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알튀세르를 열다
今、アルチュセールを開く
마토바 아키히로(的場昭弘)・나카마사 마사키(仲正昌樹)
『정황』 2003년 1∙2월호
지금 알튀세르를 열다 - 정황 2003년 1-2월호.pdf
1. 알튀세르 재부상의 의미
나카마사 : 알튀세르는 맑스의 사상을 현대적으로 혁신했다는 점으로 오래 전부터 알려져 있습니다만, 데리다가 『맑스의 유령들』을 냈을 무렵부터, 기존의 맑스 연구와는 완전히 다른 맥락에서 7, 8년 전에 갑자기 재부상하게 됐습니다. 데리다를 축으로 하는 포스트모던의 문맥에서 맑스가 ‘다시’ 인기를 끌게 됐는데요, 그 열쇠가 되는 것은 아무래도 알튀세르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데리다는 「정치와 우정」에서 자신의 탈구축적인 사상의 근원이 알튀세르에 있다고 말했으며, 알튀세르와 자신의 관계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또한 데리다 이외의 현대사상가들도 반드시 어디선가에서 알튀세르의 맑스 독해를 염두에 두고 있으며, 그런 상황에서 맑스의 유물론이란 무엇인가 등의 논의가 전개되고 있습니다.
우선 마토바 씨에게 물어보고 싶은 것은, 알튀세르가 실제로(actual) 활약했던 당시, 맑스 프로파겐더(propaganda)를 하고 있던 사람들 사이에서 그가 어떻게 수용되었는가라는 문제입니다. 그때의 수용되는 방식이란, 주로 데리다를 경유해 수용되고 있는 현재의 방식과는 사뭇 다른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만, 그런 간극에 관해 말씀을 듣고 싶습니다.
마토바 : 『맑스를 위하여』에는 “헤겔 신화”(mythe)라는 흥미로운 말이 있습니다. 우리 맑스 연구자의 대부분은, 맑스가 헤겔을 열심히 읽고, 헤겔의 지평에서 헤겔을 넘어서고, 또한 포이어바흐를 넘어서서 다음 단계로 나아간 것이라는 전제에 서 있습니다만, 이것은 옳지 않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맑스는 헤겔적이었는가라는 문제입니다. 알튀세르가 다른 논자를 비판할 때에도 볼 수 있습니다만, 맑스가 헤겔의 논리에 올라타 있다고 한다면, 왜 헤겔의 논리를 넘어서는 것이 가능했는가라는 문제입니다. 관념론인 헤겔을 물구나무 세워서, 그 방법론만을 받아들여 현실적인 문제를 추구한다고 해서는 헤겔을 넘어선 것이 되지 않는다. 헤겔을 넘어선다는 것은 변증법을 포함한 헤겔의 이론을 근본적으로 바꾸는 것이다. 맑스가 헤겔주의자였다면, 맑스가 헤겔의 방법론을 넘어선 논의를 하는 것은 매우 어렵다. 그래서 맑스는 사실상 헤겔의 방법론을 수용하지 않은 것 아니냐는 문제 설정을 하는 것입니다. 맑스는 헤겔을 외부로부터 붕괴시키는 형태로 넘어섰다. 그것이 맑스의 새로움이라는 것이다. 그것은 포이어바흐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며, 맑스는 포이어바흐주의자가 아니라, 포이어바흐를 넘어섰다. 새로운 방법론을 만들어 갈 때에는 이런 형태 밖에는 없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 맑스 연구자에게 “헤겔 신화”란 헤겔주의자 맑스의 신화이며, “포이어바흐 신화”란 포이어바흐주의자 맑스의 신화입니다만, 이런 알튀세르적 관점에서는 우선 맑스에게서의 “신화”를 얘기하는 접점이 있는 것 아닌가 합니다.
맑스에 대한 알튀세르의 연구 방법은 원래는 몽테스키외 연구의 방법에서 시작됩니다. 우선 “왜 몽테스키외는 위대한가?”라고 묻습니다. 알튀세르에게는 “문제틀(Problématique)”이라는 개념이 있습니다만, “질문을 어떤 형태로 내는 것인가?”입니다. 알튀세르의 경우 그 패턴은 거의 정해져 있습니다. 예를 들어 어떤 인물을 말할 때, 그 인물이 그 시대에 얼마나 뛰어나고 그 “뛰어난 방식”의 패턴으로서 그 시대에 있어서 그 시대의 지평을 열어젖힌 인물이었는가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왜 몽테스키외가 위대했느냐 하면, 몽테스키외는 그의 시대에 일반적으로 말해졌던 법 개념을 넘어서는 새로운 제안을 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의 시대까지의 법은, 자연법 체계이든 무엇이든, 결국 권력자 쪽이 준 명령이나 도덕적 체계를 법이라는 말로 이야기하고 있는 것에 지나지 않았다. 그런데 몽테스키외는 그런 명령으로서의 도덕 체계를 수행하기 위한 법을 산산조각 내어 분해하고, 그것과는 관계없는 일반적인 법이라는 개념을 도입했다. 그것을 알기 위해서 몽테스키외는 세계 각지의 법을 분석했다. 중국, 독일 등에서도 각각의 법체계는 일반적인 법이 아니라 개별적인 법이었다. 그것은 권력자가 요구한 개별 도덕moral을 법체계화한 것에 불과하다. 그것을 넘어서는 법체계를 몽테스키외 나름의 문제틀로서 내놨다. 이 문제야말로 새로운 지평으로, 법이 관습과 권력자의 명령에 따르지 않고도 존재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문제틀에 의해 [새로운] 지평을 연 것이 몽테스키외의 위대함이라고 합니다.
마찬가지의 것을 마키아벨리에 관해서도, 프로이트에 관해서도, 레닌에 관해서도 말할 수 있다고 알튀세르는 주장하는데요, 이런 의미에서 알튀세르의 분석은 알기 쉽다. 어떤 인물을 분석할 때 그 인물이 어떤 문제설정을 했는지, 그 문제설정이 새롭다면 새로운 지평을 연다는 게 되는 것이고, 문제를 해결하는 것에 가치가 있는 게 아니라, 문제를 내는 그 제기방식에 가치가 있는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알튀세르 책의 번역은 『맑스를 위하여』가 인문서원(人文書院)에서 1968년, 『『자본』을 읽자』가 합동출판(合同出版)에서 1974년에 출판됐는데요, 그때 우리가 문제 삼은 말은 “인식론적 단절 coupure épistémologique”입니다. 1844년의 『경제학철학수고』와 45년부터 46년에 걸친 『독일 이데올로기』 사이에는 단절이 있다는 것입니다. 아마 그 무렵의 우리는 이 단절을 지금 말하는 것처럼 문제틀problematique로서 파악하지 못한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문제설정으로서 맑스는 문제를 냈다. 그 무렵 우리가 문제 삼았던 것은 “문제를 낸다”는 것이 아니라 “문제를 해결했다”, 즉 45년 이후 맑스의 방법은 전부 바뀐 것이며, 거기에 이미 해결이 있다고 파악했습니다. 그렇게 파악했기에, 우리 맑스 연구자들 가운데 알튀세르의 위치는, 마침 그 무렵의 히로마츠 와타루 씨도 그랬다고 생각합니다만, “소외론에서 물상화론으로”인지, 혹은 “인식론적 단절”인지는 별도로 하고, 단절 문제를 해결한 인물로서였다. 즉, 맑스는 헤겔적 물구나무서기를 극복한 인물이었다.
그러나 현재 문제인 것은, 앞서도 얘기했듯이 알튀세르가 스케일이 꽤 크게 문제를 제기하는 방식입니다. 그 제기방식에 물음이 있었지만, 아마 그 당시의 우리는 그런 물음에 대해 이해할 수 없었다.
나카마사 : “인식론적 단절”의 의의가 소외론과 물상화론의 상관관계와 엮여서 이해되고, “문제계”를 찾아내는 것 자체가 중요하다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했다는 것이죠. “현대사상”에 있어서는, 곧바로 대답을 내는 이론은 오히려 수상쩍어 보이며, 오히려 문제계를 찾아내는 것이 [높게] 평가받네요. 히로마츠 와타루 씨도 “소외론에서 물상화론”이라는 식으로, 맑스의 철학에서의 “변화”를 일종의 “발전”형으로 파악했습니다만, 반면 알튀세르는 “단절”이라는 표현을 하고 있는 거죠. 그러나 일본에서 그것을 수용한 사람들은 “단절” 자체로서 파악하는 것이 아니라, 진화를 위한 단절이라고 파악한 것 같습니다만.
마토바 : 『맑스를 위하여』에서 알튀세르가 비판하고 있습니다만, 당시 Recherche Internationale라는 프랑스 잡지에서 소비에트의 연구자가 한 초기 맑스 연구의 번역을 모은 특집이 편성됐는데요, 거기에는 나중에 『경제학철학수고』의 연구로 매우 유명해진 라핀이라는 인물의 논문 등도 들어 있습니다만, 그것을 비판하고 있습니다. 그 비판의 최대 포인트는, 그들이 발전론적 이해로 초기 맑스, 후기 맑스를 이해하는 것은 안 된다는 것입니다. 알튀세르가 제기하고 있는 단절이란 그런 것이 아니라, 맑스에게는 그때그때 어디로 가는지 모르는 우연적(contingence)인 것이 있었다는 겁니다. 그것을 그는 “후방적 회귀(retour en arrière)”라고 합니다. 연구할 때 앞을 향해 회귀하는 것이 아니라, 뒤를 향해 회귀한다. 앞으로 회귀하는 것은, 앞을 향해 발전한다는 것을 전제로 회귀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뒤로[뒤를 향해] 회귀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사상가를 사상가답게 하는 것은 그의 이론사가 아니라 그가 살고 있는 현실이다. 그래서 사상가가 살고 있는 동시대의 현실적 연구를 한편으로 진행함으로써, 맑스 안에서 『경제학철학수고』로부터 『독일 이데올로기』로 나아갈 가능성도 발견할 수 있다. 완전히 다른 것으로 갈 가능성도 있다, 그런 가능성을 찾아내는 것이 중요한 것이라고. 그런데 라핀 등은 그것을 이해하지 못했다. 어디까지나 소련 사람들은 후기 맑스 쪽에 입장을 두고 있고, 반드시 『자본』에 도달한다는 것을 전제에 두고 초기 맑스를 읽어낸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 않다. 알튀세르의 주장은, 아무리 기다려도 후기로 가지 않는 경우가 있다, 그것은 우발적이라는 것이다. 그 사람이 그 시대에 구속되어 있는 이상, 그 인물이 오지 않은 가능성이 있다, 그 가능성을 끌어내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합니다. 그때 『맑스 전기』를 쓴 오귀스트 코르뉘의 연구가 매우 도움이 됐다고 말합니다. 그런 연구 스타일이 나오지 않으면 다음으로 나아갈 스텝은 없다고. 코르뉘의 책을 읽으면, 맑스는 반드시 『자본』에 도달한다고는 생각되지 않는, 뭐가 튀어나올지 모르는 우발적인 부분이 있다, 어쩌면 맑스는 전혀 다른 곳으로 갔는지도 모른다. 그런 것을 파헤치는 스타일로 쓰인 것이 오귀스트 코르뉘가 쓴 전기이다. 발전된 후기 맑스로부터 초기 맑스를 보는 것이 아니라, 초기는 초기로서 독립해 있는 것이다.
그러나 초기에는 문제가 있었다. 그것은 초기의 문제설정입니다. 맑스는 문제를 설정했는데도 풀리지 않지요. 그것은 그때까지의 철학으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때까지의 경제학으로는 어떤가 하면, 그 방법론으로도 안 됩니다. 기존의 19세기까지의 지식을 모아 봐도, 이런 도구들로는 아무것도 찾을 수 없다. 거기에서 깊은 심연을 보아버린 맑스는 이로부터 새로운 지평에 들어간다. 그 시대의 사람들의 상당수는 그 시대의 도구를 써서 문제를 설정하고 그것을 해결할 수 있다는 지평에 있는데, 맑스만은 그 시대의 도구로는 미래가 보이지 않는다, 지금까지의 지식을 쓸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그 순간 인식론적 단절이 찾아온다는 것이며, 그래서 답을 낼 수 없게 된다. 히로마츠 씨의 경우는, 물상화라는 형태로 후기가 전개된다고 합니다만, 거기서는 또한 “물상화는 맑스에게 무엇인가?”, “물상화에 의해 무엇이 열리는가?”라는 물음이 생기며, 그것에 대해 대답할 책임이 있는 것입니다만, 실제로 대답해 보면 진부한 것이 될 가능성을 지울 수 없다. 그렇지만 알튀세르는 [더 이상] 말하지 않습니다. 맑스는 새로운 방법론을 초조해하면서 만들어냈습니다만, 그러나 결국 그 시대는 고독하고 누구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백년 후, 이백년 후에 처음으로 이해되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그런 것을 당시의 우리는 그가 설정한 도구로는 이해할 수 없는 게 아닌가? 지금의 포스트모던이 제기한 방법론이나 도구를 사용하면 40년 전의 알튀세르의 물음을 이해할 수 있다. 그 당시는 할 수 없었다. 그런 의미에서는 알튀세르도 반쯤은 맑스와 닮은 데가 있습니다.
2. 주체/객체 도식과 비가시의 ‘구조’
나카마사 : 인식론적 단절을 알기[이해하기] 힘든 이유에는, 맑스주의적인 “주체/객체”론과의 관련이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알튀세르에 따르면, 맑스는 “인식론적 단절” 전에는 주체/객체의 틀 속에서 사고했습니다만, 단절 이후에는 완전히 다른 틀 속에서 사고하게 되며, 거기서 상부구조/하부구조의 얘기가 나옵니다. 기존의 맑스 이해에서는, 상부구조/하부구조가 주체/객체의 틀의 연장선상에서 이해되고 있던 게 아닐까요? 이마무라 히토시(今村仁司) 씨 등도 지적했듯이, 알튀세르는 주체/객체 관계가 “구조” 속에서 생기는 것이지, 주체/객체 중 어느 쪽이 먼저냐 하는 문제의 제기방식으로는 “구조”를 둘러싼 문제계는 보이지 않는다. 기존의 맑스 이해에서는 하부구조 결정론이 제창되고, “하부구조라는 객체”, 즉 “저쪽”에 의해 규정된다고 간주됐다. 역사적으로 봐서, 하부구조=객체결정론적인 맑스주의 이해는 언제 무렵부터 지배적이게 됐을까요?
마토바 : 19세기 말, 당시 사회민주당 사람들이 가장 많이 읽은 책은 엥겔스의 『반뒤링론』입니다만, 그것을 경유해서 맑스로 갔습니다. 왜 『반뒤링론』을 읽게 된 것이냐 하면, 그것 이전에 다윈의 『진화론』을 읽고, 모두 공부모임을 열었다. 그 연장선상에서 맑스가 읽혔습니다만, 맑스까지 도달한 사람은 적었다. 졸저 『미완의 맑스(未完のマルクス)』(2000년)에서 언급했습니다만, 당시 사회민주당 안에서는 맑스 자신의 저작이 거의 읽히지 않았으며, 맑스에 관한 책, 특히 『반뒤링론』이 읽혀졌다. 그 즈음부터 그런 하구부조의 우위성이라는 생각이 나온 게 아닐까 생각합니다.
유물사관이 하부구조가 상부구조를 결정한다는 식으로 이해되는 반면, 알튀세르는 “중층적 결정(surdetermination[과잉결정])”이라는 개념을 냄으로써 새로운 사고방식을 열었습니다만, 그 알튀세르조차도 “최종심급에서의 결정”(dernière instance)이라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심급”도 고육지책의 번역어라고 생각합니다만, 즉 “그 경우의 경우”라는 의미입니다. 이러저러한 경우가 있지만, 마지막 경우에서 정하는 것이 “최종심급”이라고 한다면, 뭐라 말하든 아무래도 최종심급은 경제적 하부구조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최종이라고. 『맑스를 위하여』에서 엥겔스에 대해 언급하고 있습니다만, 엥겔스도 그 언저리에 관해 고민하고 있고, 하부구조가 결정하는 경우는 어떤 국면에 한정되어 있다, 실제로는 그렇지 않고 다면적이라고. 우리는 오히려 엥겔스보다도 맑스의 『경제학비판서설』에 나오는 그리스시대는 그토록 생산력이 낮았는데도 왜 그토록 문화가 꽃피웠는가라는 질문을 생각해냅니다. 그런 물음을 제기하면서, 그 한편으로 하부구조가 상부구조를 결정한다고 말한다. 이 모순을 어떻게 생각하면 좋을까? 이 의문은 사실 엥겔스도 갖고 있었다. 경우를 나누어 치밀하게 논의하는 것이 이뤄지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 당시의 우리가 이해한 알튀세르의 공헌은, 하부구조/상부구조라는 아주 대략적인 논의에 대해, 경우 경우에 따라 역전되는 경우도 있고 또 하부구조가 결정하는 경우도 있으며, 그 경우를 나눠서 전개한 것입니다. 역시 알튀세르가 알튀세르인 곳, 달리 말하면 그가 스스로를 맑스주의자라고 자칭하는 까닭은, 마지막에서는 경제가 우월하다고 주장하는 곳입니다. 역시 그는 거기서 유물론자로서 논진을 펴고 있습니다. 알튀세르는 19세기부터 20세기에 전개된 프랑스의 사상은 당치도 않다고 생각한다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베르그손부터 시작되어 이윽고 포스트모던으로 연결되는 철학은 직관 등등을 주장하는 관념론이기 때문이라고. 왜 유물론 철학은 발전하지 못했는가? “나는 그런 흐름에 대해 유물론 철학에서 노력한다”고 말한다. 알튀세르는 대부분의 세밀한 논의 속에서는 유물론적 결정을 버리고 있지만, 최종심급을 주장하는 한에서 최후의 유물론자로서 그 성채를 지키고 있다고 말할 수 없을까요?
나카마사 : 이렇게 생각하면, 맑스도 후기가 되어서도 주체/객체 도식을 완전히 넘어서지 못하고 질질 끌려가는 부분이 있다는 게 되죠. 맑스 자신이 주체/객체의 이미지를 상부구조/하부구조에 덧씌우고 있는 곳이 있으며, 그것을 알튀세르 자신도, 이마무라 씨는 완전히 분리하고 있는 듯한 설명을 하고 있습니다만, 마지막 부분에서는 질질 끌고 있다는 것이네요.
마토바 : 그렇다고 생각합니다. 베르그손에서 시작되어 사르트르까지 이어지는 프랑스의 철학의 흐름은 관념론적인 곳으로 갑니다. 반면, 한편으로 포스트모더니즘 속에서 유물론자로서 마지막까지 성을 지키는 이 고고함이 없다면 아마 알튀세르는 알튀세르로서의 논진을 펴지 못하지 않았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알튀세르는 포스트모던적인 논의 속에 끌려들어가는 것입니다만, 다만 자신의 위치를 유물론이라는 곳에 두고 있고 그로부터 벗어나지 않는다. 그러나 이 유물론은 최종심급(최후의 경우)에서의 그것이지, 그의 전체는 거기에는 없습니다.
나카마사 : 알튀세르는 “구조”라는 추상적인 말을 쓰고 있습니다만, 거기에는 역시 하부구조라는 면이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도, 그런 그의 “구조” 이해를 살릴 수 있다고 한다면, “구조”의 의미가 기존의 “하부구조”와는 꽤 다르다는 점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기존의 맑스주의에서 이미지된 하부구조는 중공업을 중심으로 한 공장에서의 노동에 종사하는 “프롤레타리아트”의 “존재”와 결부되어 있었습니다만, 알튀세르의 “구조”은, 아무래도 그것으로만 수렴되는 것 같지는 않아요. 『『자본』을 읽자』에서 제자 랑시에르가 있습니다만, “구조”를 형성하고 있는 관계성은 “비가시의 X”적인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하부구조는 조사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비가시적인 것으로, 인간들이 보면 “우연성”을 포함한 것 같다. 그런 관점을 알튀세르가 냈다고 하는 것은 [높이] 평가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만.
마토바 : 최근 유고집 번역이 조금씩 출판되고 있는데요, 그 안에 『불확정적인 유물론』(1988년)이라는 번역서가 있습니다(또는 『철학에 대해』, 1994년). 바로 그 제목이 그렇죠. 그가 살인사건을 일으켜 공개적으로 글을 내지 않을 때 멕시코의 여성 연구자 페르난다 나바로와 서신교환한 것이 편집, 출판된 것인데요, 이 안에서, 확정되고 명확하게 알 수 있는 유물론이 아니라, 사뿐사뿐[훨훨 날아] 움직이는 우발적인 것에 올라타는 유물론이 기술되어 있습니다. 이런 것은 나중에 바뀐 것이 아니고, 아마 60년대부터 줄곧 갖고 있고, 그저 우리가 그것을 이해할 여유가 없었고 [그럴] 도구도 없었는지도 모릅니다.
또 하나는 “국가의 이데올로기 장치[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appareils Idéologiques d’Etat)라는 용어가 있습니다. 중층적 결정[과잉결정]을 하는 가운데, 문화적 이니셔티브를 국가 나름에 있어서, 눈에 보이지 않는 형태로 우리의 사상 행동을 결정해간다. 이런 용어에 의해 당시는 유물론적 철학 속에 설명할 수 없었던 것을 잘 설명했다. 단순하게 생각하면, 국가의 이데올로기 장치[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라는 개념은 60년대, 70년대와 시간이 지남에 따라 혁명운동이 쇠퇴하는 가운데, 그 원인을 묻고, 말이 궁색해졌을 때 이용하는 아주 편리한 말이었던 게 아닐까 생각합니다. 이 개념에 대해 설명한 책이 니시카와(西川) 씨 등에 의해 번역된 것은 1975년이라고 생각합니다만, 현재에는 이 개념을 『재생산에 대해』(1995년)에서도 읽을 수 있습니다. 이런 개념을 사용함으로써 매우 자세하게 논의했던 것과 동시에, 한편으로 문화연구자들에게 큰 영향을 줬다. 문화가 어떻게 그 시대의 지배구조에 편입되는가, 단순히 “편입된다”고 말할 뿐이라면 그 자체로 결정론이 되는 것입니다만, 거기서 매우 자세하게 분석해야만 한다. 문화연구에서 하는 하위문화는 국가의 이데올로기 장치[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로부터는 인정받지 못한 미공인의 문화입니다. 이 미공인의 문화가 하위문화인 것은, 정통적인 문화가 국가의 이데올로기 장치[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에 의해 정해지기 때문입니다. 스튜어트 홀은 영국에 충분한 이론이 없기에 알튀세르를 열심히 읽고, 이론을 알튀세르로부터 빌려왔다고도 말하고 있습니다.
나카마사 : 알튀세르는 “구조”를 통해 중층적으로[과잉] 결정되어 있다고 주장함으로써, 생산력으로 전부 결정된다고 하는 스탈린주의적인 조잡한 논리와는 일단 거리를 둔다. 이와 동시에, “휴머니즘적인 맑스주의”와도 거리를 두고 있다. 알튀세르는 양동작전을 편 것입니다. 프랑스공산당의 주류파, 즉 유로코뮤니즘 중에서는 가장 소련에 가까운 사람들에게 대항할 때는, “구조”를 통한 “중층적 결정[과잉결정]”을 주장하고, 그 반대의 극에 대해서도 거리를 둔다는 전략이라고 생각합니다만, 이런 전략을 어떻게 평가하십니까?
마토바 : 알튀세르는 휴머니즘 비판을 했습니다만, 사르트르를 중심으로 한 프랑스 전후의 계몽의 흐름에는 두 가지가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는 맑스주의입니다. “맑스주의는 넘어설 수 없다”고 사르트르는 말합니다. 다른 하나는 휴머니즘입니다. 맑스주의와 휴머니즘은 68년 혁명까지는 전후 세계를 지배하던 기본 원리입니다. 이것은 절대로 넘어설 수 없다. 인권을 지킨다고 하는 게 휴머니즘이며, 그 공격 지점은 소련의 수용소이며, 혹은 나치 시대의 수용소입니다. 이에 대해서는 좀체 비판할 수 없다. 다른 하나는 맑스주의입니다. 근대주의는 잘못되지 않았다. 근대가 나치를 산출했다고 하지만, 그렇지 않다. 나치가 생겨난 것은 근대가 도착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생각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제2차 대전이 끝난 후에는 근대를 더욱 철저하게 하면 나치와 같은 체제는 일어나지 않는다, 그리고 근대를 가장 철저하게 한 것이 맑스주의이다, 맑스주의는 근대라는 전제 위에 서면 완성 형태로서 우리의 행복을 실현하는 것이라고 생각됐습니다. 이 두 가지 흐름을 접목하고, 당시 지적 세계를 지배한 사르트르는 무적입니다. 그것에 대해 서서히 결함이 보이게 됐다.
알튀세르도 자신의 입장을 제시했다(『포지션』, 1976년). 맑스주의가 갖고 있던 근대주의의 꿈을 산산조각으로 깨뜨렸다. 근대주의는 생산력의 발전에 의해 우리의 생활이 좋아지며, 이와 동시에 미래를 약속해준다는 사고방식을, 중층적 결정[과잉결정] 등의 개념을 제출함으로써 알튀세르는 뒤집어버렸다. 이것은 맑스주의에 대한 비판입니다.
다른 하나는 휴머니즘에 대한 비판입니다. 『존 루이스에게 답함』(1973년)이라는 저작이 있습니다만, 존 루이스는 맑스 연구자 중에서 그다지 유명하지 않지만, 왜 알튀세르가 그를 거론했느냐 하면, 이런 속류적인 인물을 거론함으로써 맑스주의의 본질을 폭로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참고로 알튀세르는 이 『존 루이스에게 답함』을 사용해 이듬해의 강의를 합니다만, 그 강의의 내용에 대해서는 아까도 이름을 거론한 랑시에르가 『알튀세르의 교훈』(1974년)을 씁니다. 이 존 루이스가 맑스주의적 휴머니즘의 전형이며, “맑스주의는 휴머니즘이다”고 주장한다. 반면 알튀세르는 맑스주의가 휴머니즘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만일 맑스주의가 휴머니즘이었다면, 철저한 인간주의이고, 맑스의 자연관은 여기서 무너져버린다. 「학위논문」이나 『경제학철학수고』의 글을 잘 읽어보라고. 인간은 자연에 작동을 가하지만, 자연도 인간에게 작동을 가한다. 자연과 인간은 일체가 되어 있으며, 인간이 자연에 일방적으로 영향을 주는 인간주의일 뿐인 게 결코 아니라 서로 영향을 준다. 이를 맑스가 몰라서 인간주의에 빠졌다고 한다면, 맑스의 저작들은 설명되지 않는다. 잘 읽으면 그런 것을 알 수 있지만, 많은 사람들이 휴머니즘이라는 말로 인권 등의 사상을 맑스주의 속에서 읽어내고 싶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맑스주의는 휴머니즘을 극복하겠다는 더욱 큰 관점을 갖고 있으며, 자연 속에 인간을 두고 또한 인간을 자연 속에 포함시킴으로써 지금까지의 근대주의가 빠져 있었던 아포리아를 극복하려고 생각했기 때문에, 만약 맑스주의가 휴머니즘이었다면 이렇게 시시한 사상은 없는 것이라는 형태로 비판합니다.
이런 양동작전으로 전후의 사상을 만든 맑스주의와 휴머니즘이라는 양대 조류에 대해 한 방을 먹였다. 이것이 만약 완벽한 비판이 됐다면, 사르트르를 하나의 대표로 한 전후의 많은 사상이 결여하고 있고 이로부터 노도(怒濤)처럼 68년을 향해 새로운 사상이 나올 가능성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알튀세르는 기본적인 부분에서 그런 방향으로 나갈 준비를 했을 뿐이었습니다. 아마 그 작업은 푸코나 데리다에게로 이어졌던 것입니다.
3. 휴머니즘과 맑스에게서의 ‘자연’
나카마사 : 현재에는 데리다 등이 서구적인 “인간성” 개념 자체가 문제라는 입장을 분명하게 표명하고 있습니다. 인간성의 “유형”을 만든 뒤, 이를 지키려고 하는 논의를 전개하는 “휴머니즘”의 한계를 지적하고 있습니다. “데리다가 말하기” 때문에 별다른 저항감이 없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만, 현대사상에 있어서는, 보통 얘기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70년대 전후의 시기에 인권사상이나 인간성이라는 생각 자체를 해체하는 방향을 노골적으로 내세웠다면, 아마 상당히 떴을 겁니다. 당시에는 이런 주장이 맑스주의의 맥락에서는 매우 통하기 힘들었다고 생각합니다만, 그것을 알튀세르는 굳이 한 겁니다. 일본에서는 아마 그 면이 수용되지 않았다고 생각합니다만.
마토바 : 그렇다고 생각해요. 지금도 그렇습니다만, “나는 휴머니스트가 아니다”라고는 말하기 힘드네요. 마찬가지로 맑스주의 안에서 “맑스주의는 휴머니즘이 아니다”고 말하는 것도 어렵네요. 그것은 휴머니즘 안에는 보편적인 것이 있다는 환상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 환상이 깨지는 것은, 자연환경 문제에서 보이듯이, 자연에 대해 인간의 힘이 너무 커지는 가운데, 인간 자체가 지닌 자연성이 강조되기에 이른 시대, 구체적으로는 70년대 이후군요, 그런 시대가 되어서 처음 말한 것입니다. 그 전에는 대놓고 말하지는 못했습니다. 또 스탈린이 한 격렬한 탄압에 대해 인간으로서 용서할 수 없는, 소련인들은 인권을 빼앗기고 있다는 비판이 있고, 그에 대해 소련인들은 자신들도 인간주의를 취하고 있다고 말하고, 둘 다 인간주의가 기본이 됐으며, 그 안에서는 반인간주의를 말하기 힘들었다고 생각합니다. 그 안에서 인간을 넘어서 자연으로. 과거의 학위논문이나 초기논문의 독해에서는 인간주의가 암묵적인 전제가 되고 있으며, 『맑스의 자연 개념』을 슈미트가 써서 일본에서도 그것이 자주 읽히고 있습니다만, 어떤 의미에서는 놀랍고 새로운 발견이었습니다. 맑스의 인간 개념에 관한 책은 지천에 널려 있고, 그것이 일반적이었다. 반면 맑스의 자연 개념이 이해되기에 이른 것은 70년대 이후부터입니다. 이것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는지가 현재의 맑스주의자 속에서 문제가 된다. 이것을 잘 이해할 수 있는지가 알튀세르의 문제틀problematique을 이해할 수 있느냐 아니냐의 관건이 되지 않는가 싶습니다.
나카마사 : 그때의 “자연”이란 이른바 “객체로서의 자연”이 아니라, 우리의 “인간적”인 시야를 통해 인식할 수 있는 부분으로 회수될 수 없는, 대문자의 “자연”이죠. 그 부분도 여전히 그다지 이해되지 않았네요. “자연”이라고 하면, “객체로서의 자연”이라고 지레 짐작되고, 곧바로 노동과 결부됩니다. 인간이 “자연으로서” 인식하고 있는 것은 사실상 자연이 아니며, 인식할 수 없는 외부에 있는 것이 자연이며, 그것과 어떤 식으로 우리가 관계를 맺고 있느냐 하는 것이 『경철수고』에서도 문제가 됩니다만, 그런 부분이 길다는 것, 그때까지도 “인식”되지 않았다. 그러나 알튀세르는 눈여겨보고 있었다.
마토바 : 저는 그것을 “부재”absence, 혹은 “침묵”silence이라고 말합니다. 알튀세르가 확장한 영역의 하나는 정신분석입니다. 그는 정신분석에 흥미를 갖고 있고, 에콜 노르말을 나와 거기서 강사(사감, 비서)를 하고 있을 때 처음으로 영향을 받은 것은 폴리체르(Politzer)라는 정신분석학자입니다. 그리고 몽테스키외에 관한 책을 쓴 몇 년 후에 에콜 노르말에 라캉을 불러와서 정신분석 강의를 하게 합니다(1963-4년). 알튀세르가 문제 삼은 것은 “정신분석이라는 학문은 성립하느냐 아니냐?”라는 문제입니다. 정신분석은 우리가 의식하지 못한 부분, 즉 인간이 갖고 있는 “우리가 전부 알고 있다”라는 곳에서부터 누락된 부분, 즉 무의식을 문제 삼는다. 이 부재의 부분을 학문으로서 성립하게 만드는 것은 큰 일입니다. 그래서 프로이트는 오해됐다, 프로이트는 19세기에 그것을 예감했지만, 당대 사람들은 자신들이 인식할 수 있는 수준에서만 논의를 하고, 인식할 수 없는 학문은 학문이라고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에, 프로이트가 쓴 것은 학문으로서 간주되지 않는다, 이른바 사이비학문이라고 생각됐다. 이 사이비라고 생각됐던 것을 학문으로서 인식할 수 있게 한 것은 라캉이며, 바로 라캉에 의해 부재 문제가 학문적인 것으로서 제기될 수 있게 됐다. 그런 곳에서 라캉을 매우 높이 평가하는데, 또 다른 선구자로서의 프로이트에게도 의의가 있다. 우리가 인식할 수 있는 것과는 다른 수준의 문제로서 이 세계에는 우리에게는 알 수 없는 것이 있다. 그 안에서 우리는 홀로 뒹굴고 있을 뿐이다. 뒹굴고 있는 우리의 주위를 에워싸고 있는 우리의 알 수 없는 것이 “자연”이죠. 이런 사고방식이 알튀세르에게 떠올랐던 이유는 정신분석의 영향입니다. 그것은 푸코에게도 도착한 1950년대에 에콜 노르말에서 배웠던 사람들의 방향이었던 거죠. 다만 이런 것은 우리가 처음으로 알튀세르의 책을 읽었을 때에는 이해 못했던 겁니다.
나카마사 : 마르쿠제도 프로이트의 정신분석을 꺼내들었습니다만, 마르쿠제 본인이 그렇게 주장했는지 여부는 별개로 치고, 마르쿠제를 경유한 맑스와 프로이트의 결부에 있어서는, “무의식”이라는 것이 어느새 “자연충동” 같은 것이 되어버려서, 자연과학적으로 인식할 수 있는 “인간의 숨은 욕망”으로 해석되었습니다. 프로이트 자신에게도, “무의식”을 자연과학적으로 기술하는 곳도 있기 때문에, 하는 수 없었는지도 모릅니다만, 그것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는 프로이트 이해였다고 생각합니다. “억압된 자연충동”을 “해방”한다는 형태로, 맑스주의적 객체결정론의 맥락에 올라탄 것입니다. 이것이 독일, 미국을 경유해 일본에도 들어왔습니다. 알튀세르의, 라캉을 경유한 프로이트 이해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자아에게 있어서 완전히 “이질적인 타자”라는 것을 전면에 내세우면, 마르쿠제 경유의 이해와는 완전히 다르죠. 이것이 “구조” 개념에도 반영되어 있습니다.
마토바 : 그렇군요. 프로이트가 오해된 부분은 또한 프로이트가 살아남을 수 있는 부분이기도 합니다만, 리비도 즉 억압된 성, 잠재의식은 새로운 인간이 재구성되기 위한, 승화되기 위한 수단이 된다. 그러한 잠재의식을 극복함으로써 인간은 성장한다. 억압된 잠재의식을 해방한다는 방향을 향하는 프로이트 해석에 대해, 그런 것은 해방도 뭣도 아니고 마치 바다처럼 우리 속에 확산되고 있는 부재의 영역에 지나지 않는다는 생각도 있다. 그 부분이 스피노자와 관련되는 대목입니다. 인간이 모르는 지식은 많이 있고, 그 속에서 우리는 그 일부만을 알려고 한다. 그것에 의해 이 세계를 해석한다. 그러나 실제로는 모르는 영역이 많이 있다. 그런 영역이 있다는 것을 이해해야만 한다. 여기에 알튀세르와 스피노자가 상통하는 대목이 있는 게 아닐까.
그런 발상의 계기로서 프로이트가 있었던 것과 동시에 마키아벨리가 있습니다. 「마키아벨리의 고독」(『마키아벨리의 고독』, 1998년 수록)이라는 논문이 있는데요, “왜 마키아벨리는 고독한가?” 문제설정으로서는 방금 전의 것과 같습니다만, 마키아벨리는 군주제 국가의 모습이 일반적인 국가의 모습이라고 생각됐던 시대에 군주제 국가를 넘어서는 일반적인 국가를, 군주제 국가도 잘 되고 있지 않은 이탈리아에서 생각하려고 했다. 군주는 국가를 만들었을 때, 거기에서 민주제를 실현하고, 마침내 군주는 그로부터 떠나지 않으면 안 된다. 1400년대부터 1500년대에 걸쳐 마키아벨리가 생각하는 이런 국가를 이해할 수 있는 군주는 없었다. 바로 마키아벨리는 군주로부터도 포기되고 고독했다. 17세기의 스피노자도 마찬가지로 새로운 지평을 엶으로써 고독했다.
이런 분석 패턴은 알튀세르의 인물 연구에서 공통적으로 보이는 패턴입니다. 각각 그 시대의 획을 긋는 사상가의 사상은 그 시대에서는 이해되지 않는다. 이해되지 않는 것을 썼기 때문에, 그 사상을 이해하는 것은 다음 세대의 사람들이다. 그 사상가가 말하려고 했던 것은 그 시대의 말로는 표기할 수 없는 것, 즉 쓰이지 않은 것, 쓰고 있는 것 속에서는 보이지 않는 것, 쓰고 있는 데도 그 시대에는 독파되지 못한 것이다. 행간 속에 있는 부재의 부분을 읽어내는 것이 새로운 시대의 사람들의 작업이며, 이 독해를 한 손으로 받아들인 것이 알튀세르라는 그 사람 아닐까요.
4. 징후적 독해의 ‘고독’
마토바 : 알튀세르는 맑스 속에서, 맑스가 썼지만 읽히지 않았던 것을 오로지 읽고자 했다. Pour Marx(1965년), 옛날의 일역본 제목은 『되살아난 맑스(『甦るマルクス)』였습니다만 정확하게는 역시 『맑스를 위하여』이죠. 알튀세르는 바로 “맑스를 위해 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 있다”고 선언하기 위해 이 책을 썼으니까요. 독파되지 못한 부분이 앞서 말한 부재의 부분입니다. 많은 사상가는 까닭 모를 것을 많이 남겼으며, 그 부분이 이해되기를 기다리고 있다.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우리는 지금까지 인식하지 못했다. 인식할 수 있는 것을 인식하고 이것으로 맑스를 이해했다는 기분이 들었다. 문제는 그로부터 넘쳐흐르는 것을 어떻게 해야 하느냐라는 알튀세르의 문제틀입니다.
나카마사 : 맑스 자신도 보통의 “주체의 의식”으로는 인식할 수 없는 부분을 이데올로기라든가 하부구조라는 개념을 갖고 설명하려 했습니다. 다만 그런 맑스 자신도, “그의 시대의 문제계”를 질질 끌고 있었기 때문에 딱 잘라 표현할 수 없었다. 표현할 수 없으며, 맑스 자신도 몰랐던 부분, 바로 무의식의 부분이, 그가 쓴 것=에크리튀르 속에 나오는 것을 알튀세르가 “징후적 독해”로 읽어낸다. 알튀세르는 맑스의 의도를 “재구성”한다는 맑스 이해는 부정합니다만, 그렇다면 거기에서 “읽어내야 할 것”을 읽어낸다는 생각은 과연 있었을까? 데리다라면 “읽어내야” 하는지 여부는 아무래도 좋고, 이쪽이 멋대로 읽어냈다는 것이 됩니다. 알튀세르는 거기까지는 가고 있지 않는 것 같습니다.
마토바 : 징후적 독해(lecture symptomale)는 『『자본』을 읽자』(1965년)의 서두에 있는데요, 이것은 지금도 사용하는 말로, 1960년대부터 활발해진 언어학의 영향을 받은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징후적 독해에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어떤 것을 비판할 때, 그 사람이 말하려고 하는 것을 그 사람 자신이 알지 못하고 그것을 꺼내든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그 사람이 말하고자 한 것이나 말하고자 하지 않은 것도 포함해, 전혀 그것과는 관계가 없이, 요컨대 그 사람이 전혀 알고 있지 못한 것(그 사람에게 부재한 것)을 우리가 읽어 들인다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후자이며, 저자가 말하고 싶은 것과 말하고 싶지 않은 것을 넘어가서 새로운 시대에 태어난 독자가 그 본질을 끄집어내려고 하는 것입니다. 바로 장인의 기술입니다만, 문제는 알튀세르가 맑스의 작품에 관해 각각 세세하게 했느냐 하면, 의문입니다. 『공산주의자 선언』에 대해서도, 『독일 이데올로기』에 대해서도 징후적 독해를 한 것은 아니다. 유일하게 『자본』뿐입니다. 그것도 “징후적 독해”라는 추상적인 방법론을 제시했을 뿐입니다. 『독일 이데올로기』와 『경철수고』에 대해 징후적 독해를 하면 어찌 되느냐를 알고 싶습니다만, 결국 그 언저리를 빙빙 돌고 있을 뿐이고 내용까지 들어가지는 않았습니다. 그런 의미에서는 알튀세르는 새로운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만, 다른 한편으로 맑스의 개념들에 대한 그의 독해방식으로서는 징후적 독해를 살리지 못하고, 그 시대의 맑스주의자들과 다르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나카마사 : 알튀세르는 사상적∙철학적 에크리튀르와, 문학이나 일반인이 쓴 것을 구별했습니다. 데리다는 『공산주의자 선언』 속의 Gespenst는 “요괴”가 아니라 “유령”이라고 읽을 수 있다는 것에서부터 논의를 전개합니다만, 데리다가 하고 있는 것을 맑스 자신이 “의식”했다고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습니다. 데리다는 맑스의 시대에 Gespenst라는 말이 어떤 사회적 외연을 갖고 있었는가라는 곳까지 문맥을 넓혀가고, 그로부터 자기 나름의 “독해”를 확대해 간다. 그에 비해 알튀세르는 그런 “독해방식”에 대한 아이디어를 냈지만, 스스로는 그런 “읽기”를 실천할 수 없는 바가 있네요. 견딜 수 없기 때문에, 중요한 곳에서 해묵은 논의를 또 다시 꺼낸다. 가장 중요한 점이 이해되기가 어렵다는 것인 양 스스로 고안해내고 있는 부분이 있네요.
마토바 : 알튀세르는 맑스의 개별 저작에 대한 독자적인 해석은 없습니다. 알튀세르는 맑스를 1845년까지의 초기 맑스, 그 이후 『경제학비판』까지의 성숙해지고 있는 맑스, 그리고 성숙한 맑스, 이렇게 셋으로 나눕니다. 이 나누는 방식은 매우 당연한 분류입니다. 만일 우리가 “알튀세르를 위해” 하려고 한다면, 그것은 그의 문제제기를 맑스의 세 가지 시기구분에 한정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19세기의 맑스가, 19세기를 갑자기 뛰어넘어 21세기, 22세기까지 가서, 새로운 방법론을 제기하고 스스로도 까닭을 알 수 없게 되어버린 것을 발견한 알튀세르를 이해하는 것이다. 이런 것은 맑스주의자들이 논하기보다는 훨씬 더 넓게 철학자가 논의하는 편이 좋다. 세세한 부분에서 맑스의 저작에 대해 알튀세르가 새로운 전개를 했다고는 말할 수 없습니다. 그러니까 거기에 알튀세르를 위치시켜도 의미가 없다. 굳이 그의 인식론적 단절을 비약하여 해석하고, 인식론적 절단 이후의 맑스는 『공산주의자 선언』이나 『자본』이라는 수준에 머물러 있지 않았고, 더욱 날아올라, 21세기나 22세기에 있어서 새로운 문제설정을 하고 있는 맑스라고 말해 본다면 어떨까? 이쪽이 더 살아있죠.
나카마사 : 그 부분이 좀체 이해되기 어렵네요. 알튀세르는 절반은 맑스 해석자의 틀을 넘어 새로운 문제계를 세우고 있지만, 기존의 맑스주의의 스타일을 채용한 탓에, “새로운” 부분이 좀체 이해하기 어렵다. 또한 자주 얘기되듯이, 그 자신이 공산당에 집착하고, 공산당 주류파와 그토록 대립했지만, 공산당에 계속 남았다. 68년 혁명 이후, 그토록 데데하고 시시하다고 말해지는 공산당에 힘썼기에 그가 스탈린주의적으로 이해되고 말았다. 반드시 실제의 정치적 행동이 스탈린주의가 아니었다고 생각합니다만, 당과의 관계에서 그렇게 파악되어 버렸다, 그렇게 처신해버립니다. 그가 당에 집착한 것은 그의 맑스주의관에서 도출된 것인지 아니면 그런 수준에서의 얘기가 아니라 단순히 정치적인 인간관계인지, 그 언저리를 알기 어렵습니다만,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마토바 : 어려운 부분이네요. 『미래는 오래 지속된다』(1992년)에서 그는 자신의 인생을 얘기한다. 오랫동안 수용소 생활(1940-5년)을 보내며, 여기서 돌아와서 에콜 노르말에 복학하고, 거기서 엘렌느라는 여성과 서로 알게 됩니다. 그 전에 가톨릭의 어느 쪽이냐 하면 우파에 가까운 운동에 참여합니다. 1946년 로마로 가서 당시의 교황 피우스 12세를 알현하기도 합니다. 그것은 특별한 얘기가 아니고, 조금 전의 세대에게는 “악시옹 프랑세즈” 같은 단체에 들어가면서, 오른쪽으로 가거나 왼쪽으로 가거나 하는 사람들이 있어서 특별한 일이 아닙니다. 이 무렵 엘렌느에게 듣고서 공산당에 갑니다만, 꽤 흔들리는 부분이 있다. 이 부근은 부땅의 『알튀세르 전기』(1992년)에 자세하다. 그의 공산당 입당은 어느 정도 확신적이었는지는 모릅니다. 거꾸로 들어감으로써 그의 당에 대한 충성은 그것을 정당화하기 위해, 현실 수준보다도 이론 수준에서 순화하고 있다. 이론 수준에서 귀의해간 것이 아닌가. 그러나 그것도 문제인 것은, 그 자신이 말하고 있듯이 사람의 보이지 않는 부분을 어떻게 이해하는가입니다. 30년 전과 달리 현재에서는 알튀세르의 인생에 대해 많이 알게 됐다. 예전에 저는 너무 강조했습니다만(「알튀세르와 맑스アルチュセールとマルクス」, 『情況』, 11월호, 1999년), 그에게는 겉의 세계와 속[裏]의 세계가 있고, 속의 세계란 복잡한 여성의 문제이며 겉의 세계란 공산당의 문제입니다. 거기에 중층적인 구조가 있으며, 이 구조 속에서 알튀세르를 보면, 무엇하나 결정할 수 있는 것이 없다. 남녀관계를 보면, 기존의 도덕으로 보면 괘씸한 남자로, 흔들리고 있다. 한편으로는 당으로의 귀의라는 대목에서는 매우 성실하게 오랫동안 당원생활을 보낸다. 이 낙차이죠. 에콜 노르말의 수업도 할 때에는 확실히 하지만, 갑자기 정신병원에 들어가거나 애인한테 간다. 발리바르 등이 본 교사로서의 그는 뛰어난 교사인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잘 하느냐 하면 갑자기 어딘가로 가버리는 변해버린 교사였다. 이런 이중성 속에서 그의 공산당을 자리매김해야 한다. 이론적으로 생각하면, 본래는 떠나가고 있고, 흔들리고 있는 인간상에서 봐도 떠나가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마지막까지 떠나지 않았다. 그것이 인간이겠고, 바로 그가 말하는 불확정적인 유물론, 불확정적인 요소이겠죠. 이 사람만큼 사후에 겉과 속이 사라지고, 모두 폭로되어 버린 학자는 없다고나 할까, 바로 불확정적인 부분이 없고, 유물론적인 결정을 할 수 없는 인물은 없다. 이상하게 표현하자면, 삶의 방식 자체가 포스트모던적입니다.
나카마사 : 알튀세르는 국가나 문화의 이데올로기성을 논하는 대신, “당”이 어떤 것인지를 직접적으로는 논하지 않고, 이것과는 별도의 틀에서 다루는 것 같아요. 이것이야말로 “당”은 그에게 있어서 비가시적인 구조였는지도 모릅니다만, 당에 대해 종교적으로 귀의하고 있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습니다.
마토바 : 그에게는 에콜 노르말에 있었을 때에 푸코 등을 공산당에 넣은 책임이 있습니다. 푸코 등은 나갑니다만, 알튀세르는 머물러 있었습니다만, 그런 의미에서는 책임을 다하고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그와 동시에, 60년대부터 70년대에 걸쳐 중국의 문화대학명이 있었습니다만, 소련은 안 되지만 중국에는 아직 미래가 있다고 함으로써 중국에 접근한다는 움직임이 있었습니다. 중국에 지나치게 접근하면 공산당에서 벗어나게 된다. 그런 급진적인 방향으로 향하면서, 중요한 부분에서는 당에 머물러 있다고 하는 불가해한 부분이 있다. 나는 이렇게 생각합니다만, 알튀세르는, 육체를 초월한 지성이라는 세계가 있다고 믿고, 이 세계에 완전하게 살려고 한 인간이 아닌가라고. 지성의 세계 속에서는 현실을 일단 무시하고, 머릿속에서 완벽하게 구성할 수 있는 것이 있다고. 그가 쓴 것은 분명히 말하면 이치에 맞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몽테스키외도 마키아벨리도, 그 시대에 살면서도 그 시대를 뛰어넘는 사상을 머릿속에서 만들고, 이 머릿속에 게임 같은 완벽한 세계를 만들었다. 이 게임의 세계에 들어가면 좋습니다만, 들어가지 않는 인간으로부터 보면, 이것은 보통의 사람들이 한 것이 아니다. 그러나 이 게임의 세계야말로 그에게 진짜 실재라고 한다면, 이 게임 속에 그가 생각한 공산당이나 공산주의가 있다면, 그에게는 만족이며, 현실과의 낙차는 없다. 보통의 인간은, 자신의 이론에 대해 현실이 다르다면 이상하다고 느낍니다만, 그에게는 머릿속으로 도망치는 핑계거리가 있었던 게 아닐까 생각될 가능성이 있습니다. 자신의 고독한 생활 속에서 점차 증식되는 머리의 세계가 있다. 보통의 인간도 그런 것은 있습니다만, 그의 경우, 지성은 이 세상에서 무엇보다 멋진 것이라는 것을 알고, 그것에 특화되어 간 사람인지도 모릅니다.
5. 알튀세르의 ‘신체’
나카마사 : 그가 보고 있는 문제계가 너무 앞서 나가고, 실제의 그의 행동 형태와 괴리가 생기고, 행동면의 기반이 되는 것에 대해서는 “중층적 구조”로서 분석할 수 없게 된다. 당초 나치즘에 “존재” 자체의 발생을 봤던 하이데거가 현실의 나치즘이 자신이 생각한 나치즘과 다르다는 것을 알고서도 좀체 헤어나오지 못했다는 것도 비슷한 바가 있습니다. 마토바 씨가 말씀하신 것은, 알튀세르가 평가되는 면도 있습니다만, 비판되어야 할 면도 있습니다. 본인의 “신체성”에 대한 고찰이 분명히 결여되어 있다. 알튀세르 안에는 자신은 신체를 갖고 있고 세계 속에 편입되어 있다는 의식이 없는 듯한 느낌이 듭니다. 현대사상이라면, 인식의 수준을 바꿔도 결국은 자신도 신체를 갖고 세계에 편입되어 있다, 그러한 자신의 신체성을 메타 관점에서 보지 않으면 안 된다는 얘기가 곧바로 나옵니다. 그런 관점이 알튀세르로부터는 좀체 보이지 않고, 신체를 갖고 있지 않은 투명 인간처럼 현실 속에 있는 것 같군요.
마토바 : 그는 아내를 죽이고 그 재판에서 정신병이라고 함으로써 책임능력이 없게 되어 죄를 면합니다만, 그것에 대해 그 자신이 얘기한 대목에서, 자신은 책임능력이 없다non lieu, 즉 “세상의 것이 아니다”가 됐다고 말합니다. 그것을 자기 정당화하기 위해, 나는 옛날부터 있지 않았던, “루이Louis”라는 자신의 이름도 옛날 자신의 어머니의 애인의 이름이다. 그리고 프랑스어로 “루이”는 그lui입니다. 어머니는 자신을 죽은 애인처럼 키웠다. 나는 어머니 속에서는 존재하지 않는다, 나는 오랫동안 non-lieu였다. 그런 나는 여성에 대해 줄곧 늦깎이이고, non lieu였다. 사귀는 여성에 대해서도 가벼운 형태로 흘러갔다. 그래서 그에게 있어서 현실은 신체성을 잃은 존재하지 않은 것이었다. 물론 이것은 자기정당화이며, 그런 인간은 이상적이라고 하더라도, 최종심급이 실재라면, 실재란 그에게 있어서는 파리의 현실 생활입니다. Non-lieu라는 것은 그의 이론을 부정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가 혼처럼 존재할 뿐이라는 것은, 그의 바로 모든 학문 자체가 현실과의 접점을 잃어버리게 된다는 것이다. 최종심급이라는 위태로운 곳에 접점은 있지만, 그 최종심급을 빼면 둥실둥실 날아가 버리게 된다. 그러나 날아가는 내용은 매우 아름답다. 그래서 이 아름다운 것으로부터 우리는 물려받는 바가 있지만. 이 이론은 화제는 제공합니다만, 사회를 바꾸는 힘이 될 수 없는 것은 지면에서 떨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알튀세르는 나름대로 맑스를 마음대로 읽은 것입니다만, 마음대로 읽는 것은 상관없으나, 알튀세르의 신체가 보이지 않는다. 그 언저리는 벤사이드가 “절대적 사상의 세계”에서 행했던 알튀세르 비판의 부분이라고 생각합니다(논문집 『反アルチュセール』, 1999년).
나카마사 : 달리 말하면, 최종심급 자체는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울려 퍼질 뿐이며, 이쪽은 그것을 듣고 있을 뿐입니다만, 심급이니까 어떤 판결을 내는 것입니다. “마음대로 들렸을 뿐이다”고 말한다고 생각하면 말해버린다. 그리하면 모든 것은 탁상공론이 될 수 있다. 알튀세르 자신은 제대로 전개하고 있지 않습니다만, 최종심급을 “심급”답게 하려면, 개개인이 마음대로 듣고 있는 것만으로는 심급으로서 기능하지 않기 때문에, 그렇게 기능시키는 장치가 필요할 것입니다. 알튀세르에게 그런 장치로 통하는 뭔가의 아이디어가 있고, 그것을 우리가 “징후적으로 독해”할 수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어떤 양상을 띠는 것일까요?
마토바 : 알튀세르는 혁명에 대해 두 개의 서로 모순된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최종심급의 목소리가 들려서, 그것을 혁명으로 끌고 가려면, 그것만으로는 할 수 없다, 어떤 주체의 작동이 필요하다고. 그 주체란 지식인의 지도, 이른바 전위인지도 모릅니다. 그것에 의해 민중을 이끌어 혁명으로 나아간다고 말합니다. 그렇게 말하면서 한편으로 그것은 잘못이라고 말하고, 민중 쪽에서부터의 목소리가 있고, 그것에 지식인은 끌리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아마 알튀세르처럼 자기 변호에 능한 인간들이 본다면, 인텔리에 대한 숭배가 있으며, 그것은 볼셰비키적 혁명으로 이어집니다만, 지식인이 혁명을 추진하고 민중은 그것을 따라가면 된다고 하는 부분이 있습니다만, 그렇게 말하면서 그것을 부정하고 있고, 자기 모순되어 있습니다. 어느 쪽이냐? 그러나 어느 쪽인지 말하지 않습니다. 이런 자기모순은 어떤 사상가에게서도 있을 수 있습니다만, 다만 지식인이나 전위가 혁명을 수행한다는 방향에 내기를 걸었다는 면에, 오히려 그의 지성주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그가 『레닌과 철학』(1969년)에서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만, 레닌이 이탈리아로 망명했을 때, 이탈리아에 있는 러시아인이 카리브섬에서 의회를 하고 있으니까 그 장소로 와서 철학에 대해 떠들어달라고 고리키가 레닌에게 부탁합니다. 레닌은 거기로 가서 철학에 대해 지껄일지 고민합니다. 레닌은 자신은 철학을 실천하려 하고 있고, 그렇다면 철학에 대해 지껄인다는 것은 이상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지껄이는 수준을 넘어선 곳에 있는 철학을 목표로 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 철학이 있다면 묵과하지 않았다는 겁니다. 그래서 결국 레닌은 가지 않았습니다. 가지 않았던 것이 레닌의 뛰어난 부분입니다. 맑스주의에 있어서의 철학은 사실은 철학이 아니다. 철학이라면 하나의 합리적인 논의로서 민중에게 이야기되는 일종의 게임이 된다. 그러나 맑스의 철학은 그런 것을 넘어선 현실을 바꾸는 뭔가이다. 철학을 부정하고 있기 때문에 레닌은 철학에 대해 얘기할 수 없다. 그것을 레닌은 이해하고 있다, 그러니까 레닌은 뛰어나다는 게 됩니다.
이처럼 알튀세르의 사고 패턴은 항상 정해져 있습니다. 어떤 인간이 위대하다고 말할 때에는, 그 위대한 인간은 그 시대의 인간들의 사고의 지평을 뛰어넘어 역설적으로 물음을 역전시키는 인간인 것입니다. 이런 패턴은 알튀세르의 가장 알튀세르적인 부분입니다. 모든 뛰어난 인간들은 미래에 자신을 맞이하고 있는 인간들에게 신호를 보내고 있으며, 그를 돕는 것은 미래의 인간뿐이다. 살고 있는 시대에는 누구 하나 이해하는 친구를 갖지 못하고, 친구는 미래에만 있을 뿐이다. 이 미래의 친구와의 연관, 예를 들어 마키아벨리와 스피노자 등의 5세기에 걸친 이해의 우정 연합이 친구를 만들고, 그것 이외에는 전혀 친구가 아닌, 맑스도 마키아벨리도 스피노자도, 그리고 레닌도 그런 의미에서 고독하다.
나카마사 : 너무 “고독”해졌을 때, 어떻게 대중의 목소리를 듣나요? 어딘가에서 “대중의 목소리”를 들어두느냐면, 맑스주의라고는 말하기 어려운 곳이 있네요. 네그리는 “구성적 권력”이라는 것을 끈질기게 말하고 있습니다만, 지식인이나 혁명가가 자신의 머리로 “구성”하는 권력이 아니라 다중(multitude)으로부터 “저절로 구성되는 것”을 찾아내지 않으면, 진정한 혁명으로는 안 되니까요. 알튀세르의 최종심급도, 자신의 머릿속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대중이라고는 직접적으로 말하지 않더라도, “외부”로부터 끌고와야 할 것이 아닐까요? 알튀세르의 제자인 발리바르 등은, 스피노자의 다중의 얘기와 결부시키고, 대중적인 것으로부터 끌고 온다는 유형의 논의를 하고 있습니다만, 알튀세르 자신은 그런 인식은 전개하지 않는 것처럼 보입니다.
마토바 : 알튀세르는 중세의 수도사 같은 생활을 하고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사감으로서 에콜 노르말에 입주하면서, 학생들에게 철학을 이야기하고, 바로 현실과의 접점을 갖지 않은 곳에서 그는 우위성을 가진다. 이렇게 말하면, 그것을 너무 강조하고 있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만, 일종의 이상적인 세계에서, 연구를 위한 연구를 할 수 있는 환경 속에서, 이치를 가득 채워 일을 밀고 나간다. 그렇기 때문에 현실과의 접점이 상실되고 있다. 이 현실과의 연결을 어떻게 갖는가가 50년대부터 60년대에 전개하는 그의 여성 문제가 아니었을까. 그것이 바로 보이지 않는 세계입니다. 그가 숨지고 전기가 나오기 시작함으로써 비로소 우리는 알 수 있게 된 것이고, 나오지 않았으면 알 수 없었다. 에른스트 만델이 제4인터내셔널의 대빵이라는 것은 알려져 있으며, 그의 말투도 포함해 운동가로서의 카리스마성이 있다. 그러나 글쓰기로서의 카리스마성은 없다. 그에 반해 알튀세르는 오로지 “글쓰기로서” 카리스마성을 획득할 수 있었던 희소한 인물입니다. 그 자신이 그런 자신을 만들어내고 있고, 그것을 연기하고, 현실과의 접점을 갖지 않는 곳에 이지적인 곳에서 구축했다. 프랑스의 인구 5천만 명 중에 뛰어난 지성을 지닌 인간이 몇 명 있고, 그 몇 명만을 소중히 하고, 그 몇 명은 미래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 그런 생각이 프랑스에는 있습니다. 그런 선택된 인간으로서 스스로를 연기하고, 모두에게 그것을 납득시킬 수 있는 인물이었는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카리스마성이 있다.
나카마사 : “철학”으로서는 그 편이 철저한 것인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알튀세르 이후의 세대가 되면 그것은 좀체 주장하기 어려워졌다. 역시 알튀세르는 마토바 씨가 말씀하시듯이, 자신 이외의 타자로서, 눈에 보이는 “현실의 인간”을 설정하지 않는다. 그의 시야에 있는 것은, 아득한 옛날의 역사적 인물이라든가, 미래의 위대한 인물이네요. 위대한 지성 연합 속의 타자인 것이며, 이른바 “아래로부터” 나타나는 타자라는 이미지에는 아무래도 연결되지 않는다. 그것이 알튀세르의 좋은 부분이기도 하고 한계이기도 하다.
마토바 : 알튀세르는 초엘리트라는 것을 자인하고, 그것을 연기했습니다만, 그것을 뒷받침해주는 프랑스의 국토가 있었다. 프랑스의 철학자는 대개 엘리트입니다. 베르그손도 프랑스에서 대대로 이어져온 엘리트이며, 사르트르도 엘리트이지만 베르그손보다 떨어진다. 알튀세르는 사르트르보다 더욱 떨어지는 셋째, 넷째의 엘리트입니다만, 삶의 방식으로서는 더욱 엘리트 같다. 알튀세르처럼 에콜 노르말의 조수가 되는 것은 상책이 아니다. 오히려 파리대학의 선생이 되고, 장차 콜레주드프랑스의 선생이 되어, 아카데미에 들어가는 쪽이 좋은 것입니다. 확실히 우수한 인간은 에콜 노르말에 몰려듭니다만, 여기서는 교사로서의 지위는 오르지 않는다. 중세의 수도사처럼 여기에 있던 인간은 어딘가 어긋나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 어긋난 태도를 승인해주는 지적인 분위기가 당시의 프랑스에는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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