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터데스크 관리자

도움말
닫기
적용하기   첫페이지 만들기

태터데스크 메시지

저장하였습니다.

현대사상 2015년 2월 임시증간호

자크 데리다

 

<미번역 텍스트>

1. 하이데거에 관한 대담자크 데리다

 

<데리다의 삶과 사상>

2. 데리다의 최고 전성기, M. 나스

3. 탈구축<, R. 가쉐

4. L’enfant que donc je suis 혹은 고양이의 에피소드는 왜 자전적인가郷原佳以

5. 데리다 처음으로 존재론적 차이와 존재자적 은유増田一夫

 

<인터뷰>

6. Deadletter로서의 철학아즈마 히로키

 

<사형>

7. 엑스 렉스 자크 데리다의 사형론 세미나, J. 페닝턴

 

<하이데거>

8. 자기 전승과 자기 촉발 데리다의 하이데거 강연(1964-1965)에 관해,

 

<철학>

9. 평행적 차이 자크 데리다장 뤽 낭시

10. 주변에서 주변으로 데리다/들뢰즈의 곶으로부터,

11. 우뚝 솟은 상태의 철학말라부

12. 타자성의 분유 계획 불가능한 것의 계산藤本一勇

 

<정치>

12. ‘전쟁의 일상화와 무조건의 환대-평화’ 사이에서松葉祥一

13. 호명으로서의 우애애도로서의 우애 자크 데리다의 우애론에서의 아리스토텔레스에 관해宮崎裕助

14. 차연과 평등 타자의 윤리인가 아니면 평등한 자들의 공동체인가梶田裕

 

<신학>

15. 데리다의 급진적 무신론,

16. 현상을 가르치기 레비나스데리다와 메시아주의의 물음마르셀

17. 데리다와 존재신학 칸트하이데거레비나스가 교착하는 장소로長坂真澄

 

<문학>

18. 팔루스유령천황제 자크 데리다와 中上健次

19. 데리다 미학의 연구 문학 혹은 픽션성의 제도立花史

 

 ******************

12. ‘전쟁의 상태화/일상화와 무조건의 환대-평화’ 사이에서 (2/2)

마츠바 쇼이치(松葉祥一)

 

1/2에 이어서....


4. 칸트적 평화와 레비나스적 평화

데리다는 아듀에서 성서의 행방에 수록된 레비나스의 강연 정치는 나중에1(Lévinas 1982)의 논의를 검토하면서, 레비나스의 평화론과 칸트의 평화론을 대립시킨다(Derrida 1997b). 레비나스는 칸트의 영구 평화를 위하여를 옹호하고 있지만, 사실 두 사람은 완전히 다른 입장에 서 있으며, 그 차이를 생각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이 데리다의 결론이다.

확실히 칸트는 전쟁과는 다른 차원의 영구평화를 생각한다. 이런 의미에서 칸트의 평화론은 슈미트-하이데거적인 일상화된[常態的] 전쟁론과는 다른 전제에 서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데리다에 따르면, 그 전제는 다음의 두 개의 명제이다. “1, 평화는 자연스러운, 대칭적인, 단순히 전쟁과 대립시킬 수 있는 현상이 아니다. 평화는 다른 차원의 현상이며, 자연스런 본성이 아니라 제도적인 본성(즉 정치적-사법적 본성)을 가진다. 2, 평화는 단순한 적대행위의 정지, 전쟁을 벌이는 것의 자제, 즉 휴전이 아니다. 평화는 영구평화로서, 영구평화의 약속으로서 제도화되어야 한다”(Derrida 1997b:132). , “만일 평화가 있다면, 그 평화는 영구적이지 않으면 안 되며, 제도화된 평화, 법적-정치적 평화로서, 비자연적이지 않으면 안 된다”(Derrida 1979b:133)고 말하는 것이다. 이런 평화는 가능할까? 적어도 정치적 방법에 의해서는 이런, 영구평화에는 도달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영구평화는 정치적이지 않게 된다. 데리다는 여기서의 칸트가 레비나스에 접근한다”(Derrida 1997b:133)고 말한다.

그러나 칸트와 레비나스는 갈라진다. 칸트는 보편적이고 무조건적이어야 할 환대를 제한해 버리는 것이다. 데리다는 만국의 세계시민들이여, 다시 한 번 노력하라!(Derrida 1996)에서, “세계시민의 법권리는 보편적인 환대의 조건들에 제한되어야 한다”(Kant 1795:49)라는 세 번째 확정조항이 불충분하다고 지적한다. 칸트가 환대의 법을 방문권에 한정하고, 체류권을 인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외국인이 요구할 수 있는 것은 손님의 권리(이 권리를 요구하려면 그를 일정 기간 가족의 구성원으로 다룬다고 하는, 호의 있는 특별한 계약이 필요해질 것이다)가 아니라 방문의 권리인데, 이 권리는 지구의 표면을 공동으로 소유할 권리에 기초하여, 서로 교제를 신청할 수 있다는 것처럼, 모든 인간에게 속해 있는 권리이다”(Kant 1795:49). 데리다는 이 점을 다음과 같이 비판한다. “[이방인/방문자]는 체류권을 인정받는 것이 아니라, 방문권만 인정받는 것입니다. 칸트는 이 점에서 수많은 확연한 구별을 하고 있습니다. 저는 이것을 조건부 환대라고 부르며, ‘무조건의환대 혹은 순수한환대라고 부르는 것에 대립시키고 싶습니다. 이것은 조건 없는 환대이며, 설령 신참자가 시민이 아니더라도 그것이 누구인지를 규정하는 것은 요구하지 않습니다”(Derrida 1999).

여기서 칸트는 환대에 조건을 부여함으로써 환대=평화를 진보의 최종 단계로 되돌려보낸다는 것이다. 그것은 칸트의 평화 개념에 전쟁의 흔적이 남아 있기 때문이라고 데리다는 말한다. “칸트에게서 영구평화, 세계시민적인 법권리, 보편적인 환대 같은 것의 제도화는 자연적인 적대성 의 흔적을 보존하고 있다”(Derrida 1997b:134).

그에 반해 레비나스의 경우, 환대=평화는 무조건이어야 한다. 레비나스는 평화를 지금(La paix maitenaint)”(Derrida 1997b:134)이라고 주장하는 것이며, 코스모폴리터니즘보다도 보편성을 택하는 것이다. 바꿔 말하면, 레비나스에게서 모든 것은 평화에서 시작되는것이다. “이 평화는 자연이 아니다 . 또 이 평화는 단순히 제도적 내지 법적-정치적인 것도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것은 환대 속에서 타자의 얼굴을 맞아들이는 데서 시작된다’”(Derrida 1997b:137, 강조는 데리다). 레비나스에게서는 칸트와는 반대로, 전쟁 자체도 맨 얼굴의 평화로운 맞아들임의 증언이 되는 흔적을 보존하고 있으며, “전쟁이 평화의 증언인 것, 전쟁은 평화의 한 현상에 머무는 것”(Derrida 1997b:144)이 된다.

레비나스는 전쟁-평화의 대칭성을 절단하는 점에서는 칸트와 같다. 그러나 방향은 정반대이다. 칸트의 경우, 전쟁이 기반이 됐던 반면, 레비나스의 경우 평화-환대가 기반이 된다. “전쟁 자체, 적대성, 나아가 살해마저도 얼굴로의 열림이라는 근원적 맞아들임아직도 전제하며, 변함없이 맞아들임의 표명이라는 것을 의미할 수 있다. 전쟁을 할 수 있는 것은 얼굴에 대해서만이며 타자의 얼굴의 의미이기도 한 살인하지 마라는 레비나스에게 있어서 윤리의 근원이다”(Derrida 1997b:138, 강조는 데리다). 칸트에게서는 평화를 제도화해도 자연상태로서의 전쟁의 흔적은 남는다. 거꾸로 레비나스에게서 전쟁, 면역 반응이 나타나는 것은 환대를 스스로 신청하는 경우뿐이다. 레비나스는 칸트적인 무장된 평화’, ‘휴전으로서의 평화’, 법적-세계시민주의와 절연하고 있다. 따라서 레비나스에게서 전쟁은 수단에 의한 평화의 계속”(Derrida 1997b:144)이며, 전쟁은 환대의 파생물이게 된다. “이 위대한 담론은 종말론적 평화를, 또한 무엇에도 선행될 수 없는 환대적인 맞아들임을 말한다. 거기서 무엇을 듣더라도 상관없으나, 다만 정치적인 평화신학만은 들을 수 없다”(Derrida 1997b:144). 데리다는 이런 레비나스의 평화 개념을 ()-근원적인 환대혹은 과정 없는 평화”(Derrida 1997b:139)라고 부른다.

레비나스는 이 평화-환대의 기반을 언어작용에서 간파한다. 왜냐하면 레비나스는 언어작용의 본질은 선량함이며, 나아가 언어작용의 본질은 우애이며 환대이다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Derrida 1997b:138). 가령 전체성과 무한의 끝부분에서, 언어 속에서 타자, 그 어떤 경계선도 부정도 없는, <타자와의> 평화적 관계의 적극적인 전개가 산출된다고 말했음을 떠올려보자. 그리고 거기서는 급진적인 분리의 다원론”(Derrida 1997b:146)이 문제가 됐다. 그것은 전체적인 공동체의 다원성이 아닌 듯한, 다원성을 구성하는 요소들의 정합성이 아닌 듯한 다원론”(Derrida 1997b:146)이다. 거기서의 다원성의 통일이야말로 평화라고 여겨진다. “따라서 평화를 전쟁의 종식과 동일시할 수 없다”(Lévinas 1999:471).

그러나 데리다는 이런 레비나스에게서의 평화론을 두 가지 점에서 비판한다. 한편으로, -근원적인 환대’, ‘아나키한 선량함부성적인 것으로 간주된다는 것이다(Derrida 1997b:143-144). 그 결과, 평화에는 계층질서적인 비대칭성이 남게 된다. 다른 한편 이런 레비나스의 윤리적 평화론은 보편주의-배외주의에 빠질 위험이 있다. “죽이지 말라라는 윤리적 명제를 절대화함으로써 자신의 입장만이 보편적이며 다른 입장을 인정하지 않는 배외주의에 빠지며, 폭력적 배제나 처벌에 길을 열게 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레비나스가 시오니즘이 내셔널리즘을 넘어선 윤리적 입장이라고 주장할 때, 이 위험에 길을 열고 있다(Derrida 1997b:165). 현실에서 시오니즘이 배타적 폭력의 근거가 되고 있는 것을 목도하게 될 때, 이 입장의 위험성을 알 수 있다.

 

5. 윤리적 평화와 정치적 평화 사이에서

우리는 칸트와 레비나스의 평화론을 윤리적 평화냐 정치적 평화냐라는 문제로서 검토했던 적이 있다(松葉 2008). 한편으로 윤리적 평화론이 무력하다는 것도 사실이지만, 다른 한편으로 정치적 평화론에 늘 위험이 따라다닌다는 것도 사실이다. 1차 대전 후의 부전조약[不戰條約, Treaty for the Renunciation of War; 켈로그-브리앙 조약]이나, 유엔헌장에서 무력행사를 행할 수 있는 예외적 조건으로서 자위권이 인정된 이후, 팽창일로를 거듭해 왔다. 그것은 무력행사의 정당성을 주장하기 위한 대외적, 대내적인 논거로서 계속 확대되며, 이제는 예방적·선제적 자위권이나, 확대된 집단적 자위권까지 주장하게 되며, 어떤 군사적 행동도 그 안에 던져 넣을 수 있는 개념이 되고 있다. 이런 자위 개념의 팽창을 억누르는 것은 더 이상 정치적 수단만으로는 곤란하다. 칸트나 아베 드 생-피에르(Abbe de Saint-Pierre)가 주장한 이성=이익에 기초한 정치적 수단으로는 자위 개념의 비대화와 그것에 기반한 정전론(正戦論)의 부활을 막을 수 없으며, 정치적 차원에서 윤리적 차원으로의 전회가 필요하다는 것은 틀림없다(松葉 1995).

다른 한편으로 윤리적인 평화론이 불충분하다는 것도 분명하다. 전쟁의 일상화[常態化]가 기본인 한, 그것이 아무리 일시적이고 위험한 것이라 해도, 정치적인 수단에 의한 해결책의 추구는 필요할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칸트적인 세계시민공화국에서의 도래할 민주주의를 상정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데리다가 지적하듯이 칸트는 정치적 평화를 위해 국가연맹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했던 것은 아니었다. “그는 그것을 그저 현실주의적인 타협안으로서 제기했던 것에 불과합니다”(Derrida 1997a). 실제로 칸트는 두 번째 확정조항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서로 관계가 있는 국가들에 있어서 그저 전쟁밖에 없는 무법적인 상태로부터 탈출하기 위해서는 이성에 의거한 다음의 방책밖에는 없다. , 국가도 개개인의 인간과 마찬가지로, 그 미개한(무법적인) 자유를 버리고 공적인 강제법에 순응하고, 그리고 하나의(가장 끊임없이 증대하고 있는) 민족들의 합일국가(civitas gentium)을 형성하고, 이 국가가 항상 지상의 모든 민족을 포괄하도록 한다는 방책밖에는 없다”(Kant 1795:47). 그러나 이런 세계시민국가라 해도, 자기 면역으로서의 전쟁을 피할 수는 없다. 그런 의미에서 진정으로 전쟁의 본질에 대치할 수 있는 것은 윤리적 평화밖에는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윤리적 평화를 조금씩이라도, 일시적이라도 실현할 수 있는 것은 정치적 수단에 의한 것밖에는 없다.

확실히 영구평화를 위해영구평화의 어정쩡한 약속, 유보 없는 환대에 관한 양의적인 혹은 위선적인 약속”(Derrida 1997b:151)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칸트는 무덤을 갈망하는 것도, 평화주의적 철학자의 달콤한 꿈을 바라는 것도 아니다”(Derrida 1997b:151-152). 칸트는 이 양자택일에 대한 응답으로서, 환대의 법권리나 세계시민정치를 제안한다”(Derrida 1997b:152).

여기서 데리다는 다음과 같이 결론짓는다. “적어도 칸트와 레비나스 사이에 있는, 어떤 차이를 여기서 첨예하게 만들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에서, 르완다에서, 유럽에서, 미국에서, 아시아에서, 그리고 세계 속의 생베르나르(Saint Bernard) 교회에서, 무수한 상파피에홈리스들이, 다른 국제법, 국경선에 관한 별도의 정치, 인도(人道)에 관한 별도의 정치, 나아가 국민국가의 너머에서 실효적으로 행해지고 있는 인도적 참여engagement, 그런 모든 것을 요구하고 있는 도처에서, 칸트와 레비나스의 이 치아는 전례 없이 중요한 것이다”(Derrida 1997b:152).

우리는 슈미트-하이데거적인 전쟁의 일상화[常態化]’를 인정하면서도, 그 저편에서 전쟁의 결여태로서의 평화와는 상이한 평화를 찾아내고, 정치적 평화윤리적 평화라는 두 개의 항 사이에서, 계속 살아가기 위한 방책을 찾아낼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이 사이의 경계선은 단순하지 않다. “윤리적인 것과 정치적인 것의 경계는 하나의 경계선이 지닌 분할 불가능한 단일성을 결정적으로 잃고 있기”(Derrida 1997b:149) 때문이다.

 

****

확실히 지금 요구되는 것은 확고한 전쟁 개념에 대응하는 확고한 평화개념을 대치하는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 오히려 어떻게 생존 공간을 다시 만들 것인가, 거기서 필요한 최저한의 질서를 어떻게 확보할 것인가라는 사고가 요구되고 있는 것이리라. 집단적 자위권이 도입되고, 무기수출의 3원칙이 변경되고, 비밀보호법이 시행된다는 예외상태속에 있는 현재, 이제 상황은 실재 가능성으로서의 전쟁에서 현전한전쟁 속에 있을 것이다. 필요한 것은 현재는 전시’(辺見 2013)이라는 인식이며, 필요한 것은 거기서 살아남기 위한 <전쟁 중>이라는 사고일지도 모른다. 한편으로 이런 움직임에 이의를 제기하고, 할 수 있는 한 명문화된 개헌을 멈추는 최대한의 정치적 노력이 필요할 것이다. 그러나 그것에는 한계가 있다. 왜냐하면 정치의 텔로스가 전쟁인 한, 정치적 방법으로는 전쟁은 벗어날 수 없기 때문이다. 동시에 본질이 타자의 존재를 신체적-물리적으로 말소하는 것에 있는 전쟁을, ‘죽이지 말라라는 관점에서 비판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런 평화는 불가능한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불가능한 것을 생각하고, 실행할 수밖에 없지 않을까. 데리다는 우정의 정치는 어떻게 가능한 것이냐는 질문에 대해, “그것은 불가능한 것입니다. 그러나 불가능하다는 것은 가능성의 반대가 아니며, 불가능하다고 말하는 것은 가능성을 부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 불가능한 것을 실행하는 것이, 불가능한 것을 생각하고 행하는 것이 필요한 것입니다”(Derrida 2001b:43)이라고 말한다. 문제는 눈앞의 현실을 부정하고 불가능한 것을 떠올리면서 그것을 시행하는 것이다.

 

참고문헌

인용할 때 일본어 번역본이 있는 경우는 그 쪽수를 표기했다. 다만, 문맥에 비춰서 번역문을 일부 변경한 경우가 있다.

Aristoteles (n. d.) / 山本光雄訳(1969), アリストテレス全集, 第一五巻, 岩波書店.

Derrida, J. (1994) / 鵜飼哲大西雅一郎松葉祥一訳(2003), 友愛のポリテイツクス, 2권 중 제1, みすず書房.

Derrida, J. (1997a) / 港道隆訳(1996), 万国世界市民たちもう一努力!, 世界.

Derrida, J. (1997b) / 藤本一勇訳(2004), アデュー──エマニュエル・レヴィナスのために, 岩波書店.

Derrida, J. (1999) / 安川慶治訳(1999), ジヤツク・デリダとの対話──歓待正義責任, 批評空間, II, 23.

Derrida, J. (2001a) / 松葉祥一訳(2001), りないしみをじています, 現代思想, 二九巻一三号.

Derrida, J. (2001b) / 中山元訳(2002), だれも無実ではない, 中山元訳, 発言──米同時多発テロとお思想家たち, 朝日出版社.

Derrida, J. (2001c). «Une hospitalité à l’infini», in De l’hospotalité : Autour de Jacques Derrida, La passe du vent.

Derrida, J. (2003a) / 藤本一男澤里岳史訳(2004), テロルの時代哲学使命, 岩波書店.

Derrida, J. (2003b) / 鵜飼哲高橋哲哉(2009), ならずたち, みすず書房.

Derrida, J. (2010). Séminaire, La bête et le souverain : Volume II (2002-2003), Galilée.

Gaston, S. (2009). Derrida, Literautre and War : Absence and the Chance of Meeting, Continuum.

Heidegger, M. (1954) / 関口浩訳(2009), 技術への, 平凡社.

辺見庸 (2013), 作家辺見庸さん 現在戦時」」, 神奈川新聞, 201397.

Kant, I. (1795) / 宇都宮芳明訳(1985), 永遠平和のために──哲学的考察, 岩波文庫.

松葉祥一 (1995), 愛国者でも世界市民でもなく──サン・ピエールルソーカントにおける国家連合永遠平和, 現代思想, 二三巻七号, 195-205.

松葉祥一 (2008), 倫理的平和政治的平和, 同志社哲学年報, 三一号, 31-44.

松葉祥一 (2014), デリダ/ランシエール──デモクラシー・他者共同性, 岩波講座 政治哲学, 第五巻, 藤藤純一編, 岩波書店, 127-148.

西谷修土佐弘之岡真理 (2014), 「「非戦化する戦争, 現代思想, 201411월호.

Odello, L. (2014). «Que reste-t-il du cosmopolitisme?», Appels de Jacques Derrida, Cohen-Lévinas, D. & Michaud. G. (dir.). Editions Hermann.

Leroux, G. (2014). «Walten ou hyper-souveraineté», Appels de Jacques Derrida, Cohen-Lévinas, D. & Michaud. G. (dir.). Editions Hermann.

Lévinas, E. (1971) /合田正人(1999), 全体性無限──外部性についての試論, 国文社.

Lévinas, E. (1982) / 合田正人(1996), 聖句彼方──タルムード読解講演, 法政大学出版.

Schmitt, C. (1931) / 田中浩原因武雄訳(1970), 政治的なものの概念, 未来社.

Scheler, M. (1937) / 駒井義昭訳(1991), 平和理念平和主義, 富士書店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설정

트랙백

댓글


티스토리 툴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