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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계나 한국의 곳곳에서, 즉 정치, 경제, 사회의 다양한 국면에서 기존 질서가 붕괴하거나 요동치고 있다. 이러한 상황을 어떤 이는 ‘격변의 시대’, ‘전환기’라고 말하며, 또 다른 이는 ‘불확정성의 시대’라고 말하고 있다. 미래를 구상하기 위해서는 얼핏 보기에 혼돈의 상황을 통찰하는 지적 자세가 필요하다. 위의 제시문들은 그런 상황에 대한 각각의 견해를 제시하고 있다. 이를 바탕으로 아래의 문제에 답변하시오.



<가> 아주 사소한 사건에 의해 역사의 흐름이나 사람의 운명이 극적으로 바뀌는 경우가 있다. 예를 들어 암살자가 쏜 한 발의 탄환에 의해 혁명이 일어나기도 하고, 급하게 올라탄 비행기가 생각지도 못하게 추락하기도 한다. 인생은 복잡하고 불확정적이며, 미래를 예측하는 것은 어렵다. 그래서 사람들은 과학이 하는 예측에 그다지 매력을 느끼지 못하고 과학은 우리들의 일상적 삶과는 그다지 관계가 없다고 생각해 왔을 것이다.
그러나 최근 들어 카오스라고 불리는 과학의 새로운 분야가 출현하여 사람들로 하여금 상상의 나래를 펴게 하고 있다. 이것은 일상적 경험과 자연법칙을 결합하여 단순과 복잡, 혹은 질서와 무질서 사이에 섬세하고 아름다운 관계가 있음을 밝히고 있다.
과학자는 항상 우주를 지배하는 법칙을 모색해 왔다. 아이작 뉴턴은 운동 법칙과 중력 이론을 가지고 별이 천공을 어떻게 운동하는지를 설명했다. 프랑스의 수학자 피에르 시몬 드 라플라스는 19세기 초반 무렵, 뉴턴이 그려낸 정밀한 우주 세계의 모습을 굳게 믿고 어떤 입자든 그 위치와 속도를 알면 그 입장의 행동을 모두 예측할 수 있다고 단언했다.
이러한 결정론적 개념에 최초의 타격을 가해졌던 것은 1920년대에 들어서였다. 양자 역학이 발전하여 전자와 같은 미립자가 실제로 어떻게 움직이는지가 설명된 후부터이다. 양자 역학은 확률에 의거한 통계 이론이다. 뉴턴의 고전역학에서는 입자의 위치와 운동량을 동시에 측정할 수 있다고 한다. 그러나 양자 역학에서는 이 둘을 동시에 결정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한다. 위치를 측정하려고 하면, 그러한 측정이 입자의 운동량에 영향을 주기 때문에 결국 운동량을 결정할 수 없다는 것이다. 거꾸로 운동량을 측정하려고 하면, 그 측정 자체와 입자의 위치가 상호작용하므로 위치가 애매하게 된다. 이것이 이른바 불확정성 원리라고 말해지는 것으로, 자연의 고유한 법칙 중 하나이다.
이러한 불확정성 원리가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물리학자들은 양자 역학을 사용해 물질의 기본 성질이나 우주에서 작동하는 힘을 설명하는 강력한 이론을 구축해 왔다. 그리고 우주가 어떻게 진화해 왔으며, 또한 우주가 어떻게 만들어졌는지를 설명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이러한 ‘환원주의’ 논자 ― 소수의 원리나 법칙이 있고 모든 현상은 그 원리나 법칙으로부터 추론 또는 계산에 따라 인도되며 설명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 들은, 일단 ‘궁극의 이론’을 도출해 내면 원자나 분자가 어떻게 움직이는지, 더 나아가 그것들이 어떻게 (예를 들어 생물로서) 자기 증식을 하는가 등과 같은 보다 복잡한 현상을 설명할 수 있을 것이라고 한다. 인류를 지배하는 자연법칙도, 은하를 지배하는 자연법칙도 마찬가지이며, 머지않아 주식시황이나 질병의 전파 등 인간 사회의 사건까지도 예측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물론 거기에는 막대한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이러한 접근방법이 정말 도움이 되는 것일까? 현재 상태에서는 예측이 불가능한 것이 상당히 많이 있다. 언제 수도꼭지에서 물이 샐 것인가라거나, 2주일 후의 날씨가 어떨 것인가를 과학의 기본법칙을 갖고 예측하는 것은 현재 불가능하다. 많은 물체들 사이의 여러 가지 상호작용으로 이루어져 있는 복잡계에 관해서는 말할 필요도 없지만, 겨우 2~3가지의 힘밖에는 관계하지 않는 계에 대해서도 예측하는 것이 지극히 곤란한 것이다.
그런데 최근 들어 극히 복잡한 상태를 예측하는 데에는 본래적인 한계가 있음을 알기 시작했다. 확실히 이러한 예측 불가능한 점이 생겨나는 것을 분명히 하는 것이야말로 카오스 이론이 활약하는 장소이다. 카오스 이론은 수학과 컴퓨터가 결합해 생겨난 것이다. 그것은 물리의 기본법칙을 따르면서도 무질서한 계 ― 복잡하여 예측 불가능한 성질을 지닌 1개의 세계 ― 의 작동을 보여준다. 그리고 계속해서 변화하는 계에서도 위치나 속도 등의 초기 상태에 의해 얼마나 영향을 받기 쉬운가가 밝혀진다. 즉, 초기 조건 중에서 몇 가지의 변화만 일어난다고 하더라도 시간이 흐름에 따라 그것이 계속해서 피드백되어 나중에는 이것이 증폭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계에서는 미래에 대한 예측을 충분히 할 수 없는 것이 당연하다. 더욱이 그러한 예측은 초기 조건을 얼마나 정확하게 측정하는가와 관련된다. 실제로 컴퓨터를 사용해 그런 계의 모델을 만드는 경우에도 수립한 방정식의 수치에 대해 소수점 이하를 약간 바꾸기만 해도 이후의 결과는 완전히 달라져 버리게 된다.
카오스계의 미묘한 움직임은 거대 컴퓨터에 의해 처음으로 밝혀졌다. 몇 백만 번이나 그 모습을 추적할 수 있기 때문이다. 카오스계의 추상적인 기하학적 성질을 컴퓨터 그래픽에 의해 나타내면, 그 전체적 모습에는 반복되는 패턴이 있음을 볼 수 있다. 이것의 정밀한 기본 구조가 카오스 본래의 성질을 특징지으며, 어느 시점에서 예측을 할 수 없게 되는지를 가리켜준다.
카오스 현상의 본질적 특징은, 오차가 조금이라도 있으면 이것이 시간과 함께 발전하여 커진다는 점이다. 이 모습을 구체적으로 보기 위해서는 우선 비-카오스계의 사례 ― 단진자의 운동 ― 로부터 시작한다. 완전히 똑같이 흔들리고 있는 두 개의 동일한 종류의 진자 중 어느 한쪽의 운동을 조금 복잡하게 한다. 약간씩 그 움직임이 흐트러진 두 진자의 차이 ― 즉 위상의 차이 ― 는 진자가 흔들리고 있는 동안에는 그다지 크지 않은 채로 있다.
단진자의 운동을 예측하려면 진자의 위치와 속도를 어떤 순간에 측정하여 이후의 움직임을 뉴턴의 법칙을 사용해 계산한다. 최초의 측정에 오차가 있으면 계산을 통해서 영향력이 나타나며, 예언치에 오차를 야기한다. 단진자의 경우 입력에 약간의 오차가 있다는 것은 예측을 하기 위한 계산 ― 출력 ― 에 약간의 오차가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보통 비-카오스 계에서 오차는 시간이 흐르면 커진다. 오차가 시간에 비례하여 (혹은 약간의 시간 차이에 비례하여) 증대한다는 사실이 중요하며, 그 때문에 오차를 다루는 것이 비교적 쉽다.
반면 카오스 계의 경우 이번에는 두 개의 동일한 계의 초기 조건에 약간의 차이가 있으면 차이는 급격하게 커진다. 운동이 지수함수적으로 발산해 간다는 것은 카오스의 증명서처럼 되며, 예측 문제로 다시 검토해 보면, 처음에 약간이라도 오차가 있으면 시간이 흐름에 따라 오차는 자꾸자꾸 증대해가게 된다. 더욱이 계산을 곧바로 무효로 만들 정도로 커져 버리기에 예측 능력은 모두 없어진다. 이처럼 입력에 조금이라도 오차가 있으면 곧바로 이것이 증폭되기에 엄청난 계산을 필요로 한다.
카오스와 비카오스의 움직임의 차이는 원형 진자를 예로 들면 잘 알 수 있다. 원형 진자란 두 방향으로 자유롭게 흔들리는 진자이다. 이 계를 세로로 매달고 세로축을 조금씩 움직이는 등 주기적인 온동을 하여 평면 안에서 흔들리게 한다. 그렇게 하면 진자의 운동이 시작되어 아주 잠시 동안은 안정된 운동 ― 더욱이 예측 가능한 운동 ― 으로 자리잡는다. 이때 공은 강제된 진동수와 같은 진동수로 타원 궤도를 그리며 움직인다. 그러나 여기에서 강제된 진동수를 조금씩 바꾸면 이 규칙적인 운동은 카오스로 이행한다. 공은 이리저리 흔들리며, 시계 방향으로 움직였다고 생각하자마자 반시계 방향으로 움직인다. 분명히 무작위적 움직임을 하는 것이다.
결정론에 따른 예측 가능한 것은 무한히 정밀한 이상적 극한일 때뿐이다. 예를 들어 진자의 운동은 초기 조건에 의해 대략 정해지지만, 초기 데이터에는 진자의 위치도 포함되므로 이를 정확히 예측하기 위해서는 고정된 점에서 진자의 중심에 이르는 정확한 거리에 대응하는 실수(實數)가 필요하다. 이것을 정확하게 정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비-카오스 계에서 오차는 천천히 확대되어 가므로 이러한 제약이 그다지 중요하다고는 할 수 없다. 그러나 카오스 계에서의 오차는 가속도적으로 확대된다. 예를 들어, 다섯 번째 자릿수에 오차가 있고, 시간 t만 경과한 후의 계의 움직임에 영향이 있다고 하자. 좀 더 정밀하게 분석하면 오차를 열 번째 자릿수로까지 감소시키는 것이 가능할 것이다. 그러나 오차가 지수함수적으로 시간과 함께 발전하기 때문에 이렇게 정밀하게 한다고 해도 2t만큼의 오차가 나온다. 즉, 초기 상태에 대해서 10만 배(5자리수)나 더 정밀도를 높이더라도 예언할 수 있는 시간은 두 배 느는 것에 불과하다. 아마존의 정글에서 나비가 날개 짓을 하면 아득히 멀리 있는 텍사스에 맹렬한 회오리가 일어난다고 말을 하면 잘 알겠지만, 이것은 카오스가 초기 조건에 예민하게 반응한다는 것을 가리키는 것이다.
결정론적 카오스가 존재한다는 것은 분명히 놀랄 만한 것이다. 그러나 자연계는 사실 결정론적이지 않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양자 현상과 관련된 비결정론은 카오스계이든 비-카오스 계이든 모든 계의 역학에 대해 원자 수준에서 파고 든다. 양자론적 불확정성은 카오스와 결합되어 우주의 예측 불가능성을 조장하고 있다고 생각된다.
“시계 장치의 우주”라는 라플라스의 관념에 관해 어떤 결론을 내리면 좋을까? 물리의 세계는 카오스와 비-카오스 계를 광범위하게 포함하고 있다. 카오스 계의 경우 예측 가능성은 극히 한정되어 있으며, 그러한 계가 하나라도 있다면 전체 우주의 운동을 계산하는 힘도 제한된다. 우주의 극히 작은 일부분의 미래 운동조차도 수치로 계산할 수 없다고 생각되기에 우주 전체는 두말할 나위가 없다. 좀 더 문학적인 표현을 사용하면 “우주는 그것 자체가 가장 빠른 속도의 시뮬레이터(모의훈련장치)이다.”
이러한 결론의 의미는 심원하며, 자연계가 엄밀하게 결정론적이라는 것을 인정하더라도 우주의 장래는 어떤 의미에서는 ‘열려져 있다’는 것을 가리킨다. 사람들 중에는 이러한 열려져 있음이야말로 인간의 자유의지의 실현의 근거라고 해석하기도 한다. 또는 자연계에 창조력의 요소가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 즉, 진정으로 새로운 것, 우주의 초기 단계에서는 상상할 수 없는 무언가를 산출한다는 것이다. 각자의 입장이 어떻든 카오스 연구가 내린 결론은 다음과 같다. 우주의 미래는 정해져 있으며 더 이상 무엇인가를 바랄 수는 없다는 식으로 말할 수는 없다. 위대한 우주라는 책자의 마지막 페이지는 아직도 쓰여지지 않았다.

<나> 사람은 상황에 따라 행동하며, 상황의 제약을 받으며, 그 결과를 피드백시켜 행동한다. 그러나 인간 행동의 대부분을 인간과 환경의 물리적 상호작용으로서 설명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왜냐하면 인간 행동의 대부분은 외부의 상황에 대한 직접적․반사적 반응이 아니라 ‘의미부여’라는 내적인 작업을 거치기 때문이다. 인간은 다양한 자극을 수용하고, 상황을 지각하고 느끼며 생각하고, 평가․판단하며 행동한다. 이러한 자극의 수용과 행동을 매개하는 내적인 작업을 여기에서는 ‘의미부여’라고 부른다. 즉 인간은 상황에 의미를 부여하고 행동하며 또한 그 결과에 대해 의미를 부여하고 나아가 행동한다.
따라서 인간의 행동이나 이것의 복합체인 사회 현상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선 행동 주체가 상황에 대해 어떻게 의미를 부여했는지, 즉 상황이 ‘의미를 부여하는 사람에게 있어서 갖는 의미’가 무엇인지를 이해할 필요가 있다. 물론 사태의 전체적 추이를 이해함에 있어서 주체가 부여한 의미를 이해하는 것으로 모든 것이 다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주체가 부여한 의미는 잘못된 것일 수도 있고 불충분한 것일 수도 있다. 이 경우 “그/그녀는 ~라고 생각해서 ~를 했지만, ~한 사정 때문에 ~한 사태가 되었다”라는 식의 설명이 이루어지게 된다. 그러나 어찌되었든 인간의 행동이나 사회 현상을 이해함에 있어서 이러한 설명의 앞부분에 해당하는 주체 혹은 주체들이 “의미부여”나 “의미 부여의 방식”을 이해하는 것은 필요 불가결하다.
그런데, 그렇게 되면 인간의 행동이나 사회 현상을 이해하려고 하는 학문적 시도는 극히 복잡하고 어렵게 된다. 왜냐하면 나중에 말하겠지만, “의미부여의 불확정성”을 직시할 필요를 느끼게 되기 때문이다. 물론 모든 국면에서 불확정성이 문제시되는 것은 아니다. 인간의 의미부여가 극히 안정되어 있는 국면에서는 인간의 ‘의미부여 방식’을 불확정성을 포함하지 않는 고정적인 시스템으로 상정하여 분석을 진행시킬 수 있다. 그러나 의미부여 방식의 변화를 포함하는 의미의 변화가 거론되는 국면에서는 불확정성의 문제를 피해 나갈 수 없다. 의미 부여 방식이란 요컨대 사물을 보는 방식, 느끼는 방식, 사고방식이다. 평온한 일상일 경우 사람들은 안정되고 상투적인 의미 부여 방식을 채용하여 살아간다. 그러나 그렇게 대처할 수 없는 사태에 직면하거나 아니면 더 매력적인 의미 부여 가능성에 마음이 쏠리게 되면, 사람들은 의미 부여 방식을 포함하여 의미를 재편성한다. 사람들의 사물에 대한 보는 방식, 느끼는 방식, 사고방식의 변화를 묻고 있는 문제들을 다룰 경우 의미 부여의 불확정성을 피할 수는 없다.
그렇다면 ‘의미부여’란 어떤 시도일까? 또, 그러한 시도에 수반된 불확성성이란 어떤 성질을 지닌 불확정성일까? 그리고 불확정성이 문제로 되는 것은 어떠한 상황일까? 이를 차례차례 생각해 보자. 우리는 말뿐만 아니라 시각 이미지나 음성 이미지 등을 사용하여 의미를 부여한다. 그러나 조금 복잡한 의미 부여가 되면, 다양한 이미지나 개념을 관련지어 정리하는 데 있어서 말을 사용한다. 또 그렇게 의미 부여한 의미를 말에 의해 말한다. 이러한 인간의 의미부여 노력이 지닌 특징은 말의 사용에 응축된 형태로 반영되어 있다. 그러므로 의미부여와 말의 관계를 구체적으로 살펴보기로 하자.
의미부여의 노력을 주체 내부에서 진행되는 과정으로 파악한다면, 그것은 자극의 수용에 의해 기억이 환기되어 (환기란 원래 양자역학적인 계가 외부에서 에너지를 얻어 처음보다 높은 에너지 상태로 이행하는 것이다. 여기에서는 기억이 일깨워져 다음 움직임으로의 준비상태로 이행한다는 뜻이다.), 상호간의 인력에 의해 기억 상호 관련 배치를 형성하는 과정이다. 자극은 예를 들어 빛이나 소리나 말이다. 새가 나는 광경을 보고 ‘새’나 ‘난다’는 개념을 환기시켜 동작주(새)와 동작(난다)로 배치를 정하고, “아, 새 가 날고 있다”고 말한다. 이어서 말을 수용한 경우를 택해서 기억의 인력에 관해 검토하자. 예를 들어 ‘가다’, ‘나’, ‘유치원’이라는 세 개의 말이 독자에게 일으킬 작용을 생각해 보자. 각각의 말이 단독으로 환기시키는 기억과 ‘나는 유치원에 간다’고 배열되었을 때의 ‘나’, ‘유치원’, ‘가다’가 각각 정리하고 있는 기억과 다르다는 것을 눈치챌 수 있을 것이다. 단독(單獨)의 ‘나’는 ‘1인칭의 일상적 표현’을 생각나게 할 뿐 ‘아이’ 개념을 포함하지 않는다. 더욱이 ‘노란색 모자를 쓴 유치원생’의 모습 또한 떠오르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유치원에 간다’라는 의미가 부여되었을 때 ‘나’가 단독으로 환기시키는 ‘1인칭의 일상적 표현’은 대부분 의미의 중요성을 상실한다. 초기의 의미부여에서는 이 개념이 ‘노란색 모자를 쓴 유치원생’이라는 이미지를 끌어들이는 계기로서 중요한 기능을 하지만, 의미 부여된 의미에서의 중요성은 저하되고 있다. 이러한 것은 ‘유치원’이나 ‘가다’라는 말에서도 동일하게 생겨난다.
말들이 결정하는 기억은 상호 공진을 증폭시키거나 억제하여, 즉 서로 끌어당기면서 그 과정에서 농담이나 내용까지도 변화시키면서 관련된 배치를 형성하고 의미를 만든다. “나는 유치원에 간다”에 생생한 의미를 부여한 것은 나와 독자가 지닌 이러한 다양한 이미지나 개념 등의 기억이다. 만일 ‘1인칭 단수의 표현’이 ‘나’의 문자 그대로의 의미라고 하더라도, 그 문자 그대로의 의미를 몇 가지로 늘어놓아도 생생한 의미 부여를 낳지 않는다. ‘의미 부여’의 과정에서 말은 기억의 흐름의 소용돌이를 일으켜 흐름을 정돈하여 점치 기억의 관련된 배치를 형성해 나간다.
사람이 살아가는 과정에서 계속 축적하는 경험의 기억은 방대하다. 더욱이 직접적인 체험이나 언어 활동에 의한 간접적 경험을 통한 학습에 의해 기억은 서로 관련을 맺게 되며, 그 상호관련도 또한 기억으로서 계속 축적된다. 따라서 말의 기억을 포함하여 다양한 기억은 서로 복잡하게 서로 연쇄된다. 외부 세계나 내부 세계로부터 자극이 수용되면, 이 연쇄의 채널을 통해 다양한 기억이 환기되고 서로 끌어당겨져 점차 상호 관련 배치를 형성한다. 인지과학자들은 이것이 뇌를 중심으로 한 뉴런 네트워크에서 일어나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러한 의미부여 프로세스는 기억에서 유래하는 불확정성을 품고 있다. 그러한 불확정성으로는 네 가지를 생각할 수 있다. 즉, 다양성, 다의성, 이력변용성(履歷變容性), 그리고 불가지성이다. 사람이 지금까지 축적한 기억은 개성화된 집합이기 때문에 같은 자극이 환기하는 기억은 사람마다 다르다. 이 때문에 의미는 사람들 사이에서 다양하게 된다. 또한 어떤 것의 의미부여에 있어서 환기하는 기억은 그것의 자극과 상황의 자극 둘 모두에 의존한다. 이 때문에 얼핏 보기에 같은 것으로 보이는 의미도 상황에 따라 다의적이 된다. 더욱이 기억은 살아가는 과정에서 비가역적으로 계속 축적된다. 그 때문에 환기하는 기억은 이력(履歷)에 의존하여 변화하며, 의미는 시간축 위에서 확정되지 않는다. 그리고 기억에는 기억이라고 생각되지 않는 ‘암묵지’(헤엄치는 방법, 자전거를 타는 방법, 말의 사용법 등에는 대부분 의식되지 않는 신체적 지식이 포함되어 있다. 마이클 폴라니는 이런 종류의 지식을 암묵지라고 불렀다.)나 잠재 기억이 존재한다. 암묵지나 잠재 기억은 삶을 영위하는데 있어서 결코 사소한 의미밖에 갖고 있지 않는 기억이 아니다. 게다가 우연이나 주의 깊은 연구에 의해 그 기능이 밝혀지게 되는 경우가 있더라도 대부분은 미지의 것으로 남아 있다. 그렇다면 환기하여 관련 배치를 형성하는 기억에는 중요할 수도 있으나 눈치를 못 챈 기억이 포함되어 있을 수 있다. 그 때문에 사람은 의미 부여된 의미의 전모를 모조리 알 수는 없다. 따라서 의미는 불가지성을 감추고 있다.
이러한 불확정성에 의해 우리는 우리 자신 및 타자의 삶의 의미를 확정할 수가 없다. “의미부여의 불확정성”은 삶의 의미를 확정할 수 없는 실존적 불확정성과 공통된 근원적 불확정성이다. 그렇지만 ‘의미 부여의 불확정성’은 아무렇게나 함과 동의어가 아니다. 생물적 자질에 의해, 혹은 경험의 반복에 의해 구조화되며, 쉽게 바뀔 수 없는 안정적 구조의 부분적 기억 관련 배치도 역시 다수 존재한다. 대부분의 경우 이것들은 의미부여 과정의 기억 속에서도 분해․재편성되지 않고 한 덩어리가 되어 유동적으로 배치 형성에 참여한다. 이미지나 개념, 또는 이러한 기억을 관련짓는 의미부여 도식 속에 이러한 안정적 부분 구조의 기억의 정신이 있다. 이러한 부분구조가 요청하는 질서를 충족시키면서 기억은 서로의 관련 배치를 형성한다. 그 때문에 의미부여는 한없이 유동하여 확산되는 것을 피하며, 이리하여 의미가 형성되는 것이다. 바로 이 때문에 우리는 인격적 통일성을 보존할 수 있다. 또한 이러한 부분적 질서에는 개성적인 것이 있으며, 사람들 사이에 공유되고 있는 것이 있다. 전자의 집합이 개인의 개성을 이룬다. 후자는 사람으로서의 자질 동형성이나 문화의 공유에 의한 경험의 동형성에 의해 형성된다. 그렇지만 의미부여 전체가 완전히 안정화되고 구조화되지는 않는다는 점을 강조해 두어야만 한다. 질서라고 하더라도 산재해 있는 부분적 질서이며, 의미를 확정할 때까지 전체를 포괄하는 것은 아니다.
의미부여는 불확정성과 질서가 함께 일어나 진행하는 과정이다. 사실 앞의 “나는 유치원에 간다”에 대해서 의미부여된 의미에도 불확정성이 잠복해 있다. “노란색 모자를 쓴 건강한 어린 아이가 지금부터 유치원에 간다고 한다”는 의미부여는 그러한 불확정성 중에서 떠오르게 되는 하나의 의미부여에 불과하다. 예를 들어 근처의 유치원에서는 빨간색 모자를 쓰게끔 할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그 지역의 주민은 “빨간색 모자를 쓴 유치원생”을 떠올릴지도 모른다. 사람에 따라서는, 때와 장소에 따라서는 의미가 다를 수 있으며, 깊이 성찰해 보면 생각지도 못한 의미를 담고 있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또한 의미부여가 지닌 질서에 의해 ‘남자 아이’가 ‘여자 아이’로 치환될 수는 거의 없으며, “유치원이 내가 가는 곳이다”라는 의미부여도 일어나지 않는다.
의미부여에 있어서의 불확정성과 질서의 협력은 인간의 커뮤니케이션을 이해하는데 있어서 극히 중요하다. 인간의 커뮤니케이션이란 단순한 말과 같은 기호의 교환이 아니다. 기호를 매개로 한 ‘의미부여의 상호작용’인 것이다. 개성화된 기억에 의해 생기는 의미의 다양성은 사람들 사이에 의미의 간극을 발생시킨다. 만일 의미가 확정되어 있다면 간극을 메울 방법이 없기 때문에 커뮤니케이션 자체가 성립하지 않는다. 또한 만일 공유된 질서가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면 간극을 메우는 것 자체가 존재할 수 없다. 불확정성과 질서의 협력이 인간의 커뮤니케이션의 기반이자 본질적 특성이다. ‘의미부여의 불확정성’은 사회 질서의 생성․붕괴 등의 현상을 이해하려고 하는 경우 특히 중요한 문제가 된다. 커뮤니케이션의 관점에서 보면 사회 질서는 의미부여 상호간의 관계가 서로 모순되지 않을 것이라는 기대에 의해 성립된다. 즉 넓은 의미에서의 합의에 의해 성립된다.
그러나 합의는 의미부여의 불확정성이 존재하기 때문에 성립․비성립, 합의의 의미 내용, 지속, 실행 등에 관해서도 또한 불확정적이 된다. 예를 들어 합의의 의미 내용에 관해 말하자면, 관계자들이 부여한 의미는, 행동의 판단만이 일치하는 경우도 있다면, 그 이유까지 일치하는 경우도 있다. 더욱이 배후의 가치관까지 일치하는 경우도 있다. 일치하는 영역이 넓을수록 바람직한 합의라고 할 수도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생각해 보면 절대로 깨질 수 없는 합의가 과연 합의일까? 문서나 성명에 의해 이론(異論)의 여지없는 일치라고 생각되는 경우조차도 원리적으로는 불확정성을 벗어날 수 없다. 이 때문에 합의가 깨지면 “이 문구는 어떻게 해석해야 했지?” 등과 같은 불일치가 문제로 된다. 성립했을 때에는 완전한 일치에 따른 합의라고 믿었다고 하더라도, 이미 거기에는 눈치를 채지 못했던 불일치가 내포되어 있고 변용 가능성도 잠재해 있다. 합의는 불확정성을 은폐하고 있기 때문에 합의인 것이다. 확증 불가능하기 때문에 때때로 사람들은 말로 확인하기도 하고, 거수나 문서, 서명 등으로 합의의 증명을 의제(擬制)한다. 그러나 의미끼리의 관계인 이상, 합의는 불확정성을 벗어날 수 없다.
인간의 의미부여와 커뮤니케이션은 확실히 불확정성을 품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이러한 불확정성이 지닌 기존 질서에 대한 교란적 측면뿐만 아니라 생산적이고 창조적인 측면에도 주목해야 한다. 얼핏 보기에 어떻게 하더라도 해결할 수 없는 것처럼 보이던 대립이나 분쟁이 생각지도 못한 합의가 성립함으로써 해결되는 경우가 있을 수 있다. 싸우는 수밖에는 없다고 여겨지던 상황의 의미부여가 때로는 상호인정 가능한 의미부여로 재편성 되는 경우도 있다. 그런 의미에서 불확정성은 새로운 의미나 새로운 의미부여의 방식으로의 가능성을 열어 둔다. 그런 의미에서 불확정성은 새로운 사회질서나 사회관계, 혹은 새로운 문화 창조의 기반이기도 하다. 이런 점에서 특히 주목받는 것은 타자와의 대화이다. 타자의 이일적 말의 배열은 자기의 상투적인 ‘의미부여 방식’에 의해 흔들리게 된다. 에를 들어 적대적이고 악의에 가득 찬 담론은, 오히려 경계심을 강하게 하며 의미부여를 반발로 향하게 하여 대립․분쟁을 초래한다. 다른 한편으로, 근원적 불확정성을 자각한 사람들 상호간의 겸허하고 활발한 대화는 창조성을 활성화한다.
무엇보다도 의미를 부여하는 인간에게 있어서 사실상 모든 사회적 상호작용은 행동의 상호작용인 동시에 행동을 매개로 한 의미부여의 상호작용이기도 하다는 이중성을 지니고 있다. 따라서 어떤 불확정성 및 질서가 있고 이것들이 서로 어떻게 관련되어 있는지, 즉 의미부여와 커뮤니케이션에 있어서의 불확정성과 질서의 협력의 실상(實相)에 육박하는 것은 사회의 학문에 있어서 큰 의의가 있는 과제이다. 이 경우 의미부여가 품고 있는 근원적 불확정성에 어떠한 자세를 취하여 어떠한 방법으로 접근할 것인가를 묻게 될 것이다. 자칫하면 의미를 확정하는 것이 사명이라고 생각했던 종래의 학문관도 또다시 의문시될 것임에 틀림없다.


문제 1. 두 제시문을 각각 요약한 후, 비교하시오.

문제 2. 두 제시문이 다루는 공통의 주제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논술하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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