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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크 데리다 사후 10



 

0. 들어가며 

.........................................................................................................................................................西山雄二


1. 민주주의의 항상성과 일관성 (Constance et consistance de la démocratie) 

............................................................................................. Jérôme LÈBRE (일역 松田智裕横田祐美子)


2. 데리다와 랑시에르에게서의 민주주의와 타자의 물음 (La démocratie et la question de l’autre chez Derrida et Rancière)

.................................................................................................................................................... 亀井大輔


3. 들뢰즈와 데리다두 사람의 운동은 같지 않다 (Deleuze et Derrida, ce n’est pas le même mouvement)

.......................................................................................... Jean-Clet MARTIN (일역 大江倫子西山雄二)


4. 최후의 유대인’ : 데리다유대교와 아브라함적인 것 (« Le dernier des juifs » : Derrida, le judaïsme et l’abrahamique)

.............................................................................................................. Gisèle BERKMAN (일역 佐藤香織)


5. 희생된 동물의 두 개의 신체 자크 데리다의 철학에 있어서 동물-정치 개념에 대한 고찰 (Les deux corps sacrifiés de l’animal. Réflexions sur le concept de zoopolitique dans la philosophie de Jacques Derrida)

................................................................................................................... Patrick LLORED (일역 吉松覚)


6. 자크 데리다동물성의 시학 무인간적인 것에 관해 (Jacques Derrida. Une poétique de l’animalité. Sur l’anhumain)

........................................................................................................... Gérard BENSUSSAN (일역 桐谷慧)


7. 고양이눈빛그리고 죽음 (The Cat, the Look, and Death)

................................................................................... Darin TENEV (일역 南谷奉良)



8. 대린 테네브고양이눈빛그리고 죽음에 대한 응답

........................................................................................................................... 大杉重男南谷奉良山本潤


9. 데리다에게서의 증여와 교환 (Gift and Exchange in Derrida (Derridative)

............................................................................. Darin TENEV (일역 横田祐美子松田智裕亀井大輔)

 

이하 몇 편의 글이 더 있으나 생략.



자크 데리다 사후 10년


고양이, 눈빛, 그리고 죽음

猫、眼差し、そして死

ダリン・テネフ

(訳=南谷奉良)

일본어 번역본은 여기를 클릭.


ダリン・テネフ講演会「文学理論において、いかにしてモデルを構築するべきか?」報告 星野 太

1

 이 논고에서 나는 여러분 ― 이런 나를, 이 대학에, 그리고 이 세미나에 초대해준 여러분 ― 과 함께, 다종다양한 고양이들에게 우리의 눈빛[눈길, 시선]을 향하고 싶다. 이 ‘맹도묘[盲導猫, 시각 장애인의 길을 안내해주는 고양이]’가 되어주는 것이, 데리다의 『동물을 쫓다, 고로 나는 있다[동물이다]』[이하 『동물을 쫓다』로 약칭]의 고양이이다.1) 나는 그녀의 흔적을 쫓음으로써, 고양이의 본질이 아니라, 고양이에 얽힌 전통과 담론 속에서 어떤 윤곽을 이루는, 고양이의 단독성을 추구하고 싶다. 그런 담론의 계보를 망라하여 제시하는 것은 이 글의 목적이 아니며,2) 데리다의 저작에 등장하는 고양이를, 고양이와 눈빛, 그리고 죽음이 맺는 관계를, 그 전통과 담론이 고유한 모습으로 부각시키는 모양을 보여주고 싶다.

 이런 기획의 관심 중 하나에는, 데리다 자신의 타자와 ‘단독적인 것’의 이해를 고려하면서 그의 텍스트에 등장하는 고양이의 ‘단독성’을 생각하는 것이 있다. 데리다의 『동물을 쫓다, 고로 나는 있다[동물이다]』의 발간 후에는 이 책에 대한 엄청난 양의 비평이 작성되고, 이 프랑스 철학자가 묘사하는, 고양이와 함께 사는 장면이 되풀이되어 논해졌다. 현실에서 일어난, 그러나 상상적이기도 한 이 장면은, 지금은 꽤 유명한 에피소드가 됐다. 어느 날 아침의 데리다의 집의 욕실에서 일어난 일이다. 데리다의 고양이 ― 암코양이 ― 가 “그녀의 아침을 달라고”, 욕실에 있는 그의 뒤를 따라오자, 거기서 그녀는 데리다가 알몸인 것을 보고 “욕실에서 나가달라고 요구”했다는 것이다(L’animal... p. 30-31 ; The Animal... p. 13; 『動物を追う』 34頁. 이하 프랑스어판, 영어판, 일본어판의 순서로 인용 쪽수를 표기한다). 고양이에게 알몸이라는 것을 보이고, 그 철학자는 부끄러움을 느끼지만, 그것은 그가 마침 알몸의 상태를 고양이에게 보였기에 부끄럽게 느꼈다는 것이 아니다. 그 자신이 부끄러움을 느꼈기 때문에 부끄러워하고 있는 것 자체에 부끄러움을 느꼈기 때문이다. 이 기묘한 수치의 경험은, 데리다가 부르는 바의 ‘수치의 반사’(『동물을 쫓다』 18頁)를 산출한다. 데리다는 그 고양이가 진짜 고양이라는 것을 강조하고, 어떤 의미에서 “본질의 고양이”라고 말하는지를 명확히 하려고 한다 ― “알몸의 나를 바라보고 있는 것은 ‘실재의 고양이이다’라고 내가 말하는 것은 그 대체 불가능한 단독성[singularity]을 각인[표시]하기 위해서이다[cʼest pour marquer son irremblaçable singularité]”[L’animal...26/9/27).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데리다가 그의 고양이와의 현실적/상상적인 장면을 제시하고 있는 [프랑스의] 스리지 라 살에서의 연구집회를 앞두고, 『죽음을 주다』(1990)의 시점에서, 이미 고양이와 단독성을 연결시키고 있다는 것이다 ― “다양한 단독자에게, 즉 저 사람이나 이 사람이 아니라, 바로 이 사람이나 저 사람, 어떤 남성 또는 어떤 여성에, 이런 나를 결부시키는 것은 언제까지나 정당화되는 것이 아니다. … 당신이 몇 년 동안 매일아침 먹이를 주며 키우고 있는 고양이를 위해, 시시각각 전 세계의 다른 고양이들이 굶어죽고 있는 것을 도대체 어떻게 정당화할 수 있을까?”[우카이의 번역을 참고로 일부 변경함].3) 고양이를 이용한 예증은 놀라운 것이 아니지만, 『동물을 쫓다』를 읽은 후에는, 위의 인용은 다시금 이채를 내뿜는 것 같다. 『죽음을 주다』에 후속되는 『동물을 쫓다』가 밝히는 것은, 위의 인용부 안에 있는 ‘당신’도 또한, 자[서]전적인 ‘나’로서 해석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때 데리다는 마치, 내가 얘기하는 것은 나와 내 고양이에 대해서이다, 라고도 말하는 것 같다. 그렇다면 우리는 『죽음을 주다』에 그려지고 있는, 그가 고양이에 먹이를 주고 있는 아침 장면은, 『동물을 쫓다』에서 그려진 아침 욕실의 장면 뒤에 일어났다고 추측해도 좋을지 모르겠다. 후자의 장면에서 데리다는, 이 단독적인 고양이에 의해, 각인[표시]되는 ― 비유적인 고양이가 아니라 ― 실재하는 고양에 의해, 자신의 알몸을 보인 것이다.

 그렇지만 단독성으로서의 고양이를 생각하는 것에는, 그것으로서 고유한 곤란한 문제가 뒤따른다. 우리가, 이 구체적인, 단독적인 고양이에 주의를 기울이는 것은, 예를 들어 타자성(otherness)이나 전적인 타자[the wholly other) 같은 일반 개념의 도식을 거부하는 것으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편으로, 이타성[他性, alterity]이나 타자성[otherness], 타자[the other]라는, 현재에는 매우 많이 보급되어 있는 개념으로는 환원할 수 없는 단독성을 생각하는 것이야말로, 데리다가 『동물을 쫓다』에서 착수하려고 한 문제의 하나이다. 실제로 데리다가 “그들이 ‘동물’이라고, 그리고 예를 들어 ‘고양이’라고 부르는, 전적인 다른 것”[plus autre que tout autre, 전적으로 다른 것보다 더 다른 것]이라고 말할 때(L’animal... 29/11/31), 그것은 모종의, 데리다가 자신에게 겨눈 비판이 되고 있지 않은가. 혹은 매우 안이하게 타자성의 개념을 사용하고, 마치 그 타자가 형이상학과 서양적 사고의 모든 문제에 대한 보편적 해답인 양 행동하는 해석자들에 대한 비판이 되고 있지 않은가. 실제로, 데리다의 저작에 있는 문구를 알맹이가 없는 채, 무비판적인 형태로 반추하기를 원하지 않은 독자에게, 단독성과 타자의 관계를 재개념화하는 것은, 진지하게 물어야 할 과제이다. ‘타자’라는 단어를 사용하지 않는 텍스트는 존재할까? 후기 데리다에게, 그런 텍스트가 과연 있기라도 하는 것일까? 만약 ‘다른 것’의 단독성을, 일반개념으로 환원하지 않는다면, 그때 일반적 ‘타자’는 어떻게 될까? 그러나 후기 데리다의 저작이 되면, 타자성을 각각의 구체적인 타자로, 그때마다 단독적인 타자로 분해되는 ― 탈구축이라고 해야 할까? ― 경향이 있는 듯하다.

 하지만 주목해야 할 것은, 데리다가 단독적인 이 타자 저 타자에 대해 말할 때에는 ― 그것이 아이와 고양이이든, 혹은 유령이든 ― 그때마다 자(서)전적인 순간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동물을 쫓다』의 고양이의 사례에서 명백하다. 데리다는 (사실 한 마리 이상의) 고양이를 길렀다.4) 다만 자(서)전(autobiography)이라고 하더라도, 그것은 데리다 식의 어법으로 이해할 필요가 있다. 즉, 단순한 개성[individuality]이나 개체[個] 자기성(ipseity)의 저쪽에 있고, 자기(auto) 속에 각인되면서도, 자기를 구성하는 타자나 단독성이 혼성되어 있다는 의미에서의 자(서)전이다. 데리다는 ‘나’의 존재에 선행하는 ‘나’ 속의 ‘타자’에 대해 말하는 것인데, 내가 여기서 강조하고 싶은 것은, 항상 하나 이상의 타자가, 하나 이상의 단독성이 존재하고, 그것들이 상관적으로 관계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 글에서는 이런 상관적으로 관계하는 형상(figure]을 ‘공형상’[configuration]이라고 부르고 싶다. 다양한 공형상이, ‘자(서)전’의 ‘자기’를 형성하는 가운데, 동시에 철학적 사색이 개시되는 것이다. 어떤 철학도 자(서)전적인 것을 벗어나기 어렵다. 어떤 공형상의 흔적을 재-추적하는 것은, 단순히 자(서)전적 사실 속에서 대답을 찾아낸다기보다는, 개념상의 고고학적 실천이 무엇보다 필요하다. 이 논고에서는 “왜 고양이인가?”에 대해 나는 대답을 삼가고, 그렇게 묻지도 않겠다. 다만 그 공형상이란 무엇인가, 데리다와 함께 있는 고양이의 자(서)전적인 공형상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질문을 제기하고 싶다.

 공형상은 자(서)전적이지만 ― 혹은 바로 이 때문에 ― 끊임없이 다른 저작이나, 상이한 전통을 참조하면서, 다양한 담론에 의해 중층결정되고 있다. 그 중 하나로서, 고양이에 얽힌 담론이 있다. 『동물을 쫓다』의 첫머리에서 데리다는 그 담론(혹은 ‘담론들’이라고 해야 할까? 왜냐하면 항상 하나 이상의 담론이 있기 때문이다)을 명확한 형태로 언급하고 있다. 이 담론 속에서 고양이들은, 우의(寓意)나 은유, 환유로서 사용될 뿐 아니라, 야생의 동물과 길들여진 동물의 경계라는 까다로운 분리선을 지시하는 수단으로서, 혹은 애완동물이나 신성한 존재의 화신으로서도 유용되기도 한다. 또한 이에 덧붙여, “고양이의 눈을 통해 보다”라는 시도에서 이용되기도 한다.

 이 글에서는 이 공형상 중에서도, 내게 결정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고 생각되는 요소 중 세 가지, 즉 ‘고양이’와 ‘눈빛’과 그리고 ‘죽음’을 다루겠다. 이 세 가지가 함의하는 바인 단독적인 공형상의 일부를 이루고 있는 철학적 진술을 재-구축해보자.

 고양이와 눈빛, 그리고 죽음을 고른 이유는 무엇인가? 사실 고양이와 눈빛, 죽음의 공형상은, 희미한 윤곽이기는 하지만 이미 데리다의 저작의 꽤 초기에 그 모습을 드러냈다. 1974년에 출판된 『조종』5)의 첫머리, 리토레 사전으로부터의 인용에서, 고양이와 눈빛, 그리고 죽음이 이미 상관적인 관계를 맺고 있는 것이다. 데리다가 리토레 사전에서 공형상을 끄집어낸 구절을 인용하면, 영역판에서는 다음과 같다.


Catafalque(명사) 관(棺)이나 죽은 자를 본 뜬 상을 두기 위해, 경의를 표시하고 교회의 중앙에 설치된 단[台]. … <어원> 이탈리아어 catafalco ; 속(俗) 라틴어 catafaltus, catafaldus, cadafalle, cadapallus, cadaphallus, chafallus. 뒤 강주[17세기 프랑스의 역사가, 문헌학자 사전 편찬자)에 따르면 cata는 속 라틴어의 catus, 동물과 연관지어 ‘고양이’로 불리는 전투용 무기에서 유래한다. 또 디에츠에 따르면 catere(보기, 주시하기)에서 파생된다. 가장[du reste], catus(고양이)와 cater(주시하기)는 같은 어근을 공유하고 있으며, 이 두 개의 어원은 일치한다. 남은 falco에 대해서는 속 라틴어의 이형(異形)들에 p이 나타나는 것부터가 독일어 balk(balcon을 참조)에서만 있을 수 있다. catafalque는 교수대(scaffold)와 같은 단어이다(échafaud을 참조).6)

 

물론 이것은 그저 인용이며, 데리다 자신이 쓴 것은 아니라고 말할 수도 있다. 그러나 『조종』이 이용하는 논리는 그런 주장을 뿌리친다. 데리다가 리트레 사전 안의 이 항목을 인용하게 된 이유, 그리고 그의 텍스트상에서는 어떤 부분을 괄호에 넣고, 어떤 부분은 그대로 두고 있는(예를 들면 고양이(catus)와 바라보다(catere)에 공통되는 어근을 데리다는 언급한다) 이유를 생각하면, 이 인용을 무시할 수 없게 될 것이다.

 이처럼 ‘죽음’과 관련된 ‘눈빛’과 ‘고양이’가 있다. 어원적으로는 고양이와 눈빛은 동일한 것이며, 이것이 죽은 자의 신체를 눕힌 관이 놓인 단의 토대가 된다. 이 단 위에서 죽은 자는 바라보이고, 아마도 명예를 얻게 된다. 마치 고양이가 바라보이게 되고 있는 것처럼. 이미 여기서, 죽은 자의 몸의 문제와 그것에 대해 이루어져야 할 조치가, 적절한 처치 방법이 암묵적으로 제시되고 있다. [이 단 위에 놓여 있는 동안] 시체는 땅에 매장하거나, 화장해서 재로 할 것이냐는 결정되지 않은 채로 남아 있다. 죽은 자는 높은 장소로, 지상보다 높은 곳에 있는 대 위에서 허공에 매달려지고宙吊りにされ,7) 그 모습은 마치, 두 번째의 죽음을 기다리는 듯하다. 환상적인 장면이 독자 앞에는 확 열리고, 어떤 환상이 이미 그 효력을 발하기 시작한다. [죽은 자를 향한] 눈빛(주시하는 것)은 마비된다. 마치 그 자신의 한계의 끝을 보려는 것처럼. 죽은 자의 얼굴에 떠오르는 죽음을 바라보며, 죽음과 서로 마주보고 있다고 하는 양. 이중으로 된 환상상의 주시하는 시선이 삶의 문턱‘과’ 죽음의 문턱에 쏟아진다.

 아마 내가 지금 한 『조종』의 몇 구절의 해석은 상당히 자의적으로 보일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데리다가 1974년의 『조종』 이후, ‘고양이’과 ‘눈빛’, 그리고 ‘죽음’의 공형상을 다루지 않을 때의 얘기이다. 데리다의 텍스트에서는 때때로 세 가지 요소 중 두 가지만 명시적으로 모습을 드러내는 경우가 있다. 예를 들어 『샛길』8)에서는 고양이와 눈빛, 「애도의 힘에 의해」9)에서는 눈빛과 죽음, 『죽음을 주다』에서는 고양이와 죽음처럼.


2

 여기서 구체적인 고양이들로 눈을 돌리고 싶지만, 내가 ‘고양이’라고 할 때, 그것은 결코 ‘진짜 고양이’라는 뜻은 아니다. 문학 속에 등장하는 고양이는 대부분 경우, 우의(寓意)와 은유, 환유로만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사실 어떤 작품에 등장하는 고양이가 그대로 고양이인지, 다른 뭔가를 상징하고 있는지 여부를 결정하는 것은 으레 거의 불가능하다. 한편으로는 이것은 문학에 내재하는 하나의 위험함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모든 것이 그것과는 다른 것을 상징한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이 사실은 때로 고양이의 불가해함으로 여겨지는 것과도 관련되어 있다. 고양이는 수수께끼 같고, 인간은 고양이를 바라보지만 고양이를 이해하는 것은 아니다. 이런 고양이에 얽힌 담론은 아마 고대 이집트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지만, 여기에서 일단 언급해야 할 것은 보들레르의 고양이에 대한 시 『악의 꽃』과 보르헤스의 소네트 「한 마리의 고양이에게」 등의 작품에서 보듯이, 근대 시대에 이르러서도, 고양이에 얽힌 담론이 계속 생겨나고 있다는 것이다. 수수께끼로서, 비밀로서 간주되는 고양이는, 이중적 역할을 맡는다. 한편으로, 고양이는 그 자신에 주목을 끌고, 점점 더 정체모를 것으로서 모습을 드러낸다. 다른 한편으로, 고양이가 수수께끼와 비밀을 안고 있는 한, 고양이는 이해 불가능한 존재로서 머문다. 달리 말하면, 그런 고양이는 타자로서 머물며, 기지(旣知)의 것 혹은 알 수 있는 것으로 환원할 수 없는 것에 머문다. 이리하여 고양이는 우의(寓意)나 수사적인 장치를 불러들이는, 뭔가 다른 것 ― 여성 혹은 단순히 초상적인 것 ― 으로 그 모습을 바꾸기 시작하는 것이다.

 이른바 고양이의 우아함이나 품위도 그 위에 보태지고, 고양이의 수수께끼 같은 성격이 여성과의 유비를 만들어내는 것을 가능케 해 왔다. 물론 여성을 수수께끼 같은 존재로서 보는 것은 자연스럽게 생긴 것이 아니라, 프로방스 시와 함께 유럽에 처음 나타난 어떤 조류의 역사적 산물이며, 단테와 프란체스코 페트라르카 등 당대의 시인들은, 그들이 사랑한 여성을, 자신들에게는 손이 닿지 않을 정도로 떨어져 있어서 거의 이해할 수 없는 존재로서 묘사했다.10) 그래서 아마 유럽에서의 최초의 유명한 고양이들이, 단테와 페트라르카의 고양이인 것은 당연하다고 할 수 있다. 단테의 고양이는 그 앞발로 촛불을 쥐고, 단테의 저녁식사와 독서를 비춰졌다고 전해지는데, 페트라르카의 고양이가 되면, 그 고양이는 라우라[연애서정시 『칸초니에레Canzoniere』에 등장하는 영원의 여성]의 라이벌이라는 흥미로운 에피소드도 있다. 페트라르카는 그의 고양이에 방부처리를 해서 미라로 만들고, 그 무덤에 “어떤 토스카나 시인의 마음에는 이중적 사랑의 불길이 타올랐다. 바깥인 큰 불길을 이런 나를 위해. 안인 작은 불길을 라우라를 위해”라는 묘비명을 썼다고 한다. 여기서도 고양이와 죽음이 결부되어 있는데, 고양이는 무덤 아래서 소리를 내는 미라로서, 죽어서도 영원히 사는(sur-vivre) 고양이이다. 고양이를 미라로 만드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미라는 죽은 사람을 구현할 뿐 아니라, 그 사람을 삶과 죽음 사이에서 중지시키고, 죽음의 수용을 거부하는 것이기도 할 것이다. 죽은 자를 나타내는 미라는, 사체가 그것 자신의 이미지로 변화하는 것을 전제로 한다. 사체 그 자체는 땅속에 묻히지 않고, 또한 화장되지도 않고, 아직도 자신의 죽음을 지속시키는 방법을 찾고 있는 듯하다.

 고양이와 여성이 어떤 형태로든 유비를 이루는 전통은 근대의 도처에서 볼 수 있으며, 보들레르부터, 훌리오 코르타사르, 미셸 투르니에에 이르기까지 찾아볼 수 있다. 『동물을 좇다』에서 데리다는, 그를 바라보고 있는 고양이와 여성을 환유적으로 연결한다. 고양이의 시선[눈빛]에 노출된 알몸이라는 것의 부끄러움은, 여성이 그 욕실에 들어왔다고 한다면, 훨씬 더 참기 어려운 것이 된다고 데리다는 말한다. ― “그런데 이런 나, 수컷인 이런 나는 깨달았다고 믿고 있는 것이다, 이 방에 여자가 있기에, 고양이에 대한 관계 속에, 내가 알몸인 것을 보고 있는 알몸의 고양이, 그리고 내가 알몸인 것을 그것 자체가 보고 있는, 그것을 내가 보고 있는 것을 보고 있는 알몸의 고양이의 눈빛 속에, 모종의 불이 켜졌듯이. 그 불은 빛나고, 향기처럼 방안을 맴돌기 시작한 질투의 연기와 함께”(86/58/113). 이로부터 데리다는 다음 장면으로 옮겨간다. 그가 고양이의 눈빛[시선]에 노출되어 있는 그 방에, 고양이 외에 거울도 있다고 하는 장면이다. 이 두 개의 상황에서 흥미로운 것은, 어느 쪽이든 데리다는 고양이와 거울, 여성과 자신을 동일시하고 있다기보다는, 그의 정체성을 상실한 것처럼 보인다는 것이다. 처음 장면의 기술을, 데리다는 다음과 같이 끝맺는다 ― “나는 여자이며, 그 여자는 또한 남자이다”(86/58/113). 거울도 또한 방 안에 있는 두 번째 장면에서는, “더 이상 우리는, 우리가, 그때, 모든 남자, 모든 여자가, 몇 명, 몇 마리인지 모르다. 그리고 나는 주장한다, 자(서)전이 시작된 것은 그때라고” 말해진다(86/58/113). 이처럼 데리다는 고양이와 여성 사이에 병행관계를 만들어내는 전통을 집어들어 그것을 탈구시켜 가는데, 그때, 그가 묘사하는 두 개의 상황의 잠재적인 연결, 고양이와 여성, 고양이와 거울의 연결을 설명하는 것은 없다. 언뜻 보면 데리다는 여성과 거울의 역할의 공통점을 듦으로써 은근히 고양이와 여성이 비슷하다는 것을 내비치는 것 같기도 하다. 여자가 고양이에게 있어서 거울이라면, 여자는 남자에 대해 고양이를 반사할 것이다. 남자는 보고 있는 남자이기도 하다면, 보이고 있는 남자이기도 하니까. 거울 속의 이중화에 의해, 여성은 고양이로, 고양이는 여성으로 모습을 바꾼다. 다른 한편, 이런 해석이 들어맞는 것은, 거울 속에 누가 반사되고 있는지를 우리가 아는 한에서, 즉 우리가 남자 주인공의 관점을 특정하고, 이것과 동일화할 수 있는 경우에 한정된다. 데리다의 이야기 속에서, 이것은 난점이다. 거울이든 여성이든, 데리다가 그 방에 제3자를 입실시킨 순간에, 남성의 관점이라는 입장은 중지되고宙づりにされ, 동시에 여성과 고양이의 안정된 병행관계를 만들어낼 가능성도 중지된다宙吊りにされる. 그때 우리에게는 더 이상 누가 누구를 보고 있는가, 누가 누구를 반사하고 있는가를 모르게 된다. “더 이상 우리는, 우리가, 그때, 모든 남자, 모든 여자가, 몇 명, 몇 마리인지 모른다”는 것이다. 남성은 ‘여성’ 혹은 ‘그녀 ―― 고양이’, ‘나비[고양이의 애칭]’가 되고 있다. 마치 그가 거울인 그를 반사하는 거울이 반사를 반사하듯이. 이때, 고양이의 반사와 여성의 반사, 그리고 남성의 반사가 있다. 단 데리다는 고양이가 보고 있을 것, 고양이가 말할지도 모르는 것, 고양이가 생각하고 있는 것에 대해 이해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다만 고양이의 눈빛에 완전히 사로잡힌 듯, 이 고양이에 대해서는 거의 아무것도 말하지 않는다. 데리다는 그 고양이가 몇 살인지, 어느 정도의 사이즈인지, 그 털 색깔에 대해, 그 고양이가 어디서 잠을 자고 먹는지에 대해 아무것도 쓰려고 하지 않는다. 그는 그 자신의 입장, 그 자신의 자기를 불안정하게 하는 형태로 그 장면을 묘사하는데, 그가 상대하고 있는 그 고양이라는 타자에 대해, 그 어떤 형태로도 지배적인 지식을 가진 기색도 보이지 않고, 그녀를 이해한 느낌도 들지 않는다. 데리다가 그의 고양이에 완전히 사로잡혀 있다고 말할 때, 그는 그 단독적인 생물이 그를 바라보고 있는 모양에 완전히 사로잡혀 있는 것이다.

 앞서 말했듯이, 고양이의 눈빛/시선에 홀린 사태는 결코 데리다의 사례에서 시작된 것이 아니며, 포나 보들레르, 훌리오 코르타사르 등의 작가들에게서도 찾아볼 수 있다.

 사실, 근대문학은 특히 고양이의 눈빛에 매료된 구절이 있다. 고양이에 얽힌 담론에는 두 개의 전통이 있는 듯하다. 즉, 하나에는 고양이를 외부에서 바라보는 전통이, 다른 하나에는 고양이의 시선을 통해 보려고 하는 전통이 있다.

 그래서 어떤 전통에서는, 시인의 응시 대상이 된 고양이의 응시가 그려진다. 고양이에게 바라보여지고, 시인이나 작가는 그 눈빛에 매료되지만, 그들은 그 고양이를 외부의 관점에서 바라보고 있을 뿐이다. 포, 보들레르, 릴케, 보르헤스, 코르타사르는 이 전통의 일족이다. 고양이가 이쪽을 바라보거나, 세계를 바라보거나 할 때, 이런 작가들의 누구 한 명도, 그 고양이 자체에 보이는 것을 말하려고는 하지 않는다.

 그러나 한편으로, 페트라르카의 고양이에 이어진 근대문학은, 고양이의 눈빛에 매료됨으로써, 또한 별개의 전통을 산출하고 있으며, 어떤 시인이나 작가들은 마치 고양이의 내부의 관점에서 묘사하는 시도를 실천해왔다. 이 작가들은 고양이에게 언어 능력을 주고, 고양이를 자(서)전적 동물로 변신시킨 것이다. 그 내적 관점의 장치에는, 고양이에게 말하게 하고, 고양이에게 보이는 것을 서술한다는 의도가 있었다. 이런 전통에 대해서는, 더 거슬러 올라가면 루드비히 티크의 희극 『장화 신은 고양이』부터, 현재에도 인기 있는 아동문학, 제임스 보웬의 『내 이름은 밥』 같은 책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예를 찾아볼 수 있다. 보웬의 책에서는 저자와 함께 살게 된 고양이 밥의 얘기가 말해진다.11) 이런 전통의 가장 유명한 작품은 E.T.A. 호프만의 『수고양이 무르의 인생관』일 것이다.12) 그 이후도, 고양이의 자(서)전을 쓴다는 시도를 한다는 작가들이 있으며, 예를 들어 이폴리트 텐의 『어떤 고양이의 생애와 그 철학적 의견』13)이나, 20세기 초반에 발표된 나쓰메 소세키의 『나는 고양이로소이다』 같은 작품이 있다.14)

 지금 언급한 작품은 모두, 고양이의 관점에서 보는 것, 고양이에게 말하게 하는 것, 고양이에게 언어를 주는 것은 똑같은 것처럼 보인다. 즉, 어떤 작품에서든 고양이의 자(서)전은 그 시각의 탄생에서 시작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어떤 작품에서든, 첫 장면은, 처음으로 고양이가 눈을 뜨는 곳에서 시작된다. 시각의 탄생은 우의화의 탄생인 동시에, ‘시각이 없는 상태’를 마치 허구적으로 만들어내는 순간이기도 하다.

 여기서 나쓰메 소세키(夏目漱石)의 『나는 고양이로소이다(我輩は猫である)』의 고양이한테 눈을 돌려보자. 다음의 인용에서 보듯이, 고양이의 자(서)전적인 이야기가 시작되자 이와 동시에 시각이 시작되고 있다는 것은 명백하다. “나는 고양이다. 이름은 아직 없다. / 어디서 태어났는지 도무지 짐작조차 되지 않는다. 왠지 어둡고 눅눅한 곳에서 야옹 야옹 했던 것만은 기억한다. 나는 여기서 처음으로 인간이라는 것을 봤다.” 고양이가 기억하고 있는 첫 번째 것은, 어둑어둑하고 습한 곳에서 울었던 기억이다. 이 장면은 그 이야기를 나[我輩]라는 거만한 ‘나[私]’의 인칭을 사용해, ‘나는[我輩は]’이라고 말하기 시작하는 고양이가, 처음으로 인간을 보는 장면이다. 여기에는 주목해야 할 것이 여럿 보인다. 하나는, 여기서의 눈길의 대상이 인간이며, 인간이 고양이에 의해 보인다는 것이다. 인간이 고양이에게 바라보인다는 것이다. 주지하듯이, 주인공의 모델은 소세키 자신이다. 이처럼 고양이에게 [주인공이] 보인다는 것에 강하게 [마음이] 끌리는 사태가, 이야기의 첫머리에서 써져 있다. 두 번째 점에서는, 그 사람이 그 장면에서 언급되는 유일한 눈길[눈빛]의 대상이라는 것이 거론된다. 세 번째 점의 중요한 사실은, 그 장소가 어둑하고, 뚜렷하게 보이지 않는 장소라는 것이다. 고양이는 어둠 속에서도 본다고 간주되지만, 이 장면에서는 전혀 관련이 없을 것이다. 독자는 오히려 이 고양이와 인간이 만나는 장면을, 똑똑히 시각적으로 인식할 수 없다는 관점에서 생각하도록 만들어진다. 인간이 그 새끼 고양이를 손에 들고 옮길 때 그 인간의 얼굴을 겨우 몸을 구부려 볼 기회가 되자 고양이는 그 얼굴이 ― 적어도 고양이한테 ― 얼마나 기묘한지를 소묘하고 있다.

 인간에게는 무엇이 보일까? 적어도 『나는 고양이로소이다』에서, 그 대답이 명확해지는 것은 아니다. 1장에서는 주인이 고양이 스케치를 시작하는 장면이 있다. 그 장면을 인용하면,


그는 지금 나의 윤곽을 다 그리고 얼굴 주위를 형형색색으로 수놓고 있다. 나는 자백한다. 나는 고양이로서 결코 최상의 성과가 아니다. 키와 좋은 출신과 좋은 얼굴 생김새라고 말해도 굳이 다른 고양이보다 뛰어나리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않아. 하지만 아무리 못생긴 나라도, 지금 내 주인이 묘사하고 있는 묘한 모습은 도무지 생각할 수가 없어. 첫째, 색이 다르다. 나는 페르시아산 고양이처럼 노란색을 포함한 담회색에다 옻과 같은 무늬의 피부를 갖고 있다. 이것만은 누가 봐도 의심할 수 없는 사실이라고 생각한다. 마찬가지로 지금 주인의 채색을 보면, 노란색도 아니고 검은 색도 아니고, 회색도 아니고 갈색도 아니며, 그렇다고 이것들을 섞은 색도 아니다. 그저 일종의 색깔이라는 것 외에는 달리 평할 방법이 없는 색깔이다. 게다가 신기한 일은, 눈이 없다. 더욱이 이것은 자고 있는 것을 스케치했으니까 무리가 없지만, 눈 같은 곳조차도 보이지 않기 때문에 눈먼 고양이인지 잠자는 고양이인지 분명치 않은 것이다.15)

彼は今吾輩の輪廓をかき上げて顔のあたりを色彩っている。吾輩は自白する。吾輩は猫として決して上乗の出来ではない。背といい毛並といい顔の造作といいあえて他の猫にまさるとは決して思っておらん。しかしいくら不器量の吾輩でも、今吾輩の主人に描き出されつつあるような妙な姿とは、どうしても思われない。第一色が違う。吾輩はペルシャ産の猫のごとく黄を含める淡灰色に漆のごとき斑入りの皮膚を有している。これだけは誰が見ても疑うべからざる事実と思う。しかるに今主人の彩色を見ると、黄でもなければ黒でもない、灰色でもなければ褐色でもない、さればとてこれらを交ぜた色でもない。ただ一種の色であるというよりほかに評し方のない色である。その上不思議な事は眼がない。もっともこれは寝ているところを写生したのだから無理もないが眼らしい所さえ見えないから盲猫だか寝ている猫だか判然しないのである。


이 구절은 본래라면 자세하게 논해야 할 대목이지만, 여기서는 세 가지 사항에 머무르고 싶다. (1) 이 장면에서 고양이는 자신이 그려진 스케치를 보고 있다. 거울을 보는 고양이, 텔레비전에 비치는 자신 이외의 다른 고양이를 보는 고양이 등과 같은 데리다의 문제의식을 떠올려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소세키의 고양이는 그림에 그려진 자신을 인식하지 않는다. 이것은 매우 묘한 사태이다. 그 그림은 고양이 자신을 닮지 않고, 고양이 자신과는 달리 보이기 때문에. 어떻게 다를까? 지적해야 할 것은 다음 두 가지 점이다. (2) 하나는 이 그림에 그려진 고양이에게 눈이 없다는 것이다. 눈이 보이지 않은지, 그저 자고 있는지는 판별할 수 없다. 그러나 사실, 그 고양이한테는 눈이 없다. 이 그림을 그리고 있는 인간은, 고양이의 보는 방식에, 고양이를 바라보는 것에 관해서 문제가 있는 것 같다. 그는 그저 눈을 그리지 않을 뿐 아니라, 고양이의 눈을 보는 것을 거부한 것이다. (3) 두 번째는 고양이의 색을 잘못 그렸다. 즉, 주인의 눈에 문제가 있다는 것을 의미할 것이다. 주인은 그의 눈앞에 있는 것을 볼(see) 수 없었던 것이다.

 『나는 고양이로소이다』를 읽어나가 보면, 이 ‘보다’라는 것의 문맥에서는 또 하나 인용해야 할 장면이, 2장의 첫머리에 있다. 새해를 맞아 주인은 어떤 친구가 그림으로 그린 연하장 엽서를 받는다. 그의 친구는 화가였으나, 주인은 고양이의 머리도 꼬리도 분간할 수 없었다. 그런데 고양이는 엽서를 본 순간에 자신의 모습을 훌륭하게 그린 그림이라고 이해한다.


주인은 그림엽서의 색깔에는 감복했으나, 그려져 있는 동물의 정체는 모르기에, 아까부터 고심을 한 것으로 보인다. 도무지 모를 그림엽서라고 생각하면서, 졸린 눈을 품위 있게 뜨고, 천천히 내려다보니 영락없이 자신의 초상화이다. … 누가 봐도 고양이에 다름없다. 조금 안식이 있다면, 고양이 중에서도 다른 고양이가 아니라 나[吾輩]라는 것이 분명히 알기 쉽게 훌륭하게 그려져 있다. 이렇게나 명료한 일을 알지 못하고 그렇게나 고심하느냐 생각하자, 조금 인간이 더 안타깝다.16)

主人は絵はがきの色には感服したが、かいてある動物の正体が分らぬので、さっきから苦心をしたものと見える。そんな分らぬ絵はがきかと思いながら、寝ていた眼を上品になかば開いて、落ちつき払って見ると紛れもない、自分の肖像だ。[…中略…]誰が見たって猫に相違ない。少し眼識のあるものなら、猫のうちでもほかの猫じゃない吾輩である事が判然とわかるように立派にかいてある。このくらい明瞭な事を分らずにかくまで苦心するかと思うと、少し人間が気の毒になる。


 (화가가 아니더라도) 그 인간[사람]은 고양이를 제대로 파악할 수 없고, 그림으로 그려진 것이라면 자신이 기르고 있는 고양이를 인식할 수도 없다. 이 때문에 고양이는 주인에게 이 그림이, 고양이의 그림이라는 것을 이해시키려고 하지만, 주인은 고양이가 전하려 하는 것도 이해할 수 없다. 이 장면은 인간이 어떤 고양이와 다른 고양이를 구별하지 못하고, 또한 원리적으로 고양이의 성질을 이해할 수 없는 사태를 생각할 소지를 마련하고 있다. 고양이의 관점에서 보라고 하는 욕망은, 번번이, 그 불가능성에 의해 이중화된다. 고양이의 관점에서 그리려고 하면, 그 작가의 눈이 보이지 않게 되며, 고양이에 대해 맹목이 되어버린다.

 고양이의 눈빛에 끌리는 근대문학의 강한 관심의 곁에는 언제나, 고양이의 눈을 통해 보는 것의 불가능성의 인식이 붙어 있다. 그리고 아마 그것이야말로 근대문학에 있어서, 고양이의 눈빛, 혹은 고양이에 대한 눈빛에, 시각적인 문제가 항상 생기는 까닭이다.

 고양이의 눈을 통해 본다는 것은 곧 고양이에게 그것으로서의 언어를 준다는 것이다. 외부의 관점에서 그려진 고양이와 내부의 관점에서 그려진 고양이를 구별하는 것은 대체로 얘기할 수 있는 고양이와 얘기할 수 없는 고양이의 구분과 일치한다고 말할 수 있다. 이 때문에 한편에서는 호프만이나 이폴리트 텐, 소세키의 고양이처럼 고양이가 얘기를 하는 경우가 있으면서도, 다른 한편에는 루이스 캐롤의 『거울나라의 앨리스』에서 묘사되는, 항상 같은 것을 얘기하는 검은 아기 고양이도 있다. 데리다도 『동물을 쫓다(動物を追う)』에서 언급하고 있으나, 그 작품 속에서 앨리스는 검은 고양이가 ‘네’를 의미하는가, ‘아니오’를 의미하는가를 이해할 수 없다. 이렇게 많은 것을 얘기할 수 있는 고양이가 있는 반면, 항상 같은 소리를 발성할 뿐 아무것도 말하지 않는 고양이가 있다고 하는 구도가 근대문학 속에는 존재한다.

 이런 문맥 속에서, 제임스 조이스가 『율리시즈』에서 고양이를 작품에 등장시키는 방법을 보는 것이 재미있을 것이다. 레오폴드 블룸이 처음 이 소설에 등장하는 네 번째 에피소드 「칼립소」에는 그가 키우는 고양이도 등장한다. 이 네 번째 삽화는 블룸과 그의 고양이를 그린 장면에서 시작되며, 고양이는 블룸에게 먹이를 요구한다. 자유간접화법을 사용함으로써, 조이스는 블룸의 사고를 통해 고양이를 그리고 있다. 여러 가지 상념이 블룸의 머리에는 오가는 한편, 그 고양이가 하는 것이라고 말하면, 그저 되풀이해서 ‘야옹’이라고 울 뿐이다. 고양이는 같은 음성을 반복해서 발화한다. 하지만 조이스는 그 ‘야옹’이라는 음을 그때마다 다른 형태로 재현하고, 독자에게는 ‘므크그나오(Mkgnao)’, ‘므그크나오(Mgknao)’, ‘므크르크그나오(Mkrkgnao)’ 등과 같은, 고양이의 주장을 음절로 나타내고, 먹이를 주지 않는 블룸에 대한 불만을 표현하는 음의 잇따름이 주어진다. 이리하여 소세키의 고양이의 웅변과도, 앨리스의 검은 고양이처럼 무의미한 같은 음의 반복과도 상이한 줄거리가 마련된다. 이때 고양이는 같은 음을 되풀이하고, 그것을 조금씩 바꾸고, 그녀의 욕구를 전하려고 한다. 고양이는 그 욕구를 전할 때, 일부러 인간의 언어를 줄 필요가 없다. 조이스는 인간에게는 거의 발음할 수 없는 것을 묘사하고 있으며, 블룸의 고양이는 의인법으로 묘사되는 고양이로부터는 거리가 멀고, 어떤 점에서도 비인간적이다.

 일단 언어나 이해와 같은 문제가 도입되면, 텍스트에는 고양이의 눈빛에 대한 강한 관심도 또한 모습을 드러낸다. 처음에는 블룸의 사고 속에 ― “이 녀석은 인간이 말하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인간이 이 녀석을 이해하는 것보다 훨씬. 이 녀석은 자신이 이해한 것은 모조리 알고 있다. 원망스러운 것도 있어서, … 이 녀석에게 나는 어떻게 보일까? 탑 정도의 높이? 아니 아냐, 나를 뛰어넘는 것도 할 수 있어.” 바로 데리다와 마찬가지로, 블룸은 고양이에게 보여지고 있는 자기 자신을 본다. 그리고 이 순간에, 블룸은, 고양이가 그를 바라보고 있을 때, 고양이에게는 그가 어떤 식으로 보이는지, 그녀가 보고 있는 것은 무엇인지 모른다고 인정한다. 그 질문에는 일단 답이 이어지고, 다시 의문으로서 “높은 탑이?”라고 적혀 있다. 블룸이 즉각 부인하는 이 대답 속에는, 동물의 지배에 얽힌 모든 담론이 포함되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높은 탑은 인간의 우월성을 나타내고 있는데, 그런 생각 자체는 즉각 블룸에 의해 부정된다. 그리고 단순히 부정한다기보다는, “아니 아냐, 나를 뛰어넘는 것도 할 수 있어”라고 덧붙임으로써, 인간과 동물의 서열이 뒤집힐 가능성을 시사하고, 게다가 고양이로부터 [인간에게] 발신되는 것[예를 들어 고양이의 말이나 행동, 눈빛]가, 예상 불가능한, 인간을 앞지르는[추월하는] 듯한 존재방식을 나타내고 있다.

 고양이의 눈빛이 다시금 하나의 주제가 된 바로 뒤에, 이번에는 눈 그 자체에 초점이 맞춰진다. ― “그녀는 간절히 바라마지 않은, 부끄러운 듯한 눈을 끔벅이고 이쪽을 바라보며, 불쌍하고 길게 ‘뮤’라고 울고, 그에게 우윳빛 이빨을 보여줬다. 가만히 보면서, 그 검고 가느다랗고 긴 두 눈은 강한 욕망 때문에 점점 가늘어지고, 마침내 두 개의 초록색 보석이 됐다”17)〔U 4: 33-35〕. 보석으로 바뀐 눈은 완전히 대상화되어가지만, 그것은 마치 부끄러움의 의식에 습격당하는 것을 막고, 자꾸자꾸 다가오는 눈빛에서 벗어나려고 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고양이의 눈빛이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블룸의 관심은 고양이의 수염으로 옮아가고, 이 수염에 의해, 빛이라는 문제 자체의, 본다[視る]는 것을 가능케 하는 것이라는 테마가 도입된다. ― “고양이의 그것을 자르면, 쥐를 잡을 수 없다는 것은 정말일까? 왜 그럴까? 어둠 속에서 빛나는 거야, 첨단이”〔U 4: 40-41〕. 이 마지막 부분에는, 빛을 가져오며, 주위를 보게끔 하는 고양이와 같은, 예로부터의 전통적 울림을 알아들을 수 있을 것이다.

 이 글이 가설로 제기하는 것은, 이런 고양이의 눈빛에 대한 강한 관심, 고양이를 바라볼 때 나타나는 시각의 문제, 그리고 빛을 가져오는 존재로서의 고양이는, 일체적인, 동일의 현상이 되고 있다. 고양이가 보는 것을 가능케 하고, 그 시력 자체가 모종의 빛이 된다. 그러나 동시에, 고양이는 보는 것을 불가능하게 하는 존재이기도 하다. 이런 의미에서 고양이의 눈빛은 때로, 보이지 않는 것, 맹목인 것 등과 같은 문제와 밀접하게 이어진다. 나쓰메 소세키의 눈이 없는 상태에서 그려진 고양이는, 바로 이런 문제의 우의(寓意)라고 할 수 있다.

 조이스 자신도 또한, 기묘한 형태로 고양이와 시각의 문제를 연계시킨다. 『율리시스』에서 조이스는 고양이가 보는 것에 질문을 던지고 그 문제에 답하는 것이 아니라, 열린 채로 하고 있다. 앞서 인용했듯이, 블룸은 “이 녀석에게 나는 어떻게 보일까”라고 의문을 던진다. 마지막 에피소드에서는, 몰리 블룸이 이 문제를 변주하여 다룬다. ― “… 우리에게는 보이지 않는 것이 보일까, 저렇게 바라보고 계단의 맨 위에 앉아서 쭉……”〔U 18: 936-38〕. 이렇게 되면, 더 이상 인간이 어떻게 고양이에게 보이느냐가 문제가 아니라, 인간과 고양이가 보는 것의 차이가 문제가 된다. 그 때문에 특히 인간을 바라본다는 문제가 아니게 되며, 일반적으로 세계를 쳐다본다는 것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이 제기된다. 여기서는 조이스가 그 자신의 시각에 담고 있던 모종의 불안을 간파할 수도 있을 것이다. 고양이에게는 인간보다 많은 것은 보이지 않은가, 인간과는 다른 것을 보고 있는지 여부를 묻는 가운데, 마치 조이스가 자기 자신이 충분히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한 감각을 표명한 것처럼 보인다. 그것은 그가 보려고 생각해도 보이지 않는 것이 있다는 감각이다.

 안타깝게도 조이스의 예감은 적중했다. 그의 눈에 생긴 문제는, 1922년(2월 2일)의 『율리시스』 출판 이후, 점점 더 심각해졌다. 1922년 9월에 해리엇 쇼 위버에게 보낸 편지에서, 조이스는 자신의 눈의 문제를 건드리고 있다. 그리고 이 편지에는 다음과 같은 짧은 시도 덧붙여져 있다.


― 지미 조이스, 지미 조이스, 어디 갔었어?

― 여왕님을 보러[만나러] 런던에 가고 있었어.

― 지미 조이스, 지미 조이스, 뭘 봤는지 들려줄래?

― 유스턴 호텔에서 놋쇠 침대를 봤어.18)


–Jimmy Joyce, Jimmy Joyce, where have you been?

–Iʼve been to London to see the queen –

–Jimmy Joyce, Jimmy Joyce, what saw you, tell?

–I saw a brass bed in the Euston Hotel.


 이 짧은 시가 어떤 영어의 유명한 동요의 개사곡이 아니라면, 나는 언급하지 않았을 것이다. 본이 되고 있는 동요의 가사는 ―


새끼 고양이야, 새끼 고양이야, 어디 갔어?

여왕님을 [직접] 보러 런던에 갔었어.

새끼 고양이야, 새끼 고양이야, 너는 거기서 뭘 했어?

여왕님의 의자 밑에서 새앙쥐를 놀라게 했어.


Pussy cat, pussy cat, where have you been?

I've been to London to look at the Queen.

Pussy cat, pussy cat, what did you do there?

I frightened a little mouse, under the chair.


― 왜냐하면, ‘지미 조이스’는 원래 ‘새끼 고양이야’였다. 조이스는 자신을 고양이에 포개놓고 있는 듯 보인다. 정말로 조이스는 1922년 8월 중반에, 눈의 보양을 위해서도 파리를 거쳐 런던을 여행했다.19) 그러나 일은 계획대로 옮겨지지는 않았고, 그의 건강상태는 악화될 뿐이었다. 그러는 동안, 조이스는 아내와 함께 유스턴 호텔에 머물렀으며, 그 이름을 이 시에 등장시킨다.20)여기서 일어나는 원래의 시와는 다른 어구로의 치환은, 고양이와 조이스의 이름을 치환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중요한 사실이다. “무엇을 했어?”라는 질문 대신에 “무엇을 봤어?”라는 식으로, ‘보다’를 강조하는 의문으로 치환되고 있다. 이와 더불어, 언뜻 보기에 그 정도로 중요하지 않다고 하더라도, 원래 있던 쥐를 쫓아간다는 능동적 행동은, 어떤 장소에 구애받고 있는 수동성을 포함한 어구로 치환되고 있다. 동요의 원문을 거의 허물어뜨리지 않고 사용되는 곳은 두 번째 행뿐이지만, 그래도 “to look at”에서 “to see”로의 변경을 확인할 수 있다. 앞을 바라보지만, 그가 가로누운 초라한 침대보다 먼 것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고도 말하는 것 같다.

 원래 시의 “여왕님을 이 눈으로 본다”(“to look at the queen”)라는 표현은 유명한 속담 “a cat may look at the queen”(“a cat may look at a king”의 다른 판본에서, “아무리 신분이 미천한 사람에게도 그 나름의 권리가 있다”의 의미)를 가리킨다고 생각하면 좋을 것이다. 조이스는 이 표현을 다른 곳에서도 이용하는데, 해리엇 쇼 위버에게 보낸 시에서는, 거의 대부분을 원문 그대로 사용함으로써, 이번에는 그가 보고 싶은 것은 ― 마치 고양이처럼 ― 뭐든지 바라볼 수 있고, 누구도 만날 수 있다는 것을 내포하고 있는 듯 보인다. 다만 유일한 문제는, 이런 [시각의] 자유가 생기는 것은, 그가 바라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더 이상 보이지 않는 바로 그 순간이라는 것이다. 조이스=고양이는, 고양이의 눈빛을 얻었으나, 그 보상으로 그의 시각을 잃는 것이다.

 이처럼 고양이와 눈빛, 그리고 맹목이라는 것은 조이스의 생애에서 자(서)전적으로 복잡하게 보인다.

 … 슬슬 데리다로 화제를 되돌리기로 하자.



3

 이 글에서는 지금까지, 고양이라는 동물이 죽음과 눈빛에 관계가 있다고 여기는, 고양이에 얽힌 문학적 담론의 전통을 살펴봤다. 눈빛이든, 죽음이든, 고양이는 그 경계 자체를 문제화하고, 끊임없이 그 경계선을, 삶과 죽음 사이를, 바라보는 것과 바라보이는 것 사이를, 보는 것과 맹목인 것을 횡단한다. 데리다가 굳이 그렇게 하는 것인지는 몰라도, 그의 텍스트는 확실히 이 전통을 계승시키고 있다.

 『동물을 쫓다』에서 데리다는 거듭 되풀이하여 눈빛(주시하다)을, 보는 것(pour voir), 그리고 맹목인 것으로 되돌아간다. 그때 데리다는 일반적 혹은 추상적인 의미에서 눈빛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한 마리의 고양이의, 단독적인 고양이의 눈빛에 대해 말하고 있다. 그렇지만 데리다 앞에 있는 고양이는 어떤 의미에서 맹목[눈이 멀었음]이며, 그녀는 바라보고 있을 뿐, 보는 것은 아니다. 데리다는 말한다. ― “[그 눈빛은] 보는 자의, 환시자(幻視者)의, 혹은 극도로 명민한 장님[盲者]의 눈빛인지도 모른다”[Un regard de voyant, de visionnaire ou dʼaveugle extra-lucide.”](L’animal…, 4/18/18). 그런 의미에서 그녀는 맹목이며, 보는 자이다. 보는 자와 환시자는 미래를 “예견할” 수 있는 사람들에게 주어진 이름이다. 그들에게 보이는 것은, 지금 여기가 아니다. 그들은 직접적인 소여의 것의 저편을 바라보는 것이야말로 맹목일 필요가 있는 것이다.

 데리다가 환시자와 장님을 동시에 고양이의 눈빛 속에서 찾아내는 위의 인용 대목보다 1페이지 앞에, 그가 이미 예견과 맹목을 관계시키는 것은 흥미로운 사실이다. 거기서 문제되는 것은 고양이의 눈빛이 아니라, 데리다 자신의 눈빛이다. Cerisy la salle의 연구집회에서의 제목은 얼핏 보면 무작위적 선택으로 보이지만, 거기에는 미리 마련된 것 같은 순서로, 말하자면 ‘신의 뜻 = 기계’가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설명한 뒤, 그 “정체불명의 선견지명을, 맹목이면서도 제대로 함께 형상을 이루는 것이 미리 형상을 이루어가는 과정”[une obscure prévoyance, le procès dʼune aveugle mais sûe préonfiguration dans la configuration,”]에 대해 말한다(L’animal…, 2/17/16-17). 물론 이 “정체불명의 선견지명”은 다른 누구도 아니라 데리다 그 자신인 것이다. 이때 다시 예견과 맹목이 함께 일어나지만, 그것은 보고 있는 고양이 쪽에서가 아니라, 고양이에게 보이고 있는 데리다의 예견과 맹목으로서 함께 일어난다. 그러나 어떤 경우든, 이 보이는 것과 맹목인 것에 붙어다니는 복잡한 관계 속에는, 어떤 자(서)전적인 기원이 있는 듯이 보인다.

 데리다의 텍스트에서는 다른 사항에서도 많이 일어나지만, 이런 ‘예견’이나 ‘맹목’ 등과 같은 문구는 모두, 그가 다루는 주제에 대해 지금까지 썼던 다른 텍스트를 암묵적으로 언급하고 있다. 이번 회의 경우에는, 데리다가 맹목과 시각〔vision〕의 문제에 참여한 텍스트, 예를 들어 『장님의 기억』에 눈을 돌리면 좋을 것이다. 이 책은 역시 첫머리에서, 데리다는 맹목이라는 것을 예견에 관계시킨다. ― “장님은 보는 자이며, 때로, 환시자의 직을 맡는 경우가 있다.”21) 예견이라는 행위에서는, 뭔가가 맹목의 차원에 속해 있다. 왜냐하면 “보는 자가 지닌 환시적인 시각”에 의해, 보는 자는 “가시의 현재의 건너편”이 보이게 되기 때문이다.22) 그 때문에 보는 자에게 보이는 광경은, 모종의 ‘전망[내다보임]’〔sur-view〕으로서, 너무 보이는 동시에 끝까지 지켜본다. 보는 자에게는 현전하지 않고 비가시의 대상이 보이지만, 현전하는 것은 보이지 않고 가시의 대상도 보이지 않는다. 그 때문에 예견에는 그 내부에서부터 따라다녔던 맹목의 순간이 존재한다. 그러나 이 경우, 맹목이란 무엇을 의미할까? 『장님의 기억』에서 데리다는 보이는 것, 시각, (그림의) 소묘에 내부로부터 따라다니는, 비가시의 양태를 추구하고 있다. “그린 선의 수사학”으로 통하는 묘선[描線, 그린 선]의 비가시성이 있으며, 그때 바로 묘선[그린 선]퇴인함[退引, 뒤로 그어짐]으로써 발화나 담론의 공간이 열린다. 발화나 담론은 시각에 대한 ‘근원적 대체보충’이라는 것이 될 것이다. 우리가 보는 것은 항상, 비가시의 담론의 침투를 받고 있는 것처럼. 예를 들어 고양이에 얽힌 문학의 담론에서 그렇듯이.

 그러나 [원래 보이는 것, 시각, 소묘에 내재하는 비가시성 이전에] 그 전 단계에서조차, “보이는 것에 있어서 절대적으로 이질적인”23) 비가시성이, 보이는 것의 핵심에 있는 절대적인 비가시성이, 보이는 것에 따라다니는 맹점이 존재한다. 그 때문에, 눈에 보이는 이마주로서의 이마주는, 애초의 처음부터 폐허가 될 운명에 있다. “폐허는 처음 응시되는 순간부터 나타나는 이미지에서 생기는 것이다.”24) 그래서 애초의 시작부터, 시각이 시작되는 곳에서부터, 결여가 존재하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는 또 두 개의 보완적인 논의를 감안해야 한다. 하나는 “바라보다”〔looking〕와 “보다”〔seeing〕의 구별에 대해, 또 하나는 이미지가 지닌 특수한 성격에 관련된 것이다.

 고양이의 눈빛에 얽힌 문학의 담론을 재축하는 가운데, 나는 “바라보다”와 “보다”를 어떻게 구별할 수 있는가에 대해 다루지 않았으나, 이 재구축의 작업을 끝냈을 때, 『동물을 쫓다』에서 논지를 다시 전개시켰을 때, 그 구별의 필요성이 다시금 명확해진 것이다. 데리다는 이런 구별을 다른 텍스트에서 소묘하고 있는데, 본고에서는 특히 『촉각에 대해 : 장-뤽 낭시를 건드리다』의 처음 장에 관심을 겨누고 싶다. 거기서는 우리에게 보이는 것은, 눈빛(주시)뿐이라고 말한다. 즉, 우리에게는 타자에게 보이는 것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타자의 눈빛은 접근 가능하게 보이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외부로부터의 시점(視点)으로부터만 가능할 뿐이다. 고양이를 바라보는 것은 고양이의 눈빛을 바라봄으로써 가능해지지만, 그 내부로부터의 시점(視点), 즉 그녀가 바라보는 것이 [이쪽에] 보이게 되려면, 픽션의 장치 없이는 불가능한 채로이다. 이것은 지금까지 고양이에 얽힌 문학의 담론을 재구축하는 가운데 말한 것과 일치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데리다는 거기서 멈춰 서지 않는다. 그는 다른 구별을, 이번에는 눈과 눈빛의 구별을 도입한다. 우리가 눈을 볼 때, 그 눈빛은 보이지 않은 채이지만, 그 눈 자체는 색이나 모양 같은 속성을 지닌 대상물이 된다. 만일 우리가 그 눈이 아니라, [그 눈이 이쪽에 눈빛을 쏟는] 응시를 보려고 하면, 우리는 맹목이 되며, 보일 터인 것도 보이지 않게 된다. 이런 여러 가지 이유 때문에, 우리를 바라보고 있는 것이 보이도록 노력하면, 그 행위 고유의 맹목성이 산출되는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당신을 주시하는 것이 도둑맞은 것”이다(le dérobement de ce qui vous regarde).25) 응시와 그 눈이 함께 보인다고 믿는 것이라면, 그때 우리는, 매혹이라는 주문에, 데리다가 부르는 “매혹의 사랑”에 사로잡히며,26) 더 이상 보인다기보다는, 닿는[접촉되는] 것에 가까워진다. 눈은 눈빛과는 다르며, 닿을[접촉될] 수 있기 때문에. 이 가설은 확실히 데리다가 고양이에게 가까이 가는 방법에 해당한다. 그에게는 고양이의 응시가 보이고, 그녀가 그를 바라보고 있는 모습이 보이고, 그래서 그에게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그러므로 데리다는 고양이의 눈의 색을 기술하지도 않고, 수염 색깔에 대해서도 말하지 않는 것이다. 그의 눈에 보이는 고양이는, 그녀의 응시에 의해, 맹목을 산출하는 것이다. 그녀의 비가시성이, 그녀의 비가시성이 눈에 보임으로써, 그녀의 존재는 이미지로, 고양이에 얽힌 문학의 담론의 전통에 의해 중층결정되는 이미지로 바뀌어버린다. 그렇다고 해도 이것은 데리다의 욕실로 들어가는 이 단독적인 고양이가 실재하지 않는다거나, 그것이 단순한 비유에 불과하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이 고양이는 어디까지나 실재하며, “또한 동시에” 상상적인 듯한 고양이이다.

 이 점을 명확히 하기 위해서도, 데리다가 ‘이미지’ 개념에 바친 몇 안 되는 텍스트 중의 하나에 눈을 돌리고 싶다. 「애도의 힘에 의해」라는 제목의 텍스트는 그의 친구 루이 마랑(Louis Marin)이 죽은 후의 1993년에 작성된 것이다.27) 거기서는 ‘보다’와 ‘바라보다’의 문제가, 이미지의 질문을 던지는 가운데 제기된다. 이 텍스트에서 데리다는 이미지에는 ‘존재’로는 환원할 수 없는 힘 또는 가능성이 있다고 말한다. 그것은 절대적인 가능성, 절대적인 ‘가능태(뒤나미스)’이다. ― “죽음만이, 아니 오히려 애도가, 즉 이미 앞자리를 차지한 죽음만이, 이런 절대적인 ‘가능태’ ― 힘, 효력, 그것으로서의 가능성, 그것 없이는 이미지의 힘을 이해할 수 없는 것으로서의 ― 절대적인 가능태가 들어설 공간을 열 수 있다.”28) 즉, 죽음과 애도만이, 이미지가 지닌 절대적인 가능태에 공간을 열고, 그것을 유지할 수 있다는 것이다. 데리다는 처음으로 “죽음만이”라고 말하고, 이어서 “죽음이 아니라 애도가”라고 엄밀한 형태로 바꿔 말한다. 죽음 그 자체가 아니다, 죽음 “그 자체”라고 말한 것은 존재하지 않으며, 죽음은 “그 자체”를 불가능하게 하기 때문에. 그래서 죽음이 아니라, 앞서서 죽음의 장소를 차지하고 있는 것, 즉 애도가, 라고 하는 것이다. 애도는 그러므로 죽음에 앞서 있는 죽음이다. 죽음 “그 자체”를 경험할 수는 없으나, 애도는 죽음을 경험하는 것이기 때문에, 애도는 불가능성의 체험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 논의에 암암리에 포함되어 있는 것은, 하이데거에 의한 죽음의 ‘이해’에 대한 반론이다. 하이데거가 『존재와 시간』에서 발전시킨 죽음의 ‘이해’에 대한 자세한 분석은, 나중에 데리다의 『아포리아』에서 전개되지만, 이로부터 1년도 채 지나지 않아 이 「애도의 힘에 의해」를 집필할 기회가 찾아온 것이다. 하이데거에 따르면, 현존재에 있어서 죽음이란, 실존의 불가능성의 가능성이며, 죽음이란 그때마다 나 자신의 것(Jemeinigkeit = 각자성各自性)이다. 나 이외의 누구도, 나를 대신해 죽을 수 없기 때문이다. 나는 타자의 죽음을 경험할 수 없다. 타자의 죽음을, 그것으로서 고유한, 순수한 죽음으로서 경험될 수 없다. 그것 자신의 죽음의 불가능성과의 관계로서, “죽음에 임하는 존재(Sein zum Tode[죽음을 향한 존재])”는 현존재가 그 가장 고유한 가능성을 불가능성의 지점에서 파악하기 위해, 현존재가 자신에 선행하는 방법이다. 이리하여 “죽음에 임하는 존재”는 다른 온갖 가능성의 근거가 되어 현존재의 실존을 지탱하고, “~로서-구조”를 가능케 하는 현존재의 이해를 뒷받침한다. “~로서-구조”란 곧, 현존재에, 있는 것을 ‘무엇인가’로서 보게 하고, 사물을 ‘그것으로서’ 보는 것을 가능케 하는 구조이다. 하이데거에 있어서 현존재는, 그것으로서 고유한 의미에서 죽을 수는 없는 동물과는 달리, 그것 자신의 죽음에 대해 순수한 관계를 갖는다고 간주된다. 동물에 있어서 죽는 것은 불가능하며, 그러므로 존재 이해를 갖지 못하고, 한편으로 현존재에 있어서 그것 자신의 실존의 불가능성의 가능성‘으로서’ 있는 죽음은, 참된, 그것으로서 고유한 존재 이해의 조건이 된다.

 『아포리아』에서는 현존재의 죽음은, 가장 그것으로서 고유한 것도, 순수한 죽음도, 그때마다 “나만”인 것도 있을 수 없다고 여겨진다. 그것은 비록 현존재의 죽음이 불가능성의 가능성이라 할지라도, 죽는 것에 있어서 나는 나 자신이기를 그치고, 더 이상 ‘내’가 아니게 되기 때문이다. 불가능성으로서의 죽음이 그것으로서 고유한 것을 파괴해버린다. 그것은 “그것으로서의” 불가능성이다. 죽음은 결코 나의 것일 수 없고, 이런 의미에서, 현존재는 동물에 비해 죽음에 대한 더 순수한 관계를 갖지 않는다. “하이데거에 따르면, 그것으로서 현존재에는 가능한 것, 다른 어떤 형식의 존재자나 산 것에는 가능하지 않은 것이, 그러므로 ‘그것으로서’의 불가능성이라고 한다. 그러나 ‘그것으로서’의 불가능성이, 실제로 ‘그것으로서’의 불가능성이라면, 그것은 또한 그것으로서 나타날 수 없는 것이기도 하다. 실제로, 그것으로서만 소멸해버리는 ‘그것으로서’에 대해서 지닌 관계는, 현존재의 실존의 비본래적인 형식에도 본래적인 형식에도 공통되는 특징이며, 또한 모든 양태의 죽음의 경험(그것으로서 고유하게 죽는 것〔Sterben; Dying〕, 소멸하는 것〔Verenden; Perishing〕, 목숨을 잃는 것〔Ableben; Demise〕에도 공통되는 특징이며, 게다가 현존재의 외부에 있는, 온갖 산 것 일반에도 공통되는 특징인 것이다. … 동물도 죽는 것이다29)) 게다가 ”나 자신의 죽음“은 나의 능력이 미치는 영역에는 없다. 때문에 현존재에 있어서, 나 자신의 죽음과 타자의 죽음 사이에 순수한 구별은 있을 수 없다. 불가능성과, 불가능성의 가능성을 확연하게 구분하는 것 자체가 의심스러운 것이다. 불가능성으로서의 죽음이, 우리가 우리 자신의 죽음을 죽는 것을 불가능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이것이야말로 데리다가, 현존재가 자신에 앞서고, 그것 자신의 죽음 ―타자의 죽음이 앞서고, 우리에게 있어서 유일한, 고유하고 비고유한 죽음을 구성하는 것으로서의 죽음 ― 예기하는 방법을 재-해석하는 까닭이다. 데리다는 아래와 같이 말한다. ―


왜냐하면, 반대로, 만일 죽음이 불가능성의 가능성이고, 그 때문에, 나타나고 있는 그것으로서의 불가능성이, 그것으로서 나타나고 있는 가능성인 것이라면, 인간은 혹은 현존재로서의 인간은, 그것으로서의 죽음에 대해 관계를 갖는 것은 결코 할 수 없고, 그저 멸하는 것, 목숨을 잃는 것, 그리고 (더 이상 타자가 아닌) 타자의 죽음에 대해서만 관계를 갖게 된다. 타자의 죽음은 이렇게 다시 ‘시작’의 죽음에, 항상 시작으로서의 죽음이 된다. … 타자의 죽음, ‘나’ 속에 있는 타자의 죽음은, 근원적으로 ‘나의 죽음’이라는 연사(連辞) 속에서 명명되는 유일한 죽음이다. 이것으로부터 끌어낼 수 있는 모든 결과에도 불구하고.30)


 이처럼 애도는 죽음에 관한 데리다의 텍스트 속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고 있다. 타자의 죽음의 불가능한 경험으로서의 애도는, 나 자신의 죽음에 선행할 뿐 아니라, 나에 앞서서, 나의 ‘자아’에도 선행한다. 이미지의 힘의 기반은, 앞서서 각인된 죽음과 관련되어 있으며, 그렇게 근원적인 애도와 관련되어 있다는 관점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이미지가 나타나려면, 그 사람의 죽음[落命, 목숨을 잃음]을 기다릴 필요가 없다. 타자의 죽음 그 자체가 이미지가 될 수 있는 가능성으로서, 이미지는, 가능한 타자의 죽음을 각인해버리기 때문에. 데리다는 어떤 육체가 이미지로 변용하는 과정을 가리키는 루이 마랑의 개념의 하나인 “상상적 변용”을 다루고 있다. 마랑의 이론에서는, 어떤 육체를 이미지로 변용시킨다. “이 기층적인 힘은, 상상적 변용의 혜택을 입고, 상상적 변용의 결과로서 생긴다. 그 기초는 무엇보다 우선 상상적이다. 그 힘은 원래 시작부터 상상적이고, 환상적이다.”31) 왜 데리다는 여기서 “환상적”(phantasmatic)이라고 말하는 걸까? 어쩌면 여기서의 환상은, 신체가 이미 그런 바의 이미지를 가리킬 것이다. 환상의 문제는, 고양이의 공형상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는 중요하기 때문에, 나중에 다시 건드리고 싶다.

 그러나 『아포리아』에서의 이미지의 분석에는, 이미지에 대해 말했던 것과, 고양이와 맹목에 대해 말했던 것을 관련시킬 수 있는 대목이 갑자기 나타난다. 텍스트의 어떤 대목에서, 데리다는 말한다. ― “우리에게 이미지는, 그것이 보이고 있는 것 이상의 것으로 보인다. 이미지가 우리를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32)[“Lʼimage est voyante, plus que visible. Lʼimage nous regarde”]. 일독하면 이 두 개의 문장은 놀라운 것으로 보이지만, 어느 쪽의 문장도, 이미지와 애도의 관계의 개념적 발전과 완전히 조화하고 있는 것이다. 애도는 타자인 자가 우리에 앞서서 각인되는 방법이다. 애도는 우리 자신의 죽어야 할 운명과의 관계로서도 또한 각인되어 있다. 이처럼 이미지의 가능성, 이미지의 힘은, 우리 자신의 비-역능의 일부이며, 우리에게 주어진 [앞서서 각인될 수 없는 것의] 불가능성의 일부인 것이다. 여기서 중요해지는 것인데, 애도가 내미는[제출하는] 목적지를 보여주라고 말할 때, 애도는 언뜻 보면 우리로부터 타자로 향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그 방향은 역방향이라고 말해야 한다. 우리 자신 속에 들어서고, 우리를 우리답게 하는 것은 타자이다. 그래서 만일 데리다가 말하듯이, 이미지의 힘이 절대적인 가능태라면, 이미지가 우리에게 제출되고[내밀어지고] 있으며, [맞은편에서] 우리를 바라보고, [맞은편에서] 우리를 횡단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이처럼 애도에 있어서 애도하는[슬퍼하는] 사람은, 죽은 자에 의해, 죽은 자의 이미지에 의해 바라보이고 있는 이미지로 전환된 그/녀 자신인 것이다. 데리다는 이 문맥에서 거울에 대해 얘기하지 않으나, 여기서는 고양이와 거울, 그리고 여성 사이에 생기는 복잡함에도 비슷한 것이 존재하고 있다. 내가 나를 바라보고 있는 타자를 바라볼 때, 나는 더 이상 나 자신이 아니게 된다. 타자가 이미 내 안에 있고, 나를 변용시키기 때문에. 타자의 눈빛은 타자로부터 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눈빛은 내 안에 있다. 타자는 이렇게 실재하는 타자인 동시에 환상적인 타자이다. ― 타자는 내 앞에 앞서서, 단독적으로, 거기에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내 안에 있으며, 나의 시선(주시)을 보내는[내미는], 나의 애도이기 때문에. “우리는 모두 바라보이고 있다, 그렇게 내가 말했다. 루이 마랑에 따르면, 그때마다, 단독적으로. 그가 우리를 바라본다. 우리 속에서[En nous]. 그가 내 안에서 바라본다. [“Il regarde en nous”] … 그때마다 우리 속에서 우리를 바라본다. ― 우리가 그러한 바의 사람을 향해 ― 더 이상 존재하지 않고 ― 그 사람은 전적인 타자이며, 무한한 타자이다. 지금까지도 그랬던 것처럼. 죽음은 지금까지 이상으로 그에게 믿음을 두고, 그를 넘어서고, 그를 이 무한의 이타성[他性] 속에서 멀리해 왔다. … 그것은 과잉과 비대칭이다. 우리는 우리 자신 속에서, 루이 마랑이 우리에게 쏟은 눈빛을 받는다[“nous portons en nous-même le regard que Louis Marin porte sur nous”].”33) 타자의 죽음에 의해서, 내 속에서 타자의 이타성[他性]이 숨겨진다[제공된다]. 그것 때문에 나는 나 자신의 자기로부터 떼어놓아진다. 일반적인 타자가 있는 동시에, 타자는 그때마다 단독적이기도 하다. 무한의 이타성[他性]은 그/녀의 단독성을, 이 개개의 구체적인 존재나 존재자를 의미한다. 그렇지만, 우리가 이타성[他性]과 단독성의 관계를 통해 뭔가를 생각하기 시작하면, 그 순간에, 이타성[他性]은, 단독성의 개념화의 한 방법이 되며, 그것을 일반적인 것으로, 모종의 개념으로 지양되는 것처럼 보인다. 이것이야말로 「애도의 힘에 대해」와 『동물을 쫓다』 같은 텍스트 사이의 차이의 하나인데, 후자에 있어서 데리다는 “plus autre que tout autre”이라는 문구를 강조하는 것이다. 이 “plus autre que tout autre”란 무슨 의미일까. 물론 이것을, 데이비드 윌스를 좇아, “어떤 것보다도 가장”이라고 번역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전적인 다른 것 이상으로 다름”과 같이〔『動物を追う』 31頁〕. 그러나 만약 “전적인 타자의 로고스”가 충분하지 않은 점에 대해, 데리다의 설명 의무를 고려하고 있다면(“un autre sans altérité”117/161), 우리가 동물에 대해 생각하고, 타자성 없는 타자로서의 동물에 대해 그가 말하고 있는 것을 생각할 경우에는, 우리는 다른 선택지의 가능성을, 즉 “plus autre que tout autre”라는 문구를 “전적인 타자 이상의”라고 번역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애도는 앞서 말한 어떤 경우에 있어서도, 우리 자신을 향하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타인에게도 향하고 있다. 이미지의 힘은 일방향적이지만, 동시에 ― 이때야말로 환상이 나타나는 시간인데 ― 타자의 죽음은 ‘나의 죽음’이라는 연사(連辞)에 있어서 명명되는 유일한 죽음이며, 그리하여 “죽음의 저편에 있는 것”이라는 환상을 만들어내는 것이 우리에게 가능해진다. 이처럼 살아 있고, 내게는, 나 자신의 죽음이 보이는, 이렇게 살아 있고, 내게는, 나 자신의 죽은 육체가, 나의 장례식이 ‘보인다’는 것이다.

 데리다가 그의 세미나의 마지막에서 장대한 분석의 대상으로 하는 것이 바로 이 환상이다. 거기서 그는 “나의 죽음에 대해 생각하는, 아니, 오히려 나의 사체를 상상하는” 시도에 대해 말하고, 생각하는 것과 상상하는 것에 대해 “일반적으로 상정되는 구별”을 등한시하고, 죽음을 생각하면, 거기에 상상과 환상이 은연중에 포함된다고 주장한다.34) 상상과 환상은, 〔단순한 자기촉발이 아니라 타자를 매개로 한〕 “자기-이타-촉발”(auto-hetero-affective, 自己―異他―触発)을 전제하고 있으며, 데리다가 말하듯이 “우리는 ‘자기-이타-촉발’의 차원 없이는 환상을 생각할 수 없다.”35) 본고에서는 이런 ‘자기-이타-촉발’을, 눈빛에서, 이미지에서, 애도에서 봤다. 우리 자신에 대한 우리의 관계는, 우리 속에 존재하는 타자를 통해 맺어지는데, 이것을 우리에게 환원할 수 없는 것이다. 데리다가 특히 주안을 두는 환상은, 시신[遺体]에 생길 수 있는 환상이다. 우리의 문화에 있어서의 실제적으로 두 가지 방법, 즉 매장과 화장이다.



4

 모리스 블랑쇼〔1907-2003〕가 죽은 것은 데리다가 세미나에서 위의 테마에 대해 그의 사색을 전개시킨 때였다. 데리다는 블랑쇼의 화장에 입회하고, 조사(悼辞)를 읽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그의 서거 이틀 후에는 블랑쇼에 관한 긴 세미나를 했다(데리다는 그 내용을 나중에 개최된 강연에서 발표했다. 내가 이것을 언급하는 것은 이 세미나의 종반부에서 블랑쇼에 대해 논의하는 가운데, 데리다가 『수수께끼의 사람 토마』의 초판에서부터 길게 인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실, 이 소설 속에서는, 고양이의 환상과 눈빛의 환상, 더욱이 죽음의 환상과 자기 자신의 매장의 환상 등과 같은 형상이 함께 모습을 드러낸다. 이 소설 속에서, 한밤중에 주인공 토마가 외출했을 때,36) 그를 본 유일한 자는 장님 같은 고양이였다. 그 고양이가 그의 뒤를 따라다닌다. 거의 아무것도 보이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토마 뒤를 쫓아다니는 가운데, 고양이는 모습을 바꾸기 시작하고, 그 몸은 인간의 몸으로, 고양이 자신도 모르는 목소리가 고양이의 안쪽에서 말하기 시작하고, 고양이의 영혼들이 모조리 사라져버린 과정에 대해, 이어서 고양이 자신을 다시 떠밀어내고, 고양이 자신이 횡단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 허공에 대한 감상을 말한다. 고양이는 변신을 계속하면서, 이제 “고등한 고양이”가 됐다고 고양이는 말한다. 그 고양이 자신이 거대한 머리로, 고양이 자신한테 시선을 보내는 거대한 머리로, 시선이면서도 자기 자신을 인식하지 않는 눈빛으로 계속 바뀐다고 말한다. 눈빛이 고양이 그 자신의 죽음을 목격하고, 그 고양이 자신에 의해 “나는 죽는다, 죽는 것이다”라고 말한다. 고양이는 인간이기를 그만두고, 다시금 지면에 쓰러진 불상한 고양이가 된다. 그리고 이 고양이는 토마를 마지막으로 슬쩍 쳐다본다. 토마는 맨손으로 땅에 무덤을 파고, 그를 또한 “고등한 고양이”라고 부른다. 고양이가 독백을 끝내자, 장면은 그 자신의 무덤을 파는 토마의 묘사로 옮겨지고, 구멍을 다 판 그는 그 무덤에 들어가려고 한다. 하지만 기묘한 일이 일어난다. 그 자신의 이미지가, 그의 분신이 되고, 바로 그 자신의 외형을 가진 무덤의 허무에 의해, 그는 안에 들어갈 수 없다. “사실 그는 죽었고, 동시에 또한 죽음의 현실로부터 떠밀려났다”(菅野昭正訳, 131頁).37) 그는 어찌어찌해서 무덤에 들어가는 데 성공하지만, 마침내는 죽는 것도 소생한 것도 깨닫고, 무덤에서 벗어난다. “그림에 그려진 채색된 미라”처럼, 마치 라자로ラザロ인 것처럼.

 데리다는 세미나에서 『수수께끼의 사람 토마』의 “내가 죽기”에는 “터무니없는 환상〔phantasm〕”이 있다고 말하고, 이 사례에는 “동물되기”, “자(서)전적 동물되기”를 인식할 수 있다고 말한다. 그런데 그는 그의 작품에서 인용한 장대한 구절에 대해 특별하게 언급하지 않고, 인용 후에는 하이데거의 “지배”〔walten〕를 다루고, 그것을 블랑쇼의 “중성적인 것”〔neuter〕이라는 문제에 접속시키고 있다.

 이때 고양이에 대해, 혹은 고양이가 맹목인 것에 대해, 그리고 불가능한 죽음이 반복되는 장면에 대해, 더 나아가 고양이와 인간이 서로 거울 사본鏡写し[거울처럼 그대로 복제한 것]이 되고 있는 것에 대해, 데리다로부터 조금도 언급이 없는 것은 꽤 기묘하다고 할 수 있다. 그 침묵은, 블랑쇼의 소설의 장면이, 고양이와 눈빛, 그리고 죽음에 대해 데리다가 말해야 했던 모든 것에 있어서 계열적인 관계를 갖는다고 말하는 것 같지만, 그는 그것에 대해서 아무것도 언급하지 않는 것이다. 왜 데리다는 한마디로 하지 않았을까?

 데리다의 두 개의 원고(세미나판과 강연판)을 주의깊게 비교하면, 독자는 세 가지 사항을 깨닫게 될 것이다. 하나는 문장에 가해진 작은 변경점, 또한 “강연판 원고”에서 블랑쇼의 소설로부터 갑자기 ‘지배’와 중성적인 것으로 이행하기 전에 아주 짧은 구절이 추가되고 있다는 것. 그리고 블랑쇼의 텍스트를 인용할 때, 어떤 부분을 여러 차례 생략하고 있는 점이다.

 (1) 데리다는 그의 세미나에서, 블랑쇼의 소설 장면을 할 때, 그 소설에는 들뢰즈라면 “동물되기”라고도 부르는 것에 관한 “엄청난 환상”이 존재한다고 말하고, “여기에는 이야기꾼이라는 ‘동물되기’, 이야기꾼이라는 ‘자(서)전적 동물되기’에 대해 설명한다.38) 블랑쇼의 강연에서 읽혀진 세미나 원고에는, 약간의 변경이 가해진다. ― 이야기꾼이라는 ‘동물되기’, 들뢰즈라면 그렇게 부를 것인데, 나로서는 ‘자(서)전적 동물되기’, 그렇게 부르고 싶다.”39) 주목해야 할 것은, 데리다는 분명히 그의 사상인 자(서)전적 동물의 개념으로 얘기를 연관시킨다는 것이다. “나로서는 그렇게 부르고 싶다[dirait je pour ma part]”고 데리다는 말한다. 즉, 이 개념은 데리다 자신이 발명한 것이다. 게다가 “강연판 원고”에서는 “이야기꾼”이라는 단어가 삭제되어 있다. 데리다는 여기서, 어떤 읽기의 가능성도 시사하고 있는 것처럼 비친다. 즉, 블랑쇼의 이야기를 해석할 때, 데리다 자신의 ‘나’를 도입함으로써, 그것을 그 자신의 ― 자(서)전적으로 ― “동물되기”와 연관시키는 읽기를. 데리다는 “자(서)전적 동물”이라는 개념을 만들어냈을 뿐 아니라, 그 자신도 자(서)전적 동물이 된 것이다. 그것은 마치 맹목의 고양이가 나오는 장면에 자(서)전적 의미가 있다는 것을, 상당히 애매한 형태로 데리다가 인정하고 있는 듯하다. 마치 블랑쇼의 고양이가 데리다에게 있어서 자(서)전적인 고양이가 된 것처럼.

 (2) 강연판 원고에서 데리다는, 하이데거의 ‘지배’의 문제에 대해 되풀이하여 논지를 전개시킨다. 이 개념은 그의 세미나가 진행되는 과정에서 관련을 갖는데, 그런 전개를 행하는 이유는 블랑쇼에 관한 강연에서는 명확하지 않았다. 그 때문에 그는 〔이 강연이 행해질 때〕 이 이행에 이유를 부여하기 위해 몇 줄의 문장을 보태고, “그것으로서”의 문제를 제기한다. 즉, 인간과 동물의 차이의 기원으로서의 “그것으로서”이며, 그것이 있어서야 비로소, 그 차이가 소설의 장면과 이어지는 것이다.40) 한 가지는 맹목의 고양이와 그의 무덤을 파는 토마의 관계가, 또한 그 한편에서는 “그것으로서”의 문제가 있고, 이것들은 모두 전혀 드러나지 않고 있으나, 데리다 자신은 그 연결을 이해하고 있었던 것 같다.

 (3) 세 번째의 변경에 대해 말하면, 데리다는 의식적인지 무의식적인지, 고양이에 얽힌 에피소드를 인용할 때, 세 개의 단락을 생략하고 있다. 실제로, 이 세 개의 단락은 모두 고양이의 눈과 눈빛에 관련된 것이다. 데리다는 세미나와 강연 둘 다의 경우에도, 이 단락의 인용을 생략하고 있다. 처음 생략된 구절은, 고양이의 눈에 대해 얘기하고 있으며, “한쪽 눈은 닫혀 있고, 다른 쪽 눈은 피에 젖어 있다”고 하며, 그 두 눈 속에서 “스스로의 모습을 보게 하는 감각을 얻었다”고 적혀 있다.41) 두 번째의 생략된 구절에서는, 고양이가 뛰어넘을 수 없는 허무에 사로잡힌 감각을 고양이가 이야기하며, 미리 예건하는 능력을 잃은 것이 그려져 있다. ― “이리하여 이제 나는, 눈빛 없는 존재이다”[“Et maintenant je suis un être sans regard”].42) 그리고 고양이가 그 혀/언어가 맹목(의 사람의 것)이라는 목소리도 또한 들려온다. ― “langue dʼaveugle.” 세 번째의 생략된 구절은, 고양이 자신이 거대한 머리가 된 것에 대해 말하는 대목에서, 그 고양이가 머리라기보다는 눈빛이 됐다고 말하는 장면이다[“au lieu dʼun tête, semble nʼêtre quʼun regard”].43) 어떤 경우든, 눈빛과 그 시선이 문제가 되며, 어떤 경우든, 어떤 시점(視点)에서, 불가피하게 허구적이 되는 고양이의 시점(視点)에서, 보이는 것과 맹목인 것이 문제가 되는 것이다.

 블랑쇼의 고양이의 “자(서)전되기”와 눈빛과 맹목이 강조되고 있는 것에 대해서는, 그 관계에 대해서 거의 정신분석적인 독해를 가하고 싶은 부분이다. 아마 이 연결을 이해하려면, “그것으로서”의 문제에 눈을 돌리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즉, 블랑쇼에 관한 데리다의 텍스트에 있어서, 『수수께끼의 사람 토마』를 언급하는 부분에서 일어나는 두 번째의 변경점의 기초가 되는 “그것으로서”의 문제이다.

 그것이 하이데거에 대한 언급임은 명백하다. 하이데거에 따르면, 현존재에 그것으로서 고유한 것은, 죽음과의 관계이며, 그 불가능성의 가능성과의 관계이다. 현존재의 가장 본래적인 가능성을 구성하는 것은, 이 관계에 있어서이다. 이런 가능성이 ‘이해’(Verstehen)의 핵심을 구성하고 있다(현존재의 세 가지 결정적인 현실적 요소 중 하나. 남은 두 개는 정태성情態性/심경〔state of mind〕과 퇴락〔falling〕이다). “~로서-구조”, 또는 “그것으로서”의 구조를 ‘봄’〔Sight, 視〕이나 ‘예견’〔Foresight〕에 결부시키는 것이 ‘이해’이다. 하이데거에 있어서는 “모든 ‘봄’[alle Sicht]이 원래 뜻에서는 이해에도 기초한”44) 것이지만(細谷訳, 319頁),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봄’은 가능성을 기투하는 것이며, 우리의 ‘이해’라는 기반 위에 존재하는 것을 해석하는 것을 돕는다. 이런 의미에서 ‘봄’은 “그것으로서”와 관련을 가진다. ‘봄’은 ‘그것으로서’의 사물에 접근할 수 있는 현존재의 가능성을 기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달리 말하면, ‘봄’은 존재의 ‘개시성’(Erschlossenheit)과 상관관계를 갖는다는 것이다. 가능성의 기투는 “~으로서-구조”를, 세 개의 서로 얽힌 “선-구조” ― ‘앞서 가짐(Vorhabe), 앞서 봄(Vorsicht), 앞서 잡음(Vorgriff)의 관계로 연결시킨다. 예견 ― 앞서 가짐과 앞서[先] 개념을 잇는 중간항 ― 은 앞서서 봄으로써, “이해되는 것을 해석 가능한 것으로서 고정시키고”, “내 것으로 하는 행위[Zueigunung45)]〔고유화〕”를 선도한다. 이리하여 현존재는 “그것으로서”를 가진 목적으로, 예견적으로 사항의 점유와 파악을 선도한다.

 블랑쇼의 『수수께끼의 사람 토마』에서의 고양이의 에피소드는, 이렇게 ‘이해’라는 개념의 이해에 있어서 이뤄진, 하이데거 철학에 대한 초기의 주석으로 읽을 수 있다. 블랑쇼의 텍스트에서는 “그것으로서”의 죽음에 접근할 방도는 없다. 토마는 “죽음의 현실로부터 떠밀려지고”, 단순히 떠밀려난다/거부된다고 할 뿐 아니라, 그것은, 죽어 있는 “~로서”의 그 자신의 이미지이며, 토마에 죽음과의 관계를 맺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더욱 흥미로운 것은 마치 고양이에 의해 “앞서서” 반복되듯이, 토마의 섬뜩한[어쩐지 기분 나쁜, 편치 않은] 경험이 반복되는 모양이다. 고양이의 독백은 실제로, 토마에게 일어나는 것의 예언으로서 해석할 수 있다. 예견이 예언이 되며, ‘봄’은 언어가 된다. 그리고 이 언어는 맹목이며, 장님의 언어가 된다. 죽음에 관해서 그것 자신이 맹목이라는 것이 보이는 것은, 인간이 아니라 고양이인 것이다.

 데리다에게 있어서 예견은, 현재에 대한 맹목과 결부되어 있을 뿐 아니라, 환상이라는 맹목과도 결부된다. 우리는 그 환상 속에서 우리 자신을, 죽음의 불가능성에 대해 접근시키지 않는 것이다. 그렇지만 죽음 속에서 나는 더 이상 나 자신이 아니기 때문에, 죽음에 대한 나의 관계는, 내 속에 이미 있는 타자의 존재방식에 근거하고 있다. 데리다는 원래 『그라마톨로지에 관하여』의 시점(時点)부터, “타자와의 관계나 죽음과의 관계는, 동일한 개구부이다”46)고 말했다. 타자, 예를 들어 동물, 예를 들어 고양이는, 나 자신과 더불어 있는 내게, 나의 종언이라는 심연에 있는 나와 대면하는 것이다. 데리다가 말하듯이, “어떤 바닥없는 눈빛에 못지않게, ‘동물의’라고 말해지는 이 눈빛은, 타자의 눈으로서, 인간적인 것의 심연의 한계를 내게 볼 수 있도록 해주는 것이다. 비인간적 또는 몰인간적인 것, 인간의 종언의 무수함들”을 주기 때문이다(L’animal…, 30/12/33).

 『동물을 쫓다』에서 데리다가 강조한 것은, 나를 열고, 내 속에 죽음을 기입하는 것은, 추상적인, 일반적인 의미에서의 타자뿐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그것은, 그때마다 유일한 타자, 그러므로 ‘이타성[他性]’조차도 아니고, 그저 이 혹은 저, 단독적인 것에 대한 관계는, 결코 정당화되지 않는다. 설령 그것이, 내게 모종의 일반적인 것으로 아직 잔존해 있는 듯한(다른 고양이들이나 다른 국어나 언어, 다른 철학자들 등과 같은) 다른 온갖 단독적인 것을, 그들을 단독적인 것으로 하지 않은 희생을 나더러 치르게 한다고 해서, 그 관계는 정당화되지는 않는다. 이것은 키에르케고르가 윤리적인 것으로부터 종교적인 것으로 이행할 때,47) 즉 그가 신앙의 도약을 했을 때의, 데리다에 의한 키에르케고르 해석법이다. 그 신앙의 도약은, 이 프랑스의 철학자의 경우에는, 신의 전능성이나 초월적인 신과는 결부되지 않고, 오히려 약하고, 여리고, 상처 받기 쉽고, 그때마다 개개의 존재이며, 경험적으로, 그리고 자(서)전적으로도 나를 각인해 온 것과 결부됐다. 이것은 즉 비오스〔사회적∙정치적 삶〕가, 개개인의 ‘생명’ 또는 ‘생활’이, ‘자기[自]’ 속에, ‘자기성’ 속에, 죽음을, 타자를 ‘기입한다’(graphein)고 하는 것이다. 어떤 의미에서, 모든 자(서)전에는, ‘자-타-사-생-기’(auto-hetero-thanato-bio-graphy, 自―他―死―生―記)가 동시적으로 혼재하고 있다. 이런 관점에서, 데리다가 “산 것들의 또 다른 사고에, 산 것들의, 이것들의 자기성에 대한, 이것들의 autos에 대한 … 관계”를 강조하는 점을 우리는 해석할 수 있다(L’animal…, 173/126/234). 내가 보기에, 눈빛이 데리다를 가로지름으로써, 동물이나 불가능한 것에 대한 질문, 그리고 희생과 죽음의 물음이 갑작스레 열리는 곳으로 그를 유도한 것은 ― 거의 대부분을 저 환상적이고 실재하는 고양이가 맡고 있지만 ― 그래도 역시 동시에, 그 고양이 이전에 존재한 고양이, 그 고양이를 쫓고 있는 고양이들, 즉 고양이를 그리는 문학의 담론을 모두 통틀어, 저 전통 그 자체이기도 한 것이 아닐까,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다. 고양이의 눈빛 ― 우리는 맹목이 되는 바의 눈빛 ― 은 우리의 시야로부터 벗어난, 우리가 우리 자신의 도덕성과 맺고 있는 관계의 맹점이 되고 있는 장소에, 우리의 단독적인 것을 제출한다. 그리고 이 눈빛은, 우리에게 내던져져 있는 동시에, 우리로부터 환상적으로 발생하는 이 눈빛은, 그때마다 단독적이다. 절대적으로 개개의, 근원적으로 경험되고 있는, 이(tode ti), 욕실의 이 고양이가 미동도 없이 나를 바라보고, 환상의 여백을 연다. 결코 개념으로는 환원할 수 없는 환상에 있어서 열려진 여백을. 고양이가 아니다, 고양이가 아닌 것이다. 전적인 타자도 아니고, 어쩌면 타자조차도 아니다. 우리가 만난 단독성은, 하나의/한 명의 타자라고조차 부르지 마라. 그것이 나와 만난 순간, 그것이 나를 바라보고, 내가 보이는 순간, 그것은 순식간에 나를 건드리고, 나를 가로지르며, 내게 속하지 않는 나의 일부가 되기 때문에. 우리는 단독적으로 어울린다, 서로의 장소를 교환함으로써. 우리 자신에게도 아직 알려져 있지 않은 장소를.



〔범례〕

1. 본고는 2014년 12월 3일에 首都大学東京에서 열린 국제 세미나 ダリン・テネフ『猫、眼差し、そして死』에서 읽은 원고 “The Cat, The Look, andDeath: (Variation on a Derridean Theme)”의 번역이다.

2. 본고에서 참조되는 데리다의 주요 텍스트는 원전 프랑스어판으로서 Jacques Derrida, L’animal que donc je suis(Paris: Galilée, 2006; L’animal…,로 약칭), 일본어판으로서 『動物を追う、ゆえに私は(動物で)ある』(鵜飼哲訳, 筑摩書房, 2014 年;『動物を追う』로 약칭), 영어판 Jacques Derrida, The Animal That Therefore I Am, trans. David Wills(New York: Fordham University Press, 2008; The Animal…,로 약칭)을 각각 저본으로 삼고, 인용할 때에는 필요할 경우에는 프랑스어/영어/일본어로 기재했다.

3. 본문 안의 [ ]는 저자가 Jacques Derrida, L’animal que donc je suis, Paris: Galilée, 2006.에서 원문의 인용을 할 때 사용했다.

4. 본문 안의 “ ”는 저자의 인용을, ( )은 저자의 원어표기 및 보충을, 〔 〕는 역자에 의한 주석을 나타낸다. 저자 ダリン・テネフ의 원문 안에서 이탤릭으로 강조된 대목은 굵은 글씨로 나타냈다.


〔인용・참고문헌〕

본고의 번역에 있어서는 이하의 문헌을 참조했다. 작품으로부터의 인용은, 특히 거절당하지 않은 한 원저 뒤에 적은 ( ) 안의 번역서를 사용하고, 적절하게 필요할 경우에만 역자가 기존 번역에 약간의 변경을 가했고 이를 각주에 적었다.


Blanchot, Maurice. Thomas l’bscur. Première version, 1941, Paris: Gallimard, 2005.(「謎の男トマ」菅野昭正訳、『ベケット・ブランショ』<筑摩世界文学体系82 >所収、筑摩書房、1982 年、121-65 頁)

Derrida, Jacques. De la grammatologie, Paris: Seuil, 1967. ; English translation : Of grammatology, trans. G. Ch. Spivak.(『グラマトロジーについて』(上・下)足立和浩訳、現代思潮社、1972 年)

_______, Mémoires d’veugle. L’utoportrait et autres ruines.(『盲者の記憶―自画像およびその他の廃墟』みすず書房、鵜飼哲訳、1998 年)

_______, Aporias, trans. Thomas Dutoit.(『アポリア 死す―「眞理の諸限界」を「で/相」待―期する』港道隆訳、2000 年)

_______, Donner la mort, Paris: Galilée, 1999; The Gift of Death(『死を与える』廣瀬浩司・林好雄訳、ちくま学芸文庫、2004 年)

_______, Le toucher  English translation : Jacques Derrida, On Touching.( 『触覚、ジャン=リュック・ナンシーに触れる』松葉祥一・榊原達哉ほか訳、青土社、2006 年)

_______, L’animal que donc je suis.(『動物を追う、ゆえに私は(動物で)ある』鵜飼哲訳、筑摩書房、2014 年)

Heidegger, Martin. Sein und Zeit. ; English translation: Being and Time, trans. John Macquarrie & Edward Robinson.(『存在と時間』(上・下)細谷貞雄、筑摩書房、1994 年)


〔著者紹介〕

다린 테네브ダリン・テネフ(Darin Tenev)는 비교문학과 서구현대사상을 주전공으로 하며, 현재는 소피아대학 조교수. 저작으로 조이스와 엘리엇, 불가리아 시인 아타나스 달체프의 문학작품, 볼프강 이자, 모리스 블랑쇼의 문학론, 후설, 하이데거, 장-뤽 낭시 등의 존재론,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이나 라캉의 정신분석 등을 비교문학적으로 논한 문학원론 『허구와 이미지, 모델』(Фикция и образ. Модели [Fiction and Image. Models], Пловдив: Жанет 45 [Plovdiv: Zhanet 45], 2012), 가능성이나 증여, 상상력 등과 같은 주제로부터의 데리다론 『탈선 : 자크 데리다론』(Отклонения. Опити върху Жак Дерида [Digressions. Essays on Jacques Derrida], София: Изток-Запад [Sofia: Iztok-Zapad], 2013)이 있다. 일역본으로서 「애도된 영토 : 일본 아방가르드 잡지 『아』의 경우喪われる領土――日本アヴァンギャルド雑誌『亞』の場合」(小川寛大訳・高木信編『日本文学からの批評理論――亡霊・想起・記憶』笠間書院, 2014년)가 있다. 또한 テネフ 씨는 그동안 萩原朔太郎, 高村光太郎, 谷川俊太郎 등의 시인과, 西田幾多郎와 三木清 등의 철학자의 작품의 불가리아어 번역을 했다.


Darin Tenev, “The Cat, the Look, and Death”. Reprinted by permission of Darin Tenev.

訳=南谷奉良(一橋大学博士課程)


1) Jacques Derrida, L’animal que donc je suis, Paris: Galilée, 2006. 본고에서는 이하 원문 프랑스어판을 L’animal…이라고 표기하고, 영어판에는 Jacques Derrida, The Animal That Therefore I Am, trans. David Wills, New York: Fordham University Press, 2008을, 일본어판에는 『동물을 쫓다, 고로 나는 있다(동물이다)[動物を追う、ゆえに私は(動物で)ある]』, 鵜飼哲訳, 筑摩書房, 2014년을 참고했으며, 인용 때에는 쪽수를 프랑스어/영어/일본어의 순서로 빗금과 더불어 표기한다.

2) 아마 고양이에 얽힌 망라적인 계보학 연구를 한 최초의 시도에는 일찍이 1920년대 초반에 집필된 Carl van Vechten, The Tiger in the House, New York: Alfred A. Knopf, 1968 (1920)가 있다. 유익한 책이지만, 꽤 나이브한 필치로 써져 있는 점은 아쉽다. 그렇지만 고양이에 관한 연구서로서는 초석이 되는 저작이다.

3) Jacques Derrida, Donner la mort, Paris: Galilée, 1999, p. 101; Derrida, The Gift of Death, trans. David Wills, Chicago: U of Chicago Press, 1995, p. 71. 1990년에 처음으로 일반에게 공개된 이 텍스트에서 이미 고양이가 등장하고 있다. Jacques Derrida, “Donner la mort”, In: L’thique du don. Colloque de Royaumont décembre, Paris: Métailié-Transition, 1992, p. 70.를 참조.

4) “리조랑지스(Ris-Orangis)의 묘지 안내도에는 생전에 그가 길렀던 모든 고양이의 무덤이 있다”(Benoît Peeters, Derrida, Paris: Flammarion, 2010, p. 518).

5) Jacques Derrida, Glas, Paris: Galilée, 1974 ; English translation: Jacques Derrida, Glas, trans. John P. Leavey, Jr., Richard Rand, Chicago: Chicago University Press, 1986.

6) Ibid., p. 8bi for the French, p. 2bi for the English edition.

7) [옮긴이] 일본어에서 ‘宙吊りにする[글자 그대로는 <허공에 매달다>]’, ‘宙吊りにされる[글자 그대로는 <허공에 매달리다>]’는 대체로 영어의 suspend, 즉 ‘중지하다’의 의미를 갖는다. 그러나 이렇지 않은 경우도 제법 있는데, 여기서도 그렇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자구 그대로 번역해야 했다. 물론 영어 원문을 보면 수정할 수도 있을 것이다.

8) Catherine Malabou, Jacques Derrida, Counterpath. Travelling with Jacques Derrida, trans. D. Wills, Stanford : Stanford University Press, 2004, p.56에는 “And, as every morning, with only a cat for a witness. Here his name is Settembrino.”라는 기술이 있다.

9) Jacques Derrida, « À force de deuil », Chaque fois unique, la fin du monde, Paris: Galilée, 2003, pp.177-204; English translation: Jacques Derrida, “By Force of Mourning”, The Work of Mourning, edited and translated by Pascale-Anne Brault and Michael Naas, Chicago and London: The University of Chicago Press, 2001, pp.139-64.

10) Miglena Nikolchina, Devi, ritsari, kralitsi (Maidens, Knights, and Queens), Plovdiv: Janet 45, 2014를 참조.

11) James Bowen & Garry Jenkins, My Name is Bob, London: Red Fox Picture Books, 2014.

12) E. T. A. 호프만, 수고양이 무르의 인생관 양장본(The Life and Opinions of the Tomcat Murr)』, 김선형 옮김, 경남대학교출판부, 2010.

13) Hippolyte Taine, Vie et Opinions Politiques d’un Chat, 1858.

14) 夏目漱石, 『吾輩は猫である』, 東京, 角川文庫, 1972.

15) 同上16-17頁.

16) 同上26頁.

17) James Joyce, Ulysses. Hans Walter Gabler, ed. (Random House: New York, 1982)〔이하 본문 안에서 『율리시스』를 인용할 때에는 약호 U에 이어 삽화 수와 행수를 적는다.〕

18) James Joyce, Poems and Shorter Writings, London: Faber & Faber, 1991, p. 128.

19) Richard Ellmann, James Joyce, Oxford: Oxford UP, 1983, pp. 536-37.

20) ibid, p. 536.

21) Jacques Derrida, Memoirs of the Blind, op.cit., p. 2.

22) Ibid., p. 47.

23) Ibid., p. 51.

24) Ibid., p. 68.

25) Jacques Derrida, Memoirs of the Blind, op.cit., p. 65. (Jacques Derrida, Mémoires d’aveugle. L’autoportrait et autres ruines, Louvre, Réunion des musées nationaux, 1990, p. 69.)

26) Jacques Derrida, Le toucher, op. cit., p.13; English translation: Jacques Derrida, On Touching, op. cit., p.3.

27) 다음의 문헌을 참조. Jacques Derrida, « À force de deuil », Chaque fois unique, la fin du monde, Paris: Galilée, 2003, pp. 177-204 ; English translation : Jacques Derrida, « By Force of Mourning », The Work of Mourning, Chicago : U of Chicago Press, pp. 139-63.

28) Ibid., p. 182 for the French; p. 146 for the English text.

29) Jacques Derrida, Aporias, trans. Thomas Dutoit, Stanford: Stanford university Press, 1993, p.75.

30) Ibid., p. 76.

31) Ibid., p. 188 for the French; p. 151 for the English text.

32) Ibid., p. 199 for the French; p. 160 for the English text.

33) Ibid., p. 200 for the French; p. 161 for the English text.

34) Jacques Derrida, Séminaire. La bête et le souverain, Vol.II, op.cit., p. 176.

35) Ibid., p. 244.

36) 『수수께끼의 사람 토마』의 원저에는 초판 : Maurice Blanchot, Thomas l’obscur. Première version, 1941, Paris: Gallimard, 2005, pp. 72-79; 2판 : Maurice Blanchot, Thomas l’obscur, Paris: Gallimard, 1950, pp. 34-42을 사용했다. 영어판은 2판만 입수 가능하며, Maurice Blanchot, Thomas the Obscure, trans. Robert Lamberton, The Station Hill Blanchot Reader, ed. Georg Quasha, Station Hill: Barrytown, 1999, pp. 71-75을 참조. 〔일역본으로는 門間広明訳『謎の男トマ 一九四一年初版』(叢書・エクリチュールの冒険)月曜社、2014년이 있다.〕

37) Ibid., pp. 77-78 for the first edition; p. 40 for the second edition; pp. 73-74 for the English translation.

38) Jacques Derrida, Séminaire. La bête et le souverain, Vol.II, op.cit., p. 266.

39) Jacques Derrida, Parages, Paris: Galilée, 2003, p. 295.

40) Ibid., p. 299.

41) Maurice Blanchot, Thomas l’obscur. Première version, 1941, op. cit., p. 73. 이 대목은 2판에서는 없어졌다.

42) Ibid., p. 74. (Lamberton translates: “And now I am a dull-eyed creature.”, p. 71.)

43) ibid., p. 75.

44) Martin Heidegger, Sein und Zeit, Tübingen: Max Niemeyer, 1986 (1927), S. 147; English translation: Martin Heidegger, Being and Time, trans. John Macquarrie & Edward Robinson, New York: Harper Collins, 1962, p. 187.

45) Heidegger, Sein un Zeit, op.cit., S. 150; Being and Time, op. cit., p. 191.

46) Jacques Derrida, De la grammatologie, Paris: Seuil, 1967, p. 265. English translation : Of grammatology, trans. G. Ch. Spivak, Baltimore and London : John Hopkins UP, 1997, p. 187.

47) Jacques Derrida, Donner la mort, op. cit. (The Gift of Death, op. cit.)를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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