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가야마 겐, 『푸코 : 생명권력과 통치성』

中山元フーコー 生権力統治性

6. 생명권력 : 프랑스의 중상주의 모델

1. 생명권력의 등장


* 국내에서 통용되는 번역어로 최대한 바꾸려고 노력했다. '폴리차이'는 '내치'라는 번역어가 적절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conduite는 명료한 경우가 아니라면 '품행'으로 옮기지 않고, '인도, 인도하다' 등으로 적는다. 한편, 제목에서는 '生権力'이라고 되어 있으나, 여기서는 6장의 제목과 1절의 제목의 생명권력은 権力이다. 아래에서는 이것을 모두 생명권력으로 옮긴다. 

* 그러나 국내의 적합한 번역어로 바꾸지 못한 부분도 있다. 눈이 밝지 않아 생긴 문제라고 널리 혜량을 구한다.  

 

중농주의의 새로움 

국가이성의 개념이 가장 활용된 것은 17세기부터 18세기의 프랑스에서였다. 그 상징은 재상 리슐리외와 루이 14세이다. 루이 13세를 모시던 리슐리외는 1624년에 권력을 잡고 프랑스 절대왕정의 확립에 기여했다. 리슐리외는 국가이성을 위해, “공공의 이익을 사적인 이익보다 우선시하기 위해, 군주도 신하도 헌신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또한 루이 14세는 국가이성을 모든 사람이 동의하는 첫 번째 법이지만, 통치하지 않는 자에게는 가장 어두컴컴하고 가장 알려지지 않은 것이라고 정의하고, “아무리 자의적으로 생각한다고 해도, 주권자의 모든 행위를 정당화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루이 14세는 모든 문제를 자신이 해결하는 것을 목표로 삼고, 국가를 위해 한 몸을 바쳤다. 혁명 전의 이 태양왕 시대의 중요한 난제 중 하나가 식량부족으로 인한 평민 반란의 가능성이었다. “식량난은 도시 환경에서 출현하고, 그리고 그 직후에 반란이 발생할 가능성이 높아지기 때문이다. 프랑스 혁명의 직접적인 방아쇠가 된 것이 식량난의 문제였다는 것은 마리 앙투아네트의 유명한 말로 상징된다.

이에 대해 정부가 의거한 것은 법과 규율에 의한 중상주의적 시스템이었다. 곡물의 가격을 제한하고, [곡물을] 비축하는 권력을 제한하는 것이다. 농민은 수확한 곡물을 비축할 수 없기 때문에, 지정된 가격에 곧바로 매각하도록 의무가 부과되었다. 더욱이 최저량의 씨앗을 뿌리는 것이 의무로 여겨지고, 특정한 작물의 재배는 금지됐다. “처음의 수확에서부터 이미 대대적인 감시 시스템이 구축되고, 재고의 통제가 가능해지며, 국가 간 유통이나 지방 유통을 막을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러나 이 시스템은 파탄 났다. 그 이유는 첫째로 농민의 파산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풍년이 든 해에 농민들은 염가로 곡물을 매각하도록 강제되어 생산 비용을 회수할 수 없었다. 농민이 충분한 수입을 얻을 수 없게 되면, 이듬해에 뿌릴 씨는 필연적으로 적어진다. 그러면 기후 악화 등의 작은 원인으로도 식량난이 발생하게 된다.

이런 악순환에 대처하기 위해 1764년까지, 중농주의의 원칙 아래서 곡물 통상과 곡물 유통의 자유의 원칙이 채용된다. 그런데 1764년에는 귀엔느(Guyenne)에서 흉작이 일어나고, 완전한 자유를 유지했기 때문에 곡물 가격이 천문학적인 속도로 상승”하는 사태에 직면했다.

그래도 중농주의자들은 이 자유화를 옹호했다. 중농주의자들은 우선 [중상주의의] 법과 규율의 시스템에서는 으로 간주된 곡물의 부족과 가격의 인상을 도덕적인 사태로서가 아니라 자연의 현상으로서 파악할 것을 주장한다. 그것은 있는 그대로의 것으로 받아들여져야 한다. “식량난이라는 강박관념”에서 벗어나 곡물 가격의 변동이라는 자연의 현상을 방해하지 않고 조금씩 보정하고 제동을 걸고 최종적으로는 제한하고 최종단계에서 취소하는 것을 시도하는 것이다.

그러면 실제로는 어떻게 하는가? 우선 곡물의 가격을 저하시키는 것이 아니라 곡물 가격이 상승하는 것을 인가하고 우대하기까지 한다.” 그리고 완전히 방치하는 것이 아니라, 인공적 수단에 의해 가격의 상승을 꾀하는 것도 허용된다. 예를 들어 수출을 장려금으로 조성하거나, 수입관세를 부과할 수도 있다.

풍작인 해에는 상대적으로 가격이 비싸진다. 그러면 경작지가 확대된다. 농민은 전년도의 수확으로부터 충분한 이익을 확보했기 때문에 경작지를 확대하고 경작을 늘릴 수 있다. 그렇다면 기상 조건이 조금쯤 나쁘더라도 식량난이 일어나지는 않는다. 그리고 전보다 다량의 곡물이 시장에 공급되기 때문에, 이듬해는 가격이 떨어진다.

혹은 이듬해에 흉작이 예상된다면, 곧바로 가격이 상승한다. 하지만 이 가격상승은 방치해둘 수 있다. 그것은 국내의 통상도 외국의 무역도 자유롭기 때문에 풍작인 지역이나 국가로부터의 수입이 증대하며, 가격을 인하할 압력이 가해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농민들은 가격을 내려서라도 판매하려고 하는 것이다.

이 중농주의의 자유화 정책의 특징은 단순히 시장에서의 곡물의 양과 가격의 관계를 조작하는 것이 아니라, 농민에 의한 경작의 때와 매각의 때의 계산, 수입 상인의 계산, 소비자의 계산까지 고려해서 사람들을 순수하게 이익을 획득하려고 하는 주체, 호모 에코노미쿠스로서 다루는 데 있다. 이 정책은 생산의 계기를 통합하고 세계시장을 통합하고 그리고 마지막으로 주민생산자소비자의 경제적인 행동을 통합하는 것이다.

 

새로운 주체의 등장 : 주민·인구

푸코는 중농주의가 채용한 이 수단의 전체를 안전장치라고 부르는데, 이것이 안전이라고 불리는 것은 외부로부터 규제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것이 아니라 주민 전체에 있어서 작동하는 내적인 메커니즘이기 때문이다. “주권은 영토의 경계 내에서 행사되고 규율은 개개인의 신체에 행사됐으며 그리고 마지막으로 안전은 주민 전체에 행사되는 것이다.

이 장치가 대상으로 하는 것은 주민인구라는 총체이며, 이것이 전체로서 정치적 주체로서 행동하고 있다고 간주하는 것이다. “정치적 주체로서의 주민인구는 그 이전의 수세기 동안의 법사상정치사상에 있어서는 완전히 이질적인 새로운 집단적 주체이며, 이 새로운 주체가 여기에 등장한 것이다. 이 주체를 대상으로 하는 기술은 규율을 가하고 조작해야 할 주체를 향한 기술과는 명확히 다른 수준에 있다.

중농주의의 등장은 새로운 권력의 탄생을 알리는 것이었다. 이것이 생명권력이다. 이것은 개인들의 행동의 극히 세부까지 통치를 행했던규율권력과는 꽤 성질이 다른 것이다. 생명권력은 개인의 신체가 아니라 주민인구라는 새로운 정치적 인물에 작동을 거는 것이다. 푸코는 이 정치적인 인물이 18세기에 놀라운 등장을 이루었다고 지적한다.

물론 인구라는 요소를 처음으로 주목힌 것은 아니다. 중상주의 시대의 영국에서 인구를 주목한 적이 있다. 그것은 잉글랜드의 존 그라운트의 대위 존 그라운트에 의한 런던시의 정치, 종교, 상업, 발달, 공기, 질병 등에 주로 관련하여 이루어진 자연적 및 정치적 관찰들(1661)을 단서로 할 것이다. 이 관찰은 페스트에 의한 런던의 인구 감소와 재증가에 주목하는 것이었다. “1603년과 1625년 페스트의 해에는, 거의 전체 인구의 5분의 1이 사망했으나, “페스트에 의해 생긴 런던시의 인구의 균열은 보통 2년 동안 채워진다”는 것이 확인된 것이다.

이런 그라운트의 관찰에 이어서 윌리엄 페티는 1681년에 더블린의 사망표에 관한 관찰들을 발표하는데, 이것도 마찬가지로 질병에 의한 사망률에 주목했다. 같은 해의 정치산술은 런던과 파리 등의 도시와 인구를 비교하면서, 국가에 있어서 인구가 지닌 중요성을 강조했다. 4장에서는 잉글랜드 국왕의 인민 및 영토들은 그 부 및 힘에 관해서, 프랑스의 그것들과 자연적으로 거의 같은 중요성이 있다는 것을 지적하면서, 27만 명이나 되는 프랑스의 성직자가 얼마나 국부를 줄이고 선원과 해병이 얼마나 잉글랜드의 국부를 늘리는가를 대비하면서 강조하는 것이었다.

그라운트와 페티의 사망표는 역병에 의한 도시인구의 증감을 고찰하는 것임에 틀림없었지만, 정치산술은 중상주의적 관점에서, “국가권력의 근육과 신경을 감독하는 정치적 수완을 발휘한 것으로서, 그 후의 본보기가 됐다. 17세기에는 인구를 국가의 재산으로 생각하고, 힘의 원천으로 간주하게 됐다. 중상주의에서는 인구를 이른바 국력과 국부의 근간으로 간주하고, 이 인구가 적절한 방식, 장소, 목적으로 작동하는[일하는] 것을 확보하는 것을 중요한 과제로 하게 됐기 때문이다.

이렇게 중상주의에서는 인구주민을 주권자의 신하로 간주한 것이며, 이것에 규제를 가함으로써, 국력을 증진시킬 수 있다고 생각했다. “사람들은 법권리의 주체, 법에 복종하는 신민, 통제적 틀을 부여받을 수 있는 신민으로서 거기에 있던 것이다.

이에 대해 18세기의 중농주의로부터는, 인구에 대한 시선이 중상주의와는 완전히 다른 것이 된다. 인구는 그것만으로는 국력이 되지 않는다. “주민이 소비하는 것 이상으로 생산하고, 식료품에 국외의 매수자가 지불하는 것과 같은 수준의 가격을 지불하는 경우에 한해서 국부를 만들어낸다. 생산하는 것 이상으로 소비를 하고, 수출가격보다 더 싸게 식량을 구입한 것으로는 국력이 감퇴한다. 그러나 농업수입을 증대시키면 그것은 풍요가 되며, 자연스럽게 인구를 증대시킨다.

우선 토지의 산물을 풍요롭게 하는 것이 중요하며, 인구 자체를 늘리는 것을 자기 목적으로 삼지 않는다고 중농주의는 생각한다. “케네나 그 제자들의 사고방식으로는, 인간은 대지와 부를 잇는 본질적인 매개이다. 인구가 증대하면, “산업에 값싼 노동력을 공급하고, 그것이 원가를 낮추고, 생산과 상업의 발전을 가능케 하는 것이다. 이것은 신하로서 주시해야 할 대상이 아니라, 시민으로서 자유롭게 노동하게 해야 할 존재인 것이다.

그리고 중농주의에서 이 인구는 자연에 맡겨야 할 것으로서 등장한다. 인구가 자연성으로서, “법에 의지한 주권자의 의지에 맡기는 것에 대해, 이른바 <두께>로서, 본성적인 현상으로서 나타나는 곳에, 중상주의의 인구 개념과 큰 차이가 있다고 푸코는 생각한다.

 

인구의 자연성

푸코에 따르면 인구의 이런 자연성은 세 개의 차원에서 나타난다. 첫째로, 인구는 주권자가 조작할 수 있는 주어진 것이 아니라, 자연스럽게 변동하는 것이며, 어떤 불투명성을 갖추고 있는 것이다. 인구는 풍토에 의해서, 통상의 크기나 부의 크기에 의해서, 사람들의 습관에 의해서, 도덕적인 가치나 종교적 가치에 의해서, 식량의 상태에 의해서 변동한다. 이런 변수들은 서로 복잡하게 관련되어 있으며, 법에 의해 통제할 수는 없는 것이다. 주권자는 법을 정해서 신민을 지배할 수 있으며, 신민은 법을 거부함으로써 지배에서 벗어날 수 있다. 그러나 통치에 의해 인구를 원하는 대로 지배할 수는 없으며, 주민은 스스로의 의지에 의해 인구를 통제할 수 없는 것이다. 주권자에 대해 인구는 어떤 불투명한 <두께>로서 나타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구는 이런 자연성을 갖추고 있기 때문에, 전혀 통제할 수 없는 것이 아니라, 현명한 정책에 의해 영향을 줄 수 있는 것이다. 이 정책에서는, 국내를 순환하는 통화의 흐름을 제어하고, 수출을 증가시키고 수입을 제어할 필요가 있다. 통화가 원활하게 또한 구석구석까지 흐르도록 배려할 필요가 있다. 수출이 증가하면 노동의 가능성이 커지며, 부가 커지며, 인구도 증대한다. 수입이 증가하면 국내의 노동을 빼앗기지만, 식량이 증가함으로써 인구에도 영향을 미친다. 인구에는 이런 자연성이 있기 때문에, 중상주의에서 생각된 것과는 완전히 다른 기술이 필요해진다. 신민을 복종시키는 기술이 아니라, 다양한 요인에 작동을 가함으로써, 자연스럽게 인구를 증가시키는 기술이 요구된 것이다.

둘째로, 인구의 자연성은, 사람들의 욕망의 자연성에 의거하고 있다. 사람들은 이익이 있는 곳에 모인다. “인간은 부를 획득할 수 있는 곳, 편안하게 살 수 있는 곳, 자연의 노동근면에 의해 손에 넣을 수 있는 부를 확실하게 제 것으로서 소유할 수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모이며, 증식하는 것이며, 이것을 막아서는 안 되며, 막을 수도 없다.

이 중농주의의 욕망 개념은 중요하다. 이것은 개인이 자신의 사적 이익을 추구하는 것이 사회 전체의 부의 증대를 가져올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욕망의 놀이에 의해 집단적 이익이 생긴다는 것이 인구의 자연성의 커다란 특징이다. 그래서 욕망을 잘 불러일으키고, 잘 이용하는 것이 요구된다. 이것에 의해 인구가 증가하는 것이며, 규율사회처럼 사람들의 욕망을 관리하는 것이 중요한 게 아닌 것이다.

이 자유주의로 통하는 욕망의 사상은, 17세기까지의 통치나 주권의 행사에 관한 과거의 윤리적법적인 구상과는 정반대의 극에 있는 것이다. 과거에는 주권자는 개인의 욕망에 아니라고 말할 수 있는 자였다. 그런데 18세기의 이 욕망의 사상은 이것은 완전히 역전시켜 버린다. 이제 문제는 이 욕망에 어떻게 해서 그렇다고 말할 수 있는가이다. 푸코는 이 욕망의 긍정의 이론, “자기애욕망을 자극하고 우대하고”, 그것이 생기는 효과를 활용한다는 사고방식을 공리주의 철학의 원형이라고 부르고 높이 평가한다.

세 번째 차원으로, 인구의 자연성은 기묘할 정도의 규칙성을 나타낸다는 것이 지적된다. 이미 런던의 사망표를 관찰한 그라운트는 런던의 인구에서 보이는 균일성을 지적했다. “남아의 출생은 항상 여아의 그것을 웃돈다. 더욱이 지금 거론한 자료에 따르면, 14 13의 비율이다.” 양성의 비율이 수적으로 거의 균형을 이룬 것은, 이 관찰에서 처음 확인됐다고 한다. “인구의 자연성은 현상들의 항상성에서 나타났다.”

이런 인구의 자연성이 확인된 것은 통치에 있어서 큰 전환점이 된다. “권력의 기술들의 영역에 하나의 자연이 들어왔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인간은 인류라는 이념적인 ()” 개념 아래서가 아니라, 다른 동물들과 나란히 인간이라는 ()” 개념으로 생각되게 됐다. “인간이 모든 생물의 종의 규정이라는 영역 속에 하나의 종으로서 모습을 드러내는 것은, 인간의 통치가 생물학의 영역과 깊은 관계를 갖게 시작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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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가야마 겐, 『푸코 : 생명권력과 통치성』

中山元フーコー 生権力統治性

5국가에 의한 통치 독일의 내치[폴리차이] 모델

2. 독일의 모델 : 중상주의 유형


* 국내에서 통용되는 번역어로 최대한 바꾸려고 노력했다. '폴리차이'는 '내치'라는 번역어가 적절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conduite는 명료한 경우가 아니라면 '품행'으로 옮기지 않고, '인도, 인도하다' 등으로 적는다. 

* 그러나 국내의 적합한 번역어로 바꾸지 못한 부분도 있다. 눈이 밝지 않아 생긴 문제라고 널리 혜량을 구한다.  

 

외교와 내치[폴리차이]의 관계

국가이성의 시대는 유럽의 균형의 시대이며, 항상적인 외교와 상설 군대에 의해 다양한 국가들이 대립하고 경합하는 시대였다. 이는 대외적 경합을 목표로 하는 기술이다. 이에 대해서 국내에서의 국력을 증강하는 기술이 있으며, 이미 말했듯이 이것이 프랑스에서는 폴리스, 독일에서는 내치[폴리차이]로 불린 것이었다. 이 기술이 가장 커진 것은 독일에서였다. 5장부터 7장까지 군주권력의 국가이성의 시대부터, 규율권력의 시대, 그리고 생명권력의 시대로 이르는 유럽의 정치적 이성에 대해서, 독일, 영국, 프랑스의 세 가지 모델을 검토하면서 각각의 방식을 비교하고 싶다.

독일에서 내치의 학은 관방학으로서 치밀하게 구축됐다. 푸코는 독일에서 이 학이 발달한 이유로, 베스트팔렌 조약에 의해 많은 작은 영방국가가 탄생하고 각국이 독립적으로 존재했기 때문에 봉건적 구조와도 거대 국가와도 다른 국가적 실험에 있어서 특권적인 공간이 됐기 때문이 아니냐고 생각하고 있다. 독일에는 프랑스와는 달리 국가행정의 스태프[인력]가 부재하며, 이 때문에 대학에서 인력[스태프]을 조달하게 되어, 대학에서 관방학이 구축됐다는 것이다. “경제면에서는 그다지 활동할 수 없던 부르주아지가 끊임없이 [이웃 국가와의] 항쟁에 직면했던 군주의 편에 서서, 국가의 조직을 위해 도움이 되는 인재, 능력, 부 등을 제공했다.” 이 관방학은 독일의 특산품으로서 유럽의 각지에 전해졌다.

내치는 좋은 통치의 기술이며, 신민의 복지를 개선하는 기술로서, 사목의 기술과 공통된 곳이 있다. 작동되는 대상이 영토로서의 국토가 아니라 국민이라는 것, 그리고 목적으로 하는 바가 국민의 복지라는 것은, 사목의 기술과 내치의 기술에 공통된 바임은 이미 확인했던 대로이다. 독일의 관방학의 이론적 지도자의 한 명이었던 폰 유스티는 국가의 자산은 영방 내에 존재하고, 가신에 속하든, 국가가 직접 소유하든, 모든 종류의 동산과 부동산으로 이루어질 뿐만이 아니다. 공화국에 속하는 사람의 모든 능력과 숙달로부터도 성립되어 있는 것이다. 당연히 사람들 자체도 시각에 따라서는 국가의 자산에 넣지 않으면 안 된다고 지적한다. 푸코는 “내치는 국내 질서와 국력 증강 사이에 동적인, 그렇지만 안정적이고 통제할 수 있는 관계를 수립하는 것을 가능케 하는 계산과 기술이라고 정의한다.

여기서 주목하고 싶은 것은 내치가 신민의 복지의 개선을 목적으로 한다고 외치면서, 실은 국가의 장려함을 목적으로 하는 학이라는 것이다. 당시부터 내치에 대해 국가 전체의 장려함과 전체 시민의 행복을 위해 이용되는 수단의 총체라고 말해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것은 유럽의 세력균형에서의 외교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자국의 장려함을 과시하는 것은 해부학에 열중하는 관찰자들에게 자국의 힘을 보여준다는 의미를 갖기 때문이다.

푸코는 내치와 세력균형의 관계를 국력, 타국을 주시하는 권리, 통계학, 통상이라는 네 가지 측면에서 고찰한다. 우선 세력균형은 발전하고 있는 국가의 힘의 균형을 취하는 것이었다는 의미에서 내치와 깊은 관계에 있다. 내치는 좋은 국가질서를 유지하면서 국력을 증강시키고 더욱이 유럽의 힘의 균형을 유지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유럽의 세력균형의 상태 아래서, 영구평화의 실현을 목표로 한 칸트는 이것을 날카롭게 지적한다. 칸트는 유럽의 현상황이 사회계약을 체결하기 이전의 인간들의 관계와 마찬가지이며, 전쟁상태가 계속되고 있다고 생각한다. “국제법의 이념은 서로 독립된 국가가 인접하면서도 분리되어 있음을 전제로 한다. 그러나 이 상태는 이미 전쟁상태이다.”

그러나 이 전쟁상태는 전쟁의 폐절로 향하는 싹을 갖추고 있다. 그것은 두 개의 경향에 있어서이다. 하나는 어떤 국가도 타국을 정복하고 스스로 제국 아래로 통일하고 싶다고 생각하지만, 언어와 종교가 다르기 때문에 이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이 차이는 타민족을 미워하는 경향을 낳는데, 한편으로는 자국의 문화를 향상시키고, 타국을 이해하고 평화를 촉진하는 계기가 된다. 이 평화는 자유의 무덤 위에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힘을 서로 경합하게 하고, 그 균형을 취함으로써 생겨나고 확보되는 것이다.” 칸트는 좋은 국가체제야말로 민족의 좋은 도덕성을 기른다고 생각하는 것이며, 다양한 문화와 언어의 차이 속에 서로 동떨어져 있는 국가가 국내에서 좋은 국가체제를 구축하고, 서로 힘을 균형시킴으로써, 평화가 실현된다고 생각한다.

이런 세력균형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주위의 국가들에 패하지 않을 정도의 외교능력과 군사력을 유지할 필요가 있는데, 이를 위해서는 각각의 국가가 국력을 증강시킬 필요가 있다. 하나의 국가가 타국보다 국력의 증강에서 뒤떨어지면, 전체의 균형이 무너지는 것이다. 이렇게 어떤 국가는 다른 국가의 국력의 증강을 주시하는 권리를 소유하는 것처럼 된다. 그리고 타국의 국력을 주시[감시]하기 위해 필요하다고 간주된 것은, 하나의 국가의 인구군대천연자연생산통상통화유통 등의 정보를 수집하는 것이며, 이를 위해 통계학이 성립된 것이다.

칸트는 이 타국을 주시[감시]하는 권리에 대해 국력의 증강이라는 관점보다는 오히려 법적인 체제의 확립과 자국의 안전이라는 관점에서 지적한다. 만약 국내에 법률이 밑바탕에 깔려 있지 않으면, “서로 이웃해 있는 것만으로도 다른 민족에 해를 끼칠 것이다. 그래서 어떤 민족도, 스스로의 안전을 위해이웃 국가가 국제적인 사회계약을 체결하는 것, “거기서 스스로의 권리가 지켜지도록 하는 것을 다른 민족에게 요구할 수 있으며, 요구해야 한다.”

또한 통상관계에 대해서는, 이 시대는 중상주의의 시대, 즉 통상의 시대였음을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 푸코의 간략한 요약에 따르면, 중상주의는 각국에 다음과 같은 것을 요구한다. “첫째로 각국이 되도록 많은 인구를 가지려고 할 것, 둘째로 그 인구 전체가 노동에 대해 있을 것, 셋째로 그 인구에 주어지는 임금이 최대한 낮을 것을 요구한다.” 그리고 상품의 원가가 최대한 낮아질 것을 요구하는 것이다. 이렇게 함으로써, 상품을 해외에 수출할 수 있으며, 군주가 소유할 수 있는 돈이 많아지는 것이다. 중상주의는 이처럼 통화의 수입기술로서의 통상의 전략에 의거하고 있는 것이며, 그만큼 국내의 국력의 충실이라는 내치가 중요한 역할을 맡는 것이다.

칸트는 이 시대에 각국이 밀접한 통상관계를 맺고 있는 것이 전쟁을 방지하는 효과를 발휘한다고 지적한다. 각국은 서로의 이기심을 통해서민족들과 결합한다. 이것이 상업의 정신이며, “세계의 어디에서도, 전쟁이 발발할 위험이 다가오면, 국가들은 마치 영속적인 동맹을 맺고 있는 양 중재에 의해 전쟁을 방지할 수밖에 없게 된다.”

 

내치의 실무

그렇다면 이 내치라는 학과 기술은 어떻게 적용될까? 푸코는 들라마르의 『내치』으로부터, 내치가 국가의 내부에서 관리해야 할 것을 11개 항목을 꼽고 있다. 종교, 도덕성, 건강, 물품의 공급, 도로토목공공건축물, 공안(公安), 자유학예, 상업, 작업장, 하인과 육체노동자, 빈민이다.

이것으로는 국가의 내정의 거의 모든 분야를 꿰찬다. 내치가 종교에 신경을 쓰는 것은 진리로서의 교리를 전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도덕성을 확보하기 위해서이다. 내치는 사목의 권력과 마찬가지로, 신민의 혼의 건강을 배려하는 것이다. 다음으로 건강과 식량의 공급에 신경을 씀으로써, 내치삶을 보호한다.” 내치는 생명을 배려하는 것이다. 도로토목공공건축물, 상업, 작업장, 육체노동자, 빈민, 공안[치안]을 배려함으로써내치생활의 쾌적함, 정신을 배려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자유학예를 배려함으로써 인생의 기쁨 그 자체”에 신경을 쓴다. “인간이 생존하고, 생활하고, 더 한층 잘 사는 것을 가능케 하는 것이 내치의 역할로 여겨지는 것이다내치가 현재의 경찰처럼, 사회의 복지와 행복의 촉진의 배려가 아니라, 장래의 악의 방지의 배려를 목표로 하게 된 것은, 1770년대 이후의 일에 지나지 않는다.

또한 푸코는 튀르케 드 마이엘느귀족민주주의적 군주제라는 내치론을 인용하면서, 내치의 활동 분야를 크게 넷으로 분류한다. 첫 번째 분야는 아이와 젊은이의 교육을 대상으로 한다. 국민은 경건한 신앙을 갖고, 무기 취급에 익숙해지며, 직업을 습득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젊은 남성은 25세가 되면 내치 사무국에 가서 앞으로 어떻게 생활하려고 하는지를 보고하도록 요구된다. 보고를 거부하는 자는 “건달로, 명예를 결여한 인민의 쓰레기로 간주된다.

두 번째 분야는 빈민을 대상으로 한다. 건강한 빈민에게는 일자리를 주고, 병자나 장애자에게는 수당을 준다. 더욱이 공중위생을 배려하고, 일을 하기 위해 자금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자금을 대준다. 세 번째 분야는 상인을 대상으로 한다. 통상을 규제하고 조성한다. 네 번째 분야는 부동산을 대상으로 하고, 상속을 기록하고, 도로하천공공건축물삼림을 주시[감시]한다.

이 네 가지 분야에서 구체적으로 다루는 것은, “국력의 구성요소로서의 인간의 활동이다. 우선 인간의 수를 대상으로 한다. 17세기에 국력은 주민의 수와 비례한다고 여겨지게 됐지만내치학에서는 단순히 주민의 수를 늘리는 것이 아니라, 생산성이 높은 주민의 수를 늘리는 것을 목표로 한다. 작은 영토에서도 다수의 일하는 사람들이 있으면 풍요로워지는 것이다.

이어서 생활필수품을 규제한다. 주민의 수가 많더라도, 먹일 수 없으면 의미가 없다. 이것은 식량을 증산하기 위한 농업정책이며, 생산된 곡물의 질을 유지하고 비축하고 공급하는 곡물 내정(內政)이다. 더욱이 건강을 배려한다. 역병의 방지는 물론이고, “만인의 일상적인 건강이 중시된다. 도시에서는 공기, 환기, 통풍이 중시된다. 도시공간에 대한 일대 정책이 전개되는 것이다. 더 건강한 인간들의 활동을 감시[주시]하는 것이 필요해진다. 마지막으로 인간의 활동에서 생겨나는 상품이나 생산물의 유통을 배려할 필요가 있다.

이런 모든 것을 배려하는 내치의 학이 사목적 시선을 갖추고 있는 것은 분명하지만, 동시에 근대국가의 거의 가부장적인 배려를 행사하는 것이라는 점도 확실할 것이다. “내치의 목적은 시민이 전체적으로도 개별적으로도 행복해지는 것에 관련되는 것이다. 인간이 그저 살아 있느냐 아니냐는 문제가 아니라, “더 잘 사는 것, 공존하는 것, 교류하는 것이 실제로 국력의 증대로서 실현되는 것이 중요하다.

독일에서는 나폴레옹 전쟁과 함께 아담 스미스의 경제학이 도입되기 때문에 이런 내치의 학은 이윽고 생명령을 잃어가지만, 제국이 존속한 오스트리아에서는 1840년대까지 이 학에 의한 국가과학의 강의가 이뤄졌다고 한다. 적어도 18세기 전체를 통해 내치의 학은 독일인의 <신성로마제국>에서의 유일한 지배적 재정론(財政論)이기를 계속하는 것이다.

 

국가의 의학

내치학은 유럽의 국가들에 전파됐으나, 독일에서 집대성되고, 실제로 활용됐다. 내치학이 실제로 어떤 형태로 전개되었는지를 18세기 독일의 의학의 방식과 프랑스나 영국의 의학의 방식을 비교함으로써 검토해보자. 독일에서는 국가가 주도하는 형태로 의료가 전개됐다. 1764년에는 프로이센에서 의료행정(메디치니셰 폴리차이)”이라고 불리는 것이 탄생했다. 이것은 대학에서 배운 의사에게만 의료면허증을 수여함으로써 국내의 의료 상담자의 실천과 지식을 규범화하고, 각지의 의사나 의료기관으로부터 상세한 데이터를 수집하는 시스템이다. 프랑스와 영국에서는 출산율과 사망률의 단순한 통계표가 이미 작성되고 있었으나, 전염병이나 풍토병의 관찰 등에 의한 훨씬 완전힌 발병률의 관찰 시스템”은 독일에서 확립됐다.

또한 중앙에는 의학을 전문으로 하는 관공서가 설립되고, 그 아래에 계층구조적으로 지역의 의사를 배속했다. 이리하여 모든 의사는 국가에 의해 면허를 수여받고, 행정적 지도 아래서 의료에 종사하고, 의학적 정보를 중앙에 집중시키는 시스템이 확립된 것이다. 이것은 다른 나라에서는 볼 수 없을 정도의 극한까지 국가화된 의학의 시스템이 됐다.

이 의학이 중시한 것은 국력의 토대가 되는 국민의 신체와 생명이었다. “공적인 위생 행정이 관심을 가졌던 것은 노동자의 신체가 아니라 개인 그 자체의 신체이며, 이런 개인들이 모여서 국가를 형성했다는 것이며, 프로이센은 중상주의적인 관점에서 인근 국가와 경합하기 위해서도, 국내의 주민의 건강을 배려하는 시스템을 만들어냈다.

그러나 나폴레옹 전쟁 뒤에 평화가 회복되자, 이 국가의 의학의 이념은 공동화된다. 독일에서도 공업화가 진행되는 동시에, 이 가부장적인 시스템은 그다지 유효하지 않게 된다. 그리고 절대주의와 중상주의를 엄호하기 위해 이데올로기적 상부구조로 전환되어 갔다. 공업화의 시대에는 새로운 의학이 요구됐던 것이며, 프랑스와 영국이 그 임무를 맡게 된다

Posted by 상겔스 상겔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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