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뢰즈와 자연

ドゥルーズと 自然

고이즈미 요시유키(小泉義之, 리츠메이칸대학 교수)

[청자 / 해설] 나카마사 마사키(仲正昌樹)

정황343, 2003, 176-189

 


들뢰즈와 ‘자연’.pdf


── 일본의 들뢰즈론은 일반적으로 문학적인 경향이 매우 강하고, 그의 난해한 문체를 문제 삼거나 예술비평에 초점을 맞추는 경우가 많다고 생각합니다만, 그런 가운데 고이즈미 선생이 쓴 들뢰즈의 철학(ドゥルーズの哲学)(講談社現代新書)이과(理科)”적이랄까, 들뢰즈의 사고법과 근대자연과학의 방법론의 연관이 클로즈업되고 있는 것이 특징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연관을 축으로 말씀을 듣고 싶은데요, 우선 첫 번째 점으로 들뢰즈와 라이프니츠의 관계를 꼽고 싶습니다. 책에서도 보편수학이 언급되는데요, 이것은 원래 라이프니츠의 개념이죠. 1980년대 말부터 90년대 초반에 걸쳐 일본에서 라이프니츠 유행(boom)이 일어났을 때, “보편수학이나 보편기호학이 화제가 됐습니다만, 이것과 당시 역시 주목받은 들뢰즈가 주름에서 전개한 라이프니츠론은 어떤 관계에 있었을까요? 원래 관계가 있다면 하는 얘기입니다만.

 

고이즈미 : 들뢰즈가 보편수학을 꺼낸 배경에는 현대의 수리과학의 기초를 확실히 하겠다는 의도가 있었다고 봅니다. 게다가 들뢰즈는 자연물도 생물도, 보편수학에 의해 일의적으로 파악된다고 생각하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 생명이나 생물의 시스템론과 모델론에는 많은 종류가 있습니다만, 거기서는 수학의 역할이 매우 컸고, 거기에 사고를 집중시킬 필요가 있었던 것입니다.

보편수학 mathesis uiversalis”은 데카르트가 복권시키고 라이프니츠가 계승한 구상입니다. 라이프니츠 자신은 보편수학에 대해 짤막하게 여러 가지를 쓰고 있습니다만, 자연물이나 생물을 포함한 존재자를 어떻게 다뤄야 하는지를 정리해서 말하지는 않습니다. 칸트는 라이프니츠의 보편수학 구상이 꿈에 그칠 것이라고 결론짓습니다만, 들뢰즈는 현대에서 실현 가능하다고 짐작하고 있는 것입니다.

제 느낌으로는, 10년 전의 라이프니츠 유행은, 들뢰즈의 라이프니츠관과 그다지 접점이 없는 것 같습니다. 그것은 EU통합 붐의 일환으로만 보였습니다. 그때 얘기된 라이프니츠의 보편성은 법학자 라이프니츠의 보편성이며, 그런 의미에서 유럽적 보편에 머물러 있는 듯 보였습니다. 상당히 이전의 러셀이나 루이 쿠트라(Louis Couturat)의 고전적 라이프니츠 연구 쪽이 풍부합니다.

 

── 히가키 타츠야(檜垣立哉) 씨는 최근 나온 들뢰즈(ドゥルーズ)(NHK出版)에서 라이프니츠에 대한 긍정적인 면으로서 보편성을 추구했다는 것, 부정적인 면으로서 예정조화로 끝났다는 것을 들고 있는 것 같습니다. “생성의 철학자인 들뢰즈는 예정조화와는 양립할 수 없다고 합니다.

 

고이즈미 : 라이프니츠는 다면적이고 가능성으로 넘치는 철학자입니다. 들뢰즈는 그 가능성을 이용하면서 고쳐서 새로 만들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예를 들어 가능세계론에 관해서도, 이것은 스즈키 이즈미(鈴木泉) 씨가 해명하고 있습니다만, 들뢰즈는 꽤 초기부터, “가능세계는 타자로서의 여성이 표출되는 장이다고 고쳐 읽습니다.

라이프니츠의 주름 pli”이라는 개념에 대해서도, 이 속에 접혀져 있다 = 암시[함축]되어 있다 im-pli-qué”는 것이 펼쳐져 있다 = 해명된다 ex-pli-qué”는 것이 생명의 발생이나 세계의 진전이라고 읽혀집니다만, 이것뿐이라면 단순한 전성(前成)”설이며, 쓸모가 없습니다. 솔직하게 말해서, 많은 사람들은 들뢰즈의 주름전성설적으로만 읽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주름은, 작게 접혀진 현실적인 것일 뿐입니다. 이로부터 앞으로 나아갈 필요가 있다. 예를 들어 주름을, 공간의 왜곡이나 다양체의 곡률로 재파악해서 현대화, 대수화할 필요가 있다. 주름 개념이라 해도, 그것을 현대수학적으로 깊어지고, 생명이나 자연의 잠재성과 생성을, “후성(後成)”적으로도 표현할 수 있는 장치로 가다듬는 것이 들뢰즈의 보편수학의 목표였으며, 우리에게 남겨진 과제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을 하지 않고, “생성변화라고 기록하는 사람이 많습니다만, 그러면 속류 무상(無常)관과 다를 바 없습니다.

 

── 라이프니츠의 수학주름은 반드시 정합성을 갖고 전개되는 것은 아니지만, 들뢰즈가 그것을 해석에 의해 다소 무리하게 연결하고자 했다는 말인가요?

 

고이즈미 : 무한소라는 수학적 개념과 미소지각이나 미소표상과 주름이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가라는 물음을, 라이프니츠 자신에게 맞부딪쳐 보더라도, 명확한 대답은 돌아오지 않습니다. 연구자도 그것들을 그저 나란히 늘어놓았을 뿐입니다. 들뢰즈는 라이프니츠를 바로크 철학자라고 보는 고색창연한 해석을 멋지게 복권시킨 셈입니다만, 실제로는, 라이프니츠에 대해 긍정적이지만 비판적인 태도를 계속 취하고 있다. 차이와 반복에서는 라이프니츠의 무한소는 어디까지나 무한 표상에 불과하며, 헤겔보다는 덜하지만, 코시나 데데킨트가 달성하는 극한개념에는 이르지 못했다고 주장한다. 의미의 논리시네마에서도 라이프니츠의 가능세계론이나 예정조화론에 대해 격렬하게 비판을 하고 있습니다.

 

── 들뢰즈는 미분개념에서 차이를 도출하려고 한 것입니다만, 우리가 고등학교 수학에서 배우는 라이프니츠 당대 수준의 미분이라면, 하나의 값으로 예정조화적, 연속적으로 수렴되는 이미지이기에, 철학적인 차이와는 거리가 머네요. 대학에서 배우는 코시 이후의 수학이라면, 미분 속에는 불연속적인 것도 있으며, 결코 하나의 값으로 깨끗하게 수렴되어 가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 조금은 이미지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만, 들뢰즈의 차이개념은 라이프니츠 시대의 미분이라기보다는 더 현대적인 미분에 대응하는 셈입니까?

 

고이즈미 : 요는 대학 이후의 수학을 알아야 한다는 것이죠. 미분 방정식의 해()가 발산하고 분기하는 경우 등, 수학은 결코 얌전하게 길들여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을 규체역학으로 길들이려고 하고, 수치계산 시뮬레이션에 갖고 들어옵니다만, 이번에는, 기계에 설치된 수학이, 야만적이고 길들여지지 않게 됩니다. 여기에 발판을 놓는 것이, 들뢰즈와 가타리의 천 개의 고원이라는 마이너과학입니다.

들뢰즈는 자연계에서도 생물계에서도, 차이가 제한없이 자라나서 현실화한다는 사실, 진화의 맥락에서 말하자면, 변이가 점점 자라나 발생한다는 사실을 우선 인정합니다. 그리고 차이를 산출하는 장을 표현할 수 있는 인간의 인식 장치는 미분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들뢰즈는 차이를 생산하는 장이 현대의 수학에 의해 얼마나 적절하게 표현되는가라는 물음을 제기한다. 제 자신도, 차이를 발생시키는 장에 접근하려면 일상언어로는 안 되며, 해석학과 대수학 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게다가, 자주 사용되었던 강도라 해도, 들뢰즈 자신이 강도와 미분의 관계가 어렵다고 말했으며, 강도는 수학의 방정식에서 자유 변수(파라미터)입니다.

다만 동시에, 실제로 수학자자연과학자가 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철학자는 비판적으로 평가해야 한다. 들뢰즈가 차이와 반복에서 하는 것은 그것입니다. 게다가 평가하는 쪽도 현대의 수리과학자연과학을 어느 정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이때, 말하고 싶은 것은, 최근의 철학윤리학은 수학자연과학에 대해 완전히 무지하고, 아무런 관심도 기울이지 않습니다. 사회윤리도 경제학 비판도, 에코메트릭스의 횡포를 방치해두고 있습니다. 후생경제학 이후라고 말해도 좋습니다만, 환경경제학, 진화경제학, 블랙 숄즈 모델 같은 사이비 이론의 횡행에 대해 속수무책입니다. 지난 수십 년 동안, 분석철학이 철학 전체를 휩쓸었습니다만, 분석철학계의 과학론은 전혀 쓸모가 없다. 예를 들어, 현대자연과학에서는 자연법칙은 미분방정식으로 적히는 데도, 명제형식 밖에는 염두에 놓이지 않습니다. 전쟁부터 종전 직후까지, 수리철학도 생명철학도 꽤 높은 수준에 있었습니다만, 그 전통은 완전히 끊기고 말았습니다. 그것을 재건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 미분이라는 것은 인간이 사물[]”에 대해 점차 접근해갈 때에 나타나는 다양한 차이를 표현하는 수단이라는 거군요. 그렇게 하면, “미분이란 주관적인 것이라는 게 되는 것 같습니다만, 선생은 그것을, 일상언어로 그대로 주관적으로 표현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는 거군요. 그러면, 객관적인 것이기 때문에, 수학의 언어로 엄밀하게 하나의 해답을 낼 수 있느냐 하면, 그런 것도 아니다. 주관적이라고도 객관적이라고도 단언할 수 없기에, 좀체 알기 어려워집니다만, “미분주체인간과 어떤 관계에 있다고 봐야 할까요?

 

고이즈미 : 수학은 풀지 못하는 문제를 표현하고 있습니다. 인간도 천사도 신도 풀지 못한다고 증명되는 문제입니다. 그런데 생물과 자연물은, 풀지 못하는 문제를 풀면서 생성소멸한다. 그렇다면 수학적으로 표현되는 문제에 대해, 주관적이라고 평가해도 객관적이라고 평가해도, 엉뚱해진다. 주관객관 도식은, 이런 곳에서 파산할 것예요. 들뢰즈는 자주, “식물은 빛을 지각한다는 말을 합니다. 식물은 빛에 자극되어 광합성을 하는 방식으로 빛을 지각한다. 그런 의미에서 식물에는 지각하는 이 있고, 빛의 정동affection”이 있다. 그 식물의 지각 경험을 가능케 하는 초월론적 장을 표현하는 것은 보편수학뿐이며, 식물은 보편수학이 표현하는 빛의 문제를 풀면서, 초월론적인 장으로부터 발생하는 것입니다. 보편수학이 이렇게 표현하는 것이, 인간의 주관의 범위 안에 잡힐 리가 없으며, 보편수학을 인식하는 것이 인간의 주관일리도 없다.

기존의 철학자가 말하는 주관은 결국 인간의 주관입니다. 현상학은 지각의 수동적 종합 아래서는, 즉시 휠레(hyle)가 온다고 믿는다. 인간의 주관의 그물에 걸리지 않는 것은 형상 없는 제일 질료라고 믿고 있다. 구제할 길이 없는 인간중심주의입니다. 거기에서, 현상학 이후의 철학은, 인간주관의 한계를 이러저러하게 밀어 올리고, “역설을 만지작거렸다[당치도 않게 내세웠다]. 식물이 광합성을 통해 빛을 지각하는 모습은, 인간에게는 알 수가 없고, 알지 못하는 것은 나타내질 뿐이다, 알았다고 한다면 물리학주의에 불과하다, 고 얘기를 끝내고 사고를 포기했다. 이에 대해 들뢰즈는 한계나 역설을 꿰뚫고 긍정적인 인식으로 나아가기 위한 논의를 몇 군데에서 하며, 칸트론에서의 부조화적 능력론 등, 그것은 그 나름으로 세련된 것입니다만, 그런 것을 좇기보다는, 우선은 소박한 유물론, 소박한 실재론으로 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아무튼 인간중심주의적 인식론을 일단 벗어난 곳에서부터, 철학을 다시 할 필요가 있다. “인간의 종언을 단순한 공상으로 끝나게 할 수는 없습니다.

 

── 철학사적으로 라이프니츠와 스피노자는 자주 한 쌍으로 다뤄지는 경우가 많습니다만, 마이클 하트도 지적하듯이, 스피노자에 대한 들뢰즈의 태도는 다른 철학자에 대한 태도와는 완전히 다르죠. 경건하다고 해도 좋을 정중한 태도를 취하고 있습니다. 전기(傳記) 부분도 포함해서 그다지 만지작거려지지 않았기에, 상당히 정중하게 기술되어 있네요.

고이즈미 : 들리즈에게는 스피노자야말로 사랑하는 철학자였다고 생각합니다. 보통은 부정적으로 읽히기 쉬운 윤리학』 「3의 정서론도, “외부와의 마주침으로서 긍정하며, 5에서 신에 대한 사랑으로 [높이 날아] 올라가는 곳에서도, 유보없이 긍정한다. 들뢰즈가 통째로 긍정하고 있는 철학자는 스피노자 정도입니다. 들뢰즈에게는 스피노자가 혁명가입니다.

지난 수십년 동안 스피노자 붐이 있고, 스피노자의 정치사상가로서의 면이 강조됐습니다만, 들뢰즈의 스피노자론은 그것과는 매우 이질적이라고 생각합니다. 어디까지나 스피노자를 형이상학자윤리학자로서 평가하고 있다.

 

── 보통의 철학 교과서라면, 스피노자의 실체개념이 범신론적인 것이라고 소개되어 있습니다. 모든 것은 하나의 신적인 실체의 일부라고 하는 이미지입니다. 그렇다면 아까 나온 정동이라 해도, 순수한 외부로부터 온다기보다는 대우주와 소우주가 공명하는, 예정조화적인 이미지가 되어버리네요. 그런 교과서적 이미지에서 보면, 들뢰즈는 꽤 이상하게 읽고 있는 것처럼 보이네요.

 

고이즈미 : “실체속성에 대한 들뢰즈의 해석은, 이른바 범신론적이고 내부예정조화적인 이미지를 타파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만, 그것을 강조해도, 아무리 차이를 무한하게 반복하는 것이 실체라고 다시 말하더라도, 기껏해야 차이의 정치의 담론이나 다문화주의의 담론으로만 청취될 뿐이죠. 예전부터 생각하는 것인데요, 이것으로는 17세기 철학의 영향력impact은 전해지지 않는다. 예를 들어, 스피노자는 권리역능이라고 단언한다. 이것은 굉장히 대단한 견해인데도 그 영향력은 전혀 전해지지 않았다. 또한 스피노자는 세계에서 일어나는 것은 신체의 정동이라고 잘라 말한다. 정치경제적인 이슈에 대해 분노하고 논하고 행동하는 것도 정동이라고 한다. 들뢰즈나 스피노자가 말하는 것은, 우리가, 정치나 사회의 장면에서 서로 영향을 미치고, 그것을 통해 정동이 야기되고, 마주침을 하도록 꾀해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기쁨의 감정에 의해 수동감정을 능동감정으로 전환하는 민중이 형성된다는 것만이 중요하며, 나머지는 아무래도 좋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사건을 그렇게 볼 수 없게 되고 있다. 그만큼 상징적인 것이나 르상티망에 얽매여 있다.

라이프니츠도 스피노자도, 생리적 수준에서 생기는 미세한 변용과, 정신적이고 심리적인 수준에서의 변용의 관계를 문제 삼고 있습니다만, 두 가지 수준의 변용의 얽힘이라고 사건을 볼 수 있는지가 중요합니다. 그것을 모르면, 근대철학과 들뢰즈의 사고방식은 체득할 수 없습니다. 철학 교과서는 그것을 왜소한 심신 문제로 파악할 뿐이며, 입구에서 글러먹었습니다. 사고의 동기부여를 모른다.

 

── , ‘정념이라는 형태로 신체적으로 생기는 것의 «원인»을 가능성으로서 탐색하는 가운데, 초월론적인 실체가 나오는 것이며, 그것을 현대인이 역전시키고, “실체를 출발점으로, ‘정념’, ‘정동을 이해하고자 하기 때문에, 진부한 예정조화론으로만 이해할 수 있다는 거죠.

 

고이즈미 : 실체의 보이는 방식이 다른 것입니다. 인간의 경험의 조건인 초월론적인 장(속성)과 식물의 경험의 조건인 초월론적인 장(속성)을 차이화하면서 생산하는 것이 실체라고 본다. , 인간의 생존양식과 식물의 생존양식이, 생태-윤리적으로 차이화되는 방식이 분명해진다.

인간의 편에서 말한다면, 인간은 모종의 생물로서, 정동의 경합을 경험합니다만, 그 경험을 통해 주관이 세워진다. 그때의 원리를, 초월론적이고 경험론적인 장의 원리로서 파악하는 것이, 들뢰즈의 흄론의 포인트입니다. 그리고 주관성이 세워지는 곳에, 신념이나 정념이 몰려들고, 사람들은 그것에 구속된다. 그 속박을 이용하면서도 그로부터 해방된다는 것이 들뢰즈의 윤리의 핵심입니다. 까놓고 말해서, “편하게 살자는 것인데, 그런 식으로 일체의 현상을 보는 것은 꽤 어렵다. 그만큼 우리는 인격이나 주관성 같은 것에 쾌적하게 얽매여 있습니다.

 

── 최근, 화제가 된 네그리와 하트의 제국에서, 키워드로서 스피노자에서 유래하는 다중multitude”이 나오네요. 그들더러 말하라면, “다중을 움직이고 있는 것은 이성이 아니고 정동입니다. 그 스피노자 독해방식을 그들은 들뢰즈로부터 계승한 것이라고 되어 있습니다만, 그런 형태에서의 정동론의 응용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고이즈미 : 나는 다중구성된 힘potestas”이 아니라 구성하는 힘potentia”이라고 해석하는, 네그리나 발리바르 등, 스피노자연구의 2세대의 논의에는 무리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무리가 있기에 안 된다는 얘기는 아니지만, 저는, 들뢰즈가 스피노자의 multitude를 다양체로 끌어들여 사용하는 일은 있어도, 저런 포텐셜의 의미로 사용했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물론 정치적으로도 사용되지 않습니다. 네그리와 하트가 다중에 정치적으로 판돈을 거는 것은 모종의 병이라고 생각합니다.

 

── 그러면 들뢰즈에게 스피노자가 혁명가라고 하는 것은, 정치적 의미에서가 아니라 어디까지나 삶의 방식에 있어서의 혁명이라는 게 된다고 생각합니다만, 그것은 어떤 삶의 방식일까요?

 

고이즈미 : 들뢰즈가 혁명을 말한다고 했다면, “노마드(유목민)”푀플(민중)”이라는 말을 쓰겠죠. 네그리와 하트는 지배자의 명령에 따를 수 없는 신체”, “자연에 무시하는 신체”, “마음대로 되지 않는 신체를 긍정하고 있습니다만, 중요한 것은, 그 위치를 양보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절대로, 공화주의라든가 자유주의라든가 민주제라고는 지껄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지배 속에서 편하게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아무래도 따를 수 없는 신체가 있으며, 거기에서 벗어나고 새로운 지평을 여는 노마드적 인간이 있다. 들뢰즈는 그런 인간에게 기대를 건다. 다만 그것이 구성하는 권력으로서 세워진다고는 생각하지 않으며, 그런 것을 기대하기 때문에, 지배를 불러들인다고 말한 게 아닐까. “혁명이라는 말은 사용합니다만, 이미지하고 있는 것은 전혀 다른 것입니다.

들뢰즈도 개별 이슈들에 대해 정치적 견해를 밝히긴 했지만, 그것과 철학적윤리학적 전망은 차원이 다른 겁니다. 들뢰즈는 보통의 정치에 관해 이야기하지 않고, 그럴 필요도 인정하지 않았다고 생각합니다. 그의 관리사회론이 자주 거론됩니다만, 정치론으로서는 보잘 것 없는 것이고, 뭔가에 응용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짐작하기 어렵습니다. 오히려 관리사회 속에서 신체의 역능이 여는 새로운 지평을 생각하려 했다고 봐야 할 것입니다.

 

── 그렇다면 가타리와의 공저이기도 한 안티 오이디푸스천 개의 고원, 자본해체론으로 읽을 필요가 없는 것일까요?

 

고이즈미 : 그렇습니다. 자본이나 화폐에 관해, 두 개의 책에서는 아무것도 배운 게 없었다고 생각합니다만, 그런 것보다, 자본제에 대항하는 것이 분열자분석을 간과해 왔다는 것이 중대합니다. 안티 오이디푸스가 왜 이토록 매력적이냐 하면, 서두에 나오는, 잡동사니 기계의 소년이나 산책하는 광인, “도래하는 광인의 힘에 감동했습니다. 그 책이 나온 70년대 초반에는, 반정신의학반임상심리운동장애인자립운동의 물결이 있었고, 당시는 그런 맥락에서 받아들여진 것입니다.

들뢰즈는 그 뒤 새로운 생명체새로운 그리스도를 만들어내자고 호소합니다. , 인간이라는 생명체가 근본적으로 안 된다고 생각하고 있는 겁니다. 안 된다고 인정한 다음, 인간을 소재로, 생명의 잠재력을 끌어내고, 새로운 생명체로 변용시킬 가능성에 건다. “도래할 광인에 기대를 건다. 그런 발상의 전환을 통해 그는 기존의 정치적 대결도식을 송두리째 뒤집겠다고 한 것은 아닐까요?

들뢰즈는 자신의 철학이 모두 생명론이라고 말합니다. 생명이란 진화하고 변신하고 새로운 생명체를 낳는 힘입니다. 들뢰즈주의자는 항상 생명을 생활로 잘못 읽어왔습니다. 만일 들뢰즈로부터 아무래도 정치적인 것을 읽어내고 싶다면, 생명론의 정치적 의미를 생각해야 합니다. 그것은 아직 아무도 없습니다. 예를 들어 현재의 바이오인포매틱스(생명정보학)이라는 분야에서는, 수학을 응용한 해명이 진행되고 있습니다만, 이것은 가짜 보편수학이며, 그것을 구실로 어리석은 일이 진행되고 있다. 저런 종류의 것에 대해서, 생명의 잠재적인 힘을 표현하는 보편수학을 내걸고, 어떻게 대항하느냐가, 들뢰즈적 정치라고 긴급하게 생각되어야 합니다.

 

── 책에서도 썼다고 생각합니다만, 들뢰즈의 생명윤리라고 할 경우, 뭐가 윤리의 주체이고 객체인가라는 전제 자체가 기존의 윤리학과는 다른 것 같아요. 개인의 생명의 존엄을 제일로 생각한다는 입장에서, “개인=주체를 절대시하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해서 전체=생명이라는 관점에서 개인을 말소해버리는 것도 아니다. “개체전체의 이항대립에 얽매이지 않는 생명의 존재방식을 생각하고 있다는 것인가요?

 

고이즈미 : 개인에 관해 생각하면, 아무래도 인격이나 주관성이 되어 버립니다. 그것이 우리의 사고의 한계입니다. 들뢰즈는 스피노자를 인용하여, “우리는 신체가 무엇을 할 수 있는지조차 모른다라고 몇 번이나 말합니다. 들뢰즈주의자는 이것을 신체적 행위의 수준에서 이해할 뿐입니다. 정치적 행위나 사회적 행위만 염두에 두고 있을 뿐입니다. 그러나 들뢰즈는 육체 수준에서 생각하고 있습니다. 개체와 전체의 이항대립에서는 파악되지 않는 생물로서의 인간의 수준입니다. 우리는 육체로 무엇을 할 수 있는지 모른다, 육체의 포텐셜을 끄집어내는 윤리를 세우려고 하는 것이 들뢰즈의 생명윤리에 해당된다고 생각합니다. 예를 들어 병을 놓고 생각할 때, 왜 인간에게는 병이 되는 힘이나 질병에서 낫는 힘이 있느냐고 질문을 제기한다. 그 힘을 긍정적으로 붙잡고 싶다. 그리고 우리의 육체에, 살고 병들고 늙고 죽어가는 힘이 있다고 긍정적으로 인식되면, 생명을 둘러싸고 일어나고 있는 소동에 대해 다른 태도가 취해지는 것입니다. 스피노자의 제3종의 인식입니다. 그 언저리는 누구나 어슴푸레하게 몸으로 알고 있겠습니다만, 좀체 손을 대지 않는다. 나는 그것을 뭔가 명확하게 표현하고 싶습니다.

 

── 생명이라는 것은 인간 속에서 점차 변용되어 가는 거네요. “미분대목에서도 화제가 됐는데요, 그것을 고정한 주관의 관점에서만 파악하려고 해도, 그다지 의미가 없다는 게 되네요. 하지만 현재의 생명윤리는 주체에 있어서 무엇이 올바른 해답인가를 일의적으로 요구하고 있습니다. 그 패러다임 자체를 바꿔간다는 것입니까?

 

고이즈미 : 실천의 장에서는 알 수 없는 것은 알 수 없는 채로 하는 용기가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 위에서 우선은 들뢰즈처럼 스토아파의 윤리를 계승해보죠. 생로병사에 있어서, 자기의 몫과 운명의 몫을 정확하게 분간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언제나 주체로서의 자기의 몫을 과대하게 추측하고, 그것을 둘러싸고 수다를 떨고 싶어집니다. 인간의 잘못된 부분입니다. 그러나 인간은 그것을 면할 수 없다. 해답을 원하고, 수다를 떨고 싶어진다. 안 그러면, 아마 할 수 없다. 그래서 동시에, 이론인식을 삶의 방식에 더하는 것입니다. 분자생물학의 진전에 의해 생로병사의 시각은 근본적인 변용을 강요당하고 있다. 줄기세포를 생각한다면, 기관이라는 말을 무비판적으로 쓸 수는 없다. 신경계나 면역계는 엄청난 전망을 열고 있다. 그런데 이것들은 메이저과학으로 회수되고 바이오산업에 의해 빼앗겨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마이너과학의 이론적 탐구의 기쁨을 알았으면 하고 생각합니다.

 

── 생명윤리라면 반드시 자기결정권인폼드 콘센트(informed consent: 의사가 환자에게 진료의 목적·내용을 충분히 설명하여 납득시킨 다음 치료하는 일)” 얘기가 나오죠. 할 수 있는 한, 생명을 주체로서의 개인의 통제화에 집어넣으려 하는 발상이 근저에 있는 것인데요, 지금 하셨던 말씀에서 보면, 들뢰즈적인 생명윤리에 있어서, 그런 문제의 제기방식에 과연 의미가 있는가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고이즈미 : 저는, 바이오기술을 추진하는 쪽도, 그것에 우려를 표명하는 쪽도, 생명의 포텐셜을 조작 가능하고 지배 가능하다고 보는 점에서, 한통속이라고 생각합니다. 생명의 포텐셜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 채로, 단편적인 정보의 교환에서 안심입명(安心立命)을 얻으려 하는 모습을 보면, 슬퍼집니다.

자기 결정론 비판은 겁내면서 조금씩 나왔습니다만, 생식의 문제에서 자기결정론은 결정적으로 파탄 났다고 생각합니다. 새로운 생명체를 낳을 때, 자기결정론은 잘 안 팔립니다. 현재의 생식기술의 동향에서 보더라도, 기존의 틀에서의 생명윤리는 꾸려나갈 수 없겠죠.

 

── 근대의 윤리학이라는 것은 자신이 결정할 수 있다는 것을 최후의 근거로 삼고 있습니다. 데리다는 결정 불가능성을 인정하면서, 마지막에는 구태여 타자에 대한 책임을 떠맡으면서 결단한다는 것을 지우고 있다고 생각합니다만, 들뢰즈는 그런 누락은 없는 것 같아요.

 

고이즈미 : 결단했다는 것으로는 대단한 것이 되지 않는다. 인간 주관에 의한 결정 등은 대수롭지 않습니다. 들뢰즈는 결정하지 않는 쪽이, 방목해 두는 쪽이 좋다고 생각했다고 봅니다. 스피노자론에서도 그것을 논하고 있고, 자기 결정은 자유로운 주체라는 환상을 퍼뜨리고, 모종의 지배와 복종의 방식을 살아남게 하는 것에 불과합니다.

 

── 스피노자는 자유의 사상가라고 붐이 일었을 때 자주 얘기됐습니다만, 들뢰즈의 관점에서 봤을 경우의 자유란 기존에 생각됐던 것과는 꽤 다른 것이 되겠네요. «자유로운 상태»를 이상으로 내걸고, 이를 위해 자기를 해방한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신의 신체에 일어나고 있는 것을 그대로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는 곳에 중점이 놓여 있는 겁니까?

 

고이즈미 : 그것이 스토아학파의 윤리입니다. 그 위에서, 17세기의 자유론은, “마음대로 한다는 것뿐의 얘기였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우리는 좋아하는 것이 뭔지 모릅니다. 의료의 현장에서 환자가 되면, 어떻게 하고 싶은지 모르게 된다. 하지만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어렴풋이 알았다면, 그것을 좋아하도록 하는 것일 뿐입니다. 그것이 자유입니다.

불가사의한 것은, 자유론을 얘기하는 사람이, “좋아하는 것이 마음대로는 안 된다고 말하지 않고서는 있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좋아하는 것이 마음대로는 안 되기에, 법적공동체적 규제를 가해 계속 운운하고, 그것을 이용하는 것이 진정한 자유라고 결론내립니다. 이것에 철두철미하게 좋아하는 대로 하면 되잖아라고 하는 것이 17세기의 철학이며, 들뢰즈의 입장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것 이상으로, 자유에 관해 사고하는 의미가 있다고는 도저히 생각하지 않습니다. 이렇게 말하면, 반드시 기가 막히게 되지만, 기가 막히게 만드는 것은 이쪽입니다.

있는 그대로의 자신으로 좋다”, “좋아하는 것을 마음대로 해도 좋다고 많은 사람들이 말할 수 없다. 그것은 나쁜 짓을 해도 좋냐라는 문제가 남아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죠. 들뢰즈더러 말하라면, “나쁜 짓을 해도 되거든요. 나쁜 짓을 하고 싶다는 욕망을 품고, 그것을 포기하지 않고 한다면 그것이 더 착실한 것입니다.

 

── , “/이라는 구별에서도 자유로워진다는 거군요.

 

고이즈미 : 실제로 정말로 자유롭게 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자유는 의무나 규제와 한 세트를 이룬다고 생각되고 있습니다만, 그런 것은 버리자는 것입니다. 위험하게 들리지만, 사실은 안전한 것입니다.

현재 자유주의자들은 야만적인 폭력에 떨고 있습니다. 새로운 단계의 문명화 작용에 대항하는 야만입니다. 그런 야만에 어떻게 대처할 것이냐 하면, 들뢰즈와 가타리는, 안티 오이디푸스천 개의 고원에서 민족, 인종 환상에 얽매이는 것은 당연하다며 불가사의한 것도 아무것도 아니라고 말한다. 환상에 홀려서 자유롭게 행동한다면, 그게 더 낫다는 것입니다. 전쟁기계라는 야만적인 폭력을 두려워 할 필요도 없다. 오히려 도덕주의나 법적정치적인 것이, 야만적인 폭력을 조직화하고 있다. 국가와, 정치조직이나 종교조직이, 전쟁기계로서의 야만적인 폭력과, 문명화와 시민화에 대항하는 야만을, 폭력적으로 조직화하고 있다. 그런 것으로부터의 해방이야말로, 야만의 제멋대로의 분출이야말로, 들뢰즈의 자유이죠.

 

 

 

[해설] 들뢰즈에게서의 자연인간

나카마사 마사키(仲正昌樹)

이번의 고이즈미 요시유키 씨와의 인터뷰의 중심적 주제가 된 것은 들뢰즈에 의한 근대적인 인간/자연관의 재독해이다. 우리가 교과서에서 배우는 통상적인 철학사에서는, 데카르트 이후의 서양근대 지식의 기본적 틀은, “주관=정신 / 객관=자연의 이분법이라고 한다. (순수) 주관인 는 물리적인 자연으로부터 근원적으로 분리되어 있으며, 스스로가 회상하는 관념들을 매개로 해서만 «자연»에 접근할 수 있을 뿐이다. “속에 대상으로서 재구성된 «자연»자연자체가 아니다. 나의 내부외부의 구별은, 내가 주관인 한에서 해소될 수 없다는 것이 근대철학의 대전제가 되어 왔다. 헤겔이나 맑스는 이런 분열을 극복하려고 했으나, 결국 어떻게 외부=물질주관=정신의 지배권에 편입하는가(헤겔) 혹은 어떻게 외부내부에 객관적으로 반영시키는가(맑스)라는 이항대립적인 발상의 틀에서 벗어나지 못했다고 한다. “내부외부가 깨끗하게 분리되어 버린다는 전제에서 출발하는 한, 이항대립을 회피할 수는 없다.

현대사상은 이런 이항대립적인 틀을 해체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지만, 이를 위한 유력한 열쇠로서 부상한 것이 메를로-퐁티의 지각현상학으로 대표되는 신체론의 계보이다. “신체는 외적으로 보면 물질이지만, 거기서 생기는 다양한 지각이나 정동은 )무의식전의식 수준에서) “정신내부에도 영향을 미친다. 또한 정신«자신의 신체»의 이미지를 형성함으로써 외부에 있는 신체의 존재방식에 능동적으로 관여하고 있다. 현대사상은 신체및 그것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는 감성적미적인 것을 실마리로, “주관/객관의 이항대립과는 상이한 사고형태를 모색했다.

이런 신체론은 현대사상의 전매특허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데리다와 함께 현대프랑스철학을 대표하는 사상가인 들뢰즈는 인터뷰에서 고이즈미 씨가 지적하듯이, 신체와 정동을 둘러싼 논의는 오히려 라이프니츠와 스피노자가 활약한 17세기가 현대보다 현실적actual이었다고 보고 있다. 이항대립적인 사고법에 아직 완전히 사로잡히지 않았던 그들은, 자신의 신체주위에 생기는 다양한 정동을 차분하게 관찰하고, 나와 자연의 관계에 관해 생각했다. 그것을 현대인의 관점에서 사후적으로 돌이켜보면, “주관/객관의 구분을 넘어서 신의 관점에 서고자 하는 신비주의, 소우주(=)와 대우주(=자연)의 예정조화 같은 비합리주의적인 형이상학의 잔영밖에는 보이지 않고 있는 것이다.

다만 기존의 철학사에서도 신체 수준에서의 정동의 문제가 완전히 무시된 것은 아니었다. 데카르트가 정신과 물질을 연결하는 송과선의 문제에 집착한 것이나, 정념론을 쓴 것은, 보통의 철학교과서의 데카르트의 항목의 말미에 일단 적혀 있다. 자세한 교과서라면, 라이프니츠가 우리의 지각에 생기는 미소표상”(=미세한 것의 운동)에 관해 생각했다는 것에 대한 기술이 있다. 스피노자가 실체에 생기는 정동에 대해 논한 것도, 대개의 교과서에 언급되어 있다. 다시 말하면 초기 헤겔에게도, 신체적인 수난Leiden”을 둘러싼 정동론적(스피노자적) 고찰이 있으며, 경제학-철학 초고의 맑스도 헤겔론이라는 형태로 수난의 문제를 언급하는 것은 나름대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이것들은 철학사 전체의 흐름 속에서는 무시해도 상관없는 아무래도 좋은문제로서 취급되기 일쑤였다. 데카르트의 코기토”(나는 생각한다)주권/객관의 분리가 완성됐다고 본다면, 정동론은 이 기본적인 틀을 벗어나는 쓸데없는 문제일 뿐인 것이다.

들뢰즈는 그런 근대철학사의 통설적인 견해에 얽매이지 않고 신체에 있어서 부상되는 «»«자연» 사이의 긴장관계를, 라이프니츠와 스피노자의 텍스트로부터 소박하게 읽어내려고 한다. 흄을 논한 그의 교수자격논문 경험주의와 주체성도 이 관점에서 읽으면, 매우 쉽게 알게 된다. 인간의 «주관»이 외부세계로부터 완전히 분리된 형태로 이미 성립하고 있다는 이항대립적 선입견을 갖고 인성론을 읽으면, 지각에 있어서의 인과관계관습에서 생겨난 것이라는 논의는 진부한 회의주의로만 생각될 수 있을 뿐이다. 하지만 그런 내부/외부의 경계선은 흄에 의해 자명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신체 수준에서 카오스적으로 생기는 정념의 관습적인 결합을 통해 내부가 역사적으로 구성된다는 들뢰즈적 관점에서 보면, 흄의 포스트근대성이 돋보인다. 스피노자--들뢰즈의 견지에서 보면, “라는 것은 자연으로부터 자립한 폐쇄영역이 아니라 무정형의 정념과 함께 항상 생성도상에 있는, “우연으로 가득 찬 경계선 미확정의 영역이다. 가타리와의 공저인 안티 오이디푸스천 개의 고원에서 자아 성립 «이전»의 무의식=기계가 주제화되고 있는 것도, 이런 문제의식의 연장선상에서 이해할 수 있다.

단지 신체에 생겨나는 정념에 주목한다고 해도, “신체적인 것은 이성으로는 파악할 수 없다고 문학적«주관»적으로 이야기하는 것만으로는, 확실한 것은 아무것도 알지 못한다. 고이즈미 씨는, 거기서 수학”, 특히 현대적 미분적분학이 중요한 역할을 맡는다고 지적한다. 우리가 고등학교에서 배우는 미적분이라면, 일정한 값으로 «깨끗하게» 수렴되는 연속적인 함수밖에 나오지 않기에, 예정조화적 인상을 갖게 되기 쉽지만, 대학에서 배우는 더 엄밀하게 정의된 수학에서는, 그래프와 식으로 단순하게 표기할 수 없는 불연속함수나 복수의 변수를 지닌 함수가 등장한다. 예를 들어 우리가 보통 평면으로 취급하는 책상과 책의 표면에는 잘 보면 다양한 주름이 복잡하게 새겨져 있으며, 그런 주름적인 것을 일일이 고려한다면, 물건의 길이와 면적을 산출하는 것은 고등학교 수준의 수학에서는 거의 불가능하다. 그래서 보통은 그런 주름적인 울퉁불퉁함은 무시하고, 단순화해서 계산하고 있지만, 자연계는 오히려 다양한 주름으로 가득하다. “주름의 파악방식에 의해 (객관적인) “사물을 보는 방식은 꽤 달라진다. 현대에서는 고도로 정밀화된 미적분에 의해, 17-18세기에는 수학과는 무관하다고 생각됐던, 생물생명의 세계의 «신비»가 서서히 그런 것이기는 하지만 해명되고 있다. 들뢰즈는 그런 현대수리과학과 신체정념론이 교차하는 지점에 관심을 갖고 있었다는 것이다. 차이와 반복에서 그가 끊임없이 미적분을 언급하는 것은, 단순한 비유나 바로크로의 복고 취향이 아니다. 나카자와 신이치(中沢新一)가 현대사상에 도입하려고 한 프랙탈, 매우 대충 말하면, 자연계에서의 주름적인 불규칙성을 수학적으로 표현하기 위한 개념이라고 말할 수 있다.

수학을 매개로 한 자연-신체-정념의 해명은, 데카르트나 라이프니츠가 보편수학이라는 표어 아래 목표로 한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들뢰즈는 17세기의 보편수학의 구상을, 현대에 있어서 더 구체적으로 계승하려는 것이다. 물론 현대수학에 대한 재접근에 의해 주관/객관의 이항대립 구조를 해체할 수 있다고 낙관한다면, 엥겔스-레닌적인 소박한 객관적 유물론의 우를 반복할 수 있다. 그러나 철학을 하는 사람들은 더욱 자연과학을 알아야 한다는 고이즈미 씨의 주장을, 아이러니라며 흘려듣고 넘겨버릴 수 없다. “주관/객관의 분석 구조를 이데올로기라고 비난하거나, 극복할 수 없다고 시치미를 떼는 것만으로는 철학적으로는 아무것도 얻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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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주의자 질 들뢰즈

도래할 민중을 위한 에티카

自然主義者 ジル・ドゥルーズ

るべき民衆のためのエチカ

우노 쿠니이치(宇野邦一)

청자안도 레이지(安藤礼二)

정황(情況)200312월호(3기 제411), 72-89.

 


자연주의자 질 들뢰즈.pdf


── 이번에는 들뢰즈가타리의 천 개의 고원을 중심으로 이러저러한 얘기를 나누고 싶습니다. 그 전제로, 가타리와의 공동작업에 들어가기 전의 들뢰즈는 도대체 어떤 사람인지에서부터 생각하고 싶습니다. 안티 오이디푸스에서 천 개의 고원이라는 자본주의와 분열증이라는 거대한 문제에 도착하기 전의 들뢰즈는 단적으로 말해서 자연주의자였다고 생각합니다. 게다가 그것은 자연이라는 것의 극한을 철저하게 추구한, 아직 아무도 그런 것이 존재한다고 생각조차 하지 못한 자연을 묘사하는 데 성공한 자연주의자입니다. 1953년의 처녀작인 흄론(경험주의와 주체성)은 바로 정통으로 인간적 자연의 탐구였습니다. 그리고 아마 그 사색이 정점을 맞이한 68년의 차이와 반복과 스피노자론(스피노자와 표현의 문제)에서 들뢰즈의 자연주의는 완성됩니다. 들뢰즈의 자연은 구체적이면서도 극도로 추상적인 형이상학, 굳이 말하자면 신학의 대상이기도 하며, 더욱이 이로부터 본능들과 제도들이 동시에 생겨나는 장소였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69년의 의미의 논리부터 전체적인 어조가 상당히 변화하며 방향이 전환된다. 그것이 72년의 안티 오이디푸스, 80년의 천 개의 고원으로 이어지는 것입니다. 그런 68년으로부터 불과 몇 년 사이에, 들뢰즈 안에서 뭔가 중대한 사건이 발생하며, 새로운 지평이 열렸다. 이렇게 말할 수 있지 않을까요? 그러면 그 사태란 어떤 것이었나? 거기에는 처녀작 이후에도 여전히 생산성으로 가득 찬 자연이 추구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 탐구의 방법이 크게 변화했습니다. 한마디로 말해서 그것은 공동성의 탐구가 됐다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여기서 공동성은 두 가지 의미를 갖습니다. 하나는 사고의 대상으로서 집단이라는 것이 전면에 나옵니다(685월 혁명은 이것의 둘도 없는 실천이었습니다). 그리고 또 하나, 그런 탐구가 문자 그대로 누군가와 함께행하는 작업이 됐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직접적으로는 가타리와의 공동작업에 의한 책의 집필입니다만, 또 한 사람인 푸코와의 관계가 매우 크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이 가타리와 푸코와 함께사고한다는 것이야말로 그 믿기 힘든 안티 오이디푸스에서 천 개의 고원에 이르는 커다란 힘과 흐름을 만들어낸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들뢰즈의 사고는 매우 체계적입니다. 그것은 천 개의 고원에서도 바뀌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 그의 결론에 놓인 구체적 규칙과 추상적 기계라는 장에서는 여섯 개의 개념이 제출되며, 그것이 사고의 토대로부터 초월까지 빼어나게 조합되고 설명되어 있습니다. 순서대로 지층지층화”, “어레인지먼트”,리좀”, “존립평면기관없는 신체”, “탈영토화”, “추상기계입니다. 지층은 대지로부터 어레인지먼트들이 변형을 가함으로써 기관 없는 신체를 산출하고, 더욱이 그 기관 없는 신체는 내재성의 평면으로 초월한다. , 이 개념의 형성과정, 사고의 시스템은, 사실상 이미 스피노자와 표현의 문제에서 약술된 것입니다. 유일하고 절대적인 으로부터 무한한 속성이 산출되며, 그것이 더욱 무한한 변용을 지닌 양태로 표현된다. 그것을 거꾸로 말했던 거죠. 그러나 스피노자와 표현의 문제천 개의 고원사이에는 커다란 차이도 존재합니다. 그것은 우선 무엇보다도 천 개의 고원에서는 하나하나의 개념이 더 풍부해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개념을 풍부하게, 그리고 표현적이게 하는, 바로 이것이야말로 아마 푸코 및 가타리와의 공동성 속에서 생겨난 것일 테죠.

들뢰즈가 푸코에게서 얻은 것. 그것은 바로 어레인지먼트라는 개념이 아닌가 합니다. 인간도 사회도, 그 형태도 의미도 모두 자연의 어레인지”(구성)로부터 생겨난다. 그리고 그것에 있어서 들뢰즈의 자연은 푸코의 바깥개념과 서로 포개진다. , 스피노자 속에서 발견된 =자연은 더 추상적이고 잔혹한 푸코적인 바깥으로 완전히 치환될 수 있게 됐다.

그렇다면 들뢰즈는 가타리에게서 무엇을 얻었는가? 그것은 무의식의 적극적인 의미부여라고 생각합니다. 차이와 반복까지는 죽음본능이 매우 중시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안티 오이디푸스천 개의 고원에서는 그것이 완전히 사라집니다. 그리고 더욱이 그 적극적인 무의식을 발동하는 조건이 되기 위해 필요하다고 여겨진 무리라는 개념. 아마 이것들이 가타리에게서 얻은 것이 아닐까? 장황하게 얘기했는데, 이런 한 가지 독해가 가능하다고 생각하지만, 우노 씨 당신은 안티 오이디푸스천 개의 고원과 그 이전의 들뢰즈의 사상 사이의 차이를 뭐라고 느꼈는지 말씀해 주시면 좋겠습니다만.

 

거미와 거미줄 : 들뢰즈의 변화 과정

宇野 : 들뢰즈 사상의 변화 과정 자체에 독특한(unique), 생각해야 할 문제가 도사리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 변화가 무엇이었는지가 물론 문제입니다만, 들뢰즈의 독자적인 변화 방식은 광인의 두 가지 체제라는, 무인도에 이어 사후 편집된 텍스트 모음집 2권에 실린, 프루스트에 관해 당시의 롤랑 바르트 등과 한 대화 속에 아주 현저하게 나타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철학자보다 오히려 장 피에르 리샤르라든가 장 리카르도라든가 장 주네트 등, 당시의 문학이론의 새로운 흐름을 맡은 사람들이 프루스트에 대해 말한 자리에서 한 것입니다만, 들뢰즈는 자신의 문제를 프루스트와 기호들에서 말한 것을 반복하고 있는 것에 불과하다고 합니다만, 거기서 프루스트의 문제를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라는 작품에서의 전체와 부분의 관계에 포개면서 논하고 있습니다. 이 프루스트론에서는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다양한 단편적 요소에 있어서 전체와 부분의 관계가 어떤 식으로 전개되느냐가 하나의 테마였다고 생각하는데요, 거기서 들뢰즈가 프루스트의 작품의 변주variation를 보고, 기본적으로 프루스트에게는 전체성의 비전이 있을 수 없다, 있다면 매우 특이한 형태로 나타난다고 말합니다. 들뢰즈 자신의 변화 방식, 들뢰즈 자신의 일관성, 변화나 단편성이, 거기서 프루스트와 서로 비추고 있는 듯이 표현되고 있다. “거미줄이라는 비유에는 기관 없는 신체라는 개념의 모델 같은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거미줄은 일종의 리좀이기도 하죠. 거미줄과 거미 자신이 일종의 신체를 이루고 있으며, 모든 곳에 지각이 퍼져 있으며, 거미줄 속에는 전혀 중심이 없다. 거미는 시각에 의해 자신이 사는 세계를 조망하는 게 아니라, 오로지 부분의 연속 속에서부터 시각을 만들어낸다. 거미는 그런 신체로서의 거미줄과 함께 있다. 프루스트의 화자는 바로 그런 것이라는 겁니다. 들뢰즈의 변화 과정이 바로 그런 것이었으며, 방금 말씀하신 것은 거의 맞는 말이라고 생각합니다. 방금 말씀하신 이야기를 듣고 그런 곳으로부터, 거미와 거미줄이 일체가 되어 있는 자연, 그런 퍼짐[넓어짐] 속에 있는 전체와 부분 같은 곳에서부터 들뢰즈의 변화를 사고할 필요가 있는 게 아니냐 생각했습니다.

들뢰즈의 자연주의는 가타리와의 공저에서 매우 급진적인 변화를 이뤄갑니다만, 이 변화의 방식은 어떤 것이었는지를 살펴보고 싶습니다.

 

네그리와 하트의 <제국> : ‘항쟁의 역사를 위해

宇野 : 들뢰즈에게서는 스피노자와 베르그손이 서로 모순되지 않는 형태로, 더욱이 거기에 니체도 보태지며, 자연과 인간을 어디까지나 연속된 것으로 파악하고, 자연의 능산성의 연장선상에서 세계를 파악하고 인간을 파악하려고 한다. 그런 의미에서는 매우 근본적인 자연주의가 있다. 그런 한에서는 물질과 기억은 주관의 감축과 이완의 정도일 뿐이므로, 연속적인 지평에 있다. 그러나 자연주의의 관념뿐만 아니라, 여기서 네그리와 하트를 끄집어내지 않으면 안 됩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천 개의 고원이라는 책을 본격적으로 계승하여, 70년대, 80년대의 사고의 책, 즉 지금에서는 돌아볼 가치가 없는 것으로 여겨지던 책을, 사실은 거기에 나오는 개념들은 현대에서도 살아 있으며, 더욱이 모든 곳으로 열려 있으며, 지금 여기서 현실화하고 있다는 관점에서 읽으려 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제국에는 항쟁이라는 개념이 있습니다. 이것은 물론 들뢰즈 안에도 있는 개념입니다만, 그러나 네그리는 들뢰즈로부터 전면적으로 영향을 받은 것이 아니고, 네그리에게는 맑스도 스피노자도 마키아벨리도 있기 때문에, 들뢰즈와 또 다른 형태에서의 어레인지먼트를 형성하고 있다. 네그리도 스피노자로부터 능산적 자연이라는 사고방식을 받아들이고, 자연주의를 매우 소중하게 여긴다. 그런 자연주의가 있다고 한다면, 예를 들어 서양 근대는 그 자연주의를 어떻게 살았는가, 스피노자는 단순한 마이너리티에 불과했는가? 그런 개념이, 그런 자연이 명확해지려면 항쟁이 필요한 것이 아니었는가? 들뢰즈로부터는 그런 역사적 비전이 아주 선명하게 떠오르지는 않았습니다.

네그리의 근대 파악에서는, 근대는 단순히 이성이나 과학이나 자본주의의 세기가 아니라 하나의 항쟁의 세계였다. 아니 그 이전에도, 이성과 자연의 능산성 사이에는 끊임없이 항쟁이 있었다. 르네상스 시기에 나타난 인간 존재의 자각은 자연의 능산성의 새로운 자각이기도 했다. 그것이 정치학적 비전으로서 마키아벨리에게서 나타난다. 그런 능산적 자연의 연장선상에 있는 창조력, 즉 삶이 넘치는 힘, 이것은 스피노자나 마키아벨리로부터 온 개념입니다만, 능산적 자연을 신의 초월성의 바깥에서 파악하려고 하는 근대인의 자각이 나타난다. 그러나 이번에는 그것에 대항하여, 그것을 통제하거나 질서화하려는 움직임도 나타나며, 거기서 형이상학적 이성이나 조정적인 정치조직, 혹은 권력, 통치의 질서 등이 그것에 대항하는 질서로서 재구성된다. 그런 항쟁, 경합의 역사야말로 근대라는 것입니다.

항쟁이라는 개념을 들뢰즈는 그렇게 전면에 내세워 사고한 적이 없지만, 그러나 전쟁기계와 국가장치라는 이항대립에 그것을 포개어 생각할 수 있다. 그리고 그 두 항 사이에서 발생하는 리좀이라는 개념. 이것은 단순한 이항대립이 아닙니다만, 그러나 이 두 항은 항상 침투하고 있는 관계라고 보고 있으며, 이 관계를 풀기 위해 일부러 두 항으로서 다루는 것입니다만, 각각이 독자성을 지닌 것은 아니라는 게 골치 아프다고 말합니다만, 각각이 그런 양의성을 지닌 장치로서 나타납니다. 리좀이라는 관념 자체가 양의성을 포함한 개념이며, 나무와 같은 작동을 하는 리좀이거나, 리좀과 같은 작동을 하는 나무이거나, 그런 리좀적인 텍스트가 이번에는 텍스트라는 차원을 둘러싸고 중심화, 수목화되며, 보르헤스라든가 조이스에 있어서 기묘한 양의성을 드러낸다는 거네요. 네그리만큼 명확하지는 않습니다만, 그런 항쟁의 관념이 들뢰즈 안에서도 뿌리 깊게 있습니다. 니체주의자로서 항쟁개념이 없을 수는 없으며, 그러니까 자연주의를 둘러싼 항쟁이 그대로 들뢰즈의 철학의 모티프였다. 다만 그것이 네그리와 같은 역사적 사고라는 형태를 취하지는 않았다.

 

네그리의 스피노자, 들뢰즈의 스피노자

宇野 : 앞에서 들뢰즈 안에는 스피노자와 베르그손이 전혀 모순 없이 존재하고 있다고 말했는데, 예를 들어 베르그손의 그림자가 일단 사라졌나 싶으면, 나중에 영화론 속에서 부활합니다. 그렇게 끊임없는 개념의 변천이 들뢰즈의 사상의 다원성을 만들고 있습니다. 이 들뢰즈에게서의 스피노자와 베르그손의 동시 존재라는 의문에 관해 네그리는 자서전에서 언급하고 있습니다. , 스피노자주의자로서의 네그리는 절대로 베르그손을 받아들일 수 없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베르그손에는 능산적 자연 개념, 즉 창조적 진화라는 아이디어가 있습니다만, 밋밋하게 일원적으로 퍼져나가는 자연 개념 속에서, 물질과 기억이 똑같은 차원에서 전개되고 있으며, 말하자면 거기에는 항쟁의 개념이 성립할 수 없다. 베르그손 자신은 도덕과 종교의 원천을 묻는다는 형태로 역사를 문제 삼자고 한 것입니다만, 네그리에게서는 역시 그리하면 아무래도 항쟁이라는 물음이 제기되지 않게 된다고 생각한다. 베르그손은 동시대의 현실 사회의 알력 속에서 살면서, 베르그손 나름의 항쟁의 비전을 갖고 있었음에 틀림없습니다만. 하지만 베르그손의 개념 형성의 근본적 움직임 속에 그것이 없다는 게 네그리의 비위를 몹시 거스르게 되죠. 네그리의 발언을 읽으면, 들뢰즈의 베그르손주의의 굴절이 또한 흥미롭게 생각됩니다.

물론 그것은 흄론 안에도 있었다. 들뢰즈의 흄론의 비전은 스피노자에 매우 가까운 곳에 있다. 기본적으로는, 스피노자 안에 매우 확실한 형태를 취하는 자연의 능산성이라는 움직임, 흄이라면 정서의 움직임에 따라 이성을 재구축하려고 하는 모종의 이성 비판이 있으며, 경험론은 그런 모티프와 더불어 읽히고 있습니다. 그런 들뢰즈의 자연주의 속에는 구축과 항쟁의 개념이 처음부터 있었으며, 가타리나 푸코와 마주치는 것, 역사적인 변화사건과 마주침으로써 그 흔들림이 확대됐다는 것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 네그리의 스피노자와 들뢰즈의 스피노자에 대한 차이입니다만, 거기에 있는 가장 큰 차이는 들뢰즈의 스피노자에 관한 글들에서 각각 강조되고 있습니다만, 자연 속에 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스피노자 이해라고 생각합니다. 거기에는 선도 악도 없고, 있는 것은 그저 자연의 조합(어렌지)에 의해 뭔가가 산출되는 과정과, 그것이 해체되는 과정뿐. 어떤 것인가가 무한한 조합에 의해 무한하게 생성되는, 그것이야말로 기쁨의 감정이며, 또한 동시에 그것이 진정한 의미에서의 건강을 형성한다. 들뢰즈는 그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후에도, 구성되는 힘에 의해 생성하는 자연이라는 비전을 결코 놓지 않았다. 천 개의 고원이 간행된 직후에 증보된 스피노자론(스피노자 : 실천의 철학에서는 윤리학)은 생태학과 결부되어 진정한 생태의 윤리가 된다고 말합니다만, 이런 자연관은 매우 독창적인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들뢰즈의 자연주의가, 맨 처음에 정리된 형태로 겉으로 나온 것은, 물론 흄론으로 이어진다는 것입니다만, 니체와 철학이 출판되기 직전의 1961년입니다. 이때 마조히즘론(나중에 마조히즘에 수록)루크레티우스와 자연주의(나중에 개정되어 의미의 논리에 수록)가 거의 동시에 발표됐습니다. 그리고 이것들이 모두 자연주의를 주제로 삼고 있는 것과 더불어, 자연주의를 구성하는 주체와 객체를 제시하는 것입니다. , “도착자원자입니다. “도착자는 자연을 찾아내는 시선을 무한한 다양성에 열리고, “원자는 그 자연을 구성하는 요소의 하나하나가 그것만으로 다양체라는 것을 밝힙니다. 도착자는 철저하게 자연을 변혁하고, 그 자연의 근저에는 보통의 지각에서는 파악될 수 없는 최소의 시간단위, 무한소의 편위(클리나멘)를 지닌 아톰atom이 존재합니다. 이러한 독특한 자연관에서 출발하기 때문에, 들뢰즈에게서 항쟁은 그 의미를 바꾸고. 목적을 갖지 않는, 새로운 개념으로서의 싸움이 되겠죠. 들뢰즈 안에도서 항쟁은 존재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산출의 기초가 되는 조합으로서의 싸움이며, 그런 싸움이 전개되는 지평인 자연이야말로 항상 들뢰즈가 계속해서 보고 있던 게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그 독자적인 항쟁이야말로, 타자에 열려 있는 것이 된다. 싸우면서 우애롭게 되는 것. 그것이 어렌지먼트라는 개념으로도 이어지는 게 아닐까요.

 

선악의 피안, 반역사로서의 천 개의 고원

宇野 : 네그리는 자연주의라는 문제를 근대의 항쟁의 최초 속에 위치시키려고 했다. , 역사적 독해를 하고 있는 것인데, 들뢰즈는 그런 독해를 거부하고 오히려 반역사의 입장을 취하고 있습니다. 천 개의 고원의 주제군은 연속된 역사를 이루는 것이 아니라, 리좀에서 시작되며, 지질학적인 이미지에 포개진 진화론의 문제에 연쇄되어 있으며, 이윽고 그리스도의 얼굴과 주체화라는 문제, 칭기스칸과 유목민의 문제, 그리고 일체의 전쟁기계의 문제라는 식으로, 역사의 스케일을 당돌하게 뛰어넘어 버린다. 이렇게 움직이는 방식을 하고 있는 것 자체, 들뢰즈가타리가 만들어낸 반역사적 시간성이 있으며, 그것이 들뢰즈의 자연주의의 문제와 연결되는 게 아닐까 생각합니다.

확실히 들뢰즈가타리는 자연주의의 연장선상에서 새로운 에티카를 형성하는 것입니다만, 그 기초가 되는 들뢰즈의 스피노자 윤리학의 독해 속에서, 가장 큰 문제의 하나가 되는 것은 바로 지금 나온 선악의 문제이며, 선악의 피안이라는 문제가 이미 거기서 읽어내어지고 있습니다. “이 있는 게 아니라, 이라는 도덕적 표상이 앞에 있는 것이 아니라, “좋다”, “나쁘다밖에 없다. “좋다”, “나쁘다의 기준은, 이것은 신체의 문제가 됩니다만, 신체를 형성하는 다양한 힘을 맞이하는, 결합하는, 더욱이 새로운 차이를 맞이하고 새로운 삶의 미립자를 산출하는 데 있다. “정서를 결합한다라는 표현이 될 텐데요, 즉 그것은 삶의 강도를 높이는 것이며, 완전히 자연의 연장선상에 있는 윤리이다. 그것을 해체하는 것이 인간의 사회 속에, 혹은 자연 속에도 죽음이나 부패라는 형태로 존재한다. 정서의 결합을 저해하는 결합의 움직임이 있고, 이는 인간의 사회의 기본적인 움직임의 하나이며, 권력의 작용이기도 하다. 만일 악이 있다고 한다면, 그런 정서나 미립자의 결합이나 활동을 방해하거나 해체하는 것이 악입니다.

그런 결합을 방해하는 체제와, 그것에 저항하는 힘의 형성, 스피노자는 그것을 반드시 이라는 식으로 정식화한 것이 아니라, “을 사고하는 것을 가능케 한 것은 오히려 니체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서구사회의 새로운 질서, 생산형태, 자본주의의 진전, 혹은 자연과학적인 비전 속에서의 개념의 변천과 관련되어 있다고 생각합니다. 들뢰즈는 스피노자에 매우 가까운 곳에서, 힘의 뉘앙스를 식별하는 니체의 분류학적 사고를, 그런 니체의 새로운 탐구를 이어나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니체와 철학속에서, 권력이나 폭력은 나쁜 힘일 수 있으나, 힘 그 자체에는 좋지도 나쁘지도 않다고 말합니다. 만일 나쁜 것이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반동적인 힘입니다. 스피노자론에서는 힘의 결합을 저해하는 것이 이라고 말합니다만, 니체에게서 나쁜 것반동성이며, 힘에 대해 반동하는 힘이며, 그것이 르상티망(re-ssemtiment)입니다. “다시 한 번에 있어서, 감정은 감정의 감정이 되며, 거기에 반동으로서의 힘이 형성되고, 그 형성이 새로운 힘의 형성을 방해한다. 윤리가 아니라 도덕이 거기서 나타난다.

 

── , 윤리는 선악의 피안에 생성된다.

宇野 : 들뢰즈와 스피노자는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에티카는 반도덕적인 관념이라고.

자연주의를 둘러싸고, 자연의 능산성이라고 해도, 물론 자연과학적인 성과도 있으며, 19세기의 역사적사회적자본주의적 전개의 문제도 있습니다만, 졸라의 자연주의는 스피노자의 능산성과 관계가 있을까 없을까. 예를 들어 졸라의 수인(獸人)”을 생각하는 경우에는 동물의 문제가 관련됩니다. 들뢰즈에게서 동물이라는 범주는 매우 중요한 것으로서 있었습니다.

들뢰즈는 자연주의라는 문제를, 베르그손, 스피노자, 니체의 각각에서 발견하고 계승하지만, 그 의미는 각각에 의해 다르다. “자연이라는 개념에 기초한 에티카는 자연의 연장선상에서, 능산적 힘에 대한 반동적 힘을 분간하기 위해서 있다. 이것이 권력 비판이라는 문제계로 이어지며, 그것이 니체를 경유하여 푸코로 흘러든다. 들뢰즈는 그것에 평행하면서도, 거기에 예를 들어 성도착의 문제가 있습니다. 자연에 인공이 가미되며, 인공적이 된 성이 도착인가 하면, 반드시 그런 비전인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서 묘사된 동물과 식물 사이에 맺어지는 성관계. 말벌이 잘못해서 난과 섹스를 하는 것은, 단순한 자연 속에서 행해지는 이종교배입니다만, 그러나 그것은 어떤 의미에서 말하면 도착적, 반자연적인 것입니다. 이것은 프루스트 자신의 비전이기도 하며, 거기서 동성애자나 성도착자를, 특히 식물의 차원에서 파악하려고 한다. 들뢰즈는 도착도 자연주의 속에 넣고, 그렇게 자연을 여러 가지 선으로 식별해 보인다는 문제계를 안고 있었다. 들뢰즈 자신 속의 자연주의의, 여러 가지 선분을 식별해보이는 것이 중요하지 않는가 생각합니다.

 

이념으로서의 추상기계, ‘언어존재로서의 인간

── 들뢰즈는 자신의 자연주의를 철저하게 규명한 다음, 안티 오이디푸스천 개의 고원으로 향합니다만, 거기서 이번에는 자연이 묘사하는 구체적구상적인 선분을 철저하게 어레인지하면서, 더욱이 그 저편에 있는 아주 추상적인 지평으로 나가려고 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니체의 힘스피노자의 에티카를 종합하여, 양자를 함께 탈영토화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거기에 새로운 지평에서의 항쟁개념, 싸움의 개념이 나온다. 그것이 아마 전쟁기계라는 개념에 집약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거기서는 선악을 넘는싸움이 발생한다. 그것은 최악의 반동, 즉 파멸적이고 전면적인 붕괴로도 되며, 또한 동시에 뭔가 새로운 존재(바로 초인’)를 산출하는 계기도 된다. 천 개의 고원에서는, 미래는 항상 장밋빛으로는 그려지지 않으며, 최선의 것으로도 최악의 것으로도 어느 쪽으로도 될 가능성이 있다. 자연의 선분을 어떻게 어레인지하고 어떻게 싸울까라는 것이 80년대의 이 단계에서 말해진 것은 매우 크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앞으로의 현대를 살아가기 위한 도래할 투쟁이 개념의 모형雛形이 될 것입니다.

 

宇野 : 방금 말씀하신 것에는 두세 가지가 연결되어 있습니다.

하나는, 들뢰즈가타리는 추상기계라는 말에 집착하여 이를 사용한다는 것. 더욱이 안티 오이디푸스천 개의 고원에서, 그때까지는 없었던 것으로서 나중에 나오는 프래그머티즘의 문제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좋게 생각하면, 그때 시작된 것이 아니며, 이미 멀리 흄론 속에서 말해진 경험론으로서 있었던 것입니다만, 그러나 들뢰즈의 경험론은 단순한 경험론, 단순한 프래그머티즘이 아니다(물론 단순한 경험론이나 단순한 프래그머티즘이 있느냐라는 문제가 있습니다만). 들뢰즈는 퍼스와 같은 사상가를 평가하고 있으며, 화이트헤드 안에도 있는 프래그머티즘을 매우 평가하고 있습니다. 그런 프래그머티즘의 선분이 있으면서도, 차이와 반복안에는 이념이라는 개념이 나옵니다. 이것은 플라톤과 관련된 것입니다만, 그러나 플라톤의 발상에서 이데아를 떼어내고 아주 기묘한 개념을 만들어낸다고 하는 것이, 틀림없이 차이와 반복의 한 가지 주제였다. 그리고 의미의 논리안에서는 표층이라는 개념이 나옵니다. 표층의 차원, 의미의 차원, 사건의 차원이 거의 엇비슷한 것으로 나타난다. 이것들은 신체 차원의 작용/반작용과는 다른 차원의 것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앞의 죽음의 본능이라는 것조차도, 들뢰즈는 거기에 이념적인 차원, 사건적 차원을 보고 있다. 문제는 자연 속에 이념이 있느냐 하는 것인데, 아무래도 차이와 반복에서 그것은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념은 예를 들어 개체가 발생할 때에도 작동할 수 있는 것이며, 실제로 강도를 배분하는 것이라는 범주로서 나타난다. 또한 말년에 들뢰즈는 푸코를 읽으면서 언어존재라는 새로운 존재가, 지금 이 현대에 미래를 향해서 출현하고, 그 언어 존재로서의 인간이야말로 새로운 인간의 이미지라고 말합니다.

이처럼 이념, 추상 언어라는 주제는 상당히 어려운 독해를 강요하는 것이며, 자연 속에도 있는 차이의 작동이며, 그런 이념은 신체와는 다른 차원을 만들고 있다. 그것은 자연의 능산성의 연장선상에 있다고는 말할 수 없는지도 모르지만, 적어도 새로운 상이한 채원의 창조에 속한다, 혹은 새로운 존재론의 하나의 골격을 이룰 수 있다는 것이 줄곧 말해졌으며, 천 개의 고원속에서도 말해집니다.

예를 들어 네그리하트는 제국에서 정보사회에 대해 말합니다만, 그것은 언어-기호를 생산하고 소비하고 기호를 둘러싸고 노동하며 협업하는 사회입니다. 이런 사태가 <제국>에 있어서의 기본적인 작동 중 하나가 되고 있다. 이런 것은 들뢰즈의 인식과 관계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비신체, 비프래그머티즘, 비생명, 경우에 따라서는 죽음의 본능이라는 차원을 가지는 언어나 이념의 차원이, 그러나 자연의 능산성과 결코 분리하기 어려운 형태로, 현대사회에서의 능산성의 하나의 잠재적인 중심을 만든다는 비전이 들뢰즈에게는 분명히 있었습니다.

이런 것은 우리를 매우 현혹시킵니다. 들뢰즈는 신체의 철학자라고 말해집니다만, 그러나 신체라고 해도, “기관 없는 신체의 철학자이며, 여기서 우선 까다로워진다. 그리고 의미의 논리를 읽으면, 의미는 신체와 전혀 관계가 없는 차원이라는 상당히 이질적인 사고마저 나온다. 물론 그것으로 끝나는 게 아니라, 신체와 비신체가 다양한 형태로 교차하는 세계의 비전이 천 개의 고원에 나오고 있으며, 다양한 변주를 통해 그려지고 있습니다만, 거기서는 기계-신체-물질이라는 계열이 하나에 있고, 기호-비신체-추상의 계열이 또 하나 있으며, 거대한 스케일을 갖고 다양하게 교차한다는 비전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안티 오이디푸스는 더 신체적 차원에 기울고 있으며, 흐름의 교차를 제어하고 증강하며 혹은 가둔다는 자본주의의 운동을 나타내고 있다. 거기서도 기호의 갤럭시라는 맥루언적인 비전이 분명히 나오고 있습니다만. 그에 반해 천 개의 고원은 훨씬 복잡한 형태로 두 개의 차원을 교차시키고 있습니다.

도래할 민중은 무리속에서 태어난다.

── 그 두 가지 차원의 교착을, 구체적인 기계와 추상적인 기계의 끊임없는 상호 전환의 과정으로 파악하는 것이 천 개의 고원의 아주 독창적인 대목이 아닙니까? 그리고 거기서는 자연은 모든 것을 포함하고 전개하는 거대하고 정교치밀한 <기계권>이 됩니다. 게다가 푸코론에서는, 그 추상적인 <기계권>의 끝에, 현대적인 사회와 생명의 어레인지먼트를 관통해서 나오는 존재야말로, 니체가 말하는 초원자체라고 합니다. 인간을, 다양하게 조합된 기계로서 사고했을 때, 거기서 출현하는 강도의 추상을 자신 안에 분유한 새로운 존재야말로 언어 존재로서의 인간이 아닐까요. 아마 들뢰즈는 그런 존재에 도래할 민중이라는 개념을 준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추상과 구상, 그리고 선악에 고정되지 않은 윤리와 권력()을 가진 도래할 인간을 만들어 나가야만 한다. 그런 것을 반복하고 반복해서 천 개의 고원에서 말하고 있습니다. 다분히 네그리하트의 다중이라는 개념은 들뢰즈의 그런 민중개념이 없으면 생겨나지 않았을 겁니다. 무너져야 할 인간이라는 개념에 대해, 추상에 있어서도 구체에 있어서도 초월하는 것이 아니며, 기쁨과 함께, 내재적인 구성의 힘에 있어서, 조합(어레인지)에 의해 새로운 것을 낳는다고 하는 것. 거기서 생성되는 민중은, 끊임없이 모든 곳에서 투쟁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전쟁상태에 있는 민중, 선악의 피안을 견디며 꿋꿋하게 살아가는 민중. 그것은 항상 목표로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존재로서의 이념이기도 하죠. 여기서 발견된 도래할 민중은 또한 천 개의 고원에서 인상적으로 묘사된 무리라는 개념에 서로 포개지는 것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宇野 : 천 개의 고원에 나오는 무리”meute늑대의 무리라든가 패거리에 가까운 말이며, 또 하나는 ‘masse’이며, 이것은 군집으로 번역됩니다만, 일종의 코드성, 계급성을 가지고, 자신이 누구인가라는 정체성을 꼭 동반한 것입니다. “무리는 네그리가 다중에 관해 말하듯이 유연성과 이동성을 특징으로 갖고, 바로 노마드이기도 하며, 우두머리가 있을지도 모르지만, 국가적인 고정된 질서를 만들어내려고 하면 반드시 저항이 작동한다. 예를 들어 아이의 갱들이 낮에 함께 움직이더라도, 잠잘 때 같이 자는지 자지 않는지, 어른이 되어서도 남아 있는가 아니면 떠나는가. 이런 사소한 것이 집단의 성격을 결정한다. 이런 예를 제시함으로써 들뢰즈·네그리는 무리에 구치적인 이미지를 주는 것입니다. 그에 반해 네그리·하트는 일관되게 도식적이고 친근한 이미지가 솟아나지 않습니다. 개개인의 역할과 위치관계, 거리가 그 장마다 바뀌어가는 무리의 집단은, 기본적으로는 코드에 의해서는 통제하기 어려운 것이며, 그것은 비록 작은 것이라고 하더라도 그것이 전쟁기계에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런 무리라는 개념을 바로 들뢰즈는 무수한 고원으로부터 추출했습니다.

예전에 예정부조화라는 책에서도 썼습니다만, 그런 무리는 또한 셀린느(LouisFerdinand Céline)의 파시즘의 문제와도 관련됩니다. 예를 들어 Mort à crédit에 나오는 무리의 이미지. 모종의 갱, 사기꾼 등, “무리라는 것에서 보자면 셀린느는 읽어낸 것 아니냐고 생각했던 적이 있습니다. 무리가 한발을 잘못 디디면, 나치즘으로 자빠진다. 한나 아렌트는 나치즘이 과격한 불평분자들, 즉 군중들(mobs)로부터 형성되는 역사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물론 그것만으로는 환원할 수 없으며, 아렌트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겠지만, 군중들(mobs)무리였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무리이기 때문에 좋다든가 무리는 혁명적이라든가 등과는 전혀 말하고 싶지 않다.

 

ーー 매우 양의적이네요.

宇野 : 집단성의 양상을 두 가지 각도에서 말하고 있다. “무리는 리좀적 집단으로, “군집은 트리적 집단이 됩니다. 인간의 개체를 미립자의 결합으로서, 그리고 속도의 양태로서 보고 있다. 그리고 그 양자는 멀리 떨어져 있지 않고, 쉽게 상호 전환된다. “무리의 메커니즘은 사회학적으로도, 굉장히 재미있는 문제죠.

 

ーー 무리의 문제계에 대해서입니다만, 들뢰즈 안에는 항상 다양체라는 개념이 있다고는 하나, “무리라는 존재가 리얼하게 다시 구체적으로 나오는 것은 역시 가타리와의 만남이 큰 것 아니냐고 생각합니다. 가타리는 라보르도 병원에서, 의사와 환자라는 수직성의 관계를 최대한 배제하고, 그리고 또한 환자들에게도 다양한 역할을 맡게 하고 병원 전체를 하나의 무리로서, 그것을 하나의 다양체로 변신시킨다는 실험을 했습니다. “광기를 앓는 사람들이 그대로 다양한 역할을 맡는다면 하나의 집단을 형성해간다는 가타리의 실천으로부터, 들뢰즈는 매우 큰 영감을 받은 게 아닐까 생각해요.

 

宇野 : 글쎄요. 모종의 어레인지먼트를 산출한다는 거군요. 천 개의 고원의 첫 대목에서, 두 사람이서 책을 쓸 때, 우리 두 사람은 이미 몇몇이며, 각각이 무리이며, “무리무리가 교착하고 있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저뿐만 아니라, 누구나 들뢰즈·가타리의 책은 어떤 식으로 생겨났는가라고 생각했는데요, ()을 분담해서 썼다고는 생각할 수 없으며, 모종의 개념에 관해 두 사람 중 누가 말했느냐는, 세밀하게 조사하면 뭐 알 것이라고 생각합니다만, 기본적으로는 분담이라고 생각되지 않는 텍스트를 무리로서 썼으며, “무리로서의 텍스트가 등장했다고 할 수 있죠. 안티 오이디푸스가 나온 뒤에는, 여러 사람들이 들뢰즈·가타리의 여러 다양한 텍스트들을 갖고 와서 이것들이 인용됐다. 출처가 불분명한 텍스트나, 테크놀로지의 역할 등과 관련된 미완성 논문이나, 공개되지 않은 문서가 인용되고 있다. 이렇게 텍스트 자체가 무리라는 양상을 만들어낸다. 어레인지먼트라는 개념이 책을 쓰는 방식이 되기도 하며, 사고의 방식 자체를 형성한다. “내가 없다는 것이 천 개의 고원에 현실적으로 존재했다는 것이며, 그것은 단순히 사상을 집단성에 열어 간다고 하는 것이 아니며, 더욱이 혼자서 했던 것을 몇 사람이 한다는 것이 아니며, 그것보다 훨씬 이상의 일이 시도되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는 아까 들뢰즈·가타리는 장밋빛 미래를 절대로 그려내지 않는다는 얘기가 있었습니다만, 그것과 동시에 잠재성의 차원에서는 다양한 것이 온갖 차원에서 실현되는 것입니다. 어레인지먼트의 철학이란, 실천과 이론 사이의 어레인지먼트라는 의미를 필연적으로 수반합니다. 그것은 이론을 따라 실천한다는 교과서적인 어레인지먼트일 수 없죠.

 

언표행위의 어레인지먼트, 기호의 생산

ーー 예를 들어 푸코와 가타리에 대해서는 푸코의 바로 옆에는 무수한 죄수들이 있으며, 가타리의 바로 옆에도 또한 무수한 광인들이 있는 상황이 있었다. 들뢰즈가 구체적으로 공동 작업을 하고, 실제로 함께 쓴 것은 가타리인데요, 70년대의 들뢰즈의 주위에는 그 자신도 포함해서 익명이고 무수한 무리가 분명히 존재했다. 그런 집단적인 존재방식 자체가 어레인지먼트이며, 특히 안티 오이디푸스부터 천 개의 고원에 걸쳐, 무리야말로 다양한 텍스트를 담당하고 또한 다양한 텍스트 자체가 되며, 다양한 결합을 이루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봅니다.

 

宇野 : 그 당시는 구조주의의 자극에 의해 언어-기호에 관한 새로운 사색이 자꾸 전개되고 있었습니다만, 언어를 구조적으로 본다는 것 자체가 대단한 의미를 갖고 있으며, 이것 자체가 이론의 능산성을 갖고 있었다. 라캉은 68년에 대해 구조가 길거리로 내려왔다고 말했습니다만, 러시아 형식주의 등도 있고, 은유나 환유를 다시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여러 가지 독해를 할 수 있게 됐다. 또한 사용가치와 교환가치를 자본에서 받아들여, 그것들을 기표와 기의의 문제에 접속하고, 유물론화된 문학이론을 구상한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거기에 들뢰즈·가타리의 언표행위의 어레인지먼트라는 작업이 가져온 단절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이것은 물론 푸코의 작업에 하나의 기원을 갖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자유간접화법과도, 폴리포니(polyphony)와도 관계가 있습니다. 들뢰즈는 의미의 논리에서 의미에 관해 묻습니다만, 구조주의에서는 의미가 아니라 차이가, 혹은 관계가 문제라고 얘기됩니다. 들뢰즈는 구조주의와 유물론 사이에 이것들을 가교하는 사고를 가져왔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게다가 언어를 행위로서, 더욱이 어레인지먼트라고 파악하고, 한 명이서 발화하고 있는 것도 집단적 어레인지먼트 속에 있다고 한다. 이런 시각은 당시의 제게는 매우 참신한 것이었다. 이런 견해는 민중이라는 것과도, 프래그머티즘의 문제와도 관계가 있으며, 어레인지먼트의 문제는 언어뿐만 아니라 기계, 신체와도 관계가 있다. 기계와 어레인지먼트는 모종의 동의어라고 파악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라캉은 가족의 표상을, 부재 대상이라는 탁월한 기호를 도입하여 기호의 복잡한 대수적(代數的) 조작으로서 설명한다. 들뢰즈·가타리는 그것조차도 어레인지먼트로서, 어레인지먼트 속에서 말한다. “욕망이 기계이다라는 주장을 비웃기라도 하듯이, 보드리야르는 들뢰즈가타리가 말하는 기계생산일 것이지만, 지금은 소비사회니까 이제 와서 생산이라니 라며 비판을 말했습니다. 그러나 들뢰즈가타리가 말하는 생산은 기호의 생산이며, 주체의 생산에 관여하며, 자연의 능산성에 관한 것이며, 보드리야르처럼 20세기 말의 몇 십년 동안의 스케일로 말하고 있는 게 아니라, 더욱 긴 스케일로 생각하고 있다. 이런 관점에서, “자연기계로서 재파악하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 우주 이론은 화상에는 물이 있는가라든가, 어딘가의 천체에 생명이 있는가라는 식으로, 단체 수준에서 사고하고 있는 지평에서부터, 우주의 확대 속에서 모든 것이 연결된 하나의 기계로서 우주 전체가 움직이고 있는, 우주 자체가 살아 있고, 그 광대한 삶 속에 생명이 있다는 비전을 제시하는 것 같아요. 들뢰즈가타리의 기계 개념은 그런 의미의 자연론과 무관하지 않을까요.

 

잠재성속에서 끝까지 싸우기

── 매우 구체적상황적인 70년대에 고유한 문제와, 스피노자와 표현의 문제로 결실을 맺은 메타피지크(metaphysics)의 극치가 여기서 직접 접합되어 있다. 거기에는 모든 것은 표현이며, 동사이다라고 합니다. 구체적 상황과 추상적 개념이 표현의 차원에서 만나고 합치한다. 지금 이나 자연등을 끄집어내어 형이상학을 재건하려고 하면 어떻게 될지 모르겠지만, 그러나 들뢰즈는 거기에 매달리고 철저하게 사고했다. 그래서 때가 현대에 있어서도, 그 구체적인 상황을 견뎌내는 강인한 개념을 만들어낸 것이 아닐까요? 그리고 그것에는 자연주의라는 단일의 확실한 선이 통했다. 맑스가 그 백년 전에 자본속에 써서 남긴 자연과정속에서 생산을 사고한다는 사태에 직결되는 것을, 한쪽은 메타피지크 속에서, 다른 쪽은 구체적인 상황 속에서 행하며, 더욱이 양자를 결합할 수 있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宇野 : 들뢰즈가타리의 사고는 매우 추상적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만, 그때 추상이란 무엇이냐라는 문제가 우선 있습니다. 들뢰즈는 회화에 있어서의 추상과 구상이라는 문제까지도 다루고 있습니다. 추상도 구상도 아닌 곳에, “figure”(‘도상’)이라는 개념을 끄집어냈습니다. ‘도상은 추상도 구상도 아닙니다. 추상회화든 구상회화든 “figure”를 실현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들뢰즈는 잠재성이라는 것을 계속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도 베르그손으로부터, 아주 본질적인 형태로 받아들인 것입니다. 잠재성은 일종의 추상성입니다. 하지만 그것과 동시에 잠재성은 리얼하기도 하다고 말합니다. 예를 들어 알의 잠재성을 생각해보면, 알에서 점점 발생이 진행되면, 장기나 손이나 발이나 머리가 보인다. 형태발생에 있어서 잠재성은 리얼이지만, 그러나 여기서 현실화되는 것은 잠재성의 복제copy가 아니다. 복제copy로서 현실화하는 것은 가능성이며, “잠재성가능성을 구별하고 있습니다. 이 구별은 상당히 중요하고, 아마 잠재성의 차원은 추상성의 차원보다도 더 중요한 것이 아닌가. 들뢰즈가타리는 안티 오이디푸스천 개의 고원에서 현대의 자본주의나 분열증을 문제 삼고 있습니다만, 그것에 영향을 받은 네그리하트는 분석에 있어서는 현실과 상당히 다른 접촉의 방식을 갖고 있다. 들뢰즈가타리는 개념으로서 살아가는 사고, 개념의 잠재성이 그대로 리얼하다는 글쓰기를 목표로 현실에서 행동하는 사람은 그로부터 결코 복제copy가 아닌 무엇인가를 산출하면 좋다는 사고방법을 갖고 있는 게 아닐까.

네그리하트는 안티 오이디푸스, 천 개의 고원에서부터 자본주의의 탈영토화라는 개념을 이어받고, 20세기 말부터 21세기에 걸친 전개에 응용하고, 단순히 응용만 할 뿐 아니라 큰 스케일을 가진 사고실험을 하고 있습니다만, 그때 들뢰즈가타리의 개념은 가능성으로서 받아들여지고 있다. 예를 들어 노동의 분석에 있어서 적용될 때에도, “가능성으로서 파악되고 있다. 네그리하트는 어떤 곳에서 다중은 일종의 그림자에 불과하다는 식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다중이라는 말을, 현실의 노동자나 저항하는 사람들이나 마이너리티에 그대로 적응하면, 어딘가 조잡한 게 아니냐는 배려가 작동하는 것은 아닐까 생각되지만, 그와 동시에, 그들의 분석은 가능성의 분석이 되며, 그만큼 추상적이게 된다. 그리고 리얼로 향하면 향할수록 그만큼 추상성이 나타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국은 중요한 문제제기를 한 책이라고 생각합니다. 천 개의 고원이후, 이 책의 개념에 비춰보더라도, 사실은 아직 생각되지 않고 있으며, 그리고 전혀 다른 관점에서 생각해도 좋은 것이 확실히 있다고 생각합니다.

 

── 『천 개의 고원을 철저하게 하면, 생산은 표현이 되며, 표현은 또한 싸움이기도 하며, 그 생산과 투쟁을 동시에 표현으로서 포함하는 것이야말로 자연이라는 테제에 이른다고 생각합니다. 자연속에서는, 모든 것은 다양체로서 동등하지만, 차이화의 정도에 의해 거기에 배분되는 것, 산출되는 것은 무한해집니다. 그런 이념, 지금의 눈앞의 상황에서 시작해, 그 상황 속에 모든 것을 모조리 표현하는 것. 아마 그런 시도가 1980년이라는 해에 행해진 것은 매우 상징적인 일일 겁니다. 이후 천 개의 고원은 생산이며 표현이며 투쟁이기도 하다는 것을 싸우고, 그로부터 자신의 모습을 얻고자 하는 도래할 민중을 위한 지침이 됐다고 생각합니다.

 

들뢰즈에서 푸코로의 통저기(通底器)”

宇野 : 오늘은 푸코와의 관계에 대해 말할 수는 없었습니다. 이것을 하게 되면 한이 없지만, 들뢰즈의 푸코론은 매우 중요한 책이라고 생각합니다.

 

── 어레인지먼트를 궁극까지 밀고 나가면 뭐가 나오느냐는 것은, 푸코론에서만 그려져 있죠.

 

宇野 : 어떤 의미에서 푸코는 어레인지먼트의 분석을 실현했다. 푸코는 역사를 연구했다고 말해지지만, 확실히 그렇고, “역사의 문제라는 것이 있으며, 그것을 몇 가지 책에서 확실히 제기하고, 고문서에 비추어 파내려갔습니다. 그것은 들뢰즈의 사고의 타대와는 다른 것입니다만, 그렇게 함으로써 푸코는 분명히 철학과 거리를 취하면서, 여전히 철학적으로 사고한 급진적인 사고자였다. “광기를 생각하려 한 철학에, 현상학이 있었습니다. 인간을 타자성이나 장소성이나 신체성이나 공간시간 등 속에서 생각하고, 그런 총체가 고장날 때 광기가 나타난다고 한다. 그러나 푸코는 그런 인식과는 완전히 다른 관점에서, “가둬져 있다는 제도성, 구체적인 장소와 과정, 갇혀 있음을 가능케 하는 담론, 이런 연쇄를 보고 있습니다. 거기에는 놀랄 만큼 기본적인, 인식의 태도의 변경이 있다. 그것은 이성 자체를 어레인지먼트로서 보는 듯한 문제의식으로 이어지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는 푸코는 철학을 거부하고, 철학의 배후로부터 남색질을 한것이네요. 그런 전환을 들뢰즈는 매우 존경했으며, 자신은 할 수 없다고 본 것이 아닐까. 들뢰즈는 완전히 다른 어레인지먼트에 대해서 사색했다. 푸코 자신은 어레인지먼트라는 말에 구애되어 사용하지는 않았습니다만.

 

── 『말과 사물의 출판은 들뢰즈에게 결정적이었던 게 아닐까요? 이 책이 없다면 들뢰즈 안에는 어레인지먼트라는 말, 그리고 그 개념 규정은 떠오르기조차도 못했던 게 아닐까 생각합니다.

 

宇野 : 말과 사물의 어레인지먼트이기도 하며, 그 밖에도 다양하게 있습니다. 광기의 역사, 임상의학의 탄생도 중요합니다.

 

── 거대한 원천이 푸코에 있고, 그것이 들뢰즈에게 영향을 계속 미쳤던 게 아니냐는 것이죠.

 

宇野 : “시도됐다고 하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공동 작업을 하고 있지 않더라도, 일종의 공동작업이 성립됐다고 말할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아마 이 들뢰즈푸코의 공동작업의 보이지 않는 통저기(通底器)를 파고들어간다는 과제가 있으니까요. ()

 

Posted by 상겔스 상겔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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