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래할 생명권력론을 위해


사상, 2013년 2

2부 2장. 

인간과 동물의 문턱

조르조 아감벤에게서의 생명 개념 

히가키 타츠(槍垣立哉)

들어가며

생명정치의 장래를 향해 무엇을 써야 할까? 후기 푸코로 거슬러 올라가는 관리[통제]사회의 문제들, 즉 개인의 자유의지가 이미 문제거리조차도 안 되는 비참한 삶을 톺아내고, 거기서 희미하게 뭔가의 전망을 찾아내야 할까? 들뢰즈=가타리가 물론 어둠을 간직하면서도 보다 분명하게 미래의 생명을 그려냈듯이, 현재의 인간이나 그 사회의 해체를 함의하기도 하는 생명의 밝음을 부각시켜야 할까? 생명정치학의 개념이, 항상 이런 양면을 갖추고 있는 것은 사실일 것이다. 원래 미래가 어두운 것인가, 밝은 것인가라는 물음 자체가 무의미하기도 하다. 미래를 살아가는 것은 나도 아니고 우리도 아니다. 미래에서 그 가치를 판단하는 것은 지금 여기를 살아가고 있는 이 삶이 아니다. 미래라고 하면서 뭔가가 말해질 때, 나나 우리는 그것을 가치 판단할 능력을 전혀 가질 수 없다.

그런 물음에서 시작하지 않아도 좋을지도 모른다. 혹은 그런 몽상 같은 철학자의 말은 생명정치학이 현실적인 정치의 물음과 연관되는 한, 아무 쓸모도 없다고 생각될지도 모른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 인간의 신체와 생명을, 그 자연사적 깊이를 지닌 시계(視界)에서 재파악하는 것, 말하자면 법, 제도, 윤리, 말 등을 고작 2000년부터 3000년 정도로만 거슬러 올라갈 수 있을 뿐인 근원을 훨씬 뛰어넘어, 더욱 멀리 생명 자체에 뿌리를 내려 파악하려고 시도하는 것, 이것이 바로 생명정치학의 독자성 그 자체를 이루는 것이 아닐까?

이런 방향성에서 생명정치학의 광대함을 확실하게 파악하고 있는 사상가가 이탈리아의 조르조 아감벤이다. 아감벤이 세계적 사상의 무대에 등장한 것은 20세기도 끝나갈 무렵이다. 아우슈비츠의 남은 것(1998)호모 사케르 : 주권권력과 벌거벗은 생명(1995)이라는, 푸코의 생명정치학을 이어받아 쓴 작품군과, 거기서 제시된 벌거벗은 생명(la nuda vita)’이라는 개념은, 세간의 큰 주목을 받았다. 하지만 아감벤의 저작의 전모가 알려짐에 따라, 그와 생명정치학 자체의 관련이 결코 단순한 것은 아니라는 것이 여러 가지 논점에서 분명해졌다(일본에서는 우에무라 타다오(上村忠男), 오카다 아츠시(岡田温司), 다카쿠와 가즈미(高桑和巳) 등에 의한 이탈리아어로부터의 빼어난 번역과 해설이 극히 중요한 역할을 맡았다. 이탈리아라는, 철학지리학에서는 변방적인 사상가의 논의가, 프랑스 및 미국과 거의 동시에 일본에 영향을 주었던 속도성에서도, 위의 번역자들의 작업은 돋보이는 것이라 할 수 있다). 특히 거기서 감안되어야 할 것은 아우슈비츠의 남은 것호모 사케르만으로는 헤아릴 수 없는, 그의 고전적 소양의 광대함과, 종교나 법에 관련된 지식의 풍성함이다. , 하이데거의 세미나에 참석하면서도 벤야민을 애호하고(시대를 공유하는 이 두 사람의 사유는, 상식적으로는 거의 양립할 수 없을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도 기독교 역사도 곱씹으면서, 현재적인 정치의 논의에도 깊이 헤집고 들어가는, 그 독특한 사유법 자체이다(벤야민이 말하는 이질적인 것과의 접합이야말로 그의 모토인 듯하다).

확실히 오카다 아츠시가 아감벤의 종교신학을 강조하듯이,[각주:1] 특히 금세기에 양산된 작품군(세속화 예찬(2005), 왕국과 영광(2007), 벌거벗음(2010))은 생명정치라기보다는 종교성과의 연관이 매우 깊다. 그 때문에 아감벤을 생명정치학의 개념만으로 파악하는 것은 부당하다고 생각될지도 모른다. 철학의 영역에 한정해도, 푸코나 들뢰즈를 언급하는 논의는 어느 일정한 시기에 이뤄진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래도 굳이 아감벤의 논의를 생명정치학의 관점에서 독해하는 것은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우선 그가 주장하는 벌거벗은 생명이나 잠재력(potenza)’이라는 개념이 설령 우연의 결과일지라도 푸코나 들뢰즈가 논하는 유사 개념에 매우 접근하기 때문이다. 전자는 벤야민의 폭력비판론에서 (그것도 벤야민의 텍스트를 읽는 한 상당히 미묘한 논맥에서) 끌어낸 용어이다. 그래도 아감벤의 독창성은 벌거벗은이라는 개념을, 생물적 신체가 정치적 과제이게 되는 푸코의 논의와 관련시키고 벤야민적 논맥으로부터는 벗어난 의미를 끄집어냈던 것에 있다. ‘잠재력에 관해 말하면, 아감벤의 고찰의 원천은, 일관되게 아리스토텔레스적인 뒤나미스 분석에 있다. 그러나 이것도 잠재성(virtualité)을 논하는 들뢰즈와, 스피노자를 매개로 맺어지고 생명을 그러내는 주요한 위상에 놓인다. 양자 모두와 더불어, ‘생명신체를 사고하는 키워드 자체로서, 아감벤에 의해 강하게 부각되는 것이다.

 

하지만 동시에 아감벤은 푸코와도 들뢰즈와도 다른 생명정치학을 전개하고 있기도 하다. 그것은 법이나 말에 강하게 천착하는 데에서도 간파할 수 있다.

말할 것도 없지만, 아감벤은 생명정치학을 탐구하는 데 있어서 법과 언어를 중시한 논의를 펼친다. 그것은 푸코가 기본적으로 정신분석 비판을 염두에 두면서, 혹은 들뢰즈(들뢰즈=가타리)가 시니피앙 중심주의적 언어론에 대한 반발로부터 생명 개념과 그 질료성에 시선을 돌렸던 것과는 명확하게 대조적인 자세라고도 할 수 있다. 그러나 거기서 아감벤은 푸코 등이 비판했던 정신분석이나 법이라는 초월성을 회복시키는 것이 결코 아니다. 그는 생명에 파묻혀 있는 법이나 언어, 달리 말하면 생명을 반사하고 생명으로부터 반사되는 법이나 언어의 위상을 솜씨 좋게 세세하게 집어냄으로써, 생명정치학의 개념을 더욱 전개시키는 것이다. 이런 시도는 아렌트와 푸코 쌍방의 부족분을 연결시키는 호모 사케르의 서두 부분 등에서[각주:2] 두드러진 성과를 보이고 있다. 아감벤은 법과 언어의 경시 때문에 푸코도 (나아가 들뢰즈도) 비판하지만, 그러나 그들이 비판했던 대상의 의표를 찌르는 방식으로 논의를 전개하는 것이다.

여기서 생각해야 할 것은 생명정치학 속에서 꺼내진 언어와 법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생명과 어떻게 결부되어 있는가이다.

아감벤은 매우 견실한 지식으로 뒷받침된 역사학자로서 행동하면서도, 거기서의 종교의 파악 방식은, 앞서 말했듯이 시공을 종횡무진 횡단하고, 현대의 첨단적인 장면과 고대세계를 결부시킨다. 그의 자세는 역사를 논하면서도 역사 자체를 원리로 삼지 않는, 말하자면 근원을 논하면서도 근원자체를 허공에 매다는[중지시키는] 감각으로 넘쳐난다. 이는 오히려 푸코가 고대를 다룬[문제 삼은] 그 방식에, 혹은 레비스트로스가 신화를 분석하는 그 방법에, 나아가 들뢰즈(와 가타리)가 생태계적인 자연사를 그려내는 그 시각에 매우 가까운 것이 아닐까? ‘중지하다[허공에 매달다]라는 말이 아감벤의 핵심어의 하나이듯이, 거기에는 근원을 탐구하면서 근원을 탈근거화하는 지식의 방식이 모색되고 있는 것 같다. 그리고 그 행동 방식 자체가 생명정치학의 시도와 강하게 겹쳐진다.[각주:3]

이렇게 제시되는 아감벤의 독자적인 영역이란 바로 애매함이며 회색지대라고 할 수 있다. 거기서 아감벤은 생명에 독자적인 존재를 인정하는 동시에, 그 방식을 항상 언어와 연관시키고, 벌거벗은 질료성이 법이나 제도의 막간[틈새]으로서 기능한다는 것을 밝힌다. 이와 같은 이중의 방법에 의한 중간성이나 문턱의 존재가, 앞의 중지라는 방법론과 포개져 있다.

그러면 여기서 아감벤에게 생명 그 자체란 어떤 개념이었을까? 이 물음에 대답하기 위해 다루고자 하는 테마가 바로 인간과 동물의 관계이다.

아감벤에게서의 이 주제에 관해서는 열림(2002)이라는 저작, 특히 거기서 다뤄지는 하이데거의 동물론이 중요하다. 하지만 동물과 인간이라는 주제가 겨냥하는 것은 그것만이 아니다. 동물론은 절대적 내재성(사유의 역량, 2005년 수록)이라는 들뢰즈와 푸코의 관계를 논한 텍스트의 귀결이, 하이데거와도 맞물린 이 주제에 의해 도출됐다는 것과도 관련된 것이다.

여기서 아감벤은 들뢰즈의 생명 개념과 푸코의 생명 개념을 대립시키면서 생명론이 향하는 곳을 탐색한다. 그런데 약간 희화화되어 그려진 최후의 생명론의 계보도에서, 푸코와 들뢰즈는 대립되기는커녕 내재성의 라인에 똑같이 배분되고, 다른 쪽의 초월의 라인에 데리다나 레비나스 등을 적은 뒤, 굳이 하이데거를 그 중간 영역에 배치하고 있다. 이는 매우 기묘한 것이기도 하다. 생명을 논할 때, 그 중간적인 위상에 있어서도, 하이데거를 내재의 방향에 위치시키는 것은 꽤 모험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그는 해석학적 존재론과 존재의 언어를 논하는 자로서, 흔히 어디까지나 초월의 라인에 위치시켜야 할 사상가로 간주될 것이다. 아감벤은 하이데거의 어디에서 내재적 생명론에 대한 공헌을 보는 것일까?

더 나아가 이런 도식을 그려내는 아감벤은 자신의 시도를 어디에 위치시키는 것일까? 이것들을 생각할 때 문제가 되는 것이 푸코와도 들뢰즈와도 관련된 동물이라는 주제가 아닐까? 그것이 생명정치학의 사고에 있어서 새로운 문턱으로서 두드러지는 것이 아닐까?


아감벤에게서의 생명

논고 절대적 내재성은 푸코와 들뢰즈 둘 다의 생전의 마지막 텍스트가 각각 생명을 둘러싼 것이었음을 속시원하게 지적하는 것에서부터 시작된다. 양자에게 생명을 논하는 것은 유언의 차원에 속하는 것이었다고 한다.

그 텍스트란. 푸코의 경우 생명 : 경험과 과학[각주:4]이라는 캉길렘을 다룬 비교적 긴 논고이며, 들뢰즈의 경우 내재성 : 하나의 삶 …」(1995)[각주:5]이라는 아주 짧은 문서이다. 아감벤의 논의는 들뢰즈의 글 제목과 스타일 등에 대한 주석으로 시작되지만, 기본적으로는 솔직히, 푸코와 들뢰즈에 대한 아감벤의 사유의 위상이 제시된다. 아감벤의 벌거벗은 생명이 무엇인지를 두 사람과의 대비에서 서술하는 것이다.

이 텍스트를 검토하기 전에, 아감벤에게 벌거벗은 생명이 무엇이었는지를 잠시 다시 살펴보자.

호모 사케르의 서두에서 아감벤은 비오스조에라는, 이제는 주지의 바가 된 말을 사용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조에는 살아 있는 모든 존재(동물이든 인간이든 신이든)에 공통된, 살아 있다는 단순한 사실을 표현했다. 그에 반해 비오스는 각각의 개체나 집단에 특유한 살아가는 형식, 삶의 방식을 가리켰다.”[각주:6]

여기서 조에로서 말해지고 있는 것은 아리스토텔레스가 논한, 살아 있다는 사실과 관련된 잠재적인 힘이다. 그리고 후자인 비오스란 이른바 정치적인 삶,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는) 폴리스적인 삶을 모델로 한 것이다.

조에비오스라는 생명에 관련된 말하기 방식을, 현대정치와 관련시켜 얘기하는 아감벤의 주장은 그리 어려운 것이 아니다. ‘벌거벗은 생명과도 강하게 관련되는 조에가 그대로 정치의 주제로 간주되는 것, 혹은 말을 사용하여 행하는 폴리스적 사태에, 다만 살아 있을 뿐인 생명성인 조에가 침입해 오는 것, 이것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이런 사정이 18세기 이후의 근대사회의 성립에 있어서, 푸코가 생명정치학으로 논했던 것과 겹쳐진다.


폴리스의 영역에 조에가 진입한 것, 즉 벌거벗은 생명 자체가 정치화됐다는 것은 근대의 결정적 사건을 이루며, 고전적 사유의 정치적-철학적 범주가 근원적으로 변용했음을 부각시키고 있다.[각주:7]


이것에 덧붙여 중요한 것은, 이런 범주의 변용은 모종의 회색지대를 산출한다는 것이다. 거기서는 삶과 죽음, 공과 사, 우파와 좌파, 절대주의와 민주주의라는 대립 도식으로 말하는 것이 불가능한 정치적 장면이 형성된다.[각주:8]

, 생명정치학과 벌거벗은 생명의 정치화는 겹쳐 있지만, 근대에 특징적으로 현현한 독자적인 방식에 있어서, 근대를 지배했던 기존의 정치적 범주가, 모두 회색지대로 내몰리게 된다는 것이 아감벤의 주장이다.

아감벤이 아우슈비츠의 남은 것에서 살아 있으나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비참한 신체, 혹은 생물학적 인체 실험을 겪은 생체를 예로 든다는 것, 더 나아가 호모 사케르에서도 국가라는 법의 규제로부터 벗어난 난민, 삶과 죽음 자체를 규정할 수 없는 뇌사자를 대표적인 예로 들고 있다는 것으로부터, 이런 논의들이 근대 후기라는 시대성과 강하게 관련된 것으로 읽히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아감벤이 푸코와 의견을 달리하는 것은, 이런 회색지대가 현재화하는 것이 근대 후기였다고 해도, ‘조에비오스와 얽혀 있는 착종된 사정 자체는 정치적인 것이 출현하는 원리로서 당초부터 숨어 있었다고 하는 점에 있다.

그것은 호모 사케르의 모델 자체가 공동체로부터 배제된 방식으로 그것에 포함되는 신체를 다루는 로마 시대의 처벌에 있는 것으로부터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호모 사케르란 신성화된 사람들이지만, 그 신체는 살해 가능하지만, ‘희생물로 될 수 없다는 양의성을 갖추고 있다. 흔히 이 두 개의 특징은 병치될 수 없다. (뭔가의 형벌을 받은) 살해 가능한 신체(법으로부터의 폐기)는 손쉽게 희생화되지만(종교로의 포함), 여기서는 살해 가능성은 희생이라는 형식을 취할 수 없는 것이다. 그 때문에 거기에는 살해 가능성과 희생화 불가능성의 교점에 있어서, “인간의 법으로부터도 신의 법으로부터도 배제된 신체가 출현하게 된다. 이 신체가 벌거벗은 생명의 원상原像인 것이다.[각주:9]

그래서 이것은 법에 있어서 모든 의미에서의 예외이기도 하다. ‘은 신성화되지 않지만 죽여도 좋다는 의미에서, 스스로가 포함할 수 없는 것을 배제된 것으로서 포함해버린다. 그리고 주권이란 칼 슈미트가 말했듯이 예외상태에 대해 결정을 내리는 자라고 한다면, 이런 신체를 다루는 것 자체가 법을 주권적인 법으로 만드는 원리라는 것이다. 스스로가 배제하는 것은 배제로서 포함하는 것, 이것이 법을 성립시키는 원점에 있다.

배제와 포함이 서로를 맞아들이는 이런 사정이 바로 아우슈비츠로 나타나는 비참한 신체의 전형이라는 것이 아감벤의 주장이다. 그것은 법의 원리이면서도, 현실적인 무엇인가로서 출현하는 것이다. “호모 사케르의 벌거벗은 생명은 이리하여 우리와 관계가 있는 것이 되며 시민의 생물학적 생명과 일치하고자 한다[각주:10]는 시대 진단이 거기에 포개지게 된다.

여기서 우선 논의되는 것은 법이 초월적인 기관을 경유하지 않고, 생명 자체를 포함한다는 사정이다. 바타유적 살해가 초월화된 신성성을 묻는다면, 이것과는 정반대의 관점이 여기서 드러난다. 여기서 법은 시니피앙이 아니며, 또한 명령하는 것일 수도 없다. 법은 법이 포함할 수 없는 것을 배제함으로써 포함한다. 거꾸로 말하면, 법 자신이, 벌거벗은 생명이라는 예외상태에서의 규정 불가능성을 들이대는 것으로부터 성립한다는 것이다. 그런 한에서 아감벤에게서의 벌거벗은 생명은 그 벌거벗은이라는 방식에 있어서, 규정 자체를 가능케 하는 규정 불가능성이라는 것이다. 거듭 말하지만, 이것이 법의 원리라고 하는 것이다.[각주:11]

거기에는 조에비오스의 연관에 관해서도, 단순하지 않는 사태가 출현하게 된다. 살아 있는 신체란, 물론 조에인 동시에 비오스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것은 해당 신체의 특정한 동물적, 식물적 기능이 조에이며, 특정한 인간적 기능이 비오스라는 것이 아니다. ‘비오스비오스인 한에서 항상 조에를 기반으로 하는 것인데, ‘비오스에 있어서 조에란 어디에도 없는 것이며 또한 어디에도 있는 것이기도 하다. 말과 신체, 로고스와 물질, 이것들도 마찬가지의 배치에 놓이게 될 것이다. 이들 중에서 후자는 전자에 의해 배제됨으로써 포함되는 바로 그것이다. ‘예외상태라는 외부를 보여줌으로써 질서를 규정하는 것, 이것이 양자의 관계성이다.

벌거벗은 생명예외상태의 관점에서 보면, 그것들은 아감벤의 발상의 기본이라고 할 수 있는 이중관계를 이루는 것인 비오스조에는 마치 단순히 이층화되는 것이 아니다. 이것들도 배제와 포함을 둘러싸고 서로 얽혀 있는 것에 다름 아니기 때문이다.

이렇게 아감벤에게서 생명은 법이나 언어가 규정할 수 없는 예외성인데, 동시에 그것에 의해 법이나 언어를 가능케 하는 것이라고도 그려진다. 생명 자체가 아리스토텔레스적 식물적 생명이나 동물적 생명이라기보다도 언어화할 수 없는 것에 의해 언어를 떠받치는 무엇인가로서 제시되는 것이다. 이리하여 아감벤은 푸코나 들뢰즈가 법적, 언어적 위상의 초월성을 비판하는 것으로부터 생명의 위상을 끄집어낸 것과는 대조적인 위치에 선다. 그리고 마찬가지로, 법과 언어를 시니피앙적 초월로서가 아니라, 생명과의 역접적 관계에서 끌어내게 된다.


들뢰즈 및 푸코 비판

그러면 여기서 절대적 내재성의 논의로 돌아가보자. 이 글에서 아감벤은 푸코와 들뢰즈의 생애 마지막 텍스트가 모두 생명을 다뤘다는 기묘한 부합을 강조하면서, 두 사람이 논하는 내용을 다양하게 검토한다.

대부분이 들뢰즈를 향한 이 논고의 처음 소소한 부분에서 아감벤은 푸코를 언급한다. 그 소재가 되는 푸코의 캉길렘론은 푸코의 최후기의 다양한 사유, 즉 프랑스 철학에서의 인식론과 영성주의(spiritualism)라는 두 개의 계보의 구분이나, 계몽의 논의의 재검토를 이루고 있다는 점에서 극히 흥미롭다. 하지만 아감벤은 특히 푸코의 서술의 마지막에 눈길을 돌린다. 거기서는 생명의 중심에는 잘못[착오]이라는 문제가 있다고 써져 있지 때문이다.


생명의 가장 근본적인 수준에서 코드와 해독의 작동[기능]은 우연히 주어져 있다. 그것은 질병이나 결함이나 기형이 되기 이전의, 정보 시스템의 변조나 잘못 취함[오용]같은 것이다. 극단적으로 말하면, 생명이란 잘못할 수 있는 것이다.[각주:12]


그리고 그 후에 푸코는 이런 캉길렘의 생명에 관한 견해를, 시대적으로 그다지 멀지 않은 니체의 그것과 결부시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진리는 생명의 기나긴 연대기에 있어서 가장 새로운 잘못이다. 더 정확히 말하면, 참과 거짓의 분할이나 진리에 부여된 가치는 생명이 발명했던 가장 특이한 삶의 방식을 형성하고 있기 때문이다.[각주:13]


아감벤은 생명과 오류라는 주제는 푸코가 성의 역사1권 이후에서 보여줬던 논의의 흔들림에 영향을 줬을 것이라고 말한다(그것은 들뢰즈의 견해이기도 하다). 그러나 아감벤은 또한 푸코의 이런 생명에 대한 사유는 새로운 경험과도 같은 무엇인가, 생명이라는 지면에 뿌리내린 별도의 주체성을 향하기 위한 무엇인가를 끌어내는 것이기도 하다고 평가한다. 거기서는 그저 생명과 생명의 일탈과만 상관관계를 가진 인식[각주:14]이 진리를 향하는 것이 아니라 탐구되기 때문이다.

이것은 들뢰즈가 푸코(1986)에서 지식과도 권력과도 구분되는 3의 축으로 간주했던 것과 결부되어 있다고 아감벤은 지적한다. 이리하여 아감벤은 푸코의 최후기의 시도를 들뢰즈의 그것과 교차시킨다. 들뢰즈가 그려내는 생명의 권역으로부터, 새로운 주체의 모습을 (바로 최후기의 푸코가 행했듯이) 끌어내는 것이야말로 생명정치의 향후 과제라고 아감벤은 생각했던 것이다. 그 자신 아감벤의 고찰과 깊이 관계가 있을 것이다.

그러면 아감벤은 들뢰즈의 생명 개념에 관해서는 어떻게 평가하고 있을까? 그것을 감안한 다음, 푸코적인 주체의 논의를 구성해가는 라인은 어떻게 그어짓는다는 것일까?

아감벤은 들뢰즈 최후의 텍스트 내재성 ; 하나의 삶 …」의 표제에 있는 콜론에 강하게 집착한다. 여기서 중간에 배치된 콜론은 단순한 동일성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바로 생명과 내재성, ‘거리도 동일성도 아닌 일종의 통과, 아무런 공간적 변동도 없는 이행임을 나타내는 것이라고 한다. 내재성과 생명은 각각이 다른 것에 열려 있으면서, 생명은 생명에 내재한다는 형태로 그것과 관련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생명이 내재성이라기보다는 내재성을 불러일으키는 것이 생명이라는 것이다. 이런 일련의 논의는, 바로 들뢰즈의 내재성과 아감벤이 잠재력으로 말하는 것을 결부시킨다.

여기서 아감벤이 증거로 삼는 것은 철학이란 무엇인가(1991)의 들뢰즈이다. 이 저작에서의 내재성또는 내재평면(plan d’immanence)’의 논의야말로 여기서의 포인트가 된다. 이 텍스트에서 들뢰즈는 내재성이란 그저 자신에 대해 내재하는것뿐이며, “무엇에 대해 내재하는것이 아니라고 논한다(사르트르의 자아의 초월성에 대한 의미의 논리에서의 높은 평가를 여기서 참조하고 있다).[각주:15]내재성이란 의식에의 내재성도 자아로의 내재성도 아니다. 그것은 내재하는 것에의 내재인 것이며, 바로 자기 완결적인 운동성이다.

  

후기 들뢰즈의 텍스트를 여기서 끄집어내는 것에는 충분한 의미가 있다. 그것은 아감벤이, 여기서의 내재평면을 바로 (현실화한 생명체를 상정하는 베르크손적인 잠재성이 아니라) 스피노자적인 일의성으로 끌어당겨, 거기서 내재 그 자체를 해석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내재원리란, 존재의 초월을 모두 배제하는 일의성의 존재론을 일반화하는 것에 다름없다. 하지만 일의성을 절대화하면, 존재의 모든 점에서 존재 자체와 동등한 것이 되며, 관성과 부동성이 존재 위에 짓눌러오는 것 아닐까? 그런데 스피노자가 말하는 내재적 원인이라는 사유는, 행위자 자신에 대해서는 행위자 자체의 수동성이라는 것이며, 이 사유에 의해 존재는 그 의심에서 해방된다.[각주:16]


내재성은 바로 초월을 거부하면서 내재성자신이 내재하는 운동으로서 작동하는 가운데 있다고 간주된다. ‘내재성이 그 자체로, 초월이 아니라 작동을 갖는다는 것, 이것에 아감벤은 들뢰즈가 생명이라고 말하는 것의 원상을 보고 있다.

하지만 이에 대해 아감벤은 전면적으로 찬성하는 것은 아니라며, 다양한 반론을 가한다. 그것은 아감벤과 들뢰즈의 사유가 닿을락말락할 정도로 접근하고 있기 때문에 분간하기 어려운 것이지만, 그러나 결정적인 비판이기도 하다.

그 비판 중 하나는 들뢰즈가 이 텍스트에서 디킨스의 소설을 다루는 장면과 관련된 것이다. 그곳에서는 죽음에 처한 어떤 악당이 묘사된다. 죽어가고 있는 그에 대해, 주위의 누구나 상냥함을 드러낸다. 그에게 발견되는 것은 바로 벌거벗은 생명과 비슷한, 순수한 내재로서의 신체이다. 그런데 병에서 회복되면서, 악당은 단순한 생명이기를 그치고 다시 악당이 되며, 나쁜 짓과 욕지거리를 하기 시작한다. 주위 사람들도 다시 그에게서 멀어진다.

여기서 묘사되는 비인칭의 삶[생명]’은 바로 순수한 생명의 모습에 가깝다. 삶과 죽음의 협간에 있는 이런 중간지대의 묘사에 아감벤은 공명한다. 하지만 들뢰즈는 죽음에 가까운 이 장면에서, 삶을 개체 속에 가둬버리는 것을 거부한다. 들뢰즈는 또한 거의 분간되지 않는 아기의 웃음이라는 비인칭성도 언급한다. 비인칭적인 아기의 웃음은 아기가 개체화되면(, 거기에 개성이 출현하면) 사라지는 것, 개체에 속하지 않는 것이다. 그것은 죽어가는 인간에게서 나타나는 벌거벗은 존재방식과 평행적인, 원초적인 생명의 형상이며, 아감벤이 진술하는 중간영역 자체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에 대해 아감벤은 이렇게 논한다. , 여기서 제시되는 벌거벗은 생명이란 바로 아리스토텔레스가 영양섭취의 생명이라고 부른 것, 혹은 비샤가 우리에 갇힌 동물이라고 지목한 것, 즉 생명적 신체가 지닌 동물적인 혹은 식물적인 기능 방식에 매우 가까운 것이 아니냐고. 그러니까 여기서 질문되고 있는 것은 일면에서는 인간과 동물의 불분명함 아니냐고. 그 때문에 이들의 논의는, 정말로는 (들뢰즈 자신이 하고 있지는 않은) 이런 방향에서 생각되어야 하는 게 아니냐고. 그런데 이렇게 읽을 수 있는 서술이란, 내재를 생명이라는 영역으로 비켜 놓는 것에 관해서, 매우 위험한 토지속으로 들어가는 것이라고 아감벤은 말한다.

아감벤은 여기서 들뢰즈와 푸코의 차이도 선명해진다고 한다. 들뢰즈는 푸코가 성의 역사 1 : 지식의 의지에서 묘사한 권력론을 제대로 이해하기는 했다. 그러나 푸코가 생물학적인 실존이 정치 속에 들어온다는 것을 생명정치로서 파악한 반면, 들뢰즈는 푸코에서 이런 생명 자체란 무엇인가, 권력과의 관련에서의 그 의의는 무엇인가를 캐묻지 않고, “생명은 권력에 대한 저항이 되는바로 그것이라고 단적으로 정리해버린다. 하지만 그래서는 생명정치적인 갈등의 양의성을 논하기 위해서는, 충분한 논의의 방향을 제시하는 것이 되지 않지 않을까?[각주:17]

아감벤은 들뢰즈가 거론하는 내재의 생명에 실제로는 생물학적 요소가 거의 없다고 논한다(이것도 푸코에게서의 생명의 구체성과 대비를 이루는 사태이다). 최종적으로는 스피노자적인 내재의 지복에 이르는 들뢰즈의 에 있어서, ‘하나의 삶이란 절대적으로 무매개적이면서, 모든 생명에 깃든 무엇인가로서, ‘인식 없는 순전한 관조가 되고 만다. 그것은 들뢰즈 자신이 생기론에 두 가지 길을 찾아내려고 하면서도, 그 한쪽인 행동하는 이데아가 아니라 [다른 한쪽인] 순전한 내적 감각을 선택하는 것과도 포개져 있다. 들뢰즈가 논하는 것은 인식의 모든 대상주체의 저편에 있어서의 순전한 관조이며, 행동하지 않고 보존하는 순수한 잠재력이 아닐까.[각주:18]

이에 반해 아감벤은, 다음과 같은 의문을 던진다. 그렇다면 벌거벗은 생명, 생명이 깃든 불분명성의 지대에서가 아니라, 내재 자체의 위상에 가둬두는 것 밖에 안 되는 것 아니냐고 말이다. , 거기에는 아리스토텔레스적인 영양섭취의 생명과 반대의 것 밖에만 발견되는 것 아니냐고 말이다. 아리스토텔레스적(혹은 비샤적)인 생명이란 식물적인 생명/관계의 생명, 바깥의 동물/안의 동물, 식물/인간, 조에/비오스, 벌거벗은 생명/정치적인 삶이란느 다양한 구분선을 가능케 하는 것이었다(그리고 생명에 의거하는 푸코도, 아감벤과 간극이 있기는 하지만, 이 구분을 전제로 생명과 정치의 관계를 사고했을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들뢰즈의 생명이 절대적 내재에 이르는 것이라고 한다면, 이런 계층성이나 분리를 전혀 예상할 수 없는 것이다(그것이 일의성이 지닌 의미이기 때문이다). 들뢰즈의 생명 논의는, 스피노자적인 지복으로서의, ‘내재속의 운동에 머물러 버린다.[각주:19] 이것은 생명에 대한 취급방식으로서 정당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그리고 그것은 푸코가 말하는 생명정치학적인 상황에, 어떤 길을 제시하는 것일까?

아감벤은 바로 중간지대의 사상가로서, 다음과 같이 말하며 논의를 수습하려 한다.


푸코의 사유와 들뢰즈의 사유가 둘 다 극단적인 유언으로서 남긴 생명이라는 개념은, 도래하는 철학의 테마가 될 것임에 틀림없다고 우리는 서두에서 단언했는데, 어떤 의미에서 이런 단언을 할 수 있는가는 이제 분명하다. 이로부터 문제가 되는 것은 한편으로는 생명권력과 주체화 과정에 관한 최후의 푸코의 얼핏 보면 음울한 고찰과 다른 한편으로는 절대적 내재지복으로서의 하나의 삶에 관한 들뢰즈의 얼핏 보면 명랑한 고찰, 이 두 개의 고찰을 함께 읽어보는 것이다.[각주:20]


함께 읽어본다는 것은 물론 양자를 평균화시킨다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양측을 양측의 걸림돌로서 읽는 것, 양측을 양측에 대항시켜 읽는 것을 의미한다. 들뢰즈가 논하는 비인칭성의 일의성에는, 아감벤은 그 위상의 의미를 인정하면서도, 명확하게 이의를 제기하고 있다. 푸코의 주체화에 관해서도 최후기의 그것에 아슬아슬할 정도로까지 찬성하면서도 배제와 포함에 관한 논의의 부재를 계속 묻는 것이다.

그러면 이런 일련의 고찰을 마무리하는 데 있어서 아감벤은 앞서 말한 도식을 별다른 설명도 없이 제시한다. 일련의 논의가 푸코와 들뢰즈의 생명에 관한 개념의 애매함을 논의한 반면, 마지막에 놓인 이 도식에서는, 한편으로 푸코와 들뢰즈가 동거하는 내재의 선이 그려지고(그것은 스피노자와 니체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것에 대립시키듯이, 레비나스와 데리다의 초월의 선(후설이나 칸트로 거슬러 올라간다)이 설정된다(앞의 153쪽의 그림을 참조).

들뢰즈와 푸코의 유사성과 대비에 의해 전개되는 논의가, 완전히 다른 방향으로 나아가는 점은 여기서 따지지 말자. 이것 이상으로 문제인 것은, 이 양자의 선의 중간에 하이데거가, 아무런 설명도 없이 배치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 이상으로, 마치 하이데거를 축으로 초월과 내재라는 두 개의 선이 배치 가능한 것처럼 그려져 있다. 하지만 생명의 철학의 탐구의 마지막에, 왜 하이데거가 중요한 의미를 갖고 갑자기 도입되게 되는 것일까?

또 하나 생각해야 할 것은, 이 도식에서, 아감벤의 호모 사케르의 사유 자체는 어디에 놓이는가이다. 이에 대해서는 답변은 아마 한 가지밖에 없다. 아감벤은 항상 자신의 사유를 중간지대로 설정하려 한다는 것이리라. 그런 한에서, 여기서 아감벤은 자신과 하이데거를, 생명의 사유에 있어서 분명하게 포개놓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아감벤과 하이데거의 관련 : 동물과 인간

하이데거는, 여기서 이른바 아무런 예고도 없이, 생명의 문제의 초점을 맞추기 위해 끌어내지고 있다. 아감벤은 법이나 초월을 자명시하는 것은 아니지만, 법이라는 주제로 끌어들이고 생명을 논하는 한, 중간지대에 자신의 입장을 설정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아감벤이 본래 자신을 두어야 할 위치에, 하이데거의 이름이 적혀 있다. 그렇지만 하이데거는 바로 해석학적 현상학으로서 존재론을 구상하고, 언어에 존재가 깃들어 있다고 한 점에서 초월의 선을 대표하는 철학자가 아닐까? 하이데거의 어디에서 생명의 논의가 발견되는 것일까?

절대적 내재의 텍스트에서 하이데거의 이름이 제시되지 않은 것은 아니다. 들뢰즈의 내재와 사르트르의 논의의 가까움을 논하는 부분에서, 아감벤은 하이데거에 관해 다음과 같이 언급한다.


이렇게 들뢰즈는 의식이 가졌던 가치들을 정산하고 있는데, 이것은 어떤 철학자의 몸짓을 계속하는 것이 된다. 그 철학자의 작업을 들뢰즈는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으나, 20세기 현상학의 대표자 속에서는, 이 철학자가 적어도 이 점에 있어서는 들뢰즈에게 가장 가깝다는 것은 확실하다. 그 철학자란 하이데거, 그 멋들어진 알프레드 자리론에 등장하는 파타퓌직한 하이데거이다.[각주:21]


하지만 이것만으로는 설명이 충분하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파타퓌직으로서의 하이데거(들뢰즈, 하이데거의 알려지지 않은 선구자 알프레드 자리, 비평과 임상 수록)를 토대로 했다고 해도, 생명론적인 위상에는 아직 이를 수 없었을 것이다.[각주:22]

오히려 아감벤 자신의 하이데거론인 열림이 여기서의 논의와 더 깊은 연관을 갖고 있는 것으로서 검토해야 하지 않을까?

아감벤의 저작 열림으로 넘어가자. 이 책에서 아감벤은 인간과 동물이라는 부제에서 드러나듯이, 동물성을 둘러싸고 하이데거의 생명론이라는 문제계를 추적한다.

말할 것도 없으나, 존재와 시간(1927)에서의 하이데거는 생물학이나 생명의 철학에 대해 매우 엄격한 견해를 제시했다. 거기서는 자신의 존재론을, 당시 융성을 뽐냈던 생명의 철학으로부터 구분하는 것이나, 현존재의 논의가 생물학적인 생명의 주장과는 전혀 다른 것이라는 것을 확실하게 적고 있다.

하지만 이 단계에서의 하이데거도, ‘세계세계성의 개념에 이르는 직전에서라고는 하지만, ‘환경세계(Umwelt)’라는 윅스퀼의 술어에 중요한 지위를 부여한다. 윅스퀼의 환경세계론, 하이데거의 도구 존재로서의 세계를 묘사하기 위해 커다란 의의를 가진 것이었다.

그리고 이 테마를 생각할 때, 존재와 시간이상으로 중요한 것은 하이데거의 1929-30년의 강의록 형이상학의 근본개념들[각주:23]이다. 이 방대한 강의록에서는, 그 전반부에서 권태(Langeweile)’라는 (‘불안과는 다른) 정동성이 논의되고, 또한 후반부에서는 윅스퀼을 축으로 한 생물학적 논의가 주제화되며, 동물성을 둘러싸고도 상당한 서술이 이뤄진다. 거기서는 동물적인 생명은, “세계가 가난하다(Weltarmut)”고 규정되며, 돌이 세계를 갖지 않는 것(Weltlos)이나 인간이 세계(Welt)를 살고 있는 것과 대비되어 묘사된다.

이 하이데거의 강의록 자체가 수많은 문제를 포함하고 있을 것이다. 이 책의 전반부에서는 시간성을 노정시키는 근원적인 정서로서, 존재와 시간에서는 불안에 할당되었던 역할이, ‘깊은 권태[지루함]’로 대체된다(‘깊은 권태는 특정한 지루한 대상을 갖지 않는다는 점에서도 불안과 겹칠 것이다). 거기서는 불안이 죽음에의 선취로 현존재를 움직이게 하는 것과는 달리, 순간과 시간의 오랫동안(Langweile)의 관계가 논의되는 것이다.[각주:24] 심지어 이 깊은 권태(die tiefe Langweile)’의 논의가 전단계가 되어, 동물적 생명을 다루는 후반부로 향할 때, 현존재가 동물과 다른 것으로서 규정되게 된다. 이른바 하이데거 자신이 2년 전에 간행된 미완의 저서 존재와 시간, 다른 종류의 시각에서 재검토하는 것이다.

아감벤은 하이데거의 이 텍스트를 소재로 삼아, 열림의 논의를 밀고 나간다. 아감벤이 주목하는 것은, 특히 인간이 시간을 살아가는 형태로서의 깊은 권태라는 정동성과, 동물이 환경세계에 사로잡혀 있는 가난함사이의, 역설적인 결합 자체이다. 이 두 가지는 유사하지만, 인간(현존재)의 본질과 동물의 본질로서, 완전히 다른 종류의 사태이기도 하다. 하지만 아감벤은 하이데거의 논의에 있어서의 이 두 개의 착종된 관계에, 앞의 도식에서 초월과 내재의 선이 교차하는 지점을 찾아내고 있다.

아감벤은 다음과 같이 적는다.


하이데거에게서 초미의 과제는 동물의 세계의 가난함(Weltlos)’, 인간이 세계를 형성하다(weltbildend)’의 관계를 통해서, 현존재 세계--존재 라는 근본 구조 자체를 동물에 대해 위치짓게 되며, 그렇게 함으로써, 인간의 등장과 더불어, 생물 속에 나타나는 개시의 근원과 의미를 탐구하게 되는 것이다.[각주:25]


그렇지만 인간과 동물의 관계를, 예를 들어 이성적 동물이라는 방식으로, 동물적 생명에 무엇인가가 부가되도록 묘사하는 것은, 바로 존재와 시간에서의 하이데거가 계속 거부했던 것이었다. 여기서도 생물학적인 논의가 이뤄지지만, 그런 거절이 보이지 않는 것은 아니다. 달리 말하면, 여기서는 오히려 존재와 시간에서는 몇 줄로 처리되고 말았던 생물학과의 대결재부상하는 것으로 간주되어야 한다.[각주:26] 동물과 인간의 연관을 차이에 있어서 파악하는 것이, 현존재의 규정에 있어서 중요하다는 것이다.

하지만 왜 그럴까?

아감벤은 하이데거가 동물은 환경세계를 억지해제(das Enthemmende)한다고 표현하고 있는 것에 주목한다. 그것은 동물이 각각의 환경세계에서 고리를 이루면서도, 이로부터 열려져 있는 존재방식을 갖추고 있다는 것을 드러내는 것이다. “억지해제에 있어서는 동물이 그것에 에워싸여 있는 고리로부터 열려 있다.”[각주:27] 하지만 그런 동물의 존재방식은 또한 사로잡혀 있다=방심(Benommenheit)”고 말해진다. “사로잡힘=방심도 또한 환경세계 속에서, 열려지고 있으면서도, 몽롱한 상태에 있다는 것을 가리킨다. 존재 자체로의 열림(Offenbarheit)이 있는 것은 아니다.

이러한 사로잡힘=방심에 있어서, 동물은 어떤 지각을 행하는 것은 아니다. 꿀벌이 꿀을 빨고 있을 때에는, 오로지 그 대상 자체에 사로잡혀 있다[푹 잠겨 있다]. 거기서 자신의 신체가 절단돼도, 꿀벌은 꿀을 계속 빨고 있다.[각주:28] 이것은 주어진 환경성의 규정에 대한 사로잡힘=방심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동물의 행동거지는 억지해제로서, 열림에 대한 양의성을 갖추고 있다고 하이데거는 말한다. 그것은 하이데거의 다음의 문장에서 엿볼 수 있는 것이기도 하다. “방심 속에서는 존재자는 열려 있는(offenbar) 것이 아니며, 개시되는 것도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로 그 때문에, 닫혀져 있는 것도 아니다.”[각주:29]

동물은 존재자에게 열려있지만, 그런 존재자는 존재로서 노정되어 있는 게 아니다. 이런 매우 양의적인 사태가 여기서 강조되는 것이다.

그런데 동물이 환경세계 속에서 억지해제고리를 이루며 살고 있기 때문에 열림의 방향성을 갖는 것과, 그것이 사로잡힘=방심하고 있는 것 사이의 양의성은, 하이데거가 이 강의록의 전반부에서 논한 깊은 권태의 논의로 결부된다. 하이데거 자신이 동물의 사로잡힘=방심, 인간이 지닌 깊은 권태이라는 테마를, 그대로 연관시키고 있는 것이다.


이 점에 이르러서 하이데거는 강의의 1부에서 다뤘던 깊은 권태에 관한 논술을 불러일으키며, 동물의 방심과 깊은 권태라고 불렸던 근본적인 정서를 뜻밖의 형태로 공명시킬 수 있다.[각주:30]


깊은 권태란 하이데거에게서 인간적인 것이 동물적인 것으로 연결되는 장면 자체를 가리킨다. 하지만 그 방식은 어떤 것일까?


하이데거의 깊은 권태

이로부터 아감벤의 논의는 형이상학의 근본 개념들에서의 깊은 권태를 주제로 하는 것으로 향한다. 그것은 동물의 사로잡힘=방심과 매우 유사하지만, “사로잡힘=방심이 세계에 열려 있으면서도 스스로에 머물 수밖에 없는 것인 반면, ‘깊은 권태는 바로 인간이 시간을 살아가는 것의 근본에 있는 정동성이며, 그 때문에 닫혀 있으면서도 그 한가운데서 열려 있다는 점에서, 그 방향성을 정반대로 하는 것이다.

이러한 깊은 권태는 두 가지 특징을 갖는다고 말해진다. 우선 거기서는, 현존재가 거절되고 있는 존재자에게 건네지고[넘겨지고] 있다는 것이다. 이 계기는, 동물성이 지닌 억지해제고리’, 즉 닫혀 있으면서도 열려 있다는 존재방식과 흡사하다. 현존재는 보통은 존재자의 존재에 접근할 수 없다. 하지만 권태라는 존재방식 속에서, 그 닫힘 자체에 있어서, 인간은 존재자에게 건네지고 있다(ausfeliefert)는 것이다.

그리고 또 다른 깊은 권태의 특징은, “허공에 매달린 채로 있다[중지된 채로 유지된다](Hingehaltenheit)”는 것이라고 말해진다. “허공에 매달린 채로 있다[중지된 채로 유지된다]”는 것은 거기서 비활성인 채로 체류하는 것(brachliegende)이기도 하다고 얘기된다. 그것은 손에 넣지 못한 채 방치되고 있는 경작지를 의미하는 농경용어이기도 하다.

이것은 가능성을 가지면서 어떤 가능성도 현재화시키지 못하는 것으로서, 모든 가능성을 눈앞에 두는 것이기도 하다. 이런 사정은 아감벤이 잠재력에 의해 말했던 것과 강하게 겹친다. ‘깊은 권태특정한 구체적 가능성 전부를 중지시키고, 탈취하는 가운데, 근원적인 가능성(즉 잠재력)이 그 가치를 드러내는 체험[각주:31]이기 때문이다.

하이데거의 권태론은 특히 불안과의 연관에서 많은 논의해야 할 테마를 포함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당장은 아감벤의 논의에만 초점을 맞춘다면, 아감벤은 여기서의 논의에, 자신의 잠재력과 매우 가까운 어떤 것을 보고 있는가가 중요할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동시에 들뢰즈의 잠재성이나 내재라는 사고와의, 강한 결부를 시사하는 것이다. 거부함으로써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것. 거꾸로 아무것도 하지 않음으로써 가능성을 계속 갖는 것. 그것은 아감벤도 들뢰즈도 논의하는 바틀비(허만 멜빌), “하지 않는 편이 좋습니다[안 하는 게 좋습니다=안 하는 걸 좋아합니다](I would prefer noto to)라는 말과도 결부되면서, 무한한 가능성을, 모종의 무능력을 축으로서 끄집어내고 있는 것이다.[각주:32]

그러면 이런 깊은 권태는 동물성과 연관될까? 어떤 의미에서는 그럴 것이다. 이것은 현상적으로는, 동물이 환경세계속에서 사로잡힘=방심하는 것과 매우 가깝기 때문이다. 그리고 바틀비적인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는 무능력은, 들뢰즈라면 곧바로 bêtise=어리석음이라는 주제로 이어지며, 동물적인 무력함에 연관시키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감벤은 동물의 방심과 인간의 깊은 권태를 아슬아슬하게 접근시키면서 이것들을 동일시하지는 않는다.


방심에 있어서 동물은 억지해제하는 것과 직접 관계를 맺으며, 억지해제하는 것 속에 노출되고 마비됨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그런 것으로서 들통나게 하는 것은 결코 할 수 없었다. 바로 특정한 억지해제 영역과의 관계를 중지하고 비활성적인 것으로 하는 것을 동물은 할 수 없는 것이다. 그에 반해 깊은 권태는 세계가 가난하기 때문에 세계로, 동물환경으로부터 인간세계로 이행이 실현시키는 형이상학적인 조작인 것처럼 생각된다.[각주:33]


그래서 인간이란 동물성의 억지해제에 의해 성립하는 것이 아닌 것이다. 오히려 동물에게는 결코 할 수 없는 권태를 살아감으로써, 시간성의 무한의 가능성에, 그 비활성의 존재방식에 그칠 수 있는 존재자로서 그려질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인간은 동물에게는 불가능한 세계가능성을 찾아낼 수 있게 된다.

아감벤의 고찰의 귀결은, 이런 동물과 인간의 관계를 중립적으로 화해시키는 것이 아니다. 거기서 이뤄지는 것은 오히려 반대로, 이런 사정을 그대로 중지의 중지에 두는 것이다.


타원의 두 개의 초점

그러면 이런 형이상학의 근본개념들에 관한 논의는, 절대적 내재성에서의 아감벤에 의한 들뢰즈나 푸코의 독해에 무엇을 덧붙이는 것일까?

거기에서 하이데거가 맡는 역할은 명확하다. 하이데거가 생명의 사유의 계보 안에서 초월과 내재의 중간지점에 놓여 있다는 것의 의미는 열림에서 깊은 권태를 둘러싸고 제시된 매우 들뢰즈적인 내재성의 모습을 전제로 할 때에야 명확하게 드러날 것이다.

게다가 아감벤은 이렇게 파악되는 하이데거의 이중성, 즉 동물성에 있어서의 열림이면서도 돌파는 하지 않는 사로잡힘=방심, 인간에 있어서의 무능력으로서의 가능성인 깊은 권태, 대립하면서도 접하는 지점으로서 간주하는 것이다. 이렇게 묘사되는 타원 속에서, 들뢰즈와는 달리, 동물과 인간에 관해 생명 속에서의 본질적인 구분선을 탐색하는 것이 가능해진다. , 아감벤이 (들뢰즈적인 삶의 일의성에 반하여) 요청하는 벌거벗은 생명의 탐구의 다양성이 확보되는 셈이다. 이런 의미에서 아감벤이 해석하는 들뢰즈적인 내재가 갖추고 있는 불만이, 여기서 동물/인간의 분할선을 둘러싼 방식에서 다시 설정되고, 생명정치학적인 장면으로서 재파악된다.

여기서 아감벤은, 정당한 독해인지는 제쳐놓더라도, 하이데거의 생물론에서 배제와 포함을 둘러싼 자신의 논의와 가까운 것을 보고 있다. 그것은 내재를 둘러싸고 이루어지는 것인데, 인간적 초월의 편으로도, 다른 방향으로도 자리매김 되는 것일 수밖에 없다. 벌거벗은 생명은 동물성과 아주 가깝더라도, 하이데거의 권태쪽에 강하게 겹쳐진다. 무위가 지닌 가능성이 여기서는 논의의 요점이 된다.

포함과 배제를 둘러싼 아감벤의 사고는, “벌거벗은 생명을 생물학적인 논의로서 파악하는 것은 아니나, 하지만 거기서 생물성과 인간성을 역접적 연관 속에서 억누르려 하는 한, 하이데거의 시도와 아주 가깝다고 말할 수 있다. 언어나 법이라는 영역을 인정하면서, 중지에 있어서 깊은 권태를 노출시킨다는 전술은, 아감벤적인 양의성에 그대로 겹치는 것처럼 보인다. 다만 거기서 하이데거는 본래는 삶의 계보학의 중간이라기보다도 어디까지나 초월과 내재를 분할하는 선의 초월 쪽으로 기운 것으로 묘사되어야 할 인물이 아닐까? 그리고 아감벤은 하이데거와 똑같은 타원 내부에서 동거하면서도, 들뢰즈적인 내재에 가깝다는 점에서, 하이데거에 대해 약간 내재에 기우는 곳에 놓여야 할 것이다.

그러나 아무튼,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동물이라는 테마이다. 동물성을 고찰함으로써 가능해지는, 생명 속에서의 인간과 이것 이외의 존재자 사이의 분할선이다. 거기서는 동물과 인간이, 둘 다 생명이면서도, 배제와 포함을 반복하는 그 접점이 제시된다. 생명정치학의 논의가 인간의 동물화와 동시에 동물의 인간화(권리부여)와도 교차되면서 말해지는 의의도 여기에 있다.[각주:34] 인간과 동물을 둘러싼 타원, 하이데거와 아감벤이 동거하면서 두 개의 초점을 그리는 타원, 여기에 생명정치학의, 혹은 생명의 철학의 새로운 형상을 보는 것도 가능해지지 않을까? 아감벤의 들뢰즈 독해가 끄집어내는, 최대의 논점이 아닐까?


  1. 생명정치학의 측면에서는 얘기되지 않은 아감벤의 저술의 다양성에 대해서는 岡田温司, 『アガンベン読解』, 平凡社, 2011을 참조. [본문으로]
  2. Cf. Giorgio Agamben, Homo sacer : il potere sovrano e la nuda vita, Einaudi, 1995, pp.6ff. [본문으로]
  3. 푸코의 ‘고고학’ 및 ‘계보학’의 서술이 일관되게 단선적인 시간 배치에 의거하고 있지 않다는 것, 또한 ‘중지’라는 관점은 벤야민의 「역사의 개념에 대해」에서의 ‘중지상태의 변증법’에, 혹은 들뢰즈=가타리가 『철학이란 무엇인가』에서 논한 ‘부감俯瞰’이라는 관점 없는 관점과 매우 가깝다는 것 등을 고려해야 한다. 생명을 논하는 생명정치란 이런 “현실적인actual 관점”의 포기에 의해 바로 현실성이 될 수 있는 게 아닐까? [본문으로]
  4. Michel Foucault, «La vie: l’expérience et la science», in Dits et écrits, 1954-1988. tome IV, Gallimard. 1994. pp.763-776. [본문으로]
  5. Gilles Deleuze, «L’immanence: une vie …», in Deux régimes de fous : textes et entretiens, 1975—1995, Minuit 2003, pp.359-363. [본문으로]
  6. Agamben, Homo sacer, p.3. [본문으로]
  7. ibid., pp.6—7. [본문으로]
  8. ibid., p.7. [본문으로]
  9. 『호모 사케르』 2부를 참조. [본문으로]
  10. Ibid., p.127. [본문으로]
  11. 그러나 동시에 바타이유의 사유가 현대적 정치학 속에서 반복해서 다뤄지고 있다는 것을 봐도, 이런 초월을 목표로 할 뿐만 아닌 방향성, 즉 바타이유 자신이 “저열한 유물론”이라고 부른 영역을 어떻게 생각할 것이냐는 중요한 문제이기를 계속한다. [본문으로]
  12. Foucault, «La vie», p.774. [본문으로]
  13. ibid: p. 775. [본문으로]
  14. Giorgio Agamben, La potenza del pensiero: saggi e conferenze, Neri Pozza, 2005, p.386. [본문으로]
  15. Gilles Deleuze et Félix Guattari, Qu’est-ce que la philosophie?, Minuit 1991, pp.49-50. [본문으로]
  16. Agamben, La potenza del pensiero, p.393. [본문으로]
  17. ibid., pp.401ff. [본문으로]
  18. ibid., p.404. [본문으로]
  19. 그렇지만 이것에 이어진 「산보하다(pasearse)」라는 절에서, 이런 스피노자적 내재 자체에 있어서의 운동성에, 아감벤이 모종의 찬성을 보여주지 않는 것은 확실하다. 순수한 관조에 상응하는 ‘산보’에, 아감벤이 벤야민적인 산책자의 그림자를 보지 못했을리도 없다. 이 점은 아감벤 자신의 ‘애매함’을 잘 드러낸다. [본문으로]
  20. ibid., p.410. [본문으로]
  21. ibid.. p.392. [본문으로]
  22. 오히려 이 논고에서는 알프레드 자리를 끌어들여 기묘한 언어 사용으로서의 하이데거가 찬양된다. 하이데거에 관해서는 물론 『차이와 반복』에서의 각주(Gilles Deleuze, Différence et répétition, PUF, 1968, p.188) 등의 검토 재료가 있는데, 이 양자에서의 ‘생명’을 둘러싼 관계성은 아감벤에 의한 매개를 거치지 않으면 역시 사고하는 데 어렵다고 생각된다. [본문으로]
  23. Martin Heidegger, Die Grundbegriffe der Metaphysik : Welt, Endlichkeit, Einsamkeit, in Gesamtausgabe, Bd. 29/30, Vittorio Klostermann, 1983. [본문으로]
  24. 본 논고에는 직접 관련되지 않으나, 이 강의록에서의 시간론은 하이데거의 문맥에서도, 또한 그것 이외의 맥락에서도 많은 문제를 품고 있다. 특히 『존재와 시간』에서 논의되는데, 그 존재방식이 면밀하게는 기술되지 않은 “순간=찰나(Augen-blick)”이라는 주제가 “깊은 권태”라는 “시간의 사이가 길어지는 것”의 논의에 관련되어 재파악되고, 그것이 “순간의 첨단이 도망쳐 들어오는” 것으로 그려지는 점(33, 34절 등)은 시간과 순간, 현재의 본래성과 비본래성이라는 테마를 고찰할 때 간과할 수 없을 것이다. [본문으로]
  25. Giorgio Agamben, L’aperto: l’uomo e l’animale, Bollati Boringhieri. 2002, p.53. [본문으로]
  26. ibid., p.53. [본문으로]
  27. Heidegger, Die Grundbegriffe der Metaphysik, S.370-371. [본문으로]
  28. ibid., S.352. [본문으로]
  29. ibid., S.361. [본문으로]
  30. Agamben, L’aperto, pp.64-65. [본문으로]
  31. ibid., p. 70. [본문으로]
  32. 들뢰즈의 논의란 『비판과 임상』에 수록되어 있는 「바틀비 또는 상투어」이다. 아감벤은 이 책의 이탈리아어 번역본에 긴 해설을 붙여서 한 권의 책으로 냈다(Gilles Deleuze et Giorgio Agamben, Bartleby: la formula della creazione, Quodlibet, 1998). [본문으로]
  33. Agamben, L’aperto, pp.70-71. [본문으로]
  34. 인간의 동물화와 함께 동물의 인간화라는 반대 방향의 움직임도 발생하고, 거기서 ― 바로 아감벤식으로 말하면 ― 인간과 동물의 동일성과 차이의 문제가 다시 물어지고 있다는 것은, 삶을 다루는 여러 가지 논의의 구체성에 있어서 ― 동물윤리, 환경문제, 생물다양성 등 ― 이것들을 재차 형이상학적으로 사고하기 위해서도 필요한 것이리라. 이 점에 대해서는 小泉義之, 「人間の消失、動物の消失」, 『現代思想』, 2009년 7월호. ; 市野川容孝, 「動物の人間化、人間の動物化──バイオポリティクスの一断面」, 『現代思想』, 2009년 7월호를 참조. 두 논문 모두 양자의 구분이 애매해지는 교차점을 묘사한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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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래할 생명권력론을 위해


사상, 2013년 2

2부 1장. 

죽음정치에서 비정치

이탈리아에서의 생명정치의 전개

오카다 아츠시(岡田温司)


1. 들어가며 : 이탈리아적 차이를 둘러싸고

1970년대 중반 미셸 푸코가 기선을 잡은 생명정치의 사유가 1990년대에 들어 특히 이탈리아에서 독자적인 발전을 이룩하고 있는 것, 그리고 이를 선두에서 인솔한 것이 다름 아닌 조르조 아감벤(1942년 생)이라는 것은 더 이상 강조할 것도 없다. 나아가 이제 여기에 나폴리의 정치철학자 로베르토 에스포지토(1950년 생)의 이름을 덧붙여야 한다는 것도 마찬가지다. 나도 여태껏 두 사람에 대한 번역 등을 통해, 기회가 있을 때마다 이를 강조했다.[각주:1] 그렇지만 오히려 본국 이탈리아에서는 생명이라는 접두사가 약간 붐을 일으키는 식으로, ‘생명미학’(피에트로 몬타니)생명경제학’(라우라 바치칼루포) 같은 신조어가 출현할 지경이다.[각주:2]

roberto esposito에 대한 이미지 검색결과

로베르토 에스포지토


물론 이 추세를 고스란히 수긍하는 일은 삼가야 하지만, 다름 아닌 이탈리아에서 생명정치를 둘러싼 사유가 새로운 전개를 이룬 데에는 단순한 우연으로 그치지 않는 연유가 있다. 왜냐하면 생명은 전통적으로 이탈리아 사유에서, 공공연하든 암묵적이든, 늘 중심적 테마 중 하나였기 때문이다. 마키아벨리, 조르다노 브루노, 지암바티스타 비코Giambattista Vico(1688~1744)의 이름을 상기하는 것만으로 충분할 것이다.

아주 최근작인 살아 있는 사유 : 이탈리아 철학의 기원과 현실성(Pensiero vivente. Origine e attualità della filosofia italiana)(2010)에서 에스포지토 본인이 논하듯이, 거기에는 이 나라의 역사적 특수 사정이 적잖이 관계하고 있다. , 즐비하게 늘어선 도시국가나 유럽열강, 나아가 로마 교회 등과의 갈등이나 밀당에 항상 노출된 이탈리아의 사유는, 필연적으로 국민국가라는 틀에 얽매이지 않고 그 바깥에서 전개되었다. 이탈리아 철학은 국민국가의 형성과 병행하는 것도, 그 형성 이후에 계속된 것도 아니다. 그 때문에 이 나라의 사상은, 예를 들어 주체에 관한 반성이나 인식론이라는, 데카르트부터 칸트에 이르는 철학의 왕도로부터는 필연적으로 벗어나 있다. 이탈리아에서 그런 반성은 철학의 내부에서 벼려지고 철학의 전문용어로 말해지기보다는 오히려 정치적이고 역사적인 생명의 현실을 겨누게 됐다. 추상적이고 형이상학적인 사유로부터는 생명의 구체적인 모습은 빠져나가 버린다. 이리하여 이탈리아는 서양철학의 이른바 방계가 되어 왔지만, 이것은 시각을 바꾼다면 (푸코적인 의미에서의) ‘바깥의 사유를 혹은 (들뢰즈적 의미에서의) ‘탈영토화를 선취했다고도 해석할 수 있다. , 이질적인 것에 열려 있고, 유동성이나 갈등이나 변화를 환영하는 태도이다.[각주:3]

나아가 여기서 벤야민적인 역사철학의 선취를 보탤 수 있을지 모른다. 가령 비코는 새로운 학문(1725)에서 지저분하고 더럽고, 절단되고, 본래의 장소로부터 벗어난 곳에 가로놓였기 때문에 그동안은 지식에 있어서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았던 고대의 이러저러한 위대한 단편갈고 닦아’ ‘합성하고 본래의 장소에 두는것을 새로운 학의 중요한 원리라고 꼽는데,[각주:4] 이는 벤야민의 역사철학 테제를 연상시키지 않을 수 없다. 비코에게 시나 신화도 역사로부터 배제된 것이 아니며, 역사 속으로 편입되고, 자주 역사를 술안주거리로삼는다. 이런 게 허용된다면, 이탈리아의 철학은 항상 시대착오적이기 때문에 현실성을 얻었다는 측면을 갖는 것처럼 생각된다.

The New Science of Giambattista Vico에 대한 이미지 검색결과

그러면 이탈리아의 특수 사정, 또는 이탈리아적 차이에 관한 서설은 이 정도로 하고, 본론에 들어가자. 이 글에서 나는 감히 정면에서 생명정치 자체에서라기보다는 오히려 이것이 반전된 것으로서 죽음정치에서 출발하고 싶다. 왜냐하면 이 죽음정치라는 특이한 신조어도 푸코를 기점으로, 이탈리아에서 매우 흥미로운 전개를 이룩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우선 그 저간의 사정을 밝힌 후, 이어서 이 죽음정치를 극복하는 것, 혹은 그것에 대립되는 것으로서의 비정치에 주목해보자. 장치와 무위, 공동체와 면역, 탈주체화와 비인칭 같은 문제계가 여기에 깊이 관련될 것이다. 주역으로서 등장하기를 바라는 것은 물론 아감벤과 에스포지토이지만, 뜻밖의 조연들 예를 들어 시몬 베유 도 거기서 중요한 역할을 맡게 될 것이다. 그러면 우선 죽음정치부터 시작해보자.

 

I. 푸코에서 아감벤으로 : ‘죽음정치로의 전도

방금 전에 나는 죽음정치도 푸코에게서 기원한다고 말했는데, 이것은 도대체 무슨 말일까? 생명정치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여기서도 우리는 저명한 그 텍스트, 1975-76년의 콜레주드프랑스 강의 사회를 보호해야 한다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푸코 자신은 상당히 기묘하게 울려 퍼지는 이 용어 죽음정치를 직접 사용한 것은 아니지만, 분명히 이것을 암시했다.

주권권력의 계보나 전쟁과 국가에 관해 논한 일련의 강의의 마지막 날, 프랑스의 철학자는 아주 당돌하게도, ‘생명정치라고 그 자신이 명명했던 것에 관해 이야기하기 시작한다. “19세기의 극히 중요한 현상 중 하나는 권력에 의한 생명의 부담이라고도 말해야 할 것이었다고 생각합니다이 구절로 말문을 열었던, 기념해야 할 하루이다.[각주:5]

이미 잘 알려져 있듯이, 여기서 푸코는 특히 18세기 이후, 인민의 생명이나 건강이 국가의 최대 관심사가 되는 상황을, 생살여탈권으로서의 주권권력으로부터, “생명을 보증하는 권력으로서의 생명권력으로의 이행으로 파악했다. , “권력에 의한 살아 있는 것으로서의 인간의 파악이며, “생물적인 것의 국가화의 시작이다. 그때까지의 주권권력의 모토가 죽게 만들거나[죽게 하거나] 아니면 살게 내버려두는거나였다고 한다면, 생명권력의 그것은 살게 만들고[살게 하고], 그리고 죽게 내버려둔다는 것이 된다. 이 권력을 어떻게 사용하느냐, 그 테크놀로지가 생명정치라고 불리는 것이다. , 생명정치는 의학이나 법학, 위생학이나 통계학 등에서 다양한 지식이나 기술을 끌어들임으로써 이 권력의 개입 영역을 결정하는 것이다.

하지만 여기에는 중대한 아포리아가 도사리고 있다는 것을 위대한 사상가는 날카롭게 꿰뚫어봤다. 생명권력에는 과잉으로 흐르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이미 생명권력에 대한 주권권력의 과잉이 아니라 주권권력에 대한 생명권력의 과잉입니다.” 그 과잉이 생기는 것은, 예를 들어 생명을 조절할 뿐 아니라 생명을 무성하게 하고 생물을 제조하고 괴물을 제조하며 궁극적으로는 관리 불가능하고 보편적 파괴력을 지닌 바이러스를 제조하는 것이 기술적으로도 정치적으로도 인간에게 가능해질 때이다.[각주:6] 이 경고가 울렸던 1970년대 당시 이미 생물병기나 핵이 중대한 위협으로 존재했던 것은 물론이지만, 게다가 출생 전 진단이나 유전자 조작이나 복제기술까지도 포함한 분자생물학이 장족의 진보를 이루고 있었다.

그 증거로, 푸코는 놓치지 않았다. 생명권력은, 그것이 바로 생물학적인 요청과 결부될 때, 가장 위험한 양상을 보여준다는 것을. 나치즘의 경우가 그 좋은 예이다. 왜냐하면 생물학적 위험의 제거와 종 자체, 혹은 인종의 강화를 목표로 삼을 경우”, 죽음의 명령을 용인하게 되기 때문이다. “국가가 생명권력을 따라 기능하기 시작하자마자, 국가의 살인 기능이 보장되는 것은, 다름 아닌 인종주의에 의해서인 것이다.[각주:7] 이리하여 푸코는 다음과 같이 결론짓게 된다. “전반화된 생명권력은, 엄청나게 증대한 죽음의 권리와 죽음의 위험에 의해 사회 전체에 골고루 퍼진 절대적인 독재 정치와 일치하는 것이라고.[각주:8]

푸코는 여기서 죽음의 권리죽음의 명령혹은 죽음에 노출되는 것이라는 표현을 쓰고, 죽음과 생명권력 사이의 진퇴양난의 관계를 정확하게 표현하고 있지만, 그것을 죽음의 정치혹은 죽음정치라는 이름으로 부르는 것은 아니다. 또 그는 나치즘을 생명권력의 과잉이며, “생명권력을 틀림없이 전반화한 사회라고 해석하는 한편,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시에, “죽이다는 주권권력을 전반화한 사회이기도 하다고 파악하고 있기도 하다.[각주:9] , 푸코에 따르면, 나치즘은 신구의 두 개의 권력의 메커니즘 생살여탈권의 고전적 메커니즘과 규율과 조절에 의한 생명권력의 새로운 메커니즘 이 합체한 것으로 간주되고 있다.

이 논의를 이어받아, 바로 죽음정치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하는 것이 다름 아닌 아감벤이다. 세계적 논쟁을 야기한 책인 1998년의 아우슈비츠의 남은 것에서, 이 이탈리아 철학자는 프랑스 선배의 논의를 간결하게 요약하고, 다음과 같이 말한다. 현대의 막강한 전체주의 국가, 특히 나치 국가에서 살리는 생명권력의 전대미문의 절대화는 죽게 만드는 주권권력의 똑같은 정도로 절대적인 전면화와 일치한다. 그 결과, 생명정치는 죽음정치와 무매개적으로 일치한다.[각주:10] 이리하여 아감벤은 죽음정치라는 신조어를 확실하게 전면에 내세우게 된다.

게다가 생명정치와 죽음정치 사이의 이 일치는 푸코에게 진정한 역설살리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권력이, 무제한의 죽음의 권력을 행사하는 것은 왜인가? 이었지만, 아감벤에게서는 어떤 의미에서 필연으로 간주된다. 왜냐하면 나치 수용소는 궁극적으로, “죽음과 대량학살의 장소일 뿐 아니라, 무엇보다도 무젤만을 생산하는 장소”, 즉 이제 인종적 차별을 초월해, 살아 있지도 죽어 있지도 않은 문턱에 인간을 몰아넣는 장소이기 때문이다. 생명정치와 죽음정치는 이른바 동일한 동전의 양면일 뿐이다.

이것을 아감벤은 똑같은 저서의 다른 대목에서, 심지어 다음처럼 바꿔 말한다. 신구의 두 개의 권력 모토, “죽게 만들거나 아니면 살게 내버려 두거나살게 만들고, 그리고 죽게 내버려두는것 사이에, 이제 세 번째 정식이 몰래 들어선다. , “이제 죽이는 것도 살리는 것도 아니고, 살아남게 한다는 것이 그것이다. 삶도 죽음도 아니고, 조절 가능하고 잠재적으로는 무한한 생존의 생산이 현대 생명권력의 주요 성능이다.”[각주:11]

그런데 푸코의 텍스트에 대한 아감벤의 이런 접근법을 오해나 곡해로 보느냐, 아니면 반대로 창조적인 확대 해석이라고 보느냐에 대해서는 평가가 갈릴지도 모른다. 사실 그 때문에 이 철학자는 비판도 당하는가 하면 거꾸로 칭찬도 받았다. 그가 상대하는 사람은 푸코만이 아니다. 아리스토텔레스부터 하이데거까지, 혹은 탈무드나 카발라부터 바르부르크나 벤야민까지, 만국박람회 일지로 이미 알려진 이 이탈리아인은, 대략 모든 텍스트를 그런 방식으로 읽어왔다. 이 점에 관해 본인은 자신의 방법을 2008년의 저서 사물의 표시에서 포이어바흐의 발전 가능성이라는 개념을 원용해 이렇게 말한다. “작품의 저자에 속하는 것과, 그것을 해석하고 발전시키는 자에게 귀속되는 것 사이의 차이는, 본질적인 동시에 파악하기 어려운 것이 된다.[각주:12] 자기정당화처럼 들리지 않는 것도 아니지만, 이처럼 충실한 불성실한 자, 혹은 불성실한 충실자라는 문턱에서야말로, 아감벤의 언표는 발생한다.

한편, 원래의 기원은 고대 로마법에서 찾아짐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철학자와 더불어 2000년 이상의 시간을 가로질러 패러다임으로서 부상했던 호모 사케르에 관해서도, 혹은 아우슈비츠에서 비롯되는 이른바 무젤만에 관해서도, 이것들이 본래의 역사적 문맥을 무시하고, 통시태와 사료에 주의를 소홀히 한다는 비판에 대해서, 역시 사물의 표시에서 다음과 같은 반론을 전개한다.

 

만약 패러다임성은 사물 속에 있느냐 연구자의 정신 속에 있느냐고 물어본다면, 내 대답은 그 물음에는 의미가 없다는 것이다. 패러다임 속에서 문제가 되는 이해 가능성은 존재론적 성격을 갖고 있다. 주체와 객체의 인식론적 관계에서가 아니라 존재에 준거하고 있는 것이다. , 패러다임적 존재론이 있는 것이다.[각주:13]

 

여기서 하이데거의 영향을 보는 것은 쉬우며, 실제로 본인도 어느 정도까지는 그 점을 인정하고 있다. 하지만, 아감벤에 따르면, 보편과 개별의 이원론이 문제인 것도, “하이데거에게서처럼 ’, 선취와 해석의 순환성이 있는 것도 아니다.” 패러다임에는 기원도 아르케도 없다. 진정한 문제는 전체의 인식과 개별의 인식 중 어떤 것이 우선 혹은 선행하느냐라는 점에서가 아니라, 개별 사이의 범례적 배치 속에 있는 것이다.”[각주:14] 이런 의미에서 푸코로부터 발달시켰던 죽음정치도 또한 아감벤에게 하나의 패러다임으로서 기능하는 것이다.

그런데 다시금 죽음정치로 돌아간다면, 이 철학자의 이름을 일약 세계적인 것으로 한 1995년의 저서 호모 사케르도 또한, 어떤 의미에서 푸코에 대한 독자적인 응답이라는 성격을 갖고 있지만, 여기서도 또한 죽음정치라는 단어는 표면화되지 않는다. 그 대신에 거의 결말 부근에 죽음을 정치화하기라는 제목이 달린 절이 주도면밀하게 마련되어 있으며, 적절하게 소생기술이나 장기이식기술의 진보의 그늘에서, 삶과 죽음 사이에서 흔들리는 현대의 벌거벗은 생명”, 혹은 새로운 호모 사케르가 출현하고 있다는 것을, 날카롭게 파헤친 것이었다.[각주:15] 그리고 이 책은 3년 후에 출판된 아우슈비츠의 남은 것을 바로 예고하는 것 마냥 근대적인 것의 노모스로서의 수용소라는 제목이 달린 절로 막을 내린다.

호모 사케르』가 세계적 반향을 불러일으킨 이후, 도처에서 모습을 드러내고 있는 현대의 호모 사케르벌거벗은 생명’, 근대정치의 노모스로서의 수용소, 항상화된 예외상태 등 같은 아감벤 식의 말투가 언론계를 떠들썩하게 했던 것은 여전히 우리의 기억에 새로울 것이다. 마치 911 이후의 세계정세가 이 아감벤 효과에 박차를 가하고 있는 것 마냥.[각주:16] 예를 들어, 관타나모 수용소나 아부그라브 교도소에서의 고문이나, 테러리즘과의 전쟁이라는 대의명분을 생각하면, 아감벤은 마치 현대의 예언자인 셈이다. 사실, 관타나모 수용소 폐쇄 여론이 들끓는 가운데, 예를 들어 슬라보예 지젝은 뉴욕타임즈에 기고한 기사(2007324일자)에서, “이탈리아의 정치철학자아감벤의 이름을 일부러 들먹이면서 현대의 호모 사케르살아 있는 죽은 기사들― 을 언급했었다.[각주:17]

아무튼 생명정치는 죽음정치로 전도되는 것이 필수적이다. 궁극적으로는 이것이 아감벤의 테제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것은 호의적으로 듣는다면 격렬한 경고로도 받아들여지지만, 반대로 비관주의나 허무주의의 입장에서 장난치듯이 위기를 부추기고 있을 뿐이라고 받아들여지지 못하는 것도 아니다. 이것에 대해 아마 본인은 반론을 할 것이다. 정치적인 것을 정치의 내부에서만 사고하는 것이야말로 허무주의의 내부에 머무는것에 다름 아니라고 말이다.[각주:18] 여기서 정치적인 것과 비정치적인 것의 관계라는 문제가 부상하게 되지만, 이것에 관해 고찰하기 전에 소론의 또 다른 주역인 에스포지토에게 등장할 기회를 줘보자.

 

II. 아감벤에서 에스포지토로 : ‘면역의 공과

이 나폴리의 철학자도 푸코와 아감벤을 토대로, ‘죽음정치에 관해 파고들어 얘기하려고 한다. 2004년에 출판된 두께감이 있는 책 비오스에서, 꼬박 한 개의 장을 죽음정치”(인종의 사이클)에 할애하고, 푸코가 문제 제기에 머물렀던 나치즘에서의 생명정치=죽음정치의 문제를 철저하게 논하고 있다.[각주:19] 행위수행적이고 범례론적인 아감벤의 말투에 대해, 에스포지토의 그것은, 얼핏 보면, 굳이 말하면 사실확인적이고 학술논문적인 체재를 취하고 있기 때문에, 또한 호모 사케르로 상징되듯이, 사람들의 눈길을 끄는 문구에 호소하는 것도 굳이 피하려 하기 때문에, 아감벤 정도의 센세이셔널한 반응을 불러일으키지 않는다(본인도 그것을 원치 않는다). 하지만 그 논의에는 항상 확실한 강도와 신뢰성이 갖춰져 있다는 것을, 굳이 부언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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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마키아벨리나 비코의 연구에서 출발한 이 정치철학자는 생명정치를 사고하는 데 있어서, 선배인 아감벤과도, 심지어 또 다른 선배인 안토니오 네그리(1933)와도 일정한 거리를 두려 했다. 이 점에 관해 나는 전에 논한 적이 있기에 그것을 참조하기를 바라지만,[각주:20] 굳이 단순화해서 말한다면, 아감벤의 묵시록에도 네그리의 다행증(euphoria)에도 치우치지 않는 길을 찾겠다는 것이다.

에스포지토에 따르면, 원래 푸코의 생명정치 자체가 이런 양자택일을 초래할 가능성을 품고 있다. 왜냐하면 푸코에게서는 삶과 죽음이 두 개의 상이한 항으로서 우선 각각 전제되고, 그런 후에 양자가 외재적으로 연결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되면 필연적으로 생명정치는 아감벤처럼 삶에 대한 권력의 과잉 행사로 보게 되거나, 네그리처럼 권력에 대한 삶의 과잉 잠재력으로 보게 되는 식으로, 정반대의 방향으로 분열하게 되는 것은 피하기 어렵다. 달리 말하면, 생명정치는 삶에 대한 절대적인 권력 속으로 해소되어 버리거나, 아니면 삶의 절대적인 힘 속에 흡수되거나 둘 중 하나가 되어 버린다. 이것이야말로 푸코가 미해결인 채로 남겨둔 아포리아이다.

이에 대해 나폴리의 철학자가 제기하는 것은 삶 자체가 그 성립에서부터 이미 정치를 내포하고 있다는 관점이다. 예를 들어 출생이라는 개념을 떠올려보면 분명하듯이, 삶과 죽음은 처음부터 빼어나게 내재적인 관계에 있는 것이며, 이것은 한나 아렌트가 이미 깨달았던 것 그대로이다.[각주:21] 그 때문에, 에스포지토가 그의 저서의 제목으로 골랐던 것이 벌거벗은 생명혹은 자연적 생명을 의미하는 그리스어 조에가 아니라, 이것과 대치되고, 사회적 삶을 의미하는 비오스라는 것은, 매우 상징적이다. 아감벤은 비오스를 조에로 접어넣으려 하는 과정 속에 생명정치의 문턱 죽음정치 을 봤지만, 에스포지토에 따르면, 조에는 비오스의 내적 차이로 간주되어야 하는 것이다. 혹은 이미 어떤 형태로 비오스로 이행하지 않는 조에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도대체 생명정치의 어디에 죽음정치로 전락할 위험성이 숨어 있는 것인지, 에스포지토에게 진정한 문제는 그것을 규명하는 데 있다. 이리하여 나치즘의 생명정치의 철저한 규명이 요구되는 것이다. 푸코가 미해결인 채로 남기고, 아감벤이 궁극적으로 모든 생명정치를 그것으로 귀착시키려 했던 수용소의 정치학의 수수께끼란, 결국 무엇일까? 여기서 그 자세한 논의를 추적할 수는 없으나, 에스포지토는 그것을 면역혹은 면역화라는 범주 속에서 알아내려고 한다. 의학생리학에서 발전됐던 이 범주는, 나폴리의 철학자에게 새롭게 생명정치의 씨름판으로 불러들여지고, 철저하게 재검토된다. 2002년의 저서 이무니타스 : 생명의 보호와 부정이 그것으로, 사실은 비오스보다 먼저 출판됐다.[각주:22]면역이라는 범주가 유효한 것은, 무엇보다 그것이 생명 자체의 내부에서 이른바 내재론적으로 생명정치를 고찰하는 것을 가능케해주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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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면역화를 생리학의 영역에서 끌어낸 것은 에스포지토가 처음은 아니다. 예를 들어 911 이후, 점점 더 자기면역화를 강화하는 사회가 자살행위로 향해가는 것에 대해 날카로운 경고를 울렸던 것은 주지하듯이 말년의 자크 데리다였다.[각주:23] [각주:24] 그렇지만 프랑스의 탈구축주의자가 지적하는 전지구적 자기면역화의 위기란 생명정치에 직접 관련된다기보다는 오히려 종교와 정보에 관한 것이다. 물론, 사회학자 니콜라스 루만이 꿈꾸었던 오토포이에시스적 면역화와, 에스포지토의 그것이 다르다는 것은 말할 것도 없다.

이에 반해 나폴리의 정치철학자가 말하는 면역화는 바로 생명정치의 무대의 중심에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는 점에서 독창적이다. 이 관점에서 본다면, 나치즘의 인종주의나 우생학주의가 초래한 완전한 자기면역화에의 지향은, 자기와 타자의 완전한 파괴라는 사태를 초래한 생명정치 결국은 죽음정치 나 다름없다. 아감벤이 생명정치의 묵시록으로 간주하는 것은 에스포지토에 따르면 사실상 이무니타스(면역)’라는 장치의 궁극적인 활동의 결과나 다름 아니다.

게다가 나치즘적인 면역화는 완전히 과거형으로 되어 버린 것이 아니다. ‘면역형 민주주의라고 명명할 수 있는 것이 출현하고 있다. 예를 들면, 의학이나 의료기술의 눈부신 발달에 의해 살 가치가 있는 삶과 그렇지 않은 삶 사이의 새로운 선별이 조용하게, 그러나 확실하게 우리 주위에서 진행되고 있다(점점 더 고도화되는 출생 전 진단은 그 전형이다). 그뿐이 아니다. 그 기술은 개인 개인의 신체를 넘어 종의 특징까지 꼼짝없이 개입한다. “도처에 맞서기 힘든 방식으로 잠재적인 파괴력을 지닌 새로운 면역 증후군이 재부상하고 있다. “오늘날 우리는 전례 없을 정도로 나치즘의 이면에 있다. 이것이 의미하는 것은 이로부터 눈을 돌리는 한, 이로부터 해방되는 것은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각주: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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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II. ‘페르소나의 정치학 : ‘인격가면

삶의 선별, 오늘날 이것은 노골적인 인종주의나 전체주의적 사상에서라기보다, 특히 자유주의자라고 지목된 논객들에 의해서 자유주의적 사상이나 제도의 내부에서 복권되고 있다. 그리고 거기서 중요한 역할을 맡는 것이 인격이라는 개념 에스포지토의 표현으로는 장치이다. 인격은 개인이나 시민 등 비교적 새로운 개념보다 훨씬 오래되고 보편적이라고 간주됐다. ‘인격에는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권리가 수반되어 있으며, 그것은 단호하게 지켜지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이 개념이 라틴어 페루소나로 거슬러 올라가는 것이며, 원래는 가면을 의미했다는 것은 이미 널리 알려져 있다. 이로부터 역할이나 등장인물, 자격이나 처지, 심지어 위격이나 인격이나 인칭과 같은 의미가 파생된다. 게다가 이 단어는 특히 고대 로마법이나 기독교 둘 다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핵심어였다는 경위가 있다.

서양의 철학과 종교, 정치와 사법의 근간과 관련되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이 페르소나라는 장치, 그 탄생부터 오늘날까지 어떻게 기능했는지, 에스포지토의 3인칭의 철학(Terza persona. Politica della vita e filosofia dell'impersonale)(Einaudi, Torino, 2007)은 그 메커니즘을 철저하게 해명하는 데 바쳐지고 있다.[각주:26] [각주:27] 상세한 논의는 이 책에 맡기는 수밖에 없지만, 굳이 단순화해서 말한다면 이 장치는 고대 이후 줄곧 인간의 분할과 선별, 포함과 배제를 담당하는 것으로서 기능해 왔다는 것이다. 요컨대 페르소나는 본래 단일한 것이었을 인간의 삶을 여러 겹으로 분열시키는 장치이며, 이 분열은 개인 수준에서도 집단 수준에서도 작동해 왔다. 이 사실은 노골적으로 인격을 짓밟는 차별적 제도나 담론에 있어서는 물론 말할 필요도 없지만, 인격 존중을 정면에 내거는 인도적이고 인권주의적이라고 지목되는 사상과 제도에 있어서도 기본적으로 바뀌지 않는다. 왜냐하면, 인격과 인격 없는 자 사이의 차별화가 거기에서는 항상 작동하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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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언뜻 보기에 정반대처럼 보이는 정치나 사상, 예를 들어 철저하게 인권을 파괴한 나치즘의 생명정치=죽음정치와, 이와 반대로 인격을 금과옥조처럼 추켜세우는 자유주의의 인권 사상이 사실은 똑같은 전제 살 가치가 삶, 삶의 생산적 관리 등 를 공유하고 있다는 점에도, 에스포지토는 우리의 주의를 환기시키고 있다. 생물학이나 인류학, 언어학이나 사회학 등 여러 가지 관점에서 인간을 규명하고자 해온 근대의 여러 과학들을 근저에서 파헤치는 것, 그것이 이 페르소나의 장치이며, 나치즘과 자유주의는 똑같은 장치에 의해서 초래된 서로의 물구나무 선 상이라는 점에는 틀림이 없다.

그런데 페르소나가 분할과 선택의 장치이라고 한다면, 그 당연한 귀결로서 산출되는 것이 불분명한 경계 영역이며, 그곳에서는 또한 포함적 배제라는 역설적인 메커니즘이 작동해온 것이다. 나폴리의 철학자는 물론 이 점에도 매우 민감하다(여기에도 역시 아감벤의 영향을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미 로마법에 내포된 이러한 불분명 지대를, 근대의 철학과 사법과 정치 안에서 추적하려 하는 2페르소나, 인간, 사물3인칭의 철학에서도 가장 농밀한 장이다. 최첨단 의료의 발달과 생명윤리의 수립은 이 불분명 지대를 해소시키기는커녕 더더욱 곤란한 아포리아로 우리를 끌고 들어간다. 왜냐하면 분할선을 아무리 세밀하고 정밀하게 하더라도, 원리적으로 잔여 ‘~가 아니지 않다는 항상 생기지 않지 않았기 때문이다.

오늘날 정치나 외교, 사법이나 의료 등의 현장에서 발생하는 다양한 문제는 일반적으로 인격의 이념이 널리 침투하지 않은 데 근본적인 원인이 있다고 여겨진다. 하지만 에스포지토에 의하면 이야기는 거꾸로다. 침투하해 있지 않기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그로부터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탈출의 길은 있을까? 여기서 부상되는 것이 비인격혹은 비인칭이라는 문제계인데, 이것으로 들어가기 전에, 아감벤의 논의를 우회하지 않으면 안 된다.

아감벤도 페르소나의 주제에 일찍부터 관심을 보였다. 희극이라는 제목의 단테론(1976)에서 페르소나의 계보를 간결하게 소묘하면서, 고대나 중세에는 아직 이 단어에 본래의 연극적인 반향이 뚜렷하게 남아 있었다는 것을 추적한다.[각주:28] 아감벤이 공감을 보여주는 것은 분명히 누구에게도 양도할 수 없는 의식이나 도덕의 주체로서의인격이라기보다는 어디까지나 가면으로서의, 혹은 얼굴로서의 페르소나이다. 원래 인간에게서 페르소나와 본성이 일치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 그렇다고 한다면, 문제는 어떤 가면을 떠맡아 연기하는 것인가, 어떤 얼굴을 드러내는가이다.

최근작 벌거벗음(2009)에 수록된 논문 페르소나 없는 정체성에서는 생물학적·유전학적인 데이터 새로운 벌거벗은 생명의 양태 로 점점 환원되어가는, 우리 현대인의 정체성이 통렬하게 비판된다. 이제 그것은 페르소나적 정체성 없다는 것은 확실하다. , 사회집단에 속하는 구성원들에 의한 승인과 결합된 정체성이 아니며, 사회적 가면을 쓰고, 그래서 가면에 녹아드는 일이 없도록 하는, 개인의 능력과 결합된 정체성도 아니다.”[각주:29] 이 인용문에서도 역투사되듯이, 아감벤에게 페르소나는 인격이라기보다는 항상 그 본뜻인 가면으로 돌려보내야 할 것, 가면과의 접촉 방식으로 간주되어야 할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더욱 흥미로운 것은 바로 얼굴이라는 제목의 논문(1990년 초출)이다. “나의 얼굴은 나의 바깥이다. 나의 모든 고유성이 차이를 잃고, 고유한 것과 공통된 것, 내부와 외부가 차이를 잃는 점이다.”[각주:30] 그 때문에 페르소나의 본래 의미인 가면이란 안에 갇힌 나(의 인격)를 가리키는 게 아니고, 바깥으로 열려진 나의 얼굴=경계선을 가리킨다.

한 가지를 더 언급한다면, 소수자적 생명정치라는 제목의 인터뷰(2003)에서 아감벤은 푸코의 아포리아를 언급하고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푸코의 말년의 작업에는 제게 아주 흥미롭게 보이는 한 가지 아포리아가 있습니다. 한편으로는 자기에의 배려에 관한 작업의 전체가 있습니다. , 자기의 모든 형식과 실천에 있어서 자기에게 배려할 필요가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과 동시에 반복해서 얘기되는 것은 언뜻 보기에 정반대의 주제입니다. , 자기로부터 분리될 필요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는 몇 번이나 이렇게 말합니다.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서 다시 물으려 한다면, 결국 삶으로 나아간다. 산다는 것의 기법은 정체성을 파괴하는 것, 심리학을 파괴하는 것이다. 그래서 여기에는 아포리아가 있습니다. 자기에의 배려는 자기의 경시로, 자기의 분리나 일탈로 이끌어져야 할 것이라는 얘기니까요. 문제는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 제기될 수 있죠. , 주체화의 과정 같은 게 아니라면, 자신의 실천은 무엇일까. 하지만 그 주체화의 과정은, 반대의 것으로, 즉 분리로 귀착되지 않을 수 없을 겁니다. 자기의 정체성이 발견되는 것은, 단지 자기로부터 분리되는 것에서만 있을 것이라는 겁니다. 말하자면 이런 주체화와 탈주체화라는 이중의 운동을 따를 필요가 있다는 것이죠.[각주:31]

* 이탈리아어 : https://www.facebook.com/notes/riccardo-tammaro/una-biopolitica-minore-intervista-di-stany-grelet-e-mathieu-potte-bonneville-a-g/10207385837176982/

* 프랑스어 : http://www.vacarme.org/article255.html

Dans les derniers travaux de Foucault, il y a une aporie qui me semble très intéressante. Il y a d’une part tout le travail sur le « souci de soi » : il faut se soucier de soi, dans toutes les formes de pratique de soi. Et en même temps, à plusieurs reprises, il énonce le thème apparemment opposé : il faut se déprendre de soi. Il dit plusieurs fois : « On est fini dans la vie si l’on s’interroge sur son identité ; l’art de vivre, c’est détruire l’identité, détruire la psychologie. » Donc il y a bien ici une aporie : un souci de soi qui doit aboutir à une déprise de soi. Une manière dont on pourrait poser la question, c’est : qu’est-ce que c’est qu’une pratique de soi, non pas comme processus de subjectivation, mais qui n’aboutirait au contraire qu’à une déprise, qui trouverait son identité uniquement dans une déprise de soi ? Il faudrait pour ainsi dire se tenir en même temps dans ce double mouvement, désubjectivation et subjectivation.

 

여기서도 또한, 아감벤 식의 푸코 해석이 얼굴을 내비치고 있다. 더구나 지금까지의 검토에서 알 수 있듯이, 그는 또한 페르소나와 주체를 엄밀한 의미에서 구별하지 않는 것 같다.

,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이런 것이다. 아감벤에게서 정체성은 탈정체성과, 인격(인칭)은 비인격(비인칭), 인격화는 탈인격화와, 주체화는 탈주체화와 언제나 떼어놓을 수 없는 형태로 연결된 것이며, 한쪽 없이는 다른 쪽은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이것은 다시 아감벤이 아리스토텔레스의 잠재력을 -잠재력“~하지 않을 수 있다로서 독창적으로 바꿔 읽은 것과도 관련되는데, 이 주제에 대해서는 졸저에서 논의한 일이 있으므로, 여기서는 되풀이하지 않는다. 하지만 어쨌든 이렇게 우리는 다시 비인칭의 문제계로 돌아오게 된다.

 

IV. ‘비인칭임의(쿼드리베트)’

사실 아감벤이 비인칭에 대해 정면에서 얘기한 것은 내가 아는 한 거의 없는 것 같다. 이를 대신하는 것이 라틴어로 말해서 쿼드리베트(quodlibet)’, 즉 불특정한 익명적 임의인 자이다. 그의 정치철학에서, 잠재력과 더불어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것이, 뜻밖으로 들릴지도 모르겠으나 이 임의이다. 그렇지만 이 기묘한 대명사에 대해서는 좀 더 설명이 필요할 것이다.

1990년에 출판된 짧으나 농밀한 한 권인 도래하는 공동체는 바로 이 임의에서 논의가 시작된다. 왜냐하면 임의[누구든]’야말로, 혹은 이것이 어원이 된 뭐든이야말로 다가올 정치와 공동체의 주체이자 객체이기 때문이다. 이를 테면 초월론자들의 스콜라학적 열거법에 따르면, 임의의[뭐든] 존재자는 하나이며 참이며 선 혹은 완전하다.” 그래서 뭐든이란 무엇인지는 중요하지 않다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어쨌든 중요하다.” 왜냐하면 거기에는 이미 비인칭의 마음에 든다(libet)”에 대한 참조가 내포되어 있기 때문이다.[각주:32] 유사한 이탈리아어에는 또한 아무리 ~ 해도라는 의미의 콸시볼리아(qualsivoglia)”가 있는데, 여기서도 원하다라는 의미의 볼리아(voglia)”가 포함되어 있다.

, ‘임의의사람은 원해지는 것이며, ‘사랑받는 것이다. ‘뭐든’, ‘누구든무관심하고 무관한 무엇인가라는 게 결코 아닌 것이다. 뭐든임의는 또한, “있는 그대로의 존재(essere tale qual è)”라고도, 혹은 특이성=단일성(singolaratà)”라고도 바꿔 말해진다. ‘특이성이라고 하면, 보통 우리는 뛰어난 개성이나 독창성 같은 것을 떠올릴지도 모르지만, 그런 게 아니라, 우리는 각각 있는 그대로의 존재로서, 단일하고 특이한 것이다. 임의특이성은 또한 잠재력의 다른 이름이기도 한 것 같다. ‘임의의우리는 있는 그대로의 존재로서, 현실성이 아니라 잠재력을 공유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의 문맥에서 바꿔 말한다면, 아감벤이 말하는 임의란 바로 인격의 앞 혹은 건너편에 있는 존재이며, 생명정치적인 선긋기나 선택의 바로 앞에 혹은 건너편에 있는 존재이다. “만인에 대한 만인의 싸움”(홉스)친구/의 이항대립(슈미트)도 아니고 이 임의에 그의 정치철학의 출발점이자 도달점이 있는 것이다.

아감벤은 또 다른 논문에서, 굳이 시대착오적인 개념인 게니우스를 불러내는데, 거기에 등장하는 것이 비인칭()(impersonale)’이라는 형용사이다. 게니우스란 우리가 태어나는 순간에 우리를 자신의 보호 아래에 두는 신을 가리켜 고대 로마인들이 부른 단어로, ‘천재재능의 어원이 된 것으로도 알려졌다. 그렇지만 아감벤이 주목하는 것은 그 점이 아니며, “이 매우 친밀하게 인칭적인 신이, 우리 속에 있으며, 더 비인칭적인 것이며, 우리를 극복하고 능가하는 것의 화신이기도 하다는 점이다. , ‘게니우스에 있어서 암시되고 있는 의미란, “인간이 단순히 자아나 개인적 의식일 뿐 아니라 탄생부터 죽을 때까지, 굳이 말하면 비인칭적이고 전개체적인 요소와 더불어 살아 있다는 것이다.[각주:33]

여기서 아감벤이 염두에 두는 것은 질베르 시몽동전개체적인 것인데, 새로운 보조선으로서, 예를 들어 우리나라에서도 키무라 빈(木村敏)이 비인칭의 삶에 관해 언급하는 것을 덧붙여도 될 것이다. “누군가의(저라도 좋고, 어떤 사람이라도 좋지만) 생명이 살아 있다는 것은, 거기에 누구든 좋다, 말하자면 비인칭의 생명이 깃들어 있다는 것입니다.” 키무라는 또한, 인칭으로 환원되지 않는, 그 때문에 특정한 신체에 깃들어 있는 것도 아닌 이 비인칭의 생명을, 조에로서 고쳐 읽는 것이다. 그것은 사물로서가 아니라, ‘로서의 생명이며, ‘비인칭이고 자타미분화상태에 있다.[각주: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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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인칭과 비인칭, 주체화와 탈주체화라는 삶의 이중의 운동은, 아감벤의 바틀비(1993)에서 더 나아가, 창조와 탈창조라는 표현으로 불러내지고 있다.[각주:35] 말할 것도 없이, 탈창조라는 단어는, 시몬 베유에게서 빌려온 것인데, 본인은 왜 그런지 그 출전을 밝히지 않는다. 그렇지만 어떤 창출된 것을, 창출되지 않고 처음부터 존재하는 것 속으로 옮겨보내게 하는 것이라는, 베유에 의한 탈창조’(혹은 창조’)의 정의는, 아감벤에게서의 -잠재력과 겹치는 바가 큰 것 같다.[각주:36] 그럼에도 불구하고 멜빌의 소설 주인공 바틀비가 체현하는 -잠재력을 설명하는 데 있어서 아감벤은 둔스 스코투스에 의한 우연성의 존재론은 언급하면서도 베유의 이름은 왜 보이지 않게 깔아두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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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다가 최근 십수년 동안의 저작에서 아감벤은 신학적 전회라고도 명명할 수 있는 변화를 수행하는 것인데, 이 전개도 1930년대 후반 이후에 신빈화로의 경향을 강화한 베유의 변화에 의해 선취되고 있다는 견해도 불가능하지 않은 것 같다.[각주:37] 그녀가 인격과 성스러운 것에서 묘사하려고 한 것, 신의 페르소나의 의지로서의 섭리라는 신화는, 아감벤이 왕국과 영광(2007)에서 전개하게 되는 것과 거의 대응한다. 심지어 극빈 : 수도원 규칙과 삶의 형식(2011)에서는 청빈의 성자 아시시의 성 프란체스코와 그 수도회, 삶의 형식의 하나의 모델이 추적되고 있는 것이다.[각주:38] 아감벤이 여기서 가장 높이 평가하는 것은 아시시의 성자와 그 일파 성령파 소유사용을 명확히 구별하고, 전자에 대해 후자를 중시했다는 점이다. 여기서도 또한 권리나 소유를 인격과 나란히 폭력의 원천으로 간주했던 베유의 그림자가 춤추고 있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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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에스포지토는 그의 저작 상당수에서, 확실히 프랑스의 여성사상가에 대한 준거를 공언하고 있다. 그는 그녀 속에서, 비인칭의 철학의 최초의 표명을 찾아내고 있는 것이다. , 나중에 블랑쇼나 들뢰즈 등으로 이어지게 되는 처음의 기점이, 베유에서 찾아지고 있다.[각주:39] 실제로 인격과 성스러운 것에서 그녀는 강력하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성스러운 것이란 인격이기는커녕 한 명의 인간 존재에 있어서, 비인격적인 것이며, 그것만이 성스러운 것이다.” 더 말하면, “비인격적인 것의 영역에 들어선 사람은, 저마다 거기서 모든 인간 존재에 대한 책임에 직면한다. , 그들 속의 인격을 소중히 하는 책임이 아니라, 인격이 비인격적인 것으로 이행하는 몇 가지 가능성으로 덮어져 있는 모든 것을 소중히 하는 책임이다.”[각주:40]

에스포지토의 독해를 곱씹는다면, 이리하여 베이는, 인격과 권리 사이에 있는 배타주의적 관계를 고발하고, 정의를 권리로부터 확연하게 떼어낸다. 권리가 인격=인칭에 귀속된다면, 정의는 비인격=비인칭적인 것에 결부된다. 윤리적 차원은, 인칭이 아니라 비인칭에 갖춰져 있다. 결국 비인칭이란 단순히 인격의 소박한 부정이나 대립항이 아니다. 오히려 아직 인격이 아닌 것, 더 이상 인격이 아닌 것, 결코 인격이라고는 공언되지 못한 모든 사람에게 향해진, 분리와 차별의 메커니즘을, 인격의 내부에서 동결시키는 것이다.[각주:41] 그렇다고 한다면, 비인칭적인 것을 둘러싼 사고는, 생명정치의 내부에 어떤 결과를 가져올까? 이것이 우리의 마지막 질문이 된다.

 

V. ‘비정치무위

에스포지토가 베유의 이름을 처음으로 소환한 것은, 사실 지금부터 4반 세기 전, 1988년 초판된 저작 비정치의 범주로 거슬러 올라간다. 여기서 에스포지토의 정치철학은 비정치라는 관점에서 정치를 역투영하려고 시도하는데, 이른바 비정치가 정치에의 주의의 약체화나 저하를 초래하는 것이 아니며, 반대로 그 강화와 철저화라는 것은, 시몬 베유부터 한나 아렌트까지, 헤르만 블로흐부터 조르주 바타이유까지, 심지어 최근에는 르네 샬까지의 작업과 전기의 양쪽에 의해 분명하게 증명되고 있다고 말이다.[각주:42]비정치란 정치적인 것과는 다른 것이 아니다. 오히려 도래할 정치의 별명이 비정치이며, 그 모델 중 하나가 베유에서 찾아지는 것이다. 그녀에게 비인칭으로의 이행은 윤리적이고 신학적이며 또한 정치적인 요청이기도 했다. 정의나 자유는 우리에 의해 쟁취된다기보다는 비인칭에 호소하는 것이지 않으면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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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정치는 반정치도 초정치도 탈정치도 아니다. 정치의 이면도 아니고 이를 넘어선 곳에 있는 것도 아니다. 거꾸로 바로 정치적인 것의 한복판 속에 있으며, 그것을 비판하는 힘을 가진다. 이런 생각을 정면에서 수립한 것은 이탈리아에서는 마시모 카차리(1944~)가 처음이었던 것 같다. 1978년의 논고 니체에게서의 비정치에서, 일찍이 네그리의 동지이자 절친이었던 이 베네치아의 철학자는, 토마스 만에 의한 니체의 비정치성의 해석을 통렬하게 비판했다.[각주:43]

독일의 소설가에 따르면, 니체는 비정치적이기 때문에 독일 문화의 중심적 존재로 간주되고, 그 비정치성이야말로 독일의 정신적 힘의 상징이라고 여겼다. 하지만 카차리에 따르면, 비정치는 정치를 무가치한 것으로서 단죄하는 것에 있는 것도, 정치로부터 해방되는 것에 있는 것도 아니며, 오히려 그 반대이다. 비정치야말로 가치를 가진 것으로서의 정치를 철저하게 비판할 수 있다. 그 때문에 비정치는 허위를 고발하는 이데올로기 비판보다 훨씬 근원적인 것이다. 결국 카차리는 거절을 거절하는 것이며, 그 신념이 성공이냐 실패냐는 차치하고 베네치아 시장 재직 중에 미시정치로서 실천됐다는 것은 또한 우리의 기억에 새롭다.

에스포지토에게서의 비정치도 또한 이 연장선상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이런 의미에서 1960-70년대에 일본에서도 일세를 풍미한, 이른바 논폴리와는 구별된다. 비정치는 중립적인 게 아니라, 빼어나게 정치적인 몸짓이다. 권리에 근거한 정치라는 발상을 철저하게 비판한 베유를 받아들여, 에스포지토는 의무에 기초를 둔 공동체를 구상한다. 이 발상은 또한 공동체의 어원이 된 라틴어 코무니타스와도 합치한다. 왜냐하면 이 단어는 의무책임을 의미하는 무누스, ‘~와 더불어, 함께를 의미하는 접두사 타무가 붙어서 만들어진 명사이기 때문이다. , 공동체 함께 살아가는 것 란 본래 각자가 타자에 대한 의무를 짊어져야 하는 것이다. 이에 반해 면역의 어원인 라틴어의 이무니타스는 똑같은 무누스와 지우다를 가리키는 접두사 가 조합되어 만들어졌다. 이무니타스는 따라서 의무로부터 면제되다라는 의미를 갖게 된다. 일반의 인식과는 정반대로, 그 어원에 따르면, 공동체란 원래 동일성이나 고유성에 집착하는 것과는 정반대의 것이며, 면역은 자기보존은커녕 자기와 타자 쌍방의 파멸을 초래할 우려가 있다.[각주:44] 에스포지토는 근대의 정치사법적 범주의 거의 대부분이 자기 면역화의 방향을 따르는 것이었다고 생각한다. ‘인격은 그 으뜸가는 것 중 하나이다.

이처럼 공동체와 면역을 하나의 쌍을 파악하고, ‘의무를 끼워 넣어 흡사 정반대의 관계로 양자를 둔 점에 에스포지토의 새로움이 있다. 그래서 코무니타스이무니타스비정치의 범주의 뒤를 쫓듯이 출판된 것도 우연이 아니다. 또 에스포지토가 말하는 공동체가 바타이유부터 블랑쇼를 거쳐 낭시로 이어지는, 이른바 비정치적인 공동체 사상 계보로 연결되는 것도 사실이다. 그렇지만 비인칭에 대한 주목에 의해 어떤 새로운 삶의 저치의 지평이 열리게 될지, 그 대답은 아직은 분명하게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인간과 페르소나 사이의 형이상학적인 분리를 무효화하는 생명정치는 정말로 가능할까? ‘인격이라는 장치에 빨려 들어가버린 삶을 어떻게 하면 탈환할 수 있을까? 적어도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삶을 선별하거나 계층화하는 것이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아감벤을 부연해서 말한다면, 그 누구도 삶을 소유하고 있지 않으며, 그냥 사용하고 있을 뿐인 것이다.

그럼 아감벤은 어떨까? 내가 아는 한, 그가 정색하고 비정치를 입에 담는 것은 거의 없다고 해도 좋다. 대신에 되풀이하여 인용되는 것은 무위라는 단어이다. 그것은 또한 그의 장치론과도 연동되어 있다. ‘장치라는 개념도 푸코에게서 연원되는 것이지만, 이 이탈리아 후배는 여기에서도 그것을 독자적으로 고쳐 읽고 있다. 결국 세계 통치의 다양한 장치 그 으뜸가는 것이 생명정치의 그것 는 세계를 구원하기는커녕 카타스토로피로 이끌어 간다고, 감히 단순화해서 한다면, 이것이 아감벤의 테제이다. 최첨단 과학이나 테크놀로지도 궁극적으로는 죽음정치에 봉사하고 끝날 수밖에 없다는 얘기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어떤 길이 남아 있는가? 어떤 의미에서 답은 단순하다. 이런 장치들을 작동시키지 않게 하거나, 아니면 추앙되고 있는 그 신성함을 신성모독하거나 둘 중 하나이다. 무위와 신성모독이라는 두 개의 몸짓은, 이리하여 아감벤에게서 밀접하게 결합된다. 아니 양자는 확실하게 나눠져 있는 게 아니다. 그것이 명확하게 제시되는 것이 왕국과 영광의 결말이다. 초기 기독교 시대의 삼위일체의 교의로까지 거슬러 올라가면서 오이코노미아”, 즉 통치의 형태를 자세하게 추적한 끝에 아감벤이 당도하는 것은, 무위로서의 권력의 영광이다. 신이 엿새 동안의 창조 후에 쉬고, 최후의 심판 후에 영원한 안식일이 오듯이, 권력의 중심에 있는 것은 사실상 무위라는 빈 장소이다. 오늘날 가장 초미의 문제가 되는 것은, 아감벤에 따르면, 정치적인 것이 스스로의 장치 속에 이 무위를 탈환하는 것이다.[각주:45] 무위나 신성모독은 종종 자유로운 사용이나 공통의 사용이라고도 바꿔 말해진다.

이런 아감벤의 장치관, 혹은 더 넓게는 기술관은, 종종 너무도 소박할 뿐 아니라, 너무도 비관적이라고 비난받아 왔다.[각주:46] 그렇지만 무위나 신성모독은 쓸데없이 장치를 중지시키거나 파괴하거나 하는 것도, 게으르게 방치하는 것도 아니다. 장치란 무엇인가(2006)에서도 말해지고 있듯이, 그것은 분리·분할된 것을 공통의 사용으로 되돌리는 대항장치인 것이다. 그것은 또한 장치의 자유로운 사용이며, 장치 아래서 노는것이기도 하다. 중요한 것은 이런 장치들에 의해 휘둘리지 않는, 그 목적에 얽매이지 않는 것이다.[각주:47]

앞서 말했듯이, 아감벤은 최근 점점 더 소유에서 사용으로, 풍요에서 가난으로 라는 발상의 전환을 밀어붙이고 있다. 이리하여 1990년대 중반에 시작되어, 현재에도 여전히 진행 중인 장대한 <호모 사케르> 계획은 정치로부터 출발해 비정치로 급속하게 방향타를 꺾었다(그렇지만 물론 그 경향은 처음부터 있었다). 아감벤의 무위나 에스포지토의 비정치는 오늘날 더욱, 예를 들어 알랭 바디우에게서의 전-정치에 대한 주목이나, 자크 랑시에르에게서의 치안과 정치의 구별을 둘러싼 사유와도 맞대결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일부에서 그런 시도도 시작되고 있지만, 그것은 향후의 과제로 남겨둔다.[각주:48]

아무튼 예전에 시몬 베유가 제창한 비정치, 전체주의의 폭력이라는 동시대의 카타스트로프에 민감하게 대응하는 것이었다면, 작금 새롭게 재부상하고 있는 비정치의 사유는, 관리화와 규율화가 진행되는 가운데, 삶의 보호와 부정이 바야흐로 불분명해지는 생명정치/죽음정치의 문턱을 스쳐지나가고 있는 현대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과제가 된다는 것은 확실한 것처럼 내게는 생각된다.

 

  1. 졸고, 「アイステーシスの潜勢力」, 『ラチオ』 第04号, 講談社, 2007년 11월 및 『イタリア現代思想への招待』, 講談社選書メチエ, 2008년을 참조. [본문으로]
  2. Pietro Montani, Bioestetica: Senso comune, tecnica et artenell’età della globalizzazione, Roma: Carocci, 2007 ; Laura Bazzicalupo, II governo delle vite : Biopolitica ed economia Roma-Bari: Laterza, 2006. [본문으로]
  3. Roberto Esposito, Pensiero vivente: Origine e attualità della filosofia italiana, Torino: Einaudi, 2010. [본문으로]
  4. ジャンバッティスタ•ヴィーコ, 『新しい学 1󰡕, 上村忠男訳、法政大学出版局、ニ〇〇七年、ニ〇五ぺージ。 [본문으로]
  5. Michel Foucault, «Il faut défendre la société» : Cours au Collège de France (1975-1976), Paris: Gallimard-Seuil, 1997, p.213(미셸 푸코, 『“사회를 보호해야 한다”: 콜레주드프랑스강의 1975-1976』, 김상운 옮김, 난장) [본문으로]
  6. Ibid., p.226. [본문으로]
  7. Ibid., p.228. [본문으로]
  8. Ibid., p.232. [본문으로]
  9. Ibid. [본문으로]
  10. Giorgio Agamben, Quel che resta di Auschwitz : L’archivio e il testimone (Homo sacer III), Torino: Bollati Boringhieri, 1998. p.78. [본문으로]
  11. Ibid., p.145. [본문으로]
  12. 조르조 아감벤, 『사물의 표시』, 양창렬 옮김, 난장, ****. [본문으로]
  13. 상동, ***쪽. [본문으로]
  14. 상동, ***쪽. [본문으로]
  15. Giorgio Agamben, Homo Sacer: II potere sovrano e la nuda vita (1995),Torino: Einaudi, 2005, pp.178-184(조르조 아감벤, 『호모 사케르 : 주권권력과 벌거벗은 생명』, 박진우 옮김, 새물결, ***). [본문으로]
  16. 이에 관해서는 졸저, 『アガンペン読解』, 平凡社, 2011을 참조. [본문으로]
  17. Slavoj Zizek, “Knights of the Living Dead”, New York Times, March 24, 2007. [본문으로]
  18. Agamben, Homo Sacer, cit. p.69. [본문으로]
  19. Roberto Esposito, Bios: Biopolitica e filosofia, Torino: Einaudi, 2004, chap. IV. [본문으로]
  20. 拙著 「イタリア現代思想への招待」、『ラチオ』 第01号, 講談社, 2006년 2월 및 「ナポリ発、全人類へ──ロべルト・エスポジトの思想圏」(訳者イントロダクション), ロべルト・エスポジト, 『近代政治の脱構築—共同体・免疫・生政治』, 岡田温司 訳, 講談社選書メチエ, 2009년 수록. [본문으로]
  21. Esposito, Bios, cit, pp.194-196. 비오스의 조에로의 환원 속에서 나치즘의 생명정치=죽음정치의 메커니즘을 봤던 아감벤에 대해서, 에스포지토도 “조에의 정신화와 정신의 생물학화에 관해 말해야만 한다”고 날카롭게 견제하고 있다(Ibid., p.153). [본문으로]
  22. Roberto Esposito, Immunitas : Protezione e negazione della vita, Torino: Einaudi, 282. [본문으로]
  23. 다음을 참조. 宮崎裕助 「自己免疫的民主主義とはなにか──ジャック•デリダにおける「来たるベさデモクラシー論」の帰趨」 『思想』 第1060号(2012年8月)岩波書店、45-68頁. [본문으로]
  24. * 데리다의 자기면역화에 대해 데리다의 ‘자기면역화’가 가장 분명하게 드러나는 책은 『불량배들』이다. 이 책은 두 개의 강연으로 구성되어 있다. 하나는 세리지의 연례적인 10일 동안의 강연과 세미나로, 장문의 기록 「강자의 이성 : 불량국가들은 있는가」이며, 다른 하나는 「도래할 계몽의 <세계> : 예외, 계산, 주권」이다. 첫 번째 강연에서 데리다는 미국이 일부 국가들을 고발하기 위해 사용한 ‘불량국가’라는 개념을 꺼내들고, 그 의문점을 들춰낸다. 여기까지는 촘스키와 같다고 생각할 수도 있으나, 문제는 정치적인 것에 국한되지 않는다. 주권과 이성의 문제이며, 생명의 자기보존으로서의 면역과, 이것이 생명 자체를 파괴해버리는 자기면역, ‘죽음충동’(p.299)의 문제이기도 하다. 현실적인 정치적 문제를 철학의 근본문제로까지 끌고 가는 수완은, 아감벤과 데리다 두 명의 사상가의 두드러진 특징일 것이다. 두 번째의 짧은 강연에서는 시간적인 제약도 있고 해서, 데리다는 “전보적이기도 하고 강령적이기도 한”(p.293) 형태로, 지금까지 얘기한 다양한 문제를 요약적으로, 솜씨 좋게 제시한다. 그 요약의 능수능란함 때문에, 독자는 눈이 어질어질한 부분도 있지만, 거꾸로 인용을 견뎌내는 짧은 문장도 많다. 첫 번째 논문에서는 시간의 여유가 너무 많아서(데리다는 그래도 모자라다고 계속 말하지만), 우회로를 거칠 시간이 너무 길어서, 인용할 수 있는 대목은 별로 없다. 이 우회로가 즐거운 것은 확실하며, 데리다의 세미나는 재미있었을 것이라고 상상한다. 서평에서는 전보적인 것을 더욱 인상비평적으로 거론할 수밖에 없는 것이 안타깝다. 처음 논문에서는 민주주의가 자기면역을 일으키며, 자살하기 직전에 이른 사태를 고찰한다. 무엇보다 범례적인 것은 알제리이다. 민주주의를 부정하는 이슬람 정당이 민주적인 선거에서 압승할 것이 확실한 시점에서, 군대가 쿠데타를 일으키고 선거를 무기한 연기한 것이다. 이것은 민주주의의 이름에서의, 민주주의에 대한 모든 침해의 전형적인 사건(p.74)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알제리 정부는 “시작된 선거과정은 민주적으로 민주주의의 종언으로 이끌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들은 스스로 민주주의를 종식시키는 쪽을 선택한 것이다. 그들은 주권적으로 결정했던, 민주주의를, 민주주의에 있어서 좋은 것이기 때문에, 그리고 그 치료를 하기 때문에, 최악의, 거리 전체의 가장 높은 침해에 대해서 그것을 면역화하기 위해서, 적어도 잠정적으로 중지하는 것”(Ibid.)을. 이것은 “자기면역적 자살”(p.75)이었다. 전보적인 두 번째 논문으로부터 자기면역의 간단한 정의를 복습해두자. “어떤 생체 속에, 타자의 공격적인 침입에 대한 면역을 해당 정체에 부여하는 것, 바로 해당 주체가 자살적으로 파괴할 수 있는”(p.234) 것이다.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민주주의를 죽이는 알제리, 주권을 지키기 위해 주권의 근원인 것을 죽이는 쿠데타, 불량국가를 공격한다는 명목으로, 스스로 불량국가가 되는 미국. 미국 행정부는 ‘악의 축’에 대항한다고 칭하며, 민주적 자유를 “불가피하게, 또한 부인 불가능한 방식으로 제한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리고 이것에 대해서는 누구도, 어떤 민주주의자도 진심으로 반대할 수 없는” 것이다(p.86). 그뿐만이 아니다. “가장 폭력적인 불량국가, 그것은 스스로 그 위임자라고 자칭하는 국제법을, 스스로 그 이름 아래서 말하고, 스스로 그 이름 아래서, 이른바 불량국가에 대한 전쟁을 개시하는 국제법을, 스스로의 이해관계가 명하는 경우에는 매번 무시해온 국가, 계속 침범한 국가, 즉 미국이다.”(p.189). 그리고 미국과 동맹하는 국가도, 이것에 대항하는 국가도, 모든 국가도 국익의 이름으로, 주권의 지고성의 이름으로, 국가이성의 이름으로, 똑같이 행세하는 것이기 때문에, “이제 불량국가밖에는 없으며, 그리고 이제 불량국가는 없다. 이 개념은 그 한계에”(p.205) 도달한 것이며, “이 종언은 항상, 처음부터, 가까웠던 것이다”(Ibid.). 또한 데리다는 이 주권성의 이론의 배후에 기독교의 신학이 존재한다는 것을 시사한다. “민주적이라 불리는 체제에서조차 주권의 근저에는 존재-신론이 있다”(p.299). 그러나 이 논문에서는 거기까지는 논의가 진행되지 않는다. 그런데 자기면역은 가장 보편적인 형태로 바꿔 말하면, 아포리아이기도 하고 이중구속이기도 하다. “아포리아, 이중구속 및 자기면역적 과정은, 단순한 동의어가 아니지만, 이것들은 바로 공동으로, 그리고 부담=책임으로서, 내적 모순 이상의 것, 결정 불가능성을 … 내적 이율배반을 갖고 있다”(p.78). 이 개념은 여기까지 부연하면, 뭐든지 사용할 수 있는 편리한 도구처럼 되어 버린 것은 확실하다. 그는 전보적으로 몇 개인가? 데리다는 복제를 좋아하지만, 치료적인 복제는 부정할 근거가 없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원래 모든 개별성에는 반복이라는 요소가 불가피하게 존재하는 것이며, 그것을 무시하고 개성의 고귀함을, 하나의 생명의 특이성을 강조해도 공허하기 때문이다. “반복・복제는 생산・재생산과 완전히 똑같이, 문화・지식・언어・교육의 조건을 보증하는 것이다”(p.278). 인간의 특이성에 근거한 복제반대론은 “유전자주의 혹은 생물학주의를, 즉 뿌리 깊은 동물학주의, 근본적인 환원주의를, 스스로 반대하고 있는 공리계와 나눠 갖고 있는”(Ibid.) 것이다. 그러나 자기면역이 절대적인 악인 것은 아니다. 사건이 그 이름값을 하는 것이라면, “사건은 절대적인 면역도 아무런 보상도 없이, 자신의 유한성 속에서 지평 없이, 벌거벗음의 취약함에 접해야 한다. 이 경우에는, 타자의 예측 불가능성에 대치하고 서로 맞서는 것은 여전히 할 수 없다. 혹은 더 이상 할 수 없는 것이다. 그 점에서 보면, 자기면역성은 절대적인 악이 아니다. 자기면역성은 대상에 노출되는 것, 즉 도래하는 것이 없는 자에게, 따라서 계산 불가능한 것에 머물 수밖에 없는 것에 노출되는 것을 가능케 하기 때문이다. 만일 절대적인 면역성이 있을 뿐이고 자기면역성이 없다고 한다면, 더 이상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p.290). 레비나스의 알레르기 이론과 통저하며, 데리다의 이론의 깊이가 엿보이는 경지이다. [본문으로]
  25. Roberto Esposito, Termini Della Politica, Comunita, Immunita, Biopolitica, Mimesis Edizioni, 2008. [본문으로]
  26. Roberto Esposito, Terza persona. Politica della vita e filosofia dell’impersonale, Einaudi, Torino, 2007. 이와 아울러 2011년 3월에 일본을 방문했을 때의 강연에 기초한 다음의 논고도 참조. ロベルト•エスポジト「装置としてのペルソナ」 多賀健太郎 訳, 『表象06』, 2012년. 나아가 이 잡지의 특집 「ベルソナの詩学」에 기고한 젊은 연구자들(岡本源太, 横山太郎, 千葉雅也, 信友建志)의 논고도 참조. [본문으로]
  27. 제목 : 로베르토 에스포지토 강연회, 「장치로서의 페르소나(装置としてのペルソナ)」 http://utcp.c.u-tokyo.ac.jp/blog/2011/03/roberto-esposito-persona-as-de/ 2011년 3월 9일, 도쿄대학 코마바 캠퍼스에서 이탈리아 인문고학연구소 소장인 로베르토 에스포지토 씨의 초청 강연회가 열렸다. 에스포지토 씨 외에도 사회자로 교토대학 교수인 오카다 아츠시(岡田温司) 씨, 토론자로 노스캐롤라이나대학의 페델리코 루이제티 씨를 맞이한 본 강연회는 총 세 시간 동안 논의가 이뤄졌으며, 그의 사상의 현실성을 음미하는 절호의 기회가 됐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우선 맨 처음으로 진행을 맡은 오카다 씨가 이탈리아 현대사상의 종합적 해설과 그 속에서 에스포지토 씨가 차지하는 위치에 대해 정중한 설명이 주어졌다. 오카다 씨의 지적에 따르면, 에스포지토 씨뿐 아니라, 아감벤이나 카차리, 혹은 바티모 등 이른바 이탈리아 현대사상이 주목을 받은 원인으로서, 이탈리아가 ‘국민국가’로서 좋든 나쁘든 기능하지 못한 것과 뒤얽혀 있는 지정학적 조건을 들 수 있다. 중심적 권력 부재 속에서 태어난 이들 사상이, ‘포스트제국’적인 시대 정황과 부합하는 부분이 적잖이 있었던 게 아니냐는 것이다. 그 중에서도 에스포지토 씨는 “비오스bios”, “면역immunitas”, 그리고 “공동체communitas”를 주제로 한 3부작을 중심으로, 푸코 이후의 생명정치의 문제를 공동체론으로 전개하면서, 생명의 탈구축을 기반으로 한 포스트휴먼적 정치철학을 구축하는 데 그 특징이 있다고 소개됐다. 기조강연에서 에스포지토 씨의 강연 내용은 “페르소나 persona” 개념의 심급과 깊숙하게 관련되어 있다. 인격, 위계(位階), 혹은 가면이라고도 번역되는 이 단어는, 그 다의성 속에서, 특히 법철학적 함축을 전면에 내세우면서, 서양사상 속에서 중심적인 위치를 맡아왔다고 분석된다. 에스포지토 씨에 따르면, 들뢰즈나 아감벤이 ‘장치’라는 이름으로 비판했던 오이코노미아를 정초지었던 것이 바로 이 ‘페르소나’에 다름 아니며, 거기서 ‘신/인간’, ‘혼/육체’의 이분법이 유비적으로 구조화됐다고 간주된다. 주체와 비주체의 존재론적 차이를 정초짓는 이 구조가, 후자를 ‘타락’이나 ‘병’, ‘동물’로 명명해 왔던 바로 그것이라는 얘기다. 또 이 개념은 역사적으로 볼 때, 로마법의 체계와도 접점을 갖고 있다. 무엇이 ‘페르소나(=개인)’인가라는 법적 지표에 의해, 노예와 자유인, 심지어 타고난 자유인과 해방 노예의 자유인의 구별이 차례차례 만들어진다. 즉, 법적 기능에 있어서의 페르소나는 규범과 예외를 무한히 창출함으로써 모든 것을 그 무한한 권리에 있어서의 이분법으로 끌어들이는 부단한 변증법적 과정을 의미하게 된다. 이곳에서는 법=권리적 통합이나 보편화는 예외자를 배제하고 이어서 이것들을 에워싸면서, 새로운 통합을 지향한다. 에스포지토 씨의 분석은 이 구조를 ‘인간화’의 메커니즘에 내재하는 ‘비-인간화(탈페르소나화)’로서 부각시켜 보여준다. 즉, 비-인간은 페르소나 개념이 촉진했던 주체화 과정의 등 뒤에서 계속 움직이고 있다. 그것은 억압되고, 적어도 개념 수준에서, ‘완벽한 인간’ 아래에 종속될 수밖에 없다. 현대의 안락사나 장애와 뒤얽혀 있는 문제도 이런 조류 속에서 다시 생각할 수 있다. ‘인간/비인간’의 부단한 변증법에 맞서서, 에스포지토 씨가 그 돌파구로서 이번 강연에서 끌어낸 것은 시몬 베이유의 사상이다. 고대 로마를 참조하면서 히틀러주의의 기원을 분석하는 베이유는, 거기에 로마법적인 페르소나의 움직임이 공통적으로 존재한다는 것을 찾아낸다. 베이유는 비-인간적인 폭력이 인간의 가능성의 조건을 구성한다는 것을 냉혹하게 지적하면서도, 인간의 내부에 깃든 다른 비-인간, 즉 ‘신성한 것’을 동시에 희구한다. 상이한 ‘내부’, 상이한 ‘비-인간’을 어떻게 끌어당겨, 주체를 변환할 수 있는가, 에스포지토 씨가 베이유에게서 찾아낸 가능성은 여전히 자세하게 음미될 필요가 있을 것이다. 루이제티 씨의 의견 및 회장의 질의에 대해서도 간단하게 언급하고 싶다. 루이제티 씨는 에스포지토 씨의 ‘비인간’의 사상을 프랑스 현대사상의 계보 속에 위치시키고, 에스포지토 씨의 사상 속에 ‘대륙/영미’와는 상이한 별개의 유럽성이 있다고 지적한다. 이는 첫머리에서 말한 오카다 씨의 지적과도 겹치는 것인데, ‘이탈리아’의 이름 아래서 상이한 근대, 상이한 철학, 상이한 사상이 싹트고 있었던 것이라는 지적은 데리다가 『불량배들』 안에서 행한 철학에서의 라틴 기원의 문제와도 관련된 것이며, 매우 흥미로운 것이리라. 이 점에 관해서는 강연장에서의 질의에서, “상이한 유럽”이 아니라 “유럽의 타자”인 일본인의 사상에 대해서 ‘페르소나’의 탈구축은 의의를 가지느냐는 지적이 있었던 것도 덧붙이고 싶다. 이 밖에도 거점 리더인 코바야시로부터는 베이유의 사상에 있는 종교성이라는 것을 비인간적이라고 함으로써 중성화하는 것이 허용되느냐는 근원적인 질문이 있었다. 보고자인 나 大橋完太郎도, 페르소나의 탈구축이 철저하고 모두가 비인간이 된 세계는 과연 얼마나 살기 좋은 것이냐는 질문을 제기했다. 비판에 대한 반비판을 긍정적 가치로 옮겨 놓을 때, 새로운 개념적 배치의 변용을 촉진시킬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 것은 나뿐일까? 어쨌든, 평일에 일찍부터 시작되어 3시간 반이나 되는 대장정이었음에도 불구하고 100명을 넘는 분이 왕림하셔서 성황리에 이번 강연회를 마칠 수 있었다. 에스포지토 씨, 루이제티 씨, 당일 훌륭한 통역을 선 보여주신 무라 마리코(村松真理子) 씨, 그리고 무엇보다 이번 그의 초청에 관해서 진력을 다하신 오카다 아츠시 씨와 그 지원 스탭들께 마음에서 우러나는 감사를 드리는 바이다. [본문으로]
  28. 조르조 아감벤, 『이탈리아적 범주』, ***. [본문으로]
  29. 조르조 아감벤, 『벌거벗음』, ***. [본문으로]
  30. Giorgio Agamben, Mezzi senza fine : Note sulla politica, Torino: Bollati Boringhieri, 1996, p.80(조르조 아감벤, 『목적 없는 수단』, ***). [본문으로]
  31. “Una biopolitica minore: Intervista di Stany Grelet e Mathieu Potte-Bonnnville a Giorgio Agamben”, Biopolitica minore, a cura di Paolo Perticari. Roma: Manifestolibri, 2003, pp.193-194. [본문으로]
  32. Giorgio Agamben, La comunità che viene, Torino: Einaudi, 1990: Nuova edizione accrsciuta. Torino: Bollati Boringhieri, 2001. pp.3-4(조르조 아감벤, 『도래하는 공동체』, ***). [본문으로]
  33. Giorgio Agamben, Profanazioni, Roma: Notte tempo, 2005, p.9(조르조 아감벤, 『세속화 예찬』, 난장, ***). [본문으로]
  34. 木村敏, 『臨床哲学講義』, 創元社, 2012년, 7-8, 12-14頁. 살바토레 나톨리도 최근 저서에서 비오스를 영원히 연속된 조에의 분할이자 개별화라고 해석한다(Salvatore Natoli, L’edificazione di sé : Istruzioni sulla vita interiore, Roma-Bari: Laterza, 2010, p.6). [본문으로]
  35. Giorgio Agamben, Bartleby, la formula della creazione, 1993(Agamben, Potentialities, trans. Daniel Heller-Roazen, 1999). [본문으로]
  36. Simone Weil, La Pesanteur et la grâce, 1947[Gravity and Grace, Routledge & Kegan Paul, 1952 ; Routledge Classics 2002]. 에스포지토는 『비정치의 범주』에서 베이유의 ‘탈창조’를 다음처럼 고쳐 읽는데, 거기서는 분명히, 아감벤의 ‘비잠재력’에서 받은 영향을 느낄 수 있다. 이를 테면 ‘탈창조’는 “자기 멸각自己滅却의 창조이며, 창조적인 자기 멸각이다. 혹은 더 일반적으로 말한다면, 활동으로 드러나지 않는 현실태이다. 심지어 ‘현실태’로 해소되지 않는 활동, 또한 ― 이미 말했던 ‘수동적 잠재력’이라는 범주를 따른다면 ― ‘잠재력’인 채로 머무는 활동이라고 해도 좋다”(Roberto Esposito, Categorie dell’impolitico, Bologna: II Mulino. 1988; Nuova ed.. 1999. p.28). [본문으로]
  37. 아감벤과 베유의 숨겨진 관계에 대해서는 최근 몇 명의 젊은 연구자에 의해 지적되고 있다. 가령 다음을 참조. Leland de la Durantaye, Giorgio Agamben: A critical Introduction, Stanford: Stanford University Press. 2009, pp.22-23; Alessia Ricciardi, “From Decreation to Bare Life: Weil, Agamben, and the Impolitical”, Diacritics, 39 (2), 2009, pp.75- 93. [본문으로]
  38. Giorgio Agamben, Altissima povertà : Regole monastiche e forma di vita, Vicenza: Neri Pozza, 2011. [본문으로]
  39. 예를 들어 『근대정치의 탈구축』의 마지막 장 「비인칭의 철학을 향하여」나 『3인칭의 철학』의 2장 「페르소나, 인간, 사물」을 참조. [본문으로]
  40. シモーヌ•ヴューユ, 「人格と聖なるもの」, 中田光雄訳、『シモーヌ•ヴューユ著作集』 第2巻, 春秋社, 1968年, (新装版) 1998年, 443, 447頁. [본문으로]
  41. 에스포지토, 『근대정치의 탈구축』, 272頁. [본문으로]
  42. Esposito, Categorie dell’impolitico, cit, p.XII 이 책에서는 베이유나 바타이유와 더불어, 카프카, 엘리아스 카네티, 헤르만 블로흐, 모리스 블랑쇼 등에 많은 쪽수가 할애되어 있다. [본문으로]
  43. 논고는 니체의 『철학자의 책哲学者の書』의 이탈리아어판 해설로 작성됐다. Massimo Cacciari, “L’impolitico niezschiano”, in Friedrichi Wilhielm Nietzsche, II libro del filsofo, a cura di Marina Beer e Maurizio Ciampa, Roma: Savelli, 1978, pp.103-120. 또한 1970년대부터의 카차리의 주요 논문 9편을 모은 앤솔로지가 영어판으로 2009년에 출판됐는데, 그 제목도 『비정치 : 정치적 이성의 철저한 비판에 대해』이다. Massimo Cacciari, The Unpolitical: On the Radical Critique of Political Reason, translated by Massio Verdicchio, New York: Fordham University Press, 2009. [본문으로]
  44. Roberto Esposito, Communitas: Origine e destino della comunità, Torino: Einaudi. 1998, pp.XII-XXVL. [본문으로]
  45. 이 탈환은 “메시아적인 것의 작동”이라고도 불려진다. Giorgio Agamben, Il Regno e la Gloria: Per una genealogia teologtca dell’economia e del governo (Homo Sacer II, 2), Vicenza: Neri Pozza. 2007, p.272(조르조 아감벤, 『왕국과 영광』, ***). [본문으로]
  46. 예를 들어 다음을 참조. Bernard Stiegler, Prendre soin : De la jeunesse et des générations, Paris: Flammarion, 2008. [본문으로]
  47. Giorgio Agamben, Che cos é un dispositivo?, Nottetempo, 2006(조르조 아감벤, 『장치란 무엇인가?』, ***). 아감벤에게서의 ‘무위’와 ‘신성함’에 관해서는 拙著, 『アガンべン読解』를 참조하기 바란다. [본문으로]
  48. 다음을 참조. Alain Badiou, Logiques des mondes, Paris: Seuil, 2006; 자크 랑시에르, 『불화』, 진태원 옮김, 도서출판 길, ***.; Laurent Dubruil, “Preamble to Apolitics”, Diacritics, 39 (2), 2009, pp.5-20. [본문으로]
Posted by 상겔스 상겔스

도래할 생명권력론을 위해


사상, 2013년 2

 

1부 1장. 

생명정치학적 고찰

우노 쿠니이치(字野邦一)

 å­—野邦一에 대한 이미지 검색결과

* 각주는 모두 뺐으며, 프랑스 및 영어 원본 등과의 대조를 통한 번역 수정도 하지 않았다. 따라서 일본에서 어떻게 번역하는지를 알 수 있는 기회일 것이다. 

 

1. 묵시록적인 한 구절

지식의 의지(1976)에서 미셸 푸코가 쓴 한 구절(‘죽게 만들 것인가 살게 내버려 둘 것인가라는 고대의 권리를 대신하여 살게 만들 것인가 죽음 속으로 내던질 것인가라는 권력이 나타났다고 말할 수도 있다)이 초래한 기묘한 충격을 돌이켜봐야 한다. “~라고 말할 수 있다(on pourrait dire ~)”고 가설처럼 말했던 것은, 이 발언이 품고 있는 매우 중대하고 위험하고 위태로운 내용 때문이었을까? 아무튼 그것은 불길한 죽음의 고지를 충분히 포함했다. 그저 죽게 만드는것이 아니라, ‘죽음 속으로 내던진다는 이중으로 가혹하게 죽음을 하게 만드는 권력은 더 이상 결코 우연도 예외도 아니라, 새로운 권력의 규칙[常態]이며 원리이기도 하다고 지적된다.

Histoire de la sexualité, tome 1 : La Volonté de savoir

 푸코는 권리(droit)’권력(pouvoir)’이라는 말을, 여기서는 그렇게까지 엄밀하게 나눈다고는 생각할 수 없다. 그건 그렇다 치더라도, 죽게 만드는 권리란 군주의 권리였지만, 살게 만드는 권력이란 더 이상 특정한 인격에 속하는 것이 아니라, 정부나 행정 등의 기관들에 의해서 분절되고 오히려 익명의 권력으로서 분산되고 국민의 생명에 대한 관리, 통제, 조절을 면밀하게 실천한다고 말했다.

 일찍이 군주는 눈에 보이는 노골적인 힘을 행사하여 사람을 살해할 수 있었다. 그처럼 명백하고 무자비한 폭력을 극복한 것처럼 보이는 근대의 사회가 원리적으로 보다 잔혹하게, 음험하게 생명을 말살할 수 있다는 것, 실제로 말살해 왔다는 것을 푸코는 지적했던 것이다. 그것은 권력이 결코 피할 수 없었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그 중추적 원리로서 작동하는 아포리아를 똑바로 가리켰던 것이다.

 “대량학살은 사활의 문제가 된다.” 전쟁의 결정은 살아남는가 아닌가라는 노골적인 물음을 둘러싸고 이뤄지게 됐다.” “핵무기 하의 상황은 이런 과정의 도달점에 서 있다.” “일종의 생물학적 위험인 인간이기 때문에, 합법적으로 살해할 수 있다.” 푸코는 몇 쪽에 걸쳐, 이렇게 암흑의 세기의 도래를 알리는 묵시록적 기술을 재빠르고 민첩하게 전개하고 있다. 그리고 나치즘의 우생학적 재편성에 관해서, 또한 인간이 기억할 수 있는 최대의 학살에 관해서도 말했던 것이다.

 그런데 푸코가 생명정치’, ‘생명권력이라고 부른 것은 엄밀하게 서양의 18세기 중엽에 출현했던 것으로 간주되고, “종인 신체, 생물의 역학에 의해 관통되고, 생물학적 과정을 뒷받침하는 신체가 그 초점이 되었다. 또한 생물학적 과정이란 번식과 탄생, 사망률, 건강 수준, 수명, 장수이며, 그것들을 변화시키는 다양한 조건이라고 푸코는 설명한다. 생명정치는 이전에 그가 감시와 처벌(1975)에서 정밀하게 묘사했던 신체를 둘러싼 훈육[調敎], 규율의 시스템과 연동하여, 더 이상 군주의 권리로서도, 모든 주권이나 법권리의 형태에 의해서도 설명되지 않는 새로운 권력의 그물망을 세계로 뻗쳐나간다.

 그리고 지식의 의지성의 역사1권으로 썼기 때문에, 바로 생명/의 정치는 의 정치로서, 신체의 훈육·규율이라는 측면과 생식을 하는 생물학적 인간에 대한 통제·관리라는 또 다른 측면을 연동시킨다. 이러한 새로운 권력과 더불어 분절되는 을 여전히 법에 의한 단속이나 검열이나 금기, 그리고 억압의 대상으로 생각하게 됐던 것은, 새로운 생명권력 그 자체에도 깊이 침투되어, 이것에 편입[기입]됐던 생명과 성의 현황을 파악하지 못하게 한다.

 푸코는 바로 이것에 역점을 두고 지식의 의지를 마무리했지만, 오히려 이 책을 둘러싼 논의도 자주, 성은 과연 억압되어 있는가 아닌가를 둘러싸고 이뤄지게 됐다. 욕망이나 성적 억압은 오랫동안 정치적 쟁점일 뿐만 아니라, 정신분석에서도 쟁점이었기 때문에, 푸코는 여기서도 대담한 발상의 전환을 촉구했던 것이다.

 나아가 이 책의 또 다른 중요한 논점은 성을 둘러싼 권력은 강대한, 눈에 보이는 중심에 의해 작동하는 것이 아니라, 미시적인, 도처에 분산되어 있는, 무수한 점을 통해서, 내재적으로 작동한다는 것이었다. 이 권력은 일정한 중심에 국지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더 이상 지배자와 피지배자를 분할할 수 없다. 이 전제에 관해서도, 만일 권력이 그렇게 비집권적이고, 거의 실체를 결여한 것이라면, 반권력의 투쟁은 더 이상 불가능한가라는 의문도 항의도 나왔다(“권력은 도처에 있다. 모든 것을 아우르기 때문이 아니라 도처에서 생기기 때문이다).

 이리하여 푸코가 조금 묵시록적인 어조로 재빨리 말했던 생명정치학, 지식의 의지가 간행되었던 당시에는 그다지 논의를 야기하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살게 만들거나 죽음 속으로 내던지는 권력이라는 무서운 지적은 내 머리 속에도 내려앉아 사악하게 맴돌면서 불길한 인상을 계속 내뿜었다. 푸코는 극히 엄밀한 저자인데, 누구나 아는 인간의 종언이라는 도발을 포함한 주요 저서도 있으니, 결코 묵시록적인 발언을 스스로에게 금지해 왔던 것은 아니다. ‘인간의 종언은 엄밀하게 서양의 담론형성체가 어떻게 인간이라는 표상을 만들어내고 변경해 왔는가라는 고찰의 한 결론이며, 그것 이상의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그것이 어느 정도 한정된 문제계 속에서 엄밀하게 말해졌다고 하더라도, ‘인간에 관한 그 담론의 종언이란, 그대로 인간의 종언이라는 묵시록적인 의미를 가질 수 있다.

 푸코는 충분히 진지하고 노골적이며 도발적이기도 하며, [실제로] 훌륭하게 도발에 성공했다. 담론 형성체[편성]에 관한 엄밀한 분석과 더불어 인간의 종언에 관해 말했기 때문에, 그것은 사상사적 사건이 될 수 있었다. 그리고 생명정치학또한 인간의 종언에 못지않게 묵시록적인 시사였다. 이것도 또한 서양 근대의 어떤 시점에 위치지어질 수 있는 역사적, 제도적인 권력기구의 엄밀한 고찰에서 나온 제안이긴 했지만, 푸코는 순식간에, 몇 쪽에서, 20세기의 강제수용소나 핵무기의 위기까지 생명정치의 정의를 확장하고 있다. 미증유의 규모로 냉혹한 죽음을 초래하는 생명정치론은 또 다른 인간의 종언론이기도 했다. 그리고 생명정치학죽음 속으로 내던진다는 가능성이 바로 폭발하듯이 현실화하는 것이 20세기의 전쟁과 수용소였다고 한다면, 푸코는 그 조짐을 이미 수세기 전의 서양에서 발견하고, 이 세계의 체제가 점점 더 생명정치적인 것으로 되고 있다는 것을 조심스럽게 암시하고 있다.

 환경파괴나 인구의 폭발적 증가가 아직 지구적 규모의 위협이 되기도 전에 인간은 이미 생명정치에 의해서 위기적 상황을 척척 만들어냈다고 말할 수도 있다. 그리고 엄밀하게는, 환경과 인구에 대해서조차 이미 생명정치는 다양한 작용을 끼쳐왔음에 틀림없다. 생명과 죽음의 권력을 둘러싼 푸코의 도식은 극히 간략하며 간단할 뿐으로, 충격적이지만, 면밀한 논증을 결여하고 있으며, 반드시 진실을 알리는 언표로서 독해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것은 아무튼 밑도 끝도 없는 규모에 걸친 심각한 문제제기였다.

 

2. 정치의 과제는 생명이 아닌가?

푸코는 한나 아렌트의 책을 거의 언급하지 않지만, 내 머리 속에서 생명정치학은 아렌트가 물었던 정치와 생명이라는 문제에 직결된다. 잘 알려져 있듯이, 아렌트의 정치학은 공공성개념과 한 몸을 이루며, ‘공공성이란 어디까지나 복수성을 존중하고, 상이한 의견을 격렬하게 주고받으며 겨루는 자유이기도 하다. 그러한 공공성과 이것을 창출하고 유지하는 행동이 그녀에게 그대로 정치의 내용이 됐다. 그래서 공공성이라는 이상을 외골수로 계속 추구했던 것으로 보이는데, 그녀의 비판적 사색은 공공성을 단순한 이념으로 폄하하는 현실의 정치적 과정을 겨누었다. 그리고 공공성의 창출 그 자체를 목표로 하는 정치는 역사의 다양한 과정에서 실현되었다고 그녀는 생각했다. 그런 정치의 앞에, 바로 커다란 위험으로서 가로막고 있는 것은 생명의 위기라는 사태였다. 아렌트는 단적으로 이렇게 쓴다.

 “만일 정치가 유감스럽게도 인간의 생존유지를 위해 필요한 것일 뿐이라는 것이 정말이라면, 실제로는 정치는 스스로를 말소해 왔던 것이 된다.” 아렌트에게서 현대세계가 손에 넣은 절멸전쟁의 가능성을 앞에 둔 정치란, 더 이상 정치의 기본적 요건(공공성, 자유)을 결여하고 있다.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그저 단순히 자유만이 아니라, 생명이기도 하며, 인간이나 어쩌면 이 세상의 생명체 전체가 더 생존할 수 있는가이기도 하다. 여기서부터 생겨나는 문제는 모든 정치를 위험하게 하는 것이며, 현대의 조건 아래에서는, 정치와 생명의 유지가 서로 조화한다는 것이 의심스럽게 보이게 된다.”

政治とは何か

 이런 사고에 있어서는 바로 생명정치학이라는 말 자체가 터무니없는 생각이며, 원래 성립할 수 없을 것이다. 아렌트에게 정치란 생명의 유지(살게 만드는 것)에 직접적으로 관계되는 활동이 아니라, 완전히 다른 차원에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렌트는 아직 생명정치학적 문제가 출현하기 전의 고전적 정치()에 집착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정치는 곧 통치가 아니며, 생명유지를 도모하는 체제도 아니라고 계속 말하면서, 아렌트는 한결같이 구성적 차원의 정치에 계속 주목했다. 이 정치에 있어서 궁극적인 적(반대물)으로 전체주의를 상세하게 연구하는 책을 썼다. 또한 공공성의 사고를 칸트의 세 번째 비판서(판단력비판)의 미학적 판단에 비춰서 더욱 심화시키고자 했다.

 이런 식으로 생명정치학을 아렌트의 공공성의 정치학과 비춰봄으로써, 무엇을 볼 수 있을까? 생명정치는 생명을 배려하고 통제하는 정치로서 출현하지만, 이때 생명정치도 새로운 양상을 띠게 되며, 이 둘 사이에도 새로운 관계가 맺어지는 것임은 틀림없다. 아렌트는 생명을 목표로 하는 정치그 자체에 강한 부정을 피력하고, 그리스의 폴리스나 미국의 독립혁명을 재평가하며, 거기서 실현된 공공성의 정치를 이상으로 삼는 것처럼 말했는데, 그저 회고적으로가 아니라, 새롭게 실현하고 구성해야 할 정치로서도 그것을 말했다.

푸코의 제안을 받아들여서, 우리는 다시금, 오늘의 세계에서 정치가 생명과 어떻게 마주대하고, 생명을 어떻게 다루고, 조작하는가라고 물을 수 있다. 그리고 이 세계에서 정치는 무엇을 하는가를 재차 묻게 된다. 정치가 생명을 배려하는 것은 당연하며, 그 무엇으로도 대체할 수 없는 절대적인 목표인 듯 싶지만, 그것은 꼭 자명한 것은 아니다. 어쩌면 정치는 더 이상 과거와 같은 정치가 아닌데도 그래도 똑같이 정치라는 말이 변함없이 사용되고 있는 듯하다. 어떤 시대부터, 특히 생명을 배려하게 됐다고 얘기되는 정치는 도대체 어떻게 변화하고 무엇을 표현하며 무엇을 실현할 수 있고 실현할 수 없었는가? 아렌트의 비판은 단순히 정치는 무엇을 잃었다가 아니라, 생명정치 이전의, 혹은 생명정치 이상의 정치를 눈여겨보면서, 생명정치에 에워싸이게 된 정치를 재고하기 위한 시사로서 독해할 수 있다.

 그리고 푸코의 살게 만들 것인가 죽음 속으로 내던질 것인가라는 권력이라는 정식에는 근본적인 단절이 포함되어 있다는 것에도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18세기 중엽에 출현하여 번식과 탄생, 사망률, 건강 수준, 수명, 장수등을 치밀하게 배려하게 되는 살게 만드는 권력이 왜, 어떻게 죽음 속으로 내던지는 권력일 수 있었는가, 삶의 권력이 어떻게 죽음의 권력으로 변형할 수 있었는가, 그것에 관해서도 사실은 푸코는 그렇게 설득력 있게 쓰지 않았다.

 절멸전쟁의 가능성과 더불어 있고, 절멸인가 아닌가라는 선택에 몰입하는 정치에 관해 아렌트뿐만 아니라 푸코도 절멸수용소와 핵무기에 관해서 언급하면서 문제 삼았다. 그리고 환경파괴나 인구폭발은 또 다른 생사에 관련되는 정치의 과제를, 명백하게 들이댔다. 이것들은 어느 정도 생명정치학적 문제이며, 또한 적지 않게 생명정치적인 변화가 산출했던 결과이기도 한 것임이 틀림없다. 그러나 이것들을 그저 묵시록적인 비전으로 용해해버리는 것이 아니라, 각각의 다른 차원, 다른 수준의 문제로서 재고하는 데 있어서 이러한 맥락을 파악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생명정치라는 말이 상당히 충격적이었기 때문에, 각각으로 풀어 헤쳐져 고유한 수준에서 생각해야 할 상이한 물음이, 모두 빠짐없이 거기에 한꺼번에 밀어닥친 것은 아닐까?

 그렇다고 해도 묵시록은 도처에서, 영화 속에서도, 철학 속에서도, 특히 미디어 속에서도 되풀이되고 있다.

 

3. 생명정치인가, 구성적 정치인가

그리고 생명과 정치의 맥락에, 설령 절멸전쟁은 아니라고 하더라도, 전쟁이라는 요인이 개입함으로써 질문은 순식간에 복잡해진다. 아무튼 전쟁은 생명보다 상위에 있는 가치를 전제로 한다. 적의 생명은 말살해도 상관없는 최저의 가치밖에 갖고 있지 않다. 위협 받고 있는 자국민의 생명을 구하는 것이 전쟁의 이유라 해도, 이를 위해 자국민(의 일부)도 희생시키는 것 전쟁의 전제이며, 어디까지나 국민보다 국가가 소중한 것이다. 발터 벤야민은 폭력비판론(1921)에서 정치적 폭력을 둘러싼 아포리아에 관해 쓰고 있다. ‘인간이란 인간의 생명과도, 인격과도 일치하는 것이 아니라고 진단하면서, 인간의 생명이 소중하다는 도그마는 결코 자명하지 않으며, 그것이 어디에서 왔는가를 물어야만 한다고 그는 제안한다.

 그러나 그것 이상으로 깊이 있게 이 도그마의 유래를 추구하기보다도, 벤야민의 관심은, 법과 더불어 있는 폭력의 양의성으로 향했다. 법을 유지하기 위해, 법에 의해 한정되고 규제되는 폭력(예를 들어 경찰), 법의 바깥에 있어서 법의 규제를 당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법을 정립하는 폭력(예를 들어 혁명)과 자주 구별되기 어렵다. 그러한 불분명한 폭력의 상황에서는 인간의 생명도 완전히 무방비한 상태에, 즉 법적 질서의 주변에 놓이게 된다. 문학, 언어, 이데아를 예리하게 비평하는 새로운 유물론을 전개한 벤야민의 사고의 근저에는 구성적인 정치 또는 정치의 구성적 차원에 관해 그토록 날카로운 질문이 있다는 것은 잊기 힘들다.

 나치즘이 출현한 시대에 구성적 권력을 둘러싸고 이토록 눈부신 사유가 나타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생명정치()’라는 말을 꼭 사용하지 않더라도, 이 말이 가리키는 정치의 급변은, 생산과 금융과 기술을 통해 가속화된 자본주의와 연동하여 세계를 크게 뒤흔들고, 그러한 구성적 차원의 정치에 대한 사유를 촉구하게 되었다. 벤야민의 폭력론도, 아렌트의 공공성의 정치학도, 그리고 칼 슈미트의 예외상태의 정치학도, 그런 역사적 동요에 대한 민감한 반응이었으며, 하이데거의 존재론마저도 그것과 무관하지 않으며, 존재자의 구성적 차원으로 깊이 하강하려는 시도였다고 말할 수 있다.

 “예외는 통상의[정상적인] 사례보다 흥미롭다.” “법률학에서 예외상태는 신학에서의 기적과 유사한 의미를 지닌다.” 그런 도발적인 문장을 쓸 수 있었던 슈미트는, 역시 정치의 구성적 차원으로 깊이 하강하고, 때로는 바로 도착적인 신학과 닮은 논의를 전개하고 있다. “구체적인 생활의 철학은 바로 예외나 극단적인 사례에 대해 망설이는 것을 허용하지 않으며, 최고도로 그것에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구체적 생활의 철학에 있어서는, 통상[정상]보다 예외가 더 중요할 수 있다. 더욱이 이것은 역설을 좋아하는 낭만주의적 아이러니가 아니라, 평균적으로 되풀이되는 사례의 명백한 일반화 이상으로 핵심부로 파고드는 통찰이 지닌, 철저하고 고지식함에서 나오는 발언이다.” 이렇게 쓴 그는 확실히 아주 진지하게 법적 사고의 극한에서 사고했을 것이다. 하지만 예외는 통례를 뒷받침할 뿐만 아니라 통례는 원래 예외에 의해서만 살아간다. 예외에 있어서야 현실생활의 힘이, 반복으로서 경직된 관습적인 것의 껍질을 깨는 것이다라고까지 결론을 내리는 법학자는, 한 개인의 자질을 넘어서, “예외적인시대의 예외적인 정치적 압력에 실로 민감하게 반응했으며, 아마 슈미트에게만 속하는 것이 아닌 이러한 사고 형태가 나치즘의 추진력이 되었음에 틀림없다.

 구성적 차원에서의 정치라는 물음은 슈미트의 경우처럼 예외상태에 대한 강한 관심을 불러일으키며, 한편으로는 아렌트가 계속했던 공공성의 창출에 초점을 맞춘 사고를 초래했다. 그리고 이것들은 아마도 공통의 배경을 가지면서도 또한 정반대의 사상을 형성했던 것이다.

 얼핏 보면 푸코가 말한 생명정치학은 그러한 구성적 차원에 관련된 것이 아니다. 그러나 푸코는 특히 정치적 실천에 관해서는, ‘대표대의[재현, 표상]’에 이끌리는 정치를 끊임없이 비판하고, 정당정치와도 맑스주의와도 거리를 두려고 했다. 정신병원이나 감옥의 탄생에 관해 정밀한 역사학적 연구를 하는 것 자체가 적어도 다른 정치를 제안한 것이며, 지식의 의지에서는 바로 생명정치학에 대해 저항하는 힘에 관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