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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젝트 1-2 : 데리다 사후 10년/3) 사상 2014년 12월 10년 후의 자크 데리다

<좌담회> 10년 후의 자크 데리다 (3) : 강의록 『짐승과 주권자』에 관해

by 상겔스 상겔스 2017. 3. 23.

2. <좌담회> 10년 후의 자크 데리다 (3)


우카이 사토시(鵜飼哲)니시야마 유지(西山雄二)

고쿠분 고이치로(國分功一郎)미야자키 유스케(宮崎裕助)

 

이 글은 자크 데리다 사망 10주년을 기념하여 열린 좌담회의 기록으로일본의 사상』 2014년 12월호에 수록된 것입니다원래 각주는 없었으나 가독성을 위해 문헌 등은 각주로 옮겼습니다




III. 강의록 짐승과 주권자에 관해

우화 늑대와 어린 양

미야자키 : 정치적 토픽[화두]이 나온 김에 강의록 얘기로 옮겨가고 싶습니다. 이미 소개했듯이 짐승주권자’, 즉 동물론과 정치론을 접합하는 세미나가 드디어 출판됐습니다. 그 번역을 맡으신 니시야마 씨께서 짐승과 주권이 어떻게 연결되는가라는 기본적인 논점도 포함해 말씀해주시겠습니까?

 

니시야마 : 이건 20011212일에 시작된 세미나입니다. 우카이 씨도 참석하셨죠?

 

우카이 : 여기에 있는 멤버는 다 참석했잖아요?

 

미야자키 : 저도 두 번 정도 나갔습니다.

 

고쿠분 : 그립군요.

 

우카이 : 9·11 직후의 세미나였죠.

 

니시야마 : 그래요. 방금 우카이 씨는 막바지까지도 약속을 취소하지 않은 데리다 얘기를 하셨는데요, 9·11 직후 대부분의 지식인이 뉴욕행을 취소하는 가운데, 데리다는 약속대로 뉴욕대학에 갔고 동시다발 테러 현장도 방문했습니다. 이것은 그 경험이 짙게 반영된 세미나로, 당시의 맥락을 반영하고 있을 뿐 아니라, 그에 대해 전략적으로 개입하겠다는 의도도 느껴집니다.

   모처럼 맞이한 기회니까, 몇 가지 흥미로운 부분을 인용하면서 얘기하고 싶습니다.

 

이 세미나에서는 다양한 늑대를 몇 번이나 논하게 됩니다만, 그 중 한 마리가 여기서 무대에 올려집니다. 늑대와 새끼 양이라는 제목의 우화에 나오는 늑대입니다. 이것은 서두의 두 가지 시구인데, 이 경우, 우화는 이야기 이전에, 지연된 이야기의 계기 이전에 교훈으로부터 시작됩니다. 이것은 상당히 드뭅니다.

 

최강자의 논리가 항상 최고 좋은 것입니다.

조금 있다가 보시죠. (p.26).

 

라퐁텐의 우화 늑대와 새끼 양의 서두에 있는 두 줄이 인용되고 있습니다. 가장 강한 자의 이성이야말로 최고 좋은 것, 최선의 것이라고, 조만간 이를 증명하자고 말입니다. 강의 물 마시는 곳에서 싸움을 한 끝에, 마지막에 늑대가 새끼 양을 먹어버립니다만, 그때까지 시간이 걸립니다. 이 시간차가 포인트로, 힘이 있는 자가 법을 구현하고 행사하기까지는 항상 시간이 걸립니다. 늑대는 새끼 양을 설득합니다만, 그 도중에 이 점은 루이 마랑이 먹을 수 있는 말[각주:1]에서 탁월한 분석을 하고 있습니다 새끼 양이 주인님, 노여워하지 마세요라고 늑대를 주권자로서 명명[지명]함으로써 힘과 정의의 지연이 해소되고, 드라마가 반전되어 새끼 양은 먹혀버리게 됩니다.

9·11 직후의 국제사회의 분위기를 시사하는 생생한 우화라고 말할 수 있죠. 오사마 빈 라덴이 비디오 영상으로서 유령적 미디어에 등장하고, 그를 숨겨줬다고 간주된 아프가니스탄에 미국이 침공합니다. 해가 바뀌어 20021월에는 악의 축이라는 명칭이 사용되고, “테러와의 전쟁이 본격화됩니다. , 미국이라는 최강자의 논리가 최선임을 이제 조금 있으면 보여주는 이 현실을 이 우화는 행위수행적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 문구가 세미나의 서두에서 몇 번이나 암시적으로 반복됐다는 것이 참으로 인상적이었습니다.

 

고쿠분 : 라퐁텐의 이야기는 정말로 그립네요. 저금 보충하면, 데리다가 강의에서 말했던 것은, “최강자의 논리가 항상 최고 좋은 것입니다. 조금 있다가 보시죠라는 발언이 기묘한 자기 증명적 구조가 되고 있다는 것이죠. 무슨 말이냐 하면, “최강자의 논리가 항상 최고 좋은 것입니다라고 말한 화자는, 그것을 증명하는 것은 잠시 후이며, 지금 당장 증명할 필요는 없다고 제멋대로 정해버립니다. 그런 것을 제멋대로 정한다는 것은 그것을 정하는 화자가 최강이라는 것이며, ‘최강이기 때문에 그 판단은 최고 좋다고 말입니다. 2행은 이런 의미에서 1행에서 진위진술적(constative)으로 서술됐던 명제의 행위수행적(performative) 증명이 됩니다. 데리다의 이 분석에서 [저는 전기가 통하듯이] 찌르르했습니다. 그리고 당연히 이 얘기는, 국제정치에서는 규칙을 마음대로 정할 수 있는 자가 최강이라는 것의 비유가 됐습니다.

 

우카이 : 최근 5년 정도 와세다대학의 비상근으로 법비판으로의 초대라는 수업을 맡고 있는데요, 항상 이 늑대와 새끼 양의 우화를 제 나름의 해석과 데리다나 루이 마랑의 독해방식을 겹쳐놓으면서 얘기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깨달은 것은 주권자를 동물로서 표상하는 것이 일본의 경우는 예외적일 정도로 적거나 드문 국가라는 점입니다. 특히 늑대같은 정치인이라는 것은 고이즈미 준이치로 정도로, 그 이전의 자민당의 정치가는 굳이 말하면 너구리라든가 여우라든가 같은 유형이죠. 교활하거나 악착같거나 무엇을 생각하는지 모르는 것이 보수의 정치가라고 여겨졌습니다. 아시아에서도, 김일성은 백두산의 호랑이라고 불렸습니다만.

그렇다면 왜 일본은 그러한가라고 하면, 천황제의 문제가 크다고 느낍니다. , 천황제에 의한 국민통합이 위기에 빠지면, 포퓰리즘 유형의 보수정치가가 가면을 벗고 동물화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하시모토 도루(橋下徹)는 고이즈미 준이치로 이상으로 늑대유형의 정치가죠. 다만, 문제는 민중이 반드시 늑대로부터 도망치려고하는 것은 아니기에, 오히려 강한 자의 매혹에 지고 맙니다. 이런 현상 없이 1930년대의 유럽정치의 전개는 생각할 수 없으며, 이것을 일본에서도 경험할 수밖에 없게 되고 있지 않은가 생각합니다.

 

니시야마 : 홉스는 인간을 공포의 상태에 두는 것이 주권국가로서의 통일을 촉진한다고 말했으며, 슈미트는 이 없으면 주권국가는 성립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또한 마키아벨리에게는 여우의 사례가 나오며, 확실히 무법자의 늑대는 무섭지만, 더 무서운 것은 여우이며, 교활한 지혜를 가진 여우는 늑대조차 공포에 떨게 한다고 표현되어 있습니다. 그런 예를 인용하면서, 데리다는 당시의 미국의 행동과 관련시켜 얘기를 전개시킵니다.

   다음의 인용은 인간과 동물의 유비에 관한 것입니다.

 

유혹들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결코 다음과 같이 말하는 것에 만족해서는 안 되겠죠. 사회적인 것, 정치적인 것, 그리고 이것들에 있어서 주권의 가치나 행사는 동물적인 힘이나 순수한 힘의 갈등의 가장된 표명일 뿐이며, 동물학은 우리에게 그 진실 다시 말해서 바닥에서 비인간적인 짐승성, 야만성, 잔학성을 준다고[명확히 해준다고] 말이다. 세계 전역의 문서고[자료실]이나 도서관으로부터, 이 도식에 기대는[도식에 관해 신뢰할 수 있는] 무수한 담론을 인용할 수 있을 것이고, 인용하는 것이 가능할 겁니다[언젠가는 사용할 수 있겠죠]. 우리는 유비의 의미를 뒤집어, 정치적 인간이 여전히 동물인 게 아니라, 동물이 이미 정치적이라고 정반대로 인식할 수도 있습니다. 또한 동물사회라고 불리는 것의 수많은 사례에서, 위계적 구조, 권위와 권력의 속성, 상징적 신뢰의 현상을 가지고, 자연과 대립하는 이른바 인간의 문화에 그토록 종종 귀속되고 그토록 순박하게 예비된[매우 섬세한 방식으로 숙명지어지는] 그토록 많은 것들과 더불어, 세련되고 복잡한 조직이 등장한다는 것을 아주 쉽게 보여줄 수 있습니다(p.35).

 

동물의 야만적인 힘, 비인간적인 잔학성은 정치적인 한계 또는 정치적으로 통치해야만 하는 것으로서 표상됐습니다. , 인간과 동물의 유비는 항상 정치적 비유로 사용됐습니다. 특히 데리다가 관심을 기울인 것은 늑대로, 서두에서 이 세미나는 늑대의 걸음으로(à pas de loup=살금살금)” 시작된다고 말하고 있으며, 늑대에 관한 연구를 상당히 많이 조사하고 있습니다. 더욱이 그는 동물의 형상의 성적 차이에 철저하게 천착합니다. 암컷 늑대와 수컷 늑대에는 어떤 문화적 표상의 차이가 있는가, 왜 암컷 늑대는 매춘부로 표상되고, 성욕에 결부되었는가 등도 묻고 있습니다.

다음의 인용으로 나아가보죠.

 

주권자와 짐승은 법의-바깥에-있다(being- outside- the- law)는 점에서 공통적인 듯 보입니다. 마치 두 가지가 정의상 법들과의 거리에, 혹은 법들 위에서, 절대적인 법을 존중하지 않고 위치되어 있는 듯하다는 것입니다. 두 가지는 절대적인 법을 만들어 내거나, 두 가지가 그런 법 자체이기도 합니다만, 두 가지는 이것을 존중할 필요가 없습니다. <법의-바깥에-있음>은 한편으로 주권의 형상의 경우, 법들-위에-있음의 형태를 아마 취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 자체, 법들의 기원, 법들의 보증자라는 형태를 취할 수 있는 것입니다. 마치 대문자의 <> 법의 조건 이 법에 앞서, [상위], 그러니까 법 바깥에 있으며, 법에 외적이거나 심지어 이질적인 것처럼 말입니다. 다른 한편으로, 대체로 동물성이나 짐승성에 의해 이해되는 것의 형상의 경우, <법의-바깥에-있음>은 또한 법이 나타나지 않는 장소, 혹은 법이 존중받지 못하는 장소, 혹은 법이 위반되는 장소를 위치지을 수 있습니다(p.38).

 

   이 세미나에서는 새롭게 짐승이라는 주제가 첨가되고, “인간과 동물이 아니라 인간과 짐승”, “주권자와 짐승이 중층적으로 따져지고 있습니다. 인간은 정치적이고 이성적인 동물이지만, 동시에 주권자와 짐승은 그런 동물적 공간의 외부, 법의 외부의 존재로 규정됩니다. 주권자는 법의 상위에 존재하며, 법을 만들어내고 법을 부여하는 능력을 갖는 자인 반면, 짐승은 법의 하위에서 배제된 무법자(outlaw, 법 바깥의 존재)입니다. 이 주권자와 짐승이라는 두 개의 법의 외부에, 정치적 동물로서의 인간이 끼워넣어지는 것입니다.

 

미야자키 : 법의 체계는 물론 인간적인 것이며, 그것에 의해 인간 사회가 구축되는 한, 동물은 그 외부에 있습니다. 그런데 법이 법으로서 체계화되고 효력을 갖기 위해서는 잉여가 필요하며, 그 잉여는 특권적인 힘을 가질 필요가 있습니다. 그것이 주권입니다만, 주권은 바로 동물을 통해서만 말할 수 있을 뿐이라는 것이 포인트입니다. 이성의 판단으로 구축된 언어의 공간에서도, 최종적인 힘을 행사하는 곳에서는 반드시 주권이 법의 잉여로서 개입합니다. 그러나 법의 일부라는 것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그런 의미에서는 미국의 패권주의적 행동도 법적으로 정당화될 수 있는 것입니다만, 그 현상 형태로서는 터무니없는 비인간적인 사태가 일어납니다. 그곳에서는 인간과 동물이라는 기본적 분할선이 성립하지 않는다는 것을, 이 강의록은 비판적·핵심적(critical)으로 드러내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홉스에 대한 언급

니시야마 : 그의 정치적 동물에는 항상 두 종류의 차원이 있다는 것이 다음의 인용입니다.

 

거듭 말하지만, 모든 방향으로 펼쳐져야 할 모든 질문들에는, 우리 자신에게 물어야만 하는 모든 것들에는 인간을 정치적 동물이나 정치적 존재[살아 있는 것]로 형상화하는 것이 있지만, 그러나 이중적이고 모순적인 형상화(그리고 형상화는 항상 우화나 우의의 시작입니다), 정치적 인간의 이중적이고 모순적인 형상화가 있습니다. 한 쪽의 형상은 그의 지고성(sovereignty) 자체에 있어서, 그가 통제하고 종속시키고 지배하고 사육하거나 죽이는 짐승보다 우월하며, 따라서 그의 주권(sovereignty)은 그를 동물의 상위로 추켜세우고 동물을 전유하는 데 있으며, 동물의 생명을 마음대로 좌지우지하는 데 있습니다. 다른 한편으로(모순되는 것입니다만), 정치적 인간의 형상화, 그리고 특히 동물성으로서, 혹은 심지어 짐승성으로서의 주권국가의 형상화가 있습니다(우리는 이 두 개의 가치들 사이에서 구별해야 합니다). , 보통의(normal) 짐승성이거나 아니면 신화적이거나 우화적인 괴물적 짐승성 사이에서 말입니다. 동물성보다 우월한 정치적 인간과 동물성으로서의 정치적 인간(p.50).

 

왜 정치적 주권 주권자나 국가나 인민 은 이성의 법을 통해, 짐승보다 상위에, 동물의 자연적 생명보다 상위에 위치하는 것으로 형상화되거나 (혹은 동시에) 인간의 짐승성이나 동물성, 달리 말하면 인간의 자연성의 현시(manifestation)로서 형상화되기도 하는 것일까요. 당분간 이 질문은 있는 그대로 놔둡시다. 그 응답에 관해서는, 이것을 보철적(prothétique), 보충대체-국가적(proétatique), 보철-국가적인(prothétatique) 응답, , 인위적 기관 여기서는 국가입니다 을 부가함으로써 자연을 대체보충하는 대체보충의 기술적 혹은 보철적 논리를 따르는 응답이라고 부릅시다(p.50).

 

   인간은 동물을 지배하고 복종시키고 살해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인간은 동물보다 우월합니다. 하지만 동시에 그런 정치적 인간, 정치적 공간은 종종 동물의 은유로 표현됩니다. “리바이어던도 그러하며, “인간은 인간에 대해 늑대이다라는 것도 그렇습니다. 동물성보다 우월하면서, 그러나 동물의 유비로서 밖에는 표현할 수 없는 사태를 데리다는 보철적(補綴的)”이라고 표현합니다. 자연도 문화도 아닌, 양자의 경첩[이음매]를 이루는 위상입니다. “인간은 동물이 아닌 동시에 동물이다라는 이중의 수준에서 동물-정치학을 생각하는 것 그것이 데리다의 물음이 됩니다.

   강의록의 마지막에 나오는 아감벤에 대한 비판도 바로 이 점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아감벤은 푸코의 질문을 잇는 형태로 아리스토텔레스로 거슬러 올라가, 사회적인 비오스와 동물적인 조에라는 두 가지 생명 사이에 명확한 대립선을 긋습니다. 반면, 데리다는 정말로 아리스토텔레스 속에서 그런 명확한 선이 발견되는가라는 점에 유보를 붙이고, 다층적인 동물-정치학에 입각해 논의를 제기하려고 합니다.

 

미야자키 : 아감벤에 대한 비판은 이 강의록의 처음 부분에도 나옵니다. 아감벤의 호모 사케르 : 주권권력과 벌거벗은 생명(원저 1995)은 이 세미나와 질문 대상이 겹치며, 당시 이미 아감벤도 유명인이 됐기에 언급하지 않을 수 없었는지도 모릅니다. 데리다가 본격적으로 아감벤을 논한 것은 아마 이 대목이 처음이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 비판은 애매한 느낌이며, 호모 사케르에서 보이는 단언적 수사에는 수행적인(performative) 속임수(trick, 계략)가 있으며, 독자에 따라서는 경쾌하게 느껴지지만, 알았다는 기분에 처하게 할 뿐이지 않는가라고 합니다. 다만, 그것은 최종적으로는 비오스와 조에라는 아감벤의 근간과 관련된 구별로 향합니다.

 

니시야마 : 그것은 홉스에 대한 논의와도 관련된 것으로, 홉스는 주권을 설정할 때 신과 짐승을 배제합니다. 여기서 중요해지는 것이 바로 언어의 물음입니다. 데리다는 응답반응을 구별하고, 인간은 응답할 수 있지만, 동물은 반응할 뿐이라고 하는 분할선이 철학사에서는 문제를 안고 있다고 봅니다. 신과도 짐승과도 사회계약을 체결할 수 없다, 왜냐하면 신과 짐승은 완전히 달라서 응답할 수 없고, 책임을 맡을 수도 없기 때문이라고 말해지지만, 원래 주권이야말로 응답반응의 구별에 의해 가까스로 성립합니다. 그렇게 역사적으로 형성될 수밖에 없는 주권의 공간은, 그렇기에 탈구축 가능하다고 데리다는 생각하는 겁니다.

 

우카이 : 사상사적으로 흥미로운 것은 그때까지의 저작에서는 거의 참조(reference)가 없던 홉스를 끄집어내고 있는 곳이에요. 이 문맥에서 홉스를 도입하는 것의 전략적 함의는 뭘까요?

 

니시야마 : 데리다의 논의는, 법의 바깥에서 제 것인 양 행동[처신]하는 주권자는 짐승이다, 미국은 국제질서의 법을 초월해 짐승처럼 예외적으로 행동하고 있다, 이런 식의 단순한 비판과는 선을 긋고 있습니다. 데리다는 주권이라는 것도 아니고 주권자라는 것도 아니라, ‘짐승이나 주권자를 실체적으로 파악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합니다. 주권자와 짐승(bête)의 식별 불가능한 경계 어리석음(bêtise)의 주제에 의해 의문시된 경계 로부터 보면, 주권에는 때로 길항하는 다양한 형식이 있을 뿐이고, 주권과 대립하는 것이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무조건성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우카이 : 불량배들이라는 제목만 해도, 데리다는 불량배들(voyous)”이라고 복수형으로 제시함으로써, 자기 자신도 불량배의 한패거리에 넣어서 논의를 제기합니다. , “불량배(rogoue)”라는 영어 프랑스어에 대응하는 말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를 타자화하지 않습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주권국가의 불량배성, 민주주의 자체가 지닌 불량배성도 동시에 억누릅니다. 이것은 짐승주권자의 논의로도 연결되는 선이라고 생각합니다.

 

아감벤과 데리다

고쿠분 : 주권에 관해 말하면, 아무튼 주권의 역설 같은 것을 지적하는 것으로 만족하면 안 된다는 것이 명백하게 말해지고 있군요. 법을 정하는 것이 법의 바깥에 있다는 역설은 이미 칼 슈미트가 1920년대에 말했던 것이죠. 그래서 문제는 그 다음의 걸음을 데리다가 얼마나 갔는가, 그리고 우리 독자가 그로부터 얼마나 새로운 논의를 이끌어내는가라는 것으로 끝난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아감벤의 좋은 독자가 아니기 때문에 제대로 된 평가는 할 수 없지만, 그는 주권의 역설에 머물지 않는 논점을 제대로 제시하는 거잖아요.

  그리고 니시야마 씨가 주권의 공간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만, 주권이라는 것은 오히려 이죠. 그 아래에서 행정에 의한 통치의 공간이 넓어지고 있습니다. 통치의 문제는 1970년대부터 푸코가 다뤘지만, 당시는 푸코가 무엇을 하려고 하는 걸까, 많은 사람들은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아감벤을 경유하여, 당시의 푸코의 시도의 의미가 비로소 알려지게 됐다고 말해야 하지 않을까요. 그래서 이 논점에 관해서는 푸코를 얽혀 두어야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미야자키 : 최근 오카다 아츠시 씨가 이탈리아 이론[각주:2]이라는 책을 냈습니다만, 그 중 1장에서 데리다와 아감벤의 관계를 포괄적으로 논하고 있습니다. 거기서는 두 사람을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로 파악하고, 아감벤은 항상 데리다에게 대드는 아들이라는 위치가 되고 있다. 아감벤 자신, 데리다에 관해 상당히 신랄할 것을 말했기도 하기에, 드디어 이 강의에서 데리다가 폭발해서 응답을 시작했다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오카다 씨는 데리다의 아감벤 비판은, 그 배후에 있던 푸코의 생명정치나 생명권력에 관한 논의를 어디까지 감안하고 있었는가, 나아가 그 배후에는 하이데거가 있는데, 왜 그것을 명시적으로 다루지 않았는가라고 묻고 있습니다.

 

고쿠분 : 대단히 유행했던 생명권력(biopouvoir)”이라는 개념에는 주의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알기 수운 얘기라 많은 사람들이 달려들었지만, 들뢰즈는 이것을 비판했습니다. 들뢰즈의 철학원리5장에서 자세하게 설명했습니다만,[각주:3] 감시와 처벌(1975)에서 독파할 수 있는 다이어그램은 추상적이면서도 구체적인 배치(arrangement)를 설명할 수 있는, 실제로 뛰어난 개념이었습니다. 그런데 생명권력혹은 생명정치는 대략적으로 사회적 추세를 파악하는 개념으로, 다이어그램에 비하면 아주 단순해지고 있다는 겁니다. 다만, 강의록을 읽으면, 푸코는 동시기에 생명권력이나 생명정치와는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통치의 문제도 물었던 것이죠. 그리고 아감벤은 바로 이 통치권력의 문제에 주목합니다. 그렇다면 생명권력내지 생명정치의 논의와 통치권력의 논의는 그냥 나눠서 생각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요? 통치권력의 문제는 법의 운용의 문제이기 때문에, 데리다가 벤야민을 논하는 가운데 전개했던 법에 관한 논의에 통하는 것이죠. 그런 의미에서는 아감벤과 데리다에게도 논점의 공통성이 보입니다. 다른 한편, “생명권력의 개념에 관해서는, 아마 데리다는 의문을 갖고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저도 별로 도움이 되는 개념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습니다.

 

미야자키 : ‘비오스와 같은 생명을 하나로 묶어버리는 개념에 대해 데리다는 비판적이네요 아감벤은 생명권력은 근대적 현상이다라고 날카롭게 마구 몰아세우지만, 그것은 잘못이고, 생명권력은 옛날부터 있으며, 그것에 관한 논의도 옛날부터 있습니다. “새로운 생명권력이라고 표현할 수 있을지도 모르지만, 그것도 결국은 생명개념을 너무 일반화하고 있다고 데리다에게는 보였을 것입니다.

 

고쿠분 : 요컨대 데리다도 들뢰즈도 비판했습니다.

 

니시야마 : 근대의 주권 개념에 직결시키려면 너무 조잡합니다.

 

미야자키 : 데리다는 그것을 대신해 동물-인간적(zoo-anthropologique)”인 정치라는 표현을 하고, 동물과 인간의 관계성을 묻는 곳에 정치를 정위시키는 자세(stance)를 일관되게 했습니다. 그런 것도 감안한 위에서, 생명정치나 생명권력이라는 현대사상에서 열띠게 이뤄진 논의에 데리다의 사상이 어떻게 개입할 수 있는지 여부는 지금부터 생각해야 할 포인트라고 생각합니다.

 

우카이 : 10년 정도 전까지, 저는 아감벤에게 오히려 호의적이었습니다. 열림 : 인간과 동물(원저 2002)의 번역이 나왔을 때에도 긍정적인 서평을 썼습니다. 문학론 관계의 저작에는 일찍부터 프랑스어 번역이 있어서 산문의 이념, 벤야민에 대한 독해방식에 관해서도 배운 것이 많이 있습니다. 다만 그를 유명하게 한 호모 사케르등의 정치적 주제를 다룬 일련의 저작에 관해서는, 지금은 문제를 느끼는 것이 많아졌습니다. 예를 들어 비오스조에의 구별의 전략적 중시는 칼 켈레니(Karl Kerenyi, 1897~1973)에서 온 것입니다. 이것은 니체의 영향을 받으면서 생명 일원론에서 그리스 문화를 재해석하려는 19세기 말 이후의 강한 사조를 맞서 비오스조에를 뚜렷하게 나눠서 논의해야 한다고 주장한 것입니다. 아감벤의 논의는 어떤 의미에서 그 반복이죠. 물론 완전히 같지는 않고, 1970년대 이후의 생명권력의 미분적 확대라는 맥락 속에서, 푸코가 가볍게 언급했을 뿐인 것을 아감벤이 부풀리고, 그렇게 해서 논의가 가능해졌다는 면은 확실히 있습니다. 다만 아리스토텔레스나 하이데거의 논의를 어떻게 토대로 삼고 있는가라는 사상사적 절차의 관점에 서면, 많은 의문이 있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호모 사케르가 출판된 1995년은 마치 전후 50년에 해당됐기에, 이미 작업을 시작한 우리의 세대도, 그 시대에 관해 뭔가 말해야 한다고 느꼈습니다. 거기에 아우슈비츠의 남은 것 : 문서고와 증인이 나왔는데, 유럽에서는 수용소를 경험한 사람들이 남긴 텍스트를 철저하게 조사하는 사람들이 있고, 이런 텍스트들을 아감벤이 어떻게 편집하고 논의를 조립하고 있느냐는 점에 대해 격렬한 비판을 받게 됐습니다.[각주:4] 데리다에게 이 저작은 아들인 피에르 알페리가 프랑스어 번역[각주:5]을 했기 때문에 가족의 문제이기도 했고, 아주 복잡한 입장을 겪었습니다만, 이 단계에서는 공적으로는 아감벤을 옹호하고 있습니다. 그런 경위를 거친 후에, 이 세미나에서는 복잡하게 축적된 잠재적 논쟁의 맥락에 마침내 손을 대게 되며, 주권을 묻는 사상가 자신의 주권적 몸짓을 징후론적으로 읽는다는 작업을 입구로 삼은 것입니다.

 

미야자키 : 데리다는 시선의 권리[각주:6]에서 아감벤의 사유의 종언[각주:7]을 긍정적으로 인용하기도 하고, 오히려 호의적으로 봤다고 생각합니다.

 

우카이 : 실제로 친구였거든요. 다만 아감벤의 입장에서 보면, 자신이 향하고 싶은 방향이 탈구축에 의해서 미리 저해되고 있다는 느낌은 처음부터 품고 있었던 게 아닐까 생각합니다.

 

미야자키 : 장 뤽 낭시(1940년 생)가 인터뷰에서 말했던 것입니다만,[각주:8] 아감벤은 데리다를 뒤쫓고 있었으며, 데리다와 길항하는 형태로 주제를 수립했지만, “이것은 데리다로부터 빌려온 것이다라거나 이것은 데리다를 의식하고 있다등은 전혀 말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것이 가까운 친구인 낭시에게는 잘 알고 있었지만, 두 사람 모두와 친구이기도 해서 항상 씁쓸한 생각으로 바라봤다고 해요.

 

우카이 : 아감벤은 데리다의 세미나에 나가기도 했으니까요.

 

미야자키 : 물론 그런 인간관계 수준이 아닌 곳에서 두 사람에 관해 생각해야 한다고 봅니다.

 

우카이 : 동물론과의 관계에서 말하면, 꽤 오랫동안 아감벤은 인간에게 고유한 것이 있다라는 발상의 사람이었습니다. 목적 없는 수단(원저 1995)에서는 동물을 거울을 봐도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라는 것을 말하기도 했습니다. 별로라고 생각하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 쉽게 이해되기에 역사계, 문학계의 연구를 하고 있는 학생들도 호모 사케르를 원용하는 것입니다만, 이렇게 하면 결국 생명권력의 문제는 인간을 동물 취급한다는 얘기가 되어 버립니다. 그래서는 과거의 인간주의가 그대로 돌아올 뿐으로, 아무리 그래도 아감벤 자신은 그렇게까지 단순한 것은 말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아감벤과 아감벤 효과는 구별해서 생각해야 하고, 아감벤 자신도 열린을 쓰던 무렵에는 이와 관련된 문제들을 조정하고, 인간과 동물의 차이의 소멸과 더불어 찾아오는 주권의 종언이나 주권 이후의 이미지를, 주도면밀하게 수립한 메시아주의적 전망 속에서 내놓게 됐습니다. 아무튼 논의 자체는 흥미로운 것이기 때문에, 제대로 텍스트에 입각해 검증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계속>

  1. Louis Marin, La Parole mangée, Klincksieck, 1986. [ルイ・マラン, 『食べられる言葉』, 梶野吉郎 訳, 法政大学出版局, 1999]. [본문으로]
  2. 岡田温司, 『イタリアン・セオリー』, 中公叢書, 2014년. [본문으로]
  3. 國分功一郎, 『ドゥルーズの哲学原理)』, 岩波現代全書, 2013년. [고쿠분 고이치로, 『들뢰즈 제대로 읽기』, 박철은 옮김, 동아시아, 2015.] [본문으로]
  4. Philippe Mesnard et Claudine Kahan, Giorgio Agamebn à l’épreuve d’Auschwitz : temoignages / interprétations, Kimé, 2001. [본문으로]
  5. Giorgio Agamben, Ce qui reste d’Auschwitz : l’archive et le témoin, traduit de l’italien par Pierre Alferi, Payot & Rivages, 1999. [본문으로]
  6. Jacques Derrida, Droit de regards, Minuit, 1985. [본문으로]
  7. Giorgio Agamben, La fine del pensiero, Le Nouveau Commerce, 1982. [본문으로]
  8. Lorenzo Fabbri, “Philosophy as Chance : An Interview with Jean-Luc Nancy”, translated by Pascale-Anne Brault and Michael Naas, Critical Inquiry, Vol. 33, No. 2, Winter 2007.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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