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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음 제시문을 읽고 질문에 답하시오.

<문제 1> 제시문을 읽고 필자의 사고방식을 300자 이내로 요약하시오.

<문제 2> 언어활동을 인간 독자의 진화로 간주하는 필자의 견해를 고려한 후에, 언어와 인간의 관계에 관한 자신의 생각을 논술하시오. (400자 이내)



마음에 관해 예전부터 있었던 여러 가지 말 ― 영혼, 넋, 정신, 마음 등의 말 ― 대신에 최근에는 과학적인 맥락에서 ‘의식’(consciousness)이라는 말이 보다 자주 사용되고 있다. 하지만 나는 ‘마음’을 ‘의식’이라는 말로 완전히 치환할 수 없다고 생각하며, ‘의식’이라는 말의 의미에 관해 조금 상세하게 분석하면서 ‘마음’에 관해 새롭게 생각해 보고 싶다.

생각해 보면 영혼이나 마음이라는 한 마디로 말하고 있는 우리들 마음의 실제적 경험은 다른 여러 부분들로 나누어질 수 있다는 느낌이 든다. 슬프다, 기쁘다와 같은 정서도 마음의 기능이다. 마찬가지로, 계산을 하거나 추리를 하는 것도 마음의 기능이다. 또한 공상에 빠지거나 미(美)를 의식하는 것도 마음의 기능이라면, 마찬가지로 강연을 하고 책을 쓰는 것도 마음의 기능이다. 하지만 미를 느끼는 마음의 기능과 추리나 계산을 할 때의 마음의 기능은 같은 것이 아니다.

그런데 ‘의식하다’는 것은 마음의 여러 가지 상이한 경험에 공통적인 것일까, 아니면 여러 가지 경험과는 다른, 또 하나의 새로운 종류의 경험일 것일까? 확실히 ‘마음’과 달리 ‘의식하다’는 말은 그것에 대응하는 경험을 모든 사람이 가지고 있고 알고 있는 경험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의식하다’는 말에 해당하는 마음의 경험은 구체적으로 어떠한 경험일까? 이 물음에 답하는 것은 상당히 어렵다. 기쁘다나 슬프다와 같은 마음의 경험은 어떤 경험인가라고 물어보면, 그러한 경험을 한 과거의 어떤 장면을 생각해 내고 그 때 내가 가지고 있었던 마음의 경험이 그것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의식하다’는 경험의 경우에는, 어떤 구체적인 특징의 사례를 거론할 수 있을까?

의식이라는 말은 한국 고유의 말이 아니라 근대에 들어와 영어의 consciousness, 프랑스어의 conscience, 독일어의 Bewußtsein, 라틴어의 conscientia, 그리스어의 δυνείόησις이다. 영어, 프랑스어, 라틴어는 그리스어에서 유래한 것으로, ‘함께 알다’는 동사의 명사형이다. 이 ‘함께’를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에 관해서는 여러 가지 설들이 있다. 독일어에서는 ‘깨닫다’나 ‘알고 있다’는 의미이며, 그리스어 계통에서도 여러 가지 상이한 대상을 구별하여 (나누어) 알고 있다, 즉 ‘알고 있다’는 의미이다. 그런 의미에서는 개나 고양이뿐만 아니라 물고기도 곤충도 지각을 통해 자신의 환경 속에서 사물이나 사건을 깨닫고 있으며, 그것이 무엇인가를 어느 정도까지 ‘알고’ 있기 때문에, 어쩌면 모든 생물은 ― 정도의 차이는 있더라도 ― 무엇인가를 알아차리고, 그것이 어떤 것인가를 ‘알고’ 있으며, 그런 의미에서 의식을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의식하고 있다’는 것은 도대체 어떠한 경험일까를 생각하여 우리들이 자기 자신의 경험을 반성해 보도록 하자. 이 경우 우리들이 알지 못하는 사이에 빠져드는 혼동이 생겨난다. 그것은 우리가 바깥에 있는 무엇인가의 ‘대상을 깨닫고 있다’는 의식 1과, 대상을 깨닫고 있다, 즉 의식 1을 하고 있다는 것은 무엇인가를 생각하는 의식 2가 혼동되어 버린다. 달리 말하면, 어떤 대상을 의식하고 있다는 것과, 어떤 대상을 의식하고 있다는 것을 대상으로 하여 그것은 무엇인가를 의식하여 묻는 것, 다시 바꿔 말하자면, 의식과 의식의 의식을 혼동하는 것이다. 의식하고 있다는 사실과 의식이라는 말의 의미는 무엇인가를 명확하게 하고자 하는 의식의 혼동이며, 이 나중의 물음은 단순히 의식한다는 (동물도 인간과 마찬가지로 가지고 있는) 사실이 아니며, 의식이라는 말의 의미를 묻는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의식은 언어를 가지고 있는 인간만이 가지고 있는 의식이며, 의식을 의식하는 자기의식이며, 동물에게는 없는 인간 특유의 마음의 존재이라는 생각으로 나아가 버린다.

생각해 보면, 인간이더라도 예를 들어 야구 경기를 하고 있을 때, 자신이 친 공이 어떤 방향으로 날아가고 있는가는 ‘알고 있다’, 즉 의식하고 있으며, 자신이 1루를 향해 달리고 있을 때, 공이 1루수의 손에 들어가기 전에 자신의 몸이 1루 베이스를 밟기 위해 충분한 시간이 있다고 하는 것도 ‘알고 있으며’, 그것을 의식하며 달린다. 이 의식과 매가 공중을 날고 있고, 지상에 사냥감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으며, 그것을 포획하기 위해서 급강하하여 사냥감을 손에 넣을 수 있게 행동할 때에 알고 있다는 의식과는 같은 종류의 의식이며, 각각의 마음의 기능의 일부이다. 마찬가지로 인간이 사바나 지역에서 사자와 맞딱뜨려 사자라는 것을 알고 (의식 1), 그 결과로서 공포의 감정을 가지는 마음의 움직임과 얼룩말이 사자와 맞딱뜨려 사자라고 알고 (의식 1), 그 결과로서 공포의 감정을 가진다는 것, 인간과 얼룩말에 공통의 동일한 종류의 마음의 기능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또한 추리한다는 마음의 기능도 인간 이외의 다른 동물에게서도 발견된다. 고양이가 쥐를 잡는 운동 속에서도, 쥐의 행동 방식을 사전에 예측하여 행동하기도 하고, 사자가 사냥감을 쫓을 때 다른 사자가 사냥감이 도망칠 방향을 예측하여 다른 방향에서 사냥감을 기다리는 행동을 할 때에도 추리를 한다.

이렇게 의식 1, 즉 ‘알아챈다’는 것, 추리한다는 것, 공포나 기쁨 등의 감정, 정서와 같은 마음의 여러 가지 기능은 (정도의 차이를 무시하면) 인간 특유의 것이 아니다. 모든 동물, 경우에 따라서는 식물도 온도나 빛의 유무를 ‘알고 또는 알아채고’ 행동(꽃을 피우기도 하고, 낙엽을 떨어뜨리기도 하며, 꽃이 향한 방향을 바꾸기도 하는)을 하기 때문에, 마음의 일부의 기능은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다(감정, 정서의 마음의 기능의 부분은 갖고 있지 않더라도)고 할 수 있다.

단, 의식2는 인간에게 특유한 마음의 기능의 부분 속에서 생겨나는 것이다. 그것은 단순히 의식하고 있다(의식 1)든가, 또는 공포스러워 하거나 슬퍼하는 마음의 기능의 바깥에, ‘의식’이라든가 ‘슬픔’, ‘공포’ 등 그 밖의 많은 언어기호에 관해 그러한 의미를 생각하고, 그것들이 서로 중복하기도 하고 모순되기도 하는가 그렇지 않은가를 생각하는 다른 하나의 마음의 기능이다. 그리고 이 ‘다른 하나의 마음의 기능’은 인간이 언어를 가지고 있다는, 다른 동물에게는 존재하지 않는, 완전히 새로운 마음의 기능을 진화의 과정에서 획득했다는 것에 의해서 인간에게서만 생겨나는 것이다.

언어기호를 사용한다는 인간의 독자적 능력은 마치 날개를 퍼덕이며 공중을 나는 새의 능력과 마찬가지로, 인간이 사는 환경 세계의 이미지를 다른 동물의 이미지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확대된다. 현재 생존하는 개나 고양이는 3백년 이전의 강호의 이미지, 더구나 5만년 이전의 원시 인류가 어떤 생활을 하고 있는가의 이미지를 가질 수 없다. 하지만 인간을 그것을 할 수 있다. 그 이미지는 시대나 장소나 사람에 따라서 다를 수도 있지만, 어떠한 경우에도 이미지 그 자체는 가질 수 있다. 이것은 인간의 지각에서의 의식, 즉 귀나 눈과 같은 감각 기관으로 지각하고 알 수 있는 환경의 풍경이, 현재 지각되고 있는 것의 의식에서, 현재 지각되지 않으나 일찍이 한 번 지각되었던 것의 기억, 상상에 의해 과거나 미래의 이미지의 의식에 이르기까지 ― 언어활동을 통한 ― 확대 연장된 예이다.

이러한 풍경의 의식의 확대에 기초를 두고, 인간 마음의 다른 기능, 예를 들어 감정이나 정서의 기능도 확장된다. 인간이나 동물은 자신이 손에 넣었던 음식이 다른 동물에게 빼앗길 때에 생겨날 수 있는 감정은 동일하며, 종의 유지를 위해 행하는 성행위의 순간의 감정도 동일할 것이다. 그러나 일상의 식물은 일단 부족하지 않게 섭취하고 있으나 사회가 경제 불황에 빠지고 고용이 악화되어 실업의 공포가 낳을 생활의 불안이라든가, 인간의 생태계 악화에 따라 장래에 일어날 인류의 멸망이라는 관념이, 어떤 사람에게 부여된 미래에 대한 유토피아를 빼앗긴 희망 없는 종말에 대한 불안과 같은 복잡한 감정, 또는 한국의 문학적 표현의 한 양식에 수반된 ‘한적함’이라든가 ‘고담함’이라는 정서는 언어표현의 능력을 갖고 있지 않은 다른 동물에게는 일어나지 않는 감정 정서의 인간 특유의 언어에 의한 확장일 것이다.

또한 인간 이외의 동물에게서도, 예를 들어 필요로 한 식물이 많은가 적은가의 차이는 판단할 수 있고, 사냥감을 쫓는 행동을 할 때, 그 사냥감이 어떻게 행동하는가를 앞서서 추리할 수 있을 것이다. ― 그러나 이 많은가 적은가를 숫자 기호(언어기호와 같은)를 이용해 4배 많다든가 15배 많다 등이라는 산수적 계산은 할 수 없으며, 또한 추론을 현재 눈앞에서 일어나고 있는 사건 속에서 행하는 것으로부터 분리되어 일반적, 형식적으로 표현할 수 없다. 이것을 할 수 있는 인간 마음의 기능은, 언어 기호 또는 숫자 기호를 이용하는 일을 할 수 있게 된 대뇌가 확대된 기능에 따라, 대뇌의 감정이나 정서를 낳는 부분이 적응력을 갖고 작동하게 되었던 것에서 생겨나는, 마음의 확장된 부분의 기능이다.

이처럼 마음의 여러 가지 부분의 기능이, 동물 일반으로부터 인간이라는 동물이 되어 현저하게 확장되는 원인은, 인간으로 되어 처음으로 언어기호를 사용하는 것이 가능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감각기관을 통해 환경을 지각하여 의식하는 능력은 인간이나 다른 동물도 (시각이 중심에 잇거나 아니면 시각이 없어도 청각이 다른 동물보다 두드러진 차이를 별로 한다면)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는 능력이다. 그러나 언어사용의 능력은 인간만이 진화의 과정에서 가질 수 있었던 특별한 능력이다.

이 언어를 이용함으로써, 인간은 서로 커뮤니케이션을 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한 사람의 환경의 풍경을 무한히 확대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스 신화를 듣기도 하고 읽기도 함으로써 우리들은 현재 지각하고 있는 환경의 풍경을 넘어서, 지각의 풍경 속에서 어쩌면 현재 볼 수 없는 날개를 가진 말, 즉 페가수스라는 동물의 이미지를 가질 수 있으며, 오르페우스와 에우리디케 이야기에 감동하기도 한다. 또 도스토예프스키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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