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린 인간과 동물

L’aperto

L’uomo e l’animale

 

 

조르조 아감벤

김상운 옮김

영어판으로 1.

인용은 금함


11. 진드기

 

동물은 기억을 갖고 있으나 기록은 갖고 있지 않다.

하이만 슈타인탈

The animal has memory, but no memories.

Heymann Steinthal

 

 

윅스퀼의 책들은 때때로 도판들illustrations을 담고 있는데, 이것들은 고슴도치, 꿀벌, 파리, 개의 관점에서 인간 세계의 절편segment이 어떻게 보일 수 있는지에 대한 힌트를 주려고 한다. 비인간[인간이 아닌 것]의 눈으로 가장 친숙한 장소들을 갑작스럽게 보도록 강제되면, 이것은 독자에게 편치 않은disorienting[방향상실의] 효과를 산출할 것인데, 실험은 이런 효과를 거두기에 유용하다. 하지만 이런 편치 않음disorientation[방향 상실]은 윅스퀼이 진드기라는 이름으로 좀 더 널리 알려진 진드기류(Ixodes ricinus)의 환경을 묘사할 때 부여할 수 있었던 조형적인 힘figurative force[표현력]에는 결코 도달하지 못할 것이다. 윅스퀼의 서술은 확실히 위뷔 왕(Ubu roi)테스트 씨(Monsieur Teste)와 나란히 읽혀져야 할, 근대적 반인간주의의 극치를 이룬다.

서두는 목가적인 어조를 띠고 있다.

 

[길들여진] 개를 데리고 자주 숲과 덤불을 돌아다니는 시골주민이라면 반드시 그렇다고 말해도 좋을 정도로, 한 마리의 작은 동물과 친숙해지지 않을 수 없다. 이 작은 동물은 작은 가지에 매달려 인간인지 동물인지를 묻지 않고 먹잇감을 기다리며, 머리 위로 뛰어내려 그 피를 빨아먹는 것이다. 알에서 막 부화한 시점에서는 이 작은 동물은 아직 완전히 성충이 되지 않는다. , 다리 한 쌍과 생식기가 결여되어 있다. 그러나 이미 이 단계에서 이 놈은 풀잎 끝에서 매복해 있으며, 도마뱀 같은 냉혈동물을 습격하는 방법을 알고 있다. 탈피를 몇 번이나 되풀이하고, 부족했던 기관을 얻게 되면, 오로지 온혈동물을 사냥감으로 삼아 사냥에 나서게 된다. 암컷은 산란기에 들어가면, 알맞은 높이에서 재빠르게 아주 작은 포유동물 위에 뛰어내리거나, 아니면 더 큰 대형 동물에 의해 부딪치게 되는 것, 여덟 개의 다리를 사용해 잔가지의 끝에까지 기어오르는 것이다(Uexküll, 85-86).

 

윅스퀼의 지시를 따르면서, 여름의 어떤 갠 오후에 덤불에 매달린 진드기를 상상해보자. 사방팔방이 형형색색의 들꽃이 내뿜는 향기, 꿀벌과 다른 곤충들이 윙윙거리는 소리, 새들의 지저귐에 둘러싸이면서 햇볕을 쬐고 있는 듯하다. 하지만 여기서 목가(牧歌)는 이미 끝났다. 진드기는 이런 모든 것을 전혀 지각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눈이 없는 이 동물은 빛에 대한 껍질의 일반적인 감각만의 도움을 빌려 매복하는 방법을 찾아낸다[이 동물에는 눈이 없다. 그래서 매복하는 장소는 밝음에 대한 몸 껍질의 감각만으로 찾고 있는 것이다]. 이 눈멀고 귀먹은 강도는 후각을 통해서만 사냥감이 접근하는 것을 알아챈다. 모든 포유류의 피지모낭sebaceous follicles에서 발산되는 낙산(酪酸)butyric acid 냄새가 진드기에게는 신호로서 작용하며, 그리하여 매복한 장소를 뒤로 한 채 먹잇감을 향해 운에 맡긴 채blindly 낙하하게끔 야기한다. 만일 (정확한 온도를 감각할 수 있는 기관에 입각해 진드기가 지각하는) 따뜻한 뭔가에 낙하할 수 있을 정도로 충분히 운이 좋다면, 진드기는 먹잇감인 온혈동물에 착지했다는 것이며, 이후에는 촉각에만 의지하여 가급적 몸에 털이 없는 지점을 찾아내고 먹잇감의 피하조직에 머리부터 깊숙이 파고들어갈 수 있다. 이제 진드기는 따뜻한 피의 흐름을 천천히 빨아들일 수 있다(ibid., 86-87).

 

이 지점에서 우리는 진드기가 피 맛을 좋아한다고, 혹은 적어도 피 맛을 지각할 수 있는 감각을 소유한다고 당연하게 기대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윅스퀼이 전하는 바에 따르면, 연구실에서 모든 종류의 체액으로 채워진 인공적인 막membranes을 사용해 실험한 결과는 진드기가 모든 미각을 절대적으로 결여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진드기는 적절한 온도를 갖고 있다면, 즉 포유류의 혈액 온도에 대응하는 섭씨 37도를 갖고 있다면, 어떤 체액이든 열심히 빨아들인다. 아무튼 진드기가 벌이는 피의 잔치는 장례의 만찬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이제 진드기에게는 땅바닥에 내려와서 산란하고 죽는 것 말고는 해야 할 것이라고는 이제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기 때문이다.

진드기의 예는 모든 동물들에게 고유한 환경이 지닌 일반적 구조를 보여준다. 특히 이 경우 환세계는 세 가지 의미[작용]의 담지자 혹은 표식(Merkmalträger)’의 담지자로 환원될 뿐이다. (1) 모든 포유류의 땀에 포함된 낙산(酪酸)butyric acid 냄새. (2) 포유류의 혈액과 똑같은 섭씨 37도의 온도. (3) 일반적으로 체모를 갖추고 있고 모세혈관으로 뒤덮여 있는 포유류에 특징적인 껍질의 유형. 하지만 진드기는 이 세 가지 요소들과 강렬하고 열정적인passionate 관계로 직접적으로 통일되어 있다[불가분한 관계로 직접 연결되어 있다]. 인간의 세계가 외견상 아무리 풍요롭게 보이더라도, 그 세계와 인간을 묶는 관계는 아마도 이와 비슷하게 강렬한 관계일 수는 없을 것이다the likes of which we might never find in the relations that bind man to his apparently much richer world. 진드기는 이런 관계이다. 그리고 진드기는 이런 관계 속에서만, 이를 관계를 통해서만 살아갈 뿐이다she lives only in it and for it.

하지만 바로 이 지점에서 윅스퀼은 우리에게 다음의 얘기를 알려준다. 로스톡Rostock[발트해 연안의 독일의 한자도시]의 실험실에서는 18년 동안 먹이도 없이, 즉 환경으로부터 완벽하게 격리된 조건에서 진드기 한 마리가 살아 있었다고 한다. 윅스퀼은 이 특이한 사실에 대해 전혀 설명을 제시하지 않으며, 진드기는 기다리는 기간 동안우리가 매일 체험하고 있는 것과 유사한 수면 비슷한 상태에 있었을 것이라고 추측했을 뿐이다. 그런 다음 윅스퀼은 살아 있는 주체 없이는 시간은 존재할 수 없다without a living subject, time cannot exist는 유일한 결론을 끌어낸다(ibid, 98). 하지만 18년 동안 지속된 이런 중지상태에서 진드기와 그 세계는 도대체 어떻게 되는가[세계에는 도대체 무엇이 일어났는가]? 환경과의 관계에만 전적으로 놓여 있는 생물a living being that consists entirely in its relationship with the environment이 그런 환경의 절대적인 결핍 속에서 살아남는 것은 어떻게 가능한가? 그리고 시간도 없고 세계도 없이 기다린다고 말할 수 있다는 것은 도대체 무슨 의미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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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르조 아감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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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환[경]세계

 

그 어떤 동물도 물자체와의 관계에 들어설 수 없다.

야콥 폰 윅스퀼(Jakob von Uexküll)

 

오늘날 20세기의 가장 위대한 동물학자 중 한 명이자 생태학의 시조들 중 한 명으로 간주되는 야콥 폰 윅스퀼 남작이 제1차 세계대전에 의해 파산하게 된 것은 오히려 다행이었다. 확실히, 이런 일이 있기 전에도 이미, 먼저는 하이델베르크에서, 다음에는 나폴리의 동물학 연구소에서 그는 독립연구자로서, 무척추동물들의 생리학과 신경계[생리학 및 무척추동물의 신경계통에 관한] 연구로 꽤 훌륭한 과학적 명성을 누렸다. 그러나 상속재산을 잃자마자 그는 남부 이탈리아의 햇빛을 뒤로 하지 않을 수 없었으며(그렇지만 카프리 섬에 있는 별장은 계속 갖고 있었다. 그는 여기서 1944년에 거뒀으며, 1926년에는 발터 벤야민이 몇 개월 동안 머물렀다), 함부르크대학으로 전속하고, 이곳에서 그를 더 유명하게 만든 환세계연구소(Institut für Umweltforschung)를 설립했다.

동물의 환경에 관한 윅스퀼의 조사는 양자물리학과 아방가르드 예술의 등장과 동시대적이다. 이런 것들과 마찬가지로, 윅스퀼의 조사도 생명과학에 있어서 모든 인간중심주의적 관점의 유보 없는 폐기를, 그리고 자연의 이미지의 근본적인 탈인간화를 표현했다(따라서 이것들이[윅스퀼의 연구가] 다른 누구보다도 인간을 생명 존재[생물 일반]the living being로부터 분리하려고 애를 쓴 20세기의 철학자인 하이데거뿐 아니라, 인간을 절대적으로 비의인화적인nonanthropomorphic 방식으로 동물을 사고하려 노력한 질 들뢰즈에게 강하게 영향을 미쳤다고 해도 결코 놀랍지 않다). 고전적 과학이 바라본 세계가 가장 단순한 원소 형태부터 더 고등한 유기체[생물]organisms에 이르기까지 위계적으로 배열될 수 있는 모든 생물 종들all living species을 그 내부에 포괄하고 있는 단일한single 세계였다면, 윅스퀼은 오히려 무한하게 다양한 지각 세계들을 전제한다. 이 지각 세계들은 마치 거대한 악보에서처럼 한결같이 완벽하고 서로 연결되어 있으나 서로 교통하고 있지 않고 서로 배타적이다. 이런 세계의 중심에는 나팔성게[Echinus esculentus], 아메바 테리콜라[Amoeba terricola], 배럴 해파리[Rhizostoma pulmo], 성구동물[별벌레][Sipunculus], 아네모니아 술가타[말미잘][Anemonia sulcata], 익소데스 리시누스 진드기[Ixodes ricinus] 등등의 친숙한 동시에 약간 소원한 작은 동물들beings이 놓여 있다. 따라서 윅스퀼은 성게, 아메바, 해파리, 별벌레, 말미잘, 진드기(이것들은 위에서 적은 생물들being의 보통명사이다)와 자신이 특별히 좋아한 다른 작은 유기체의 환경을 재구성하는 것을 미지의 세계들로 향한 짧은 여행excursions in unknowable worlds이라고 부른다. 왜냐하면 이런 피조물들[작은 생물들]에서 볼 수 있는 환경과의 기능적 통일[일치]은 인간 및 이른바 고등동물들의 그것과는 꽤 거리가 먼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그는 이렇게 주장한다. 어떤 특정한 동물적 주체가 자신의 환경에 있어서 사물들과 맺고 있는 관계는 우리를 우리네 인간 세계에 있어서 대상들과 묶고 있는 관계들과 똑같은 공간과 똑같은 시간 속에서 발생한다고 우리는 너무도 자주 상상한다. [그러나] 이런 착각illusion은 모든 생명 존재들all living beings이 하나의 단일한single 세계에 위치되어 있다는 믿음에 입각해 있다. 윅스퀼이 보여주는 것은 그런 일원론적unitary 세계는 실존하지 않으며, 마찬가지로 모든 생명 존재들에게 등질적인equal 공간과 시간도 실존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한낮에 우리 곁에서 날고 있다고 우리가 관찰하는 파리, 잠자리, 벌은 우리가 이것들을 관찰하고 있는 세계와 똑같은 세계에서 움직이고 있는 것이 아니며, 이것들은 우리와 혹은 이런 곤충들 사이에서도 똑같은 시간과 공간을 공유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윅스퀼은 우리가 어떤 생명 존재[생물]living being가 움직이고 있는 것을 보고 있는 객관적 공간인 환경(Umgebung)’을 다소간 넓은[크고 작은 풍부한] 일련의 요소들에 의해 구성되는 환경-세계인 환세계(Umwelt)’와 신중하게 구별하는 데서 시작한다. 그리고 그는 동물의 관심을 끄는 유일한 것들인 이런 요소들을 의미[작용]의 담지자(Bedeutungsträger)’ 또는 지각 표식의 담지자(Merkmalträger)’라고 부른다. 실제로 환경(Umgebung)’은 우리 인간에게 고유한 환세계(Umwelt)’인데, 윅스퀼은 이것에 어떤 특별한 특권을 부여하지 않는다. 오히려 환세계는 이것을 관찰하는 관점이 취하는 방식에 따라 변할 수 있다. 객관적으로 정해진 환경으로서의 숲이 실존하는 게 아니다. , 실존하는 것은 삼림감독관에게서의-, 사냥꾼에게서의-, 식물학자에게서의-, 나그네[산책자]wayfarer에게서의-, 자연애호가에게서의-, 나무꾼carpenter에게서의-, 그리고 빨간 모자를 쓴 아이Little Red Riding Hood가 길을 잃은 동화의 숲이다. 의미의 담지자로 간주된 가장 작은 세부사항(예를 들어 가령 들꽃의 줄기)조차도, 이것이 상이한 환경에 놓여 있을 때마다 매번, 때로는 그것이 관찰되는 환경이 변화함에 따라 다른 요소를 구성한다. 가령 꽃을 꺾어 작은 꽃다발로 엮은 소녀의 환경에서 줄기는 코르셋에 핀을 꽂아 꽃을 장식하기 위한 것이며, 개미의 환경에서 줄기는 꽃받침calyx에 있는 영양분에 도달하기 위한 이상적인 경로이다. 또 매미 유충의 환경에서 줄기는 폭신폭신한 누에고치의 액체부분을 만들기 위해 줄기의 수관[髄管]medullary canal에 구멍을 뚫어 이를 펌프로 이용하기 위한 것이다. 그리고 젖소의 환경에서 줄기는 그저 되새김질을 해서 먹이로서 삼키는 것일 뿐이다.

모든 환경은 그 자체에 있어서[그 자체 안에] 닫힌 통일체이다a closed unity in itself. 이 통일체는 바로 인간의 환경에 다름 아닌 환경(Umgebung)’에서부터 일련의 요소들이나 지각 표식을 선택적으로 추출한 결과로부터 생겨난다. 동물을 관찰하는 연구자의 첫 번째 과제는 동물의 환경을 구성하고 있는 의미[작용]의 담지자들을 판별하는recognize 것이다. 그러나 의미의 담지자들은 객관적이고 현사실적으로 떼어내지는isolated 것이 아니라 오히려 동물의 수용 기관들과의 긴밀한 기능적 혹은 윅스퀼이 좋아하는 표현을 쓴다면 음악적 통일성을 구성한다. 그리고 이런 수용 기관들은 표식을 지각하는 것(지각기관, Merkorgan)과 이 표식에 반작용하는 것(작용기관, Wirkorgan)에 할당되어 있다. 의미[작용]의 외부적 담지자와 동물의 신체에서의 이것의 수용은 마치 단일한 악보에 있는 두 개의 요소들, 건반 위의 두 개의 음표들을 구성하고 있는 것과도 같은 식으로 모든 게 일어난다. 이 건반 위에서, 자연은 의미[작용]의 초시간적이고 초공간적인 교향곡을 연주하고 있는데”, [이런 의미작용이 없다면] 이다지도 이질적인 두 개의 요소들이 어떻게 이토록 긴밀하게 연결될 수 있었는지를 말하기란 불가능할 것이다[그 이유를 알아낼 수는 없을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거미집에 대해 고찰해보자. 거미는 파리에 관해 아무것도 모른다. 또 파리는 양복장이가 고객의 옷을 만들기 전에 치수를 재는 것처럼 파리의 치수를 잴 수도 없다. 그렇지만 거미는 파리의 몸집에 맞춰서 거미집의 방사망 길이를 결정하며, 날고 있는 파리의 몸체의 충격력에 대해 정확한 비율로 줄의 저항을 조정한다. 더욱이 방사선 모양의 줄은 원형 모양의 줄보다 더 튼튼하다. 왜냐하면 방사선 모양의 줄과 달리 점착성 액체가 발라져 있는 원형 모양의 줄은 파리를 가둬서 날아가지 못하게 할 정도로 충분히 탄력성을 갖춰야 하기 때문이다. 방사선 모양의 줄의 경우, 이런 거미집은 부드럽고 건조하다. 왜냐하면 거미는 먹잇감을 향해 덤벼들기 위한 지름길로 줄을 사용하고 마침내 먹잇감을 보이지 않는 감옥 안에 감아두기 때문이다. 실제로 가장 경탄을 금치 못하는 사실은 거미집의 줄이 파리의 눈의 시각적 능력에 정확하게 들어맞는다는 것이다. 파리는 줄을 볼 수 없으며 따라서 깨닫지도 못한 채 죽음을 향해 날아드는 것이다. 파리와 거미라는 두 개의 지각적 세계들은 전혀 교류하지 않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완벽하게 조화를 이루고 있다. 그리하여 우리는 파리라는 원본 악보 원본 이미지나 원형이라고도 부를 수 있는 가 거미가 짓는 거미집을 파리에 안성맞춤인거미집이라고 형언할 수 있을 정도로 거미의 악보에 작용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비록 거미는 파리의 환세계를 결코 볼 수 없지만(윅스퀼은 몇 가지 성공을 거두게 될 하나의 원리를 정식화하면서 이렇게 단언한다. “어떤 동물도 그 자체로서의 대상[물자체]과의 관계에 들어설 수 없다”, 동물의 고유한 의미[작용]의 담지자와의 관계에만 들어설 수 있을 뿐이다라고 말이다) 거미집은 이런 [거미와 파리 둘 다의] 상호적인 맹목성[눈이 멂]의 역설적 일치를 표현한다.

생태학의 창시자인 윅스퀼의 연구는 20세기의 인문지리학human geography을 심대하게 뒤엎어버린profoundly revolutionize 폴 비달 드 라 블라슈의 인구와 그 환경 사이의 관계에 관한 연구(프랑스 지리지Tableau de la géographie de la France1903년에 나왔다)프리드리히 라첼의 국민peoples생존 공간(vital space)’에 관한 연구(정치지리학Politische Geographie1897년에 나왔다)가 나온 지 불과 몇 년 후에 이루어졌다. 그래서 [하이데거의] 존재와 시간의 핵심 테제, 즉 인간의 근본적인 구조로서의 세계-안에-있음(in-der-Welt-Sein)에 관한 테제를 어떤 의미에서는 이런 문제적 영역에 대한 하나의 응답으로 읽는 것은 불가능하지 않을 것이다. [그만큼이나] 20세기 초반에 이 문제적 영역은 생명 존재[생물 일반]the living being와 그 환경-세계 사이의 전통적 관계를 본질적으로 수정한[전환시킨] 것이다. 잘 알려져 있듯이, 모든 국민peoples은 이들의 본질적인 차원으로서 이들의 생존공간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고 하는 라첼의 테제는 나치의 지정학geopolitics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둘 사이의] 이런 근접성proximity은 윅스퀼의 지적 일대기에 나오는 어떤 흥미로운 에피소드에 표시되어 있다. 나치즘이 대두하기 5년 전인 1928년에, 온건하기 그지없는 이 과학자는 오늘날 나치즘의 선도자[흑막]precursors 중 한 명으로 지목되는 휴스턴 체임벌린19세기의 기초(Die Grundlagen des neunzehnten Jahrhunderts)에 서문을 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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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ul Vidal de la Blache(1845-1918). 프랑스의 지리학자. 뤼시앙 갈로와와 더불어 지리학연보(1893)의 창간자이며, 프랑스 지리학파의 창시자. 프랑스 역사가 에르네스트 라비스, 프랑스사에 대한 서설로서 쓴 프랑스지리지(1903)의 저자로서 알려져 있다. 다른 저작으로서, 인문지리학원리(1922)가 있다.

Friedrich Ratzel(1844-1904). “국가란 토착의 유기체이다(Der Staat ist ein bodenständiger Organismus)”라는, 이른바 국가유기체설로 유명한 독일의 지리학자. 1896정치지리학(Politische Geographie)을 출판했기에 지정학의 시조 중 한 명이라 불린다. 헥켈과 다윈의 이론을 수용하면서도 인간 활동의 결정 요인으로서의 물리적 환경(공간, raum)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국경은 국가의 동화력의 경계선이며, 성장력 있는 국가의 국경은 확대된다는 이념을 내놓았다. 이런 생각은 지리적 환경결정론에 의거한 것이며, 민족이나 국민에 대한 생활공간의 확립을 생태학적으로 파악한 것이었다. 라첼의 이런 사상은 나중에 독일의 지리학자 칼 하우스호퍼(루돌프 헤스의 스승이기도 했던)생존권(生存圈)” 개념으로 계승되며, 나치 정권을 뒷받침한 이론적 이데올로기에 편입됐다. 이 밖에 인문지리학(1882-91) 등의 저작이 있다

Houston Chamberlain(1855-1927). 영국 출신의 작가. 일찍부터 독일에서 살았으며, 1882년에 바이로트에서 바그너와 만나고, 평생 동안 바그너 신봉자가 된다. 바그너의 둘째 딸 에파 마리아와 결혼했다. 이후 고비노와 바그너 등의 사상에서 영향을 받고, 19세기의 기초(1899), 마리아의 세계관(1918), 인종과 민족(1918), 인종과 인격(1925) 등 인종주의적 경향이 강한 저작을 차례로 발표한다. 특히 19세기의 기초는 나치의 공인 어용철학자인 알프레트 로젠베르크가 쓴 20세기의 신화와 나란히, 나치의 인종정책에 있어서의 최대의 이론적 지주가 된다. 또한 본문에도 있듯이, 윅스퀼은 체임벌린(Chamberlain)의 친구이며, 그의 미완의 원고를 편집하기도 하고, 그에 관한 에세이를 몇 개 쓰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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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인간학 기계

 

 

Homo alalus primigenius Haeckelii

(헥켈의 말을 갖지 못한, 일찍 태어난 인간 )

한스 바이힝거(Hans Vaihinger)

 

1899년 예나 대학의 교수인 에른스트 헥켈은 슈투트가르트의 크뢰너 출판사에서 세계의 수수께끼(Die Welträtsel)를 출판했다. 이 책은 모든 이원론과 형이상학에 맞서 철학적 진리 탐구와 자연과학의 진보를 화해시키려고 꾀했다. 이 책이 다루는 문제들의 전문성과 폭에도 불구하고, 이 책은 단기간에 15만부 이상이 팔리면서 이른바 과학적 진보주의의 복음서[성서]가 됐다. 책 제목은 에밀 뒤 보아-레이몽이 이보다 수년전에 베를린 과학 아카데미에서 했던 강연에 대한 아이러니한 암시 이상의 것을 담고 있다. 이 강연에서 저명한 과학자는 일곱 개의 세계[과학]의 수수께끼를 열거했는데, 그 중 세 가지를 초월적이고 해결 불가능한 수수께끼”, 다른 세 가지를 아직 해결되지 못했으나 해결할 수 있는 수수께끼, 그리고 마지막 한 가지를 불확실한 수수께끼라고 부른다. 뒤 보아-레이몽의 처음 세 개의 수수께끼를 독자적인 실체론[물질론]에 의해 말끔하게 해소했다고 믿은 헥켈은 책의 5장에서 인간의 기원이라는 문제 중의 문제에 집중적으로 파고들었다. 헥켈은 아직 해결되지 못했으나 해결 가능한 뒤 보아-레이몽의 세 가지 문제를 어떻게든 인간의 기원의 문제 자체에 결부시키고자 하는 것이다and that in some ways encompasses Du Bois-Reymond’s three solvable, though not yet solved, problems. 그리고 여기서도 헥켈은 다윈의 진화론을 철저하고 일관되게 적용함으로써 의문을 명확하게 해결했다고[이 문제에 종지부를 찍었다]고 생각했다.

헥켈은 이미 토머스 헉슬리인간이 원숭이의 자손이라는 이론이 어떻게 다윈주의의 필연적 귀결인가를 보여줬다고 설명한다(Haeckel, 37). 그러나 바로 이 확신은 비교해부학의 결과는 물론이고 고생물학적 연구의 발굴에 기초해 인간의 진화사를 재구축한다는 어려운 과제를 부과한다[그러나 바로 이 확신 탓에 곤란한 과제가 생기게 된다. , 비교해부학의 연구 성과와 마찬가지로 고생물학 연구의 발굴결과에 기초해 인간 진화의 역사를 재구성해야만 하는 것이다]. 헥켈은 1874년의 인류발생학(Anthropogenie)에서 이미 이 과제에 전념했다. 이 책에서 그는 실루리아기의 어류에서 시작되고, 3기 중신세Miocene의 인원(人猿)manapes이나 유인원(類人猿)Anthropomorphs에 이르기까지 인간의 역사를 재구축했다. 그러나 헥켈이 특별히 기여한[진력했던] 그가 자랑하듯 얘기한 것 은 유인원(類人猿)anthropoid apes(혹은 인원man-apes)에서 인간으로의 이행의 한 형태로서 특별한 존재를, 즉 그가 원인ape-man(Affenmensch)’, 혹은 언어능력이 없었기 때문에 피테칸트로아스 알랄루스Pithecanthropus alalus[언어를 갖지 못한 원숭이와 비슷한 인간]라고 부른 특별한 존재를 가정했다는 것이다.

 

3기 초반(시신세)배반포 유류Placentals에서부터 영장목의 최초 선조인 반원(半猿, semiscimmie)이 파생됐다. 3기 중신세에 접어들면, 이 반원에서 진화해 본래적 의미의 원숭이가 등장했다. 보다 정확을 기한다면, 협비류(狭鼻類)의 원숭이로부터, 우선 처음으로 개코 원숭이dog-apes(긴꼬리 원숭이Cynopitheci), 그 다음에는 인원man-apes(人猿)(유인원Anthropomorphs)이 생겨났다. 이 가장 나중의 유인원의 혈통에서 선세기(Pliocene period)의 시기에, 언어를 갖지 못한 원인(猿人) 피테칸트로푸스 알랄루스가 파생되며, 그리고 결국에는 이 원인으로부터 말을 하는 인간이 탄생한다(Ibid.)


이런 피테칸트로푸스 또는 원인ape-man이 실존했다는 것은 1874년의 시점에서는 아직 단순한 가설에 불과했지만, 1891년에 네덜란드의 군의사 유진 뒤보아가 자바섬에서 현생 인류의 것과 유사한 두개골과 대퇴골의 뼛조각[두개골의 뼛조각과 현생 인류의 것과 유사한 대퇴골]을 발견했을 때 현실reality이 됐다. 그리고 헥켈을 크게 만족시켰던 것은 (헥켈의 열광적인 애독자였던) 뒤보아가 이때 그 뼈의 주된 존재에 피테칸트로푸스 에렉투스[직립원인]이라고 명명했던baptized 것이다. 헥켈은 단호한 어조로 다음과 같이 확언했다. “이것이야말로 영장목(霊長目)의 진화[]적 연쇄에 있어서 간절히 원했던, 부족하다고 가정됐던 잃어버린 고리이다. 이것은 열등한 협비류(狭鼻類) 원숭이로부터 가장 고도로 진화된 인간에 이르기까지 끊어지지 않고 쭉 뻗어 있다is in truth the much-sought ‘missing link,’ supposed to be wanting in the evolutionary chain of the primates, which stretches unbroken from the lowest Catarrhines to the highest developed man”(Ibid., 39).

그러나 말을 갖지 못한 원인[sprachloser Urmensch]이라는 이 관념 이것도 헥켈이 정의한 것인데 은 그가 전혀 깨닫지[예상치] 못한 듯한 몇 가지 아포리아를 수반[내포]했다. 동물에서 인간으로의 이행은, 비교해부학과 고생물학의 발굴자료를 강조했음에도 불구하고, 실제로는 둘 중 어느 하나와는[그 어떤 것과도] 아무 관계도 없는 요소, 그 대신 인간을 규정하는 특징[인간의 상징]이라며 전제되었던 요소, 즉 언어라는 요소를 빼버림으로써 산출됐다. 스스로를 언어와 동일시한다는 점에서 말하는 인간은 이미 인간이자 아직은 인간이 아닌 것으로서[이미 인간인 것이든, 아직 인간이 되지 못한 것이든] 자기 자신의 바깥에 자신의 고유한 침묵성을 두고 있다.

여기서 얘기는, 근대과학의 방법을 유대교 연구에 응용하려 한 유대주의의 과학[Wissenschaft des Judentums]을 대표하는 마지막 후예 중 한 명이기도 한 하이만 슈타인탈이라는 언어학자로 향하게 된다. 왜냐하면 그는 말을 갖지 못한 사람(Homo alalus)’이라는 헥켈의 이론, 그리고 더 일반적으로는, 우리가 근대의 인간학적 기계라고 부르는 이론에 내포된[숨어 있는] 아포리아를 적나라하게 보여주기 때문이다. 언어의 기원에 관한 자신의 연구에서 슈타인탈은 헥켈보다 훨씬 몇 년 전에, 인류의 전언어적 단계라는 관념을 자기 나름의 방식으로 개진했다. 슈타인탈은 언어가 아직 출현하지 않았던 무렵에 인간의 지각적 생명[지각에 의해서만 영위된 인간의 생명]의 단계를 상상[상정]하려고 노력했으며, 그는 이 단계를 동물의 지각적 생명[지각에 의해서만 영위된 동물의 생명]의 단계와 비교했다. 그러고 나서 슈타인탈은 언어가 어떻게 인간의 지각적 생명에서 샘솟아날 수 있었는지, 그리고 왜 동물의 지각적 생명에서는 그럴 수 없었는지를 보여주려고[설명하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바로 여기에서, 그가 불과 몇 년 후에 완벽하게 깨달았던[지겨울 정도로 되새기게 됐던] 하나의 아포리아가 출현했다. 슈타인탈은 이렇게 썼다.

 

우리는 이 순수하게 가설적인 인간의 정신 단계를 동물의 그것과 비교하고, 대체로 모든 면에 걸쳐, 전자 속에서 힘의 과잉을 발견한 것이다. 이로부터 우리는 인간 정신이 이 과잉을 언어의 창출에 할당한 채로 내버려뒀다. 이리하여 우리는 왜 언어가 인간 정신과 그 지각에서 비롯되는지, 왜 동물의 그것으로부터 발생하지 않았는지를 증명할 수 있었다. 그러나 우리에 의한 인간 정신 및 동물의 정신의 서술에 있어서, 우리는 언어를 도외시할 수밖에 없었다. 바로 언어의 가능성을 입증하는 것이야말로 중요했음에도 불구하고, 무엇보다 우선 제시해야 했던 것은 언어가 형성하는 정신의 힘이 도대체 어디에서 유래하는가였다. 언어를 창출할 수 있다는 이 힘은, 언어에서 유래할 수 없다는 것은 명백하다. 그렇기에 우리는 언어에 선행하는 인간단계를 상정한 것이다. 그러나 이 인간단계는 하나의 허구에 불과하다. 사실, 언어는 인간 존재에 있어서 매우 필연적이고 자연적인 것이며, 언어를 빼고서는 인간은 존재할 수 없으며, 존재하는 것으로서 고찰될 수 없는 것이다. 인간은 언어를 갖고 있거나, 혹은 단순히 갖고 있지 않거나 둘 중 하나이다. 한쪽은 그리고 이것이야말로 허구를 정당화하는 것인데 언어를, 인간 정신 속에 이미 생득적으로 갖춰져 있는 것으로서 고찰할 수도 없다. 오히려 아직 충분히 의식되고 있지 않지만, 언어는 이미 인간의 생산물이다. 언어는, 정신의 한 발전 단계이며, 그것에 선행하는 선행단계로부터 연역될 필요가 있다. 언어와 더불어, 진정한 의미에서의 인간 활동이 시작된다. 언어는 동물계로부터 인간계로 통하는 가교이다. 그러나 우리는 동물성으로부터 인간성에 이르기까지 언어를 통해서 진보를 걸었던 것이 동물이 아니라 인간뿐이었다는 근거를, 동물과 동물인을 비교함으로써 설명하고 싶다고 원했던 것이다. 이 비교에 의해 판명된 것은, 우리가 상상하려 한 인간, 즉 언어를 갖지 못한 인간이란, 동물인[Tier-Mensch]이며, 인간-짐승[Menschentier]이 아니라는 것이며, 그래도 이것은 이미 인간종이며, 동물종이 아니라는 것이다. (Steinthal 1881, 355-56).


인간을 동물로부터 구별하는 것은 언어이다. 그러나 언어는 인간의 정신물리학적[심적] 구조 속에 선천적으로 갖춰져 있는 자연적 소여가 아니다natural given already inherent in the psychophysical structure of man. 오히려 언어는 역사적 산물이다. 따라서 그런 것으로서의 언어는 동물에게도 인간에게도 고유하게properly 할당[배정]될 수 없다. 만일 이 요소가 사상(捨象)된다면, 동물에서 인간으로 이행하는 가교로서 기능하게 될 말하지 않는nonspeaking 인간 바로 호모 알랄루스(Homo alalus[말을 갖지 못한 인간]) 을 상상하지 않는 한, 인간과 동물의 차이는 없어질[무효가 될] 것이다. 그러나 말을 갖지 못한 인간이 언어가 드리우는 그림자, 말을 하는 인간의 전제조건일 뿐이라는 것은 명백하다. 우리는 오히려 말을 하는 인간에 의해 항상 인간의 동물화(헥켈의 원인ape-man과 같은 동물인animal-man) 혹은 동물의 인간화(인원man-ape)만을 [이 둘 중 하나만을] 입수한다obtain[추출하는 것이다]. 동물-인간과 인간-동물은 두 측면들 중 어느 하나에 의해서도 수리될 수 없는 단일한 균열[단절]fracture의 두 측면들이다.

몇년 후, 슈타인탈은 그 당시 과학 논쟁과 철학 논쟁의 중심부에[소용돌이에] 있던 다윈과 헥켈의 테제들을 배운 후에, 자신의 이론으로 되돌아가면서, 자신의 가설에 내포된[암시된] 모순을 완벽하게 깨닫는다. 슈타인탈이 이해하려 노력했던 것은 왜 동물이 아니라 인간만이 언어를 창출하는가였다. 하지만 이것은 인간이 어떻게 동물에서 기원하는가를 이해하는 것과 버금가는 것이었다. 그리고 바로 여기서 모순이 생기는 것이다.

 

직관이라는 전 언어적 단계는 하나일 수 있을 뿐, 이중적일 수가 없다. 그리고 직관은 동물에게서도 인간에게서도 다를 수 없다. 만약 동물과 인간에게서 직관이 다르다면, 즉 만약 인간이 동물보다 자연적으로 고등하다면[처음부터 원숭이보다 고등하다면], 인간의 기원은 언어의 기원과 일치하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인간의 기원은 동물의 직관인 저등한 형태의 직관에서 기원하는 인간의 고등한 직관의 형식의 기원과 일치할 것이다. 나는 이를 깨닫지 못한 채, 이 기원을 전제로 삼았다. , 이런 인간적 특성을 지닌 인간은 사실상 [신에 의한] 창조를 통해 내게 주어진 것이며, 그리하여 인간에게서 언어의 기원을 발견하려고 애썼던 것이다. 하지만 이런 식으로 나는 언어의 기원과 인간의 기원이 하나의 동일한 것이라는 나의 전제와 모순을 범하게 됐다. 나는 먼저 인간을 설정하고 그 다음으로 인간이 언어를 산출하게 했던 것이다(Steinthal 1877, 303).


슈타인탈이 여기서 감지하는 모순은 우리 문화에서 고대와 근대적인 그 두 개의 변이들에서[고금의 이중주를 확대 전개하면서] 작동하고 있는 인간학 기계를 정의하는 것과 똑같은 모순이다. 인간/동물, 인간/비인간의 대립을 통한 인간의 산출이 여기에서[오늘날의 문화에서] 관건인 한에서, 인간학 기계는 필연적으로 배제(항상 이미 포획이기도 하다)와 포함(항상 이미 배제이기도 하다)에 의해 기능한다. 실제로 인간이 매번 전제되어 있기 때문에, 인간학 기계는 일종의 예외상태를, 즉 외부가 내부의 배제에 다름 아니고 내부가 다시 외부의 배제일 뿐인 미결정의 지대a zone of indeterminacy를 현실적으로 산출한다.

한편으로 우리는 근대인들의 인간학적 기계를 갖고 있다. 우리가 봤듯이, 이 기계는 이미 인간 존재인 것을 (아직) 인간이지 않은 것으로서의 자기 자신으로부터 배제함으로써 기능한다. , 인간을 동물화함으로써, 인간 내부에서 비인간적인 것인 호모 알랄루스(Homo alalus)’ 혹은 원인ape-man을 분리함으로써 작동하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의 연구영역을 몇십 년 전으로 돌려놓는 것으로도 충분할 것이다. 그렇게 하면 이런 무해한 고생물학적 발굴 자료를 대신해 우리는 유대인을, 달리 말해서 인간 내부에서 산출된 비인간non-man, 혹은 새로운 사체(新死體, néomort)나 과잉혼수상태, 즉 인간 신체 내부에서 분리된 동물을 손에 넣을 것이다.

초창기[고대인의] 시대의 기계는 정확하게 이와 대칭적인 방식으로 작동한다. 만일 근대인들의 기계에서 외부가 내부의 배제를 통해 산출되고 비인간이 인간을 동물화함으로써 산출된다면, 여기서 내부는 외부의 포함을 통해 획득되며, 비인간non-man은 동물의 인간화에 의해 산출된다. , 인원man-ape, ‘야생아enfant sauvage혹은 호모 페루스Homo ferus’, 하지만 또한 무엇보다 우선, 인간의 형태를 한 동물의 형상들로서의 노예, 야만인, 이방인들이 그렇다. [고대와 근대의] 두 기계는 그 중심에 미식별 지대a zone of indifference를 설정함으로써만 기능한다. 이 중심 안에서는 이미 잠재적으로 현전하고virtually present 있기 때문에 항상 결여하고 있는 잃어버린 고리[상실된 환경]로서 인간과 동물, 인간과 비인간[인간이 아닌 것]nonman, 말하는 존재와 살아 있는 존재 사이의 분절이 발생할 수밖에 없다. 모든 예외의 공간과 마찬가지로, 이 미식별 지대는 사실상 완벽하게 텅 비어 있으며, 거기서 생겨야 마땅한 진정으로 인간적인 존재는 끊임없이 최신의 것으로 갱신되는 결정의 장소일 뿐으로, 이 장소에서는 [인간적인 것을 결정하는] 간극caesurae과 그 재분절화가 항상 새롭게 탈구되며dislocated 자리바꿈된다displaced. 하지만 그렇게 획득될 수 있는 것은 동물적인 생명도 인간적인 생명도 아니고, 그저 자기 자신으로부터 분리되고 배제된 생명, 즉 벌거벗은 생명뿐이다.

그리고 인간과 비인간의 이런 극단적 형상[벌거벗은 생명]과 접하면, 두 개의 기계들(혹은 똑같은 기계의 두 개의 변종들) 중에서 어떤 것이 더 좋거나 더 효과적인지를 묻는 것 아니 오히려 둘 중 어떤 것이 덜 치명적이고 피비린내가 덜 나는지를 은 아무래도 좋은 일이다. 오히려 중요한 것은 이런 기계들이 어떻게 작동하는가를 이해하고, 결국에는 이런 기계들을 중지시킬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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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린 인간과 동물

L’aperto

L’uomo e l’animale

 

 

조르조 아감벤

김상운 옮김

영어판으로 1.

인용은 금함



7. 분류학

 

 

데카르트가 원숭이를 보지 못한 것은 확실하다Cartesius certe non vidit simios.

카롤루스 리네우스[칼 폰 린네]

 

근대의 과학적 분류학의 시조인 린네는 사족을 못 쓸 정도로 원숭이를 편애했다. 아마 그는 연구를 위해 암스테르담에 체류하는 도중에 원숭이를 가까이서 볼 기회가 있었을 것이다. 당시 암스테르담은 이국적exotic 동물들을 매매하는 교역의 일대 중심지였다. 훗날 스웨덴으로 귀국해 왕궁 부속 의사의 우두머리가 되면서 그는 웁살라에 작은 동물원을 만들고, 거기에서 다양한 종류의 원숭이를 사육했다. 린네는 그런 원숭이들 중에서도 디아나Diana라는 이름의 한 마리의 바바리 원숭이(Barbary ape)를 끔찍이 아꼈다고 한다. 다른 짐승(bruta)’과 마찬가지로 원숭이도 혼을 결여하고 있기에 인간과 본질적으로 다를 것이라는 신학자들의 생각에 그는 쉽게 무릎 꿇을 마음이 생기지 않았다. “데카르트가 원숭이를 본 적이 없다는 것은 확실하다”, 약간 초조한 어조로 이렇게 단언한 린네는 자연의 체계(Systema naturae)의 각주에서 자동기계(automata mechanica)’라는 관점에서 동물을 파악한 데카르트의 이론을 일축했다. 나아가 그는 인류의 사촌[Menniskans Cousiner]이라는 제목의 나중에 쓴 논문에서, 자연과학의 관점에서 유인원과 인간 사이의 종차specific difference를 특정하는identify 것이 얼마나 어려운가를 설명한다. 물론 린네도 도덕적 수준과 종교적 수준에서 인간을 짐승으로부터 떼어내는[분리하는] 뚜렷한 차이를 보지 못한 것은 아니다.

[린네Carl von Linné (1707-78). 스웨덴의 식물학자. <이명법(二名法)>을 창시하고, 분류학의 확립에 기여했다. 원래의 성은 린네우스(Linnaeus)였으나, 1762년에 귀족으로 서훈된 후, 폰 린네로 개명했다. 1728년에 웁살라대학교에 입학. 네덜란드로 갔다가 귀국하면서부터, 스톡홀름에서 개업의가 되며, 나중에 웁살라대학교 의학부 교수가 됐다. 1751년에 이명법(라틴어의 명사 단어 한 개의 속명과 형용사 단어 한 개의 종소명에 의한 종의 표시)을 제창했다. 그때까지의 학술명은 여러 단어로 이루어진 종의 특징의 서술이었지만, 이명법에서는 간결하고 단순한 호칭이 되며, 이것에 의해 생물의 학술명이 안정됐다. 현재의 국제명명규약에서는, 식물에 대해서는 린네의 식물의 종초판(1753), 동물에 대해서는 린네의 자연의 체계10(1758)의 종명을 기준으로 삼기로 정해졌다

[자동기계(automata mechanica)시계와 물레방아처럼, 자족적으로 작용원천을 가지고, 그 자체로 작동을 계속하는 듯이 보이는 기계의 총칭. 데카르트의 동물기계론이나 라 메트리의 인간기계론에서처럼, 인간이나 동물의 생리학적 메커니즘을 유물론적으로 설명하는 데 사용됐다. 스피노자, 라이프니츠, 홉스 등에게 심신문제나 국가론의 설명도식으로 등장한다

인간은 «창조주»가 그토록 믿기 어려운 정신을 가진 칭찬할 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 동물이다. «창조주»는 인간을 당신의 총애의 대상으로 채택하고 싶어 했고[여겨 우리를 자식처럼 아꼈으며] 인간에게 더 고귀한 실존을 마련해줬다. 심지어 «»은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 당신의 외아들을 [지상에] 보내기까지 했다(Linneo 1955, 4).

 

그러나 그의 결론에 따르면, 이 모든 것은

 

다른 법정forum에 속하는 것이다. 마치 제화공이 끝까지 작업 책상에 매달리듯이, 나 자신도 내 실험실에 머무르면서 한 명의 자연과학자로서, 인간과 그의 신체를 고찰해야 한다. 그렇게 하면, 원숭이에게는 송곳니와 다른 이빨 사이에 빈 공간이 있다는 사실을 빼면, 인간을 원숭이들로부터 떼어내는[인간과 원숭이를 구별하는] 구별 표시는 거의 찾아낼 수 없다[무엇 하나 발견할 수 없다].

 

그 때문에 자연의 체계에서 원숭이(Simia), 여우원숭이(Lemur), 박쥐(Vespertilio)와 나란히, 인류(homo)를 안트로포모르파Anthropomorpha (, order)(1758년의 10판 이후, 영장목(Primates)이라 불리게 된 것)에 배정한 그의 단호한 몸짓은 전혀 놀랍지 않다. 게다가 그 분류법의 시비를 둘러싸고 다양한 논쟁이 야기되었음에도 불구하고despite the polemics that his gesture did not fail to provoke, 이 문제는 어떤 의미에서 중지된 채로 있었다in a certain sense the issue was in the air. 이미 1693, 존 레이는 네 발 동물 중에서 안트로포모르파Anthropomorpha의 그룹, 인간 같은[유인목(類人目)]manlike동물들의 그룹을 구별했다. 그리고 일반적으로는, 구체제 시기에서 인간의 경계는 19세기, 즉 인간과학들의 발전 이후에 나타나게 될 것보다 훨씬 불확실[부정확uncertain]하고 유동적이다. 특히 인간이라는 것을 식별하는 특징이 될which would become man’s identifying characteristic par excellence 언어는 18세기까지, ()과 목()이라는 분류를 훌쩍 뛰어넘었다. 왜냐하면 새도 말을 할 수 있다고 의심을 샀기 때문이다. 존 로크처럼 신뢰할 수 있는 증인조차도 나소(Nassau)의 군주가 기르던 앵무새의 이야기를 다소간 신빙성 있다more or less as a certainty고 언급한 것이다. 이 앵무새가 대화를 할 수 있고 이성을 가진 피조물처럼like a reasonable creature질문들에 응답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또한 인간과 다른 종들 사이의 물리적인 경계설정physical demarcation도 확고한 소속certain identities을 할당할 수 없는 미확정의 지대zones of indifference를 수반[내포]했다. 페타 아르테디가 쓴 어류학(1738) 같은 본격적인 과학서는 바다표범과 바다사자 다음에 세이렌도 여전히 열거했으며, 사실 린네 자신도 그의 책 유럽의 판(Pan Europaeus)에서 세이렌 덴마크의 해부학자 카스퍼 바르톨린은 이것을 해인(海人, Homo marinus)’이라고 불렀다 을 인간과 원숭이와 함께 분류하고 있다. 다른 한편, 유인원과 몇몇 원시인 사이의 경계도 결코 자명하지 않다. 의사 니콜라스 툴립이 쓴 1641년의 오랑우탄에 관한 최초의 서술은 이 숲의 인간(Homo sylvestris)(말라이Malay어의 표현인 오랑우탄은 이런 뜻이다)의 인간적인 측면을 강조한다. 원숭이와 인간의 신체적physical 차이가 비교해부학이라는 견고한 토대 위에서 처음으로 파악되기 위해서는, 에드워드 타이슨의 논문 오랑우탄 혹은 숲의 인간, 또는 피그미의 해부(Orang-Outang, sive Homo Sylvestris: or, the Anatomy of a Pygmie)(1699)를 기다려야만 한다. 비록 이 논문이 영장류학primatology의 일종의 초기 간행본incunabulum으로 간주되긴 하지만, 타이슨이 피그미(Pygmie)’라고 부르는 생물creature(해부학적으로는 인간과는 48개의, 원숭이와는 34개의 특성에 의해 구별된다)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에게 원숭이와 인간 사이의 일종의 중간동물intermediate animal을 대표하며, 이런 점에서, 천사와는 대칭적으로 정반대의 관계에 서 있다. [팔코나 경(Lord Falconer)에게 바친 헌사에서 타이슨은 이렇게 말한다.]

[존 레이] John Ray (1627-1705). 영국의 성직자, 철학자, 박물학자[자연학자]. 영국에서의 박물지의 아버지라고 불린다. 식물을 떡잎이나 꽃잎에 의해 분류하는 근대적인 자연분류체계를 제창했으나, 그의 공적은 오랫동안 린네의 그늘에 가려져 왔다. 1686년에 식물지를 간행하고 씨앗을 처음으로 정의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 밖에도 케임브리지 박물목록(1686), 식물신방법론(1682), 창조물에 이름을 붙인 신의 지혜(1691), 자연-신학 3(1692) 등 방대한 저작을 남겼다

[페타 아르테디Peter Artedi (1705-35). 스웨덴의 박물학자로, 어류학의 아버지로 알려졌다. 웁살라 대학에서 처음에는 신학을 배운 후, 의학, 박물학, 그리고 나중에는 어류학으로 관심이 옮겨가고, 영국으로 건너갔다. 암스테르담에서는 부유한 네덜란드인 알베르트 세파가 소장했던 당시 유수한 콜렉션을 분류하는 작업에 씨름했다. 그가 남긴 원고는 요절한 그를 대신해 친구 린네의 손에 의해 정리되고, 사후 1738년에 라이덴에서 어류백과사전, 어류철학으로 출판됐다

[카스퍼 바르톨린Casper Bartholin (1655-1738). 덴마크의 의사, 해부학자. 신학자이자 해부학자인 캐스퍼 바르톨린 대공(1585-1629)의 손자로, 해부학에서는 바르톨린 샘()”으로 그 이름을 남겼다

[니콜라스 툴립] Nicolas Tulp. 공개해부학 강의를 묘사한 렘브란트의 집단초상화 «니콜라스 둘프 박사의 해부학 강의»(1632)로 유명한 외과의, 해부학자

[에드워드 타이슨Edward Tyson (1650-1708). 영국의 의사, 해부학자. 방울뱀, 촌충류에 관한 중요한 논고를 남기고, 젊은 침팬지의 비교해부 등도 했다

 

제가 해부한 동물은 «인류(Mankind와 가장 가까운 것이며, 각하처럼 «이성적인 분(the Rational«동물(the Animal사이의 «매듭(Nexus인 것 같습니다. 더구나 그런 서열의 동물들은, 이해도의 점에서도 지혜라는 점에서도, 우리들에게 가장 가까운 피조물의 종과 닮아 있습니다.

 

이처럼 인간의 경계가 실제의 동물뿐만 아니라 신화에 나오는 생명체creatures에 의해서도 여전히 얼마나 위협 받고 있었는지를 깨닫는 데는 논문의 제목 전체를 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 “오랑우탄, 또는 숲의 인간, 또는 원숭이, 유인원, 인간과 비교한 피그미의 해부, 덧붙이면, 고대인들의 피그미, 견두인(犬頭人, Cynocephali), 사티로스(Satyrs), 스핑크스와 관련해, 이들 생명체들이 유인원이거나 원숭이 중 하나이며, 과거에 주장되었던 것 같은 인간이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하는 문헌학적 논문이라는 것이다.

실제로 린네의 천재성은 그가 인간을 영장목에 등록한 결단력resoluteness에 있다기보다는 오히려 그가 다른 종에 대해서 한 것과는 달리 호모()이라는 명칭 바로 옆에 너 자신을 알라(nosce te ipsum)”라는 오래된 철학적 격언 이외의 어떤 종류의 표시[식별하는 특징]도 기입하지 않았다는 그 아이러니에 있다. 자연의 체계10판에서 정식 명칭이 호모 사피엔스가 됐을 때조차도, “사피엔스라는 새로운 부가형용사는 분명히 하나의 기술을 대표하는 것이 아니며 오히려 호모라는 용어의 바로 옆에서 그 지위를 유지하는 말의 옆에 배치되면서도 여전히 그 자리를 유지하는 방금 말한 격언이 간소화되고simplification[저속해지고] 있을 뿐이라는 것을 모든 증거가 시사한다. 이 분류법적 변종anomaly에 관해 성찰할 만한 가치가 있다. 왜냐하면 이 변종은 하나의 소여가 아니라 하나의 정언명령imperative, 종차[종으로서의 차이]로서 할당하고 있기 때문이다.

자연의 체계의 첫머리인 서문(Introitus)을 분석하면, 린네가 인간은 그저 스스로를 인식할 수 있는 능력 말고는 다른 어떤 종적 특성specific identity도 갖고 있지 않다라는 모토에 귀속시킨 의미에 대해 아무런 의심도 남겨두지 않는다. 하지만 인간을 그 어떤 타고난 기질(nota characteristica)’[이라는 특징]을 통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자기-인식을 통해 정의한다는 것은, 인간이란 그런 것으로서 스스로를 인식하는 존재라는 것을, 인간이란 스스로를 인간이려고 하는 인간으로 인식해야 하는 동물이라는 것을 뜻한다. 사실 린네는 탄생의 순간에, 자연이 인간을 벌거벗은 지상에 벌거벗은 채로”, 즉 가르침을 받지 않는다면 알 수도, 말할 수도, 걸을 수도, 혹은 먹을 수도 없는 채로 인간을 던졌다[낳았다]고 적었다(Nudus in nuda terra cui scire nichil sine doctrina; non fari, non ingredi, non vesci, non aliud naturae sponte). 인간은 인간을 넘어설 때에야 비로소 인간 자체가 되는 것이다(o quam contempta res est homo, nisi supra humana se erexerit).

린네의 자연의 체계에서는 인간이 원숭이의 이미지로 창조된 것 같다며 반대한 비판가인 요한 게오르크 그멜린(Johann Georg Gmelin)에게 보낸 편지에서, 린네는 자신의 모토가 지닌 진의를 제시함으로써 이것에 응수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스스로를 인식합니다. 어쩌면 저는 이 말을 철회해야겠죠. 그렇지만 제가 당신과 온 세상[학자들]에 말하고 싶은 것은 자연사의 원리들과 일치하는 원숭이와 인간 사이의 속적generic 차이를 제가 보여준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저는 그런 차이를 전혀 모릅니다”(Gmelin, 55). 또 다른 비판가인 테오도어 클라인(Theodor Klein)에게 응답하기 위해 쓴 노트는 호모 사케르의 정식에 암묵적으로 존재하는 아이러니를 린네가 어디까지 밀고나가려고 하는지를 보여준다. , 자연의 체계에서 린네가 인간에게 할당한 입장에 자신이 처해 있음을 인정하지 않는 클라인 같은 사람들은 너 자신을 알라라는 명령을 스스로에게 적용해야 한다[자기 자신에게 비춰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런 사람들은 자기 자신을 인간이라고 인정하는 법을 알지 못한다는 점에서, 스스로를 원숭이들 사이에 두고 있기[자신들을 원숭이의 동료로 헤아리고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호모 사피엔스는 명확하게 정의된 종도 아니고 실체도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인간의 인정을 산출하기 위한 하나의 기계 혹은 장치이다. 그 당시의 취향과 합치하듯이, 이 인간발생적(anthropogenic)(혹은 푸리오 이에지의 표현을 취한다면 인간학적(anthropological)) 기계는 인간이 자기 자신을 보면서 항상 이미 원숭이의 용모로 기형화된 자신의 이미지를 보는 일련의 거울들로 구성된 하나의 광학기계이다(가장 최근의 연구에 따르면, 이것은 리바이어던에도 기재되어 있는 장치이며, 아마 린네는 그 책의 서론에서 너 자신을 알라(nosce te ipsum)’라는 모토를 끌어온 것 같다. ‘최근에는 이해되고 있지 않은 격언(saying not of late understood)’을 홉스는 너 자신을 읽어라(read thyself)라고 번역한다). ‘호모인간의 모습을 한(anthropomorphous)”(린네가 자연의 체계10판까지 일관되게 사용한 용어를 따라 말한다면, “인간과 흡사한”) 것으로서 구성된 동물이며, 이 동물이 인간적이기 위해서는 비인간적인 것들 속에서 스스로를 인식해야 하는 것이다.

[푸리오 이에지] Furio Jesi(1941-80). 이탈리아의 독일 연구자, 신화학자. 팔레르모대학과 제노바대학에서 독일문학을 강의하고, 릴케, 카네티, 캐스터니다, 뒤메질의 번역, 슈펭클러의 서양의 몰락의 교정 재판본의 감수, 갈상티 유럽백과사전의 종교학 분야의 고문 등을 맡았다. 그의 박학다식함은 흡혈귀의 이미지에 관한 최후의 밤(1987)에도 발휘됐다. 이 밖에도 스파르타쿠스 : 반란의 상징학(1969년 집필, 2000년 간행) 등이 있다. 최근 재평가의 기운이 높아지고 있다

중세의 도상에는 원숭이가 거울을 들고 있는데, 이 거울에서 죄를 진 인간은 스스로를 신의 원숭이(simia dei)’라고 인정[인식]해야 한다. 린네의 광학기계에서는 스스로를 원숭이라고 인정하기를 거부하는 자는 모두 하나가 된다[린네는 원숭이가 자기 인식을 갖는다는 것을 부인했으나, 다른 한편으로 원숭이는 린네의 광학기계 속에서 자기를 인식하게 된다In Linnaeus’s optical machine, whoever refuses to recognize himself in the ape, becomes one]. 파스칼의 말을 쉽게 고쳐 말한다면, 인간을 만드는 자가 원숭이를 만든다(qui fait l’homme, fait le singe). ‘호모를 동물, 자신이 동물이 아니라고 인식했을 때에만 존재하는동물이라고 정의한 린네는, 바로 이 때문에 자연의 체계의 서문의 끝부분에서, 자신을 조롱하기 위해 자신의 어깨 위에 올라타 있는 비판가로 분장한 원숭이들을 참아내야만 한다must put up with apes disguised as critics climbing on his shoulders to mock him[큰 원숭이들이 그를 비판하는 자들로 분장해서 그의 어깨 위에 올라타서 그를 조롱하는 것을 참을 수 없게 된 것이다]. “그 때문에 나는 이빨을 훤히 드러내고 조롱 섞인 웃음을 터뜨리는 사티로스를, 내 어깨 위로 뛰어올라 의기양양해 하는 긴꼬리원숭이도 참아냈다”(ideoque ringentium Satyrorum cachinnos, meisque humeris insilientium cercopithecorum exsultationes sustinui).





Posted by 상겔스 상겔스

열린 : 인간과 동물

L’aperto

L’uomo e l’animale

 

 

조르조 아감벤

김상운 옮김

* 영어판으로 1.

인용은 금함


6. 경험적 인식 Cognitio experimentalis

 

 

그러므로 우리는 암브로시아 도서관의 세밀화에 그려진 동물의 머리를 한 의인들의 표상[재현]을 그토록 수수께끼처럼 만드는 것에 관한 몇 가지 잠정적인 가설을 개진할 수 있다. 역사의 메시아적 종언 또는 구원이라는 신적인 오이코노미아의 완성[실현, 완수]은 하나의 임계적 문턱을 정의하는 바, 그 문턱에서는 우리 문화에 그토록 결정적인 동물과 인간 사이의 차이가 사라질[말소될, vanish] 위험에 처해 있다. , 인간과 동물 사이의 관계는 역사연구가 필연적으로, 제일철학[존재론]에 의존하지 않고서는 도달할 수 없는 초역사ultrahistory의 언저리fringe와 대결할 수밖에 없는, 본질적인 영역의 경계선을 표시한다. 그것은 마치 인간과 동물 사이의 경계선을 결정하는 것이 철학자와 신학자, 과학자, 정치가에 의해 무수히 논의된 하나의 물음이라는 게 아니라 오히려 그 속에서만 인간과 같은 어떤 것이 결정되고 산출되는 근본적인 형이상학적-정치적인 작동이라는 것과 같다. 만일 동물의 생명과 인간의 생명이 완벽하게 중첩superimpose될 수 있다면, 인간도 동물도 그리고 어쩌면 신조차도 더 이상 사고할 수 없을 것이다. 이런 이유 때문에, 후역사posthistory에의 도달은 [인간과 동물의] 경계선이 확정되었던 전역사적prehistoric 문턱의 재현실화를 필연적으로 수반한다. «천국[낙원]»은 에덴동산을 다시 의문에 부친다.

Utrum Adam in statu innocentiae animalibus dominaretur(순진무구함의 상태에 있는 아담은 동물들을 지배하는가 아닌가)라는 의미심장한 제목을 붙인 신학대전(Summa)의 한 구절에서 토마스 아퀴나스는 인간과 동물의 관계에 놓여 있을 수도 있는 인식적 경험을 환기함으로써 한순간에 문제의 핵심에 접근하는 것처럼 보인다.

 

순진무구한 상태에서 인간들은 육체적 필요 때문에 동물들을 필요로 하지는 않았다. 인간들은 옷을 입기 위해 동물들을 필요로 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들은 자신들이 벌거벗었지만 이를 부끄러워하지는 않았기 때문에, 방탕한 색욕(inordinate concupiscence)의 어떠한 충동motion도 없었다. 인간은 낙원의 나무로부터 먹을거리를 얻었기 때문에 어떠한 음식도 필요치 않았다. 더욱이 운송수단을 위해 동물을 필요로 하지도 않았다. 그런 목적이라면 자신의 육체만으로도 충분히 강했기 때문이다[더욱이 자신의 육체가 충분히 강했기 때문에 운송수단을 위해 동물을 필요로 하지도 않았다]. 하지만 인간들은 그들의 본성으로부터 경험적 인식을 끌어내기 위해서 동물을 필요로 했다[Indigebant tamen eis, ad experimentalem cognitionem sumendam de naturis eorum]. 이것은 각각의 본성을 지칭하는 이름을 동물들에게 부여하면서, 신이 동물들을 인간[아담]보다 앞에 뒀다[앞으로 데리고 왔다]는 사실에서 드러난다. 


우리는 이런 경험적 인식(cognitio experimentalis)에서 무엇이 관건인지를 파악하기 위해 노력해야만 한다. 어쩌면 신학과 철학뿐만 아니라 정치학, 윤리학, 법학jurisprudence 또한 인간과 동물의 차이에 있어서 [경계가] 그어지고 중지되어 있다. 이 차이에서 쟁점이 되는 인식적 경험cognitive experiment이란 궁극적으로 인간의 본성 혹은 더 정확하게 말해서, 이런 인간 본성의 산출과 정의 과 관련된 것이며, 그것은 인간의 본성에 관한(de hominis natura)’ 하나의 경험[실험, experiment]이다. 인간과 동물의 차이가 사라지고 두 용어가 오늘날 자주 일어나듯이 서로서로 붕괴하고 있다면[이 두 극이, 오늘날 자주 일어나고 있는 듯이 보이는 것처럼 모두 위기에 처했다고 한다면], 존재와 무, 합법과 비합법, 신과 악마 등의 차이도 서서히 사라지며[무효가 되며], 그 자리에는 우리가 심지어 이름조차도 결여하고 있는 듯한 어떤 것이 나타날 것이다[그 대신 이를 지칭하기 위한 이름조차도 결여되어 있는 어떤 것이 모습을 드러낼 것이다]. 아마 강제수용소와 절멸수용소도 이런 종류의 경험[실험], 인간적인 것과 비인간적인 것 사이에서[인간인가 비인간인가를] 결정하려는 극단적이고 괴물과도 같은 시도이다. 그리고 이런 시도는 결국 인간과 비인간을 구별할 가능성 자체를 폐허로 끌고 가는 것으로 끝나버릴 것이다[파국적으로 말려들게 하는 것이다].

 

Posted by 상겔스 상겔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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