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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아감벤은 <호모 사케르> 1부 1장 1.4에 달린 <주석>(편의상 이렇게 부르겠다)의 끝에서 주권권력의 구조가 언어학적 예(Example, 모범)의 구조와 비슷하다고 지적한다. 그리고 언어학적 예가 예외와 구분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생살여탈권"과 결부된 사례와 관련하여  말하는 가운데 <사사기(판관기)> 12장 6절에 나오는 에피소드를 언급한다. 이 에피소드는 말 그대로 다음과 같다.(70쪽)

 "거기서 길르앗인들은 요르단 강 반대편으로 피신하려는 에브라임족 도망자들에게 '쉽볼렛'을 발음해 보라 시켜서 (그들은 이를 '십볼렛'이라 발음했다) 이들을 색출해 냈다. ("길르앗 사람들이 묻기를 '너는 에브라임 사람이냐?" 아니오라고 하면, '쉽볼렛'이라고 말해보라고 하고, 그대로 발음하지 못하고, '십볼렛'이라고 하면 잡아서 요르단 강 나루턱에서 죽였다").

이와 관련하여, 아감벤은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쉽볼렛'이라는 단어에서는 예외와 예가 구분 불가능하다. 그것은 본보기로서 또는 예외로서 기능하는 예라고 할 수 있다(이러한 의미에서 예외상태에서는 본보기로서의 징벌에 의존하는 경향이 나타나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같은 곳)

1.4절은 예외exception와 예Example의 관계에 대해 말하는 대목이다. 아감벤에 따르면, 예외는 포함적 배제(배제된 것을 포함하는 것)로 기능하는 반면, 예는 배제적 포함(포함된 것을 배제하는 것)으로 기능한다. 왜냐하면 예는 "자기가 어떤 집합에 속한다는 것"을 보여주지만 "바로 이 때문에 예는 자신의 집합을 드러내고 한계짓는 순간 그것에서 빠져나오게" 되기 때문이다. "예란 말하자면 통상적인normal 경우에 속하지 않기 때문이 아니라, 반대로 그것에 속한다는 사실을 드러내기 때문에 통상적인 경우로부터 배제된다고 할 수 있다."(번역수정)
이처럼 "예는 특정 집합에 속한 한에서 그 특정 집합으로부터 배제되는 반면에, 예외는 바로 통상적인 경우에 속하지 않기 때문에 그것에 포함된다." 그래서 아감벤은 예를 배제적 포함이라고 하고, 예외를 포함적 배제라고 하는 것이다. 예를 본보기로 이해하고, 징벌이 배제적 포함이라는 점을 염두에 두면 쉽게 이해될 것이다. 일단 여기까지.


2. 슬라보이 지젝은 <sic 2: Cogito And The Unconscious>(Durhan and London: Duke University Press, 1998)를 편집하면서 서문의 제목을 이렇게 붙였다. "Introduction : Cogito as a Shibboleth". 이 글에서 지젝이 묻고자 하는 바는 철학과 정신분석학의 관계가 무엇인가이다. 이 책은 인터넷에서 쉽게 구해볼 수 있기에(http://www.multitude.co.kr/257) 그냥 여기서 얘기하려는 핵심으로만 들어가면 이렇다. (정확한 번역은 아니니 이해를....) [아래에서 '개념'은 모두 notion의 번역어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철학을 정신분석"하느라 애쓸 필요가 없을까? 아니다, 광기에 대한 철학의 참조는 엄격하게 말해서 철학에 내적인 것이다. 데카르트를 전후로, 근대철학 전체는 광기의 위협에 대한 고유한 참조를 포함하며, 그러므로 초월론적 철학자를 광인으로부터 분리하는 명확한 선을 그으려고 필사적으로 노력한다. (데카르트 : 내가 실재reality을 환각하고 있지 않다는 걸 나는 어떻게 아는가? 칸트 : 스베덴보리적이고 환각적인 어슬렁거림으로부터 어떻게 형이상학적 사변[사색]의 한계를 명확히 정할 것인가?) 근대철학이 싸우고자 한 이러한 광기의 초과excess야말로 데카르트적 주체성의 정초적founding 몸짓이다. ... 이 지점에서, 포스트모던한 탈구성주의[해체주의]로 시를 짓는verse 사람이라면 누구나 지루하다는 한숨을 쉬면서 이렇게 말할 것이다. <물론, 데카르트적 자아, 이성의 자명한 주체는 착각이야. 그것의 진리는 탈중심화되고 균열되었고, 유한한 주체는 우발적이고, 불투명한 맥락에 내던져져 있으며, 바로 이것을 정신분석학은 보여주는 거야.> 하지만 사태는 더 복잡하다. 프로이트적 중심 개념들과 라캉적 중심 개념들(무의식, 주체)이 지닌 문제는 이 개념들이 이론적 <쉽볼렛>으로 기능한다는 것이다. <중략: 위의 1번 항목을 보면 된다> 정신분석적 이론에서 쉽볼렛의 최고 사례는 바로 무의식 개념이다. 프로이트가 무의식적인 정신 과정들에 관한 테제를 제시했을 때, 철학자들은 "당연하지! 우리는 오래 전부터 이걸 알았어. -- 쇼펜하우어, 생철학Lebensphilosophie, 근원적의지primordial Will...."이라고 말하면서 즉각 반응했다. 갑자기, (그것의 "철학적 기반"을 제공함으로써) 정신분석학을 표준적인 철학적 문제틀로 (재)통합하려고 하는 해석학적 소생술과 다른 소생술들로 북적인다. (무의식은 생활세계 맥락의 불투명함에, 잠복해 있고 전혀 완수되지 않은 주체적 의도 등등에 기반을 잡게 된다.) 반면, 이러한 통합에 저항하는 잉여surplus는 거부된다. -- 예를 들어 <프로이트의 생물학주의>, 프로이트의 <죽음 충동에 관한 받아들 수 없는 사변[사색]> 등등의 모습으로."

이어서 각주가 하나 달려 있다. "로베르트 팔러(Robet Pfaller)가 강조했듯이(나는 여기에서 그에게 의존한다), 쉽볼렛 개념notion은 또한 정확한 방식으로, 과학과 이데올로기 사이의 역설적 관계를 정의할 수 있게 해 준다. 즉, 이데올로기는 과학을 배제하지 않는다. 오히려 이데올로기는 과학을 자신의 장 속으로 통합하려고 애쓴다. 마치 권투시합에서 상대방과 직접 싸우는 대신 상대방을 '클린치'(껴안기)하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이데올로기/과학의 차이란 어느 한쪽에서만, 즉 과학 측에서만 볼 수 있다는 점이다. 이데올로기적 쉽볼렛의 진일보한 예는 지배적 ("고급") 문화가 대항문화counterculture와 관계를 맺는 방식에 의해 제공된다. 대항문화의 구성원들이 공식적인 고급 문화로 '통합'되거나 [후자에 의해] '흡수'되지나 않을까하는 두려움으로, 그래서 그 전복적 비꼬기sting를 잃지는 않을까 하는 두려움으로 끊임없이 시달릴 때, 이들은 중대한 이론적 잘못을 저지른다. 대항문화로부터 고급문화를 나누는 분리의 선은 대항문화 측에서만 볼 수 있으며, 이 때문에 고급문화는 하나의 규칙으로서 '열려' 있으며, 그 구성원들은 항상 활동의 공통 장[무대]에 관해 '얘기'하고 이를 수립하고 싶어한다. ... 신학의 경우 쉽볼렛 논리의 모범적 사례를 제공하는 것은 잔세니스트(Jansenist)의 기적 개념이다. 이것은 또한 역설적인 '비대칭적 가시성'에 의존한다. 왜냐하면 잔세니스트들에게 기적은 모두가 볼 수 있는 신앙의 증거로서, 직접적이고 '천박한' 물질적 수준에서 일어나지 않는다. 신앙이 없는 사람들에게 기적의 사건은 사물의 자연스런 과정의 단순한 연속의 일부일 뿐이다. -- 기적은 (이미) 믿는 사람들에 의해서만 그 자체로 승인될 수 있다."

3. 데리다는 쉽볼렛에 관한 책을 한 권 썼다. 그러나 이것은 서지 정보에 따른 것일 뿐, 이 책을 아직 접하지 못했고, 지인을 통해 입수를 부탁했다. 그러므로 그 책을 입수한 후에야 계속 쓸 수 있을 것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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