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역의 윤리학

: 벤야민과 데리다 (2)

翻訳の倫理学

   ベンヤミンとデリダ(二)

후지모토 카즈이사(藤本一勇)


* 국역본이나 프랑스어본과 대조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번역의 윤리학 : 벤야민과 데리다 (1)>보다 훨씬 더 초벌이다. 



언어의 다수성과 유령성[亡霊性]

데리다는 벤야민의 번역론을 논한 「바벨의 탑」에서, 언어의 다수성 혹은 언어의 타자성에서 출발해서 논의를 하고 있다. 데리다에게서 언어에 있어서의 다수성∙타자성의 물음은 항상 이로부터 출발해야 할 기점인 동시에, 이것으로 귀착되어야 할 기점이기도 하다. 그 경우의 다수성이나 타자성은, 일반적으로 「바벨의 탑」이 빗대어 얘기하고 있다고 생각되는, 다수의 언어가 지상에 뿔뿔이 흩어져 있고 통일이 없다는 사태를 시사하는 것만이 아니다. 데리다에게서의 다수성이나 타자성의 물음은, 더욱 근원적인 다수성∙타자성, 즉 어떤 단위나 통일을 전제로 하는 복수성이 아니라, 단위나 통일의 내파 그 자체를 나타내는 ‘산종’을 문제 삼는다.

 이 언저리의 사정은 그의 『타자의 단일 언어 사용 : 혹은 기원의 보철』(1996년)에서 명료하게 논해지고 있기에 그것을 참조하자.

 『타자의 단일 언어 사용』은 “나는 하나밖에 언어를 갖지 못하며, 그것은 내 것이 아니다”라는 언어의 타자성의 선언에서 시작되는데, 그것은 또한 “우리는 결코 단 하나의 언어를 얘기하는 것은 아니다”라는 언어의 복수성의 논의로 전개된다. 인간에게서 각자의 언어는 ― 설령 그것이 모어(母語)라고 불리는 것이든 ― 스스로가 선택한 언어가 아니라, 자기가 선택하기 이전에 주어진 것임에 틀림없다. 이런 의미에서 ‘모어’는 단적으로 ‘타자의 언어’이다.


즉, 나는 하나밖에 언어를 갖지 못하며, 더욱이 그것은 내 것이 아니다. 내 ‘고유한’ 언어는 내게 있어서 동화 불가능한 언어이다. 내 언어, 내 자신이 얘기하는 것을 내가 듣고 있고, 말하는 것을 잘 하는 하나의 언어, 그것은 타자의 언어이다.1)


‘모(母)’라는 가장 ‘자연’적이고 ‘친밀’하다고 생각되는 것(사실상 가장 ‘자연’적이고 ‘친밀’한 것)은 사실 자기에게 있어서 가장 ‘누락[欠落]’된 ‘소원(疎遠)’한 것이다. 데리다는 그것을 “소외 없는 소외의 구조, 이 소외 불가능한 소외”2), 즉 “본질적 소외”3)라고 부른다.

 이 근원적 소외는, 데리다의 경우, 프랑스의 식민지 알제리에서 태어난 유대인이라는 이중∙삼중으로 찢겨진 개인적 상황, 분열적 정체성에 의해 훨씬 첨예해진다. 그의 ‘모어’는 단순히 타자의 언어일 뿐만 아니라, 그 타자의 언어 자체가 복수로 분열된 것이다. “일찍이 한 번도, 프랑스어를, 즉 내가 지금 여러분께 말하고 있는 이 언어를, ‘나의 모어’라고 부르는 것을 나는 할 수 없었다.”4) 프랑스령 알제리의 유대인의 아이들에게 주어진, “타자로부터 강제된 단일 언어 사용”5)의 문제를, 데리다는 “전쟁을 다른 수단으로 연장해가는”, “상징적 정복”,6) “정치의 문제”7)의 물음으로서, 더 나아가 “호명을 강제하고 정당화하는 이 권력”,8) “<언어>로서의 <법>”,9) 근원적인 ‘주권성’의 물음으로서 비판적으로 들춰서 폭로한다. 하지만 그것은 잃어버린, 혹은 ‘찬탈’되고 ‘강간’10)당한, 순수한, 본래적인, 기원적인, 자연의 언어를 회복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유대인의 인종성이나 문화성이나 히브리어도, 또한 식민권력인 프랑스 ‘본국’의 문화나 언어도, 더 나아가 알제리의 이슬람성이나 아프리카성도, 이 중 어느 하나가, 데리다의 단일하고 유일한 정체성의 원천이라고는 말할 수 없으며, 또 이 중 어느 하나가 그의 정체성이라고도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정체성(동일성)이란 이렇게 근원적으로 찢겨진 복수적∙다수적인 것(차이들의 효과들)으로부터 형성된 직물(텍스트)이며, 데리다의 경우는 특히 두드러진다고는 하지만, 이 다수다양체로서의 개별성(특이성)이라는 분열적 정체성 구조는, 누구에게나 많든 적든 공통된 것이리라.

 사실 따지고 보면, 개체[個]라는 다수다양체를 구성하고 있는 요소들 그 ‘자체’가 (데리다의 경우로 말하면, 유대인성, 히브리성, 아프리카성, 아랍성 등이) 그 순결∙순혈적인 유일성을 본래적으로 갖고 있는 것이 아니라, 더 분할된 다수다양체이며, 집합적 유령과도 같은 것이다. “사실, 유령성의 최초이자 가장 중요한 형상 중 하나, 유령성 그 자체는, 프랑스 … 가 아니었을까 ….”11) “국가와도 국민과도 종교와도 일치하지 않고, 굳이 말하면 뭔가 어떤 진정한 공동체와도 일치하지 않는, 이 말의 그런 불투명한 의미에서의 국가[알제리]."12) 즉, 데리다가 근원적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어떤 단위(통일체)가 복수로 존재한다는 의미에서의 복수성(예를 들어 단어나 의미의 다양성이나 상호주관성이나 국가연합 등)이 아니라, 그 이전의 곳에서 단위(통일체)의 성립을 방해하는, 혹은 통일체가 그 환상적 효과의 산물인, 통일에 선행하는 잠재적 복수성이라고 말하자. 복수의 통일체가 아니라, 통일체가 되지 않는, 통일체 이전의 복수성. 즉, 데리다가 초기부터 ‘산종’ 혹은 ‘차연’으로서 추구한 사태이다.13)


과장법의 래디컬리즘

이러한 언어의 산종 구조에 입각한 데리다가 그에게 주어진 타자의 언어인 ‘모어’ ― 즉 ‘프랑스어’ ― 를 ‘사용’할 때(그는 그것을 사용하지 않을 수 없었지만 ― “나는 하나밖에 언어를 갖지 못한다 …”), 특히 철학적∙문학적 사용법에 있어서 그가 목표로 하는 것은, “나에게만 맡겨져 있을 것인 언어”14) 속에 침잠해 있는 복수의 잠재적인 가능성의 발굴이며, 정통적이라고 말해지는 프랑스어가 감춰버린 “언어로부터의 유언”15)에 대한 응답이다.

 여기서 주목하고 싶은 것은 그가 주장하는 ‘유산상속’의 방식, 더욱이 그의 독특한 ‘과장법’의 래디컬리즘, 뿌리 뽑힘의 근본주의이다. 데리다에 따르면, 탈구축은 모든 장면에서의 순수주의 전반에 대한 비판을 기초로 삼고 있다.


내가 ‘순수성’이라는 모티프를 재문제화하는 것을 그만둔 적은 한 번도 없었다(‘탈구축’이라고 불리는 것의 첫 번째 운동은 순수성이라는 환상 내지 공리의 이러한 ‘비판’으로, 혹은 기원이라는 해체 불가능한 단순성으로 사람들을 이끌 순화 작용을 분석적으로 해체하는 것으로, 순수성을 실어다주는 것이다).16)


하지만 흥미로운 것은 이 순수성의 탈구축이 단순히 순수성 일반의 거부가 아니라 한층 급진적으로 된 순수주의, 순수함의 래디컬리즘에서 생기고 있다고 그가 고백하는 점이다.


… 내가 가끔 공언하고 있는 모든 것에 반하여, 나는 ― 여기에서 털어놓지만 ― 사람에게 털어놓지 못하지만 감당 못할 어떤 무관용을 체득하고 말았다. 즉, 적어도 프랑스어에서는, 그리고 그것은 언어에 관해서만인데, 내가 참거나 칭찬하는 것은 그저 순수한 프랑스어뿐이다.17)


프랑스어에 대한 나의 집착은 때로 나 자신도 "신경증적"이라고 생각하는 형태를 취한다.18)


데리다의 고백하는 “언어의 순수성에 대한 이 강박적 요청”19)은 물론, 알제리에서 프랑스어 교육과 프랑스 문화 교육의 식민 정책의 효과(결과・성과)이다. 이른바 ‘문화 변용’의 압력 속에서 피식민지인이 식민자의 가치를 해당 식민자 이상으로 강하게 내면화하는 것은 자주 보이는 현상이다. “그들은 살아남기 위해서 혹은 더 잘 살기 위해서 스스로의 특유 언어를 잃지 않으면 안 된다. 이것은 비극적 에코노미라고 말해야 하며 대체로 참기 힘든 충고이다.”20) 그러나 데리다의 ‘내부’에 신들린 ‘순수한 프랑스어’에 대한 강박관념은 식민자들이 무의식적으로 혹은 형이상학적으로 상정하고 있는, ‘프랑스어’의 순수성, 본래성・고유성을 허물어뜨리는 데까지 철저화=근본화(radicalisation)된다.


좋은 프랑스어로, 순수한 프랑스어로 말하는 것, 그것도 거기에 연결되어 있는 모든 것, 그리고 때로 거기에 살고 있는 모든 것을 무수한 방식으로 비난할 때에도 그렇게 하는 것. 이 과장법(그것은 ‘프랑스어보다도 프랑스어적으로’, 즉 순수 어법주의자들의 순수성이 요청한 것보다 더 ‘순수하게 프랑스어적으로’라는 것이다 …), 이 지나친 강박적인 과격주의 ― 나는 그것을 아마 학교에서, 바로 내가 인생을 보낸 프랑스의 여러 학교에서 습득한 것이다.21)


“언어의 순수성에 대한 이 과장된 선호”,22) “전반화된 과장법”23)은 데리다의 탈구축의 본질적 특징을 이루고 있다. 즉 탈구축은 그 대상이 철학이나 문학의 텍스트이든, 정치·경제·법률 같은 현실적 구조이든, 대체로 대상이 주장하는 자기 정당화나 자기 순화의 논리를 바로 이 논리가 어떻게 배반하는지를 들춰서 폭로한다. 다양한 논리나 개념을 과잉될 정도로까지 ‘성실하게’, ‘문자 그대로’·‘액면 그대로’(littéral) 떠맡아 논리나 개념의 순수한 핵을 근저에 이르기까지 래디컬하게, 과격할 정도로 극한까지 래디컬하게, 철저히 따져나간 끝에, 바로 이 개념이나 논리의 한계나 편의주의[기회주의]가 그 내부에서 자동적으로 드러나도록 이끄는 것, 이것이 탈구축의 기본 전략이며, 탈구축의 과장법, 래디컬리즘이다. 그것은 개념이나 논리의 확장이자 자기 탈구축이며, 끊임없는 무한의 ‘서로 끌어올림[競り上げ]’, ‘상고(上告(grief)’24)라고도 할 수 있다. 논리나 개념이나 제도가 자신 속에 안고 있으면서도 억압하고 배제하는 이 특이점을, 탈구축은 그것들 자신의 말을 통해서 고백시키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은 결코 탈구축만의 전략이 아니다. 원래 소크라테스의 ‘아이러니’, ‘무지의 앎’ 자체가 유사한 전략이었고, 플라톤의 ‘문답법’에서 헤겔의 ‘변증법’(특히 ‘이성의 간지’)도 마찬가지였다. 이런 의미에서는 그 외견이나 일반적 평가와는 달리, 탈구축은 극히 ‘철학’적인 수법이며, 철학에 있어서의 전통적이고 왕도적인 방법이라 할 수 있다(때로 너무 철학적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25) 그러나 데리다는 전통적인 형이상학처럼 순수함에 대한 욕망에 의해 순수함의 논리를 끝까지 밀어붙인 끝에, 목표로서 진정한 순수함 혹은 진리로서의 순수함에 도달하는 것은 아니다. 그는 오히려 순수함의 진리로서, 불순한 것의 불가피성, 불순한 것에 의한 오염의 필연성을 부각시킨다. 그리고 그 결과 단일의 순수성 혹은 순수한 단일성을 요구하는 순수주의(데리다가 ‘현전성의 형이상학’이라고 부르는 것)이 순수함의 불순한 본성을 부인하고 망각하려고 하는 폭력을 보여주려고 하는 것이다. 데리다가 보기에, 이것은 주어진 언어의 구성과 배치를 고수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단 하나밖에 갖고 있지 않지만, 그러나 자신의 것이 아닌 언어를 재편하고[변형시키고] 미래를 향해서 해방해가는 작업이다(그것이 거꾸로 자신의 해방될 것이다).


그것은 타자의 언어로서의 자신의 언어에 굴복한다는 것이며, 더구나 내가 자신의 언어에 굴복한다는 것은, 그 언어가 다시 일어설 수 없게 한다는, 거의 항상 계획적인 의도를 담고 있는 것이다 ― 거기에서가 아니라 여기에서, 여기에서가 아니라 거기에서, 어떤 하나의 주어진 것에 감사를 드리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저 도래할 것에만 감사를 드리기 위해서. 그리고 그러니까 나는 유산 상속 또는 유언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것이다. 나는 그러므로 너무 순수하지 않는 순수성을 털어놓고 있는 셈이다. 문제가 되는 것은 순정 어법주의 따위가 전혀 아니다. 적어도 그것은 유일한 불순한 "순수성"이며, 그것에 대한 선호를 나는 굳이 고백하고 있다.26)


이러한 데리다의 ‘순수성’의 탈구축을 둘러싼 논의는, 벤야민의 ‘순수 언어’에 대한 욕망을 상기시킨다. 벤야민의 "‘순수 언어’는 “스스로는 더 이상 아무것도 지향하지 않고 아무것도 표현하지 않고, 표현을 갖지 않는 창조적인 단어”27)였다. 알기 쉽게 바꾸면, 존재 자체와 일체가 된 듯한, 주관과 객관, 시니피앙과 시니피에, 기호와 의미, 형식과 내용이 일치하는 이상적 또는 신적인 언어였다. 그것은 역사적·시간적 기원에 실재한 것도, 미래의 어떤 시점이나 종점에 실재하게 되는 것도 결코 아닌 언어지만, 그래도 “모든 언어에서 지향되는 것”28)이었다. 이른바 산종된 언어들의 내부에 숨겨져 있고, 이 언어들을 구동하는 숨겨진 욕망적 동인이면서 결코 현실화되지 않고 현전화하지 않고 오로지 ‘도래할’ 것에 머무는, 도래할 것으로서 잔류하고 잔여하며, 여백에 머무는 것이었다. 순수 언어는 각 개별 언어가 그 달성·성취를 불가능하다고 알면서, 그래도 그 ‘해방’과 ‘구원’을 자신의 ‘과제’로 떠맡을 수밖에 없다는 의미에서, 언어 일반에 그 유한성과 불완전성을 들이대며 그렇게 언어의 존재 이유와 책임을 심문하는 ‘허초점’이다. 극한까지 순화된 순수성에 대한 욕망은 순수 존재의 불가능성과 불순한 것의 불가피성을 결론으로서 이끌고, 또한 이것에 그치지 않고 언어가 형식과 내용의 합치라는 효과에 (비록 환상이라고 하더라도) 입각한 이상, 순수 언어라는 불가능한 것을 ‘과제’로서 떠맡는다는 책임을 부과하는 것이다. 벤야민의 순수 언어론(그리고 번역론)도 순수의 과장법, 순수함의 래디컬리즘, 즉 근저를 어디까지든 파고들어 간 끝에 뿌리 자체를 앞지른다는 ‘래디컬라즘’, 근저성(根底性)이 무저성(無底性)으로 전도되는 과잉적인, 잉여의 ‘래디컬리즘’이라고 말해도 좋다. 이 지점에서는 더 이상 근거와 무근거, 조건부와 무조건성, 정치와 윤리, 합법성과 정의, 교환과 증여, 계산과 계산 불가능성은 단순하게 분리되거나 대립되지 않는 것이다.

이러한 벤야민과 데리다의 래디컬리즘은 칸트의 ‘규제적 이념’과 비슷한 면 또는 효과를 갖는지도 모르지만, 그러나 칸트의 경우 아무리 인간 이성의 유한성과 절대 존재에의 도달 불가능성이 강조된다고 해도, 그 유한성과 완성 불가능성은 예지계[叡智界]29)라는 우주 전체를 관장하는 신에 대한 신앙과 역사의 섭리에 대한 신뢰에 의해 뒷받침되고 있다. 신과 예지계[叡智界]의 절대성에 대한 신앙이 대칭적 혹은 상보적으로 인간과 이성의 유한성을 요구하고 그것을 지탱하는 것이다. 벤야민이 ‘순수 언어’라고 말하고 데리다가 ‘도래할 것’이라고 말하더라도 그들은 ‘인간적인 것’의 유한성과 상대성을 요구함과 동시에 그것을 구원하는 초월자나 절대자를 염두에 두고 있는 것이 아니다. 벤야민의 말처럼 ‘구원’하는 것은 오히려 유한자 측의 사명인 것이다.


이질적인 언어의 내부에 속박되는 그 순수 언어를 스스로 언어 속에서 구원하는 것, 작품 속에 갇힌 것을 언어 치환 속에서 해방하는 것이 번역자의 사명이나 다름없다. 이 사명을 위해서 번역자는 자신의 언어의 썩은 울타리를 부서뜨린다.30)


데리다의 ‘도래할’이라는 사고방식도 미리 목표로 설정된 어떤 이념이 도래한다는 것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물론 그것도 ‘도래할’의 양상 중 하나, 가능성 중 하나이지만). 그것은 ‘규제적 이념’의 그것을 포함해 대체로 온갖 도래의 가능성을 여는, 도래를 도래시키는 ‘지금 여기’에서의 단독적 결정이며 ‘구조상의 엶’31)이다. 그것은 “더 이상 재고유화=재본래화되지 않을 만큼 충분히 다른 언어를 발명하는 것”32)이라고도 불린다. 이 “새로운 특유 언어는 도래시킨다. 이 서명은 도래를 일으키는 것이다. 그것은 주어진 소여의 언어 속에서 무수한 사건들을 산출하는 것이다. … 주어진다기보다는 항상 약속되는 무수한 사건들.”33)

 이 수많은 사건을 약속하는 언어, 사건의 도래에 열린, 도래를 도래시키는 언어는 그 자체가 필연적으로 복합적이다. 그것은 여러 가지 복합적 요소들로 구성되어 있을 뿐 아니라 사건이라는 타자에 자신을 여는 한에서, “자신의 언어의 썩은 울타리를 부서뜨림”으로써 항상 이미 복수적인 것으로 생성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나의 언어 따위란 존재하지 않는다.”34) 언어는 체계이며, 일견 통일성을 갖는 듯이 보인다. 그러나 그러한 언어의 외견상의 통일성은 특이한 통일성이며, “대체로 가장 급진적인 접목에 의해서, 뒤틀린 모양[歪形], 변형, 접수[接収, 받아들임, 징발], 모종의 비-규범성에 의해, 이례성, 비-준칙화에 의해서 움직이는 것이다. … 이 [언어의] 몸짓은 그 자체에 있어서 복합적이며 분할되며 중층 결정되고 있다.”35)

 데리다가 향해 가는 것은 이러한 언어의 통일성의 외관 아래에 묻혀 있는 잠재력의 교배로서의 언어, 착종된 잠재체로서의 언어인 것이다.


항상 이미 번역으로서의 언어

이러한 착종 잠재체로서의 데리다의 언어관에서는 어떤 번역론이 도출될 것인가? 착종  잠재체로서의 언어는 이미 일종의 번역 존재라고 말해도 좋지만, 그 논의에 들어가기 전에, 벤야민의 번역론을 논한 「바벨의 탑」에서 그가 일반적인 번역론에 대해 행하고 있는 비판을 확인하자.

 데리다는 “번역에 관한 이론들의 한계”의 하나를 다음과 같이 지적한다.


그 이론들은 너무 자주 한 언어에서 다른 언어로의 이행을 논하고, 몇 가지 언어가 하나의 텍스트 속으로 두 개 이상의 방식으로 감아 넣어질[휘말려 들어갈] 가능성을 충분히 고찰하지 않는다. 동시에 몇 개의 언어로 쓰인 하나의 텍스트를 어떻게 번역하면 좋을까? 복수성의 효과를 어떻게 "번역"하면 좋을까? 그리고 동시에 몇 개의 언어로 번역했다면 사람들은 그것을 번역이라고 부를까?36)


즉 전통적이고 일반적인 번역론은 야콥슨의 분류를 따라 말하면, ‘언어 간 번역’에 논의가 집중되고 있으며 이 종류의 번역을 번역 그 자체로 본다. 또한, 그러한 언어 간 번역은 개별적으로 복수 존재하는 언어 시스템의 통일성을 전제로 한다. 이 전제는 야콥슨 같은 예민하고 주도면밀한 언어학자의 번역론에서도 의심되지 않는다고 데리다는 지적한다. 데리다는 야콥슨의 『번역에 대해』(1959년)이라는 논문을 거론하고, 야콥슨에 의한 번역의 세 유형을 다음과 같이 요약하고 있다. 야콥슨은 번역에는 ‘언어 내 번역’, ‘언어 간 번역’, ‘기호법 간 번역’의 세 종류가 있다고 한다. ‘언어 내 번역’이란, 동일 언어 내에 있는 몇 개의 언어 기호를, 그 동일한 언어 내의 다른 언어 기호로 해석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사전의 정의에서 보듯이, ‘책’이라는 언어 기호를 ‘서책’이나 ‘서적’이라는 다른 언어 기호로 ‘말 바꾸기’하거나(실제로 야콥슨은 ‘언어 내 번역’을 ‘말 바꾸기’라고 바꿔 말한다), ‘책의 본질’이라는 언어 기호를, “어느 정도 이상의 분량이 있는, 장정(装丁)된 종이 매체”라든가 “저자의 메시지나 이야기가 적힌 종이 매체”라든가로 해석할 때의 기호 조작이다. 데리다는 이 ‘언어 내 번역’은 다음의 것을 전제로 하고 있다고 말한다. “즉, 어떤 언어의 통일성 및 동일성을, 바꿔 말하면 그 언어의 경계들의 결정 가능한 형태가 엄밀하게는 어떻게 규정되어야 하는지, 이것을 궁극적으로는 알고 있다”37)라고. 다음으로 ‘언어 간 번역’(보통 ‘번역’이라고 했을 때 생각되는 ‘이른바 번역’)도 ‘언어 내 번역’과 똑같은 전제, 즉 언어는 궁극적으로 그 윤곽이 명확한 통일체이라고 하는 전제를 믿고 있다고 데리다는 지적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기호법 간 번역’인데, 이것은 언어기호를 비언어기호로 해석하는 것이며, 알기 쉬운 예로 말하면, 일상 언어를 논리 기호로 ‘옮겨심는[移し換える, 옮겨적는]’(‘옮겨심기[옮겨적기]’라는 말도 야콥슨에 의한 ‘기호법 간 번역’의 정의이다) 논리학적 조작 등이 해당된다. 당연히 이 경우도 기호의 질이 다르다고 하지만, 언어 간 번역과 같은 전제가 작동하고 있다.

 요컨대, 데리다가 보기에는, 야콥슨이 정밀하게 추출한 세 가지 번역 유형 모두 언어 시스템의, 더 일반적으로 말하면, 기호 시스템의 통일성을 전제하고 있다는 것이다. ‘바벨탑’의 전설에 대해 다수의 언어가 지상에 분산되는 보편성을 가진 ‘큰’ 통일 언어가 상실됐다고 하는 해석(바벨의 일반적 해석이다)은 분산된 개별 언어의 ‘작은’ 통일성까지는 의심하고 있지 않지 않느냐, 데리다는 이렇게 생각한다.


언어란 무엇인가. 어떤 언어와 다른 언어의 관계는 무엇인가, 특히 언어라는 것에 있어서 동일성 혹은 차이성이란 무엇인가, 이런 것을 누구나 알고 있다고 간주되고 있다. 바벨에 의해서 타격을 가할 수 없었던 듯한 투명성이 만약 있다면, 바로 이것, 즉 언어들의 다수성의 경험 및 ‘번역’이라는 말의 ‘이른바’ 의미이다.38)


이것은 ‘큰 이야기’가 권위를 실추하고 ‘작은 이야기’의 무리(‘섬 우주’의 난립)만 남아 있다고 하는, 이른바 ‘포스트모던’ 상황이라 불리는 것의 모습과도 흡사하다. 앞서 말한 착종 잠재체로서의 언어라는 데리다의 생각은 거대한 통일 언어 즉 ‘절대적 메타언어’의 ‘불가능성’39)을 주장하는 것은 당연하지만, 더 나아가 ‘작은’ 개별 언어의 통일성, 즉 다른 것과 통약 가능성을 갖지 못한 닫힌 ‘섬 우주’의 언어 게임의 울타리라고 하는 사고방식도 비판하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데리다의 번역론은 어떻게 되는가? 그것은 이미 지적했듯이, 착종 잠재체로서의 언어 자체가 이미 번역 효과로부터 빚어낸 운동체라는 것이다. 데리다에게서 근원적인 번역 현상이나 번역 행위는 동일 언어 내의 말 바꾸기도, 복수의 언어 통일체 간의 거래도, 이질적인 기호 간의 옮겨심기도 아니다. 오히려 그것들이 전제하는 통일체를 구성하면서도 벗어나는[초과하는], 통일화될 수 없는 하부-통일적이고 초-통일적인, 타생[他生, 전생과 내세]적인 작용이다. 복수의 타발[他発]적인 사건은 그 접촉의 계기·순간에 있어서 항상 이미 번역 작용을 발생시키고 있다. 혹은 오히려 번역 작용이 타발성=다발성의 교착 운동 그 자체라고 말하는 편이 좋다. 통일성과 자기성(그것 자체·그것 자신인 것)을 구성하는, 이 동시적이면서도 착시(錯時)적인 운동에 있어서는 더 이상 원본(original)과 번역의 구별이 의미를 갖지 않는다. 얼마간의 윤곽이나 심지어 단위=통일성(즉 자기성 또는 원문성)을 보유한다고 보이는 텍스트는 이미 번역의 한 효과이다. 근원적인 번역은 언어 간 번역 이전에, 또는 언어 내에서의 번역 이전에, 통상적인 번역 개념이 전제로 하는 어떤 단위=통일성 이전에 생기는 번역 작용이다.


번역의 윤리학과 정치학

데리다의 번역 개념은 그가 초기부터 탐구한 에크리튀르나 차연이나 대체보충 같은 구조를 새롭게 고쳐 쓴[갱신한] 것이다. 이 구조는 통일성·단일성(그리고 상보 관계에 있는, 단위를 전제로 한 복수성), 투명성, 동시성·순간성, 기원, 합치로서의 진리, 자연, 예지적[叡智的]인 것, 합목적성·합법성·합법칙성이라는 서양 형이상학의 기본적 개념들을 내파(자기 탈구축)시키고, 그러한 개념 체제 및 그것과 연관된 정치·사회·문화의 체제들이 어떤 억압과 배제의 폭력 구조를 갖는지를 고백시켰다. 이 탈구축 작업의 근저에는 그런 체제들 아래서 억압되고 배제되는 ‘타자’(외발적인 것)들에 대한 윤리적 반응이라는 동기가 있다는 것은 틀림없지만, 그것은 또 동시에 ‘타자’(외발적인 것)와 표리일체의 관계에 있는 ‘자기’(자발적인 것)에 대한 윤리적 반응이기도 하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데리다가 떠맡는 ‘번역자의 사명’에 있어서의 타자의 도래에 대한 요청[외침]은 “자기에 대한 차이 속에서라기보다는 오히려 자기와 함께 있는 차이 속에, 언어를 맞아들이고, 언어를 끌어 모은다.”40) 그것은 자신에게 주어진 (혹은 획득한) 기존의 ‘언어’(개념, 발상, 행동 패턴, 감수성)에 유폐되지 않고 자기를 생성 변화시킬 가능성을 준다. 언어는 그 자본에 있어서, 초기 설정에 있어서 자기를 특정한 틀에 끼우지만, 동시에 다른 한편으로 이질적인 사람들의 군집으로 구성된 착종체라는 그 본질에 있어서, 끊임없이 타자와 자기의 다른 관계의 가능성도 준다.


다른 사물에 대해 얘기하고, 타자에게 말을 거는 것을 스스로에게 가능케 해주는 이질 논리적인 열림을 불러들이는 힘이, 하나의 언어에는 항상 이미 있다는 것이다.41)


현재 소유하고 그곳에 안주하는 언어적 배치를 타자(이타성他性·타발적인 것)와의 접촉에 의해 재편[변형]하고, 현재의 언어적 배치 아래 억압되고 파묻혀 있는 잠재력을 부각시키는 것은, 경우에 따라서는, 불안이나 공포를 야기하고, 망연자실한 ‘실어증’ 속에 사람들을 둘지도 모른다. 그러나 시인이나 철학자들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기존 언어에서 일탈하는 “이질 논리적인 열림”의 ‘언어 사용’(‘타자의 단일 언어 사용’)이야말로 자기의 새로운 가능성의 발굴로 이어진다. 새로운 언어적 배치의 발명은 새로운 자기나 세계의 발명이기도 할 것이다.


이런 단일 언어 사용자는 이른바 실어증이기 때문에 (아마 실어증이기 때문에 그는 어떤 것을 썼다) 그는 절대적인 번역 속에, 준거의 극(極) 없는, 기원의 언어 없는, 출발의 언어 없는 번역 속에 내던져져 있는 것이다. 그에게서 존재하는 것은 그저, 이렇게 말하는 편이 좋다면, 도래의 다양한 언어뿐이다….42)


이런 ‘도래의 언어’, 혹은 도래로 열린 언어사용이야말로 ‘절대적인 번역’이며, 타자뿐만 아니라, 다른 세계의 가능성을, 자신의 래디컬한 교착 잠재력에 기초하여 여는 구조적 가능성이다. 이 “특이한 번역 현상”43)은 도래할 타자와 도래할 언어(심지어 도래할 ‘자기’)를 소환하고 여는 것으로서, 특이한 ‘메시아성’이라고 불린다. 데리다가 『맑스의 유령들』(1993년)에서 ‘메시아주의 없는 <메시아적인 것>’이라고 부른 것이다. 이것은 이른바 ‘형식적’·‘구조적’ 메시아주의라고도 말해야 할 것이며, 구체적인 구원의 내용이나 표현을 동반하는 메시아주의가 아니라(이것은 전통적인 종교적 혹은 정치적 메시아주의이다), 구원이나 해방의 실현 내용보다도 그 ‘약속’에만 초점이 맞춰진 ‘메시아주의’이다(그런 것이 아직 메시아주의라고 부를 수 있다고 한다면 말이지만).


그것은 불가능한 것을, 뿐만 아니라 모든 말의 가능성을 약속하고 있다고 이제 내가 주장하는 약속[우리의 문맥으로 번역하면, 이것은 타자와 다른 가능성에 충실을 맹세하는, 열린 번역이다], 이 특이한 약속은, 여기에서는 어떤 메시아적 혹은 종말론적인 내용도 털어놓지 않고, 넘겨주지도 않는다. 여기에는 구원을 구원하거나 약속하는 듯한 어떤 구원도 없다. 모든 구원론의 피안 또는 앞에 있는 이 약속 …. 이 타자의 약속 안에는, 그리고 타자의 언어 속에는 어떤 필연적으로 한정 가능한 내용도 없다는 것 …. 이는 구조적인 열림, 메시아이며, 이것 없이는 좁은 의미의 또는 문자 그대로의 메시아주의도 가능하지 않을 것이다. 아마 그게 바로 메시아주의 ― 즉, 기원적이고 고유한 내용을 결여한 약속 ― 인 한에서, 그리고 모든 메시아주의가 그 엄격하고 사막 같은 가혹함을, 모든 것을 몽땅 빼앗겨버린 그 메시아성을 스스로를 위해 요구하는 한에 있어서.44)


데리다는 통상적인 메시아주의가 보편적으로 가지고 있는 ‘약속’이라는 구조를 형식적(혹은 형상적)으로 추출하고, 그것을 모든 메시아주의의 가능성의 조건으로서의 ‘메시아’(강조는 데리다)으로서 적극적으로 끄집어낸다. 이것은 구원의 내실이나 그 실현 자체보다도, 구원의 약속의 장소(플랫폼)을 항상 열어 놓겠다고 하는, 도래의 가능성을 열어 두겠다고 하는 ‘메시아주의’이다. 초점이 되는 것은 일체의 도래에 대해 닫히지 않다고 하는, 엶에 대한 약속이며, 엶에 대한 엶이다. 이것도 또한 데리다 식의 메시아주의의 ‘탈구축’(과장의 래디컬리즘)인데, 자칫하면 자기언급성의 형식화=형상화라고도 생각될 수 있는 이 데리다에 의한 메시아주의의 ‘번역=번안’은 정말로 타자와 이타성에의 윤리적 환대로 가득 차 있다고는 하지만, 그것은 어떤 정치성을 갖는가? 절대적으로 타자에 열려 있으라는 윤리적 명법(命法)은, 이것이 구체적 상황과 관련된 경우, 정치적인 것과 충돌하고, 정치적인 것에 지장을 주는 것 아닌가. 예를 들면, 모든 이민을 받아들일 수는 없다고 하는 이민 제한 문제의 경우처럼.

 그러나 아마 데리다는 이 ‘충돌’·‘지장’ 혹은 ‘불화’야말로 새로운 정치의 가능성이라고 생각한다. 타자와 이타성[他性]에 대한 극도의 ‘윤리’성은, 이것이 정치나 정치적인 것과 양립할 수 없는 부분을 갖기 때문에, 심지어 정치와 충돌하고 이것에 균열을 생기게 하고, 경우에 따라서는 정치를 불가능하게 때문에 ‘정치성’을, 특이한 정치적 효과를 가지는 것이다. 정치는 자기성과 타자성의 관계를 근본적 국면이라고 하는 행위이다. 이런 의미에서, 타자성의 물음은 정치에 본질적으로 내재하는 급소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무조건적인 타자에의 윤리는 정치에 내재하면서, 그러나 정치의 한계=경계를 부각시키는 임계점을 들춰서 폭로한다. 이 임계점에서 정치를 논의하고 구체적인 개입을 하는 것은 정치와 정치적인 것(국가, 주권, 폴리스, 법권리, 국민·시민성, 전문 정치, 관료제 등등 ― 한마디로 말해서, 정치의 관리囲い込み, 정치의 일자화)에 한정되지 않는 다른 정치를 발명하는 것이다. 이타성[他性]으로의 열림의 약속이 약속이기 위해서는 약속의 언어행위(협의의 performativity)만으로는 불충분하며, 당연히 현실 개입과 구체적 실천이 필요하다. 윤리는 윤리적인 것에만 틀어박혀서는 윤리적이지 않다. 타자에의 열림을 약속하는 것만으로 일을 끝내버리면, 자신의 ‘아름다운 혼’에 박수를 보내는 자기만족에 지나지 않으며, 그것은 참으로 윤리적인 자세라고는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윤리는 자신이 세운 격률(약속·명법命法)에 따르는 구체적인 실천이 동반되어야 비로소 윤리가 된다. 윤리는 그것이 진정으로 있다고 한다면, 필연적으로 정치에 개입하고 정치에 휘말려 들어갈 수밖에 없다(사르트르가 말하는 앙가주망이다). 그러나 이와 동시에 그 실천이 어디까지나 윤리적이기 위해서는 정치의 논리와 제도들(이른바 ‘현실주의’)에 시야가 한정돼서도 안 된다. 거기에 필연적으로 정치와 윤리 사이의 강한 긴장 관계가 생긴다.

 이 긴장관계는 경우에 따라서는 양측의 배타적 관계로 끝날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긴장관계가 있어야, 현존의 정치와는 다른, 별개의 정치의 가능성이, 또 주권 및 치안 유지(이른바 폴리스 정치) 같은 정치적인 것에 한정되지 않는, 정치적인 것과는 이질적인 정치의 가능성이 생길 것이다. 적어도 정치와 윤리라는 이질적인 언어 사이의 번역을 끈질기게 지속하고 상호 협상과 감염 속에서 양자의 담론을 가다듬는 것이, ‘도래할’ 정치, ‘도래할’ 윤리에는 요구될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도 정치와 윤리가 어떤 구체적 내용을 동반하더라도, 근본적인 것은 이타성(타발성)으로 여는 번역 행위이다. 그것은 내용 없는 내용을 지시한다는 의미에서, 극히 취약한, 최소한의 것이지만(그래서 관념론과 이상주의로 보인다), 그것 없이는 구체적인 정치나 윤리의 알맹이도 정당화될 수 없는, 그러한 플랫폼이다.

 데리다는 번역 공간을 이 플랫폼의 하나로 제시함으로써 하나의 데몬스트레이션(demonstration)을 했다고 한다. 그의 번역론은 역사, 사회, 정치나 문화에 있어서의 좁은 의미에서의 번역의 문제일 뿐만 아니라, 초월론적 주관성과 존재론의 기초 구조의 내부에까지 번역의 문제를 확장하고(과장법에 의해서 래디컬하고), 이타성과 교착하는 잠재체의 존재방식을 부각시켰다. 이 언뜻 보기에 너무나 추상적으로, 너무나 철학적으로, 경우에 따라서는 너무나 윤리적으로 보이는 그의 ‘논증’(프랑스어의 démonstration)은, 그러나 일종의 정치력을 가진 ‘시위’(영어의 demonstration)로서 의도되고 있다. 반쯤은 말장난이면서도 진심이 담긴 사고인 이 파사주(이행·통과·통로·한 구절)는 기존 정치, 윤리, 철학, 예술 같은 선 긋기를 동요시키는 연극적인 정치 효과를 가진다. 정치 원리의 하나에 힘들의 배분(역할 분배=분담)이 있다면, 정치의 본질에는 힘의 연극이 있다. 그러므로, 데리다의 사고와 에크리튀르에 연극적 요소가 있으며, 또 연극적이라는 것을 데리다가 강하게 의식하고 있다고 해도, 그것은 정치나 사회에 있어서의 ‘현실적’이라고 불리는 것으로부터 도피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반대로 그 본질에 날카롭게 파고들어 가기 위해서이다.


나는 아마 지금 막 하나의 «demonstration»을 했다 …. 하지만 나는 더 이상 도대체 어떤 언어로 이 단어를 듣게 해주면 좋은지 모른다. 악상 기호 없는 경우의 demonstration은 하나의 결론을 강요하는 논리적인 논증이 아니라, 그것은 무엇보다도 하나의 정치적 사건, 거리에서의 하나의 의지 표명이며(아까 나는 매일 아침 내가 어떻게 길거리[街路]로 내려가는지를 얘기했다 ― 결코 도로[街道]가 아니라 길거리이다), 행진, 행위, 호소[외침], 요구이다. 그것은 심지어 하나의 무대이다. 나는 지금 막 하나의 무대를 만든 것이다. 프랑스어에서도 또한, 악상 기호가 붙은 démonstration은 무엇보다 우선 하나의 몸짓, 신체의 운동, 즉 ‘의지 표명=시위’의 행위이다. 바로 그것은 무대다. 극장 없이, 그러나 하나의 무대, 길거리의 무대다.45)


두 개의 ― 혹은 이중의 ― de(dé)monstration의 불가능한 번역의 효과는 언어의 안과 밖이 주름처럼 서로 얽힌 교착 잠재체를 형성하고, 이것이 기존의 언어적 배치와 의미 분배를 흔든다. 이것이 데리다가 생각하는 첫 번째의 정치력, 아마도 탈정치적인 정치력이다.46) 번역이 착종체는 이타성으로부터의 촉발에 의해 끊임없이 언어와 세계관의 경계선을 다시 작성하여 자리가 옮겨지며, 날마다 새로운 다수다양한 언어들을 발명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것이 데리다에게서의 ‘도래할 민주주의’이며, ‘메시아주의 없는 메시아적인 것’이리라. 그것은 심지어 ‘새로운 인터내셔널’(『맑스의 유령들』) ― ‘내셔널’한 것의 틈새 ― 일지도 모른다.


만약 네가 나의 언어를 이해할 수 있고 혹은 네가 그러기를 원한다면, 너의 언어 속에서 발명하기를. 즉, 만약 네가 그것을 이해하도록 내밀 수 있고 혹은 그러기를 원한다면 나의 언어를 너의 언어와 마찬가지로 발명하기를. 그 언어의 운율법이라는 사건이 단 한번만 그 언어에서 일어난 곳에서, 그 ‘언어의 아래=집에서(chez)’라는 것이 동거자들, 같은 시민들, 동향자들의 질서를 어지럽히는 바로 그 곳에서. 만국의 동향자들, 시인-번역자들이여, 애국주의에 반항하라! 뭔가 어떤 단어를, 내가 사랑하고 쓰기가 좋아하는 뭔가 어떤 단어를 내가 쓸 때마다, 이 단어의 시간에, 단 하나의 음절의 순간에 이 새로운 인터내셔널의 노래가 내 안에서 솟구치는 것이다. 나는 그 노래에 결코 항거하지 않는다. 그 부름을 받고 나는 길거리에 있다 ― 비록 외관상은 아침 일찍부터 조용히 책상에 앉아 일을 하고 있다고 해도.47)


이 ‘길거리’야말로 ― 노숙자나 퍼포머들이 있는 ― 이 길 위와 길가의 무대야말로, 데리다가 생각하는 다수다양체의 플랫폼, 도래할 민주주의의 번역공간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또한 사고(에크리튀르)와 현실이 교착하는 번역공간이기도 하다. “나는 길거리에 있다 ― 비록 외관상은 아침 일찍부터 조용히 책상에 앉아 일을 하고 있다고 해도.”



1) ジャック・デリダ, 『たった一つの, 私のものではない言葉――他者の単一言語使用』, 守中高明訳, 岩波書店, 2001년, 46頁. 이하 이 책에서의 인용은 이 일역본에 의거하지만, 논지의 전개상 필요하다고 여겨질 경우 적절하게 변경했다.

2) 同書, 47頁.

3) 同書, 110頁.

4) 同書, 64頁.

5) 同書, 76頁.

6) 同書, 75頁.

7) 同書, 74頁.

8) 同書, 同頁.

9) 同書, 75頁.

10) 同書, 44頁.

11) 同書, 80頁.

12) 同書, 82頁.

13) 여기서 초기 데리다에게서의 의미론의 탈구축, 심지어 가장 근원적인 이론 기반인 시간론의 탈구축을 확인하는 것이 필요하지만, 지면 사정상 생략한다.

14) 同書, 88頁.

15) 同書, 同頁.

16) 同書, 87頁.

17) 同書, 同頁.

18) 同書, 105頁.

19) 同書, 87頁.

20) 同書, 58頁.

21) 同書, 92頁.

22) 同書, 91頁.

23) 同書, 91-93頁.

24) ‘경합하여 값을 끌어올림(競り上げ, surenchère)’에 대해서는 예를 들어 『우정의 정치(友愛のポリティックス1)』(鵜飼哲・大西雅一郎・松葉祥一 訳, みすず書房, 2003년)의 73頁, ‘상고(上告, grief)’에 대해서는 이 책의 11頁을 참조.

25) 들뢰즈가 『차이와 반복』에서 지적한 두 개의 웃음의 전략인 아이러니와 유머로 말하면, 데리다의 탈구축의 전략은 어느 쪽인가 하면, 원리의 이름으로 원리의 원리를 추구하고 그 근원적 무근거성을 밝히는 아이러니의 전략으로 분류될 수 있을 것이다. 이 아이러니의 전략은 소크라테스 이후의 철학의 전통적 수법이다. 물론 아이러니와 유머의 전략이 확연이 분리되거나 대립되거나 하는 것은 아님을 이해한 위에서의 얘기이지만.

26) 前掲, 『他者の単一言語使用』, 89-90頁.

27) ヴァルター・ベンヤミン, 「翻訳者の使命」, 『ベンヤミン・コレクション2』, 浅井健二郎 編訳, 三宅晶子・久保哲司・内村博信・西村龍一 訳, ちくま学芸文庫, 1996년, 407頁.

28) 同書, 同頁.

29) [옮긴이] 일본에서 인간의 예지(叡智, 밝은 지혜, 사물의 도리에 깊이 통달한 지혜나 높은 지성; 사물의 참 실재나 진리를 파악할 수 있는 최고의 인식 능력)로써 밝힐 수 있는 세계라는 의미로, 감성계와 대립시켜 사용된다.

30) 同書, 407-408頁.

31) 前掲, 『他者の単一言語使用』, 130頁.

32) 同書, 126頁.

33) 同書, 126-127頁.

34) 同書, 124頁. 강조는 데리다.

35) 同書, 124-125頁.

36) ジャック・デリダ, 「バベルの塔」, 高橋允昭 編訳, 『他者の言語』 수록, 8頁. 강조는 데리다.

37) 同書, 12頁.

38) 同書, 12-13頁.

39) 前掲『他者の単一言語使用』, 41頁.

40) 同書, 129頁. 강조는 데리다.

41) 同書, 132頁.

42) 同書, 116頁. 강조는 데리다.

43) 同書, 124頁.

44) 同書, 130頁. 강조는 데리다.

45) 同書, 137頁.

46) 前掲, 『友愛のポリティックス1』, 170-171頁을 참조. “이 탈-정치화는 … 정치적인 것(그리고 그 중에서 민주제적인 것)의 계보학적 탈구축을 통해, 다른 정치, 다른 민주제를 사고하기, 해석하기, 실제로 작동시키기를 요구한다. … 말하기, 주제화하기, 형식화하기, 이것은 사후적으로 위에부터 아래로 내려다보며 찾아오는 중립적 내지 비정치적인 행동거지가 아니다. 이 행동거지는 어떤 과정에서 입장을 선명하게 하는 것이다”(同書, 171頁).

47) 前掲, 『他者の単一言語使用』, 108頁.


Posted by 상겔스 상겔스

번역의 윤리학

: 벤야민과 데리다 (1)

翻訳倫理学

ベンヤミンとデリダ

후지모토 카즈이사(藤本一勇)

 

* 이 글은 두 번에 걸쳐 발표된 것이다. 원문은 인터넷 검색 요망.

* 벤야민의 번역자의 사명쪽수만 가리키는 각주는 모두 본문으로 옮겼다.

* 초역일 뿐이다. 

 

 

발터 벤야민은 문예비평, 예술비평, 미디어론, 사회철학 등 광범위한 분야에 큰 족적을 남긴 사상가이지만, 또한 그는 비교적 수수한 영역인 번역론에서도 단 한편의 짧은 텍스트 게다가 자신이 번역한 보들레르 번역서에 붙인 서문이라는 위상을 지닌 텍스트 에 의해 후세에 영향을 주고 있다. 오늘날, 번역연구(translation studies)가 화려한 전개를 보여주고 있으나, ‘번역의 문제가 각광을 받고 하나의 학문영역으로서 인지되기에 이르는 데 있어서 벤야민이나 그에게 영향을 받았다고 간주되는 조지 스타이너의 바벨 후에[각주:1]의 힘이 크다. 또한 견실한 번역학의 전문적기술적 연구의 발전에 덧붙여, 자크 데리다 같은 철학자에 의한, 번역이 지닌 사상적문화적 의의의 부각(close-up)도 빼놓을 수 없다.

본고에서는 번역학의 전문기술적인 고찰이 아니라, 번역을 둘러싼 철학적 고찰의 맥락의 하나로서, 벤야민과 데리다의 번역 사상을 소묘한다. 번역이라는 일견 기술적으로 보이는 작업에서 그들은 어떤 사상적철학적 가능성을 보았는가? 그 커다란 방향성을 밝혀보자.

우선 (1)에서는 벤야민의 번역사상의 틀을 번역자의 사명속에서 탐구하기로 한다. 그런 다음 (2)에서는 데리다의 번역론을 프쉬케에 수록된 바벨의 탑타자의 단일언어사용이라는 두 개의 텍스트를 중심으로 분석하고, 벤야민과의 관계성을 논의한다.

 

전달론의 문제점

벤야민의 번역자의 사명(Die Aufgabe des Übersetzeis), 보들레르의 파리의 풍경의 스스로의 번역에 붙인 서문이다. 벤야민의 개별 연구로서는, 이 번역의 경위와 배경도 흥미롭고, 또한 번역자가 스스로의 번역의 서문에 번역론을 썼다는 자기 언급적인 메타계층구조에 대한 논의도 재미있으나, 여기서는 벤야민의 주장의 내용을 추출하는 것에 집중하자.

[* 국역본은 번역자의 과제」, 『언어 일반과 인간의 언어에 대하여 / 번역자의 과제 외』, 최성만 옮김, 길, 2008.]

 

잘 알려져 있듯이, 벤야민은 번역의 본질은 의미전달에 있지 않다고 말한다.

 

번역은 무엇인가를 전달하려 한다는 의도를, 의미를 최대한 도외시해야 하며, 이런 점에서 원작은 번역가에 있어서, 원작이 번역자와 그의 번역작품을, 전달될 수 있는 것이 부과하는 노고와 질서로부터 이미 해방하고 있는 한에서만, 본질적인 것이다.

(ヴァルター・ベンヤミン翻訳者使命, ベンヤミン・コレクション2, 浅井健二郎編訳, 三宅晶子久保哲司内村博信西村龍一訳, ちくま学芸文庫, 1996, 405. 이하 벤야민의 텍스트로부터의 인용은 이 번역을 따르지만, 논의의 맥락에 비춰 약간 수정을 가했다.)

* 국역본 : ... 번역은 무엇인가를 전달하려는 의도, 즉 의미를 아주 상당한 정도로 도외시하지 않으면 안되며, 또 그런 정도에서 원작은 단지 그것이 전달의 노력과 전달할 내용의 질서에서 번역자와 그의 작품을 이미 해방시켰다는 점에서 번역에 본질적이다(137쪽).


상식적이고 전통적인 번역관이나 통역관에서는, 번역이나 통역이 번역하는대상은 번역되는 언어(번역학의 용어로 말하면 기점 언어’)가 말하고자 하는 의미나 내용(메시지)이며, 이것을 번역하는 쪽의 언어(마찬가지로 번역학의 용어로는 목표 언어’)전사하고, ‘옮겨놓는다고 생각되고 있다. 이 경우, 번역가능성은 상이한 두 개의 언어에 걸쳐 있으며, 3자의 위치에 선 초월적인 의미(말하고자 하는 내용)에 의해 보증된다. 상이한 두 개의 개별 언어는, 3심급에 있는 의미의, 두 개의 상이한 표현이며, 이 두 개의 표현의 연락소통이나 그 적절함은 이 제3심급에 의해 최종적으로 판단(심판)되는 동시에 보증된다.

이것은 곧 알게 되겠지만, 복수의 존재를 궁극적으로 일자로 회수하고, 또 그렇게 함으로써 복수의 존재의 의미를 규정하려고 꾀하는 신학적 구도이다. 플라톤의 이데아론으로 말하면, 현실의 복수적 존재자들은, 이것들을 초월하는 이데아로부터 그 존재 기반(실재성)을 부여받는(메텍시스) 가상물이다. 또 기독교신학으로 말하면, 현세의 모든 복수적 존재자는, 유일자인 신이 창조한 피조물이다. 두 경우 모두, 이런 복수적 존재자들의 궁극적 존재 이유(의미), 이데아든 신이든, 어떤 일자가 쥐고 있다. 언어론의 역사에서 자주 원용되는 전설로 말하면, 창세기에 나오는 바벨의 탑의 완성된 형태라고나 할까.

그러나 바벨의 신화가 이야기하듯이, ‘은 완성되지 못하고, 언어는 다수어로 분산되며, 사람들은 대지로 뿔뿔이 흩어진다. 그리고 그런 산종이라는 현실이 있기 때문에, 번역이 가능해지며, 필요해진다. ‘번역가능성은 오히려 의미에 의한 통일이 불가능하다는 현실에서 생긴다고 말해야 할 것이다. 실제로 만일 제3자의 심급으로서의 의미(진리)가 언어들을 관통하고 있다면, 번역을 할 것도 없이 각각의 언어에 있어서 의미의 파악이 가능해지기 때문에, 원래 번역의 필요는 없다. 또 언어들이 각각의 입장을 넘어선 일자의 표현이라고 생각한다면, 모든 언어행위는 의미되어야 할 일자(소기, 시니피에)표현’, ‘표상’, ‘능기/시니피앙로 간주되기 때문에, 원작도 번역과 마찬가지로 일개의 복사[모사]가 되며, 궁극적으로는 번역과 동렬의 지위에 놓이고, 설령 원작이 번역 이상의 가치나 힘을 갖더라도, 그것은 잠정적인 것에 지나지 않게 된다. 이렇게 전달을 번역의 본질이나 가능성의 원천으로 보는 것은 (이런 사고방식은 좁게는 번역에 대해서뿐만 아니라 커뮤니케이션 일반에 대한 상식이기도 한데) 거꾸로 번역의 필요성과 가능성을 빼앗는 것이다.

 

원작이 전달에 전념하는 것이면 그럴수록, 번역에 있어서 이바지하는 것은 갈수록 줄어들고, 마침내 그 의미의 완전한 우위가, 어디까지나 형식으로 이루어진 번역의 지렛대가 되기는커녕, 번역은 헛된 일이 되고 만다(409).

* 국역본 : 원작의 언어가 가치와 품위를 적게 지니면 지닐수록, 그것이 전달에 가까우면 가까울수록 여기서 번역을 위해 얻을 수 있는 것은 그만큼 적으며, 결국에 그러한 [의역이 추구하는] 의미의 비중이 과도하게 커짐으로써 그것이 풍부한 형식의 번역을 위한 지렛대가 되기는커녕 번역을 좌초시킨다(141쪽).

 

전달 불가능한 것

벤야민은 번역 가능성의 근원이 오히려 전달 불가능성’, 심지어 번역 불가능성그 자체에 있다고 생각한다.

 

원작에는 번역에 있어서 전달 이상의 무엇인가가 존재한다. 더 엄밀하게 말하면, 이 본질적인 핵심은, 번역 그 자체에 있어서 더 이상 번역 불가능한 것이라고 규정할 수 있다. , 번역에서 전달에 관련된 요소를 가능한 한 추출해서, 그것을 번역했다고 하더라도, 진정한 번역자의 작업이 목표로 한 것은 건드려질 수 없는 채로 남겨진다. 그것은 원작의 시인의 말과 마찬가지로, 치환(Obertragung[번역]) 불가능한 것이다(399).

* 국역본 : ... 어떤 한 번역에서 전달을 넘어서는 무엇이 놓여 있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이 본질적인 핵은 그 번역 자체에서 다시금 번역할 수 없는 어떤 것이라고 규정할 수 있다. 다시 말해 그 번역에서 전달에 해당하는 부분을 얼마든지 뽑아내어 이를 번역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그럼에도 진정한 번역자의 작업이 지향한 어떤 것이 건드릴 수 없는 채 남는다. 그것은 원작과 작가의 말처럼 옮길 수 있는 것이 아닌데... (131쪽)

 

벤야민은 전달이라는 개념을 위에서 봤듯이, ‘의미전달로 좁게 파악하고 있으며, 더욱이 의미개념이나 사물등의 의미되어야 할 것으로서만 파악하고 있다. 이런 파악방식 자체는, 전달을 의미로부터 규정하고, 의미도 전달로부터 규정한다는 점에서 순환논법이다. 물론 이 순환논법은 전통적인 전달론, 의미론 자신의 논법이기 때문에, 벤야민의 책임이라고는 말할 수 없으나, 의미나 전달의 개념에 대해, 벤야민 자신은 전통적인 순환논법을 비판하는 데 머물러 있으며, 울타리를 탈각하는[장벽을 부숴뜨리는] 더 새로운 의미전달개념을 구축하고 있다고는 말할 수 없다. 이 점에서 벤야민의 논의 구성은 데리다의 탈구축이 안고 있는 것과 똑같은 문제를 이미 품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또한 지레 짐작해서는 안 되는 것은, 벤야민은 전달 가능한 것이 없다고는 말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번역에 있어서 전달 이상의 것이라든가 번역으로부터 전달에 관련된 요소를 가능한 한 추출해서라는 문장에는, 번역에 있어서 전달 가능한 것이 있다고 하는 전제가 언뜻 엿보인다. 그러나 벤야민에게서 전달 가능한 것은 번역의 본질이 아니다. 번역에 있어서, 전달 가능한 것은 번역의 전부가 아니라 그 일부에 불과하다. 번역에 있어서 전달 가능한 것이 번역을 성립시킨다고 생각하면 본말전도인 것이라고 벤야민은 말하고 있는 것이다. “모든 언어와 각각의 언어에 의한 형성물에는, 전달 가능한 것 외에, 전달 불가능한 것 이 존재하는 것이다”(406)["모든 언어와 그 형성물들에는 전달 가능한 것 이외에 전달 불가능한 어떤 것, ...이 남아 있다"(138쪽)].

이런 조심을 한 위에서, 벤야민이 말하는 번역 불가능한 것을 생각해보자. 그가 끄집어낸 번역의 본질로서의 번역 불가능한 것이란 도대체 무엇인가? 그것이 의미가 아니라고 한다면, 흔히 말해지듯이 (이것도 번역의 의미론적 정의와 마찬가지로 상식적이다) 원문이 지닌 다의성, 미묘한 뉘앙스, 음영, 함축, 문장의 리듬 등의, 일반적으로 행간이라고 불리는 것일까? 벤야민의 문장 그 자체는, 이것들의 어떤 해석도 배제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지만, 또한 그 어느 것도 결정할 수 없다. 또한 원문의 자구 배열을 말하는 것일까? 벤야민은 축자성(축자적 번역)’에 매달리고 있기에, 이것을 번역 불가능한 것이라고 보고 싶어지지만, 그러나 자구의 모습과 그 배열이 번역 불가능한 것임은 당연한 것이다. 그것들을 그대로 재생하려고 한다면, 그것은 원문을 그대로 제시할 수밖에 없고, 그것은 번역이 아니다.

또한 아까 번역의 본질의 논의로부터 벤야민이 배제하는 것처럼 생각된 의미’(의미로서 지향되는 것)도 번역 불가능한 것으로서 이해할 수 있다. 일반적으로 의미란 말이 말하려고 하는 지시대상, 예를 들어 물자체를 가리키는데, 물자체가 엄밀하게는 인식 불가능하다는 것은 칸트 철학 이후의 상식이며, 그러므로 당연히 번역 불가능한 것으로 간주할 수 있다. 그렇기에 사물 자체에 대한 인식 가능성을 전제로 하는 유형의 의미론적 번역관을 벤야민은 비판했던 것이다. 벤야민은 그의 번역론을 분명히 인식 비판과 결부시켰다.

 

원작과 번역의 진정한 관계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인식 비판이 모사이론의 불가능성을 증명해야 한다고 할 때 걷게 되는 사고과정과, 그 의도에 있어서 더 닮은 고찰이 이뤄져야 한다. 인식비판에 있어서, 인식은 현실적인 것의 모사인 경우에는 객관적일 수 없으며, 오히려 객관성을 주장하는 권리조차도 없다는 것이 제시된다면, 이 고찰에 있어서는, 번역은 그 궁극적 본질로서 원작과의 유사를 지향하는 한, 원래 불가능하다는 것이 증명될 수 있다(394-395).

* 국역본 : 원작과 번역 사이의 진정한 관계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인식비판이 모사론의 불가능성을 증명하기 위해 전개하는 사고 과정과 전적으로 유사한 의도를 갖는 어떤 숙고를 해볼 수 있다. 그러한 인식비판을 통해 인식에서 객관성이란 그것이 현실적인 것의 모사 속에 존재할 것 같으면 성립할 수 없고, 심지어 여기서 번역이 원작과의 유사성을 그 자신의 마지막 본질에 따라 추구할 경우 어떠한 번역도 가능하지 않을 것이라는 점이 입증될 수 있다(127쪽). 

 

벤야민의 번역론은 번역의 인식비판론이라는 측면을 갖고 있다. , 번역=표상이라는 사고방식에 대한 비판이며, 벤야민이 말하는 번역 불가능한 것, 번역 불가능성이란, 표상 불가능한 것, 표상 불가능성을 가리킨다고 생각하는 편이 정확하다. 따라서 번역 불가능한 것을 앞에 둔 번역의 완수 불가능성이 번역의 가능성이라고 하는 벤야민의 아이러니한 번역관은, 결코 모순어법이 아니다. 그것은 표상 불가능한 것이 번역을 요구하고, 번역을 가능케 한다는 의미로 취해야 할 것이다. , 표상 불가능한 것을 건드리고자 하기 때문에 번역인 것이며, 즉 번역은 변형, 변환, 전이, 치환을 통해, 표상 불가능한 것을 구멍’, ‘구덩이로서 부각시키는 작업이라고 할 수 있다.

 

번역의 임계

의미자구배열이든 행간이든, 아무튼 벤야민의 번역론의 사고대상은, 표상 불가능한 것의 일반이며, 더 정확하게 말하면, 표상 불가능한 것에 부딪치는 번역의 한계=경계이다. 한계와 경계의 의미를 아울러서 여기서는 임계라고 부르기로 하자. 번역의 임계를 묻는 벤야민의 사고는, 노하우로서의 번역술을 논하는 것이 아님은 당연한데, 더욱이 개별의 번역 방식을 논하는 번역연구도 아니다. 분명히 번역을 메타의 시점에서 사고하고 있다. 벤야민의 번역론이 실천적 번역자들이나 실제적 번역 메커니즘의 연구자들에게서 평판이 나쁜 이유는 여기에 있다. 행위의 임계를 묻는 사고는, 그 행위의 실천에 직접 도움이 되지는 않으며, 또한 메커니즘의 분석을 가능케 하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그것들을 주저하게 하며 저해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렇기에 벤야민은 번역의 사명이 아니라 번역가의 사명이라고 말하는 것이리라. 벤야민의 관심은 번역의 메커니즘이나 테크놀로지에 있는 게 아니라, 번역에 있어서의 윤리나 철학에 있는 것이다.

벤야민은 번역의 불가능성의 문제가 언어에 있어서의 폭력의 문제라는 것을 들이댄다. ‘번역 불가능한 것은 번역의 피하기 힘든 한계를 단순히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번역의 경계선상에 있어서의 폭력도 보여주는 것이다. ‘번역 불가능한 것에 대해 언급한 후, 벤야민은 이렇게 계속한다.

 

번역의 언어는 그 내실을, 넉넉한 주름을 갖춘 왕의 망토처럼 감싼다. 왜냐하면 번역의 언어는 그것 자신보다도 고차적인 언어를 의미하고, 그것에 의해 그 자신의 내용에 대해 부적당하고 폭력적이고 이질적인 것에 머물기 때문이다(399).

* 국역본 : 번역의 언어는 마치 주름들이 잡혀 있는 널따란 왕의 외투처럼 그것의 내용을 감싼다. 왜냐하면 번역의 언어는 그 언어 자체보다 더 상위의 언어를 의미하며, 그로써 번역 자신의 내용에 어울리지 않고 강압적이며 낯선 채로 머물기 때문이다(132쪽). 

 

번역이란 기점언어를 목표언어로 변형하는 작업인 이상, 거기에는 일종의 폭력이 끼어들 수밖에 없다. 그러나 변형의 폭력을 두려워해 번역의 작업을 포기해버리면, 원작의 위광(威光)은 생겨나지 않는다. 번역은 스스로가 휘두르는 변형의 폭력을 자각하고 떠맡으면서도 그 폭력에 대해 협박을 하거나 체념하는 것이 아니라, 원작을 원작인 채로 전이시킨다는 불가능한 일을 수행해야 한다. 번역이 번역인 이상, 스스로가 원문의 대체자(데리다라면 대체보충supplément‘이라고 말할 것이다)임을 은폐말소하고, 원문을 탈취하거나 개작하는 것은 허용되지 않는다. 자신이 휘두르는 변형의 폭력 속에서, 그래도 원문에 충실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 사실상 불가능한 충실성에 계속 빙의된다는 충실성 말하자면, 충실성에 대한 충실성이야말로 번역자의 사명이다. 그것은 번역의 임계로부터 도피하지 않고, 그것에 계속 선다는 것을 의미한다.

 

번역과 원작의 상호 확증

이런 번역의 행위는, 이른바 원작의 증언, 원작의 영광의 증언이라는 의미를 띤다. 벤야민에 따르면, 번역이란 그것이 존재함으로써 원작을 끊임없이 새롭게 태어나게 하고, 드높이는 것이다.

 

번역은 원작을 어떤 하나의 언어영역으로 이식한다. 그것은 적어도 원작이 이 영역으로부터 더 이상 어떤 치환에 의해서도 움직이지 못하고, 이 영역으로 오로지 새롭게, 다른 부분에 이르기까지 드높여질 수 있는 한에서 아이러니한 의미에서 더 궁극적인 언어영역인 것이다(400).

* 국역본 : 따라서 번역은 원작을 어떤 ― 아이러니하고 ― 보다 궁극적인 언어 영역으로 옮겨 심는 작업인데, 그것이 아이러니한 이유는 원작을 그 영역으로부터 더 이상 어떤 번역을 통해서도 옮길 수 없고 오로지 그 영역 속으로 항상 새로이, 그리고 다른 부분들에서도 상승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132쪽).

 

벤야민은 번역이 원작보다 사후의 존재임을 지적한다(당연한 것이지만). 그리고 번역은 원작이 그 삶 이후에도 사후의 삶을 사는 것을 가능케 한다고 말한다.

 

번역은 원작에서 유래한다. 게다가 원작의 삶이라기보다 그 <살아남음 Überleben>에서 유래한다. 왜냐하면 번역은 원작보다 나중에 오는 것이기 때문이며 번역은 그 작품의 <사후의 삶 Fortleben>의 단계를 나타내는 것이기 때문이다. 예술작품의 삶과 그 사후의 삶이라는 사고방식은, 은유로서가 아니라, 완전히 문자 그대로 이해되어야 한다. 번역에 있어서, 원작의 삶은 그 항상 새롭고 최종적인, 가장 포괄적인 발전단계에 도달한다(392-393).

* 국역본 : ... 번역은 원작에서 나온다. 그것도 원작의 삶에서라기보다 원작의 '사후의 삶'에서 나온다. 번역은 그렇지 않아도 원작보다 뒤늦게 생겨나며, ... 번역은 그것들의 사후의 삶의 단계를 지칭하게 마련이다. 완전히 비은유적인 객관성 속에서 예술작품의 삶과 사후의 삶에 대한 생각을 파악할 필요가 있다. ... 번역들은 그것들이 매개 이상의 것일 경우 한 작품이 사후의 삶에서 자신의 명성의 시대에 도달했을 때 탄생한다. 그렇기 때문에 번역들은 열악한 번역자들이 자신들의 작업에 요구하곤 하듯이 명성에 기여하기보다는 오히려 이 명성 덕택에 생겨난다. 그 번역들 속에서 원작의 삶은 언제나 새롭게 자신의 가장 뒤늦으면서 포괄적인 전개의 단계에 도달한다(124-125쪽). 

 

번역이 태어나기 위해서는, 우선 원작이 번역될 정도로 값어치가 있을 정도로 뛰어난 것이어야만 하지만, 그러나 번역이 없다면, 원작의 탁월성은 제시되지 않으며, 현전하지 않는다. 번역은 원작의 사후에 도래하며, 원작의 삶을 소생시키고, 오래토록 살게 하며, 명성이나 영광이 높아지는 것을 가능케 한다. 여기서는 원작과 번역이 공존관계, 상호확증관계에 있다.

이것이 유대-기독교(특히 유대교)에서의, 창조자인 신과 증언자로서의 인간이라는 관계의 유비라는 것은 분명하다. 세계사의 오더(order)인 신은 세계를 창조했으나, 그것만으로는 불충분하다고 느끼고, 자신의 업(작품)을 기리는 관객으로서의 증언자를 원했다. 그래서 신은 세계라는 작품 전체를 대충 만든 후, 증언자로서의 인간을 만들고, 로고스를 주고, 자신의 작품을 기리게 만든다. 인간은 신의 업의 증언자로서 존재 이유를 부여받고, 신은 증언자인 인간에 의해 그 존재나 힘을 확증받는다. 이런 신과 인간의 교류, 상호 승인의 증표가 계약의 책인 성서가 된다.

벤야민이 역설한 원작과 번역의 관계는 신(창조)와 인간(증언)의 관계에 대응한다. 사실 벤야민은 번역의 모델을 신의 말과의 관계 속에서 보고 있다(390, 401을 참조). 그러나 역점은 이동하고 있다. 유대-기독교의 정통(正統)에서 신의 창조는 절대적으로 자율적이다. 그러나 벤야민에게서는 마치 증언이 증언되어야 할 것(원작)의 가치를 그때마다 창조해가는 것 같지 않은가. “번역에 있어서, 원작의 삶은 그 항상 새롭게 최종적인, 가장 포괄적인 발전 단계에 도달한다.” 원작을 번역이, 기원을 말단이, ‘흔적으로서, ‘에크리튀르로서 입증해가는 운동은, 그것을 더욱 급진적으로 한다면, 데리다가 대체보충이라고 부른 것이 되리라. ‘유래는 이미 경유인 것이다.

벤야민의 논의를 더욱 급진적으로 하면, 원작은 번역의 시련을 거침으로써 비로소 살아남게 된다고까지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유대-기독교의 전통에서는, 당연히 시련을 받는 것은 신이 아니라 인간인데, 여기서는 번역뿐 아니라 (번역이 시련을 겪는 것은 당연하다) 원작도 번역의 시련을 받는다[겪는다]. 한편으로는 얼마나 뛰어난 번역을 산출할 수 있는가라는 의미에서, 다른 한편으로는 원작은 번역에 저항해야 한다는 의미에서. 전자는 자명한 것이다. 뛰어난 번역을 다시 산출할 수 있는가 여부는 원작의 힘에 달려 있다. 후자에 대해서는, 원작은 그것이 완전히 번역되어 버리지 못한다면, 원작으로서의 가치가 없어진다는 것이다. 원작은, 뛰어난 번역이 아무리 밀려오더라도, 반드시 그 잔여, ‘번역 불가능한 저항의 부분이 없으면 오리지널(original)할 수가 없다. 원작이 원작인 이유는 번역 불가능한 저항력을 가진 점에 있다. 원작의 풍요로운 저항력 때문에, 상이한 무수한 번역이 산출되는 것이다. 저항 없이 하나의 번역으로 모든 것이 다 드러나는[소진되는] 작품에서는 원작으로서의 힘이 약하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하나의 번역으로 소진되지 않는 잠재력을 가져야만 다수의 번역을 산출할 수 있다. 이 저항의 잠재력을 많이 갖고 있는 작품이야말로 뛰어난 원작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어떤 작품이 얼마나 저항의 잠재력을 갖추고 있는지는 번역의 시련에 부쳐지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런 의미에서는, 원작과 번역의 상호 확증 관계는 단순한 한통속이나 예정조화의 관계가 아니라 서로 엄격한 시련을 주는 관계라고 말해도 좋다. 게다가 그것은 항쟁이나 전쟁상태에 이르는 것이 아니라, 분유=분할의 공동성을 구성하는 관계이다.

 

순수언어

그러므로 번역은 원작의 모사copy가 아니다. “번역은 하나의 고유한 형식이며, 번역자의 사명도 또한 하나의 고유한 사명으로서 파악되어야 한다”(401)["번역이 하나의 고유한 형식이라면 번역자의 과제도 작가의 과제와 확연히 구별된느 고유한 과제로 파악될 수 있다"(133쪽)]. “번역은 언어활동의 자유 속에서 충실한 법칙을 따르면서 그 가장 고유한 궤도를 따라 걷는다”(408)["번역도 ... 충실성의 법칙에 따라 언어운동의 자유 속에서 그 고유한 궤도를 따라간다"(139쪽)]. 그것은 표상이면서 표상의 임계를 돌파하려고 하는 특이한 욕망이다. 결코 도달할 수 없는 번역 불가능한 것, 그것에 도달할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계속 요구하고, 자신의 한계까지, 경계선상에서 노력하는 것이다. 그것은 도달 불가능한 것의 도래를 오로지 희구하는 기도와도 같은 작업이다. 그것을 전적인 타자의 도래에 대한 기원(祈願)이라고 불러도 좋을 것이다.

벤야민에 있어서, 기도를 잘 보여주는 용어가 순수언어이다. ‘순수언어라는 개념은 많은 논자를 끌어드ㅡㄹ이면서도, 번역자의 사명에서도 특히 난해한 개념으로 유명하다. 벤야민에 의한 순수언어의 정의는 다음과 같다.

 

순수언어란 스스로는 더 이상 무엇도 지향하지 않고, 무엇도 표현하지 않고, 표현을 갖지 않은 창조적인 단어로서, 모든 언어 하에서 지향되는 것인데, 이 순수언어에 있어서 마침내, 모든 전달, 모든 의미, 모든 지향은, 이것들이 모조리 소멸하도록 정해진 하나의 층에 도달한다(407).

* 국역본 : 더 이상 아무것도 의도하지 않고 아무것도 표현하지 않으며 표현할 수 없는 말, 창조적인 말로서 모든 언어 속에 의도된 것이라 할 이 순수언어 속에 결국 모든 전달, 모든 의미, 그리고 모든 의도가 하나의 층위에서 만나며, 이 층위에서 그것들은 소멸하게끔 되어 있다(139쪽). 

 

순수언어란 그 자체가 존재 자체와 일체가 되는, 주관과 객관, 시니피앙과 시니피에, 기호와 의미, 형식과 내용이 일치하는, 그런 신적 로고스의 이미지로 이해되고 있다. 그것은 지금 거론한 이항대립을 전제하는 전달’, ‘의미’, ‘지향을 전혀 필요로 하지 않는 언어이며, 언어가 그대로 존재의 창조인 언어이다. ‘태초에 말이 있었다고 얘기될 때의 =로고스이다.

이런 순수언어는 모든 언어 아래서 지향되는 것이다. 모든 개별 언어는 순수 언어를 동경한다(402)[134쪽]. 그것은 원작이라는 것, 원문이라는 것도 아니다. 원문도 개별 언어의 하나이기 때문이다. 원문의 원어도 순수언어를 내포하면서도 덮어 감추고 있다. 그런 점에서는 원문도 번역도 구조상의 자격은 동등하다. 그러나 번역 언어는 그 대체보충적인 입장 때문에, 원작 이상으로, 모든 언어가 지향하는 순수언어에 대한 동경을 강하게 지닌다. 이런 점에서는 번역이 순수언어에 대한 지향이라는 언어 일반의 지향 구조를 잘 보여준다고 말할 수 있다. 벤야민은 원작에 있어서는, ‘창작에 있어서는, ‘시인의 행위에 있어서는, 언어가 그 내실에 대한 연관으로 직접적으로 향하는 반면, 번역에 있어서는, 언어가 지향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원문의 언어이며, 직접적인 내실이 아니라고 지적한다.

 

창작의 지향은 결코 언어 그 자체, 언어의 전체성을 향하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직접적으로, 언어에 관련된 특정한 내실의 연관으로 향한다. 하지만 번역은, 창작과는 달리 이른바 언어 그 자체의 깊은 숲 속에 있는 것이 아니다. 번역은 이 숲의 외부에 있으며, 이 숲에 대치하며, 그리고 이 숲에 발을 내딛는 것도 아니며, 그때마다 번역의 언어 자신 속의 메아리가 다른 언어로 쓰여진 작품의 반향을 울리게 할 수 있는 유일무이한 장소에 서서, 원작을 불러들인다. 번역의 지향은, 창작의 지향과는 뭔가 다른 것을, 즉 다른 언어로 쓰여진 개별 예술작품에서 출발하여 하나의 언어 전체를 지향할 뿐만 아니라, 그것 자신이 다른 지향이기도 하다. , 시인의 지향은 소박한, 시원적인, 직감적인 지향이며, 번역자의 지향은 파생적인, 궁극적인, 이념적인 지향이다. 왜냐하면 다수의 언어를 저 하나의 진정한 언어로 통합한다는 장대한 모티프가 그의 작업을 충족시키고 있기 때문이다(401-402).

* 국역본 : 문학작품의 의도는 결코 언어 자체, 그 언어의 총체성을 지향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특정한 언어적 의미 연관만 직접 지향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번역은 문학작품과는 달리 자신이 마치 언어 내부의 숲속 자체에 있는 듯이 여기는 것이 아니라, 그 숲의 외부에서 그 숲과 대면한다고 여기며 그 숲에 발을 들여놓지 않으면서 원작을 불러들이는데, 자신의 언어로 울리는 메아리가 낯선 [원작의] 언어로 쓰인 작품에 대한 반향을 줄 수 있는 유일한 장소로 불러들인다. 번역의 의돈느 문학작품의 의도와는 무언가 다른 것을 지향하는 것, 즉 낯선 [번역자의] 언어로 재현된 개개 예술작품의 언어 전체를 지향하는 것만 아니다. 번역의 의도는 그 자체가 또 다른 것이기도 하다. 즉 작가의 의도가 소박하고 일차적이며 구체적이라면 번역자의 의도는 파생된 것이고 궁극적이며 이념적이다. 왜냐하면 다수의 언어들을 하나의 진정한 언어로 통합하려는 거대한 동기가 그의 작업을 채우기 때문이다(133-134쪽). 

 

저 하나의 진정한 언어순수언어이다. 개별 언어는 그 언어구조, 문화구조, 역사상황 등에 대한 구속에 의해 차이가 있는 것이다. , 지향의 방식은 다양한 것이다. 그렇지만 언어들은 지향하는 그 방식에 있어서 서로 보완하고 조화롭게 합일되는”(402)["스스로 의도하는 방식에서 보완되고 화해되어 서로 합일되는"(134쪽)] 것을 지향하는 것이며, 그 성과가 순수언어라고 불린다.


언어들 사이의 모든 역사를 넘어선 친연성의 성질은, 각각 전체를 이루고 있는 개별 언어에 있어서, 그때마다 하나의, 더욱이 동일한 것이 지향되고 있다는 점에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동일한 것은, 개별적인 언어들로는 달성되는 것이 아니며, 언어들이 서로 보완하는 이러저러한 지향(intention)의 총체에 의해서만 도달할 수 있는 것이며, 그것이 곧 <순수언어(die reine Sprache)>인 것이다. 달리 말하면, 언어들의 모든 개별 요소가, 즉 단어, 문장, 문맥이 서로 배제하는 반면, 언어들은 그 지향 자체에 있어서 서로 보완하는 것이다(396-397).

* 국역본 : 오히려 언어들의 초역사적 근친성은 각각의 언어에서 전체 언어로서 그때그때 어떤 똑같은 것이, 그럼에도 그 언어들 가운에 어떤 개별 언어에서가 아니라 오로지 그 언어들이 서로 보충하는 의도의 총체성만이 도달할 수 있는 그러한 똑같은 것이 의도되어 있다는 점에 바탕을 둔다. 그것은 곧 순수언어이다. 즉 서로 낯선 언어들의 모든 개별적 요소들, 단어, 문장, 구문들은 서로를 배제하는 반면, 이 언어들은 그것들의 의도 자체에서는 서로 보완한다(129쪽). 

 

순수언어에 대한 지향은, 서로 다르며, 세계는 분산된 언어들을 어떤 친연성’, ‘공동성속에 둔다. “각각의 언어는 서로 무관한 것이 아니라, 아프리오리하게, 모든 역사적인 연관과는 무관하게, 언어들이 말하고(Sagen) 있는 것에 있어서 서로 친연성을 갖고 있다”(394)["언어들은 서로 낯설지 않고 선험적으로, 그리고 모든 역사적 관계를 차치하더라도 그 언어들이 말하고자 하는 것에서 서로 근친관계에 있다"(126쪽)]. 이것은 새로운 바벨의 탑의 건설을 이미지하게 만든다.

그러나 순수언어라는 지향 대상은, 벤야민이 인용하고 있는 의 사례(394)[130쪽]와는 다르며, 실재하는 것이 아니다. 순수언어는 어디까지나 언어들의 동경으로서, 꿈으로서 지향되는 것이다. 번역의 언어(목표언어)는 스스로의 언어가 번역대상의 언어(기점언어)와 완전히 일치한다고 하는, 불가능한 꿈을 꾼다. 하지만 이것은 번역에 한정되지 않고, 무릇 언어인 이상, 모든 언어(원작, 창작도 포함해)가 지닌 꿈이다. 번역은 언어일반이 가진 이 불가능한 과제(표현매체와 대상 사이의 합치, 기호와 존재의 즉융(即融)), 범례적으로 부각시키는 각별한 통로이며, ‘아케이드이다.

 

불가능한 메시아주의

벤야민의 바벨의 탑은 잃어버린 바벨의 탑이다. 그 잃어버린 것에 대한 추억에 의해, 언어들의 공동체를 만들어내는 것은 낭만주의나 유대신비주의 사상을 방불케 한다. 낭만주의와의 관련은 독일 비애극의 근원이나 그 밖의 논문을 보면 분명하며, 번역자의 사명에서도 번역과 낭만파의 관계가 언급되어 있다(400-401)[132-133쪽]. 유대신비주의와의 관련은, 숄렘과의 관계로부터 이것도 분명하다. 여기서는 이 두 개의 관련에 대해 자세하게 논하지는 않으나, 아래의 대목이 숄렘을 통한 유대신비주의 사상의 영향 아래 있다는 것은 많은 논자가 지적하고 있다.

 

하나의 그릇 조각을 조합하려면, 이 조작들은 가장 미세한 부분에 이르기까지 서로 합치해야 하는데, 그렇다고 해서 같은 형태일 필요는 없다. 마찬가지로 번역은 원작의 의미에 스스로를 닮게 하는 것이 아니며, 오히려 사랑을 갖고 세부에 이르기까지, 원작이 갖고 있는 지향하는 방식을 자신의 언어 속에 형성해야 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원작과 번역은, 마치 그 조각이 하나의 그릇의 파편으로 인정되듯이, 하나의 더 큰 언어의 파편으로 인식될 수 있게 되는 것이다(404-405).

* 국역본 : 즉 어떤 사기그릇의 파편들이 다시 합쳐져 완성된 그릇이 되기 위해서는 가장 미세한 파편 부분들이 하나하나 이어져야 하면서 그 파편들이 서로 닮을 필요는 없는 것처럼, 이와 마찬가지로 번역도 원작의 의미에 스스로를 비슷하게 만드는 대신 애정을 가지고 또 그 세부에 이르기까지 원작이 의도하는 방식에 자신의 언어로 스스로를 동화시켜 원작과 번역 양자가 마치 사기그릇의 파편이 사기그릇의 일부를 이루듯이 보다 큰 언어의 파편으로 인식되도록 하지 않으면 안 된다(136-137쪽). 

 

우리는 여기서는 유대신비주의와의 관련에 파고드는 것이 아니라, ‘바벨의 탑의 더욱 일반적인 이미지와 결부시켜두려고 할 뿐인데, 벤야민의 순수언어론에는, 잃어버린 그릇에 대한 향수가 존재하는 것은 틀림없다. 그러나 그것은 실낙원으로 대표되는 기원의 상실의 얘기가 아니다. ‘순수언어는 과거 어딘가에 실재했던 역사상의 어떤 기원의 언어가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미래, ‘종말의 언어이다. 벤야민은 역사의 메시아적 종말에 대해 말한다. 그것은 지향되는 것이, 다양한 지향하는 방식[=언어들] 모두의 조화 가운데에서, 순수언어로서 나타날 수 있게 될때이다(398)["의도된 것이 모든 의도하는 방식들의 조화에서 순수언어로서 모습을 드러낼 때까지"(130쪽)].

 

그때까지, 지향되는 것은 언어들 속에 숨어 있는 채이다. 그러나 만일 언어들이 이렇게 해서, 그 역사의 메시아적 종말에 도달할 때까지 성장한다면, 그때야말로 번역은, 작품들의 영원한 사후의 삶과 언어들의 무한한 활성화에 의해 불타오르며, 끊임없이 새롭게, 언어들의 저 성스러운 생장(生長)을 검증하는 것이다(同頁).

* 국역본 : 그처럼 오랫동안 그 의도된 것은 언어들 속에 숨겨져 있다. 그러나 언어들이 이처럼 그것들의 역사의 메시아적 종점에 이를 때까지 성장한다면, 작품들의 영원한 사후의 삶에서, 그리고 언어들의 무한한 생기에서 점화되면서 항상 새롭게 언어들의 성스러운 성장을 시험해보는 것이 바로 번역이다(130쪽). 

 

잃어버린 기원이 종말의 메시아적 때에 있어서 회복된다는 종말-목적론도 유대-기독교의 역사 이야기이다. 벤야민에게 그 향수가, 잔재가 없다고는 말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벤야민은 전통적인 종말-목적론에 머물지 않는다. 왜냐하면 벤야민은 이 역사의 메시아적 종말의 때는, 그 자체로서는, 즉 역사상의, 시간축상의 사건으로서는 결코 도래하지 않는다고 충분히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이질성[언어들의 이질성]순간적이고 최종적인 해결은, 인간에게는 거절되고 있다. 혹은 어찌됐든 그것을 직접 지향할 수는 없다”(同頁)["이러한 이질성을 이처럼 일시적이고 임시적으로 해결하는 방식과는 또 다른 해결방식, 어떤 순간적이고 궁극적인 해결방식은 인간이 다다를 수 없는 것으로 남아 있거나 어쨌든 직접적으로 추구할 수는 없다(131쪽)]. ‘순수언어가 출현하는 역사의 메시아적 종말은 결코 도래하지 않는다. 그러나 간접적으로, ‘일시적이고 잠정적해결은 가능하며, 어떤 의미에서, 항상 이미 그것은 생겨나고 있다. 그것이야말로 번역의 순간인 것이다. 더 나아가 번역의 지금 여기의 한 순간 한 순간이, 그때마다 메시아적 종말구원완전한 구원으로서는 불가능한 구원’, 그래도 무가 아닌 어떤 누력으로서의 구원(혹은 구원의 기원)의 때라고 말할 수 있을까.

 

모든 번역은 언어들의 이질성과 대결하는 하나의, 아무튼 잠정적인 방법에 지나지 않지만 그러나 번역은 모든 언어 결합의 궁극적, 최종적, 결정적인 단계로 향하는 스스로의 방향성을 부인하는 것이 아니다(同頁).

* 국역본 : 이로써 물론 모든 번역은 언어들의 이질성과 대결하는 모종의 임시적 방식일 뿐이라는 점이 인정된 셈이다. 이러한 이질성을 이처럼 일시적이고 임시적으로 해결하는 방식과는 또 다른 해결방식, 어떤 순간적이고 궁극적인 해결방식은 인간이 다다를 수 없는 것으로 남아 있거나 어쨌든 직접적으로 추구할 수는 없다(130-131쪽)

 

번역자에게는 번역에 있어서 순수언어의 씨앗을 성숙시킨다는 과제”(403)["번역 속에서 순수언어의 씨앗들이 익어가도록 한다는 과제"(135쪽)]가 부과된다. 과제=사명”(Aufgabe), 단순히 상실된 기원을 회상하는 것도, 미래의 종말의 때의 현전을 기다리는 것도 아니고, ‘지금 여기에서, 이 언어들의 번역 속에서 수행되어야 할 것이다. “순수언어를 형성된 형태에 있어서 언어운동에 되찾아주는 , 이것이 번역이 짊어진 강력한, 더욱이 유일한 힘인 것(407)["순수언어를 형상화한 모습으로 언어운동에 되찾아주는 일, 이것이야말로 번역이 지닌 엄청나면서 유일한 능력"(138-139쪽)]이지만, 그것은 산종된 개별언어의, 개별 번역의 지금 여기에서, 기다림 없이 이뤄지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번역의 지금 여기의 작업이 이뤄짐으로써, 번역은 스스로가 순수언어를 지향하여 작업을 하면서도, 그 작업이 결코 순수언어일 수 없었다는 것을 그때마다 돌이켜 생각하고, 또한 새롭게 스스로를 순수언어라고 부르게 하면서 기투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이른바 스스로의 좌절과거’(이것은 원리적인 실패이며, 단순한 실책이 아니다)를 용수철[계기]미래에 기투하는 것인데, ‘기는 그 미래도 반드시 좌절과거가 된다는 것을 충분히 알고 있는 가운데에서의 기획이다. 이 목표(goal) 없는 기투, 미래에의 열림의 운동 그 자체, 이것이 벤야민이 말하는 (불가능한) ‘역사의 메시아적 종말의 때이며, ‘순수언어의 때가 아닐까.

우리는 나중에 이런 벤야민의 메시아주의를 데리다의 메시아 없는 메시아주의’, ‘메시아주의 없는 메시아성과 결부시켜, 그 관련성을 논하기로 한다.

 

타자의 언어

아무튼 벤야민의 번역론은 언어가 지닌 근원적인 타자성으로 우리를 꼬드기는 것처럼 생각된다. “순수언어란 그런 언어의 타자성을 집약한 생각이 아닐까? ‘순수언어는 번역의 언어가 목표로 하면서도, 실현 불가능한, 타자로서의 언어였다(데리다 식으로 말하면, ‘도래할 언어[각주:2]일까?). 그러나 그뿐만이 아니다. ‘순수언어는 원작의 언어에 있어서도 타자의 언어인 것이다.

 

이질적인 언어의 내부에 속박되어 있는 그 순수언어를 스스로의 언어 속에서 구원하는 것, 작품 속에 갇힌 것을 언어 치환 속에서 해방하는 것이, 번역자의 사명에 다름없다. 이 사명을 위해 번역자는 자신의 언어의 썩은 울타리를 부숴뜨린다(407-408).

* 국역본 : 낯선 [원작의] 언어 마력에 걸려 꼼짝 못하고 있는 순수언어를 번역자 자신의 언어를 통해 해방시키고 또 작품 속에 갇혀 있는 언어를 그 작품의 재창작을 통해 해방시키는 것이 번역자의 과제이다. 이 순수언어를 위해 번역자는 자신의 언어의 낡은 장벽을 무너뜨린다(139쪽). 

 

번역은 그 변형 작업에 있어서, 원문이 원문 자신에 있어서도 보지 못했던 부분을 부각시킨다. 원작의 언어도 또한 하나의 개별 언어인 이상, 원문에 있어서도 순수언어이며, 스스로가 내포하면서도, 혹은 스스로가 체현하고 있으면서도, 원문만으로는 결코 나타낼 수 없는 언어이다. 번역은 이 원문의 원문 자체에 대한 타자성을 조사한다. 복수의 번역이 있으며, 그 수만큼 원문은 그 풍성한 양상을 드러낸다. 그것은 원문만으로는 이룰 수 없는 프리즘을 형성할 것이다. 원문과 그것을 둘러싼 다수다양한 번역이 빚어내는 다면체 그것이 저 다양한 지양하는 모든 방식의 조화 속에서, 순수언어로서 나타나는것 아닐까? 벤야민은 조화라고 말하는데, 물론 이 다면체는 결코 조화로울 뿐만 아니라, ‘긴장이나 충돌도 포함하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전체고정된 전체가 아니라 항상 그때마다, 번역의 개별성을 따라 변모하는 전체 , 분열과 과리를 토대로 하는 동적인 일체성’(데리다는 타자의 언어의 단일성이라고 말한다)을 형성한다는 것은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다수다양한 타자들로 이루어진 일종의 분유=분할체는, 개별 언어의 타자성을 존중하면서도 공동성을 구축한다. <타자의 언어> 혹은 <언어의 타자성>에 대한 지향은, 데리다의 번역론과, 어떤 관계를 맞부딪치며 맺을까?

 

이상으로 베냥민의 번역자의 사명의 독해를 통해, 번역의 문제에서 타자의 언어의 문제에 이르렀는데, (2)에서는 데리다에게서의 타자의 언어론에서 출발해, 그의 번역론으로 접근해보자.

 

 

  1. ジョージ・スタイナー, 『パベルの後に : 言葉と翻訳の諸相』, 全二巻, 亀山健吉訳, 法政大学出版局, 上巻 1999년, 下巻 2009년. [본문으로]
  2. デリダ, 『たった一つの、私のものではない言葉ーー他者の単一言語使用』, 守中高明訳, 岩波書店, 2001년. 128頁. [본문으로]
Posted by 상겔스 상겔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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