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터데스크 관리자

도움말
닫기
적용하기   첫페이지 만들기

태터데스크 메시지

저장하였습니다.


논제 1. 아래의 세 제시문은 국가라는 관념과 형태의 변화에 관한 것이다. 제시문의 논점을 각각 300자 이내로 요약하시오.

논제 2. 제시문을 참고로 현대국가와 근대국가의 차이점을 설명한 후, 현대 국가가 어떤 변화에 노출되어 있는지 논술하시오. (700자 이내)

논제 3. 아래 제시문과 위의 논제에 대한 답변을 기초로 할 때, 향후 국가의 위상을 고려하면서 자신의 국가관이나 국가상을 800자 이내로 논술하시오.

<가>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자 국민국가는 시대에 뒤떨어졌다는 것은 일반적인 생각이 되었다. 이러한 생각이 명실공히 최초의 초국가적 기구, 즉 국제연맹을 창설하려는 시도의 바탕이 되었다. 그러나 국제연맹은 무력하다는 것이 곧 드러났다. 그리고 제2차 세계대전 후 창설된 국제연합(UN)도 처음 40년간은 줄곧 강대국끼리 서로 다투는 장소로서의 구실밖에 하지 못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의 다른 하나의 시도인 범국제적 통화기구의 창설은 케인즈가 죽기 몇 달 전에 제안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미국에 의해 거부당하였다. 그런 반면 핵을 범국제화하려는 미국의 제안, 즉 핵에너지와 핵무기의 범국제적 통제를 위한 바루크 계획은 소련에 의해 거부되었다. 그리고 제2차 세계대전 후 창설된 기구들 가운데 가장 성공적인 「관세와 무역에 관한 일반협정」(GATT)도 분명히 국가 주권의 가장 핵심부문, 즉 국제무역에 있어 글로벌리즘(globalism)의 실현을 의도하였으나 개별 국가의 이해관계를 거의 극복하지 못하였다.
오히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전전(戰前) 제국[식민지 제국]의 계승자로 자처한 수많은 국민국가들이 탄생하였고, 그들은 스스로 종전의 제국과 같이 조직되었으며, 그리고 거대국가(megastate)로 이행해 갔다.
그러나 최근 10년간 ― 아마도 1970년대부터 시작하여 ― 국민국가들이 분해되는 양상을 나타내기 시작하였다. 국민국가는 핵심 영토[분야]를 이미 ‘포위’당하고 말았다. 국가주권이 그 의미를 상실하고 말았던 것이다. 모든 정부가 직면하는 새로운 도전은 점점 더 단순히 개별 국가적 또는 국제적 행동으로 해결할 수 없는 것이 되고 있다. 그런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그들 스스로 ‘주권’을 가진 ‘범국제적 기구들’(transnational agencies)을 필요로 하고 있다. 또한 ‘지역주의’(regionalism)가 점차 국민국가를 옆에서 훼방하고 있다. 그리고 국가의 내부에 있어서는 ‘종족주의’(tribalism)가 국민국가의 토대를 무너뜨리고 있다.
‘돈은 조국을 모른다’라는 것은 매우 오래된 속담이다. 그러나 국민국가는 크게 말해 이 속담이 틀렸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고안된 것이다. 돈의 통제[통화에 대한 지배권]는 소위 ‘주권’의 핵심적 영역에 속한다. 그러나 돈[통화]은 국민국가의 고삐를 풀고 빠져나갔다. 돈은 범국제적으로 되어버렸다. 돈은 이제 더 이상 국민국가들 혼자 또는 그들의 공동 노력으로도 통제될 수 없다.
중앙은행마저도 통화의 흐름을 더 이상 통제하지 못한다. 중앙은행은 이자율[금리]의 인상과 인하를 통하여 돈의 흐름에 영향을 주려고 노력할 수 있을 뿐이다. 그러나 돈의 흐름에 있어 금리에 못지 않게 정치적 요인이 점차 중요해져가고 있다. 어느 한 개별 국가의 중앙은행의 통제 바깥에 있는 통화의 양 ― 뉴욕 외환 시장이나 런던 국제 금융 시장과 같은 국제금융시장에서 매일 거래되고 있는 돈의 규모 ― 는 이미 개별 국가나 국제 거래에 필요한 수준을 훨씬 초과하여 넘치고 있다. 그 넘치는 통화는 자기들을 통제하려는, 그리고 한계를 그으려는 어떠한 시도나 관리하려는 것은 더욱 피해 나간다.
정보 또한 조국을 모른다. 정보는 보댕의 주권 개념의 속성에 포함되지도 않았다. 원래 16세기 후반에 정보라는 것이 그렇게 많지도 않았으니까 말이다. 그러나 금세기에 매스미디어가 등장하자 ― 신문, 영화, 라디오 ― 정보의 통제[지배]는 국가 주권의 새로운 실천자[주인]인 전체주의자들에게는 즉시 필수적인 것이 되었다. 레닌부터 시작하여 모든 전체주의자들 ― 무솔리니, 스탈린, 히틀러 ― 은 정보에 대해 완벽한 통제를 가하려고 노력하였다. 또한 민주주의 국가에서도 정보의 지배 ― 특히 텔레비전의 지배 ― 야말로 점점 더 정치가와 정치의 핵심 기술이 되고 있다.
지금 정보는 통화와 마찬가지로 완전히 범국제화되었다. 정부는 여전히 뉴스 프로그램을 통제할 수 있다. 그러나 제2차 세계대전 중 독일에서조차도 저녁 뉴스 시간에 나치 선전상 요제프 괴벨스의 연설을 많은 사람들이 들으면서도 비밀리에 BBC 방송을 들었다. 그러나 뉴스 프로그램은 점차 ‘정보’의 작은 부분밖에 차지하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뉴스 프로그램이 ‘정보’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점차 작아지고 있다.] TV의 30초짜리 상품광고, 18분짜리 애정연속극이 가장 신경 써서 만들어진 뉴스 프로그램만큼, 혹은 아마도 그 이상만큼으로 많은 정보를 포함하고 있다. 이제 정보에는 국경이 없다. 확실히 역사상 가장 절대적인 정권조차도 국민의 정보 접근을 계속 막을 수 없었다는 사실이 공산주의의 몰락과 소련 제국을 붕괴시킨 주요한 요소였다.
정보는 왜곡될 수도 있을 것이다. 세계에서 가장 인기 있는 TV 프로그램의 하나인 ≪달라스≫(Dallas)에 묘사되고 있는 미국인의 생활상은 전혀 얼토당토않은 풍자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그러한 사실이 많은 나라에서 많은 사람들이 다른 어떤 ‘메시지’보다 ≪달라스≫를 시청하고 있다는 사실을 변화시키지 않는다.
공산주의 중국에서조차도 ≪달라스≫의 시청을 금지할 수는 없었다. 수년 이내로, 극히 소형화되어 그것을 집안에서 사용하는 것을 비밀경찰도 막을 수 없는 접시형 수신 안테나, 그리고 전 세계의 어느 곳에도 방송을 보낼 수 있는 통신 위성으로 말미암아 좋든 싫든 간에 정보는 진정으로 범국제적이 될 것이며, 그리고 진실로 어느 국가도 통제할 수 없게 될 것이다. 자국의 국가 문화의 순수성 유지에 관심을 갖는 나라들, 예를 들어 일본이나 프랑스와 같은 나라들은 인기 있는 대중정보에 대한 주권적인 통제를 강화하려 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지금까지 충분히 증명된 것처럼 소용이 없다.
범국제적인 기구를 통해 돈(통화)에 대한 통제력을 회복하는 것은 가능할는지도 모른다. 유럽경제공동체(EC)는 유럽중앙은행과 유럽공동통화를 추진하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경제와 조세정책의 범국제 통제와 마찬가지가 될 것이다. 그것은 경제 분야에 있어 국민국가를 지방 정부의 책임자 위치로 격하시키는 것이다. 정보에 관여하는 이러한 범국제적인 기구마저도 가능하지 않다. 세계적 독재체제 하에서도 말이다. 현대 기술은 가장 엄격한 전체주의식 정보 통제마저 회피할 수 있는 수단을 개인들에게 제공한다. 공산주의 국가들은 정보를 통제하기 위한 필사적인 수단으로 팩스나 복사기마저도 사용을 금지하려는 시도를 해 보았다. 이러한 조치는 지하신문 ― 사미즈다트(samizdat, 지하출판) ― 을 만들게 하였을 뿐이다. 필사본은 수백 수천 명의 학생들의 손으로 베껴지고, 소련의 방방곡곡에 무료로 배포되었다. 사람들이 랩탑 컴퓨터, 팩스, 전화기, 복사기, 비디오, 카세트레코드 ― 통신위성으로부터 메시지를 받아내는 텔레비전은 고사하고라도 ― 를 갖게 되거나 집에 설치하고 나면 정보에 대한 통제는 다시 회복할 수 없이 불가능하게 된다.
범국제화된 통화(돈)는 국가의 경제정책을 무력화시킴으로써 국민 국가를 포위한다. 범국제적으로 된 정보는 ‘문화적’ 정체성으로 구분했던 ‘민족적’ 동일성을 훼손 ― 사실상 파괴하고 있다 ― 함으로써 국민국가를 포위하고 있다. 만약에 대부분의 프랑스 사람들이 채플린 영화를 어떤 프랑스 작가가 쓴 연극이나 또는 프랑스에서 만든 영화보다도 더 좋아한다면, ‘프랑스인’이라고 하는 것은 무슨 의미를 갖는가? 1920년 채플린의 영화가 처음으로 프랑스에서 상영되었을 때 어떤 프랑스 비평가는 이렇게 물었던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프랑스인들 ― 그리고 미국인들, 영국인들, 독일인들, 러시아인들, 일본인들, 중국인들도 ― 은 그들의 나라에서 만든 어떤 영화보다도 더, 채플린의 후계자인 상황 코미디나 ‘다큐드라마’를 좋아한다. ‘고급문화’는 ‘대중문화’만큼이나 넓게 범국제적으로[초국가적으로] 되어갔다.

― 피터 드러커, <자본주의 이후의 사회>

<나> 우리는 과거 수세기에 걸쳐 국가주의의 힘이 거대했다는 것을 인정하는데, 이 현상에 대해 올바른 관점에서 논해야만 한다. 저널리스트나 정치가뿐만 아니라 학자들조차도 국가주의를 인간의 특성에 깊이 뿌리 내린 근본적인 열망이라고 생각하거나, 국가주의의 기반인 ‘민족’을 마치 가족이나 국가와 마찬가지로 오랜 영속적인 사회적 존재처럼 생각하는 것이 일상적이고 다반사이다. 국가주의는 역사 속에서 맹위를 떨치고, 종교나 이데올로기처럼 다른 지향 형태에 의해 제지되지 않는, 나아가 공산주의와 자유주의 모두를 쓸어버릴 것이라는 생각은 이제 상식으로 되었다.
최근 구소련이나 동구 전체에 걸친 국가주의적 심정의 부활도 있으며, 이러한 견해는 경험적 뒷받침이 주어져 있는 듯이 보이며, 그 중에는 냉전 후의 시대가 19세기에 못지않은 국가주의 부흥의 시대가 될 것이라고 예언하는 흐름도 있다.
구소련의 공산주의자의 주장에 따르면 국가의 문제는 좀 더 근본적인 계급이라는 문제에서 파생한 것이며, 계급 없는 사회로의 이행에 의해 해결될 것이라고 한다. 그런데 민족주의자가 소련 내의 공화국에서 한 사람씩 공산주의자를 정권에서 추방하고 동구의 구공산권 국가들에서도 같은 사태가 일어나게 됨에 따라, 이 주장의 공허함이 분명해졌으며, 이것은 많은 사람들에 의해 국가주의를 구축했다고 하는 모든 주장의 신용성을 실추시키는 결과가 되었다.
냉전 이후의 세계에서 폭넓게 나타난 국가주의의 힘은 부정할 수 없으며, 국가주의를 영원불멸하며 모든 것을 정복해 버릴 것이라는 견해는 편협하기도 하고 진실과는 거리가 멀기도 하다. 이러한 생각은 첫째로, 국가주의가 얼마나 최근의, 그리고 우발적인 현상인가라는 점을 오인하게 만들어 버린다. 국가주의는 어네스트 겔너의 말을 빌리자면, 어떤 “인간의 영혼에 깊이 뿌리박은 것”은 아니다.
인간은 진작부터 어떤 종류의 큰 사회적 집단에 대해서 그것이 존재하는 한 애착심을 느껴왔지만, 이러한 집단이 언어적으로도 문화적으로도 균질적인 존재라고 정의된 것은 산업혁명 이후의 일이다. 산업사회가 도래할 때까지는 민족성을 공유하는 사람들 사이에서도 계급의 차이가 널리 퍼져 있어서 그것이 상호 교류를 방해하는 장애물이 되었다. 러시아의 귀족은 자신의 영지(領地)에 살고 있는 농민보다 프랑스 귀족과 훨씬 더 많은 공통점을 갖고 있었을 것이다. 러시아의 귀족은 사회적 조건이 프랑스 귀족과 유사할 뿐만 아니라 자신도 프랑스어로 대화를 하고, 다른 한편으로 자신이 있는 곳의 농민과는 얼굴을 마주 대하고 이야기를 할 기회도 거의 없었던 것이다.
국가도 또한 민족성이라는 것을 전혀 고려하지 않았다. 예를 들어 합스부르크 왕조의 카를5세는 독일의 일부와 스페인, 네덜란드를 동시에 통치하고 있었고, 터키의 오스만 제국은 터키인, 아랍인, 베르베르인, 게다가 유럽의 일부 기독교도를 지배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지만 이러한 경위를 더듬어가 모든 사회에 철저하게 평등주의를 주입하고, 사회의 균질화와 계몽을 강요했던 것이 근대 자연과학의 경제적 논리였다. 거기에서는 지배자도 피지배자도 하나의 국가 경제 속에 하나로 얽히게 된 이상, 동일한 언어를 사용해 이야기를 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간주되었다. 시골에서 도회지로 나가 사무일에 종사하기 위해도 공통어의 읽고 쓰기를 할 수 있게 되며, 어느 정도 교육을 받을 필요가 있었다. 계급, 혈연, 부족, 종파라는 사회의 구분은 노동력의 일관된 유동성을 필요로 한 압력 하에서 점차 쇠퇴하고, 공통의 언어와 그것을 토대로 한 문화만이 사람들의 주요한 사회적 유대로 남게 되었다. 요컨대 국가주의는 대체로 산업화와 그것에 수반된 민주적이고 평등주의적인 이데올로기의 산물이었다.
근대 국가주의의 결실인 국가는 전부터 존재하고 있었던 자연스러운 언어 구분을 토대로 하고 있었다. 그러나 동시에 그 국가는 누가 혹은 무엇이 언어나 국가를 구성하는가를 어느 정도 자유롭게 정의할 수 있었던 국가주의자들의 손에 의해 인위적으로 건설된 것이기도 했다.
예를 들어 근래 들어 다시 눈을 뜬 소련 중앙아시아의 국가들은 볼셰비키 혁명 이전에는 자각한 언어적 국가로서 존재하고 있었던 것이 아니다. 게르나에 따르면 지구상에는 8천개 이상의 자연적 언어가 존재하며, 그 중 7백 개가 주요한 언어라고 간주되지만, 한편으로 국가의 수는 2백 개에도 미치지 못한다.
바스크 지방의 소수민족을 품고 있는 스페인과 같은 두 개 또는 그 이상의 언어집단에 걸쳐 있는 과거부터의 민족 국가의 상당수는 이러한 새로운 언어 집단의 개별적 정체성을 인정하라는 압력에 노출되어 있다. 거기에는 국가가 영원한 것도 아니라면, 시대를 뛰어넘은 사람들의 애착심의 자연적 원천도 아니라는 것이 드러나 있다. 민족의 동화나 국가의 재정의는 당연히 일어날 수 있는 것이며, 또한 드문 것이 결코 아닌 것이다.
                                                                                                   ― 프랜시스 후쿠야마, <역사의 종말>

<다> 17세기는 영국, 프랑스, 스페인, 게다가 네덜란드의 관계가 극히 복잡한 시기였다. 무역 건국(建國), 즉 통상국가를 목표로 삼은 네덜란드는 서로 대립하는 영국과 프랑스 사이에 끼어 있어서 극히 불안정한 입장에 서 있었다. 이 불안정한 국가간 관계 속에서 ‘평화 국가’를 목표로 하고 통상국가를 목표로 삼는 것은 극히 곤란한 일이었다. 게다가 연방 공화국은 각 주(州)에 주권을 대폭 부여했기 때문에 주(州) 사이의 이익이 대립했다. 결국 네덜란드는 이러한 불안정한 국가간 관계를 강력한 중앙정부를 갖지 않은 채 극복하고자 했기에 실패했다.
그로티우스가 <전쟁과 평화의 법>을 쓴 것이 바로 이 무렵이었다. 그러나 그로티우스로 하여금 이 대작을 쓰게 했던 것은 꼭 네덜란드의 사정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유럽의 전 영토를 혼란에 빠뜨린 종교전쟁, 즉 30년 전쟁이라고 한다. 그리고 이 30년 전쟁이 끝날 무렵에 체결된 것이 베스트팔렌 조약이며, 따라서 보통 베스트팔렌 조약에 의해 국민국가 체계가 생겨났다고 간주된다.
30년에 걸쳐 천만 명이 넘은 사람이 목숨을 잃은 이 종교전쟁의 결과 체결된 베스트팔렌 조약으로 독일 내부의 종교 대립이 종지부를 찍게 되었으며, 이와 동시에 말하자면 ‘전후 국가간 질서’라고도 해야 할 것이 만들어졌다. 이 조약의 의의는 종교적 교리나 종교적 대립으로부터 국가를 독립시킨 점, 또 신성로마제국이나 합스부르크가의 스페인이라는 고대․중세적 국가의 힘을 현저히 쇠약하게 만든 점에 있다. 독일은 사실상 분열했고, 네덜란드와 스위스의 독립이 승인되었으며, 프랑스와 독일의 국경선이 확정되었다. 요컨대 신성로마제국이 상징했듯이, 기독교라는 초월적인 보편성으로 유럽을 통일한다는 중세의 원리가 거의 붕괴해 버리고, 그 대신 주권국가간의 국가 간 관계(interstate relation)가 등장한 것이다.
유럽에서의 국민 국가의 형성은 실제로는 그 후 2세기 반에 걸쳐 몇 단계를 거치면서 실현된다. 종교적 권위나 고대․중세적 제국으로부터의 해방이 그대로 곧바로 국민 국가의 성립을 의미한 것은 아니다. ‘국민’이라는 관념이 성립하기 위해서는 인민 주권을 주장한 프랑스 혁명과 민병대를 조직한 나폴레옹의 활약이 없으면 안 되었으며, 독일이나 이탈리아의 통일에는 19세기 내내 지속되었던 자유주의적 독립운동이 없으면 안 되었다. 유럽의 마지막 제국인 합스부르크가의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소멸하기 위해서는 제1차 대전이 필요했다. 제1차 대전을 거치고 나서야 비로소 공통의 언어, 인종, 문화를 기본으로 한 ‘민족’이 국가의 단위로서 승인된다. 하나의 민족이 국가를 만들 권리가 승인된 것이다. E. H. 카가 <민족주의의 발전>에서 말했듯이, 이때에 이르러서야 겨우 ‘힘’이 아니라 ‘권리’가 국경을 결정하게 된 것이다.
보통 근대사회의 가치들은 프랑스 혁명에 대해 명료하게 선언되었고, 그 경제적 기반은 산업혁명에 의해 확립되었다고 한다. 프랑스 혁명에서 울려 퍼진 자유, 평등, 박애, 특히 자유와 평등이 근대사회를 세우는 사상의 기둥이 되었다. 이와 동시에 영국으로부터 유럽 각국으로 전파된 산업혁명이 낳은 산업주의(industrialism) 역시 또 다른 가치가 되었다. 바꿔 말하면, 자유주의, 민주주의, 산업주의가 근대사회를 대표하는 것이다. 이런 이야기를 자주 들을 수 있는 것이고, 또한 사실임에 틀림없다. 그런데 서구의 근대사회 형성을 지탱한 또 다른 중요한 요소가 있는데, 그것이 바로 ‘국민 국가’의 형성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근대사회란, 한편으로는 산업주의와 자유민주주의의 확대인 동시에, 다른 한편으로는 국민 국가의 발전이라는 것이었다. 하지만 국민 국가의 형성은 당연하게도 내셔널리즘이나 민족주의라는 집단의식을 수반한다. 여기에서 근대사회의 형성이란 어떤 의미에서는 기묘하게 분열된 운동처럼 보인다. 한편으로 그것은 프랑스 혁명의 유산인 보편주의를 주창했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내셔널리즘이라는 특정화된 집단의식을 숭상한다. ‘인간성’이나 ‘인권’이라는 보편적인 것 위에 세워졌던 자유나 평등을 옹호하는 동시에, 민족적인 국가라는 것을 독립이라는 이름하에 옹호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자유주의나 민주주의가 내셔널리즘을 핵으로 한 국민국가 개념과 대립한다고 단언해 버릴 수는 없다. 사태는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 프랑스 혁명만 하더라도 결코 보편적인 이념의 혁명이었다고는 말할 수 없고, ‘인민’에 의한 민주주의의 실현이었다고도 간단하게 결론지을 수는 없다. 그것은 또한 절대주의적 국가를 자유주의적 국가로 새롭게 만들어 더 한층 통합된 강력한 ‘국민국가’를 만들어 내기 위한 혁명이라는 면도 포함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프랑스 혁명은 원래 부르주아적이긴 하지만, ‘인민’에 의한 민주주의를 목표로 하기보다는 의회제를 핵으로 한 자유주의적인 국민국가 형성을 목표로 하는 것이기도 했다. 따라서 이런 관점에서 보면, 로베스피에르에 의한 급진적인 인민주권의 실현은 혁명의 좌절을 의미한다.
요컨대 내셔널리즘을 핵으로 한 국민국가의 형성과 자유주의, 그리고 민주주의라는 근대사회의 세 개의 기둥이 맺는 관계는 19세기의 경우 그렇게 단순하지 않은 것이다. 열쇠를 쥔 것은 자유주의 개념이며, 사실 19세기의 유럽을 생각할 때 결정적인 중요성을 갖고 있는 것은 이 자유주의 개념이다.
그러므로 19세기의 유럽에서 자유주의는 현대처럼 민주주의와 결합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국민국가의 형성 운동과 결합되었다고 보는 편이 좋다. 어떤 의미에서 이것은 당연히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자유주의는 정치적으로는 전제적인 권력으로부터의 해방(liberation)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자유주의에는 독립이라는 기본적인 가치가 있고, 이것이 국가에 적용되었을 때에는 국가독립운동을 고무하게 된다. 이 자유주의의 영향 아래에서 19세기 전반에는 나폴리의 독립운동, 피에르몬테(사르디니아)의 독립운동, 그리고 그리스의 독립전쟁이 일어난다.
                                                                     ― 사에키 케이시, <‘아메리카니즘’의 종말>에서 발췌·수정

신고

설정

트랙백

댓글


티스토리 툴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