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래할 생명권력론을 위해


사상, 2013년 2

2부 1장. 

죽음정치에서 비정치

이탈리아에서의 생명정치의 전개

오카다 아츠시(岡田温司)


1. 들어가며 : 이탈리아적 차이를 둘러싸고

1970년대 중반 미셸 푸코가 기선을 잡은 생명정치의 사유가 1990년대에 들어 특히 이탈리아에서 독자적인 발전을 이룩하고 있는 것, 그리고 이를 선두에서 인솔한 것이 다름 아닌 조르조 아감벤(1942년 생)이라는 것은 더 이상 강조할 것도 없다. 나아가 이제 여기에 나폴리의 정치철학자 로베르토 에스포지토(1950년 생)의 이름을 덧붙여야 한다는 것도 마찬가지다. 나도 여태껏 두 사람에 대한 번역 등을 통해, 기회가 있을 때마다 이를 강조했다.[각주:1] 그렇지만 오히려 본국 이탈리아에서는 생명이라는 접두사가 약간 붐을 일으키는 식으로, ‘생명미학’(피에트로 몬타니)생명경제학’(라우라 바치칼루포) 같은 신조어가 출현할 지경이다.[각주: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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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베르토 에스포지토


물론 이 추세를 고스란히 수긍하는 일은 삼가야 하지만, 다름 아닌 이탈리아에서 생명정치를 둘러싼 사유가 새로운 전개를 이룬 데에는 단순한 우연으로 그치지 않는 연유가 있다. 왜냐하면 생명은 전통적으로 이탈리아 사유에서, 공공연하든 암묵적이든, 늘 중심적 테마 중 하나였기 때문이다. 마키아벨리, 조르다노 브루노, 지암바티스타 비코Giambattista Vico(1688~1744)의 이름을 상기하는 것만으로 충분할 것이다.

아주 최근작인 살아 있는 사유 : 이탈리아 철학의 기원과 현실성(Pensiero vivente. Origine e attualità della filosofia italiana)(2010)에서 에스포지토 본인이 논하듯이, 거기에는 이 나라의 역사적 특수 사정이 적잖이 관계하고 있다. , 즐비하게 늘어선 도시국가나 유럽열강, 나아가 로마 교회 등과의 갈등이나 밀당에 항상 노출된 이탈리아의 사유는, 필연적으로 국민국가라는 틀에 얽매이지 않고 그 바깥에서 전개되었다. 이탈리아 철학은 국민국가의 형성과 병행하는 것도, 그 형성 이후에 계속된 것도 아니다. 그 때문에 이 나라의 사상은, 예를 들어 주체에 관한 반성이나 인식론이라는, 데카르트부터 칸트에 이르는 철학의 왕도로부터는 필연적으로 벗어나 있다. 이탈리아에서 그런 반성은 철학의 내부에서 벼려지고 철학의 전문용어로 말해지기보다는 오히려 정치적이고 역사적인 생명의 현실을 겨누게 됐다. 추상적이고 형이상학적인 사유로부터는 생명의 구체적인 모습은 빠져나가 버린다. 이리하여 이탈리아는 서양철학의 이른바 방계가 되어 왔지만, 이것은 시각을 바꾼다면 (푸코적인 의미에서의) ‘바깥의 사유를 혹은 (들뢰즈적 의미에서의) ‘탈영토화를 선취했다고도 해석할 수 있다. , 이질적인 것에 열려 있고, 유동성이나 갈등이나 변화를 환영하는 태도이다.[각주:3]

나아가 여기서 벤야민적인 역사철학의 선취를 보탤 수 있을지 모른다. 가령 비코는 새로운 학문(1725)에서 지저분하고 더럽고, 절단되고, 본래의 장소로부터 벗어난 곳에 가로놓였기 때문에 그동안은 지식에 있어서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았던 고대의 이러저러한 위대한 단편갈고 닦아’ ‘합성하고 본래의 장소에 두는것을 새로운 학의 중요한 원리라고 꼽는데,[각주:4] 이는 벤야민의 역사철학 테제를 연상시키지 않을 수 없다. 비코에게 시나 신화도 역사로부터 배제된 것이 아니며, 역사 속으로 편입되고, 자주 역사를 술안주거리로삼는다. 이런 게 허용된다면, 이탈리아의 철학은 항상 시대착오적이기 때문에 현실성을 얻었다는 측면을 갖는 것처럼 생각된다.

The New Science of Giambattista Vico에 대한 이미지 검색결과

그러면 이탈리아의 특수 사정, 또는 이탈리아적 차이에 관한 서설은 이 정도로 하고, 본론에 들어가자. 이 글에서 나는 감히 정면에서 생명정치 자체에서라기보다는 오히려 이것이 반전된 것으로서 죽음정치에서 출발하고 싶다. 왜냐하면 이 죽음정치라는 특이한 신조어도 푸코를 기점으로, 이탈리아에서 매우 흥미로운 전개를 이룩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우선 그 저간의 사정을 밝힌 후, 이어서 이 죽음정치를 극복하는 것, 혹은 그것에 대립되는 것으로서의 비정치에 주목해보자. 장치와 무위, 공동체와 면역, 탈주체화와 비인칭 같은 문제계가 여기에 깊이 관련될 것이다. 주역으로서 등장하기를 바라는 것은 물론 아감벤과 에스포지토이지만, 뜻밖의 조연들 예를 들어 시몬 베유 도 거기서 중요한 역할을 맡게 될 것이다. 그러면 우선 죽음정치부터 시작해보자.

 

I. 푸코에서 아감벤으로 : ‘죽음정치로의 전도

방금 전에 나는 죽음정치도 푸코에게서 기원한다고 말했는데, 이것은 도대체 무슨 말일까? 생명정치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여기서도 우리는 저명한 그 텍스트, 1975-76년의 콜레주드프랑스 강의 사회를 보호해야 한다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푸코 자신은 상당히 기묘하게 울려 퍼지는 이 용어 죽음정치를 직접 사용한 것은 아니지만, 분명히 이것을 암시했다.

주권권력의 계보나 전쟁과 국가에 관해 논한 일련의 강의의 마지막 날, 프랑스의 철학자는 아주 당돌하게도, ‘생명정치라고 그 자신이 명명했던 것에 관해 이야기하기 시작한다. “19세기의 극히 중요한 현상 중 하나는 권력에 의한 생명의 부담이라고도 말해야 할 것이었다고 생각합니다이 구절로 말문을 열었던, 기념해야 할 하루이다.[각주:5]

이미 잘 알려져 있듯이, 여기서 푸코는 특히 18세기 이후, 인민의 생명이나 건강이 국가의 최대 관심사가 되는 상황을, 생살여탈권으로서의 주권권력으로부터, “생명을 보증하는 권력으로서의 생명권력으로의 이행으로 파악했다. , “권력에 의한 살아 있는 것으로서의 인간의 파악이며, “생물적인 것의 국가화의 시작이다. 그때까지의 주권권력의 모토가 죽게 만들거나[죽게 하거나] 아니면 살게 내버려두는거나였다고 한다면, 생명권력의 그것은 살게 만들고[살게 하고], 그리고 죽게 내버려둔다는 것이 된다. 이 권력을 어떻게 사용하느냐, 그 테크놀로지가 생명정치라고 불리는 것이다. , 생명정치는 의학이나 법학, 위생학이나 통계학 등에서 다양한 지식이나 기술을 끌어들임으로써 이 권력의 개입 영역을 결정하는 것이다.

하지만 여기에는 중대한 아포리아가 도사리고 있다는 것을 위대한 사상가는 날카롭게 꿰뚫어봤다. 생명권력에는 과잉으로 흐르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이미 생명권력에 대한 주권권력의 과잉이 아니라 주권권력에 대한 생명권력의 과잉입니다.” 그 과잉이 생기는 것은, 예를 들어 생명을 조절할 뿐 아니라 생명을 무성하게 하고 생물을 제조하고 괴물을 제조하며 궁극적으로는 관리 불가능하고 보편적 파괴력을 지닌 바이러스를 제조하는 것이 기술적으로도 정치적으로도 인간에게 가능해질 때이다.[각주:6] 이 경고가 울렸던 1970년대 당시 이미 생물병기나 핵이 중대한 위협으로 존재했던 것은 물론이지만, 게다가 출생 전 진단이나 유전자 조작이나 복제기술까지도 포함한 분자생물학이 장족의 진보를 이루고 있었다.

그 증거로, 푸코는 놓치지 않았다. 생명권력은, 그것이 바로 생물학적인 요청과 결부될 때, 가장 위험한 양상을 보여준다는 것을. 나치즘의 경우가 그 좋은 예이다. 왜냐하면 생물학적 위험의 제거와 종 자체, 혹은 인종의 강화를 목표로 삼을 경우”, 죽음의 명령을 용인하게 되기 때문이다. “국가가 생명권력을 따라 기능하기 시작하자마자, 국가의 살인 기능이 보장되는 것은, 다름 아닌 인종주의에 의해서인 것이다.[각주:7] 이리하여 푸코는 다음과 같이 결론짓게 된다. “전반화된 생명권력은, 엄청나게 증대한 죽음의 권리와 죽음의 위험에 의해 사회 전체에 골고루 퍼진 절대적인 독재 정치와 일치하는 것이라고.[각주:8]

푸코는 여기서 죽음의 권리죽음의 명령혹은 죽음에 노출되는 것이라는 표현을 쓰고, 죽음과 생명권력 사이의 진퇴양난의 관계를 정확하게 표현하고 있지만, 그것을 죽음의 정치혹은 죽음정치라는 이름으로 부르는 것은 아니다. 또 그는 나치즘을 생명권력의 과잉이며, “생명권력을 틀림없이 전반화한 사회라고 해석하는 한편,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시에, “죽이다는 주권권력을 전반화한 사회이기도 하다고 파악하고 있기도 하다.[각주:9] , 푸코에 따르면, 나치즘은 신구의 두 개의 권력의 메커니즘 생살여탈권의 고전적 메커니즘과 규율과 조절에 의한 생명권력의 새로운 메커니즘 이 합체한 것으로 간주되고 있다.

이 논의를 이어받아, 바로 죽음정치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하는 것이 다름 아닌 아감벤이다. 세계적 논쟁을 야기한 책인 1998년의 아우슈비츠의 남은 것에서, 이 이탈리아 철학자는 프랑스 선배의 논의를 간결하게 요약하고, 다음과 같이 말한다. 현대의 막강한 전체주의 국가, 특히 나치 국가에서 살리는 생명권력의 전대미문의 절대화는 죽게 만드는 주권권력의 똑같은 정도로 절대적인 전면화와 일치한다. 그 결과, 생명정치는 죽음정치와 무매개적으로 일치한다.[각주:10] 이리하여 아감벤은 죽음정치라는 신조어를 확실하게 전면에 내세우게 된다.

게다가 생명정치와 죽음정치 사이의 이 일치는 푸코에게 진정한 역설살리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권력이, 무제한의 죽음의 권력을 행사하는 것은 왜인가? 이었지만, 아감벤에게서는 어떤 의미에서 필연으로 간주된다. 왜냐하면 나치 수용소는 궁극적으로, “죽음과 대량학살의 장소일 뿐 아니라, 무엇보다도 무젤만을 생산하는 장소”, 즉 이제 인종적 차별을 초월해, 살아 있지도 죽어 있지도 않은 문턱에 인간을 몰아넣는 장소이기 때문이다. 생명정치와 죽음정치는 이른바 동일한 동전의 양면일 뿐이다.

이것을 아감벤은 똑같은 저서의 다른 대목에서, 심지어 다음처럼 바꿔 말한다. 신구의 두 개의 권력 모토, “죽게 만들거나 아니면 살게 내버려 두거나살게 만들고, 그리고 죽게 내버려두는것 사이에, 이제 세 번째 정식이 몰래 들어선다. , “이제 죽이는 것도 살리는 것도 아니고, 살아남게 한다는 것이 그것이다. 삶도 죽음도 아니고, 조절 가능하고 잠재적으로는 무한한 생존의 생산이 현대 생명권력의 주요 성능이다.”[각주:11]

그런데 푸코의 텍스트에 대한 아감벤의 이런 접근법을 오해나 곡해로 보느냐, 아니면 반대로 창조적인 확대 해석이라고 보느냐에 대해서는 평가가 갈릴지도 모른다. 사실 그 때문에 이 철학자는 비판도 당하는가 하면 거꾸로 칭찬도 받았다. 그가 상대하는 사람은 푸코만이 아니다. 아리스토텔레스부터 하이데거까지, 혹은 탈무드나 카발라부터 바르부르크나 벤야민까지, 만국박람회 일지로 이미 알려진 이 이탈리아인은, 대략 모든 텍스트를 그런 방식으로 읽어왔다. 이 점에 관해 본인은 자신의 방법을 2008년의 저서 사물의 표시에서 포이어바흐의 발전 가능성이라는 개념을 원용해 이렇게 말한다. “작품의 저자에 속하는 것과, 그것을 해석하고 발전시키는 자에게 귀속되는 것 사이의 차이는, 본질적인 동시에 파악하기 어려운 것이 된다.[각주:12] 자기정당화처럼 들리지 않는 것도 아니지만, 이처럼 충실한 불성실한 자, 혹은 불성실한 충실자라는 문턱에서야말로, 아감벤의 언표는 발생한다.

한편, 원래의 기원은 고대 로마법에서 찾아짐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철학자와 더불어 2000년 이상의 시간을 가로질러 패러다임으로서 부상했던 호모 사케르에 관해서도, 혹은 아우슈비츠에서 비롯되는 이른바 무젤만에 관해서도, 이것들이 본래의 역사적 문맥을 무시하고, 통시태와 사료에 주의를 소홀히 한다는 비판에 대해서, 역시 사물의 표시에서 다음과 같은 반론을 전개한다.

 

만약 패러다임성은 사물 속에 있느냐 연구자의 정신 속에 있느냐고 물어본다면, 내 대답은 그 물음에는 의미가 없다는 것이다. 패러다임 속에서 문제가 되는 이해 가능성은 존재론적 성격을 갖고 있다. 주체와 객체의 인식론적 관계에서가 아니라 존재에 준거하고 있는 것이다. , 패러다임적 존재론이 있는 것이다.[각주:13]

 

여기서 하이데거의 영향을 보는 것은 쉬우며, 실제로 본인도 어느 정도까지는 그 점을 인정하고 있다. 하지만, 아감벤에 따르면, 보편과 개별의 이원론이 문제인 것도, “하이데거에게서처럼 ’, 선취와 해석의 순환성이 있는 것도 아니다.” 패러다임에는 기원도 아르케도 없다. 진정한 문제는 전체의 인식과 개별의 인식 중 어떤 것이 우선 혹은 선행하느냐라는 점에서가 아니라, 개별 사이의 범례적 배치 속에 있는 것이다.”[각주:14] 이런 의미에서 푸코로부터 발달시켰던 죽음정치도 또한 아감벤에게 하나의 패러다임으로서 기능하는 것이다.

그런데 다시금 죽음정치로 돌아간다면, 이 철학자의 이름을 일약 세계적인 것으로 한 1995년의 저서 호모 사케르도 또한, 어떤 의미에서 푸코에 대한 독자적인 응답이라는 성격을 갖고 있지만, 여기서도 또한 죽음정치라는 단어는 표면화되지 않는다. 그 대신에 거의 결말 부근에 죽음을 정치화하기라는 제목이 달린 절이 주도면밀하게 마련되어 있으며, 적절하게 소생기술이나 장기이식기술의 진보의 그늘에서, 삶과 죽음 사이에서 흔들리는 현대의 벌거벗은 생명”, 혹은 새로운 호모 사케르가 출현하고 있다는 것을, 날카롭게 파헤친 것이었다.[각주:15] 그리고 이 책은 3년 후에 출판된 아우슈비츠의 남은 것을 바로 예고하는 것 마냥 근대적인 것의 노모스로서의 수용소라는 제목이 달린 절로 막을 내린다.

호모 사케르』가 세계적 반향을 불러일으킨 이후, 도처에서 모습을 드러내고 있는 현대의 호모 사케르벌거벗은 생명’, 근대정치의 노모스로서의 수용소, 항상화된 예외상태 등 같은 아감벤 식의 말투가 언론계를 떠들썩하게 했던 것은 여전히 우리의 기억에 새로울 것이다. 마치 911 이후의 세계정세가 이 아감벤 효과에 박차를 가하고 있는 것 마냥.[각주:16] 예를 들어, 관타나모 수용소나 아부그라브 교도소에서의 고문이나, 테러리즘과의 전쟁이라는 대의명분을 생각하면, 아감벤은 마치 현대의 예언자인 셈이다. 사실, 관타나모 수용소 폐쇄 여론이 들끓는 가운데, 예를 들어 슬라보예 지젝은 뉴욕타임즈에 기고한 기사(2007324일자)에서, “이탈리아의 정치철학자아감벤의 이름을 일부러 들먹이면서 현대의 호모 사케르살아 있는 죽은 기사들― 을 언급했었다.[각주:17]

아무튼 생명정치는 죽음정치로 전도되는 것이 필수적이다. 궁극적으로는 이것이 아감벤의 테제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것은 호의적으로 듣는다면 격렬한 경고로도 받아들여지지만, 반대로 비관주의나 허무주의의 입장에서 장난치듯이 위기를 부추기고 있을 뿐이라고 받아들여지지 못하는 것도 아니다. 이것에 대해 아마 본인은 반론을 할 것이다. 정치적인 것을 정치의 내부에서만 사고하는 것이야말로 허무주의의 내부에 머무는것에 다름 아니라고 말이다.[각주:18] 여기서 정치적인 것과 비정치적인 것의 관계라는 문제가 부상하게 되지만, 이것에 관해 고찰하기 전에 소론의 또 다른 주역인 에스포지토에게 등장할 기회를 줘보자.

 

II. 아감벤에서 에스포지토로 : ‘면역의 공과

이 나폴리의 철학자도 푸코와 아감벤을 토대로, ‘죽음정치에 관해 파고들어 얘기하려고 한다. 2004년에 출판된 두께감이 있는 책 비오스에서, 꼬박 한 개의 장을 죽음정치”(인종의 사이클)에 할애하고, 푸코가 문제 제기에 머물렀던 나치즘에서의 생명정치=죽음정치의 문제를 철저하게 논하고 있다.[각주:19] 행위수행적이고 범례론적인 아감벤의 말투에 대해, 에스포지토의 그것은, 얼핏 보면, 굳이 말하면 사실확인적이고 학술논문적인 체재를 취하고 있기 때문에, 또한 호모 사케르로 상징되듯이, 사람들의 눈길을 끄는 문구에 호소하는 것도 굳이 피하려 하기 때문에, 아감벤 정도의 센세이셔널한 반응을 불러일으키지 않는다(본인도 그것을 원치 않는다). 하지만 그 논의에는 항상 확실한 강도와 신뢰성이 갖춰져 있다는 것을, 굳이 부언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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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마키아벨리나 비코의 연구에서 출발한 이 정치철학자는 생명정치를 사고하는 데 있어서, 선배인 아감벤과도, 심지어 또 다른 선배인 안토니오 네그리(1933)와도 일정한 거리를 두려 했다. 이 점에 관해 나는 전에 논한 적이 있기에 그것을 참조하기를 바라지만,[각주:20] 굳이 단순화해서 말한다면, 아감벤의 묵시록에도 네그리의 다행증(euphoria)에도 치우치지 않는 길을 찾겠다는 것이다.

에스포지토에 따르면, 원래 푸코의 생명정치 자체가 이런 양자택일을 초래할 가능성을 품고 있다. 왜냐하면 푸코에게서는 삶과 죽음이 두 개의 상이한 항으로서 우선 각각 전제되고, 그런 후에 양자가 외재적으로 연결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되면 필연적으로 생명정치는 아감벤처럼 삶에 대한 권력의 과잉 행사로 보게 되거나, 네그리처럼 권력에 대한 삶의 과잉 잠재력으로 보게 되는 식으로, 정반대의 방향으로 분열하게 되는 것은 피하기 어렵다. 달리 말하면, 생명정치는 삶에 대한 절대적인 권력 속으로 해소되어 버리거나, 아니면 삶의 절대적인 힘 속에 흡수되거나 둘 중 하나가 되어 버린다. 이것이야말로 푸코가 미해결인 채로 남겨둔 아포리아이다.

이에 대해 나폴리의 철학자가 제기하는 것은 삶 자체가 그 성립에서부터 이미 정치를 내포하고 있다는 관점이다. 예를 들어 출생이라는 개념을 떠올려보면 분명하듯이, 삶과 죽음은 처음부터 빼어나게 내재적인 관계에 있는 것이며, 이것은 한나 아렌트가 이미 깨달았던 것 그대로이다.[각주:21] 그 때문에, 에스포지토가 그의 저서의 제목으로 골랐던 것이 벌거벗은 생명혹은 자연적 생명을 의미하는 그리스어 조에가 아니라, 이것과 대치되고, 사회적 삶을 의미하는 비오스라는 것은, 매우 상징적이다. 아감벤은 비오스를 조에로 접어넣으려 하는 과정 속에 생명정치의 문턱 죽음정치 을 봤지만, 에스포지토에 따르면, 조에는 비오스의 내적 차이로 간주되어야 하는 것이다. 혹은 이미 어떤 형태로 비오스로 이행하지 않는 조에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도대체 생명정치의 어디에 죽음정치로 전락할 위험성이 숨어 있는 것인지, 에스포지토에게 진정한 문제는 그것을 규명하는 데 있다. 이리하여 나치즘의 생명정치의 철저한 규명이 요구되는 것이다. 푸코가 미해결인 채로 남기고, 아감벤이 궁극적으로 모든 생명정치를 그것으로 귀착시키려 했던 수용소의 정치학의 수수께끼란, 결국 무엇일까? 여기서 그 자세한 논의를 추적할 수는 없으나, 에스포지토는 그것을 면역혹은 면역화라는 범주 속에서 알아내려고 한다. 의학생리학에서 발전됐던 이 범주는, 나폴리의 철학자에게 새롭게 생명정치의 씨름판으로 불러들여지고, 철저하게 재검토된다. 2002년의 저서 이무니타스 : 생명의 보호와 부정이 그것으로, 사실은 비오스보다 먼저 출판됐다.[각주:22]면역이라는 범주가 유효한 것은, 무엇보다 그것이 생명 자체의 내부에서 이른바 내재론적으로 생명정치를 고찰하는 것을 가능케해주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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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면역화를 생리학의 영역에서 끌어낸 것은 에스포지토가 처음은 아니다. 예를 들어 911 이후, 점점 더 자기면역화를 강화하는 사회가 자살행위로 향해가는 것에 대해 날카로운 경고를 울렸던 것은 주지하듯이 말년의 자크 데리다였다.[각주:23] [각주:24] 그렇지만 프랑스의 탈구축주의자가 지적하는 전지구적 자기면역화의 위기란 생명정치에 직접 관련된다기보다는 오히려 종교와 정보에 관한 것이다. 물론, 사회학자 니콜라스 루만이 꿈꾸었던 오토포이에시스적 면역화와, 에스포지토의 그것이 다르다는 것은 말할 것도 없다.

이에 반해 나폴리의 정치철학자가 말하는 면역화는 바로 생명정치의 무대의 중심에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는 점에서 독창적이다. 이 관점에서 본다면, 나치즘의 인종주의나 우생학주의가 초래한 완전한 자기면역화에의 지향은, 자기와 타자의 완전한 파괴라는 사태를 초래한 생명정치 결국은 죽음정치 나 다름없다. 아감벤이 생명정치의 묵시록으로 간주하는 것은 에스포지토에 따르면 사실상 이무니타스(면역)’라는 장치의 궁극적인 활동의 결과나 다름 아니다.

게다가 나치즘적인 면역화는 완전히 과거형으로 되어 버린 것이 아니다. ‘면역형 민주주의라고 명명할 수 있는 것이 출현하고 있다. 예를 들면, 의학이나 의료기술의 눈부신 발달에 의해 살 가치가 있는 삶과 그렇지 않은 삶 사이의 새로운 선별이 조용하게, 그러나 확실하게 우리 주위에서 진행되고 있다(점점 더 고도화되는 출생 전 진단은 그 전형이다). 그뿐이 아니다. 그 기술은 개인 개인의 신체를 넘어 종의 특징까지 꼼짝없이 개입한다. “도처에 맞서기 힘든 방식으로 잠재적인 파괴력을 지닌 새로운 면역 증후군이 재부상하고 있다. “오늘날 우리는 전례 없을 정도로 나치즘의 이면에 있다. 이것이 의미하는 것은 이로부터 눈을 돌리는 한, 이로부터 해방되는 것은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각주: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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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II. ‘페르소나의 정치학 : ‘인격가면

삶의 선별, 오늘날 이것은 노골적인 인종주의나 전체주의적 사상에서라기보다, 특히 자유주의자라고 지목된 논객들에 의해서 자유주의적 사상이나 제도의 내부에서 복권되고 있다. 그리고 거기서 중요한 역할을 맡는 것이 인격이라는 개념 에스포지토의 표현으로는 장치이다. 인격은 개인이나 시민 등 비교적 새로운 개념보다 훨씬 오래되고 보편적이라고 간주됐다. ‘인격에는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권리가 수반되어 있으며, 그것은 단호하게 지켜지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이 개념이 라틴어 페루소나로 거슬러 올라가는 것이며, 원래는 가면을 의미했다는 것은 이미 널리 알려져 있다. 이로부터 역할이나 등장인물, 자격이나 처지, 심지어 위격이나 인격이나 인칭과 같은 의미가 파생된다. 게다가 이 단어는 특히 고대 로마법이나 기독교 둘 다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핵심어였다는 경위가 있다.

서양의 철학과 종교, 정치와 사법의 근간과 관련되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이 페르소나라는 장치, 그 탄생부터 오늘날까지 어떻게 기능했는지, 에스포지토의 3인칭의 철학(Terza persona. Politica della vita e filosofia dell'impersonale)(Einaudi, Torino, 2007)은 그 메커니즘을 철저하게 해명하는 데 바쳐지고 있다.[각주:26] [각주:27] 상세한 논의는 이 책에 맡기는 수밖에 없지만, 굳이 단순화해서 말한다면 이 장치는 고대 이후 줄곧 인간의 분할과 선별, 포함과 배제를 담당하는 것으로서 기능해 왔다는 것이다. 요컨대 페르소나는 본래 단일한 것이었을 인간의 삶을 여러 겹으로 분열시키는 장치이며, 이 분열은 개인 수준에서도 집단 수준에서도 작동해 왔다. 이 사실은 노골적으로 인격을 짓밟는 차별적 제도나 담론에 있어서는 물론 말할 필요도 없지만, 인격 존중을 정면에 내거는 인도적이고 인권주의적이라고 지목되는 사상과 제도에 있어서도 기본적으로 바뀌지 않는다. 왜냐하면, 인격과 인격 없는 자 사이의 차별화가 거기에서는 항상 작동하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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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언뜻 보기에 정반대처럼 보이는 정치나 사상, 예를 들어 철저하게 인권을 파괴한 나치즘의 생명정치=죽음정치와, 이와 반대로 인격을 금과옥조처럼 추켜세우는 자유주의의 인권 사상이 사실은 똑같은 전제 살 가치가 삶, 삶의 생산적 관리 등 를 공유하고 있다는 점에도, 에스포지토는 우리의 주의를 환기시키고 있다. 생물학이나 인류학, 언어학이나 사회학 등 여러 가지 관점에서 인간을 규명하고자 해온 근대의 여러 과학들을 근저에서 파헤치는 것, 그것이 이 페르소나의 장치이며, 나치즘과 자유주의는 똑같은 장치에 의해서 초래된 서로의 물구나무 선 상이라는 점에는 틀림이 없다.

그런데 페르소나가 분할과 선택의 장치이라고 한다면, 그 당연한 귀결로서 산출되는 것이 불분명한 경계 영역이며, 그곳에서는 또한 포함적 배제라는 역설적인 메커니즘이 작동해온 것이다. 나폴리의 철학자는 물론 이 점에도 매우 민감하다(여기에도 역시 아감벤의 영향을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미 로마법에 내포된 이러한 불분명 지대를, 근대의 철학과 사법과 정치 안에서 추적하려 하는 2페르소나, 인간, 사물3인칭의 철학에서도 가장 농밀한 장이다. 최첨단 의료의 발달과 생명윤리의 수립은 이 불분명 지대를 해소시키기는커녕 더더욱 곤란한 아포리아로 우리를 끌고 들어간다. 왜냐하면 분할선을 아무리 세밀하고 정밀하게 하더라도, 원리적으로 잔여 ‘~가 아니지 않다는 항상 생기지 않지 않았기 때문이다.

오늘날 정치나 외교, 사법이나 의료 등의 현장에서 발생하는 다양한 문제는 일반적으로 인격의 이념이 널리 침투하지 않은 데 근본적인 원인이 있다고 여겨진다. 하지만 에스포지토에 의하면 이야기는 거꾸로다. 침투하해 있지 않기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그로부터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탈출의 길은 있을까? 여기서 부상되는 것이 비인격혹은 비인칭이라는 문제계인데, 이것으로 들어가기 전에, 아감벤의 논의를 우회하지 않으면 안 된다.

아감벤도 페르소나의 주제에 일찍부터 관심을 보였다. 희극이라는 제목의 단테론(1976)에서 페르소나의 계보를 간결하게 소묘하면서, 고대나 중세에는 아직 이 단어에 본래의 연극적인 반향이 뚜렷하게 남아 있었다는 것을 추적한다.[각주:28] 아감벤이 공감을 보여주는 것은 분명히 누구에게도 양도할 수 없는 의식이나 도덕의 주체로서의인격이라기보다는 어디까지나 가면으로서의, 혹은 얼굴로서의 페르소나이다. 원래 인간에게서 페르소나와 본성이 일치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 그렇다고 한다면, 문제는 어떤 가면을 떠맡아 연기하는 것인가, 어떤 얼굴을 드러내는가이다.

최근작 벌거벗음(2009)에 수록된 논문 페르소나 없는 정체성에서는 생물학적·유전학적인 데이터 새로운 벌거벗은 생명의 양태 로 점점 환원되어가는, 우리 현대인의 정체성이 통렬하게 비판된다. 이제 그것은 페르소나적 정체성 없다는 것은 확실하다. , 사회집단에 속하는 구성원들에 의한 승인과 결합된 정체성이 아니며, 사회적 가면을 쓰고, 그래서 가면에 녹아드는 일이 없도록 하는, 개인의 능력과 결합된 정체성도 아니다.”[각주:29] 이 인용문에서도 역투사되듯이, 아감벤에게 페르소나는 인격이라기보다는 항상 그 본뜻인 가면으로 돌려보내야 할 것, 가면과의 접촉 방식으로 간주되어야 할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더욱 흥미로운 것은 바로 얼굴이라는 제목의 논문(1990년 초출)이다. “나의 얼굴은 나의 바깥이다. 나의 모든 고유성이 차이를 잃고, 고유한 것과 공통된 것, 내부와 외부가 차이를 잃는 점이다.”[각주:30] 그 때문에 페르소나의 본래 의미인 가면이란 안에 갇힌 나(의 인격)를 가리키는 게 아니고, 바깥으로 열려진 나의 얼굴=경계선을 가리킨다.

한 가지를 더 언급한다면, 소수자적 생명정치라는 제목의 인터뷰(2003)에서 아감벤은 푸코의 아포리아를 언급하고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푸코의 말년의 작업에는 제게 아주 흥미롭게 보이는 한 가지 아포리아가 있습니다. 한편으로는 자기에의 배려에 관한 작업의 전체가 있습니다. , 자기의 모든 형식과 실천에 있어서 자기에게 배려할 필요가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과 동시에 반복해서 얘기되는 것은 언뜻 보기에 정반대의 주제입니다. , 자기로부터 분리될 필요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는 몇 번이나 이렇게 말합니다.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서 다시 물으려 한다면, 결국 삶으로 나아간다. 산다는 것의 기법은 정체성을 파괴하는 것, 심리학을 파괴하는 것이다. 그래서 여기에는 아포리아가 있습니다. 자기에의 배려는 자기의 경시로, 자기의 분리나 일탈로 이끌어져야 할 것이라는 얘기니까요. 문제는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 제기될 수 있죠. , 주체화의 과정 같은 게 아니라면, 자신의 실천은 무엇일까. 하지만 그 주체화의 과정은, 반대의 것으로, 즉 분리로 귀착되지 않을 수 없을 겁니다. 자기의 정체성이 발견되는 것은, 단지 자기로부터 분리되는 것에서만 있을 것이라는 겁니다. 말하자면 이런 주체화와 탈주체화라는 이중의 운동을 따를 필요가 있다는 것이죠.[각주:31]

* 이탈리아어 : https://www.facebook.com/notes/riccardo-tammaro/una-biopolitica-minore-intervista-di-stany-grelet-e-mathieu-potte-bonneville-a-g/10207385837176982/

* 프랑스어 : http://www.vacarme.org/article255.html

Dans les derniers travaux de Foucault, il y a une aporie qui me semble très intéressante. Il y a d’une part tout le travail sur le « souci de soi » : il faut se soucier de soi, dans toutes les formes de pratique de soi. Et en même temps, à plusieurs reprises, il énonce le thème apparemment opposé : il faut se déprendre de soi. Il dit plusieurs fois : « On est fini dans la vie si l’on s’interroge sur son identité ; l’art de vivre, c’est détruire l’identité, détruire la psychologie. » Donc il y a bien ici une aporie : un souci de soi qui doit aboutir à une déprise de soi. Une manière dont on pourrait poser la question, c’est : qu’est-ce que c’est qu’une pratique de soi, non pas comme processus de subjectivation, mais qui n’aboutirait au contraire qu’à une déprise, qui trouverait son identité uniquement dans une déprise de soi ? Il faudrait pour ainsi dire se tenir en même temps dans ce double mouvement, désubjectivation et subjectivation.

 

여기서도 또한, 아감벤 식의 푸코 해석이 얼굴을 내비치고 있다. 더구나 지금까지의 검토에서 알 수 있듯이, 그는 또한 페르소나와 주체를 엄밀한 의미에서 구별하지 않는 것 같다.

,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이런 것이다. 아감벤에게서 정체성은 탈정체성과, 인격(인칭)은 비인격(비인칭), 인격화는 탈인격화와, 주체화는 탈주체화와 언제나 떼어놓을 수 없는 형태로 연결된 것이며, 한쪽 없이는 다른 쪽은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이것은 다시 아감벤이 아리스토텔레스의 잠재력을 -잠재력“~하지 않을 수 있다로서 독창적으로 바꿔 읽은 것과도 관련되는데, 이 주제에 대해서는 졸저에서 논의한 일이 있으므로, 여기서는 되풀이하지 않는다. 하지만 어쨌든 이렇게 우리는 다시 비인칭의 문제계로 돌아오게 된다.

 

IV. ‘비인칭임의(쿼드리베트)’

사실 아감벤이 비인칭에 대해 정면에서 얘기한 것은 내가 아는 한 거의 없는 것 같다. 이를 대신하는 것이 라틴어로 말해서 쿼드리베트(quodlibet)’, 즉 불특정한 익명적 임의인 자이다. 그의 정치철학에서, 잠재력과 더불어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것이, 뜻밖으로 들릴지도 모르겠으나 이 임의이다. 그렇지만 이 기묘한 대명사에 대해서는 좀 더 설명이 필요할 것이다.

1990년에 출판된 짧으나 농밀한 한 권인 도래하는 공동체는 바로 이 임의에서 논의가 시작된다. 왜냐하면 임의[누구든]’야말로, 혹은 이것이 어원이 된 뭐든이야말로 다가올 정치와 공동체의 주체이자 객체이기 때문이다. 이를 테면 초월론자들의 스콜라학적 열거법에 따르면, 임의의[뭐든] 존재자는 하나이며 참이며 선 혹은 완전하다.” 그래서 뭐든이란 무엇인지는 중요하지 않다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어쨌든 중요하다.” 왜냐하면 거기에는 이미 비인칭의 마음에 든다(libet)”에 대한 참조가 내포되어 있기 때문이다.[각주:32] 유사한 이탈리아어에는 또한 아무리 ~ 해도라는 의미의 콸시볼리아(qualsivoglia)”가 있는데, 여기서도 원하다라는 의미의 볼리아(voglia)”가 포함되어 있다.

, ‘임의의사람은 원해지는 것이며, ‘사랑받는 것이다. ‘뭐든’, ‘누구든무관심하고 무관한 무엇인가라는 게 결코 아닌 것이다. 뭐든임의는 또한, “있는 그대로의 존재(essere tale qual è)”라고도, 혹은 특이성=단일성(singolaratà)”라고도 바꿔 말해진다. ‘특이성이라고 하면, 보통 우리는 뛰어난 개성이나 독창성 같은 것을 떠올릴지도 모르지만, 그런 게 아니라, 우리는 각각 있는 그대로의 존재로서, 단일하고 특이한 것이다. 임의특이성은 또한 잠재력의 다른 이름이기도 한 것 같다. ‘임의의우리는 있는 그대로의 존재로서, 현실성이 아니라 잠재력을 공유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의 문맥에서 바꿔 말한다면, 아감벤이 말하는 임의란 바로 인격의 앞 혹은 건너편에 있는 존재이며, 생명정치적인 선긋기나 선택의 바로 앞에 혹은 건너편에 있는 존재이다. “만인에 대한 만인의 싸움”(홉스)친구/의 이항대립(슈미트)도 아니고 이 임의에 그의 정치철학의 출발점이자 도달점이 있는 것이다.

아감벤은 또 다른 논문에서, 굳이 시대착오적인 개념인 게니우스를 불러내는데, 거기에 등장하는 것이 비인칭()(impersonale)’이라는 형용사이다. 게니우스란 우리가 태어나는 순간에 우리를 자신의 보호 아래에 두는 신을 가리켜 고대 로마인들이 부른 단어로, ‘천재재능의 어원이 된 것으로도 알려졌다. 그렇지만 아감벤이 주목하는 것은 그 점이 아니며, “이 매우 친밀하게 인칭적인 신이, 우리 속에 있으며, 더 비인칭적인 것이며, 우리를 극복하고 능가하는 것의 화신이기도 하다는 점이다. , ‘게니우스에 있어서 암시되고 있는 의미란, “인간이 단순히 자아나 개인적 의식일 뿐 아니라 탄생부터 죽을 때까지, 굳이 말하면 비인칭적이고 전개체적인 요소와 더불어 살아 있다는 것이다.[각주:33]

여기서 아감벤이 염두에 두는 것은 질베르 시몽동전개체적인 것인데, 새로운 보조선으로서, 예를 들어 우리나라에서도 키무라 빈(木村敏)이 비인칭의 삶에 관해 언급하는 것을 덧붙여도 될 것이다. “누군가의(저라도 좋고, 어떤 사람이라도 좋지만) 생명이 살아 있다는 것은, 거기에 누구든 좋다, 말하자면 비인칭의 생명이 깃들어 있다는 것입니다.” 키무라는 또한, 인칭으로 환원되지 않는, 그 때문에 특정한 신체에 깃들어 있는 것도 아닌 이 비인칭의 생명을, 조에로서 고쳐 읽는 것이다. 그것은 사물로서가 아니라, ‘로서의 생명이며, ‘비인칭이고 자타미분화상태에 있다.[각주: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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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인칭과 비인칭, 주체화와 탈주체화라는 삶의 이중의 운동은, 아감벤의 바틀비(1993)에서 더 나아가, 창조와 탈창조라는 표현으로 불러내지고 있다.[각주:35] 말할 것도 없이, 탈창조라는 단어는, 시몬 베유에게서 빌려온 것인데, 본인은 왜 그런지 그 출전을 밝히지 않는다. 그렇지만 어떤 창출된 것을, 창출되지 않고 처음부터 존재하는 것 속으로 옮겨보내게 하는 것이라는, 베유에 의한 탈창조’(혹은 창조’)의 정의는, 아감벤에게서의 -잠재력과 겹치는 바가 큰 것 같다.[각주:36] 그럼에도 불구하고 멜빌의 소설 주인공 바틀비가 체현하는 -잠재력을 설명하는 데 있어서 아감벤은 둔스 스코투스에 의한 우연성의 존재론은 언급하면서도 베유의 이름은 왜 보이지 않게 깔아두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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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다가 최근 십수년 동안의 저작에서 아감벤은 신학적 전회라고도 명명할 수 있는 변화를 수행하는 것인데, 이 전개도 1930년대 후반 이후에 신빈화로의 경향을 강화한 베유의 변화에 의해 선취되고 있다는 견해도 불가능하지 않은 것 같다.[각주:37] 그녀가 인격과 성스러운 것에서 묘사하려고 한 것, 신의 페르소나의 의지로서의 섭리라는 신화는, 아감벤이 왕국과 영광(2007)에서 전개하게 되는 것과 거의 대응한다. 심지어 극빈 : 수도원 규칙과 삶의 형식(2011)에서는 청빈의 성자 아시시의 성 프란체스코와 그 수도회, 삶의 형식의 하나의 모델이 추적되고 있는 것이다.[각주:38] 아감벤이 여기서 가장 높이 평가하는 것은 아시시의 성자와 그 일파 성령파 소유사용을 명확히 구별하고, 전자에 대해 후자를 중시했다는 점이다. 여기서도 또한 권리나 소유를 인격과 나란히 폭력의 원천으로 간주했던 베유의 그림자가 춤추고 있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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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에스포지토는 그의 저작 상당수에서, 확실히 프랑스의 여성사상가에 대한 준거를 공언하고 있다. 그는 그녀 속에서, 비인칭의 철학의 최초의 표명을 찾아내고 있는 것이다. , 나중에 블랑쇼나 들뢰즈 등으로 이어지게 되는 처음의 기점이, 베유에서 찾아지고 있다.[각주:39] 실제로 인격과 성스러운 것에서 그녀는 강력하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성스러운 것이란 인격이기는커녕 한 명의 인간 존재에 있어서, 비인격적인 것이며, 그것만이 성스러운 것이다.” 더 말하면, “비인격적인 것의 영역에 들어선 사람은, 저마다 거기서 모든 인간 존재에 대한 책임에 직면한다. , 그들 속의 인격을 소중히 하는 책임이 아니라, 인격이 비인격적인 것으로 이행하는 몇 가지 가능성으로 덮어져 있는 모든 것을 소중히 하는 책임이다.”[각주:40]

에스포지토의 독해를 곱씹는다면, 이리하여 베이는, 인격과 권리 사이에 있는 배타주의적 관계를 고발하고, 정의를 권리로부터 확연하게 떼어낸다. 권리가 인격=인칭에 귀속된다면, 정의는 비인격=비인칭적인 것에 결부된다. 윤리적 차원은, 인칭이 아니라 비인칭에 갖춰져 있다. 결국 비인칭이란 단순히 인격의 소박한 부정이나 대립항이 아니다. 오히려 아직 인격이 아닌 것, 더 이상 인격이 아닌 것, 결코 인격이라고는 공언되지 못한 모든 사람에게 향해진, 분리와 차별의 메커니즘을, 인격의 내부에서 동결시키는 것이다.[각주:41] 그렇다고 한다면, 비인칭적인 것을 둘러싼 사고는, 생명정치의 내부에 어떤 결과를 가져올까? 이것이 우리의 마지막 질문이 된다.

 

V. ‘비정치무위

에스포지토가 베유의 이름을 처음으로 소환한 것은, 사실 지금부터 4반 세기 전, 1988년 초판된 저작 비정치의 범주로 거슬러 올라간다. 여기서 에스포지토의 정치철학은 비정치라는 관점에서 정치를 역투영하려고 시도하는데, 이른바 비정치가 정치에의 주의의 약체화나 저하를 초래하는 것이 아니며, 반대로 그 강화와 철저화라는 것은, 시몬 베유부터 한나 아렌트까지, 헤르만 블로흐부터 조르주 바타이유까지, 심지어 최근에는 르네 샬까지의 작업과 전기의 양쪽에 의해 분명하게 증명되고 있다고 말이다.[각주:42]비정치란 정치적인 것과는 다른 것이 아니다. 오히려 도래할 정치의 별명이 비정치이며, 그 모델 중 하나가 베유에서 찾아지는 것이다. 그녀에게 비인칭으로의 이행은 윤리적이고 신학적이며 또한 정치적인 요청이기도 했다. 정의나 자유는 우리에 의해 쟁취된다기보다는 비인칭에 호소하는 것이지 않으면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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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정치는 반정치도 초정치도 탈정치도 아니다. 정치의 이면도 아니고 이를 넘어선 곳에 있는 것도 아니다. 거꾸로 바로 정치적인 것의 한복판 속에 있으며, 그것을 비판하는 힘을 가진다. 이런 생각을 정면에서 수립한 것은 이탈리아에서는 마시모 카차리(1944~)가 처음이었던 것 같다. 1978년의 논고 니체에게서의 비정치에서, 일찍이 네그리의 동지이자 절친이었던 이 베네치아의 철학자는, 토마스 만에 의한 니체의 비정치성의 해석을 통렬하게 비판했다.[각주:43]

독일의 소설가에 따르면, 니체는 비정치적이기 때문에 독일 문화의 중심적 존재로 간주되고, 그 비정치성이야말로 독일의 정신적 힘의 상징이라고 여겼다. 하지만 카차리에 따르면, 비정치는 정치를 무가치한 것으로서 단죄하는 것에 있는 것도, 정치로부터 해방되는 것에 있는 것도 아니며, 오히려 그 반대이다. 비정치야말로 가치를 가진 것으로서의 정치를 철저하게 비판할 수 있다. 그 때문에 비정치는 허위를 고발하는 이데올로기 비판보다 훨씬 근원적인 것이다. 결국 카차리는 거절을 거절하는 것이며, 그 신념이 성공이냐 실패냐는 차치하고 베네치아 시장 재직 중에 미시정치로서 실천됐다는 것은 또한 우리의 기억에 새롭다.

에스포지토에게서의 비정치도 또한 이 연장선상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이런 의미에서 1960-70년대에 일본에서도 일세를 풍미한, 이른바 논폴리와는 구별된다. 비정치는 중립적인 게 아니라, 빼어나게 정치적인 몸짓이다. 권리에 근거한 정치라는 발상을 철저하게 비판한 베유를 받아들여, 에스포지토는 의무에 기초를 둔 공동체를 구상한다. 이 발상은 또한 공동체의 어원이 된 라틴어 코무니타스와도 합치한다. 왜냐하면 이 단어는 의무책임을 의미하는 무누스, ‘~와 더불어, 함께를 의미하는 접두사 타무가 붙어서 만들어진 명사이기 때문이다. , 공동체 함께 살아가는 것 란 본래 각자가 타자에 대한 의무를 짊어져야 하는 것이다. 이에 반해 면역의 어원인 라틴어의 이무니타스는 똑같은 무누스와 지우다를 가리키는 접두사 가 조합되어 만들어졌다. 이무니타스는 따라서 의무로부터 면제되다라는 의미를 갖게 된다. 일반의 인식과는 정반대로, 그 어원에 따르면, 공동체란 원래 동일성이나 고유성에 집착하는 것과는 정반대의 것이며, 면역은 자기보존은커녕 자기와 타자 쌍방의 파멸을 초래할 우려가 있다.[각주:44] 에스포지토는 근대의 정치사법적 범주의 거의 대부분이 자기 면역화의 방향을 따르는 것이었다고 생각한다. ‘인격은 그 으뜸가는 것 중 하나이다.

이처럼 공동체와 면역을 하나의 쌍을 파악하고, ‘의무를 끼워 넣어 흡사 정반대의 관계로 양자를 둔 점에 에스포지토의 새로움이 있다. 그래서 코무니타스이무니타스비정치의 범주의 뒤를 쫓듯이 출판된 것도 우연이 아니다. 또 에스포지토가 말하는 공동체가 바타이유부터 블랑쇼를 거쳐 낭시로 이어지는, 이른바 비정치적인 공동체 사상 계보로 연결되는 것도 사실이다. 그렇지만 비인칭에 대한 주목에 의해 어떤 새로운 삶의 저치의 지평이 열리게 될지, 그 대답은 아직은 분명하게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인간과 페르소나 사이의 형이상학적인 분리를 무효화하는 생명정치는 정말로 가능할까? ‘인격이라는 장치에 빨려 들어가버린 삶을 어떻게 하면 탈환할 수 있을까? 적어도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삶을 선별하거나 계층화하는 것이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아감벤을 부연해서 말한다면, 그 누구도 삶을 소유하고 있지 않으며, 그냥 사용하고 있을 뿐인 것이다.

그럼 아감벤은 어떨까? 내가 아는 한, 그가 정색하고 비정치를 입에 담는 것은 거의 없다고 해도 좋다. 대신에 되풀이하여 인용되는 것은 무위라는 단어이다. 그것은 또한 그의 장치론과도 연동되어 있다. ‘장치라는 개념도 푸코에게서 연원되는 것이지만, 이 이탈리아 후배는 여기에서도 그것을 독자적으로 고쳐 읽고 있다. 결국 세계 통치의 다양한 장치 그 으뜸가는 것이 생명정치의 그것 는 세계를 구원하기는커녕 카타스토로피로 이끌어 간다고, 감히 단순화해서 한다면, 이것이 아감벤의 테제이다. 최첨단 과학이나 테크놀로지도 궁극적으로는 죽음정치에 봉사하고 끝날 수밖에 없다는 얘기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어떤 길이 남아 있는가? 어떤 의미에서 답은 단순하다. 이런 장치들을 작동시키지 않게 하거나, 아니면 추앙되고 있는 그 신성함을 신성모독하거나 둘 중 하나이다. 무위와 신성모독이라는 두 개의 몸짓은, 이리하여 아감벤에게서 밀접하게 결합된다. 아니 양자는 확실하게 나눠져 있는 게 아니다. 그것이 명확하게 제시되는 것이 왕국과 영광의 결말이다. 초기 기독교 시대의 삼위일체의 교의로까지 거슬러 올라가면서 오이코노미아”, 즉 통치의 형태를 자세하게 추적한 끝에 아감벤이 당도하는 것은, 무위로서의 권력의 영광이다. 신이 엿새 동안의 창조 후에 쉬고, 최후의 심판 후에 영원한 안식일이 오듯이, 권력의 중심에 있는 것은 사실상 무위라는 빈 장소이다. 오늘날 가장 초미의 문제가 되는 것은, 아감벤에 따르면, 정치적인 것이 스스로의 장치 속에 이 무위를 탈환하는 것이다.[각주:45] 무위나 신성모독은 종종 자유로운 사용이나 공통의 사용이라고도 바꿔 말해진다.

이런 아감벤의 장치관, 혹은 더 넓게는 기술관은, 종종 너무도 소박할 뿐 아니라, 너무도 비관적이라고 비난받아 왔다.[각주:46] 그렇지만 무위나 신성모독은 쓸데없이 장치를 중지시키거나 파괴하거나 하는 것도, 게으르게 방치하는 것도 아니다. 장치란 무엇인가(2006)에서도 말해지고 있듯이, 그것은 분리·분할된 것을 공통의 사용으로 되돌리는 대항장치인 것이다. 그것은 또한 장치의 자유로운 사용이며, 장치 아래서 노는것이기도 하다. 중요한 것은 이런 장치들에 의해 휘둘리지 않는, 그 목적에 얽매이지 않는 것이다.[각주:47]

앞서 말했듯이, 아감벤은 최근 점점 더 소유에서 사용으로, 풍요에서 가난으로 라는 발상의 전환을 밀어붙이고 있다. 이리하여 1990년대 중반에 시작되어, 현재에도 여전히 진행 중인 장대한 <호모 사케르> 계획은 정치로부터 출발해 비정치로 급속하게 방향타를 꺾었다(그렇지만 물론 그 경향은 처음부터 있었다). 아감벤의 무위나 에스포지토의 비정치는 오늘날 더욱, 예를 들어 알랭 바디우에게서의 전-정치에 대한 주목이나, 자크 랑시에르에게서의 치안과 정치의 구별을 둘러싼 사유와도 맞대결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일부에서 그런 시도도 시작되고 있지만, 그것은 향후의 과제로 남겨둔다.[각주:48]

아무튼 예전에 시몬 베유가 제창한 비정치, 전체주의의 폭력이라는 동시대의 카타스트로프에 민감하게 대응하는 것이었다면, 작금 새롭게 재부상하고 있는 비정치의 사유는, 관리화와 규율화가 진행되는 가운데, 삶의 보호와 부정이 바야흐로 불분명해지는 생명정치/죽음정치의 문턱을 스쳐지나가고 있는 현대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과제가 된다는 것은 확실한 것처럼 내게는 생각된다.

 

  1. 졸고, 「アイステーシスの潜勢力」, 『ラチオ』 第04号, 講談社, 2007년 11월 및 『イタリア現代思想への招待』, 講談社選書メチエ, 2008년을 참조. [본문으로]
  2. Pietro Montani, Bioestetica: Senso comune, tecnica et artenell’età della globalizzazione, Roma: Carocci, 2007 ; Laura Bazzicalupo, II governo delle vite : Biopolitica ed economia Roma-Bari: Laterza, 2006. [본문으로]
  3. Roberto Esposito, Pensiero vivente: Origine e attualità della filosofia italiana, Torino: Einaudi, 2010. [본문으로]
  4. ジャンバッティスタ•ヴィーコ, 『新しい学 1󰡕, 上村忠男訳、法政大学出版局、ニ〇〇七年、ニ〇五ぺージ。 [본문으로]
  5. Michel Foucault, «Il faut défendre la société» : Cours au Collège de France (1975-1976), Paris: Gallimard-Seuil, 1997, p.213(미셸 푸코, 『“사회를 보호해야 한다”: 콜레주드프랑스강의 1975-1976』, 김상운 옮김, 난장) [본문으로]
  6. Ibid., p.226. [본문으로]
  7. Ibid., p.228. [본문으로]
  8. Ibid., p.232. [본문으로]
  9. Ibid. [본문으로]
  10. Giorgio Agamben, Quel che resta di Auschwitz : L’archivio e il testimone (Homo sacer III), Torino: Bollati Boringhieri, 1998. p.78. [본문으로]
  11. Ibid., p.145. [본문으로]
  12. 조르조 아감벤, 『사물의 표시』, 양창렬 옮김, 난장, ****. [본문으로]
  13. 상동, ***쪽. [본문으로]
  14. 상동, ***쪽. [본문으로]
  15. Giorgio Agamben, Homo Sacer: II potere sovrano e la nuda vita (1995),Torino: Einaudi, 2005, pp.178-184(조르조 아감벤, 『호모 사케르 : 주권권력과 벌거벗은 생명』, 박진우 옮김, 새물결, ***). [본문으로]
  16. 이에 관해서는 졸저, 『アガンペン読解』, 平凡社, 2011을 참조. [본문으로]
  17. Slavoj Zizek, “Knights of the Living Dead”, New York Times, March 24, 2007. [본문으로]
  18. Agamben, Homo Sacer, cit. p.69. [본문으로]
  19. Roberto Esposito, Bios: Biopolitica e filosofia, Torino: Einaudi, 2004, chap. IV. [본문으로]
  20. 拙著 「イタリア現代思想への招待」、『ラチオ』 第01号, 講談社, 2006년 2월 및 「ナポリ発、全人類へ──ロべルト・エスポジトの思想圏」(訳者イントロダクション), ロべルト・エスポジト, 『近代政治の脱構築—共同体・免疫・生政治』, 岡田温司 訳, 講談社選書メチエ, 2009년 수록. [본문으로]
  21. Esposito, Bios, cit, pp.194-196. 비오스의 조에로의 환원 속에서 나치즘의 생명정치=죽음정치의 메커니즘을 봤던 아감벤에 대해서, 에스포지토도 “조에의 정신화와 정신의 생물학화에 관해 말해야만 한다”고 날카롭게 견제하고 있다(Ibid., p.153). [본문으로]
  22. Roberto Esposito, Immunitas : Protezione e negazione della vita, Torino: Einaudi, 282. [본문으로]
  23. 다음을 참조. 宮崎裕助 「自己免疫的民主主義とはなにか──ジャック•デリダにおける「来たるベさデモクラシー論」の帰趨」 『思想』 第1060号(2012年8月)岩波書店、45-68頁. [본문으로]
  24. * 데리다의 자기면역화에 대해 데리다의 ‘자기면역화’가 가장 분명하게 드러나는 책은 『불량배들』이다. 이 책은 두 개의 강연으로 구성되어 있다. 하나는 세리지의 연례적인 10일 동안의 강연과 세미나로, 장문의 기록 「강자의 이성 : 불량국가들은 있는가」이며, 다른 하나는 「도래할 계몽의 <세계> : 예외, 계산, 주권」이다. 첫 번째 강연에서 데리다는 미국이 일부 국가들을 고발하기 위해 사용한 ‘불량국가’라는 개념을 꺼내들고, 그 의문점을 들춰낸다. 여기까지는 촘스키와 같다고 생각할 수도 있으나, 문제는 정치적인 것에 국한되지 않는다. 주권과 이성의 문제이며, 생명의 자기보존으로서의 면역과, 이것이 생명 자체를 파괴해버리는 자기면역, ‘죽음충동’(p.299)의 문제이기도 하다. 현실적인 정치적 문제를 철학의 근본문제로까지 끌고 가는 수완은, 아감벤과 데리다 두 명의 사상가의 두드러진 특징일 것이다. 두 번째의 짧은 강연에서는 시간적인 제약도 있고 해서, 데리다는 “전보적이기도 하고 강령적이기도 한”(p.293) 형태로, 지금까지 얘기한 다양한 문제를 요약적으로, 솜씨 좋게 제시한다. 그 요약의 능수능란함 때문에, 독자는 눈이 어질어질한 부분도 있지만, 거꾸로 인용을 견뎌내는 짧은 문장도 많다. 첫 번째 논문에서는 시간의 여유가 너무 많아서(데리다는 그래도 모자라다고 계속 말하지만), 우회로를 거칠 시간이 너무 길어서, 인용할 수 있는 대목은 별로 없다. 이 우회로가 즐거운 것은 확실하며, 데리다의 세미나는 재미있었을 것이라고 상상한다. 서평에서는 전보적인 것을 더욱 인상비평적으로 거론할 수밖에 없는 것이 안타깝다. 처음 논문에서는 민주주의가 자기면역을 일으키며, 자살하기 직전에 이른 사태를 고찰한다. 무엇보다 범례적인 것은 알제리이다. 민주주의를 부정하는 이슬람 정당이 민주적인 선거에서 압승할 것이 확실한 시점에서, 군대가 쿠데타를 일으키고 선거를 무기한 연기한 것이다. 이것은 민주주의의 이름에서의, 민주주의에 대한 모든 침해의 전형적인 사건(p.74)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알제리 정부는 “시작된 선거과정은 민주적으로 민주주의의 종언으로 이끌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들은 스스로 민주주의를 종식시키는 쪽을 선택한 것이다. 그들은 주권적으로 결정했던, 민주주의를, 민주주의에 있어서 좋은 것이기 때문에, 그리고 그 치료를 하기 때문에, 최악의, 거리 전체의 가장 높은 침해에 대해서 그것을 면역화하기 위해서, 적어도 잠정적으로 중지하는 것”(Ibid.)을. 이것은 “자기면역적 자살”(p.75)이었다. 전보적인 두 번째 논문으로부터 자기면역의 간단한 정의를 복습해두자. “어떤 생체 속에, 타자의 공격적인 침입에 대한 면역을 해당 정체에 부여하는 것, 바로 해당 주체가 자살적으로 파괴할 수 있는”(p.234) 것이다.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민주주의를 죽이는 알제리, 주권을 지키기 위해 주권의 근원인 것을 죽이는 쿠데타, 불량국가를 공격한다는 명목으로, 스스로 불량국가가 되는 미국. 미국 행정부는 ‘악의 축’에 대항한다고 칭하며, 민주적 자유를 “불가피하게, 또한 부인 불가능한 방식으로 제한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리고 이것에 대해서는 누구도, 어떤 민주주의자도 진심으로 반대할 수 없는” 것이다(p.86). 그뿐만이 아니다. “가장 폭력적인 불량국가, 그것은 스스로 그 위임자라고 자칭하는 국제법을, 스스로 그 이름 아래서 말하고, 스스로 그 이름 아래서, 이른바 불량국가에 대한 전쟁을 개시하는 국제법을, 스스로의 이해관계가 명하는 경우에는 매번 무시해온 국가, 계속 침범한 국가, 즉 미국이다.”(p.189). 그리고 미국과 동맹하는 국가도, 이것에 대항하는 국가도, 모든 국가도 국익의 이름으로, 주권의 지고성의 이름으로, 국가이성의 이름으로, 똑같이 행세하는 것이기 때문에, “이제 불량국가밖에는 없으며, 그리고 이제 불량국가는 없다. 이 개념은 그 한계에”(p.205) 도달한 것이며, “이 종언은 항상, 처음부터, 가까웠던 것이다”(Ibid.). 또한 데리다는 이 주권성의 이론의 배후에 기독교의 신학이 존재한다는 것을 시사한다. “민주적이라 불리는 체제에서조차 주권의 근저에는 존재-신론이 있다”(p.299). 그러나 이 논문에서는 거기까지는 논의가 진행되지 않는다. 그런데 자기면역은 가장 보편적인 형태로 바꿔 말하면, 아포리아이기도 하고 이중구속이기도 하다. “아포리아, 이중구속 및 자기면역적 과정은, 단순한 동의어가 아니지만, 이것들은 바로 공동으로, 그리고 부담=책임으로서, 내적 모순 이상의 것, 결정 불가능성을 … 내적 이율배반을 갖고 있다”(p.78). 이 개념은 여기까지 부연하면, 뭐든지 사용할 수 있는 편리한 도구처럼 되어 버린 것은 확실하다. 그는 전보적으로 몇 개인가? 데리다는 복제를 좋아하지만, 치료적인 복제는 부정할 근거가 없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원래 모든 개별성에는 반복이라는 요소가 불가피하게 존재하는 것이며, 그것을 무시하고 개성의 고귀함을, 하나의 생명의 특이성을 강조해도 공허하기 때문이다. “반복・복제는 생산・재생산과 완전히 똑같이, 문화・지식・언어・교육의 조건을 보증하는 것이다”(p.278). 인간의 특이성에 근거한 복제반대론은 “유전자주의 혹은 생물학주의를, 즉 뿌리 깊은 동물학주의, 근본적인 환원주의를, 스스로 반대하고 있는 공리계와 나눠 갖고 있는”(Ibid.) 것이다. 그러나 자기면역이 절대적인 악인 것은 아니다. 사건이 그 이름값을 하는 것이라면, “사건은 절대적인 면역도 아무런 보상도 없이, 자신의 유한성 속에서 지평 없이, 벌거벗음의 취약함에 접해야 한다. 이 경우에는, 타자의 예측 불가능성에 대치하고 서로 맞서는 것은 여전히 할 수 없다. 혹은 더 이상 할 수 없는 것이다. 그 점에서 보면, 자기면역성은 절대적인 악이 아니다. 자기면역성은 대상에 노출되는 것, 즉 도래하는 것이 없는 자에게, 따라서 계산 불가능한 것에 머물 수밖에 없는 것에 노출되는 것을 가능케 하기 때문이다. 만일 절대적인 면역성이 있을 뿐이고 자기면역성이 없다고 한다면, 더 이상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p.290). 레비나스의 알레르기 이론과 통저하며, 데리다의 이론의 깊이가 엿보이는 경지이다. [본문으로]
  25. Roberto Esposito, Termini Della Politica, Comunita, Immunita, Biopolitica, Mimesis Edizioni, 2008. [본문으로]
  26. Roberto Esposito, Terza persona. Politica della vita e filosofia dell’impersonale, Einaudi, Torino, 2007. 이와 아울러 2011년 3월에 일본을 방문했을 때의 강연에 기초한 다음의 논고도 참조. ロベルト•エスポジト「装置としてのペルソナ」 多賀健太郎 訳, 『表象06』, 2012년. 나아가 이 잡지의 특집 「ベルソナの詩学」에 기고한 젊은 연구자들(岡本源太, 横山太郎, 千葉雅也, 信友建志)의 논고도 참조. [본문으로]
  27. 제목 : 로베르토 에스포지토 강연회, 「장치로서의 페르소나(装置としてのペルソナ)」 http://utcp.c.u-tokyo.ac.jp/blog/2011/03/roberto-esposito-persona-as-de/ 2011년 3월 9일, 도쿄대학 코마바 캠퍼스에서 이탈리아 인문고학연구소 소장인 로베르토 에스포지토 씨의 초청 강연회가 열렸다. 에스포지토 씨 외에도 사회자로 교토대학 교수인 오카다 아츠시(岡田温司) 씨, 토론자로 노스캐롤라이나대학의 페델리코 루이제티 씨를 맞이한 본 강연회는 총 세 시간 동안 논의가 이뤄졌으며, 그의 사상의 현실성을 음미하는 절호의 기회가 됐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우선 맨 처음으로 진행을 맡은 오카다 씨가 이탈리아 현대사상의 종합적 해설과 그 속에서 에스포지토 씨가 차지하는 위치에 대해 정중한 설명이 주어졌다. 오카다 씨의 지적에 따르면, 에스포지토 씨뿐 아니라, 아감벤이나 카차리, 혹은 바티모 등 이른바 이탈리아 현대사상이 주목을 받은 원인으로서, 이탈리아가 ‘국민국가’로서 좋든 나쁘든 기능하지 못한 것과 뒤얽혀 있는 지정학적 조건을 들 수 있다. 중심적 권력 부재 속에서 태어난 이들 사상이, ‘포스트제국’적인 시대 정황과 부합하는 부분이 적잖이 있었던 게 아니냐는 것이다. 그 중에서도 에스포지토 씨는 “비오스bios”, “면역immunitas”, 그리고 “공동체communitas”를 주제로 한 3부작을 중심으로, 푸코 이후의 생명정치의 문제를 공동체론으로 전개하면서, 생명의 탈구축을 기반으로 한 포스트휴먼적 정치철학을 구축하는 데 그 특징이 있다고 소개됐다. 기조강연에서 에스포지토 씨의 강연 내용은 “페르소나 persona” 개념의 심급과 깊숙하게 관련되어 있다. 인격, 위계(位階), 혹은 가면이라고도 번역되는 이 단어는, 그 다의성 속에서, 특히 법철학적 함축을 전면에 내세우면서, 서양사상 속에서 중심적인 위치를 맡아왔다고 분석된다. 에스포지토 씨에 따르면, 들뢰즈나 아감벤이 ‘장치’라는 이름으로 비판했던 오이코노미아를 정초지었던 것이 바로 이 ‘페르소나’에 다름 아니며, 거기서 ‘신/인간’, ‘혼/육체’의 이분법이 유비적으로 구조화됐다고 간주된다. 주체와 비주체의 존재론적 차이를 정초짓는 이 구조가, 후자를 ‘타락’이나 ‘병’, ‘동물’로 명명해 왔던 바로 그것이라는 얘기다. 또 이 개념은 역사적으로 볼 때, 로마법의 체계와도 접점을 갖고 있다. 무엇이 ‘페르소나(=개인)’인가라는 법적 지표에 의해, 노예와 자유인, 심지어 타고난 자유인과 해방 노예의 자유인의 구별이 차례차례 만들어진다. 즉, 법적 기능에 있어서의 페르소나는 규범과 예외를 무한히 창출함으로써 모든 것을 그 무한한 권리에 있어서의 이분법으로 끌어들이는 부단한 변증법적 과정을 의미하게 된다. 이곳에서는 법=권리적 통합이나 보편화는 예외자를 배제하고 이어서 이것들을 에워싸면서, 새로운 통합을 지향한다. 에스포지토 씨의 분석은 이 구조를 ‘인간화’의 메커니즘에 내재하는 ‘비-인간화(탈페르소나화)’로서 부각시켜 보여준다. 즉, 비-인간은 페르소나 개념이 촉진했던 주체화 과정의 등 뒤에서 계속 움직이고 있다. 그것은 억압되고, 적어도 개념 수준에서, ‘완벽한 인간’ 아래에 종속될 수밖에 없다. 현대의 안락사나 장애와 뒤얽혀 있는 문제도 이런 조류 속에서 다시 생각할 수 있다. ‘인간/비인간’의 부단한 변증법에 맞서서, 에스포지토 씨가 그 돌파구로서 이번 강연에서 끌어낸 것은 시몬 베이유의 사상이다. 고대 로마를 참조하면서 히틀러주의의 기원을 분석하는 베이유는, 거기에 로마법적인 페르소나의 움직임이 공통적으로 존재한다는 것을 찾아낸다. 베이유는 비-인간적인 폭력이 인간의 가능성의 조건을 구성한다는 것을 냉혹하게 지적하면서도, 인간의 내부에 깃든 다른 비-인간, 즉 ‘신성한 것’을 동시에 희구한다. 상이한 ‘내부’, 상이한 ‘비-인간’을 어떻게 끌어당겨, 주체를 변환할 수 있는가, 에스포지토 씨가 베이유에게서 찾아낸 가능성은 여전히 자세하게 음미될 필요가 있을 것이다. 루이제티 씨의 의견 및 회장의 질의에 대해서도 간단하게 언급하고 싶다. 루이제티 씨는 에스포지토 씨의 ‘비인간’의 사상을 프랑스 현대사상의 계보 속에 위치시키고, 에스포지토 씨의 사상 속에 ‘대륙/영미’와는 상이한 별개의 유럽성이 있다고 지적한다. 이는 첫머리에서 말한 오카다 씨의 지적과도 겹치는 것인데, ‘이탈리아’의 이름 아래서 상이한 근대, 상이한 철학, 상이한 사상이 싹트고 있었던 것이라는 지적은 데리다가 『불량배들』 안에서 행한 철학에서의 라틴 기원의 문제와도 관련된 것이며, 매우 흥미로운 것이리라. 이 점에 관해서는 강연장에서의 질의에서, “상이한 유럽”이 아니라 “유럽의 타자”인 일본인의 사상에 대해서 ‘페르소나’의 탈구축은 의의를 가지느냐는 지적이 있었던 것도 덧붙이고 싶다. 이 밖에도 거점 리더인 코바야시로부터는 베이유의 사상에 있는 종교성이라는 것을 비인간적이라고 함으로써 중성화하는 것이 허용되느냐는 근원적인 질문이 있었다. 보고자인 나 大橋完太郎도, 페르소나의 탈구축이 철저하고 모두가 비인간이 된 세계는 과연 얼마나 살기 좋은 것이냐는 질문을 제기했다. 비판에 대한 반비판을 긍정적 가치로 옮겨 놓을 때, 새로운 개념적 배치의 변용을 촉진시킬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 것은 나뿐일까? 어쨌든, 평일에 일찍부터 시작되어 3시간 반이나 되는 대장정이었음에도 불구하고 100명을 넘는 분이 왕림하셔서 성황리에 이번 강연회를 마칠 수 있었다. 에스포지토 씨, 루이제티 씨, 당일 훌륭한 통역을 선 보여주신 무라 마리코(村松真理子) 씨, 그리고 무엇보다 이번 그의 초청에 관해서 진력을 다하신 오카다 아츠시 씨와 그 지원 스탭들께 마음에서 우러나는 감사를 드리는 바이다. [본문으로]
  28. 조르조 아감벤, 『이탈리아적 범주』, ***. [본문으로]
  29. 조르조 아감벤, 『벌거벗음』, ***. [본문으로]
  30. Giorgio Agamben, Mezzi senza fine : Note sulla politica, Torino: Bollati Boringhieri, 1996, p.80(조르조 아감벤, 『목적 없는 수단』, ***). [본문으로]
  31. “Una biopolitica minore: Intervista di Stany Grelet e Mathieu Potte-Bonnnville a Giorgio Agamben”, Biopolitica minore, a cura di Paolo Perticari. Roma: Manifestolibri, 2003, pp.193-194. [본문으로]
  32. Giorgio Agamben, La comunità che viene, Torino: Einaudi, 1990: Nuova edizione accrsciuta. Torino: Bollati Boringhieri, 2001. pp.3-4(조르조 아감벤, 『도래하는 공동체』, ***). [본문으로]
  33. Giorgio Agamben, Profanazioni, Roma: Notte tempo, 2005, p.9(조르조 아감벤, 『세속화 예찬』, 난장, ***). [본문으로]
  34. 木村敏, 『臨床哲学講義』, 創元社, 2012년, 7-8, 12-14頁. 살바토레 나톨리도 최근 저서에서 비오스를 영원히 연속된 조에의 분할이자 개별화라고 해석한다(Salvatore Natoli, L’edificazione di sé : Istruzioni sulla vita interiore, Roma-Bari: Laterza, 2010, p.6). [본문으로]
  35. Giorgio Agamben, Bartleby, la formula della creazione, 1993(Agamben, Potentialities, trans. Daniel Heller-Roazen, 1999). [본문으로]
  36. Simone Weil, La Pesanteur et la grâce, 1947[Gravity and Grace, Routledge & Kegan Paul, 1952 ; Routledge Classics 2002]. 에스포지토는 『비정치의 범주』에서 베이유의 ‘탈창조’를 다음처럼 고쳐 읽는데, 거기서는 분명히, 아감벤의 ‘비잠재력’에서 받은 영향을 느낄 수 있다. 이를 테면 ‘탈창조’는 “자기 멸각自己滅却의 창조이며, 창조적인 자기 멸각이다. 혹은 더 일반적으로 말한다면, 활동으로 드러나지 않는 현실태이다. 심지어 ‘현실태’로 해소되지 않는 활동, 또한 ― 이미 말했던 ‘수동적 잠재력’이라는 범주를 따른다면 ― ‘잠재력’인 채로 머무는 활동이라고 해도 좋다”(Roberto Esposito, Categorie dell’impolitico, Bologna: II Mulino. 1988; Nuova ed.. 1999. p.28). [본문으로]
  37. 아감벤과 베유의 숨겨진 관계에 대해서는 최근 몇 명의 젊은 연구자에 의해 지적되고 있다. 가령 다음을 참조. Leland de la Durantaye, Giorgio Agamben: A critical Introduction, Stanford: Stanford University Press. 2009, pp.22-23; Alessia Ricciardi, “From Decreation to Bare Life: Weil, Agamben, and the Impolitical”, Diacritics, 39 (2), 2009, pp.75- 93. [본문으로]
  38. Giorgio Agamben, Altissima povertà : Regole monastiche e forma di vita, Vicenza: Neri Pozza, 2011. [본문으로]
  39. 예를 들어 『근대정치의 탈구축』의 마지막 장 「비인칭의 철학을 향하여」나 『3인칭의 철학』의 2장 「페르소나, 인간, 사물」을 참조. [본문으로]
  40. シモーヌ•ヴューユ, 「人格と聖なるもの」, 中田光雄訳、『シモーヌ•ヴューユ著作集』 第2巻, 春秋社, 1968年, (新装版) 1998年, 443, 447頁. [본문으로]
  41. 에스포지토, 『근대정치의 탈구축』, 272頁. [본문으로]
  42. Esposito, Categorie dell’impolitico, cit, p.XII 이 책에서는 베이유나 바타이유와 더불어, 카프카, 엘리아스 카네티, 헤르만 블로흐, 모리스 블랑쇼 등에 많은 쪽수가 할애되어 있다. [본문으로]
  43. 논고는 니체의 『철학자의 책哲学者の書』의 이탈리아어판 해설로 작성됐다. Massimo Cacciari, “L’impolitico niezschiano”, in Friedrichi Wilhielm Nietzsche, II libro del filsofo, a cura di Marina Beer e Maurizio Ciampa, Roma: Savelli, 1978, pp.103-120. 또한 1970년대부터의 카차리의 주요 논문 9편을 모은 앤솔로지가 영어판으로 2009년에 출판됐는데, 그 제목도 『비정치 : 정치적 이성의 철저한 비판에 대해』이다. Massimo Cacciari, The Unpolitical: On the Radical Critique of Political Reason, translated by Massio Verdicchio, New York: Fordham University Press, 2009. [본문으로]
  44. Roberto Esposito, Communitas: Origine e destino della comunità, Torino: Einaudi. 1998, pp.XII-XXVL. [본문으로]
  45. 이 탈환은 “메시아적인 것의 작동”이라고도 불려진다. Giorgio Agamben, Il Regno e la Gloria: Per una genealogia teologtca dell’economia e del governo (Homo Sacer II, 2), Vicenza: Neri Pozza. 2007, p.272(조르조 아감벤, 『왕국과 영광』, ***). [본문으로]
  46. 예를 들어 다음을 참조. Bernard Stiegler, Prendre soin : De la jeunesse et des générations, Paris: Flammarion, 2008. [본문으로]
  47. Giorgio Agamben, Che cos é un dispositivo?, Nottetempo, 2006(조르조 아감벤, 『장치란 무엇인가?』, ***). 아감벤에게서의 ‘무위’와 ‘신성함’에 관해서는 拙著, 『アガンべン読解』를 참조하기 바란다. [본문으로]
  48. 다음을 참조. Alain Badiou, Logiques des mondes, Paris: Seuil, 2006; 자크 랑시에르, 『불화』, 진태원 옮김, 도서출판 길, ***.; Laurent Dubruil, “Preamble to Apolitics”, Diacritics, 39 (2), 2009, pp.5-20.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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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 현대사상의 전개

오카다 아츠시(岡田温司)

현대사상, 20131월호

 

이탈리아 이론

패션이나 요리만이 아니다. 세계의 사상계에서도 이탈리아는 오늘날 상당히 붐이다. 저작의 대부분이 세계의 주요 언어로 번역된 조르조 아감벤(1942년 생)과 안토니오 네그리(1933년 생)는 그 대표라고도 말해도 좋은 존재일 것이다. 영어권에서는 프랑스 이론을 대신하여 이탈리아 이론이 대두했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을 정도다.

그 이유 중 하나로 생각되는 것은 미셸 푸코나 질 들뢰즈나 자크 데리다 같은 프랑스 철학의 거물들이 차례차례 세상을 떠난 후, 상대적으로 이탈리아 사상가들에 대한 관심이 늘어났다는 사정이다. 하지만 그것은 단순한 시간의 우연이고, 외재적 원인일 뿐이다. 이탈리아에 내재적인 더 깊은 이유가 있을 것이다.

원래 이탈리아의 사상은 전통적으로, 국민국가라는 틀에 얽매이지 않았다는 큰 특징을 갖고 있다. 이것은 영국이나 프랑스나 독일 등과의 현저한 차이이다. 이들 나라에서는 많든 적든 국가의 형성이나 성장과 발맞춰 철학이나 미학이 발전했다고 할 수 있다. 존 로크든, 르네 데카르트든, 헤겔이든, 예외가 아니다.

하지만 이탈리아의 경우에는 원래 통일국가가 존재하지 않았다. 그것이 이윽고 모습을 갖추기 시작한 것은 19세기 후반의 리소르지멘토(이탈리아 국가통일운동)까지 기다려야만 했다. 그때까지는 많은 도시국가가 즐비했으며, 더욱이 여기에 바티칸 세력이 가담했으며, 이와 동시에 반복적으로 유럽 열강의 개입을 경험했다는 경위가 있다. 이탈리아의 사상은 정치적이고 종교적인 갈등에 끊임없이 노출되었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 때문에 삶과 정치는 늘 이탈리아 철학의 중심적 주제이길 계속했다. ‘주체진리등의 관념적이고 추상적인 문제보다도 삶과 역사의 현실적이고 구체적인 문제에 관심이 쏠린 것이다.

예를 들어 로마 교회가 이단이라고 선고한 조르다노 브루노(1548-1600)를 떠올려 보면 좋다. 이것 이전에도, 정치권력과 교회권력의 경쟁 속에서 가다듬어진 니콜로 마키아벨리(1469-1527)의 독자적인 정치철학이 있다. 좀 더 나중 시대가 되면, 잠바티스타 비코(1668-1744)의 역사철학이나 언어철학도 국민국가의 형성과 병행하는 게 아니다. 이와 같은 이탈리아적 전통의 특이성을 빼고서는 아감벤이나 네그리의 사상을 파악할 수 없다.

그 때문에 오늘날 정치나 경제 등 모든 국면에서 국민국가의 틀이 사실상 약해지거나 붕괴되는 상황 아래서, 이탈리아의 사상이 갑작스레 현실성을 띠게 되었다면, 이것도 어떤 의미에서는 필연이라고까지 말할 수 있을지 모른다. 아래에서는 이탈리아적 사유가 더욱 전형적인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는 생명정치와 종교(기독교)와 예술을 둘러싼 주제로 논의를 좁혀, 최근 2-30년의 동향을 소묘해 보자.

 

아감벤 효과

특히 최근 십 수년 동안 아감벤에 대한 관심의 고조는 특별하다. 한 미국학자는 이를 아감벤 효과라고 이름 붙였을 정도이다. 실제로 1990년대에는 본국인 이탈리아의 대형 서점에 들어가 봐도, 아감벤의 저서를 보게 되는 것은 매우 드물었다. 그 시점에서는 이미 몇 권의 책을 출판했는데도 말이다.

이 상황을 단번에 바꾼 것이 1995년에 출판된 호모 사케르이다. 미셸 푸코에서 유래한 생명정치의 사유를 극한까지 밀어붙인 이 책은 몇 년 사이에 많은 언어로 번역되어 세계적인 성공을 거두었다. 그렇다면 그 이유는 어디에 있을까?

무엇보다 우선 꼽을 수 있는 것은, 이 책이 마치 묵시록적인 예언서 같은 것으로 받아들여졌다는 점이다. 규칙화[일상화]되는 예외상태, ‘벌거벗은 생명’, 근대정치의 노모스로서의 수용소 등, 호모 사케르에서 계보학적으로 검증된 테제가 특히 9·11 이후의 세계정세 속에서 갑작스레 현실감을 띠게 되었던 것이다.

예를 들어 관타나모 수감자나 아부그라이브 교도소에서의 고문이든, 테러리즘과의 싸움이라는 대의명분이든, 아감벤은 흡사 현대의 예언자라는 것이다. 사실, 관타나모 수용소를 폐쇄하라는 여론이 들끓는 가운데, 슬라보예 지젝은 뉴욕타임즈에 기고한 기사(2007327일자)에서 이탈리아의 정치철학자아감벤의 이름을 특별히 거론하고, 현대의 호모 사케르살아 있는 죽은 자의 기사(騎士)를 언급했던 것이다.

호모 사케르가 나온 지 3년 후에 출판된 아우슈비츠의 남은 것역시 찬반양론을 아울러 세계적인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여기서 아감벤은 푸코(사회를 보호해야 한다)가 미결로 남긴 문제, 생명정치는 무엇 때문에 죽음정치로 전도되는가에 도전한다.

아감벤에 따르면 이 전도는 어떤 의미에서 필연이다. 왜냐하면 본래 하나의 것일 터인 을 의학적이고 생물학적, 정치적이고 법학적인 장치에 의해 구획하려고 하는 한, 삶의 서열화와 선별이 행해지는 것은 피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나치즘에서 그것은 더욱 현저한 형태를 띠었지만, 민주주의 사회에서도 이 선별은 더 표면화되는 형태로 진행되고 있다. 그 때문에 이런 장치를 중지시키고 장치의 신성함을 파헤치는 것, 무위신성모독(세속화, profanation)이라는 그의 사상의 근거 중 하나를 여기서 찾을 수 있다.

물론 아감벤의 이런 철학적 몸짓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비판도 가해지고 있다. 그의 궁극적 메시지는 정치적 허무주의이다”(에르네스토 라클라우). 그는 정치적 사명 없는 사상가(파올로 비르노). 역설이나 아포리아나 과장 등의 수사를 부려서 정치를 미학화[심미화]하고 있다(도미니크 라카프라) 등의 어조이다. 네그리도 분열된 두 명의 아감벤을 진단한다. 한편으로 문헌학과 언어학적 분석의 작업에 전념함으로서 존재의 힘에 도달하는아감벤이 있는가 하면, 다른 한편으로 실존적이고 운명론적인 무서운 그림자 속을 헤매고 있는아감벤이 있다. 두 얼굴의 야누스, 그것이 아감벤의 정체라는 것이다.

아마 이런 비판들은, 큰 틀에서는 그다지 빗나가지는 않았다. 하지만 이런 것들이 또한 그의 사상이 지닌 큰 매력이기도 하다고 나는 생각한다. 동일화와 고정성을 일부러 기피하는 아감벤. 부정성과 긍정성의 문턱에서 놀고 있는 아감벤. 두 개의, 경우에 따라서는 복수의 가면(페르소나)을 교묘하게 골라 쓰는 아감벤.

2000년의 남은 때 : 바울 강의이후, 그의 사유는 더 새롭게 전개되고 있다. 우리는 그것을 신학적 전회라고 명명하는데, 2007년의 왕국과 영광이나 2009년의 벌거벗음에서 파헤쳐지는 것은 정치나 법이나 미의식 등, 다양한 국면에서 현대에도 여전히, 신학이 얼마나 환속화된 장치로서 기능하고 있는가라는 점이다.

게다가 아감벤의 사유는 환속화를 확인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세속화[신성모독]’이 요구된다. 왜냐하면 예를 들어 주권의 패러다임이 신의 초월성의 환속화에 다름 아니라는 인식에 머무는 한, 그 권력 자체는 [손을 대지 않은 채] 고스란히 남기 때문이다. “종교로서의 자본주의”(벤야민)와 사회 전반의 스펙터클화”(기 드보르)가 점점 더 진행되는 현대, 환속화신성화가 거의 구별되지 않고 있는 현대에서 세속화[신성모독]’이 매우 긴요한 과제라고 아감벤은 말한다.

성 프란체스코와 그의 수도회의 이념에 관해 논한 최근작인 극빈(2011)에서 아감벤은 전부터 그가 홀렸던 아이디어, 소유에서 사용으로, ‘풍요에서 가난으로의 발상의 전환을 훨씬 더 밀고 나간다. 근대의 정치와 경제를 지탱하던 번영과 이익 추구, 소유와 사유(私有)의 사상이 철저하게 상대화되고 있는 것이다.


     



에스포지토의 경우

그런데 푸코에게서 물려받은 생명정치의 사유가 아감벤에게서 독자적으로 전개됐다면, 아감벤과는 또 다른 길을 모색하는 사상가로 잊어서는 안 되는 또 한 명의 존재가 있다. 나폴리의 정치철학자 로베르토 에스포지토(1950년생). 그의 저서 역시 최근에 각국의 언어로 번역되고 있다. 논문이나 강연을 모은 2008년의 정치적인 것의 용어, 인격(페르소나)’이라는 장치를 계보학적으로 답사하고 비판적으로 검증한 2009년의 3인칭의 철학[비정치적인 것의 범주들]도 출판되어 있다.

    

에스포지토의 사상의 특징을 한마디로 요약한다면, ‘생명정치공동체면역의 문제계로 접속시켰다는 점에서 찾을 수 있다. 그 성과는 토리노의 에이나우디 출판사에서 차례대로 발표되었던 농밀한 3부작, 코무니타스 : 그 기원과 운명(1999), 이무니타스 : 생명의 보호와 부정(2002), 비오스 : 생명정치와 철학(2004)으로 결실을 맺었다.

     


우선 에스포지토는 어원으로 거슬러 올라가자고 제안한다. 가령 공동체는 지금까지 귀속의식이나 동료의식, 동일성이나 유사성 등의 관점에서 사고됐지만, 어원적으로는 오히려 반대의 의미라고 한다. 라틴어의 코무니타스‘~와 더불어/함께라는 의미의 증여나 바침혹은 의무나 부담을 의미하는 무누스로 이루어진 말로, 그 때문에 원래는 귀속이나 소유를 의미한다기보다는 내가 당신에게 짊어져야 할 어떤 의무를, 즉 잠재적인 부재나 결여를 나타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동체 개념은 전통적으로 자기 동일적인 주체의 범주에서 기초를 찾고, 그것에 의해 지켜지고 가다듬어졌다. 에스포지토가 비판하는 것은 바로 이 점이다. 집단의 형식으로 확장된 개체로서 공동체를 파악하는 한, 이 공동체는 어디까지나 자기의 고유성이나 소유권(영토, 민족, 언어, 문화, 종교 등)에 갇힌 개체를 지향하게 된다. 민주주의, 자유, 주권 등 서양의 정치적 전통의 주요 개념도 대부분의 경우 이 관점에서 논해져왔다.

하지만 코무니타스란 본래 집단적인 귀속의 경계 속에 가둬둠으로써 주체를 보호하는 것이 아니라, 거꾸로 자기의 바깥으로 주체를 내던지고, 타자와의 접촉이나 전염에 주체를 노출시키는 것이었다. 그런데 서양의 근대는 타자나 외부에 대해 점점 자신을 닫고, 자기 면역화를 도모하려는 경향을 강화해 왔다고 나폴리의 철학자는 진단한다. , 면역 또는 면역화는 서양에서 문명화의 형식 자체가 되었다고까지 말할 수 있는 것이다.

무누스에 접두사 이 붙은 게 코무니타스라면, ‘면역의 어원이 된 이무니타스는 마찬가지로 무누스에 부정의 접두사 이 붙은 것이다. , 타자에 대한 의무나 증여에서 맺어지는 것이 본래의 코무니타스라면, 반대로 이무니타스는 그런 의무나 부담으로부터 구성원들을 면제하는 것이 된다. 이리하여 이무니타스는 위해를 가할 위험이 있는 모든 외적인 요소에 대한 방어와 공격이라는 형태로, 정치적·의학적으로 발동된다.

물론 면역체계는 필수적이며, 이것 없이는 개인의 신체도 사회 조직도 존속하기 어렵다. 하지만 지나친 자기면역화가 자기파괴를 초래하는 것도 사실이다. 특히 9·11 이후, 더 큰 안심과 자유를 확보한다는 명분으로 안전(안보, security) 전략이 과도하게 작동하고, 더 큰 통제가 개입하고 있다. 한편으로 도처에서 보급된 감시카메라가, 다른 한편으로 점점 고도화되는 첨단의료 및 의약품이 우리 삶의 양태를 규제하고 관리하며 공통의 행복이라는 아이기스(Aigis)의 방패 아래서 형성된 합의(consensus)가 자유와 억압, 위험과 안전 사이의 경계를 점점 더 분간하기 어렵게 만든다.

상반되는 힘으로서의 코무니타스이무니타스’, 이것들 사이에 끼어있듯이 전개되는 것이 에스포지토에게서의 생명정치의 사유이다. 물론 생명정치는 한편으로 생명을 보호하고 보증하고 증강시킨다는 역할을 갖고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반대로 푸코가 암시했듯이, 죽음의 정치로 뒤집혀질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아감벤은 이 뒤집힘 혹은 배반을 역사적이고 논리적인 필연으로 봤다. 이것에 대해 네그리가 생명정치의 새로운 가능성을 적극적으로 평가했다는 것은 잘 알려져 있다.

아감벤 같은 비관론과 네그리 같은 다행증(多幸症, euphoria), 에스포지토가 극복하려 계획하는 것이 이 이율배반이다. 왜 이런 양극화가 생겨난 것일까? 그에 따르면, 출발점인 푸코에게 하나의 원인이 있다. 왜냐하면 푸코에게 생명과 정치는 두 개의 상이한 항으로 우선 각각 전제되고, 그 후에는 외재적으로 묶이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 필연적으로 생명정치는 생명에 대한 주권의 과잉 행사로 간주되거나(아감벤), 아니면 주권에 대한 생명의 과잉 잠재력으로 간주되는(네그리) , 정반대의 방향으로 분열된다. 이에 대해 에스포지토가 제기하는 것은 생명과 정치가 특출나게 내재적인 관계에 있다는 관점이며, 이를 위해 중요한 핵심 개념이 되는 게 생물학적이고 정치적인 면역이라는 것이다.

생명정치의 계보를 차근차근 더듬어간 그의 책 제목으로 선택된 것이 벌거벗은 생명내지 생물학적인 생명을 의미하는 그리스어의 조에가 아니라 이와 반대로 사회적인 삶을 뜻하는 비오스라는 말인 것은 그 때문에 매우 상징적이다. 아감벤은 비오스를 조에에 새겨넣으려 하는 과정 속에서 생명정치의 문턱을 봤지만, 에스포지토에 따르면 조에는 비오스의 내적인 차이로 간주되어야 한다. 혹은 이미 벌써 비오스화되지 않은 조에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의 이름인 에스포지토라는 이탈리아어에는 또 버려진 아이라는 의미가 있다. 나아가 에스포지토노출된’, ‘부채를 진이라는 의미가 있다. 이름이 실체를 드러낸다고나 할까, 多孔性’(벤야민)의 마을 나폴리의 철학자이자 버려진 아이는 면역화에 맞서고 자신(의 사고)을 외부로 드러내려 시도한다. 그의 사유에 대해 앞으로도 더욱 더 눈을 뗄 수 없다.

 

기독교를 둘러싼 물음

생명정치공동체에 관한 문제와 더불어 특히 1990년대에 들어서 논의가 재연되는 듯한 것은 종교(특히 기독교)를 둘러싼 문제계이다. 아무리 신이 죽었다고 해도, 가톨릭의 대국(大國)이자 바티칸의 근거지라는 지정학적인 요인이 거기서 작동하고 있다는 것은 아마 부인하기 어려울 것이다. 한편으로 포퓰리즘적 교회회귀, 다른 한편으로 기독교 원리주의의 대두라는 상황을 앞에 두고, 교리적이지도 강권적이지도 종파적이지도 않고, 그렇다고 진부한 보편주의나 세계교회주의(Ecumenism)도 아닌 새로운 종교철학이 요구되고 있다. 아감벤에 의한 신학적 전회, 그 성격을 달리하긴 하지만 크게는 이런 문맥에서 파악할 수 있을지 모른다.

약한 사유1980년대에 씩씩하게 등장한 쟌니 바티모(1936년 생)도 최근 들어 기독교에 대해 거듭 발언하고 있다. 그것은 가령 기독교 이후 : 비종교적인 기독교 사상을 위하여(2002), 나아가 리차드 로티와 공저한 종교의 미래 : 연대, 자애, 아이러니(2005) 등과 같은 저서에서 현저하게 나타난다.

[Vattimo, Gianni]のAfter Christianity (Italian Academy Lectures)                [Vattimo, Gianni, Rorty, Richard]のThe Future of Religion: Richard Rorty and Gianni Vattimo

니체와 하이데거 연구에서 출발한 바티모는 최근의 종교회귀 현상 속에 필연성과 위험성의 양 측면이 결합되어 있음을 지적한다. 가령 과학과 테크놀로지의 눈부신 발달에 의해, 특히 생명윤리의 분야에서 합리적 사고나 논리만으로는 도저히 해결할 수 없는 심각한 문제 삶과 죽음, 자기결정과 운명 사이의 헤라클레스의 기둥 에 우리는 직면하고 있는데, 이것은 어떤 의미에서는 필연적으로 (그것을 신이라고 부를지 여부는 제쳐놓고) 초월적인 것의 존재와 마주하게 될 것이다. 하지만 거기에는 또한 신비주의나 독단적 신앙이 몰래 숨어들어올 위험성이 도사리고 있다.

현대에서 종교의 이런 야누스성은 더 나아가 익명성의 그늘로 쫓겨났던 사회집단이 종교의 우산 밑에서 자신들의 정체성을 주장하는 경우에서도 그 얼굴을 내비친다. 종교를 둘러싼 이런 상황을 철학은 자각적으로 받아들이고 비판적으로 사고해야만 한다고, 종교를 회피해서는 안 된다고 바티모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철학자는 더 이상 무신론자라고 잘난 체 해서는 안 된다. 니체가 신의 죽음을 예고했을 때조차, 소박하게 신의 부재 또는 무신론이 선고되고 있다고는 생각할 수 없다. 왜냐하면 절대적인 것이 있는 곳에, 설령 그것이 신의 부재라고 하더라도, 늘 형이상학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더욱이 바티모는 교회에 대해서도 일방적인 비판을 되풀이하는 것을 자제하라고 제안한다. 흡사 예술의 운명에 있어서 부정하든 긍정하든 미술관이라는 제도와의 모종의 대결이 불가결하듯이, 기독교는 교회라는 제도와 이후에도 줄곧 함께 가야 한다[대결해야 한다].

기독교를 둘러싼 물음과 관련해 여기서 꼭 거론하고 싶은 사상가가 또 한 명 있다. 세르조 퀸초(Sergio Quinzio, 1927-96)이다. 바티모나 마씨모 카차리(1944년 생) , 기독교의 문제를 회피하려 들지 않는 많은 철학자에게 큰 영향을 끼쳤던 이단의 개종자이다. 그의 사상은 신의 패배를 정면에서 받아들이는 데서 출발한다. 강제수용소의 홀로코스트로 귀결되었던 기독교의 역사는 바로 패배의 역사, 신의 침묵의 역사 이외의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이다.

이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 한, 기독교는 다시금 현실도피와 자기정당화의 폭력에 빠져버릴, 그 심각한 위기의식이 퀸초의 강인하고 진지한 사고를 떠받치고 있다. 이렇게 말하면, 독자들 중에는 의문을 가진 분도 있을지 모르겠다. 적어도 기독교인이면서도 그는 왜 이렇게까지 신앙이나 구원의 문제를 부정적으로 사고하려는 것인가라고 말이다.

이런 의문에 대해, 이 현대의 예언자는 아마 이렇게 대답할 것이다. 신앙과 비신앙, 믿는 것과 믿지 않는 것의 사이에는 절대적인 경계선 따위란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이다. 다른 누구도 아닌 예수 그리스가 십자가 위에서 신에 대한 불신 어찌하여 저를 버리시나이까을 무심코 누설했듯이, 신앙의 핵심에는 불신이 있으며, 신앙이란 믿는 것과 믿지 않는 것 사이의 갈등일 수밖에 없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신앙은 스스로에게 안주하고 충족해버리며, 아무런 의심도 가질 수 없게 될 것이다. 신앙의 폭력은 바로 여기에서 기인한다.

오늘날 퀸초의 사유가 새로운 현실성을 갖고 울려 퍼진다면, 그것은 바로 종교적 원리주의가 정치나 외교의 도처에서 폭을 넓혀가고 있기 때문에 다름 아니다(이 중요한 사상가에 관해서는 내가 쓴 이탈리아 현대사상으로의 초대(イタリア現代思想への招待)(講談社選書メチェ, 2008년)에서 비교적 소상히 소개했다. 관심이 있는 분은 참조하기 바란다).

 

예술과 미/아름다움의 사상

마지막으로 이탈리아의 미학사상에 관해서도 언급하지 않을 수 없으리라. 이 나라는 뭐니 뭐니 해도 우선 예술의 나라다. 이것은 아무도 의심할 여지가 없다. 미학 혹은 아이스테시스(aisthesis)’라는 그리스어의 어원으로 거슬러 올라가면 감성의 학은 바로 이탈리아의 사상의 존재중명 그 자체라고 말하더라도 결코 과언이 아닐 것이다. 20세기 이후로 얘기를 한정하더라도, 시학부터 정치학까지, 모든 앎을 횡단하는 베네딕트 크로체(1866-1952)의 사상의 출발점은 다름 아니라 미학에 있다. 현대에서는 문학부터 철학까지, 움베르토 에코(1932년 생)가 이런 이탈리아적 전통의 훌륭한 계승자이다.

하지만 이뿐이 아니다. 아감벤도 카차리도 영역 횡단적인 사유의 출발점은 바로 미학에 있다. 아감벤의 1970년대의 첫 저작인 내용 없는 인간, 이어서 1977년의 행간은 무엇보다 우선 미학 내지 시학의 책인데, 이미 이 책들에는 철학이나 신학은 물론이고 정치와 법 등을 둘러싸고 전개되는 문제계가 다양한 형태로 선취되고 있다(자세한 것은 내가 쓴 아감벤 독해(アガンべン読解), 平凡社, 2011을 참조).

여기서 더 나아가 다루고 싶은 것은 수수께끼무기적인 것의 섹스어필등의 저서로 알려진 마리오 페르니올라(1941년 생)이다. 아감벤과 거의 동세대로, 1960년대에 서로 교우관계가 있었다고 두 사람에게 직접 들은 적이 있다. 더욱이 에코와 바티모와 함께 같은 토리노 대학에서 이색적인 미학자 루이지 파레이존(1918-91)의 가르침을 받았다는 경력을 갖고 있다. 이 두 명과 마찬가지로, 페르니올라도 미학을 전문으로 하면서 예술뿐 아니라 문화, 사회, 정치, 종교 등 폭넓은 영역에 걸쳐 적극적이고 현실적인(actual) 발언과 저작을 거듭하고 있다.

페르니올라의 사상을 한마디로 요약한다면, ‘통과일 것이다. 이탈리아어로 트란지토(trànsito)’, 영어의 트랜지트(transit)’에 해당된다. 비행기를 연결해서 갈아타는 것을 곧바로 연상할지도 모르겠으나, 이 단어에는 또한 저승으로 떠났다’, 죽음의 의미도 있다. 일상적으로도 사용되는 말을 굳이 불러냄으로써 이 미학자가 모색하는 것은 헤겔의 변증법적 종합과도, 하이데거의 형이상학의 극복과도 상이한 제3의 길이다. 문제는 종합도 극복도 아니고, 어디까지나 동일물에서 동일물로의 이동, 통과인 것이다.

통과는 결코 수직축의 방향 예를 들어 신이나 ‘(대문자) 타자으로 이뤄지는 것도, 대립물의 종합이라는 형식을 취하는 것도 아니고, 어디까지나 수평의 방향으로 미끄러지듯이(slide) 이루어진다. 물론 그 방향성은 일정한 것이 아니며, 갈아타기나 궤도수정도 가능하다. ‘통과의 궁극에 있는 죽음도 위쪽(천국)이나 아래쪽(지옥)에서 우리를 기다리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통과와 똑같은 평면 위에서 일어난다. 그 때문에 통과란 일상의 자잘한 죽음의 준비라고 바꿔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처럼 통과는 단숨에 한꺼번에 다른 것으로 향하는 것은 아니지만, 우리 속에서 변화와 비동일성으로 향하는 문을 언제나 열어준다. 감성과 상상력 그 때문에 예술 의 풍부한 가능성은, 초월성이나 과격성 속에서가 아니라 자잘한 통과속에서 찾아질 수 있다.

, 이제 붓을 놓을 때가 왔다. 어쩌면 이탈리아인들은 우리와는 또 다른 시간을 살아가고 있는 게 아닐까? 그들과 마주치면 자주 그렇게 생각되는 경우가 있다. 이것은 대체로 그들이 시간에 느슨(loose)하기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니다. 그들은 예컨대 많은 미국인이나, 그리고 이제는 우리 일본인도 대부분 그렇듯이, 오로지 현재와 미래만 바라보고 살아가는 것이 아니다. 과거는 그들에게 현재라는 시간과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다.

바르부르크 식으로 표현한다면, 아마도 태초 이후의 기억의 흔적이, 다양한 형태로 그리고 깨닫지 못한 채, 그들의 신체 자체 속에 깊이 새겨져 있는 것이다. 그것은 바로 로마라는 마을이, 바흐친이 말하는 크로노토프(xpohotoll, chronotope)를 방불케 하는, 복수(複數)의 시공을 다성적(polyphonic, 多聲的)으로 울려 퍼지고 있는 것에도 비교할 수 있을 것이다. 아나크로닉(시대착오)과 헤테로토피아(heterotopia), 이것이야말로 이탈리아 사상의 계속된 특징이다. 현재성(actualité)은 아나크로닉 때문에 발휘되는 것이다. 이런 기묘한 역설에 아마 이탈리아적 다이몬과 그 부산물인 이 나라의 현대사상의 최대의 특징과 매력이 숨어 있다


Posted by 상겔스 상겔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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