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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래의 글은 안토니오 네그리의 "Logic and Theory of Inquiry: militant praxis as subject and as episteme "을 번역한 것이다. 원래 이 글은 http://www.generation-online.org/p/fpnegri20.htm 및 http://eipcp.net/transversal/0406/negri/en 에 수록되어 있는 것이다. 네이트 홀드런과 아리안느 보브가 영어로 옮긴 것이다. 하지만 이 글은 이탈리아어판과 일본어판으로만 출판된 <제국에 관한 다섯 개의 강의>의 제5강 1장이기도 하다. 애초에 일본어판만 출판되었기에 그것을 토대로 번역했다가 이제서야 영어판을 참고하여 수정, 공개한다. 2004년도에 처음 접한 것이니 상당한 시간이 흘렀다. 또 이러저러한 일에 쫓기다보니 제대로 교정교열을 보지 못했다. 일단 업로드한 후에 나중에 가독성 등을 고려하여 다시 한번 수정할 기회를 갖게 될 것이다.

 
한글에서 작업한 것이라 복사해서 그대로 옮길 경우 겹낫표 등이 있을 경우 업로드가 제대로 되지 않는다. 따라서 가급적 옆에 첨부한 PDF 파일을 다운로드 받기 바란다.

 

제5강의

5-1. 연구의 논리와 이론

―주체와 에피스테메로서의 전투적 실천

역사적 인과성과 ‘제국’ 개념의 존재론적 계보학에 관한 논의에서 우리는 거대한 사회운동, 통치 기법의 변형과 주권의 구조적 장치들dispositifs의 변형을 (헤겔, 맑스의 용어를 따라) ‘개념 속에 포섭’시키고자 노력했다. 따라서 우리는 정치학을 실천했지만, 그것만 한 것이 아니다. 이러한 유형의 분석을 통해 우리는 몇 가지 기능적 이행을 철저하게 조사하려고 했을 뿐만 아니라 이러한 사건의 펼침 속에 현존하는 잘못된 기반(wrong-footedness)과 모순을 파악하고자 했던 것이다. 하지만 지금까지 나아온 경로는 우리에게 일련의 방법론적인 물음들을 열어두고 있다는 점, 우리가 반드시 검토해야만 하는 그런 물음들을 남겨두고 있다는 점을 지적해야만 할 것이다.

이제 우리가 검토해야만 하는, 논의 속에서 떠오른 첫 번째 쟁점은 존재론적 운동 요소와 제도적 운동 요소(각각 운동과 정치인)의 결합conjugation에 의해 결정된 이행과 관련된다. 사회운동과 제도적 변화 사이의 관계는 운동의 본성 자체의 변형과 병행하여/나란히 형성된다. 이런 의미에서 이행은 근본적으로 물질적 노동의 헤게모니에서 비물질적 노동의 헤게모니로의 이행이다. 다시 말해서 노동, 실존, 표현 형태들을 변형시켰던 노동력의 내부 과정에 대한 분석이 근본적인 것이다. 역사적 진화에 대한 설명은 노동의 이러한 존재론적 차원 내부에서 발견되어야 한다. 이러한 차원들이 이처럼 노동의 심대한 변형으로 채워지고, 이 변형과 연결되고, 이 변형에 의해 산출되지 않는다면, 어떠한 효과적인 투쟁도 있을 수 없을 것이다. 투쟁은 단순히 임금 할당allocation의 문제나 임금과 이윤 사이의 관계의 정량화quantification, 배분, 적대를 둘러싸고 전개된 것이 아니었다. 무엇보다도 투쟁은 항상 노동을 해방하려는 의도를 둘러싸고 주기적으로 일어난 것이었다. [오늘날] 노동의 이러한 해방은 비물질적 노동의 헤게모니로 이끄는 과정을 통해 진행된다. ‘노동의 거부’라는 60년대와 70년대의 슬로건(keywords)은 테일러주의적이고 포드주의적 노동 패러다임의 거부와 이것을 변화시키려는 의지를 일체화한 적극적positive 기호이다. 이러한 의지는 대중 노동자의 노동을 특징지었던 신체의 피로, 궁핍, 파괴로부터의 해방의 더 나은 조건이자 실질적 가능성들을 결정한 동시에, 인간 노동의 보다 진일보한 생산성 형태의 발견을 산출한다. 이러한 분석을 더 진척시키면, 우리는 삶 전체에 파고드는invest 노동의 새로운 차원과 마주친다. 방법론적 관점에서 보면, 이러한 변동은 이러한 과정에 내부적인 해석적 틀을 우리에게 제공할 뿐만 아니라 우리로 하여금 (경제적 활동으로서의) 생산적 활동이라는 견지에서뿐만 아니라 정서적, 의사소통적, 생적vital 이성을, 다시 말해서 존재론적 요소들을 통합하는 틀 속에서 노동을 이해할 수 있게 해 준다. 이러한 측면들은 삶과 생산적 활동을 하나이자 서로 얽힌, 그리고 하나의 유효한 실재성으로 바꾼다. (이러한 ― 노동에서 생정치로의 ― 해석적 견지/열쇠를 받아들이는 것이 극히 중요하다는 것에 주의해야 한다. 왜냐하면 이것은 우리로 하여금 사회적 재생산과 같은 일련의 중심 문제들, 그리고 페미니즘에 의해 제기된 물음들에 직면하게 해 줄 뿐만 아니라, 공통적인 담론적 구조fabric 내부로 이것들을 포함시키고 다루게 해 주기 때문이다.)

특히 방법론적 관점에서 보다 면밀한 검토가 필요한 두 번째 쟁점은 다중의 정의이다. 우리는 다중을 ― 노동의 경험 및 변형과 연계된 ― 하나의 계급 개념으로, 그리고 ― 시민적 특이성들 속에서 새로운 관계들의 구축을 지향하는 민주적 제안으로서의 ― 하나의 정치적 개념으로 정의했을 뿐만 아니라, 전체로서의 삶으로 확장하며 공통적인 것을 표현할 수 있는 역량(potenza)의 장치dispositif로도, 즉 역량의 증대 및 삶, 생산, 자유의 새로운-의미부여re-qualification로도 정의했다. 이렇게 말함으로써 우리는 우리가 자주 주장했던 바를, 즉 우리는 지금 장기적으로 복합적인 이행 국면을 거치고 있으며, 그것의 모든 면모를 파악하기는 어렵다는 것을 재확인한다. 하지만 우리가 정립한 다중 개념은 우리를 승화sublimation와 종합이라는 (지양이라는 헤겔적 방법의) 모든 변증법으로부터 점차 자유롭게 해 주면서 우리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를 알 수 있는 열쇠를 제공한다. [헤겔과는] 반대로, 우리의 방법은 다중을 존재론적 문턱으로 간주하며, 따라서 [중간이] 생략되고 차단되고 열려 있으며 비시대적인 것으로 정의된다. 다중과 마찬가지로, 방법은 사건으로 주름져 있으며, 이것이 사건이다.

그러므로 주체성의 생산을 따라갈 수 있는 또 다른 쟁점이 본질적으로 중요하게 된다. 여기에서 주체성의 생산은 노동 활동의 가능한 수렴과 ‘공통적인 것’의 구축을 측면 지원하며 이를 발전시킨다.[여기에서 주체성의 생산은 노동 활동과 ‘공통적인 것’의 구축의 수렴 가능성을 도우며 이것을 발전시킨다.] 우리의 방법은 여기에서 아래로부터 출발하지만, 아래로부터 구축할 때 우리는 엄청난 장애물과 부딪치게 된다. 제4강에서 ― 자본주의적 통제의 마지막 단계로서의 전쟁에 관한 논의에서 ― 저자와 독자 모두는 이러한 쟁점들과 직면해서 현재의 역사적 국면에 대해 현기증을 느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다른 쟁점들과 마찬가지로 이 쟁점에 관해서도 위험은 불가피하다.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 중요하며, 이렇게 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몰입immersion의 논리에 따라, 즉 우리 자신을 현재적인 것 내부에 위치시키고, 항상 아래로부터 출발하는 것, 더 이상 외부가 없는 곳에서 출발하는 것에 따라 연구를 진행하는 것이다. 이제, 이러한 관점에서 우리를 굳게 다지기 위해서는 협력을 정의하는 것이 필수적이다. 우리는 언어적 협력이 탈근대적 생산 모델이라고 말했다. 이는 물질적으로 말하는 기계가 언어를 수단으로 하여 기능하기 때문일 뿐만 아니라, 개인들 사이의 협력의 새로운 형태들이 언어를 통해서 계속하여 출현하는 한에서 그러한 모델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다루는 것은 개인들이라기보다는 협력하는 특이성들이다. 하지만, 만일 언어적 협력이 생산적 협력이라면, 모든 것이 이러한 협력 내부에 있다면, 그리고 그 내부에서는 다중이 구성권력이라고 한다면, 이러한 흐름들 안에서 잡다함diversity과 명령의 분절은 무엇인가? 예를 들어, 경영자와 노동자 사이의 차이, 이들의 각각의 활동들 사이의 차이는 무엇인가? 명확한 방법론적 용어로 보면 문제는 이러하다. 즉, 이러한 전개/발전을 내부에서부터 어떻게 평가할 수 있고, 또 필요하다면 내부에서부터 이러한 전개/발전을 어떻게 절단할 수 있을까? 협력의 형태 자체만으로는 이 문제를 풀기에 충분치 않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공통적인 것을 몇 가지 혼동을 제거하고 차이화differentiation의 다의적인equivocal 결여[오류에 의한 식별 곤란]를 제거할 수 있는 유일한 차원으로 정의하는 (맑스적) 실타래를 따라가는 것이 반드시 필요하다. 공통적인 것은 구별한다. 이것은 우리로 하여금 경영자를 노동자로부터 분리할 수 있게 해 준다. 사실상 ‘공통적인 것’의 긍정만이 내부로부터 생산의 흐름을 이끌게 해주며, 소외시키는 자본주의적 흐름들로부터 인식과 자유를 재합성하는 것으로부터 분리할 수 있게 해 준다. [그렇다면] 문제는 공통적인 것의 실천의 중심성을 재확인/재긍정할 수 있는 실천적 단절에 의해서 해결될 것이다.

우리 연구 전체에 있어서 유일하게 가능한 방향은 공통적인 것의 구축 과정에서 인식과 행위의 전투성 및 수렴의 새로운 형상들을 통해 해석되어야만 하는 적대의 과거fore 형태들로 돌아가는 것이다. 방법에 관한 담론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 중 한 가지는 실천적, 물질적 결정이다. 즉 순수하게 비판적인 틀을 파괴하는 실천인 것이다. 언어와 협력은 이러한 과정 내부에서 인식과 행위의 구체적 통일인 실천적인 단절에 의해서, 공통적인 실천의 중심성의 수립에 의해서 횡단되어야만 한다.

우리는 또 다른 관점에서 이 쟁점을 다룰 수 있으며, 그러한 방법의 모범적 형태로서 ‘공동 현황조사’joint-research에 관한 오뻬라이스모의 오랜 전통의 논의로 이를 요약할 수 있다. 공동 현황조사의 실시는 노동자를 생산적 주체로서 편입시킨 과정에 대한 자각과 의식 수준을 현장탐문inquiry을 통해 아는 것의 가능성에 다름 아니었다. 만일 내가 어떤 공장에 가서 노동자들과 접촉하여 노동자들과 함께 그들의 노동조건에 관한 조사를 수행한다면, 공동 현황조사는 명백히 생산 주기에 대한 서술이자 그러한 주기 내부에서 각 개인의 기능에 대한 규정idenfitication이다. 하지만 그것은 동시에 노동자 개개인과 노동자 전체가 겪고 있는 착취의 수준에 관한 일반적인/전면적인general 평가이기도 하며, 노동자들이 기계 시스템 속에서, 그리고 명령 구조 앞에서 자신들의 착취 의식에 관해 반응할 수 있는 능력에 대한 전면적인 평가이기도 하다. 이런 식으로, 조사가 진행됨에 따라 공동 현황조사는 공장 내부에서는 투쟁의 전망을 창출하고 공장 외부에서는 협력의 맥락thread이나 장치들devices을 정의한다. 분명히 현황조사에 있어서 실천 헤게모니와 중심성은 바로 여기에 있다. 이러한 실천은 생산과 착취의 주기에 대한 우리의 이해에 도움이 되며, 이러한 실천이 저항과 선동을 결정할 때, 다시 말해서 투쟁을 발전시킬 때 고양될 것이다. 그러므로 적대적 주체를 구성하는 것이 실천적으로 가능하다. 왜냐하면 모든 논증은 모두 이것에 관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뻬라이스모의 오랜 경험으로부터 출발하여 우리 자신에게 이렇게 물을 수 있다. 즉, 포스트-모더니티에 있어서, 그리고 노동과 사회적 조직화 무대의 총체적 변형에 있어서 오늘날 우리는 어떠한 공동 현황조사를 할 수 있는가? 이것은 분명 어려운 질문이며, 나 역시 여기에서 대답할 수 있다고 주장할 수 없는 질문이다. 그렇지만 굳이 대답한다면, 중요한 것은 앞으로 나아가는 것, 그것에 관해 작업을 하는 것이라고 하겠다.(if anything, it is a case of moving forward and working around it.)

사실 우리가 오늘날 모든 실천적 유의미성을 지니는 연구에 관해 생각한다면, 가장 중요한 것은 연구의 생정치적 전제와 셋팅을 고양시키는 것이다. 연구의 중심 요소들은 신체들이 되어야만 마땅하다. 우리가 어떤 배치상태constellation나 합성composition을 구성하고 재현하고 싶다면, 또 이것들을 정의하기 시작한다면, 신체와 육체적 삶과 관련된 쟁점들의 대열이 있는 바, 이것들은 반드시 작동되어야만 한다. 나는 이 쟁점이 극히 중요하며, 우리가 실천하기 시작하고 있는 생정치적 방법으로부터 생겨난다고 생각한다. 이 방법은 사회학에 의해 시도되었던 너무도 엄격한 분석적 방법론들과는 단절한다. 나는 그러한 방법을 살라미(salami, 마늘로 양념을 한 이탈리아식 소시지) 이론들이라고, 즉 사회적 신체에 대한 분석적인 잘게 썰기 이론들이라고 부른다. 이와는 반대로, 오늘날 우리는 육체성이라는 가장 중요한 문제와 대결하기 시작하고 있음에 틀림없다. (그리고 우리는 신체의 역량에 대한 충분한 신뢰를 가지고 그렇게 하는 것이다.)

다루어야만 하는 또 다른 쟁점은 단순히 대상의 동일성이나 차이가 아니라 오히려 ‘공통적인 것’을 향한 대상의 특이성과 노력thrust을 상정하면서assume대상을 구축하려는 ― 항상 그리고 각각의 심급에서 부정적으로 출발하려는 ― 시도이다. 이러한 방법론적 열쇠는 정말로 새롭고 독창적이다. 과거에 우리는 경제적 인간Homo Economics, 심미적aesthetic 인간, 심리적 인간 등등을 선별하고 이것들을 분석적으로 따로 떼어낸 다음 이것들을 가리키곤 했었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이 모든 것을 함께 다룰 수 있다. 과거에 우리는 결정의 과정과 현상의 특정성이라는 견지로부터 항상 동일성과 차이 사이로 귀결되곤 했던 것으로 나아갔던 반면, 이제 우리는 우리의 결정 노력에 있어서 우리를 종종 막아서곤 하는 이러한 이분법적 대칭쌍을 뛰어넘어 다중을 ‘공통적인 것’으로서, 차이를 특이성으로서 인식할 수 있게 되었다. 오늘날 우리는 이러한 낡은 이분법을 말뿐만 아니라 구체적으로 극복할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되었다고 나는 생각한다. 즉, 차이들의 내용은 특이성들로 풍성해지고 있으며, 이러한 특이성들이 활동의 새로운 틀에서처럼 함께 움직이는 ‘공통적인 것’으로 풍성해지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의 핵심 요소는 ‘공통적인 것’, 즉 신체들이며, 특이성이라는 논리적 범주이며, 신체들이 공통적인 것을 가리키는 방식인 것이다. 그리고 존재론적 전제조건으로서의 ‘공통적인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사회학적 현황조사는 특이성이 그 내부에서 수립되는 ‘공통성’의 조건을 분명하게 해야 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우리가 어떤 것을 구축하고자 한다면 이것이 중요하다. 이러한 배치상태는 계급 ‘합성’의 요소들이라는 낡은 배치disposition과 다소 상응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기에서는 신체적 공통의 풍부함 내부에서 새롭게 구성된 것에 상응한다.

(다음을 잘 생각해 보자. 생정치적인 것이 우리 연구의 전망으로 고안된 이후, 우리는 결코 신체들과의 접촉을 경유하여 전진하지 못했다. 각각의 특이성은 신체성으로서 정의되지만, 생정치적 신체성은 단순히 생물학적인 신체성이 아니라 사회적인 신체성이다. 예를 들어 우리가 노동의 불안정화와 같은 쟁점을 다룰 때, 우리는 확실히 실제로는 불안정 노동자의 조건 ― 노동의 이동성과 유연성 ― 이 지닌 피로한 육체적 성격physicality을 파악하지만, 우리는 여기에 새로운 노동-역량의 역량에 대한 우리의 지각을 덧붙여야만 한다. 다른 말로 하면, 한편으로는 불안정 노동을 강요하는 끔찍한 조건들이 있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이것의 새로운 성질들이 있다. 이런 방식으로 우리는 동일성과 차이 사이를 오가면서, 공통적인 것을 착취의 토대로 간주하면서도 동시에 저항의 활동으로 간주하면서 불안정성을 파악할 수 있다.)

이러한 토대 위에서 우리는 실천과 실천적 선택지option으로의 변동 ― 즉 적대의 재발견 ― 으로 나아갈 수 있다. 하지만 이러한 이행은 정확히 어디에 있으며, 적대의 선택지는 어디에 놓여 있는가? 지금까지 말했던 것에서 보면, 이론적 제안은 명령에서의 착취를 협력의 수탈expropriation과 동일시할 것이다. 즉, 다중의 활동을 차단하는 가능성과 동일시하는 것이다. 착취는 바로 공통적인 것의 풍부함 위에, 다중의 생산성 위에서 수립되며, 다중의 표현을 방해하고 그 표현을 침묵하게 만들며 탈신체화하고 제거하며 다중의 고유성properties을 제거하려는 시도 위에서 수립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신체의 모든 측면과 관련된 강력한 물질성을 양도해야만 한다/소외에 부여해야만 한다. 이것은 특이성 및 ‘공통적인 것’과 맞부딛치는, ‘공통적인 것’의 표현과 그 구축 과정으로부터 솟구쳐 나오는 실천과 명백하게 충돌하는 수탈이자 탈신체화이다. 나는 우리 연구를 보다 강하게 강조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새로운 생산주체들의 특이하고 공통적인 배치/형성configuration을 주장하는 것이라고, 또한 포스트-모더니티에서 우리 눈앞에서 춤추고 움직이는 사태로부터 전개되고 있는 착취 ― 그러한 주체에 대해 깊이 있게 진행되고 있는 착취 ― 를 주장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제 우리의 마지막 물음을 아주 공개적으로 제기하자. 우리가 원하는 것은 무엇인가? 우리는 분명 민주주의를, 전지구적 규모에 있어서의 민주주의를, 즉 만인에 대한 민주주의를 원한다. ‘민주주의’라는 용어가 만족스러운 것이 아니라는 점은 확실하지만, 우리는 이것 외의 다른 용어를 갖고 있지 못하다. 우리는 민주주의를 원한다고 말할 때마다 우리는 매번, 다음과 같은 물음이 던져지기 때문에 우리가 덫에 걸린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 즉, 그렇지만 정확히 당신은 원하는 게 뭐야? 이러한 토대platform에서 당신이 주장하고 싶어 하는 민주주의적 요구의 목록을 제시해 보라고! 나는 목록을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렇지만 굳이 말한다면, 우리는 지금까지 말했던 것에 기초하여 민주주의에 대한 욕망, 아니 어쩌면 ‘공통적인 것’의 욕망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의 도식을 계속 발생하고 있는 대안적 제안들을 평가하기 위한 방법론적 기준으로 삼는 것에서 출발해야 한다. 나는 가끔, 최근까지도 극히 유토피아적인 것처럼 보였던 일련의 제안들 전체가 오늘날에는 점점 더 실재적으로 보이게 되는 인상을, 마치 우리가 이제 새로운 시대epoch로 접어들었다는 의식이 성숙했다는 듯이, 받곤 한다. 왠지 우리 또한 프랑스 혁명의 발발 전에 공표되었던 진정서나 탄원서cahiers de doleances에 비견될만한 것을 작성해야만 할 것 같다. 이 문서들은 제3신분의 불평이 제시되었는데, 이것은 단순한 항의 이상의 것이었다. 즉, 이 문서들은 부정의에 대한 고발일 뿐만 아니라 그 해결방법의 제안이기도 했다. 아래로부터 작동하는 방법은 실천적 응답을 제공하기 위해 비판을 뚫고 나간다.

오늘날의 쟁점은 전지구적 수준에서 민주주의를 어떻게 인식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이하 겹낫표 문제로 생략. 전문은 첨부 파일을 다운로드 받으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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