 사람들이 아니라 우노, 히로마츠, 히라타, 라치 등 이단파였던 것이 1991년 소련 붕괴 후 이단파의 약진으로 이어지고 있다. 하지만, 여기에서 거론한 사람들은 모두 이미 사망했다. 1898년생인 우노는 물론이거니와 라치 치카라는 1985년 55세에 암으로 쓰러졌고, 히로마츠 와타루와 히라타 기요아키는 1991년의 소련 붕괴를 직접 보긴 했지만, 히라타는 1995년에 73세로, 히로마츠는 1994년에 61세로 타계했다. 흔히 일본에는 초기 맑스 연구자는 일찍 죽는다는 말이 있다. 정통파의 이데올로기와 정면으로 대결했던 사람들은 확실히 젊어서 세상을 떠났다. 정통파가 힘을 잃은 가운데 그들이 차례로 죽어간 것은 얄궂은 일이라고 해도 좋을 지 모르겠다.

2) 소련 붕괴 후의 맑스 연구
이렇게 해서 '최근'의 연구는 어떻든 크게 바뀌었다. 4월에 간행된 책으로 내가 편집책임을 맡고 있는 『아소시에』(アソシエ)6호는 "21세기 맑스로부터 무엇을 볼 수 있는가"라는 표제를 달고 있다. 이 표제는 역설적이지만 또한 "21세기 맑스로부터 무엇을 볼 수 없는가"라는 의미이기도 하다.

『아소시에』는 '아소시에' 그룹의 기관지이기도 하다. 회원수가 650명이고 매년 4회 잡지를 간행하고 있다. 참가자의 다수는 신좌익계지만, 급진적인 시민과 학자도 참가하고 있다. 『아소시에』는 1990년에 생긴 '포럼 90'을 계승한 것이다. '포럼 90'은 히로마츠파와 우노파 사람들, 그리고 신좌익계 활동가 등에 의해 형성된 시민조직이었는데, 1990년에 분열되어 '아소시에'가 탄생한다.

『아소시에』에 게재된 15편의 논문을 보면 먼저 집필자의 문제의식이 확산되어 있어서 하나로 수렴되고 있지 않는다는 점이 눈에 띈다. 히라타 시민사회론이나 히로마츠 와타루론 등도 있긴 하지만, 급진적 민주주의, 정보론, 페미니즘론, 아나키즘론, 분석 맑스주의론 등 다양하다. 권두의 대담(야마노우치 야스시[山之內靖] 對 마토바 아키히로)에서 히로마츠 와타루와 동세대의 중진인 야마노우치 야스시는 맑스주의가 재생할 가능성은 근대사회의 현실을 직시하는 수밖에는 없다며 맑스주의 속에 빠져 있는 자연 개념을 포에르바흐(Feuerbach)와의 관계에서 소급해 고찰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특히 맑스가 『경제학ㆍ철학 초고』의 제3 초고에서 포이에르바흐를 높이 평가하고 있는 것으로부터, 히로마츠나 프랑스의 루이 알튀세(Louis Althusser)가 1960년대, 70년대에 주장했던 초기와 후기의 단절은 자연과 인간사회의 관계가 위기에 놓인 현재 전혀 무의미하다며 '『경제학ㆍ철학 초고』로 돌아가라'고 주장하고 있다.

야마노우치의 이러한 주장의 배경은 현재 급속하게 진행되고 있는 인간에 의한 자연의 재생산 시스템 파괴로부터 몸을 지키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이다. 자본주의 사회는 지리적 공간을 완전히 상품화한 후에, 자연의 재생산 메커니즘의 상품화와 가상적인(virtual) 인간정신의 세계에서의 상품화를 진전시키고 있다. 이러한 세계를 먼저 인식하고, 그러한 문제을 이해한 위에서 맑스를 재인식해야 한다는 것이다.

테마의 확산 현상은 단지 『아소시에』에만 국한된 것은 아니다. 1999년에 역시 내가 편집한 아사히신문사의 『아에라 무크』의 특집 '맑스를 알다'도 마찬가지의 문제의식에 의한 것이었다. 계급투쟁, 변증법, 공황론과 같은 종래의 언설(言說) 대신에 문화 연구, 오리엔탈리즘, 니체, 베버, 프로이트 등의 테마가 다루어진 것도 그러한 현실의 급속한 변화에 대응할 수 있는 맑스 사상의 편제 개편을 의도했기 때문이다.

3) 엥겔스 사후 100년
1991년 이후 맑스 연구는 일단 한풀 꺾였다. 그러다가 새로운 기운으로 재등장하기 시작한 것이 1995년이다. 1995년은 엥겔스가 1895년에 서거한 지 꼭 100년이 되는 해로서 엥겔스 특집이 그 계기가 되었다. 스기하라 시로(衫原四郞)와 후루하타 세츠오가 편집한 『엥겔스와 현대』(御茶の水書房)는 엥겔스에 관한 연구 논문 15편을 게재하고 있는데, 맑스와는 별개의 인격체로서의 엥겔스를 본격적으로 다룬 최초의 논문집이라고 할 수 있다. 일본에서도 맑스는 독립적으로 다루어졌지만, 엥겔스를 별도로 취급한다는 습관은 이제까지는 없었기 때문이다. 물론 히로마츠 와타루의 『엥겔스론』(盛田書店, 1968)이 있긴 했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초기 엥겔스를 다루고 있는 데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같은 해 영국의 카버(Carver)의 『맑스와 엥겔스의 지적 관계』(山之內弘 역, 世界書院, 1995)가 번역되었는데, 카버는 만년의 엥겔스에 이르기까지 맑스와는 완전히 다른 인물로 엥겔스를 그리고 있다.

그 해에 나온 조금 색다른 책으로는 나카무라 세이지(中村靜治)의 『엥겔스 찬가』(信山社, 1995)일 것이다. 나카무라는 1970년 이후의 주요한 맑스 연구자들을 철저하게 비판하면서 맑스와 엥겔스는 일체라는 정통파의 언설을 부활시킨다. 여기에서 비판의 대상이 된 것이 히로마츠 와타루와 스기하라 시로 등이다. 스기하라는 『월간 포럼』(포럼 90' 편, 社會評論社)의 1995년 7월호 특집 「엥겔스 사후 100년」에서 나카무라의 이 책을 거론하면서 비판한다. '포럼 90'이 엥겔스를 특집으로 한 것 자체가 새로운 맑스 연구의 변화를 의미하고 있다. 맑스 연구에서 터부가 없어진 것이다.

나는 그 해에 『파리에서의 맑스』(御茶の水書房, 1995)와 『프랑스에서의 독일인』(御茶の水書房, 1995)이라는 두 권의 연구서를 출판했다. 이것은 1986년에 낸 『트리어의 사회사』(未來社, 1986)와 마찬가지로 맑스에 관한 내용인데, 맑스의 동시대 인물과 역사로 하여금 말하게 하는 수법을 취하고 있다. 이러한 방법은 소련으로부터 예전에는 부르주아적 '맑스학'이라는 비판을 받고 있었다. 그 비판의 의미가 무언가 하면, 아무렇든 상관없는 소소한 맑스의 스캔들을 들어 맑스를 비방하는 학문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판단은 맑스 연구에 어떤 종류의 터부가 있었던 때에 성립하는 것으로 이제 그러한 비판은 효력이 없어진 것이다. 당연히 나카무라는 『「자본론」과 「논어」』(信山社, 1996)의 첫머리에서 나와 같은 입장을 비판하고 있다.

4) 1998년 『공산당선언』 150주년
1995년에 시작된 맑스 연구는 1998년 『공산당선언』 150주년부터 기세를 더해 간다. 별책 『정황』(情況社)은 7월호에서 「『공산당선언』과 혁명의 유훈」이라는 특집을 조직했다. 정통파를 제외하고 신·구 맑스 연구자가 모두 모인 기획에는 수십 명의 연구자가 참가하였다. 1998년은 1848년 혁명의 150주년이기도 하였다. 여기에서는 『공산당선언』과 1848년 혁명 연구라는 두 가지 논점에서 논문이 편집되었다. 그 해 이시즈카 마사히데(石塚正英), 시노하라 도시아키(조原敏昭)가 편집한 『공산당선언 - 해석의 혁명』(御茶の水書房)과, 마토바 아키히로와 다카쿠사키 코이치(高草木光一)가 편집한 『1848년 혁명의 사정(射程)』(御茶の水書房)이 출판되었다. 이 두 권의 책은 19세기 고전독서회가 다듬어서 내놓은 연구서인데, 맑스를 19세기의 역사 속에서 재확인한다고 하는 작업 속에서 이루어졌다.

그 해에는 오무라 이즈미(大村泉)의 『신 MEGA와 『자본론』의 성립』(八朔社)이나 시부야 다다시(澁谷正)가 편집한 『초고완전복각판 독일 이데올로기』(新日本出版社) 등의 이색적 서적도 출판되었다. 1991년 소련 붕괴 후에 신메가(『새로운 맑스 엥겔스 전집』)는 소련의 손을 떠나서, IMES(국제 맑스 엥겔스 재단)으로 옮겨갔는데, 편집 작업에 일본인 연구자도 적극적으로 관여하게 되었다. 오무라 이즈미는 『자본론』 2권의 초고 편집에 참가하고 있는데, 그러한 편집 작업에서 이 책이 태어난다. 시부야의 책은 맑스의 『독일 이데올로기』의 새로운 판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일본에서는 히로마츠 판의 뒤를 잇는 본격적인 판이다. 오무라 등은 『맑스 엥겔스 맑스주의 연구』(八朔社)라는 잡지를 매년 간행하고 있다.

1998년에는 각 잡지에 맑스 특집이 마련되었다. 전통 있는 철학잡지인 『사상(思想)』(894호, 岩波書店)은 '『공산당선언』 150주년'을, 『이상(理想)』(662호, 理想社)은 '맑스, 지금' 이라는 주제로 특집을 짜고 있다.『사상』특집에서는 '공간론'으로 유명한 하비(Harvey)의 논문이나 벤사이드(Bendsaid)의 논문이 게재되어 있는데, 이것은 2000년 이후 맑스 연구의 방향을 파악하는데 중요한 논문이었다.

1995년 이후 특징적인 것은, 1980년대까지 중심을 이루었던 맑스 경제학 쪽으로부터의 접근이 전혀 없다는 것이다. 서적의 수가 적을 뿐 아니라 특집으로 짜여지는 횟수, 나아가서는 맑스 경제학을 특집으로 하는 경제 잡지의 소멸이다. 일본 공산당계의 『경제(經濟)』(新日本出版社)는 남아 있지만 시판되고 있는 맑스 경제학 잡지는 아주 적어졌다. 그런 가운데 『경제와 사회(經濟と社會)』(時潮社)가 1998년 겨울호에 '특집 『공산당선언』 150주년'을 조직했다. 그러나 여기에서도 실질적으로는 경제학자의 논문은 적었고 역사가와 사상가의 논문만이 두드러졌다. 이 잡지는 그 후 소멸되었다.

맑스 사상에 대한 특집이 그동안 비교적 마이너(minor)한 잡지에 치우쳐 있었던데 반해서 판매부수에서는 6,000부 가까이 팔리고 있는 종합지 『대항해(大航海)』(新書館)가 '맑스의 고고학'이라는 특집을 마련한 것은 큰 의미가 있다. 여기에서는 새로운 일본사를 개척하고 있는 아미노 요시히코(網野善彦), 미야타 노보루(宮田登)를 비롯하여 현대사상의 이마무라 마사시(今村司), 프랑스 문학의 가시마 시게루(鹿島茂), 경제학자인 가네코 마사루(金子勝)와 같은 논단의 영향력 있는 인물이 맑스론을 이야기한 것이다. 이것은 그 당시에 다쿠미 미츠히코의 『'대공황형' 불황』(講談社, 1998)이 항간에서 많이 읽혀졌던 것과 무관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맑스를 대망하는 소리는 반쯤 혐오하면서도 조금씩 나오고 있었던 것이다.

5) 『맑스를 알다』와 『맑스의 현재』
1999년이 되어 3만 부를 발행하는 『아에라 무크』가 '맑스를 알다' 라는 특집을 짰다. 맑스 연구자가 격감해 가는 것과는 반대로 세상 사람들은 조금씩 맑스에 마음이 끌리기 시작했다고도 생각되었다. 실제로는 약간 예상이 빗나갔음은 알지만, 『아에라 무크』중에서도 1, 2위를 다툴 정도로 팔렸던 것도 사실이다. 마침 그것과는 반대로 아주 마이너한 출판사인 '돗데모벤리출판부'에서 예전에 뉴아카데미즘의 기수라고 불렸던 아사다 아키라(淺田彰)와 문예적 맑스론으로 고정 팬을 가지고 있는 가라타니 코진(柄谷行人)이 쓴 『맑스의 현재』가 출판되었다. 기획자는 교토대학(京都大學) 학생이었는데, 이 책은 아사다, 가라타니의 명성에 더해 네그리 등과의 재미있는 대담으로 판을 거듭하게 된다.

1999년에 두 권의 책이 순간적이긴 했지만 베스트셀러가 됨으로써 매일 800만부를 발행하는 거대 신문인 『아사히신문(朝日新聞)』 학예부의 주목을 받게 된다. 1999년 11월에 아사다와 가라타니의 '오사카 아소시에 대회'에는 300명에 가까운 사람들이 모였고, 같은 달 도쿄 에서의 발표자로 우치다 히로시(內田弘), 강상중(姜尙中), 요네타니 마사후미(米谷匡史), 사회자 마토바 아키히로의 '맑스를 알다'라는 모임의 토론회에도 100여 명이 참가했다. 11월 18일에는 '세기 말에 맑스를 묻는다' 라는 특집이 『아사히신문』에 게재되어, 지금 맑스가 계속 읽히고 있다는 기사가 실리게 되었다.

물론 이것은 일부는 사실이고, 일부는 오해였지만, 젊은이들이 맑스를 읽고 싶다고 생각하는 것도 일면은 진실이기도 하다. 마침 같은 해에 역시 『아시히신문』에 의해 문화 연구가 불붙여진 것과 매우 비슷하다. 단지 독자 중에는 종교적인 열광을 찾아서 맑스에게 온 사람도 있고, 데리다나 푸코와 같은 포스트모던의 관점을 통해 맑스를 접한 사람도 있어서 천차만별이었다.

6) 『맑스 카테고리 사전(事典)』과 『신맑스학 사전(事典)』
맑스 연구의 부활과 새로운 방향의 시작은 잡지나 신문만의 문제만은 아니다. 맑스 사전을 편집하는 작업이 이루어져 1998년과 2000년에 완성된 것을 들 수 있다. 사전을 만든다는 기획은 오랜 편집 작업과 또 사전의 가격을 감당할 수 있는 수요라는 점에서 출판사로서는 상당히 위험한 도박이다. 맑스주의의 쇠퇴가 주장되는 가운데 오츠키출판사(大月書店)는 『맑스ㆍ엥겔스 전집』의 증쇄를 중지해 버렸고 오츠키문고(大月文庫)의 맑스·엥겔스의 저작도 품절 상태가 계속되고 있다. 이와나미문고(岩波文庫)에서조차 상품 부족 상태가 계속되고 있다. 그러나 현재 맑스ㆍ엥겔스 선집의 번역[梵摩書房], 헤이본샤(平凡社) 라이브러리의 맑스 선집의 계획이 진행되고 있다. 그러한 가운데 사전 출간은 커다란 도박이었다.

『맑스 카테고리 사전』(靑木書店, 1998)과 『신맑스학 사전』(弘文堂, 2000)은 완전히 취지가 다른 사전이다. 사전의 규모와 집필자는 거의 같지만, 의도와 내용은 상당히 다르다. 먼저 큰 차이로 들 수 있는 것은 『맑스 카테고리 사전』이 현대에서 본 맑스주의를 중심으로 항목 수를 엄선하고 한 항목에 6000자라는 대항목주의임에 비해서, 『신맑스학 사전』은 맑스를 19세기에서 보았을 때에 관련되는 항목을 고르고 그다지 맑스주의를 언급하지 않은 것이 특징이다. 두 사전은 거의 같은 시기에 시작되어 완성 시점도 2년밖에 차이가 나지 않는데도 편집 개념이 이처럼 다른 것은 놀랄 만한 일이다.

그러나 오히려 이러한 차이가 있는 사전이 나온 것 자체가 현재의 일본의 맑스 연구의 자유로운 점인지도 모른다. 『맑스 카테고리 사전』도 맑스의 현대성을 설명하면서 그다지 당파적인 측면을 강조하고 있지 않다. 오히려 엄선된 항목을 살펴보면 추상적인 개념이나 역사적 항목이 많다. 또 한편에서 『신맑스학 사전』 쪽도 19세기에 맑스를 말한다고 하면서 그 분석 방법, 자료 분석, 아날학파적 접근 등 현대 역사학의 수준에서 접근하고 있다. 맑스와 관련된 사전으로서는 『자본론 사전』, 『맑스주의 사전』 등의 제목으로 지금까지도 여러 가지가 나와 있는데, 각각 매우 당파적인 색채가 강하게 나타나 있었음에 비해서 이 두 사전은 말하자면 사전을 읽을 거리로 해서 맑스를 재구성해 간다고 하는 방향에서 쓰여 있다. 독자에 의해 다양한 맑스상(像)이 나타난다고 하는 것은 1991년 이후의 맑스 연구의 변화의 한면을 나타내는 것이라고도 생각된다.

3. 이후의 맑스 연구

1) 과거 연구의 곤란: 시스템론의 등장
21세기를 막 시작한 오늘날에 맑스를 연구한다는 것은 얼마나 의의가 있는가? 그 답은 각자가 처한 상황에 따라 다르다는 것은 새삼 말할 필요도 없을지 모른다. 하지만 20세기 말에는 급속한 세계화(globalization)가 진행되고, 각 나라나 지역은 역사적으로 발전단계가 다르고, 각각의 발전 유형이 있고, 그에 상응해 각자의 맑스 이해가 있다는 사고가 상당히 흔들리기 시작하였다.

전후는 소련에 의한 맑스주의의 확대 시대, 1950년대는 냉전에 의한 적대의 시대, 1960·70년대는 후진국의 독립과 혁명의 시대였다. 1980년대 말이 되어 소련 및 동유럽의 붕괴와 함께 세계의 개별적 현상은 상호관련이 더욱더 강해져서 한 나라나 한 지역의 자유로운 전개가 억제되어 가는 시대가 시작된다. 1980년대에 왈러쉬타인(Wallerstein)의 세계체제론이 화제가 되었던 것은 그러한 시대적 배경의 영향을 받은 것이었다. 자유주의 경제와 소련이라는 대항도식은 본래 허구이고, 현실적으로는 세계시장을 견인하는 중앙과 주변밖에 없어서 선진자본주의 국가와 그 주변(소련도 주변에 들어간다)이라는 대항관계는 19세기로부터 20세기까지 전혀 바뀌지 않았다는 지적이다. 이 지적은 개발독재나 사회주의가 선진자본주의 국가에 대한 주변의 반응으로 나올 수 있으나, 후자가 전자를 대신하는 일은 없다는 측면도 가지고 있다. 유럽과 미국을 제외한 거의 모든 지역은, 공산주의이든 개발독재이든 간에, 주변이라는 점에는 변함이 없다는 것이다.

나아가서 이 지적에서 또 하나 중요한 것이 나온다. 그것은 선진국과 후진국의 대항관계, 즉 중앙과 주변의 대항관계는 전자가 후자의 미래가 아니라는 점을 의미하고 있다. 중앙이 언제나 주변을 필요로 하는 이상, 두 개는 역사적으로 동시대에 의존하고 있는 것으로, 미래도 아니고 과거도 아닌 현재의 모습이라는 것이다. 세계시장이 언제나 착취하는 자와 착취당하는 자를 동시에 만들고 있는 이상, 주변은 항상 주변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2) 계급투쟁과 변증법적 유물론 시대의 종언
전후의 맑스주의는 소련을 중심으로 여러 후진국으로 만연해갔다. 그것은 소련을 중심으로 한 새로운 중앙-주변과 관계를 재구축하는 것이기도 하였다. 결과적으로 스탈린을 중심으로 한 맑스주의에 대한 신앙을 각국에서 만들어 갔다. 혹시 그렇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중국이라는 새로운 중앙의 재편성이었다. 1980년대의 자본주의의 글로벌화는 소련이나 중국도 휩쓸어 넣어서 중앙과 주변을 재편하는 과정이었다. 이리하여 미국을 중심으로 하는 중앙의 주변에 소련이 편입됨으로써 사회주의권이라는 환상은 무너졌다.

그런 가운데 맑스주의 연구는 새로운 변화를 요구받았다. 1960년대·70년대까지의, 소련을 중심으로 한 사회주의권의 구축(構築)에 의한 새로운 중앙과 주변으로의 분할이 붕괴됨으로써 소련형 맑스주의가 효력을 상실했던 것이다. 코민포름의 명령을 기초로 소련의 명령을 받아서 각지에서 혁명을 일으킨다는 전략, 소련형 사회주의의 건설이라는 발상은 근본에서부터 무너져 버렸다. 서구의 여러 나라에서는 1956년의 스탈린 비판 무렵에 매듭이 지어졌지만, 민족독립운동에 불타던 나라들의 다수는 이러한 소련형 맑스주의를 받아들였다. 이 때 소리 높여 주장된 것이 계급투쟁과 경제공황이다.

맑스주의의 기본 테제로서 자본주의 경제에서의 계급 대립을 파헤쳐내고, 그 철저한 대항관계로부터 다음의 역사를 만들어 내는 프롤레타리아트에게 기대를 건다. 최종적으로는 혁명에 의해 자본주의로부터 이탈하는 데에는 경제공황이라는 경제적 계기가 필요하고, 많은 맑스주의 경제학자들은 경제공황이나 임금노동을 분석의 대상으로 삼았다. 물론 '변증법적 유물론'이라는 스탈린의 조어는 맑스의 그럴 듯한 언설로서 당시의 맑스주의자들에게 채용되었다.

그런데 계급투쟁은 고도성장에 의한 임금상승으로 점차 효력을 상실하고, 계급투쟁은 표면상의 방침으로 하고 오로지 임금 상승만을 생각하는 노동조합 운동으로 변모해갔다. 물론 후진국가들 중에는 한 때는 절대적 궁핍화에 의한 빈곤화에 맞서기 위해 철저한 항쟁과 계급투쟁론이 반영된다. 그러나 개발독재가 끝날 무렵이 되면 그러한 나라들에서도 고도성장이 일어나서 민중은 그러한 운동에서 이탈해간다. 이리하여 계급투쟁과, 자본주의의 멍에에서 벗어나기 위한 혁명은 점차 사람들의 관심을 불러일으키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일본의 맑스주의도 전후 거의 1960년대까지 그러한 방향을 취했는데, 그것은 나라에 따라 조금씩 차이가 있지만, 별반 다르지 않을 것이다.

3) 시민사회의 형성과 맑스주의의 변용
맑스주의에서 계급투쟁과 변증법적 유물론이란 개념은 점차 사라지기 시작하고, 그 대신에 시민사회의 형성이 문제로 대두된다. 히라타 기요아키의 '개인적 소유의 재건'이라는 말이 주장되어 학생과 시민이 이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 것이 1960년대 말이다. 고도성장에 의해 중산계급이 확대되어 가고 사람들의 관심은 마이홈을 갖는 것으로 이동해간다. 그러한 가운데 국유나 사회적 소유라고 하는 개념에 비판이 가해지고, 개인적 소유의 완성이야말로 사회주의라고 말해지게 된 것이다.

히로마츠 와타루와 라치 치가라의 맑스 연구의 새로움은 이러한 시민의식을 19세기 노동자계급 운동의 배후에 흐르는 지하수맥으로서 파악하려 한 점이다. 맑스의 초기 작품에는, 소련식으로 말하자면, 부르주아적 요소가 흐르고 있다. 그것은 당연한 것으로 맑스는 휴머니스트나 개혁주의자였기 때문이다. 『경제학ㆍ철학 초고』와 『독일 이데올로기』를 연구함으로써, 맑스의 사회주의적이지 않은 부분을 분석했고, 이를 통해 맑스의 사상 속에 있는 시민사회적 요소를 추출하려 했던 것이 그들의 공적이었다. 그러므로 그들이 지향했던 운동형태는 노동운동이 아니라 생활협동조합운동이나 시민운동이었다. 변용돼 가는 세계에 대해서 맑스 연구는 시민사회적 요소를 도입하는 것으로, 계급투쟁과 혁명이란 표어로부터 이탈하고 살아남게 된다.

이러한 가운데에서 환경문제, 페미니즘 등도 차례로 편입되어 좌익연합군으로서 맑스의 연명이 이루어져 간다. 그런데 시민사회론의 최대의 약점은 자본주의의 진짜 무서움을 모르는 데에 있다. 자본주의는 중산계급의 형성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중산계급은 선진국이 후진국의 노동자를 착취하는 가운데 생기는 것이라고 한다면, 후진국의 노동자로부터 잉여가 생기지 않게 되면 선진국은 자국의 중산계급으로부터 착취할 수밖에 없다. 후진국이 완전히 자본주의 시장에 편입되기 시작한 1990년대가 되어 선진자본주의 국가는 공장을 후진국으로 이전시키고, 따라서 선진국에서도 고도의 노동이 아니면 살아남을 수 없다는 현상이 일어나고 있다. 구조조정이라는 현상이 그것인데, 일본에서의 1억 총중산 계급이라는 꿈의 붕괴와 함께 시민사회의 신화도 붕괴되어 간다.

시민사회라는 발상은 원래 1920년대·30년대의 포드주의의 선물이다. 자동차를 팔기 위해서 먼저 임금을 올리고 임금의 상승에 의해서 경기를 부양시켜 간다는 장미빛 세계는 국가가 다른 나라의 노동자나 상품과 경쟁하지 않는 시대에 만들어져 간다. 국가가 경제적·군사적·정치적으로 다른 나라를 이기기 위해서 국가 전략으로서 국민의 복리후생을 향상시켜 간다는 것은 이른바 '총력전체제'라고 불리고 있다. 연금이나 보험제도 등 복리후생제도는 거의 이 시기에 완성되었다. 이러한 이유에서 시민사회 역시 국가주의의 한 형태였다고 할 수 있겠다. 일본에 있어서도 시민사회의 논의가 활발해지자 사람들의 관심은 국내 문제로 향했다.

4) 자본주의에 의한 공간의 정복
자본주의는 지구의 지리적인 정복을 완성했을 뿐 아니라 인간의 신체, 나아가서는 정신의 정복까지 임박해 있다. 앙리 르페브르(H. Lefebvre)는 『공간의 생산』(La production de l'espace, 1974)에서 자본이 공간을 균질적인 것으로 바꾸어 간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공간의 균질화란 자본에 의해 공간의 정복이 완성되는 것이다. 자본은 그 다음에 우리의 신체까지도 균질적인 것으로 만들어간다. 전세계에서 팔리고 있는 맥도날드 햄버거는 거의 같은 지역으로부터 원료인 소고기가 보내져 오고 같은 조리법으로 만들어지고 있다. 이러한 소를 대량생산하기 위해서 다시 소의 사료도 균질화하고 호르몬을 투여하고, 소의 고기를 소에게 먹이는 일을 하고 있으며, 이것이 광우병의 원인이 되었다고 하기도 한다. 요컨대, 자본이 진행시킨 신체에 대한 침략은 우리들 신체의 재생산 기능까지 파괴해간다.

신체의 관리는 푸코(Foucalt)가 말한 바와 같이 18세기 후반부터 일어난 현상이다. 결국 신체의 상품화 및 균질화는 현대의 특징일지도 모른다. 신체의 균질화는 지리적 공간의 정복을 끝낸 자본에게 있어서 가장 가능성이 있는 미개척지이기도 하다. 유전자 공학, 복제 인간이라고 하는 것은 가까운 장래에 거대한 수익을 가져다주는 산업이 될 것이고, 이를 둘러싸고 자본은 새로운 단계로 나아가고 있다고 생각된다. 그러한 가운데 자연으로서의 인간은 계속 파괴되고 있다.

더욱이 자본은 인간의 가상적인 세계로 진출했다. 인터넷의 세계에서 볼 수 있는 공간은 아직 자본이 완전하게 공간적 정복을 하지 못한 영역이다. 그러나 IT혁명에 의한 네트 사회의 실현은 허구가 가치를 낳고 한 순간에 거대한 부를 획득하기도 하고 잃기도 하는 공간을 만들어 내고 있다. 세계의 어디에서나 네트 공간에 들어감으로써 그 역사성이나 민족성을 잃는다고 하는 것은 이제까지 국가나 민족이 지니고 있던 후진성이나 선진성을 파괴해간다. 맑스주의가 지금까지 가장 강조해 왔던 사적유물론이라는 발상은 가상적 공간 속에서는 전혀 의미를 갖지 못한다. 사람들의 역사의식이 희박해지고 공간적 의식도 희박해지기 시작하고 있는 것은 이러한 가상적 공간의 출현에 의한 바가 많다는 측면에서도 생각할 수 있다.

5) 맑스 연구의 가능성
현대 자본주의는 20세기에 생각된 것으로부터 현저하게 변용되고 있다. 그러한 변용을 인식하지 않고 맑스주의의 과거의 테마를 말하는 것은 점차 어려워지고 있다. 확실히 구조조정에 대해서 노동조합에 의한 철저한 항쟁과 파업, 그것을 후방에서 지원하는 계급투쟁론도 단기적으로는 의미를 가질지도 모른다. 다만 경영 효율이 나쁜 회사에는 세계시장에서 살아남을 기회가 없는 것도 사실이다. 패쇄경제에 의해서 생을 부지할 가능성은 있지만, 현실적으로는 무리일 것이다. 또한 경제공황과 그에 따른 사회주의의 실현의 견지에서 볼 때는 공황은 다시 일어날지도 모른다. 아니 디플레이션 현상과 경제의 마이너스 성장은 이미 공황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공황이 일어났다고 해서 사회주의 혁명이 일어나는 것도 곤란하다. 소련형의 국유화와 통제경제밖에 나오지 않는다면, 도저히 사람들의 신뢰를 얻지 못할 것이고, 이것도 조만간에 붕괴된다.

여기에서 문제로 삼을 테마를 좁혀 보자. 우선, 크게 말해서 인간과 자연의 관계 문제를 생각해 보자. 예를 들어 우리들은 자연 속에 있는 불문율을 지킬 수 있는 것일까? 이는 맑스의 자연관에 관한 문제인데, 맑스의 자연 개념에 관해서는 독일의 슈미트(A. Schmidt)가 행한 연구 외에 거의 연구된 바가 없다. 이는 환경과 맑스라는 협소한 주제가 아니다. 눈에 보이는 환경파괴가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환경파괴에 어떻게 대응할까를 맑스 속에서 읽을 수 있는가의 여부이다.

여기서 눈에 보이지 않는 파괴란 자본의 대량생산이 만들어내고 있는 유전자 조작 등과 어떻게 싸울 것인가 하는 것이다. 1998년에 남프랑스에서 일어난 맥도날드 습격 사건은 하나의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 맥도날드가 호르몬 주사를 놓은 소를 수입하는 것을 반대하는 운동이 자연적 식품을 원하는 운동으로서 세계에 파급된 것이 그것이다. 인간은 유기농법의 식품을 먹을 권리가 없는 것인가? 맑스가 『경제학ㆍ철학 초고』에서 쓰고 있는 소외론은 바로 그러한 주제를 다루고 있다. "인간의 노동은 자연의 하나에 불과했지만 그것이 사적 소유의 원인이 됨으로써 독자적 행보를 하게 되었고, 인간은 자연으로부터 소외되어 갔다." 맑스는 대체로 이러한 내용을 제3 초고의 첫머리에 쓰고 있다. 진보적이어야 할 고전경제학은 자연을 망각함으로써 근대사회를 만들어냈다. 그러나 근대사회를 피할 수 없다는 데에 소외의 어려움이 있다.

그러나 맑스는 "자연으로 돌아가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그것대로 운명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운명을 받아들인 다음에 그것을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에 관해서 맑스는 해답을 주고 있지 않지만, 옛날로 돌아가는 것만으로는 안된다고 말함으로써 시대의 변화에 대응하여 인류가 지혜를 발휘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맑스와 같이 유대인인 스피노자(Spinoza)도 인류가 자기 멋대로 세계를 변혁할 수는 없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세계를 마음대로 바꿨을 때 인류는 불행에 빠진다. 신(神), 곧 자연이 명령하는 대로 움직일 때 비로소 인류는 진정한 자유를 얻는다고 말하고 있는데, 맑스의 의도도 의외로 그러한 곳에 있는지도 모른다. 야마노우치 야스시를 중심으로 한 그룹은 이러한 견지에서 초기 맑스의 재검토를 꾀하고 있다.

다음으로 맑스와 역사의 문제가 있다. 자본이 공간과 신체를 점차 균질화함으로써 인간사회는 더욱더 균질화되고 역사의 차이가 느껴지지 않게 되어가는 현상이 실제로 일어나고 있다. 역사의 종언이라고 불린 현상은 자본주의 사회가 초래한 필연적인 모습이기도 하다. 인간사회에서 차이는 불필요한 것일까? 차이라고 하면 국가나 민족이 가장 먼저 떠오른다. 아시아에서 살고 있는 우리가 서구화된다고 하는 것은 서구에 의해 강요된 결과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것이 자본주의다. 이제 세계사는 하나이고, 아시아 국가의 역사 등은 무의미한 것일까? 오리엔탈리즘론이나 문화연구론은 그러한 것을 문제로 삼고 있다.

하지만, 오리엔탈리즘론이나 문화연구론 역시 아시아 등의 마이너 문화의 의의를 설명할 뿐이고 해결하는 것은 아니다. 자본주의 세계라는 편제 속에 편입되어진 것이라고 쉽게 비판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중앙의 문화에 의한 압력과 그에 대한 선망은 맑스 시대에도 있었다. 헤겔(Hegel) 및 청년 헤겔파가 품었던 프랑스나 영국에 대한 선망은 오히려 독일의 사회변혁의 역사적 의미를 이끌어 내게 되었다. 자본주의, 구체적으로는 서구문화의 세계 지배가 역으로 아시아·아프리카에 역사의식을 창출했음은 분명하다. 균질화와 차이화는 오히려 상호보완적이기도 하다. 서구화가 강요되는 가운데 아시아란 것이 자각됨으로써 종속이 강요된다. 헤겔 좌파 및 독일 역사학파는 그런 의미에서 프랑스나 영국의 압력에 대한 독일이 취한 반응의 하나이기도 했다.

헤겔 좌파는 뒤쳐진 독일이야말로 역으로 역사의 발전을 인식할 수 있다는 역전의 발상으로 역사의 세세한 사실보다는 사변적인 역사이론의 구축으로 나아갔다. 맑스가 「포이에르바흐에 관한 테제」의 11번째 항에서 말한, "이제까지의 철학자들은 세계를 단지 해석해 왔을 뿐이다. 중요한 것은 그것을 변혁하는 것이다"라는 문장은 추상적 논의를 버리고 현실적인 논의를 하라는 말이 아니라, 추상적으로 다듬어져서 확고하게 된 이론을 실천에 옮김으로써 현실이 변하는 것이라는 자신이 숨겨져 있다. 먼 장래에 변혁을 기대한다고 하는 의식이 현실에서 구축된다고 한다면, 변혁은 독일이 아니라 프랑스나 영국에서 일어나야 했을 것이다. 그런데 그 말이 독일에서 소리 높여 외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뒤쳐진 나라이기 때문에 미래를 내다볼 수 있다는 직감이 있기 때문이다. 자본의 균질화에 대한 대항으로서 맑스류의 유토피아를 생각해 보는 것도 좋을지 모른다. 블로흐(Bloch)나 데리다(Derrida)의 논의는 뜻밖에 그런 점에 있다. 일본에서도 이러한 시점은 특히 젊은 연구자들에게 공유되어 있다. 포스트모더니즘 사상에 영향을 받은 젊은이 중에는 맑스와 포스트모더니즘을 연결시키는 가운데 데리다의 『맑스의 망령』(Spectres de Marx, 1993)에 관심을 갖기 시작하고 있다.

4. 글을 마무리하며

우리가 지금까지 고찰한 맑스 사상에 대한 관심은 일본 고유의 문제를 빼고 논해진다면 내용은 공허해질 것이다. 사상은, 해외와의 교류 없이 말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 자체의 풍토를 빼고는 말할 수 없다. 맑스 연구가 일본에서 그 나름대로 오랜 전통을 만들어온 배경에 맑스 연구와 일본사회의 변용이 밀접하게 결부되어 있었던 점이 있다. 전후의 생산력 논쟁, 가치 논쟁도 일본의 경제 부흥과 밀접하게 결부되어 있었고, 시민사회론도 고도 경제성장과 결부되어 있었다. 맑스 연구의 변화도 일본사회의 커다란 변용, 나아가 세계의 커다란 변용을 빼고는 말할 수 없다. 유토피아론도 유대교나 그리스도교적 전통이 없는 사회에서 어떻게 구성해 갈 것인가, 또한 자연과 인간의 소외 문제도 일본의 불교적ㆍ유교적 도덕관과 어떻게 관련시켜 나갈 것인가 하는 문제를 제기하지 않고는 일본사회에서 맑스 연구에 기여하는 바는 적을 것이다.

하지만 현대의 일본사회 및 세계는 그러한 문제를 제기하고 문제로 삼는 측면을 가지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맑스 연구자가 계급투쟁론이나 공황론, 변증법에 흥미가 없다고 해서 탄식하는 것도 우스운 일이다. 사회의 변용과 동시에 맑스 연구도 변하고, 그리고 나아가서는 맑스 연구도 사회의 변용에 어느 정도의 영향을 미치는 것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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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共産당宣言』一五○周年」, 『經濟と社會』(時潮社) 一二號, 1999年
「共産당宣言特集」, 『思想』(岩波書店) 一二月號, 1998年
「マルクスをどうする」, 『情況』(情況社) 三月號, 2000年
「エンゲルス沒後 100年」, 『月刊フォ??ラム』(社會評論社) 七月號, 1995年
『新マルクス學事典』, 弘文堂, 2000年
『マルクス·カテゴリ 事典』, 靑木書店, 1998年
「21世紀マルクスからなにがみえるか」, 『アソシエ』(御茶の水書房書房) 六號, 2001年

<미 주>
* 1952년 생. 경응의숙대학 경제학과 박사과정 수료. 현재 가나가와 대학 정경학부 교수. 주요저서로는 『トリ??アの社會史』(未來社, 1986), 『パリの中のマルクス』(御茶の水書房, 1995), 『フランスの中のドイツ人』, (御茶の水書房, 1995)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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