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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가야마 겐, 『푸코 : 생명권력과 통치성』

中山元フーコー 生権力統治性

5. 국가에 의한 통치 : 독일의 내치[폴리차이] 모델

1. 국가이성 개념


* 국내에서 통용되는 번역어로 최대한 바꾸려고 노력했다. '폴리차이'는 '내치'라는 번역어가 적절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conduite는 명료한 경우가 아니라면 '품행'으로 옮기지 않고, '인도, 인도하다' 등으로 적는다. 

* 그러나 국내의 적합한 번역어로 바꾸지 못한 부분도 있다. 눈이 밝지 않아 생긴 문제라고 널리 혜량을 구한다.  

 

국가의 이념

그런데 이렇게 해서 인간의 신체, 생명, 정신의 통치가 사목의 원리의 연장과 수정 아래서 진행된 결과, 근대의 다양한 국가의 이념들이 등장한다. 우선 종교개혁에서 나타난 대항품행 개념은 근대의 초기에 영방국가[領邦国家, 13세기에 독일 황제권이 약화되자 봉건 제후들이 세운 지방 국가]가 성립되기 위한 커다란 실마리가 됐다. 사목의 위기와 폭발과 사방으로 흩어짐四散 때문에 몇 개의 새로운 정치적 개념이 탄생했다. 예를 들어 국가이성, 폴리차이, 세력균형과 외교 등의 개념이다. 그 배경에는 16세기에, 스콜라철학에서 믿었던 정치적 이성 개념이 [꽃을 피우기] 시작했음을 지적할 수 있다.

루터의 종교개혁이 초래한 것은 그 나라의 종교는 그 나라의 영주가 정한다는 영방국가領邦国家의 성립과 신성로마제국 권위의 붕괴였다. 황제 칼 5세가 제국에서 루터를 추방하라고 명했는데도, 나라들의 지배자가 이것에 응하지 않으면 아무 의미도 없다. 그리고 종교개혁은 점점 더 통치권력이 주도하는 유형의 양상을 띠게 됐다. 나라들의 지배자는 종교개혁을 추진함으로써 제국으로부터 독립된 정치적 지배권을 확립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제국은 개신교 국가들과 가톨릭 국가들로 분열되면서, 각각이 자국 안에서 지배자의 종교를 강제할 수 있다고 확정된 것이다. 이 체제는 1648년의 베스트팔렌조약으로 최종적으로 확립되지만, 1555년의 아우구스부르크의 화의(和議)에서 이미 현실화됐다. 이리하여 새로운 정치 단위를 통치하기 위한 새로운 정치의 이념이 요구됐던 것이다.

국가이성은 주로 이탈리아에서 생겨난 국가통치의 이념이며, 레종 데타라는 프랑스어에 남아 있으며, 국가의 생존을 유지하고 강화하기 위해 취해야 할 원칙이라는 의미로 쓰인다. 때로 국가가 스스로의 생존을 위해 어떤 행위를 취하더라도, 초법규적으로 허용된다는 국가 이기주의적 맥락에서 말해지는 경우도 많았다. 그러나 이탈리아의 정치학자 조반니 보테로(1544-1617)는 훨씬 넓은 의미에서 국가가 일상적인 기능에 있어서 (매일의 관리에 있어서) 기초지어졌을 때부터 나라를 유지보수하는 것을 가능케 하는 종류의 합리성이라고 말했으며, 국가의 자존을 지향하는 기능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내치[폴리차이]는 독일에서 생겨난 내정적인 이념이며(푸코는 폴리스라고 프랑스어로 표기하지만, 경찰과 헷갈리기 쉽기에 독일어로 표기한다[이 번역본 등에서는 모두 이하 '내치'로 옮긴다]),국내 질서와 국력 증강 사이의 동적인 (그렇지만 안정적이고 통제 가능한) 관계를 수립하는 것을 가능케 하는 계산기술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국가이성도 내치도 국가가 자존하고 강화되기 위한 이념이지만, 세력균형이나 외교개념은 자존하고 있는 국가 사이에서 세력의 유지와 균형을 목표로 하는 이념이다. 이것들에 대해서는 머지않아 더 자세하게 검토하지만, 사목권력이 붕괴했을 때, “정확하게 말해서 1580년과 1650년 사이에 고전주의 시대의 에피스테메의 창설이 이뤄졌을 때”, 그 사목권력이 붕괴된 후의 장소에 새로운 국가의 이념이 등장했던 것이다. 이 장에서는 이런 이념에 대해 고찰하는데, 그 전에 중세 이후 국가의 통치 역사를 돌이켜보자.

 

중세의 통치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치학이 번역되지 않았던 중세에서 정치학의 이념은 키케로를 통해서 전해졌다. 특히 마크로비우스의 스키피오의 꿈의 주석을 통해서다. 마크로비우스는 플라톤과 신플라톤주의의 전통을 비판하면서 키케로의 정치철학을 소개했다(‘스키피오의 꿈은 키케로의 국가의 말미를 장식한 부분이다). 그리스의 전통에서 정치학에 종사하는 것은 신에 대한 명상과 철학이라는 행위보다 낮은 차원의 활동으로 여겨졌다. 마크비우스가 비판하는 플로티누스는 정치적인 덕이 인간을 신에 가까운 존재로 만드는 것이 아니지만 신과 똑같이 되려면 플라톤이 말한 것처럼 세속적인 삶의 방식과 사물로부터 도주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키케로에게서 배운 마크로비우스는 국가를 위해 한 몸을 바치는 자는 철학에 전념하는 자와 마찬가지로 천국에서 환영 받고, 영원한 행복을 향유한다고 주장한다. 이를 위해 정치가에게 필요한 것은 이성에 근거하고 정의에 맞는 것만 이루는 사려(프루덴티아에), 정념을 이성에 따르게 하는 절제(템페라티아에), 위험을 두려워하지 않고, 역경에도 굴하지 않는 굳건함(포르티투데니스), 배분적 정의(유스티티아에)의 네 가지 덕이 필요하다.

이렇게 덕을 갖춘 정치가는 자신을 배려하고 통제할 수 있는 인간인 동시에, 키케로적인 의미에서의 국가를 통치할 수 있는 인간이다. 그리고 선한 지배자이며, 국가의 창립자인 자는 거의 신과 동등한 지위를 향유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리하여 정치가는 사람들의 눈에 보이는 공적인 빛 속에서 덕의 높이를 나타내는 인간이며, 보통 사람보다도 신에 가까운 존재로 여겨지게 됐다.

다만 13세기에 아리스토텔레스가 본격적으로 소개되자, 정치적 활동의 제약의 크기가 주목받게 된다. 정치학은 인간의 실천적 행위에 관련된 학문이며, 신의 명상 같은 높은 지위를 인정받지 않는 것이다. 아퀴나스에서 단테에 이르기까지 중세의 정치철학은 인간 삶의 영위에 있어서의 정치학의 탁월성과, 신의 명상으로 대표되는 철학의 탁월성 사이에서 흔들리게 된다. 어쨌든 정치가(폴리티코스)라는 개념은 타자와 함께 사는 지상의 공화국에서 공통선을 찾는/요구하는 중요한 행위를 나타내는 개념이었다.

중세의 스콜라 철학의 통치이성은, 이 공통의 공공선을 중심적인 이념으로 한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왕을 사목자와 같은 것이라고 생각한다. “사목자는 양떼에 있어서의 선을 찾지만/요구하지만, 모든 지배자는 복종하는 집단의 선을 찾는다/요구한다는 것이다. 아퀴나스에게 왕은 하나의 도시 또는 영지領国의 사람들을 그 공통선을 위해 지배하는 자이다.

그렇다면 왕은 어떻게 사람들을 통치해야 할까? 아퀴나스는 이를 위해 몇 가지 종류의 모델을 제기한다. 푸코는 이를 신과의 유비, 자연과의 유비, 사목자나 아버지와의 유비라는 세 개의 모델로 설명한다. 우선 신과의 유비는, 대우주와 소우주의 대비로 행해진다. 자연의 사물의 통치에는 보편적인 통치와 개별적인 통치가 있고, 보편적인 통치를 행하는 것은 창조주인 신이다. “신의 통치는 모든 것을 포함하고, 신의 섭리는 모든 것을 지배한다는 것이다. 이에 반해 개별적인 것의 지배는 미시적 인간의 자기 통치이다. 인간은 이성에 의해 스스로를 지배하는 것이며, 이것은 거시적 신의 지배를 모방한다. “인간과 이성의 관계는 세계와 신의 관계와 같다.”

또 신과의 유비는 이성에 의한 인간의 통치뿐 아니라, 도시와 영지의 통치자인 왕의 임무에도 해당된다. 신은 세계를 창조했으나 왕은 지배하는 인간과 국가를 창조할 수는 없다. 이미 자연에 존재하는 것을 이용할 수밖에 없기에 왕은 우선 국가에 적당한 장소를 선택할 필요가 있으며, 국가에 있어서의 교회나 법원이나 시장의 장소를 선택할 필요가 있으며, 사람들의 직업에 따라 장소를 지정하고, 사람들이 살아가도록 할 필요가 있다. 이것이 국가의 설립에서 보이는 세계 창조와의 유비이다. 다음으로 도시와 영지의 설립을 세계가 창조된 방법으로부터 배울 뿐만 아니라 이를 지배하는 방법도 세계에 대한 신의 성스러운 지배 방법으로부터 배울 필요가 있다.” 국가의 창조와 지배의 양쪽에서 왕은 신을 흉내낼 필요가 있는 것이다.

두 번째의 유비는 생명체의 생명력과의 유비이다. 아퀴나스는 인간의 신체나 다른 동물의 신체 속에, “모든 지체肢體(모든 구성원)의 공통선을 지켜보는[보살피는] 지배적인 힘이 존재하지 않으면 붕괴해버릴 것이다고 했다. 이것은 국가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라고 말할 수 있다. “각자는 자기 자신의 선으로 향하며, 따라서 공통선을 간과하려고 한다.” 그래서 국가에도 이 지배적인 힘에 상당하는 것이 필요해진다. 국가에 있어서는 각각의 개인의 특별한 선을 넘어, 다수자의 공통의 선을 향해 사람들을 강제하는 것이 없으면 안 된다.” 이것이 지배하는 권력이다.

세 번째의 유비는 사목자와의 유비이며, 이것은 처음에 제시했던 것 그대로이다. 왕은 사목자로서, 아버지로서 통치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사람들이 사회 속에서 함께 살아감으로써 혼자서는 획득할 수 없는 것을 손에 넣으려고 하는 것이며, 이것은 선한 생활이다. “선한 생활이란 덕이 높은 삶이며, 덕이 높은 삶이야말로 함께 사는 사람들의 목적인 것이다.” 덕이 높은 삶을 보냄으로써, 혼이 구제되도록 하는 것이 국가의 목적이며, 왕의 임무는 이를 실현하는 것이다. 왕은 개인의 영원한 구제가 위험에 노출되지 않도록 조처할 뿐 아니라, 그 구제가 가능해지도록 조처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푸코가 이런 세 가지 유비를 통해 주목하는 것은, 인간의 신체, 가정, 국가, 그리고 자연의 전체에 대한 우주론적인 일대 연속체의 이름으로, 왕이 통치하는 것을 인가받고, 이 연속체가 주권자가 따라야 할 모델을 제공하는 것이다. “왕이 통치할 수 있고 또한 통치해야만 하는 것은 왕이 신으로부터 자연이나 사목자를 통해 한 집안의 아버지에 이르는 이 거대한 연속체의 일부를 이루기 때문이며, 그리고 16세기에 붕괴한 것은 이 연속체이다.

신이 자연을 사목적으로 통치했다고 한다면, 구원, 복종, 진리의 세 가지 축에 있어서 지배했을 것이다. 구원의 축에 있어서는, 세계는 인간의 구원을 위해 만들어진 것이 되며, 인간이 만들어진 것은 이 세계에서 살기 위해서가 아니라 다른 세계로 이행하기 위해서라는 것이 된다. 그렇다면 모든 것은 인간중심주의이면서, 인간은 이 세계를 위해서 살아 있지 않는 것이 된다.

이것은 중세와 르네상스의 대우주와 소우주의 대비의 사고방식으로 상징되는 것이다. 우주와 자연은, 거대한 우주로서, 인간을 비추는 거울이며, 큰 인간이다. 동시에 소우주인 인간은 가장 높은 천구의 가시적인 질서를 반영하고 있음에 틀림없다. 대우주는 하나의 커다란 세계이지만, 소우주의 극에는 하나의 특권적인 피조물인 인간이 존재하고 있고, “그것이 한정된 규모에서, 천공, 성신星辰, 산악, 하천, 폭풍우의 광대한 질서를 재현하고 있는 것이다.

복종의 축에서 생각한다면, 신은 인간들에 대해 구원의 표시를 주고, 신의 의지를 제시한 것이라고 푸코는 생각한다. “사목적으로 통치되는 자연은 곧 기적, 위협, 표시로 가득 찬 자연이 된다. 그때 세계의 양상은, 문장, 문자, 암호, 어두컴컴한 말, 터너에 따르면 상형문자에 의해 뒤덮이는 것이다. 이 표시는 각각에 벌의 위협과 구원의 약속과 선택의 표시로서 해독되어야 할 것이다. “세계는 해독되어야 할 기호로 뒤덮여 있기때문에, “인식하는 것은 해석하는 것이 된다.

세 번째인 진리의 축으로 생각하면, 기호로 가득 찬 세계는, 그 진리가 해독되기를 기다리는 세계라는 것이다. “세계는 한 권의 책이며, 그 열려 있는 책 속에서 사람은 진리를 발견할 수 있었다.” 사람은 유비와 유사의 관계 속으로부터, 세계의 진리를 해독해야만 한다. 그래서 자연과 말은 무한하게 서로 교차하며, 읽는 유령을 터득한 자에 대해서, 이른바 유일하고 방대한 텍스트를 형성하는 것이다


군주권력의 시대의 통치

이런 중세적 세계의 이미지는 이미 지적했듯이 “1580년부터 1650년 사이에, 고전주의의 에피스테메의 창설 자체가 이뤄졌을 때에 소멸하게 된다. 그 절단을 중세의 사목적 우주론을 떠받치던 세 개의 축으로 고찰해보자. 첫 번째인 신과의 유비의 축을 절단한 것은 갈릴레오의 천문학이다. 갈릴레오는 망원경을 발명함으로써 아리스토텔레스적인 성신신학星辰神学을 타파했다. 달 위의 세계와 달 아래의 세계의 구별이 소멸된다. 대우주와 소우주의 조응은 무지개처럼 무산霧散됐다. 이제 진리는 자연의 신의 말에 의해서가 아니라, 수학의 말에 의해 작성되게 됐다.

그리고 이제 우주를 지배하고 있는 것은 계층구조가 아니다. 이 우주를 해독하려면 유비적인 계층구조가 아니라, 데카르트가 『정신지도의 규칙』에서 제시한 분석방법이 필요해진다. 분석에서도 비교는 행해진다. 그러나 이 비교라는 작업은 세계가 어떻게 질서 잡혀져 있는지를 분명히 하는 역할을 맡는 게 아니다. 그것은 사고의 질서를 따라서 행해지며, 단순한 것에서 복잡한 것으로 향하는 것이다.

두 번째의 자연과의 유비의 축을 절단한 것은 포르 루아얄의 『일반문법』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제 세계는 신의 표시로 가득 차 있는 것이 아니다. 원래 기호나 암호라는 것은 인간이 분석에 의해 만들어낸 것이다. 중세의 점술’(디비나티오)신에 의해 세계 속에 미리 배분된 언어를 주워 담는것이며, “신적인 사물을 꿰뚫어보는 이었다. 그러나 이제 기호가 기호로서 작동하기 시작하는 것은 인식의 내부에서이다.” 이리하여 미지의 기호나 무언의 표식은 더 이상 있을 수 없게 되는 것이다.

세 번째의 사목자와의 유비의 축을 절단한 것은 말브랑슈에서 콩디약에 이르기까지의 기호의 철학일 것이다. 분석의 방법에 의해 기호가 작성되지만, “정신이 분석을 향하기 때문에 기호가 나타나며, 정신이 기호를 손에 넣고 있기 때문에 분석은 끝없이 이어지게 된다. 이 기호가 만들어내는 공간은 표상작용의 내부, 관념의 간극, 관념이 스스로를 분해하고, 재합성하고 스스로와 시시덕거리며 노는 투명한 표상의 타블로의 두께가 없는 공간이며, 도덕성을 따질 수 없는 공간이다.

이리하여 갈릴레오와 데카르트에 의한 17세기의 과학혁명에 의해 코스모스의 붕괴와 우주의 무한화가 일어났는데, 푸코는 이 시대에 정치적으로도 새로운 조작 개념이 등장했음을 지적한다. 그것이 통치술이라는 개념이다. 주권자는 주권의 행사에 있어서, “신이 자연에 대해서, 사목자가 양에 대해서, 가장이 아이들에 대해서 행하는 것과 다른 것을 요구하게 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자연은 자연의 과학적인 원칙이 지배한다. 인간의 세계는 통치의 이성이 지배한다. 대우주와 소우주의 조응이 붕괴하는 동시에, 우주와 국가를 각각 지배하는 이성(raison)이 탐구되는 것이다. “자연의 원칙(프린키피아 나투라)과 국가이성(레종 데타), 자연과 국가, 이것이야말로 근대서양의 인간에게 주어진 다양한 지식이나 기술의 양대 좌표로서 마침내 구성되며, 마침내 분리된 것이었다.”

 

국가이성

그 배경에 있는 것은 종교개혁으로 독일에 다수의 영방국가가 설립되고, 그것이 지역적인 국가의 성립 모델이 된 것이다. 마키아벨리가 군주의 권력 행사에 대한 전통적인 속박을 풀고, 루터가 지배하는 자가 종교를 정한다는 원칙을 확립하기 위해 크게 기여했다. 그 후 수세기의 유럽에서의 군주국의 성립에 있어서, 이 두 사람의 힘은 크지만, 특히 루터의 의도치 않은 기여가 컸다. 피기스(J. N. Figgis)가 지적하듯이, 리슐리외는 개혁운동의 산물이며, “루터가 없었다면 루이 14세는 있을 수 없었을 것이다. 실제로 교회의 종교에서 국가의 종교로 바뀐 것이다. 그 최초의 형태가 왕의 신성한 권리이다.”

제국과 교회의 울타리 안에서 등장하기 시작한 근대의 국가는 종교적 권위를 부정했기에 그 정통성을 이론적으로 확보하기가 어려웠다. 세속적인 국가는 그때까지 종교적 권위를 근거로 삼았기 때문이다. 더 어려운 것은 기독교의 권위와 함께 토마스 아퀴나스의 아리스토텔레스적인 국가의 이론도 부정되었기 때문에, 국가의 개념을 일신할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이제 정치가라는 개념으로는 실제의 정치활동을 잘 표현할 수 없었던 것이다.

이를 위해 중요한 역할을 수행한 것이 마키아벨리(1469-1527)이다. 그때까지의 전통적인 정치학은 키케로의 공화주의적 정치학에 의거했다. 정치학(폴리틱스)은 폴리스의 학문이었다. 그리고 국가의 통치에 대해 쓴 많은 책이 군주를 위한 귀감을 제시하는 것이었다. 로마의 키케로의 이념과 사목의 이념을 따라, 국가의 통치자는 양들의 행복을 목표로 한다는 것을 배운 것이다. 정치란 정의와 이성을 따라 국가를 통치하는 술이며, 통치의 기술은 기술 중의 최고의 기술이었다.

그러나 마키아벨리가 보여준 것은 이런 폴리티코스의 개념과는 이질적인 국가(state) 개념이었다. 프랑스어의 국가(état)라는 말과 마찬가지로, 원래는 상태나 상황을 의미하는 state라는 단어에는 국가외에 세력자의 세력”, ‘공권력’, ‘지배자등의 의미가 있다. 마키아벨리는 『군주론』에서, 폴리티코스라는 단어를 전혀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사용하지 않는다. 이 책에서 마키아벨리가 전개하려고 한 주제는, “군주가 소유하는 나라를 어떻게 통치하고, 유지해야 하는가라는 문제였으며, 대등한 시민에 의한 통치라는 공화적인 의미를 담고 있는 폴리티코스의 학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폴리스는 시민이 이성을 따라서, 정의와 공통의 선을 목표로 하여 공동으로 통치하는 장인데, 나라[국가]는 군주가 그 국가의 국민의 이익을 목적으로서가 아니라, 스스로의 이익을 목적으로서 소유하고, 유지하는 장이다. 이 책은, 피렌체라는 과거의 공화국을 자신의 나라로서 소유하는 메디치가에 바친 것이었다. 게다가 시민들의 적대감 속에서, 정복자로서 추방의 신분에서 돌아온 젊은 줄리아노 데 메디치에게 바쳐야 할 것이었다(다만 줄리아노는 요절했기 때문에, 조카이자 피렌체의 최고 지휘관에 막 임명된 로렌초에게 바쳐졌다).

이 어려운 과제에 직면했던 줄리아노에게는 당시의 역사가인 프란체스코 귀차르디니(1483-1540)를 비롯하여 다양한 의견서가 제출됐다. 피렌체의 국민[인민]에게는 아직 자유를 원하는 공화주의적인 정신이 강했기 때문에, 자유와 평등을 바라는 사람들도, 군주의 지배를 좋아한다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런 의견서에는 주로, 신분이 높은 유력자에게는 지위와 권력을 부여할 것, 신분이 높으나 권력을 원하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지위와 명예를 부여할 것, 평민들에게는 안심하고 일에 종사하도록 국내의 평화를 확보할 것을 권고한 것이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그때까지 공화국의 전통과 정신을 이어받은 사람들에게 권력, 명예, 치안이라는 세 개의 축으로부터, 공화국보다 군주국이 바람직하다는 것, 자신들이 통치하기보다는 메디치가의 통치를 받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것을 확신시키는 것이라고 강조되었다.

마키아벨리가 군주론』을 헌정했을 때에는, 이런 권고서보다 뛰어난 정치술과 정치관을 갖추고 있음을 나타내는 것이 필요했다. 그리고 마키아벨리는 자신이 그 적임자라고 확신했다. “[]이 정한 바에 의해 견직물업도 모직물업도 이해타산도 전혀 모르는 제게는, 정치를 말하는 것이 [본]성에 해당됩니다는 것이 마키아벨리의 자화상이기 때문이다.

마키아벨리가 직면한 것은 전통적인 공공선 이론이 더 이상 적용될 수 없는 이탈리아의 정치상황에서, “이탈리아의 모든 인민에게 행복을 가져다주는 새로운 형태를 산출하는 재료가, 과연 이 나라에 있을까라는 질문에 답하는 것이었다. 그때 마키아벨리가 중시한 것이 국가(stato)의 생명력이었다. 이를 위해서는 군주 또는 공화국이, 스스로의 stato를 어떻게 확립하고 국가(stato)를 보전할 수 있는가를 물을 필요가 있었다군주론』은 군주제의 stato를 분석하고『전술론』이나 『로마사 논고에서는 공화제의 stato의 가능성을 고찰한다. 이 모든 것은, 현실의 이탈리아라는 상황(stato)에서 권력자가 자신의 세력(stato)을 확립하고, 국민 전체의 행복을 확보할 수 있는 국가(stato)를 유지할 수 있는가를 묻고 있었던 것이다. 여기서 국가이성(라티오네 데 stato) 개념의 싹이 탄생한 것이다.

푸코는 이 국가이성 개념은 마키아벨리가 창조한 것이 아니라, 마키아벨리를 반박하는 진영에서 만들어졌다고 생각한다. 다만 마이네케가 지적하듯이, 마키아벨리 이전부터, 이미 국가의 힘 그 자체에 주목하는 이론이 발생했다. 프랑스의 신학자 장 젤송1404년에, 다양한 법률이 국가의 목적인 평화의 유지에 도움이 안 될 때, 법은 이 목적을 따라 해석되어야 한다고 지적했다. “필요는 법을 갖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국가이성이라는 새로운 사고방식은 이탈리아의 작은 도시국가에서 생겨난 것이었다. 11세기부터 12세기 무렵까지, “결실이 풍부한 배후지로 혜택을 입은 롬바르디와 토스카나 지방 등, 이탈리아 북부 지방에는 다수의 도시국가가 성립되고, 독일 황제의 지배를 거부하며, 자치를 확립했다. 피사에서는 1085년에 콘술에 통치를 맡기는 도시국가(코무네)가 성립했으며, 1097년에는 밀라노에서, 1125년에는 볼로냐와 시에나에서 이런 코무네가 성립했다.

그 후, 이런 도시는 급속히 발전한다. 피렌체는 14세기에는 인구가 10만 명으로 확대되고, 베네치아, 밀라노, 제노바 등의 이탈리아 도시와 파리가 유럽의 5대 도시가 될 정도로까지 성장한다. 주변의 농촌에서 도시로 유입된 농민이 도시의 공예산업, 무역, 환전업의 성장을 촉진했다.

이윽고 이런 도시는 통치를 외부로부터 온 통치자(포데스타)에게 맡기게 된다. 권한이 지정되고, 정해진 임기 후에는 그 작업의 내용이 점검된다. 12세기 말에는 이탈리아 북부의 전체가 이런 코무네에서 조직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문제는 로마법 아래서는, 도시의 자치와 독립의 근거가 존재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1235년에는 프리드리히 2세가 피아첸차 회의에서 이탈리아의 도시들에 제국의 통일로 복귀하라고 요구한다. 결국 로마 황제도 영토적 야심을 드러내고, 치열한 전투로 도시는 황폐해진다. 결국 이 긴 전쟁 속에서, 도시의 법률가들은 황제의 주장에 반박할 수 있는 이데올로기를 찾게 된다. 로마법학자들이 모두 황제의 주장을 지지하는 가운데, 삭소페라토의 바르톨루스Bartolus de Saxoferrato(1314-57)가 새로운 논리를 구축했다. 이것은 로마법의 혁명을 초래한 것이며, 법과 사실이 대립하는 경우에는 법에 맞게 사실을 개혁하는 것이 아니라, 사실에 맞게 법을 해석해야 한다고 주장한 것이다. 피렌체 같은 도시가 실제로 제국에서 독립해 자치를 할 경우, 그것을 사실로 용인해야 한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리고 스스로의 나라를 바치는める 자는, 통치자로서, 자국에서는 황제와 똑같은 권한을 소유한다는 원칙(lex in regno suo est imperator)을 제시한 것이다.

이 전통적인 국가 개념의 혁신은, 국가의 통치라는 사실을 통해 그때까지의 황제의 전통적인 권리를 부정하는 것이며, 이탈리아에서의 상태(stato)에서 모든 권리의 원천을 찾아내려고 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마키아벨리 또한 유럽에서의 현황을 전제 삼아 고찰한다. “나폴리, 교회국가, 피렌체, 밀라노, 베네치아의 다섯 개 국가의 체계에 의해 어떤 의미에서 균형을 유지한 상태에 의거하여, stato에 대한 고찰을 시작한 것이다.

이 상태에서, 마키아벨리는 메디치가의 군주들에게, 피렌체를 새롭게 통치하기 위한 마음가짐을 보여준 것이다. 우선 마키아벨리는 인간이 악한 존재라는 사실을 들이댄다. “인간은 사악하며, 당신에게 신의를 충실하게 지키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군주는 신의를 지켜서는 안 된다. 또한 사람의 원한은 선행에서 생기는 것이기 때문에, 선한 행위에 매달리면, “선행이 원수가 되는 것이다.

인간이란 누구나 사리사욕을 추구한다는 것은 마키아벨리의 깊은 신념이었다. 군주는 조언자들이 사리사욕을 생각한다는 것을 전제로 해야 한다. “조언자가 사리사욕으로 내달리지 않는다는 것은 도저히 생각할 수 없다. 왜냐하면 사람은 어쩔 수 없는 상황 때문에 선한 자가 되는 셈이어서, 그렇지 않으면 모두 당신에게 사악하게 되기 때문이다.

이것은 시민들이 공통의 선을 위해 국가를 형성한다는 아리스토텔레스와 키케로 이후의 전통적인 국가 개념을 파괴하는 사고방식이었다. 종교도 도덕도, 국가를 떠받치기 위해서는 필요하지만, 군주는 이것을 도구로서 파괴하는 사용해야 한다. 국가를 떠받칠 수 있는 것은 군주의 덕(비르투)뿐이며, 이를 위해서는 온갖 수단을 행사해야 한다. 이것은 마이네케가 지적하듯이, 국가이성의 원리로 이어지는 사고방식이며, “그것을 표시하는 말은 마키아벨리에게는 결여되어 있으나, 사실과 stato를 중시하는 새로운 사상적 흐름 속에서, 마키아벨리는 국가이성과 동일한 것을 말하고 있었던 것이다.

 

보테로와 국가이성

이 국가이성이라는 개념을 명확히 정의한 것은 1589년에 󰡔국가이성에 대해󰡕라는 책을 쓴 조반니 보테로였다. 이 시대에는 국가이성은 마키아벨리의 이름으로 말해졌으나, 보테로는 마키아벨리 같은 경건하지 못한 인물과 이 개념을 결부시켜서는 안 된다고 강력하게 비판한다. 국가(stato)는 인민의 확고한 통치이며, 국가이성은 이런 통치를 확립하고 유지하고 확대하기 위해 걸맞은 지식이다.

보테로는 마키아벨리와 마찬가지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군주의 덕이라고 생각하는데, 그것은 마키아벨리가 생각한 <기세>, 간사함도 아니다. 보테로가 특히 중요하다고 생각한 것은, 정의와 관대함이다. 정의는 평화와 화합의 토대이다. 신하를 공평하게 대우하고, 아첨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관대한 마음을 갖고, 빈자를 돕고, 덕이 높은 행위를 칭찬해야 한다. 이는 대부분 전통적인 군주의 귀감이라는 말에 가깝다. 그리고 마키아벨리는 군주가 정의와 관대함을 갖추고 있는 듯 보이게 하는것의 가치를 인정한 반면, 보테로는 군주가 실제로 정의를 중시하고 관대함을 추구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군주에게 공통선의 실현이라는 과제를 부여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보테로의 이 책에서 주목할 필요가 있는 것은 그때까지 없었던 시민들의 공동의 과제였던 공통선의 실현을 명확하게 군주의 과제로 삼음으로써, stato의 기술을 공통선 실현의 목적과 결부시키고, 전통적인 정치학의 언어와 국가의 통치의 언어를 통합한 것에 있다. “그때까지 정치학은 시민의 철학(정의, 우정, 화합)과 결부되었으나, 이를 분리하고, (군주의) 평판을 유지하고 높이는 방법으로 제시함으로써, 보테로는 실제로는 정치학을 국가의 기술의 지침에 따라 해석할 것을 주창했던 것이다.

보테로는 예수회의 콜레주 출신이며, 이 시대의 예수회는 토마스 아퀴나스의 철학을 계승하면서, 국가의 통치의 이론을 전개했다. 보테로는 마키아벨리가 제시한 통찰을, 토마스가 제시한 아리스토텔레스 이후의 공화주의적인 공통선의 가르침과 통합하는 데 성공한 것이며, 이것에 의해 국가이성의 이론은 유럽의 다양한 궁중들에 퍼질 수 있었다. 예를 들면 이 책은 스페인의 궁정에서 읽혀지고 통치의 참고가 됐으며, 파이엘른의 막시밀안 2세도 보테로의 국가통치술의 원칙을 채용했다. 그리고 합스부르크의 프레데릭 2세도 이 책을 읽었다.

이런 국가이성의 이론은 국가의 통치 기술을 합리적으로 분석하면서, 군주의 권력을 강화하는 것이 아니라 국가 자체의 힘을 강화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것이다. 국가를 유럽의 공간 안에서 병존시키면서 모든 것이 자국의 힘과 세력을 강하게 하려고 노력하고 있는 stato로 간주하고, 그 목적을 통치자의 덕과 합리적인 배려에 의해 수행하는 것이다. 스콜라 철학에서는 신과 자연에 입각해서 인간의 내세에서의 구원을 목적으로 통치하는 것이 요구됐다. 그것이 이제는 국력을 따라서 통치하는 것이 중요해진다. “국력을 확장적이고 경쟁적인 틀 속에서 강화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통치 형태가 문제가 되는 것이다.

이것이 베스트팔렌 조약 이후의 유럽의 세력균형의 상태에 걸맞은 학문임이 드러날 것이다. 이 당시는 매일 무수한 사람들이 국가이성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을 듣는다는 증언이 있을 정도이며, 이는 곧바로 하나의 발명으로 인식된 것이었다.

이런 국가이성이란 결국 선한 통치의 기술이다. 이 기술의 특징은 마키아벨리와는 달리 군주의 덕을 중시하는 것이 아니라 국가의 보존 자체를 목적으로 한다. 토마스 아퀴나스와 달리 사람들의 영혼의 구원과 같은 국가 이외의 목적을 목표로 하는 것이 아니라 국가의 행복 자체를 목적으로 하는 것이다.

이런 국가이성에 의한 통치에는 몇 개의 두드러진 특징이 있다. 우선 이 통치가 필요해지는 것은 인간 본성의 약함이나 인간들의 악의가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국가이성 없이는 국가는 단 한순간도 존재할 수도 지속될 수도 없는 것이다. 이 기술은 항상적으로 실행되는 것이 필요하다. 거기에 있는 것은 무제한한 시간, 항상적이고 보수적인 통치의 시간이다.

두 번째 특징은 지금 존속하고 있는 국가의 힘 자체가 중요하며, 국가가 어떻게 설립됐느냐는 기원의 질문은 의미가 없다는 것이다. 마키아벨리는 군주가 국가를 계승했더라도, 찬탈한 것으로 통치 방식을 바꿀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지만, 국가이성의 통치에 있어서는 기원이나 정초나 정통성이나 왕조에 관한 문제조차 제기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세 번째 특징은 국가의 보존만이 목적이며, 국가가 맡아야 할 종국적 목적 등이 모습을 지우고 있다는 것이다. 인간의 혼의 구원 등은 배려할 필요도 없고, 종말에 대해 생각할 필요도 없다. 통치의 시간은 현재만을 지향하지만, 이 현재는 영원히 계속되는 것으로 상정되는 것이며, 종말은 없다. “열린 역사성 속에 있는 것이다.

 

국가이성과 사목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이런 국가이성의 기술이, 사목의 기술과 어떤 관계에 있으며, 사목의 기술이 어떻게 국가이성의 기술로 전개되고 있느냐에 있다. 국가이성은 사목과는 명확하게 다른 특징을 갖추면서, 어떤 의미에서 사목의 기술을 채용하고 전개하고 있었던 것이다. 푸코는 이 두 이론의 관계를 사목의 기술에서 고찰의 축으로 삼은 구원, 복종, 진리의 세 가지 축으로 검토한다.

 

── 구원의 축

먼저 구원에 대해 푸코가 의거하는 것은 국가이성의 가장 현저한 표현인 쿠데타 개념이다. 오늘날 쿠데타는 정통성 있는 권력자가 아닌 자가 폭력적 수단으로 국가의 권력을 탈취하는 것을 의미하지만, 원래는 국가(état)에 의한 일격(coup)이며, 국가가 예외적인 조치로서, 비상수단을 채택하는 것이었다. “쿠데타란 법과 합법성을 중지시키고, 정지시키는 것이다.

국가이성은 통상적이라면 법을 지키지만, 그것은 스스로에 도움이 되는 한에서이며, “법을 따라 명령하는 것이 아니라, 법에 대해 명령하는 것이어야만 한다. 국가가 법에 적응하는 것이 아니라, 법이 국가의 현황에 대해 적응하는 것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16세기의 이탈리아의 법률가가 코무네에는 황제의 침략으로부터 방어할 권리가 있다고 주장한 것과 마찬가지로, 국가이성은 국가의 구원이라는 이름으로”, 초법규적인 수단을 행사할 권리가 있는 것이다. 이런 구원의 필요성이라는 명분 아래서, “그때까지 인정되고 작동되었던 시민적, 도덕적, 자연적인 법을 일소하도록 국가이성을 들볶는 것이 요구된다. 그것이 정당한 것으로 여겨지는 것은, 그것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거기에는 양(羊)의 혼의 구원을 첫 번째의 목적으로 한 사목자의 역설이 뒤집혀진 채 남아 있다.

이런 쿠데타는 필요성에 의해 초래되는 것이지만, 이와 동시에 폭력적이며, 이것이 쿠데타의 두 번째의 중요한 특징이다. 보통 국가이성은 법을 틀로서, 형식으로서, 스스로의 의지로 행사하지, 쿠데타의 순간에는, 폭력적이게 되는 것이다. 이때 국가 이외의 모든 것은 희생된다. 구원되는 것은 국가뿐이다. 그래서 국가이성의 구원은 사목의 구원을 물구나무 세운 것이다. 사목의 구원은 겉으로는 만인의 구원을 목적으로 한다. 그러나 국가이성은 선택적인 사목제, 배제하는 사목제, 전체를 위해 몇몇을 희생시키고 국가를 위해 몇몇을 희생시키는 사목제가 된다는 것이다. 이것은 공공선을 위해 개인의 이익을 희생시키는 행위이다. 전체의 무리를 보호하기 위해 오염된 양을 배제하는 사목자의 역설이다.

쿠데타의 세 번째 특징은 연극적이라는 데 있다. 국가이성은 쿠데타에 있어서 연극적으로 실천될 필요가 있다. 그것은 극적인 형식에 있어서 국민의 눈앞에 제시함으로써, 그 정통성을 보여줬기 때문이다. 사목은 모든 비참을 참아내는 인내의 술을 가르쳤는데, 국가이성은 필요하다면 국민을 희생시키는 연극적이고 비극적인 가혹함을 보여주는 것이다. 사목에서 신도들은 스스로의 구원을 위해 자기를 희생하지만, 국가이성에서는 국가의 구원이라는 목적을 위해 국민이 스스로를 희생할 것이 강요되는 것이다.

 

복종의 축

두 번째 축은 복종이다. 푸코가 고찰하고 있는 텍스트는 프랜시스 베이컨의 모반과 동란에 대한 시론이라는 글인데, 여기서는 국가이성의 최초의 이론가인 보테로의 『국가이성에 대해』를 실마리 삼아 생각해보자. 마키아벨리는 군주가 국내의 통치에서 가장 중시해야 하는 것은 대귀족의 세력이라고 생각했다. 귀족을 억제하기 위해서는 프랑스의 고등법원 제도를 참고해야 한다고 마키아벨리는 생각했다. 프랑스에서는 민중이 대귀족의 횡포를 미워하며, 왕은 민중을 보호하기 위해 대귀족을 억제하는 것을 목표로 했다. 그러나 왕이 직접 귀족들을 억누르면 민중을 편들게 되며, 귀족의 원성을 살 위험성이 있었다. 이를 위해 고등법원을 설치하여 3자의 중재자로 삼아 큰 세력을 억누르고자 한 것이다.

마키아벨리는 민중에게서 미움을 사지 않는 것이야말로 최상의 성벽(城壁)”이라고 생각한다. 그것이 국내의 유력자로부터도, 외국의 적으로부터도 자신을 지키기 위한 최선의 수단으로 여겼던 것이다. 마키아벨리에게 민중은 방패와 같은 것이며, 능동적으로 일하는 것이 아니다. 푸코가 지적하듯이, 그에게 인민은 본질적으로 수동적이고 순박한 것이며, 군주에게 도구로서 도움이 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며, 다만 그럴 뿐이다.

반면, 보테로는 전혀 다른 관점을 보여준다. 보테로에게 민중은 능동적 주체이며, 국가에 있어서 중요한 역할을 맡는 것이다. 군주가 국가를 유지하기 위해 중요한 것은 자금과 주민이다. “다른 모든 것을 포함한 두 개의 힘이 남는다. 그것은 인민과 자금이다.” 보테로는 군주가 국내의 상거래와 수출입에 어느 정도의 세금을 거둬들여서 국고를 살찌울 수 있는지를 상세하게 검토한다. 세금을 너무 많이 거둬들이면, 인민은 가난해지고, 반란을 일으키기 십상이다. 그리고 결국 국가는 파멸에 이른다. 세금이 너무 적으면 군주는 충분한 자금을 확보할 수 없고, 군대를 유지할 수 없게 된다. 그리고 외국의 공격을 받았을 때, 나라를 지킬 수 없다. 적절한 세금을 걷는 것, 그것이 군주의 중요한 과제이다. 보테로가 보여준 것은, 국가의 수입과 지출의 통계를 작성하는 것이다. 보테로는 통계학의 이른바 선구자이다.

 

인민을 해치지 않고, 지배자가 수중에 남겨둔 금액을 정확하게 알기 위해서는, 국내에 반입되는 상품의 지불을 위해 어느 정도의 금액이 나라에서 나올 것인지, 국외로 수출되는 상품의 지불로 어느 정도의 금액이 나라에 들어오는가를 확인하고, 수중에 남겨둘 금액이 국가의 수입으로부터 지출을 뺀 금액보다 많아지지 않도록 해야 한다.

 

이것은 중상주의의 견해를 선구적으로 보여준 것이며, 이렇게 함으로써, 인민은 스스로의 부를 향유하고, 반란을 일으키지 않게 되며, 세금을 내게 된다고 간주된다. 반란을 방지한다는 이런 관점은 국가의 두 번째 중요한 요소인 주민의 생산성에 대한 시선과 교차한다. 군주는 스스로 국가의 수입을 만들어낼 수 없다. 이를 만들어내는 것은 주민이다. 이를 위해서 군주는 신하가 농업, 산업, 상업에서 열심히 일하도록 장려해야 한다.” 보테로는 인민을 움직일 수 있게 하는 것은, 사적 이익[私利]뿐이라고 생각한다. 인민이 풍족해지지 않으면, 국가는 부유할 수 없다. 사적 이익의 추구는 국가의 이익을 높이는 것이다.

이처럼 군주는 두 개의 기술, 즉 통계학과 중상주의에 의한 경제적 계산에 의해 국가를 부유하게 할 수 있는 동시에 인민을 복종시킬 수 있다. 인민을 복종시키기 위해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인민이 풍요로워져 반란을 일으킬 필요를 느끼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 귀족은 반란을 일으키면 처벌하면 된다. 반면 인민은 현실적으로 곤란하며, 현실적으로 위험하다. 통치한다는 것은 본질적으로 인민을 통치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통치의 계산의 대상이 되는 것은 , 부의 유통, 세금 , 인민의 활동 그 자체이다.

사목의 기술에서는 복종 그 자체가 선이었다. 신도는 복종함으로써, 스스로의 구원을 확보할 수 있다. 국가이성에서는 복종 그 자체는 선이 아니다. 인민은 풍요로워짐으로써 자연에 복종하고, 반란을 일으키지 않게 되는 것이다. 더 이상 피안에서의 인민의 혼의 구원이 목적이 아니다. 차안(此岸)에서의 인민의 경제적 행복에 의해 뒷받침된 국가의 구원이 목적이다. 그러나 인민을 복종시킨다는 목적을, 사목의 기술과 국가이성은 공유하는 것이다.

 

── 진리의 축

푸코가 사목과 국가이성을 비교하는 세 번째 축은 진리에 관한 관점이며, 이는 통계학이라는 학문에 관련된 것이다. 사목에서는, 사목의 기술의 전제가 되는 기독교의 교의가 우선 진리로서 가르쳐질 필요가 있었다. 다음으로 사목자는 담당하는 양떼들에서 일어나는 일을 정확하게 알고 있을 필요가 있었다. 그리고 양들은, 스스로의 진리를 인식하고, 그것을 고백할 필요가 있었다. 이 신-사목자-양이라는 사이클이 사목의 진리의 사이클이라고 한다면, 국가이성에서는 진리의 대상이 되는 영역 그 자체가 바뀌게 된다.

국가이성이 등장하기 전에 지배자에게 요구된 진리와 지식은 교회법이며 자연법이었다. 더욱이 역사상의 다양한 예나 미덕의 모델에 대한 지식이었다. 그리고 지배자에게는 법을 신중하고 공평하게 적용할 것이 요구됐다. 그러나 17세기가 되자 지식의 내용 자체가 바뀌게 된다. 법이 아니라 국가의 현실 자체인 사물이 지식의 대상이 된 것이다. 지배자에게는 국가의 세력에 관련된 모든 요소를 정확하게 인식할 것이 요구됐다. “인구의 계량, 사망률과 출생률의 계량, 국내의 다양한 범주의 개인들의 산정(算定), 그들의 부의 산정 , 조사해야 할 요소는 무수히 많다. 이것이 통계학(statistique)이다. 통계학이란 국가(state)의 학인 것이다. 그것만으로 통계 데이터가 국가의 비밀이며 제권帝権의 비밀(아르카나 임페리이[지고의 비밀])이라고 불렸던 것이다.

이렇게 국가이성에 있어서 중요한 지식은 단순한 영토가 아니며, 개별 국민도 아니고, 주민이며, 인구이며, 국가의 부의 총체를 만들어내는 사람들의 무리에 대한 지식이었다. 이 양떼의 시선은, 사목의 기술과 국가이성에 공통되는 것이며, 국가이성은 바로 사목으로부터 이것을 배운 것이다.

 

세력균형과 영구평화

이 국가이성의 개념은 유럽에 광범위하게 보급되고, 이윽고 독일에서는 내치[폴리차이, 관방학]로 불리는 국가학을 만들어내게 된다. 다만 이 국가학에 대해 검토하기 전에, 국가이성의 이론을 채용한 유럽의 국가들 사이의 관계에 대해 생각하고 싶다. “다양한 힘이 경합하는 장에 있어서의 새로운 통치술에 특징적인 기술이 생겨났는데, 이것은 내치[폴리차이]라는 학이 생겨나기 위한 하나의 전제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보테로는 이상적인 국가의 규모로 중간 정도의 국가를 상정했다. 너무 작은 국가는 타국의 침략을 받기도 쉽고 멸망하기도 쉬우며, 국가가 커지면 부가 증대하고, 부가 증대하면 악덕이 증대한다. 특히 사치와 오만과 방탕과 탐욕, 모든 악의 원천이 증대하기 때문에, 내적 원인에 의해 멸망할 것이다.

작고 멸망한 국가의 예로 보테로는 15세기에 중세 도시의 특권을 잃은 시칠리아의 라구사와, 14세기까지 피렌체와 함께 영화를 누렸던 토스카나의 도시 루카를 들고 있다. 또한 너무 큰 국가의 예로 보테로는 스페인 제국과 터키 제국을 들고 있다. 중간 규모로 바람직한 국가의 실례로서는 베네치아, 밀라노, 플랑드르, 보헤미아를 들고 있다.

문제는 중간 규모의 이상적인 국가를 어떻게 유지할 것이냐인데, 보테로는 국가가 끊임없이 인구를 증대시키고 세력을 확대해가는 것은 필연이라고 생각했다. 국가는 세력을 확대함으로써만 유지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대국이 되면, 멸망이 눈앞에 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래서 보테로는 국가의 인구를 두 가지 차원에서 생각하려 한다. 국가의 번영의 문제를 고찰한 『도시의 위대함에 대해』에서 보테로는 도시에는 생성적인 virture()의 요소와 영양적인 virture()의 요소가 있다고 지적한다. 생성적인 덕의 비율은 도시 인구의 증가율이며, 이것은 시간과 더불어 변동하는 것이 아니다. 다윗과 모세의 시대에도, 현대에도, 인간은 똑같이 생식할 능력이 있기 때문이다.

반면 영양적 덕은 도시나 국가가 인구를 유지할 수 있는 능력을 나타내는 것인데, 여기에는 어떤 종점이 존재한다. 다양한 도시의 발전 단계에서 생성적인 덕의 비율이 영양적인 덕의 비율을 넘어선 시점에 인구는 정점에 이르며, 그 뒤는 쇠퇴가 기다리고 있다. 국가는 항상 이런 탄생, 증강, 완성, 쇠퇴라는 사이클을 경험하는 것이다(이것이 당시는 ‘revolution’이라는 용어로 불렸던 것이다. 혁명의 원뜻은 여기에 있다). 보테로는 이런 완성의 단계가 찾아온 국가는, 식민이라는 수단으로, 너무 증가한 인구를 방출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통치의 술은, 이 정점을 되도록 멀리하는 것이며, 국가이성은 국가를 본질적으로 그런 혁명에 맞서 유지하는 것이다.

다만 이 국가는 다양한 국가들 속에 존재하면서 자신을 유지해야만 한다. 강대국에 둘러싸인 국가의 경우에는 국가를 유지하기 위해 특별한 방책이 필요할 것이다. 그것은 단순히 중립을 유지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나라와도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다. 강대국들이 서로 싸우게 됐을 때 어느 한쪽을 도우면, 다른 나라를 분노케 할 것이다. 둘 다를 돕는다면, 쓸데없이 자금을 낭비하고, 어느 쪽도 감사하지 않을 것이다. 어느 쪽도 돕지 않는다면, 어느 쪽에 의해서도 적으로 간주될 것이다.”

이 국가이성의 외교정책은 유럽의 새로운 시대에 걸맞은 것이었다. 이 시대에 진정한 의미에서의 유럽이 탄생하기 때문이다. 단테 무렵까지는 아직 기독교적 제국의 힘으로, 유럽의 통일이 가능하다고 생각됐으나, 종교개혁과 그 후의 종교전쟁이 그 환상의 뿌리를 완전히 잘라버렸다. 가톨릭과 개신교 국가들로 분열된 이 시대에는, 더 이상 기독교적 제국이 가능하다는 것은 누구도 생각하지 않게 됐다. 단테의 레스 푸블리카 크리스티아나(기독교 공동체)의 환상이 붕괴한 후에 생겨난 것이 세력의 균형이라는 이상이었다. 이 이상이 목표로 한 것은 기독교의 국가와 군주 사이에 힘의 평형관계를 확립하고 유지하는 것이었다. 국가이성이 찾아낸 것은, 자국이 타국들과의 공존 속에 있다는 것이며, 유럽의 현실은 국가들이 경합 공간에 나란히 있고 위치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유럽은 단순히 지리적 명칭일 뿐이게 되고, 다양한 국가가 모여 하나의 균형을 만들어내는 정치적 단위가 됐다. 각각의 국가에는 주권자가 있고, 독립된 세력을 유지하고 있다. 그 국가의 종교는 그 국가의 주권자가 결정한다는 독일의 영방국가의 원칙이 유럽의 전체 원칙이 됐다. 이 시대의 유럽은 두 강대국이 패권을 다투고 있었다. 재상 올리바레스Olivares가 이끄는 합스부르크 제국의 스페인과 재상 리슐리외가 이끄는 부르봉 왕조의 프랑스이다. 이 대립에서, 둘 다 가톨릭 국가임에도 불구하고 프랑스는 개신교의 네덜란드에 원조의 손을 내밀고, 독일의 -합스부르크의 개신교 제후를 극력 지원하는 게 리슐리외의 기본적인 외교 전략이었다.” 이는 프랑스의 전통적인 정책이며, 앙리 4세 이후의 정책을 그대로 이어받은 것뿐이었다. 전쟁에 있어서는 가톨릭의 국가가 개신교 국가와 동맹하고, “가톨릭 국가들이 개신교의 군대를 이용하는 것은 충분히 있을 수 있고, 그 반대도 있을 수 있게 된 것이다.

이들 국가들에 세력의 차이는 있으나, 주권자라는 것에서 서로 대등하며, 이른바 절대적인 단위이다. 각각의 단위에 있어서, 국가는 자기를 주장하고 보존하려고 하며, 다른 국가와 경합하려고 한다. 국가에 있어서는 자기 보존이 자기 목적이 되며, 이를 위해 국가이성이라는 원리가 적용된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특히 주목을 받은 것이 스페인이었다. 스페인은 유럽 안에서 특이한 위치를 차지했던 것이다. 우선 스페인은 유럽의 국가들 중 하나이며, 다른 국가들과의 경합관계에 있다. 그러나 스페인은 해외에 거대한 식민지를 획득했으며, 세계 제국(帝國)에 가까운 세력을 뽐냈다. 남아메리카에서 유입되는 금과 은은 거대한 부를 스페인에게 가져다주었는데, 그 식민지에서 생겨난 부 때문에 스페인은 급속하게 쇠퇴했던 것이다. 그 부 때문에 더욱 눈부시고 더욱 빠른 방식으로 빈곤에 빠졌기 때문이다.

이른바 스페인 문제라고도 해야 할 것이 유럽 사람들의 머리를 괴롭혔다. 이 문제는 삼중의 의미를 가졌다. 첫째는 스페인이 식민지를 건설할 때, 원주민들을 노새처럼 다룬 것이 법적 문제를 야기했던 것이다. 현지 주민들은 인간인지 아닌지, 동물처럼 학대하는 것이 허용되는가. 기독교인이 아니라는 이유로 학대하는 것은 허용되는가. 현지의 제국과의 사이에서 싸운 전쟁은 정의의 전쟁이라고 말할 수 있는가. 이것은 자연법과 만민법의 심각한 문제를 야기했다.

둘째는 식민지의 운영의 문제이다. 스페인은 금과 은의 입수만을 위해 식민지를 운영하고, 이를 위해 현지의 사람들을 학대했다. 이런 식민지 경영은 적절한 것일까? 식민지는 모국에 이익이 되는 것일까? 이익이 되도록 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운영해야 할까? 이윽고 영국은 북아메리카와 스페인에 거대한 식민지를 건설하게 되며, 프랑스는 북아메리카에, 네덜란드는 동남아시아에 진출한다. 모국은 이런 식민지와 어떤 관계를 맺어야 할까?

셋째는 스페인이 획득한 대단히 많은 재신이 모국을 몰락시킨 것은 왜인가라는 수수께끼였다. 부를 획득하는 것이 국력을 증강시킨다는 것은 당시의 중상주의의 신념이었다. 그런데도 스페인은 왜 몰락한 것일까? 이 부가 문제였던 것은, 스페인이 신대륙에서 가져온 부의 대부분이 전쟁이라는 암을 위해 소비됐기 때문이었다. 이 부는 유럽의 세력균형을 교란하기 위해 사용된 것이며, 다른 국가들에 있어서도 간과할 수 없는 문제였다.

 

외교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 세 번째 문제가 단순히 스페인 일국의 문제가 아니라, 각 국가의 국부의 문제로 이해됐다는 것이다. 국가의 부의 문제를 어디까지나 주권자의 관점에서 보고 있는 보댕에게 주권자로서의 국왕이 얻은 부는 국왕의 행동방식의 문제로서 제기됐다. “과세의 인기가 낮은 것은, 지배자가 신하에게서 얻은 부를, 일반적으로 전 국민의 이익이 되는 용도로 사용함으로써 완화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보테로가 보기에 전통적인 기독교의 관점에서, 국왕의 부가 신하의 부에 의존하는 것이 명확해졌다. 이제 군주의 부가 아니라, 각 국가의 국력의 총체가 문제가 된다. 그리고 스페인의 네거티브 모델에 대항하는 형태로, 영국, 프랑스, 독일 등의 대항하는 부의 모델이 제기된다. “국가이성에 관한 이런 분석, 자기 정의하고 있었던 새로운 정치의 영역에 관한 이런 분석은 모두, 스페인의 적국이나 대항국에 있어서 특권적인 방식으로 발전된 것이다.

대항의 축은 더 이상 군주의 부가 아니라, 국가 자체의 부이며, 영토의 크기가 아니라 국가에 내속하는 부, 국가가 손에 넣고 있는 자원, 천연자원, 통상력, 교환 균형 등이며, 군주 사이의 대항관계가 아니라 국가의 경합관계이다. 반대의 의미에서는, 이 시대에는 광대한 영토를 지닌 스페인이 아니라 어째서 소국인 네덜란드가 풍요로운 국가인가가 문제로서 제기된 것이다. 어떤 중상주의의 이론가는 소국인 네덜란드가 자연적인 부도 식량도 목재도 또한 전시평상시의 그 밖의 자원도 거의 갖고 있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매우 큰 욕망을 만족시킬 뿐 아니라, 함선무기삭구綱具곡물화약탄환 기타 등등을 근면한 무역에 의해 세계의 구석구석으로부터 모집하고, 이것을 타국의 왕후에게 공급하고 매각할 수 있는 것을 세계의 한 가지 수수께끼라고 부른다. “네덜란드 문제스페인 문제의 뒤쪽에 들러붙은 수수께끼인 것이다.

이런 역학관계의 물음으로부터 유럽 국가들의 외교가 중요한 의미를 갖게 된 것이다. 이 시대에, 이윽고 산 피에르와 루소에 의해 영구평화라는 희망이 얘기되게 된다. 그리고 이 영구평화는 유럽의 국가들 사이의 외교적 수단에 의해 구축되게 되어 있었다. 유럽의 국가들의 힘관계가 완전히 균형을 이루었다면, 타국을 정복하려고 하는 강대국의 시도에는, 반드시 주위의 국가들로부터 견제가 가해지고, 실패로 끝날 것임에 틀림없다. 그렇게 되면, 적어도 유럽의 내부에서는 평화가 실현될 것임에 틀림없다고 기대된 것이다.

그 본보기가 된 것은 프랑스의 앙리 4세의 시도이다. 이것은 아직 30년 전쟁이 종결되기 전, 즉 베스트팔렌 조약이 체결되기 전에 시도된 것이었다. 앙리 4세는 유럽을 통일하려고 한 것이 아니라, 복수의 유럽들 사이에서 이해관계의 그물망을 만들어내고, 단테의 기독교 공동체와는 다른 기독교의 공화국을 만들어내려고 시도했다. 그 계획의 중심은 스페인의 합스부르크가를 포위하여 제국의 유럽 지배의 야망을 종식시키는 데 있었다.

왕은 우선 영국에 작동을 건다. 이어서 스웨덴에, 사부아에, 로마 황제에게. 영국은 스페인이 국내의 가톨릭 교도에 작용하여 음모를 꾀하는 것을 그만두게 하고 싶다고 생각했으며, 그동안 원조했던 네덜란드를 스페인의 지배로부터 해방시킬 수 있으면, 더 이상 원조를 위해 높은 비용을 들일 필요는 없어진다고 생각했다. 스웨덴 왕은 포메라니아(Pomerania)를 손에 넣어 독일에 지반을 굳히고 싶다고 생각했다. 사부아공은 밀라노령과 롬바르디아의 왕관을 노렸다. 로마교황도 스페인의 압제에 시달리고 있었기에, 나폴리를 중개로 이 계획에 참가하려고 했다. 이렇게 해서 유럽 전역을 지배하려고 하는 합스부르크가를 포위하여 타도함으로써, 유럽에 평화를 가져오는 것이 계획된 것이었다.

새로운 체제 아래서는, 유럽의 기독교 세계를 열다섯 개의 지배력으로 분할하고, 이런 강국들 사이의 경계는 제대로 조정調整될 수 있도록, 더 이상 그 사이에서 언쟁이 일어나지 않도록, 권리나 주장의 다양성을 공평하게 조정調整한 것이어야 한다.” 이리하여 유럽의 마지막 전쟁이 될 터인 전쟁이, 불멸의 평화를 준비하고 있던 그때에 왕이 암살당하고 이 계획은 실패로 끝난 것이었다.

이는 합스부르크가가 목표로 삼은 단일한 유럽이 아니라, “근본적으로 복수로 이루어진 유럽에 조화와 평화를 가져오려고 하는 계획이었다. 다만 이 계획이 목표로 하는 평화는 유럽 내부의 평화에 불과하다는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 계획에서는 동시에, 합스부르크가의 스페인이 영토를 잃은 것을 보상하듯이, 스페인에 대외 식민지에서의 활동을 우선적이라고 인정했기 때문이다. 이른바 독점적으로 타국을 착취할 권리를 보장함으로써, 유럽에서의 영토 상실을 눈감게 하는 동시에, 그 제국주의적 야망을 구역의 바깥으로 돌리게 할 의도가 있었던 것이다. 이 평화로운 유럽은 세계의 나머지 부분과의 차이에 이용식민지화지배라는 관계를 갖는, 지리적 지역으로서의 유럽이며, 이 유럽의 사고와 역사적 현실로부터 우리는 여전히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이 세력균형을 목표로 하는 유럽에서, 외교를 틀로 삼은 국가이성은 세 개의 도구를 이용할 수 있었다. 첫째는 전쟁이다. 역설적인데, 평화와 균형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전쟁을 할 준비가 필요하다. 여기서 전통적인 전쟁과는 다른 근대적인 전쟁 개념이 등장한다. 중세에서 전쟁은 법이 침범당했을 때 행해지는 것이었다. “전쟁은 법적인 틀에 있어서 전개된 것이다.

그러나 국가이성의 시대에는 전쟁이 전혀 다른 틀에서 전개된다. 우선 전쟁을 시작하는 이유가 완전히 외교적이게 됐다. 균형이 위협 받고 있는 것만으로 전쟁이 행해지게 된 것이다. 그 실례로 유명한 것이, 북부 이탈리아의 밀라노와 베네치아에 인접한 만토바공국(Ducato di Mantova)의 계승을 둘러싼 만토바전쟁이다. 1627년 말에 만토바공이 사망하자, 근친자는 조카인 마리아뿐이며, 여성이 계승할 수 없기 때문에, 프랑스 왕의 신하인 느베르(Nevers) 공이 나섰다. 그리고 만토바공국이 프랑스의 지배 아래에 들어가는 것을 싫어한 스페인의 밀라노 총독이 만토바와 몽페라트를 보장 점령하고, 이것이 곧바로 프랑스와 스페인의 전쟁으로 비화했다. 더 이상 전쟁은 사법과 결부되는 것이 아니라, 국내와 국외의 정치와 결부되게 된다. 동맹국과의 결부라는 외교의 이유만으로 전쟁을 시작하기에는 충분한 것이다. 200년 후에는 전쟁이란 정치적 수단과는 다른 수단으로 계속되는 정치이다라는 정식화되게 될 것이다.

두 번째 도구는 외교이다. 이 시대에는 다양한 조약이 체결되고, 유럽의 균형이 유지된다. 이 조약들은 지금처럼 계승에 관한 법권리나 승리자의 법권리와 같은 낡은 법권리를 따라서가 아니라, 물리적 원칙을 따라서 이뤄진다. “영토, 도시, 교구, 항구, 수도원, 식민지가 교환되고 값이 깎이고, 옮겨지는 것이다. 이것은 국가 사이의 균형을 최대한 안정된 것으로 하기 위해 행해진 것이다.

이를 위한 교섭을 행하는 목적으로, 상설 조직이 검토됐다. 앙리 4세의 계획에서는, 분쟁 처리를 위한 중앙 평의회가 설치되고, 열다섯 개의 강국의 각국으로부터 4명씩 선출된 대표 60명이 모여서 평등한 형태로 다수결로 분쟁을 해결하기로 했다. 산 피에르의 영구평화론에서는 열아홉 개의 강국이 유럽 연방의 연합의회를 설립하고, “전권 위원을 임명하고, 일정한 장소에서, 연합의회 또는 상설 회의를 전개할 예정으로, 이 회의에서 체결 당사자 사이의 분쟁은 모두 중재 또는 심판이라는 방법에 의해 조정되며, 해결되는 것이 된다. 이는 곧 국제연맹의 사상으로 이어진다. 빈회의로부터 제1차 세계대전까지는, 화려한 외교의 시대가 된다. “다양한 절차가 성문화되고, 외교 특권이 정의됐다.” 이리하여 외교관이 장군의 대를 잇게 된 것이다.

세 번째의 도구로서 푸코가 들고 있는 것이 항상적인 군사장치이다. “평화 시스템의 내부 자체에, 항상적인, 비용이 드는 중요한, 지식을 갖춘 군사장치가 존재한다는 역설이, 이 유럽의 균형을 떠받쳤던 것이다. 상비군에 의해 뒷받침된 정치와 군사의 복합체는, 안전 메커니즘으로서의 유럽의 균형의 구성에는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 되는 것이다.

국가이성을 표방하는 프랑스의 리슐리외와 스페인의 올리바레스는 각각에 자국을 축으로 한 유럽의 세력균형 계획을 세웠다. 올리바레스가 목표로 한 기독교 세계는 오스트리아의 지배 아래서의 평화(팍스 아우스트리아나)이며, 로마교황청과 밀접하게 협력한 빈(Wien)의 신성로마 제국과 마드리드의 스페인 왕국이 유럽에 평화와 질서를 가져다준다는 것이다. 리슐리외가 목표로 한 기독교 세계는 프랑스가 첫째 가는 군주국으로서 유럽에 집단 안전 보장을 실현한다는 앙리 4세의 꿈을 실현하려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 불가결한 수단이 전쟁이며, 프랑스와 스페인은 패권을 놓고 30년 전쟁을 전개한 것이다. 유럽의 평화란 끊임없는 전쟁상태의 다른 이름이었다.

이 모든 것은 국가이성 안에서, 자국의 국력과 타국의 국력을 정밀하게 분석하는 시선이 만들어낸 것이다. 이 시대의 정치이론가들은 군주가 이웃 나라의 움직임을 주의깊게 관찰해야 한다는 것을, 매우 자명한 것이라고 했다. 1628년에 간행된 어떤 정치 팜플렛은 이웃 나라가 강대해지는 것을 막으려면, 누구든 그 시선을 열어두어야만 한다고 말했다. “국가이성의 이론은 관찰자 속에 완전히 새로운 정신을 심어준 것이며, 유럽의 해부학이 정치이론의 바탕이 된 것이다.

다만 유럽의 힘의 균형의 구상은 단명했다. 나폴레옹 전쟁 뒤에 그 꿈이 약간 되살아난다. 그러나 1815년의 빈조약에서 만들어진 유럽의 균형은 이미 시대착오적인 것에 지나지 않는다. 조약으로 유지할 수 있던 상황은 항상 그 내부로부터 위협받는다. 1848년에 유럽을 뒤흔든 혁명은 1870년대의 이탈리아와 독일의 국민국가의 형성을 통해 종식된다. “1870년대 초반에는 빈회의에서 구상된 서유럽은, 이제 거의 대부분 남아 잇지 않았던 것이다. 일본도 참전한 제1차 세계대전은 유럽의 균형의 이념이 외부에 배제했던 세계의 다양한 지역이, 더 이상 무시할 수 없는 것임을 명확하게 보여준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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