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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1.02.01 [옮김] 베르나르 스티글러 - 욕망, 문화산업, 개인 (2)

욕망, 문화산업, 개인

베르나르 스티글러
http://www.monde-diplomatique.fr/2004/06/STIEGLER/11261

수십 년 간 세계를 지배하고 있는 우화가 있다. 적지 않은 정치사상이나 철학이 그러한 환상의 포로가 되어 왔다. 이 우화에 따르면 1968년을 거쳐서 시대는 ‘여유로운 사회’나 ‘톨레랑스의 사회’, ‘유연한 구조의 사회’ 등, 이른바 여가 사회, 개인주의 사회로 변모했다고 한다. 탈산업사회론으로 불리는, 이 우화의 이론으로부터 ‘포스트모던’ 철학은 큰 영향을 받았다. 그것이 이 철학의 아킬레스건이 되었다. 시민사회주의자도 마찬가지다. 이 우화를 믿고 대량생산, 대량소비의 산업사회로부터 중간계급의 사회로 시대가 이행했다고 주창하고, 프롤레타리아 계급은 소멸할 것이라고 예상했다.
통계를 보면 프롤레타리아트 숫자는 더욱 많다. 임금노동자의 대부분이 프롤레타리아화하고 있는 현상에서 보면, (직장의 기계화에 따른 결과, 자발성을 발휘할 기회도, 전문직으로서의 지식도 지금 빼앗기고 있다) 오히려 전체적인 숫자는 증가했다. 중간계급도 빈곤화되고 있다. 사전에 따르면 여가, 즉 ‘레저’란 질곡으로부터의 자유, ‘절대적인 자유’를 의미한다. 그러나 사전상의 의미에서 여가가 발달했는지 여부는 극히 의심스럽다. 개인의 자유로운 시간이 증가하기는커녕, 반대로 더욱 더 시간의 관리와 하이퍼 매스화가 진행되고 있기 때문이다. 여가는 자발적 예속의 새로운 형식을 낳았다. 문화산업과 프로그램 콘텐츠 산업이 여가의 상업화와 조직화를 추동한 결과, 일찍이 철학자 질 들뢰즈가 말했던 ‘통제사회’가 완성되었다. 통제사회가 확대됨에 따라 문화․서비스 자본주의가 급격히 성장하여 라이프스타일의 세부사항을 만들어내고, 일상생활을 눈앞의 이익을 추구하는 장으로 바꾸었다. ‘마케팅 지향’을 통한 인간의 평준화 역시 진행되었다. 경제적 가치라는 관점에서 개인의 삶의 시간을 계산가능한 것으로 만드는 ‘삶의 가치’는 이러한 움직임의 전형일 것이다. 이러한 움직임의 본질은 특이화와 개체화의 기회를 빼앗는 것이다.
들뢰즈가 혜안을 가지고 간파했듯이, ‘마케팅’이란 ‘사회의 통제를 위한 도구’[질 들뢰즈, ≪대담≫(Pourparlers), Editions de Minuit, Paris, 2003]이며, ‘탈산업’ 사회라고 칭하는 사회의 실태는 하이퍼산업사회이다.[≪상징직 빈곤에 관하여 1―하이퍼 산업시대≫(De la misère symbolique.1―L’époque hyperindustrielle), Galilée, Paris, 2004를 참조.] 개인주의가 우선시되었기보다는 오히려 개체는 무리를 이뤄 행동하고, 개체화의 기회는 완전히 소멸되고 있는 시대인 것이다.
철학자 질베르 시몽동이 개체화의 상실이라는 개념을 제창한 것은 기계의 지배 하에 있는 19세기의 노동자의 상황을 설명하기 위해서였다. 당시의 노동자는 우선 직능을, 그 다음으로 인격을 상실하고 프롤레타리아로 전락해갔다. 이제는 소비자의 행동이 욕망을 포맷하고 개선하여 평준화할 차례이다. 현대의 인간은 살아갈 힘, 다양한 삶을 살 가능성을 잃고 있다. 규격이라는 사고방식이 그 대신 나타났다. 하지만 규격이란 시인인 말라르메가 잡지 ≪최신유행≫에서 논했듯이, 유행에 대한 끝없는 눈짓에 다름 아니다. 현대의 규격은 마케팅 기술이 ‘합리적’으로 촉진하고 있다. 외식산업계를 좌지우지하는 ‘매뉴얼’과 아주 비슷하다. 계약의 파기나 소송을 살짝살짝 언급하면서 프랜차이즈 체인점 산하의 소매사업자들을 굴레에 묶어두는 성스러운 계율과 비슷한 것이다.
‘개체화의 상실’이 ‘삶의 상실’도 의미하고 있다는 것에는 심각한 위험이 들어 있다. 시의회 의원 8명이 희생되었던 낭테르 시의회 총격 사건의 범인인 리샤르 뒤른느는 “한번이라도 살아 있다는 실감을 맛보고 싶었다. 그래서 무엇인가 악한 행동을 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고 일기에 기록했다.[Le Monde, 10 avril 2002. 또한 「9․11에서 4․21에 걸친 사랑과 자기애, 우애≫(Aimer, s’aimer, nous aimer, du 11 septembre au 21 avril), Galilée, Paris, 2003를 참조.]
1930년, 정신분석의 창시자인 지그문트 프로이트는 다음과 같이 쓴다. 산업기술이 신에게 어울리는 속성을 인간에게 주었음에도 불구하고, “신과 닮기에 이르게 되면서 오늘날의 인간은 자신이 행복하다고 생각하지 않고 있다.”[지그문트 프로이트, ≪문명 속의 불만≫(Malaise dans la civilisation), PUF, Paris, 1992.] 이것이야말로 하이퍼 산업사회에 살고 있는 우리 인간의 모습이다. 현대 사회는 인간에게서 인격을 빼앗아 가축떼로 바꾸어 버렸다. 무엇이든 마음대로 되지 않은, 요컨대 미래가 없는 가축떼로 바꾸어 버린 것이다. 비인간적인 가축떼는 광기로 치닫는 경향이 있다. 1920년에 집필한 ≪집단심리학과 자아분석≫에서 프로이트는 집단 광기에 빠지는 군중심리에 대한 분석에 처음으로 임했다. ≪쾌락원칙을 넘어서≫에서 집단 광기의 배후에 잠복해 있는 죽음의 충동 문제를 채택하여 전체주의나 나치즘, 반유태주의가 유럽에서 발호된 1930년에 프로이트는 ≪문명 속의 불만≫을 저술하여 다시 한 번 같은 주제로 돌아갔다.
≪문명 속의 불만≫에서 프로이트는 사진, 레코드, 전화 기술에 관해 논하고 있지만 라디오에 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으며, 무솔리니나 스탈린에 이어 히틀러가 빈번히 사용한 영화에 대해서도 한 마디로 거론하지 않았다. “상업은 영화의 뒤를 쫓는다”[장-미셀 프로동(Jean-Michel Frodon), ≪국민적 기획―영화와 국민≫(La Projection nationale. Cinéma et nation), Odile Jacob, Paris, 1998.]고 미국 상원의원이 발언한 것이 1912년이니까 기묘하다고 하면 역시 기묘하다. 나치가 첫 텔레비전 공개방송을 단행한 것은 1935년 4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프로이트가 텔레비전의 발명을 예상하고 있다고 생각되지도 않는다. 프로이트와 똑같은 시기에 사상가인 발터 벤야민은 전체주의 권력이 어떻게 미디어를 장악하는가라는 문제를 ‘대중의 나르시시즘’이라는 관점에서 분석하려고 했다. 하지만 프로이트와 마찬가지로 벤야민도 여명기의 문화산업이 민주주의 국가를 포함하여 장래 모든 나라에서 ‘기능’에 관해서 어떤 신지평을 열게 될 것인지를 예측할 수 없었다.
이 점을 이론화한 것은 프로이트의 친조카인 에드워드 버네이즈였다. 리비도 경제와 숙부인 프로이트가 명명한 것을 잘 활용하면 무한한 가능성을 열 것이라고 버네이즈는 생각했던 것이다. 그것의 결실이 PR이라는 설득 기법이었다. 1930년 무렵, 버네이즈는 무의식 이론을 기초로 편집한 PR기법을 담배 회사인 필립 모리스사를 위해 현장에 적용했다. 확실히 이때는, 프로이트의 눈에는 문명에 대항한 죽음충동이 유럽에서 퍼지고 있는 것으로 비쳐지고 있던 시기에 해당한다. 무엇보다도 프로이트는 미국에 관해 일체 언급하고 있지 않다. 다음과 같은 아주 기묘한 한 구절을 제외하고는 말이다. “<대중의 심리적 빈곤>이라고도 불러야할 상태가 생겨날 위험이 임박했다. 이 위기가 가장 강하게 느껴지는 것은 지도자가 될 인재가 지도자이지 않고 사회의 관계가 오로지 구성원 상호간의 동일시에 의해 생겨날 때이다. 이러한 인재가 지도자라는 중요한 역할을 맡을 필요는 대중이 형성되는 곳에서야말로 특히 클 것이라고 한다.” 이어서 “현재 미국의 문화상태는, 또는 앞에서 말한 것처럼 일어날지도 모르는 문화의 해로움을 연구하기 위해서는 좋은 기회일 것이다. 그러나 나는 현대의 미국 문화를 비판하고 싶다는 유혹을 피하고 싶다고 생각한다. 나 자신도 미국적 방법을 취하려고 하다는 인상을 주고 싶지 않은 것이다.”[지그문트 프로이트, 앞의 책]

리비도적․정서적 빈곤
문화산업의 기능을 진정한 의미에서 분석의 대상으로 삼았던 것은 사상가인 테오도르 W. 아도르노와 막스 호르크하이머로, 이들은 칼 크라우스가 1910년부터 행했던 미디어 비판보다 깊이 파고 들어가 ‘미국식 방법’을 고발했다.
오늘날의 관점에서 보면, 여전히 미진한 부분이 있기는 하지만,[나는 ≪기술과 시간≫(La Technique et le Temps)의 3권인 ≪영화의 시간과 나쁜 존재의 문제≫(Le temps du cinéma et la question du mal-être), Galilée, 2001의 1장에서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의 분석이 어떤 점에서 불충분한가를 지적해 두었다. 칸트 사상의 도식론을 원용하면서 이들은 문화산업이 확실히 칸트주의의 비판을 필요로 하고 있다는 점을 간과했다.] 아도르노 등이 분명히 한 것은 문화산업이 산업전반과 독립된 개별적인 것이 아니라는 것, 또한 라이프스타일의 대중화를 통해서 소비행동을 일정하게 방향짓는 기능을 담당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경제활동은 소비자에게 불필요한 다수의 신상품을 만들어낸다. 원활한 유통은 당연히 어떻게 해서든 확보해야만 한다. 그리하여 과잉생산이나 경제공황의 만성적 위기가 문화산업에서도 생긴다. 시스템 자체를 근저에서부터 살펴보지 않는 한, 위기를 뛰어넘으려면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가 말한 야만 자체를 계속 성장하게 만드는 것 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다.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평화 부흥기에 생산과잉은 전체의 40%에 달한다는 예측을 받아들여 PR이론에 이어 ‘구매동기 조사법’이 과잉생산의 해소를 위해 확립되었다. 당시의 광고 대리점이던 한 회사는 1955년에 다음과 같이 보고했다. “수요와 욕망을 새롭게 만들어낸 동시에, 오래된 것, 구식으로 된 것에 대해 혐오감을 품게 하는 것”을 북미는 자랑해도 좋다고 말이다. 기호와 혐오는 뗄래야 뗄 수 없는 관계이다. 혐오감을 잘 키워낼 수 있으며 기호 그 자체도 저절로 바뀐다. 요점은 얼마나 “밑의 정서”에 호소력을 갖고 있는가이다. 특히 산업계에서 이 방법은 미국내 공장 제품에 대해 어떻게 하면 시민의 구매욕을 높일 수 있을 것인가라는 어려운 질문에 대한 능숙한 해결책이 되었다.[방스 파카르(Vance Packard), ≪비합법적인 설득≫(La Persuasion clandestine), Calmann-Lévy, Paris, 1958.]
프랑스에서도 19세기 이래 적지 않게 저항에 부딪치면서도, 산업 제품의 도입이 조직적으로 진행되어 라이프스타일이 격변했다. 에밀 드 지라드당의 광고회사, 루이 압바스에 의한 통신사의 설립은 그 전형적인 예이다. 하지만 시간 소비 제품이 처음으로 출현한 것은 문화산업(영화, 레코드), 특히 프로그램 콘텐츠 산업(라디오와 텔레비전)이 등장한 후이다. 라디오나 텔레비전 프로그램의 청취자 및 시청자들은 영화와 달리 스피커나 브라운관 앞에 혼자 있기 때문인지, 자기 하고 싶은 대로 스스로 즐기고 있다는 환상을 품고 있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시간 소비 제품을 통해서 개인의 행동은 대중의 행동으로 바뀌며 개인의 ‘내면’까지도 거뜬히 통제할 수 있게 되었다.
‘자유시간’에 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하이퍼 산업사회에서는 인간의 모든 활동영역이 소비자에게 특유한 충동적이고 모방적인 행동으로 가득 채워진다. 세지나 껌처럼 교육이나 문화, 건강도 소비의 대상이다. 중요한 것은 역시 개인 소비라는 환상이 욕구 불만이나 의혹, 파괴본능을 야기한다는 것이다. 텔레비전 앞에서 혼자 시간을 보내고 있으면 자신이 개인 행동을 취하고 있다고 무심코 생각하게 된다. 하지만 실제로는 그 순간에 수십만 명의 시청자가 같은 프로그램을 보고 있다.
산업활동이 지구 전역으로 확대되었다는 것을 받아들이면서 산업계는 규모의 경제의 대규모적인 실현을 목표로 하게 되었다. 소비 행동의 기술적 관리와 균질화는 더욱 중요하게 되었다. 그 역할을 담당한 것이 프로그램 콘텐츠 산업이다. 시간 소비 제품을 마구 사들이고 세상에 넓게 유포시키고 사람들의 시간을 사로잡는다. 포수로 간주된 시간에서 시청자가 생겨나고, 광고주에게 강매하는 상품도 생겨난다.
멜로디나 영화, 라디오, 방송 등 시간의 경과를 주축으로 하는 사물의 본질은 시간 속에 있다. 철학자 에드문트 후설이 ‘유출’이라고 부른 시간인 것이다. 시간은 바뀌고 지나간다. 우리의 의식은 시간적인 사물이 통합하고 있다. 하지만 의식과 마찬가지로, 시간적인 사물도 나타나자마자 금새 사라진다. 1920년의 시민 라디오의 탄생, 1947년의 텔레비전 프로그램의 방영 개시를 경계로, 프로그램 콘텐츠 산업이 우리의 의식의 시간에 딱 들어맞는 사물을 만들어내기 시작했다. 시간적인 사물은 의식의 시간과 겹쳐져 우리의 의식 속에도 집어넣어진다. 오늘날의 문화산업이 발송하는 것은 치약이나 소다, 구두나 자동차를 소비하는 시간을 대규모의 소비자의 의식 속에 집어넣는 것이다. 문화산업이 수익을 올리는 구조는 거의 100% 이런 상태이다.
의식이란 본질적으로 ‘자기’ 의식이며, 이 자기의식을 특이성이라고 한다. ‘나’라고 말로 할 수 있는 것은 자기 자신에게 나만의 고유한 시간이 주어져 있기 때문이다. 철학자 미셸 푸코는 만년에 자기의 테크놀로지에 대한 해명에 착수했다. 하지만 문화산업, 특히 텔레비전은 거대한 동기화(同期化) 장치가 되어서 자기를 손쉽게 쳐부숴버린다. 수만 명, 아니 수십만 명의 텔레비전 시청자가 어떤 실시간 중계 프로그램을 동시에 보고 있는 순간에, 세계 사람들의 의식 속에 같은 하나의 시간 소비 제품이 미끄러져 들어간다. 매일 규칙적으로 같은 시간에, 같은 AV 소비 행동을 반복하게 되면 사람들의 ‘의식’은 최종적으로는 동일한 ‘혼자’의 의식이된다. 결국 누구의 것도 아닌 의식으로 되는 것이다. 가축떼의 무의식은 심층의 욕망을 해방시킨다. 그것을 제지하여 욕망의 심층과 연결시키는 것이 욕망의 역할이다. 그러나 이것은 오늘날 불가능하다. 욕망이 생겨나려면 ‘특이성’이 우선 필요하기 떄문이다.
마케팅 기술은 1940년대에 미국의 산업계에서 실행 단계에 들어갔으며 이후 더욱 더 고도화되었다. 그 과정에서 생겨난 것은 상징적 빈곤과 리비도적․정동적 빈곤이다. 리비도적․정동적 빈곤은 일찍이 내가 본원적 나르시시즘이라고 명명한 것의 상실을 초래한다.
생산과 소비를 ‘동시에’ 장악하여 대중의 행동을 강하게 규정하고 있다는 점에 오늘날의 자본주의가 지닌 장점이 있다. 탈산업사회론의 우화에는 그런 관점이 완전히 누락되어 있다. 개인을 집단과 대립시켜 파악하는 그릇된 의견으로부터 벗어나려고 하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시몽동이 완벽하게 분명히 했던 것은 개인이란 진행되고 있는 하나의 과정이며 존재를 향한 ‘생성’ 과정에 있다고 하는 것과는 정반대의 사태인 것이다. 개인이 마음의 수준에서 개인으로서 성립하려면 집단 속에서 개체를 형성할 필요가 있다. 집단은 개체화 과정에서 빠뜨릴 수 없는 역할을 담당한다. 왜냐하면 어떤 특이성이든 ‘전-개체적 저류’라고 시몽동이 부른 공통의 층으로부터 각각이 각자에게 필요한 것을 길러내기 때문이다.
‘전-개체적 저류’는 몇 세대에 걸쳐 경험이 축적된 것으로부터 생겨난 과거의 유산이다. 특이성은 이로부터 각자에게 필요한 것을 길러내지 않는 한, 그리고 심적인 개체가 그 저류를 서로 공유하여 자기에게 덧붙이면서 바뀌어가지 않는 한, 다음 세대에 그 유산을 물려줄 수 없다. 하지만 각각의 개체가 그 저류에 개별적으로 관련되지 않는다면, 서로 공유한다고 말할 수 없다. 또 개별적으로 관련된다고 말할 수 있는 한에서는, 그렇게 관련된 방식은 타인과는 다른 특이한 것이어야만 한다. 사회 집단은 공통의 저류 속에서 자기를 재인식한다는 의미에서 독자적으로 길러낸다는 의미에서 통시적인 결합체이다.
하지만 프로그램 콘텐츠 산업은 공시성과 통시성의 공존을 모순으로 간주하는 경향이 있다. 하이퍼 싱크로나이제이션, 즉 초동기화를 최우선으로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설령 매스미디어 프로그램이 전-개체적 저류를 만들어냈다고 하더라도, 각각의 개체가 특이하게 그 내용을 우리의 것으로 할 수는 없다. 인류학자인 앙드레 르루와-구랑(Andre Leroi-Gourhan)이 사회․민족적 프로그램이라고 명명한 것은 오늘날 프로그램 표로 대체되었다. 나는 이웃들과 쏙 빼닮은 체험을 하며, 우리는 무리를 이루어 살고 있다.

나르시시즘의 붕괴
후설은 ‘나’를 ‘일차적 파악(rétentions primaires)’이라고 불렀지만, 시간적인 ‘유출’이 만들어내는 의식이다. ‘일차적 파악’이란 의식의 ‘지금’으로부터 의식이 파악하는 것을 가리킨다. 하나의 선율 속에서 어떤 음에 잔향되어 있는 바로 직전의 소리는 나의 의식에 경과음으로서 나타난다. 먼저 울린 소리는 선율 속에 영향을 주며, 지금은 지금 속에서, 선율 속에서 유지된다. 바로 앞의 소리가 이어진 소리와 어떤 관계를 만들며, 음정을 만들어 내고, 이어진 음을 ‘구성’한다. 내가 ‘수용하고’, ‘만들어내는’ 다양한 현상과 마찬가지로 (내가 ‘연주’를 하기도 하고 ‘청취하는’ 선율이나 ‘소리를 내기도’ 하고 ‘귀로 듣는’ 문장, 또는 ‘행하기도’ 하며 사람에게서 ‘받아들이는’ 행위 등), 나의 의식은 본질적으로 일차적 파악으로부터 성립된다.
의식에서의 파악은 ‘선택’을 한다. 나는 파악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파악하는 것이 아니다.[일차 파악은 관계를 형성한다. 예를 들어 선율(멜로디)에서 아르페지오로 연주한 소리의 연속에서 화성이나 음계가 생겨난다. 글 속의 의미론적(sémantiques)․통사론적(syntaxiques) 관계도 마찬가지이다.] 알기 쉽게 반복되는 것이 나타나는 흐름 속에서 의식은 각각의 파악에 고유한 방식으로 선택한다. 똑같은 선율을 두세 번 계속 들으면 어떻게 될까? 내 의식은 바로 그 선율에 대한 것으로 바뀌어 버린다. 일종의 ‘여과’를 통해 선택하는 것이다. 이 여과 행위가 ‘이차 파악’이다. 이차 파악은 기억이 보존하는 일차 파악의 상기이며, 일차파악은 상기를 위한 경험의 토대를 만들어낸다.
의식은 일차 파악과 이차 파악에 의한 여과로 이루어져있다. 하지만 일차 파악과 이차 파악의 관계는 중층적으로 결정된다. 결정에 관련된 것이 삼차 파악이다. 삼차 파악이란 기억의 버팀목인 사물이나 기억 기술과 같은, 흔적을 기록할 수 있는 것이다. 특히 사진이나 녹음, 영화나 비디오, 또 하이퍼 산업 시대의 통제사회의 통제적인 인프라가 되는 디지털 기술이다.
삼차 파악은 예를 들어 알파벳 표기처럼 개인이 마음 내부와 집단 내부의 양쪽에서 개체화하는 과정에서 전-개체적인 저류에 도달하기 위한 버팀목이다. 인간 사회에는 예외없이 이러한 삼차 파악이 발견된다. 개체화를 방향짓는 것이 삼차 파악이다. 개체화란 상징적인 공유이며, 개인의 경험이 흔적에 외재하여, 처음으로 가능하게 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산업화된 경우, 삼차 파악은 통제를 위한 기술로 되며, 상징교환은 심대하게 변질되어 버린다. 생산하는 측과 소비하는 측에 어디까지든 하나의 선분이 그어지며, 다양한 의식 시간이 남김없이 초동기화(超同期化)되어 버리기 때문이다.
사람들의 의식 시간은 엇비슷한 이차 파악이 차지하고 있으며, 마침내 동일한 일차 파악을 선택하게 된다. 모든 것이 더 이상 크게 바뀌지 않게 된다. 사람들은 일부러 자기에 대해 말해야 할 필요도 없으며, 다른 사람과의 만남도 드물게 되어 버렸다는 것을 차차 알게 된다. 집에 틀어 박혀 TV 화면 앞에 앉아 고독으로 내몰리는 것이다. 여가라는 ‘모든 제약으로부터 자유로운’ 시간은 화면을 통해 입수하게 되기에 오히려 더 어려워진다.
위의 상징적 빈곤이 진행된 결과, 나르시시즘이 붕괴하여 정치․경제적인 면에서는 무질서가 격증한다. 나르시시즘은 병리적 상태에 이르는 경우도 있으나 우선 일차적으로는 마음, 욕망, 특이성의 기능을 조건짓는 메커니즘이다.[Ce terme s’applique « à la découverte du fait que le Moi lui aussi est investi de libido, en serait même le lieu d’origine et dans une certaine mesure en demeurerait le quartier général », Malaise dans la civilisation, op. cit.] 마케팅은 생산자 측이 제품을 계속 만들어내는 것을 질리지 않고 조장하며, 소비자 측의 욕구도 처음부터 생겨나 욕구의 재생산, 다양화, 계층화의 과정에 끊임없이 조정역할로서 관여한다. 이때 시스템의 기능의 윤활유가 되는 것은 생산자와 소비자 각각이 품고 있는 욕망의 발현인 ‘실존적 에너지’에 다름 아니다. 노동이나 소비의 리비도는 제3자가 지배하고 이끈다. 본래 노동이란 승화이며 현실 원리였다. 하지만 산업사회에서 분업화된 노동에서는 승화의 쾌락이나 나르시시즘의 쾌락을 맛볼 기회는 감소하며, 타인에게 리비도를 빼앗긴 소비자가 소비에서 쾌락을 느낄 기회도 더군다나 줄어든다. 소비자는 반복강박으로 마비되며 욕망은 어찌할 수 없이 ‘쇠약’해진다.
통제사회는 규제사회이며[Pourparlers, op. cit. 참조.], AV기술이나 디지털 기술 등, 미적인 감성(aisthesis, 그리스어로 경험을 구성하는 감성을 뜻한다.)에 호소하는 기술을 구사하여 의식 시간이나 심신의 무의식을 제어한다. 하이퍼 산업사회에서는 미적 감성을 자극하는 것만이 전면에 나서게 되며, 하이퍼 대중을 조작하여 개인이 마음 속이나 사회에서 맛보는 감각의 경험을 대체해 버린다. 오늘날 경제 전쟁의 무기에서도 무대가 된 것은 상징적 차원이다. 초동기화 탓에 본원적 나르시시즘이나, 개인이 마음과 사회의 양방향에서 개체화해 가는 과정이 완전히 뿌리 뽑혀지며, 사람들의 과거는 균질화되고 그리하여 개체화의 기회는 사라져 버린다. 일인칭 단수형의 ‘나’와 복수형인 ‘우리’의 구별은 상징적으로 취약한 무정형의 비인칭 ‘사람’ 속에서 애매하게 된다. 누구나 똑같은 통제의 대상이 되는 것은 아니다. 그런 의미에서는 마치 ‘우리’가 두 가지 층으로 나뉘어져 있듯이, 감성의 단층을 우리는 살아 있게 한다. 하지만 상황을 뛰어넘는 행동을 하지 않으면, 머지않아 ‘우리의 모든 것’이 음울한 운명을 어찌할 수 없이 겪게 될 것이다. 우리의 아이들은 더욱 더 그러할 것이다.
20세기는 생산과 소비를 둘러싼 환경과 시스템을 최적화한 시대였다. 생산 관리와 투자 관리에서는 정보 컴퓨터 기술이, 소비 관리 및 정치면도 포함한 사회행동 관리에서는 커뮤니케이션 기술이 각각 개발되었다. 오늘날 두 개의 영역은 서로 융합하고 있다. 소리 높여 주창되고 있는 것은 이미 ‘여가 사회’가 아니다. 개개의 인간의 욕구를 ‘개인화’하는 것이다. 일찍이 정신분석학자 펠리스 가타리는 개인이 더 한층 하위로 분할되어 가는 현상이 확대되고 있다고 지적했다. 특이성은 인지과학이나 계측공학을 응용한 기술의 지배 하에서 특수성으로 바뀌어 간다.
이러한 기술은 ‘사용 내용 검색’(user profiling) 등 새로운 수법을 통해서, 프로이트뿐만 아니라 파블로프의 방법론도 원용하여 교묘한 조건부여의 수법을 짜고 있다. 어떤 책의 독자에게, 같은 책을 읽은 독자들은 어떤 책을 읽고 있는가를 알려 주면서 그 사람도 읽고 싶다고 생각하게 만드는 방식이 그 전형적인 예이다. 검색 엔진이 검색 결과 화면의 맨 위에서부터 순서대로 조회 빈도가 많은 사이트를 내거는 것도 사이트 조회수를 더 늘리려는, 사이트 조회율을 고도로 높이는 것을 촉진하는 기술이 되었다.

특이성의 문제
산업 자동화가 생산 공정의 기억 기술의 중추를 차지하게 된 오늘날, 동종의 디지털 기기가 동일한 규격으로 생산라인의 모든 장면을 관리하게 되었다. 마이크로컴퓨터 방식의 제품도, 통신판매로 고객과 공장을 직접 연결하여 다양한 수요에 유연하게 대처하는 방법도, 원격 조작에 의한 공장 생산 관리도, 언제 어디서든 같은 기기, 같은 규격이다. 디지털 기기는 마케팅에도 많은 도움이 되어 소비의 조직화를 추진하고 있다. 벤야민이 상상한 것과는 반대로 하이퍼 대중의 출현과 함께 일어난 것은 대중의 나르시시즘의 광범위한 전개가 아니라 오히려 개인과 집단의 나르시시즘의 대규모 붕괴이다. 이러한 사태가 의미하는 것은 단적으로 “예외자의 파괴”이다. 본원적 나르시시즘을 일소한 결과 도처에서 무리(떼)의 생활방식이 횡행하고 있다.
개인이 마음의 수준과 집단 내의 쌍방향에서 개체화하는 과정에서는 집단의 상상력이나 개체의 다양한 역사가 서로 묶이게 된다. 시간 소비 제품은 대중 규격을 대리품으로서 강요하며, 한 사람 한 사람의 개체의 실천의 특이성이나 개체의 실천에 머무는 예외적인 성격이 조금씩 축소되어 간다. 또한 예외도 하나의 규칙이다. 다만 입으로는 아무 것도 언표하지 않는 규칙인 것이다. 예외는 변칙적인 장면과 조우할 때 처음으로 예외라는 것을 실감할 수 있다. 즉 매뉴얼로 만들 수도, 예측도 할 수 없다. 세부적 차이에는 눈을 감고 무엇에든 대응할 수 있는 규칙을 행하는 것으로는 아무래도 잘 되지 않는다. 오랫동안 예외자를 신으로 귀속시켰던 것도 그 때문이다. 신이야말로 특이한 것은 서로 비교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말하는 규칙 그 자체이며, 규칙을 절대적으로 초월한 존재였다. 그런데 마케팅 덕분에 특이성은 핵심이 빠져 버려, 바라는 대로 비교나 분류할 수 있는, 내용물이 텅 비어 있는 특수성으로 바뀌어 버렸다. 소비의 하이퍼 대중화와 소비 기호의 분화를 통해 리비도 에너지를 농락했던 지금에서는 이제 완전히 다루기 쉬운 존재가 되어 버렷다.
여기에서 문제로 삼고 있는 것은 리비도 경제와는 완전히 반대의 사태이다. 원래 특이성, 예외자만이 욕망의 대상이 될 수 있다. 내게 예외라고 비치는 것만이 나의 욕망의 대상이 된다. 범용성은 욕망하지 않는다. 그저 반복강박만이 범용성을 지향한다. 마음은 에로스와 죽음 충동이라는 서로 끊임없이 뒤섞이는 두 가지 경향으로 이루어져 있다. 문화산업과 마케팅은 소비 욕망의 발달을 높이는 것을 목표로 내걸었다. 하지만 실제로는 죽음 충동을 강하게 하고, 반복강박적인 상황을 만들어내자 제멋대로 하기 시작했다. 문화산업과 마케팅은 삶의 욕망에 있어서 큰 장벽이 된다. 무엇인가를 욕망하는 것이 본래의 의미에서의 소비 행동의 기본이라는 점에서 보더라도 위에서 언급한 과정은 자멸적이다. 철학자 자크 데리다의 표현을 따르자면 자기 면역 이상이라고 말해도 좋을 것이다.
어떤 사물의 특이성을 내가 욕망하는 것은 그 물건이 나라는 특이성을 거울처럼 비추기 때문이다. 나 자신도 아직 알지 못하는, 나의 특이성이 무엇인지를 사물이 명확하게 해 주는 것이다. 자본이 우리들의 행동을 하이퍼 매스화한다면, 자본은 당연히 욕망의 하이퍼 매스화를 목표로 할 것이다. 개인도 어쩔 수 없이 무리가 되어서 살아갈 수밖에 없다. 그런 논리에서 보면, 예외자는 전적으로 타도해야 할 적이 될 것이다. 이 점은 산업 민주주의 덕분에 가축 사회가 출현할 것이라고 갈파한 니체가 이미 예측하고 있던 것이다. 산업 사회의 정치구조가 품은 진정한 곤란인 것이다. 예외자에 대한 욕망을 투영하는 스크린을 엄중한 관리 하에 두었을 때 타나토스[죽음]의 논리, 즉 엔트로피의 그림자가 세계를 넓게 에워싸기 시작한다. 타나토스란 질서가 무질서에 종속되는 것을 의미한다. 타나토스는 열반의 상태이며, 모든 것이 평준화로 향한다. 예외자가 ‘욕망의 욕망하는’ 대상인 한, 타나토스는 모든 예외자를 모조리 부정하는 것과 동의어이다.
이상에서 지적한 문제의 근본부분이 프랑스가 주창하는 ‘문화적 예외’[WTO 창설에 도달한 우루과이 라운드 이래, 문화산업을 무역 자유화의 예외로 할 것을 주창해 온 프랑스 정부의 입장을 가리킨다.] 논의에서는 유감스럽게도 전혀 보이지 않는다. 어떤 조치를 서둘러 강구해야만 한다고 하지만, 천박한 정치구호 때문에 초점을 희미해질 뿐이다. 이 논의의 주창자들은 예외라는 문제를 좁은 시야에서만 고찰할 뿐, 하이퍼 산업사회의 진전이나 그 귀결인 상징적 빈곤으로 인해 생기는 수많은 과제에 제대로 임하려는 자세도 보이지 않는다. 예외를 둘러싼 문제는 내일의 지구화 사회에서 가장 중요한 과제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화적 예외’라는 논의는 예외 조치를 국제통상 협정의 틀에서 폐기할 것을 요구하는 이러저러한 논의와 마찬가지로, 지역이나 산업 부문, ‘이익 단체’의 문제만을 채택할 뿐, 본질적인 문제에는 입을 굳게 다물어 버린다.
이것은 문화부가 관할하는 이른바 ‘문화’의 미래에만 한정되는 것이 아니다. 하이퍼 산업사회는 일상생활의 존재방식에 아주 상세하게 지시를 내리며, 일상생활을 모든 측면에서 압도하고 있다. 여기에서 산업사회의 생태계가 품은 최대의 불안 요인이 있다[또한 ≪우연의 철학. 엘리 뒤렝과의 대화≫(Philosopher par accident. Entretiens avec Elie During), Galilée, Paris, 2004을 참조]. 인간 집단이 전에 없었던 규모의 대량 파괴를 초래하는 방법을 손에 넣었기 때문에, 인류의 정신이나 지성, 정동이나 감성은 전면적인 위기에 직면하고 있다.
리비도 붕괴의 원인인 혼란은 정치의 영역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 정치가들은 자신들을 상품으로 판매하기 위해서 정치에 마케팅 기술을 도입했다. 그 점에서 투표자들은 다른 상품에 싫증을 내듯이 깊은 혐오감을 느끼고 있다.
시민과 시민 대표자들은 지금이야말로 눈을 떠야 한다. 특이성의 정치가 지닌 문제의 비중은 지금 결정적인 것으로 되었다. 특이성의 정치가 없으면 정치에 미래는 있을 수 없다. 특이성의 정치만이 극우 내셔널리즘이나 모든 원리주의의 발호를 막을 수 있다. 장래의 하이퍼 산업사회에 욕망을 복권시키는 것. 혼란의 확대를 미리 저지하는 것. 이것을 위해서는 정치 스스로가 욕망을 솔선하여 만들어 내지 않으면 안 된다. 3월 28일의 통일지방선거에서 현정권에 반대표를 던지고, 어떤 구체적인 정책 목표를 갖고 있지 않은 정당에게 비판의 소리를 들려주었던 것은 리비도 경제의 전면적인 파괴를 우려하여 전혀 충족될 수 없는 정치적 욕망을 갈망했던 사람들이다. 말할 것도 없이 아리스토텔레스가 시민 사이의 관계를 규정하면서 말했던 ‘우애’는 리비도 경제라는 나무에서 향긋하고 잘 익은 과실로 결실을 맺은 것이다.
2002년 4월 21일의 대통령 선거부터 2004년 3월 28일의 통일지방선거에 이르기까지 넓게 퍼진 운동에서는 정치계급 전체가 상징적․심리적 빈곤, 그리고 불가피하게 정치적 빈곤을 상대로 하여 단호하게 싸우는 것을 목표로 내걸었다. 특히 문화와 연구에 관한 문제에서, 정부가 괴멸에 가까운 패배를 당한 것은 우연이 아니다. 문화는 부차적인 정치적 문제 등이 결코 아니며, 바야흐로 정치의 진수이다. 리비도와 마찬가지로 문화야말로 산업이 궁극적으로 빼앗으려고 하는 요새이다. 때문에 정치는 무엇보다도 우선 문화의 정치가 아니면 안 된다. 이것은 문화부가 문화로 생계를 영위하는 다양한 사람들의 기대에 제대로 부응할 수 있는가 아닌가라는 의미에서가 아니다. 하이퍼 산업자본주의는 사회조직이라는 개체가 마음과 집단의 양 측면에서 개체화하기 위한 기반을 산산조각으로 파괴해 버린다. 문화의 정치는 그 파괴에 대해서 근본적인 비판을 들이댄다.

Posted by 상겔스 상겔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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