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프로젝트 1 : 생명정치와 통치성

나가야마 겐, 『푸코 : 생명권력과 통치성』7장. 생명권력 : 영국의 자유주의 모델 2절. 호모 에코노미쿠스와 시민사회

by 상겔스 상겔스 2017. 5. 8.

나가야마 겐, 『푸코 : 생명권력과 통치성』

中山元フーコー 生権力統治性

7. 생명권력 : 영국의 자유주의 모델

2. 호모 에코노미쿠스와 시민사회


국내에서 통용되는 번역어로 최대한 바꾸려고 노력했다. '폴리차이'는 '내치'라는 번역어가 적절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conduite는 명료한 경우가 아니라면 '품행'으로 옮기지 않고, '인도, 인도하다' 등으로 적는다. 한편, 제목에서는 '生権力'이라고 되어 있으나, 여기서는 6장의 제목과 1절의 제목의 생명권력은 権力이다. 아래에서는 이것을 모두 생명권력으로 옮긴다. 

* 그러나 국내의 적합한 번역어로 바꾸지 못한 부분도 있다. 눈이 밝지 않아 생긴 문제라고 널리 혜량을 구한다.  

 

흄의 질문

이미 지적됐듯이, 시장에서 생산자도 소비자도 자신의 이익만을 추구할 때 시장의 진정한 모습이 나타나며, 통치가 개입할 필요는 없어진다. 이 자신의 이익만을 따라 행동하는 인간이 호모 에코노미쿠스이다.

푸코는 이 호모 에코노미쿠스 개념의 원천이 영국의 경험론 철학에 있다고 생각한다. 로크의 경험론 철학에서 묘사된 것은 타불라 라사[tabula rasa, 백지상태]의 인간이었다. 이 인간은 백지상태로부터 경험에 의해서만 그 관념을 구축해가는 인간이다. 이 인간은 원죄도 모르고 도덕도 모른다. 신이라는 개념도 실체라는 개념도 모른다. 인간의 마음에는 그 어떤 생득적인 개념도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그리고 로크는 마음은, 말하자면 문자를 완전히 결여한 백지로, 관념은 조금도 없다고 가정해보자고 유혹한다. 인간의 관념은 모두 경험, 즉 감각 또는 반성[内省]에서 발생한다고 가정하는 것이다. 인간은 감각 기관에 의해 외부의 것을 지각한다. 이리하여 인간에게 공간과 시간이라는 개념이 생긴다. 한편으로 인간이 반성[内省]에 의해 자신의 마음을 관찰할 때, 거기서 처음 만나는 것은 쾌락과 고통의 관념이다. 인간의 도덕성은 그로부터 생겨난다. 쾌락을 가져오는 것은 선이며, 고통을 가져오는 것은 악이다. “사물은 단지 쾌락과 고통과의 관련에서만 선 또는 악한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쾌락과 고통의 관념으로부터 인간의 다양한 정념이 생긴다. 그리고 자유인 인간이 무엇보다 원하는 것은 자신의 행복이며, 행복이란 쾌락을 가져오는 선을 손에 넣는 것이다. “인간은 자신을 가장 기쁘게 하는 것을 알고 있으며 그것을 현실에서 선택한다는 것이다. 인간은 행복을 의지하지만, 문제는 현실의 선과 현실이 아닌 선이 있다는 것이며, 이로부터 인간의 의지와 판단의 미궁이 생겨나는 것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이 쾌락과 고통의 원칙에 기초하여 개인의 선택이 환원할 수 없는 것”, 게다가 양도할 수 없는 것이라고 본 점에 있다. 푸코는 로크의 뒤를 이어 영국의 경험론을 더욱 심화시킨 흄의 예를 취해 설명한다. 체조를 하고 있는 사람에게 체조를 왜 하는지를 물어보자. “건강하고 싶기 때문이야라고 대답할 것이다. 왜 건강이 중요하냐고 물어보면, “아픈 것보다는 건강한 것이 좋으니까라고 답할 것이다. 왜 아픈 것보다 건강한 것이 좋냐고 물으면, “병에 걸리면 괴로우니까라고 대답할 것이다. 그러나 왜 괴로운 것이 싫으냐고 질문을 거듭할 수는 없다. 인간은 누구나 쾌락을 추구하고 고통을 피하려 들기 때문이다. 묻는 사람은 자신을 생각해보면, 물을 것도 없이 그 이유를 이해할 수 있다. 이 선택은 그것 이외의 어떤 이유로도 환원할 수 없다. “이것은 궁극적인 목적이며, 다른 그 어떤 목표에도 결코 귀속되지 않는다.” 이것 이상으로는 더 이상 거슬러 올라갈 수 없다.

다음으로 쾌고의 원칙에 기초한 개인의 선택이 양도할 수 없는 것이라는 점에 대해서도, 푸코는 흄의 예를 통해 설명한다. 이 고통은 나의 고통이며, 다른 사람에게 [나와 똑같은] 고통을 맛보게 하거나 나를 대신하게 할 수는 없다. 타인의 쾌락은 내게는 맛볼 수 없는 것이다. 흄은 자신의 손가락을 긁고 싶다는 기묘한 욕망을 예로 들어 말한다. “내 손가락 한 개를 긁기 위해 전 세계의 파괴를 선택하더라도, 이성에 반하는 것은 아니다라고.

 

새로운 인간상의 등장 : 세 가지 답변 방식

여기서 새로운 것은 영국의 경험론의 이런 원자적인 인간상으로부터, 지금까지 그 전례가 없는 주체상, 즉 자신의 쾌락과 고통의 이익만을 원칙으로 삼아 행동하고 선택하는 새로운 인간상이 등장했다는 것이다. 이 인간상은 도덕도 타자도 자신의 이익에 종속시킨다는 의미에서는 경제적인 것을 절대시하는 호모 에코노미쿠스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중요한 것은 여기에 이해관심이 처음으로 하나의 의지의 형식으로서, 직접적인 동시에 절대적으로 주관적인 의지의 형식으로서 나타난다는 것이다.” 자신의 가려운 손가락을 긁으려고 하는 욕망이 채워지기 위해서는 타자의 죽음은 물론 세계의 파괴까지도 용인할 것이라는 의지는, 그렇다면 타인과 어떻게 해서 서로 사회를 형성해 나가는 것일까? 자신의 이익만을 목적으로 삼아 선택하는 호모 에코노미쿠스는 어떻게 해서 사회를 형성할 수 있을까?

이처럼 원자적으로 이해된 호모 에코노미쿠스의 인간상은 뉴턴의 물리학을 사회적인 차원에서 고찰하려고 하는 시도라고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정치의 세계에 뉴턴의 물리학을 적용하는 것, 그것은 국가를 구성하는 개인을 원자의 이미지로 이해하려고 한 홉스 이후의 근대의 정치철학의 근본적인 과제이다. 그리고 흄도 뉴턴의 실험을 중심으로 하는 철학이 자연계의 주제에 적용되는 것으로부터 완전히 한 세기를 사이에 두고서, 드디어 정신적인 주제에도 적용됐다는 것을 칭찬하고, “어디까지나 실험을 하고, 모든 결과를 매우 단순하고 소수의 원인으로부터 해명하고, 모든 원리를 할 수 있는 한 보편적인 것으로 하도록 노력한다고 선언한 것이다.

이런 물리학의 실험의 방법으로, 호모 에코노미쿠스는 어떻게 타자의 행복을 바라고 사회를 형성할 수 있느냐고 묻는다면, 세 개의 대답을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첫 번째 대답 방식은, 인간이 이웃에게 동정심을 품기 때문에, 이웃이 행복해지기를 바란다는 것이다. 이것은 이익의 합치의 원칙 혹은 공감의 원칙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타자에 대한 공감을 축으로 사회의 형성을 목표로 하는 것은 아담 스미스의 도덕감정론의 사고방식이기도 하다. 스미스는 이 책의 첫머리에서 인간이 아무리 이기적이라고 생각하더라도, 그의 본성에는 몇 가지 원리들이 있어서 이것이 그로 하여금 타인들의 복리에 관심을 기울이게 하고 타인들의 행복을 타인들에게 필수적이게 한다는 것이 분명하다. 설령 그가 그로부터 아무것도 얻지 못하고 그저 그것을 본다는 쾌락만을 얻을 뿐이라고 하더라도[원문 대조 후 수정함]고 지적하고, 그 원리를 연민 혹은 동정이라고 명명했다.

두 번째 사고방식은 동정과 공감이라는 애매하고 측정하기 힘든 정서가 아니라, 인간의 이기주의를 그대로 긍정한 뒤, 사회의 형성 가능성을 생각하는 방법이다. 만일 인간의 이기주의와 욕망이 항상 타자의 이기주의와 욕망의 부정 위에 성립되는 것이라면, 만인은 만인의 적이 될 것이다. 이것으로는 원래 도덕은커녕 사회조차도 성립될 수 없으며, 인류는 이미 타자를 살육하고 멸망시키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런데 현실에서는 인류가 존속하고 있으며, 사회 속에서 평화롭게 살고 있다. 그렇다면, “다양한 이기주의는 자연과 조화를 이루는 것이며, 자동적으로 인간이라는 종에 선을 가져다준다고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이익의 자연적인 동일성의 원칙이라고 부를 수 있다. 맨드빌은 꿀벌의 우화에서, 사회 속에서 개인이 자신만의 이익을 추구함으로써 사회에 선을 가져다준다고 주장했다. “거짓말, 사치, 자랑은 역시 없어서는 안 되는 것, 그리고 그 혜택은 우리가 받는다는 것이며, 악덕조차도 사회를 부유하게 한다. “이리하여 악덕은 巧知[교묘한 재지(才智)]를 기르며, 때와 노동에 결부되며, 빈민들조차도 옛날의 부자에게도 미치지 못하는 생활을 보내게 될 것이라는 셈이다. 아담 스미스의 국부론에서의 유명한 신의 손[보이지 않는 손]의 이론은 이 원칙에 의거하고 있는 것이다.

다만 이 이론은 꽤 역설적이다. 맨드빌은 인간의 사적 이익 추구를 악덕이라고 부르면서, 그것이 공적인 선을 가져다준다는 역설의 형태로 이 원칙을 주장한 것이다. 이것이 역설이 되지 않은 사고방식은 없을까? 그것은 외적인 강제를 들여옴으로써 가능해진다. 인간의 이기주의는 치료할 수 없다. 그래서 사회의 일반적인 이익에 적합하도록 인간을 행동시키기 위해서는 입법자가 법이나 규칙을 정하고 이것이 실현되도록 할 수밖에 없다는 얘기가 된다. 이것은 이익의 인위적인 동일화의 원칙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흄은 인간이 눈앞의 이해에 현혹되어, 중요한 이해라 하더라도, 먼 장래에 관련된 이해는 외면할  것이라고 인정한다. 이것은 인간의 본성에 있어서의 불치의 약점이다. 그러므로 대책이 필요하다고 여겨지며, 정의의 집행책임자를 임명하고, 사람들에게 아무리 마지못해서 하는 것이라고 할지라도 그들 자신의 참된 영속적 이해를 숙고시킬 필요가 있다고 흄은 생각한다.

이 세 개의 대답들이 그 후의 영국의 정치철학의 흐름을 수놓게 된다. 공감을 중시하는 흐름은 스미스와 흄의 사회철학의 근본이 된다. 두 번째 대답은 사적 이익과 자기애를 중시하는 영국의 도덕철학과 정치철학의 큰 축이 된다. 밀과 벤담의 공리주의도 이 흐름 속에 있다. 세 번째의 대답은 벤담의 법철학의 기본이 된다.

그리고 이렇게 해서 국가와는 다른 차원에 새롭게 등장한 것이 시민사회라는 개념이다. 그때까지는 국가와 시민사회의 분리는 의식되기는 했으나 명확하게 주장되지는 않았다. 예를 들어 로크의 시민정부론7장은 정치사회 또는 시민사회에 대해라는 제목을 달고 있으며, 이 두 개념은 호환적인 것으로 생각되었음을 드러내고 있다. 이 개념을 특히 역사적인 관점에서 명확하게 한 것이 아담 퍼거슨이며, 푸코는 생명정치의 탄생의 강의 마지막 회를 퍼거슨의 시민사회론에 할애한다. 푸코는 퍼거슨의 시민사회는 바로 아담 스미스가 제시한 호모 에코노미쿠스가 기능하는 구체적인 요소이며, 구체적인 전체의 장이다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시민사회의 첫 번째 특징

푸코는 퍼거슨의 시민사회 개념을 네 가지 관점에서 분석한다 역사적이고 자연적인 상수로서, 자발적인 종합의 원칙으로서, 정치권력의 상실적 모체로서, 역사의 구동력으로서이다. 순서대로 보자. 첫 번째의 역사적이고 자연적인 상수란 퍼거슨의 시민사회가 역사적으로 인류에게, 자연에 갖춰져 있는 것을 체현했다는 얘기다. 이것은 그때까지의 전통적인 자연상태론도, 홉스적인 자연상태론도 부정한다는 의미를 지닌다.

전통적인 자연법에 따르면, 사람들에게는 사교성이 갖춰져 있기 때문에, 자연상태에서 이미 사회를 형성했다고 생각한다. [가령] 홉스의 자연상태론에 따르면, 사람들은 자연상태에서는 전쟁상태에 있으며, 사회계약을 체결함으로써 비로소 사회를 형성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퍼거슨은 사람들은 처음부터 집단이나 동료로서 모여들었다고 주장한다. 이것이 사교성을 전제로 한 전통적인 자연법 이론과 다른 것은, 퍼거슨이 사교성이라는 개념을 필요로 하지 않고, 인간이 존재할 때에는 이미 사회가 존재하고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매에게 날개가 있고, 사자에게 발톱이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인간이라는 것을 기술할 때에는 이미 언어를 가지고 타자와 대화하고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또한 퍼거슨은 사회상태 이전에 자연상태가 존재했다고 생각하는 것은 상상력의 작동에 지나지 않는다며 홉스의 이론을 부정한다. 퍼거슨은 루소의 인간불평등기원론을 비판하면서, 인간을 생각할 때에는 사회를 형성하고 있다는 것을 역사적으로도 자연적으로도 상정해야 한다고 한다.

푸코는 이런 퍼거슨의 주장을 사회적인 유대는 자연발생적으로 형성되고, 사회를 구축하거나, 정초짓거나 하는 특별한 조작은 존재하지 않는다. 사람은 아무튼 사회 속에서 살고 있다. 사회적인 유대에 전사(前史)는 없다고 요약한다. 사회적인 것은 인간 개념 그 자체로부터 떼어놓을 수 없다. 이것이 푸코가 지적하는 퍼거슨의 시민사회론의 첫 번째 특징이다.

 

시민사회의 두 번째 특징

두 번째의 자발적인 종합의 원칙이라는 관점은 사회계약과 관련된 것이다. 사회상태 이전에 존재하는 자연상태를 부정하는 것의 당연한 귀결인데, 퍼거슨의 시민사회론은 사회계약론을 부정한다. 사람들이 집단을 형성했을 때, 사회적 유대 속에서 자연스럽게 각 개인의 욕망이 충족될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로크처럼 사회계약을 체결하는 것도, 홉스처럼 자연권을 타자에게 양도하는 것도, 주권자에게 복종하는 계약을 체결하는 것도 불필요하다. 자연 속의 사람들의 욕망이 사회 속에서 종합되고 통합되는 것이다.

퍼거슨은 이를 증명하기 위해 고독한 탐험가가 남긴 기록을 이용한다. 13개월 동안 고독 속에서 여행하던 탐험가는 타인과 얘기를 나누는 것이 얼마나 기쁨을 가져다주는지를 실감한다. 인간은 사회 속에서 타인과 함께 살아가는 것에 큰 기쁨을 느낀다고 퍼거슨은 지적한다. “서로의 관용을 발견하고 함께 참을성 있게 견뎌냄으로써, 우정의 열의가 두 배가 되고, 인간의 가슴에 불꽃이 지펴진다. 이것은 개인적 이익이나 안전성에 관한 배려가 끌 수 없는 불꽃이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모이고, 서로 타자와의 사이에서 욕망을 충족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런 인간의 집합체인 시민사회는 시장과 마찬가지로, 자신의 욕구를 추구함으로써 타자의 욕망도 또한 채우게 되는 장이다. 그러나 이 사회에서 기능하는 것은 경제적인 이익이 아니다. “어떤 종류의 정열도 애착도, 대상에 이해관심(interest)을 갖게 한다고 말해지고, 인류는 인간의 복지에 이해관심을 보여준다고 말해진다. 그러나 이런 이해관심이라는 단어는 재산에 대해서만 얘기되는 경우가 많은데, 인류 전체의 이익과 그 행복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퍼거슨은 인간의 열정이 자신의 이해를 초월할 수 있음을 지적한다. 증오와 질투 등에 휘둘리면, 인간은 자신의 이익을 무시하고 행동해버리는 일이 있기 때문이다. 미움은 이해관심 없는 정열이다. 그렇다면 인간에게 이해관심이 없는 관대함 같은 것이 있더라도 신기하지 않을 것이다. 자신의 이익을 무시하고 타자에게 은총을 베푸는 기분도 있을 것이다.

다만 이 시민사회는 세계적 규모가 되는 시장과는 달리, 어떤 한정된 경계를 갖추고 있다. 지구는 대륙으로 분할되고, 대륙은 국가로 분할되며, 국가는 도시와 농촌으로 분할되며, 도시는 내부 집단으로 분할된다. 이 분할로 만들어지는 경계마다 사람들은 동포에 대한 애정과 다른 집단에 대한 적대감을 기른다. 인간이라는 종은 조화를 향하는 경향이 있는 동시에 “서로 대립하는 경향을 갖추고 있다. “우리는 구별을 좋아한다. 우리는 어떤 중요한 대립점도 없이 대립하며, 당파나 계파의 이름으로 다툰다. 혐오는 애정과 마찬가지로 특정한 대상과 마주함으로써 조성醸成된다.”

인간은 집단을 결성하여 합치며, 서로 욕망을 채운다. 그러나 이를 위해서는 대립이 불가결하다. 인간에게는 동포에 대한 공평무사한 감정이 있고, 인간성과 정의에 대한 선호도 있다. “그러나 대립하는 자들에 대한 적대감을 인정하지 않고서, 대중이 자신들의 통일의 감각을 품는 것을 기대해 봤자 헛된 일이다.” 그리고 시민사회의 토대는 세계도 대륙도 아니고 국가이다.

여기에서 기묘한 역설이 발생한다. 사적 이익의 추구에 있어서 사람은 호모 에코노미쿠스로서 고독하다. 그런데 사회의 유대가 특히 강하게 느껴지는 것은 타자에게 혜택을 주고 있거나, 조국을 위해 스스로를 희생하기도 할 때이다. 그때까지의 사회계약설에서는, 사람들이 사회를 형성하는 것은 스스로를 보호할 수 없기 때문이었거나(홉스), 또는 소유를 확실한 것으로 하기 위해서(로크)였다. 그러나 퍼거슨은 외적인 이득이 주어지지 않을 때일수록 사회의 유대가 강해진다고 지적한다. “사람들은 사회를 그 외적인 편의를 위해 평가하는 것이 아니다. 이러한 편의가 가장 적은 때에 사람들은 사회에 애착을 품는다. 자신의 피로 사회에 충성을 바칠 때 사회에 가장 충실한 것이다. 정서는 최대의 난문에 직면했을 때 최대의 힘을 발휘한다.”

말하자면 국가의 위기에 있어서 조국을 구하기 위해 목숨을 바칠 때 가장 사회의 유대가 강해진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서 상업적인 활동에서는, 사람들은 호모 에코노미쿠스로서 타자를 마치 이익을 가져오는 가축이나 토지와 똑같이 다룬다. 여기서는 타자에 대한 차갑고 싸늘한 관계가 지배한다. 따라서 경제적인 상태로 나아갈수록 역설적이게도 시민사회를 구축하는 유대는 약해진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사회를 자발적으로 형성하고, 이 사회 속에서 경제적 유대가 구축되지만, “경제적인 유대는 끊임없이 이 사회의 유대를 위협하게 된다.

이 사회 속에서 인간은 분열하고 있는 것이다. 파거슨은 인간에게는 늘 이기적인 욕망과 이타적인 욕망이 존재하고 있음을 지적한다. 이기적인 욕망은 자신의 만족과 기쁨을 가져올 것이다. 하지만 이기적인 욕망을 충족하는 것이 고통을 초래하기도 한다. “자신의 배려가 높아지면 그것이 고통스러울 정도의 불안과 잔혹한 열정을 산출해내는 일이 있다. 그것이 탐욕에, 허영에, 교만高慢에 이르는 일이 있다. 그것이 질투와 시샘, 증오와 악의의 습관을 기르게 되면, 우리 스스로의 만족을 파괴하는 일이 있다. 인류의 복지에 적대적인 것이 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타적인 욕망을 만족시키면 타자에게 만족과 기쁨을 가져다주게 되며, 자기는 그만큼 가난해진다고 생각되고 있다. 그러나 거기서 얻어지는 만족은 이기적인 욕망의 충족을 넘어서기도 한다. “일부 사람들은 자신을 위해 재산을 획득하는 것보다 타자를 위해 재산을 획득하고자 하는 쪽이 큰 이익을 확보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는 사회 속에서 살아가는 개인의 욕망이 따라가는 복잡한 변증법이다. 경제적인 유대와 사회적인 유대는 상보적인 운동을 하기도, 대립적인 운동을 하기도 하며, 그 양쪽이 동시에 작동하는 경우도 있다.

 

시민사회의 세 번째 특징

시민사회의 세 번째 특징은, 그것이 정치적 제도를 만들어내기 전의 원시적인 장이라는 것이다. “어떤 정치 제도가 만들어지기 전에 사람들은 재능의 다양성, 혼의 상태의 차이, 열정의 격렬함 등의 성질에서 각각 달랐다. 사람들을 모으면, 각자는 자신에게 어울리는 위치를 찾아냈다.” 각각의 기질과 재능에 맞게, 그 조직의 과제에 맞추어 각자는 자신에게 어울리는 지위를 차지한다. 어떤 자는 자연스럽게 리더가 되고, 그 리더를 사람들은 따라다닌다. 그리고 정치 제도가 필요하다고 여겨지게 되는 것은 그것이 잘 되지 않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인류가 위정자와 신하의 능력에 있어서 많은 잘못을 저지른 뒤에야 비로소 통치 자체 규칙을 적용시키는 것을 생각하게 됐다.” 정치제도는 시민사회에 사후적으로, 뒤늦게, 권력의 사실 자체보다 나중에 발생하는 것이다.

 

시민사회의 네 번째 특징

푸코가 시민사회의 네 번째 특징으로 드는 것은 그것이 역사의 원동력이 된다는 것이다. 퍼거슨은 인간의 시민사회는 세 단계를 쫓아 발달되어 왔다고 생각한다. 처음에는 아주 조야한 사회이다. 그 사회에서는 수렵과 물고기 사냥만으로 살고 있어서, 각자가 운반 도구와 가죽만을 소유한다. “내일의 식량은 아직 [야수로서] 숲 속에 있는 야생 상태에서 살아 있는 것이며, [물고기로서] 물속에 숨어 있는 것이다. 잡지 않았으면 아직 소유할 수 없는 것이다.

일부의 조야한 사회에서는 수렵에 조야한 농업이 보태진다. 수렵하는 장소는 부족의 소유물이라고 선언되지만, 그 구성원 사이에서 분할되지 않는다. 퍼거슨은 북미 인디언 사회를 검토하면서 아직 국가가 없는 야만적인 사회의 모습을 묘사한다. “(인디언들은)어떤 정해진 정부의 형식도 없고 통일된 유대도 없고, 이성의 발명이라기보다는 본능이 시사하는 바와 유사한 것의 힘으로, 국가의 조화와 힘을 갖고 행동했다. 외국인은 위정자가 누구인지를 파악할 수 없고, 장로회가 어떻게 조직되어 있는지도 이해할 수 없었다. 다만 조약을 체결하는 위원회와 싸우는 전사 집단을 찾아냈을 뿐이었다.” 국가가 성립하기 이전에 사람들은 자연발생적인 균형과 자연발생적인 유대를 품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 시대의 북미 인디언들은 부가 축적되지 않았기 때문에 이 양식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른바 국가의 성립을 막기 위한 경제적인 시스템, ‘국가에 맞선 사회의 시스템을 확립했기 때문이다. “야만인은 그 재산이라고 하면 작은집과 피혁과 무기뿐이며, 자신이 입수할 수 있는 식량과 안전성으로 만족했다.” 그래서 집단의 리더를 존경하고 그에게 복종하더라도 통치의 통일적인 규칙도 없고, 법체계도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 사회 속에서, 경제적 이기주의가 발달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기술을 개발하고 산업이 생겨나기 시작한다. 농업이 탄생하고, 짐승의 무리가 재산이 되며, 정주를 시작한다. 이것이 야만적인 사회이다. 리더 아래 모이고, 명예를 요구하고, 야수의 사냥꾼이 아니라 인간의 사냥꾼으로서 타국으로 쳐들어간다. 모든 나라가 도적의 모임이며, 억제도 후회의 마음가짐도 없이 이웃을 약탈한다. 그러나 여기서 이미 국가의 싹이 탄생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재산이 축적되는 이 풍요로운 사회에서는, 마침내 국가와 법이 필요해진다. 이를 위해 필요한 것은 평의회의 구성원들이 선출되는 방법을 결정하고, 혼란을 시정하는 상설 권한을 평의회에 주고, 정의를 지키기 위한 몇 가지 법을 정하는 것만으로 좋았을 것이다. 그러나 이 약간의 단계step를 실행하는 것은 쉽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 중에, 자신이 경작하고 있는 땅을 후손에게 남기려는 사람이 등장하고, 사람들을 복종시킬 권리가 있다고 생각하는 리더가 등장한다. 그리고 자신을 위해서보다도 타자를 위해 계획을 세우는 사람들이 등장한다. 이리하여 문명적인 사회가 찾아온다. 인간은 눈앞의 불편을 없애기 위해, “또는 명백한 이익이나 우연히 손에 넣는 이익을 목표로, 상상밖에는 할 수 없었던 곳에 이르게 된다는 것이다.

퍼거슨은 다양한 사회는 어디에서 불어와서 어디로 가는지 모르는 바람처럼 인간의 역사 속에 등장한다고 주장한다. “사회의 형식은 철학이 발생한 날짜보다 전에, 인간의 사변으로부터가 아니라, 인간의 본능으로부터 발생한 것이다. 국가의 탄생은 인간의 디자인意匠을 실행하는 것에 의해서가 아니라, 인간의 행동의 결과로서 성립한 것이다.

그렇기에 다양한 사회는, 그 필요성에 맞게 자발적으로 등장하며, 그것이 인간의 지금까지의 역사를 형성하게 된다. 그것은 누구의 디자인意匠에 의한 것도 아니고, 모든 사람의 욕망의 총화로서 등장하는 것이다. 푸코는 이 역사관은, 호모 에코노미쿠스가 자신의 욕망을 추구하는 결과로서, 타자의 욕망을 충족시키고, 그것이 하나의 사회를 형성하는 과정과 마찬가지라고 지적한다. 사회는 맹목적인 발의, 이기적인 이해, 각자가 자신을 위해서만 행하는 계산의 결과로서 탄생하는 것이다.

 

새로운 차원의 등장

푸코는 퍼거슨의 시민사회론을 꽤 자세히 검토하고, 18세기 후반에 사회에 대한 새로운 시각이 등장했음을 지적했다. 이것은 퍼거슨뿐 아니라 아담 스미스의 국부론이나 흄의 시민정부론등에서도 엿보이는 새로운 경향이다. 이 새로운 경향에 대해 푸코는 다음 세 가지 점으로 요약한다.

첫째, 여기서 등장한 새로운 사회관계의 이론은, 순수하게 경제적인 유대나, 집단적이고 정치적인 단위나, 법적 유대와는 다른 새로운 차원으로서 열린 것이다. “순수하게 경제적인 것도, 순수하게 법적인 것도 아니고, 계약의 구조에 겹치는 것도, 이양되거나 위탁되거나 양도되기도 하는 법권리의 작용의 구조에 겹칠 수도 없는 성질의 것이다.

둘째, 이 시민사회 개념에 의해 역사라는 것의 새로운 시각, 새로운 관점이 등장하는 것이다. 그때까지 역사는, 예를 들어 로마 제국의 역사처럼, 처음에 어떤 법적인 구조가 결정되고, 그것이 어떻게 논리적으로 발전되는가를 조사하는 것이었다. 혹은 그리스나 로마의 고대의 모델을 상정하고, 이로부터 근대까지 어떤 쇠퇴가 발생하는가, “부정적인 현상이 발생하고 원초의 투명성이 어떻게 혼탁해지는가를 검토하는 것이었다. 고대와 근대의 우월의 논쟁은 18세기까지 계속될 것이다. 그러나 퍼거슨의 역사관, 루소의 역사관, 이 시기에 등장하는 다양한 단계적 역사관은, 고대로부터의 변천을 인간 사회의 경제적인 구조가 새로운 것이 되는 역사로서 이해하는 것이며, 법적 구조의 변화나, 쇠퇴의 역사로서 이해하는 것이 아니었다.

셋째, 시민사회라는 차원을 고찰함으로써, 정부라는 형식에서의 권위와 사회적 유대 사이의 내적이고 복잡한 관계를 분석하는 관점이 생겨난 것이다. “시민사회에 의해, 사회적인 유대와, 통치라는 형태에서의 권위의 관계 속에서 생겨난 복잡하고 내적인 관계를 가리키고 밝힐 수 있게 된다. 풍토에 의해, 역사적 상황의 차이에 의해, 어떤 통치가 걸맞고, 어떤 통치가 실패로 끝날지 등을 분석하는 몽테스키외의 법의 정신의 분석이 이 가능성을 명확하게 나타내고 있다.

그런데 이렇게 해서 영국에서는 호모 에코노미쿠스의 이론에 기초하여 ‘야경국가 이론이 확립됐다. 이것은 유럽 중에서도 특히 이미 당시에 자본주의화를 추진한 영국에서 가장 현저하게 보일 것이다. 프랑스의 중농주의는 미라보 등을 대표자로 하면서, 그대로 프랑스 혁명으로 치닫게 되는데, 혁명 후의 프랑스는 이런 호모 에코노미쿠스에 기초한 야경국가의 이념을 채용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푸코가 이 책에서 고찰하고 있는 전후의 독일과 미국의 자유주의를 비롯하여, 현대에 이르기까지의 자유주의의 이론적 토대는 이 시민사회의 이론 속에서 결실하고 있는 것이다. 이 공과를 포함해, 남은 문제는 크지만, 종교개혁에서 시작되는 근대의 반사목과 반[대항]품행의 운동이, 국가의 통치를 부정하는 자유주의의 이론으로서 결실한 것은 확실하며, 근대의 국가론의 중요한 틀의 하나가 여기서 확립된 것이다.

또한 푸코는 생명정치의 탄생에서는 이 호모 에코노미쿠스의 개념이 현대사상에 초래한 세 가지 문제점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기에, 여기서 확인해두자. 첫째는 인간을 호모 에코노미쿠스로 봄으로써, 하나으 중요한 이론적 격자가 생겨났다는 것이다. 인간은 다양한 측면에서 고찰할 수 있는 중층적이고 유기적인 모습을 하는 존재이다. 인간이라는 생물이라는 관점에서 고찰할 수도, 아버지라는 사회적 존재로서 고찰할 수도, 정치적인 활동을 하는 개인으로서 고찰할 수도 있다. 그 착종된 얼굴을 지닌 인간을 경제적 측면에서만 고찰하려고 하는 이 호모 에코노미쿠스라는 개념에 큰 제약이 있다는 것은 확실하다. 인간을 경제활동만으로 단순하게 잘라말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동시에, 이런 인간의 복잡한 측면을 추상하고, 점과 같은 경제적 행위자로 간주하는 것에는, 다른 장점이 존재하는 것이다. 인간의 모든 행동을 그 경제적 합리성에서 관찰할 수 있는 것이다. 호모 에코노미쿠스는 자기의 이익을 최대로 하게끔 합리적인 행동을 하는 인간으로서 이해할 수 있으나, 이 개념을 이용함으로써, “인간의 행동양식의 내적 합리성을 분석하기 위한 하나의 사고방법, 경제와 사회에 대한 하나의 분석격자를 거머쥘 수 있다. 경제학의 게임의 이론이나 심리학의 행동주의도 이런 개념을 토대로 하고 있다고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하나의 단순화인 동시에, 인간의 합리성을 고찰하기 위한 새로운 차원을 만들어내는 것임에 틀림없을 것이다. 롤스의 무지의 베일의 개념을 낳은 것도, 인간의 행동을 그 합리성으로만 고찰하려고 하는 이 관점일 것이다.

두 번째 문제는, 이 개념에 의해 맑스적 노동자의 개념과는 전혀 다른 노동자 개념이 제기된다는 것이다. 맑스에게서 노동자란 자신의 노동력을 시장에서 매각하고 자기를 재생산하기 위해 필요한 자금을 획득하는 인물이다. 그리고 자본주의 사회가 부정의한 것은, 자본주의가 노동자가 매각한 노동력에 걸맞은 대가를 노동자에게 주지 않고, 착취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호모 에코노미쿠스 개념 아래서의 노동자는 자기의 노동에 의해 최대한의 소득을 획득하려고 하기 위해 자기의 적성이나 능력을 갈고 닦고, 이것을 가급적 높은 대가로 매각하려고 하는 자본이다. 노동자는 자기 능력을 개선하고, 그것을 비싸게 팔려고 노력하는 것이며, ‘인적 자본으로 간주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하나의 기업에 투자되는 자본에 대해 시장 가격에서 판매되어야 할 것으로서의 노동력이라는 사고방식과는 완전히 반대극에 있다는 것이며, 현대의 노동이론은 완전히 이 개념에 의거하고 있는 것이다. 푸코는 사람들이 자기를 자본으로 간주하기 시작함으로써, 자기의 자손도 또한 자본으로 간주하고, 이것을 개선하기 위해 최고의 결혼 상대를 획득하려고 하는 경향이 강해졌다고 지적한다. “큰 자본을 갖고 있는 상대를 배우자로서, 혹은 미래의 인적 자본의 공동생산자로서 손에 넣는 것이 중시되는 것이다. 이런 결혼전략뿐 아니라, 평생교육의 가치, 노동자의 질의 높음과 국가의 경제성장의 밀접한 관계 등, 현대의 다양한 문제가 인적 자본이라는 호모 에코노미쿠스의 개념과 결부된 것은 확실할 것이다.

세 번째의 문제점은 이 호모 에코노미쿠스의 이론이 그때까지의 정치철학에서 상정된 주권이나 법과 권리의 주체의 개념과 전혀 다른 주체의 개념을 제기한 것이다. 이 호모 에코노미쿠스는 이미 말했듯이,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세계의 파괴도 받아들이는 주체로서 생각되고 있다. 이에 대해 전통적인 정치철학의 주체는, 법과 권리의 주체라는 사고방식이었다. 루소나 칸트의 주체는, 사회를 형성하기 위한 법을 받아들이고, 그 법을 위반한 경우에는 자기의 처벌을 받아들이는 주체였다. 법의 주체는 과거에 갖고 있던 자연권을 포기하는 것을 용인한 주체이며, “부정성을 받아들이는 주체, 자기 자신의 포기를 받아들이는 주체이다.

이에 대해 자기의 이익을 우선하는 호모 에코노미쿠스의 주체는 사익을 추구하는 것이 공익이 부합하다고 생각하는 주체이며, 자기의 욕망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긍정하는 주체이다. 그것은 개개인의 의지가 자연발생적으로 그리고 의지적으로 될 수 없는 방식으로, 다른 개개의 의지 및 이해관심과 조화하는 메커니즘을 따르는 것이며, “법권리의 주체의 변증법과는 전혀 다른 메커니즘을 따르는 것이다.

반대로 말하면, 이 주체는 타자의 이익을 생각하지 않을 때, 가장 선하게 행동하는 것이라는 얘기이다. 사람들이 공공선 등을 배려하지 않을 때, 가장 시스템이 잘 작동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 호모 에코노미쿠스에게 있어서는 불명료함, 맹목성이 절대로 필요하게 되며, “집단적 이익이 목표로 되지 않는 것이다. 루소가 집단적인 여론을 만들어내는 당파를 싫어한 것도, 롤스가 무지의 베일을 필요로 한 것도, 이 맹목성의 관점에서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이처럼 자유주의와 호모 에코노미쿠스 개념은 전통적인 정치철학과 법철학의 틀을 넘어서 현대사상으로 이어지는 큰 원천의 하나를 형성하고 있다. 푸코는 동시대의 사상을 분석하는 것은 별로 하지 않았으나, 독일과 미국의 자유주의를 고찰한 이 생명정치의 탄생의 강의는 푸코의 고찰의 철저성과 그 분석력의 날카로움을 보여주기에, 우리에게 새로운 사고를 유도하고 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