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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틀비 혹은 우연성에 관하여

Bartleby o della contingenza

Giorgio Agamben  

 

Bartleby o della contingenza

Original Italian edition ⓒ 1993 by Giorgio Agamben.



1. 필경사 혹은 창조에 관하여


필경사로서의 바틀비는 어떤 문학의 성좌에 속해 있다. 이 성좌의 정반대에 있는 별은 아카키 아카키에비치Akaky Akakievich이며(“그에게 세계 전체는 어떤 의미에서는 그의 사본에 담겨 있었다. 그는 좋아하는 문자가 있었으며, 이 문자들과 만나기라도 할 때면 그는 거의 정신줄을 놓을 정도로 기뻐했다[이 필경사라는 작업에서 세계는 그에게 이른바 완벽하게 닫혀져 있었다. 몇 개의 문자를 마음에 들어했으며, 이것들과 마주치면 그는 뛸 듯이 기뻐했다]”), 성좌의 중앙은 부바르Bouvard와 페퀴체Pécuchet라는 쌍둥이별로 이루어졌으며(“두 사람 모두에게 남모르게 좋은 생각이 싹텄다 필사복사가 그것이다”), 이것들의 반대 극은 지몬 탄나Simon Tanner(그가 요구한 유일한 정체성[신원]나는 필경사다이다), 그리고 어떤 필체handwriting도 가뿐하게 복제할 수 있는 미쉬킨 공작의 하얀 빛으로[빛이] 빛났다. 조금 떨어진 곳에는 소행성대()처럼 카프카의 [소송에 나온 이름 없는] 법정의 서기들이 있다. 그러나 바틀비는 또한 철학적 성좌에도 속한다. 바틀비라는 형상의 수수께끼를 풀 암호를 담고 있는 것은 그 성좌뿐이며, 문학적 성좌로는 그 암호를 충분하게 추적할 수 없을 것이다.

 

1. 수다Suda라는 이름으로 통하는 후기 비잔틴 시대에 나온 사전은 아리스토텔레스라는 항목에 다음과 같은 정의를 담고 있다[특이한 정의를 전하고 있다]. Aristotelēs tēs physeōs grammateus ēn ton kalamon apobrekhōn eis noun, “아리스토텔레스는 자신의 펜을 사유 속에 담군 자연의 필경사였다.” 횔덜린은 소포클레스의 [오이디푸스왕] 번역에 붙인 노트에서 이 구절을 인용하는데, 그때 그는 분명한 이유도 제시하지 않은 채 약간의 정정을 가함으로써 이를 뒤엎어 버렸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자신의 호의적인 펜을 담군 자연의 필경사였다”(eis noun[사유 속에]eunoun[호의적인]으로 바꾼 것이다). 세빌랴의 성() 이시도루스[Isidore of Seville(c 570-636): 세빌랴의 대주교·학자·역사가]어원(Etymologies)은 똑같은 구절의 상이한 판본을 기록하는데, 이것은 카시오도루스Cassiodorus에게서 연원한다. Aristoteles, quando perihermeneias scriptebat, calamum in mente tingebat, “아리스토텔레스는 [오르가논을 이루는 기초적 논리학의 작품 중 하나인 아감벤] 명제론을 썼을 때 그의 펜을 정신[*영문에는 사유라고 되어 있으나 원문을 보면 정신이다] 속에 담궜다. 어떤 경우든 결정적인 것은 자연의 필경사라는 이미지가 아니라 (이런 이미지는 이미 앗티쿠스Atticus에게서도 발견된다) 누스nous, 즉 사유나 정신이 이 철학자가 펜을 담군 잉크병과 비교된다는 점이다. 쓰기 위해서 사고가 사용하는 잉크라는 이 어둠의 한 방울이 사유 자체인 것이다[펜이 쓰기 위해 사용하는 잉크라는 이 어둠의 한 방울이 바로 사유 자체인 것이다].

필경사라는 하찮은[볼품 없는] 복장[몰골]으로 [서양]철학전통의 근본적인 형상을 제시하는, 그리고 특별한 종류의 행위임에도 불구하고 글쓰기라는 행위를 사유에 빗대는 이 정의의 기원은 무엇인가?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작 전체에는 이와 유사한 이미지를 담고 있는 텍스트가 딱 하나 있는데, 어쩌면 이것이 카시오도루스나 미지의 작가[은유가]에게 은유를 위한 토대[실마리, 단초]를 제공했을 수도 있다. [다만] 이 구절은 논리학의 오르가논이 아니라 아리스토텔레스의 영혼에 관하여에 속한다. 3권에 있는 구절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누스, 즉 지성 또는 잠재적 사유[잠재적 지성 또는 사유]를 아직 거기에 아무것도 쓰여 있지 않은 서판에 빗댄다. “누스란 그 위에는 아무것도 현실적으로 쓰여져 있지 않은 서판[grammateion]과도 같다[서판이 현실적으로는 아무것도 쓰여져 있지 않은[그러나 잠재적으로는 글자가 쓰여져 있다고도 말할 수 있다] 것과 마찬가지가 누스에 관해서도 일어난다](영혼에 관하여, 430 a 1).

기원전 4세기의 그리스에서는 파피루스와 잉크가 기록의 유일한 수단이지는 않았다[파피루스 위에 잉크로 쓰는 것이 글쓰기의 유일한 수단인 것은 아니었다]. 밀랍을 엷게 바른 층으로 덮인 서판에 첨필stylus[문자를] 새겨넣음으로써 [글을] 쓰는 것이 훨씬 일반적이었고, 사적인 사용에서는 [사적인 용도로 사용할 때는] 특히 그랬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자신의 논고에서 결정적인 지점, 즉 잠재적 지성[사유]의 본성을, 그리고 지성[사유]이 지성화[지성]의 현실성으로 이행하는 양식을 고찰하는 지점에 이르러서, 이런 종류의 대상을 지시한다. 그것은 필시 그가 자신의 사유들을 그 순간에 기록하고 있었던 바로 서판 자체였을 것이다. 훨씬 나중에, 펜과 잉크로 적는 것이 일단 지배적인 관행이 되었을 때, 그리고 아리스토텔레스의[가 사용하는] 이미지가 케케묵은 것처럼 보일 위험이 있었을 때, 누군가가 나중에 수다에 기록된 의미로 이를 근대화했다[누군가가 이것을 시대에 맞게 새롭게 고쳤고 마침내 이 나중의 의미가 수다에 기록되었던 것이다].

 

2. 서양철학 전통에서 [] 이미지는 커다란 행운을 누렸다. ‘서판grammateion백지tabula rasa[처음으로 옮긴 영혼에 관하여] 라틴어 번역자는 이 이미지를 [새로운] 역사에 맡겼다. 이 역사는 [한편으로는] 로크의 백지에 이르렀고(“태초에 정신은 그 어떤 성격도, 그 어떤 이념도 없는 이른바 백지 같은 것이라고 가정해 보자”), [다른 한편으로는] 이탈리아어에서 백지로 돌아가다깨끗하게 일소하다’(far tabula rasa)라는 여전히 존재하나 어울리지 않는 표현에 이르렀다. 사실상 이미지는 애매했으며[애매함을 띨 가능성을 포함하며], 확실히 이 애매함이 이 이미지의 성공[이미지가 널리 퍼져 안착되는 데]에 기여했다. 아프로디시우스의 알렉산드로스Alexander of Aphrodisius는 철학자아리스토텔레스grammateion서판에 관해 말한 것이 아니라 보다 정확하게는 그것의 epitedeiotes, 즉 서판의 표면을 덮고 있는 엷은 밀랍 층에 관해 말해야만 했다고 지적했다. 바로 여기에다 첨필로 문자를 새겨넣는 것이다. (라틴어 번역자의 용어를 따른다면 ‘tabula rasa미끄러운 서판이 아니라 ‘rasura tabulae서판의 미끄러운 곳이다.) 알렉산드로스가 이렇게 주장할 특별한 이유를 갖고 있었던 고찰은, 하지만 정확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서판의 이미지를 통해 피하려고 애쓴 어려움은 사유의 순수 잠재성이라는 어려움이며, 사유의 순수 잠재성이 현실성으로 이행하는 것을 어떻게 인식할 수 있는가였다. 왜냐하면 만일 사유가 그 자체에 있어서 어떤 한정적인determinate 형식을 지닌다면, (서판이 하나의 사물이듯이) 사유가 항상 이미 어떤 것이라면, 그것은 이해 가능한 대상으로 필연적으로 보일 것이며, 따라서 지성intellection을 방해할 것이다. 이 때문에 아리스토텔레스는 누스잠재적이라는 것 외에는 다른 어떤 본성을 갖지 않으며, 사고하기에 앞서서 그것은 절대적으로 무이다”(De anima, 429 a 21-22)라고 특정하는 데 주의를 기울였다.

그러므로 정신마음은 사물[정해진 어떤 것]이 아니라 순수 잠재성의 존재이며, 거기에는 아무것도 쓰여져 있지 않는 서판이라는 이미지는 순수 잠재성이 존재하는 양식을 표상하는 기능을 한다.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있을[어떤 것일] 수 있거나 어떤 것을 할 수 있는 모든 잠재성은 항상 있지[어떤 것이지] 않을 수 있거나 어떤 것을 하지 않을 수 있는 잠재성(dynamis mē einai, mē energein)이다. 이것이 없으면 잠재성은 항상 이미 현실성으로 이행할 것이며, 그리하여 현실성과 구별될 수 없게 될 것이다(아리스토텔레스가 형이상학9권에서 명확하게 논박하고 있는 것이 바로 이러한 메가라파의 테제이다). ‘~이지 않을 잠재성[-잠재성, potential not to]은 잠재성에 관한 아리스토텔레스의 교설의 가장 중요한 비밀이다. 이 교설은 모든 잠재성 그 자체를 비잠재성으로 변형한다(tou autou kai kata to auto pasa dynamis adynamia모든 잠재성은 각각에 대응하는 비잠재성과 동일한 것에 속하며, 동일한 과정에 따른다)(형이상학, 1046 a 32). 건축가는 건축할 수 있는 잠재성을 현실화하지 않을 때에도 자신의 잠재성[잠재력]을 간직하고 있듯이, 그리고 기타라 연주자는 그가 기타라를 연주하지 않을 수 있기 때문에 기타라 연주자이듯이, 이와 마찬가지로 사유는 사고할 수 있는 잠재성과 사고하지 않을 수 있는 잠재성으로서 [동시에] 존재하며, 거기에는 아무것도 쓰여 있지 않은 [밀랍으로 덮여 있는] 서판도 이와 마찬가지다(이것이 중세의 철학자들이 말한 잠재적 지성potential intellect이다). 민감한 밀랍 층이 필경사의 첨필에 의해 갑작스럽게 긁히게 되듯이, 사유의 잠재성은 그 자체에 있어서는[즉자적으로는] 무이지만[아무것도 아니지만], 지성intelligence의 현실성이 발생할 수 있도록 허용한다.

 

3. 메쉬나에서 1280년과 1290년 사이에, 아브라함 아불라피아Abraham Abulafia는 카발라주의적 논고들을 편찬했는데, 유럽 각지의 도서관에 초고의 형태로 수세기 동안 묻혀 있었던 이 논고들은 20세기가 되어서야 비로소 (게르숌 숄렘과 모쉐 이델Moshe Idel에 덕분에) 비전문가들의 주목을 끌었다. 이 저작들에서 신적 창조는 글쓰기라는 행위[현실성]로 간주되는데, 이 글쓰기에서 문자는 «»의 창조적 말[신의 창조를 행하는 말] 자신의 펜을 끄적대는 필경사와 유사하다 이 피조물로 육화肉化되는 물질적 수단vehicle을 대표하는 것이라고 얘기될 수 있다. “모든 피조물의 기원에 있는 비밀은 알파벳 문자이며, 모든 문자는 창조를 지시하는 하나의 기호이다. 필경사가 펜을 손에 쥐고 자신이 물질에 부여하고 싶어 하는 형식을 마음속에서 생각하면서 펜을 사용해 잉크방울로 그려내듯이, 이와 유사한 행위가 창조라는 더 높은 영역과 더 낮은 영역에서도 수행된다(이 모든 몸짓에 있어서 필경사의 손은 물질과 형식의 지지체/담지자subject인 신체를 재현하는 잉크가 양피지로 흘러들도록 하는 도구로서 사용된 무생물인inanimate 펜을 움직이는 살아 있는 기관이다[이 모든 몸짓에 있어서 필경사의 손은 생명력 없는 펜을 움직이는 살아 있는 기관이다. 이때 펜은 물질과 형식의 지지체/담지자인 신체를 재현하는 양피지 위로 잉크가 흘러들도록 하는 도구로서 사용된다]). 이것은 지능을 가진 자라면 누구나 이해할 수 있다. 왜냐하면 이것 이상의 것을 말하는 것은 금지되기 때문이다.”

아불라피아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독자였으며, 당시의 모든 교양 있는 유대인과 마찬가지로, 아랍어 번역과 주석을 통해 철학자[아리스토텔레스]를 잘 알고 있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영혼에 관하여에서 약간 수수께끼 같은 문장으로 정리해버리는) 수동적 지성의 문제, 그리고 수동적 지성이 능동적 혹은 제작적 지성과 맺는 관계의 문제는 팔라시파falasifa(아리스토텔레스 신봉자들을 이슬람에서는 이렇게 불렀다)에 의해 예외적인 예민함을 가지고 다뤄졌다. 그리고 [그 자신이] 팔라시파의 황태자인 아비첸나는 세계의 창조를 신적 지성이 스스로를 사고하는 현실태로서 인식했다[그리고 바로 팔라시파의 군주인 아비첸나는 세계의 창조를 인식하는데 있어서, 세계의 창조를 신 자신을 사고하는 신의 지성이 현실성으로 이행한 것이라고 간주했다]. 따라서 달 아래 세상의 창조(아비첸나가 마음속에 품고 있던 유출론적 과정에 따르면, 이것은 최후의 천사인 지성의 작업으로, 아리스토텔레스의 능동적 지성agent intellect에 다름 아니다)는 스스로를 사고하는 사유의 모델을 따라서, 그리고 이런 식으로 피조물들의 복수성을 있게 하는 사유의 모델을 따라서 이해되었다. 창조의 모든 행위는[현실성은] (아비첸나의 천사들을 여성으로 바꿔버린 13세기의 연애시인들은 이것을 잘 알고 있었는데) 지성[지능]의 현실성[행위]이다. 그리고 거꾸로, 지성의 모든 현실성은 어떤 것을 존재하게 하는 창조의 현실성이다. 하지만 바로 영혼에 관하여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잠재적 지성을 거기에 아무것도 쓰여져 있지 않은 서판이라고 표상했다[제시했다]. 그 결과 중세인들이 자연학6권으로 알고 있었던 영혼에 관한 감탄할 만한 논고에서 아비첸나는 잠재적 지성의 다양한 종류나 수준을 묘사하기 위해 글쓰기라는 이미지를 사용한다. 언젠가는 쓰는 법을 틀림없이 배울 테지만 아직은 쓰기에 관해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의 조건과 닮은 잠재성이 있다(그는 이것을 물질적[질료적] 잠재성이라 부른다). 그 다음에는, 펜과 잉크로 쓰기 시작했으며 처음으로 글자를 적는 방법을 알게 된 아이에게 속하는 잠재성이 있다(그는 이것을 [손쉬운 잠재성 또는] 가능적 잠재성이라 부른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완성된 또는 완벽한 잠재성이 있는데, 이것은 쓰지 않는 순간에도 쓰기라는 기예를 완벽하게 소유한 필경사에게 속한다(potentia scriptoris perfecti in arte sua, cum non scripserit). 좀 더 나중에, 아랍의 전통에서 창조는 쓰기라는 현실성과 같은 것으로 간주됐다. , 수동적 지성을 조명하고[빛을 쪼이고] 이것을 현실성으로 이행시키는 능동적agent 지성 혹은 제작적 지성은, 따라서 ‘«»’(Qalam)이라는 이름의 천사와 동일시된다.

안달루시아의 위대한 수피인 이븐 아라비Ibn Arabi메카의 계시(The Illuminations of Mecca)라는, 죽을 때까지 헌신적으로 썼던 작업의 구상을 신성한 도시holy city에서 끌어왔을 때, 그가 2장을 문자의 학문ilm al-hurûf에 바치기로 결정한 것은 따라서 결코 우연이 아니다. 이 학문은 모음과 자음의 위계적 수준들뿐만 아니라 이것들이 신적인 이름들에 어떻게 조응하는가를 다루었다. 인식을 획득하는 과정에서, 문자의 학문은 표현할 수 없는 것에서 표현할 수 있는 것으로의 이행을 표시한다. 창조의 과정에서 이것은 잠재성에서 현실성으로의 이행을 가리킨다. 스콜라학파에게는 단순히 말로 형언할 수 없는 것이던 실존과 순수 «존재»를 이븐 아라비는 네가 그 의미인 문자라고 정의한다. 그는 잠재성에서 현실성으로의 창조의 이행을 둑투스ductus라고 표상한다[창조가 잠재성에서 현실성으로 이행하는 것이 둑투스라고 도해적으로 표상한다]. 이 둑투스는 알리프--alif-lâm-mîm이라는 세 개의 문자를 하나의 몸짓으로 묶는다. 이 서기소grapheme[書記素: 어떤 언어의 서기체계書記體系의 최소 단위, 영어 알파벳의 각 문자 따위]의 첫 번째 부분인 문자 알리프alif는 잠재적 «존재»가 속성으로 하강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두 번째 부분인 람lâm은 속성이 현실성으로 확장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세 번째 부분인 밈mîm은 현실성이 현시manifestation로 하강한다는 것을 나타낸다.

여기서 쓰기와 창조 과정의 등치[동일시]는 절대적이다. 쓰지 않는 필경사(바틀비는 이것의 마지막이자 소진된[쇠약해진] 형상이다)는 완전한 잠재성이며, 이것을 창조의 현실성으로부터 분리하는 것은 오로지 «»뿐이다.

 

4. 필경사의 손을 움직이게 하고, 그리하여 쓰기라는 현실성으로 이행시키는 것은 누구인가? 가능적인 것이 실제적인 것으로 이행하는 것은 어떤 법칙을 따라서 이뤄지는가? 가능성이나 잠재성과 같은 어떤 게 있다고 한다면, 이 어떤 것 안에서 혹은 바깥에서 이 어떤 것을 존재하도록 야기하는 것은 무엇인가? 이슬람에서 이 물음은 모테칼레밈motekallemim, 즉 수니파 신학자들과 팔라시파falasifa 사이의 분열의 주제를 구성했다[이슬람에서 모테칼레밈motekallemim이라 불리는 수니파 신학자들과 팔라시파falasifa 사이의 분열은 이런 의문을 둘러싸고 일어났다]. 팔라시파는 아리스토텔레스의[가 말하는] 서판에 시선을 고정한 채, «»의 마음정신이나 장인의 마음정신에 존재하는 가능적인 것이 창조적 현실성에 있어서 어떤 원칙과 법칙을 따라 발생하느냐 발생하지 않느냐를 탐구했다. 이들과는 반대로, 수니 정통파의 지배적 조류를 대표하는 아슈알리파Asharites는 원인, 법칙, 원칙이라는 개념 자체를 파괴할 뿐 아니라, 가능적인 것과 필연적인 것에 관한 모든 담론을 무효로 만들며, 그리하여 팔라시파의 탐구의 토대 자체를 무너뜨린다.

사실상 아슈알리파는 창조의 현실성을 기적과도 같은 사고(事故)를 끊임없이 순간적으로 생산하는 것이라고 인식한다. 이런 사고(事故)는 다른 사고에 영향을 끼칠 수 없으며, 따라서 모든 법칙과 인과관계로부터 독립적이다. 염색업자가 흰 천을 쪽빛 염료 통에 담글 때, 혹은 대장장이가 칼을 불에 달굴 때, 염료는 천을 색깔로 물들이기 위해 천에 침투하는 것이 아니며, 금속의 열은 칼날을 고온으로 발광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다[금속의 열은 칼날을 시뻘겋게 달아오르게 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 자신이 우연의 일치coincidence를 수립한다. 이 우연의 일치는 습관적인 것이지만, 그 자체로는 순전히 기적과도 같다. 이런 우연의 일치에 의해 천이 쪽빛 염료 통에 담그어진 순간에 천에는 색깔이 산출되며, 칼날이 불로 달궈질 때마다 매번 시뻘겋게 달아오른다.

 

그러므로 필경사가 펜을 움직일 때, 펜을 움직이는 것은 필경사가 아니다. 이 움직임은 신이 필경사의 손으로[손 안에서] 창조하는 사고(事故)일 뿐이다. 신은 손의 움직임이 펜의 움직임과 일치한다는 것을, 또 펜의 움직임이 쓰기의 산출과 일치한다는 것을 관습적인 것으로서 수립했다. 하지만 손은 이 과정에서 그게 무엇이 됐든 그 어떤 인과적 영향력도 갖고 있지 않다. 왜냐하면 어떤 사고(事故)는 다른 사고에 대해 작용할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펜의 움직임의 경우, 신은 네 개의 사고(事故)를 창조한다. 이 네 가지 사고(事故)는 결코 다른 사고의 원인일 수가 없으며, 그저 서로 공존할 뿐이다. 첫 번째 사고(事故)는 펜을 움직이려는 나의 의지이다. 두 번째는 펜을 움직일 수 있는 나의 잠재력이다[펜을 움직이려는 나의 의지를 움직일 수 있는 나의 잠재력이다]. 세 번째는 내 손의 움직임 자체이다. 마지막으로 네 번째는 펜의 움직임이다. 따라서 인간이 어떤 것을 원하고 이를 할 때, 이것이 의미하는 것은 첫째, 그의 의지가 그에게 창조되며, 그런 후에 움직이는 능력이 창조되며, 그리고 마지막으로 행동 자체가 창조된다는 것이다.

 

이것은 철학자들이 제공한 창조적 현실성과는 다른 창조적 현실성에 대한 인식이 아니다[여기서 문제가 된 것은 단순히 철학자들이 구상한 것과는 다른 창조적 현실성의 구상이 아니다]. 신학자들이 원하는 것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서판을 영원히 깨버리는 것, 세계로부터 가능성의 경험을 모조리 몰아내는 것이다. 그러나 잠재성의 문제는 인간 존재의 영역에서 축출되자마자 곧바로 신에게서 재등장한다[신의 영역으로 이행한다]. 이 때문에 가잘리Ghazali는 바그다드에 있는 고등학교madrasa의 총명한 교수였을 때는 철학자들의 자기파괴(The SelfDestruction of the Philosophers)라는 책에서 아슈알리파의 입장을 집요하게 유지했으나, 이후 예루살렘의 바위의 모스크mosque of the Rock in Jerusalem에서부터 다마스쿠스의 미나레츠[minarets, 회교사원의 뾰족탑]에 이르기까지 방황을 하는 동안에, 필경사라는 형상을 또 다시 곰곰이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종교학의 부활(Revival of the Religious Sciences)에서 신의 잠재력에 관한 교훈담apologue을 저술했다. 그것은 다음과 같이 시작되었다.

 

신의 빛에 의해 계발된 사내가 검은 잉크가 묻은 종이 한 장을 보고 이렇게 물었다. ‘너는 아까 눈을 멀게 할 정도로 새하얗는데, 어째서 지금은 검은 표시로 덮여 있는가? 왜 네 얼굴이 거무스름해진 건가?’ ‘네가 그렇게 말하는 것은 부당하다고 종이는 대답한다. ‘내 얼굴을 검게 만드는 것은 내가 아니기 때문이지. 잉크에게 물어봐. 아무런 이유도 없이 잉크 단지에서 나와서는 내게 쏟아졌으니까.’ 그래서 사내는 설명을 기대하고 잉크에게 말을 걸지만, 잉크는 펜에게 들으라고 대답한다. 자신을 조용한 거처에서 떼어내서 종이 위로 추방한 것은 그 놈이라는 것이다. 다시 사내가 펜에게 물어보자, 펜은 손한테서 얘기를 들으라고 한다. 자신을 움켜쥔 다음에 잔인하게 끄트머리를 둘로 쪼개고 잉크 단지에 담근 것은 손이 아니냐는 것이다. 손이 말하길, 자신은 비참한 살과 뼈에 불과할 뿐이며, 따라서 자신을 움직인 «잠재성»에게 물어보면 어떻냐고 사내에게 얘기한다. 하지만 «잠재성»«의지»에게 들어보라 하고, «의지»«»에게 물어보라 하며, 마침내 원인에서 원인으로 움직이면서 이 계발된 사내는 신적 «잠재성»의 칠흑 같은impenetrable 장막에 이르렀다. 거기서 무시무시한 목소리가 천둥처럼 내리꽂힌다. ‘신이 하는 일에 대해 신에게 이유를 묻지 마라. 네 행위에 대한 이유는 네게서 찾아라.’

 

그러므로 이슬람적 숙명론(강제수용소 수감자inhabitant 중에서도 가장 어두운 형상인 무젤만의 이름은 여기서 유래한다)의 뿌리는 체념의 태도에 있는 게 아니라, 그 반대로 신의 기적이 끊임없이 작동되고 있다는 해맑은 신앙에 있다. 그러나 모테말레밈motekallemim의 세계에서는 [그리고 기독교 신학자들에게는 이들에 상당하는 사람들의 세계에서는] 가능성의 범주가 모조리 파괴됐다는 것은 분명하다. 인간의 잠재성이 기반을 잃었다는 것도 확실하다. [이제] 신의 펜의 해명할 수 없는 움직임만이 있을 뿐으로, 그 움직임은 결코 예측될 수 없으며, 서판은 이 움직임을 예상할 수 있는 아무런 이유[근거]도 갖고 있지 않다. 세계의 이 절대적인 탈양태화demodalization 대립하여, 팔라시파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유산에 여전히 충실한 채로 있다. [사실상] 철학은 가장 깊은 의도에 있어서 잠재성의 확고한 천명assertion이며, 가능적인 것 자체의 경험의 구축이다. 사유가 아니라 사고할 수 있는 잠재력이야말로, 쓰기가 아니라 흰 종이야말로 철학이 모든 대가를 치러서라도 잊기를 거부하는 것이다.

 

5. 하지만 잠재성은 사고하기가 가장 어렵다. 왜냐하면 잠재성이 항상 무언가를 하거나 뭔가일 수 있다는 잠재력일 뿐이라면, 우리는 잠재성을 결코 그 자체로 경험할 수 없기 때문이다. 메가라학파가 주장하듯이, 잠재성은 현실성이 실현되는 그런 현실성에서만 존재할 뿐일 것이다. 잠재성 자체의 경험은 잠재성이 항상 또한 (어떤 것을 하거나 사고하지) 않을 잠재력일 때에만, 서판이 그 위에 적히지 않을 수 있을 때에만 가능할 뿐이다. 그러나 바로 여기서 모든 것은 훨씬 복잡해진다. 사고하지 않을 수 있는 잠재력을 사고한다는 것은 어떻게 가능한가? 사고하지 않을 수 있는 잠재력이 현실성으로 이행한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사유의 본성이 잠재적이라 한다면, 사고는 무엇을 사고하게 될 것인가?

형이상학9권의 신의 정신을 다루는 대목(1074b 15-35)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바로 이런 아포리아에 직면한다.

 

사고[누스]의 문제는 몇 가지 아포리아를 내포한다. 사고는 현상들 중에서도 가장 신적인 것 같기 때문에, 그 <존재>의 양태는 문제적인 것처럼 나타난다[문제적인 것을 내포하고 있다]. 사실상 사유가 아무것도 사고하지 않는다면[, 사유가 사고하지 않을 수 있는 잠재력을 유지한다면], 왜 사유는 존귀한 것일까? 사유는 잠자는 사람과 같은 것일 텐데. 그 반대로, 뭔가를 현실적으로 사고한다면, 사유의 <존재>가 현실성이 아니라 잠재성이기 때문에, 사유는 이 뭔가[현실성]에 종속될 것이다. 사유는 가장 고귀한 실재가 아니게 된다. 왜냐하면 사유가 탁월한 것은 현실성이라는 상태에 있는 사유 때문이라는 게 되어버리기 때문[사유는 잠재적이라는 사유의 고유한 본질이 아닌 다른 뭔가에 의해 결정될 것이다.] 그리고 둘 중 어떤 경우든, 즉 사유의 본성이 잠재적 사유[nous]이든 현실적 사유[noēesis]이든, 사유는 무엇을 사고하는가? 사유 자신을 사유하는가, 아니면 사유 자신과는 다른 뭔가를 사고할 것이다. 만일 사유가 사유 자신과는 다른 뭔가를 사고한다면, 사유는 똑같은 것을 항상 사고하거나, 아니면 때로는 이것을 때로는 저것을 사고할 것이다. 그러나 고귀한 것을 사고하는 것과 우유적인[임의의] 뭔가[대상]를 사고하는 것을 차이나게 만드는 것은 무엇인가?[그러나 선을 사유하는 것과, 임의의 대상을 사유하는 것 사이에 아무런 차이가 없다는 것인가?] 어떤 대상들을 사고하는 것은 부조리하지 않다는 것인가? 그렇다면 사유가 가장 신적이고 가장 존경할 만한 것을 변함없이 사유할 것이라는 점은 분명하다. … 그리고 만일 사유가 [현실적인] 사고가 아니라 사고할 수 있는 잠재성이라면, 그 사고의 연속성은 사유를 피곤하게 할 것이라는 게 [논리적으로] 뒤따라나올 것이다. 게다가 이 경우, 사유보다 더 고귀한[상위의] 뭔가, 즉 사유의 대상이 있으리라는 것은 분명하다. 실제로 사고와 현실적 사유는 [둘 다] 심지어 최악의 [가장 저열한] 대상들을 사고하는 것에 속한다. 만일 이런 일이 기피되어야 한다면 (사실상 보는 것보다 보지 않는 게 더 나은 것들이 있기 때문에) 현실적 사유가 가장 좋은 것일 수는 없다. 그러므로 사유가 모든 것들 중에서 가장 탁월하다면, 사유는 사유 자체를 사고한다. 사유는 사고의 사고이다.

 

여기서의 아포리아는 최고의 사유가 아무것도 사고하지 않을 수도 없고 어떤 것을 사고할 수도 없으며[무를 사고할 수도 없고 어떤 것을 사고할 수도 없으며], 잠재적인 채로 머물 수도 없고 현실적으로 될 수도 없으며, 쓸 수도 없고 쓰지 않을 수도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아리스토텔레스는 이 아포리아에서 벗어나기 위해, 사유 자체를 사고하는 사유라는 그의 유명한 관념을 정식화한다. 이것은 아무것도 사고하지 않음과 어떤 것을 사고함 사이의, 잠재성과 현실성 사이의 일종의 중간이다. 사유 자체를 사고하는 사유는 어떤 대상을 사고하는 것도 아니고 아무것도 사고하지 않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사고할 수 있는 잠재성과 사고하지 않을 수 있는 잠재성이라는) 순수한 잠재성을 사고한다. 그리고 자기 자신의 잠재성을 사고하는 것은 가장 신적이고 행복하다blessed.

하지만 아포리아는 해결되자마자 다시 되돌아온다. 사고할 수 있는 잠재력이 스스로를 사고한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순수한 잠재성을 현실성에서 사고한다는 것은 어떻게 가능한가[순수한 잠재성은 어떻게 현실성에서 스스로를 사고하는가]? 아무것도 적혀 있지 않은 서판은 어떻게 서판 자체로 다시 향해가고 스스로를 각인할 수 있는가?

영혼에 관하여에 대한 주해에서 백지tabula rasa의 수수께끼에 대해, 그리고 사유 자체를 사고하는 사유라는 수수께끼에 대해 성찰하고 있는 알베르투스 마그누스Albert the Great는 바로 이런 의문을 고찰하기 위해 발걸음을 멈췄다. 그는 아베로에스와 완전히 견해가 일치한다고 선언하는데, 그 아베로에스는 잠재적 지성[사유]을 모든 인간 존재에 공통적인 하나의 실체로 만들면서, 이것에 최고의 특권을 부여했다. 하지만 아베로에스는 이 결정적인 점을 꽤 성급하게 다뤘다. 지성 자체가 가지적이라고 하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진술은 임의의 어떤 대상이 가지적이라고 우리가 말할 때와는 똑같은 의미로 이해될 수 없었다. [사실상] 잠재적 지성은 하나의 사물이 아니다[특정한 상태의 사물이 아니다]. 그것은 어떤 것thing이 그것을 통해 이해되는 지향intentio에 다름 아니다. 그것은 인식된known 대상이 아니라 그저 순수한 인식 가능성knowability과 수용 가능성(pura receptibilitas)에 다름 아니다. 메타언어의 불가능성이라는 비트겐슈타인의 테제를 선취하면서, 알베르투스는 어떤 이해 가능성intelligibility[맥락상 인식 가능성]이 이해 가능성intelligibility 자체를 포착한다[이해한다]고 말하는 것은 이해 가능성을 메타-지성과 대상-지성으로 분할함으로써 이해 가능성을 사물화하는 것일 수 없음을 분명히 알아차렸다. 사유의 글쓰기는 부드러운 밀랍을 긁기 위해 첨필을 움직이는 외부적 손의 글쓰기가 아니다. 오히려 사유의 잠재성이 그 자신에게로 향해 돌아서는 지점, 순수한 수용성이 이른바 자신의 고유한 감각을 감각하는 지점에서, “마치 문자가 저절로, 서판 위에다 스스로를 쓰고 있는 것 같다”(et hoc simile est, sicut si diceremus quod litterae sciberent seipsas in tabula)고 알베르투스는 적었다.

 

6. 진부한 말이지만, 3대 일신교는 세계가 무에서 창조됐다고 설명하는 데서 일치한다. 그래서 기독교 신학자들은 무로부터의 제작operari ex nihilo인 창조를 장인의 현실성art에 대립시킨다. 장인의 현실성은 항상 물질로부터 만드는 것facere de materia이라고 간주된다. 다음과 같은 견해에 맞서서 랍비들과 모테칼레밈 사이에서 벌어진 논쟁에서도 이에 못지않게 결정적인 논점이 발견된다. 철학자들이 한 것으로 알려진 견해[억견]에 따르면, 신이 세계를 무로부터 창조했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무에서는 무가 만들어지기[무에서는 아무것도 만들어지지 않기]nihil ex nihil fit 때문이다. 각각의 경우에, 본질적인 것은 물질(즉 잠재적 «존재») 같은 어떤 것이 «»보다 앞서 존재할 수 있다는 관념 자체를 논박하는 것이다. 그러나 무로부터 창조한다는 것은 무엇을 뜻할까? 문제를 꼼꼼이 검토하자마자, 모든 것이 복잡해진다. , «»는 점점 더 어떤 것을 닮기 시작한다. 이 어떤 것이 어떤 특정한 종류의 어떤 것임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마이모니데스는 방황하는 자들을 위한 안내서Guide for the Perplexed에서, 무로부터의 창조의 진실을 주장했는데[창조를 역설한다고 표명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피르케 랍비 엘리에젤Pirke Rabbi Eliezer의 이름으로 알려진 권위 있는 미드라슈midrash의 한 구절을 잘 알고 있었다. 이 미드라슈는 신학자와 학자의 신앙을 크게 흔들어버린다.” 창조의 물질 [질료] 같은 어떤 것이 실존한다고 주장하기 때문이다[왜냐하면 거기에는 세계의 창조의 바탕이 된 물질을 생각하지 않고서는 이상한 뭔가가 묘사되어 있기 때문이다]. 미드라슈에서 이런 걸 읽는 것이다. “천국[하늘]은 무엇으로 창조되었는가? 신은 자신의 옷에서 빛을 취하고, 이것을 시트처럼 쭉 폈다. 그리하여 천국이 만들어졌다. 그것은 그는 옷에 감기듯이 빛에 몸을 감싸고 천국을 양탄자처럼 편다고 적혀 있는 것 그대로이다.” 게다가 코란의 시구에 따르면, 신은 우리는 네가 아무것도 아니었을[무였을](네가 하나의 무였을) 때, 너를 창조했다고 말하면서 피조물에게 말을 걸었다고 여겨지지만, 수피들에 따르면 이 시구는 신이 창조의 행위에서[현실성에 있어서] 있으라!”라고 말하면서 <무>를 전환했기[불러냈기] 때문에, 이무는 순수한 <무>가 아니었다는 것을 증명했다.

사실은 이렇다. 유대교, 이슬람교, 기독교의 신학자들이 무로부터의 창조라는 관념을 정식화했을 때, 신플라톤주의는 그로부터 모든 것들이 생겨나는 <무>를 최고의 원리로 이미 인식했다는 것이다. 신플라톤주의자[신학자]들이 이른바 위로부터 존재자들을 초월하는 <무>와 아래로부터 존재자들을 초과하는 <무>라는 두 개의 무를 구별하듯이, 신플라톤주의자들은 두 개의 물질을 구별했다. 하나는 육체적 물질이고, 다른 하나는 비육체적 물질이다. 후자는 가지적인 존재자들의 어둡고 영원한 배경[밑바탕]이다. 카발라학자들과 신비가들은 이 테제를 극한으로 끌고가 이들의 특징적인 급진성으로, 이로부터 모든 창조가 생겨나는 <무>가 신 자체라고 명확하게 진술했다. 신적인 <존재>(심지어 초hyper-<존재>)이란 존재자들의 <무>이며, 오로지 신이 <무>에, 이른바 푹 빠져들었기[내려갔기]에 신은 세계를 창조할 수 있었다. 요하네스 엘리우게나John Scotus Eriugena『신적인 자연에 대해De divisione naturae에서 창세기의 시구인 “그리고 대지는 형태가 없고 공허하며, 어둠이 심연의 면[얼굴]에 있다(terra autem erat inanis et vacua et tenebrae erant super faciem abyssi)에 주석을 달면서, 이것이 신의 정신 속에서 영원히 만들어지는 존재자들의 제1이념 혹은 제1원인을 가리킨다고 한다. “오로지 이 어둠, 이 심연으로 내려감으로써만 신은 세계를 창조하며, 이와 동시에 신 자신도 창조한다(descendens vero in principiis rerum ac velut se ipsam creans in aliquo inchoat esse)는 것이다.

사실상 여기서 쟁점은 가능성이나 잠재성이 <신> 속에 실존하는가라는 문제이다. 모든 잠재성은 또한 비잠재성(있지 않거나 하지 않을 수 있는 잠재성)이라고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이래, 신학자들은 신이 전능하다고 단언한 동시에 신에게서 있을[존재할] 수 있고 의욕할 수 있는 모든 잠재력을 제거할 수밖에 없었다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무엇인가를 할 수 있다는 잠재성은 이미 이것을 하지 않을 수 있다는 잠재성이기도 하다. 그 때문에 신학자들은 신이 전능하다고 단언함에도 불구하고 이것과 동시에, 신에 대해 존재할 수 있다는 잠재성, 의욕할 수 있다는 잠재성을 부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만일 신이 존재할 수 있는 잠재성을 갖고 있다면, 신은 존재하지 않을 수도 있으며, 따라서 이것은 신의 영원성과 모순될 것이다. 다른 한편, 만일 신이 자신이 원하는 것을 원하지 않을 수 있다면, 그는 비-<존재>와 악을 원할 수 있을 것이며, 이것은 니힐리즘의 원리를 신 속에 도입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그래서 신학자들은 이렇게 결론내린다. , 신이 자신 속에 무제한의 잠재성을 포함하고 있다고 하더라도, 신은 신 자신의 의지에 구속되며, 자신이 의지했던 것과는 다른 그 어떤 것을 할 수도, 원할 수도 없다. 신의 의지는 신의 <존재>와 마찬가지로 이른바 절대적으로 잠재성을 결여한다신의 의지는 신의 존재와 마찬가지로 절대적으로 잠재성이 없는 것이다.

이와 대조적으로 신비가들과 카발라학자들에 따르면, 창조가 전제하는 모호한 물질은 다름 아니라 신의 잠재성이다이와 반대로 신비가들과 카발라학자들이 창조에 선행하는 것으로 전제하고 있는 것이 바로 모호한 물질인 신적인 잠재성이다. 창조의 행위현실성는 신이 심연으로 하강하는 것인데, 이 심연은 신 자신의 잠재성과 비잠재성이며, 신의 있을 능력가능성과 있지 않을 수 있는 능력이다이 심연은 신 자신의 잠재성과 비잠재성 사이의, 신이 행할 가능성과 행하지 않을 가능성 사이에 열려진 심연에 다름 아니다. 1210년에 이단이라고 선고를 받은 디낭의 다비드David of Dinant의 급진적 정식화에서는, 신과 사유와 물질은 하나의 동일한 것이며, 이 무차이적인undifferentiated 심연은 이로부터 세계가 진행되는 <무>이며, 이것에 세계가 영원히 의존하는 <무>이다나아가 1210년에 교의가 이단선언을 받은 디낭의 다비드의 과격한 정식화에 따르면, 신과 사유와 물질은 하나의 동일한 것이며, 이처럼 차이가 없는 심연이야말로 그로부터 세계가 생겨나는 무이며, 세계는 이 심연에 영원히 의존한다. 이런 맥락에서 심연은 은유가 아니다. 야콥 Jakob Böhme이 명확하게 진술하듯이, <무>가 영원히 산출되는 것은 <신>의 어둠의 삶이며, <지옥>의 신적 뿌리이다. 우리가 이 타르타루스[바닥 없는 지옥]에 빠져들고 우리 자신의 비잠재성을 경험하는 데 성공할 때에만, 우리는 창조할 수 있게 되며, 진정으로 시인이 된다. 그리고 이 경험에서 가장 어려운 것은 많은 사람들이 여전히 그 안에 갇혀 있는 <무>나 그 어둠이 아니다. 가장 어려운 것은 이 <무>를 무화할 수 있는 것, <무>로부터 뭔가를 있게 만들 수 있는 것이다. 이븐 아라비Ibn Arabi는 메카 계시의 서두에서, “<무>로부터 사물들을 실존하게 만들고 무를 무화했기 때문에 신은 찬양된다고 적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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