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래할 생명권력론을 위해


사상, 2013년 2

 

 

목차

사상의 말

히가키 타츠야(槍垣立哉)

(좌담회) 도래할 생명권력론을 위하여 (2/3)

히가키 타츠야(槍垣立哉)・카스가 나오키(春日直樹)이치노카와 야스타카(市野川容孝)

II. 생명권력론의 최전선

아감벤을 어떻게 생각할까

* 지금 아감벤의 이름이 나왔는데요, ‘생명권력론의 최전선을 생각할 경우에는, 특히 2000년대 이후 압도적인 존재감을 보여주는 아감벤의 논의를 무시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우선 아감벤 얘기부터 시작할까요?

上村忠男에 대한 이미지 검색결과

조르조 아감벤


히가키 : 아감벤 같은 존재가 이탈리아에서 나온 것은 솔직히 말해서 의외였습니다. 확실히 이탈리아에는 네그리 같은 사람이 있지만, [네그리는] 들뢰즈나 가타리의 동료였으며 프랑스의 현대사상이나 좌익사상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최근에도 잔니 바티모(1936년 생)약한 사고(1983)가 번역되었듯이, 우에무라 타다오(上村忠男) 씨나 오카다 아츠시(岡田溫司) 씨의 정력적인 소개도 있지만, 철학 영역에서 이탈리아가 이 정도로 주목을 받은 것은 처음인 듯 싶습니다.

上村忠男에 대한 이미지 검색결과                         photo

우에무라 타다오(@tadao_uemura)                    오카다 아츠시

이치노카와 : 왜 아감벤이 부상한 걸까요?

히가키 : 그 이유는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아우슈비츠의 남은 것(1998)이 잘 팔렸다는 건 있을 수 있는 일이지만, 그러나 이것이 과연 일본만의 현상일까 생각해보니, 파리의 서점에도 아감벤코너에 책이 산처럼 쌓여 있더군요. 시기적으로도 그렇게 일본과 동떨어져 있지는 않을 거예요.

카스가 : 난민 문제를 포함해 현지 조사를 하는 사람들도 자주 인용하고 있습니다.

히가키 : 그렇군요. 다만, 아감벤은 어떻게 해석할지가 어려워요. 아우슈비츠의 남은 것에서는 위르겐 하버마스(1929)나 한스 요나스(1903-93)에게 [공격과 비판의] 칼날을 향하고 있습니다. 후안무치한 일을 저지른 독일인 무리들은 아직도 이런 얘기를 하고 있고, 그것으로 문제가 끝났다고 생각하다니 놀랍네, 이런 식의 격렬한 독일 비판을 하고 있습니다. 이렇게까지 말할 수 있다는 것은 단순하게 말해서 매우 대단하다고 생각합니다.

  

  아감벤이 처음 주목받은 것은 호모 사케르아우슈비츠의 남은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푸코의 논의를 넘어서 새로운 것을 하겠다고 드는 사람인가 싶더니, 실상은 다른 것 같아요(웃음). 졸업논문에서는 시몬 베유(1909-43)를 다루고, 1960년대가 되면 하이데거의 강의에 참석하고 이탈리아어판 벤야민 전집』을 감수했습니다. 2000년대가 되면 로마세계의 종교론에 생명정치의 문제를 접목시키고, 기독교 세계로부터 뭔가 종횡무진으로 내달리는 작업을 하게 됐습니다. 이런 형태로 세계의 주요 장면에 나온 이탈리아인은 꽤 드물 겁니다. 특히 철학의 영역은 고대그리스, 중세를 별도로 치면, 영미계와 프랑스계와 독일계가 차지하고 있습니다. 대학의 강좌에 대한 인사를 보더라도 확연합니다만, 이것은 어쩔 수 없는 제국주의이죠. 그런 상황을 아감벤 같은 존재가 교란시킨다는 것은 매우 큽니다.

카스가 : 과연 그렇죠.

히가키 : 제 선생이었던 사카베 메구미(坂部恵) 씨가 말년에 일본철학회에서, 전지구화 등을 얘기하면서도 왜 일본의 철학과에서는 영미계와 프랑스계와 독일계라는 세 가지에서 선택을 하게 만들까, 이런 시시한 짓은 이제 그만두는 편이 좋다, 논문은 어느 나라 말로 써도 좋고, 베트남 철학이어도 좋다,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서두에서도 조금 언급했습니다만, 이것을 아감벤은 실현해버렸습니다. 이것은 향후 철학자의 모델이 되며, 아마 지금부터 앞으로는 중국인이나 한국인으로부터도 아감벤 같은 역할을 맡는 철학자가 나오겠죠.

   그리고 오늘의 화두와 관련해 중요한 것은, 아감벤이 생명정치와 종교를 강하게 연관시켰다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푸코는 사목권력(pouvoir pastoral)’이라는 개념을 제시했는데, 이것은 아주 큰 문제이고, 요컨대 유럽의 권력은 유대-기독교적 권력이라고 합니다. 이 개념은 푸코가 1978년에 두 번째 일본방문을 했을 때의 강연에서 다뤄지기도 했으며, 일본에서는 굉장히 유명하지만, 실제의 푸코는 그 후 거의 전개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을 아감벤은 진지하게 씨름하고 있고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이치노카와 : 제가 아감벤의 이름을 처음 들은 것은 다자키 히데아키(田崎英明) 씨한테서였습니다. ‘벌거벗은 생명개념도 다자키 히데아키 씨에게 배웠다고 기억합니다. 이후 번역으로 아우슈비츠의 남은 것, 목적 없는 수단, 호모 사케르를 읽었고, 서평도 두개 정도 썼습니다만, 아감벤은 사회학자가 사용하기는 매우 힘들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실제로 오오츠 마사키(大津真幸) 씨 등을 제외하면, 사회학에서 아감벤에 의거해서 뭔가를 말하는 사람은 매우 적다고 생각합니다. 푸코라면 근대가 문제였고, 그것에 걸터앉아 사회학에서 뭔가 말하는 것은 비교적 쉽습니다만, 앞에서도 얘기가 있었듯이, 아감벤은 로마에서 시작하기에, 결국은 19세기 이후에 생겨났을 뿐인 사회학적 상상력으로는 따라잡기 어려운 대목이 있습니다. 푸코의 경우도, 어떻게 생각되든 국민국가, 에티엔 발리바르(1942)가 말한 바의 국민적이고 사회적인 국가”(복지국가)를 전제하고 있습니다.

히가키 : 말씀하신 그대로입니다.

이치노카와 : 아감벤의 호모 사케르2002년에 독일어 번역본이 나왔고, 이후에도 다른 저작들이 속속들이 번역되고 있습니다만, [독일이] 다른 나라들과 조금 다를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독일에서는 아우슈비츠의 문제를 말하는 이상, 아감벤에게 귀를 기울이지 않을 수 없었다는 것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아감벤의 나치즘 해석 방식에는 저조차도 실증적 수준에서 이의를 제기하고 싶은 대목이 꽤 있으며, 조금 허풍을 떨고 있다는 느낌이 있습니다.

히가키 : 확실히 철학자 특유의 허풍을 떨고 논리가 성긴 대목이 있습니다(웃음).

이치노카와 : 그리고 칼 슈미트를 그렇게 원용하고 있는 것도, 독일에서는 좀처럼 쉽게 받아들이기 어려운 부분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버마스가 전형입니다만, 슈미트에 맞서서 생각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카스가 : 저는 최근 피지에서 일종의 노인 홈(home) 같은 특이한 시설에서 조사를 하게 되면서부터 벌거벗은 생명이라는 말이 편리해서 몇 번 사용한 적이 있습니다. 다만, 이것은 이치노카와 씨와 같은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지금은 한 가지로 사용할 수 없다고 할까, 인류학자에게는 지금 한 가지의 리얼리티가 없네요. 예쁜 허구를 만들고 있지만, 환기력이 없습니다.

   그렇지만 주권자를 권력에 외부는 없다고 선언하는 인간으로 제시한 것은 재미있다고 생각합니다. 푸코는 외부가 없다고 말했지만, 아감벤은 사이라고 함으로써 외부를 보여주고, 필연적으로 법치국가의 역설을 제시합니다. 인간들의 편에서 보면, 역설이 있습니다만, 신이 주권자라면 그런 역설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감벤의 외부에는 처음부터 인간이 들어 있으며, 인간화된 외부를 초월적인 것으로서 말합니다. 그런 사이밖에 있을 수 없다고 말함으로써, 이것은 이것으로 알기 쉽습니다만, 그것이 아감벤의 한계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히가키 : 굳이 아감벤을 추켜세운다면, 주권권력의 문제를 다시 거론한 것이 컸습니다. 푸코는 이제 주권권력은 없어진다는 식으로 읽을 수 있는 것을 말했지만, 실제로 주권국가는 있으며, 전구화되고 있다고 해서 정말로 없어질지 여부는 모릅니다. 그런 상황에서 주권권력을 다시 다룬 것은 역시 크다=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정말로 사이인 것이죠. 삶과의 역설로 주권권력을 내고, 동물과의 역설로 인간을 냅니다. 그 제기방식이 멋지지만, 실증연구로서는 어디까지 사용할 수 있는가라는 것이기도 합니다. 말하자면 문학적 비유에 불과한 부분이 확실히 있습니다. 그래서 아우슈비츠 이야기만 하더라도 나치즘에 대한 실증연구를 하고 있는 사람에게 의미가 있느냐 없느냐보다, 종교 얘기와 같은 것이라고 생각하거든요. 거기에는 종교 얘기로서의 리얼리티가 있고, 나치즘도 1000, 2000년도 지난 후에는 종교 얘기가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카스가 : 종교 얘기라고 하셨는데, 맞는 말일 수도 있습니다. 

히가키 : 그런 점은 아감벤에게 일관되게 보인다고 생각해요.

이치노카와 : 일본에서도 예를 들어 홈리스의 사람들이 처한 상황을 생각할 때 벌거벗은 생명이라는 말에는 강한 리얼리티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런 문제를, 예를 들어 사회학적으로, 구체적으로, 실증적으로 파고들어갈수록, ‘벌거벗은 생명이라고 말하는 것으로 끝날 수 없게 된다고 생각합니다.

카스가 : 인류학의 현장에서도, 모두에게서 버림받고 아무도 모르게 죽어가는 사람들이 있지만, 제대로 취급받는다면 벌거벗은 생명이란 있을 수 없다, 거기에는 확실히 의미가 있으며 비오스가 있다는 게 됩니다.

이치노카와 : 제 감각도 그것에 가깝습니다.

 

벌거벗은 생명과 벤야민

히가키 : 아감벤은 벌거벗은 생명(nuda vita)”이라는 개념을 발터 벤야민(1892-1940)폭력 비판을 위하여에 있는 단순한 생명(das blosse Leben)”이라는 표현에서 빌려 왔다죠?

이치노카와 : 그렇습니다.

히가키 : 그런데 벤야민은 단순한 생명에 관해 부정적으로 쓰고 있고, 그것을 중요한 개념으로 채용한 아감벤의 의도를 도무지 모르겠어요. 더 말하면, 이 저작에서 취급되고 있는 신적 폭력자체, 상식적으로 읽으면, 그것에 의해 벤야민이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지를 잘 모르겠고, 수수께끼로 가득 차 있어요. 적어도 일본에서 신적 폭력은 아나키스틱한 폭력으로 이해되고, 그렇기에 1960=70년대의 일본에서는 국가의 철폐 등을 향한 논의로서, 좌파적 맥락에서도 유행했습니다. 그런데 이치노카와 씨의 독해는 다르던데요?

이치노카와 : 다릅니다.

히가키 : 우선 폭력 비판을 위하여」가 로자 룩셈부르크(1871-1919) 추도문이라고 보시는군요.

이치노카와 : 그 점에 관해서는 저는 확신하고 있습니다. 벤야민은, 물론 로자 룩셈부크르만을 염두에 둔 것은 아니겠습니다만, 그가 게르숌 숄렘(1897-1982)에게 보낸 편지(19201229)에 비춰봐도, 로자 룩셈부르크가 이 때의 벤야민의 염두에 없었다는 것은 절대로 없어요.

히가키 : 또 하나는 신적 폭력에 대해서, 이치노카와 씨는 자크 데리다(1930-2004)를 비판하면서, 이는 의회제 민주주의를 구하는 폭력이라고 말씀하시네요.

이치노카와 : 굳이 말한다면 그렇습니다.

히가키 : 이것은 꽤나 아슬아슬한 독해 아닙니까?

이치노카와 : 그렇다고 생각합니다. 줄타기 곡예를 벌이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미 줄에서 떨어지고 있다는 비판도 있겠지만(웃음).

히가키 : 일반적으로 신적 폭력은 메시아적 폭력, 즉 세계를 모조리 망가뜨린다고 일컬어지는 폭력이라고 읽히고 있습니다. 그런데 신화적 폭력은 피 냄새를 풍기는 폭력이기는 하지만, 신적 폭력은 피 냄새가 나지 않는 폭력이라고 얘기됩니다. 그리고 단순한 생명은 서양근대에서 지난 수십 년 동안의 논의에 지나지 않지만, 신적 폭력은 모든 생명에 있어서의 것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벤야민은 조르주 소렐(1847-1922)을 높이 평가하는 것처럼 보이는데, 보통 소렐은 아나키즘으로 이해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치노카와 씨는 소렐과 달리, 벤야민이 말하는 신적 폭력이 의회제 민주주의를 잇는 폭력이라고 말합니다.

이치노카와 : 그렇습니다. 하지만 저는 로자 룩셈부르크도 비판한 유일-의회주의(-議会主義)”를 제창하는 것이 전혀 아닙니다. 그건 오해하지 않았으면 합니다. 그리고 저더러 말하라 한다면, 소렐이 폭력론(1908)에서 자신의 생디칼리즘을 분명히 신화(mythe)’라고 표현하고 있고, 다른 한편, 벤야민은 신화적(mysthisch)’이 아니라, 일부러 이것과 구별해서 신적(göttlich)’이라고 말하고 있기에, 그것을 무시하고 벤야민과 소렐의 생각을 그대로 같다고 풀이하는 것은 소박하다고 생각하고 이상하다고 여기는 것입니다.

히가키 : 다만 역사의 개념에 대해서를 읽으면, 우리가 살아온 역사 등은 지구의 역사로부터 보면 단 몇 초에 불과할 뿐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시간의 막대기가 균형을 이뤄 현재시(Jetztzeit)”가 되며, 모든 시간이 수평이 되는 곳에서, 모든 과거의 것이 일어나서 구제된다. 이것은 엄청나게 종교적이고 메시아적인 비전입니다. 이것과 신적 폭력이 이어지지 않을 수 없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이치노카와 : 그것은 인정합니다. 다만 주의해야 할 것은, 첫째로, 벤야민이 Zur Kritik der Gewalt(폭력 비판을 위하여)에서 논하는 ‘Gewalt’라는 독일어에는, 예를 들어 ‘Gewaltenteilung’삼권 분립을 의미하듯이, “정당성을 갖춘 권력이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벤야민은 ‘Gewalt’라는 말에 폭력뿐 아니라, ‘정당성을 갖춘 권력’, 라틴어로는 ‘potestas’라는 의미를 담아내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앞의 아렌트 얘기에서 히가키 씨는, 철학은 권력도 자연력도 똑같이 으로 이해했다고 말씀하셨지만, 그때의 potestas’가 아니라 ‘potentia’(독일어로 말하면 ‘Macht’), 즉 정당성 같은, 이렇게 말해도 좋다면, 인간적인 노모스의 옷을 입은 것을 모조리 벌거벗긴 힘이라고 생각합니다. 근대에 들어와 ‘potestas’ 대신 ‘potentia’가 전경화됐다고 저는 이해했습니다만, 아무튼 벤야민의 주제는 ‘Macht’(‘potentia’)가 아니라 ‘Gewalt’ (‘potestas’)입니다. 이로부터 두 번째로, 푸코가 말하는 통치성(gouvernementalitaté)’과 결부시켜 말한다면, ‘Gewalt’의 원형 동사인 ‘walten’통치하다라는 의미라는 것. 셋째로, 벤야민은 이 논고에서 ‘Gewalt’의 폐절을 역설한다고 해석하기는 어렵다는 것. 아무리 생각해도, 여기서 벤야민은 ‘göttliche Gewalt’(‘신적 폭력혹은 통치’)를 긍정하고 있으며, 이 논고는 ‘waltende Gewalt’(통치하는 통치)라는, 어떤 의미에서 동어반복적인 것의 희구로 끝을 맺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 논고의 마지막 단락에는 ‘Entsetzung des Rechts samt den Gewalten’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Entsetzung’은 지금까지 폐절이나 비정립’, ‘탈정립등으로 번역되었습니다만, 어떻게 하는 게 좋을까요? ‘Entsetzung’이 법을 정립하는(rechtssetzend) 폭력과의 대비에서 나온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그러나 ‘entsetzen’이라는 독일어는 놀라게 하다’, ‘깜짝 놀라게 하다라는 뜻도 있습니다만, 솔직하게 생각하면, 갇혀 있거나 파묻혀 있거나 해서 옴짝달싹 못하고 있는 뭔가를 거기에서 빼내거나 풀어내기도 하는 것입니다. 실제로 군사용어에서는 적에게 포위된 아군을 구출할 때 ‘entsetzen’이라고 말합니다. 따라서 문제의 말은 “Gewalt를 포함한 Recht(법적 권리)의 구출이라는 의미로도 될 수 있습니다.

히가키 : 다른 곳으로 낸다는 것이죠.

이치노카와 : 그렇습니다. 아감벤의 해석에는 부정신학적인 대목이 있는데, ‘Recht’(법적 권리)‘Gerechtigkeit’(정의), 희망도 갖지 않는 듯이 논의된다고 저는 생각합니다만, 벤야민의 생각은 더 밝다고나 할까, 긍정적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벤야민이 이 논문의 주석 10에서 언급하는 쿠르트 힐러(1885-1972)와 대비시키면 잘 알 수 있습니다. 쿠르트 힐러는 이 주석에서 언급되는 ()-카인(1919)이라는 소론에서, ‘행복(Glück)’이나 정의(Gerechtigkeit)’보다 고귀한 것이 있다, 그것은 (Dasein)자체다, 이렇게 말합니다. ‘행복이나 정의의 실현이라는 이름 아래서 생존[실존]을 부정하는 폭력이나 테러리즘을 허용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 힐러의 주장입니다만, 이것은 뒤집어보면 행복이나 정의에 관한 허무주의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벤야민은 힐러의 이런 생각을 전면적으로 비판하기 위해 이 논고를 썼습니다. ‘단순한 생명이라는 말도, 그런 맥락에서 나온 겁니다.

   또 하나, 이것은 아감벤이 빠뜨린 채 읽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만, 폭력 비판을 위하여에는 단순한(bloss)’이라는 단어가 사실은 두 번, 상이한 형태로 나옵니다. 하나는 힐러의 생각을 비판하는 형태로 나오는 단순한 생명(das blosse Leben)’으로, 아감벤이 주목한 것은 이것입니다. 그러나 그 몇 줄 뒤에 정의를 갖춘 인간단순히 아직 존재하지 않았을 뿐이라는 것(das blosse Nochnichtsein)’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정의보다도 단순한 생명이 고귀한 거야, 정의란 무엇인가를 첫 번째라고 생각할 필요는 없는 거야, 라는 힐러의 비관주의에 대해, 벤야민은 그런 것이 아니라고, 정의는 와야 할 것으로서 확실하게 있다고, 정의는 단순히 아직 존재하지 않았을 뿐이다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게다가 벤야민은 이 두 번째의 ‘bloss’절대로(unbedingt)’라는 단어를 덧붙이고 있습니다. 거칠게 말하면, 벤야민은 정의가 단순히 아직 존재하지 않을 뿐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절대로필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히가키 : ‘bloss’가 두 번 나온다는 거네요. 정말로.

이치노카와 : 아감벤은 그 중 하나에만 주목하고 있을 뿐입니다. 벤야민은 이 논고를 19211월에 탈고했습니다. 2010년대에 살고 있는 우리가 1917년의 러시아혁명을 보면, 그것은 1989년 이후에 붕괴하는 것의 시작, 끝의 시작이라고 아무래도 보이지만, 벤야민뿐 아니라 1921년에 살았던 사람들에게는 시작의 시작으로 보였던 것 같네요. 위대한 가능성을 감춘 무엇인가가 지금 막 시작됐다고나 할까. 그래서 마음 깊은 곳에서, 겁을 먹은 사람들이 아주 많았습니다만. 그런 감각 속에서 벤야민은 ‘Gerechtigkeit’(정의)‘Gewalt’(통치)라는 말을 사용하고 있는 것이며, ‘정의라는 이념을 벤야민은 믿었다고 생각합니다.

히가키 : 그때 정의를 믿었다는 것은 ‘waltende Gewalt’가 지시하는 것은 도래할 공산주의였다는 것입니까?

이치노카와 : 그렇다고 생각합니다. 좌절된 독일혁명의 저편에 있어서 단순히 아직 존재하지 않을 뿐인 공산주의. 이와 똑같은 것을 2010년대의 우리가 일본에서 생각해도 좋다고 봅니다. 현존한 사회주의와 결별하면서 말입니다.

카스가 : 저는 오늘을 위해 벤야민을 다시 읽어보고 꽤 흥분했어요. 아까 말씀드렸듯이, 아감벤은 주권자를 거론하더라도, 결국은 인간화한 것입니다만, 벤야민은 인간을 다시 한 번, 신 쪽으로 끌고 가는 느낌이 있습니다. 근대란 인간이 초월적인 관점을 갖는 것이며, 이에 대해 푸코는 시점(視點)을 분산시켰습니다. 그러나 벤야민에 따르면, 초월자의 관점은 인간에게는 다다르지 않는 것이며, 폭력 비판을 위하여는 인간에게 더 신성함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지금까지도 손에 넣지 못했던 비근대라고도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치노카와 : 맞아요. 신적 폭력은 인간의 눈에는 감춰져 있다고 벤야민은 말하더군요.

카스가 : 인간적 허무주의. 인간으로서 읽기 때문에, 더욱 허무주의가 된다는 하이퍼-세계.

이치노카와 : 제 해석도 아직 너무 인간적인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만, 폭력 비판을 위하여를 쓸 무렵, 벤야민은 이미 에른스트 블로흐(1885-1977)와 친했습니다. 블로흐의 유토피아의 정신(1918)도 출판된 직후에 읽었고, 당시의 편지를 보더라도, 벤야민이 이 책에 상당히 촉발을 받았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벤야민의 생각은 소렐의 그것과 동일시할 수 없듯이, 블로흐의 그것과도 동일시할 수는 없습니다만, ‘유토피아’, 그리고 블로흐의 나중의 주제인 희망같은 것과 벤야민의 폭력 비판을 위하여를 연결해서 읽을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더 말한다면, 블로흐를 통해서 저는 벤야민과 루디 두츠케(Alfred Willi Rudi Dutschke, 1940-79)를 연결해서 생각하고 있습니다. 두츠케의 연장선상에 있는 오늘날의 독일의 녹색당을 포함해서 말입니다. 이 노선(line)은 일본에서는 생겨나지 않았습니다. 적어도 힘을 가질 수 없었고, 일본이 지금과 같은 상황이 되는 한 요인도 거기에 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아무튼 단순히 아직 존재하지 않을 뿐인 것에 대한 강한 신념이, 적어도 폭력 비판을 위하여의 벤야민에게는 있습니다. 그것이 아감벤에게서는 사라집니다. 아마 이 두 번째의 ‘bloss’를 빠뜨리고 읽기 때문입니다.

히가키 : 그것은 알고 있습니다.

 

비오스조에

히가키 : 아감벤이라고 하면, 또 하나, ‘비오스조에의 구별이 잘 알려져 있습니다. 다만 최근의 뇌신경계적 자기라든가, DNA 수준에서의 사체에 있어서의 생명의 파악 같은 얘기를 보면, 비오스로서의 나의 이 신체로는 다뤄질 수 없습니다. 나의 면역계, 나의 뇌신경계의 움직임, 나의 세포 속의 DNA라는 것을 조작하는 것이 가능해졌을 때, ‘조에라는 말이 딱 들어맞는 곳이 있는 것 같습니다.

이치노카와 : 확실히, 개체로서의 비오스라는 리얼리티는 약해지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카스가 : 조에의 일부이기 때문에.

히가키 : 그래요. 다만, 난민이라든가, 양로원 등에서 아무도 찾아오지 않고 단순히 살아 있는 사람에 관한 장면에서 얘기되는 조에와, 나의 뇌신경계를 나는 어찌할 수가 없으나, 그것이 무엇인가를 산출하고 있다는 장면에서 얘기되는 조에, 이렇게 둘 다가 있으며, 논의가 분분합니다.

카스가 : 후자의 논의는 중요하다고 생각하지만, 수상쩍은 얘기라고나 할까, SF적인 이야기도 많잖아요. 극히 일부만을 다루고 페티쉬해버립니다. 예를 들어, 심해에 있는 혐기성 미생물 등은 유전자의 구조가 점점 바뀌고 있는데요, 그것만을 갖고 생명을 말해버립니다.

히가키 : 철학에서도 한때, 뇌신경 윤리가 유행했지만, 이런 뇌파가 생기면 이런 이미지가 나타난다는 식의 단순한 것을 사용해 프라이버시에 관해 논의하는 정도일 뿐, 그 다음부터는 더는 아무것도 나오지 않습니다. 그러면, 기술이 진전되어 정교하고 치밀해졌을 때 어떻게 될지는 지금 단계에서는 아직 뭐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카스가 : 다만 정말로 급진적인 것은 나오지 않았네요. 두 개의 머리를 지닌 하나의 신체라든가, 두 개의 신체를 지닌 하나의 머리 같은 것은. 기술적으로 가능했다고 해도, 그런 것은 절대로 만들지 않죠. 비교적 상상하기 쉬운, 조금 괴이한 테크놀로지만이 나옵니다.

이치노카와 : 개체로서의 비오스의 윤곽을 무너뜨리는 얘기입니다만, 게놈연구 등은 오히려 사적 소유의 논리로 진행되고 있지요. 지적 재산권 등을 말하고 있습니다만. 분명히 생명이 조에로서 보이는 장면이 늘고 있지만, 경제와 사회의 논리로부터 보면, 이전보다 더 사적 소유의 틀이 강해지고 있는 듯 보입니다.

히가키 : 거꾸로 강해지고 있군요. 이것은 나의 유전자이다, 라고 말이죠.

이치노카와 : 혹은 내가 발견한 유전자라는 식이죠. 지적 재산권이라는 의미에서의 사적 소유의 논리가 강화되고 있습니다.

카스가 : 마릴린 스트라썬(Marilyn Strathern, 1941~)도 쓰고 있습니다만, 간염 항체를 만들 때, 그 소유권은 최초로 세포를 제공한 사람에게도 있는 것이 아니냐라는 논의가 이뤄집니다.

Marilyn Strathern에 대한 이미지 검색결과

마릴린 스트라썬

이치노카와 : 개체로서의 생명은 끝나더라도, 사적 소유의 논리는 계속 살아 있습니다. 계속 살아 있을 뿐만 아니라 강해지고 있잖아요.

히가키 : 정말 그렇군요. 근대를 넘어서는 것이 나타난다고 말하기도 하지만, 그것을 파악하는 것은 근대의 논리 밖에는 없습니다.

카스가 : 그때 생명권력은 강력한 것으로서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치노카와 : 결국 자본제를 어떻게 생각하느냐가 생명권력론에 있어서 큰 문제라고 생각해요. 그 점을 분명히 전면화하는 것은 네그리로, 거기서는 아감벤과 크게 다르다고 생각합니다.

카스가 : 생명권력론의 장점은 인간이 생물학적인 생명의 주인이라는 것과 사회적인 존재라는 것, 이 두 가지를 함께 파악하는 데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 특집에 기고한 논문에도 썼지만, 우리의 사유는 자연적인 것과 사회적인 것, 혹은 법칙과 가치라는 두 가지의 것을 조합시킴으로써 작동합니다. 따라서 지금의 생명권력론에서 제가 못마땅하게 생각하는 것은, 생명권력론을 어떻게 사용하는가라는 논의는 많은데, 왜 이렇게 간단하게 생명권력이라고 말할 수 있는가라는 논의가 없다는 점입니다. 이미 우리 내부에 그런 사유의 이분화 기계가 제대로 들어 있는데도, 그것을 묻겠다고 하지 않습니다. 그것을 묻고자 하는 것이 서두에서 이름이 나온 비베이로스 데 카스트로입니다. 특히 중요한 것은 그가 반자연주의를 존재론으로서 가져왔다는 곳에서, 인식론으로서 가질 수 있다면 단순히 다문화주의의 하나가 되어버리지만, 존재론으로서 가지고 옴으로써 우리의 사유양식 자체를 다시 묻는 것을 시도하고 있습니다.

 

사회학의 최전선

사회학에서의 생명권력론의 최전선이라고 하면, 어떤 것이 되고 있나요?

 

이치노카와 : 저한테 사회학을 대표해서 말할 자격이 있는 건 아닌데, 개인적으로 생각하는 것은, 한 가지는 생명권력이라는 개념을 모방한 역사연구는 아닐 겁니다. 이것은 실제로 늘고 있고, 앞으로도 늘어날 겁니다. 실제로 의료나 복지에 관한 역사사회학적 연구는 늘고 있고, 젊은 사람들이 저보다 훨씬 훌륭하게 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그런 역사연구는 생명권력이라든가 생명정치라고는 말할 필요가 없네요. 제 자신이, 요네모토 씨 등과 우생학과 인간사회 : 생명과학의 세기는 어디로 향하는가(優生学人間社会──生命科学世紀はどこへかうのか)(講談社現代新書, 2000)를 썼을 때에는, ‘생명권력이나 생명정치라는 말을 전혀 쓰지 않았습니다. 그런 개념을 쓰지 않고도 역사는 쓸 수 있습니다. 오히려 이런 연구들에 의해 묘사되는 사실 자체가 생명권력생명정치라는 개념의 외연을 자동적으로 점차 메워준다고 생각합니다. 뒤집어 말하면, ‘생명권력이나 생명정치라는 개념은 내포가 공허하고, 그 공허한 그릇이 실증적 역사연구에 의해 메워진다고 생각합니다.

優生学と人間社会에 대한 이미지 검색결과

   다른 하나는 요네모토 쇼우헤이 씨 식의 바이오폴리틱스연구로, 저는 이것에서 조금 멀어졌지만, 이런 연구는 향후에도 더더욱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푸코도 감안한 가유카와 준지(粥川準二) 씨의 바이오화하는 사회 : ‘핵시대의 생명과 신체(バイオする社会──「核時代生命身体)(青土社, 2012) 같은 작업입니다. 참고로 독일에서 바이오폴리틱스(Biopolotik)’라는 말을 제목으로 내걸고 출판되고 있는 책이나 논문은, 물론 푸코나 아감벤을 논한 것도 절반 정도가 있습니다만, 나머지 절반은 요네모토 씨 식의 바이오폴리틱스’, 즉 생명과학의 문제들에 관해 어떤 정치적 결정을 할 것인지에 관한 것입니다. 구체적으로는, 착상 전 진단, 배아연구, ES세포연구 등을 인정할 것이냐 말 것이냐, 인정한다면 어떤 조건에서 인정할 것이냐 등의 얘기입니다. 2001년에 독일에서는 주로 생명과학에 관한 국민윤리평의회(Nationaler Ethikrat)라는 것이 설립되고, 2008년에 독일윤리평의회(Deutscher Ethikrat)로 개칭됐는데, 이런 식으로 바이오폴리틱스가 이른바 제도화되기도 했습니다. 다만 독일에서는 특히 생명의 시작에 관한 것에 얘기가 집중되고 있네요. 일본에서 문제가 되는 뇌사를 비롯한 생명의 끝에 관한 것은 그다지 열띠게 논의되고 있지 않습니다.

バイオ化する社会에 대한 이미지 검색결과

히가키 : 그건 기독교의 맥락과도 관계되어 있습니까?

이치노카와 : 그렇다고 생각합니다. 생명의 끝에 관한 얘기보다도, 예를 들어 배아(체외수정란)를 실험에 사용해도 좋은가 같은 것이 아주 진지하게 논의되고 있습니다.

히가키 : 위화감이 드는군요.

이치노카와 : 일본의 우리라면 그렇게까지 진지해지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할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유전자를 조작하는 게 좋은가라는 문제를 포함해서, 이것들에 관한 논의에는 기독교적인 것이 상당히 농밀하게 들어가 있습니다. 특히 독일은 프랑스 같은 라이시테(정교분리)의 원리로는 움직이지 않으며, 예를 들어 기독교민주동맹이라고 당당히 이름을 내걸고 있기에, 바이오폴리틱스를 포함해 정치 일반에 종교(기독교)가 강하게 들어 있습니다. 독일에서는 생명윤리의 문제들에 관해서, 나치라는 과거가 있기에, 타국보다도 신중하고 엄격한 대응이 이뤄진다고 자주 듣곤 합니다. 확실히 그런 부분도 있지만, 나치라는 지나가지 않는 과거는 사실상 표면적인 것이며, 그 이면에는 기독교 도덕이 무의식에 가까운 형태로 강하게 작동하고 있다고 보는 게 좋은 부분도 있습니다.

히가키 : 반대로 일본을 보면, “자연으로 돌아간다”, “흙으로 돌아간다는 발상이 있는데, 어째서 뇌사의 얘기가 되면, 그렇게까지 죽음의 기준이 문제가 되는가?

이치노카와 : 그것에 대해서는 나도 아직 확실한 것을 말할 수 없습니다만, “일본()에는 정신을 신체보다 우월하게 하는 서양근대의 데카르트적 심신이원론과는 다른 독자적인 신체관생명관이 있었다고 운운하는, 한때 일본에서 유행했던 비교문화론에는 별 근거가 없다고 장담할 수 있습니다. 실제로 柳田園男장례제도 연혁 사료(葬制沿革史料)(1934) 등에서 써서 남긴 넋을 부름[魂呼ばい]”, 즉 죽기 직전의 사람의 이름을 큰소리로 부르기도 하면서, 그 사람의 혼이 육체로부터 떠나는 것을 불러 세운다는 풍습은 심신이원론 없이는 성립하지 않습니다. 다른 한편, 서양 근대의학은 정신을 신체보다 우월하게 여기는 것 등은 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아까 나온 비샤의 텍스트를 읽으면, 곧바로 알 수 있습니다. 비샤는 정신에 상당하는 동물적 생명보다도 신체에 상당하는 유기적 생명을 중시하며, 후자가 소멸할 때까지는 의학적으로 봐서 사람이 죽었다고 말해서는 안 된다고 말합니다(신체/생명참조). 서양 근대의학이 데카르트적 이원론에 의거하고 있다면, 비샤는 정반대의 것을 말해야 할 테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게다가 비샤는 분명히 오늘날의 뇌사와는 다릅니다만, “뇌의 죽음이라는 개념을 이미 제시하고 있고, “뇌의 죽음을 갖고서 사람의 죽음으로 하는 것은 너무 이른다고도 말하는 겁니다.

  이로부터 또 하나, 일본에 대해 말할 수 있는 것은, 가족이라는 신체, 가족이라는 경계의 강함입니다. ‘身内[친척]이라는 일본어가 상징적입니다만, 자신의 身内[친척]의 장기를 身内[친척]도 아무것도 아닌 생면부지의 사람에게 제공하는 것에 대한 강한 저항감이 있으며, 그것이 뇌사상태의 사람으로부터의 장기적출에 제동을 걸고 있다는 측면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다른 한편, 많은 사람들은 身内[친척]이 제공자가 되는 생체장기이식, 특히 생체간이식은 일본에서 구미국가들보다 훨씬 많이 실시되고 있습니다. 게다가 인구 비율로 보면, 생체간이식은 일본보다도 한국에서 많이 실시되고 있습니다. 일본이나 한국에서는 생체간이식에 대한 저항감이 약하지만, 히포크라테스에게서 유래한 해를 끼치지 말라(non nocere)”를 의료윤리의 기반으로 삼고 있는 구미에서는, 아주 건강한 사람의 신체에 메스를 집어넣고, 게다가 간의 일부를 잘라내는 것에 의사들이 강한 저항감을 갖고 있습니다. 장기기증자에 대해서는 해를 입힌다는 것 이외의 것이 없으니까. 일본에서는 가족이라는 경계의 내부에서 장기가 이동하는 생체간이식에 대해 저항감이 약하고, 가족이라는 경계를 넘어서 장기가 이동하는 뇌사상태의 사람으로부터의 장기이식에 대해서는 거꾸로 강하다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던 것입니다만, 나의 이 가설은, 2009년의 장기이식법개정 때에 도입된 친족 우선 제공으로 부분적으로 뒷받침됐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규정이 있는 것은, 현재의 일본과 일본의 것과는 다르지만 한국 정도입니다.

  푸코의 텍스트에 적혀 있는 우아한 철학적 논의는 아니지만, 이런 것도 생명권력이나 생명정치의 한 측면으로서, 적어도 사회학적으로는 생각하면 좋다고, 아니 생각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다테이와 신야(立岩真也) 씨가 그동안 주도해 왔던 생존학이나, 다테이와 씨나 제가 거의 10년 정도 관계해온 장애학(disability Studies)”을 언급하고 싶습니다. 장애학에서는 “disability”라는 말을 가능성 박탈이라는 의미로 사용합니다. , 장애를 가진 사람이 그 물리적신체적 상태를 이유로 다양한 가능성을 빼앗기고 있는 사회의 구조나 짜임새를 문제 삼으면서, 장애학은 그 개혁을 요구합니다. 푸코가 말하는 죽음 속으로의 폐기라는 것은 이 가능성 박탈의 극한 형태라고 말해도 좋다. 그러나 이런 가능성 박탈의 구조를 바꿔나가는 것은 삶의 가능성을 증대시키고 증식시킨다는 것이기도 하며, 그래서 생명권력의 한복판에 있다는 것이기도 합니다. “권력이 있는 곳에 저항이 있다”, “저항은 권력에 대해 외부에 위치하는 것이 결코 아니다라고 푸코는 말했습니다만(지식의 의지), 그것은 장애학에 대해서도 말할 수 있습니다. 복지국가나 제가 말한 바의 사회적인 것은 확실히 생명권력의 산물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것들을 안이하게 파괴할 수는 없으며, 해서는 안 됩니다.

   이와 관련시켜 더 말하면, 푸코가 강의 생명정치의 탄생에서 다룬 ()자유주의는 생명권력이나 생명정치와 어떤 관계에 있는가? 왜 푸코는 생명정치를 자유주의라는 맥락에서 말하려고 했는가? 자유주의나 신자유주의는 생명권력의 한복판에서 저항이라는 주름을 다양하게 산출해내는 것인가? 아니면 저항을 빼뜨리고 생명권력이나 생명정치를 더욱 매끈하게 확장하고 비대화시켜가는 것인가? 푸코가 정말로 무엇을 생각했는가, 내게는 아직 잘 이해할 수 없습니다.

 

인류학의 최전선

이치노카와 : 인류학에서 생명권력론의 최전선이라고 하면, 어떤 것이 되나요?

카스가 : 하나는 모든 것에 행위자(agency)를 배분해간다는 사고방식입니다. 이것은 라투르에게도 통하며, 비베이로스 데 카스트로도 스트라썬도 그렇습니다만, 들뢰즈에 겹쳐지는 논의라고 생각합니다. 스트라썬은 영국 경험주의에서 출발해, 동일성이라는 것이 성립되지 않은 곳에서부터 논의를 시작한다. 프랑스의 사상에서는 전혀 언급되지 않는다. 그녀는 우선 경험주의자로부터의 반론에 대해 자신 나름대로 방어벽을 치면서, 안쪽으로 생성하는 간극에 주목하고 있습니다. 자신이 보고 있는 눈으로부터의 간극이, 자신이 알려고 하는 대상과 반향하며, “lateral reflection”(수평적 반향)을 초래하며 타자로 연결되어 간다. 이것은 매우 들뢰즈적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관점에서 생명정치생명권력을 생각해보면, 이치노카와 씨가 말한 게놈의 사적 소유의 얘기에 있었던 것처럼, 사람과 물건을 나눠서 소유자로서의 주체를 만들어낸다고 하는 방식이 얼마나 특수한지를 잘 알게 됩니다. 증여론이 좋은 예인데요, 인격이라는 것은 물건에 나타나며, 얼마든지 분할되며, 멜라네시아에서는 누군가가 갖고 있는 것을 모두 먹으면 인격이 사라진다. 그런 인간의 존재방식에 주목하여 분석의 수법을 발전시키는 것은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만, 현재까지의 과학기술론의 일부를 빼면 그다지 하고 있지 않습니다.

   둘째, 아나키스트 인류학을 위한 단장(アナーキスト人類学のための断章)(2004)을 쓴 데이비드 그레이버(1961~)처럼, 증여론이 점점 짓눌러지고, 근대에 대한 전근대적인 것을 이항대립적으로 나오게 되는 논의가 있습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푸코가 감시와 처벌에서 제시한 전근대적인 것이 여러 곳에서 보입니다. 예를 들어 피지에서는 선교사가 들어왔을 때 부활에 대해 얘기하는데요, 피지인들에게는 부활이라는 관념이 없다는 것을 압니다. 아까 얘기가 나온 아폴로시 나와이도 그렇습니다만, 불사성이랄까, 아무리 저주받아도 죽지 않는다는 것을 강조한다. 그러면 죽음이라는 개념이 없느냐 하면, 그것은 있으며, 그러나 여기저기에 떨어져 있는 것이라고 생각되고 있다. 그것은 생기가 사라졌다고 함으로써, 병을 포함해, 쓸 수 있는 것이 못쓰게 되는 사태를 똑같이 생기가 사라졌다고 말한다. 그런 생명의 시각을 감안하면, 생명권력의 외부에는 실로 다양한 것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셋째, 비베이로스 데 카스트로의 논의가 있습니다. 이것은 관점이라는 것에 주목하는 것으로, 재규어와 인간이 다른 것은, 관점이 다르기 때문이 아니라 신체가 다르기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발상입니다. 그리하여 유럽적 보편주의나 일원적 자연주의에 대해, 다문화주의를 내세우는 것이 아니라 다자연주의를 제기하고 있습니다.

이치노카와 : 다문화주의가 하나의 자연, 많은 문화라는 문제 기제라고 한다면, 다자연주의는 하나의 문화, 많은 자연이라는 말인가요?

카스가 : 문화라기보다는 인간이네요. 모든 인간. 관점은 모두 마찬가지이고, 인간도 재규어도 마찬가지라고 말한다.

이치노카와 : 다만, 그것도 하나의 문화 아닌가라고 말할 수 있다는 기분이 듭니다만.

카스가 : 그런 반론은 시종일관 당하고 있습니다.

이치노카와 : 아까 카스가 씨는 다자연주의를 인식론으로서가 아니라 존재론으로서 갖고 온 곳에 비베이로스 데 카스트로의 중요성이 있다고 말씀하셨는데, 인식론이 아니라 존재론으로서, 라는 것은 단순한 문화로 이야기를 회수하지 않는다는 대목이 중요한 거네요.

카스가 : 거기서 큰 것은 역시 사이언스입니다. 사이언스의 힘은 리얼리티가 대단하다. 실제로, 생명과학은 하드 사이언스화하고 있으며, 그 힘에는 대단한 것이 있습니다. 그런데 푸코에 기대를 걸고 있는 인문계 사람은 상대주의적인 이해를 하기 쉽죠?

히가키 : 생명에 대해서요.

카스가 : 인문계 사람이 생명이라고 말할 경우, 19세기에 말하는 것과 지금 말하는 것에는 의미가 완전히 다른데, 자연과학계 사람들은 동일한 의미에서 계속 사용하고 있다. 그것을 인문계 사람이 어떻게 읽는가를 생각한다는 것이 일어나는 것인데요, 최종적으로는 사이언스의 힘이 이긴다.

히가키 : 젠더론 등에서 구축주의가 너무 강한 것 아닌가요? 그래도 소박하게 생각하면, 퀴어적인 것은 자연이 산출하고 있는 거죠? 그것을 남녀로 나눠서 고정화하는 것이 문화이기 때문에, 자연이라는 것은 형편없는 것으로 정해져 있다. 그런데 자연은 일의적으로 정하고 있지만, 문화는 다양한 독해를 한다는 예전의 사회학적 말투가 있었잖아요? 니콜라스 로스도 쓰고 있는데요, 인종 문제도 마찬가지죠. 어떤 인종인지는 문화적으로 결정되는 것이며 자연본질주의는 안 된다고 말합니다만, 자연을 유전자 수준에서 보면, 인종은 뒤범벅되어 있게 마련입니다. 그렇게 하면 인종문제에 대한 관점도 바뀌는 것을 기대할 수 있다. 그것이 다자연주의의 한 가지 의미라고 생각합니다.

이치노카와 : 지금 얘기에 촉발되어 말하자면, 사회학적 사고의 대명사 같은 구축주의로는 전혀 불충분하다고 제 자신은 생각합니다. 구축주의가 말하는 것은 옳지만, 지나치게 옳아서 무의미한 곳이 있다. 특히 실천적으로는.

카스가 : 처음부터 답이 나오고 말았다.

이치노카와 : “문화는 자의적으로 구축된다고 말하지만, 그 자의적인 문화를 막상 바꾸기 위해서는, 카스가 씨가 말씀하신 사이언스에 의해 보편적인 것, 불변적인 것을 열고, 들이대지 않으면 안 되는 것도 있습니다. 그 일례로, 남성동성애를 형사처벌의 대상으로 한 독일제국형법(1871)175조를 둘러싼 투쟁을 들 수 있습니다. 175조의 철폐를 목표로 한 게이 해방의 주도자의 한 사람은, 자신도 게이였던 성과학자 마그누스 히르쉬펠트(Magnus Hirschfeld, 1868-1935), 그들은 과학적-인도적 위원회(Wissenschaftlich-humanitäres Komitee)”라는 조직을 1897년에 꾸리고, 175조의 철폐운동을 전개했다. 여기에는 실은 벤야민을 얘기한 대목에서 언급한 쿠르트 힐러도 가담하고 있습니다. 힐러는 조금 다른 이유로 이 운동에 가담했습니다만, 히르쉬펠트[허쉬펠드]의 입론은 이러했습니다. 동성애자는 옛날에도 지금에도 일정한 비율로 반드시 생긴다. 그것은 자연의 섭리이며, 동성애에는 선천적인 기초가 있다. 자연(퓌시스)이 산출하는 그런 존재를 법률(노모스)에 의해 부정하고 처벌하고 박해하는 것이 과연 인도적인 것인가라고. 베를린에 있을 때, 히르쉬펠트[허쉬펠드]와 그의 성과학연구소의 기념비를 독일인 지인이 알려줘서 보러 갔는데요, 거기에는 처음에 “per scientiam ad justitiam”(과학에 의해 정의로)라는 히르쉬펠트[허쉬펠드]의 신조가 라틴어로 새겨져 있었다.

   문화를 바꾸기 위해 히르쉬펠트[허쉬펠드] 등은 자연, 그리고 과학으로 향해야 했다. 175조가 자연에 대치되는 문화, 존재에 대치되는 당위, 즉 인간의 구축물인 것은, 이 조문의 철폐를 완강하게 인정하려 들지 않았던 사람들에게는 당연한 얘기입니다. 그런 것을 지적한 곳에서 아무것도 바뀌지 않는다. 문화라는 것은 마음먹기에 따라 바꿀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실제로 바꾸기 위해 히르쉬펠트[허쉬펠드] 등은 자연에 의거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푸코를 인용하면서 과거의 성과학은 본질주의적이기 때문에 천박하고, 구축주의에 서 있는 우리는 깨어 있는 사람들이다라는 얘기가 자주 이뤄집니다. 성과학을 무조건 긍정할 생각은 내게도 없지만, 적어도 성과학에 관한 구축주의자의 얘기에 대해서는 그래?”, “정말로 그럴까?”, “천박한 것은 당신들 아닐까?”라는 생각을 금치 못하겠다. 자연의 논리에 의해 문화가 고쳐 쓰여진[변조된] 후에야, 구축주의는 그러니까 문화는 가변적이다라고 말할지도 모르지만, 구축주의 그 자체는 문화를 실제로 바꾸는 힘을 갖고 있지 않다. 구축주의가 말하는 바는 옳지만, 그것은 추수[뒤쫓기]의 논리일 뿐이다.

   아까의 장애학도 구축주의적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중요한 것은 거기에서도 자연과 신체입니다. 예를 들어 눈이 보이지 않는다는 자연적 신체를 기반으로 삼아, 사회와 문화를 어떻게 바꿀 것인가, 만들어나갈 것인가가 문제이며, 장애라는 이미지가 사회적으로 구축된다는 얘기가 아니냐고 나는 생각합니다.

히가키 : 눈이 보이지 않는 사람은 청취 능력이 3배에서 4배라는 얘기가 있잖아요.

이치노카와 : 사람마다 다르다고 생각합니다만.

히가키 : 뇌과학이 진전되고 그런 것이 밝혀지게 되면, 장애학에서의 해방으로도 연결된다. 

이치노카와 : 확실히 그런 부분은 있다. 인지뇌과학의 사카이 구니요시(酒井邦嘉) 씨가 씨름하고 있는 수화의 뇌연구도(언어의 뇌과학 : 뇌는 어떻게 말을 산출하는가(言語脳科学──はどのようにことばをみだすか)(中公新書, 2002), 귀머거리 문화에서는 환영하는 사람이 많으며, 그것이 조금씩 밝히고 있는 수화의 뇌에서의 처리는 기본적으로 음성언어와 다를 바 없다라는 지식은, 구화주의口話主義 속에서 항상 덜떨어진 것으로 간주된 수화를 다른 것과 대비해 아무런 손색도 없는 언어로서 재위치시키는 하나의 근거를 주고 있다.

酒井邦嘉에 대한 이미지 검색결과言語の脳科学에 대한 이미지 검색결과

   과거의 일본의 장애인운동은 기술에 대해 강하게 염려한 적이 있으며, 전동 휠체어도 비장애인이 간호의 손길을 떼기 위한 것이라며 비판했다. 그 비판에는 지금도 귀를 기울여야 할 것이 있다고 생각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기술에 의해 새로운 신체와 문화가 열린다는 모멘트를 부정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올해[2012] 런던 올림픽의 광고는 휠체어나 의족으로 경기하는 선수들의 모습을 생생하게 보여줬는데, 장애인의 신체가 비장애인에 가까워지고 있다기보다는, 휠체어나 의족에 의해 새로운 다른 신체의 가능성이 열리고 있는 것처럼 내게는 느껴졌습니다. 문자가 전자 정보화됨으로써 시각 장애인이 얻거나 발신하거나 하는 정보량도 현격하게 높아졌습니다. 자연이나 과학, 기술에 의거함으로써 문화가 바뀌거나 새롭게 만들어지기도 한다는 것은, 다자연주의와의 관련에서 나 자신, 잊지 않고 싶습니다.

카스가 : 제 세미나에는 발달장애 학생이 있는데요, 다양한 능력을 계산하면, 보통은 복수의 능력이 평균적으로 되고 있는데, 그 학생의 경우는 분명한 편향[쏠림]이 있다. 그것이 장애라고 불리고 있지만, 이것은 재능 아닌가 싶네요.

이치노카와 : 확실히 그렇네요. 다만 그 재능도 측정에 의해 가시화된다는 부분이 있겠네요. 그런 가시화도 사이언스의 힘이라고 생각합니다. 좋은 것만 있는 것은 결코 아니겠지만


(제2부 끝)

Posted by 상겔스 상겔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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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무공화국의 종언


우리는 언제부터 노예가 됐나

 

 

債務共和国の終焉 

 

 

이치다 요시히코오우지 겐타,

고이즈미 요시유키나가하라 유타카


2013년 9월 30일 초판발행



목차

1경제를 둘러싼 현재

1. 심리 전쟁이 된 경제

2. 경제적인 것의 <신체>

3. 금융-채무혁명

 

2. 세계공화국

1. 지속을 요구하는 공화국

2. 문화 좌파에서 공공성 좌파로

3. 유럽 공화국의 출현

4. 민주주의의 병과 공화주의

5. ‘새로운 인터내셔널이라는 유령

 

3렌트 자본주의

1. 렌트에 의한 생산의 침식

2. 렌트/스톡 원리론

(1) <()>, 렌트스톡

(2) 화폐순환

(3) 이윤의 재정의

3. 렌트에 의한 채무의 확대혹은 투자의 행방

4. 희소성을 둘러싼 역전과 파산관리의 소비에트

 

후기 이치다 요시히코

 

본문 속의 외국어 문헌 중 일본어 번역본이 있는 문헌에 관해서는 번역서의 쪽수를 주에 붙였으나 번역문은 적절하게 변경했다.


2. 세계공화국

3. 유럽 공화국의 출현


물론 하버마스는 이 공화국의 위기를 알고 있다. 그리스 위기 때에, 그가 201111월에 보수계 신문에 발표한 에세이의 제목은 민주주의의 존엄을 구하자!”였다. 유럽연합(EU)이 합의한 그리스 지원책을 받아들일지 여부의 국민투표 계획이 독일과 프랑스 총리의 공갈에 의해 철회되고, 파판드레우 총리가 퇴진으로 내몰린 사건을, 하버마스는 게재된 신문의 보수적 사주와 함께 민주주의의 투매(sacrifice sale)”로 간주한다. 지원 방안은 페스트와 콜레라 중 어느 쪽을 선택할 것인가라는 견딜 수 없는 선택지였으나, 바로 그렇기에 그리스인은 스스로 선택하는 것을 할 수밖에 없었다고 그는 말한다. 바로 그것이 민주주의의 존엄이라고 말해야 할 것이라면서. “그리스 국민은, 최소한 사후적으로라도, 개헌과 똑같은 주권의 상실을 허용할지 말지에 대해 투표해야 하지 않았을까? 이미 EU, IMF, 그리고 유럽중앙은행으로 이루어진 트로이카의 지시를 따름으로써, 아일랜드에서도, 포르투갈에서도 마찬가지로, 아무튼 이 주권 상실이 일어나고 있었으니까.” 이것을 쓴 시점의 하버마스에게는 알아서 좋을 것은 없었으나, 2012년의 6, 아일랜드는 국민투표를 행했다. 페스트냐 콜레라냐(재정긴축이냐 EU이탈이냐)를 선택해야 했다(전자를 선택했다). 아일랜드는 그리스와는 달리 민주주의의 존엄을 지킨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하버마스도 확인하고 있듯이, 국민투표 이전에 진작에 이 주권 상실이 일어났던 것이다. 이미 주권은 상실되었기 때문에, 투표의 실질적 의미는 주권의 상실을 허용할지 여부가 아니었다. 바로 하버마스가 말하듯이 사후적으로 주권 상실을 아일랜드의 주권자가 인증한 것일 뿐이다. “페스트냐 콜레라냐의 국민투표는 민주주의의 존엄의 방법을 둘러싼 선택이었던 셈이다. 민주주의자 하버마스가 민주주의에 자신의 의지를 갖고 죽을 것을 요구하고 있다. 물론 그는 죽는 것만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다. “유럽의 정치가 신뢰를 얻으려면, 단계화된 통합을 향한 신빙성 있는 제도 설계에 의한 것뿐이다.” , 유럽 헌법의 창설이다. “(‘민주주의 유럽) 프로젝트의 필요성과 효용에 대한, 널리 공공의 장소에서의 논쟁이 이미 시작되고 있어야 한다.” 국민국가 단위의 민주주의에는 스스로 존엄사를 선택하게 하고, EU라는 규모에서 똑같은 민주주의를 재생시키는, 그것이 하버마스에게서의 사실상의 정치노선에 다름 아니다. 마키아벨리가 피렌체부터 이탈리아 전역을 조망하면서 그것을 꿈꿨듯이, 한나 아렌트가 미국 건국 혁명에서 그것을 찾아냈듯이, 하버마스도 자유의 창설 Constitutio Libertatis”을 유럽에 호소하려고 하고 있는 듯이 보인다. “유럽공화국, 사회민주주의의 차기 노선인 것처럼. 그러나 위기의 정체는, “진즉에 주권 상실이 일어나고 있다는 것 아닐까? “페스트냐 콜레라냐말고는 선택지가 없다는 그것이, “민주주의의 존엄은 이미 상실되고 있다고 증언하고 있지 않은가? 바꿔 말한다면, “유럽공화국세계공화국과 마찬가지로, 이미 실재하고 있다(각 국민의 민주적 주권을 죽이고 있다)고 메르켈과 사르코지와 파판드레우가 연기한 그리스 비극은 알려주지 않았던가.

 

오늘날 중대한 갈등은 유로권 국가들과 은행 로비 사이의, 외부에는 그다지 알려지지 않은 비밀의 이면협상의 장소로 이행하고 있다. 그것을 민주주의의 빛에 비춰진 아레나(arena)에로, 즉 피해자가 논의의 당사자로서 결정에 참가할 수 있는 장소에 다시 한 번 되돌아가게 했던 것, 설령 모두가 공포에 떨던 순간일 뿐이든, 되돌아가게 했던 것, 이 점이야말로 파판드레우 총리의 치적이다.

 

중대한 갈등을 억누르고 보이지 않게 하는 것이 공화국의 본성이었기 때문에, 그것은 유럽에서 이미 실재하고 있다. 그리스 위기 때에는, “민주주의의 빛에 비춰진 아레나에서 고전적으로 공화주의적인 정치가 거행[집행]된 것이다. “파판드레우의 방향전환, 즉 비극 제3막의 전환이 있으며, 이 비극의 진정한 냉소적인 의미가 드러났다.” 하버마스는 그 냉소적인 의미시장(market)한테는 민주주의의 정도가 적을수록 사정이 좋다고 해석한다. 그러나 공화주의와 민주주의의 본성상의 차이가 또 다시 노정됐다고 할 수도 있다. 실제로 유럽 헌법이 창설됐더라도, 그리스 국민에게 해결책이 찾아오지는 않을 것이다. 아일랜드에서 실시된 국민투표는 이렇게 시사하고 있다. 한순간의 카타르시스와 맞바꿔서, 비극은 잊히고 공화국이 지속하는 것이다. 이미 죽은 자의 사후적존엄사란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비극이라기보다는 부조리극일 것이다. 하버마스보다 훨씬 더 자각적인 공화주의자는 이미 수년 전에 이렇게 말하지 않았던가. “프랑스의 좌익은 유럽 통합을 하나의 대체 신화로 했다(레지스 드브레). 그러나 드브레도 몰랐던 것은, 좌익이 그것을 신화라고 깨닫고, 하버마스가 미테랑에 이어서 그것을 다시 한 번 신화로서 활성화하려고 할 때, 공화국은 이미 비밀의 이면협상의 장소라는 모체 내에서 성장을 이룩해왔다는 것이다. 신화라고 생각했던 공화국이 천천히 무대에 등장하여 민주주의의 죽음을 드라마로 만든다. 이 드라마에 의해 공화국이 민주주의의-죽음의-아래에서 탄생한다. 이 공화국에는 헌법이 아직 없나? 그러나 드브레에 따르면 법치는 공화주의의 본질을 구성하지 않는다. “전통적으로 사회적인 조정도 행했던 공화국에서는 공무원이 매우 중요해진 반면, 규칙이 지역적이고, 사적인 상인과 프로테스탄트로 이루어진 민주주의 국가에서는 법률가의 역할이 매우 크다. 공화국을 만드는 것은 우선 무엇보다도 공화주의자이며, 그들의 의지이다. 민주주의는 사람들이 상대적으로 무관심해도, 형식주의적으로, 즉 법적 문서의 차가운 객관성을 따라서 기능한다.” 이 정의를 따라 말하면, 막대한 EU 관료군이 존재하고, 민주주의에 정지를 요구할 정도로 공통 통화를 존속시키려고 하는 의지를 가진 정치가도 존재하는 유럽은 이미 충분히 공화국이다.

전해진 바에 따르면, 하버마스의 에세이를 게재한 신문사의 사주이자 독일 민족주의의 대사제로 꼽히는 인물은 금융위기를 지켜보면서 어쩐지 좌익이 옳은 것 같다고 점점 생각하게 됐다고 이 신문에 썼다고 한다. 리먼 쇼크 이후에는 뉴스위크지가 그 표지에서 우리는 오늘날 모두 사회주의자이다라고 선언했다. 재정긴축(=우익)이냐, 아니면 정부채무에 의한 복지국가의 견지(=좌익)냐라는 분기가 문제는 아닐 것이다. 채무에 관해서는 빌린 사람이 갚으면 된다는 불개입의 입장을 고수할 수밖에 없는 시장주의를 우익으로, 재분배 기능을 가진 국가에 채무 부담에 대해서도 재분배시키려고 하는 입장을 좌익혹은 사회주의로 보고 있는 것이다. 하버마스가 자유주의의 관할지역이라고 하고 드브레가 민주주의의 지배 지역이라고 한 사적 개인의 세계가 오늘날에는 우익의 영역이며, ‘공공은 민주주의적(하버마스)이든 공화주의적(드브레)이든, ‘() 좌익이 점령했다. 채무가 중대 문제인 한에서, ‘우익나설 차례는 없으며, “모든 관여자를 공공공간 속에 참여시키려고 하는 좌익만이 이 일을 맡을 수 있다. 그리고 채무가 생산을 상회하며, 금융적 보험, 보험적 금융이 그 차액을 지탱하는 오늘날, 채무는 다른 누구보다도 금융기관의 중대사이며(파생상품에 의해 보험을 걸고 있는 것은 그들이다), ‘좌익만이 그들을 구할 수 있다. ‘상정원본(notional amount, 이론상의 금액)’이 아니라 현실의 원본을 제공하고 있는 사람을 관여자로서 공공공간 속에 불러들이고, 그들에게 최종적인 부담을 합의하게 함으로써였다. 국민투표를 거치든 거치지 않든 (그것은 토의 절차의 How에 불과하다), 토의의 의제는 미리 정해져 있으며, 나머지는 합의하는 것뿐이다. 그리고 합의 내용의 절반은 이미 결정됐다. 새로운 공공공간 속에서 관여자로서 자격을 부여받은 자가 2급의 신()시민으로서 1급의 구()시민의 부담의 일부를 대신 떠맡는 것이다. 그러나 얼마나? 남겨진 의결 내용은 그것뿐이다. 그리스 위기에서, 아일랜드 국민투표에 있어서, 유럽 공화국이 정치의 무대에 올린 것은 비극의 오래 계속될 뿐인 이 후반부분일 것이다. 4막의 시작이다. 생각해야 하겠지만, 그리스 비극에 제4막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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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래할 생명권력론을 위해


사상, 2013년 2

 

 

목차

사상의 말

히가키 타츠야(槍垣立哉)

(좌담회) 도래할 생명권력론을 위하여

히가키 타츠야(槍垣立哉)・카스가 나오키(春日直樹)이치노카와 야스타카(市野川容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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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가키 타츠야(槍垣立哉)                           스가 나오키(春日直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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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치노카와 야스타카(市野川容孝)


들어가며

히가키 타츠야(檜垣立哉) : 오늘은 도래할 생명권력론을 위하여라는 제목의 특집의 일환으로 기획된 좌담회를 위해 인류학의 카스가 나오키(春日直樹)씨와 사회학의 이치노카와 야스타카(市野川容孝)씨를 초빙했습니다. 이치노카와 씨는 대학의 동급생으로 둘 다 아는 친구도 많이 있지만 장시간 얘기하는 것은 처음입니다. 카스가 씨는 오사카 대학에서 10년 정도 동료였습니다만, 강좌가 달라서 [얘기를 나눌 기회가 없었는데,] 이런 장에서 얘기를 나누게 되어 기쁩니다.

   오늘은 인류학, 사회학, 그리고 제가 전공한 철학이라는 세 개의 상이한 영역에 속하는 세 명이 한 곳에 모였습니다. ‘생명권력이나 생명정치학이라는 개념을 앞에 두었을 때, 상이한 분과학문discipline에서 견해 차이가 생기는 것은 당연할 테지만, 한편으로 겹치는 부분도 있지 않을까요? 원래 복수의 분과학문에서 동시에 발견할 수 있는 개념 등은 그렇게 많지 않습니다. 이 좌담회에서는 세 사람이 각각의 입장에서 생명권력이나 생명정치라는 개념을 검토하고, 그 차이와 공통점[중복]을 부각시키는 것과 더불어, 이러한 개념의 가능성을 모색하고 싶습니다.

 

I. ‘생명권력을 어떻게 파악할 수 있는가?

생명권력개념의 연원

히가키 : 다들 알고 계시다시피, ‘생명권력(bio-politique)’이나 생명정치(bio-politique)’는 미셸 푸코(1926~84)1970년대에 제시한 개념입니다. 다만, 푸코가 이 개념을 사용한 것은 아주 짧은 시기에 불과합니다. 저작을 살펴보면, ‘해부정치[](anatomo-politique)’라는 말이 적혀 있는 것은 감시와 처벌(1975)성의 역사 I(1976)의 일부이며, ‘생명정치에 관해서는 성의 역사의 마지막에서 인구의 생명정치학을 건드릴 뿐입니다. 콜레주드프랑스의 강의에는 생명정치의 탄생(1978~1979)이라는 제목이 붙어 있는 것도 있고, 가장 관련이 깊은 것으로는 안전, 영토, 인구(1977~1978)가 있지만, 솔직히 말해서 그렇게 특별하게 얘기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 때문에 우생학이나 인종주의도 성의 역사에 나오지만, 이것도 그런 화제를 건드린다는 정도이며, 명확하게 논의되는 것은 아닙니다. , 푸코는 이 개념을 거의 전개하지 않았으며, 도대체 푸코가 이 개념으로 무엇을 말하려 했는가 그 자체가 수수께끼로 가득 차 있는 셈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때로는 철학적 개념으로 보입니다만, 그런 사실과는 무관하게, 푸코 사후에야 여러 분야에서 생명권력이나 생명정치라는 말이 사용되기 시작했습니다. 그것은 근거가 없는 게 아니라, 푸코가 1984년에 사망한 후, 뇌사나 게놈 문제, 분자생물학의 문제가 나타나고, ‘생명이 아주 거대한 지식의 대상이 되며, 정치적·윤리적 대상이 되었다는 현실이 있습니다. 푸코 자신은 생각하지 못했던 것이 생명권력이나 생명정치와 관련되고, 여러 가지 형태로 퍼졌던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것은 아주 현실적인actual 개념이라고 생각합니다.

 

생명권력론의 세 시기/위상

히가키 : 이처럼 여러 분야에서 생명권력이나 생명정치라는 개념이 사용되었던 셈입니다만, 그 변천을 다시 돌이켜보면, 거기에는 세 가지 시기 또는 위상이 있는 것 같습니다.

   우선 첫 번째 시기 또는 첫 번째 위상으로, 사회학적 변용을 거론할 수 있습니다. 성의 역사1권도 그랬습니다만, 여기서는 사회구축주의적인 독해방식이 이뤄지고, 앞에서 얘기했듯이 푸코가 아주 조금밖에 건들지 않았던 우생학이나 인종주의 같은 생명적인 것을 다루고 문제로 삼았습니다. 일본에서 말하자면, 이치노카와 씨나 바이오폴리틱스 : 인체를 관리한다는 것은 어떤 것인가(中公新書, 2006)를 썼던 요네모토 쇼우헤이(米本昌平) 씨가 대표로, 생명윤리를 포함한 생명을 둘러싼 사회적 이론으로서 논의되었던 시기가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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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어서 두 번째 시기 혹은 두 번째 위상인데, 원리적으로 철학으로서 생각하려는 움직임이 있었습니다. 여기에는 저명인사의 등장이 큰 역할을 했다고 생각합니다. 나중에 화제로 삼는 조르조 아감벤(1942~)이나 안토니오 네그리(1933~), 주디스 버틀러(1956~) 같은 사람들입니다. 아감벤은 벌거벗은 생명을 둘러싼 논의로 지적인 관심을 자극했으며, 네그리가 마이클 하트(1960~)와 함께 제국(2000)을 썼던 때에는 넘어서야 할 대상으로 푸코가 있었습니다. 버틀러 역시 푸코를 상당히 의식합니다. 이들의 특징을 강하게 한 마디로 한다면, 푸코를 따르면서 푸코에 반한다는 것입니다. 아감벤이라면 법에 구애됩니다. 네그리라면 국가에 구애됩니다. 버틀러라면 정신분석에 구애됩니다. ‘이나 정신분석은 중기 이후의 푸코가 버렸다고 생각했던 개념에 다름 아닙니다. 아감벤은 호모 사케르(1995)의 서두에서 한나 아렌트(1906~75)와 푸코가 유사한 것을 생각했으나 서로 말하지 않았다는 것에서 교차하고 있다는 식으로 썼습니다만, 이렇게 말하는 것이 프랑스나 독일의 철학자라는 일종의 영토주의가 있기 때문이라고는 할 수 없죠. 아감벤과 네그리는 이탈리아인이며, 버틀러는 미국에서 활약하고 있습니다. , 프랑스 철학이나 독일 철학과는 무관한 곳에서 출발했다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왜 1990년대의 일본에서는 그런 사상이 생겨나지 않았느냐며 윗세대한테 불평을 터뜨리고 싶네요(웃음).

   그런데 21세기가 되면 세 번째 시기 혹은 세 번째 위상을 인식할 수 있는데, 영역의 확산이 더욱 가속화됩니다. 이 조류에 관해서는 이 특집호에도 몇 개 소개될 예정입니다. 예를 들어 니콜라스 로즈(1947년 생)는 최근까지 런던정경대학(LSE)BIOS연구소의 소장을 역임하고, 현재는 런던대학 킹스칼리지에 신설된 의학·건강사회과학부의 학부장 지위에 있는 사람입니다만, 그는 저작 생명 그 자체의 정치학(2007)에서 현상태의 의학에서는 신체가 파트(part)로 분리되는 게 아니라, 유전자나 분자수준에서 파악된다는 것을 받아들이고, ‘뇌신경계적 자기분자적 신체같은 개념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또한 이것은 조금 뒤에 카스가 씨의 말씀을 듣고 싶은데요, 인류학에서도 아주 주목할 만한 흐름이 생기고 있습니다. 브뤼노 라투르(1947년 생)가 큰 중계점이 되어서, 브라질의 에두아르드 비베이로스 데 카스트로(1951년 생)나 프랑스의 젊은 세대에 속한 프레데릭 켁(1974년 생) 같은 사람들이 각광을 받고 있습니다. 그들은 생명정치라는 것에 상당히 마음을 쓰고 있고, 이로부터 새로운 인류학을 구상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오랫동안 다문화주의를 부르짖었던 인류학에 대해서 다자연주의를 부르짖습니다. 거기서는 인간과 자연의 관계가 근본적으로 재독해되며, 인류학이라는 분과학문이 존속할 수 있는 걸까라는 위험한 생각이 들 정도로 파고들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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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뤼노 라투르(Bruno Latour)                         비베이로스 데 카스트로(Viveiros de Castro)

카스가 : ‘인간의 용해라고 불리기 때문이죠.

히가키 : 인간이 없어진다는 얘기가 되는 셈인데, 이로부터 돌이켜보면, 네그리나 아감벤은 거대이론grand theorie이랄까, 빈틈없는 체계를 만들고자 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그 후 세대는 그렇지 않고 개별 분야에서 얘기가 점점 더 진행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새로운 조류 중에서 푸코의 독해방식이나 사용방식도 확산하고 있습니다. 이런 사태를 수습하려고 해봤자 의미가 없, “이것은 잘못된 독해방식이고, 이것이 올바른 독해방식이다라거나, “이것은 옛날 독해방식이고 이것이 새로운 독해방식이다라고 말해봤자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오히려 확산되는 궤적 속에서부터 무엇을 낚아채는 것이 유효한가를 논의할 수 있다면 좋다고 생각합니다.

 

세 개의 분과학문

히가키 : 이런 의미에서 여기에 사회학과 인류학과 철학에 속하는 세 사람이 모였다는 것은 중요하지 않을까 싶네요. 이치노카와(市野川) 씨는 최신작 사회학(社会学)(岩波書店, 2012)에서 오귀스트 콩트(1798-1857)에 관해 쓰셨는데요, 사회학의 선조는 일반적으로 에밀 뒤르켐(1858-1916)과 가브리엘 타르드(1843-1904)라고 일컬어집니다. 사회에 관해 논하는 일은 아리스토텔레스 이래 줄곧 이루어져 왔습니다만, 분과학문으로서의 사회학은 19세기의 프랑스에서 생겨난 비교적 새로운 학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치노카와 씨도 포함해서, 사회학은 현대사회를 다루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오늘의 제3부에서 다루는 근대의 문제만 해도, 근대가 있는가 없는가 따위는 철학의 얘기이며, 근대가 있든 없든 사회학은 눈앞의 문제로 향해야 한다고 당연한 듯 생각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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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음으로 인류학인데요, 카스가 씨는 인류학의 탄생을 19세기라고 부르고 있고, 푸코는 말과 사물(1966)에서 20세기적인, 더 새로운 것으로서 인류학(구조인류학)을 다루고 있습니다. 그러나 인류학이 보고 있는 인간은 사회학이 보고 있는 인간보다 훨씬 오래됐습니다. 신석기 시대에서 시작해, 근친상간금지나 식인풍습(카니발리즘)의 문제를 다루기 때문이죠. 다만 아까 거론한 에두아르드 비베이로스 데 카스트로나 켁을 비롯하여, 클로드 레비스트로스(1908~2009)신화론(1964-71)을 높이 평가하는 움직임이 두드러집니다. , 구조주의로는 파악할 수 없는 인간과 동물의 교착상태에 주목합니다. 그것이 오늘날의 우리의 삶과 관계하지 않았을 리가 없죠.

   그러면 철학은 어떤가? 철학자는 필드연구가 책밖에 없습니다. 구체적인 대상이 없는 것입니다. 무엇을 말하더라도, “그것은 공리공론이다라는 말을 들을 운명에 있습니다. 다만, 바로 그렇기에 철학은 시대에 침을 뱉고, 일부러 반시대적인 행동을 하고 사람들의 신경을 곤두서게 하는 것 사명이라고 생각합니다.

   푸코라는 인물은 어떤 분과학문에도 들어가지 않습니다. 본인에게 물었다면, 초기라면 자신은 과학인식론학자라고 말했겠지만, 후기가 되면 그렇게도 말할 수 없습니다. 역사학자는 저런 것은 역사학이 아니다라고 말하고, 사회학자는 저런 것은 사회학이 아니다라고 말하잖아요. 그렇다고 인류학자도 철학자도 아닙니다. , 푸코 자신은 설 자리가 없는 인물로, 그렇기에 세 개의 학문이 푸코의 어느 부분에서 교차하는가를 생각할 수도 있다고 봅니다.

 

철학은 권력이나 정치에 관해 말할 수 있는가?

히가키 : 지금까지 제가 도입부를 했으니까, 두 분께 자신과 생명권력론의 관계에 관해 말씀을 듣고 싶습니다. 먼저 이치노카와 씨부터 말씀해주시겠습니까?

이치노카와 : 우선 히가키 씨한테 트집을 잡자면(웃음), 시대구분이라는 말씀에는 찬성할 수 없습니다. 1, 2, 3기로 나눈다면, 1기가 끝난 후 제2기가 오고 이어서 제3기가 온다는 것처럼 들리네요.

히가키 : 그 말씀에는 저도 반대하지 않습니다. ‘시기라고 말한 것은 읽기 방식과 수용 방식의 시대별 특징을 나타내기 위해서인 것일 뿐이며, 1기나 제2기는 이제 끝났고 지금은 제3기이다 같은 식으로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치노카와 : 세 가지의 방향이나 방법이 있다는 것은 알고 있습니다. 푸코가 생명권력이라고 말했을 때, 잠재적으로는 이미 세 가지 방향이 열려 있었다고 말하는 편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사회학과 인류학과 철학이라는 세 개의 분과학문에 대해서입니다만, 사회학이 실제로 고찰의 대상으로 삼는 인간이나 사회는 고작 2백년 정도의 것입니다. 그런 근대사회나 현대사회를 고찰의 대상으로 삼으면서도, 사회학은 다른 영역에 손을 대면서 비대해졌습니다. 그것은 콩트를 생각해보면 금방 알 수 있습니다. 실제의 고찰대상은 한정된 것 같습니다만, 그러나 말하는 내용은 어떤 의미에서 상궤를 벗어나 있을 정도로 큽니다. 이렇게 도착적인 것이 사회학에는 있습니다. 그렇게 해서, 예를 들어 마르셀 모스(1872-1950) 등으로 이어지고 분야를 넓혀서 인류학에 접근하고, 이론의 부분에서도 웅장한 것을 만들어내고 철학에 접근했다고 생각합니다. 그 사회학이 왜 생명권력이나 생명정치에 관심을 냐 하면, 푸코는 단순한 생명론이나 생명철학을 제시한 것이 아니라 생명권력이라고 말하고 생명정치라고 말했으니, “권력이나 정치라고 얘기하면 사회학자는 거의 자동적으로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습니다.

   오히려 생명과 권력의 철학(権力哲学)(ちくま新書, 2006)을 쓰신 히가키 씨께 물어보고 싶은데요, 철학자가 권력이나 정치에 관심을 갖는다는 것은 제게는 어떤 의미에서는 의외입니다. 예를 들어 아까 이름이 나온 아렌트인데요, 그녀는 1964년에 독일의 그 사람을 안다(Zur Persons)라는 인터뷰 프로그램에 출연했습니다. 그 내용은 활자화되어 있습니다(Hannah Arendt, Ich will verstehen. Selbstauskünfte zu Leben und Werk, Piper, 1996, S.46ff). 지금은 인터넷에서 영상으로도 볼 수 있습니다. 프로그램의 첫머리에서 사회자가 그녀를 철학자라고 소개하는데요, 곧바로 아렌트는 철학을 공부한 것은 사실이지만, “나는 철학자가 아닙니다”, “제 작업은 정치이론(politische Theorie)입니다”, “나는 정치철학이라고 표현하지도 않습니다라고 이의를 제기하고, “나는 철학에 영원히 작별을 고했습니다라고도 말합니다. 아렌트에 따르면, 철학과 정치 사이에는 뿌리 깊은 긴장관계가 있습니다. 자연철학에 있어서, 철학자는 전체 인류의 이름으로 자연에 마주대하지만, 정치에 대해서는 결코 중립적으로 될 수 없다. 그래서 대다수의 철학자에게서는 모든 정치에 대한 혐오감이 보이지만, “나는 그런 혐오를 공유할 생각이 없습니다라고 아렌트는 말하고, “그것은 곧 철학에 의해 흐릿해지지 않는 눈으로 정치를 본다는 것입니다라고 말한다. 보통은 거꾸로, “정치에 의해 흐릿해지지 않는 눈으로 사물을 보라(철학하라)”고 하지만, 아렌트는 철학에 의해 흐릿해지지 않은 눈으로 정치를 본다고 말한다.

生と権力の哲学에 대한 이미지 검색결과

https://youtu.be/dsoImQfVsO4



   프로그램은 그 후, 아렌트의 반편생을 반추하는 형태로 진행되는데, 사회자의 물음에 답하면서 아렌트는, 자신이 철학에 영원히 작별을 고하고 정치에 눈을 뜬 것은 1933년이라고 말한다. ‘철학이라든가 정치철학이라고 말할 때 그녀가 염두에 둔 것은 마르티 하이데거(1889-1976)라든가 칼 슈미트(1888-1985)일 겁니다. 그런 맥락에서 아렌트는 철학()은 정치를 제대로 볼 수 없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아렌트의 이 발언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히가키 : 문제는 (pouvoir)’이라고 생각합니다. 프랑스 철학의 맥락에서는, 스피노자와의 관계가 큰데요, 철학에서 사물을 생각할 때에는, 자연과학에서 얘기되는 물리적인 힘, 생명력, 그리고 말에 의해 명령하는 힘인 정치권력은 구별되지 않았다. 이것들이 구별되고 거꾸로 포개지면 위화감을 느끼게 된 것은 근대에 들어와서부터죠. 그래서 일본어로 번역하면 다른 말로 보이지만, 푸코나 특히 질 들뢰즈(1925-95) 등은 물리적인 힘도 정치적인 힘도 의도적으로 뒤섞어서 사용하고 있고, 이것들이 떼어놓을 수 없는 문제로 제시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아렌트에 대해 말하면, 그 시절의 독일의 특수성이 현현한 사례라는 측면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생각하면, 아렌트가 그런 반응을 한 것도 이해할 수 있다. 하이데거의 나치 논쟁이 아직도 벌어지고 있고, 일본에서도 니시다 기타로(西田幾多郎) 우익이었는가라는 논쟁이 있습니다. 철학은 그런 문제를 어떻게 파악하는가? 아감벤은 푸코가 파시즘에 대해 거의 아무것도 말하지 않은 것은 무슨 일인가라고 말하지만, 오히려 그런 문제에서 벗어난 곳에서 보고 싶다는 생각이 푸코에게는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이치노카와 : 조금 정정하면, 아까 “‘권력정치라고 하면, 사회학자는 거의 자동적으로 관심을 갖지 않을 수 없다고 말했는데, 적지 않은 일본의 사회학자에게는 감시와 처벌이후의 푸코를 거론하는 것은 촌스럽다는 감각도 있고, 말과 사물이 최고봉에 자리잡고 있기도 하다. 그래서 권력이나 정치에 반응하는 나 같은 사회학자가 촌스러운 것이고, 일본에서는 오히려 어긋나버리고 있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히가키 : ‘촌스럽다, 꼴불견이다라는 감각을 잘 모르겠습니다만.

이치노카와 : 나도 모르겠지만, 아렌트가 철학에 대해 말한 것이, 사회학에도 어울릴지도 모릅니다. 정치와 마주대하는 것 자체가 가치자유를 좌우명으로 삼아온 사회학의 정체성을 흔드는 것으로, 그래서 철학자와 마찬가지로, 사회학자의 대다수도, 모든 정치에 대한 혐오가 있다고 말해도 좋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아렌트에 무게를 두고 말하면, “사회학에 의해 흐릿해진 눈으로 정치를 보는것도 필요할까요?

 

사회학과 생명권력론

이치노카와 : 제 개인에 대해 말하면, 푸코의 이름을 처음 가르쳐주신 것은 우치다 류조(内田隆三) 선생입니다. 그러나 생명권력이나 생명정치라는 문제에 대해 말하면, 요네모토 쇼우헤이 씨로부터 많은 것을 배웠습니다.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요네모토 씨는 2006년에 바이오폴리틱스(バイオポリティクス)라는 책을 냈는데요, 요네모토 씨 아래에서 1990년대 전반기에, 누데시마 지로(橳島次郎) (첨단 의료의 지배[규칙] : 인체이용은 어디까지 허용되는가(先端医療のルール ──人体利用はどこまでされるのか), 講談社現代新書, 2001)나 제가 씨름했던 것도, 푸코와는 다른 의미에서의 바이오폴리틱스였습니다. 요네모토 씨는 무엇이 옳은가라는 윤리논의가 아니라 무엇이 올바르다고 여겨지는가라는 정책결정의 과정이나 구조를 분석하는 것, “에틱스ethics”에 억지소리를 늘어놓는 것이 아니라, “폴리틱스를 보이도록 하는 것이 더 중요하며, 게다가 그런 폴리틱스를 그저 바라볼 뿐만 아니라, 바람직한 정책 제언까지도 할 수 없으면 안 된다고 말했다. 요네모토 씨의 그런 자세로부터 배운 것이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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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치다 류조(内田隆三)

 누데시마 지로(橳島次郎)


   게다가 요네모토 씨의 유전관리사회 : 나치와 근미래(遺伝管理社会──ナチスと近未来)(弘文堂, 1989)로부터는 역사라는 것을 배웠습니다. 요네모토 씨가 거기서 소묘한 역사를 더욱 자세하게 하려고 생각하고, 그것을 나는 의료의 역사사회학이라고 불렀는데요, 그 과정에서 푸코가 말하는 생명권력이란 구체적으로 어떤 사태를 가리키는가, 어떤 사건을 생명권력이라는 말로 이해해야 하는가를 생각했습니다. 우생학의 역사연구는 그 하나이며, 의료윤리라는 것이 어떻게 변했는가를 나치를 포함한 독일을 주된 대상으로 삼아 고찰했던 것도 그 일환입니다. 아울러 지금, 존엄사 법안을 국회에 상정하는 움직임이 있습니다만, 그 이외에도 뇌사나 장기이식을 어떻게 생각하는가? 그런 죽음의 의료화에 관련된 문제입니다. 내게 있어서 생명권력이나 생명정치라는 것은, 이론적으로 정교화되어야 할 것이라기보다는 역사적으로 하나하나 검증되어야 할 개념으로, 실제로 무엇이 일어났는가를 나는 생명권력이라는 말을 실마리 삼아 주로 역사적으로 봤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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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가키 : 이치노카와 씨는 신체/생명(身体/生命)(岩波書店, 2000)에서 크사비에 비샤(마리 프랑수아 사비에르 비샤, 1771-1802) 얘기를 하고 있네요. 제 쪽에서 보면, 그 편이 놀라운데, “왜 사회학자가 생명철학 얘기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콩트를 거론하는 것도 사회학에서는 예삿일인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철학에서 콩트는 어디까지나 실증주의 철학자입니다. 그런 점에서는, 생명론이나 생명철학과 정치철학은 그렇게 떨어져 있지 않다. 떨어져 있는 것은 20세기의 특수상황 속에서이고, 앞으로 그것을 다시 교차시키는 것도 가능한 것은 아닐까 생각합니다.

市野川容孝에 대한 이미지 검색결과

이치노카와 : 죽음의 의료화와 관련해 여러 가지 것을 읽어나가는 가운데, 코마츠 요시히코(小松美彦) 씨의 죽음은 공명한다 : 뇌사장기이식의 탐구로(共鳴する──脳死臓器移植みへ)(勤草書房, 1996) 코마츠 씨는 근작인 생명권력의 역사 : 뇌사존엄사인간의 존엄을 둘러싸고(生権力歴史──脳死尊厳死人間尊厳をめぐって)(靑土社, 2012)에서 아감벤도 감안하면서 푸코의 생명권력을 근원적으로 되묻고, 우리의 현재를 날카롭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를 예외로 하고, 의학적으로 죽음이 그동안 어떻게 정의되었는가를 조금 역사적으로 추적하는 연구가, 번역을 포함해 일본어로는 전무에 가깝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뇌사문제를 생각하는 데 있어서 가장 기본적인 것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말입니다. 그래서 분수를 몰라도 유분수입니다만, “누구도 하지 않는다면 나라도 하지라는 마음으로 했더니, 비샤의 텍스트가 부상했다. 내게는 생명론과 생명철학을 할 생각이 전혀 있으며, 내 나름대로 생명권력을 역사적으로 되묻는 가운데, 비샤의 텍스트에 맞닥뜨렸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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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가키 : 하지만 프랑스의 맥락에서 말해도, 푸코가 임상의학의 탄생(1963)에서 다뤘기 때문에 비샤를 읽었다는 것은 있겠죠?

이치노카와 : 그것도 물론 염두에 있었지만, 푸코 때문에 비샤를 읽은 것은 아닙니다. 의학사 속에서 비샤는 큰 존재이기에, 의학사의 틀로 공부하면 반드시 맞닥뜨리는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인류학과 생명권력론

히가키 : 이어서 인류학에 대해 여쭙고 싶습니다. 카스가 씨도 그런데요, 예를 들어 다나베 시게하루(田辺繁治) 씨는 타이의 HIV환자 커뮤니티를 연구하고 계시고, 인류학에서도 생명정치학적인 것이 부상하는 것처럼 느낍니다만, 어떻습니까?

카스가 : 폴 래비노우(1944~)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캘리포니아대학 버클리교에 있는 인류학자인데요, 그가 종종 푸코를 초대해 얘기를 나눴고, 1980년대의 미국에 푸코를 도입했습니다. 래비노우는 푸코의 초기와 후기를 나누지 않고 논의합니다. 그래서 80년대 후반에 다양한 성과가 나오는데요, 그 중에서도 가장 영향이 있었던 것은 프랑스의 자크 동즐로(1943~)사회적인 것의 발명(Jacques Donzelot, L’invention du social : essai sur le declin des passions politiques, Fayard, 1984)이예요. “사회적인 것이라는 문제가 제시된 곳에 네오콜로니얼리즘이나 포스트콜로니얼리즘의 흐름이 보태져, 식민지주의 연구에서도 푸코가 다뤄지게 됐습니다. 피지에서의 위생관념이라든가 알제리에서의 도시의 구축을 다룰 때 푸코가 원용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1990년대의 특히 후반이 되면, 세계 속에서 인간의 생명에 관련된 다양한 현상이 나타납니다. 당초는 산업화사회에서의 호스피스에서의 연명치료 같은 얘기였지만, 이로부터 버림받아 이름 없는 자가 있다든가, 인도의 농촌에서 장기매매가 이뤄진다든가, 콜롬비아에 유괴범 조직이 있다든가, 아르헨티나에서는 실험을 위해 항생제를 공짜로 배포한다든가, 이런 현상들이 점차 나타났습니다. 이런 현상은 기존의 인류학의 방법으로는 잘 다룰 수 없다. 국지적인 현상이지만, 거기에 국제투자기관이 들어가고, NGO가 들어가고, 다국적기업인 제약회사가 들어가기에, 문화시스템이나 정치시스템이나 경제시스템이라는 틀로는 파악되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네트워크적인 장치같은 개념이 도입됐다. 인류학자 중에는 큰 개념을 사용하고 싶어 하지 않은 사람이 많지만, 그래도 푸코는 자연스럽게 들어와서, 푸코의 개념을 원용해 생명권력을 얘기하는 글들이 늘어나고 있는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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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 래비노우(Paul Rabinow)

   인류학이 생명권력에 관련될 경우에는 두 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하나는 의료인류학의 대가인 아서 클라인만(Arthur Kleinman, 1941~)이 그러한데요, 위험에 노출된 신체나 인격이 왜 이렇게 태어나는가에 대해 생명불평등성(bioinequality)” 같은 표현을 사용함으로써 조망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그런 역경 속에서, 푸코가 말하는 주체로서의 자기를 어떻게 재구축할 수 있는가에 주목하고 있다. 이것들은 인류학에서 다루는 문제 아닐까 생각합니다.

Arthur Kleinman에 대한 이미지 검색결과

아서 클라인만(Arthur Kleinman)

   다만 이것은 사회학의 문제일 수도 있는데요, 푸코의 시대와 비교하면, 지금은 사회적인 것이 후퇴하고 있어서, 보이기 어려워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새로운 사회성의 구축에 초점을 맞춰서 생명권력에 대해 재논의하자는 흐름이 있는데요, 이것은 1990년대 후반 이후 게놈이나 생체조직공학에서의 분자기구 같은 것이 어떤 사회성을 만들어나가는가를 논하는 것이다. 래비노우나 앞에서 히가키 씨가 언급한 로즈 등에서 볼 수 있는 분자생명정치등의 논의이죠. 다만 많은 인류학자는 이런 대략적인 논의에는 비판적인 거리를 취하고 있습니다만.

히가키 : 피지에서 현지연구field work를 하신 카스가 씨 자신과 생명권력이나 생명정치의 관계에 대해서는 어떤가요?

카스가 : 오랫동안 피지의 마을에서 현지연구field work를 하다 보니까, 서로 친해져서 동료의식도 생겨났습니다. 하지만 역시 다른 사람들이에요. 제가 신세를 졌던 마을에서는 정신적 장애를 가진 사람도 지적 장애를 가진 사람도 모두 함께 살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정상화normalisation’인 것은 아닙니다. 그렇지만 재미있는 것이, 오늘날의 세계에 일어나고 있는 것을 그들과 함께 말할 수 있다는 감각입니다.

이치노카와 : 그래서 생명권력이나 생명정치라는 말이 부상한다는 이미지인가요?

카스가 : 그렇게 말할 수 있겠죠.

이치노카와 : 과연. 이것은 자기비판입니다만, 제 자신은 국민국가선진국이라는 이중적 편견bias 속에서만 생각했을 뿐입니다. 푸코도 그럴지도 모릅니다. 헌팅턴 병이라는 유전병이 있습니다. 지리적으로 주위로부터 격리된 베네수엘라의 한 어촌에서 이 병에 걸린 환자가 많이 발생한다는 것을 알고, 거기에 미국 등의 연구팀이 들어가서, 원인이 되는 유전자가 1990년대 초반에 특정되었습니다. 생명의 해명은 이처럼 실제로는 국경을 넘어서, 다양한 연구자나 기업이나 자본이 들어감으로써 행해지고 있습니다. 이런 것도 또한 생명권력이나 생명정치에 관련되는 것입니다만, 저는 제대로 파악하지 않았습니다. 이런 것은 이미 의료인류학의 연구테마가 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만, 사회학자에게서는 거의 다뤄지지 않았다고 생각합니다. 사회학자에게는 사상할 수 없는 것을 인류학으로부터 배운다는 것은 새삼스러운 일은 아니지만, 생명권력이나 생명정치라는 문제 하나만 해도, “사회학적 상상력의 한계를 새삼 자각하게 된 것 같은 기분입니다. “제 개인의라는 한정을 달아두겠습니다만.

 

비티 카바니를 둘러싸고

히가키 : 카스가 씨가 태평양의 라스푸틴 : 비티 카바니 운동의 역사인류학(太平洋のラスプーチンヴィチ・カンバニ運動歴史人類学)(世界思想社, 2001)에서 쓰셨던 아폴로시 나와이(Apolosi Nawai)라는 사람의 얘기가 있네요. 그것이 매우 재미있는데, 학생들한테 얘기해주면 모두 포복절도합니다. 아폴로시는 신흥종교인지 주식회사인지 잘 모르겠지만 비티 카바니(Viti Kabani)’라는 조직을 세웠죠?

太平洋のラスプーチン―ヴィチ・カンバニ運動の歴史人類学에 대한 이미지 검색결과

카스가 : 영어로 하면 피지 카바니입니다.

히가키 : 1915년에 그 조직을 세웠을 때의 선언문이 있는데요, 요컨대 이렇게 말한다. 왜 우리는 미운 영국인보다 못하는가? 그들은 회사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 회사를 만들면 된다. 회사를 만들어 성공시키고, 이 전지구적 사회에서 비티 카바니가 성공하면, 100년 후에는 저 미운 영국인을 우리의 발밑에 두고 우리의 노예로 만들 수 있을 것이라고 말이죠. 그래서 회사를 세우려면 돈이 필요하니까 돈을 보내달라는 글을 작성해 피지의 구석구석에 뿌렸고, 엄청난 금액의 돈이 모였다(웃음). 그런데 아폴로시는 무엇을 했냐 하면, 바로 인류학적인 의례라는 느낌이 있습니다만, 요컨대 주지육림처럼 흥청망청 해댔습니다.

카스가 : 모두한테 대접했어요.

히가키 : 그렇게 해서 돈이 없어지면, 다시 글을 짓는다. “여러분, 지금이야말로 중요한 때이다. 회사를 지탱하기 위해 돈을 더 보내주세요라고 말이죠. 그렇게 하자 또 돈이 모여든다(웃음). 결국 아폴로시는 체포되어버린 건가요?

카스가 : 몇 번이나 붙잡혔습니다.

히가키 : 재미있다고 생각한 것은 카스가 선생이 현지연구field work에 나갔을 무렵에는 이제 비티 카바니는 없습니다라는 공식 문서가 나왔는데도, 아직도 돈을 보내는 사람이 피지 안에 있다(웃음).

카스가 : 어떤 장소에서는 저를 아폴로지의 재래(再来)라고 여겼습니다(웃음). 외부에서 온 왕[外来王]이죠.

히가키 : 바다 건너에서 온 일본인이기 때문에, 이 사람에게 돈을 건네면 회사를 만들어서 영국을 박멸해줄 것이라고 생각했던 거군요.

카스가 : 바로 감시와 처벌에 나오는 옛 권력이 갖고 있는 힘입니다. 이 감각은 피지에 가면 잘 아실 겁니다. 거기서는 참이냐 거짓이냐보다 진짜[진품]냐 가짜냐가 중요합니다. 이 사람은 진짜 신의 사람인가, 라는 거죠.

히가키 : : 카스가 씨는 진짜[진품]였던 셈이군요.

카스가 : 그렇습니다(웃음). 이런 감각을 푸코는 잘 적고 있습니다.

히가키 : 이것은 신흥종교집단에 의한 사기사건이라고도 파악됩니다만, 반식민지운동의 한 가지 형태로 파악하는 것도 가능합니다. 제가 중요하다고 생각한 것은, 영국에 대해 당신과 동등한 권리를 주라고는 한마디도 하지 않고, 자신들이 회사를 일으켜 전지구적 사회를 탈취하면, 영국인은 자신들의 발밑에 엎드릴 것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이것은 대단한 발상이죠.

카스가 : 카고 컬트(cargo cult, 멜라네시아 특유의 적화(積貨) 신앙[숭배]. 조상의 영혼이 배·비행기로 돌아와 백인에게서 해방시켜 준다는 신앙)적인 발상입니다. 결정적인 것, 세상의 비밀은 감춰져 있으며, 그것을 드러내면 모든 것이 진품이 된다. 지금 있는 것은 진품이 아니지만, “진품은 누군가가 반드시 갖고 온다는 사고방식입니다.

히가키 : 저는 이른바 포스트콜로니얼에는 꽤 불만이 있습니다. 거기에서는 식민지주의에 대해 선이냐 악이냐라는 발상이 강하고, 그것을 전제로 식민지를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가가 논의되곤 합니다. 하지만 비티 카바니에게서는 포스트콜로니얼따위는 아무래도 좋은 것입니다. 우리가 세계의 지배자가 되면 저 놈들은 우리의 노예가 될 테니까, 빨리 회사를 만들면 좋다고 피지인 자신이 말하고 있으니까요. 비슷한 얘기는, 전 세계를 찾아보면, 많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싸늘한 시선을 하면 그런 운동은 결국 미국 자본주의 속에서 으깨지도록 결정되어 있기 때문에,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가 되며, 정말 이 말 그대로 될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피지에는 비티 카바니가 없어져도 돈을 보내오는 사람들이 있고, 카고 컬트라는 예가 있었던 것처럼, 절반은 종교적인 시주 같은 것인지도 모릅니다만, 나머지 절반은 돈을 내면 언젠가 영국인은 우리의 노예가 된다는 사고 속에서 삶을 성취하고 있다. 이런 현상을 생명권력의 문제와 얽히게 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이치노카와 : 푸코가 고찰 대상으로 삼는 것은 기본적으로 유럽 근대이며, 이런 의미에서는 엄청난 유럽중심주의입니다. 그런데 그 고찰 속에서 생겨나는 개념은 유럽 근대가 아닌 장소, 혹은 유럽 근대라는 틀로는 파악되지 못하는 장소에까지 다다른다.

카스가 : 그것은 벤야민한테도 똑같이 말할 수 있네요. 아감벤에게는 없고 벤야민에게는 있는 것.

이치노카와 : 벤야민에게도요? 새삼 사회학적 상상력의 좁음을 느낍니다. 다시 제 개인의라는 한정을 붙이지 않으면, 다른 사회학자의 분노를 살 것이라고 생각합니다만

(1부 끝)

Posted by 상겔스 상겔스

도래할 생명권력론을 위해


사상, 20132

 

 

목차

사상의 말

히가키 타츠야(槍垣立哉)

(좌담회) 도래할 생명권력론을 위하여

히가키 타츠야(槍垣立哉)・카스가 나오키(春日直樹)이치노카와 야스타카(市野川容孝)

 

I. 푸코 재고

1. -‘생명정치학적 고찰

우노 쿠니이치(字野邦一)

2. 정신과 심리의 통치

고이즈미 요시유키(小泉義之)

3. 진리의 정치를 향하여 : 미셸 푸코의 생체권력론

히로세 고지(廣瀬浩司)

4. 구조주의의 생성변화

에두아르드 비베이로스 데 카스트로

 

II. 이탈리아에서

5. ‘죽음정치에서 비정치: 이탈리아에서의 생명정치의 전개

오카다 아츠시(岡田温司)

6. 인간과 동물의 문턱 : 조르조 아감벤에게서의 생명 개념

히가키 타츠야(槍垣立哉)

7. 생명권력과 생명역량[잠재력]

로베르토 에스포지토

 

 

III. 인류학의 지평

8. 오늘날의 생명정치학 : 푸코와 레비스트로스

프레데릭 켁

9. 생명권력의 외부 : 현대인류학을 통해서 생각하기

카스가 나오키(春日直樹)

10. 3종의 정치를 향하여 : 인류학적 생명권력론의 한 시도

야나이 타다지(箭内匡)

11. 신체의 산출, 개념의 연장 : 마릴린 스트라썬에게서의 멜라네시아, 민족지, -생식기술을 둘러싸고

사토미 류지(里見龍樹)구보 아키노리(久保明教)

 

IV. 착종의 장으로

12. 합성생물의 생명정치학

가나모리 오사무(金森 修)

13. 출현하고 있는 생명의 형식?

니콜라스 로스

14. 스스로 움직이는 것의 생태학

노타카 테츠시(野中哲士)

15. 라 보르도 병원의 transversalité

미와키 야스오(三脇康生)

==========================================================================

사상의 말 : 언어와 생명

히가키 타츠야(槍垣立哉)


 원래 이 글은 조르조 아감벤이 집필하기로 일정이 잡혀 있었다. 그러나 (오카다 아츠시岡田温司 선생에 따르면, 언제나 그렇듯이 지연되어) 마감을 넘겼는데도 아감벤에게서 아무런 소식이 없는 사태가 발생했다. 내가 이 특집의 좌담, 원고, 번역에 많이 힘을 쓰긴 했지만, 이런 종류의 원고를 쓰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은 분명하다. 그렇지만 이런 이유 때문에 부득이하게 떠맡게 되었다.

언어와 생명은 어려운 테마라고 생각한다.

인간이 학문을 그리스부터든 고대 중국에서부터든 아무튼 시작한 이래, 언어를 매개로 하지 않고 학문을 하는 것은 물론 불가능했다. 학문이 학문이기 위해서는 어떠한 야생의 사고든, 언어적 상징을 이용한 논리 조작이 어딘가에서 필요할 터이다. 그러한 합리화나 논리화, 혹은 규범화를 갖지 않은 지적 활동은 원래 있을 수 없다. 근세 이후, 유럽에서 학문이, 자연과학을 중심으로 경이로운 발전을 이룬 배경에는 수학이라는 추상적인 기호계의 전개가 있었다는 것은 새삼 말할 것도 없다.

언어란 어떤 것이든, 어떤 일반화를 행하는, 이 세계를 범주로 구분하는 능력을 갖고 있다. 언어의 조작에 의해 인식의 계층성이 생겨나며, 분류로서의 학이 시작된다.

하지만 언어란 우선 인간의 것이다. 우선이라고 말한 까닭은 인간 이외의 생물이 (잠재적으로든) 언어적인 무엇을 사용하지 않는다고는 할 수 없고, 또 인간이 언어를 획득한 것도 분명히 자연 진화의 과정 속에서이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언어를 명시적인 수준에서 이용할 수 있는 것은 인간뿐이다.

그렇기에 자연에 대해, 물질에 대해, 생명에 대해 인간이 자신의 존재방식을 주장하고자 할 때는, 언제나 언어의 힘을 끌어들이게 된다. 이 경향은 고대의 언령적言霊的 발상에도, 지난 세기에 언어론적 전회가 (내게 그것은 근대의 결실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선전되었을 때에도 발견된다. 특히 후자에서는, 언어가 의식을 대신하여, ‘인간을 지키는 보루가 되었다. 확실히 그래서 언어의 광기가 얘기되기도 했다. 그리고 언어가 지닌 다양성이 다문화주의의 원천으로 거론되기도 했다. 아무튼, ‘인간이란 역시 하나의 에 불과하다. 다언어주의 속에서 번역의 문제가 인문학의 열쇠처럼 다뤄졌다고 하더라도, 늘 번역은 이루어진다. 번역은 물론 인간이 갖추고 있는 근원적인 차이나 교통 불가능성을 돋보이게 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번역은 동종의 인간 사이에서의, 마찬가지로 진화한 뇌의 기능 사이에서의 번역에 다름 아니다.

그런데 생명은 전혀 다르다. 물론 생물학으로서의 생명의 지식, 즉 생명을 분류하고 논리화하는 시도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옛날부터 존재했다. 하지만 살아 있는 것이나, 생명으로서 존재하는 것 자체는, 윤리적인 삶의 방식의 문제이기는 해도, 원리적으로 지식의 문제가 되기는 어렵지 않았을까? 생명에 독특한 물질=질료성, 그저 태어나고 그저 생식하고 그저 죽어갈 뿐인 생명으로서의 이러한 나, 이것은 지식의 대상으로서는 기피되어야 할 영역이었던 것이 아닐까? 너무 분류하고 명석화하는 것으로부터는, 뭔가 다른 어떤 것이 있는 게 아닐까?

거기에는 상반되는 이유가 있을 것이다. 생명은 그 자체로, 지성을 축으로 한 생물인 인간에게, 스스로가 포함하는 역설, 스스로가 품고 있는 모순을 노정시키는 것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지식은 물질적 생명을 포섭할 수 없다. 지식은 어디서든 생명적으로 존재하는 것에 의존하지만, 그러나 생명 자체를 묻는다면, 자신의 근거가 희박하고 소멸한다는 감각이, 즉 일종의 두려운 낯설음(unheimlich)’의 감각이 항상 따라다니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그것은 어떠한 두려운 낯설음일까?

두려운 낯설음은 현대사상(혹은 그 발단의 시기)에서 처음부터 중시된 말이다. 실존주의나 생철학은 지식의 너머인 이러한 영역이나, 거기서 발견되는 부조리성이나 우연성을 부각시켰다. 하지만 이러한 학들은, 이 영역이 품고 있는 본질적인 실정성을 명시할 수 없었다. 언어론적 사고를 섭취한 정신분석은 언어화도 상징화도 할 수 없는 이 너머실재자체로서 파악하는 것은 불가능한 것으로서 방치해 온 것이다.

그러나 극히 아이러니하게도, 이러한 그저 살아 있다고 하는 너머를 실정적으로 밝혀주는 것은 바로 인간 지식의 극한 같은 생물학이었다. 뇌과학이 해명하는 시냅스 연쇄로서의 지식이나 정서의 기능, 분자생물학이 그리는 분자적으로 해체되는 신체의 이미지, 면역 기능이 제시하는 흔들리는 자기의 애매함 . 그것은 확실히 지식이 노정시키는 신체이자 자기이다. 그 때문에 그것들은 언어를 축으로 한 근대적 지식이 자기의 기반에 위험한 방식으로 구부려왔던[주름을 접혀왔던] 것의 귀결이라고도 할 수 있다. 지식으로 생명을 파악하는 것, 이것은 지식이 지식이라는 것(인간이라는 것)을 붕괴시키는 사태를 포함한 행위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것은 언어의 지식에 집착하는 철학만으로는 결코 완성할 수 없었다. 물질로서의 지식을, 생의 한가운데서 다루는 것은 불가피해진다.

여기에는 다른 방면에서의 호응도 있었다. 그것은 이론보다 훨씬 실천적인 지향이 강한, 정치나 윤리에서의 지식의 담론으로부터의 의 위치에 관한 것이다. ‘생 그 자체의 정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