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좌담회> 10년 후의 자크 데리다 (2)


우카이 사토시(鵜飼哲)니시야마 유지(西山雄二)

고쿠분 고이치로(國分功一郎)미야자키 유스케(宮崎裕助)

 

이 글은 자크 데리다 사망 10주년을 기념하여 열린 좌담회의 기록으로일본의 사상』 2014년 12월호에 수록된 것입니다원래 각주는 없었으나 가독성을 위해 문헌 등은 각주로 옮겼습니다

 


II. 동물론이 지닌 의미

무엇을 지향[목표]하는가

미야자키 : 지금의 번역론부터 동물론으로 화제를 연결시키고 싶습니다. 우카이 씨는 앞서 언급한 L’animal que donc je suis을 번역하셨는데, 이것은 적어도 직접적으로는 언어론도 번역론도 아닙니다. 데리다의 작업 속에는 다른 페이스의 것으로, 생명이라는 언어를 넘어선 리얼한 것에 대한 데리다의 직접적인 접근법이 보이는 것이라며 주목을 받았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실제로 번역하신 우카이 씨께서 전체의 인상을 포함해 얘기해주시면 좋겠습니다.

 

우카이 : 이 책은 19977월에 스리지 라 살(Cerisy-la-salle)에서 열린 콜로퀴에서 한 강연인 자서전적 동물[自伝的動物]에 기초를 둔 것입니다. 하지만 텍스트 상의 문제가 있어서, 콜로퀴의 보고서로서 출판된 책[각주:1]에는 실제로 말한 것 외에 성서해석에 관한, 강연에서는 생략된 부분이 수록되어 있습니다. 더욱이 콜로퀴의 마지막 날, 요청(request)에 응해 즉흥적으로 한 하이데거론도 있습니다. 이번에 번역한 책은 이것들을 합쳐서 저자의 사후에 출판된 하이브드리한 책입니다.

  미야자키 씨는 언어론에서 동물론으로라고 말했습니다. 그 말 그대로라고 생각합니다만, 그것과 동시에 잊어서는 안 되는 것은, 특히 서양에서는 언어를 인간에게 고유한 것이라고 여기는 전통이 있다는 것입니다. 데리다의 언어론은 1960년대부터 이 전통의 인간중심주의적인 구조를 문제 삼았습니다. 에크리튀르(기록, écriture)의 사유도 이로부터 성장해 온 셈이기에, 데리다 자신의 이 책 속에도 동물은 항상 계속해서 자신의 물음이었다고 거듭 말하고 있습니다.

  이 책에서는 주로 5명의 철학자이 동물에 대해 한 언급이 분석되고 있습니다. 데카르트, 칸트, 하이데거, 레비나스, 라캉입니다. 번역하면서 느꼈습니다만, 이런 라인업을 어떤 원근법으로 본다면, 데리다의 사유에 가깝다고 생각되는 사람들이 선택됐다고도 말할 수 있습니다. 데카르트에 관해서는 다소 유보가 필요한데요, [데카르트가] 모든 점에서 자신의 대극에 있는 철학자라고 반드시 생각했던 것 같지는 않으며, 어떤 가까움조차 느끼고 있었던 거겠죠. 이들 사상가들은, 그런 가까움에도 불구하고, 동물에 관해서는 심하게 멀다이 책 전체를 통해 그가 보여주려 하는 것은 이 미묘한 거리입니다.

 

미야자키 : 데카르트는 코기토의 철학자로, 신체와 정신의 분할이 기초(base)에 있다고 여겨지지만, 데카르트의 신체론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게 있다는 것이죠.

 

우카이 : 정념론등이 바로 그렇죠.

 

미야자키 : 데카르트의 이원론이 얼마나 비-이원론적인 것에 의해 뒷받침되고 있는가, 혹은 비-이원론적인 것과 표리일체를 이루고 있는가가 동물론을 통해 보이게 됩니다. 단순한 동물기계론이 아닌 동물론은 오히려 데카르트를 상대로 함으로써 처음으로 나타나게 된다고 생각합니다.

 

우카이 : 물론 데카르트 연구자로부터는 비판이 있었습니다만, 데카르트를 다룬 부분은 이 책에서도 가장 힘이 들어가 있는 대목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면 이 책에서 데리다는 어떤 작업을 했는가. 지금까지 그가 했던 것과 공통점도 많습니다만, 5명의 철학자들이 동물에 관해 여기서는 아무래도 정신분석적 용어가 필요합니다만 부인(否認)’이라고 부를 수밖에 없는 몸짓을 드러내고 있는 곳을 읽어가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데카르트의 방법서설5장과 성찰두 번째에서 보이는 동물기계론을 다른 테제로 대치하고 단순히 부정하는 게 아니라, 어떤 대목에서 데카르트가 실제로 느끼고 있는 듯한 것과는 다른 것을 말해버리는가에 주의합니다. 그와 같은, 이른바 징후()적 독해의 실천입니다. 다만, 실제로 번역한다면, 예를 들어 라캉의 한 구절에 관해 데리다는 여기서는 불안이 느껴진다고 말합니다만, 저는 한 번 읽고서는 [그렇게] 느낄 수 없었습니다(웃음). 이런 상태이기에, 꽤 미묘한 독해방식을 하고 있습니다만, 번역자로서는, 그러면 인용되는 라캉의 텍스트를 불안이 느껴지도록 번역해야 할까라고 생각하게 됐습니다. 그러던 도중, 과연 이것은 확실히 부인되고 있다고 생각하게 됐습니다. 이것은 다른 저자의 텍스트를 번역할 때와는 확연히 다른 경험으로, 데리다를 번역하는 것, 혹은 데리다를 읽는 것은 모종의 전이(轉移)’의 경험이기도 하며, 요컨대 최면술과 같은 곳도 있습니다. 작업의 결과는 읽어주신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만.

  이 책의 베이스가 되고 있는 강연을 한 콜로퀴는 []전적 동물이라는 제목이 붙었다고 말했습니다만, ‘[]동물이라는 두 개의 주제는 데리다 안에서 어떻게 연결되고 있는가. 이 점에 관해, 최근 일본어 번역본이 나온 엘렌 식수(1937년 생)와 데리다의 공저 베일(원저는 1998)[각주:2]을 언급하고 싶습니다. 이것은 식수의 사부아르(Savoir)라는 작은 텍스트의 뒷부분에, 데리다가 1990년대 중반 브라질로 강연 차 여행을 했을 때 기록한 일기식의 텍스트가 붙어 있는 책으로, 맹인의 기억 : 자화상 및 그 밖의 폐허(원저 1990)[각주:3]의 속편이라고 말할 수 있는 대목도 있습니다. 제목이 된 베일’, 이것은 당시 프랑스에서는 주지하듯이 정치문제였던 것을 생각해야만 하겠죠. 베일이라고 하면 이슬람의 것만이 부각되기 쉽습니다만, 쿠란에는 머리에 쓴 베일에 관해 예언자의 친족 여성 이외에 대한 규정은 없습니다. 일신교의 성전 속에서 처음 나온 것은 사실 바울이며, 여성을 베일에 의해 격리하는 사상은 오히려 기독교에서 생겨났습니다. 본서에 수록된 누에라는 텍스트에서 데리다는 바울의 여러 가지 서한과 프로이트의 텍스트 독해에다가, 알제리에서 지낸 소년시절에 누에를 길렀던 자서전적 이야기를 포갭니다. 누에는 페니스처럼 보이지만, 자신이 내뱉은 섬유로 감싼다는 의미에서 성적인 결정 불가능성을 체현합니다. 이 기묘한 관찰이 데리다 자신의 성적인 성숙 과정과 어떻게 겹치는지를 상당히 외설스런 말투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이 이야기에서도 알아차릴 수 있지만, 다소 거칠게 말하면, 인간의 자서전동물에 대한 언급이 하나도 없다는 것이 원래 있을 수 있느냐라는 것이 여기서의 데리다의 물음입니다. 동물에게 보여졌다는 것이 말해야 할 경험으로 생겨나지 않았다면, 그것 자체가 이미 부인의 시작이겠고, 데리다가 다룬 철학자들만 해도 동물의 경험이 없었다는 것은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이론가로서는 동물의 경험을 말하지 않습니다. 데카르트는 방법서설이라는 자[]전적 텍스트를 남겼다는 의미에서는 자서전적인 이야기를 억압하지 않았던 철학자로서 데리다에게 가까운존재입니다만, 그것과 동시에 동물이 없는 세계를 가정하기도 합니다. 데리다는 방법서설에 관한 의문에 응답하는 데카르트의 1638년의 편지를 참조하고 있습니다. 거기서 데카르트는 코기토가 사유 실체인 이상, 이미 연장에 편입되어 있는 신체가 살아 있다고 하더라도, 그렇다고 해서 가 살아 있다고는 말할 수 없다, “나는 숨을 쉰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고는 말할 수 없다, “나는 숨을 쉬고 있다고 생각한다, 고로 나는 있다고는 말할 수 없다고 말합니다. 이때 앞에서 니시야마(西山) 씨가 말한 나는 있다, 고로 나는 죽는다라는, 목소리와 현상에서 후설에 입각해 제시된 테제의 함의가 동물론이라는 틀 속에서, 데카르트와의 관계에서 처음으로 분명하게 밝혀진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철학사와의 관계

고쿠분 : 앞서 우카이 씨가 데리다의 주변성(marginality)이라고 말씀 하셨는데, 확실히 그렇다고 생각했습니다. 다만 다른 한편으로, 데리다가 항상 거인을 다룬 것은 사실이라고 생각합니다. 항상 후설, 데카르트, 칸트처럼 철학자의 한복판에 있는 사람들을 다루고, 예를 들어 우시아와 그람메(Ousia et Gramme)(철학의 여백수록)라면, 통속적인 시간 개념과 그렇지 않은 시간 개념은 결국 구별할 수 없다는 형태로 철학사의 한복판에 있는 철학자들의 사상을 탈구축하고, 철학사의 정경 자체를 바꾸게 된다는 방식입니다. 반면, 제가 열심히 씨름하고 있는 들뢰즈는 원래 데카르트는 거론하지 않고 스피노자를 논하거나, 아리스토텔레스는 다루지 않고 루크레티우스에 대해 논하기도 합니다. 이로부터 들뢰즈의 방식은 주변적인가(marginal) 아닌가라고 생각해도 좋을 것입니다. 단순히 선호의 문제인지도 모르겠습니다만, 논의 대상의 선택에 관한 차이는 아주 흥미로운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미야자키 : 선호도 있을 것이고, 체질[기질] 같은 것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들뢰즈는 왕도(王道)의 철학사를 피하고 다른 철학사를 만들고자 합니다만, 데리다는 정반대로, 왕도의 철학사를 정면 돌파하려 합니다. 철학사적 텍스트로서는 무시할 수 없는 칸트, 헤겔, 후설, 하이데거 같은 사람들을 내면에서부터 뚫고 나아가려고 하는 것입니다.

 

고쿠분 : 이것에 관해 굳이 우직한 의문을 제시한다면, 형이상학을 탈구축한 뒤에 철학은 어떻게 될까요? 예를 들어 하이데거는 철학은 이제 타락했다, 그래서 예전에 있던 지식을 사랑하는 것(필레인 토 소폰[φιλείν τό σοφόν])”이 중요하다고 말하고 소크라테스 이전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러면 데리다는 탈구축 이후의 철학의 광경을 어떻게 마음속에 그리고 있었을까. 들뢰즈는 나는 형이상학자입니다라고 분명히 말합니다. 철학이란 결국 형이상학이라고 들뢰즈는 생각합니다. 그런데 데리다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런 의미에서는 하이데거의 정통 후계자라고 말할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만, 형이상학과 대결해야만 한다고 생각하고, 그 대결의 형태가 탈구축이었습니다. 그렇다면 탈구축 후에 철학은 어떻게 되는 것이라고 데리다는 생각하고 있었을까요? 계속 탈구축하는가, 아니면 다른 철학이 나타나는가? 이것은 데리다를 아는 사람이 품고 있는 소박한 의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니시야마 : 철학의 거인[거장]을 거론한 것은 교직(敎職)[을 맡고 있었기] 때문이라는 사정도 있겠죠. 특히 1960년대는 아그레가시옹(교수자격시험) 대책의 복습교사였기에, 수험자용의 기본적인 철학사 수업을 했습니다. 게다가 데리다는 전통주의자라고 공언하고 있어서, 과도한 도그마와 보수(保守)에 이르지 않는 한, 구축된 것을 존중했습니다. 게다가 형이상학에 대해 말하면, 하이데거와 달리 데리다는 형이상학을 극복하려고 한 것은 아닙니다. 형이상학은 목적() 없는 마감(clôture sans fin)”이며, 목적론으로 초극하거나 파괴할 수 없습니다. 융통성 있고 거침없이 모습을 바꾸면서, 형이상학의 마감은 항상 어딘가에서 작동하게 된다는 것이 데리다의 기본적 이해입니다. 항상 탈구축의 도상에 있는 형이상학과 더불어, 철학은 어떻게 되느냐라는 견해입니다.

 

미야자키 : 결정적인 탈구축이라는 것은 없다. 이미지로서는, 밀려왔다가 다시 밀려가는 물가와도 같은 .

 

우카이 : “To be continued”라는 느낌이군요.

 

미야자키 : 탈구축하면 도그마가 돌아오고, 그것을 다시 밀어낸다는 과정이 항상 작동하고 있습니다. 그 결과, 어느새 해안선은 침식되고, 지형이 바뀌어 버린다고도 말할 수 있을까요.

 

고쿠분 : 그런 것이겠네요. 그런 이미지는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고양이와 부끄러움[수치]’

미야자키 : 동물론에 관해 우카이 씨에게 묻고 싶은 것은, ‘자서전의 문제와도 관련되어 있다고 생각하는데요, 이 책에서 데리다로서는 드물게 논한 대목에 관해서입니다. 패싱룸[passing room]에서 기르고 있는 고양이에게 알몸을 보이게 됐을 때, 이루 말할 수 없는 부끄러움을 느꼈다는 에피소드가 얘기되고 있고, 더욱이 그것이 중심적인 문제 같은 형태로 파악되고[자리잡고] 있습니다. 이것은 텍스트를 기반(base)으로 접근하는 데리다의 스타일을 고려하면 특이합니다. 우카이 씨에게는 <알몸>의 스승[각주:4]이라는 글이 있습니다만, 이 부끄러움에는 단순히 알몸을 보여줬기 때문이라거나, 기르던 고양이에게 보여졌기 때문이라고는 끝나지 않는 무엇인가가 있습니다. “인간으로서 부끄러운 일이 아니라, “인간이라는 것 자체의 부끄러움을 노출시키는 경험이라고도 말해도 좋을까요. 그 체험이 동물론의 중심에 위치하고 있고, 다른 저작과의 결정적인 차이를 이루고 있는 듯이 느껴지는 겁니다.

 

우카이 : 이 책에는 고양이가 몇 차례 나옵니다. 처음은 아마 들뢰즈와의 관계를 암암리에 가정하고, 루이스 캐럴의 이상한 나라의 엘리스거울나라의 엘리스가 다뤄집니다. 집에서 고양에게 알몸을 보여줬을 때의 부끄러움에 관해서도 거듭 논합니다만, 그때마다 사태가 점점 악화됩니다. 거기에 인간의 여성이 있었다면, 혹은 거기에 거울이 있었다면, 부끄러움은 더 커진다 등등, 마치 최악의 부끄러움을 상상하고 기뻐하는 듯합니다. 철학을 논하고 있는가 생각하면 악화되어가는 부끄러움의 얘기로 돌아가고 또 다시 철학을 논한다고 하는 기묘한 순환이 보입니다. 확실히 자신을 알몸으로 할 각오가 없는 자서전등은 의미가 없기에, 이 주제들은 데리다의 루소에 대한 애착과도 깊이 연결되어 있으며, 예전의 할례고백[각주:5]에서는 자신의 할례에 관해 장황하게 말한 다음, “이렇게 자신의 페니스 얘기를 구체적으로 한 철학자가 있었을까등이라고 말하기도 했던 사람입니다. 그런 퀴니코스파적 측면도 그에게는 있으며, 철학의 실천으로서 사람들 앞에서 알몸이 되어 보여주는 것도, 어쩌면 어떤 숨겨진 전통을 떠맡겠다고 한 것인지도 모릅니다.

   이것은 여담입니다만, 데리다의 집에는 1980년대에 고양이 두 마리가 있었습니다. 그 중 한 마리에는 루크레티우스”(Lucirèce)라는 이름이 있었습니다만, 다른 한 마리에게는 이름이 없었습니다. 다만 아들인 피에르는 오이디푸스왕이라고 불렀다고 합니다. 그의 집에서 왜 고양이는 그리스-로마계의 이름을 부여받았는지, 신기한 느낌이 듭니다. 데리다 집의 정원에 있는 고양이의 무덤이 훗날 영화에 나옵니다만,[각주:6] 그 두 마리가 죽은 후, 아마 새로운 고양이는 없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이 텍스트에서 묘사되고 있는 사건이 강연 직전에 일어났다는 것은 아니겠죠.

   “부끄러움의 문제를 생각할 경우, 사르트르의 존재와 무(1943)에 있는 부끄러움의 현상학적 서술을 고려해야 하며, 데리다도 유대인성에 관한 강연 아브라함, 또 다른 사람의[각주:7]에서 이것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사르트르뿐 아니라 라캉, 알튀세르, 푸코, 레비나스 등, 프랑스에는 시선[응시]”의 사유의 전통이라고도 해야 할 것이 있고, [데리다] 자신도 그 전통 속에 있지만, 그 중 가장 이단적이지 않을까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동물론에서 중요한 점은 창세기에서 아담이 동물을 명명하기 직전이라는 시간이 설정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시간 이전의 순간을 어떻게 생각하느냐라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때 이 무대를 설정한 신 자신은 그늘에 숨어서 그 과정을 예의주시 하고 있습니다. 이 신의 행동거지의 괴이함에 데리다는 관심을 기울입니다. 데리다 자신은 언급하지 않습니다만, 쿠란에서는 이 장면이 고쳐 써져 있습니다. 아담이 동물에 이름을 붙였다고는 하지 않고, 그 대신 아담의 귀에다[귀 밑에서] 신이 동물의 이름을 속삭이고 있습니다(쿠란2 암소). 창세기를 읽는 한에서는, 이름을 붙이는 능력을 인간이 신에게서 부여받고, 그 능력이 여기서 처음으로 발휘됐다고 하는 것인데, 이것 자체, 신의 전능성에 대한 침범이 아닌가라는 의혹이, 순수한 일신교이고자 했던 이슬람의 시원적인 종교적 직관 속에 있는 것입니다. 데리다는 똑같은 대목에 천착하면서, 인간이 이름을 붙일 능력을 발휘하려고 하면 그 순간 세계는 끝나버릴지도 모릅니다. 혹은 처음으로 의미가 개시되고 원래 역사가 시작되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그런 역사 이전의 묵시록적 사건의 가능성이, 고양이에게 알몸을 보여주는 장면과 겹쳐져 있다고 생각합니다.

   스리지 라 살의 강연에서는, 데리다가 제자들 앞에서 상상적인 스트립을 하고 있는 꼴이었기 때문에, 모두 올게 왔구나라고 느꼈습니다. 그것은 일면 최후의 만찬과 비슷합니다만, 제자들은 형제가 아니라 동물의 위치에 놓여지고, 스승인 사람이 이것이 내 신체이다라고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제가 예전에 어떤 논문(어떤 정동의 미래 : <부끄러움>의 역사성에 관해)[각주:8]에서, 여기에는 죄의 문화부끄러움의 문화같은 기존의 이분법이 더 이상 기능하지 않게 된 제2차 대전 이후의 사상이 표현되고 있지 않은가라는 가설을 세워 봤습니다. 들뢰즈도 말년에 인간이라는 것의 부끄러움이라는 모티프를 프리모 레비로부터 인용해서 중요한 고찰을 남겼습니다만,[각주:9] 하나의 시대의 사상으로서, 데리다도 같은 작업을 다른 스타일로 시도한 것일지도 모릅니다. 현재 일본에서는 인종주의(racism)가 거세지고 있고 대항(counter) 행동의 참가자도 늘고 있습니다만, 그 속에서 인간으로서 부끄럽다고 적힌 플랜카드를 본 적이 있습니다. 이는 매우 입에 담기 쉬운 방식입니다. 그렇게 말함으로써 인간은 자기 자신의 것을 덮어두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인간이라는 것의 부끄러움에 관해서는 자기 자신을 덮어둘 수 없습니다. 그런 의미에서도, 부끄러움, 책임=응답 가능성, 그리고 동물의 물음 사이에는 어떤 깊은 연결이 상정되고 있습니다.

 

미야자키 : ‘시선[응시]’에 관해서는 미국의 사상가인 대너 해러웨이가 일본어로도 번역된 개와 사람이 만날 때 : 이종협동의 정치(원저 2008)[각주:10]라는 책에서, 고양이에게 보여진 데리다의 에피소드를 다루고 있습니다. 다만 그녀는 상당히 비판적으로 독해하며, 데리다는 고양이에게 보여져도 자신의 느꼈던 부끄러움에 관해 물음을 제기했지만, 왜 고양이의 편에 서서 시선[응시]을 생각하지 않느냐고 말합니다. 동물학의 지식도 도입한 다음에 고양이의 시선에 관해 적극적으로 생각해야 한다는 셈인데, 데리다는 어디까지나 인간의 편에 서서 탈구축하려고 했습니다.

 

우카이 : 데리다는 타자론의 하나의 전개로서 했기 때문이죠.

 

미야자키 : 말씀하신 대로입니다. 그래서 거꾸로 데리다의 입장에서 보면, 해러웨이의 접근법은 너무 섣부르다는 것입니다. 인간과 동물의 대칭(symmetry)을 너무 간단하게 뛰어넘어버리는 것이니까요. 데리다는 철학의 역사 속에서, 혹은 창세기로 거슬러 올라가는 기억 속에서, 인간과 동물의 경계선이 어떻게 흔들려 왔는가를 항상 묻습니다.

 

우카이 : 그런 것이죠. 그런 의미에서 알몸[벌거벗음]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이 이 책에는 관철되고 있습니다.

 

미야자키 : 알몸(벌거벗음)은 바로 신체적 경계선이죠. 다양한 인간학적 가치가 기입되고 변용되는 경계면을 이루고 있습니다. 그래서 단순히 동물학적인 것을 들여오면 되는 게 아닙니다. 그런데 해러웨이는 인간과 함께 살고 있는 동물들이 역사적으로 존재했다는 사실로부터 배울 것이 많다고 말하며, 철학적 담론을 중지시켜버리는 것입니다. 그 대신 데리다의 작업을 동물해방론이나 동물권리론 등의 접근법과 접속시키기 힘든 점이 있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우카이 : 이것과 관련해 지적하고 싶은 것은, 이 책은 영어권에서 많이 읽히고 있다는 것입니다. 홀로코스트와 포스트모던 : 역사, 문학, 철학은 어떻게 응답했는가[각주:11]의 저자 로버트 이글스턴 씨가 이 책이 영국에서 ‘huge impact’였다고 듣고서는 놀란 적이 있습니다. 프랑스어권에서는 그런 느낌은 받지 않습니다. 같은 시기에 철학적 동물론을 했던 사람으로서는 예를 들어 티에리 곤티에 등이 있고, 동물론을 축으로 몽테뉴와 데카르트 사이에서 사상사적으로 무엇이 일어났는가를 자세하게 검토한 박사논문[각주:12]을 출판합니다. 하지만 그런 곤티에도 최근의 저작 동물의 질문 : 현대의 논쟁의 기원[각주:13]에서는 인간의 고유성이나 인간중심주의의 탈구축이라는 관점에서 동물을 []하는 것에는 소극적인 자세를 보이고, 새로운 인간주의의 정초로 향하고자 하는 것 같습니다. 영어권에서는 동물에 대한 공리주의적 관심이 분석철학적인 것과 대항하면서 존재해왔고, 거기에서 데리다의 작업을 수용하는 지평이 준비됐는지도 모릅니다. 그런 의미에서는 프랑스어권에서 방어적인 반응을 보인 사람이 많은 것은 역력합니다.

   데리다도 동물학적 식견은 참조하고 있습니다만, 그것은 동물 일반을 기술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개별 동물, 개체로서의 동물과의 관련을 탐색하기 위해서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자기 혼자서 할 수 있는 작업이 아니라, 자신의 작업은 그를 위한 작업의 공간을 여는 것이라고 분명히 밝히고 있습니다. 그때 그는, 예를 들어 언어처럼 인간에게 고유하고 알려진 것에 관해, 그것은 동물에게도 있다는 형태로 동물에게 부여하는 것이 아니라, 그 언어라는 것을 인간이 정말로 갖고 있다고 말할 수 있느냐고 묻는 방향으로 논의를 진척시킵니다. 그것은 이 책에서도 인용하고 있는, 철학적 동물론의 영역에서 매우 좋은 작업을 해 왔던 플로랑스 뷔르가의 현상학적 동물론과도 다른 것입니다. 그녀는 최근 또 하나의 실존[각주:14]이라는 책을 썼습니다만, 그 속에서 메를로 퐁티의 행동의 구조(1942)[각주:15]에서 동물의 실존을 언급하고 있는 대목을 데리다의 작업을 토대로 재독해하는 작업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문제설정은 자칫하면 동물들 중에서 어디까지 실존이 인정되느냐라는 얘기가 되기 쉽습니다. 그리고 이 책의 서문에서 문헌학자인 하인츠 비스만(Heinz Wismann, 1935-)이 시사하듯이, 예를 들어 온혈동물냉혈동물사이에 경계선이 그어집니다. 이런 작업으로부터도 얻는 바는 적지 않겠지만, 데리다 자신은 인간에게 고유한 것자체를 의문에 부치는 방향으로 논의를 열고 있습니다.

 

자연과학과의 관계

고쿠분 : 데리다의 동물론이 경계선을 묻고 있다는 것은 그것은 그대로 좋으며, 저도 별다른 반론도 없습니다만, 적어도 저는 그 논의에 그다지 큰 자극을 받지 않았다고 말해두는 것이 정직한 감상입니다. 뭐든지 들뢰즈와 비교하는 것은 좋지 않을지 모르지만, 고등학교 교사였던 들뢰즈가 쓴 교과서 본능과 제도(원서 1953)를 보면, 연어 연구나 거미 연구, 심지어 호르몬에 관한 연구 등, 이런 논의가 많이 나오며, 아주 구체적으로 동물과 본능의 문제를 묻고 있습니다. 교과서이기 때문에, 질문을 제기하고 학생들더러 생각하게 만드는 내용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만, 그런 구체적 연구를 통해, 예를 들어 본능은 개체의 이익이 될 것인가, 아니면 종의 이익이 될 것인가라는 철학적 질문을 고찰할 수 있게 됩니다. 그 결과, 인간과 동물은 무엇이 같고 무엇이 다른지를 생각하게 될 겁니다. 저는 들뢰즈다운 방식이 재미있다고 느껴집니다. 데리다가 어디까지 인간의 입장에서 인간과 동물의 차이점을 생각하는 것은, 탈구축이기 때문에 탈구축하는 입장에 서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 될지도 모릅니다만.

 

미야자키 : 일단 거기[이 논의]로 들어가보죠.

 

고쿠분 : 반면, 들뢰즈는 동물의 곁으로 바싹 다가섭니다. 물론 그런 것을 정말로 할 수 있느냐고 물어야 할지도 모르며, 인간이 인간이라는 것을 다시 의문에 부쳐야 한다는 것도 알고 있지만, “인간에게 고유한 것을 의문에 부친다는 논의 방식이 끝없이 계속 이어진다면, 예를 들어 본능이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에는 언제 이르게 되는가라는 소박한 의문이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아무래도 동물과 인간에 관한 탈구축적인 방식에는 한계를 느낍니다. 탈구축적인 방식이 향하고 있는 소재와 그렇지 않은 소재가 있지 않을까요? 예를 들어, 정치에 관해서는 그 유효성을 강하게 느낍니다. 저는 정치상황에 대해 발언을 요구받았을 때, 기본적으로 탈구축적으로 얘기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동물이 대상이 될 경우, 마찬가지로 할 수 있는가 하면, 아무래도 그렇게는 생각되지 않습니다. 철학의 연구자는 동물을 연구하는 사람들과 원래 연결이 거의 없잖아요. 연어를 연구하고 있는 사람과 일상적으로 대화를 나누지는 않았을 테니까요. 그러니까 그런 사람한테 가서 얘기를 들으면, 알 수 있는 게 많습니다. 하지만, 데리다는 자신의 경험에 천착하고, 자신의 집에서 키우는 고양이에게 보여지는 경험에서부터 얘기를 시작한 것입니다. 그것은 그래도 상관없으나, 들뢰즈였다면 연어 연구자에게서 얘기를 듣기도 하고, 거미 연구서를 읽기도 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미야자키 : 들뢰즈와의 대비에 관해서는 데리다의 강의록 짐승과 주권자에서는 들뢰즈가 정말로 동물을 묻고 있는지, 그 어조는 인간주의의 틀 안에 머물러 있는 것 아니냐는 비판이 이뤄지고 있네요.

 

니시야마 : 들뢰즈는 어리석음(bêtise)은 동물성이 아니다. 동물을 어리석은존재로 만들지 않는 특유한 형식들에 의해, 동물은 지켜지고 있다고 표현하고, 어리석음을 진리나 오류의 판단과는 다른 초월론적 물음으로 간주합니다. 데리다는 이런 어리석음의 규정에서 들뢰즈의 인간주의를 지적하고, 오히려 어리석음의 주제에 인간과 동물의 식별 불가능한 경계를 찾아내려고 하는 것입니다.

 

고쿠분 : 확실히 그런 의문은 있지요. 그것은 그래도 물어보면 좋겠지만, 앞의 탈구축적인 방식으로 향하는 소재와 향하지 않는 소재가 있는 게 아니냐는 논점에 관해 한 가지 말하면, 푸코가 구조주의에 관해 재미있는 것을 말하고 있고, 구조주의라는 것은 수법이라고 생각하고 있지만, 사실은 구조주의는 그것이 무엇을 대상으로 하는가, 그 대상에 의해 정의된다고 말하는 것예요. , 구조주의적으로 파악하는 대상과 그렇지 않은 대상이 있다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탈구축적으로 다룬 것이 유효한 대상과 그렇지 않은 대상이 있는 게 아닌가라고 생각해요.

 

니시야마 : 데리다의 항상 변함없는 질문은 인간에게 고유한 것이란 무엇인가, 도대체 고유한 것이란 무엇인가입니다. 그라마톨로지에 관해는 바로 자연과 문화의 경첩[이음매]을 묻고 있으며, 인간의 종언(철학의 여백수록)에서는 인간의 극한(limit)을 복수형으로 열고자 합니다. 인간에게 고유한 것의 한계를 다양한 단절이나 이질적인 선에 의해 열고, ‘이성이나 로고스’, ‘기술’, ‘상실[]등과 같은 하나의 대립점을 자르고, 형이상학적이고 고전적인 인간주의(humanism)로 회귀하지 않는다는 것은 초기부터의 설정이죠.

   다른 한편, 동물의 물음에 관해서는, 자연과학과의 관계는 항상 궁금하네요. 아무리 철학자의 텍스트를 읽더라도, 생명과학의 전문가에게 물으면 인식이 완전히 달라지는 게 아니냐는 의문이 남습니다. 실제로, 같은 대학의 생물학 동료에게 인간과 동물은 뭐가 다른가?”라고 물어보면, “차이는 없어라고 단도직입적으로 말합니다. 동물도 웃으며, 언어도 기술도 갖고 있으며, 상실[, 애도]의 작업도 한다고 말이죠. 물론 실증과학으로서의 생물학과는 상이한 수준에서 텍스트의 탈구축이 있고, 그것은 그것으로 유효합니다만.

 

우카이 : 실제로 철학과 동물의 관계는 아리스토텔레스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것으로, 들뢰즈는 아리스토텔레스와 마찬가지로 동물 자체에 관여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질문을 했다는 것이죠.

 

고쿠분 : 그렇습니다.

 

우카이 : 아리스토텔레스의 동물지(動物誌)가 철학적 전통 하나의 출발점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특이한 것은 아닐지도 모릅니다. 아리스토텔레스도, 물론 모두 자신이 조사한 것이 아니며, 어부와 사냥꾼, 목축인, 양봉가 등의 얘기를 많이 들었을 겁니다. 오늘날, 다른 한편에서는 동물에 관한 인간의 지식은 어디서 종합되는가라는 문제가 있습니다. 문화의 동물적 기원[각주:16]의 저자인 도미니크 레스텔은 마사이족 사람들과 함께 사자 사냥을 하러 간 적이 있다고 합니다. 마사이족 사람들이 사자에 관해 알고 있는 것을 알려면 그렇게 할 수밖에 없습니다. 한편, 동물행동학자는 자기네의 지식이 동물에 관한 모든 지식 중에서 특권적이라고 주장하기 때문에, 자칫하면 아주 방어적으로 되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그들의 동물과의 관계도 부분적인 것일 수밖에 없으며, 거기서 철학적 개입의 필요성이 있다고 레스텔은 말하는 것입니다. 제가 만났을 때, 그는 데리다의 동물론을 몰랐기에 소개를 해줬습니다만, 고양이의 에피소드를 알고 가장 먼저 했던 것은 설문조사였습니다. “동물 앞에서 부끄러움을 느낀 적이 있습니까?”라고 말입니다. 그렇게 실증연구와 함께 레스텔은 동물을 다룬 소수자적인 철학자를 발굴하고 있습니다. 채식주의의 문제도, 서양철학 속에는 확실히 있습니다. 근대의 철학에서는 주변화되어 버린 주제입니다만.

 

고쿠분 : 앙케트 따위를 바보 취급해서는 안 된다는 거네요.

 

우카이 : 정말로.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고쿠분 : 데리다의 논의가 역시 탄탄하다고 생각되는 것은 다른 분야에 갖고 가도 제대로 통용된다는 것이죠. 제 자신의 예를 들어서 죄송합니다만, 도래할 민주주의 : 코다이라시 도로(都道) 328호선과 근대정치철학의 문제들[각주:17]에서는 도로문제라는 아주 구체적인 토픽을 다뤘습니다만, 그 속에 데리다의 민주주의론을 넣어도 잘 될 것입니다. 데리다는 인문과학의 서클 속에서 밖에는 통용되지 않는 것은 말하지 않는다는 것은 강조하고 싶은 점이죠.

 

미야자키 : 독자의 문제도 있죠.

 

고쿠분 : 그렇습니다. 독자가 가두고자 합니다. 따라서 저는 데리다에 대해 사람들이 품고 있는 소박한 의문을 소중하게 여기고 싶습니다. 그것에 노출되지 않으면, 연구자 서클에서 밖에는 통용되지 않는 얘기로 끝나버립니다.

 

니시야마 : 응용 가능성과 관련해 말하면, 아까부터 지적되고 있듯이, 미국을 시작으로 하는 앵글로색슨계와 데리다 사상의 접속이라는 의미에서는 동물의 테마는 침투하기 쉽습니다. 이유는 4가지로, 벤담부터 피터 싱거에 이르는 동물론의 공리주의적 해석의 전통이 있다는 것, 인간중심주의의 탈구축이 반-휴머니즘과 친화력이 좋다는 것, 인간을 남자로서 표현하는 것의 탈구축이 페미니즘과 친근성을 갖는다는 것, 그리고 동물의 권리 문제와 적합하다는 것입니다. 다만, 데리다는 도래할 세계를 위하여에서도 말하듯이, 인간과 비인간, 남성과 여성, 권리를 가진 자와 갖지 못한 자 등의 가치 전환을 그냥 주장하는 것이 아닙니다. 탈구축의 전략은 항상 이중으로, 더욱이 대립하는 이항의 결정 불가능한 문턱까지 따지려고 하는 것이기 때문에, 단순한 권리 확장과는 다른 방식과 발상으로 영향력을 발휘합니다.

 

미야자키 : 대형 유인원에게 권리를 부여하는 것부터 시작하자는 피터 싱거와 같은 논의[각주:18]는 잠정적일 수밖에 없으며, 반대로 종차별을 들여올 위험이 있습니다. 원래 권리는 인간의 편의 사정에 의해 산출된 개념이며, 오히려 그런 한계로부터 재고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계속>

  1. L’animal autobiographique : autour de Jacques Derrida, sous la direction de Mariel-Louise Mallet, Galilée, 1999. [본문으로]
  2. Hélène Cixous et Jacques Derrida, Voiles, Galilée, 1998. [본문으로]
  3. Jacques Derrida, Mémoires d’aveugle : L’autoportrait et autres ruines, Réunion des musées nationaux, 1990. [본문으로]
  4. 鵜飼哲, 「<裸>の師」, 『思想』 2005년 1월호 ; 『자키 데리다의 무덤(ジャッキー ・デリダの墓)』, みすず書房, 2014년 수록. [본문으로]
  5. «Circonfession», in Geoffrey Bennington et Jacques Derrida, Jacques Derrida, Seuil, 1991. [본문으로]
  6. 사파 파티(Safaa Fathy) 감독의 『데리다, 다른 곳에서(D’ailleurs, Derrida)』, 2000년. ‘객지에서’로 옮겨질 수도 있다. [본문으로]
  7. «Abraham, l’autre», in Judéités : question pour Jacques Derrida, sous la direction de Joseph Cohen et Raphael Zagury-Orly, Galilée, 2003. [본문으로]
  8. 「ある情動の未来──〈恥〉の歴史性をめぐって」, 『思想別冊トレイシーズ』 제1호, 2000년 1월 ; 『主権のかなたで』, 岩波書版, 2008년 수록. [본문으로]
  9. [옮긴이] 『철학이란 무엇인가?』를 참조. 들뢰즈와 가타리는 이 책에서 프리모 레비를 인용하면서 “인간이라는 것의 부끄러움”은 레비가 체험했던 아우슈비츠의 극한상황뿐 아니라, 우리의 일상적 장면에서도 느껴진다고 말한다. “우리는 자신이 자신의 시대의 외부에 있다고는 느끼지 않으며, 외부에 있기는커녕 반대로, 우리는 자신의 시대와 부끄러운 타협을 계속하고 있다. 이런 부끄러움의 감정이, 철학의 가장 강력한 동기 중 하나이다. 우리는 희생자에게 책임이 있는 게 아니라, 희생자 앞에서(devant) 책임이 있는 것이다.” 우카이 사토시는 『주권의 저편에서(主権のかなたで)』에서, “희생자 앞에서 책임이 있다”에서 “앞에서”를 이해하는 것은 아주 어렵다고 지적한다. 그래서 우카이는 ‘앞에서’에서다가 ‘전방에서’를 덧붙이고, “희생자 앞에서, 전방에서 책임이 있다”고 번역한다. 그는 “전방에서”를 덧붙임으로써, 여기에 “아직 없다/아니다”가 울려 퍼지고 있음을 나타내려고 하는 것 같다. 한편, 부끄러움이나 수치심의 감정(sentiment)이 “철학의 가장 강력한 동기 중 하나”라는 말에서, 우리는 카프카의 소설, 특히 『소송』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실제로 이들은 계속해서 이렇게 말한다. “부끄러워야 할 비열함을 피하기 위해서는 동물들을 행하는(으르렁거리다, [구멍을] 파다, 방긋거리다, 경련을 일으키다) 것 외에는 다른 수단이 없다.” 카프카의 단편소설에서 나타나는 다양한 동물들에 눈을 돌리라고 역설했던 것은 다름 아닌 이들의 공저인 『카프카 : 소수자 문학을 위하여』가 아니었던가. 부끄러움이 나 자신의 존재방식을 넘어서고, 인간이라는 것 자체로까지 향하게 될 때, 우리는 “동물을 행하다(faire l’animal)”일 뿐이라는 말은 강렬하다. [본문으로]
  10. Donna J. Haraway, When Species Meet, University of Minnesota Press, 2008. [『犬と人が出会うとき──異種協働のポリティクス』] [본문으로]
  11. Robert Eaglestone, The Holocaust and the Postmodern, OUP Oxford, 2003. [『ホロコーストとポストモダン──歴史・文学・哲学はどう応答したか』, 田尻芳樹・太田晋 訳, みすず書房, 2013년]. [본문으로]
  12. Thierry Gontier, De l’homme à l’animal : Montaigne et Descartes, ou, les paradoxes de la philosophie moderne sur la nature des animaux, Vrin, 1998. [본문으로]
  13. Thierry Gontier, La question des l’animal : les origines du débat moderne, Hermann, 2011. [본문으로]
  14. Florence Burgat, Une autre existence : la condition animale, Albin Michel, 2012. [본문으로]
  15. Maurice Merleau-Ponty, La structure du comportment, PUF, 1942 7e éd. en 1972. [본문으로]
  16. Dominique Lestel, Les origines animales de la culture, Flammarion, 2001. [본문으로]
  17. 『来るべき民主主義──小平市都道328号線と近代政治哲学の諸問題』, 幻冬舎新書, 2013년. [옮긴이] 한자가 道路가 아니라 都道이다. 우리 식으로는 ‘국도’나 ‘지방도로’에 해당되는 듯하다. [본문으로]
  18. Paola Cavalieri & Peter Singer, eds., The Great Ape Project: Equality Beyond Humanity, St. Martin's Griffin; St Martin’s Gri edition, 1994 [パオラ カヴァリエリ & ピーター・シンガー) 편, 『大型類人猿の権利宣言』, 원저 1993년/山内友三郎・間関利貞敗 訳, 昭和堂, 2001년]. [본문으로]
Posted by 상겔스 상겔스

자크 데리다 사후 10



 

0. 들어가며 

...................................................................................................................................................................西山雄二


1. 민주주의의 항상성과 일관성 (Constance et consistance de la démocratie) 

....................................................................................................... Jérôme LÈBRE (일역 松田智裕横田祐美子)


2. 데리다와 랑시에르에게서의 민주주의와 타자의 물음 (La démocratie et la question de l’autre chez Derrida et Rancière)

.............................................................................................................................................................. 亀井大輔


3. 들뢰즈와 데리다두 사람의 운동은 같지 않다 (Deleuze et Derrida, ce n’est pas le même mouvement)

.................................................................................................... Jean-Clet MARTIN (일역 大江倫子西山雄二)


4. 최후의 유대인’ : 데리다유대교와 아브라함적인 것 (« Le dernier des juifs » : Derrida, le judaïsme et l’abrahamique)

........................................................................................................................ Gisèle BERKMAN (일역 佐藤香織)


5. 희생된 동물의 두 개의 신체 자크 데리다의 철학에 있어서 동물-정치 개념에 대한 고찰 (Les deux corps sacrifiés de l’animal. Réflexions sur le concept de zoopolitique dans la philosophie de Jacques Derrida)

............................................................................................................................. Patrick LLORED (일역 吉松覚)


6. 자크 데리다동물성의 시학 무인간적인 것에 관해 (Jacques Derrida. Une poétique de l’animalité. Sur l’anhumain)

..................................................................................................................... Gérard BENSUSSAN (일역 桐谷慧)


7. 고양이눈빛그리고 죽음 (The Cat, the Look, and Death)

............................................................................................................................. Darin TENEV (일역 南谷奉良)


8. 대린 테네브고양이눈빛그리고 죽음에 대한 응답

..................................................................................................................................... 大杉重男南谷奉良山本潤


9. 데리다에게서의 증여와 교환 (Gift and Exchange in Derrida (Derridative)

....................................................................................... Darin TENEV (일역 横田祐美子松田智裕亀井大輔)

 

이하 몇 편의 글이 더 있으나 생략.

 

 

首都大学東京人文科学研究科

2015년 6






자크 데리다 사후 10

 

자크 데리다, 동물성의 시학

: 무인간적인 것에 관해[각주:1]

ジャック・デリダ, 動物性詩学 : 無人間的なものについて

Gérard Bensussan, «Jacques Derrida. Une poétique de lʼanimalité : Sur l’anhumain». Reprinted by permission of Gérard Bensussan

 

제라르 벵수상(Gérard BENSUSSAN)

(일역자 : 桐谷慧)

코랄리 카밀리를 위해

コラーリ・カミリのために

 

20012-511-07 - 동물성의 시학 - 국역.pdf

20012-511-07 - 동물성의 시학 - 일본어.pdf

* 프랑스어 원문을 찾을 수 없어서 일역본을 중역했다.

 


 

 

동물이 우리를 바라본다, 그리고 우리는 그 앞에서 벌거벗었다. 그리고 사유하다는 아마 거기서 시작된다L’animal nous regarde, et nous sommes nus devant lui. Et penser commence peur être la.”[각주:2] 나는 동물을 쫓는다, 고로 나는 있다(동물이다)(이하 동물을 쫓다)의 데리다의 처음과 더불어, ‘조야한(brut)’ 수수께끼 속에서 간직되고 있는 동물의 이 시선에서 비롯되어 사고를 하겠다는, 철학자에게 보내진 초대로부터 출발, 혹은 재출발하고 싶다. 이 동물의 시선은 <타자>보다 더 다른, 모든 형이상학보다 더 낡은, 모든 이원론보다 근원적인 타자의 시선이다. 

모든 인류학 이전의 어떤 시작에 있어서, 이 시선 아래서, 그리고 철학자가 어떤 동물의 시선, 예를 들어 고양이의 눈에 의해, 침묵 속에서 알몸으로 허를 찔릴surpris nu, en silence, par le regard d'un animal, par exemple les yeux d’un chat[각주:3] 때에 그 시선이 불러일으키는 탈보호화(déabritement)’에 있어서, 도대체 무엇이 생각되는 것일까? 곧바로 난폭한 방식으로 말한다면, 그것은 바로 고전적 형이상학과 전통적 존재론의 탈구축이다. 사실을 말하면, 이 탈구축은 하이데거의 해체(Destruktion[파괴])’ 자체보다 근본적이며, -세계적 존재자 전체를 열어젖히는 존재자로서의 현존재(Dasein)’의 발명보다도 동요를 일으키는 것이다. 왜냐하면 동물적 탈구축(우리는 이 말이 무슨 약속인지를 보게 될 것이다) 현대사상의 이러한 결정적인 여러 단편을(해체, 현존재 거기에 데리다는 데카르트, 칸트, 레비나스 그리고 라캉을 한데 모아 덧붙인다), 이런 단편 자체에 의해 파괴되는 듯 보이는 것 속에 재기입하기 때문이다. 파괴되는 듯 보이는 것은, 즉 철학의 불변적 요소인 휴머니즘[humanisme]’, 주체성의 해소 불가능한 패러다임으로서의 휴머니티[humanité]’, ‘인간-중심주의[anthropo-centrisme]’, ‘인간-목적론[anthropo-téléologie]’, 요컨대 인간[humain]’이다. 근본적인 동물, 실존론적 분석론보다도 기초적 존재론보다도 근본적인 동물은 탈구축을 하는 동물[animal déconstructeur]”이다. 파롤이 박탈된[privé]” 것이 아니라 파롤 없는 그 시선에 있어서, 우리가 무엇을 하더라도 말의 통상적 의미에서 동물들은 우리에게 결코 응답하는 일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동물들은 생각에 잠겼고[pensif]”[각주:4] 불투명하고, “장난기 어려 있다[malicieux].” 나는 여기에서 다른 것에 비해 별로 알려지지 않은 청년 헤겔파인 테오도르 피셔의 말을 떠올린다. 그는 헤겔이 칸트를 물구나무세운 듯한 이론적 몸짓에 있어서, “대상의 장난질[malice de l’objet]”에 대해 말했다.[각주:5] 무제한으로 내빼 달아나는 것의 장난질, 이 장난질은 프리드리히 슐레겔의 이해할 수 없는 것[l’incompréhensible]”에 관한 텍스트(이해할 수 없는 것에 대해[Über die Unverständlichkeit])와 상당히 가까운 입장을 나타내고 가리킨다.[각주:6] 그리고 탈구축과 예나의 낭만주의, 데리다의 에크리튀르와 슐레겔의 단편을 결합시킨 연결을, 우리는 쉽게 드러낼 수 있을 것이다. 

동물의 생각에 잠긴 이 시선에 있어서, 어떤 뿌리가 묻혀 있다는 것, 근본적이자 잊혀져 있는 것이 분명해진다. 그것은 단순히 존재의 망각에 있어서 잊혀지고 있다는 것뿐만이 아니라, 그것은 자명한 것이다. 뿐만 아니라 그 뿌리는 망각에서 벗어나고 폐색을 해방하는[풀어놓는] 대항-장치임이 직접 분명해지는 것이다. 나는 하이데거에 논의를 집중시키려고 한다. 왜냐하면 하이데거는 이런 관점에 있어서, 그리고 아무튼 동물을 쫓는다의 역사적 철학적 도정에서 모습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뿐만이 아니다. 내가 곧바로 뒤에서 되돌아가는 몇 가지의 근본적인 이유 때문에, 그는 이 역사적 철학적 도정의 정점, 범례성, 주목할 만한 응축점을 이루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주체성의 형이상학의 탈구축의 극점에 있어서, ‘동물은 우리를 본다, 그리고 알몸이라는 감각=벌거벗음성[nudité]”에서 출발해 사고하라고 우리에게 엄명하는 것이다. 이 알몸이라는 감각은 너무 견디기 힘들기 때문에, 철학의 오랜 역사 속에서 어떤 연쇄적인 반응을, 데리다에 따르면, 아리스토텔레스로부터 적어도 오늘날에 이르기까지의, 강력하고 풍부한 연쇄를 일으키게 될 것이다. 하이데거의 맹목적 범례성은 어디에 위치하는가? 데리다를 인용하자, “인간 현존재와 동물 사이의 대립으로서의 손의 해석은, 존재의 의미의 물음의 반복, 존재-신학의 파괴, 그리고 무엇보다도 현존재와 눈앞의 존재手前存在(Vorhandensein)’손안의 존재手許存在(Zuhandensein)’ 사이의 한계들을 재분배하는 실존론적 분석 이후, 하이데거의 가장 연속적인 담론을 지배하고 있다. 하이데거가 손과 동물을 문제 삼을 때마다[각주:7] 그가 당혹을 감추려고 하고 있기 때문에 더욱 그 담론은 단정적이고 권위주의적인 레토릭에 굴복하는 것처럼 내게는 보인다. 그때 이 레토릭은 가장 심대한 형이상학적 인간주의의 공리들을, 어둠 속에서 아무런 흠집도 없이 보호된 채로 내버려둔다 . 이것은 특히 형이상학의 근본문제에 있어서 명백하다L'interprétation de la main, comme l'opposition entre le Dasein humain et l'animal, domine le discours le plus continu de Heidegger, depuis la répétition de la question du sens de l'être, la destruction de l'onto-théologie, et d'abord l'analytique existentiale qui redistribue les limites entre Dasein, Vorhandensein et Zuhandensein. Chaque fois qu'il est question de la main et de l'animal, le discours de Heidegger me semble céder à une rhétorique d'autant plus péremptoire et autoritaire qu'elle doit dissimuler un embarras. Elle laisse alors intacts, abrités dans l'obscurité, les axiomes de l'humanisme métaphysique le plus profond . Cela est particulièrement manifeste dans les Concepts fondamentaux de la métaphysique .”[각주:8]

사실, 동물성이라고 불리는 물음은, “아리스토텔레스로부터 적어도 오늘날에 이르는, 강력하고 풍부한 연쇄의 가장 불명료한 특징들을, 혹은 가장 장난스럽게, 가장 이해 불가능한, 가장 곤혹해 하고 있고, 가장 당혹하게 만드는 특징들을, 의미 깊게 끌어모으는 것이다. 이 연쇄는 끊임없이 같은 관심을 재생함으로써, “존재-신학을 휴머니즘에 결부시키고”, “인간과 동물 사이의 특히 동물성 사이의, 일의적이고, 동질적이고 반계몽주의적인 동물성이라는 개념 사이의 본질적인 대립을 산출한다. 예를 들어 동물은 <이성>, <사회>, <웃음>, <욕망>, <언어활동>, <법률>, <억압>을 갖지 않는다L'Animal n'aurait pas la Raison, la Société, le Rire, le Désir, le Langage, la Loi, le Refoulement[각주:9]고 간주되는 것이다. 목록동물을 쫓는다에서 몇 번이나 반복되고, 확대되고, 명시된다. “여기서 문제는 우리가 이런저런 능력을 동물에 대해 거절할 권리가 있느냐고 묻는 것뿐만 아니라(파롤, 이성, 죽음의 경험, 애도, 문화, 제도, 기술, 의복, 거짓말, 거짓을 속이기, 흔적의 소거, 증여, 웃음, 눈물, 존경 등등 목록은 필연적으로 제한이 없는 것이며, 그리고 우리가 살아가는 가장 강력한 철학적 전통은, 이 모든 것을 동물에 대해 거절한 것이다). 여기서 마찬가지로 문제는 스스로를 인간이라고 부르는 것이, 그것이 동물에 대해서는 거절하는 것을, 인간에 대해서는 매우 엄격하게 인정할 권리가 있느냐, 즉 자신에 대해서는 인정할 권리가 있느냐고 묻는 것이며, 그리고 이 인간이라고 스스로를 부르는 것이, 이런 것들에 대한 순수하고 엄밀하게 분할 불가능한 개념을, 그 자체로서 과연 갖고 있느냐고 묻는 것이기도 하다It is not just a matter of asking whether one has the right to refuse the animal such and such a power (speech, reason, experience of death, mourning, culture, institutions, technics, clothing, lying, pretense of pretense, covering of tracks, gift, laughter, crying, respect, etc.the list is necessarily without limit, and the most powerful philosophical tradition in which we live has refused the ‘‘animal’’ all of that). It also means asking whether what calls itself human has the right rigorously to attribute to man, which means therefore to attribute to himself, what he refuses the animal, and whether he can ever possess the pure, rigorous, indivisible concept, as such, of that attribution.”[각주:10] 

강력하고 풍부한 연쇄오늘날”, 동물성에 관한 하이데거의 담론의 전체를 지휘하고 있는 공리계 속에서 정점에 도달하고 있다 이런 담론에 대한 때 이른 관심 때문에, 당연하게도, 조종보다 전부터 이미, 데리다가 동물의 물음에 대해 민감했다고 추측할 수 있다. 어찌됐든, 전통 및 하이데거적인 반-전통에 대한 데리다의 독해는, 해체의 피안에 있어서 탈구축을 개시시키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이데거의 해체는, 텔로스에 의해 이끌어진 뒤나미스라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낡은 도식에 결말을 짓지 않기 때문이다. 비록 해체가 그 낡은 도식으로부터 형이상학적 불순물을 제거하고 있다고 해도 그렇지만 그 때문에 이 제거를 그 파괴적인 말미에 이르기까지 성취시킬 수 없는 것이다. “우리가 생물학적 규정에서 벗어나게 하려 하는 인간적인 게슐레흐트(Geschlecht)유기체적-생물학적 프로그램에 갇혀 버리는 동물성, 이 두 가지 사이에 [하이데거]는 여러 가지 차이들이 아니라 절대적으로 대립한 하나의 한계를 기입하는 것이며, 이 한계는 여러 가지 차이를 말소하고, 가장 저항력이 있는 형이상학-변증법적 전통을 따라, 그것을 균질적인 것으로 이르게 하는 것이다.”[각주:11] 

하이데거의 공리계에서의, 이 끝없는 저항과 그에 의해서 사고되지 않은 것의 증후성의 극점, 그것은 우리가 그랬고, 우리가 그 뒤를 쫓는 동물이다. 가장 근본적이고 가장 멋지게 성취된 형이상학의 파괴, 그것은 20세기의 모든 철학에 있어서 결정적인 것이었지만, 그렇지만 이 파괴는 그것에 고유한 기준들에 의해, 동물이라는 이 중대한 쟁점을 제기할 수도 사고할 수도 없다는 것이 된다. 하이데거의 존재는 철학적 중성자폭탄이다. 그것은 인간의 세계성(세계형성적)과 동물의 그것(세계가 가난하다) 사이의 존재론적 비연속성의 토대인 범주적 인류학의 결정요인의 총체를 파괴한 것이지만, 그렇지만 줄곧 전부터 그런 결정요인들을 보호하는 네 가지 벽은 존속시킨 채였다. 비연속적이고, 건망증에다 무언인 동물과, 역사적이고 기억을 지니고말하는 인간이라는, 니체가 반시대적 고찰2편의 서두에서 설정한 차이에 대해 하이데거는 비판을 내세웠지만,[각주:12] 이 비판은 손쉽게 하이데거 자신에게도 반송될 수 있을 것이다. ‘동물이나 동물성, 혹은 이것들과 인간, 인간성 사이의 가짜의 절대적으로 대립적인 한계라고 해명적으로 대결하는 것은, 그 때문에 그 귀결에 있어서, 갈릴레오, 다윈 그리고 프로이트에 의해 인류적 나르시시즘에 주어진 세 가지 상처와, 저어도 같은 정도로 중대한 사정거리를 철학적으로는 보유하고 있는 것이다.[각주:13]

철학자들과 철학에 의해 널리 알려진, 혹은 비난을 받은, 수세기 전부터 행해지는 동물의 괴로움의 지위에 대한 전쟁’, 그리고 그들은 괴로워할 수 있는가?”라는 벤담의 질문에 대한 응답의 반박하기 어려움에 대한 전쟁’, 전쟁을 둘러싼 하이데거에 대한 데리다의 대결로 나는 돌아가지 않는다.[각주:14] 만일 이렇게 말해도 좋다면, 나는 단순히 하이데거의 확장élargissement을 제시하고 싶다(나는 이하를 덧붙여야만 한다. 동일한 확장의 조작은, 마찬가지로 데카르트나 칸트, 레비나스나 라캉에 대해서도 이루어질 수 있으나, 동물을 쫓다에서는, 논증적 전략을 위해 그것은 유보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내가 아는 한에서는 데리다가 한 번도 거론한 적이 없는 50년대의 텍스트에 의지함으로써, 나는 확장의 조작을 간략하게 행하기로 한다. 이 텍스트는 그 자신도 모르게, “동물성의 시학이 그러할 수 있는 것의 몇 가지의 잘 다듬어지지 않은 모티프, 몇 가지의 시사적인 특징을 제공할 수 있는 것 같다. 내가 지금 여기서 떠올리고 있는 것은, 근거율이라는 제목으로 출판된 1955년부터 1956년의 겨울학기 강의이다.

하이데거가 잘 알려진 앙겔루스 실레시우스(Angelus Silesius)의 두 개의 시에 대한 주해에 있어서 -없이sans-pourquoi에 대해 말한 것에 대해, 많은 지면을 할애하여 거론할 수 없을 것이다(내가 여기서 하는 것보다 많은 지면을).[각주:15]

  

장미는 왜 없이 존재한다, 피는 것은 왜냐하면 그것은 핀다

스스로 자신에 신경쓰지 않고, 보이는 것을 원치 않는다[각주:16] 


 

=이유 없는 것은 없다고 하는 주어져야 할 충족된 근거의 원리(principe de raison suffisante et de raisons à fournir)”에 대해서, 신비주의적인 이 두 개의 시구는, 미리 난폭한 방식으로, 마치 길을 되돌아가듯이, 만일 이렇게 말해야 한다면 어떤 다른 원리를 대립시키고 있다. 더 정확하게 말한다면, ‘에 대해, 이 두 개의 시구는 어떤 순수한 왜냐하면[parce que]’의 현기증을 불러일으키는 명증성을 대립시키고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근거[raison)’를 탐구하는 보다 낡고, 그리고 그것 자체로서, 바닥에 가깝다.[각주:17] “장미는 핀다, 왜냐하면 그것은 피기 때문에”, 왜냐하면에 대해 대답하지 않고, 그것에 선행하여, 그리고 근거[raison, Grund]’를 제공하지 않는다. ‘왜냐하면은 판단 혹은 표상에 의해 근거에 설명을 주는(rendre compte)’ 것이 아니다. 그것은 장미의 체류를, 그 오래 있음을 가리킨다. 장미는 존재자로서 근거 없는 것이 아니다(식물학적 지식은 이 존재자로서의 장미를 완벽하게 설명할[rendre raison]’ 수 있으며, 계산적 사고는 개화(開花)를 설명할 수 있다).[각주:18] 그 존재 자체에 있어서, 장미는 왜 없는 것이다.[각주:19] “‘왜냐하면과 비교되는 [왜 없이의] ‘없이, 무엇을 부정하는가? 그것은 단순히 근거와의 관계를 부정할 뿐 아니라, 무엇보다 다음의 것을 말하는 것이다. , 근거에 대해 묻고, 근거에 있어서 스스로를 명백하게 표상하는 근거와의 관계, 이 관계를 유지하는 것 없이 장미는 존속하는 것이다. 반대로 우리 인간에 있어서는, 우리와 근거 사이의 관계가 스스로를 표상하는 것이라고 하는 것은, 보통이다. 스스로를 표상하는 존재인 우리에 대해, 근거가 관계지어지는 것은, 다양한 방식에 의해서이다. 그러나 동물들, 식물들도 또한, 스스로를 표상하는 존재가 아닐까. 확실히 그렇다.” 계속해서 하이데거는 몇 줄 뒤에서, 이성적 동물이라는 인간의 정의를 다룬다. “인간이란 그 표상에 있어서 스스로의 앞에 근거를 근거로사 만들어낼 수 있는, 유일한 살아 있는 존재이다. 전통적인 정의에 따르면, 인간은 이성적 동물이다.”[각주:20] “그저 동물(l’animal tout court)”과의 근본적인 경계선으로서의 전통적인 정의는 존재자와 그 이성(ratio)’에 관해 강조된 충족근거의 원리에, 전체로서 기초하고 있는 것이다. 하이데거는 이것과는 또 다른 이해를 제안한다. 비록 데리다에 의한 전체적 진단을 공유하고 있다고 해도, 아니 그렇게 하고 있기 때문에 특히, 나는 데리다가 이런 하이데거의 논의에 대해 충분히 주의를 기울였냐는 것에는 확신이 없다. 모든 계산적 사고와는 이질적인 성찰적 사고[각주:21]에 기인하는 이 다른 이해는, 그때, 근거가 존재에 속한다는 이것을 퍼뜨리는 대로 내버려둔다. 존재는 근거를 갖는다는 것도 모든 존재자는 어떤 근거를 갖는 것이며, 왜냐하면 근거 없는 것은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다. 표상이 이상과 같이 말하는 데 반해, 사고의 성찰적이고 시학적인 태도는 아래와 같이 말할 것이다. “존재는 그 자체로서 기초짓는[정초하는] 근거이다.”[각주:22] 이런 근거에 의해 존재자는 필요 충분한 근거를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존재는 근거 없이 있다고 간주된다. 그렇지만 꼼꼼하게 벼려진[가다듬어진] 다른 여러 가지 규정들 때문에 이성적인 동물이 성찰적 사고에 의해 비판되고 철회되고 탈구축됨에도 불구하고, 그저 동물은 그 철학자의 주인에게 어중간하기에 내버려진다. 이 그저 동물이 버려지는 장에서 출발해서, 그 뒤를 쫓을 수 있을 것이다. 실제 하이데거는 근거율의 여러 페이지의 유연한 논증에 있어서, 동물에서 떠나 그의 길을 탐구하고 있다. 이러한 하이데거에 전형적인 몸짓과 포기로부터, 데리다는 징후적인 의의를 검토하는 것이다.

단적으로 말하자. 이 왜-없이의 성찰로부터, 그저 동물인 근거 없는 가난한 동물을 위한 어떤 이익을 이끌어낼 수 없을까? 왜냐하면 존재의 사고로부터 벗어나, ‘동물은 여전히 뛰어다니고 있기 때문이다. ‘동물뒤를 쫓지않으면 안 된다, 그리고 추적의 권리가, 동물성이라는 사항 자체를 다시 다루는 것이 데리다와 함께 문제가 되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 정확하게는, 전통이 동물을 버리고, 버릴 수밖에 없던 지점이기 때문이다. 동물 쪽의 문제가 아닌 자기 변론의 형편 때문에 동물이 쓸모없다고 여겨지고, 대부분 호출되지 않게 된 이후, 그 뒤를, 즉 단순한 동물의 뒤를 쫓아야만 하는 것이 아닐까? 그리고 그 뒤를 쫓는다는 것은, 우리가 그로부터 출발한 시선의 문제를 문자 그대로 개시하는 것이 아닐까? , 하이데거가 말하지 못하고, 바라지 않고, 혹은 그럴 능력을 갖지 않았던 것을, 그들로부터 되찾는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이데거는 동물에 의해 [스스로가] 보인다는 것을 결코 보지 못했다mais ne se sont jamais vus vus par l'animal는 것에 의해 구성되는 담론의 유형속에 위치하고 있기 때문이며, 그에 반해, 반대로 동물이 우리에게 보낸 청원을 떠맡을prendre sur eux l'adresse que l'animal leur adresse[각주:23] 필요가 있는 것이다. 달리 말하면, “그런 것이 있다고 한다면, 시에 귀착되는s'il y en a, revient à la poésie[각주:24] “동물의 사고에 대해 성찰할 필요가 있다. 존재의 사고의 냉수[각주:25]에 있어서의 동물의 즉시 추방, 그 순수하고 단순한 실종으로 되돌아감으로써, 사고, 그것이 열어젖히는 시학으로 되돌아갈 수 있다. 짐승도, 적어도 장미와 마찬가지로 이유 없는 것이다. 그것은, 스스로를 표상할까? 하이데거가 말하기를, “확실히 그렇다”, 식물 자체가 스스로를 표상하는 존재들의 일부를 이루고 있는 것이다. 그렇지만 그는 이 동물 혹은 식물의 표상에, 표상이 바로 그럴 수 있는 것에는 전혀 흥미를 보이지 않는다. 하이데거에 있어서 이 표상은, ‘살아 있는 것일반과 빛나는 현존재와의 차이를 생산 혹은 재생산하는 것, 그리고 근거를 근거로서 표상한다는 인간에 고유한 능력을 강조시키는 것에만 도움이 될 뿐이다. 거의 모든 철학자들이 똑같은 것을 했으나, 반드시 전원(全員)이라고 하는 것은 아니고, 몇몇은 짐승들에 의해 스스로가 보이는 것을 봤다.” 특히 퓌론의 회의주의자들이 그렇다. 알다시피 크리시포스(Chrysippus of Soli), 예를 들어, 개가 후각을 써서 수많은 것들 속으로 나아가는 길을 선택함으로써 산토끼를 추격할 때의, 그 준-가설-연역적인 행동을 관찰하는 것에 기초하여, 개에게 삼단논법을 인정하는 곳으로까지 나아갔다.[각주:26] ‘전통적인 정의의 용어를 유지하면서 말한다면, 만일 비-이성적인 동물이, 즉 스토아학파가 말하는 짐승들(aloga)”[각주:27], 스스로를 표상할 수 있다고 한다면, 분명히, 충족한 근거를 부여한다는 양식, 응답에 있어서 근거를 도로준다[갚아준다][rendre raison]’라는 양식에 의해서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다. -이성적인 동물들에 결여되어 있는 이 상환하기[reddere]”, “갚아야 할 설명(compte à rendre)”이야말로 적어도 아리스토텔레스 이후”, 전통이 끊임없이 강조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 결여는 어떤 결여일까? 탈구축은, 결여에 보답을 주려고 시도하는 것보다는 오히려 그 상당 부분은 어떤 결여로부터, ‘해체하다[défaire]’라는 모티프를 만들어내는 데 있는 것이다. 이른바 탈구축은 -상환(de-reddere)’에 의해 상환(reddere)’에 반대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 -상환탈구축[déconstruction)’[dé)’-리다라는[de-rridien)’ 이 운동의 주모자의 성을 화합시킨다. (결여는 어떤 결여일까? 라는) 이 질문은, 하이데거의 성찰에 의해, 그리고 이 성찰이 뒤로 물러나”, “의 물음에서 해방됐을 때 이후, 그 성찰을 덮친’ ‘현기증에 의해서도, 완벽하게 가능해지고, 움직여지게 된다.[각주:28] 짐승은 왜[] 없는 것이다. , 그것은 질문에서 항상 이미 해방되어 있다. 헤겔식으로 얘기한다면, 짐승은, 현재의 십자가에 있어서 이성의 장미를 밝히는 데 있어서는, 자기를 의식하는 <정신>, 그것이 나타나는 내재적인 현전에 있어서 밝히는 데 있어서는 부적격하다(inapte).’[각주:29] 

그러므로 물어야 할 것은 이 부적격 혹은 이 결여에, 어떤 지위가 부여되고 있느냐는 것이다. 이 부적격이나 결여는, 죽어야 할 산 자들의 공동체에 대한 공-속의 모든 가까움을 동물에 대해 거부함으로써, 동물을 결정적으로 실추시키는 것일까[각주:30] 이것은 훨씬 전부터 철학의 원-지배적인 전통이 생산하고 재생산하는 것이다. 혹은 이 부적격이나 결여는 동물들의 수신처=청원(adresse)’, 그리고 우리에게 보내진 송부를 이롭게 하기 위해, 반전시킬까? 여기서의 우리는 다음과 같은 질문에 의해 스스로가 보이고 있는 것을 보고 있다. 그것은 모종의 수동성을 걱정하고”, “수동 가능성[passibilité]”, “정념=수난[passion]”, “-능력증언하는질문이다.[각주:31] 이것이야말로 분명히, 하이데거에게서의 뒤로 물러나기위한 노력, ‘이하 마찬가지로의 계기(繼起)로 환원되는 근거의 원리로부터의 해방의 노력, 그리고 그것과는 반대로 체재/체류[weilen]’로서 재파악된 왜냐하면[weil]’의 세차운동[각주:32]을 사고하기 위한 노력에 의해 가능해지는 것이라고, 내게는 판단된다. “Weilen은 다음을 뜻한다. 지속하는 것, 침착하게 머무는 것, 거기에 멈춰 서서 그대로 있는 것, 즉 편안함 . 근거에 기초한 모든 정초에, 그리고 모든 원리에 반대하는 왜냐하면[weil]은 순수하고 단순한 현전을 가리킨다. 이 현전은 이유 없는 것이며, 모든 것이 그것에 의존하고, 모든 것이 그 위에서 쉬고 있다. 왜냐하면은 지속하는 것을, 바닥으로서의, 근거로서의 존재를 명명한다.”[각주:33] 짐승은 왜 없이 존재한다, 그 동물적 존재는 존재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존재하기 때문에. 짐승은 체재와 존재의 가까이에 있다. 정신이 들었을지도 모르지만, 이 총괄과 결론은 하이데거의 것이 아니다. 이것들은 예를 들어 동물의 몽롱(hébétude)’[각주:34]의 주제에 대해 총총걸음으로 그가 말한 내용의 반대이기도 하다. 몽롱은 존재로의, 존재자로의 모든 접근을 닫아버리며, 개시의 반대말인 폐쇄 그 자체로의 접근조차도 닫아버린다.[각주:35] 이 총괄과 결론의 높이에 머무는 것은 사실 동물의 세계의 물음에 맞서는[대면하는] 것을, 그리고 동물의 세계가 가난하다라는 주장을 철회하고, 반대로, 동물이 어떤 세계를 가진다라고 하는 것에 대해 묻는 것을 필요로 할 것이다. 이 동물이 어떤 세계를 가진다라는 것에 대해서는, 들뢰즈가 정당한 직관을 갖고 있었다. 동물의 로고스에 대한 부적격성을, 순수하고 단순한 박탈과는 다른 방식으로 이해한다면, 데리다나 하이데거에 있어서의 시학적-성찰적인 것 쪽으로 이 부적격성을 옮기는 것은 가능하다고 나는 생각하지만, 그것은 절대적으로 그것에 앞선 어떤 조건을 따라야만 한다. 그 조건이란, 동물의 눈빛이며, 이 눈빛을 향한 눈빛이며, 눈빛의 교환이며, 그 교환에 극복해야 할 어색함[뻘쭘함]”이 있다고 하는 노고/고생[mal]’이다.[각주:36] 장미는 이유 없이 존재하지만, 설령 그것이 초감각적 지각을 갖추고 있다고 하더라도, 장미가 우리를 바라보고 있느냐는 것은 의심할 수 있다. 우리가 체험할 수 있는 가장 조야한 경험에서 출발해 가정해 본다면, 장미의 이유 없음은, 수신처의 반사적 차원, 그리고 어떤 눈빛 속에 나타나는 듯한 그 존재의 절대적인 타자성[他性]에 관련된 문제제기, 거의 유지하지 않는다.[각주:37] 

반면 우리를 바라보는 동물은, 우리를 어떤 수수께끼 속에, 동물의 왜-없이의, 도달하지 않는 체재의 수수께끼 속에 만류한다. 그 때문에, 동물적 존재는 순수하고 단순한 현전으로서 스스로를 주는 것이며, 이 현전은, 스스로를 동물이 바라보고 있는 것을 바라보는 우리에게까지 이르는 것이다. 동물의 수수께끼를 올바르게 평가할 수 없는 의인주의적 편애에 빠지지 않고서는, 아마도, 이것에 대해 더 이상 말할 수 있는 것은 거의 없다. 그러나 적어도, 수수께끼가 우리에게 강제하는 엄청난 높이에 머무르도록 시도해야 할 것이다. 이 수수께끼는, 이성에, 개념에, 설명적 사고에, 로고스에 대해, 동물의 눈빛에서 출발하여 그것들로부터 도망치고, 시학, -계산, 침묵한 성찰, 이해 불가능한 것의 장난질로 항상 이미, 그리고 미리 도망쳐버리는 바와 맞닥뜨리는 것을 명령하는 것이다. 모든 것이 역설이며, 혹은 더 정확하게는 아포리아라고 바로 말해야만 한다. 동물성의 시학poétique, 동물성의 아포리아학=아포리아적인 것aporétique[각주:38]이다 데리다에게서 아포리아는 다음을 가리킨다는 자명한 의미에 있어서. 아포리아가 지시하는 것은, “(어떤) -통과, 오히려 비-통과의 경험, -통과에 있어서 일어나고 매혹하는 것의 시련의 경험이며, 그것은 꼭 부정적이지는 않는 형태로, 이 분리에 있어서, 우리를 마비시키는 것이다. 그것이 일어나는 것은, 어떤 문의, 어떤 문지방의, 어떤 경계의, 어떤 선의, 혹은 단순히 타자 그 자체의 연안(沿岸) 혹은 접안(接岸)의 앞에 있어서 , 문제를, 혹은 기획이나 보호를 구성하는 것조차도 가능해지지 않게 될지도 모르는 이 장소에 있어서이며, 그리고 기획 그 자체 혹은 문제의 노력이 불가능해질 때, 그리고 우리가 보호 없이, 문제도 보철[補綴]도 없이, 가능한 대체물도 없이 절대적으로 노출되어 있을 때, 우리의 절대적으로 알몸인 절대적인 유일성에 있어서 특이한 형태로 노출되어 있을 때, , 무장해제되고 타자에게로 맡겨지고, 어떤 비밀의 내면성을 여전히 지킬 수 있는 것의 배후에 우리를 비호하는 것조차도 더 이상 할 수 없을 때에서이다. 거기에는, 요컨대 아포리아의 이 장소에는, 더 이상 문제가 없다. , 무슨 말인가, 혹은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왜냐하면 그것은 해결이 주어져 있기 때문이 아니라, 거기에서는 문제가, 우리가 자신 앞에 지키려는 것으로서는 스스로를 구성할 수 없기 때문이다. , 현전화될 수 있는 기획 혹은 대상으로서, 보호하는 대리자 혹은 보철적인 대체물로서, 여전히 통과하거나 혹은 그 뒤에서 몸을 지키거나 할 수 있는 어떤 경계로서, 그것들 같은 것으로서는, 문제는 더 이상 스스로를 구성할 수 없기 때문인 것이다.”[각주:39] 이 단어에 집착한다면, 아포리아학은, 동물과 그 눈빛을 문제로 삼음으로써, 반드시 부정적이지는 않는 분리의 이 마비에 있어서, -계산적인 것, 성찰적인 것, 생각에 잠긴 것의 시학이며, 데리다가 말하듯이, 만일 그런 것이 있다고 한다면, ‘poèsie일지도 모르는 이 사고의 시학이다.

그래서 이것들의 아포리아가, -동물이라는 인간의 규정의 목적론적 전통에 의해 제거되지 않는다는 것, 그리고 동물의 물음의 주위에서 오늘날 공공연히 선언되고 있는 전쟁에 있어서, 인간을 돕는 일밖에 하지 않는 자선적 의인주의에 의해 제거되지 않는다는 것은, 크게 있을 수 있는 것이다. 이하의 것을 간과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 데리다가 보여주려고 하는 것은, 우리가 동물로부터 박탈한 모든 것, 즉 우리가 집필(!)[각주:40]한 회귀하고 증대하는 긴 목록, 이런 것을 동물이 갖고 있다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야말로 스스로가 갖고 있다고 믿고 있는 것 전부를, 훨씬 적게만, 특히 훨씬 순수하지 않은 방식으로만 갖고 있을 뿐이라는 것이다. 하이데거의 주장에 따르면, “세계가 가난한동물은, 뭐든지 그 자체en tant que tel와의 관계를 갖는 것이 없으며, 특히 죽음 그 자체와의 관계를 갖고 있는 것이 아니며, 그 때문에, 엄밀하게 말하면 죽는 일이 없고, 그저 뒈진다périr”, 살아가는 것을 그만두다cesser de vivre에 지나지 않는다고 한다. 이런 하이데거의 주장을, 아포리아에서 데리다가 다시금 비판적으로 다룰 때, 데리다의 하이데거에 대한 물음은, 인간은, 현존재 자신은 죽음 그 자체와의 진정한 관계를 갖는다고 확증할 수 있느냐고 근본적으로 묻는 데 있다.

데리다의 뒤를 쫓아다니려고 한다면, 그러나 마찬가지로 다른 몇 사람의 뒤를, 체류와 수동성으로서의 왜냐하면에 관련된 하이데거의 성찰도 거기에 포함되는, 다른 사색가나 다른 사고의 뒤를 쫓아다니려고 한다면, 철학의 노력이란 아마, 아르토의 유명한 말을 모방한다면, “문맹의 짐승들analphabêtes을 위해 쓰는 것 속에 있을 것이다.[각주:41] , 그들을 위해, 이른바 그들이 명명할 수 없는 그들의 입장에서, 들뢰즈에게서의 동물-생성이 시사하듯이, 이형적(異型的)이고 이질적인 신체들 사이의 혼교(混交)를 따라쓰는 것 안에 있을 것이다. 동물을 쫓다는 이렇게, 문맹이며, 짐승이며 다양한, “무논리적alogiques으로 시달리고 있는 짐승들을 위해 쓰여진 것이며, 그들의 무한한 반영reflet dʼinfini위해 쓰여진 것처럼 내게는 생각된다.

 

무한의 반영을 갖지 못한 짐승은 없다.

천하고 더럽혀지고, 막대기로 혼난 이 당나귀는,

소크라테스 이상으로 신성하며, 소크라테스 이상으로 위대하다[각주:42]

 

그들이 거기에 머무는 듯한 미지의 것inconnu으로부터, 인간인 우리의 나체를 향한 그들의 눈빛 때문에[눈빛을 위해].

 

그 야생적이고 힘찬 눈동자는

인간, 알몸의 원자를 바라보고 있다

무서운 눈빛, 우리는 그것을 갖고 돌아간다

무지에 있어서의 이것들의 경마로부터[각주:43]

 

두꺼비를 위해, []을 위해, 모든 동물어들animots[각주:44]을 즉각 석방하기 위해 그들을 환대함으로써, 데리다는 이 정의의 노력을 행한다. 대략 데리다가 쓰는 바에 따르면, 모든 동물어들은 그[데리다] 같은 것이며, 그에 대해서 있으며, 그의 집에 있으며, 그의 안에 있다.[각주:45] 여기서는 데리다의 동물지(動物誌), 그러나 마찬가지로 니체와 카프카와 또 다른 사람들의 손에 의한 동물지들이 있지만, 보통은 사고나 철학 혹은 문학의 것인 영토의 바로 내부에서 동물지를 작성한다는 것은, 해방이라는 정의에 맞는 행동거지, 자유화 혹은 구출 작업을 의미한다. 이 행동거지는, 대문자의 ‘<동물>Animal이라는 단어를 고발하는 것에 대한 매우 강고한 집요함, 반복, 혹은 그 연속적인 변조(転調)에 의해 특징지어진다. <동물>이라는 뭐든 있다à tout faire, 어떤 상황이나 일에도 쓸 수 있는의 개념은, 너무도 거대하고 광대한 것이기 때문에, 항상 매우 맛없는 방식으로만 그 내용을 파악할 뿐이며, 그 때문에, <인간><동물>이라는, 심연에 의해 분리된 두 개의 기슭을 산출한다는 작업을 하기 이전에, 원래, 인간중심주의적 주관성 때문에, 그런 두 개의 기슭의 산출이 필요하다는 가짜의 필요성을 이미 초래해버린 것이다. “데카르트에서 하이데거, 칸트에서 레비나스 및 라캉에 이르는 철학자들의 모두가 그렇게 하고[각주:46] 있듯이, 우리가 <동물>이라고 말할 때, 그런 훨씬 이전의 때부터 이미, 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우리on가 단수정관사를 붙여 ‘<동물>’이라고 말할 때마다, 철학자가, 혹은 아무나가, 단수형으로 그냥 ‘<동물>’이라고만 말할 때마다, 인간이 아니라고 간주되는 모든 살아 있는 것을 지시하고 있다고 우기면서 그렇게 할 때마다, 좋다, 그럴 때마다, 이 글의 주어는, 우리, 어리석은 것bête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각주:47] 

이 점에 관한 데리다의 집요함은 주목할 만한 것이다. 이 집요함이 이론적 차원을 보유하고 있다는 것은, 한번만 봐도 알 수 있다. <동물><범주> 아래에 위치하는 짐승들bêtes이라는 말과 관련될 수밖에 없는 어리석음bêtise, 극히 철학적인 것이다. 이 어리석음이라는 단어가, ‘짐승성bestialité이라는 단어와 마찬가지로, ‘의인주의라고 이해된다면, 철학적 어리석음이라고 하는 것은 틀림없다[각주:48] 짐승들은, ‘어리석은bête것일 수도, ‘짐승 같은bestial것일 수도 없을 것이다! 플라톤은 이미 그것을 알고 있었으며, 폴리티코스에서의 젊은 소크라테스와 이방인의 대화에서 그것을 내비쳤다. “자네는 잔여를 통합[정리]하기 위해, 전체성을 포함하고 있을 유일한 종족을 남기고 있다고 생각했을 것이네. 왜냐하면 자네는 그것을 짐승들이라고 부름으로써, 이 모든 존재들을 명명하는 것에 똑같은 이름을 사용할 수 있었기 때문일세. 아마 자네의 예에서는, 예를 들어 학() 같은 다른 동물들이 모든 나머지의 동물들과 대립하고, ‘이라는 종족의 단일성을 가리키며, 알아보기 위해, 인간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나머지의 동물들에 하나의 이름을 사용하게 될 것일세. 다음으로, 스스로 자신을 숭배의 대상으로 삼기 위해, 학은, 인간들도 포함한 다른 동물들을 일단 같은 그룹에 모았다면, 인간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다른 동물들을 짐승들이라는 이름과는 다른 어떤 이름으로도 부르지 않을 걸세.”[각주:49]만일 학이 말하고 분류할 수 있다면, 그것은 <>, 인간들도 포함한 <짐승들> 사이에서의 분할을 행할 것이다. 이런 반-인간중심주의적 논의는, -스피노자적 공명 때문에, 소수파의 역사의 끝에서, 그래서 그대로의 형태로 데리다에 있어서도 발견된다. 그러나 그것은 데리다의 집요함의 가장 두드러진 측면은 아니다. 내게 이상적인 것은, 이 일련의 집요함 속에, <동물>이라는 대문자의 개념이 실행하고 허가하고 구성하고 있는 억압의 형상에 대한 집요함이다. <동물>, ‘거대한 진영’, ‘울타리’, 개념적인 (그리고 개념적일 뿐만 아니라) ‘도살장과 유사한 공간에 끊이지 않고 견주어지고, 거기서는 인간이 자신의 동포, 이웃 혹은 형제라고 인정하지 않았던 살아 있는 온갖 것[각주:50]이 갇혀 있을 것이다.

되돌려줘야[되갚아야] 할 정의에 끈끈하게 염려하는 이 텍스트 내내, <동물>의 거부는 진동하고 있다. 이 염려는, 온갖(à tout faire)[각주:51]의 개념은 무효라고 명령하는 듯한 단순한 철학적 엄밀함보다도, 더 오래되고 더 근본적인 것이다. 개념들의 적절함이 반환되고[되갚아지고. 되돌려지고], 그것을 안쪽에서부터 활기차게 하기 위해, 이 정의는 무엇보다 우선, 우리가 오늘날 생물다양성이라고 부르는 것에 근거한 존재이어야만 한다. , “개로부터 도마뱀을, 돌고래로부터 원생동물을, 새끼 양으로부터 상어를, 침팬지로부터 앵무새를, 독수리로부터 낙타를, 호랑이로부터 다람쥐를, 혹은 고양이로부터 코끼리를, 누에로부터 개미를 혹은 바늘두더지로부터 고슴도치를 떼어놓는separates the lizard from the dog, the protozoon from the dolphin, the shark from the lamb, the parrot from the chimpanzee, the camel from the eagle, the squirrel from the tiger, the elephant from the cat, the ant from the silkworm, or the hedgehog from the echidna[각주:52] 무한한 차이들에 기초한 존재이어야만 한다. 동물의 의태에 관한 분석들에 있어서 로제 카유아(Roger Caillois), 여기서는 내가 참조하는 것만 할 수 있을 뿐인 놀라울 만큼 다양하고 풍부한 기술에 의해,[각주:53] 동물의, 생존을 목표로 하는 순수한 욕동적[충동적] 유기체로의 환원, 혹은 엄밀한 기능적 목적원인론 혹은 유기체론적이고 목적론적 메커니즘으로의 환원, 달리 말하면, 모든 에 대해 인간적으로 응답하는 근거들의 총체로의 환원, 이러한 동물의 모든 환원에 대해, 안정된 결론이나 끝에 이르지 않고, 효과적이고 근본적인 비판을 전개한 것이다. 그런데 카유아에 의해 준-현상학적 방법에 의해 기술된 의태적 행동들은, “그 어떤 근거도 없다고 그는 적고 있다. 그것들은, 목적인의 성찰에 의해 초래될 수 있는 근거들의 질서에 의해서는 설명 불가능한 것, 이해 불가능한 것의 증거이며, 그것을 증언하고 있는 것이다. 반대로 의태적 행동들은, 그것을 볼 수 있는 것에 있어서는, 진짜배기의 장난질, 사치, 과잉, 초과, 브리콜라주, 낭비, 그리고 과시 같은 성향을 보여주고 있다. 이런 성향들은, 이러저러한 동물들에게는, 그 맹목적인 보존 혹은 생존의 바로 저편에서, 카유아의 말을 반복한다면, “그 어떤 근거도 없이”, 정말로 무용한[각주:54] 방식으로, 스스로를 궁지에 빠뜨리고, 그 포식자에게로 스스로를 드러내는 것이다. 무용함, 하나의 세계의 경계를 정하고, 극히 곤란함에도 불구하고, 하나의 행동의 현상학의 가능성을 시사하고 있다. 그리고 그 저편에서, ‘무용함, 후설의 순수현상학과 현상학적 철학의 이념들 149절의 무화Vernichtung의 모델 위에 수립될 수 있다. 데리다에 의해서도 검토된 동물들 없는 세계의 가설에서 출발해, 동물과 공-존재하는 것에 관한 하나의 현상학의 가능성을 시사하고 있다. ‘무용함은 그 자체에 의해서, 1929-1930년 강의에서의 세계의 가난함의 가난함을 파헤친다. 만약 동물들이 사건의 세계를 갖고 있다면, 그들도 또한 세계형성적weltbildend이라고 규정될 수 있을 것이다. , 세계를 형성하는 자 혹은 만드는 자, 그들의 무용한세계를 형성하고 만드는 자라는 것이다. 그렇지만 조심해야 한다. 동물적 세계형성Weltbildung은 현존재에 의해 이뤄지는 형성과의 사이에는 전혀 관계가 없다. 최악의 것은, 동시에 심연적이며 결정 불가능한 이질성과 비연속성의 분명한 명증성에 반하여, 다소간 생물학주의적인 동질성이나 연속성을 재건하려는 것이다.

내가 여기서 소묘하는 선은, 특히 하이데거의 독해에서 작동하고 있는 밀어 올림[앞에 내세움]이나 확대의 운동을 발전시키는 것이다. 짐승은 무논리적[alogon]’이다, 짐승은 왜-없이이다. 이 두 개의 언표 사이에, 얇은 막처럼 형이상학적인 것을 시학적인 것으로부터 분리시키는 작은 차이가 있다. 하이데거에 반하여 읽혀진 하이데거는, “세계의 가난함에 반하여 왜 없이를 울려 퍼지게 함으로써, 어느 정도까지는, 이 반전과 다른 이해를 가능케 한다. 동물을 로고스 없는 존재로 보는 몹시나 박탈적인 고전적 규정에 반하여, 동물의 왜-없이는, 스스로의 몽롱체재로 전도시키는 동물들에 의한, 그들의 세계의 시학-성찰적인 어떤 주거에 관한 가설을 열어젖힐 수 있을지도 모른다. 동물들은 근거의 십자가이며, 어떤 근거-없는 근거의 수수께끼이며, 1955-56년의 강의가 그것을 말하는 것도 없는 채로, 그로부터 동물들을 배제했으나 부분적으로 접근한, ‘의 물음으로부터의 해방의 외침이다. 대답을 귀찮아하는 것과 <동물>은 같은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 동물들은 스스로가 그렇다는 것에 의해서, <동물>을 부정한다, 왜냐하면, 그들은 스스로가 그렇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첫머리에서 지나가는 길에 보여준 것인 양, 다음과 같이 말하도록 유혹되고 있다. , 동물들은, 그들이 동물어-되기에 있어서, 목적론을, 목적원인설을, 휴머니즘을, 유기체론을, 인간중심주의를, 기계론을, 인간에 의한 나르시시즘을, 형이상학의 전통을, 전통적 정의들을, 개념들과 범주들을, 한계들과 대립들을 탈구축한다. 그러나 그들은 지식 없이, 근거 없이, 왜 없이, 북도 나팔도 없이 몰래 탈구축을 하는 것이다. 어떤 순간, 어떤 눈빛에 있어서, 그것 자체는 응답을 요구하는 물음이라는 것이 아니고, 물음에 집어던져진 -Augenblick에 있어서 동물들은 탈구축하는 것이다. 동물적 탈구축은, “살아 있는 것과 죽은 것 사이의 관계들의 조직의 다양성, 삶과/또는 죽음의, 유기적인 것과 무기적인 것의 형상들에 있어서의, 분리하기가 점점 더 어려워지는 복수의 계règnes의 사이에서의 조직과 비조직의 관계들의 다양성a multiplicity of organizations of relations between living and dead, relations of organization or lack of organization among realms that are more and more difficult to dissociate by means of the figures of the organic and inorganic, of life and/or death[각주:55]조야한 나체화dénudation brute”, 알몸의 제시이다. 데리다의 탈구축은, 그 초기[처음]부터, 이 동물적 탈구축에 정의를 되돌려준다[되갚아준다]. 그것은 결정 불가능한 것의 에크리튀르에 의해, 관념의 커플들의 교란에 의해, 정의로부터 법권리로 향하려고 하는 운동처럼, 동물에서 인간으로, 혹은 <동물>에서 동물들로 향하는 운동의 전도에 의해, 그리고 탈구축의 아포리아학에 의해 정의를 되갚아주는[되돌려주는] 것이다. 법의 힘에 포함된,[각주:56] 특히 1법권리에서 정의로에서의 몇 가지 논의를 꺼내들어, 그것을 동물적 탈구축의 주제에 있어서도 그대로의 형태로 작동시키는 것을 쉽게 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으로부터, 동물에서 인간으로 이행하는 것이 문제가 되는 것은 결코 아니라는 것,[각주:57] 하물며, 한쪽을 도려냄으로써 다른 쪽에 고유한 것을 부정적으로 만들어내는 온갖 없이에 의해, 일회성으로 결정될 수 있는 양자 사이의 가짜-한계에 머무는 것이 문제가 되는 것은 결코 아니라는 것이 이해될 것이다. 아포리아의 공간이, 이것들의 보증된 통과와 확고한 경계선을 폐지한다. 그것은 브라운 운동 혹은 시적이고 우연적인 행보를, 간신히 소묘하는 것이다.

동물적 탈구축은, 이처럼, 동시에 <동물>의 탈구축 가능성(그리고 물론 마찬가지로 <인간>의 탈구축 가능성)과 동물들의 탈구축 가능성에 의해 가능해질 것이다. 이것은, 탈구축 가능한 법권리와 탈구축 불가능한 정의 사이의 관계와 동질적인 것이다. 동물적 탈구축은, 이처럼 동물-존재의 경험으로서의 불가능한 것의 경험, “모든 개념에 반역하는 실존une existence rebelle à tour concept[각주:58]으로 돌려보낼 것이다. 비록 동물의 고통의 반박하기 어려움, 그 탈구축 불가능성으로부터, 탈구축의 불가능한 운동을 가능케 하는 어떤 추진력을 가리키고 있다고 하더라도, 나는 그것을 경험하는 것은 결코 할 수 없다. 더구나 동물적 탈구축은, 나를 탈구축적인 아포리아의 등록부에 머물게 하기 위해, 동물들/인간들의 한계의 결정 불가능한 것의 시련으로 돌려보낼 것이다. 데리다에게 이 아포리아의 등록부의 변조(転調)는 대부분 제한 없이 확장 가능한 것이다. 용서할 수 없는 것의 용서, 거짓말, 증언, 환대 혹은 또한 번역에 있어서, 어떤 불-가능한 것이 문제가 되는 것이다. 동물의 <무용함>이 자기 자신을 그런 것으로 하는 것, 즉 결정 불가능한 것으로 하는 것은 단정적 결단에 의해, 그리고 그 결단에 있어서, 이번에는 꽤 극복하기가 불가능하다. 마치 거기에는 두 개의 기슭밖에는 없는 것처럼, 어떤 기슭 혹은 반대 기슭 중 어떤 하나를 위해 안쪽에서부터 결단하는 결단은, <동물성>을 그 <본질>에 있어서 주관적으로 규정할 수 있다고 믿고 있는 모든 흔들림 없는 확신의 탈구축에 의해, 이른바 작동되고, 좀먹어지고, 빙의되어 있을 것이다. 탈구축 그 자체에 의해 초래되는 결정 불가능한 것 혹은 단정 불가능한 것은, ‘정의들에 있어서의 모든 안정성의 부재를 떠맡기, 동물들과 인간들을, 끝도 없이 반대하는 본성이나 특성으로 돌려보내기의 불가능성을 떠맡기를, 탈구축에 대해 정한다고 말할 수 있다. 달리 마랗면, “동물의 정념=수난, 근본적이고, 불확실하고, 끝없는 파악 불가능성을 스스로 떠맡는 것을 탈구축에 대해 정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가끔 데리다는, 그 자신이 그것에 등을 지는 경우가 있다. 예를 들어, 데리다가 동물-존재를 그것에 연결하는 실존은 모든 개념에 반역한다라는 문장은, 여전히 너무 많이 말하며, 혹은 너무 서두르며, 결정 불가능한 것을 너무 빠른 미숙아 출산 쪽으로 재촉하고 있다. 체재의 한순간에 그치기weilen, 동물적 실존의 -냐하면, 모든 반란보다 이전의 것이다. 그리고 아마 이 체재는, 이것은 벤담의 그들은 시달릴 수 있을까?Can they sufer를 그 토대 자체에 있어서 흔드는 것인지도 모르지만, “--없다는 것ne-pas-pouvoir밖에는 할 수 없는 동물들에 관해서는, 그런 것〔=동물의 고통만이 사고될 수 있다고 하는 것, 그렇게 생각하는 것을 금지한다는 것이다. 사실을 말하면, 동물은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알 수 없다, 그리고, 내가 여기서 모방하는 윤리학의 유명한 표현에 있듯이, “동물들에 관련된, 모든 지각 판단을, 모든 대상 판단을 더 이상 중단할 필요가 있는지도 모른다.

데리다의 동물의 정념=수난. 이 대격적이고 주격적인 이중의 속격[각주:59]동물을 쫓다의 철학적 기획을, 하이데거의 단어를 고쳐 다룬다면, 현기증에 잘 결부시킬 수 있으며, ‘동물어(動物語)’를 관찰하는 것=데리다에 있어서는, 그럴 때마다 그의 것인 듯한 장난질의 심연에 잘 결부시킬 수 있다. 그렇지만 적어도 마찬가지로, 이 열정=수난은 동물들 자신의 것이기도 하며, 그것은 그 바닥이 바닥없는 어떤 눈빛, 죄가 없는 동시에 아마 잔혹하며, 아마 느끼기 쉽지만 무감동이기도 한, 선량한 동시에 악의가 있고, 해석 불가능, 독해 불가능, 결정 불가능, 심연적이고 비밀의 눈빛, 즉 완전히 다른 눈빛un regard dont le fond reste sans fond, à la fois innocent et cruel peut-être, peut-être sensible et impassible, bon et méchant, ininterprétable, illisible, indécidable, abyssal et secret : tout autre[각주:60]으로 향한 누군가의 눈빛 이후, 그렇다. 이때, 전에 없을 정도로, “탈구축은 정의이다.”[각주:61] “동물의 생명뿐만 아니라, 함께-고통compassion의 감정에 이르기까지 침해하는 자,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 이 연민에 대한 반박할 수 없는 증언에 호소하는 자ceux qui violent non seulement la vie animale mais jusqu’à ce sentiment de compassion et, d’aurre part, ceux qui en appellent au témoignage irrécusable de cette pitié와의 사이에서 행해지는 연민을 주제로 하는 전쟁une guerre au sujet de la pitié[각주:62]에서, 탈구축은 철학적이고 진보적인 입장을 만들어내게 될 것이다. 늦게 말하지만, 이것은 결코 그 가장 작은 이점이 아니다. 동물은 무인간적인 것이다. 그리고 무인간적인 것은, 자기보다 조금 먼 곳을 가리키며, 모종의 이타지시적異他指示的hétérodéictiqie이며, 인간과 비인간 사이의 모든 경계의, 시학적인 바로 앞[手前]en-deçà의 아포리아적 형상이다.[각주:63] 우리 서구의 선통에서, 경계 그 자체의바로 앞[手前]은 선(인간의 인간성)과 악(그 짐승성인 인간의 비인간성)의 저편의 성찰을 새롭게 개시하는 것을 촉구할 수 있을 뿐이다. 동물이 그러한 이 무인간적인 것에 대해, 데리다는, 어떤 똑같은 행태에 의해, 그 모든 형이상학적 자원과 연쇄를 분해하면서, ()에 고유한 자원의 탐구를, 항상 멀리 도망치는 누군가, 혹은 무엇인가의 극한적인 장난질의 탐구를 행하는 것이 된다.

 

 

Gérard Bensussan, « Jacques Derrida. Une poétique de lʼanimalité : Sur lʼanhumain ». Reprinted by permission of Gérard Bensussan

 

翻訳桐谷慧東京大学ストラスブール大学博士課程





 

  1. * [일역자] 본고의 인용에 관해서는, 기존 번역을 참조하면서, 문맥을 따라 번역어를 바꾸었다. 또 원문은 하이데거의 프랑스어 번역본을 참조하고 있으나, 독자의 편의를 고려해 독일어 원문의 출전을 기재한다. 1) 〔일역자〕 ‘무인간적인 것’의 원어는 anhumain이며, 윤리적인 함의를 지닌 ‘비인간적인〔inhumain〕’이라는 단어에 대해, 단순히 인간이 아니라는 의미가 강하다. 또한 ‘동물〔animal〕’이라는 단어와 철자와도 유사성을 갖고 있다. [본문으로]
  2. [주2] Jacques Derrida, L’animal que donc je suis, Galilée, 2006, p.50〔『動物を追う, ゆえに私は(動物で)ある』, 鵜飼哲訳, 筑摩書房, 2014년, 61頁〕. 나는 대부분의 대목에서 1997년에 세리지(Cerisy)에서 열린 강연의 제1부, 즉 『動物を追う』의 15부터 77쪽에서 채록된 부분에 집중하기로 한다. 왜냐하면 이 부분은, 그 넓이를 조금도 잃지 않으며, 논의를 압축하고 있기 때문이다. [옮긴이] 이 책의 1장은 [동물, 그러니까 나인 동물]로 <<문화과학>>에 번역 수록되었다. [본문으로]
  3. [주3] Ibid., p. 18〔同前, 17頁〕. [본문으로]
  4. [주4] 〔일역자〕 ‘생각에 잠겨 있다’의 원어는 pensif. 이 단어는 ‘사고〔pensée〕’와의 연관을 상기시키는 것인데, 단순히 무엇인가를 사고하고 있다는 것뿐 아니라, 그 사고에 몰두하는 모습을 나타내고 있다. 마찬가지로, 그 몰두하고 있는 대상이, 바깥쪽으로부터의 관찰에 의해서는 파악되지 않는다는 것도 함축한다. [본문으로]
  5. [주5] 〔일역자〕 테오도르 피셔〔Theodor Vischer 1807-1887〕는 독일의 청년헤겔파 철학자. ‘대상의 장난질’이란, 사물 등을 분실했을 때, 그 대상 자체가 ‘장난질’에 의해 도망쳤다고 생각하는 개념. 본문에서는 인간의 파악[포착, 쥠]으로부터 동물이 도망치는 사태를 가리키기 위해 사용되고 있다. [본문으로]
  6. [주6] 〔일역자〕 슐레겔의 이 텍스트는 다음에 수록되어 있다. Friedrich Schlegel, Kritishce Schriften, Carl Hanser Verlag, 1958. [본문으로]
  7. [주7] [옮긴이] 본문에도 있듯이, Vorhandensein과 Zuhandensein를 국내에서는 각각 ‘눈앞의 존재’와 ‘손안의 존재’로 옮겨진다. 그러나 이렇게 옮길 경우 ‘손’(handen)이라는 용어가 제대로 살아나지 않는다. 이 때문에 일본에서는 번역어를 바꾸어 각각 手前存在(손앞의 존재)와 手許存在(손에 잡히는 존재)로 옮기고 있다. [본문으로]
  8. [주8] J. Derrida, «De lʼesprit» [1987] in Heidegger et la question, Flammarion, 1990, p.23〔『精神について:ハイデッガーと問い』[1990] 港道隆訳, 平凡社, 2010年, 25頁〕. 데리다는 손의 문제에 관해 『사유란 무엇인가』와 파르메니데스에 관한 세미나를, 그리고 『형이상학의 근본개념들』에서의 동물의 ‘세계의 가난함’에 관한 유명한 명제를 참조하고 있다. [본문으로]
  9. [주9] J. Derrida, Glas, Galilée, 1974, p.35. [본문으로]
  10. [주10] J. Derrida, L’animal que donc je suis, op. cit., pp.185-186〔『動物を追う, ゆえに私は(動物で)ある』, 前掲, 248頁〕. [영어판 p.135] [본문으로]
  11. [주11] J. Derrida, « La main de Heidegger » in Heidegger et la question, op. cit., p.193. [옮긴이] 이 텍스트는 Psyché : Inventions de l’autre(Paris: Galilée, 1987)에 수록되어 있다. 영어판은 PSYCHE : Inventions of the Other, Volume II, Stanford University Press, 2008과 “Geschlecht II : Heidegger's Hand”, in Deconstruction and Philosophy: The Texts of Jacques Derrida, ed. John Sallis(Chicago: University of Chicago Press, 1987)가 있다. [본문으로]
  12. [주12] Martin Heidegger, Zur Auslegung von Nietzsches II. Unzeitgemässer Betrachtung "Vom Nutzen und Nachteil der Historie für das Leben" [1938/1939], GA 46, Vittorio Klostermann, 2003, S. 8 sq. [본문으로]
  13. [주13] J. Derrida, Glas, op. cit., p. 35. [본문으로]
  14. [주14] Cf. J. Derrida, L’animal que donc je suis, op. cit., pp.49-50〔『動物を追う, ゆえに私は(動物で)ある』, 前掲, 59-61頁〕. [본문으로]
  15. [주15] 〔일역자〕 pourquoi라는 단어는 의문사로서는 ‘왜?’라는 의미를 가지며, 명사로서는 ‘이유’라는 의미를 갖는다. 물론, 여기서는 이 두 개의 의미가 모두 포함되어 있다. 본론에서는 ‘왜냐하면〔parce que〕’과의 대비가 중요하다는 것을 감안해, 원칙적으로 pourquoi는 ‘왜’라고 번역하고, 문맥에 따라 ‘왜=이유’라고 했다. [본문으로]
  16. [주16] M. Heidegger, Der satz vom Grund [1957], GA10, Vittorio Klostermann, 1997, S. 54 sq〔『根拠律』辻村公一訳, 創文社, 1962 年, 74頁以下〕. [본문으로]
  17. [주17] 〔일역자〕 독일어의 Grund의 번역어라는 것을 고려해, raison은 원칙적으로 ‘근거’라고 번역한다. 그렇지만 당연히 이 단어는 ‘이성’이나 ‘이유’라는 의미도 갖고 있다. [본문으로]
  18. [주18] 〔일역자〕 rendre raison은 문자 그대로 번역하면, ‘근거를 도로주다[갚아주다, 되돌려주다]’이다. 이 직전에 보이는 rendre compte〔‘보고하다’ 혹은 ‘설명하다’라는 정도의 의미를 갖는다〕라는 표현에서와 마찬가지로, ‘갚다’, ‘답례로 주다’라고 번역할 수 있는 rendre라는 단어가 사용되는 것에 주의가 필요하다. 조금 앞의 대목에서 저자는, 데리다의 논의에서는 동물이 갖고 있지 못하다고 전통적으로 생각되었던 것을, 동물에 대해 ‘갚아주는[되돌려주는]’ 것이 문제가 되고 있는 것은 아니라고 논하고 있다. [본문으로]
  19. [주19] Ibid., S. 57〔同前, 78頁〕. [본문으로]
  20. [주20] Ibid., S. 62-63〔同前, 86-87頁〕. [본문으로]
  21. [주21] Ibid., S. 178〔同前, 241-242頁〕. [본문으로]
  22. [주22] Ibid., S. 73〔同前, 101頁〕. [본문으로]
  23. [주23] J. Derrida, L’animal que donc je suis, op. cit., p.33〔『動物を追う, ゆえに私は(動物で)ある』, 前掲, 37頁〕. 〔직전의 ‘결코 동물에 의해 스스로가 보고 있는 것을 보지 못했다’라는 문장의 출전은 ibid., p.31〔同前, 35頁〕.〕 [본문으로]
  24. [주24] Ibid., p.23〔同前, 24頁〕. [본문으로]
  25. [주25] 〔일역자〕 ‘냉수’는 맑스의 『공산주의자 선언』의 1장에서 읽을 수 있는 표현이다. [본문으로]
  26. [주26] 섹스투스 엠피리쿠스, 『퓌론주의 철학 개요(ピュロン主義哲学の概要)』 1권 69. 이 개[犬]의 삼단논법은, 그것이 어떻게 생각될 수 있어도, 후각이 준-계산적 이성의 대신이 된다고 간주되는 그들의 추론 그 자체에 의해, 들뢰즈가 그의 소망으로부터, 동물의 모든 사고에 있어서의 동물에 대한 동물의 관계를 갖는다고 부른 것으로, 그리고 데리다가 그 나름의 책임과 방식으로 다른 식으로 다시 다루는 것으로, 참가할 수 있는 것이다. [본문으로]
  27. [주27] 〔일역자〕 aloga는 그리스어로 ‘짐승’을 의미하며, 문자 그대로는 ‘이성이 없는 것’이다. [본문으로]
  28. [주28] M. Heidegger, Der satz vom Grund, op. cit., S. 185〔『根拠律』, 前掲, 251頁〕. [본문으로]
  29. [주29] 〔일역자〕 헤겔은 『법철학』 서문에서 이성을 장미에 빗대고 있다. [본문으로]
  30. [주30] 이 테마에 관한, 엄밀한 해명으로서는 다음을 참조. E. De Fontenay, «La raison du plus fort» in Plutarque, Trois traités pour les animaux, P. O. L, 1992, pp.56-57. [본문으로]
  31. [주31] J. Derrida, L’animal que donc je suis, op. cit., p.49〔『動物を追う, ゆえに私は(動物で)ある』, 前掲, 59頁〕. [본문으로]
  32. [주32] [옮긴이] 歲差運動. <물리> 물체의 회전축이 회전을 하는 운동. 기울어진 팽이의 회전축이 만드는 원뿔형의 운동. <지리> 지구의 자전축이 궤도에 대하여 23도 30초의 기울기를 가지고 자전하는 운동. [본문으로]
  33. [주33] M. Heidegger, Der satz vom Grund, op. cit., S. 186〔『根拠律』, 前掲, 253頁〕. [본문으로]
  34. [주34] 〔일역자〕 hébétude는 하이데거가 사용하는 독일어 Benommenheit의 번역어이다. Benommenheit는 『형이상학의 근본개념들』의 일역본에서는 ‘사로잡힘’으로 번역되어 있다. [옮긴이] 일본에서 hébétude는 ‘망연자실’로 옮겨지기도 하고, 하이데거의 용어를 좇아 ‘방심’이라고 번역되기도 한다. ‘몽롱’은 좀 애매한 번역어 같다. [본문으로]
  35. [주35] M. Heidegger, Die Grundbegriffe der Metaphysik : Welt –Endlichkeit –Einsamkeit [1929-1930], Vittorio Klostermann, 1983, S. 358, 369〔『形而上学の根本諸概念:世界―有限性―孤独』川原栄峰, セヴェリン・ミュラー訳, 創文社, 1998年, 390, 401頁〕. 하이데거를 하이데거에 맞서 사용한다고 하는 내가 여기서 소묘하고 있는 조작은, 레비나스를 레비나스에 맞서서 마구 몰아댐으로써 동물의 ‘얼굴’의 주제에 대해서도 완벽하게 실행 가능한 것처럼 판단된다. 마치 결정 불가능한 것을 재빠르게 단정하려고 하는 것처럼 해서, 『동물을 쫓다』에서 데리다가 위와 같은 가능성을 검토하고 있지 않다는 것은 주목해야 할 것이다. [본문으로]
  36. [주36] J. Derrida, L’animal que donc je suis, op. cit., p.18〔『動物を追う, ゆえに私は(動物で)ある』, 前掲, 17頁〕. [본문으로]
  37. [주37] “알몸의 나를 바라보는 이 고양이 앞에서, 나는 알몸이라는 감각을 더 이상 갖고 있지 않는 한 마리의 짐승으로서 부끄러울까? 혹은 반대로, 알몸이라는 감각을 간직한 한 명의 인간으로서 부끄러울까? 그때 나는 누구일까? 나는 누구의 뒤를 쫓는 것일까? 타자에 대해서가 아니라면, 누구에게 그것을 묻는 것일까? 그리고 아마도 고양이 자신에 대해서가 아니라면?Devant le chat qui me regarde nu, aurais-je honte comme une bête qui n'a plus le sens de sa nudité? Ou au contraire honte comme un homme qui garde le sens de Ia nudité? Qui suis-je alors? Qui est-ce que je suis? À qui le demander sinon à l'autre? Et peut-être au chat lui-même?” Ibid., p.20〔同前, 21頁〕. [본문으로]
  38. [주38] 〔일역자〕 여기서는 poétique와 aporétique라는 유사한 단어가 사용되고 있다. [본문으로]
  39. [주39] J. Derrida, Apories, Galilée, 1996, p.31〔『アポリア』港道隆訳, 人文書院, 2000년, 32-33頁〕. 강조는 인용자. [본문으로]
  40. [주40] 〔일역자〕 plume은 ‘날개’를 뜻하며, 이로부터 바뀌어서 ‘붓’을 가리킨다. 아마 여기서는, 이간이 동물의 ‘날개’를 이용해 쓰고 있다고 하는 함축이 담겨져 있다고 생각된다. [본문으로]
  41. [주41] 이 점에 관해서는 cf. Aicha Liviana Messina, «Publiez-moi, publiez-moi, car je ne suis pas une bête» in Lignes, no 28, 2009. 〔analphabète는 문맹을 의미한다. 그러나 여기서 저자는 짐승을 의미하는 bête라는 단어를 거기에 섞어 넣고, analphabête라고 쓴다.〕 [본문으로]
  42. [주42] Victor Hugo, « Le crapaud » in La légende des siècles. [본문으로]
  43. [주43] Victor Hugo, « Le cheval » in Les chansons des rues et des bois. [본문으로]
  44. [주44] 〔일역자〕 ‘동물어動物語〔animot〕’는 데리다가 『동물을 쫓다』에서 창안한 말. 이 조어에는 몇 가지 노림수가 있는데, 주된 것으로는 ‘동물〔animal〕’이라는 단수형의 개념의 비판을 들 수 있다. animal의 복수형은 animaux이며, animot와 소리에 있어서는 구별할 수 없다. 데리다는 animal이라는 단수형 개념을 비판하면서 animaux의 복수형을 메아리치게 하기 위해 animot라는 단어를 사용한다. [본문으로]
  45. [주45] J. Derrida, L’animal que donc je suis, op. cit., p. 60〔『動物を追う, ゆえに私は(動物で)ある』, 前掲, 75頁〕: “이제 제 텍스트에 차고 넘치는 셀 수 없을 정도의 짐승들의 방문 앞에서 …, 내 기억의 회고록이나 나 개인의 기호의 숲에서 …, 나는 동물들의 무리를 스스로에게 주고 있었다.” ‘동물어〔animot〕’는 단수형의 ‘말〔mot〕’에 있어서는, 복수(複数)라는 것을 듣고 알아채도록 명령한다. [본문으로]
  46. [주46] Ibid., p. 62〔同前, 99頁〕. 강조는 인용자. 마찬가지로 p. 65〔同前, 80-81頁〕도 참조. [본문으로]
  47. [주47] Ibid., p. 53-54〔同前, 65頁〕. [본문으로]
  48. [주48] Ibid., p. 93〔同前, 122頁〕. [본문으로]
  49. [주49] 플라톤, 『정치가』, 263 c-d〔『プラトン全集第三巻:ソピステス, ポリティコス(政治家)』藤沢令夫・水野有庸訳, 岩波書店, 1976年, 211頁〕。 [본문으로]
  50. [주50] Derrida, L’animal que donc je suis, op. cit., p.56〔『動物を追う, ゆえに私は(動物で)ある』, 前掲, 70頁〕. 아마 여기에서, 동물들의 도살 및 축산의 철저한 산업화와, 유대인들에 대한 산업적인 몰살 사이의 관계/비-관계의 물음을 개시해야 할 것이다. 다른 많은 사상가의 저작에 빙의한 후에, 이 물음은 데리다의 텍스트도 가로지른다. 이 매우 어려운 테마에 대해서는, 나는 엘리자베트 드 퐁트네의 고찰로 돌려보낸다. 아마 위고의 시에서 아이들에 의해 잔혹하게 학대당한 두꺼비를 떠올리면서, 막스 자코브는 드랑시(Drancy)에서 쓴 그의 말년의 시의 하나, 「이웃 사랑」에서,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행운의 두꺼비, 너는 노란별을 갖고 있지 않았다!” [본문으로]
  51. [주51] [옮긴이] 일본어로는 ‘なんでもあり’(직역하면 ‘뭐든 있다’)에서도 드러나듯이, 이 표현은 프랑스어의 관용구로 ‘어떤 상황[일]에도 쓸 수 있는’이라는 의미이다. [본문으로]
  52. [주52] Ibid., pp.56-57〔同前, 70頁; 영역판, p.34〕. 이 구절에서는 다양한 철학적 동물지를 볼 수 있는데, 특히 이 열거의 마지막에는, 데리다 자신의 동물지를 볼 수 있다. 그것은 고양이, 개미, 누에, 고슴도치이다. [본문으로]
  53. [주53] R. Caillois, Le Mythe et l’homme, Gallimard, 1938, p. 112 sq〔『神話と人間』, 久米博訳, せりか書房, 1983年, 117-118頁 이하〕. [본문으로]
  54. [주54] 이 ‘무용함’이라는 풍부한 관념을, 나는 안드레아 포테스타에게서 차용했다. 포테스타는 그 의의에 대해 «De lʼinutile. Formes animales» in Le Portique, no 23-24, 2009, pp.21-33라는 제목의 매우 아름다운 텍스트에서 논하고 있다. 그의 결론은 다음과 같다. “동물적 형식들은, 목적론적인 모든 규정을 피하며, 마치 가능한 모든 이성적 포섭과는 상이한 형식들을 현재화하는 사건의 어떤 장을 참조하는 것을 강요하는 것처럼, 동물적 세계를 참조하기를 강요하는 것이다.” [본문으로]
  55. [주55] J. Derrida, L’animal que donc je suis, op. cit., p.53〔『動物を追う, ゆえに私は(動物で)ある』, 前掲, 65頁〕. [영어판, p.31.] [본문으로]
  56. [주56] J. Derrida, La force de loi, Galilée, 1994〔『法の力』堅田研一訳, 法政大学出版局, 1999年〕. [본문으로]
  57. [주57] 데리다는 이런 혐의에 반발했으며, 그 혐의가 그에게 걸릴 수 있다는 것에 대해서 당연히 분개하고 있다. Cf. J. Derrida, L’animal que donc je suis, op. cit., pp.51-52〔『動物を追う, ゆえに私は(動物で)ある』, 前掲, 62-63頁〕. [본문으로]
  58. [주58] Ibid., p.26〔同前, 28頁〕. [본문으로]
  59. [주59] 〔일역자〕 주격적 및 대격적 속격이란 라틴어의 문법용어로, 원문에서의 «La passion de lʼanimal de Derrida»라는 문장에 대해 설명하고 있으며, 단순화한다면, 데리다가 동물에 대해 passion을 갖고 있는 동시에, 동물 자신도 또한 passion을 갖고 있다는 사태를 가리키고 있다. [본문으로]
  60. [주60] J. Derrida, L’animal que donc je suis, op. cit., p.29〔『動物を追う, ゆえに私は(動物で)ある』, 前掲, 32頁〕. 없이, 동시에, 아마, 〔인용문에서 인정되는 이런 단어들은〕, 우리를 바라보고 있는 어떤 짐승의 수수께끼를 말한다. [본문으로]
  61. [주61] J. Derrida, Force de loi, op. cit., p.35〔『法の力』, 前掲, 34頁〕. [본문으로]
  62. [주62] J. Derrida, L’animal que donc je suis, op. cit., p.50〔『動物を追う, ゆえに私は(動物で)ある』, 前掲, 60-61頁〕. [본문으로]
  63. [주63] 〔일역자〕 저자에 따르면, 여기서의 ‘手前〔en-deçà〕’이란 경계선의 ‘맞은쪽’과 대비되는 ‘手前’이 아니라, 그런 경계선 그 자체의 ‘手前’를 가리킨다. [본문으로]
Posted by 상겔스 상겔스


티스토리 툴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