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징적 빈곤’이라는 포퓰리즘의 토양

― ‘의식의 시장화’로부터 벗어나기

베르나르 스티글러(Bemard Stiegler)

1952년 프랑스에서 태어났다. 프랑스의 퐁피두 센터 연구개발 디렉터. 콩피엔느 대학의 지식․조직․기술시스템 연구부 부장 및 교수, 국립 시청각 연구소 부소장, 음향/음악 연구 소장을 역임하고 있음. ‘자본주의의 변혁’을 목표로 한 운동단체인 Ars Industrialis를 주관하고 있다.

― ‘상징적 빈곤’ 개념을 설명해 주십시오.  
‘상징적 빈곤’을 저는 기술철학의 관점에서, ‘생산에서의 빈곤’과의 대비에서 생각합니다. 그것은 자본주의의 발전단계와 관련되어 있습니다. 19세기의 산업혁명을 겪은 자본주의에는 두 가지 큰 결과가 있었습니다. 첫째로 이른바 프롤레타리아가 등장했습니다. 기술론의 관점에서 말하자면 이미 자신의 ‘제작 지식’에 의해 생산을 하지 않고 기계의 부속품에 불과한 존재가 되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그들이 가지고 있던 생산과 관련된 지식이 기계로 옮겨가 버렸습니다. 생산자의 신체적 행동은 기계의 자동운동으로 변형되었고 그리하여 개별 생산자의 ‘제작 지식’은 빼앗기게 됩니다.
맑스가 프롤레타리아화라고 부른 것은 바로 이것으로, 내가 자주 참조하는 기술철학자인 시몽동이 ‘비개체화 과정’이라고 불렀던 것도 바로 이것입니다. 이것이 ‘생산에 있어서의 빈곤’입니다. 두 번째 귀결로서, 19세기의 말이 되자 자본주의는 기계화 때문에 생산성이 확대되었고, 맑스가 ‘이윤율 저하’라는 사태에 직면했습니다. 사회가 생산물을 모두 다 소비할 수 없게 된 것입니다. 그 때문에, 맑스가 이미 1865년부터 1870년 무렵에 예고했듯이, 자본주의는 위기에 빠졌고, 그것은 제1차 세계 대전에 이르는 자본주의 국가들 사이의 전쟁으로 나타나게 되었습니다. 이상은 자본주의의 제1기의 특징입니다만, 유럽을 중심으로 하여 일어난 것입니다.

미국형 자본주의, 문화산업, 마케팅
그런데 20세기에는 자본주의의 중심이 미국, 특히 캘리포니아로 이동합니다. 20세기 초반, 미국형 자본주의는 이윤율 저하에 대한 해결책을 찾아냈습니다. 그것은 세 가지 차원으로 이루어졌습니다.
첫 번째는 포드주의의 등장입니다. 생산자란 동시에 소비자이며, 생산성을 높임으로써 이 소비자로서의 생산자의 수입을 개선해야 한다는 생각에 근거한 것입니다. 이 모델에 따르면 모든 사람이 승리를 거두게 됩니다. 프롤레타리아는 소비자가 됩니다. 유명한 포드의 T형 자동차는, 바로 이것을 생산한 노동자를 겨냥한 것입니다.
이것은 완전히 새로운 생각으로, 유럽형 자본주의에 대한 미국형 자본주의의 혁명이었습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20세기의 미국형 자본주의는 목표로 했던 생산성의 향상과는 다른 과제에 임하게 됩니다. 자본주의의 발전을 보증하는 것은 시장의 확대이기에 미국형 자본주의는 광대한 시장의 획득을 목표로 하게 됩니다. 처음에는 국내 시장을, 이어서 세계시장을, 20세기 초반 이래 미국형 자본주의는 세계 규모의 시장 확대의 비전을 가지고 있었다고 하는 것이죠. 이것은 새로운 종류의 제국주의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이것과 연동된, 두 번째의 아주 중요한 차원이 있습니다. 그것은 미국 영화의 등장이자, 미국형 ‘문화산업’의 탄생입니다. 1905년부터 1907년에, 미국 영화는 산업 모델에 근거하여 발달을 시작하게 되었고 1912년에는 영화의 전략적 중요성이 정치에서 이미 논의되고 있었습니다. 이것은 물론 영화로 이익을 올리는 것과도 관련됩니다만, 특히 중요한 것은 소비자의 마음이 대중 소비에 의해 조건지었다는 것에 있었습니다. 영화산업의 발달을 통해 1930년대에는 ‘미국적 생활방식’이라 불리게 된 행동양식이 미국 내부와 세계적 규모로 촉진되는 일이 생겨났습니다.
이 점이 극히 중요한 것은, 이것이 포드주의를 보완했기 때문입니다. 포드가 T형을 생산함으로써 목표로 했던 광대한 시장을 손에 넣기 위해서는 산업 제품을 사람들이 차지하게 만들기 위한 행동양식을 동시에 발달시켜야만 합니다. 일반적으로 말해서 사회는 산업 제품을 스스로 발전시켜 채택하려고 하지는 않기 때문에 조건을 부여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 조건 부여의 주된 역할을 한 것이 바로 영화의 영상입니다.
영화는 문학, 음악 등의 전통적인 상징표현보다 훨씬 큰 모방 환기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은 레코드라는 음악적 산업제품과 더불어 더욱 발전하였고, 이어서 라디오가, 그리고 2차 세계 대전 전후에는 드디어 텔레비전이 등장함으로써 구현되기에 이릅니다. 이것은 내가 ‘산업적 시간 대상’[그 자체 속에 시간성을 구비한 산업 제품, ‘시간의 패키지 제품’]이라고 부르는 것에 의한 사회의 통제입니다. 게다가 오늘날에는 휴대 전화 등에 의해 사람들의 생활의 틈새 시간까지도 이러한 사회적 통제의 대상이 되고 있습니다.
세 번째 차원은 에드워드 버네이즈(Edward Bernays)라는 인물로 대표되는 마케팅의 등장이 있습니다. 정신분석의 아버지 프로이트의 조카인 이 사람은 당시에는 ‘PR(Public Relation)’이라고 불렸고 나중에는 ‘마케팅’으로 불리게 된 것을 발명한 사람입니다만, 그는 1917년 이후 자본주의의 문제란 여론(opinion)을 조작하는 것에 있다고, 미국의 또는 세계의 소비자 개인 및 집단 수준에서의 리비도(무의식의 욕망)를 제어하여 방향을 부여하여 포착하는 것에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자본주의의 진정한 문제는 생산이 아니라 팜애에 있다는 생각에 근거하여 판매하기 위해서는 대중의 욕망, 즉 리비도 에너지를 부모나 연인, 종교나 정치라는 이상적인 ‘승화’의 대상으로부터 소비의 대상으로 되돌려 고정시켜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모든 욕망은, 맑스의 말을 빌리자면(원래 맑스와는 다른 의미입니다만), 상품의 물신주의에 의거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 프로이트는 주식시장에서 배운 원리를 “무의식의 욕망 에너지(리비도 에너지)”의 작동으로 진단하고 ‘리비도 경제’라는 획기적인 이론을 수립했다.]

‘상징적 빈곤’ ―‘삶의 지혜’의 상실
이러한 과정은 미국에서는 이미 1920년대에 시작되었습니다만, 특히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텔레비전의 보급에 의해 급속히 발전되었습니다. 예를 들면 프랑스에서의 텔레비전 보급률은 1950년에는 0.1%였으나 1960년에는 13%, 1970년에는 70%, 그리고 현재에는 98%에 이르렀습니다. 즉 50년 사이에 모든 개인이 텔레비전의 통제 하에 들어갔다는 것입니다. 또 평균 시청 시간도 3시간 반에 이르러, 일하고 출퇴근하고 잠자는 시간 외에는 거의 모든 ‘시간’을 텔레비전 앞에서 보내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상징적 빈곤’이라고 제가 부른 사태를 낳고 있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이처럼 ‘시간’을 텔레비전과 같은 문화 산업이 유통시킨 ‘산업적 시간 대상’을 통해 구성하게 됩니다. 구체적으로는, 사람들은 텔레비전 프로그램이나 레코드 음악을 통해 자신의 ‘시간’을 구성하게 됩니다. 그리하여 스스로 상상하거나 추억을 마음 속에서 떠올리거나 자기 자신의 고유한 욕망을 낳기도 하는 ‘삶의 에너지’, 즉 프로이트의 용어로 하면 ‘리비도’가 문화산업에 빨려 들어가게 하는 것입니다. 자기 자신의 리비도를 고유한 ‘욕망’으로서 표현하고 구성해 나가기 위한 상징적 자원을 사람들을 잃어가고 있습니다. 이것이 ‘상징적 빈곤’의 진행입니다.
19세기의 산업자본주의에 의한 프롤레타리아화가 생산수단의 기계화에 의해 ‘생산자’에게서 ‘제작 지식’을 상실하게 만들었던 것에 비해, 20세기의 소비자본주의에서의 전반적인 프롤레타리아화는 소비자에게서 ‘삶의 지혜’를 상실하게 만드는 것으로 진행되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의식을 파악하고 행동을 표준화함으로써 20세기의 소비자는 ‘삶의 지혜’를 잃는 것입니다. 소비자에게 있어서의 ‘삶의 지혜’는 이제 자신의 삶의 현장 경험에 의해서가 아니라 미리 결정된 매뉴얼이나 취해야 할 행동을 미리 정한 마케팅에 의해 결정되어 버리고 있습니다. 이것은 지극히 중요하며, 말하자면 그것이야말로 개인 및 집단 차원에서의 상징적 괴로움, ‘살기 힘들다’는 것을 산출하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괴로움이야말로 여러 가지 사건이나 흉측한 사건으로 나타나는 ‘결행(acting out)’을 초래하고 있습니다. 그러한 행동에는 ‘살아 있다’는 존재 감각의 상실이 있습니다.
그리고 (라디오나 네트워크도 덧붙여야 합니다만) 텔레비전을 필두로 한 문화산업이 보급한 문화 콘텐츠에 의한 대중의 리비도 포착은 궁극적으로 리비도 자체의 파괴로까지 나아갑니다. 리비도를 포착할 수 있도록 만들어지고, 그것을 위해서 기능해야만 하는 것이 오히려 리비도를 파괴해 버립니다. 이것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하나는 리비도의 담지자가 개체로서의 단독성을 가진 개인이며, 자신의 유일한 존재로서의 단독성을 투영할 수 있는 대상만을 ‘욕망의 대상’으로 요구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개체의 단독성에 의거한 욕망의 투영 구조는 프로이트가 ‘원-나르시시즘’(원-자기애)라고 부르고, 또 라캉이 ‘거울상 단계’라고 부른 것입니다. 하이퍼 산업사회에서 개체는 문화산업이 유통시키는 이미지를 손에 넣어 내면화합니다만, 내면화된 이미지는 더욱 더 표준화되며, 개인의 과거는 모든 사람에게서 같은 것으로 되어 버립니다. 한 사람의 개인에게는 고유의 ‘과거’ 따위란 이미 없으며, 산업적인 ‘한철’(즉 유행)로만 존재하게 됩니다. 개인의 단독성의 의지처는 그의 개인으로서의 경험에 있습니다만, ‘개인이다’는 것은 근처에 있는 사람과 같지 않다는 것입니다.
포드주의에서 보여졌듯이, 생산의 경우 개인은 노동에서는 완전히 과학적인 조직화와 관리를 받아들이고 완전히 표준화된 작업을 행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동시에 소비에 있어서도 문화산업이 유통시킨 ‘산업적 시간 대상’을 통해 통제를 받고 표준화된 행동을 취하게 됩니다. 사람들이 개인적 경험을 갖는다고 할 수 없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조르조 아감벤이 ‘경험의 상실’이라고 부른 사태입니다.
그것을 가능케 한 것이 문화산업에 의한 ‘과거 파악’[‘산업적 시간 대상’에 의해서 ‘시간’을 산출하여, 공통의 ‘과거’를 사람들의 의식에 의해서 구성하는 것], 즉 ‘기억의 통제’입니다. 오늘날에는 텔레비전뿐만 아니라 휴대 전화 등 새로운 커뮤니케이션 장치의 보급에 의해서 모든 것이 상시적으로 통제되게 되어 있습니다. 이것이야말로 질 들뢰즈가 ‘통제 사회’라고 부른 사태입니다.
하지만 여기에는 역설이 있다고 말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문화산업에 의해서 리비도가 포착되고, 상징적 빈곤이 진행됨에 따라서 리비도 자체가 붕괴되어 버립니다. 왜냐하면 리비도는 단 하나 밖에 없는 단독적인 욕망의 대상이 주어질 때에만 작동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리비도가 요구하는 대상의 단독성이 성립하기 위해서는 리비도 자체가 단 하나 밖에 없는 개인의 단독성에 근거해야만 합니다. 또한 타자를 욕망할 수 있는 것도 이 개인의 과거의 단독성에 근거한 것입니다.
그런데 개인이 표준화된 것을 소비하기 시작하고 표준화된 과거를 차지하게 됨으로써 자신의 단독성을 잃게 되면 이것과 동시에 대상의 단독성에 대한 감성도 잃어버립니다. 리비도가 리비도인 것은 둘 도 없는 단독성을 요구하는 한에서이기 때문에, 이리하여 리비도 자체가 파괴됩니다. 그리하여 제가 ‘리비도 에너지의 체감[감소]’이라고 부른 사태에 이르게 됩니다만, 이것은 자본주의의 두 번째 위기에 다름 아닙니다.

산업 포퓰리즘이 산출한 정치 포퓰리즘
저는 근래 프랑스에서 특이한 범죄를 일으킨 사람들, 특히 젊은이들의 행동에 관심을 쏟아 왔습니다. 그들의 행동은 극단적이거나 원리주의적이거나 일본의 옴 진리교에서 보았듯이 종교적인 것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러한 폭력적이고 범죄적인 행위나 흉측한 행동 하에는 자신이 살아 있다고 하는, 존재 감각의 상실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소비자는 마케팅의 표적이 되면 자신이 자신으로서 존재하고 있다는 감각을 잃게 됩니다. 이러한 실감의 상실 때문에 자신은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역으로 증명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자기 존재의 증명을 위해서 흉측한 행동을 취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결과, 이번에는 여론이 패닉상태에 빠지며, 이것이 사회의 퇴행적 행동으로 나타나게 됩니다. 정치의 수준에서는 ‘질서’나 ‘권위’ 등이 소리 높이 요구되며, 결국 ‘정치 포퓰리즘’의 기초가 만들어지게 됩니다. 중요한 것은 이러한 ‘정치 포퓰리즘’ 자체가 ‘산업 포퓰리즘’에 의해 준비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즉 이런 현상을 낳는 것은 ‘산업 포퓰리즘’으로서의 마케팅입니다.
소비자로서의 삶의 단독성을 상실해 가는 사람들의 의식의 시간은 산업 포퓰리즘에 의해 장악되게 됩니다. 리비도가 자꾸 파괴되기 때문에 자본주의는 이제 ‘욕망’이 아니라 ‘충동’에 호소하게 됩니다.
실제로 15년 정도 전부터 텔레비전 프로그램이나 헐리우드 영화는 정의, 이상, 영웅 같은 ‘욕망’에 호소하는 것이 아니라 성적 표현이나 폭력, 게다가 리얼리티 쇼와 같은 모방 행동을 야기하는 프로그램을 통해서, 직접적인 ‘충동’에 호소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경향이 정치에서는 죽음의 충동이든 파괴 충동이든, 어쨌든 충동에 호소하는 극우세력으로 나타나게 됩니다. 산업 포퓰리즘과 정치 포퓰리즘은 똑같은 마케팅 논리에서 기인하고 있다고 봐야 합니다. 또 그렇게 함으로써 정치가들의 행동은 점점 더 문화산업의 마케팅과 구별할 수 없게 됩니다.  

미디어 정치가들이 태어나는 메커니즘

― 사르코지, 베를루스코니, 고이즈미 같은 정치적 인물이 미디어화되고 있는 현상을 어떻게 생각합니까?
사르코지는 기묘할 정도로 고이즈미와 닮아 있으며, 이것은 부시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르코지는 부시처럼 연설이나 정책을 실시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문화적 차이에도 불구하고 같은 과정이 일반화하는 것을 보고 있습니다. 그것은 우선, 심리적 구조가 어디서든 같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방금 전에 말한, 산업 포퓰리즘의 메커니즘이 작동하고 있는 것이죠. 또 테크놀로지 환경도 같습니다. 텔레비전, 휴대전화, 컴퓨터를 통해 미디어가 리비도를 파악하는 것이 가능하게 되었으며, 그것이 ‘정신의 산업 에콜로지’라고 제가 부른 문제를 야기하고 있습니다. 이 때문에 어디에서든 동일한 정치적 오작동(malfunction), 정치 포퓰리즘이 산출되게 됩니다. 이것은 우리들이 리비도의 문제가 지구화되는 시대를 살고 있다는 것의 증거입니다. 유럽이든 미국, 아시아든 선진 산업 국가들의 공통의 문제이며, 똑같은 메커니즘이 똑같은 결과를 무서운 형태로 일으키고 있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일본의 오모테산도의 거리를 걸으면 막스 마라의 부띠끄를 볼 수 있습니다. 막스 마라는 세계적인 브랜드입니다만, 오늘날에는 이러한 브랜드를 개입시켜서 리비도의 집단적 개별화를 행합니다. 리비도의 개별화는 이미 국가, 문명, 종교라는 수준이 아니라 산업적 논리를 개입시켜 행해지고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더 이상 각 지역에 특유한 언어, 이념이라는 승화의 대상을 통해서 개별화를 하지 않습니다. 지금 일어나고 있는 것은 자본주의와 더불어 지구화된 브랜드, 제품의 논리에 의한 사람들의 동일화, 개체화입니다. 작금의 자본주의는 영토화된 자본주의가 아니라 완전히 탈영토화된 자본주의입니다. 이 자본의 탈영토화가 지역적으로 운영되기 위해서 정치가는 자본주의의 탈영토화 논리와 영토적인 지역적 현실 사이의 조정 역할을 맡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신자유주의’와 ‘신보수주의’라는 정치 포퓰리즘의 의미입니다.

― 지난해 프랑스에서 일어난 폭동을 어떻게 봅니까? 
그 질문에 답하려면 충분히 주의할 필요가 있겠죠. 말하자면 프랑스에서 ‘바보 바보’라는 것이 소리 높여 외쳐졌기 때문입니다. 이 폭발은 미디어가 전하는 영상에 의해서, 마치 프랑스가 완전한 혁명상태에 들어갔다는 인상을 주었습니다만, 그렇게까지 심각한 것이라고는 생각되지 않습니다. 제 자신이 파리에 살고 있습니다만, 불에 탄 자동차는 1대 밖에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러니까 특정 지역에서 일어난 현상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만, 그렇더라도 지극히 중대한 것이라는 점은 인정해야만 합니다.
왜냐하면 이것이야말로 확실히 상징적 빈곤, 정신적 빈곤의 표현이기 때문입니다. 사건은 단순히 이슬람계 이민자뿐만 아니라 특정 계층의 프랑스인도 살고 있는 지극히 빈곤한 외곽에서 일어났습니다. 거기에 있는 것은 그저 텔레비전뿐입니다. 즉 텔레비전이 사회와 맺는 유일한 관계입니다. 그런데 텔레비전은 사회관계를 파괴합니다. 이런 사람들이 거주하는 단지의 구조는 너무도 심각해서 사람이 전혀 살 수 없습니다. 사람들은 정말로 아무 것도 전혀 갖고 있지 못한 사람들로, 소비하는 것 외에는 그들이 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들이 할 수 있는 것이라면 소비자가 되는 것뿐인데, 소비하기 위한 양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역설적인 위치에 놓여 있습니다.
그들은 프랑스 사회의 모순에 노출되어 있습니다. 소비하는 것 외에는 살아 있다는 존재를 실감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소비할 수 있는 경제적 수단을 갖고 있지 못합니다. 그 때문에 도둑질을 함으로써만 소비를 할 수 있다는 처지에 빠져듭니다. 존재상실을 모순 속에서 강렬하게 체험하고, 그들 자신의 분명히 말하듯이 존재하기 위해서는 도둑질을 하는 것 외에는 없습니다.
지난 해 말 라디오에서는 파리의 감옥에 근무하는 정신과 의사가 나와서 말했습니다만, 이번 폭동에서 현행범으로 체포된 소년들에게 그들이 저지른 행위의 이유를 물으면, 한결같이 ‘존재하기 위해서 그랬다’고 대답했다는 것입니다. 텔레비전에서 다루어지고 사회에서 일정하게 대접을 받기 위해서라고, 정치체제를 전복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존재하기’ 위해서라고 했다는 것입니다. 게다가 그들은 불을 붙이는 자신들의 모습을 휴대 전화로 촬영해서 영상을 방송국에 팔았습니다. 완전히 상식을 벗어난 행동입니다만, 정치적인 수준에서 리얼리티 쇼를 재현해 보였던 것이라고 말할 수 있겠죠.

‘상징적 빈곤’으로부터의 탈출
― 소비사회에 편입되어 단독성을 잃게 되는 상황에 우리들은 어떻게 대결할 수 있습니까? 한마디로 말해서 어떻게 하면 ‘상징적 빈곤’으로부터 빠져나올 수 있습니까?
우리 사회가 ‘상징적 빈곤’에서 빠져나올 필요가 있다는 것은 두말할 나위도 없겠죠. 말하자면 이대로는 자본주의 자체가 붕괴로 나아가기 때문입니다. 지난해에 저는 몇 명의 철학자, 지식인, 그리고 산업가들과 함께 ≪Ars Industrialis≫(산업의 방법)이라는 국제적인 운동 조직을 세웠습니다. 이 단체의 목적은 자본주의의 위기에 대한 해결이 될 새로운 산업 모델을 만들어내는 것입니다. 포드가 이윤율의 체감에 대한 해결책을 찾아냈던 것처럼, 오늘날 진행되고 있는 ‘리비도의 체감’에 대해 새로운 산업모델을 발명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지식인, 예술가의 역할이란 오늘날에서는 ‘정신의 테크놀로지’로 된 테크놀로지의 문제에 골몰함으로서, 테크놀로지가 새로운 사회화 모델을 자본주의에 대해 제안하는 것에 있습니다.
그 새로운 산업모델은 ‘소비’와 ‘생산’의 대립이 아니라 지식 테크놀로지, 정신의 테크놀로지에 의한 새로운 개체화 과정에 의거한 것이 될 것입니다. 텔레비전이나 컴퓨터, 휴대 전화 등의 기술은 현재 상태로서는 개인의 개성을 잃게 하는 과정을 낳고 있습니다만, 완전히 새로운 개인의 개별화를 산출할 수도 있는 기술이기도 합니다. 문제는 마케팅에 의한 사회적 조직화를 의문에 부치고, 사회를 다른 방식으로 조직하는 것입니다. 원래 마케팅 자체가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말하자면 이대로는 소비자는 막스 마라에 코트를 사러 가는 것이 아니라 불을 지르러 가게 되겠지요. 자본주의는 소비자가 없으면 가능하지 않기 때문에 자본주의는 변화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예를 들어 오늘날의 프랑스에서는 반소비 운동이 있습니다만, 반소비 운동이 공격하는 것은 부띠끄가 아니라 광고입니다. 그것은 자발적인 대중운동으로, 지하철에 있는 광고를 폐기하자는 인터넷에서의 요청에서부터 시작된 것입니다. 이것은 광고 공간을 판매함으로써 수입을 얻고 있는 파리지하철공사에게는 큰 문제였습니다. 또 SUV 자동차에 대한 습격이라는 현상도 있습니다. SUV의 타이어를 펑크내는 것입니다만, 이것도 결국 심각한 문제가 될 것입니다. 차의 소유자가 엽총을 꺼내게 되는 폭력이 일어나겠지요. 또는 ‘반소비 운동’이라는 것도 존재합니다. 소비를 바라지 않는 소비자들의 운동인 것이죠.
물론 소비를 안할 수는 없습니다만, 소비가 마음을 괴롭게 하고 중독을 일으키기 때문에 소비를 바라지 않는다는 사람들에 의한 운동입니다. 소비는 헤로인 중독과 같아서 괴로움을 완화시키기 위해서 죽음에 이른다는 것을 알면서도 계속 소비하게 되기 때문에 더 이상 소비를 바라지 않는다는 사람들이 확실히 많아지고 있습니다. 미국의 어떤 마케팅 회사는 재작년에, 이대로라면 프랑스가 소비의 붕괴에 휩쓸려 버릴 것이라고 예고했습니다. 이것은 세계 어느 곳에서나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소비의 붕괴가 일어날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자본주의는 소비와는 다른 해결책을 찾아내지 않으면 안 됩니다.


Posted by 상겔스 상겔스

욕망, 문화산업, 개인

베르나르 스티글러
http://www.monde-diplomatique.fr/2004/06/STIEGLER/11261

수십 년 간 세계를 지배하고 있는 우화가 있다. 적지 않은 정치사상이나 철학이 그러한 환상의 포로가 되어 왔다. 이 우화에 따르면 1968년을 거쳐서 시대는 ‘여유로운 사회’나 ‘톨레랑스의 사회’, ‘유연한 구조의 사회’ 등, 이른바 여가 사회, 개인주의 사회로 변모했다고 한다. 탈산업사회론으로 불리는, 이 우화의 이론으로부터 ‘포스트모던’ 철학은 큰 영향을 받았다. 그것이 이 철학의 아킬레스건이 되었다. 시민사회주의자도 마찬가지다. 이 우화를 믿고 대량생산, 대량소비의 산업사회로부터 중간계급의 사회로 시대가 이행했다고 주창하고, 프롤레타리아 계급은 소멸할 것이라고 예상했다.
통계를 보면 프롤레타리아트 숫자는 더욱 많다. 임금노동자의 대부분이 프롤레타리아화하고 있는 현상에서 보면, (직장의 기계화에 따른 결과, 자발성을 발휘할 기회도, 전문직으로서의 지식도 지금 빼앗기고 있다) 오히려 전체적인 숫자는 증가했다. 중간계급도 빈곤화되고 있다. 사전에 따르면 여가, 즉 ‘레저’란 질곡으로부터의 자유, ‘절대적인 자유’를 의미한다. 그러나 사전상의 의미에서 여가가 발달했는지 여부는 극히 의심스럽다. 개인의 자유로운 시간이 증가하기는커녕, 반대로 더욱 더 시간의 관리와 하이퍼 매스화가 진행되고 있기 때문이다. 여가는 자발적 예속의 새로운 형식을 낳았다. 문화산업과 프로그램 콘텐츠 산업이 여가의 상업화와 조직화를 추동한 결과, 일찍이 철학자 질 들뢰즈가 말했던 ‘통제사회’가 완성되었다. 통제사회가 확대됨에 따라 문화․서비스 자본주의가 급격히 성장하여 라이프스타일의 세부사항을 만들어내고, 일상생활을 눈앞의 이익을 추구하는 장으로 바꾸었다. ‘마케팅 지향’을 통한 인간의 평준화 역시 진행되었다. 경제적 가치라는 관점에서 개인의 삶의 시간을 계산가능한 것으로 만드는 ‘삶의 가치’는 이러한 움직임의 전형일 것이다. 이러한 움직임의 본질은 특이화와 개체화의 기회를 빼앗는 것이다.
들뢰즈가 혜안을 가지고 간파했듯이, ‘마케팅’이란 ‘사회의 통제를 위한 도구’[질 들뢰즈, ≪대담≫(Pourparlers), Editions de Minuit, Paris, 2003]이며, ‘탈산업’ 사회라고 칭하는 사회의 실태는 하이퍼산업사회이다.[≪상징직 빈곤에 관하여 1―하이퍼 산업시대≫(De la misère symbolique.1―L’époque hyperindustrielle), Galilée, Paris, 2004를 참조.] 개인주의가 우선시되었기보다는 오히려 개체는 무리를 이뤄 행동하고, 개체화의 기회는 완전히 소멸되고 있는 시대인 것이다.
철학자 질베르 시몽동이 개체화의 상실이라는 개념을 제창한 것은 기계의 지배 하에 있는 19세기의 노동자의 상황을 설명하기 위해서였다. 당시의 노동자는 우선 직능을, 그 다음으로 인격을 상실하고 프롤레타리아로 전락해갔다. 이제는 소비자의 행동이 욕망을 포맷하고 개선하여 평준화할 차례이다. 현대의 인간은 살아갈 힘, 다양한 삶을 살 가능성을 잃고 있다. 규격이라는 사고방식이 그 대신 나타났다. 하지만 규격이란 시인인 말라르메가 잡지 ≪최신유행≫에서 논했듯이, 유행에 대한 끝없는 눈짓에 다름 아니다. 현대의 규격은 마케팅 기술이 ‘합리적’으로 촉진하고 있다. 외식산업계를 좌지우지하는 ‘매뉴얼’과 아주 비슷하다. 계약의 파기나 소송을 살짝살짝 언급하면서 프랜차이즈 체인점 산하의 소매사업자들을 굴레에 묶어두는 성스러운 계율과 비슷한 것이다.
‘개체화의 상실’이 ‘삶의 상실’도 의미하고 있다는 것에는 심각한 위험이 들어 있다. 시의회 의원 8명이 희생되었던 낭테르 시의회 총격 사건의 범인인 리샤르 뒤른느는 “한번이라도 살아 있다는 실감을 맛보고 싶었다. 그래서 무엇인가 악한 행동을 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고 일기에 기록했다.[Le Monde, 10 avril 2002. 또한 「9․11에서 4․21에 걸친 사랑과 자기애, 우애≫(Aimer, s’aimer, nous aimer, du 11 septembre au 21 avril), Galilée, Paris, 2003를 참조.]
1930년, 정신분석의 창시자인 지그문트 프로이트는 다음과 같이 쓴다. 산업기술이 신에게 어울리는 속성을 인간에게 주었음에도 불구하고, “신과 닮기에 이르게 되면서 오늘날의 인간은 자신이 행복하다고 생각하지 않고 있다.”[지그문트 프로이트, ≪문명 속의 불만≫(Malaise dans la civilisation), PUF, Paris, 1992.] 이것이야말로 하이퍼 산업사회에 살고 있는 우리 인간의 모습이다. 현대 사회는 인간에게서 인격을 빼앗아 가축떼로 바꾸어 버렸다. 무엇이든 마음대로 되지 않은, 요컨대 미래가 없는 가축떼로 바꾸어 버린 것이다. 비인간적인 가축떼는 광기로 치닫는 경향이 있다. 1920년에 집필한 ≪집단심리학과 자아분석≫에서 프로이트는 집단 광기에 빠지는 군중심리에 대한 분석에 처음으로 임했다. ≪쾌락원칙을 넘어서≫에서 집단 광기의 배후에 잠복해 있는 죽음의 충동 문제를 채택하여 전체주의나 나치즘, 반유태주의가 유럽에서 발호된 1930년에 프로이트는 ≪문명 속의 불만≫을 저술하여 다시 한 번 같은 주제로 돌아갔다.
≪문명 속의 불만≫에서 프로이트는 사진, 레코드, 전화 기술에 관해 논하고 있지만 라디오에 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으며, 무솔리니나 스탈린에 이어 히틀러가 빈번히 사용한 영화에 대해서도 한 마디로 거론하지 않았다. “상업은 영화의 뒤를 쫓는다”[장-미셀 프로동(Jean-Michel Frodon), ≪국민적 기획―영화와 국민≫(La Projection nationale. Cinéma et nation), Odile Jacob, Paris, 1998.]고 미국 상원의원이 발언한 것이 1912년이니까 기묘하다고 하면 역시 기묘하다. 나치가 첫 텔레비전 공개방송을 단행한 것은 1935년 4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프로이트가 텔레비전의 발명을 예상하고 있다고 생각되지도 않는다. 프로이트와 똑같은 시기에 사상가인 발터 벤야민은 전체주의 권력이 어떻게 미디어를 장악하는가라는 문제를 ‘대중의 나르시시즘’이라는 관점에서 분석하려고 했다. 하지만 프로이트와 마찬가지로 벤야민도 여명기의 문화산업이 민주주의 국가를 포함하여 장래 모든 나라에서 ‘기능’에 관해서 어떤 신지평을 열게 될 것인지를 예측할 수 없었다.
이 점을 이론화한 것은 프로이트의 친조카인 에드워드 버네이즈였다. 리비도 경제와 숙부인 프로이트가 명명한 것을 잘 활용하면 무한한 가능성을 열 것이라고 버네이즈는 생각했던 것이다. 그것의 결실이 PR이라는 설득 기법이었다. 1930년 무렵, 버네이즈는 무의식 이론을 기초로 편집한 PR기법을 담배 회사인 필립 모리스사를 위해 현장에 적용했다. 확실히 이때는, 프로이트의 눈에는 문명에 대항한 죽음충동이 유럽에서 퍼지고 있는 것으로 비쳐지고 있던 시기에 해당한다. 무엇보다도 프로이트는 미국에 관해 일체 언급하고 있지 않다. 다음과 같은 아주 기묘한 한 구절을 제외하고는 말이다. “<대중의 심리적 빈곤>이라고도 불러야할 상태가 생겨날 위험이 임박했다. 이 위기가 가장 강하게 느껴지는 것은 지도자가 될 인재가 지도자이지 않고 사회의 관계가 오로지 구성원 상호간의 동일시에 의해 생겨날 때이다. 이러한 인재가 지도자라는 중요한 역할을 맡을 필요는 대중이 형성되는 곳에서야말로 특히 클 것이라고 한다.” 이어서 “현재 미국의 문화상태는, 또는 앞에서 말한 것처럼 일어날지도 모르는 문화의 해로움을 연구하기 위해서는 좋은 기회일 것이다. 그러나 나는 현대의 미국 문화를 비판하고 싶다는 유혹을 피하고 싶다고 생각한다. 나 자신도 미국적 방법을 취하려고 하다는 인상을 주고 싶지 않은 것이다.”[지그문트 프로이트, 앞의 책]

리비도적․정서적 빈곤
문화산업의 기능을 진정한 의미에서 분석의 대상으로 삼았던 것은 사상가인 테오도르 W. 아도르노와 막스 호르크하이머로, 이들은 칼 크라우스가 1910년부터 행했던 미디어 비판보다 깊이 파고 들어가 ‘미국식 방법’을 고발했다.
오늘날의 관점에서 보면, 여전히 미진한 부분이 있기는 하지만,[나는 ≪기술과 시간≫(La Technique et le Temps)의 3권인 ≪영화의 시간과 나쁜 존재의 문제≫(Le temps du cinéma et la question du mal-être), Galilée, 2001의 1장에서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의 분석이 어떤 점에서 불충분한가를 지적해 두었다. 칸트 사상의 도식론을 원용하면서 이들은 문화산업이 확실히 칸트주의의 비판을 필요로 하고 있다는 점을 간과했다.] 아도르노 등이 분명히 한 것은 문화산업이 산업전반과 독립된 개별적인 것이 아니라는 것, 또한 라이프스타일의 대중화를 통해서 소비행동을 일정하게 방향짓는 기능을 담당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경제활동은 소비자에게 불필요한 다수의 신상품을 만들어낸다. 원활한 유통은 당연히 어떻게 해서든 확보해야만 한다. 그리하여 과잉생산이나 경제공황의 만성적 위기가 문화산업에서도 생긴다. 시스템 자체를 근저에서부터 살펴보지 않는 한, 위기를 뛰어넘으려면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가 말한 야만 자체를 계속 성장하게 만드는 것 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다.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평화 부흥기에 생산과잉은 전체의 40%에 달한다는 예측을 받아들여 PR이론에 이어 ‘구매동기 조사법’이 과잉생산의 해소를 위해 확립되었다. 당시의 광고 대리점이던 한 회사는 1955년에 다음과 같이 보고했다. “수요와 욕망을 새롭게 만들어낸 동시에, 오래된 것, 구식으로 된 것에 대해 혐오감을 품게 하는 것”을 북미는 자랑해도 좋다고 말이다. 기호와 혐오는 뗄래야 뗄 수 없는 관계이다. 혐오감을 잘 키워낼 수 있으며 기호 그 자체도 저절로 바뀐다. 요점은 얼마나 “밑의 정서”에 호소력을 갖고 있는가이다. 특히 산업계에서 이 방법은 미국내 공장 제품에 대해 어떻게 하면 시민의 구매욕을 높일 수 있을 것인가라는 어려운 질문에 대한 능숙한 해결책이 되었다.[방스 파카르(Vance Packard), ≪비합법적인 설득≫(La Persuasion clandestine), Calmann-Lévy, Paris, 1958.]
프랑스에서도 19세기 이래 적지 않게 저항에 부딪치면서도, 산업 제품의 도입이 조직적으로 진행되어 라이프스타일이 격변했다. 에밀 드 지라드당의 광고회사, 루이 압바스에 의한 통신사의 설립은 그 전형적인 예이다. 하지만 시간 소비 제품이 처음으로 출현한 것은 문화산업(영화, 레코드), 특히 프로그램 콘텐츠 산업(라디오와 텔레비전)이 등장한 후이다. 라디오나 텔레비전 프로그램의 청취자 및 시청자들은 영화와 달리 스피커나 브라운관 앞에 혼자 있기 때문인지, 자기 하고 싶은 대로 스스로 즐기고 있다는 환상을 품고 있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시간 소비 제품을 통해서 개인의 행동은 대중의 행동으로 바뀌며 개인의 ‘내면’까지도 거뜬히 통제할 수 있게 되었다.
‘자유시간’에 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하이퍼 산업사회에서는 인간의 모든 활동영역이 소비자에게 특유한 충동적이고 모방적인 행동으로 가득 채워진다. 세지나 껌처럼 교육이나 문화, 건강도 소비의 대상이다. 중요한 것은 역시 개인 소비라는 환상이 욕구 불만이나 의혹, 파괴본능을 야기한다는 것이다. 텔레비전 앞에서 혼자 시간을 보내고 있으면 자신이 개인 행동을 취하고 있다고 무심코 생각하게 된다. 하지만 실제로는 그 순간에 수십만 명의 시청자가 같은 프로그램을 보고 있다.
산업활동이 지구 전역으로 확대되었다는 것을 받아들이면서 산업계는 규모의 경제의 대규모적인 실현을 목표로 하게 되었다. 소비 행동의 기술적 관리와 균질화는 더욱 중요하게 되었다. 그 역할을 담당한 것이 프로그램 콘텐츠 산업이다. 시간 소비 제품을 마구 사들이고 세상에 넓게 유포시키고 사람들의 시간을 사로잡는다. 포수로 간주된 시간에서 시청자가 생겨나고, 광고주에게 강매하는 상품도 생겨난다.
멜로디나 영화, 라디오, 방송 등 시간의 경과를 주축으로 하는 사물의 본질은 시간 속에 있다. 철학자 에드문트 후설이 ‘유출’이라고 부른 시간인 것이다. 시간은 바뀌고 지나간다. 우리의 의식은 시간적인 사물이 통합하고 있다. 하지만 의식과 마찬가지로, 시간적인 사물도 나타나자마자 금새 사라진다. 1920년의 시민 라디오의 탄생, 1947년의 텔레비전 프로그램의 방영 개시를 경계로, 프로그램 콘텐츠 산업이 우리의 의식의 시간에 딱 들어맞는 사물을 만들어내기 시작했다. 시간적인 사물은 의식의 시간과 겹쳐져 우리의 의식 속에도 집어넣어진다. 오늘날의 문화산업이 발송하는 것은 치약이나 소다, 구두나 자동차를 소비하는 시간을 대규모의 소비자의 의식 속에 집어넣는 것이다. 문화산업이 수익을 올리는 구조는 거의 100% 이런 상태이다.
의식이란 본질적으로 ‘자기’ 의식이며, 이 자기의식을 특이성이라고 한다. ‘나’라고 말로 할 수 있는 것은 자기 자신에게 나만의 고유한 시간이 주어져 있기 때문이다. 철학자 미셸 푸코는 만년에 자기의 테크놀로지에 대한 해명에 착수했다. 하지만 문화산업, 특히 텔레비전은 거대한 동기화(同期化) 장치가 되어서 자기를 손쉽게 쳐부숴버린다. 수만 명, 아니 수십만 명의 텔레비전 시청자가 어떤 실시간 중계 프로그램을 동시에 보고 있는 순간에, 세계 사람들의 의식 속에 같은 하나의 시간 소비 제품이 미끄러져 들어간다. 매일 규칙적으로 같은 시간에, 같은 AV 소비 행동을 반복하게 되면 사람들의 ‘의식’은 최종적으로는 동일한 ‘혼자’의 의식이된다. 결국 누구의 것도 아닌 의식으로 되는 것이다. 가축떼의 무의식은 심층의 욕망을 해방시킨다. 그것을 제지하여 욕망의 심층과 연결시키는 것이 욕망의 역할이다. 그러나 이것은 오늘날 불가능하다. 욕망이 생겨나려면 ‘특이성’이 우선 필요하기 떄문이다.
마케팅 기술은 1940년대에 미국의 산업계에서 실행 단계에 들어갔으며 이후 더욱 더 고도화되었다. 그 과정에서 생겨난 것은 상징적 빈곤과 리비도적․정동적 빈곤이다. 리비도적․정동적 빈곤은 일찍이 내가 본원적 나르시시즘이라고 명명한 것의 상실을 초래한다.
생산과 소비를 ‘동시에’ 장악하여 대중의 행동을 강하게 규정하고 있다는 점에 오늘날의 자본주의가 지닌 장점이 있다. 탈산업사회론의 우화에는 그런 관점이 완전히 누락되어 있다. 개인을 집단과 대립시켜 파악하는 그릇된 의견으로부터 벗어나려고 하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시몽동이 완벽하게 분명히 했던 것은 개인이란 진행되고 있는 하나의 과정이며 존재를 향한 ‘생성’ 과정에 있다고 하는 것과는 정반대의 사태인 것이다. 개인이 마음의 수준에서 개인으로서 성립하려면 집단 속에서 개체를 형성할 필요가 있다. 집단은 개체화 과정에서 빠뜨릴 수 없는 역할을 담당한다. 왜냐하면 어떤 특이성이든 ‘전-개체적 저류’라고 시몽동이 부른 공통의 층으로부터 각각이 각자에게 필요한 것을 길러내기 때문이다.
‘전-개체적 저류’는 몇 세대에 걸쳐 경험이 축적된 것으로부터 생겨난 과거의 유산이다. 특이성은 이로부터 각자에게 필요한 것을 길러내지 않는 한, 그리고 심적인 개체가 그 저류를 서로 공유하여 자기에게 덧붙이면서 바뀌어가지 않는 한, 다음 세대에 그 유산을 물려줄 수 없다. 하지만 각각의 개체가 그 저류에 개별적으로 관련되지 않는다면, 서로 공유한다고 말할 수 없다. 또 개별적으로 관련된다고 말할 수 있는 한에서는, 그렇게 관련된 방식은 타인과는 다른 특이한 것이어야만 한다. 사회 집단은 공통의 저류 속에서 자기를 재인식한다는 의미에서 독자적으로 길러낸다는 의미에서 통시적인 결합체이다.
하지만 프로그램 콘텐츠 산업은 공시성과 통시성의 공존을 모순으로 간주하는 경향이 있다. 하이퍼 싱크로나이제이션, 즉 초동기화를 최우선으로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설령 매스미디어 프로그램이 전-개체적 저류를 만들어냈다고 하더라도, 각각의 개체가 특이하게 그 내용을 우리의 것으로 할 수는 없다. 인류학자인 앙드레 르루와-구랑(Andre Leroi-Gourhan)이 사회․민족적 프로그램이라고 명명한 것은 오늘날 프로그램 표로 대체되었다. 나는 이웃들과 쏙 빼닮은 체험을 하며, 우리는 무리를 이루어 살고 있다.

나르시시즘의 붕괴
후설은 ‘나’를 ‘일차적 파악(rétentions primaires)’이라고 불렀지만, 시간적인 ‘유출’이 만들어내는 의식이다. ‘일차적 파악’이란 의식의 ‘지금’으로부터 의식이 파악하는 것을 가리킨다. 하나의 선율 속에서 어떤 음에 잔향되어 있는 바로 직전의 소리는 나의 의식에 경과음으로서 나타난다. 먼저 울린 소리는 선율 속에 영향을 주며, 지금은 지금 속에서, 선율 속에서 유지된다. 바로 앞의 소리가 이어진 소리와 어떤 관계를 만들며, 음정을 만들어 내고, 이어진 음을 ‘구성’한다. 내가 ‘수용하고’, ‘만들어내는’ 다양한 현상과 마찬가지로 (내가 ‘연주’를 하기도 하고 ‘청취하는’ 선율이나 ‘소리를 내기도’ 하고 ‘귀로 듣는’ 문장, 또는 ‘행하기도’ 하며 사람에게서 ‘받아들이는’ 행위 등), 나의 의식은 본질적으로 일차적 파악으로부터 성립된다.
의식에서의 파악은 ‘선택’을 한다. 나는 파악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파악하는 것이 아니다.[일차 파악은 관계를 형성한다. 예를 들어 선율(멜로디)에서 아르페지오로 연주한 소리의 연속에서 화성이나 음계가 생겨난다. 글 속의 의미론적(sémantiques)․통사론적(syntaxiques) 관계도 마찬가지이다.] 알기 쉽게 반복되는 것이 나타나는 흐름 속에서 의식은 각각의 파악에 고유한 방식으로 선택한다. 똑같은 선율을 두세 번 계속 들으면 어떻게 될까? 내 의식은 바로 그 선율에 대한 것으로 바뀌어 버린다. 일종의 ‘여과’를 통해 선택하는 것이다. 이 여과 행위가 ‘이차 파악’이다. 이차 파악은 기억이 보존하는 일차 파악의 상기이며, 일차파악은 상기를 위한 경험의 토대를 만들어낸다.
의식은 일차 파악과 이차 파악에 의한 여과로 이루어져있다. 하지만 일차 파악과 이차 파악의 관계는 중층적으로 결정된다. 결정에 관련된 것이 삼차 파악이다. 삼차 파악이란 기억의 버팀목인 사물이나 기억 기술과 같은, 흔적을 기록할 수 있는 것이다. 특히 사진이나 녹음, 영화나 비디오, 또 하이퍼 산업 시대의 통제사회의 통제적인 인프라가 되는 디지털 기술이다.
삼차 파악은 예를 들어 알파벳 표기처럼 개인이 마음 내부와 집단 내부의 양쪽에서 개체화하는 과정에서 전-개체적인 저류에 도달하기 위한 버팀목이다. 인간 사회에는 예외없이 이러한 삼차 파악이 발견된다. 개체화를 방향짓는 것이 삼차 파악이다. 개체화란 상징적인 공유이며, 개인의 경험이 흔적에 외재하여, 처음으로 가능하게 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산업화된 경우, 삼차 파악은 통제를 위한 기술로 되며, 상징교환은 심대하게 변질되어 버린다. 생산하는 측과 소비하는 측에 어디까지든 하나의 선분이 그어지며, 다양한 의식 시간이 남김없이 초동기화(超同期化)되어 버리기 때문이다.
사람들의 의식 시간은 엇비슷한 이차 파악이 차지하고 있으며, 마침내 동일한 일차 파악을 선택하게 된다. 모든 것이 더 이상 크게 바뀌지 않게 된다. 사람들은 일부러 자기에 대해 말해야 할 필요도 없으며, 다른 사람과의 만남도 드물게 되어 버렸다는 것을 차차 알게 된다. 집에 틀어 박혀 TV 화면 앞에 앉아 고독으로 내몰리는 것이다. 여가라는 ‘모든 제약으로부터 자유로운’ 시간은 화면을 통해 입수하게 되기에 오히려 더 어려워진다.
위의 상징적 빈곤이 진행된 결과, 나르시시즘이 붕괴하여 정치․경제적인 면에서는 무질서가 격증한다. 나르시시즘은 병리적 상태에 이르는 경우도 있으나 우선 일차적으로는 마음, 욕망, 특이성의 기능을 조건짓는 메커니즘이다.[Ce terme s’applique « à la découverte du fait que le Moi lui aussi est investi de libido, en serait même le lieu d’origine et dans une certaine mesure en demeurerait le quartier général », Malaise dans la civilisation, op. cit.] 마케팅은 생산자 측이 제품을 계속 만들어내는 것을 질리지 않고 조장하며, 소비자 측의 욕구도 처음부터 생겨나 욕구의 재생산, 다양화, 계층화의 과정에 끊임없이 조정역할로서 관여한다. 이때 시스템의 기능의 윤활유가 되는 것은 생산자와 소비자 각각이 품고 있는 욕망의 발현인 ‘실존적 에너지’에 다름 아니다. 노동이나 소비의 리비도는 제3자가 지배하고 이끈다. 본래 노동이란 승화이며 현실 원리였다. 하지만 산업사회에서 분업화된 노동에서는 승화의 쾌락이나 나르시시즘의 쾌락을 맛볼 기회는 감소하며, 타인에게 리비도를 빼앗긴 소비자가 소비에서 쾌락을 느낄 기회도 더군다나 줄어든다. 소비자는 반복강박으로 마비되며 욕망은 어찌할 수 없이 ‘쇠약’해진다.
통제사회는 규제사회이며[Pourparlers, op. cit. 참조.], AV기술이나 디지털 기술 등, 미적인 감성(aisthesis, 그리스어로 경험을 구성하는 감성을 뜻한다.)에 호소하는 기술을 구사하여 의식 시간이나 심신의 무의식을 제어한다. 하이퍼 산업사회에서는 미적 감성을 자극하는 것만이 전면에 나서게 되며, 하이퍼 대중을 조작하여 개인이 마음 속이나 사회에서 맛보는 감각의 경험을 대체해 버린다. 오늘날 경제 전쟁의 무기에서도 무대가 된 것은 상징적 차원이다. 초동기화 탓에 본원적 나르시시즘이나, 개인이 마음과 사회의 양방향에서 개체화해 가는 과정이 완전히 뿌리 뽑혀지며, 사람들의 과거는 균질화되고 그리하여 개체화의 기회는 사라져 버린다. 일인칭 단수형의 ‘나’와 복수형인 ‘우리’의 구별은 상징적으로 취약한 무정형의 비인칭 ‘사람’ 속에서 애매하게 된다. 누구나 똑같은 통제의 대상이 되는 것은 아니다. 그런 의미에서는 마치 ‘우리’가 두 가지 층으로 나뉘어져 있듯이, 감성의 단층을 우리는 살아 있게 한다. 하지만 상황을 뛰어넘는 행동을 하지 않으면, 머지않아 ‘우리의 모든 것’이 음울한 운명을 어찌할 수 없이 겪게 될 것이다. 우리의 아이들은 더욱 더 그러할 것이다.
20세기는 생산과 소비를 둘러싼 환경과 시스템을 최적화한 시대였다. 생산 관리와 투자 관리에서는 정보 컴퓨터 기술이, 소비 관리 및 정치면도 포함한 사회행동 관리에서는 커뮤니케이션 기술이 각각 개발되었다. 오늘날 두 개의 영역은 서로 융합하고 있다. 소리 높여 주창되고 있는 것은 이미 ‘여가 사회’가 아니다. 개개의 인간의 욕구를 ‘개인화’하는 것이다. 일찍이 정신분석학자 펠리스 가타리는 개인이 더 한층 하위로 분할되어 가는 현상이 확대되고 있다고 지적했다. 특이성은 인지과학이나 계측공학을 응용한 기술의 지배 하에서 특수성으로 바뀌어 간다.
이러한 기술은 ‘사용 내용 검색’(user profiling) 등 새로운 수법을 통해서, 프로이트뿐만 아니라 파블로프의 방법론도 원용하여 교묘한 조건부여의 수법을 짜고 있다. 어떤 책의 독자에게, 같은 책을 읽은 독자들은 어떤 책을 읽고 있는가를 알려 주면서 그 사람도 읽고 싶다고 생각하게 만드는 방식이 그 전형적인 예이다. 검색 엔진이 검색 결과 화면의 맨 위에서부터 순서대로 조회 빈도가 많은 사이트를 내거는 것도 사이트 조회수를 더 늘리려는, 사이트 조회율을 고도로 높이는 것을 촉진하는 기술이 되었다.

특이성의 문제
산업 자동화가 생산 공정의 기억 기술의 중추를 차지하게 된 오늘날, 동종의 디지털 기기가 동일한 규격으로 생산라인의 모든 장면을 관리하게 되었다. 마이크로컴퓨터 방식의 제품도, 통신판매로 고객과 공장을 직접 연결하여 다양한 수요에 유연하게 대처하는 방법도, 원격 조작에 의한 공장 생산 관리도, 언제 어디서든 같은 기기, 같은 규격이다. 디지털 기기는 마케팅에도 많은 도움이 되어 소비의 조직화를 추진하고 있다. 벤야민이 상상한 것과는 반대로 하이퍼 대중의 출현과 함께 일어난 것은 대중의 나르시시즘의 광범위한 전개가 아니라 오히려 개인과 집단의 나르시시즘의 대규모 붕괴이다. 이러한 사태가 의미하는 것은 단적으로 “예외자의 파괴”이다. 본원적 나르시시즘을 일소한 결과 도처에서 무리(떼)의 생활방식이 횡행하고 있다.
개인이 마음의 수준과 집단 내의 쌍방향에서 개체화하는 과정에서는 집단의 상상력이나 개체의 다양한 역사가 서로 묶이게 된다. 시간 소비 제품은 대중 규격을 대리품으로서 강요하며, 한 사람 한 사람의 개체의 실천의 특이성이나 개체의 실천에 머무는 예외적인 성격이 조금씩 축소되어 간다. 또한 예외도 하나의 규칙이다. 다만 입으로는 아무 것도 언표하지 않는 규칙인 것이다. 예외는 변칙적인 장면과 조우할 때 처음으로 예외라는 것을 실감할 수 있다. 즉 매뉴얼로 만들 수도, 예측도 할 수 없다. 세부적 차이에는 눈을 감고 무엇에든 대응할 수 있는 규칙을 행하는 것으로는 아무래도 잘 되지 않는다. 오랫동안 예외자를 신으로 귀속시켰던 것도 그 때문이다. 신이야말로 특이한 것은 서로 비교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말하는 규칙 그 자체이며, 규칙을 절대적으로 초월한 존재였다. 그런데 마케팅 덕분에 특이성은 핵심이 빠져 버려, 바라는 대로 비교나 분류할 수 있는, 내용물이 텅 비어 있는 특수성으로 바뀌어 버렸다. 소비의 하이퍼 대중화와 소비 기호의 분화를 통해 리비도 에너지를 농락했던 지금에서는 이제 완전히 다루기 쉬운 존재가 되어 버렷다.
여기에서 문제로 삼고 있는 것은 리비도 경제와는 완전히 반대의 사태이다. 원래 특이성, 예외자만이 욕망의 대상이 될 수 있다. 내게 예외라고 비치는 것만이 나의 욕망의 대상이 된다. 범용성은 욕망하지 않는다. 그저 반복강박만이 범용성을 지향한다. 마음은 에로스와 죽음 충동이라는 서로 끊임없이 뒤섞이는 두 가지 경향으로 이루어져 있다. 문화산업과 마케팅은 소비 욕망의 발달을 높이는 것을 목표로 내걸었다. 하지만 실제로는 죽음 충동을 강하게 하고, 반복강박적인 상황을 만들어내자 제멋대로 하기 시작했다. 문화산업과 마케팅은 삶의 욕망에 있어서 큰 장벽이 된다. 무엇인가를 욕망하는 것이 본래의 의미에서의 소비 행동의 기본이라는 점에서 보더라도 위에서 언급한 과정은 자멸적이다. 철학자 자크 데리다의 표현을 따르자면 자기 면역 이상이라고 말해도 좋을 것이다.
어떤 사물의 특이성을 내가 욕망하는 것은 그 물건이 나라는 특이성을 거울처럼 비추기 때문이다. 나 자신도 아직 알지 못하는, 나의 특이성이 무엇인지를 사물이 명확하게 해 주는 것이다. 자본이 우리들의 행동을 하이퍼 매스화한다면, 자본은 당연히 욕망의 하이퍼 매스화를 목표로 할 것이다. 개인도 어쩔 수 없이 무리가 되어서 살아갈 수밖에 없다. 그런 논리에서 보면, 예외자는 전적으로 타도해야 할 적이 될 것이다. 이 점은 산업 민주주의 덕분에 가축 사회가 출현할 것이라고 갈파한 니체가 이미 예측하고 있던 것이다. 산업 사회의 정치구조가 품은 진정한 곤란인 것이다. 예외자에 대한 욕망을 투영하는 스크린을 엄중한 관리 하에 두었을 때 타나토스[죽음]의 논리, 즉 엔트로피의 그림자가 세계를 넓게 에워싸기 시작한다. 타나토스란 질서가 무질서에 종속되는 것을 의미한다. 타나토스는 열반의 상태이며, 모든 것이 평준화로 향한다. 예외자가 ‘욕망의 욕망하는’ 대상인 한, 타나토스는 모든 예외자를 모조리 부정하는 것과 동의어이다.
이상에서 지적한 문제의 근본부분이 프랑스가 주창하는 ‘문화적 예외’[WTO 창설에 도달한 우루과이 라운드 이래, 문화산업을 무역 자유화의 예외로 할 것을 주창해 온 프랑스 정부의 입장을 가리킨다.] 논의에서는 유감스럽게도 전혀 보이지 않는다. 어떤 조치를 서둘러 강구해야만 한다고 하지만, 천박한 정치구호 때문에 초점을 희미해질 뿐이다. 이 논의의 주창자들은 예외라는 문제를 좁은 시야에서만 고찰할 뿐, 하이퍼 산업사회의 진전이나 그 귀결인 상징적 빈곤으로 인해 생기는 수많은 과제에 제대로 임하려는 자세도 보이지 않는다. 예외를 둘러싼 문제는 내일의 지구화 사회에서 가장 중요한 과제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화적 예외’라는 논의는 예외 조치를 국제통상 협정의 틀에서 폐기할 것을 요구하는 이러저러한 논의와 마찬가지로, 지역이나 산업 부문, ‘이익 단체’의 문제만을 채택할 뿐, 본질적인 문제에는 입을 굳게 다물어 버린다.
이것은 문화부가 관할하는 이른바 ‘문화’의 미래에만 한정되는 것이 아니다. 하이퍼 산업사회는 일상생활의 존재방식에 아주 상세하게 지시를 내리며, 일상생활을 모든 측면에서 압도하고 있다. 여기에서 산업사회의 생태계가 품은 최대의 불안 요인이 있다[또한 ≪우연의 철학. 엘리 뒤렝과의 대화≫(Philosopher par accident. Entretiens avec Elie During), Galilée, Paris, 2004을 참조]. 인간 집단이 전에 없었던 규모의 대량 파괴를 초래하는 방법을 손에 넣었기 때문에, 인류의 정신이나 지성, 정동이나 감성은 전면적인 위기에 직면하고 있다.
리비도 붕괴의 원인인 혼란은 정치의 영역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 정치가들은 자신들을 상품으로 판매하기 위해서 정치에 마케팅 기술을 도입했다. 그 점에서 투표자들은 다른 상품에 싫증을 내듯이 깊은 혐오감을 느끼고 있다.
시민과 시민 대표자들은 지금이야말로 눈을 떠야 한다. 특이성의 정치가 지닌 문제의 비중은 지금 결정적인 것으로 되었다. 특이성의 정치가 없으면 정치에 미래는 있을 수 없다. 특이성의 정치만이 극우 내셔널리즘이나 모든 원리주의의 발호를 막을 수 있다. 장래의 하이퍼 산업사회에 욕망을 복권시키는 것. 혼란의 확대를 미리 저지하는 것. 이것을 위해서는 정치 스스로가 욕망을 솔선하여 만들어 내지 않으면 안 된다. 3월 28일의 통일지방선거에서 현정권에 반대표를 던지고, 어떤 구체적인 정책 목표를 갖고 있지 않은 정당에게 비판의 소리를 들려주었던 것은 리비도 경제의 전면적인 파괴를 우려하여 전혀 충족될 수 없는 정치적 욕망을 갈망했던 사람들이다. 말할 것도 없이 아리스토텔레스가 시민 사이의 관계를 규정하면서 말했던 ‘우애’는 리비도 경제라는 나무에서 향긋하고 잘 익은 과실로 결실을 맺은 것이다.
2002년 4월 21일의 대통령 선거부터 2004년 3월 28일의 통일지방선거에 이르기까지 넓게 퍼진 운동에서는 정치계급 전체가 상징적․심리적 빈곤, 그리고 불가피하게 정치적 빈곤을 상대로 하여 단호하게 싸우는 것을 목표로 내걸었다. 특히 문화와 연구에 관한 문제에서, 정부가 괴멸에 가까운 패배를 당한 것은 우연이 아니다. 문화는 부차적인 정치적 문제 등이 결코 아니며, 바야흐로 정치의 진수이다. 리비도와 마찬가지로 문화야말로 산업이 궁극적으로 빼앗으려고 하는 요새이다. 때문에 정치는 무엇보다도 우선 문화의 정치가 아니면 안 된다. 이것은 문화부가 문화로 생계를 영위하는 다양한 사람들의 기대에 제대로 부응할 수 있는가 아닌가라는 의미에서가 아니다. 하이퍼 산업자본주의는 사회조직이라는 개체가 마음과 집단의 양 측면에서 개체화하기 위한 기반을 산산조각으로 파괴해 버린다. 문화의 정치는 그 파괴에 대해서 근본적인 비판을 들이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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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베르나르 스티글러'에 관한 몇 개의 글이 소개되었다.
중대신문에 실린 <베르나르 스티글러, 상징계에 맞서는 기술철학자> http://www.cauon.net/news/articleView.html?idxno=15392 를 비롯하여, 한겨레신문에 약간 선정적인(?) 제목으로 수록된 글, <은행강도 출신 철학자의 소비욕망 탈출전략> http://www.hani.co.kr/arti/culture/culture_general/346563.html 등이 그것이다.
알다시피 김재희 등이 옮긴 <에코그라피>(자크 데리다 외, 민음사, 2002)는 데리다와 스티글레르(스티글러)가 나눈 대담이다.
그렇지만, 아직은 그의 기술철학을 비롯하여 프랑스의 기술철학의 흐름에 대해 전반적인 소개가 미진한 편이다. 이하에서는 이런 점을 감안하여조금 더 자세하고 길게 스티글레르의 기술철학을 중심으로 프랑스의 기술철학의 흐름을 개괄해 볼 작정이다. 다른 글과 달리 이것은 인터넷 상에서 직접 쓰는 것이기 때문에, 수정과 교정을 계속 할 것이고, 따라서 완성되려면 며칠은 족히 걸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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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베르나르 스티글레르라는 1990년대부터 활약하고 있는 프랑스의 기술철학자의 논의를 소개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프랑스에는 20세기로만 한정하더라도, 과학인식론에 속하는 캉길렘(깡길렘)을 비롯하여, 스티글레르에게도 큰 영향을 미친 질베르 시몽동, 나아가 현대 미디어 기술을 리얼타임이라는 그 특징으로부터 비판적으로 파악하는 폴 비릴리오 등, 기술에 관해 독창적 논의를 전개하는 몇 사람의 철학자, 사상가가 존재했고, 존재한다. 우리들은 물론 그들의 기술에 관한 사고를 경시할 작정은 아니지만, 이하의 세 가지 점에서 스티글레르의 기술철학을 이 글에서 독자적으로 다룰 만한 값어치가 있다고 생각한다. 첫째로, 그가 현대의 디지털 기술까지 논의의 대상으로 삼고 있다는 점이다. 둘째로, 초기 데리다를 이론적 기반으로 삼음으로써 다른 철학자에게는 없는 독자적 관점이 포함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셋재로는, 한국에서는 아직 그의 작업이 깊이 있게 소개된 것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우선 이 철학자에 관해 앞에서 언급한 두 개의 글에서 간략하게 소개되기는 했지만, 어쨌든 이 글의 목적에 맞게 간단하게 재정리해 보자. 베르나르 스티글레르는 1952년에 태어나 국립시청각연구소(INA)의 소장을 거쳐, 음향음악연구소(IRCAM)의 소장을 역임했고, 현재 퐁피두센터 문화개발부 디렉터로 재직중이다. 나아가 '미디올로지Mediology> 운동의 이론적 지주의 한 명으로도 활약하는 등, 다방면에 걸쳐 활약하고 있다. 한겨레의 선정적 제목의 근거가 되었듯이, 그는 1978년부터 83년까지 감옥에 수감된 경험도 있다.
그런데 그는 90년대에 들어서 데리다, 사라 코프만, 필립 라쿠-라바르트, 장-뤽 낭시가 시작한 총서 La philosophie en effect에서 <기술과 시간>이라는 제목의 시리즈 저작물을 간행하기 시작했다. 원래 <기술과 시간>은 총 4권으로 예정되어 있었으나 3권으로 끝났다. 그의 논의의 대부분은 초기 데리다의 논의를 이론적 기반으로 삼으면서, 후설이나 하이데거의 현상학, 선서학자인 앙드레 루르아-그랑의 학설들, 질베르 시몽동의 개체화론과 기술론 등의 비판적 검토를 통해서, 지금까지의 목적과 수단에 속박되어 왔던 기술관을 비판하며 새로운 기술관을 제시하는 것과 더불어, 현대기술과 과거의 기술들 사이의 다양한 차이를 묻고 있다.
이 글에서는 다음 순서로 논의를 전개한다. 우선 제1절과 2절에서는 스티글레르의 기술철학의 이론적, 원리적 측면을 다룬다. 구체적으로는, 제1절에서 고고학자 르루와-구랑(Andre Leroi-Gourhan)의 학설이 지닌 역설(패러독스)를 살피고, 이어서 제2절에서는 스티글레르가 그 역설의 해결을 위해 데리다의 '차연'을 어떻게 확장시켰는가를 살핌으로써, 그의기본적 발상이 어떤 것인가를 부각시키려고 할 것이다. 또한 제2절의 마지막에서는 스티글레르의 이러한 확장이 데리다의 사고, 철학에 대해 어떤 장점을 갖고 있는가, 또는 반대로 어떤 약점을 지니고 있는가를 간략하게 살필 것이다. 이어서 제3절은 제1절과 2절의 이론적 측면의 적용, 응용편에 속한다. 거기에서는 스티글레르가 구체적인 기술적 대상에 관해 어떤 생각을 갖고 있는가를 검토한다. 특히 미디어 기술의 변화(문자에서 아날로그, 디지털로의 변화)에 관한 그의 생각을 중심으로 다루고자 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제4절에서는 그의 논의의 철학적인 문제점을 지적하고, 동시에 전망도 살펴볼 생각이다. (하지만 이건 생각일 뿐이다. 잘 될지는 모른다.)

1. 이론적 측면(1)
-- 르루와-구랑의 역설과 아포리아

스티글레르의 최대의 표적은 로고스 또는 에피스테메/테크네라는 서양철학에서 볼 수 있는 전통적인 대립이다. 철학사적으로는 플라톤에서 철학자의 로고스를 도구화하는 소피스트가 비판적으로 다루어져 왔기 때문에, "철학적 에피스테메/소피스트적 테크네"(주4)라는 구분 및 앞의 항의 우위라는 이항대립이 성립하는데, 이 착상은 다양하게 변화하면서도 20세기의 철학, 학문들에도 여전히 잔존하고 있다고 간주된다. 예를 들어 <포스트모던의 조건>(1979)를 쓴 리오타르(료타르)조차도, 사고, 에크리튀르에 대해 텔레그라피를 대립시킨다는 형태로 남아 있으며(주5), 나아가 90년대 전반까지의 인지과학의 기본적 아이디어에서조차도, 종이 등의 기록매체를 무시한다는 형태로 잔존해 있다고 한다.(주6) 그러므로 여기에서는 20세기의 대표적 고고학자이자 스티글레르가 <기술과 시간>의 제1권인 <에피메테우스의 과오>에서 상당한 쪽수를 할애하여 검토하고 있는 앙드레 르루와-구랑의 인류발생의 학설을 다뤄보도록 하자. 르루와-구랑도 인간과 기술 사이의 강한 결합/연결을 긍정하지만 앞에서 말한 대립을 여전히 남기고 있다. 그리고 스티글레르가 보여주는 것은 이러한 에피스테메/테크네의 대립이 사실은 역설의 불충분한 해결에서 유래한다는 것이며, 또한 그 역설을 진정으로 해결하기 위해서는 '차연'이라는 데리다가 만들어낸 개념이 기술의 영역에서 고려되어야만 한다는 것이다. 이하에서는 그의 논의 과정을 따라 나아가 보자.
앙드레 르루와-구랑은 1964년과 65년에 <몸짓과 말>(Le Geste et la Parole, Paris: Albin Michel, 1964)이라는 두 권으로 된 책을 출판했다.(주7) 여기에서 탐구되는 테마는 척추동물의 진화, 원인(原人)/구인(舊人)/신인(新人)이라는 인류의 진화, 나아가 인간사회의 변천과 도래할 인간의 운명까지 다방면에 걸쳐져 있는데, 여기에서 다루는 것은 그가 오스트랄란트로푸스나 진쟌트로푸스(*주8)로부터 원인(原人), 그리고 구인(舊人)으로의 진화를 말한 부분, 즉 인류의 발생에 관해 논한 부분이다. 우선 르루와-구랑은 이 책의 1장에서 지금까지 서술된 다양한 인간상을 언급하는 가운데, 루소의 <인간불평등기원론>에 등장한 "자연인"이라는 허구를 비판한다.(*주9) 즉, 기술을 사용하여 타락한 인간 이전에, 자연상태에 놓인 인간이 존재했다는 허구를 비판하며, 바꿔 말하면 이것은 루소에게 존재하는 퓌시스/테크네의 대립에 대한 비판이기도 하다. 스티글레르도 이러한 루소의 허구를 검토하는데, 스티글레르에 따르면 루소의 이러한 발상은 퓌시스/테크네에 관한 아포리아로 이끌게 한다. 우선 이 아포리아가 무엇인지 간략하게 살펴보자. 왜냐하면 르루아-구랑도 나중에 같은 아포리아로 이끌리게 되기 떄문이다.
루소는 "자연인"을 어디까지나 필요한 '허구'로 여기지만, "자연인"을 규정할 때 두 발로 보행하는 것까지 배제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 조건은 인간의 기원에 존재하는 자연인이라는 그의 규정과는 양립하기 힘든 의미를 갖게된다. 말하자면 기원부터 인간이 두 발로 보행을 하고 손을 동물의 발 역할로부터 해방한다는 것은 또한, 인간이 손으로 '조작'한다는 것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손이 조작하는 것은 도구, 용구이다. 루소는 기술을 사용하게 된 인간의 상태를 타락이라고 한탄하며, 기술로부터 해방된 자연인을 인간의 기원으로 상정하지만, 이 상정으로부터 도구나 용구라는 기술을 완전히 내쫓을 수는 없다. 이것이 루소의 아포리아이다.(*주 10)
그리고 퓌시스와 테크네를 대립시킨 루소에 반하여, 르루와-구랑이 보여주고자 하는 것은 "직립상태의 골격, 기술, 언어, 사회 사이의 본질적인 연결"이다. 그는 기술을 인간의 피하기 힘든 특징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스티글레르는 르루와-구랑의 기본적인 착상에는 어떤 역설이 있으며, 그것을 무리하게 없애려고 함으로써 그 역시 결국은 루소와 동일한 아포리아로 귀착된다고 비판한다. 그 역설은 "외화"의 역설이라고 말해지며, 대략 다음과 같은 구조를 갖고 있다. 르루와-구랑은 석기의 등장을 인간의 등장의 징표로 간주한다. 그 때문에 "도구, 테크네가 인간을 발명한 것이지 인간이 기술을 발명한 것은 아니다."(*주11)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그는 "인간은 도구를 발명함으로써 테크놀로지적으로 자기를 <외화>함으로써 자기를 발명한다"고 생각한다. 즉, 여기에서 인간은 "내부", 어떤 내면을 갖춘 것으로 간주되며, 그것이 외화된다고 생각되는 것이다. 도구에 의해 발명된 인간의 "내부"가 자기를 "외화"하여 도구를 발명한다는 역설이 여기에 있다. 도구가 인간을 발명하는가, 인간이 도구를 발명하는가는 결코 결정될 수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르루와-구랑은 이러한 역설을 어떻게 피하려고 하는가? 르루와-구랑이 이를 위해 제출한 생각은 바로, "[석기를 최초로 발명한] 진쟌트로푸스의 기술은 반(半)-동물학적이다."(*주12)라는 것이다. 즉, 진쟌트로푸스의 기술은 아주 단순한 의식에 의한 선취(완성되게 될 돌의 형태의 선취)의 산물이자만, 대다수는 고릴라나 침팬지 등과는 다른 새로운 대뇌피질의 조직의 외화에 대한, 즉 그 새로운 대뇌피질의 외부세계에 대한 대응물에 불과하다고 그는 상정한다. 실제로, 그가 오스트랄란트로푸스나 진쟌트로푸스, 원인, 구인이라는 진화 과정에서 추구하고자 한 것은, "[대뇌피질의] 새로운 조직화와 그 이론적 귀결"로서의 "기술성과 그것이 포함하는 사회의 형성"(*주13)이다. 그리고 이렇게 아주 단순한 미래의 어떤 상태로의 선취가 있지만, 이제 대뇌피질의 새로운 조직화의 "외화"로서 상정되는 단계의 의식을 그는 "기술적 의식"이라 부르며, 보통 우리들이 말하는 의식이나 "창조적 의식"과 구별한다. 나아가 이 선취는 보다 고도화되고 보다 복잡한 석기를 만들게 된 인간으로서 원인(原人)이 언급되는데, 아직 원인의 단계에서도 그 석기는 새로운 대뇌피질의 대응물로 간주된다. 그리고 대뇌피질의 조직화가 완성된 단계, 즉 우리들에게까지 이르는 그 조직에 크 변화가 발견되지 않는 인간이 구인이다. 구인에게서 비로소 우리들과 동등한 의식이 산출된다. 그 이후, 기술의 조작과 새로운 대뇌피질의 조직화가 대응하는 것은 없을 것이다. 구인은 "창조적 의식"을 손에 넣었다
그러나 우리들은 여기에서 어떤 친숙한 대립을 보게 되지 않는가? 여기에서는 오스트랄란트로푸스나 진쟌트로푸스, 나아가 원인이 지니는,단순한 선취밖에는 할 수 없고 대부분은 대뇌피질의 조직에 의해 규정된 "기술적 의식"과, 구인이 지닌 반성과 상징을 수반한 "비기술적 의식"이 대립한다. 즉, 결국에는 "진쟌트로푸스의 기술은 반-동물학적이다"라는 형태에서의 앞의 역설의 해결은, 그를 호모 파베르와 호모 사피엔스라는 대립으로, 즉 테크니/에피스테메라는 친숙한 대립 도식으로 끌고가 버리는 것이다. 더욱이 여기에는 앞의 루소와 완전히 똑같이, 기원에 얽힌 아포리아가 생겨난다. 루소의 착상이 퓌시스로부터의 테크네의 발생에 얽힌 "최초의 기원"의 아포리아로 이끌리게 된다면, 르루와-구랑은 테크네로부터의 에피스테메의 발생에 얽힌 "제2의 기원"의 아포리아로 이끌린다.

"루소가 육체적인 것에 덧붙여져 왔다고 보았던 것[즉 기술]은 이미 실제로 최초의 기원보다 이전에 존재했다. ... 그런데 '제2의 기원'에 관해서도 이와 똑같이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제2의 기원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하자면 기술적 차이화는 오스트랄란트로스부터 이미, 완전하고 전체적인, 또한 조작적으로 다이나믹한 그러한 선취를 상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 반성을 수반한 지성은 기술적 지성에 덧붙여지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이미 기술적 지성의 배경에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주14)

르루와-구랑이 이러한 아포리아에 이끌리게 되었던 것은 최초의 "외화의 역설"을 매끄럽게 해결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 역설은 어떻게 해결될 수 있는가?

2. 이론적 측면 (2)
-데리다의 차연은 어떻게 확장되는가
스티글레르의 독창성, 그것은 이 역설을 해결하는 설명원리로서 '차연'을 도입하는 것에 있다. 우선 간단히 '차연'에 관해 설명해 두자. '차연'은 초기 데리다의 핵심어 중 하나이며, 다양한 이항대립(파롤/에크리튀르, 주관/객관 등)이나, 소쉬르의 기호론에서의 시니피에(기의), 시니피앙(기표)의 차이 등을 산출하는 운동으로 간주되며, 나아가 또한 시니피에(개념)의 차이적 성격을 산출하는 것이기 때문에, 어떤 특정한 개념의 화자/독자에게 완전한 자기현전을 무한하게 지연시키는 것으로 간주된다. 그리고 '차이'와 '지연'을 모두 산출하는 운동을 가리키기 위해 데리다가 만들어낸 조어가 바로 '차연'la differance이다.(*주15) 간략하게 말하면, 차연이란, 모든 차이들(기호체계 내의 차이, 다양한 이항대립 등)을산출하며, 그 결과 개념의 자기에의 현전을 무한하게 지연시키는 운동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특히, 이 운동이 능동/수동 또는 주체/객체 등의 대립도 산출하기 때문에, 인간 주체가 능동적으로 어떤 객체






* 주8 : 보통은 이 명칭보다는 오스트랄로피테쿠스Australopithecus라는 명칭에 친숙한 사람들이 많은 것이다. 그런데 오스트랄로피테쿠스나 진쟌트로푸스 등은 오스트랄로피테키네('남방원숭이과'의 뜻)는 이름 아래에 분류되기 때문에 '인간'이라는 함의를 지닌 오스트랄란트로푸스('남쪽에서 발견된 인간'이라는 의미)라는 명칭을 사용하는 것을 르루아-구랑은 더 좋아한다.(르루아-구랑, Le Geste et la Parole, Paris: Albin Michel, 19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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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앙드레 르루아-구랑에 관해서는 국내에 소개된 바가 거의 없다. (기술철학적인 의미에서는 아니지만) 그나마 대략 언급하고 있는 것이 다음 글이다. http://artspacec.com/sub02/past_04.php 한편, 르루아-구랑에 관해서는 짤막하게 언급하나 클라스트르와 관련해서 정리가 잘 된 글로는 다음을 보라. http://blog.aladdin.co.kr/780426173/2555694


Posted by 상겔스 상겔스

Simondon au pied du mur

Article paru dans Critique, n°706, mars 2006.

A propos de :
Gilbert Simondon, L’Invention dans les techniques. Cours et conférences, édition de Jean-Yves Chateau, Paris, Seuil, 2005, 348 p.

Deleuze l’avait bien vu : avec sa philosophie des techniques, « ce que Gilbert Simondon élabore, c’est toute une ontologie » (1). Mais pourquoi faut-il en passer par la machine de Gramme ? Pourquoi la turbine Guimbal, avec ses ailettes de refroidissement ? Pourquoi les techniques d’aérage et de transport dans les mines, la construction des voûtes, le transformateur électrique, la roue à eau ou le moteur à gaz ? La réponse est simple : qu’on prenne goût à ces « travaux pratiques », à ces descriptions d’ustensiles, d’appareils et de machines accompagnées de leurs planches de dessins, ou qu’on leur préfère les développements plus abstraits confiés aux parties récapitulatives, il n’y a pas d’autre moyen d’éprouver la consistance d’une intuition ou d’un concept que de travailler sur pièces, en suivant le fil des exemples. Il n’y a d’ailleurs pas de sens à parler des techniques en général, ou alors il s’agit d’autre chose - de l’homo faber, du « phénomène technique », ou encore de la fameuse « essence de la technique » à laquelle continuent de se référer bon nombre de discours de déploration. Pour que la pensée ne tourne pas à vide, il faut que quelque chose résiste. Il faut des objets qui vous arrêtent et vous forcent à les suivre. Et Simondon demande justement : qu’est-ce qu’un mur ?

La route et le mur : questions de méthode

Peut-on considérer un mur, un poteau, un chemin, comme des machines ? Seuls les paresseux verront là une question de mots. Il faut se mettre au travail pour voir ce qu’on y gagne, remarquer d’abord qu’« un poteau fléchit et revient élastiquement à sa position première » (p. 159), comme la plupart des constructions fonctionnant par flexions et tractions. Un poteau « travaille » donc, au sens mécanique, tout comme les murs, les immeubles ou les ponts. Un poteau est une « machine passive ». Simondon ajoute laconiquement : « un chemin aussi ». Libre à chacun d’imaginer le discours de la méthode qui choisirait de se régler sur une pareille idée. Un texte plus tardif fournit pourtant quelques éclaircissements au sujet de ce curieux chemin-machine. « Une voie de passage, pour exister selon la compatibilité interne, doit être douée de cohérence et de stabilité en tant qu’objet physique (imperméabilité, répartition égale des charges sur le terrain…) et la recherche de cette compatibilité interne est ce qui apparaît en premier lieu comme le but de l’invention consciente et volontaire… » (p. 298). Descartes savait bien qu’il n’est pas nécessaire de savoir où l’on va pour tracer un chemin (il voyait même là le principe d’une morale « par provision » : si vous êtes perdu en forêt, le mieux est encore d’avancer tout droit) ; mais encore faut-il s’assurer que le chemin soit viable en lui-même. L’invention concerne le tracé (en fonction des contraintes externes imposées par le mode de parcours, le relief et la composition des terrains), mais tout autant la consistance interne de la route. Et si la voie romaine est conçue comme un édifice réalisé bloc par bloc, misant sur la résistance des assises, nos routes modernes constituent des ensembles élastiques et continus, à la fois souples et imperméables. Chacune a sa manière de durer : « En vieillissant, la route romaine se dénivelle dalle par dalle tandis que la route contemporaine se déséquilibre en longues ondulations ou en plis. » La cohérence interne qui fait de la route une construction consistante et durable implique ensuite un « système de transfert » entre l’être vivant et son milieu : « la route, en tant que chaussée, développe autour d’elle, pour se raccorder au milieu sauvage, des médiations supplémentaires telles que ponts, viaducs, tunnels, haies d’arbres, dispositifs contre les avalanches, plantations préventives, parfois à de grandes distances, comme des postes avancés ». À mesure qu’il s’étend, le réseau des ouvrages d’art contribue ainsi à sa propre conservation et amélioration. Le développement de la cohérence interne de l’objet étend la portée du couplage entre le milieu et l’activité humaine, lequel soutient en retour, à travers différents relais, la consistance de l’objet. Les techniques de la route et du chemin tiennent lieu, plus généralement, de métaphore ou de paradigme pour les voies imprévisibles de l’invention et du progrès techniques. Inventer consiste à suivre le développement « naturel » d’une situation problématique où les éléments, en s’appuyant les uns sur les autres, entrent pour ainsi dire en résonance et se renforcent mutuellement (2). Première règle d’une méthode qui n’a déjà plus grand chose à voir avec celle des dénombrements et des chaînes de raisons : « Ce n’est pas chaque objet créé qu’il faut considérer à part des autres, mais l’univers de médiation qu’ils forment et en lequel chacun sert partiellement de moyen aux autres. » (p. 299-300). Quelques réflexions suscitées par un pan de mur valent mieux ici que les radotages scolaires sur la rationalité technicienne et le projet cartésien de se rendre « comme maître et possesseur de la nature » : « Descartes pense la construction d’un immeuble comme celle d’une machine simple, c’est-à-dire comme l’organisation d’un système linéaire de transfert par étapes ; le roc supportant les fondations, le certum quid et inconcussum, est transféré par assise jusqu’aux combles ; la construction vaut la plus faible de ses assises, comme une chaîne vaut ce que vaut le plus faible de ses maillons ; ce mode segmentaire et additif de construction s’oppose au système des parements enserrant un blocage, qui peut donner naissance à des composantes horizontales provoquant un détriplement de la muraille (mur "soufflé") ; autrement dit, un mur ne peut être défini comme un couple de forme et de matière mise en forme : il se produit un travail des éléments les uns par rapport aux autres. » (p. 160).

Du mode d’existence des objets techniques (3) montrait déjà que les objets et les réseaux techniques sont le siège de processus d’individuation aussi réels, c’est-à-dire aussi concrets, que ceux qu’on observe dans les organismes vivants. Mais l’individuation, comme le rappelle Deleuze, n’est pas « coextensive à l’être » (4) : elle doit être « situable, déterminable par rapport à l’être ». Et si l’enquête ouverte par la thèse de doctorat prend toute son ampleur dans les livres suivants, jusqu’à L’Individuation psychique et collective (5) qui ambitionne d’embrasser les grandes formes du rapport de l’homme au monde et à la culture, envisagés du point de vue physique, vital, et psycho-social, il reste que toute reprise générale des thèmes simondoniens qui ne repart pas des configurations singulières où naissent les problèmes risque de donner lieu à une pataphysique indigeste où les mots magiques de « transduction », de « métastabilité » ou d’« allagmatique » viennent habiller de robustes évidences touchant aux rapports de l’individuel et du collectif dans la nature, l’art et la politique. Le meilleur remède à cette tentation est sans doute de lire Simondon. Durant les quelques années où il fut professeur de philosophie au lycée de Tours, il eut aussi pour charge d’enseigner la physique. On rapporte qu’il fit alors construire par une de ses classes un prototype de téléviseur. Plus tard, dans ses livres comme dans ses cours, il n’hésitait pas à entrer dans l’épaisseur des réseaux techniques, dans la durée propre des objets et de leurs lignées évolutives. Il faut le suivre dans les méandres de ses études de cas, il faut rejoindre la classe, ou rester à la porte. Le recueil édité part Jean-Yves Chateau complète utilement le corpus déjà publié en réunissant un cours d’agrégation donné en 1968-1969 sur « l’invention et le développement des techniques » (le thème du concours, cette année-là, était « la science et la technique », et Simondon revient à cette occasion, dans quelques pages denses et claires, sur la grande question de l’insertion des techniques dans la nature), une conférence donnée en 1971 sur « l’invention dans les techniques », mais aussi des extraits de textes plus spécialement consacrés aux aspects psychologiques de l’invention : « Imagination et invention » (1965-1966), « La résolution des problèmes » (1974), « Invention et créativité » (1976). On se doute qu’un des enjeux importants de ces textes est de voir comment s’y concilient, précisément, l’ontologie des objets techniques et cette psychologie de l’invention. On se souviendra, à cette occasion, qu’à l’Université de Paris V à laquelle il fut rattaché de 1963 à 1983, Simondon avait fondé et dirigé un centre de recherches au titre pour le moins intriguant : le « laboratoire de psychologie générale et technologie ». De quoi s’agissait-il ?

Qu’est-ce qu’un objet technique ?

Jean-Yves Chateau a raison de le rappeler dans la longue introduction qui ouvre ce recueil : le souci de l’invention, chez Simondon, n’est pas une manière de dramatiser l’histoire des techniques, c’est une véritable méthode de recherche et d’analyse - mieux, un critère de ce qui est proprement technique, de ce qui fait de la technique « un ordre original de réalité » (p. 14). Aussi l’invention dans le domaine des techniques ne relève-t-elle pas à proprement parler d’une investigation psychologique « au sens habituel du terme », comme le précise Simondon (p. 332). Elle ne se confond pas avec la « créativité » de l’inventeur au travail ; elle ne peut apparaître que rétrospectivement, dans les gestes matérialisés, stabilisés en procédés, dans les objets inventés et les indices matériels de leur élaboration (schémas, prototypes, etc.). On ne lit pas à livre ouvert dans l’esprit des inventeurs : l’esprit est une boîte noire. Qu’il s’agisse du fil à couper le beurre ou de la turbine Guimbal, l’invention doit se lire dans les « traces ». La psychologie de l’invention technique suppose donc une forme d’archéologie, et le sujet de l’invention, qu’il soit individuel ou collectif, laborieux ou génial, est toujours un sujet reconstruit à travers ses objets - un sujet technologique plutôt que psychologique. Ainsi la psychologie se confond finalement avec une phénoménologie des objets techniques dont les chemins ne cessent de recroiser ceux de la technologie et de l’histoire des techniques. Mais elle n’est pas séparable non plus d’une ontologie qui interroge le « mode d’existence » de l’objet technique à partir de ce qui fait proprement sa technicité (6). On objectera peut-être ici qu’à moins d’être technicien ou technologue, nous n’avons quasiment jamais affaire à des « objets techniques », mais d’emblée à des ustensiles ou à des machines dont le mode d’être n’est pas séparable de modes d’emploi ou d’usages particuliers. Il y a trois manières de répondre à cela. D’abord, l’objection concède à Simondon le point essentiel, à savoir que les objets techniques n’ont pas l’évidence qu’on leur prête habituellement. À strictement parler, nous ne savons pas ce qu’est un objet technique ; nous ignorons ce qu’il y a de spécifiquement technique dans les objets artificiels dont nous usons le plus souvent sans y penser. L’objet technique est-il d’ailleurs un objet ? Les catégories ordinaires qui nous servent à déployer les modes de l’objectivité ne nous masquent-elles pas l’essentiel ? Ensuite, au niveau fondamental où Simondon prend les choses, le point de vue de la fonctionnalité ou de l’utilité nous détourne de ce qui est proprement technique. L’objet technique n’est d’ailleurs pas nécessairement un outil ou un instrument : il peut être un ustensile, ou une machine présentant des degrés de complexité variables. Or un balai, un aspirateur, peuvent bien servir tous deux à ramasser de la poussière, cet usage commun ne les rapproche pas davantage que le fait de voisiner dans un placard. Enfin, si l’outil et l’instrument remplissent en effet une fonction médiatrice, une fonction de couplage entre un organisme et son milieu, l’essentiel pourtant n’est pas dans ce couplage et les diverses fonctions qu’il remplit : fonction de prolongement (cas de la pince à long bec), fonction de transformation (bras de levier de la pince), fonction d’isolement (pince gainée). Leroi-Gourhan, parmi d’autres, a produit des descriptions et des classifications précises des formes fondamentales de la médiation opérée par l’outil. Cependant, tout reste à faire pour ce qui est d’isoler les critères de la « technicité » et de cerner la nature de l’objet technique. Car « la fonction relationnelle n’est pas la seule : même au niveau le moins élevé, les objets techniques ont une logique interne, une auto-corrélation sans laquelle ils ne pourraient exister » (p. 91).

L’idée est simple. Une pièce du meilleur métal, capable de concentrer avec le minimum de perte l’action du bras et de la main sur la surface d’une tête de clou, jointe à un manche excellent, offrant une prise idéale, ne seraient d’aucune utilité et ne feraient qu’un médiocre outil s’ils ne s’emmanchaient pas bien. Ce qui compte dans le marteau, du point de vue de son être technique, n’est pas tant le service qu’il rend, la « prise » qu’il offre à un organisme sur son environnement, ni la série de couplages qu’il implique entre le bois, le clou et le corps du travailleur ou du bricoleur : « le problème crucial est celui de l’emmanchement » (p. 91). En effet : « la nature fournit une grande abondance de manches solides, en bois ou en os ; la métallurgie est capable de produire, depuis des millénaires, des fers robustes, des tranchants tenant l’affûtage. Pourtant, même de nos jours, le point faible de beaucoup d’outils (faux, marteaux, pioches) est le raccord entre le manche et le fer ; les trois modes principaux d’emmanchement, soie, collet, douille, avec leurs variantes et certaines adjonctions comme les ligatures, les frettes ou coins, montrent qu’il y a un problème général de l’auto-corrélation dans le fonctionnement interne des outils, qui existe même s’il est invisible et ne consiste qu’en contraintes, flexions, ou torsions invisibles ; l’outil "travaille" à l’intérieur de lui-même, entre ses différentes parties qui agissent les unes sur les autres… » (p. 91)

Qui pense « concret » ?

Si l’objet technique n’est pas un objet quelconque, s’il n’est pas nécessairement outil ou instrument, où faut-il donc le chercher ? On devine déjà la réponse de Simondon : elle consiste à remarquer, pour commencer, que l’« auto-corrélation » si clairement illustrée par l’emmanchement ne désigne pas seulement une propriété que présentent certains objets, mais plus profondément, un processus dans lequel ces objets se laissent discerner. L’objet technique, à son tour, ne se définit pas par une structure donnée, ni par les usages auxquels on le destine ; il est d’abord « ce dont il y a genèse » (7). « La genèse de l’objet technique fait partie de son être. » Il n’y a donc pas d’autre solution, pour celui qui veut suivre les chemins de l’invention technique, que de ressaisir un objet présent à chaque étape de son devenir, comme une « unité de devenir » manifestée le long des lignes de « concrétisation » qui l’adaptent de mieux en mieux à lui-même, selon un principe de « résonance interne ». Inventer, c’est résoudre des problèmes ; et ces problèmes se ramènent, de manière générale, à un seul : éliminer le « résidu d’abstraction » qui maintient l’objet en lutte avec lui-même, qui perpétue les artefacts et les bruits de fond locaux, qui l’empêche enfin d’être aussi cohérent et unifié - aussi nécessaire - qu’il pourrait. L’objet technique sera d’autant plus individualisé qu’il sera mieux unifié, c’est-à-dire rendu intrinsèquement homogène par la convergence de plus en plus grande des directions fonctionnelles hétérogènes qui le traversent. C’est pourquoi il n’y a en réalité rien de plus abstrait qu’un objet artisanal fait « sur mesure » : « l’objet technique sur mesures est en fait un objet sans mesure intrinsèque ; ses normes lui viennent de l’extérieur : il n’a pas encore réalisé sa cohérence interne » (8). L’objet artisanal est d’autant moins individué, et d’autant moins nécessaire comme objet technique, qu’il paraît plus spécialement ajusté aux contraintes circonstancielles imposées par tel ou tel usage. Certains verront dans cette critique du « sur mesure » une forme d’anti-bergsonisme. Bergson ne définissait-il pas justement l’intuition comme une pensée « sur mesure », qui épouserait les sinuosités de son objet en s’efforçant de ne pas « tailler trop large » et de l’habiller pour ainsi dire de l’intérieur ? Il faut pourtant reconnaître qu’on aurait alors affaire à un anti-bergsonisme plutôt paradoxal, puisqu’il partagerait avec le bergsonisme l’essentiel de ses motifs : notions de problème, d’invention et d’intuition, d’individuation par différenciation, concrétisation, importance d’une saisie immanente de la genèse, insuffisance des pures analyses de structures, etc. Sans doute Simondon reproche-t-il à Bergson de proposer avec l’« élan vital » un remède trop violent aux facilités du finalisme. Le mouvement de différenciation par dissociations de tendances antagonistes que désigne l’élan vital doit être subordonné à un processus plus englobant, celui de la structuration individuante. Simondon parle d’un « schème génétique plus primitif que les aspects opposés de l’adaptation et de l’élan vital, et les renfermant tous deux comme cas-limites abstraits » (9). Ainsi l’aspect intensif, explosif et « cascadant » (10) des processus d’individuation, qui avait si vivement retenu l’attention de Deleuze, tend à passer au second plan. Si l’objet technique émerge d’un champ pré-individuel fait de polarités et de tensions entre des ordres hétérogènes, il n’atteint son unité individuelle qu’en refoulant ce que les singularités de son devenir comportent encore de disparate. Il ne s’individualise qu’en s’homogénéisant (11). Cependant, ce genre de processus se distingue encore par une manière singulière de durer. C’est pourquoi l’invention dans le domaine des techniques oblige à un exercice d’intuition contrariée. Retracer les lignes de concrétisation de l’objet technique, c’est, pour retourner contre elle-même une formule bergsonienne, ressaisir du « tout fait » se faisant. Pour peu qu’on soit sensible à ce que la vie des techniques renferme d’invention et de créativité, ces objets ne se réduisent justement pas à des assemblages de matière inerte ; ils n’existent comme objets techniques qu’à travers leur propre genèse (12). Simondon nous invite donc à penser les techniques « en durée », sub specie durationis. Et l’on ne s’étonnera pas que la pensée de l’invention suppose, selon lui, quelque chose comme une « intuition réflexive » qui suit son objet et s’individualise avec lui : « seule l’individuation de la pensée peut, en s’accomplissant, accompagner l’individuation des êtres autres que la pensée ; […] nous ne pouvons, au sens habituel du terme, connaître l’individuation ; nous pouvons seulement individuer, nous individuer, et individuer en nous… » (13). Comment mieux définir une pensée « sur mesure » ? Et cependant, s’il s’agit bien d’une intuition réflexive, la pensée ne se contentera pas « des intuitions et des schémas opératoires purement concrets » (14) incorporés dès l’enfance par l’artisan ou le technicien. Un rapport enfin « majeur » aux techniques passe par une réflexion sur la culture matérielle et ses trames symboliques (signes, schémas, diagrammes, etc.). Les cours et les conférences témoignent de cette volonté de dégager sur pièces les principes d’un « schématisme de la connaissance technologique » (15). Ils permettent aussi de mieux saisir, dans une sorte de vue synoptique, certaines limites du projet.

L’usage : un angle mort

Voici le problème. La réflexion sur les objets et les réseaux techniques oscille sans cesse entre deux pôles : celui de l’« auto-corrélation », qui concrétise un objet et le rend viable (problème de l’emmanchement), et celui de la « médiation » (« adaptation » ou « couplage ») par lequel cet objet vient s’apparier à un « milieu associé » pour être dirigé par un opérateur ou un flux d’information (16). Y a-t-il encore une place pour penser l’invention des usages eux-mêmes - des usages inventifs qui échapperaient aux canons du « user profiling » ? On peut en douter. Simondon se méfie trop de la lecture anthropologique des techniques en termes de fonctionnalité globale et de moyens ajustés à des fins. Ni l’utilité, ni a fortiori l’usage en général, ne sont en mesure, selon lui, de fournir un critère de technicité. L’usage est une catégorie instable, et peut-être inconsistante (17) : tantôt il connote l’indétermination (en témoigne la diversité des formes qui peuvent convenir à un même usage), tantôt au contraire il est du côté de l’hyperspécialisation ou de la standardisation (limite de l’adaptation). Maintenues à égale distance des figures de l’inventeur, du fabricant et de l’usager, les techniques finissent par revêtir une apparence quelque peu spectrale où les processus d’individuation sans sujet sont bien souvent aussi des fonctionnements sans usage. Plus exactement, l’usage n’est jamais un problème : c’est au mieux une affaire d’adaptation. Simondon le dit très tôt, et sa position ne variera pas beaucoup par la suite. Par un renversement de perspective typique de la lecture « interne » qu’il privilégie, la nécessité conquise par l’objet technique au terme de son processus de concrétisation a pour corollaire une sorte de domestication de l’usage. Avec le développement du machinisme, tout se passe comme si l’usage était obligé de se faire aux objets, de se mouler sur eux : « les besoins se moulent sur l’objet technique industriel, qui acquiert ainsi le pouvoir de modeler une civilisation . C’est l’utilisation qui devient un ensemble taillé sur les mesures de l’objet technique ». En somme, toute l’invention est du côté de l’objet et de ses métamorphoses ; c’est aux usages de s’adapter.

Couplage ou agencement ?

Ce n’est pas sans lui faire un peu violence que Deleuze a pu mobiliser les analyses de Simondon pour mettre au point, avec Guattari, un concept d’agencement machinique, qui a justement pour effet de déplacer la question de l’invention (19) des techniques elles-mêmes aux ensembles à la fois matériels et idéels, psychiques et sociaux, dans lesquels elles sont prises avec leurs usages. Ce concept d’agencement répond à un problème précis : comment rendre compte des différences qui marquent la spécificité de l’arme par rapport à l’outil, sans faire dépendre ces différences de facteurs externes, d’ordre sociologique ou idéologique ? Si l’arme et l’outil n’ont pas de caractères distinctifs intrinsèques, il n’y a pas d’autre manière de les différencier que de rapporter l’objet générique (bâton, hache, ou autre) à un « modèle » - une « forme de vie », aurait dit Spengler avant Wittgenstein -, qui vient le qualifier en l’associant à des gestes, mais aussi à des valeurs intensives, un régime particulier d’affects, des vecteurs de vitesse, etc. Ce que Deleuze et Guattari appellent « machine de guerre » n’a pas d’autre fonction. L’outil suppose le travail ; les armes supposent la chasse, ou la guerre. Et les traits formels de l’agencement machinique agissent comme des contraintes internes sans être pour autant intrinsèques (20). En résumé : « le principe de toute technologie est de montrer qu’un élément technique reste abstrait, tout à fait indéterminé, tant qu’on ne le rapporte pas à un agencement qu’il suppose. Ce qui est premier par rapport à l’élément technique, c’est la machine : non pas la machine technique, qui est elle-même un ensemble d’éléments, mais la machine sociale ou collective, l’agencement machinique qui va déterminer ce qui est élément technique à tel moment, quels en sont l’usage, l’extension, la compréhension…, etc. » (21) Or Simondon pourrait à la rigueur s’accommoder de l’idée que l’élément technique n’est reconnu comme tel qu’à travers un usage, qui renvoie lui-même à une machine sociale plus vaste. Mais il n’irait certainement pas jusqu’à dire que l’objet technique reste « abstrait » et même « tout à fait indéterminé » en dehors de son insertion dans de tels usages. Les objets selon lui n’attendent pas d’être utilisés pour fonctionner ; ils se différencient eux-mêmes, en fonction de normes intrinsèques. Sans doute la hache n’existerait pas si nul n’en avait usage, mais avant d’être un outil ou une arme, il faut bien que la hache puisse hacher. Cependant, Deleuze et Guattari formulent un nouveau problème ; il est naturel qu’ils découpent les choses autrement. Pour embrasser pleinement la logique de l’agencement, pour passer du couplage aux branchements hétérogènes, du milieu associé au jeu des alliances, de la mécanologie à la stratégie, il faut commencer par faire passer au premier plan, non pas l’intégration fonctionnelle qui concrétise un objet ou stabilise un procédé, mais les équilibres « métastables » et les ruptures de symétrie impliquées dans les processus de transformation par « transduction » ou modulation de proche en proche. C’est ainsi que Deleuze retient surtout de Simondon une logique du « problématique » qu’il interprète comme une logique du disparate, du déphasage ou du « polyphasage ». Aux analyses des processus de convergence et d’unification, il joint cet avertissement : la « matière-flux » expressive, le « phylum machinique » qui traverse les mondes techniques, ne se réalise pas sans se diviser et se différencier, il n’y a pas d’individuation sans hétérogénèse. En somme, la différence entre l’objet et ses usages multiples ne lui est pas extérieure ; elle passe déjà au sein même de l’objet pour l’emporter ailleurs.

L’invention des usages

Simondon n’aurait probablement pas souscrit à cette métaphysique de la matière-flux : non pas qu’il se défiât de toute métaphysique, mais parce que son propre projet le conduisait du côté d’une ontologie différente, une ontologie des processus d’individuation dont Deleuze avait perçu très tôt la force et les limites. Du pré-individuel au trans-individuel, c’est l’individuation qui demeure en effet l’enjeu central de cette ontologie. Et cela ne va pas sans une « vision morale du monde » (22) : dans tous les cas, « le pré-individuel reste et doit rester associé à l’individu ». Tout se passe alors comme si cette exigence conduisait Simondon à n’accorder aux usages qu’une fonction résiduelle et marginale dans la transformation des objets ou des dispositifs techniques sur lesquels ils se greffent. S’agit-il de préserver l’individu technique d’une impureté essentielle de l’usage, d’un principe d’illimitation qui intensifierait les zones d’instabilité au point de menacer le processus d’individuation ? S’agit-il en somme de défendre l’intégrité de l’objet technique contre des usages polymorphes et potentiellement pervers ? Cette interprétation n’est pas tenable : les analyses de Simondon suggèrent au contraire une subordination structurelle des usages aux normes techniques immanentes aux objets et à leurs médiations. Si ce constat recouvre une injonction morale, ce ne peut être qu’à travers l’idée même d’individuation qui oriente toute la description. Rien d’étonnant à ce que Deleuze, de son côté, cherche à revaloriser l’usage : il y voit la possibilité de reconduire les formes individuées au champ de singularités pré-individuelles qui les borde, comme la guerre « hoplitique » décrite par Marcel Détienne associe le bouclier à deux poignées aux intensités affectives et aux lignes de vitesse qui parcourent ce nouvel agencement d’infanterie qu’est la phalange. Derrière la claire découpe des fonctions se trament des devenirs plus ou moins louches ; ainsi « l’Éros homosexuel de groupe » tend à remplacer « l’Éros zoosexué du cavalier » (23). Les techniques et les usages qu’elles libèrent en sont parties prenantes. Le déni de l’usage dans les analyses de Simondon doit se comprendre autrement, à partir du caractère d’indétermination foncière associé à l’usage, indétermination dont on a vu qu’elle était parfaitement compatible avec le phénomène d’hyper-adaptation ou de standardisation. Comment concevoir en effet, sur de telles bases, que l’usage puisse enclencher un processus de différenciation autrement que de manière accidentelle et marginale ? Mais alors la question se déplace : il ne s’agit plus de se prononcer sur une « vision morale du monde » qui valoriserait l’individuation aux dépens des pointes intensives de l’agencement (« lignes de fuite », « déterritorialisation ») ; il s’agit tout simplement de savoir si la théorie est en mesure de rendre compte de certains aspects saillants de l’évolution des techniques, et de la place qu’y tiennent encore l’artisan et le bricoleur, figures techniciennes que Simondon a tendance à délaisser pour celle de l’ingénieur (24).Or au-delà de la prise - cette prise qu’offre l’outil à l’organisme qui s’oriente dans son milieu -, il y a bien quelque chose comme la reprise. L’art du siècle passé n’a cessé d’en jouer en même temps qu’il s’intéressait aux machines. Le détournement a encore ses adeptes. Mais la reprise doit d’abord s’entendre au sens où l’on reprise des chaussettes, et par extension au sens où l’on « customise » un vélo, une automobile ou une configuration audio-visuelle : elle suppose une intervention directe sur un dispositif matériel, des gestes susceptibles de libérer des effets et de précipiter des devenirs d’un genre nouveau. Le marteau peut enfoncer des clous ; il peut aussi frapper des cloches et fracasser des crânes. C’est une banalité de le rappeler. D’autres faits, en revanche, semblent opposer plus de résistance. Ainsi la voiture peut servir à se déplacer rapidement, mais elle peut tout aussi bien se transformer en discothèque ambulante en se trouvant équipée d’un « sound system » suffisamment puissant (pratiques du « tuning » (25)). S’agit-il de la même voiture ? Le plateau d’une platine de disques peut tourner à vitesse uniforme ; il peut aussi être retenu par la main du DJ qui en inverse le mouvement pour replier la musique sur elle-même et la mettre en boucle. Que se passe-t-il au juste lorsque la machine individuée (qui peut être aussi un synthétiseur, une table de mixage ou une boîte à rythme) s’anime au point de devenir le sujet de la musique, et de modifier en retour ses propres normes techniques (26) ? Lorsque les ressources inventives du bricolage finissent par infléchir la logique de la production industrielle ? Quelles sont, plus généralement, les conditions qui définissent une pratique d’expérimentation créative sur des objets ou des dispositifs techniques ? La métaphysique de la matière-flux qui redouble chez Deleuze la phénoménologie des agencements machiniques est-elle le prix à payer pour rendre visible et pensable la part d’invention qui entrent aussi dans l’appropriation ou le détournement des techniques ? On peut en discuter. Mais c’est justement là que Simondon nous laisse seuls face au mur.

Elie DURING


Notes

(1) Gilles Deleuze, « Gilbert Simondon, L’individu et sa genèse physico-biologique », in L’Île déserte et autres textes, Éditions de Minuit, 2002, p.124.

(2) Deleuze note que « dans la dialectique de Simondon, le problématique remplace le négatif » (art. cit., p. 122). Voir également Différence et Répétition, Paris, P.U.F., 1968, p. 316 s.

(3) Gilbert Simondon, Du mode d’existence des objets techniques, Paris, Aubier, 1958 (rééd. 1989), désormais abrégé par MEOT.

(4) Gilles Deleuze, art.cit., p.121.

(5) Paris, Aubier, 1989.

(6) Sur la manière dont s’articulent ces différents registres (technologie, histoire des technique, ontologie de l’objet technique), on se reportera à l’étude de Xavier Guchet, Les Sens de l’évolution technique, Paris, Éditions Léo Scheer, 2005 (voir la recension qu’en donne B. Bensaude-Vincent dans ce même numéro).

(7) MEOT, p. 20.

(8) MEOT, p.24.

(9) MEOT, p.156.

(10) Gilles Deleuze, Différence et Répétition, op. cit., p. 317.

(11) Au lieu de dissociations de tendances, l’évolution des techniques offre l’exemple de toutes sortes de dédoublements assurant une meilleure adaptation à la chose ou à l’opérateur (le manche et le fer, en général, mais aussi le maillet et le ciseau à bois, le marteau et le tranchet, etc.). Ces dédoublements appellent un progrès dans le sens de l’auto-corrélation ou de la convergence des fonctions. La différenciation interne a donc toujours pour contrepartie une réduction de l’hétérogénéité à un niveau supérieur. Cela est fort clairement expliqué dans le texte sur « l’invention et les techniques », p. 233 s.

(12) À un autre niveau, celui de l’histoire des techniques, se conjuguent deux régimes de durée. Le temps de l’adaptation est organique, il conserve « l’allure temporelle de la relation entre organisme et milieu » (p. 102) ; mais le temps de l’invention est problématique : « le progrès technique interne ne peut guère être continu ; il se fait par sauts, par étapes discontinues » (p. 103).

(13) Gilbert Simondon, L’Individu et sa genèse physico-biologique, Grenoble, Jérôme Millon, 1995, p. 34.

(14) MEOT, p. 90.

(15) Sur le sens de cette « intuition réflexive », son rapport au schématisme kantien et à l’intuition bergsonienne, voir la section intitulée « Invention technique et pensée réflexive » au chapitre V du livre de Xavier Guchet, op. cit., p. 242 s. Ces questions sont aussi au cœur du livre de Jean-Hugues Barthélémy, Penser l’individuation : Simondon et la philosophie de la nature, Paris, L’Harmattan, 2005.

(16) L’homo faber doué d’« intention fabricatrice » était encore un acteur. Simondon, qui abandonne le modèle intentionnel au profit d’une logique matérielle de l’invention, ne voit plus que des opérateurs. Sur ce point, voir Bernard Stiegler, La Technique et le temps I. La faute d’Épiméthée, Paris, Galilée, 1994, p. 82 s.

(17) MEOT, p.19.

(18) MEOT, p. 24.

(19) Car « un agencement est une véritable invention » (Gilles Deleuze et Félix Guattari, Mille plateaux, Paris, Éditions de Minuit, 1980, p. 506).

(20) Ibid., p. 495.

(21) Ibid.

(22) Gilles Deleuze, art. cit., p. 124.

(23) Mille plateaux, op. cit., p. 496-497.

(24) Au contraire, Deleuze et Guattari se réfèrent constamment à la figure de l’artisan pour annoncer le règne d’une pensée itinérante et ambulante, capable de suivre les matières et les flux (ibid., p.509).

(25) Sur ce point et plus généralement sur les dispositifs d’amplification, voir Christophe Kihm, « La musique et l’espace », Art Press, n°308, janvier 2005, p. 46-52.

(26) Voir Bastien Gallet, « Le jour d’aujourd’hui… », in Fresh Théorie, Paris, Éditions Léo Scheer, 2005, p. 216 s., sur l’insertion des gestes créatifs dans les dispositifs « insaturé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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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2 Novembre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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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ubliscopie

Notes de lecture
par Philippe Sarro sarro.philippe@voila.fr

Retours en arrière.
Gilbert Simondon. Du mode d'existence des objets techniques Méot 1958

Comme promis voici un texte sur Gilbert Simondon et son livre "Du mode d'existence des objets technique" Il va peut être vous paraître provocateur vis à vis des thèses sur le néo-darwinisme que vous développer sur les automates intelligents. Ce sera à vous de juger.

Merci au contraire de nous faire connaître des auteurs peut-être un peu oubliés aujourd'hui, dont la contribution à l'évolution de la pensée contemporaine sur les systèmes a été et demeure importante. JPB-CJ

Gilbert SIMONDON
(1924-1989)

Eléments de biographie

Né à Saint-Etienne le 2 octobre 1924, Gilbert Simondon fit ses études secondaires au lycée de sa ville natale, et eut tôt l’occasion de fréquenter le milieu industriel, de discuter avec des ingénieurs, de s’intéresser à l’invention scientifique et technologique et à la manière dont les innovations sont reçues au sein de la société.

Elève de khâgne au lycée du Parc à Lyon, élève de l’ENS de 1944 à 1948, agrégé de philosophie, il fut professeur de classe terminale au lycée Descartes de Tours (1948-1955), où il lui arrivait de faire le cours de physique aussi bien que celui de philosophie, et où il avait installé dans les sous-sols une présentation de machines au fonctionnement desquelles il initiait ses élèves. En 1955 il devint assistant à l’Université de Poitiers. Sa double thèse de doctorat d’Etat (sur l’individuation, sur les objets techniques), soutenue en 1958, lui permit de devenir professeur des universités: à la Faculté des lettres de Poitiers (1960-1963), à la Faculté des lettres et sciences humaines de Paris (1963-1969), à l’UER de psychologie de l’Université de Paris-V (1969-1984). A Paris, il avait son "laboratoire de psychologie générale" (en fait, un laboratoire de technologie) à l’Institut de psychologie Henri Piéron, 28 rue Serpente. La dernière partie de sa vie fut assombrie par une souffrance psychique, qui le contraignit à prendre une retraite anticipée. Il mourut à Palaiseau le 7 février 1989.

Ces principaux ouvrages ont pour nom « L’individu et sa genèse physico-biologique » (1964), « L’individuation psychique et collective » (1989) constituant les 2 parties de sa thèse principale de doctorat (1958) et surtout « Du mode d’existence des objets techniques » (1958) la thèse secondaire.

Dans le postmodernisme le philosophe Simondon apparaît plus optimiste qu’un Martin Heidegger (La question de la technique) avec son concept d’Arraisonnement (le Gestell) et pour qui la technique ne sert que la volonté de puissance et n’est qu’un moyen d’augmenter le faire en faisant oublier l’Être. Il est aussi opposé à la technophobie d’un Jacques Ellul (La technique où l’enjeu du siècle) pour qui la culture technique n’existe pas, mais constitue un abus de sens et un non-sens. Pour Ellul la techno-science et le système technique est autonome et anti-humaniste (Gilbert Hottois dans sa conférence de L’Université de tous les savoirs.)

L’œuvre de Simondon aura influencée et inspiré des auteurs tels que Jean Baudrillard (Le Système des objets, 1968), Georges Friedmann (La Puissance et la sagesse, 1970), Abraham Moles (Théories des objets, 1972) ainsi que Gilles Deleuze (L’image et le mouvement) et Bernard Stiegler (La technique et le temps). Son œuvre n’est pas sans résonance avec celle de Leroi-Gourhan (Milieu et technique). Elle n’est pas non plus sans parenté avec le mouvement auquel appartient « le groupe Ethnotechnologie » qui donnera naissance à la revue « Culture techniques » et plus tard les revues « Terminal » et « Les cahiers de Médiologie » de l’emblématique Régis Debray. Ceci peut être vu comme une évolution transductive qui est un concept simondonien qui sera développé plus loin.

Pourtant son oeuvre reste méconnue et sous estimée selon Hubert Curien lors d’un colloque qui lui a été consacré en 1992.

Ses idées et concepts se retrouvent aussi implicitement en sociologie de l’innovation au travers de la théorie de l’acteur réseau connue sous l’approche de la traduction. (Madeleine Akrich, Michel Callon, Bruno Latour) Cette dernière essaie de montrer les conflits sociaux, les interactions, les rapports de forces, les conflits qui se manifestent lors des processus d’innovations. Pour Simondon la technique doit être plus vue comme une médiatrice d’homme à homme ou d’homme à nature plutôt qu’un outil ou qu’un instrument qui plus est, au service d’une idéologie politique, sociale ou économique.

Du mode d’existence des objets techniques (MEOT, 1958)

Simondon a divisé « Du mode d'existence des objets techniques » (MEOT) en trois parties: (1) Genèse et évolution des objets techniques; (2) L'homme et l'objet technique; et (3) Essence de la technicité. Cette dernière partie se subdivise en trois chapitres: (I) Genèse de la technicité; (II) Rapport entre la pensée technique et les autres espèces de pensée; (III) Pensée technique et pensée philosophique.

La première partie est consacrée au problème de civilisation qui découle du malaise de ses contemporains envers la technique, allant jusqu’à la technophobie ou la technofolie. Il l’explique par la méconnaissance de l’objet technique. Il écrit « Cette étude est animée par l'intention de susciter une prise de conscience du sens des objets techniques. La culture s'est constituée en système de défense contre les techniques; or, cette défense se présente comme une défense del'homme, supposant que les objets techniques ne contiennent pas de réalité humaine. » Et ceci amène à « l’idolâtrie de la machine », qui fait un mythe du robot et de l’automatisme. Il rajoute « En fait, l’automatisme est un assez bas degré de perfection […] Le véritable perfectionnement des machines, celui dont on peut dire qu’il élève le degré de technicité, correspond non pas à un accroissement de l’automatisme, mais au contraire, au fait que le fonctionnement d’une machine recèle une certaine marge d’indétermination. C’est celle-ci qui permet à la machine d’être sensible à une information extérieure. » Ce sont les " vraies machines ", saisies dans leur statut ontologique même. On dirait aujourd’hui automate intelligent. La machine est alors vu comme ce qui augmente la néguentropie et ce qui, comme la vie et avec la vie, s’oppose au désordre et à la dégradation de l’énergie. Elle devient stabilisatrice du monde.

Simondon va alors analyser la genèse ( l'ontogenèse ) de l’objet technique en définissant le processus de concrétisation par lequel il acquiert une sorte d’autonomie et une forme d’individualité. Il s’invente indépendamment des déterminations économiques historiques, sociales de tout genre. L’objet technique a quand même une présence et une réalité humaine qui survit en lui « C’est de l’humain cristallisé ». Ce qui permet une coprésence et une coévolution, sans relation de domination de l’un sur l’autre, de l’homme et de la machine dans une sorte de société, de milieu associé qui évolue aussi corrélativement. Simondon est confiant dans le progrès technique qu’il voit comme libérateur et émancipateur par rapport à la nature, à la matière mais aussi par rapport aux asservissements politiques et idéologiques.

Puis pour aplanir le problème du malaise dans la civilisation provoquant la technophobie, il envisage dans les parties suivantes, avec une vision anthropologique  génétique, une culture technique qui exige le développement d’une Technologie du mode d’existence des objets techniques, c’est à dire une science inductive des schèmes techniques, de leurs genèse, de leurs relations, de leurs rapports aux hommes. Mais pour Simondon cette Technologie ne prend pas assez en compte les modes de pensées et d’êtres-au-monde non techniques (la magie, la religion, l’esthétique). D’où les résistances, les blocages. Ici par parenthèse, je rappellerais la tentative d’un Bruno Latour ( Nous n’avons jamais été modernes, 1991) de créer ces dernières années une Anthropologie symétrique. Mais pour Simondon, la seule analyse de la genèse des objets techniques et de la connaissance de leurs modes d’existence ne suffisent pas à solutionner le malaise culturel qu’ils suscitent.

Ce qui l’amène dans la dernière partie, à considérer une philosophie du devenir et de l’individuation comme seule capable de réconcilier et d’intégrer la réalité technique à la culture universelle, afin de vivre en amitié avec les machines et les techniques, d’autant si elles doivent être appliquées à l’humain.

Individuation

Le concept d’individuation; technique mais aussi en parallèle, physique, biologique humaine et psychique, est développé plus amplement dans le livre «L’individuation psychique et collective ». Le trait commun entre ces individuations est qu’une forme émerge d’un fond. La forme prend en un point puis elle se propage, c’est l’opération de transduction qui est « individuation en progrès ». Ou selon la définition de G Simondon, « une opération physique biologique, mentale, sociale, par laquelle une activité se propage de proche en proche (à partir d’une préindividualisation) à l’intérieur d’un domaine, en fondant cette propagation sur une structuration du domaine opérée de place en place: chaque région de structure constituée sert à la région suivante de principe de constitution, si bien qu’une modification s’étend ainsi progressivement en même temps que cette opération structurante. » Chaque place ou phase ou palier est alors en équilibre métastable et possède un potentiel d’énergie de création de nouvelles formes ou un potentiel d’invention de nouvelles solutions, sans pour autant éliminer les anciennes. « L’individu est ce qui a été individué et continue à s’individuer. » Pour un René Thom (colloque, 1994) la transduction sera la transformation génératrice de cet « étalement de l’être. »

Mais d’après Anne Fagot-Largeault (Colloque, 1994) le schéma évolutif de Simondon ne comporte ni pression de mutation, ni pression de sélection, les solutions inadéquates ne sont pas éliminées. Le néo-darwinisme lui reste étranger, mais il voulait donner du sens au devenir sans retomber dans l’hypothèse créationniste. Il serait plutôt néo-Lamarckien considérant que l’individu ou l’organisme en formation participe activement à son remaniement, à sa réorganisation. Toujours selon Fagot-Largeault, ce paradigme l’emporterait en matière d’évolution technique (génomique ou autre) sur le néodarwinisme qui reste bien entendu valable pour  l’évolution naturelle. Car en matière de technique c’est une évolution dirigée par l’homme, même si cette individuation dirigée l’est de façon spontanée et non volontairement. Je suppose que ces remarques ne resteront pas sans discutions sur ce site consacré aux automates intelligents.

Gilbert Hottois quant à lui (conférences UTLS), voit Simondon comme un homme de son temps qui s’arrête devant la possibilité d’une postmodernité techno-symbolique dont un représentant est le philosophe H T Engelhardt qui illustre une position qualifié de technophile évolutioniste. L’on pourrait toutefois appliquer ses concepts d’individuation et de transduction au processus d’hominisation qui se déroule depuis des lustres, en interprétant le moment présent, qui voit s’inventer une vie artificielle prenant toute sa place dans une lignée technique, comme une phase métastable pleine d’aventures pour un futur ouvert. Quel bifurcation s’annonce ? dirait René Thom. Que va inventer l’homme, grâce à la libération due aux nouvelles technologies de l’intelligence et de la mémoire, comme en son temps la station debout avait libéré la main en même temps que le langage, qui allait amener à l'invention de l'écriture ? S’interroge Michel Serres.

Finalement ce qui apparaît dans la pensée de cet auteur, c’est moins une résolution des tensions entre les pessimismes et les optimismes envers la technique, qu’une problématisation de celle-ci. Pour finir je citerais 2 phrases, la première est tiré de la dernière page du livre d’André Leroi-Gourhan « Le geste et la parole tome I :Technique et langage », et la deuxième d’une page de MEOT. Les voici :

« L’outil quitte précocement la main humaine pour donner naissance à la machine » et

« L’opération technique est une opération pure qui met en jeu les lois véritables de la réalité naturelle, l’artificiel est du naturel suscité. »

Bibliographie

LATOUR, Bruno. 1991. Nous n’avons jamais été modernes. Essais d’anthropologie symétrique, Paris, Editions La découverte.
LEROI-GOURHAN, André. 1964. Le geste et la parole, tome I Technique et langage, Paris, Editions Albin Michel.
SIMONDON, Gilbert. 1964. L'individu et sa genèse physico-biologique (l'individuation à la lumière des notions de forme et d'information), Paris : PUF, Rééd. J.Millon, coll. Krisis, 1995
SIMONDON, Gilbert. 1989. L'individuation psychique et collective, Paris, Aubier.
SIMONDON, Gilbert. 1989. Du mode d'existence des objets techniques, Paris, Aubier

ouvrages sur Simondon
Gilbert Simondon, une pensée de l'individuation et de la technique, Actes du Colloque organisé par le Collège International de Philosophie, 31 mars - 2 avril 1992, Paris: Editions Albin Michel, Bibliothèque du CIP, 1994
HOTTOIS, Gilbert. Simondon et la philosophie de la culture technique, Bruxelles: De Boeck, 1992, diffusion Belin
Université de tous les savoirs (UTLS). 2000. Qu’est-ce que la vie ? - volume I – Conférence du 19 janvier 2000 de Gilbert Hottois (La technosciences : entre technophobie et technophilie). Sous la direction d’Yves Michaud. Editions Odile Jaco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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