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래할 생명권력론을 위해


사상, 2013년 2

 

 

목차

사상의 말

히가키 타츠야(槍垣立哉)

(좌담회) 도래할 생명권력론을 위하여 (2/3)

히가키 타츠야(槍垣立哉)・카스가 나오키(春日直樹)이치노카와 야스타카(市野川容孝)

II. 생명권력론의 최전선

아감벤을 어떻게 생각할까

* 지금 아감벤의 이름이 나왔는데요, ‘생명권력론의 최전선을 생각할 경우에는, 특히 2000년대 이후 압도적인 존재감을 보여주는 아감벤의 논의를 무시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우선 아감벤 얘기부터 시작할까요?

上村忠男에 대한 이미지 검색결과

조르조 아감벤


히가키 : 아감벤 같은 존재가 이탈리아에서 나온 것은 솔직히 말해서 의외였습니다. 확실히 이탈리아에는 네그리 같은 사람이 있지만, [네그리는] 들뢰즈나 가타리의 동료였으며 프랑스의 현대사상이나 좌익사상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최근에도 잔니 바티모(1936년 생)약한 사고(1983)가 번역되었듯이, 우에무라 타다오(上村忠男) 씨나 오카다 아츠시(岡田溫司) 씨의 정력적인 소개도 있지만, 철학 영역에서 이탈리아가 이 정도로 주목을 받은 것은 처음인 듯 싶습니다.

上村忠男에 대한 이미지 검색결과                         photo

우에무라 타다오(@tadao_uemura)                    오카다 아츠시

이치노카와 : 왜 아감벤이 부상한 걸까요?

히가키 : 그 이유는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아우슈비츠의 남은 것(1998)이 잘 팔렸다는 건 있을 수 있는 일이지만, 그러나 이것이 과연 일본만의 현상일까 생각해보니, 파리의 서점에도 아감벤코너에 책이 산처럼 쌓여 있더군요. 시기적으로도 그렇게 일본과 동떨어져 있지는 않을 거예요.

카스가 : 난민 문제를 포함해 현지 조사를 하는 사람들도 자주 인용하고 있습니다.

히가키 : 그렇군요. 다만, 아감벤은 어떻게 해석할지가 어려워요. 아우슈비츠의 남은 것에서는 위르겐 하버마스(1929)나 한스 요나스(1903-93)에게 [공격과 비판의] 칼날을 향하고 있습니다. 후안무치한 일을 저지른 독일인 무리들은 아직도 이런 얘기를 하고 있고, 그것으로 문제가 끝났다고 생각하다니 놀랍네, 이런 식의 격렬한 독일 비판을 하고 있습니다. 이렇게까지 말할 수 있다는 것은 단순하게 말해서 매우 대단하다고 생각합니다.

  

  아감벤이 처음 주목받은 것은 호모 사케르아우슈비츠의 남은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푸코의 논의를 넘어서 새로운 것을 하겠다고 드는 사람인가 싶더니, 실상은 다른 것 같아요(웃음). 졸업논문에서는 시몬 베유(1909-43)를 다루고, 1960년대가 되면 하이데거의 강의에 참석하고 이탈리아어판 벤야민 전집』을 감수했습니다. 2000년대가 되면 로마세계의 종교론에 생명정치의 문제를 접목시키고, 기독교 세계로부터 뭔가 종횡무진으로 내달리는 작업을 하게 됐습니다. 이런 형태로 세계의 주요 장면에 나온 이탈리아인은 꽤 드물 겁니다. 특히 철학의 영역은 고대그리스, 중세를 별도로 치면, 영미계와 프랑스계와 독일계가 차지하고 있습니다. 대학의 강좌에 대한 인사를 보더라도 확연합니다만, 이것은 어쩔 수 없는 제국주의이죠. 그런 상황을 아감벤 같은 존재가 교란시킨다는 것은 매우 큽니다.

카스가 : 과연 그렇죠.

히가키 : 제 선생이었던 사카베 메구미(坂部恵) 씨가 말년에 일본철학회에서, 전지구화 등을 얘기하면서도 왜 일본의 철학과에서는 영미계와 프랑스계와 독일계라는 세 가지에서 선택을 하게 만들까, 이런 시시한 짓은 이제 그만두는 편이 좋다, 논문은 어느 나라 말로 써도 좋고, 베트남 철학이어도 좋다,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서두에서도 조금 언급했습니다만, 이것을 아감벤은 실현해버렸습니다. 이것은 향후 철학자의 모델이 되며, 아마 지금부터 앞으로는 중국인이나 한국인으로부터도 아감벤 같은 역할을 맡는 철학자가 나오겠죠.

   그리고 오늘의 화두와 관련해 중요한 것은, 아감벤이 생명정치와 종교를 강하게 연관시켰다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푸코는 사목권력(pouvoir pastoral)’이라는 개념을 제시했는데, 이것은 아주 큰 문제이고, 요컨대 유럽의 권력은 유대-기독교적 권력이라고 합니다. 이 개념은 푸코가 1978년에 두 번째 일본방문을 했을 때의 강연에서 다뤄지기도 했으며, 일본에서는 굉장히 유명하지만, 실제의 푸코는 그 후 거의 전개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을 아감벤은 진지하게 씨름하고 있고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이치노카와 : 제가 아감벤의 이름을 처음 들은 것은 다자키 히데아키(田崎英明) 씨한테서였습니다. ‘벌거벗은 생명개념도 다자키 히데아키 씨에게 배웠다고 기억합니다. 이후 번역으로 아우슈비츠의 남은 것, 목적 없는 수단, 호모 사케르를 읽었고, 서평도 두개 정도 썼습니다만, 아감벤은 사회학자가 사용하기는 매우 힘들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실제로 오오츠 마사키(大津真幸) 씨 등을 제외하면, 사회학에서 아감벤에 의거해서 뭔가를 말하는 사람은 매우 적다고 생각합니다. 푸코라면 근대가 문제였고, 그것에 걸터앉아 사회학에서 뭔가 말하는 것은 비교적 쉽습니다만, 앞에서도 얘기가 있었듯이, 아감벤은 로마에서 시작하기에, 결국은 19세기 이후에 생겨났을 뿐인 사회학적 상상력으로는 따라잡기 어려운 대목이 있습니다. 푸코의 경우도, 어떻게 생각되든 국민국가, 에티엔 발리바르(1942)가 말한 바의 국민적이고 사회적인 국가”(복지국가)를 전제하고 있습니다.

히가키 : 말씀하신 그대로입니다.

이치노카와 : 아감벤의 호모 사케르2002년에 독일어 번역본이 나왔고, 이후에도 다른 저작들이 속속들이 번역되고 있습니다만, [독일이] 다른 나라들과 조금 다를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독일에서는 아우슈비츠의 문제를 말하는 이상, 아감벤에게 귀를 기울이지 않을 수 없었다는 것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아감벤의 나치즘 해석 방식에는 저조차도 실증적 수준에서 이의를 제기하고 싶은 대목이 꽤 있으며, 조금 허풍을 떨고 있다는 느낌이 있습니다.

히가키 : 확실히 철학자 특유의 허풍을 떨고 논리가 성긴 대목이 있습니다(웃음).

이치노카와 : 그리고 칼 슈미트를 그렇게 원용하고 있는 것도, 독일에서는 좀처럼 쉽게 받아들이기 어려운 부분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버마스가 전형입니다만, 슈미트에 맞서서 생각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카스가 : 저는 최근 피지에서 일종의 노인 홈(home) 같은 특이한 시설에서 조사를 하게 되면서부터 벌거벗은 생명이라는 말이 편리해서 몇 번 사용한 적이 있습니다. 다만, 이것은 이치노카와 씨와 같은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지금은 한 가지로 사용할 수 없다고 할까, 인류학자에게는 지금 한 가지의 리얼리티가 없네요. 예쁜 허구를 만들고 있지만, 환기력이 없습니다.

   그렇지만 주권자를 권력에 외부는 없다고 선언하는 인간으로 제시한 것은 재미있다고 생각합니다. 푸코는 외부가 없다고 말했지만, 아감벤은 사이라고 함으로써 외부를 보여주고, 필연적으로 법치국가의 역설을 제시합니다. 인간들의 편에서 보면, 역설이 있습니다만, 신이 주권자라면 그런 역설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감벤의 외부에는 처음부터 인간이 들어 있으며, 인간화된 외부를 초월적인 것으로서 말합니다. 그런 사이밖에 있을 수 없다고 말함으로써, 이것은 이것으로 알기 쉽습니다만, 그것이 아감벤의 한계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히가키 : 굳이 아감벤을 추켜세운다면, 주권권력의 문제를 다시 거론한 것이 컸습니다. 푸코는 이제 주권권력은 없어진다는 식으로 읽을 수 있는 것을 말했지만, 실제로 주권국가는 있으며, 전구화되고 있다고 해서 정말로 없어질지 여부는 모릅니다. 그런 상황에서 주권권력을 다시 다룬 것은 역시 크다=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정말로 사이인 것이죠. 삶과의 역설로 주권권력을 내고, 동물과의 역설로 인간을 냅니다. 그 제기방식이 멋지지만, 실증연구로서는 어디까지 사용할 수 있는가라는 것이기도 합니다. 말하자면 문학적 비유에 불과한 부분이 확실히 있습니다. 그래서 아우슈비츠 이야기만 하더라도 나치즘에 대한 실증연구를 하고 있는 사람에게 의미가 있느냐 없느냐보다, 종교 얘기와 같은 것이라고 생각하거든요. 거기에는 종교 얘기로서의 리얼리티가 있고, 나치즘도 1000, 2000년도 지난 후에는 종교 얘기가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카스가 : 종교 얘기라고 하셨는데, 맞는 말일 수도 있습니다. 

히가키 : 그런 점은 아감벤에게 일관되게 보인다고 생각해요.

이치노카와 : 일본에서도 예를 들어 홈리스의 사람들이 처한 상황을 생각할 때 벌거벗은 생명이라는 말에는 강한 리얼리티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런 문제를, 예를 들어 사회학적으로, 구체적으로, 실증적으로 파고들어갈수록, ‘벌거벗은 생명이라고 말하는 것으로 끝날 수 없게 된다고 생각합니다.

카스가 : 인류학의 현장에서도, 모두에게서 버림받고 아무도 모르게 죽어가는 사람들이 있지만, 제대로 취급받는다면 벌거벗은 생명이란 있을 수 없다, 거기에는 확실히 의미가 있으며 비오스가 있다는 게 됩니다.

이치노카와 : 제 감각도 그것에 가깝습니다.

 

벌거벗은 생명과 벤야민

히가키 : 아감벤은 벌거벗은 생명(nuda vita)”이라는 개념을 발터 벤야민(1892-1940)폭력 비판을 위하여에 있는 단순한 생명(das blosse Leben)”이라는 표현에서 빌려 왔다죠?

이치노카와 : 그렇습니다.

히가키 : 그런데 벤야민은 단순한 생명에 관해 부정적으로 쓰고 있고, 그것을 중요한 개념으로 채용한 아감벤의 의도를 도무지 모르겠어요. 더 말하면, 이 저작에서 취급되고 있는 신적 폭력자체, 상식적으로 읽으면, 그것에 의해 벤야민이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지를 잘 모르겠고, 수수께끼로 가득 차 있어요. 적어도 일본에서 신적 폭력은 아나키스틱한 폭력으로 이해되고, 그렇기에 1960=70년대의 일본에서는 국가의 철폐 등을 향한 논의로서, 좌파적 맥락에서도 유행했습니다. 그런데 이치노카와 씨의 독해는 다르던데요?

이치노카와 : 다릅니다.

히가키 : 우선 폭력 비판을 위하여」가 로자 룩셈부르크(1871-1919) 추도문이라고 보시는군요.

이치노카와 : 그 점에 관해서는 저는 확신하고 있습니다. 벤야민은, 물론 로자 룩셈부크르만을 염두에 둔 것은 아니겠습니다만, 그가 게르숌 숄렘(1897-1982)에게 보낸 편지(19201229)에 비춰봐도, 로자 룩셈부르크가 이 때의 벤야민의 염두에 없었다는 것은 절대로 없어요.

히가키 : 또 하나는 신적 폭력에 대해서, 이치노카와 씨는 자크 데리다(1930-2004)를 비판하면서, 이는 의회제 민주주의를 구하는 폭력이라고 말씀하시네요.

이치노카와 : 굳이 말한다면 그렇습니다.

히가키 : 이것은 꽤나 아슬아슬한 독해 아닙니까?

이치노카와 : 그렇다고 생각합니다. 줄타기 곡예를 벌이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미 줄에서 떨어지고 있다는 비판도 있겠지만(웃음).

히가키 : 일반적으로 신적 폭력은 메시아적 폭력, 즉 세계를 모조리 망가뜨린다고 일컬어지는 폭력이라고 읽히고 있습니다. 그런데 신화적 폭력은 피 냄새를 풍기는 폭력이기는 하지만, 신적 폭력은 피 냄새가 나지 않는 폭력이라고 얘기됩니다. 그리고 단순한 생명은 서양근대에서 지난 수십 년 동안의 논의에 지나지 않지만, 신적 폭력은 모든 생명에 있어서의 것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벤야민은 조르주 소렐(1847-1922)을 높이 평가하는 것처럼 보이는데, 보통 소렐은 아나키즘으로 이해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치노카와 씨는 소렐과 달리, 벤야민이 말하는 신적 폭력이 의회제 민주주의를 잇는 폭력이라고 말합니다.

이치노카와 : 그렇습니다. 하지만 저는 로자 룩셈부르크도 비판한 유일-의회주의(-議会主義)”를 제창하는 것이 전혀 아닙니다. 그건 오해하지 않았으면 합니다. 그리고 저더러 말하라 한다면, 소렐이 폭력론(1908)에서 자신의 생디칼리즘을 분명히 신화(mythe)’라고 표현하고 있고, 다른 한편, 벤야민은 신화적(mysthisch)’이 아니라, 일부러 이것과 구별해서 신적(göttlich)’이라고 말하고 있기에, 그것을 무시하고 벤야민과 소렐의 생각을 그대로 같다고 풀이하는 것은 소박하다고 생각하고 이상하다고 여기는 것입니다.

히가키 : 다만 역사의 개념에 대해서를 읽으면, 우리가 살아온 역사 등은 지구의 역사로부터 보면 단 몇 초에 불과할 뿐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시간의 막대기가 균형을 이뤄 현재시(Jetztzeit)”가 되며, 모든 시간이 수평이 되는 곳에서, 모든 과거의 것이 일어나서 구제된다. 이것은 엄청나게 종교적이고 메시아적인 비전입니다. 이것과 신적 폭력이 이어지지 않을 수 없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이치노카와 : 그것은 인정합니다. 다만 주의해야 할 것은, 첫째로, 벤야민이 Zur Kritik der Gewalt(폭력 비판을 위하여)에서 논하는 ‘Gewalt’라는 독일어에는, 예를 들어 ‘Gewaltenteilung’삼권 분립을 의미하듯이, “정당성을 갖춘 권력이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벤야민은 ‘Gewalt’라는 말에 폭력뿐 아니라, ‘정당성을 갖춘 권력’, 라틴어로는 ‘potestas’라는 의미를 담아내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앞의 아렌트 얘기에서 히가키 씨는, 철학은 권력도 자연력도 똑같이 으로 이해했다고 말씀하셨지만, 그때의 potestas’가 아니라 ‘potentia’(독일어로 말하면 ‘Macht’), 즉 정당성 같은, 이렇게 말해도 좋다면, 인간적인 노모스의 옷을 입은 것을 모조리 벌거벗긴 힘이라고 생각합니다. 근대에 들어와 ‘potestas’ 대신 ‘potentia’가 전경화됐다고 저는 이해했습니다만, 아무튼 벤야민의 주제는 ‘Macht’(‘potentia’)가 아니라 ‘Gewalt’ (‘potestas’)입니다. 이로부터 두 번째로, 푸코가 말하는 통치성(gouvernementalitaté)’과 결부시켜 말한다면, ‘Gewalt’의 원형 동사인 ‘walten’통치하다라는 의미라는 것. 셋째로, 벤야민은 이 논고에서 ‘Gewalt’의 폐절을 역설한다고 해석하기는 어렵다는 것. 아무리 생각해도, 여기서 벤야민은 ‘göttliche Gewalt’(‘신적 폭력혹은 통치’)를 긍정하고 있으며, 이 논고는 ‘waltende Gewalt’(통치하는 통치)라는, 어떤 의미에서 동어반복적인 것의 희구로 끝을 맺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 논고의 마지막 단락에는 ‘Entsetzung des Rechts samt den Gewalten’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Entsetzung’은 지금까지 폐절이나 비정립’, ‘탈정립등으로 번역되었습니다만, 어떻게 하는 게 좋을까요? ‘Entsetzung’이 법을 정립하는(rechtssetzend) 폭력과의 대비에서 나온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그러나 ‘entsetzen’이라는 독일어는 놀라게 하다’, ‘깜짝 놀라게 하다라는 뜻도 있습니다만, 솔직하게 생각하면, 갇혀 있거나 파묻혀 있거나 해서 옴짝달싹 못하고 있는 뭔가를 거기에서 빼내거나 풀어내기도 하는 것입니다. 실제로 군사용어에서는 적에게 포위된 아군을 구출할 때 ‘entsetzen’이라고 말합니다. 따라서 문제의 말은 “Gewalt를 포함한 Recht(법적 권리)의 구출이라는 의미로도 될 수 있습니다.

히가키 : 다른 곳으로 낸다는 것이죠.

이치노카와 : 그렇습니다. 아감벤의 해석에는 부정신학적인 대목이 있는데, ‘Recht’(법적 권리)‘Gerechtigkeit’(정의), 희망도 갖지 않는 듯이 논의된다고 저는 생각합니다만, 벤야민의 생각은 더 밝다고나 할까, 긍정적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벤야민이 이 논문의 주석 10에서 언급하는 쿠르트 힐러(1885-1972)와 대비시키면 잘 알 수 있습니다. 쿠르트 힐러는 이 주석에서 언급되는 ()-카인(1919)이라는 소론에서, ‘행복(Glück)’이나 정의(Gerechtigkeit)’보다 고귀한 것이 있다, 그것은 (Dasein)자체다, 이렇게 말합니다. ‘행복이나 정의의 실현이라는 이름 아래서 생존[실존]을 부정하는 폭력이나 테러리즘을 허용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 힐러의 주장입니다만, 이것은 뒤집어보면 행복이나 정의에 관한 허무주의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벤야민은 힐러의 이런 생각을 전면적으로 비판하기 위해 이 논고를 썼습니다. ‘단순한 생명이라는 말도, 그런 맥락에서 나온 겁니다.

   또 하나, 이것은 아감벤이 빠뜨린 채 읽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만, 폭력 비판을 위하여에는 단순한(bloss)’이라는 단어가 사실은 두 번, 상이한 형태로 나옵니다. 하나는 힐러의 생각을 비판하는 형태로 나오는 단순한 생명(das blosse Leben)’으로, 아감벤이 주목한 것은 이것입니다. 그러나 그 몇 줄 뒤에 정의를 갖춘 인간단순히 아직 존재하지 않았을 뿐이라는 것(das blosse Nochnichtsein)’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정의보다도 단순한 생명이 고귀한 거야, 정의란 무엇인가를 첫 번째라고 생각할 필요는 없는 거야, 라는 힐러의 비관주의에 대해, 벤야민은 그런 것이 아니라고, 정의는 와야 할 것으로서 확실하게 있다고, 정의는 단순히 아직 존재하지 않았을 뿐이다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게다가 벤야민은 이 두 번째의 ‘bloss’절대로(unbedingt)’라는 단어를 덧붙이고 있습니다. 거칠게 말하면, 벤야민은 정의가 단순히 아직 존재하지 않을 뿐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절대로필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히가키 : ‘bloss’가 두 번 나온다는 거네요. 정말로.

이치노카와 : 아감벤은 그 중 하나에만 주목하고 있을 뿐입니다. 벤야민은 이 논고를 19211월에 탈고했습니다. 2010년대에 살고 있는 우리가 1917년의 러시아혁명을 보면, 그것은 1989년 이후에 붕괴하는 것의 시작, 끝의 시작이라고 아무래도 보이지만, 벤야민뿐 아니라 1921년에 살았던 사람들에게는 시작의 시작으로 보였던 것 같네요. 위대한 가능성을 감춘 무엇인가가 지금 막 시작됐다고나 할까. 그래서 마음 깊은 곳에서, 겁을 먹은 사람들이 아주 많았습니다만. 그런 감각 속에서 벤야민은 ‘Gerechtigkeit’(정의)‘Gewalt’(통치)라는 말을 사용하고 있는 것이며, ‘정의라는 이념을 벤야민은 믿었다고 생각합니다.

히가키 : 그때 정의를 믿었다는 것은 ‘waltende Gewalt’가 지시하는 것은 도래할 공산주의였다는 것입니까?

이치노카와 : 그렇다고 생각합니다. 좌절된 독일혁명의 저편에 있어서 단순히 아직 존재하지 않을 뿐인 공산주의. 이와 똑같은 것을 2010년대의 우리가 일본에서 생각해도 좋다고 봅니다. 현존한 사회주의와 결별하면서 말입니다.

카스가 : 저는 오늘을 위해 벤야민을 다시 읽어보고 꽤 흥분했어요. 아까 말씀드렸듯이, 아감벤은 주권자를 거론하더라도, 결국은 인간화한 것입니다만, 벤야민은 인간을 다시 한 번, 신 쪽으로 끌고 가는 느낌이 있습니다. 근대란 인간이 초월적인 관점을 갖는 것이며, 이에 대해 푸코는 시점(視點)을 분산시켰습니다. 그러나 벤야민에 따르면, 초월자의 관점은 인간에게는 다다르지 않는 것이며, 폭력 비판을 위하여는 인간에게 더 신성함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지금까지도 손에 넣지 못했던 비근대라고도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치노카와 : 맞아요. 신적 폭력은 인간의 눈에는 감춰져 있다고 벤야민은 말하더군요.

카스가 : 인간적 허무주의. 인간으로서 읽기 때문에, 더욱 허무주의가 된다는 하이퍼-세계.

이치노카와 : 제 해석도 아직 너무 인간적인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만, 폭력 비판을 위하여를 쓸 무렵, 벤야민은 이미 에른스트 블로흐(1885-1977)와 친했습니다. 블로흐의 유토피아의 정신(1918)도 출판된 직후에 읽었고, 당시의 편지를 보더라도, 벤야민이 이 책에 상당히 촉발을 받았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벤야민의 생각은 소렐의 그것과 동일시할 수 없듯이, 블로흐의 그것과도 동일시할 수는 없습니다만, ‘유토피아’, 그리고 블로흐의 나중의 주제인 희망같은 것과 벤야민의 폭력 비판을 위하여를 연결해서 읽을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더 말한다면, 블로흐를 통해서 저는 벤야민과 루디 두츠케(Alfred Willi Rudi Dutschke, 1940-79)를 연결해서 생각하고 있습니다. 두츠케의 연장선상에 있는 오늘날의 독일의 녹색당을 포함해서 말입니다. 이 노선(line)은 일본에서는 생겨나지 않았습니다. 적어도 힘을 가질 수 없었고, 일본이 지금과 같은 상황이 되는 한 요인도 거기에 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아무튼 단순히 아직 존재하지 않을 뿐인 것에 대한 강한 신념이, 적어도 폭력 비판을 위하여의 벤야민에게는 있습니다. 그것이 아감벤에게서는 사라집니다. 아마 이 두 번째의 ‘bloss’를 빠뜨리고 읽기 때문입니다.

히가키 : 그것은 알고 있습니다.

 

비오스조에

히가키 : 아감벤이라고 하면, 또 하나, ‘비오스조에의 구별이 잘 알려져 있습니다. 다만 최근의 뇌신경계적 자기라든가, DNA 수준에서의 사체에 있어서의 생명의 파악 같은 얘기를 보면, 비오스로서의 나의 이 신체로는 다뤄질 수 없습니다. 나의 면역계, 나의 뇌신경계의 움직임, 나의 세포 속의 DNA라는 것을 조작하는 것이 가능해졌을 때, ‘조에라는 말이 딱 들어맞는 곳이 있는 것 같습니다.

이치노카와 : 확실히, 개체로서의 비오스라는 리얼리티는 약해지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카스가 : 조에의 일부이기 때문에.

히가키 : 그래요. 다만, 난민이라든가, 양로원 등에서 아무도 찾아오지 않고 단순히 살아 있는 사람에 관한 장면에서 얘기되는 조에와, 나의 뇌신경계를 나는 어찌할 수가 없으나, 그것이 무엇인가를 산출하고 있다는 장면에서 얘기되는 조에, 이렇게 둘 다가 있으며, 논의가 분분합니다.

카스가 : 후자의 논의는 중요하다고 생각하지만, 수상쩍은 얘기라고나 할까, SF적인 이야기도 많잖아요. 극히 일부만을 다루고 페티쉬해버립니다. 예를 들어, 심해에 있는 혐기성 미생물 등은 유전자의 구조가 점점 바뀌고 있는데요, 그것만을 갖고 생명을 말해버립니다.

히가키 : 철학에서도 한때, 뇌신경 윤리가 유행했지만, 이런 뇌파가 생기면 이런 이미지가 나타난다는 식의 단순한 것을 사용해 프라이버시에 관해 논의하는 정도일 뿐, 그 다음부터는 더는 아무것도 나오지 않습니다. 그러면, 기술이 진전되어 정교하고 치밀해졌을 때 어떻게 될지는 지금 단계에서는 아직 뭐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카스가 : 다만 정말로 급진적인 것은 나오지 않았네요. 두 개의 머리를 지닌 하나의 신체라든가, 두 개의 신체를 지닌 하나의 머리 같은 것은. 기술적으로 가능했다고 해도, 그런 것은 절대로 만들지 않죠. 비교적 상상하기 쉬운, 조금 괴이한 테크놀로지만이 나옵니다.

이치노카와 : 개체로서의 비오스의 윤곽을 무너뜨리는 얘기입니다만, 게놈연구 등은 오히려 사적 소유의 논리로 진행되고 있지요. 지적 재산권 등을 말하고 있습니다만. 분명히 생명이 조에로서 보이는 장면이 늘고 있지만, 경제와 사회의 논리로부터 보면, 이전보다 더 사적 소유의 틀이 강해지고 있는 듯 보입니다.

히가키 : 거꾸로 강해지고 있군요. 이것은 나의 유전자이다, 라고 말이죠.

이치노카와 : 혹은 내가 발견한 유전자라는 식이죠. 지적 재산권이라는 의미에서의 사적 소유의 논리가 강화되고 있습니다.

카스가 : 마릴린 스트라썬(Marilyn Strathern, 1941~)도 쓰고 있습니다만, 간염 항체를 만들 때, 그 소유권은 최초로 세포를 제공한 사람에게도 있는 것이 아니냐라는 논의가 이뤄집니다.

Marilyn Strathern에 대한 이미지 검색결과

마릴린 스트라썬

이치노카와 : 개체로서의 생명은 끝나더라도, 사적 소유의 논리는 계속 살아 있습니다. 계속 살아 있을 뿐만 아니라 강해지고 있잖아요.

히가키 : 정말 그렇군요. 근대를 넘어서는 것이 나타난다고 말하기도 하지만, 그것을 파악하는 것은 근대의 논리 밖에는 없습니다.

카스가 : 그때 생명권력은 강력한 것으로서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치노카와 : 결국 자본제를 어떻게 생각하느냐가 생명권력론에 있어서 큰 문제라고 생각해요. 그 점을 분명히 전면화하는 것은 네그리로, 거기서는 아감벤과 크게 다르다고 생각합니다.

카스가 : 생명권력론의 장점은 인간이 생물학적인 생명의 주인이라는 것과 사회적인 존재라는 것, 이 두 가지를 함께 파악하는 데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 특집에 기고한 논문에도 썼지만, 우리의 사유는 자연적인 것과 사회적인 것, 혹은 법칙과 가치라는 두 가지의 것을 조합시킴으로써 작동합니다. 따라서 지금의 생명권력론에서 제가 못마땅하게 생각하는 것은, 생명권력론을 어떻게 사용하는가라는 논의는 많은데, 왜 이렇게 간단하게 생명권력이라고 말할 수 있는가라는 논의가 없다는 점입니다. 이미 우리 내부에 그런 사유의 이분화 기계가 제대로 들어 있는데도, 그것을 묻겠다고 하지 않습니다. 그것을 묻고자 하는 것이 서두에서 이름이 나온 비베이로스 데 카스트로입니다. 특히 중요한 것은 그가 반자연주의를 존재론으로서 가져왔다는 곳에서, 인식론으로서 가질 수 있다면 단순히 다문화주의의 하나가 되어버리지만, 존재론으로서 가지고 옴으로써 우리의 사유양식 자체를 다시 묻는 것을 시도하고 있습니다.

 

사회학의 최전선

사회학에서의 생명권력론의 최전선이라고 하면, 어떤 것이 되고 있나요?

 

이치노카와 : 저한테 사회학을 대표해서 말할 자격이 있는 건 아닌데, 개인적으로 생각하는 것은, 한 가지는 생명권력이라는 개념을 모방한 역사연구는 아닐 겁니다. 이것은 실제로 늘고 있고, 앞으로도 늘어날 겁니다. 실제로 의료나 복지에 관한 역사사회학적 연구는 늘고 있고, 젊은 사람들이 저보다 훨씬 훌륭하게 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그런 역사연구는 생명권력이라든가 생명정치라고는 말할 필요가 없네요. 제 자신이, 요네모토 씨 등과 우생학과 인간사회 : 생명과학의 세기는 어디로 향하는가(優生学人間社会──生命科学世紀はどこへかうのか)(講談社現代新書, 2000)를 썼을 때에는, ‘생명권력이나 생명정치라는 말을 전혀 쓰지 않았습니다. 그런 개념을 쓰지 않고도 역사는 쓸 수 있습니다. 오히려 이런 연구들에 의해 묘사되는 사실 자체가 생명권력생명정치라는 개념의 외연을 자동적으로 점차 메워준다고 생각합니다. 뒤집어 말하면, ‘생명권력이나 생명정치라는 개념은 내포가 공허하고, 그 공허한 그릇이 실증적 역사연구에 의해 메워진다고 생각합니다.

優生学と人間社会에 대한 이미지 검색결과

   다른 하나는 요네모토 쇼우헤이 씨 식의 바이오폴리틱스연구로, 저는 이것에서 조금 멀어졌지만, 이런 연구는 향후에도 더더욱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푸코도 감안한 가유카와 준지(粥川準二) 씨의 바이오화하는 사회 : ‘핵시대의 생명과 신체(バイオする社会──「核時代生命身体)(青土社, 2012) 같은 작업입니다. 참고로 독일에서 바이오폴리틱스(Biopolotik)’라는 말을 제목으로 내걸고 출판되고 있는 책이나 논문은, 물론 푸코나 아감벤을 논한 것도 절반 정도가 있습니다만, 나머지 절반은 요네모토 씨 식의 바이오폴리틱스’, 즉 생명과학의 문제들에 관해 어떤 정치적 결정을 할 것인지에 관한 것입니다. 구체적으로는, 착상 전 진단, 배아연구, ES세포연구 등을 인정할 것이냐 말 것이냐, 인정한다면 어떤 조건에서 인정할 것이냐 등의 얘기입니다. 2001년에 독일에서는 주로 생명과학에 관한 국민윤리평의회(Nationaler Ethikrat)라는 것이 설립되고, 2008년에 독일윤리평의회(Deutscher Ethikrat)로 개칭됐는데, 이런 식으로 바이오폴리틱스가 이른바 제도화되기도 했습니다. 다만 독일에서는 특히 생명의 시작에 관한 것에 얘기가 집중되고 있네요. 일본에서 문제가 되는 뇌사를 비롯한 생명의 끝에 관한 것은 그다지 열띠게 논의되고 있지 않습니다.

バイオ化する社会에 대한 이미지 검색결과

히가키 : 그건 기독교의 맥락과도 관계되어 있습니까?

이치노카와 : 그렇다고 생각합니다. 생명의 끝에 관한 얘기보다도, 예를 들어 배아(체외수정란)를 실험에 사용해도 좋은가 같은 것이 아주 진지하게 논의되고 있습니다.

히가키 : 위화감이 드는군요.

이치노카와 : 일본의 우리라면 그렇게까지 진지해지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할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유전자를 조작하는 게 좋은가라는 문제를 포함해서, 이것들에 관한 논의에는 기독교적인 것이 상당히 농밀하게 들어가 있습니다. 특히 독일은 프랑스 같은 라이시테(정교분리)의 원리로는 움직이지 않으며, 예를 들어 기독교민주동맹이라고 당당히 이름을 내걸고 있기에, 바이오폴리틱스를 포함해 정치 일반에 종교(기독교)가 강하게 들어 있습니다. 독일에서는 생명윤리의 문제들에 관해서, 나치라는 과거가 있기에, 타국보다도 신중하고 엄격한 대응이 이뤄진다고 자주 듣곤 합니다. 확실히 그런 부분도 있지만, 나치라는 지나가지 않는 과거는 사실상 표면적인 것이며, 그 이면에는 기독교 도덕이 무의식에 가까운 형태로 강하게 작동하고 있다고 보는 게 좋은 부분도 있습니다.

히가키 : 반대로 일본을 보면, “자연으로 돌아간다”, “흙으로 돌아간다는 발상이 있는데, 어째서 뇌사의 얘기가 되면, 그렇게까지 죽음의 기준이 문제가 되는가?

이치노카와 : 그것에 대해서는 나도 아직 확실한 것을 말할 수 없습니다만, “일본()에는 정신을 신체보다 우월하게 하는 서양근대의 데카르트적 심신이원론과는 다른 독자적인 신체관생명관이 있었다고 운운하는, 한때 일본에서 유행했던 비교문화론에는 별 근거가 없다고 장담할 수 있습니다. 실제로 柳田園男장례제도 연혁 사료(葬制沿革史料)(1934) 등에서 써서 남긴 넋을 부름[魂呼ばい]”, 즉 죽기 직전의 사람의 이름을 큰소리로 부르기도 하면서, 그 사람의 혼이 육체로부터 떠나는 것을 불러 세운다는 풍습은 심신이원론 없이는 성립하지 않습니다. 다른 한편, 서양 근대의학은 정신을 신체보다 우월하게 여기는 것 등은 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아까 나온 비샤의 텍스트를 읽으면, 곧바로 알 수 있습니다. 비샤는 정신에 상당하는 동물적 생명보다도 신체에 상당하는 유기적 생명을 중시하며, 후자가 소멸할 때까지는 의학적으로 봐서 사람이 죽었다고 말해서는 안 된다고 말합니다(신체/생명참조). 서양 근대의학이 데카르트적 이원론에 의거하고 있다면, 비샤는 정반대의 것을 말해야 할 테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게다가 비샤는 분명히 오늘날의 뇌사와는 다릅니다만, “뇌의 죽음이라는 개념을 이미 제시하고 있고, “뇌의 죽음을 갖고서 사람의 죽음으로 하는 것은 너무 이른다고도 말하는 겁니다.

  이로부터 또 하나, 일본에 대해 말할 수 있는 것은, 가족이라는 신체, 가족이라는 경계의 강함입니다. ‘身内[친척]이라는 일본어가 상징적입니다만, 자신의 身内[친척]의 장기를 身内[친척]도 아무것도 아닌 생면부지의 사람에게 제공하는 것에 대한 강한 저항감이 있으며, 그것이 뇌사상태의 사람으로부터의 장기적출에 제동을 걸고 있다는 측면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다른 한편, 많은 사람들은 身内[친척]이 제공자가 되는 생체장기이식, 특히 생체간이식은 일본에서 구미국가들보다 훨씬 많이 실시되고 있습니다. 게다가 인구 비율로 보면, 생체간이식은 일본보다도 한국에서 많이 실시되고 있습니다. 일본이나 한국에서는 생체간이식에 대한 저항감이 약하지만, 히포크라테스에게서 유래한 해를 끼치지 말라(non nocere)”를 의료윤리의 기반으로 삼고 있는 구미에서는, 아주 건강한 사람의 신체에 메스를 집어넣고, 게다가 간의 일부를 잘라내는 것에 의사들이 강한 저항감을 갖고 있습니다. 장기기증자에 대해서는 해를 입힌다는 것 이외의 것이 없으니까. 일본에서는 가족이라는 경계의 내부에서 장기가 이동하는 생체간이식에 대해 저항감이 약하고, 가족이라는 경계를 넘어서 장기가 이동하는 뇌사상태의 사람으로부터의 장기이식에 대해서는 거꾸로 강하다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던 것입니다만, 나의 이 가설은, 2009년의 장기이식법개정 때에 도입된 친족 우선 제공으로 부분적으로 뒷받침됐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규정이 있는 것은, 현재의 일본과 일본의 것과는 다르지만 한국 정도입니다.

  푸코의 텍스트에 적혀 있는 우아한 철학적 논의는 아니지만, 이런 것도 생명권력이나 생명정치의 한 측면으로서, 적어도 사회학적으로는 생각하면 좋다고, 아니 생각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다테이와 신야(立岩真也) 씨가 그동안 주도해 왔던 생존학이나, 다테이와 씨나 제가 거의 10년 정도 관계해온 장애학(disability Studies)”을 언급하고 싶습니다. 장애학에서는 “disability”라는 말을 가능성 박탈이라는 의미로 사용합니다. , 장애를 가진 사람이 그 물리적신체적 상태를 이유로 다양한 가능성을 빼앗기고 있는 사회의 구조나 짜임새를 문제 삼으면서, 장애학은 그 개혁을 요구합니다. 푸코가 말하는 죽음 속으로의 폐기라는 것은 이 가능성 박탈의 극한 형태라고 말해도 좋다. 그러나 이런 가능성 박탈의 구조를 바꿔나가는 것은 삶의 가능성을 증대시키고 증식시킨다는 것이기도 하며, 그래서 생명권력의 한복판에 있다는 것이기도 합니다. “권력이 있는 곳에 저항이 있다”, “저항은 권력에 대해 외부에 위치하는 것이 결코 아니다라고 푸코는 말했습니다만(지식의 의지), 그것은 장애학에 대해서도 말할 수 있습니다. 복지국가나 제가 말한 바의 사회적인 것은 확실히 생명권력의 산물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것들을 안이하게 파괴할 수는 없으며, 해서는 안 됩니다.

   이와 관련시켜 더 말하면, 푸코가 강의 생명정치의 탄생에서 다룬 ()자유주의는 생명권력이나 생명정치와 어떤 관계에 있는가? 왜 푸코는 생명정치를 자유주의라는 맥락에서 말하려고 했는가? 자유주의나 신자유주의는 생명권력의 한복판에서 저항이라는 주름을 다양하게 산출해내는 것인가? 아니면 저항을 빼뜨리고 생명권력이나 생명정치를 더욱 매끈하게 확장하고 비대화시켜가는 것인가? 푸코가 정말로 무엇을 생각했는가, 내게는 아직 잘 이해할 수 없습니다.

 

인류학의 최전선

이치노카와 : 인류학에서 생명권력론의 최전선이라고 하면, 어떤 것이 되나요?

카스가 : 하나는 모든 것에 행위자(agency)를 배분해간다는 사고방식입니다. 이것은 라투르에게도 통하며, 비베이로스 데 카스트로도 스트라썬도 그렇습니다만, 들뢰즈에 겹쳐지는 논의라고 생각합니다. 스트라썬은 영국 경험주의에서 출발해, 동일성이라는 것이 성립되지 않은 곳에서부터 논의를 시작한다. 프랑스의 사상에서는 전혀 언급되지 않는다. 그녀는 우선 경험주의자로부터의 반론에 대해 자신 나름대로 방어벽을 치면서, 안쪽으로 생성하는 간극에 주목하고 있습니다. 자신이 보고 있는 눈으로부터의 간극이, 자신이 알려고 하는 대상과 반향하며, “lateral reflection”(수평적 반향)을 초래하며 타자로 연결되어 간다. 이것은 매우 들뢰즈적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관점에서 생명정치생명권력을 생각해보면, 이치노카와 씨가 말한 게놈의 사적 소유의 얘기에 있었던 것처럼, 사람과 물건을 나눠서 소유자로서의 주체를 만들어낸다고 하는 방식이 얼마나 특수한지를 잘 알게 됩니다. 증여론이 좋은 예인데요, 인격이라는 것은 물건에 나타나며, 얼마든지 분할되며, 멜라네시아에서는 누군가가 갖고 있는 것을 모두 먹으면 인격이 사라진다. 그런 인간의 존재방식에 주목하여 분석의 수법을 발전시키는 것은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만, 현재까지의 과학기술론의 일부를 빼면 그다지 하고 있지 않습니다.

   둘째, 아나키스트 인류학을 위한 단장(アナーキスト人類学のための断章)(2004)을 쓴 데이비드 그레이버(1961~)처럼, 증여론이 점점 짓눌러지고, 근대에 대한 전근대적인 것을 이항대립적으로 나오게 되는 논의가 있습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푸코가 감시와 처벌에서 제시한 전근대적인 것이 여러 곳에서 보입니다. 예를 들어 피지에서는 선교사가 들어왔을 때 부활에 대해 얘기하는데요, 피지인들에게는 부활이라는 관념이 없다는 것을 압니다. 아까 얘기가 나온 아폴로시 나와이도 그렇습니다만, 불사성이랄까, 아무리 저주받아도 죽지 않는다는 것을 강조한다. 그러면 죽음이라는 개념이 없느냐 하면, 그것은 있으며, 그러나 여기저기에 떨어져 있는 것이라고 생각되고 있다. 그것은 생기가 사라졌다고 함으로써, 병을 포함해, 쓸 수 있는 것이 못쓰게 되는 사태를 똑같이 생기가 사라졌다고 말한다. 그런 생명의 시각을 감안하면, 생명권력의 외부에는 실로 다양한 것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셋째, 비베이로스 데 카스트로의 논의가 있습니다. 이것은 관점이라는 것에 주목하는 것으로, 재규어와 인간이 다른 것은, 관점이 다르기 때문이 아니라 신체가 다르기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발상입니다. 그리하여 유럽적 보편주의나 일원적 자연주의에 대해, 다문화주의를 내세우는 것이 아니라 다자연주의를 제기하고 있습니다.

이치노카와 : 다문화주의가 하나의 자연, 많은 문화라는 문제 기제라고 한다면, 다자연주의는 하나의 문화, 많은 자연이라는 말인가요?

카스가 : 문화라기보다는 인간이네요. 모든 인간. 관점은 모두 마찬가지이고, 인간도 재규어도 마찬가지라고 말한다.

이치노카와 : 다만, 그것도 하나의 문화 아닌가라고 말할 수 있다는 기분이 듭니다만.

카스가 : 그런 반론은 시종일관 당하고 있습니다.

이치노카와 : 아까 카스가 씨는 다자연주의를 인식론으로서가 아니라 존재론으로서 갖고 온 곳에 비베이로스 데 카스트로의 중요성이 있다고 말씀하셨는데, 인식론이 아니라 존재론으로서, 라는 것은 단순한 문화로 이야기를 회수하지 않는다는 대목이 중요한 거네요.

카스가 : 거기서 큰 것은 역시 사이언스입니다. 사이언스의 힘은 리얼리티가 대단하다. 실제로, 생명과학은 하드 사이언스화하고 있으며, 그 힘에는 대단한 것이 있습니다. 그런데 푸코에 기대를 걸고 있는 인문계 사람은 상대주의적인 이해를 하기 쉽죠?

히가키 : 생명에 대해서요.

카스가 : 인문계 사람이 생명이라고 말할 경우, 19세기에 말하는 것과 지금 말하는 것에는 의미가 완전히 다른데, 자연과학계 사람들은 동일한 의미에서 계속 사용하고 있다. 그것을 인문계 사람이 어떻게 읽는가를 생각한다는 것이 일어나는 것인데요, 최종적으로는 사이언스의 힘이 이긴다.

히가키 : 젠더론 등에서 구축주의가 너무 강한 것 아닌가요? 그래도 소박하게 생각하면, 퀴어적인 것은 자연이 산출하고 있는 거죠? 그것을 남녀로 나눠서 고정화하는 것이 문화이기 때문에, 자연이라는 것은 형편없는 것으로 정해져 있다. 그런데 자연은 일의적으로 정하고 있지만, 문화는 다양한 독해를 한다는 예전의 사회학적 말투가 있었잖아요? 니콜라스 로스도 쓰고 있는데요, 인종 문제도 마찬가지죠. 어떤 인종인지는 문화적으로 결정되는 것이며 자연본질주의는 안 된다고 말합니다만, 자연을 유전자 수준에서 보면, 인종은 뒤범벅되어 있게 마련입니다. 그렇게 하면 인종문제에 대한 관점도 바뀌는 것을 기대할 수 있다. 그것이 다자연주의의 한 가지 의미라고 생각합니다.

이치노카와 : 지금 얘기에 촉발되어 말하자면, 사회학적 사고의 대명사 같은 구축주의로는 전혀 불충분하다고 제 자신은 생각합니다. 구축주의가 말하는 것은 옳지만, 지나치게 옳아서 무의미한 곳이 있다. 특히 실천적으로는.

카스가 : 처음부터 답이 나오고 말았다.

이치노카와 : “문화는 자의적으로 구축된다고 말하지만, 그 자의적인 문화를 막상 바꾸기 위해서는, 카스가 씨가 말씀하신 사이언스에 의해 보편적인 것, 불변적인 것을 열고, 들이대지 않으면 안 되는 것도 있습니다. 그 일례로, 남성동성애를 형사처벌의 대상으로 한 독일제국형법(1871)175조를 둘러싼 투쟁을 들 수 있습니다. 175조의 철폐를 목표로 한 게이 해방의 주도자의 한 사람은, 자신도 게이였던 성과학자 마그누스 히르쉬펠트(Magnus Hirschfeld, 1868-1935), 그들은 과학적-인도적 위원회(Wissenschaftlich-humanitäres Komitee)”라는 조직을 1897년에 꾸리고, 175조의 철폐운동을 전개했다. 여기에는 실은 벤야민을 얘기한 대목에서 언급한 쿠르트 힐러도 가담하고 있습니다. 힐러는 조금 다른 이유로 이 운동에 가담했습니다만, 히르쉬펠트[허쉬펠드]의 입론은 이러했습니다. 동성애자는 옛날에도 지금에도 일정한 비율로 반드시 생긴다. 그것은 자연의 섭리이며, 동성애에는 선천적인 기초가 있다. 자연(퓌시스)이 산출하는 그런 존재를 법률(노모스)에 의해 부정하고 처벌하고 박해하는 것이 과연 인도적인 것인가라고. 베를린에 있을 때, 히르쉬펠트[허쉬펠드]와 그의 성과학연구소의 기념비를 독일인 지인이 알려줘서 보러 갔는데요, 거기에는 처음에 “per scientiam ad justitiam”(과학에 의해 정의로)라는 히르쉬펠트[허쉬펠드]의 신조가 라틴어로 새겨져 있었다.

   문화를 바꾸기 위해 히르쉬펠트[허쉬펠드] 등은 자연, 그리고 과학으로 향해야 했다. 175조가 자연에 대치되는 문화, 존재에 대치되는 당위, 즉 인간의 구축물인 것은, 이 조문의 철폐를 완강하게 인정하려 들지 않았던 사람들에게는 당연한 얘기입니다. 그런 것을 지적한 곳에서 아무것도 바뀌지 않는다. 문화라는 것은 마음먹기에 따라 바꿀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실제로 바꾸기 위해 히르쉬펠트[허쉬펠드] 등은 자연에 의거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푸코를 인용하면서 과거의 성과학은 본질주의적이기 때문에 천박하고, 구축주의에 서 있는 우리는 깨어 있는 사람들이다라는 얘기가 자주 이뤄집니다. 성과학을 무조건 긍정할 생각은 내게도 없지만, 적어도 성과학에 관한 구축주의자의 얘기에 대해서는 그래?”, “정말로 그럴까?”, “천박한 것은 당신들 아닐까?”라는 생각을 금치 못하겠다. 자연의 논리에 의해 문화가 고쳐 쓰여진[변조된] 후에야, 구축주의는 그러니까 문화는 가변적이다라고 말할지도 모르지만, 구축주의 그 자체는 문화를 실제로 바꾸는 힘을 갖고 있지 않다. 구축주의가 말하는 바는 옳지만, 그것은 추수[뒤쫓기]의 논리일 뿐이다.

   아까의 장애학도 구축주의적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중요한 것은 거기에서도 자연과 신체입니다. 예를 들어 눈이 보이지 않는다는 자연적 신체를 기반으로 삼아, 사회와 문화를 어떻게 바꿀 것인가, 만들어나갈 것인가가 문제이며, 장애라는 이미지가 사회적으로 구축된다는 얘기가 아니냐고 나는 생각합니다.

히가키 : 눈이 보이지 않는 사람은 청취 능력이 3배에서 4배라는 얘기가 있잖아요.

이치노카와 : 사람마다 다르다고 생각합니다만.

히가키 : 뇌과학이 진전되고 그런 것이 밝혀지게 되면, 장애학에서의 해방으로도 연결된다. 

이치노카와 : 확실히 그런 부분은 있다. 인지뇌과학의 사카이 구니요시(酒井邦嘉) 씨가 씨름하고 있는 수화의 뇌연구도(언어의 뇌과학 : 뇌는 어떻게 말을 산출하는가(言語脳科学──はどのようにことばをみだすか)(中公新書, 2002), 귀머거리 문화에서는 환영하는 사람이 많으며, 그것이 조금씩 밝히고 있는 수화의 뇌에서의 처리는 기본적으로 음성언어와 다를 바 없다라는 지식은, 구화주의口話主義 속에서 항상 덜떨어진 것으로 간주된 수화를 다른 것과 대비해 아무런 손색도 없는 언어로서 재위치시키는 하나의 근거를 주고 있다.

酒井邦嘉에 대한 이미지 검색결과言語の脳科学에 대한 이미지 검색결과

   과거의 일본의 장애인운동은 기술에 대해 강하게 염려한 적이 있으며, 전동 휠체어도 비장애인이 간호의 손길을 떼기 위한 것이라며 비판했다. 그 비판에는 지금도 귀를 기울여야 할 것이 있다고 생각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기술에 의해 새로운 신체와 문화가 열린다는 모멘트를 부정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올해[2012] 런던 올림픽의 광고는 휠체어나 의족으로 경기하는 선수들의 모습을 생생하게 보여줬는데, 장애인의 신체가 비장애인에 가까워지고 있다기보다는, 휠체어나 의족에 의해 새로운 다른 신체의 가능성이 열리고 있는 것처럼 내게는 느껴졌습니다. 문자가 전자 정보화됨으로써 시각 장애인이 얻거나 발신하거나 하는 정보량도 현격하게 높아졌습니다. 자연이나 과학, 기술에 의거함으로써 문화가 바뀌거나 새롭게 만들어지기도 한다는 것은, 다자연주의와의 관련에서 나 자신, 잊지 않고 싶습니다.

카스가 : 제 세미나에는 발달장애 학생이 있는데요, 다양한 능력을 계산하면, 보통은 복수의 능력이 평균적으로 되고 있는데, 그 학생의 경우는 분명한 편향[쏠림]이 있다. 그것이 장애라고 불리고 있지만, 이것은 재능 아닌가 싶네요.

이치노카와 : 확실히 그렇네요. 다만 그 재능도 측정에 의해 가시화된다는 부분이 있겠네요. 그런 가시화도 사이언스의 힘이라고 생각합니다. 좋은 것만 있는 것은 결코 아니겠지만


(제2부 끝)

Posted by 상겔스 상겔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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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상 201412

10년 후의 자크 데리다

 

1. 사상의 말

타카하시 테츠야(高橋哲哉)

2. <좌담회> 10년 후의 자크 데리다 [1]  [2]  [3]  [4]

우카이 사토시(鵜飼哲)・니시야마 유지(西山雄二)

고쿠분 코이지로(國分功一郎)・미야자키 유스케(崎裕助)

 

1

3. 미국독립선언

자크 데리다

   * 생략 : 자크 데리다, <법의 힘>(진태원 옮김, 민음사)에 수록되어 있음. 


4. 국가창설의 퍼포머티브와 서명의 정치 : 자크 데리다의 미국독립선언

미야자키 유스케(宮崎裕助)


5. 입헌 민주주의의 위기와 예외상태 : 데리다, 아감벤, 벤야민, 슈미트와 유령의 회귀

사토 요시유키(佐藤嘉幸)


6. 세계의 종언 후에 : 말년의 자크 데리다의 묵시록적 어조에 관해

니시야마 유지(酉山雄二)


7. 목적론에서의 종말론의 균열

카메이 다이스케(亀井大輔)

* * *


8. 신조어, 새로운 ~주의, 포스트~주의, 기생 및 그 밖의 작은 지진현상에 관한 몇 개의 성명과 자명의 이치

자크 데리다

 

 

2

9. 베리테에서 바리테 : 라캉-데리다 논쟁을 재고하다

마츠모토 타쿠야(松本卓也)


10 언어·표상·: 인지과학 대 탈구축

케어리 울프


11. 시간의 원물질성 : 탈구축, 진화, 사변적 유물론

Martin Hägglund


12. 그라마톨로지와 가소성可塑性

카트린 말라부

 

 

3

13. 테크놀로지와 도래할 텍스트

후지모토 카즈이사(藤本一勇)


14. 더욱 잉여의 사랑 : 자크 데리다에 의한 에코포이에시스와 표박의 나르시시즘

リピット水田尭


15. <인터뷰> 자크 데리다 영화와 그 유령들

앙투안 드 베크, 티에리 주스

 

 

* * *

16. 철학의 재묘再描 : 데리다/낭시, 사라지는 선()을 묘사하며

카키나미 류스케(柿並良佑)


17. <토의> 자크 데리다, 필립 라쿠 라바르트, 장 뤽 낭시의 대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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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좌담회> 10년 후의 자크 데리다 (1)


우카이 사토시(鵜飼哲)니시야마 유지(西山雄二)

고쿠분 고이치로(國分功一郎)미야자키 유스케(宮崎裕助)

 

* 이 글은 자크 데리다 사망 10주년을 기념하여 열린 좌담회의 기록으로, 일본의 사상201412월호에 수록된 것입니다. 원래 각주는 없었으나 가독성을 위해 문헌 등은 각주로 옮겼습니다

 

 

들어가며

미야자키 유스케(宮崎裕助, 이하 미야자키’) : 올해는 자크 데리다(1930~2004)의 사후 10년이 됩니다. 돌아가신 때를 떠올려 보면, 바로 프랑스 현대사상의 마지막 거성이 졌구나라는 느낌이 있었습니다. 미셸 푸코(1926~84), 질 들뢰즈(1925~95), 에마뉘엘 레비나스(1906~95), -프랑수아 리오타르(1924~98) 같은 사람들이 죽었고, 마침내 데리다마저? 라고 충격을 받은 기억이 납니다.

   데리다는 죽기 직전까지도 맹렬한 속도와 밀도로 집필 활동과 발언을 계속 했습니다. 거기서 제시된 주제를 보는 것만으로도, [/우리] 자신이 살고 있는 시대의 본질적 물음을 데리다와 공유하고 있다는 긴장감과 기쁨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만큼 데리다의 사망은 사유의 주춧돌을 잃어버렸다고도 느껴지는 사건이었습니다. 데리다의 죽음은 현대사상 자체의 종언을 고한 것일지도 모릅니다.

   데리다가 사망한 후의 10년을 돌이켜보면, 세계사적 격동이 있었습니다. 이라크 전쟁에 대해 대가를 치르는 형태로 세계금융위기가 생긴 결과, 미국에서는 부시 시대의 단독패권주의를 대신해 버락 오바마가 대통령에 취임하고, 북아프리카와 중동에서는 아랍의 봄이라 불리는 일련의 혁명이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일본에서는 3년 전[2011]에 동일본 대지진이 있었고, 그 여파로 원자력 발전소 사고의 영향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이런 격동의 배경에 페이스북이나 트위터를 비롯한 미디어 상황의 대변화가 있었음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다른 한편, 사상의 장면(scene)을 보면, 프랑스현대사상이라는 한 시대를 풍미한 사상의 영향력이 약해지고, 영미권의 공리주의와 자유주의, 프래그머티즘의 영향이 커졌으며, 원래 사상이라는 것이 지닌 소구력이 확산되는 듯 보입니다.

   물론 이것은 이유 없는 변화가 아닙니다. 그만큼 데리다가 남긴 유산을 어떻게 계승하고 [이를] 학분 분야를 넘어서 전개할 것인가는, 자크 데리다라는 거대한 존재를 아는 사람에게 질문되고 있는 과제입니다. 이상과 같은 문제의식에 서서, 오늘은 고쿠분 고이치로 씨, 니시야마 유우지 씨, 그리고 우카이 사토시 씨와 함께 10년 후의 자크 데리다를 생각하고 싶습니다.

 


1. 사후 10년을 돌이켜보기

데리다의 텍스트에 관한 상황

미야자키 : 맨 처음으로, 최근 10년의 데리다에 관한 텍스트의 상황을 개괄하고 싶습니다. 우선 일본어로 데리다 수용에 관해 말하면, 정직하게 말해서 유산상속은 그다지 잘 되고 있지 않다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푸코와 들뢰즈는 번역이 거의 정비됐으나, 이에 비해 데리다는 아직 번역되지 않은 주요 저서가 있으며, 젊은 세대의 연구자도 결코 많지 않습니다. 데리다의 작업이 지닌 놀라운 범위와 다양함에 걸맞은 응답=책임을 맡고 있다고는 말할 수 없으며, 이번의 특집이 조금이라도 그 보충이 되기를 바랍니다.

   21세기에 들어서면서부터 이뤄진 작업에 한정해 데리다의 주요 저작을 꼽아보면, 드 만에 관한 장대한 논의를 포함한 파피에 머신(Papier machine)(Galilée, 2001), 노동론이 되기도 하는 응축된 대학론인 조건 없는 대학(L’université sans condition)(Galilée, 2001), 정신분석가 엘리자베트 루디네스코와의 대담 도래한 세계를 위해(De quoi demain ... Dialogue)(Fayard Galiléé, 2001), 911 동시다발 테러의 여파 속에서 편찬된 위르겐 하버마스와 지오반나 보라도리와의 공저 테러 시대의 철학의 사명 [각주:1], 추도문집인 그럴 때마다 단 하나, 세계의 종언(Chaque fois unique, la fin du monde)(Galilée, 2003), 가장 완성된 민주주의론인 불량배들(Voyous)(Galilée, 2003) 등이 있습니다. 데리다의 최후의 발언 중 하나인 인터뷰 사는 것을 배우다, 마침내에는 나는 나 자신과 전쟁상태에 있다는 인상적인 문장이 있는데요, 마지막 4, 5년은 정말 치열하게 많은 작업을 했습니다. 그때까지 했던 즉흥적 대담과 인터뷰, 영화출연 등의 작업도 받아들이고, 정말로 분골쇄신으로 활동했다고 생각합니다.

   그 결과, 숨진 뒤에도 마치 데리다의 유령이 계속 쓰고 있는 것 마냥 저작들이 줄줄이 출판되고 있습니다. 그 중에서도 중요한 것은 세미나의 간행입니다. 말년의 2001년부터 03년에 행한 강의 짐승과 주권자가 총 2권으로 출판된 것을 시작으로[각주:2] 1999년부터 2001년의 사형론 강의[각주:3] 그리고 단숨에 초기로 돌아가 1964년부터 65년에 고등사범학교(Ecole Normale Supérieure : ENS)에서 행한 하이데거에 관한 강의 [각주:4]가 현재까지 간행되어 있습니다. 1960년대부터 죽음의 직전까지, 40년 이상에 미치는 강의록의 출판이 계획되고 있고, 실현되면 엄청난 양이 될 것입니다.


  


   


  


 

니시야마 유지(西山雄二, 이하 니시야마’) : 전체 43, 총계 104천 장으로 예정되어 있습니다.

 

미야자키 : 터무니없이 많은 양입니다. 그렇지 않아도 생전에 출판된 저작이 얇은 것까지 포함해 7, 80권은 있으니까, 게다가 대량의 강의록까지 보태면, 도대체 누가 다 읽을 수 있겠나 생각하니 몸 둘 바를 모르겠어요(웃음).

 

니시야마 : 사후 출판된 책 중에서도 세미나는 매우 중요해요. 포인트는 세 가지 있습니다. 우선 첫째 이것은 편집자 서문에서도 말해진 바가 있습니다만 세미나에서는 데리다가 생전에 출판한 막대한 텍스트가 형태를 이뤄가는 과정, 교육을 통해 사유가 세련되는 과정을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은 데리다에 의한 교육의 실천인 동시에, 사유의 작업 현장 자체입니다. 사후 출판이기 때문에, 편집자가 최저한도로 체크했을 뿐 저자 자신의 퇴고는 거의 이뤄지지 않으며, 실수도 모두 그대로 되어 있는 만큼, 더욱 그런 성격을 띠고 있습니다.

   둘째 [말투, 어조]”을 들고 싶습니다. 강의록은 여름방학에 썼다고 알려져 있습니다만, 거기에는 분명히 청중을 앞에 둔 톤을 느낄 수 있습니다. “소리 내어 읽다[낭독하다]”, “논평하다”, “판서”, “번역하다, 자기 자신에 대한 지시도 기입되어 있고, 출판된 저작과는 다른 독특한 톤이 있습니다. 데리다는 톤이라는 것을 중요한 사상가이기 때문에, 그것을 생생하게 느끼는 것은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셋째로, 세미나의 출판에 의해 초기, 중기, 후기 등의 단계론에 대해 재독해를 할 수밖에 없게 됐다고 생각합니다. 그 동안 1960년대까지의 초기에는 철학이나 문학을 중심으로 한 연구가 있고, 70년대부터 중기에는 실험적 시도가 전개되며, 그리고 80년대 중반에 시작되는 후기에는 정치학적, 종교학적, 윤리학적인 전회가 일어났다고 말해집니다. 그러나 강의록을 보면, 다양한 아이디어가 [연구자들이 나눈] 기존의 시기 구분과 관계없이 발견됩니다. 그러므로 기존의 단계론으로는 파악할 수 없는 아이디어의 연속적인 산종에 의한 사상 형성의 확대가 보이게 됩니다. 다만, 이것은 총 43권이 출판되고 나서야 할 수 있는 얘기이기 때문에, 이런 전모가 분명해지려면 50년 이상이 걸릴 겁니다(웃음).

 

고쿠분 고이치로(國分功一郎, 이하 고쿠분’) : [그때가 되면] 오늘의 멤버는 이제 아무도 살고 있지 않겠죠(웃음).

 

미야자키 : 사후 출판에서 또 하나 주목해야 할 것은 동물론입니다. L’animal que donc je suis(Galilée, 2006)이 그것으로, “나는 동물이다로도, “내가 동물을 쫓고 있다고도 번역되는 다의적 제목입니다. [각주:5] 동시대적으로 보면, 푸코에서 조르조 아감벤(1942년 생)에 이르는 생명정치론이나, 영미권을 중심으로 한 동물의 권리론, 동물윤리학 등과 길항하는 형태로, 데리다의 동물론이 각광을 받기 시작합니다. 10년을 생각할 때, 동물론을 어떻게 파악할 것인가가 불가결한 토픽이라고 생각합니다.

  

   다음으로 데리다를 둘러싼 움직임에 눈을 돌리면, 브누와 피터스가 쓴 결정판이라고 할 수 있는 빼어난 평전 [각주:6]이 간행되며, 영어권을 중심으로 잡지의 특집이나 논집이 여럿 출판되는 등 다양한 반응과 반향이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 상황입니다. 금년[2014] 5월 말에는 2년마다 열리는 국제학회 오늘의 데리다(Derrida Today)4회 대회가 뉴욕에서 개최됩니다만, 전환점이 되는 해인지라 대규모로 열릴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일본에서도 우카이 씨, 니시야마 씨, 그리고 제가 중개인이 되어 지난해 탈구축연구회를 발족시키고, 금년에도 심포지엄 등의 기획을 생각 중입니다(또 이런 학회나 심포지엄의 기록에 관해서는 탈구축연구회의 홈페이지[각주:7]를 참조해 주세요).

 

니시야마 : 평전에 대해서는 또 한 권, 에드워드 베어링의 청년 데리다와 프랑스 철학[각주:8]도 보태고 싶습니다. 데리다의 문서고가 일반에 공개된 것을 받아들여 쓰인 노작으로, 루이 르 그랑 학교에서의 학생시절부터 고등사범학교에서의 교원시대 초기에 이르는 시기로 거슬러 올라가, 청년 데리다가 어떻게 자기[] 형성했는가를 텍스트의 변천과 지식사회의 분석으로부터 그려내고 있습니다. 또한 평전 등에서는 알제리 시대의 데리다의 경험과 추억으로부터, 알제리의 유대인인 자키[각주:9]가 어떻게 철학자 데리다가 됐는지가 적혀 있습니다. 실제로 말년의 데리다는 무스타파 셀리프와 알제리에 관한 대화를 했습니다, [각주:10] 사후인 2006년에는 알제리국립도서관에서 심포지엄도 열렸습니다[각주:11] 지중해 남북 양안 주변이나 연안은 탈구축적인 물음 자체입니다 이 데리다의 중요한 사상적 광경임을 재확인시키고 있습니다. 게다가 데리다를 대상으로 한 사전(事典)이 두 권 나왔으며[각주:12] 작년은 키워드북도 나왔습니다[각주:13]

   「오늘의 데리다를 말씀하셨는데, 프랑스에서도 200510월에 고등사범학교에서 데리다, 철학의 전통(Derrida, la tradition de la philosophie)라는 심포지엄이 열렸습니다. 이것은 프랑스의 철학자가 데리다를 독해한 것으로, 데리다의 철학을 탈구축’, ‘차연’, ‘에크리튀르[기록]를 축으로 하여 철학의 전통과 대치시키는 시도였습니다. 다른 한편, 오늘의 데리다는 프랑스인이 거의 관련이 없습니다. 지난번에는 캘리포니아대학교 어바인교에서 개최됐습니다만, 어떤 프랑스인을 보고 뭘 연구하십니까?”라고 물어봤더니 나보코프” [각주:14]라고 말해서 아주 놀랐습니다. 이렇게 보면, 데리다의 사유가 계승되는 흐름이나 인맥이 영미계와 프랑스계로 나눠지는 조짐이 느껴집니다.

Derrida, la tradition de la philosophie

 

미야자키 : 적어도 사람[연구자]의 흐름에 관해서는 분단되어 있네요.

 

세대의 문제

니시야마 : 오늘은 사후 10년을 계기로 한 좌담회입니다만, 데리다 본인이 누군가의 죽음에 임해서 뭔가를 특권적으로 말하는 것은 터무니없다고 생각했던 사람이죠. 미야자키 씨가 말씀하신 추도문집[그럴 때마다 단 하나, 세계의 종언[각주:15]에도 분명히 있지만, 이것은 미국에서, 게다가 데리다 자신이 아니라 두 명의 편집자의 책임 아래서 나온 것입니다. 데리다 속에는 나는 존재한다, 고로 나는 죽어간다고 하는 목소리와 현상(원저 1967)의 테제에 의한 협박이 항상 있었습니다. 항상 이미 내가 죽어가고 있는 듯한 상태의 존재론(ontologie), 유령적인 유재론(幽在論, hantologie) [각주:16]입니다. 이것을 데리다는, 하이데거의 나의 죽음’, 레비나스의 타자의 죽음’, 그리고 프로이트의 죽음충동이라는 세 종류의 근본적 경험으로부터 불가능한 것이라는 형태로 생각했습니다. 이것은 데리다만의 물음입니다만, “사후라는 표현과 계기는 이미 이런 사상적 과제를 생각하게 합니다.

  

 

고쿠분 : 오늘의 멤버 중에서는 [제가] 데리다에 관해 가장 초보자라고 생각하기에, 그런 입장에서 말씀 드리면, 저는 옛날의 데리다를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귀찮은 것을 조금 어렵게 말하고 말장난을 하는 사람이라는 이미지로, 재미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2000년에 프랑스로 유학을 가서, 사회과학고등연구원(Ecole des hautes études en sciences sociales: EHSS)에서 했던 데리다의 강의에 참석해보니, 제가 생각했던 사람과는 전혀 달랐어요. 하이데거라든가 칼 슈미트 등에 점점 파고들어가면서, 아주 호쾌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항상 청중을 웃기고 있었습니다.

   나중에 돌이켜보면, 제가 처음에 갖고 있던 데리다의 이미지는 단순히 일부의 데리다 독자들이 만들어낸 것이었다고 생각했습니다. 애잔하고 신비적이며 소중하게 다루지 않으면 깨질 것 같은 이미지더군요. 생각하면, 데리다뿐 아니라 프랑스 현대사상은, 특히 1960년대에는 신비적인 베일이 드리워져 있었습니다. 인상에 남은 것은 현대사상의 특집 미번역 북가이드 : 현대사상 22(19864월호)입니다.

 

미야자키 : 그랬군요.

 

고쿠분 : 마치 외래품의 이미지입니다. 아직 아무도 가져가지 않은 훌륭한 보물이 이역만리 땅에 있다는 이미지 말입니다. 그런 이미지 때문에 거꾸로 사상에 끌려들어가는 사람도 있겠지만, 저는 오히려 반발했습니다. 그래서 젊은 때에 데리다 본인을 만났던 것은 매우 행운이었습니다.

   그리고 한 가지 놀란 것은 데리다가 논의를 수립하는 데 있어서 실제로 참으로 친절한 사람이었다는 것입니다. 말장난을 하면서 까다로운 말을 하잖아요. 매우 어려워서 간단하게 답을 낼 수 없는 문제를, 어떻게든 알기 쉽게 하려고 고심하면서 자세하게 논의를 해부하여 얘기를 하고 있습니다. 말장난으로 보이는 것은, 거기에 접근하기 위한 하나의 수단이었습니다. “이렇게 친절한 사람이란 말인가!”라고 감격했으며, 데리다의 강의를 들은 것은 제 자신의 사고방식이나 말하기 방식이나 쓰기 방식을 다시 생각할 기회가 되기도 했습니다. 일본으로 돌아와서 고바야시 야스오(小林康夫) 선생에게 이런 발표에서 자네는 데리다로부터 아무것도 배운 게 없군이라고 말씀하시며 혼내셨던 것도 있고(웃음), 제 자신은 데리다를 기준으로 하여 단련되었다고까지 생각합니다.

   제가 데리다의 강의를 청강했던 것은 2000년부터 2004년까지, 즉 그의 마지막 4년 동안입니다. 사형 문제를 다루고 있었습니다. 지금 말했듯이, 아주 자극적이었습니다만, 한 가지 깨닫게 된 바가 있는데, 그것은 데리다 속에서 언어라는 문제가 뒤로 물려졌다는 것입니다. 물론 그렇게 되지 않을 수 없는 상황 등이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데리다라는 것은 뭐니 해도 언어의 인간이라고 생각합니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언어역사가 데리다의 사상 속에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에크리튀르라는 것은 물론 언어와 관련된 것이지만, 원래 역사의 담지자이기도 하잖아요. 데리다는 에크리튀르라는 토픽을 통해 언어를, 따라서 역사를 계속 물었습니다.

   최근에야 [일본어] 번역이 나온 철학의 여백(원저 1972)이라는 중기의 작업 등을 읽으면, 이를 잘 알 수 있습니다. 다른 한편, 이로부터 현 상태를 다시 보면, 데리다 자신의 강의에서 언어의 문제가 후퇴하는 것처럼, 오늘날의 인문 지식이 어딘가 언어에 대한 관심을 잃고 있다는 느낌이 들어요. 1960년대부터 70년대는 누구나 소쉬르를 읽었습니다. 구조주의에 대한 과거의 열광적인 관심도 그것과 떼어놓을 수 없습니다. 저는 1990년대 중반에 학생시절을 보냈는데, 그 무렵에도 아직 언어에 대한 관심이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것이 현저하게 후퇴하고 있습니다.

   분명히 말하면, 최근 10년 동안에, 적어도 일본에서는 그다지 데리다의 이름을 듣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언어역사에 대한 관심의 저하와 떼어놓을 수 없는 게 아닐까요. 오늘날, 일본에서 함부로 역사, 역사 라고 말합니다만, 거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말할 것도 없이 자신들의 욕망을 만족시켜주는 이야기에 불과합니다. , ‘언어역사라는 인간이 살아가는 데 있어서의 절대적인 조건이 지금 제대로 따져 물어지지 않고 있습니다. 데리다가 한 것의 의의를 알기 어려워지고 있는 것은 그 때문이 아닐까 생각하며, 바로 그렇기에 저는 데리다에게서 언어의 문제, 따라서 역사의 문제를 다시금 강조하고 싶네요.

 

우카이 사토시(鵜飼哲, 이하 우카이’) : 고쿠분 씨가 말씀하신 것에 저도 찬성으로, 데리다는 처음부터 역사의 물음에 천착했습니다. 후설에 관해서도 생성의 문제를 다루고 있으며, 앞서 소개된 1964~65년의 강의도 하이데거 : 존재의 물음과 역사라는 제목입니다. ‘역사의 종언이라는 주제는 냉전의 종언 후에 나온 것이 아니라, 알렉상드르 코제브의 영향도 있어서, 당시 이미 한창 논의되었습니다. 데리다에게서는 다른 역사의 사고를 어떻게 열 것이냐가 첫 번째에 놓인 물음으로, 그라마톨로지에 관해(원저는 1969)도 그 문제의식 속에서 가다듬어졌다고 말할 수 있죠.

  

 

미야자키 : 확실히 생명정치나 영미계의 문제의식에서 보면, 언어의 문제를 중심으로 파악한 데리다는 텍스트주의적 혹은 문헌[]주의적으로 보입니다. 최근 카바이예스를 중심으로 프랑스 인식론(epistemologie)의 빼어난 연구를 하고 있는 곤도 가즈노리(近藤和敬) 씨가 데리다를 필두로 하는 프랑스 현대사상에는 명작을 감상하는 듯한 태도가 근본에 있다고 쓰고 있고(문제-인식론과 물음-존재론 : 들뢰즈에서 메이야수, 데란다로),[각주:17] 자신보다 젊은 세대에게는 텍스트를 읽는다라는 것이 그렇게 비칠까라고 생각했습니다. 텍스트를 읽는 것의 다층성이 간과되고, 국어시간에 독서 감상문을 쓸 때와 같은 어휘로 회피되고 있습니다. 10년 동안 보는 방식이 완전히 변해버렸음을 실감하고 있습니다.

 

니시야마 : 고쿠분 씨가 말씀하신 세대 경험은 매우 중요하고, 키워드는 신비성언어의 놀이[게임]’가 아닐까요. 신비성에 관해서는, 들뢰즈의 철학 등의 긍정성과의 대비도 있고, 부정신학이라는 문제가 유포되어 있습니다. 우리 세대에게는 부정신학이라고 하면, 사유의 몽매주의적이지 않은 어색함을 이끄는 것으로, 그것을 회피하고 긍정적이고 내재적인 사유를 열어야 한다고 생각해 버립니다. 다만, 데리다 자신, 부정신학에는 아주 주의 깊게, 부정신학이라고 불리는 것의 근원성과 복수성을 고찰했던 것도 있습니다(이름을 구하다 : 부정신학에 관한 복수의 목소리).[각주:18] 언어의 놀이에 관해서는 말의 다의성이나 조어가 많이 사용되는 데리다의 텍스트가 일본어에 다양한 부하를 거는 형태로 번역되고 있으며, 그 복잡함에 대한 피로가 있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실물의 데리다를 보고 몽매함이 깨졌다는 고쿠분 씨의 증언은 사실 납득이 가는 것으로, 제 자신도 마찬가지의 경험을 했습니다. 데리다의 세미나는 독특하고, 결코 언어의 놀이에 의한 텍스트주의라고는 형언할 수 없습니다. 이런 간행된 세미나의 일본어 번역본에서는, 교육자 데리다 특유의 명쾌하고 강력한 목소리를 들려줄 작정입니다. 우리는 살아생전의 데리다에게 교육을 받은 마지막 세대로서, 살아생전의 데리다를 모르고 [데리다의] 텍스트에서만 출발하는 다음 세대에게 바통을 넘겨줘야 합니다. 이 때문에라도 이 신비성언어의 놀이라는 문제를 자기 나름대로 해결하는 작업을 연구교육번역의 면에서 전개하고 싶습니다.

 

데리다와의 기억

우카이 : 저는 데리다와 개인적으로 꽤 오랫동안 교류가 있어서, 우선 말년의 일을 얘기하고 싶습니다. 1980년대의 일본에서 온 유학생 가운데 데리다와 직접 관련을 맺은 그룹이 있었습니다. 저도 그 중 한 명으로, 데리다의 집에 초청을 받기도 했습니다. 사망하기 두 달 전, 20048월에도 그의 집에서 만났으며, 이후에도 두 차례 전화로 얘기를 나눴습니다. 데리다가 사망한 것은 109일이었습니다만, 설마 그렇게 일찍이 [사망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항암제 치료제로 식욕은 떨어져 있었지만, 검사 수치는 변함이 없다고 들었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8월 말부터 9월 초에는 리우데자네이루의 콜로퀴를 위해 마지막 강연을 했습니다. 주위 사람들은 만류했지만, 그는 이 콜로퀴는 오래 전부터 계획된 것이기 때문에 취소하고 싶지 않다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생각나는데요, 데리다는 취소를 하지 않는 사람이죠. 그것은 병을 얻고서도 변하지 않았습니다. 리우데자네이루 전에도 종교에 대한 심포지엄 때문에 질 아니자르(Gil Anidjar),[각주:19] 하셈 포다(Hashem Foda)와 함께 미국의 서해안으로 갔습니다. 안타깝게도 실현되지 않은 것은 원래 블랙팬더로, 경찰 살해 혐의로 미국에서 사형판결을 받은 현재에는 종신형으로 감형됐습니다만 흑인 저널리스트 무미아 아부-자말(Mumia Abu-Jamal)을 방문하는 계획입니다. 데리다가 국제적인 사형폐지 운동에 거의 활동가라고 말해도 좋을 자세로 관여했다는 것은 일본에서는 거의 알려지지 않아서 한 마디 해두고 싶습니다.

   여기서 단숨에 거슬러 올라가 1970년대에 데리다를 선택한다는 것이, 어디서부터 어떤 동기로 생겨났는가를 얘기하고 싶습니다. 요즘은 오직 들뢰즈만 유행한다고들 하지만, 제 감각으로 말하면 항상 들뢰즈가 주류였습니다. 특히 제가 있는 교토대학교에서는 학년 위에도 아래에도 우수하고 개성적인 들뢰지안이 몇 명이나 있었습니다. “왜 너는 데리다인 거야라는 얘기를 듣는 환경에 처음부터 몸담고 있었기에, 데리다가 인기가 없다는 것에는 별다른 이상한 것도 없고, 그의 작업은 항상 일종의 떠맡게 된 주변부성을 느끼게 합니다. 실제로 데리다의 텍스트는 [궁합이 맞는] 사람을 고른다는 게 있기에, 제 자신은 이른바 유행과는 무관한 곳에서 부합한다고 느낍니다.

   1930년대 생인 데리다는 사르트르 이후의 사상가 가운데서는 이른바 막내입니다. 한편, 1940년대 생의 후속 인물들과는 전쟁 경험도 포함해 큰 세대적 단절이 있습니다. 데리다에게는 모종의 브라더 콤플렉스가 있으며, 형인 르네 데리다와는 사이가 좋지 않았습니다. 팔레스타인 문제에서도 대립했으며, 르네는 유대계의 잡지에 친이스라엘적인 투고를 하기도 했습니다. 피터스의 평전에는 어린 시절부터 형이 정치적으로 우파의 입장에 서 있어서 동생과 사사건건 부딪쳤다고 적혀 있습니다. 어떤 영화작품에서 형은, “우리 집에는 별로 책도 없었는데 동생의 정신이 어디에서 왔는지 전혀 모르겠다고 말했습니다[각주:20] 가정환경이나 상징자본이라는 면에서 보면, 데리다라는 존재는 돌연변이라는 거죠. 미야자키 씨가 프랑스 현대사상 최후의 거성이라는 표현을 사용했습니다만, 확실히 데리다는 동생적 존재로, 가장 나중에 외래자로서 작업을 시작한 사람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아까 고쿠분 씨가 언어의 문제를 지적하셨습니다. 1950년대부터 60년대의 구조주의를 중심으로 한 전개입니다. 저는 포스트구조주의라는 표현을 별로 좋아하지 않고, 베어링의 평전에서는 데리다의 초기 발상이 오히려 포스트실존주의적이라고 말합니다. 즉흥적인 말씀처럼 느껴지는 바도 있습니다만, 실제로 자료를 본 뒤에 선택된 이 말에는 일정한 의미가 있다고 생각하며, 이것은 고쿠분 씨나 미야자키 씨가 거론하신 데리다에게 있어서의 키에르케고르적인 계기를 어떻게 생각하는가라는 문제와도 관여하고 있습니다[각주:21] 푸코론인 코기토와 광기의 역사(에크리튀르와 차이, 원저 1967년에 수록)에도 제사[銘句]로서 키에르케고르가 인용되고 있습니다.

   언어의 문제는 당연히 번역의 문제와 관련되어 있습니다. 제게 그 커다란 계기는 1983년에 데리다가 처음으로 일본을 방문했을 때 한 강연 중 하나가 바벨의 탑(타자의 언어 : 데리다의 일본 강연[각주:22]이었습니다. 당시 대학원생이던 우리 세대에게는 이 논문이 아주 중요했습니다. 언어론 일반에서 번역론으로의 이동(shift)은 언어의 복수성을 처음부터 그 안에 담고 있는 사유를 요청합니다. 그것은 단일하다고 간주되는 언어의 내적복수성의 물음에도 열려 있습니다.

   나중에 데리다의 텍스트를 번역하는 작업을 하게 됐는데, 번역의 사상가의 텍스트를 번역하고 있다는 긴장감은 [지금도] 항상 [갖고] 있습니다. 제 자신의 작업으로서 데리다를 참조하면서 번역론을 축으로 벤야민을 수용했던 것도 같은 무렵입니다. 하나의 텍스트는 복수의 언어로 적혀 있습니다. 그것은 데리다가 드 만에 대한 추도문 속에 부여한 탈구축의 정의가 하나 이상의 말(plus d’une langue)”라는 것이었다는 것으로도 연결됩니다[각주:23] 현대의 문화상황에서는 한 언어로 써져 있는 것을 한 언어로 번역할 수 있다고 간주하는 투명성에 대한 지향이 회귀하고 있음을 깨닫습니다. 데리다만이 아니라 크레올(Créole, 크리올) 문학처럼, 원래 복수의 언어로 써 있는 것을 일본어로 번역한다는 근본적인 아포리아를 안고 있는 작업이 경원시되고 있습니다. 그런 경향이 데리다를 읽기 어렵게 느끼게 하며, 번역론이라는 회전(curve)을 거친 후의 언어론을 성가시게 느껴지게 하는 것 아니냐고 생각합니다. 



(계속)

  1. [옮긴이] 지오반나 보라도리, 『테러 시대의 철학 : 하버마스, 데리다와의 대화』, 손월성, 김은주, 김준성 옮김, 문학과지성사, 2004. [본문으로]
  2. Séminaire : La bête e le souverain, 2. vol. édition établie par Michel Lisse, Marie-Louise Mallet et Cinette Michard, Galilée, 2008-10. [본문으로]
  3. Séminaire : La peine de mort, édition établie par Geoffrey Bennington, Marc Crépon et Thomas Dutoit, tome I (1999-2000), Galilée, 2012. [본문으로]
  4. Heidegger : la question de l’Êtat et l’Histoire. Cours de l’ENS-Un (1964-1965), édition établie par Thomas Dutoit avec la collaboration de Marguerite Derrida, Galilée, 2013. [본문으로]
  5. [옮긴이] 자크 데리다, 「동물, 그러니까 나인 동물(계속)」, 『문화과학』, 76호, 299-378쪽. 뒤의 ‘동물론’ 관련 부분을 보면 알 수 있듯이, 판본에 차이가 있다. [본문으로]
  6. Benoît Peeters, Derrida, Flammarion, 2010. [본문으로]
  7. http://www.comp.tmu.ac.jp/decon [본문으로]
  8. Edward Baring, The Young Derrida and French Philosophy, 1945-1568,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11. [본문으로]
  9. [옮긴이] 자크가 아니라 자키로 불렸다. [본문으로]
  10. Jacques Derrida et Mustapha Chérif, Islam et l’Occcident : Rencontre avec Jacques Derrida, Odile Jacob, 2006. [본문으로]
  11. Derrida à Alger : un regard sur le monde, sous la direction de Mustapha Chérif, Actes Sud, 2008. [본문으로]
  12. Niall Lucy, A Derrida Dictionary, Blackwell, 2004 ; Simon Morgan Wortham, The Derrida Dictionary, Continuum, 2010. [본문으로]
  13. Maria-Daniella Dick and Julian Wolfreys, The Derrida Wordbook, Edinburgh University Press, 2013. [본문으로]
  14. [옮긴이] 블라디미르 나보코프(Vladimir Vladimirovich Nabokov), 러시아 제국에서 태어난 미국인 소설가. [본문으로]
  15. Jacques Derrida, Chaque fois unique, la fin du monde, Textes présentés par Pascale-Anne Brault et Michael Nass, Galilée, 2003. [본문으로]
  16. [옮긴이] 일본에서는 빙재론 유재론 등으로 불리고 '유령론'으로 불린 적은 거의 없는 것 같다. 한국에서처럼 유령론이라고 하게 되면 '존재'와 관련된 어감이 사라지는 문제도 있다. 개인적으로는 여전히 '유령론'이라고 쓰고 원어를 병기하는 것을 선호한다. [본문으로]
  17. 近藤和敬, 「問題i認識論と問い存在論──ドゥルーズからメイヤスー、デランダヘ)」, 『現代思想』, 2014년 1월호. [본문으로]
  18. Jacques Derrida, Sauf le nom, Galilée, 1993. [본문으로]
  19. [옮긴이] 질 아니자르는 Jacques Derrida, Acts of Religion, Routledge, 2002의 영어판 편집자이자 서문을 썼다. [본문으로]
  20. Derrida. directed by Kriby Dick and Amy Ziering Kofman, Zeitgeist Films, 2004. [본문으로]
  21. 특집 「キルケゴール」, 『現代思想』, 2014년 2월호. [본문으로]
  22. 「バベルの塔」, 『他者の言語──デリダの日本講演』, 高橋允紹 編訳, 法政大学出版局, 1989년 수록. [본문으로]
  23. Jacques Derrida, Mémoires : pour de Paul de Man, Galilée, 1988. [본문으로]
Posted by 상겔스 상겔스

 

 

죽음, 동물, 그리고 촉각

: 데리다에 의한 하이데거의 동물의 탈구축

20012-512(15)-008 - 파트릭 롤레드 - 죽음 동물 그리고 촉각 - 번역.pdf

20012-512(15)-008 - 파트릭 롤레드 - 죽음 동물 그리고 촉각 - 일본어.pdf

 

動物そして触覚

デリダによるハイデガーの動物脱構築

Patrick Llored, La mort, l’animal et le toucher

Une déconstruction de l’animal heideggerien par Derrida.

파트릭 롤레드 (프랑스 리옹3대학)

(일역 : 桐谷慧)

 

* 프랑스어 원본을 구할 수 없어서 일본어판을 옮겼으나, 맥락에 따라 한국에서 통용되는 단어들로 바꾸었다. 다만, 데리다의 원문 등은 수정했다. [2017321.]

 

데리다의 철학이 동물 윤리라는 분야에 속한다며 논해지는 일은 드물다. 그 동물윤리가 촉각의 윤리[éthique du toucher]로 논해지는 일은 더욱 드물다[주1]. 그렇지만 본고에서 변호되는 것은 이런 명제이다. 하지만 자크 데리다의 사상에서 촉각의 철학이라는 말로 우리가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지를 명확하게 하기 전에, 데리다의 사상은 그 핵심에 있어서 인간이 아닌 살아 있는 것vivant non humain에 대한 최신의 위대한 철학 중 하나라는 것을 말해두어야만 한다. 우리는 데리다의 탈구축이 물론 동물을 위해 작업[작동]하는 철학이지만, 그것뿐만 아니라 그것은 동물에 의해 반영되는 철학이기도 하다고 주장한다. 데리다가 동물의 물음이라고 몇 번이나 지목한 것은, 데리다의 철학에서 중심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으며, 그런 까닭에, 데리다의 윤리라고 불려야만 할 것의 핵심에 위치하고 있다. 다음처럼 주장할 수도 있을 것이다. , 동물들의 형상이 거기서는 큰 존재감을 갖고 있기에, 동물의 물음은 데리다의 철학의 핵을 이루고 있으며, 그 동물들의 형상이 차연, 흔적, 대리보충, 그리고 촉각이라는 그의 주요 개념에 본래적 의미를 부여한다고, 즉 이런 개념들은 동물성의 물음의 빛 아래에서만 이해될 수 있는 것이라고. 마찬가지로, 용서, 환대, 약속 그리고 정의 등의 개념 이것들은 무조건성이라는 관념에 신호를 보내고 있다 에 의해 묘사되는 데리다의 윤리의 전체야말로, 이렇게 새로운 종류의 동물윤리가 되기에 이른다. 데리다의 동물윤리는, 거기서 쟁점이 되는 사항 때문에, 앵글로색슨국가들에서 발전된 동물윤리와는 매우 다르다. 촉각의 물음은, 의심할 바 없이, 윤리의 물음과 관련된 데리다의 작업의 잘 알려진 말년의 방향성의 하나이며, 그리고 촉각의 물음 덕분에 탈구축은, 동물에 대한 배려에 큰 관심을 품는 다수의 연구영역을 풍성하게 할 수 있는 철학이 된 것이다.


[주1] 일역자toucher라는 단어는 닿다, 건드리다’, ‘접촉하다’, ‘관계하다등을 가리키는 동사이며, 또한 촉각혹은 접촉/닿기라는 의미의 명사이기도 하다. 마찬가지로 촉각이라는 의미를 가진 tact, ‘촉각을 가리키는 contact, ‘촉각의라는 형용사인 haptique라는 단어도 본론에서 사용되고 있다


 왜 촉각이 인간과 동물의 만남에 있어서 이렇게나 중요성을 띠는 것일까? 촉각은 다른 감각과 똑같은 하나의 감각인 것일까? 오히려 촉각은 다른 모든 감각의 존재 조건이 아닐까? 사실상 촉각은 삶[생명]의 유지에 필요 불가결한 감각, 즉 살아 있는 것의 삶[생명], 모든 살아 있는 것의 삶[생명]의 의미=감각sens이 아닐까? 촉각이 엄밀하게는 하나의 감각이 아니라는 것, 혹은 더 정확하게 말하면, 촉각이 다른 모든 감각의 의미=감각le sens de tous les autre sens이라는 것, 사실은 이러한 것은 많이 있을 수 있다. 촉각이라는 단어에 의해 표면과 외부 사이의 접촉contact, 즉 외재성과의 접촉을 상정한 감각이 바로 문제가 되고 있는 한, 모든 감각의 의미=감각le sens de tout sens이라는 표현은 역설을 담고 있는데, 이 표현에 깊이를 주려고 한다[주2]. 그런데 우리는 안과 밖이라는 고전적 대립의 적절함이 상실된는 것을 데리다와 함께 보게 될 것이다. 데리다에 의해 이뤄진 동물의 촉각에 대한 질문의 혁명을 이해하기 위해 다음을 덧붙여두자. 촉각의 철학은 서구철학 전체를 통해 전개된 아주 길고 풍부한 역사를 갖고 있는데, 데리다에 따르면, 이 전통은 어떤 중대한 문제를 그 안에 내포하고 있다. 그것은 촉각중심주의haptocentrisme이다. 촉각중심주의란 촉각에 있어서 인간의 손에 주어진 특권이며, 이 특권의 가장 폭력적인 귀결은, 살아 있는 것들의 공동체에 대한 바람직한 공-속으로부터 동물을 몰아내는 것이다. 데리다의 작업 전체는, 동물을 이 공동체의 대등한 구성원으로 하기 위해, 그리고 촉각을 모든 살아 있는 것들 인간도, 인간이 아닌 것도 을 삶[생명]으로 연결시키는 감각이라고 하는 것을 목표로 하여, 촉각중심주의를 탈구축하는 데 있다. 촉각중심주의의 질문은, 하이데거의 존재론 전체의 탈구축이라는, 탈구축의 가능한 한 가지 해석의 안내선이 될 수 있다. 이 촉각의 물음에서 출발함으로써만, 그리고 또한 하이데거에 이르기까지 거기에 포함된 촉각중심주의로 향하는 촉각의 질문의 지배적인 동향에서 출발함으로써만, 심지어 하이데거의 존재론의 탈구축은 완전한 의의를 얻을 수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주2] 일역자sens라는 단어는 감각’, ‘감관외에, ‘의미의의’, ‘존재이유등의 의미도 갖고 있다. «le sens de tous les autres sens»란 이런 다의성을 이용한 표현이며, 촉각이 하나의 감각sens이면서 동시에 다른 감각들의 의미 혹은 존재이유sens이기도 하다는 사태를 나타내고 있다


하이데거에 의한 동물의 존재론은, 무엇에 의해 구성되어 있을까? 우리가 생각하기에 그것은, 촉각을 세계에 있어서 가난한 촉각toucher pauvre en monde이라고 하는, 어떤 촉각의 존재론으로부터 구성되어 있다. 하이데거에 따르면, 동물은 접촉하지만, 동물의 세계의 가난함 때문에, 실은 동물은 스스로가 접촉하고 있다れる는 것을 모른다. 촉각이 세계에 있어서 가난하다는 것은 이러한 의미에서이다. 이상의 주장이야말로 데리다가 몇 개의 저작에서, 그리고 실제로는 그의 전체 저작을 통해 탈구축하려고 시도하는 것이다. 다음에 인용하는 것은, 데리다가 하이데거에 맞서 쓰고 있는 텍스트인데, 그것은 어떤 살아 있는 것에 있어서 지각하는 것percevoir이 무엇을 의미하고 있느냐는 것, 그리고 그 살아 있는 것과 그것에 고유한 죽음 사이의 관계, 이런 것들이야말로 문제라고 하는 것을 우리에게 명료하게 보여주고 있다.


하이데거가 동물의 Benommenheit이라고 부르는 것에 있어서(우리는 이 단어를 망연자실hébétude〕 혹은 방심accaparement이라고 번역하지만이 번역이 어렵고 독해의 모든 무게를 다 떠맡고 있다는 것을 안다), 동물의 Benommenheit에 있어서이 Benommenheit에 의해 정의되는 동물들은다음과 같은 가능성이 제거되고 빼앗기고 뺄셈되어 있다[열림]과 현시된 존재에 있어서현시 혹은 현시성에 있어서동물에 대해 현시된 것의 엶[열림]에 있어서존재자 그 자체étant comme tel와 관련될 가능성스스로가 지각한 것을 그 자체로서 지각할 가능성혹은 존재자나 세계 그 자체en tant que tel와 관련될 가능성이다[주3].

Dans ce que Heidegger appelle la Benommenheit de l’animal (qu’on traduit, mais nous verrons que la traduction est difficile et porte toute la charge de la lecture, par hébétude ou accaparement), dans sa Benommenheit, eh bien, a l’animal defini par cette Benommenheit est alors retirée, prise, soustraite la possibilite de se rapporter a l’etant comme tel, la possibilite de percevoir comme tel ce qu il percoit ou de se rapporter a l’etant et au monde, en tant que tels, dans l’ouverture et l’etre manifeste, dans la manifestation ou la manifesteté, dans l’ouverture de ce qui se manifeste a lui.


[주3] 일역자Jacques Derrida, La bête et le souverain : Volume II (2002-2003), Galilée, 2010, p.104.

             [옮긴이] accaparement를 일역자는 전유(專有)’라고 옮기고 있는데, 이것은 appropriation(자기 것으로 삼기)와는 달리 매점매석이나, ‘독점을 비롯해 독차지라는 의미이다. 그런데 우리 말로 Benommenheit얼빠져 있음’, ‘방심’, ‘사로잡혀 있음’, (세계에 대한 몰입이 심화된 양상인) ‘함몰등으로 옮겨진다. 아무튼 여기서는 혼동을 피하기 위해 독차지로 바꿔 옮긴다. manifestation manifeste, manifesteté 등을 일역자는 개명(開明)’이라고 옮기는데, 이것은 풀어보면 밝게 엶’, ‘밝게 열다이다. 한국어로는 표명’, ‘계시’[드러내 보임], 현시(Erscheinung), ‘현현(顯現, manifestation·epiphany)’ 등으로 옮겨진다. 여기서는 현시를 활용한다

 

하이데거에게 동물의 세계에 대한 관계, 그리고 즉 동물이 자기 자신에 대해 맺는 관계는 망연자실이라는 관계이다. 망연자실은 스스로가 지각하고 있다는 것을 지각하는 것을 동물에게 금지하고, 동물의 그것에 고유한 죽음과의 관계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되는 이러한 능력 없음[不能力], 세계와의 관계에 있어서 동물의 정의 그 자체로 한다. 하이데거에 따르면, 스스로가 지각한다는 것을 지각하는 것에 관련된 동물의 능력 없음[不能力], 더 나아가 폭력적인 것에도, 동물에 대해 세계로서의 세계라는 존재자와 관련되는 것을 금지한다. 이것은 동물이 그 자체로서의 자기 자신과는 관계를 갖지 않는다는 것일 뿐 아니라, 더 근본적으로는, 동물 자신에 의한 이 세계의 지각은 존재할 수 없다는 의미에서, 동물은 세계가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모른다고 말하는 것으로 귀착된다. 이것은 죽음의 문제에 중대한 귀결을 가져다준다. 하이데거에 따르면, 동물의 자기 자신과의 관계의 가난함, 그리고 동물의 스스로가 살고 있는 세계와의 관계의 가난함 때문에, 동물은 다음과 같은 것에 대해서도 그 자체로서는 지각할 수 없다. , 살아 있는 것들이 이 똑같은 세계에 대해 갖고 있는 근본적인 관계의 하나, 그 관계는 존재할 수 있으며, 지나갈 수 있으며, 현실에서는 끝에 의해서, 즉 내게 고유한 소멸에 의해서, 내게 고유한 죽음에 의해서 지나간다는 것이다. 이런 하이데거의 논의는마치 죽음이 투명한 지식의 대상이 될 수 있다는, 나와 죽음 사이에 있는 지식이라는 관계, 마치 죽음이 그런 관계를 경유할 수 있다는, 마치 삶[생명]과 죽음이라는 대립하는 상이한 두 개의 실체가 있다는 것 같다. 이 이중적 실체에 대해, 동물은 스스로가 살고 있다는 것을 모르기 때문에, 그 중의 하나 그 자체에, 즉 삶[생명] 그 자체에 접근할 수는 없다. 그래서 동물은 더군다나 실제로는, 정말로 이런 이중적 실체의 또 다른 측면, 즉 죽음에 접근할 수는 없는 것이다. 달리 말하면, 동물은, 설령 자신이 살아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고 하더라도, [생명]으로서의 삶[생명]이 무엇인가에 대해서는 알지 못하고 있다. 이와 똑같이, 내가 내게 고유한 죽음이라는 관념에 적어도 접근할 수 있는 것은, [생명] 그 자체에서 출발하는 경우뿐이기 때문에, 동물은 스스로가 죽을 수 있다는 것을 모른다. 그러므로 근본적인 문제는 자기 자신과의, 그리고 세계 그 자체와의 모든 관계를 동물에 대해 금지하는 망연자실 혹은 독차지라는 상황, 동물이 정말로 그런 상태 속에 있는지 여부를 아는 것이다.

이상으로부터, 동물의 자기 자신에 대한, 세계에 대한, 즉 그것에 고유한 죽음에 대한 비관계를 명시하기 위해, 하이데거의 세 개의 열쇠가 되는 생각이 도출된다.

 

생각 1 : (동물의) [생명]의 근본적 구조로서의 독차지(Benommenheit), 죽음의, 죽음에 도달하는 것의 극히 정확한 가능성들을 묘사한다.

생각 2 : 동물의 죽음, 그것은 죽는다mourir일까, 혹은 끝난다finir일까?

생각 3 : 그래서 우리가 인간은 죽는다고 보는 한에서, 동물은 죽을 수 없으며, 그저 끝에 도달할 뿐이다.

 

이것이야말로 삶[생명]에 대해서도 죽음에 대해서도 그 어떤 자체로서의 관계를 갖지 못하는 것으로서의 동물, 그런 동물의 비-죽음에 대한 하이데거의 거대한 주장이다. 동물은 삶[생명]에 대한 그 자체로서의 관계없이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동물은 죽음에 대한 그 자체로서의 관계없이 죽는다, 왜냐하면 동물에게는 자기 자신으로, 세계로, 즉 그것에 고유한 죽음으로 접근하는 것을 가능케 하는 능력이 근본적으로 결여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데리다는, 이 주장의 폭력에 반대하기보다도, 오히려 다음을 보여주려고 시도하고 있다. , 모든 살아 있는 것을 그 자신에 있어서, 세계에 있어서, 그것에 고유한 죽음에 있어서 정의하는 것은 이성적인 지식에 속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감성적인 관계에 속한다는 것이다. 데리다에게 감성적인 관계란 촉각의 질문을 경유하는 것이며, 이 촉각의 질문은 인간들과 인간이지 않은 것들, 사유와 감성의 잘못된 대립을 넘어설 윤리적 가능성으로서이다. 촉각의 질문은, 하이데거에게서의 동물의 존재론의 탈구축이라는 역할을 맡게 되는 것이다.

 

확실히, 촉각에의 권리를 동물에게 인정한 철학자는 드물다. 그 적은 수의 철학자들에 아리스토텔레스가 있는데, 이 문제에 있어서의 아리스토텔레스의 중요성은 자세하게 설명되어야 한다. 그것 없이는, 이 논의에 있어서 데리다의 공헌을 완전히 이해되지는 못할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살아 있는 것의 철학은, 촉각을 생리학적이고 원초적인 한 기능으로 환원하는 생물학적 자연주의와 불가분한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촉각은 살아 있는 것 그 자체의 존재에 필요 불가결한 유일한 감각이라는 이유에 의해, 아리스토텔레스가 그 동물철학에 있어서 촉각에 중심적인 역할을 맡게 한다는 것을 강조하는 것은, 역시 중요하다. “촉각이라는 감각은, 그 박탈이 동물들의 죽음을 초래하는 필연적이고 유일한 감각이다. 왜냐하면 동물이 아닌 존재가 이 감각을 갖는 것은 가능하지 않고, 동물이기 위해서는 촉각과는 다른 감각을 갖는 것은 필요하지 않기 때문이다[촉각이 없이는 다른 {감각들이} 존재하지 않으며, 촉각기관은 흙으로도, 그리고 원소들 가운데 다른 어떤 것으로도 {구성되어} 있지 않다. 그렇다면 이 감각만을 결여해도 동물은 반드시 죽는다는 것이 분명하다. 왜냐하면 동물이 아니고는 그 감각을 갖지 않으며, 또한 동물은 이것 없이는 다른 {감각}을 가질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라고 아리스토텔레스는 『영혼에 관하여(435b 4-7)[주4]에서 쓰고 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주장은, 촉각을 살아 있는 것의 존재에 불가결한 유일한 감각이라고 하기 때문에, 매우 급진적인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우리에게 말하는 바에 따르면, 이 촉각이라는 감각의 존재를 동물의 존재조건으로서 고려하지 않는다면, 촉각이 거기에 속해 있는 동물 존재는 사고될 수 없다. 그래서 동물에게 촉각은, 그것 없이는 동물의 삶[생명] 그 자체가 질문에 부쳐지게 되는, [생명]의 유지에 필요 불가결한 것이다. 이상으로부터, 촉각과 동물의 삶[생명]과의 사이뿐만 아니라, 촉각과 동물의 죽음 사이의 밀접한 관계가 도출된다. 만일 촉각이 살아 있는 것의 삶[생명]을 낳는 것이고, 데리다가 아리스토텔레스의 열쇠인 표현을 거론하면서 우리에게 보여주듯이, [생명]과 촉각 사이의 공외연성coextensivité이 있다고 한다면, 아리스토텔레스의 주요한 발견이란, 촉각을 죽음의 시련épreuve de la mort에 걸었다는 것, 촉각을 바로 삶[생명]과 죽음의 물음으로 삼았다는 것이리라. 데리다는 촉각, -뤽 낭시를 건드리다에서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동물적 생명과 촉각 사이의 이 본질적인 공외연성, 아리스토텔레스는 이것을 측정mesurer한 것이다. 그는 또한 이 공외연성을 죽음의 시련에 의해 설명한다. 시각, 청각 혹은 미각을 박탈당하더라도, 동물이 반드시 죽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만일 촉각이 결여되기에 이른다면 동물은 지체 없이 죽는다. 반대로 (그렇지만 이것은 같은 현상의 다른 측면인데), 촉각의 과잉[초과]적 강도intensité excessive가 건드릴[촉각할] 때에도 동물은 죽는다. 감각적인 것의 과장법hyperbole[주5]은 그때, ‘우리가 그것에 의해 삶[생명]을 정의했던이 촉각의 기관을 파괴하기에 이른다. 촉각의 이 중용=측정mesure, 이 절제modération, 바로, 어떤 유보réserve가 그것을 과잉(exagération)의 일보직전에서 붙들고 있는 경우에 한해서, [생명]에 도움이 되기를 계속한다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Cette coextensivité essentielle de la vie animale et du toucher, Aristote la mesure. il l’explique aussi à l’épreuve de la mort. Privéde la vue, de l’ouïe ou du goût, l’animal ne meurt pas nécessairement. Or il meurt sans retard si le toucher vient à lui manquer. Inversement (mais c’est l’autre face du même phénomène), l’animal meurt aussi lorsque l’intensité excessive du toucher le touche. L’« hyperbole » du tangible en vient alors à détruire l’organe de ce toucher « par lequel nous avons défini la vie » (435 b 10-16). Cette mesure, cette modération du toucher, ne peut-on dire quelle reste au service de la vie dans la seule mesure, justement, où quelque réserve la retient au bord de l’exagération?”[주6]


[주4] 일역자〕 『について, 中畑正志訳, 京都大学学術出版会, 2001, 184. [아리스토텔레스, 영혼에 관하여, 유원기 역주, 궁리, 2001, 252.]

[주5] 일역자저자는 감각적인 것의 과장법hyperbole du sensible이라고 쓰고 있으나, 인용된 촉각의 데리다의 원문에서는 촉지 가능한 것의 과장법hyperbole du tangible이라고 되어 있다

[주6] J. Derrida, Le toucher, Jean-Luc Nancy, Galilée, 2000, p.61.〔『触覚ジャン=リュック・ナンシーにれる松葉祥一榊原達哉加國尚志訳青土社200695-96


데리다에게 촉각의 중요성은 촉각이 끊임없이 따르고 있는 아포리아와 관계없이는 이해될 수 없다. 왜냐하면 만일 모든 동물의 삶[생명]이 필연적으로 촉각에 의존하고 있다면, 같은 때에 같은 장소에서, 촉각이 과잉[초과]적 강도라는 형태를 취해 나타날 경우에는, 죽음 그 자체가 촉각으로부터 도래할 수 있기 때문이다. 감각적인 것의 과장법[주7]은 이 과잉[초과]적 강도에 의해, 동물 자신에 대해 휙 돌아서서 덤벼드는 자기-면역의 과정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자기 자신을 파괴하는 삶[생명]에 대해 생각하기 위해, 자살을 언급하는 것을 주저해서는 안 된다. 그래서 촉각은 다른 감각들과는 달리, 데리다의 윤리의 중심적 개념인 파르마콘의 논리logique du pharmakon를 따르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파르마콘의 논리에 의해, 촉각이라는 이 특이한 감각은, 살아 있는 것의 핵심에 동물의 -la-vie-la-mort[주8]를 세우는 것이 되며, 또한 유보개념에 입각한 윤리와 분리 불가능하게 된다. 그리고 그 윤리는, 유보 개념에 의해, 그것에 외재적인 형식적이고 규범적인 규칙들에 기초하는 것이 아니라, [생명]의 파르마콘적 해석에 의해 이해된 동물의 신체 그 자체에 기초한 것이 된다.


[주7] 〔일역자감각적인 것의 과장법hyperbole du sensible촉각으로부터의 직전의 인용문에서도 볼 수 있는 표현인데, 앞의 옮긴이 주에서도 지적했듯이, 데리다의 원문에서는 촉지 가능한 것의 과장법hyperbole du tangible이다

[주8]  일역자-la-vie-la-mort는 데리다가 자주 사용한 표기. “생사la vie la mort라고 쓰는 경우도 있다. [생명]과 죽음을 이어 적음으로써, 양자의 분리 불가능성을 나타내고 있다. 데리다는 1974년부터 75년까지 생사라는 제목의 강의를 했다

 

데리다에 의한 동물의 촉각

촉각자기비자기사이의 다양한 경계가 창출되는 공간에 살아 있는 것들의 각각이 예외없이 기입되는 것을 가능케 하는 것이며, 그래서 살아 있는 것들 사이에서의 만남[마주침]의 감각이다. ‘자기비자기사이의 다양한 경계에 기초함으로써, 접촉과 사건으로서의 만남이 가능해진다. “아리스토텔레스를 따라, 그리고 그를 넘어서, 촉각은 다른 감각들과는 달리, 살아 있는 신체에 공외연적이라고 가정하자. 또한 마찬가지로, 또 다시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듯이, 먹는 것은 촉각에 속한다고 가정하자. 그런 경우, 애도에 따른 체내화(incorporation)는 어떻게 되고, 무엇을 의미할까? 그것은 여전히 삶[생명]의 살아 있는 한 계기일까? 물론이다, 그것은 어떻게 다를 수 있을까? 그것은 여전히 죽음을 삶[생명]에 포함시켜야만 한다. [생명]의 살아 있는 이 계기, 이것은 내화intériorisation일까 아니면 배출expulsion일까? 그것은 건드릴 수 없는 것의 촉지-가능하게-되기devenir-tangible일까, 혹은 반대로, 촉각적tactile육체, 촉각하는 것과 촉각되는 것의 촉지-불가능하게-되기devenir intangible를 산출하는 이념화idéalisation, 정신화, 혼화魂化, animation인 것일까? // 질문들의 이 모체는 어떻게 세계의 질문을 탄생시키는 것일까? 그리고 유한성의 질문을. 왜냐하면 촉각이 다른 감각들 중의 하나의 감각이 아니라면, 이 점으로 나중에 돌아가겠지만, 어떤 면에서는, 엄밀한 의미에서는 하나의 감각이 아니라면, 그것은 촉각이 모든 유한한 실존에 도래하는 것을, 이 실존을 상기시키기 때문이다. 그것은 어떠한 것이든, 그 어떤 존재자이든, 유한한 실존에 도래하는 것을그 실존에 대해 현전화시키기 때문인데, 그렇지만 그때, 촉각은이 현전화의 증여에 의해, 그것에 있어서, 혹은 그것으로부터 현전화가 고지되는 바의 한계를 표식한다Supposons, selon Aristote et au-delà, que l’haptique, à la différence des autres sens, soit coextensif au corps vivant. Supposons aussi que manger, comme le dit encore Aristote, relève du toucher. Que devient alors et que signifie l’incorporation selon le deuil ? Encore un moment vivant de la vie ? Bien sûr, comment pourrait-il en être autrement ? Encore faut-il inclure la mort dans la vie. Ce moment vivant de la vie, serait-ce une intériorisation ou une expulsion ? Un devenir-tangible de l’intouchable ou au contraire une idéalisation, une spiritualisation, une animation produisant alors un devenir intangible du corps tactile, du touchant et touché ? // En quoi cette matrice de questions donnerait-elle naissance à la question du monde ? Et à la question de la finitude ? Car si l’haptique n’est pas un sens parmi d’autres, si d’une certaine façon, nous y reviendrons, il n’est même pas un sens, stricto sensu, c’est qu’il rappelle à toute existence finie ce qui vient à elle : pour lui présenter quoi que ce soit, quelque étant que ce soit, mais en marquant, par le don de cette présentation, la limite à laquelle ou depuis laquelle une présentation s’annonce.”[주9]


[주9]  J. Derrida, Le toucher, op. cit., p.67.〔『触覚前掲104-105


따라서 만약 동물의 살아 있는 신체와 촉각 사이의 공외연성이, 인간과 동물의 관계를 양자의 촉각적 공동체의 승인이라는 방향으로 변화시켜야 한다면, 역시, 이 공외연성이 오늘날 우리에게 지닌 의미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선진적인 논의에서의 그것과는 다른 것이 된다. 공외연성은, 우리의 동물들에 대한 관계를 철저하게 재고시키기 때문에 정치적인 문제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바로 이런 윤리적 관심이야말로 공외연성이라는 개념에 대해 가장 급진적인 의의를 주도록 데리다를 이끌고 있는 것이다. 실제로, 아리스토텔레스가 죽음으로부터 삶[생명]을 분리하는 반면, 데리다는 공외연성이라는 이 개념을 통해, 동물이라는 살아 있는 것을, 촉각에 의해 죽음과 삶[생명]에 동시에 연결된 존재로 본다. 동물은 그래서, 촉각에 의해 자신의 삶[생명]-죽음에 대한 관계의 한계들을 끊임없이 세우는 존재인 것이다. 동물의 삶[생명]-죽음에 대한 관계는, []화와 배출로 이루어진 이중적 운동에 의해 해석될 수 있다. 촉각을 통한 과정으로서의 내[]화는, 여기서는, 모든 살아 있는 것에 있어서 촉각은 자기 접촉un se toucher이 된다는 사태를 의미한다. 촉각이란, 우선 스스로 자기 자신을 접촉하는[자기 자신을 건드리는] 것이다. 데리다가 모든 동물에서 발견된 내[]화의 현상에 의해, 동물이라는 살아 있는 것에 있어서, [생명]은 스스로를 접촉하는 것이다. 어떤 살아 있는 것에 있어서, 살아 있는 것이란 스스로를 접촉하는 것이다. 스스로를 접촉하는 것이, 살아 있는 것의 자기 자신에 대한 타동성他動性transitivité이라는 이 작동에 의해, 살아 있는 것을 존재하게 하는 것이다. “스스로 자신을 접촉하는 것의 사활을 건 필연성 없이는 모든 존재는 불가능하며, 무와 관련될 것이다. 동시에 이 스스로 자신을 접촉하는 것은 아포리아라는 형태를 취해 나타난다. 왜냐하면 스스로 자신을 접촉하는 것이란 타자를 접촉하는[타자를 건드리는] 과 동시적인 것으로서만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로부터, 데리다가 배출이라고 부르는 것에 대한 촉각이 열리게 된다.

촉각이 그러한 배출이라는 이 삶[생명]의 계기에 의해, 무엇이 의미되고 있을까? 살아 있는 것의 핵심에 있는 배출이 의미하는 것, 그것은 동물이 존재를 계속하기 위해서는 촉각을 외재화[외부화]할 필요가 있다는 것인데, 동시에, 자기 자신의 바깥으로 나간다는 이 작동에 연결된 위험들로부터 자신의 몸을 지키려고 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자기 자신의 바깥으로 나간다는 이 작동은 촉지 가능하게 되기를 불러일으키고, “촉지 가능하게 되기는 데리다의 동물 윤리가 직면하는 문제에 신호를 보낸다. 그 문제란 접촉할 수 없는 것l’intouchable의 질문이다. 촉각의 질문이 따르고 있는 아포리아를 가리키는 것은, 접촉할 수 없는 것이라는 단어이다. 이하가 아포리아의 매우 복잡한 전모이다. 만약 촉각에 의해서만, 그리고 촉각에 있어서만 동물의 삶[생명]이 존재하는 것이라면, 설령 그것이 자신을 접촉하는 것이더라도, 타자를 접촉하는 것이더라도 타자로의 이 엶은, 즉 타인이 항상 그렇게 접촉하는 것touchant으로의 이 엶은, 감각으로서의 촉각의 핵심 그 자체에 숨어 있는 항구적인 위협일 수 있다는 것을 우리는 이해할 것이다. 그러나 바로 이 위험이야말로 데리다가 동물의 삶[생명]정신화spiritualisation라는 강한 용어로 부르는 바의 조건이다. 정신화는 접촉하기와 접촉되기touché사이에서, “촉각적 신체의 촉지-불가능해지기를 가능케 한다. 다른 식으로 말한다면, 동물이 스스로에게 고유한 신체를 창출하는 것은 촉각에 의해서이며, 그 고유한 신체는, 타자의 촉각에 의해, 즉 촉각의 타자에 의해 끊임없이 위협당하는 것에 의해 성립되는 것이다.

이로부터 먼저 생각해두어야 하는 것은, 촉각을 구성하는 이 아포리아이다. 이 아포리아 때문에, 동물은 존재하기 위해서는 스스로를 접촉할 수밖에 없는 살아 있는 것이지만, 그러나 동시에, 안과 밖의 경계를 스스로 창출하는 살아 있는 것이기도 하다. 이런 한계를 정신적이라고 부르기를 주저해서는 안 된다. 그리고 이 한계에 의해 동물은 스스로의 유한한 실존 앞에 놓이는 것이며, 타자의 유한성 앞에 놓이는 것과 마찬가지로, 스스로에게 고유한 유한성 앞에 놓이는 것이다. 타자의 실존이 그러한 것과 똑같이, 동물의 유한한 실존은, 촉각에 의해 그 동물 자신에 도래한다. 그래서 촉각의 유한성에 의해, 타자는 자기 자신에 대해 다른 것이 되지 않을 수 없다. 촉각이란 동물이라는 살아 있는 것의 내부에, 그리고 인간이라는 살아 있는 것과 인간이 아닌 살아 있는 것의 관계의 내부에 한계들을 창출하는 감각인데, 그런 촉각에 의해 만남은 실현된다. 달리 말한다면, 촉각은 자아와 타자 사이의 한계를 그려내는 것이며, 이 자아가 동물이라고 불리든 인간이라고 불리든, 이 동물 윤리에 있어서는, 그런 동물과 인간 사이의구별의 모든 존재론적 가치는 상실된다. 동물의 삶[생명]을 묘사하기 위해, 우리는 자기-촉발auto-affection에 대해 논해야 한다. 왜냐하면 자기-촉발이야말로 모든 살아 있는 것이 자신의 안에 타자를 맞아들이는 것을 가능하게 해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촉각의, 촉각에 의한 한계

이 한계는 촉각의 내부 그 자체에 있어서의 간격화espacement의 가능성이다. 촉각은 다른 감각들에 대해, 그리고 한계를 간격화하고 확장할 수 있는 모든 것에 대해, 산종된다. 사실, 촉각에 의해 수립된 한계는, 간격화에 의해, 그리고 간격화 때문에 성립되는 것이며, 그 한계를 확대하여 도래하는 모든 것을 열고, 그것에 대해 열릴 수 있는 것이다. 그렇지만 그것은, 항상 공외연적인 법 아래에서이다. “그러나 이 한계는, 접촉tact, 사실을 말하면, 간격화의 준-초월론적 특권을 이렇게 확인하면서, 촉각과 다른 감각을 서로 접촉하게 한다. 그리고 간격화란, 테크네와 보철적 대체물에 자리를 주는 것이다Mais cette limite-ci fait se toucher le toucher et les autres sens, confirmant ainsi le privilege quasi transcendantal du tact, en vérité de l’espacement. Et de l’espacement comme ce qui donne lieu à la tekhnè et au substitut prothétique.”[주10]


[주10] Ibid., p. 137.同前230


간격화란 한계를 창출하는 것으로서의 촉각이라는 이 특수한 감각의 다른 이름이며, 그 한계에 기초함으로써 만남은 생길 수 있다. 인간과 동물이 서로 접촉한다는 것은 융합이나 동일화가 되지 않는 것으로서의 만남, 양자 사이에서의 그런 만남의 조건이다. 융합이나 동일화는 데리다가 무매개적인 인접contiguïté immédiate이라고 명명한 무매개성의 환상을 나타내고 있다. 그래서 무매개성으로부터 촉각을 떼어놓는 것[주11]이 문제이다. 바로 이 말은, 우리가 촉각의 중요성을 이해한다면, 데리다의 동물철학을 선도하고, 우리에게 상식과도 철학적 양식과도 관계를 끊으라고 명하는 것, 탈구축의 표어이다. 촉각중심주의란 촉각에 있어서 인간의 손에 특권이 주어지고 있다는 것인데, 그 촉각중심주의의 두 가지 주요한 형식융합과 동일화, 촉각이 무매개적인 감각 능력의 경험적 표현[출현]에 지나지 않는다는 확신에 의해 도출되고 있다. 그런데 촉각이라는 감각 능력sensibilité haptique에는 그 어떤 무매개성도 존재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무매개적인 것으로서의촉각sensibilité tactile이라는 개념을 따를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주12] 현상으로서의 촉각은, 경험적 촉각에 의해서는 접촉되지 않는다. 이렇게 데리다는 촉각에무매개성을 인정하지 않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촉각을 단순한 하나의 감각으로 만들 위험을 예방하기 위해 그렇게 하는 것일 뿐이다. 그래서 오늘날까지 동물의 촉각의 철학을 창설하는 것을 불가능하게 해온 다양한 구별을 뛰어넘기 위해, 촉각의 법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에 도달해야만 한다. 그런 구별들은, 현실과 잘 어울리지 않는 두 개의 세계를 분리하는 것으로 생각되는 자연과 문화의 이원론에 의해 설명된다. 이 두 개의 세계 중 한 쪽은 동물성을 자연에 가둬둠으로써 자연결정론을 따르며, 다른 한쪽은 인간의 특성으로 간주되는 문화적 문맥주의를 따르고 있다.


[주11] 일역자〕 Cf. Ibid.同前230-231

[주12]  일역자이 대목에서는 둘 다 촉각이라고 번역할 수 있는 sensibilité haptiquesensibilité tactile라는 두 개의 표현이 나눠서 사용되고 있다. 그리스어에 기원을 두고, 주로 학술용어로 사용되는 haptique라는 단어가, キネステーゼ 등도 포함한 촉각에 관련된 것 전반을 가리키는 반면, 라틴어에서 유래하는 tactile라는 단어는, 더 직접적인 접촉이라는 뉘앙스가 강하다고 간주된다

 

동물의 촉각의 법

동물의 물음에 대한 우리의 대부분의 반성은 여전히 인간성과 동물성 사이의 구별에 기초하고 있는 것인데, 데리다의 탈구축은 이 구별을 뛰어넘겠다는 욕망에 끊임없이 사로잡혀 있다고 하겠다. 탈구축에 있어서의 이런 극복은, 촉각의 법의 존재에 의해 이뤄진다. 사실, 살아 있는 것들 사이에 있어서의 접촉을 완전히 단념해버리지 않고, 그것을 바로 중단하는 촉각의 법이 있다고 한다면, 이른바 서양에 고유한 것인 인간과 동물 사이의 형이상학적 분리 이전에 그 법은 항상 생기고 있다. 사실, 너무도 자주 동물의 촉각의 물음에 대한 우리의 관계를 지배하고 있는 무매개성은 촉각을, 생리학적이고 동물학적 기능에 대한 법칙을 따르는 자연적신체를 전제로 한 행위로 삼아버린다. 그런 경우, 촉각이란 동물의 물리적 신체에 관련될 것이다. 그러나 촉각은, 몇 가지 과학법칙을 충족시킬 수 있는 물질의 질문이 아니다. 만일 촉각이 자연현상으로 환원되어버린다면 자연 현상이 존재하고 있다는 착각을 주는 것은 촉각인데 과학적 유형의 객관적 지식이 신속하게 촉각의 질문으로 처리되어 버릴 것이다. 그런데 그런 지식은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촉각에 있어서 촉각으로 환원 불가능한 것, 촉각에 있어서 그 단순한 물리적 출현[표현]으로부터 도망치는 것, 즉 모든 촉각의 중심 그 자체에 비-촉각이, 접촉될[건드려질] 수 없는 것에 속하는 무엇인가가 있기 때문에 촉각은 존재한다는 사실’, 이것을 과학적 유형의 객관적 지식은 고려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촉각은 끊임없이 타자에 대해 스스로를 열고 또한 스스로를 닫는다는 역설적 감각이며, 타자를 접촉하지 않는다는 가능성에 의해서만 성립되는 감각인 것이다. 달리 말하면, 촉각의 근본적 법으로서의 자기-촉발이야말로 촉각에 고유한 삶[생명]을 통제하는 것이다. 그리고 또한, 이 자기-촉발 덕분에, 촉각의 법이란, 객관적으로 생각되는 자연에는 결코 따르지 않는다는 것이다. 더 근본적으로는, 만약 자연이라는 단어가 알몸의 삶[생명]의 영역을 의미한다면, 동물의 촉각을 이끄는 법이란, 자연에는 결코 따르지 않는다는 것이며, 그것은 자연으로부터 해방된 것이다.

우리에게 인간성과 동물성 사이의 형이상학적 구별을 재고하도록 명하는 것은, 바야흐로, 해방과 자유를 가져오는 이 촉각의 법이다. 촉각이란 인간들과 동물들에 공통의 세계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이 법은 촉각을 더 이상 자연에는 속하지 않는 하나의 사건이 되기 때문에, 인간성과 동물성이라는이 범주들을 질문에 부친다. 이것은 데리다의 논의의 급진적인 결론이다. 만나게 되는 것은 두 개의 알몸의 신체가 아니라, 오히려 촉각을 매개로 한 관계를 시간과 공간에 있어서 그려내는 두 개의 방법이다. 다양한 이원론이 인간들과 동물들의 평화로운 관계를 방해하고, 폭력을 가져오는 것인데, 만남이 의미를 갖는 것은, 이것이 이원론을 산출하는 대립들 이전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예전부터 탈구축이 발명하려고 추구해 왔던 것은, 인간들과 동물들의 평화로운 관계이다. 여기서는 자연이라는 단어를 결정론이라는 의미로 사용하는데, 동물이 그런 자연으로부터 해방되는 것은 촉각에 있어서, 촉각에 의해서라고 하는 한에서, 그 어떤 자연도 그 법을 동물의 촉각에 떠넘기는 일은 없다. 촉각의 선행성은, ‘주체객체의 범주도, 누가qui무엇을quoi이라는 범주도 물음에 부친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동시에 촉지 가능한 것이기도 촉지 불가능한 것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동물은 동시에 주체이기도 객체이기도 하며, 누구이기도 하고 무엇을이기도 하다. 이리하여 촉각의 목적이란 탈구축이라는 것이, 즉 현전하는 개체성의 탈동일화라는 것이 드러난다. 달리 말하면, 촉각의 경험에 있어서는, 접촉하기와 접촉되기는 더 이상 분리 가능하지 않다. 왜냐하면, 누구와 무엇을은 거기에 있어서는 더 이상 사용될 수 없기 때문이다. 인간이든 동물이든, 접촉하는 것celui qui touche, 마찬가지로 접촉하기도 접촉되기이기도 하다. 이것은 사유의 범주로서의 촉각이 동물성 그 자체에 의해 탈구축된다는 것이다. 그 이유를, 데리다는 다음과 같이 강조한다. “그런데 이 관점에서 보면, ‘누가혹은 무엇을, 접촉하는 것le touchant이나 접촉되는 것le touché을 결정하기 전에는 여기서 우리는 성급하게도 이것들을 행위의 주체 혹은 객체라고 부르지 않겠지만 촉각 일반에 관한 질문을, 촉각의 몇몇 본질에 관한 질문을 더 이상 제기할 수 없다. 우선 접촉le toucher이 있고, 그 다음에 주어 혹은 보어에 의해 동사를 보충할 수 있게 해주는 이차적인 변양이 있는 게 아니다(무엇이 누구를 혹은 무엇을 접촉하다[건드리다], 누가 누구를 혹은 무엇을 접촉하다[건드리다])Or, a cet égard, il n’est plus possible de poser la question du toucher en general, de quelque essence du toucher en general avant de determiner le «qui» ou le «quoi», le touchant ou le touché que nous ne nous hâterons pas d’appeler sujet ou objet d’un acte. Il n’y a pas d’abord le toucher, et ensuite des modifications secondaires permettant de compléter le verbe d’un sujet ou d’un complément (quoi touche qui ou quoi, qui touche qui ou quoi).”[주13] 접촉le toucher은 없다고 말하는 것, 그것은 사실상 이 사건에는 얼마간의 특이성이 있을 뿐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 사건은, 마주대한 접촉이라는 행위의행위자들의 예견을 동요시키는 것이며, 그 행위자들은 더 이상 주체와 객체라는 고전적 범주에 의해서는 사고될 수 없다. 인간은 주체의 범주라는 주권적 지위에 있다고 생각되고 있는데, 이렇게 탈구축된 촉각은 인간의 모든 주권적 지위를 잃게 한다. 촉각의 물음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우리를 객체 혹은 무엇을의 위치에 놓는 것이며, 그렇게 함으로써, 동물이 접촉하기가 될 때, 마침내 동물에 대한 모든 주권성을 우리로부터 잃게 만드는 것이다. 만약 동물과 인간의 만남이 생기기를 바란다면, 사건이라는 그 특이성에 있어서 고려해야 하는 것은, 이 불가능한 가능성이다. 데리다의 동물윤리를 정초하는 것은 이 불가능성이다. 동물의 삶[생명]에도, 혹은 신의[생명]에도 똑같이 관련되는 것인 촉각에 의한 주권성의 탈구축을, 그 어떤 인간학적 한계도 중단하지 않는다. 데리다의 동물윤리에 있어서는 접촉contact으로서의 촉각, 즉 촉, tact으로서의 촉각이라는 이 사건만이, 현전하는 동일성의 탈구축을, 그리고 모든 공동체적 동일성의 해체를 행할 수 있다. 그래서 인간과 동물 사이에서 확립되는 촉각에는 다음과 같은 전복의 힘이 있음을 인정해야 한다. , 촉각은 근원으로서의 살아 있는 자기와, [] 박힌 혹은 접촉된 자기와의 사이에서의 항상적인 차연을 표식하는 대목이며, 접촉된 자기는 이 기원이라고 생각된 것을 끊임없이 차연하는 것이다. 따라서 살아 있는 현재가 열어젖혀지게 것은 촉각 덕분에 의해서이며, 이 열어젖힘은 접촉하는 것이기도 하고 접촉되는 것이기도 하며, 스스로가 자기 자신에 대해 다른 것이라는 것을 발견시킨다. 자기에의 현전은 그것은 인간이 아닌 살아 있는 것에도, 인간이라는 살아 있는 것에도 관련되는 것인데 ― 〔촉각이라는사건에서 무탈하게 떠날 수는 없다. 이 사건은, 분할 불가능한 주권성에 있어서 살려지게 된다고 생각되는 근원적인 절대자의 무구한 비분할[주14]이라고 데리다가 부르는 것, 이것을 물음에 부침으로써 성립한다. 촉각이 물음에 부치는 것, 그것은 이 현전의 형이상학인 것이다.


[주13] J. Derrida, Le toucher, op. cit., p.84.〔『触覚前掲138〕 〔인용할 때 저자는 촉각의 원문에 있는 따옴표를 생각했으나, 일본어로서의 읽기 쉬움을 고려하고 옮긴이의 판단에 따라 이런 따옴표를 번역했다.

[주14] 일역자이 표현은 기하학의 기원의 서문에서 볼 수 있다. Edmund Husserl, L’Origine de la géométrie, introduit et traduit par Jacques Derrida, PUF, 1962, p. 171.〔『幾何学起源田島節夫矢島忠夫鈴木修一訳青土社2003250



그래서 촉각은 살아 있는 것들의 확대된 공동체로의 타자의 무조건적인 맞아들임에 대한 질문을 개시한다. 그때 이후 이 공동체는, 환대라는 개념의 윤리적 힘에 의해 완전히 탈중심화된다. 어떤 공동체를 창설하는 분리의 법, 항상 이 분리의 법 아래에서이긴 하지만, 촉각에 의해 동물이 나를 맞아들인다. 왜냐하면 동물들에 권리를 준다는 이견이 많은 문제 이전에, 촉각의 물음은 동물들과의 공동체를 만든다는 가능성 때문에 중요한 것이기 때문이다. 이 동물들의 권리라는 관념은, 인간인 살아 있는 것과 인간이 아닌 살아 있는 것을 연결시키는 촉각적 공동체의 바깥에서는 의미가 없다. 이 촉각적 공동체는 접촉contact의 공동체이며, 즉 자기와의, 그리고 타자와의 -촉각co-tact의 공동체이다. -촉각은동물이 그러한 전적인 타자(tout autre)와의 함께avec이기 때문에, 자기와의 함께이기도 하다. 그래서 데리다의 동물 윤리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바로 촉각에 의해 동물과의 공동체를 만든다는 것이다. 아마 이것이야말로 분리의 법을 전제로 하는 특이한 동물 윤리를 잘 가다듬기 위해 필요한 것이리라. 이 분리의 법은, -속에 반하는 것이 아니냐고 생각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생기는 것은 정반대의 것이다. 왜냐하면 이 발명해야 할, 도래할 공동체는, 그것이 전적인 타자인 동물에 대해 열릴 수 있는 경우에만 존재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 어떤 것도, 이 집단을 포함하고 모조리 이어받지 않으면 안 되며, 그것을 어떤 자연적, 유기적, 혹은 법-제도적인 전체성으로 제한해서도 안 된다. “이렇게 촉각은, 존재에 있어서, 존재처럼, 존재자의 존재처럼, 함께l’avec(cum 혹은 co-)[주15]의 접촉이며 그것은 타자와의 함께처럼 자기와의 함께이기도 한 함께이다 접촉으로서의 함께이며, -촉각으로서의 공동체일 것이다Le toucher serait ainsi, dans l’être, comme être, comme l’être de l’étant, le contact de l’avec (du cum ou du co-) avec soi comme avec l’autre, l’avec comme contact, la communauté comme co-tact.”[주16] 동물의 촉각의 물음에 의해 모든 정치제도를 쇄신할 수 있는 새로운 정치의 형식, 그런 정치의 형식에 있어서 우리가 발명해야만 하는 것은, -촉각의 공동체이다. 더 이상 상상적인 것도 인간중심주의적인 것도 아닌, 종차별적인 경계를 극복하려는 공동체를 발명함으로써, 민주주의 그 자체야말로 동물적이 되어야만 한다. 데리다의 도래할 민주주의는 지금, 거기에-있는-동물의 민주주의(démocratie animale-là)에 의해 살아 있는 것이다!


[주15] 일역자cum함께라는 뜻을 지닌 라틴어 전치사이며, co-는 프랑스어에서 함께라는 뜻을 지닌 접두사이다.

[주16]  J. Derrida, Le toucher, op. cit., p.133.〔『触覚前掲225

 

Patrick Llored, «La mort, l’animal et le toucher : Une déconstruction de l’animal heideggerien par Derrida». Reprinted by permission of Patrick Llored

桐谷慧東京大学ストラスブール大学博士課程

Posted by 상겔스 상겔스

자크 데리다 사후 10



 

0. 들어가며 

...................................................................................................................................................................西山雄二


1. 민주주의의 항상성과 일관성 (Constance et consistance de la démocratie) 

....................................................................................................... Jérôme LÈBRE (일역 松田智裕横田祐美子)


2. 데리다와 랑시에르에게서의 민주주의와 타자의 물음 (La démocratie et la question de l’autre chez Derrida et Rancière)

.............................................................................................................................................................. 亀井大輔


3. 들뢰즈와 데리다두 사람의 운동은 같지 않다 (Deleuze et Derrida, ce n’est pas le même mouvement)

.................................................................................................... Jean-Clet MARTIN (일역 大江倫子西山雄二)


4. 최후의 유대인’ : 데리다유대교와 아브라함적인 것 (« Le dernier des juifs » : Derrida, le judaïsme et l’abrahamique)

........................................................................................................................ Gisèle BERKMAN (일역 佐藤香織)


5. 희생된 동물의 두 개의 신체 자크 데리다의 철학에 있어서 동물-정치 개념에 대한 고찰 (Les deux corps sacrifiés de l’animal. Réflexions sur le concept de zoopolitique dans la philosophie de Jacques Derrida)

............................................................................................................................. Patrick LLORED (일역 吉松覚)


6. 자크 데리다동물성의 시학 무인간적인 것에 관해 (Jacques Derrida. Une poétique de l’animalité. Sur l’anhumain)

..................................................................................................................... Gérard BENSUSSAN (일역 桐谷慧)


7. 고양이눈빛그리고 죽음 (The Cat, the Look, and Death)

............................................................................................................................. Darin TENEV (일역 南谷奉良)


8. 대린 테네브고양이눈빛그리고 죽음에 대한 응답

..................................................................................................................................... 大杉重男南谷奉良山本潤


9. 데리다에게서의 증여와 교환 (Gift and Exchange in Derrida (Derridative)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