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年3月31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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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 존재, 픽션
이치다 요시히코
文学、存在、フィクション / 市田良彦
【『푸코 문학 강의 : 커다란 이방의 것(フーコー文学講義──大いなる異邦のもの)』(柵瀬宏平 訳, ちくま学芸文庫, 2021年) 합평회(2022年3月26日) 기록】
1) 존재론과 픽션
오늘의 주제는 60년대 푸코의 문학론을 현재의 관점에서 어떻게 되파악할 것인가이겠지만, 80년대의 이른바 파르레시아론에서 [내 논의를] 시작하는 것을 용서해주시기 바랍니다. 1983년도의 콜레주드프랑스 강의인 『자기와 타자의 통치』는 아시다시피 대체로 고대 그리스에서의 파르레시아 개념을 중심으로 돌고 있었습니다만, 그 마지막 부근인 3월 2일 첫째 시간인데요, 푸코는 1년 동안 자신이 해온 것을 이렇게 정리합니다. 그것은 "진리의 담론의 존재론 l’ontologie ou les ontologies du discours de vérité"이었다고 말입니다. '존재론'을 둘러싼 단수형과 복수형의 차이는 일단 옆으로 치워두고, 그는 곧 이어서 이 '존재론'의 함의를 세 가지로 나눠서 설명합니다(GSA 285/三八〇-三八一).
① "모든 담론, 특히 진리의 담론, 진리진술véridiction은 하나의 실천으로 간주된다."
② "모든 진리는 진리진술 게임에서 출발하여 이해된다."
③ "모든 존재론은 픽션으로서 분석된다." (강조는 인용자)
세 가지를 테제 식으로 바꿔 말해봅시다.
테제 ① 내가 묻는 담론은 "진실을 말한다 dire vrai"는 '언어 행위 speech act'이다.
테제 ② 진리는 게임을 통해 확정된다.
테제 ③ 존재론은 픽션이다.
푸코의 저작에 어느 정도 친숙한 사람들은 ①과 ②의 바꿔치기에 그다지 위화감을 품지 않을 것입니다. 갑자기 '언어 행위 speech act'라는 영미적 어휘를 꺼내는 것은 '조금 그렇네'라는 생각이 들 수도 있겠지만, 69년의 『지식의 고고학』에 이르는 과정에서 푸코가 오스틴에서 시작되는 언어행위론, 분석철학에 깊이 탐닉했다는 것은 오늘날 잘 알려진 사실이며, 비트겐슈타인의 '언어 게임' 개념을 푸코가 자기 나름대로 변주하여 그 후 언제라도 이용할 수 있는 것[自家薬籠中のもの]으로 삼았다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런 점에 대해서는 더 파고 들면 흥미로운 논점도 많이 있지만, 여기서는 건들지 않겠습니다. 주목하고픈 것은 세 번째입니다. 존재론이 픽션이라고? 상당히 갑작스럽다는 울림을 갖지 않나요? 하이데거는 온갖 거짓말만 늘어놓았다고 말하는 것일까요? 푸코가 이 독일 철학자에게 깊은 영향을 받았다는 것도 주지의 사실이기 때문에, 여기서 픽션이라는 단어를 꺼내는 의미를 독자로서는 아무래도 이렇게 짐작하게 됩니다. 푸코는 생애 마지막에 하이데거와 결별하려 한 건가? 『자기와 타자의 통치』만 쫓아온 눈에도 픽션이라는 단어는 갑작스럽습니다.
이 강의에서 푸코가 이 단어를 꺼내는 것은 여기뿐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그가 여기서 무엇을 언급하고 있는지, '픽션'이라고 입에 담음으로써 '존재론'을 무엇과 연관시키려 하는지는 명백합니다. 지난 1년 강의에서는 실제로 하나의 픽션 작품이 분석의 도마에 올랐기 때문입니다. 파르레시아라는 단어를 그리스어 문헌에 처음 등장시킨 에우리피데스의 희곡 『이온』입니다. 이것이 오늘 이야기의 안내 실이 됩니다. 테제③을 이렇게 뒤집고 싶은 거죠. 픽션은 존재론을 포함하고 있다. 『이온』이라는 문학작품은 하나의 존재론으로 읽힌다. 이렇게 뒤집어보면 60년대 문학론이 푸코의 행보에서 가진 의미가 절로 떠오르는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픽션은, 정확히 말해서 픽션이 무엇인가라는 질문은 60년대 문학론에서 큰 주제였기 때문입니다. 원저가 2013년에 간행된 『문학강의』와 이보다 6년 후에 간행된 미교정 원고와 강연을 모은 『광기, 언어, 문학』을 합쳐 읽으면, 그 점은 더욱 분명해집니다. 그렇다면 푸코는 1960년대에 문학과의 격투를 통해 얻은 시각과 분석 도구를, 파르레시아론에서, "자기와 타자의 통치"라는 주제의 분석에서, 더욱이 그 나름의 "존재론"에서 살려내고 있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요? 적어도 앞서 말한 1983년 3월 2일의 정리는, 그렇게 생각하도록 우리에게 촉구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과연 만년(晩年)에 이르러서의 일종의 회귀일까요? 아니면 청년기 사색의 업데이트인가요? 어쨌든 60년대 푸코의 문학론에는 그의 작업 편력에서의 연속성과 변화를 다시 생각하게 할 성 싶은 것이 제 눈에는 보입니다.
문제는 80년대와 60년대의 관계뿐만이 아닙니다. 『문학강의』에 수록된 사드에 대한 두 개의 연속 강연은 1970년 3월에 이루어졌습니다. 콜레주드프랑스 강의는 같은 해 12월에 시작되어 71년 3월까지 첫해 강의 『〈지식의 의지〉 강의』가 계속되었습니다. 70년대 푸코, 즉 잘 알려진 말투를 원용하여 <지식-권력>savoir-pouvoir의 푸코라고 해 두지만, 그 <지식-권력>의 시대의 개막을 알린 강의의 마지막회는 소포클레스의 유명한 비극 『오이디푸스 왕』 독해에 할애하고 있습니다. 불행하게도 책으로서의 『〈지식의 의지〉 강의』는 푸코의 준비 노트의 재수록일 뿐이고, 마지막 회의 내용은 유난히 단편적이어서 그가 너무 알려진 이 비극을 어떻게 읽었는지에 대한 자세한 내용을 추적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마지막 회로부터 1년 후 1972년 3월 뉴욕에서 행한 강연 「오이디푸스의 지식」이 거의 이 마지막 회 강의 내용과 겹칠 것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사드 강연과 이 「오이디푸스의 지식」을 나란히 읽어보면, 나중에 말씀드리겠지만, 분석의 골격이 기본적으로 똑같습니다. 그렇다면 60년대 문학론의 마지막과 70년대 <지식-권력>론의 처음은 보기 좋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60년대부터 80년대까지 푸코는 기본적으로, 아니 조금도 변하지 않은 것이 아닐까? 라는 생각마저 듭니다.이런 관점에서 오늘은 말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83년 3월에 말한 '존재론'에 대해 조금 보충하겠습니다. "진리의 담론의 존재론"이라고 여겨지는 파르레시아 문제와 그 세 번째 함의에서 이른바 '존재론' 일반에 대한 언급을 인식할 수 있다는 두 가지 점에 대해서입니다. 존재론이라는 문제가 '무엇이 있는가', '있다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를 논하는 논의라면, 푸코는 여기서 존재론을 그 나름의 방식으로 종별화하고 있습니다. 즉, 존재론이란 "무엇이 진정으로[정말로] 있는가"를 둘러싼 논의이며, 어떻게 진위를 가려내는가라는 물음을 담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정식화에 따른 테제①과 ②를 묶으면, 진위의 구별은 각자가 참이라고 믿는 담론을 서로 던지고 교환하는 게임을 통해 집단적으로 행해집니다. 바꾸어 말하면 진리는 게임의 '바깥', 언어 외적인 장소에 미리 있는 것이 아니라, 게임의 결과 내지 효과로서 성립합니다. 하지만 진리진술을 문제 삼는다고 ①은 말하고 있기 때문에, 진리는 이 게임을 어떤 의미에서 처음부터 통제하기도 합니다. 어쨌든 푸코의 존재론은 "무엇이 진정으로[정말로] 있는가", 그 "진정으로[정말로]"는 어떻게 확정되느냐는 물음에 일단 게임을 통해서라고 대답합니다. 게임에는 규칙이나 절차가 있을 것입니다. 없으면 그것을 게임이라고 부를 수 없습니다. 존재론을 픽션과 등치하는 테제③은 이 규칙이나 절차를 픽션에서 보고 있는 것입니다. 좀 더 정확하게 말하면, 픽션이 픽션으로서 성립하는 메커니즘에, 푸코는 "진정으로[정말로] 있다"를 성립시키는 절차를 포개고 있는 것이 됩니다. 픽션이란 문자 그대로 픽션, 즉 실재하지 않는 비현실적인 것이기 때문에 푸코적 존재론의 기묘함étrangeté을 아실 거라고 생각합니다. La grande étrangíre, "커다란 이방의 것"이라는 『문학강의』의 원제는 물론 '문학'을 가리키고 있습니다만, 저로서는 "진정으로[정말로]"는 "없다"고 할 것을 "있다"로 하는, 이렇게 드러내는 메커니즘을 존재론과 포개는[중첩시키는] 푸코적 존재론이 étrangíre인 것처럼 보입니다. 왜냐하면 소위 존재론은 '있다'의 의미를 여러 가지로 살펴보거나, 그것이 일의적인지 다의적인지를 논하더라도, '없다'가 '없는' 채로 '있다'가 되는 절차 procédure 등은 문제 삼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 문제의식은 저의 견강부회나 조작(捏造)이 아닙니다. 푸코는 1978-79년도 강의 『생명정치의 탄생』에서, 그때까지의 자신의 작업을 되돌아보면서, 그것들을 관통하는 물음을 이렇게 정리하고 있습니다. "어떤 간섭작용에 의해 일련의 실천이 존재하지 않는 것(광기, 병, 비행성, 섹슈얼리티 등)이 여전히 존재하지 않으면서도 무엇인가가 될 수 있게 했는가." 즉 "나"는 광기나 비행성이나 섹슈얼리티를 픽션으로 취급해 왔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른바 존재론은 '없다'와 '있다' 사이에 배중률을 두거나 '창조 création'를 보고 있습니다. 거기에 절차로 연결될 여지는 없습니다.혹은 '없다'를 '그때까지 없었다'로 대체하여 양자 사이에 오래된 것에 의한 새로운 것의 '생산 production'이라는 관계를 다시 설정합니다. '생산'이라면 확실히 절차를 문제 삼을 수 있겠지만, 그것은 이미 '없다'에서 '있다'로의 이행 절차가 아닙니다. 푸코의 존재론은 이러한 존재론의 어느 것과도 다릅니다. 그가 문제 삼고 싶은 '있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 '있다'가 되어도 '없는' 채입니다. 이행이라고 해도 매우 étranger한 상태[로의] 이행일 것입니다. 바로 픽션의 성립기제를 묻고 있습니다. 진위의 구별과 관련지어 말하면 가짜가 가짜인 채 참으로 통용되는, 거짓말이 그대로 진짜로[정말로] 되는 과정을 묻는 것입니다. 그래서 역시 철학으로서는 grande étrangíre일 것입니다.
절차procédure와 같은 계열의 단어에 procédé가 있습니다. 흔히 '수법'으로 번역됩니다. 1963년에 간행된 「레몽 루셀」에서의 키워드이며, 『문학강의』에도 『광기, 언어, 문학』에도 빈출합니다. 문학 영역에서는 즉, 작품을 쓰는 '수법[기법]'을 가리킵니다. 다시 한 번 지적할 필요는 없겠지만 procédé에 대한 푸코의 관심은 루셀의 『나는 어떻게 모종의 책을 썼는가』에서 유래합니다. 오늘은 푸코의 루셀론에는 깊이 들어가지 않지만, 다음 사항만은 확인해 두어도 좋을지도 모릅니다. 작가 본인의 손으로 죽음 직전에 밝혀진 '수법'은 한층 창작의 비밀의 폭로가 된 것일까? 그것이 『레몽 루셀』을 관통하는 존재론적 물음입니다. 루셀에게서의 '있다', 그의 작품이 '있다'는 것은, 밝은 곳으로 꺼내는明るみのもとに出す 알레테이아와는 본질적으로 이질적이라는 것을 그의 '수법'은 말하고 있지 않는가? 라는 셈입니다. '광기란 작품의 부재다'라는 푸코의 테제를 상기해 주었으면 한다. 그는 '수법'의 폭로로 작품을 한층 수수께끼로 만들지 않았는가, 창작의 진실을 이야기함으로써 한층 독자를 진실에서 멀어지게 하지 않았는가. 진리를 바로 픽션으로 만들지 않았는가. 그러한 절차 procédure가 procédé의 폭로였다, 라고 푸코의 루셀론을 일단 어디까지나 난폭하게나마 요약하는 것은 허용된다고 생각합니다.
눈을 오이디푸스론으로 돌려보죠. 푸코는 소포클레스의 비극에 대해 무려 6차례나 공개석상에서 논하고 있습니다만, 1971년부터 83년까지 그 모든 글에서도 가장 큰 키워드는 procédure입니다. 정확히 말하면 procédure judiciaire, '사법절차'입니다. 자세한 내용은 나중으로 돌리겠지만, 이 절차의 결과에 대해서는 말할 필요도 없을 것입니다. 물론 픽션의 성립 등이 아니라 그것과는 오히려 정반대라고 해야 할, 오이디푸스야말로 아버지를 죽인 범인이라는 진리의 확정입니다. 거짓말을 진실로 만드는 절차 등이 아닙니다. 즉 존재론을 둘러싸고 우리가 끄집어낸 세 가지 함의, 테제 중 처음 두 가지에 대응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대응시키면 푸코적 존재론의 또 다른 étrangeté 또한 떠오릅니다. 진리진술, '진실을 말하다'가 'speech act'를 이룬다고 할 때, 이 희곡에서는 도대체 누가 그런 acte를 실행하고 있을까요? 신 혹은 예언자일까요? 그들이 말한 것은 결과적으로는 진실이었다고 판명되지만, 그것이 진실이라고는 오이디푸스도 시민도 믿지 않기 때문에, 즉 신과 예언자의 speech act는 일단 실패하기 때문에 오이디푸스에 의한 사법절차가 개시되었을 것입니다. 그것이 드라마의 축을 이루었을 것입니다. 『오이디푸스 왕』에서 그 진리 진술이 곧 speech act가 되는 것은 마지막에 등장하는 두 노예뿐입니다. "나는 보았다, 했다"는 그들의 증언만이 acte juridique로서의 speech act를 구성합니다. 무슨 말인지 잘 모르겠다고 생각하실 수도 있지만, 제가 무슨 말을 하고 싶냐 하면, 푸코는 여기서 자신의 입장을 영미식 언어행위론으로부터 구별하고 있는 것 같다는 것입니다. speech act가 speech act가 되는 '절차'를 문제 삼고 있는 것이니까요. 오스틴이나 설의 언어행위론이 그런 것을 문제 삼았을까요? 여기서 자세히 서술할 여유는 없지만, 거기서는 발화의 언어 외적인 '상황'과 '규약 conventions'이 문제였을 것입니다. 이치다 요시히코가 지금 여기서 "국가 총동원령을 포고한다"라고 발언해도, 유효하지 않다, 그것이 그들의 언어 행위론의 기본일 것입니다. 거기서의 '게임의 규칙'은 '절차'상의 '규칙'이 아닙니다. '법' 너머에 있는 '사회계약' 같은 것입니다. 즉 '항상 이미 있는' 것입니다. 그에 반해 푸코가 읽는 『오이디푸스 왕』에서는 절차를 밟는 것 그 자체가 규칙을 이룹니다. 그것도 규칙의 정당성은 게임의 마지막에만 증명됩니다. 거기에 비극의 근간이 있습니다. Speech act=acte de parole[발언행위, 발화행위, 언어행위]를 그 자체로 acte juridique ―― 판사의 판결 같은 것입니다 ―― 로 간주하는 언어행위론에 procédure judiciaire ―― 소송절차 같은 것입니다 ―― 는 필요없습니다. 뭐랄까, 개입의 여지가 없습니다. 푸코와의 사이에 상호 영향관계가 있었다고 생각되는 오스왈드 뒤클로라는 언어학자, 설의 프랑스어 번역자이기도 한 이 언어학자는 실제로 언어행위를 그대로 acte juridique로 간주할 것을 주장합니다. 그래서 푸코적 존재론은 영미 언어행위론의 영향을 많이 받고 있지만, 역시나 그것과는 매우 이질적입니다. 그의 존재론이 언어행위론, 언어게임론인 것은 틀림없지만, 크게 étrange입니다.
2) 렉시스와 렉톤
드디어 픽션론에 대한 검토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제가 오늘 발표의 실질적인 내용으로 여러분 앞에 피력하고 싶은 분석은 사실상 다음 그림에 대한 분석뿐입니다. 『광기, 언어, 문학』 원저 232페이지에 있습니다. 오른쪽 일본어 부분은 제 추가입니다. 그림은 1967년에 작성된 것으로 추정되는 노트에서 볼 수 있습니다.

'픽션'이 아닌 다른 단어는 오늘 이야기에 처음 등장하는데요, '페이블[파블, fable]'은 익숙한 단어일 것입니다. '우화'나 '이야기'로 번역됩니다. 하지만 픽션과 어떻게 다를까요? 그것이 우선 문제입니다. 그리고 '렉시스'와 '렉톤'은 푸코의 독자들에게는 생소한 단어일 것입니다. 둘 다 그리스어로, 오늘 이야기에서는 이른바 조연입니다. 푸코는 1966년에 « L’arrière-fable »이라는 쥘 베른을 다룬 논문을 썼습니다. '페이블의 뒤편[배후]'이네요. 논문에서는 이 '뒤편[배후]'을 이루는 것을 픽션이라고 정의하고 있습니다. 논문에서는 그러나 이 페이블[파블, fable]과 픽션의 전후 관계 자체에 대해서는 서두 부분에서 잠깐 언급되어 있을 뿐입니다. 이렇게 정의한다, 라고 꽤 추상적인 말로 이야기하고 있을 뿐입니다. 렉시스나 렉톤이라는 단어도 등장하지 않습니다. 아마 푸코에게도 아직 불충분하고 소화되지 않은 주제였을 것입니다. 그래서 베른론을 쓴 후에 여러 가지 시행착오를 거쳤을 것입니다. 그 결과가 67년 노트였겠죠. 그 베른론의 서두 부분을 일단 인용하겠습니다.
"서사récit의 형식을 가진 모든 작품에서 페이블[파블]과 픽션을 구별해야 한다. 페이블[파블]이란 이야기된raconté 것이다(에피소드, 등장인물, 그들이 서사에서 수행하는 기능, 사건). 픽션이란 régime du récit이다. 혹은 오히려 récit이 그것에 따라 réciter되는 다양한 régimes이다. 즉, 화자가 자신이 말하는 것에 대해 취하는 posture(그는 aventure에 속해 있는지, 조금 후퇴한 곳에서 관객으로서 aventure를 바라보고 있는지, aventure의 바깥에 배제되어 있는지, 외부에서 aventure를 surprendre[감시]하는지) 객관적 기술(記述)을 맡아 사물이나 인물을 통람(通覧)하는 중립적 시선의 있음/없음(…). 페이블[파블]은 일정한 순서로 배치되는 요소로 이루어진다. 픽션은 말하는 자와 그가 그것에 대해 말하는 것 사이에 설정되는 관계들의 trame이다. 픽션이란 페이블[파블]의 « aspect »이다」(DE 1, 506/『思考集成』II三一六).
페이블[파블, fable]이란 일단 누가 어떻게 무엇이 일어났다, 이렇게 나중에 요약할 수 있는 이야기의 골격으로 이해해 둡시다. 픽션 쪽에 대해서 푸코는 여러 곳에서 조금씩 이야기하는데, 베른론의 이 서두 부분과 관련해서 픽션을 알기 쉽게 설명하고 있는 구절을 『문학강의』에서 인용해 봅시다.
"작품은 도대체 언제 문학이 되는 것일까? 작품의 역설은, 작품이 문학으로 되는 것이 작품이 시작되는 바로 그 순간뿐이라는 것(첫 문장, 한 장의 백지에서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아마 문학이 진실로[진정으로] 문학인 것은 이 순간, 이 표면에서일 뿐입니다〔…〕"(100).
『광기, 언어, 문학』을 참조하면 이 주장은 오스틴의 언어행위론과의 대비에서 말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흔히 '담화 분석'으로 번역되는 유형의 '담론 분석'과의 대비가 푸코로 하여금 '백지' 운운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담화'에서 푸코는 어떤 곳에서 티테이블 주변에서 이루어지는 수다 같은 희화화를 하고 있는데, 발화 주체와 발화의 '지금 여기'가 언어 외적이고 자명하게 존재합니다. 그런데 백지에 갑자기 글을 쓰기 시작하는 문학에서는 그런 '바깥'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발화 주체가 누구인지, 그는 어떤 상황에 놓여 있고, 어떤 태세[자세]posture로 대화에 임하고 있는지 전혀 알 수 없습니다. '첫 문장'의 '바깥'은 '백지'입니다. 즉 언표에 언어 외적 상황, 대응하는 '현실'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문학은 먼저 '픽션'이라고 특징지어지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 '첫 문장'인 언표는 글로 쓰이다/내뱉어지다에 의해, 반드시 어딘가에 발화 주체와 그 상황, 그의 posture를 만들어내지 않을까요? 알기 쉬운 예로 푸코는 『광기, 언어, 문학』에서 플로베르 『감정교육』의 첫 문장을 들고 있습니다(257). « Le 15 septembre 1840, vers six heures du matin, la Ville-de-Montereau, près de partir, fumait à gros tourbillons devant le quai Saint- Bernard. » 플로베르는 '말하는 주체'를 1인칭 '나'로 등장시키지 않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쓰는/말하는 누군가는 반드시 어딘가에 있다고 독서 쪽은 받아들입니다.이를테면 등장하지 않는 부재의 발화 주체에 자신을 포개놓으면서, 소설을 읽어 나갑니다. 이해합니다. 『광기, 언어, 문학』에서 인용합니다.
"픽션이란 담론의 내부에 마치 구덩이creux에 있는 것처럼 언표를 조직하고 구조화하는 언어 외적인 것을 정의하는 acte이다. 혹은 오히려, 그러한 actes의 집합ensemble이다"(253, 강조 인용자).
앞의 « L’arrière-fable »의 첫머리 부분에 대한 좋은 설명이 될 것입니다. '백지[빈 페이지]' 위에 놓인 '첫 문장' 이후, 소설이 어떻게 [전개]될지, 어떤 페이블[파블, fable]이 이야기될지에 대해서는 전혀 불분명하다고 할까, 무한한 가능성이 허용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픽션에 대해서는 또 이렇게 말하기도 합니다. "말해야 할 것들의 무한정한 덩어리masse인 '담론의 우주'와 récit(유한)의 요소로 이루어진 페이블[파블, fable] 사이에 픽션은 있다"(253). 픽션은 따라서 '체(篩), tri'(255)라고 푸코는 간결하게 적고 있습니다. 앞의 régime에 해당하는 표현이겠지요. 이것으로 앞의 그림에서 첫 번째 화살표, 픽션과 페이블[파블, fable]의 전후 관계에 대해서는 일단 알았다고 칩시다.
그 다음으로 두 번째 화살표, 페이블[파블, fable]에서 렉시스로 이어지는 화살표인데요, 애초에 렉시스는 무엇일까요? 푸코의 다른 문헌이나 그가 참조한 것으로 보이는 저작을 대충 살펴봤지만, 두 번째 화살표에 대한 설명이 될 만한 것을 찾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철학사에서 잘 알려진 것인데요, 렉시스와 렉톤을 대비시켜 논한 것은 스토아파입니다. 두 단어를 정의하고 있는 대목을 『초기 스토아파 단편집(初期ストア派断片集)』(제2권, 교토대학 학술출판회, 2002)에서 가져옵시다.
"참된 것은 명제이고 명제는 렉톤이며 렉톤은 비물체이다"(140)
"렉시스란 <문자로 언표할 수 있는 음성>이다"(148).
보충하자면, '진리' 자체는 '참된 것을 서술하는 지식' 혹은 '영혼의 주도적 부분 양태'로서 '물체'라고 규정됩니다. 또 음성은 '물체적'으로 간주됩니다. 렉시스의 물체성, 물질성과 렉톤의 이념성이 대립하고 있다고 해도 좋을 것입니다. 아리스토텔레스에도 등장하는 렉시스는 프랑스어 문헌에서는 보통 « mot »라든가 « expression »으로 번역됩니다. 렉톤 쪽은, 이 단어가 아리스토텔레스도 나오는지 모르겠지만, 스토아파를 논하는 문맥에서는 흔히 « exprimable »로 번역됩니다. 혹은 단순히 « ce qui est dit »로 번역됩니다. 『광기, 언어, 문학』 수록 노트에서 두 관계를 가장 간결하게 기록하고 있는 부분을 살펴봅시다.
« La position du sujet parlant, dont le repérage, les déplacements constituent, par rapport à ce qui est dit (lekton), la lexisde l’œuvre. » (232)
'말하는[발언하는] 주체'의 position이란 앞서 봤던, 문학이 '첫 문장'에 의해서 만들어 버리는, 움푹 파인 '구덩이', 언어 외적인 장소place나 태세posture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것을 노트에서는 '작품의 렉시스'라고 정의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말하자면, 문자로는 표현되지 않은 바로 언어 외적인 장소이기 때문에, 그것을 '단어'나 '표현'이라는 의미의 '렉시스'라는 단어로 지시하는 것은 아마 푸코에게 독자적인 것입니다. '렉톤'은 통상적인 해석대로 « ce qui est dit »로 규정되어 있습니다만,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앞서 본 « L’arrière-fable »의 서두 부분에서의 페이블[파블, fable]의 정의인 « ce qui est raconté »와 거의 같다고 할까, '말한 것' ――이라고 굳이 일본어로 말합니다 ―― 이 « ce qui est dit »-lekton과 « ce qui est raconté »-fable로 이중화되어 있다는 점입니다. 렉톤이 비물체적, 이념적이라는 스토아파의 규정을 감안하면 다음과 같이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누가 어떻게, 무엇이 일어났다는 형태로 '이야기되는' 페이블[파블, fable]은 뭔가 다른 이념적 수준에 있는 렉톤의 '우화=페이블[파블, fable]'이다. 페이블[파블, fable]은 렉톤을 이야기에 포함된 '참[진실]'으로서 이야기한다. 이 이해를 푸코에게서 정당화해 줄 것 같은 페이블[파블, fable]의 용법을 발견할 수 있는 것이, 실은 『〈지식의 의지〉 강의』와 「오이디푸스의 지식」에서의 오이디푸스론입니다. '오이디푸스의 페이블[파블, fable]'이라는 표현을 그는 씁니다. 그리고 그것은 '진리의 페이블[파블, fable]'이라고 생각합니다. '지식'에 의해 왕이 되는 인물이 자신이 설치한 덫 ―― 그것이 '사법 절차'입니다 ―― 에 걸려서 추방당하는 비극에 대해 우리로서는 이렇게 말해도 좋을 것입니다. 푸코는 『오이디푸스 왕』을 '지식'과 '권력'이 분리되어 연결된 savoir-pouvoir의 '페이블[파블, fable]'로 읽고 있습니다. 〈지식-권력〉이 『오이디푸스 왕』에서 푸코가 읽어낸 렉톤입니다. 저로서는 이야기를 선취해서 이렇게도 말하기도 합니다. 푸코는 사드의 『新 쥐스틴』을 '욕망'과 '진리'가 분리되어 연결돼 있음을 렉톤으로서 가진 페이블[파블, fable]로 읽는다고.
이야기를 그림으로 되돌립니다.푸코는 아무래도 '말한 것'을 페이블[파블, fable]과 렉톤으로 이중화하는 역할을 렉시스에서 보는 것 같습니다. 그것을 나타내는 대목을 같은 노트에서 인용합니다.
"렉시스는 (픽션과 마찬가지로) 그대로 작품이나 담론의 요소가 아니다. 그것들은 고유한 물질적 시니피앙을 가지고 있지 않다. 물질적 시니피앙에서 출발해야만 분석 가능함에도 불구하고. […] 렉시스는 종종 그것에 고유한 redoublement 상태에 있다. [말하는] 주체가 représenter된다는 이중화다. […] 이 주체는 항상 근본적으로 absent임에도 불구하고, 페이블[파블] 안에는 항상 présence의 양태가 있다"(232).
즉 푸코적 렉시스는 작품 속의 '단어'나 '표현'이 아닙니다. 하지만 언어 바깥의 어딘가에서 작품 속의 담론을 이야기하는 주체로서 작품 속에 있습니다. 문학작품에서 그런 '말하는 주체', 플로베르의 『감정교육』의 첫머리의 문장에도 있는 '주체'가 푸코의 렉시스입니다. 담론이 전개됨에 따라, 페이블[파블, fable]은 혼자이거나 복수이거나 하는, 또 여러 가지 '지금·여기'를 그때그때 가지고 있는 '주체=렉시스'를, 즉 부재하는 '말하는 주체'를, 담론의 '구덩이' 속에 존재하게 합니다. 이것이 그림의 두 번째 화살표가 의미하는 바일 것입니다. 그리고 세 번째 화살표입니다, 이 absent하고 présent한 주체가 작품의 진실, 렉톤을 이야기합니다. 스토아파의 렉시스-렉톤 관계를 푸코는 이런 식으로 바꿔 읽고 있습니다. 스토아파에서는 단지 물체적, 물질적일 뿐인 렉시스에 물체적이고 비물체적인, 물질적이며 비물질적인 성격을 갖게 하는 것입니다. 참고로 푸코의 기간행 문헌 중 렉시스의 용례를 발견할 수 있는 것은 『광기, 언어, 문학』에 수록된 두 개의 노트뿐입니다만, 렉톤 쪽은 스토아파에 대한 언급과 함께 『〈지식의 의지〉 강의』에 딱 한 번 등장합니다.
렉시스에 대한 이런 독자적인 해석을 푸코는 어디서 얻었을까요? 렉시스-렉톤의 짝이라고 하면 스토아파인데, 렉시스에 대한 이해만 스토아파와는 사뭇 다릅니다. 이것은 그의 독창적인, 어떻게 보면 무모한 해석일까요? 설사 그렇다 하더라도, 그것은 그리스어 해석의 문제이며, 어떤 출처가 있을 것입니다. 그렇게 생각해서 저는 한동안 희미한 문헌을 탐색하다가 딱 한 가지를 발견했습니다. 『〈지식의 의지〉 강의』에서 주제적으로 다루고 있는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입니다. 강의에서는 언급되지 않았지만 푸코는 『형이상학』 2권 2장의 다음 문장에 눈길이 멈췄을 것입니다. 프랑스어 번역본을 일본어로 옮기겠습니다.
"« homme un »와 « homme étant »와 « homme »는 실제로는 같은 말이다. 즉, 〈인간이란 인간이며 한 명의 인간이다.〉 렉시스에서 이러한 redoublement는 어떤 차이도 나타내지 않는다"(Γ2 1003b27).
확실히 렉시스에서의 '이중화 상태'를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한 문장을 주석하고 있는 현대의 연구자도 지적하듯이, 아리스토텔레스는 여기서 렉시스에 대한 불신감, 경계를 말하고 있다고 할 것입니다. '단어'의 수준에서는 소피스트들처럼 여러 가지로 말할 수 있지만, 그 대부분에 실질적 의미가 있는지 의심스럽다는 불신감입니다. 푸코는 즉 아리스토텔레스가 경계하는 렉시스의 본성을 그대로 긍정적으로 파악하여 픽션론으로, 아니 문학은 우선 픽션으로 이해되어야 한다는 문학 파악에 유용[전용]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에 대한 이러한 역방향의 활용은 『〈지식의 의지〉 강의』에서 자주 볼 수 있는데, 여기서는 주제에서 벗어나므로 지적만 해두겠습니다. 어쨌든 푸코의 렉시스-렉톤 관계와 그 문학론으로의 도입이 스토아파에 비추어 볼 때나 아리스토텔레스에 비추어 볼 때나 크게 étrange하다는 것은 확실합니다.
어쨌든 렉시스-렉톤 관계에 의해 이중화된 픽션-페이블[파블, fable] 관계에서는 페이블[파블, fable]이 렉시스를 통해 렉톤을 이야기의 '참[진실]'으로 이야기합니다. 정확히는 페이블[파블, fable]은 부재의 주체인 렉시스로 하여금 렉톤을 이야기하게 합니다. 쥘 베른의 경우, 앞의 논문「페이블[파블, fable]의 배후[뒷편]」를 참조하면, 그의 과학소설에서의 레톤은 '엔트로피와의 투쟁'이거나 '인간의 무지'일 것입니다. 이른바 테마 비평이 작품의 '테마'로 꺼내려 했던 것을 푸코는 렉톤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렉톤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지는 않았지만 '테마'에 대해서는 언급하고 있습니다. 『2년 동안의 휴가』라면 "민주주의 국가의 건설"이 소설=페이블[파블, fable]의 렉톤일지도 모릅니다.
3) '진리의 페이블[파블, fable]'
여기서 비로소 푸코의 오이디푸스론으로 들어갈 수 있는데,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그는 이 비극이 '진리의 페이블[파블] fable de lavérité'이라고 생각합니다. 오이디푸스의 페이블[파블]은 진리의 페이블[파블]이라고. 어딘가 이상하지 않나요? 이것저것의 구체적 진리, 이것저것인 진리 ―― 베른이라면 '엔트로피와의 투쟁' ―― 가 아니라 진리인 것, 진리라는 것의 페이블[파블]입니다. 즉, 렉시스-렉톤 관계라는 구도하에서 '진리' 그 자체를 읽어내려 하고 있습니다. 서사의 '참[진리]'인 렉톤이 아니라 '진리'라는 렉톤, 렉톤으로서의 '진리'를 분석하려 합니다. 그 경우 『오이디푸스 왕』에서 렉시스는 무엇 혹은 누구일까요? 혹은 누가 '진리'라는 렉톤을 말할까요? '노예'가 아닙니다. 노예는 등장인물이며, 그들이 말하는 « je »는 서사의 외부, 담론 속에 부재하는 장소, '구덩이'에서 말하는 '주체'가 아닙니다. 렉시스의 푸코적 정의에서 보면 『오이디푸스 왕』에서 그런 주체는 분명합니다. 신 아폴론입니다.
저로서는 그리스의 신들이야말로 렉시스의 모델이라고 말하고 싶을 정도입니다만, 어쨌든 『오이디푸스 왕』에서 아폴론은 직접 말을 뱉는 주체로 등장하지는 않지만, 신탁과 예언을 통해 전해지는 그의 말 ―― "죄인을 벌하라"라는 명령, 즉 사법진술과 "범인은 오이디푸스이다"라는 진리진술의 두 가지입니다 ―― 이 이야기를 앞으로 나아가게 하는 추진력이 되고 있습니다. 아폴론은 희곡 속에서 "늘 근본적으로 absent함"에도 불구하고 그는 페이블[파블] 속에서 '늘 présence의 양태'를 갖고 있습니다. 저는 앞에서 푸코에게 『오이디푸스 왕』은 진리를 확정하는 절차procédure의 드라마라고 말했습니다. 즉, 『광기, 언어, 문학』 노트에 있는 그림의 세 번째 화살표인 렉시스에서 렉톤으로 이어지는 선을 푸코는 일련의 '절차'로 분해하려고 하는 것 같습니다. 렉시스가 렉톤을 이야기하고, 낳고, 존재하게 하는 메커니즘을 『오이디푸스 왕』에서 보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희곡에서 렉톤은 어떤 양태로 '있는' 것일까요? 아폴론의 'présence의 양태' ―― 신탁과 예언입니다 ―― 에 해당하는, 진리=렉톤의 '양태'는 어떤 것일까요? 푸코는 그것을 명확하게 규정[同定]하고 있습니다.코로스의 다음 대사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예언자[점쟁이]의 말이 옳았다는 것을 알기 전까지는 비난하는 자들에게는 결코 동의하지 않을 것이다.
그리스어 원문에는 '올톤 에포스 ὀρθὸν ἔπος'라는 어구가 포함되어 있는데, 그것이 희곡에서 렉톤의 존재양태라고 푸코는 간주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이 그리스어를 그는 « parole juste » 혹은 « parole droite »로 번역하는데, 로브고전총서의 영어 번역이 문맥상의 뉘앙스를 보존하고 있는 것입니다. 즉, « the saying made unmistakable »입니다. 시민의 대표인 코로스는 오이디푸스가 라이오스를 죽인 범인이라는 예언자의 진리진술을 증거에 의해 unmistakable이 될 때까지 믿지 않는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진리진술은 일정한 절차를 거치면 사법진술 « parole juste » / « parole droite »이 됩니다. 사법진술은 '죄인을 벌하라'는 양태로 이미 주어져 있지만, 절차를 거쳐 진리진술과 합치하지 않으면 action juridique로 기능하지 않는 것입니다. '부재'하면서 '존재'하는 신의 말은 절차를 거쳐야 유효한 판결로서의 speech act가 됩니다. 오이디푸스의 추방입니다.
그 절차를 푸코는 「오이디푸스의 지식」 이후 줄곧 변함없이 '절반의 게임[반쪽짜리 게임]'이라고 불렀습니다. 도자기 조각을 반으로 쪼개어 메시지 수신자에게 따로 보내고, 수신자의 손에서 두 조각이 빈틈없이 합치하면 메시지가 진짜라는 고대 그리스의 풍습에 준거합니다. 사법진술과 진리진술이 그 두 가지의 절반[반쪽]입니다. 게임의 세부 사항에 대해서는 여기서 언급하지 않겠지만, 어쨌든 ① 둘로 나누고, ② 합치를 방해하는 것처럼 보이는 '들쭉날쭉한' 요인를 몇 단계에 걸쳐[의 단계를 밟아] 제거하는 것, 그것이 바로 '절반의 게임[반쪽짜리 게임]'이라는 절차입니다. 이야기의 '침[진실]'인 렉톤은 물론 첫 번째 메시지와 같아서 신의 말씀이 처음부터 옳았다는 것이지만, 한 가지 더 있을 것입니다. 비극의 핵심 부분을 이루는 '참[진실]'입니다. 즉, 절차의 수행자인 오이디푸스, '지식'과 '권력'을 겸비한 참주는 절차가 끝난 뒤 퇴장해야 합니다. '진리'가 확정되자마자, 거기에 이르기까지의 '게임' 자체를 수행자 모두 삭제해야 하는 것입니다. 즉, 렉시스='말하는 주체'의 이중성을 말입니다. '절반의 게임[반쪽짜리 게임]'은 이 이중성을 지우는 게임이나 다름없습니다. 서사적으로, 아니 페이블[파블]적으로는 '진리'는 신에게로 돌아갑니다. 『오이디푸스 왕』은 '진리'가 고향으로 돌아가는 '귀향 서사'입니다. 희곡이 '진리의 페이블[파블]'라고 한 것은 그런 의미로 파악할 수 있을 것입니다. 푸코는 『<지식의 의지> 강의』에서 이 페이블[파블]을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소피스트 추방 및 추방으로 인한 '철학'의 성립과 동시대의 것으로 간주하고 있습니다. 즉, 양자는 하나의 동일한 렉톤을 공유하는 페이블[파블]이라고 합니다. 저로서는 그 자체로 하나의 문학적이고 철학적 페이블[파블]처럼 전개되는 푸코의 오이디푸스론에서 이러한 푸코의 렉톤을 읽어내는 것이 허용된다고 생각합니다. 어쨌든 그에게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은 궤변의 적인 동시에 문학의 적이었을 것입니다. 그의 눈에는 궤변도 문학도 주체를 absent이자 présent로 만드는 렉시스에 존립 근거를 두고 있다고 보였을 것임에 틀림없습니다. 참고로 주체의 이 이중성은 『광기, 언어, 문학』에서도, 『문학 강의』에서도 '광기'를 특징짓는 본성이라고도 합니다.
4) 사드와 오이디푸스
헌데, 이러한 오이디푸스론과 사드론의 동형성인데, 그것은 사법진술 juridiction과 진리진술 véridiction을 각각 prescription '처방' 내지 '명령' ―― '~해야 한다/하라'라는 담론입니다 ―― 과 '기술' 내지 '묘사' description로 바꾸어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사드론에 대해서는 이 후에 다나세 고헤이(柵瀬宏平) 씨가 자세히 이야기할 것이기 때문에, 여기에서는 말 바꿔치기를 통해 부상하는 오이디푸스론과의 동형성에 대해서만 말씀드리겠습니다. 푸코 자신이 두 개의 사드 강연에서 말 바꿔치기를 하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 밖의 다양한 논고, 특히 『자기와 타자의 통치』 강의의 처음 두 번을 할해하여 행한 칸트의 「계몽이란 무엇인가」의 분석에서는 특별히 일러두지 않고 당연하다는 몸짓으로 말 바꿔치기를 하고 있습니다. 이때 사법진술을 prescription으로 해석하는 데에는 설명이나 정당화가 필요 없겠지만, 진리진술을 description으로 바꿔치기하는 데에는 그럴 필요가 있을 것입니다. 자세히 서술할 여유는 없지만, 그 점은 푸코의 언표론 자체를 검토함으로써 납득할 수 있을 것입니다. 즉, 그는 "<p는 q이다>라고 말한다"를 진리진술로 간주해도 무방하다는 입장입니다. 입밖에 나오지 않은[아직 말하지 않은] 상태의 명제는 진리진술이 아니겠지만, "나는 <p는 q이다>라고 생각한다"라고 말하면 그것은 이미 진리진술입니다. 그러니까 '말하는 주체'가 정경(情景)을 기술, 묘사하면 그 주체가 담론에 absent하거나 présent하겠지만, 그것도 이미 그 '주체'의 진리진술인 것입니다.
사드 강연은 "사드에서의 진리와 욕망의 관계"를 문제 삼는다고 명시되어 있습니다. 양자를 관계시키는 것이 사드의 "에크리튀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한 가지만 인용하면, "에크리튀르란 진리가 된 욕망이며, 욕망이라고 하는 형태를 취한 진리(…)입니다"(196). 그리고 또, 에크리튀르는 "수법 procédé"이라고도 합니다. 더 이상 말할 것도 없을 것입니다, 사드 강연의 푸코는 '진리'와 '욕망'을 오이디푸스론의 '절반-절반'처럼 보고, '에크리튀르'를 양자를 합치시키는 '절차'로 보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사드 강연에서 '올톤 에포스'란 무엇일까요? 에크리튀르에 의해 두 개의 '절반'을 합체시켜 얻을 수 있는, 사드 작품의 '렉톤'이란? 오이디푸스의 추방에 상당하는 『新쥐스틴』의 '참[진실]', 사드가 자신의 에크리튀르에 의해 수행하는 action juridique란? 이곳이 푸코론으로서는 재미있고 중요한 지점이라고 생각합니다만, 사드에게서의 '올톤 에포스'는 언표도 담론도 아닙니다. 단적으로 '사정(射精)'입니다. 성적 절정이죠. 푸코가 『新쥐스틴』에서 에크리튀르의 기능을 설명하고 있는 '유일한 텍스트'로 꼽은 대목을 꼭 한번 읽어 보시기 바랍니다(179-180). 인용하지는 않지만, 간단한 내용입니다. 요컨대, 2주간 '자위행위 금지'를 하라, 그리고 그런 동안에 떠오른 망상을 단숨에 문자로 만들어라, 그러면 사정할 수 있다는 '처방 prescription' 혹은 '수법 procédé'. 왜 그것이 재미있고 중요한가 하면, 하나의 speech act 이론이 되기 때문입니다. 'act'의 효과는 판결처럼 사법적이지 않아도 되고, 자기의 신체에 대한 효과여도 되지만, 어쨌든 '절차'야말로 중요합니다. 발화를 action으로 만드는 데 어떠한 사회적 '규약 convention'도 필요 없다고 푸코의 논의는 사실상 말하고 있습니다. '절차'와 '규칙'은 별개라는 것입니다. 고독하고 특이한, 성기에 손을 대는 행위조차 요건으로 삼지 않는 '절차'가 '절반의 게임[반쪽짜리 게임]'을 수행하여 절반과 절반의, 말을 동반하지 않는 '합치'를 실현합니다. 그런 '절반의 게임[반쪽짜리 게임]'도 있을 수 있다고 푸코는 주장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요.
둘째 날 강연에서는 사드적인 '절반의 게임[반쪽짜리 게임]'이 좀 더 구체적으로 분석되고 있습니다. 아니, 푸코가 『新쥐스틴』을 '절반의 게임[반쪽짜리 게임]'의 한 예로 읽고 있다는 것을 확실히 알 수 있습니다. 여기서의 절반과 절반은 푸코의 말투로는 <장면 scáne>과 <담론 discours>입니다. 에로틱한 광경이 차례차례 그려지는 <장면>과 신은 존재하지 않는다/자연은 존재하지 않는다/나는 존재하지 않는다/타자는 존재하지 않는다라는 네 가지 비재(非在), 네 가지 '진리'를 이론적으로 증명하려는 <담론>입니다. 네 가지 비재(非在) 증명에 대해서는 많은 이야기를 할 수 있지만, 다나세 고헤이(柵瀬宏平) 씨가 언급해 주실 것이기 때문에, 여기에서는 〈장면〉과 〈담론〉이 '욕망'과 '진리'에 대응하고 있다는 점에만 주목하고 싶습니다. 〈장면〉이 '욕망'에 대응하는 것은, 문자 그대로 욕망을 환기한다는, 욕정을 불러일으킨다는, 글쓰기의 목적에 이바지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런 <장면>과 이론적 <담론>을 번갈아 가며 교체하는 procédé-procédure는, 일반적으로 생각했을 때 '사정'이라는 '올톤 에포스'에 도달하는 데 오히려 방해가 되지 않는 것일까요? 푸코의 사드에 따르면, 또 그것이 바로 이 사드론의 재미있고 중요한 부분인 것 같은데, 전혀 방해가 되지 않습니다. 인용합니다. "진정한 담론은 욕망을 증폭시키고 심화시키고 무한하게 만드는 것이며, 욕망은 담론을 점점 더 진정한[진실한] 것으로 만든다"(242). 포르노 소설로는 안 된다, 포르노그래픽한 상상만으로는 절정에 이를 수 없다! 거기에 철학적 담론이 더해질 때 비로소 '섹시해진다'. 그것이 사실인지 아닌지는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중요하지 않습니다]. 문제는 이 신념이 <담론>상의 '진리'를, 즉 사드의 진리진술을 사법진술로 바꾸어 버리는 데 있습니다. 네 가지 '진리'를 하나로 묶은 "악덕은 번성한다"라는 철학적 명제는 그대로는 진리진술이 아닙니다. 네 가지 비존재를 실현할 때까지 리베르탕적 행동을 멈추지 마라, 비록 동료들을 죽이고 최후의 한 사람이 되더라도 불타는 화산에 몸을 던질 때 절정에 이르러야 비로소 리베르탕의 담론, the saying은 unmistakable이 될 것이다. 철학적 진리진술이 이처럼 사법진술로 바뀌는 한편, <장면>의 기술이나 묘사는 『오이디푸스 왕』에 나오는 노예의 증언과 똑같은 기능을 갖게 됩니다. 즉, 〈이것이 증거다〉. 기술이나 묘사가 곧장 진리진술이 되는 것입니다. 즉 사드적인 절반의 게임[반쪽짜리 게임]에서는 '욕망과 진리'라는 쌍이 'description과 prescription', 진리진술과 사법진술로 이른바 뒤집어집니다. 뫼비우스 띠를 이룹니다. 인용합니다. 사드는 "진리와 욕망은 끝없이[완결되지 못하고] 빙글빙글 도는 똑같은 리본의 두 면과 같다는 것을 보여주려고 한 것입니다"(244).
이런 '절반의 게임[반쪽짜리 게임]'을 전개시키는 것이 사드의 담론이라면, 사드는 앞의 그림에서 세 번째 화살표를 거꾸로 따라가는 것 같습니다. 성적 절정이라는 렉톤에서 출발해 리베르탕을 '말하는 주체'로서 존재하게 하는, 그들을 렉시스로 만드는 방향입니다. 실제로 『新쥐스틴』에는 다양한 리베르탕이 차례로 등장하지만, 누구도 진정한 리베르탕으로 이 세상에 남지 않습니다. 말하자면 리베르탕은 부재할 수밖에 없는 운명을 타고난 것입니다. 진리와 욕망은 두 개의 도자기 조각처럼 일치하지 않고, 렉시스처럼, 아니 오히려 렉시스에 걸맞은 redoublement를 보여주며 끝납니다. 진정한 리베르탕은 존재하며 또한 존재하지 않습니다. 『新쥐스틴』에서는 줄리엣이나 쥐스틴의 주위에서 전개되는 하나하나의 에피소드가 페이블[파블]이 되어, 그때까지 담론에 présent했던 개개의 리베르탕을 absent로 만들어버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新쥐스틴』은 더 이상 『오이디푸스 왕』처럼 전체적으로 하나의 페이블[파블], 무엇인가 하나의 참[진실] 혹은 진리인 것을 렉톤으로 이야기하는 페이블[파블]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이 작품은 무엇을 하는 걸까요? 제게는 그것이 바로 그림의 첫 번째 화살표를 거꾸로 따라가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즉, 페이블[파블]에서 픽션으로, 페이블[파블] 무리에서 픽션으로, 입니다. 오늘 제 이야기의 출발점으로 돌아가서 말하자면, 존재론으로서의 픽션으로, 입니다.
"사드는 신이나 영혼, 자연이나 법을 착각으로 만들지 않습니다. 그는 그것들을 기괴한 공상, 그가 « chimère »라고 부르는 것으로 만듭니다. « chimère »란 존재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그 자신일수록 점점 더 존재하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228).
* 옮긴이 : chimère는 그리스 신화 '키마이라', '키메라'를 가리키며, 비유적으로는 '괴상하게 짜맞춘 작품 등'을 의미한다.
시메르(chimère)한 것은 신이나 자연만이 아닐 겁니다. 리베르탕 또한 그렇습니다. <담론>과 그것이 이야기하는 '진리'는 신이나 자연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증명하지만, 증명이 완결되는 것은 <장면>에 의한 증언, 리베르탕들의 action에 의해서이며, 이 action이 성립하기 위해서는 신이나 자연이 존재하지 않으면 곤란합니다. 그리고 리베르탕은 리베르탕이려고 하면 할수록 자신의 죽음에 가까워집니다. 사드의 담론, 에크리튀르, 그의 추론과 묘사는 "그 자신일수록 점점 더 존재하지 않게 되는" 시메르(chimère)한 것을 exister 시킵니다. '없는' 채 '있는' 것을. 『오이디푸스 왕』이 페이블[파블]에서 렉톤으로의 관계를 보여준다면, 『新쥐스틴』은 픽션과 렉시스의 관계를, 렉시스에서 페이블[파블]를 경유하면서 픽션으로 가는 방향으로 추적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말하는 주체'의 '절차'가 지향하는 목표는 '올톤 에포스'가 아니라 '존재'가 '픽션'인 시메르입니다. 어쨌든 똑같이 '절반의 게임[반쪽짜리 게임]'을 펼치는 두 작품에서는 '진리'의 동태[동학]가 정반대인 것 같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드디어 "존재론은 픽션이다"라는, 처음에 세운 테제③으로 돌아갈 수 있습니다. 푸코가 이 테제를 제출한 것은 1983년, 에우리피데스의 희곡 『이온』을 둘러싸고였습니다. 『자기와 타자의 통치』 강의를 같은 해 3월에 마친 푸코는 가을에 캘리포니아대학교 버클리 캠퍼스를 방문해 '파르레시아' 개념의 통사라고 할 만한 연속 강연을 합니다. 그 두 번째 회차에는 『이온』을 거론하면서 『오이디푸스 왕』과 비교하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두 희곡에서는 "진리의 동태 the dynamics가 정반대입니다."[1] 『이온』에서의 '진리'도 테제②가 주장하는 대로 게임을 통해 확정됩니다. 그리고 그 게임은 『오이디푸스 왕』과 마찬가지로 '절반의 게임[반쪽짜리 게임]'입니다. 그 점을 푸코는 강의에서도 강연에서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양쪽에서 그가 분석하는 바로는, 게임을 구성하는 두 개의 절반[반쪽]이 『오이디푸스 왕』과 같지 않습니다. 진리진술과 사법진술이 아닙니다. 참과 거짓입니다. 참과 거짓이 절반과 절반으로 '합치'됩니다. 무슨 말일까요? 푸코의 존재론은 단순히 '무엇이 있는가', '있다'의 의미가 무엇인가가 아니라 '무엇이 진정으로[참으로] 있는가'였습니다. 그렇다면 참과 거짓의 '합치'란 '진정으로[참으로, 정말로] 있다'와 '진정으로[참으로, 정말로] 없다'의 '합치'여야 합니다. '없는' 채로 '있다'는 것이어야 합니다. 이 상태에 대해서 강의의 푸코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는 온갖 착각, 온갖 거짓말의 구덩이 creux에 있다"(GSA 100/148).
이 '우리'란 연극을 보는 관객이자 아테네 시민을 가리키는데, 푸코를 포함한 현대의 독자라도 상관없습니다[를 의미할 수도 있습니다]. 이 연극 속에서는 신(神) 아폴론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습니다. 『오이디푸스 왕』에서처럼 자신의 말을 절반으로 쪼개어 인간에게 보내지도 않고 끝까지 침묵을 지킵니다. 대신 주요 등장인물들은 모두 절반은 진실이고 절반은 거짓인 담론을 서로 주고받으며, 그 결과 아테네의 창설 신화, 즉 아테네인들의 '참[진실]'이 그들과 시민들 사이에 공유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국가는 신을 아버지로 하고 아테네 땅을 어머니로 하여 태어났다는 신화입니다. 극의 세부사항, 즉 『이온』의 '절반의 게임[반쪽짜리 게임]'의 실체에 대해 파고드는 대신, 저로서는 『광기, 언어, 문학』에서 이미 인용한 문장을 다시 한 번 인용하며 오늘의 이야기를 마무리하고자 합니다.
"픽션이란 담론의 언설 내부에 마치 구덩이creux에 있는 것처럼 언표를 조직하고 구조화하는 언어 외적인 것을 정의하는 acte이다. 혹은 오히려, 그러한 actes의 집합ensemble이다."
인용문헌 약호
GSA : Michel Foucault, Le gouvernement de soi et des autres, Cours au Collège de France 1982-1983, Seuil / Gallimard, 2008.(『自己と他者の統治』阿部崇訳、筑摩書房、2010年)
« L’arrière-fable » (1966), Dits et Écrits, tome 1, Gallimard, 1994.(「物語の背後にあるもの」竹内信夫訳、『ミシェル・フーコー思考集成』II、筑摩書房、1999年。
『文学講義』:『フーコー文学講義――大いなる異邦のもの』柵瀬宏平訳、ちくま学芸文庫、2021年。
『狂気、言語、文学』:Folie, langage, littérature, Vrin, 2019.(未邦訳)
[1] 여섯 번의 연속 강연 「담론과 진리」. 강연은 영어로 진행되었다. Michel Foucault, Discourse and truth, established by Nancy Luxon and edited by H-P. Fruchaud and D. Lorenzini, University of Chicago Press, 2019, p.82.
* 이치다 요시히코의 책이나 논문 목록 : https://researchmap.jp/read00788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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