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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양창렬씨가 메신저로 정리해 보낸 것을 기초로 이재원씨가 이쁘게, 일목요연하게 재정리한 것을 (이미지는 빼고)그대로 가져온다. http://blog.naver.com/virilio73/80096351868


지난 2008년 4월 5~6일 영국의 켄트대학교에서 국제회의가 열린 적이 있다. 아시는 분들은 이미 다 아시겠지만 그 주제는 이름하여
“오늘날의 이탈리아 사상: 생명정치, 니힐리즘, 제국”(Italian Thought Today: Biopolitics, Nihilism, Empire)이었다. 요컨대 조르조 아감벤(생명정치), 지아니 바티모(니힐리즘), 안토니오 네그(제국) 등 영미국에서 ‘핫’한 아이템으로 떠오른 이탈리아 출신 사상가들에 대한 국제회의였다. 첫 번째 날에 6명, 두 번째 날에 6명, 총 12명이 발표를 했는데 이 중 비이탈리아권 학자는 쉐인 웰러(영국 켄트대학교)와 티모시 머피(미국 오클라호마대학교) 둘뿐이었다. 요컨대 이탈리아 출신의 젊은 학자들이 이 국제회의의 실질적인 토론을 이끈 것. 토론회 분위기가 어땠는지는 모르겠지만, 상징적으로는 그야말로 ‘이탈리아의 침략’(Italian Invasion)이라고 할 만했다. 

이 국제회의의 결과물이 얼마 전 호주의 출판사 re.press에서 <이탈리아적 특이성: 니힐리즘과 생명정치 사이에서>(The Italian Difference: Between Nihilism and Biopolitics)라는 제목으로 나왔다. 한 가지 흥미로운 건 국제회의의 발표자 목록과 이 단행본의 필자 목록이 다르다는 점(이에 대해서는 나중에 살펴보도록 하겠다). 아무튼 이 책이 나온 뒤, 얼마 전인 11월 30일 파리의 고등사범학교에서 “이탈리아와 생명정치”(Italie et biopolitique)라는 주제로 토론회가 열렸다. 일전의 국제회의-단행본 ‘동지들’이 주도한 이날의 토론회 선수들은 로베르토 에스포지토, 로렌조 키에자, 알베르토 토스카노였다. 뉴페이스인 브루노 베사노 역시 이탈리아인으로서 베를린에서 활동 중이다. 에스포지토와 키에자는 도서출판 난장의 필자들이기도 한데다, 일전 국제회의-단행본의 한국어판 출간을 국제회의 준비기간 중인 2008년 2월부터 논의 중이었던지라(논의가 막바지 단계에 왔다) 기록 차원에서 최근의 토론회 내용을 기록해둔다. 아래 내용은 (역시 도서출판 난장의 필자이자 기획위원이기도 한) 파리1대학 박사과정 중의 양창렬 씨가 현장에서 정리한 내용이다(양 특파원, 수고했어요~! ㅎㅎㅎ). 그리고 중간중간 대괄호([  ]) 안의 내용은 창렬씨의 코멘트(혹은 내 나름대로의 추임새) 내용이다. 

[기조발제] 로베르토 에스포지토(Roberto Esposito, 1950~  )

오늘날 이탈리아 사상이 큰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 하지만 이탈리아 사상의 모든 개념이 이탈리아에서 생겨난 건 아니다. 생명정치가 대표적이다. 그것은 미셸 푸코, 더 거슬러 올라가면 프리드리히 니체에게서 연유한 것이다. [그런데 왜 이탈리아와 생명정치인가?] 독일의 해석학, 특히 프랑크푸르트학파의 초기와 현재를 비교해보라. 영향력이 많이 줄었다. 프랑스 철학은 훌륭하지만, 자기-지시적이고, 외부로 열려 있지 않다. 1930년대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 마르틴 하이데거 등의 언어적 전회가 독일, 영국, 프랑스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반면 이탈리아 사상은 이 영향에서 다소 떨어져 있었다. [아마도 이런 상황이 이탈리아에서 생명정치 논의가 활발해질 수 있었던 토대 중 하나였을 것이다.]

프레데릭 봄즈는 최근 저서에서 프랑스 철학의 두 경향, 즉 생명을 중심으로 하는 축(앙리 베르그송, 질 들뢰즈 등)과 수학·단절을 중심으로 하는 축(장 카바예스, 알랭 바디우 등)을 나눴다. 그러나 니콜로 마키아벨리, 지암비스타 비코, 토마소 캄파넬라 등, 이탈리아 사상은 예전부터 ‘삶/생명’과 ‘정치/역사’의 관계, 다시 말해서 삶/생명과 역사/정치의 긴장을 문제 삼았다. 그리고 거기서 삶/생명의 우위를 고민하는 것이 문제였다. 이런 기원 때문에 오늘날 생명정치로의 발전이 쉬웠을 것이다.

 들뢰즈는 영토화 대 탈영토화를 말한 적이 있다. 이탈리아는 다른 유럽의 나라들과는 달리 오랫동안 국민국가가 성립되지 못하고 있었다. 어떤 의미에서 처음부터 이탈리아 사상은 ‘구성적 탈중심화,’ ‘구성적 탈영토화’를 견지했는지 모른다. 이 점에서 다른 국가들의 사상과는 다르다. 또한 이탈리아에서 철학과 정치가 처음부터 이율배반적인 관계에 놓여 있었다. 16~18세기, 최근의 경우 베네데토 크로체, 안토니오 그람시 등 모든 철학자들이 ‘정치’와 맞닥뜨려야 했고, 권력에 대한 저항을 보여줬다.

 

[기조발표 뒤 <이탈리아적 특이성>에 수록된 몇몇 글들 요약]

 

네그리의 존재론은 선형적이고, 지나치게 도발적이다(“이탈리아적 특이성”). 토스카노는 적대의 문제를 다뤘고(“봉기의 연대기: 트론티, 네그리, 그리고 적대의 주체”), 키에자는 바티모, 아감벤, 네그리에게서 나타나는 신학적인 영향을 다뤘다(“조르조 아감벤의 프란체스코파적 존재론”). 예를 들어 아감벤은 최근 오이코노미아의 섭리적 패러다임을 말하고 있고, 심지어 그가 대안으로 말한 ‘세속화’도 결국 신학 용어 아닌가(비록 그것이 신학에서 가치절하됐던 것이라 하더라도)? 파올로 비르노는 인간의 본성에 주목하면서 인격적/인칭적이지 않은 주체성을 탐구하고 있다(“자연-역사적 도식: ‘새로운 글로벌’ 운동과 생물학적 불변항”).

 

 

[발언 1] 로렌조 키에자(Lorenzo Chiesa)

 

피에르 파올로 파졸리니는 오늘날 이탈리아 사유의 선구자라 할 수 있다. 파졸리니는 일찍기 ‘성스러운 삶/생명’을 개념화했다. [이 성스러운 삶/생명과 인구 증가, 그리고 섹슈얼리티의 경제 문제를 가지고 키에사가 파졸리니의 생명정치론을 분석했음. 파졸리니 얘기는 에스포지토도 책에서 하는 모양임. 아감벤과 파솔리니의 관계도 예사롭지 않고, 아무튼 파솔리니에 주목할 필요가 있을 듯.]


아감벤은 생명정치의 계보학을 그리지만 지나치게 회의주의적이다. 반면 에스포지토는 <비오스>에서 파솔리니의 교훈을 따르며 해방에 대한 관심을 보인다. 즉, 긍정적인 생명정치가 가능한가의 문제. 에스포지토가 그 책 후반부에서 니체의 ‘권력의지’를 분석하는 것도 주목해봐야 한다. 
 

 

[발언 2] 알베르토 토스카노(Alberto Toscano)

 
생명정치라는 단어가 오늘날 여러 영역에서 너무 다양하게 쓰이고 있다. 수용소, 안락사, 출생, 나치, 생명/유전공학 등 도처에 생명정치라는 단어가 사용되고 있다. 그람시는 <옥중수고>의 “아메리카니즘”이라는 글에서 노동의 재생산, 노동의 규율 문제를 다뤘다. 이것은 생명정치론으로 확대해서 독해할 수 있는 여지가 있다. 마시모 카치아리는 <아우트아우트>(Aut Aut)에 수록된 글에서 들뢰즈-가타리의 이탈리아 수용 또는 영향력을 비판했다. 들뢰즈-가타리의 ‘생산의 생기론’을 비판한 것이다. 여기에 카치아리는 ‘부정성의 사유’를 맞세웠다. 하지만 카치아리는 푸코가 강조하고자 했던 것, 또는 생명정치론의 다양한 양상을 이해하지 못했던 것 같다. 오늘날 생명정치의 양상은 크게 세 가지이다.

 

(1) 고전적인 입장: 마이클 하트와 안토니오 네그리. 네그리와 하트는 스피노자적인 다중 개념을 쓰고, 프랑스 철학에서 차용한 개념, 테마를 사용한다. 이들의 논의는 맑스주의와 상대적으로 쉽게 양립 가능하다. 예를 들어 네그리는 <정치경제학 비판 요강>(그륀트리세) 독해를 통해 산노동 대 죽은 노동의 적대를 얘기한다던가, 자본에의 실질적 포섭을 중요한 개념으로 제시한다. 이 입장은 "구성 권력의 생명정치"로 요약될 수 있다.

(2) 자연주의적 입장: 파올로 비르노. 비르노는 인간 본성, 능력 개념을 통해 정치를 다시 사유하려 한다. 맑스 이전의 유물론, 특히 포이어바흐의 유물론 등에서 개념을 끌어온다. 이 입장은 ‘인간의 인지적-언어적 능력의 생명정치’로 요약될 수 있다.


(3) 미분적 영성주의: 마우리지오 라자라토. 라자라토는 네그리와는 다소 다르다. 라자라토는 가브리엘 타르드에게서 영향을 받았으며, 그의 입장은 ‘잠재성의 생명정치’라고 할 수 있다.

생명정치 개념이 여러 나라에서 굉장히 상이한 맥락에서 적용되고 있다는 점에서 그 ‘분과학문을 넘어서는 횡단성’을 말할 수 있지만, 동시에 그런 사용의 ‘모호함/중의성’도 주목해야 한다.
 

 

[발언 3] 브루노 베사나(Bruno Besana)

 

[이 친구 발표는 뭔가 내용은 있는 것 같은데, 말이 너무 빠르고 체계적이지 않아서 알아듣기 어려웠음. 이 친구 역시 초반에 철학과 정치의 ‘이접’(disjonction)이 중요하다, <이탈리아적 특이성> 서문에서 이탈리아의 현재 상황에 대한 얘기가 나온다, 이탈리아는 국가의 현전을 숨김없이 전시하면서 규범화를 가속화시키고 있다 등등 애기하면서 카치아리를 비판함. 주요 요지는 카치아리는 바깥에 위치하면서 부정성의 현전만을 주장하므로 어떤 저항도 행위도 불가능하게 만든다는 것.]

 

[집단토론] 에스포지토, 키에자, 토스카노, 베사나, 그리고 청중들

 

에스포지토: 철학에서는 아나크로니즘이 중요하다. 기원과 동시대성, 동시대성과 기원을 함께 놓고 사유하기. 나는 이점에서 아감벤의 주장에 동의한다.

청중 1: 미국, 프랑스 등지에서 생명정치는 사회학이나 구체적 역사 분석에 집중하는 반면, 이탈리아의 경우 생명정치는 철학의 차원에서 심화되고 있다. 이것이 일종의 기여가 아닐까?

키에자: 부정적인 생명정치론, 즉 아감벤의 타나토폴리틱이 있고, 다른 한쪽에는 긍정적 생명정치론, 즉 네그리의 것이 있다. 이 둘 사이에 에스포지토가 위치한다.

토스카노: 네그리의 다중, 아감벤의 난민 등 각 사상가의 ‘사유 스타일’도 그런 차이에 한 몫 하는 듯.

베사나: 네그리에게 사회는 이미 어느 정도 동질적이다. 레닌과 달리 네그리가 보기에 사회 안에는 ‘약한 고리’가 없다. 그렇기 때문에 네그리에게는 ‘카이로스’가 필요한 것이다. 이는 결국 사건적 사유나 메시아주의로 흐르지 않겠는가?

에스포지토한나 아렌트에게 ‘출생’은 생물학적 현상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이었다. 반면 나에게 있어서 그것은 생물학적 현상인 동시에 공동체가 면역화(immunisation)을 획득하는 과정이다. 따라서 출생은 바로 정치적인 함의를 갖는다.

봄즈: 생명정치와 생명권력, 또는 긍정적 생명정치와 부정적 생명정치를 나누는 기준은 무엇인가? 과연 정치 대 생명의 대립으로 그것을 풀 수 있겠는가? 생명정치는 완전히 긍정적이지도, 완전히 부정적이지도 않은 길을 찾아내야 한다. 자크 데리다의 세미나가 최근 <짐승과 주권자>라는 제목으로 출간됐다. 여기서 데리다는 푸코와 아감벤을 비판한다. 내 생각에는 정의(justice) 개념을 도입하는 것이 하나의 기준이 될 것 같다.

에스포지토: 생명에 대한 정치(생명권력)과 생명의 정치(생명정치)를 나누는 것이 중요하다. 내가 생각하는 기준은 ‘법률’과 ‘규범’이다. 법률(jus)은 주체에게 초월적으로 부과되는 것이다. 규범(나는 이 개념을 조르주 캉길렘에게서 끌어오는데)은 주체에 내재적이다. 즉, 부과되는-초월적인 법률과 삶의 내재적 규범이 대립되는 것이다. 나는 얼마 전 콜로키엄에서 데리다 대 아감벤이라는 주제를 다룬 적이 있다. 거기에는 사실 데리다와 푸코 사이의 문제가 있다고 본다. 장-뤽 낭시, 아감벤, 나는 베네치아에서 있었던 어느 저녁 식사자리에서 그 얘기를 했다. 낭시의 말에 따르면 데리다는 푸코가 “철학자가 아니라 역사가다”라고 했다고 한다. 데리다는 말년에 푸코를 넘어서고 싶었던 것 같다.

봄즈: 법률/규범을 각각 초월적/내재적으로 구별하는 것의 기준이 또 필요해지는 것이 아닌가? 또한 규범(화)의 경우에도 정치의 차원에서 출발하는 규범화가 있고, 생명의 차원에서 출발하는 규범화가 있지 않겠는가? 여전히 그 질문은 해결되지 않고 있다.

키에자: 긍정적 생명정치를 판별하는 내재적 기준을 찾는 것이 가장 중요한 문제인 것 같다. 그 기준은 내 생각에 “법률에 대한 삶의 우위”가 아닐까 한다. 아감벤은 삶-의-형태가 ‘법률-의-형태’를 완수시키는 것이라고 말했지만, 여기에는 생기론적 위험이 있다. 더욱이 아감벤이 말하는 삶-의-형태는 비트겐슈타인의 것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생명공학의 [누구? 잘 들리지 않았음]에게 있어서 삶-의-형태라는 단어는 일종의 주인기표 노릇을 했음을 잊어서는 안 된다. (끝)


 

※ 기조발제에서 에스포지토도 언급했고, 집단토론에서도 출몰하는 봄즈(Frédéric Worms, 1964~)는 릴3대학의 교수이자 이번 파리 토론회의 주최단체인 국제현대프랑스철학연구소(Centre international d'étude de la philosophie française contemporaine, CIEPFC)의 책임자이기도 하다(CIEPFC는 바디우가 설립한 단체이다. 공식 블로그에 가면 재미 있는 논문들을 무료로 볼 수 있다). 봄즈의 ‘최근 저서’란 <20세기 프랑스 철학>(La philosophie en France au XXe siecle, Paris: Gallimard, 2008)을 말한다. 총 3부로 구성된 책인데 무려 643쪽이나 된다(도서출판 길에서 나올 예정이라고 한다). 

※※ 봄즈가 언급한 데리다의 세미나 <짐승과 주권자>(La bête et le souverain: Séminaire, vol.1. 2001-2002, Paris: Galilée, 2008) 역시 만만찮은 분량이다. 467쪽. 진작에 영역본도 나왔는데 제목 자체에서 이탈리아 발(發) 생명정치론에 대한 도전의식이 보인다(아감벤이 <호모 사케르>의 한 장을 “추방령과 늑대”에 할애한 것을 상기해보라). 표지는 영역본이 맘에 든다.

 마치 주권자에 대한 ‘짐승의 은유’를 계보학적으로 따져보는 듯한 이 책은 라 퐁텐느의 우화 속 짐승들(특히 “늑대와 양”), 토머스 홉스의 논의에 나오는 성서 속의 바다괴물 리바이어던,  D. H. 로렌스의 시에 나오는 뱀, 장-자크 루소가 <사회계약론>에서 환기시키는 늑대[이리]인간, 그리고 무엇보다 니콜로 마키아벨리의 저 유명한 은유인 ‘여우-군주’의 형상을 통해서 주권자와 짐승의 연관관계를 파헤친다(이런 점에서 이 책은 내게 수전 손택의 <은유로서의 질병>을 떠올리게 만들기도 한다).

 

 

요컨대 군주나 짐승이나 ‘법’에 종속되지 않기는 마찬가지라는 것(군주는 법 위에 군림하며, 짐승은 법 외부에 위치한다). 이런 기본 전제를 통해서 데리다가 푸코와 아감벤을 어떻게 공략하는지가 관전 포인트라고 할 만하다. 프랑스의 경우 데리다의 세미나는 시리즈로 계속 나올 계획이라고 하는데(몇 권이 될지는 며느리도 모른다. 워낙 많은 세미나를 한 양반이라), 국역본 데리다 세미나를 볼 수 있을지는 잘 모르겠다. 아마 <짐승과 주권자>는 많은 출판사들이 관심을 보일 것 같지만 말이다.

 

※※※ <이탈리아적 특이성>에 글이 실리지 않은 런던 국제회의의 참석자들은 앞서 말한 웰러와 머피 말고도 5명이다. 오즈렌 푸포박(얀반에이크아카데미), 마르게리타 파스쿠치(런던대학교/뉴욕대학교), 세르지오 벤베누토(이탈리아과학연구위원회), 안드레아 푸마갈리(파비아대학교), 젤리카 수믹 리하(루블라냐대학교) 등이다. 그러니까 국제회의 참석자 12명 중 7명이 빠지고, 5명(네그리, 피에르 알도 로바티, 루이자 무라로, 마리오 트론티, 파울로 비르노)이 새로 들어와 <이탈리아적 특이성>의 필자는 총 10명이 됐다. 국제회의의 5명이 빠진 이유는 대충 발표논문 제목으로 유추할 수 있다.

1. Ozren Pupovac, “Machiavelli, Negri, Althusser: Encounters and Detours”

2. Margherita Pascucci, “The Real Richness: Politics and the Subject”

3. Sergio Benvenuto, “The Drive Towards the Real: Philosophy in the Epoch of Bio-techno-logies and Bio-politics”

4. Andrea Fumagalli, “Bioeconomy and the Valorisation Process”

5. Jelica Sumic Riha, “Giorgio Agamben's Politics of the Remnant”

 

6. Shane Weller, “The Art and Ethics of Distortion: Heidegger, Derrida, Vattimo”

7. Timothy Murphy, “Pedagogy of the Moltitude: Negri on Stage”

요컨대 빠진 사람들의 발표논문은 ‘이탈리아적 특이성’보다는 그 응용에 좀더 초점이 맞춰진 그런 내용이었던 셈. <이탈리아적 특이성>은 그보다는 오히려 그 특이성의 스펙트럼을 더 다양하게 볼 수 있는 그런 글들이 전면에 배치됐다. 그러니 어떤 점에서 그 국제회의와 <이탈리아적 특이성>은 그야말로 ‘특이한’ 관계를 맺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대로는 아니지만 무관하지도 않은 연결의 끈이 있다고나 할까? 이런 국제회의가 심심찮게 개최되는 현지(!?)가 부러우면서도 배아프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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