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튀세르 사상의 현행성
アルチュセール思想のアクチュアリティ
『再生産について──イデオロギーと国家のイデオロギー諸装置』をめぐって
니시카와 나가오(西川長夫)∙오나카 가즈야(大中一彌)∙
곤노 히카루(今野晃)∙야마카 아유무(山家歩)
[사회] 이부키 히로카즈(伊吹浩一)
『정황』 2005년 8∙9월호
이부키 : 저번에 알튀세르의 『재생산에 대해 : 이데올로기와 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들』이 출판되었는데요, 오늘은 니시카와 나가오(西川長夫) 선생을 비롯해 저도 포함한 번역자 모두가 모였기에, 이 책을 둘러싸고 다양하게 논의하고 싶습니다.
알튀세르는 꽤 예전에 니시카와 선생이 번역한 「이데올로기의 국가와 이데올로기 장치」라는 논문이 있었습니다. 당초 이 이데올로기론은 2권으로 구성될 대작으로 계획되었습니다만, 그러나 결국, 계획은 끝가지 완수되지 못하고, 1권만이 초고로 작성됐습니다. 게다가 초고 단계에서 단념되고, 포인트가 될 만한 것만을 엮어 만들어 세상에 선보이게 된 것이 그 논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초고’라고는 하지만, 그 완성도는 매우 높다. 그래서 최근 알튀세르의 유고가 본국인 프랑스에서 차례대로 간행되고 있는데요, 이 책도 그런 가운데 무려 10년 전 프랑스에서 출판됐다. 그것에 발맞춰서 우리나라에서도 차례대로 번역이 출판되고 있으며, 그리고 이번에 이 책이 간행됐습니다. 책의 띠에도 적혀 있듯이, 바로 여기서 ‘알튀세르의 이데올로기론의 전모’가 제시되어 있습니다.
알튀세르 사상의 중요성은 새삼 물을 것도 없고, 확실히 그 영향력은 상당한 것이었다. 특히 이데올로기론이 가장 많은 사람에게 영향을 주고 지금도 언급되고 있다. 그런데 그 영향이 너무도 넓고 다방면에 이르고 있기 때문에, 더 이상 확인하는 것 자체가 어려움을 겪지만, 뭐랄까 사정이 좋은 이번의 번역자분들은 각자 전문 영역이 다르고, 각각의 전문영역에서, 또한 독자적인 방향성에서 알튀세르 사상에 씨름하고 계십니다. 각자가 거기서 얻은 것을 여기에 제시해주는 것만으로도 알튀세르 사상이 지닌 넓이와 심도를 가늠할 수 있지 않을까?
또한 우리나라에서 알튀세르에 대해 말하는 데 있어서, 그 주춧돌을 놓으신 니시카와 선생의 존재를 잊어서는 안 된다는 것은 말할 것도 없겠습니다만, 이번에 함께 이 작업을 해주시는 와중에, 다양한 것을 가르쳐주셨다는 생각이 듭니다. 「역자해설」을 읽으면 아시겠지만, 니시카와 선생의 알튀세르에 대한 남다른 ‘생각.’ 번역 작업의 과정에서, 우리는 이 ‘생각’에 계속 압도되었습니다만, 이 생각, 열정이야말로 이 책을 세상에 내보내게 된 원동력이 됐다고 생각하며, 우리도 그것에 충동질되어 왔다고 할까, 질질 끌려왔다(웃음).
그러나 니시카와 선생은 현재는 국민국가론을 비롯한 다양한 영역에서 횡단적으로 활약하고 계시며, 그 방면의 작업이 전면에 나서고 있기에, 제 주변의 젊은 연구자들 가운데는 니시카와 나가오와 알튀세르를 결부시키지 않은 사람도 있다.
그래도 유심히 쳐다보면, 니시카와 선생의 국민국가론 등등의 작업과 알튀세르의 사상, 특히 ‘이데올로기론’과의 관계는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은 일목요연한 것 아닌가 한다.
그런 셈이어서 오늘의 좌담회는 알튀세르 사상을 둘러싼 것과, 그것의 한 가지 발전형태인 니시카와 선생의 작업을 둘러싼 것을 교차시키면서 진행하고 싶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우선 처음으로, 니시카와 선생의 「역자해설」을 보시고 역자 분들 각각의 의견이나 문제의식을 말씀해주시는 것에서부터 시작하고 싶습니다.
오나카 : 알튀세르의 사후 출판된 92년 『마가쟁 리테레르』의 알튀세르 특집호에는 부땅의 전기와 나바로와의 대화에 나온, 지금 보면 그다지 새로운 정보는 아닙니다만, 지금도 새로운 정보가 있고, 그것은 이븐 뒤르가 쓴 것입니다. 이 사람은 알튀세르의 제자들이 집안싸움을 벌일 때 중개자 역할을 맡은 사람이며, 서클로서의 알튀세리앙을 그려낼 경우에,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인물입니다. 이 사람이 우리가 알고 있는 알튀세르, 즉 구조주의 운동의 일익을 역사적으로 담당한 알튀세르라는 상이 형성된 60년대 중반 무렵에, 지금 보면 잡다하고 이종혼교적인 집단이, 하나의 지적인 운동을 어떻게 만들어나갔느냐를 말하고 있습니다.
현시점에서는 우리는 그 후 알튀세르가 어떤 인생 여정을 거쳤는지를 알고 있으며, 이 때문에 그에 대해 비극적인 이미지를 강하게 갖고 있습니다. 이 특집호의 표지도 그런 아주 어두운 이미지입니다. 우리는 그런 이미지를 갖고 있습니다만, 뒤르는 자신들의 젊은 시절을 회상하며, 너무도 ‘진지’하며, 그리고 ‘유희적 ludique’이었다고 말하고 있다. 20대의 젊은이들이 알튀세르 주변에 모여서, 공산당의 그럴싸한 제도에 “도전하고, 업신여기며, 이론적인 도취감에 젖어 있었다.” 그리고 스피노자주의가 큰 역할을 한 것과 동시에, 어쩐지 니체주의적인 분위기가 있었다고 합니다.
제가 여기서 강조하고 싶은 것은 이 ‘유희적’ 측면입니다. 서클로서의 알튀세리앙이 성립됐을 때에는, 정치적으로는 상승 국면에 있으며, 고등사범학교라는 것을 배경으로 하여 다양한 분야의 사람들이 서로 부딪치면서 새로운 과학들을 위한 작업을 진행시키고 있었다. 이번의 번역작업의 멤버도 각각이 다른 분야에서 활약하고 있으며, 번역작업을 되돌아보고, 확실히 매우 힘든 작업이었습니다만(웃음), 아주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고 말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또 하나는, 제 출발점은 풀란차스인데요. 그런 곳에서 바라본 알튀세르의 미묘한 위치의 문제에 관련되어 있습니다. 이전에 ‘국가론 르네상스’라는 것도 있고, 이것은 오로지 맑스주의 정치학 안에서의 얘기였습니다. 다구치 후쿠지(田口富久治) 선생과의 어떤 토론에서 니시카와 선생은 아오키쇼텐(青木書店)이 내고 있는 역사학 연구회의 논문집의 한 구절을 인용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아마 국가론 르네상스를 외치던 쪽의 일종의 자기비판이라고 생각합니다만, 냉전이 종식되는 가운데, 어째서 국가론 르네상스가 한 시기에 무르익었는데도 잘 안 되어가고, 다른 한편에서 국민국가 비판이 민족주의 분석의 맥락에서 번성했는가를 자문하고 있습니다. 니시카와 선생이 다구치 선생과의 대담에서 이런 문장을 뺀 의도는 떠나서(웃음), 알튀세르는 어느 쪽으로부터도 이용 가능한 것입니다. 국가론 르네상스와 국민국가론, 어느 한 쪽을 택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만, 두 쪽은 서로 겹치면서도 역시 미묘하게 틀어져 있습니다. 이번에 처음으로 니시카와 선생과 정해진 기간 동안 일을 하면서, 프랑스어 등 번역상의 언어 문제에다 알튀세르나 그의 시대의 지적 역사적 정황에 대해 많은 것을 배웠습니다. 그 동안에 저만 그런 것은 아니었다고 생각합니다만, 자연스럽게 ‘니시카와 나가오 스터디’ 쪽으로 ‘저절로 나아갔’습니다(웃음).
그 중에서 몇 가지 궁금한 문제가 있습니다. 니시카와 선생은 “세 가지 혁명”을 살고 있다는 특권적인, 우리 세대에는 있을 수 없는 체험을 하셨습니다. 하나는 전후의 불탄 자리[焼跡]의 체험. 당신 자신이 군화를 신고 소년시절을 보냈다고 적혀 있습니다. 다른 하나는 68년 5월의 파리. 세 번째는 조금 더 간접적입니다만, 냉전에 종식을 가져온 동유럽혁명. 각각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만, 그 중에서도 역시 불탄 자리의 체험이 중요한 것 아닌가. 전후의 문제인 동시에, 전중의 체험과의 관계의 문제이기도 하다. 선생의 국민국가론 속에서 ‘비국민’이라는 말이 나오는 것은 그때의 체험에 뿌리를 뒀기 때문이 아닌가.
그러나 정치학의 입자에서 보면, 국민국가 비판을 ‘비국민’이라는 것에 의거해서 전개하고 또한 마지막에 갑자기 자신의 불면증 얘기로 끝나버린다 ― 라는 이론 전개를 받아들이지 못한 사람들은 많이 있는 것입니다(웃음). 아마 “그것은 정치에 대한 발언일지도 모르지만, 정치학은 아니다”라고 할까요. 저는 거기서 갈림길에 서게 되어 곤란해졌습니다.
저는 방송대학에서 비상근 강사를 하고 있는데요, 비교정치학 교과서(『개정판 비교정치학(04)』에 키첼트(Herbert Kitchelt)라는 정치학자가 들어 있습니다. 이 사람은 북유럽 사회민주주의론 연구를 하고 있는 인물입니다. 예를 들어 68년 이후 변용한 선진국에서의 정치를 어떻게 생각하면 좋은가라고 할 때, 제2차 산업의 노동자가 단결하여 혁명을 일으킨다는 것과는 다른 ‘좌파’라는 것이 등장한다. 키첼트는 그것을 ‘리버테리안적 좌파의 정치’라고 한다. 즉, 환경이나 젠더 같은 68년에서 나오느 ‘새로운 사회운동’의 가치를, (당과 같은 조직이 아니라) 개인을 기초에 있어서 실현하려고 하는 정치입니다. ‘비국민’이라는 것을 특권적인 관점으로서 설정하는 논의는, 정치학에서는, 이런 정치로 분류되어버리는 것 아닌가. 즉, 고학력으로, 지적인 일에 종사하며, 공공 부문과 대학 등의 비교적 경쟁에 노출되지 않은 곳에 있던 사람들이 그런 입장을 취하기 쉽고, 반면 권위주의적이고 우파적 정치로 가는 사람들이란, 현대에서는 오히려 블루칼라 노동자, 혹은 상점주 등의 고전적 소부르주아가 아니냐고 말이에요.
제가 말하고 싶은 것은, 알튀세르의 국가의 이데올로기 장치라는 개념을 사용할 때, 주체의 입장성의 문제가 물어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 결과, 예를 들어 니시카와 선생의 어휘라고, ‘비국민’이라는 말이 나오는 것 아닌가. 발리바르의 경우, 그것이 ‘국가/비국가’(État/Non-État), 즉 공산당의 문제가 됩니다. 알튀세르는 공산당이, 국가장치의 하나이면서도 동시에 국가의 바깥에 있기도 하다는 것을 말합니다만, 그것에 대해 발리바르는 의문을 드러냅니다. 그는 자신이 알튀세르와 헤어지는 것은 이 문제에서라고 거듭 말하고 있습니다. 비국민이든, 공산당이든, 혹은 히로마츠(廣松) 선생이라면 ‘학지적(学知的) 주체’이든, 변혁의 주체를 어떻게 정의하느냐입니다. 국민국가론 쪽에서의 알튀세르 이론의 이용의 문제와, 변혁의 주체의 문제는, 아마 연결되어 있는 것 아니냐는 것입니다.
곤노 : 오나카 씨가 낸 국가론과의 관계인데요, 사회학의 맥락에서 말하면, 국가의 이데올로기 장치라는 개념은, 예를 들어 미디어 분석 등 다양한 분석을 행할 때 매우 쓰기 좋은 도구였습니다만, 지금까지 이 개념을 쓰고, 앞으로도 계속 쓰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이 초고 속에서 마음대로 사용할 수 있는 편리함이 심화되어 전개되고 있는 것이 아닐까 기대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그때 여기에서의 접속의 문제를 어떻게 하면 좋을까를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봅니다.
그리고 아마 알튀세르 자신이 국가의 이데올로기 장치라는 개념을 통해 변혁의 주체가 그려질 수 있는 것은 아닌가, 그것이 설령 착각에 불과한 것이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만, 그런 기대가 있었다고 생각하는데요, 거기에서의 길을 어떻게 생각하면 좋겠느냐라는 것도 있습니다.
이부키 : 그러면 다음으로 야마카 씨, 부탁드립니다. 다른 번역자가 알튀세르를 전문으로 하고 있습니다만, 야마카는 푸코죠. 그런 입장에서는 어떤가요?
야마카 : 알튀세르를 놓고서는, 알튀세르를 하나의 실마리로 삼은 나가하라 유타카(長原豊)씨의 맑스 재독해 작업이나 이부키 씨의 라캉-알튀세르에 대한 논의도 매우 흥미롭게 읽었으며, 알튀세르 그 자체에도 관심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만, 푸코적 입장에서 정신의학적 권력이나 통치를 문제로 삼고 있는 현재의 제 연구에는 반드시 직접 관련된 것은 아닙니다. 그러면, 왜 이번에 이 작업에 가담했느냐 하면, 알튀세르는 현재에는 이미 역사상의 등장인물의 하나가 된 것입니다만, 학부시절에 선생의 보나파르티즘론을 읽고 큰 영향을 받았던 제게는 니시카와 선생도 역사상의 위대한 인물이었습니다(웃음). 확실히 주변 친구들도, 대단한 공을 들여 알튀세르를 번역해서 네게 도대체 어떤 장점이 있느냐, 푸코로 네 연구를 전개시키는 쪽이 좋지 않겠냐고 자주 말했습니다. 그러나 그래도 이번의 알튀세르 작업을 맡은 또 하나의 이유는, 니시하라 카즈히사(西原和久) 선생도 『자기와 사회』(新泉社)에서 말씀하시고 있는 것처럼 일본에서 푸코에 대한 언급이 이뤄지는 경우에는 권력론으로부터 그 ‘가시’를 뽑아내기 위해, 푸코가 이용된다는 ‘나쁜 풍습’이 있었습니다. 최근에는 다시 정황이 바뀌고 있습니다만, 그런 ‘풍습’으로부터 거리를 두기 위해서도 이번에 다시 한 번 푸코와 알튀세르의 관계를 제 나름대로 제대로 생각하고 싶었다는 것이 있습니다. 그래서 ‘니시카와 나가오 스터디’로 얘기를 되돌립니다만, 알튀세르와 니시카와 선생의 국민국가론은 어떤 관계에 있느냐라는 관심을 갖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보나파르티즘론과의 관계로 말하면, 그람시의 헤게모니 개념의 문제 등에 대해, 그람시-알튀세르의 관계를 어떻게 정리하고 계시는가.
그리고 (번역 이후의 과제로서는) 선생이 이 알튀세르의 이데올로기론을 소개된 당시부터 현재까지의 정황의 변화를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 있습니다. 지금, 일본에서도 우파적 움직임이 대두되고 있으며, 또한, 전시상태 아래이기도 합니다만, 이 고약한 일본의 정황 속에서 알튀세르를 읽으면서 도대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를 생각하고 싶습니다.
이부키 : 사회자의 입장을 떠나서 얘기하겠습니다만, 한 점만. 「역자해설」에서 선생님도 번역어의 문제에 관해 언급하셨습니다만, 알튀세르는 이 이데올로기론을 맑스-레닌주의의 맥락 속에서 생각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나라의 알튀세르 연구는 종종 알튀세르를 맑스주의와 떼어내어 생각하려고 하는 경향이 강하다, 특히 이데올로기론에서 현저했다. 확실히 그것을 자초한 원인이 알튀세르 자신에게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그러나 이 책 전체를 읽어보시면, 알튀세르가 이데올로기론을 맑스주의의 내부에서 생각하고, 이로부터 도출한 것임을 일목요연하게 읽어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확실히 예전의 「이데올로기와 국가의 이데올로기 장치」에서는 맑스주의로는 어쩔 수 없는 것을 알튀세르가 독자적으로 만들어냈다는 인상을 받는다. 즉, 레닌은 국가를 억압장치로 생각했으나, 그러나 그것으로는 국가라는 것을 정확하게 파악하지 못한다, 따라서 새롭게 ‘국가의 이데올로기 장치’라는 개념을 덧붙인다고 말하는 것처럼 읽었습니다만, 그러나 그런 게 아니라, 이 초고에서 ‘이데올로기 장치’라는 것이야말로 레닌은 이미 알았으며, 알고 있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혁명 이후의 사회에서 무엇을 해야 하느냐를 생각했을 때, 이 이데올로기 장치를 바꾸지 않으면 안 된다, 낡은 것을 파괴하고 새로운 것으로 대체한다는 문제가 레닌에게 끊임없이 따라다녔다고 지겹도록 장황하게 썼습니다. 그런 곳에서부터 알튀세르는 아이디어를 얻어 ‘국가의 이데올로기 장치들’이라는 개념을 만들어냈다. 이것은 절대로 강조해두지 않으면 안 되는 포인트입니다. 물론, 알튀세르가 현대사상가들에게 영향을 미친 것은 사실이며, 알튀세르 자신도 그의 사상도 당시의 지적인 네트워크 속에 존재했다는 것도 사실이기 때문에, 그런 면도 봐두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런 셈이어서 여러분에게 문제의식을 말씀해주신 건데요, 이것을 다시 니시카와 선생께 돌려주고 싶습니다. 어떠신가요?
닫힌 지식의 공동체
니시카와 : 오나카 씨로부터 서클로서의 알튀세리앙의 말씀이 있었습니다. 진지한 동시에 유희적인 일면이 있었다는 것은 확실히 그렇다고 생각하며, 그것은 정신의 유연성을 유지하기 위해서도 필요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것에 대해서는 조금 위화감도 있습니다.
「역자해설」에도 조금 썼는데요, 일본에 소개되는 프랑스의 철학자들의 거의 모두가 에콜 노르말 출신이라는 것입니다. “지식의 중앙집권”이라고 하는 것을 「해설」에도 썼는데요, 이것은 장난으로 쓴 면도 있지만(웃음), 그런 제도 속에서 한패거리의 악당처럼 되고 있는 것에 대한 위화감 때문에 그렇게 쓴 면도 있습니다. 제가 알튀세르와 만났을 때, 너무 사교적sociable이어서, 상대에 대한 배려가 있는 상냥한 사람이라는 인상을 받았습니다만, 그러나 실제로 만난 것은 에콜 노르말의 한 교실이며, 그는 거기에 계속 눌러앉아 있었던 거죠. 특권적인 제도에 의해 보호되고, 제도 아래로 몰려드는 그룹의 강함과 약함, 혹은 ‘추잡함’이라고나 할까요, 그것도 있다는 것을 덧붙이고 싶다. 전부 노르말리앙이라는 것은 사실상 이상한 것이며, 이 비정상성을 좀 더 생각해봐도 좋은 게 아닌가. 알튀세르뿐 아니라, 푸코의 전기 등을 읽어봐도 그건 매우 작은 서클 얘기가 되고 있다. 지적인 생산이 그런 형태로 행해진 것이며, 그것은 무너뜨리지 않으면 안 되는 제도이며, 그 언저리를 조금 생각해 보고 싶다는 것이 있습니다.
오나카 씨가 거론하신 『마가쟁 리테레르』 기사를 방금 읽어주셨는데요, 68년 이후는 그 서클이 사라졌다는 것도 적혀 있네요. 이 책은 그 단계에서 써진 것이죠. 그래서 대화적인지 아닌지, 오히려 대화가 끝난 후부터 쓰기 시작한 것이 아닐까요.
오나카 : 발리바르도 「부론(付論)」의 각주에서 언급하고 있는데요, 68년을 거침으로써 각각의 정치적 경향이 첨예화되어 깨져버리고, 그래도 그룹을 정리하고자 하며, 대문자로 시작되는 “Ecole”[학교제도 일반을 가리키지만, 동시에 학파나 ‘고등사범학교’의 약창이기도 하다]이라는 저작의 출판을 의욕하고, 교육의 문제에 매달렸다. 그러나 누가 참여했는가를 대외적으로는 숨긴 채 과거의 작업 그룹을 유지하려고 한 시도는, 실패로 끝났다고 합니다. 확실히 68년 이후에 균열이 들어와, 공산당에서 나간 사람들은 당연히 남은 사람들을 공격합니다. 그 반대도 있었죠.
니시카와 : 그것은 이 책의 성격을 결정짓는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만, 그것에 대해서는 나중에 언급하죠.
‘비국민’과 혁명의 주체
니시카와 : 오나카 씨로부터 ‘비국민’의 문제가 언급되는 가운데, 불탄 자리의 체험(焼跡体験)과 68년과 냉전 붕괴라는 세 가지 혁명을 제 세대의 특권적 체험이라는 형태로 시사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말씀하신 그대로입니다만, 조금 오해가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자기반성으로서 말하는 것인데요, ‘체험’이라는 말은 조금 조심해서 쓰는 편이 좋을지 모릅니다. 체험은 나중에 만들어지는 것이니까. 저는 패전 때 소학교 5학년으로 만주에 있었습니다. 거기서 종전 3일 전에 갑자기 무개화차(無蓋貨車[덮개가 없는 화물열차])에 실려 남쪽으로 갑니다. 결국 서울 가까이서 내려지고 패전을 맞고, 거기서 1년 정도 억류되어 있었습니다. 그리고 거기서 달아나 국경(38선)을 넘는다. 그런 난민체험 같은 것이 있고, 불탄 자국(焼跡)이라는 것을 정말로 몰랐다. 그렇기에 모종의 ‘이상화’가 있는지도 모르며, ‘폐허’에 대한 믿음을 만들어낸 것인지도 모릅니다. 오나카 씨가 『일본의 전후소설(日本の戦後小説)』(1988)로까지 거슬러 올라가, 그것을 국민국가론에 연결시켜준 것은 고마우며, 저로서는 기쁩니다. 사실은 또 한 명 그것을 지적해신 분이 있는데, 그것은 역사가 야스다 츠네오(安田常雄) 씨입니다. 야스다 씨에 따르면, 니시카와의 국민국가론의 입구는 ‘폐허’이고 출구는 ‘사문화(私文化)’입니다. 야스다 씨는 『‘폐허’라는 원기의 장소(「廃墟」という原基の場所)』를, 단순히 전쟁 직후의 불탄 자리(焼跡)뿐 아니라, 고도성장기의 ‘폐허’, 68년 5월 혁명의 ‘폐허’라는 식으로 더듬고 있다(牧野憲夫 편, 『<나>에게 있어서의 국민국가론(〈私〉にとっての国民国家論)』, 274頁 이하). 오나카 씨가 말하는 세 번째 혁명(동유럽혁명)을 그것에 보태도 좋고, 또한 ‘사문화(私文化)’를 ‘비국민’이라고 바꿔 말해도 좋다고 생각합니다.
‘비국민’이란 불탄 자리의 체험도 물론 있습니다만, 그 전의 전쟁 중의 체험입니다. 전쟁 중, ‘비국민’이라고 불리는 것이 얼마나 힘 일인지, 거기서의 감각이 잘 전해지지 않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비국민의 특권성’이라고 말하기 전에, ‘비국민’이라고 불리는 사람들이 어떤 생활을 강제당했는지를 상상해 보세요. 전에 조금 쓴 적이 있는데요(「제국의 형성과 국민화(帝国の形成と国民化)」), ‘비국민’이라는 말이 생겨난 것은 청일-러일 전쟁 때입니다. 반전론자는 비국민으로 취급당했습니다. ‘국민’의 창출과 ‘비국민’의 창출은 궤를 같이 합니다. ‘국민’이라는 메이저리티의 형성, 즉 nation-building에는 피차별적 마이너러티의 존재가 필요하다. 모든 국민국가에 공통된 국민통합의 메커니즘이죠. ‘비국민’이라는 말로 직접 연상되는 것은 대역사건, 오스키 사카에(大杉栄)나 이토 노에(伊藤野枝)의 학살 등입니다만, 따지고 보면 과거에는 참정권이 없는 여성이나 가난뱅이는 비국민이었습니다. 아이도 외국인도 비국민. ‘국민의 역사’에 대해 ‘비국민의 역사’를 쓰고 싶다고 생각합니다만 …. 전쟁 중은 ‘주의자’뿐 아니라, 병자와 장애자도 비국민이었습니다. 레지스탕스 시대의 독일 협력을 이유로 머리를 삭발당한 여성도 비국민인데요, 문화대혁명 때 규탄을 당해 곤욕을 치룬 사람도 ‘비국민’이죠. 전후의 일본사회에서도 기본적으로는, 어느 정당도 애국자이며 민족주의자이며, 이로부터 벗어남으로써, 어느 정도의 압력이 걸리고, 고독으로 내몰리게 되는가. 그런 생각이 한편에 있으며 ‘비국민’이라는 말을 사용한 것입니다. 제게는 ‘비국민’이라고 불리는 악몽이 줄곧 있었습니다. 저는 애국소년이었습니다만, 만약 적에게 붙잡혀 고문을 당하게 됐을 때, 고문을 견뎌낼 수 있을까? 아마 견뎌낼 수 없다는 것을 줄곧 생각했습니다. ‘비국민’이 되는 공포가 있었던 겁니다.
불면증 얘기가 나왔는데요(웃음), 그것은 꽤 전략적으로 끄집어낸 것입니다. 즉, 국가로부터의 압력이 개인의 내면에 무의식에까지 파고들어갔으며, 그런 문제로서 국가를, 세계 시스템을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는 현재의 정치학에 대한 비판이기도 합니다. 뼛속까지 국민화된, 즉 국가의 가치들을 내면화한 인간에게 어떻게 제대로 된 국가비판이 가능할까? 그들이 하고 있는 것은 결국 “국가 이데올로기”의 동어반복에 불과한 것이 아닌가 …. 사실은 그런 숨겨진 의도를 정확하게 읽어내 이 짧은 에세이(「국민화와 시간병(「国民化と時間病)」)으로 제 국민국가론을 대표시키고 훌륭한 분석을 해주신 사람이 있습니다(畠山弘文, 『動員史観へのご招待』). 저는 이 사람을 한 번도 만난 적이 없으며, 전혀 모르는 분이라서 크게 놀랐습니다. 그에 따르면, 야마노우치 야스시(山之内靖)와 무라카미 야스스케(村上泰亮)와 함께, ‘네오 마키아벨리안’이 된다는 것 같습니다.
알튀세르에 대한 저의 사고는 그렇게 이어져 있습니다. 국가비판의 길을 가르쳐준 것은 알튀세르였습니다. 알튀세르가 다른 맑스주의자와 다른 곳은, ‘국가 사멸’이라는 것을 강조한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아나키즘과의 관계에서 모두 주저하고 있습니다. 지금은 ‘착취’도 ‘계급’이라는 것도 말하지 않기에, 저는 혼자서 말하게 되고 있는데요(웃음), 꽤 고독합니다. 국가비판을 어디서 멈추고 있느냐라는 문제인데요, 일본의 맑스주의도 그렇습니다만, 결국 전부 국가 유지예요. 반면 알튀세르는 국가 장치의 파괴로까지 밀어붙이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그리고 그때 ‘국민’은 ‘비국민’이 된다.
이부키 : 이 책에서도 알튀세르는 확실히 레닌은 사회주의 국가를 만들려고 했지만, 그러나 프롤레타리아트 독재라는 것은 잠정적인 것, 과도적인 것이며, 하나의 이행기일 뿐이라는 것을 몇 번이나 거듭 강조하고 있네요.
니시카와 : 그렇군요. 알튀세르가 갖고 있는 것은 국가에 대한 그런 자세네요. 또 하나는 ‘착취’를 강조하고 있다는 것이네요. 그것과 ‘혁명’입니다. 그것들은 제게 있어서도 아무래도 버릴 수 없는 것입니다. 물론 그것이 어떤 형태를 취하느냐라는 문제는 있습니다. 그것은 야마카 씨가 말하신 헤게모니론과 관련됩니다만, 저는 그람시의 헤게모니론을 몇 차례나 읽어도 잘 모르겠고, 애매하지 않느냐는 곳에서는 알튀세르와 같은 생각입니다. 알튀세르는 쓰지 않았습니다만, 국가의 이데올로기 장치 혹은 이데올로기론이 별종의 헤게모니론으로, 혹은 혁명론으로 이어진다는 것에 내기를 걸고 있다. ‘비국민’은 그 지점에서 새로운 풍부한 의미를 갖는다.
그리고 이부키 씨가 말씀하신 맑스주의 속에서 생각하는, 맑스주의 안에 위치된다는 것인데요, 저도 그러고 싶다고 생각하는데요, 그것은 알튀세르에 대한 생각인 동시에 맑스주의에 대한 생각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실제로 제가 지금까지 해온 작업은, 보나파르티즘론이 전형인데요, 맑스에 대해서는 맑스 비판이고, 알튀세르에 대해서는 알튀세르 비판입니다. 알튀세르는 이번의 책 속에서도 프랑스 혁명 이후의 프랑스 공화주의의 전통을 상대화하고 비판적으로 고찰할 수 있는 관점을 획득하지 않았다고 생각합니다. 본서에는 근대 프랑스사에 관한, 교과서적이랄까, 교육적 기술이 꽤 포함되어 있어서 (예를 들어 7장) 재미있는 지적도 몇 가지 있는데요, 기본적으로는 낡은 정통파적 해석에 의거하고 있고, 알튀세르적 독자성은 별로 볼 수 없다.
이부키 : ‘비국민’ 얘기로 말하면, 알튀세르의 이데올로기론은 바로 이것과 관련된 논의를 전개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른바 ‘호명 呼びかけ=尋問’ interpellation의 논의입니다. <주체> 혹은 이데올로기로부터 개인들 individus이 호명되고, 그것에 응함으로써 개인들은 주체들 sujets이 된다는 논의인데요, ‘비국민’이란 이 개인들의 위치에 있는 것으로서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개인들은 알튀세르의 논의를 정확하게 읽어내면, 본래적으로 존재하지 않을 터입니다. 왜냐하면 “주체는 항상 이미 주체이기” 때문입니다. 이간은 이미 항상 주체이며, 이 세상에 태어나자마자 주체인 셈이니까, 주체 이전의 개인은 이 세상에는 존재하지 않게 된다. 그러나 개인이 <주체>로부터의 호명에 응함으로써 비로소 주체로 승격되며, 주체가 존재하게 된다는 구도이다. <주체>의 위치에 국가를 놓으면, 이로부터의 호명에 응하지 않는 것이 있다. ‘비국민’입니다. ‘비국민’은 국민의 비-주체입니다. 주체가 될 수 없는 것은, 즉 개인인데요, 그러나 개인은 ‘이론상’으로는 원래 존재하지 않을 것, 존재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비국민’도 국가 속에서는 존재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오나카 : 그 논의에 관해서는 보다 일신교적인 담론이기 때문에 일본사회에는 타당하지 않는다는 비판이 있는데요, 일신교 운운을 말하기 전에, ‘비국민’의 예를 봐도 알 수 있듯이, 구조로서 그런 것인 이상, 이 이데올로기론은 일본사회에 100퍼센트 타당하다는 것을 봐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또 한 가지 점은, “항상 이미 주체”인 이상, 개인은 존재할 수 없다는 논의에 대해서인데요, 그런 시간 계열이 되고 있습니다만, 저 시퀀스는 편의상 그러하다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알튀세르는 말하고 있다. 그리고 이 점에 관련해서 생각하는 것은, 알튀세르 말년의 에피쿠로스의 원자 얘기입니다. 원자도 부딪치지 않으면 존재하지 않는다. 부딪치면, 개물(個物), 구체적인 대상이 되지만, 그렇지 않으면 (감성적으로는) 인식할 수 없다. 개인은 individual한 것, 분할 불가능한 것이라는 한에서 바로 원자입니다. 에피쿠로스(루크레티우스)에 있어서 원자는 보통, 허공을 수직으로 등가 속도로 낙하하는 것이라고 생각되고 있다. 이 구체적인 대상을 산출하지 못하는 수직 낙하의 운동을, 일상적인 지배관계의 재생산이라고 한다면, 이로부터 한없이 미세하게 사행(斜行)하는[비스듬하게 나아가는] 원자의 우동이 클라나멘입니다. 클리나멘도 또한, 호명과 마찬가지로 하나의 생성 devenir의 원리입니다. 그러나 원자의 수직 낙하가, 호명의 이야기,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는” 상황의 재생산 얘기라고 했다면, 그로부터 빗나가는 것이 클리나멘이며, 그것은 수직 낙하로부터 한없이 미소(微少)하게 틀어지고 있다. 알튀세르는 변증법의 새로운 논리의 탐구를 위해 중층적 결정이나 여러 가지 도구를 동원한 끝에, 매우 간단하면서도 우아한 결론에 도달한다. 그리고 이 자유의 물음은, 만년의 알튀세르는 철학적 문제틀problematique를 같이 하지 않던, 23살의 맑스가 박사논문에서 제기한 물음이기도 했습니다.
68년 5월과 알튀세르
니시카와 : 「역자해설」에서 강조해 둠으로써, 거꾸로 제가 여러분께 의견을 여쭙고 싶은 것이 몇 가지 있는데요, 하나는 이 초고에 대한 68년의 크기에 관해서입니다. 「역자해설」에 “1968년의 5월과 그것에 이어진 사건들은 알튀세르와 본서에, 매우 굴절된 형태이긴 하지만 결정적인 각인을 남기고 있다”(439頁)고 썼습니다만, 알튀세르는 68년 5월을 복잡한 처사[仕方]라고 말합니다만, 오히려 비판적 방식[仕方]으로 빠져나가려고 합니다만, 과연 68년을 이해할 준비가 되어 있는 것인가. 또한 “맑스가 파리 코뮌에 직면하여, 자기의 역사=국가이론의 새로운 전개를 피할 수 없게 됐듯이, 알튀세르는 ‘5월혁명’에 직면하여, 이데올로기와 국가장치, 더욱이 혁명적 운동에 관한 자기의 이론의 새로운 전개를 피할 수 없게 된 것 아닌가”(440頁)이라는 가설을 세웠는데요, 맑스가 『프랑스 내전』을 쓸 수밖에 없었던 것 같은 정황과 겹쳐서 이 책을 이해할 수는 없을까요?
야마카 : 알튀세리앙이 아닌 제 입장에서, 화제를 흔들기 위해서도, 굳이 말하자면, 푸코와 들뢰즈 등등, 누구든 좋지만, 그들이 취한 68년에 대한 자세에 비하면, 알튀세르가 취한 자세는 아까 선생이 말씀하신 “지식의 중앙집권”의 문제에 대해서는 일단 얘기를 중지하더라도, 아주 ‘좁게’ 느껴집니다. 그것이야말로 현재에서부터 부딪쳐 본다면, 매우 시시콜콜한 곳에서 아주 시시콜콜한 것에 에너지를 낭비해버린 불행한 사람이라는 인상을 갖고 있습니다(웃음). 그런 것이 알튀세르라는 사람에게, 독특한 매력을 주고 있다는 것도 있겠지만.
이부키 : ‘좁다’거나 ‘시시콜콜하다’는 것은 무슨 말이죠? ‘당의 입장’이라고요?
야마카 : 그렇습니다. 그 맥락에서만 정황적인 발언을 할 뿐이며, 이 책에 프로파간다적인 텍스트라고 하더라도 ‘당’에 대해 알튀세르가 보냈던 기대를 우리에게서는 더 이상 지지할 수 없는 것이라고 한다면, 알튀세르의 이 ‘좁음’을 지금의 우리가 어떻게 다시 받아들이느냐라는 문제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오나카 : 68년 5월의 문제에 대해, 알튀세르에 국한되지 않고 일반적으로 말할 수 있는 것은 ‘제도’와 어떤 관계를 갖고 있느냐라는 문제가 아닐까요? 당도 그렇습니다만, 이 책에 나오는 가족도 제도입니다. 알튀세르가 당이라는 제도 속의 사람이고, 또한 에콜 노르말이라는 제도 속의 사람이라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이 사실에 관해서도, 좋은 곳과 나쁜 곳의 두 측면을 인식하고, 모순의 내실을 이해할 필요가 있는 게 아니냐고 생각합니다.
예를 들어 아까 니시카와 선생이 최근에 모두 ‘착취’라는 것을 말하지 않게 되었다고 말씀하셨습니다만, 그러나 이것을 억척스럽게 맑스주의적으로 생각했을 때, ‘착취’라는 것을 과연 지금 어떻게 말할 수 있느냐는 문제가 있다. 그런 것을 진지하게 이야기하려고 할 때, 균열된 상태[股裂き状態]가 되는 것입니다. 한편으로는 19세기의 대공업모델로 작성된 것을 그대로 적용할 수 없을 정도로 현실의 자본주의의 진전이 있다. 이것을 뒤쫓으려 하면, 기술이나 사회편성의 변천은 뒤쫓을 수 있으나, 『자본』이 모범적으로 행하고 있는 착취의 원리론을 일반적인 형태로 심화시켜가는 것은 어렵다. 다른 한편, 순수이론, 『자본』의 텍스트 해석에서 처음으로 시작하게 되면, 가치론이나 노동시간의 문제는 뒤쫓을 수 있으나, IT나 전지구화의 현실은 좀체 추적할 수 없게 되어 버린다. 냉전이 끝나고 소련이 붕괴하고, 맑스주의가 제도로서 붕괴했다는 것뿐만 아니라, 이론상의 어려움이 있기에 착취가 이야기되지 않는 것이라는 것도 인정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착취’에서 시작해서, 모든 상부구조의 논의 등 논리적으로 개념이 구축되고 있습니다. 현상으로서 착취가 있다는 것은 확실합니다만, 그러나 가치론, 노동시간은 어떻게 할 것인가? 제도적 자원을 잃은 맑스주의가 이 두 개의 과제를 동시에 맡는 것은 어렵다. 그래서 누구도 말하려 하지 않는다, 또한 말할 능력이 없는 게 아닐까요?
그런데 「역자해설」의 68년 5월에 대한 대목에서, 니시카와 선생은 미셸 베레(Michel Verret)의 논문도 더 읽어 마땅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만, 요컨대 알튀세르는 5월을 프티부르주아적 운동으로서 위치시켰다는 것을 말씀하고 싶었던 것입니까?
니시카와 : 역사가 시작된 이래, 총파업이라는 곳에서부터 본다는 것이죠. 거기에 관점을 두고, 학생이나 지식인의 움직임을 보면서 수정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얘기였다고 생각합니다.
오나카 : 더 언급되어야 마땅하다고 하는 것은, 알튀세르의 ‘좁음’이 있다는 것이 지적되고 있다는 말인가요?
니시카와 : 아니, 그런 게 아니라, 알튀세르의 68년 5월에 대한 자세는 ‘좁다’라고 자주 말해집니다만, 제 생각으로는 “이 책을 쓴 것이 아닌가”라는 것입니다. 이 책을 가지고, 미셸 베레에 대한 반론을 다시 한 번 고쳐 봐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 책의 여러 곳에서 미묘한 얘기言い方를 하고 있고, 그것을 어떻게 읽느냐에 저는 관심이 있으며, 그것들에 주의 깊게 임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이부키 : 알튀세르의 ‘좁음’, 즉 당이라는 틀에 얽매여 있다는 것은 확실히 자주 지적되고 비판되고 있습니다만, 제 개인은 그것이 알튀세르의 장점이랄까, 배운 점입니다. 알튀세르는 싫어할지도 모릅니다만, 그의 실존을 느낍니다. 안전지대로부터 사태를 말하지 않는다는 자세입니다.
그런데 이 책에서는, 당은 국가의 이데올로기 장치의 하나가 되고 있다. 보통 당의 인간은 공산주의자라면, 당만은 특별한 것일 터입니다. 당만은 특별한 위상에 있으며, 높은 곳에서 다양한 이데올로기 장치를 내려다보며 분석하는 구도가 되었을 터입니다. 그런데 보이는 쪽에, 대상 편에 당이 들어 있다. 조금 허둥댔다고 할까, 당혹스러웠습니다. 그런 관점이 원래 알튀세르에게 있었던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이처럼 명확하게 활자화된다는 것은, 이 시점에서 어떤 사상적 전환이 있었는지도 모른다. 『미래는 오래 지속된다』에 68년의 문제를 언급하는 장면에 있는데요, 당시 이미 당에서 제명된 아내 엘렌느에게서 “이 현상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질문을 받고, 알튀세르는 대답이 궁해집니다. 게다가 “공산당은 이 문제에 대해 정면에서 파악할 수 없기 때문에 안 된다”는 얘기를 듣고 골똘히 생각에 잠깁니다. 알튀세르에게 어떤 사상적 동요가 있었던 것은 사실 같아요. 그 결과가 이렇게 이데올로기론으로서 작성된 것인지도 모른다.
니시카와 : 예를 들어 “이 계급투쟁 속에서, 그가 가져다준 근원적인 새로운 것을 별개로 한다면”(224頁)이라고 쓰고 있습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문장입니다. 5월에 대해 “근원적인 새로운 것”이란 무엇인가? 이것에 대해 써야만 한다고 알튀세르는 생각했다. 그러나 쓰지 않는다. 하지만 “근원적인 새로운 것”이라는 식으로, 은근슬쩍 한 마디를 넣고 있다. 여기에 가족의 문제 등이 나옵니다.
또한 “68년 5월은 [말의] 강한 의미에서의 역사적 정치적 전망 없이 ‘살고 있다’”, 이 “전망 없이 ‘살고 있다’”라는 것이 하나의 키워드인데요, “그 때문에 나는”이라고 여기서 일부러 말한 다음에, “국가의 이데올로기 장치들에 있어서의 계급투쟁에 관한 사실들을 이해하고 반항을 그 역량에 걸맞은 수준으로 되돌리기 위해 ‘재생산의 관점’에 설 필요가 있다”(303頁)고 말합니다. 5월을 보고, 재생산의 관점에 설 필요가 있다는 논의로 가져오고 있다. 현재의 정세를 본 다음에, “나는”이라고 말하는 서술방식은, 지금까지 우리가 알고 있던 알튀세르의 서술방식과는 다른 것입니다. 이렇게 굴절된, 그러나 필요한 것은 최소한 말한다는 쓰기방법입니다. 그리고 이 대목은 『재생산에 대해』는 5월이 일어남으로써 쓰기 시작한 것임의 증거가 된다. 이처럼 하나하나의 표현을 세세하게 보면, 또 다른 이 책의 성격과 알튀세르의 모습이 보이게 되는 것 아니냐 생각합니다.
이부키 : 현상의 측면만을 봐도, 프랑스의 5월도, 전공투 운동 등의 일본의 60년대 후반의 반란도 그렇습니다만, 대학에서 일어나고, 그것을 중심으로 바깥으로 뻗어나간 것이네요. 그렇다면 5월 그 자체를 생각하려고 할 때, 아무래도 “학교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통과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말할 것도 없이, 학교는 국가의 이데올로기 장치의 대표이며, 알튀세르도 그렇게 말하고 있다. 표면적으로 봐도, 5월을 계기로 하여 그것에 대해 어떻게 이론적으로 호응하느냐라는 문제의식 아래서 이 책이 써졌다고 말할 수 있을지 모릅니다.
오나카 : 적어도 원래 ‘학교’라는 기획 자체가 그런 문제의식 아래서 행해진 것이며, 그런 관점을 창출한 것은 68년의 영향(impact)이었죠.
『재상산에 대해』는 초고이기는 합니다만, 한 권의 책입니다. 선생이 지금 말씀하신 재생산의 관해서는, 알튀세르의 독창성(originalité)이란, 현대식으로 말하면 ‘담론’의 기능에 의해 주체가 시동[가동]되며, 그것에 의해 사회적인 관계가 재생산되어 가는, 그래서 학교가 중요해진다는 것을 말한 것입니다. 그것이 68년의 영향(impact)이었습니다.
그러나 문자 그대로 읽다보면, 재생산이 나날이 이뤄지는 가운데에서도 계급투쟁이 우위를 차지하는 것도 동시에 서술되고 있습니다. 무매개적인 우발사의 관점만은 아니라는 겁니다. 나날이 재생산되어가는 가운데에서의 투쟁이, 관계나 제도나 장치의 안쪽에 위치지어지고 있다. 제도적 실천 속에서, 예를 들어 에콜 노르말 속에서 이런 담론을 내세우는 것도 투쟁의 한 형태라고. 제도와 관계를 맺는 방식입니다. 그것이 ‘좁다’라는 비판은 물론 있다고 생각합니다만, 알튀세르의 투쟁의 선택이란 그런 형태를 취했다.
곤노 : 오나카 씨는 “틀 속에서의 실천”은 알튀세르의 전략이라고 말씀하셨는데요, 프랑스에서 열린 맑스국제회의의 알튀세르 세션에서 청중에게서 가장 많이 나온 질문은, “알튀세르가 말하는 것은 해방적이고 탈중심적인 것은 알겠다. 그렇다면 왜 당에 머물러 있는가”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런 점에서 말하면, 틀 안에서 실천을 하는 것에 문제성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또 하나는 담론이라는 형태로 틀을 넘어선다고 오나카 씨와 이부키 씨는 말씀하셨습니다만, 그렇다면 일부러 틀에 머물 필요는 없다. 그것은 나쁜 것이라고는 말하지 않습니다만, 아주 양가적인 양상이 있다.
이부키 : 알튀세르 자신이 틀 안에 머물러 있는 것의 중요성을 자각하고 있었던 것 아닌가.
곤노 : 저는 그렇게는 생각하지 않는다.
야마카 : 알튀세르 자신이 자기가 당에 남아 있는 것을 어떻게 생각했느냐라는 문제와, 알튀세르가 남아 있었던 것을 지금 현재에서 살고 있는 우리가 어떻게 평가하느냐라는 두 가지 문제가 있네요. 물론 현재의 우리의 모습 자체를 알튀세르를 통해 다시 묻는 것도 필요하겠죠.
곤노 : 『미래는 오래 지속된다』의 영역판에서 더글러스 존슨은 긴 서문을 썼는데요, 그가 말하기로는, 알튀세르는 68년이 혁명의 마지막 기회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이데올로기론을 쓴 것이라고. 정황의 긴급성이 알튀세르에게는 있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정말로 그런가는 논란의 여지가 있습니다만, 선생이 말씀하신 맑스와 평행적으로 생각하면 약간 맥락이 다른 것 같아요. 우리가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좋겠지만.
니시카와 : 마지막 기회라고 생각했는지 여부는, 이 책에서 써져 있는 것과, 그 후에 써진 것으로 달라진다고 생각합니다만, 이 책에서는 “때가 왔다”고 한편으로 말하면서, 그러면 혁명은 언제 성취되느냐고 하자, 한참 뒤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제 자신은 알튀세르가 68년을 혁명의 마지막 기회라고 생각했다고는 못하겠어요.
이 책에서는 이렇게도 말해지고 있습니다. “무슨 표시일까? 레닌이 말했듯이 <혁명>이 일정에 오르고 있다는 표시인데, 그것은 정황이 혁명적이라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우리는 여전히 그것으로부터 멀다)”(225頁). 이 발언으로부터 68년을 마지막 혁명의 기회라고 생각했던 것은 아님을 아시겠죠.
오나카 : 이 책보다 훨씬 나중 시대에 『철학에 대해』에서 F. 나바로가 쓴 것이 있습니다. 냉전 종결 뒤의 문장으로, 간단하게 신용해서는 안 됩니다만, “남미에서는 맑스주의는 계속 살아남을지도 모르지만, 유럽에서는 계급이나 착취 등의 일련의 맑스주의의 어휘는 없어져버릴 것이다”라고 알튀세르는 말했다고 그녀는 적고 있습니다.
『재생산에 대해』라는 책에서, 68년에 대한 양가성이 있는 것은 확실하다고 생각합니다. 알튀세르의 제도적 입장에서는, 68년의 세대처럼 앙가주망할 수 없다. 연령대로도 그렇고, 자신이 지도하고 있는 학생들에게는 아그레가시옹을 잘 치르게 하고 싶다고 생각했고(웃음). 그러나 학생들과는 다르지만, 분명히 일종의 혁명적 사건이라고는 느꼈으며, 그런 양가적인 마음이 이 책 전체에 감돌고 있다.
이부키 : 공산당원인 알튀세르에게는 당연히 혁명의 도식이 있다. 그것은 당이 정점에 있고, 당의 지도에 의해 노동자나 대중이 움직이고, 그것에 의해 혁명이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을 배신해버린 것이 68년 5월이며, 당이 없어도 ‘혁명적’ 정황은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줬다. 알튀세르의 인식의 틀에 들지 않는 사태가 눈앞에서 전개된 것이기 때문에, 이것이 혁명이라고는 좀체 인정할 수 없었던 거겠죠. 그래도 한편으로는 사회가 격동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며, 확실히 혁명적 양상을 드러내고 있었다. 자신의 인생을 그것에 [내기를] 걸었던 이념과 눈앞의 사실 사이에서 균열된 상태[股裂き状態, 가랑이가 찢어진 상태]가 되었던 것이기 때문에, 그렇게 간단하게 명확한 태도 표명을 할 수 없는 게 아닌가.
오나카 : 제도에 계속 머무는 것은 왜인가라는 문제가 있고, 조금 관점을 바꿔서, 제도 편에서 알튀세르를 본다면, 그는 주변부적 존재입니다. 대학에서의 철학에서도 『레닌과 철학』을 읽어보면 알 수 있듯이, 자신이 서 있는 위치의 주변부성을 호소하고 있다. 대학에서의 입장에 보태서, 당 안에서도 단순한 일개 당원, 그것도 지도부에 점점 더 비판적으로 되어가는 일개 당원입니다. 또한 비공산당적인 좌파 편에서 보면, 세대적으로도, 68년의 학생운동에 전면적으로 헌신할 수도 없다. 이런 것은 거꾸로 말하면, 이러저러한 제도와의 관계에서, 일종의 ‘경계선’에 서 있겠다는 선택이기도 하다. 그런 것은 기성 제도들로 바뀐 운동의 고양 등이 없는 현재 상황에서는 꽤 현실적인actual 것이 아닌가.
알튀세르는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는 시대란, 국가의 이데올로기 장치들이 완벽하게 기능하고 있을 때이다. 국가의 이데올로기 장치들이 더 이상 기능하지 않게 될 때, 즉 모든 주체의 ‘의식’ 속에서 생산관계들을 재생산하는 것을 더 이상 할 수 없게 될 때, 5월처럼, 다소 중대한 이른바 ‘사건’이 일어난다. 하지만 5월의 ‘사건’은 처음의 예행연습의, 그 또한 느낌에 불과했다. 하지만 언젠가, 오랜 걸음의 끝에, ‘사건’은 혁명을 수반하게 될 것이다”(286頁).
발리바르도 「부론付論」에서 말합니다만, 자가당착어법에 의해 혁명에 도달하려고 하는 방식입니다. 이단 국가장치들이 사회 전체를 전면적으로 에워싸고, 그렇기에 반전되는 것이죠. 그런 곳에서 자신이 제도와의 관계를 계속 유지하는 것의 의의를 찾아내려고 한 것이 아닐까. 그리고 그런 제도 내부의 사람만의 관점에서 공산당에 머물러 있다.
이부키 : 공산당에 머물러 있던 것에 관해서인데요, 알튀세르 자신이 그것의 중요성을 자각했다고 생각한다. 추측일 뿐이지만, 그에게는 당에서 나와도 여전히 공산주의자로서 버틸 수 있을지 모르는 “자신 없음” 같은 것이 있던 것이 아닌가.
원래 당이라는 것은 공산주의자를 공산주의로서 머물게 하는 장치입니다. 주체성론처럼, 아무리 자신이 다짐하면서 살아가더라도, 다른 이데올로기 장치에 의해 개조되어 버리는 것을 알튀세르는 잘 알았으며, 이 책에서 그것을 마침내 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공산주의자이길 계속하기 위해서는 아무래도 공산당이라는 이데올로기 장치에 머무를 필요가 있었던 것입니다.
오나카 : 비극적이게도, 그의 인생은 가족이라는 이데올로기 장치를 파괴한 결과, 학교라는 장치에서도 당이라는 장치에서도 사라졌다. “책임 능력이 없는 상태”가 된다.
니시카와 : 당에 남아 있느냐 여부에 대해서는 거꾸로 생각해보면 어떨까요? 당이 바뀌고 있는 것이니까, 알튀세르 혼자만 당에 남았다고.
이론적 문체와 프로파간더적(교육적) 문체의 병존
니시카와 : 또 하나 여러분께 여쭙고 싶은 것은, 이것도 텍스트의 성질과 관련되는 것인데요, 전반부와 후반부가 어긋나 있는 것 아니냐는 것입니다. 이것은 발라비라도 지적하고 있으며, 일반적으로 그렇게 읽는 것 아니냐고 생각합니다. 솔직하게 말하면, 처음에 제가 『팡세』의 논문을 번역했을 때에도, 갑자기 도중에 화제가 바뀌고, “어, 뭐지?”라고 생각이 들었고, 납득할 수 없는 기분이 남았습니다. 그러나 이 문제에 관해서는, 저는 발리바르와 달리, 이 텍스트 전체를 통해 읽어봤을 때 이어진다는 것을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이어지는 것이 모순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이번에 번역해 보니 설득이 되었습니다. 그런 한편으로, 두 개의 문체, 즉 이론적 탐구의 문체, 그리고 프로파간다적인, 교육적인 문체가 병존하고 있으며, 이 두 개의 문체의 차이는 역력하다. 그것을 어떻게 해석하는가.
그것에 대해서는 알튀세르는 『마키아벨리의 고독』에서 아주 좋은 해답을 보여주었습니다. 이 논고가 나왔을 때 저는 일종의 질투를 느꼈습니다만, 우선 제목이 좋고, 교활하네, 라고(웃음). 그다지 말해지지 않는 것인데요, 이것은 국민국가론입니다.
오나카 : 좋게도 나쁘게도.
니시카와 : 알튀세르는 ‘국민국가’État-nation라는 말을 사용하지 않고, 여기서는 État national이라고 말합니다만, 그러나 적혀 있는 것은 국민국가론입니다. 그 속에서 알튀세르는 “『군주론』은 정치적 <마니페스트>이다”라는 그람시의 말을 인용한 뒤, 다음과 같이 말한다. 바로 이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이념형을 생각할 수 있다면, 정치적 <마니페스트>는 순수한 이론적 담론이 아니라는 것, 순수한 실증적 논의가 아니라는 것을 고유한 특징으로 한다. <마니페스트>에 이론은 없다는 의미가 아니다. 아는 것과 관련된 적극적 요소를 담지 않는다면, <마니페스트>는 진공에서 질러대는 큰 소리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그런 것이 아니라, 정치적 <마니페스트>는, <마니페스트>이려고 한다면, 즉 역사적 효과를 산출하려고 한다면, 순수 인식과는 완전히 다른 영역에 기입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그 <마니페스트>는 그것이 거기서 작용을 미치려고 하는 정치 정황에 기입되지 않으면 안 되며, 그 모든 것이, 정치적 정황과 이 정황을 결정하는 힘관계가 가져올 정치적 실천을 목표로 삼지 않으면 안 된다. <마니페스트>가 표명하는 이론은, <마니페스트>의 개입의 장, <마니페스트>의 사고의 장, 즉 사회공간 속에, 이 <마니페스트> 그 자체에 의해 위치지어지지 않으면 안 된다”(419-20頁).
이론적 탐구의 말과 지금의 지배적인 정황 속에 새겨지게 되는 말은 성질이 다르지만, 그러나 그것이 하나로 정리된[뭉쳐진] 것으로서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이 있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글을 쓸 때의 저의 한 가지 이상이기도 합니다. 알튀세르의 이 책을 순수하게 이론적인 탐구의 말로 구성된 것이라고 기대하고 읽으면, 법이나 조합이나 역사에 관한 기술, 혹은 프로파간다적인 호명 등도 들어 있어서, 독자는 혼란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두 종류의 말이 혼재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고, 모순과 결함으로 보이는 것이 또한 이 책의 매력이기도 하다.
오나카 : 발리바르는 이번에 출판된 별책 『정황』의 레닌 특집에 수록된 「레닌과 간디」에서도 그렇습니다만, 아포리아라는 것을 방법적으로 이용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중요하다”는 것이네요. 모순되고 있으니까 안 된다는 것이 아닙니다. 원래 모순은 변증법의 원동력인 것이니까(웃음).
그리고 마키아벨리에 대해서. 제도와 관계를 맺는 방식의 문제에도 관련됩니다만, 알튀세르의 담론은 더 엄밀하다고 합니다. 엄밀한 이론 담론이 미치는 ‘효과’effect, 혹은 ‘효과성’ efficace의 문제에 관해서, 분명히 알튀세르 안에서도 사고방식의 변화가 있습니다. 『『자본』을 읽자』의 서문의 마지막 부분에서 그는 “그 폐쇄성 자체에 의해 끊임없이 열리는 원환”이라고 말합니다만, 이런 인식론(epistemology)적인 지향과, “이론적 유토피아”를 말하는 마키아벨리론에서의 철학적이 유물론은 똑같이 엄밀하다고는 하지만, 역시 미묘하게 다르다. 여기서 마키아벨리론이 ‘만기(晩期)’ 알튀세르의 작품이라고 말할 수 있는 근거가 있다고 생각합니다만, 그 문제는 일단 젖혀둡니다. 그래서, 이런 차이는 일단 보류해 둔다고 밝힌 뒤, 아까 말씀하신 담론의 ‘효과’나 ‘효과성’의 문제라는 것은, 『『자본』을 읽자』에 실린 논문 「『자본』의 대상」에서 다뤄지고 있는 시간성의 문제라고 주장하고 싶습니다. 복수의 심급에는, 각각 고유한 시간성이 있다는 얘기를, 아날학파의 장기지속의 생각을 인용해서 행하는 대목입니다. 최종적으로는, 단순히 복수의 시간성이 있다는 것만으로는 경험적, 기술적이며, 그래서 차이적 시간성의 ‘개념’을 구축할 필요가 있다는 얘기가 됩니다. 물론 이 논점도 소묘로 끝나고 있습니다. 그러나 에콜 노르말의 좁고 후미진 자기 방에서 적은 말, 혹은 살 카바이에스(salle Cavaillès) 같은 큰 교실에서 이뤄지는 발화가 세계의 운명을 결정한다고 믿었다 운운이라고 하는, Y-M. 부땅이었던가, 전기적 텍스트에서 전해지고 있는 이야기는, 물론 혼자인 지식인의 삶을 그리는 데 있어서의 과장표현이며, 대상에 대한 사랑이 있는 농담이며, 또한 그렇게 단순한 관념론적 망상이라고 말하면 그것까지지만, 그러나 어떤 물질성에 뿌리를 둔 논의입니다. 만일 이데올로기든 담론의 심급이, 그 특유한 시간성을 갖고, 그런 한에서 다른 더욱 더 ‘현실적’인 심급과 모순, 교차한다면, 역시 그것은 그 나름의 ‘효과’를 갖는다는 것입니다. 아까 청년 맑스를 인용하셨는데요, 맑스 자신의 출발점도, “철학사와 어떻게 대결할까”였다. 그런 것을 생각하는 것은 청년 헤겔파가 ‘오버닥터’의 클럽이었기 때문이며, 또한 그런 것을 말하면 오버닥터가 됩니다(웃음). 아무튼 제도적 입장성이 있다는 것, 그리고 대부분 관념론이라는 것도 확실합니다만, 헤겔적 레퍼런스로부터, 즉 철학사가 세계를 움직인다고 하는 상념으로부터 알튀세르가 떨어져나갈 수 없는 것은, 이데올로기론에서 말해지는 “물질성의 양태의 이론”(361頁)이 거기에 내기돈으로 걸려 있기 때문입니다. “물질성의 양태의 이론”은, 한편으로는, 히로마츠(廣松) 선생은 아닙니다만, 이론이 대중을 사로잡으면 게발트(gewalt)가 된다는 동시대적 얘기를,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는 비동시대적인 ‘효과’의 얘기, 마치 바디블로(body blow)처럼, 완전히 다른 시대 조건 아래서 국경을 넘어서, ‘효과를 미치는’ 철학담론의 생산과 유통의 조건들이라는 얘기를, 바로 설명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마키아벨리론이 국민국가론이 되고 있다는 것에 대해서인데요, 『구성적 권력』의 주[2장(82)]에서 네그리는 이탈리아의 리소르지멘토의 맥락에서의 마키아벨리 독해, 요컨대 19세기의 독해, 『군주론』의 마지막 대목의 이탈리아를 통일하자고 하는 민족주의적인 주장에 역점을 둔 독해에 거리를 두고 있습니다. 네그리의 알튀세르 평가는 당연히 매우 높습니다만, 이런 엇갈리는 것도 감안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마키아벨리에게 있어서의 국민국가는, 실현 불가능한 것이라는 점은 분명히 짚고 넘어가야만 한다. 그것은, 당시에 있어서는 비동시대적인 착상(conception)이며, 알튀세르는 그래서 “이론적 유토피아”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이부키 : 방금 말하신 맑스의 “이론도 또한 대중을 사로잡자마자 물질적인 힘이 된다”는 문구인데요, 꽤 오래 전에 『정황』에서 야마자키 카오루(山崎カヲル) 씨가 이것에 대해 논했으며, 요컨대 “어떻게 대중을 사로잡는가”라는 곳에 관점을 두면, 이론도 다른 식으로 보이게 된다는 얘기입니다. 대중에게 외치고 설득하고 합의를 획득하는 것, 요컨대 선동, 그것을 제1의 목적으로 삼을 때, 이론도 그 중의 하나의 도구에 지나지 않게 된다. 대중을 매료시키기 위한 매체, 설득을 위한 레토릭, 더욱이 가장 효과가 있는 레토릭입니다. 그때 이론도 또한 하나의 프로파간다에 지나지 않게 된다. 그래서 이 책이 정치논문인 한, 이론적 문체와 프로파간다적인 문체가 혼재되고 있다는 것에 저는 그다지 위화감을 갖고 있지 않습니다.
자유주의에 관해서
니시카와 : 「역자해설」에 다음과 같이 썼습니다. “냉전 체제의 붕괴 이후, 그리고 특히 러시아와 중국 같은 옛 사회주의 국가가 시장원리를 받아들인 이후, 혹은 선진국들의 혁명 정당이 혁명을 포기한 이후, 세계의 보수화의 흐름은 좌우를 막론하고 멈출 줄 몰랐다. 과거의 사회주의자나 맑스주의자 가운데, 지금 누가 국가의 억압과 국가의 사멸을 이야기하고, 자본의 착취와 계급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을까? 이 책의 독자는 교조주의라고도 잘못 보는 맑스-레닌주의적 원칙이 되풀이되고 있는 것을 읽고, 맑스-레닌주의의 망령을 보고 있다고 생각을 하게 될 것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다시 생각해 달라고 하고 싶다. 우리가 본서를 읽고 그렇게 느꼈다면, 그것은 동시에, 우리가 얼마나 무원칙적인 보수화의 흐름에 멀리 떠밀려 내려간 것인지를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멀리 떠밀려 내려간 뒤의 지적인 폐허에 우르르 밀고 들어온 것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자유주의라고 말해도 좋을 것이다. 현재의 체제의 유지를 전제로 한 자유주의는 현대사회의 부분적 부정(不正)이나 불평등에 대해 이야기하지만, 그런 부정이나 불평등을 산출하는 근본적인 구조에 대해서는 입을 다문다. 하지만 본서에서는, 그런 자유주의와 경제주의 혹은 민족주의에 관한 근본적인 비판이 이미 앞에 두고 명쾌한 말로 얘기되고 있는 것이다”(442頁). 자유주의의의 문제입니다. 자유주의는 기성 질서 속에서 생각하고 있다. 이것을 썼을 때 제 염두에는 알튀세르의 ‘보통선거’ 비판(「보통선거는 속임수다」, 306頁)이나 「인권의 자명성」 307頁)이 있었습니다. 명확한 정의 없이 자유주의를 꺼내든 것은, 일종의 도발로, 여기서 반론이 나오고 논의가 일어나기를 기대했기 때문입니다. 그것에 관해서는, 작년, 근무하는 학교의 대학원 강습에서, 다문화주의에 관한 텍스트를 스무편 정도 읽었는데요, 그때의 강한 인상이 있었습니다. 인권에 대해 민족이나 문화의 권리를 꺼내든 다문화주의는 자유주의 속에서 가장 좌파에 자리매김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자유나 정의나 평등을 외치는 자유주의의 다양한 논의는 모두 착취와 계급, 즉 자본과 국가의 본질적 문제 바로 앞에서 멈춰 버린다. 그것은 알고 있더라도 이상한 풍경입니다. 확실한 금기가 있고 그것을 넘어설 수 없다.
야마카 : 그렇군요. 예를 들어 시민사회의 활성화라든가 NPO, NGO는 굉장히 멋지다는 얘기가 힘을 갖고 있습니다. 물론 멋진 면도 있고, 그 가능성을 버리지 말아야 한다는 것은 맞는 말이지만, 그것과 동시에 국가의 재편이라는 맥락과 교차되는 곳에서 그것에 대해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 여러 가지가 있을 텐데, 그것이 무시되고 있으며, 그것을 지적하면 크게 빈축을 산다(웃음). 여기에 있는 여러분에게는 말할 것도 없습니다만, 시민사회와 국가, 사(私)와 공(公) 등의 구별은 국가장치의 작동의 효과=결과로서 출현한 것입니다. 이런 알튀세르의 생각을 제대로 감안하는 것의 중요성이 점점 더 커지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부키 : 일본 국내를 봐도, 국가를 유지하기 위한 국가에 대한 충성심과 ‘국민’ 그 자체를 재생산할 가장 중요한 지점인 교육현장이 붕괴하고 있다. 국가가 안쪽에서부터 무너지기 시작했다. 거기서는 국가에 대해서 말할 수 있는 것이 종종 있을 겁니다.
니시카와 : 확실히 말씀하신 대로라고 생각합니다만, 그 반면, 이렇게까지 교육이 성공하고 있다고 생각되는 것도 있습니다. 얼마 전 어떤 대학 수업에서, 중국에서 일어난 반일시위에 관해 70명 정도의 학생에게 리포트를 쓰라고 했는데, 거의 전원이 ‘폭력은 안 된다’고 썼습니다. 토마토나 달걀을 던지거나 유리창을 깨거나 하는 것이 그들/그녀들에게는 매우 심한 폭력인 거죠. 정말로 평화주의 교육이 철저했구나라고 감탄하게 됐습니다. 하지만 잘 생각해보면, 그녀들/그들은 시위를 벌인 적이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폭력에 대한 알레르기가 너무 심한 것입니다. 제가 “지금까지 관리되고 있군”이라고 무심코 소감을 털어놓자, 또 반발이 생겨나 “나는 지금까지의 인생에서 폭력을 휘두른 적도 없고 당한 적도 없다”고 적은 학생도 있다. 어째서 그런 말을 할 수 있을까 생각하고, 이번에는 그것을 설득하게 되고, 요한 갈퉁(Johan Galtung)의 ‘구조적 폭력’ 얘기를 하기도 하고, 근대국가의 폭력적 기원이나 폭력 장치 얘기를 하기도 하고, 세계 체제나 에콜로지의 얘기를 하고, 마지막에는 “우리의 존재 자체가 폭력이다”라는 것으로까지 엉겁결에 말해버려서(웃음), 대격투라고 할까, 큰 고생을 했습니다. 거기까지 얘기를 갖고 가는 것은 힘듭니다. 거기까지 일본의 전후 교육은 성공한 것이로구나, 감탄했습니다.
오나카 : 아까의 키첼트(Herbert Kitchelt)의 도식이란, 정치사상 업계에서 말하는 “리버테리언”이라기보다는, 68년 이후 나온 “새로운 사회운동”의 가치들, 예를 들어 젠더라든가 환경 등입니다. 그리고 이 “좌파 리버테리안적 정치”라는 논의는, 선생이 말씀하신 국가의 논의와 관계됩니다. 구체적으로는 사회민주주의적 제도들입니다. 공교육 얘기라면 일교조(日教組)의 역할이라든지, 그 밖에 구체적으로 존재하게 된 사회민주주의적 획득물의 총체입니다. 국가나 혁명이라는 레닌주의적인 ‘하드(hard)’한 정치실천의 지향과, 68년적인 ‘소프트(soft)’한 정치실천의 지향의 관계를 생각할 때, 이 양자의 대립점, 혹은 거꾸로 양자를 연결하는 것으로서 제도의 문제가 부각됩니다. 사회민주주의라는 양가적인 제도적 존재, 즉 한편으로 계급투쟁을 가라앉히기 위한 장치인 셈이지만,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그것이 신자유주의에 의한 극심한 공격을 받고 있다.
야마카 : 조합에 관해서인데요, 역시 조합은 중요하죠. 일본에서 워크쉐어링(worksharing)을 할 수 없는 것은 조합의 힘이 압도적으로 약하기 때문이라는 것도 있다. 최근에는 젊은이의 비정규 고용자가 늘고 있습니다만, 정부는 ‘할 의욕이 없는 니트’라는 형태로 문제를 처리하려고 합니다. 그 비정규 고용의 젊은이의 권리를 어떻게 획득하고 지키는가라는 것이 너무 제대로 논의되지 않고 있고, 그들, 우리들도 그렇지만, 당연히 한 사람 한 사람이 권리 주장을 할 수 없기 때문에, 그렇게 전에는 포함되지 않았던 층도 과거의 조합 같은 것에다 거둬들일 필요가 나오고 있다. 오나카 씨가 말하셨듯이, 새롭게 나오는 것과, 그 이전의 조직 사이의 관계를 어떻게 다시 맺을 것인가를 다시금 생각할 필요가 있다. 알튀세르의 조합장치론에 대한 논의가 그런 것이기 위해 어디까지 유효하냐는 것은 또 다른 얘기겠지만요.
이부키 : 니시카와 선생의 이 책에서, 공산당이든, 그것이 정당인 한, 아무리 반체제적 조직이든, 그것은 어디까지나 국가의 이데올로기 장치이며, 국가를 전제로 한 것임을 적고 계십니다만, 정말로 실질적으로 국가의 이데올로기 장치가 될 수 있는 것이 있다는 게, 선생이 아까 말씀하신 폭력에 대한 혐오의 이야기네요. 평화교육이 철저해짐에 따라 폭력을 혐오하는 젊은이들을 창출하고, 그것은 결과적으로는 현행의 국가를 유지하는 것에 봉사하게 된다.
오나카 : 랑시에르의 『불화』가 최근 번역되었습니다. 68년에는 감성적인 것이나 차이라는 것이 강조됐습니다만, 랑시에르는 이것들을 다시 한 번 꺼내들며, 정치란 사람들이 느끼는 방식의 분할(=공유) partage du sensible[감각적인 것의 나눔]이라고 합니다. 랑시에르나 버틀러와 함께, 이런 감수성과 신체성의 구축의 수준에 이르기까지, 호명의 문제를 읽어내야 할지도 모릅니다. 알튀세르 자신도 마키아벨리에 관한 논의 속에서 그런 경향을 보이고 있습니다. 물론 소묘에 그치고 있지만, 그런 방향에서의 전개를 알튀세르도 하고 있지 않고, 또한 현실성actualité이 있는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달리 말하면, 감성적인 것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포이어바흐적인 인간주의, 본질주의로 돌아갈 필요는 없습니다.
철학에의 집착, 혹은 서구중심주의?
니시카와 : 알튀세르는 철학을 고집하죠. 저는 그것에 위화감을 느껴 버립니다. 그렇다면 그 철학이란 무엇인가 하면, 서구의 철학이며, 대학에서 가르치고 있는 철학이죠. 제가 보면 한없이 서구중심적입니다. 그것이 철학을 중심으로 하는 곳에서 나타나고 있다. 그것에 관해 어떻게 생각하면 좋은가.
이부키 : 이 책도 갑작스레 ‘철학이란 무엇인가’라고 시작되니까요.
니시카와 : 그러네요. 그 장에서 중국이나 인도에는 철학은 없다고 말합니다.
오나카 : 헤겔이 말하고 있는 것 그대로네요.
니시카와 : 이것을 읽을 때 깜짝 놀랐습니다. 한편으로 마오쩌뚱을 내놓는다. 거기서 끊어버린다. 철학을 서구의 것만으로 하고, 그래서 맑스주의 철학의 보편성을 주장한다. 그런 개소리는 아니다. 그런 것을 쓸 때 억제가 효과를 보고 있지 않다. 오나카 씨는 어떻게 해석합니까?
오나카 : 이것은 책인데 초고이죠. 『팡세』의 논문에 들어 있는 것과 들어 있지 않는 것이 있다는 것은 아닐까요.
니시카와 : 초고이기 때문에 오히려 솔직한 심정이 나온다는 것이죠.
오나카 : 그래서 출판의 의의가 있다(웃음). 68년의 영향도 계속 있고, 아직 그런 서구중심주의적인 것을 말할 수 있던 시대였다는 것 아닐까.
이부키 : 철학을 고집하는 인간의 한 명으로서 말하자면, 알튀세르는 철학자라고 자칭하면서 왜 이렇게 철학을 따르지 않느냐라는 인상을 갖고 있습니다. 보통의 철학자라면, 철학을 적극적인 것으로서 내세울 것입니다. 그런데 알튀세르에 있어서는, 『맑스를 위하여』라든가 『『자본』을 읽자』의 단계에서는 그런 경향이 심하며, 어차피 과학을 추종하는 것이며, 과학의 진전 속에서 산출되는 부산물일 뿐이며, “어차피 그런 것이다”라고 말한다. 그러나 세월이 지나면서 『과학자들을 위한 철학 강의』라든가 『레닌과 철학』에서 드디어 철학을 적극적으로 내세우고, 저는 안심할 수 있었는데요(웃음), 그래도 헤겔에 비하면 얌전한 것입니다.
오나카 : 『레닌과 철학』은 프랑스 철학회에서의 발표로, 데리다와 연속해서 행한 것입니다만, 디츠겐의 유명한 대사를 인용하면서 강단 철학에 대해 모욕적인 것을 말한 죄로, 학회장으로 이때의 사회를 본 장 앙드레 발(Jean André Wahl[장 월])에 의해 도중에 중단되기도 하는 거예요[〔福井訳, 『マキァヴェリの孤独』, 475頁(27)]. 발리바르의 의견에 비추어 해설을 아마도 쓴 것일 편집자 이브 생토메(Yves Sintomer)는 “학회라는 장에는 이례적일 정도로 많은 청중”이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는데요, 알튀세르 비판 문서의 하나인 베르나르 리스본, 『맑스주의 철학인가 알튀세르 철학인가(マルクス主義哲学かアルチユセール哲学か)』에 따르면, 철학 등 어차피 부르주아적이라고 용감하게 말하고, “맑스학의 파리 속의 지체 높으신 양반들(le tout-Paris de la marxologie) 앞에서 틀림없이 성공을 거두었”지만, “그 성공은 자신의 맑스주의에 대한 배신의 높이에 따른 것이었다”가 됩니다(웃음). 이리하여 확실히 일단 성공을 거두긴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보고에 이은 토론에서도 드러났듯이, 얼마 전에 세상을 떠난 리쾨르와 꽤 격론도 벌이고 있다. 요는 제도적인 철학 속에서는 알튀세는 역시 마이너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말해도 확실히, 니시카와 선생이 「역자해설」에서 지적하신 대로, 역시 “중앙집권적”인 철학의 제도 속에 틀어박혔다. 하지만 다른 한편, 에콜 노르말이라는 제도가 없어지면, 니시카와 선생은 밥줄이 끊어지는 것 아닌가(웃음).
니시카와 : 전혀 그런 일은 없다(웃음).
오나카 : 제도란 무엇이냐고 하면, 그런 겁니다. 서구 중심의, 프랑스 중심의, 파리 중심의 것이 왜 보편성을 참칭할 수 있느냐는 것은 확실하게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몰락이라는 위기감이 모두 여론에 배어 있는 프랑스나 일본에서, 그런 한줌의 인간을 위한 제도가 신자유주의적인 개혁에 의해 현실에서 없어졌을 때, 어떻게 될까? 프랑스에서의 바칼로레아의 개혁에서도 항상 “이런 것은 필요 없어”라고 말해지는 것의 필두는 철학입니다. 그것에 대해 데리다 등이 열심히 옹호해왔습니다만, 물론 그것은 첫째로, 업계 보호, 기득권익의 확보 때문입니다. 조합이라면 그럴 겁니다. 하지만 현실의 담론 생산의 장면에서는, 철학이라는 제도가 없어지기가 꽤 힘듭니다. 업계 보호, 기득권익의 확보라는 조잡한 하부구조 환원론으로, 모든 것이 정리되는 것도 아닙니다.
니시카와 : 제가 역사학 비판을 하면 그것은 학회 전체를 적으로 돌리게 된다. 그것은 어디서든 마찬가지죠. 그것을 하기 위해 저는 국민국가론을 하고 있는 것인데요(웃음). 그것은 달리 말하면 철학도 문학도, 국민국가 시대의 대단한 유산인 셈이죠. 그것은 대단하다고 생각하는데요, 그것을 조금만 콕콕 찔러도 엄청난 반응이 돌아온다.
오나카 : 대학 내부에서의 담론에서는, ‘국민국가론’은 일정한 시민권을 얻고 있죠.
니시카와 : 제대로 된 시민권을 주지 못한 채로, 실제로 작성되는 근대에 관한 역사논문의 절반 이상이 국민국가론에 입각해 있고, 그래서 학회를 유지하는 사람들에게는 거꾸로 초조한 거예요.
오나카 : 대학제도를 squat하고 있다는 말입니까? 하지만 가령 영어로 작성되는 논문에서는 그람시 인용 회수는 꽤 높습니다만, 그것은 담론 전략의 이론가로서이며, 역사유물론의 관점에서 본다면(웃음), 상당히 알맹이가 빠진 것이며, 코드화되어 버렸다. 미국의 일부 대학에서는 교육 프로그램 속에 들어갔으며, 감안해야 할 약속이 있으며, 그것에 의거하면서 논문이 작성된다. 그런 곳에서 위험하다고 느끼는 것은, 국민국가론과도 인연[類縁]이 깊고, 일본에서의 다문화주의 등의 수용방식입니다. 알튀세르의 ‘좁음’은 오히려 찬양되어야 할 것이라고 느낍니다.
니시카와 : 그렇게 생각합니다.
오나카 : “왜 당에 남았는가”라는 것으로, 당에 남은 사람의 이유도 거기에 있었던 것입니다. 푸코는 콜레주드프랑스 교수가 되고 현실에서 출세를 하죠. 보수파와 비공산당적 좌파가 “객관적으로 동맹”하고 있는 것 아닌가(웃음). 나는 어느 나라의 공산당원도 아니고, 냉전 후의 현자라면 이런 것을 말해도 농담으로 끝날 수 있지만, 당시는 비공산당원적인 좌파에는 그런 욕설이 항상 따라다녔다.
이부키 : 얘기를 되돌립니다만, 철학에 관해서인데요,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철학에 대해』라든가 「유물론의 독특한 전통」 등에서, 그때까지 서구철학 속에서는 마이너적인, 에피쿠로스나 스피노자 등의 철학에 주목하여 그것을 전면에 내세우게 됩니다만, 알튀세르는 서구철학의 영역 속에서도 반체제적이며, 반란을 일으켰던 것이니까, 안이하게 서구 철학 자체를 인정한 것은 아니었다….
니시카와 : 하지만 이들도 대체로 철학사에 적혀 있는 사람들입니다. 철학에 대한 태도를 보면, 역시 서구중심주의라는 것을 강하게 느낍니다.
알튀세르와 식민지 문제에 대한 시선
니시카와 : 이 책의 색인을 보면 ‘식민지주의’라는 항목이 없는데요, 논의 속에서 그것이 자리 잡지 못한다는 겁니다. 그것을 별개로 쳐도, 지배/피지배, 억압/피억압, 착취/피착취의 관계를 봤을 때, 세계의 지표의 80퍼센트가 식민지화되고, 식민지의 사람들의 수는 유럽의 프롤레타리아트는 문제가 되지 않을 만큼 많다. 세계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착취 받고 억압받고 지배되고 있는 체제 속에서 유럽이 유지되고 있다. 거기에 이야기가 미치지 못한다. 그것이 제게는 믿을 수 없다.
알튀세르를 만났을 때 그에게서 들었습니다만, 프랑스의, 특히 공산당 사람들의 식민지에 대한 논의를 알고 싶다, 그것을 일본에 소개하고 싶으니까 가르쳐달라고. 그러자 알튀세르의 낯빛이 변했다. 안타깝게도 ‘없다’고 말하더군요. 지금은 그것을 하고 있는 것은 사르트르들이라고 말했습니다. 놀라운 일입니다.
이부키 : 선생께서 맨 처음에 말씀하신, 에콜 노르말이라는 매우 한정된 인간들에 의해 창출된 이론이었던 것의 표현[現れ]이 이런 형태로 나오는 거죠.
야마카 : 레닌 등이라면 함부로 언급하고 있는 것이니까, 이 누락은 매우 불가사의하네요.
오나카 : 일단 ‘제3세계 혁명’을 주창한 마오쩌뚱이 있으니까요.
니시카와 : 그러니까 더욱 더 불가사의한 겁니다. 마오쩌뚱을 인용하는 것이기 때문에, 식민지 문제가 나와도 좋을 텐데.
오나카 : 그것은 알튀세르가 68년에 영향을 받은 결과가 아닙니까. 요컨대 선진국 혁명을 말해야만 한다, 아무래도 그것은 노동자가 아니라 학생 등이 메인(main)이라고. 하부구조가 아니라 상부구조 얘기를 해야만 한다고.
당시라면 알제리의 문제가 있죠. 사르트르와의 대항관계가 있기에, 그것은 맑스주의라고는 인정할 수 없다거나, 그렇게 생각했던 걸까요? 정말로 맑스주의가 아니라고 생각했던 것일까요?
니시카와 : 오히려 알튀세르는 사르트르에 대해 존경심을 갖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알튀세르는 세계의 대부분의 착취/피착취의 관계가 시야 밖에 있고, 세계의 절반의 젠더가 시야 밖에 있다.
오나카 : 그것은 68년 탓입니다(웃음). 68년에 영향을 받지 않고 억척스럽게 맑스주의적인 전개로 가면, 종속이론 등과 같은 것이 되었는지도 모릅니다.
곤노 : 그곳은 앵글로 색슨적인 문제설정을 어떻게 해서 알튀세르에게 넘길 것이냐라는 얘기로는 안 될까요?
오나카 : 젠더에 관해서는 J. 버틀러가 푸코와 알튀세르에 있어서는 ‘주체화’라는 것이 공통점이고 합니다만, 미국에 알튀세르 이론이 건너감으로써 미국의 대학에서는 그런 문제설정이 자리 잡게 됩니다.
니시카와 : 알튀세르의 이론은 그런 전개도 할 수 있는 것이 되고 있다. 그러나 자신은 하지 않았다. 하지 않은 게 저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기도 하며, 거꾸로 말하면, 알튀세르를 앞으로 읽어나갈 때의 과제가 된다.
오나카 : 그런 맞붙음이 없는 것은, 금욕한 것인가 아니면 보지 못한 것인가, 만일 보지 못한 것이라고 한다면, 내재적인 이유가 있을 것이라는 게 되죠.
곤노 : 프랑스 고유의 문맥에서는, 그런 전개가 있을 있는가 없는가. 바로 국민국가의 모델 같은 프랑스에서.
니시카와 : 오히려 공산당이 식민지 문제에 관해서 가장 안 되지 않나요. 좌파일수록 바깥이 보이지 않게 된다는 프랑스의 정치전통이 있다. 에메 세제르(Aimé Césaire)의 『식민지주의론』이라는 오래 전에 나왔다, 즉 식민지 쪽에서부터 식민지를 보는 관점은 이미 나왔다. 그것이 프랑스에서는 전개되지 않은 것은 왜인가가 제 보나파르티즘론의 문제의식인데요, 프랑스의 공화주의가 그것을 전개할 수 없도록 저지하고 있습니다. 그 공화주의의 중심에 맑스주의도 있다. 알튀세르는 그것을 파괴해줄 것이라고 기대했던 것입니다만….
오나카 : 어떤 제도가 어떤 보편성을 체현한다는 구조에 대해서인데요, 그것은 무엇에 대해서도 논해야 한다는 것의 뒤집음이며, 왜 알튀세르는 그것을 논해야만 하느냐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모든 것을 그에게 빚지지 않으면 안 된다는 얘기가 되지 않나요?
니시카와 : 그렇게는 안 됩니다. 그의 이론구조에서 보면, 그것은 당연히 문제가 되어야 하는 데도 안 된다는 것입니다.
야마카 : 지금의 우리의 관점에서 보면, 국가장치를 생각할 때, 제국주의의 문제를 접속할 필요가 당연히 있다는 것이 됩니다만, 알튀세르 자신의 논의에는 그것이 결정적으로 빠져 있다는 것은 확실합니다. 이 점에서는 알튀세르의 국가장치의 문제틀을 이어받은 다음에, 다시 한 번 레닌이나 마오 등을 다시 읽을 필요가 있다고도 말할 수 있겠죠. 알튀세르가 누락한 사항을 그 자신의 문제틀의 연장선상에서 읽어들인다는 작업이. 아까 오나카 씨도 언급하셨습니다만, 마침 『정황』의 별책으로 「레닌 특집」이 나올 겁니다(웃음).
네이션 : 알튀세르의 관점에서 누락된 것
니시카와 : 저는 알튀세르를 지지하고 보나파르티즘론을 썼습니다만, 알튀세르가 건드리려고 하지 않는, 혹은 몇 줄로 쓴 것을, 저는 한 권의 책으로 만들었습니다. 그것은 알튀세르론의 하나의 전개인 동시에 알튀세르에 대한 비판이기도 했던 것입니다. 똑같은 것이 국민국가론의 경우에도 있으며, 그것은 네이션에 관한 것입니다.
이전에 「네이션 재고(ネイション再考)」라는 논문에서 알튀세르의 국가장치의 도식을 프랑스 혁명에 있어서의 프랑스 근대국가가 형성되는 과정에 적용할 때, 무엇이 타당하고 뭐가 누락되었는가를 찾아내려고 했는데요, 역시 네이션 의식이라는 것이 누락되어 있다. ‘국가 이데올로기’라고 말하면서도 프랑스의 네이션 의식이 결여되어 있다. 프랑스 혁명이란 결국 네이션의 창출이며 국민국가의 창출이기 때문에, 이것은 큰일입니다.
그것은 동시에 이데올로기 장치의 문제를 생각할 때 ‘언어’의 문제가 중요하다고는 지적되고 있습니다만, 그러나 알튀세르의 경우, 그것이 ‘국어’의 문제로서 의식되지 않는 것으로 이어진다. 그것은 어마어마하게 큰일입니다. 학교교육의 근본은 특히 프랑스에서는 국어교육이니까요. 국어교육이 어느 정도 네이션 의식을 만들고, 국가 이데올로기의 중추가 되느냐는 것은, 바깥에서 보면 그다지 잘 보이지 않는 것이지만, 그러나 거기에 논의가 없다.
오나카 : 푀플(people)과 네이션의 관계는 어떻게 생각되고 있습니까? 알튀세르의 이데올로기론은 일본에서는 완벽하게 타당하다고 말했습니다만, 거기서 염두에 둔 것은 천황제 국가입니다. 그렇게 말해도, 천황제 국가와 공화제 국가에는 차이가 있다. AIE론은, 일반성이 높은 도식이기에, 타당하는 범위는 넓습니다만, 각각의 차이를 설명하는 능력은 부족한 도식이네요.
니시카와 : 제 국민국가론의 전제는 국민국가는 모두 변이variation이며, 역사적으로도 지형학적으로도 다양한 조건에 의해 바뀐다. 그러나 공통되는 것이 있으며, 세계체제 속에서 강제되고 그렇게 되어야만 한다, 모두 똑같은 제도를 요구하고 현실에서 똑같은 제도를 구축하고 있다.
오나카 : 그런 논의를 제기하고 있다고는 생각합니다만, 그러나 어디까지 똑같고 어디서부터 다른가는 구체적인 문제로서 생긴다고 생각합니다.
아까 네이션의 문제가 알튀세르에게는 없다고 말씀하셨는데, 그것은 국민국가론의 시각에서 보니까 그렇게 되는 거죠.
니시카와 : 따로 알튀세르에게 한정되지 않는 것입니다만, 그것은 프랑스의 네이션의 특성입니다. 더 정확하게 말한다면, 네이션의 문제가 없는 게 아니라, 적절하게 자리매김 되지 않는다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예를 들어 부르주아 국가의 ‘국가 이데올로기’ 속에서 재편성되는 본질적인 테마로서, 자유주의, 경제주의, 휴머니즘과 나란히 내셔널리즘이 첫머리에 꼽히고 있다(본서 199頁). 하지만 프랑스의 (프랑스에 국한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만) 네이션 개념이 국가 이데올로기로서 얼마나 강력하며, 문명 개념과 결합되어 어떻게 지배적인 힘을 휘두르고 있는가에 대해서는 인식이 약하다.
오나카 : 그러나 그렇게 말해도 프랑스에서는 푀플의 문제는 무시할 수 없는 반면, 일본의 경우는 ‘국민’이라고 단순하게 번역해버리는, 그다지 문제가 아니다. 번역상의 문제입니다만.
국가장치들의 동형성이 있다는 것은 물론 말할 수 있습니다만, 차이도 있다. 헌법도 다르고. 정치학자는 그것을 하고 있는 셈이죠. 네이션과 푀플의 대항관계는 어느 나라에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일본의 경우는 푀플이 억압당해왔는지도 모릅니다만. 그러나 푀플은 사실에 있어서 전혀 없었는가 하면, 전혀 그렇지 않으며, 유사 이래 다양한 사회운동은 존재하며, 따라서 푀플적인 계기는 많이 있었고, 역사학자는 없는 것을 있는 것처럼 꾸며내왔다(웃음). 그것은 하나의 투쟁의 형태였다. 그러나 지금은 정황이 다르다.
니시카와 : 프랑스에는 민중사가 있을까요? 민중사가 국민사가 되어버린 것이 프랑스입니다. 상징적인 것은, 미슐레의 『프랑스 혁명사』입니다. 미슐레는 맨 먼저 『민중』(푀플)이라는 책을 썼습니다만, 『프랑스 혁명사』에서 푀플은 네이션이 되어 버린다. 그것이 그 후의 프랑스의 역사가 된다.
이부키 : 선생이 말씀하신 것을 이어받아, 이 책을 다시 읽으면, 호명론에 관해서도 여러 가지로 생각하는 것이 가능해지네요. 알튀세르의 이데올로기론에 대해 자주 이뤄지는 비판의 하나로, 너무도 안정적이고, 정적이며, 이것으로는 혁명의 계기는 찾아낼 수 없는 것 아니냐는 것입니다. 즉 혁명의 주체가 이 이론에는 부재하다고. 주체는 항상 이미 주체인 셈이니까, 사람은 반드시 어딘가의 국각의 국민이 되어버린다. 그러나 혁명을 일으킬 때, 그 담지자가 되는 것은 국민이 아니다. 국민이기를 거부한 자이며, 호명론에서는 ‘개인’입니다. 그러나 개인은 알튀세르의 이론에서는 존재하지 않는 게 되고 있다. 선생도 적고 있습니다만, 혁명을 행하는 것은 부르주아지도 프롤레타리아트도 아니라고. 알튀세르도 혁명을 행하는 것은 대중이라고 말합니다. 대중은 이 책 속에서는 ‘개인들’입니다. 어떤 범주에서는 테두리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을 전면에 내세울 수 없었던 알튀세르는, 혹시 선생이 말씀하셨듯이, 프랑스적인 틀 안에 사로잡혀 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할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번역>이란 무엇인가
니시카와 : 그러니까 ‘역사’의 문제입니다. ‘역사’란 대단한 제도이며, 근대국가의 형성과 함께 역사학이 만들어지고, 역사라는 개념이 만들어진다. 말할 것도 없이, 국민국가 형성에 있어서 중요하고 근본적인 문제입니다. 근대의 ‘역사’는 기본적으로 국민사입니다. 최근, ‘역사인식’이라든가 ‘역사교과서’라든가 문제가 많습니다만, 제 생각으로는, 이 문제는 국민국가를 전제로 하는 한, 근본적인 해결은 있을 수 없다. 이 문제를 알튀세르의 국가 이데올로기 장치라는 관점에서 생각하면 어떻게 될까, 그런 것에 대한 배려가 알튀세르에게 충분히 있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알튀세르의 국가 이데올로기 장치의 도식을 프랑스혁명이나 일본의 메이지유신이나 중국혁명이나 인도네시아의 국가건설 등 여러 가지의 것에 적용해보면, 알튀세르를 지렛대로 삼아 시작한 작업입니다만, 꽤 다른 곳으로 나아가버린다.
저는 그런 작업은 알튀세르의 <번역>의 계속이며, 불가결한 일부라고 생각합니다. 자신들이 연루된 역사 속에 알튀세르의 담론을 옮김으로써, 겨우 <번역>이 완성된다. 그것은 ‘비판’이기도 합니다만, ‘수용’의 한 형태이기도 하다.
이번에 여러분과 함께 번역을 하면서 너무 즐거웠고 공부도 할 수 있었습니다. 번역이란 제법 그 사람의 인품이나 사고방식이 나오는 것으로, 그 점에서도 여러 가지 발견이 있었습니다. 텍스트 해석 이전의 문제로서, 번역문의 문체의 문제가 있습니다만, 저는 되도록 누구든 알 수 있는 평이한 문장으로, 학회의 용어나 지적 저널리즘의 용어로부터 최대한 벗어난 일상의 말을 사용하고 싶다는 바람이 있고, 그 바람을 꽤 인정받은 것도 있어서, 이 번역은 이런 종류의 책으로서는 예외적으로 읽기 쉬운 것이 된 게 아닌가 싶습니다. 그러나 이론적 정확성, 학문과 지식의 체계 속에서의 다른 것과의 관계나 정확한 위상을 생각하면, 또한 상이한 사고방식도 있으며, 우리의 번역에는 그런 다양한 입장이 서로 드잡이질을 하는 곳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오해나 착각도 남아 있다고 생각하니까, 독자들의 따가운 비판을 받고 그것을 바탕으로 다시 공동으로 개역할 기회가 주어지길 바랍니다. 다만 저로서는 동시에 여러분이 각각의 영역에서 활동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그것이 <번역>의 ‘계속’인지, 전혀 다른 것인지는 차치하고, 이 알튀세르의 유서라고도 말해야 할 책의 운명은 여러분 손에 맡기겠다고 한다면 왠지 협박하고 있는 것 같아서 미안합니다. 오늘은 귀중한 의견을 들려주셔서 감사합니다.
(2005년 5월 30일 수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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