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래할 생명권력론을 위해


사상, 2013년 2

2부 1장. 

죽음정치에서 비정치

이탈리아에서의 생명정치의 전개

오카다 아츠시(岡田温司)


1. 들어가며 : 이탈리아적 차이를 둘러싸고

1970년대 중반 미셸 푸코가 기선을 잡은 생명정치의 사유가 1990년대에 들어 특히 이탈리아에서 독자적인 발전을 이룩하고 있는 것, 그리고 이를 선두에서 인솔한 것이 다름 아닌 조르조 아감벤(1942년 생)이라는 것은 더 이상 강조할 것도 없다. 나아가 이제 여기에 나폴리의 정치철학자 로베르토 에스포지토(1950년 생)의 이름을 덧붙여야 한다는 것도 마찬가지다. 나도 여태껏 두 사람에 대한 번역 등을 통해, 기회가 있을 때마다 이를 강조했다.[각주:1] 그렇지만 오히려 본국 이탈리아에서는 생명이라는 접두사가 약간 붐을 일으키는 식으로, ‘생명미학’(피에트로 몬타니)생명경제학’(라우라 바치칼루포) 같은 신조어가 출현할 지경이다.[각주: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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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베르토 에스포지토


물론 이 추세를 고스란히 수긍하는 일은 삼가야 하지만, 다름 아닌 이탈리아에서 생명정치를 둘러싼 사유가 새로운 전개를 이룬 데에는 단순한 우연으로 그치지 않는 연유가 있다. 왜냐하면 생명은 전통적으로 이탈리아 사유에서, 공공연하든 암묵적이든, 늘 중심적 테마 중 하나였기 때문이다. 마키아벨리, 조르다노 브루노, 지암바티스타 비코Giambattista Vico(1688~1744)의 이름을 상기하는 것만으로 충분할 것이다.

아주 최근작인 살아 있는 사유 : 이탈리아 철학의 기원과 현실성(Pensiero vivente. Origine e attualità della filosofia italiana)(2010)에서 에스포지토 본인이 논하듯이, 거기에는 이 나라의 역사적 특수 사정이 적잖이 관계하고 있다. , 즐비하게 늘어선 도시국가나 유럽열강, 나아가 로마 교회 등과의 갈등이나 밀당에 항상 노출된 이탈리아의 사유는, 필연적으로 국민국가라는 틀에 얽매이지 않고 그 바깥에서 전개되었다. 이탈리아 철학은 국민국가의 형성과 병행하는 것도, 그 형성 이후에 계속된 것도 아니다. 그 때문에 이 나라의 사상은, 예를 들어 주체에 관한 반성이나 인식론이라는, 데카르트부터 칸트에 이르는 철학의 왕도로부터는 필연적으로 벗어나 있다. 이탈리아에서 그런 반성은 철학의 내부에서 벼려지고 철학의 전문용어로 말해지기보다는 오히려 정치적이고 역사적인 생명의 현실을 겨누게 됐다. 추상적이고 형이상학적인 사유로부터는 생명의 구체적인 모습은 빠져나가 버린다. 이리하여 이탈리아는 서양철학의 이른바 방계가 되어 왔지만, 이것은 시각을 바꾼다면 (푸코적인 의미에서의) ‘바깥의 사유를 혹은 (들뢰즈적 의미에서의) ‘탈영토화를 선취했다고도 해석할 수 있다. , 이질적인 것에 열려 있고, 유동성이나 갈등이나 변화를 환영하는 태도이다.[각주:3]

나아가 여기서 벤야민적인 역사철학의 선취를 보탤 수 있을지 모른다. 가령 비코는 새로운 학문(1725)에서 지저분하고 더럽고, 절단되고, 본래의 장소로부터 벗어난 곳에 가로놓였기 때문에 그동안은 지식에 있어서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았던 고대의 이러저러한 위대한 단편갈고 닦아’ ‘합성하고 본래의 장소에 두는것을 새로운 학의 중요한 원리라고 꼽는데,[각주:4] 이는 벤야민의 역사철학 테제를 연상시키지 않을 수 없다. 비코에게 시나 신화도 역사로부터 배제된 것이 아니며, 역사 속으로 편입되고, 자주 역사를 술안주거리로삼는다. 이런 게 허용된다면, 이탈리아의 철학은 항상 시대착오적이기 때문에 현실성을 얻었다는 측면을 갖는 것처럼 생각된다.

The New Science of Giambattista Vico에 대한 이미지 검색결과

그러면 이탈리아의 특수 사정, 또는 이탈리아적 차이에 관한 서설은 이 정도로 하고, 본론에 들어가자. 이 글에서 나는 감히 정면에서 생명정치 자체에서라기보다는 오히려 이것이 반전된 것으로서 죽음정치에서 출발하고 싶다. 왜냐하면 이 죽음정치라는 특이한 신조어도 푸코를 기점으로, 이탈리아에서 매우 흥미로운 전개를 이룩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우선 그 저간의 사정을 밝힌 후, 이어서 이 죽음정치를 극복하는 것, 혹은 그것에 대립되는 것으로서의 비정치에 주목해보자. 장치와 무위, 공동체와 면역, 탈주체화와 비인칭 같은 문제계가 여기에 깊이 관련될 것이다. 주역으로서 등장하기를 바라는 것은 물론 아감벤과 에스포지토이지만, 뜻밖의 조연들 예를 들어 시몬 베유 도 거기서 중요한 역할을 맡게 될 것이다. 그러면 우선 죽음정치부터 시작해보자.

 

I. 푸코에서 아감벤으로 : ‘죽음정치로의 전도

방금 전에 나는 죽음정치도 푸코에게서 기원한다고 말했는데, 이것은 도대체 무슨 말일까? 생명정치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여기서도 우리는 저명한 그 텍스트, 1975-76년의 콜레주드프랑스 강의 사회를 보호해야 한다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푸코 자신은 상당히 기묘하게 울려 퍼지는 이 용어 죽음정치를 직접 사용한 것은 아니지만, 분명히 이것을 암시했다.

주권권력의 계보나 전쟁과 국가에 관해 논한 일련의 강의의 마지막 날, 프랑스의 철학자는 아주 당돌하게도, ‘생명정치라고 그 자신이 명명했던 것에 관해 이야기하기 시작한다. “19세기의 극히 중요한 현상 중 하나는 권력에 의한 생명의 부담이라고도 말해야 할 것이었다고 생각합니다이 구절로 말문을 열었던, 기념해야 할 하루이다.[각주:5]

이미 잘 알려져 있듯이, 여기서 푸코는 특히 18세기 이후, 인민의 생명이나 건강이 국가의 최대 관심사가 되는 상황을, 생살여탈권으로서의 주권권력으로부터, “생명을 보증하는 권력으로서의 생명권력으로의 이행으로 파악했다. , “권력에 의한 살아 있는 것으로서의 인간의 파악이며, “생물적인 것의 국가화의 시작이다. 그때까지의 주권권력의 모토가 죽게 만들거나[죽게 하거나] 아니면 살게 내버려두는거나였다고 한다면, 생명권력의 그것은 살게 만들고[살게 하고], 그리고 죽게 내버려둔다는 것이 된다. 이 권력을 어떻게 사용하느냐, 그 테크놀로지가 생명정치라고 불리는 것이다. , 생명정치는 의학이나 법학, 위생학이나 통계학 등에서 다양한 지식이나 기술을 끌어들임으로써 이 권력의 개입 영역을 결정하는 것이다.

하지만 여기에는 중대한 아포리아가 도사리고 있다는 것을 위대한 사상가는 날카롭게 꿰뚫어봤다. 생명권력에는 과잉으로 흐르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이미 생명권력에 대한 주권권력의 과잉이 아니라 주권권력에 대한 생명권력의 과잉입니다.” 그 과잉이 생기는 것은, 예를 들어 생명을 조절할 뿐 아니라 생명을 무성하게 하고 생물을 제조하고 괴물을 제조하며 궁극적으로는 관리 불가능하고 보편적 파괴력을 지닌 바이러스를 제조하는 것이 기술적으로도 정치적으로도 인간에게 가능해질 때이다.[각주:6] 이 경고가 울렸던 1970년대 당시 이미 생물병기나 핵이 중대한 위협으로 존재했던 것은 물론이지만, 게다가 출생 전 진단이나 유전자 조작이나 복제기술까지도 포함한 분자생물학이 장족의 진보를 이루고 있었다.

그 증거로, 푸코는 놓치지 않았다. 생명권력은, 그것이 바로 생물학적인 요청과 결부될 때, 가장 위험한 양상을 보여준다는 것을. 나치즘의 경우가 그 좋은 예이다. 왜냐하면 생물학적 위험의 제거와 종 자체, 혹은 인종의 강화를 목표로 삼을 경우”, 죽음의 명령을 용인하게 되기 때문이다. “국가가 생명권력을 따라 기능하기 시작하자마자, 국가의 살인 기능이 보장되는 것은, 다름 아닌 인종주의에 의해서인 것이다.[각주:7] 이리하여 푸코는 다음과 같이 결론짓게 된다. “전반화된 생명권력은, 엄청나게 증대한 죽음의 권리와 죽음의 위험에 의해 사회 전체에 골고루 퍼진 절대적인 독재 정치와 일치하는 것이라고.[각주:8]

푸코는 여기서 죽음의 권리죽음의 명령혹은 죽음에 노출되는 것이라는 표현을 쓰고, 죽음과 생명권력 사이의 진퇴양난의 관계를 정확하게 표현하고 있지만, 그것을 죽음의 정치혹은 죽음정치라는 이름으로 부르는 것은 아니다. 또 그는 나치즘을 생명권력의 과잉이며, “생명권력을 틀림없이 전반화한 사회라고 해석하는 한편,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시에, “죽이다는 주권권력을 전반화한 사회이기도 하다고 파악하고 있기도 하다.[각주:9] , 푸코에 따르면, 나치즘은 신구의 두 개의 권력의 메커니즘 생살여탈권의 고전적 메커니즘과 규율과 조절에 의한 생명권력의 새로운 메커니즘 이 합체한 것으로 간주되고 있다.

이 논의를 이어받아, 바로 죽음정치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하는 것이 다름 아닌 아감벤이다. 세계적 논쟁을 야기한 책인 1998년의 아우슈비츠의 남은 것에서, 이 이탈리아 철학자는 프랑스 선배의 논의를 간결하게 요약하고, 다음과 같이 말한다. 현대의 막강한 전체주의 국가, 특히 나치 국가에서 살리는 생명권력의 전대미문의 절대화는 죽게 만드는 주권권력의 똑같은 정도로 절대적인 전면화와 일치한다. 그 결과, 생명정치는 죽음정치와 무매개적으로 일치한다.[각주:10] 이리하여 아감벤은 죽음정치라는 신조어를 확실하게 전면에 내세우게 된다.

게다가 생명정치와 죽음정치 사이의 이 일치는 푸코에게 진정한 역설살리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권력이, 무제한의 죽음의 권력을 행사하는 것은 왜인가? 이었지만, 아감벤에게서는 어떤 의미에서 필연으로 간주된다. 왜냐하면 나치 수용소는 궁극적으로, “죽음과 대량학살의 장소일 뿐 아니라, 무엇보다도 무젤만을 생산하는 장소”, 즉 이제 인종적 차별을 초월해, 살아 있지도 죽어 있지도 않은 문턱에 인간을 몰아넣는 장소이기 때문이다. 생명정치와 죽음정치는 이른바 동일한 동전의 양면일 뿐이다.

이것을 아감벤은 똑같은 저서의 다른 대목에서, 심지어 다음처럼 바꿔 말한다. 신구의 두 개의 권력 모토, “죽게 만들거나 아니면 살게 내버려 두거나살게 만들고, 그리고 죽게 내버려두는것 사이에, 이제 세 번째 정식이 몰래 들어선다. , “이제 죽이는 것도 살리는 것도 아니고, 살아남게 한다는 것이 그것이다. 삶도 죽음도 아니고, 조절 가능하고 잠재적으로는 무한한 생존의 생산이 현대 생명권력의 주요 성능이다.”[각주:11]

그런데 푸코의 텍스트에 대한 아감벤의 이런 접근법을 오해나 곡해로 보느냐, 아니면 반대로 창조적인 확대 해석이라고 보느냐에 대해서는 평가가 갈릴지도 모른다. 사실 그 때문에 이 철학자는 비판도 당하는가 하면 거꾸로 칭찬도 받았다. 그가 상대하는 사람은 푸코만이 아니다. 아리스토텔레스부터 하이데거까지, 혹은 탈무드나 카발라부터 바르부르크나 벤야민까지, 만국박람회 일지로 이미 알려진 이 이탈리아인은, 대략 모든 텍스트를 그런 방식으로 읽어왔다. 이 점에 관해 본인은 자신의 방법을 2008년의 저서 사물의 표시에서 포이어바흐의 발전 가능성이라는 개념을 원용해 이렇게 말한다. “작품의 저자에 속하는 것과, 그것을 해석하고 발전시키는 자에게 귀속되는 것 사이의 차이는, 본질적인 동시에 파악하기 어려운 것이 된다.[각주:12] 자기정당화처럼 들리지 않는 것도 아니지만, 이처럼 충실한 불성실한 자, 혹은 불성실한 충실자라는 문턱에서야말로, 아감벤의 언표는 발생한다.

한편, 원래의 기원은 고대 로마법에서 찾아짐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철학자와 더불어 2000년 이상의 시간을 가로질러 패러다임으로서 부상했던 호모 사케르에 관해서도, 혹은 아우슈비츠에서 비롯되는 이른바 무젤만에 관해서도, 이것들이 본래의 역사적 문맥을 무시하고, 통시태와 사료에 주의를 소홀히 한다는 비판에 대해서, 역시 사물의 표시에서 다음과 같은 반론을 전개한다.

 

만약 패러다임성은 사물 속에 있느냐 연구자의 정신 속에 있느냐고 물어본다면, 내 대답은 그 물음에는 의미가 없다는 것이다. 패러다임 속에서 문제가 되는 이해 가능성은 존재론적 성격을 갖고 있다. 주체와 객체의 인식론적 관계에서가 아니라 존재에 준거하고 있는 것이다. , 패러다임적 존재론이 있는 것이다.[각주:13]

 

여기서 하이데거의 영향을 보는 것은 쉬우며, 실제로 본인도 어느 정도까지는 그 점을 인정하고 있다. 하지만, 아감벤에 따르면, 보편과 개별의 이원론이 문제인 것도, “하이데거에게서처럼 ’, 선취와 해석의 순환성이 있는 것도 아니다.” 패러다임에는 기원도 아르케도 없다. 진정한 문제는 전체의 인식과 개별의 인식 중 어떤 것이 우선 혹은 선행하느냐라는 점에서가 아니라, 개별 사이의 범례적 배치 속에 있는 것이다.”[각주:14] 이런 의미에서 푸코로부터 발달시켰던 죽음정치도 또한 아감벤에게 하나의 패러다임으로서 기능하는 것이다.

그런데 다시금 죽음정치로 돌아간다면, 이 철학자의 이름을 일약 세계적인 것으로 한 1995년의 저서 호모 사케르도 또한, 어떤 의미에서 푸코에 대한 독자적인 응답이라는 성격을 갖고 있지만, 여기서도 또한 죽음정치라는 단어는 표면화되지 않는다. 그 대신에 거의 결말 부근에 죽음을 정치화하기라는 제목이 달린 절이 주도면밀하게 마련되어 있으며, 적절하게 소생기술이나 장기이식기술의 진보의 그늘에서, 삶과 죽음 사이에서 흔들리는 현대의 벌거벗은 생명”, 혹은 새로운 호모 사케르가 출현하고 있다는 것을, 날카롭게 파헤친 것이었다.[각주:15] 그리고 이 책은 3년 후에 출판된 아우슈비츠의 남은 것을 바로 예고하는 것 마냥 근대적인 것의 노모스로서의 수용소라는 제목이 달린 절로 막을 내린다.

호모 사케르』가 세계적 반향을 불러일으킨 이후, 도처에서 모습을 드러내고 있는 현대의 호모 사케르벌거벗은 생명’, 근대정치의 노모스로서의 수용소, 항상화된 예외상태 등 같은 아감벤 식의 말투가 언론계를 떠들썩하게 했던 것은 여전히 우리의 기억에 새로울 것이다. 마치 911 이후의 세계정세가 이 아감벤 효과에 박차를 가하고 있는 것 마냥.[각주:16] 예를 들어, 관타나모 수용소나 아부그라브 교도소에서의 고문이나, 테러리즘과의 전쟁이라는 대의명분을 생각하면, 아감벤은 마치 현대의 예언자인 셈이다. 사실, 관타나모 수용소 폐쇄 여론이 들끓는 가운데, 예를 들어 슬라보예 지젝은 뉴욕타임즈에 기고한 기사(2007324일자)에서, “이탈리아의 정치철학자아감벤의 이름을 일부러 들먹이면서 현대의 호모 사케르살아 있는 죽은 기사들― 을 언급했었다.[각주:17]

아무튼 생명정치는 죽음정치로 전도되는 것이 필수적이다. 궁극적으로는 이것이 아감벤의 테제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것은 호의적으로 듣는다면 격렬한 경고로도 받아들여지지만, 반대로 비관주의나 허무주의의 입장에서 장난치듯이 위기를 부추기고 있을 뿐이라고 받아들여지지 못하는 것도 아니다. 이것에 대해 아마 본인은 반론을 할 것이다. 정치적인 것을 정치의 내부에서만 사고하는 것이야말로 허무주의의 내부에 머무는것에 다름 아니라고 말이다.[각주:18] 여기서 정치적인 것과 비정치적인 것의 관계라는 문제가 부상하게 되지만, 이것에 관해 고찰하기 전에 소론의 또 다른 주역인 에스포지토에게 등장할 기회를 줘보자.

 

II. 아감벤에서 에스포지토로 : ‘면역의 공과

이 나폴리의 철학자도 푸코와 아감벤을 토대로, ‘죽음정치에 관해 파고들어 얘기하려고 한다. 2004년에 출판된 두께감이 있는 책 비오스에서, 꼬박 한 개의 장을 죽음정치”(인종의 사이클)에 할애하고, 푸코가 문제 제기에 머물렀던 나치즘에서의 생명정치=죽음정치의 문제를 철저하게 논하고 있다.[각주:19] 행위수행적이고 범례론적인 아감벤의 말투에 대해, 에스포지토의 그것은, 얼핏 보면, 굳이 말하면 사실확인적이고 학술논문적인 체재를 취하고 있기 때문에, 또한 호모 사케르로 상징되듯이, 사람들의 눈길을 끄는 문구에 호소하는 것도 굳이 피하려 하기 때문에, 아감벤 정도의 센세이셔널한 반응을 불러일으키지 않는다(본인도 그것을 원치 않는다). 하지만 그 논의에는 항상 확실한 강도와 신뢰성이 갖춰져 있다는 것을, 굳이 부언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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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마키아벨리나 비코의 연구에서 출발한 이 정치철학자는 생명정치를 사고하는 데 있어서, 선배인 아감벤과도, 심지어 또 다른 선배인 안토니오 네그리(1933)와도 일정한 거리를 두려 했다. 이 점에 관해 나는 전에 논한 적이 있기에 그것을 참조하기를 바라지만,[각주:20] 굳이 단순화해서 말한다면, 아감벤의 묵시록에도 네그리의 다행증(euphoria)에도 치우치지 않는 길을 찾겠다는 것이다.

에스포지토에 따르면, 원래 푸코의 생명정치 자체가 이런 양자택일을 초래할 가능성을 품고 있다. 왜냐하면 푸코에게서는 삶과 죽음이 두 개의 상이한 항으로서 우선 각각 전제되고, 그런 후에 양자가 외재적으로 연결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되면 필연적으로 생명정치는 아감벤처럼 삶에 대한 권력의 과잉 행사로 보게 되거나, 네그리처럼 권력에 대한 삶의 과잉 잠재력으로 보게 되는 식으로, 정반대의 방향으로 분열하게 되는 것은 피하기 어렵다. 달리 말하면, 생명정치는 삶에 대한 절대적인 권력 속으로 해소되어 버리거나, 아니면 삶의 절대적인 힘 속에 흡수되거나 둘 중 하나가 되어 버린다. 이것이야말로 푸코가 미해결인 채로 남겨둔 아포리아이다.

이에 대해 나폴리의 철학자가 제기하는 것은 삶 자체가 그 성립에서부터 이미 정치를 내포하고 있다는 관점이다. 예를 들어 출생이라는 개념을 떠올려보면 분명하듯이, 삶과 죽음은 처음부터 빼어나게 내재적인 관계에 있는 것이며, 이것은 한나 아렌트가 이미 깨달았던 것 그대로이다.[각주:21] 그 때문에, 에스포지토가 그의 저서의 제목으로 골랐던 것이 벌거벗은 생명혹은 자연적 생명을 의미하는 그리스어 조에가 아니라, 이것과 대치되고, 사회적 삶을 의미하는 비오스라는 것은, 매우 상징적이다. 아감벤은 비오스를 조에로 접어넣으려 하는 과정 속에 생명정치의 문턱 죽음정치 을 봤지만, 에스포지토에 따르면, 조에는 비오스의 내적 차이로 간주되어야 하는 것이다. 혹은 이미 어떤 형태로 비오스로 이행하지 않는 조에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도대체 생명정치의 어디에 죽음정치로 전락할 위험성이 숨어 있는 것인지, 에스포지토에게 진정한 문제는 그것을 규명하는 데 있다. 이리하여 나치즘의 생명정치의 철저한 규명이 요구되는 것이다. 푸코가 미해결인 채로 남기고, 아감벤이 궁극적으로 모든 생명정치를 그것으로 귀착시키려 했던 수용소의 정치학의 수수께끼란, 결국 무엇일까? 여기서 그 자세한 논의를 추적할 수는 없으나, 에스포지토는 그것을 면역혹은 면역화라는 범주 속에서 알아내려고 한다. 의학생리학에서 발전됐던 이 범주는, 나폴리의 철학자에게 새롭게 생명정치의 씨름판으로 불러들여지고, 철저하게 재검토된다. 2002년의 저서 이무니타스 : 생명의 보호와 부정이 그것으로, 사실은 비오스보다 먼저 출판됐다.[각주:22]면역이라는 범주가 유효한 것은, 무엇보다 그것이 생명 자체의 내부에서 이른바 내재론적으로 생명정치를 고찰하는 것을 가능케해주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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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면역화를 생리학의 영역에서 끌어낸 것은 에스포지토가 처음은 아니다. 예를 들어 911 이후, 점점 더 자기면역화를 강화하는 사회가 자살행위로 향해가는 것에 대해 날카로운 경고를 울렸던 것은 주지하듯이 말년의 자크 데리다였다.[각주:23] [각주:24] 그렇지만 프랑스의 탈구축주의자가 지적하는 전지구적 자기면역화의 위기란 생명정치에 직접 관련된다기보다는 오히려 종교와 정보에 관한 것이다. 물론, 사회학자 니콜라스 루만이 꿈꾸었던 오토포이에시스적 면역화와, 에스포지토의 그것이 다르다는 것은 말할 것도 없다.

이에 반해 나폴리의 정치철학자가 말하는 면역화는 바로 생명정치의 무대의 중심에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는 점에서 독창적이다. 이 관점에서 본다면, 나치즘의 인종주의나 우생학주의가 초래한 완전한 자기면역화에의 지향은, 자기와 타자의 완전한 파괴라는 사태를 초래한 생명정치 결국은 죽음정치 나 다름없다. 아감벤이 생명정치의 묵시록으로 간주하는 것은 에스포지토에 따르면 사실상 이무니타스(면역)’라는 장치의 궁극적인 활동의 결과나 다름 아니다.

게다가 나치즘적인 면역화는 완전히 과거형으로 되어 버린 것이 아니다. ‘면역형 민주주의라고 명명할 수 있는 것이 출현하고 있다. 예를 들면, 의학이나 의료기술의 눈부신 발달에 의해 살 가치가 있는 삶과 그렇지 않은 삶 사이의 새로운 선별이 조용하게, 그러나 확실하게 우리 주위에서 진행되고 있다(점점 더 고도화되는 출생 전 진단은 그 전형이다). 그뿐이 아니다. 그 기술은 개인 개인의 신체를 넘어 종의 특징까지 꼼짝없이 개입한다. “도처에 맞서기 힘든 방식으로 잠재적인 파괴력을 지닌 새로운 면역 증후군이 재부상하고 있다. “오늘날 우리는 전례 없을 정도로 나치즘의 이면에 있다. 이것이 의미하는 것은 이로부터 눈을 돌리는 한, 이로부터 해방되는 것은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각주: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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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II. ‘페르소나의 정치학 : ‘인격가면

삶의 선별, 오늘날 이것은 노골적인 인종주의나 전체주의적 사상에서라기보다, 특히 자유주의자라고 지목된 논객들에 의해서 자유주의적 사상이나 제도의 내부에서 복권되고 있다. 그리고 거기서 중요한 역할을 맡는 것이 인격이라는 개념 에스포지토의 표현으로는 장치이다. 인격은 개인이나 시민 등 비교적 새로운 개념보다 훨씬 오래되고 보편적이라고 간주됐다. ‘인격에는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권리가 수반되어 있으며, 그것은 단호하게 지켜지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이 개념이 라틴어 페루소나로 거슬러 올라가는 것이며, 원래는 가면을 의미했다는 것은 이미 널리 알려져 있다. 이로부터 역할이나 등장인물, 자격이나 처지, 심지어 위격이나 인격이나 인칭과 같은 의미가 파생된다. 게다가 이 단어는 특히 고대 로마법이나 기독교 둘 다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핵심어였다는 경위가 있다.

서양의 철학과 종교, 정치와 사법의 근간과 관련되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이 페르소나라는 장치, 그 탄생부터 오늘날까지 어떻게 기능했는지, 에스포지토의 3인칭의 철학(Terza persona. Politica della vita e filosofia dell'impersonale)(Einaudi, Torino, 2007)은 그 메커니즘을 철저하게 해명하는 데 바쳐지고 있다.[각주:26] [각주:27] 상세한 논의는 이 책에 맡기는 수밖에 없지만, 굳이 단순화해서 말한다면 이 장치는 고대 이후 줄곧 인간의 분할과 선별, 포함과 배제를 담당하는 것으로서 기능해 왔다는 것이다. 요컨대 페르소나는 본래 단일한 것이었을 인간의 삶을 여러 겹으로 분열시키는 장치이며, 이 분열은 개인 수준에서도 집단 수준에서도 작동해 왔다. 이 사실은 노골적으로 인격을 짓밟는 차별적 제도나 담론에 있어서는 물론 말할 필요도 없지만, 인격 존중을 정면에 내거는 인도적이고 인권주의적이라고 지목되는 사상과 제도에 있어서도 기본적으로 바뀌지 않는다. 왜냐하면, 인격과 인격 없는 자 사이의 차별화가 거기에서는 항상 작동하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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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언뜻 보기에 정반대처럼 보이는 정치나 사상, 예를 들어 철저하게 인권을 파괴한 나치즘의 생명정치=죽음정치와, 이와 반대로 인격을 금과옥조처럼 추켜세우는 자유주의의 인권 사상이 사실은 똑같은 전제 살 가치가 삶, 삶의 생산적 관리 등 를 공유하고 있다는 점에도, 에스포지토는 우리의 주의를 환기시키고 있다. 생물학이나 인류학, 언어학이나 사회학 등 여러 가지 관점에서 인간을 규명하고자 해온 근대의 여러 과학들을 근저에서 파헤치는 것, 그것이 이 페르소나의 장치이며, 나치즘과 자유주의는 똑같은 장치에 의해서 초래된 서로의 물구나무 선 상이라는 점에는 틀림이 없다.

그런데 페르소나가 분할과 선택의 장치이라고 한다면, 그 당연한 귀결로서 산출되는 것이 불분명한 경계 영역이며, 그곳에서는 또한 포함적 배제라는 역설적인 메커니즘이 작동해온 것이다. 나폴리의 철학자는 물론 이 점에도 매우 민감하다(여기에도 역시 아감벤의 영향을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미 로마법에 내포된 이러한 불분명 지대를, 근대의 철학과 사법과 정치 안에서 추적하려 하는 2페르소나, 인간, 사물3인칭의 철학에서도 가장 농밀한 장이다. 최첨단 의료의 발달과 생명윤리의 수립은 이 불분명 지대를 해소시키기는커녕 더더욱 곤란한 아포리아로 우리를 끌고 들어간다. 왜냐하면 분할선을 아무리 세밀하고 정밀하게 하더라도, 원리적으로 잔여 ‘~가 아니지 않다는 항상 생기지 않지 않았기 때문이다.

오늘날 정치나 외교, 사법이나 의료 등의 현장에서 발생하는 다양한 문제는 일반적으로 인격의 이념이 널리 침투하지 않은 데 근본적인 원인이 있다고 여겨진다. 하지만 에스포지토에 의하면 이야기는 거꾸로다. 침투하해 있지 않기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그로부터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탈출의 길은 있을까? 여기서 부상되는 것이 비인격혹은 비인칭이라는 문제계인데, 이것으로 들어가기 전에, 아감벤의 논의를 우회하지 않으면 안 된다.

아감벤도 페르소나의 주제에 일찍부터 관심을 보였다. 희극이라는 제목의 단테론(1976)에서 페르소나의 계보를 간결하게 소묘하면서, 고대나 중세에는 아직 이 단어에 본래의 연극적인 반향이 뚜렷하게 남아 있었다는 것을 추적한다.[각주:28] 아감벤이 공감을 보여주는 것은 분명히 누구에게도 양도할 수 없는 의식이나 도덕의 주체로서의인격이라기보다는 어디까지나 가면으로서의, 혹은 얼굴로서의 페르소나이다. 원래 인간에게서 페르소나와 본성이 일치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 그렇다고 한다면, 문제는 어떤 가면을 떠맡아 연기하는 것인가, 어떤 얼굴을 드러내는가이다.

최근작 벌거벗음(2009)에 수록된 논문 페르소나 없는 정체성에서는 생물학적·유전학적인 데이터 새로운 벌거벗은 생명의 양태 로 점점 환원되어가는, 우리 현대인의 정체성이 통렬하게 비판된다. 이제 그것은 페르소나적 정체성 없다는 것은 확실하다. , 사회집단에 속하는 구성원들에 의한 승인과 결합된 정체성이 아니며, 사회적 가면을 쓰고, 그래서 가면에 녹아드는 일이 없도록 하는, 개인의 능력과 결합된 정체성도 아니다.”[각주:29] 이 인용문에서도 역투사되듯이, 아감벤에게 페르소나는 인격이라기보다는 항상 그 본뜻인 가면으로 돌려보내야 할 것, 가면과의 접촉 방식으로 간주되어야 할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더욱 흥미로운 것은 바로 얼굴이라는 제목의 논문(1990년 초출)이다. “나의 얼굴은 나의 바깥이다. 나의 모든 고유성이 차이를 잃고, 고유한 것과 공통된 것, 내부와 외부가 차이를 잃는 점이다.”[각주:30] 그 때문에 페르소나의 본래 의미인 가면이란 안에 갇힌 나(의 인격)를 가리키는 게 아니고, 바깥으로 열려진 나의 얼굴=경계선을 가리킨다.

한 가지를 더 언급한다면, 소수자적 생명정치라는 제목의 인터뷰(2003)에서 아감벤은 푸코의 아포리아를 언급하고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푸코의 말년의 작업에는 제게 아주 흥미롭게 보이는 한 가지 아포리아가 있습니다. 한편으로는 자기에의 배려에 관한 작업의 전체가 있습니다. , 자기의 모든 형식과 실천에 있어서 자기에게 배려할 필요가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과 동시에 반복해서 얘기되는 것은 언뜻 보기에 정반대의 주제입니다. , 자기로부터 분리될 필요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는 몇 번이나 이렇게 말합니다.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서 다시 물으려 한다면, 결국 삶으로 나아간다. 산다는 것의 기법은 정체성을 파괴하는 것, 심리학을 파괴하는 것이다. 그래서 여기에는 아포리아가 있습니다. 자기에의 배려는 자기의 경시로, 자기의 분리나 일탈로 이끌어져야 할 것이라는 얘기니까요. 문제는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 제기될 수 있죠. , 주체화의 과정 같은 게 아니라면, 자신의 실천은 무엇일까. 하지만 그 주체화의 과정은, 반대의 것으로, 즉 분리로 귀착되지 않을 수 없을 겁니다. 자기의 정체성이 발견되는 것은, 단지 자기로부터 분리되는 것에서만 있을 것이라는 겁니다. 말하자면 이런 주체화와 탈주체화라는 이중의 운동을 따를 필요가 있다는 것이죠.[각주:31]

* 이탈리아어 : https://www.facebook.com/notes/riccardo-tammaro/una-biopolitica-minore-intervista-di-stany-grelet-e-mathieu-potte-bonneville-a-g/10207385837176982/

* 프랑스어 : http://www.vacarme.org/article255.html

Dans les derniers travaux de Foucault, il y a une aporie qui me semble très intéressante. Il y a d’une part tout le travail sur le « souci de soi » : il faut se soucier de soi, dans toutes les formes de pratique de soi. Et en même temps, à plusieurs reprises, il énonce le thème apparemment opposé : il faut se déprendre de soi. Il dit plusieurs fois : « On est fini dans la vie si l’on s’interroge sur son identité ; l’art de vivre, c’est détruire l’identité, détruire la psychologie. » Donc il y a bien ici une aporie : un souci de soi qui doit aboutir à une déprise de soi. Une manière dont on pourrait poser la question, c’est : qu’est-ce que c’est qu’une pratique de soi, non pas comme processus de subjectivation, mais qui n’aboutirait au contraire qu’à une déprise, qui trouverait son identité uniquement dans une déprise de soi ? Il faudrait pour ainsi dire se tenir en même temps dans ce double mouvement, désubjectivation et subjectivation.

 

여기서도 또한, 아감벤 식의 푸코 해석이 얼굴을 내비치고 있다. 더구나 지금까지의 검토에서 알 수 있듯이, 그는 또한 페르소나와 주체를 엄밀한 의미에서 구별하지 않는 것 같다.

,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이런 것이다. 아감벤에게서 정체성은 탈정체성과, 인격(인칭)은 비인격(비인칭), 인격화는 탈인격화와, 주체화는 탈주체화와 언제나 떼어놓을 수 없는 형태로 연결된 것이며, 한쪽 없이는 다른 쪽은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이것은 다시 아감벤이 아리스토텔레스의 잠재력을 -잠재력“~하지 않을 수 있다로서 독창적으로 바꿔 읽은 것과도 관련되는데, 이 주제에 대해서는 졸저에서 논의한 일이 있으므로, 여기서는 되풀이하지 않는다. 하지만 어쨌든 이렇게 우리는 다시 비인칭의 문제계로 돌아오게 된다.

 

IV. ‘비인칭임의(쿼드리베트)’

사실 아감벤이 비인칭에 대해 정면에서 얘기한 것은 내가 아는 한 거의 없는 것 같다. 이를 대신하는 것이 라틴어로 말해서 쿼드리베트(quodlibet)’, 즉 불특정한 익명적 임의인 자이다. 그의 정치철학에서, 잠재력과 더불어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것이, 뜻밖으로 들릴지도 모르겠으나 이 임의이다. 그렇지만 이 기묘한 대명사에 대해서는 좀 더 설명이 필요할 것이다.

1990년에 출판된 짧으나 농밀한 한 권인 도래하는 공동체는 바로 이 임의에서 논의가 시작된다. 왜냐하면 임의[누구든]’야말로, 혹은 이것이 어원이 된 뭐든이야말로 다가올 정치와 공동체의 주체이자 객체이기 때문이다. 이를 테면 초월론자들의 스콜라학적 열거법에 따르면, 임의의[뭐든] 존재자는 하나이며 참이며 선 혹은 완전하다.” 그래서 뭐든이란 무엇인지는 중요하지 않다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어쨌든 중요하다.” 왜냐하면 거기에는 이미 비인칭의 마음에 든다(libet)”에 대한 참조가 내포되어 있기 때문이다.[각주:32] 유사한 이탈리아어에는 또한 아무리 ~ 해도라는 의미의 콸시볼리아(qualsivoglia)”가 있는데, 여기서도 원하다라는 의미의 볼리아(voglia)”가 포함되어 있다.

, ‘임의의사람은 원해지는 것이며, ‘사랑받는 것이다. ‘뭐든’, ‘누구든무관심하고 무관한 무엇인가라는 게 결코 아닌 것이다. 뭐든임의는 또한, “있는 그대로의 존재(essere tale qual è)”라고도, 혹은 특이성=단일성(singolaratà)”라고도 바꿔 말해진다. ‘특이성이라고 하면, 보통 우리는 뛰어난 개성이나 독창성 같은 것을 떠올릴지도 모르지만, 그런 게 아니라, 우리는 각각 있는 그대로의 존재로서, 단일하고 특이한 것이다. 임의특이성은 또한 잠재력의 다른 이름이기도 한 것 같다. ‘임의의우리는 있는 그대로의 존재로서, 현실성이 아니라 잠재력을 공유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의 문맥에서 바꿔 말한다면, 아감벤이 말하는 임의란 바로 인격의 앞 혹은 건너편에 있는 존재이며, 생명정치적인 선긋기나 선택의 바로 앞에 혹은 건너편에 있는 존재이다. “만인에 대한 만인의 싸움”(홉스)친구/의 이항대립(슈미트)도 아니고 이 임의에 그의 정치철학의 출발점이자 도달점이 있는 것이다.

아감벤은 또 다른 논문에서, 굳이 시대착오적인 개념인 게니우스를 불러내는데, 거기에 등장하는 것이 비인칭()(impersonale)’이라는 형용사이다. 게니우스란 우리가 태어나는 순간에 우리를 자신의 보호 아래에 두는 신을 가리켜 고대 로마인들이 부른 단어로, ‘천재재능의 어원이 된 것으로도 알려졌다. 그렇지만 아감벤이 주목하는 것은 그 점이 아니며, “이 매우 친밀하게 인칭적인 신이, 우리 속에 있으며, 더 비인칭적인 것이며, 우리를 극복하고 능가하는 것의 화신이기도 하다는 점이다. , ‘게니우스에 있어서 암시되고 있는 의미란, “인간이 단순히 자아나 개인적 의식일 뿐 아니라 탄생부터 죽을 때까지, 굳이 말하면 비인칭적이고 전개체적인 요소와 더불어 살아 있다는 것이다.[각주:33]

여기서 아감벤이 염두에 두는 것은 질베르 시몽동전개체적인 것인데, 새로운 보조선으로서, 예를 들어 우리나라에서도 키무라 빈(木村敏)이 비인칭의 삶에 관해 언급하는 것을 덧붙여도 될 것이다. “누군가의(저라도 좋고, 어떤 사람이라도 좋지만) 생명이 살아 있다는 것은, 거기에 누구든 좋다, 말하자면 비인칭의 생명이 깃들어 있다는 것입니다.” 키무라는 또한, 인칭으로 환원되지 않는, 그 때문에 특정한 신체에 깃들어 있는 것도 아닌 이 비인칭의 생명을, 조에로서 고쳐 읽는 것이다. 그것은 사물로서가 아니라, ‘로서의 생명이며, ‘비인칭이고 자타미분화상태에 있다.[각주: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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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인칭과 비인칭, 주체화와 탈주체화라는 삶의 이중의 운동은, 아감벤의 바틀비(1993)에서 더 나아가, 창조와 탈창조라는 표현으로 불러내지고 있다.[각주:35] 말할 것도 없이, 탈창조라는 단어는, 시몬 베유에게서 빌려온 것인데, 본인은 왜 그런지 그 출전을 밝히지 않는다. 그렇지만 어떤 창출된 것을, 창출되지 않고 처음부터 존재하는 것 속으로 옮겨보내게 하는 것이라는, 베유에 의한 탈창조’(혹은 창조’)의 정의는, 아감벤에게서의 -잠재력과 겹치는 바가 큰 것 같다.[각주:36] 그럼에도 불구하고 멜빌의 소설 주인공 바틀비가 체현하는 -잠재력을 설명하는 데 있어서 아감벤은 둔스 스코투스에 의한 우연성의 존재론은 언급하면서도 베유의 이름은 왜 보이지 않게 깔아두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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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다가 최근 십수년 동안의 저작에서 아감벤은 신학적 전회라고도 명명할 수 있는 변화를 수행하는 것인데, 이 전개도 1930년대 후반 이후에 신빈화로의 경향을 강화한 베유의 변화에 의해 선취되고 있다는 견해도 불가능하지 않은 것 같다.[각주:37] 그녀가 인격과 성스러운 것에서 묘사하려고 한 것, 신의 페르소나의 의지로서의 섭리라는 신화는, 아감벤이 왕국과 영광(2007)에서 전개하게 되는 것과 거의 대응한다. 심지어 극빈 : 수도원 규칙과 삶의 형식(2011)에서는 청빈의 성자 아시시의 성 프란체스코와 그 수도회, 삶의 형식의 하나의 모델이 추적되고 있는 것이다.[각주:38] 아감벤이 여기서 가장 높이 평가하는 것은 아시시의 성자와 그 일파 성령파 소유사용을 명확히 구별하고, 전자에 대해 후자를 중시했다는 점이다. 여기서도 또한 권리나 소유를 인격과 나란히 폭력의 원천으로 간주했던 베유의 그림자가 춤추고 있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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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에스포지토는 그의 저작 상당수에서, 확실히 프랑스의 여성사상가에 대한 준거를 공언하고 있다. 그는 그녀 속에서, 비인칭의 철학의 최초의 표명을 찾아내고 있는 것이다. , 나중에 블랑쇼나 들뢰즈 등으로 이어지게 되는 처음의 기점이, 베유에서 찾아지고 있다.[각주:39] 실제로 인격과 성스러운 것에서 그녀는 강력하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성스러운 것이란 인격이기는커녕 한 명의 인간 존재에 있어서, 비인격적인 것이며, 그것만이 성스러운 것이다.” 더 말하면, “비인격적인 것의 영역에 들어선 사람은, 저마다 거기서 모든 인간 존재에 대한 책임에 직면한다. , 그들 속의 인격을 소중히 하는 책임이 아니라, 인격이 비인격적인 것으로 이행하는 몇 가지 가능성으로 덮어져 있는 모든 것을 소중히 하는 책임이다.”[각주:40]

에스포지토의 독해를 곱씹는다면, 이리하여 베이는, 인격과 권리 사이에 있는 배타주의적 관계를 고발하고, 정의를 권리로부터 확연하게 떼어낸다. 권리가 인격=인칭에 귀속된다면, 정의는 비인격=비인칭적인 것에 결부된다. 윤리적 차원은, 인칭이 아니라 비인칭에 갖춰져 있다. 결국 비인칭이란 단순히 인격의 소박한 부정이나 대립항이 아니다. 오히려 아직 인격이 아닌 것, 더 이상 인격이 아닌 것, 결코 인격이라고는 공언되지 못한 모든 사람에게 향해진, 분리와 차별의 메커니즘을, 인격의 내부에서 동결시키는 것이다.[각주:41] 그렇다고 한다면, 비인칭적인 것을 둘러싼 사고는, 생명정치의 내부에 어떤 결과를 가져올까? 이것이 우리의 마지막 질문이 된다.

 

V. ‘비정치무위

에스포지토가 베유의 이름을 처음으로 소환한 것은, 사실 지금부터 4반 세기 전, 1988년 초판된 저작 비정치의 범주로 거슬러 올라간다. 여기서 에스포지토의 정치철학은 비정치라는 관점에서 정치를 역투영하려고 시도하는데, 이른바 비정치가 정치에의 주의의 약체화나 저하를 초래하는 것이 아니며, 반대로 그 강화와 철저화라는 것은, 시몬 베유부터 한나 아렌트까지, 헤르만 블로흐부터 조르주 바타이유까지, 심지어 최근에는 르네 샬까지의 작업과 전기의 양쪽에 의해 분명하게 증명되고 있다고 말이다.[각주:42]비정치란 정치적인 것과는 다른 것이 아니다. 오히려 도래할 정치의 별명이 비정치이며, 그 모델 중 하나가 베유에서 찾아지는 것이다. 그녀에게 비인칭으로의 이행은 윤리적이고 신학적이며 또한 정치적인 요청이기도 했다. 정의나 자유는 우리에 의해 쟁취된다기보다는 비인칭에 호소하는 것이지 않으면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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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정치는 반정치도 초정치도 탈정치도 아니다. 정치의 이면도 아니고 이를 넘어선 곳에 있는 것도 아니다. 거꾸로 바로 정치적인 것의 한복판 속에 있으며, 그것을 비판하는 힘을 가진다. 이런 생각을 정면에서 수립한 것은 이탈리아에서는 마시모 카차리(1944~)가 처음이었던 것 같다. 1978년의 논고 니체에게서의 비정치에서, 일찍이 네그리의 동지이자 절친이었던 이 베네치아의 철학자는, 토마스 만에 의한 니체의 비정치성의 해석을 통렬하게 비판했다.[각주:43]

독일의 소설가에 따르면, 니체는 비정치적이기 때문에 독일 문화의 중심적 존재로 간주되고, 그 비정치성이야말로 독일의 정신적 힘의 상징이라고 여겼다. 하지만 카차리에 따르면, 비정치는 정치를 무가치한 것으로서 단죄하는 것에 있는 것도, 정치로부터 해방되는 것에 있는 것도 아니며, 오히려 그 반대이다. 비정치야말로 가치를 가진 것으로서의 정치를 철저하게 비판할 수 있다. 그 때문에 비정치는 허위를 고발하는 이데올로기 비판보다 훨씬 근원적인 것이다. 결국 카차리는 거절을 거절하는 것이며, 그 신념이 성공이냐 실패냐는 차치하고 베네치아 시장 재직 중에 미시정치로서 실천됐다는 것은 또한 우리의 기억에 새롭다.

에스포지토에게서의 비정치도 또한 이 연장선상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이런 의미에서 1960-70년대에 일본에서도 일세를 풍미한, 이른바 논폴리와는 구별된다. 비정치는 중립적인 게 아니라, 빼어나게 정치적인 몸짓이다. 권리에 근거한 정치라는 발상을 철저하게 비판한 베유를 받아들여, 에스포지토는 의무에 기초를 둔 공동체를 구상한다. 이 발상은 또한 공동체의 어원이 된 라틴어 코무니타스와도 합치한다. 왜냐하면 이 단어는 의무책임을 의미하는 무누스, ‘~와 더불어, 함께를 의미하는 접두사 타무가 붙어서 만들어진 명사이기 때문이다. , 공동체 함께 살아가는 것 란 본래 각자가 타자에 대한 의무를 짊어져야 하는 것이다. 이에 반해 면역의 어원인 라틴어의 이무니타스는 똑같은 무누스와 지우다를 가리키는 접두사 가 조합되어 만들어졌다. 이무니타스는 따라서 의무로부터 면제되다라는 의미를 갖게 된다. 일반의 인식과는 정반대로, 그 어원에 따르면, 공동체란 원래 동일성이나 고유성에 집착하는 것과는 정반대의 것이며, 면역은 자기보존은커녕 자기와 타자 쌍방의 파멸을 초래할 우려가 있다.[각주:44] 에스포지토는 근대의 정치사법적 범주의 거의 대부분이 자기 면역화의 방향을 따르는 것이었다고 생각한다. ‘인격은 그 으뜸가는 것 중 하나이다.

이처럼 공동체와 면역을 하나의 쌍을 파악하고, ‘의무를 끼워 넣어 흡사 정반대의 관계로 양자를 둔 점에 에스포지토의 새로움이 있다. 그래서 코무니타스이무니타스비정치의 범주의 뒤를 쫓듯이 출판된 것도 우연이 아니다. 또 에스포지토가 말하는 공동체가 바타이유부터 블랑쇼를 거쳐 낭시로 이어지는, 이른바 비정치적인 공동체 사상 계보로 연결되는 것도 사실이다. 그렇지만 비인칭에 대한 주목에 의해 어떤 새로운 삶의 저치의 지평이 열리게 될지, 그 대답은 아직은 분명하게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인간과 페르소나 사이의 형이상학적인 분리를 무효화하는 생명정치는 정말로 가능할까? ‘인격이라는 장치에 빨려 들어가버린 삶을 어떻게 하면 탈환할 수 있을까? 적어도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삶을 선별하거나 계층화하는 것이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아감벤을 부연해서 말한다면, 그 누구도 삶을 소유하고 있지 않으며, 그냥 사용하고 있을 뿐인 것이다.

그럼 아감벤은 어떨까? 내가 아는 한, 그가 정색하고 비정치를 입에 담는 것은 거의 없다고 해도 좋다. 대신에 되풀이하여 인용되는 것은 무위라는 단어이다. 그것은 또한 그의 장치론과도 연동되어 있다. ‘장치라는 개념도 푸코에게서 연원되는 것이지만, 이 이탈리아 후배는 여기에서도 그것을 독자적으로 고쳐 읽고 있다. 결국 세계 통치의 다양한 장치 그 으뜸가는 것이 생명정치의 그것 는 세계를 구원하기는커녕 카타스토로피로 이끌어 간다고, 감히 단순화해서 한다면, 이것이 아감벤의 테제이다. 최첨단 과학이나 테크놀로지도 궁극적으로는 죽음정치에 봉사하고 끝날 수밖에 없다는 얘기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어떤 길이 남아 있는가? 어떤 의미에서 답은 단순하다. 이런 장치들을 작동시키지 않게 하거나, 아니면 추앙되고 있는 그 신성함을 신성모독하거나 둘 중 하나이다. 무위와 신성모독이라는 두 개의 몸짓은, 이리하여 아감벤에게서 밀접하게 결합된다. 아니 양자는 확실하게 나눠져 있는 게 아니다. 그것이 명확하게 제시되는 것이 왕국과 영광의 결말이다. 초기 기독교 시대의 삼위일체의 교의로까지 거슬러 올라가면서 오이코노미아”, 즉 통치의 형태를 자세하게 추적한 끝에 아감벤이 당도하는 것은, 무위로서의 권력의 영광이다. 신이 엿새 동안의 창조 후에 쉬고, 최후의 심판 후에 영원한 안식일이 오듯이, 권력의 중심에 있는 것은 사실상 무위라는 빈 장소이다. 오늘날 가장 초미의 문제가 되는 것은, 아감벤에 따르면, 정치적인 것이 스스로의 장치 속에 이 무위를 탈환하는 것이다.[각주:45] 무위나 신성모독은 종종 자유로운 사용이나 공통의 사용이라고도 바꿔 말해진다.

이런 아감벤의 장치관, 혹은 더 넓게는 기술관은, 종종 너무도 소박할 뿐 아니라, 너무도 비관적이라고 비난받아 왔다.[각주:46] 그렇지만 무위나 신성모독은 쓸데없이 장치를 중지시키거나 파괴하거나 하는 것도, 게으르게 방치하는 것도 아니다. 장치란 무엇인가(2006)에서도 말해지고 있듯이, 그것은 분리·분할된 것을 공통의 사용으로 되돌리는 대항장치인 것이다. 그것은 또한 장치의 자유로운 사용이며, 장치 아래서 노는것이기도 하다. 중요한 것은 이런 장치들에 의해 휘둘리지 않는, 그 목적에 얽매이지 않는 것이다.[각주:47]

앞서 말했듯이, 아감벤은 최근 점점 더 소유에서 사용으로, 풍요에서 가난으로 라는 발상의 전환을 밀어붙이고 있다. 이리하여 1990년대 중반에 시작되어, 현재에도 여전히 진행 중인 장대한 <호모 사케르> 계획은 정치로부터 출발해 비정치로 급속하게 방향타를 꺾었다(그렇지만 물론 그 경향은 처음부터 있었다). 아감벤의 무위나 에스포지토의 비정치는 오늘날 더욱, 예를 들어 알랭 바디우에게서의 전-정치에 대한 주목이나, 자크 랑시에르에게서의 치안과 정치의 구별을 둘러싼 사유와도 맞대결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일부에서 그런 시도도 시작되고 있지만, 그것은 향후의 과제로 남겨둔다.[각주:48]

아무튼 예전에 시몬 베유가 제창한 비정치, 전체주의의 폭력이라는 동시대의 카타스트로프에 민감하게 대응하는 것이었다면, 작금 새롭게 재부상하고 있는 비정치의 사유는, 관리화와 규율화가 진행되는 가운데, 삶의 보호와 부정이 바야흐로 불분명해지는 생명정치/죽음정치의 문턱을 스쳐지나가고 있는 현대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과제가 된다는 것은 확실한 것처럼 내게는 생각된다.

 

  1. 졸고, 「アイステーシスの潜勢力」, 『ラチオ』 第04号, 講談社, 2007년 11월 및 『イタリア現代思想への招待』, 講談社選書メチエ, 2008년을 참조. [본문으로]
  2. Pietro Montani, Bioestetica: Senso comune, tecnica et artenell’età della globalizzazione, Roma: Carocci, 2007 ; Laura Bazzicalupo, II governo delle vite : Biopolitica ed economia Roma-Bari: Laterza, 2006. [본문으로]
  3. Roberto Esposito, Pensiero vivente: Origine e attualità della filosofia italiana, Torino: Einaudi, 2010. [본문으로]
  4. ジャンバッティスタ•ヴィーコ, 『新しい学 1󰡕, 上村忠男訳、法政大学出版局、ニ〇〇七年、ニ〇五ぺージ。 [본문으로]
  5. Michel Foucault, «Il faut défendre la société» : Cours au Collège de France (1975-1976), Paris: Gallimard-Seuil, 1997, p.213(미셸 푸코, 『“사회를 보호해야 한다”: 콜레주드프랑스강의 1975-1976』, 김상운 옮김, 난장) [본문으로]
  6. Ibid., p.226. [본문으로]
  7. Ibid., p.228. [본문으로]
  8. Ibid., p.232. [본문으로]
  9. Ibid. [본문으로]
  10. Giorgio Agamben, Quel che resta di Auschwitz : L’archivio e il testimone (Homo sacer III), Torino: Bollati Boringhieri, 1998. p.78. [본문으로]
  11. Ibid., p.145. [본문으로]
  12. 조르조 아감벤, 『사물의 표시』, 양창렬 옮김, 난장, ****. [본문으로]
  13. 상동, ***쪽. [본문으로]
  14. 상동, ***쪽. [본문으로]
  15. Giorgio Agamben, Homo Sacer: II potere sovrano e la nuda vita (1995),Torino: Einaudi, 2005, pp.178-184(조르조 아감벤, 『호모 사케르 : 주권권력과 벌거벗은 생명』, 박진우 옮김, 새물결, ***). [본문으로]
  16. 이에 관해서는 졸저, 『アガンペン読解』, 平凡社, 2011을 참조. [본문으로]
  17. Slavoj Zizek, “Knights of the Living Dead”, New York Times, March 24, 2007. [본문으로]
  18. Agamben, Homo Sacer, cit. p.69. [본문으로]
  19. Roberto Esposito, Bios: Biopolitica e filosofia, Torino: Einaudi, 2004, chap. IV. [본문으로]
  20. 拙著 「イタリア現代思想への招待」、『ラチオ』 第01号, 講談社, 2006년 2월 및 「ナポリ発、全人類へ──ロべルト・エスポジトの思想圏」(訳者イントロダクション), ロべルト・エスポジト, 『近代政治の脱構築—共同体・免疫・生政治』, 岡田温司 訳, 講談社選書メチエ, 2009년 수록. [본문으로]
  21. Esposito, Bios, cit, pp.194-196. 비오스의 조에로의 환원 속에서 나치즘의 생명정치=죽음정치의 메커니즘을 봤던 아감벤에 대해서, 에스포지토도 “조에의 정신화와 정신의 생물학화에 관해 말해야만 한다”고 날카롭게 견제하고 있다(Ibid., p.153). [본문으로]
  22. Roberto Esposito, Immunitas : Protezione e negazione della vita, Torino: Einaudi, 282. [본문으로]
  23. 다음을 참조. 宮崎裕助 「自己免疫的民主主義とはなにか──ジャック•デリダにおける「来たるベさデモクラシー論」の帰趨」 『思想』 第1060号(2012年8月)岩波書店、45-68頁. [본문으로]
  24. * 데리다의 자기면역화에 대해 데리다의 ‘자기면역화’가 가장 분명하게 드러나는 책은 『불량배들』이다. 이 책은 두 개의 강연으로 구성되어 있다. 하나는 세리지의 연례적인 10일 동안의 강연과 세미나로, 장문의 기록 「강자의 이성 : 불량국가들은 있는가」이며, 다른 하나는 「도래할 계몽의 <세계> : 예외, 계산, 주권」이다. 첫 번째 강연에서 데리다는 미국이 일부 국가들을 고발하기 위해 사용한 ‘불량국가’라는 개념을 꺼내들고, 그 의문점을 들춰낸다. 여기까지는 촘스키와 같다고 생각할 수도 있으나, 문제는 정치적인 것에 국한되지 않는다. 주권과 이성의 문제이며, 생명의 자기보존으로서의 면역과, 이것이 생명 자체를 파괴해버리는 자기면역, ‘죽음충동’(p.299)의 문제이기도 하다. 현실적인 정치적 문제를 철학의 근본문제로까지 끌고 가는 수완은, 아감벤과 데리다 두 명의 사상가의 두드러진 특징일 것이다. 두 번째의 짧은 강연에서는 시간적인 제약도 있고 해서, 데리다는 “전보적이기도 하고 강령적이기도 한”(p.293) 형태로, 지금까지 얘기한 다양한 문제를 요약적으로, 솜씨 좋게 제시한다. 그 요약의 능수능란함 때문에, 독자는 눈이 어질어질한 부분도 있지만, 거꾸로 인용을 견뎌내는 짧은 문장도 많다. 첫 번째 논문에서는 시간의 여유가 너무 많아서(데리다는 그래도 모자라다고 계속 말하지만), 우회로를 거칠 시간이 너무 길어서, 인용할 수 있는 대목은 별로 없다. 이 우회로가 즐거운 것은 확실하며, 데리다의 세미나는 재미있었을 것이라고 상상한다. 서평에서는 전보적인 것을 더욱 인상비평적으로 거론할 수밖에 없는 것이 안타깝다. 처음 논문에서는 민주주의가 자기면역을 일으키며, 자살하기 직전에 이른 사태를 고찰한다. 무엇보다 범례적인 것은 알제리이다. 민주주의를 부정하는 이슬람 정당이 민주적인 선거에서 압승할 것이 확실한 시점에서, 군대가 쿠데타를 일으키고 선거를 무기한 연기한 것이다. 이것은 민주주의의 이름에서의, 민주주의에 대한 모든 침해의 전형적인 사건(p.74)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알제리 정부는 “시작된 선거과정은 민주적으로 민주주의의 종언으로 이끌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들은 스스로 민주주의를 종식시키는 쪽을 선택한 것이다. 그들은 주권적으로 결정했던, 민주주의를, 민주주의에 있어서 좋은 것이기 때문에, 그리고 그 치료를 하기 때문에, 최악의, 거리 전체의 가장 높은 침해에 대해서 그것을 면역화하기 위해서, 적어도 잠정적으로 중지하는 것”(Ibid.)을. 이것은 “자기면역적 자살”(p.75)이었다. 전보적인 두 번째 논문으로부터 자기면역의 간단한 정의를 복습해두자. “어떤 생체 속에, 타자의 공격적인 침입에 대한 면역을 해당 정체에 부여하는 것, 바로 해당 주체가 자살적으로 파괴할 수 있는”(p.234) 것이다.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민주주의를 죽이는 알제리, 주권을 지키기 위해 주권의 근원인 것을 죽이는 쿠데타, 불량국가를 공격한다는 명목으로, 스스로 불량국가가 되는 미국. 미국 행정부는 ‘악의 축’에 대항한다고 칭하며, 민주적 자유를 “불가피하게, 또한 부인 불가능한 방식으로 제한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리고 이것에 대해서는 누구도, 어떤 민주주의자도 진심으로 반대할 수 없는” 것이다(p.86). 그뿐만이 아니다. “가장 폭력적인 불량국가, 그것은 스스로 그 위임자라고 자칭하는 국제법을, 스스로 그 이름 아래서 말하고, 스스로 그 이름 아래서, 이른바 불량국가에 대한 전쟁을 개시하는 국제법을, 스스로의 이해관계가 명하는 경우에는 매번 무시해온 국가, 계속 침범한 국가, 즉 미국이다.”(p.189). 그리고 미국과 동맹하는 국가도, 이것에 대항하는 국가도, 모든 국가도 국익의 이름으로, 주권의 지고성의 이름으로, 국가이성의 이름으로, 똑같이 행세하는 것이기 때문에, “이제 불량국가밖에는 없으며, 그리고 이제 불량국가는 없다. 이 개념은 그 한계에”(p.205) 도달한 것이며, “이 종언은 항상, 처음부터, 가까웠던 것이다”(Ibid.). 또한 데리다는 이 주권성의 이론의 배후에 기독교의 신학이 존재한다는 것을 시사한다. “민주적이라 불리는 체제에서조차 주권의 근저에는 존재-신론이 있다”(p.299). 그러나 이 논문에서는 거기까지는 논의가 진행되지 않는다. 그런데 자기면역은 가장 보편적인 형태로 바꿔 말하면, 아포리아이기도 하고 이중구속이기도 하다. “아포리아, 이중구속 및 자기면역적 과정은, 단순한 동의어가 아니지만, 이것들은 바로 공동으로, 그리고 부담=책임으로서, 내적 모순 이상의 것, 결정 불가능성을 … 내적 이율배반을 갖고 있다”(p.78). 이 개념은 여기까지 부연하면, 뭐든지 사용할 수 있는 편리한 도구처럼 되어 버린 것은 확실하다. 그는 전보적으로 몇 개인가? 데리다는 복제를 좋아하지만, 치료적인 복제는 부정할 근거가 없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원래 모든 개별성에는 반복이라는 요소가 불가피하게 존재하는 것이며, 그것을 무시하고 개성의 고귀함을, 하나의 생명의 특이성을 강조해도 공허하기 때문이다. “반복・복제는 생산・재생산과 완전히 똑같이, 문화・지식・언어・교육의 조건을 보증하는 것이다”(p.278). 인간의 특이성에 근거한 복제반대론은 “유전자주의 혹은 생물학주의를, 즉 뿌리 깊은 동물학주의, 근본적인 환원주의를, 스스로 반대하고 있는 공리계와 나눠 갖고 있는”(Ibid.) 것이다. 그러나 자기면역이 절대적인 악인 것은 아니다. 사건이 그 이름값을 하는 것이라면, “사건은 절대적인 면역도 아무런 보상도 없이, 자신의 유한성 속에서 지평 없이, 벌거벗음의 취약함에 접해야 한다. 이 경우에는, 타자의 예측 불가능성에 대치하고 서로 맞서는 것은 여전히 할 수 없다. 혹은 더 이상 할 수 없는 것이다. 그 점에서 보면, 자기면역성은 절대적인 악이 아니다. 자기면역성은 대상에 노출되는 것, 즉 도래하는 것이 없는 자에게, 따라서 계산 불가능한 것에 머물 수밖에 없는 것에 노출되는 것을 가능케 하기 때문이다. 만일 절대적인 면역성이 있을 뿐이고 자기면역성이 없다고 한다면, 더 이상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p.290). 레비나스의 알레르기 이론과 통저하며, 데리다의 이론의 깊이가 엿보이는 경지이다. [본문으로]
  25. Roberto Esposito, Termini Della Politica, Comunita, Immunita, Biopolitica, Mimesis Edizioni, 2008. [본문으로]
  26. Roberto Esposito, Terza persona. Politica della vita e filosofia dell’impersonale, Einaudi, Torino, 2007. 이와 아울러 2011년 3월에 일본을 방문했을 때의 강연에 기초한 다음의 논고도 참조. ロベルト•エスポジト「装置としてのペルソナ」 多賀健太郎 訳, 『表象06』, 2012년. 나아가 이 잡지의 특집 「ベルソナの詩学」에 기고한 젊은 연구자들(岡本源太, 横山太郎, 千葉雅也, 信友建志)의 논고도 참조. [본문으로]
  27. 제목 : 로베르토 에스포지토 강연회, 「장치로서의 페르소나(装置としてのペルソナ)」 http://utcp.c.u-tokyo.ac.jp/blog/2011/03/roberto-esposito-persona-as-de/ 2011년 3월 9일, 도쿄대학 코마바 캠퍼스에서 이탈리아 인문고학연구소 소장인 로베르토 에스포지토 씨의 초청 강연회가 열렸다. 에스포지토 씨 외에도 사회자로 교토대학 교수인 오카다 아츠시(岡田温司) 씨, 토론자로 노스캐롤라이나대학의 페델리코 루이제티 씨를 맞이한 본 강연회는 총 세 시간 동안 논의가 이뤄졌으며, 그의 사상의 현실성을 음미하는 절호의 기회가 됐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우선 맨 처음으로 진행을 맡은 오카다 씨가 이탈리아 현대사상의 종합적 해설과 그 속에서 에스포지토 씨가 차지하는 위치에 대해 정중한 설명이 주어졌다. 오카다 씨의 지적에 따르면, 에스포지토 씨뿐 아니라, 아감벤이나 카차리, 혹은 바티모 등 이른바 이탈리아 현대사상이 주목을 받은 원인으로서, 이탈리아가 ‘국민국가’로서 좋든 나쁘든 기능하지 못한 것과 뒤얽혀 있는 지정학적 조건을 들 수 있다. 중심적 권력 부재 속에서 태어난 이들 사상이, ‘포스트제국’적인 시대 정황과 부합하는 부분이 적잖이 있었던 게 아니냐는 것이다. 그 중에서도 에스포지토 씨는 “비오스bios”, “면역immunitas”, 그리고 “공동체communitas”를 주제로 한 3부작을 중심으로, 푸코 이후의 생명정치의 문제를 공동체론으로 전개하면서, 생명의 탈구축을 기반으로 한 포스트휴먼적 정치철학을 구축하는 데 그 특징이 있다고 소개됐다. 기조강연에서 에스포지토 씨의 강연 내용은 “페르소나 persona” 개념의 심급과 깊숙하게 관련되어 있다. 인격, 위계(位階), 혹은 가면이라고도 번역되는 이 단어는, 그 다의성 속에서, 특히 법철학적 함축을 전면에 내세우면서, 서양사상 속에서 중심적인 위치를 맡아왔다고 분석된다. 에스포지토 씨에 따르면, 들뢰즈나 아감벤이 ‘장치’라는 이름으로 비판했던 오이코노미아를 정초지었던 것이 바로 이 ‘페르소나’에 다름 아니며, 거기서 ‘신/인간’, ‘혼/육체’의 이분법이 유비적으로 구조화됐다고 간주된다. 주체와 비주체의 존재론적 차이를 정초짓는 이 구조가, 후자를 ‘타락’이나 ‘병’, ‘동물’로 명명해 왔던 바로 그것이라는 얘기다. 또 이 개념은 역사적으로 볼 때, 로마법의 체계와도 접점을 갖고 있다. 무엇이 ‘페르소나(=개인)’인가라는 법적 지표에 의해, 노예와 자유인, 심지어 타고난 자유인과 해방 노예의 자유인의 구별이 차례차례 만들어진다. 즉, 법적 기능에 있어서의 페르소나는 규범과 예외를 무한히 창출함으로써 모든 것을 그 무한한 권리에 있어서의 이분법으로 끌어들이는 부단한 변증법적 과정을 의미하게 된다. 이곳에서는 법=권리적 통합이나 보편화는 예외자를 배제하고 이어서 이것들을 에워싸면서, 새로운 통합을 지향한다. 에스포지토 씨의 분석은 이 구조를 ‘인간화’의 메커니즘에 내재하는 ‘비-인간화(탈페르소나화)’로서 부각시켜 보여준다. 즉, 비-인간은 페르소나 개념이 촉진했던 주체화 과정의 등 뒤에서 계속 움직이고 있다. 그것은 억압되고, 적어도 개념 수준에서, ‘완벽한 인간’ 아래에 종속될 수밖에 없다. 현대의 안락사나 장애와 뒤얽혀 있는 문제도 이런 조류 속에서 다시 생각할 수 있다. ‘인간/비인간’의 부단한 변증법에 맞서서, 에스포지토 씨가 그 돌파구로서 이번 강연에서 끌어낸 것은 시몬 베이유의 사상이다. 고대 로마를 참조하면서 히틀러주의의 기원을 분석하는 베이유는, 거기에 로마법적인 페르소나의 움직임이 공통적으로 존재한다는 것을 찾아낸다. 베이유는 비-인간적인 폭력이 인간의 가능성의 조건을 구성한다는 것을 냉혹하게 지적하면서도, 인간의 내부에 깃든 다른 비-인간, 즉 ‘신성한 것’을 동시에 희구한다. 상이한 ‘내부’, 상이한 ‘비-인간’을 어떻게 끌어당겨, 주체를 변환할 수 있는가, 에스포지토 씨가 베이유에게서 찾아낸 가능성은 여전히 자세하게 음미될 필요가 있을 것이다. 루이제티 씨의 의견 및 회장의 질의에 대해서도 간단하게 언급하고 싶다. 루이제티 씨는 에스포지토 씨의 ‘비인간’의 사상을 프랑스 현대사상의 계보 속에 위치시키고, 에스포지토 씨의 사상 속에 ‘대륙/영미’와는 상이한 별개의 유럽성이 있다고 지적한다. 이는 첫머리에서 말한 오카다 씨의 지적과도 겹치는 것인데, ‘이탈리아’의 이름 아래서 상이한 근대, 상이한 철학, 상이한 사상이 싹트고 있었던 것이라는 지적은 데리다가 『불량배들』 안에서 행한 철학에서의 라틴 기원의 문제와도 관련된 것이며, 매우 흥미로운 것이리라. 이 점에 관해서는 강연장에서의 질의에서, “상이한 유럽”이 아니라 “유럽의 타자”인 일본인의 사상에 대해서 ‘페르소나’의 탈구축은 의의를 가지느냐는 지적이 있었던 것도 덧붙이고 싶다. 이 밖에도 거점 리더인 코바야시로부터는 베이유의 사상에 있는 종교성이라는 것을 비인간적이라고 함으로써 중성화하는 것이 허용되느냐는 근원적인 질문이 있었다. 보고자인 나 大橋完太郎도, 페르소나의 탈구축이 철저하고 모두가 비인간이 된 세계는 과연 얼마나 살기 좋은 것이냐는 질문을 제기했다. 비판에 대한 반비판을 긍정적 가치로 옮겨 놓을 때, 새로운 개념적 배치의 변용을 촉진시킬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 것은 나뿐일까? 어쨌든, 평일에 일찍부터 시작되어 3시간 반이나 되는 대장정이었음에도 불구하고 100명을 넘는 분이 왕림하셔서 성황리에 이번 강연회를 마칠 수 있었다. 에스포지토 씨, 루이제티 씨, 당일 훌륭한 통역을 선 보여주신 무라 마리코(村松真理子) 씨, 그리고 무엇보다 이번 그의 초청에 관해서 진력을 다하신 오카다 아츠시 씨와 그 지원 스탭들께 마음에서 우러나는 감사를 드리는 바이다. [본문으로]
  28. 조르조 아감벤, 『이탈리아적 범주』, ***. [본문으로]
  29. 조르조 아감벤, 『벌거벗음』, ***. [본문으로]
  30. Giorgio Agamben, Mezzi senza fine : Note sulla politica, Torino: Bollati Boringhieri, 1996, p.80(조르조 아감벤, 『목적 없는 수단』, ***). [본문으로]
  31. “Una biopolitica minore: Intervista di Stany Grelet e Mathieu Potte-Bonnnville a Giorgio Agamben”, Biopolitica minore, a cura di Paolo Perticari. Roma: Manifestolibri, 2003, pp.193-194. [본문으로]
  32. Giorgio Agamben, La comunità che viene, Torino: Einaudi, 1990: Nuova edizione accrsciuta. Torino: Bollati Boringhieri, 2001. pp.3-4(조르조 아감벤, 『도래하는 공동체』, ***). [본문으로]
  33. Giorgio Agamben, Profanazioni, Roma: Notte tempo, 2005, p.9(조르조 아감벤, 『세속화 예찬』, 난장, ***). [본문으로]
  34. 木村敏, 『臨床哲学講義』, 創元社, 2012년, 7-8, 12-14頁. 살바토레 나톨리도 최근 저서에서 비오스를 영원히 연속된 조에의 분할이자 개별화라고 해석한다(Salvatore Natoli, L’edificazione di sé : Istruzioni sulla vita interiore, Roma-Bari: Laterza, 2010, p.6). [본문으로]
  35. Giorgio Agamben, Bartleby, la formula della creazione, 1993(Agamben, Potentialities, trans. Daniel Heller-Roazen, 1999). [본문으로]
  36. Simone Weil, La Pesanteur et la grâce, 1947[Gravity and Grace, Routledge & Kegan Paul, 1952 ; Routledge Classics 2002]. 에스포지토는 『비정치의 범주』에서 베이유의 ‘탈창조’를 다음처럼 고쳐 읽는데, 거기서는 분명히, 아감벤의 ‘비잠재력’에서 받은 영향을 느낄 수 있다. 이를 테면 ‘탈창조’는 “자기 멸각自己滅却의 창조이며, 창조적인 자기 멸각이다. 혹은 더 일반적으로 말한다면, 활동으로 드러나지 않는 현실태이다. 심지어 ‘현실태’로 해소되지 않는 활동, 또한 ― 이미 말했던 ‘수동적 잠재력’이라는 범주를 따른다면 ― ‘잠재력’인 채로 머무는 활동이라고 해도 좋다”(Roberto Esposito, Categorie dell’impolitico, Bologna: II Mulino. 1988; Nuova ed.. 1999. p.28). [본문으로]
  37. 아감벤과 베유의 숨겨진 관계에 대해서는 최근 몇 명의 젊은 연구자에 의해 지적되고 있다. 가령 다음을 참조. Leland de la Durantaye, Giorgio Agamben: A critical Introduction, Stanford: Stanford University Press. 2009, pp.22-23; Alessia Ricciardi, “From Decreation to Bare Life: Weil, Agamben, and the Impolitical”, Diacritics, 39 (2), 2009, pp.75- 93. [본문으로]
  38. Giorgio Agamben, Altissima povertà : Regole monastiche e forma di vita, Vicenza: Neri Pozza, 2011. [본문으로]
  39. 예를 들어 『근대정치의 탈구축』의 마지막 장 「비인칭의 철학을 향하여」나 『3인칭의 철학』의 2장 「페르소나, 인간, 사물」을 참조. [본문으로]
  40. シモーヌ•ヴューユ, 「人格と聖なるもの」, 中田光雄訳、『シモーヌ•ヴューユ著作集』 第2巻, 春秋社, 1968年, (新装版) 1998年, 443, 447頁. [본문으로]
  41. 에스포지토, 『근대정치의 탈구축』, 272頁. [본문으로]
  42. Esposito, Categorie dell’impolitico, cit, p.XII 이 책에서는 베이유나 바타이유와 더불어, 카프카, 엘리아스 카네티, 헤르만 블로흐, 모리스 블랑쇼 등에 많은 쪽수가 할애되어 있다. [본문으로]
  43. 논고는 니체의 『철학자의 책哲学者の書』의 이탈리아어판 해설로 작성됐다. Massimo Cacciari, “L’impolitico niezschiano”, in Friedrichi Wilhielm Nietzsche, II libro del filsofo, a cura di Marina Beer e Maurizio Ciampa, Roma: Savelli, 1978, pp.103-120. 또한 1970년대부터의 카차리의 주요 논문 9편을 모은 앤솔로지가 영어판으로 2009년에 출판됐는데, 그 제목도 『비정치 : 정치적 이성의 철저한 비판에 대해』이다. Massimo Cacciari, The Unpolitical: On the Radical Critique of Political Reason, translated by Massio Verdicchio, New York: Fordham University Press, 2009. [본문으로]
  44. Roberto Esposito, Communitas: Origine e destino della comunità, Torino: Einaudi. 1998, pp.XII-XXVL. [본문으로]
  45. 이 탈환은 “메시아적인 것의 작동”이라고도 불려진다. Giorgio Agamben, Il Regno e la Gloria: Per una genealogia teologtca dell’economia e del governo (Homo Sacer II, 2), Vicenza: Neri Pozza. 2007, p.272(조르조 아감벤, 『왕국과 영광』, ***). [본문으로]
  46. 예를 들어 다음을 참조. Bernard Stiegler, Prendre soin : De la jeunesse et des générations, Paris: Flammarion, 2008. [본문으로]
  47. Giorgio Agamben, Che cos é un dispositivo?, Nottetempo, 2006(조르조 아감벤, 『장치란 무엇인가?』, ***). 아감벤에게서의 ‘무위’와 ‘신성함’에 관해서는 拙著, 『アガンべン読解』를 참조하기 바란다. [본문으로]
  48. 다음을 참조. Alain Badiou, Logiques des mondes, Paris: Seuil, 2006; 자크 랑시에르, 『불화』, 진태원 옮김, 도서출판 길, ***.; Laurent Dubruil, “Preamble to Apolitics”, Diacritics, 39 (2), 2009, pp.5-20. [본문으로]
Posted by 상겔스 상겔스

** 양창렬씨가 메신저로 정리해 보낸 것을 기초로 이재원씨가 이쁘게, 일목요연하게 재정리한 것을 (이미지는 빼고)그대로 가져온다. http://blog.naver.com/virilio73/80096351868


지난 2008년 4월 5~6일 영국의 켄트대학교에서 국제회의가 열린 적이 있다. 아시는 분들은 이미 다 아시겠지만 그 주제는 이름하여
“오늘날의 이탈리아 사상: 생명정치, 니힐리즘, 제국”(Italian Thought Today: Biopolitics, Nihilism, Empire)이었다. 요컨대 조르조 아감벤(생명정치), 지아니 바티모(니힐리즘), 안토니오 네그(제국) 등 영미국에서 ‘핫’한 아이템으로 떠오른 이탈리아 출신 사상가들에 대한 국제회의였다. 첫 번째 날에 6명, 두 번째 날에 6명, 총 12명이 발표를 했는데 이 중 비이탈리아권 학자는 쉐인 웰러(영국 켄트대학교)와 티모시 머피(미국 오클라호마대학교) 둘뿐이었다. 요컨대 이탈리아 출신의 젊은 학자들이 이 국제회의의 실질적인 토론을 이끈 것. 토론회 분위기가 어땠는지는 모르겠지만, 상징적으로는 그야말로 ‘이탈리아의 침략’(Italian Invasion)이라고 할 만했다. 

이 국제회의의 결과물이 얼마 전 호주의 출판사 re.press에서 <이탈리아적 특이성: 니힐리즘과 생명정치 사이에서>(The Italian Difference: Between Nihilism and Biopolitics)라는 제목으로 나왔다. 한 가지 흥미로운 건 국제회의의 발표자 목록과 이 단행본의 필자 목록이 다르다는 점(이에 대해서는 나중에 살펴보도록 하겠다). 아무튼 이 책이 나온 뒤, 얼마 전인 11월 30일 파리의 고등사범학교에서 “이탈리아와 생명정치”(Italie et biopolitique)라는 주제로 토론회가 열렸다. 일전의 국제회의-단행본 ‘동지들’이 주도한 이날의 토론회 선수들은 로베르토 에스포지토, 로렌조 키에자, 알베르토 토스카노였다. 뉴페이스인 브루노 베사노 역시 이탈리아인으로서 베를린에서 활동 중이다. 에스포지토와 키에자는 도서출판 난장의 필자들이기도 한데다, 일전 국제회의-단행본의 한국어판 출간을 국제회의 준비기간 중인 2008년 2월부터 논의 중이었던지라(논의가 막바지 단계에 왔다) 기록 차원에서 최근의 토론회 내용을 기록해둔다. 아래 내용은 (역시 도서출판 난장의 필자이자 기획위원이기도 한) 파리1대학 박사과정 중의 양창렬 씨가 현장에서 정리한 내용이다(양 특파원, 수고했어요~! ㅎㅎㅎ). 그리고 중간중간 대괄호([  ]) 안의 내용은 창렬씨의 코멘트(혹은 내 나름대로의 추임새) 내용이다. 

[기조발제] 로베르토 에스포지토(Roberto Esposito, 1950~  )

오늘날 이탈리아 사상이 큰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 하지만 이탈리아 사상의 모든 개념이 이탈리아에서 생겨난 건 아니다. 생명정치가 대표적이다. 그것은 미셸 푸코, 더 거슬러 올라가면 프리드리히 니체에게서 연유한 것이다. [그런데 왜 이탈리아와 생명정치인가?] 독일의 해석학, 특히 프랑크푸르트학파의 초기와 현재를 비교해보라. 영향력이 많이 줄었다. 프랑스 철학은 훌륭하지만, 자기-지시적이고, 외부로 열려 있지 않다. 1930년대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 마르틴 하이데거 등의 언어적 전회가 독일, 영국, 프랑스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반면 이탈리아 사상은 이 영향에서 다소 떨어져 있었다. [아마도 이런 상황이 이탈리아에서 생명정치 논의가 활발해질 수 있었던 토대 중 하나였을 것이다.]

프레데릭 봄즈는 최근 저서에서 프랑스 철학의 두 경향, 즉 생명을 중심으로 하는 축(앙리 베르그송, 질 들뢰즈 등)과 수학·단절을 중심으로 하는 축(장 카바예스, 알랭 바디우 등)을 나눴다. 그러나 니콜로 마키아벨리, 지암비스타 비코, 토마소 캄파넬라 등, 이탈리아 사상은 예전부터 ‘삶/생명’과 ‘정치/역사’의 관계, 다시 말해서 삶/생명과 역사/정치의 긴장을 문제 삼았다. 그리고 거기서 삶/생명의 우위를 고민하는 것이 문제였다. 이런 기원 때문에 오늘날 생명정치로의 발전이 쉬웠을 것이다.

 들뢰즈는 영토화 대 탈영토화를 말한 적이 있다. 이탈리아는 다른 유럽의 나라들과는 달리 오랫동안 국민국가가 성립되지 못하고 있었다. 어떤 의미에서 처음부터 이탈리아 사상은 ‘구성적 탈중심화,’ ‘구성적 탈영토화’를 견지했는지 모른다. 이 점에서 다른 국가들의 사상과는 다르다. 또한 이탈리아에서 철학과 정치가 처음부터 이율배반적인 관계에 놓여 있었다. 16~18세기, 최근의 경우 베네데토 크로체, 안토니오 그람시 등 모든 철학자들이 ‘정치’와 맞닥뜨려야 했고, 권력에 대한 저항을 보여줬다.

 

[기조발표 뒤 <이탈리아적 특이성>에 수록된 몇몇 글들 요약]

 

네그리의 존재론은 선형적이고, 지나치게 도발적이다(“이탈리아적 특이성”). 토스카노는 적대의 문제를 다뤘고(“봉기의 연대기: 트론티, 네그리, 그리고 적대의 주체”), 키에자는 바티모, 아감벤, 네그리에게서 나타나는 신학적인 영향을 다뤘다(“조르조 아감벤의 프란체스코파적 존재론”). 예를 들어 아감벤은 최근 오이코노미아의 섭리적 패러다임을 말하고 있고, 심지어 그가 대안으로 말한 ‘세속화’도 결국 신학 용어 아닌가(비록 그것이 신학에서 가치절하됐던 것이라 하더라도)? 파올로 비르노는 인간의 본성에 주목하면서 인격적/인칭적이지 않은 주체성을 탐구하고 있다(“자연-역사적 도식: ‘새로운 글로벌’ 운동과 생물학적 불변항”).

 

 

[발언 1] 로렌조 키에자(Lorenzo Chiesa)

 

피에르 파올로 파졸리니는 오늘날 이탈리아 사유의 선구자라 할 수 있다. 파졸리니는 일찍기 ‘성스러운 삶/생명’을 개념화했다. [이 성스러운 삶/생명과 인구 증가, 그리고 섹슈얼리티의 경제 문제를 가지고 키에사가 파졸리니의 생명정치론을 분석했음. 파졸리니 얘기는 에스포지토도 책에서 하는 모양임. 아감벤과 파솔리니의 관계도 예사롭지 않고, 아무튼 파솔리니에 주목할 필요가 있을 듯.]


아감벤은 생명정치의 계보학을 그리지만 지나치게 회의주의적이다. 반면 에스포지토는 <비오스>에서 파솔리니의 교훈을 따르며 해방에 대한 관심을 보인다. 즉, 긍정적인 생명정치가 가능한가의 문제. 에스포지토가 그 책 후반부에서 니체의 ‘권력의지’를 분석하는 것도 주목해봐야 한다. 
 

 

[발언 2] 알베르토 토스카노(Alberto Toscano)

 
생명정치라는 단어가 오늘날 여러 영역에서 너무 다양하게 쓰이고 있다. 수용소, 안락사, 출생, 나치, 생명/유전공학 등 도처에 생명정치라는 단어가 사용되고 있다. 그람시는 <옥중수고>의 “아메리카니즘”이라는 글에서 노동의 재생산, 노동의 규율 문제를 다뤘다. 이것은 생명정치론으로 확대해서 독해할 수 있는 여지가 있다. 마시모 카치아리는 <아우트아우트>(Aut Aut)에 수록된 글에서 들뢰즈-가타리의 이탈리아 수용 또는 영향력을 비판했다. 들뢰즈-가타리의 ‘생산의 생기론’을 비판한 것이다. 여기에 카치아리는 ‘부정성의 사유’를 맞세웠다. 하지만 카치아리는 푸코가 강조하고자 했던 것, 또는 생명정치론의 다양한 양상을 이해하지 못했던 것 같다. 오늘날 생명정치의 양상은 크게 세 가지이다.

 

(1) 고전적인 입장: 마이클 하트와 안토니오 네그리. 네그리와 하트는 스피노자적인 다중 개념을 쓰고, 프랑스 철학에서 차용한 개념, 테마를 사용한다. 이들의 논의는 맑스주의와 상대적으로 쉽게 양립 가능하다. 예를 들어 네그리는 <정치경제학 비판 요강>(그륀트리세) 독해를 통해 산노동 대 죽은 노동의 적대를 얘기한다던가, 자본에의 실질적 포섭을 중요한 개념으로 제시한다. 이 입장은 "구성 권력의 생명정치"로 요약될 수 있다.

(2) 자연주의적 입장: 파올로 비르노. 비르노는 인간 본성, 능력 개념을 통해 정치를 다시 사유하려 한다. 맑스 이전의 유물론, 특히 포이어바흐의 유물론 등에서 개념을 끌어온다. 이 입장은 ‘인간의 인지적-언어적 능력의 생명정치’로 요약될 수 있다.


(3) 미분적 영성주의: 마우리지오 라자라토. 라자라토는 네그리와는 다소 다르다. 라자라토는 가브리엘 타르드에게서 영향을 받았으며, 그의 입장은 ‘잠재성의 생명정치’라고 할 수 있다.

생명정치 개념이 여러 나라에서 굉장히 상이한 맥락에서 적용되고 있다는 점에서 그 ‘분과학문을 넘어서는 횡단성’을 말할 수 있지만, 동시에 그런 사용의 ‘모호함/중의성’도 주목해야 한다.
 

 

[발언 3] 브루노 베사나(Bruno Besana)

 

[이 친구 발표는 뭔가 내용은 있는 것 같은데, 말이 너무 빠르고 체계적이지 않아서 알아듣기 어려웠음. 이 친구 역시 초반에 철학과 정치의 ‘이접’(disjonction)이 중요하다, <이탈리아적 특이성> 서문에서 이탈리아의 현재 상황에 대한 얘기가 나온다, 이탈리아는 국가의 현전을 숨김없이 전시하면서 규범화를 가속화시키고 있다 등등 애기하면서 카치아리를 비판함. 주요 요지는 카치아리는 바깥에 위치하면서 부정성의 현전만을 주장하므로 어떤 저항도 행위도 불가능하게 만든다는 것.]

 

[집단토론] 에스포지토, 키에자, 토스카노, 베사나, 그리고 청중들

 

에스포지토: 철학에서는 아나크로니즘이 중요하다. 기원과 동시대성, 동시대성과 기원을 함께 놓고 사유하기. 나는 이점에서 아감벤의 주장에 동의한다.

청중 1: 미국, 프랑스 등지에서 생명정치는 사회학이나 구체적 역사 분석에 집중하는 반면, 이탈리아의 경우 생명정치는 철학의 차원에서 심화되고 있다. 이것이 일종의 기여가 아닐까?

키에자: 부정적인 생명정치론, 즉 아감벤의 타나토폴리틱이 있고, 다른 한쪽에는 긍정적 생명정치론, 즉 네그리의 것이 있다. 이 둘 사이에 에스포지토가 위치한다.

토스카노: 네그리의 다중, 아감벤의 난민 등 각 사상가의 ‘사유 스타일’도 그런 차이에 한 몫 하는 듯.

베사나: 네그리에게 사회는 이미 어느 정도 동질적이다. 레닌과 달리 네그리가 보기에 사회 안에는 ‘약한 고리’가 없다. 그렇기 때문에 네그리에게는 ‘카이로스’가 필요한 것이다. 이는 결국 사건적 사유나 메시아주의로 흐르지 않겠는가?

에스포지토한나 아렌트에게 ‘출생’은 생물학적 현상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이었다. 반면 나에게 있어서 그것은 생물학적 현상인 동시에 공동체가 면역화(immunisation)을 획득하는 과정이다. 따라서 출생은 바로 정치적인 함의를 갖는다.

봄즈: 생명정치와 생명권력, 또는 긍정적 생명정치와 부정적 생명정치를 나누는 기준은 무엇인가? 과연 정치 대 생명의 대립으로 그것을 풀 수 있겠는가? 생명정치는 완전히 긍정적이지도, 완전히 부정적이지도 않은 길을 찾아내야 한다. 자크 데리다의 세미나가 최근 <짐승과 주권자>라는 제목으로 출간됐다. 여기서 데리다는 푸코와 아감벤을 비판한다. 내 생각에는 정의(justice) 개념을 도입하는 것이 하나의 기준이 될 것 같다.

에스포지토: 생명에 대한 정치(생명권력)과 생명의 정치(생명정치)를 나누는 것이 중요하다. 내가 생각하는 기준은 ‘법률’과 ‘규범’이다. 법률(jus)은 주체에게 초월적으로 부과되는 것이다. 규범(나는 이 개념을 조르주 캉길렘에게서 끌어오는데)은 주체에 내재적이다. 즉, 부과되는-초월적인 법률과 삶의 내재적 규범이 대립되는 것이다. 나는 얼마 전 콜로키엄에서 데리다 대 아감벤이라는 주제를 다룬 적이 있다. 거기에는 사실 데리다와 푸코 사이의 문제가 있다고 본다. 장-뤽 낭시, 아감벤, 나는 베네치아에서 있었던 어느 저녁 식사자리에서 그 얘기를 했다. 낭시의 말에 따르면 데리다는 푸코가 “철학자가 아니라 역사가다”라고 했다고 한다. 데리다는 말년에 푸코를 넘어서고 싶었던 것 같다.

봄즈: 법률/규범을 각각 초월적/내재적으로 구별하는 것의 기준이 또 필요해지는 것이 아닌가? 또한 규범(화)의 경우에도 정치의 차원에서 출발하는 규범화가 있고, 생명의 차원에서 출발하는 규범화가 있지 않겠는가? 여전히 그 질문은 해결되지 않고 있다.

키에자: 긍정적 생명정치를 판별하는 내재적 기준을 찾는 것이 가장 중요한 문제인 것 같다. 그 기준은 내 생각에 “법률에 대한 삶의 우위”가 아닐까 한다. 아감벤은 삶-의-형태가 ‘법률-의-형태’를 완수시키는 것이라고 말했지만, 여기에는 생기론적 위험이 있다. 더욱이 아감벤이 말하는 삶-의-형태는 비트겐슈타인의 것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생명공학의 [누구? 잘 들리지 않았음]에게 있어서 삶-의-형태라는 단어는 일종의 주인기표 노릇을 했음을 잊어서는 안 된다. (끝)


 

※ 기조발제에서 에스포지토도 언급했고, 집단토론에서도 출몰하는 봄즈(Frédéric Worms, 1964~)는 릴3대학의 교수이자 이번 파리 토론회의 주최단체인 국제현대프랑스철학연구소(Centre international d'étude de la philosophie française contemporaine, CIEPFC)의 책임자이기도 하다(CIEPFC는 바디우가 설립한 단체이다. 공식 블로그에 가면 재미 있는 논문들을 무료로 볼 수 있다). 봄즈의 ‘최근 저서’란 <20세기 프랑스 철학>(La philosophie en France au XXe siecle, Paris: Gallimard, 2008)을 말한다. 총 3부로 구성된 책인데 무려 643쪽이나 된다(도서출판 길에서 나올 예정이라고 한다). 

※※ 봄즈가 언급한 데리다의 세미나 <짐승과 주권자>(La bête et le souverain: Séminaire, vol.1. 2001-2002, Paris: Galilée, 2008) 역시 만만찮은 분량이다. 467쪽. 진작에 영역본도 나왔는데 제목 자체에서 이탈리아 발(發) 생명정치론에 대한 도전의식이 보인다(아감벤이 <호모 사케르>의 한 장을 “추방령과 늑대”에 할애한 것을 상기해보라). 표지는 영역본이 맘에 든다.

 마치 주권자에 대한 ‘짐승의 은유’를 계보학적으로 따져보는 듯한 이 책은 라 퐁텐느의 우화 속 짐승들(특히 “늑대와 양”), 토머스 홉스의 논의에 나오는 성서 속의 바다괴물 리바이어던,  D. H. 로렌스의 시에 나오는 뱀, 장-자크 루소가 <사회계약론>에서 환기시키는 늑대[이리]인간, 그리고 무엇보다 니콜로 마키아벨리의 저 유명한 은유인 ‘여우-군주’의 형상을 통해서 주권자와 짐승의 연관관계를 파헤친다(이런 점에서 이 책은 내게 수전 손택의 <은유로서의 질병>을 떠올리게 만들기도 한다).

 

 

요컨대 군주나 짐승이나 ‘법’에 종속되지 않기는 마찬가지라는 것(군주는 법 위에 군림하며, 짐승은 법 외부에 위치한다). 이런 기본 전제를 통해서 데리다가 푸코와 아감벤을 어떻게 공략하는지가 관전 포인트라고 할 만하다. 프랑스의 경우 데리다의 세미나는 시리즈로 계속 나올 계획이라고 하는데(몇 권이 될지는 며느리도 모른다. 워낙 많은 세미나를 한 양반이라), 국역본 데리다 세미나를 볼 수 있을지는 잘 모르겠다. 아마 <짐승과 주권자>는 많은 출판사들이 관심을 보일 것 같지만 말이다.

 

※※※ <이탈리아적 특이성>에 글이 실리지 않은 런던 국제회의의 참석자들은 앞서 말한 웰러와 머피 말고도 5명이다. 오즈렌 푸포박(얀반에이크아카데미), 마르게리타 파스쿠치(런던대학교/뉴욕대학교), 세르지오 벤베누토(이탈리아과학연구위원회), 안드레아 푸마갈리(파비아대학교), 젤리카 수믹 리하(루블라냐대학교) 등이다. 그러니까 국제회의 참석자 12명 중 7명이 빠지고, 5명(네그리, 피에르 알도 로바티, 루이자 무라로, 마리오 트론티, 파울로 비르노)이 새로 들어와 <이탈리아적 특이성>의 필자는 총 10명이 됐다. 국제회의의 5명이 빠진 이유는 대충 발표논문 제목으로 유추할 수 있다.

1. Ozren Pupovac, “Machiavelli, Negri, Althusser: Encounters and Detours”

2. Margherita Pascucci, “The Real Richness: Politics and the Subject”

3. Sergio Benvenuto, “The Drive Towards the Real: Philosophy in the Epoch of Bio-techno-logies and Bio-politics”

4. Andrea Fumagalli, “Bioeconomy and the Valorisation Process”

5. Jelica Sumic Riha, “Giorgio Agamben's Politics of the Remnant”

 

6. Shane Weller, “The Art and Ethics of Distortion: Heidegger, Derrida, Vattimo”

7. Timothy Murphy, “Pedagogy of the Moltitude: Negri on Stage”

요컨대 빠진 사람들의 발표논문은 ‘이탈리아적 특이성’보다는 그 응용에 좀더 초점이 맞춰진 그런 내용이었던 셈. <이탈리아적 특이성>은 그보다는 오히려 그 특이성의 스펙트럼을 더 다양하게 볼 수 있는 그런 글들이 전면에 배치됐다. 그러니 어떤 점에서 그 국제회의와 <이탈리아적 특이성>은 그야말로 ‘특이한’ 관계를 맺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대로는 아니지만 무관하지도 않은 연결의 끈이 있다고나 할까? 이런 국제회의가 심심찮게 개최되는 현지(!?)가 부러우면서도 배아프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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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olume 36, Number 2, Summer 2006

Special Issue: Bios, Immunity, Life: The Thought of Roberto Esposito
Guest Editor: Timothy Campbell

CONTENTS

    Campbell, Timothy C.
  • Bios, Immunity, Life: The Thought of Roberto Esposito
    [Access article in HTML] [Access article in PDF]
    Subject Headings:
    • Esposito, Roberto, 1950-
    • Biopolitics.
    • Political science -- Philosophy.
    Abstract:

      Intended both as an introduction to the thought of the Italian philosopher Roberto Esposito and as a mapping of current biopolitical practice, this essay traces the contributions and the limits of recent Italian contributions to the discussion of biopolitics. The essay offers a summary of Esposito's insight into the relation of community and immunity and compares his thinking to other philosophers who take immunity as their object of study (particularly Jacques Derrida). Campbell goes on to read Esposito's privileging of bios in the light of Giorgio Agamben's emphasis on zōē, while making reference as well to Antonio Negri and Michael Hardt's understanding of biopower. He concludes by arguing that the stakes of Esposito's analysis for an affirmative biopolitics concern fundamentally the nature of community and its opening to all life forms as bios.

    Esposito, Roberto, 1950-
  • The Immunization Paradigm
    [Access article in HTML] [Access article in PDF]
    Subject Headings:
    • Biopolitics.
    • Political science -- Philosophy.
    Abstract:

      In the following excerpt from Bios, Esposito sketches the template of immunity as a response to what he calls a "hermeneutic block" in Foucault's notion of biopolitics. After singling out those moments of greatest tension in Foucault's reading of biopolitics especially as it relates to Nazi thanatopolitics, Esposito sets out in detail the most important features of what he calls the immunization paradigm. Consisting of three dispositifs, namely sovereignty, property, and liberty, the immunitary paradigm has for Esposito a decisively modern inflection. Indeed modern biopolitics cannot be thought apart from the mode by which communities immunize or protect themselves.

    Campbell, Timothy C.
    Esposito, Roberto, 1950-
  • Interview
    [Access article in HTML] [Access article in PDF]
    Subject Headings:
    • Esposito, Roberto, 1950- -- Interviews.
    • Biopolitics.
    • Political science -- Philosophy.
    Abstract:

      In his first interview to appear in English, Esposito answers a number of questions as they relate to his elaboration of an affirmative biopolitics. He suggests where his own understanding of biopolitics converges and diverges with other contemporary Italian thinkers working on biopolitics, namely Giorgio Agamben and Antonio Negri, and then offers a concise summary of his own work on immunity, especially as it emerges in his Bios: Biopolitics and Philosophy. He concludes the interview with a series of reflections on the meaning of death and birth for Nazism in light of its perverted concept of biopolitics.>

    Donà, Massimo.
  • Immunity and Negation: On Possible Developments of the Theses Outlined in Roberto Esposito's Immunitas
    [Access article in HTML] [Access article in PDF]
    Subject Headings:
    • Esposito, Roberto, 1950- Immunitas: protezione e negazione della vita.
    • Biopolitics.
    • Political science -- Philosophy.
    Abstract:

      What is the relation of risk to negativity? Is it possible to think a notion of the negative that doesn't exclude the other via inclusion? These two questions are at the heart of Massimo Donà's discussion of immunity. Drawing on Roberto Esposito's genealogy of immunity in community, Donà shows how immunity depends upon a paradox of separation that brings the common and the immune closer together. After sketching the relation of immunity to the notion of polemos, Donà argues that the immune subject, by including the other, negates itself so that the other becomes the true self. The essay closes with a series of reflections on how to think negation and immunity together through pregnancy; a negation that affirms a nonsubstitutive or alternative way of being.

    Bonito Oliva, Rossella.
  • From the Immune Community to the Communitarian Immunity: On the Recent Reflections of Roberto Esposito
    [Access article in HTML] [Access article in PDF]
    Subject Headings:
    • Esposito, Roberto, 1950-
    • Biopolitics.
    • Political science -- Philosophy.
    Abstract:

      In this survey of Roberto Esposito's thought, Bonito Oliva reflects upon the stakes of reading biopolitics in an immunitary key. After sketching the features of a "fundamental crisis in the sense of coexistence," the author, moving from ancient to modern philosophy, emphasizes the centrality of fear in Esposito’s understanding of the origins of community. The importance of fear explains in part the intrinsic relation community has to immunity for Esposito, in which immunity is figured primarily as a negative form of community. In the essay's closing pages, the author shows how deeply immunity informs Esposito's understanding of contemporary biopolitics. She goes on to note Esposito's indebtedness to Hegel, especially with regard to the negative, and echoes Esposito’s and Deleuze's own calls for the construction of "an immanent norm of life."

    Dubreuil, Laurent.
  • Leaving Politics: Bios, Zōē, Life
    [Access article in HTML] [Access article in PDF]
    Subject Headings:
    • Esposito, Roberto, 1950- Bíos.
    • Giorgio Agamben. Homo sacer.
    • Biopolitics.
    • Political science -- Philosophy.
    Abstract:

      This article explores the category of biopolitics through the use Roberto Esposito and Giorgio Agamben make of two Greek words, bios and zōē. In particular, I argue that the separation of bios and zōē as introduced in Homo Sacer has no “natural” nor “lingual” relevance. The exposition of such a fabulous antinomy simply ruins the historical matter of Agamben’s discourse on biopolitics. Here, Esposito’s research could be read as an attempt to found the category of biopolitics anew without repeating the fiction of a bifurcation between zōē and bios. However, Esposito, in his own celebration of biopower, undermines the very power of language and, thus, ignores the variation of the invariant that is history. Esposito’s and Agamben’s difficulties lead us back to the possible ambition of all politics to absorb all life, as it was already expressed (and partially displaced) by Aristotle. In this sense, “(post)modern biopolitics” becomes a case study for the totalitarian temptation of political order.

    Giorgi, Gabriel.
    Pinkus, Karen.
  • Zones of Exception: Biopolitical Territories in the Neoliberal Era
    [Access article in HTML] [Access article in PDF]
    Subject Headings:
    • Biopolitics.
    • Marginality, Social.
    • Political science -- Philosophy.
    Abstract:

      “Zones of Exception: Biopolitical Territories of the Neoliberal Era” explores the biopolitical in Roberto Esposito together with the notion of exception in Giorgio Agamben to think diverse scenarios of social, economic, and cultural conflict of the neoliberal era. Focusing on the Argentine piqueteros and the clandestini at the Centers of Temporary Permanence in Italy, we discuss how the economic rationality of neoliberal rule both produces “bare life” and is haunted by its disruption, in ways that neoliberalism can’t fully contain. This dislocation, its paradoxical and unstable nature between bodies and territories, may become the instance of an actual or potential resistance.

    Bazzicalupo, Laura, 1946-
  • The Ambivalences of Biopolitics
    [Access article in HTML] [Access article in PDF]
    Subject Headings:
    • Biopolitics.
    • Political science -- Philosophy.
    Abstract:

      In this essay Laura Bazzicalupo surveys the contemporary biopolitical landscape from the war on terror to biotechnology to migration. Characterizing the biopolitical chiefly as a move from the juridical toward the normalizing, Bazzicalupo both critiques recent neomaterialist theorizations of biopower as vitalist and singles out some currents of feminist thought for their modern, anticommunitarian bias. A discussion of Arendt's analysis of depoliticization is then taken up from the perspective of immunity, one indebted to the thought of Roberto Esposito. She concludes with a spirited defense of aesthesis, which she defines as the creative assimilation of the other and an active reactivity, and an argument in favor of a non-normative ethics capable of resolving some of the most glaring ambivalences of biopolitic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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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상겔스 상겔스

20세기를 해석하기 : 전체주의인가 생명정치인가?

Interpreting the 20th century: totalitarianism or biopolitics?

Text Roberto Esposito Philospher

20th C 3

© Prisma

02th C 2

© Prisma

인간의 생명은 공적인 것과 사적인 것, 자연적인 것과 인위적인 것, 신학적인 것과 정치적인 것을 뒤얽어버리며, 다수성의 어떠한 결정도 끄를 수 없는 방식으로 이것들을 칭칭 동여맨다. 권력 메커니즘에서 생명의 반란은 민주주의의 쇠퇴의 신호탄이며, 적어도 우리가 지금껏 상상했던 민주주의의 그런 형태의 쇠퇴의 신호탄이다.
Human life interweaves the public with the private, the natural with the artificial, the theological with the political, binding them together in such a way that no decision of the majority can undo. The insurrection of life in the mechanisms of power signals the eclipse of democracy, at least of that form of democracy we had imagined up until now.

1. 20세기에 관한 정치적 해석을 향하여. '해석하다'란 무슨 뜻인가? 우리는 이 말에 어떤 유의미성을 부여해야 하는가? 두 개의 상이한 방식, 그리고 어떤 의미에서는 서로 대립된 방식으로 답변할 수 있다. 첫 번째는 고전적 해법이다. 즉 이것은 철학 자체가 제공한 해석적 열쇠와 일치하여 역사적 사실을 독해하는 것으로 이뤄진다. 이것이 20세기의 위대한 철학자들의 실천이었다. 가장 기념비적인 사람들만 이름을 꼽아도 후설, 하이데거, 사르트르 등이 있다. 이것은 역사의 본질을 이해하는 유일한 방식으로 간주되어 왔다. 즉, 이것을 후설은 유럽 학문의 위기와 동일시했고, 하이데거는 니힐리즘의 전개와 동일시했으며, 사르트르는 억압된 인민의 해방과 동일시했다.
1. Towards a political interpretation of the 20th century. What does ‘interpret' mean? What significance should we give it? It is possible to respond in two different, and in some sense opposed ways. The first is the classical solution: this consists of reading historical facts in accordance with an interpretative key provided by philosophy itself. Such was the practice of the great philosophers of the 20th century, Husserl, Heidegger, Sartre, to name only the most celebrated. This was considered to be the only way to understand the essence of history: that which Husserl identified with the crisis of European science, Heidegger with the development of Nihilism and Sartre with the liberation of the oppressed peoples.

어떤 경우든 20세기는 이것에 어떤 의미를 부여하기 위해서, 사건들이 단 하나의 방향으로 전개한 그러한 방식으로 사건들의 순서를 나열하기 위해서 이미 결정된 어떤 철학의 내적 요구에 따라 해석되었다. 그러므로 철학과 역사 사이에 외적인, 그리고 어떤 의미에서는 부과적인 관계가 수립되었다. 철학이 없었더라면 무의미하게 보였을 수도 있는 일련의 사건들에 대해 오로지 철학만이 전반적인 유의미성을 부여할 수 있는 유능한 것으로 치부되었다.
      In any case, the 20th century was interpreted according to the internal demands of a philosophy that was determined to confer on it a sense, and to order events in such a way that they advanced in a single direction. Thus, between philosophy and history an external, and in some sense impositional, relationship was established. Only philosophy was deemed competent to attribute an overall significance to a series of events that would otherwise appear meaningless.

획기적인 분석을 산출했던 이 첫 번째 반응은 이 논리를 억누르거나 무효로 만든 또 다른 반응에 의해서 의문시되거나 논박된다. 이 두번째 반응은 철학과 역사 사이에 상이한 기능적 관계를 수립한다. 이것은 더 이상 역사적 동학을 사유의 이성에 종속시키는 걸 목표로 삼지 않으며, 오히려 어떤 사건들에서 그 자체로 철학적인 요소나 특징들을 발견하는 걸 목표로 삼는다. 그러므로 사건들의 의미는 더 이상 관찰자의 세계관에 따라서, 또는 이들의 철학적 관점에 일치하여 외부로부터 부과되는 것이 아니며, 오히려 이 의미는 사건들 자체로부터 흘러나오는 것처럼 보이거나 사건들을 통해서 스스로를 수립하는 것처럼 보인다. -- 사건들의 새로움, 범위, 또는 효과 때문에. 어쩌면 관점에 있어서의 이러한 변화는 또한 하이데거에서 비트겐슈타인에 이르는 위대한 20세기 촐학자들이, 코제브의 말을 빌리면 한편으로는 '철학의 종언'이라고 서술한 것과 다른 한편으로는 '역사의 종언'이라고 서술한 것에 상응한다. 진정으로 종언에 이르렀던 것은 역사를 철학적 실행의 대상으로서 관찰/고찰하는 방식이었다.
      This first response, which produced epoch-making analyses, is questioned or contested by another which suppresses or revokes its logic. This second response establishes a different functional relationship between philosophy and history, no longer one that aims to subordinate the historical dynamic to the reason of thought, but rather to discover in certain events, elements or characteristics which are in themselves philosophical. Thus, the sense of events is no longer imposed from the outside, according to the point of view, or in accordance with the philosophical perspective of the observer, but rather that this sense appears to flow from the events themselves, or establish itself through them - because of their novelty, scope, or effect. Perhaps this change in viewpoint also corresponds with what the great 20th century philosophers, from Heidegger to Wittgenstein, but taking in Kojève, described as the "end of philosophy", on the one hand, and the "end of history" on the other. What truly did come to an end was a way of observing history as an object of philosophical exercise. One might say that from then on history has no longer been the object of philosophy but rather its subject. In the same way that philosophy ceased to determine the form of history and became instead its content. If we accept that the events of our present are in themselves charged with a certain philosophical weight, then the objective of reflection will no longer consist of attributing to history a sense that matches hypotheses and historical developments, but rather in confronting the significance that was present in the events from the very moment of their inception. But this, be careful, should not be taken to mean that history is provided with a single pre-existing meaning, for this was precisely the pretension of all philosophies of history, no matter whether they were progressive or regressive, ascendant or descendant. Rather, just the opposite, this meaning is that which results from the confrontation and conflict between numerous high density vectors that are in competition with each other. The events with the greatest significance, for example the attack on the Twin Towers, are precisely those that suddenly demolish prior significance, and in an unforeseen way open up a new source of signification. In this radical way the expression that postulates that contemporary history is eminently philosophical becomes comprehensible. I do not mean that history can only be understood in its essence from a philosophical viewpoint and not from other more reductionist ones, such as economics, sociology or political sciences, as Augusto Del Noce sustained  in a precocious and neglected work (A. Del Noce, 1982), but rather that the decisive events, world wars, technological advances, globalisation, terrorism..., are philosophical powers that are struggling to take and dominate the world; that are competing to become the dominant interpretation, that is, the definitive significance. Thus, even more than oil, weapons, or democracy, what is at stake in the present conflict is the metaphysical desire to define the sense of contemporary history.

 
Two interpretative models
2. I shall try to relate these two styles of understanding contemporary history - that which corresponds to the more traditional philosophy of history and that of history as philosophy - with two hermeneutic paradigms which are quite confused and overlapping, and yet end up being radically alternative, in opposition to each other in terms both of their hypotheses and their effects. The two paradigms are totalitarianism and biopolitics. Despite the attempts to bring them together in a framework that makes each the continuation or confirmation of the other, whether it be in the form of a biopolitical totalitarianism or totalitarian biopolitics, they are in fact interpretative models that diverge in terms of logic, and furthermore, are destined to be mutually exclusive, because at heart, even more so than in terms of particular contents, they oppose each other in terms of their postulates regarding the relation between philosophy and history, and in the way in which they conceive the history of and in terms of philosophy.

      In a totalitarian category graphic representation (axis of coordinates), history is inscribed throughout the chronological cycle, though the latter is fractured by a fundamental division between two options, the democratic and the totalitarian. These two succeed or replace each other, alternating over time. The long period of liberal democratic development, during the middle of the last century, was succeeded by another which was totalitarian, in both the west and the east. These were then overcome in two continuations, in 1945 and in 1989 respectively, leading to the victory of the liberal democratic model, which currently holds sway throughout the west. The result is a double historico-philosophical configuration. Modern history, then, is laid out along a single vertical line, at first, ascendant and progressive, and then, from the 1920s onwards, regressive and declining, and finally, in the second half of the century, once more reverting to, or being redirected in, the right direction. This despite the fact that risks of involution are currently appearing, above all in the Islamic world. Yet while the vertical axis is fractured, on the horizontal there appears a profound homogeneity of forms, contents, languages, that seem very different not only from Nazism and Communism, overlapping in a single conceptual block, but also from those of liberalism and democracy, meeting, without too many problems, the demands of a philosophy of history more inclined to assimilation than to differentiation. In fact, in order for the totalitarian paradigm to be attributed to a fairly traditional philosophy of history, constant and contradictory recourse is taken to the category of ‘origin'. It is no coincidence that this word appears in the titles of two of the most important texts: The Origins of Totalitarianism by Arendt (H. Arendt, 1951) and The Origins of Totalitarian Democracy by Talmon (J. L. Talmon, 1952). Note the evident sign of the inherence of this category, ‘totalitarianism', which is claimed to be new, in a highly classical philosophical framework. In all the philosophical essays on totalitarianism, the gaze of the observer searches for the origin, and ends up absorbed in his or her investigation: Where does it come from? What engendered it? What is the seed of all that 20th century totalitarianism has brought to the world?

      In this interrogation about its origins appears the first antinomy of the paradigm as a whole: how to discover the genesis of the totalitarian phenomenon, declared unassimilable to all other forms of government, as Hannah Arendt does, and thus, as a consequence, alien to any genetic sequence of a causal nature? Why search for the origin of something that appears to have no origin? How is it possible to reconcile the discontinuity in principle - the absolute novelty of the totalitarian event - and the continuity in fact, its provenance from an origin?

       There are two possible strategies for responding, and both are typical of the historicist model. The first is that adopted by H. Arendt, which traces the entire western political tradition back to an original loss, that of the Greek polis. In Arendt's theory, this loss produces, in the following period, a depoliticisation that converges into the anti-political deviation of totalitarian domination. The totalitarianism of the 20th century, understood as a dynamic and as a logic that in itself was unitary, ends up appearing to be a result that although not a priori inexorable, did in fact become inevitable when certain conditions or circumstances concurred, in a logic similar to that which leads to modernity as a whole. It is true that for H. Arendt, between the two segments involved there is always an unforeseen acceleration that differentiates those who are connoted, situated on a single line of development, to be hurled in the end into the abysm of Auschwitz and Kolyma. She also sustains, clumsily, that it was Hobbes who "provided political thought with the hypotheses underlying all racial theories" (H. Arendt, 1951).

      On the other hand the path trod by Talmon, and later, though in another way, by François Furet (F. Furet, 1997), is that of searching for the origin of totalitarianism within the democratic tradition itself, which it must oppose. Here totalitarianism is characterised as an illness whose origins lie not in Hobbes or Rousseau, but in the decisive event connoting modernity: the French Revolution. In this way, the paradigm in question ends up locked in a second antinomy, no less important than the first: while the reference to the French Revolution, that is, the most radical experiment in political democratisation, might be valid in terms of explaining communism, how can it also explain Nazism?

      A difficulty, a logical flaw, which not even H. Arendt's great essay can avoid.  This work is divided into two parts: the first, a masterly genealogical reconstruction of Nazi anti-Semitism that goes back to the war years, and the second where she compares Nazism with Stalinist communism, a poorer part, and doubtless influenced by the atmosphere of the incipient Cold War. The reason for this deformity, perhaps related with the closed nature of the Soviet archives, concerns the critical point of the interpretative model as a whole: the difficulty of finding the roots of Soviet communism in the same deviation of a degenerate critical process that transformed the nation-state into colonial imperialism, to the point of the explosion of biological racism that led to Nazism. How to include in one framework, in a single horizon of categories, a hyper-natural conception, like that of the Nazis, with the historicist paroxysm of communism?

      What is the connection, from a philosophical point of view, between a theory of absolute equality - which communism is, at least in principle - and a theory, and even more, a practice of absolute difference, like Nazism?

      A monochrome vision seems to prevail of a single vertical opposition between the period of democracy and the period of totalitarianism regarding the great caesurae, logical categorical and linguistic, that fractured modern history, in which the paradigm of totalitarianism is portrayed as a difficult period of inscrutable complexity. It is not by chance, but precisely because of this logical and historical difficulty, that Arendt's work continues to be a great book about Nazism, just as those of Aron, Talmon and Furet are only books about communism. The reason for the choice - in reality, the necessity - that excludes from the discourse the other pole of the paradigm, as identified by Aron in his essay Democracy and Totalitarianism, is the fact that the interpreter is only interested in those regimes that declare themselves democratic when, on the contrary, they tend to end up being perverse deviations from democracy (R. Aron, 1969). Both Talmon and Furet, though also Gauchet (M. Gauchet, 1976) and Lefort (C. Lefort, 1981), validate this thesis of Aron's: the totalitarianism of the left grows out of a diseased rib of democracy, and not from anything external to it. Further, the totalitarian regime does not come out of a deficit but rather from its opposite, from an excess, from an overabundance of democracy -from a democracy that is so radical, extreme, and absolute, so full of egalitarian substance, that it breaks its own formal limits and implodes, transmuting into its own opposite. Communism, suggests Gauchet, is instituted through a perverse inversion of the democratic model, whose traits it deforms in a ghostly way, but always from the inside, from within the assumptions of the democratic model. There the utopian dream meets the demon of a possessed democracy and they blend in a confused mishmash. At this point, the chain of aporiae of the paradigm of totalitarianism is evident. If communism is not only located within the conceptual horizon of democracy inherited from the French Revolution, but in addition, in some sense takes this to its extreme and only in this way to its dissolution; if it is connected to this revolution in its genesis and in its egalitarian excess, how can the distinction between totalitarianism and democracy, on which the whole of the discourse is built, be sustained? It is possible in the same way that totalitarianism has proved itself capable of transforming itself into the opposite of that which gave birth to it. Secondly, if such an antinomic relation with democracy might be valid for communism, it is not, of course, valid for Nazism, which in a coherent way has been excluded from the analytical schema by all these authors. But in this case, it sits less easily with the very logical consistency of the category of totalitarianism. Already shaky in a historical sense, it also collapses in terms of the philosophical hypotheses from which it appeared to draw its final guarantee.

 
Starting from concrete events
3. Unlike that of totalitarianism, the biopolitical paradigm does not take as its starting point a philosophical hypothesis, of whatever kind of philosophy of history, but rather the concrete events themselves, and not only the facts, but also the effective languages that make them comprehensible. Even more than the analysis of Foucault (cf. M. Foucault, 2008) and the genealogy of Nietzsche, and in particular the latter's deconstruction of the concept of origin - that origin which the theoreticians of totalitarianism were still searching for - it is necessary to change the point of view in order to find a perspective that suits this new way of looking. If there is no unequivocal origin of the historical process, if the latter is not unique, because it duplicates or multiplies itself into many, in such a way that these can no longer be defined as such, as Nietzsche explains in radical contrast with all the forms of philosophical historicism, in such a case, then the historical events of the west will clearly not be reducible to the linearity of the single perspective. The entire interpretation of modernity is then profoundly altered. And as a consequence, all possibilities of a unified reading, of whatever kind, vanish to be replaced by an image divided by horizontal and vertical fault lines that break all postulated continuums. In addition, that reading which in the preceding paradigm was configured as a simple fact - like acquired knowledge - of the singular language of politics, now becomes dilated into a much broader relationship, the result of the meeting, the failure to meet, or the mere juxtaposition, with the lexicons of other disciplines that interact and contaminate each other creating novel effects. The bursting of biological life onto the scene, rather than predisposing modern philosophy as a whole to a single depoliticising deviation - as in Arendt's model - decomposes the scene, reordering it in accordance with different vectors of sense that accumulate or affect each other but without becoming confused or unified into a single direction of flow. The strength of the biopolitical perspective resides, in fact, in its capacity to read this trap and this conflict, this deviation and this implication; the powerfully antinomic result of the cross-fertilisation of languages, such as the political and the biological, which are heterogeneous in their origins. What happens when an ‘outsider', life, bursts into the political sphere shattering its supposed autonomy, displacing the discourse to a terrain that refuses to yield to the traditional terms - democracy, power, ideology - of modern political philosophy?

      The phenomenon of Nazism is situated in this framework, where its radical heterogeneity can also be studied. Without drawing on more recent interpretations, Ernst Nolte, whom no-one can suspect of having leftist sympathies, characterised the theoretical fallacy of situating on the same lexical plane an ideology like communism - in truth, catastrophic in terms of its political consequences - and something like Nazism, which of course cannot in any way be placed in the same category (E. Nolte, 1987). In contrast to what H. Arendt thought, Nazism is not an ‘ideology', because it belongs to a lower dimension and one that is different from those which contain ‘ideas', whence, on the other hand, Marxist communism sprang. Nazism is not a different species within one family, that of the totalitarian, because it lies outside the western tradition, which does however include, like an outlying spur, the philosophy of communism. In contrast to these traditions, unified despite their internal differences by a shared reference to a transcendent universal idea, Nazism elaborates a radically different conception that has no need of legitimating itself with an idea, whatever that idea might be, because its intrinsic foundation is in mere material force. This in its turn is not the product - contingent or necessary - of a history that defines relations between men on the basis of their freely taken decisions or, as the communist doctrine considers, of their social conditions, but rather as a fact that is absolutely natural which corresponds solely to the biological realm. Recognising in Nazism the attempt, the only one of its kind, to liberate the natural features of existence from their historical peculiarity, means overturning Arendt's thesis of the totalitarian juxtaposition of the philosophy of nature with that of history. And, even more so, it means identifying the notion of its unassimilable character as a dead end, and therefore, the philosophical impracticability of the notion of totalitarianism.

      The 20th century, examined from a biopolitical point of view, offers a vision of the complete course of modernity, not determined nor decided by the superficial and contradictory antithesis between totalitarianism and democracy, but rather by that which is much more profound - in that it concerns the conservation of life - between history and nature, between the historicisation of nature and the naturalisation of history. Much more profound, I say, because it cannot refer to a symmetrical bipolarity, for the fact that this nature - understood, as Nazism did, in a biological sense - is not an anti-history, a philosophy or ideology that is opposed to that of history, but rather a non-philosophy and a non-ideology. Not a political philosophy but a political biology, a politics of life and about life, inverted into its opposite, and thus a producer of death. As Levinas wrote in the 1930s, in Nazism "the biological, with all the facility which that involves, becomes much more than an object of spiritual life, it is transformed into its very heart" (E. Levinas, 1996). And this element which is immediately bio, that is, Nazism's politics of death - and not the number of victims, which is smaller than that produced by Stalinist communism - is what makes the category of totalitarianism historically and theoretically unusable.

 
Intensification of the conflict
4. The implosion of the communist system, which brought the Cold War to an end, and the subsequent explosion of terrorism have given rise to the illusion of returning to the old political lexicon that existed prior to the so-called totalitarianisms. However, at present the biopolitical conflict appears to be growing even more intense. From this perspective, the end of World War II does not indicate, either in terms of language or in material practice, the victory of the alliance between democracy and communism, but rather that of a liberalism that forms part of the same biopolitical regime that, falling into its opposite, had given rise to Nazism. I mean that Nazism, in this sense much younger than communism, emerges from the war having been definitively defeated militarily and politically, but not completely in cultural and linguistic terms, since the centrality of the bios as object and subject of politics was reinforced, though metamorphosed into a liberal form, which means that appropriations and possible modifications of the body may be performed not only by the state but also by the individual who is the owner of him/herself. If for Nazism man is merely a body, and nothing more, for liberalism, from Locke onwards, man has his own body, which he possesses and may, therefore, use, transform, or sell as an inner slave. In this sense, liberalism - here I am referring to its conceptual categories - inverts the Nazi perspective, transferring ownership of the body from the state to the individual, but remains within the same biopolitical lexicon. The biopolitical nature of liberalism is precisely what differentiates it from democracy. With an exaggeration that is not wholly unjustified, we might say that the reason why after the so-called totalitarianisms it is not possible to return to democratic liberalism, resides in the fact that the latter has never existed as such. In the same way that we have deconstructed the assimilation of Nazism and communism into the category of totalitarianism, so with the same clarity we might question the notion of democratic liberalism. The ideology of liberalism, in its logic, hypothesis and conceptual language - particular, counter-egalitarian, and on occasions also naturalist - while not the negation of democracy, which tends to universality and egalitarianism, is very different from it, as Carl Schmitt pointed out in a great essay in the 1920s on parliamentarianism and democracy (C. Schmitt, 1923). If we adopt a representation of modernity that is not historicist, in other words, if we reject the idea of a chronological succession between demo-liberal and totalitarian regimes, in favour of a different representation, let's say, genealogic or topological, we see that the true fault line, the conceptually significant discrimination, is not the vertical between totalitarianism and demo-liberalism, but rather the horizontal and transversal, between democracy and communism on the one side - communism as the paroxysmic consummation of democratic egalitarianism - and biopolitics on the other. The latter is divided into two antithetical, though not unconnected, forms, Nazism and liberalism: biopolitics of the state and individual biopolitics.

      In addition, Foucault himself noted the biopolitical nature of liberalism (M. Foucault, 2008), situating it on the plane of governing life, and as such, opposed, or at least a stranger to the universalist procedures of democracy. Democracy, at least that form which proclaimed itself as such, founded on the primacy of abstract laws and the equality of rights of individuals equipped with the powers of reason and free will, came to an end in the 1920s and ‘30s and can no longer be reconstructed, much less exported. If the democratic regime is reduced to merely the presence of more than one party in formal competition and the use of elections to form governing majorities, then such a system can always sustain itself, as has happened recently, with the steady increase in the number of formal democracies in the world. But in this way we lose sight of the radical transformation that has been wrought on democracy, dragging it into a semantic orbit that is proof against all that the concept of democracy itself presupposes. Note: in sustaining this thesis I am not referring to the dysfunctions, defects, limits, or contradictions that are implicit in all political forms of government, necessarily imperfect and incomplete. Rather I am alluding to a profound upheaval within the democratic horizon itself. This can be seen immediately when we shift from the formal to the material plane of the current political regimes. It is true that democracy as such has no ‘contents': it is a technique, a series of norms that set out to distribute power in a way that is proportional to the wishes of the electorate. But it is precisely for this reason that it explodes or implodes when filled with a substance that it cannot contain without transforming itself into a radically different thing.

      It is biological life, both individual and of the population at large, that occupies centre-stage in all significant political decisions. This does not mean that in the confrontation between political forces other options are not being debated regarding international relations, internal order, the model of economic development, definitions of civil rights... However, the explosive element in terms of the traditional democratic framework, consists of the fact that all these options refer, with no mediation whatsoever, to the body of the citizens.

      If we consider that in our own country the proposals that have generated most interest amongst the public are those related to the prohibition of smoking, drug use, road safety, immigration, or artificial insemination, we can appreciate the extent and also the direction of this change of paradigm: the health care model has become not only the privileged object of politics but even the very form of political life; and in addition, of a type of politics whose sole possible source of legitimisation is life. And the only things that move citizens to intervene, or that at least interest them, are matters relating to conservation, the limits or the exclusion of the body itself. Yet here is the decisive point: at the moment in which the living, or dying, body becomes the symbolic and material epicentre of political dynamics and conflicts, we enter a dimension that is not ‘post-‘ or ‘beyond' democracy, as it is often described, but rather decidedly outside it; not only in its procedures but also in its language and conceptual structure. It is always a question of rebelling against a group of equalised subjects precisely for the fact of their being separated from the body itself, that is, considered as pure atoms of logic equipped with rational will. This element of abstraction or stripping bare of the body is echoed in the proposals that aim to set the person at the centre of democratic practice. In these proposals, the word ‘person', in accordance with its original scope, means a disembodied subjectivity, something that is different from the series of impulses, needs and desires brought together in the corporeal dimension (cf. R. Esposito, 2007). When, with the biopolitical change of direction highlighted here, even this corporeal dimension is transformed into a real interlocutor of the government, subject and object at the same time, the principle of equality is called into question, inapplicable as it is to something like bodies, where each is necessarily different from all others, according to criteria that are redefined and modified from time to time. But apart from the principle of equality, a whole series of differences or oppositions are also questioned which are even more fundamental to democracy, the entire political conception of modernity, as well as everything this generates in terms of the public, the private, the cultural and the natural, the juridical, the theological...

      At the moment that the body substitutes or "fills" the abstract subjectivity of the legal recognised person, it becomes difficult, if not impossible, to differentiate what is of the public realm and what is private. And more generally, what belongs to the natural order and what depends on technical intervention, with all the ethical and religious implications the latter brings in its train.

      The reason for this imprecision, and the incorrigible nuisances it occasions, is that human life interweaves the public with the private, the natural with the artificial, the theological with the political, binding them together in such a way that no majority decision can undo. Hence, its centrality is not compatible with the conceptual lexicon of democracy. Contrary to what we might imagine, the insurrection of life into the mechanisms of power signals the eclipse of democracy, at least of that type of democracy we have been able to imagine to date. This does not mean that it is impossible to imagine another type, compatible with the irreversible emergence of biopolitics now underway. But where to look, and how to conceive what a biopolitical democracy or democratic biopolitics might mean today, one capable of working, if not through bodies, at least in favour of them? It is difficult to recommend a defined model. For the moment it is only possible to glimpse it. What is true is that to activate a current of thought in such a direction, it is necessary to divest ourselves of all the old philosophies of history and of all the conceptual paradigms that constantly drag us back to them.


Works cited

H. Arendt, The Origins of Totalitarianism; 1951, Pub. Schocken.

R. Aron, Democracy and Totalitarianism: A Theory of Political Regimes; 1969, Pub. Praeger

A. Del Noce, L'interpretazione transpolitica della storia contemporanea; 1982, Naples, Pub. Guida.

R. Esposito, Terza persona. Politica della vita e filosofia dell'impersonale; 2007, Pub. Einaudi

M. Foucault, Security, Territory and Population; 2007, Pub. Palgrave Macmillan

M. Foucault, The Birth of Biopolitics; 2008, Pub. Palgrave Macmillan

F. Furet, The History of an Illusion; 1997 Pub. The Free Press

M. Gauchet, L'experiénce totalitaire et la pensée de la politique; 1976, in the Journal  "Esprit", Nºs 7 and 8.

C. Lefort, L'invention démocratique. Les limites de la domination totalitaire; 1981,  Paris, Pub.  Fayard.

E. Levinas, Reflections on the Philosophy of Hitlerism; 1990 Critical Inquiry, Vol. 17. Chicago, IL: Chicago University Press

E. Nolte, The European Civil War, 1917-1945: National Socialism and Bolshevism; 1987

C. Schmitt, Die geistesgeschichtliche Lage des heutigen Parlamentarismus; 1923, Munich-Leipzig, Pub. Duncker & Humblot.

J. Talmon, The Origins of Totalitarian Democracy; 1952, Pub. Secker and Warburg.


Posted by 상겔스 상겔스

 http://www.16beavergroup.org/mtarchive/archives/002759print.html


ARTicles

December 28, 2008

Rene -- An interview with Roberto Esposito

Interesting to think about unfolding calamities in Gaza and elsewhere and the notion of immunity that has been investigated by Roberto Esposito. -rg

from diacritics 36.2 (2006) 49-56

Roberto Esposito
Timothy C. Campbell
Translated by Anna Paparcone

Abstract
In his first interview to appear in English, Esposito answers a number of questions as they relate to his elaboration of an affirmative biopolitics. He suggests where his own understanding of biopolitics converges and diverges with other contemporary Italian thinkers working on biopolitics, namely Giorgio Agamben and Antonio Negri, and then offers a concise summary of his own work on immunity, especially as it emerges in his Bios: Biopolitics and Philosophy. He concludes the interview with a series of reflections on the meaning of death and birth for Nazism in light of its perverted concept of biopolitics.>

Timothy Campbell: The theme of biopolitics figures prominently in contemporary thought originating in Italy, especially in the work of Giorgio Agamben, Toni Negri, and your own. What do you think accounts for this recurring interest in bios and politics in Italy, and what distinguishes your discussion of biopolitics from both Agamben's and Negri's?

Roberto Esposito: It's true that Italy, perhaps more than any other country, is the place in which Foucault's reflections on biopolitics, which were left interrupted at the end of the 1970s, have been extended with more breadth and originality (without of course overlooking the important contributions Agnes Heller and Donna Haraway have made). Why? We might begin by observing that Italy is a country on the frontier, not only in a geographic sense, but also culturally, between different worlds, between Europe and the Mediterranean, and between North and South, with all of the richness and contradictions that come with that position. Italy is traversed but also in a certain sense constituted by this fracture, that is, by this sociocultural interval. Perhaps the sensibility to a theme such as biopolitics may be linked to this liminal condition of the border, for biopolitics is also situated at the intersection between apparently different languages such as those of politics and life, of law and of anthropology.

But another observation needs to made, one that touches on something deeper vis-à-vis the long-standing history and vocation of the Italian philosophical tradition. That tradition has always been eminently concerned with the political. If we think only of those Italian authors who are known internationally—from Machiavelli to Vico, to Croce, and to Gramsci—we can say that all of their reflections are placed at the point of encounter and tension between history and politics. Unlike the Anglo-Saxon analytic tradition or, for that matter, German hermeneutics and French deconstruction, the continual problem for Italian philosophy has been thinking the relationship with the present day [contemporaneità], what Foucault would have called "the ontology of actuality," which is to say, an interrogation of the present interpreted in a mostly political key. Thinking especially of Vico or differently of Gramsci, we can say that history and politics have constituted the obligatory point of transition from which and through which the dimension of thought generally has been constituted in Italy.

In addition to a prevailing interest in Italy in political history—or better, in history insofar as it is constituted politically—we ought to add another interest in the horizon of life that is just as strong and original. Authors such as Bruno and Campanella, for example, worked within such a problematic, in a form that often appears to anticipate Spinoza and his diverging position toward the mechanistic and artificial (antinaturalist) direction that modern philosophy follows beginning with Descartes and Hobbes. It is in opposition to the latter (or at least differently from them) that the philosophical reflection developed in the second Italian Renaissance is to be understood. Such a reflection moves in the direction of a comingling of history and nature, between the life of a human being and the life of the world. Perhaps this difference vis-à-vis modern philosophy also plays a role in the [End Page 49] current attention Italian philosophy pays to biopolitics.

As to the relation between my perspective on biopolitics and that of Negri and Agamben, I would say that it is situated not in a median point between them, but is external or indeed nonconcentric to them. Of course a common element is shared by all: for each of us research in biopolitics begins from the point when Foucault's work was interrupted, in the sense that all our investigations attempt to respond to the underlying question with which Foucault ended: what is the nature and meaning of biopolitics? Are we to understand it as a process that is substantially positive, innovative, and productive, or rather as something negative, as a lethal retreat from life? Leaving aside other questions about philosophic language, or the principal assumptions that characterize our different research interests, it seems to me that the difference between Agamben, Negri, and myself will be found in the response to this particular question. Where Agamben accentuates the negative, even tragic tonality of the biopolitical phenomenon in a strongly dehistoricizing modality—one that pays tribute to Heidegger, Schmitt, and Benjamin—Negri, on the contrary, insists on the productive, expansive, or more precisely vital element of the biopolitical dynamic. The reference is explicitly to the line that joins Spinoza to Marx and to Deleuze. Indeed, Negri imagines that biopolitics can contribute to the reconstruction of a revolutionary horizon in the heart of empire, and in so doing, he absolutely accentuates the moment of resistance to power, in opposition to the letter of the Foucauldian text. For my own part, I don't radicalize one of the two semantic polarities of biopolitics to the detriment of the other. Instead I have tried to move the terms of the debate by providing a different interpretive key that is capable of reading them together, while accounting for the antinomical relation between them. All done without renouncing the historical dimension, as Agamben does, and without immediately collapsing the philosophical prospective into a political one, as Negri does. As you know, this hermeneutic key, this different paradigm, is that of immunity.

Campbell: Much of your recent work is dedicated to what you call the immunitary paradigm. Indeed, in your previous works, Communitas, then Immunitas, and now Bios, you read modern political, juridical, and aesthetic categories as essentially marking an attempt to immunize the social body from the dangers of a communal munus. Could you describe in more detail the features of communitas and the kind of relation you're drawing between it and a new form of bios thought outside of the immunitary paradigm?

Esposito: As we know, in biomedical language immunity is understood as a form of exemption [esenzione] or protection in relation to a disease. In juridical language immunity represents a sort of safeguard that places the one who holds it in a condition of untouchability vis-à-vis common law. In both cases, therefore, immunity or immunization alludes to a particular situation that protects [mette in salvo] someone from a risk, a risk to which an entire community is exposed. You can already see the opposition between community and immunity that is the basis of my most recent work. Without wanting to enter too deeply into the merits of complex etymological questions, let's say simply that immunity—or, using its Latin formulation, immunitas—emerges as the contrary or the reverse [rovescio] of communitas. Both words originally derive from the term munus, which in Latin signifies "gift," "office," and "obligation." But the one, communitas, has a positive connotation, while the other, immunitas, is negative. This is why, if the members of a community are characterized by an obligation of gift-giving thanks to the law of the gift and of the care to be exercised toward the other, immunity implies the exemption from or the derogation of such a condition of gift-giving. He is immune who is safe from obligations or dangers that concern everyone else, from the moment that giving something in and of itself implies a diminishment of one's own goods and in the ultimate analysis also [End Page 50] of oneself.

At this point my underlying theses are essentially two. The first is that this immunitary dispositif, that is, this demand for exemption or protection, which originally was only awarded the medical and juridical spheres, was over time extended to all those other sectors and languages of our life, until it becomes the coagulating point, both real and symbolic, of the entire contemporary experience. In my earlier work, Immunitas, I tried to trace the presence of the immunitary paradigm in theology, anthropology, and politics, as well as in law and medicine. Certainly this preoccupation with self-protection doesn't only belong to our own period. All societies, as well as all individuals, have been concerned with assuring their own survival with respect to the risk of environmental or interhuman contamination. But the threshold of knowledge when faced with the risk of contagion (and therefore the kind of response that is required) has been very different over the course of time, until it reaches its apex precisely in our own period.

Here, exactly, is grafted the second thesis: the idea that immunity, which is necessary to protect our life, when brought beyond a certain threshold, winds up negating it. It is for this reason that I subtitled Immunitas "the protection and the negation of life," though clearly one could also say "protection is the negation of life," in the sense that such a protection, when pushed beyond a certain limit, forces life into a sort of prison or armoring in which what we lose is not only freedom, but also the real sense of individual and collective existence. In other words, we lose that social circulation, which is to say that appearing of existence outside of itself that I choose to describe with the word communitas: the constitutively exposed character of existence. Here, then, is the contradiction that I tried to bring to light: what safeguards the individual and political body is also what impedes its development, and beyond a certain point risks destroying it. To use Benjamin's language, we could say that immunization at high doses entails the sacrifice of the living, that is, of every qualified form of life, motivated by simple survival: the reduction of life to its simple biological layer.

The other side of this antinomy, which is to say, the connection between the protection and the negation of life, is implicit in the medical procedure of immunization itself. As is well known, when vaccinating a patient against a disease, one introduces into his or her organism a tolerable amount, which means that in this case the medicine consists of the same poison which the organism needs to protect itself from. It is as if to save someone's life it is necessary to have him or her in some way sample death, injecting the same disease [male] which one wants to safeguard the patient from. In addition the Greek term pharmakon contains within it, as Derrida's classic study shows, the double meaning of "cure" and "poison," poison as cure, the cure that takes place through a poisoning. Today it is as if modern immunitary procedures have led to the maximum intensification of this contradiction. More and more the cure is given in the form of a lethal poison.

Campbell: I had the sense reading Bios that your perspective on the immunitary paradigm has changed since Immunitas, less a means for deconstructing the political and juridical categories of modernity and now seen more as an obstacle for sketching an affirmative biopolitics. What accounts for this change in your perspective, if indeed you agree that such a change has occurred? To return to the question above, do recent events decisively signal a different form of life, or better, a bios, at the center of the global polis?

Esposito: No, I wouldn't say that my perspective on the categories of immunization has changed over time. What has changed, it seems to me, at least in part, is the theoretical framework within which immunization is inscribed. We might say, in fact, that until Communitas, my intention (as well as the general tenor of my discourse) could somehow be assimilated (admitting of course its specific characteristics) to a deconstructionist perspective [End Page 51] applied to the political language of modernity. With regard to this first approach, which appears most evidently and meaningfully in my work on the impolitical [Categorie dell'impolitico], another kind of thought was progressively superimposed, without either excluding or completely substituting for the first. This second movement was more constructive, and moved in the direction of Deleuze's proposition according to which the primary character of philosophy is that of constructing concepts that can keep pace with the events that involve and transform us. The other point of reference in the last few years is that line of inquiry that moves from a Nietzschean genealogy to Foucault's ontology of actuality. It's clear that both these authors and above all the concept of ontology, however we may wish to understand it, bring us to Heidegger, but with an underlying difference that I tried to bring to light in Bios and more so in another text that was just published on the idea of human nature after humanism ["Il post-umano"]. I'm referring to the centrality that the theme of life enjoys in my research, insofar as such a theme is external to or at least marginalized in Heidegger's reflection. We recall that after having thematized it in his own way as "factitious life" in his early years at Freiburg, he then replaced it with the notion of "existence," which was then programmatically removed from a biological semantics. As is well known, despite the attention paid to the daily character of existence, the theme of the body doesn't make another appearance in Heidegger's thought, which is to say that it doesn't reemerge precisely as a biologically defined body.

It is precisely from this perspective on Heidegger that Merleau-Ponty's reflections began to assume greater importance for me, above all when he so clearly distances his thought from the classical phenomenology of the Husserlian sort, exactly through a thematization of the body in its environmental relation with the theme of "flesh." Without delving too much into the question—which was my approach in Bios—it seemed to me that Merleau-Ponty's refrain, especially in the later works, of the chiasmus between body and flesh could be useful for thinking a notion of biopolitics that was in some way positive. For that to be possible, which is to say that a politics of life emerges as thinkable, it's necessary to break the modern relation between biopolitics and immunization. As I've tried to demonstrate in Bios, especially in those sections dedicated to Nazism and its precedents, it was precisely an exasperated immunitary conception of biopolitics that became a form of paroxysmic thanatopolitics, that is, a politics of death. Now, to return to Merleau-Ponty, this immunitary, indeed autoimmunitary closure of biopolitics found its expression precisely in the idea of a body that is closed on itself; this is how the Nazi biocracy conceived of the German people. And of course the organicistic metaphor of the political body has always had a prevalently conservative meaning, until it takes on, with fascist corporativism, basically a reactionary character. It is just this blocked and compacted notion of the body that Merleau-Ponty deconstructs and opens to its outside and to its internal difference. The notion of flesh, first Christian and then phenomenological, when reread today against the backdrop of a twentieth-century artistic avant-garde (I'm thinking of Bacon and Cronenberg), can have a disruptive force. Flesh is the body that doesn't coincide completely with itself (as Nazism wanted, according as well to Levinas's interpretation), that isn't unified beforehand in an organic form, and that is not led by a head (which therefore is acephalous, as Bataille would say). No. Flesh is constitutively plural, multiple, and deformed. It is also from this point of view that one can begin to imagine an affirmative biopolitics.

Campbell: In a series of interviews before his death on the "events" of 9/11 as well as in his earlier contribution to his and Vattimo's collection Religion, Jacques Derrida too speaks of immunity, or better, of autoimmunity, and associates it with the effects of trauma: it is the correlative of a threat that something terrible will happen. You, on the other hand, employ a different perspective when discussing (auto)immunity, one more [End Page 52] indebted to Foucault's appropriation of a biopolitics first set out in Nietzsche. How do you understand "the ordeal of the event" as Derrida describes the events of 9/11 (and now Madrid and London) as marking a global autoimmunity crisis?

Esposito: First, let me begin with a general observation. The fact that some of the most important contemporary authors, working independently from one another and following different paths of thought, came to work on the category of immunization signals just how significant the category is today. From Derrida to Sloterdijk, from Agnes Heller to Donna Haraway, such a conclusion seems fairly clear. Today a philosophy that is capable of thinking its own moment [tempo] cannot avoid engaging with the question of immunization. Furthermore, the paradigm of immunization began to emerge as absolutely decisive even before, beginning with Nietzsche, and then continuing with Plessner and Gehlen's philosophical anthropology, and then to Luhmann, who sees the immunitary system of our society in law, without of course mentioning medicine. Obviously, the problem resides in the mode by which we conceive it and put it forward for examination. For example, both Sloterdijk and Haraway elaborate it, albeit differently, in an essentially positive manner, as something that is able to enrich and develop our experience at various levels. Derrida, rather, gives it a much less optimistic even tragic characterization. More than immunity or immunization, he always speaks of "autoimmunity," beginning with the essay on religion and then in his more recent interventions beginning after September 11. The explicit reference is to so-called autoimmune diseases. The contemporary political situation can indeed be interpreted in the light of a similar destructive and self-destructive process. On this point I am in complete agreement with him. It seems to me as well that the war currently underway is linked doubly with the immunitary paradigm, and that the war constitutes the form of immunity's exasperation, of its being out of control, which results in a sort of "immunitary crisis," in the sense that René Girard gives the expression a sense of "sacrificial crisis." The current conflict appears in fact to have arisen from the pressure created by two opposing and specular immunitary obsessions. I'm speaking of Islamic fundamentalism, which has decided to protect (even to the death) its religious, ethnic, and cultural purity from contamination by Western secularization; and the other found in certain parts of the West, and that is engaged in excluding the rest of the planet from sharing its own surplus of goods, as well as defending itself from the hunger that strikes a large part of the world that is increasingly condemned to forced anorexia. This is not to say that the two sides have the same responsibility or in other words that a homicidal and suicidal terrorism can have any kind of possible justification. However, looking at what is taking place today from a systemic perspective, it seems clear that when these two opposing stimuli are intertwined, the entire world is shaken by a convulsion that has the characteristics of the most devastating autoimmune disease: the excess of defense and the exclusion of those elements that are alien to the organism turn against the organism itself with potentially lethal effects. Not only did the Twin Towers explode, but along with it the immunitary system that had until then supported the world.

From this point of view, therefore, I agree with Derrida. Nevertheless, certain relevant differences remain vis-à-vis the formation of the category of immunity that in Derrida emerge as somewhat extemporaneous, in the sense that immunity is linked neither with the theme of community (which Derrida rejects in favor of the weaker concept, from my point of view, of friendship), nor with that of biopolitics, which is utterly extraneous to his thought. This isolation of the category of immunity, or better of autoimmunity, impedes Derrida from fully grasping the dialectic character of immunity, which is to say that life, be it single or common, would die without an immunitary apparatus. In fact Derrida doesn't treat the long-standing modern character of the immunitary paradigm, which emerges as crushed in the contemporary period. On the other hand, it is precisely the [End Page 53] indissolvable, albeit negative, relation with communitas that opens for me the possibility of a positive, communitarian reconversion of the same immunitary dispositif on which I began working in the final chapter of Immunitas. And that is in the sense indicated by current medical research. Isn't it precisely the immunitary system, what is defined as "immunological tolerance," that carries with it the possibility of organ transplants? Obviously, translating this nonnegative, hospitable notion of a "common immunity" into political or ethical terms isn't at all easy. Yet it is precisely on such a possibility that we have to gamble, just as for biopolitics. Moreover, Derrida also saw autoimmunity as a vital power that reacts against itself and therefore tends to cancel itself out. Today we need to recognize not only the self-destructive aspect of this dialectic, but also those aspects which are potentially creative and productive.

Campbell: To follow up on globalization and the immunitary paradigm, in Bios you explicitly associate a specific moment of immunization with modernization, when individualistic or private models substitute for forms of organization associated with communitas. Is there something radically different today in the autoimmunity crisis you describe that marks a break with the standard periodizations of modernity?

Esposito: If we were to fix a symbolic point of departure for the process of modern immunization, it could probably be found in Hobbes. It's with the advent of his philosophy that the question of an immunitary self-preservation of life encamps in the center of political theory and praxis. As is typical of the negative dialectic of immunization, subjects [sudditi] exchange, in order to protect their lives from the risk of death that is implicit in the community, the sacrifice of all their natural rights to the sovereign. All the political categories that Hobbes and those who follow him employ, that is, sovereignty, property, liberty, are nothing other than the linguistic and conceptual modalities by which the immunitary question of how to safeguard negatively individual and collective life is translated into philosophical/juridical terms. We could conclude that it wasn't modernity that posed the problem of immunization (in relation to the undoing of ancient communitarian practices), but rather that it is immunization that brings modernity into existence, or differently invents modernity as a complex of categories able to solve the problem of safeguarding life. What we call modernity, generally speaking, is nothing other than that language that allowed for more effective responses to be given to a series of requests for self-preservation originating deeply within life itself. Such a request for salvific accounts—consider, for example, that of the social contract—was born and then would become increasingly urgent, when the mechanisms of defense that had up until that moment constituted the shell of symbolic protection began to weaken, beginning with the transcendental perspective linked to a theological matrix. With these natural defenses missing, ones that had been rooted in a common meaning for all, this sort of primitive immunitary shield demanded, in short, a further dispositif, this time an artificial one, that was bound to protect human life from risks that were becoming increasingly unsustainable, such as those caused by civil wars and foreign invasions. Modern man needs a series of immunitary apparatuses that are intended to protect a life that has been completely given over to itself when the secularization of religious meaning takes place. This occurs precisely because man was projected toward the outside in a form that had never been experienced before. Naturally, as is typical of the immunitary dialectic, all of this has a price, which we can measure with the reversal of the original meaning that modern political categories put to the test, beginning with that of liberty.

That said, once this initial moment is established, it's clear that today we are no longer inside the immunitary semantics of the classic modern period. The underlying difference, recognizable in biopolitical terms, resides in the fact that in the classic modern [End Page 54] age the immunitary relationship between politics and the preservation of life was still mediated or filtered by a paradigm of order that was articulated in the concepts of sovereignty, representation, and individual rights. In the second phase (which through various steps takes us to today), however, that mediation diminishes in favor of a more immediate superimposition between politics and life. That's the moment when the immunitary mechanism that had been working until then (at least in the sense of insuring a possible order) begins to turn on itself with more and more destructive effects, given its ultimately continual recourse to create ever more extensive and intensive security-producing [securitari] dispositifs. All of this occurs thanks to a series of causes related to what one commonly refers to as globalization, in the sense that the more human beings (but also ideas, languages, and technologies [le tecniche]) communicate and intersect, the more a preventive immunization is generated as a kind of counterweight. As Derrida emphasizes, the new local enclaves, with their ethno-fundamentalist tendencies, can be explained as the immunitary rejection of that general contamination that is called globalization. It was precisely the fall of the Berlin Wall that produced as a reaction the raising of so many small walls. It is that which is defined as the passage from immunity to autoimmunity, which is to say, an immunity that is destined to destroy itself together with the other. Nazi thanatopolitics as well as more recent phenomena, such as those linked to September 11, can be read in this key. Nevertheless, as I said earlier, the most recent and terrible phase of the autoimmunitary process can also open scenarios never before seen whose parameters we still cannot make out.

Campbell: In your chapter on thanatopolitics in Bios, I was struck by your description of the Nazi extermination of the Jews as having a "homeopathic tonality, " which emerges in your reading as implicit in "a unique logical and semantic chain that links degeneration, regeneration, and genocide." In particular you locate three immunitarian apparatuses that characterize the Nazi thanatopolitics: the normativization of life, the double enclosure of the body, and the anticipatory suppression of life. While recognizing the subtlety of your reading, I have some doubts about such an approach that attempts to inscribe them in the horizon of a contemporary biopolitics. And so: isn't there a real risk in such an approach of removing the historical specificity of the Nazi extermination camps?

Esposito: Yes, such a risk exists. But to a certain degree it's unavoidable in all analyses of Nazism, which always come up against the problem of defining something like genocide, which isn't representable with the usual ethical and political categories and which slips through conceptual language itself. Nevertheless we have to run the risk; otherwise we would consign ourselves either to silence (and to the still greater risk of a loss of memory) or to more traditional analyses. After the first hints in Foucault and then Levinas's illuminating fragment on Hitlerism, Agamben's interventions have also been very good on this theme. As for me, it seemed useful to think about the entire cycle of genos, from birth to death, one in the other.

I have tried to uncover what death meant for Nazism, beginning with a reversed and perverted conception of biopolitics. Not only did Nazism's entire praxis pivot on biopolitics—it was the precipice of a logic that couldn't result in anything other than immense catastrophe—but death for Nazism was also more complicated. It was what they wanted to avoid at all costs in an obsessive search for immortality. It was also the instrument with which they thought to obtain it. Precisely because they were obsessed by an unbearable fear of death, that is, of seeing what they held to be an elect race degenerate into extinction, the Nazis, after attempting to annihilate what seemed to threaten them, transmitted a massive portion of death within the elected race. This is the deadly figure that Nazism's biopolitical dispositif literally assumed: wanting to save the life of the German people at [End Page 55] any cost by protecting it from a contagious, infected part, they came to the point of condemning all of the German people to death, which is what Hitler's last order issued from the barricades makes clear. The Nazis defended themselves from a death to come, the result of an infection produced by inferior races, by going through with a real death. The logical passage that allowed for such a choice to be made was the idea that life that was to destroyed was in reality already condemned to death, a life that death produces and death inhabits. This was the reason that those who spread death did not consider themselves assassins but, rather, impartial judges because they were charged with reestablishing the natural borders between life and death that the mixing of races had erased. In their homicidal madness, they believed that they weren't doing anything other than giving back to death the life that had always belonged to it; a life born dead or a living death.

But if Nazism conceived of death in this way, birth too was seen as ambivalent, an object of both fascination and repulsion, something provocative and at the same time, increasingly, as something to annihilate. Gisela Bock has already noted an underlying incongruence between the destruction of birth practiced by the Nazis and the natalist ideology that always accompanied its being put into practice [see Maternity and Gender Policies]. In fact the Nazi commitment for increasing the birth rate of the German population is well known. Nazism severely prohibited abortion and financially supported families with more than two children. Nazism also saw in the continuing birth of those who had the same blood the unifying thread that kept the German national body identical with itself across generations. If the State is really the body of its inhabitants, as the Nazis believed, and if they in turn are unified in the body of the leader, politics is nothing other than the modality through which birth is held up as the only live political force of history. However, birth, precisely because it is charged with this political value, also becomes the line along which life is separated from itself, breaking into subordinate orders: masters and slaves, human beings [uomini] and animals, and the living and the dead. Birth becomes the object of a sovereign decision that, precisely because it appears to have emerged directly from life itself, proceeds by dividing it beforehand into zones of different value. This is how the Nazi ambivalence toward birth is to be understood: on the one hand, as the exaltation before the fact of a life that is racially perfect; on the other hand, as the removal of the status of the living from those sentenced to death. They could and needed to die since they had never been truly born. Once identified with the German nation, birth suffers the same fate as life, which is also held in a biopolitical grip, and which can only be pried open through a collective death.

Roberto Esposito teaches contemporary philosophy at the Italian Institute for the Human Sciences in Naples, Italy. His Communitas: Origin and Destiny of Community is forthcoming from Stanford University Press and Third Person: Politics of Life and the Philosophy of the Impersonal from Polity.
Timothy Campbell is an associate professor of Italian Studies at Cornell University.


 

Posted by 상겔스 상겔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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