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래할 생명권력론을 위해


사상, 2013년 2

2부 2장. 

인간과 동물의 문턱

조르조 아감벤에게서의 생명 개념 

히가키 타츠(槍垣立哉)

들어가며

생명정치의 장래를 향해 무엇을 써야 할까? 후기 푸코로 거슬러 올라가는 관리[통제]사회의 문제들, 즉 개인의 자유의지가 이미 문제거리조차도 안 되는 비참한 삶을 톺아내고, 거기서 희미하게 뭔가의 전망을 찾아내야 할까? 들뢰즈=가타리가 물론 어둠을 간직하면서도 보다 분명하게 미래의 생명을 그려냈듯이, 현재의 인간이나 그 사회의 해체를 함의하기도 하는 생명의 밝음을 부각시켜야 할까? 생명정치학의 개념이, 항상 이런 양면을 갖추고 있는 것은 사실일 것이다. 원래 미래가 어두운 것인가, 밝은 것인가라는 물음 자체가 무의미하기도 하다. 미래를 살아가는 것은 나도 아니고 우리도 아니다. 미래에서 그 가치를 판단하는 것은 지금 여기를 살아가고 있는 이 삶이 아니다. 미래라고 하면서 뭔가가 말해질 때, 나나 우리는 그것을 가치 판단할 능력을 전혀 가질 수 없다.

그런 물음에서 시작하지 않아도 좋을지도 모른다. 혹은 그런 몽상 같은 철학자의 말은 생명정치학이 현실적인 정치의 물음과 연관되는 한, 아무 쓸모도 없다고 생각될지도 모른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 인간의 신체와 생명을, 그 자연사적 깊이를 지닌 시계(視界)에서 재파악하는 것, 말하자면 법, 제도, 윤리, 말 등을 고작 2000년부터 3000년 정도로만 거슬러 올라갈 수 있을 뿐인 근원을 훨씬 뛰어넘어, 더욱 멀리 생명 자체에 뿌리를 내려 파악하려고 시도하는 것, 이것이 바로 생명정치학의 독자성 그 자체를 이루는 것이 아닐까?

이런 방향성에서 생명정치학의 광대함을 확실하게 파악하고 있는 사상가가 이탈리아의 조르조 아감벤이다. 아감벤이 세계적 사상의 무대에 등장한 것은 20세기도 끝나갈 무렵이다. 아우슈비츠의 남은 것(1998)호모 사케르 : 주권권력과 벌거벗은 생명(1995)이라는, 푸코의 생명정치학을 이어받아 쓴 작품군과, 거기서 제시된 벌거벗은 생명(la nuda vita)’이라는 개념은, 세간의 큰 주목을 받았다. 하지만 아감벤의 저작의 전모가 알려짐에 따라, 그와 생명정치학 자체의 관련이 결코 단순한 것은 아니라는 것이 여러 가지 논점에서 분명해졌다(일본에서는 우에무라 타다오(上村忠男), 오카다 아츠시(岡田温司), 다카쿠와 가즈미(高桑和巳) 등에 의한 이탈리아어로부터의 빼어난 번역과 해설이 극히 중요한 역할을 맡았다. 이탈리아라는, 철학지리학에서는 변방적인 사상가의 논의가, 프랑스 및 미국과 거의 동시에 일본에 영향을 주었던 속도성에서도, 위의 번역자들의 작업은 돋보이는 것이라 할 수 있다). 특히 거기서 감안되어야 할 것은 아우슈비츠의 남은 것호모 사케르만으로는 헤아릴 수 없는, 그의 고전적 소양의 광대함과, 종교나 법에 관련된 지식의 풍성함이다. , 하이데거의 세미나에 참석하면서도 벤야민을 애호하고(시대를 공유하는 이 두 사람의 사유는, 상식적으로는 거의 양립할 수 없을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도 기독교 역사도 곱씹으면서, 현재적인 정치의 논의에도 깊이 헤집고 들어가는, 그 독특한 사유법 자체이다(벤야민이 말하는 이질적인 것과의 접합이야말로 그의 모토인 듯하다).

확실히 오카다 아츠시가 아감벤의 종교신학을 강조하듯이,[각주:1] 특히 금세기에 양산된 작품군(세속화 예찬(2005), 왕국과 영광(2007), 벌거벗음(2010))은 생명정치라기보다는 종교성과의 연관이 매우 깊다. 그 때문에 아감벤을 생명정치학의 개념만으로 파악하는 것은 부당하다고 생각될지도 모른다. 철학의 영역에 한정해도, 푸코나 들뢰즈를 언급하는 논의는 어느 일정한 시기에 이뤄진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래도 굳이 아감벤의 논의를 생명정치학의 관점에서 독해하는 것은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우선 그가 주장하는 벌거벗은 생명이나 잠재력(potenza)’이라는 개념이 설령 우연의 결과일지라도 푸코나 들뢰즈가 논하는 유사 개념에 매우 접근하기 때문이다. 전자는 벤야민의 폭력비판론에서 (그것도 벤야민의 텍스트를 읽는 한 상당히 미묘한 논맥에서) 끌어낸 용어이다. 그래도 아감벤의 독창성은 벌거벗은이라는 개념을, 생물적 신체가 정치적 과제이게 되는 푸코의 논의와 관련시키고 벤야민적 논맥으로부터는 벗어난 의미를 끄집어냈던 것에 있다. ‘잠재력에 관해 말하면, 아감벤의 고찰의 원천은, 일관되게 아리스토텔레스적인 뒤나미스 분석에 있다. 그러나 이것도 잠재성(virtualité)을 논하는 들뢰즈와, 스피노자를 매개로 맺어지고 생명을 그러내는 주요한 위상에 놓인다. 양자 모두와 더불어, ‘생명신체를 사고하는 키워드 자체로서, 아감벤에 의해 강하게 부각되는 것이다.

 

하지만 동시에 아감벤은 푸코와도 들뢰즈와도 다른 생명정치학을 전개하고 있기도 하다. 그것은 법이나 말에 강하게 천착하는 데에서도 간파할 수 있다.

말할 것도 없지만, 아감벤은 생명정치학을 탐구하는 데 있어서 법과 언어를 중시한 논의를 펼친다. 그것은 푸코가 기본적으로 정신분석 비판을 염두에 두면서, 혹은 들뢰즈(들뢰즈=가타리)가 시니피앙 중심주의적 언어론에 대한 반발로부터 생명 개념과 그 질료성에 시선을 돌렸던 것과는 명확하게 대조적인 자세라고도 할 수 있다. 그러나 거기서 아감벤은 푸코 등이 비판했던 정신분석이나 법이라는 초월성을 회복시키는 것이 결코 아니다. 그는 생명에 파묻혀 있는 법이나 언어, 달리 말하면 생명을 반사하고 생명으로부터 반사되는 법이나 언어의 위상을 솜씨 좋게 세세하게 집어냄으로써, 생명정치학의 개념을 더욱 전개시키는 것이다. 이런 시도는 아렌트와 푸코 쌍방의 부족분을 연결시키는 호모 사케르의 서두 부분 등에서[각주:2] 두드러진 성과를 보이고 있다. 아감벤은 법과 언어의 경시 때문에 푸코도 (나아가 들뢰즈도) 비판하지만, 그러나 그들이 비판했던 대상의 의표를 찌르는 방식으로 논의를 전개하는 것이다.

여기서 생각해야 할 것은 생명정치학 속에서 꺼내진 언어와 법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생명과 어떻게 결부되어 있는가이다.

아감벤은 매우 견실한 지식으로 뒷받침된 역사학자로서 행동하면서도, 거기서의 종교의 파악 방식은, 앞서 말했듯이 시공을 종횡무진 횡단하고, 현대의 첨단적인 장면과 고대세계를 결부시킨다. 그의 자세는 역사를 논하면서도 역사 자체를 원리로 삼지 않는, 말하자면 근원을 논하면서도 근원자체를 허공에 매다는[중지시키는] 감각으로 넘쳐난다. 이는 오히려 푸코가 고대를 다룬[문제 삼은] 그 방식에, 혹은 레비스트로스가 신화를 분석하는 그 방법에, 나아가 들뢰즈(와 가타리)가 생태계적인 자연사를 그려내는 그 시각에 매우 가까운 것이 아닐까? ‘중지하다[허공에 매달다]라는 말이 아감벤의 핵심어의 하나이듯이, 거기에는 근원을 탐구하면서 근원을 탈근거화하는 지식의 방식이 모색되고 있는 것 같다. 그리고 그 행동 방식 자체가 생명정치학의 시도와 강하게 겹쳐진다.[각주:3]

이렇게 제시되는 아감벤의 독자적인 영역이란 바로 애매함이며 회색지대라고 할 수 있다. 거기서 아감벤은 생명에 독자적인 존재를 인정하는 동시에, 그 방식을 항상 언어와 연관시키고, 벌거벗은 질료성이 법이나 제도의 막간[틈새]으로서 기능한다는 것을 밝힌다. 이와 같은 이중의 방법에 의한 중간성이나 문턱의 존재가, 앞의 중지라는 방법론과 포개져 있다.

그러면 여기서 아감벤에게 생명 그 자체란 어떤 개념이었을까? 이 물음에 대답하기 위해 다루고자 하는 테마가 바로 인간과 동물의 관계이다.

아감벤에게서의 이 주제에 관해서는 열림(2002)이라는 저작, 특히 거기서 다뤄지는 하이데거의 동물론이 중요하다. 하지만 동물과 인간이라는 주제가 겨냥하는 것은 그것만이 아니다. 동물론은 절대적 내재성(사유의 역량, 2005년 수록)이라는 들뢰즈와 푸코의 관계를 논한 텍스트의 귀결이, 하이데거와도 맞물린 이 주제에 의해 도출됐다는 것과도 관련된 것이다.

여기서 아감벤은 들뢰즈의 생명 개념과 푸코의 생명 개념을 대립시키면서 생명론이 향하는 곳을 탐색한다. 그런데 약간 희화화되어 그려진 최후의 생명론의 계보도에서, 푸코와 들뢰즈는 대립되기는커녕 내재성의 라인에 똑같이 배분되고, 다른 쪽의 초월의 라인에 데리다나 레비나스 등을 적은 뒤, 굳이 하이데거를 그 중간 영역에 배치하고 있다. 이는 매우 기묘한 것이기도 하다. 생명을 논할 때, 그 중간적인 위상에 있어서도, 하이데거를 내재의 방향에 위치시키는 것은 꽤 모험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그는 해석학적 존재론과 존재의 언어를 논하는 자로서, 흔히 어디까지나 초월의 라인에 위치시켜야 할 사상가로 간주될 것이다. 아감벤은 하이데거의 어디에서 내재적 생명론에 대한 공헌을 보는 것일까?

더 나아가 이런 도식을 그려내는 아감벤은 자신의 시도를 어디에 위치시키는 것일까? 이것들을 생각할 때 문제가 되는 것이 푸코와도 들뢰즈와도 관련된 동물이라는 주제가 아닐까? 그것이 생명정치학의 사고에 있어서 새로운 문턱으로서 두드러지는 것이 아닐까?


아감벤에게서의 생명

논고 절대적 내재성은 푸코와 들뢰즈 둘 다의 생전의 마지막 텍스트가 각각 생명을 둘러싼 것이었음을 속시원하게 지적하는 것에서부터 시작된다. 양자에게 생명을 논하는 것은 유언의 차원에 속하는 것이었다고 한다.

그 텍스트란. 푸코의 경우 생명 : 경험과 과학[각주:4]이라는 캉길렘을 다룬 비교적 긴 논고이며, 들뢰즈의 경우 내재성 : 하나의 삶 …」(1995)[각주:5]이라는 아주 짧은 문서이다. 아감벤의 논의는 들뢰즈의 글 제목과 스타일 등에 대한 주석으로 시작되지만, 기본적으로는 솔직히, 푸코와 들뢰즈에 대한 아감벤의 사유의 위상이 제시된다. 아감벤의 벌거벗은 생명이 무엇인지를 두 사람과의 대비에서 서술하는 것이다.

이 텍스트를 검토하기 전에, 아감벤에게 벌거벗은 생명이 무엇이었는지를 잠시 다시 살펴보자.

호모 사케르의 서두에서 아감벤은 비오스조에라는, 이제는 주지의 바가 된 말을 사용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조에는 살아 있는 모든 존재(동물이든 인간이든 신이든)에 공통된, 살아 있다는 단순한 사실을 표현했다. 그에 반해 비오스는 각각의 개체나 집단에 특유한 살아가는 형식, 삶의 방식을 가리켰다.”[각주:6]

여기서 조에로서 말해지고 있는 것은 아리스토텔레스가 논한, 살아 있다는 사실과 관련된 잠재적인 힘이다. 그리고 후자인 비오스란 이른바 정치적인 삶,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는) 폴리스적인 삶을 모델로 한 것이다.

조에비오스라는 생명에 관련된 말하기 방식을, 현대정치와 관련시켜 얘기하는 아감벤의 주장은 그리 어려운 것이 아니다. ‘벌거벗은 생명과도 강하게 관련되는 조에가 그대로 정치의 주제로 간주되는 것, 혹은 말을 사용하여 행하는 폴리스적 사태에, 다만 살아 있을 뿐인 생명성인 조에가 침입해 오는 것, 이것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이런 사정이 18세기 이후의 근대사회의 성립에 있어서, 푸코가 생명정치학으로 논했던 것과 겹쳐진다.


폴리스의 영역에 조에가 진입한 것, 즉 벌거벗은 생명 자체가 정치화됐다는 것은 근대의 결정적 사건을 이루며, 고전적 사유의 정치적-철학적 범주가 근원적으로 변용했음을 부각시키고 있다.[각주:7]


이것에 덧붙여 중요한 것은, 이런 범주의 변용은 모종의 회색지대를 산출한다는 것이다. 거기서는 삶과 죽음, 공과 사, 우파와 좌파, 절대주의와 민주주의라는 대립 도식으로 말하는 것이 불가능한 정치적 장면이 형성된다.[각주:8]

, 생명정치학과 벌거벗은 생명의 정치화는 겹쳐 있지만, 근대에 특징적으로 현현한 독자적인 방식에 있어서, 근대를 지배했던 기존의 정치적 범주가, 모두 회색지대로 내몰리게 된다는 것이 아감벤의 주장이다.

아감벤이 아우슈비츠의 남은 것에서 살아 있으나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비참한 신체, 혹은 생물학적 인체 실험을 겪은 생체를 예로 든다는 것, 더 나아가 호모 사케르에서도 국가라는 법의 규제로부터 벗어난 난민, 삶과 죽음 자체를 규정할 수 없는 뇌사자를 대표적인 예로 들고 있다는 것으로부터, 이런 논의들이 근대 후기라는 시대성과 강하게 관련된 것으로 읽히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아감벤이 푸코와 의견을 달리하는 것은, 이런 회색지대가 현재화하는 것이 근대 후기였다고 해도, ‘조에비오스와 얽혀 있는 착종된 사정 자체는 정치적인 것이 출현하는 원리로서 당초부터 숨어 있었다고 하는 점에 있다.

그것은 호모 사케르의 모델 자체가 공동체로부터 배제된 방식으로 그것에 포함되는 신체를 다루는 로마 시대의 처벌에 있는 것으로부터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호모 사케르란 신성화된 사람들이지만, 그 신체는 살해 가능하지만, ‘희생물로 될 수 없다는 양의성을 갖추고 있다. 흔히 이 두 개의 특징은 병치될 수 없다. (뭔가의 형벌을 받은) 살해 가능한 신체(법으로부터의 폐기)는 손쉽게 희생화되지만(종교로의 포함), 여기서는 살해 가능성은 희생이라는 형식을 취할 수 없는 것이다. 그 때문에 거기에는 살해 가능성과 희생화 불가능성의 교점에 있어서, “인간의 법으로부터도 신의 법으로부터도 배제된 신체가 출현하게 된다. 이 신체가 벌거벗은 생명의 원상原像인 것이다.[각주:9]

그래서 이것은 법에 있어서 모든 의미에서의 예외이기도 하다. ‘은 신성화되지 않지만 죽여도 좋다는 의미에서, 스스로가 포함할 수 없는 것을 배제된 것으로서 포함해버린다. 그리고 주권이란 칼 슈미트가 말했듯이 예외상태에 대해 결정을 내리는 자라고 한다면, 이런 신체를 다루는 것 자체가 법을 주권적인 법으로 만드는 원리라는 것이다. 스스로가 배제하는 것은 배제로서 포함하는 것, 이것이 법을 성립시키는 원점에 있다.

배제와 포함이 서로를 맞아들이는 이런 사정이 바로 아우슈비츠로 나타나는 비참한 신체의 전형이라는 것이 아감벤의 주장이다. 그것은 법의 원리이면서도, 현실적인 무엇인가로서 출현하는 것이다. “호모 사케르의 벌거벗은 생명은 이리하여 우리와 관계가 있는 것이 되며 시민의 생물학적 생명과 일치하고자 한다[각주:10]는 시대 진단이 거기에 포개지게 된다.

여기서 우선 논의되는 것은 법이 초월적인 기관을 경유하지 않고, 생명 자체를 포함한다는 사정이다. 바타유적 살해가 초월화된 신성성을 묻는다면, 이것과는 정반대의 관점이 여기서 드러난다. 여기서 법은 시니피앙이 아니며, 또한 명령하는 것일 수도 없다. 법은 법이 포함할 수 없는 것을 배제함으로써 포함한다. 거꾸로 말하면, 법 자신이, 벌거벗은 생명이라는 예외상태에서의 규정 불가능성을 들이대는 것으로부터 성립한다는 것이다. 그런 한에서 아감벤에게서의 벌거벗은 생명은 그 벌거벗은이라는 방식에 있어서, 규정 자체를 가능케 하는 규정 불가능성이라는 것이다. 거듭 말하지만, 이것이 법의 원리라고 하는 것이다.[각주:11]

거기에는 조에비오스의 연관에 관해서도, 단순하지 않는 사태가 출현하게 된다. 살아 있는 신체란, 물론 조에인 동시에 비오스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것은 해당 신체의 특정한 동물적, 식물적 기능이 조에이며, 특정한 인간적 기능이 비오스라는 것이 아니다. ‘비오스비오스인 한에서 항상 조에를 기반으로 하는 것인데, ‘비오스에 있어서 조에란 어디에도 없는 것이며 또한 어디에도 있는 것이기도 하다. 말과 신체, 로고스와 물질, 이것들도 마찬가지의 배치에 놓이게 될 것이다. 이들 중에서 후자는 전자에 의해 배제됨으로써 포함되는 바로 그것이다. ‘예외상태라는 외부를 보여줌으로써 질서를 규정하는 것, 이것이 양자의 관계성이다.

벌거벗은 생명예외상태의 관점에서 보면, 그것들은 아감벤의 발상의 기본이라고 할 수 있는 이중관계를 이루는 것인 비오스조에는 마치 단순히 이층화되는 것이 아니다. 이것들도 배제와 포함을 둘러싸고 서로 얽혀 있는 것에 다름 아니기 때문이다.

이렇게 아감벤에게서 생명은 법이나 언어가 규정할 수 없는 예외성인데, 동시에 그것에 의해 법이나 언어를 가능케 하는 것이라고도 그려진다. 생명 자체가 아리스토텔레스적 식물적 생명이나 동물적 생명이라기보다도 언어화할 수 없는 것에 의해 언어를 떠받치는 무엇인가로서 제시되는 것이다. 이리하여 아감벤은 푸코나 들뢰즈가 법적, 언어적 위상의 초월성을 비판하는 것으로부터 생명의 위상을 끄집어낸 것과는 대조적인 위치에 선다. 그리고 마찬가지로, 법과 언어를 시니피앙적 초월로서가 아니라, 생명과의 역접적 관계에서 끌어내게 된다.


들뢰즈 및 푸코 비판

그러면 여기서 절대적 내재성의 논의로 돌아가보자. 이 글에서 아감벤은 푸코와 들뢰즈의 생애 마지막 텍스트가 모두 생명을 다뤘다는 기묘한 부합을 강조하면서, 두 사람이 논하는 내용을 다양하게 검토한다.

대부분이 들뢰즈를 향한 이 논고의 처음 소소한 부분에서 아감벤은 푸코를 언급한다. 그 소재가 되는 푸코의 캉길렘론은 푸코의 최후기의 다양한 사유, 즉 프랑스 철학에서의 인식론과 영성주의(spiritualism)라는 두 개의 계보의 구분이나, 계몽의 논의의 재검토를 이루고 있다는 점에서 극히 흥미롭다. 하지만 아감벤은 특히 푸코의 서술의 마지막에 눈길을 돌린다. 거기서는 생명의 중심에는 잘못[착오]이라는 문제가 있다고 써져 있지 때문이다.


생명의 가장 근본적인 수준에서 코드와 해독의 작동[기능]은 우연히 주어져 있다. 그것은 질병이나 결함이나 기형이 되기 이전의, 정보 시스템의 변조나 잘못 취함[오용]같은 것이다. 극단적으로 말하면, 생명이란 잘못할 수 있는 것이다.[각주:12]


그리고 그 후에 푸코는 이런 캉길렘의 생명에 관한 견해를, 시대적으로 그다지 멀지 않은 니체의 그것과 결부시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진리는 생명의 기나긴 연대기에 있어서 가장 새로운 잘못이다. 더 정확히 말하면, 참과 거짓의 분할이나 진리에 부여된 가치는 생명이 발명했던 가장 특이한 삶의 방식을 형성하고 있기 때문이다.[각주:13]


아감벤은 생명과 오류라는 주제는 푸코가 성의 역사1권 이후에서 보여줬던 논의의 흔들림에 영향을 줬을 것이라고 말한다(그것은 들뢰즈의 견해이기도 하다). 그러나 아감벤은 또한 푸코의 이런 생명에 대한 사유는 새로운 경험과도 같은 무엇인가, 생명이라는 지면에 뿌리내린 별도의 주체성을 향하기 위한 무엇인가를 끌어내는 것이기도 하다고 평가한다. 거기서는 그저 생명과 생명의 일탈과만 상관관계를 가진 인식[각주:14]이 진리를 향하는 것이 아니라 탐구되기 때문이다.

이것은 들뢰즈가 푸코(1986)에서 지식과도 권력과도 구분되는 3의 축으로 간주했던 것과 결부되어 있다고 아감벤은 지적한다. 이리하여 아감벤은 푸코의 최후기의 시도를 들뢰즈의 그것과 교차시킨다. 들뢰즈가 그려내는 생명의 권역으로부터, 새로운 주체의 모습을 (바로 최후기의 푸코가 행했듯이) 끌어내는 것이야말로 생명정치의 향후 과제라고 아감벤은 생각했던 것이다. 그 자신 아감벤의 고찰과 깊이 관계가 있을 것이다.

그러면 아감벤은 들뢰즈의 생명 개념에 관해서는 어떻게 평가하고 있을까? 그것을 감안한 다음, 푸코적인 주체의 논의를 구성해가는 라인은 어떻게 그어짓는다는 것일까?

아감벤은 들뢰즈 최후의 텍스트 내재성 ; 하나의 삶 …」의 표제에 있는 콜론에 강하게 집착한다. 여기서 중간에 배치된 콜론은 단순한 동일성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바로 생명과 내재성, ‘거리도 동일성도 아닌 일종의 통과, 아무런 공간적 변동도 없는 이행임을 나타내는 것이라고 한다. 내재성과 생명은 각각이 다른 것에 열려 있으면서, 생명은 생명에 내재한다는 형태로 그것과 관련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생명이 내재성이라기보다는 내재성을 불러일으키는 것이 생명이라는 것이다. 이런 일련의 논의는, 바로 들뢰즈의 내재성과 아감벤이 잠재력으로 말하는 것을 결부시킨다.

여기서 아감벤이 증거로 삼는 것은 철학이란 무엇인가(1991)의 들뢰즈이다. 이 저작에서의 내재성또는 내재평면(plan d’immanence)’의 논의야말로 여기서의 포인트가 된다. 이 텍스트에서 들뢰즈는 내재성이란 그저 자신에 대해 내재하는것뿐이며, “무엇에 대해 내재하는것이 아니라고 논한다(사르트르의 자아의 초월성에 대한 의미의 논리에서의 높은 평가를 여기서 참조하고 있다).[각주:15]내재성이란 의식에의 내재성도 자아로의 내재성도 아니다. 그것은 내재하는 것에의 내재인 것이며, 바로 자기 완결적인 운동성이다.

  

후기 들뢰즈의 텍스트를 여기서 끄집어내는 것에는 충분한 의미가 있다. 그것은 아감벤이, 여기서의 내재평면을 바로 (현실화한 생명체를 상정하는 베르크손적인 잠재성이 아니라) 스피노자적인 일의성으로 끌어당겨, 거기서 내재 그 자체를 해석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내재원리란, 존재의 초월을 모두 배제하는 일의성의 존재론을 일반화하는 것에 다름없다. 하지만 일의성을 절대화하면, 존재의 모든 점에서 존재 자체와 동등한 것이 되며, 관성과 부동성이 존재 위에 짓눌러오는 것 아닐까? 그런데 스피노자가 말하는 내재적 원인이라는 사유는, 행위자 자신에 대해서는 행위자 자체의 수동성이라는 것이며, 이 사유에 의해 존재는 그 의심에서 해방된다.[각주:16]


내재성은 바로 초월을 거부하면서 내재성자신이 내재하는 운동으로서 작동하는 가운데 있다고 간주된다. ‘내재성이 그 자체로, 초월이 아니라 작동을 갖는다는 것, 이것에 아감벤은 들뢰즈가 생명이라고 말하는 것의 원상을 보고 있다.

하지만 이에 대해 아감벤은 전면적으로 찬성하는 것은 아니라며, 다양한 반론을 가한다. 그것은 아감벤과 들뢰즈의 사유가 닿을락말락할 정도로 접근하고 있기 때문에 분간하기 어려운 것이지만, 그러나 결정적인 비판이기도 하다.

그 비판 중 하나는 들뢰즈가 이 텍스트에서 디킨스의 소설을 다루는 장면과 관련된 것이다. 그곳에서는 죽음에 처한 어떤 악당이 묘사된다. 죽어가고 있는 그에 대해, 주위의 누구나 상냥함을 드러낸다. 그에게 발견되는 것은 바로 벌거벗은 생명과 비슷한, 순수한 내재로서의 신체이다. 그런데 병에서 회복되면서, 악당은 단순한 생명이기를 그치고 다시 악당이 되며, 나쁜 짓과 욕지거리를 하기 시작한다. 주위 사람들도 다시 그에게서 멀어진다.

여기서 묘사되는 비인칭의 삶[생명]’은 바로 순수한 생명의 모습에 가깝다. 삶과 죽음의 협간에 있는 이런 중간지대의 묘사에 아감벤은 공명한다. 하지만 들뢰즈는 죽음에 가까운 이 장면에서, 삶을 개체 속에 가둬버리는 것을 거부한다. 들뢰즈는 또한 거의 분간되지 않는 아기의 웃음이라는 비인칭성도 언급한다. 비인칭적인 아기의 웃음은 아기가 개체화되면(, 거기에 개성이 출현하면) 사라지는 것, 개체에 속하지 않는 것이다. 그것은 죽어가는 인간에게서 나타나는 벌거벗은 존재방식과 평행적인, 원초적인 생명의 형상이며, 아감벤이 진술하는 중간영역 자체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에 대해 아감벤은 이렇게 논한다. , 여기서 제시되는 벌거벗은 생명이란 바로 아리스토텔레스가 영양섭취의 생명이라고 부른 것, 혹은 비샤가 우리에 갇힌 동물이라고 지목한 것, 즉 생명적 신체가 지닌 동물적인 혹은 식물적인 기능 방식에 매우 가까운 것이 아니냐고. 그러니까 여기서 질문되고 있는 것은 일면에서는 인간과 동물의 불분명함 아니냐고. 그 때문에 이들의 논의는, 정말로는 (들뢰즈 자신이 하고 있지는 않은) 이런 방향에서 생각되어야 하는 게 아니냐고. 그런데 이렇게 읽을 수 있는 서술이란, 내재를 생명이라는 영역으로 비켜 놓는 것에 관해서, 매우 위험한 토지속으로 들어가는 것이라고 아감벤은 말한다.

아감벤은 여기서 들뢰즈와 푸코의 차이도 선명해진다고 한다. 들뢰즈는 푸코가 성의 역사 1 : 지식의 의지에서 묘사한 권력론을 제대로 이해하기는 했다. 그러나 푸코가 생물학적인 실존이 정치 속에 들어온다는 것을 생명정치로서 파악한 반면, 들뢰즈는 푸코에서 이런 생명 자체란 무엇인가, 권력과의 관련에서의 그 의의는 무엇인가를 캐묻지 않고, “생명은 권력에 대한 저항이 되는바로 그것이라고 단적으로 정리해버린다. 하지만 그래서는 생명정치적인 갈등의 양의성을 논하기 위해서는, 충분한 논의의 방향을 제시하는 것이 되지 않지 않을까?[각주:17]

아감벤은 들뢰즈가 거론하는 내재의 생명에 실제로는 생물학적 요소가 거의 없다고 논한다(이것도 푸코에게서의 생명의 구체성과 대비를 이루는 사태이다). 최종적으로는 스피노자적인 내재의 지복에 이르는 들뢰즈의 에 있어서, ‘하나의 삶이란 절대적으로 무매개적이면서, 모든 생명에 깃든 무엇인가로서, ‘인식 없는 순전한 관조가 되고 만다. 그것은 들뢰즈 자신이 생기론에 두 가지 길을 찾아내려고 하면서도, 그 한쪽인 행동하는 이데아가 아니라 [다른 한쪽인] 순전한 내적 감각을 선택하는 것과도 포개져 있다. 들뢰즈가 논하는 것은 인식의 모든 대상주체의 저편에 있어서의 순전한 관조이며, 행동하지 않고 보존하는 순수한 잠재력이 아닐까.[각주:18]

이에 반해 아감벤은, 다음과 같은 의문을 던진다. 그렇다면 벌거벗은 생명, 생명이 깃든 불분명성의 지대에서가 아니라, 내재 자체의 위상에 가둬두는 것 밖에 안 되는 것 아니냐고 말이다. , 거기에는 아리스토텔레스적인 영양섭취의 생명과 반대의 것 밖에만 발견되는 것 아니냐고 말이다. 아리스토텔레스적(혹은 비샤적)인 생명이란 식물적인 생명/관계의 생명, 바깥의 동물/안의 동물, 식물/인간, 조에/비오스, 벌거벗은 생명/정치적인 삶이란느 다양한 구분선을 가능케 하는 것이었다(그리고 생명에 의거하는 푸코도, 아감벤과 간극이 있기는 하지만, 이 구분을 전제로 생명과 정치의 관계를 사고했을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들뢰즈의 생명이 절대적 내재에 이르는 것이라고 한다면, 이런 계층성이나 분리를 전혀 예상할 수 없는 것이다(그것이 일의성이 지닌 의미이기 때문이다). 들뢰즈의 생명 논의는, 스피노자적인 지복으로서의, ‘내재속의 운동에 머물러 버린다.[각주:19] 이것은 생명에 대한 취급방식으로서 정당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그리고 그것은 푸코가 말하는 생명정치학적인 상황에, 어떤 길을 제시하는 것일까?

아감벤은 바로 중간지대의 사상가로서, 다음과 같이 말하며 논의를 수습하려 한다.


푸코의 사유와 들뢰즈의 사유가 둘 다 극단적인 유언으로서 남긴 생명이라는 개념은, 도래하는 철학의 테마가 될 것임에 틀림없다고 우리는 서두에서 단언했는데, 어떤 의미에서 이런 단언을 할 수 있는가는 이제 분명하다. 이로부터 문제가 되는 것은 한편으로는 생명권력과 주체화 과정에 관한 최후의 푸코의 얼핏 보면 음울한 고찰과 다른 한편으로는 절대적 내재지복으로서의 하나의 삶에 관한 들뢰즈의 얼핏 보면 명랑한 고찰, 이 두 개의 고찰을 함께 읽어보는 것이다.[각주:20]


함께 읽어본다는 것은 물론 양자를 평균화시킨다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양측을 양측의 걸림돌로서 읽는 것, 양측을 양측에 대항시켜 읽는 것을 의미한다. 들뢰즈가 논하는 비인칭성의 일의성에는, 아감벤은 그 위상의 의미를 인정하면서도, 명확하게 이의를 제기하고 있다. 푸코의 주체화에 관해서도 최후기의 그것에 아슬아슬할 정도로까지 찬성하면서도 배제와 포함에 관한 논의의 부재를 계속 묻는 것이다.

그러면 이런 일련의 고찰을 마무리하는 데 있어서 아감벤은 앞서 말한 도식을 별다른 설명도 없이 제시한다. 일련의 논의가 푸코와 들뢰즈의 생명에 관한 개념의 애매함을 논의한 반면, 마지막에 놓인 이 도식에서는, 한편으로 푸코와 들뢰즈가 동거하는 내재의 선이 그려지고(그것은 스피노자와 니체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것에 대립시키듯이, 레비나스와 데리다의 초월의 선(후설이나 칸트로 거슬러 올라간다)이 설정된다(앞의 153쪽의 그림을 참조).

들뢰즈와 푸코의 유사성과 대비에 의해 전개되는 논의가, 완전히 다른 방향으로 나아가는 점은 여기서 따지지 말자. 이것 이상으로 문제인 것은, 이 양자의 선의 중간에 하이데거가, 아무런 설명도 없이 배치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 이상으로, 마치 하이데거를 축으로 초월과 내재라는 두 개의 선이 배치 가능한 것처럼 그려져 있다. 하지만 생명의 철학의 탐구의 마지막에, 왜 하이데거가 중요한 의미를 갖고 갑자기 도입되게 되는 것일까?

또 하나 생각해야 할 것은, 이 도식에서, 아감벤의 호모 사케르의 사유 자체는 어디에 놓이는가이다. 이에 대해서는 답변은 아마 한 가지밖에 없다. 아감벤은 항상 자신의 사유를 중간지대로 설정하려 한다는 것이리라. 그런 한에서, 여기서 아감벤은 자신과 하이데거를, 생명의 사유에 있어서 분명하게 포개놓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아감벤과 하이데거의 관련 : 동물과 인간

하이데거는, 여기서 이른바 아무런 예고도 없이, 생명의 문제의 초점을 맞추기 위해 끌어내지고 있다. 아감벤은 법이나 초월을 자명시하는 것은 아니지만, 법이라는 주제로 끌어들이고 생명을 논하는 한, 중간지대에 자신의 입장을 설정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아감벤이 본래 자신을 두어야 할 위치에, 하이데거의 이름이 적혀 있다. 그렇지만 하이데거는 바로 해석학적 현상학으로서 존재론을 구상하고, 언어에 존재가 깃들어 있다고 한 점에서 초월의 선을 대표하는 철학자가 아닐까? 하이데거의 어디에서 생명의 논의가 발견되는 것일까?

절대적 내재의 텍스트에서 하이데거의 이름이 제시되지 않은 것은 아니다. 들뢰즈의 내재와 사르트르의 논의의 가까움을 논하는 부분에서, 아감벤은 하이데거에 관해 다음과 같이 언급한다.


이렇게 들뢰즈는 의식이 가졌던 가치들을 정산하고 있는데, 이것은 어떤 철학자의 몸짓을 계속하는 것이 된다. 그 철학자의 작업을 들뢰즈는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으나, 20세기 현상학의 대표자 속에서는, 이 철학자가 적어도 이 점에 있어서는 들뢰즈에게 가장 가깝다는 것은 확실하다. 그 철학자란 하이데거, 그 멋들어진 알프레드 자리론에 등장하는 파타퓌직한 하이데거이다.[각주:21]


하지만 이것만으로는 설명이 충분하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파타퓌직으로서의 하이데거(들뢰즈, 하이데거의 알려지지 않은 선구자 알프레드 자리, 비평과 임상 수록)를 토대로 했다고 해도, 생명론적인 위상에는 아직 이를 수 없었을 것이다.[각주:22]

오히려 아감벤 자신의 하이데거론인 열림이 여기서의 논의와 더 깊은 연관을 갖고 있는 것으로서 검토해야 하지 않을까?

아감벤의 저작 열림으로 넘어가자. 이 책에서 아감벤은 인간과 동물이라는 부제에서 드러나듯이, 동물성을 둘러싸고 하이데거의 생명론이라는 문제계를 추적한다.

말할 것도 없으나, 존재와 시간(1927)에서의 하이데거는 생물학이나 생명의 철학에 대해 매우 엄격한 견해를 제시했다. 거기서는 자신의 존재론을, 당시 융성을 뽐냈던 생명의 철학으로부터 구분하는 것이나, 현존재의 논의가 생물학적인 생명의 주장과는 전혀 다른 것이라는 것을 확실하게 적고 있다.

하지만 이 단계에서의 하이데거도, ‘세계세계성의 개념에 이르는 직전에서라고는 하지만, ‘환경세계(Umwelt)’라는 윅스퀼의 술어에 중요한 지위를 부여한다. 윅스퀼의 환경세계론, 하이데거의 도구 존재로서의 세계를 묘사하기 위해 커다란 의의를 가진 것이었다.

그리고 이 테마를 생각할 때, 존재와 시간이상으로 중요한 것은 하이데거의 1929-30년의 강의록 형이상학의 근본개념들[각주:23]이다. 이 방대한 강의록에서는, 그 전반부에서 권태(Langeweile)’라는 (‘불안과는 다른) 정동성이 논의되고, 또한 후반부에서는 윅스퀼을 축으로 한 생물학적 논의가 주제화되며, 동물성을 둘러싸고도 상당한 서술이 이뤄진다. 거기서는 동물적인 생명은, “세계가 가난하다(Weltarmut)”고 규정되며, 돌이 세계를 갖지 않는 것(Weltlos)이나 인간이 세계(Welt)를 살고 있는 것과 대비되어 묘사된다.

이 하이데거의 강의록 자체가 수많은 문제를 포함하고 있을 것이다. 이 책의 전반부에서는 시간성을 노정시키는 근원적인 정서로서, 존재와 시간에서는 불안에 할당되었던 역할이, ‘깊은 권태[지루함]’로 대체된다(‘깊은 권태는 특정한 지루한 대상을 갖지 않는다는 점에서도 불안과 겹칠 것이다). 거기서는 불안이 죽음에의 선취로 현존재를 움직이게 하는 것과는 달리, 순간과 시간의 오랫동안(Langweile)의 관계가 논의되는 것이다.[각주:24] 심지어 이 깊은 권태(die tiefe Langweile)’의 논의가 전단계가 되어, 동물적 생명을 다루는 후반부로 향할 때, 현존재가 동물과 다른 것으로서 규정되게 된다. 이른바 하이데거 자신이 2년 전에 간행된 미완의 저서 존재와 시간, 다른 종류의 시각에서 재검토하는 것이다.

아감벤은 하이데거의 이 텍스트를 소재로 삼아, 열림의 논의를 밀고 나간다. 아감벤이 주목하는 것은, 특히 인간이 시간을 살아가는 형태로서의 깊은 권태라는 정동성과, 동물이 환경세계에 사로잡혀 있는 가난함사이의, 역설적인 결합 자체이다. 이 두 가지는 유사하지만, 인간(현존재)의 본질과 동물의 본질로서, 완전히 다른 종류의 사태이기도 하다. 하지만 아감벤은 하이데거의 논의에 있어서의 이 두 개의 착종된 관계에, 앞의 도식에서 초월과 내재의 선이 교차하는 지점을 찾아내고 있다.

아감벤은 다음과 같이 적는다.


하이데거에게서 초미의 과제는 동물의 세계의 가난함(Weltlos)’, 인간이 세계를 형성하다(weltbildend)’의 관계를 통해서, 현존재 세계--존재 라는 근본 구조 자체를 동물에 대해 위치짓게 되며, 그렇게 함으로써, 인간의 등장과 더불어, 생물 속에 나타나는 개시의 근원과 의미를 탐구하게 되는 것이다.[각주:25]


그렇지만 인간과 동물의 관계를, 예를 들어 이성적 동물이라는 방식으로, 동물적 생명에 무엇인가가 부가되도록 묘사하는 것은, 바로 존재와 시간에서의 하이데거가 계속 거부했던 것이었다. 여기서도 생물학적인 논의가 이뤄지지만, 그런 거절이 보이지 않는 것은 아니다. 달리 말하면, 여기서는 오히려 존재와 시간에서는 몇 줄로 처리되고 말았던 생물학과의 대결재부상하는 것으로 간주되어야 한다.[각주:26] 동물과 인간의 연관을 차이에 있어서 파악하는 것이, 현존재의 규정에 있어서 중요하다는 것이다.

하지만 왜 그럴까?

아감벤은 하이데거가 동물은 환경세계를 억지해제(das Enthemmende)한다고 표현하고 있는 것에 주목한다. 그것은 동물이 각각의 환경세계에서 고리를 이루면서도, 이로부터 열려져 있는 존재방식을 갖추고 있다는 것을 드러내는 것이다. “억지해제에 있어서는 동물이 그것에 에워싸여 있는 고리로부터 열려 있다.”[각주:27] 하지만 그런 동물의 존재방식은 또한 사로잡혀 있다=방심(Benommenheit)”고 말해진다. “사로잡힘=방심도 또한 환경세계 속에서, 열려지고 있으면서도, 몽롱한 상태에 있다는 것을 가리킨다. 존재 자체로의 열림(Offenbarheit)이 있는 것은 아니다.

이러한 사로잡힘=방심에 있어서, 동물은 어떤 지각을 행하는 것은 아니다. 꿀벌이 꿀을 빨고 있을 때에는, 오로지 그 대상 자체에 사로잡혀 있다[푹 잠겨 있다]. 거기서 자신의 신체가 절단돼도, 꿀벌은 꿀을 계속 빨고 있다.[각주:28] 이것은 주어진 환경성의 규정에 대한 사로잡힘=방심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동물의 행동거지는 억지해제로서, 열림에 대한 양의성을 갖추고 있다고 하이데거는 말한다. 그것은 하이데거의 다음의 문장에서 엿볼 수 있는 것이기도 하다. “방심 속에서는 존재자는 열려 있는(offenbar) 것이 아니며, 개시되는 것도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로 그 때문에, 닫혀져 있는 것도 아니다.”[각주:29]

동물은 존재자에게 열려있지만, 그런 존재자는 존재로서 노정되어 있는 게 아니다. 이런 매우 양의적인 사태가 여기서 강조되는 것이다.

그런데 동물이 환경세계 속에서 억지해제고리를 이루며 살고 있기 때문에 열림의 방향성을 갖는 것과, 그것이 사로잡힘=방심하고 있는 것 사이의 양의성은, 하이데거가 이 강의록의 전반부에서 논한 깊은 권태의 논의로 결부된다. 하이데거 자신이 동물의 사로잡힘=방심, 인간이 지닌 깊은 권태이라는 테마를, 그대로 연관시키고 있는 것이다.


이 점에 이르러서 하이데거는 강의의 1부에서 다뤘던 깊은 권태에 관한 논술을 불러일으키며, 동물의 방심과 깊은 권태라고 불렸던 근본적인 정서를 뜻밖의 형태로 공명시킬 수 있다.[각주:30]


깊은 권태란 하이데거에게서 인간적인 것이 동물적인 것으로 연결되는 장면 자체를 가리킨다. 하지만 그 방식은 어떤 것일까?


하이데거의 깊은 권태

이로부터 아감벤의 논의는 형이상학의 근본 개념들에서의 깊은 권태를 주제로 하는 것으로 향한다. 그것은 동물의 사로잡힘=방심과 매우 유사하지만, “사로잡힘=방심이 세계에 열려 있으면서도 스스로에 머물 수밖에 없는 것인 반면, ‘깊은 권태는 바로 인간이 시간을 살아가는 것의 근본에 있는 정동성이며, 그 때문에 닫혀 있으면서도 그 한가운데서 열려 있다는 점에서, 그 방향성을 정반대로 하는 것이다.

이러한 깊은 권태는 두 가지 특징을 갖는다고 말해진다. 우선 거기서는, 현존재가 거절되고 있는 존재자에게 건네지고[넘겨지고] 있다는 것이다. 이 계기는, 동물성이 지닌 억지해제고리’, 즉 닫혀 있으면서도 열려 있다는 존재방식과 흡사하다. 현존재는 보통은 존재자의 존재에 접근할 수 없다. 하지만 권태라는 존재방식 속에서, 그 닫힘 자체에 있어서, 인간은 존재자에게 건네지고 있다(ausfeliefert)는 것이다.

그리고 또 다른 깊은 권태의 특징은, “허공에 매달린 채로 있다[중지된 채로 유지된다](Hingehaltenheit)”는 것이라고 말해진다. “허공에 매달린 채로 있다[중지된 채로 유지된다]”는 것은 거기서 비활성인 채로 체류하는 것(brachliegende)이기도 하다고 얘기된다. 그것은 손에 넣지 못한 채 방치되고 있는 경작지를 의미하는 농경용어이기도 하다.

이것은 가능성을 가지면서 어떤 가능성도 현재화시키지 못하는 것으로서, 모든 가능성을 눈앞에 두는 것이기도 하다. 이런 사정은 아감벤이 잠재력에 의해 말했던 것과 강하게 겹친다. ‘깊은 권태특정한 구체적 가능성 전부를 중지시키고, 탈취하는 가운데, 근원적인 가능성(즉 잠재력)이 그 가치를 드러내는 체험[각주:31]이기 때문이다.

하이데거의 권태론은 특히 불안과의 연관에서 많은 논의해야 할 테마를 포함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당장은 아감벤의 논의에만 초점을 맞춘다면, 아감벤은 여기서의 논의에, 자신의 잠재력과 매우 가까운 어떤 것을 보고 있는가가 중요할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동시에 들뢰즈의 잠재성이나 내재라는 사고와의, 강한 결부를 시사하는 것이다. 거부함으로써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것. 거꾸로 아무것도 하지 않음으로써 가능성을 계속 갖는 것. 그것은 아감벤도 들뢰즈도 논의하는 바틀비(허만 멜빌), “하지 않는 편이 좋습니다[안 하는 게 좋습니다=안 하는 걸 좋아합니다](I would prefer noto to)라는 말과도 결부되면서, 무한한 가능성을, 모종의 무능력을 축으로서 끄집어내고 있는 것이다.[각주:32]

그러면 이런 깊은 권태는 동물성과 연관될까? 어떤 의미에서는 그럴 것이다. 이것은 현상적으로는, 동물이 환경세계속에서 사로잡힘=방심하는 것과 매우 가깝기 때문이다. 그리고 바틀비적인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는 무능력은, 들뢰즈라면 곧바로 bêtise=어리석음이라는 주제로 이어지며, 동물적인 무력함에 연관시키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감벤은 동물의 방심과 인간의 깊은 권태를 아슬아슬하게 접근시키면서 이것들을 동일시하지는 않는다.


방심에 있어서 동물은 억지해제하는 것과 직접 관계를 맺으며, 억지해제하는 것 속에 노출되고 마비됨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그런 것으로서 들통나게 하는 것은 결코 할 수 없었다. 바로 특정한 억지해제 영역과의 관계를 중지하고 비활성적인 것으로 하는 것을 동물은 할 수 없는 것이다. 그에 반해 깊은 권태는 세계가 가난하기 때문에 세계로, 동물환경으로부터 인간세계로 이행이 실현시키는 형이상학적인 조작인 것처럼 생각된다.[각주:33]


그래서 인간이란 동물성의 억지해제에 의해 성립하는 것이 아닌 것이다. 오히려 동물에게는 결코 할 수 없는 권태를 살아감으로써, 시간성의 무한의 가능성에, 그 비활성의 존재방식에 그칠 수 있는 존재자로서 그려질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인간은 동물에게는 불가능한 세계가능성을 찾아낼 수 있게 된다.

아감벤의 고찰의 귀결은, 이런 동물과 인간의 관계를 중립적으로 화해시키는 것이 아니다. 거기서 이뤄지는 것은 오히려 반대로, 이런 사정을 그대로 중지의 중지에 두는 것이다.


타원의 두 개의 초점

그러면 이런 형이상학의 근본개념들에 관한 논의는, 절대적 내재성에서의 아감벤에 의한 들뢰즈나 푸코의 독해에 무엇을 덧붙이는 것일까?

거기에서 하이데거가 맡는 역할은 명확하다. 하이데거가 생명의 사유의 계보 안에서 초월과 내재의 중간지점에 놓여 있다는 것의 의미는 열림에서 깊은 권태를 둘러싸고 제시된 매우 들뢰즈적인 내재성의 모습을 전제로 할 때에야 명확하게 드러날 것이다.

게다가 아감벤은 이렇게 파악되는 하이데거의 이중성, 즉 동물성에 있어서의 열림이면서도 돌파는 하지 않는 사로잡힘=방심, 인간에 있어서의 무능력으로서의 가능성인 깊은 권태, 대립하면서도 접하는 지점으로서 간주하는 것이다. 이렇게 묘사되는 타원 속에서, 들뢰즈와는 달리, 동물과 인간에 관해 생명 속에서의 본질적인 구분선을 탐색하는 것이 가능해진다. , 아감벤이 (들뢰즈적인 삶의 일의성에 반하여) 요청하는 벌거벗은 생명의 탐구의 다양성이 확보되는 셈이다. 이런 의미에서 아감벤이 해석하는 들뢰즈적인 내재가 갖추고 있는 불만이, 여기서 동물/인간의 분할선을 둘러싼 방식에서 다시 설정되고, 생명정치학적인 장면으로서 재파악된다.

여기서 아감벤은, 정당한 독해인지는 제쳐놓더라도, 하이데거의 생물론에서 배제와 포함을 둘러싼 자신의 논의와 가까운 것을 보고 있다. 그것은 내재를 둘러싸고 이루어지는 것인데, 인간적 초월의 편으로도, 다른 방향으로도 자리매김 되는 것일 수밖에 없다. 벌거벗은 생명은 동물성과 아주 가깝더라도, 하이데거의 권태쪽에 강하게 겹쳐진다. 무위가 지닌 가능성이 여기서는 논의의 요점이 된다.

포함과 배제를 둘러싼 아감벤의 사고는, “벌거벗은 생명을 생물학적인 논의로서 파악하는 것은 아니나, 하지만 거기서 생물성과 인간성을 역접적 연관 속에서 억누르려 하는 한, 하이데거의 시도와 아주 가깝다고 말할 수 있다. 언어나 법이라는 영역을 인정하면서, 중지에 있어서 깊은 권태를 노출시킨다는 전술은, 아감벤적인 양의성에 그대로 겹치는 것처럼 보인다. 다만 거기서 하이데거는 본래는 삶의 계보학의 중간이라기보다도 어디까지나 초월과 내재를 분할하는 선의 초월 쪽으로 기운 것으로 묘사되어야 할 인물이 아닐까? 그리고 아감벤은 하이데거와 똑같은 타원 내부에서 동거하면서도, 들뢰즈적인 내재에 가깝다는 점에서, 하이데거에 대해 약간 내재에 기우는 곳에 놓여야 할 것이다.

그러나 아무튼,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동물이라는 테마이다. 동물성을 고찰함으로써 가능해지는, 생명 속에서의 인간과 이것 이외의 존재자 사이의 분할선이다. 거기서는 동물과 인간이, 둘 다 생명이면서도, 배제와 포함을 반복하는 그 접점이 제시된다. 생명정치학의 논의가 인간의 동물화와 동시에 동물의 인간화(권리부여)와도 교차되면서 말해지는 의의도 여기에 있다.[각주:34] 인간과 동물을 둘러싼 타원, 하이데거와 아감벤이 동거하면서 두 개의 초점을 그리는 타원, 여기에 생명정치학의, 혹은 생명의 철학의 새로운 형상을 보는 것도 가능해지지 않을까? 아감벤의 들뢰즈 독해가 끄집어내는, 최대의 논점이 아닐까?


  1. 생명정치학의 측면에서는 얘기되지 않은 아감벤의 저술의 다양성에 대해서는 岡田温司, 『アガンベン読解』, 平凡社, 2011을 참조. [본문으로]
  2. Cf. Giorgio Agamben, Homo sacer : il potere sovrano e la nuda vita, Einaudi, 1995, pp.6ff. [본문으로]
  3. 푸코의 ‘고고학’ 및 ‘계보학’의 서술이 일관되게 단선적인 시간 배치에 의거하고 있지 않다는 것, 또한 ‘중지’라는 관점은 벤야민의 「역사의 개념에 대해」에서의 ‘중지상태의 변증법’에, 혹은 들뢰즈=가타리가 『철학이란 무엇인가』에서 논한 ‘부감俯瞰’이라는 관점 없는 관점과 매우 가깝다는 것 등을 고려해야 한다. 생명을 논하는 생명정치란 이런 “현실적인actual 관점”의 포기에 의해 바로 현실성이 될 수 있는 게 아닐까? [본문으로]
  4. Michel Foucault, «La vie: l’expérience et la science», in Dits et écrits, 1954-1988. tome IV, Gallimard. 1994. pp.763-776. [본문으로]
  5. Gilles Deleuze, «L’immanence: une vie …», in Deux régimes de fous : textes et entretiens, 1975—1995, Minuit 2003, pp.359-363. [본문으로]
  6. Agamben, Homo sacer, p.3. [본문으로]
  7. ibid., pp.6—7. [본문으로]
  8. ibid., p.7. [본문으로]
  9. 『호모 사케르』 2부를 참조. [본문으로]
  10. Ibid., p.127. [본문으로]
  11. 그러나 동시에 바타이유의 사유가 현대적 정치학 속에서 반복해서 다뤄지고 있다는 것을 봐도, 이런 초월을 목표로 할 뿐만 아닌 방향성, 즉 바타이유 자신이 “저열한 유물론”이라고 부른 영역을 어떻게 생각할 것이냐는 중요한 문제이기를 계속한다. [본문으로]
  12. Foucault, «La vie», p.774. [본문으로]
  13. ibid: p. 775. [본문으로]
  14. Giorgio Agamben, La potenza del pensiero: saggi e conferenze, Neri Pozza, 2005, p.386. [본문으로]
  15. Gilles Deleuze et Félix Guattari, Qu’est-ce que la philosophie?, Minuit 1991, pp.49-50. [본문으로]
  16. Agamben, La potenza del pensiero, p.393. [본문으로]
  17. ibid., pp.401ff. [본문으로]
  18. ibid., p.404. [본문으로]
  19. 그렇지만 이것에 이어진 「산보하다(pasearse)」라는 절에서, 이런 스피노자적 내재 자체에 있어서의 운동성에, 아감벤이 모종의 찬성을 보여주지 않는 것은 확실하다. 순수한 관조에 상응하는 ‘산보’에, 아감벤이 벤야민적인 산책자의 그림자를 보지 못했을리도 없다. 이 점은 아감벤 자신의 ‘애매함’을 잘 드러낸다. [본문으로]
  20. ibid., p.410. [본문으로]
  21. ibid.. p.392. [본문으로]
  22. 오히려 이 논고에서는 알프레드 자리를 끌어들여 기묘한 언어 사용으로서의 하이데거가 찬양된다. 하이데거에 관해서는 물론 『차이와 반복』에서의 각주(Gilles Deleuze, Différence et répétition, PUF, 1968, p.188) 등의 검토 재료가 있는데, 이 양자에서의 ‘생명’을 둘러싼 관계성은 아감벤에 의한 매개를 거치지 않으면 역시 사고하는 데 어렵다고 생각된다. [본문으로]
  23. Martin Heidegger, Die Grundbegriffe der Metaphysik : Welt, Endlichkeit, Einsamkeit, in Gesamtausgabe, Bd. 29/30, Vittorio Klostermann, 1983. [본문으로]
  24. 본 논고에는 직접 관련되지 않으나, 이 강의록에서의 시간론은 하이데거의 문맥에서도, 또한 그것 이외의 맥락에서도 많은 문제를 품고 있다. 특히 『존재와 시간』에서 논의되는데, 그 존재방식이 면밀하게는 기술되지 않은 “순간=찰나(Augen-blick)”이라는 주제가 “깊은 권태”라는 “시간의 사이가 길어지는 것”의 논의에 관련되어 재파악되고, 그것이 “순간의 첨단이 도망쳐 들어오는” 것으로 그려지는 점(33, 34절 등)은 시간과 순간, 현재의 본래성과 비본래성이라는 테마를 고찰할 때 간과할 수 없을 것이다. [본문으로]
  25. Giorgio Agamben, L’aperto: l’uomo e l’animale, Bollati Boringhieri. 2002, p.53. [본문으로]
  26. ibid., p.53. [본문으로]
  27. Heidegger, Die Grundbegriffe der Metaphysik, S.370-371. [본문으로]
  28. ibid., S.352. [본문으로]
  29. ibid., S.361. [본문으로]
  30. Agamben, L’aperto, pp.64-65. [본문으로]
  31. ibid., p. 70. [본문으로]
  32. 들뢰즈의 논의란 『비판과 임상』에 수록되어 있는 「바틀비 또는 상투어」이다. 아감벤은 이 책의 이탈리아어 번역본에 긴 해설을 붙여서 한 권의 책으로 냈다(Gilles Deleuze et Giorgio Agamben, Bartleby: la formula della creazione, Quodlibet, 1998). [본문으로]
  33. Agamben, L’aperto, pp.70-71. [본문으로]
  34. 인간의 동물화와 함께 동물의 인간화라는 반대 방향의 움직임도 발생하고, 거기서 ― 바로 아감벤식으로 말하면 ― 인간과 동물의 동일성과 차이의 문제가 다시 물어지고 있다는 것은, 삶을 다루는 여러 가지 논의의 구체성에 있어서 ― 동물윤리, 환경문제, 생물다양성 등 ― 이것들을 재차 형이상학적으로 사고하기 위해서도 필요한 것이리라. 이 점에 대해서는 小泉義之, 「人間の消失、動物の消失」, 『現代思想』, 2009년 7월호. ; 市野川容孝, 「動物の人間化、人間の動物化──バイオポリティクスの一断面」, 『現代思想』, 2009년 7월호를 참조. 두 논문 모두 양자의 구분이 애매해지는 교차점을 묘사한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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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래할 생명권력론을 위해


사상, 2013년 2

 

 

목차

사상의 말

히가키 타츠야(槍垣立哉)

(좌담회) 도래할 생명권력론을 위하여 (2/3)

히가키 타츠야(槍垣立哉)・카스가 나오키(春日直樹)이치노카와 야스타카(市野川容孝)

II. 생명권력론의 최전선

아감벤을 어떻게 생각할까

* 지금 아감벤의 이름이 나왔는데요, ‘생명권력론의 최전선을 생각할 경우에는, 특히 2000년대 이후 압도적인 존재감을 보여주는 아감벤의 논의를 무시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우선 아감벤 얘기부터 시작할까요?

上村忠男에 대한 이미지 검색결과

조르조 아감벤


히가키 : 아감벤 같은 존재가 이탈리아에서 나온 것은 솔직히 말해서 의외였습니다. 확실히 이탈리아에는 네그리 같은 사람이 있지만, [네그리는] 들뢰즈나 가타리의 동료였으며 프랑스의 현대사상이나 좌익사상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최근에도 잔니 바티모(1936년 생)약한 사고(1983)가 번역되었듯이, 우에무라 타다오(上村忠男) 씨나 오카다 아츠시(岡田溫司) 씨의 정력적인 소개도 있지만, 철학 영역에서 이탈리아가 이 정도로 주목을 받은 것은 처음인 듯 싶습니다.

上村忠男에 대한 이미지 검색결과                         photo

우에무라 타다오(@tadao_uemura)                    오카다 아츠시

이치노카와 : 왜 아감벤이 부상한 걸까요?

히가키 : 그 이유는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아우슈비츠의 남은 것(1998)이 잘 팔렸다는 건 있을 수 있는 일이지만, 그러나 이것이 과연 일본만의 현상일까 생각해보니, 파리의 서점에도 아감벤코너에 책이 산처럼 쌓여 있더군요. 시기적으로도 그렇게 일본과 동떨어져 있지는 않을 거예요.

카스가 : 난민 문제를 포함해 현지 조사를 하는 사람들도 자주 인용하고 있습니다.

히가키 : 그렇군요. 다만, 아감벤은 어떻게 해석할지가 어려워요. 아우슈비츠의 남은 것에서는 위르겐 하버마스(1929)나 한스 요나스(1903-93)에게 [공격과 비판의] 칼날을 향하고 있습니다. 후안무치한 일을 저지른 독일인 무리들은 아직도 이런 얘기를 하고 있고, 그것으로 문제가 끝났다고 생각하다니 놀랍네, 이런 식의 격렬한 독일 비판을 하고 있습니다. 이렇게까지 말할 수 있다는 것은 단순하게 말해서 매우 대단하다고 생각합니다.

  

  아감벤이 처음 주목받은 것은 호모 사케르아우슈비츠의 남은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푸코의 논의를 넘어서 새로운 것을 하겠다고 드는 사람인가 싶더니, 실상은 다른 것 같아요(웃음). 졸업논문에서는 시몬 베유(1909-43)를 다루고, 1960년대가 되면 하이데거의 강의에 참석하고 이탈리아어판 벤야민 전집』을 감수했습니다. 2000년대가 되면 로마세계의 종교론에 생명정치의 문제를 접목시키고, 기독교 세계로부터 뭔가 종횡무진으로 내달리는 작업을 하게 됐습니다. 이런 형태로 세계의 주요 장면에 나온 이탈리아인은 꽤 드물 겁니다. 특히 철학의 영역은 고대그리스, 중세를 별도로 치면, 영미계와 프랑스계와 독일계가 차지하고 있습니다. 대학의 강좌에 대한 인사를 보더라도 확연합니다만, 이것은 어쩔 수 없는 제국주의이죠. 그런 상황을 아감벤 같은 존재가 교란시킨다는 것은 매우 큽니다.

카스가 : 과연 그렇죠.

히가키 : 제 선생이었던 사카베 메구미(坂部恵) 씨가 말년에 일본철학회에서, 전지구화 등을 얘기하면서도 왜 일본의 철학과에서는 영미계와 프랑스계와 독일계라는 세 가지에서 선택을 하게 만들까, 이런 시시한 짓은 이제 그만두는 편이 좋다, 논문은 어느 나라 말로 써도 좋고, 베트남 철학이어도 좋다,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서두에서도 조금 언급했습니다만, 이것을 아감벤은 실현해버렸습니다. 이것은 향후 철학자의 모델이 되며, 아마 지금부터 앞으로는 중국인이나 한국인으로부터도 아감벤 같은 역할을 맡는 철학자가 나오겠죠.

   그리고 오늘의 화두와 관련해 중요한 것은, 아감벤이 생명정치와 종교를 강하게 연관시켰다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푸코는 사목권력(pouvoir pastoral)’이라는 개념을 제시했는데, 이것은 아주 큰 문제이고, 요컨대 유럽의 권력은 유대-기독교적 권력이라고 합니다. 이 개념은 푸코가 1978년에 두 번째 일본방문을 했을 때의 강연에서 다뤄지기도 했으며, 일본에서는 굉장히 유명하지만, 실제의 푸코는 그 후 거의 전개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을 아감벤은 진지하게 씨름하고 있고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이치노카와 : 제가 아감벤의 이름을 처음 들은 것은 다자키 히데아키(田崎英明) 씨한테서였습니다. ‘벌거벗은 생명개념도 다자키 히데아키 씨에게 배웠다고 기억합니다. 이후 번역으로 아우슈비츠의 남은 것, 목적 없는 수단, 호모 사케르를 읽었고, 서평도 두개 정도 썼습니다만, 아감벤은 사회학자가 사용하기는 매우 힘들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실제로 오오츠 마사키(大津真幸) 씨 등을 제외하면, 사회학에서 아감벤에 의거해서 뭔가를 말하는 사람은 매우 적다고 생각합니다. 푸코라면 근대가 문제였고, 그것에 걸터앉아 사회학에서 뭔가 말하는 것은 비교적 쉽습니다만, 앞에서도 얘기가 있었듯이, 아감벤은 로마에서 시작하기에, 결국은 19세기 이후에 생겨났을 뿐인 사회학적 상상력으로는 따라잡기 어려운 대목이 있습니다. 푸코의 경우도, 어떻게 생각되든 국민국가, 에티엔 발리바르(1942)가 말한 바의 국민적이고 사회적인 국가”(복지국가)를 전제하고 있습니다.

히가키 : 말씀하신 그대로입니다.

이치노카와 : 아감벤의 호모 사케르2002년에 독일어 번역본이 나왔고, 이후에도 다른 저작들이 속속들이 번역되고 있습니다만, [독일이] 다른 나라들과 조금 다를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독일에서는 아우슈비츠의 문제를 말하는 이상, 아감벤에게 귀를 기울이지 않을 수 없었다는 것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아감벤의 나치즘 해석 방식에는 저조차도 실증적 수준에서 이의를 제기하고 싶은 대목이 꽤 있으며, 조금 허풍을 떨고 있다는 느낌이 있습니다.

히가키 : 확실히 철학자 특유의 허풍을 떨고 논리가 성긴 대목이 있습니다(웃음).

이치노카와 : 그리고 칼 슈미트를 그렇게 원용하고 있는 것도, 독일에서는 좀처럼 쉽게 받아들이기 어려운 부분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버마스가 전형입니다만, 슈미트에 맞서서 생각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카스가 : 저는 최근 피지에서 일종의 노인 홈(home) 같은 특이한 시설에서 조사를 하게 되면서부터 벌거벗은 생명이라는 말이 편리해서 몇 번 사용한 적이 있습니다. 다만, 이것은 이치노카와 씨와 같은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지금은 한 가지로 사용할 수 없다고 할까, 인류학자에게는 지금 한 가지의 리얼리티가 없네요. 예쁜 허구를 만들고 있지만, 환기력이 없습니다.

   그렇지만 주권자를 권력에 외부는 없다고 선언하는 인간으로 제시한 것은 재미있다고 생각합니다. 푸코는 외부가 없다고 말했지만, 아감벤은 사이라고 함으로써 외부를 보여주고, 필연적으로 법치국가의 역설을 제시합니다. 인간들의 편에서 보면, 역설이 있습니다만, 신이 주권자라면 그런 역설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감벤의 외부에는 처음부터 인간이 들어 있으며, 인간화된 외부를 초월적인 것으로서 말합니다. 그런 사이밖에 있을 수 없다고 말함으로써, 이것은 이것으로 알기 쉽습니다만, 그것이 아감벤의 한계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히가키 : 굳이 아감벤을 추켜세운다면, 주권권력의 문제를 다시 거론한 것이 컸습니다. 푸코는 이제 주권권력은 없어진다는 식으로 읽을 수 있는 것을 말했지만, 실제로 주권국가는 있으며, 전구화되고 있다고 해서 정말로 없어질지 여부는 모릅니다. 그런 상황에서 주권권력을 다시 다룬 것은 역시 크다=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정말로 사이인 것이죠. 삶과의 역설로 주권권력을 내고, 동물과의 역설로 인간을 냅니다. 그 제기방식이 멋지지만, 실증연구로서는 어디까지 사용할 수 있는가라는 것이기도 합니다. 말하자면 문학적 비유에 불과한 부분이 확실히 있습니다. 그래서 아우슈비츠 이야기만 하더라도 나치즘에 대한 실증연구를 하고 있는 사람에게 의미가 있느냐 없느냐보다, 종교 얘기와 같은 것이라고 생각하거든요. 거기에는 종교 얘기로서의 리얼리티가 있고, 나치즘도 1000, 2000년도 지난 후에는 종교 얘기가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카스가 : 종교 얘기라고 하셨는데, 맞는 말일 수도 있습니다. 

히가키 : 그런 점은 아감벤에게 일관되게 보인다고 생각해요.

이치노카와 : 일본에서도 예를 들어 홈리스의 사람들이 처한 상황을 생각할 때 벌거벗은 생명이라는 말에는 강한 리얼리티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런 문제를, 예를 들어 사회학적으로, 구체적으로, 실증적으로 파고들어갈수록, ‘벌거벗은 생명이라고 말하는 것으로 끝날 수 없게 된다고 생각합니다.

카스가 : 인류학의 현장에서도, 모두에게서 버림받고 아무도 모르게 죽어가는 사람들이 있지만, 제대로 취급받는다면 벌거벗은 생명이란 있을 수 없다, 거기에는 확실히 의미가 있으며 비오스가 있다는 게 됩니다.

이치노카와 : 제 감각도 그것에 가깝습니다.

 

벌거벗은 생명과 벤야민

히가키 : 아감벤은 벌거벗은 생명(nuda vita)”이라는 개념을 발터 벤야민(1892-1940)폭력 비판을 위하여에 있는 단순한 생명(das blosse Leben)”이라는 표현에서 빌려 왔다죠?

이치노카와 : 그렇습니다.

히가키 : 그런데 벤야민은 단순한 생명에 관해 부정적으로 쓰고 있고, 그것을 중요한 개념으로 채용한 아감벤의 의도를 도무지 모르겠어요. 더 말하면, 이 저작에서 취급되고 있는 신적 폭력자체, 상식적으로 읽으면, 그것에 의해 벤야민이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지를 잘 모르겠고, 수수께끼로 가득 차 있어요. 적어도 일본에서 신적 폭력은 아나키스틱한 폭력으로 이해되고, 그렇기에 1960=70년대의 일본에서는 국가의 철폐 등을 향한 논의로서, 좌파적 맥락에서도 유행했습니다. 그런데 이치노카와 씨의 독해는 다르던데요?

이치노카와 : 다릅니다.

히가키 : 우선 폭력 비판을 위하여」가 로자 룩셈부르크(1871-1919) 추도문이라고 보시는군요.

이치노카와 : 그 점에 관해서는 저는 확신하고 있습니다. 벤야민은, 물론 로자 룩셈부크르만을 염두에 둔 것은 아니겠습니다만, 그가 게르숌 숄렘(1897-1982)에게 보낸 편지(19201229)에 비춰봐도, 로자 룩셈부르크가 이 때의 벤야민의 염두에 없었다는 것은 절대로 없어요.

히가키 : 또 하나는 신적 폭력에 대해서, 이치노카와 씨는 자크 데리다(1930-2004)를 비판하면서, 이는 의회제 민주주의를 구하는 폭력이라고 말씀하시네요.

이치노카와 : 굳이 말한다면 그렇습니다.

히가키 : 이것은 꽤나 아슬아슬한 독해 아닙니까?

이치노카와 : 그렇다고 생각합니다. 줄타기 곡예를 벌이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미 줄에서 떨어지고 있다는 비판도 있겠지만(웃음).

히가키 : 일반적으로 신적 폭력은 메시아적 폭력, 즉 세계를 모조리 망가뜨린다고 일컬어지는 폭력이라고 읽히고 있습니다. 그런데 신화적 폭력은 피 냄새를 풍기는 폭력이기는 하지만, 신적 폭력은 피 냄새가 나지 않는 폭력이라고 얘기됩니다. 그리고 단순한 생명은 서양근대에서 지난 수십 년 동안의 논의에 지나지 않지만, 신적 폭력은 모든 생명에 있어서의 것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벤야민은 조르주 소렐(1847-1922)을 높이 평가하는 것처럼 보이는데, 보통 소렐은 아나키즘으로 이해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치노카와 씨는 소렐과 달리, 벤야민이 말하는 신적 폭력이 의회제 민주주의를 잇는 폭력이라고 말합니다.

이치노카와 : 그렇습니다. 하지만 저는 로자 룩셈부르크도 비판한 유일-의회주의(-議会主義)”를 제창하는 것이 전혀 아닙니다. 그건 오해하지 않았으면 합니다. 그리고 저더러 말하라 한다면, 소렐이 폭력론(1908)에서 자신의 생디칼리즘을 분명히 신화(mythe)’라고 표현하고 있고, 다른 한편, 벤야민은 신화적(mysthisch)’이 아니라, 일부러 이것과 구별해서 신적(göttlich)’이라고 말하고 있기에, 그것을 무시하고 벤야민과 소렐의 생각을 그대로 같다고 풀이하는 것은 소박하다고 생각하고 이상하다고 여기는 것입니다.

히가키 : 다만 역사의 개념에 대해서를 읽으면, 우리가 살아온 역사 등은 지구의 역사로부터 보면 단 몇 초에 불과할 뿐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시간의 막대기가 균형을 이뤄 현재시(Jetztzeit)”가 되며, 모든 시간이 수평이 되는 곳에서, 모든 과거의 것이 일어나서 구제된다. 이것은 엄청나게 종교적이고 메시아적인 비전입니다. 이것과 신적 폭력이 이어지지 않을 수 없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이치노카와 : 그것은 인정합니다. 다만 주의해야 할 것은, 첫째로, 벤야민이 Zur Kritik der Gewalt(폭력 비판을 위하여)에서 논하는 ‘Gewalt’라는 독일어에는, 예를 들어 ‘Gewaltenteilung’삼권 분립을 의미하듯이, “정당성을 갖춘 권력이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벤야민은 ‘Gewalt’라는 말에 폭력뿐 아니라, ‘정당성을 갖춘 권력’, 라틴어로는 ‘potestas’라는 의미를 담아내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앞의 아렌트 얘기에서 히가키 씨는, 철학은 권력도 자연력도 똑같이 으로 이해했다고 말씀하셨지만, 그때의 potestas’가 아니라 ‘potentia’(독일어로 말하면 ‘Macht’), 즉 정당성 같은, 이렇게 말해도 좋다면, 인간적인 노모스의 옷을 입은 것을 모조리 벌거벗긴 힘이라고 생각합니다. 근대에 들어와 ‘potestas’ 대신 ‘potentia’가 전경화됐다고 저는 이해했습니다만, 아무튼 벤야민의 주제는 ‘Macht’(‘potentia’)가 아니라 ‘Gewalt’ (‘potestas’)입니다. 이로부터 두 번째로, 푸코가 말하는 통치성(gouvernementalitaté)’과 결부시켜 말한다면, ‘Gewalt’의 원형 동사인 ‘walten’통치하다라는 의미라는 것. 셋째로, 벤야민은 이 논고에서 ‘Gewalt’의 폐절을 역설한다고 해석하기는 어렵다는 것. 아무리 생각해도, 여기서 벤야민은 ‘göttliche Gewalt’(‘신적 폭력혹은 통치’)를 긍정하고 있으며, 이 논고는 ‘waltende Gewalt’(통치하는 통치)라는, 어떤 의미에서 동어반복적인 것의 희구로 끝을 맺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 논고의 마지막 단락에는 ‘Entsetzung des Rechts samt den Gewalten’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Entsetzung’은 지금까지 폐절이나 비정립’, ‘탈정립등으로 번역되었습니다만, 어떻게 하는 게 좋을까요? ‘Entsetzung’이 법을 정립하는(rechtssetzend) 폭력과의 대비에서 나온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그러나 ‘entsetzen’이라는 독일어는 놀라게 하다’, ‘깜짝 놀라게 하다라는 뜻도 있습니다만, 솔직하게 생각하면, 갇혀 있거나 파묻혀 있거나 해서 옴짝달싹 못하고 있는 뭔가를 거기에서 빼내거나 풀어내기도 하는 것입니다. 실제로 군사용어에서는 적에게 포위된 아군을 구출할 때 ‘entsetzen’이라고 말합니다. 따라서 문제의 말은 “Gewalt를 포함한 Recht(법적 권리)의 구출이라는 의미로도 될 수 있습니다.

히가키 : 다른 곳으로 낸다는 것이죠.

이치노카와 : 그렇습니다. 아감벤의 해석에는 부정신학적인 대목이 있는데, ‘Recht’(법적 권리)‘Gerechtigkeit’(정의), 희망도 갖지 않는 듯이 논의된다고 저는 생각합니다만, 벤야민의 생각은 더 밝다고나 할까, 긍정적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벤야민이 이 논문의 주석 10에서 언급하는 쿠르트 힐러(1885-1972)와 대비시키면 잘 알 수 있습니다. 쿠르트 힐러는 이 주석에서 언급되는 ()-카인(1919)이라는 소론에서, ‘행복(Glück)’이나 정의(Gerechtigkeit)’보다 고귀한 것이 있다, 그것은 (Dasein)자체다, 이렇게 말합니다. ‘행복이나 정의의 실현이라는 이름 아래서 생존[실존]을 부정하는 폭력이나 테러리즘을 허용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 힐러의 주장입니다만, 이것은 뒤집어보면 행복이나 정의에 관한 허무주의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벤야민은 힐러의 이런 생각을 전면적으로 비판하기 위해 이 논고를 썼습니다. ‘단순한 생명이라는 말도, 그런 맥락에서 나온 겁니다.

   또 하나, 이것은 아감벤이 빠뜨린 채 읽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만, 폭력 비판을 위하여에는 단순한(bloss)’이라는 단어가 사실은 두 번, 상이한 형태로 나옵니다. 하나는 힐러의 생각을 비판하는 형태로 나오는 단순한 생명(das blosse Leben)’으로, 아감벤이 주목한 것은 이것입니다. 그러나 그 몇 줄 뒤에 정의를 갖춘 인간단순히 아직 존재하지 않았을 뿐이라는 것(das blosse Nochnichtsein)’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정의보다도 단순한 생명이 고귀한 거야, 정의란 무엇인가를 첫 번째라고 생각할 필요는 없는 거야, 라는 힐러의 비관주의에 대해, 벤야민은 그런 것이 아니라고, 정의는 와야 할 것으로서 확실하게 있다고, 정의는 단순히 아직 존재하지 않았을 뿐이다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게다가 벤야민은 이 두 번째의 ‘bloss’절대로(unbedingt)’라는 단어를 덧붙이고 있습니다. 거칠게 말하면, 벤야민은 정의가 단순히 아직 존재하지 않을 뿐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절대로필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히가키 : ‘bloss’가 두 번 나온다는 거네요. 정말로.

이치노카와 : 아감벤은 그 중 하나에만 주목하고 있을 뿐입니다. 벤야민은 이 논고를 19211월에 탈고했습니다. 2010년대에 살고 있는 우리가 1917년의 러시아혁명을 보면, 그것은 1989년 이후에 붕괴하는 것의 시작, 끝의 시작이라고 아무래도 보이지만, 벤야민뿐 아니라 1921년에 살았던 사람들에게는 시작의 시작으로 보였던 것 같네요. 위대한 가능성을 감춘 무엇인가가 지금 막 시작됐다고나 할까. 그래서 마음 깊은 곳에서, 겁을 먹은 사람들이 아주 많았습니다만. 그런 감각 속에서 벤야민은 ‘Gerechtigkeit’(정의)‘Gewalt’(통치)라는 말을 사용하고 있는 것이며, ‘정의라는 이념을 벤야민은 믿었다고 생각합니다.

히가키 : 그때 정의를 믿었다는 것은 ‘waltende Gewalt’가 지시하는 것은 도래할 공산주의였다는 것입니까?

이치노카와 : 그렇다고 생각합니다. 좌절된 독일혁명의 저편에 있어서 단순히 아직 존재하지 않을 뿐인 공산주의. 이와 똑같은 것을 2010년대의 우리가 일본에서 생각해도 좋다고 봅니다. 현존한 사회주의와 결별하면서 말입니다.

카스가 : 저는 오늘을 위해 벤야민을 다시 읽어보고 꽤 흥분했어요. 아까 말씀드렸듯이, 아감벤은 주권자를 거론하더라도, 결국은 인간화한 것입니다만, 벤야민은 인간을 다시 한 번, 신 쪽으로 끌고 가는 느낌이 있습니다. 근대란 인간이 초월적인 관점을 갖는 것이며, 이에 대해 푸코는 시점(視點)을 분산시켰습니다. 그러나 벤야민에 따르면, 초월자의 관점은 인간에게는 다다르지 않는 것이며, 폭력 비판을 위하여는 인간에게 더 신성함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지금까지도 손에 넣지 못했던 비근대라고도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치노카와 : 맞아요. 신적 폭력은 인간의 눈에는 감춰져 있다고 벤야민은 말하더군요.

카스가 : 인간적 허무주의. 인간으로서 읽기 때문에, 더욱 허무주의가 된다는 하이퍼-세계.

이치노카와 : 제 해석도 아직 너무 인간적인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만, 폭력 비판을 위하여를 쓸 무렵, 벤야민은 이미 에른스트 블로흐(1885-1977)와 친했습니다. 블로흐의 유토피아의 정신(1918)도 출판된 직후에 읽었고, 당시의 편지를 보더라도, 벤야민이 이 책에 상당히 촉발을 받았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벤야민의 생각은 소렐의 그것과 동일시할 수 없듯이, 블로흐의 그것과도 동일시할 수는 없습니다만, ‘유토피아’, 그리고 블로흐의 나중의 주제인 희망같은 것과 벤야민의 폭력 비판을 위하여를 연결해서 읽을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더 말한다면, 블로흐를 통해서 저는 벤야민과 루디 두츠케(Alfred Willi Rudi Dutschke, 1940-79)를 연결해서 생각하고 있습니다. 두츠케의 연장선상에 있는 오늘날의 독일의 녹색당을 포함해서 말입니다. 이 노선(line)은 일본에서는 생겨나지 않았습니다. 적어도 힘을 가질 수 없었고, 일본이 지금과 같은 상황이 되는 한 요인도 거기에 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아무튼 단순히 아직 존재하지 않을 뿐인 것에 대한 강한 신념이, 적어도 폭력 비판을 위하여의 벤야민에게는 있습니다. 그것이 아감벤에게서는 사라집니다. 아마 이 두 번째의 ‘bloss’를 빠뜨리고 읽기 때문입니다.

히가키 : 그것은 알고 있습니다.

 

비오스조에

히가키 : 아감벤이라고 하면, 또 하나, ‘비오스조에의 구별이 잘 알려져 있습니다. 다만 최근의 뇌신경계적 자기라든가, DNA 수준에서의 사체에 있어서의 생명의 파악 같은 얘기를 보면, 비오스로서의 나의 이 신체로는 다뤄질 수 없습니다. 나의 면역계, 나의 뇌신경계의 움직임, 나의 세포 속의 DNA라는 것을 조작하는 것이 가능해졌을 때, ‘조에라는 말이 딱 들어맞는 곳이 있는 것 같습니다.

이치노카와 : 확실히, 개체로서의 비오스라는 리얼리티는 약해지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카스가 : 조에의 일부이기 때문에.

히가키 : 그래요. 다만, 난민이라든가, 양로원 등에서 아무도 찾아오지 않고 단순히 살아 있는 사람에 관한 장면에서 얘기되는 조에와, 나의 뇌신경계를 나는 어찌할 수가 없으나, 그것이 무엇인가를 산출하고 있다는 장면에서 얘기되는 조에, 이렇게 둘 다가 있으며, 논의가 분분합니다.

카스가 : 후자의 논의는 중요하다고 생각하지만, 수상쩍은 얘기라고나 할까, SF적인 이야기도 많잖아요. 극히 일부만을 다루고 페티쉬해버립니다. 예를 들어, 심해에 있는 혐기성 미생물 등은 유전자의 구조가 점점 바뀌고 있는데요, 그것만을 갖고 생명을 말해버립니다.

히가키 : 철학에서도 한때, 뇌신경 윤리가 유행했지만, 이런 뇌파가 생기면 이런 이미지가 나타난다는 식의 단순한 것을 사용해 프라이버시에 관해 논의하는 정도일 뿐, 그 다음부터는 더는 아무것도 나오지 않습니다. 그러면, 기술이 진전되어 정교하고 치밀해졌을 때 어떻게 될지는 지금 단계에서는 아직 뭐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카스가 : 다만 정말로 급진적인 것은 나오지 않았네요. 두 개의 머리를 지닌 하나의 신체라든가, 두 개의 신체를 지닌 하나의 머리 같은 것은. 기술적으로 가능했다고 해도, 그런 것은 절대로 만들지 않죠. 비교적 상상하기 쉬운, 조금 괴이한 테크놀로지만이 나옵니다.

이치노카와 : 개체로서의 비오스의 윤곽을 무너뜨리는 얘기입니다만, 게놈연구 등은 오히려 사적 소유의 논리로 진행되고 있지요. 지적 재산권 등을 말하고 있습니다만. 분명히 생명이 조에로서 보이는 장면이 늘고 있지만, 경제와 사회의 논리로부터 보면, 이전보다 더 사적 소유의 틀이 강해지고 있는 듯 보입니다.

히가키 : 거꾸로 강해지고 있군요. 이것은 나의 유전자이다, 라고 말이죠.

이치노카와 : 혹은 내가 발견한 유전자라는 식이죠. 지적 재산권이라는 의미에서의 사적 소유의 논리가 강화되고 있습니다.

카스가 : 마릴린 스트라썬(Marilyn Strathern, 1941~)도 쓰고 있습니다만, 간염 항체를 만들 때, 그 소유권은 최초로 세포를 제공한 사람에게도 있는 것이 아니냐라는 논의가 이뤄집니다.

Marilyn Strathern에 대한 이미지 검색결과

마릴린 스트라썬

이치노카와 : 개체로서의 생명은 끝나더라도, 사적 소유의 논리는 계속 살아 있습니다. 계속 살아 있을 뿐만 아니라 강해지고 있잖아요.

히가키 : 정말 그렇군요. 근대를 넘어서는 것이 나타난다고 말하기도 하지만, 그것을 파악하는 것은 근대의 논리 밖에는 없습니다.

카스가 : 그때 생명권력은 강력한 것으로서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치노카와 : 결국 자본제를 어떻게 생각하느냐가 생명권력론에 있어서 큰 문제라고 생각해요. 그 점을 분명히 전면화하는 것은 네그리로, 거기서는 아감벤과 크게 다르다고 생각합니다.

카스가 : 생명권력론의 장점은 인간이 생물학적인 생명의 주인이라는 것과 사회적인 존재라는 것, 이 두 가지를 함께 파악하는 데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 특집에 기고한 논문에도 썼지만, 우리의 사유는 자연적인 것과 사회적인 것, 혹은 법칙과 가치라는 두 가지의 것을 조합시킴으로써 작동합니다. 따라서 지금의 생명권력론에서 제가 못마땅하게 생각하는 것은, 생명권력론을 어떻게 사용하는가라는 논의는 많은데, 왜 이렇게 간단하게 생명권력이라고 말할 수 있는가라는 논의가 없다는 점입니다. 이미 우리 내부에 그런 사유의 이분화 기계가 제대로 들어 있는데도, 그것을 묻겠다고 하지 않습니다. 그것을 묻고자 하는 것이 서두에서 이름이 나온 비베이로스 데 카스트로입니다. 특히 중요한 것은 그가 반자연주의를 존재론으로서 가져왔다는 곳에서, 인식론으로서 가질 수 있다면 단순히 다문화주의의 하나가 되어버리지만, 존재론으로서 가지고 옴으로써 우리의 사유양식 자체를 다시 묻는 것을 시도하고 있습니다.

 

사회학의 최전선

사회학에서의 생명권력론의 최전선이라고 하면, 어떤 것이 되고 있나요?

 

이치노카와 : 저한테 사회학을 대표해서 말할 자격이 있는 건 아닌데, 개인적으로 생각하는 것은, 한 가지는 생명권력이라는 개념을 모방한 역사연구는 아닐 겁니다. 이것은 실제로 늘고 있고, 앞으로도 늘어날 겁니다. 실제로 의료나 복지에 관한 역사사회학적 연구는 늘고 있고, 젊은 사람들이 저보다 훨씬 훌륭하게 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그런 역사연구는 생명권력이라든가 생명정치라고는 말할 필요가 없네요. 제 자신이, 요네모토 씨 등과 우생학과 인간사회 : 생명과학의 세기는 어디로 향하는가(優生学人間社会──生命科学世紀はどこへかうのか)(講談社現代新書, 2000)를 썼을 때에는, ‘생명권력이나 생명정치라는 말을 전혀 쓰지 않았습니다. 그런 개념을 쓰지 않고도 역사는 쓸 수 있습니다. 오히려 이런 연구들에 의해 묘사되는 사실 자체가 생명권력생명정치라는 개념의 외연을 자동적으로 점차 메워준다고 생각합니다. 뒤집어 말하면, ‘생명권력이나 생명정치라는 개념은 내포가 공허하고, 그 공허한 그릇이 실증적 역사연구에 의해 메워진다고 생각합니다.

優生学と人間社会에 대한 이미지 검색결과

   다른 하나는 요네모토 쇼우헤이 씨 식의 바이오폴리틱스연구로, 저는 이것에서 조금 멀어졌지만, 이런 연구는 향후에도 더더욱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푸코도 감안한 가유카와 준지(粥川準二) 씨의 바이오화하는 사회 : ‘핵시대의 생명과 신체(バイオする社会──「核時代生命身体)(青土社, 2012) 같은 작업입니다. 참고로 독일에서 바이오폴리틱스(Biopolotik)’라는 말을 제목으로 내걸고 출판되고 있는 책이나 논문은, 물론 푸코나 아감벤을 논한 것도 절반 정도가 있습니다만, 나머지 절반은 요네모토 씨 식의 바이오폴리틱스’, 즉 생명과학의 문제들에 관해 어떤 정치적 결정을 할 것인지에 관한 것입니다. 구체적으로는, 착상 전 진단, 배아연구, ES세포연구 등을 인정할 것이냐 말 것이냐, 인정한다면 어떤 조건에서 인정할 것이냐 등의 얘기입니다. 2001년에 독일에서는 주로 생명과학에 관한 국민윤리평의회(Nationaler Ethikrat)라는 것이 설립되고, 2008년에 독일윤리평의회(Deutscher Ethikrat)로 개칭됐는데, 이런 식으로 바이오폴리틱스가 이른바 제도화되기도 했습니다. 다만 독일에서는 특히 생명의 시작에 관한 것에 얘기가 집중되고 있네요. 일본에서 문제가 되는 뇌사를 비롯한 생명의 끝에 관한 것은 그다지 열띠게 논의되고 있지 않습니다.

バイオ化する社会에 대한 이미지 검색결과

히가키 : 그건 기독교의 맥락과도 관계되어 있습니까?

이치노카와 : 그렇다고 생각합니다. 생명의 끝에 관한 얘기보다도, 예를 들어 배아(체외수정란)를 실험에 사용해도 좋은가 같은 것이 아주 진지하게 논의되고 있습니다.

히가키 : 위화감이 드는군요.

이치노카와 : 일본의 우리라면 그렇게까지 진지해지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할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유전자를 조작하는 게 좋은가라는 문제를 포함해서, 이것들에 관한 논의에는 기독교적인 것이 상당히 농밀하게 들어가 있습니다. 특히 독일은 프랑스 같은 라이시테(정교분리)의 원리로는 움직이지 않으며, 예를 들어 기독교민주동맹이라고 당당히 이름을 내걸고 있기에, 바이오폴리틱스를 포함해 정치 일반에 종교(기독교)가 강하게 들어 있습니다. 독일에서는 생명윤리의 문제들에 관해서, 나치라는 과거가 있기에, 타국보다도 신중하고 엄격한 대응이 이뤄진다고 자주 듣곤 합니다. 확실히 그런 부분도 있지만, 나치라는 지나가지 않는 과거는 사실상 표면적인 것이며, 그 이면에는 기독교 도덕이 무의식에 가까운 형태로 강하게 작동하고 있다고 보는 게 좋은 부분도 있습니다.

히가키 : 반대로 일본을 보면, “자연으로 돌아간다”, “흙으로 돌아간다는 발상이 있는데, 어째서 뇌사의 얘기가 되면, 그렇게까지 죽음의 기준이 문제가 되는가?

이치노카와 : 그것에 대해서는 나도 아직 확실한 것을 말할 수 없습니다만, “일본()에는 정신을 신체보다 우월하게 하는 서양근대의 데카르트적 심신이원론과는 다른 독자적인 신체관생명관이 있었다고 운운하는, 한때 일본에서 유행했던 비교문화론에는 별 근거가 없다고 장담할 수 있습니다. 실제로 柳田園男장례제도 연혁 사료(葬制沿革史料)(1934) 등에서 써서 남긴 넋을 부름[魂呼ばい]”, 즉 죽기 직전의 사람의 이름을 큰소리로 부르기도 하면서, 그 사람의 혼이 육체로부터 떠나는 것을 불러 세운다는 풍습은 심신이원론 없이는 성립하지 않습니다. 다른 한편, 서양 근대의학은 정신을 신체보다 우월하게 여기는 것 등은 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아까 나온 비샤의 텍스트를 읽으면, 곧바로 알 수 있습니다. 비샤는 정신에 상당하는 동물적 생명보다도 신체에 상당하는 유기적 생명을 중시하며, 후자가 소멸할 때까지는 의학적으로 봐서 사람이 죽었다고 말해서는 안 된다고 말합니다(신체/생명참조). 서양 근대의학이 데카르트적 이원론에 의거하고 있다면, 비샤는 정반대의 것을 말해야 할 테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게다가 비샤는 분명히 오늘날의 뇌사와는 다릅니다만, “뇌의 죽음이라는 개념을 이미 제시하고 있고, “뇌의 죽음을 갖고서 사람의 죽음으로 하는 것은 너무 이른다고도 말하는 겁니다.

  이로부터 또 하나, 일본에 대해 말할 수 있는 것은, 가족이라는 신체, 가족이라는 경계의 강함입니다. ‘身内[친척]이라는 일본어가 상징적입니다만, 자신의 身内[친척]의 장기를 身内[친척]도 아무것도 아닌 생면부지의 사람에게 제공하는 것에 대한 강한 저항감이 있으며, 그것이 뇌사상태의 사람으로부터의 장기적출에 제동을 걸고 있다는 측면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다른 한편, 많은 사람들은 身内[친척]이 제공자가 되는 생체장기이식, 특히 생체간이식은 일본에서 구미국가들보다 훨씬 많이 실시되고 있습니다. 게다가 인구 비율로 보면, 생체간이식은 일본보다도 한국에서 많이 실시되고 있습니다. 일본이나 한국에서는 생체간이식에 대한 저항감이 약하지만, 히포크라테스에게서 유래한 해를 끼치지 말라(non nocere)”를 의료윤리의 기반으로 삼고 있는 구미에서는, 아주 건강한 사람의 신체에 메스를 집어넣고, 게다가 간의 일부를 잘라내는 것에 의사들이 강한 저항감을 갖고 있습니다. 장기기증자에 대해서는 해를 입힌다는 것 이외의 것이 없으니까. 일본에서는 가족이라는 경계의 내부에서 장기가 이동하는 생체간이식에 대해 저항감이 약하고, 가족이라는 경계를 넘어서 장기가 이동하는 뇌사상태의 사람으로부터의 장기이식에 대해서는 거꾸로 강하다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던 것입니다만, 나의 이 가설은, 2009년의 장기이식법개정 때에 도입된 친족 우선 제공으로 부분적으로 뒷받침됐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규정이 있는 것은, 현재의 일본과 일본의 것과는 다르지만 한국 정도입니다.

  푸코의 텍스트에 적혀 있는 우아한 철학적 논의는 아니지만, 이런 것도 생명권력이나 생명정치의 한 측면으로서, 적어도 사회학적으로는 생각하면 좋다고, 아니 생각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다테이와 신야(立岩真也) 씨가 그동안 주도해 왔던 생존학이나, 다테이와 씨나 제가 거의 10년 정도 관계해온 장애학(disability Studies)”을 언급하고 싶습니다. 장애학에서는 “disability”라는 말을 가능성 박탈이라는 의미로 사용합니다. , 장애를 가진 사람이 그 물리적신체적 상태를 이유로 다양한 가능성을 빼앗기고 있는 사회의 구조나 짜임새를 문제 삼으면서, 장애학은 그 개혁을 요구합니다. 푸코가 말하는 죽음 속으로의 폐기라는 것은 이 가능성 박탈의 극한 형태라고 말해도 좋다. 그러나 이런 가능성 박탈의 구조를 바꿔나가는 것은 삶의 가능성을 증대시키고 증식시킨다는 것이기도 하며, 그래서 생명권력의 한복판에 있다는 것이기도 합니다. “권력이 있는 곳에 저항이 있다”, “저항은 권력에 대해 외부에 위치하는 것이 결코 아니다라고 푸코는 말했습니다만(지식의 의지), 그것은 장애학에 대해서도 말할 수 있습니다. 복지국가나 제가 말한 바의 사회적인 것은 확실히 생명권력의 산물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것들을 안이하게 파괴할 수는 없으며, 해서는 안 됩니다.

   이와 관련시켜 더 말하면, 푸코가 강의 생명정치의 탄생에서 다룬 ()자유주의는 생명권력이나 생명정치와 어떤 관계에 있는가? 왜 푸코는 생명정치를 자유주의라는 맥락에서 말하려고 했는가? 자유주의나 신자유주의는 생명권력의 한복판에서 저항이라는 주름을 다양하게 산출해내는 것인가? 아니면 저항을 빼뜨리고 생명권력이나 생명정치를 더욱 매끈하게 확장하고 비대화시켜가는 것인가? 푸코가 정말로 무엇을 생각했는가, 내게는 아직 잘 이해할 수 없습니다.

 

인류학의 최전선

이치노카와 : 인류학에서 생명권력론의 최전선이라고 하면, 어떤 것이 되나요?

카스가 : 하나는 모든 것에 행위자(agency)를 배분해간다는 사고방식입니다. 이것은 라투르에게도 통하며, 비베이로스 데 카스트로도 스트라썬도 그렇습니다만, 들뢰즈에 겹쳐지는 논의라고 생각합니다. 스트라썬은 영국 경험주의에서 출발해, 동일성이라는 것이 성립되지 않은 곳에서부터 논의를 시작한다. 프랑스의 사상에서는 전혀 언급되지 않는다. 그녀는 우선 경험주의자로부터의 반론에 대해 자신 나름대로 방어벽을 치면서, 안쪽으로 생성하는 간극에 주목하고 있습니다. 자신이 보고 있는 눈으로부터의 간극이, 자신이 알려고 하는 대상과 반향하며, “lateral reflection”(수평적 반향)을 초래하며 타자로 연결되어 간다. 이것은 매우 들뢰즈적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관점에서 생명정치생명권력을 생각해보면, 이치노카와 씨가 말한 게놈의 사적 소유의 얘기에 있었던 것처럼, 사람과 물건을 나눠서 소유자로서의 주체를 만들어낸다고 하는 방식이 얼마나 특수한지를 잘 알게 됩니다. 증여론이 좋은 예인데요, 인격이라는 것은 물건에 나타나며, 얼마든지 분할되며, 멜라네시아에서는 누군가가 갖고 있는 것을 모두 먹으면 인격이 사라진다. 그런 인간의 존재방식에 주목하여 분석의 수법을 발전시키는 것은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만, 현재까지의 과학기술론의 일부를 빼면 그다지 하고 있지 않습니다.

   둘째, 아나키스트 인류학을 위한 단장(アナーキスト人類学のための断章)(2004)을 쓴 데이비드 그레이버(1961~)처럼, 증여론이 점점 짓눌러지고, 근대에 대한 전근대적인 것을 이항대립적으로 나오게 되는 논의가 있습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푸코가 감시와 처벌에서 제시한 전근대적인 것이 여러 곳에서 보입니다. 예를 들어 피지에서는 선교사가 들어왔을 때 부활에 대해 얘기하는데요, 피지인들에게는 부활이라는 관념이 없다는 것을 압니다. 아까 얘기가 나온 아폴로시 나와이도 그렇습니다만, 불사성이랄까, 아무리 저주받아도 죽지 않는다는 것을 강조한다. 그러면 죽음이라는 개념이 없느냐 하면, 그것은 있으며, 그러나 여기저기에 떨어져 있는 것이라고 생각되고 있다. 그것은 생기가 사라졌다고 함으로써, 병을 포함해, 쓸 수 있는 것이 못쓰게 되는 사태를 똑같이 생기가 사라졌다고 말한다. 그런 생명의 시각을 감안하면, 생명권력의 외부에는 실로 다양한 것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셋째, 비베이로스 데 카스트로의 논의가 있습니다. 이것은 관점이라는 것에 주목하는 것으로, 재규어와 인간이 다른 것은, 관점이 다르기 때문이 아니라 신체가 다르기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발상입니다. 그리하여 유럽적 보편주의나 일원적 자연주의에 대해, 다문화주의를 내세우는 것이 아니라 다자연주의를 제기하고 있습니다.

이치노카와 : 다문화주의가 하나의 자연, 많은 문화라는 문제 기제라고 한다면, 다자연주의는 하나의 문화, 많은 자연이라는 말인가요?

카스가 : 문화라기보다는 인간이네요. 모든 인간. 관점은 모두 마찬가지이고, 인간도 재규어도 마찬가지라고 말한다.

이치노카와 : 다만, 그것도 하나의 문화 아닌가라고 말할 수 있다는 기분이 듭니다만.

카스가 : 그런 반론은 시종일관 당하고 있습니다.

이치노카와 : 아까 카스가 씨는 다자연주의를 인식론으로서가 아니라 존재론으로서 갖고 온 곳에 비베이로스 데 카스트로의 중요성이 있다고 말씀하셨는데, 인식론이 아니라 존재론으로서, 라는 것은 단순한 문화로 이야기를 회수하지 않는다는 대목이 중요한 거네요.

카스가 : 거기서 큰 것은 역시 사이언스입니다. 사이언스의 힘은 리얼리티가 대단하다. 실제로, 생명과학은 하드 사이언스화하고 있으며, 그 힘에는 대단한 것이 있습니다. 그런데 푸코에 기대를 걸고 있는 인문계 사람은 상대주의적인 이해를 하기 쉽죠?

히가키 : 생명에 대해서요.

카스가 : 인문계 사람이 생명이라고 말할 경우, 19세기에 말하는 것과 지금 말하는 것에는 의미가 완전히 다른데, 자연과학계 사람들은 동일한 의미에서 계속 사용하고 있다. 그것을 인문계 사람이 어떻게 읽는가를 생각한다는 것이 일어나는 것인데요, 최종적으로는 사이언스의 힘이 이긴다.

히가키 : 젠더론 등에서 구축주의가 너무 강한 것 아닌가요? 그래도 소박하게 생각하면, 퀴어적인 것은 자연이 산출하고 있는 거죠? 그것을 남녀로 나눠서 고정화하는 것이 문화이기 때문에, 자연이라는 것은 형편없는 것으로 정해져 있다. 그런데 자연은 일의적으로 정하고 있지만, 문화는 다양한 독해를 한다는 예전의 사회학적 말투가 있었잖아요? 니콜라스 로스도 쓰고 있는데요, 인종 문제도 마찬가지죠. 어떤 인종인지는 문화적으로 결정되는 것이며 자연본질주의는 안 된다고 말합니다만, 자연을 유전자 수준에서 보면, 인종은 뒤범벅되어 있게 마련입니다. 그렇게 하면 인종문제에 대한 관점도 바뀌는 것을 기대할 수 있다. 그것이 다자연주의의 한 가지 의미라고 생각합니다.

이치노카와 : 지금 얘기에 촉발되어 말하자면, 사회학적 사고의 대명사 같은 구축주의로는 전혀 불충분하다고 제 자신은 생각합니다. 구축주의가 말하는 것은 옳지만, 지나치게 옳아서 무의미한 곳이 있다. 특히 실천적으로는.

카스가 : 처음부터 답이 나오고 말았다.

이치노카와 : “문화는 자의적으로 구축된다고 말하지만, 그 자의적인 문화를 막상 바꾸기 위해서는, 카스가 씨가 말씀하신 사이언스에 의해 보편적인 것, 불변적인 것을 열고, 들이대지 않으면 안 되는 것도 있습니다. 그 일례로, 남성동성애를 형사처벌의 대상으로 한 독일제국형법(1871)175조를 둘러싼 투쟁을 들 수 있습니다. 175조의 철폐를 목표로 한 게이 해방의 주도자의 한 사람은, 자신도 게이였던 성과학자 마그누스 히르쉬펠트(Magnus Hirschfeld, 1868-1935), 그들은 과학적-인도적 위원회(Wissenschaftlich-humanitäres Komitee)”라는 조직을 1897년에 꾸리고, 175조의 철폐운동을 전개했다. 여기에는 실은 벤야민을 얘기한 대목에서 언급한 쿠르트 힐러도 가담하고 있습니다. 힐러는 조금 다른 이유로 이 운동에 가담했습니다만, 히르쉬펠트[허쉬펠드]의 입론은 이러했습니다. 동성애자는 옛날에도 지금에도 일정한 비율로 반드시 생긴다. 그것은 자연의 섭리이며, 동성애에는 선천적인 기초가 있다. 자연(퓌시스)이 산출하는 그런 존재를 법률(노모스)에 의해 부정하고 처벌하고 박해하는 것이 과연 인도적인 것인가라고. 베를린에 있을 때, 히르쉬펠트[허쉬펠드]와 그의 성과학연구소의 기념비를 독일인 지인이 알려줘서 보러 갔는데요, 거기에는 처음에 “per scientiam ad justitiam”(과학에 의해 정의로)라는 히르쉬펠트[허쉬펠드]의 신조가 라틴어로 새겨져 있었다.

   문화를 바꾸기 위해 히르쉬펠트[허쉬펠드] 등은 자연, 그리고 과학으로 향해야 했다. 175조가 자연에 대치되는 문화, 존재에 대치되는 당위, 즉 인간의 구축물인 것은, 이 조문의 철폐를 완강하게 인정하려 들지 않았던 사람들에게는 당연한 얘기입니다. 그런 것을 지적한 곳에서 아무것도 바뀌지 않는다. 문화라는 것은 마음먹기에 따라 바꿀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실제로 바꾸기 위해 히르쉬펠트[허쉬펠드] 등은 자연에 의거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푸코를 인용하면서 과거의 성과학은 본질주의적이기 때문에 천박하고, 구축주의에 서 있는 우리는 깨어 있는 사람들이다라는 얘기가 자주 이뤄집니다. 성과학을 무조건 긍정할 생각은 내게도 없지만, 적어도 성과학에 관한 구축주의자의 얘기에 대해서는 그래?”, “정말로 그럴까?”, “천박한 것은 당신들 아닐까?”라는 생각을 금치 못하겠다. 자연의 논리에 의해 문화가 고쳐 쓰여진[변조된] 후에야, 구축주의는 그러니까 문화는 가변적이다라고 말할지도 모르지만, 구축주의 그 자체는 문화를 실제로 바꾸는 힘을 갖고 있지 않다. 구축주의가 말하는 바는 옳지만, 그것은 추수[뒤쫓기]의 논리일 뿐이다.

   아까의 장애학도 구축주의적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중요한 것은 거기에서도 자연과 신체입니다. 예를 들어 눈이 보이지 않는다는 자연적 신체를 기반으로 삼아, 사회와 문화를 어떻게 바꿀 것인가, 만들어나갈 것인가가 문제이며, 장애라는 이미지가 사회적으로 구축된다는 얘기가 아니냐고 나는 생각합니다.

히가키 : 눈이 보이지 않는 사람은 청취 능력이 3배에서 4배라는 얘기가 있잖아요.

이치노카와 : 사람마다 다르다고 생각합니다만.

히가키 : 뇌과학이 진전되고 그런 것이 밝혀지게 되면, 장애학에서의 해방으로도 연결된다. 

이치노카와 : 확실히 그런 부분은 있다. 인지뇌과학의 사카이 구니요시(酒井邦嘉) 씨가 씨름하고 있는 수화의 뇌연구도(언어의 뇌과학 : 뇌는 어떻게 말을 산출하는가(言語脳科学──はどのようにことばをみだすか)(中公新書, 2002), 귀머거리 문화에서는 환영하는 사람이 많으며, 그것이 조금씩 밝히고 있는 수화의 뇌에서의 처리는 기본적으로 음성언어와 다를 바 없다라는 지식은, 구화주의口話主義 속에서 항상 덜떨어진 것으로 간주된 수화를 다른 것과 대비해 아무런 손색도 없는 언어로서 재위치시키는 하나의 근거를 주고 있다.

酒井邦嘉에 대한 이미지 검색결과言語の脳科学에 대한 이미지 검색결과

   과거의 일본의 장애인운동은 기술에 대해 강하게 염려한 적이 있으며, 전동 휠체어도 비장애인이 간호의 손길을 떼기 위한 것이라며 비판했다. 그 비판에는 지금도 귀를 기울여야 할 것이 있다고 생각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기술에 의해 새로운 신체와 문화가 열린다는 모멘트를 부정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올해[2012] 런던 올림픽의 광고는 휠체어나 의족으로 경기하는 선수들의 모습을 생생하게 보여줬는데, 장애인의 신체가 비장애인에 가까워지고 있다기보다는, 휠체어나 의족에 의해 새로운 다른 신체의 가능성이 열리고 있는 것처럼 내게는 느껴졌습니다. 문자가 전자 정보화됨으로써 시각 장애인이 얻거나 발신하거나 하는 정보량도 현격하게 높아졌습니다. 자연이나 과학, 기술에 의거함으로써 문화가 바뀌거나 새롭게 만들어지기도 한다는 것은, 다자연주의와의 관련에서 나 자신, 잊지 않고 싶습니다.

카스가 : 제 세미나에는 발달장애 학생이 있는데요, 다양한 능력을 계산하면, 보통은 복수의 능력이 평균적으로 되고 있는데, 그 학생의 경우는 분명한 편향[쏠림]이 있다. 그것이 장애라고 불리고 있지만, 이것은 재능 아닌가 싶네요.

이치노카와 : 확실히 그렇네요. 다만 그 재능도 측정에 의해 가시화된다는 부분이 있겠네요. 그런 가시화도 사이언스의 힘이라고 생각합니다. 좋은 것만 있는 것은 결코 아니겠지만


(제2부 끝)

Posted by 상겔스 상겔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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