フーコー「サド講演」における欲望と真理 / 柵瀬宏平
【『フーコー文学講義──大いなる異邦のもの』(柵瀬宏平訳、ちくま学芸文庫、2021年)書評会(2022年3月26日)の記録】
* 국역본 : 미셸 푸코, 허경 옮김, 『문학의 고고학』, 인간사랑, 2015.
오늘은 제가 번역하여 2021년에 출판된 『푸코 문학 강의: 커다란 이방의 것』에 수록된 「사드에 관한 강연」에 대해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사드 강연」은 1970년 뉴욕주립대 버팔로 캠퍼스에서 두 차례에 걸쳐 이뤄진 연속 강연입니다. 이 강연은 질적 측면에서 푸코가 행한 가장 본격적인 사드 독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또한 「사드 강연」은 푸코가 1960년대부터 1970년대에 걸쳐 진행한 사드 해석의 변천에서도 중요한 위치를 차지합니다. 1960년대에 푸코는 여러 차례 사드를 언급했는데, 이때 사드는 근대적 인간학적 사유의 한계를 보여주는 침범[위반]의 사상가로 적극적으로 평가되었습니다. 이에 반해 1975년 발표된 「사드, 성의 법무관(サド、性の法務官)」에서 사드는 규율 권력의 틀에 갇힌 성의 법무관으로 부정적으로 평가되었고, 이듬해 출간된 『지식의 의지』에서도 기독교적 고백 전통의 후예로 자리매김되기에 이르렀습니다. 1970년에 행해진 「사드 강연」은 1960년대의 긍정적 사드 독해와 1970년대의 부정적 사드 독해의 전환점에 위치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사드 강연」에서는 도대체 무엇을 논의하고 있는 것일까요? 「사드 강연」의 테마는 사드에게서 욕망과 진리의 관계입니다. 푸코에 따르면, "『쥐스틴』의 이야기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욕망의 실천에서 [...] 진리 같은 어떤 것을 출현시키는 것"[1]입니다.
사드의 소설을 통해 진리와 욕망의 관계를 논하는 푸코의 이러한 문제 설정은 「사드 강연」과 같은 해 콜레주드프랑스에서 행한 『지식의 의지에 대한 강의』와 밀접한 연관이 있습니다. 이 강의에서 푸코는 니체에 의거하면서 진리를 향한 의지의 계보학을 시도했다. 그 시작으로 푸코는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의 서두의 한 구절("모든 인간은 그 자연본성에 의해 인식에 대한 욕망을 가지고 있다"[2])을 상세히 분석하며, 거기에서 진리를 매개로 욕망을 인식 속에 포함[포섭]하는囲い込む 철학적 조작을 간파합니다. 진리와 인식, 욕망의 관계를 둘러싸고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해 이루어진 이러한 조작은 이후 오랫동안 서양 철학의 역사를 지배하게 되는데, 푸코에 따르면 니체가 시도한 것은 욕망을 그러한 진리와 인식의 포섭 관계로부터 해방시키는 것이었습니다.[3] 그런데 「사드 강연」에서 푸코는 사드를 "우리 문명에서 욕망이 계속 사로잡혀 있던 진리에 대한 종속으로부터 욕망을 실제로 해방시킨 인물"[4]로 파악합니다. 이처럼 푸코는 욕망과 진리가 맺는 관계에 대한 재물음이라는 점에서 사드와 니체 사이에 일종의 동맹 관계를 인정하고 있는 셈인데, 이 점에 대해서는 나중에 자세히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자, 그럼 먼저 「사드 강연」의 첫 번째 강연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이 강연에서 푸코가 분석하는 것은 사드의 에크리튀르론입니다. 그런데 20세기 중반의 프랑스에서 사드의 에크리튀르에 주목한 것은 푸코뿐만이 아닙니다. 예를 들어 블랑쇼는 1969년에 출간된 『끝없는 대화』에 수록된 사드론 「봉기, 글쓰기의 광기(蜂起、書くことの狂気)」에서 "[사드의] 작품에서 상궤를 벗어난 운동의 진실은 글쓰기라는 운동에 의해 탐구된다"[5]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또한 푸코의 「사드 강연」, 특히 제1차 강연에 큰 영향을 끼친 클로소프스키는 1967년 가필 수정을 거쳐 재출간된 저서 『나의 이웃 사드(わが隣人サド)』에 수록된 논문 「악당의 철학자(悪虐の哲学者)」에서 사드는 에크리튀르를 통해 소돔이라는 도착적 행위를 집요하게 반복함으로써 사고의 황홀경을 가져온다고 논했습니다.[6] 푸코는 이러한 논의를 바탕으로 사드의 에크리튀르의 특이성을 욕망과 진리의 관계라는 1970년대 초 그 자신의 고유한 문제 체계 속에서 분석합니다.
사드의 에크리튀르를 논할 때 푸코가 다루는 것은 줄리엣이 친구이자 리베르탱(libertin)인 도니 백작부인에게 도착의 실마리를 풀어주는[에 대해 설명해주는] 『쥐스트』의 한 구절입니다. 조금 길지만, 중요한 대목이라, 조금 생략하면서 인용하겠습니다.
ㅈ2주 동안은 색욕에 관여하지 말아야 한다. [...] 때가 되면, 캄캄한 방에 조용하고 차분하게 누워라. 그리고 그동안 금기시했던 모든 것을 떠올려라. 그런 다음 당신의 상상력을 자유롭게 하고 여러 가지 착란을 단계적으로 상상해 보라. [...] 망상이 당신의 감각을 사로잡아 당신이 행위를 하고 있다고 믿게 되고, 당신은 메살리나처럼 정력을 발산하게 될 것이다. 그런 다음 즉시 촛불에 다시 불을 붙이고, 목록 위에 지금 당신을 타오르게 한 착란의 종류와 그 세부 사항을 더욱 격렬하게 만들 수 있는 모든 상황을 적어 내려가라. 그것을 끝내면 잠을 자라. 다음 날 다시 노트를 읽고 작업을 재개하고 [...] 상상력이 당신의 흥분을 더 고조시킬 수 있는 모든 것을 덧붙여라. [...] 그런 다음 실행에 옮겨라. [7].
그런데 이 대목에 관해 푸코는 클로소프스키를 암묵적으로 언급하면서[8] 사드의 에크리튀르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타자를 설득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이성적 언어가 아니라 성적 환영이라고 지적합니다. 그런데 만약 그렇다면 다음과 같은 문제가 제기됩니다. 즉, "만약 순전한 성적 환영을 종이에 옮겨 적는 것에 불과하다면, 어떻게 [사드는] 진리를 말하고 있다고 할 수 있는가"[9]라는 문제입니다. 푸코는 사드의 에크리튀르의 특이성을 분석함으로써 이 질문에 답하는 동시에, 사드에서 욕망과 진리가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지를 밝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사드의 에크리튀르의 특이성은 도대체 어떤 것일까요? 푸코에 따르면 사드의 에크리튀르는 네 가지 기능을 가지고 있는데, 그 공통점은 에크리튀르가 욕망에 부과된 한계를 지우고 욕망을 무제한화한다는 점입니다. 이 논점은 1963년 논문 「위반에의 서문」에서 '칸트와 사드 이후 우리 문화에 본질적인 체험'으로서, '한계와 위반의 체험'[10]에 대해 이야기했던 것을 상기시키는데, 이 대목에서 푸코는 이를 에크리튀르론의 형태로 전개하게 됩니다.
이제 구체적으로 살펴봅시다. 사드의 에크리튀르의 첫 번째 기능은 상상력과 현실 사이의 경계를 지우는 것입니다. 푸코에 따르면, 방금 인용한 대목에서 현실은 "그러니까 실행하시오"라는 내실 없는 대사로 환원되어 거의 무화되어 버립니다. 그 결과 성적 상상력에 제동을 거는 외적 제약이 되는 현실이라는 심급, 프로이트적 용어를 사용한다면 현실 원리가 실질적으로 배제되고 상상적인 것의 한계가 무제한화되는 것입니다.
사드의 에크리튀르의 두 번째 기능은 향락("정력을 발산하는 것")을 반복함으로써 향락에 부과된 시간적 한계를 지워버리는 것입니다. 에크리튀르에 의한 반복을 통해 향락은 신체적 유한성으로부터 해방되는 것이며, 이런 의미에서 푸코는 사드에서 에크리튀르를 "반복된 향락의 원리"[11]라고 말합니다. 이러한 분석은 「악당의 철학자」에서 클로소프스키가 사드가 에크리튀르를 통해 도착적 행위를 반복함으로써 신체적 오르가즘이 아닌 사고의 황홀경을 가져다주려 했다고 주장했던 것을 떠올리게 합니다.
그런데 사드의 에크리튀르의 세 번째 기능은 에크리튀르의 반복, 즉 한 번 쓴 후에 그 다음 날 다시 읽고 고쳐 쓰는 작업을 통해 성적 상상력을 강화한다는 점입니다. "상상력이 스스로의 흥분을 높이기 위해 당신이 떠올릴 수 있는 모든 것을 추가하라"는 것이므로, 그 결과 성적 상상력 자체의 내적 한계를 극복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사드의 에크리튀르는 성적 상상력에 의해 부과된 외적 한계와 내적 한계를 모두 지워버리고, 리베르탕들이 저지르는 범죄를 극한까지 격화시키는데, 그 결과 역설적이게도 허용되는 것과 허용되지 않는 것의 경계, 즉 비범죄와 범죄 사이의 경계 자체가 지워지게 됩니다. 더 이상 허용할 수 없는 것이 없으니 범죄란 애초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드의 에크리튀르의 네 번째 기능입니다. 이렇게 사드의 리베르탕버턴들은 범죄자라는 일반적인 법적 범주로 파악할 수 없는 절대적으로 고독한 단독자가 되는 것인데요, 푸코는 바타유를 근거로 하면서[12] 이러한 단독자로서의 리베르탕을 '불규칙한 실존'[13]이라고 부릅니다.
그렇다면 에크리튀르의 이러한 기능들은 어떻게 욕망과 진리를 연결시킬 수 있을까요? 앞서 살펴본 것처럼 사드의 에크리튀르는 욕망과 현실 사이의 경계를 지우는 것이었는데, 그 결과 욕망을 현실에 맞지 않는 거짓된 것으로 치부해버리는 현실 원리가 부재하게 됩니다. 혹은 프로이트적 개념을 좀 더 참조한다면, 현실 검증이 기능 장애에 빠졌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 결과 성적 상상력만이 스스로를 검토하는=진실화하는(vérifier) 유일한 심급이 되고, 그 결과 아무리 현실과 동떨어진 것이라도 모든 환상이 진실한[참인] 것이게 됩니다. 즉, 욕망과 현실 사이의 대응이라는 형태의 진리가 무효화되고, 굳이 스피노자식으로 말하자면 욕망 그 자체가 자신의 진리를 나타내는 자기 지표(index sui)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진리와 환상의 관계를 둘러싼 이러한 논의는 「사드 강연」' 이듬해에 행한 '니체 강의'에서 푸코가 니체가 진리와 가상의 구분을 지워버림으로써 '가상이 현실이다'[14]라고 논하기에 이르렀음을 강조했음을 상기시켜 줍니다[15]. 「사드 강연」에서 푸코의 진리 개념은 가상의 역동성 속에서 진리의 출현을 보았던 니체적 진리론과 통하는 바가 있습니다.
에크리튀르를 통한 욕망과 진리의 결합에 관해 다음으로 문제가 되는 것은 욕망의 영원 회귀라고 할 수 있는 논점입니다. 앞서 살펴본 것처럼 에크리튀르는 향락을 반복함으로써 욕망의 시간적 한계를 지워버렸지만, 이로 인해 에크리튀르는 '욕망을 반복의 영원한 세계 속으로 인도하는'[16] 셈이 됩니다. 이렇게 영원히 회귀하는 욕망은 금방 사라지는 일시적이고 덧없는 존재가 아니라 항상 동일하게 머무르는 존재라는 의미에서 진실한[참인] 것이 됩니다. 이러한 논점 속에서 니체의 영원 회귀 개념을 알아채는 일은 그리 어렵지 않을 것입니다. 참고로 푸코뿐만 아니라 클로소프스키도 『나의 이웃 사드』에서 "사드는 [...] 니체가 도달하게 될 길을 열어주는 것이다. 삼사라サムサラ의 수용 ― 동일자의 영원회귀의 수용이라는 길을"[17]이라고 논하며, 사드 안에서 니체적인 영원회귀를 읽어내고 있는데, 이러한 해석은 20세기 중반 프랑스 사상에서 사드 독해의 한 토포스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에크리튀르를 통한 욕망과 진리의 관계에 대해 마지막으로 문제가 되는 것은 욕망의 지고성이라는 논점입니다. 앞서 확인했듯이 에크리튀르는 욕망을 격화시킴으로써 허용되는 것과 허용되지 않는 것의 한계 자체를 지워버렸습니다. 즉, 욕망에 제동을 걸고 억압하는 외적인 심급은 존재하지 않게 되고, 그리하여 욕망은 스스로에게 고유한 법만을 가진 절대적 주권자가 됩니다. 욕망에는 더 이상 불가능한 것이 없으며, 지고의 욕망은 그 어떤 규범에 의해서도 방해받지 않고 자신의 소망을 순식간에 실현하고 진실한[참인] 것으로 만듭니다. 푸코가 "욕망은 항상 자기 자신에게 고유한 진리와 같은 차원에 있다"[18]고 논하는 것은 그 때문입니다. 이러한 논의는 가능성의 한계를 넘어 욕망하는 지고자로서의 사드의 모습을 강조한 바타유의 논의[19]를 이어받아 푸코가 1969년 뱅센느에서 행한 '섹슈얼리티 강의'에서 "[지고의 주체의] 욕망이야말로 그 특성, 그 무제한성이라는 점에서 [사드의] 침략적 유토피아를 이룬다."[20]고 논했던 것과 궤를 같이하지만, 「사드 강연」에서 푸코는 이 욕망의 지고성이라는 논점을 진리론의 틀 안에서 다시금 자리매김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푸코는 사드에게서 욕망이 특이한 에크리튀르를 통해 진리와 연결될 수 있는 모습을 분석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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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그럼 이제 두 번째 강연을 살펴보겠습니다. 이 강연의 서두에서 푸코는 사드의 소설에서 이론적 담론과 에로틱한 장면이 규칙적인 형태로 번갈아 나타나는 것에 주목합니다. 푸코는 『말과 사물』에서도 사드의 담론과 장면의 교체에 주목하고, 이를 '욕망의 법칙 없는 법칙과 담론적 표상 사이의 찰나적 균형'[21]을 보여주는 것으로 분석했었습니다. 이에 반해 「사드 강연」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에로틱한 장면에서의 욕망의 실천이 리베르탕들의 담론을 통해 이야기되는 진리와 어떻게 연결되는가 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번 두 번째 강연에서 주목해야 할 것은 사드에게서 욕망과 진리의 관계를 둘러싼 푸코의 분석이 『〈지식의 의지〉강의』에서 분석된 고전기 그리스의 진리론, 즉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해 명제론적 진리의 체제가 수립되기 전의 진리의 모습을 둘러싼 논의와 밀접한 연관성을 가지고 있다는 점입니다. 이 점을 염두에 두고 푸코의 사드론을 검토해봅시다.
그런데 우선 문제가 되는 것은 사드의 담론의 내용, 즉 사드의 소설에 등장하는 리베르탕들이 무엇을 말하는가 하는 것인데, 푸코에 따르면 그것은 다음과 같은 네 가지 비존재 증명 ―― 신은 존재하지 않는다, 영혼은 존재하지 않는다, 법은 존재하지 존재하지 않는다, 자연은 존재하지 않는다 ―― 입니다. 이러한 비존재 증명이 사드의 진리 담론을 구성하고 있습니다. 참고로 조금 벗어났지만, 칸트가 『순수이성비판』에서 신, 영혼, 세계를 초월론적 이념으로 분석했던 것을 떠올린다면, 이 네 가지 비존재 증명이 반형이상학적 성격을 가진 것임은 분명할 것입니다.
다음으로 푸코가 문제 삼는 것은 이러한 진리의 담론이 사드에게서 어떤 기능을 수행하는가 하는 점입니다. 푸코에 따르면 사드의 담론에는 다섯 가지 기능이 있고, 그것들은 서로 밀접하게 얽혀 있는데, 각각의 기능에 대해 순차적으로 검토해 나갑시다.
푸코는 사드 담론의 첫 번째 기능을 탈거세의 기능이라고 부릅니다[22]. 이 기능을 밝히기 위해 푸코는 사드의 리베르탕들의 담론을 형이상학적 담론과 대비시킵니다. 푸코에 따르면 서양의 형이상학은 존재론의 차원에서는 신, 영혼, 법, 자연을 긍정하는 반면, 명령의 차원, 즉 행위를 규제하는 규범의 차원에서는 욕망을 부정해 왔습니다. 이와 대조적으로 사드의 리베르탕적 담론은 존재론의 차원에서는 신, 영혼, 법, 자연을 부정하는 반면, 명령의 차원에서는 욕망을 긍정하는, 즉 사악한 욕망을 적극적으로 실천하라고 명령합니다. 모든 규범을 물리치고 자신의 이해관심을 최우선시하는 이 탈거세의 기능은 블랑쇼가 사드에게서 '완전한 이기주의'[23]로 분석한 것에 해당하는 기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드 담론의 두 번째 기능은 차이화의 기능입니다[24]. 신, 영혼, 법, 자연을 둘러싼 네 가지 비존재 증명이라는 진리의 담론은 이 네 가지 비존재 증명을 유지할 수 있는 자를 리베르탕으로, 유지할 수 없는 자를 희생자로 선별합니다. 그런데 이 선별을 통해 리베르탕으로 인정받은 자들은 서로를 인정하고, 범죄 친구 모임의 회칙이 보여주듯 서로를 죽이지 않겠다는 신사숙녀 협정을 맺습니다. 즉, 리베르탕들은 서로 몸을 내어주고, 경우에 따라서는 폭행을 가할지언정 죽이지는 않는 반면, 희생자들은 리베르탕들에 의해 철저하게 능욕당하고, 몸이 잘려나가고, 살해당하기까지 합니다.
그러나 여기서 흥미로운 점은 리베르탕들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이러한 상호 인정이 결코 영속적이지 않다는 점입니다. 왜냐하면 네 가지 비존재 증명을 하나도 빠뜨리지 않고 항상 유지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며, 엄청난 노력과 강한 의지를 필요로 하기 때문입니다. 푸코가 네 가지 비존재 증명은 '한 번뿐이고[단번에] 결정적으로 승인되는' 교리 조항이 아니라, 리베르탕들에게 영구히 부과되는 '도덕적 과제'라고 말한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25]. 따라서 리베르탕들은 서로가 네 가지 비존재 증명을 계속 유지하고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 서로 함정을 파고, 함정에 걸린 리베르탕이 네 가지 비존재 증명 중 하나라도 유지하지 못하고 있다고 판명된 경우에는 상대를 죽여버립니다. 실제로 대(大)리베르탕인 상 퐁サン・フォン은 클레어윌クレアウィル과의 논쟁을 통해 영혼의 불멸을 믿는다고 판명되어 사위인 노아수유ノアルスイユ의 손에 죽임을 당하게 됩니다. 즉, 사드에게서 네 가지 비존재 증명이라는 진리 담론은 '영원히 갱신되는 시련의 기능'[26]을 가지고 있는 셈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논점은 『<지식의 의지> 강의』에서 분석된 고전기アルカイック期 그리스에서의 진리의 기능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습니다. 푸코에 따르면, 고전기 그리스에서 진리는 무시무시한 힘을 가진 것으로, 신명 재판의 예에서 알 수 있듯이 진리의 선서는 선서자를 시련에 부치고, 그 시련을 이겨낸 자의 담론을 진실한[참인] 것으로 인정하는 기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즉, "[진리의 선서에서] 폭로되는 것은 진리에 사로잡히는 것을 받아들이는 자의 무장해제된 벌거벗은 모습이거나, 반대로 진리로부터 도망치려는 자의 허세"[27]였던 것입니다. 명제론적 진리 체제에 속하는 '완벽한 추론의 필연적이고 피할 수 없는 귀결'[28]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도덕적 과제로 파악된 사드의 진리 담론은 고전기 그리스에서 볼 수 있었던 진리의 시련이라는 역할을 담당하고 있는 것입니다.
자, 그럼 다음으로 푸코가 파괴의 기능이라고 부르는 사드의 담론의 네 번째 기능에 대해 검토합시다. 이 파괴의 기능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사드의 무신론을 둘러싸고 클로소프스키가 제기한 논점을 짚어둘 필요가 있습니다. 클로소프스키는 『나의 이웃 사드』에서 사드는 그가 그의 저서에서 암묵적으로 의존하고 있는 달러백ドルバック[돌망세?] 같은 합리주의적 무신론자가 아니라고 논했습니다. 왜냐하면 사드의 리베르탕들은 침범[위반]의 대상으로서 신의 존재를 필요로 하기 때문입니다. 클로소프스키가 "신의 개념과 이웃의 개념은 그[리베르탕]에게 불가결한 것이다"[29]라고 주장한 것은 바로 이 때문입니다.
이에 대해 블랑쇼는 『로트레아몽과 사드』에서 사드의 무신론에 관한 클로소프스키의 이러한 해석을 비판하며, 사드에게서의 '부정의 초월적 기능'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다음과 같이 논했습니다. "사드의 초인은 신의 이름으로 인간을 부정한 후, 신을 환영하여 맞이하고, 이번에는 자연의 이름으로 신을 부정하고, 마지막에는 부정의 정신과 동화하면서 자연을 부정하는 것이다."[30]. 즉 블랑쇼에 따르면 사드가 그 존재를 요청하는 것처럼 보이는 신이나 자연은 사드에게서의 반인간주의적 부정의 운동의 한 계기일 뿐이며, 그것들 역시 부정의 정신의 격화를 통해 무화되기에 이르는 것이다. 『광기의 역사』에서 푸코는 이러한 블랑쇼의 논의에 의존하면서 근대 정신의학에 의해 수립된 인간학적 원환을 깨부수는 사드의 부정의 정신을 높이 평가한 것인데[31], 「사드 강연」에서 그는 욕망과 진리라는 새로운 문제설정 아래에서 사드의 담론이 갖는 파괴의 기능과 그로부터 도출되는 여러 결과들을 보다 상세하게 분석하게 됩니다.
그러면 이제 푸코가 주목한 사드의 담론에서 파괴의 기능에 대해 좀 더 자세히 살펴봅시다. 먼저 푸코는 클로소프스키와 마찬가지로 사드의 담론과 18세기 합리주의적 무신론의 차이를 강조합니다. 합리주의적 무신론은 처음에 '신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하고, 이로부터 '신에게 선악 같은 속성을 부여하는 것은 잘못이다'라는 귀결을 도출합니다. 즉, 합리주의적 무신론자에게 신은 착각(illusion)[32]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이에 대해 사드는 먼저 '신은 악하다'고 논하고, 신에게 사악함이라는 속성을 귀속시킨 다음, 이로부터 '신이 사악할수록 신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결론을 도출하는 형태로 논의를 전개합니다. 사악할수록, 즉 자신의 본질에 부합할수록 존재하지 않게 되는 사드의 특이한 신을 푸코는 단순한 착각과 구별하여 '기괴한 공상'(chimère)[33]이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푸코는 이러한 사드의 논증의 특이성을 밝히기 위해 사드의 논리를 철학사에서 유명한 두 가지 논리와 대비시킵니다. 먼저 푸코가 다루는 것은 러셀의 형식주의 논리입니다. 다들 아시다시피, 러셀 철학의 중심 이론 중 하나는 기술 이론입니다[34]. 오스트리아의 철학자 마이농은 '둥근 사각형'이나 '황금산' 같은 지시대상이 없는 표현도 그것들을 주어로 한 명제를 만들 수 있는 이상, 모종의 논리적 존재를 갖는다고 논했는데요, 러셀의 기술 이론은 마이농의 이러한 존재론에 대항하기 위해 구축된 것이었습니다. 푸코는 러셀의 기술 이론을 설명하기 위해 그가 『지식의 고고학』에서도 다룬 '황금산은 캘리포니아에 있다'(La Montagne d'or est en Californie)라는 명제를 예로 듭니다[35]. 이 명제를 기술 이론에 따라 논리식으로 표현하면 다음과 같이 될 것입니다.
이렇게 논리식으로 만들면, 이 명제는 제1 연언지連言肢를 만족하는 것이 없기 때문에 거짓이라는 것이 됩니다. 이에 대해 푸코는 "<황금산이 캘리포니아에 있다>라는 유형의 명제가 참일 수도 있고 거짓일 수도 있는 것은 그 명제를 분해하여 먼저 <황금산이 존재한다>라고 말할 수 있고, 그 다음에 <황금산은 캘리포니아에 있다>라고 말할 수 있다는 조건에서만 가능하다."[36]고 말합니다.
* 연언지(連言肢, conjunct) : …A,B를 두 개의 명사 혹은 두 개의 명제(문장)로 한다. 이때 <A 그리고 B>를 A와 B의 연언(連言)이라고 하며, A, B를 그 연언지(連言肢)라고 한다. 현대논리학에서는 A,B가 명제일 때의 <그리고>를 ∧로 기호화하고, A∧B처럼 쓴다.
이에 대해 사드의 논증은 어떤 것이었냐면, 그는 먼저 '신은 사악하다'라는 속성 판단을 내리고, 그 위에서 이로부터 '신은 존재하지 않는다'라는 속성의 주체에 대한 비존재 판단을 도출하는 것이었습니다. 만약 이런 논증이 가능하다면 러셀이 마이농에 대항하여 기술 이론을 고안할 필요가 없었을 것이고, 그런 의미에서 사드의 논리는 러셀의 형식논리학적인 관점에서 보면 매우 황당한 괴물 같은 논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다음으로 푸코가 사드의 논리와 대비하는 것은 데카르트의 신에 대한 존재론적 증명입니다. 데카르트는 『철학 원리』 제1부 14장에서 신의 존재론적 증명을 전개하는데[37], 푸코는 데카르트의 이 논증을 '신은 완전하다'라는 속성 판단으로부터, '완전함은 존재를 함축한다'라는 소전제를 거쳐, 따라서 '완전한 것인 신은 존재한다'라는 존재 판단에 이르는 것으로서 정리합니다. 그런데 푸코는 이러한 데카르트의 신에 대한 존재론적 증명에 대해 "관념과 관념의 존재에, 따라서 가능한 것에 필연적인 방식으로 입각해 있는 데카르트의 <직관주의적> 논리"[38]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그 배경에는 마르샬 겔루가 『이성들의 순서에 따른 데카르트』에서, 제5성찰에서의 신의 존재론적 증명은 제3성찰에서 확립된 '명증성의 규칙'과 이를 보증하는 '결과에 의한 신의 증명'을 전제로 하고 있다고 주장한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39]. 참고로 『라이프니츠의 데카르트 비판』에서 이본 베라발イヴォン・ベラヴァル은 "직관의 명증성과 신의 성실성이라는 두 가지 원리에 기초하여 논의를 전개하는" 데카르트의 논증을 라이프니츠의 형식주의와 대비시키면서 직관주의로 특징짓고 있습니다[40].
자, 이야기가 조금 벗어났으니 본론으로 돌아갑시다. 사드가 전개하는 신의 비존재 증명은 데카르트의 이러한 신의 존재론적 존재론적 증명과 정반대인 것은 누구의 눈에도 분명합니다. 왜냐하면 사드는 '신은 악하다'라는 속성판단에서 출발하여 '신은 존재하지 않는다'라는 비존재판단을 이끌어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푸코는 "사드는 반러셀주의자인 것과 마찬가지로 반데카르트주의자이다"[41]라고 결론을 내립니다.
그렇다면 러셀의 형식주의 논리와도, 데카르트의 직관주의 논리와도 대립하는 사드의 논리의 핵심은 도대체 무엇일까요? 그것은 사드에 의한 신의 비존재 증명이 리베르탕들에 의한 욕망의 실천과 불가분하다는 것입니다. 사드는 '신이 악할수록 신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논하지만, 신의 악함을 증대시키고 '신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담론을 진실로 만드는 것은 리베르탕들이 자신의 악한 욕망을 실천함으로써 신도 부처도 아닌 것처럼 생각되게 하는, 아주 무참하고 끔찍하고 비참한 광경을 연이어 산출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신은 존재하지 않는다'라는 담론의 진리는 리베르탕에 의한 욕망의 실천을 통해 행위수행적으로 증명되는 것입니다. 푸코가 사드에서 "신의 부재는 담론 속에서, 욕망 속에서 매순간마다 실현된다"[42]고 논하는 것은 그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 사드의 특이한 행위수행론적 진리론을 푸코가 1981년 루뱅대학에서 행한 강의 제목을 차용하여 '악을 행하고 진실을 말한다'라는 말로 특징지을 수 있을 것입니다[43]. 악한 욕망의 실천이야말로 담론을 진실하게 만들고, 진실을 말하는 것을 가능케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드에게서의 이러한 악과 진리의 결합은 푸코가 『<지식의 의지> 강의』에서 분석 대상으로 삼은, 고전기 그리스에서 성립한 진리진술과 사법진술의 결합 방식을 전도시키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푸코에 따르면, 고전기 그리스에서 크리네인이라는 재판 형식이 진리(알레테이아)와 정의(디케)를 불가분한 형태로 연결한 이래로 우리는 여전히 이 '크리네인의 왕조'[44]에 의해 수립된 진리의 체제 속에 갇혀 있는 것입니다만, 사드의 행위수행론적 진리론은 이 '크리네인의 왕조'에 과감히 반기를 드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드의 담론에서 파괴의 기능, 즉 진리와 욕망 사이의 상승적 강화 혹은 격화에서 도출되는 것이 경합의 기능이라는, 사드의 담론의 네 번째 기능입니다. 사드의 리베르탕들은 라 뒤보아ラ・デュボワ의 체계나 교황의 체계에서 볼 수 있듯이 네 가지 비존재 증명을 각각 고유한 방식으로 체계화합니다. 따라서 리베르탕들은 서로 고립된 단독자이며, 블랑쇼가 강조한 것처럼 '절대적 고독'[45] 속에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사드의 리베르탕들은 루소의 선량한 야만인들처럼 서로에게 무관심한 채 평화롭게 살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그와는 정반대로, 리베르탕들은 각자의 체계, 즉 각자의 진리의 담론을 무기로 삼아 어느 체계가 더 강력한지를 두고 목숨을 걸고 투쟁합니다. 그리고 클레어윌クレアウィル과 줄리엣에 의해 보르헤스ボルゲーゼ 공작부인이 살해당하는 장면이 보여주듯이, 투쟁의 끝에서 더 약한 체계를 가진 리베르탕은 더 강한 체계를 가진 리베르탕에 의해 패배하고 살해당하게 됩니다. 여기서 우리는 진리의 담론과 욕망의 실천 사이의 상승적 강화를 통해 사드의 담론의 두 번째 기능인 차이화의 기능을 특징짓던, 진리의 시련이라는 측면이 전면적으로 전경화되고 차이화의 기능의 또 다른 측면인 리베르탕들 간의 상호 승인과 그들끼리 서로를 죽이지 않겠다는 신사숙녀 협정이 깨지는 것을 목격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푸코는 『<지식의 의지> 강의』에서도 "<진리>는 가장 효과적인 언어적 무기의 하나[...]로서, 매우 빨리 인간에게 나타났다"라는 뒤메질의 말을 인용하면서[46], 진리가 권력관계에서의 투쟁의 무기로서 기능하는 것을 강조했습니다. 이러한 사고방식은 1976년 콜레주드프랑스 강의 『'사회를 보호해야 한다'』에서 더 명확해지며, "진리가 말하는 것은 그것이 권력관계의 무기가 될 수 있기 때문이며, 궁극적으로 그런 한에서 진리가 요구된다"[47]라고 논의되었습니다. 사드의 담론에서 경합의 기능이라는 아이디어는 진리와 권력의 결합이라는 이러한 논점을 선취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이제 마지막으로 사드의 담론의 다섯 번째 기능인 자기소거의 기능을 살펴봅시다. 앞서 말했듯이, 리베르탕들은 자신의 체계, 즉 진리의 담론을 유지하면서 투쟁하는데, 그 과정에서 그/그녀들은 자신의 죽음이라는 위험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입니다. 오히려 "만약 처형당하게 된다면 나는 기다릴 것도 없이 교수대 쪽으로 날아갈 거야"[48]라고 호언장담하는 줄리엣처럼, 리베르탕들은 자신의 죽음을 가장 큰 쾌락과 함께 향유합니다. 이것이 사드의 담론에서의 자기소거의 기능인데, 푸코는 이 자기소거의 기능에서 사드의 담론의 일차적 기능인 탈거세의 기능이 반전된다고 지적합니다. 탈거세의 기능에서 문제가 되었던 것은 모든 규범을 배척하면서 자신의 이해관심을 최우선으로 삼는 완전한 이기주의였던 것인데, 이에 반해 자기소거의 기능에서 이야기되는 것은 '네가 인생에서 만날 수 있는 가장 큰 쾌락은 너의 고정성 자체가 사라지는 그 날이다"[49]라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드 담론의 출발점에 있던 이기주의는 파괴의 기능을 거쳐 자기소거로 반전되는 것입니다. 나아가 푸코는 이 자기소거의 기능의 귀결로 신, 영혼, 법, 자연을 둘러싼 네 가지의 비존재 증명에 더해 '개인 자체는 존재하지 않는다'[50]는 다섯 번째 비존재 증명이 도출된다고 논합니다. 여기서 흥미로운 점은 이 다섯 번째 비존재 증명 역시 리베르탕 자신이 자신의 죽음을 욕망하고, 그리고 실제로 기꺼이 죽는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행위수행적으로 그 진리가 증명된다는 점입니다. 욕망의 실천과 진리의 담론 사이의 행위수행적 결합이야말로 푸코가 발견한 사드의 진리론의 핵심입니다.
사드의 담론에서 자기소거의 기능을 둘러싼 이러한 푸코의 분석은 『광기의 역사』에서 사드 독해의 연장선상에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광기의 역사』에서 푸코는 사드가 '극한으로 내몰린 부정의 정신을 경험하는 주권'[51]을 추구했다는 점을 강조하는 블랑쇼의 논의를 바탕으로 『줄리엣 이야기』의 결말 부분을 분석하면서 '자연의 언어가 그곳에서는 영구히 침묵하게 된 비이성의 허무는, 자연의 폭력, 자연에 반하는 폭력이 되며, 마침내 자기 자신의 지고한 폐지(l'abolition souveraine de soi-même)에 이르게 된다."[52]고 논했습니다. 「사드 강연」에서 푸코는 사드의 리베르탕들이 자기소거의 기능을 통해 욕망의 지고성을 확립하고, 이와 더불어 자기소거의 행위를 통해 자신의 담론을 진리화한다는 것을 분명히 밝힌 것입니다.
그런데 진리의 담론을 보존하기 위해 자신의 죽음의 위험까지 적극적으로 감수하고, 바로 그것으로 그 담론이 진실임을 증명하는 이러한 논의는 푸코가 말년에 집중적으로 분석했던 파르레시아라는 진리의 서사를 떠올리게 합니다. 푸코는 그리스어로 '모든 것을 말하다'라는 뜻의 파르레시아를 용기를 갖고 진리를 말하는 것으로 재파악하고 그 역사적 계보를 추적했는데, 파르레시아의 중요한 특징으로 푸코는 "파르레시아의 언표를 정의하는 것, [...] 그것은 파르레이시아에 있어서 위험이 열린다는 것입니다."[53]라고 말했습니다. 실제로 파르레시아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실직, 추방, 심지어 생명의 위험을 각오하고 자신이 진실이라고 믿는 것을 용기 있게 말하는 것이며, 이러한 위험을 감수하는 것이야말로 말해진 담론이 진실이라는 것을 소급적으로 증명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사드의 담론에서의 자기소거의 기능 속에서 일종의 파르레시아를 볼 수도 있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런데 「사드 강연「을 마무리하면서 푸코는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사드는 <욕망은 진리 안에서 무한한 것이 되고, 진리는 욕망 안에서만 작동한다>고 말한 사람입니다."[54]. 두 차례에 걸친 강연을 자세히 추적해온 우리에게 '욕망은 진리 안에서 무제한이 된다'는 분석이 사드의 에크리튀르론을 논한 1차 강연에, '진리는 욕망 안에서만 작동한다'는 분석이 사드의 담론을 논한 2차 강연에 대응하고 있음은 이제 분명할 것입니다. 이렇게 푸코는 두 번의 강연을 통해 사드에게서 욕망과 진리가 독자적인 방식으로 서로 얽히고설키며 강화되는 모습을 분석했던 것입니다.
***
그럼 마지막으로 푸코가 1970년에 행한 「사드 강연」이 후대의 푸코에 의해 어떻게 계승되었는지, 그리고 우리는 그것을 어떻게 전개할 수 있는지에 대해 간략하게 이야기해 보겠습니다.
오늘 서두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1970년대 중반 이후 푸코는 「사드 강연」에서 정점에 도달한 긍정적인 사드 평가를 뒤집게 됩니다. 1976년 출간된 『지식의 의지』에서 푸코는 1960년대 자신이 사드와 바타유를 통해 다듬어낸 위반 개념을 권력의 생산적 작용을 놓치는 반시대적인 것으로 치부하면서 사드를 다음과 같이 논하게 됩니다. "모든 것을 말한다고 정신지도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반복한다. [...] 사드는 정신지도 지침서에서 베껴온 듯한 표현으로 다시 그 요청을 주장한다."[55] 블랑쇼는 그의 사드론인 「봉기, 글쓰기의 광기」에서 "사드의 <모든 것을 말하는 것>"[56]의 혁신성을 적극적으로 평가했는데, 이에 반해 푸코는 그것을 고스란히 기독교 사목에서 유래한 고백의 전통 속에 위치시켜 버립니다. 이 점에서 푸코는 「사드 강연」에서 그가 거리를 두었던, 사드와 기독교 신학의 연관성을 강조하는 클로소프스키의 사드 독해에 다시 한 번 접근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후 푸코는 『육신의 고백』에서 초기 기독교에서 성과 진리의 관계에 대해 본격적으로 연구하게 되는데, 거기서 그는 클로소프스키나 블랑쇼의 사드론에서 중요한 분석 대상이 된 금욕=수련과 아파테이아의 문제나 처녀성의 문제에 대해 상세히 검토 하게 됩니다.[57] 이러한 기독교적 육신의 경험과의 관계를 염두에 두고 푸코와 그의 동시대인들의 사드론을 다시 읽어보는 것은 푸코의 죽음으로 미완성으로 남겨진 『성의 역사』 프로젝트의 가능한 전개에 대해 생각해보는 데에도 유익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1970년대 중반 이후 푸코가 사드를 언급한 것은 이뿐만이 아닙니다. 푸코는 그가 사망한 1984년 콜레주드프랑스 강의 『진실의 용기』에서 퀴니코스주의의 계보를 추적한 독일 연구자 하인리히 니푸스-프레프슈틴크의 저서 『디오게네스의 퀴니코스주의의 냉소주의ディオゲネスのキュニコス主義のシニシズム』에 대해 언급하면서, 서구에서 퀴니코스주의의 중요한 계기로서 디드로의 『라모의 조카』와 함께 사드를 언급하고 있습니다.[58] 푸코는 『진실의 용기』에서 퀴니코스주의를 대표하는 철학자 디오게네스에게 강한 공감을 표하며 많은 시간을 할애하여 논했는데, 디오게네스와 사드 사이에는 스캔들 중시,[59] 전투적 삶과 연결된 주권적 삶,[60] 그리고 파르레시아의 실천 같은 점에서 공통점을 지적할 수 있습니다. 가장 마지막인 파르레시아에 대해 말하자면, 디오게네스에게서 파르레시아의 실천은 자신의 삶 그 자체와 일체화되는 반면, 사드의 리베르탕들에서 파르레시아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은 '개인 자체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진리의 담론이 보여주듯이, 최종적으로는 리베르탕 자신의 죽음과 일체화된다는 점에서 양자는 대조적이며, 이 또한 파르레시아의 역사적 변천에 대해 생각해 볼 때 흥미로운 지점입니다.[61]
푸코가 말년에 전개한 진리론의 프로젝트가 고대 그리스와 초기 기독교의 진리 개념의 전환을 중시했다는 것은 오늘날 널리 알려져 있는데, 이렇게 보면 사드는 이 두 진리론의 계보를 가교하는 존재라고 할 수는 없을지언정, 두 가지 모두에 관여하는 존재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푸코가 「사드 강연」에서 전개한 욕망과 진리를 둘러싼 고찰은 푸코의 말년 진리론의 전개에 대해 생각해보는 데에도 적지 않은 의미가 있지 않을까, 이렇게 말씀드림으로써 오늘 이야기를 마무리하고자 합니다.
** 아래의 각주는 일본어를 거의 그대로 번역한 것일 뿐이다. 국역본 서지사항으로 대체되어야 한다.
[1] ミシェル・フーコー『フーコー文学講義―大いなる異邦のもの』柵瀬宏平訳、ちくま学芸文庫、二〇二一年、一七四頁[미셸 푸코, 『푸코 문학 강의 : 위대한 이방인의 것』, 柵瀬宏平 역, ちくま学芸文庫, 2011년, 174쪽].
[2] ミシェル・フーコー『〈知への意志〉講義』慎改康之、藤山真訳、筑摩書房、二〇一四年、八頁[미셸 푸코, 『〈지식의 의지〉 강의』, 慎改康之, 藤山真 역,筑摩書房, 2004년, 8쪽].
[3] Cf. 同上、三四−三五頁[위의 책, 34-35쪽].
[4]ミシェル・フーコー『フーコー文学講義―大いなる異邦のもの』前掲邦訳、二四六頁[미셸 푸코, 『푸코 문학 강의 : 위대한 이방인의 것』, 앞의 책, 246쪽].
[5] モーリス・ブランショ『終わりなき対話』Ⅱ、湯浅博雄ほか訳、筑摩書房、二〇一七年、二七〇頁[모리스 블랑쇼 『끝없는 대화』 Ⅱ, 湯浅博雄 외 역, 筑摩書房, 2017년, 270쪽].
[6] Cf.ピエール・クロソウスキー『わが隣人サド』豊崎光一訳、一九七三年、五二頁[피에르 클로소프스키, 『나의 이웃사촌 사드』, 豊崎光一 역, 1973년, 52쪽]。
[7] ミシェル・フーコー『フーコー文学講義―大いなる異邦のもの』前掲邦訳、一七九―一八〇頁[미셸 푸코, 『푸코 문학 강의 : 위대한 이방인의 것』, 앞의 책, 179-180쪽].
[8] Cf.ピエール・クロソウスキー『わが隣人サド』前掲邦訳、三五−三六頁[피에르 클로소프스키, 『나의 이웃사촌 사드』, 앞의 책, 35-36쪽].
[9]ミシェル・フーコー『フーコー文学講義―大いなる異邦のもの』前掲邦訳、一八五頁[미셸 푸코, 『푸코 문학 강의 : 위대한 이방인의 것』, 앞의 책, 185쪽].
[10] ミシェル・フーコー「侵犯への序言」西谷修訳、『ミシェル・フーコー思考集成Ⅰ』筑摩書房、一九九八年、三一四頁[미셸 푸코 「침범에의 서문」, 西谷修 역, 『미셸 푸코 사상집성Ⅰ』, 筑摩書房, 1948년, 314쪽].
[11]ミシェル・フーコー『フーコー文学講義―大いなる異邦のもの』前掲邦訳、一八八頁[미셸 푸코, 『푸코 문학 강의 : 위대한 이방인의 것』, 앞의 책, 188쪽].
[12] Cf.ジョルジュ・バタイユ『エロティシズム』酒井健訳、ちくま学芸文庫、二〇〇四年、一八四頁[조르주 바타유, 『에로티시즘』, 酒井健 역, ちくま学芸文庫, 2004년, 184쪽].
[13] ミシェル・フーコー『フーコー文学講義―大いなる異邦のもの』前掲邦訳、二〇五頁[미셸 푸코, 『푸코 문학 강의 : 위대한 이방인의 것』, 앞의 책, 205쪽].
[14] フリードリッヒ・ニーチェ『ニーチェ全集』第二期第八巻、麻生建訳、白水社、一九八三年、四八〇頁[프리드리히 니체, 『니체 전집』, 제2기 제8권, 麻生建 역, 白水社, 1983년, 480쪽].
[15] Cf.ミシェル・フーコー『〈知への意志〉講義』前掲邦訳、二八七頁[Cf. 미셸 푸코, 『〈지식의 의지〉 강연』, 앞의 책, 287쪽].
[16] ミシェル・フーコー『フーコー文学講義―大いなる異邦のもの』前掲邦訳、一九三頁[미셸 푸코, 『푸코 문학 강의 : 위대한 이방인의 것』, 앞의 책, 193쪽].
[17] ピエール・クロソウスキー『わが隣人サド』前掲邦訳、一二七―一二八頁[피에르 클로소프스키, 『나의 이웃 사드』, 앞의 책, 127-128쪽].
[18] ミシェル・フーコー『フーコー文学講義―大いなる異邦のもの』前掲邦訳、一九四頁[미셸 푸코, 『푸코 문학 강의 : 위대한 이방인의 것』, 앞의 책, 194쪽].
[19] Cf.ジョルジュ・バタイユ『エロティシズム』前掲邦訳、二七八―三三五頁[조르주 바타유, 『에로티시즘』, 앞의 책, 278-335쪽].
[20] Michel Foucault, La sexualité, suivi de Le discours de la sexualité, Paris, EHESS/Gallimard/Seuil, 2018, p. 193.
[21] ミシェル・フーコー『言葉と物』、渡辺一民、佐々木明訳、新潮社、一九七四年、二三〇頁[미셸 푸코, 『말과 사물』, 渡辺一民, 佐々木明 역, 新潮社, 1974년, 230쪽].
[22] ミシェル・フーコー『フーコー文学講義―大いなる異邦のもの』前掲邦訳、二〇八頁[미셸 푸코, 『푸코 문학 강의 : 위대한 이방인의 것』, 앞의 책, 208쪽].
[23] モーリス・ブランショ『ロートレアモンとサド』小浜俊郎訳、国文社、一九七〇年、一八二頁[모리스 블랑쇼, 『로트레아몽과 사드』, 小浜俊郎 역, 國文社, 1970년, 182쪽].
[24] ミシェル・フーコー『フーコー文学講義―大いなる異邦のもの』前掲邦訳、二一六頁[미셸 푸코, 『푸코 문학 강의 : 위대한 이방인의 것』, 앞의 책, 216쪽].
[25] 同上、二一四頁[위의 책, 214쪽].
[26] 同上、二一六頁[위의 책, 216쪽].
[27]ミシェル・フーコー『〈知への意志〉講義』前掲邦訳、一〇〇頁[미셸 푸코, 『〈지식의 의지〉 강의』, 앞의 책, 100쪽].
[28] ミシェル・フーコー『フーコー文学講義―大いなる異邦のもの』前掲邦訳、二一四頁[미셸 푸코, 『푸코 문학 강의 : 위대한 이방인의 것』, 앞의 책, 214쪽].
[29] ピエール・クロソウスキー『わが隣人サド』前掲邦訳、一〇四頁[피에르 클로소프스키, 『나의 이웃 사드』, 앞의 책, 104쪽].
[30] モーリス・ブランショ『ロートレアモンとサド』前掲邦訳、二〇九頁[모리스 블랑쇼, 『로트레아몽과 사드』, 앞의 책, 209쪽].
[31] Cf. Michel Foucault, Histoire de la folie à l’âge classique, Œuvres I, Paris, Gallimard, 2015, p. 593-596.[ミシェル・フーコー『狂気の歴史』田村俶訳、新潮社、一九七五年、五五四―五五七頁[미셸 푸코, 『광기의 역사』, 田村俶 訳, 新潮社, 1975년, 544-557쪽]].
[32] ミシェル・フーコー『フーコー文学講義―大いなる異邦のもの』前掲邦訳、二二八頁[미셸 푸코, 『푸코 문학 강의 : 위대한 이방인의 것』, 앞의 책, 228쪽].
[33] 同上[위의 책]。
[34] Cf.バートランド・ラッセル「指示について」清水義夫訳、『現代哲学基本論文集Ⅰ』勁草書房、一九八六年、四五―七八頁[버트랜드 러셀, 「지시에 대하여」, 清水義夫 역, 『現代哲学基本論文集Ⅰ』, 勁草書房, 1986년, 45~78쪽].
[35] Cf.ミシェル・フーコー『知の考古学』慎改康之訳、河出文庫、二〇一二年、一六八頁[미셸 푸코, 『지식의 고고학』, 慎改康之 역, 河出文庫, 2012년, 168쪽].
[36]ミシェル・フーコー『フーコー文学講義―大いなる異邦のもの』前掲邦訳、二二六―二二七頁[미셸 푸코, 『푸코 문학 강의 : 위대한 이방인의 것』, 앞의 책, 226-227쪽].
[37] Cf.ルネ・デカルト『哲学原理』山田弘明ほか訳、ちくま学芸文庫、二〇〇九年、一〇一―一〇二頁[르네 데카르트, 『철학의 원리』, 山田弘明 외 역, ちくま学芸文庫, 2009년, 101~102쪽]. 이 대목에서 푸코가 제시하는 데카르트의 신에 대한 존재론적 증명은 『철학원리』 제5성찰의 그것보다 『철학원리』 제14부의 그것과 더 가깝다는 점에 대해서는 고이즈미 요시유키(小泉義之) 씨에게 가르침을 받았다.。
[38] ミシェル・フーコー『フーコー文学講義―大いなる異邦のもの』前掲邦訳、二二七頁[미셸 푸코, 『푸코 문학 강의 : 위대한 이방인의 것』, 앞의 책, 227쪽].
[39] Cf. Martial Gueroult, Descartes selon l’ordre des raison, I, Paris, Aubier, 1975, p. 331-384.
[40] イヴォン・ベラヴァル『ライプニッツのデカルト批判』上、岡部英男、伊豆蔵好美訳、法政大学出版局、二〇一一年、七九頁[이본 벨라발, 『라이프니츠의 데카르트 비판』 상, 岡部英男, 伊豆蔵好美 역, 法政大学出版局, 2011년, 79쪽].
[41] ミシェル・フーコー『フーコー文学講義―大いなる異邦のもの』前掲邦訳、二二七頁[미셸 푸코, 『푸코 문학 강의 : 위대한 이방인의 것』, 앞의 책, 227쪽].
[42] 同上、二三一頁[위의 책, 231쪽].
[43] Cf. ミシェル・フーコー『悪をなし真実を言う:ルーヴァン講義一九八一』市田良彦ほか訳、二〇一五年、河出書房新社[Cf. 미셸 푸코, 『악을 행하고 진실을 말하다: 루뱅 강의 1981』, 市田良彦 외 옮김, 1995년, 河出書房新社].
[44]ミシェル・フーコー『〈知への意志〉講義』前掲邦訳、一二七頁[미셸 푸코, 『〈지식의 의지〉 강의』, 앞의 책, 127쪽].
[45] モーリス・ブランショ『ロートレアモンとサド』前掲邦訳、一八二頁모리스 블랑쇼, 『로트레아몽과 사드』, 앞의 책, 182쪽].
[46] ジョルジュ・デュメジル「セルウィウスとフォルトゥナ」、伊東忠夫、高橋秀雄訳、『デュメジル・コレクション2』、筑摩書房、二〇〇一年、四〇三頁[조르주 뒤메질 「세르비우스와 포르투나」, 伊東忠夫, 高橋秀雄 역, 『뒤메질 컬렉션 2』, 筑摩書房, 2011년, 403쪽]. ミシェル・フーコー『〈知への意志〉講義』前掲邦訳、一一二頁[미셸 푸코, 『〈지식의 의지〉 강연』, 앞의 책, 112쪽.]
[47] ミシェル・フーコー『社会は防衛しなければならない』石田英敬、小野正嗣訳、筑摩書房、二〇〇七年、五五頁[미셸 푸코, 『사회는 방어해야 한다』, 石田英敬, 小野正嗣 訳, 筑摩書房, 2007년, 55쪽].
[48] Sade, Histoire de Juliette, Œuvres III, Paris, Gallimard, p.1099. ミシェル・フーコー『フーコー文学講義―大いなる異邦のもの』前掲邦訳、二四〇頁[미셸 푸코, 『푸코 문학 강의 : 위대한 이방인의 것』, 앞의 책, 240쪽].
[49] 同上、二四一頁[위의 책, 241쪽]
[50] 同上、 二四二頁[위의 책, 242쪽].
[51] モーリス・ブランショ『ロートレアモンとサド』前掲邦訳、二一五頁[모리스 블랑쇼, 『로트레아몽과 사드』 앞의 책, 215쪽].
[52] Michel Foucault, Histoire de la folie à l’âge classique, op. cit., p. 596.[ミシェル・フーコー『狂気の歴史』前掲邦訳、五五六頁[미셸 푸코, 『광기의 역사』, 앞의 책, 556쪽]].
[53] ミシェル・フーコー『自己と他者の統治』阿部崇訳、筑摩書房、二〇一〇年、七七頁[미셸 푸코 『자기와 타자의 통치』 阿部崇 역, 筑摩書房, 2010년, 77쪽].
[54] ミシェル・フーコー『フーコー文学講義―大いなる異邦のもの』前掲邦訳、二四七頁[미셸 푸코『푸코 문학 강의 : 위대한 이방인의 것』, 앞의 책, 247쪽].
[55] ミシェル・フーコー『知への意志』渡辺守章訳、新潮社、一九八六年、三〇頁[미셸 푸코 『지식의 의지』, 渡辺守章 역, 新潮社, 1986년, 30쪽].
[56] モーリス・ブランショ『終わりなき対話』Ⅱ、前掲邦訳、二七〇頁[모리스 블랑쇼, 『끝없는 대화』Ⅱ, 앞의 책, 270쪽].
[57] Cf.ミシェル・フーコー『肉の告白』, 慎改康之訳、新潮社、二〇二〇年、二〇五―二三一頁[미셸 푸코, 『육체의 고백』, 慎改康之 역, 新潮社, 2000년, 205-231쪽]. 사드에게서 금욕=수련과 아파테이아에 대해서는 다음을 참조. Cf.モーリス・ブランショ『ロートレアモンとサド』前掲邦訳, 二一八―二二一頁[모리스 블랑쇼, 『로트레아몽과 사드』, 앞의 책, 218-221쪽]. 또한 사드에게서 처녀성의 문제에 대해서는 다음을 참조. Cf.ピエール・クロソウスキー『わが隣人サド』前掲邦訳、一五〇ー一六三頁[피에르 클로소프스키, 『나의 이웃 사드』, 앞의 책, 15~163쪽].
[58] ミシェル・フーコー『真理の勇気』慎改康之訳、筑摩書房、二〇一二年、二四五頁。/ 미셸 푸코, 『진리의 용기』, 慎改康之 역, 筑摩書房, 2012년, 245쪽.
[59] Cf. 同上、二九三―三〇一頁. 사드에게서 스캔들에 대해서는 다음을 참조. Cf. モーリス・ブランショ『ロートレアモンとサド』前掲邦訳、一七九―一八一頁。/ Cf. 사드의 스캔들에 대해서는 아래 참조, 모리스 블랑쇼, 『로트레아몽과 사드』, 앞의 책, 179~181쪽.
[60] Cf.ミシェル・フーコー『真理の勇気』前掲邦訳、三三九―三六五頁。/ Cf. 미셸 푸코, 『진실의 용기』, 앞의 책, 339-365쪽.
[61] 이 점에 대해서는 오지 겐타(王寺賢太) 씨의 지적에서 중요한 시사점을 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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