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가야마 겐, 『푸코 : 생명권력과 통치성』

中山元フーコー 生権力統治性

7. 생명권력 : 영국의 자유주의 모델

4. 생명정치와 인종의 이론


국내에서 통용되는 번역어로 최대한 바꾸려고 노력했다. '폴리차이'는 '내치'라는 번역어가 적절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conduite는 명료한 경우가 아니라면 '품행'으로 옮기지 않고, '인도, 인도하다' 등으로 적는다. 한편, 제목에서는 '生権力'이라고 되어 있으나, 여기서는 6장의 제목과 1절의 제목의 생명권력은 権力이다. 아래에서는 이것을 모두 생명권력으로 옮긴다. 

* 그러나 국내의 적합한 번역어로 바꾸지 못한 부분도 있다. 눈이 밝지 않아 생긴 문제라고 널리 혜량을 구한다.  


계몽과 자립의 이념 

이렇게 18세기 후반에 시민사회의 이론이 수립됐다. 여기서 돌이켜보면, 이 시민사회의 이론은 무엇보다도 그때까지의 사목과 국가이성의 정신과 신체와 생활에 대한 과잉일 정도로까지의 개입에 대한 반감으로서 생긴 것이었다. 이미 말했듯이, 어떻게 해서 이런 방법으로 통치되지 않는 방법은 없는가, 이렇게 통치되지 않기 위해서는 어떻게 하면 좋을까? 이것이 이 시대 사람들의 중요한 물음이었다.

이 물음에 대한 중요한 응답 중 하나가 칸트의 계몽 개념이었다. 칸트는 독일의 국가이성의 시대에, 프리드리히 대왕의 절대 계몽 전제 아래서 사색하면서 인간이 어떻게 정신과 생활의 지도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가를 모색했다. 사람들의 혼의 사항에 대해서는, 사목자에게 맡긴다. 신체의 사항에 대해서는 의사에게 맡긴다. 정신의 사항에 대해서는 학자에게 맡긴다. “자신의 이성을 작동시키는 대신에 책에 의존하고, 양심을 작동시키는 대신에 목사에게 의존하고, 스스로 식사를 절제하는 대신에 의사에게 식이 요법을 처방 받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으로는 인간은 타자의 지도 없이는 살아갈 수 없다는 것이 아닌가, 마치 미성년 자녀 같은 게 아닌가? 칸트는 계몽이란 인간이 스스로 초래한 미성년 상태에서 벗어나는 것이라고 정의한다. 그것은 스스로 이성을 작동시키고, 자신에게서의 최선의 사항을 찾으려고 노력하지 않으면, 사목자와 국가에 의해 언제까지나 지도되며, 명령을 받게 되기 때문이다. 이렇게 통치되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것은 이성을 작동시키는 것이다.

독일에서는 19세기 전반기의 헤겔의 시대까지, 국가이성과 내치의 지배가 계속되는데, 18세기 말의 칸트가 규율과 명령의 시대에 작별을 고하는 것을, 인간이 성숙하기 위한 중요한 과제로 제기했다는 것은 주목할 만하다.

이렇게까지 통치되지 않게 하려면, 아직 다른 길이 두 개 나눠져 있다. 하나는 시민사회의 이론 속에 내포된 국가와 사회의 분리라는 개념을 활용해서, 사회에 있어서 사람들이 자율적이고 자유롭게 살 수 있도록, 국가를 개조한다는 혁명의 길이다. 사회는 자율적 생활의 장이며, 국가의 개입은 불필요한 것이며, 정부의 통치는 최소화해야 한다는 것이 영국 자유주의의 결론이며 직관적인 확신이었다. 이 결론을 연장하면, 사회의 선에 공헌하지 않은 국가는 악하다는 결론이 나온다.

미국 혁명의 선동자이자 동반자였던 토머스 페인은 미국의 독립을 호소한 책인 커먼센스[상식]에서 사회는 어떤 상태에서도 기뻐해야 할 것이지만, 정부는 설령 최선의 상태에 있어서도 부득이한 악에 지나지 않는다고 단언한다. 그리고 바람직한 정부는 최소한의 경비로 최대의 행복을 가져다주고 가장 많이 안전을 보증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리고 영국의 현황을 보는 한, 국왕과 귀족정치(상원)는 세습이며, 인민으로부터 독립해 있기 때문에, 사회의 내적 요소가 아니라는 것, 그리고 헌법상의 의의로부터 보면, 이것들은 국가의 자유에는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는다는 것을 지적한다.

인민의 생활의 복지와 안전이 정부의 목적이며, 그 목적을 실현할 수 없는 정부는 폐지하고, 새로운 정부를 만들어내야 한다. 그것은 모든 인간은 당연히 평등한 것이며, “자기 자신을 통치한다는 것은 우리의 자연권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타자에 의한 과잉 통치를 거부하기 위한 방법이 인민에 의한 인민을 위한 정부의 수립에 있다는 것이 명확하게 말해지고 있다.

과잉 통치를 거부하기 위한 두 번째 길은 시민사회의 이론에 있어서 보여진 역사의 개념을 이용하여 현황을 비판하고, 과잉 통치를 거부하는 방법이다. 퍼거슨은 시민사회가 미개에서 야만으로, 야만에서 문명으로 진전하는 역사를 말했다. 루소는 자연인에서 미개인으로, 미개인에서 문명인에 이르는 역사적 변천을 말했다. “사회적 유대 위에 역사를 분절하는 것은 그 시대의 사회에 있어서 자명하게 간주된 것을 뒤엎기 위한 중요한 시도였다. 이것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었다.

하나는 이것이 현실의 사회를 비판하기 위한 사고 실험으로서의 의미를 갖는다는 것이다. 역사 이전의 자연적인 상태를 상정하는 것은 문명의 부패와 사회의 모습을 근본에서부터 비판하는 관점을 구축하는 것이다. 루소의 야생인 개념은 문명 사회 그 자체를 비판하는 것과 더불어, 인간은 원래 선하며, 인간을 악하게 한 것은 사회임을 주장한다. 개혁되어야 할 것은 사회의 악인 것이다.

그리고 이 야생인의 개념에서 루소의 사회계약의 개념이 생겨난다. 인간이 자유로웠던 야생인에서 사회를 설립하고, 더욱이 자유를 잃지 않게 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하면 좋은가가, 루소의 사회계약의 목적이기 때문이다. “어떻게 하면 공동의 힘의 모든 것을 갖고, 각각의 구성원의 인격과 재산을 지키고, 보호할 수 있는 결합의 형식을 찾아낼 수 있을까? 이 결합에 있어서, 각자는 모든 사람들과 결부하면서, 더욱이 자신에게만 복종하지 않고, 그 이전과 마찬가지로 자유로운 것은 어떻게 하면 가능해질까?

이것은 우리 각자는 우리의 모든 인격과 모든 힘을, 일반의지의 최고의 지도 아래에 맡긴다는 방법으로 실현된다. 이 일반의지가 홉스의 리바이어던 같은 주권자와 다른 것은 그것이 시민 모두의 욕망의 잔재로서 생겨나기 때문이다. 사람들의 의지는 상이하다. 그 상이한 의지로부터 일반의지를 끄집어내려면 어떻게 하면 좋은가라고 루소는 생각한다. 그것은 모든 사람들이 그 어떤 당파도 만들지 않고, 자신의 욕망만을 순수하게 드러냄으로써이다.

만일 사람들이 충분한 정보를 갖고서 논의를 끝까지 다하고, 서로 미리 사전에 교섭해두지 않으면, 작은 의견 차이가 많이 모여서, 거기서 일반의지가 생겨나는 것이며, 그 결의는 항상 선한[좋은] 것이다.” 여기에는 스미스와 맨드빌도 포함해 영국의 사상적 전통 속에서 키워졌던 사적 이익을 중시하는 사상이 흥미로운 형태로 숨 쉬고 있다. 공적인 공화제를 구축하는 기초가 되는 것은 공적인 덕을 함양하는 것이 아니라, 각자가 사적 이익을 추구하는 것이다. 원래 사람은 자신의 이익을 우선시하는 것이다. 각자는 각각이 전체의 이익과는 상이한 특수 이익을 갖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각자는 그 특수이익을 그대로 표명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루소는 주장한다. 타자에게 지도되는 것도 아니고, 타자와 자신의 이익을 서로 전달하고 당파를 결성하는 것도 아니고, 사적 이익을 그대로 표명함으로써 타자의 사적 이익과의 충돌이 발생한다. 그때 사람들은 타자의 사적 이익과 자신의 사적 이익을 비교하면서 서로 대화한다. 그리고 자신의 이익을 타자의 시선으로부터 바라보는 것을 배운다. 이리하여 일반의지가 생겨나는 것이다.

루소는 일반의지가 항상 옳다고 이야기하며, 그 이유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그것은 모든 사람이 자신의 행복을 제일로 생각하기 때문이며, “권리의 평등과 앞으로 생겨날 정의라는 관념은 각자가 우선 자신을 우선시한다는 것, 즉 인간의 본성에서 생겨난 것이기 때문이다.

각자가 사적 이익을 우선시하고, 자신의 이익을 주장하는 것으로부터, 처음으로 사회의 모든 사람에게 평등하게 적용되는 이라는 형태로, 일반의지가 생기는 것이며, 이 일반의지를 만드는 곳에 정치의 기술이 있다. 각자의 특수의지가 모두 동일하며, 그것이 일반의지가 되는 것은 천사의 나라이며, 정치는 불필요하다. 이 계약 아래서 맺어진 약속에는 커다란 역설이 있다. “사람이 이 약속을 따라 타인을 위해 일할 때, 동시에 자신을 위해서도 일하게 되기 때문이다. 이것은 빵집도 정육점도 타인의 복지를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욕망을 채우기 위해 일하기 때문에, 모든 사람이 빵과 고기를 먹을 수 있게 된다는 스미스의 지적을, 경제의 영역이 아니라 정치의 영역에서 뒤집어서 말한 것이다.

여기서는 사람들은 사적 이익을 추구하면서 호모 에코노미쿠스로서 계약을 체결한다. 그것이 법이라는 형태로 표명되면, 일반의지가 되며, 틀리지 않는 것이 된다. 당파나 외적 간섭을 방지하면 모든 사람의 이익을 목표로 하는 일반의지가 형성될 것이다. 여기서 사회계약을 체결하는 사람들이 자신의 행복만을 목적으로 하는 호모 에코노미쿠스라는 것, 사람들이 호모 에코노미쿠스로서 행동하는 것이 최선의 결과를 초래한다고 생각되는 것은 분명하다.

푸코는 이렇게 행동하는 사람들을 미개인이라고 부른다. 사고 실험 속에서 자연상태로부터 벗어나 사회를 결성하려고 하는 단계에 있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계약을 맺고 사회를 창설하기 위해 숲에서 나온 미개인이며, 또한 교환과 물물교환을 하게 되는 호모 에코노미쿠스로서의 미개인이다. “18세기의 법사상에서의 이 미개인은 본질적으로 교환하는 인간이다. 법의 교환자 혹은 재화의 교환자이다. 즉 법의 교환자로서, 그는 사회와 주권을 창설한다. 재화의 교환자로서 그는 경제체로서의 사회를 교환한다는 푸코의 지적은 날카롭다.

또 한 가지 의미는 절대 군주가 지배하는 유럽의 정치적 논의 속에, 로마 이후의 시민적civic , 공화주의적 정신이 도입됐다는 것이다. 푸코는 법적인 루소주의로부터 두 개의 큰 역사적 형성이 부활한다고 지적한다. 그 한 가지 형식은, “로마의 부활이며, “고결하고 고대적인 공화제 로마와 자유와 반영을 기술하는 갈리아 로마적 도시의 부활이다. 다른 하나는 프랑크적 자유와 갈리아 로마적 자유의 결절점으로서의 샤를마뉴의 이미지이다. 그리고 프랑스 혁명에서 중요했던 것은 공화적인 로마의 도시 이미지였다.

 

자유주의의 문제점

이렇게 근대의 근본적 원리가 두 가지, 확립된 것처럼 생각됐다. 계몽, 즉 통치가 아니라, 자율적인 이성에 기초한 비판과, 시민적 및 경제적 자유이다. 계몽과 자유주의. 그러나 이 두 가지 원리는 기묘한 역설에 시달리게 된다. 우선 칸트의 계몽의 원리는 타자에 대한 의존을 배제할 터였다. 이 원리는 추상적으로 말해지는 한, 항상 옳은 것이다. 그리고 칸트는 실제로, 계몽 전제(專制)를 비판한다. 너무 통치하는 것이 초래하는 폐해는 분명했기 때문이다. 칸트는 이렇게 말한다.

 

아버지가 자신의 아이를 지배하듯이, 국민을 혜택의 원리에 기초하여 지배할 경우, 그것은 가부장적 지배라고 불린다. 이 지배 하에서는, 신민은 무엇이 자신에게 정말로 유익하며, 무엇이 정말로 유해한지를 분별할 수 없는 미성숙한 아이처럼, 그저 수동적인 자세를 취하도록 강제된다. 이때 신민은, 자신들이 어떻게 행복해야 하는가를, 국가의 원수(元首)에게 판단해 달라고 할 수밖에 없다. 국가의 원수가 신민의 행복도 바라게 되는 선량한 지배자이기를 기대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런 지배는 생각되는 한에서 가장 강력한 전제정치, 신민의 모든 자유를 파기하고, 그리하여 신민은 그 어떤 권리도 갖지 못하는 체제이다.

 

그러나 아는 용기를 가진 신민은, 계몽 전제 군주 국가에서 살아가기 위해서는 자신 속에, 군주가 정한 법률과 법을 내면화함으로써 자율적일 수밖에 없다. 칸트의 정언명법에서의 이 모순은 이미 헤겔이 지적하고 있다. 헤겔은 칸트의 정언명법에서는 도덕은 무조건 명한다. 그리고 모든 자연적 경향을 억압한다. 그렇게 도덕적 법칙을 보는 자는, 그것에 대해 노예로서 행동한다고 지적한다. 그리고 자기 자신의 주인이며, 노예라는 것은, 과연 인간이 소원(疎遠)한 것의 노예라는 상태보다도, 이점을 갖는 것처럼 생각하지만 자연이 스스로를 억압하는 것은 부자연스러운 것이 아닌가, “내적인 조화가 파괴되어 버리는 것은 아닌가, 지배자가 외부에 있는 소원한 것인 쪽이 아직 나은 게 아니냐고 묻는다. 바깥쪽에 폭군을 갖는 쪽이 안쪽에 폭군을 갖고 있는 것보다 낮지 않느냐는 것이 칸트에 대한 헤겔의 차가운 야유인 것이다. 장언명법이라는 형태로 도덕의 법을 내면화한 인간은, 얌전하게 국가의 질서를 따르게 되는 것이다. 푸코는 이 역설을 이렇게 지적한다.

 

우리의 자유가 내깃돈이 되고 있는 것이며, 타자에게 복종하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이 순간부터, 즉 자신의 지[과 그 한계]을 적절하게 이해할 수 있게 된 순간부터, 자율의 원칙을 발견할 수 있게 되는 것이며, 더 이상 복종하지 말라는 명령을 듣지 않고서도 충분하게 되는 것입니다. 오히려 복종하라는 명령이 자신의 자율에 근거될 수 있다고 말해야겠죠.

 

또 하나의 자유의 원리에도 고유한 역설이 있다. 영국도 프랑스도 이윽고, 내치의 원리가 아니라 자유주의의 원리를 통치의 원칙으로서 채용하게 된다. 그리고 이로부터 어떻게 국가를 만들 수 있을까? 물론 시장이 자유화되고, 사람들이 자유롭게 거래하고, 사적 이익을 목적으로서 활동하는 국가이다. 그러나 이 국가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하면 좋을까? 야경국가로서, 치안만을 배려하면 좋을까?

실제로 탄생한 것은 야경국가가 아니었다. 시장의 자유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큰 비용이 든다. 치안을 유지할 필요가 있을 뿐 아니라, 자유로운 거래가 행해질 수 있도록 감시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스미스는 신의 손이 일하고, 시장은 완전히 자율적일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실제로는 이 국가는 자유를 소비하는 국가이다. 자유를 소비한다는 것은, 이 국가가 성립하기 위해서는 시장의 자유, 판매자와 구매자의 자유, 소유권의 자유로운 행사, 토론의 자유, 경우에 따라서는 표현의 자유 등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이런 자유 위에, 이런 자유들을 소비하지 않고서는, 이 국가는 성립하지 않는 것이다. 새로운 통치이성은 자유를 필요로 하기 때문에, 이것을 만들어낼 필요가 있다.

자유주의란 시민에 대해 자유로우라고 명령하는 통치가 아니라, 시민이 자유로울 수 있기 위한 자유를 만들어내고, 자유롭게 행동할 수 있는 공간을 관리하는 통치이다. 그리고 역설적이게도, 이 국가는 이 목적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한편으로는 자유를 만들어내고, 다른 한편으로는 제한과 관리와 강제와 위협에 기초한 의무 부과를 만들어낼 필요가 있다. 이런 것 없이는 자유롭게 행동할 수 없다. 푸코는 그 실례로서, 상업의 자유를 확보하기 위해서는 독점을 금지하기 위한 세밀한 규칙과 제약이 필요해진다는 것, 외국과의 불평등한 경쟁을 방지하기 위해, 보호 관세를 유지해야만 한다는 것을 들고 있다. 노동자가 모여 조직을 만든다면 경쟁의 자유가 상실될 것이다. 그래서 노동조합은 금지 혹은 제한되어야 한다.

두 번째 역설은, 국내에서 자유롭게 거래를 할 수 있으려면, 행동 공간의 안전성을 확보해야만 한다는 점이다. 이를 위해서는 예측되는 다양한 위험에 대처할 필요가 있다. 자유주의의 통치는 모든 개인에게 스스로 안전을 배려하게 하고, 스스로가 사회 전체의 위험이 되지 않도록 유의도록 요구한다. 이 위험성은 다양한 형태로 찾아온다. 직업병의 위험성, 범죄의 위험성, 질병에 걸릴 위험성, 성적 위험성(외적인 것과 내부에서 오는 것) , 다양한 위험성을 사람들이 날카롭게 느끼도록 요구하는 것이다. “위험의 도야 없이는, 자유주의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사회의 치안과 안전을 지킨다는 명분 아래서, 어느 정도의 규제가 도입되는가는 현대 사회를 생각하면 분명할 것이다.

이리하여 사람들의 개인적 안전성, 즉 사람들의 행동가 신체의 보호와, 사회 전체의 안전성 사이에서 뒤얽힌 문제가 발생한다. 사회의 안전성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시민이 안전해야만 하지만, 사실상 사회의 위험은 개별 시민들이 초래하는 것이며, 이런 시민의 위험성으로부터 사회를 보호할 필요가 있다. 자유주의는 사회의 보호를 중요한 목적으로 하는 것이다.

이런 자유주의 사회가 이상으로 하는 것은 시민을 그 사상과 행동의 세부에 이르기까지 상세하게 감시하는 사회이다. 이것은 규율권력의 판옵티콘과는 상이한 배경과 이념에서 생긴 새로운 판옵티콘의 사회이다. “판옵티콘, 그것은 자유주의적 통치의 정식 그 자체이다.” 자유로운 사회를 유지하기 위해 사실상 생명정치와 생명권력이 총력을 기울일 필요가 있는 것이다.

돌이켜보면, 우리는 자유로워짐으로써 규율을 받아들이고, 감시를 용인한다. 자유와 민주주의는 규율 없이는 성립하지 않는 것이다. 푸코의 간결한 표현을 인용하자. 푸코는 군주제라는 귀찮기 그지없는 권력을 없애고, 부르주아지에게 정치 참여와 자유를 인정했을 때, 어떤 대가가 발생했다고 지적한다.

 

그러나 동시에 그 보상으로서, 대폭적인 훈육의 체제라고도 불러야 할 것을 만들어낸 것이다. 이것은 다른 사회계급뿐만 아니라 새로운 지배계급도 대상으로 하는 것이었다. 부르주아지는 이른바 자기 자신을 훈육하며, 그것에 걸맞은 개인의 종류를 만들어낸 것이다. 이것은 모순된 것이 아니다. 한쪽은 다른 쪽의 대가이며, 다른 쪽 없이는 성립하지 않았다. 모종의 부르주아적 자유주의가 제도의 차원에서 가능해지기 위해서는, 내가 미시권력이라고 부르는 차원에서, 개개인을 더욱 엄중하게 포위하는 것이 필요했으며, 신체와 행동의 감시망을 조직하는 것이 필요했다. 규율이라는 것은 민주주의라는 동전의 다른 면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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