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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8.04.04 『사상』, 2013년 2월 / 1부 1장. 반‘생명정치학’적 고찰

도래할 생명권력론을 위해


사상, 2013년 2

 

1부 1장. 

생명정치학적 고찰

우노 쿠니이치(字野邦一)

 å­—野邦一에 대한 이미지 검색결과

* 각주는 모두 뺐으며, 프랑스 및 영어 원본 등과의 대조를 통한 번역 수정도 하지 않았다. 따라서 일본에서 어떻게 번역하는지를 알 수 있는 기회일 것이다. 

 

1. 묵시록적인 한 구절

지식의 의지(1976)에서 미셸 푸코가 쓴 한 구절(‘죽게 만들 것인가 살게 내버려 둘 것인가라는 고대의 권리를 대신하여 살게 만들 것인가 죽음 속으로 내던질 것인가라는 권력이 나타났다고 말할 수도 있다)이 초래한 기묘한 충격을 돌이켜봐야 한다. “~라고 말할 수 있다(on pourrait dire ~)”고 가설처럼 말했던 것은, 이 발언이 품고 있는 매우 중대하고 위험하고 위태로운 내용 때문이었을까? 아무튼 그것은 불길한 죽음의 고지를 충분히 포함했다. 그저 죽게 만드는것이 아니라, ‘죽음 속으로 내던진다는 이중으로 가혹하게 죽음을 하게 만드는 권력은 더 이상 결코 우연도 예외도 아니라, 새로운 권력의 규칙[常態]이며 원리이기도 하다고 지적된다.

Histoire de la sexualité, tome 1 : La Volonté de savoir

 푸코는 권리(droit)’권력(pouvoir)’이라는 말을, 여기서는 그렇게까지 엄밀하게 나눈다고는 생각할 수 없다. 그건 그렇다 치더라도, 죽게 만드는 권리란 군주의 권리였지만, 살게 만드는 권력이란 더 이상 특정한 인격에 속하는 것이 아니라, 정부나 행정 등의 기관들에 의해서 분절되고 오히려 익명의 권력으로서 분산되고 국민의 생명에 대한 관리, 통제, 조절을 면밀하게 실천한다고 말했다.

 일찍이 군주는 눈에 보이는 노골적인 힘을 행사하여 사람을 살해할 수 있었다. 그처럼 명백하고 무자비한 폭력을 극복한 것처럼 보이는 근대의 사회가 원리적으로 보다 잔혹하게, 음험하게 생명을 말살할 수 있다는 것, 실제로 말살해 왔다는 것을 푸코는 지적했던 것이다. 그것은 권력이 결코 피할 수 없었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그 중추적 원리로서 작동하는 아포리아를 똑바로 가리켰던 것이다.

 “대량학살은 사활의 문제가 된다.” 전쟁의 결정은 살아남는가 아닌가라는 노골적인 물음을 둘러싸고 이뤄지게 됐다.” “핵무기 하의 상황은 이런 과정의 도달점에 서 있다.” “일종의 생물학적 위험인 인간이기 때문에, 합법적으로 살해할 수 있다.” 푸코는 몇 쪽에 걸쳐, 이렇게 암흑의 세기의 도래를 알리는 묵시록적 기술을 재빠르고 민첩하게 전개하고 있다. 그리고 나치즘의 우생학적 재편성에 관해서, 또한 인간이 기억할 수 있는 최대의 학살에 관해서도 말했던 것이다.

 그런데 푸코가 생명정치’, ‘생명권력이라고 부른 것은 엄밀하게 서양의 18세기 중엽에 출현했던 것으로 간주되고, “종인 신체, 생물의 역학에 의해 관통되고, 생물학적 과정을 뒷받침하는 신체가 그 초점이 되었다. 또한 생물학적 과정이란 번식과 탄생, 사망률, 건강 수준, 수명, 장수이며, 그것들을 변화시키는 다양한 조건이라고 푸코는 설명한다. 생명정치는 이전에 그가 감시와 처벌(1975)에서 정밀하게 묘사했던 신체를 둘러싼 훈육[調敎], 규율의 시스템과 연동하여, 더 이상 군주의 권리로서도, 모든 주권이나 법권리의 형태에 의해서도 설명되지 않는 새로운 권력의 그물망을 세계로 뻗쳐나간다.

 그리고 지식의 의지성의 역사1권으로 썼기 때문에, 바로 생명/의 정치는 의 정치로서, 신체의 훈육·규율이라는 측면과 생식을 하는 생물학적 인간에 대한 통제·관리라는 또 다른 측면을 연동시킨다. 이러한 새로운 권력과 더불어 분절되는 을 여전히 법에 의한 단속이나 검열이나 금기, 그리고 억압의 대상으로 생각하게 됐던 것은, 새로운 생명권력 그 자체에도 깊이 침투되어, 이것에 편입[기입]됐던 생명과 성의 현황을 파악하지 못하게 한다.

 푸코는 바로 이것에 역점을 두고 지식의 의지를 마무리했지만, 오히려 이 책을 둘러싼 논의도 자주, 성은 과연 억압되어 있는가 아닌가를 둘러싸고 이뤄지게 됐다. 욕망이나 성적 억압은 오랫동안 정치적 쟁점일 뿐만 아니라, 정신분석에서도 쟁점이었기 때문에, 푸코는 여기서도 대담한 발상의 전환을 촉구했던 것이다.

 나아가 이 책의 또 다른 중요한 논점은 성을 둘러싼 권력은 강대한, 눈에 보이는 중심에 의해 작동하는 것이 아니라, 미시적인, 도처에 분산되어 있는, 무수한 점을 통해서, 내재적으로 작동한다는 것이었다. 이 권력은 일정한 중심에 국지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더 이상 지배자와 피지배자를 분할할 수 없다. 이 전제에 관해서도, 만일 권력이 그렇게 비집권적이고, 거의 실체를 결여한 것이라면, 반권력의 투쟁은 더 이상 불가능한가라는 의문도 항의도 나왔다(“권력은 도처에 있다. 모든 것을 아우르기 때문이 아니라 도처에서 생기기 때문이다).

 이리하여 푸코가 조금 묵시록적인 어조로 재빨리 말했던 생명정치학, 지식의 의지가 간행되었던 당시에는 그다지 논의를 야기하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살게 만들거나 죽음 속으로 내던지는 권력이라는 무서운 지적은 내 머리 속에도 내려앉아 사악하게 맴돌면서 불길한 인상을 계속 내뿜었다. 푸코는 극히 엄밀한 저자인데, 누구나 아는 인간의 종언이라는 도발을 포함한 주요 저서도 있으니, 결코 묵시록적인 발언을 스스로에게 금지해 왔던 것은 아니다. ‘인간의 종언은 엄밀하게 서양의 담론형성체가 어떻게 인간이라는 표상을 만들어내고 변경해 왔는가라는 고찰의 한 결론이며, 그것 이상의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그것이 어느 정도 한정된 문제계 속에서 엄밀하게 말해졌다고 하더라도, ‘인간에 관한 그 담론의 종언이란, 그대로 인간의 종언이라는 묵시록적인 의미를 가질 수 있다.

 푸코는 충분히 진지하고 노골적이며 도발적이기도 하며, [실제로] 훌륭하게 도발에 성공했다. 담론 형성체[편성]에 관한 엄밀한 분석과 더불어 인간의 종언에 관해 말했기 때문에, 그것은 사상사적 사건이 될 수 있었다. 그리고 생명정치학또한 인간의 종언에 못지않게 묵시록적인 시사였다. 이것도 또한 서양 근대의 어떤 시점에 위치지어질 수 있는 역사적, 제도적인 권력기구의 엄밀한 고찰에서 나온 제안이긴 했지만, 푸코는 순식간에, 몇 쪽에서, 20세기의 강제수용소나 핵무기의 위기까지 생명정치의 정의를 확장하고 있다. 미증유의 규모로 냉혹한 죽음을 초래하는 생명정치론은 또 다른 인간의 종언론이기도 했다. 그리고 생명정치학죽음 속으로 내던진다는 가능성이 바로 폭발하듯이 현실화하는 것이 20세기의 전쟁과 수용소였다고 한다면, 푸코는 그 조짐을 이미 수세기 전의 서양에서 발견하고, 이 세계의 체제가 점점 더 생명정치적인 것으로 되고 있다는 것을 조심스럽게 암시하고 있다.

 환경파괴나 인구의 폭발적 증가가 아직 지구적 규모의 위협이 되기도 전에 인간은 이미 생명정치에 의해서 위기적 상황을 척척 만들어냈다고 말할 수도 있다. 그리고 엄밀하게는, 환경과 인구에 대해서조차 이미 생명정치는 다양한 작용을 끼쳐왔음에 틀림없다. 생명과 죽음의 권력을 둘러싼 푸코의 도식은 극히 간략하며 간단할 뿐으로, 충격적이지만, 면밀한 논증을 결여하고 있으며, 반드시 진실을 알리는 언표로서 독해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것은 아무튼 밑도 끝도 없는 규모에 걸친 심각한 문제제기였다.

 

2. 정치의 과제는 생명이 아닌가?

푸코는 한나 아렌트의 책을 거의 언급하지 않지만, 내 머리 속에서 생명정치학은 아렌트가 물었던 정치와 생명이라는 문제에 직결된다. 잘 알려져 있듯이, 아렌트의 정치학은 공공성개념과 한 몸을 이루며, ‘공공성이란 어디까지나 복수성을 존중하고, 상이한 의견을 격렬하게 주고받으며 겨루는 자유이기도 하다. 그러한 공공성과 이것을 창출하고 유지하는 행동이 그녀에게 그대로 정치의 내용이 됐다. 그래서 공공성이라는 이상을 외골수로 계속 추구했던 것으로 보이는데, 그녀의 비판적 사색은 공공성을 단순한 이념으로 폄하하는 현실의 정치적 과정을 겨누었다. 그리고 공공성의 창출 그 자체를 목표로 하는 정치는 역사의 다양한 과정에서 실현되었다고 그녀는 생각했다. 그런 정치의 앞에, 바로 커다란 위험으로서 가로막고 있는 것은 생명의 위기라는 사태였다. 아렌트는 단적으로 이렇게 쓴다.

 “만일 정치가 유감스럽게도 인간의 생존유지를 위해 필요한 것일 뿐이라는 것이 정말이라면, 실제로는 정치는 스스로를 말소해 왔던 것이 된다.” 아렌트에게서 현대세계가 손에 넣은 절멸전쟁의 가능성을 앞에 둔 정치란, 더 이상 정치의 기본적 요건(공공성, 자유)을 결여하고 있다.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그저 단순히 자유만이 아니라, 생명이기도 하며, 인간이나 어쩌면 이 세상의 생명체 전체가 더 생존할 수 있는가이기도 하다. 여기서부터 생겨나는 문제는 모든 정치를 위험하게 하는 것이며, 현대의 조건 아래에서는, 정치와 생명의 유지가 서로 조화한다는 것이 의심스럽게 보이게 된다.”

政治とは何か

 이런 사고에 있어서는 바로 생명정치학이라는 말 자체가 터무니없는 생각이며, 원래 성립할 수 없을 것이다. 아렌트에게 정치란 생명의 유지(살게 만드는 것)에 직접적으로 관계되는 활동이 아니라, 완전히 다른 차원에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렌트는 아직 생명정치학적 문제가 출현하기 전의 고전적 정치()에 집착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정치는 곧 통치가 아니며, 생명유지를 도모하는 체제도 아니라고 계속 말하면서, 아렌트는 한결같이 구성적 차원의 정치에 계속 주목했다. 이 정치에 있어서 궁극적인 적(반대물)으로 전체주의를 상세하게 연구하는 책을 썼다. 또한 공공성의 사고를 칸트의 세 번째 비판서(판단력비판)의 미학적 판단에 비춰서 더욱 심화시키고자 했다.

 이런 식으로 생명정치학을 아렌트의 공공성의 정치학과 비춰봄으로써, 무엇을 볼 수 있을까? 생명정치는 생명을 배려하고 통제하는 정치로서 출현하지만, 이때 생명정치도 새로운 양상을 띠게 되며, 이 둘 사이에도 새로운 관계가 맺어지는 것임은 틀림없다. 아렌트는 생명을 목표로 하는 정치그 자체에 강한 부정을 피력하고, 그리스의 폴리스나 미국의 독립혁명을 재평가하며, 거기서 실현된 공공성의 정치를 이상으로 삼는 것처럼 말했는데, 그저 회고적으로가 아니라, 새롭게 실현하고 구성해야 할 정치로서도 그것을 말했다.

푸코의 제안을 받아들여서, 우리는 다시금, 오늘의 세계에서 정치가 생명과 어떻게 마주대하고, 생명을 어떻게 다루고, 조작하는가라고 물을 수 있다. 그리고 이 세계에서 정치는 무엇을 하는가를 재차 묻게 된다. 정치가 생명을 배려하는 것은 당연하며, 그 무엇으로도 대체할 수 없는 절대적인 목표인 듯 싶지만, 그것은 꼭 자명한 것은 아니다. 어쩌면 정치는 더 이상 과거와 같은 정치가 아닌데도 그래도 똑같이 정치라는 말이 변함없이 사용되고 있는 듯하다. 어떤 시대부터, 특히 생명을 배려하게 됐다고 얘기되는 정치는 도대체 어떻게 변화하고 무엇을 표현하며 무엇을 실현할 수 있고 실현할 수 없었는가? 아렌트의 비판은 단순히 정치는 무엇을 잃었다가 아니라, 생명정치 이전의, 혹은 생명정치 이상의 정치를 눈여겨보면서, 생명정치에 에워싸이게 된 정치를 재고하기 위한 시사로서 독해할 수 있다.

 그리고 푸코의 살게 만들 것인가 죽음 속으로 내던질 것인가라는 권력이라는 정식에는 근본적인 단절이 포함되어 있다는 것에도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18세기 중엽에 출현하여 번식과 탄생, 사망률, 건강 수준, 수명, 장수등을 치밀하게 배려하게 되는 살게 만드는 권력이 왜, 어떻게 죽음 속으로 내던지는 권력일 수 있었는가, 삶의 권력이 어떻게 죽음의 권력으로 변형할 수 있었는가, 그것에 관해서도 사실은 푸코는 그렇게 설득력 있게 쓰지 않았다.

 절멸전쟁의 가능성과 더불어 있고, 절멸인가 아닌가라는 선택에 몰입하는 정치에 관해 아렌트뿐만 아니라 푸코도 절멸수용소와 핵무기에 관해서 언급하면서 문제 삼았다. 그리고 환경파괴나 인구폭발은 또 다른 생사에 관련되는 정치의 과제를, 명백하게 들이댔다. 이것들은 어느 정도 생명정치학적 문제이며, 또한 적지 않게 생명정치적인 변화가 산출했던 결과이기도 한 것임이 틀림없다. 그러나 이것들을 그저 묵시록적인 비전으로 용해해버리는 것이 아니라, 각각의 다른 차원, 다른 수준의 문제로서 재고하는 데 있어서 이러한 맥락을 파악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생명정치라는 말이 상당히 충격적이었기 때문에, 각각으로 풀어 헤쳐져 고유한 수준에서 생각해야 할 상이한 물음이, 모두 빠짐없이 거기에 한꺼번에 밀어닥친 것은 아닐까?

 그렇다고 해도 묵시록은 도처에서, 영화 속에서도, 철학 속에서도, 특히 미디어 속에서도 되풀이되고 있다.

 

3. 생명정치인가, 구성적 정치인가

그리고 생명과 정치의 맥락에, 설령 절멸전쟁은 아니라고 하더라도, 전쟁이라는 요인이 개입함으로써 질문은 순식간에 복잡해진다. 아무튼 전쟁은 생명보다 상위에 있는 가치를 전제로 한다. 적의 생명은 말살해도 상관없는 최저의 가치밖에 갖고 있지 않다. 위협 받고 있는 자국민의 생명을 구하는 것이 전쟁의 이유라 해도, 이를 위해 자국민(의 일부)도 희생시키는 것 전쟁의 전제이며, 어디까지나 국민보다 국가가 소중한 것이다. 발터 벤야민은 폭력비판론(1921)에서 정치적 폭력을 둘러싼 아포리아에 관해 쓰고 있다. ‘인간이란 인간의 생명과도, 인격과도 일치하는 것이 아니라고 진단하면서, 인간의 생명이 소중하다는 도그마는 결코 자명하지 않으며, 그것이 어디에서 왔는가를 물어야만 한다고 그는 제안한다.

 그러나 그것 이상으로 깊이 있게 이 도그마의 유래를 추구하기보다도, 벤야민의 관심은, 법과 더불어 있는 폭력의 양의성으로 향했다. 법을 유지하기 위해, 법에 의해 한정되고 규제되는 폭력(예를 들어 경찰), 법의 바깥에 있어서 법의 규제를 당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법을 정립하는 폭력(예를 들어 혁명)과 자주 구별되기 어렵다. 그러한 불분명한 폭력의 상황에서는 인간의 생명도 완전히 무방비한 상태에, 즉 법적 질서의 주변에 놓이게 된다. 문학, 언어, 이데아를 예리하게 비평하는 새로운 유물론을 전개한 벤야민의 사고의 근저에는 구성적인 정치 또는 정치의 구성적 차원에 관해 그토록 날카로운 질문이 있다는 것은 잊기 힘들다.

 나치즘이 출현한 시대에 구성적 권력을 둘러싸고 이토록 눈부신 사유가 나타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생명정치()’라는 말을 꼭 사용하지 않더라도, 이 말이 가리키는 정치의 급변은, 생산과 금융과 기술을 통해 가속화된 자본주의와 연동하여 세계를 크게 뒤흔들고, 그러한 구성적 차원의 정치에 대한 사유를 촉구하게 되었다. 벤야민의 폭력론도, 아렌트의 공공성의 정치학도, 그리고 칼 슈미트의 예외상태의 정치학도, 그런 역사적 동요에 대한 민감한 반응이었으며, 하이데거의 존재론마저도 그것과 무관하지 않으며, 존재자의 구성적 차원으로 깊이 하강하려는 시도였다고 말할 수 있다.

 “예외는 통상의[정상적인] 사례보다 흥미롭다.” “법률학에서 예외상태는 신학에서의 기적과 유사한 의미를 지닌다.” 그런 도발적인 문장을 쓸 수 있었던 슈미트는, 역시 정치의 구성적 차원으로 깊이 하강하고, 때로는 바로 도착적인 신학과 닮은 논의를 전개하고 있다. “구체적인 생활의 철학은 바로 예외나 극단적인 사례에 대해 망설이는 것을 허용하지 않으며, 최고도로 그것에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구체적 생활의 철학에 있어서는, 통상[정상]보다 예외가 더 중요할 수 있다. 더욱이 이것은 역설을 좋아하는 낭만주의적 아이러니가 아니라, 평균적으로 되풀이되는 사례의 명백한 일반화 이상으로 핵심부로 파고드는 통찰이 지닌, 철저하고 고지식함에서 나오는 발언이다.” 이렇게 쓴 그는 확실히 아주 진지하게 법적 사고의 극한에서 사고했을 것이다. 하지만 예외는 통례를 뒷받침할 뿐만 아니라 통례는 원래 예외에 의해서만 살아간다. 예외에 있어서야 현실생활의 힘이, 반복으로서 경직된 관습적인 것의 껍질을 깨는 것이다라고까지 결론을 내리는 법학자는, 한 개인의 자질을 넘어서, “예외적인시대의 예외적인 정치적 압력에 실로 민감하게 반응했으며, 아마 슈미트에게만 속하는 것이 아닌 이러한 사고 형태가 나치즘의 추진력이 되었음에 틀림없다.

 구성적 차원에서의 정치라는 물음은 슈미트의 경우처럼 예외상태에 대한 강한 관심을 불러일으키며, 한편으로는 아렌트가 계속했던 공공성의 창출에 초점을 맞춘 사고를 초래했다. 그리고 이것들은 아마도 공통의 배경을 가지면서도 또한 정반대의 사상을 형성했던 것이다.

 얼핏 보면 푸코가 말한 생명정치학은 그러한 구성적 차원에 관련된 것이 아니다. 그러나 푸코는 특히 정치적 실천에 관해서는, ‘대표대의[재현, 표상]’에 이끌리는 정치를 끊임없이 비판하고, 정당정치와도 맑스주의와도 거리를 두려고 했다. 정신병원이나 감옥의 탄생에 관해 정밀한 역사학적 연구를 하는 것 자체가 적어도 다른 정치를 제안한 것이며, 지식의 의지에서는 바로 생명정치학에 대해 저항하는 힘에 관해, 약간이기는 하지만 인상적인 서술을 남기고 있다. “요구되고, 목표의 역할을 하는 것은, 근원적인 욕구이자 인간의 구체적인 본질로서, 그의 잠재적인 힘의 성취이며, 가능한 것의 충만으로서 이해된 생명이다. 그것이 유토피아인가 아닌가는 그다지 문제가 아니다. 거기서는 극히 현실적인 투쟁의 과정이 있다. 정치적 대상으로서의 생명은, 어떤 의미에서는 문자 그대로 받아들여지고 그것을 관리하고자 기획한 시스템으로 거슬러 올라가 역전시키는 것이다. 권리보다도 훨씬 생명 쪽이 그때, 정치적 투쟁의 관건=목적이 되었으며, 그것은 이 투쟁이 권리의 확립을 통해서 주장되었다고 해도 다를 바 없다.” 푸코에게서는 적어도 이 생명정치학적 쟁점을 둘러싸고 새로운 정치와 저항이 구성되고 있고 구성되어야 하며, 거기서도 또한 하나의 구성적 차원이 출현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 후에 용기를 갖고 진리에 관해 말하는 것”(파르레시아)을 통해서, 혹은 자기에의 배려로서 푸코가 추구했던 것은, 아렌트나 슈미트와 같지 않은 방식으로, 정치 이전의, 정치를 구성할 수 있는 차원을 어떻게 사고하는가라는 과제였다. 그저 자기를 배려하는 것, 자기와 어떻게 관계하는가는 것조차, 그것은 결코 제도나 도덕을 자명한 소여로서 간주하지 않고, 이것들의 외부에서, 자립적으로, 어떠한 자기를 구성하는가라는 질문에 다름 아니었다. ‘생명정치학이라는 질문에, 푸코 자신은 그다지 정밀한 대답을 주지 않은 채 그저 이 질문을 겸손하게, 그러나 도발적으로 제기했다. 그 질문은 충분히 도발적으로 전해졌다. 그래도 푸코는 짧은 말년에, 그리스-로마의 문헌에 파고들어가, 먼 시공에서부터, 대답으로는 보이지 않는 대답을 계속 보냈다. 마치 생명정치학이라는 문제 등, 이제 잊어버렸던 것처럼 보였지만, 그렇게 하여 푸코는 끈질기게 계속했다고 생각한다.

 

4. 생명정치의 냉소주의, 일본의 호모 사케르

또 하나, 여기서 오늘날의 생명정치학적 상황에 관해서, 상당히 단정적으로, 절망적 선언처럼 쓰인 말이 있다. “우리의 정치는 오늘날, 생명 이외의 가치를 알지 못한다”(조르조 아감벤, 호모 사케르, 1995). 생명정치는 더 이상 정치의 일부를 이루는 것도, 미래의 징후도 아니며, 더구나 정치에 있어서 예외적인 사태가 아니며, 오히려 전면화했다는 지적이다. 아감벤은 확실히 푸코로부터 생명정치라는 문제를 받아들인 것임에 틀림없지만, 그의 사고의 모티프는 오히려 칼 슈미트에 친화적인 것 같다. ‘예외상태에 대한 이론적 열정과 같은 것이, 아감벤의 사고를 견인하는 듯 보인다. 그리고 예외는 그저 규칙의 외부로 쫓겨나는 것이 아니라, 쫓겨나면서도 내부에 포함된다고 한다. 그렇게 불분명한영역에 있는 인간은 호모 사케르’(성스러운 인간)라고 불린다.

 아감벤은 호모 사케르의 예를 얼마 내놓지 못한다. 고대 로마에서 경계석을 무너뜨린 것, 부모에게 폭력을 행사하는 자식, 손님을 부정하게 대우한 주인처럼 죄를 저지른 것은 성스러운 인간이라고 불리며, 이런 인물은 살해 가능하지만 희생물로 바칠 수 없다는 이상한 상황에 처해졌다. 그는 예외상태에 놓이며, 살아 있으면서 죽어 있다. 이런 불분명한 상황에 처해진다. 이런 상황에 처한 인간을 아감벤은 벌거벗은 인간이라고 부른다. 도대체 누가 이러한 예외상황으로 사람을 몰고 가는가? 그것이야말로 주권이라 불려야 하며, ‘주권은 바로 이러한 예외상태를 산출하는 능력이며, 또한 예외상태를 필요로 한다고 생각된다.

 분명히 주권은 헌법을 제정하고 정체를 결정한다는 의미에서는, 그 헌법이나 정체의 외부에 있으며, 동시에 그렇게 규정된다는 의미에서는 내부에 있다. 아감벤은 그러한 의미에서, 주권과 호모 사케르는 동형적이라고 한다. 하지만 구성적 권력인 주권과, 권력으로부터 배제된 인간은, 동일한 하나의 시스템을 구성하더라도, 동일한 리스크를 짊어지는 것이 아니며, 동일한 입장에 서는 것도 아니다.

 호모 사케르는 또 다른 형태로도 존재한다. 그들은 범죄자라기보다는 영웅을 닮았지만, “싸우기 전에 자신을 죽은 자의 신들에게 장엄하게 바쳤으나 전사하지 않은 자이다(그들은 데보투스devotus라고 불린다). 출전하기 전에 스스로를 제물로 바친 이 인간은 이제 살아 돌아오더라도 세속에 속할 수 없다. “그의 생명은 세속적인 삶의 형식이 지닌 현실의 맥락에서도, 종교적 생명의 형식이 지닌 현실의 맥락에서도 이중의 배제에 있어서 분리되며, 이제 죽음과의 깊은 공생에 들어선다는 것에 의해서만 정의되며, 그렇지만 아직 죽은 자의 세계에 속하지 않는 생명이다.”

 이리하여 호모 사케르와 데보투스, 그리고 주권에 있어서, 동형적인 것, 마찬가지로 배제적 포함의 논리를 보고, 마침내 아감벤은 단숨에 묵시록적 결론을 부여한다. “오늘날 우리가 보고 있는 것은 사실, 생명 그 자체가 전례없는 폭력에 노출되어 있다는 것이다.”호모 사케르라는 모습으로 미리 규정할 수 있는 형상이 오늘날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것은, 우리가 모두 잠재적으로 호모 사케르이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분명히 이 예외상태의 정치학은, 오늘날 우리들의 삶/생명이 어떻게 정치에 포함되 고 방어되며 어떻게 배제되고 유기되는가를 생각하게 만든다. 또한 그렇게 생명을 에워싼 정치가 어디에서 왔는가도 생각하게 만든다. 그런 의미에서 주의 깊게 검토하게 만든다. 그런데 아감벤의 호모 사케르 연구는 구체적인 사례가 부족하며, 또한 사례의 분석에도 그다지 들어서지 않으며, 아주 도식적으로만 기술되어 있다. 아감벤의 관심은, 미리 추상화된 도식 쪽에 있으며, 그가 다루는 예외상태자체에 결코 예외나 다양성을 인정하고 싶지 않는 것 같다.

 잔혹한 전쟁을 겪고 귀환한 인간은 적어도 예외적이고 불분명한 상황에 처하게 된다. 예를 들어 제2차 세계대전 후에는 일본에서조차 많은 호모 사케르들이 실재했다. 이가라시 요시쿠니(五十嵐恵邦), 패전과 전후 사이에서 : 늦게 돌아온 자들(敗戦戦後のあいだで れてりしたち(2012)은 바로 일본의 전후에 겪었던 예외상태를 통해서, 전쟁에서 전후로 굴절된 역사적 시간을 비추고 있는 책이다. 이가라시생명정치학호모 사케르도 언급하지 않지만, 이 책은 분명히 생명정치의 거대한 사례로서 일본의 전쟁과 전후를 재고한다는 과제를 시사하며, 이미 그것을 실천하고 있기도 하다.

五十嵐恵邦에 대한 이미지 검색결과

 전시에 적의 포로가 되어 수용소에서 길고 가혹한 생활을 한 뒤에 돌아온 자는 이른바 살아 있는 영령(英霊)’이며, 바로 희생물로 바쳐진 뒤에 살아남았다. 혹은 전투 중에 군의 지휘를 벗어나 고립상태에 있었던 병사는, 패전을 알지 못한 채, 또는 알게 되었더라도 전혀 믿지 않은 채, 밀림에 틀어박혀 가상의 적과 계속 싸운다(요코이 쇼이치横井庄一, 오노다 히로小野田寬郎의 예). 일본의 전후에 나타난 호모 사케르는 전후에 억압되고 중화되어 버린 내셔널리즘을 새롭게 소생시키기 위한 절호의 영웅이 되었다. 그런데 오노다보다 조금 늦게 귀환한 마지막 일본군나카무라 데루오(中村輝夫)는 대만인이며, 일본으로 돌아왔을 때는 더 이상 일본국적이 아니라 대만에 속해 있었다. 나카무라는 이리하여 예외적 전후를 살아남고, 또한 귀환하더라도 구식민지 출신자로서 예외상태에 놓이며, 대만의 고향으로 돌아가, 그렇게 센세이셔널한 화제가 되지 않고 3년 반 후에 병사했다. 나카무라는 더욱이 대만에서도 고사족(高砂族)이라는 소수민족 출신으로, 대만어를 말하지 않았다.

 이가라시는 소련·시베리아 수용소에 억류된 뒤에 귀환한 사람들에 관해서도 썼다. 특히 시인 이시하라 요시로(石原吉郎)의 억류와 귀국 후의 생애에 여러 쪽을 할애했다. 억류자도 또한 겹겹이 예외상태를 살게 되었다. 우선 예외적으로 가혹한 억류와 강제노동이며, 10만이라는 엄청난 사망자 사이에서 살아남아 고향으로 돌아간다고 하는 예외적 체험이며, 일본으로 돌아오더라도, 일반적으로는 결코 그들은 환대받지 못했다. 원래 <전범>으로 구속된 <예외자>이며, 소련에 억류된 동안에 <공산주의에 고취됐을> 수도 있으며, 거꾸로 소련의 수용소의 비인간성을 탄핵한다면, 이번에는 소련에 대한 비판을 듣고 싶지 않은 좌익으로부터 비난을 살 수도 있었다. 그렇기에 극한 상태에서 많은 사망자를 목격했던 억류자는 살아남았다는 것 자체를 죄책감으로서 무겁게 품게 된다. 이리하여 몇 겹이나 겹치는 예외상태는 그저 귀환자를 불분명한 중지상태에 둘 뿐만 아니라 그의 정신을 꿰뚫어 황폐하게 해 버릴 수도 있다. 돌아온 이시하라 요시로는 시를 씀으로써 그러한 예외상태를 살아남고, 황폐를 견디며, 황폐에 저항하고자 했음에 틀림없다.

 분명히 예외상태를 둘러싼 냉소주의라는 문제가 있다. 예외자는 예외상태를 초래하는 권력의 객체가 되며, 억류자는 소련으로부터, 일본으로부터, 사회로부터, 그리고 어쩌면 몸 안에서부터 압력을 받고 협공을 당하며 혹은 유기되며, 더욱이 그러한 압력을 스스로 자기의 심신을 들볶는 것으로 받아들인다. 예외자를 어떤 시스템의 객체(대상)로 간주하는 것은 바로 냉소주의적 입장에 서는 것이다. 아감벤은 때로 섬세한 본질적 비평을 전개하는 필자이기도 하지만, 생명정치와 예외상태에 관해 생각할 때의 그의 입장은, 이런 의미에서 어디까지나 냉소적이다.

 예외자가 된 주체가 황폐에서 어떻게 살아남는가, 어떻게 <피해자>의 입장을 거부하는가, 이가라시의 책은 바로 이 점을 건드리고 있다. “피해자의 위치에 서지 않는 것은, 피해자의 위치로부터 고발하지 않는다는 태도에 불과하다. 그것은 자신의 행동의 주체를, 정치적 또는 역사적 힘으로 해소하지 않겠다는 결의이기도 하다. , 피해자로서 규정된 자기는 보다 큰 역학에 의해 산출된, 양의적인, 이른바 그림자 같은 존재일 수밖에 없지만, 이시하라는 이것에 맞서서, 자신의 체험을 정치 그리고 역사로부터 분리하고, 자기를 행위자로서 재생시키고자 한다. , 자신의 체험을 수동적, 반동적인 것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주체에 의해 선택된 것이라는 입장을 구축하고자 했던 것이다.” 예외자(호모 사케르) 속에는 생명정치의 냉소주의에 대항하고자 하며, 대항 따위는 불가능하다는 절망에 속하는 냉소주의마저도 관통하여, 또 다른 냉소주의가 구성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기존의 일본어가 아니라, 외국어도, 우리말도 아닌 언어가, 절단하면서 비약하는 언어가, 시로서, 의미의 극한으로 결정화된다.

 아우슈비츠, 수용소[Lager] 후에도, 그 체험을 둘러싸고 아직 쓰여지지 않으면 안 되는 시라는 게 있었다. 더 이상 시는 불가능하며, 시인지 아닌지 모르겠으나, 아무튼 언어 자체에 숨어 있는 힘의 기구를 찢어버리고 의식의 냉소주의를 금가게 하는 말을 찾아내야만 했다.

 생명권력을 행사하는 주권의 예외성, 호모 사케르라고 불리는 인간의 상황은, 호모 사케르가 객체라고 간주되는 동안에는, 마치 논리적으로 동형적으로 보이지만, 살다가 죽는 주체로서 그것을 본다면 동형적이지 않는 것이다. 거기서 엿볼 수 있는 <생명권력의 외부의 삶>에 관해 말하는 말과 논리를 추적해야 한다. 더 이상 시라고 부를 수 있는지 없는지 모르겠으나, 이런 삶의 상황에 의해 찢겨지고 또한 호흡하는 말이 쓰여졌던 것이다.

 애당초 정치 제도와 법적 언어는 생명의 외부에 있으며, 생명은 원래 정치 속으로도, 법 속으로도 포섭되지 않는다. 이 완전히 자명한 사태에서 출발해서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된다. 우리는 몇 가지 예외 상태(의 정치학)를 살펴봤는데, 이러한 예외상태에 대해 말하려면, 정치와 법이 예외 없이 생명의 세계를 모조리 덮어버린다는 것을 전제로 삼아야 한다. 그렇지 않고, 정치와 법이 오히려 예외이며, 예외적인 창조였다는 것을 슈미트도 아감벤도 결코 전제로 하지 않는다.

 아감벤은 법과 언어의 본질적인 가까움에 대해 썼다. “어떤 단어가 현실성에 있고 실제로 내뱉어진 담론의 심급에 있어서 현실의 한 절편을 외시할 수 있다는 힘을 획득하는 것은, 그 단어가 비-외시(, 언어로부터 확실하게 구별된 언어. 담론에 있어서의 구체적인 사용에서 독립하여 존재하는, 어휘로서의 순수한 정합성으로서의 단어)에 있어서 의미를 갖기 때문에 다름 아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법적) 규범이 개별 사정을 참조할 수 있는 것은, 규범이, 주권에 의한 예외화에 있어서 순수한 잠재력으로서, 현실성에 있는 실제의 참조가 모두 중지되어 버린 곳에서 효력을 갖기 때문에 다름 아니다.”

 여기서도 언어의 외부에, 언어가 촉지할 수 없는 삶의·차원이 퍼져 있다는 자명한 사실은, 아감벤에게 문제가 아니다. 언어의 외부에 (예외로서) 있는 것은 오히려 언어가 (파롤로서) 개별적으로 사용되고 지시를 하기 이전에 체계(랑그)로서 언어를 성립시키고 있는 잠재력이며, 그것이 법규범에 있어서 역시 예외적인 주권의 잠재력과 대비되고 있다. 확실히 언어는, 그 자체는 무의미한 형식(체계)에 의해 의미작용을 가지며, 법 또한 개별 사례에 적용되기 이전에 이른바 <명법>의 형식이라는 것에 의해서 효력을 갖는다. 그러나 언어와 법은 똑같은 형식이 아니다. 마찬가지로 볼 때, 형식으로 간주하는 것이 이미 하나의 작위이며 선택이다.

 이렇게 동형적으로 파악된 법-언어에 있어서, 외부란 어디까지나 내부에 포섭되는 <예외>이며, 아감벤의 사색은 이런 토폴로지에 대해 면면히 이야기는 해도, 그의 정치학은, 결코 삶에 대해, 살아 있는 주체에 대해 말하는 말을 갖고 있지 않은 것 같다. 하지만 호모 사케르가 단순히 그렇게 닫힌 시스템의 대상이며 효과일 뿐만 아니라, 그런 냉소적인 토폴로지 속에 있더라도, 또 그것을 더욱 변형하는 토폴로지를 만들어낸다면, 삶과 정치 사이에, 다른 맥락이 발견되지 않을까? “정치적 대상으로서의 삶은 어떤 의미에서는 문자 그대로 받아들이고, 그것을 관리하려고 시도했던 시스템을 거슬러 역전시킨다고 푸코가 암시할 뿐인 것에 머문, 그런 역전은 도처에서 발생하는 게 아닐까.

 “종인 신체는, 생물의 역학에 의해 관통되고 생물학적 과정의 버팀목이 된 신체를 둘러싼 생명정치에 대해 푸코가 썼던 것으로 돌아가자. 살아 있는 주체 쪽에 무엇이 일어나는가, 생명정치를 앞에 둔 생명이 무엇을 경험했는가를 보지 못하고, 그저 생명정치가 산출하는 예외상태에 대해 생각하는 것만으로는 결코 해명할 수 없는 것이 있다. 생명정치는 결코 법과 더불어 있는 사회에 면면히 존재한 예외상태의 한 사례에 그치는 것이 아니다.

 아감벤은 생명정치를 단숨에 보편화하려고 하며 이렇게 쓴다. “현대의 문화에 있어서, 모든 다른 투쟁을 좌우하는 결정적인 정치투쟁이야말로 인간의 동물성과 인간성 사이의 투쟁이다. , 서양의 정치학은 기원에서부터 동시에, 생명정치인 것이다”(열림, 2002).

 사실은 생명, 생물, “살아 있는 종으로서 파악되게 된 인간을 둘러싼 정치에 대해, 그런 정치에 포위된 삶에 대해 아감벤은 거의 말하지 않는다. 오히려 예외상태에 다름 아닌 벌거벗은 생명(호모 사케르), 강제수용소의 빈사(瀕死)의 삶과 포개서 동물상태라고 형언하고 있으나, 동물은 항상 가스실에 내몰린 인간처럼 살아가는 것이 아니다.

 생명, 생물로서, 생물학적으로, 혹은 임상의학이나 해부학이나 유전학에 의해 파악되게 된 인간은, 확실히 정치에 있어서, 권력에 있어서 새로운 대상으로서 나타나며, 그것에 대해 정치도 권력도 변질되어 갔음에 틀림없다. 아마 인간의 살아가는 힘, 의지, 욕망도, 그것에 대해 변질되었다. 또한 동시에, 삶과, 살아 있는 신체가, 새로운 힘관계 속에 개입하게 되었다. 동물이기도 한 인간이, 새로운 빛에 비춰지게 된 것이다. 생명정치의 세기가 오기도 전에, 스피노자 윤리학은 이미, 신체는 무엇을 할 수 있느냐고 묻고, 인간의 의식보다 훨씬 정교하게 다양한 것을 실현할 수 있는 동물의 생명을 긍정하는 윤리를 생각한 것이 아닐까?

 예외 없이 생명을 배려하고 관리하고 통제하려고 하는 정치가, 더욱이 예외상태를 산출하는 것이 필연적인 것처럼, 생명정치의 사상가는 말한다. 그것은 바로 슈미트가 말하는 신학적 기적처럼 말해진 것이 아닐까? 사실은 푸코의 말투조차도 이 기적과 무관하다고는 말할 수 없다.

 이 기적을 예외상태의 정치학으로서 초역사적으로 논리화하는 것이 아니라(그것은 전혀 기적이 아니니까), 생명을 둘러싼 정치에 있어서, 생명과 정치 둘 다에서 무엇이 일어나고 있는가를 생각해야 한다. 새로운 압력과 힘관계에 포위되면서 변용된 생명은, 이 힘의 시스템의 표적이 되면서도 민감하게 반응하고, 스스로를 어떤 힘으로서 재구성하고, 지속하고 어떤 생명의 주체이고자 했는가? 인간의 생명이, 동물의 생명을 결코 배제해온 것이 아니라면, 어떻게 그것을 새롭게 억누르려고 했는가?

 확실히 아감벤의 관심은 다른 곳에 있으며, 오히려 정치의 구성적 차원이기도 한 예외상태가 어떤 부조리한 폭력을 산출하는가에 특히 주의를 환기시키고, 강제수용소라는 예외상태에 관해서도 중요한 문제제기를 했다고 할 수 있다. 그것은 20세기 독일의 사상가들이 상이한 입장에서 주의를 촉구한 구성적, 발생적 차원에서의 정치와 권력의 문제에 비추어 생명정치를 파악하려는 시도였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생명정치를 그저 예외상태(동물상태, 불분명 상태)의 정치(오히려 논리학이라고 해야 할까)로 환원함으로써, 바로 생명정치에 노출된 생명이라는 주체를 둘러싼 사고는 완전히 배제되어 버린 것이다.

 

 

5. 두 개의 계보, 항쟁

여기서 바로 생명정치학적인 상황에서, 생명 그 자체에, 그리고 생명의 조건과 생명의 표상에, 어떤 변화가 일어났는가를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된다. 예를 들어 생물학적 범위에서는, 분자생물학이나 유전자학에 대한 정밀한 방향에 분화가 일어나는 것과 동시에, 진화론이나 우생학처럼, 때로는 과학적 엄밀성을 넘어선 도그마로까지 생물학적 사고는 확장됐다.

 임상의학, 해부학, 생물학 같은 지식이 연동되고, 생물, 생체로서의 인간의 파악이 진화되어 가는 동시에, 그런 지식은 당연히 통치 속에 편입되고, 권력에 있어서 새로운 과제를 가져다주었음에 틀림없다. 그런 문맥에서 푸코는 살게 하는정치에 주목했으나, 확실히 이 생명의 지식은, 생명에 깊이 침투하여 생명을 조작하는 지식이기도 하며, 생명이 어떻게 영위되는가를 세밀하게 알고 통치하는 것은, 거꾸로 어떤 조건에서 생명이 죽음이 될 수 있는가, 생명을 살해할 수 있는가를 알면서 통치하는 것이기도 하다. 생명의 차원이란 생식의 영역이기도 하며, 즉 성적 활동이기도 하며, 성을 둘러싼 지식도 이런 생명정치적 전환에 편입되며, 이윽고 성과학뿐만 아니라 심리학이나 정신분석도 그것에 합류하게 된다.

 푸코가 생명정치를 단숨에 강제수용소나 핵무기로까지 관계시켰다는 것은 확실히 조금 성급하게 보인다. 그러나 생명을 정밀하게 파악하고 조작하려는 지식의 체계는 분명히 평행하여 물질에도, 또한 이윽고 무수한 생명을 순식간에 살상할 수 있는 기술을 산출하는 게 됐다. 한편에서는 새로운 생물학과 진화론이 초래한 생물로서의 인간이라는 표상을, 정치적 표상으로서는 재구성하는 과정이 진행되어 간 것이다. 나치즘에는 이렇게 상이한 출신을 지닌 경향이 쏟아부어져 합류됐음에 틀림없다. 이 모든 것을 생명정치라는 말로 뒤덮어버리는 것은 매우 성급한 일이다. 다만, 이 모든 것이 동일한 경향을 공유하면서 공진했다는 것을 생명정치라는 말은 암시하기도 한다.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는 정신과 신체, 인간과 동물을 나누고 형이상학이나 종교적 세계관이 점점 더 의심을 받게 되고 신체, 동물의 생명을 살아 있는 인간에 새로운 빛이 비춰지게 됐다. 17세기의 서양에서는 확실히 신체와 동물의 생명이 재발견되고, 더욱이 상이한 빛 속에서 재발견됐다.

 데카르트는 당시의 의학이나 해부학에 통달하고, 신체를 정념의 자리로 정의하며, 어디까지나 관리하고 조작하고 억제해야 할 대상으로서, 바로 신체의 생명을 정신과 이성으로부터 분할했다. 이미 데카르트 속에, 생명과 신체를 대상화하는 생명정치적 지성이 엿보인다고도 할 수 있다. 그런 데카르트를 비판한 스피노자는, 신체를 조작할 수 있는 의식도 자유의지도 부정하고, “신체는 무엇을 할 수 있는가를 묻고, 신체, 생명, 심지어 자연의 <능산성> 위에 이성을 정초하려고 했다. 이것도 또 다른 생명정치적 윤리라고 해야 할까? 적어도 이 윤리에서, 생명은 관리되고 조작되어야 할 권력의 객체가 아니다. 스피노자에게서는 이 생명이야말로 주체이며, 그 요구의 연장선상에 하나의 정치가 구상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생명을 둘러싼 철학과 정치에 관해서, 여기서 적어도, 서로 뒤얽힌 두 개의 계보가 부상한다. 안토니오 네그리와 마이클 하트가 제국(2000)에서, 서양근대의 중심에 있는 갈등으로 지적한 것은, 아마 이것과 관련된다. “근대성의 중심에는 하나의 갈등이 있다. 즉 한편에는 사람들의 욕망과 연합으로 이루어진 내재적 힘들, 공동체에 대한 사랑이 있으며, 다른 편에는 사회적 영역에 질서를 강제하고 강요하는, 전체적 지배력을 지닌 권위에 의한 강력한 관리가 있으며, 이것들 사이에 갈등이 존재하는 것이다.” 갈등은 데카르트와 스피노자 사이의 철학적 대립으로서 출현된 갈등이기도 하다. 그것은 또한 내재성으로서 생명의 힘을 긍정하는 공동체와, 그 생명 위에 군림하면서 정밀한 관리의 그물망을 펼쳐가는 생명정치 사이의 뒤얽힘에도 연쇄했다.

 스피노자 이후에는, 누구보다도 니체가 이 한쪽의 계보 위에 부상하게 됐다.

 니체의 철학은 확실히 생명을 새로운 빛 속에서 바라보는 생태주의로서, 서양의 형이상학, 종교, 과학을 바로 생명의 적으로서 단죄한 것이다. 아마 생명정치적 지식과 실천은 다양한 반응이나 저항을 불러일으켰음에 틀림없다. 하지만 결코 그것은 생명정치라고 불리는 것도, 인간의 삶을 샅샅이 포위하는 새로운 체제로서 의식되는 것도 없는 채, 다양한 반응, 반향, 반항을 초래했으며, 거꾸로 그런 반발에 더욱 더 대답하는 것이기도 했다.

 하이데거는 니체의 철학을 높이 평가하면서도, 그 철학이 담고 있는 생물학주의를 비판한다. “예를 들어 생물학에 있어서 유력한 특정한 생물관이, 식물계와 동물계로부터 다른 존재자의 영역으로, 예를 들어 역사의 영역으로 전용되고자 한다면, 이것을 생물학주의라고 할 수 있다. 이 경우에는, 생물학주의라는 이 명칭은 이미 말한, 생물학적 사고가 생물학에 고유한 영역을 넘어서 확장되고, 아마 과장된다고 하는, 앞에서도 언급한 경계 침범을 표시하게 된다.” 그러나 니체가 아무리 생물학적으로 사고하고 있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그는 존재으로서 생각하면서, “생물학적으로 보이는 이 세계상을 형이상학적으로 정초하고 있다고 하이데거는 말하는 것이다. 사실 생물이 무엇인가라는 것, 생물이 존재한다는 것 그 자체에 대해서, 결코 생물학은 결단을 내릴 수가 없다. 그것은 철학만이 가능하다고 그는 말하고 싶은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존재를 삶이라는 의미로 이해하는 존재감보다도 생생한 존재관은 도저히 생각할 수 없다고도 그는 적고 있다. 요컨대 니체의 생물학적 사고의 본체는, 어디까지나 존재의 철학 쪽에 있는데도, 생물학적으로 보이는 주장 쪽에 정신이 팔려 니체의 존재론적 핵심에 이르지 못하는 피상적인 독해방식을 하는 세간의 경향을 하이데거는 비판한 것이다.

 도대체 니체의 생물학(적 사고)란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이른바 <사이비 진화론>으로 읽혀지고, 위험한 우생학적 발상을 자극하고, 마침내 나치즘의 <생명정치>에 거둬들여지는 사태도 분명히 일어났다. 그런 니체 속에, 사실은 어떤 생명정치가, 혹은 내재적, 능산적인 삶의 철학(스피노자의 계보)이 잠재했는가? 어디까지나 니체의 생물학주의의 근거에 있는 존재의 형이상학의 깊이를 읽으려고 한 하이데거의 사색은, 어떤 계보를 짊어질까? 아니면 그는 모든 계보로부터 완전히 고립된 독창적인 사상가였을까? 그 하이데거는 생명정치의 가속화된 실례였을지도 모르는 나치즘에 접근했으나, 니체는 생물학에 접근하면서 생명정치의 위기를 민감하게 감지하고 어디까지나 그 외부에 다른 <삶의 철학>을 세우려고 했던 게 아닐까? 각각이 때로는 물구나무 세우기를 포함한 입장에 서면서, 생명정치적 상황에 민감하게 반응했던 것이다.

 

VI. 니체, 그리고 아르토의 응답

니체는 어떻게 생물학을 이해하고 어떻게 주체를 생물학화하고, 오히려 주체를 생물로서 해체하고, 생물이라는 별개의 주체를 발견했던 것일까? 바르바라 스티글러의 소책자 니체와 생물학(2001)은 이 문제를 면밀하게 뒤쫓고 있다. 예를 들어 루돌프 루드비히 칼 비르효(1821-1902)의 세포에 관한 고찰을 이어받아, 니체는 생물의 근원적 과정을, 자기에 있어서 미지의 타자가 <자극>으로서 나타나는 장면에서 보고 있다. 그 자극(의 인상)이 고통을 안길 때, 생물은 자극을 받을 뿐 아니라 그것을 해석하고 동화하는 주체이기도 하다. 이러한 주체는 환경으로부터 고립된 동일한 것(동일성)이 아니라, 환경을 구성하는 타자들로부터 끊임없이 영향을 받고, 영향에 반응하고 타자의 이타성을 동화하는 주체이다. 엄밀하게 말해서 그것은 의식도 주체도 동일성도 아니고, 그저 그것 자체성(ipséité)이라고도 불러야 할 뭔가이다.

 니체는 생명과 생물 속에, 의식이 아니라, (권력에의) ‘의지를 본다. 결코 생물에 목적론이나 초월적 이념을 적용하는 것이 아니라, 역시 생물학(특히 발생학의 창시자 빌헬름 루, 1850-1924)을 따라서, 생물의 자기형성 과정을, <자기 조정>이며 <내적 투쟁>이기도 한 과정으로서 고찰한 것이다. 다만 환경에 의한 도태나, 생존을 위한 투쟁으로서 생명의 진화를 생각한 다윈은, 이런 발생에 비하면, 결코 생물의 <내부에> 들어가지 않았다. 니체는 빌헬름 루에게서 배우고, 생물의 내부의 미세한 단위에서까지 차이, 부등성, 복수성, 서열, 투쟁, 조정작업을 발견하려고 한 것이다. 생명체에 있어서의 조화와 안정과 동일성은, 이런 과정에서, 그 효과로서 사후적으로 출현할 뿐, 결코 과정을 이끄는 것이 아니다. 생명에 있어서의 차이는 지속하고 영속하는 것이지, 결코 해소되는 것이 아니다. 니체가 생각하는 권력에의 의지, 이런 차이의 의지로서 생물을 관통하고, 인간도 관통하는 것이다.

빌헬름 루


 그러한 니체의 사고는 생물의 기억은 어디까지나 외부세계로부터의 영향에 대해 수동적으로 행동한다고 봤던 에른스트 헥켈(1834-1919)에도 대립하며, 오히려 단절이나 비연속의 힘으로서 생물의 <의지>를 파악하고자 했다. 스티글러에 따르면, 니체는 이렇게 동시대의 생물학이나 생물학적 사고에 크게 촉발되고, 또한 그것을 비판하면서 생물에 대한 사고를 중요한 모티프로서 권력에의 의지의 철학을 제련해냈던 것이다. 생물이 진화를 거듭하면서 예정조화적으로, 균형이나 통합(이른바 도덕적 이상)으로 향한다고 생각한 허버트 스펜서(1820-1903)에게도 니체는 비판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조화><균형>은 사후적으로 그러한 상태를 드러낼 뿐이며, 어디까지나 차이의 항쟁 그 자체가 생명과 그 진화의 과정을 인솔하는 것이다. 작은 변화가 수없이 겹쳐지며, 도태가 거듭되는 가운데 진화가 일어난다고 하는 다윈의 진화론에서는, 생물계에서의 도태도 항쟁도, 매우 온화하게 점진하는 것에 불과하지만, 니체에게 있어서 생물은 끊임없이 이상(異常)이나 예외를 산출하는 것이며, 변화나 항쟁이야말로 정상常態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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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른스트 헥켈

 다윈도 스펜서도 개체로서의 생물의 짧은 시간 스케일에서는, 동일적으로 안정적으로 존재하는 개체와 개체성을 전제로 하여 생물계를 생각한다. 그러나 니체에게 있어서 개체는 결코 자기에 일치하지 않으며, 끊임없이 차이화하는 것이며, 생물의 자기는 미리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그때마다 형성되고 발견되는 것이다.

 니체의 생물학주의의 한 측면으로 간주되어 온 우생학적 사고도, 사실은 똑같은 경향으로 관통되고 있다. 그는 우생학의 창시자 프랜시스 골턴(1822-1911)의 책을 읽고 공감했다고 한다. 스티글러의 독해에 따르면, 골턴의 우생학은 나치즘이 채용한 듯한 사이비 다윈주의와는 한 선을 긋는[다른] 것이었다. 골턴의 시각에서는, 자연도태는 오히려 새로운 것의 출현을 막고, 집단적 본능에 이끌리는 사회를 신장시킨다. 유전은 오히려 인간의 능력을 평균화하고, 차이를 말소하도록 작동하기에, 인공적인 조작에 의해 차이나 다양성을 증강할 필요가 있다고 골턴은 생각했다. 유전()의 인공적 조작은 거꾸로, ‘순화등질화等質化의 방향에서도 행해질 수 있으며, 우생학적 발상은 오히려 그런 위험한 방향으로 발전하며, 현재에도 곳곳에서 되살아나고 있다. 그래도 니체는 동시대의 우생학에서조차도 그의 차이(그리고 권력에의 의지’)의 철학을 뒷받침하는 근거를 보고 있다. 이것은 그의 초인의 사상에도 관련된 것이다. ‘초인의 사상이란 단순히 우생학적인 제안의 변종(variation)일까? 아니면 인간이라는 동일성의 바깥으로 나가서, 차이나 다양성으로서의 거친 삶을 맞이하려고 하는 발상이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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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랜시스 골턴

 아마 종인 신체, 생물의 역학에 관통되고, 생물학적 과정의 버팀목이 되는 신체”(푸코)는 생명정치를 훨씬 뛰어넘어 인간의 주체적 의식의 앞에 출현하고, 주체와 의식을 흔들며 서서히 찢어버리게 됐다. 삶이 인간의 외부로서 발견되는 동시에, 똑같은 삶이, 금방 인간의 차원에 수용되고 관리되어야 했다. 삶을 재발견하는 사고와, 재발견된 삶을 면밀하게 알고 통제하려고 하는 권력의 실천은 동시에 진행된 것이다. 인간을 살게 하는 면밀한 배려란, 기묘하게도 인간의 삶을 마비시키고 때로는 무참한 죽음으로 유기하게 됐다. 생명정치()이란 삶을 둘러싼 의식과 실천에 있어서의 큰 전환에 대한 하나의 응답이며, 동시에 그러한 상황에 대처하려고 하는 권력의 재편성의 과정이기도 했다. 생명정치에 있어서 인간의 삶은, 인식하고 조정하고 관리해야 할 대상이었는데, 인간은 일찍이 그 삶의 주체이며, 이윽고 역사적 주체의 위치로부터 탈락하고 오히려 삶이야말로 진정한 주체가 된다는 전환조차도 넘어선 것이다. 삶이라는 주체는 더 이상 서양의 철학이 정의하고 문제화했던 주체일 수 없었다. 니체는 그것을 의식이 아니라 삶의 의지로서, 끊임없이 변모하는 차이의 무리로서 생각했다.

 생명정치와 밀접하게 연계하는 체제, 인식, 과학, 기술은 확실히 나치즘의 경우, 예외상태의 정치와 결합되어 무서운 살인기계를 산출했다. 아감벤은 그런 실제 사례를 특히 법적 차원의 예외상태로서, 고대 로마로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권력 시스템에 통저하는 것으로서 생각했다. 그 문제제기는 본질적으로 귀중했지만, 그래도 생명정치라는 거대한 문제의 단 한 가지 측면밖에는 언급하지 않았다.

 나치즘 점령 하의 프랑스에서, 비점령지역의 정신병원에서 간신히 살아남은 앙토냉 아르토는 도대체 왜 기관 없는 신체라는, 저 기묘한 말을 거듭 반복하여 노트에 적어두면서, 인류에 대해, 역사에 대해, 완전히 고독한 선전포고를 한 것일까? 그의 심신에, 특히 신체의 심층에 미치는 거대한 적의 힘에 대해, 돈키호테처럼 헛쇤 싸움을 그는 계속했다고 해야 할까? 그의 기묘한 싸움은, 신체 기관에, 아니 오히려 기관으로서 파악되는 생명에, 그리고 생명을 탄생, 생식, 노동력, 수명으로서, 여러 가지 기능으로서, 이윽고 이식 가능한 기관으로서 파악하는 정치, 의학, 기타 여러 가지 지식과 실천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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앙토냉 아르토 

 생명정치는 사용되고 분해되고 조작되고 소진되는 기관의 모임으로서, 산 신체를 관리하고 통치한다는 의미에서는 전혀 인정사정없는 체제이다. 아르토가 기관 없는 신체의 선전포고가 되는 라디오 드라마(신의 심판과 결별하기 위해, 1948)를 미국에서 조직적으로 행해지고 있다는 인공수정 기술을 지탄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한 것에는 명백할 정도의 이유가 있었다. 물론 그가, 생명에 개입하는 새로운 기술에 항의한 것보다도, 기관으로서 생명을 분리하고, 대상화하고, 조작하는 삶의 이식과 실천에 대해 누구보다도 근본적으로 민감하게 저항한 것에 주목해야 한다. “기관 없는 신체는 죽음의 표출이기도 하며, 죽음과 이웃한 신체이며, 실제로 아르토에게는 죽음이 가까이에 임박했다. 그러나 그것은 분명히 생명정치학이 기관으로서의 신체에 초래할 수 있는 죽음과는 별개의 죽음이었음에 틀림없다. , 그것은 생명정치학이 초래하는, “살게 하거나 죽음 속으로 폐기한다고 하는, 저 기묘한 삶과 죽음의 결탁의 바깥으로 나아가려고 하는 마음이었다.

 * 이 글은 졸저 <なる>哲学──思想のゆくえ(平凡社, 2005)을 보강하는 것이며, 그것의 자기 비판적 성찰이기도 하다



 

Posted by 상겔스 상겔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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