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헌 민주주의의 위기와 예외상태

: 데리다, 아감벤, 벤야민, 슈미트와 유령의 회귀

사토 요시유키(佐藤嘉幸)

 

* 원문 : http://www.jimbunshoin.co.jp/files/satoyoshiyuki_democracy.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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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311일에 일어난 동일본 대지진과 후쿠시마 원전 사고 이후, 우리는 바야흐로 벤야민이 말하는 예외상태의 규칙화[일상화, 상태화][각주:1] 속에 있다. 동일본 대지진과 후쿠시마 원전 사고는 전후 일본의 통치 시스템의 문제점(전원電源3법에 기초한 막대한 보조금과 맞바꿔서 원전을 지방에 떠넘기는 희생의 시스템’,[각주:2] 그리고 지진이 빈발하는 일본열도에 54기의 원자력 발전소를 건설하여 운영해온 핵에너지 정책의 취약성)을 노정시켰는데, 그 약점은 지진 후에 선전된 유대라는 이름의 내셔널리즘과, 중국한국러시아와의 영토문제라는 이름의 국경분쟁, 북한의 핵무장이 야기한 배외주의적 내셔널리즘에 의해 덮어 감춰지고, 외부의 적과 전쟁을 할 실재적 가능성으로 변환됐다. 그런 변환을 배경으로 하여, 20147, 2차 아베정권은 헌법해석을 변경함으로써 집단적 자위권, 나아가 집단안전보장의 행사도 가능케 하는 해석개헌을 실현했다. 해석 개헌에 의해, 평화헌법을 기초로 하는 입헌민주주의의 체제는 파괴되고, 대외전쟁을 가능케 하는 2의 구조물을 헌법의 곁에 둔다고 하는 예외상태가 발생한 것이다.

이런 예외상태의 형성은 의회에서의 논의를 거친 입법 행위에 의해 헌법을 개정하는 게 아니라, 내각의 각의결정이라는 행정적 수단에 의해, 기존 헌법의 옆에 그것과는 다른 2의 구조물을 두는 것을 가능케 하는, 극히 위험한 행위이다. 그런 행위는 민주주의 자체를 붕괴시키는 위험을 품고 있다.

정치를 전쟁으로부터, 예외상태로부터 정의함으로써, 평화헌법을 기초로 삼은 입헌민주주의의 체제를 정지시키고, 거기에 완전히 다른 체제, 즉 대외전쟁을 가능케 하는 체제를 구축하는 것, 이것이 동일본 대지진과 후쿠시마 제1원전 사고 이후 일본에서 입헌민주주의의 위기의 본질이다. 이런 상황은 관동대지진이나 세계공황으로 인한 경제적 타격 후에 식민지주의와 전시체제의 구축으로 치닫고, 15년 전쟁의 수렁에 빠진 전전(戰前)의 일본의 상황을 상기시킨다. , 2011년의 동일본대지진과 후쿠시마 원자력 발전소 사고 이후의 상황은 마치 관동대지진 이후의 상황의 유령이 회귀하고 있는 듯하다.

이런 현황 인식에서 출발해 본고에서 우리는 데리다와 아감벤의 슈미트 및 벤야민 해석을 독해하고, ‘예외상태에 관한 이들의 이론에 입각해 우리가 놓여 있는 예외상태의 규칙화[일상화, 상태화]의 현황을 조사하려 시도한다.

 

1. ‘정치적인 것의 텔로스로서의 전쟁

데리다는 주권권력을 비판할 때 반드시 슈미트의 주권이론을 참조한다. 예를 들어 2004년 그가 사망한 탓에 마지막 강의가 되어 버린 짐승과 주권자2(2002-2003)에서 데리다는 주권자란 슈미트가 말하듯이 예외에 관해 결정하고 법권리를 중지하는, 예외적 권리를 지닌 예외적 존재이다[각주:3]라고 말한다. 그가 슈미트 이론을 가장 자세하게 분석한 저작은 우정의 정치(1994년 출판. 또 이 책은 1988-1989년 강의에 바탕을 뒀다)이다. 따라서 우리는 우선 우정의 정치를 자세하게 독해하고, 데리다의 슈미트 해석에 입각해 정치적인 것과 전쟁의 관계에 관해 고찰하자.

정치신학(1922)의 슈미트에게 주권자란 예외상태에 관해 결정하는 자[각주:4]이다. 이런 예외상태는 이 책보다 10년 뒤에 쓰인 정치적인 것의 개념(1932)[각주:5]에서는 친구와 적의 구별”, 전쟁으로서 나타난다. 데리다는 슈미트를 해석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정치적 행위나 동기의 기본원인으로 생각되는 특종(特種) 정치적 구별(die spenzifisch politische Unterscheidung)이란 친구이라는 구별(die Unterscheidung von Freund und Feind)이다”(정치적인 것의 개념, 26/15).

만일 차이적 구별 혹은 각인(刻印, Unterscheidung), 정치적인 것의 규정이, ‘정치적 차이자체(die politische Unterscheidung)가 친구와 적 사이의 차별(Unterscheidung)로 귀착된다면, 그런 분리는 하나의 단순한 차이로는 환원되지 않는다. 이것은 한정된 대립, 대립 자체이다. 이 규정이 전제하는 것, 그것은 바로 대립이다. 이 대립이, 그것과 더불어 전쟁이 말소되면, ‘정치적이라 불리는 경계는, 그 경계 혹은 종차성을 잃어버린다.[각주:6]

 

친구와 적이라는 구별이야말로 정치적인 것의 정의인데, 이는 달리 말하면, 친구와 적의 대립이다. 그리고 이 대립이 함의하는 것은 다음에서 인용된 슈미트의 말에서 드러나듯이, ‘잠재성혹은 실재적 가능성으로서의 전쟁 자체이다.

 

그 기대나 교육적 노력에 공명하든 하지 않든, 국민들은 친구-적의 대립을 따라 결속하는 것이며, 이 대립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현실에 존재하며, 또한 정치적으로 존재하는 모든 국민들에게 실재적인 가능성으로서(als reale Möglichkeit) 주어져 있다는 것은 이치상 부정할 수 없다.

따라서 적이란 경쟁상대나 상대방 일반이 아니다. 또한 반감을 품고 증오하고 있는 사적인 상대방도 아니다. 적이란 다만 적어도 잠재적으로, 즉 실재적 가능성으로서, 항쟁하고 있는 인간의 총체 다른 마찬가지의 총체와 대결하고 있다 이다(Feind ist nur eine wenigstens eventuell, d. h. der realen Möglichkeit nach kämpfende Gesamtheit von Menschen. die einer ebensolchen Gesamtheit gegenübersteht)[정치적인 것의 개념, 29/18-19][각주:7]

 

데리다는 슈미트의 이 말을 해석하면서 적이란 다만 적어도 잠재적으로, 즉 실재적 가능성으로서, 항쟁하고 있는 인간의 총체이다라는 대목에 주목한다. “그것은 가능성에서 우발성(여기서는 최소한의 우발성으로서 종차화되어 있다)으로의, 그리고 우발성에서 현실성(여기서는 실재적 가능성, «reale Möglichkeit»이라고 불린다)으로의 이행이다[각주:8]고 데리다가 말하듯이, 여기서 슈미트는 적과의 항쟁, 즉 전쟁을, 적어도 잠재성, ‘실재적 가능성’, 나아가 현실성으로서 파악한다. , 정치적인 것은 슈미트에게서 잠재적 혹은 현실적 전쟁의 가능성에 있어서 파악되는 것이다.

이때 친구와 적의 대립이란 공적(公的)’이며, 국민을 단위로 하는 것이며, 적이란 사적인 적이 아니다. “적은 공적인 적일 수밖에 없다(nur der öffentliche Feind). 왜냐하면 이런 인간의 총체, 특히 전 국민에 관계하는 것은 모두 공적(公的)이게 되기 때문이다. 적이란 호스티스hostis[공적公敵]이며, 넓은 의미에서의 이니미쿠스inimicus[사적私敵]가 아니다”(정치적인 것의 개념, 29/19).[각주:9] 그런 적과의 대립은 적이 내적(内敵)이라면 내란, 외적(外敵)이라면 전쟁이 될 것이다. 하지만 뭐가 됐든, 이런 공적인 대립은, 잠재성 즉 실재적 가능성으로서의 전쟁, 무력에 의한 전투를 의미하는 것이다. 데리다는 슈미트를 분석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할 것이다.

 

왜냐하면 적이라는 개념은 구체적인 현실성의 영역에서의, 어떤 전투의 우발성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im Bereich des Realen ligende Eventualität eines Kampfes). 역사적 변화에 의존하는 무기와 전쟁의 기술의 일정하지 않는 변화를 고려하지 않고, 이 말을 검토해야 한다. 전쟁은 조직화된 정치적 통일체 사이에서의 무력에 의한 전투이다. 내전이란 하나의 (하지만 이것에 의해 위태롭게 되는) 정치적 통일체의 한복판에서의 무력에 의한 전투이다(정치적인 것의 개념, 33/25).

어떤 경우든 이 전투는 무력에 의한 것이다. 치사(致死)를 목표로 하는 것 말이다. ‘무기는 여기서 그 본질적인 개념에 있어서, 인간의 치사로서의, ‘신체적=물리적치사를 목표로 하는 수단(ein Mittel physischer Tötung von Menschen)이다. 인간의 죽음은 이 적의 개념에 의해 이렇게 함의[내포]되며, 즉 대외전쟁이든 내전이든 일체의 전쟁에 함의[내포]된다.[각주:10]

 

, 전쟁은 슈미트가 다음에서 말하듯이, 적의 신체적=물리적 치사를 목표로 한 무력에 의한 전투이다. “친구, , 전투 같은 개념은, 그 실재적인 의미를(ihren realen Sinn) 신체적 치사의 실재적 가능성에 대한(auf die reale Möglichkeit der physischen Tötung) 항상적인 관계로부터 끌어낸다. 전쟁은 적대로부터 생겨난다. 왜냐하면 적대는 다른 존재의 존재론적 부정(seinsmäßige Negierung eines anderen Seins)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전쟁은 적대의 극한적 실재화(die äußerste Realisierung der Feindschaft)일 뿐이다. 전쟁은 평범한 일상이나 정상적인 것일 필요는 없으며, 하나의 이상처럼, 혹은 원할 값어치가 있는 것처럼 느껴질 필요가 없으나, 적의 개념이 그 의미를 보존하는 한, 실재적 가능성으로서 현전하기를 계속하지(als reale Möglichkeit vorhanden bleiben) 않으면 안 된다”(정치적인 것의 개념, 33/25).[각주:11] 따라서 친구와 적의 대립, 즉 정치적인 것이라는 개념은, 전쟁이라는, 적의 신체적 치사의 실재적 가능성에 대한 관계로부터, 그 실재적 의미를 끌어낸다. 그렇다면 슈미트는 단순한 사고 대상으로서의 전쟁으로부터가 아니라, 극히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전쟁으로부터 정치적인 것을 사고하고 있다는 것이게 된다. 슈미트에 따르면, 전쟁이 그런 구체성을 결여한 경우, 그 개념은 유령적인 추상이 된다.” “정치적 관계들의 본질이 주어지는 것은, 바로 이 구체적 대항(konkrete Gegensätzlichkeit)이 환기되는 경우이다. 모든 정치적 개념, 표상 및 말에는 어떤 항쟁적 의미가 있다. 이것들은 어떤 구체적인 항쟁(eine konkrete Gegensätzlichkeit)을 조준하고 있으며, 그 궁극적인 논리가 친구-적의 배치(그것은 전쟁 혹은 혁명이라는 형태 아래서 바깥에서 나타난다)라는 구체적인 상황과 연결되어 있는 것이며(an eine konkrete Situation gebunden), 이런 상황이 부재하면, 그런 개념들, 표상 및 말들은 공허하고 유령적인 추상이 된다(werde zu leeren und gespenstischen Abstraktion)”(정치적인 것의 개념, 31/22).[각주:12] 그런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전쟁상태를 예외상태라고 명명할 수 있다. 실제로 슈미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오늘날에도 여전히 전쟁이라는 사태는 긴급사태(Ernstfall)’이다. 이 경우에도 다른 경우에도, 예외적 사태(Ausnahmefall)야말로 특별히 규정적인, 사물의 핵심을 분명히 하는 의의를 가질 수 있다. 왜냐하면 친구와 적의 정치적 배치의 극한적 귀결이 두드러지는 것은 현실적 전투에서일 뿐이기 때문이다. 극한적 가능성에서 출발해서 인간들의 삶은 특수 정치적인 긴장을 획득한다”(정치적인 것의 개념, 35/30).[각주:13] 데리다는 슈미트의 이 구절을 염두에 두면서 다음과 같이 말한 것이리라.

 

예외가 규칙이다, 이것이 아마도, 실재적 가능성의 이런 사유가 의미하는 바일 것이다. 예외가 일어나는 것의 규칙이다, 사건의 법이다, 그 실재적 가능성의 실재적 가능성이다. 사태 혹은 우발성에 관한 결단을 정초하는 것은 예외이다. 이 사태, 이 상황(diesser Fall)은 예외적인 방식으로만(nur aisnahmsweise) 도래한다. 그것은 그 결단적 성격을 중단시키지도 않고 지양시키지도 않고 무효화하지도 않는다(hebt nicht auf). 이 예외성이 반대로, 사건의 우발성을 정초짓는다(begründet). 어떤 사건이 사건이며, 그리고 결정적인 것은, 예외적인 경우뿐이다. 그 자체로서의 사건은 예외적이다.[각주:14]

 

전쟁의 실재적 가능성으로부터 정치적인 것을 생각하는 것, 그것은 곧 예외상태로부터 정치적인 것을 생각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한다면, 정치가 전쟁과의 관계에서 스스로를 규정할 때, 우리는 바야흐로 벤야민이 말한 예외상태의 규칙화[일상화, 상태화]속에 놓이게 된다. 이로부터 데리다는 다음과 같이 말하는 슈미트를 염두에 두면서, 전쟁이란 정치적인 것의 텔로스이다고 말할 것이다. “가장 극한적인 정치적 수단으로서의 전쟁은, 모든 정치적 개념의 기초에, 이 친구와 적의 구별의 가능성이 존재한다는 것을 개시하는 것이다. 따라서 전쟁은 이 구별이 윤리 사이에 실재적으로 현전하고 있는 한, 혹은 적어도 실재적으로 가능한 한에서만 의미를 갖는다”(정치적인 것의 개념, 36/31).

 

세 가지 기준(실재성, 가능성, 현전)이 여기서는 같은 우발성의 핵심에서 얽히고설킨다. 사건의, 하나이자 동일한 사건성의 핵심에서. 친구/적의 배치는 어떻게 개시되는가? 어떻게 현전하는가? 이런 실재적 가능성은 현전하는가, 아니면 실현하는가, 가능적인 것으로서, 혹은 실재적인 것으로서. 이 실재성은 어떻게, 어떤 경우에는 현전을, 어떤 경우에는 가능성 자체를 강조하는가. 전쟁에 있어서이다. 극한으로서의, 전쟁상태의 극한적 경계로서의, ‘극한적 우발성’(als extreme Eventualität)으로서의 전쟁에 있어서다. 전쟁이 개시적인 것은 이 자격에 있어서다. 그것은 그 위에서 하나의 본질을 읽어낼 수 있는 하나의 사실을 구성한다. 정말로 그러하지만, 그 본질은 우선 비통상적인, 비경험적인, 어떤 목적론적인(téléologique)(극한적 경계로서의 텔로스[목적=귀결]) 의미에서 범례적이고 모범적인, 하나의 사실에서 곧바로 읽어낼 수 있다. 이렇게 개시되는 실재적 가능성의 현전’(Vorhandenheit), 실재적 혹은 가능적인 이 현전은, 사실이나 사례의 현전이 아니다. 그것은 텔로스의 현전이다. 정치적 텔로스의, 이러저러한 정치적 목적의, 이러저러한 정책의 현전이 아니라, 정치적인 것의 텔로스 의 현전이다. ‘가장 극한적인(extremste)’ 정치적 수단으로서, 일체의 정치적 표상을 정초짓는전쟁은, 친구/적의 이 차별의 가능성을 현현한다(offenbart). 그리고 이 표상에 의미가 있는 것은, «sinnvoll»인 것은, 이 차별이 실재적으로 현전하고 있는’(real vorhanden) 한에서이며, 혹은 적어도 현실[실재]적으로 가능한(oder wenigstens real möglich) 한에서이다.[각주:15]

 

따라서 실재적 가능성으로서의 전쟁이란 정치적인 것의 텔로스(목적)이다. 정치적인 것의 텔로스란 친구/적의 구별, 친구-적의 항쟁이며, 그것은 전쟁이다. “전쟁에는 의미가 있다, 그리고 어떤 정치도, 정치적인 유대로서의 어떤 사회적 유대도, 전쟁 없이는, 그 실재적 가능성 없이는 의미가 없다.”[각주:16] 달리 말하면, ‘예외상태에서는 어떤 정치이든, 어떤 정치적 유대이든, 전쟁의 실재적 가능성에 의해 정초지어진 것이다. 다음의 슈미트의 말과는 정반대로 말이다. “전쟁은 결코 정치의 목표, 목적, 내용이 아니며, 전쟁은 인간적으로 행동하는 것과 사고하는 것을 특수한 방식으로 규정하며, 그리고 그것에 의해서 특수 정치적 행태를 산출하는, 실재적 가능성으로서 항상 현전하고 있는 저 전제(die als reale Möglichkeit immer vorhandene Voraissentzung)이다”(정치적인 것의 개념, 34-35/27).[각주:17] 여기서 슈미트는 전쟁은 정치적인 것의 전제라고 말하며, ‘목적이라는 것을 부정한다. 그러나 예외상태에서 전쟁은 바로 정치적인 것의 전제인 동시에 그 목적이며, 귀결이기도 하다.

지금까지의 논의를 요약하자. 첫째, 친구/적 관계로부터 정치적인 것을 정의하는 것은 절대적 적대로서의 전쟁으로부터 정치적인 것을 규정하는 것이다.

둘째, 적이란 적어도 잠재적으로, 즉 실재적 가능성으로서, 항쟁하고 있는 인간의 총체인데, 그것은 정치 시스템으로 통합 불가능한 내부의 적이기도 할 것이며(즉 내전), 다른 국민국가라는 외부의 적이기도 할 것이다(즉 대외전쟁).

셋째, 친구/적 관계, 즉 전쟁으로부터 정치적인 것을 정의하는 것이 정치의 전제’(슈미트), 정치의 텔로스’(목적)(데리다)가 되는 경우, 우리는 예외상태혹은 더 정확하게는 예외상태의 규칙화[상태화, 일상화]’ 속에 있게 된다. 우리는 제2차 아베정권의 해석개헌이 제시한 일련의 안전보장(‘실재적 가능성으로서의 전쟁)에 관한 논의를 계기로 하여, 바로 이런 예외상태의 규칙화[상태화, 일상화]’ 속에 놓여 있다.

 

2. ‘예외상태의 규칙화[상태화, 일상화]’법률의 힘

이제 다음으로 해석개헌의 무엇이 문제인가라는 점에 관해 데리다와 아감벤의 예외상태에 관한 분석에 입각해 생각해보자.[각주:18]해석개헌이란 피구성적 권력(헌법에 의해 구성된 권력[pouvoir constitué])인 내각이 구성적 권력=헌법제정권력(헌법을 구성하는 권력[pouvoir constituant])임을 선언하지 않고, 즉 입법적 수단에 의해 헌법을 개정하지 않고 각의결정[국무회의결정]이라는 행정적 수단에 의해 헌법의 효력을 중지시키는 것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여기서 구성적 권력이란 새로운 헌법을 만들어내는 권력이며, 기존의 헌법 혹은 법체계에 의해 구속되지 않는 무한정한 권력이다. 반대로 피구성적 권력이란 기존의 헌법에 의해 구성된 권력이며, 이것에 의해 구속되는 한정된 권력이다. 이로부터 예외상태란 바로 헌법을 중지하고 그 곁에 헌법과는 다른 2의 구조물을 구축한다는 상태를 가리키게 된다.

달리 말하면, 예외상태란 피구성적 권력과 구성적 권력이 구별할 수 없게 된 상태를 지시한다. 이런 예외상태에 관해 해석하기 위해 데리다의 =법률의 힘(1994)[각주:19]을 참조하자. 우정의 정치에 관한 강의(1988-1989)와 같은 시기인 198910월에 카도조 로스쿨(뉴욕)에서의 심포지엄에서 발표되고 역시 우정의 정치와 같은 시기인 1994년에 출판된 =법률의 힘(따라서 우정의 정치=법률의 힘은 내용적으로도 극히 긴밀하게 연결되며, 서로가 서로를 참조하고 있다)에서 데리다는 벤야민의 폭력 비판을 위하여(1921)를 매우 밀도 높게 독해하고 있다. 벤야민이 이 논문에서 법정립적 폭력[Rechtsetzende Gewalt]”(새로운 법체계를 정립하는 폭력=권력[Gewalt])이라고 부르는 것은 거의 구성적 권력에 상당하며, “법유지적/법보존적 폭력[Rechtserhaltende Gewalt]”(기존의 법체계에 의해 구속되고 그것을 유지하는 폭력=권력[Gewalt])라 부르는 것은 피구성적 권력에 상당한다.[각주:20] 데리다는 =법률의 힘에서 구성적 권력은 피구성적 권력에 의해 반복되고, 때로는 (예외상태에서는) 그것에 의해 대리된다고 말한다.

 

두 개의 폭력, 즉 법정립적 폭력과 법유지적 폭력을 구별하는 것에서 시작하면서 벤야민은 어떤 때 다음의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 한 쪽의 폭력은 다른 쪽의 폭력과 그다지 근본적으로 이질적인 것일 수 없다. 왜냐하면 이른바 법정립적 폭력은 법유지적 폭력에 의해 때로 대리되고반드시 반복되는 이 말의 강한 의미에서 것이기 때문이다.[각주:21]

 

법정립적 폭력은 법유지적 폭력에 의해 반복되고 대리된다. 실제로 벤야민은 폭력 비판을 위하여의 결론 부분에서 법정립적 폭력은 법유지적 폭력에 있어서 대리된다(repräsentiert)’고 명확하게 말한다.[각주:22] 달리 말하면, 구성적 권력은 피구성적 권력에 의해 반복되고 대리된다. 이 단정은 무엇을 의미할까? 데리다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벤야민이 제시하듯이, 그 폭력[법정립적 폭력]은 확실히 독해 가능하며, 더욱이 이해 가능한 것이다. 왜냐하면 그 폭력은 법권리와 무관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마치 폴레모스와 엘리스가 디케가 취하는 모든 형식이나 의미작용과 무관하지 않듯이. 그러나 이 폭력은 법권리 속에 있으며, 법권리를 중지하는 것이다. 그것은 기존의 법권리를 중단하고 다른 법권리를 창설한다. 법권리를 중지하는 이 순간, 이 에포케, 법권리를 창설하는 이 순간, 혹은 혁명적 순간은, 법권리 속에 있으며[있으면서도] 법권리가 아닌 심급이다. 그러나 그것은 또한 법권리의 전체 역사이기도 하다. 이 순간은 항상 생겨나고 있지만, 어떤 현전이라는 형태로는 결코 생겨나지 않는다. 그것은 법권리의 창설이, 공허 속에서, 혹은 심연 위에서 중지되어 있는 순간이며, 누구에게도, 그리고 누구 앞에서도 설명할 수 없는, 순수한 수행적 행위(acte performatif)로 중지되어 있는 순간이다.[각주:23]

 

법정립적 폭력 혹은 구성적 권력은 법권리 속에 있으며 법권리를 중단하고 중지하는 것, 달리 말하면 예외상태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그리고 일단 법권리=입헌적 시스템을 정립한 후에도, 법정립적 폭력 혹은 구성적 권력은 법유지적 폭력 혹은 피구성적 권력에 있어서 비현전적인 방식으로 (“이 순간은 항상 생겨나고 있으나 어떤 현전이라는 형태로는 결코 생겨나지 않는다”) 반복되고 대리된다.’ 이로부터 데리다는 다음과 같이 결론짓는다.

 

벤야민의 명시적인 의도를 넘어서 내가 제출하려는 해석은 다음과 같은 것이다. , 법권리를 창설하는, 혹은 정립하는 폭력(Rechtsetzende Gewalt[법정립적 폭력])은 그것 자체, 법권리를 유지하는 폭력(Rechtserhaltende Gewalt[법유지적 폭력])을 포함하지 않으면 안 되며, 그것과 떼려야 뗄 수 없다. 법정립적 폭력은 자기의 반복(répétition)을 요구하고 유지해야 할 것, 유지할 수 있는 것, 유산이나 전통이 될 것을 약속받고, 분유되는 것을 약속받는 것을 창설한다는 것, 이것은 법정립적 폭력의 구조에 속해 있는 것이다. 창설이란 약속이다. 모든 정립(Setzung)은 용인하고 앞에 둔다. 모든 정립은 놓고, 약속함으로써 정립한다. 그리고 설령 어떤 약속이 실제로는 지켜지지 않더라도, 반복 가능성(itérabilité), 창설의 가장 침입적인 순간에, 보호의 약속을 기입한다. 이처럼 반복 가능성은 원초적인 것의 중심에 반복의 가능성을 기입하는 것이다. 더 잘 말하면, 혹은 더 나쁘게 말하면, 반복 가능성은 이 반복 가능성의 법칙 속에 기입되며, 그 법칙 아래서, 혹은 그 법칙 앞에, 스스로를 보존하는 것이다. 따라서 법권리를 순수하게 창설하는, 혹은 정립할 정도의 작용은 존재하지 않으며, 따라서 순수한 법정립적 폭력은 존재하지 않으며, 또한 순수한 법유지적 폭력도 존재하지 않는다. 정립 작용이란 이미 반복 가능성이며, 자기를 유지하는 반복을 요구한다. 유지 작용도, 그것이 창설하는 것을 유지할 수 있도록, 또한 다시 창설을 행하는 것이다. 따라서 정립 작용과 유지 작용 사이에는 엄밀한 대립관계는 존재하지 않으며, 둘 사이의 차연적 오염이라고 내가 부르는 것(그리고 벤야민은 그렇게 명명하지 않는다)만이, 이것이 이끌 수 있는 모든 역설을 수반하여 존재한다.[각주:24]

 

법정립적 폭력 혹은 구성적 권력은, 그것이 어떤 법체계를 정립하는 순간에, 따라서 어떤 입헌적 시스템을 창설하는 순간에, 스스로의 반복 가능성을 법권리의 구조 속에 기입한다. , 어떤 입헌적 시스템이 창설된 후에 그것을 유지하는, 법유지적 폭력 혹은 피구성적 권력에 있어서, 법정립적 폭력 혹은 구성적 권력이 비현전적인 방식으로 반복되고 대리되는 것이다.

그리고 예외상태에서 구성적 권력은, 피구성적 권력과 구별하지 못하게 하지 않는 방식으로 스스로를 행사한다. 그것은 법률이 아니지만 법률의 힘을 지닌 행정적 수단(예를 들어 정부명령, 행정명령 등)에 의해, 입헌적 수단을 매개하지 않고 법체계를 중지시키는 것이다. 법정립적 폭력과 법유지적 폭력 사이의, 구성적 권력과 피구성적 권력 사이의 이 양의성, 혹은 양자 사이의 차연적 오염, 데리다는 벤야민을 인용하면서 유령적(gespenstisch) 혼합체라고 부르고, “비열하고 천시해야 할 것이며, 언어도단이라고 비판한다.[각주:25] 데리다가 구성적 권력과 피구성적 권력의 양의성을 유령적이라고 부른 것은, 피구성적 권력에 있어서 구성적 권력이 반복되고 대리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대리성이 결코 현전하지 않기 때문이다. “유령성이란 어떤 신체가 그것 자체에 대해서, 실제로 존재하는 것에 대해 결코 현전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유래한다. 그 신체는 사라짐으로써 나타나며, 혹은 그것이 대리하고 있음에도 사라짐으로써 나타난다. , 그 신체는 자신과는 다른 것을 위해 있다. 인간은 자신이 무엇을 상대하고 있는지 결코 알지 못한다. 이처럼 두 개의 폭력 사이에 경계선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 즉 창설 작용과 유지 작용이 서로 오염하고 있다는 것, 이것은 비열한 것이다.”[각주:26] 따라서 피구성적 권력이 구성적 권력을 반복하고 대리하면서도 구성적 권력임을 분명히 선언하지 않고 있는 사태는, 구성적 권력의 비현전성에 있어서 유령적이며, 그 때문에 극히 비열한 사태이다. 이런 사태가 제2차 아베정권이 행한 해석 개헌헌법 개정을 행하는 구성적 권력임을 선언하지 않고 각의결정이라는 행정적 조치에 의해 헌법을 실질적으로 개정해버리는 것 에 고스란히 들어맞는다는 것은 더 이상 덧붙일 필요도 없다.

이런 예외상태에 관해 더 나아가 고찰하기 위해 아감벤의 예외상태를 참조하자. 아감벤은 이 책에서 데리다의 =법률의 힘을 언급하면서, 이 텍스트가 철학자들 사이에서도 법학자들 사이에서도 광범위한 논란을 불러일으켰음에도 불구하고, 누구도 이 =법률의 힘이라는 제목의 의미에 관해 논하지 않는다고 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결정적인 것은 기술적인 의미에서 법률의 힘(force-de-loi)’이라는 어구는 근대의 학설에서도 고대의 학설에서도 법률을 지시하는 것이 아니라, 집행권력이 몇 가지 경우에, 특히 예외상태에서 포고하는 것을 인정해주는 듯한, 바로, 이른바 법률의 힘을 지닌 정부명령(décrets)을 지시한다는 것이다. , 법의 전문 용어로서의 법률의 힘이라는 개념은, 규범의 구속력(vis obligandi) 혹은 적용 가능성을 그 형식적 본질로부터 분리하고, 형식적으로는 법률이 아닌 정부명령이나 조치나 방책이 그대로 여전히 법률의 을 획득한다는 것을 정의하고 있다.[각주:27]

 

아감벤에 따르면, 법학에서 법률의 힘(force de loi)’이라는 개념은 법률 자체를 지시하는 게 아니라, 예외상태에서 집행권력이 포고하는 정부명령, 행정명령 등의 행정적 수단을 의미한다. , ‘법률의 힘이란, 집행권력이 법률의 힘을 지닌 법률 이외의 수단(행정적 수단)에 의해 통치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바로 데리다가 =법률의 힘에서 말했던, 피구성적 권력이 구성적 권력을 대리한다는 것, 혹은 양자의 유령적 혼합체에 상당한다. 이로부터 아감벤은 예외상태를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예외상태에 관해 논의하고 연구해 온 가운데, 우리는 집행 권력에 의한 법적 결정들과 입법권력에 의한 법적 결정들 사이의 이런 혼동의 수많은 예와 마주쳤다. 이런 혼동이야말로 이미 봤듯이, 예외상태의 본질적 성격의 하나를 정의하는 것이다. 그러나 기술적 관점에서 보면, 예외상태에 고유한 능력은, 지금까지 너무도 강조되었던 권력들의 혼동에 있다기보다는 법률의 힘을 법률로부터 분리하는 데 있다. 그 고유한 능력은 한편으로 규범이 효력을 지니나 적용되지 못하고(‘을 지니지 못하고) 다른 한편으로 법률의 가치를 갖지 않는 행위들이 법률의 을 획득하는, ‘법률의 상태를 정의하는 것이다. 따라서 비상시의 경우에 법률의 힘은 무규정의 요소로서 부유하는 것이며, 그것은 (위임독재로서 처신하는) 국가 당국에 의해서도, (주권독재로서 처신하는) 혁명조직에 의해서도 요구될 수 있는 것이다. 예외상태란 법률 없는 법률의 힘(따라서 이것은 법률의 힘(force-de-loi)이라고 써야 할 것이다)이 관건이 되고 있는 아노미적 공간이다.[각주:28]

 

, ‘예외상태법률의 힘을 법률로부터 분리하고 법률의 가치를 갖지 않는 행위들(행정적 수단)법률의 힘을 획득하게 만드는 상태를 의미한다. 그것은 통치권력이 기존의 법체계를 무화하고, 법률 없는 법률의 힘’(아감벤은 이것을 법률의 힘(force-de-loi)’이라고 고쳐 말한다)이 통치하는 무질서한 통치를 의미한다.

이로부터 아감벤은, 예외상태를 독재라는 관점에서 생각해서는 안 되고, “법권리의 중지라는 관점에서 생각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예외상태는 독재의 모델을 따라 권력의 완전함, 법이 충만한 상태[자주 예외상태를 특징짓는 말로서 사용되는 전권[pleins pouvoirs]’이라는 표현을 참조]로서 정의되는 것이 아니라, 법권리가 공허한 상태, 법권리의 공백과 중지로서 정의된다.”[각주:29] 예를 들어 슈미트는 벤야민의 폭력 비판을 위하여와 같은 1921년에 출판된 독재론에서 예외상태를 위임독재주권독재라는 관점에서 고찰하려 했다. ‘위임독재란 헌법 혹은 법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헌법 혹은 법질서를 중지하는 것, 즉 피구성적 권력이 법권리를 중지하는 것을 가리킨다. 또한 주권독재란 기존의 헌법에 구속되지 않고, 새로운 헌법을 구성하는 권력, 즉 구성적 권력을 가리킨다.[각주:30] 이런 개념들은 예외상태에서의 통치의 두 가지 양상을 거의 정확하게 기술한다. 그렇지만 예외상태를 독재라는 관점에서 생각하면, 가령 독재자로 간주되는 히틀러나 무솔리니가 법률적으로는 합법적으로 임명된 총리였음을 간과해버린다. 그런 의미에서는 오히려 예외상태를 슈미트처럼 독재라는 관점에서가 아니라 합법적 헌법의 중지라는 관점에서 파악해야 한다. 이 점에 관해 아감벤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현대 공법학에서는 제1차 대전 후의 민주주의 국가들의 위기에서 생겨난 전체주의적 국가들을 독재라고 정의하는 것이 관습으로 정착됐다. 이리하여 히틀러도 무솔리니도, 프랑코도 스탈린도, 모두 한결같이 독재자로 제시되기에 이르렀다. 그렇지만 무솔리니든 히틀러든 법기술적으로는 그들을 독재자라고 정의할 수 없다. 무솔리니는 국왕으로부터 합법적으로 임명된 총리였으며, 마찬가지로 히틀러도 바이마르 공화국의 정당한 대통령으로부터 임명된 라이히의 재상이었다. 이탈리아의 파시즘 체제든, 독일의 나치즘 체제든, 이것들을 특징짓는 것은, 잘 알려진 대로, 이것들이 현행의 헌법(각각 알베르토 헌법과 바이마르 헌법)을 존속시킨 채로, 날카롭게도 이중국가라고 정의된 하나의 패러다임에 근거하며, 자주 법적으로는 정식화되지 않았으나 예외상태 덕분에 합법적 헌법과 나란히 존재할 수 있었던 두 번째의 구조물을 합법적인 헌법의 곁에 두었다는 것이다. 법학적 관점에서 이런 체제를 정당화하는 데는 독재라는 용어는 전혀 어울리지 않으며, 게다가 오늘날 지배적이 되고 있는 통치 패러다임의 분석에 있어서도, 민주주의 대 독재라는 앙상한 대립도식은 길을 잘못 든 것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각주:31]

 

현대적인 통치권력의 작동 메커니즘에 관해 분석할 때, 예외상태를 민주주의 대 독재라는 관점에서 파악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으며, 그렇게 해버리면 오히려 권력의 작동 메커니즘의 본질을 놓쳐버리는 것으로 이어진다. 따라서 예외상태를 민주주의 대 독재라는 도식으로부터 분석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합법적 헌법의 중지, 그리고 이것과는 다른 두 번째 구조물을 합법적 헌법의 옆에 존재하게 만드는 것이라는 관점에서 분석해야 한다.

예외상태에 의해 합법적 헌법을 중지하고 집행권력이 행정적 수단에 의해 입법권력을 대리하는 것은, 삼권분립에 의한 권력 상호 간의 견제와 균형 상태를 파괴하고, 필연적으로 민주주의의 붕괴를 귀결시킬 것이다. 예를 들어 전간기[양차대전 사이의] 독일에서의 바이마르 체제를 생각해보자. 당시의 세계에서 가장 민주주의적인 헌법이라고 여겨진 바이마르 헌법은 그 48조에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민주주의를 중지한다고도 형용해야 할 예외상태의 규정을 뒀다. 그 조문은 다음과 같다. “독일 제국 안에서 안전과 공공의 질서가 중대한 정도로 교란되거나 위협받은 경우에는, 라이히 대통령은 군대의 힘을 빌려서라도 안전과 공공의 질서의 재건에 필요한 수단을 취할 수 있다. 이 목적을 위해 라이히 대통령은 헌법 114, 115, 117, 123, 124, 153조에서 정해진 기본적 권리들을 전면적 혹은 부분적으로 중지할 수 있다.” 이 조항에 의거하여 바이마르 공화국의 역대 내각은 250회 이상에 걸쳐 예외상태를 선언하고 긴급정부명령을 발포했다. 헌법 48는 수천 명의 공산당 활동가를 투옥하고 그들에게 극형을 내리기 위한 특별 법정을 설립하기 위해 이용된 동시에, 또한 많은 경우에는 독일 마르크의 하락에 대처하고 경제적 위기를 수습하기 위해서도 이용됐다. 이런 예외상태의 사용은 정치적-군사적 긴급사태와 경제적 위기를 합치시키려 하는 현대의 경향에도 합치한다고 아감벤은 말한다(예를 들어 동일본대지진 이후의 일본에서, 경제적-군사적 위기를 정치적 예외상태로 변환하는 통치수법 에너지=경제에서의 위기와 군사적 위기해석 개헌으로 변환하는 통치수법 을 참조하라).[각주:32] 더욱이 1930년대 이후, 독일은 항상적으로, 48조를 발동한 대통령 독재의 상태에 있으며, 최종적으로 1933, 나치 체제가 의회에서 전권 위임법을 통과시키자, 바이마르 헌법은 그것이 존재한 채로 완전히 중지된다.[각주:33] 이처럼 바이마르 헌법 48조의 예외상태의 규정은, 바이마르 헌법이라는 당시에서 가장 민주적인 헌법을 붕괴시키고, 전간기 독일의 민주주의 자체를 붕괴시켰던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현대 일본으로 시점(視點)을 옮기고, 자민당의 헌법개정초안에 있는 긴급사태조항이 바이마르 헌법 48조와 완전히 같은 성질의 규정이라는 것에 특별히 더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그 조항을 아래에서 인용한다.

 

98(긴급사태의 선언) : 내각총리대신은 우리나라에 대한 외부로부터의 무력공격, 내란 등에 의한 사회질서의 혼란, 지진 등에 의한 대규모의 자연재해, 기타 법률에서 정하는 긴급사태에 있어서, 특히 필요하다고 인정될 때에는, 법률이 정하는 바에 따라, 각의를 통해 긴급사태를 선언할 수 있다.

99(긴급사태의 선언의 효과) : 긴급사태가 선언됐을 때에는 법률이 정하는 바에 따라, 내각은 법률과 동일한 효력을 지니는 정부명령을 제정할 수 있는 것 외에, 내각총리대신은 재정상 필요한 지출, 기타 처분을 행하고, 지방자치단체의 장에게 필요한 지시를 할 수 있다.

3 : 긴급사태가 선언됐을 경우에는, 누구라도, 법률이 정하는 바에 따라, 해당 선언과 관련된 사태에 있어서 국민의 생명, 신체 및 재산을 지키기 위해 행해지는 조치에 관해서 발포되는 지역, 기타 공공기관의 지시에 복종해야 한다. 이 경우에도 제14, 18, 19, 21, 기타 기본적 인권에 관한 규정은 최대한 존중되어야 한다.

 

이런 조항들이 긴급사태’(=예외상태)에 있어서 내각이 법률과 동일한 효력을 지니는 정부명령을 제정할 수 있다”(‘법률의 힘혹은 법률의 힘에 의한 통치를 가능케 할 수 있는)고 한 다음, “긴급사태가 선언됐을 경우에는, 누구라도, 법률이 정하는 바에 따라, 해당 선언과 관련된 사태에 있어서 국민의 생명, 신체 및 재산을 지키기 위해 행해지는 조치에 관해서 발포되는 지역, 기타 공공기관의 지시에 복종해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는 점에, 우리는 기시감을 지울 수가 없다. 이 조문에서는, 그 후에 기본적 인권에 관한 규정은 최대한 존중되어야 한다는 문장이 이어지지만, 실제로는 자민당 헌법초안을 보충하는 Q&A에는 국민의 생명, 신체 및 재산이라는 커다란 인권을 지키기 위해, 이를 위해 필요한 범위에서 보다 작은 인권이 어쩔 수 없이 제한될 수 있다고 하고 있기 때문에, ‘긴급사태에서는 표현의 자유 등 기본적 인권이 국민의 생명, 신체 및 재산이라는 커다란 인권을 지키기 위해제한될 가능성이 높다.[각주:34] 따라서 우리는 앞으로 예외상태규정을 헌법에 명문화함으로써 헌법을 무화하는 헌법개정(현행 헌법에 대한 긴급사태 조항의 부가도 포함한)을 절대로 거부해야 한다.

그렇지만 법률의 힘에 의한 기존 헌법의 중지라는 통치 수법은 이런 긴급사태조항에 의하지 않더라도, 이미 해석 개헌이라는 수법에 의해 실현되고 있다. 이런 의미에서 예외상태는 더는 예외적 조치로서가 아니라, 오히려 하나의 통치기술로서 항상 등장하게 됐을 뿐 아니라, 법질서를 구성하는 패러다임이라는 그 성격을 명확히 하고 있다.”[각주:35] 아감벤이 벤야민을 참조하면서 예외상태의 규칙화[일상화, 상태화]라고 형언하는 것은 예외상태”(법체계를 중단, 정지시키고 그것과는 다른 구축물을 그 곁에 두는 것)시큐리티(security)’(넓은 의미에서의 안전뿐 아니라 군사적인 의미에서의 안전보장도 의미하는)이라는 개념으로 대체되고, 일반적인 통치에서의 통치기술로서 받아들여지고 행사되는 것이다. ‘예외상태의 유령은 전전(戰前)과 같은 형태로는 회귀하지 않는다. 그것은 두 번째에는 모습을 바꾸며, 시큐리티 확보라는 미명 아래서의 법체계의 중지 혹은 법률의 힘으로서, 일반적인 통치기술로서 회귀한다. ‘해석 개헌[각주:36]이 출현시키는 예외상태의 규칙화[일상화, 상태화]는 기존 헌법의 곁에 그것과는 다른 구축물을 두고, 행정적 수단에 의해 헌법을 공백으로 만듦으로써[헌법에 공백을 창출함으로써] 입헌 민주주의뿐 아니라 민주주의 자체의 붕괴를 귀결시킬 뿐인, 극히 위험한 통치기술인 것이다.

 

 

  1. Walter Benjamin, »Über den Begriff der Geschichte«, in Gesammelte Schriften, Bd. I-2, Suhrkamp, 1999, S.697. “비억압자의 전통은 우리가 그 속에서 살고 있는 ‘예외상태’가 규칙[常態]이라는 것을 가르쳐주고 있다[Die Tradition der Unterdrückten belehrt uns darüber, daß der »Ausnahmezustand«, im dem wir leben, die Regel ist].” [옮긴이] 일본어로는 예외상태의 ‘상태화’로 표기되었으나 사전적 의미에는 ‘규칙화’가 가장 충실하지만, 일상적인 의미를 담아내려면 이를 ‘일상화’라고 볼 수도 있다. 그러나 이 경우 법과의 관계라는 측면이 지워져버릴 위험이 있음에 유의해야 한다. 이 글에서는 ‘규칙화[일상화, 상태화]’로 표기한다. [본문으로]
  2. 다음을 참조. 高橋哲哉, 『犠牲のシステム──福島・沖縄』, 集英社新書, 2012년. [본문으로]
  3. Jacques Derrida, Séminaire La bête et le souverain. Volume II (2003-2004), Galilée 2010, p.30. [본문으로]
  4. Carl Schmitt, Politische Theologie, Duncker & Humblot, 1922, 8. Auflage, 2004, S.13. [본문으로]
  5. Carl Schmitt, Der Begriff des Politischen, Duncker & Humblot, 1932, 3. Auflage, 1963. 본서에서 인용할 때에는, 데리다의 슈미트 해석을 분석해야 할 필요가 있기 때문에, 독일어 원서를 참조하면서도 주로 『우정의 정치』에서 데리다가 한 프랑스어 번역본에서 인용했다. 출전은 본문 속에 독일어 원서를 표기한다. [본문으로]
  6. Jacques Derrida, Politiques de l’amitié, Galilée, 1994, p.104. [본문으로]
  7. 다음에서 인용. Ibid., p.105. [본문으로]
  8. Ibid., p.105. [본문으로]
  9. 다음에서 인용. Ibid., p.108. [옮긴이] 공적과 사적의 희랍어는 각각 ‘polemios’과 ‘echthros’이다. [본문으로]
  10. Ibid., pp.142-143. [본문으로]
  11. 다음에서 인용. Ibid., p.147. [본문으로]
  12. 다음에서 인용. Ibid., pp.138-139. [본문으로]
  13. 다음에서 부분적으로 인용. Ibid., p.152. [본문으로]
  14. Ibid., p.156. [본문으로]
  15. Ibid., p.155. [본문으로]
  16. Ibid., p.156. [본문으로]
  17. Ibid., p.149. [본문으로]
  18. 우리는 데리다와 아감벤의 ‘예외상태’ 개념에 관해, 상이한 관점에서 논한 적이 있다. 『新自由主義と権力──ブーコーから現在性の哲学へ』人文書院, 2009년, 第三章 「主権権力の強化と例外状態の常態化」[사토 요시유키, 3장. 「주권권력의 강화와 예외상태의 일상화」, 『신자유주의와 권력』, 김상운 옮김, 후마니타스, 2014]를 참조. [본문으로]
  19. Jacques Derrida, Force de loi, Galilée, 1994. 본서의 제목은 『법의 힘』으로 정착되어 있으나, 본고에서는 «force de loi»라는 법학적 개념을 “법률의 힘”으로 번역할 필요 때문에, 본서의 제목을 『법의 힘=법률의 힘』으로 표기한다. [본문으로]
  20. 우리는 다음의 데리다의 지적에 의거하면서, Gewalt라는 단어를 폭력=권력으로 번역하고, 법정립적 폭력을 구성적 권력과, 법유지적 폭력을 피구성적 권력과 거의 동등한 개념으로 생각한다. “Gewalt란 ‘폭력’이지만, 또한 ‘정당한 힘(force légitime)’, 즉 권위지어진=인가된 폭력(violence autorisée), 합법적 권력(pouvoir légal)이기도 하다. Staatsgewalt, 즉 국가권력이라는 표현할 때가 이것에 해당된다”(Ibid., p.74). [본문으로]
  21. Ibid., pp.69-70. [본문으로]
  22. Walter Benjamin, »Zur Kritik der Gewalt«, Gesammelte Schriften, Bd. II-1, Suhrkamp, 1999, S.129. “법유지적[법보존적] 폭력은 반드시 그 지속의 과정에서, 제반 적대하는 대항폭력을 억압하는 것을 통해, 자신에게 있어서 대리되는(repräsentiert) 법정립적 폭력도, 자신으로부터 간접적인 방식으로 약화시켜 버린다.” [본문으로]
  23. Jacques Derrida, Force de loi, p.89. [본문으로]
  24. Ibid., pp.93-94. [본문으로]
  25. 데리다가 들고 있는 것은 벤야민의 「폭력 비판을 위하여」를 좇아 근대 경찰의 예이다. “한계의 부재라는 성격을 근대 경찰에 부여하는 것은, 감시와 단속의 테크놀로지 ― 그것은 이미 1921년에는, 섬뜩한 방식으로 공사(公私)의 생활 전체와 서로 포개지고, 그것에 신들리게 됐다(오늘날 이 테크놀로지의 발달에 관해 우리는 뭐라고 할 수 있겠는가!) ― 뿐이 아니다. 이 성격을 근대 경찰에 부여하는 것은 또한 경찰이란 국가라는 것, 경찰이란 국가의 유령이며, 경찰을 강력하게 비난하기 위해서는, 공공의 것(res publica)의 질서에 선전포고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경찰은 오늘날에는 법률을 힘에 의해 적용하는(enforce) 것만으로는, 따라서 법률을 유지하는 것만으로는 만족하지 못하고, 법률을 발명하고, 행정 명령(ordonnance)을 공표하고 법적 상황이 명백하지 않을 때는 언제든 개입하고 시큐리티를 보증하려 하기 때문이다. 법적 상황이 확실하지 않을 때란, 오늘날에는 거의 항상 있는 것이다. 경찰은 법률의 힘(force de loi)이며, 법률의 힘을 지닌다. 경찰이 비열한 것은, 그 권위에 있어서, ‘법정립적 폭력과 법유지적 폭력 사이의 분리가 중지되기(혹은 지양되기[aufgehoben])’ 때문이다. 이 지양(Aufhebung)이라는, 경찰 자체가 의미하는 것에 있어서, 경찰은 법을 발명하고 스스로를 «rechtsetzende»인 것, 즉 입법하는 것으로 만든다. 경찰은 법권리에 미확정적인 부분이 있기 때문에 그 가능성이 있을 때에는 반드시, 법권리를 부당하게 찬탈한다. 설령 경찰이 법률을 발포하는 것은 아니라고 하더라도, 현대에서의 입법자의 하나로서 ― 현대의 [유일한] 입법자로서 그렇게 하는 것이라고는 말하지 않더라도 ― 행동한다. 경찰이 존재하는 곳에서는, 즉 어디서나, 그리고 바로 여기서도, 이제 두 개의 폭력, 즉 법유지적 폭력과 법정립적 폭력을 구별지을 수 없다. 그리고 이 양의성이 비열하고 천시해야 할 것이며, 언어도단인 것이다”(Ibid., pp.102-103). 다음도 참조. Walter Benjamin, »Zur Kritik der Gewalt«, in Gesammelte Schriften, Bd, II-1, S.189. [본문으로]
  26. Jacques Derrida, Force de loi, p.102. [본문으로]
  27. Giorgio Agamben, État d’exeption, trad. fr., Seuil, 2003, pp.66-67. [본문으로]
  28. Ibid., pp.67-68. [옮긴이] 원래 ‘법률’에 X표를 해야 하나, 프로그램의 한계 때문에 이렇게 표기했다. [본문으로]
  29. Ibid., p.82. [본문으로]
  30. Carl Schmitt, Die Diktatur, Duncker & Humblot, 1921, 7, Auflage, 2006, S.133-134. [본문으로]
  31. Giorgio Agamben, État d’exeption, trad. fr., p.82. [본문으로]
  32. 이런 경제적-군사적 ‘위기’의 정치적 ‘예외상태’로의 변환을 배경으로 하여 제2차 아베정권은 경제계로부터의 요망에 부응해, 무기수출의 원칙적 금지를 정했던 “무기 수출의 3원칙”을 폐지하여 “방위 장비 이전 3원칙”(‘방위 장비’라는 익숙하게 들은 말은 ‘무기’를 바꿔 말한 것)을 각의에서 결정하고, 무기수출을 해금했다. 그것은 군사적 ‘위기’를, 군수산업의 수출 확대(그것은 원전의 수출 확대와 밀접하게 결부되어 있다. 왜냐하면 같은 재벌계 기업이 그 주체이기 때문이다)에 의한 자본주의의 ‘위기’의 극복으로 변환하는 시도이다. ‘해석 개헌’도 어떤 의미에서는, 이런 시도에 이바지하는 하나의 수단에 지나지 않는다. 자본주의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군수산업이 동원되고 이를 위한 수단으로서 집단적 자위권 집단적 안전보장이 해금된다는 군사-자본주의적 논리에는 특단의 유의가 필요하다. 또한 이 점에 관해서 히로세 준 씨의 트위터에서의 발언(http://twitter.com/flux_de_merde/status/496847829445259264)에서 시사를 얻었다. [본문으로]
  33. Giorgio Agamben, État d’exeption, trad. fr., pp.30-32. [본문으로]
  34. 현행 헌법과 자민당 헌법초안을 비교하고, 후자의 문제점을 자세하게 해설한 아래의 사이트의 서술은, 극히 유익하다. 「자민당 헌법초안의 조문 해설」 http://satlaws.web.fc2.com/92html. 또한 「일본국 헌법개정초안 Q&A」는 다음에서 관람 가능. http://www.jimin.jp/policy/pamphlet/pdf/kenpou_qa.pdf. [본문으로]
  35. Giorgio Agamben, État d’exeption, trad. fr., p.18. [본문으로]
  36. 마지막으로 ‘해석 개헌’의 헌법 해석(데리다적 의미에서의 ‘텍스트 해석’)의 문제에 관해 데리다의 사상에 의거하면서 부연하고 싶다. 진부해진 탈구축 개념의 설명으로서, 텍스트 해석은 원본의 문맥으로부터 자유로우며, 따라서 반드시 역사적 문맥에 의해 규정될 필요는 없다고 하는 변종이 있다. 그러나 이런 설명은 전혀 데리다적이지 않으며, 그런 극단적인 ‘텍스트주의’가 역사수정주의에 대해서도 부담일 수 있다고 한다면, 그런 설명은 데리다의 사상을 완전히 배반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우선, 사실적인 헌법해석으로서, 1972년의 정부 견해(「집단적 자위권과 헌법 사이의 관계에 관한 정부 자료」)에 기반을 두고 “안전보장환경의 변화”를 따라 집단적 자위권과 집단적 안전보장의 행사를 인정한다는 제2차 아베정권이 행한 해석은, 1972년의 정부견해가 집단적 자위권의 보유를 인정하면서도, 그 행사는 “헌법상 허용되지 않는다”라고 결론짓고 있는 이상, 완전히 파탄 났다. 더욱이 철학적인 문맥에서는, 데리다 자신이 『법=법률의 힘』에서 “탈구축은 정의이다”라고 단언함으로써, 탈구축이 단순한 상대주의가 아니라는 것, 그것이 모종의 ‘정의’, 즉 급진민주주의(‘도래할 민주주의’)의 이념에 다가서는 것임을 강조한다. 우리에게 평화주의, 즉 전쟁의 기피는 바로 데리다의 ‘도래할 민주주의’의 이념에 따른 것이다. 또한 이 점에 관해, 히로세 준과의 개인적인 대화로부터 시사를 얻었음을 밝히고 감사드린다. [본문으로]
Posted by 상겔스 상겔스

 

 

죽음, 동물, 그리고 촉각

: 데리다에 의한 하이데거의 동물의 탈구축

20012-512(15)-008 - 파트릭 롤레드 - 죽음 동물 그리고 촉각 - 번역.pdf

20012-512(15)-008 - 파트릭 롤레드 - 죽음 동물 그리고 촉각 - 일본어.pdf

 

動物そして触覚

デリダによるハイデガーの動物脱構築

Patrick Llored, La mort, l’animal et le toucher

Une déconstruction de l’animal heideggerien par Derrida.

파트릭 롤레드 (프랑스 리옹3대학)

(일역 : 桐谷慧)

 

* 프랑스어 원본을 구할 수 없어서 일본어판을 옮겼으나, 맥락에 따라 한국에서 통용되는 단어들로 바꾸었다. 다만, 데리다의 원문 등은 수정했다. [2017321.]

 

데리다의 철학이 동물 윤리라는 분야에 속한다며 논해지는 일은 드물다. 그 동물윤리가 촉각의 윤리[éthique du toucher]로 논해지는 일은 더욱 드물다[주1]. 그렇지만 본고에서 변호되는 것은 이런 명제이다. 하지만 자크 데리다의 사상에서 촉각의 철학이라는 말로 우리가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지를 명확하게 하기 전에, 데리다의 사상은 그 핵심에 있어서 인간이 아닌 살아 있는 것vivant non humain에 대한 최신의 위대한 철학 중 하나라는 것을 말해두어야만 한다. 우리는 데리다의 탈구축이 물론 동물을 위해 작업[작동]하는 철학이지만, 그것뿐만 아니라 그것은 동물에 의해 반영되는 철학이기도 하다고 주장한다. 데리다가 동물의 물음이라고 몇 번이나 지목한 것은, 데리다의 철학에서 중심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으며, 그런 까닭에, 데리다의 윤리라고 불려야만 할 것의 핵심에 위치하고 있다. 다음처럼 주장할 수도 있을 것이다. , 동물들의 형상이 거기서는 큰 존재감을 갖고 있기에, 동물의 물음은 데리다의 철학의 핵을 이루고 있으며, 그 동물들의 형상이 차연, 흔적, 대리보충, 그리고 촉각이라는 그의 주요 개념에 본래적 의미를 부여한다고, 즉 이런 개념들은 동물성의 물음의 빛 아래에서만 이해될 수 있는 것이라고. 마찬가지로, 용서, 환대, 약속 그리고 정의 등의 개념 이것들은 무조건성이라는 관념에 신호를 보내고 있다 에 의해 묘사되는 데리다의 윤리의 전체야말로, 이렇게 새로운 종류의 동물윤리가 되기에 이른다. 데리다의 동물윤리는, 거기서 쟁점이 되는 사항 때문에, 앵글로색슨국가들에서 발전된 동물윤리와는 매우 다르다. 촉각의 물음은, 의심할 바 없이, 윤리의 물음과 관련된 데리다의 작업의 잘 알려진 말년의 방향성의 하나이며, 그리고 촉각의 물음 덕분에 탈구축은, 동물에 대한 배려에 큰 관심을 품는 다수의 연구영역을 풍성하게 할 수 있는 철학이 된 것이다.


[주1] 일역자toucher라는 단어는 닿다, 건드리다’, ‘접촉하다’, ‘관계하다등을 가리키는 동사이며, 또한 촉각혹은 접촉/닿기라는 의미의 명사이기도 하다. 마찬가지로 촉각이라는 의미를 가진 tact, ‘촉각을 가리키는 contact, ‘촉각의라는 형용사인 haptique라는 단어도 본론에서 사용되고 있다


 왜 촉각이 인간과 동물의 만남에 있어서 이렇게나 중요성을 띠는 것일까? 촉각은 다른 감각과 똑같은 하나의 감각인 것일까? 오히려 촉각은 다른 모든 감각의 존재 조건이 아닐까? 사실상 촉각은 삶[생명]의 유지에 필요 불가결한 감각, 즉 살아 있는 것의 삶[생명], 모든 살아 있는 것의 삶[생명]의 의미=감각sens이 아닐까? 촉각이 엄밀하게는 하나의 감각이 아니라는 것, 혹은 더 정확하게 말하면, 촉각이 다른 모든 감각의 의미=감각le sens de tous les autre sens이라는 것, 사실은 이러한 것은 많이 있을 수 있다. 촉각이라는 단어에 의해 표면과 외부 사이의 접촉contact, 즉 외재성과의 접촉을 상정한 감각이 바로 문제가 되고 있는 한, 모든 감각의 의미=감각le sens de tout sens이라는 표현은 역설을 담고 있는데, 이 표현에 깊이를 주려고 한다[주2]. 그런데 우리는 안과 밖이라는 고전적 대립의 적절함이 상실된는 것을 데리다와 함께 보게 될 것이다. 데리다에 의해 이뤄진 동물의 촉각에 대한 질문의 혁명을 이해하기 위해 다음을 덧붙여두자. 촉각의 철학은 서구철학 전체를 통해 전개된 아주 길고 풍부한 역사를 갖고 있는데, 데리다에 따르면, 이 전통은 어떤 중대한 문제를 그 안에 내포하고 있다. 그것은 촉각중심주의haptocentrisme이다. 촉각중심주의란 촉각에 있어서 인간의 손에 주어진 특권이며, 이 특권의 가장 폭력적인 귀결은, 살아 있는 것들의 공동체에 대한 바람직한 공-속으로부터 동물을 몰아내는 것이다. 데리다의 작업 전체는, 동물을 이 공동체의 대등한 구성원으로 하기 위해, 그리고 촉각을 모든 살아 있는 것들 인간도, 인간이 아닌 것도 을 삶[생명]으로 연결시키는 감각이라고 하는 것을 목표로 하여, 촉각중심주의를 탈구축하는 데 있다. 촉각중심주의의 질문은, 하이데거의 존재론 전체의 탈구축이라는, 탈구축의 가능한 한 가지 해석의 안내선이 될 수 있다. 이 촉각의 물음에서 출발함으로써만, 그리고 또한 하이데거에 이르기까지 거기에 포함된 촉각중심주의로 향하는 촉각의 질문의 지배적인 동향에서 출발함으로써만, 심지어 하이데거의 존재론의 탈구축은 완전한 의의를 얻을 수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주2] 일역자sens라는 단어는 감각’, ‘감관외에, ‘의미의의’, ‘존재이유등의 의미도 갖고 있다. «le sens de tous les autres sens»란 이런 다의성을 이용한 표현이며, 촉각이 하나의 감각sens이면서 동시에 다른 감각들의 의미 혹은 존재이유sens이기도 하다는 사태를 나타내고 있다


하이데거에 의한 동물의 존재론은, 무엇에 의해 구성되어 있을까? 우리가 생각하기에 그것은, 촉각을 세계에 있어서 가난한 촉각toucher pauvre en monde이라고 하는, 어떤 촉각의 존재론으로부터 구성되어 있다. 하이데거에 따르면, 동물은 접촉하지만, 동물의 세계의 가난함 때문에, 실은 동물은 스스로가 접촉하고 있다れる는 것을 모른다. 촉각이 세계에 있어서 가난하다는 것은 이러한 의미에서이다. 이상의 주장이야말로 데리다가 몇 개의 저작에서, 그리고 실제로는 그의 전체 저작을 통해 탈구축하려고 시도하는 것이다. 다음에 인용하는 것은, 데리다가 하이데거에 맞서 쓰고 있는 텍스트인데, 그것은 어떤 살아 있는 것에 있어서 지각하는 것percevoir이 무엇을 의미하고 있느냐는 것, 그리고 그 살아 있는 것과 그것에 고유한 죽음 사이의 관계, 이런 것들이야말로 문제라고 하는 것을 우리에게 명료하게 보여주고 있다.


하이데거가 동물의 Benommenheit이라고 부르는 것에 있어서(우리는 이 단어를 망연자실hébétude〕 혹은 방심accaparement이라고 번역하지만이 번역이 어렵고 독해의 모든 무게를 다 떠맡고 있다는 것을 안다), 동물의 Benommenheit에 있어서이 Benommenheit에 의해 정의되는 동물들은다음과 같은 가능성이 제거되고 빼앗기고 뺄셈되어 있다[열림]과 현시된 존재에 있어서현시 혹은 현시성에 있어서동물에 대해 현시된 것의 엶[열림]에 있어서존재자 그 자체étant comme tel와 관련될 가능성스스로가 지각한 것을 그 자체로서 지각할 가능성혹은 존재자나 세계 그 자체en tant que tel와 관련될 가능성이다[주3].

Dans ce que Heidegger appelle la Benommenheit de l’animal (qu’on traduit, mais nous verrons que la traduction est difficile et porte toute la charge de la lecture, par hébétude ou accaparement), dans sa Benommenheit, eh bien, a l’animal defini par cette Benommenheit est alors retirée, prise, soustraite la possibilite de se rapporter a l’etant comme tel, la possibilite de percevoir comme tel ce qu il percoit ou de se rapporter a l’etant et au monde, en tant que tels, dans l’ouverture et l’etre manifeste, dans la manifestation ou la manifesteté, dans l’ouverture de ce qui se manifeste a lui.


[주3] 일역자Jacques Derrida, La bête et le souverain : Volume II (2002-2003), Galilée, 2010, p.104.

             [옮긴이] accaparement를 일역자는 전유(專有)’라고 옮기고 있는데, 이것은 appropriation(자기 것으로 삼기)와는 달리 매점매석이나, ‘독점을 비롯해 독차지라는 의미이다. 그런데 우리 말로 Benommenheit얼빠져 있음’, ‘방심’, ‘사로잡혀 있음’, (세계에 대한 몰입이 심화된 양상인) ‘함몰등으로 옮겨진다. 아무튼 여기서는 혼동을 피하기 위해 독차지로 바꿔 옮긴다. manifestation manifeste, manifesteté 등을 일역자는 개명(開明)’이라고 옮기는데, 이것은 풀어보면 밝게 엶’, ‘밝게 열다이다. 한국어로는 표명’, ‘계시’[드러내 보임], 현시(Erscheinung), ‘현현(顯現, manifestation·epiphany)’ 등으로 옮겨진다. 여기서는 현시를 활용한다

 

하이데거에게 동물의 세계에 대한 관계, 그리고 즉 동물이 자기 자신에 대해 맺는 관계는 망연자실이라는 관계이다. 망연자실은 스스로가 지각하고 있다는 것을 지각하는 것을 동물에게 금지하고, 동물의 그것에 고유한 죽음과의 관계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되는 이러한 능력 없음[不能力], 세계와의 관계에 있어서 동물의 정의 그 자체로 한다. 하이데거에 따르면, 스스로가 지각한다는 것을 지각하는 것에 관련된 동물의 능력 없음[不能力], 더 나아가 폭력적인 것에도, 동물에 대해 세계로서의 세계라는 존재자와 관련되는 것을 금지한다. 이것은 동물이 그 자체로서의 자기 자신과는 관계를 갖지 않는다는 것일 뿐 아니라, 더 근본적으로는, 동물 자신에 의한 이 세계의 지각은 존재할 수 없다는 의미에서, 동물은 세계가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모른다고 말하는 것으로 귀착된다. 이것은 죽음의 문제에 중대한 귀결을 가져다준다. 하이데거에 따르면, 동물의 자기 자신과의 관계의 가난함, 그리고 동물의 스스로가 살고 있는 세계와의 관계의 가난함 때문에, 동물은 다음과 같은 것에 대해서도 그 자체로서는 지각할 수 없다. , 살아 있는 것들이 이 똑같은 세계에 대해 갖고 있는 근본적인 관계의 하나, 그 관계는 존재할 수 있으며, 지나갈 수 있으며, 현실에서는 끝에 의해서, 즉 내게 고유한 소멸에 의해서, 내게 고유한 죽음에 의해서 지나간다는 것이다. 이런 하이데거의 논의는마치 죽음이 투명한 지식의 대상이 될 수 있다는, 나와 죽음 사이에 있는 지식이라는 관계, 마치 죽음이 그런 관계를 경유할 수 있다는, 마치 삶[생명]과 죽음이라는 대립하는 상이한 두 개의 실체가 있다는 것 같다. 이 이중적 실체에 대해, 동물은 스스로가 살고 있다는 것을 모르기 때문에, 그 중의 하나 그 자체에, 즉 삶[생명] 그 자체에 접근할 수는 없다. 그래서 동물은 더군다나 실제로는, 정말로 이런 이중적 실체의 또 다른 측면, 즉 죽음에 접근할 수는 없는 것이다. 달리 말하면, 동물은, 설령 자신이 살아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고 하더라도, [생명]으로서의 삶[생명]이 무엇인가에 대해서는 알지 못하고 있다. 이와 똑같이, 내가 내게 고유한 죽음이라는 관념에 적어도 접근할 수 있는 것은, [생명] 그 자체에서 출발하는 경우뿐이기 때문에, 동물은 스스로가 죽을 수 있다는 것을 모른다. 그러므로 근본적인 문제는 자기 자신과의, 그리고 세계 그 자체와의 모든 관계를 동물에 대해 금지하는 망연자실 혹은 독차지라는 상황, 동물이 정말로 그런 상태 속에 있는지 여부를 아는 것이다.

이상으로부터, 동물의 자기 자신에 대한, 세계에 대한, 즉 그것에 고유한 죽음에 대한 비관계를 명시하기 위해, 하이데거의 세 개의 열쇠가 되는 생각이 도출된다.

 

생각 1 : (동물의) [생명]의 근본적 구조로서의 독차지(Benommenheit), 죽음의, 죽음에 도달하는 것의 극히 정확한 가능성들을 묘사한다.

생각 2 : 동물의 죽음, 그것은 죽는다mourir일까, 혹은 끝난다finir일까?

생각 3 : 그래서 우리가 인간은 죽는다고 보는 한에서, 동물은 죽을 수 없으며, 그저 끝에 도달할 뿐이다.

 

이것이야말로 삶[생명]에 대해서도 죽음에 대해서도 그 어떤 자체로서의 관계를 갖지 못하는 것으로서의 동물, 그런 동물의 비-죽음에 대한 하이데거의 거대한 주장이다. 동물은 삶[생명]에 대한 그 자체로서의 관계없이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동물은 죽음에 대한 그 자체로서의 관계없이 죽는다, 왜냐하면 동물에게는 자기 자신으로, 세계로, 즉 그것에 고유한 죽음으로 접근하는 것을 가능케 하는 능력이 근본적으로 결여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데리다는, 이 주장의 폭력에 반대하기보다도, 오히려 다음을 보여주려고 시도하고 있다. , 모든 살아 있는 것을 그 자신에 있어서, 세계에 있어서, 그것에 고유한 죽음에 있어서 정의하는 것은 이성적인 지식에 속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감성적인 관계에 속한다는 것이다. 데리다에게 감성적인 관계란 촉각의 질문을 경유하는 것이며, 이 촉각의 질문은 인간들과 인간이지 않은 것들, 사유와 감성의 잘못된 대립을 넘어설 윤리적 가능성으로서이다. 촉각의 질문은, 하이데거에게서의 동물의 존재론의 탈구축이라는 역할을 맡게 되는 것이다.

 

확실히, 촉각에의 권리를 동물에게 인정한 철학자는 드물다. 그 적은 수의 철학자들에 아리스토텔레스가 있는데, 이 문제에 있어서의 아리스토텔레스의 중요성은 자세하게 설명되어야 한다. 그것 없이는, 이 논의에 있어서 데리다의 공헌을 완전히 이해되지는 못할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살아 있는 것의 철학은, 촉각을 생리학적이고 원초적인 한 기능으로 환원하는 생물학적 자연주의와 불가분한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촉각은 살아 있는 것 그 자체의 존재에 필요 불가결한 유일한 감각이라는 이유에 의해, 아리스토텔레스가 그 동물철학에 있어서 촉각에 중심적인 역할을 맡게 한다는 것을 강조하는 것은, 역시 중요하다. “촉각이라는 감각은, 그 박탈이 동물들의 죽음을 초래하는 필연적이고 유일한 감각이다. 왜냐하면 동물이 아닌 존재가 이 감각을 갖는 것은 가능하지 않고, 동물이기 위해서는 촉각과는 다른 감각을 갖는 것은 필요하지 않기 때문이다[촉각이 없이는 다른 {감각들이} 존재하지 않으며, 촉각기관은 흙으로도, 그리고 원소들 가운데 다른 어떤 것으로도 {구성되어} 있지 않다. 그렇다면 이 감각만을 결여해도 동물은 반드시 죽는다는 것이 분명하다. 왜냐하면 동물이 아니고는 그 감각을 갖지 않으며, 또한 동물은 이것 없이는 다른 {감각}을 가질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라고 아리스토텔레스는 『영혼에 관하여(435b 4-7)[주4]에서 쓰고 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주장은, 촉각을 살아 있는 것의 존재에 불가결한 유일한 감각이라고 하기 때문에, 매우 급진적인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우리에게 말하는 바에 따르면, 이 촉각이라는 감각의 존재를 동물의 존재조건으로서 고려하지 않는다면, 촉각이 거기에 속해 있는 동물 존재는 사고될 수 없다. 그래서 동물에게 촉각은, 그것 없이는 동물의 삶[생명] 그 자체가 질문에 부쳐지게 되는, [생명]의 유지에 필요 불가결한 것이다. 이상으로부터, 촉각과 동물의 삶[생명]과의 사이뿐만 아니라, 촉각과 동물의 죽음 사이의 밀접한 관계가 도출된다. 만일 촉각이 살아 있는 것의 삶[생명]을 낳는 것이고, 데리다가 아리스토텔레스의 열쇠인 표현을 거론하면서 우리에게 보여주듯이, [생명]과 촉각 사이의 공외연성coextensivité이 있다고 한다면, 아리스토텔레스의 주요한 발견이란, 촉각을 죽음의 시련épreuve de la mort에 걸었다는 것, 촉각을 바로 삶[생명]과 죽음의 물음으로 삼았다는 것이리라. 데리다는 촉각, -뤽 낭시를 건드리다에서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동물적 생명과 촉각 사이의 이 본질적인 공외연성, 아리스토텔레스는 이것을 측정mesurer한 것이다. 그는 또한 이 공외연성을 죽음의 시련에 의해 설명한다. 시각, 청각 혹은 미각을 박탈당하더라도, 동물이 반드시 죽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만일 촉각이 결여되기에 이른다면 동물은 지체 없이 죽는다. 반대로 (그렇지만 이것은 같은 현상의 다른 측면인데), 촉각의 과잉[초과]적 강도intensité excessive가 건드릴[촉각할] 때에도 동물은 죽는다. 감각적인 것의 과장법hyperbole[주5]은 그때, ‘우리가 그것에 의해 삶[생명]을 정의했던이 촉각의 기관을 파괴하기에 이른다. 촉각의 이 중용=측정mesure, 이 절제modération, 바로, 어떤 유보réserve가 그것을 과잉(exagération)의 일보직전에서 붙들고 있는 경우에 한해서, [생명]에 도움이 되기를 계속한다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Cette coextensivité essentielle de la vie animale et du toucher, Aristote la mesure. il l’explique aussi à l’épreuve de la mort. Privéde la vue, de l’ouïe ou du goût, l’animal ne meurt pas nécessairement. Or il meurt sans retard si le toucher vient à lui manquer. Inversement (mais c’est l’autre face du même phénomène), l’animal meurt aussi lorsque l’intensité excessive du toucher le touche. L’« hyperbole » du tangible en vient alors à détruire l’organe de ce toucher « par lequel nous avons défini la vie » (435 b 10-16). Cette mesure, cette modération du toucher, ne peut-on dire quelle reste au service de la vie dans la seule mesure, justement, où quelque réserve la retient au bord de l’exagération?”[주6]


[주4] 일역자〕 『について, 中畑正志訳, 京都大学学術出版会, 2001, 184. [아리스토텔레스, 영혼에 관하여, 유원기 역주, 궁리, 2001, 252.]

[주5] 일역자저자는 감각적인 것의 과장법hyperbole du sensible이라고 쓰고 있으나, 인용된 촉각의 데리다의 원문에서는 촉지 가능한 것의 과장법hyperbole du tangible이라고 되어 있다

[주6] J. Derrida, Le toucher, Jean-Luc Nancy, Galilée, 2000, p.61.〔『触覚ジャン=リュック・ナンシーにれる松葉祥一榊原達哉加國尚志訳青土社200695-96


데리다에게 촉각의 중요성은 촉각이 끊임없이 따르고 있는 아포리아와 관계없이는 이해될 수 없다. 왜냐하면 만일 모든 동물의 삶[생명]이 필연적으로 촉각에 의존하고 있다면, 같은 때에 같은 장소에서, 촉각이 과잉[초과]적 강도라는 형태를 취해 나타날 경우에는, 죽음 그 자체가 촉각으로부터 도래할 수 있기 때문이다. 감각적인 것의 과장법[주7]은 이 과잉[초과]적 강도에 의해, 동물 자신에 대해 휙 돌아서서 덤벼드는 자기-면역의 과정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자기 자신을 파괴하는 삶[생명]에 대해 생각하기 위해, 자살을 언급하는 것을 주저해서는 안 된다. 그래서 촉각은 다른 감각들과는 달리, 데리다의 윤리의 중심적 개념인 파르마콘의 논리logique du pharmakon를 따르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파르마콘의 논리에 의해, 촉각이라는 이 특이한 감각은, 살아 있는 것의 핵심에 동물의 -la-vie-la-mort[주8]를 세우는 것이 되며, 또한 유보개념에 입각한 윤리와 분리 불가능하게 된다. 그리고 그 윤리는, 유보 개념에 의해, 그것에 외재적인 형식적이고 규범적인 규칙들에 기초하는 것이 아니라, [생명]의 파르마콘적 해석에 의해 이해된 동물의 신체 그 자체에 기초한 것이 된다.


[주7] 〔일역자감각적인 것의 과장법hyperbole du sensible촉각으로부터의 직전의 인용문에서도 볼 수 있는 표현인데, 앞의 옮긴이 주에서도 지적했듯이, 데리다의 원문에서는 촉지 가능한 것의 과장법hyperbole du tangible이다

[주8]  일역자-la-vie-la-mort는 데리다가 자주 사용한 표기. “생사la vie la mort라고 쓰는 경우도 있다. [생명]과 죽음을 이어 적음으로써, 양자의 분리 불가능성을 나타내고 있다. 데리다는 1974년부터 75년까지 생사라는 제목의 강의를 했다

 

데리다에 의한 동물의 촉각

촉각자기비자기사이의 다양한 경계가 창출되는 공간에 살아 있는 것들의 각각이 예외없이 기입되는 것을 가능케 하는 것이며, 그래서 살아 있는 것들 사이에서의 만남[마주침]의 감각이다. ‘자기비자기사이의 다양한 경계에 기초함으로써, 접촉과 사건으로서의 만남이 가능해진다. “아리스토텔레스를 따라, 그리고 그를 넘어서, 촉각은 다른 감각들과는 달리, 살아 있는 신체에 공외연적이라고 가정하자. 또한 마찬가지로, 또 다시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듯이, 먹는 것은 촉각에 속한다고 가정하자. 그런 경우, 애도에 따른 체내화(incorporation)는 어떻게 되고, 무엇을 의미할까? 그것은 여전히 삶[생명]의 살아 있는 한 계기일까? 물론이다, 그것은 어떻게 다를 수 있을까? 그것은 여전히 죽음을 삶[생명]에 포함시켜야만 한다. [생명]의 살아 있는 이 계기, 이것은 내화intériorisation일까 아니면 배출expulsion일까? 그것은 건드릴 수 없는 것의 촉지-가능하게-되기devenir-tangible일까, 혹은 반대로, 촉각적tactile육체, 촉각하는 것과 촉각되는 것의 촉지-불가능하게-되기devenir intangible를 산출하는 이념화idéalisation, 정신화, 혼화魂化, animation인 것일까? // 질문들의 이 모체는 어떻게 세계의 질문을 탄생시키는 것일까? 그리고 유한성의 질문을. 왜냐하면 촉각이 다른 감각들 중의 하나의 감각이 아니라면, 이 점으로 나중에 돌아가겠지만, 어떤 면에서는, 엄밀한 의미에서는 하나의 감각이 아니라면, 그것은 촉각이 모든 유한한 실존에 도래하는 것을, 이 실존을 상기시키기 때문이다. 그것은 어떠한 것이든, 그 어떤 존재자이든, 유한한 실존에 도래하는 것을그 실존에 대해 현전화시키기 때문인데, 그렇지만 그때, 촉각은이 현전화의 증여에 의해, 그것에 있어서, 혹은 그것으로부터 현전화가 고지되는 바의 한계를 표식한다Supposons, selon Aristote et au-delà, que l’haptique, à la différence des autres sens, soit coextensif au corps vivant. Supposons aussi que manger, comme le dit encore Aristote, relève du toucher. Que devient alors et que signifie l’incorporation selon le deuil ? Encore un moment vivant de la vie ? Bien sûr, comment pourrait-il en être autrement ? Encore faut-il inclure la mort dans la vie. Ce moment vivant de la vie, serait-ce une intériorisation ou une expulsion ? Un devenir-tangible de l’intouchable ou au contraire une idéalisation, une spiritualisation, une animation produisant alors un devenir intangible du corps tactile, du touchant et touché ? // En quoi cette matrice de questions donnerait-elle naissance à la question du monde ? Et à la question de la finitude ? Car si l’haptique n’est pas un sens parmi d’autres, si d’une certaine façon, nous y reviendrons, il n’est même pas un sens, stricto sensu, c’est qu’il rappelle à toute existence finie ce qui vient à elle : pour lui présenter quoi que ce soit, quelque étant que ce soit, mais en marquant, par le don de cette présentation, la limite à laquelle ou depuis laquelle une présentation s’annonce.”[주9]


[주9]  J. Derrida, Le toucher, op. cit., p.67.〔『触覚前掲104-105


따라서 만약 동물의 살아 있는 신체와 촉각 사이의 공외연성이, 인간과 동물의 관계를 양자의 촉각적 공동체의 승인이라는 방향으로 변화시켜야 한다면, 역시, 이 공외연성이 오늘날 우리에게 지닌 의미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선진적인 논의에서의 그것과는 다른 것이 된다. 공외연성은, 우리의 동물들에 대한 관계를 철저하게 재고시키기 때문에 정치적인 문제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바로 이런 윤리적 관심이야말로 공외연성이라는 개념에 대해 가장 급진적인 의의를 주도록 데리다를 이끌고 있는 것이다. 실제로, 아리스토텔레스가 죽음으로부터 삶[생명]을 분리하는 반면, 데리다는 공외연성이라는 이 개념을 통해, 동물이라는 살아 있는 것을, 촉각에 의해 죽음과 삶[생명]에 동시에 연결된 존재로 본다. 동물은 그래서, 촉각에 의해 자신의 삶[생명]-죽음에 대한 관계의 한계들을 끊임없이 세우는 존재인 것이다. 동물의 삶[생명]-죽음에 대한 관계는, []화와 배출로 이루어진 이중적 운동에 의해 해석될 수 있다. 촉각을 통한 과정으로서의 내[]화는, 여기서는, 모든 살아 있는 것에 있어서 촉각은 자기 접촉un se toucher이 된다는 사태를 의미한다. 촉각이란, 우선 스스로 자기 자신을 접촉하는[자기 자신을 건드리는] 것이다. 데리다가 모든 동물에서 발견된 내[]화의 현상에 의해, 동물이라는 살아 있는 것에 있어서, [생명]은 스스로를 접촉하는 것이다. 어떤 살아 있는 것에 있어서, 살아 있는 것이란 스스로를 접촉하는 것이다. 스스로를 접촉하는 것이, 살아 있는 것의 자기 자신에 대한 타동성他動性transitivité이라는 이 작동에 의해, 살아 있는 것을 존재하게 하는 것이다. “스스로 자신을 접촉하는 것의 사활을 건 필연성 없이는 모든 존재는 불가능하며, 무와 관련될 것이다. 동시에 이 스스로 자신을 접촉하는 것은 아포리아라는 형태를 취해 나타난다. 왜냐하면 스스로 자신을 접촉하는 것이란 타자를 접촉하는[타자를 건드리는] 과 동시적인 것으로서만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로부터, 데리다가 배출이라고 부르는 것에 대한 촉각이 열리게 된다.

촉각이 그러한 배출이라는 이 삶[생명]의 계기에 의해, 무엇이 의미되고 있을까? 살아 있는 것의 핵심에 있는 배출이 의미하는 것, 그것은 동물이 존재를 계속하기 위해서는 촉각을 외재화[외부화]할 필요가 있다는 것인데, 동시에, 자기 자신의 바깥으로 나간다는 이 작동에 연결된 위험들로부터 자신의 몸을 지키려고 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자기 자신의 바깥으로 나간다는 이 작동은 촉지 가능하게 되기를 불러일으키고, “촉지 가능하게 되기는 데리다의 동물 윤리가 직면하는 문제에 신호를 보낸다. 그 문제란 접촉할 수 없는 것l’intouchable의 질문이다. 촉각의 질문이 따르고 있는 아포리아를 가리키는 것은, 접촉할 수 없는 것이라는 단어이다. 이하가 아포리아의 매우 복잡한 전모이다. 만약 촉각에 의해서만, 그리고 촉각에 있어서만 동물의 삶[생명]이 존재하는 것이라면, 설령 그것이 자신을 접촉하는 것이더라도, 타자를 접촉하는 것이더라도 타자로의 이 엶은, 즉 타인이 항상 그렇게 접촉하는 것touchant으로의 이 엶은, 감각으로서의 촉각의 핵심 그 자체에 숨어 있는 항구적인 위협일 수 있다는 것을 우리는 이해할 것이다. 그러나 바로 이 위험이야말로 데리다가 동물의 삶[생명]정신화spiritualisation라는 강한 용어로 부르는 바의 조건이다. 정신화는 접촉하기와 접촉되기touché사이에서, “촉각적 신체의 촉지-불가능해지기를 가능케 한다. 다른 식으로 말한다면, 동물이 스스로에게 고유한 신체를 창출하는 것은 촉각에 의해서이며, 그 고유한 신체는, 타자의 촉각에 의해, 즉 촉각의 타자에 의해 끊임없이 위협당하는 것에 의해 성립되는 것이다.

이로부터 먼저 생각해두어야 하는 것은, 촉각을 구성하는 이 아포리아이다. 이 아포리아 때문에, 동물은 존재하기 위해서는 스스로를 접촉할 수밖에 없는 살아 있는 것이지만, 그러나 동시에, 안과 밖의 경계를 스스로 창출하는 살아 있는 것이기도 하다. 이런 한계를 정신적이라고 부르기를 주저해서는 안 된다. 그리고 이 한계에 의해 동물은 스스로의 유한한 실존 앞에 놓이는 것이며, 타자의 유한성 앞에 놓이는 것과 마찬가지로, 스스로에게 고유한 유한성 앞에 놓이는 것이다. 타자의 실존이 그러한 것과 똑같이, 동물의 유한한 실존은, 촉각에 의해 그 동물 자신에 도래한다. 그래서 촉각의 유한성에 의해, 타자는 자기 자신에 대해 다른 것이 되지 않을 수 없다. 촉각이란 동물이라는 살아 있는 것의 내부에, 그리고 인간이라는 살아 있는 것과 인간이 아닌 살아 있는 것의 관계의 내부에 한계들을 창출하는 감각인데, 그런 촉각에 의해 만남은 실현된다. 달리 말한다면, 촉각은 자아와 타자 사이의 한계를 그려내는 것이며, 이 자아가 동물이라고 불리든 인간이라고 불리든, 이 동물 윤리에 있어서는, 그런 동물과 인간 사이의구별의 모든 존재론적 가치는 상실된다. 동물의 삶[생명]을 묘사하기 위해, 우리는 자기-촉발auto-affection에 대해 논해야 한다. 왜냐하면 자기-촉발이야말로 모든 살아 있는 것이 자신의 안에 타자를 맞아들이는 것을 가능하게 해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촉각의, 촉각에 의한 한계

이 한계는 촉각의 내부 그 자체에 있어서의 간격화espacement의 가능성이다. 촉각은 다른 감각들에 대해, 그리고 한계를 간격화하고 확장할 수 있는 모든 것에 대해, 산종된다. 사실, 촉각에 의해 수립된 한계는, 간격화에 의해, 그리고 간격화 때문에 성립되는 것이며, 그 한계를 확대하여 도래하는 모든 것을 열고, 그것에 대해 열릴 수 있는 것이다. 그렇지만 그것은, 항상 공외연적인 법 아래에서이다. “그러나 이 한계는, 접촉tact, 사실을 말하면, 간격화의 준-초월론적 특권을 이렇게 확인하면서, 촉각과 다른 감각을 서로 접촉하게 한다. 그리고 간격화란, 테크네와 보철적 대체물에 자리를 주는 것이다Mais cette limite-ci fait se toucher le toucher et les autres sens, confirmant ainsi le privilege quasi transcendantal du tact, en vérité de l’espacement. Et de l’espacement comme ce qui donne lieu à la tekhnè et au substitut prothétique.”[주10]


[주10] Ibid., p. 137.同前230


간격화란 한계를 창출하는 것으로서의 촉각이라는 이 특수한 감각의 다른 이름이며, 그 한계에 기초함으로써 만남은 생길 수 있다. 인간과 동물이 서로 접촉한다는 것은 융합이나 동일화가 되지 않는 것으로서의 만남, 양자 사이에서의 그런 만남의 조건이다. 융합이나 동일화는 데리다가 무매개적인 인접contiguïté immédiate이라고 명명한 무매개성의 환상을 나타내고 있다. 그래서 무매개성으로부터 촉각을 떼어놓는 것[주11]이 문제이다. 바로 이 말은, 우리가 촉각의 중요성을 이해한다면, 데리다의 동물철학을 선도하고, 우리에게 상식과도 철학적 양식과도 관계를 끊으라고 명하는 것, 탈구축의 표어이다. 촉각중심주의란 촉각에 있어서 인간의 손에 특권이 주어지고 있다는 것인데, 그 촉각중심주의의 두 가지 주요한 형식융합과 동일화, 촉각이 무매개적인 감각 능력의 경험적 표현[출현]에 지나지 않는다는 확신에 의해 도출되고 있다. 그런데 촉각이라는 감각 능력sensibilité haptique에는 그 어떤 무매개성도 존재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무매개적인 것으로서의촉각sensibilité tactile이라는 개념을 따를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주12] 현상으로서의 촉각은, 경험적 촉각에 의해서는 접촉되지 않는다. 이렇게 데리다는 촉각에무매개성을 인정하지 않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촉각을 단순한 하나의 감각으로 만들 위험을 예방하기 위해 그렇게 하는 것일 뿐이다. 그래서 오늘날까지 동물의 촉각의 철학을 창설하는 것을 불가능하게 해온 다양한 구별을 뛰어넘기 위해, 촉각의 법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에 도달해야만 한다. 그런 구별들은, 현실과 잘 어울리지 않는 두 개의 세계를 분리하는 것으로 생각되는 자연과 문화의 이원론에 의해 설명된다. 이 두 개의 세계 중 한 쪽은 동물성을 자연에 가둬둠으로써 자연결정론을 따르며, 다른 한쪽은 인간의 특성으로 간주되는 문화적 문맥주의를 따르고 있다.


[주11] 일역자〕 Cf. Ibid.同前230-231

[주12]  일역자이 대목에서는 둘 다 촉각이라고 번역할 수 있는 sensibilité haptiquesensibilité tactile라는 두 개의 표현이 나눠서 사용되고 있다. 그리스어에 기원을 두고, 주로 학술용어로 사용되는 haptique라는 단어가, キネステーゼ 등도 포함한 촉각에 관련된 것 전반을 가리키는 반면, 라틴어에서 유래하는 tactile라는 단어는, 더 직접적인 접촉이라는 뉘앙스가 강하다고 간주된다

 

동물의 촉각의 법

동물의 물음에 대한 우리의 대부분의 반성은 여전히 인간성과 동물성 사이의 구별에 기초하고 있는 것인데, 데리다의 탈구축은 이 구별을 뛰어넘겠다는 욕망에 끊임없이 사로잡혀 있다고 하겠다. 탈구축에 있어서의 이런 극복은, 촉각의 법의 존재에 의해 이뤄진다. 사실, 살아 있는 것들 사이에 있어서의 접촉을 완전히 단념해버리지 않고, 그것을 바로 중단하는 촉각의 법이 있다고 한다면, 이른바 서양에 고유한 것인 인간과 동물 사이의 형이상학적 분리 이전에 그 법은 항상 생기고 있다. 사실, 너무도 자주 동물의 촉각의 물음에 대한 우리의 관계를 지배하고 있는 무매개성은 촉각을, 생리학적이고 동물학적 기능에 대한 법칙을 따르는 자연적신체를 전제로 한 행위로 삼아버린다. 그런 경우, 촉각이란 동물의 물리적 신체에 관련될 것이다. 그러나 촉각은, 몇 가지 과학법칙을 충족시킬 수 있는 물질의 질문이 아니다. 만일 촉각이 자연현상으로 환원되어버린다면 자연 현상이 존재하고 있다는 착각을 주는 것은 촉각인데 과학적 유형의 객관적 지식이 신속하게 촉각의 질문으로 처리되어 버릴 것이다. 그런데 그런 지식은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촉각에 있어서 촉각으로 환원 불가능한 것, 촉각에 있어서 그 단순한 물리적 출현[표현]으로부터 도망치는 것, 즉 모든 촉각의 중심 그 자체에 비-촉각이, 접촉될[건드려질] 수 없는 것에 속하는 무엇인가가 있기 때문에 촉각은 존재한다는 사실’, 이것을 과학적 유형의 객관적 지식은 고려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촉각은 끊임없이 타자에 대해 스스로를 열고 또한 스스로를 닫는다는 역설적 감각이며, 타자를 접촉하지 않는다는 가능성에 의해서만 성립되는 감각인 것이다. 달리 말하면, 촉각의 근본적 법으로서의 자기-촉발이야말로 촉각에 고유한 삶[생명]을 통제하는 것이다. 그리고 또한, 이 자기-촉발 덕분에, 촉각의 법이란, 객관적으로 생각되는 자연에는 결코 따르지 않는다는 것이다. 더 근본적으로는, 만약 자연이라는 단어가 알몸의 삶[생명]의 영역을 의미한다면, 동물의 촉각을 이끄는 법이란, 자연에는 결코 따르지 않는다는 것이며, 그것은 자연으로부터 해방된 것이다.

우리에게 인간성과 동물성 사이의 형이상학적 구별을 재고하도록 명하는 것은, 바야흐로, 해방과 자유를 가져오는 이 촉각의 법이다. 촉각이란 인간들과 동물들에 공통의 세계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이 법은 촉각을 더 이상 자연에는 속하지 않는 하나의 사건이 되기 때문에, 인간성과 동물성이라는이 범주들을 질문에 부친다. 이것은 데리다의 논의의 급진적인 결론이다. 만나게 되는 것은 두 개의 알몸의 신체가 아니라, 오히려 촉각을 매개로 한 관계를 시간과 공간에 있어서 그려내는 두 개의 방법이다. 다양한 이원론이 인간들과 동물들의 평화로운 관계를 방해하고, 폭력을 가져오는 것인데, 만남이 의미를 갖는 것은, 이것이 이원론을 산출하는 대립들 이전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예전부터 탈구축이 발명하려고 추구해 왔던 것은, 인간들과 동물들의 평화로운 관계이다. 여기서는 자연이라는 단어를 결정론이라는 의미로 사용하는데, 동물이 그런 자연으로부터 해방되는 것은 촉각에 있어서, 촉각에 의해서라고 하는 한에서, 그 어떤 자연도 그 법을 동물의 촉각에 떠넘기는 일은 없다. 촉각의 선행성은, ‘주체객체의 범주도, 누가qui무엇을quoi이라는 범주도 물음에 부친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동시에 촉지 가능한 것이기도 촉지 불가능한 것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동물은 동시에 주체이기도 객체이기도 하며, 누구이기도 하고 무엇을이기도 하다. 이리하여 촉각의 목적이란 탈구축이라는 것이, 즉 현전하는 개체성의 탈동일화라는 것이 드러난다. 달리 말하면, 촉각의 경험에 있어서는, 접촉하기와 접촉되기는 더 이상 분리 가능하지 않다. 왜냐하면, 누구와 무엇을은 거기에 있어서는 더 이상 사용될 수 없기 때문이다. 인간이든 동물이든, 접촉하는 것celui qui touche, 마찬가지로 접촉하기도 접촉되기이기도 하다. 이것은 사유의 범주로서의 촉각이 동물성 그 자체에 의해 탈구축된다는 것이다. 그 이유를, 데리다는 다음과 같이 강조한다. “그런데 이 관점에서 보면, ‘누가혹은 무엇을, 접촉하는 것le touchant이나 접촉되는 것le touché을 결정하기 전에는 여기서 우리는 성급하게도 이것들을 행위의 주체 혹은 객체라고 부르지 않겠지만 촉각 일반에 관한 질문을, 촉각의 몇몇 본질에 관한 질문을 더 이상 제기할 수 없다. 우선 접촉le toucher이 있고, 그 다음에 주어 혹은 보어에 의해 동사를 보충할 수 있게 해주는 이차적인 변양이 있는 게 아니다(무엇이 누구를 혹은 무엇을 접촉하다[건드리다], 누가 누구를 혹은 무엇을 접촉하다[건드리다])Or, a cet égard, il n’est plus possible de poser la question du toucher en general, de quelque essence du toucher en general avant de determiner le «qui» ou le «quoi», le touchant ou le touché que nous ne nous hâterons pas d’appeler sujet ou objet d’un acte. Il n’y a pas d’abord le toucher, et ensuite des modifications secondaires permettant de compléter le verbe d’un sujet ou d’un complément (quoi touche qui ou quoi, qui touche qui ou quoi).”[주13] 접촉le toucher은 없다고 말하는 것, 그것은 사실상 이 사건에는 얼마간의 특이성이 있을 뿐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 사건은, 마주대한 접촉이라는 행위의행위자들의 예견을 동요시키는 것이며, 그 행위자들은 더 이상 주체와 객체라는 고전적 범주에 의해서는 사고될 수 없다. 인간은 주체의 범주라는 주권적 지위에 있다고 생각되고 있는데, 이렇게 탈구축된 촉각은 인간의 모든 주권적 지위를 잃게 한다. 촉각의 물음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우리를 객체 혹은 무엇을의 위치에 놓는 것이며, 그렇게 함으로써, 동물이 접촉하기가 될 때, 마침내 동물에 대한 모든 주권성을 우리로부터 잃게 만드는 것이다. 만약 동물과 인간의 만남이 생기기를 바란다면, 사건이라는 그 특이성에 있어서 고려해야 하는 것은, 이 불가능한 가능성이다. 데리다의 동물윤리를 정초하는 것은 이 불가능성이다. 동물의 삶[생명]에도, 혹은 신의[생명]에도 똑같이 관련되는 것인 촉각에 의한 주권성의 탈구축을, 그 어떤 인간학적 한계도 중단하지 않는다. 데리다의 동물윤리에 있어서는 접촉contact으로서의 촉각, 즉 촉, tact으로서의 촉각이라는 이 사건만이, 현전하는 동일성의 탈구축을, 그리고 모든 공동체적 동일성의 해체를 행할 수 있다. 그래서 인간과 동물 사이에서 확립되는 촉각에는 다음과 같은 전복의 힘이 있음을 인정해야 한다. , 촉각은 근원으로서의 살아 있는 자기와, [] 박힌 혹은 접촉된 자기와의 사이에서의 항상적인 차연을 표식하는 대목이며, 접촉된 자기는 이 기원이라고 생각된 것을 끊임없이 차연하는 것이다. 따라서 살아 있는 현재가 열어젖혀지게 것은 촉각 덕분에 의해서이며, 이 열어젖힘은 접촉하는 것이기도 하고 접촉되는 것이기도 하며, 스스로가 자기 자신에 대해 다른 것이라는 것을 발견시킨다. 자기에의 현전은 그것은 인간이 아닌 살아 있는 것에도, 인간이라는 살아 있는 것에도 관련되는 것인데 ― 〔촉각이라는사건에서 무탈하게 떠날 수는 없다. 이 사건은, 분할 불가능한 주권성에 있어서 살려지게 된다고 생각되는 근원적인 절대자의 무구한 비분할[주14]이라고 데리다가 부르는 것, 이것을 물음에 부침으로써 성립한다. 촉각이 물음에 부치는 것, 그것은 이 현전의 형이상학인 것이다.


[주13] J. Derrida, Le toucher, op. cit., p.84.〔『触覚前掲138〕 〔인용할 때 저자는 촉각의 원문에 있는 따옴표를 생각했으나, 일본어로서의 읽기 쉬움을 고려하고 옮긴이의 판단에 따라 이런 따옴표를 번역했다.

[주14] 일역자이 표현은 기하학의 기원의 서문에서 볼 수 있다. Edmund Husserl, L’Origine de la géométrie, introduit et traduit par Jacques Derrida, PUF, 1962, p. 171.〔『幾何学起源田島節夫矢島忠夫鈴木修一訳青土社2003250



그래서 촉각은 살아 있는 것들의 확대된 공동체로의 타자의 무조건적인 맞아들임에 대한 질문을 개시한다. 그때 이후 이 공동체는, 환대라는 개념의 윤리적 힘에 의해 완전히 탈중심화된다. 어떤 공동체를 창설하는 분리의 법, 항상 이 분리의 법 아래에서이긴 하지만, 촉각에 의해 동물이 나를 맞아들인다. 왜냐하면 동물들에 권리를 준다는 이견이 많은 문제 이전에, 촉각의 물음은 동물들과의 공동체를 만든다는 가능성 때문에 중요한 것이기 때문이다. 이 동물들의 권리라는 관념은, 인간인 살아 있는 것과 인간이 아닌 살아 있는 것을 연결시키는 촉각적 공동체의 바깥에서는 의미가 없다. 이 촉각적 공동체는 접촉contact의 공동체이며, 즉 자기와의, 그리고 타자와의 -촉각co-tact의 공동체이다. -촉각은동물이 그러한 전적인 타자(tout autre)와의 함께avec이기 때문에, 자기와의 함께이기도 하다. 그래서 데리다의 동물 윤리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바로 촉각에 의해 동물과의 공동체를 만든다는 것이다. 아마 이것이야말로 분리의 법을 전제로 하는 특이한 동물 윤리를 잘 가다듬기 위해 필요한 것이리라. 이 분리의 법은, -속에 반하는 것이 아니냐고 생각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생기는 것은 정반대의 것이다. 왜냐하면 이 발명해야 할, 도래할 공동체는, 그것이 전적인 타자인 동물에 대해 열릴 수 있는 경우에만 존재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 어떤 것도, 이 집단을 포함하고 모조리 이어받지 않으면 안 되며, 그것을 어떤 자연적, 유기적, 혹은 법-제도적인 전체성으로 제한해서도 안 된다. “이렇게 촉각은, 존재에 있어서, 존재처럼, 존재자의 존재처럼, 함께l’avec(cum 혹은 co-)[주15]의 접촉이며 그것은 타자와의 함께처럼 자기와의 함께이기도 한 함께이다 접촉으로서의 함께이며, -촉각으로서의 공동체일 것이다Le toucher serait ainsi, dans l’être, comme être, comme l’être de l’étant, le contact de l’avec (du cum ou du co-) avec soi comme avec l’autre, l’avec comme contact, la communauté comme co-tact.”[주16] 동물의 촉각의 물음에 의해 모든 정치제도를 쇄신할 수 있는 새로운 정치의 형식, 그런 정치의 형식에 있어서 우리가 발명해야만 하는 것은, -촉각의 공동체이다. 더 이상 상상적인 것도 인간중심주의적인 것도 아닌, 종차별적인 경계를 극복하려는 공동체를 발명함으로써, 민주주의 그 자체야말로 동물적이 되어야만 한다. 데리다의 도래할 민주주의는 지금, 거기에-있는-동물의 민주주의(démocratie animale-là)에 의해 살아 있는 것이다!


[주15] 일역자cum함께라는 뜻을 지닌 라틴어 전치사이며, co-는 프랑스어에서 함께라는 뜻을 지닌 접두사이다.

[주16]  J. Derrida, Le toucher, op. cit., p.133.〔『触覚前掲225

 

Patrick Llored, «La mort, l’animal et le toucher : Une déconstruction de l’animal heideggerien par Derrida». Reprinted by permission of Patrick Llored

桐谷慧東京大学ストラスブール大学博士課程

Posted by 상겔스 상겔스

자크 데리다 사후 10



 

0. 들어가며 

...................................................................................................................................................................西山雄二


1. 민주주의의 항상성과 일관성 (Constance et consistance de la démocratie) 

....................................................................................................... Jérôme LÈBRE (일역 松田智裕横田祐美子)


2. 데리다와 랑시에르에게서의 민주주의와 타자의 물음 (La démocratie et la question de l’autre chez Derrida et Rancière)

.............................................................................................................................................................. 亀井大輔


3. 들뢰즈와 데리다두 사람의 운동은 같지 않다 (Deleuze et Derrida, ce n’est pas le même mouvement)

.................................................. Jean-Clet MARTIN (일역 大江倫子西山雄二)


4. 최후의 유대인’ : 데리다유대교와 아브라함적인 것 (« Le dernier des juifs » : Derrida, le judaïsme et l’abrahamique)

........................................................................................................................ Gisèle BERKMAN (일역 佐藤香織)


5. 희생된 동물의 두 개의 신체 자크 데리다의 철학에 있어서 동물-정치 개념에 대한 고찰 (Les deux corps sacrifiés de l’animal. Réflexions sur le concept de zoopolitique dans la philosophie de Jacques Derrida)

............................................................................................................................. Patrick LLORED (일역 吉松覚)


6. 자크 데리다동물성의 시학 무인간적인 것에 관해 (Jacques Derrida. Une poétique de l’animalité. Sur l’anhumain)

..................................................................................................................... Gérard BENSUSSAN (일역 桐谷慧)


7. 고양이눈빛그리고 죽음 (The Cat, the Look, and Death)

............................................................................................................................. Darin TENEV (일역 南谷奉良)


8. 대린 테네브고양이눈빛그리고 죽음에 대한 응답

..................................................................................................................................... 大杉重男南谷奉良山本潤


9. 데리다에게서의 증여와 교환 (Gift and Exchange in Derrida (Derridative)

....................................................................................... Darin TENEV (일역 横田祐美子松田智裕亀井大輔)

 

이하 몇 편의 글이 더 있으나 생략.

 

 

首都大学東京人文科学研究科

2015년 6






자크 데리다 사후 10


프랑스어본 :  Deleuze-et-Derrida-ce-nest-pas-le-même-mouvement....pdf


일본어 번역본 : 

20012-511-04 - 들뢰즈와 데리다, 두 사람의 운동은 같은 게 아니다 일역본.pdf



* 한국어 번역본은 조만간...


Posted by 상겔스 상겔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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