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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음 제시문을 읽고 질문에 답하시오.

<문제 1> 제시문 <가>는 개인주의가 추락한 모습을 어떻게 파악하고 있는지 설명하시오. (500자 이내)

<문제 2> 제시문 <가>는 국가, 시민사회 및 개인이 취해야 할 관계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설명하시오. (1000자 내외)

<가> 시민사회가 개인주의적이지도 않고 집단주의적이지도 않은 사회라는 것에 주목하고 싶다. 그것은 ‘나’와 ‘우리’ 모두에게 걸쳐져 있다. 나는 여기에서 일찍이 미국의 풍경 속에 산재했던 많은 합숙소, 클럽, 정당의 지역 조직 등을 염두에 두고 있다. 미국 헌법 비준에 관한 심의에서 헌법초안을 지지했던 페더럴리스트(연방주의자)라고 불리는 사람들에 대해 반대자들과 반-페더럴리스트가 서로 손을 잡았던 것은 소규모 사회(라틴어의 키비타테civitate)의 세계에서였다. 건전한 시민단체가 장기간에 지속할 수 있는가 없는가에 관해, 반-페더럴리스트는 페더럴리스트 정도의 자신감이 없었고, 그러한 단체를 번영시키기 위한 규정을 헌법에 포함시키길 바랬다. 반-페더럴리스트들은 하나의 자립적 공화국가를 이상상으로 명확히 내세우고, 그것에 의해 강대한 권력을 배척하고 반대로 시민의 미덕과 공통의 선이라는 고전적 원리에 토대를 두고 구상된 국가를 만들어내고자 했다. 이 헌법 초안 심의를 연구했던 역사가 랄프 케참은 다음과 같이 썼다.

“반-페더럴리스트들은 풀뿌리의 작고 온화한 정부를 이상으로 삼았고, 그 이상상과 새로운 헌법 초안에 암묵적으로 포함되어 있는 강대한 정부와 그 장대한 야심을 날카롭게 대립시켰다. … 전자는 시민이 자신의 삶을 각각 자유롭게 보낼 수 있고 공화국에 결정적으로 중요한 미덕(사적일 뿐만 아니라 공적이기도 한 미덕)을 함양(涵養)할 수 있게 해 준다. 다른 한편으로 후자는 세금과 징병제와 관료를 산출하며, 전쟁을 시작하고, 자치에 있어서 생명과도 같은 인간의 존엄성에 상처를 입힌다고 생각했다.”

반-페더럴리스트는 자신들의 논의를 장밋빛 논조로 물들이는 경우가 많았지만, 그들은 어떤 중요한 문제점을 건드리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나중에 알렉스 드 토크빌이 <미국의 민주주의>에서 상세하게 전개한 악순환에 빠지고 싶지 않았으며, 오히려 그 악순환을 끊고 싶다고 생각했다. 토크빌은 하나의 경고로서, 몰락하고 있는 하나의 세계, 그가 미국에서 실제로 조사한 강건한 민주주의와는 정반대의 세계를 묘사해 냈다. 동시에 그는 미국의 민주적 시민은 그들의 생활양식이 부패할 가능성을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고 믿었다. 그의 시나리오에 따르면 최악의 사례는 자신의 이익만을 생각하는 개인주의자들이 사회생활 속에 이중삼중으로 존재하는 상태로, 결사에서 얻을 수 있는 귀중한 억제력과 영양소로부터 분리된 결과 “위로부터의 통제”를 점점 강하게 요구하게 된다. 이러한 나쁜 의미의 무제한적 개인주의로부터 생겨난 사회를 해체시키는 힘이 실제로는 적어도 몇 가지 억제된 ‘위로부터의 통제’를 요구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되지 않기 위해서는 사회의 주변부가 생겨나지 않아야만 한다고 그는 경고했다. 국가의 영역 이외의, 오히려 그 아래에 있는 정치적 영역을 중요하게 지키고 육성하며, 약동하게 만들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한다. 토크빌은 중심 또는 정점으로 권력이 집중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지방 의회나 위원회의 역할에 주목했다. 비대하고 집중된 권력은 오히려 권력이 전혀 없는 상태 ― 즉 무정부 상태와 마찬가지로 바람직하지 않은 것이며, 소규모 사회에 의해서 비로소 개개인은 시민으로서 민주적 미덕과 민주주의의 가능성을 육성하고 민주주의의 드라마 속에서 적극적인 역할을 맡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한 민주주의에의 참가는 공동사회에 어떤 형태로, 또한 어떤 의미가 있는 관계를 갖게 된다. 시민의 적극적 참가를 허용하고 또한 장려하는 한도를 넘어서 권력이 과도하게 행사되면, 시민으로서의 존엄이 훼손되고, 마침내 민주적 자치를 진정으로 이해할 수 없게 된다. 반-페더럴리스트들의 권력 집중에 대한 염려는 토크빌의 우려를 선취한 것이었다. 토크빌에 따르면 반대로 권력의 강함 ― 예를 들어 군사력의 우위에서 나온 것으로 간주된 나라의 강대함은 ‘민주주의 국가의 인민의 가슴에 쾌감을 준다’, ‘생명의 위험이 있다고 하는 예외에서는 어떠한 노력도 하지 않고 얻을 수 있는, 생생한 영광을 갑자기’ 마치 도처에서 주어지게 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정치이론가, 사회이론가는 토크빌의 우려에 관해 그 동안 많은 논의를 해 왔다. 이 점에서 토크빌을 따르는 사람들은 미국 민주주의의 실체가 고대의 비민주적인 기구와 의무로부터 개개인을 해방시켰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개인주의와 동시에 사적 이익에만 전념하는 이른바 사유화(privatization)의 경향도 해방되었다. 토크빌이 두려워했던 것은 플라톤이나 토마스 홉스와 같은 비민주적인 철학자가 말하듯이, 그 결과로서 무정부 상태가 생겨난다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는 사적 이익의 획득을 목표로 하는 상업 국가에서는 새로운 형태의 사회적, 정치적 지배가 생겨나게 된다고 생각했다. 그는 이러한 나쁜 형태의 개인주의를 ‘이기주의(egoism)’라고 부르고, 민주적인 생활양식이 번창하기 위해 필요한 인간적 존엄과 자기 책임이라는 관념과 구별하고자 했다. 당시까지 사람들을 지켜왔던 사회적 그물망이 점차 흩어지게 되면, 개인은 각각 고립되고 무력화되며, 여러 가지 위험에 처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권력의 공백 상태에 정부의 조직적 권력이 상층부의 중앙집권적 국가라는 형태로 치고 들어오게 된다. 이러한 토크빌의 심려에 관해서 곧바로 국가와의 관계에서 더 이야기를 하겠지만, 그 전에 우선 현대 서구의 민주적 생활양식에 대해 몇 가지 비판, 나아가 비난에 관해 논해 보겠다.

우선, 이러한 심려를 염두에 두어야 한다. 머지않아 개인이 자아중심에 이르기까지 고립되며, 철저한 개인의 자립이 찬미되기에 이르면, 개개인 상호간의 의무나 상호의존망은 이미 의심의 눈초리로 보여지게 된다. 이러한 도식에서 중요한 것은 개인들만이, 그/녀의 선택만이다. 그리고 선택이 이렇게 절대적인 것으로 되어 버리면, 개인의 권리와 사회적 의무의 관계라는 중대한 문제가 소멸되어 버린다. 개인주의의 한 극에 모든 것을 미리 맡겨버릴 수 있기 때문이다. 이상적으로는 민주적 개인이란 ‘무제한적으로 주관주의적이며, 자기 이익을 추구하는 개인이 아니라’라고 할 수 있으나 문제로 되는 것은 시간이 흐르면 그렇게 된다는 점이다. 토크빌이 시의적절하게 보여준 민주적 생활의 장소 ― 특히 평등의 정신, 상이한 지위에 있는 사람들 사이의 형식을 갖추지 않고 서로 섞이게 되며, 이것 이외의 가장 놀라운 자기 폐쇄적인, 시기심과 의심 및 냉소주의라는 관습과 기질이 전면에 나오게 된다.

역사가이자 문화비평가인 크리스토퍼 래쉬(Christopher Lasch)는 <진실의 유일한 천국>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18세기의 근대 자유주의의 창시자들은 인간의 욕구와 필요는 확대하며, 오히려 인간의 욕구와 필요를 완전하게 충족시킬 수 없다는 전제에서 논의했다. 이러한 필요의 창출과 충족이라는 쉴새 없는 사이클cycle을 충족시키기고, 더욱이 촉진해 나가기 위해서는 경제생활에서의 생산력의 무한한 성장이 필요하게 된다고 한다. 이러한 진보라고 불리는 이데올로기는 자신들의 세계로부터 시간이라는 요소를 가둬버리고, 완전히 수수방관하기 힘든 낙관론으로 귀착해 간다고 라슈는 주장한다. 어떤 생활양식이 시간이 지나도 전혀 상처받지 않고 그 자신의 가장 중요한 원리에 심한 왜곡이 생겨나지도 않는다는 수수방관하기 힘든 낙관론으로 귀착된다는 것이다.

여러 가지 유형의 자유주의와 보수주의가 20세기의 진보 이데올로기를 떠받쳐왔지만, 그 공유재산은 끝이 없는 성장의 세계를 축복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끝이 없는 성장이란 실제로는 보다 큰, 그리고 보다 좋은 소비자주의를 의미한 것이었다. 생산자를 찬미하는 것으로부터 소비자의 찬미로 이행하는 것, 그것이 중심적인 문제점이었다. 과소 소비는 투자의 감소를 초래한다는 것이 그 결론이었기 때문이다. 이로부터 생겨난 것은, 우리는 아주 많은 것을 바란다, 지금 당장 바란다는 태도이다. 생활의 모든 곳에 시장이 침투하고, 시장의 이미지가 널리 퍼져 있다. 미국의 도시 중심부에서 젊은이들이 고가의 스니커즈(고무바닥을 천으로 만든 운동화) 등을 빼앗기 위해 서로를 때리고 쟁탈전을 벌이고 결과적으로 서로를 죽이는 것, 또는 미국 교외의 부유한 가정 젊은이들이 학교의 면학이나 공동사회에 참가하는 것을 기피하고 파트타임 일에 종사하여 어떤 새로운 소비재를 사고자 하는 것은 어쩌면 아주 놀라워해야 할 것이 아닌가 한다.

나는 래쉬의 논의가 법왕 요하네 파울로 2세의 사회적 관심에 관한 1988년의 회장(回章)(Sollicitudo Rei Socialis, ‘진정한 개발이란 인간 부재의 개발에서 인간 존중의 개발로’)에서의 ‘자유-자본주의’에 대한 비판과 유사하다고 해석한다. 요나네 파울로는 진보 이데올로기의 독선적인 자기 만족에 반대하고, 특히 ‘온갖 물질적 재화가 상당히 많고, 몇 가지 사회적 집단에는 오히려 좋지 않은’ 상태라는 ‘초고도 발전’ 현상을 지적하고 있다. ‘초고도 발전’은 “사람들을 ‘소유’와 지금 만족을 찾고 싶다고 하는 욕구의 노예로 만든다. 사람들은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을 더 많게, 또는 그것을 대신하여 그 밖의 더 좋은 것을 끊임없이 추구하고 싶다는 것 이외에는 아무 것도 생각하지 않는다. 이것이 이른바 ‘소비’ 또는 ‘소비자주의’의 문명이다. 그것은 많은 것을 ‘버리고’ 또는 ‘낭비’하는 것을 의미한다”고 말한다.

요하네 파울로는 나아가 이렇게 말한다. “순진한 소비자주의에 이렇게 무비판적으로 굴복하는 것의 비참한 결과”는 물질주의와 ‘가지면 가질수록 더 갖고 싶어하게 된다’는 끊임없는 불만이다. 타인과 교류하는 세계 속에서 인간적 존엄을 지키고자 하는, 더 깊은 바램은 질식되어 버린다. 이 바램을 요하네 파울로는 ‘연대’라고 명명한다. 그것은 “많은 사람들의 불행에 대한 막연한 동정이나 옅은 곤혹의 감정” 등이 아니라 “우리는 모두 인간에 대해서 책임이 있다고 생각하고, 따라서 공통의 선, 모든 개개인의 선을 위해 헌신하고자 하는” 결의를 가리킨다. 요하네 파울로의 말에는 연대를 통해 우리는 “타인을 … 단순히 어떤 목적을 위한 도구로서가 아니라 우리의 ‘이웃’, ‘협력자’ … 우리 모두가 신으로부터 초대받은 인생의 향연에 우리와 대등한 입장으로 참가하고 있는 사람들”이라고 간주하는 것이다.

요하네 파울로의 말은 유토피아적, 또는 소박하다는 인상을 주지만, 즉 그 정도로 우리는 시민사회를 상실하고 있다. 적어도 사회학자 알랭 울프는 <누구의 수호자인가? 사회과학과 도덕적 의무>에서 이렇게 결론을 내리고 있다. 울프는 토크빌을 현대인과 대조시켜, 현대가 점점 더 나쁜 의미에서의 개인주의의 길로부터 어느 정도로 멀리, 또한 어느 정도로 빠르게 걸어가고 있는가, 그리고 우리 각자는 각각의 작은 왕국에 밀집해 있는 결과, 점점 더 큰 관리와 통제, 정치․경제의 권력 집중이 필요하게 되었는가를 측정하고 있다. 또한 현대사회, 특히 미국의 현대사회가 아무리 큰 성공을 거두었다고 하더라도, 모든 것이 잘 되어가지는 않는, 무엇인가가 심각하게 되어 버렸다는 감각이 있다는 것, 때로는 절망적인 감각이 있다고 말하고 있다. 우리 자유롭고 민주적인 사회의 시민은, 자유의 의미를 이해하고 그것을 존중하고 있지만, 울프에 따르면 우리는 “무릇 자유를 가능케 하는 … 사회적 의무라는 점이 되면 머리가 혼란스러워져버린다”고 한다. 그리고 이 혼란은 시장에서 가정, 나아가 대학으로 모든 수준에서 침투하고 있다고 한다.

이러한 혼란은, 과거 수십년간 미국에서 뿌리를 내린 권리라는 것에 대한 새로운 태도와 큰 관계가 있다. 미국인은 지금까지 오랜 기간, 권리에 관해 말해 왔다. 그것은 우리가 계승한 유산의 일부이며, 애플 파이와 마찬가지로 미국적인 것이다. 미국 헌법 초안에 권리 장전이 부가되고, 미국 헌법의 일부로 되었을 때, 권리가 먼저 어떻게 말해졌는가를 생각해 보자. 여기에서의 권리는 사회적 자유 ― 즉 집회, 출판, 언론의 자유와 관련된 것이며, 정부는 시민에 대해 무엇을 할 수 없는가(예를 들어 부당한 조사나 체포를 해서는 안 된다)에 관련된 것이다. 권리는 오로지 불가침의 권리, 존대한 정부권력으로부터 우리를 보호하는 하나의 수단으로서 정해지며, 어떤 의미에서의 ‘자격’으로서는 정해지지 않았다. 권리를 가진 시민이란 사회적 산물이며, 공동사회의 산물이며, 내가 앞에서 말한 시민 사회의 세계 속애 존재하는 가족, 그 가족 속의 남녀였다. 하지만 시간이 결과함에 따라, 권리를 가진 개인이 “나(me)와 나(my)의 권리”로서 자립하게 되었다. 일찍이 단순히 개인의 욕망으로 간주되었던 것이 오늘날에는 권리로서 요구되게 되었다. 그 권리는 성적 충족, 자존심, 무제한의 자족표현을 ‘권리’로서 요구했기 때문에, 모든 인간이 예외 없이 여러 가지 소비자로서 선택하는 ‘권리’를 갖는다는 관념에 이르기까지, 모든 영역으로 확대되었다. 메어리 앤 그랜든이 <권리에 관한 담화>에서 지적했듯이, 여기에서는 권리와 권리를 규정된 자아가 자립하게 된다. 사회성과 책임이라는 차원이 결여되는 것이다.

이러한 변화를 돌이켜보면, ‘권리 담의’에서 생기는 정치적 부산물을 이해하게 쉽게 된다. 확실히 그것이 민주주의를 심판하는 입장에 서게 한다. 내가 앞에서 말한 하나의 논점을 더욱 밀고 나아가, 이 점을 설명해 보자. 우리가 보는 바, 도덕적으로 몹시 지친 좌익은 욕망을 권리로 전환하고자 함으로써, 시장의 논리에 도전하지 않고 오히려 그것을 받아들이고 있다. 정치적 좌익은 오늘날에도 엄밀히 경제적 의미에서의 시장을 길들여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으나, 사회적 관계에 관한 시장 모델을 승인하고 (오늘날의 말로 하자면) 모든 ‘라이프스타일’을 지니며 살아가는 개인의 자유에 대한 제한은, 이미 권리와 자유로운 표현에 대한 인정하기 힘든 제한이라고 생각한다. 다른 한편으로 정치적으로 좌익인 많은 사람들은 경제생활에서는 시장의 무제한의 작동(제약이 적으면 적을수록 좋다고 한다)을 애호하면서, 가족생활과 노동생활에서는 엄격하게 성적, 사회적 원칙을 필두로 하여 전통적 도덕의 부활을 바라고 있다. 양자 모두 “각각의 도덕적 의무를 정하는데 있어서” 시장이나 나아가 국가에 의존하고 있는 셈인데, 그러나 “양자가 진정으로 필요로 하는 것은 시민사회 ― 가족, 공동사회, 우정의 네트워크, 직장에서의 연대, 자발적 활동, 자연발생적인 그룹과 운동 등이며, 그것은 근대화, 현대화의 진행을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을 완정시키는 것이다”라고 울프는 주장하고 있다.

이처럼 귀중한 목표의 달성을 촉진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권리라는 것을 철저하게 사회적인 것으로 이해한다는 오랜 관습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권리는 항상 다른 것에 대한 일이다. 항상 우리를, 타인들과 관련시키는 것이다. 권리는 자립적인 것이 아니다. 권리는 우리가 누구인가, 무엇인가가 제일이라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왜 아픈 아이를 밤새도록 간병하는가, 이웃 사람이 퇴원하면 왜 스프를 끓여서 가지고 가는가? (홍수나 허리케인처럼) 자연재해의 피해자에게 구호물자가 두루 전달되게 하기 위해서 왜 몇 시간이나 일을 하는가? 이러한 이유를 오늘날의 ‘권리 담의’ 속에서, 그것을 통해 이해하고자 한다면, 이러한 사회적 책임감과 공감에 토대를 둔 활동의 의미를 심각하게 왜곡해버리는 것이 될 것이다. 왜 그렇게 하는가를 우리는 직관적으로 알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이유가 정치적으로 올바르다는 것을 설명해야만 한다고 느낄 때에는, 우리의 관심을 현실보다 훨씬 더 개인주의적으로, 또한 비사회적으로 설명하기 십상이다. 자유-민주주의의 ‘최고의 논의’는 권리의 논의라는 입장으로 다시 귀결되어 버리는 것이다.

강대한 국가(여기에 우리가 친숙한 복지국가를 포함시킨다고 하더라도)에 대한 토크빌식의 의미에서의 불안에 관해서는, 내가 앞에서 거론한 정치사상가는 아무도 해결책을 알지 못한다. 19세기 유럽에서 가장 선진적인 복지국가는 독일의 비스마르크의 ‘복지-군사’ 국가였다. 여기에서 사회복지는 가난한 사람들을 국가에 충실하게 의존하게 하는 것을 명확하게 꾀하고 있었다. 사회적 통제가 그 목적이며, 복지는 그를 위한 전략이었다. 현대 서구에서 살고 있는 대부분의 모든 사람들에게 복지국가는 시민사회가 시장의 힘에 굴복하기 시작했을 때에 생겨난 윤리적 관심과 정열로부터 출현한 것이었다. 이러한 관심이 국가는 ‘시민사회의 도덕적 유대를 대신하는 유일한 것’이라는 신념으로 바뀌어 버렸다. 그러나 과거 50년의 사실에서 명확하게 되었듯이, 국가에 의한 원조의 논리와 장기적으로 국가에 의존하는 계급의 출현이 모두, “정부에 의한 통치를 가능하게 해 온 사회적 유대 자체”가 더 한층 약화되었던 것이다.

이 점을 확실히 해 보자. 나는 국가 없이도 살아갈 수 있다고 믿을 정도로 소박하지 않으며 어리석지도 않다. 국가는 잘 키우기만 한다면, 민주사회에서 극히 중요한 역할을 한다. 내게 있어서는 오히려 국가주의의 논리에 관해 불안하게 생각한다. 그 논리란 우선 국가를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또는 사람들의 관심에 부응할 수 있는 유일한 것으로 보는 견해이다. 국가가 그러한 역할을 확대하게 되면 지방적인 제도의 능력을 서서히 축소되어 버린다. 그것이 하나의 문제이다. 다른 하나의 문제는 국가주의의 이데올로기라고 불러야만 할 것이다. 이 이데올로기는 장 자크 루소가 염두에 두었던 시민적 국가체제, 그리고 프랑스 혁명에 참가한 사람들을 포함한 시민적 활동가가 오랜 기간 동안, 실천으로 옮겨왔던 시민적 정치체제에서도 발견되고 있는데, 북미에서는 그다지 유행하지 않았다.

국가주의자란 국가주의적인 시민은 국가에 대해서 망설이지 않고 충성하고, 국가와 그 목적을 우선시하는 시민이다. 국가주의자는 우리 시민을, 아주 강력한 중앙집권적 기구에 의해 동원되는 대상으로 간주하고, 가족의 일원, 이웃 사람, 공제조합이나 여성의 의료 조합 회원, 아프리카 코끼리를 멸종으로부터 지키려고 하는 활동가, 독서회의 참가자, 침례교도나 가톨릭교도 등이라고는 보지 않는다. 국가주의자는 우리가 여러 가지 국가의 명령에 에워싸이고, 의무를 지게 되기를 바란다.

그러나 민주적 시민사회의 시민은 정부가 도덕적 의무를 약화시키기도 하고 강화시키기도 할 수 있다고 하더라도, 도덕적 의무의 대상으로 될 수 없다는 것을 이해하고 있다. 몇 세대를 연결시킨 인간관계, 친구나 이웃사람의 세계에 대한 우리의 개별적인, 도덕적 근거의 어떤 책임감이 쇠퇴하게 되면, 국가가 그것의 빈틈에 파고 들어온다. 그리고 넓은 의미에서의 한정된 문제를 일시적으로 해결하는지도 모르나, 그러나 확실히 이 국가에 의한 해결은 장기적으로는 의무감을 더욱 엷게 만들어버리게 된다. 머지않아 국가 자체를 지지하는 힘이 저하되며, 사람들은 방향감각을 잃고, 권리를 손상시킬 수 있으며, 불만만이 자라게 할 수 있다. 그 증거가 탈세행위이며, 사람이나 재산에 대한 폭력 행위의 증가이며, 가족을 포함한 사회적 유대의 전례 없는 대규모의 해체이며, 절망감과도 닮은 정치적 냉소주의의 대두이다.

현대의 수많은 관찰자는 서유럽이나 스칸디나비아 국가들처럼 오랜 역사를 지닌 복지-민주주의 국가에 있어서도, 그러한 시민적, 사회적 위기의 배후를 보고 있다. 고령자의 고독, 젊은이들의 무관심, 교회나 공동 사회 조직의 쇠퇴, 가족의 유대와 가족생활의 의례와 리듬의 해체 등의 이야기는 이미 친숙한 것이다. 복지 수당이 직접 그 원인이 되었다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상층부만 비대한 관료제라는 부담을 지고 있는 국가는 국민을 그 ‘필요’에 의해 분류하고, 그 필요를 전제로 여러 가지 개혁 방안을 실행하지만, 그것은 이른바 ‘사회공학’(social engineering)의 방향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으며, 그것은 민주적 자유, 시민사회, 개인의 자유 사이에 긴장을 낳는다는 점이다.

한편으로는 개인주의라는 유력한 수사학과 냉소주의 문화, 다른 한편에서 우리는 실제로 가족, 공동사회, 교회, 이웃관계의 구성원으로서 어떻게 행동하는가 ― 이 양자를 구별해야만 하는 것은 지금 분명하다. 어쩌면 분명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사회적 일상생활은, 확실히 강한 압력에 노출되어 있다. 그것은 민주주의 자체가 막다른 골목에 처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범죄를 두려워하는 사람들은 더욱 더 ‘법과 질서’를 추구하며, 범죄자에 대해서 더 엄한 벌을 추구한다. 미국에서 사람들은 안전이 가장 공격적인 자조(自助)라고 생각하며, 자위의 무기를 지니게 되었다. 분노한 사람들은 정치가한테 그만두라고 절규하는데, 그렇지만 새로운 정치가가 조금이라도 더 낫다고 믿고 있는 것은 아니다. 불안에 떨고 있는 사람들은 이웃집 아이들이 자기 아이들보다 더 부당하게 편애를 받고 있는 것은 아닌가라고 심려한다. 절망한 사람들은 자기 자신의 생활과 주변 사람들과의 생활을 파괴한다. 이유를 분간하는 못하는 사람들은 여기저기로 어수선하게 돌아다니며, 주변이 혼란하여, 자신이 누구인가, 무엇인가도 확실하게 않게 된다. 부주의한 사람들은 자기네 아이들을 돌보지 않게 되며, 그래서 교사와 사회적 노동에 대해 불만을 터뜨리게 된다. 양친이 일으킨 분쟁을 교사나 사회적 노동으로 처리하자고 하지만, 글래서 “자기 자신의 일은 자기 스스로 처리하자”고 외치는 것이다. 물론, 인간의 결점의 상당수는 처리되지 않는다. 인간생활의 모든 것은 이른바 조용히 체념하면서 보내지게 된다. 우리는 모두, 때로는 공포와 슬픔으로부터 구출되어야만 한다. 그러나 나는 구체적으로 존재하는 절망, 냉소주의, 폭력을 시대의 음울한 배후로 보고, 그것을 민주주의에 대한 하나의 경고로 이해하고 있다. 민주주의 자체가 여러 가지 갈망 ― 자유, 공정, 평등에 대한 갈망을 해방시켰는데, 그러한 갈망을 충족시킨다는 과제를 지금 처리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경고인 것이다.

― Jean Bethke Elshtain, Democracy on Trial. New York: Basic Book, 19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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