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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도와 멜랑콜리

: 데리다의 <정신분석의 철학>[각주:1] (1)

Mourning and Melancholy(1)

: Derrida’s“ Philosophy of Psychoanalysis”(1)

 

모리무라 오사무(森村修)

 

http://repo.lib.hosei.ac.jp/bitstream/10114/10035/1/15_ibunkaronbun_16_morimura.pdf

 

1. 들어가며 : “살아남은 자죽은 자대화

데리다는 (2004108) 죽기 직전인 200325일에 하이델베르크대학에서 한스 게오르크 가다머 기념 강연이라고 명명된 강연을 했다. 그 뒤, 강연은 숫양 : 끊김이 없는 대화 : 두 개의 무한 사이의 시(2003)[이하 숫양으로 약칭]로 정리됐다. 그리고 이 책은 아마 데리다 생전의 마지막 저작이 됐다.

강연에서 데리다는 거의 30년 전에 만났던 가다머와의 추억을 언급하고, 그 이후 줄곧 그와 대화를 계속했다고 말했다. 그러나 데리다 본인의 증언과는 달리, 일반적인 이해로는, 가다머와 데리다의 만남은 실패였다. 예를 들어, 숫양의 번역자 하야시 요시오(林好雄)데리다와 가다머의 첫 만남, 첫 대화는 실패였다고 많은 사람들은 생각했다. 적어도 가다머의 눈에는, 데리다에게는 대화 능력이 결여되어 있으며, 데리다의 사고양식은 대화를 배제하고 있는 것처럼 비쳤다[각주:2]고 적었다. 당사자인 가다머조차 실패였다고 생각한 만남에 대해 데리다는 정반대의 것을 말하고 있는 셈이다.

 

나는 어떤 기묘한, 그리고 강렬한 분유=공유(un étrange et intense partage)가 시작됐다고 확신했다. 모종의 파트너십(un partenariat)이라고 말해도 좋을지 모르겠다. 나는 예감했다. 아마 가다머 등은 내적 대화(dialogue intérieur)’라고 불렀던 것이, 우리 각각의 안에서, 때로는 말 없이, 우리 자신 안에서 직접적으로든 혹은 간접적으로든 계속될 것임을.[각주:3]

 

데리다는 가다머의 생전부터 사후에 걸쳐, 가다머와의 사이에 각각의 안에서”, “때로는 말 없이”, 또한 우리 자신 안에서 직접적으로” “간접적으로” “내적 대화가 계속되고 있다고 한다. 게다가 그 내적 대화에는 멜랑콜리(우수울적함) mélancolie”가 따라다녔다. 가다머에 대한 감사와 애정과 더불어 멜랑콜리가 데리다에게 붙들려[신들려] 있었다고 말해도 좋다. “고마움, 또 이것의 바탕이 된 애정에, 언제부터인지 모르게 멜랑콜리가 섞이고 있다는 것을 나는 막연하게 느끼고 있다. 그것도 훨씬 전부터.”[각주:4] 1981년의 만남 전부터, 데리다는 가다머와의 사이에 멜랑콜리를 느끼고, 그리고 가다머 사후에도, 이로부터 벗어나지 못했다. 그러나 왜 데리다는 그렇게 오랫동안 멜랑콜리에 붙들려 있었을까?

물론 데리다 자신은 멜랑콜리무엇에서 기인하는가를 이해했다. “아마도 이 멜랑콜리는 적어도 내가 그것을 느낄 때마다 그랬듯이, 변함없이 우정(lʼamitié) 속에서, 비통한, 점점 깊어져 가는 확신, 언젠가 죽음이 우리를 갈라놓는다(séparer)는 확신에서 기인했다. 두 명의 친구 중 한쪽은 다른 쪽의 죽음을 보게 된다는 엄연하고 불가피한 (운명에 의해 정해진) (loi inflexible et fatale).”[각주:5] 한쪽의 죽음이 둘을 갈라놓고 살아남은[뒤따르는] le survivant”는 남겨. 확실히 이런 의미에서 친구 가다머의 죽음이 데리다의 멜랑콜리(우울)”의 원인이 된다.

그러나 문제는 멜랑콜리가 한 친구를 먼저 보내는 살아남은 자에게 필연적으로 생긴다는 것이다. 게다가 살아남은 자가 타자(lʼautre)로서의 죽은 자 le mort’와의 사이에서, 끝없는 내적 대화를 계속해야만 한다는 숙명=운명 fatalité’맡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 불가피한 운명은 대화의 당사자가, 죽은 후에도 타자=죽은 자로서 살아남은 자에게 재래하는 revenir’ 것도 지배한다. 더욱이 다른 쪽 당사자의 내부에 들어서고’, ‘살아남은 자죽은 자사이에 대화가 시작되는 것도 피할 수 없다.

그러므로 본고에서는 살아남은 자로서의 데리다가 자신 안에 들어선 타자=죽은 자로서의 가다머와 내적 대화를 하는 것의 의미에 관해 살피고 싶다. 이때 데리다와 가다머 사이의 내적 대화, 데리다에게서의 애도의 작업 Trauerarbeit, travail du deuil, work of mourning’으로 재파악하고, 데리다에게 생긴 멜랑콜리를 정신분석의 지식을 이용해 해석하는 것을 시도한다.[각주:6] 이를 위해 내투사[받아들임/들어섬] introjection체내화体内化 incorporation라는 개념에 주목한다. 이를 위해 본고에서는 살아남은 자=산 자죽은 자내적으로 어떻게 받아들이고[내투사하고]’, 또한 체내화하는가라는 문제를, 데리다의 <정신분석의 철학>으로부터 밝히고, 그와 가다머의 내적 대화를 재파악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 필자는 데리다가 멜랑콜리에 시달리고 있다면, 그것은 죽은 가다머가 데리다 속에 내투사된[받아들여진] introjecté’ 후에도 체내화되지 incorporé’ 않고, 다시 데리다의 내부에 보존되면서 유령=회귀하는 자(재래자) revenant’로서 회귀=재래한다 revenir’는 것을 의미한다고 생각한다. 이를 위해 데리다의 개인적인 정신분석적 체험을 바탕으로, 데리다에게 따라다니는 멜랑콜리애도의 작업사이의 관계를 철학적으로 고찰하는 것이 필요해질 것이다. 이로부터 필자는 데리다와 정신분석 사이의 관계의 일단을 밝힐 수 있다고 본다. 게다가 이를 위해 본고에서는 데리다와 비정통적[각주:7] 정신분석 사이의 관계에 주목하고, 데리다가 그들에게서 어떤 영향을 받았는지를 문제 삼는다. 그리고 본고에 이어지는 일련의 논고에서는, 아브라함(과 토록)-현상학 transphénoménologie”을 배경으로, 데리다가 1980년대 이후 죽 직전까지 자기 나름의 <애도의 철학>을 구축하려고 했다는 것을 밝히고 싶다.[각주:8]

이것의 것으로부터, 우선 본고에서는 다음의 점에 관해 검토한다. 첫째, 데리다가 붙들린[사로잡힌] ‘멜랑콜리, 프로이트의 애도와 멜랑콜리(1915/1917)에 입각해, ‘애도 멜랑콜리사이의 관계로서 다룬다. 프로이트는 애도멜랑콜리의 문제를, ‘정상적인 애도병적인 애도라는 구별에 포갬으로써, 어떤 의미에서 멜랑콜리애도의 작업의 실패로 파악한다. 그러나 프로이트에 대해 데리다는 애도의 작업의 실패에 타자의 타자성(altérité)을 해치지 않는 윤리가 있다고 생각한다.

둘째, 데리다가 의거하는 비정통적인정신분석에 속하는 니콜라 아브라함과 마리아 토록의 논고로부터, 프로이트의 애도멜랑콜리의 문제는, ‘애도혹은 멜랑콜리라는 문제로서 재파악되고, 프로이트의 애도의 작업이 비판 받은 것을 다룬다. 그때 받아들임[내투사]’체내화사이의 해석의 차이가 중요해진다.

셋째, 데리다의 FORS[수많은 심판/를 제외하고] 니콜라 아브라함과 마리아 토록의 모난 말(les mots anglé)[각주:9](늑대 인간의 언어 표본 : 매장 어법의 정신 분석(1976)[각주:10]의 서문][언어 표본으로 약칭]에서, 더 나아가 양자의 받아들임[내투사]’체내화개념을 검토한다. 이로부터 두 명의 정신분석적 견해가 데리다에게 끼친 영향과, 데리다와 두 명의 사상적 차이를 분명히 한다. 이때 주의해야 할 것은, 데리다가 아브라함과 토록의 정신 분석의 갱신 renewals of psychoanalysis”[각주:11]에 공감을 드러내고, 그들의 정신분석적 사고를 자신의 철학에 다양한 형태로 반영시키고 있는 것이다.

이상으로부터, 데리다와 가다머의 내적 대화를 정신분석적으로 분명히 함으로써, 데리다의 멜랑콜리의 의미를 찾는 것이 본고의 표적이다. 다만 데리다에 의한 받아들임[내투사]’체내화의 문제는, 다양한 문제를 포함해, 데리다 철학을 관통하고 있는 주제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본고만으로는 논할 수 없는 문제가 많이 있음을 미리 지적해두고 싶다.

 

2. 애도와 멜랑콜리 : 프로이트의 애도의 작업

멜랑콜리는 가다머와 직접 만나기 전부터, 가다머가 곧 죽을 것이라는 예감과 함께, 가다머에 대한 감사와 애정과 더불어, 데리다를 지배했다. “살아남은 자는 타자를 자신 안에 보존하고 있다(garder lʼautre en soi)고 생각하고 있으나, 그는 이미 타자의 생전부터 그런 것이었던 것이며, 앞으로는 자신의 내부에서 타자에게 말해지는 것이다.”[각주:12] 그렇다면 어떻게 해서 살아남은데리다는 자신 안에서, 가다머가 죽기 전부터 그를 보존하고(=지키고돌보고 garder)”, 그에게 말을 건네고, 두 사람 사이의 대화를 계속했던 것일까? 생전부터 사후에 이르기까지, 가다머를 자신 안에 보존할, 데리다에게서, 가다머의 실제의 생사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가다머가 죽는다는 것은, 이미 데리다 안에서는 확신되고 있는 것이며, 어느 한쪽이 먼저 죽는 것도 또한, 이미 에 의해 정해졌다. 그렇다면, 데리다가 품은 멜랑콜리는 가다머가 말하는 타자의 죽음’=‘상실을 선취한 것일 뿐 아니라, 자신의 내부에 가다머라는 타자애도를 이미 발생시키고 있는 것 아닌가. 그것도 나중에 보듯이, 데리다가 빠진 애도, ‘멜랑콜리를 품고 는 심상치 않은 애도라는 것에 주의하자.

다시 지적할 것도 없이, 데리다가 애도에 대해 말하는 것도, 프로이트의 정신분석을 배경으로 했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래서 본절에서는 우선, ‘애도가 실제로 어떤 문맥에서 프로이트 정신분석에 등장했는지 돌이켜보고 싶다. 프로이트는 1915(1917년 개정)애도와 멜랑콜리라는 논문에서, 애도와 멜랑콜리를 대비시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멜랑콜리와 애도를 나란히 놓고 고찰하는 것은, 이 두 가지의 상황의 전체상으로부터 정당화된다고 생각한다. 또한 인생경험에서 유래하는 유인도, 적어도 분명히 그것과 분간할 수 있는 경우에는, 일치한다. 애도는 으레 사랑받은 인물이나 그런 인물의 위치로 치환된 조국, 자유, 이상 등의 추상물을 상실한 것에 대한 반응이다. 마찬가지의 영향 아래서 적지 않은 사람들이 애도 대신에 멜랑콜리를 보이지만, 우리는 그것을 보면, 그 사람들이 병적인 [素因]을 갖고 있는 게 아니냐는 의심을 갖는다.[각주:13]

 

프로이트에 따르면, 애도는 사랑받은 사람을 잃었기 때문에 생기는 정상적인 반응인 반면, 멜랑콜리는 병적인 요인을 갖고 있는 것 아니냐는 의심을 받은 사람들에게 애도 대신으로 생긴다. 게다가 애도와 멜랑콜리의 차이는, 프로이트에 따르면, “자존감의 장애라는 한 가지 점뿐이다.[각주:14] 애도에는 자존감의 장애가 존재하지 않은 반면, 멜랑콜리에는 현격하게 자존감의 장애가 보인다. 프로이트는 멜랑콜리 환자에게는 애도의 경우에는 볼 수 없는 특징으로서 상궤를 벗어난 자아감정의 저하[끌어내림, 격하], 훌륭한 자아의 빈곤화[각주:15]가 있다고 한다. “애도의 경우에는 세계가 가난하고 공허해지지만, 멜랑콜리의 경우에는 자아 자신이 공허해진다.” 그 결과, 환자는 자신의 자아가 아무런 가치도 없고, 실행력도 결여하고 있으며, 도덕적으로도 책임져야 할 존재로서, 타인 앞에서 스스로를 못살게 들볶는다.

참고로 프로이트에 따르면, 자기 비난은, 본래라면, 상실한 대상으로 향해질 터인 비난이, 그 대상에서 벗어나, 멜랑콜리 환자 본인으로 전환된 것에서 생긴다. , “대상 상실이 자아 상실로 전환되고, 자아와 사랑 받은 인물 사이의 갈등은, 자아비판과 동일화에 의해 변용된 자아 사이의 내적 갈등으로 전환된다[각주:16]는 것이다. 그 과정은 다음과 같은 경위를 거친다. 우선 대상선택이라는 특정한 인물[사랑 받은 대상]에 대한 리비도의 구속이 존재한다. 다음으로, 그 사랑 받는 대상으로부터 현실의 모멸이나 실망을 겪고[각주:17] 그 영향에 의해, 대상관계가 흔들린다. 그러나 그 후, 리비도를 해당 대상으로부터 옮겨서 새로운 대상으로 향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자아 안으로 철저화시켜 버린다.

게다가 자아로 돌아간 리비도는 단념된 대상[사랑 받은 대상]에 대한 자아의 동일화를 위해 이용되어 버린다. 그 결과, 대상이 자아로 동일화됨으로써, “자아는 이제 마치 하나의 대상처럼, 버림받은 대상처럼[각주:18] 되어버린다. , 비난해야 할 대상을 자아가 아니라 타자로 삼음으로써, 자기비난을 피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멜랑콜리 환자는 비난의 화살을 자신에게 돌리고, 더욱이 타자와 자기를 동일화함으로써, 타자에 대한 비난을 스스로 떠맡는 것이다.

이런 과정에서 밝혀진 것은, 멜랑콜리 환자에게 전형적인 자기비난이나 자존감의 격하는, 당초 존재했던 사랑 받은 대상에 대한 비난이며, 모멸감정이며, 실망에서 유래한다는 것이다. 사랑 받은 대상과 자아의 동일화에 의해, 본래라면 사랑 받는 대상을 향했을 터인 리비도는, 대상을 상실함으로써, 자아로 되돌려진다. 그 결과, 상실한 대상으로 동일화된 자아도 또한 스스로를 상실한다는 경과를 거친다. 이 과정이 일어나는 것은, 원래 자아에는 대상에 대한 나르시스적 동일화가 작동하고 있기 때문에 다름 아니다.

프로이트는 애도와 멜랑콜리와 동시기에 작성된 충동과 충동의 운명(1915)에서, 나르시시즘의 특징으로서,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것 sich selbst lieben”이라고 말했다. , 자아는 원래 자기()애적(autoerotisch)이며, 대상을 향한 사랑도 또한 결과적으로는 자기()애의 연장일 뿐이다. 주어진 대상도 쾌락의 원천이라면 자아 속에 받아들이지만, 불쾌를 야기하는 대상이라면 자아로부터 밀어내버리는 것이다.[각주:19] 더욱이 라플랑슈/폰탈리스에 따르면, 프로이트에게서는 구순적 체내화 incorporation orale”라는 관념이 1912년부터 1915년에 걸쳐 형성됐다(토템과 터부, 애도와 멜랑콜리).[각주:20]

그리고 애도와 멜랑콜리에서 프로이트는 구순적 체내화동일화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동일화(Identifizierung)는 대상 선택의 준비 단계(Vorstufe der Objektwahl)이며, 자아가 양가적(ambivalent)인 표현에 의해 하나의 대상을 부각시키는 최초의 방식[각주:21]이다. 또한 그는 계속해서, “자아는 이 [상실한] 대상과 일체화(=대상을 체내화 einverleiben)하고 싶어 하고, 더욱이 리비도 발전의 구순적 혹은 식인적인 단계(orale oder kannibalische Phase)에 상응하며, [탐하며] 먹는다(Fressen)는 방식에 의해 일체화(=체내화)하고 싶어 한다[각주:22]고 한다. 프로이트에 따르면 자아는 상실한 대상과 일체화하고 싶다는 리비도를 갖고, 사랑 받는 동시에 미워하는 대상을 구순을 통해 일체화=체내화하고 싶어 하는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프로이트에게서의 구순적식인적 동일화가 구순을 통해서 [상실한] 타자를 체내화하기 위해 먹는다는 것이다.[각주:23]

그렇다면 멜랑콜리붙들린[신들린] 데리다는, 프로이트가 말하듯이, 사랑하는 동시에 미워해야 할 대상으로서의 가다머를 체내화하기 위해서 먹은것일까? 가다머와 일체화[가다머를 체내화]함으로써, 가다머를 자신의 자아와 동일화한 것일까? 원래 데리다는 가다머를 먹는것을 통해 실제로 체내화할 수 있었을까?

그러나 데리다의 증언을 믿는다면, 그는 이미, 가다머를 만나기 이전에, 하물며 그를 잃기 이전부터, “멜랑콜리붙들리고[신들리고], 도래할 가다머의 죽음에 의한 상실을 살았다. 만일 그렇다면, 데리다는 애도를 선취하고, ‘멜랑콜리조차 선취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보통의 경우, 우리는 사랑 받은 대상을 상실함으로써, 애도의 비탄 속에서 망연자실한 채로 살아간다. 사랑하는 대상을 상실했을 때, 우리는 외부세계에 대한 관심을 잃어버린다. 프로이트가 들고 있는 예에 따르면, 애도의 상태에 있는 사람들은, 고인을 떠올리게 하지 않는 한, 외적인 세계에 대한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 또한, 애도되고 있는 인물의 대체물을 얻는 것으로 이어지기 위해서, 새로운 애정의 대상을 찾아내는 것도 하지 않는다. 그리고 더 나아가, 고인의 추억과 결부되지 않은 사건에는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 라플랑슈/폰탈리스는 정신분석용어사전(1967/1976)에서, 애도의 상태에 있는 사람들에 대해, “주체의 모든 에너지(tout lʼénergie du sujet)는 고통과 회상에 의해, 완전히 독차지되고(accaparée) 있는 것처럼 보인다[각주:24]고 말한다. 사랑받는 대상을 상실한 사람들은 애도의 슬픔[비탄]을 경험하고, 일상성으로부터 멀어지며, 외부세계로부터 침잠한다.

물론 이런 애도의 상태는 특단의 병적인 상태가 아니다. 우리는 애도의 슬픔에 잠긴 사람들에 대해, 나름대로의 시간과 장소를 제공하는 것을 마다하지 않는다. 거꾸로 말하면, 우리는 일정 기간을 지나고 나면, 원래의 생활로 복귀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비록 그것이 고통으로 가득 차 있고, 그 기간이 길게 느껴지는 것도 있지만, 애도가 정상적인 심리상태인 한에서, 반드시 끝이 찾아온다. , “애도의 작업의 완료이다. 그러나 일상성으로 복귀하고, 외부세계를 되찾는 것은, 상실 체험을 극복할 수밖에 없는 이상, 가혹하다는 것은 말할 것도 없다.

프로이트는 이런 일상성의 복귀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현실음미(Realitätsprüfung)가 사랑받는 대상은 더 이상 현존(bestehen)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이고, 더 이상 이런 대상과의 연결로부터 모든 리비도를 회수하라는 권고를 공표한다.”[각주:25] 그러나 그때까지 애도에 무릎 꿇던[죽음을 슬퍼하던] 자아는, 쉽게 현실이 들이대는 권고에 동의하지 않는다. 사랑 받는 대상이 더 이상 현존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면서도, 좀체 자아는 추억에서 벗어날 수 없다. 그러나 점차 한걸음씩, 냉철한 현실이 우리에게 닥쳐온다.

 

리비도가 잃어버린 대상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상기나 기대의 상황의 하나하나에 현실이 개입하고, 이것들 모두에 대상은 더 이상 존재(existieren)하지 않는다는 평결을 철저히 주지시킨다. 그렇게 하면 자아는 이른바 너는 이 운명을 함께 하는 것을 원하느냐라는 질문에 직면하게 되고, 그리고 살아 있는 것으로부터 받아들이는 나르시스적인 만족의 총계를 고려하여, 무로 돌아간 대상에 대해 스스로의 구속을 해제한다는 결론을 감수하여 받아들인다.[각주:26]

 

프로이트의 따르면, “애도의 작업이란 정상적인 일상생활로 돌아가기 위해, 자아가 엄청난 노력과 노고를 가한 끝에, 일상성으로 복귀함으로써 벗어날 수 있는 고역=작업 travail, Arbeit, work’에 다름 아니다. 그러나 그것은 살아남은 자에게 애도의 작업은 엄청난 고통을 수반하는 고역=작업이지만, 결국 일상성으로 복귀한다는 성공으로, ‘고역=작업은 완료된다. 그렇기에 라플랑슈/폰탈리스는 애도의 작업애착의 대상을 상실한 결과 일어나는 정신 내부의 과정. 인간은 그 과정을 통해 점차 그 애착 대상으로부터 벗어나는 데 성공한다(réussir)”[각주:27]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라플랑슈&폰탈리스는 다니엘 라가슈의 말을 인용해, ‘애도의 작업이란 죽은 자를 죽이는 tuer le mort”[각주:28] 것이라고도 말했다. 이 말은 매우 시사적이다. 우리는 현실에서 사랑하는 대상을 상실할 뿐 아니라, ‘애도의 작업을 완료시킴으로써, 한번 상실한 대상을 또 다시 잃는다. 아니 오히려, 우리가 일상성으로 복귀하기 위해서는, ‘애도는 끝나지 않으면 안 된다. 이를 위해서는 자신의 내부의 사랑하는 대상의 추억이나 기억을 다시 한 번 잃고, 더 나아가 사랑스런 대상을 재차 죽일필요가 있다. 그것이 프로이트의 동일화라고 해도 좋다. 데리다는 숫양에서 멜랑콜리를 언급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프로이트에 따르면, 애도는, 자기 안에 타자를 짊어지는 것에 있다. 더 이상 세계는 없다. 그것은 타자의 죽음에 있어서의 타자를 위한 세계의 종언이며, 나는 이 세계의 종언을 내 안에 맞아들인다. 나는 타자와 그의 세계를, 내 안에 있는 세계를 짊어져야만 한다. , 받아들임[내투사](introjection), 기억의 내부화(intériorisation du souvenir (Erinnerung)), 이상화(idéalisation)이다. 멜랑콜리가 애도의 실패와 병리학에 응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내가 타자에게 충실하기 위해서, 타자의 단독=특이한 이타성(altérité)을 존중하기 위해, 내 안에 타자를 짊어져야만 한다(그것은 윤리 자체이다)고 하더라도, 그래도 여전히 모종의 멜랑콜리는, 정상적인 애도에 항의할 것임에 틀림없다. 이 멜랑콜리가 이상화적인 받아들임[내투사]을 감수할 리가 없다. 프로이트가, 마치 정상성의 규범을 확증하기 위해서도 있는 것처럼, 조용한 확신을 갖고 얘기하는 것에 대해서 멜랑콜리는 격분할 것임에 틀림없다. ‘규범이란 건망증의 양심에 다름 아니다. 그 덕분에 우리는 타자를 자기의 내부에 (au-dedans de soi) 자기로서(comme soi) 보존(=보살핌 garder)하는 것, 그것은 이미 타자를 잊는다고 하는 것임을 잊을 수 있다. 망각이 거기서 시작되는 것이다. 그래서 멜랑콜리가 필요한 것이다. 이 장소에서, 모종의 병리학의 괴로움이, (loi)을 구술=명령(dicter)하는 그리고 시(le poème)가 타자에게 바쳐지는(dédier) 것이다.[각주:29]

 

데리다의 말을 요약하지 않고 다소 길게 인용한 것도, 데리다의 가다머 기념 강연의 말투의 흐름을 해치기 싫기 때문만은 아니다. 어떤 긴장감을 동반해 이야기되는 데리다의 말 속에서, 자신의 멜랑콜리를 떠맡는 데리다의 윤리를 읽어낼 수 있기 때문이다. 더욱이 여기서 문제는 데리다가 언급하는 중요한 지적이다. 그것은 다음의 네 가지 점으로 모아질 수 있을 것이다.

첫째, 자기의 안에 타자를 짊어진다는 것은 타자를 위한 세계의 종언을 의미한다는 것. 둘째, 자기가 타자와 그의 세계를 짊어진다는 것은 모종의 정신분석적인 받아들임[내투사]’, ‘기억의 내부화’, ‘이상화라는 것. 셋째, 멜랑콜리는 애도의 실패와 병리학에 응한다는 것. 그리고 넷째, 병리학의 괴로움(멜랑콜리의 괴로움)은 법을 구술한다는 것. 즉 시를 타자에게 바친다는 것. 이런 네 가지 점이다.

이런 지적들이 중요한 것은, 이미 프로이트가 애도를 정상적인 애도병적인 애도의 두 종류로 나누고, 후자가 멜랑콜리에 대응한다고 말했던 것과 관련된다. , 프로이트에 반하여 데리다는 정상적인(normal) 애도가 타자를 자기의 내부에 자기로서 보존하는(=돌보는)” 것이, 이미 타자를 망각하는 것조차도 망각하는 것으로 연결된다고 말했다. 데리다에 따르면, 친구를 두번 죽이는것을 하지 않고, “살아남기위해서는, 프로이트의 동일화를 회피하고. 정상적인 일상성으로 복귀하는 애도의 작업을 거부한다는 것이다. 그 결과, 데리다는 적극적으로 병적인 애도로서의 멜랑콜리를 떠맡을 수밖에 없다. 데리다가 타자(가다머)에게 충실하기 위해서는, 그리고 타자(가다머)의 단독=특이한 이타성을 존중하기 위해서는, 데리다는 자신의 안에 타자(가다머)짊어지게 해야만 한다. 그것이 가다머에 대한 데리다의 윤리이다.

데리다가 말하는 윤리란 자신의 안에 받아들여진[내투사된] 타자가 자아와 동일화함으로써 타자의 단독적=특이적인 이타성을 상실하고, 타자를 먹음으로써 체내화하고, 자아가 되는(=사유화되는) 것을 피하는 것이다. ‘정상적인 애도에서는, (자아)의 내부에서, 타자가 타자라는 것(=타자의 이타성)이 잊혀질 뿐 아니라, 잊혀진 것조차도 잊혀진다는 것이 생긴다. 그것이 바로 정상적인 애도이며, 데리다는 그것을 건망증의 양심이라고 부른다. 반면 데리다 자신은, 사랑 받는 타자’(가다머)를 망각의 늪에 가라앉히지 않기 위해, 가다머의 이타성을 상실하지 않기 위해, 그를 자신의 내부에 보존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리고 결코 스스로의 자아에 동일화시키지 않고, ‘체내화도 시키지 않고, ‘’=자아의 내부에서 상실시키지 않기 위해, 데리다는 멜랑콜리를 견뎌 내야만 한다(“멜랑콜리가 필요한 것이다”). , 자아와 타자 사이에 윤리가 성립하기 위해서는, 타자가 자신의 내부에 존재하지 않으면 안 된다. 자아와 동일화된 타자(=자아) 사이에는, 더 이상 윤리는 성립하지 않는다.

그러나 물론, 그것은 당초 프로이트가 생각한 애도의 작업이 아니다. 정신과의사이기도 한 프로이트에게서는 사랑 받은 대상을 상실한 자아가 일상성으로 복귀하는 것, 애도의 작업이 완료되는 것이 치료의 종언을 의미했다. 그러나 데리다는 굳이 애도의 작업의 미완료, 이른바 애도의 작업’의 실패를 요구한다. 그것은 멜랑콜리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이유는 무엇인가?

다음 절에서는 데리다가 굳이 타자의 이타성을 상실하지 않기 위해서, ‘멜랑콜리를 견뎌 내여야만 한다고 생각한 배경에 대해 생각해보자.

 

3. 받아들임[내투사]와 체내화(1) : 토록의 문제제기

멜랑콜리를 윤리적으로 떠맡는 데리다는 애도와 멜랑콜리라는 대비, 혹은 정상적인 애도 병적인 애도라는 대비를 굳이 거부한다. 그것은 필연적으로, 데리다에게 애도 혹은 멜랑콜리라는 양자택일을 강요하게 된다. 그렇다면 데리다는 그런 선택을 왜 자신에게 강요하는가?

여기서 중요한 것은, 데리다의 선택을 강요하는 배경이 있다는 것이다. 데리다는 만년의 숫양에 이르는 30년 가까이 전에, “애도 혹은 멜랑콜리라는 생각을 자신의 철학 속에 받아들였다[내투사했다].” 그것이 아브라함 & 토록의 비정통적인(unorthodox)” 정신분석의 사상[각주:30]이다. 그 하나의 방증으로, 데리다가 아브라함과 토록의 작업에 대해 두 개의 서문을 썼다는 것을 꼽을 수 있을 것이다. 하나는 두 사람의 공저인 늑대인간의 언어표본 : 매장어법의 정신분석(1976)[각주:31]의 서문 FORS이며, 다른 하나는 아브라함의 단독 논문 표피와 핵(1979)에 덧붙여진 영어판 서문 : 정신분석 MePsychoanalysis(1979)[각주:32]이다.

영어판 서문은 잡지의 특집 프로이트의 상징학(비유적 어법/토폴로지)”을 바탕으로 하여, 아브라함의 상징론을 데리다 나름대로 해석하려고 한 것이다. 그것은 아브라함의 현상학 연구를 토대로 한 새로운 정신분석의 입장에서의 프로이트 비판에 대해, 데리다로부터의 평가를 포갠다는 복잡한 구조를 갖고 있다.

그에 반해 FORS는 데리다가 아브라함 & 토록의 정신분석 사상을 검토하면서 받아들임[내투사]’체내화의 개념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는 글이다. 그것은 앞 절에서 언급한 데리다의 지적의 두 번째 점, ‘받아들임[내투사]’, ‘기억의 내부화’, ‘이상화라는 정신분석 개념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다만 데리다는 FORS에서 아브라함 & 토록, 특히 토록이 받아들임[내투사]’체내화를 명확하게 구별하는 반면, 양자는 근본적으로 분리할 수 없는 것이 아닌가라고 생각하고, 양자의 사상에 대해 일정한 유보를 붙이고 있다.[각주:33]

그래서 본 절에서는 아브라함 & 토록의 정신분석 사상을 검토함으로써 데리다의 멜랑콜리의 기원을 탐구하는 것을 시도하자. 이, 필자가 주목하는 것은, ‘받아들임[내투사]’체내화사이의 차이의 문제이다. 데리다는 FORS에서 두 명의 도전을, ‘받아들임[내투사]’체내화라는 두 개의 개념의 차이와 동일성 사이의 경계설정에 위치시키고자 한다. 데리다는 토록의 논문 애도의 병과 묘한 시체의 판타시즘(1968)[각주:34][이하 애도의 병으로 약칭]을 언급하면서, 토록의 받아들임[내투사/체내화]이라는 개념은, 샹들 페렌치에 의해 1909년에 정신분석에 도입되고, 이후 프로이트나 칼 아브라함, 멜라니 클라인에게로 계승되는 중요한 개념이다.

그러나 토록에 따르면, 당초 페렌치에 의해 발견된 받아들임[내투사]’ 개념은, 프로이트를 시작으로, 정신분석의사들 안에에서 다양하게 의미가 바뀐다. 그래서 토록은 의미변용을 겪은 받아들임[내투사]’ 개념을 페렌치가 사용한 엄밀한 개념으로 되돌림으로써, ‘체내화와 명확하게 구별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녀에 따르면, 페렌치에 입각함으로써야 비로소, ‘받아들임[내투사]’ 개념은 유효성을 획득하며, 임상적 사실을 분명히 한다.[각주:35] 우선, 토록은, 프로이트의 리비도 이론이 풍부해질수록, 동일화에 대한 견해가 심화되고 있다고 말한다. 프로이트의 체내화에 대해 토록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대상 상실의 트라우마는 하나의 반응을 초래한다. , <자아 Moi>로의 체내화(incorporation)이다. <자아>는 체내화된 대상에 부분적으로 동일화(sʼidentifier)한다. 이 대상은 경제적 균형을 회복할(rééquilibrer lʼéconomie) 때까지, 또한을 재분배할 때까지 모종의 시간적 지연[연기](une certaine temporisation)을 가능케 한다. 죽은 자를 청산하고, ‘그는 더 이상 없다고 결정적으로 선언할 수 없기에, 애도에 잠긴 자가 자기 자신에 대해 죽은 자가 되며, 그렇게 함으로써, 서서히 한 걸음 한 걸음 절단의 영향을 소화해가는 시간을 벌 것이다.[각주:36]

 

이 대목에서 토록은 흥미로운 것을 말했다. 프로이트에게 애도의 작업은 일상성으로의 복귀를 위해 자아가 한 걸음 한 걸음 현실로 복귀해가는 고통으로 가득 찬 행로를 의미했다. 상실한 (혹은 이미 죽은) 대상과 <자아>가 부분적으로 동일화하기 위해서, 상실한 대상으로부터 리비도를 회수하고, ‘현실의 명령을 하나하나 수행하는 고역이 정상적인 애도의 과정이다.

이에 반해 토록이 기술하는 것은, 부분적으로 동일화된 자아가, ‘죽은 자로서, 자신과 사랑 하는 상실 대상 사이의 절단을 한 걸음 한 걸음 소화하고, 시간을 번다는 것이다. 자아의 입장에 서서 애도의 작업을 기술하는 과정과, 상실 대상으로서의 죽은 자에 동일화하고, 죽은 자가 된 자아의 입장에서 기술하는 토록의 관점의 차이에 주의해야 할 것이다. 더욱이 토록은 프로이트의 체내화 Einverleiben’ 또는 “[게걸스럽게] 먹는 것 Fressen”은 페렌치의 의미에서의 받아들임[내투사] Introjektion’과는 다르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굳이 토록이 받아들임[내투사]’체내화를 차이화하는 지적을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받아들임[내투사]’ 개념의 아버지가 페렌체인 것은 프로이트를 시작으로, 칼 아브라함, 멜라니 클라인 등 많은 동시대의 정신분석가가 인정하는 데도 불구하고, 그 개념 내용이 완전히 다르게 유포되고 있다는 것을 비판하려는 의도가 있다. 동시에 그녀는 페렌치의 업적이 프로이트 등의 정통적 정신분석으로부터 정당하게 평가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정신분석을 일신시킬 가능성도 내포한다는 것을 지적하고 싶기 때문이다.

토록에 따르면, 페렌치에서 시작되는 받아들임[내투사]’체내화와는 관계없거나, 혹은 설사 관계가 있다손 치더라도, 정통적인 정신분석의 이해와는 다르다. 토록은 논문 애도의 병에서 받아들임[내투사]과 체내화 사이에 생겨난 잘못된 동의성(同義性)을 제거하고, 의미론적으로 고유한 그것들의 특종성에 엄밀한 방식으로 천착하고 싶다고 생각한다[각주:37]고 말한다. 그녀가 받아들임[내투사]’체내화를 엄밀하게 나눔으로써 애도’[정상적인 애도]멜랑콜리’[병적인 애도]의 구별에 의해 어떤 점이 드러나게 되는가?

 

4. ‘받아들임[내투사]’체내화’ (2) : 페렌치를 읽는 토록과 데리다

우선 일반적으로 받아들임[내투사]’이란 어떤 의미를 갖고 있는지를, 라플랑슈/폰탈리스의 정신분석 용어사전에서 확인해두자. 그들은 받아들임[내투사]’ 개념이 페렌치에 의해 정신분석에 도입됐다고 언급하면서, 페렌치의 정의가 애매하다는 것도 지적하고 있다. 그들의 기술에서 중요한 것은 받아들임[내투사]의 성질은 더욱이 입에 의한 체내화와의 관련성에 의해서도 정한다고 말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 두 개의 술어는, 프로이트에 의해서도 많은 연구자에 의해서도 자주 동의어로서 사용되고 있다고 말한 뒤, 그들은 프로이트의 충동과 충동의 운명을 언급하고, 프로이트가 페렌치에게서는 애매해진 받아들임[내투사] introjection’투사 projection’의 대립을 명백하게 했다고 한다. 라플랑슈/폰탈리스에 따르면, 프로이트는 주체(자아)-대상(외적 세계)의 대립(lʼopposition sujet (moi) - objet (monde extérieur))의 발생과 쾌-불쾌의 대립(lʼopposition plaisir-déplaisir)의 발생과 상관관계에 있다고 생각하고, 쾌락 자아는 쾌락을 가져다주는 것을 모두 받아들이고[내투사하고]’, 불쾌를 가져다주는 것을 모두 바깥으로 투사 une projection au-dehors’함으로써 형성된다고 한다.[각주:38] 계속해서 그들은 프로이트의 부정(1925)에서 다음 대목을 인용한다. “가장 오래된, 즉 구순적인 충동이 꿈틀거리는 언어(In der Sprache derältesten, oralen Triebregungen)로 말한다면, 그것을 나는 먹고(essen) 싶거나, 혹은 토해내고(ausspucken) 싶거나 하는 것이다. 더 번역해서 말한다면, 그것을 나는 자신 속에 받아들이고[내투사하고](in mich einführen) 싶은가, 혹은 자신 속으로부터 폐제하고(aus mir ausschließen) 싶은가이다. 좋은 것은 모두 받아들이고[내투사하고](alles Gute sich introjizieren), 나쁜 것은 모두 내던지려고(alles Schlechte von sich werfen) 한다.”[각주:39]

이상에서 알 수 있듯이, 프로이트 혹은 그를 전거로 삼은 라플랑슈/폰탈리스는, ‘받아들임[내투사]’투사를 쌍을 이루는 개념으로 다루고, ‘먹는다 essen/먹어치운다 fressen’내뱉는다의 대비, ‘불쾌의 대비로서 묘사하고 있다. 그래도, 라플랑슈/폰탈리스는 체내화받아들임[내투사]’의 구별은 지켜져야 할 것이라고 말하고, “체내화라는 과정은 분명히 신체의 안팎과 관련되어 있다. 받아들임[내투사]이라는 술어의 의미는, 그것보다 넓다. 문제가 되는 것은, 더 이상 신체의 내부뿐 아니라, 심적 장치(lʼappareil psychique)나 심급(une instance)의 내부이다[각주:40]라고 한다. 그래서 받아들임[내투사]’의 정의로서 받아들임[내투사]은 그 신체적 모형(prototype corporel)인 체내화에 가깝지만, 반드시 신체적 경계를 문제 삼는 것은 아니다(자아로의 받아들임[내투사], 자아이상으로의 받아들임[내투사] )”[각주:41]이라고 규정한다.

그러나 그들은 계속해서 받아들임[내투사]은 동일화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각주:42]고 말한다. 앞서 봤듯이, 프로이트에게서 체내화동일화와 거의 같은 뜻으로 사용됐다. 구순을 통해서, 잃어버린 대상을 먹음으로써 대상과 동일화하는 것이야말로 체내화의 의미였다. 그렇다면 받아들임[내투사]’동일화와 밀접하게 관련시키는 라플랑슈/폰탈리스의 정의는, ‘받아들임[내투사]’체내화를 한없이 가깝게 하는 것이 되지 않겠는가. 거꾸로, 그들이 규정하듯이, 신체의 안팎’, 신체적 경계에서 양자를 분리한다는 것만으로는, 양자를 구별할 수 없는 것이 아닌가.

토록은 받아들임[내투사]’이라는 개념이 덫으로 가득 찬 관념 영역이라고 말하고, 그 이해의 어려움을 언급하고 있다. 그녀는 우선 페렌치의 원초적 의미로 돌아감으로써, ‘받아들임[내투사]’에 들러붙은 오해와 몰이해의 근거를 확인하고자 한다. 그녀는 페렌치의 받아들임[내투사]의 개념 규정에 대해 Zur Begriffsbestimmung der Introjektion(1912)에서 그의 받아들임[내투사]’ 개념을 끄집어낸다. 페렌치는 거기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는 받아들임[내투사], 외적 세계의 대상들을 자아 안으로 넣음(einbeziehen)으로써, 원래 자기()애적인 관심의 확장(Ausdehnung des ursprünglich autoerotischen Interesses)으로서 기술했다. 나는 이 안에 넣어진다 Einbeziehen’에 주안점을 뒀으나, 그것에 의해 나는 모든 대상애(jede Objektliebe)(혹은 전이 Übertragung), 정상적인 사람에 있어서도, 신경증 환자에 있어서도 (당연히 그 능력이 있는 한에서는 편집증 환자에 있어서도), 자아의 확대로서, 즉 받아들임[내투사]으로서 이해하고 싶은 것이다. 결국 인간이란 바로 그저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것(sichselbst lieben)밖에는 할 수 없다. 인간이 어떤 대상을 사랑할 때, 그 경우 인간은 어떤 대상을 자신의 자아 안에 수용한다(aufnehmen). 사랑 받은 대상에 그렇게 고착(Anwachsen)하는 것, 사랑 받은 대상을 그렇게 안에 넣는(Einbeziehen) 것을, 나는 받아들임[내투사]이라고 명명한 것이다. 나는 대상에 대한 모든 전이, 모든 대상애의 메커니즘을, 받아들임[내투사]으로서, 자아 확대(Ichausweitung)로서 표상(sich vorstellen)한다. / 그러나 신경증 환자의 과도한 전이 경향을, 나는 이 메커니즘의 무의식적인 과대로서, 절도를 잃은 받아들임[내투사]으로서 기술했다.[각주:43]

 

토록은 위와 같은 페렌치의 개념 정의로부터 받아들임[내투사]’에 대해 다음의 세 가지 점을 지적한다. “(1) 자기()애적 관심의 확장(extension des intérêts auto-érotiques). (2) 억압의 해제에 의한 <자아>의 확대(élargissement du Moi) (3)대상을 <자아>에 봉입(inclusion de lʼobjet dans le Moi)하는 것, 그리고 그것에 의해 원초적인 자기애를 대상으로 향하게 하는 것 objectalisation de lʼauto-érotisme’”[각주:44]이다. 그녀에 따르면, 페렌치의 받아들임[내투사]’의 개념이 이 세 가지 점을 포함하는 반면, 프로이트 등 그의 동시대인들은, ‘받아들임[내투사]’체내화에 의한 대상의 점유 la prise de possession de lʼobjet par incorporation’라는 표층적(superficiel) 측면으로 제한했다. 토록에 의하면, 거기로부터, ‘받아들임[내투사]’체내화의 구별이 애매해질 뿐 아니라, ‘받아들임[내투사]’ 자체에 무시할 수 없는 용법의 차이가 발생한다.[각주:45]

그래서 토록은, 페렌치의 받아들임[내투사]’체내화의 구별을 자세하게 검토하게 된다. 페렌치=토록에 있어서 받아들임[내투사]’이란 자기()애의 관심을 확장시키고, 더욱이 자아를 증대시킴으로써, “사랑 받은 대상을 자아의 안에 넣는것을 의미한다. 결과적으로 사랑 받은 대상을 사랑한다는 대상애전이는 자아가 증대한 결과로서, 대상을 자아 안에 받아들이는[내투사하는] 것에 의한 자기()애의 확장일 뿐이다. 그런 고로, 페렌치가 말하듯이, “인간은 단지 자기 자신을 사랑할 수 있을 뿐이다.” 거꾸로 말하면, 사랑 받은 대상은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자기애대상으로 향하게 하는 것 objectalisation’에 의해서 사랑할 수밖에 없다. 적어도 1912년 당시의 페렌치도, 프로이트의 나르시스적 동일화를 배경으로, 자기()애적인 나르시시즘의 특징을 기본으로 사고하고 있다고 해도 좋다.[각주:46]

그래도 토록이 페렌치를 읽으면서 강조하는 것은, ‘받아들임[내투사]’은 사랑의 대상의 현실적 상실을 반드시 필요로 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프로이트가 애도와 멜랑콜리에서 지적한 체내화에 의한 동일화, 어디까지나 사랑 받은 대상의 현실적 상실을 전제한다. 그에 반해 페렌치=토록은 받아들임[내투사]’은 상실된 대상을 받아들임[내투사]’는 것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자아를 확대하고, 풍부하게 함으로써 욕동과 그 변전의 총체받아들임[내투사것이며, 대상은 그 계기에 불과하다.[각주:47] 이 점에 대해 데리다는, 토록에 의한 페렌치의 인용을 이용하면서, “마리아 토록은 받아들임[내투사]이 단순히 대상뿐 아니라, 그것에 관련된 제반 욕동도 포함한다(봉입한다)고 덧붙인다[각주:48]고 한다. 그러나 데리다는 토록의 논술을 따르면서, 토록의 구별을 미묘하게 비틀면서, 그의 사고를 끼워넣는다. 데리다는 토록의 주장을 충분히 이해한 다음, 그녀의 논의를 자신의 사고에 끌고가려고 한다고 해도 좋다.

 

애도와 멜랑콜리」…에 따르면, <자아> 속으로의 체내화는, 대상 상실에 대한 경제론적 응답(une réponse économique)을 초래한다. ‘체내화된 incorporé’ 이 대상에, <자아 le Moi>는 이렇게 자기를 동일화(sʼidentifier)하려고 한다. 마리아 토록이 지연(=연기)temporisation’라고 부르는 것 덕분에, <자아>는 리비도의 재편성을 기다리면서, 상실한 대상에 이전에 이뤄진 제반 투여[투자]를 다시 제 것(=재전유 réapproprier)으로 한다. 대상의 상실에, 그러나 또한 애도의 거부에도 서명하고, 이런 조작은 받아들임[내투사의 과정(processus dʼintrojection)에는 소원하며, 사실을 말하면 대립하고 있다. 나는 살아 있는 죽은 자(le mort vivant), 손대지 않은 채, 아무 상처 없는 채 내 안에=내 안을 제외한 곳에(sauf(fors) en moi) 받아들여지는[내투사되는](=먹는 prendre) 시늉을 한다. 하지만 그것은 정상적 normal’이라고 불리는 애도라면 그렇듯이, 내 안에 아무 상처 없이(sauf en moi), 받아들임[내투사]의 과정을 따라, 죽은 자를 살아 있는 부분으로서 사랑하는 것을, 필연적으로 애매한 형태로, 거부하기 위해서이다. 이 애도에 대해서 물론, 그것이 타자를 내 안(en moi)타자(autre)(죽은 산 자=산 사자 vivant mort)로서 보존(garder)하고 이쓴지 여부를 물을 수 있을 것이다. 타자로서의 타자의, 이 보존(la garde), 혹은 전유 일반(lʼappropriation générale)의 물음은 항상 결정을 내릴 것이다. 그러나 이 물음은 본질적인 애매함에 의해, 받아들임[내투사]과 체내화 사이에 통과시키는 경계를 어지럽히는(brouiller) 것이 아닌가?[각주:49]

 

데리다는 프로이트의 애도와 멜랑콜리를 언급하는 척하면서, 그 이면에서는 토록의 주장을 끌어들이고 비튼다. 데리다에 따르면, 대상 상실에 대한 리비도와 그 투자[투여]경제론적 응답으로서, <자아> 속에 체내화된대상으로 향해진 리비도는, 일상성으로 복귀하기 위해, 재차 <자아>로 방향을 틀지 않으면 안 된다. 그것이 정상적인 애도이며, “애도의 작업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상실한 대상에 동일화한 <자아>, 상실한 대상과 좀체 분리되지 않는다. 그래도 한 걸음 한 걸음 현실의 시간을 두고[=시간적인 지연(=연기)], ‘애도의 작업은 완료된다.

그러나 이런 정상적인 애도로서의 애도의 작업은 페렌치의 받아들임[내투사]’과는 관계가 없을 뿐더러, 데리다에 따르면 대립하고 있다.” 그에 따르면, ‘받아들임[내투사]’이란 산 사자=죽은 산 자받아들임[내투사]’이면서도, 그것은 단순한 척하기에 지나지 않는다. , 실제로는, ‘받아들임[내투사]’이라고 말할 수 있는지 여부도 분명치 않다. 하물며 산 사자=죽은 산 자로서의 타자멀쩡한 채[아무 상처 없는 채] 내 안에받아들여진다[내투사된다]고 한다면, 그것은 =자아(le Moi)” 속으로 동일화되지 않는(체내화되지 않는) 것을 보존하는 것이 되지 않을까. 그때 전유/고유화는 무엇을 의미하게 될까. 원래 타자라는 내 것이 되지 않는 것 = 전유되지 않는 것을 받아들임[내투사]은 동일화나 체내화라고는 부르지 않을 것이다. 이리하여 데리다는 받아들임[내투사]’체내화의 구별로부터, 타자의 체내화가 품고 있는 문제를 폭로한다.

그에 반해, 토록은 정상적인 애도에 있어서의 받아들임[내투사]’체내화를 구별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녀가 보기에, 그 경계 설정이야말로 페렌치의 독창적인 규정을 지키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데리다에 따르면, 그 경계나 엄밀한 구분선을 긋는 것이, “<자아>(받아들임[내투사]의 집합들 ensemble des introjection)의 내부에, 체내화라는 이질적인 것의 공간(espace allogène dʼincorporation)으로서의 매장실적인 독립공간(lʼenclave cryptique)을 에워싸게[각주:50] 된다. 그것은 자아의 내부에, 이질적인 자=타자를 보존하는 장소, 즉 데리다가 말하는 지하매장실 crypte’이라고 해도 좋다. 그리고 지하매장실이란 전유/고유화로서의 동일화를 거부하는 산 사자=죽은 산 자를 보존하는 «장소»이며, 죽은 가다머가, 데리다의 내부에서 동일화되지 않고 «살아남은» 장소이기도 하다. 이런 의미에서 지하매장실의 장소 le lieu cryptique’무덤 une sépulture’이며, ‘어떤 일정한 비-장소 un certain non-lieu’[각주:51]이다. 더욱이 그 주민은 항상, 산 사자(mort-vivant)이며, 사람이 산 채로, 그러나 죽은 자로서 보존하고(=보살피고 garder) 싶다고 생각하는 사자, 자신의 죽음에 이르기까지 그것을, 즉 자기의 안에 손을 대지 않은 채, 멀쩡한 채[아무 상처도 없는 채], 따라서 산 채로 보존한다는 조건에서, 보존하고 싶다고 생각하는 사자[각주:52]이다.

가다머는 데리다의 지하매장실속에서, 데리다가 산 채로, 사자로서 보존하고 싶다고 생각하고, 데리다의 죽음에 이르기까지 자기의 안에, 손을 대지 않은 채로, 멀쩡한 채로” “산 채로 보존한다는 조건에서, 보존하고 싶다고 생각하는” “산 사자였다. 즉은 가다머는, 가다머와 만나기 전부터, 만난 후에도, 그리고 가다머가 죽은 후에도, 데리다의 자아의 지하매장실속에서 계속 살고 있다. ‘타자로서의 사자가다머는, ‘죽은 산 자 = 산 사자로서, 페렌치의 의미에서 데리다의 자아에 받아들여져[내투사되어]’ 있으나, 프로이트적인 의미에서는 동일화되지 않고, 데리다의 무의식의 지하매장실에서 계속 살고 있다.

그렇다면 데리다가 깨닫지 못한 채, 죽은 가다머를 받아들이지[내투사하지]’, 동일화하지 못한 채 자아의 내부에 품고 있는 지하매장실이란 무엇을 의미할까? 필자로서는 데리다가 다른 저작에서도 빈번하게 사용하는 지하매장실이라는 생각을, 아브라함 & 토록의 애도 혹은 멜랑콜리(1972)와 비교하면서, 다시 되돌아가서 재차 생각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그렇게 함으로써 미나토미치 다카시(港道隆)가 말하듯이, 데리다에게서 지하매장실이라는 일찍이 한 번도 현전하지 않았던 것[각주:53]유령이 되어 재귀한다(revenir)는 것은 어떤 의미를 갖는가, 그리고 그것이 어떻게 데리다의 철학에 영향을 주었는가가 드러날 것이다.

 

5. 마치며 : ‘살아남은데리다와 유령가다머의 내적 대화를 위해

본고에서는 데리다와 정신분석 사이의 관계를 바탕으로, 데리다가 가다머의 생전부터 사후에 이르기까지, 가다머와의 사이에서 내적 대화를 계속 하고 있는 것의 내실을 밝혔다. 그 결과로서 판명해진 것은, 가다머가, 데리다 속에 체내화되지 않고 죽은 산 자 = 산 죽은 자로서 <무의식>지하매장실에 머물러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원래 지하매장실이라는 개념 자체는 아브라함 & 토록의 비정통적 정신분석에 뿌리를 두고 있다. 그러나 본고에서는 이들의 비정통적 정신분석의 연구가 충분하지 않기 때문에, ‘지하매장실개념의 검토가 이뤄질 수는 없었다. 다만 잊어서는 안 되는 것은, 그리고 데리다와 가다머 사이의 관계에서 중요한 것은, 데리다가 가다머의 이타성체내화라는 동일화를 하게 하지 않고, ‘멜랑콜리를 견뎌낸다는 윤리를 사수했다는 것이다. 더욱이 데리다에게서의 죽은 산 자 = 산 죽은 자로서의 가다머는, 항상 데리다를 자극하고, 데리다의 사고에 신들리고 들러붙어 있었다.

더 나아가 데리다 자신이 숫양을 서문으로서 위치시킨 그럴 때마다 단 하나, 세계의 종말(2003)에서는, ‘산 죽은 자로서 16명의 지인친구논적에 대한 조사가 게재되어 있다. 이 책을 일독하면 알게 되듯이, 데리다는, 그들과의 대화도 또한, 그들의 사후에 계속했다. 그래서 우리는 데리다의 철학을 검토하는 데 있어서, ‘산 죽은 자들과의 대화를 시야에 넣을 필요가 있다. 게다가 주의해야 할 것은 미나토미치 다카시가 지적했듯이, “일찍이 한 번도 현전하지 않았던 것조차도, ‘지하매장실에 매장되어 있으며, 이로부터 유령이 재귀하는 것이다.

그리고 데리다에 의한 체내화의 문제는, 숫양에서의 가다머와의 내적 대화와 어떻게 관련되어 있느냐라는 문제는 여전히 남아 있다. 앞으로, 죽은 가다머를 데리다의 내부의 지하매장실에서 살고 있는 유령=재래자로서 위치시키고, 데리다에게서의 애도의 문제를 척결할 필요가 있다. 또한 이로부터 만년의 데리다가 유령으로서 말하고자 했던 타자의 문제의 내실에 대해 언급할 수 있을 터이다. 이상의 점을 감안함으로써, 데리다의 <애도의 철학>에 있어서의 정신분석의 영향을 가늠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문제들에 대해서는 본고에서는 논할 수 없었다. 본고의 계속에 대해서는 다른 기회로 미루고 싶다.

 

 

 

  1. 본고로부터 개시되는 일련의 논고는 1980년대 이후의 데리다의 철학의 ‘죽음’과 ‘유령’을 둘러싼 <애도의 철학>으로서 위치시키는 시도이다. 또한 이미 몇 년 전에 필자는 이를 위한 준비로서 데리다와 田邊元 사이의 비교철학적 시론을 공표했다. 森村修, 「喪の倫理」, 日本現象学会編『現象学年報24』, 2008년을 참조. [본문으로]
  2. 林好雄, 「訳者解説」, 『雄羊—途切れない対話: 二つの無限のあいだの, 詩』所収, ちくま学芸文庫, 2006 年, p.177. [본문으로]
  3. J. Derrida, Beliers, Le dialogue ininterrompu: entre deux infinis, le poeme, Galilée, 2003, p.10. (デリダ, 『雄羊—途切れない対話: 二つの無限のあいだの, 詩』林好雄訳, ちくま学芸文庫, 2006年, p.9.)(강조는 인용자). 또한 인용할 때 번역은 맥락에 따라 수정. [본문으로]
  4. J. Derrida, ibid. (デリダ, 同書, p.7.) [본문으로]
  5. J. Derrida, ibid., pp.19-20. (デリダ, 同書, pp.17-18.) [본문으로]
  6. 물론 가다머와 사별했을 때 데리다가 품었던 ‘멜랑콜리’는 정신분석적으로 말하면, 데리다 개인의 체험에 기초한 것이며, 개인심리적 문제에 불과하다. 그러나 필자는 데리다가 말하는 ‘멜랑콜리’와 ‘내적 대화’ 속에서, 철학적 문제가 내재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즉, 데리다의 ‘멜랑콜리’는 단순히 죽은 가다머를 그리워하는 심리적 감정에 있는 것이 아니다. 문제는 ‘사자 le mort’가 된 가다머가 데리다 속에 어떻게 ‘재래하는 revenir’가에 있다. 그리고 그것은 데리다의 후기 철학에서, ‘애도’나 ‘유령성’의 문제로서, 다양한 형태로 변주되는 테마이기도 하다. 그렇기에 필자가 문제 삼는 것은, 가다머가 “사후(死後)에 살다(=사후의 삶, life after death)”의 의미가 아니다. 확실히 필자에게는 ‘사후의 삶’의 문제는 본 논고와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다만 본고에서는, 어디까지나 데리다와 가다머의 ‘내적 대화’를 둘러싼 문제계에 한정되어 있으므로, ‘사후의 삶’을 둘러싼 철학적∙정신분석적 고찰은 건드리지 않는다. [본문으로]
  7. 여기서 말하는 ‘비정통적(unorthodox)’ 정신분석이란 헝가리의 정신분석의사인 페렌치 샨도르(Ferenczi Sándor, 1873-1933)에서 시작되어 멜라니 클라인(1882-1960), 마이클 발린트(Michael Balint, 1896-1970)을 거쳐 니콜라 아브라함(1919-1975)이나 마리아 토록(1925-1998)으로 흐르는 “헝가리 학파”를 의미한다. 또한 페렌치와 프로이트의 관계 및 페렌치의 트라우마 이론에 대해서는 다음의 저작이 자세하다. 森茂起, 『トラウマの発見』, 講談社選書メチエ, 2005年. [본문으로]
  8. 필자가 <애도의 철학>이라고 부르는 데리다의 후기 철학은, 데리다가 논적∙친구 등을 위해 쓴 조사(弔辞)를 모은 논집인 『그럴 때마다 단 하나, 세계의 종언(そのたびごとにただ一つ, 世界の終焉)』(2001/2003)으로 대표된다. 다만 데리다가 이른바 ‘애도’ 혹은 ‘애도의 작업’, ‘죽음’이나 ‘유령’ 등의 개념을 이용해, 다양한 저작이나 논문, 강연 등을 했기에, 하나의 저작으로서 모든 것을 말할 수는 없다. 그래서 다양한 텍스트를 섭렵함으로써, 데리다의 <애도의 철학>을 밝히는 것이 필자의 과제가 된다. 또한 본 논집의 편집자들에 따르면, 데리다는 ‘친구의 죽음’에 대해 뭔가를 쓰는 것을 자신에게 엄격하게 금했다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81년에 롤랑 바르트의 죽음을 접하고 그는 처음으로 ‘친구의 죽음’에 대해 붓을 들었던 것은, 데리다 안에 모종의 변화가 생겼다고도 말할 수 없지도 않다(P-A. Brault and M. Naas, “Editorsʼ Introduction: To Reckon with the Dead: Jacques Derridaʼs Politics of Mourning,” in J. Derrida, The Work of Mourning, The University of Chicago Press, 2001, p.6.; P = A・ブロー/ M・ナース「序論 死者を考えること———ジャック・デリダと喪の政治学」, 土田知則他訳『そのたびごとにただ一つ, 世界の終焉Ⅰ』所収, 岩波書店, p.9 참고). 게다가 이 책은 본고에서 검토되는 『숫양(雄羊)』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데리다는 이 책의 프랑스어판 서문에서 “만일 내가 굳이 이 책에 대한 진정한 서론을 제시하려고 한다면, 그것은 내가 출판사 갈릴레에서 동시에 출판하는 에세이, 『숫양 : 끊기지 않는 대화, 두 개의 무한 사이에서, 시(雄羊 途切れない対話—二つの無限の間で, 詩)』일 겁니다. 이것은 몇 년 동안 제 머리를 떠나지 않은 첼란의 시의 한 행을 둘러싼 배회의 기록입니다. / 세계는 없어졌다, 나는 너를 짊어져야 한다(Die Welt ist fort, ich muss dich tragen.)”(J. Derrida, Chaque fois unique, la fin du monde, Présenté par Pascale-Anne Brault et Michael Naas, Galilée, 2003, p.11)고 썼다. 필자는 데리다가 마지막에 인용한 한 행을 포함한, 파울 첼란의 시의 해석을 『숫양』에서의 ‘희생’의 문제로서 논한 적이 있다(森村修, 「なぜ動物は犠牲にされるのか―デリダの「犠牲」論」, 東北大学哲学研究室編 『思索』, 第45号 野家啓一先生御退職記念号, 2013年). 부언한다면, 본고에 이어진 일련의 논고의 최종적 목적은, 데리다와 가다머를 잇는 공통의 ‘친구’ 파울 첼란을 논한 『시볼레 : 파울 첼란을 위해(シボレート—パウル・ツェランのために』(1986)의 독해를 통해 데리다에게서의 «죽음의 철학»과 «시의 철학»을 접합하는 것이다. 또한 이후, 90년대의 시기는, 일반적인 데리다 연구사에서는, 그의 이른바 ‘정치적 전회 political turn’라고 불리는 시기와 겹친다. 다만, 필자로서는 전회의 유무의 판단은 보류하고 싶다. [본문으로]
  9. 부언한다면, 본 서문은 데리다의 정신분석 이해, 나아가 ‘애도의 작업’에 대한 데리다의 사고의 출발점이 되기도 한다는 점도 중요하다. [본문으로]
  10. N. Abraham et M. Torok, Cryptonmie, Le Verbier de L’homme aux Loups, précédé de FORS par Jacques Derrida, Aubier Flammarion, 1976. [본문으로]
  11. N. Land, “Introduction: Renewals of Psychoanalysis,” in: N. Abraham & M. Torok, The Shell and the Kernel, Edited , Translated, and with an Introduction by N. T. Rand, The University of Chicago Press, 1994, p. 1. 니콜라스 랜드는 아브라함/토록의 공저 『표피와 핵(表皮と核)』의 영역자이다. 그는 「서문 : 정신분석의 갱신(Introduction: Renewals of Psychoanalysis)」이라는 서문을 썼다. 그는 두 명이 정신분석학의 보편주의적 경향에 저항하며, 프로이트주의가 이용하는 다양한 개념(오이디푸스 콤플렉스, 죽음충동, 페니스 선망, 원풍경)에 변경을 가할 뿐만 아니라, 어떤 사항(유아기의 섹슈얼리티, 무의식, 꿈 해석, 정신분석의 상황 하의 전이의 중요성)에 대해서는, 이것들을 문제시하고 있다고 생각한다(cf. N. Land, ibid., pp. 2-3.). 참고로 랜드는 아브라함의 조카이며, 토록의 배우자이다. [본문으로]
  12. J. Derrida, ibid., p. 20. (デリダ, 同書, p. 18.) 강조는 인용자. [본문으로]
  13. S. Freud, “Trauer und Melancholie,” in: Gesammelte Werke, X, Werke aus den Jahren 1913-1917, herausgegeben von Anna Freud, E. Bibring, W. Hoffer, E. Kris, O. Isakower, Imago Publishing Co., Ltd., Ondon, 1946, Achte Auflage, S. Fischer, Frankfurt am Main, 1991., SS. 428-429. 이하, 피셔판 프로이트 전집에 대해서는 GW로 약칭하고 옆줄 뒤에 로마자로 권수를 표기한다. (伊藤正博訳, 「喪とメランコリー」, 『フロイト全集14』 수록, 岩波書店, 2010年, pp.273-274). 강조는 인용자. [본문으로]
  14. S. Freud, ibid., S. 429.(同書, p. 274.). [본문으로]
  15. S. Freud, ibid., S. 431.(同書, pp. 276-277.). [본문으로]
  16. S. Freud, ibid., S. 435. (同書, p.281.). [본문으로]
  17. S Freud, ibid.(同書). [본문으로]
  18. S. Freud, ibid.(同書). [본문으로]
  19. 프로이트는 「충동과 충동의 운명[欲動と欲動運命]」(1915)에서 사랑하는 것에 대해 세 가지 대립이 있고, 하나는 사랑하다/미워하다는 대립, 두 번째는 사랑하다/사랑받다라는 대립, 세 번째는 사랑하다와 미워하다를 하나로 하면, 무관심의 상태와 대립한다고 말했다. 게다가 ‘사랑하다/사랑받다’라는 대립은, 능동성에서 수동성으로 돌아서는 것에 대응하며, 최종적으로는 “하나의 근본상황으로 환원될 수 있다. 이 근본상황은 이른바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것이며, 우리가 보기에 그것은 나르시시즘의 특징이다”(Freud, „Treibe und Triebschicksale“, GW-X, S. 185, フロイト「欲動と欲動運命」, 『フロイト全集14』, 岩波書店, 2010年, p.226. 강조는 프로이트). [본문으로]
  20. J. Laplanche et J. –B. Pontalis, Vocabulaire de la psychanalyse, PUF, 1967, p.188.(「同一化」, 村上仁監 訳, 『精神分析用語辞典』 수록, みすず書房, 1977年, p.345.) [본문으로]
  21. S. Freud, Trauer und Melancholie, S. 436.(フロイト, 「喪とメランコリー」, p.282.). [본문으로]
  22. S. Freud, Trauer und Melancholie, S. 436.(フロイト, 「喪とメランコリー」, p.282.).이 대목에 대해, 프로이트 저작집의 어떤 편집자는 그 「편집자 해설」에서 주를 달아서, 프로이트가 ‘받아들임[내투사] Introjektion’라는 술어를, 메타심리학에 관한 일군의 논고들에서, 이미 사용했다고 하면서도, 이 논문에서는 ‘받아들임[내투사]’ 개념을 사용하지 않았다고 말한다. 게다가 편집자는 프로이트가 ‘동일화’의 주제로 돌아갈 때, 그는 ‘받아들임[내투사]’라는 말을 사용한다는 것도 지적한다(“Editorische Vorbemerkung“, in Sigmund Freud, Studienausgabe Band Ⅲ , Psychologie des Unbewußten, Fischer Wissenschaft, 1982, S. 196.) 어떤 의미에서 ‘받아들임[내투사]’과 ‘체내화’ 혹은 ‘먹다’는 일반적으로 정신분석의 맥락에서는 동의어처럼 다뤄지고 있다고 말해도 좋다. 이 점에 대해서는 3절에서 토록의 ‘체내화’와 ‘받아들임[내투사]’에 대한 이해 때에 검토한다. [본문으로]
  23. 앞의 각주에서 언급한 저작군의 편집자들은 프로이트가 「애도와 멜랑콜리」와 같은 시기에, 『성욕 이론에 관한 세 가지 에세이(性理論のための三篇)』의 3판(1915)에 추가된 절〔「성적 편성의 발달단계 性的編成の発達段階」〕에서 동일화와 구순기 사이의 관계에 대해 말한다고 지적한다(“Editorische Vorbemerkung,“ ibid., S. 195.). 프로이트는 추가된 절에서, “성기기(性器期) 전의 성적 편성 중 최초의 것은 구순적(oral) 편성이라고 명명되는 것인데, 필요가 있다면, 식인적(kannibalisch) 편성이라고 명명해도 좋다. 성적 활동은 여기서는, 음식을 섭취하는 것에서 아직 분리되지 않았다. 즉 이 편성 속에서는, 대립물은 아직 미분화(未分化)되어 있었다. 한쪽의 활동의 대상은 동시에 다른 쪽의 활동의 대상이 되고 있다. 그렇기에 성목표(性目標)는 대상의 체내화(Einverleibung)이다. 참고로 이 체내화는 나중에 동일화(Identifizierung)라고 명명되어 매우 중요한 심적 역할을 맡게 되는 것의 조형(祖型, Vorbild)을 이룬다”(S. Freud, Drei Abhandlungen zur Sexualtheorie, GWV, S. 98. 강조는 프로이트). 프로이트는 이 단계에서는, 구순적과 식인적을 동의어처럼 생각하고 있으며, 더욱이 음식을 받아들이는(내투사하는) 것과 대상을 ‘체내화’하는 것을 동의어처럼 생각하고 있다. 게다가 ‘체내화’는 ‘동일화’의 조형(祖型)으로서 자리매김 된다. 더욱 흥미로운 것은, 편집자들은, 증례(症例) 「어떤 유아기 신경증자의 병력으로부터(늑대인간)(ある幼児期神経症者の病歴より〔狼男〕)」(1918年, 집필은 1914年)에서는, 멜랑콜리와 구순기 사이의 관계를 건드린다는 점이다. 아브라함과 토록은 바로 ‘늑대인간(狼男)’의 증례를 둘러싸고, 『언어표본(言語標本)』을 쓴 것이며, 거기서 문제가 되는 것이 ‘체내화’의 문제이다. 이것에 대해서는 3절 이후에서 검토한다. [본문으로]
  24. J. Laplanche et J. –B. Pontalis, Vocabulaire de la psychanalyse, PUF, 1967, p.504.(「喪の作業〔悲嘆の作業〕」, 村上仁監訳, 『精神分析用語辞典』所収, みすず書房, 1977年, p.444.). [본문으로]
  25. S. Freud, op.cit., S. 430. (フロイト, 前掲書, p.275.). [본문으로]
  26. S. Freud, op.cit., S. 443-444. (フロイト, 前掲書, p.289.). [본문으로]
  27. J. Laplanche et J. –B. Pontalis, Vocabulaire de la psychanalyse, PUF, 1967, p.504.(「喪の作業〔悲嘆の作業〕」, 村上仁監 訳, 『精神分析用語辞典』所収, みすず書房, 1977年, p.444.) [본문으로]
  28. J. Laplanche et J. –B. Pontalis, ibid. (「喪の作業〔悲嘆の作業〕」, 同書). 이 점에 대해 필자는 졸고에서 데리다가 프로이트의 ‘애도의 작업’을 비판하고 있다고 언급하고, ‘애도의 작업’이란 “죽은 자를 두 번 죽이는” 것을 의미한다고 논했다(森村修, 「喪の倫理」 참조). [본문으로]
  29. J. Derrida, Béliers, pp. 74-75. (デリダ, 『雄羊—途切れない対話: 二つの無限のあいだの, 詩』, pp.80-81.) (강조는 인용자). 또한 인용할 때, 번역은 문맥에 맞게 변경했다. [본문으로]
  30. 데리다 자신의 증언으로부터, 정신분석 연구에 본격적으로 착수한 것은 60년대 말부터 70년대 초반이며, 1965년 무렵까지 그는 정신분석에 대해 연구를 진행하지 않았다. 또한 아브라함과 토록의 작업에 대해 흥미를 갖고 있었지만, 영향을 받는 데까지는 이르지 못했다. 실제로 데리다와 아브라함이 친분을 두텁게 한 것은 1959년 이후라고 한다. 당시 스리지 라 살(Cerisy-la-Salle)에서 “구조와 생성”의 테마로 콜로케가 개최되고, 아브라함과 데리다 둘 다 발표했다(N. Abraham, « Réflections phénoménologiques sur les implications structurelles et génétiques de la psychanalyse, in N. Abraham et M. Torok, L’écorce et le noyau, Champs-Flammarion, 1996, pp.77-87. (「構造および発生に関して精神分析が含意する事柄についての現象学的省察」, 大西雅一郎・山崎冬太監訳, 『表皮と核』 수록, 松籟社, 2014年, pp.89-99.). J. Derrida, “GENノSEET STRUCTURE” ET PHノNOMノNOLGIE, in L’ecriture et la difference, editions du Seuil, 1967, pp. 229-251.(「『発生と構造』と現象学」, 合田正人/谷口博史訳, 『エクリチュールと差異』(신판) 수록, 法政大学出版局, 2014年, pp.309-338.). 또한 두 사람의 만남에 대해서는 『언어표본』의 번역자인 미나토미치 다카시(港道隆)가 「Postscriptum」에서 간결하게 말했다(港道隆, 「Postscriptum」, 『言語標本』 수록, 法政大学出版局, 2006年, pp.278-279.). 또한 아브라함이 당초 현상학을 배우고 나중에 정신분석으로 이행한다는 특이한 경력을 갖고 있다는 것도 港道이 언급하고 있다. [본문으로]
  31. N. Abraham et M. Torok, Cryptonmie, Le Verbier de L’homme aux Loups, précéde FORS par Jacques Derrida, Aubier Flammarion, 1976. [본문으로]
  32. 데리다의 영어판 서문은 잡지 “diacritics”의 「특집 : 프로이트의 상징학 Toropology of Freud」에 발표한 것(Me—Psychoanalysis: An Introduction to the Translation of “The Shell and the Kernel” by Nicolas Abraham, Diacritics, Vol.9, No.1, The Tropology of Freud (Spring, 1979), pp.3-12)이다. 그것이 나중에 프랑스어판 원문으로 데리다 중기의 논문집 『프쉬케(プシュケー)』(1987)에 게재됐다. 정신분석적 어법 자체가 통상적인 수사학적인 이해로부터는 곤란함에도 불구하고, 데리다는 번역자린 리처드 클라인(Richard Klein)과의 공저라는 형태로, 프랑스어와 영어라는 두 개 국어를 구사하고, 아브라함의 정신분석의 의의에 대해 말한다. 두 개 국거의 사용이란, 서문의 제목의 번역의 어려움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영어판 서문의 부제에도 ‘번역translation’에 대한 ‘서문/도입 Introduction’이 있다. 번역의 문제는 그뿐만 아니라, 주제목인 「Me—Psychoanalysis」도, 『프쉬케』에 전재(転載)된 프랑스어판에서는 「Moi—Psychoanalyse」가 되고 있으며, 일본어 번역에서는 「나 ― 정신분석(私—精神分析)」이 되고 있다. 그러나 아브라함 & 토록의 저작 『표피와 핵(表皮と核)』(원문 프랑스어)의 일본어 번역본에서는 「자아―정신분석(自我—精神分析)」이라고 번역되어 있다. 영어의 인칭대명사 ‘me’는 프랑스어 원문에서는 ‘moi’로 표기되어 있다는 것에 대해서는 문제가 없으나, 일본어 번역본에서는 ‘나[私]’와 ‘자아’, 둘 다로 번역이 가능하다. 아마 『표피와 핵(表皮と核)』의 일역자는 프랑스어판에서 ‘Moi’라고 대문자로 표기되어 있기 때문에, 만일 ‘Moi’를 ‘자아’로 이해한다면, 제목에 국한하지 않고 대문자로 ‘Moi’라고 표기하고 있기 때문에 ‘자아’라고 번역했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 이유로서 생각되는 것은, 아브라함 자신이, 「표피와 핵」 논문 속에서 정신분석적 개념을, 독일어에서 프랑스어로 번역할 때, 대문자로 표기하는 것의 의의와 의미에 대해 말하기 때문이다(cf. N. Abraham, ʻLʼécore et le noyau,ʼ in L’écorce et le noyau (「表皮と核」, 『表皮と核』所収, 松籟社, 2014 참조). 반면, 데리다의 『프쉬케』의 번역자 藤本一勇는 ‘나[私]’라고 번역한 이유를 데리다의 서문의 내용으로부터 설명한다. 다만 藤本는 데리다가 논하고 있는 아브라함의 「표피와 핵」의 내용과의 관계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는다. 이상으로부터도 번역의 어려움을 알아챌 수 있다. [본문으로]
  33. 『言語標本』의 번역자 港道도 데리다와 아브라함&토록 사이에, 유보가 있다는 것을 인정한다. “데리다는 그 〔『언어표본言語標本』의〕 서문에서, 두 사람의 입론에 미묘하게도 근본적인 유보를 달았다”(港道, 「Postscriptum」, p.281). [본문으로]
  34. M. Torok, « Maladie du deuil et fantasme du cadavre exquis », Revue Française de Psychanalyse, 1968, 4 [in Nicolas Abraham et Maria Torok, L’Écore et le noyau, op.cit., pp. 229-251.](「喪の病と妙なる屍体のファンタスム」, 『表皮と核』 수록, pp. 253-277.). [본문으로]
  35. M. Torok, ibid., p. 234. (M・トローク, 同書, p.258. 참조). [본문으로]
  36. M. Torok, ibid.(M・トローク, 同書, p.258). [본문으로]
  37. M. Torok, ibid., p. 236. (トローク, 前掲書, p. 260.). [본문으로]
  38. J. Laplanche et J. –B. Pontalis, Vocabulaire de la psychanalyse, pp.209-210.(「取り込み〔摂取, 取り入れ〕」, 村上仁監訳『精神分析用語辞典』所収, みすず書房, 1977年, p.362.) [본문으로]
  39. S. Freud, Die Verneinung, GW-XIV, S. 13.(フロイト「否定」, 『フロイト全集19』, 岩波書店, 2010年, p.5.). 다만, 라플랑슈 & 퐁탈리스는 프랑스어로 번역하는 관계로, 프로이트의 원문과 다소 이동이 있다. 참고로 이들은 이 책을 인용할 때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 본래의 쾌락 자아[快自我]는 좋은 모든 것을 받아들인다(sʼintrojecter), 나쁜 모든 것을 기각(rejeter)하려고 한다”(J. Laplanche et J. –B. Pontalis, ibid., p.210. (「取り込み〔摂取, 取り入れ〕」, p.362.)). [본문으로]
  40. J. Laplanche et J. –B. Pontalis, ibid., p.210.(「取り込み〔摂取, 取り入れ〕」, p.363.) [본문으로]
  41. J. Laplanche et J. –B. Pontalis, ibid., p.209.(「取り込み〔摂取, 取り入れ〕」, p.362.) [본문으로]
  42. J. Laplanche et J. –B. Pontalis, ibid., pp.209.(「取り込み〔摂取, 取り入れ〕」, p.362.) [본문으로]
  43. S. Ferenczi, Zur Begriffsbestimmung der Introjektion (1912), in S. Ferenczi, Bausteine zur Psycholoanalyse, Band I: Theorie, Ullstein Materialien, 1984, SS. 58-59. 토록은 페렌치의 텍스트를 자신이 프랑스어로 번역했다고 생각되지만, 본고에서는 독일어판으로부터 직접, 해당 대목을 번역했기 때문에, 토록의 번역문과 미묘하게 다른 대목이 있다. 예를 들어 페렌치의 인용 대목에서, 그는 “결국 인간이란 바로 자기 자신 밖에는 사랑할 수 없다. 〔그래서〕 인간이 어떤 대상을 사랑할 때에는, 인간은 그것을 자신의 자아 속에 받아들인다(Im Grunde genommen kann der Mensch eben nur sich selbst lieben: liebt er ein Objekt, so nimmt er es in sein Ich auf.)”고 썼는데, 토록(데리다)의 프랑스어 번역에서는 “사물을 그 기본에 있어서 생각하면, 인간의 사랑은, 바로 자기 자신에게만 향할 수 있을 것이다. 인간이 대상을 사랑하는 한에서, 인간은 대상을 자신의 <자아>의 부분으로서 받아들인다(A prendre les choses à la base, lʼamour de lʼhomme ne saurait porter, précisément, que sur lui-même. Pour autant quʼil aime un objet, il lʼadopte comme partie de son Moi.)”라고 번역한다. 여기서 문제가 있다고 한다면, 페렌치에서는 단순히 “인간은 대상을 자신의 자아의 안에 받아들인다∙ 수용한다aufnehmen”라고 되어 있는데, 토록(데리다)는 “자신의 <자아>의 부분(partie de son Moi)으로서 받아들인다/채택한다adopter”고 번역하는 것이다. 왜 토록은 “자아의 부분으로서”라는 말을 보충한 것일까? 이 점에 대한 의문은 지면의 사정상, 본고에서는 충분히 검토할 수 없기 때문에 지적하는 선에서 그치고 싶다. [본문으로]
  44. M. Torok, op.cit., p. 236.(トローク, 前掲書, p.260). [본문으로]
  45. M. Torok, ibid.(トローク, 同書) [본문으로]
  46. 본고의 2절의 각주 19를 참조. 또한 프로이트는 「충동과 충동의 운명[欲動と欲動運命]」에서 자아의 ‘자체(성)애’에 대해 페렌치의 ‘받아들임[내투사]’를 언급한다. “자아는 자체애적인 한 외부세계를 필요로 하지 않으나, 자아보존충동의 경험의 결과, 외부세계로부터 대상을 획득하게 된다. 그렇게 되면 내적인 충동 자극을 잠시 동안 불쾌한 것으로서 느끼는 것은 불가피하다. 여기서 쾌락 원리의 지배 아래에 있으며 자아 속에서 새로운 전개가 생긴다. 자아는 내밀어진 대상을, 그것이 쾌락의 원천인 한에서 자신의 자아 속에 받아들인다. 즉, (페렌치의 표현에 따르면), 이것들을 받아들이고(introjiziert sich), 다른 한편으로는 내부에서 불쾌를 일으키는 것은 자신 안에서 밀어내버린다(투사의 규칙에 대해서는 나중에 말하고 싶다)”(Freud, ibid., S.228, フロイト「欲動と欲動運命」, pp.187-188.). 이로부터도 분명해졌듯이, 프로이트는 피렌체의 ‘받아들임’을 ‘받아들인다’라는 동사형으로 사용한다. 이 대목이 프로이트가 피렌체의 ‘받아들임’에 대해 언급한 최초라고 여겨진다(『フロイト全集14』編注, p. 367 참조). [본문으로]
  47. Cf. M. Torok, op.cit., p. 36.(トローク, 前掲書, pp. 260-261 参照) [본문으로]
  48. J. Derrida, ʻFORS : Les mots anglés de Ncolas Abraham et Maria Torok,ʼ in N. Abraham et M. Torok, CRYPTONYMIE : Le Verbier de l’homme aux loups, précédé de FORS par J. Derrida, Aubier Flammarion, 1976, p. 16. (J・デリダ, 「Fors[数々の裁き/を除いて]ニコラ・アブラハムとマリア・トロークの角のある言葉(les mots anglés)」, 『言語標本』所収, 法政大学出版局, p. 182.). [본문으로]
  49. J. Derrida, ibid., pp. 16-17. (J・デリダ, 同書, p.183. 단, 번역은 맥락에 맞게 수정했다). [본문으로]
  50. J. Derrida, ibid., p.16. (デリダ, 同書, p.182.) [본문으로]
  51. J. Derrida, ibid., p.25. (デリダ, 同書, p.191.) [본문으로]
  52. J. Derrida, ibid. (デリダ, 同書, p.192.) [본문으로]
  53. 港道隆, 「Postscriptum」, p.283.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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