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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젝트 1-2 : 데리다 사후 10년/3) 사상 2014년 12월 10년 후의 자크 데리다

<좌담회> 10년 후의 자크 데리다 (4) : 데리다의 민주주의론과 그 사정거리

by 상겔스 상겔스 2017. 3. 23.

2. <좌담회> 10년 후의 자크 데리다 (4)


우카이 사토시(鵜飼哲)니시야마 유지(西山雄二)

고쿠분 고이치로(國分功一郎)미야자키 유스케(宮崎裕助)

 

* 이 글은 자크 데리다 사망 10주년을 기념하여 열린 좌담회의 기록으로, 일본의 사상 2014 12월호에 수록된 것입니다. 원래 각주는 없었으나 가독성을 위해 문헌 등은 각주로 옮겼습니다




IV. 데리다의 민주주의론과 그 사정거리

도래할 민주주의란 무엇인가?

미야자키 : 지금까지의 논의에도 나왔듯이, 이성적 통합을 해야 할 주권이야말로 가장 야만적인 형태로 현상한다는 역설이 주권에는 발견됩니다. 이 역설이 뚜렷하게 드러나는 것이 말년의 데리다가 씨름한 민주주의(democratie)의 문제입니다. 철학사적으로 보면, 플라톤부터 하이데거에 이르기까지, 민주주의라는 것은 정치체제로서는 결함이 있는 것이라고 생각되었으며, 어떻게 민주주의를 벗어날 것인지가 논의되었습니다. 예를 들어 칸트도 영구 평화를 위하여를 읽으면, ‘공화제라는 개념을 사용해 민주주의적인 것을 말하지만, ‘민주주의라는 말은 비판하고 있습니다. 민주주의는 민중의 전제(專制)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하며 비판하고 있습니다. 반면 데리다는 이것은 동물론이나 사형론과도 평행한다고 생각합니다만 그렇게 철학자들이 네거티브하게 봤던 것을, 그 한계에서 다시 다루고, 바로 거기야말로 물음이 있다는 형태로 민주주의를 포지티브하게 다뤘습니다.

   데리다의 민주주의론의 포인트는 민중에 의한 자기 지배인 것인 민주주의는 완전하게는 달성할 수 없는 것을 구조적으로 운명 지어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그 운명 지어져 있는 불가능성이야말로 민주주의의 가능성의 조건이 된다는 점입니다. 그 결함이야말로 민주주의의 원동력이 됩니다. 분명히 민주주의는 항상 자살적자기파괴적인 위협에 스스로를 드러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데리다가 민주주의의 자기면역이라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는 것에서도 표현되고 있듯이, 그 위협에 대한 강함도 되고 있습니다. 물론 그것은 불안정하다는 데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민주주의는 스스로를 위험에 빠뜨림으로써 스스로를 단련하려고 합니다만, 그것이 언제 민주주의의 구조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 되어도 이상하지 않습니다.

   그런 불안정한 구조를 내재시키는 방식을, 데리다는 도래할 민주주의(démocratie à venir)”라는 말에 담았습니다. 그것은 도래할이라고 말해지듯이, 완전하게는 달성되지 않으며, 달성은 항상 지연됩니다. 언젠가는 달성되겠지만, 기대의 지평에 머물러 있습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데리다는 그것을 약속으로서도 생각하고 있습니다. , 그 기대는 항상 이미 와야 할 것이며, 오는 것이 있을 수 있다는 방식을 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지금일지도 모르며, 내일일지도 모릅니다. 따라서 단순히 지연되고 목표인 채로 머물러 있는 게 아니라, 약속이기 때문에 실현해야 한다, 그런 결단을 촉구하는 명법이 있는 셈입니다. 그런 이중의 형태로 데리다는 민주주의의 존재방식을 약속하고 있습니다.

   거기서 고쿠분 씨의 의견과 접촉됩니다. 고쿠분 씨는 바로 도래할 민주주의라는 제목을 지닌 책에서 쓰고 있듯이, 실천적 지평에서 데리다의 아이디어를 살려내려는 시도를 하고 있습니다. 앞서도 정치적 영역에서의 탈구축적인 수법의 유효성을 지적하셨습니다만, 반응도 포함해서 좀 더 구체적으로 들려주시면 좋겠습니다.

 

고쿠분 : 이미 맑스와 아들들(원저 2002)역자해설에서 고쿠분 씨가 쓰셨는데, 데리다는 불량배들속에서 도래할 민주주의(démocratie à venir)”“à”에는 두 개의 의미가 들어 있다고 말합니다. 저는 이것을 담론적 투쟁비담론적 투쟁으로서 설명해 봤습니다.

   담론적 투쟁이란, 모두가 말하는 것이나 통념에 대한 투쟁입니다. 예를 들어 우리나라에서는 민주주의가 완전히 실현되고 있습니다라고 말했다면, “민주주의는 항상 도래할 것에 머물러 있다며 이것을 비판해야 한다고 말입니다. 이것은 제가 주민투표운동 속에서 실제로 체험한 것입니다. 주민투표에 대한 흔한 비판으로서 무엇이 주민투표이다. 일본은 의회제 민주주의이다라는 것이 있습니다만, 이것은 의회제 민주주의에 의해 민주주의는 달성되고 있따고 하는 통념을 의심하지 않는 한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비판하는 사람은 정말로 그렇게 단언할 수 있을까? 도래할 민주주의는 이렇게 질문합니다. 이것이 담론적인 투쟁입니다.

    “민주주의는 항상 도래할 것에 머물러 있다.” 그러나 동시에 도래할 민주주의민주주의를 오게 하지 않으면 안 도니다는 의미로도 읽을 수 있습니다. 이것이 비담론적 투쟁의 측면이죠. , 민주주의를 오게 하기 위한 행동이 요구된다는 것입니다. 제가 실제로 했던 것은 구체적인 제도의 제안이며, 또한 주민투표의 유효한 실현이었습니다.

   두 개의 “à”, 곧 이 두 가지가 필요하다는 것이지만, 이렇게 생각해 보면, 데리다가 말하는 것은 사실상 그렇게 까다롭지 않습니다. 실제로, 한꺼번에 운동을 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데리다의 민주주의론의 얘기를 했을 때, “데리다가 말하는 것을 아주 잘 알겠다고 실감을 갖고 말해준 적이 있었습니다. 그것에 제가 감동했습니다. 뛰어난 철학자란, 추상적인 얘기를 하고 있더라도, 그 깊은 곳에는 구체적인 것을 갖고 있으며, 그것이 사람의 마음에 울립니다. 데리다의 저력도 거기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미야자키 : 제 자신은 데리다의 텍스트에 몰두하는 바가 있으며, 얼핏 보면 이렇게 에둘러도 될지 모르겠다고 생각되는 그런 것이, 그렇게까지 구체적이고 직설적인 형태로 울려 퍼지고 있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대답이 아니라, 고쿠분 씨가 씨름한 문제에서는 주민투표라는 형태가 됐다는 거네요.

 

고쿠분 : 물론 그렇습니다.

 

미야자키 : 반드시 주민투표인 것만은 아닙니다. 고쿠분 씨는 강화 파트(part)”라는 표현을 하고 있습니다만, 그것 이외에도 민중의 목소리를 연결하는 방법은 있습니다. 예를 들어 아즈마 히로키는 일반의지 2.0 : 루소, 프로이트, 구글에서 IT 테크놀로지를 사용해 민중의 목소리를 가시화함으로써 민주주의의 존재방식을 바꾸는 것을 제안하고 있습니다.

 

고쿠분 : 저의 도래할 민주주의라는 책은 들뢰즈의 제도론을 응용하면서 제도를 늘림[증대]으로써 인간은 자유로워진다고 하는 얘기를 하고 있는 셈이니까, 아즈마 씨가 생각하는 IT테크놀로지에 의한 일반의지의 가시화도, 그런 제도의 하나로서 민주주의에 실장(実装) 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아무리 열심히 설명해도, 그것을 읽지 않고 의회제 민주주의에 문제가 있다고 하는 것은 옛날부터 알고 있었는데, 그것을 주민투표로 벌충하려 한다니 무슨 해괴한 짓을 말하는 거냐라는 상투적인 반응이 있는 법이죠. “그런 것은 이미 말해졌다고 말하는 사람은, 자의식의 만족을 요구하는 것이죠. 얘기해도 안 된다. 그러나 그럼에도 대응해야 한다. 그것에 대응한 위에서 민주주의 신앙 같은 것으로부터도 거리를 두고, “민주주의는 도래할 것에 머물러 있다고 계속 말한다는 것은 상당히 힘듭니다. “도래할 민주주의의 두 가지 “à”를 동시에 한다는 것은 균형감각도 필요하며, 데리다도 힘들어했을 것이라고 외람되지만 생각했습니다.

 

니시야마 : 제가 고쿠분 씨의 책을 읽고 흥미롭게 생각한 것은, “도래할 민주주의의 날카로운(sharp) 담론도 실제로는 다양한 현실에 오염될 가능성이 있다고 느껴지는 대목입니다. 담론적 투쟁과 비담론적 투쟁 둘 다를 유지하는 것, 둘 다의 긴장(tension)을 유지하는 것은 불가능한 요구이며, 항상 어느 한 쪽으로 흔들립니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데리다 자신도 의식하고 있듯이, 칸트가 말하는 규제적 이념입니다. 실현할 수 없을지도 모르지만, 그것을 향해 방향지어져 있다고 하는 생각. 전후 민주주의의 맥락에서는, 마루야마 마사오나 히다카 로쿠로(日高六郎)에 의한 영구혁명으로서의 민주주의도 있었습니다. 민주주의라는 것은 하나의 정체로서는 실현되지 못하며, 그 다양한 양상(정치체제, 운동형태, 법체계, 이념, 생활양식 등)을 고려하고, 영속적으로 작동시켜야 한다는 발상. 혹은 의회제 민주주의로 집약되는 주권적인 일반의지를 다원적으로 개방하는 투쟁의 장을 어떻게 조직하는가를 묻는 급진민주주의의 발상도 그렇습니다. 그런 것에 오염되어 담론과 운동이 흔들리는 점이 흥미롭게 느껴졌습니다.

 

미야자키 : 다만, 데리다가 강조하고자 하는 포인트는 그런 것은 아니지요. 확실히 모델로서 끄집어내면 닮은 것이 있다고 하더라도, 규제적 이념이나 영구혁명 같은 수정주의적 발상이 아니라, ‘약속이라는 말로도 제시되듯이, “언젠가 한다는 것뿐 아니라, “지금 해야 한다는 절박성이 데리다의 논의에는 반드시 들어 있습니다.

 

고쿠분 : 급진민주주의라고 해도 결국은 의회민주주의요? 그러니까 도래할 민주주의가 그런 것으로서 이해되어 버린다면, 그것은 우리처럼 데리다에 관해 잘난 체 하며 말하는 인간들의 책임입니다. 바로 담론적 투쟁을 제대로 전개해야 합니다.

 

투표와 민주주의

우카이 : 정치에 관해서는 우리 세대에 고유한 경험이 있어서 다소 말하기 어렵지만, 적어도 제게 민주주의라는 말은 오랫동안 터부였습니다. 그런데 데리다는 우정의 정치(원저 1994) 무렵부터 명확히 민주주의라는 말을 사용하기 시작합니다. 물론 처음에는 놀랐습니다. 극복의 대상이라고 생각하는 것을 데리다가 다루는 것이니까요. 그러나 지금은 민주주의라는 단어와 다시 만나는 데 이것 이외의 길은 없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확실히 데리다는 다른 말이 될 가능성도 있다고 말하지만, 그 다른 말의 도래를 기다리면서 옛 이름의 정치를 떠맡아야 합니다. 기본에 있는 것은 데모스(민중)”크라토스(지배)”의 관계로, 이 두 개의 말의 절합을 데리다는 꽤 집요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낭시라면 파르타주(분유)”에 의해 연결짓는 바에 데리다는 어디까지나 아포리아로서 마주보고, 그 아포리아야말로 도래할 민주주의의 가능성의 조건을 이룬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직접민주주의간접민주주의는 정치사상사 속에서 줄곧 이항대립을 이루고 있으며, 루소는 직접민주주의자였지만, 프랑스혁명의 경험을 거치고 벵자맹 콩스탕 무렵부터 혁명의 이념과 간접민주주의를 매개하는 자유주의가 나온다고 이해되어 왔습니다. 그러나 이 대립을 유지하는 한, 정치사상은 막다른 골목으로 내닫습니다. 그것을 어떻게 열어가느냐라는 모티프가 도래할 민주주의라는 말로 제시된 것이, 이 시기의 데리다의 작업의 커다란 의의 중 하나겠죠. 그것은 현재의 우리에게도 현실적인(actual) 문제로 이어지고 있으며, 굳이 말한다면 도움이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고쿠분 씨가 말씀 하신 것에 찬성합니다.

   그것과 관련해서 투표제도에 관해 한 마디 하면, 현재와 같은 투표방법은 꽤 오래 전부터 행해져 왔습니다. 그래서 투표권을 가진 사람들만이 제시된 후부 속에서 선택하는 것이 권리의 행사라고 말해집니다. 그 결과, 최근의 도쿄도지사 선거에서도 그랬듯이, 누구에게 투표해도 하고 싶은 말이 많다고 하는 사태가 생깁니다. 그런데 투표하는 순간, 사람들의 다양한 생각은 추상되어 숫자가 되어 버립니다. 데리다 자신, 민주주의는 동시에 의 문제이기도 하다는 것을 강조했습니다. 마지막으로 그의 집을 방문했을 때, 함께 있던 질 아니자르가 저는 선거 따위는 하러 가지 않는다고 말하기 시작하고 투표제도가 화제가 됐던 것이 떠오르네요. 일본에서도 프랑스처럼 2회 투표제로 할 것을 요구하는 가능성이 있을 테며, 개개인의 선택의 의지의 내용이 더 반영되는 민주주의, 왜 그 후보를 선택했는지가 반영되는 동시에 거기에 어떤 유보가 있는지도 무시되지 않는 민주주의, 그런 민주주의가 있을 수 있는가도 따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니시야마 : 프랑스어로 (voix)”목소리(voix)”이기도 합니다. 분할 불가능한 목소리를 계산 가능한 것으로 간주하고, 반나절 정도의 제한 시간으로 센다고 하는 방법 자체를 다시 묻는다는 것이죠.

 

우카이 : 그런데 그 방법은 이미 나쁜 방향으로 탈구축되고 있습니다. 기일전 투표[사전투표]라는 제도가 그것입니다. 원래 아고라에 모여서 투표했떤 민주주의에는 동시성이 규범으로서 존재했을 텐데, 그렇다면 투표율이 떨어질 것이라고 해서 사전투표가 인정되고 있습니다. 물론, 이념이 아니라 운용의 문제입니다만, 예를 들어 창가학회 등은 노인정에 있는 나이가 지긋한 분들을 버스로 모셔가서 기일전 투표를 시키기도 합니다. 그 결과, 경우에 따라서는 선거 당일에는 사전 출구조사에 의해 NHK 등이 이미 추세를 파악하고 있기도 합니다. 이런 의미에서도, 일본의 선거제도는 한계에 이르렀고, 이런 제도로는 안 된다는 것을 어떻게 선거 속에서 실현할 수 있는가는, “도래할 민주주의이 긴급한 물음이라고 생각합니다.

 

미야자키 : 조직표가 되어 버리지요.

 

우카이 : 그런 형태로 투표율을 올린 결과, 아고라에 모이는 규범적 민주주의의 이념으로부터는 점점 멀어집니다.

 

고쿠분 : 하지만, 아고라에 모인다는 형태에 천착해야 하는가 여부는 논란의 여지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원래 저는 직접민주주의간접민주주의라는 말은 정말로 사전에서 지워버리는 편이 좋다고 생각해요. 아무런 도움도 안 되기는커녕, 사물을 혼란시킬 뿐인 말입니다. 원래 직접민주주의 따위라는 게 존재할 수 없습니다. 루소의 경우를 따라, 민중을 대신해 행정을 하는 정부의 존재를 당연히 인정하고 있으며, 그 정부에 이대로 행정을 계속 맡길 것인가 아닌가를 정기적인 민회에서 결정한다는 얘기인데, 이것을 직접민주주의라고 말해야 할까요? 아무튼 직접민주주의와 간접민주주의 중 어느 쪽에 서는가라는 발상을 하는 정치사상은 결단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우카이 : 19685월까지는 평의회 사회주의 같은 형태로 직접민주주의를 복권하려는 움직임이 있었습니다. 필립 라쿠-라바르트(1940~2007) 등은 그 계통의 인물이네요. 우리가 자신들을 신좌파라고 불렀던 무렵은, 그런 정치의 존재방식이 무한 원점으로서 있었고 비로소 처음으로 맑스주의적인 의회주의 비판이 가능했다는 것이 있었습니다. 그런 틀은 이제는 그대로는 통용되지 않을 것이며, “도래할이라는 말의 의미는 직접민주주의에 접근하는 게 아니라, “강자의 이성을 용인하기 위한 기계(machine)가 되어버린 현행 민주주의를 탈구축하기 위한 지렛대 같은 거예요.

 

법과 정당성=정통성의 문제

고쿠분 : 이번 특집에서는 미야자키 씨가 미국 독립 선언을 번역하셨군요. 저는 최근 정당성=정통성(legitimacy)” 문제에 관심이 있고, 이것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실감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지금, 크림반도에서도 타이에서도, 어디에 정당성이 있는가를 모르고 있습니다. 정치질서라는 것은, 일단 정당성이 상실되면, 여기저기서 우리가 정당성이 있다고 말하기 시작하고, 걷잡을 수 없게 됩니다. 그래서 미야자키 씨에게 여쭈고 싶은데, 데리다적인 관점에서 봤을 때, 정당성 문제는 어떻게 자리매김 됩니까?

 

미야자키 : 이것은 아주 짧은 것으로, 독립선언의 텍스트 자체를 분석하는 형태로, 그것이 어떤 구조로 작성되었는가를 분석하면서, ‘퍼포머티브개념을 처음으로 정치적 장면에서 전개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말할 것도 없이, 독립선언이라는 것은 미국이 설립될 때의 원-텍스트입니다.

 

고쿠분 : 바로 정당성의 근거죠.

 

미야자키 : 그 텍스트에서 정당성이 호출될 때, “의 심급이 퍼포머티브한 형태로 묻어 나온다는 것을 데리다는 강조합니다. 주권의 문제에서도 그렇습니다만, 근대화되고 세속화된 정치의 물음 속에서 신학적인 전통이 밀수입되는 장면이 항상 회귀하고 있는 것입니다. , 우리는 항상, 전도된 정치신학 또는 숨은 정치신학으로서 정치를 행해야 합니다. 더 나아가, 그것이야말로 근대정치의 가능성의 조건이기도 합니다.

 

고쿠분 : 주권도 정당성을 갖지 않으면 주권으로서 작동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그 건거는 도대체 어떻게 생겨나는 것인가를 생각할 때, 탈구축적인 접근법으로는 무엇을 말할 수 있을까요? 푸코주의자라면, ‘폭력에 의해 정해진다고 말할 것이라고 생각하거든요. 데리다적인 입장에서라면 어떻게 말할까요?

 

미야자키 : 간단히 말하면 언어네요. 언어가 지닌 퍼포머티브한 힘이 무조건적인 형태로 사건을 불러일으킵니다. 그 힘에 데리다는 천착하며, “이라는 것도 그 힘에 내장된[편입되어 있는/힘에 의해 구성되는] 역사적 형상이라고 파악하는 것 같습니다.

 

고쿠분 : 하지만 독립선언이 퍼포머티브로서 기능할 수 있었던 것은, 어떤 사람이 쓰고 어떤 장면에서 어떻게 선언됐는가 등의 역사학자라면 알고 있는 맥락이 있었기 때문이죠?

 

미야자키 : 물론 그렇습니다만, 그 한편으로 법의 근거도 아무것도 없는 곳으로부터 국가를 수립해야 한다는 모순도 있었던 것입니다. 아직 국가가 없는 곳에서 국가를 만드는 이상, 그 국가의 정당성은 이제부터 만들고자 하는 국가에 의해서만 인정됩니다. 그런 모순된 것을 어떻게 수립했는가라는 것입니다.

 

우카이 : 일본국 헌법으로 말하면, 전문(前文)우리라는 단어가 나옵니다만, 이것이 누구인지 모르겠네요. 저는 요즘 헌법에 관해 얘기할 때는 9조의 라는 것을 강조합니다. 9조보다 앞은 모두 천황제에 관한 조문입니다. 그러면 그 뒤의 10조는 말하자면, “일본국민이 되는 요건은 법률로 이것을 정한다고 되어 있습니다[대한민국헌법 제2대한민국의 국민이 되는 요건은 법률로 정한다]. , 전문의 우리가 누구인지는 헌법 속에서는 규정되어 있지 않고, 헌법에 준거해서 만들어질 법률(국적법)로 전송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처음에 나오는 우리란 누구인가라는 물음은, 헌법의 구조 자체 속에서 중지되어 있습니다.

 

고쿠분 : 정말 그렇네요.

 

우카이 : 물론 어떤 나라에도 동종의 문제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데리다가 우정의 정치를 썼을 무렵, 이미 세계정치는 혼란에 빠져 있었고, 팔레스타인 문제는 말할 것도 없이, -유고슬라비아 내전, 그리고 프랑스에서는 누벨 칼레도니(Nouvelle Calédonie)의 문제도 있었습니다. 세계의 어느 곳에서도 주권의 논리로는 더 이상 버틸 수 없다, 그러나 아직은 그것밖에 없다는 상황 속에서, 세기의 전환기에는 줄줄이 엄청난 일이 일어나고 있었습니다. 이 무렵의 이른바 영토문제 등은, 드디어 그 상황이 일본에도 파급되었던 것인지도 모릅니다. 감정을 철저히 배제하고 문제를 제기한 칸트조차도 법이 법이라는 것의 정당성은 존경이라는 감정에 의해 뒷받침된다고 했듯이, 법은 법 자신의 정당성을 담보할 수 없다 이것이 포인트라고 생각합니다.

 

니시야마 : 법의 힘(원저 1994)에서의 주장이 바로 그렇군요. 힘이 있는 자가 법이나 정의를 실현하는 게 아니라, 법 자체가 지닌 힘을 생각하려 하는 문제설정이 데리다에게는 있습니다. 아직 국민이 실체로서 수립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우리 국민의 이름으로라는 형태로 퍼포머티브하게 텍스트를 발동시킴으로써 법을 발생시키는 힘입니다. 말년의 짐승과 주권자는 인간의 법질서뿐 아니라, 주권자와 짐승이라는 광범위한 동물-정치학에 의해, 법의 힘의 주제를 발전시키는 시도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짐승과 주권자에는 “walten”(지배하다)이라는 말을 길게 주석을 다는 대목이 있습니다. 하이데거에 따르면, “퓌지스라는 말은 성장이라든가 증대라고 번역되고 있지만, 그 이전에, 자신을 형성하면서 지배하는 “walten”이라는 주권적 힘이 있습니다. 데리다는 이 근원적 위상에 매달리고, 이것이야말로 정치신학을 초과하는 힘이며, 인간을 위협하는 과잉적 힘인 동시에 인간을 보호하고 지탱해주는 힘이기도 하다고 해석합니다.

 

 

마치며 : 데리다로부터 계승하는 것

언어의 문제의 향배

고쿠분 : 오늘은 모두(冒頭)에서 언어야말로 데리다의 사상의 중심에 있는 게 아니냐고 말씀 드렸습니다. 저는 지금 중간태[中動態]”에 관해 연구하고 있고, 이 때문에 에밀 방브니스트(1902~68)를 꽤 자세하게 읽고 있습니다. 데리다가 계사(繫辭)의 대체보충(철학의 여백수록)라는 방브니스트 비판을 썼습니다만, 저 같은 방브니스트 독자들의 입장에서 보면, 그 비판은 방브니스트의 논의를 너무도 단순화하고 있습니다. 데리다는 방브니스트가 언어가 사유를 결정한다고 말하고 있는 것처럼 쓰고 있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방브니스트는 언어는 사유의 가능성을 규정한다고 말합니다. 가능성의 조건으로서의 언어의 얘기를 하고 있는 것이죠. 따라서 데리다의 방브니스트 비판은 도저히 납득할 수 없지만, 다른 한편으로, 그것을 읽으면서 데리다가 도대체 무엇을 경계했는지도 잘 알게 된 것 같습니다. “언어가 사고를 결정한다는 사회건축론 같은 얘기가, 한때 크게 유행했던 적이 있습니다만, 데리다는 이것을 경계하고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왜 저런 사회구축론이 안 되는가 하면, 역사를 삭제하는 생각이기 때문입니다. 데리다는 역사와 언어를 항상 세트로 생각했다고 봅니다. 아니 오히려 그것들은 나눠질 리가 없습니다. 데리다가 에크리튀르라는 것을 통해 말하려 했던 것 중 하나도 그것이죠. 방브니스트는 언어를 고찰하는 데 있어서, 역사의 관점을 절대로 잊지 않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데리다에게 가까운 것이며, 데리다의 비판은 표적에서 빗나간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그로부터 오히려 데리다가 무엇을 소중하게 생각했는지를 알았다는 기분이 들었습니다.

 

미야자키 : 주어진 것은 자연 본질적으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언어의 자의적이고 시차적인 의미나 가치의 네트워크에 의해 매개된다는 구조주의 이후의 기본적 인식을 데리다는 절대로 양보하지 않습니다. 뭔가가 그 자체로서 주어진다는 것은 결코 없으며, 반드시 언어의 직물의 차원 혹은 텍스트(혹은 콘텍스트)의 차원에서 매개되고, 그 때문에 지연당합니다. 그래서 언어 자체를 실체화하고, 이런 언어가 있기 때문에 이런 것이 나온다고 생각하는 언어중심주의에 대해, 데리다는 언어가 텍스트(혹은 콘텍스트)의 차원에서 항상 흔들리고 있음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결정 불가능성이라는 표현도 이로부터 나오는 것입니다. 그것은 아포리아에 빠진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바로 거기에서 일괴암처럼 파악된 언어가 해체=해소되고, 새로운 결정의 기회가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데리다는 자주 오해되듯이 언어중심주의이기는커녕, 언어중심주의가 아님을 보여주기 위해 언어라고 불리는 일종의 매개의 의식으로부터 출발해서 분석해야 한다는 것을 계속 호소했던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다만, 오늘의 처음 얘기로 돌아가면, 그 때문에 데리다가 갖고 있는 문헌학적 천착이, 텍스트주의라는 오해를 주고, 입구에서 독자를 멀어지게 하는 것도 사실이며, 거기서 우리는 뭔가를 해야 한다는 것이죠.

 

우카이 : 저도 방브니스트는 아주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계사의 대체보충에서는 비판하지만, 데리다는 일관되게 방브니스트를 참조하면서 작업을 했습니다.

 

고쿠분 : 그렇습니다.

 

우카이 : 데리다와 구조주의의 관계를 생각할 경우, 다른 누구보다도 방브니스트와의 관계를 중심에 놓는 편이 생산적이라고 생각합니다. 최근 읽었는데요, 에티엔 발리바르(1942년 생)감각적 확신에서 장르의 규칙으로라는 논문에서 헤겔과 방브니스트와 데리다를 나란히 놓고 논했습니다. 발리바르에게는 알튀세르와의 관계가 있기에, 구조주의와 데리다의 관계는 큰 주제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방브니스트와의 관계를 특권적으로 다루고 있습니다. 이것은 아주 재미있는 논문으로, 헤겔에게 있어서는 라는 말이 공허해지게 된다는 점에서부터 감각적 확신이 시작되지만, 방브니스트가 라고 말할 때에는 당신도 동시에 말합니다. , 1인칭과 2인칭만이 진짜 인칭이고, 3인칭은 본래의 의미에서의 인칭이 아니라는 문제설정을 합니다. 발리바르의 가설은 1인칭2인칭 대 3인칭이라는 분할 자체를 데리다는 실천적으로 물음에 붙인 것 아니냐는 것입니다. , 1인칭2인칭이라면 프랑스어나 영어에서는 성차가 나오지 않기에, 데리다가 우편엽서 : 소크라테스에서 프로이트로, 그리고 그 너머로(원저 1980)의 서두에서 장대한 주는/증여하는/보내는 말을 쓴 이유도 그것과 관련된다고 합니다. 언어 속에서는 성차가 늦게 온다는 것을 퍼포머티브하게 보여줬다는 것입니다.

   아마 계사의 대체보충의 데리다는, 후설에 관해 논한 것을 그대로 방브니스트에게 덮어씌워 게 아닌가 싶어요. 지난해 출간된 하이데거 강의에서도 바로 계사의 문제로 연결되는 “être”의 의미론을 다루고 있고, 거기서는 폭력과 형이상학(에크리튀르와 차이수록)에서 잠시 언급된 에른스트 르낭의 언어기원설을 자세하게 독해하기도 합니다. 루소와 니체의 문헌학적 작업을 하이데거에 대립시킨다는 것을 1964-65년의 시점에서 이미 한 것이니까, 계사의 대체보충」을 독해하기 위한 새로운 실마리가 된다고 생각합니다.

 

고쿠분 : 실제로 환대에 대해서(원저 1997)도 방브니스트가 없으면 절대 쓰지 못했겠죠.

 

우카이 : ‘증여논의도 그렇죠.

 

미야자키 : 데리다는 분석을 하기 전에, 먼저 언어의 기층 부분을 끌어냅니다. 강의록을 봐도 생각합니다만, 한 가지를 논하기 위한 레퍼런스가 엄청나며, 단순히 사전적 정의를 나열하는 게 아니라, 하나의 말을 다양한 수준에서 파악하고, 이런 복수의 실들을 서로 꿰매듯 연결하면서 뜨개질을 하는 것처럼 중층적으로 전개합니다. 거미집의 이미지를 언제나 품게 됩니다. 그 솜씨는 정말로 대단하다고 생각합니다만, 그때 방브니스트의 인도-유럽어 제도들의 어휘집은 항상 중요한 레퍼런스가 됩니다. 그렇다고 해도 그렇게 시도되는 것은, 단순히 문헌학도 어원학도 아니고, 니체식으로 계보학이라 부르는 수밖에 없는 것이네요. 데리다는 탈구축이 방법과 응용의 개념 조작 같은 것이 아니라, 역사가의 행위라는 것을 자주 강조했습니다.

 

탈구축에 깃든 가능성

니시야마 : 데리다는 텍스트를 논할 때 에둘러서 도입을 제시하는 경우가 적지 않습니다. 자기가 왜 이 텍스트를 다루는지, 어떤 맥락이 있는지를 보여줌으로써 장소를 설정하고, 탈구축의 가능성의 조건을 정해가는 기법이 느껴집니다. 텍스트의 특성이나 어조를 부각시켜가는 이런 절차는 데리다에 의한 교육적 배려와 효과이기도 합니다. 데리다는 1970년대부터 철학교육의 변혁운동을 주도하고, 83년에 국제철학대학을 설립합니다. 교육의 장에 관한 물음이 이론과 실천의 양면에서 모색된 이 시기에, 플라톤이 제시한 코라(Khôra)“라는 장의 문제도 고찰됩니다. 코라는 모든 것을 가려내는/선별하는にかける 진동과 같은 것으로, 맥락을 정하고 장소를 설정하는 것은 여러 가지 요소를 가려내고/선별하고にかける 물음을 부각시키는 시도입니다. 장의 물음이라는 것은, 물음의 물음, 즉 물음이 생성되기 위한 물음에 다름 아닙니다. 데리다는 철학의 제도에 개입함으로써, 탈구축이 생성하는 장이 어떻게 확보되는가라는 교육적 실천을 행했습니다. 이런 철학과 제도의 물음은 일본에서는 거의 파고 들어가지 않은 측면으로, 앞으로 전개될 수 있는 여지가 있는 논점입니다.

 

고쿠분 : 탈구축 자체가 교육이죠. 탈구축을 눈앞에서 함으로써, 자신이 생각하거나 이야기하고 있는 것을 다시 묻습니다. 그것은 탈구축적 교육 같은 것이 아니라 탈구축 자체가 교육이라고 말해도 좋다고 생각합니다. 예전에 미야자키 씨가 탈구건축은 계몽주의적이다라는 프레드릭 제임슨의 말에 관해, 그 규정에 이의가 없으나, 다만 탈구축은 반계몽주의적일 정도까지 계몽주의적이라고 말씀하셨죠?

 

미야자키 : 반계몽주의적일 정도까지 과잉적인 계몽주의라고 했죠(변명, 기계, 무작위적이지 않음 : 폴 드 만과 독해의 윤리).

 

고쿠분 : 그 이미지가 저는 너무 좋다고 생각하거든요. 탈구축은 무지몽매를 깨우치는 것입니다. 자신이 보지 못한 것을 열어나갑니다. 하지만 그것은 결코 이성의 빛으로 비추는 것과 같은 계몽주의가 아니라 계몽주의라는 입장 자체도 무너뜨리고 하나의 사고의 운동으로 사람을 꼬드기는 이미지이네요.

 

니시야마 : 적어도 1980년대부터 계몽에 대한 긍정적인 언급은 많아집니다. 말년에는 칸트의 계몽이란 무엇인가를 주석한 것도 있으며, 공표성의 원칙의 물음을 바탕으로 하면서 대학에 새로운 계몽의 가능성을 걸고 있기도 합니다. 말년의 푸코와는 다른 방식으로, 데리다는 계몽을 탈구축적으로 계승하려 했습니다. 그런데 미야자키 씨는 탈구축의 본체는 보이지 않기에, 탈구축인 것처럼 무엇인가를 제시한다는 방법이 가능하다고 생각하시는 겁니까?

 

미야자키 : 앞에서도 말했듯이, 탈구축 자체는 방법과 응용의 개념 조작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그게 올바른 방법이라고 말할 수 없지만, 그런 긴장감 속에서 하지 않으면 단순한 텍스트의 장난으로 받아들여져서, 읽히지 않게 됩니다.

 

고쿠분 : 그것과 관련될지도 모릅니다만, 데리다에 관해 학생에게 가르칠 때의 어려움이라는 것을 잘 느끼고 있죠. “데리다는 뭐를 한 사람이에요?”라고 들어도, “, 탈구축한 거야같은 것 밖에는 말하지 못하고, 상당히 어렵습니다. 뭔가 모델을 제시할 필요는 있다고 생각하지만.

 

미야자키 : 데리다는 대단하지만, 미국의 데리다주의자들이 탈구축을 방법론으로 만들어버린 결과, 평범해져서 탈구축은 죽었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습니다만, 실제로는 그런 사람들이 말하는 정도로 방법론화는 이뤄지지 않았다고 생각합니다. 폴 드 만이 자각적으로 탈구축에 헌신했듯이, 오히려 철저하게 방법론화나 기술적 응용을 밀어붙임으로써, 탈구축의 가능성은 보이게 됩니다. 논의가 왕성한 영어권에 비하면, 특히 일본에서는 거의 아무것도 이뤄지지 않고 있잖아요. 그러니까 데리다주의라거나 뭐라고 말해지지만, 이것이 탈구축이다, 뭐 이런 것을 자기 나름대로 보여줄 필요가 있습니다. 오해되는 것은 알면서 해가고, 비판은 그 속에서 이뤄지면 좋다고 생각합니다.

 

니시야마 : 2013, 국제철학대학의 30주년 기념행사에서 탈구축의 포퓰라리티라는 워크숍이 있었습니다. 탈구축은 한편으로 대중화되거나 통속화되거나 하지만, 현전할 수 없는 것을 다루는 한에서, 반드시 비교적밀교적인 여백이 남는다는 것이 만장일치의 결론이었습니다. 이미 데리다 자신이 칸트에 입각해서 철학의 난해성과 통속성의 구별을 고찰했습니다. 칸트는 둘의 구별을 이성적인 것과 감성적인 것의 구별에 대입하고, 초감성적인 것은 통속화될 수 없다는 형이상학을 설파합니다. 이에 반해 데리다는 현대의 매스미디어에 의한 철학의 통속화를 토대로 하여, 이성적인 것과 감성적인 것의 대체보충적인 복잡성을 묻는 것이야말로 탈구축의 엄밀한 책임으로 연결된다고 말합니다. 오늘의 모두에서 화제가 됐던 탈구축의 시대성, 데리다의 포퓰라리티와도 관련됩니다만, 탈구축의 비교적(秘敎的) 통송성을, 그때마다의 시간성이나 역사성과 더불어 어떻게 실천적으로 사유할 것인가라는 과제는 우리에게 그대로 남겨져 있습니다.

 

우카이 : 연장자인 저는 이미 여러분의 세대가 있기에, 뭔가 안심해버린 것이 좋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여러분의 이야기에서는 탈구축 자체를 후세대에게 어떻게 넘길 것인가라는 상속의 책임의 자각이 잘 전해집니다. 데리다는 확실히 어딘가에서, 탈구축이 가능하다고 말했던 것은 한 번도 없다고 말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가 이렇게 말할 때, 어딘가 즐거워 보이는 것은 왜일까요? 탈구축이 방법이라고 해도, 탈구축에 종사하는 기쁨은, 그것을 도구처럼 사용함으로써 얻는 쾌감은 아니죠. 탈구축적인 사건의 한복판에 있다고 느낄 때의 정동, 제게서 그것은 일종의 기쁨에 아주 가깝습니다. 이 정동은 어떻게 하면 전해질까, 제 나름대로 앞으로 모색하고 싶습니다.

(2014310, 이와나미서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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