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래할 생명권력론을 위해


사상, 2013년 2

2부 2장. 

인간과 동물의 문턱

조르조 아감벤에게서의 생명 개념 

히가키 타츠(槍垣立哉)

들어가며

생명정치의 장래를 향해 무엇을 써야 할까? 후기 푸코로 거슬러 올라가는 관리[통제]사회의 문제들, 즉 개인의 자유의지가 이미 문제거리조차도 안 되는 비참한 삶을 톺아내고, 거기서 희미하게 뭔가의 전망을 찾아내야 할까? 들뢰즈=가타리가 물론 어둠을 간직하면서도 보다 분명하게 미래의 생명을 그려냈듯이, 현재의 인간이나 그 사회의 해체를 함의하기도 하는 생명의 밝음을 부각시켜야 할까? 생명정치학의 개념이, 항상 이런 양면을 갖추고 있는 것은 사실일 것이다. 원래 미래가 어두운 것인가, 밝은 것인가라는 물음 자체가 무의미하기도 하다. 미래를 살아가는 것은 나도 아니고 우리도 아니다. 미래에서 그 가치를 판단하는 것은 지금 여기를 살아가고 있는 이 삶이 아니다. 미래라고 하면서 뭔가가 말해질 때, 나나 우리는 그것을 가치 판단할 능력을 전혀 가질 수 없다.

그런 물음에서 시작하지 않아도 좋을지도 모른다. 혹은 그런 몽상 같은 철학자의 말은 생명정치학이 현실적인 정치의 물음과 연관되는 한, 아무 쓸모도 없다고 생각될지도 모른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 인간의 신체와 생명을, 그 자연사적 깊이를 지닌 시계(視界)에서 재파악하는 것, 말하자면 법, 제도, 윤리, 말 등을 고작 2000년부터 3000년 정도로만 거슬러 올라갈 수 있을 뿐인 근원을 훨씬 뛰어넘어, 더욱 멀리 생명 자체에 뿌리를 내려 파악하려고 시도하는 것, 이것이 바로 생명정치학의 독자성 그 자체를 이루는 것이 아닐까?

이런 방향성에서 생명정치학의 광대함을 확실하게 파악하고 있는 사상가가 이탈리아의 조르조 아감벤이다. 아감벤이 세계적 사상의 무대에 등장한 것은 20세기도 끝나갈 무렵이다. 아우슈비츠의 남은 것(1998)호모 사케르 : 주권권력과 벌거벗은 생명(1995)이라는, 푸코의 생명정치학을 이어받아 쓴 작품군과, 거기서 제시된 벌거벗은 생명(la nuda vita)’이라는 개념은, 세간의 큰 주목을 받았다. 하지만 아감벤의 저작의 전모가 알려짐에 따라, 그와 생명정치학 자체의 관련이 결코 단순한 것은 아니라는 것이 여러 가지 논점에서 분명해졌다(일본에서는 우에무라 타다오(上村忠男), 오카다 아츠시(岡田温司), 다카쿠와 가즈미(高桑和巳) 등에 의한 이탈리아어로부터의 빼어난 번역과 해설이 극히 중요한 역할을 맡았다. 이탈리아라는, 철학지리학에서는 변방적인 사상가의 논의가, 프랑스 및 미국과 거의 동시에 일본에 영향을 주었던 속도성에서도, 위의 번역자들의 작업은 돋보이는 것이라 할 수 있다). 특히 거기서 감안되어야 할 것은 아우슈비츠의 남은 것호모 사케르만으로는 헤아릴 수 없는, 그의 고전적 소양의 광대함과, 종교나 법에 관련된 지식의 풍성함이다. , 하이데거의 세미나에 참석하면서도 벤야민을 애호하고(시대를 공유하는 이 두 사람의 사유는, 상식적으로는 거의 양립할 수 없을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도 기독교 역사도 곱씹으면서, 현재적인 정치의 논의에도 깊이 헤집고 들어가는, 그 독특한 사유법 자체이다(벤야민이 말하는 이질적인 것과의 접합이야말로 그의 모토인 듯하다).

확실히 오카다 아츠시가 아감벤의 종교신학을 강조하듯이,[각주:1] 특히 금세기에 양산된 작품군(세속화 예찬(2005), 왕국과 영광(2007), 벌거벗음(2010))은 생명정치라기보다는 종교성과의 연관이 매우 깊다. 그 때문에 아감벤을 생명정치학의 개념만으로 파악하는 것은 부당하다고 생각될지도 모른다. 철학의 영역에 한정해도, 푸코나 들뢰즈를 언급하는 논의는 어느 일정한 시기에 이뤄진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래도 굳이 아감벤의 논의를 생명정치학의 관점에서 독해하는 것은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우선 그가 주장하는 벌거벗은 생명이나 잠재력(potenza)’이라는 개념이 설령 우연의 결과일지라도 푸코나 들뢰즈가 논하는 유사 개념에 매우 접근하기 때문이다. 전자는 벤야민의 폭력비판론에서 (그것도 벤야민의 텍스트를 읽는 한 상당히 미묘한 논맥에서) 끌어낸 용어이다. 그래도 아감벤의 독창성은 벌거벗은이라는 개념을, 생물적 신체가 정치적 과제이게 되는 푸코의 논의와 관련시키고 벤야민적 논맥으로부터는 벗어난 의미를 끄집어냈던 것에 있다. ‘잠재력에 관해 말하면, 아감벤의 고찰의 원천은, 일관되게 아리스토텔레스적인 뒤나미스 분석에 있다. 그러나 이것도 잠재성(virtualité)을 논하는 들뢰즈와, 스피노자를 매개로 맺어지고 생명을 그러내는 주요한 위상에 놓인다. 양자 모두와 더불어, ‘생명신체를 사고하는 키워드 자체로서, 아감벤에 의해 강하게 부각되는 것이다.

 

하지만 동시에 아감벤은 푸코와도 들뢰즈와도 다른 생명정치학을 전개하고 있기도 하다. 그것은 법이나 말에 강하게 천착하는 데에서도 간파할 수 있다.

말할 것도 없지만, 아감벤은 생명정치학을 탐구하는 데 있어서 법과 언어를 중시한 논의를 펼친다. 그것은 푸코가 기본적으로 정신분석 비판을 염두에 두면서, 혹은 들뢰즈(들뢰즈=가타리)가 시니피앙 중심주의적 언어론에 대한 반발로부터 생명 개념과 그 질료성에 시선을 돌렸던 것과는 명확하게 대조적인 자세라고도 할 수 있다. 그러나 거기서 아감벤은 푸코 등이 비판했던 정신분석이나 법이라는 초월성을 회복시키는 것이 결코 아니다. 그는 생명에 파묻혀 있는 법이나 언어, 달리 말하면 생명을 반사하고 생명으로부터 반사되는 법이나 언어의 위상을 솜씨 좋게 세세하게 집어냄으로써, 생명정치학의 개념을 더욱 전개시키는 것이다. 이런 시도는 아렌트와 푸코 쌍방의 부족분을 연결시키는 호모 사케르의 서두 부분 등에서[각주:2] 두드러진 성과를 보이고 있다. 아감벤은 법과 언어의 경시 때문에 푸코도 (나아가 들뢰즈도) 비판하지만, 그러나 그들이 비판했던 대상의 의표를 찌르는 방식으로 논의를 전개하는 것이다.

여기서 생각해야 할 것은 생명정치학 속에서 꺼내진 언어와 법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생명과 어떻게 결부되어 있는가이다.

아감벤은 매우 견실한 지식으로 뒷받침된 역사학자로서 행동하면서도, 거기서의 종교의 파악 방식은, 앞서 말했듯이 시공을 종횡무진 횡단하고, 현대의 첨단적인 장면과 고대세계를 결부시킨다. 그의 자세는 역사를 논하면서도 역사 자체를 원리로 삼지 않는, 말하자면 근원을 논하면서도 근원자체를 허공에 매다는[중지시키는] 감각으로 넘쳐난다. 이는 오히려 푸코가 고대를 다룬[문제 삼은] 그 방식에, 혹은 레비스트로스가 신화를 분석하는 그 방법에, 나아가 들뢰즈(와 가타리)가 생태계적인 자연사를 그려내는 그 시각에 매우 가까운 것이 아닐까? ‘중지하다[허공에 매달다]라는 말이 아감벤의 핵심어의 하나이듯이, 거기에는 근원을 탐구하면서 근원을 탈근거화하는 지식의 방식이 모색되고 있는 것 같다. 그리고 그 행동 방식 자체가 생명정치학의 시도와 강하게 겹쳐진다.[각주:3]

이렇게 제시되는 아감벤의 독자적인 영역이란 바로 애매함이며 회색지대라고 할 수 있다. 거기서 아감벤은 생명에 독자적인 존재를 인정하는 동시에, 그 방식을 항상 언어와 연관시키고, 벌거벗은 질료성이 법이나 제도의 막간[틈새]으로서 기능한다는 것을 밝힌다. 이와 같은 이중의 방법에 의한 중간성이나 문턱의 존재가, 앞의 중지라는 방법론과 포개져 있다.

그러면 여기서 아감벤에게 생명 그 자체란 어떤 개념이었을까? 이 물음에 대답하기 위해 다루고자 하는 테마가 바로 인간과 동물의 관계이다.

아감벤에게서의 이 주제에 관해서는 열림(2002)이라는 저작, 특히 거기서 다뤄지는 하이데거의 동물론이 중요하다. 하지만 동물과 인간이라는 주제가 겨냥하는 것은 그것만이 아니다. 동물론은 절대적 내재성(사유의 역량, 2005년 수록)이라는 들뢰즈와 푸코의 관계를 논한 텍스트의 귀결이, 하이데거와도 맞물린 이 주제에 의해 도출됐다는 것과도 관련된 것이다.

여기서 아감벤은 들뢰즈의 생명 개념과 푸코의 생명 개념을 대립시키면서 생명론이 향하는 곳을 탐색한다. 그런데 약간 희화화되어 그려진 최후의 생명론의 계보도에서, 푸코와 들뢰즈는 대립되기는커녕 내재성의 라인에 똑같이 배분되고, 다른 쪽의 초월의 라인에 데리다나 레비나스 등을 적은 뒤, 굳이 하이데거를 그 중간 영역에 배치하고 있다. 이는 매우 기묘한 것이기도 하다. 생명을 논할 때, 그 중간적인 위상에 있어서도, 하이데거를 내재의 방향에 위치시키는 것은 꽤 모험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그는 해석학적 존재론과 존재의 언어를 논하는 자로서, 흔히 어디까지나 초월의 라인에 위치시켜야 할 사상가로 간주될 것이다. 아감벤은 하이데거의 어디에서 내재적 생명론에 대한 공헌을 보는 것일까?

더 나아가 이런 도식을 그려내는 아감벤은 자신의 시도를 어디에 위치시키는 것일까? 이것들을 생각할 때 문제가 되는 것이 푸코와도 들뢰즈와도 관련된 동물이라는 주제가 아닐까? 그것이 생명정치학의 사고에 있어서 새로운 문턱으로서 두드러지는 것이 아닐까?


아감벤에게서의 생명

논고 절대적 내재성은 푸코와 들뢰즈 둘 다의 생전의 마지막 텍스트가 각각 생명을 둘러싼 것이었음을 속시원하게 지적하는 것에서부터 시작된다. 양자에게 생명을 논하는 것은 유언의 차원에 속하는 것이었다고 한다.

그 텍스트란. 푸코의 경우 생명 : 경험과 과학[각주:4]이라는 캉길렘을 다룬 비교적 긴 논고이며, 들뢰즈의 경우 내재성 : 하나의 삶 …」(1995)[각주:5]이라는 아주 짧은 문서이다. 아감벤의 논의는 들뢰즈의 글 제목과 스타일 등에 대한 주석으로 시작되지만, 기본적으로는 솔직히, 푸코와 들뢰즈에 대한 아감벤의 사유의 위상이 제시된다. 아감벤의 벌거벗은 생명이 무엇인지를 두 사람과의 대비에서 서술하는 것이다.

이 텍스트를 검토하기 전에, 아감벤에게 벌거벗은 생명이 무엇이었는지를 잠시 다시 살펴보자.

호모 사케르의 서두에서 아감벤은 비오스조에라는, 이제는 주지의 바가 된 말을 사용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조에는 살아 있는 모든 존재(동물이든 인간이든 신이든)에 공통된, 살아 있다는 단순한 사실을 표현했다. 그에 반해 비오스는 각각의 개체나 집단에 특유한 살아가는 형식, 삶의 방식을 가리켰다.”[각주:6]

여기서 조에로서 말해지고 있는 것은 아리스토텔레스가 논한, 살아 있다는 사실과 관련된 잠재적인 힘이다. 그리고 후자인 비오스란 이른바 정치적인 삶,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는) 폴리스적인 삶을 모델로 한 것이다.

조에비오스라는 생명에 관련된 말하기 방식을, 현대정치와 관련시켜 얘기하는 아감벤의 주장은 그리 어려운 것이 아니다. ‘벌거벗은 생명과도 강하게 관련되는 조에가 그대로 정치의 주제로 간주되는 것, 혹은 말을 사용하여 행하는 폴리스적 사태에, 다만 살아 있을 뿐인 생명성인 조에가 침입해 오는 것, 이것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이런 사정이 18세기 이후의 근대사회의 성립에 있어서, 푸코가 생명정치학으로 논했던 것과 겹쳐진다.


폴리스의 영역에 조에가 진입한 것, 즉 벌거벗은 생명 자체가 정치화됐다는 것은 근대의 결정적 사건을 이루며, 고전적 사유의 정치적-철학적 범주가 근원적으로 변용했음을 부각시키고 있다.[각주:7]


이것에 덧붙여 중요한 것은, 이런 범주의 변용은 모종의 회색지대를 산출한다는 것이다. 거기서는 삶과 죽음, 공과 사, 우파와 좌파, 절대주의와 민주주의라는 대립 도식으로 말하는 것이 불가능한 정치적 장면이 형성된다.[각주:8]

, 생명정치학과 벌거벗은 생명의 정치화는 겹쳐 있지만, 근대에 특징적으로 현현한 독자적인 방식에 있어서, 근대를 지배했던 기존의 정치적 범주가, 모두 회색지대로 내몰리게 된다는 것이 아감벤의 주장이다.

아감벤이 아우슈비츠의 남은 것에서 살아 있으나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비참한 신체, 혹은 생물학적 인체 실험을 겪은 생체를 예로 든다는 것, 더 나아가 호모 사케르에서도 국가라는 법의 규제로부터 벗어난 난민, 삶과 죽음 자체를 규정할 수 없는 뇌사자를 대표적인 예로 들고 있다는 것으로부터, 이런 논의들이 근대 후기라는 시대성과 강하게 관련된 것으로 읽히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아감벤이 푸코와 의견을 달리하는 것은, 이런 회색지대가 현재화하는 것이 근대 후기였다고 해도, ‘조에비오스와 얽혀 있는 착종된 사정 자체는 정치적인 것이 출현하는 원리로서 당초부터 숨어 있었다고 하는 점에 있다.

그것은 호모 사케르의 모델 자체가 공동체로부터 배제된 방식으로 그것에 포함되는 신체를 다루는 로마 시대의 처벌에 있는 것으로부터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호모 사케르란 신성화된 사람들이지만, 그 신체는 살해 가능하지만, ‘희생물로 될 수 없다는 양의성을 갖추고 있다. 흔히 이 두 개의 특징은 병치될 수 없다. (뭔가의 형벌을 받은) 살해 가능한 신체(법으로부터의 폐기)는 손쉽게 희생화되지만(종교로의 포함), 여기서는 살해 가능성은 희생이라는 형식을 취할 수 없는 것이다. 그 때문에 거기에는 살해 가능성과 희생화 불가능성의 교점에 있어서, “인간의 법으로부터도 신의 법으로부터도 배제된 신체가 출현하게 된다. 이 신체가 벌거벗은 생명의 원상原像인 것이다.[각주:9]

그래서 이것은 법에 있어서 모든 의미에서의 예외이기도 하다. ‘은 신성화되지 않지만 죽여도 좋다는 의미에서, 스스로가 포함할 수 없는 것을 배제된 것으로서 포함해버린다. 그리고 주권이란 칼 슈미트가 말했듯이 예외상태에 대해 결정을 내리는 자라고 한다면, 이런 신체를 다루는 것 자체가 법을 주권적인 법으로 만드는 원리라는 것이다. 스스로가 배제하는 것은 배제로서 포함하는 것, 이것이 법을 성립시키는 원점에 있다.

배제와 포함이 서로를 맞아들이는 이런 사정이 바로 아우슈비츠로 나타나는 비참한 신체의 전형이라는 것이 아감벤의 주장이다. 그것은 법의 원리이면서도, 현실적인 무엇인가로서 출현하는 것이다. “호모 사케르의 벌거벗은 생명은 이리하여 우리와 관계가 있는 것이 되며 시민의 생물학적 생명과 일치하고자 한다[각주:10]는 시대 진단이 거기에 포개지게 된다.

여기서 우선 논의되는 것은 법이 초월적인 기관을 경유하지 않고, 생명 자체를 포함한다는 사정이다. 바타유적 살해가 초월화된 신성성을 묻는다면, 이것과는 정반대의 관점이 여기서 드러난다. 여기서 법은 시니피앙이 아니며, 또한 명령하는 것일 수도 없다. 법은 법이 포함할 수 없는 것을 배제함으로써 포함한다. 거꾸로 말하면, 법 자신이, 벌거벗은 생명이라는 예외상태에서의 규정 불가능성을 들이대는 것으로부터 성립한다는 것이다. 그런 한에서 아감벤에게서의 벌거벗은 생명은 그 벌거벗은이라는 방식에 있어서, 규정 자체를 가능케 하는 규정 불가능성이라는 것이다. 거듭 말하지만, 이것이 법의 원리라고 하는 것이다.[각주:11]

거기에는 조에비오스의 연관에 관해서도, 단순하지 않는 사태가 출현하게 된다. 살아 있는 신체란, 물론 조에인 동시에 비오스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것은 해당 신체의 특정한 동물적, 식물적 기능이 조에이며, 특정한 인간적 기능이 비오스라는 것이 아니다. ‘비오스비오스인 한에서 항상 조에를 기반으로 하는 것인데, ‘비오스에 있어서 조에란 어디에도 없는 것이며 또한 어디에도 있는 것이기도 하다. 말과 신체, 로고스와 물질, 이것들도 마찬가지의 배치에 놓이게 될 것이다. 이들 중에서 후자는 전자에 의해 배제됨으로써 포함되는 바로 그것이다. ‘예외상태라는 외부를 보여줌으로써 질서를 규정하는 것, 이것이 양자의 관계성이다.

벌거벗은 생명예외상태의 관점에서 보면, 그것들은 아감벤의 발상의 기본이라고 할 수 있는 이중관계를 이루는 것인 비오스조에는 마치 단순히 이층화되는 것이 아니다. 이것들도 배제와 포함을 둘러싸고 서로 얽혀 있는 것에 다름 아니기 때문이다.

이렇게 아감벤에게서 생명은 법이나 언어가 규정할 수 없는 예외성인데, 동시에 그것에 의해 법이나 언어를 가능케 하는 것이라고도 그려진다. 생명 자체가 아리스토텔레스적 식물적 생명이나 동물적 생명이라기보다도 언어화할 수 없는 것에 의해 언어를 떠받치는 무엇인가로서 제시되는 것이다. 이리하여 아감벤은 푸코나 들뢰즈가 법적, 언어적 위상의 초월성을 비판하는 것으로부터 생명의 위상을 끄집어낸 것과는 대조적인 위치에 선다. 그리고 마찬가지로, 법과 언어를 시니피앙적 초월로서가 아니라, 생명과의 역접적 관계에서 끌어내게 된다.


들뢰즈 및 푸코 비판

그러면 여기서 절대적 내재성의 논의로 돌아가보자. 이 글에서 아감벤은 푸코와 들뢰즈의 생애 마지막 텍스트가 모두 생명을 다뤘다는 기묘한 부합을 강조하면서, 두 사람이 논하는 내용을 다양하게 검토한다.

대부분이 들뢰즈를 향한 이 논고의 처음 소소한 부분에서 아감벤은 푸코를 언급한다. 그 소재가 되는 푸코의 캉길렘론은 푸코의 최후기의 다양한 사유, 즉 프랑스 철학에서의 인식론과 영성주의(spiritualism)라는 두 개의 계보의 구분이나, 계몽의 논의의 재검토를 이루고 있다는 점에서 극히 흥미롭다. 하지만 아감벤은 특히 푸코의 서술의 마지막에 눈길을 돌린다. 거기서는 생명의 중심에는 잘못[착오]이라는 문제가 있다고 써져 있지 때문이다.


생명의 가장 근본적인 수준에서 코드와 해독의 작동[기능]은 우연히 주어져 있다. 그것은 질병이나 결함이나 기형이 되기 이전의, 정보 시스템의 변조나 잘못 취함[오용]같은 것이다. 극단적으로 말하면, 생명이란 잘못할 수 있는 것이다.[각주:12]


그리고 그 후에 푸코는 이런 캉길렘의 생명에 관한 견해를, 시대적으로 그다지 멀지 않은 니체의 그것과 결부시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진리는 생명의 기나긴 연대기에 있어서 가장 새로운 잘못이다. 더 정확히 말하면, 참과 거짓의 분할이나 진리에 부여된 가치는 생명이 발명했던 가장 특이한 삶의 방식을 형성하고 있기 때문이다.[각주:13]


아감벤은 생명과 오류라는 주제는 푸코가 성의 역사1권 이후에서 보여줬던 논의의 흔들림에 영향을 줬을 것이라고 말한다(그것은 들뢰즈의 견해이기도 하다). 그러나 아감벤은 또한 푸코의 이런 생명에 대한 사유는 새로운 경험과도 같은 무엇인가, 생명이라는 지면에 뿌리내린 별도의 주체성을 향하기 위한 무엇인가를 끌어내는 것이기도 하다고 평가한다. 거기서는 그저 생명과 생명의 일탈과만 상관관계를 가진 인식[각주:14]이 진리를 향하는 것이 아니라 탐구되기 때문이다.

이것은 들뢰즈가 푸코(1986)에서 지식과도 권력과도 구분되는 3의 축으로 간주했던 것과 결부되어 있다고 아감벤은 지적한다. 이리하여 아감벤은 푸코의 최후기의 시도를 들뢰즈의 그것과 교차시킨다. 들뢰즈가 그려내는 생명의 권역으로부터, 새로운 주체의 모습을 (바로 최후기의 푸코가 행했듯이) 끌어내는 것이야말로 생명정치의 향후 과제라고 아감벤은 생각했던 것이다. 그 자신 아감벤의 고찰과 깊이 관계가 있을 것이다.

그러면 아감벤은 들뢰즈의 생명 개념에 관해서는 어떻게 평가하고 있을까? 그것을 감안한 다음, 푸코적인 주체의 논의를 구성해가는 라인은 어떻게 그어짓는다는 것일까?

아감벤은 들뢰즈 최후의 텍스트 내재성 ; 하나의 삶 …」의 표제에 있는 콜론에 강하게 집착한다. 여기서 중간에 배치된 콜론은 단순한 동일성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바로 생명과 내재성, ‘거리도 동일성도 아닌 일종의 통과, 아무런 공간적 변동도 없는 이행임을 나타내는 것이라고 한다. 내재성과 생명은 각각이 다른 것에 열려 있으면서, 생명은 생명에 내재한다는 형태로 그것과 관련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생명이 내재성이라기보다는 내재성을 불러일으키는 것이 생명이라는 것이다. 이런 일련의 논의는, 바로 들뢰즈의 내재성과 아감벤이 잠재력으로 말하는 것을 결부시킨다.

여기서 아감벤이 증거로 삼는 것은 철학이란 무엇인가(1991)의 들뢰즈이다. 이 저작에서의 내재성또는 내재평면(plan d’immanence)’의 논의야말로 여기서의 포인트가 된다. 이 텍스트에서 들뢰즈는 내재성이란 그저 자신에 대해 내재하는것뿐이며, “무엇에 대해 내재하는것이 아니라고 논한다(사르트르의 자아의 초월성에 대한 의미의 논리에서의 높은 평가를 여기서 참조하고 있다).[각주:15]내재성이란 의식에의 내재성도 자아로의 내재성도 아니다. 그것은 내재하는 것에의 내재인 것이며, 바로 자기 완결적인 운동성이다.

  

후기 들뢰즈의 텍스트를 여기서 끄집어내는 것에는 충분한 의미가 있다. 그것은 아감벤이, 여기서의 내재평면을 바로 (현실화한 생명체를 상정하는 베르크손적인 잠재성이 아니라) 스피노자적인 일의성으로 끌어당겨, 거기서 내재 그 자체를 해석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내재원리란, 존재의 초월을 모두 배제하는 일의성의 존재론을 일반화하는 것에 다름없다. 하지만 일의성을 절대화하면, 존재의 모든 점에서 존재 자체와 동등한 것이 되며, 관성과 부동성이 존재 위에 짓눌러오는 것 아닐까? 그런데 스피노자가 말하는 내재적 원인이라는 사유는, 행위자 자신에 대해서는 행위자 자체의 수동성이라는 것이며, 이 사유에 의해 존재는 그 의심에서 해방된다.[각주:16]


내재성은 바로 초월을 거부하면서 내재성자신이 내재하는 운동으로서 작동하는 가운데 있다고 간주된다. ‘내재성이 그 자체로, 초월이 아니라 작동을 갖는다는 것, 이것에 아감벤은 들뢰즈가 생명이라고 말하는 것의 원상을 보고 있다.

하지만 이에 대해 아감벤은 전면적으로 찬성하는 것은 아니라며, 다양한 반론을 가한다. 그것은 아감벤과 들뢰즈의 사유가 닿을락말락할 정도로 접근하고 있기 때문에 분간하기 어려운 것이지만, 그러나 결정적인 비판이기도 하다.

그 비판 중 하나는 들뢰즈가 이 텍스트에서 디킨스의 소설을 다루는 장면과 관련된 것이다. 그곳에서는 죽음에 처한 어떤 악당이 묘사된다. 죽어가고 있는 그에 대해, 주위의 누구나 상냥함을 드러낸다. 그에게 발견되는 것은 바로 벌거벗은 생명과 비슷한, 순수한 내재로서의 신체이다. 그런데 병에서 회복되면서, 악당은 단순한 생명이기를 그치고 다시 악당이 되며, 나쁜 짓과 욕지거리를 하기 시작한다. 주위 사람들도 다시 그에게서 멀어진다.

여기서 묘사되는 비인칭의 삶[생명]’은 바로 순수한 생명의 모습에 가깝다. 삶과 죽음의 협간에 있는 이런 중간지대의 묘사에 아감벤은 공명한다. 하지만 들뢰즈는 죽음에 가까운 이 장면에서, 삶을 개체 속에 가둬버리는 것을 거부한다. 들뢰즈는 또한 거의 분간되지 않는 아기의 웃음이라는 비인칭성도 언급한다. 비인칭적인 아기의 웃음은 아기가 개체화되면(, 거기에 개성이 출현하면) 사라지는 것, 개체에 속하지 않는 것이다. 그것은 죽어가는 인간에게서 나타나는 벌거벗은 존재방식과 평행적인, 원초적인 생명의 형상이며, 아감벤이 진술하는 중간영역 자체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에 대해 아감벤은 이렇게 논한다. , 여기서 제시되는 벌거벗은 생명이란 바로 아리스토텔레스가 영양섭취의 생명이라고 부른 것, 혹은 비샤가 우리에 갇힌 동물이라고 지목한 것, 즉 생명적 신체가 지닌 동물적인 혹은 식물적인 기능 방식에 매우 가까운 것이 아니냐고. 그러니까 여기서 질문되고 있는 것은 일면에서는 인간과 동물의 불분명함 아니냐고. 그 때문에 이들의 논의는, 정말로는 (들뢰즈 자신이 하고 있지는 않은) 이런 방향에서 생각되어야 하는 게 아니냐고. 그런데 이렇게 읽을 수 있는 서술이란, 내재를 생명이라는 영역으로 비켜 놓는 것에 관해서, 매우 위험한 토지속으로 들어가는 것이라고 아감벤은 말한다.

아감벤은 여기서 들뢰즈와 푸코의 차이도 선명해진다고 한다. 들뢰즈는 푸코가 성의 역사 1 : 지식의 의지에서 묘사한 권력론을 제대로 이해하기는 했다. 그러나 푸코가 생물학적인 실존이 정치 속에 들어온다는 것을 생명정치로서 파악한 반면, 들뢰즈는 푸코에서 이런 생명 자체란 무엇인가, 권력과의 관련에서의 그 의의는 무엇인가를 캐묻지 않고, “생명은 권력에 대한 저항이 되는바로 그것이라고 단적으로 정리해버린다. 하지만 그래서는 생명정치적인 갈등의 양의성을 논하기 위해서는, 충분한 논의의 방향을 제시하는 것이 되지 않지 않을까?[각주:17]

아감벤은 들뢰즈가 거론하는 내재의 생명에 실제로는 생물학적 요소가 거의 없다고 논한다(이것도 푸코에게서의 생명의 구체성과 대비를 이루는 사태이다). 최종적으로는 스피노자적인 내재의 지복에 이르는 들뢰즈의 에 있어서, ‘하나의 삶이란 절대적으로 무매개적이면서, 모든 생명에 깃든 무엇인가로서, ‘인식 없는 순전한 관조가 되고 만다. 그것은 들뢰즈 자신이 생기론에 두 가지 길을 찾아내려고 하면서도, 그 한쪽인 행동하는 이데아가 아니라 [다른 한쪽인] 순전한 내적 감각을 선택하는 것과도 포개져 있다. 들뢰즈가 논하는 것은 인식의 모든 대상주체의 저편에 있어서의 순전한 관조이며, 행동하지 않고 보존하는 순수한 잠재력이 아닐까.[각주:18]

이에 반해 아감벤은, 다음과 같은 의문을 던진다. 그렇다면 벌거벗은 생명, 생명이 깃든 불분명성의 지대에서가 아니라, 내재 자체의 위상에 가둬두는 것 밖에 안 되는 것 아니냐고 말이다. , 거기에는 아리스토텔레스적인 영양섭취의 생명과 반대의 것 밖에만 발견되는 것 아니냐고 말이다. 아리스토텔레스적(혹은 비샤적)인 생명이란 식물적인 생명/관계의 생명, 바깥의 동물/안의 동물, 식물/인간, 조에/비오스, 벌거벗은 생명/정치적인 삶이란느 다양한 구분선을 가능케 하는 것이었다(그리고 생명에 의거하는 푸코도, 아감벤과 간극이 있기는 하지만, 이 구분을 전제로 생명과 정치의 관계를 사고했을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들뢰즈의 생명이 절대적 내재에 이르는 것이라고 한다면, 이런 계층성이나 분리를 전혀 예상할 수 없는 것이다(그것이 일의성이 지닌 의미이기 때문이다). 들뢰즈의 생명 논의는, 스피노자적인 지복으로서의, ‘내재속의 운동에 머물러 버린다.[각주:19] 이것은 생명에 대한 취급방식으로서 정당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그리고 그것은 푸코가 말하는 생명정치학적인 상황에, 어떤 길을 제시하는 것일까?

아감벤은 바로 중간지대의 사상가로서, 다음과 같이 말하며 논의를 수습하려 한다.


푸코의 사유와 들뢰즈의 사유가 둘 다 극단적인 유언으로서 남긴 생명이라는 개념은, 도래하는 철학의 테마가 될 것임에 틀림없다고 우리는 서두에서 단언했는데, 어떤 의미에서 이런 단언을 할 수 있는가는 이제 분명하다. 이로부터 문제가 되는 것은 한편으로는 생명권력과 주체화 과정에 관한 최후의 푸코의 얼핏 보면 음울한 고찰과 다른 한편으로는 절대적 내재지복으로서의 하나의 삶에 관한 들뢰즈의 얼핏 보면 명랑한 고찰, 이 두 개의 고찰을 함께 읽어보는 것이다.[각주:20]


함께 읽어본다는 것은 물론 양자를 평균화시킨다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양측을 양측의 걸림돌로서 읽는 것, 양측을 양측에 대항시켜 읽는 것을 의미한다. 들뢰즈가 논하는 비인칭성의 일의성에는, 아감벤은 그 위상의 의미를 인정하면서도, 명확하게 이의를 제기하고 있다. 푸코의 주체화에 관해서도 최후기의 그것에 아슬아슬할 정도로까지 찬성하면서도 배제와 포함에 관한 논의의 부재를 계속 묻는 것이다.

그러면 이런 일련의 고찰을 마무리하는 데 있어서 아감벤은 앞서 말한 도식을 별다른 설명도 없이 제시한다. 일련의 논의가 푸코와 들뢰즈의 생명에 관한 개념의 애매함을 논의한 반면, 마지막에 놓인 이 도식에서는, 한편으로 푸코와 들뢰즈가 동거하는 내재의 선이 그려지고(그것은 스피노자와 니체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것에 대립시키듯이, 레비나스와 데리다의 초월의 선(후설이나 칸트로 거슬러 올라간다)이 설정된다(앞의 153쪽의 그림을 참조).

들뢰즈와 푸코의 유사성과 대비에 의해 전개되는 논의가, 완전히 다른 방향으로 나아가는 점은 여기서 따지지 말자. 이것 이상으로 문제인 것은, 이 양자의 선의 중간에 하이데거가, 아무런 설명도 없이 배치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 이상으로, 마치 하이데거를 축으로 초월과 내재라는 두 개의 선이 배치 가능한 것처럼 그려져 있다. 하지만 생명의 철학의 탐구의 마지막에, 왜 하이데거가 중요한 의미를 갖고 갑자기 도입되게 되는 것일까?

또 하나 생각해야 할 것은, 이 도식에서, 아감벤의 호모 사케르의 사유 자체는 어디에 놓이는가이다. 이에 대해서는 답변은 아마 한 가지밖에 없다. 아감벤은 항상 자신의 사유를 중간지대로 설정하려 한다는 것이리라. 그런 한에서, 여기서 아감벤은 자신과 하이데거를, 생명의 사유에 있어서 분명하게 포개놓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아감벤과 하이데거의 관련 : 동물과 인간

하이데거는, 여기서 이른바 아무런 예고도 없이, 생명의 문제의 초점을 맞추기 위해 끌어내지고 있다. 아감벤은 법이나 초월을 자명시하는 것은 아니지만, 법이라는 주제로 끌어들이고 생명을 논하는 한, 중간지대에 자신의 입장을 설정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아감벤이 본래 자신을 두어야 할 위치에, 하이데거의 이름이 적혀 있다. 그렇지만 하이데거는 바로 해석학적 현상학으로서 존재론을 구상하고, 언어에 존재가 깃들어 있다고 한 점에서 초월의 선을 대표하는 철학자가 아닐까? 하이데거의 어디에서 생명의 논의가 발견되는 것일까?

절대적 내재의 텍스트에서 하이데거의 이름이 제시되지 않은 것은 아니다. 들뢰즈의 내재와 사르트르의 논의의 가까움을 논하는 부분에서, 아감벤은 하이데거에 관해 다음과 같이 언급한다.


이렇게 들뢰즈는 의식이 가졌던 가치들을 정산하고 있는데, 이것은 어떤 철학자의 몸짓을 계속하는 것이 된다. 그 철학자의 작업을 들뢰즈는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으나, 20세기 현상학의 대표자 속에서는, 이 철학자가 적어도 이 점에 있어서는 들뢰즈에게 가장 가깝다는 것은 확실하다. 그 철학자란 하이데거, 그 멋들어진 알프레드 자리론에 등장하는 파타퓌직한 하이데거이다.[각주:21]


하지만 이것만으로는 설명이 충분하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파타퓌직으로서의 하이데거(들뢰즈, 하이데거의 알려지지 않은 선구자 알프레드 자리, 비평과 임상 수록)를 토대로 했다고 해도, 생명론적인 위상에는 아직 이를 수 없었을 것이다.[각주:22]

오히려 아감벤 자신의 하이데거론인 열림이 여기서의 논의와 더 깊은 연관을 갖고 있는 것으로서 검토해야 하지 않을까?

아감벤의 저작 열림으로 넘어가자. 이 책에서 아감벤은 인간과 동물이라는 부제에서 드러나듯이, 동물성을 둘러싸고 하이데거의 생명론이라는 문제계를 추적한다.

말할 것도 없으나, 존재와 시간(1927)에서의 하이데거는 생물학이나 생명의 철학에 대해 매우 엄격한 견해를 제시했다. 거기서는 자신의 존재론을, 당시 융성을 뽐냈던 생명의 철학으로부터 구분하는 것이나, 현존재의 논의가 생물학적인 생명의 주장과는 전혀 다른 것이라는 것을 확실하게 적고 있다.

하지만 이 단계에서의 하이데거도, ‘세계세계성의 개념에 이르는 직전에서라고는 하지만, ‘환경세계(Umwelt)’라는 윅스퀼의 술어에 중요한 지위를 부여한다. 윅스퀼의 환경세계론, 하이데거의 도구 존재로서의 세계를 묘사하기 위해 커다란 의의를 가진 것이었다.

그리고 이 테마를 생각할 때, 존재와 시간이상으로 중요한 것은 하이데거의 1929-30년의 강의록 형이상학의 근본개념들[각주:23]이다. 이 방대한 강의록에서는, 그 전반부에서 권태(Langeweile)’라는 (‘불안과는 다른) 정동성이 논의되고, 또한 후반부에서는 윅스퀼을 축으로 한 생물학적 논의가 주제화되며, 동물성을 둘러싸고도 상당한 서술이 이뤄진다. 거기서는 동물적인 생명은, “세계가 가난하다(Weltarmut)”고 규정되며, 돌이 세계를 갖지 않는 것(Weltlos)이나 인간이 세계(Welt)를 살고 있는 것과 대비되어 묘사된다.

이 하이데거의 강의록 자체가 수많은 문제를 포함하고 있을 것이다. 이 책의 전반부에서는 시간성을 노정시키는 근원적인 정서로서, 존재와 시간에서는 불안에 할당되었던 역할이, ‘깊은 권태[지루함]’로 대체된다(‘깊은 권태는 특정한 지루한 대상을 갖지 않는다는 점에서도 불안과 겹칠 것이다). 거기서는 불안이 죽음에의 선취로 현존재를 움직이게 하는 것과는 달리, 순간과 시간의 오랫동안(Langweile)의 관계가 논의되는 것이다.[각주:24] 심지어 이 깊은 권태(die tiefe Langweile)’의 논의가 전단계가 되어, 동물적 생명을 다루는 후반부로 향할 때, 현존재가 동물과 다른 것으로서 규정되게 된다. 이른바 하이데거 자신이 2년 전에 간행된 미완의 저서 존재와 시간, 다른 종류의 시각에서 재검토하는 것이다.

아감벤은 하이데거의 이 텍스트를 소재로 삼아, 열림의 논의를 밀고 나간다. 아감벤이 주목하는 것은, 특히 인간이 시간을 살아가는 형태로서의 깊은 권태라는 정동성과, 동물이 환경세계에 사로잡혀 있는 가난함사이의, 역설적인 결합 자체이다. 이 두 가지는 유사하지만, 인간(현존재)의 본질과 동물의 본질로서, 완전히 다른 종류의 사태이기도 하다. 하지만 아감벤은 하이데거의 논의에 있어서의 이 두 개의 착종된 관계에, 앞의 도식에서 초월과 내재의 선이 교차하는 지점을 찾아내고 있다.

아감벤은 다음과 같이 적는다.


하이데거에게서 초미의 과제는 동물의 세계의 가난함(Weltlos)’, 인간이 세계를 형성하다(weltbildend)’의 관계를 통해서, 현존재 세계--존재 라는 근본 구조 자체를 동물에 대해 위치짓게 되며, 그렇게 함으로써, 인간의 등장과 더불어, 생물 속에 나타나는 개시의 근원과 의미를 탐구하게 되는 것이다.[각주:25]


그렇지만 인간과 동물의 관계를, 예를 들어 이성적 동물이라는 방식으로, 동물적 생명에 무엇인가가 부가되도록 묘사하는 것은, 바로 존재와 시간에서의 하이데거가 계속 거부했던 것이었다. 여기서도 생물학적인 논의가 이뤄지지만, 그런 거절이 보이지 않는 것은 아니다. 달리 말하면, 여기서는 오히려 존재와 시간에서는 몇 줄로 처리되고 말았던 생물학과의 대결재부상하는 것으로 간주되어야 한다.[각주:26] 동물과 인간의 연관을 차이에 있어서 파악하는 것이, 현존재의 규정에 있어서 중요하다는 것이다.

하지만 왜 그럴까?

아감벤은 하이데거가 동물은 환경세계를 억지해제(das Enthemmende)한다고 표현하고 있는 것에 주목한다. 그것은 동물이 각각의 환경세계에서 고리를 이루면서도, 이로부터 열려져 있는 존재방식을 갖추고 있다는 것을 드러내는 것이다. “억지해제에 있어서는 동물이 그것에 에워싸여 있는 고리로부터 열려 있다.”[각주:27] 하지만 그런 동물의 존재방식은 또한 사로잡혀 있다=방심(Benommenheit)”고 말해진다. “사로잡힘=방심도 또한 환경세계 속에서, 열려지고 있으면서도, 몽롱한 상태에 있다는 것을 가리킨다. 존재 자체로의 열림(Offenbarheit)이 있는 것은 아니다.

이러한 사로잡힘=방심에 있어서, 동물은 어떤 지각을 행하는 것은 아니다. 꿀벌이 꿀을 빨고 있을 때에는, 오로지 그 대상 자체에 사로잡혀 있다[푹 잠겨 있다]. 거기서 자신의 신체가 절단돼도, 꿀벌은 꿀을 계속 빨고 있다.[각주:28] 이것은 주어진 환경성의 규정에 대한 사로잡힘=방심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동물의 행동거지는 억지해제로서, 열림에 대한 양의성을 갖추고 있다고 하이데거는 말한다. 그것은 하이데거의 다음의 문장에서 엿볼 수 있는 것이기도 하다. “방심 속에서는 존재자는 열려 있는(offenbar) 것이 아니며, 개시되는 것도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로 그 때문에, 닫혀져 있는 것도 아니다.”[각주:29]

동물은 존재자에게 열려있지만, 그런 존재자는 존재로서 노정되어 있는 게 아니다. 이런 매우 양의적인 사태가 여기서 강조되는 것이다.

그런데 동물이 환경세계 속에서 억지해제고리를 이루며 살고 있기 때문에 열림의 방향성을 갖는 것과, 그것이 사로잡힘=방심하고 있는 것 사이의 양의성은, 하이데거가 이 강의록의 전반부에서 논한 깊은 권태의 논의로 결부된다. 하이데거 자신이 동물의 사로잡힘=방심, 인간이 지닌 깊은 권태이라는 테마를, 그대로 연관시키고 있는 것이다.


이 점에 이르러서 하이데거는 강의의 1부에서 다뤘던 깊은 권태에 관한 논술을 불러일으키며, 동물의 방심과 깊은 권태라고 불렸던 근본적인 정서를 뜻밖의 형태로 공명시킬 수 있다.[각주:30]


깊은 권태란 하이데거에게서 인간적인 것이 동물적인 것으로 연결되는 장면 자체를 가리킨다. 하지만 그 방식은 어떤 것일까?


하이데거의 깊은 권태

이로부터 아감벤의 논의는 형이상학의 근본 개념들에서의 깊은 권태를 주제로 하는 것으로 향한다. 그것은 동물의 사로잡힘=방심과 매우 유사하지만, “사로잡힘=방심이 세계에 열려 있으면서도 스스로에 머물 수밖에 없는 것인 반면, ‘깊은 권태는 바로 인간이 시간을 살아가는 것의 근본에 있는 정동성이며, 그 때문에 닫혀 있으면서도 그 한가운데서 열려 있다는 점에서, 그 방향성을 정반대로 하는 것이다.

이러한 깊은 권태는 두 가지 특징을 갖는다고 말해진다. 우선 거기서는, 현존재가 거절되고 있는 존재자에게 건네지고[넘겨지고] 있다는 것이다. 이 계기는, 동물성이 지닌 억지해제고리’, 즉 닫혀 있으면서도 열려 있다는 존재방식과 흡사하다. 현존재는 보통은 존재자의 존재에 접근할 수 없다. 하지만 권태라는 존재방식 속에서, 그 닫힘 자체에 있어서, 인간은 존재자에게 건네지고 있다(ausfeliefert)는 것이다.

그리고 또 다른 깊은 권태의 특징은, “허공에 매달린 채로 있다[중지된 채로 유지된다](Hingehaltenheit)”는 것이라고 말해진다. “허공에 매달린 채로 있다[중지된 채로 유지된다]”는 것은 거기서 비활성인 채로 체류하는 것(brachliegende)이기도 하다고 얘기된다. 그것은 손에 넣지 못한 채 방치되고 있는 경작지를 의미하는 농경용어이기도 하다.

이것은 가능성을 가지면서 어떤 가능성도 현재화시키지 못하는 것으로서, 모든 가능성을 눈앞에 두는 것이기도 하다. 이런 사정은 아감벤이 잠재력에 의해 말했던 것과 강하게 겹친다. ‘깊은 권태특정한 구체적 가능성 전부를 중지시키고, 탈취하는 가운데, 근원적인 가능성(즉 잠재력)이 그 가치를 드러내는 체험[각주:31]이기 때문이다.

하이데거의 권태론은 특히 불안과의 연관에서 많은 논의해야 할 테마를 포함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당장은 아감벤의 논의에만 초점을 맞춘다면, 아감벤은 여기서의 논의에, 자신의 잠재력과 매우 가까운 어떤 것을 보고 있는가가 중요할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동시에 들뢰즈의 잠재성이나 내재라는 사고와의, 강한 결부를 시사하는 것이다. 거부함으로써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것. 거꾸로 아무것도 하지 않음으로써 가능성을 계속 갖는 것. 그것은 아감벤도 들뢰즈도 논의하는 바틀비(허만 멜빌), “하지 않는 편이 좋습니다[안 하는 게 좋습니다=안 하는 걸 좋아합니다](I would prefer noto to)라는 말과도 결부되면서, 무한한 가능성을, 모종의 무능력을 축으로서 끄집어내고 있는 것이다.[각주:32]

그러면 이런 깊은 권태는 동물성과 연관될까? 어떤 의미에서는 그럴 것이다. 이것은 현상적으로는, 동물이 환경세계속에서 사로잡힘=방심하는 것과 매우 가깝기 때문이다. 그리고 바틀비적인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는 무능력은, 들뢰즈라면 곧바로 bêtise=어리석음이라는 주제로 이어지며, 동물적인 무력함에 연관시키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감벤은 동물의 방심과 인간의 깊은 권태를 아슬아슬하게 접근시키면서 이것들을 동일시하지는 않는다.


방심에 있어서 동물은 억지해제하는 것과 직접 관계를 맺으며, 억지해제하는 것 속에 노출되고 마비됨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그런 것으로서 들통나게 하는 것은 결코 할 수 없었다. 바로 특정한 억지해제 영역과의 관계를 중지하고 비활성적인 것으로 하는 것을 동물은 할 수 없는 것이다. 그에 반해 깊은 권태는 세계가 가난하기 때문에 세계로, 동물환경으로부터 인간세계로 이행이 실현시키는 형이상학적인 조작인 것처럼 생각된다.[각주:33]


그래서 인간이란 동물성의 억지해제에 의해 성립하는 것이 아닌 것이다. 오히려 동물에게는 결코 할 수 없는 권태를 살아감으로써, 시간성의 무한의 가능성에, 그 비활성의 존재방식에 그칠 수 있는 존재자로서 그려질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인간은 동물에게는 불가능한 세계가능성을 찾아낼 수 있게 된다.

아감벤의 고찰의 귀결은, 이런 동물과 인간의 관계를 중립적으로 화해시키는 것이 아니다. 거기서 이뤄지는 것은 오히려 반대로, 이런 사정을 그대로 중지의 중지에 두는 것이다.


타원의 두 개의 초점

그러면 이런 형이상학의 근본개념들에 관한 논의는, 절대적 내재성에서의 아감벤에 의한 들뢰즈나 푸코의 독해에 무엇을 덧붙이는 것일까?

거기에서 하이데거가 맡는 역할은 명확하다. 하이데거가 생명의 사유의 계보 안에서 초월과 내재의 중간지점에 놓여 있다는 것의 의미는 열림에서 깊은 권태를 둘러싸고 제시된 매우 들뢰즈적인 내재성의 모습을 전제로 할 때에야 명확하게 드러날 것이다.

게다가 아감벤은 이렇게 파악되는 하이데거의 이중성, 즉 동물성에 있어서의 열림이면서도 돌파는 하지 않는 사로잡힘=방심, 인간에 있어서의 무능력으로서의 가능성인 깊은 권태, 대립하면서도 접하는 지점으로서 간주하는 것이다. 이렇게 묘사되는 타원 속에서, 들뢰즈와는 달리, 동물과 인간에 관해 생명 속에서의 본질적인 구분선을 탐색하는 것이 가능해진다. , 아감벤이 (들뢰즈적인 삶의 일의성에 반하여) 요청하는 벌거벗은 생명의 탐구의 다양성이 확보되는 셈이다. 이런 의미에서 아감벤이 해석하는 들뢰즈적인 내재가 갖추고 있는 불만이, 여기서 동물/인간의 분할선을 둘러싼 방식에서 다시 설정되고, 생명정치학적인 장면으로서 재파악된다.

여기서 아감벤은, 정당한 독해인지는 제쳐놓더라도, 하이데거의 생물론에서 배제와 포함을 둘러싼 자신의 논의와 가까운 것을 보고 있다. 그것은 내재를 둘러싸고 이루어지는 것인데, 인간적 초월의 편으로도, 다른 방향으로도 자리매김 되는 것일 수밖에 없다. 벌거벗은 생명은 동물성과 아주 가깝더라도, 하이데거의 권태쪽에 강하게 겹쳐진다. 무위가 지닌 가능성이 여기서는 논의의 요점이 된다.

포함과 배제를 둘러싼 아감벤의 사고는, “벌거벗은 생명을 생물학적인 논의로서 파악하는 것은 아니나, 하지만 거기서 생물성과 인간성을 역접적 연관 속에서 억누르려 하는 한, 하이데거의 시도와 아주 가깝다고 말할 수 있다. 언어나 법이라는 영역을 인정하면서, 중지에 있어서 깊은 권태를 노출시킨다는 전술은, 아감벤적인 양의성에 그대로 겹치는 것처럼 보인다. 다만 거기서 하이데거는 본래는 삶의 계보학의 중간이라기보다도 어디까지나 초월과 내재를 분할하는 선의 초월 쪽으로 기운 것으로 묘사되어야 할 인물이 아닐까? 그리고 아감벤은 하이데거와 똑같은 타원 내부에서 동거하면서도, 들뢰즈적인 내재에 가깝다는 점에서, 하이데거에 대해 약간 내재에 기우는 곳에 놓여야 할 것이다.

그러나 아무튼,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동물이라는 테마이다. 동물성을 고찰함으로써 가능해지는, 생명 속에서의 인간과 이것 이외의 존재자 사이의 분할선이다. 거기서는 동물과 인간이, 둘 다 생명이면서도, 배제와 포함을 반복하는 그 접점이 제시된다. 생명정치학의 논의가 인간의 동물화와 동시에 동물의 인간화(권리부여)와도 교차되면서 말해지는 의의도 여기에 있다.[각주:34] 인간과 동물을 둘러싼 타원, 하이데거와 아감벤이 동거하면서 두 개의 초점을 그리는 타원, 여기에 생명정치학의, 혹은 생명의 철학의 새로운 형상을 보는 것도 가능해지지 않을까? 아감벤의 들뢰즈 독해가 끄집어내는, 최대의 논점이 아닐까?


  1. 생명정치학의 측면에서는 얘기되지 않은 아감벤의 저술의 다양성에 대해서는 岡田温司, 『アガンベン読解』, 平凡社, 2011을 참조. [본문으로]
  2. Cf. Giorgio Agamben, Homo sacer : il potere sovrano e la nuda vita, Einaudi, 1995, pp.6ff. [본문으로]
  3. 푸코의 ‘고고학’ 및 ‘계보학’의 서술이 일관되게 단선적인 시간 배치에 의거하고 있지 않다는 것, 또한 ‘중지’라는 관점은 벤야민의 「역사의 개념에 대해」에서의 ‘중지상태의 변증법’에, 혹은 들뢰즈=가타리가 『철학이란 무엇인가』에서 논한 ‘부감俯瞰’이라는 관점 없는 관점과 매우 가깝다는 것 등을 고려해야 한다. 생명을 논하는 생명정치란 이런 “현실적인actual 관점”의 포기에 의해 바로 현실성이 될 수 있는 게 아닐까? [본문으로]
  4. Michel Foucault, «La vie: l’expérience et la science», in Dits et écrits, 1954-1988. tome IV, Gallimard. 1994. pp.763-776. [본문으로]
  5. Gilles Deleuze, «L’immanence: une vie …», in Deux régimes de fous : textes et entretiens, 1975—1995, Minuit 2003, pp.359-363. [본문으로]
  6. Agamben, Homo sacer, p.3. [본문으로]
  7. ibid., pp.6—7. [본문으로]
  8. ibid., p.7. [본문으로]
  9. 『호모 사케르』 2부를 참조. [본문으로]
  10. Ibid., p.127. [본문으로]
  11. 그러나 동시에 바타이유의 사유가 현대적 정치학 속에서 반복해서 다뤄지고 있다는 것을 봐도, 이런 초월을 목표로 할 뿐만 아닌 방향성, 즉 바타이유 자신이 “저열한 유물론”이라고 부른 영역을 어떻게 생각할 것이냐는 중요한 문제이기를 계속한다. [본문으로]
  12. Foucault, «La vie», p.774. [본문으로]
  13. ibid: p. 775. [본문으로]
  14. Giorgio Agamben, La potenza del pensiero: saggi e conferenze, Neri Pozza, 2005, p.386. [본문으로]
  15. Gilles Deleuze et Félix Guattari, Qu’est-ce que la philosophie?, Minuit 1991, pp.49-50. [본문으로]
  16. Agamben, La potenza del pensiero, p.393. [본문으로]
  17. ibid., pp.401ff. [본문으로]
  18. ibid., p.404. [본문으로]
  19. 그렇지만 이것에 이어진 「산보하다(pasearse)」라는 절에서, 이런 스피노자적 내재 자체에 있어서의 운동성에, 아감벤이 모종의 찬성을 보여주지 않는 것은 확실하다. 순수한 관조에 상응하는 ‘산보’에, 아감벤이 벤야민적인 산책자의 그림자를 보지 못했을리도 없다. 이 점은 아감벤 자신의 ‘애매함’을 잘 드러낸다. [본문으로]
  20. ibid., p.410. [본문으로]
  21. ibid.. p.392. [본문으로]
  22. 오히려 이 논고에서는 알프레드 자리를 끌어들여 기묘한 언어 사용으로서의 하이데거가 찬양된다. 하이데거에 관해서는 물론 『차이와 반복』에서의 각주(Gilles Deleuze, Différence et répétition, PUF, 1968, p.188) 등의 검토 재료가 있는데, 이 양자에서의 ‘생명’을 둘러싼 관계성은 아감벤에 의한 매개를 거치지 않으면 역시 사고하는 데 어렵다고 생각된다. [본문으로]
  23. Martin Heidegger, Die Grundbegriffe der Metaphysik : Welt, Endlichkeit, Einsamkeit, in Gesamtausgabe, Bd. 29/30, Vittorio Klostermann, 1983. [본문으로]
  24. 본 논고에는 직접 관련되지 않으나, 이 강의록에서의 시간론은 하이데거의 문맥에서도, 또한 그것 이외의 맥락에서도 많은 문제를 품고 있다. 특히 『존재와 시간』에서 논의되는데, 그 존재방식이 면밀하게는 기술되지 않은 “순간=찰나(Augen-blick)”이라는 주제가 “깊은 권태”라는 “시간의 사이가 길어지는 것”의 논의에 관련되어 재파악되고, 그것이 “순간의 첨단이 도망쳐 들어오는” 것으로 그려지는 점(33, 34절 등)은 시간과 순간, 현재의 본래성과 비본래성이라는 테마를 고찰할 때 간과할 수 없을 것이다. [본문으로]
  25. Giorgio Agamben, L’aperto: l’uomo e l’animale, Bollati Boringhieri. 2002, p.53. [본문으로]
  26. ibid., p.53. [본문으로]
  27. Heidegger, Die Grundbegriffe der Metaphysik, S.370-371. [본문으로]
  28. ibid., S.352. [본문으로]
  29. ibid., S.361. [본문으로]
  30. Agamben, L’aperto, pp.64-65. [본문으로]
  31. ibid., p. 70. [본문으로]
  32. 들뢰즈의 논의란 『비판과 임상』에 수록되어 있는 「바틀비 또는 상투어」이다. 아감벤은 이 책의 이탈리아어 번역본에 긴 해설을 붙여서 한 권의 책으로 냈다(Gilles Deleuze et Giorgio Agamben, Bartleby: la formula della creazione, Quodlibet, 1998). [본문으로]
  33. Agamben, L’aperto, pp.70-71. [본문으로]
  34. 인간의 동물화와 함께 동물의 인간화라는 반대 방향의 움직임도 발생하고, 거기서 ― 바로 아감벤식으로 말하면 ― 인간과 동물의 동일성과 차이의 문제가 다시 물어지고 있다는 것은, 삶을 다루는 여러 가지 논의의 구체성에 있어서 ― 동물윤리, 환경문제, 생물다양성 등 ― 이것들을 재차 형이상학적으로 사고하기 위해서도 필요한 것이리라. 이 점에 대해서는 小泉義之, 「人間の消失、動物の消失」, 『現代思想』, 2009년 7월호. ; 市野川容孝, 「動物の人間化、人間の動物化──バイオポリティクスの一断面」, 『現代思想』, 2009년 7월호를 참조. 두 논문 모두 양자의 구분이 애매해지는 교차점을 묘사한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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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린 인간과 동물

L’aperto

L’uomo e l’animale

 

 

조르조 아감벤

김상운 옮김

영어판으로 1.

인용은 금함




10. 환[경]세계

 

그 어떤 동물도 물자체와의 관계에 들어설 수 없다.

야콥 폰 윅스퀼(Jakob von Uexküll)

 

오늘날 20세기의 가장 위대한 동물학자 중 한 명이자 생태학의 시조들 중 한 명으로 간주되는 야콥 폰 윅스퀼 남작이 제1차 세계대전에 의해 파산하게 된 것은 오히려 다행이었다. 확실히, 이런 일이 있기 전에도 이미, 먼저는 하이델베르크에서, 다음에는 나폴리의 동물학 연구소에서 그는 독립연구자로서, 무척추동물들의 생리학과 신경계[생리학 및 무척추동물의 신경계통에 관한] 연구로 꽤 훌륭한 과학적 명성을 누렸다. 그러나 상속재산을 잃자마자 그는 남부 이탈리아의 햇빛을 뒤로 하지 않을 수 없었으며(그렇지만 카프리 섬에 있는 별장은 계속 갖고 있었다. 그는 여기서 1944년에 거뒀으며, 1926년에는 발터 벤야민이 몇 개월 동안 머물렀다), 함부르크대학으로 전속하고, 이곳에서 그를 더 유명하게 만든 환세계연구소(Institut für Umweltforschung)를 설립했다.

동물의 환경에 관한 윅스퀼의 조사는 양자물리학과 아방가르드 예술의 등장과 동시대적이다. 이런 것들과 마찬가지로, 윅스퀼의 조사도 생명과학에 있어서 모든 인간중심주의적 관점의 유보 없는 폐기를, 그리고 자연의 이미지의 근본적인 탈인간화를 표현했다(따라서 이것들이[윅스퀼의 연구가] 다른 누구보다도 인간을 생명 존재[생물 일반]the living being로부터 분리하려고 애를 쓴 20세기의 철학자인 하이데거뿐 아니라, 인간을 절대적으로 비의인화적인nonanthropomorphic 방식으로 동물을 사고하려 노력한 질 들뢰즈에게 강하게 영향을 미쳤다고 해도 결코 놀랍지 않다). 고전적 과학이 바라본 세계가 가장 단순한 원소 형태부터 더 고등한 유기체[생물]organisms에 이르기까지 위계적으로 배열될 수 있는 모든 생물 종들all living species을 그 내부에 포괄하고 있는 단일한single 세계였다면, 윅스퀼은 오히려 무한하게 다양한 지각 세계들을 전제한다. 이 지각 세계들은 마치 거대한 악보에서처럼 한결같이 완벽하고 서로 연결되어 있으나 서로 교통하고 있지 않고 서로 배타적이다. 이런 세계의 중심에는 나팔성게[Echinus esculentus], 아메바 테리콜라[Amoeba terricola], 배럴 해파리[Rhizostoma pulmo], 성구동물[별벌레][Sipunculus], 아네모니아 술가타[말미잘][Anemonia sulcata], 익소데스 리시누스 진드기[Ixodes ricinus] 등등의 친숙한 동시에 약간 소원한 작은 동물들beings이 놓여 있다. 따라서 윅스퀼은 성게, 아메바, 해파리, 별벌레, 말미잘, 진드기(이것들은 위에서 적은 생물들being의 보통명사이다)와 자신이 특별히 좋아한 다른 작은 유기체의 환경을 재구성하는 것을 미지의 세계들로 향한 짧은 여행excursions in unknowable worlds이라고 부른다. 왜냐하면 이런 피조물들[작은 생물들]에서 볼 수 있는 환경과의 기능적 통일[일치]은 인간 및 이른바 고등동물들의 그것과는 꽤 거리가 먼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그는 이렇게 주장한다. 어떤 특정한 동물적 주체가 자신의 환경에 있어서 사물들과 맺고 있는 관계는 우리를 우리네 인간 세계에 있어서 대상들과 묶고 있는 관계들과 똑같은 공간과 똑같은 시간 속에서 발생한다고 우리는 너무도 자주 상상한다. [그러나] 이런 착각illusion은 모든 생명 존재들all living beings이 하나의 단일한single 세계에 위치되어 있다는 믿음에 입각해 있다. 윅스퀼이 보여주는 것은 그런 일원론적unitary 세계는 실존하지 않으며, 마찬가지로 모든 생명 존재들에게 등질적인equal 공간과 시간도 실존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한낮에 우리 곁에서 날고 있다고 우리가 관찰하는 파리, 잠자리, 벌은 우리가 이것들을 관찰하고 있는 세계와 똑같은 세계에서 움직이고 있는 것이 아니며, 이것들은 우리와 혹은 이런 곤충들 사이에서도 똑같은 시간과 공간을 공유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윅스퀼은 우리가 어떤 생명 존재[생물]living being가 움직이고 있는 것을 보고 있는 객관적 공간인 환경(Umgebung)’을 다소간 넓은[크고 작은 풍부한] 일련의 요소들에 의해 구성되는 환경-세계인 환세계(Umwelt)’와 신중하게 구별하는 데서 시작한다. 그리고 그는 동물의 관심을 끄는 유일한 것들인 이런 요소들을 의미[작용]의 담지자(Bedeutungsträger)’ 또는 지각 표식의 담지자(Merkmalträger)’라고 부른다. 실제로 환경(Umgebung)’은 우리 인간에게 고유한 환세계(Umwelt)’인데, 윅스퀼은 이것에 어떤 특별한 특권을 부여하지 않는다. 오히려 환세계는 이것을 관찰하는 관점이 취하는 방식에 따라 변할 수 있다. 객관적으로 정해진 환경으로서의 숲이 실존하는 게 아니다. , 실존하는 것은 삼림감독관에게서의-, 사냥꾼에게서의-, 식물학자에게서의-, 나그네[산책자]wayfarer에게서의-, 자연애호가에게서의-, 나무꾼carpenter에게서의-, 그리고 빨간 모자를 쓴 아이Little Red Riding Hood가 길을 잃은 동화의 숲이다. 의미의 담지자로 간주된 가장 작은 세부사항(예를 들어 가령 들꽃의 줄기)조차도, 이것이 상이한 환경에 놓여 있을 때마다 매번, 때로는 그것이 관찰되는 환경이 변화함에 따라 다른 요소를 구성한다. 가령 꽃을 꺾어 작은 꽃다발로 엮은 소녀의 환경에서 줄기는 코르셋에 핀을 꽂아 꽃을 장식하기 위한 것이며, 개미의 환경에서 줄기는 꽃받침calyx에 있는 영양분에 도달하기 위한 이상적인 경로이다. 또 매미 유충의 환경에서 줄기는 폭신폭신한 누에고치의 액체부분을 만들기 위해 줄기의 수관[髄管]medullary canal에 구멍을 뚫어 이를 펌프로 이용하기 위한 것이다. 그리고 젖소의 환경에서 줄기는 그저 되새김질을 해서 먹이로서 삼키는 것일 뿐이다.

모든 환경은 그 자체에 있어서[그 자체 안에] 닫힌 통일체이다a closed unity in itself. 이 통일체는 바로 인간의 환경에 다름 아닌 환경(Umgebung)’에서부터 일련의 요소들이나 지각 표식을 선택적으로 추출한 결과로부터 생겨난다. 동물을 관찰하는 연구자의 첫 번째 과제는 동물의 환경을 구성하고 있는 의미[작용]의 담지자들을 판별하는recognize 것이다. 그러나 의미의 담지자들은 객관적이고 현사실적으로 떼어내지는isolated 것이 아니라 오히려 동물의 수용 기관들과의 긴밀한 기능적 혹은 윅스퀼이 좋아하는 표현을 쓴다면 음악적 통일성을 구성한다. 그리고 이런 수용 기관들은 표식을 지각하는 것(지각기관, Merkorgan)과 이 표식에 반작용하는 것(작용기관, Wirkorgan)에 할당되어 있다. 의미[작용]의 외부적 담지자와 동물의 신체에서의 이것의 수용은 마치 단일한 악보에 있는 두 개의 요소들, 건반 위의 두 개의 음표들을 구성하고 있는 것과도 같은 식으로 모든 게 일어난다. 이 건반 위에서, 자연은 의미[작용]의 초시간적이고 초공간적인 교향곡을 연주하고 있는데”, [이런 의미작용이 없다면] 이다지도 이질적인 두 개의 요소들이 어떻게 이토록 긴밀하게 연결될 수 있었는지를 말하기란 불가능할 것이다[그 이유를 알아낼 수는 없을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거미집에 대해 고찰해보자. 거미는 파리에 관해 아무것도 모른다. 또 파리는 양복장이가 고객의 옷을 만들기 전에 치수를 재는 것처럼 파리의 치수를 잴 수도 없다. 그렇지만 거미는 파리의 몸집에 맞춰서 거미집의 방사망 길이를 결정하며, 날고 있는 파리의 몸체의 충격력에 대해 정확한 비율로 줄의 저항을 조정한다. 더욱이 방사선 모양의 줄은 원형 모양의 줄보다 더 튼튼하다. 왜냐하면 방사선 모양의 줄과 달리 점착성 액체가 발라져 있는 원형 모양의 줄은 파리를 가둬서 날아가지 못하게 할 정도로 충분히 탄력성을 갖춰야 하기 때문이다. 방사선 모양의 줄의 경우, 이런 거미집은 부드럽고 건조하다. 왜냐하면 거미는 먹잇감을 향해 덤벼들기 위한 지름길로 줄을 사용하고 마침내 먹잇감을 보이지 않는 감옥 안에 감아두기 때문이다. 실제로 가장 경탄을 금치 못하는 사실은 거미집의 줄이 파리의 눈의 시각적 능력에 정확하게 들어맞는다는 것이다. 파리는 줄을 볼 수 없으며 따라서 깨닫지도 못한 채 죽음을 향해 날아드는 것이다. 파리와 거미라는 두 개의 지각적 세계들은 전혀 교류하지 않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완벽하게 조화를 이루고 있다. 그리하여 우리는 파리라는 원본 악보 원본 이미지나 원형이라고도 부를 수 있는 가 거미가 짓는 거미집을 파리에 안성맞춤인거미집이라고 형언할 수 있을 정도로 거미의 악보에 작용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비록 거미는 파리의 환세계를 결코 볼 수 없지만(윅스퀼은 몇 가지 성공을 거두게 될 하나의 원리를 정식화하면서 이렇게 단언한다. “어떤 동물도 그 자체로서의 대상[물자체]과의 관계에 들어설 수 없다”, 동물의 고유한 의미[작용]의 담지자와의 관계에만 들어설 수 있을 뿐이다라고 말이다) 거미집은 이런 [거미와 파리 둘 다의] 상호적인 맹목성[눈이 멂]의 역설적 일치를 표현한다.

생태학의 창시자인 윅스퀼의 연구는 20세기의 인문지리학human geography을 심대하게 뒤엎어버린profoundly revolutionize 폴 비달 드 라 블라슈의 인구와 그 환경 사이의 관계에 관한 연구(프랑스 지리지Tableau de la géographie de la France1903년에 나왔다)프리드리히 라첼의 국민peoples생존 공간(vital space)’에 관한 연구(정치지리학Politische Geographie1897년에 나왔다)가 나온 지 불과 몇 년 후에 이루어졌다. 그래서 [하이데거의] 존재와 시간의 핵심 테제, 즉 인간의 근본적인 구조로서의 세계-안에-있음(in-der-Welt-Sein)에 관한 테제를 어떤 의미에서는 이런 문제적 영역에 대한 하나의 응답으로 읽는 것은 불가능하지 않을 것이다. [그만큼이나] 20세기 초반에 이 문제적 영역은 생명 존재[생물 일반]the living being와 그 환경-세계 사이의 전통적 관계를 본질적으로 수정한[전환시킨] 것이다. 잘 알려져 있듯이, 모든 국민peoples은 이들의 본질적인 차원으로서 이들의 생존공간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고 하는 라첼의 테제는 나치의 지정학geopolitics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둘 사이의] 이런 근접성proximity은 윅스퀼의 지적 일대기에 나오는 어떤 흥미로운 에피소드에 표시되어 있다. 나치즘이 대두하기 5년 전인 1928년에, 온건하기 그지없는 이 과학자는 오늘날 나치즘의 선도자[흑막]precursors 중 한 명으로 지목되는 휴스턴 체임벌린19세기의 기초(Die Grundlagen des neunzehnten Jahrhunderts)에 서문을 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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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ul Vidal de la Blache(1845-1918). 프랑스의 지리학자. 뤼시앙 갈로와와 더불어 지리학연보(1893)의 창간자이며, 프랑스 지리학파의 창시자. 프랑스 역사가 에르네스트 라비스, 프랑스사에 대한 서설로서 쓴 프랑스지리지(1903)의 저자로서 알려져 있다. 다른 저작으로서, 인문지리학원리(1922)가 있다.

Friedrich Ratzel(1844-1904). “국가란 토착의 유기체이다(Der Staat ist ein bodenständiger Organismus)”라는, 이른바 국가유기체설로 유명한 독일의 지리학자. 1896정치지리학(Politische Geographie)을 출판했기에 지정학의 시조 중 한 명이라 불린다. 헥켈과 다윈의 이론을 수용하면서도 인간 활동의 결정 요인으로서의 물리적 환경(공간, raum)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국경은 국가의 동화력의 경계선이며, 성장력 있는 국가의 국경은 확대된다는 이념을 내놓았다. 이런 생각은 지리적 환경결정론에 의거한 것이며, 민족이나 국민에 대한 생활공간의 확립을 생태학적으로 파악한 것이었다. 라첼의 이런 사상은 나중에 독일의 지리학자 칼 하우스호퍼(루돌프 헤스의 스승이기도 했던)생존권(生存圈)” 개념으로 계승되며, 나치 정권을 뒷받침한 이론적 이데올로기에 편입됐다. 이 밖에 인문지리학(1882-91) 등의 저작이 있다

Houston Chamberlain(1855-1927). 영국 출신의 작가. 일찍부터 독일에서 살았으며, 1882년에 바이로트에서 바그너와 만나고, 평생 동안 바그너 신봉자가 된다. 바그너의 둘째 딸 에파 마리아와 결혼했다. 이후 고비노와 바그너 등의 사상에서 영향을 받고, 19세기의 기초(1899), 마리아의 세계관(1918), 인종과 민족(1918), 인종과 인격(1925) 등 인종주의적 경향이 강한 저작을 차례로 발표한다. 특히 19세기의 기초는 나치의 공인 어용철학자인 알프레트 로젠베르크가 쓴 20세기의 신화와 나란히, 나치의 인종정책에 있어서의 최대의 이론적 지주가 된다. 또한 본문에도 있듯이, 윅스퀼은 체임벌린(Chamberlain)의 친구이며, 그의 미완의 원고를 편집하기도 하고, 그에 관한 에세이를 몇 개 쓰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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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린 인간과 동물

L’aperto

L’uomo e l’animale

 

 

조르조 아감벤

김상운 옮김

영어판으로 1.

인용은 금함


9. 인간학 기계

 

 

Homo alalus primigenius Haeckelii

(헥켈의 말을 갖지 못한, 일찍 태어난 인간 )

한스 바이힝거(Hans Vaihinger)

 

1899년 예나 대학의 교수인 에른스트 헥켈은 슈투트가르트의 크뢰너 출판사에서 세계의 수수께끼(Die Welträtsel)를 출판했다. 이 책은 모든 이원론과 형이상학에 맞서 철학적 진리 탐구와 자연과학의 진보를 화해시키려고 꾀했다. 이 책이 다루는 문제들의 전문성과 폭에도 불구하고, 이 책은 단기간에 15만부 이상이 팔리면서 이른바 과학적 진보주의의 복음서[성서]가 됐다. 책 제목은 에밀 뒤 보아-레이몽이 이보다 수년전에 베를린 과학 아카데미에서 했던 강연에 대한 아이러니한 암시 이상의 것을 담고 있다. 이 강연에서 저명한 과학자는 일곱 개의 세계[과학]의 수수께끼를 열거했는데, 그 중 세 가지를 초월적이고 해결 불가능한 수수께끼”, 다른 세 가지를 아직 해결되지 못했으나 해결할 수 있는 수수께끼, 그리고 마지막 한 가지를 불확실한 수수께끼라고 부른다. 뒤 보아-레이몽의 처음 세 개의 수수께끼를 독자적인 실체론[물질론]에 의해 말끔하게 해소했다고 믿은 헥켈은 책의 5장에서 인간의 기원이라는 문제 중의 문제에 집중적으로 파고들었다. 헥켈은 아직 해결되지 못했으나 해결 가능한 뒤 보아-레이몽의 세 가지 문제를 어떻게든 인간의 기원의 문제 자체에 결부시키고자 하는 것이다and that in some ways encompasses Du Bois-Reymond’s three solvable, though not yet solved, problems. 그리고 여기서도 헥켈은 다윈의 진화론을 철저하고 일관되게 적용함으로써 의문을 명확하게 해결했다고[이 문제에 종지부를 찍었다]고 생각했다.

헥켈은 이미 토머스 헉슬리인간이 원숭이의 자손이라는 이론이 어떻게 다윈주의의 필연적 귀결인가를 보여줬다고 설명한다(Haeckel, 37). 그러나 바로 이 확신은 비교해부학의 결과는 물론이고 고생물학적 연구의 발굴에 기초해 인간의 진화사를 재구축한다는 어려운 과제를 부과한다[그러나 바로 이 확신 탓에 곤란한 과제가 생기게 된다. , 비교해부학의 연구 성과와 마찬가지로 고생물학 연구의 발굴결과에 기초해 인간 진화의 역사를 재구성해야만 하는 것이다]. 헥켈은 1874년의 인류발생학(Anthropogenie)에서 이미 이 과제에 전념했다. 이 책에서 그는 실루리아기의 어류에서 시작되고, 3기 중신세Miocene의 인원(人猿)manapes이나 유인원(類人猿)Anthropomorphs에 이르기까지 인간의 역사를 재구축했다. 그러나 헥켈이 특별히 기여한[진력했던] 그가 자랑하듯 얘기한 것 은 유인원(類人猿)anthropoid apes(혹은 인원man-apes)에서 인간으로의 이행의 한 형태로서 특별한 존재를, 즉 그가 원인ape-man(Affenmensch)’, 혹은 언어능력이 없었기 때문에 피테칸트로아스 알랄루스Pithecanthropus alalus[언어를 갖지 못한 원숭이와 비슷한 인간]라고 부른 특별한 존재를 가정했다는 것이다.

 

3기 초반(시신세)배반포 유류Placentals에서부터 영장목의 최초 선조인 반원(半猿, semiscimmie)이 파생됐다. 3기 중신세에 접어들면, 이 반원에서 진화해 본래적 의미의 원숭이가 등장했다. 보다 정확을 기한다면, 협비류(狭鼻類)의 원숭이로부터, 우선 처음으로 개코 원숭이dog-apes(긴꼬리 원숭이Cynopitheci), 그 다음에는 인원man-apes(人猿)(유인원Anthropomorphs)이 생겨났다. 이 가장 나중의 유인원의 혈통에서 선세기(Pliocene period)의 시기에, 언어를 갖지 못한 원인(猿人) 피테칸트로푸스 알랄루스가 파생되며, 그리고 결국에는 이 원인으로부터 말을 하는 인간이 탄생한다(Ibid.)


이런 피테칸트로푸스 또는 원인ape-man이 실존했다는 것은 1874년의 시점에서는 아직 단순한 가설에 불과했지만, 1891년에 네덜란드의 군의사 유진 뒤보아가 자바섬에서 현생 인류의 것과 유사한 두개골과 대퇴골의 뼛조각[두개골의 뼛조각과 현생 인류의 것과 유사한 대퇴골]을 발견했을 때 현실reality이 됐다. 그리고 헥켈을 크게 만족시켰던 것은 (헥켈의 열광적인 애독자였던) 뒤보아가 이때 그 뼈의 주된 존재에 피테칸트로푸스 에렉투스[직립원인]이라고 명명했던baptized 것이다. 헥켈은 단호한 어조로 다음과 같이 확언했다. “이것이야말로 영장목(霊長目)의 진화[]적 연쇄에 있어서 간절히 원했던, 부족하다고 가정됐던 잃어버린 고리이다. 이것은 열등한 협비류(狭鼻類) 원숭이로부터 가장 고도로 진화된 인간에 이르기까지 끊어지지 않고 쭉 뻗어 있다is in truth the much-sought ‘missing link,’ supposed to be wanting in the evolutionary chain of the primates, which stretches unbroken from the lowest Catarrhines to the highest developed man”(Ibid., 39).

그러나 말을 갖지 못한 원인[sprachloser Urmensch]이라는 이 관념 이것도 헥켈이 정의한 것인데 은 그가 전혀 깨닫지[예상치] 못한 듯한 몇 가지 아포리아를 수반[내포]했다. 동물에서 인간으로의 이행은, 비교해부학과 고생물학의 발굴자료를 강조했음에도 불구하고, 실제로는 둘 중 어느 하나와는[그 어떤 것과도] 아무 관계도 없는 요소, 그 대신 인간을 규정하는 특징[인간의 상징]이라며 전제되었던 요소, 즉 언어라는 요소를 빼버림으로써 산출됐다. 스스로를 언어와 동일시한다는 점에서 말하는 인간은 이미 인간이자 아직은 인간이 아닌 것으로서[이미 인간인 것이든, 아직 인간이 되지 못한 것이든] 자기 자신의 바깥에 자신의 고유한 침묵성을 두고 있다.

여기서 얘기는, 근대과학의 방법을 유대교 연구에 응용하려 한 유대주의의 과학[Wissenschaft des Judentums]을 대표하는 마지막 후예 중 한 명이기도 한 하이만 슈타인탈이라는 언어학자로 향하게 된다. 왜냐하면 그는 말을 갖지 못한 사람(Homo alalus)’이라는 헥켈의 이론, 그리고 더 일반적으로는, 우리가 근대의 인간학적 기계라고 부르는 이론에 내포된[숨어 있는] 아포리아를 적나라하게 보여주기 때문이다. 언어의 기원에 관한 자신의 연구에서 슈타인탈은 헥켈보다 훨씬 몇 년 전에, 인류의 전언어적 단계라는 관념을 자기 나름의 방식으로 개진했다. 슈타인탈은 언어가 아직 출현하지 않았던 무렵에 인간의 지각적 생명[지각에 의해서만 영위된 인간의 생명]의 단계를 상상[상정]하려고 노력했으며, 그는 이 단계를 동물의 지각적 생명[지각에 의해서만 영위된 동물의 생명]의 단계와 비교했다. 그러고 나서 슈타인탈은 언어가 어떻게 인간의 지각적 생명에서 샘솟아날 수 있었는지, 그리고 왜 동물의 지각적 생명에서는 그럴 수 없었는지를 보여주려고[설명하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바로 여기에서, 그가 불과 몇 년 후에 완벽하게 깨달았던[지겨울 정도로 되새기게 됐던] 하나의 아포리아가 출현했다. 슈타인탈은 이렇게 썼다.

 

우리는 이 순수하게 가설적인 인간의 정신 단계를 동물의 그것과 비교하고, 대체로 모든 면에 걸쳐, 전자 속에서 힘의 과잉을 발견한 것이다. 이로부터 우리는 인간 정신이 이 과잉을 언어의 창출에 할당한 채로 내버려뒀다. 이리하여 우리는 왜 언어가 인간 정신과 그 지각에서 비롯되는지, 왜 동물의 그것으로부터 발생하지 않았는지를 증명할 수 있었다. 그러나 우리에 의한 인간 정신 및 동물의 정신의 서술에 있어서, 우리는 언어를 도외시할 수밖에 없었다. 바로 언어의 가능성을 입증하는 것이야말로 중요했음에도 불구하고, 무엇보다 우선 제시해야 했던 것은 언어가 형성하는 정신의 힘이 도대체 어디에서 유래하는가였다. 언어를 창출할 수 있다는 이 힘은, 언어에서 유래할 수 없다는 것은 명백하다. 그렇기에 우리는 언어에 선행하는 인간단계를 상정한 것이다. 그러나 이 인간단계는 하나의 허구에 불과하다. 사실, 언어는 인간 존재에 있어서 매우 필연적이고 자연적인 것이며, 언어를 빼고서는 인간은 존재할 수 없으며, 존재하는 것으로서 고찰될 수 없는 것이다. 인간은 언어를 갖고 있거나, 혹은 단순히 갖고 있지 않거나 둘 중 하나이다. 한쪽은 그리고 이것이야말로 허구를 정당화하는 것인데 언어를, 인간 정신 속에 이미 생득적으로 갖춰져 있는 것으로서 고찰할 수도 없다. 오히려 아직 충분히 의식되고 있지 않지만, 언어는 이미 인간의 생산물이다. 언어는, 정신의 한 발전 단계이며, 그것에 선행하는 선행단계로부터 연역될 필요가 있다. 언어와 더불어, 진정한 의미에서의 인간 활동이 시작된다. 언어는 동물계로부터 인간계로 통하는 가교이다. 그러나 우리는 동물성으로부터 인간성에 이르기까지 언어를 통해서 진보를 걸었던 것이 동물이 아니라 인간뿐이었다는 근거를, 동물과 동물인을 비교함으로써 설명하고 싶다고 원했던 것이다. 이 비교에 의해 판명된 것은, 우리가 상상하려 한 인간, 즉 언어를 갖지 못한 인간이란, 동물인[Tier-Mensch]이며, 인간-짐승[Menschentier]이 아니라는 것이며, 그래도 이것은 이미 인간종이며, 동물종이 아니라는 것이다. (Steinthal 1881, 355-56).


인간을 동물로부터 구별하는 것은 언어이다. 그러나 언어는 인간의 정신물리학적[심적] 구조 속에 선천적으로 갖춰져 있는 자연적 소여가 아니다natural given already inherent in the psychophysical structure of man. 오히려 언어는 역사적 산물이다. 따라서 그런 것으로서의 언어는 동물에게도 인간에게도 고유하게properly 할당[배정]될 수 없다. 만일 이 요소가 사상(捨象)된다면, 동물에서 인간으로 이행하는 가교로서 기능하게 될 말하지 않는nonspeaking 인간 바로 호모 알랄루스(Homo alalus[말을 갖지 못한 인간]) 을 상상하지 않는 한, 인간과 동물의 차이는 없어질[무효가 될] 것이다. 그러나 말을 갖지 못한 인간이 언어가 드리우는 그림자, 말을 하는 인간의 전제조건일 뿐이라는 것은 명백하다. 우리는 오히려 말을 하는 인간에 의해 항상 인간의 동물화(헥켈의 원인ape-man과 같은 동물인animal-man) 혹은 동물의 인간화(인원man-ape)만을 [이 둘 중 하나만을] 입수한다obtain[추출하는 것이다]. 동물-인간과 인간-동물은 두 측면들 중 어느 하나에 의해서도 수리될 수 없는 단일한 균열[단절]fracture의 두 측면들이다.

몇년 후, 슈타인탈은 그 당시 과학 논쟁과 철학 논쟁의 중심부에[소용돌이에] 있던 다윈과 헥켈의 테제들을 배운 후에, 자신의 이론으로 되돌아가면서, 자신의 가설에 내포된[암시된] 모순을 완벽하게 깨닫는다. 슈타인탈이 이해하려 노력했던 것은 왜 동물이 아니라 인간만이 언어를 창출하는가였다. 하지만 이것은 인간이 어떻게 동물에서 기원하는가를 이해하는 것과 버금가는 것이었다. 그리고 바로 여기서 모순이 생기는 것이다.

 

직관이라는 전 언어적 단계는 하나일 수 있을 뿐, 이중적일 수가 없다. 그리고 직관은 동물에게서도 인간에게서도 다를 수 없다. 만약 동물과 인간에게서 직관이 다르다면, 즉 만약 인간이 동물보다 자연적으로 고등하다면[처음부터 원숭이보다 고등하다면], 인간의 기원은 언어의 기원과 일치하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인간의 기원은 동물의 직관인 저등한 형태의 직관에서 기원하는 인간의 고등한 직관의 형식의 기원과 일치할 것이다. 나는 이를 깨닫지 못한 채, 이 기원을 전제로 삼았다. , 이런 인간적 특성을 지닌 인간은 사실상 [신에 의한] 창조를 통해 내게 주어진 것이며, 그리하여 인간에게서 언어의 기원을 발견하려고 애썼던 것이다. 하지만 이런 식으로 나는 언어의 기원과 인간의 기원이 하나의 동일한 것이라는 나의 전제와 모순을 범하게 됐다. 나는 먼저 인간을 설정하고 그 다음으로 인간이 언어를 산출하게 했던 것이다(Steinthal 1877, 303).


슈타인탈이 여기서 감지하는 모순은 우리 문화에서 고대와 근대적인 그 두 개의 변이들에서[고금의 이중주를 확대 전개하면서] 작동하고 있는 인간학 기계를 정의하는 것과 똑같은 모순이다. 인간/동물, 인간/비인간의 대립을 통한 인간의 산출이 여기에서[오늘날의 문화에서] 관건인 한에서, 인간학 기계는 필연적으로 배제(항상 이미 포획이기도 하다)와 포함(항상 이미 배제이기도 하다)에 의해 기능한다. 실제로 인간이 매번 전제되어 있기 때문에, 인간학 기계는 일종의 예외상태를, 즉 외부가 내부의 배제에 다름 아니고 내부가 다시 외부의 배제일 뿐인 미결정의 지대a zone of indeterminacy를 현실적으로 산출한다.

한편으로 우리는 근대인들의 인간학적 기계를 갖고 있다. 우리가 봤듯이, 이 기계는 이미 인간 존재인 것을 (아직) 인간이지 않은 것으로서의 자기 자신으로부터 배제함으로써 기능한다. , 인간을 동물화함으로써, 인간 내부에서 비인간적인 것인 호모 알랄루스(Homo alalus)’ 혹은 원인ape-man을 분리함으로써 작동하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의 연구영역을 몇십 년 전으로 돌려놓는 것으로도 충분할 것이다. 그렇게 하면 이런 무해한 고생물학적 발굴 자료를 대신해 우리는 유대인을, 달리 말해서 인간 내부에서 산출된 비인간non-man, 혹은 새로운 사체(新死體, néomort)나 과잉혼수상태, 즉 인간 신체 내부에서 분리된 동물을 손에 넣을 것이다.

초창기[고대인의] 시대의 기계는 정확하게 이와 대칭적인 방식으로 작동한다. 만일 근대인들의 기계에서 외부가 내부의 배제를 통해 산출되고 비인간이 인간을 동물화함으로써 산출된다면, 여기서 내부는 외부의 포함을 통해 획득되며, 비인간non-man은 동물의 인간화에 의해 산출된다. , 인원man-ape, ‘야생아enfant sauvage혹은 호모 페루스Homo ferus’, 하지만 또한 무엇보다 우선, 인간의 형태를 한 동물의 형상들로서의 노예, 야만인, 이방인들이 그렇다. [고대와 근대의] 두 기계는 그 중심에 미식별 지대a zone of indifference를 설정함으로써만 기능한다. 이 중심 안에서는 이미 잠재적으로 현전하고virtually present 있기 때문에 항상 결여하고 있는 잃어버린 고리[상실된 환경]로서 인간과 동물, 인간과 비인간[인간이 아닌 것]nonman, 말하는 존재와 살아 있는 존재 사이의 분절이 발생할 수밖에 없다. 모든 예외의 공간과 마찬가지로, 이 미식별 지대는 사실상 완벽하게 텅 비어 있으며, 거기서 생겨야 마땅한 진정으로 인간적인 존재는 끊임없이 최신의 것으로 갱신되는 결정의 장소일 뿐으로, 이 장소에서는 [인간적인 것을 결정하는] 간극caesurae과 그 재분절화가 항상 새롭게 탈구되며dislocated 자리바꿈된다displaced. 하지만 그렇게 획득될 수 있는 것은 동물적인 생명도 인간적인 생명도 아니고, 그저 자기 자신으로부터 분리되고 배제된 생명, 즉 벌거벗은 생명뿐이다.

그리고 인간과 비인간의 이런 극단적 형상[벌거벗은 생명]과 접하면, 두 개의 기계들(혹은 똑같은 기계의 두 개의 변종들) 중에서 어떤 것이 더 좋거나 더 효과적인지를 묻는 것 아니 오히려 둘 중 어떤 것이 덜 치명적이고 피비린내가 덜 나는지를 은 아무래도 좋은 일이다. 오히려 중요한 것은 이런 기계들이 어떻게 작동하는가를 이해하고, 결국에는 이런 기계들을 중지시킬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Posted by 상겔스 상겔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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