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무공화국의 종언


우리는 언제부터 노예가 됐나

 

 

債務共和国の終焉 

 

 

이치다 요시히코오우지 겐타,

고이즈미 요시유키나가하라 유타카


2013년 9월 30일 초판발행



목차

1경제를 둘러싼 현재

1. 심리 전쟁이 된 경제

2. 경제적인 것의 <신체>

3. 금융-채무혁명

 

2. 세계공화국

1. 지속을 요구하는 공화국

2. 문화 좌파에서 공공성 좌파로

3. 유럽 공화국의 출현

4. 민주주의의 병과 공화주의

5. ‘새로운 인터내셔널이라는 유령

 

3렌트 자본주의

1. 렌트에 의한 생산의 침식

2. 렌트/스톡 원리론

(1) <()>, 렌트스톡

(2) 화폐순환

(3) 이윤의 재정의

3. 렌트에 의한 채무의 확대혹은 투자의 행방

4. 희소성을 둘러싼 역전과 파산관리의 소비에트

 

후기 이치다 요시히코

 

본문 속의 외국어 문헌 중 일본어 번역본이 있는 문헌에 관해서는 번역서의 쪽수를 주에 붙였으나 번역문은 적절하게 변경했다.


2. 세계공화국

4. 민주주의의 병과 공화주의


민주주의의 존엄을 구하라!보다 약 8년 전에, 하버마스는 유럽을 둘러싼 또 다른 인상 깊은 정치문서를 발표했다. 인상 깊음의 절반은 그가 초고를 쓴 그 우리의 전후 부흥 : 유럽의 재생(20035)에서, 그와 오랜 논적이었던 자크 데리다가 공저자로서 이름을 올렸다는 점에 있지만(데리다가 초안 작성에 관여하지 않았던 이유는, 주로 건강문제에 있었던 것 같다), 오늘날의 눈에서 볼 때, 이 문서는 민주주의의 존엄을 구하라!와의 거리에 있어서야말로 인상 깊다. 정치 문서의 안목으로서의 상황적 주장을 비교했을 때, 정반대의 것을 호소하고 있다. 2011년의 문서에 관해서는 이미 봤던 대로이다. 국민투표가 타국의 정치가의 압력에 의해 중지됐고, 그리스인은 주권을 행사할 기회를 빼앗겼다. , EU의 상황은 주권의 존재를 위태롭게 한다. 그것이 민주주의의 위기다.

이에 대해 2003년의 문서는 주권이 EU를 재생이 필요할 정도로 빈사瀕死의 상태에 사로잡혔다는 진단을 기조로 하고 있다. 문제의 발단은 스페인의 총리가 독주하여 부시의 이라크 전쟁에 대한 지지와 가담을 공공연하게 표명하고, 내심 전쟁에 흥미를 가지고 기웃거리던정부들의 등을 떠밀고, ‘불량배불량배의 전쟁에 EU 전체를 끌어들인 데에 있다. 그 표명은 유럽의 공동 외교를 좌절에 몰아넣고, 매파 미국과 비둘기기파 유럽, 신적인 칼과 인도주의의 윤리적으로 허용하기 힘든 일련의 분업체제를 완성시켰다. 이라크의 (대량살상무기를 소유했을 거라던) 주권, 미국의 (전쟁 개시 결단을 내린) 주권, 스페인의 (누구에게 정의가 있는가, 누구를 퇴장시켜야 하는가를 선택하고 그것을 표명하는) 주권을 앞두고, “차이들을 승인하는 것, 타자를 그 타자성에 있어서 서로 승인하는 것정체성/동일성이라고 해야 하며, “유럽적 공공성은 패배했다. “국가폭력의 행사를 통제하기 위해서는, 전지구적 수준에서도, 주권의 행동 범위를 상호적으로 제한하는 것이 필요하다라는 “EU의 간주권적 통치원리는 일국의 총리의 배반 이것도 주권의 행사일 것이다 때문에 좌절한 것이다. 그래서 전후에 기대를 걸었던 재생의 호소이다.

데리다가 좀 더 살았더라면(2004년 사망), 이 대조contrast를 어떻게 평가했을까? 그가 서명한 2003년의 공동문서에서 민주주의라는 단어는 거의 무게를 갖지 않았으나, 차이나 타자성을 승인하는 것, 그리고 간주권적 통치를 이 문서의 민주주의개념으로 간주한다고 본다면(그렇게 봐도 나쁜 이유가 데리다에게 있을까), 그 대답은 생전의 저작에서 충분하게 추측하여 헤아릴 수 있다. 2002년의 불량배들이다. 거기서는 민주주의가 깊은 자기면역성의 병을 앓고 있다고 간주됐다(앞의 책, 3. 민주제의 타자, 대신하다 : 대체와 교체). 이를 테면, 민주주의는 자기 자신을 적으로 간주하고 공격하는 경향이 있다. 그것은 자기 파괴적, 자살적이다 등등. 예를 들어, 이슬람 원리주의 정당의 승리를 눈앞에 둔 선거과정을 군부가 정지시킨 알제리. 정지시키지 않으면, 알제리의 민주주의는 확실하게 하나의 끝을 맞이했을 것이다. 정지는 실제로 민주주의의 이름으로 행해졌다. 그러나 선거과정의 정지는 민주주의의 정지이다. 게다가 이라크. 불량국가를 쫓아내지 않으면 중동에 민주주의는 찾아오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 무력 공격을 받지도 않은 국가들이 하나의 주권국가에 선제공격을 가한 것은 주권국가 간의 민주주의에 반한다.

EU를 둘러싼 두 개의 정치문서를 염두에 두면서, 민주주의의 자기면역성을 패러프레이즈해보자. 주권자를 실정적으로 성립시키는 것은, 그 주권자가 누구든 민주주의이며, 데모스의 지배로서의 민주주의는 지고적인 지배권으로서의 주권의 존재를 전제로 해야만 하나의 통치 이념일 수 있다. , 주권이란 민주주의의 자기일 것이다. 그 주권이 민주주의의 타자가 되어 버린 사태를 두 개의 문서가 보여주는 대조contrast는 부각시키고 있다. 맨 먼저, 주권과의 일체성으로부터 우리를 주권적 공공성으로 조금 떼어낸 민주주의는 주권으로부터 공격을 받는다(2003). 그 다음으로, 자립적이고 자율적인 그 민주주의가, 바로 간주권적 공공성의 이름으로, 주권의 공격에 착수하는 것이다(2011). 하버마스적 어휘인 간주권적 통치나 그것에 일치하는 개념으로서 사용되는 공공성불량배들의 데리다는 이렇게 표현한다. “보편적인, 심지어 국민국가적 구조로부터 독립한 민주주의의 이런 세계정치적(=코스모폴리탄적인) 차원”(강조는 인용자). 두 사람의 어휘가 이렇게 상통한다고 상정해야만 2003년 문서에 데리다가 서명한 것을 납득할 수 있다(이 상통으로부터 무엇을 독해할 수 있는가는 나중에 보자). 아무튼 주권과 민주주의의 분리는 아무리 민주주의 개념을 주권 개념에 구속되지 않는 차이나 타자의 승인으로 확장하더라도 이는 자기자기의 분리에 다름 아니며, 그 확장 자체에 의해서 민주주의의 자기면역성을 높여버릴 것이다. ‘민주주의의 타자란 우선 민주주의의 자기라는 것을 주권으로부터의 민주주의의 해방은 깨닫게 해줄 것이다. 시민사회의 수세기 동안의 역사적 성숙과, 홀로코스트를 정점으로 하는 그 비참한 이면(裏面)이 가능케 하고 또 요구하기도 한 민주주의 개념의 확장, 주권을 넘어선 지평으로의 그 이동이, 민주주의에, 스스로 뿌리치고 달아났을 터인 과거의 제약, 이로부터 스스로를 해방했을 터인 뿌리를 썩게 하고, 스스로를 공동화(空洞化)시키는 것이다. 이런 상황을, 2011년의 문서는 비통한 외침 민주주의의 존엄을 구하자!” 에 의해 증언하고 있다. 불량배들의 논리는 이런 진단을 이 문서에 내린 내릴 수 있는 것이다.

랑시에르가 민주주의에 대한 증오에서 도마에 올린 베니 레비(목자의 살해)나 장-클로드 밀네르(민주주의적 유럽의 범죄적 경향), 혹은 앞 절에서 우리가 거론한 레지스 드브레 등의 논자들의 프랑스적 공화주의(주권주의적 공화주의)는 이런 민주주의의 자기면역성에 대한 바로 면역 반응일 수도 있다. ‘자기면역성을 참을 수가 없기 때문에 민주주의그 자체를 타자화해버리는 것이다. ‘공화국의 타자로 말이다. 그들은 전체주의자나 신권정치의 옹호자로 전향한 것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본질적인 민주주의자로서, 공공정신을 시들게 하고 사적 개인의 사회생활의 양식으로 전락한 민주주의의 현재를 증오하고 있다. 그리고 그 본질적인 민주주의에 공화주의의 이름을 준다는 공통성에 의해 하나의 사상 조류를 형성하고 있다. 토크빌 이후의 민주주의 비판을 프랑스 혁명의 옹호 요체는 프랑스의 과거와 현재의 옹호 와 공존시키는 특수한 프랑스적 이데올로기이다. 데리다에게 자기면역성은 분명히 민주주의의 결함 본성적 역설paradox 에 불과하지만, ‘불량배이라크를 처벌하고 쫓아내려고 하는 미국도 불량배라고 간주할 수 있는 근거를 제공하는 한에서, 역설은 자기파괴 경향뿐 아니라 재생의 계기도 포함했다. 두 사람의 불량배는 모두 민주주의의 자기라고 하는, 견딜 수 없는 현황 인식의 그 견딜 수 없음은 자기의 내부로부터만 나오는 것은 아닐 것이다. ‘자기의 내부에 있기 때문에, 전쟁은 그 자체가 윤리적으로 허용하기 힘든 분업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것도 또한 자기면역적 반응이며(타인의 전쟁이라면 방치해두면 된다, 어처구니없다고 한탄할 뿐이어도 된다), 바로 그것이 정의의 계기이라고 데리다는 자기를 완전히 타자화하여 문제를 어영부영 넘어가려고 하는 공화주의자들을 나무랐을 것이다.

여기에 이르러서, 우리가 이용했던 공화주의 개념의 특성을 세 가지 차이를 통해 더 명확하게 할 수 있다. 우선 프랑스 이데올로기로서의 공화주의는 국가주권과 민주주의의 괴리에 대한 거부에 의해 특징지을 수 있는데, 우리의 공화주의 개념에는 원래 공화국의 주권이 필요 없다. 그것은 이미 봤듯이, 군주에게도 귀족에게도 민중에게도 주권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에서부터 출발하는 체제의 개념이며, 주권이 아닌 현실권력 (real power) 사이의 차이, 경합, 모순을 집합체의 권력의 확장으로 변환하려고 한다. 이 점에서, 헌법에 주권 규정을 포함하지 않고서도, 원리적으로 얼마든지 State(=국가)를 연방에 환영하며 맞아들일 수 있는 미국은, 우리가 말하는 공화국의 한 가지 모델일 것이다. United States를 하나의 주권국가로 만드는 것은 국제관계’(하버마스의 간주권적지평)일 뿐이다. 공화국의 내적 구성에 주권은 필요 없으며, “자유의 구성 Constitutio Libertatis”으로서의 공화국 헌법은 사회계약이 아닌 개인 간 동맹이어도 전혀 상관이 없다. 국가 간 조약과 마찬가지로 간주권적인 맹약이며, 맹약에 의해 성립된 사회에 개인이 본질적으로는 아무것도 특히 주권은 넘겨주지 않는 특수한 사회계약 경제인(호모 에코노미쿠스)들의 사회설립계약 같은 이다. 아무튼 주권과는 다른 지평에 서서, 혹은 그 지평으로 나가려고 하는 정치적 의지에 있어서, 우리가 말하는 공화주의는 데리다-하버마스가 말하는 민주주의와 이념을 공유하고 있다.

이 공통성을 좀 더 뒤쫓아보자. 데리다가 말하는 민주주의의 자기면역성이란, 정체로서의 민주주의(의회제)를 특징짓는 것이라기보다는, 모든 정체의 밑바탕에 있으며, 특정한 현재의 정체(군주정, 귀족적, 민주정), 그것에 대한 면역 반응으로서/에 의해 유지시키는 메커니즘이다. 게다가 정체의 창설은, 그 자체가 민주주의의 자기면역적 과정의 일부를 이룰 것이다. 어떤 새로운 정체도, 민주주의의 자기인 주권자(국가 그 자체여도 신이어도 상관없다)의 이름에 의해, 현재의 정체에 의한 이 자기에 대한 공격에 맞선 방어=대항공격으로서 수립된다. 쿠데타조차도 근본적으로 정확하게는 근본에 있어서만 민주주의적이다. 이런 자기면역성이란, 우리의 용어법으로는, 세 정체 모두가 품고 있는 부패로의 경향이며, 또한 그 부패에 맞서는 이며, 정체의 순환을 출현시키는 정체 일반의, 혹은 정치라는 것의 본성적 위기에 다름없다. 자기면역성은 우리가 말하는 공화정체의 특성이기도 하다[주].

[주] 우정의 정치(1988-89년도의 데리다 세미나 기록을 정리한 저작. 鵜飼哲大西雅一郎松葉祥一 訳, みすず書房, 2003)에는 민주주의와 정체들의 관계에 대해 아리스토텔레스에 기초한 약간 뉘앙스가 다른 서술이 있다. 군주정, 귀족정, 민주정은 각각 부친적 관계, 남자와 아내의 관계, 형제 사이의 관계에서 유래한다는 것이다. 그런 한에서는, 세 개의 관계 사이에는, 파생은 성립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본래적으로 정치적’(이것은 많은 경우 민주제적이라고 번역된다)은 형제 사이의 관계이며, “정치적인 것 그 자체, 형제애, 민주주의, 이것들 사이에 있는 상호적 포함 관계, -속적 관계는, 거의 동어반복적=동일의 논리에 입각한 것이다(2, 九頁)라고 말한다. , ‘정치적인 것 그 자체는 민주주의적이며, 세 정체의 구별은 (근원적?) 민주주의에 선행한다고도 읽을 수 있다. 데리다에게서, 이윽고 형제 간의 관계에, ‘자기면역성이 발견될 수 있을까? 형제들의 유산상속을 둘러싼 혈육 간의 싸움 민주주의의 자기면역성일까

그러나 데리다에게 자기면역성은 결코 그 자체의 정체를 갖는 것이 아니다. ‘자기면역적 과정차연의 운동의 하나로 여겨지며, ‘도래할 민주주의가 결코 미래의 현재의 민주주의가 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 자체의 신체 corps’를 갖는 것이 아니다. ‘자기면역성은 항상 도래할것에 머무는 민주주의()바닥 그 자체이며, 정치에 있어서의 시간(‘시대’)과 공간(각 정체)의 차이를 산출하면서, 그 차이 속에 ()장소를 차지한다. 그렇다고 한다면, 우리로서는 이렇게 물을 수 있다. ()본질주의는, 근대에 있어서는 특히 마키아벨리가 정치 노선화한 현실의 공화주의를 무시하지 않을까? 또한 삼권분립의 사상조차 파악하지 못한 게 아닐까? 마키아벨리는 데리다 식으로 바꿔 말한다면, 세 정체 각각의 부패경향을 상호적으로 공격시키는 자기면역시스템으로 공화국을 구상한 것이다. 그것은 로마에서조차 자기파괴했듯이, ‘자기면역성의 병인 부패로부터 쾌유할 수는 없으나, 민주주의의 자기면역성이 재생의 계기를 간직하고 있었듯이, ‘부패에 맞서는 도 또한 갖추고 있으며(‘부패 부패에 다름 아니다), 그 혼합정체는 부패의 상호공격을 의 생산시스템으로 변환하려고 한다. 공화국의 확장으로 대체하려고 한다. 민주주의의 자기 면역 과정에 끝이 없듯이, 공화국은 지속한다. ‘도래할 민주주의가 결코 현실화되지 않듯이, 공화국의 확장에는 목적goal이 없으며, 확장의 지속 속에서만 부패를 능가한다. 목표goal가 없는 것은, 반드시 언젠가 우연의 앞을 가로막으며, 확장 과정을 어디선가 자기파괴 과정으로 반전시키기 때문이다. 아무튼 마키아벨리적 공화국은, 언젠가는 끝이 온다는 것을 받아들인, 뒤집어보면 도래할 민주주의가 도래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는, ‘자기파괴’-‘부패재생’-‘의 균형 시스템이다. 근대의 삼권분립은 그 후계였을 것이다.

즉 우리의 공화주의는 데리다의 민주주의도래할 민주주의자기면역 과정으로서의 민주주의 둘 다 와 달리, 정체로서 실재한다. 뭐랄까, 우리는 어디까지나 실재하는 시스템을 공화주의의 이름에 의해 규정(identification)했다. 이것이 두 번째 차이이다. 이 공화주의는 그러므로, 그 점에서는 우리와 마찬가지로, 데리다와 프랑스적 공화주의 둘 다에 대해 거리를 취하려고 하는 랑시에르의 제비뽑기노선과도 다르다. “아무나=누구든 좋은 누군가 le n’importe qui”가 정치를 담당하는, 이 플라톤에서 유래한 민주주의적 공화주의와도 다르다. 세 번째 차이이다. 플라톤은 그런 체제가 실현되면 자유와 존엄을 깨달은 말[]이나 당나귀가 길을 양보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부닥치게 된다고 하는 이유로 그것을 배척했다. 즉 플라톤에게 제비뽑기민주주의는 단적으로 정치 질서 랑시에르는 그것을 정치가 아니라 치안이라고 부르는데 의 부재이며, 랑시에르는 이 아나르시アナルシ=무질서를 하나의 긍정성으로 뒤집어버리고, 데리다의 도래할 민주주의와 비슷한, 결코 미래의 현재의 민주주의가 되지 않는 체제로 위치시킨다. 그러나 우리가 말하는 공화주의는 어디까지나, 역사상 거의 어디에서도 있으며 그리고 언제든 있는 n’importe où et n’importe quand 체제의 호칭이다. 랑시에르의 제비뽑기민주주의는 주권의 거처를 둘러싼 고찰 끝에 주권을 삭제하지도 않고 특정한 어딘가에 존속시키지도 않는, 더 정확하게는 주권의 존재와 부재를 균형 혹은 일치시키는 체제이며, 그 있을 수 없는 도래 가능성에 의해 도래할 민주주의의 일종이며, 또한 그 부정적 보편성, 보편적 부정성에 의해, 민주주의와 주권의 일치를 목표로 하는 프랑스적 공화주의의 일종 또는 극한(limit)를 형성한다. 프랑스적 공화주의가 일치의 순수한 긍정성=실정성을 추구하는 반면, 랑시에르의 공화주의는 똑같은 일치를, 데리다의 자기면역성과 마찬가지로, 바닥 없는 바닥에 두고 있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게다가 그것들에 대해, 우리가 말하는 공화주의, 이른바 그 평범함, 흔해빠진 착상에 있어서 강력한 사상이며, 주권 개념이 데리다-랑시에르-프랑스적 공화주의를 하나의 에피스테메로 결합시키고 있다고 한다면, 있는지 없는지를 포함해, 주권을 아무래도 좋다고 생각해온 또 다른 에피스테메를 이룬다. 그것은 주권을 아무래도 좋은것으로 한다는 문제 관심에 의해서 정체의 제도를 실제로 설계해온 에피스테메이다.

그러나 이런 차이는 정치적으로 봐서, 어디에 효과를 나타내는 것일까? 어디까지나 주권을 자기로 하는 민주주의의 추구와, 주권의 보류에 의해 성립하는 공화주의를 가상의 적으로 하는 노선은 어디에서 갈라지는 것일까? 그것은 자명하지 않다. 그런 공화주의에 대해서, ‘도래할 민주주의노선에 더 저항한다는 입장도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포콕이 꼼꼼하게 계보를 추적하고, 네그리가 그것을 전제로 그의 구성적 권력의 개념사를 그려낸, 근대의 공화주의는 마키아벨리적 계기로서 이탈리아에서 영국으로, 게다가 미국으로 계승되며, 지정학적으로는 오늘날 세계정치에 있어서 앵글로색슨 동맹의 확장을 요구하는 커먼웰스에 사상적 주형[거푸집]을 계속 제공하고 있으며, 전지구적 자본주의노선에 대해, ‘민주주의를 기치로 내세우고, EU에 기대를 걸면서 저항하는 자세는 현대의 양식을 거의 대표하고 있다는 감이 있다. 그것은, 얼마간의 효과를 낳는다고 하는 의미에서는 분명히 객관적인 대항축을 형성하고 있으며, 진행 중인 투쟁의 귀추를 전망하기에는 너무 빠른 감도 있다. 예를 들어 아랍의 봄에는 민주주의파의 승리라고 정리해버릴 수 없는 요인이 너무도 많다. 무엇보다 그것은 반란의 전지구화라고도 불러야 할 과정 속에 있으며, 과정을 가속시키고, ‘주권원리의 세계적 후퇴를 우리에게 고한 것이다. 그래도 이라크 전쟁과 그리스 위기 후에도 아직, 하버마스를 필두로 하여 EU간주권적 통치를 체념하지 않았으며, 미국의 이라크로부터의 철수를 단적인 특징으로 하는, 공화국의 군사적 확장노선의 분명한 후퇴 경향에 동반된 이 대립축은 점점 더 많은 기대를 모을 수도 있다.

그러나 바로 그렇기에 물어야 한다고 우리는 생각한다. ‘민주주의공화주의에 대한 유효한 맞수(counter)가 될까? 대립축이 실제로 만들어내는 효과들은 당사자가 기대하는 그대로일까? 우리가 민주주의의 존엄을 구하자!”라는 정치 문서에서 간파한 것은, 채무 문제가 양자의 차이를 실질적으로 소거하고 있다는, 기대와는 거꾸로 나아가는 경향에 다름 아니다. 본서가 무엇보다도 경제를 문제 삼는 까닭도, 똑같은 질문이 관련되어 있다. 그러나 그런 경제로 한걸음 더 내딛기 전에, 1993년에 데리다의 마르크스의 유령들에서 처음 등장한 이후, ‘도래할 민주주의노선이 어떻게 되어 왔는지를 확인해야 할 것이다. 프랑스를 대표 선수로 하는 민주주의’ vs 영미가 인솔하는 공화주의라는 도식이 형태를 이루는 데에는 맑스의 유령들이 적잖은 역할을 해 왔을 터이다. “우리는 오늘날 모두 사회주의자이다라고 주류 언론이 말할 정도로. ‘도래할 민주주의를 기치로 내세운 새로운 인터내셔널은 주권국가를 광신적으로 지키려고 하는 공화주의와 확장을 요구하는 커먼웰스”(전지구적 자본주의) 양자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는 입장을 사상적으로 지목했을 것이다. ‘경제라는 바닥을 참조하여 그 파탄을 주장하는 것과는 별개로, 고유하게 정치적인 수준에서, 혹은 간주권적이고 세계정치적인 차원에서, 이미 20년의 역사를 지닌 새로운 인터내셔널의 현재가 어떤지는 확인해 두어야 한다.

 

Posted by 상겔스 상겔스

채무공화국의 종언


우리는 언제부터 노예가 됐나

 

 

債務共和国の終焉 

 

 

이치다 요시히코오우지 겐타,

고이즈미 요시유키나가하라 유타카


2013년 9월 30일 초판발행



목차

1경제를 둘러싼 현재

1. 심리 전쟁이 된 경제

2. 경제적인 것의 <신체>

3. 금융-채무혁명

 

2. 세계공화국

1. 지속을 요구하는 공화국

2. 문화 좌파에서 공공성 좌파로

3. 유럽 공화국의 출현

4. 민주주의의 병과 공화주의

5. ‘새로운 인터내셔널이라는 유령

 

3렌트 자본주의

1. 렌트에 의한 생산의 침식

2. 렌트/스톡 원리론

(1) <()>, 렌트스톡

(2) 화폐순환

(3) 이윤의 재정의

3. 렌트에 의한 채무의 확대혹은 투자의 행방

4. 희소성을 둘러싼 역전과 파산관리의 소비에트

 

후기 이치다 요시히코

 

본문 속의 외국어 문헌 중 일본어 번역본이 있는 문헌에 관해서는 번역서의 쪽수를 주에 붙였으나 번역문은 적절하게 변경했다.


2. 세계공화국

3. 유럽 공화국의 출현


물론 하버마스는 이 공화국의 위기를 알고 있다. 그리스 위기 때에, 그가 201111월에 보수계 신문에 발표한 에세이의 제목은 민주주의의 존엄을 구하자!”였다. 유럽연합(EU)이 합의한 그리스 지원책을 받아들일지 여부의 국민투표 계획이 독일과 프랑스 총리의 공갈에 의해 철회되고, 파판드레우 총리가 퇴진으로 내몰린 사건을, 하버마스는 게재된 신문의 보수적 사주와 함께 민주주의의 투매(sacrifice sale)”로 간주한다. 지원 방안은 페스트와 콜레라 중 어느 쪽을 선택할 것인가라는 견딜 수 없는 선택지였으나, 바로 그렇기에 그리스인은 스스로 선택하는 것을 할 수밖에 없었다고 그는 말한다. 바로 그것이 민주주의의 존엄이라고 말해야 할 것이라면서. “그리스 국민은, 최소한 사후적으로라도, 개헌과 똑같은 주권의 상실을 허용할지 말지에 대해 투표해야 하지 않았을까? 이미 EU, IMF, 그리고 유럽중앙은행으로 이루어진 트로이카의 지시를 따름으로써, 아일랜드에서도, 포르투갈에서도 마찬가지로, 아무튼 이 주권 상실이 일어나고 있었으니까.” 이것을 쓴 시점의 하버마스에게는 알아서 좋을 것은 없었으나, 2012년의 6, 아일랜드는 국민투표를 행했다. 페스트냐 콜레라냐(재정긴축이냐 EU이탈이냐)를 선택해야 했다(전자를 선택했다). 아일랜드는 그리스와는 달리 민주주의의 존엄을 지킨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하버마스도 확인하고 있듯이, 국민투표 이전에 진작에 이 주권 상실이 일어났던 것이다. 이미 주권은 상실되었기 때문에, 투표의 실질적 의미는 주권의 상실을 허용할지 여부가 아니었다. 바로 하버마스가 말하듯이 사후적으로 주권 상실을 아일랜드의 주권자가 인증한 것일 뿐이다. “페스트냐 콜레라냐의 국민투표는 민주주의의 존엄의 방법을 둘러싼 선택이었던 셈이다. 민주주의자 하버마스가 민주주의에 자신의 의지를 갖고 죽을 것을 요구하고 있다. 물론 그는 죽는 것만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다. “유럽의 정치가 신뢰를 얻으려면, 단계화된 통합을 향한 신빙성 있는 제도 설계에 의한 것뿐이다.” , 유럽 헌법의 창설이다. “(‘민주주의 유럽) 프로젝트의 필요성과 효용에 대한, 널리 공공의 장소에서의 논쟁이 이미 시작되고 있어야 한다.” 국민국가 단위의 민주주의에는 스스로 존엄사를 선택하게 하고, EU라는 규모에서 똑같은 민주주의를 재생시키는, 그것이 하버마스에게서의 사실상의 정치노선에 다름 아니다. 마키아벨리가 피렌체부터 이탈리아 전역을 조망하면서 그것을 꿈꿨듯이, 한나 아렌트가 미국 건국 혁명에서 그것을 찾아냈듯이, 하버마스도 자유의 창설 Constitutio Libertatis”을 유럽에 호소하려고 하고 있는 듯이 보인다. “유럽공화국, 사회민주주의의 차기 노선인 것처럼. 그러나 위기의 정체는, “진즉에 주권 상실이 일어나고 있다는 것 아닐까? “페스트냐 콜레라냐말고는 선택지가 없다는 그것이, “민주주의의 존엄은 이미 상실되고 있다고 증언하고 있지 않은가? 바꿔 말한다면, “유럽공화국세계공화국과 마찬가지로, 이미 실재하고 있다(각 국민의 민주적 주권을 죽이고 있다)고 메르켈과 사르코지와 파판드레우가 연기한 그리스 비극은 알려주지 않았던가.

 

오늘날 중대한 갈등은 유로권 국가들과 은행 로비 사이의, 외부에는 그다지 알려지지 않은 비밀의 이면협상의 장소로 이행하고 있다. 그것을 민주주의의 빛에 비춰진 아레나(arena)에로, 즉 피해자가 논의의 당사자로서 결정에 참가할 수 있는 장소에 다시 한 번 되돌아가게 했던 것, 설령 모두가 공포에 떨던 순간일 뿐이든, 되돌아가게 했던 것, 이 점이야말로 파판드레우 총리의 치적이다.

 

중대한 갈등을 억누르고 보이지 않게 하는 것이 공화국의 본성이었기 때문에, 그것은 유럽에서 이미 실재하고 있다. 그리스 위기 때에는, “민주주의의 빛에 비춰진 아레나에서 고전적으로 공화주의적인 정치가 거행[집행]된 것이다. “파판드레우의 방향전환, 즉 비극 제3막의 전환이 있으며, 이 비극의 진정한 냉소적인 의미가 드러났다.” 하버마스는 그 냉소적인 의미시장(market)한테는 민주주의의 정도가 적을수록 사정이 좋다고 해석한다. 그러나 공화주의와 민주주의의 본성상의 차이가 또 다시 노정됐다고 할 수도 있다. 실제로 유럽 헌법이 창설됐더라도, 그리스 국민에게 해결책이 찾아오지는 않을 것이다. 아일랜드에서 실시된 국민투표는 이렇게 시사하고 있다. 한순간의 카타르시스와 맞바꿔서, 비극은 잊히고 공화국이 지속하는 것이다. 이미 죽은 자의 사후적존엄사란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비극이라기보다는 부조리극일 것이다. 하버마스보다 훨씬 더 자각적인 공화주의자는 이미 수년 전에 이렇게 말하지 않았던가. “프랑스의 좌익은 유럽 통합을 하나의 대체 신화로 했다(레지스 드브레). 그러나 드브레도 몰랐던 것은, 좌익이 그것을 신화라고 깨닫고, 하버마스가 미테랑에 이어서 그것을 다시 한 번 신화로서 활성화하려고 할 때, 공화국은 이미 비밀의 이면협상의 장소라는 모체 내에서 성장을 이룩해왔다는 것이다. 신화라고 생각했던 공화국이 천천히 무대에 등장하여 민주주의의 죽음을 드라마로 만든다. 이 드라마에 의해 공화국이 민주주의의-죽음의-아래에서 탄생한다. 이 공화국에는 헌법이 아직 없나? 그러나 드브레에 따르면 법치는 공화주의의 본질을 구성하지 않는다. “전통적으로 사회적인 조정도 행했던 공화국에서는 공무원이 매우 중요해진 반면, 규칙이 지역적이고, 사적인 상인과 프로테스탄트로 이루어진 민주주의 국가에서는 법률가의 역할이 매우 크다. 공화국을 만드는 것은 우선 무엇보다도 공화주의자이며, 그들의 의지이다. 민주주의는 사람들이 상대적으로 무관심해도, 형식주의적으로, 즉 법적 문서의 차가운 객관성을 따라서 기능한다.” 이 정의를 따라 말하면, 막대한 EU 관료군이 존재하고, 민주주의에 정지를 요구할 정도로 공통 통화를 존속시키려고 하는 의지를 가진 정치가도 존재하는 유럽은 이미 충분히 공화국이다.

전해진 바에 따르면, 하버마스의 에세이를 게재한 신문사의 사주이자 독일 민족주의의 대사제로 꼽히는 인물은 금융위기를 지켜보면서 어쩐지 좌익이 옳은 것 같다고 점점 생각하게 됐다고 이 신문에 썼다고 한다. 리먼 쇼크 이후에는 뉴스위크지가 그 표지에서 우리는 오늘날 모두 사회주의자이다라고 선언했다. 재정긴축(=우익)이냐, 아니면 정부채무에 의한 복지국가의 견지(=좌익)냐라는 분기가 문제는 아닐 것이다. 채무에 관해서는 빌린 사람이 갚으면 된다는 불개입의 입장을 고수할 수밖에 없는 시장주의를 우익으로, 재분배 기능을 가진 국가에 채무 부담에 대해서도 재분배시키려고 하는 입장을 좌익혹은 사회주의로 보고 있는 것이다. 하버마스가 자유주의의 관할지역이라고 하고 드브레가 민주주의의 지배 지역이라고 한 사적 개인의 세계가 오늘날에는 우익의 영역이며, ‘공공은 민주주의적(하버마스)이든 공화주의적(드브레)이든, ‘() 좌익이 점령했다. 채무가 중대 문제인 한에서, ‘우익나설 차례는 없으며, “모든 관여자를 공공공간 속에 참여시키려고 하는 좌익만이 이 일을 맡을 수 있다. 그리고 채무가 생산을 상회하며, 금융적 보험, 보험적 금융이 그 차액을 지탱하는 오늘날, 채무는 다른 누구보다도 금융기관의 중대사이며(파생상품에 의해 보험을 걸고 있는 것은 그들이다), ‘좌익만이 그들을 구할 수 있다. ‘상정원본(notional amount, 이론상의 금액)’이 아니라 현실의 원본을 제공하고 있는 사람을 관여자로서 공공공간 속에 불러들이고, 그들에게 최종적인 부담을 합의하게 함으로써였다. 국민투표를 거치든 거치지 않든 (그것은 토의 절차의 How에 불과하다), 토의의 의제는 미리 정해져 있으며, 나머지는 합의하는 것뿐이다. 그리고 합의 내용의 절반은 이미 결정됐다. 새로운 공공공간 속에서 관여자로서 자격을 부여받은 자가 2급의 신()시민으로서 1급의 구()시민의 부담의 일부를 대신 떠맡는 것이다. 그러나 얼마나? 남겨진 의결 내용은 그것뿐이다. 그리스 위기에서, 아일랜드 국민투표에 있어서, 유럽 공화국이 정치의 무대에 올린 것은 비극의 오래 계속될 뿐인 이 후반부분일 것이다. 4막의 시작이다. 생각해야 하겠지만, 그리스 비극에 제4막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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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무공화국의 종언


우리는 언제부터 노예가 됐나

 

 

債務共和国の終焉 

 

 

이치다 요시히코오우지 겐타,

고이즈미 요시유키나가하라 유타카


2013년 9월 30일 초판발행



목차

1경제를 둘러싼 현재

1. 심리 전쟁이 된 경제

2. 경제적인 것의 <신체>

3. 금융-채무혁명

 

2. 세계공화국

1. 지속을 요구하는 공화국

2. 문화 좌파에서 공공성 좌파로

3. 유럽 공화국의 출현

4. 민주주의의 병과 공화주의

5. ‘새로운 인터내셔널이라는 유령

 

3렌트 자본주의

1. 렌트에 의한 생산의 침식

2. 렌트/스톡 원리론

(1) <()>, 렌트스톡

(2) 화폐순환

(3) 이윤의 재정의

3. 렌트에 의한 채무의 확대혹은 투자의 행방

4. 희소성을 둘러싼 역전과 파산관리의 소비에트

 

후기 이치다 요시히코

 

본문 속의 외국어 문헌 중 일본어 번역본이 있는 문헌에 관해서는 번역서의 쪽수를 주에 붙였으나 번역문은 적절하게 변경했다.


2. 세계공화국

2. 문화 좌파에서 공공성 좌파로

현실 사회주의가 사라진 이래, 공공성 개념은 좌파의 피난처가 된 적이 있다. 공공이라는 공간은, 과거의 공산주의가 목표로 삼았던 계급투쟁이 끝난 사회를, 의미를 바꿔도 이념적으로 계승할 수 있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일 것이다. 이미 봤듯이, 공화국에서의 분쟁의 부재는, 분쟁을 국내적(domestic)으로는 승인하지 않는, 즉 부근으로 분쟁의 장소를 옮긴다는 함의였다. 그렇게 하자 분명히, 공화국이 세계 자체를 외연으로 하게 되면, 겉보기에는 세계공산주의의 이상과 비슷하다(사회주의 공화국에서조차 외부의 적은 존재했다). 물론 현실공산주의가 모습을 감춘 후에는 국가가 남았다. 그래도, 혹은 그렇기 때문에, 공공공간은 국가지양할 수 있는 장인 것처럼 마음속 깊이 받아들여질 수 있다.

 

공론장의 구조변동[하버마스의 1962년 저작]으로부터 거의 30년 후에 쓴 신판서문이나 사실성과 타당성에서는, 공공성이 위치되는 장소가 크게 변화한다. 그것은 비국가적일 뿐 아니라 동시에 비시장적 영역으로서의 시민사회(Zivilgesellschaft)’이다. 이런 의미의 시민사회를 형성하는 것은 자유로운 의사에 기초한 비국가적비경제적인 결합이다.(齋藤純一 公共性)

사이토 준이치, 『민주적 공공성』, 윤대석, 류수연 옮김, 이음, 2009.


위르겐 하버마스, 공론장의 구조변동』, 한승완 옮김, 나남출판, 2004.

 

하버마스나 사이토 준이치(齋藤純一)가 공산주의자였던 적은 없지만, ‘자유로운 의사에 기초한 결합이 개인을 단위로 하는 결합이며, 포괄적인, 즉 국가나 시장과 마찬가지의 전체성을 지닌 사회라면, 그것은 이미 일종의 공산주의 사회가 아닐까? 그와 같은 결합이 국가에서도 시장에서도 없는 곳, 즉 자본주의 사회의 상부구조에서도 하부구조에서도 없는 곳에서 발견된다. 정확하게는 가탁(仮託)되고 있다. 맑스주의에 있어서는, 상부도 하부도 아닌 심급은 원리적으로 존재하지 않았을 터인데, 갱신된renewal 좌파 이론의 개념 배치도에서는 공공공간이 공산주의 사회를 대체하는 것이다. 19세기 이래의 협동조합사상(어소시에이셔니즘)이나 특수한 당 조직론을 가진 20세기의 맑스주의에서는 이것과 비슷한, 비국가적비시장적인 장소에서 공산주의 사회의 모형이 될 수 있는 인간의 결합관계를 지금 여기서 정위하고자, 발견하고자 하는 지향을 발견할 수 있다. ‘현실사회주의의 소멸 후, 공공공간이 그 행렬에, 처음부터 무한정한 넓이를 가지고 가세한 것이다. 공공공간은 더 이상 부분사회가 아닌 자유의 공간이며, 국가를 지양한 공화국이다.

하버마스를 표지판으로 삼아 좌파사상사를 돌이켜보면, 그가 오늘날의 좌파 전반에 있어서 선구적인 까닭과, 90년대 이후 신구 좌파가 공공성 개념에 우르르 몰려드는 기미를 잘 알 수 있다. 1962년의 시점에서 공론장의 구조변동의 공공공간은 유럽의 부르주아 시민사회를 모범으로 삼은 공권력에 대한 비판적 영역이며, ‘친밀권’(부르주아 시민의 사생활)에 그 뿌리를 두고 있었다. 독서를 하고 카페에서 얘기를 나누고, 가정에서 현악사중주를 즐기는 듯한 자립된 시민층의 생활 속에서부터 국민적인(national), 나아가 유럽 규모의 문예공화국이 생겨나고, 그것이 공권력의 조작적 공개성에 대항하는 비판적 공개성의 잠재력을 키웠다는 것이다. 두 가지 점을 확인해야 할 것이다. 우선 하버마스는 다른 사회민주주의자보다 앞서서, 국가를 통한 자본주의의 개량(베른슈타인식 수정주의)과는 다른 사회민주의 노선(민주적 자본주의를 추구하는 노선)을 이론적으로 제기했다는 점이다. 공공공간은 국가도 시장도 아니지만 미래 사회의 모태인 장소로서 사회민주주의 속에 도입됐다. 공공성 개념에 의해 사회민주주의가 진화했다고 말해도 좋다. 이때 루카치 이후의 서구맑스주의는 시민사회파 맑스주의가 됐다. 일본에서의 그 도입자들은, 파리나 제네바, 로마를 방문하고 유럽시민사회의 성숙을 체득하라고 권장한다. “유럽의 지성이 자각적으로 형성한 것이 우리에게도 가치기준이 될 것이다. 동구사회의 지적 세계는, 이제, 서구 시민사회 형성기의 사상을, 사회주의의 보다 높은 차원으로 비약을 요구하고 추구하고 있는 것이다”(平田清明). 그와 같은 형태로 선진자본주의야말로 사회주의에 가장 가깝다는 정통파 맑스주의의 원점을, 사회민주주의가 러시아 맑스주의로부터 되찾았다고 말해야 할지도 모른다.

둘째, 새롭게 발견된 미래 사회의 모태는 이미 문화의 장소였다는 점이다. 오늘날까지도 호되게 비판받고 있듯이, 이 공공공간은 부르주아적이다. 페미니즘은 때문에 거기서는 남성중심주의를 키우는 장소라고 지적하고, 3세계주의는 공공공간 속에서 유럽인과 아시아인, 아프리카인 사이에 의사소통적 행위의 합리성이 작동하는가라고 물었다(일본을 방문한 하버마스는 이 질문에 대해 모르겠다고 대답했다). 그러나 이처럼 부르주아 시민사회를 비판적 공개성의 영역이라며 노골적으로 옹호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부르주아적이라는 것의 의미는, 자본가적이라는 것이 아니라 문화(교양시민적)이라는 것이었다. ‘시민의 의미를 본질 환원주의(경제주의)적으로가 아니라, 또한 법-정치체제에 의해서도 아니라, 하물며 생물학적으로가 아니라 정의했기 때문에, 공공공간은 이미 1962년의 시점에서, 공화주의 국가로부터 넓은 의미의 문화적인 장소로 바뀌었던 것이다. 그래서 신판서문(1990)에서 “60년대 말 이후에 형성되고 정착된 대항문화와 새로운 사회운동’(부의 분배가 아니라 생활양식의 문법을 쟁점으로 하는 페미니즘, 에콜로지, 반핵반원전 등의 운동)에 대한 평가”(齋藤純一 앞의 책)를 하버마스가 자기 비판적으로 행하는 것은, 용이한 것 이상으로 자기 옹호적인 수정이었다. 68-69년에는, 프랑크푸르트학파의 우두머리[領袖] 아도르노가 학생운동을 새로운 전체주의”, “좌익 파시즘이라고 부르기도 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여파(aftermath)새로운 사회운동을 흡수, 회수하는 이론적 장치를 시민사회내지 공공성 개념은 처음부터 준비하고 있었던 것이다. 차별을 고발하거나 다양성이나 차이에의 권리를 요구하는 90년대의 문화좌익, ‘문화를 지렛대로 삼아 어디까지나 사회주의 혁명을 생각하는 일부 구신좌익을 빼고, 공공성의 사회민주주의에 미리 이론적으로는 패배했던 것도 마찬가지이다. 하버마스에게 90년의 신판서문이 아무리 수정됐다고 해도, 그는 각종 문화좌익보다 선구적으로 맑스주의의 문화적 전회”(프레드릭 제임슨)를 성취했던 것이다. 68년의 후예로서의 새로운 사회운동의 역군들은 우익이 역사가 끝났다고 승리를 선언한 후에 문화의 배로 옮겨 탄 것일 뿐이다. 교양시민적 문화 개념을 인류학적, 사회학적인 그것으로 비판적으로 확장 내지 수정하려고 해도, 그것이 미리 비국가적비시장적인 문화의 장소가 아니라면, 그것조차 불가능했을 것이다.

사이토 준이치(齋藤純一)는 이 신판 서문에 대해 이렇게 적고 있다. “공공성에 있어서의 과제는, 국가나 유력한 조직의 활동에 대한 비판적 감시로부터, 토의를 통한 적극적인 정치적 의사형성, 정치적 아젠다의 설정으로 옮아간다. 자유주의로부터 공화주의(비국가적인 차원에서의 정치적 자치의 실천을 중시하는 사상)로의 중심 이동이 보인다.” 조금이라도 사상사에 통달해 있으면, 어느새 공화주의는 비국가적인 차원의 사상이 되어버렸네?라고 묻는 게 당연한 서술이다. 공화주의가 문화의 영역에 침입해들어갔다는 것을 역사적으로 확인시키는 서술이기도 하다. 게다가 문화좌익도 공공성 논자도 모두 공화주의자이다, 라고 오늘날에는 말해도 좋은 하나의 근거가 되는 서술이다. 아무리 토의갈등conflict’, 마치 계급투쟁의 후계인 양 공공공간 속에 들여왔다고 해도(문화 연구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그렇게 주장할 수도 있다), 거기에는 공화주의의 틀이 이미 [사람들을] 걸려들게 하고 있다. 교양시민의 문화도 민속적인(ethnic) 문화도 문화인 것처럼, ‘토의갈등은 현대의 아고라(사이토는 공공공간을 담론공간이라고 정의한다 담론 discourse이란 우선 연설이다) 속에 둘러싸인다. ‘현실의 사회주의를 잃어버린 좌익은 공공공간 속으로 계급투쟁의 잔재를 거느리고 도망쳐 들어갈 수 있더라도, 그것은 공화주의자가 되는 것과 맞바꾼다는 것이다. 권력문제와의 관계에서 정의되는 민주주의자(데모스파, 멀티튜드파)의 자격을 잃어버린 것과 맞바꾸는 것이다. 도대체 공공성 공화주의에, ‘갈등의 이름으로 계급투쟁공화국속에 들여오려고 노력하는 민중의 대변자’(혹은 복면을 쓴 맑스주의)라는 규정을, 우로부터 비판하기 위해서든 좌로부터 옹호하기 위해서든, 줄 수 있을까? 역사상의 공화주의가 계급투쟁의 억제, 억누름을 본질적인 사명으로 했듯이, 현대의 공화주의는 자립적인 담론공간으로만 갈등을 한정하려고 한다. 이런 사상에 의해, 시위가 거칠어진다는 것은 정치로부터의 일탈이며, 그것 자체가 사회문제인 것이다.

하버마스 자신은 스스로를 민주주의자라고 규정하기는 했으나, 공화주의를 표방한 적은 없다. 그는 형이상학적인 목적(‘이나 완성’)시민적 덕 civic virtue’으로 변환함으로써 성립하는 공화주의(의 내용이 공화국의 지속공화국 확장에 대한 헌신 이다), ‘합의를 목표로 하는 토의의 절차에 기초를 두는 자신의 민주주의를 뚜렷하게 구별한다. 게다가 이 양자로부터, 시장에서의 계약이나 법적 권리의 기초인 자유주의도 또한 구별하고 있다. 그리고 이 세 가지를 그의 민주주의에 통합시킨다.

 

자유주의의 견해에 따르면, 민주적 과정은 오로지 이해관계의 타협이라는 형식으로 실시된다. 반면 공화주의의 견해에 따르면, 민주적 의사형성은 윤리적-정치적 자기 이해의 형식으로 실시된다. 토의 이론은 자유주의와 공화주의의 두 진영의 요소를 거둬들여, 이것들을 심의와 의결을 위한 이상적 절차라는 개념에 통합하는 것이다(사실성과 타당성, 1992).

위르겐 하버마스, 사실성과 타당성』, 박영도, 한상진 옮김, 나남출판, 2007.

 

어떻게 하버마스 이론적으로 통합되는가는 우리의 관심사가 아니며, 또한, 토의의 장소에 주어지는 포괄적 명칭이 시민사회’ = ‘공론장’(본고의 용어법으로는 공공공간’)이라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3종의 정치이념을 민주주의가 통합하고 있다. 토의 이론은, 자유주의와 손을 잡고 나아가는 이해조정의 과정에도, 공화주의의 관할인 정치적 의사형성의 과정에도, 바로 토의의 절차들(토의의 How), 토의라는 절차(What으로서의 토의)를 과정의 이상으로서 개입시키려고 한다. 그 실천은 오늘날, 행정기관의 의사결정을 보완하는 주민 참여의 토의 민주주의로서, 일본에서도 곳곳에서 확산되고 있다. 토의에는 커뮤니케이션을 통한 합의 형성이 목적으로서 부과되기 때문에, 목적으로서의 합의가 이해 조정 과정에서도 정치적 의사형성 과정에서도 통제적으로 작동하는 것을, 3종의 정치 이념의 통합은 효과로서 기대한다. How이자 What인 토의의 목적=합의가 공공공간을 구성하는 것이어야 한다. 그것이 하버마스의 민주주의이다. “모든 있을 수 있어야 할 관여자가 합리적 토의에 대한 참가자로서 합의할 수 있는 행위 규범이야말로 타당하다.”민주주의 원리는 정당한 법제정 절차를 규정해야 한다고 할 뿐만 아니라, 법 매체 그 자체의 산출까지도 제어해야 한다.” 토의의 How(대의제, 직접민주주의, 미디어 등)는 현실적으로는 관여자를 다양하게 한정하며, 다양한 배제를 동반하지 않을 수 없기에, What으로서의 토의에는 그런 한정은 포함되지 않으며, 이 불균형 때문에, 목적으로서의 모든 있을 법한 관여자의 합의는 합의의 확대 균형을 요청할 터이다. 배제된 자는, 배제됐다는 관여를 이미 하고 있기 때문이다. “모든 것은 잠재적으로 보편으로까지 확장되어야 하는 것으로서, 각각의 특수한 합의를 타당한 것으로 한다.

아무튼 공공공간에는 미리 배제된 관여자가 있어서는 안 된다. 공공공간은 배제를 배제하는 확대에 의해 지속하는 것이다. 부르주아에서 프롤레타리아로, 남성에서 여성으로, 국민에서 외국인으로, 심지어 기존의 에서 기존의 , 사람 또는 그 지위의 시민권을 끊임없이 확장하려고 하지 않는 공공공간은 부패한다. ‘보편적 규범의 내용은 미리 주어지는 (칸트의 도덕처럼) 것이 아닌 대신에, ‘관여자의 영구 확대의 가능성으로 변환됨으로써, 그때그때의 타협이나 의사형성의 타당성을 뒷받침할 수 있다. “누구도 합리적으로 이의를 제기할 수 없을 것이다”, 이런 기준을 누구에게 한정을 가하지 않고 규범으로 하는 의지만이, 공공공간을 지속시키는 것이다. , 토의에 의한 공공공간의 제어시민사회확장 그것을 구성하는 사람문제’(빈부격차, 국적, 젠더 등) 둘 다 이어야 한다. ‘합의의 타당성은 사실상 그 내용이 아니라 아직 합의하지 않은 구성원들이 있을 수 있다”, “아직 해결이 합의되지 않은 문제가 있을 수 있다라는 개방성에 있다.

더 말할 것도 없다. 공공공간은 영토의 침략을 채무의 확대가 아니라 관여자로서의 시민의 확장으로 대체한 공화국이다. 이 확장력, 자기 팽창력에 의해 공공성 개념은 문화좌익을 흡수하고, 보수 사상으로서의 공화주의(국가에의 헌신을 공민公民의 덕으로 삼는)와도 공존시킬 수 있었다. ‘문화좌익의 등장에 수반된 문화 개념이 의미의 인플레이션에 휩쓸린 것처럼, 공공성 개념은 공공성의 확장=지속=통제라는 본성을 따라서 세계공화국을 다운사이즈시켜야만 할 때 개념적 인플레이션을 경험하고 있다. 이 확장력에 시민을 합의에 이르게 하는 잠재력을 기대하고 있다.

 

 

Posted by 상겔스 상겔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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