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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 과학지식과 기술문명에 의해 인간에게는 한없는 장밋빛 미래가 약속된 것처럼 생각되었다. 부분적으로는 불가능하게 보이는 것이나, 고약한 일이나 심각한 일이 생기더라도 이것들은 결국에는 극복될 것이라고 믿게 되었다. 그런데 현실은 그러한 방향으로만 진행되지는 않았다. 뿐만 아니라, 현실이나 자연으로부터 인간은 가차 없는 앙갚음을 받게 되었다. 실제로 이 지구상에서 우리 인간은 누구든 간에 많든 적든 자연 파괴나 환경오염으로 인해 피해를 입게 되었고, 우리 인간의 생활환경은 자연적뿐만 아니라 사회적․정신적으로도 위험으로 넘쳐나게 되었다.
과학지식이 만능이 아니라는 것을 사람들이 점차 눈치 채게 된 것은 그러한 면 때문만은 아니다. 다른 하나로는 이런 것이 있다. 즉, 과학지식을 너무 신뢰한 나머지 독주한 결과, 이것에 그다지 합치하지 않는 영역, 사태의 성질상 애매함을 남길 수밖에 없는 영역을 정당하게 다룰 수 없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것은 일반적으로 말하자면 ‘경험이 말하는’ 영역이나 ‘말이 큰 역할을 하는’ 영역에서 뚜렷하게 볼 수 있다. 그렇다면, 근대과학이 이정도로 사람들의 신뢰를 받고 설득력을 갖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고금(古今)의 수많은 이론이나 학문 중에서 특별한 위치를 차지한 이유는 무엇일까? 한마디로 말하자면, 근대과학이 17세기의 ‘과학혁명’ 이후 ‘보편성’과 ‘논리성’, ‘객관성’이라는 자신의 설을 논증하여 타인을 설득하는데 있어서 가장 적합한 세 가지 성질을 보존해 왔기 때문에 다름 아니다.
우선 ‘보편성’이란 이론의 적용 범위가 더할 나위 없이 넓은 것이다. 예외 없이 언제 어디서든 타당하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이런 성격을 지닌 이론에 대해서는 예외를 들어 반론을 가할 수 없다. 원리적으로 예외는 있을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다음으로 ‘논리성’이란 주장하는 바가 극히 명쾌하고 수미일관된 것이다. 이론의 구축에 관해서도, 용어에 있어서도 다의적인 애매함을 조금도 포함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따라서 그러한 성격을 가진 이론에 대해서는, 최초로 논자에 의해 선택된 절차에 의해서만 문제가 수립되고 논의할 수 있게 된다. 마지막으로 ‘객관성’은 누구든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명백한 사실로서 존재한다는 것이다. 개개인의 감정이나 생각으로부터 독립해 존재한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그러한 성격을 가진 이론에 있어서는 사물의 존재가 주관에 의해서는 전혀 좌우되지 않는다는 것이 된다.
그렇지만 ‘현실’이란 이렇게 근대과학에 의해 파악된 것에만 한정되는 것일까? 아니, 이러한 원리를 갖춘 이론에 의해 구체적인 현실이 파악되고 있을까? 이것과는 정반대일 것이다. 오히려 근대과학에 의해 파악된 현실이란, 기본적으로 기계론적․역학적으로 선정되고 정리된 것에 불과한 것이 아닐까?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근대과학의 ‘보편성’과 ‘논리성’, ‘객관성’이라는 세 가지 원리는 각각 무엇을 경시하고 무시하고 있는 것일까? 이것들은 무엇을 배제함으로써 성립할 수 있었을까?
[근대 과학에 대한 반성을 근거로 하여, 내가 제창하는]‘임상적 앎’이란 좁은 의미에서의 의학적인 임상적 앎이 아니다. 근대과학이 간과하고 배제해 온 측면들을 낳게 된 앎의 방식이자 학문의 방법이다.
임상적 앎의 사고방식이 비판의 대상으로 삼는 것은 무엇보다도 근대적인 ‘과학적 앎’이기에 이것과 대조하여 문제를 파악해 보자.
그런데 ‘임상적 앎’은 과학적 앎의 세 가지 구성 원리를 앞에서 (1) 보편주의, (2) 논리주의, (3) 객관주의라고 불렀을 때, 이 각각에 대해서 (1) 우주론, (2) 상징주의, (3) 퍼포먼스라고 내가 부르는 것을 구성 원리로 삼고 있다.
여기에서는 우선, 첫째로 우주론은 무엇보다도 장소나 공간을 ― 보편주의의 경우처럼 ― 무차별성과 균질적 확장으로서가 아니라 하나하나가 유기적인 질서를 갖고 의미를 가진 영역으로 보는 입장이다. 따라서 또한 여기에서는 개별 사례나 장소(토포스)가 중요하게 된다. 즉, 천체에 관해 일찍이 말해졌던 코스모스의 성질을, 대우주에 대한 소우주처럼 여러 가지 구체적인 장소나 공간 속에서 보는 견해이다.
어떤 사건이 일어날 때, 그것이 자연현상일 때조차도 실제로는 이러한 장소 안에서 일어난다. 그 사건이 인간에 관련된 것이라면, 그러한 장에서 활동하든 생활하든, 혹은 타인과 관계하든, 공간의 질이나 양상이나 의미가 그것에 한층 더 깊이 관련을 맺게 된다.
다음으로 두 번째로, 여기서 상징주의라는 것은 문학에서의 상징주의처럼 한정된 의미가 아니다. 그것은 추상 기호로가 아니라 말에 의한 것처럼 사물을 이 사물이 지닌 다양한 측면에서, 일의적이 아니라 다의적으로 파악하여 나타내는 입장이다. 예를 들어 손목시계의 존재양태에 관해 생각해 보면, 많은 시계는 개념적으로는 동일한 손목시계라도 그 존재양태는 완전히 다르다.
오늘날에는 시계라고 하더라도 단순히 시간을 측정하고 시각을 알기 위한 것만은 거의 없으며, 값이 싸더라도 디자인이 기발한 것, 가격이 높은 쪽에는 많은 다이아몬드가 박혀 있는 것 등등 여러 종류가 있다. 즉 그저 실용적인 목적을 위해서만 만들어진 것은 아니다. 이러한 의미의 다면성, 다의성은 시계 같은 것뿐만 아니라, 어떤 평범한 자갈에 관해서도 말할 수 있다. 따라서 상징주의란 사물에는 많은 측면과 의미가 있다는 것을 자각적으로 파악하여 표현하는 입장인 것이다.
마지막으로 세 번째로는 퍼포먼스인데, 여기서 퍼포먼스란 공학적인 의미에서의 ‘성능’이 아니라는 것, 자주 오해되고 있듯이 그저 몸을 사용하고, 몸을 움직여 무엇인가를 하는 것만도 아니다. 전신의 몸을 사용한 표현인 경우도 있지만 퍼포먼스이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행위하는 당사자와 그것을 보는 상대, 또는 그것에 입회한 상대와의 사이에 상호작용interaction이 성립되어 있어야만 한다.
게다가 그러한 상호작용이 성립하는 것은 어떤 특별한 도발이 일어나기 때문이 아니다. 그렇다기보다는 인간이 신체성을 가지고 행위하고 행동하기 때문이며, 바로 그때 사람은 곧바로 상대방이나 자신을 둘러싼 환경의 영향을 받으면서, 즉 자기 가운데 파토스적․수동적 존재양태를 포함하여 행위 및 행동하게 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주론과 상징주의와 퍼포먼스라는 세 가지를 특성이나 구성 원리로 하는 ‘임상적 앎’은 근대적인 ‘과학적 앎’과 대비해 볼 때 다음처럼 정리할 수 있다. 즉 과학적 앎은 추상적인 보편성에 의해 분석적으로 인과율에 따른 현실에 관계하며, 그것을 조작적으로 객관화하는 반면, 임상적 앎은 개별 사례나 장소를 중시하여 심층의 현실에 관계하며, 세계나 타자가 우리에게 보여준 숨겨진 의미를 상호행위 속에서 읽어내고 파악하는 기능을 한다고.
바꿔 말하면, 과학적 앎이 싸늘한 눈빛의 앎, 시각 중심의 앎인데 반해, 임상적 앎은 감각들의 협동에 토대를 둔 공통감각적인 앎이게 된다. 말하자면 임상적 앎에 있어서는 시각이 기능하더라도 단독으로가 아니라 다른 감각들, 특히 촉각을 포함한 체질 감각과 결합되어 기능하기 때문에 그 기능은 공통감각적인 것이 되는 것이다.
그런데 과학적 앎이 주로 가설과 연역적 추리와 실험의 반복으로부터 성립된 데 반하여, 이러한 임상적 앎은 직감과 경험과 유추의 시행착오로부터 성립되고 있으므로, 임상적 앎에서는 특히 경험이 큰 역할을 하며 또한 큰 의미를 가지고 있다.
                                                                 - 나카무라 유지로, <임상적 앎이란 무엇인가>에서 발췌 ․ 수정

<나> [아래의 글상자 안에 있는 글의 저자인] 존슨은 지금까지 주류를 이루었던 의미와 합리성 이론이 현재 중대한 위기에 직면하고 있다는 확인에서부터 논의를 시작한다. 의미, 이해, 추리 등 모든 면에서 상상력이 떠맡고 있는 중심적 역할이 완전히 무시되고 있는 것, 이것 이상으로 심각한 위기가 있을까?
상상력에 무지하기는커녕, 의미와 합리성 자체에 위기를 초래한 사고방식을 존슨은 ‘객관주의’라고 명명한다. 객관주의란 의미와 합리성을 순수하게 개념적인 것으로 간주하는 사고방식, 거꾸로 말하면 신체에 의한 경험이나 그러한 경험을 구조화한 상상력에는 어떠한 역할도 부여하지 않는 사고방식에 다름 아니다. 객관주의의 이러한 특징이 명백하게 나타난 것은 아마도 의미이론의 분야일 것이다.
이 이론에 따르면 의미란 기호와 현실 사이의 객관적 관계에 토대를 두고 있다고 한다. 기호에 관해서는 그 자체로는 의미도 고유한 구조도 갖추지 않은, 완전히 추상적이고 자의적인 존재자에 불과하다고 본다. 보통 기호에 따른 관념이나 이미지라는 요소는 의미를 규정할 때에 어떤 역할도 하지 않는 주관적인 것에 불과하다고 간주되어 배제된다. 그리고 현실에 관해서는 우선 이것이 사물, 사물이 지닌 특성, 사물이 서로 결합된 관계, 이 세 가지로부터 성립된다는 것, 그리고 이것들은 모두 인간을 이해하는 기능으로부터 독립하여, 즉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것이라고 주장된다.
그런데 추상적인 기호는 현실의 요소와 대응하는 한에서 의미를 지닌다. 예를 들어 ‘금강산’ 등의 지시표현은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금강산을 가리킨다. 술어(동사나 형용사)는 ‘높다’는 특성이나 ‘보다 높다’와 같은 관계를 지시한다. 문장이 참이라는 것은 지시된 존재자가 그것에 부여된 술어가 지시하는 특성을 현실에서 갖고 있는 경우(‘금강산은 높다’), 또는 지시된 존재자들이 술어가 지시하는 관계를 실제로 묶고 있는 경우(‘금강산은 63빌딩보다 높다’)이다. 어느 쪽 경우든 이해의 기능은 개재되지 않는다. 이리하여 문장의 의미란 이 글을 참으로 하는 조건(진리 조건)에 다름 아니라고 간주된다. 이렇게도 단순하고 명쾌한 견해가 그 밖에 또 있을까.
존슨은 이 설명에 등장한 ‘기호’, ‘사물’, ‘관계’ 등의 말이 모두 공허하다고 한다. 왜냐하면 기호가 기능하는 장면에는 동시에 반드시 인간의 ‘이해’ 기능이 수반되는데, 이 설명에서는 한마디도 이 사실에 눈에 띄지 않기 때문이다. 그가 대안으로 제시하는 것은 개념의 형성이나 범주 파악에 필요불가결한 역할을 맡은 ‘신체’의 의의를 강조하고, 이미지 도식이나 은유적 투사를 만들어내고 조작하는 ‘상상력’을 중시하는 의미 이론이다.
객관주의가 고대부터 오랫동안 받아들여진 서구 사상의 전통이었으며, 특히 과학주의와 고도의 기술 문명을 낳은 근대에 적합하다고 한다면, 인지의미론을 하나의 축으로 하여 전개된 존슨의 반-객관주의 사상은 각 방면에서 평소 주창되었던 포스트모더니즘의 조류로 저절로 흘러든다. 확정된 하나의 진리 대신에 문화나 개념 도식에 상대적인 복수의 진리, 또는 진리의 절대성 그 자체의 상실. 경직된 이성의 지배에 대한 상상력의 복권. 개념, 명제, 언어로 표현할 수 있는 것, 이산적(離散的)인 것 대신에 개념화 이전의 것, 이미지, 도식, 연속적인 것. 투명하고 순수한 정신은 아니라 오히려 불투명하고 불순한 신체. 문자 그대로 일의적인 것보다 비유적이기도 하고 다의적이기도 한 것 ― 포스트모던의 길은 분명히 전자에서 후자로 향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반-객관주의를 오해해서는 안 된다. 객관주의에 이의를 제기하는 것은 객관주의의 반대극에 있는 주관주의에 가담하는 것이 아니다. 주관주의란 객관주의의 단순한 반대에 불과하며, 이것 역시 ‘신화’이다. 객관주의를 택하지 않는다는 것은 주관주의도 택하지 않는다는 것, 이러한 불모의 양자택일을 떠나 ‘다른 하나’의 길을 걷는다는 것이다.

[근대 과학의 지식으로 대표되는 서구 합리성의] 위기에 적절히 대처하기 위한 열쇠는 의미와 합리성에 관한 ‘객관주의적’ 설명에서는 무시되고 낮은 가치 밖에 주어지지 않았던 것 ― 인간의 신체, 특히 우리의 신체화된 경험이 창발적인 상상력과 이해의 구조에 주목하는 것이다. ‘객관주의’는 지금까지 신체를 무시해 왔다. 왜냐하면 의미의 객관적 본성과는 관계가 없어 보인 주관적 요소를 신체가 도입한다고 생각되어 왔기 때문이다. 신체가 지금까지 무시되어 온 이유에는 다음의 것도 있다. 이성은 추상적이고 초월적인 것, 즉 인간적 이해의 신체적 측면에는 아무런 관계를 맺지 않고 있다고 생각되어 왔기 때문이다. 신체는 추상적인 일에 관해서 우리가 행하는 추리에는 어떤 역할도 맡기지 않는다고 생각된다. 그 때문에 신체는 지금까지 무시되어 왔다.
신체화된 상상적 이해라는 중요하면서도 과소평가된 관념을 구체적으로 설명하기 위해서, [내] 연구의 중심을 차지하는 상상적 구조의 두 가지 형태, 즉, 이미지 도식과 은유적 투사를 생각해 보자. 이미지 도식이란 우리의 지각적 상호작용과 운동 프로그램에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역동적 패턴이며, 이것에 의해 우리의 경험에 일관성과 구조가 주어진다. 예를 들어, 수직성(VERTICALITY) 도식은 우리가 경험으로부터 의미로 가득 찬 구조를 끄집어낼 경우에 위-아래(UP-DOWN)라는 방향부여를 이용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창발적이다. 우리는 수직성이라는 이 구조를 매일 경험하는 수천에 달하는 지각이나 활동, 예를 들어 나무를 지각하는 것, 일어설 때 느껴지는 감각, 계단을 오르는 행동, 기도의 심리적 이미지를 만드는 것, 아이의 키 크기를 측정하는 것, 욕조를 흘러넘치는 물높이의 경험 등에서 반복되어 파악된다. 수직성 도식은 이러한 수직성의 경험, 이미지, 그리고 지각의 추상적 구조이다. [이와] 같은, 경험에 근거하여 상상력에 의해 매개된 이미지 도식적인 구조는 의미와 합리성에 있어서 불가결한 요소이다.
내 탐구의 중심을 차지하고 있는 것은 신체화된 상상적 구조인데, 이 구조와 관련된 두 번째 유형은 은유에 다름 아니다. 나는 은유를 이해에 넓게 침투해 있는 양식이라고 생각한다. 즉 이 양식은 종류가 상이한 다른 영역을 구조짓기 위해서 어떤 경험 영역으로부터 거기에 패턴을 투사하는 방식인 것이다. 이렇게 생각했을 경우, 은유는 단순히 언어적인 표현 양식에 불과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인지적 구조의 중요한 한 가지이다. 이 구조 덕분에 우리는 수미일관된 질서가 있는 경험을 가질 수 있는 것이며, 그러한 경험에 관해서 추리를 작동시키기도 하고 의미를 취하기도 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추상적 이해를 조직하기 위해서, 물리적 경험 속에 나타난 패턴을 은유라는 형태로 사용한다. 구체적인 것에서 추상적인 것으로의 은유적 투사에 의해서 이해를 할 경우, 물리적 경험은 두 가지 방법으로 활용된다. 첫째로, 경험의 다양한 물리적 영역에서 나온 우리의 신체 운동과 상호 행위가 (이미지 도식에 관해서 본 것처럼) 구조지어 질 수 있게 되며, 이 구조는 은유에 의해 추상적인 영역으로 투사할 수 있다. 두 번째로, 은유적 이해는 임의의 것에서 임의의 것으로의, 아무런 제약도 없으며 자의적이고 변덕스러운 투사 등이 아니다. 구체적인 신체 경험은 은유적 투사로의 ‘입력’을 제약할 뿐만 아니라, 투사 자체의 본성, 즉 영역에 걸쳐서 생길 수 있는 사상(写像)의 종류도 제약하는 것이다.
의미와 추리에 부과된 이러한 제약의 일례로 아주 단순한 것은 아니지만 넓게 퍼져 있는 은유적 이해를 생각해 보고 싶다. 즉, 많은 쪽이 위다(MORE IS UP)라는 예이다. “많은 쪽이 위다”라는 명제를 사용한 표현 자체는 본래 명제가 아니라 여러 가지 연관으로 이루어진, 복잡하고 경험적인 그물망을 명명하기 위한 방식, 오해를 초래하기 쉬운 간략한 방식에 불과하다. 우리가 양(量)을 서술한 위의 수직성 도식을 이용하여 현재와 같은 방식으로 이해하고 있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물가는 계속 상승하고 있고(Prices keep going up), 매년 출판되는 서적의 수는 계속 증가하고 있으며(The number of books published each year keeps rising), 그의 총수입은 떨어지고 있다(Hisgross earnings fell) 등의 사례는 우리가 보다 많은(증가)를 위(이것은 수직성 도식을 따른다)로 방향지어질 수 있는 것으로서 이해하고 있다는 사실을 시사한다. ‘위’에서 ‘보다 많은’으로의 은유적 투사가 자연스럽다는 것, ‘보다 많은’이 ‘아래’라는 방향 부여를 수반하지 않는다는 것, 이러한 것에는 나름의 이유가 있다. 그것을 설명하려면 우리의 가장 평범한 일상적 신체 경험과 이에 따르는 이미지 도식을 언급해야 한다. 만약 그릇에 더 많은 액체를 부으면 수면이 상승하게 된다. 이미 쌓여져 있는 것에 더 많은 것을 첨가하면 그 높이가 상승한다. ‘보다 많다’와 ‘위’는 이처럼 우리의 경험에 있어서 서로 관련되어 있다. 이러한 상관관계에 의해 양에 관한 우리의 추상적 이해에 대해서 물리적 기초가 주어진다.
그러므로 ‘신체’라는 용어를 [나는] 이해의 상상적 구조(예를 들어, 이미지 도식이나 그 은유적 세련)가 신체화의 기능에서 기원하고 있음을 나타내기 위한 총칭으로서 [사용한다]. 내 기획을 다른 말로 표현하면 다음과 같다. ‘객관주의’와는 달리 나는, 의미와 합리성에 있어서 신체화된 인간적 이해가 불가결하다는 사실에 초점을 맞춘다. 우리는 환경과 서로 상호작용하는 신체를 갖춘 생명체이며, ‘이해’라는 말은 물론 여기에서는 이러한 생명체로서의 우리의 경험으로부터 창발되는 상상적 구조를 내포하는 것이라고 해석된다. 우리의 이해라는 기능은 경험에 갖추어진 다수의 전-개념적 및 비명제적 구조(예를 들어, 이미지 도식)를 필요로 한다. 이러한 구조는 은유적으로 투사되고 명제로 마무리되며, 의미의 네트워크를 구성할 수 있는 것이다. [여기서 나는,] 신체화된 이해의 구조가 [객관성에 대해서] 가진 분명한 중요성을 강조하고 싶다. 이것은 공유된 구조이며, 공동체가 무엇을 ‘객관적’이라고 간주하는지를 규정하는데 있어서 나름의 역할을 수행한다.
그렇다면 객관성이란 적절하고 공적으로 공유된 이해 또는 관점이다. 이것에는 개인적 편견, 개인 특유의 견해, 주관적인 표상을 넘는다는 계기가 포함되어 있다. 객관성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이해에 뒤따르는 이미지 도식 [등의] 구조가 지닌 공적인 본성과 그러한 구조에 근거한 은유적, 비유적 투사이다. 객관성을 입수하기 위해 ‘신’의 관점을 취할 필요는 없다. 그렇게 할 수는 없다. 오히려 신체화된 상상적 이해를 통해서 실재에 결합된다, 적절히 공유된 인간의 관점을 얻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 마크 존슨, <마음속의 신체>에서 발췌․정리

<다> 자연과학이 인간의 지적 행위의 하나라는 것, 바로 그렇기에 자연과학이라고 말하더라도 시대와 사회와 문화의 제약을 피할 수 없다는 것, 이런 의미에서 과학은, 근대 서구에 특징적인 사고방식을 기본으로 하여 비로소 성립할 수 있는 ‘국지적’인 성격을 갖추고 있으며, 인류의 전체 역사를 통해서 보편타당한 것은 아니라는 것이 (오늘날 널리 인식되고 있다.)
문제는 왜 이렇게 국지적인 것이 오늘날 이렇게 보편적으로 지구 전체를 에워싸고 있으며, 또한 거꾸로 왜 이것 자체에 대한 격렬한 반발이 일어나고 있는지, 그리고 결과적으로,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이라면 우리는 과학의 미래로서 무엇을 선택할 수 있는가라는 점일 것이다.
‘국지적’인 근대 서구의 과학기술이 오늘날 ‘보편적’이고 절대적인 의미를 갖는 것과 마찬가지로, 세계적 규모로 확대했고 확대되고 있는 가장 큰 이유는 현실에서의 이것의 ‘유효성’에 있다.
국지적인 근대 서구 과학을 보편적·절대적인 것으로 생각하게 하는 최대의 요인이 이것의 ‘유효성’에 있으며, 또한 그 ‘유효성’이 이 세계를 ‘일의적인 법칙에 의한, 시간과 공간 내에서의 사상(事象)의 기술(記述)’로서 그려진다고 하는, 과학에 의해 부여될 수 있는 능력에 있었다고 하더라도, 그래서 세계가 완전하게 파악될 수 있었던 것은 아니라는 것은, 사실 근대 서구과학이 확립된 직후부터 이미 알아차릴 수 있었던 것이다. 아니 오히려, 거꾸로 보면 근대 서구과학의 관점은 유럽이라는 문화권이 구축해 온 중첩된 몇 가지 관점 속에서 어느 하나만을 끄집어내어 그것을 그로테스크하게 연마해온 결과로 확립된 것이라고 말하는 편이 정확할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남아 있는 그 밖의 관점에서 행하는 과학 비판, 또는 다른 선택지의 제안은 근대부터 현대에 이르는 서구의 역사 발전 속에서 오히려 당연한 것으로서 행해질 수 있다.
초현실적인 것으로까지 비약하지 않더라도, 만일 “일의적 법칙에 의해, 시․공간 속에서 사상(事象)을 기술”하는 것을 과학이 유일무이하게 표방한다고 한다면, ‘마음’의 현상이 그 기술의 그물망으로부터 분리되어 떨어져 나간다는 것이 된다. 그러한 점에서 생각하면, 근대 과학의 연장선상에 있는 현대 과학이 일종의 포화 상태에 있으며 무엇인가 새로운 선택지를 모색하고 있다는 것 또한 분명하다.
새로운 선택지를 완전한 무에서부터 창출하는 것은 아주 어렵다. 쉽지는 않지만 비교적 융통성이 많은 방법은 과거의 역사 속에서 모델이 되어야만 하는 것을 찾아보는 것이리라.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서구 근대가 ‘일의적인 법칙에 의한, 시․공간의 사상의 기술’에 주의를 집중한 나머지, 그 안에 내포되어 있었으나 등한시해 온 몇 가지 관점의 재검토라는 작업에 이것에 들어맞는다. 물론, 사실을 말하자면, 이 재검토라고 하는 작업의 대상은 유럽의 과거에 한정할 필요는 없으며, 넓게는 비서구권에도 탐색의 손길이 뻗어야 하는 것이다.
여기에는 당장 유럽의 전통 속에 포함되면서도 근대의 ‘독단주의’ 속에서 간판이 될 수 없었기 때문에 어떤 하나의 점에 초점을 맞추어 그것이 새로운 가능성의 모색 대상이 될 수가 있는지 여부를 생각해 보고 싶다.
한마디로 말해서 그것은 ‘협력과 조화’라는 이념이다. 이러한 ‘협력과 조화’의 이념이 중요한 기능을 했고, 우리에게 아주 친숙한 인물이 바로 케플러일 것이다. 케플러에게 있어서는 바로 그것이 그의 혹성 운동에 관한 세 가지 중요한 법칙을 이끈 결정적인 열쇠였다.
케플러에게 있어서 ‘협력과 조화’는 말 그대로 ‘화음’이기도 하다. ‘화음’이란 ‘동시’에 울려 퍼지기 시작할 때에 비로소 ‘협력과 조화’인지 여부를 판단할 수 있다. ‘화음’이 ‘화음’일 수 있는 것은 ‘동시에’ 들리게 되는 소리의 여파에 따라서이다. 더욱이 그 여파 전체는 그 속에 있는 음 중 하나를 약간만 바꾸어도 우리 귀에는 완전히 다르게 들리게 된다. 전체 화음의 여파는 ‘동시성’ 속에서야 비로소 일어나게 되는 것이다.
화음에서 파생한 기하학적 도형에 관해서도 마찬가지로 말할 수 있다. 정삼각형의 한 변을 약간만 비뚤어지게 하면 그 전체적인 모습은 완전히 바뀌게 된다. 전체 도형의 변화는 전체 도형이 ‘공시적’, ‘동시적’으로 파악될 때에야 비로소 그것이라고 인지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에서 정리를 하자면, 화음이나 도형은 이른바 ‘동시적’, ‘공시적’인 질서를 나타내고 있으며, 요소(예를 들어 화음을 구성하는 몇 개의 소리, 도형을 구성하는 점이나 변)들 사이의 관계는 ‘동시적’, ‘공시적’인 지평 위에 수록되었을 때에야 비로소 그 질서를 묻을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요소들 사이의 ‘동시적’, ‘공시적’ 관계는 서구 근대 과학의 간판인 ‘일의적 법칙에 의한, 시․공간 내에서의 사상의 기술’에서는 기본적으로 탈락해 버리는 성격을 갖고 있다. 결국은 ‘계기적’[연속적으로 일어나는] 질서만을 추구하려고 하는 것이 서구 근대 과학의 특색이며, 또 어느 정도는 현대 과학의 특색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현대의 과학이 이 간판을 대신해야 할 ― 그렇지만 ‘~을 대신하다’는 상호 배타적인 의미가 아니라 오히려 ‘그것에 겹쳐져서’라고 생각해야만 하겠지만 ― 어떤 새로운 가능성을 찾는다고 한다면, 이것이 가장 가까운 열쇠 중 하나는 여기에 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닐까? 그리고 이러한 노선에 따른 가능성의 추구는, 이렇게 꼭 주장되는 것은 아니라고 하더라도, 이미 어떤 분야에서는 시작되고 있다는 것이 나의 판단이다. 그 분야는 바로 시스템론이다.
그리고 [시스템 논자]가 근대 과학의 간판으로는 두 가지 요소들 사이의 인과적 관계는 다룰 수 있었지만, 세 가지 이상의 요소의 사이의 인과적 관계를 다룰 수단을 갖고 있지 않다(예를 들어 역학에서의 세 개체의 문제, 여러 개체의 문제의 원리적 불가능성)고 말할 수 있거나, 또는 미분 방정식이 유일한 전략 무기라고 생각할 필요는 없다고 말할 때, 그것은 내가 지금까지 말한 맥락 속에서는 ‘공시적, 동시적’ 질서에 주목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과 같은 해석일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계기적 질서에 대한 지금까지의 상세한 추구를 날실로 한 것에다 동시적․공시적 질서를 씨실로 하여 직물을 짤 수 있다고 한다면, 적어도 지금까지 무시되었기에 눈치를 챌 수 없었던 세계의 양상의 한 면이 우리의 지적 파악의 무대에 모습을 나타내게 되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가져도 괜찮다고 나는 생각한다. 이것은 현재 우리가 직면한 이른바 ‘생태학적 위기’에도 관련된다. 지구 전체를 하나의 계(시스템)라고 생각했을 때, 그 계에 포함된 다양한 하위계(서브-시스템) 사이의 공시적․동시적 질서와 그 변화에 대한 추구의 방법론을 고전적 간판을 내건 과학이 갖고 있지 않는다는 점이 현대 과학의 ‘막다른 골목’이라고 불리는 것의 진정한 내용은 아니었을까? 생태학이 현대의 구세주처럼 취급받는 것도, 이것이 암묵적으로 ‘공시적 질서’의 의식을 갖추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오늘날 우리가 직면한 문제의 기본적 특징은 문자 그대로 ‘지구적’(global)이라는 점이다. 에너지 문제, 환경오염 문제, 인구문제, 식량 문제 중 어떤 것을 택하더라도 그저 하나의 국한된 관점에서 판단할 수도, 처리할 수도 없는 성격을 지니고 있다.
서구 근대의 간판인 ‘일의적 법칙에 의한 시․공간 내에서의 사상의 기술’이라는 방식은 분명히, 지식 체계로서는 우주에 이르는 거시적인 규모에서부터 소립자에 이르는 미시적인 규모까지도 모든 것을 일관된 논리 속에서 응시할 수 있다는 탁월한 특성을 갖추고는 있지만, 다른 쪽에서 말하자면 필연적으로 광역적이고 동시적․공시적으로 일어나는 사상들 사이의 유기적 관계에 관해서는 거의 무시할 수밖에 없다는 숙명을 안고 있다. 이 점을 감안하면, 우리가 나아가야 할 길은 무엇보다도 우선 항상 지구 전체의 규모에서 사물을 응시하지 않으면 안 된다. 말하자면 여러 가지 공시적으로 지구상에 존재하는 사태를 단 한 번에 담을 수 있는 새의 시신경(버드 아이 뷰, birdeye view)을 갖추지 않으면 안 된다. 여기에서도, 공시적 질서의 추구라는 제안은 유효성을 가질 것이다.
하지만 그러한 메타 지역적인 새의 시신경을 갖는 것만으로는 불충분하다. 그 시각에서 얻은 지식을 과거와 같은 시간을 관통하는 시각에서 얻은 지식과 통합하여 지구적인 규모에서의 자연 통제로 향해야만 한다. 더욱이 여기에서도 공시적 감각이 필요하게 된다. 왜냐하면 그러한 지구적 규모에서의 자연 통제의 대상은 인간을 포함하지 않는 ‘자연’이 아니며, 또한 개인, 가정, 지역 주민 등 소규모 인간집단을 포함할 뿐만 아니라 국가, 민족, 문화권 등을 모두 포함한, 문자 그대로 총체로서의 ‘자연’이기 때문이다. 여기에 추구되는 ‘문화’야말로 어떤 의미에서는 자연까지도 포괄한 ‘문화’라고도, 즉 지금까지의 ‘문화’가 ‘자연’ 내적인 존재였던 데에 반해 이제는 ‘메타문화’(meta culture)라고도 말해야 할 것이다.
                                                                       ― 무라카미 요우이치로, <근대 과학을 넘어>에서 발췌․정리



논제 :  서구 근대가 낳은 ‘과학적 앎’은 인류 역사 전체에 대해 보편적이고 유일하며 절대적인 앎이라고 주장되었으나, 최근에는 근대과학을 상대화하여 앎의 다양성과 다원성을 강조하고 새로운 앎의 가능성을 모색하는 시도가 다양한 형태로 진행되고 있다. 위의 세 제시문은 그러한 최근의 시도를 나타내고 있다. 세 제시문의 각각의 논점을 언급하면서 근대 서구의 ‘과학적 앎’의 주요 문제점을 지적하고, ‘미래의 앎은 어떠해야 하는가’에 관해 자신의 생각을 2000자 내외로 논술하시오. (서론, 본론, 결론의 형태를 취하지 말고 바로 본론부터 작성할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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