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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권자란 예외상태에 관한 결정을 내리는 자를 일컫는다." 칼 슈미트의 유명한 테제이다. 우리는 보통 "주권이란 국가의 최고 권력이다"라고 생각하는 것에서 그친다. 교과서적이며 관습적인 사고이다. 이 말을 곱씹어 보면 동어반복에 불과할 뿐 아무런 의미도 없다(그런 점에서 최고의 슬로건이다.) 그래서 슈미트는 "자연법적인 확실성으로 기능하고, 그것을 거스르는 것이 불가능한 최고의, 즉 최대의 권력 따위란 정치적 현실 속에서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가령 국민주권이라는 말을 생각해 보자.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민주주의'라는 허구적인 체제에 정통성을 임시로 부여하기 위한, 정통성을 임시로 구축하기 위한 용어법일 뿐, 정치적 현상의 실제적 양상들을 설명할 수는 없다. 기존의 법 체계가 전혀 예상치 못했거나 생각지도 못했던 긴급사태에 직면했을 때, 당연히 법의 틀 바깥에서부터의 신속한 결정이 요청된다. 이 시점에서 무엇인가 어떤 결정을 내리는 구체적인 누군가가 있다면, 그를 주권자라고 말할 수 있다. 그래서 슈미트는 이렇게 말한다. "법 생활의 현실에서 중요한 것은 누가 결정하는가이다. 내용의 올바름을 묻는 것과는 별개로 결정권의 소재를 물을 필요가 있다."

"예외는 보통/통상의 사례보다 흥미롭다. 정상상태는 그 무엇도 설명하지 못하며, 예외가 모든 것을 설명한다. 예외는 통례/규칙에 의해 뒷받침될 뿐만 아니라 통례/규칙은 원래 예외에 의해서만 산출된다. 예외에서야말로 현실 생활의 힘이, 반복되어 경직된 관습적인 것의 껍질을 부셔버리는 것이다."
이러한 예외상황에 직면한 주권자의 결정은, 마치 신학에서 말하는 신의 '기적'과 닮았다고 슈미트는 지적한다. "현대 국가 이론의 중요한 개념들은 모두 세속화된 신학 개념이다."

그런데 한스 켈젠을 필두로 한 규범주의적 법학은 이러한 '기적'을 배제하려고 한다고 슈미트는 비판한다. 켈젠의 논의는 법적 현상으로부터 인간의 자의성을 철저하게 제거함으로써 이러한 법적 현상을 자연과학처럼 순수한 통일성과 정합성을 지닌 것으로 파악하려고 하는데 그 특징이 있다.(<순수법학>)
슈미트가 보기에 이것은 구축된 체계와 모순되는 것을 모조리 무시함으로써 겨우 성립되고 있는 것에 불과하며, 본래의 아포리아와 대결할 생각은 눈꼽만치도 없는 안이한 태도에 지나지 않는다. "대개 모든 정치이념은 인간의 <본성>에 대해 어떤 태도를 결정하는 것이며, 인간이 <선천적으로 선>한 것인지, <선천적으로 악>하게 된 것인지 둘 중 하나를 전제로 한다."
루소만 하더라도, 또는 아나키스트만 하더라도 성선설을 전제로 하여 예정조화적인 이상사회를 마음속에 그리고 있다. 그러한 인간의 본래적 성질을 국가권력이 왜곡하고 있다며 비판하는 것이다. (루소나 아나키스트와 성선설의 연결은 슈미트의 생각일 뿐, 나의 생각은 아니다.)

한편 카톨릭시즘에 입각한 드노소 코르테스나 드 메이스톨 등은 원죄를 진 인간이 저지를 수 있는 '악'을 무서워하면서 그러한 '악'을 막을 수 있는 것은 신의 '기적'뿐이라고 생각한다. 구체적으로는, 무오류성을 본질로 한 교회적 질서에 대한 명령이라는 형태로 인간의 악을 억누를 것을 요구하는 것이다.
그렇지만 이렇게 인간관에서는 서로 정반대되는 두 견해는, 질서를 산출하는 계기로서의 결정자를 어떤 권위자로 상정하고 있다는 점에서 사실상 동일한 구도를 취하고 있다. 즉 "바뵈프에서 시작하여 바쿠닌, 크로포트킨, 오토 그로스에 이르는 아나키스트의 독트린은 모두 <민중은 올바르며, 당국은 부패할 것>이라는 공리를 중심으로 전개된다. 반면에 드 메이스톨은 그와는 정반대로, <그것이 존속하기만 한다면, 당국은 그 자체로 선이다>라고 언명한다." 즉, 전자에서는 '민중'이, 후자에서는 신의 권위가 절대적인 것이다.
그리고 이 둘은 모두 부르주아적 자유주의를 부정한다. 왜냐하면 "자유주의라는 것은 정치적 문제 하나하나를 모두 토론하고, 교섭/합의의 재료로 삼는 것과 마찬가지로, 형이상학적 진리마저도 토론으로 해소해 버리고자 한다. 그 본질은 합의/교섭이며, 결정적 대결, 유혈이 낭자한 결절을 어떻게든 의회의 토론으로 바꾸어 영원한 토론에 의해 영원히 정체"시켜 버리기 때문이다.
"토론의 정반대는 독재이다. 어떤 경우에서도 극단적인 사례를 상정하고 최후의 심판을 기다린다는 것이 코르테스와 같은 정신에서의 결정주의에는 포함되어 있다. 그러므로 코르테스는, 한편으로는 자유주의자를 경멸하는 동시에, 다른 한편으로 아나키스트적 사회주의가 그의 불구대천의 적이기는 하지만 이것을 존중하고 거기에 악마적인 위대함이 있음을 인정하는 것이다."

예외상태라는 구체적으로 실제적인 국면에서의 결단은 절대적이다. 끝없는 논의에 의해 문제를 재고하거나 이해대립하고 있는 조건을 서로 제시하여 타협하는 일 따위는 전혀 없다. 드노소 코르테스는 신의 기적을 바랬지만, 시대는 이미 바뀌었다. 신의 권위도, 왕권신수설의 군주제가 지닌 정통성 역시 이미 무너져 버렸고, 민중의 의지가 왕좌에 오르려고 하고 있기는 하다. 결단을 정당화할 수 있는 근거는 어디에도 없는 것처럼 보인다. 이런 경우 어떻게 하면 좋을까? "무에서 만들어진 절대적인 결단, 즉 독재밖에는 없다." 슈미트는 이렇게 결론내린다.

* 슈미트는 결정이라는 형식에 초점을 맞추고 있기는 하나, 결정되는 정치적 내용에 관해서는 무관심하다. 결정이라는 작용의 결과로서 나타나는 정치체제는 파시즘이든, 자유주의나 민주주의든, 그 어디에도 존재한다. 어떻게 하든 간에 대체가능한, 즉 가치적인 우열을 벗겨낸 수준에서 슈미트는 정치적 현상을 주시하고 있다고 생각할 수 있다. 분명히 이것은 허무주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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