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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권력 재론 : 아사라는 살해

 

이치노카와 야스타카(市野川容孝), -権力再論, 現代思想, 20079

 

과거를 역사적으로 관련짓는 것은, 그것을 원래 있던 대로인식하는 것이 아니다. 위기의 순간에 번개처럼 회상을 부여하는 것이다.”

: “과거를 역사적으로 표현한다는 것은 그것이 원래 어떠했는가를 인식하는 일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위험의 순간에 섬광처럼 스치는 어떤 기억을 붙잡는다는 것을 뜻한다.”

벤야민, 역사의 개념에 대하여(6번 테제)

 

1. 생명권력의 모순 : 살게 만드는 것이 죽게 만든다.

미셸 푸코가 제시한 생명권력이라는 말은 이미 인구에 회자되고 있으며, 많은 사람들에게 사고의 실마리가 되었다. 이것이 우리가 그 안에서 살고 있는 현재를 계속 규정하고 있는 자장을 표현하는 말이라는 것도 분명할 것이다. 그러나 이 생명권력은 여전히 수수께끼이며, 이것이 사실상 무엇인지를 발견하려면 아직 몇 가지 고찰과 검토가 덧붙여져야 할 필요가 있는 것 같다.

어쨌든 고찰에 임할 때의 출발점은 당연히 푸코 자신의 다음과 같은 말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죽게 만들 것인가, 살게 내버려 둘 것인가라는 고대의 법권리droit를 대신하여, 살게 만들 것인가 죽음 속으로 쫓아낼 것인가라는 권력pouvoir이 나타났다고 말해도 좋다.”(앎의 의지, )

 

다시 한 번, 에서 시작하기 위해서, 마치 이 정식을 무의미한 것인 양 생각하는 것에서 시작하자. , 여기에서는 고대의 법권리이든 새로운 권력이든 여기에서 사람들은 태어나고 또한 죽음에 이르게 된다고 밖에는 말할 수 없다, 따라서 둘 사이에는 어떤 유의미한 차이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해 보자는 것이다.

만일 푸코의 이러한 말이 무의미하다면, 이로부터 출발하여 [도대체] 어떤 것을 독해하고 또한 이해하지 않으면 안 될까?

이때 답해야 할 물음은 우선 첫째로, 한편으로는 고대의 법권리의 죽게 만들다faire mourir’와 권력의 죽음 속에 폐기하다rejecter dans la mort’, 다른 한편으로는 고대의 법권리의 살게 내버려두다laisser vivre’와 권력의 살게 만들다faire vivre’가 각각 서로 어떤 차이가 있는가인데, 그러나 이에 관해서는 나중에 다시 생각해 보자.

그 전에 우선 생각하고 싶은 것은, 다음의 두 물음이다. 그것은 푸코가 말한 권력내부의 문제인데, 권력이 사람들을 살게 만드는한편으로, 동시에 죽음 속에 폐기하다는 메커니즘은 도대체 어떻게 가능하냐라는 물음이다. 사람들을 살게 만드는 권력이 동시에 사람들을 죽음 속에 폐기한다, 즉 죽게 만든다는 것은 모순 이외의 아무것도 아니며, 때문에 또한 무의미한 이야기에 불과하지 않을까? 그렇지 않다면, 푸코의 말을 어떻게 해석할 필요가 있을까?

앎의 의지가 간행된 1976년의 콜레주 드 프랑스의 강연에서 푸코 자신은 다음과 같은 물음을 제기한다.

 

그렇다면 군주[주권]의 권력은 점점 더 뒷걸음치고 있는데 반해 규율적이거나 조절적인 생명권력은 점점 더 전진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라면, 제가 보기에는 그렇게 하는 것이 19세기 이래 권력의 테크놀로지가 지닌 근본적 특징 중 하나인데, 생명을 대상이자 목표로 삼은 이 권력의 테크놀로지에서는 죽이는 권리와 살해의 기능이 어떻게 행사되게 됐을까요? 본질적으로 생명을 최대화하고, 그 지속 기간을 연장하며, 그 기회를 증대시키고, 사고를 방지하며, 손해를 메우는 것을 목표로 하는 것이 사실이라면, 어떻게 이런 권력이 [사람을] 죽일 수 있을까요? 이런 조건에서 어떻게 정치권력이 죽이고, 죽음을 요청하고, 죽음을 요구하고, 죽게 만들고, 죽일 것을 명령하고, 자신의 적뿐만 아니라 자신의 시민까지도 죽음에 노출시킬 수 있을까요? 본질적으로 [사람들을] 살게 만드는faire vivre 것을 목표로 삼는 이 권력이 [사람들을] 어떻게 죽게 내버려둘laisser mourir 수 있을까요? 생명권력을 중심으로 한 정치체제에서 죽음의 권력은 어떻게 행사되고, 죽음의 기능은 어떻게 행사될까요?

 

2. ‘인종주의라는 메커니즘 사회의 이항대립적 이해

이러한 물음에 대한 하나의 대답으로 푸코가 제시했던 것이 인종주의racisme’라는 메커니즘이다. “인종주의란 무엇인가? 그것은 우선 첫째로, 권력이 장악한 생명의 영역의 내부에, 어떤 절단을 도입하는 하나의 수단입니다. , 살아 있는 것과 죽어야 할 것이라는 절단입니다.” 생명권력은 모든 인간을 살게 만드는 것이 아니다. 살만한 값어치가 있는 자와 그렇지 않은 자라는 분할선을 기입하면서 생명을 증대시키고 증식시키는 것이다.

그렇지만 이러한 절단과 분할선의 존재는 살게 만드는 권력이 동시에 사람들을 살해한다는 모순을, 아직 해소하는 것에 이르지 못한다. 살해하는 것과 살게 만드는 것이 역접이 아니라 순접으로 맺어지지 않는 한, 모순은 모순으로 남아 있다. 둘은 어떻게 순접으로 연결될 수 있는가?

인종주의를 바탕으로 한 생명권력이 행하는 살해는 감시와 처벌의 서두에서 그려진 스펙터클한 신체형(다미앵의 처형)과는 달리, 죽음 그 자체를 목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다. 살해는 생명을 증대시키고 증식시키기 위해 나오는 것이다. 생명에 절단을 기입하는 것에 이어서, 인종주의의 두 번째 기능네가 죽게 만들면 죽게 만들수록, 너 자신은 살 수 있다라는 적극적 관계, 서로 부정하는 배반과는 어쩌면 정반대의 관계를, 삶과 죽음 사이에, 살게 만드는 것과 죽게 만드는[죽게 내버려두는] 것 사이에 설정하는 것이다.

살해를 생명에 순접으로 연결하는 이론은, 이미 존재한다. 자신들의 생명을 지키기 위해서는 적을 죽이지 않으면 안 된다는 전쟁”guerre의 논리가 그렇다. 그러나 생명권력은 이 전쟁의 논리를 계승하면서 이것을 생물학적인 것으로 치환한다고 푸코는 말한다. , “열등한 종이 감소하면 감소할수록, 또한 정상이지 않은 개인이 제거되면 제거될수록, 종의 내부의 변질된 것은 감소하며 나 개인으로서가 아니라 종으로서의 나 는 보다 잘 살며, 보다 힘 세게, 보다 강력하게, 그리고 보다 건강하게 될 것이다라는 논리가, 생명권력의 살해를 떠받치고 정당화하는 것이다.

인종주의의 논리는 전쟁의 논리의 연장선상에 있으면서 그것을 넘어선다. 왜냐하면 전쟁의 논리는 살해의 대상을 적으로 한정하는데 반해, 인종주의가 이끄는 살해는 적뿐만 아니라 동포에게도 미치기 때문이다. 자신들의 종을 변질시키는 것, 자신들의 생명의 더욱 더 비약을 방해하는 것으로서 인식되는 한에 있어서, 적뿐만 아니라 동포나, 동일한 종에 속한 자도 또한 살해할 값어치가 있는, 아니 말살해야 할 존재로 되는 것이다. 대외전쟁을 수행하는 그 과정에서, 동시에 자국민인 유대인의 말살을 기획한 나치즘은, 푸코 자신이 언급하고 있듯이, 그가 말한 인종주의의 전형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렇지만 전쟁의 논리를 넘어서더라도, 인종주의는 어떤 동일한 인식틀을 전쟁과 공유한다. 그것은 사회에 관한 이항대립적 개님”, 두 개의 집단, 개인들에 관한 두 개의 범주, 두 개의 군대가 서로 대치하면서 존재한다는 인식에 다름 아니다. 이러한 이분법은 인종주의에 고유한 것이 아니며, 이것만이 인종주의의 구성요건인 것도 아니다. 그러나 이 이항대립은 인종주의의 이른바 필요조건이며, 이것 없이는 인종주의는 성립할 수 없다.

푸코는 고찰의 사정을 인종주의의 틀로부터 일단 해방하며, 이 사회에 관한 이항대립적 이해에 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저는 국가에 대한 어떤 비판적역사적정치적 분석, 국가의 제도와 권력메커니즘에 대한 어떤 분석이 서구에서 어떻게 등장했는지 보려 해왔고, 제 생각에 저는 늘 그렇게 하려고 했습니다. 이 분석은 이항적인 용어로 행해집니다. 사회체는 신분의 피라미드나 위계질서에 의해 짜여지는 것이 아니며, 정합적이고[각 부분이 서로 긴밀하게 연결된] 통일적인 유기체를 구성하는 것도 아닙니다. 그것이 아니라 사회체는 완벽하게 구별될 뿐만 아니라 서로 대립하는 두 개의 전체ensemble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사회체를 구성하고 국가를 가동시키는 이 두 개의 전체 사이에 존재하는 이 대립의 관계는 사실상 전쟁의 관계, 영구적 전쟁의 관계입니다. 국가는 외견상 평화로운 형태 아래에서 문제가 되는 이 두 개의 전체가 서로 전쟁을 계속하는 방식에 지나지 않습니다. 여기서 출발해 저는 이런 유형의 분석이 어떻게 동시에 반란이나 혁명의 희망, 정언명령, 정치와 절합되는지를 보여주고 싶습니다.”

 

3. 홉스와 루소 고대의 법권리에서 생명권력으로

주지하듯이, T. 홉스는 전쟁상태로부터 출발하여, 국가나 사회의 존재를 기초지었다. 그러나 그의 정치철학은 앞에서와 같은 사회의 이항대립적 이해와는 사실 완전히 다르다. 오히려 그러한 이해를 봉쇄하는 것이야말로 홉스의 주된 과제였다고 푸코는 말한다.

우선 첫째로, 홉스가 사고실험으로서 제시한 만인의 만인에 대한 전쟁상태”(리바이어던13)에서는 모든 인간이 자신에게 있어서의 적이기 때문에, 위와 같은 이항대립에서 전제되고 있는 전체ensemble’ 자체가 생성불가능하다. 홉스의 모델은 철저하게 원자적이며, 집단이 생성가능하다고 한다면, 그것은 원자로서의 개인간의 전쟁을 종식시킨 제3자에게, 사람들이 자신의 자연의 권리를 (양도가 아니라) 방기하여 복종하는 경우일 뿐이다. 그 결과 탄생하는 것이 커먼웰스commonwealth’인데, 그것은 원래의 부분의 집합과 조화에 의해 떠받쳐지는 유기체와 같은 것이 아니다. 홉스가 강조하듯이, 그것은 하나의 인격person’이며, 이 인격을 담당담지하는 자가 주권자soveraigne라고 불리며, 그 반대 측에 위치하면서 이 주권자에게 복종하는 자가 신민(=주체)subject이라고 불린다(위의 책 제17). 주권자라는 인격과 신민(주체)루소가 말하는 일반의지와는 달리 결코 하나로 용해되지 않으며, 따라서 홉스가 생각한 커먼웰스를 집단전체ensemble라고 부르는 것에는 몇 가지 유보가 계속 남겨지게 된다.

둘째로, 홉스의 전쟁상태에는 이항대립을 기초짓는 (집단 사이의) 완전한 이질성이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 푸코는 이렇게 말한다. “최초의 전쟁, 만인에 대한 만인의 전쟁은 평등=동일성egalité에서 태어나 이 평등이라는 요소 속에서 펼쳐지는 평등의 전쟁입니다. 전쟁은 차이-없음 또는 아무튼 불충분한 차이의 직접적인 결과입니다.” 만인이 적이라는 점에서, 모든 사람이 동일하게 되는 상태, 그것이 홉스가 말한 전쟁상태이며, 거기에는 적대가 극한까지 널리 퍼져 있기 때문에, 적대 그 자체가 탈구되어 있다.

역사적으로 보더라도, 청교도 혁명이 한창이던 1651년에 간행된 홉스의 리바이어던이 무엇보다 우선 종결시키고자 했던 것은 당신의 잉글랜드의 내전 상태에 다름 아니었다. “, 아니 차라리 홉스가 대결한 적의 담론은 당시의 잉글랜드에서 국가를 분열시켰던 내전 속에서 들려오던 담론입니다. 그 담론은 두 개의 목소리를 지녔죠.”

나아가 또 다른, 홉스가 그의 정치철학에 의해 배척하고자 했던 것은, 푸코에 따르면, ‘정복이라는 문제틀에 의해 국가와 정치를 말한다는 것이었다. “한마디로 말하면, 홉스가 제거하고 싶었던 것은 정복, 또는 역사적 담론과 정치적 실천에서 이뤄지던 이 정복이라는 문제의 활용이었습니다. 리바이어던의 보이지 않는 적수는 바로 정복입니다.”

1066년의 이른바 노르망디 정복을 시작으로 잉글랜드의 정치사를 돌이켜본다면, 노르만족 등의 이민족 집단의 침입과 그것에 의한 선주민의 지배라는 사실이 반복되며, 그러한 경험의 축적 위에, 잉글랜드의 주권(), 즉 국왕을 역사적으로 위치짓는 것은 완전히 가능하다고, 아니 당시에서도 주류였다고 말해도 좋지만, 홉스는 그러한 길을 배척하고, (전쟁상태로서의) 자연상태라는 몰역사적 사고실험에만 의존하여, 주권자의 존재이유를 설명하기 시작한다. 그렇게 함으로서 홉스는 주권()’를 이질적인 두 개의 집단 사이의 적대관계, 즉 이항대립의 도식으로부터 분리하고, 그러한 적대 자체를 종언시키는, 조정하는 제3자로서 위치짓는다.

그리고 이 제3, 인격으로서의 주권()’에 반사되면서 신민(주체)’가 원자 또는 개인으로서, 즉 그 이상으로 분할 불가능한 사회의 단위로서 결정화(結晶化)한다. 이 메커니즘이 푸코가 말한 규율권력이며, ‘해부-정치인데, 이것은 (개인이 아니라) 인구라는 집합체에 정위된 -정치와도, 또한 이 생-정치를 (규율 ․ 훈육을 덧붙여) 불가결한 요소로 삼는 생명권력과도, 나아가 사회를 두 개의 이질적 집단의 반목이나 상극(相剋)으로 이해하는 이항대립도식과도 위상을 달리한다.

어쨌든, 역사적 사실로서의 전쟁이나 정복이 아니라, 의제fiction로서의 전쟁상태로부터 출발하여 만들어진 홉스의 정치철학은, 사회의 이항대립적 이해를 봉쇄하고 또한 적어도 커먼웰스commonwealth 내부에서의 전쟁을 종결시킨다.

지금까지의 논의를 정리해 보자. 살게 만드는 권력이, 왜 죽일 수 있는가라는 모순과 역설을 묻는 것으로부터, 인종주의의 문제가 부상하고, 나아가 그 배경에 있는 것으로서, 사회에 관한 이항대립적 이해라는 것을 볼 수 있었다. 홉스가 역설한 주권()이 이러한 이항대립을 봉쇄하기 위한 존재라는 것까지는 알았다. 그렇지만, 우리들의 고찰의 출발점에 있는 삶과 죽음의 문제에 대해, 이 주권()는 어떤 관계를 갖고 있을까?

홉스는 커먼웰스를 두 가지로 구별한다. 하나는 설립institution’에 의한 것이며, 다른 하나는 획득acquisition’에 의한 것이다.(리바이어던17장 이하.)

전자는 설립(의 계약)을 행하는 사람들의 서로에 대한 공포로부터 생겨나는 것이며(같은 책, 20), 그렇게 설립된 주권()은 바로 만인의 만인에 대한 전쟁상태를 종결시키는 제3자로서 군림한다. 이에 반해, 후자의 획득에 의한 커먼웰스는 예를 들어 사람이 아니나 자손들을 그의 지배에 복종시키고, 만일 복종을 거부하면 이것을 파멸시키는 경우, 또는 전쟁에 의해 적을 자신의 의지에 종속시키고, 그 복종을 조건으로 하여 생명을 부여하는 경우이다(같은 곳, 17).

후자의 획득에 의한 커먼웰스는, 그 때문에, 홉스가 기각하고자 했던 정복이라는 문제계로 한없이 가까워지지만, 그는 어떤 공통항을 설정함으로써, ‘획득에 의한 커먼웰스를 전자의 설립에 의한 커먼웰스와 동일한 것으로 간주한다. 그 공통항이란 복종하는 자들이 품고 있는 공포’, 정확하게는 죽음 또는 폭력의 공포그 대상이 이웃이든 주권자든 이며(같은 책, 20), 뒤집어 말하자면, 이런 사람들의 살려고 하는 의지이다. 사람들이란 죽고 싶지 않다, 살고 싶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복종하는 것이다.

홉스는 후자의 획득에 의한 주권의 원형으로서, 부모의 자식에 대한 권리를 언급하는데, 이것을 따라 푸코는 이렇게 말한다. “한 아이가 태어났다고 칩시다. 부모, 그러니까 시민사회에서라면 아버지, 자연상태에서라면 어머니인 부모는 그 아이를 죽게 내버려두거나laisser mourir, 순수하고 완전하게 죽게 만들 수도faire mourir 있습니다.” 이 죽음으로 향하게 할 수 있는 힘에서 홉스는 아이에 대한부모의 주권의 원천을 보지만, 이 도식은 정복자와 피정복자 사이에서도 볼 수 있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부모자식 관계와 동일시된, 혹은 그것으로 환원됨으로써, 또한 공포를 매개로 하여, 설립에 의한 주권으로 연결됨으로써, 정복이라는 문제는 그 고유성을 상실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한없이 탈색된다.

홉스에 의거하면서 푸코는 주권의 기원에 관해 이렇게 말한다. “결국 목에 칼이 들이대어졌느냐, 혹은 자신의 의지를 명확하게 정식화할 수 있느냐 아니냐는 별로 중요한 문제가 아닙니다. 주권이 존재하려면 타자의 의지가 없으면 살 수 없을 때조차도 살고 싶어 하는 어떤 근본적인 의지가 실제로 존재할 필요가 있으며, 이것으로 충분합니다. 이 의지는 공포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주권은 위로부터 형성된 것이 아닙니다. 다시 말해 최강자나 승자나 부모의 결정에 의해 형성된 것이 아닙니다. 주권은 언제나 아래로부터, 공포를 지닌 사람들의 의지에 의해 형성됩니다.”

생명권력과 대비되는 죽게 만들 것인가 살게 내버려둘 것인가라는 고대의 법/권리라는 것은 위에서 본 푸코의 말에서 이미 명확해졌지만, 요컨대 홉스의 정치철학의 요체이다(앎의 의지참조.).

76년도의 마지막 강의에서 푸코는 이러한 홉스 독해를 밑바탕으로 하여, 또한 앎의 의지에서의 서술을 자세히 해설하는 형태로, 이렇게 말한다.

 

고전적 주권 이론에서는 생살여탈권이 그 근본적 속성들 중 하나였습니다. 그런데 생살여탈권은 기묘한 권리, 이미 이론적 수준에서도 기묘한 권리입니다. 실제로, 생살여탈권을 갖고 있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요? 어떤 의미로는, 주권자가 생살여탈권을 갖고 있다고 말하는 것은, 요컨대 주권자가 죽게 만들고faire mourir 살게 내버려둘laisser vivre 수 있다는 것입니다. 특히 삶과 죽음은 정치권력의 장 바깥으로 떨어져나가는 자연적이고 무매개적인, 이른바 원초적이고 근본적인 현상이 아닙니다. 좀 더 밀고 나간다면, 역설로까지 밀고 나간다면 결국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신민[주체]이 권력에 대면해 당연하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 즉 살아 있다고도 할 수 없고 죽었다고도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삶의 관점과 죽음의 관점에서 보면 신민은 중성적입니다. 그리고 신민이 살 권리를 갖고 있는가 아니면 혹여 죽을 권리를 갖고 있는가는 오직 주권자가 정하는 것입니다. 하여튼 신민들의 삶과 죽음은 주권자의 의지의 효과에 의해서만 권리가 될 뿐입니다. 여기에 이론적 역설이 있습니다. 이론적 역설은 일종의 실천적 불균형에 의해 분명히 상호보완되어야만 합니다[이론적 역설에는 실천상의 불균형 같은 것이 반드시 들러붙어 있습니다=이 역설은 분명히 일종의 실천상의 불균형에 의해서만 해소될 수 있습니다]. 실제로 생살여탈권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물론 주권자는 죽게 만들faire mourir 수 있는 것처럼 살게 만들faire vivre 수는 없습니다. 생살여탈권은 불균형적 방식으로만, 언제나 죽음에 편에서만 행사될 수 있습니다. [생명]에 대한 주권권력의 효과는 주권자가 죽일 수 있는 순간부터만 행사됩니다. 궁극적으로 이 생살여탈권의 본질 자체를 실효적으로 담지하는 것은 죽일 권리인 거죠. 주권자가 삶[생명]에 대한 자신의 권리를 행사하는 것은 죽일 수 있는 순간일 뿐입니다. 이것은 본질적으로 칼의 권리입니다.”

 

정리해 보자. 법권리라는 것은 그 자체로 사람들의 삶과 죽음에 직접, 관계하는 것이 아니다. 법권리에 의해 사람이 산다는 것도 아니라면, 죽는다는 것도 아니며, 법권리 자체는 삶과 죽음에 대해 중립적’, 즉 무관심(무차이)이다. 주권자의 권력의 기입/진입에 의해서 비로소, 법권리는 삶과 죽음에 연결되는데, 그때의 기입/진입은 오로지 죽음에 크게 기울어져 있다. , 살게 만든다는 형태가 아니라, 죽음에 이르게 한다는 형태로 간주된다. 이것은 홉스에게 돌아가 말하자면, 부모자식 관계로부터, 부모가 신생아의 양육을 방기하고 죽게 만드는, 혹은 그 아이의 호흡을 끊어버리는 것이며, ‘획득에 의한 주권이라면 정복자가 상대를 한 사람도 남기지 않고 살해할 때까지 전쟁을 관철하는 것이며, ‘설립에 의한 주권이라면 일체의 개입을 하지 않고 만인의 만인에 대한 전쟁상태를 만인이 죽을 때까지 지속시키는 것이리라.

이러한 죽음에 이르게 하는faire mourir” 권력의 행사를 중단, 또는 보류함으로써 주권자는 사람들을 살게 내버려두는laisser vivre(faire vivre)” 것이며, 동시에 법권리를 삶에 연결시키는 것인데, 이때 삶은 주권자의 작위(faire)가 아니라 그의 부작위(laisser)의 결과로서 존재한다. 왜 부작위에 의해 삶이 존재할 수 있는가? 그것은 주권자가 아니라 신민(주체)의 쪽에 이미 살기를 욕구하는 근원적 의지가 존재하기 때문이며, 주권자는 이 의지의 자발적이고 자율적인 전개를 그저 묵인하면 되기 때문이다.

죽음에 이르게 하거나, 살게 내버려두는 고대의 법권리가, 그럴 기분이 되면 언제든 살해할 수 있다는 위협에 의해 근원적으로 뒷받침되는 의 법권리의 하나의 이념형을, 푸코가 홉스에게서 보고 있다는 것은 확실하지만,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푸코의 이러한 홉스 해석에는 다시 홉스가 자신으로 돌아와 약간의 보충 또는 교정이 필요하다. 말하자면 홉스는 일단 주권과 커먼웰스가 성립한다면, 이것에 귀속하는 신민(주체)에게는 이런 주권 및 커먼웰스에 대해 죽음에 이르게 할 수 있는 권력의 행사의 정지를 요구할 권리가 있다고 설명하고 있기 때문이다.

주권자에 대해 복종계약을 체결하더라도, 모든 권리가 방기 또는 양도되는 것은 아니라면서, 홉스는 이렇게 말한다. “사람은 자신의 생명을 빼앗기면, 자신을 덮치는 사람들에 대해 힘을 사용하여 저항하는 권리를 방기할 수 없다. 권리의 방기나 이양이 나오는 동기 및 목적은 생명에서의 그 사람의 인격의 보장security, 피폐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생명을 유지할 수 있는 수단의 보장 이외의 아무것도 아니다.”(리바이어던, 14)

복종계약의 전과 후에, 상황은 일변한다. 그 직전에는 누구든 죽음에 이르게 할 수 있는 권력이 작동하며, 그것이 복종과 주권의 창설을 기초짓지만, 복종계약 이후에는, 주권자가 자신에게 복종하는 신민(주체)를 죽음에 이르게 할 수 있다는 것은 계약 위반이 된다. 왜냐하면 복종의 가장 중요한 기능 및 목적은 신민(주체)의 생명이 적극적으로 보호되는 것이 있기 때문이며, 그 약속을 만일 깨뜨린다면, 복종계약에는 아무런 의미도 없게 되기 때문이다. 이에 덧붙여 신민(주체)에게는 복종계약 이후에도 자신의 생명을 지킬 권리가 계속 남는다.

복종계약 이후에 주권자는 그 어떤 사람이든 죽일 수 없게 된다는 것이 아니다. 사태는 오히려 반대로, 자신에게 복종하는 신민(주체)들의 생명의 안전성security을 위해 주권자는 여러 적들 커먼웰스 내부의 반대자든 커먼웰스를 외부에서 공격하는 외국인이든 을 죽일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주권자의 편에 선 이론이며, 신민(주체)의 편에는 이것과는 별개의, 정반대라고도 말해도 좋은 이론이 계속 승인된다.

커먼웰스를 만들 때에, 홉스가 각자에게 방기를 요구한 것은 타인을 지킬 권리(자기 방어를 위한) “타인을 굴복시키고 부상을 입히고 죽일 권리였지, “자기 자신을 지킬 권리가 아니다(리바이어던, 28). 복종계약이란 타자의 처우 보호든 공격이든 에 관한 자신의 권리를 방기하고, 그 권리를 주권자에게만 잔존시키는 것에 동의하는 계약에 지나지 않으며, 자신의 생명을 지킬 자신의 권리가 거기에 전면적으로 방기되는 것은 결코 아니다. , 복종계약 이후에 신민(주체)은 주권자가 자신 이외의 타인에 대해 행하는 것(처벌, 살해 등)에 관해 주권자에게 이의를 일절 제기할 수 없으나, 자기 자신의 생명의 안전성이 문제로 될 때에는, 주권자에 대해 일정한 저항권을 지닌다. 이 저항권을 만일 완벽한 형태로 행사한다면, 각 신민(주체)은 주권자에 대해, 나를 죽여서는 안 된다, 죽음에 이르게 할 수 있는 권력을 나에 대해 행사해서는 안 된다, 나의 생명의 안전성을 보장해야마 한다고까지 주장할 수 있다. 그 주장을 주권자가 들을 것인가 여부, 또한 이것에 대한 주권자의 반응이 법권리에 비춰볼 때 정당한가 부당한가와는 완전히 독립적으로이다.

이러한 저항권을 홉스 자신은 확실히 완벽한 형태로는 인정하지 않고, 주권자가 나를 죽인다는 것을 각 신민(주체)이 감수하지 않으면 안 되는 사태의 가능성을 배제하지 않지만, 동시에 다음과 같이 분명히 말한다. “어떤 사람이 병사로서 적과 싸우라는 명령을 받았는데도 그것을 거부한다면, 그 사람을 죽음으로 벌할 권리가 주권자에게 있는 경우에도, 그 사람은 [명령을] 거부해도 좋으며, 더욱이 그것이 전혀 부당하지 않은 게임이 상당수 존재한다. 다수의 사람들이 하나가 되어, 이미 부당한 형태로 주권자의 권력에 저항하고, 어떤 중죄를 범하기도 하기 때문에, 그 중에서 누군가가 자신에게 죽음이 기다리고 있다고 생각하는 경우, 그들에게는 일치단결하고, 서로 도우며 서로 방어할 자유가 인정될 수 있을까? 물론 인정된다. 왜냐하면 그들은 자신들의 생명을 지키고자 하기 때문이며, 이 자기 방어는 어떤 죄든 침해하지 않는 사람에 대해서와 마찬가지로, 죄를 범한 사람에게도 인정된다.”(리바이어던, 21).

적어도 두 가지를 확인해 두어야만 한다.

첫째로, 홉스는 자신의 생명을 지킬 권리를 축으로 하여, 신민(주체)에게 적어도 능동성을 담보한다. 이 점을 푸코는 간과하고 있는 것처럼 생각된다. 적어도 충분한 주의를 기울이지 않고 있다. “살기를 욕구하는 근원적 의지를 푸코는 오로지 복종과 연결시키지만, 이 의지를 위에서처럼 저항으로 연결시키는 회로도 또한 확실히 존재하며, 이 회로로부터 더 나아가 자신들의 생명을 지키기 위해서 주권자와 커먼웰스에 대항하여 일치단결한 자유, 즉 반란의 자유가 파생될 수 있다.

둘째로, 홉스의 정치철학에는 푸코가 지적했던, 작위faire에 의해 죽음을 초래하고 부작위laisser에 의해 삶을 나타낸다는 불균형과는 다른 불균형이 하나 더 존재한다. 그것은 주권자가 바라본 권리와 신민(주체)이 본 권리 사이의 불균형이다. 주권자의 권리는 푸코가 말하듯이, 삶보다는 죽음에 기울어 있다. 그러나 홉스에게 있어서 그 자기 방어권이 계속 계승되는 신민(주체)의 권리는, 분명히 그것과는 정반대로, 죽음보다도 삶에 기울어 있다. 이 두 가지는 확실히 요철처럼 서로 합치하며, 하나의 조화를 끌어내는 것처럼 보인다. 신민(주체)의 자기 방어권, 즉 살 권리는 주권자의 입장에서 보면 살게 내버려두는laisser vivre 법권리로 해석될 것이다. 그러나 전자와 후자를 동일시하고 둘의 관계를 상호 보완하는 것으로만 파악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신민(주체)가 자신의 생명을 지킬 권리는, 거듭 말하지만, 저항을 산출할 수 있기 때문이며, 이 저항은 주권자의 법권리를, 죽음에 이르게 할 수 있는 그것도 포함하여, 근본에서부터 뒤흔들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주권자의 권리와 신민의 권리는 어디까지나 완벽하게 겹쳐지지 않는다. 둘 사이에는 간극이 있다.

홉스가 처음부터 끝까지 각자에게 계속 인정하는 자기 방어권은 푸코가 고대의 법권리에 수반된 죽음에 이르게 할 수 있는 힘뿐만 아니라, 생명권력의 죽음 속으로 쫓아내는 힘에도 대립하는 것이리라. 그러나 기묘하게도 이 자기 방어권으로부터 나오는, 죽음 속으로 쫓아내는 생명권력을 마주대할 길이 다른 한편으로 존재한다.

그 선을 긋는 것이 다름 아니라 루소이다. 사회계약론에서, 삶과 죽음에 대한 법권리에 관하여라는 적절한 제목이 달린 장에서, 그는 이렇게 말한다.

 

모든 사람은 자신을 생명을 지키기 위해서 자신의 생명을 위험하게 할 권리를 갖고 있다. 화재를 피하기 위해 창문으로 뛰어내린 사람은 자살죄에 해당한다고 말할 사람이 아직도 있을까? 사회계약은 계약 당사자들의 보전을 목적으로 한다. 타인의 희생에 의해 자신의 생명을 보존하고자 하는 사람은, 필요한 경우에는 또한 타인을 위해 그의 생명을 포기해야만 한다. 나아가 시민은 법에 의해 자기 자신을 위험에 노출시킬 것을 요구받았을 때, 그 위험에 관해서 더 이상 운운하지 않는다. 그리고 통치자가 시민을 향해 네가 죽는 것이 국가에 도움이 된다고 말할 대, 시민은 죽어야만 마땅하다. 왜냐하면 이러한 조건에서만 그는 오늘날까지 안전 속에서 살아왔으며, 또한 그의 생명은 단순히 자연의 은총인 것이 아니라 국가에 의해 조건지어진 선물이기 때문이다.

Every man has a right to risk his own life in order to preserve it. Has it ever been said that a man who throws himself out of the window to escape from a fire is guilty of suicide? The social treaty has for its end the preservation of the contracting parties. He who wishes to preserve his life at others' expense should also, when it is necessary, be ready to give it up for their sake. Furthermore, the citizen is no longer the judge of the dangers to which the law-desires him to expose himself; and when the prince says to him: "It is expedient for the State that you should die," he ought to die, because it is only on that condition that he has been living in security up to the present, and because his life is no longer a mere bounty of nature, but a gift made conditionally by the State.(사회계약론)

 

루소는 여기에서 우선 첫째로, 자기 방어권을 양의적인 것으로 간주한다. 즉 생명의 긍정이 (화재로부터 피하기 위해 창문으로 뛰어내린 결과, 운 나쁘게도 죽어버린 경우처럼) 생명의 부정일 수도 있다고 역설한다.

둘째로, 홉스가 어디까지나 개인적인 것으로 간주한 방어권 또는 안전성을 루소는 집단적인 것으로 고쳐 쓴다. “계약 당사자들의 보존이라고 루소가 복수형으로 말했다는 것이 중요하다. 그것은 계약 당사자들 한 사람 한 사람의 생명의 보존이 아니다.

그리고 이 두 가지를 결합시키면서 루소는 셋째로, 어떤 사람의 생명을 긍정하기 위해서는 다른 사람의 생명을 부정하는 것이 있을 수 있으며, 그것은 지극히 정당하다고 역설한다. “네가 죽는 것이 국가에 도움이 된다는 언명에 대해, 홉스는 그 명령을 거부할 권리를 계속 인정하지만, 루소는 그것을 더 이상 허용하지 않는다.

생명을 위해 죽음을 초래한다는 생명권력을 떠받치는 이론은, 이미 루소에게서 발견할 수 있다. 그리고 루소는 친구와 적이라는 사회에 관한 이분법과, 전쟁이라는 문제 메커니즘을 도입하는 것으로 나아간다.

 

또 다시 사회계약을 침해하는 모든 악인은 모조리, 그 죄 때문에 조국에 대한 반역자, 배반자가 된다. 그는 법을 위반함으로써 조국의 일원이기를 그치며, 심지어 조국과 전쟁을 벌인다고 할 수 있다. 이런 경우에 국가의 보존과 그의 보존은 양립할 수 없으며, 둘 중 어느 하나는 사멸해야만 한다. 죄인을 죽음에 이르게faire mourir 할 때, 죄인은 시민이라기보다는 적으로서 살해된다.

Again, every malefactor, by attacking social rights, becomes on forfeit a rebel and a traitor to his country; by violating its laws be ceases to be a member of it; he even makes war upon it. In such a case the preservation of the State is inconsistent with his own, and one or the other must perish; in putting the guilty to death, we slay not so much the citizen as an enemy.

 

죽음에 이르게 할 수 있는 것은 더 이상 조정하는 제3자에 귀속하지 않는다. 그것은 서로 대립하는 이질적인 두 집단 또는 범주 속의 한쪽이 다른 쪽을 적으로 간주하는 형태라고 여겨진다. 더욱이 동일한 국가(커먼웰스)의 내부에서도 그러하다.

나아가 루소는 이렇게 말한다.

 

그대로 계속 살아간다면 위험한 인간을 빼면, 설령 본보기를 위해서라고 해도, 죽음에 이르게 할 수 있는 권리는 누구에게도 없다.

 

누군가를 죽음에 이르게 할 수 있는 권리는 기본적으로는 누구에게도 인정되지 않지만, “그대로 계속 살아간다면 위험한 인간에 관해서는 이야기가 다르다는 것이다.

생명권력이 왜 사람들을 죽게 만들 수 있는가에 관해 푸코는 이렇게 말한다. “타인에게 있어서 일종의 생물학적 위험인 인간이기 때문에, 합법적으로 살해할 수 있는 것이다.”(앎의 의지) ‘생물학적이라는 형용사가 없더라도 타자에게 있어서의 위험하기 때문에 어떤 생명을 말소하는 것은 정당하다는 논리는 이미 루소에게서 충분히 볼 수 있다.

사회적인 것의 개념에 강력한 탄식을 불어넣은 최초의 사람인 루소는, 그러나 푸코가 고대의 법권리의 원형으로 본 홉스의 정치철학으로부터 다양한 의미에서 거리를 두며, 살게 만들 것인가, 죽음 속으로 쫓아내는 권력으로 크게 다가섰다.

 

4. 인종주의로서의 사회주의

인종주의를 기초짓는, 사회에 관한 이항대립적 개념. 이것을 가장 선명하고 긍정적으로 제시한 인물 중 한 사람은, 말할 것도 없이 칼 슈미트이다. “정치적인 행동이나 동기의 기본원인으로 생각되는, 특수 정치적인 구별이란 친구와 적이라는 구별이다.”(정치적인 것의 개념)

나치즘에 적지 않게 관여한 것에 비추어 보더라도, 슈미트의 정치론을 푸코가 말한 인종주의나 생명권력이라는 관점에서 (무턱대고 찬양하는 것이 아니라) 비판적으로 검토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되지만, 푸코 자신은 적어도 76년의 강의에서는 슈미트를 전혀 언급하지 않는다. 이 침묵 자체도 일고할 가치가 있지만, 여기에서는 슈미트의 문제로는 들어가지 않는다.

사회에 관한 이분법을 마찬가지로 선명하고 긍정적으로 제시했던 또 다른 사고는, 계급투쟁이라는 개념 위에서 축조된 사회주의, 맑스주의이다. 76년의 강의에서 푸코는 사회주의와 그가 말한 인종주의의 연결과 유사성에 관해 몇 번이나 언급한다. 마지막 강의에서는 이렇게 말한다. 좀 길지만 그대로 인용해 보자.

 

이렇게 말하기 위해서는 또 다른 논증이 필요하겠지만, 저는 사회주의 국가, 사회주의도 근대 국가, 자본주의 국가의 기능과 마찬가지로 인종주의에 의해 표식된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여러분께 말씀드렸던 조건 속에서 형성된 국가인종주의의 맞은 편에서는 사회적 인종주의가 구성됐습니다. 이런 사회적 인종주의가 등장하기 위해서는 사회주의 국가의 형성을 기다릴 것도 없었습니다. 사회주의는 처음부터, 19세기에[] 인종주의였습니다. 그리고 19세기 초의 샤를 푸리에이든, 19세기 말의 아나키스트들이든, 모든 형태의 사회주의에서 여러분은 늘 인종주의의 구성요소를 보실 수 있을 것입니다.

이 점에 관해 말하는 것은 아주 어렵습니다. 이렇게 말하는 것은 어마어마한 주장이죠. 이 점을 논증한다는 것은 결국 또 다른 일 년의 강의가 필요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고 싶기는 합니다. 아무튼 간단히 이렇게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지금부터는 약간 두서없이 말씀드릴 텐데, 제가 보기에는 일반적으로 소유권 유형 혹은 생산양식의 경제적이거나 법적인 문제들을 우선적으로 제기하지 않는다면, 그에 따른 결과로 권력의 기제나 권력의 메커니즘 문제를 제기하고 분석하지 않는다면, [그렇게 된다면 사회주의는 Fr.] 자본주의 국가나 산업 국가를 통해 구성된 것과 똑같은 권력메커니즘을 다시 배치하고 다시 투여하지 않을 수 없게 됩니다. 아무튼 한 가지는 확실합니다. 18세기 말과 19세기 내내 발전된 생명권력의 테마는 사회주의에 의해 비판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사실상 사회주의에 의해 재수용되어 발전되고 재이식됐으며, 몇 가지 점에서 수정됐습니다만 그 기능의 기초와 양식 속에서 재검토된 적이 결코 없었습니다. 결국 사회나 국가, 혹은 국가를 대체하게 될 무엇인가의 본질적 기능은 생명을 떠맡아 관리하고 증대시키며 예측불가능한 우연을 벌충하고 그 생물학적 확률과 가능성을 두루 살펴 경계를 획정하는 것이라는 관념은 사회주의에 의해 고스란히 다시 받아들여진 것처럼 보입니다. 죽일 권리나 제거할 권리, 자격을 박탈할 권리를 행사할 것임에 틀림없는[행사해야만 하는] 사회주의 국가가 존재하는 이상, 우리는 이런 결과를 갖게 됩니다. 이렇게 해서 아주 자연스럽게도 우리는 인종주의가, 그러니까 고유하게 종족적인 인종주의가 아니라 진화론적 유형의 인종주의, 생물학적 인종주의가 []소련형 사회주의 국가들에서 정신병이나 범죄자나 정적 등에 관해 완벽하게 기능하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국가에 관해서는 이쯤 해두겠습니다.

또한 제가 흥미롭게 여기는 것, 그리고 제게 오랫동안 문제였던 것은, 다시 한 번 말씀드리면, 제가 보기에 인종주의의 이 똑같은 기능이 단순히 사회주의 국가의 수준에서만이 아니라 19세기 내내 상이한 형태의 사회주의적 분석이나 기획 안에서도 발견된다는 점입니다. [당시의] 사회주적 분석이나 기획은 다음의 사실을 둘러싸고 나왔죠. 기본적으로 무엇보다도 경제적 조건들의 변혁이 자본주의 국가에서 사회주의 국가로의 변혁이행의 원리라고 강조할 때마다, 달리 말하면 경제적 과정의 수준에서 변혁의 원리를 모색했을 때마다, 사회주의에게는 적어도 즉각적으로 인종주의가 필요하지 않았습니다. 그에 반해, 사회주의가 투쟁, 적에 맞선 투쟁, 자본주의 사회 내부에서의 적수 제거 같은 문제에 관해 강조하지 않을 수 없었던 모든 순간마다, 그에 따라 자본주의 사회에서 계급의 적수와 물리적으로 대결하는 것이 문제가 될 때마다, 인종주의는 재부상했습니다. 왜냐하면 생명권력의 주제들과 밀접히 연결됐던 사회주의적 사상에 있어서 인종주의는 적수를 죽일 이유를 사유하는 유일한 방식이었기 때문입니다. 단순히 적수를 경제적으로 제거하고 이들의 특권을 잃게 만드는 것만이 문제라면, 인종주의는 필요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적수와 일대일로 맞서는 것을 생각하자마자, 그리고 적수와 물리적으로 싸워야 하고 자기네 생명을 위험에 빠뜨려야 하며 적수의 죽임을 모색해야만 한다고 생각하자마자, 인종주의가 필요해집니다.

결국 이런 사회주의, 사회주의의 이런 형태들, 투쟁의 문제를 강조하는 사회주의의 이런 계기들을 갖게 될 때마다, 인종주의가 있게 됩니다. 예를 들어 사회주의의 가장 인종주의적인 형태는 당연히 블랑키주의였고, 파리 코뮌이었으며, 아나키즘이었습니다. 이것들은 사회민주주의보다 훨씬 더, 2인터내셔널보다 훨씬 더, 맑스주의 자체보다 훨씬 더 인종주의적이었죠. 유럽에서 사회주의적 인종주의는 19세기 말에야 비로소 청산됐습니다. 한편으로는 사회민주주의, 그리고 꼭 말해야만 하는데, 이 사회민주주의와 연결된 개혁주의의 지배에 의해서, 다른 한편으로는 프랑스의 알프레드 드레퓌스 사건 같은 몇 가지 과정에 의해서 말입니다. 그러나 드레퓌스 사건 전에는 모든 사회주의자들, 요컨대 압도적 다수의 사회주의자들이 근본적으로 인종주의자였습니다. 그들이 인종주의자였다는 것은 18세기 이래 사회와 국가의 발전이 수립했던 생명권력의 메커니즘을 그들이 재평가하지 않았거나 자명하다고 인정했기 때문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이렇게 말하고 끝마치겠습니다. 인종주의를 거치지 않은 채 어떻게 생명권력을 기능시키고, 이와 동시에 전쟁의 권리들, 살인의 권리들과 죽음의 기능의 권리들을 행사할 수 있을까? 바로 이것이 문제였고, 늘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사회를 서로 이질적인 둘로 나누고, 둘의 적대로서 사회를 독해하는 사고가 (앞에서 인용한 대목의 끝부분에서 푸코가 시사하듯이) ‘반란이나 혁명과 연결된 희망이나 명령이나 정치를 도출한다는 측면을 생략해야만 할까? 사회에 관한 이항대립적 이해와 전쟁이라는 문제계를 봉쇄하고자 했던 홉스는 당시의 잉글랜드 혁명(청교도혁명)을 동시에 봉쇄하고자 했다. 홉스가 막고자 했던 회로를 연다는 것은, 따라서 반란과 혁명의 회로를 연다는 것이기도 하다. 홉스는 혁명을 종언시키지만, 그에게 역행하는 형태로, 전쟁이나 공공의 적ennemi public”(사회계약론) 슈미트를 또한 떠올려 보라(정치적인 것의 개념) 이라는 개념을 전면에 내세우는 루소는 혁명을 개시하게 만들었다.

그렇지만 이러한 회로는 푸코에 따르면, 인종주의에 다름 아니며, 이것이 생명권력에 살해의 권리를, 죽음 속으로 쫓아내는 권리를 비급(備給)한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그것을 생략하고 은폐하는 사회주의적 사고는 그 시점에서 이미 생명권력을 비판적으로 다시 묻는 작업을 방기하는 인종주의 이외의 아무것도 아니다. 그 속에서 진정한 해방이나 저항을 찾아보기는 힘들다.

 

5. 아사라는 살해

사람들을 살게 만드는 생명권력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을 죽음 속으로 쫓아낸다, 더욱이 미증유의 규모로 폐기한다는 것. 이 모순과 역설을 푸코는 인종주의라는 메커니즘에 의해 설명했다. , 사회가 완전히 이질적인 두 개의 집단의 적대로서 이해된다면, 그 중 어느 한쪽의 살해, 보다 정확하게는 그 집단적 살해는 다른 쪽의 생명의 긍정이나 증강으로서 위치지어지기 때문에, 살게 만드는 권력이 동시에 죽인다는 것과 모순디지 않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설명에 의해 푸코 자신의 문제제기가 충분히 해명되었다고 나는 생각하지 않는다. 말하자면 인종주의는 생명권력의 살해 이유를 설명하고 있기는 하지만, 방식에 대해서는 답하지 않기 때문이다. , 살해의 이유와 근거에 대해서는 답하지만, 그 살해가 어떤 형태로 행해지는가에 관해서는 아무것도 설명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제 우리는 이 글의 서두에서 제기했던 첫 번째 물음으로 돌아가야만 한다. 푸코는 고대의 법권리가 죽음에 이르게 할 수 있는faire mourir”데 반해, 생명권력은 죽음 속으로 쫓아낸다rejeter dans la mort”라고 말했는데, 후자는 (이것과 병행하는 살게 내버려두는laisser vivre” 것으로부터 살게 만드는faire vivre” 것으로의 전환에 비춰본다면) “죽게 내버려둔다laisser mourir”는 것으로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어쨌든 확실한 것은 고대의 법권리와 생명권력에서는 살해의 방법이 다르다는 것인데, 인종주의를 근거로 생명권력이 행하는 살해를 에 의한 죽음에 이르게 한다는 것과 동일한 것으로 말하는 한에서, 이 차이는 말끔하게 인식되지 않는다.

이 차이를 명확하게 하는 데 있어서 지금 당장의 실마리가 되는 것은 작위(faire)와 부작위(laisser)의 차이이다. 그런데 작위가 아니라 부작위에 의한 살해란 구체적으로 어떤 것일까?

생존자들이 수용소에서 인간의 땅으로 전파한 극악무도한 소식은 바로, 어떠한 상상도 넘어서서 존엄과 품위를 상실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 가장 극단적인 영락零落degradation에서도 여전히 삶을 영위할 수 있다는 것이다.”(아우슈비츠의 남은 것들, 69) 죠르죠 아감벤은 푸코의 생명권력을 바탕으로 삼아 아우슈비츠를 고찰하면서 이렇게 말하는데, 아우슈비츠에서 인간이 어떠한 상상도 넘어서서 존엄과 품위를 상실하고, 극한까지 영락해가는 그 과정이란 구체적으로 어떠한 것일까? 아우슈비츠가 인간을 살게 만들면서 죽게 내버려두는to make live and to let die”(83), 즉 나중에 모든 존엄을 빼앗기면서도 그래도 생명의 마지막 숨통을 끊는다는 것이 사실이라고 해도, 존엄은 도대체 어떻게 빼앗기는 것일까?

아감벤이 간과하고 있는, 혹은 적어도 충분한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 것이 하나 있다. 그것은 아우슈비츠를 둘러싼 기아飢餓라는 문제이다. 아감벤이 반복하여 언급하는 프리모 레비는 이 문제에 관해 이렇게 말한다.

 

인간의 본성에 따르면 슬픔과 아픔은 여러 가지를 동시에 겪더라도 우리의 의식 속에서 전부 더해지는 것이 아니라, 정확히 원근법에 따라 앞의 것이 크고 뒤의 것이 작다. 이것은 신의 섭리이며, 그래서 우리가 수용소에서도 살아갈 수 있는 것이다. 자유로운 삶에서, 인간이 만족할 줄 모르는 존재라는 말을 그토록 자주 듣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사실 이것은 인간이 애초에 완전히 행복의 상태를 누릴 수 없어서라기보다 불행의 상태가 지니는 복잡한 성질을 늘 충분히 인식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수없이, 차례대로 늘어선 그 불행의 이유들이 단 하나의 이름을, 가장 큰 이유의 이름을 갖게 된다. 그 이유가 힘을 잃어버릴 때까지 말이다. 그런데 그때 우리는 그 뒤로 또 다른 이유가 등장하는 것을 본다. 비탄에 잠길 정도로 충격을 받는다. 하지만 실제로는 그 뒤로 또 다른 이유들을 줄을 서 있다.

그리하여 겨우내 우리의 유일한 적이었던 추위가 가시자 우리는 배가 고프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그리고 똑같은 오류를 범하며 오늘 배만 고프지 않다면!’ 하고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어떻게 배가 고프지 않기를 바랄 수 있단 말인가? 수용소 자체가 배고픔이다. 우리 자신이 배고픔, 살아 있는 배고픔이다.(이것이 인간인가, 110~111, 강조는 인용자)

 

불행의 원인’, 즉 아우슈비츠에서 인간으로부터 존엄과 품위를 빼앗고 영략시키는 원인은 몇 가지가 있으며, 그 중에서 많게는 하나, 또한 하나로 해소될 여지가 있지만, 그 중에서도 결코 해소되지 않은, 원인 중의 원인이라고 불러야 할 것이 하나 있는데, 그것이 바로 배고픔이라고 레비는 말한다.

레비가 말한 수용소는 가까이에 진군한 러시아군을 두려워해 19451월에는 관리자 독일인이 모조리 없어지고, 더 이상 수용소로서 기능하지 않았다. 그때까지와 같은 살육이나 학대는 없어졌음에도 불구하고, 그러나 그 후의 상황은 이전의 상황 이상으로 비참한 것이었다. 수용소 전체가 이른바 마비되고, 극히 빈곤해졌을 뿐만 아니라, 그때까지 확보되었던 식사의 배급 등이 전면 멈춰섰다. 수용소에 남은 사람들은 자력으로 식사를 찾아내고 어떻게든 연명했지만, 식사는 절대적으로 부족했으며, 한 사람씩 죽어갔다. 러시아군에 의해 구출될 때까지의 그 나날들을 레비는 시간과 공간을 넘어선 10일 간이라고 표현하면서 이렇게 말한다.

 

인간을 죽이는 건 바로 인간이다. 부당한 행동을 하는 것도, 부당함을 당하는 것도 인간이다. 거리낌 없이 시체와 한 침대를 쓰는 사람은 인간이 아니다. 옆 사람이 가진 배급 빵 4분의 1쪽을 뺏기 위해 그 사람이 죽기를 기다렸던 사람, 물론 그의 잘못은 아닐지라도, 미개한 피그미, 가장 잔인한 사디스트보다도 생각하는 사람이라는 전형에서 멀리 떨어진 사람이다.(위의 책, 263, 강조는 인용자)

 

레비의 이것이 인간인가라는 물음은 이런 상황에 처한 자신들에 대해 던지는 것이며, 아감벤이 말한 인간의 영락의 극한, 이러한 기아의 한계상황에 의해 초래된 것이다.

나치의 강제수용소에 관한 여러 가지 보고를 재검토하면, 그 어떤 것이든 기아의 문제를 반복적으로 언급하고 있음을 분명하게 깨달을 수 있다. 역시 아우슈비츠에서 생활한 E. A. 코엔은 수용소의 인간에게 많이 발견된 전신쇠약, 만성적인 영양실조증에 관해 이렇게 말한다.

 

이 상황은 인간이, 그가 소비하는 칼로리보다 적은 칼로리만 주어졌을 때 생긴다. 그러므로 마이너스 에너지 균형이 생기며, 육체는 에너지의 부족을 채우기 위해 자신을 소비하기 시작한다. 그 결과가 강제수용소에서의 무젤만유형의 인간의 출현이었다. 린겐스 라이나 부인은 이러한 억류자의 풍모를 다음과 같이 생생하게 묘사했다. “압도적으로 다수인 사람은 살아 있는 해골이었다. 늙고 추악한 모습을 하고, 그들이 발로 서 있다는 것은 마치 기적으로밖에는 생각되지 않았다.”

 

V. E. 프랑클도 또한 이렇게 말한다.

 

마지막 날은 하루의 식사라고 말하면, 하루에 한번 주어진 완전히 물과도 같은 수프와 사람을 바보 취급할 정도로 작은 빵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그것에 이른바 추가가 있었지만, 그것은 20그램의 마가린이었으며, 또한 한 조각도 되지 않은 소시지, 또 치즈 작은 조각, 그리고 대용 꿀, 혹은 한 숟가락의 마멀레이드였으며, 매일 바뀌었다. 끔찍한 중노동이나 혹한의 실외작업이나 누더기에다 얇은 옷을 생각하면, 칼로리적으로는 아무리 생각해도 절대 부족한 영양이었다. ‘정양静養중인 환자, 즉 막사 안에서 자고 있고 수용소 야외작업에 나가지 않아도 좋은 환자에게는, 더 나쁜 식사가 주어졌다. 피하지방의 남은 마지막까지 다 써버리면, 우리는 피부와 그 위에 약간의 누더기를 걸친 해골처럼 보였다. 그리고 그때 우리는 어떻게 신체가 자기 자신을 탐하기 시작했는가를 볼 수 있었다. , 유기체가 자신의 단백질을 먹어치우고 근육조직이 사라져가는 것이다.(霜山徳爾訳みすず書房, 112-3, 강조는 인용자).

 

무젤만이란 무엇인가? 우리들은 이미 이 말 속에 인종주의를 읽을 수 있지만, 그것은 극도의 기아상태, 영양실조 때문에 자기 스스로 자신을 말소시키는 생명의 모습이다. ‘무젤만을 작위에 의해 죽음에 이르게 할faire mourir’ 필요는 없다. 왜냐하면 무젤만은 자기 스스로 자신을 말소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필요하다고 여겨지는 것은 그저 죽게 내버려두는laisser mourir’ 것뿐이다.

그렇지만 아우슈비츠의 이 기아는 갑자기 생겨난 것이 아니다. 거기에는 전사(前史)가 있다. “이 전쟁에 휘말린 사건에서만큼 철저하게, 경험이라는 것의 허위가 폭로되었던 것은 없었다. , 전쟁에 관한 경험은 진지전에 의해서, 경제상의 경험은 인플레이션에 의해서, 신체적인 경험은 배고픔에 의해서, 윤리적 경험은 권력자들에 의해 모조리 가면이 벗겨진 것이었다.” 발터 벤야민은 경험과 빈곤(1933)에서 제1차 세계대전에 관해 이렇게 말하는데, 전쟁 중의 독일 국내의 식량 부족은 타국에서도 심각한 것이었다. 특히 1916년 가을, 독일인의 주식인 감자가 기후악화로 인해 전멸에 가까운 상태가 되었다. 이에 더해, 전쟁에 의해, 수입된 식량 물자도 점저 감소했다. 영국과 프랑스 등의 적국으로부터 들여오지 않은 것은 말할 것도 없지만, 그 밖의 나라로부터의 수입 루트도 적국에 의해 적지 않게 끊겨졌다. 당연히 동일한 것을 독일도 적국에 대해 행했지만, 어쨌든 전쟁, 특히 20세기의 전쟁에서 적국의 국민으로부터 생활물자를 빼앗는 것은 적국 국민을 살상하는 것 이상으로 유효하고 중요한 전략이다.

생리학자 M. 루브너(Max Rubner, 1854~1932)1928년에, 1차 세계대전 중의 자국민의 영양상태에 관해, 프랑크푸르트 시를 예로 계산을 했다. 그것에 따르면, 1915년에는 1명당 1, 3천킬로 칼로리였던 영양섭취량은 감자가 거의 전멸상태가 된 16년부터 17년 겨울에 약 700으로 급격히 떨어지고, 그 후에 상승했음에도 불구하고 18년 말의 시점에서는 2천에 달하지 못했다. 성인 한 명이 하루에 필요로 하는 영양은 약 2800킬로 칼로리로 간주된다. 이 수치를 보더라도 전쟁 중의 독일인의 식량 부족이 어떤 것이었는가를 어슴푸레하게나마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굶주림은 모든 독일 국민을 평등하게 무서워하게 만들었던 것이 아니다. 희소한 식량물자는 각자의 사회적 유용성에 따라 나누어 주어졌으며, 날마다 감소해가는 식량물자 때문에 우선 처음에 배척당했던 것은 사회의 주변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었다.

1차 대전 중, 독일 국내의 정신병원에서는 약 7만명의 정신병환자가 굶주림과 영양실조로 사망했다. K. 두르나에 따르면, 이 수치는 나치의 안락사 계획에 의해 1941년 이래 살해당했던 정신병환자의 수에 거의 맞먹는다.

1차 대전의 이 뼈아픈 상황을 당시 독일의 정신과 의사들은 어떻게 보았을까? 어떤 정신과 의사는 다음과 같이 서술한다. “전쟁중의 정신병원에서의 아주 높은 사망률에 눈을 돌리면, 우리의 죄없는 환자들이 빠졌던, 이처럼 많은 죽음의 희생은 물론 뼈아픈 것으로서 깊은 동정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하지만 어쨌든 건강한 사람들 이상으로 많은 식량을 정신병 환자에게 주는 것은 불가능했으며, 허락될 수도 없었다. 전쟁중에 희생되었던 사람들의 상당수는 그 생명이 자신에게 있어서도, 타인에게 있어서도 아무런 이득이 되지 않는 그러한 사람들이었다. 그것은 분명하다고 하더라도, 그 중에는 병에도 불구하고 살아 있는 것에 기쁨을 느끼고, 자신의 이웃에게 도움이 되고자 필사적으로 노력하지만, 유감스럽게도 죽음에 내몰렸다고 하는 사람도 있었다.” 많은 정신병 환자가 전쟁 중에 굶주림에 의해 죽었다는 것은 확실히 가슴 아픈 것이지만, 건강한 사람들을 후회하게 하여, 그들, 그녀들에게 식량을 주는 것은 할 수 없었으며, 무릇 그들, 그녀들이 살아 있다는 것 자체가 본인에게 있어서도, 주변의 사람들에게 있어서도, 아무런 이익이 되지 않았던 것이 아닐까라는 것이다.

전쟁이 초래한 굶주림은 평화시에는 존재하지 않았거나, 적어도 한없이 비가시화되었던 분할선을 가시화하고, 그 선에 의해 인구를 둘로 쪼개고, 일군의 사람들을 죽음 속에 내던졌다. 그렇지만 머지않아 사람들은 그 선별의 의미와 합리성을 사후적으로 재발견, 또는 재확인하고, 그 분할선을 더욱 강화하기 시작한다.

독일의 패전 직후인 1919, E. 크레페린은 다음과 같이 서술한다. “결코 유쾌한 것은 아니지만, 전쟁이라는 아주 난폭한 폭력은 우리의 도처에 있는 정신병 환자의 수를 감소시키기 위한 수단을 산출했다. 생활물자의 모든 운송로가 무자비하게 차단된 결과, 주지하듯이 저항력이 없는 사람들의 발병률은 높았고, 사망률도 높아졌다. 이것은 다른 누구보다도 정신병원에 있는 사람들에게서 발견되며, 그 상당수가 기아수종(기아로 인해 붓는 것), 결핵, 기타 병에 걸려 죽었다. 경제적으로 부담이었던 불치의 정신병 환자의 수가 이제 감소했다고 하더라도, 다른 한편으로 적국이 행한 식량봉쇄가 건강에는 해로운 모든 영향에 대해 우리 국민의 저항력을 감퇴시킴으로써, 장기적인 타격을 입힐 가능성은 커질 수 있다.”

전쟁은 확실히 잔혹하고, 그것에 의해 독일인이 장기적으로 입는 타격은 적지 않지만, 거기에는 또한 경제적으로 부담일 수밖에 없는 불치의 정신병 환자가 사회로부터 일소될 수 있다고 하는, 지극히 합리적인 기능, 그러나 평화시에는 수행 불가능한 기능이 있지 않는가라는 셈이다. 크레페린은 전쟁중의 굶주림이 공교롭게도 볼 수 있게 해 주었던 이 합리성을, 전후에는 보다 적극적, 보다 의도적으로 기능시키고자 한다. “전쟁은 유능하고 자기희생적인 남성들을 공포스러울 정도로 대량으로 죽음으로 내몰았다. 그 반대로 살아 남았던 것은 허약하고 자신의 일밖에는 생각하지 않는 무리이다. 그러나 전쟁뿐만 아니라, 도처에서, 약자를 지원하고 곤궁자, 병약자, 타락자를 원조한다는 인간애로 가득 찬 행동 또한, 매우 힘센 자의 계획적인 육성에 현저하게 역행하는 것이다. 이 인간애는 우리의 미래와 관련되어 있는 우수한 사람들의 선두에, 더욱 큰 짐을 지게 만들고, 이윽고 그 사람들의 활력을 마비시켜 버린다. 세계에 존재하는 것은 우리뿐만 아니며, 우리는 다른 민족(folk)과의 치열한 경쟁에 처하게 되기 때문에, 우리는 이러한 부담을 무제한으로 확장할 수는 없으며, 우리의 자기 주장을 방해하지 않을 정도에 머물러야 한다. 냉정한 것일 수도 있으나, 그러나 그것이 가혹한 필연성이며, 이것이 없다면 우리의 민족의 양질의 부분은 가치가 낮은 자에 의해 멸망하게 될 것이다.”

여기에 존재하는 것은 바로 푸코가 말한 인종주의, 보다 정확하게는 생물학과 진화론에 의해 떠받쳐진 인종주의에 다름 아닌데, 중요한 것은 이것이 무엇을 계기로 하여 어떠한 경위에서 산출되고 발견되는가이다. 일부의 난폭하고 횡포를 부리는 무리가 돌연 을 휘두르며 생명의 우수한 부분의 더 나아간 발전을 방해하는, 사회의 짐일 수밖에 없는 가치가 낮은 자로 간주된 사람들을 도살하는 것처럼, ‘죽게 만들faire mourir’려고 하는 것일까? 아니다. 이들이 무엇을 적극적으로 하기 전에, 이미 그 사람들의 상당수는 전쟁중의 굶주림에 의해 누구도 어찌할 수 없는 상황 속에서 죽었던 것이다. 7만명의 정신병 환자가 아사했다는 것은 누구도 어찌할 수 없었기 때문이며, 누군가 무엇인가를 할 수 있었다면 그렇지 않았을 것이다. 사람들의 죽음을 그렇게 철저하게 소극적으로 이해하는 것. 그 죽음 속에서 어떠한 작위도 찾아내지 않는 . 바로 이것이 생명권력의 죽음 속에 내던지기’, 죽게 내버려둔다laisser mourir’는 것을 근본에서 떠받치고 있다.

나중에 나치가 실행한 안락사 계획에 대해 사람들은 나치와 히틀러에 걸맞는 잔인함과 비도덕성 그렇지만 그 실체는 사람들의 감추어진 욕망의 투영이며, 사람들이 나치에게 바라마지 않았던 것이라는 점에 유의하자 을 찾아낸다. 그런 인식은 어떤 의미에서 올바르며, 그 올바름의 이유에 관해서는 후술하겠지만, 그러나 이런 인식은 바로 그 올바름에 의해서 가장 중요한 것을 놓쳐버리고 만다. 그것은 나치의 안락사 계획 역시 생명권력인 이상, 인간의 죽음을 작위가 아니라 부작위에 의해서 초래하고자 했던, 적어도 그러한 이해에 기초하여 실행되었다는 것이다.

어떤 의사는 1944630일자의 편지에서 당시 수행되었던 안락사 계획에 대한 각 병원 관계자의 태도에 관해 다음과 같이 보고했다. “프라하 대학 부속병원의 기르세크 박사는 안락사에 반대하여, 그것을 전혀 용납하려 들지 않았습니다. 그것에 관해서는 일절 얘기하고 싶지 않다는 어조입니다. 그러나 어디를 가더라도, 저는 그것에 놀랐습니다만, 많은 병원장은 안락사에는 단호히 반대했음에도 불구하고, 불치의 정신병 환자에게 미량의 식량밖에는 주지 않는 것에 관해서는 이것이 당연하다는 듯이 찬성합니다. 그 결과 몇 개의 병원에서는 실제로 터무니없는 일이 일어났습니다. 약물을 투여해 환자의 고통을 빨리 없애주는 것에는 반대하지만, 환자가 굶주리고 영양실조에 결리고 마침내 약간 도와주기만 하면 편하게 될 수 있도록 고통을 겪게 되는 것에 대해서는 완전히 동의하고 있습니다.”

안락사 계획의 적지 않은 부분은 제1차대전 중의 아사를 반복 또는 재현하는 형태로 간주되었다. 다른 한편으로 이것과는 반대로, 환자를 적극적으로 죽음에 이르게 하는 경우에도, 기본은 부작위에서 찾아진다고 말해도 좋다. 위의 편지에서도 쓰여 있듯이, 약물의 투여는 이미 죽음을 향해 하강을 시작한(시작했다고 간주된) 생명에 대해, 약간만 더 손을 써서 그 하강을 매끄럽게 하는, 그러한 행위로서 이해되었다.

극도의 기아상태 속에서 생명은 그 자체로 죽음으로 낙하해 간다.

G. 슈미트는 패전 직후인 1945년에 병원 내에서의 기아에서 간신히 연명한 사람들에게 인터뷰 조사를 했는데, 그 속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기아의 시설을 19456, 7월에 방문했을 때 받았던 인상은, 노인 병원의 그것이었다. 아무런 소리도 없다. 아무런 움직임도 없다. 누가 무엇을 하고자 하는 기척도 전혀 없다.”

왜 자신들이 미량의 식량밖에는 갖지 못하게 되었는가, 환자들은 그렇게 질문을 받아도, 거의 아무것도 대답하지 않으며, 그 이유를 생각하려고 하지도 않았다. 되돌아온 대답은 왜 음식이 이렇게 되었는가이며, 다르 이유는 없습니다.” “저는 그 이유를 모릅니다. 그저 여기에 있으며, 점점 여위어가고 있습니다. 하지만 왜 그런지는 저는 생각하지 않기로 했어요. 무언가를 생각하기 시작한다면, 이제 그것이 잘못입니다.”

몇 사람은 이유를 전쟁에서 찾았다. “하지만 지금은 전쟁 중이잖수. 그래서 불평을 터뜨려서는 안 되죠.”

심지어 몇몇은 진짜 이유를 어렴풋이 인식했다. “여기에 왔을 때는 저는 59킬로그램이었습니다. 지금은 44킬로그램밖에는 되지 않습니다. 이런 곳에 있으면 더욱 그렇게 됩니다! 여기에 있는 사람들은 아무것도 받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아무 일도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나는 출신성분이 나쁜 노동자였습니다. 나는 질 나쁜 감자밖에 받지 못했으며, 맛은 최악이었습니다. 나는 자주 들었습니다. 너는 일하지 않는구나.” “너 따위에게 맛있는 음식을 먹을 자격은 없다, 민족의 수치니까, 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러나 누구도 저항하고자 하지 않았다. 슈미트는 그 이유를 굶주림에서 온 전반적인 쇠약에서 찾으면서 이렇게 말한다. “쇠약이 진행되어감에 따라 자연이 인간에게 주었던 자기방어의 수단인 고통을 느끼는 능력조차도 빼앗겨버렸다.”

이미 보았듯이, 홉스는 마지막까지도 개인에게 자기방어의 권리를 인정했다. 그러나 이 권리가 작동하고 이로부터 나아가 저항이 생기기 위해서는 살아 있는 것을 욕구하는 근원적인 의지”(푸코)가 그 근저에 있지 않으면 안 된다. 그리고 이 의지의 존재 때문에 고대의 법/권리에는 죽음에 이르게 하다faire mourir’라는 작위를 찾아볼 수 있다.

정신병원을, 나아가 강제수용소를 서서히, 마지막에는 완전히 둘러쌌던 기아는 이런 의지 자체를 소멸시켰다. 이것은 울려서 흔들리는 것이었다. ‘의 공포 등은 이것에 비하면 뻔한 속임수에 지나지 않는다. 이 의지의 소멸에 의해서 생명은 어떠한 외부로부터의 작위도 필요치 않으며, 스스로 하락하기 시작한다. 생명권력은 더 이상 죽음에 이르게 할 필요가 없다. 그것에 요구되는 것은 죽게 내버려두다laisser mourir’는 것일 뿐이다.

 

6. 법권리의 구출

생명권력의 개념이 제시된 앎의 의지5장에 푸코는 죽음의 법권리와 삶에 대한 권력이라는 제목을 붙였다. 이 제목은 다음을 암시한다. 죽게 만들거나 살게 내버려둔다는 메커니즘은 법권리라고 불려야 하며, ‘권력이 아니다. 거꾸로 살게 만들거나 죽음 속에 내던진다(죽게 만든다/죽음으로 내몬다)”라는 메커니즘은 법권리의 외부에 있으며, 바로 이것이 권력이라는 것이 감추어진 메시지가 되고 있다.

마지막으로 이 법권리권력의 구별에 관해 생각해 보기로 하자.

이 구별은 그러나 그 후에, 푸코에게 있어서 애매하게 되었다. 이미 보았던 76년의 강의의 몇 가지 설명에서도 확인할 수 있지만, 푸코는 법권리속에 ‘(죽음에 이르게 하는) 권력을 새겨넣으며, 거꾸로 생명권력속에 ‘(살해와 죽음의 기능의) 법권리를 섞어놓는다.

그렇지만 여기에서는 푸코 자신의 당초의 용어법을 따라서 우선은 법권리권력의 차이를 정리하는 것에서 시작하자.

둘의 차이는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표 참조). 죽음에 이르게 하거나 살게 내버려두는’ ‘고대의 법권리는 요컨대 작위(faire)에 의해 죽음을 초래하며, 거꾸로 부작위(laisser)에 의해 삶을 초래한다. 법권리를 구성하는 것은 도표의 IIIII이다. 이에 반하여 살게 만들거나 죽음 속에 내던지는(죽음으로 내모는)’ 새로운 권력은 부작위에 의해 죽음을 초래하고, 작위에 의해 삶을 초래하기 때문에, 이것을 구성하는 것은 IIV이다.

 

죽음

작위

I

II

부작위

III

IV

그렇다면 다음으로 문제로 되는 것은 법권리에의 권력, 거꾸로 권력에의 법권리의 새겨넣어짐인데, 이것을 나는 푸코와 약간은 다른 방식으로 구성해 볼 생각이다.

내가 무엇보다 초점을 맞추고 싶은 것은 권력에의 법권리의 기입이다. 거기에는 논리적으로 생각해서, 네 가지 회로가 있는데, 그 중 하나는 IVII를 기입하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IIII을 기입하는 것이다.

전자부터 시작하자. IVII를 기입하면 어떨까? 그것은 부작위로서 출현하는 죽음을 작위로서 해석한다는 것에 다름 아니다.

그 구체적인 예는 다음과 같은 것이다.

 

개인이 다른 개인에게 육체상의 위해를, 더욱이 피해자에게 죽음을 초래하려는 위험을 갖추고 있다면, 그것을 상해치사라고 한다. 가해자가 사전에 그 위해는 치명적이라는 점을 알고 있었다면, 그의 행위를 살인이라고 한다. 그러나 사회가 몇 백명의 프롤레타리아를, 아주 빠른 부자연스런 죽음에 걸려들 수밖에 없는 상태에 둔다면, 사회가 몇 백명의 사람으로부터 필요한 생활조건을 빼앗고, 그들을 생활할 수 없는 상황에 둔다면, 또한 이러한 수천 명의 사람은 이러한 조건의 희생자가 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고 있으며, 더욱이 너무도 충분할 정도로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래도 사회가 이러한 조건을 존속시키고자 한다면, 그것은 개인의 행위와 바로 똑같이 살인이다. 다만 암암리에 악랄한 살인, 누구도 방지할 수 없는, 살인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 살인이라는 셈이다. 말하자면 살인법의 모습이 보이지 않기 때문이며, 전원이 살인범이면서 그렇지만 누구도 살인범이 아니기 때문이며, 희생자/제물의 죽음이 자연사처럼 보이기 때문이며, 그리고 이 살인은 작위범이라기보다도 부작위범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은 여전히 살인이다. 잉글랜드에서는 사회가 사회적 살인을 매일, 매시간 범하고 있다는 것, 사회가 노동자를 건강이 지속되고 장생할 수 없는 상황에 두는 것, 사회가 이러한 노동자의 생명을 조금씩 서서히 제거하고, 빨리 묘지로 끌고 가는 것, 오늘날 이러한 것을 나는 증명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프리드리히 엥겔스, 영국노동자계급의 상태)

 

부작위에 의해서 생겨났다고 생각된 죽음을, 작위로서, 즉 살해로서 인식하 둔다는 것, 이것이 IVII를 기입하는 것이며, 권력에 법권리를 기입한다는 것이다.

이미 보았듯이, 나치의 안락사 계획에 의해서 초래된 죽음, 나아가 그 강제수용소에서 생겨난 죽음은 기알르 토대로 하면서 부작위에 의한 것으로 이해되었다. 적어도 죽이는 쪽의 논리, 권리의 논리는 그렇게 인식했다. 이 인식을 180도 역전시켜서, 기아를 살해로서 인식하는 것. 그것이 주도면밀하게 준비된 일련의 작위에 의해서 일어난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

이것의 의미를 과소평가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후자의 인식은 나치 독일 하의 정신병원에서도, 강제수용소에도 없는 우리에게는 명백한 것이라고 하더라도, 그 속에 있는 사람들에게서는 어쩌면 너무도 멀리, 너무도 곤란한 인식이기 때문이다. 정신병원의 기아를 연명했던 사람이 뱉어낸 말을 다시 한 번 인용해 보자. “왜 음식이 이렇게 없는가라고 해도, 다른 이유는 없습니다.” “우리는 생각하지 않기로 했습니다. 뭔가를 생각하기 시작하면 이제 그것이 잘못이니깐요.”

부작위한 것으로서 출현하는 죽음 속에서 작위를 투시하는 것. 그렇게 함으로써 권력의 한복판에서 법권리를 구출할 가능성이 생겨나는 것이다.

그렇지만 죽음 속에서 작위를 찾아낸다는 것은 그 대신에 다른 종류의 작위에 의해서 삶을 초래한다는 것이며, 엥겔스의 사회적 살인의 고발이 요컨대 그러하듯이, 사람들을 살게 만드는 생명권력을 재작동시키는 것이 되지 않을까? 그대로이며, 그리고 그래도 좋은 것이다. 또는 그것 이외에 길은 없다. 법권리는, 또한 이것이 기초짓는 저항, 생명권력의 한복판에서만 생기는 것이다.

다른 하나의 회로, IIII을 기입시키는 것에 관해서는, 무엇을 말할 수 있을까?

우생학이라는 것은 물론 생명권력의 중요한 전략의 하나이며, 그것은 (어쩌면 푸코가 말하듯이 인종주의와 더불어) 사회주의의 내부에서도 지배적인 것이 되었다. 유용한 생명을 만들고 키운다는 것이 우생학의 과제 중 하나이다. 이 우생학에서 삶은 바로 작위에 의해서 프로그램된다. 그렇지만 그러한 작위와 힘에 저항하여 생명을 그 자체로서 존재하게 한다(sein lassen)라는 길을 열어가는 것이 허용되어야 할까? 이러한 영위도 또한 법권리의 구출로서 구상될 수 있다.

나치 독일 하의 정신병원에서, 또한 강제수용소에서 기아의 극한 속에서 말도 없이 죽어간 사람들의 삶을 구출하는 것은 할 수 없다. 그것은 문자 그대로 돌이킬 수 없는 것이다. 그렇지만 벤야민이 말했던 억압된 과거를 해방하는 투쟁, 설령 그렇다고 하더라도, 거기에서 막힌 법권리를 구출하고, 그것을 우리의 현재에 연결시키지 않고서는 개시될 수조차도 없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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