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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론

이치다 요시히코(市田良彦)


목차

 

서장. 오늘날의 시점時點 : 윤리적 정치

무차별이 된 거처’ / 악을 제거하는 정의의 정치 / 합의의 정치에 의한 시장공산주의

 

1. 대상으로서의 예외, 주체화하는 예외 : 아감벤, 알튀세르, 네그리

혁명아우슈비츠로 뒤바뀌다 / 철학과 정치의 묻지 못한 관계 / 우연성 유물론의 윤리와 수용소 / 매개의 존재자/ 구성적 권력의 정치 / 주체에 귀착하는 혁명론 / 주체의 구조’ / 특이하고 예외적인 주체 / 좌익 슈미트주의 / 이탈리아 특유의 상황 / 두 명의 한나 아렌트 / 변화하는 정치적인 것의 자율’ / 주체의 연속성 / 정치를 소멸시키는 혁명 / 주체 속에 있는 결단’ / 스피노자

 

2. 사라지는 정치, 드문(예외적인) 정치 : 데리다파(), 알튀세르, 바디우

정치적인 것의 후퇴 / 주권공동체를 추구[요구]하는 철학 / 밝힐 수 없는 정치적인 것’ / 유일사상에 저항하기 / 겨울의 시대에서 반-전 지구화로 / 좌도 우도 공화국 / 탈구축의 공동체 / 모습을 지우는 본질’ / 늘 예외와 더불어 있는 알튀세르의 주체 / 객체의 예외성에서 혁명 주체의 생성으로 / 반란과 분열하는 인민 대중 / 분기점으로서의 주체 문제 / ‘정치철학은 존재하지 않는다 / 절단이 초래하는 전체성 / 존재의 시 말라르메처럼

 

3. 다중의 살아 있는 정치 : 스피노자를 둘러싼 항쟁

들뢰즈의 혁명 혐오 / ‘명랑한 비관주의’ / 스피노자의 물리학적보수주의 / 기억을 잃은 알튀세르 / 인과성에서 자유인 국가 형성 / 국가 형성과 혁명을 같게하는 정치 / 정치에 작용하는 스피노자적 인과성을 찾아서 / 국가는 비이성적 존재이다 / 그러나 계약 개념의 부재는? / 유일한 원인으로서의 분노’ / 민주주의란 린치이다 / 결과를 인과에 내재시키는 스피노자주의 / 표현과 인과성 의미가 초래하는 지복과 곤혹 / 알튀세르의 장치’ / 결과이고 원인인 나 / 도덕과 착종하다 / ‘가 거울을 깬다 : 희망

 

결론. 발견된 자유 : 푸코와 ()가능한 혁명

전에 없었던 반-사목 혁명 / 통치성과 주체적 자유 : 최후의 수수께끼와 가능성 / 푸코와 ()자유주의 / ‘정치란 통치성에 대한 저항인가?

 

마치며

 

 


 

서장. 오늘날의 시점 : 윤리적 정치

 

 

무차별이 된 거처

정치철학이 유행하고 있다. 케케묵은 탁상공론에 불과했던 철학이 테러나 금융위기나 경제격차에 관해, 심지어 원자력발전소 재해에 관해 아직 뭔가 말할 게 있음을 이 정치철학은 실증하고 있다. 이 정치철학이 사람들에게 받아들여지고 있는 것은 현실적인 어떤 문제에도 비집고 들어가 말하려 하는 진지한 자세와 능력 때문이다. 이것이 다루는 것은 한 마디로 말해서 현상들에 내포된 윤리문제 가치로서의 자유정의이다. 이 때문에 이것이 유행하게 된 배경에는 도처에서 윤리적 판단을 내리려 하는 현대인의 욕구가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 책의 밑바탕을 이루고 있는 것은 바로 이런 정치철학에 대한 위화감, 따라서 현대인의 윤리지향에 대한 깊은 위화감이다. 정치철학이란 그런 것이었는가? 윤리란 이런 정치철학이 문제 삼고 있는 문제였단 말인가?

[거처] 번역하기 어려운 단어 중 하나가 みか이다. 이것은 체재(séjour), 혹은 우리말로는 <살 곳>에 상응하는 단어일 수 있다. 주지하듯이, 체재는 에토스에서 유래한 말이다. 에토스(고대 희랍어 : ἦθος, ἔθος; ethos, 복수형 : ἤθη θεα; ethe, ethea)여느 때와 같은 곳’(ἤθεα ππων)을 의미하며, 이것이 관습특성 등을 의미하는 뜻으로 바뀌었다. 이것 외에도 출발점출현또는 특징을 의미한다. 이를 바탕으로 도덕이나 도덕관의 발로등을 의미하는 θικός (ethikos)라는 말이 생겨났고, 라틴어로는 ethicus로 활용됐다. 또한 그 여성형인 θική φιλοσοφία (ethica)는 옛 프랑스의 ethique, 중세 영어의 ethik를 통해, 현대 영어의 ethics으로 변화했다. 아무튼 みか소굴이라는 통상적인 의미보다는, 잠정적으로 거처, 居場所거주지로 옮긴다.  그러나 '거처'라는 용어보다는 차라리 '터전'이나 '에토스'로 이해하는 편이 낫겠다고 강조해둔다. 

윤리(영어의 ethics)라는 단어의 어원이 된 그리스어 에토스ethos는 사람의 거처와 거기서의 그나 그녀의 존재방식둘 다를 가리켰다. , 에토스에는 사람이 지내는 집이나 토지나 정치적 공동체가 어떤 것인가라는 사실 문제와, 거기서 그/그녀가 어떻게 행동[처신]해야 하는가라는 규범 문제 사이의 구별이 없다. 예를 들어 중용에 의해 스스로를 관습습관이 되게 하라고 역설하는 아리스토텔레스 윤리학에서 관습은 사람이 살아가는 객체적 환경이자 또한 주체적으로 통제해야 할 행위이다. 이 윤리에는 인식의 대상인 사실과 도덕적 가치에서 유래하는 당위라는 근대적 구별이 없다. 오늘날 유행하는 정치철학=윤리학은 그리스적 윤리에서의 이 비구별을 일면에서는 분명히 계승하고 있다. 오늘날의 윤리는 단 하나이자 도처에 있는 거처에 있어서 문제가 되고 있다. 생식기술이나 장기이식부터 국제 분쟁에 이르기까지, 가족 간의 말썽(trouble)부터 지역사회나 국가의 존재방식까지, 심지어 마약부터 자연환경까지, ‘거처가 무엇이든 또 어디에 있든, 오늘날의 윤리학은 거기서의 인간의 보편적인 있는 방식[존재방식]’을 문제 삼아 개입하려 든다. 기술이나 마약이 거처일까? 현대인에게는 인터넷이 바로 그럴 것이며, 중독자에게는 리스크 자체 외에는 자신의 거주지가 없다. 우리를 에워싸고 있는 모든 문제에 대해 말참견을 할 마음이 있는 것이 오늘날의 윤리학자다.

그러나 이렇게 해서는 도덕과 같은 것이지 않을까? 적용 범위의 보편성에 관한 한, 오늘날의 윤리와 그리스도교나 근대의 도덕 사이에 큰 차이가 있는 것처럼 생각되지는 않는다. 좌우당간, 이것들이 설파하는 [인간의] ‘존재방식사람을 죽여서는 안 된다처럼, 시대나 환경, 심지어 거처에 의해 좌우되어서는 안 된다는 명령의 형태를 취한다. 다만 도덕의 보편성은 지상의 거처가 아니라 천상에서 유래한다. 신이 직접 내리거나, 동물 이하의 존재(필연이 지배하는 세계)에 대해 천상에 위치하는 인간의 자유에 기초하여, 도덕적 명령은 내려진다. 도덕의 존립 근거에 사실의 세계는 필요 없으며, 사실의 인식에 도덕은 필요 없다. 데카르트는 그것을 악인도 진리를 인식할 수 있다고 말했다. 그리고 도덕은 어디까지나 자유로운 인간을 선도교화善導教化하려 한다. 이에 반해 오늘날의 윤리는 다양한 방식으로 한정되어 있을 거처를 자꾸 무차별적으로 거처로 간주하는 것, ‘거처인 것, ‘거처로서 등질적인 것의 범위를 자꾸 확대함으로써, 그 보편성을 주장한다. 생명윤리에서 환경윤리로, 심지어 기업이나 대학의 compliance, 어디까지든 적용 범위를 확대할 수 있는 능력에 오늘날의 윤리는 학으로서의 보편성을 판돈[내깃돈]으로 걸고 있다. , 오늘날의 윤리는 지상을 등질화함으로써, 천상에서 유래한 도덕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자 하는 것이다. 이것은 인간보다 더 먼저 지상의 선도교화를 맡으려[이루려] 한다.

[compliance일본어 사전을 보면, 복종, 승낙이라는 뜻 외에도, «외력을 받았을 때 물체의 변형되기 쉬움을 나타내는 양. 로봇 기술 개발 등에 쓰임다른 한편 영어 사전에서 compliance(명령 등의) 준수; (명령 등에) 따름.

오늘날의 윤리에서는 도덕과 똑같은 보편성을 갖는 것이 목적인 동시에 전제이다. 지상의 균질화는 이제 머릿속에서 노력하고 또 이렇게 여기게 되기도 전에, 세계시장의 단일성으로서 사람들의 시야에 불가항력적으로 들어왔다(모두 맥도널드를 먹어!). ‘거처에 한정되지 않는다는 보편성, 도덕의 경우에는 천상에서 유래하기 때문에 가졌던 보편성이, 오늘날의 윤리에서는 거처자체의 무한정성에 의거한다. 여기와 지구의 반대편은 인간의 거주지라는 점에서는 다를 바 없기 때문에, 양자의 경제격차는 윤리문제가 될 수 있다. 이 의존관계에서 오늘날의 윤리는 거처존재방식의 고대부터 불가분했던 관계를 보존하고 있는 것이리라. 현대인은 사방팔방으로 퍼져나가 여기로 되돌아오는 하나의 거처인 지구를 알고 있기 때문에, 고대인이 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거처존재방식의 중립적인 지지대로서, 명령을 기다리는 존재로서, 비슷비슷하게 되어 버리면, 윤리는 더 이상 도덕과의 차이를 주장할 수 없다. 내용이 다양했던 중용, 그 내용이 일의적으로 정해지며(미국과 아시아에서는 예를 들어 사법적 공정함에 차이가 있어서는 안 된다), ‘거처와 관계없이 선험적으로 내려지는 명령과 분간될 수 없게 된다.

[지지대] 일본어로는 皿라고 되어 있다. 는 받침 접시라는 의미가 있으나 비유적으로는 받아들이는 곳’, (사물을) ‘받아들이거나 수용하거나 인수하는 자세나 태세를 가리킨다.  이것을 '지지대'라고 옮긴 것은 support의 번역어가 아닐까 생각해서이다. 참고로 support에는 무엇인가를 실현하는 매개체라는 의미도 있다. 

개개의 거처는 이제 모두 윤리적으로 평등하다. 마찬가지로 거처인 한에서, ‘거처각각의 존재방식은 본질적인 관심의 바깥에 놓인다. 어디서든 거처’라는 면에서는 똑같기 때문에, 특별히 나쁜 거처는 없으며, 그 자체로서 존재해야 한다고 윤리학이 말할 수 있는 거처는 더 이상 어디에도 없다. 윤리학은 팔레스타인 국가와 이스라엘 중 어느 하나를 선택해서는 안 되며, 윤리학을 신봉하는 인간에게는 과거에 강제수용소가 실재했던 이 세계가 그 자체로서 이미 비윤리성을 띠고 있으며, 윤리=도덕의 개입을 끊임없이 기다리고 있다. 하늘의 소리를 대기하고 있는 존재로서 모든 거처는 평등하다. 윤리학거처’, 즉 인간의 공동체나 공동성을 선택하는 , 거기에 우열을 도입하는 일을 하지 않는다. 인간의 도덕적인 존재방식거처습관으로 사실화할 것만을 오늘날의 윤리는 도처에서 요구한다.

정치철학을 오늘날 거의 혼자서 대표하고 있다고 간주되기도 하는 마이클 샌델은 거기에 잠복해 있는 난점을 분명하게 자각하고 있다. 홀로코스트의 생존자가 많이 거주하는 커뮤니티 안을 행진하는 네오나치와 남부의 분리주의자들의 커뮤니티 안을 행진하는 마틴 루터 킹 각각에게 행진을 금지시킬 윤리적 근거는 있을까 없을까? “두 개의 사례를 식별하는 원리적 방식이 있을까? 언론의 내용에 관해 중립적인 것을 취지로 하는 자유주의자에게서도, 또 문제가 되는 커뮤니티에서의 우세한 가치를 따라 권리를 정의하는 공동체주의자에게서도 대답은 아니다일 것이다”(자유주의와 정의의 한계 2판 서문. 강조는 인용자). 네오나치가 신봉하는 공동성과 킹 목사가 지향하는 그것과의 사이에서, 정치철학은 선택할 수 없다. 자신보다 상위의 가치, 따라서 이미 학문적으로 논증하는 것이 아니라 단순히 믿는 것일 수밖에 없는 차원의 <(The)> 정의를 도입하는 것이 아닌 한, 정치철학=윤리학에서는 한 인종 내의 평등과 인종 간 평등 사이에서 우열이 가려질 수 없다. 우열을 가리지 않는 것이 윤리=도덕적으로 옳다. 그러나 그런 불가능을 한다고 해봤자, 무슨 유익한 것이 될까? 어려운 문제라고 학자가 지적을 할 때 이득을 보는 것은, 이 경우에는 분명 네오나치 아닐까? ‘거처의 무차이는 거처’[] 사이의 역사적으로 성립된 관계를, 모두 문자 그대로 무시하게 해준다. 일본도 한국도 중국도 마찬가지로 거처이기 때문에, ‘혐한반일반중도 윤리의 논리 위에서는 피차일반일 뿐이며, 즉 어느 하나에만 퇴장하라고 명할 수 없는 노릇이다. 생각할 수 있는 한, 최대의 거처에 있어서 올바른 존재방식을 요구하는 무한한 정의앞에서는, 기독교 원리주의와 이슬람 원리주의는 계속 등가의 것으로 머물 수밖에 없다.

어떤 공동성도 일단 있으니까 좋다고 승인되며, ‘좋은공동체와 나쁜공동체의 싸움은 믿음취미의 문제가 된다. 이래서는 윤리문제가 과거의 것이라고 치부할 이데올로기 대립과 도대체 뭐가 다를까? ‘믿음취미만으로 정치의 무대 위에서 춤출[행동할] 수 있다는 것은, 나름대로 고생해서 체계로 가다듬었던 이데올로기가 우세였던 시대에 비해 너무 간편한 일이 아닐까? 그런 정치는 단순히 덜떨어진 이데올로기 대립일 뿐이지 않을까? 이 점을 냉정하게 받아들인다면, 국내정치가 인터넷 게시판의 논쟁을 반영하도록 해야 한다는 주장이 반드시 폭력적 논의라고는 할 수 없을 것이다. 근본적으로 새로운 것을 제안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낡은 정치로 해결할 수 없었던 것을 새롭지 않은 제안이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은 분명하다. 게다가 믿음취미는 간편한 것을 본성으로 삼기 때문에 전향은 손쉽고, 멋대로 전향하는 대결의 정치에 안정된 타개책이 찾아오리라고 바랄 수도 없다.

정치철학의 융성에는 냉전의 종결이라는 계기가 있었다. 2차 세계대전 후 및 반세기 동안 지속되었던 세계정치의 기본 틀이 붕괴되고, 국가를 넘어선 정치에는 정의나 윤리 정도를 빼면 적용 가능한 범용성이 높은 원리가 없어졌기 때문에, 정치철학이 무대 위에 등장한 것이다. 윤리학으로서의 정치철학에는 처음부터, 세계의 도처에서와 마찬가지로, ‘거처거처로 간주하는 것이 내발적 요청으로 들러붙어 있었던 것이다. 그것이 처음으로 큰 문제가 되었던 것이 구-유고슬라비아 내전에 대한 인도적 개입에 즈음해서였다는 사실을 상기해두는 것은 헛되지 않다. 사회가 붕괴되고 사람들이 이동을 강제당하고, 그 결과 지구를 무차별적으로 인류의 거처로 간주했던 인도적으로 무장한 버드아이뷰(bird’s eye-view)가 오늘날의 정치철학을 만들었다. 그렇다면 일찍이 1980년대에 사회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단언했던 영국 수상은 매우 선구적으로 윤리적이었다고 말해야 할 것이다. 어떤 사회든 거처로서 무차별하다면[아무 차이도 없다면], 그것은 실제로 특정한 현실적인 것으로서는 존재하지 않는 것이나 마찬가지 아닐까? 영국사회와 거기서의 이민사회의 구별을 원리적으로 할 수 없다고 한다면, 원래 두 개의 통합 방식의 실재성 자체가, 따라서 사회라는 공동성의 관념 자체가 괴이하다고 생각하는 게 마땅하지 않을까? 버드아이뷰에서 볼 때 지구는 그저 푸를 뿐이다. 죽임을 당하는 인간과 죽이는 인간이 있을 뿐이다.

[버드아이뷰(bird’s eye-view)원문에는 目線라고 적혀 있는데, 이것은 bird’s eye-view’를 일본어로 직역한 것이다조감도(鳥瞰圖).  

사회가 해체되고 사람들은 안전한 거처를 찾아 도망치려고 우왕좌왕한다. 현대의 윤리정치적 주체가 우선 방황하는 유대인인 것이다. 토지를 갖고 있지 않은 주민population, 그것이 윤리적으로 한정된 정치주체의 존재방식이나 다름없다. 그렇기 때문에 특히 현실정치에 참견하지 않고서도 유대인적 윤리에서 보편을 탐구하는 엠마누엘 레비나스가 최고의 정치철학자로 참조 가능해진다. 마이클 샌델처럼 뭐든지 정치철학의 예제로 삼는 것과 레비나스처럼 세속을 벗어나 율법 교전의 주해에 틀어박히는 것 사이에서 정치윤리적 차이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토지를 갖고 있지 않은 주민의 정치란 어떤 것일까? 보루에 에워싸인 도시의 방어는 정치의 범주로부터 이탈할 수밖에 없다. 부동산 관리도 정치의 작업[]은 아니다. 하물며 누가 주민의 자격을 갖고 있느냐는 주민 관리상의 소여일 뿐이다. 무리[]의 이동과 관련된 집단 내의 합의만이 실질적인 정치로 남을 것이다. 그리고 지구 전체가, 즉 가능적인 모든 거처’가 아무런 차이도 없다는 것을 미리 알고 있을 때에는, 그로부터 심지어 이동할 곳의 선택이 누락된다. 그래도 무리의 내부에서는 여러 가지 문제가 생길 것이므로, 그것들의 처리는 필요하며, 결과적으로 결정해야 할 사항이 선험적으로 부과되지 않는 집단적 결정만이 정치에는 남겨진다.

 

악을 제거하는 정의의 정치

, 결정사항에서 결정하는 것이 분리된다. 무엇을 결정해도 그 무엇what’은 정치와는 본질적으로 관계가 없어지며, 자기 목적적으로 합의(consensus)를 얻는 것만이 정치의 내용으로서 추출된다. 과정이 민주적이든 독재적이든, 아무거나 좋은 아무거나를 결정하는 것만이 정치로서 자립한다. 정치를 주권자에 의한 결정으로 환원시켜 보여준 칼 슈미트가 다시 읽혀지는 까닭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한다면, 정의를 향한 정치철학은 어떤 냉소적인 정치관, 세계관을 갖고 있는 것일까? 집단의 범위, 공동성의 실질은 기회원인론적으로 우연하게만 주어질 뿐이라는 것을 전제로, 사람들을 윤리적이라고 간주되는 어딘가로 인도하고자 하는 것이기 때문에. 더욱이, 어디로 인도해도 세계는 마찬가지라고 마음속으로 생각하면서 그렇게 하는 것이다.

그러나 윤리적 정치가 이루는 것에는 하나의 공통의 이름이 있다. 악의 제거다. 이 정치에서 통치의 대상은 거처의 유지나 개량이 아니기 때문에, 본질적인 임무는 악의 척결밖에 없을 것이다. 지상의 선도교화란 구체적으로는 악인의 제거를 의미할 것이다. 악인을 제거하면서 주민집단으로서의 공동체를 유지하는 것, 그 공동체를 선인(善人)의 그것에 근접시키는 것이 정치의 작업이 된다. 실제로, 오늘날의 정치의 대부분은 나쁜정치인을 교체하는 것에 있지 않는가. 선거의 쟁점은 그것으로 기울어지기 쉽고, 스캔들(‘나쁜 짓’)의 폭로야말로 가장 유효한 정치수단이 되고 있지 않은가. 어떤 공동성인가가 아니라, 아무튼 실제로 존재하는 공동체를 어떤 악인의 제거에 의해 지키느냐가 중요한 쟁점이 된다. 공동체는 부단하게 악마 푸닥거리를 필요로 한다. 악마 푸닥거리에 의해 공동체는 존속 가능해진다.

그렇다면 그 악이 거꾸로, 공동체로부터의 배제라는 악 경우는? 인도적 개입이나 사회안전망(safety-net)을 논하면서 윤리적 정치가 문제 삼는 것은, 공동체로부터 문자 그대로 말살되거나 경제적으로 추방되기도 하는 희생자들의 존재이며, 배제야말로 윤리적으로는 최대의 악일지도 모른다. 적어도 오늘날의 윤리에서 발단을 이루는 상징적 악이었다(유고 내전에서의 인종청소’). 뒤집어보면, 희생자야말로 윤리적 정치에 있어서의 정의를 체현하고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아우슈비츠를 근대적 정치의 패러다임이라고 말하는 조르조 아감벤은 틀림없이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 그렇다면 희생자가 될 수 있는, 혹은 희생자의 이름으로 수행되는 정의의 정치란? 윤리적 정치에서는 악인의 제거 말고는 달리 할 수 있는 게 없다. 뭐랄까, ‘거처에 손을 대지 않는다면 그것밖에 할 것이 없다. 썩은 사과를 제거하라. 이런 제약 아래서는, 희생자에게 정의의 정치란 자신을 배제한 주민공동체 자체의 말소가 된다. 배제의 희생자에게 악인이란 자신을 배제한 주민 전체나 다름없으며, 전지구적 보편윤리에 있어서 악인의 집단인 공동체는 지상에서 소멸시켜야 할 것이다. 그 구성원이 개인으로 돌아가 선()의 공동체에 들어가는 것에 동의하지 않는 한, 그는 공동체와 함께 사라져야 할 수밖에 없다. 이 판단을 정당화할 수 없는 보편윤리는 없을 것이다. 학살을 정의라고 말하는 도착된 비참한 결론에, 윤리적 정치는 제동을 걸 수 없는 것이다. 테러를 통한 집단학살을 서슴지 않는 원리주의는 윤리적 정치의 적자이다. 생각해보면 쉽게 알 수 있는 얘기 아닌가. 윤리=도덕적인 선도교화가 임무라면, 정치는 모든 사람이 악인일 수도 있고 선인일 수도 있는 동시에 둘 모두일 수도 있다는 사실에서 출발하여, 개인의 선별이나 집단의 분리 살해를 배제하지 않는 를 행하고, 그 후에 스님처럼 참회하면 된다. 그리고 확인하면 된다. 여기서도 또한 아우슈비츠가 있었습니다 .

보편의 시선에서 보면, 공동체는 중간집단처럼 보인다. 실제로 정치철학은 지금까지 자주, 보편화할 수 없는 개별성이나 예외성을 문화친밀권이라는 이름으로 중간적인 거처에 억지로 밀어 넣고, 윤리가 담당하는 보편적 공공성과 공존시키려고 시도했다. 그러나 이 공존의 실태는 어떠했을까? 예를 들어 문화적 예외성은 자국 문화를 글로벌 스탠더드로부터 지키고자 하는 프랑스 공화국의 논리 자체였다. 그리고 똑같은 공화국이 이슬람이나 아프리카의 문화에 관해서는 자주 그 예외성을 전혀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은 잘 알려져 있다. 이로부터 엿볼 수 있듯이, 중간집단은 상대적으로 중간적일 뿐이며, 어떤 중간성도 그 자체로서 전체성을 가질 수 있다. 심지어 어떤 전체도, 무한한 존재를 승인하는 한, 자신의 중간성을 주장할 수 있다. 더 큰 전체가 있다 .” 오늘날, 중간과 전체는 정치적으로는 거처와 마찬가지로 무한정하다. 그리고 레비나스가 가르쳐주듯이, 무한(여기서는 보편으로 바꿔 읽어도 무방하다) 무한정전체성저항한다. , 양자는 이질적인 논리이며, 통합이 불가능하며, 보편에 예외는 있어도 부분이나 중간은 없다. 그러나 동시에 바로 그렇기 때문에 보편적 윤리는 전체성/중간성의 논리와 분리되어 공존이 가능해진다. 그것을 유대인과 이스라엘 국가의 역사는 가르치고 있을 것이다. 한 국가에 불과한 미국이 내뱉은 무한한 정의도 전체주의와 보편주의의 편의주의[기회주의]적인 공존을 증명하고 있을 것이다. 무한에서 보면, 공동체는 전체성이라는 진영에 미리 알아서 설설 기고 있으며, 보편윤리와 논리적으로 대립하더라도 정치적으로는 대립하지 않는다. 보편윤리는 공동체의 전체성에 저항하면서도 그것을 배제하지 않는다. 공동체는 즉, 잘 관찰해보면, 전체와 보편의 양쪽에 대해 특유의 존재 성격도 중간성도 주장하지 않는다. 공동체의 정치적 중간성에 실체는 없는 것이다.

바꿔 말하면, ‘전체성과 무한’(레비나스의 책 제목인) 사이에서 공동체는 붕 떠 있다. 서로 대립하는 전체성과 무한은 공동체를 위치지을 수 없다. 존재하고 있는 공동체는 윤리정치적으로 규제도 승인도 받지만, 아직 존재하지 않는 공동체는 공공세계에 참여자격을 인정받지 못하고, 침묵을 강요당한다. 무한의 윤리가 지배해야 할 정치세계에 있어서도, 세계는 다양하고 각각 전체적인 공동체로 구성되어 있을 것인데, ‘거처인 공동체를 추구하고 만드는 , 존재방식을 바꾸기 위해 파괴하는 , 그리고 그 두 개방식how’에 관해서는, 문제 자체가 문자 그대로 장소를 갖지 않는 것이다. 공동체를 존재시키는 것, 이와 정반대로 체하는 것은 정치 이전의 사적 투쟁의 영역에 처박아진다. 국가건설도 혁명도, 마음대로 하고 있는 것인 셈이다. 존재하게 되었던 전체적 공동체를, 악의 제거라는 목적에 맞춰서 합의라는 수법에 의해 유지하는 것만이 윤리적 정치에 허용된 관심이다. 공동체의 존재가 판돈[내깃돈]이 되고 있는 건설과 해체는 정치의 예외 없는 범주 바깥으로 쫓겨나고 만다.

전쟁도 또한 정치의 이지 않게 될 것이다. 공동체의 존망이 걸린 전쟁에, 윤리적 정치는 끼어들 수 없다. 전쟁 당사자는 정치에 대해서, 끝날 때까지 기다려달라고 말하면 되며(아직 합의의 시기가 아니다), 전쟁을 비난하는 자는 당사자를 악인이라고 지명하고 말소하는 다른 전쟁을 시작하지 않는 한, 그 비난을 정치의 무대에 올릴 수 없다. 양심에서든 위선에서든, 사적으로 제멋대로 비난하고 있을 뿐이다. 그리고 공동체의 전쟁은 시작하기로 결단되는 순간, 윤리적 정치이 아닌 그 자체가 되는 것이다. 공동체의 적은 악이며, 악의 제거는 전쟁을 시작하기 전부터, 그것이 정치였기 때문이다. 공동체의 안과 밖에서 하는 것이 다른 정치는, 윤리적이지도 보편적이지도 않다.

 

합의의 정치에 의한 시장공산주의

이렇게 될 수밖에 없었을까? ‘현실 사회주의의 붕괴는 이런 결말을 정말로 요청했을까? 확실히 맑스주의는 국가와 혁명에 의해 농락당했다. 혁명이란 국가를 사멸시키는 국가를 건설하는 것이라는 역설을 실천적으로 풀 수 없었고, 그 이름을 딴 국가를 소련에서는 소멸시키고 중국에서는 자본의 유능한 관리자로 바꾸었다. 그렇지만 이 를 생각하는 것을 단적으로 그만둔 윤리적 정치는, 세숫대야의 구정물과 함께 갓난아기까지 버려버린 것이나 다름없다. 국가도 혁명도 주민의 합의에 맡긴 것은 좋지만, 자신이 악인의 제거에 매진하는 동안에, 국가는 원래 주민을 먹여 살릴 힘을 잃고, 공동체로서의 정당성을 쪼그라들게 했다. 어디서나 온통 거처가 되는 대신에, 어떤 공동체를 어떻게 만들면 되는가[에 관해] 정치는 합의말고는 다른 대답을 갖고 있지 않다. 충분히 먹을 수 없게 된 주민이 늘고 있을 때에. 어떤 공동체가 정치적 공동체인지, 그것을 국가라고 부를 수 있는지조차도 다시 생각해야만 할 때에. 그렇다고 한다면, 순수하게 혁명을 생각함으로써도 누구보다 국가를 날카롭게 따지고 든 자들의 사고는 그것만으로 충분하게 되새길 값어치가 있을 터이다. 윤리적 정치에서 보면, 혁명은 국가공동체에 있어서 예외적인 사태에 지나지 않으며, 2차적 이하의 과도적 상태, 공론장 없는 사적 투쟁의 영역에 속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정말로 예외이기 때문에, 그것을 생각한다는 것은 그것을 예외로 하고 있는 일반성 즉 국가를 생각한다는 것에 일치한다. 국가만을 영원히 존재하는 것인 양 생각하는 것보다도 훨씬 더 국가의 존립 근거에 바싹 다가설 수 있다. 맑스도 공산주의자가 된 후에야 비로소 자본주의를 영속 운동하는 자동기계처럼 분석할 수 있지 않았던가.

현실 사회주의에서의 정치철학은 그러나 이런 초보적인 변증법조차도 잊어버린 단조로운 세계관으로 영락했다. 혁명을 필연이라고 구슬리고, 혁명의 결과로서 성립한 국가가 그대로 필연적으로 전인민의 국가가 되며, ‘전인민의 국가는 이제 국가가 아니라고 믿어지게 되었다. 그리고 우리도 이미 알고 있다. 그 국가의 모습은 사실상 윤리적 정치를 선취했다는 것을. 노동이 정의가 되고, 계급의 적은 최종적으로 말살되는 프롤레타리아 주민의 거처.’ 지도기관의 의지가 곧 합의라고, 어쩐지 보증된 공동체. 그 속의 어떤 중간 공동체(원래 몇 개의 민족 공동체가 있었을 것이다)에도 정치적 실체가 없는 보편국가. ‘현실 사회주의는 붕괴함으로써 승리한 것이다. 윤리주의자는 사회주의자이며, 미국과 소련이 없는 전체성과 무한의 평화공존현실 사회주의로부터 물려받았다. 게다가 포스트 사회주의 시대의 유물론자의 역할도 맡게 되며, ‘필요에 따른 분배를 사회정의라고 하고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노동에 따른 분배(사회주의)가 아니라, 필요에 따른 분배(공산주의)야말로 오늘의 윤리이다. 세계의 어디에 어떤 필요가 있는지를 알려주고, 최적의 배분을 실현시켜주는 것이 시장메커니즘market mechanism이다. 미국과 소련은 도대체 뭐가 다르냐고 물어본 하이데거나 코제브의 혜안이 요즘 들어 더 생각난다. 정말이지, 세계는 이미 공산주의 단계에 있기 때문에 더 이상 정치는 필요가 없으며, 윤리=도덕만으로 족한 것일까? 윤리주의자도 사회주의자도, 지금 있는 국가를 절반 이상은 하늘로 올라간 국가라고 여기고 있다.

그런 국가에 선도교화되는 것을 자랑스럽게 여기지 않고, 정치는 종교가 아니라고 믿고 싶다면, 혁명을 그 예외성에 충실하게 생각하려 한 철학을 복권시키지 않으면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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