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사상 2015년 2월 임시증간호

자크 데리다

 

<미번역 텍스트>

1. 하이데거에 관한 대담자크 데리다

 

<데리다의 삶과 사상>

2. 데리다의 최고 전성기, M. 나스

3. 탈구축<, R. 가쉐

4. L’enfant que donc je suis 혹은 고양이의 에피소드는 왜 자전적인가郷原佳以

5. 데리다 처음으로 존재론적 차이와 존재자적 은유増田一夫

 

<인터뷰>

6. Deadletter로서의 철학아즈마 히로키

 

<사형>

7. 엑스 렉스 자크 데리다의 사형론 세미나, J. 페닝턴

 

<하이데거>

8. 자기 전승과 자기 촉발 데리다의 하이데거 강연(1964-1965)에 관해,

 

<철학>

9. 평행적 차이 자크 데리다장 뤽 낭시

10. 주변에서 주변으로 데리다/들뢰즈의 곶으로부터,

11. 우뚝 솟은 상태의 철학말라부

12. 타자성의 분유 계획 불가능한 것의 계산藤本一勇

 

<정치>

12. ‘전쟁의 일상화와 무조건의 환대-평화’ 사이에서松葉祥一

13. 호명으로서의 우애애도로서의 우애 자크 데리다의 우애론에서의 아리스토텔레스에 관해宮崎裕助

14. 차연과 평등 타자의 윤리인가 아니면 평등한 자들의 공동체인가梶田裕

 

<신학>

15. 데리다의 급진적 무신론,

16. 현상을 가르치기 레비나스데리다와 메시아주의의 물음마르셀

17. 데리다와 존재신학 칸트하이데거레비나스가 교착하는 장소로長坂真澄

 

<문학>

18. 팔루스유령천황제 자크 데리다와 中上健次

19. 데리다 미학의 연구 문학 혹은 픽션성의 제도立花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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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전쟁의 상태화/일상화와 무조건의 환대-평화’ 사이에서 (2/2)

마츠바 쇼이치(松葉祥一)

 

1/2에 이어서....


4. 칸트적 평화와 레비나스적 평화

데리다는 아듀에서 성서의 행방에 수록된 레비나스의 강연 정치는 나중에1(Lévinas 1982)의 논의를 검토하면서, 레비나스의 평화론과 칸트의 평화론을 대립시킨다(Derrida 1997b). 레비나스는 칸트의 영구 평화를 위하여를 옹호하고 있지만, 사실 두 사람은 완전히 다른 입장에 서 있으며, 그 차이를 생각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이 데리다의 결론이다.

확실히 칸트는 전쟁과는 다른 차원의 영구평화를 생각한다. 이런 의미에서 칸트의 평화론은 슈미트-하이데거적인 일상화된[常態的] 전쟁론과는 다른 전제에 서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데리다에 따르면, 그 전제는 다음의 두 개의 명제이다. “1, 평화는 자연스러운, 대칭적인, 단순히 전쟁과 대립시킬 수 있는 현상이 아니다. 평화는 다른 차원의 현상이며, 자연스런 본성이 아니라 제도적인 본성(즉 정치적-사법적 본성)을 가진다. 2, 평화는 단순한 적대행위의 정지, 전쟁을 벌이는 것의 자제, 즉 휴전이 아니다. 평화는 영구평화로서, 영구평화의 약속으로서 제도화되어야 한다”(Derrida 1997b:132). , “만일 평화가 있다면, 그 평화는 영구적이지 않으면 안 되며, 제도화된 평화, 법적-정치적 평화로서, 비자연적이지 않으면 안 된다”(Derrida 1979b:133)고 말하는 것이다. 이런 평화는 가능할까? 적어도 정치적 방법에 의해서는 이런, 영구평화에는 도달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영구평화는 정치적이지 않게 된다. 데리다는 여기서의 칸트가 레비나스에 접근한다”(Derrida 1997b:133)고 말한다.

그러나 칸트와 레비나스는 갈라진다. 칸트는 보편적이고 무조건적이어야 할 환대를 제한해 버리는 것이다. 데리다는 만국의 세계시민들이여, 다시 한 번 노력하라!(Derrida 1996)에서, “세계시민의 법권리는 보편적인 환대의 조건들에 제한되어야 한다”(Kant 1795:49)라는 세 번째 확정조항이 불충분하다고 지적한다. 칸트가 환대의 법을 방문권에 한정하고, 체류권을 인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외국인이 요구할 수 있는 것은 손님의 권리(이 권리를 요구하려면 그를 일정 기간 가족의 구성원으로 다룬다고 하는, 호의 있는 특별한 계약이 필요해질 것이다)가 아니라 방문의 권리인데, 이 권리는 지구의 표면을 공동으로 소유할 권리에 기초하여, 서로 교제를 신청할 수 있다는 것처럼, 모든 인간에게 속해 있는 권리이다”(Kant 1795:49). 데리다는 이 점을 다음과 같이 비판한다. “[이방인/방문자]는 체류권을 인정받는 것이 아니라, 방문권만 인정받는 것입니다. 칸트는 이 점에서 수많은 확연한 구별을 하고 있습니다. 저는 이것을 조건부 환대라고 부르며, ‘무조건의환대 혹은 순수한환대라고 부르는 것에 대립시키고 싶습니다. 이것은 조건 없는 환대이며, 설령 신참자가 시민이 아니더라도 그것이 누구인지를 규정하는 것은 요구하지 않습니다”(Derrida 1999).

여기서 칸트는 환대에 조건을 부여함으로써 환대=평화를 진보의 최종 단계로 되돌려보낸다는 것이다. 그것은 칸트의 평화 개념에 전쟁의 흔적이 남아 있기 때문이라고 데리다는 말한다. “칸트에게서 영구평화, 세계시민적인 법권리, 보편적인 환대 같은 것의 제도화는 자연적인 적대성 의 흔적을 보존하고 있다”(Derrida 1997b:134).

그에 반해 레비나스의 경우, 환대=평화는 무조건이어야 한다. 레비나스는 평화를 지금(La paix maitenaint)”(Derrida 1997b:134)이라고 주장하는 것이며, 코스모폴리터니즘보다도 보편성을 택하는 것이다. 바꿔 말하면, 레비나스에게서 모든 것은 평화에서 시작되는것이다. “이 평화는 자연이 아니다 . 또 이 평화는 단순히 제도적 내지 법적-정치적인 것도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것은 환대 속에서 타자의 얼굴을 맞아들이는 데서 시작된다’”(Derrida 1997b:137, 강조는 데리다). 레비나스에게서는 칸트와는 반대로, 전쟁 자체도 맨 얼굴의 평화로운 맞아들임의 증언이 되는 흔적을 보존하고 있으며, “전쟁이 평화의 증언인 것, 전쟁은 평화의 한 현상에 머무는 것”(Derrida 1997b:144)이 된다.

레비나스는 전쟁-평화의 대칭성을 절단하는 점에서는 칸트와 같다. 그러나 방향은 정반대이다. 칸트의 경우, 전쟁이 기반이 됐던 반면, 레비나스의 경우 평화-환대가 기반이 된다. “전쟁 자체, 적대성, 나아가 살해마저도 얼굴로의 열림이라는 근원적 맞아들임아직도 전제하며, 변함없이 맞아들임의 표명이라는 것을 의미할 수 있다. 전쟁을 할 수 있는 것은 얼굴에 대해서만이며 타자의 얼굴의 의미이기도 한 살인하지 마라는 레비나스에게 있어서 윤리의 근원이다”(Derrida 1997b:138, 강조는 데리다). 칸트에게서는 평화를 제도화해도 자연상태로서의 전쟁의 흔적은 남는다. 거꾸로 레비나스에게서 전쟁, 면역 반응이 나타나는 것은 환대를 스스로 신청하는 경우뿐이다. 레비나스는 칸트적인 무장된 평화’, ‘휴전으로서의 평화’, 법적-세계시민주의와 절연하고 있다. 따라서 레비나스에게서 전쟁은 수단에 의한 평화의 계속”(Derrida 1997b:144)이며, 전쟁은 환대의 파생물이게 된다. “이 위대한 담론은 종말론적 평화를, 또한 무엇에도 선행될 수 없는 환대적인 맞아들임을 말한다. 거기서 무엇을 듣더라도 상관없으나, 다만 정치적인 평화신학만은 들을 수 없다”(Derrida 1997b:144). 데리다는 이런 레비나스의 평화 개념을 ()-근원적인 환대혹은 과정 없는 평화”(Derrida 1997b:139)라고 부른다.

레비나스는 이 평화-환대의 기반을 언어작용에서 간파한다. 왜냐하면 레비나스는 언어작용의 본질은 선량함이며, 나아가 언어작용의 본질은 우애이며 환대이다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Derrida 1997b:138). 가령 전체성과 무한의 끝부분에서, 언어 속에서 타자, 그 어떤 경계선도 부정도 없는, <타자와의> 평화적 관계의 적극적인 전개가 산출된다고 말했음을 떠올려보자. 그리고 거기서는 급진적인 분리의 다원론”(Derrida 1997b:146)이 문제가 됐다. 그것은 전체적인 공동체의 다원성이 아닌 듯한, 다원성을 구성하는 요소들의 정합성이 아닌 듯한 다원론”(Derrida 1997b:146)이다. 거기서의 다원성의 통일이야말로 평화라고 여겨진다. “따라서 평화를 전쟁의 종식과 동일시할 수 없다”(Lévinas 1999:471).

그러나 데리다는 이런 레비나스에게서의 평화론을 두 가지 점에서 비판한다. 한편으로, -근원적인 환대’, ‘아나키한 선량함부성적인 것으로 간주된다는 것이다(Derrida 1997b:143-144). 그 결과, 평화에는 계층질서적인 비대칭성이 남게 된다. 다른 한편 이런 레비나스의 윤리적 평화론은 보편주의-배외주의에 빠질 위험이 있다. “죽이지 말라라는 윤리적 명제를 절대화함으로써 자신의 입장만이 보편적이며 다른 입장을 인정하지 않는 배외주의에 빠지며, 폭력적 배제나 처벌에 길을 열게 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레비나스가 시오니즘이 내셔널리즘을 넘어선 윤리적 입장이라고 주장할 때, 이 위험에 길을 열고 있다(Derrida 1997b:165). 현실에서 시오니즘이 배타적 폭력의 근거가 되고 있는 것을 목도하게 될 때, 이 입장의 위험성을 알 수 있다.

 

5. 윤리적 평화와 정치적 평화 사이에서

우리는 칸트와 레비나스의 평화론을 윤리적 평화냐 정치적 평화냐라는 문제로서 검토했던 적이 있다(松葉 2008). 한편으로 윤리적 평화론이 무력하다는 것도 사실이지만, 다른 한편으로 정치적 평화론에 늘 위험이 따라다닌다는 것도 사실이다. 1차 대전 후의 부전조약[不戰條約, Treaty for the Renunciation of War; 켈로그-브리앙 조약]이나, 유엔헌장에서 무력행사를 행할 수 있는 예외적 조건으로서 자위권이 인정된 이후, 팽창일로를 거듭해 왔다. 그것은 무력행사의 정당성을 주장하기 위한 대외적, 대내적인 논거로서 계속 확대되며, 이제는 예방적·선제적 자위권이나, 확대된 집단적 자위권까지 주장하게 되며, 어떤 군사적 행동도 그 안에 던져 넣을 수 있는 개념이 되고 있다. 이런 자위 개념의 팽창을 억누르는 것은 더 이상 정치적 수단만으로는 곤란하다. 칸트나 아베 드 생-피에르(Abbe de Saint-Pierre)가 주장한 이성=이익에 기초한 정치적 수단으로는 자위 개념의 비대화와 그것에 기반한 정전론(正戦論)의 부활을 막을 수 없으며, 정치적 차원에서 윤리적 차원으로의 전회가 필요하다는 것은 틀림없다(松葉 1995).

다른 한편으로 윤리적인 평화론이 불충분하다는 것도 분명하다. 전쟁의 일상화[常態化]가 기본인 한, 그것이 아무리 일시적이고 위험한 것이라 해도, 정치적인 수단에 의한 해결책의 추구는 필요할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칸트적인 세계시민공화국에서의 도래할 민주주의를 상정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데리다가 지적하듯이 칸트는 정치적 평화를 위해 국가연맹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했던 것은 아니었다. “그는 그것을 그저 현실주의적인 타협안으로서 제기했던 것에 불과합니다”(Derrida 1997a). 실제로 칸트는 두 번째 확정조항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서로 관계가 있는 국가들에 있어서 그저 전쟁밖에 없는 무법적인 상태로부터 탈출하기 위해서는 이성에 의거한 다음의 방책밖에는 없다. , 국가도 개개인의 인간과 마찬가지로, 그 미개한(무법적인) 자유를 버리고 공적인 강제법에 순응하고, 그리고 하나의(가장 끊임없이 증대하고 있는) 민족들의 합일국가(civitas gentium)을 형성하고, 이 국가가 항상 지상의 모든 민족을 포괄하도록 한다는 방책밖에는 없다”(Kant 1795:47). 그러나 이런 세계시민국가라 해도, 자기 면역으로서의 전쟁을 피할 수는 없다. 그런 의미에서 진정으로 전쟁의 본질에 대치할 수 있는 것은 윤리적 평화밖에는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윤리적 평화를 조금씩이라도, 일시적이라도 실현할 수 있는 것은 정치적 수단에 의한 것밖에는 없다.

확실히 영구평화를 위해영구평화의 어정쩡한 약속, 유보 없는 환대에 관한 양의적인 혹은 위선적인 약속”(Derrida 1997b:151)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칸트는 무덤을 갈망하는 것도, 평화주의적 철학자의 달콤한 꿈을 바라는 것도 아니다”(Derrida 1997b:151-152). 칸트는 이 양자택일에 대한 응답으로서, 환대의 법권리나 세계시민정치를 제안한다”(Derrida 1997b:152).

여기서 데리다는 다음과 같이 결론짓는다. “적어도 칸트와 레비나스 사이에 있는, 어떤 차이를 여기서 첨예하게 만들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에서, 르완다에서, 유럽에서, 미국에서, 아시아에서, 그리고 세계 속의 생베르나르(Saint Bernard) 교회에서, 무수한 상파피에홈리스들이, 다른 국제법, 국경선에 관한 별도의 정치, 인도(人道)에 관한 별도의 정치, 나아가 국민국가의 너머에서 실효적으로 행해지고 있는 인도적 참여engagement, 그런 모든 것을 요구하고 있는 도처에서, 칸트와 레비나스의 이 치아는 전례 없이 중요한 것이다”(Derrida 1997b:152).

우리는 슈미트-하이데거적인 전쟁의 일상화[常態化]’를 인정하면서도, 그 저편에서 전쟁의 결여태로서의 평화와는 상이한 평화를 찾아내고, 정치적 평화윤리적 평화라는 두 개의 항 사이에서, 계속 살아가기 위한 방책을 찾아낼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이 사이의 경계선은 단순하지 않다. “윤리적인 것과 정치적인 것의 경계는 하나의 경계선이 지닌 분할 불가능한 단일성을 결정적으로 잃고 있기”(Derrida 1997b:149)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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확실히 지금 요구되는 것은 확고한 전쟁 개념에 대응하는 확고한 평화개념을 대치하는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 오히려 어떻게 생존 공간을 다시 만들 것인가, 거기서 필요한 최저한의 질서를 어떻게 확보할 것인가라는 사고가 요구되고 있는 것이리라. 집단적 자위권이 도입되고, 무기수출의 3원칙이 변경되고, 비밀보호법이 시행된다는 예외상태속에 있는 현재, 이제 상황은 실재 가능성으로서의 전쟁에서 현전한전쟁 속에 있을 것이다. 필요한 것은 현재는 전시’(辺見 2013)이라는 인식이며, 필요한 것은 거기서 살아남기 위한 <전쟁 중>이라는 사고일지도 모른다. 한편으로 이런 움직임에 이의를 제기하고, 할 수 있는 한 명문화된 개헌을 멈추는 최대한의 정치적 노력이 필요할 것이다. 그러나 그것에는 한계가 있다. 왜냐하면 정치의 텔로스가 전쟁인 한, 정치적 방법으로는 전쟁은 벗어날 수 없기 때문이다. 동시에 본질이 타자의 존재를 신체적-물리적으로 말소하는 것에 있는 전쟁을, ‘죽이지 말라라는 관점에서 비판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런 평화는 불가능한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불가능한 것을 생각하고, 실행할 수밖에 없지 않을까. 데리다는 우정의 정치는 어떻게 가능한 것이냐는 질문에 대해, “그것은 불가능한 것입니다. 그러나 불가능하다는 것은 가능성의 반대가 아니며, 불가능하다고 말하는 것은 가능성을 부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 불가능한 것을 실행하는 것이, 불가능한 것을 생각하고 행하는 것이 필요한 것입니다”(Derrida 2001b:43)이라고 말한다. 문제는 눈앞의 현실을 부정하고 불가능한 것을 떠올리면서 그것을 시행하는 것이다.

 

참고문헌

인용할 때 일본어 번역본이 있는 경우는 그 쪽수를 표기했다. 다만, 문맥에 비춰서 번역문을 일부 변경한 경우가 있다.

Aristoteles (n. d.) / 山本光雄訳(1969), アリストテレス全集, 第一五巻, 岩波書店.

Derrida, J. (1994) / 鵜飼哲大西雅一郎松葉祥一訳(2003), 友愛のポリテイツクス, 2권 중 제1, みすず書房.

Derrida, J. (1997a) / 港道隆訳(1996), 万国世界市民たちもう一努力!, 世界.

Derrida, J. (1997b) / 藤本一勇訳(2004), アデュー──エマニュエル・レヴィナスのために, 岩波書店.

Derrida, J. (1999) / 安川慶治訳(1999), ジヤツク・デリダとの対話──歓待正義責任, 批評空間, II, 23.

Derrida, J. (2001a) / 松葉祥一訳(2001), りないしみをじています, 現代思想, 二九巻一三号.

Derrida, J. (2001b) / 中山元訳(2002), だれも無実ではない, 中山元訳, 発言──米同時多発テロとお思想家たち, 朝日出版社.

Derrida, J. (2001c). «Une hospitalité à l’infini», in De l’hospotalité : Autour de Jacques Derrida, La passe du vent.

Derrida, J. (2003a) / 藤本一男澤里岳史訳(2004), テロルの時代哲学使命, 岩波書店.

Derrida, J. (2003b) / 鵜飼哲高橋哲哉(2009), ならずたち, みすず書房.

Derrida, J. (2010). Séminaire, La bête et le souverain : Volume II (2002-2003), Galilée.

Gaston, S. (2009). Derrida, Literautre and War : Absence and the Chance of Meeting, Continuum.

Heidegger, M. (1954) / 関口浩訳(2009), 技術への, 平凡社.

辺見庸 (2013), 作家辺見庸さん 現在戦時」」, 神奈川新聞, 201397.

Kant, I. (1795) / 宇都宮芳明訳(1985), 永遠平和のために──哲学的考察, 岩波文庫.

松葉祥一 (1995), 愛国者でも世界市民でもなく──サン・ピエールルソーカントにおける国家連合永遠平和, 現代思想, 二三巻七号, 195-205.

松葉祥一 (2008), 倫理的平和政治的平和, 同志社哲学年報, 三一号, 31-44.

松葉祥一 (2014), デリダ/ランシエール──デモクラシー・他者共同性, 岩波講座 政治哲学, 第五巻, 藤藤純一編, 岩波書店, 127-148.

西谷修土佐弘之岡真理 (2014), 「「非戦化する戦争, 現代思想, 201411월호.

Odello, L. (2014). «Que reste-t-il du cosmopolitisme?», Appels de Jacques Derrida, Cohen-Lévinas, D. & Michaud. G. (dir.). Editions Hermann.

Leroux, G. (2014). «Walten ou hyper-souveraineté», Appels de Jacques Derrida, Cohen-Lévinas, D. & Michaud. G. (dir.). Editions Hermann.

Lévinas, E. (1971) /合田正人(1999), 全体性無限──外部性についての試論, 国文社.

Lévinas, E. (1982) / 合田正人(1996), 聖句彼方──タルムード読解講演, 法政大学出版.

Schmitt, C. (1931) / 田中浩原因武雄訳(1970), 政治的なものの概念, 未来社.

Scheler, M. (1937) / 駒井義昭訳(1991), 平和理念平和主義, 富士書店

<프랑스에서의 하이데거> 2부에 수록된 데리다 인터뷰



프랑스에서의 하이데거에 수록된 데리다 인터뷰 - 영어판.pdf



첨부한 파일은 다음의 영역본이다. 전체 파일은 구글로 쉽게 구할 수 있다. 

1999년이니까, 데리다가 사망하기 몇 년 전이다. 

아무튼 흥미로운 내용들이 매우 많다. 

2-3회에 걸쳐서 초역본을 공개할 예정이다. 


Jacques Derrida, Entretiens du 1er juillet et du 22 novembre 1999, in Heidegger en France, II. Entretien, Albin Michel, 2001, pp.89-126.




Strass de la philosophie: Heidegger et nous / Jean-Luc Nancy

Heidegger et nous / Jean-Luc Nancy


* 아직 번역하지 않았다. 짧기에 곧 옮기겠다. 이 글은 장-클레 마탱의 2014년 6월 21일자 블로그 Strass de la philosophie: Heidegger et nous / Jean-Luc Nancy에 게재되어 있다. 독일어본은 다음과 같다. Nancy: Heidegger und wir - Faust Kultur.

Martin Heidegger (1889-1976)    Jean-Luc Nancy. Foto: Corinna Hackel
마르틴 하이데거(1889-1976)                  장-뤽 낭시


Nul depuis cinquante ans ne pouvait douter que Heidegger ait partagé l'antisémitisme dominant l'Europe des années 30, même si on ne trouvait dans ses  textes aucune déclaration de cette nature.
A cet égard nous n'apprenons rien dans les Carnets noirs. Les exclamations et imprécations qu’ils suscitent témoignent plutôt d'une candeur difficile à comprendre. N’avait-on pas de longtemps analysé la mise à l'écart voire la forclusion de la source juive ou judéo-chrétienne par la pensée d'une Grèce archi- originaire ? Lyotard, Derrida, Lacoue-Labarthe,  au premier chef, et bien d'autres (Levinas, Granel, Haas, Courtine, Zarader, Janicaud, Marion, Badiou, pour ne nommer que quelques Français) peuvent être convoqués pour témoigner à des titres divers de la circonspection lucide avec laquelle Heidegger a été considéré.  Encore faut-il lire, cela va de soi, puis se remettre au travail au lieu de gesticuler. (Lire, par exemple, dans Psyché II de Derrida, p. 46, le témoignage très clair d’une parfaite conscience de l’antisémitisme de Heidegger. Il parle, à propos du Discours de rectorat, de ce qui « ouvre à une réaction archaïsante vers l’artisanat rustique et dénonce le négoce et le capital dont on sait bien à qui ces notions étaient alors associées. » On ne saurait être plus clair.)

De même, on n’a pas omis de dénoncer le silence obstiné, farouche et insupportable de Heidegger sur les camps d’extermination. Peut-être d’ailleurs ce silence a-t-il à voir avec ce que contiennent les Carnets.

La publication de ces carnets  pose-t-elle de nouvelles questions ? Oui,  mais lesquelles au juste ?

On doit se demander pourquoi Heidegger avait exclu de tous ses textes publiés les mentions faites dans ses carnets privés de ce que Peter Trawny, leur éditeur, nomme très justement "antisémitisme historial" ?

Une seconde question s'adresse à nous, quel que soit notre rapport à Heidegger. Elle ne surgit pas de ces seuls carnets, mais ils la réactivent : sommes-nous vraiment au clair avec ce qui est en jeu dans l'antisémitisme ? Savons-nous donc vraiment de quelle faute Heidegger est coupable ? Car il l'est, comme beaucoup d’autres, mais de quoi au juste ? De quoi s'agit-il dans l'antisémitisme ? Question jamais assez ni jamais bien posée, et qui s'adresse à tous, non au seul Heidegger (ni aux seuls antisémites visibles ou déclarés).

A la première question on peut esquisser une réponse provisoire. Heidegger a exclu toute mention d'antisémitisme (et d'anti-judéochristianisme) de ses écrits car il a su qu'une telle mention l’engagerait dans une de ces deux voies : ou bien rejoindre le biologisme nazi qu'il méprisait (voir les Beiträge), ou bien établir que l'antisémitisme doit jouer un rôle structurel dans la pensée d'un destin de l'Occident, ce qui pourrait mettre cette pensée dans l’embarras. En évitant cette seconde entreprise, Heidegger montre qu’il ne pouvait ou qu’il n’osait pas s’y risquer : fût-ce malgré lui il en devinait l’inconsistance.  Il touchait donc à une limite de sa pensée.

La seconde question s’enclenche ici : cette limite n’est-elle pas encore la nôtre, si nous pensons peu ou mal la constitution fondamentale – « spirituelle » disait Lacoue-Labarthe - de l'antisémitisme dans l'Occident ?

Hegel avait donné une indication en parlant du peuple juif comme "témoin du malheur de la conscience". Mais on n’a pas voulu savoir quel était ce malheur propre à l’Occident et on s’est caché la douleur qui s'aggravait. Même la vigueur et la vertu dreyfusardes sont passées à côté du problème de fond (témoin Blanchot, qui tout en reprenant la leçon de l'"affaire" veut dépasser l'éthique de la Loi)[1]

Freud voit dans le christianisme un reproche adressé à un oubli juif du meurtre du père. Mais ce reproche est la conversion d’un malaise : qu’a-t-on fait en humanisant le Dieu imprésentable ?  Ainsi le  judaïsme de la diaspora aura représenté ce que les chrétiens trahissaient : la séparation des deux royaumes. Et l’interdiction de  posséder  la terre aura conduit les juifs à prendre sur eux la souillure du prêt à intérêt.

Ces repères suffisent pour indiquer l'essentiel d'un antisémitisme en effet « historial »: le peuple juif a été identifié comme le mal dont l'Occident sentait, à son corps défendant, devoir payer la croissance illimitée de son savoir et de son  pouvoir. Pour Heidegger cette croissance (la technique, le capital, la raison normative) devait se comprendre comme un oubli par l'Occident de sa propre origine et destination. De cet oubli - pourtant  commencé avec Platon…-  les Juifs,  Rome et le judéochristianisme devaient être à la fois, par substitution fantasmatique, les témoins et les agents.

Cela même permet de discerner comment Heidegger a pu penser sur deux versants hétérogènes.  D'un côté il ouvrait la question dite "de l'être" : il remaniait de fond en comble ce qui jusque chez Husserl s'était nommé "transcendance". Nous n’en avons pas fini avec ce remaniement, qui n’a nul besoin d’être antisémite. D'un autre côté Heidegger voulait, de manière au fond très conformiste et mythologisante, que ce geste relance un "destin" de l'Occident à partir d'une provenance unique, exclusive, excluante voire exterminatrice. L'histoire réappropriait ce que l'existence aurait dû disséminer. Aussi est-ce très exactement au revers de Heidegger que Derrida (qui dès 1964 étudiait l'histoire chez Heidegger) écrivit le mot "destinerrance". On peut  l’interpréter de deux façons : 1) l'idée d'un  destin fut l'errance de Heidegger –  2) à nous maintenant de dérouter voire d'égarer le destin occidental. Et d'en finir ainsi avec l'antisémitisme.

Bien entendu, ce qui précède ne forme qu’une indication sommaire et provisoire. Même le motif du destin reste à décomposer chez Heidegger. Werner Hamacher me suggère par exemple que « destinerrance » peut être considérée comme issu de Heidegger. Peut-être y a-t-il en effet chez lui deux registres ou deux portées du « destin ». Nul doute qu’il y ait là des ressources de pensée, et telles qu’elles nous permettront d’aller plus avant dans ce qu’il nous incombe toujours de penser sur notre provenance et donc sur notre avenir.

Jean-Luc Nancy




[1] Sans assimiler du  tout Blanchot à Heidegger, et même en les opposant, je crois nécessaire l'analyse de la pensée de  Blanchot  que j’engage dans La Communauté Désavouée,  Galilée, 2014.


현대사상 20152월 임시증간호

자크 데리다

 

<미번역 텍스트>

1. 하이데거에 관한 대담, 자크 데리다

 

<데리다의 삶과 사상>

2. 데리다의 최고 전성기, M. 나스

3. 탈구축<> , R. 가쉐

4. L’enfant que donc je suis 혹은 고양이의 에피소드는 왜 자전적인가, 郷原佳以

5. 데리다 처음으로 : 존재론적 차이와 존재자적 은유, 増田一夫

 

<인터뷰>

6. Deadletter로서의 철학, 아즈마 히로키

 

<사형>

7. 엑스 렉스 : 자크 데리다의 사형론 세미나, J. 페닝턴

 

<하이데거>

8. 자기 전승과 자기 촉발 : 데리다의 하이데거 강연(1964-1965)에 관해,

 

<철학>

9. 평행적 차이 : 자크 데리다, 장 뤽 낭시

10. 주변에서 주변으로 : 데리다/들뢰즈의 곶으로부터,

11. 우뚝 솟은 상태의 철학, 말라부

12. 타자성의 분유 : 계획 불가능한 것의 계산, 藤本一勇

 

<정치>

12. ‘전쟁의 일상화무조건의 환대-평화사이에서, 松葉祥一

13. 호명으로서의 우애, 애도로서의 우애 : 자크 데리다의 우애론에서의 아리스토텔레스에 관해, 宮崎裕助

14. 차연과 평등 : 타자의 윤리인가 아니면 평등한 자들의 공동체인가, 梶田裕

 

<신학>

15. 데리다의 급진적 무신론,

16. 현상을 가르치기 : 레비나스, 데리다와 메시아주의의 물음, 마르셀

17. 데리다와 존재신학 : 칸트, 하이데거, 레비나스가 교착하는 장소로, 長坂真澄

 

<문학>

18. 팔루스, 유령, 천황제 : 자크 데리다와 中上健次

19. 데리다 미학의 연구 : 문학 혹은 픽션성의 제도, 立花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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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전쟁의 상태화/일상화무조건의 환대-평화사이에서 (1/2)

마츠바 쇼이치(松葉祥一)

 

니시타니 오사무(西谷修)는 어떤 좌담에서 지금 요구되는 것은 확고한 전쟁 개념에 대응하는 확고한 평화개념을 대립시키는 것이 아니라, 전쟁이라고 불리는 것의 전면화 속에서, 어떻게 생존공간을 다시 만드느냐, 거기에 필요한 최저한의 조건을 어떻게 확보하느냐라는 사고이지 않을까?”(西谷土佐2014:55)라고 말한다. 확실히 현재 전쟁 개념을 재정의하려 하거나, 평화 개념을 재구축하고자 할 때, 강한 무력감이 휩싸이게 된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

이것은 한편으로, ‘적극적 평화주의같은 의도적인 이중화법(double speech)’(西谷 2014:56)에 의해 평화개념이 파탄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M. 쉘러(Max Scheller, 1874-1928)1927년 독일국방부에서 행했던 강연 평화의 이념과 평화주의에서 말하듯이, 평화는 이미 무조건적으로 적극적인 가치”(Scheler 1937:16)가 되며, 아무리 호전적인 국가원수라도, 공공연하게 평화를 부정하고 전쟁을 긍정하는 것은 어렵게 됐다. 그 때문에 그들이 은밀하게 군사적 합의를 평화라는 말에 계속 투입한 결과, 이제 이 말은 그 의미가 부풀려져서 원형을 남기지 않게 된 것 같다.

다른 한편, ‘전쟁이라고는 부를 수 없는 것의 전면화에 의해 전쟁 개념도 정의 불가능해졌다. 데리다는 9·11 직후의 몇몇 인터뷰에서 9·11 같은 사건을 앞에 뒀을 때의 철학의 역할은 개념적 전제들, 특히 전쟁 개념에 관해 근본적으로 다시 묻는 것이라고 한다(Derrida 2001a ; 2001b). 그것은 그동안의 전쟁 개념, 즉 국민국가와 그 주권을 전제로 한 전쟁 개념이 9·11 같은 그 어떤 국민국가에도 선전포고를 하지 않고 특정할 수 있는 상대가 없는 전쟁”(Derrida 2001b)을 앞에 뒀을 때, 다시 물어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데리다는 이 전쟁 개념을 다시 묻는 작업을 위해 칼 슈미트를 다시 읽어야만 한다고 한다. 그 결과, 슈미트에 반하여, “현재 폭발하고 있는 폭력이, 전쟁에 기초를 둔 것이 아니다”(Derrida 2001b)는 것을 밝히고, ‘테러와의 전쟁이라는 표현이 수사학의 남용임을 분명히 드러내게 된다고 하더라도 말이다.

데리다 자신은 우정의 정치(Derrida 1994)에서 슈미트에 기초하여 전쟁 개념을 재검토한다. 그러므로 아래에서는 우선 우정의 정치에서의 전쟁 개념의 분석을 보고 싶다. 다음으로 하이데거가 형이상학의 극복(Heidegger 1954)에서 고발하는 존재 망각의 귀결로서의 전쟁의 일상화[常態化]를 검증하고, 그런 후에 불량배들(Derrida 2003b)에서 도래할 민주주의자기 면역성에 관한 분석을 확인하자. 그리고 마지막으로 아듀(Derrida 1997b)에서 레비나스의 평화론의 분석을 보여주고 싶다.

우리의 목적은 전쟁이 일상화[常態化]하는 가운데, 그것에 저항하는 사유의 발판을 찾아내는 것이다.

 

1. 정치적인 것의 텔로스로서의 전쟁

데리다가 우정의 정치에서 밝히는 것은 정치적인 것의 궁극적 텔로스(목적)가 전쟁이라는 것, 따라서 우리가 정치에 의거하는 한, 전쟁을 피할 수 없다는 것이다. 데리다는 우선 특정한 정치적 구별이란 친구와 적의 구별이다”(Schmitt 1931:15)라는 슈미트의 명제를 분석하는 데서 시작해, 이 친구-적의 구별이 대립에 다름 아니라는 것, 더욱이 이 대립이 의미하는 것은 실재적(實在的) 가능성으로서의 전쟁이라는 것을 밝히고 있다(Derrida 1994:144f).

슈미트는 친구-적의 대립이 실재 가능한항쟁이라는 것을 다음과 같이 말한다. “여러 국민들은 친구-적의 대립에 따라 결속하는 것이며, 이 대립은 오늘날에도 현실에서 존재하고 있으며, 또한 정치적으로 존재하는 모든 국민에게 실재적 가능성으로서 주어져 있다는 것을 도저히 부정할 수 없다. 따라서 적이란 다만 적어도 잠재적으로, 즉 실재적 가능성으로서, 항쟁하고 있는 인간의 총체이다”(Schmitt 1931:18-19, 강조는 인용자). 이 항쟁은 전쟁이나 다름없다. 슈미트에게 전쟁은 다음과 같이 정의된다. “전쟁이란 조직된 정치적 통일체 사이에서의 무력에 의한 전투이다”(Schmitt 1931:26). 또한 내전은 이 정치적 통일체 내부의 전쟁이다. 그리고 데리다는 전쟁도 내전도, 그 본질은 인간의 죽음을 목표로 하는[지향하는] 데에 있다고 말한다. “어떤 경우든 이 전쟁은 무력에 의한 것이다. 치사(致死)를 목표로 한. ‘무기는 여기서 그 본질적 개념에 있어서 인간의 치사로서의 신체적·물리적치사를 목표로 한 수단이다. 인간의 죽음은 이 적 개념에 의해 이렇게 함축되며, 즉 대외전쟁이든 내전이든, 모든 전쟁에 포함된다”(Derrida 1994:193-194). 여기서 대외전쟁과 내전은 인간의 죽음을 목표로 한다는 점에서 동일한 전쟁이라는 범주에 들어가게 된다는 것에도 주의하자.

실제로 슈미트에게서 이렇게 적의 신체적·물리적 죽음을 목표로 하는 전쟁은 단순히 잠재적인 가능성을 지닌 것일 뿐만 아니라 실제적 가능성으로서 현전하고 있는 것이지 않으면 안 된다고 여겨진다. “친구, , 전투 같은 개념은, 그 실재적 의미를, 신체적 치사의 실재적 가능성에 대한 항상적인 관계로부터 끌어내고 있다. 전쟁은 적대에서 생겨난다. 왜냐하면 적대는 다른 존재의 존재론적 부정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전쟁은 적대의 극한적 실재화에 지나지 않는다. 전쟁은 범용한 일상이나 정상적인 것일 필요가 없으며, 하나의 이상처럼, 혹은 바랄 값어치가 있는 것처럼 느껴질 필요도 없지만, 적 개념이 그 의미를 유지하는 한, 실재적 가능성으로서 계속 현전하지 않으면 안 된다”(Schmitt 1931:25, 강조는 인용자). , 이 전쟁은 단순한 추상적 사고 대상이 아니라, 극히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것이어야 한다. 왜냐하면 슈미트에 따르면, 전쟁이 그런 구체성을 결여했을 때, 그 개념은 유령적인 추상이 되기”(Schmitt 1931:22) 때문이다.

그러나 이렇게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것이라 해도, 전쟁은 예외상태일 것이다. 그렇다면, 정치적인 것은 예외로부터 정의되게 된다. 실제로 슈미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오늘날에도 여전히 전쟁이라는 사태는 위급[긴급]사태이다. 이 경우에도 다른 경우에도, 예외적 사태야말로 특별하게 규정적인, 사물의 핵심을 밝혀내는 의의를 갖는다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친구와 적의 정치적 배치의 극한적 귀결이 노출되는 것은 현실적 전투에서일 뿐이기 때문이다. 극한적 가능성에서 출발해 인간들의 삶은 특수 정치적인 긴장을 획득한다”(Schmitt 1931:30). 흡사 데리다에게서 여백(파르레곤)이야말로 작품(에르곤)의 의미의 틀을 규정하고 있듯이.

이로부터 데리다는 슈미트의 논의를 정리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예외가 규칙이다, 이것이 어쩌면 실재적 가능성의 이런 사고가 의미하는 바일 것이다. 이 사태, 이 상황은 예외적인 방법으로만 도래할 뿐이다. 그것은 그 결정적 성격, 중단 없이, 양도 없이, 무효화하지도 않는다. 이 예외성이 반대로, 사건의 우발성을 정초한다. 어떤 사건이 사건이고, 그리고 결정적인 것은 예외적인 경우뿐이다”(Derrida 1994:203).

이로부터 데리다는 전쟁은 전제이지 목적이 아니라고 하는 슈미트(Schmitt 1937:35)에 반하여, 전쟁은 정치적인 것의 텔로스라고 말한다. “이렇게 개시되는 [전쟁의] 실재적 가능성의 현전, 실재적 혹은 가능적인 이 현전은, 사실이나 사례의 현전이 아니다. 그것은 텔로스의 현전이다. 정치적인 텔로스의, 이러저러한 정치적 목적의, 이러저러한 정책의 현전이 아니라, 정치적인 것의 텔로스의 현전인 것이다. ‘가장 극한적인정치적 수단으로서 모든 정치적 표상을 정초하는전쟁은 친구/적의 이 차별의 가능성을 구현한다. 그리고 이 표상에 의미가 있는 것은, ‘유의미한 것은, 이 차별이 실재적으로 현전해 있는한에서, 혹은 적어도 현실적으로 가능한 한에서이다”(Derrida 1994:208-209, 강조는 인용자).

따라서 어떤 정치나 사회적 유대[연결], 실재 가능한 전쟁 없이는 있을 수 없게 된다. “전쟁에는 의미가 있다. 그리고 어떤 정치도, 정치적 유대로서의 어떤 사회적 유대도 전쟁 없이는, 그 실재적 가능성 없이는 의미가 없다”(Derrida 1994:210). 바꿔 말하면, 그 어떤 정치도, 정치적인 연결[유대]도 전쟁의 실재적 가능성에 의해 정초된다. 거꾸로 말하면, ‘예외상태로서의 전쟁이 정치적인 것을 규정하는 이상, 정치적 동물로서의 우리는 늘 친구-적을 염두에 두고, ‘예외상태로서의 전쟁으로 향하게 된다. “가장 극한적인 정치적 수단으로서의 전쟁은 모든 정치적 개념의 기초에 이 친구와 적의 구별 가능성이 존재한다는 것을 개시하는 것이다”(Schmitt 1993:31).

이리하여 우리는 슈미트의 친구-적 논의에 대한 데리다의 분석에서, 정치적인 것이 예외상태로서의 전쟁에 의해 규정되는 한, 전쟁은 정치의 텔로스이며, 우리는 늘 예외상태로서의 전쟁을 목표로 하고 있다는 결론을 끌어낼 수 있다. 그러면 전쟁이 정치적인 것의 텔로스인 한, 정치적 동물인 우리는 전쟁에서 벗어날 수 없는가.

 

2. ‘비세계에서의 전쟁의 일상화[常態化]

하이데거도 서양형이상학은 인간중심주의에 빠져 있기에 존재하는 것을 남용하기에 이르며, 필연적으로 전쟁이 일상화된다고 주장한다. 하이데거는 1936년부터 1946년까지 쓴 수기 형이상학의 초극에서, 인간이 기술에 의해 존재하는 것-(集立)[주1]하고, 대용품을 대량생산하여 소비를 위해 남용하고 있는 세계에서는, 전쟁이 일상화되며 전쟁과 평화의 구별이 없어진다고 말한다. 존재하는 것을 징발하고 남용하는 미오(迷誤[혼동])’의 세계를, 하이데거는 비세계(Unwelt)’(Heidegger 1954:137)라 부른다. 그리고 하이데거는 이 비세계화의 귀결로서, 전쟁과 평화의 구별이 없어진다고 말한다.

[주1] [옮긴이] 하이데거의 기술론에서 가장 먼저 등장하는 단어가 게슈텔(Ge-stell)인데, 이것의 일본어 번역어이다. 한국에서는 닦아세움이나 몰아세움이라고 흔히 번역된다

 

평화가 언제 오느냐라는 질문에 답할 수 없는 것은, 언제까지 전쟁이 계속될지를 알 수 없기 때문이 아니다.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것에 대한 물음이 물어지기 때문이다. 실제로 이미 전쟁은 마지막에는 평화에 이르게 될 것이라는 것이 더 이상 아니기 때문이다. 전쟁은 존재하는 것의 남용의 한 변종이 되고 있는데, 이 하나의 변종은 평화로울 때에도 계속된다. 장기간에 걸친 전쟁을 깨닫는 것은 남용의 시대에서의 새로운 것이 승인되는, 이미 시대에 뒤진 형식에 지나지 않는다. 이 장기간에 걸친 전쟁은 서서히 이행하지만, 그것은 과거의 평화에 이르는 것이 아니라, 전쟁과 관련된 것이 더 이상 전혀 그 자체로서는 경험되지 않고 평화와 관련된 것이 의미 없는 것, 알맹이 없는 것이게 되는 상태에 이른다는 것이다. 미오(迷誤)는 존재의 그 어떤 진리도 알지 못한다. 그러나 그 대신, 미오(迷誤)는 모든 영역에서의 모든 계획의 완벽이자 철저하게 동원된 질서와 확실함을 키워낸다(Heidegger 1954:138).

 

그리고 이렇게 인간이 기술에 의해 존재하는 것을 징발하는 현대세계는, 세계대전에 필연적으로 도달하게 된다고 한다. “세계대전과 그 무제한의 권력 행사는 이미 <존재로부터 외면당하는 것>의 결과에 불과하다”(Heidegger 1954:137).

이 직후에 지도자(총통, Führer)’가 불러내진다. 존재하는 것이 미오(迷誤)라는 방식으로 이행한 결과, 지도자가 필연적으로 등장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하이데거는 지도자의 등장을 찬미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지도자의 등장에 대해 사람들의 도덕적 분노는 자주 지도자들의 자의와 지배권의 요구로 부단한 찬미라는 가장 불쾌한 습관으로 향하게 된다. 지도자는 유쾌하지 않은 것이며, 그런 것은 분노의 추궁을 피할 수 없다”(Heidegger 1954:139). 그러나 그것은 피하기 힘들다는 것이 하이데거의 진단이다. 미오(迷誤) 속에서 공허(Leere)가 확산되고 공허가 존재하는 자의 유일한 조건과 확보를 요구하고, 거기서 지도의 필요성이, 즉 존재하는 것의 전체를 확보하기 위한 계획적인 산정(算定, Berechnung)의 필요성이 요구되기때문이다. 이리하여 지도자는 존재하는 것이 미오(迷誤)라는 방식으로 이행했다는 사태의 필연적인 결과”(Heidegger 1954:139)이게 된다. 이 지도자는 초인이자 본능적인 직관력을 갖고 있다는 의미에서 동물적이다. , ‘인간 이상이자 인간 이하의 존재이다. 바꿔 말하면, 이런 지도자의 존재는 인간을 이성적 동물로서 규정했던 형이상학의 산물에 불과하다. 또한 이렇게 전쟁이 전면화된 비세계에서는, 국가적인 것과 국제적인 것의 구별도 없어진다. , 존재자의 동원과 남용의 업무는 글로벌화되고, 역사를 균일화하는 동시에 인간을 획일화한다.

 

흡사 전쟁과 평화 사이의 구별이 무효라고 여겨지는 것과 마찬가지로, ‘국가적국제적을 구별하는 것도 무효가 된다. 오늘날 유럽적으로생각하는 것은, 더 이상 국제주의자라는 비판에 노출되지 않는다. 그러나 그 자는 더 이상 국가주의자도 아니다. 왜냐하면 그 자는 자국의 번영에 못지않게 그 다양한 국가들의 번영도 고려하고 있기 때문이다(Heidegger 1954:143).

 

이런 하이데거의 전쟁론은 지도자=총통에 대한 언급만이 아니라, 다양한 문제를 포함하고 있다고 자주 지적되었다.[주2] 여기서는 우리의 논점으로 이어지는 점만을 확인해두고 싶다. , 서양형이상학의 주체-인간중심주의가 지배하는 비세계에서는, “존재하는 것의 남용의 한 변형으로서 전쟁이 일상화된다는 명제이다.

[주2] 예를 들어 국가적-국제적 무차별화라는 테마는 대안지구화-코스모폴리타니즘을 재고할 때, 검은 노트에서의 탈인종화(Entrassung)’의 개념과 맞춰서 재해석해야 할 것이다

 

3. 도래할 민주주의와 자기면역

이렇게 친구-적 혹은 주-객의 존재론을 전제하는 이상, 근대세계는 필연적으로 전쟁의 일상화에 다다르게 된다는 슈미트-하이데거의 명제에 대해, 데리다는 불량배들에서 도래한 민주주의(démocratie à venir)라는, 타자를 셈에 넣는 시스템을 대립시킨다.

우리가 다른 곳에서 분석했듯이(松葉 2014), 민주주의란 민중이 지배하는 자인 동시에 지배되는 자인 정치”(Aristote n. d. : 1317b)였다. 데리다는 이런 민주주의를 도래할 민주주의라고 부르며, 그 미완결성을 보여줬다. , 민주주의는 회귀하는 수레바퀴처럼 지배하는 자와 지배되는 자가 교대함으로써 자기를 유지한다는 것이다.

한편으로 데리다는, 이런 민주주의 속에 항상 자기회귀, 자기순환하는 자기성 혹은 이것임(ipséité)’의 논리를 간파한다. “iposenopse는 방브니스트가 멋들어지게 보여줬듯이 복잡한 중계를 거쳐, 소유로, 재산으로, 기능으로, 군주, 주권자, 그리고 대개의 경우 주인(hospites), 이 집의 주인 내지 남편의 권위로 반송된다”(Derrida 2003b: 37). 이것은 데모스가 주권자[주3]일 뿐만 아니라, ‘수레바퀴의 회전운동으로서만 유지할 수 있을 뿐인 것, 따라서 거기서의 지배는 늘 불완전하고 미완결임을 드러낸다. 또한 토크빌의 정의에서 볼 수 있듯이, 데모스가 자기원인으로서 주권자이어야 하지만, 아리스토텔레스나 플라톤 등은 이 자기원인 즉 자유야말로 방종(exousia)’[주4]으로 연결된다며 비판해왔다.

[주3] 예를 들어 국가적-국제적 무차별화라는 테마는 대안지구화-코스모폴리타니즘을 재고할 때, 검은 노트에서의 탈인종화(Entrassung)’의 개념과 맞춰서 재해석해야 할 것이다

[주4] [옮긴이] 원래 엑소우시아는 권능이라는 뜻. 방종은 아콜라시아(akolasia)’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도래할 민주주의개념에 의해 데리다가 강조하고자 하는 것은 타자로의 전송으로서의 차연이다. 달리 말하면 민주주의의 자기의 갱신이 동일적인 자기로 갇히는 것이 아니라 타자의 타자성의, 이질적인 것의, 특이한 것의, 비자기동일적인 것의, 비대칭의, 타율의, 부인 불가능한 경험으로서의 차연”(Derrida 2003b:83)을 산출한다는 것이다. 이런 주권의 동일성에 대한 이타적(異他的)인 것의 도입, 그것을 데리다는 타율의 법이라고 부르기까지 한다(Derrida 1994:63).

이렇게 민주주의에 타자를 끌어당기기 위해서는 이 타자의 선택이 무조건적인 것이어야 한다. 선택이 주체가 부과하는 조건에 따르는 것이라면, 그것은 주체-주권자의 반복에 불과하게 되어버린다. 무조건적인 타자의 선택이야말로 도래할 민주주의의 기반이다. 데리다는 그것을 환대, 증여, 용서[허가] 같은 행위의 무조건성 속에서 찾아내고자 한다. “주권 없는 무조건성 속에서도, 최근 몇 년 동안 내가 특히 중요시하게 됐던 것으로서, 예를 들어 무조건의 환대를 들 수 있다. 환대가 무조건이라는 것은 타자의 도래에 제한 없이 처해 있다[노출되어 있다]는 것, 법권리를 넘어선다는 것이다. 무조건의 환대만이 무릇 환대의 개념 일반에 의미와 실천적 합리성을 부여할 수 있는 것이다”(Derrida 2003b:281-284).

그러나 바로 이 무조건성이 내전-전쟁을 초래할 위험성이 있다. “내가 받아들인 자는 폭행자, 살인자일지도 모른다. 이것과 마찬가지의 가능성은 배제할 수 없다. 그런데 보증 없는 순수한 환대에 있어서 타자가 혁명을, 나아가 예견 불가능한 최악의 모습을 초래한다. 그런 가능성도 받아들여야만 한다”(Derrida 2001c:117-118). 순수한 무조건의 환대는 그것이 바로 무조건인 까닭에 예견 불가능한 최악의 모습을 초래할지도 모르는 것이다.

데리다는 이런 시스템을 자기면역(auto-immunité)’이라고 부른다. 자기면역은 다음과 같이 정의된다. “어떤 생명체[生体] 속에서 타자에 대해 그 생명체를 보호하고 있는 것, 타자의 공격적인 침입에 대한 면역을 해당 생명체에 부여하는 것을, 바로 해당 생명체가 자율적인 방식으로 자발적으로 파괴한다는 논리”(Derrida 2003b: 234)이다. , 본래 타자로부터 자기를 구별할 터인 면역 기능이, 자기 자신에 대해 작동하는 작용이다. “도래할 민주주의는 타자를 무조건으로 편입시키기 때문에 이 자살적’(Derrida 2003b:75)인 기능이 작동하는 것이다.

가령 민주주의라는 시스템 자체를 부정하는 테러리스트들(불량배들)도 이런 타자이다. 그것은 민주주의를 민주주의답게 하는 데 불가결한 타자이며, 자신의 주권을 정당화하는 적극적인 조건으로서 데모스가 끊임없이 요구하는 타자이다. 따라서 민주주의에 대한 요구와 유지는 항상 민주주의의 파괴를 불가피하게 불러들이게 된다. 이런 자기 면역적인 민주주의는 제한 없는 과정이며, “자기 면역적인 것에 맞서는 확실한 예방법 따위란 없다”(Derrida 2003b:288).

그러나 자기 면역성은 양의적이다. 데리다는 자기 면역은 절대적인 악이 아니다라고 말한다.

 

자기 면역은 타자에게 노출된다는 것, 즉 도래하는 것 없는 자 따라서 계산 불가능한 채로 머물 수밖에 없이 노출된다는 것을 가능하게 하기 때문이다. 만일 절대적인 면역이 있을 뿐이기에 자기 면역이 없다고 한다면, 더 이상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이렇게 되면 더 이상 기다리는 것도 기대하는 것도 없을 것이며, 서로 기대하는 것도 사건을 기대하는 것도 없을 것이다(Derrida 2003b:290).

 

민주주의의 자기 면역 과정은 수레바퀴의 새로운 회전-혁명이 생기는 데 필요한 무조건성, 무방비를 위한 조건이기도 하다. 그것은 민주주의가 스스로를 유지하면서 자기동일적인 것에 머물지 않기 위해 필요한 과정이었다. 그것은 민주적인 것의 본질적이고 독특하며 구성적이고 종별적인 가능성으로서, 그 역사성 자체로서 자기 면역의 또 다른 형식이며, 이 역사성은, 그것이 다른 어떤 정체와도 분유하지 않는 내재적인 역사성이다”(Derrida 2003b:146). 따라서 데리다는 자기 면역성을 지닌 민주주의, “도래할 민주주의야말로, 설령 전쟁이나 혁명을 불어들일 가능성이 있다고 해도, 유일하게 가능한 정치라고 생각한다.

이렇게 데리다는 슈미트-하이데거가 지적하는 전쟁의 일상화[常態化]에 맞서, 자기 면역적 민주주의의 가능성을 주장한다. 확실히 도래할 민주주의는 타자에게 열려 있기 때문에 타자와의 죽음을 건 싸움을 피하고, 타자를 끌어들이면서 시스템을 유지할 수 있는 유일한 가능성일 것이다. 그러나 그것을 확대하여 칸트적인 세계시민국가(코스모폴리스)에서의 도래할 민주주의가 전쟁을 근절할 수 없다고 해도, 전쟁을 가능한 한 파멸적이지 않는 것으로 할 수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 그것은 외적(外敵)의 절대적 배제라는 면역이 아니라, 자기 면역의 고통을 동반하면서 시스템을 유지하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오히려 그것은 외부의 타자를 내부의 타자로 치환한 것일 뿐 아닐까. 거기서는 외부가 없어지기 때문에 외적과의 전쟁은 없어질지도 모르지만, 내적과의 내전은 없어질 수 없다. 그때 외적에 대한 면역보다도 자기 면역이 파멸적이지 않는 보증은 어디에도 없다. 더 이상 평화의 가능성은 남겨져 있지 않을까


(계속)

 이 글은 다른 여느 글보다 한자에 유의해야 한다. 그 중에서 특히 '반복'의 한자어가 다르다는 점에 주의하자. 즉, '反復 répétition'이 아니라 '反覆 itérabilité'이다. 자세한 것은 각주3을 참조. 한편, 용어상의 문제가 있기도 한데, 그 대표적인 것이 hantologie이다. 한국에서는 '유령론'이라고 번역되지만, 일본에서는 유령론 외에도 유재론(幽在論)이나 빙재론 등으로 옮겨진다. 




되풀이()가능성의 법

데리다의 유한책임회사와 행위수행성의 문제

反覆可能性: デリダ有限責任会社行為遂行性問題

The Law of Iterability : Jacques Derrida's Limited Inc. on the Performative

미야자키 유스케(宮崎裕助)

원문은 여기

발행일 : 2001131

 

자크 데리다의 방대한 저작군에 접근하는 데 있어서 1971-88년 사이에 계속 쓰여진 유한책임회사(J.L. 오스틴의 언어행위론의 독해를 포함한 서명, 사건, 맥락(1971), 이 논문에 대해 존 R. 설에 의해 이뤄진 비판에 재응답하는 유한책임회사 abc...(1977), 또한 이 일련의 <데리다-설 논쟁>에 대해 붙여진 질문장에 대한 공개서한으로서 발표된 후기 : 토의 윤리를 향하여(1988)의 세편의 텍스트)[각주:1]를 출발점으로 고른 것은, 이들 텍스트가 논쟁이나 공개서한, 그다지 자율적이지 않은 외견 , ‘주저가 될 수는 없는 듯한 을 드러내고 있다는 것에서 보면 의문이 없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니 오히려 그런 외견 때문에 (이 외견에 내포된 기생성의 논리야말로 이하에서 보듯이 거기서의 주요한 물음을 만드는 것인데) 유한책임회사는 아마 다음의 점에서 데리다를 읽기 시작하는 데 있어서 불가결한 도입적 가치를 부여한다. (1) 접근법의 측면. 데리다의 이른바 철학사적 입장은 보통 현상학 및 존재론에서 시작되는 해석학적 혹은 텍스트론적 전개의 하나로 간주된다(초기의 아카데믹한 후설 연구, 탈구축(déconstruction)과 하이데거의 해체’(Destmktion) 사이의 긴장관계, 존재론(ontologie)유재론(幽在論, hantologie) 등등). 그러나 탈구축의 본령이 여러 언어들, 장르들(철학, 문학, 예술, 정치, 정신분석)의 횡단이라는 것을 뒷받침이라도 하듯이, 데리다의 언어행위론에 대한 개입은, (‘대륙철학영미철학이라는) “두 개의 현저한 철학적 전통의 대결[각주:2]이라는 외형을 환기함으로써, “프랑스현대사상에 관심이 없는 철학연구자뿐 아니라, 다른 많은 독자에게도 독해의 장을 열어왔다. 확실히 언어행위론은 (일상언어를 분석대상으로 하는 등) 성질상, 오히려 현상학 등보다도 고유하게 철학적인 전문어를 조직적으로 구사하는 등이 비교적 적은 만큼 접근이 쉽다고 생각되며, 또한 그만큼 데리다 자신의 입장도 첨예해진다는 이점이 있다. 실제로 세 개의 텍스트의 분명한 문체적 차이(학회보고, 논쟁의 응답, 공개서한)는 그 입장(의 차이)을 부각시키는 역사적 혹은 전략적 맥락들을 각각 기록하고 있을 것이다. (2) 탈구축의 맥락에 내적인 측면. 데리다 본인이 이런 배치를 적극적으로 활용하고 있다. 우선 결과적으로 자신의 언어론, 텍스트론을 특징짓는 데 주요한 역할을 맡게 된 되풀이[反覆] 가능성’(되풀이反覆 itération은 이하에서 보듯이 반복 répétition과는 엄밀하게 구별된다[각주:3])이라는 개념(정확하게는 -개념에 머문다)서명, 사건, 맥락에서 처음으로 명시적으로 전경화된다.[각주:4] 원래 데리다의 언어행이론 독해는 비판’, ‘반박’, ‘대결같은 부정적이고 대항적인 기획으로서 받아들여져야 할 것이 아니라, “대답을 시도하는”(86/101) 가운데 프로그램적 상태에 머물러 있는 것을 어떤 방식으로 한정하는 것”,[각주:5] 실제로 그것을 전개하고 인수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것이며, 확실히 이것을 받아서 70년대 후기 이후(영어권 진출 이후)의 데리다는, 최근까지도, 자신의 키워드의 일부로서 언어행위론의 용어(퍼포머티브/콩스타티브, 발언내적 혹은 발언매개적인 힘, 사용/언급, 약속/협박 등등)를 적극적으로 원용한다. 이때 이런 말들이 특히 법의 힘(1989-90) 이후 현저한 것처럼, 이른바 윤리--정치적주제계와 밀접하게 결부되는 것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3) 외적인 측면. 이런 언어행위론의 변형이나 재단련은 데리다나 탈구축의 독해의 문맥에 한정되어서는 안 된다. 언어행위론 자체의 전개는, 철학 내부의 문맥(분석철학, 해석학, 용어론 등)뿐 아니라, 법철학(특히 H. A. 하트),[각주:6] 언어학, 문학이론, 정신분석 같은 영역들에도 폭넓게 파급되고 있으며, 탈구축에 있어서의 개입의 내실에 따라서, 이것들의 전개가 입는 효과들을 측정하고. 그 귀결을 최대한 끌어내는 것이 기대된다(원래 언어행위론의 순수한계승은 여기서의 기획이 아니다. 이하에서도 묻고 있듯이, 이것이 구조적인 배제에 의해 스스로의 정통성을 참칭하는 사유화/고유화를 내포하는 한, 미리 제한된 몸짓이라는 것(순수와 불순의 공모관계)는 그 자체 탈구축의 물음 중 하나이다(85ff.[100]).

이상의 가설적 측면의 모든 것을 여기서 일일이 검토하는 것이 아니라, 본 논고에서는 지면의 제약 때문에도 당장은 (2)의 측면에 논의를 집중시키고 싶다. 왜냐하면 다른 두 측면의 가치를 유효하게 평정하기 위해서는 당연하게도 그 이전에 데리다의 언어행위론 독해가 그 정도로 내재적인 이론적 개입이라는 전제가 설명되어야만 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확실히 개입일까? 그렇다면 이 개입은 어떤 것인가? 어느 정도까지 그런가? 혹은 오히려 어떤 방향에서 파악되어야 할까?

 

1. 되풀이[反覆] 가능성의 프로토콜

문제의 핵심에 간단하게 접근하기 위해, 오스틴, 설에 대한 데리다의 응답을 추적해가지는 않고(이것에 대해서는 이미 일본어로 쓰인 몇 개의 논문을 참조할 수 있다),[각주:7] 우선 유한책임회사에서 재차 환기되는 되풀이[反覆] 가능성(itërabilité)’이라는 말에 초점을 맞춰 최소한 이해할 수 있도록 해보자. 사실상 이것은 직접적으로 언어행위론의 텍스트로부터 인용된 것이 아니며, 서명, 사건, 맥락에서도 전반부(오스틴 독해는 후반부)에서 데리다가 자신의 언어론의 틀을 요약적으로 제출하려고 할 때 도입된다. 이러한 되풀이[反覆] 가능성을 주제화하는 한에서는, 언어행위론과의 관련은 외재적인 것에 머물 우려가 있으며(실제로 이 연관은 반드시 데리다의 텍스트에서 분명하다고는 말할 수 없다[각주:8]), 만일 그것 이상의 것이 아니라고 한다면, 그것에 응하여 언어행위론이 초래하는 적극적인 효과들은 상실될 것이다(나중의 데리다의 언어행위론의 적극적 원용은 단순한 전략적 몸짓에 지나지 않게 된다). 하지만 바로 이 관계를 묻기 위해서, 우선은 언어행위론의 문제계와 혼동하지 않고 그로부터 독립적으로 이 말을 검토하자. 되풀이[反覆] 가능성과 화행speech act, 혹은 오히려 행위수행성 사이의 내재적 연관을 명확하게 하는 것은 그 후의 과제이다.

원래 되풀이[反覆] 가능성이 다뤄지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은, 그것이 언어의 아주 기본적인 물음 언어란 무엇인가, 무엇이 언어를 언어답게 하는가, 무엇을 갖고 언어는 존재하며, 언어는 언어로 간주되는가 등등 에 답하는 언어 일반의 성립 조건으로서 첫째로 제출되고 있기 때문이다. 데리다에 따르면, 이 되풀이[反覆] 가능성에 있어서 증시[証示, 증명하여 보임]되는 것은, 언어에는, 어떤 구조적인 불법이 필연적인 가능성으로서 내속해 있다는 것이다. 부재란 해당 언어를 규정할 터인 초월적 심급의 최종적 부재, 즉 발신자, 수신자, 의미, 의도, 규칙, 관습, 코드, 발화의 맥락 등등의 근저적 부재이다. 무슨 말일까?

데리다는 그런 부재에 있어서도 여전히 언어가 존재하는 것의 한계적 사례를, 다음과 같은 에크리튀르(마크, 문자)의 예를 상정함으로써 환기한다. , “그 에크리튀르의 코드는 비밀의 암호로서의 두 사람의 주관만으로 창출되고 알려진 것에 불과할 정도로 특유한 어법이라고 한, 그런 에크리튀르”(27[20])를 상정하고, 그들이 죽은 후에도 (그래서 더 이상 그 올바른해독 코드를 확인할 수 없다) 여전히 에크리튀르라고 말할 수 있는지를 묻는 것이다. “확실히 우리는 다음의 한에서 그것은 아직도 에크리튀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 그 마크는 어떤 코드 설령 그 코드가 미지이고 아직 언어적이지 않더라도, 그것은 문제가 아니다 에 의해 규정되어 있고, 경험적으로 규정되어 있는 이러저러한 주관의 부재에 있어서, 따라서 궁극적으로 모든 주관의 부재에 있어서, 그 마크의 <마크로서의 동일성>에 있어서 스스로의 되풀이[反覆] 가능성에 의해 구성된다는 한에서인 것이다”(28[20]). 여기에는 기원에 있어서의 주관의 (지향의) 부재, 주관이 규정한 바의 코드의 부재에 있어서 여전히, 언어가 언어로서 되풀이[反覆]될 수 있는 한 존재한다는 가능성이 암시되고 있다(해독 코드를 잃어버린 암호, 미지의 다른 언어, 고대인(또는 우주인’, ‘광인)의 문자 흔적 등등).

되풀이[反覆]되는 것은 언뜻 보기에는 마크로서의 동일성이다. 그러나 그 어떤 선행하는 주관도 코드도 전제하지 않는 동일성이란 기묘한 것이다. 사실상 이 기호적 동일성(의미의 단위unit)은 독자가 스스로의 해독 코드(독해규칙)동시에 정립함으로써 창출된 것이다. 이 동일성은 단순히 자의적으로가 아니라, 그것을 따르는 코드에 입각해, 즉 반복하여 적용 가능한 것으로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시에 해당 코드 자체를 찾아냄으로써 가능해지고 있다. 그런 것으로서의 이 마크는 여전히 전달 가능하고, 독해 가능하고, 해석 가능하다(때문에 언어는 존재한다). 따라서 이 경우, 올바른해독 코드를 아프리오리하게 전제할 수 없는 한에서, 오히려 코드는 잃어버린 것도 숨어 있는 것도 아니고, “구조적으로 비밀스러운 코드는 존재하지 않는다”(ibid.)고 간주되지 않으면 안 된다(그렇지 않으면 그 어떤 번역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다른 한편 그런 한에서, 항상 이 동일성은 구성된 것인 동시에 한계지어진, 안정되지 않은 채 훼손되어 버린다. 요컨대 되풀이[反覆] 가능성이란 그 어떤 동일성으로부터도 독립하여 부재 자체에 있어서 반복한다는 최소한의 재인 가능성이며, 이것은 언어의 동일성을 반복 가능케 하는 코드 자체를 그때마다 동시에 자기 정립하면서 해당 동일성을 구성한다(, 또한 재파괴하고 탈구성한다)는 조건, 즉 동일성의 가능성의 조건인 동시에 불가능성의 조건인 것이다.

물론 이런 한계 사례에서의 언어의 성립이, 이른바 통상적인 커뮤니케이션 상황(수신자와 발신자가 이념상 현전해 있으며, 서로의 의도, 의미, 메시지를 이미 규약적으로 공유된 언어적 수단이나 매개에 의해 전달한다 등등의 상정)에 대한 반증을 제공하고 있다고 말하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다. 앞서 말한 부재를 한계 사례에 고유한 사태로 간주하는 한, 보통의 (이념화된) 커뮤니케이션에서는 사상되어야 할 우발사로서 둘러싸는 것이 항상 가능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원래 한계 사례를 한계적이라고 규정한 채 보통의경우로부터 구별한다는 상정은 유지할 수 있을까? 에크리튀르의 이런 구조가 일단 인정된다면, 이 부재를 단순한 우발적인 경험적 부재로서가 아니라, 쓰여진 말이든 얘기된 말이든, 언어 일반을 기능시키기 위한 적극적 조건을 이루는 구조적 부재로서 검토할 여지가 남아 있다.

확실히 보통의 사례의 경우, 개개의 언어적 요소(음조, 목소리, 잉크 등등)가 경험적으로는 다양한 현상형태를 가짐에도 불구하고, 거기에 관통하는 하나의 형식적 동일성(다양한 토큰을 통일하는 유형)이 규정[同定, identification]됨으로써 언어는 반복 가능하다고 생각된다. 이 경우의 반복은 오히려 언어를 규약적으로 조직하고 있는 코드들, 그것들을 규정[同定]할 수 있는 언어 운용자의 발화 능력(competence), 혹은 그것들을 부활[賦活: 활력을 주어 활성화시킴]하는 주관의식의 지향성, 또한 그런 심급들이 상관적으로 이루고 있는 맥락 등등에 기초하고 있다. 그런 한에서는 부재 그 자체에 있어서 반복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고, 이런 초월론적 심급이 항상 언어의 반복 가능성을 통제하고 있다는 것이다. 물론 이래서는 한계 사례는 설명할 수 없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것은 단순히 보통의 경우에 대립되는 것이 아니다. 데리다는 결코 그런 심급을 그것 자체로서 비판 검토하거나 배척하거나 하지 않을 것이다(여기가 데리다 이해의 매우 오해가 많은 곳이다). 예를 들어 데리다는 이렇게 묻고 있따. “발신자 또는 수신자의 현전이라는 (외관상의) 사실은 부재가 마크의 기능 속에 필연적으로 스스로를 기입하는 한에서, 어떤 부재의 가능성에 의해 복잡화되고, 분할되고, 오염되고, 기생되는 것이 아닐까?”(97[108]). 이때 고려되는 것은 규약성 또는 지향성 등의 심급들의 고전적인 요청의 불가피성에도 불구하고 그것들을 필연적으로 매개한다는 부재의 구조적 가능성, 즉 오히려, 아무리 불가피하더라도 그것들이 항상 부재의 가능성에 있어서 기능하고 있다는 것, 미리 부재의 가능성에 의해 한계지어지는 것에 의해 구조화되고 있다는 것이다.

설명하자. 반복하지만, 여기서 묻고 있는 것은 그런 심급들의 경험적 부재가 아니다(부재의 가능성이라고 말해지는 것에 주의). 더 일반적인 차원을 환기한다면, 실제로, 커뮤니케이션이 가능하다고 할 때, 이를 위한 최소한의 규약은, 일개의 완결된 체계적 전체에 있어서 완전히 현전시킬 수 있을 필요는 없고, 또한 경험적으로도 확정 불가능하다고 생각되지만(원래 최소한의 규약을 어디서 찾으면 되는가, 예를 들어 사전과 문법서에 의해 커뮤니케이션이 생긴다고 볼 수 있을까, 또한 하나의 사전은 완결될 수 있을까 등등), 설령 유한한 규약의 리스트를 인공적으로 작성하더라도 원리적으로 그 작성을 위한 규약, 적용을 위한 규약 같은 메타규칙이 항상 요청될 수밖에 없으며(크립키가 끄집어낸 비트겐슈타인에게서의 규칙 순종의 패러독스를 상기할 수 있다),[각주:9] 결국 커뮤니케이션이나 언어 체계의 확실한 기초로서는, 그 어떤 해석에도 환원되지 않는 규칙의 파악,[각주:10]권위의 신비적 기초”(몽테뉴-파스칼)[각주:11]가 하나의 아포리아로서 등장할 수밖에 없다. 이것은 초월론적 심급으로서 확정 가능한 규약의 근원적 부재(-근거)를 가능성으로서 포함하고 있지 않고서는 그 어떤 규약이든 기능할 수 없다는 것이다(앞서 말했듯이 반복 가능성은 바로 그런 기능의 조건이다).[각주:12] 또한 규약을 부활[賦活]하고 규정[規整: : 규범 등을 세워서 사물을 정리함]하는 의도=지향(및 그것에 의해 중심화된 맥락적 전체성)을 상정했다고 해도 사태는 바뀌지 않는다. 데리다 자신, 의도=지향의 개념을 오히려 본질적이라고 간주한 위에서, 의도=지향이 그 표현에 있어서의 충실성을 불가피하게 목표로 함에도 불구하고, 그래도 여전히 필연적으로 달성할 수 없고 또한 달성해서도 안 되는 으로서, 의도=지향의 텔로스에 대한 구조적 설명을 주고 있다. , “충실성은 의도=지향의 텔로스입니다만, 그 텔로스의 구조는 의도=지향이 이 텔로스를 달성하면 그것들은 함께 소실되고, 서로 마비하며, 움직일 수 없게 되고, 죽어버린다는 것입니다”(233). 텔로스의 달성이란 단적으로 죽음이며, 오히려 그 달성 불가능성, (end)의 부재에 있어서야말로 의도=지향의 운동은 구동되며 살아있다. 결국 이런 끝이 없음은 의도=지향의 목적론적 본질의 외재적 잔재인 것이 아니라, 가장 내밀하고 가장 환원 불가능한 타자로서, 타자 그 자체로서, 그 본질에, 그 본질에 있어서 귀속하는 것입니다”(234).

문제는 어디까지나 부재가 가능성으로서 기능하는 그 구조이다. “보통의 사례의 보통성(, 의도나 규약과 같은 초월론적 심금의 기능)은 이런 부재의 기능에 매개됨으로써 주장되고 있다. 그런 부재를 가능성으로서 드러내는 한에서, 오히려 한계 사례는 단순한 보충, 추가, 예외에 밀어붙여야 할 우발사이기는커녕, 역설적이게도 보통의 사례를 범례화하는 것이라고 말해야만 한다. 사실상 데리다의 탈구축적 몸짓을 일관되게 동기부여하고 있는 것은 이런 목적론적으로 본질화된 가치(의도의 충실, 규칙 순종의 일치, 맥락의 포화 등등), 그것에 의해 배제된 종속적 가치를 자신의 내재적 구성요소로서 늘 필요로 하며, 그런 한에서 이 본질’(현전, 동일성, 내부 )이 미리 -본질’(부재, 차이, 외부 )의 가능성에 의해 꿰뚫어지고, 분할됨으로써 비로소 처음으로 기능한다는 과정을 계속 논증하는 것이다. 부재의 구조적 가능성을 고려한 이런 에코노미의 분석은, 규약이든 의도=지향이든 맥락이든, 이것들의 가치를 규범화하고 계층화함으로써 체계화되는 전통적 언어 이론의 구축이 항상 도달하지 못하는 것으로서 구조화되어 있음을 보여줄 것이다. 부재에 있어서의 되풀이[反覆]라고 말함으로써 주장되는 것은, 언어의 이데아적 동일성을 규정[規整]하는 심급들을 그것 자체로서 파괴하거나 부정함으로써가 아니라, 이런 기능들을 고전적 요청의 필연성에 있어서 일단 받아들인 뒤에, 동일성의 생성과 해체의 이중화 과정을 통해, 이런 심급들이 안고 있는 목적론적인 구조적 한계, 게다가 이 구조를 조건짓고 있는 윤리-이론적인 결정을 파헤치는 것이다. 이론적 담론은, 주의하면 피할 수 있는 듯한 우발적인 논리적 부정함에 의해서가 아니라, 바로 엄밀하게 이론적이기 때문에, 어떤 윤리적 명령(일정한 형이상학적 가치를 서열화하고 계층화함으로써 해당 이론을 이론으로서 조직하는 명령)을 내재화하고 있다. 이리하여 되풀이[反覆] 가능성의 구조는 내부와 외부 사이의 경계선의 단순성, 항들 사이의 계기 혹은 의존의 순서=명령을 어지럽히고, 배제의 절차를 금지한다(그것을 방해하고, 부당한 것으로 한다). 그것이 되풀이[反覆] 가능성의 법이다”(171[161]).

그러나 이런 점에서 보면, 되풀이[反覆] 가능성의 어디에나 양의적인 성격이 귀결될 것이다. “(동일화하는) 되풀이[反覆] 가능성 없이는 이데아화는 없고, 그러나 똑같은 이유 때문에 (이타화하는) 되풀이[反覆] 가능성 때문에 순수한 채로 모든 모염을 면한 이데아화라는 것도 없다”(217). 되풀이[反覆] 가능성이 동일성의 가능성의 조건인 동시에 그 불가능성의 조건이라고 말해지는 것은 이런 의미에서인데, 바로 그 때문에 스스로가 조건인 바의 근원성을 실효시킬 수밖에 없다. “근원은 근원으로서의 가치를 갖고 자기 유지하기 위해서는, 근원적으로 스스로를 반복하고 이타화=변질시키지 않을 수 없다”(되풀이[反覆] 가능성의 역설).[각주:13] 사실 동일물의 반복이 아닌 되풀이[反覆]라는 것을 설명하는 데 부재 그 자체에 있어서 반복한다는 최소한의 재인 가능성이나 동일성을 반복 가능케 하는 코드 그 자체를 그때마다 동시에 자기 정립하면서 해당 동일성을 구성한다는 말투는, 되풀이[反覆]를 그 자체로서 해명하고 있다기보다는 어디까지나 이데아적 반복과의 관련에서, 그 역설적인 한계에 있어서의 환원 불가능한 잔여로서 소급적으로 나타내는 것에 불과하다. 즉 사태 그 자체로서는 미리 재마크화된(re-marqué) 마크가 항상 이미 지적되고 있을(remarqué) , 결국은 무엇이 되풀이[反覆]되는지, 왜 되풀이[反覆]되는지 등의 근본적인 물음에는 결코 답하지 않는 것이다(만일 데리다의 시차적(示差的)인 마크의 비-현전적 잔여-저항残遺”(32[24])라는 말을 그 대답으로 간주한다면, 이 기묘한 조어(残遺 restance [잔여=저항, -존립])가 요청된 곤란을 이해하지 못하게 될 것이다). “되풀이[反覆] 가능성이라고 불리는 무엇인가에 대해 말하기 위해서는, 우리는 그것을 명명하고 규정[同定]하고 기술하지 않으면 안 되며, 그렇게 함으로써 마치 그것이 하나의 대상인 것처럼 다루지 않으면 안 된다. 달리 말하면, 우리는 그것을, 그것 자신이 의문에 부치고 있는 방식으로 파악하지 않으면 안 된다.”[각주:14] 이리하여 되풀이[反覆] 가능성은 그 자체로서는 아포리아이며, 의미 내용을 갖지 않은 준-개념에 머문다. 그것은 궁극적으로는 바로 오해됨으로써만 이해될 수 있을 뿐이다(유한책임회사 abc…」에서의 오류miss’ 유형의 가설(81[97])을 상기하자). 그러므로 데리다는 직접 비판되지 않고, 서명, 사건, 맥락이 그 효과에 있어서 오히려 명중하고(toucher) 이해됐다고 말할 수 있다(85[100]). 그 감촉이 없으면, “유한책임회사 abc” 같은 일그러질 정도로까지 부풀어 오른 텍스트 입맛을 다실 뿐만 아니라, 상대를 문자 그대로 통째로 집어삼켜 체내화하는 것에 쾌락을 느끼고, 그것에 의해서 토실토실 살찌는 일종의 괴물[각주:15] 가 환기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2. 행위수행성에서 수행 가능성으로

언어의 초월론적 심급에 있어서의 부재의 구조적 가능성은, 그것을 설명하는 듯 보이는 개념(되풀이[反覆] 가능성)의 자기 복제화도 해소 불가능하게 한다. 이것이 요청하는 것은 결코 몽매주의’(216, 257n)로의 철수 따위가 아니라, 그 어떤 입장에서부터든, 이런 아포리아를 일정한 윤리-목적론적 계기들로서 내재화시킴으로써 바로 그 이론적결정이 이루어지고 있다고 하는 것에 대한 최소한의 인식이다. 언어행위론이, 탈구축이 그렇게 지명되기 이전에 있어서 열어 젖혔던 분석의 공간은, 바야흐로 이런 인식을 가능케 하는 차원으로서 제시되게 될 것이다. 언어행위론과 되풀이[反覆] 가능성의 논의와의 내재적 연관을 명확히 하고, 이 연관에 있어서 오스틴이나 언어행위론의 텍스트의 전면적 재독해를 준비하기 위해, 여기서는 잠정적이기는 하지만, 다음의 방향을 소묘할 수 있다.

(1) 전면적 화행(speech act). 오스틴이 스스로 철학사에 있어서의 가장 위대하고 가장 유익한 혁명”(HW, 3[8])[각주:16]이라고 부르는 것도 불사하는 언어행위론의 요점은, 우선 문장 일반의 기능의 조건을 규정하는 데 있으며, 사실확인적(constative)/행위수행적(performative)이라고 불리는 구별을 도입한 것에 있다. , 문장의 역할이, 진위의 어느 하나에 있어서 사실을 기술하는 진술문(사실확인적 언명)의 역할로 환원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전통적 상정을 “«기술주의(記述主義적 오류”(HW, 3[7])로서 배척하고, 거기에는 환원 불가능한 차원, 문장을 내뱉는 것이 바로 그 행위를 실제로 행하는 것이나 다름 없는”(HW, 6[11]) 차원, 언급 내용이 언급행위 자체에 의해 구성되는 행위수행적인 차원을 분리하는 것이다(“나는 약속한다등등). 그러나 여기서 주의해야 하는 것은 사실확인적/행위수행적이라는 구별의 비대칭성이다.[각주:17] 원래 이 대립은 문장의 집합 전체를 상호 배타적인 두 개의 언명군으로 분할하는 것이 아니라, 문장의 통사 형태로부터는 식별 불가능하다(“«들판에 소가 있다»라는 발언은, 경고일지도 모르며 단순히 풍경을 묘사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HW, 33[56]). 이 구별을 결정하기 위해서는 발언이 행해지는 전면적 상황”(HW, 52[91])(제반 관습=규약이나 맥락의 전체)을 고려할 필요가 있다고 오스틴은 말하지만, 물론 그런 전체성은 그 자체가 분석을 요하는 개별 문장의 집적으로부터 출발해서 생각할 수밖에 없는 이상, 부분-전체의 순환에 있어서 문제는 뒤로 미뤄진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적어도 확실한 것은, 진술이 그 자체 외에도 수많은 행위의 하나이며, 그러므로 진술의 진위가, 말의 의미에만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상황에서 어떤 행위를 수행하느냐에도 의존하기”(HW, 145[242]) 때문에, 우선 기술적(記述的) 또는 사실확인적 차원을 그 자체 발언행위로서 구성하는 퍼포머티브의 구조를 상정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 이런 상황의 전체성이 전면적 화행”(HW, 52[91])으로서 재파악되어야 한다는 것, 결국 그런 사실확인적(constative)-행위수행적(performative)의 연쇄 그 자체를 비규약적인 방식으로 근원적으로 정립[措定]하는 순수한 원초적인 퍼포머티브”(HW, 69[121])로 소급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2) 발화내적 힘들. 모든 발언 중에 그 기능의 조건으로서 편재하는 행위수행성의 차원의 발견에 대응해서, 오스틴은 하나의 발언행위에 대해 더 나아가 두 개의 기능, 즉 해당 발언 행위 속에 수행되는 또 다른 언어행위인 발언내 행위”(약속, 명령, 선언 등등), 그 수행에 의해 수신자에게 일정한 효과를 미치고자 하는 발언매개행위”(수신자의 감정 등을 실제로 야기한다)와의 두 개의 상을 구별하는 것을 제안하며, 더 일반적인 언어행위론의 구축을 향해 “«발언내적 힘들(illocutionary forces)»의 학설”(HW, 100[173])을 발견했다. 데리다는 바로 이 의 환기 속에, 고전적 진리 개념(アデクワチオ[합치] 및 알레테이아[탈은폐, 비은폐])에서 면해짐으로써 하나의 상황을 산출 혹은 변형하는”(37[28]). 퍼포머티브의 구조를 인정했던 것처럼, 우리는 여기서 되풀이[反覆] 가능성과 행위 수행성의 평행성을 해명하기 위한 실마리를 지적할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언어에 내속하는 부재의 구조적 가능성이란, 실제로 발언 내적인 힘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퍼포머티브한 언명의 자기 반사적이고 자기 언급적인 성격, 스스로가 그때마다 구성하는 특이한 현실을 지시한다는 성격에서부터 이해된다. 에밀 방브니스트가 지적하듯이, 원래 퍼포머티브의 수행적 본질은, 그것이 고유한 일회성에 있어서 내뱉어진다고 하는 것이다. 어떤 수행적 언표는, 예를 들어 오스틴이 분류한 특정한 수행 동사의 형태에 기초하여 성립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으로부터 독립된 채 한 번이자 한 번에 한해서, 정해진 어떤 때와 장소라는 특정한 상황 아래에서만 실현될 수 있다. 그것은 묘사의 가치도, 규정의 가치도 아니고 실행이라는 가치를 갖고 있는 것이다.”[각주:18] 거듭 말하지만, 퍼포머티브의 성립은 문장의 통사 형태에 의존하지 않는다. 그것이 일개의 행위일 수 있는 것은, 그것 자체가 창출되는 바의 유일한 상황에 있어서의 사건을 스스로 창출함으로써, 사건이 되기 때문이다. 이런 유일성, 일회성이 아니라면, 어떤 언명도 공허한 형식에 머물며, 그것이 특정한 상황에서 실제로 무슨 일인가를 이룬다는 것은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일회적인 사건이 사건으로서 규정[同定]되기 위해서는, 이 일회성이 그 자체로 항상 이미 반복 가능한 형식에 있어서 매개되어야만 한다. 물론 그런 형식을 맥락상의 제반 규약으로서 상대적으로 규정하고 있을 터인 전면적 상황, 그 자체로, 우리가 묻고 있는 바로 그것에 의존하고 있다. 발언내적 힘은, ‘전면적 상황인 퍼포머티브-컨스타티브의 연쇄 그 자체를 반복 가능한 형식으로서 창출하는 원초적인 퍼포머티브의 힘이다. 사후적으로만 발견될 뿐인 이 형식을 미리 정립[措定]하면서, 그것에 비추어 스스로의 특이한 사건을 성립시키는 자기 정립적인 기능이야말로, 퍼포머티브에 고유한 자기 지식 = 참조적(sui-référentie)”[각주:19]인 성격이다. 이 자기 지시성, 더 일반적으로는 자기 반사성은, 그렇지만 하나의 자기 촉발적인 기체(基體), 완결된 자율성으로서 적극적인 의미에서 받아들여져야 할 것이 아니라, 되풀이[反覆] 가능성과 마찬가지로, 어디까지나 부재의 가능성에 의해 구조화된 기능이다. 왜냐하면 발언 내적 행위는 그 자체로서는 동어반복적인 자기 언급으로 귀착되기 때문에, 거기에 부재의 가능성을 포함함으로써만, 여러 상황들에 있어서 반박 가능한 가치를 지니는 (즉 지시적인 힘을 지니는) 언어 존재로서 자신을 정립[措定]할 수 있을 뿐이기 때문이다. 그것 자체가 부재의 가능성(순수한 현전의 불가능성)에 매개된 지시 작용은, 그 자신이 언표하는 지시와 스스로의 조건에 대한 지시로 내적으로 분열된 채 결코 맞물리지 않는다(아마 우리는 여기서 원초적인 퍼포머티브에 고유한 근원적인 수행론적 모순더 이상 모순이라는 말이 적절한지 어떤지는 차치하고 을 찾아낸다).[각주:20] 이른바 일개의 발언이 의미하고 있는 것 이전에 그것이 의미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각주:21]라는 이런 이중성(언명존재와 언명내용, 발언의 factumdictum)의 거리 속에 발언 내적인 힘이 기입되어 있는 것이다(이것은 데카르트의 코기토의 구조에도 유비적이다).[각주:22]

(3) 근저적 정치화. 그러나 이렇게 퍼포머티브의 양의적 성격을 통합하는 발언 내적인 힘의 작용을 그 자체로서 일원적으로 찾아내는 한, 이상의 논의는 어디까지나 픽션에 머물 것이다. 힘은 어디까지나 부재의 가능성으로서만 사고되어야만 한다. 데리다도 후기에서 권력이나 힘이라고 지목되는 바로 그것은 결코 존재하지 않으며, 그저 권력의 차이 및 힘의 차이가, 양적인 것과 마찬가지로 질적인 바의 다양한 차이만이 있다는 사실을 고려하는 것”(275)을 강조하듯이, 퍼포머티브의 힘은, 소여의 맥락에 있어서 시차적(示差的)으로 규정된 다양한 지시적 결정으로부터 소급되지 않는다면, 그것 자체로서는 아무것도 아니다(단순히 신비적인 실체 X일 뿐이다). 되풀이[反覆] 가능성의 개념이 불가피한 자기 복잡화를 거쳐야 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행위수행성 개념은 어떤 화행이 추상적으로가 아니라 실제로 성립한다는 한에서 (경험의 근저적인 환원 불가능성), 그 효과에 있어서 기존의 사실확인적 언명으로부터 사후적으로 규정됨으로써, 불순한 그대로 파악될 수밖에 없다. 그렇지만 거꾸로 그 불순성 때문에, 행위 수행성은 소여’, ‘기득/텃세既得’, ‘자명하다고 간주된 맥락이나 관습성, 사회성에 필연적으로 관여할 수 있으며, 거기에 개입하고 그들을 동요시키고 변형하는 계기를 자신의 발언 내적인 힘들로서 계속 주고 있는 것이다.[각주:23]

어떤 퍼포머티브의 성패도 일정한 사실확인적 언표로서 서술[述定]될 수밖에 없으며, 이 컨스타티브 그 자체도 또한 항상 이미 행위수행성에 의해 매개됨으로써 재차 변형을 겪을 수밖에 없다. 그런 의미에서는, 성공한 퍼포머티브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 반복하면, 더 엄밀히 말해서, 퍼포머티브는 그 자체으로서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은 아마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qu’elle n’existe peut-être pas)”(36[27])이라고, 데리다는 서명, 사건, 맥락에서 에크리튀르를 그 되풀이[反覆] 가능성 때문에 존재론적 담론의 양자택일로부터 벗어나게 해야 한다고 적었다(156[151]).[각주:24] 일개의 퍼포머티브도 또한 존재/비존재의 대립은 물론, 성공/비성공, 적절/부적절, /불행 등과 같은 대립 속에 최종적으로 규정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아마도. 그러나 그런 것으로서 아마 존재할 것이다, 혹은 오히려 무엇인가를 할것이다. “아마(peut-être)”라고 아마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가능-존재로서의 이 양상을 자기 언급적인 언표로 강조해야만 하는 것은, 바로 행위수행성의 역설 때문이다, 즉 퍼포머티브의 존재가 그 비존재의 가능성에 의해 매개되고, 성공한 퍼포머티브가 그 실패의 가능성에 의해 매개됨으로써, 성공한 수행은 항상 그 수행의 실패의 수행으로 바뀔 수 있기 때문이다. 데리다가 다른 곳에서 적었던 말을 빌리면, 퍼포머티브는 도착 수행적(perverformative)이다.[각주:25] 퍼포머티브/컨스태티브가 子状[각주:26]으로 서로 규정하는 에코노미의 무제한은, “아마의 양상에 있어서, 완수되지 않은 화행의 결정 불가능성을 드러내는 동시에, 자신의 과정이 이 양상을 조건으로서 규정[規整]되는 유한성이라는 것도 스스로 알리고 있다. 퍼포머티브의 달성을 중지하면서 아마라고 말함으로써 이 양상이 지시하는 것은 퍼포머티브가 사건으로서 개입하는 위상, 즉 퍼포머티브가 자기 반사적으로 규정하고 규정되는 원환을 절단하는 에코노미를 재결정하는 계기인 것이다. 물론 아마라고 말해지는 이상, 이 원환 외부에 서는 것은 그것 자체 불가능하며(원환의 외부란 정의상 항상 원환에 내화되는 <내부의 외부>이다), 바로 그 사건이나 재결정의 내실을 미리 계산하거나 예견해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각주:27] 사실상 여기서 요청되는 것은 철두철미, 사실확인적 언표에 있어서 이 에코노미의 체제를 가능한 한 엄밀하고 긴밀하게 계속 재추적하는 것이며, 거기서 쟁점이 되는 관건을 바로 그 체제가 마비되기에 이르는 곳까지 그 내부로부터 과장법을 따라 경쟁적으로 서로 끌어올리는 것이다. 아마도 도착 수행적으로.

가능성으로서의 행위 수행성(수행 가능성 performability)이 위와 같이 소묘되더라도, 거기에 포함된 문제들에 대해, 오스틴의 텍스트 그 자체는 아직 검토되어야 할 여백을 남기고 있다. 한편으로 오스틴은 퍼포머티브의 순수성”(HW, 150[251])을 유지할 수 없는 것을 정당하게 밝히고 있으며, 실제로 발언 내적 힘들그 자체를 고찰의 대상으로 삼지는 않는다. 다른 한편, 이로부터 오스틴이 목표로 하는 바는 명시적인 수행동사의 분류를 거쳐 발언 내적 힘들의 목록”(Ibid.)을 일일이 열거하는 방향이다. 그러나 이런 자신의 분석 대상을 찾아내는 언어 행위론 그 자체의 퍼포머티브의 신분을 묻지 않는다면, 항상 바로 그 이론적담론은 그것이 분석한다고 주장하는 대상 그 자체 안에 포함되고, 거기서 <부분결정?되거나 하는 거승로서 나타난다”(136[136])(유한책임회사 abc…」에서의 세트유형의 가설. 데리다는 집합론의 역설을 언급하고 있다(231)). 따라서 그런 한에서는, 언어행위론은 그 방법론적 전제 속에, 스스로가 물어야 할 분석대상의 행위 수행성을 밀수입하는 것이며, “소여의 윤리에 의해 주어진 윤리적 조건들을 재생산하게 된다”(221). 이런 의미에서 오스틴이, 분석의 개시에 있어서, 발언의 불성실하고” “변칙적인” “은유적용법을 성실하고” “정상적이며 문자 그대로의용법에 기생하고 있다고 간주함으로써 스스로의 연구대상으로부터 배제했다는 것(이른바 성실함의 까닭을 성실하게 묻지 않는 것의 불성실함, 즉 언어행위론 자신의 행위(도착) 수행성), 그리고 그것을 데리다가, 이미 말했던 몸짓(텍스트의 에코노미 분석)을 통해 문제화했다는 것 말할 것도 없이 이로부터 썰과의 논쟁이 시작됐는데 이런 것을 통해 유한책임회사에 있어서 거듭 되풀이되서 사실확인적 언표로서 제시되는 것은, 어느 정도까지 폭력이, 정치적인 것이든 다른 어떤 것이든, 여러 가지 학술적 논의나 지적 논의 일반 속에 작동하고 있는가”(203)라는 각명[刻明]한 기록, “학술적인 논의의 코드 아래서 숨겨진 (철학적, 윤리적, 정치적) 공리계를 읽을 수 있게끔 한다”(205)고 하는 그것 자체가 집요할 정도의 시도인 것이다.

 

데리다의 텍스트가 형이상학의 그런 윤리-목적론적 문턱을 한계 획정하려고 기획하는 것이라 해도, 행위수행성의 구조적 불순성 때문에 그 텍스트 자신도 또한 결코 중립일 수는 없으며, 따라서 거기에 기입된 또 다른 윤리성, 다른 행위 수행성이 독파되어야만 한다. 확실히 유한책임회사에 있어서 각각 선택되는 기생적문체는, 그 때문에 특이한 퍼포머티브에 있어서 재독해될 수 있으며, 되어야 한다(데리다 자신도 그것을 어느 정도 의도했으며, 그 문체를 이중의 에크리튀르’(206)라고 부른다). 그러나 거듭 강조해 둔다면, 탈구축의 관심은 어떤 윤리에 들이대어진 대항윤리, 어떤 폭력에 들이대어진 대항폭력 등등을 그것으로서 제기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항상 그런 이항대립의 양극이 변증법적으로 서로 강화하는 에코노미의 분석을 향한다. 데리다든, 오스틴이든, 언어행위론이든, 탈구축이든, 그런 이름 아래 놓인 텍스트를 이런 윤리성의 에코노미의 바깥에서 읽을 수는 없다. 이 에코노미는 항상 분석을 필요로 하지만, 적어도 행위 수행성, 되풀이[反覆] 가능성은 그것이 이런 에코노미를 중단하고 변형하고 재개시하는 구조적 계기를 위한 조건들이라는 것을 가르치고 있다. 우리는 내재적인 외부를 고지하고 있는 이런 조건 속에 근저적 정치화라고 불러야 할 계기를 찾아낼 것이다. 그것은 어떤 윤리학도 정치학도 이루는 것은 아니지만, 어떤 철학의 정치, 이론의 정치, 사고의 정치 등과 같은 것을 노정시키기 위한 불가결한 초석이다. 그것 때문에 이후, 당분간 속행되어야 할 것은 이 계기와의 주제적이고 이론적인 관련에 있어서, 우선 유한책임회사[각주:28], 다른 언어행위론의 텍스트(오스틴, , 그라이스 )뿐 아니라, 또한 유한책임회이후, 이제 거의 언어행위론을 언급하지않고 적극적으로 사용함으로써, 특히 윤리--정치적주제를 더 명시적으로 논하기 시작한 것처럼 보이는 최근의 데리다의 텍스트(법의 힘, 맑스의 유령들, 우정의 정치, 신앙과 지식등등. 내 생각으로는 이런 변화는 폴 드 만의 역할이 결정적이라고 생각된다[각주:29]), 혹은 그런 텍스트에 관련된 모든 텍스트를, 그것들을 조직하는 에코노미를 자연스럽게 변형하고 복잡화할 수밖에 없을 때까지, 존중하고 독해하는 작업이라는 게 될 것이다.

 

 

本稿駒場哲学協会〇〇〇年度春期フォーラム(於東京大学駒場キャンパス〇〇〇年四月八日) において発表された原稿をもとに大幅加筆変更して再構成されたことを付記する

 

  1. Jacques Derrida, Limited Inc., Galilée, 1990. 이하 괄호 안의 숫자는 본서의 쪽수를 가리킨다. 「후기」를 제외한 번역은 『現代思想』 1988년 5월 임시증간호(16-6)를 참조하고, [ ]에 쪽수를 부기한다. 또한 인용에서의 강조는 원문을 따른다. 참고로 이 세 텍스트의 초출시의 언어는 각각 불어, 영어-불어동시, 영어이며, 「후기」의 초출이 된 영어판 단행본(Limited Inc, Northwestern University Press, 1988)은, 불어판보다 2년 선행한다. 이런 것은 이 텍스트의 맥락이 지닌 중층성을 고려하는 데 명기되어 좋다. [본문으로]
  2. John R. Searle, “Reiterating the Differences : A Replay to Derrida,” Glyph (1977), p.198. 邦訳, 前掲 『現代思想』 七ニ頁. 또한, 데리다의 「유한 책임 회사 abc」에 대한 재비판으로서 최종적으로 위치지어져야 하는가 여부는 의문의 여지가 있으나, 썰은 이 논쟁에 관련하여 나중에 두 개의 글을 발표한다. “The Word Turned Upside Down[A review of Jonathan Culler’s On Descostruction],” New York Review of Books, 27 〇ct 1983, pp.74-79, reprinted in Working through Derrida, ed Gary B. Madison, Northwestern University Press, 1993, pp.170-183; “Literary Theory and Its Discontents,” New Literary History 25.3(1994), pp.637-667, reprinted in Beyond Poststructuralism : The Speculations oj Theory and the Experience of Reading, ed Wendell V. Harris, Pennsylvania State University Press, 1996, pp.101-136. 전자에 대해서는 「후기」에서 데리다가 질문의 제기에 대응해 상세하게 반박을 가하고 있다(특히 Limited Inc., pp.222ff., pp.257n). 그것을 받고 후자는, 썰의 데리다에 대한 재응답을 포함하고 있는데, 거기서의 썰은, 여전히 데리다를 “모종의 전통적 비트겐슈타인 이전의 언어관”(p.639)에 관여하는 자로 간주함(전자의 기사에서는 ‘논리실증주의’라고 불렀다)으로써 계속 비난하고 있다. [본문으로]
  3. 여기서 아직 표준 번역어가 존재하지 않는 itération에 대해, 반복反復 répétition과 구별하기 위해 ‘되풀이[反覆]’라는 단어를 배정할 것을 명시적으로 제안하고 싶다(참고로 「유한책임회사 abc」의 다카하시(高橋)・마스다(増田) 번역에서는 répétition=반복, itération=<되풀이反覆>처럼 괄호를 붙임으로써 편의적으로 구별하는 데 그친다. 앞의 『現代思想』, 183頁 참조). ‘되풀이反覆’는 différence과 différance처럼 동음이의어에 의한 에크리튀르의 물음을 환기할 뿐 아니라, 한자-일본어 사전漢和辞典에 따르면, ‘반복’을 포함하는 다의적인 단어라는 점에서도 시사적이다. “① 원래 상태로 되돌리다. 되돌리다. 또한 원래 상태로 돌아가다. 돌아가다. ② 되풀이하다. 반복. ③ 등지다. 배반하다. 또한 의지와 언행이 [안정되게] 정해지지 않다. ④ 뒤집다. 뒤엎다. 또한 뒤집히다. ⑤ 뒤집어엎다. ⑥ 왕복하다. ⑦ 오르내리다. 높낮이”, 『大漢語林』, 大修館書店, 1992년, 209頁(강조는 인용자). 『유한책임회사』에 따르면, itération은 산스크리트어로 ‘타(他)’를 의미하는 itara에서 유래하며, “반복을 타자성에 연결시키는 논리”(27[20])에 관련되어 있다. ‘되풀이反覆’의 다의성을 이용한다면, 가령 다음의 설명이 가능할 것이다. itérabilité은 “같은 것의 동일성이 이타화에 있어서, 이타화를 통해서, 이타화를 목표로 삼아”(105[113]) 스스로의 이데아적 동일성을 뒤집으면서 반복되는 구조를 가리키며, 따라서 “아프리오리하게 그것 자신의 동일성을 분할하고” 배반하는 것이다 등등. [본문으로]
  4. 그래서 초출이라는 것은 아니다. itération이라는 단어 자체는 가령 『그라마톨로지』에서도 이미 사용되고 있다. Cf. De la grammatologie. Minuit, 1967, p.298. [본문으로]
  5. 「서명, 사건, 맥락」의 강연 후에 이뤄진 리쾨르 등과의 토의에서의 데리다의 발언. 前掲, 『現代思想』, 61頁. [본문으로]
  6. 최근 출판된 다음의 책은 금세기의 법철학에 있어서의 켈젠과 하트에서 시작되는 흐름을 “법의 자립성”과 “언어론적 전회”라는 주제로부터 일관되게 정리함으로써 데리다의 『법의 힘』도 시야에 넣으면서 명쾌한 조감도를 주고 있다. 中山龍一, 『二十世紀の法思想』, 岩波書店, 2000년. [본문으로]
  7. 예를 들어 다음을 참조. 高橋哲哉, 「言語•行為•意識───デリダのオースチン批判についてのノート」, 『アカデミア•人文社会科学編』, 43호, 南山大学, 1986년, 192-218頁. 野家啓一, 「「言語論的現象学」の可能性と限界───オースティンとデリダ-ザール論争」, 『言語行為の現象学』, 勁草書房, 1993년, 273-298頁. 또한 양자 사이에는 주목해야 할 대립이 존재한다. 논의의 선점을 포함하고 있으나, 간단하게 살펴보자. 野家가 이 논문의 결론부에서 “‘관습’이 지닌 역사성, 즉 역사적으로 생성하고, 전승된 것으로서의 ‘관습’은, ‘반복’의 내실에도 영향을 미치지 않을 수 없다”(앞의 책, 295頁)고 하며, ‘되풀이[反覆] 가능성’과 ‘관습’ 개념을 ‘포개는’ 방향으로 나아가는 반면, 다카하시는 다른 논문의 각주에서 “전자가 ‘코드’나 ‘맥락’ 개념에 대한 근본적 비판을 내포하고 있는 한, 양자의 차이를 강조하는 것이 중요”(『역광의 로고스逆光のロゴス』, 未來社, 1992년, 298頁)하다고 이의를 제기한다. 그러나 이 “차이를 강조하기” 위해서는, 이런 논문들을 보는 한, 여기서 말해지는 “근본적 비판”(『유한책임회사』에서의 되풀이[反覆] 가능성의, 특히 코드와 관습=규약 개념에 대한 관계)이 실제로 어떤 것인가에 대해 새로운 명확화가 필요하다고 생각된다. 관습에 대해 野家가 말하는 ‘역사성’, ‘역사적인 생성’, ‘역사적 침전의 소산’이 어떤 함의를 지니고 있는가는 별도로 검토할 수밖에 없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이하에서, 되풀이[反覆] 가능성이 처음부터 이런 역사성을 설명하는 것으로서 끄집어내졌다는 것, 이것은 “‘관습’이 ‘반복’의 내실에 영향을 미치는” 것과 대립하지 않는다(그렇기에 ‘반복’이 아니라 ‘되풀이[反覆]’이 물어지고 있는 것인데, 이런 것은 되풀이[反覆] 가능성과 관습 개념을 ‘포갤’ 이유가 되지 않는다)는 것, 오히려 되풀이[反覆] 가능성이 보여주는 것은 관습=규약의 근본적 부재의 가능성이라는 것을 볼 것이다. 사실, 『유한책임회사』의 언어행위론 비판은, 주로 의도=지향(과 그것을 발언 원점으로 하는 맥락)의 범주를 둘러싸고 주제화되고 있으며, 발언 내적 행위의 구성요건을 ‘의도’가 아니라 ‘관습’에서 찾아내는 규약주의적 입장(野家 논문의 주장의 역점은 오히려 이 입장에 있다)에 대한 관계가 보이기 어렵게 되고 있다. 되풀이[反覆] 가능성 개념을 가능한 한 일반화하고, 거기에 함의되는 규약주의에 대한 비판을 뚜렷하게 하기 위해, 이하에서는 ‘부재’라는 단어를, 의도=지향의 구조에 있어서의 의미 충실성으로서의 현전에 대립시킬 뿐 아니라, 언어의 기능을 규정[規整: : 규범 등을 세워서 사물을 정리함]하는 모든 초월론적 심급(엄밀하게는 초월론적 시니피에)의 결여라는 의미로까지 확장해서 사용하는 것에 주의하기 바란다(이것은 어떤 ‘부재’도 같은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각각의 ‘부재’의 기능이 공유하고 있는 구조적 가치를 문제 삼고 있다). 그 때문에 『유한책임회사』에서도 서술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이밖에도 예를 들어 pp.40[30]ff에서는 ‘기호의 자의성’이 환기되고 있다), 내가 보기에는, 더 명시적인 의미에서, 데리다 자신이 ‘관습=규약’ 개념을 어떤 방식으로 문제화할지를 이해하려면, 『법의 힘』의 기술을 기다리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것 같다(특히 거기서는 관습성이 법=권리 droit 쪽에 속하는 것으로서 법 loi 개념으로부터 구별된다. 이하에서 시사하듯이, 이것은 이른바 ‘근원적 규약주의’의 입장에 근접할 것이다). [본문으로]
  8. 언뜻 보면 「서명, 사건, 맥락」에서는, 행위수행성 개념은 “어떤 일반적인 인용 가능성”(44[33])으로서의 되풀이[反覆] 가능성에 포섭되어 위치지어져야만 하며, 또는 더 일반적으로 치환되어야 할 하나의 계기일 뿐이라고 생각된다. 실제로, 언어행위론이 말하는 act[행위=현재태(>active-actual-activitity)]의 가치는 현전의 형이상학적 가치를 전제로 하고 있으므로 일관되게 유보되고 있다(114[120]). 확실히 「서명, 사건, 맥락」에서 데리다가 에크리튀르와의 관련에서 오스틴으로부터 직접 탈구축적 계기로서 다뤄지고 있는 것은 ‘서명’의 심급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act이라기보다) performative를 둘러싸고 『유한 책임 회사』의 맥락적인 가치를 중시하는 우리의 독해에 있어서 위와 같은 문제화는 불가결하다. [본문으로]
  9. 비트겐슈타인-크립키의 규칙론이 어떤 정초적 함의 ― 예를 들어 회의적으로 끄집어내진 언어게임의 규칙을 다시 생활형식과 공동체적 관습 등의 간주관적 실천양식으로서 찾아내는 논의 ― 도 갖고 있는 것 아니냐는 것에 대해서는, 최근 나온 다음의 논문이 명확하게 주장하고 있다. 井上彰, 「言語ゲーム論のネガティヴィズム」, 『相関社会科学』 9호(1999), 東京大学総合文化研究科国際社会科学専攻, 2000년 3월, 48-65頁. [본문으로]
  10. Cf. Ludwig Wittgenstein, Philosophische Untersuchengen, sec. 201 et passim; Saul A. Kripke, Wittgenstein on Rules and Private Language, Harvard University Press,1の82, pp. 17ff. [본문으로]
  11. Cf. Jacques Derrida, Force de loi, Galilée, 1995, pp. 29ff. 邦訳『法の力』堅田研一訳、法政大学出版局、一九九九年、ニ六頁以下. [본문으로]
  12. 데리다에게는 크립키는 물론, 비트겐슈타인에 대한 실질적인 참조는 전혀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이지만, 이 구조는 『법의 힘』에서 “비트겐슈타인적”이라고 불리는 이하의 논의에 나타난다. Jacques Derrida, Force de loi, pp. 34ff. 및 pp. 50ff. 邦訳, 『法の力』, 33頁 이하, 54頁 이하. 아무튼, 우리 논의의 정교화 및 치밀화를 위해서는, 크립키 이후의 비트겐슈타인 독해, 다메트에 의해 발견된 근원적 규약주의, 데이비슨의 해석이론 등의 맥락 속에서, 데리다의 규칙론-언어게임론을 확정해보는 작업에 유익할 것이다. 우선 Samuel C. Wheeler, Deconstruction as Analytic Philosophy, Stanford University Press, 2000, 데리다와 데이비슨을 다룬 일본어 논문으로 森本浩ー, 「隠喩とコミュニケーション—デリダとデイビットソンの場合」, 『現代思想』, 1987년 5월호, 90-104頁이 있다. [본문으로]
  13. Force de loi, p.104. [본문으로]
  14. Samuel Weber, “It,” Glyph 4(1978), p.8. 또한 사무엘 웨버는 이런 이유도 포함해, 지시대명사 it(물론 이것은 프랑스어의 ça를 번역한 것으로 “소쉬르에게서의 시니피앙의, 헤겔에게서의 절대지의, 프로이트에게서의 기호 및 여성형 소유사”(158n[182])를 환기한다)을 itérabilité의 약칭으로 하는 것을 제안했다. [본문으로]
  15. 豊崎光一, 「怪物の肖像、あるいは論争術の極点について」, 『クロニック』, 水声社, 1989년, 259頁. [본문으로]
  16. J. L. Austin, How to Do Things with Words, 2nd ed, Harvard University Press, 1975. 邦訳, 『言語と行爲』, 大修館書店, 1978년. 이하 HW로 약칭. [본문으로]
  17. cf. Shoshana Felman, Le Scandale du corps parlant : Don Juan avec Austin ou la séduction en deux langues, Seuil, 1980, p.108. 邦訳, ショシャナ.フェルマン, 『語る身体のスキャンダル───ドン•ジュアンとオ—スティン, あるいは二言語による誘惑』, 立川健二 訳, 勁草書房, 1991년, 95頁. [본문으로]
  18. Emile Benveniste, “La philosophile analytique et le langage,” in Problème de linguistiques générale, t.1, Gallimard, 1976, pp.273. 邦訳, É・バンヴェニスト, 「分析哲学とことば」, 岸本通夫監 訳, 『一般言語学の諸問題』, みすず書房, 1983년, 260頁. [본문으로]
  19. Ibid., p.274. 邦訳, 同頁. [본문으로]
  20. 프랑수아 레카나티에 따르면, 수행론적 모순은, 그 독자적인 형식에 의해 다른 모순과는 명확하게 구별된다. “가짜인 보통의 종합명제와 논리적 모순의 중간에, 수행론적 모순이 있다. 가짜 종합 명제는 사실에 의해 모순되는 것이며, 논리적 모순은 그 자신과 자기 모순되어 있는 것이다. 수행론적 모순이라고 말하면, 사실에 의해 모순되어 있는 동시에 자기 모순도 하고 있는 것이다. … 수행론적 모순이란, 그것 자신의 언표행위의 사실에 모순되는 명제이다.” François Récanati, La transparence et l’énonciation : pour introduire à la pragmatique, Seuil, 1979, p.197. 邦訳, 『ことばの運命───現代記号論序説』 菅野盾樹 訳, 新曜社, 1982년, 248頁, 번역 수정. 우리는 이런 수행론적 모순 특유의 종차성을 인정하면서도, 이 ‘모순’을 훨씬 강한 의미에서 ― 모든 퍼포머티브의 가능성의 조건을 구성하는 모순으로서 찾아내고 있다. [본문으로]
  21. Rodolphe Gasché, “‘Setzung’ and ‘Übersetzung’” in The Wild Card of Reading, Harvard University Press, 1998, p.17. [본문으로]
  22. Cf. Jaakko Hintikka, “Cogito Ergo Sum : Inference or Performance?”(1962) in Knowledge and the Known, Reidel Publishing Company, 1974, pp.98-125. 邦訳, ヤーッコ•ヒンティッカ, 「コギト・エルゴ・スムは推論か行為遂行か」小沢明也訳, デカルト研究会編 『現代デカルト論集 II•英米編』, 勁草書房, 1996년, 11-53頁. 및 レカナティ, 前掲書, pp.l98ff. 邦訳, 250頁 이하. 언어행위론이 퍼포머티브의 자기 반사적 구조를 찾아냄으로써, 그런 문제들은, 논리적 동형성에 있어서는, 헤겔의 사변적 반성을 정점으로 하는 대륙철학의 주관성 이론의 계보에로, 즉 언어행위론이 일단은 끊어진 전통적 문제계로 다시 편입된다. 금세기의 해석학과 언어행위론에도 미치는 반성철학의 이런 문제계에 대해서는, 루돌프 가셰가 논리적으로도 철학사적으로도 일관된 매우 명쾌한 설명을 주고 있다. Cf. Rodolphe Gasché, The Tain of the mirror, Harvard University Press, Part I : Toward the Limits of Reflection. [본문으로]
  23. 그 때문에 예를 들어 “행위수행성을, 명확한 기원과 목적이 없는 채로, 그때마다 쇄신할 수 있는 행동이라고 이해함으로써, 발화는 최종적으로, 특정한 발화자나 그것을 산출한 최초의 맥락에 얽매이지 않게 될 것이다. 그런 발화는, 사회적 맥락에 의해 정의될 뿐만 아니라, 맥락을 자르는 능력에 의해서도 기록되었다. 따라서 행위수행성에는, 그것이 끊어내는 맥락에 의해 바로 행위수행성이 아직 가능하게 되는, 고유한 사회적 시간성이라는 것이 있다.” Judith Butler, Excitable Speech : A Politics of the Performative, Routledge, 1997, p.40. 邦訳, ジュディス・パトラー, 「触発する言葉 : パフォーマティヴィティの政治性」, 竹村和子訳, 『思想』 1998년 10월호, 41頁. [본문으로]
  24. 게다가 이것은 그 자체가, 데카르트 『형이상학적 성찰』 5장 제목인 「물질적 사건의 본성에 대해. 그리고 다시 신에 대해. 그것은 실존하는 것」을 ‘활용’이나 ‘사용’이냐는 중지한 채로 인용한 것이다(또한 데카르트 자신의 제목도 자기 인용 또는 자기 사용되어 적혀 있는 것이라고 지적되고 있다). 자세한 것은 Limited Inc., pp.154[149]ff. [본문으로]
  25. Cf. La Carte postale, Aubier-Flammarion, 1980, p.148. 데리다는 베르너 하마허의 독해에 재촉되어 최근의 텍스트에서도 이 말을 원용하고 있다. “Marx & Sons,” in Ghostly Demarcations : A Symposium on Jacques Derrida’s Specters of Marx, ed. Michael Sprinker, Verso, 1999, pp.224ff. [본문으로]
  26. [옮긴이] 入れ子状(이레코죠우)에서 이레코(入れ子)는 “크기의 차례대로 포개어 안에 넣을 수 있게 만든 그릇이나 상자”라는 의미이고, 죠우(状)는 상태나 모양을 뜻한다. 영어로는 emboitement state라고 한다. [본문으로]
  27. 『유한책임회사』에서는 매우 암시적으로만 사용되었던 “아마”의 양상을 여기서 강조해둘 필요가 이는 것은, 사실상 다른 한편으로, 데리다가 『유한책임회사』 이후, 특히 90년대의 텍스트에서, 사건의 양상(발생, 도래, 봉착, 역사, 시간성 등등)을 환기하려고 이 말을 적극적으로 원용하고, 반복해서 가다듬기 때문이다. 거기서는 “아마”의 양상에 있어서 사건이, 대기하지 않고 기다리고 있는 지평에 있어서 어떤 예상도 넘어서면서 갑자기 기습하는 것(단순한 미래futur로부터 구별된 장래avenir)로서 강조되고 있다. cf. 예를 들어 Force de loi, pp.60ff. 前掲邦訳, 70頁 이하 및 Spectres de Marx, Galilée, 1993, pp. 62ff., Politiques de l’amitié, Galilée, 1994, pp. 46ff. 등등. [본문으로]
  28. 본고에서는 거의 다룰 수 없었으나, 특히 정신분석과 (더 구체적인) 정치와의 연접관계가 다시 독해되어야 한다. 한편으로 무의식, 억압, 향락, 체내화, 애도의 작업 …, 다른 한편으로 경찰, 법원, 아카데미, 저널리즘 …, 이런 모티프의 긴밀한 결합[織り合わせ]이, 다른 곳에서 데리다가 “그라마톨로지”(274n ; cf. “Mes chances : au rendez-vous de quelques stéréophonies épicuriennes,” in Psyché, Inventions de l’autre, Nouvelle édition augmentée, tome I, Galilée, 1998)이라고 부르는 것의 물음을 만들 것이다. [본문으로]
  29. 드 만이 데리다보다 선구적으로 어떻게 퍼포머티브 개념의 변형과 재단련을 행했는가에 대해서는, 이미 내가 논한 적이 있다. cf. 「約束のアレゴリ-- 〈政治としての脱構築〉試論」東京大学総合文化研究科一九九八年度修士論文, 특히 2장 「デイコンストラクテイヴ、パフォーマティヴ」。 [본문으로]

응답에서 도래할 정의로

: 데리다의 책임과 정의에 관한 사유

応答からたるべき正義

―― デリダの責任正義をめぐる思考――

Realizing Justice by Responding to the Other

Jacques Derrida's Philosophical Thinking on Responsibility and Justice

 

노부유키 카키기(柿木伸之)

Hiroshima Journal of International Studies Volume 10 2004

 

. 지금 왜 도래할 정의인가?

. 타자에 대한 응답에 기초한 탈구축적 정치적 실천으로

. ‘법의 힘을 지켜보기

. 정의에 대한 호명, 그 응답과 책임의 아포리아

. 응답으로서의 사유에서 새로운 정의로

 

 

1. 도래할 정의인가?

어떤 하나의, 그리고 어떤 특정한 사람들을 위한 정의를 내세우는 그 사람이 그것의 바깥에 있는 사람들에 대해서 전율스런 힘을 행사하고 있다. 21세기가 시작한 이래, 도대체 몇 번이나 그런 광경을 목격했던가. 세계대전을 두 번이나 치렀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전쟁과 인종청소가 끊이지 않았으며, 그 때문에 흔히 전쟁의 세기라고 불렸던 20세기의 교훈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위한 정의를 부르짖는 것이 너무도 손쉽게 그들인 타자들에 대한 폭력으로 전환되어 버렸다. 오늘날 정의라는 말은 대테러 전쟁이나 성전聖戰을 일으키고 무고한 시민들을 희생시키는 것을 어떤 특정한 우리를 위해 정당화하는, 알맹이 없는 슬로건으로 변해버렸다.

미국의 군대가 아프가니스탄인들에게, 유럽의 거리에는 도저히 떨어뜨릴 수 없는 강력한 폭탄의 비를 퍼붓는 것을 정당화하기 위해 이용되었던 무한한 정의라는 말을 보자.[주1] 그것은 이 무한한 정의작전으로 실행에 옮기고자 할 때 그 총책임자가 말한 것, 우리 편에 설 것인가, 아니면 테러리스트의 아군이 될 것인가라는 말로 상징되듯이, ‘우리테러리스트’·‘인 그들을 구별하는 것, 이 구별이 무한하게 이뤄지는 것, 그리하여 그들편으로 분류된 타자들이 무한하게 배제되고 있는 것이 이 세계의 신질서임을 증표하는 게 아닐까?[주2]그렇다면 이 무한한 정의란 타자들을 배제하고 억압하는 부정의를 통해 우리의 지위와 권익을 확보하는 것을 정의라고 말하는 것, 바꿔 말하면 조지 오웰이 1984에서 어떤 전체주의적 정당의 슬로건이라고 말했던 전쟁은 평화다와 같은 말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주3]

[주1] 미국의 아프가니스탄 공습/침략과 나란히 오폭에 의해 몇몇 마을과 집들이 파괴되고 민간인들이 살해당했다고 보고하는 가운데, 작가인 헨미 요(辺見庸)가 제기한, “전술핵 수준의 위력이 있는 대형폭탄을 아프가니스탄보다 수백배나 풍족한 생활을 누리는 그러한[유럽 등의] 현대 도시에 투하할 수 있는가라는 물음(200218일자 아사히신문)은 중요하다. 이 폭탄의 사용 때문에 미국정부에 의한 명령의 선별을 느끼지 않고 지낼 수 있을까?

[주2] 걸프전쟁 당시에 제창되고 미국과 그 동맹국에 의한 이른바 대테러전쟁이 실현시키고자 한 냉전 후의 신세계질서西谷(2002)에 따르면, 대항해시대 이후 “5세기에 걸친 서양에 의한 세계의 일원화, 세계전쟁에 의해 완료된 세계의 일원화를 서구 국가들의 헤게모니에서 영속화하고자 하는 지배체제”(18)인 동시에, “이 질서가 부담/짐의 형태로 빛에 쪼이기 시작한 비문명세계이물질을 철저하게 말살하는 것을 목표로 하여 결속한, 항구적인 전쟁의 체제”(21)이다. 그렇다면 무한한 정의란 자신의 손으로 끊임없이 자신을 증오하는 이물질을 산출하면서 그 이물질을 언제까지나 배제하는 전쟁, 즉 칼 슈미트적인 예외상태를 항구화하는 것이 질서이며 정의라고 선언하는 말이라고 할 것이다

[주3] 미국정부가 ‘9·11’ ‘테러에 대한 보복으로서 계획했던 아프가니스탄 공격 작전은 당초 무한한 정의작전이라고 불렸는데, 나중에 아랍만이 무한한 정의를 이룰 수 있다고 믿는 무슬림에 대한 모욕으로 받아들여질지도 모른다는 이유로 불후의 자유작전으로 개칭되었다. 그렇지만 무한한 정의라고 말하든, ‘불후의 자유라고 말하든, ‘미국적 생활양식을 지키기 위해서라면 이 정의자유의 타자를 얼마든지 희생시켜도 좋다는 무시무시한 산술을 포함하고 있다는 것, 그리고 그 산술이 초래한 희생을 위해/때문에 미국적 생활양식의 은총을 향유하는 사람들을 테러에 대한 끝나지 않는 공포에 빠뜨리는 것에 관해서는 Roy(2001)를 참조

이처럼 힘 있는 사람의 손에 건네진 정의라는 말이, 이제 그들에 대한 부정이라고 밖에는 말할 수 없는 폭력의 위장술에 지나지 않는다고 한다면, 이 힘 있는 자가 말하는 정의와는 다른 정의는 어디에 있을 수 있을까? 또 있을 수 있다면, 그것은 도대체 어떤 정의일까? 이 글에서 매달리고 싶은 것은 이러한 물음이다. 이를 위해 자크 데리다가 1980년대 말경부터 전개한 법의 탈구축(déconstruction)’을 둘러싼 사고와, 이것에 이어서 펼쳐진 책임의 아포리아(apories de la responsabilité)’를 둘러싼 사고를 밑바탕으로 삼는 것이 현재로서는 가장 유효하다고 생각한다. 그 이유로 우선 거론할 수 있는 것은 데리다가 1920년대 초반에 쓰여진 발터 벤야민의 폭력의 비판을 위하여의 결정적인 영향을 받아서 법이 실효성을 지닌 것으로서 존재하는 것 자체에, 법 외부의 타자를, 법이 설정한 경계의 바깥으로 배제하고 내던지는 힘 또는 폭력이 필연적으로 수반된다는 것을 간파한 다음에, ‘정의(justice/Gerechtigkeit)’를 결코 동일한 평면 위에 서 있지 않는 타자와의 사이에서 법의 탈구축을 통해 추구하고자 한다.[주4이처럼 법 자체에 내재하는 타자를 배제하는 힘을 통찰하는데 있어서 정의를, 법 외적인 타자와의 사이에서 말해야만 하는 것으로 탐구하는 시도는 정의를 법과 손쉽게 동일시하고 정의를 동일한 평면 위에서 법을 공유할 수 있는 사람들, 즉 동류들 사이에서 성립하는 것이라고 생각해 왔던 지금까지의 철학적 정의론의 전통에 비춰본다면, 이것이야말로 법 외적인것이리라. 그렇지만 오늘날 필요한 것은 이 법 외적인정의론의 시도이지 않을까?

[주4벤야민은 폭력의 비판을 위하여에서 경계설정/획정(Grenzsetzung)’법정립적 폭력(rechtssetzende Gewalt)’ 일반의 원현상(Urphänomen)으로 간주한다(Benjamin 1921: 198). 어떤 정의를 힘이 있는 것이라고 말하는 것, 즉 하나의 법을 세우는 것 자체가 궁극적으로 정당화될 수 없는 힘 또는 폭력의 행사이며, 그 힘은 무엇보다도 우선 하나의 경계를 정하는 것이다. 법은 강제력이 있는 말로 제도적 질서를 형성한다. 그리하여 이 법질서의 내부에서 그 내부에 있는 사람들을 위해 어떤 정의를 실효적인 힘을 갖춘 것으로 구현시키는 것인데, 그와 동시에 하나의 법질서의 경계를 설정하고, 그 외부를, 법 바깥의 타자들을 유기(遺棄)하는 것이다. 이러한 벤야민의 통찰이 법은 탈구축 가능하며, ‘정의가 아니다라고 하는 데리다의 법의 힘의 논의에 커다란 영감을 주었음은 상상하기 어렵지 않다

예를 들어 아리스토텔레스가 적법성과 균등성을 정의로 간주하고, 이것을 국가 공동체의 자유로운 그 때문에 여성이나 노예를 배제한 구성원 사이에서만 성립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을 시작으로, 전통적인 정의론의 상당수는 기존의 법을 정의의 조건으로 간주하고 어떤 법질서의 내부에서만 적용되는 정의만을 말했다. 그러나 이렇게 법의 존재에 입각하여 정의를 말한다면, 현행 법 자체의 올바름, 즉 법의 정의를 정초할 수 없으며, 더구나 법의 존재 자체가 법질서로 편입되지 않은 타자를 배제하는 힘 또는 폭력을 행사한다는 것을 분명하게 간파할 수 없게 된다. 이와 반대로, 현대의 정의론을 대표하는 논자인 존 롤즈는 미국의 공민권 운동이나 베트남 반전운동의 고조를 배경으로, ‘정의’, 즉 그가 말한 공정으로서의 정의’(justice as fairness)가 실현되는 것이 법의 성립조건이자 법이 기초한 공동체의 성립 조건이라고 논했다. 법이 정의의 조건이 아니라 정의가 법의 조건인 것이다. 확실히 정의의 실현을 법의 성립 조건으로 간주하는 것은 법의 폭력을 다만 사회의 소수자나 이른바 사회적 약자의 권리를 확대하는 방향으로 법을 개정하는 것으로 이어지는 길을 열 것이다. 그렇지만 롤즈의 정의론은 공정으로서의 정의를 구체적으로 실현하는 법 그 자체가 늘 정당화될 수 없는 힘을 포함하고 있으며, 그 힘이 손쉽게 법 외적인타자에 대한 부정의한 폭력으로 전환될 수 있다는 것까지 주제화하는 것은 아니며, 또한 모든 사람들이 무지의 베일을 쓰고 있는 일정한 원초적 상태를 상정한다는 것은 그가 동일한 평면 위에서 법을 공유할 수 있는 인간들 사이에서만 정의의 가능성을 추구하고 있다는 것의 증거이기도 할 것이다. 그러나 어떤 하나의 정의를 하나의 법의 형태로 말하는 것이 너무도 손쉽게 법 외적인타자에 대한 폭력으로 전화하고 있는 현재에서 요구되는 것은 법의 형태로 정의를 말하는 것 자체가 행사하는 힘을 급진적으로 떠내밀며, 그것을 살펴본 위에서, 정의의 가능성을, 여기에 있는 자본에 있어서 늘 미래의 존재이며, 자신 앞에 늘 법 외적인방식으로 도래하는 타자와의 사이에서 요구하는 것이리라. 그리고 실제로 데리다는 정의는 그러한 타자와의 사이에 도래’(avenir)로서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타자가 도래하는 것 없이 정의는 없다”(Derrida 1994 : 60). 그에게는 이 도래할정의야말로 법질서의 성립조건인 것이다.[주5]  또한 여기서 데리다의 사유를 다루는 이유로서, 그가 타자에 대한 책임(responsabilité/Verantwortung)’을 떠맡는 것을, ‘법의 탈구축을 통해서 이 도래할정의로 향하게 하는 출발점으로 간주한는 것, 나아가 그가 이 책임을 떠맡는 것과 관련된 어려움도 지적한다는 점도 거론해야만 한다.[주6]  여기서 책임이란 무엇보다 우선 타자에 대한 응답 가능성으로 이해되어야 한다.[주7]  그에 따르면, 타자에 응하는 것, 그것은 우선 타자가 거기에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자신이 지금 여기에 있다는 것을 표명하는 것이다. 나중에 보겠지만, 그리하여 타자에 대해 자신이 여기에 있다는 것을 전하는 것은 이 타자에 대한 자신의 응답 가능성, 즉 책임을 표명하는 것이다. 그리고 타자에 대한 실제의 응답은 법의 탈구축이라는 형태로 수행된다. , 타자가 정의에 호소하는 것을 듣고, 그것에 반응하는 형태로 기존의 법을 일단 해체하고 법에 정의를 새롭게 체현시키려고 함으로써 타자에 대한 책임이 도출될 수 있다. 데리다는 이렇게 타자에 응답하고, 이 세계에 정의를 실현시키고자 할 때 피할 수 없는 난점을 책임의 아포리아로 묘사한다. 우리는 전면적으로, 그야말로 무한하게 정의로운 방식으로 타자에 대한 책임을 다할 수는 없다. 어떤 타자에 대해 응답하고자 할 때, 그 밖의 타자들을 희생시키고, 이 타자들에 대해서는 부정의를 작동시키는 것이다. 우리가 이 세계에서 타자에 응답하는 것을 통해 도래할 정의로 향한다는 것은, 그러한 자기 자신 속의 모순을 받아들인다는 것, 그리하여 아포리아를 견뎌낸다는 것이다. 이처럼 정의로 향하는 것이 타자에 대한 책임에 기초한다는 것임을 책임 자체의 성립으로부터 밝히며 이와 더불어 책임을 떠맡는 것에 들러붙어 있는 곤란을 은폐하지 않고 내밀어내는 사유도, 좁은 소견인 한에서 데리다 외에서는 발견되지 않는다. 그리고 이 정도로까지 철저한 사유야말로 21세기의 오늘을 살고 있는 우리가 정의로 향한 자기 자신의 사유의 가능성을 자기 비판적으로 이것이야말로 칸트의 비판과도 닮은 의미에서 비판적으로 확인해보기 위해서, 우선 실마리로 삼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주5서구형이상학의 전통의 틀 안에 있는 정의론과 데리다의 도래할 정의를 둘러싼 논의 사이의 이러한 대비에 관해서 (2002)를 참조. 또한 타자가 자기에 대해 늘 법 바깥의 존재로서 나타난다는 것을 레비나스(1971)는 타자의 얼굴(visage)’이라고 표현한다. “나의 내부인 타자의 관념을 초과하는 타자가 현전하는 그런 방식을 우리는 여기서 얼굴이라고 호칭한다”(43). 

[주6오카노(岡野, 2002)는 한나 아렌트가 인간의 조건(Arendt 1998: 63)에서 법이 고대 그리스에서 본래 공적 영역사적 영역을 나누는 경계를 의미한다고 말하는 것에 주목하고, 법이 그 자체로 경계로서의 이분법에 기초하여, ‘법 바깥의 사람을 법의 효과로서 산출하지 않고는 존재하지 않는다’(岡野2002: 60)고 지적하고, 그 배타적인 폭력을 비판할 수 있는 지점을 법 바깥의타자에 응답하는 것, 그리고 그 어려움을 받아들이는 가운데 탐색한다. 이 논고를 쓰는 데 있어서 이 논의로부터 많은 시사점을 얻었음을 적어둔다

[주7데리다가 책임응답 가능성으로서 생각하는 것에 관해서 가라타니(柄谷, 2001)는 이렇게 말한다. “책임은 타자에 대한 응답으로서 나타난다. 오히려 타자에의 응답이라는 것이 사람을 자유의 차원으로 몰아넣는다”(182). 가라타니 고진에 따르면, ‘응답 가능성으로서의 책임을 받아들임으로써만, 인간은 자유로울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의 책임을 냉전 이후의 증언의 시대에서 일본인전후 책임으로서 받아들이고, 그리하여 아시아 국가들의 타자들과의 사이에 새로운 평화로 나아가는 관계들을 구축할 가능성에 관해서는 다카하시(高橋, 1999)를 참조

그런데 이렇게 데리다의 책임과 정의를 둘러싼 사유를 더듬어가는 논고의 목적도, 여기서 말하고 싶다. 이 논고는 지금까지 정의를 대표하는 것으로 간주되었던 법 그 자체에 내재하는, 타자에 대한 폭력일 수 있는 힘을 끝까지 지켜본 위에서, 정의를 항상 미래로서 도래할 타자에 대한 응답을 기점으로 하여 추구되어야 할 도래해야 할정의로서 파악하는 것인 동시에, 이 정의를 타자에 대한 책임을 떠맡으며 추구하는 데 있어서의 피하기 힘든 어려움을 지적하는 데리다의 사고를 더듬어가며, 그것을 통해 한줌의 사람들의 이익을 대표하고 부정의를 정당화하는 정의가 목소리 높여 말해지는 가운데, 정의가 아니라 보다 보편적인 정의에 대한 요청이 점점 절박해지고 있는 현재의 상황을 향해 말할 수 있는 정의의 장소를, 타자로부터의 그러한 새로운 정의에의 요청을 귀 기울여 듣고, 그것에 응답하는 가운데 추구하고자 하는 시도이다. 만일을 위해 덧붙여 둔다면, 여기서 법 그 자체에 내재하는 힘에 관해 비판적으로 고찰하는 것은, 결코 법의 의의를 전면적으로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오히려 어떤 하나의 철학적 관점에서 이라고 불리는 것에 관해 비판적 고찰을 가하는 것을 통해 법에 새로운 정의를 체현시켜 가는, 도래할 정의를 향해 법을 재구축할 가능성을, 그 어려움도 놓치지 않으면서 법의 바깥인 타자와의 사이에 열고자 하는 것이다.[주8]

[주8] 이런 점에서 여기서의 시도는 부정의한 법도 법일 수 있다는 것을 확인한 후, 법을 정의로의 기획으로 파악하는 이노우에 타츠오(井上達夫)의 논의와도 공명할 것이다. 그에 따르면 법이 기획하는 것은 단순한 질서유지나 예견 불가능성 보장도, 사랑이나 행복의 성취도 아니고, 아니 그것 이상으로, 정의의 실현이다”(井上2003: i). 다만 그렇게 법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정의 개념의 철학적 재검토가, 더 나아가 탈구축이 필요하다는 것도 여기서 보여주면 좋을 것이다



. 타자에 대한 응답에 기초한 탈구축적 정치적 실천으로

데리다는 2001년에 프랑크푸르트시에서 아도르노상을 받았는데, 그 수상에 즈음하여 Die Welt 잡지와 한 인터뷰에서, 기묘하게도 아도르노의 생일인 911일에 미국의 중심부에서 일어났던 사건의 희생자들에게 한없는 애도를 표명하면서 동시에 이렇게 말한다. “이 사건에 대한 대답이 다소나마 맹목적인 군사적 대답으로 한정될 수 있다면 아무것도 바뀌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는 정치의 변화를 필요로 하고 있습니다. 특히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에서의 정치의 변화를. 정치적 전환만이 미래에 대해 이렇게 야만적이고 비인간적인 공격을 불가능하게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말하는 정치의 변화’, ‘정치적 전환이란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데리다는 테러리즘과 어떻게 싸울 수 있을까?”라는 물음에 답변하는 형태로, 그 변화란 부유한 나라와 가난한 나라의 관계를, 서구의 나라들, 미국이나 유럽의 나라들과 이슬람-아랍 국가들의 관계를 바꾸는 것이라고 말했다. “오늘날 유럽인들은 팔레스타인인들과의 관계를 올바른 것이라고 하는 식으로, 이스라엘을 움직이지 않으면 안 됩니다.”[주9]  좁은 구역에 가둬지고, 가난한 생활을 강제하는 잠정적 자치 정부 통치 하의 팔레스타인인들에 대해 압도적인 부와 힘을 휘두르는 이스라엘 국가는 보복이라는 미명하에 노골적으로 군대를 파병할 뿐만 아니라, 지금까지도 평화 프로세스라는 이름하에 유대인의 이주를 추진하며, 총과 불도저로 팔레스타인인들의 거주지역을 침식하고, 그 토지와 생활의 터전을 빼앗아 왔다.[주10]  그것에 대해서 지금까지 어떤 유효한 움직임도 하지 않았던 유럽의 정치적 자세가 이제 추궁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팔레스타인 땅에 사람들의 공정한 관계가 도입되지 않는 한, 또 세계에 편재한 부의 압도적인 불균형이 시정되지 않는 한, 타자와의 사이의 도랑[간극] 위에 축적된 증오의 절망적인 분출은, 지금까지도 세계의 곳곳에서 반복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제, 팔레스타인인들과의 관계를 올바른 것으로 바꾸도록, 이스라엘에, 그 사람들에게 촉구해야만 하는 것이다. 이와 더불어 부유한 나라와 가난한 나라의 관계를 올바른 것으로 바꾸지 않으면 안 된다. 데리다가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에서의 정치의 변화또는 서구의 풍요로운 나라들과 이슬람-아랍 국가들의 관계를 둘러싼 정치적 전환이라는 말로 생각하는 구체적인 내용은 이렇게 부연할 수 있을 것이다.

[주9위의 인용은 Derrida(2001)로부터. 아도르노상 수상 기념 강연(Derrida 2002)에서 그는 인터뷰와 마찬가지로 “911일의 희생자들에게 무조건의 동정을 보냅니다라고 하면서, “그래도 이 범죄를 앞에 두고선 그 누구도 억울하다고는 믿지 않는다는 것을 말씀드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37)고 말한다. 그가 그 누구도 억울하다고는 믿지 않는다는 점에 관해서는 나중에 언급할 것이다

[주10이 점에 관해서는 무엇보다 마리 오카(, 2001)를 참조

그런데 국가와 국가 사이의 관계를, 또는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를 올바른 것으로 바꿔가는 정치의 변화정치적 전환그 자체를, 데리다는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이것에 관해서는 다른 인터뷰에서 그가 한 발언이 실마리가 될 것이다. 거기서 그는 법에 정의를 체현시킬 것을 요청하고 있다. 법은 결코 정의로울 수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말로 정의는 법률에 귀착시킬 수 없으며, 법률과의 관계에서는 정의의 과잉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의가, 구체적이고 실효적이기 위해서는 법률이나 입법에 의해 구현될 것을 요구한다는 것을 나는 시도했습니다. 물론, 어떠한 법률도 정의에 적합할 수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정의의 외침은 아닌 게 아니라 무한하기 때문입니다”(Derrida 1999b : 105). 이미 아리스토텔레스가 지적했듯이, 법은 타자와의 관계를 규정한다.[주11]  그러한 법에 정의를 체현시켜야만 한다. 그렇다면 정치의 변화정치적 전환이라는 말로 데리다가 생각하는 것은, 우선 정의를 실현하기 위해 실효적인 법에 정의를 체현시켜가는 정치적 실천이다. 더욱이 그것이 변화또는 전환일 때, 그 실천 속에는 거기서 정해져 있는 법을 바꾸는 것, 즉 타자들 사이에 있는 기존의 경계를 해체하고 타자들 사이에 새로운 관계를 구축하는 것이 포함된다.[주12]  이것을 데리다는 법의 탈구축(해체)’라고 부르는 것이 아닐까?

[주11아리스토텔레스는 니코마코스 윤리학5(1925: 1129a-1130a)에서 정의를 기본적으로 타자를 향한 덕이라고 정의한 후, 그것이 타자와의 공평한 관계를 규정하는 법의 형태로 실현된다고 말한다. 이 점에 관해서는 아즈마 히로키(, 2002)을 참조. 또한 아렌트는 몽테스키외가 법의 정신에서 법을 상이한 존재 사이에 있는 관계라고 정의한 점에 주목한다(Arendt 1998: 190-191).

[주12아렌트는 인간의 조건에서 정치적인 활동(action)’에 관해, 그것은 늘 관계를 수립하는 것이며, 따라서 거기에는 일체의 제한을 해방하고 일체의 경계선을 돌파한다는 경향이 내재한다”(Arendt 1998: 190)고 서술한다. 그렇다면 아렌트에게는 어떤 의미에서 법의 탈구축과 그것에 의한 타자와의 관계의 새로운 구축이야말로 시작으로서의 정치의 본뜻이라는 것이 되는데, 오카노 야요(岡野, 2002)는 법 그 자체에 내재한 힘을 응시하면서 그런 의미에서의 정치를, 나아가 타자에의 응답에, 즉 타자에 대한 책임을 받아들이는 윤리에 연결시키고 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법에 정의를 체현시키는 정치적 실천이 타자로부터의 정의의 외침에 응답하는 형태로 행해져야만 한다는 것을 데리다가 암시한다는 점이다. 나중에 드러나듯이, ‘정의의 외침을 경청하고, 그것에 응답하는 것이, 그리고 거기서 생겨나는 타자에 대한 책임을 떠맡는 것이 이 정치적 실천을 작동시키는 것이다. 타자와의 사이에 있는 정의에의 길의 출발점에 있는 것은, 타자에의, 정의의 외침에의 응답인 것이다. 그렇다면 오늘날 세계에서 시도되고 있는 것은 국가의 힘 등이 아니라 우리 한 명 한 명의 타자에의 응답 가능성인 것인지도 모른다.

 데리다는 이처럼 법에 정의를 체현시킬 것을 요구하는 한편, 법은 결코 정의와 합치하지 않는다고도 말한다. 정의를 말하고 정의를 실현해야 할 법, 이것이 정의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 한 가지로는, ‘타자라는 존재가 늘 자기에 대해, 또한 그것이 품은 관념들에 대해 바로 타자로서, 결코 예측할 수 없는, 그 때문에 기성의 법으로 회수될 수 없는 방식으로 도래하는 이상, 정의의 외침무한하다고 밖에는 말할 수 없으며, 그 때문에 경계를 획정하고 타자와의 사이의 어떤 일정한 관계를 한정하는 법은, 그것에 결코 응할 수 없기 때문이다.[주13]  나아가 데리다는 그 자체로 무한한 타자로부터의 정의의 외침무한을 지적할 뿐만 아니라, 법의 기원에, 즉 법이 구속력이 있는 /법률/법칙(loi)’으로서 존재하는 것의 시작에, 결코 정당화될 수 없는 힘이 작동하고 있음을 간파하고 있다. 그러한 힘이 존재 그 자체 속에 포함되어 있기 때문에, 법은 결코 정의와 완전하게 겹칠 수 없는 것이다. 1989년에 뉴욕의 카도조 법학전문대학원에서 탈구축과 정의의 가능성이라는 제목의 콜로키엄의 기조강연으로 발표되고 나중에 법의 힘 : ‘권위의 신화적 기초1부에 수록된 /권리로부터 정의로는 법의 존재 그 자체 속에 그렇게 늘 타자에 대한 폭력이 있을 수 있는 힘의 소재를 확정하는 동시에, 법의 탈구축속에서 정의의 가능성을 열어젖히고자 하는 것이었다.[주14]  그 텍스트는 미국에서 법학의 다양한 분야에 데리다의 탈구축이론을 적용하고자 하는 비판법학(critical legal studies)’의 운동이 왕성해졌던 것을 배경으로 발표되고, 비판법학학파에 속한 법학자들에게 결정적인 영향을 주었는데, 이와 동시에 데리다의 탈구축자체의 최초의 모티프를 표면에 드러나게 해 주기도 했다.[주15] 탈구축이라는 프로그램은 원래 처음부터 타자와의 사이에 있는 정의를 향해서, ‘으로서의 힘을 지닌 구조나 계층질서를 뒤흔들고자 하는 것이었다. 그렇지만 여기서는 어디까지나 정의를 법의 형태로 말하는 것과 관련된 문제들을 지적하는 것을 통해서 법의 바깥인 타자와의 사이에 있는 정의를 향한 법의 탈구축의 가능성을 여는 텍스트로서 /권리로부터 정의로에 주목하고 싶다.

[주13데리다가 여기서 타자로부터의 정의의 부름무한하다고 말하는데, ‘존재론전체성을 형성할 수 있는 자아의 내적 관념을 늘 능가하는 무한으로서 나타나는 것으로서 타자를 말하는 레비나스의 타자론(cf. Lévinas 1971: 43)의 메아리를 알아들을 수 있을 것이다

[주14데리다의 법의 힘 : 권위의 신비적 기초1부인 /권리로부터 정의로, 1990년에 캘리포니아대학교 로스앤젤레스 분교에서의 콜로키엄 나치즘과 궁극의 해결’ : 표상의 한계를 탐색한다에서 발표된 원고에 기초한 2벤야민의 고유명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2부에는 벤야민의 폭력의 비판을 위하여탈구축적재해석이 제시되어 있다. 추기(追記)’에서 신적 폭력을 말하는 벤야민의 사상과 나치의 궁극의 해결을 연결시킨 것에 관해서는 벤야민 연구자들의 반론을 불러왔으며, 또한 데리다의 신의 폭력의 해석에는 이론의 여지가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그렇지만 여기서는 이러한 반론의 하나로서 Menninghaus(1992)를 거론하는데 그치며, 데리다에 의한 벤야민 해석의 옳고 그름은 따지지 않을 것이다

[주15이 점에 관해서는 다카하시(高橋, 1998: 180-188)를 참조

 

III. ‘법의 힘을 지켜보기

데리다는 법의 힘에서 법의 탈구축을 전개하기에 즈음해, “[](loix)이 신봉되는 것은 그것들이 정의에 들어맞기 때문이 아니라, 이것들이 법이기 때문이다라는 몽테뉴의 에세의 말을 인용한다. 몽테뉴에 따르면, 오로지 그것이 법이다라는 동어반복적인 신비적 기초이외에는 법의 기초가 없으며, 그 때문에 법은 그 자체로서 정의에 기초한 것일 수 없다. 오히려 그렇게 법이 이라는 것, 즉 법이 구속력을 지닌 으로서 존재한다는 것 자체 속에 해석의 폭력(violence interprétative)’ (Derrida 1994: 33)이라고 말해야 하고 또 결코 정당할 수 없는 힘이 작동하고 있음을 명확히 하고자 한다. 그에게 몽테뉴가 말한 법의 신비적 기초란 법이 그 존립의 근저에 있어서 힘이나 권력이나 폭력 등과 보다 내적이고 복잡한 관계를 지닌다”(Derrida 1994: 32)는 것, 그리고 이러한 힘에 보증을 줄 수 없는”(Derrida 1994: 33) 것을 알아맞히는 말인 것이다. 법에 이러한 정당화활 수 없는 힘이 내재한다는 것은 법이 계속해서 사람들의 인 동안에는 결코 물어질 수 없다. 자명한 인 한에서, 기초에 있는 힘은 신비라는 것에 머문다.

 그렇다면 왜 데리다에게 법의 신비적 기초를 이루는 힘이 해석의 그것일까? 그것은 법이라는 것이, ‘법해석이 행해짐으로써 비로소 효력이 있는 으로서 존재하기 시작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해석은 법으로서 말해진 말을 어떤 상황에 적용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 법을 해석한다는 것은 기본적으로 어떤 구체적인 상황을 앞에 두고, 어떤 법의 말을, 그 상황에 타당한 것으로서 늘 새롭게 찾아내고, 그것을 당사자에게 효력이 있는 것으로서 상황에 적용시키는 것이다. 그것은 어쩌면 어떠한 법에 관해서도 말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육법전서에 단순히 쓰여져 있는 것만으로 끝나는 법을, ‘이라고 부를 수 없는 없다. 어떤 상황에 적용하는 법해석이 행해질 때에야 비로소 그 주체는 쓰여져 있는 말을 이라고 파악하는 자라면 누구든 개의치 않을 것이다 거기에 쓰여져 있는 법조문은 상황의 당사자에게 으로서의 강제력을 발휘하게 될 것이다. 데리다에 의하면, 법이 이러한 적용으로서의 해석과 더불어, 늘 새롭게 효력이 있는 으로서 출현할 때, 즉 법이 어떤 정의를 말하기 시작할 때, “하나의 행위수행적인 힘(une force performative)”(Derrida 1994:32)을 발휘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 행위수행적 힘이란 늘 해석의 힘이며, 신봉하라고/하듯이 호소하는 힘이다”(Derrida 1994: 32)라고 말한다. 법의 해석 그렇다면 이것은 적용인 동시에 이미 행위수행(performance)인 해석(interprétation)인데 은 그 법이 지배하는 장을 출현시키고, 사람들에게 그것을 준수하도록 하는 것이다. 법이 어떤 정의를 말한다는 것은 무엇보다 우선, 그 법을 따른 특정한 행동을 하도록 사람들을 강제하는 힘을 갖고 있는 발화수행인 것이다. 더욱이 법을 신봉하는것 속에는 그 법이 어떤 상황을 향해서 말을 건네는 그 순간뿐만 아니라, 장래에 걸쳐서 줄곧 동일하게 해석되고 동일한 구속력을 발휘할 것을 요구한다는 것이 포함되어 있다. 그렇게 하면 법의 해석이 그 법의 지배 하에 놓여야 할 사람들에게 미치는 힘은 특정한 행동을 강제하기도 하고 금지하기도 할 뿐만 아니라, 그 강제력을 지닌 법이 늘 정의를 이루는 것이라는 점을 계속해서 믿는다는 것을, 즉 그 전제를 묻지 않도록 명령하는 힘이기도 하다는 점이 된다. 데리다식으로 말한다면, 하나의 법의 출현이란 그 법이 자신의 소리를 듣는반복에의 구속이 자명한 것으로서 공유되는 것이다.[주16]

[주16이러한 법의 음성중심주의에 관해 나카마사 마사키(仲正, 2003: 101-104)를 참조

 이처럼 데리다에 따르면, 사람들에 대해서 특정한 행동을 강제하고 더욱이 자기 자신의 정의의 자명성을 신봉하는 것을 강제하는 해석의 힘이 하나의 의 말이 효력이 있는 법으로서 존재하기 시작할 때 늘 작동하며, 사람들에게 영향을 끼치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법의 존재의 기초를 이루는 힘 자체를 정의의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아니, 어떤 정의를 말하는 법이란, 그 자체로서는 사람들을 정의로 향하게 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신봉하게끔 호소하는 힘으로서, 법의 자기 보존에 사람들을, 가타부타를 말하지 않고 말려들게 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데리다는 법의 힘을 해석의 힘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면, 법의 존재 그 자체 속에, 벤야민이 폭력의 비판을 위하여에서 말했던 법정립적 폭력법보전적 폭력’(rechtserhaltende Gewalt)이 서로 긴밀하게 유착된 형태로 작동하는 것이다.[주17]  법은 기존의 법이든 새롭게 수립된 법이든, 그것을 어떤 상황에 적용하는 해석에 의해 늘 새롭게 말해진다. 그리고 이 발화행위에는 그 법이 반복하고 마찬가지로 준수되는 것을 강제하는 힘이 포함되어 있다. ‘인도적이라고 말해지는 법도, 그것이 인 한에서, 이러한 힘을 사람들에게 미치는 것을 피할 수 없다. 더욱이 이 힘은 그 자체로서는 결코 정의의 것이라고는 말할 수 없으며, 오히려 언제나 폭력으로서 고발될 수 있는 것이다. 이와 관련해서, 벤야민에 따르면 법은 늘 이런 법의 신비적 기초를 이루는 힘을 사람들에게 미치고 있음이 망각되면, 법질서는 쉽게 부정의한 폭력의 체계가 되어버린다. “법적 제도 속에는 폭력이 잠재해 있다는 의식이 소멸하면, 그 법적 제도는 타락한다”(Benjamin 1921:190). 그렇게 되면, 어떤 법질서가 계속해서 정의로운 것일 수 있기 위해서는 자신의 폭력을 이른바 탈신비화하여 바로잡는 자기의 탈구축이 끊임없이 요구되게 될 것이다.

[주17데리다는 법의 힘에서 법정립적 폭력법보전적 폭력을 구별하고자 하는 폭력의 비판을 위하여에 벤야민에 대해 극히 비판적으로, “/권리를 정초하는, 또는 그것을 정립하는 폭력(법정립적 폭력)은 법/권리를 유지하는 폭력(법보존적 폭력)을 포괄해야만 하며, 또한 그것과 손을 뗄 수 없다”(Derrida 1994: 93-94)고 말한다

 그런데 법의 존립의 근저를 이루는 힘은, 사람들의 행동을 강제하고 사람들에게 법을 자명한 정의라고 신봉하게 만드는 것에 머무르는 게 아니다. 이미 봤듯이, 법은 경계를 획정하는 것이며, 경계의 획정에 의해서 법의 바깥인 타자들을 배제하는 힘을 행사하는 것이다. 이때 경계의 내부에 있는 우리의 구성원에게도 일정한 정체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