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래할 생명권력론을 위해


사상, 2013년 2

 

 

목차

사상의 말

히가키 타츠야(槍垣立哉)

(좌담회) 도래할 생명권력론을 위하여 (2/3)

히가키 타츠야(槍垣立哉)・카스가 나오키(春日直樹)이치노카와 야스타카(市野川容孝)

II. 생명권력론의 최전선

아감벤을 어떻게 생각할까

* 지금 아감벤의 이름이 나왔는데요, ‘생명권력론의 최전선을 생각할 경우에는, 특히 2000년대 이후 압도적인 존재감을 보여주는 아감벤의 논의를 무시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우선 아감벤 얘기부터 시작할까요?

上村忠男에 대한 이미지 검색결과

조르조 아감벤


히가키 : 아감벤 같은 존재가 이탈리아에서 나온 것은 솔직히 말해서 의외였습니다. 확실히 이탈리아에는 네그리 같은 사람이 있지만, [네그리는] 들뢰즈나 가타리의 동료였으며 프랑스의 현대사상이나 좌익사상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최근에도 잔니 바티모(1936년 생)약한 사고(1983)가 번역되었듯이, 우에무라 타다오(上村忠男) 씨나 오카다 아츠시(岡田溫司) 씨의 정력적인 소개도 있지만, 철학 영역에서 이탈리아가 이 정도로 주목을 받은 것은 처음인 듯 싶습니다.

上村忠男에 대한 이미지 검색결과                         photo

우에무라 타다오(@tadao_uemura)                    오카다 아츠시

이치노카와 : 왜 아감벤이 부상한 걸까요?

히가키 : 그 이유는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아우슈비츠의 남은 것(1998)이 잘 팔렸다는 건 있을 수 있는 일이지만, 그러나 이것이 과연 일본만의 현상일까 생각해보니, 파리의 서점에도 아감벤코너에 책이 산처럼 쌓여 있더군요. 시기적으로도 그렇게 일본과 동떨어져 있지는 않을 거예요.

카스가 : 난민 문제를 포함해 현지 조사를 하는 사람들도 자주 인용하고 있습니다.

히가키 : 그렇군요. 다만, 아감벤은 어떻게 해석할지가 어려워요. 아우슈비츠의 남은 것에서는 위르겐 하버마스(1929)나 한스 요나스(1903-93)에게 [공격과 비판의] 칼날을 향하고 있습니다. 후안무치한 일을 저지른 독일인 무리들은 아직도 이런 얘기를 하고 있고, 그것으로 문제가 끝났다고 생각하다니 놀랍네, 이런 식의 격렬한 독일 비판을 하고 있습니다. 이렇게까지 말할 수 있다는 것은 단순하게 말해서 매우 대단하다고 생각합니다.

  

  아감벤이 처음 주목받은 것은 호모 사케르아우슈비츠의 남은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푸코의 논의를 넘어서 새로운 것을 하겠다고 드는 사람인가 싶더니, 실상은 다른 것 같아요(웃음). 졸업논문에서는 시몬 베유(1909-43)를 다루고, 1960년대가 되면 하이데거의 강의에 참석하고 이탈리아어판 벤야민 전집』을 감수했습니다. 2000년대가 되면 로마세계의 종교론에 생명정치의 문제를 접목시키고, 기독교 세계로부터 뭔가 종횡무진으로 내달리는 작업을 하게 됐습니다. 이런 형태로 세계의 주요 장면에 나온 이탈리아인은 꽤 드물 겁니다. 특히 철학의 영역은 고대그리스, 중세를 별도로 치면, 영미계와 프랑스계와 독일계가 차지하고 있습니다. 대학의 강좌에 대한 인사를 보더라도 확연합니다만, 이것은 어쩔 수 없는 제국주의이죠. 그런 상황을 아감벤 같은 존재가 교란시킨다는 것은 매우 큽니다.

카스가 : 과연 그렇죠.

히가키 : 제 선생이었던 사카베 메구미(坂部恵) 씨가 말년에 일본철학회에서, 전지구화 등을 얘기하면서도 왜 일본의 철학과에서는 영미계와 프랑스계와 독일계라는 세 가지에서 선택을 하게 만들까, 이런 시시한 짓은 이제 그만두는 편이 좋다, 논문은 어느 나라 말로 써도 좋고, 베트남 철학이어도 좋다,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서두에서도 조금 언급했습니다만, 이것을 아감벤은 실현해버렸습니다. 이것은 향후 철학자의 모델이 되며, 아마 지금부터 앞으로는 중국인이나 한국인으로부터도 아감벤 같은 역할을 맡는 철학자가 나오겠죠.

   그리고 오늘의 화두와 관련해 중요한 것은, 아감벤이 생명정치와 종교를 강하게 연관시켰다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푸코는 사목권력(pouvoir pastoral)’이라는 개념을 제시했는데, 이것은 아주 큰 문제이고, 요컨대 유럽의 권력은 유대-기독교적 권력이라고 합니다. 이 개념은 푸코가 1978년에 두 번째 일본방문을 했을 때의 강연에서 다뤄지기도 했으며, 일본에서는 굉장히 유명하지만, 실제의 푸코는 그 후 거의 전개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을 아감벤은 진지하게 씨름하고 있고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이치노카와 : 제가 아감벤의 이름을 처음 들은 것은 다자키 히데아키(田崎英明) 씨한테서였습니다. ‘벌거벗은 생명개념도 다자키 히데아키 씨에게 배웠다고 기억합니다. 이후 번역으로 아우슈비츠의 남은 것, 목적 없는 수단, 호모 사케르를 읽었고, 서평도 두개 정도 썼습니다만, 아감벤은 사회학자가 사용하기는 매우 힘들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실제로 오오츠 마사키(大津真幸) 씨 등을 제외하면, 사회학에서 아감벤에 의거해서 뭔가를 말하는 사람은 매우 적다고 생각합니다. 푸코라면 근대가 문제였고, 그것에 걸터앉아 사회학에서 뭔가 말하는 것은 비교적 쉽습니다만, 앞에서도 얘기가 있었듯이, 아감벤은 로마에서 시작하기에, 결국은 19세기 이후에 생겨났을 뿐인 사회학적 상상력으로는 따라잡기 어려운 대목이 있습니다. 푸코의 경우도, 어떻게 생각되든 국민국가, 에티엔 발리바르(1942)가 말한 바의 국민적이고 사회적인 국가”(복지국가)를 전제하고 있습니다.

히가키 : 말씀하신 그대로입니다.

이치노카와 : 아감벤의 호모 사케르2002년에 독일어 번역본이 나왔고, 이후에도 다른 저작들이 속속들이 번역되고 있습니다만, [독일이] 다른 나라들과 조금 다를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독일에서는 아우슈비츠의 문제를 말하는 이상, 아감벤에게 귀를 기울이지 않을 수 없었다는 것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아감벤의 나치즘 해석 방식에는 저조차도 실증적 수준에서 이의를 제기하고 싶은 대목이 꽤 있으며, 조금 허풍을 떨고 있다는 느낌이 있습니다.

히가키 : 확실히 철학자 특유의 허풍을 떨고 논리가 성긴 대목이 있습니다(웃음).

이치노카와 : 그리고 칼 슈미트를 그렇게 원용하고 있는 것도, 독일에서는 좀처럼 쉽게 받아들이기 어려운 부분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버마스가 전형입니다만, 슈미트에 맞서서 생각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카스가 : 저는 최근 피지에서 일종의 노인 홈(home) 같은 특이한 시설에서 조사를 하게 되면서부터 벌거벗은 생명이라는 말이 편리해서 몇 번 사용한 적이 있습니다. 다만, 이것은 이치노카와 씨와 같은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지금은 한 가지로 사용할 수 없다고 할까, 인류학자에게는 지금 한 가지의 리얼리티가 없네요. 예쁜 허구를 만들고 있지만, 환기력이 없습니다.

   그렇지만 주권자를 권력에 외부는 없다고 선언하는 인간으로 제시한 것은 재미있다고 생각합니다. 푸코는 외부가 없다고 말했지만, 아감벤은 사이라고 함으로써 외부를 보여주고, 필연적으로 법치국가의 역설을 제시합니다. 인간들의 편에서 보면, 역설이 있습니다만, 신이 주권자라면 그런 역설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감벤의 외부에는 처음부터 인간이 들어 있으며, 인간화된 외부를 초월적인 것으로서 말합니다. 그런 사이밖에 있을 수 없다고 말함으로써, 이것은 이것으로 알기 쉽습니다만, 그것이 아감벤의 한계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히가키 : 굳이 아감벤을 추켜세운다면, 주권권력의 문제를 다시 거론한 것이 컸습니다. 푸코는 이제 주권권력은 없어진다는 식으로 읽을 수 있는 것을 말했지만, 실제로 주권국가는 있으며, 전구화되고 있다고 해서 정말로 없어질지 여부는 모릅니다. 그런 상황에서 주권권력을 다시 다룬 것은 역시 크다=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정말로 사이인 것이죠. 삶과의 역설로 주권권력을 내고, 동물과의 역설로 인간을 냅니다. 그 제기방식이 멋지지만, 실증연구로서는 어디까지 사용할 수 있는가라는 것이기도 합니다. 말하자면 문학적 비유에 불과한 부분이 확실히 있습니다. 그래서 아우슈비츠 이야기만 하더라도 나치즘에 대한 실증연구를 하고 있는 사람에게 의미가 있느냐 없느냐보다, 종교 얘기와 같은 것이라고 생각하거든요. 거기에는 종교 얘기로서의 리얼리티가 있고, 나치즘도 1000, 2000년도 지난 후에는 종교 얘기가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카스가 : 종교 얘기라고 하셨는데, 맞는 말일 수도 있습니다. 

히가키 : 그런 점은 아감벤에게 일관되게 보인다고 생각해요.

이치노카와 : 일본에서도 예를 들어 홈리스의 사람들이 처한 상황을 생각할 때 벌거벗은 생명이라는 말에는 강한 리얼리티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런 문제를, 예를 들어 사회학적으로, 구체적으로, 실증적으로 파고들어갈수록, ‘벌거벗은 생명이라고 말하는 것으로 끝날 수 없게 된다고 생각합니다.

카스가 : 인류학의 현장에서도, 모두에게서 버림받고 아무도 모르게 죽어가는 사람들이 있지만, 제대로 취급받는다면 벌거벗은 생명이란 있을 수 없다, 거기에는 확실히 의미가 있으며 비오스가 있다는 게 됩니다.

이치노카와 : 제 감각도 그것에 가깝습니다.

 

벌거벗은 생명과 벤야민

히가키 : 아감벤은 벌거벗은 생명(nuda vita)”이라는 개념을 발터 벤야민(1892-1940)폭력 비판을 위하여에 있는 단순한 생명(das blosse Leben)”이라는 표현에서 빌려 왔다죠?

이치노카와 : 그렇습니다.

히가키 : 그런데 벤야민은 단순한 생명에 관해 부정적으로 쓰고 있고, 그것을 중요한 개념으로 채용한 아감벤의 의도를 도무지 모르겠어요. 더 말하면, 이 저작에서 취급되고 있는 신적 폭력자체, 상식적으로 읽으면, 그것에 의해 벤야민이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지를 잘 모르겠고, 수수께끼로 가득 차 있어요. 적어도 일본에서 신적 폭력은 아나키스틱한 폭력으로 이해되고, 그렇기에 1960=70년대의 일본에서는 국가의 철폐 등을 향한 논의로서, 좌파적 맥락에서도 유행했습니다. 그런데 이치노카와 씨의 독해는 다르던데요?

이치노카와 : 다릅니다.

히가키 : 우선 폭력 비판을 위하여」가 로자 룩셈부르크(1871-1919) 추도문이라고 보시는군요.

이치노카와 : 그 점에 관해서는 저는 확신하고 있습니다. 벤야민은, 물론 로자 룩셈부크르만을 염두에 둔 것은 아니겠습니다만, 그가 게르숌 숄렘(1897-1982)에게 보낸 편지(19201229)에 비춰봐도, 로자 룩셈부르크가 이 때의 벤야민의 염두에 없었다는 것은 절대로 없어요.

히가키 : 또 하나는 신적 폭력에 대해서, 이치노카와 씨는 자크 데리다(1930-2004)를 비판하면서, 이는 의회제 민주주의를 구하는 폭력이라고 말씀하시네요.

이치노카와 : 굳이 말한다면 그렇습니다.

히가키 : 이것은 꽤나 아슬아슬한 독해 아닙니까?

이치노카와 : 그렇다고 생각합니다. 줄타기 곡예를 벌이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미 줄에서 떨어지고 있다는 비판도 있겠지만(웃음).

히가키 : 일반적으로 신적 폭력은 메시아적 폭력, 즉 세계를 모조리 망가뜨린다고 일컬어지는 폭력이라고 읽히고 있습니다. 그런데 신화적 폭력은 피 냄새를 풍기는 폭력이기는 하지만, 신적 폭력은 피 냄새가 나지 않는 폭력이라고 얘기됩니다. 그리고 단순한 생명은 서양근대에서 지난 수십 년 동안의 논의에 지나지 않지만, 신적 폭력은 모든 생명에 있어서의 것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벤야민은 조르주 소렐(1847-1922)을 높이 평가하는 것처럼 보이는데, 보통 소렐은 아나키즘으로 이해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치노카와 씨는 소렐과 달리, 벤야민이 말하는 신적 폭력이 의회제 민주주의를 잇는 폭력이라고 말합니다.

이치노카와 : 그렇습니다. 하지만 저는 로자 룩셈부르크도 비판한 유일-의회주의(-議会主義)”를 제창하는 것이 전혀 아닙니다. 그건 오해하지 않았으면 합니다. 그리고 저더러 말하라 한다면, 소렐이 폭력론(1908)에서 자신의 생디칼리즘을 분명히 신화(mythe)’라고 표현하고 있고, 다른 한편, 벤야민은 신화적(mysthisch)’이 아니라, 일부러 이것과 구별해서 신적(göttlich)’이라고 말하고 있기에, 그것을 무시하고 벤야민과 소렐의 생각을 그대로 같다고 풀이하는 것은 소박하다고 생각하고 이상하다고 여기는 것입니다.

히가키 : 다만 역사의 개념에 대해서를 읽으면, 우리가 살아온 역사 등은 지구의 역사로부터 보면 단 몇 초에 불과할 뿐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시간의 막대기가 균형을 이뤄 현재시(Jetztzeit)”가 되며, 모든 시간이 수평이 되는 곳에서, 모든 과거의 것이 일어나서 구제된다. 이것은 엄청나게 종교적이고 메시아적인 비전입니다. 이것과 신적 폭력이 이어지지 않을 수 없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이치노카와 : 그것은 인정합니다. 다만 주의해야 할 것은, 첫째로, 벤야민이 Zur Kritik der Gewalt(폭력 비판을 위하여)에서 논하는 ‘Gewalt’라는 독일어에는, 예를 들어 ‘Gewaltenteilung’삼권 분립을 의미하듯이, “정당성을 갖춘 권력이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벤야민은 ‘Gewalt’라는 말에 폭력뿐 아니라, ‘정당성을 갖춘 권력’, 라틴어로는 ‘potestas’라는 의미를 담아내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앞의 아렌트 얘기에서 히가키 씨는, 철학은 권력도 자연력도 똑같이 으로 이해했다고 말씀하셨지만, 그때의 potestas’가 아니라 ‘potentia’(독일어로 말하면 ‘Macht’), 즉 정당성 같은, 이렇게 말해도 좋다면, 인간적인 노모스의 옷을 입은 것을 모조리 벌거벗긴 힘이라고 생각합니다. 근대에 들어와 ‘potestas’ 대신 ‘potentia’가 전경화됐다고 저는 이해했습니다만, 아무튼 벤야민의 주제는 ‘Macht’(‘potentia’)가 아니라 ‘Gewalt’ (‘potestas’)입니다. 이로부터 두 번째로, 푸코가 말하는 통치성(gouvernementalitaté)’과 결부시켜 말한다면, ‘Gewalt’의 원형 동사인 ‘walten’통치하다라는 의미라는 것. 셋째로, 벤야민은 이 논고에서 ‘Gewalt’의 폐절을 역설한다고 해석하기는 어렵다는 것. 아무리 생각해도, 여기서 벤야민은 ‘göttliche Gewalt’(‘신적 폭력혹은 통치’)를 긍정하고 있으며, 이 논고는 ‘waltende Gewalt’(통치하는 통치)라는, 어떤 의미에서 동어반복적인 것의 희구로 끝을 맺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 논고의 마지막 단락에는 ‘Entsetzung des Rechts samt den Gewalten’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Entsetzung’은 지금까지 폐절이나 비정립’, ‘탈정립등으로 번역되었습니다만, 어떻게 하는 게 좋을까요? ‘Entsetzung’이 법을 정립하는(rechtssetzend) 폭력과의 대비에서 나온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그러나 ‘entsetzen’이라는 독일어는 놀라게 하다’, ‘깜짝 놀라게 하다라는 뜻도 있습니다만, 솔직하게 생각하면, 갇혀 있거나 파묻혀 있거나 해서 옴짝달싹 못하고 있는 뭔가를 거기에서 빼내거나 풀어내기도 하는 것입니다. 실제로 군사용어에서는 적에게 포위된 아군을 구출할 때 ‘entsetzen’이라고 말합니다. 따라서 문제의 말은 “Gewalt를 포함한 Recht(법적 권리)의 구출이라는 의미로도 될 수 있습니다.

히가키 : 다른 곳으로 낸다는 것이죠.

이치노카와 : 그렇습니다. 아감벤의 해석에는 부정신학적인 대목이 있는데, ‘Recht’(법적 권리)‘Gerechtigkeit’(정의), 희망도 갖지 않는 듯이 논의된다고 저는 생각합니다만, 벤야민의 생각은 더 밝다고나 할까, 긍정적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벤야민이 이 논문의 주석 10에서 언급하는 쿠르트 힐러(1885-1972)와 대비시키면 잘 알 수 있습니다. 쿠르트 힐러는 이 주석에서 언급되는 ()-카인(1919)이라는 소론에서, ‘행복(Glück)’이나 정의(Gerechtigkeit)’보다 고귀한 것이 있다, 그것은 (Dasein)자체다, 이렇게 말합니다. ‘행복이나 정의의 실현이라는 이름 아래서 생존[실존]을 부정하는 폭력이나 테러리즘을 허용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 힐러의 주장입니다만, 이것은 뒤집어보면 행복이나 정의에 관한 허무주의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벤야민은 힐러의 이런 생각을 전면적으로 비판하기 위해 이 논고를 썼습니다. ‘단순한 생명이라는 말도, 그런 맥락에서 나온 겁니다.

   또 하나, 이것은 아감벤이 빠뜨린 채 읽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만, 폭력 비판을 위하여에는 단순한(bloss)’이라는 단어가 사실은 두 번, 상이한 형태로 나옵니다. 하나는 힐러의 생각을 비판하는 형태로 나오는 단순한 생명(das blosse Leben)’으로, 아감벤이 주목한 것은 이것입니다. 그러나 그 몇 줄 뒤에 정의를 갖춘 인간단순히 아직 존재하지 않았을 뿐이라는 것(das blosse Nochnichtsein)’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정의보다도 단순한 생명이 고귀한 거야, 정의란 무엇인가를 첫 번째라고 생각할 필요는 없는 거야, 라는 힐러의 비관주의에 대해, 벤야민은 그런 것이 아니라고, 정의는 와야 할 것으로서 확실하게 있다고, 정의는 단순히 아직 존재하지 않았을 뿐이다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게다가 벤야민은 이 두 번째의 ‘bloss’절대로(unbedingt)’라는 단어를 덧붙이고 있습니다. 거칠게 말하면, 벤야민은 정의가 단순히 아직 존재하지 않을 뿐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절대로필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히가키 : ‘bloss’가 두 번 나온다는 거네요. 정말로.

이치노카와 : 아감벤은 그 중 하나에만 주목하고 있을 뿐입니다. 벤야민은 이 논고를 19211월에 탈고했습니다. 2010년대에 살고 있는 우리가 1917년의 러시아혁명을 보면, 그것은 1989년 이후에 붕괴하는 것의 시작, 끝의 시작이라고 아무래도 보이지만, 벤야민뿐 아니라 1921년에 살았던 사람들에게는 시작의 시작으로 보였던 것 같네요. 위대한 가능성을 감춘 무엇인가가 지금 막 시작됐다고나 할까. 그래서 마음 깊은 곳에서, 겁을 먹은 사람들이 아주 많았습니다만. 그런 감각 속에서 벤야민은 ‘Gerechtigkeit’(정의)‘Gewalt’(통치)라는 말을 사용하고 있는 것이며, ‘정의라는 이념을 벤야민은 믿었다고 생각합니다.

히가키 : 그때 정의를 믿었다는 것은 ‘waltende Gewalt’가 지시하는 것은 도래할 공산주의였다는 것입니까?

이치노카와 : 그렇다고 생각합니다. 좌절된 독일혁명의 저편에 있어서 단순히 아직 존재하지 않을 뿐인 공산주의. 이와 똑같은 것을 2010년대의 우리가 일본에서 생각해도 좋다고 봅니다. 현존한 사회주의와 결별하면서 말입니다.

카스가 : 저는 오늘을 위해 벤야민을 다시 읽어보고 꽤 흥분했어요. 아까 말씀드렸듯이, 아감벤은 주권자를 거론하더라도, 결국은 인간화한 것입니다만, 벤야민은 인간을 다시 한 번, 신 쪽으로 끌고 가는 느낌이 있습니다. 근대란 인간이 초월적인 관점을 갖는 것이며, 이에 대해 푸코는 시점(視點)을 분산시켰습니다. 그러나 벤야민에 따르면, 초월자의 관점은 인간에게는 다다르지 않는 것이며, 폭력 비판을 위하여는 인간에게 더 신성함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지금까지도 손에 넣지 못했던 비근대라고도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치노카와 : 맞아요. 신적 폭력은 인간의 눈에는 감춰져 있다고 벤야민은 말하더군요.

카스가 : 인간적 허무주의. 인간으로서 읽기 때문에, 더욱 허무주의가 된다는 하이퍼-세계.

이치노카와 : 제 해석도 아직 너무 인간적인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만, 폭력 비판을 위하여를 쓸 무렵, 벤야민은 이미 에른스트 블로흐(1885-1977)와 친했습니다. 블로흐의 유토피아의 정신(1918)도 출판된 직후에 읽었고, 당시의 편지를 보더라도, 벤야민이 이 책에 상당히 촉발을 받았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벤야민의 생각은 소렐의 그것과 동일시할 수 없듯이, 블로흐의 그것과도 동일시할 수는 없습니다만, ‘유토피아’, 그리고 블로흐의 나중의 주제인 희망같은 것과 벤야민의 폭력 비판을 위하여를 연결해서 읽을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더 말한다면, 블로흐를 통해서 저는 벤야민과 루디 두츠케(Alfred Willi Rudi Dutschke, 1940-79)를 연결해서 생각하고 있습니다. 두츠케의 연장선상에 있는 오늘날의 독일의 녹색당을 포함해서 말입니다. 이 노선(line)은 일본에서는 생겨나지 않았습니다. 적어도 힘을 가질 수 없었고, 일본이 지금과 같은 상황이 되는 한 요인도 거기에 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아무튼 단순히 아직 존재하지 않을 뿐인 것에 대한 강한 신념이, 적어도 폭력 비판을 위하여의 벤야민에게는 있습니다. 그것이 아감벤에게서는 사라집니다. 아마 이 두 번째의 ‘bloss’를 빠뜨리고 읽기 때문입니다.

히가키 : 그것은 알고 있습니다.

 

비오스조에

히가키 : 아감벤이라고 하면, 또 하나, ‘비오스조에의 구별이 잘 알려져 있습니다. 다만 최근의 뇌신경계적 자기라든가, DNA 수준에서의 사체에 있어서의 생명의 파악 같은 얘기를 보면, 비오스로서의 나의 이 신체로는 다뤄질 수 없습니다. 나의 면역계, 나의 뇌신경계의 움직임, 나의 세포 속의 DNA라는 것을 조작하는 것이 가능해졌을 때, ‘조에라는 말이 딱 들어맞는 곳이 있는 것 같습니다.

이치노카와 : 확실히, 개체로서의 비오스라는 리얼리티는 약해지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카스가 : 조에의 일부이기 때문에.

히가키 : 그래요. 다만, 난민이라든가, 양로원 등에서 아무도 찾아오지 않고 단순히 살아 있는 사람에 관한 장면에서 얘기되는 조에와, 나의 뇌신경계를 나는 어찌할 수가 없으나, 그것이 무엇인가를 산출하고 있다는 장면에서 얘기되는 조에, 이렇게 둘 다가 있으며, 논의가 분분합니다.

카스가 : 후자의 논의는 중요하다고 생각하지만, 수상쩍은 얘기라고나 할까, SF적인 이야기도 많잖아요. 극히 일부만을 다루고 페티쉬해버립니다. 예를 들어, 심해에 있는 혐기성 미생물 등은 유전자의 구조가 점점 바뀌고 있는데요, 그것만을 갖고 생명을 말해버립니다.

히가키 : 철학에서도 한때, 뇌신경 윤리가 유행했지만, 이런 뇌파가 생기면 이런 이미지가 나타난다는 식의 단순한 것을 사용해 프라이버시에 관해 논의하는 정도일 뿐, 그 다음부터는 더는 아무것도 나오지 않습니다. 그러면, 기술이 진전되어 정교하고 치밀해졌을 때 어떻게 될지는 지금 단계에서는 아직 뭐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카스가 : 다만 정말로 급진적인 것은 나오지 않았네요. 두 개의 머리를 지닌 하나의 신체라든가, 두 개의 신체를 지닌 하나의 머리 같은 것은. 기술적으로 가능했다고 해도, 그런 것은 절대로 만들지 않죠. 비교적 상상하기 쉬운, 조금 괴이한 테크놀로지만이 나옵니다.

이치노카와 : 개체로서의 비오스의 윤곽을 무너뜨리는 얘기입니다만, 게놈연구 등은 오히려 사적 소유의 논리로 진행되고 있지요. 지적 재산권 등을 말하고 있습니다만. 분명히 생명이 조에로서 보이는 장면이 늘고 있지만, 경제와 사회의 논리로부터 보면, 이전보다 더 사적 소유의 틀이 강해지고 있는 듯 보입니다.

히가키 : 거꾸로 강해지고 있군요. 이것은 나의 유전자이다, 라고 말이죠.

이치노카와 : 혹은 내가 발견한 유전자라는 식이죠. 지적 재산권이라는 의미에서의 사적 소유의 논리가 강화되고 있습니다.

카스가 : 마릴린 스트라썬(Marilyn Strathern, 1941~)도 쓰고 있습니다만, 간염 항체를 만들 때, 그 소유권은 최초로 세포를 제공한 사람에게도 있는 것이 아니냐라는 논의가 이뤄집니다.

Marilyn Strathern에 대한 이미지 검색결과

마릴린 스트라썬

이치노카와 : 개체로서의 생명은 끝나더라도, 사적 소유의 논리는 계속 살아 있습니다. 계속 살아 있을 뿐만 아니라 강해지고 있잖아요.

히가키 : 정말 그렇군요. 근대를 넘어서는 것이 나타난다고 말하기도 하지만, 그것을 파악하는 것은 근대의 논리 밖에는 없습니다.

카스가 : 그때 생명권력은 강력한 것으로서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치노카와 : 결국 자본제를 어떻게 생각하느냐가 생명권력론에 있어서 큰 문제라고 생각해요. 그 점을 분명히 전면화하는 것은 네그리로, 거기서는 아감벤과 크게 다르다고 생각합니다.

카스가 : 생명권력론의 장점은 인간이 생물학적인 생명의 주인이라는 것과 사회적인 존재라는 것, 이 두 가지를 함께 파악하는 데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 특집에 기고한 논문에도 썼지만, 우리의 사유는 자연적인 것과 사회적인 것, 혹은 법칙과 가치라는 두 가지의 것을 조합시킴으로써 작동합니다. 따라서 지금의 생명권력론에서 제가 못마땅하게 생각하는 것은, 생명권력론을 어떻게 사용하는가라는 논의는 많은데, 왜 이렇게 간단하게 생명권력이라고 말할 수 있는가라는 논의가 없다는 점입니다. 이미 우리 내부에 그런 사유의 이분화 기계가 제대로 들어 있는데도, 그것을 묻겠다고 하지 않습니다. 그것을 묻고자 하는 것이 서두에서 이름이 나온 비베이로스 데 카스트로입니다. 특히 중요한 것은 그가 반자연주의를 존재론으로서 가져왔다는 곳에서, 인식론으로서 가질 수 있다면 단순히 다문화주의의 하나가 되어버리지만, 존재론으로서 가지고 옴으로써 우리의 사유양식 자체를 다시 묻는 것을 시도하고 있습니다.

 

사회학의 최전선

사회학에서의 생명권력론의 최전선이라고 하면, 어떤 것이 되고 있나요?

 

이치노카와 : 저한테 사회학을 대표해서 말할 자격이 있는 건 아닌데, 개인적으로 생각하는 것은, 한 가지는 생명권력이라는 개념을 모방한 역사연구는 아닐 겁니다. 이것은 실제로 늘고 있고, 앞으로도 늘어날 겁니다. 실제로 의료나 복지에 관한 역사사회학적 연구는 늘고 있고, 젊은 사람들이 저보다 훨씬 훌륭하게 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그런 역사연구는 생명권력이라든가 생명정치라고는 말할 필요가 없네요. 제 자신이, 요네모토 씨 등과 우생학과 인간사회 : 생명과학의 세기는 어디로 향하는가(優生学人間社会──生命科学世紀はどこへかうのか)(講談社現代新書, 2000)를 썼을 때에는, ‘생명권력이나 생명정치라는 말을 전혀 쓰지 않았습니다. 그런 개념을 쓰지 않고도 역사는 쓸 수 있습니다. 오히려 이런 연구들에 의해 묘사되는 사실 자체가 생명권력생명정치라는 개념의 외연을 자동적으로 점차 메워준다고 생각합니다. 뒤집어 말하면, ‘생명권력이나 생명정치라는 개념은 내포가 공허하고, 그 공허한 그릇이 실증적 역사연구에 의해 메워진다고 생각합니다.

優生学と人間社会에 대한 이미지 검색결과

   다른 하나는 요네모토 쇼우헤이 씨 식의 바이오폴리틱스연구로, 저는 이것에서 조금 멀어졌지만, 이런 연구는 향후에도 더더욱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푸코도 감안한 가유카와 준지(粥川準二) 씨의 바이오화하는 사회 : ‘핵시대의 생명과 신체(バイオする社会──「核時代生命身体)(青土社, 2012) 같은 작업입니다. 참고로 독일에서 바이오폴리틱스(Biopolotik)’라는 말을 제목으로 내걸고 출판되고 있는 책이나 논문은, 물론 푸코나 아감벤을 논한 것도 절반 정도가 있습니다만, 나머지 절반은 요네모토 씨 식의 바이오폴리틱스’, 즉 생명과학의 문제들에 관해 어떤 정치적 결정을 할 것인지에 관한 것입니다. 구체적으로는, 착상 전 진단, 배아연구, ES세포연구 등을 인정할 것이냐 말 것이냐, 인정한다면 어떤 조건에서 인정할 것이냐 등의 얘기입니다. 2001년에 독일에서는 주로 생명과학에 관한 국민윤리평의회(Nationaler Ethikrat)라는 것이 설립되고, 2008년에 독일윤리평의회(Deutscher Ethikrat)로 개칭됐는데, 이런 식으로 바이오폴리틱스가 이른바 제도화되기도 했습니다. 다만 독일에서는 특히 생명의 시작에 관한 것에 얘기가 집중되고 있네요. 일본에서 문제가 되는 뇌사를 비롯한 생명의 끝에 관한 것은 그다지 열띠게 논의되고 있지 않습니다.

バイオ化する社会에 대한 이미지 검색결과

히가키 : 그건 기독교의 맥락과도 관계되어 있습니까?

이치노카와 : 그렇다고 생각합니다. 생명의 끝에 관한 얘기보다도, 예를 들어 배아(체외수정란)를 실험에 사용해도 좋은가 같은 것이 아주 진지하게 논의되고 있습니다.

히가키 : 위화감이 드는군요.

이치노카와 : 일본의 우리라면 그렇게까지 진지해지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할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유전자를 조작하는 게 좋은가라는 문제를 포함해서, 이것들에 관한 논의에는 기독교적인 것이 상당히 농밀하게 들어가 있습니다. 특히 독일은 프랑스 같은 라이시테(정교분리)의 원리로는 움직이지 않으며, 예를 들어 기독교민주동맹이라고 당당히 이름을 내걸고 있기에, 바이오폴리틱스를 포함해 정치 일반에 종교(기독교)가 강하게 들어 있습니다. 독일에서는 생명윤리의 문제들에 관해서, 나치라는 과거가 있기에, 타국보다도 신중하고 엄격한 대응이 이뤄진다고 자주 듣곤 합니다. 확실히 그런 부분도 있지만, 나치라는 지나가지 않는 과거는 사실상 표면적인 것이며, 그 이면에는 기독교 도덕이 무의식에 가까운 형태로 강하게 작동하고 있다고 보는 게 좋은 부분도 있습니다.

히가키 : 반대로 일본을 보면, “자연으로 돌아간다”, “흙으로 돌아간다는 발상이 있는데, 어째서 뇌사의 얘기가 되면, 그렇게까지 죽음의 기준이 문제가 되는가?

이치노카와 : 그것에 대해서는 나도 아직 확실한 것을 말할 수 없습니다만, “일본()에는 정신을 신체보다 우월하게 하는 서양근대의 데카르트적 심신이원론과는 다른 독자적인 신체관생명관이 있었다고 운운하는, 한때 일본에서 유행했던 비교문화론에는 별 근거가 없다고 장담할 수 있습니다. 실제로 柳田園男장례제도 연혁 사료(葬制沿革史料)(1934) 등에서 써서 남긴 넋을 부름[魂呼ばい]”, 즉 죽기 직전의 사람의 이름을 큰소리로 부르기도 하면서, 그 사람의 혼이 육체로부터 떠나는 것을 불러 세운다는 풍습은 심신이원론 없이는 성립하지 않습니다. 다른 한편, 서양 근대의학은 정신을 신체보다 우월하게 여기는 것 등은 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아까 나온 비샤의 텍스트를 읽으면, 곧바로 알 수 있습니다. 비샤는 정신에 상당하는 동물적 생명보다도 신체에 상당하는 유기적 생명을 중시하며, 후자가 소멸할 때까지는 의학적으로 봐서 사람이 죽었다고 말해서는 안 된다고 말합니다(신체/생명참조). 서양 근대의학이 데카르트적 이원론에 의거하고 있다면, 비샤는 정반대의 것을 말해야 할 테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게다가 비샤는 분명히 오늘날의 뇌사와는 다릅니다만, “뇌의 죽음이라는 개념을 이미 제시하고 있고, “뇌의 죽음을 갖고서 사람의 죽음으로 하는 것은 너무 이른다고도 말하는 겁니다.

  이로부터 또 하나, 일본에 대해 말할 수 있는 것은, 가족이라는 신체, 가족이라는 경계의 강함입니다. ‘身内[친척]이라는 일본어가 상징적입니다만, 자신의 身内[친척]의 장기를 身内[친척]도 아무것도 아닌 생면부지의 사람에게 제공하는 것에 대한 강한 저항감이 있으며, 그것이 뇌사상태의 사람으로부터의 장기적출에 제동을 걸고 있다는 측면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다른 한편, 많은 사람들은 身内[친척]이 제공자가 되는 생체장기이식, 특히 생체간이식은 일본에서 구미국가들보다 훨씬 많이 실시되고 있습니다. 게다가 인구 비율로 보면, 생체간이식은 일본보다도 한국에서 많이 실시되고 있습니다. 일본이나 한국에서는 생체간이식에 대한 저항감이 약하지만, 히포크라테스에게서 유래한 해를 끼치지 말라(non nocere)”를 의료윤리의 기반으로 삼고 있는 구미에서는, 아주 건강한 사람의 신체에 메스를 집어넣고, 게다가 간의 일부를 잘라내는 것에 의사들이 강한 저항감을 갖고 있습니다. 장기기증자에 대해서는 해를 입힌다는 것 이외의 것이 없으니까. 일본에서는 가족이라는 경계의 내부에서 장기가 이동하는 생체간이식에 대해 저항감이 약하고, 가족이라는 경계를 넘어서 장기가 이동하는 뇌사상태의 사람으로부터의 장기이식에 대해서는 거꾸로 강하다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던 것입니다만, 나의 이 가설은, 2009년의 장기이식법개정 때에 도입된 친족 우선 제공으로 부분적으로 뒷받침됐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규정이 있는 것은, 현재의 일본과 일본의 것과는 다르지만 한국 정도입니다.

  푸코의 텍스트에 적혀 있는 우아한 철학적 논의는 아니지만, 이런 것도 생명권력이나 생명정치의 한 측면으로서, 적어도 사회학적으로는 생각하면 좋다고, 아니 생각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다테이와 신야(立岩真也) 씨가 그동안 주도해 왔던 생존학이나, 다테이와 씨나 제가 거의 10년 정도 관계해온 장애학(disability Studies)”을 언급하고 싶습니다. 장애학에서는 “disability”라는 말을 가능성 박탈이라는 의미로 사용합니다. , 장애를 가진 사람이 그 물리적신체적 상태를 이유로 다양한 가능성을 빼앗기고 있는 사회의 구조나 짜임새를 문제 삼으면서, 장애학은 그 개혁을 요구합니다. 푸코가 말하는 죽음 속으로의 폐기라는 것은 이 가능성 박탈의 극한 형태라고 말해도 좋다. 그러나 이런 가능성 박탈의 구조를 바꿔나가는 것은 삶의 가능성을 증대시키고 증식시킨다는 것이기도 하며, 그래서 생명권력의 한복판에 있다는 것이기도 합니다. “권력이 있는 곳에 저항이 있다”, “저항은 권력에 대해 외부에 위치하는 것이 결코 아니다라고 푸코는 말했습니다만(지식의 의지), 그것은 장애학에 대해서도 말할 수 있습니다. 복지국가나 제가 말한 바의 사회적인 것은 확실히 생명권력의 산물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것들을 안이하게 파괴할 수는 없으며, 해서는 안 됩니다.

   이와 관련시켜 더 말하면, 푸코가 강의 생명정치의 탄생에서 다룬 ()자유주의는 생명권력이나 생명정치와 어떤 관계에 있는가? 왜 푸코는 생명정치를 자유주의라는 맥락에서 말하려고 했는가? 자유주의나 신자유주의는 생명권력의 한복판에서 저항이라는 주름을 다양하게 산출해내는 것인가? 아니면 저항을 빼뜨리고 생명권력이나 생명정치를 더욱 매끈하게 확장하고 비대화시켜가는 것인가? 푸코가 정말로 무엇을 생각했는가, 내게는 아직 잘 이해할 수 없습니다.

 

인류학의 최전선

이치노카와 : 인류학에서 생명권력론의 최전선이라고 하면, 어떤 것이 되나요?

카스가 : 하나는 모든 것에 행위자(agency)를 배분해간다는 사고방식입니다. 이것은 라투르에게도 통하며, 비베이로스 데 카스트로도 스트라썬도 그렇습니다만, 들뢰즈에 겹쳐지는 논의라고 생각합니다. 스트라썬은 영국 경험주의에서 출발해, 동일성이라는 것이 성립되지 않은 곳에서부터 논의를 시작한다. 프랑스의 사상에서는 전혀 언급되지 않는다. 그녀는 우선 경험주의자로부터의 반론에 대해 자신 나름대로 방어벽을 치면서, 안쪽으로 생성하는 간극에 주목하고 있습니다. 자신이 보고 있는 눈으로부터의 간극이, 자신이 알려고 하는 대상과 반향하며, “lateral reflection”(수평적 반향)을 초래하며 타자로 연결되어 간다. 이것은 매우 들뢰즈적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관점에서 생명정치생명권력을 생각해보면, 이치노카와 씨가 말한 게놈의 사적 소유의 얘기에 있었던 것처럼, 사람과 물건을 나눠서 소유자로서의 주체를 만들어낸다고 하는 방식이 얼마나 특수한지를 잘 알게 됩니다. 증여론이 좋은 예인데요, 인격이라는 것은 물건에 나타나며, 얼마든지 분할되며, 멜라네시아에서는 누군가가 갖고 있는 것을 모두 먹으면 인격이 사라진다. 그런 인간의 존재방식에 주목하여 분석의 수법을 발전시키는 것은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만, 현재까지의 과학기술론의 일부를 빼면 그다지 하고 있지 않습니다.

   둘째, 아나키스트 인류학을 위한 단장(アナーキスト人類学のための断章)(2004)을 쓴 데이비드 그레이버(1961~)처럼, 증여론이 점점 짓눌러지고, 근대에 대한 전근대적인 것을 이항대립적으로 나오게 되는 논의가 있습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푸코가 감시와 처벌에서 제시한 전근대적인 것이 여러 곳에서 보입니다. 예를 들어 피지에서는 선교사가 들어왔을 때 부활에 대해 얘기하는데요, 피지인들에게는 부활이라는 관념이 없다는 것을 압니다. 아까 얘기가 나온 아폴로시 나와이도 그렇습니다만, 불사성이랄까, 아무리 저주받아도 죽지 않는다는 것을 강조한다. 그러면 죽음이라는 개념이 없느냐 하면, 그것은 있으며, 그러나 여기저기에 떨어져 있는 것이라고 생각되고 있다. 그것은 생기가 사라졌다고 함으로써, 병을 포함해, 쓸 수 있는 것이 못쓰게 되는 사태를 똑같이 생기가 사라졌다고 말한다. 그런 생명의 시각을 감안하면, 생명권력의 외부에는 실로 다양한 것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셋째, 비베이로스 데 카스트로의 논의가 있습니다. 이것은 관점이라는 것에 주목하는 것으로, 재규어와 인간이 다른 것은, 관점이 다르기 때문이 아니라 신체가 다르기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발상입니다. 그리하여 유럽적 보편주의나 일원적 자연주의에 대해, 다문화주의를 내세우는 것이 아니라 다자연주의를 제기하고 있습니다.

이치노카와 : 다문화주의가 하나의 자연, 많은 문화라는 문제 기제라고 한다면, 다자연주의는 하나의 문화, 많은 자연이라는 말인가요?

카스가 : 문화라기보다는 인간이네요. 모든 인간. 관점은 모두 마찬가지이고, 인간도 재규어도 마찬가지라고 말한다.

이치노카와 : 다만, 그것도 하나의 문화 아닌가라고 말할 수 있다는 기분이 듭니다만.

카스가 : 그런 반론은 시종일관 당하고 있습니다.

이치노카와 : 아까 카스가 씨는 다자연주의를 인식론으로서가 아니라 존재론으로서 갖고 온 곳에 비베이로스 데 카스트로의 중요성이 있다고 말씀하셨는데, 인식론이 아니라 존재론으로서, 라는 것은 단순한 문화로 이야기를 회수하지 않는다는 대목이 중요한 거네요.

카스가 : 거기서 큰 것은 역시 사이언스입니다. 사이언스의 힘은 리얼리티가 대단하다. 실제로, 생명과학은 하드 사이언스화하고 있으며, 그 힘에는 대단한 것이 있습니다. 그런데 푸코에 기대를 걸고 있는 인문계 사람은 상대주의적인 이해를 하기 쉽죠?

히가키 : 생명에 대해서요.

카스가 : 인문계 사람이 생명이라고 말할 경우, 19세기에 말하는 것과 지금 말하는 것에는 의미가 완전히 다른데, 자연과학계 사람들은 동일한 의미에서 계속 사용하고 있다. 그것을 인문계 사람이 어떻게 읽는가를 생각한다는 것이 일어나는 것인데요, 최종적으로는 사이언스의 힘이 이긴다.

히가키 : 젠더론 등에서 구축주의가 너무 강한 것 아닌가요? 그래도 소박하게 생각하면, 퀴어적인 것은 자연이 산출하고 있는 거죠? 그것을 남녀로 나눠서 고정화하는 것이 문화이기 때문에, 자연이라는 것은 형편없는 것으로 정해져 있다. 그런데 자연은 일의적으로 정하고 있지만, 문화는 다양한 독해를 한다는 예전의 사회학적 말투가 있었잖아요? 니콜라스 로스도 쓰고 있는데요, 인종 문제도 마찬가지죠. 어떤 인종인지는 문화적으로 결정되는 것이며 자연본질주의는 안 된다고 말합니다만, 자연을 유전자 수준에서 보면, 인종은 뒤범벅되어 있게 마련입니다. 그렇게 하면 인종문제에 대한 관점도 바뀌는 것을 기대할 수 있다. 그것이 다자연주의의 한 가지 의미라고 생각합니다.

이치노카와 : 지금 얘기에 촉발되어 말하자면, 사회학적 사고의 대명사 같은 구축주의로는 전혀 불충분하다고 제 자신은 생각합니다. 구축주의가 말하는 것은 옳지만, 지나치게 옳아서 무의미한 곳이 있다. 특히 실천적으로는.

카스가 : 처음부터 답이 나오고 말았다.

이치노카와 : “문화는 자의적으로 구축된다고 말하지만, 그 자의적인 문화를 막상 바꾸기 위해서는, 카스가 씨가 말씀하신 사이언스에 의해 보편적인 것, 불변적인 것을 열고, 들이대지 않으면 안 되는 것도 있습니다. 그 일례로, 남성동성애를 형사처벌의 대상으로 한 독일제국형법(1871)175조를 둘러싼 투쟁을 들 수 있습니다. 175조의 철폐를 목표로 한 게이 해방의 주도자의 한 사람은, 자신도 게이였던 성과학자 마그누스 히르쉬펠트(Magnus Hirschfeld, 1868-1935), 그들은 과학적-인도적 위원회(Wissenschaftlich-humanitäres Komitee)”라는 조직을 1897년에 꾸리고, 175조의 철폐운동을 전개했다. 여기에는 실은 벤야민을 얘기한 대목에서 언급한 쿠르트 힐러도 가담하고 있습니다. 힐러는 조금 다른 이유로 이 운동에 가담했습니다만, 히르쉬펠트[허쉬펠드]의 입론은 이러했습니다. 동성애자는 옛날에도 지금에도 일정한 비율로 반드시 생긴다. 그것은 자연의 섭리이며, 동성애에는 선천적인 기초가 있다. 자연(퓌시스)이 산출하는 그런 존재를 법률(노모스)에 의해 부정하고 처벌하고 박해하는 것이 과연 인도적인 것인가라고. 베를린에 있을 때, 히르쉬펠트[허쉬펠드]와 그의 성과학연구소의 기념비를 독일인 지인이 알려줘서 보러 갔는데요, 거기에는 처음에 “per scientiam ad justitiam”(과학에 의해 정의로)라는 히르쉬펠트[허쉬펠드]의 신조가 라틴어로 새겨져 있었다.

   문화를 바꾸기 위해 히르쉬펠트[허쉬펠드] 등은 자연, 그리고 과학으로 향해야 했다. 175조가 자연에 대치되는 문화, 존재에 대치되는 당위, 즉 인간의 구축물인 것은, 이 조문의 철폐를 완강하게 인정하려 들지 않았던 사람들에게는 당연한 얘기입니다. 그런 것을 지적한 곳에서 아무것도 바뀌지 않는다. 문화라는 것은 마음먹기에 따라 바꿀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실제로 바꾸기 위해 히르쉬펠트[허쉬펠드] 등은 자연에 의거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푸코를 인용하면서 과거의 성과학은 본질주의적이기 때문에 천박하고, 구축주의에 서 있는 우리는 깨어 있는 사람들이다라는 얘기가 자주 이뤄집니다. 성과학을 무조건 긍정할 생각은 내게도 없지만, 적어도 성과학에 관한 구축주의자의 얘기에 대해서는 그래?”, “정말로 그럴까?”, “천박한 것은 당신들 아닐까?”라는 생각을 금치 못하겠다. 자연의 논리에 의해 문화가 고쳐 쓰여진[변조된] 후에야, 구축주의는 그러니까 문화는 가변적이다라고 말할지도 모르지만, 구축주의 그 자체는 문화를 실제로 바꾸는 힘을 갖고 있지 않다. 구축주의가 말하는 바는 옳지만, 그것은 추수[뒤쫓기]의 논리일 뿐이다.

   아까의 장애학도 구축주의적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중요한 것은 거기에서도 자연과 신체입니다. 예를 들어 눈이 보이지 않는다는 자연적 신체를 기반으로 삼아, 사회와 문화를 어떻게 바꿀 것인가, 만들어나갈 것인가가 문제이며, 장애라는 이미지가 사회적으로 구축된다는 얘기가 아니냐고 나는 생각합니다.

히가키 : 눈이 보이지 않는 사람은 청취 능력이 3배에서 4배라는 얘기가 있잖아요.

이치노카와 : 사람마다 다르다고 생각합니다만.

히가키 : 뇌과학이 진전되고 그런 것이 밝혀지게 되면, 장애학에서의 해방으로도 연결된다. 

이치노카와 : 확실히 그런 부분은 있다. 인지뇌과학의 사카이 구니요시(酒井邦嘉) 씨가 씨름하고 있는 수화의 뇌연구도(언어의 뇌과학 : 뇌는 어떻게 말을 산출하는가(言語脳科学──はどのようにことばをみだすか)(中公新書, 2002), 귀머거리 문화에서는 환영하는 사람이 많으며, 그것이 조금씩 밝히고 있는 수화의 뇌에서의 처리는 기본적으로 음성언어와 다를 바 없다라는 지식은, 구화주의口話主義 속에서 항상 덜떨어진 것으로 간주된 수화를 다른 것과 대비해 아무런 손색도 없는 언어로서 재위치시키는 하나의 근거를 주고 있다.

酒井邦嘉에 대한 이미지 검색결과言語の脳科学에 대한 이미지 검색결과

   과거의 일본의 장애인운동은 기술에 대해 강하게 염려한 적이 있으며, 전동 휠체어도 비장애인이 간호의 손길을 떼기 위한 것이라며 비판했다. 그 비판에는 지금도 귀를 기울여야 할 것이 있다고 생각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기술에 의해 새로운 신체와 문화가 열린다는 모멘트를 부정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올해[2012] 런던 올림픽의 광고는 휠체어나 의족으로 경기하는 선수들의 모습을 생생하게 보여줬는데, 장애인의 신체가 비장애인에 가까워지고 있다기보다는, 휠체어나 의족에 의해 새로운 다른 신체의 가능성이 열리고 있는 것처럼 내게는 느껴졌습니다. 문자가 전자 정보화됨으로써 시각 장애인이 얻거나 발신하거나 하는 정보량도 현격하게 높아졌습니다. 자연이나 과학, 기술에 의거함으로써 문화가 바뀌거나 새롭게 만들어지기도 한다는 것은, 다자연주의와의 관련에서 나 자신, 잊지 않고 싶습니다.

카스가 : 제 세미나에는 발달장애 학생이 있는데요, 다양한 능력을 계산하면, 보통은 복수의 능력이 평균적으로 되고 있는데, 그 학생의 경우는 분명한 편향[쏠림]이 있다. 그것이 장애라고 불리고 있지만, 이것은 재능 아닌가 싶네요.

이치노카와 : 확실히 그렇네요. 다만 그 재능도 측정에 의해 가시화된다는 부분이 있겠네요. 그런 가시화도 사이언스의 힘이라고 생각합니다. 좋은 것만 있는 것은 결코 아니겠지만


(제2부 끝)

Posted by 상겔스 상겔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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