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무공화국의 종언


우리는 언제부터 노예가 됐나

 

 

債務共和国の終焉 

 

 

이치다 요시히코오우지 겐타,

고이즈미 요시유키나가하라 유타카


2013년 9월 30일 초판발행



목차

1경제를 둘러싼 현재

1. 심리 전쟁이 된 경제

2. 경제적인 것의 <신체>

3. 금융-채무혁명

 

2. 세계공화국

1. 지속을 요구하는 공화국

2. 문화 좌파에서 공공성 좌파로

3. 유럽 공화국의 출현

4. 민주주의의 병과 공화주의

5. ‘새로운 인터내셔널이라는 유령

 

3렌트 자본주의

1. 렌트에 의한 생산의 침식

2. 렌트/스톡 원리론

(1) <()>, 렌트스톡

(2) 화폐순환

(3) 이윤의 재정의

3. 렌트에 의한 채무의 확대혹은 투자의 행방

4. 희소성을 둘러싼 역전과 파산관리의 소비에트

 

후기 이치다 요시히코

 

본문 속의 외국어 문헌 중 일본어 번역본이 있는 문헌에 관해서는 번역서의 쪽수를 주에 붙였으나 번역문은 적절하게 변경했다.


3렌트 자본주의

1. 렌트에 의한 생산의 침식

그러나 왜 채무는 변제[상환]해야 하는가? 빌린 돈은 왜 반드시 갚아야 하는가? 대차(貸借)를 포함한 거래 일반이 등가교환이며, 가치는 누군가의 사적 소유물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거기에, 가치가 노동시간에 의해 측정된다는 원칙이 더해지면, 이미 봤듯이, 오늘날의 혁명은 채무 상환의 근거가 이미 실질적으로 무너지고 있지 않다면 일어날 수 없는 사태였다. 노동시간이 가치의 유일한 척도이고 거래가 등가교환이라면, 오늘날의 채무문제는 단적으로 말해서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왜 가치생산자인 노동자가, 이미 무너지고 있는 근거를 적용받아 채무 상환을 강요받아야 하는가? 가치를 생산하는 노동자에게 공공공간의 시민이 된다는 것은 가치의 이중기준(double standard)을 받아들인다는 사태에 다름 아니다. 왜 상환 의무의 근거를 넘어서까지 빌릴 수 있었을까? 숨겨진 다른 근거는 무엇이었는가? 등에 대한 설명 의무를, 공공의 것은 모든 관여자에 대해 짊어진 것이다. 사람들이 채무 문제의 관여자로서 부담을 분담해야만 하는 근거와 채무가 막대하게 불어날 수 있었던 원리는 다르며, 후자를 방치해서는 언 발에 오줌 누기일 뿐 아니라, 공화국 위정자는 시민의 재산을 훔치는 도둑의 편이기를 계속할 수밖에 없다.

생산 과정의 내부에서 생산된 가치를 생산 과정의 외부에서 합법적으로 빼앗아가는 구조는 사실 맑스가 이미 발견했다. 지대, 즉 토지의 렌트(임대료)이다. 자본의 유명한 마지막 장 계급들은 적고 있다. “임금, 이윤, 지대를 각각 수입의 원천으로 하는 노동력의 단순 소유자, 자본의 소유자, 토지 소유자, 즉 임금노동자, 자본가, 토지소유자는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을 기초로 하는 근대 사회의 3대 계급을 구성한다.”[각주:1] 말할 것도 없이 맑스에게 세 가지 수입 원천의 더 근본적인 원천은 노동뿐이며, 3대 계급은 노동이 산출한 가치를 나눠 갖는 것에 불과하다. 이 중 앞의 두 가지는 생산과정에서 분리 불가능한 형태로 결합되어 있으며, 그 분리 불가능성을 초래하는 자본가가 가변자본을 임금으로 선불한다라는 사태가 잉여가치의 착취를 정당화했다. 그에 반해 토지소유자는 토지의 희소성을 근거로, 잉여가치의 일부를 자본가로부터 받는 것일 뿐이다. 자신은 아무것도 생산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토지가 희소하다는 것에 의해 자본가와 잉여가치를 나눠 가질 권리를 갖는 것이다. 지대는 생산과정에 외적인 수입의 범주이며, 희소성에만 근거하여 잉여가치를 빼앗는다. 때문에 맑스는 이렇게 단언한다. “자본가와 임금노동자, 이 둘만이 생산의 대리인이다. 토지소유자라는 고대 및 중세에서는 생산에 있어서 이렇게도 본질적이었던 기능자는 산업시대에서는 무용지물이다”(잉여가치학설사).[각주:2] 주지하듯이, 토지의 희소성은 결코 자연의속성이 아니라 토지가 자본에 의해 생산 불가능하기 때문에 희소한 토지의 임대료가 절대적인 것으로서 사회적으로생겨났다(절대지대). 비옥도의 차이에 의한 차액지대는 이 절대적 희소성 위에 있는 상대적인 희소성에 지나지 않는다. 배타적인 소유권이 설정됨으로써 토지는 희소해지는 것이다. 토지가 공유되어 있는 한, 지대는 발생하지 않는다. 본원적 축적과정에서의 종획(엔클로저)’에 의해, 그때까지 농민이 무상의 접근권을 갖고 있었던 공유지가 소멸됐기 때문에 토지는 희소재가 됐다. 공유에서 사유로의 이행이 토지 렌트를 발생시켰다. 그리고 미래에 전망되는 렌트 총액의 할인 현재 가치가 토지의 가격이라고 여겨지게 됐다. 농민을 생산수단으로부터 떼어내 노동력을 의제적으로 상품화한 (자본의 생산물이 아닌 노동력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의제적으로 상품일 뿐이다) 본원적 축적은 동시에 토지라는 또 다른 의제적 상품을 산출한 것이다.

게다가 여기서는 그 역사적이고 원리적인 기원에 대해 묻지 않지만, 이것도 희소한 화폐의 소유권이 대여에 의한 이자(렌트)를 낳는다는 현상은 태곳적부터 존재했다. 신용제도와 주식회사의 발전은 그런 화폐 렌트에 기대하는 자본 소유와, 이윤을 낳는 현장인 자본 경영의 분리를 추진한다. 그러나 분리의 결과는 화폐 렌트(금융적 수입)와 산업 이윤의 차이를 자본이라는 관점에서는 애매하게 할 것이다. 양자는 하나의 자본 소득이 될 것이다. 시장의 작용은 이자율과 이윤율을 균등하게 하지만, 자본가의 수입 속에서, 원리적으로는 토지 렌트와 마찬가지로 생산에 아무런 기여도 하지 않고 생산의 외부에서 가치를 빼앗아 가는 부분(‘이자 낳은 자본’)이 생겨난다. 케인스는 바로 이런 것에 초조해 했다. “오늘날 이자는 어떤 순수한 희생에 대한 보수도 뜻하지 않는다. 이 점은 지대의 경우와 마찬가지이다.”[각주:3]렌트 생활자의 안락사와, 이것에 뒤이은 자본의 희소성으로부터 가치를 착취하는 자본가의 누적적·억압적 권력의 안락사[각주:4]야말로 자본주의에 있어서는 바람직하다. 주식회사의 전반화에 의해, “말하자면 자본 소유가 생산영역으로부터 외부화되고, 토지 소유와 마찬가지로 자본 소유는 노동의 조직화가 실행될 때 아무런 직접적인 기능을 맡지 않고, 잉여가치를 끌어내게 된다”(카를로 베르첼로네).[각주:5] 생산과정에 남는 것은 그저 기능뿐이게 되며, 자본가들은 쓸데없는 인간으로서 생산과정으로부터 사라진다”(자본323이자를 낳는 자본).[각주:6]

이것 자체는 잘 알려진 맑스 이론이다. 그러나 오늘날의 관점에서는 두 가지 점을 확인해 둬야 한다. 첫째, 생산에 직접 관련된 과정의 외부로부터 가치를 빼앗아가는 메커니즘이 자본주의의 초기부터 존재하며, 산업 자본주의 시대에 이미 그 메커니즘이 미치는 범위는 지대에서 자본 자체로 확대됐다는 점이다. 이자를 낳는 자본의 공급원은 모든 수입 범주에 걸쳐 있을 수 있기 때문에, 렌트를 확장하려는 동기는 그것에 의해 더 높아질 수 있으며, 케인스가 우려했듯이 렌트는 산업자본주의의 성장에 잠재적 위협이 된다. 산업자본으로부터 이자를 낳은 자본으로의 전환(생산으로부터의 자본의 철수)을 유발하기 때문이다. 이 위협이 현실화되지 않기 위해서는 산업자본의 성장이 렌트의 확장속도를 상회해야 한다. ‘생산은 모든 수입 범주로부터, 비록 이자를 낳은 자본의 기생을 허용하더라도 자금을 흡수하는 힘을 계속 가져야 한다. 유효수요의 원리와 적자재정 정책의 거시경제학적 의미는 거기에 있을 것이며, 대량생산·대량소비의 포드주의적 축적 체제는 국가를 경유해서 모인 사람들의 자금을 실제로 흡수했다. 케인스 정책에서 국채는 국가의 이니셔티브에 의해 사람들의 미래의 구매력을 이자를 낳은 자본으로 대신하는 장치이며 또 그것을 생산확장에 쏟아 붓고 이윤과 렌트를 공존시키는 구조였다. 산업의 자금 흡수력이 추락했을 때 이 균형은 무너진다. 단순히 무너질 뿐 아니라, 이윤이 아닌 렌트를 요구하는 경향(주식에서 채권으로의 자금의 이동 모건 스탠리가 혁명이라고 부른 현상의 저류에 있는)을 가속도적으로 강화할 수밖에 없으며, 산업의 자금 흡수력을 한층 약화시킬 것이다. 케인스가 우려한 위협이 현실화되는 것이다.

그러나 산업, 즉 노동가치설적으로 보면, 유일한 잉여가치 생산의 현장 이외에, 렌트를 최종적으로 실현시키고 있는 장소가 있을까? 노동이 가치의 유일한 원천인 한, 렌트는 노동이 생산한 가치를 가로채는 것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확인해 둬야 할 두 번째 점은 이것과 관련된다. 원래 렌트는 사적 소유권이 재화를 인위적으로 희소하게 함으로써 발생한다는 점이다. 토지소유가 렌트 청구권을 갖는 것은 토지가 공유재산이 아니게 됐기 때문일 뿐이다. 그러면 자본 소유의 경우는? 화폐는 도대체 어떤 의미에서 희소하며, 어째서 렌트 청구권을 갖는가? 그 대답은 화폐론이 줄 수도 있고 주지 않을 수도 있겠지만, 노동을 원천으로 하는 자본에 있어서는, 더욱이 노동 자체에 있어서도, 대답을 알 수 있다고 해도 어쩔 도리가 없을 것이다. 화폐 소유에 대해 가치를 넘겨주어야 하는 사태를 바꾸지 못하기 때문이다. 렌트를 요구하는 이자를 낳은 자본의 압력은 다른 곳에서 실천적인 해답을 찾을 수밖에 없다. 그것은 단적으로는 노동가치설을 자본이 포기하는 것이다. 노동이 가치를 생산하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라 노동시간이 그 척도라고 보는 원리를 버리는 것이다. 이것에 의해 토지와 마찬가지로 사유(私有) 가능한 공유재산을 한꺼번에 만들어 낼 수 있다. 고정자본에 결합되지 않는 노동 전반에 임금이 아니라 렌트의 청구권을 인정하면 된다. 인간 자체를 이자를 낳은 자본으로 한다고 해도 좋다. 인간의 활동 전반을 공유지화하고, 각각의 활동에 사적 소유권을 인정하고(인간의 민영화’), 모든 활동에 렌탈료를 매긴다. 과거 본원적 축적이 노동을 의제적인 상품으로 했다면, 이번은 노동을 의제적인 자본으로 하는 것. 인간만이 아니어도 좋을 것이다. 그동안 사람들이 무상의 접근권을 가지고 있던 것(수자원, 기술, ‘문화)에 배타적 소유권을 설정하고, 인위적으로 그것들의 희소성을 만들어내고, 렌트 청구권을 인정하는 제2본원적 축적을 행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누구나 잘 알고 있는 현상이 아닐까. 서비스노동은 인간의 활동 자체에 값을 매기고, 그 가격은 비용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렌탈료이다. 문자 그대로 서비스미다 가격이 다른 성산업이 가장 알기 쉽지만, 엄청나게 많은 보수를 받는 기술자라고 해도, 그가 받은 교육을 비용으로서 보수가 산출되는 것이 아니라, 그는 자신의 개발 잠재력을 빌려주고있는 서비스노동자에 지나지 않는다. 나의 신체, 정서적 행동, 지적 능력 등등은 모두, 사회적으로 희소한 나의 사유재산이며, 나는 그것을 판매한다는 형식으로 빌려주고있다. “판매하는것이 의제라는 것은, 서비스가 팔리더라도 나의 재화인 뇌를 포함한 신체는 물질적 재화와 달리 소비=소멸하지 않는다는 점을 생각하면 분명할 것이다. 장기매매 서비스는 정반대처럼 보임에도 불구하고, 인간을 희소재로 간주함으로써 성립하는 점은 마찬가지이며, 단순육체노동조차도 희소한 나의 육체능력을 제공하는 서비스로 간주하는 것이 가능하다(어떤 단순노동도 희소하다). 종종 얘기되는 물질적 노동과 비물질적 노동의 차이는 노동 자체의 특성(육체노동인가 두뇌노동인가)에서 유래하는 게 아니라, 고정자본과 결부되어 상품에 가치를 이전시키는 더하면서 노동이, 그 자체로 일개 자본처럼 간주되는 산 노동인가의 차이라고 생각해야 할 것이다. 아무튼 를 사유재산으로 간주함으로써, 그 활동에 렌트를 발생시키는 것이 가능해지며, 렌트가 정해지면, 미래에 걸쳐서 전망되는 렌트 총액의 현재 할인 가치[각주:7]로서, ‘자체에 토지와 마찬가지로 가격을 매길 수 있다. 무상이었던 인간 자체, 인간의 전체로부터, ‘에워싸이게’(인클로저) 된다. 지적재산권은 그것의 가장 현대적인 한 예일 뿐이다. 이전비용이 기본적으로 0인 지식과 기술과 아이디어는 국가적 제도에 의한 에워싸임이 없으면 상품이 될 수 없으며, 그런 생산비들은 개발자에게 지불한 인적 자본 렌트에 의해서만 계산할 수 있다. 경제학은 상품에 의한 상품의 생산에 있어서 기술을 경제외적 요인, 즉 비용 0으로 가정하고 상품가치를 일의적, 객관적으로 도출했지만, “지식에 의한 지식의 생산에 있어서는, 상품의 가치 자체가 자기 언급적으로만 정해질 뿐이다. “지식은 설령 소프트웨어처럼 패키지화되더라도, 어디까지나, 작업을 자동화하는 서비스나 노하우의 렌탈 상품이다. 미래에 전망되는 이익을 어떻게 현시점에서 평가하는가라는 주관적인 값일 뿐이며, 거의 0에서부터 거의 무한대까지 가능하며, 그 주관적 성격 때문에 끊임없이 변화할 수밖에 없으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번 잠정적으로 정해져버리면, ‘객관적으로 가치가 정해진 물적 상품과 교환 가능한 것이다. 달리 말하면, 주관적 가치에 있어서도, 사물을 지배할 수 있다. ‘경제외적요인이, 경제의 한복판에서 경제적인 위력을 떨칠 수 있다. 지대는 차액지대에 관해서는 수확량에 의한 객관적평가가 가능했으나, 비물질적 노동의 전체로 이루어진 일개 인적 자본에 있어서는, 그 어떤 객관적 가치기준도 없다.

그러나 생각해보면, 토지보다 먼저 인간의 렌탈’이 있었을 것이다. 토지가 공유됐던 시대에도, 혹은 더 오래된, 토지를 점유하는 것에 큰 경제적 의미를 두지 않은 사회에서도, 인간과 그 능력은 대차되었다[빌려주고 빌려왔다]. 양도도 됐다. 인류학이나 종교학은 빌려주다보다 먼저 갚는행위가 인간을 묶고[속박하고] 있었던 게 아닌가라고 시사하기도 할 것이다. 희생제의나 회개의 습관은 근원적인 부채를 진 존재로서 인간의 탄생 순간부터 구속한다. 인간은 우선 갚도록운명지어지며, ‘갚음을 받은누군가(, 자연, 선조 )의 지위를 다른 누군가가 참칭함으로써 빌려준다는 관념이 발생했을 수도 있다. ‘빌려준다가 선행한 것처럼 보이는 포틀래치에서조차도 상환의 의무를 미리 지고 있지 않은 상대에게는 무의미할 것이다. 아무튼 인적 자본 렌트가 지닌 자기 언급성은, 그 너머에서, 결코 객관적으로 근거지을 수 없는 폭력이나 지배의 존재를 암시한다. 근원적으로 비대칭적인, 즉 대차[빌려주고 빌려옴]의 대칭성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우연적 현상을 사후적으로 은폐-정당화-합리화하기 위해 등가성과 희소성의 관념이 도입된 게 아닌가를 시사한다. ‘을 진 사람에게, ‘빌려온것은 희소하며 가치가 있다 하더라도 ‘갚을수 있다고 속삭인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의 법이 요청된 것은, 그런 법 없는 세계가 실재하기 때문이다. “인적 자본 렌트의 자기 언급성은 눈에는 눈의 가치가 있다고 동어반복적으로 말함으로써 가치라는 것을 중지시키며, 뜻밖에도, 희소재의 등가성의 맞은편에 있는 그런 세계 폭력이 우발적으로 응수되는 세계 ― 를 지시한다. 절대지대를 가능케 하는 지대의 희소성은 어디까지나, 인간이 가치 부여되는 역사에 선행되며, 인간의 가치 부여는 비대칭적이고 우연적이고 폭력적인, ‘가치라는 것이 없는 객관세계에 선행된다. , 역사적으로, 어딘가에서 역전이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가치가 노동시간에 의해 객관적으로 결정되며, 그 예외로서 지대가 발생하고, 그것이 인간으로 확장되는 듯한 순서는, 이론적으로 전도되어야 할 것이다. 그것에 의해, 경제적인 것의 역사는 전도의 정치적 역사로서 재기술되어야 할 것이다. 인간과 서비스가 전망에 의해 가치부여되고 교환되는 오늘날, 인류는 함무라비 법전 이전의 세계로 반쯤은 되돌아가고 있다. 등가성이 객관적으로는 정해지지 않은 세계인 것이다. 경제적인 에 의한 등가성의 설정을 기다리고 있는 세계이다.[각주:8] 거기로 반쯤돌아간다는 것은 얼마만큼 가치가 있는지 정해질 수 없는 데도 불구하고, 가치가 있다는 것만은, “인적 자본 렌트사회에 승인시키기 때문이다. 맑스는 등가교환 아래에서 착취를 발견했으나, 착취 아래에서는 오늘날 근거 없는 희소한 가치가 가치 자체를 횡령-수탈하는 세계가 얼굴을 내비치고 있다. 이보다 더 아래에는 벌거벗은 폭력이 지배하는 세계가 있을 것이다. 우리는 가치와 비가치, 등가교환과 등가성의 어정쩡한 교환, ()과 폭력이나 수탈이 특수 역사적으로 혼재-공존-병존하는 시대를 살고 있다. 생산과정의 바깥으로부터 렌트 메커니즘에 의해 가치가 빼앗긴다는 사태는, 즉 역사적이고 초역사적이다.

 


  1. カール・マルクス, 『資本論』第3巻, 大月蓄庖版, 『マルクス-エンゲルス全集』25b, 1130頁. [본문으로]
  2. 같은 곳, 26II, 42頁. [본문으로]
  3. ケインズ前掲, 『雇用、利子および貨幣の一般理論』下巻、一八三頁. [본문으로]
  4. 같은 곳. [본문으로]
  5. カルロ・ヴェルチェッローネ, 「価値法則の危機と利潤のレント化」, A・フマガッリ, S・メッザードラ 編, 『金融危機をめぐる10のテーゼ』, 朝比奈佳尉・長谷川若枝 訳, 以文社, 87頁. [본문으로]
  6. 前掲, 『マルクス=エンゲルス全集』 25a, 487頁. [본문으로]
  7. ‘현재 할인 가치(Present discounted Value)’ 또는 ‘현재 가치(Present Value)’라고 한다. 이것은 어떤 시점의 미래에 받을 가치를 만일 현재 받게 되면, 이것이 어느 정도의 가치를 갖고 있는지를 나타내는 것이다. 가령 1년 후에 100만원을 받는 것이 지금 90만원을 받는 것과 등가라고 느끼는 사람에게는 1년 후의 100만원의 현재 할인 가치는 90만원이다. [본문으로]
  8. 함무라비 법전의 경제학적 독해에 관해서는 칼 폴라니의 『인간의 경제 1 : 시장사회의 허구성』의 6장을 참조. [본문으로]
Posted by 상겔스 상겔스

지금 알튀세르를 열다

アルチュセールを

마토바 아키히로(的場昭弘)나카마사 마사키(仲正昌樹)

정황200312월호


지금 알튀세르를 열다 - 정황 2003년 1-2월호.pdf


 

1. 알튀세르 재부상의 의미

나카마사 : 알튀세르는 맑스의 사상을 현대적으로 혁신했다는 점으로 오래 전부터 알려져 있습니다만, 데리다가 맑스의 유령들을 냈을 무렵부터, 기존의 맑스 연구와는 완전히 다른 맥락에서 7, 8년 전에 갑자기 재부상하게 됐습니다. 데리다를 축으로 하는 포스트모던의 문맥에서 맑스가 다시인기를 끌게 됐는데요, 그 열쇠가 되는 것은 아무래도 알튀세르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데리다는 정치와 우정에서 자신의 탈구축적인 사상의 근원이 알튀세르에 있다고 말했으며, 알튀세르와 자신의 관계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또한 데리다 이외의 현대사상가들도 반드시 어디선가에서 알튀세르의 맑스 독해를 염두에 두고 있으며, 그런 상황에서 맑스의 유물론이란 무엇인가 등의 논의가 전개되고 있습니다.

우선 마토바 씨에게 물어보고 싶은 것은, 알튀세르가 실제로(actual) 활약했던 당시, 맑스 프로파겐더(propaganda)를 하고 있던 사람들 사이에서 그가 어떻게 수용되었는가라는 문제입니다. 그때의 수용되는 방식이란, 주로 데리다를 경유해 수용되고 있는 현재의 방식과는 사뭇 다른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만, 그런 간극에 관해 말씀을 듣고 싶습니다.

 

마토바 : 맑스를 위하여에는 헤겔 신화”(mythe)라는 흥미로운 말이 있습니다. 우리 맑스 연구자의 대부분은, 맑스가 헤겔을 열심히 읽고, 헤겔의 지평에서 헤겔을 넘어서고, 또한 포이어바흐를 넘어서서 다음 단계로 나아간 것이라는 전제에 서 있습니다만, 이것은 옳지 않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맑스는 헤겔적이었는가라는 문제입니다. 알튀세르가 다른 논자를 비판할 때에도 볼 수 있습니다만, 맑스가 헤겔의 논리에 올라타 있다고 한다면, 왜 헤겔의 논리를 넘어서는 것이 가능했는가라는 문제입니다. 관념론인 헤겔을 물구나무 세워서, 그 방법론만을 받아들여 현실적인 문제를 추구한다고 해서는 헤겔을 넘어선 것이 되지 않는다. 헤겔을 넘어선다는 것은 변증법을 포함한 헤겔의 이론을 근본적으로 바꾸는 것이다. 맑스가 헤겔주의자였다면, 맑스가 헤겔의 방법론을 넘어선 논의를 하는 것은 매우 어렵다. 그래서 맑스는 사실상 헤겔의 방법론을 수용하지 않은 것 아니냐는 문제 설정을 하는 것입니다. 맑스는 헤겔을 외부로부터 붕괴시키는 형태로 넘어섰다. 그것이 맑스의 새로움이라는 것이다. 그것은 포이어바흐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며, 맑스는 포이어바흐주의자가 아니라, 포이어바흐를 넘어섰다. 새로운 방법론을 만들어 갈 때에는 이런 형태 밖에는 없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 맑스 연구자에게 헤겔 신화란 헤겔주의자 맑스의 신화이며, “포이어바흐 신화란 포이어바흐주의자 맑스의 신화입니다만, 이런 알튀세르적 관점에서는 우선 맑스에게서의 신화를 얘기하는 접점이 있는 것 아닌가 합니다.

맑스에 대한 알튀세르의 연구 방법은 원래는 몽테스키외 연구의 방법에서 시작됩니다. 우선 왜 몽테스키외는 위대한가?”라고 묻습니다. 알튀세르에게는 문제틀(Problématique)”이라는 개념이 있습니다만, “질문을 어떤 형태로 내는 것인가?”입니다. 알튀세르의 경우 그 패턴은 거의 정해져 있습니다. 예를 들어 어떤 인물을 말할 때, 그 인물이 그 시대에 얼마나 뛰어나고 그 뛰어난 방식의 패턴으로서 그 시대에 있어서 그 시대의 지평을 열어젖힌 인물이었는가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왜 몽테스키외가 위대했느냐 하면, 몽테스키외는 그의 시대에 일반적으로 말해졌던 법 개념을 넘어서는 새로운 제안을 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의 시대까지의 법은, 자연법 체계이든 무엇이든, 결국 권력자 쪽이 준 명령이나 도덕적 체계를 법이라는 말로 이야기하고 있는 것에 지나지 않았다. 그런데 몽테스키외는 그런 명령으로서의 도덕 체계를 수행하기 위한 법을 산산조각 내어 분해하고, 그것과는 관계없는 일반적인 법이라는 개념을 도입했다. 그것을 알기 위해서 몽테스키외는 세계 각지의 법을 분석했다. 중국, 독일 등에서도 각각의 법체계는 일반적인 법이 아니라 개별적인 법이었다. 그것은 권력자가 요구한 개별 도덕moral을 법체계화한 것에 불과하다. 그것을 넘어서는 법체계를 몽테스키외 나름의 문제틀로서 내놨다. 이 문제야말로 새로운 지평으로, 법이 관습과 권력자의 명령에 따르지 않고도 존재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문제틀에 의해 [새로운] 지평을 연 것이 몽테스키외의 위대함이라고 합니다.

마찬가지의 것을 마키아벨리에 관해서도, 프로이트에 관해서도, 레닌에 관해서도 말할 수 있다고 알튀세르는 주장하는데요, 이런 의미에서 알튀세르의 분석은 알기 쉽다. 어떤 인물을 분석할 때 그 인물이 어떤 문제설정을 했는지, 그 문제설정이 새롭다면 새로운 지평을 연다는 게 되는 것이고, 문제를 해결하는 것에 가치가 있는 게 아니라, 문제를 내는 그 제기방식에 가치가 있는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알튀세르 책의 번역은 맑스를 위하여가 인문서원(人文書院)에서 1968, 『『자본을 읽자가 합동출판(合同出版)에서 1974년에 출판됐는데요, 그때 우리가 문제 삼은 말은 인식론적 단절 coupure épistémologique”입니다. 1844년의 경제학철학수고45년부터 46년에 걸친 독일 이데올로기사이에는 단절이 있다는 것입니다. 아마 그 무렵의 우리는 이 단절을 지금 말하는 것처럼 문제틀problematique로서 파악하지 못한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문제설정으로서 맑스는 문제를 냈다. 그 무렵 우리가 문제 삼았던 것은 문제를 낸다는 것이 아니라 문제를 해결했다”, 45년 이후 맑스의 방법은 전부 바뀐 것이며, 거기에 이미 해결이 있다고 파악했습니다. 그렇게 파악했기에, 우리 맑스 연구자들 가운데 알튀세르의 위치는, 마침 그 무렵의 히로마츠 와타루 씨도 그랬다고 생각합니다만, “소외론에서 물상화론으로인지, 혹은 인식론적 단절인지는 별도로 하고, 단절 문제를 해결한 인물로서였다. , 맑스는 헤겔적 물구나무서기를 극복한 인물이었다.

그러나 현재 문제인 것은, 앞서도 얘기했듯이 알튀세르가 스케일이 꽤 크게 문제를 제기하는 방식입니다. 그 제기방식에 물음이 있었지만, 아마 그 당시의 우리는 그런 물음에 대해 이해할 수 없었다.

 

나카마사 : “인식론적 단절의 의의가 소외론과 물상화론의 상관관계와 엮여서 이해되고, “문제계를 찾아내는 것 자체가 중요하다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했다는 것이죠. “현대사상에 있어서는, 곧바로 대답을 내는 이론은 오히려 수상쩍어 보이며, 오히려 문제계를 찾아내는 것이 [높게] 평가받네요. 히로마츠 와타루 씨도 소외론에서 물상화론이라는 식으로, 맑스의 철학에서의 변화를 일종의 발전형으로 파악했습니다만, 반면 알튀세르는 단절이라는 표현을 하고 있는 거죠. 그러나 일본에서 그것을 수용한 사람들은 단절자체로서 파악하는 것이 아니라, 진화를 위한 단절이라고 파악한 것 같습니다만.

 

마토바 : 맑스를 위하여에서 알튀세르가 비판하고 있습니다만, 당시 Recherche Internationale라는 프랑스 잡지에서 소비에트의 연구자가 한 초기 맑스 연구의 번역을 모은 특집이 편성됐는데요, 거기에는 나중에 경제학철학수고의 연구로 매우 유명해진 라핀이라는 인물의 논문 등도 들어 있습니다만, 그것을 비판하고 있습니다. 그 비판의 최대 포인트는, 그들이 발전론적 이해로 초기 맑스, 후기 맑스를 이해하는 것은 안 된다는 것입니다. 알튀세르가 제기하고 있는 단절이란 그런 것이 아니라, 맑스에게는 그때그때 어디로 가는지 모르는 우연적(contingence)인 것이 있었다는 겁니다. 그것을 그는 후방적 회귀(retour en arrière)”라고 합니다. 연구할 때 앞을 향해 회귀하는 것이 아니라, 뒤를 향해 회귀한다. 앞으로 회귀하는 것은, 앞을 향해 발전한다는 것을 전제로 회귀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뒤로[뒤를 향해] 회귀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사상가를 사상가답게 하는 것은 그의 이론사가 아니라 그가 살고 있는 현실이다. 그래서 사상가가 살고 있는 동시대의 현실적 연구를 한편으로 진행함으로써, 맑스 안에서 경제학철학수고로부터 독일 이데올로기로 나아갈 가능성도 발견할 수 있다. 완전히 다른 것으로 갈 가능성도 있다, 그런 가능성을 찾아내는 것이 중요한 것이라고. 그런데 라핀 등은 그것을 이해하지 못했다. 어디까지나 소련 사람들은 후기 맑스 쪽에 입장을 두고 있고, 반드시 자본에 도달한다는 것을 전제에 두고 초기 맑스를 읽어낸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 않다. 알튀세르의 주장은, 아무리 기다려도 후기로 가지 않는 경우가 있다, 그것은 우발적이라는 것이다. 그 사람이 그 시대에 구속되어 있는 이상, 그 인물이 오지 않은 가능성이 있다, 그 가능성을 끌어내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합니다. 그때 맑스 전기를 쓴 오귀스트 코르뉘의 연구가 매우 도움이 됐다고 말합니다. 그런 연구 스타일이 나오지 않으면 다음으로 나아갈 스텝은 없다고. 코르뉘의 책을 읽으면, 맑스는 반드시 자본에 도달한다고는 생각되지 않는, 뭐가 튀어나올지 모르는 우발적인 부분이 있다, 어쩌면 맑스는 전혀 다른 곳으로 갔는지도 모른다. 그런 것을 파헤치는 스타일로 쓰인 것이 오귀스트 코르뉘가 쓴 전기이다. 발전된 후기 맑스로부터 초기 맑스를 보는 것이 아니라, 초기는 초기로서 독립해 있는 것이다.

그러나 초기에는 문제가 있었다. 그것은 초기의 문제설정입니다. 맑스는 문제를 설정했는데도 풀리지 않지요. 그것은 그때까지의 철학으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때까지의 경제학으로는 어떤가 하면, 그 방법론으로도 안 됩니다. 기존의 19세기까지의 지식을 모아 봐도, 이런 도구들로는 아무것도 찾을 수 없다. 거기에서 깊은 심연을 보아버린 맑스는 이로부터 새로운 지평에 들어간다. 그 시대의 사람들의 상당수는 그 시대의 도구를 써서 문제를 설정하고 그것을 해결할 수 있다는 지평에 있는데, 맑스만은 그 시대의 도구로는 미래가 보이지 않는다, 지금까지의 지식을 쓸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그 순간 인식론적 단절이 찾아온다는 것이며, 그래서 답을 낼 수 없게 된다. 히로마츠 씨의 경우는, 물상화라는 형태로 후기가 전개된다고 합니다만, 거기서는 또한 물상화는 맑스에게 무엇인가?”, “물상화에 의해 무엇이 열리는가?”라는 물음이 생기며, 그것에 대해 대답할 책임이 있는 것입니다만, 실제로 대답해 보면 진부한 것이 될 가능성을 지울 수 없다. 그렇지만 알튀세르는 [더 이상] 말하지 않습니다. 맑스는 새로운 방법론을 초조해하면서 만들어냈습니다만, 그러나 결국 그 시대는 고독하고 누구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백년 후, 이백년 후에 처음으로 이해되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그런 것을 당시의 우리는 그가 설정한 도구로는 이해할 수 없는 게 아닌가? 지금의 포스트모던이 제기한 방법론이나 도구를 사용하면 40년 전의 알튀세르의 물음을 이해할 수 있다. 그 당시는 할 수 없었다. 그런 의미에서는 알튀세르도 반쯤은 맑스와 닮은 데가 있습니다.

 

2. 주체/객체 도식과 비가시의 구조

나카마사 : 인식론적 단절을 알기[이해하기] 힘든 이유에는, 맑스주의적인 주체/객체론과의 관련이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알튀세르에 따르면, 맑스는 인식론적 단절전에는 주체/객체의 틀 속에서 사고했습니다만, 단절 이후에는 완전히 다른 틀 속에서 사고하게 되며, 거기서 상부구조/하부구조의 얘기가 나옵니다. 기존의 맑스 이해에서는, 상부구조/하부구조가 주체/객체의 틀의 연장선상에서 이해되고 있던 게 아닐까요? 이마무라 히토시(今村仁司) 씨 등도 지적했듯이, 알튀세르는 주체/객체 관계가 구조속에서 생기는 것이지, 주체/객체 중 어느 쪽이 먼저냐 하는 문제의 제기방식으로는 구조를 둘러싼 문제계는 보이지 않는다. 기존의 맑스 이해에서는 하부구조 결정론이 제창되고, “하부구조라는 객체”, 저쪽에 의해 규정된다고 간주됐다. 역사적으로 봐서, 하부구조=객체결정론적인 맑스주의 이해는 언제 무렵부터 지배적이게 됐을까요?

 

마토바 : 19세기 말, 당시 사회민주당 사람들이 가장 많이 읽은 책은 엥겔스의 반뒤링론입니다만, 그것을 경유해서 맑스로 갔습니다. 반뒤링론을 읽게 된 것이냐 하면, 그것 이전에 다윈의 진화론을 읽고, 모두 공부모임을 열었다. 그 연장선상에서 맑스가 읽혔습니다만, 맑스까지 도달한 사람은 적었다. 졸저 미완의 맑스(未完のマルクス)(2000)에서 언급했습니다만, 당시 사회민주당 안에서는 맑스 자신의 저작이 거의 읽히지 않았으며, 맑스에 관한 책, 특히 반뒤링론이 읽혀졌다. 그 즈음부터 그런 하구부조의 우위성이라는 생각이 나온 게 아닐까 생각합니다.

유물사관이 하부구조가 상부구조를 결정한다는 식으로 이해되는 반면, 알튀세르는 중층적 결정(surdetermination[과잉결정])”이라는 개념을 냄으로써 새로운 사고방식을 열었습니다만, 그 알튀세르조차도 최종심급에서의 결정”(dernière instance)이라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심급도 고육지책의 번역어라고 생각합니다만, 그 경우의 경우라는 의미입니다. 이러저러한 경우가 있지만, 마지막 경우에서 정하는 것이 최종심급이라고 한다면, 뭐라 말하든 아무래도 최종심급은 경제적 하부구조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최종이라고. 맑스를 위하여에서 엥겔스에 대해 언급하고 있습니다만, 엥겔스도 그 언저리에 관해 고민하고 있고, 하부구조가 결정하는 경우는 어떤 국면에 한정되어 있다, 실제로는 그렇지 않고 다면적이라고. 우리는 오히려 엥겔스보다도 맑스의 경제학비판서설에 나오는 그리스시대는 그토록 생산력이 낮았는데도 왜 그토록 문화가 꽃피웠는가라는 질문을 생각해냅니다. 그런 물음을 제기하면서, 그 한편으로 하부구조가 상부구조를 결정한다고 말한다. 이 모순을 어떻게 생각하면 좋을까? 이 의문은 사실 엥겔스도 갖고 있었다. 경우를 나누어 치밀하게 논의하는 것이 이뤄지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 당시의 우리가 이해한 알튀세르의 공헌은, 하부구조/상부구조라는 아주 대략적인 논의에 대해, 경우 경우에 따라 역전되는 경우도 있고 또 하부구조가 결정하는 경우도 있으며, 그 경우를 나눠서 전개한 것입니다. 역시 알튀세르가 알튀세르인 곳, 달리 말하면 그가 스스로를 맑스주의자라고 자칭하는 까닭은, 마지막에서는 경제가 우월하다고 주장하는 곳입니다. 역시 그는 거기서 유물론자로서 논진을 펴고 있습니다. 알튀세르는 19세기부터 20세기에 전개된 프랑스의 사상은 당치도 않다고 생각한다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베르그손부터 시작되어 이윽고 포스트모던으로 연결되는 철학은 직관 등등을 주장하는 관념론이기 때문이라고. 왜 유물론 철학은 발전하지 못했는가? “나는 그런 흐름에 대해 유물론 철학에서 노력한다고 말한다. 알튀세르는 대부분의 세밀한 논의 속에서는 유물론적 결정을 버리고 있지만, 최종심급을 주장하는 한에서 최후의 유물론자로서 그 성채를 지키고 있다고 말할 수 없을까요?

 

나카마사 : 이렇게 생각하면, 맑스도 후기가 되어서도 주체/객체 도식을 완전히 넘어서지 못하고 질질 끌려가는 부분이 있다는 게 되죠. 맑스 자신이 주체/객체의 이미지를 상부구조/하부구조에 덧씌우고 있는 곳이 있으며, 그것을 알튀세르 자신도, 이마무라 씨는 완전히 분리하고 있는 듯한 설명을 하고 있습니다만, 마지막 부분에서는 질질 끌고 있다는 것이네요.

 

마토바 : 그렇다고 생각합니다. 베르그손에서 시작되어 사르트르까지 이어지는 프랑스의 철학의 흐름은 관념론적인 곳으로 갑니다. 반면, 한편으로 포스트모더니즘 속에서 유물론자로서 마지막까지 성을 지키는 이 고고함이 없다면 아마 알튀세르는 알튀세르로서의 논진을 펴지 못하지 않았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알튀세르는 포스트모던적인 논의 속에 끌려들어가는 것입니다만, 다만 자신의 위치를 유물론이라는 곳에 두고 있고 그로부터 벗어나지 않는다. 그러나 이 유물론은 최종심급(최후의 경우)에서의 그것이지, 그의 전체는 거기에는 없습니다.

 

나카마사 : 알튀세르는 구조라는 추상적인 말을 쓰고 있습니다만, 거기에는 역시 하부구조라는 면이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도, 그런 그의 구조이해를 살릴 수 있다고 한다면, “구조의 의미가 기존의 하부구조와는 꽤 다르다는 점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기존의 맑스주의에서 이미지된 하부구조는 중공업을 중심으로 한 공장에서의 노동에 종사하는 프롤레타리아트존재와 결부되어 있었습니다만, 알튀세르의 구조, 아무래도 그것으로만 수렴되는 것 같지는 않아요. 『『자본을 읽자에서 제자 랑시에르가 있습니다만, “구조를 형성하고 있는 관계성은 비가시의 X”적인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하부구조는 조사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비가시적인 것으로, 인간들이 보면 우연성을 포함한 것 같다. 그런 관점을 알튀세르가 냈다고 하는 것은 [높이] 평가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만.

 

마토바 : 최근 유고집 번역이 조금씩 출판되고 있는데요, 그 안에 불확정적인 유물론(1988)이라는 번역서가 있습니다(또는 철학에 대해, 1994). 바로 그 제목이 그렇죠. 그가 살인사건을 일으켜 공개적으로 글을 내지 않을 때 멕시코의 여성 연구자 페르난다 나바로와 서신교환한 것이 편집, 출판된 것인데요, 이 안에서, 확정되고 명확하게 알 수 있는 유물론이 아니라, 사뿐사뿐[훨훨 날아] 움직이는 우발적인 것에 올라타는 유물론이 기술되어 있습니다. 이런 것은 나중에 바뀐 것이 아니고, 아마 60년대부터 줄곧 갖고 있고, 그저 우리가 그것을 이해할 여유가 없었고 [그럴] 도구도 없었는지도 모릅니다.

또 하나는 국가의 이데올로기 장치[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appareils Idéologiques d’Etat)라는 용어가 있습니다. 중층적 결정[과잉결정]을 하는 가운데, 문화적 이니셔티브를 국가 나름에 있어서, 눈에 보이지 않는 형태로 우리의 사상 행동을 결정해간다. 이런 용어에 의해 당시는 유물론적 철학 속에 설명할 수 없었던 것을 잘 설명했다. 단순하게 생각하면, 국가의 이데올로기 장치[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라는 개념은 60년대, 70년대와 시간이 지남에 따라 혁명운동이 쇠퇴하는 가운데, 그 원인을 묻고, 말이 궁색해졌을 때 이용하는 아주 편리한 말이었던 게 아닐까 생각합니다. 이 개념에 대해 설명한 책이 니시카와(西川) 씨 등에 의해 번역된 것은 1975년이라고 생각합니다만, 현재에는 이 개념을 재생산에 대해(1995)에서도 읽을 수 있습니다. 이런 개념을 사용함으로써 매우 자세하게 논의했던 것과 동시에, 한편으로 문화연구자들에게 큰 영향을 줬다. 문화가 어떻게 그 시대의 지배구조에 편입되는가, 단순히 편입된다고 말할 뿐이라면 그 자체로 결정론이 되는 것입니다만, 거기서 매우 자세하게 분석해야만 한다. 문화연구에서 하는 하위문화는 국가의 이데올로기 장치[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로부터는 인정받지 못한 미공인의 문화입니다. 이 미공인의 문화가 하위문화인 것은, 정통적인 문화가 국가의 이데올로기 장치[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에 의해 정해지기 때문입니다. 스튜어트 홀은 영국에 충분한 이론이 없기에 알튀세르를 열심히 읽고, 이론을 알튀세르로부터 빌려왔다고도 말하고 있습니다.

 

나카마사 : 알튀세르는 구조를 통해 중층적으로[과잉] 결정되어 있다고 주장함으로써, 생산력으로 전부 결정된다고 하는 스탈린주의적인 조잡한 논리와는 일단 거리를 둔다. 이와 동시에, “휴머니즘적인 맑스주의와도 거리를 두고 있다. 알튀세르는 양동작전을 편 것입니다. 프랑스공산당의 주류파, 즉 유로코뮤니즘 중에서는 가장 소련에 가까운 사람들에게 대항할 때는, “구조를 통한 중층적 결정[과잉결정]”을 주장하고, 그 반대의 극에 대해서도 거리를 둔다는 전략이라고 생각합니다만, 이런 전략을 어떻게 평가하십니까?

 

마토바 : 알튀세르는 휴머니즘 비판을 했습니다만, 사르트르를 중심으로 한 프랑스 전후의 계몽의 흐름에는 두 가지가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는 맑스주의입니다. “맑스주의는 넘어설 수 없다고 사르트르는 말합니다. 다른 하나는 휴머니즘입니다. 맑스주의와 휴머니즘은 68년 혁명까지는 전후 세계를 지배하던 기본 원리입니다. 이것은 절대로 넘어설 수 없다. 인권을 지킨다고 하는 게 휴머니즘이며, 그 공격 지점은 소련의 수용소이며, 혹은 나치 시대의 수용소입니다. 이에 대해서는 좀체 비판할 수 없다. 다른 하나는 맑스주의입니다. 근대주의는 잘못되지 않았다. 근대가 나치를 산출했다고 하지만, 그렇지 않다. 나치가 생겨난 것은 근대가 도착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생각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제2차 대전이 끝난 후에는 근대를 더욱 철저하게 하면 나치와 같은 체제는 일어나지 않는다, 그리고 근대를 가장 철저하게 한 것이 맑스주의이다, 맑스주의는 근대라는 전제 위에 서면 완성 형태로서 우리의 행복을 실현하는 것이라고 생각됐습니다. 이 두 가지 흐름을 접목하고, 당시 지적 세계를 지배한 사르트르는 무적입니다. 그것에 대해 서서히 결함이 보이게 됐다.

알튀세르도 자신의 입장을 제시했다(포지션, 1976). 맑스주의가 갖고 있던 근대주의의 꿈을 산산조각으로 깨뜨렸다. 근대주의는 생산력의 발전에 의해 우리의 생활이 좋아지며, 이와 동시에 미래를 약속해준다는 사고방식을, 중층적 결정[과잉결정] 등의 개념을 제출함으로써 알튀세르는 뒤집어버렸다. 이것은 맑스주의에 대한 비판입니다.

다른 하나는 휴머니즘에 대한 비판입니다. 존 루이스에게 답함(1973)이라는 저작이 있습니다만, 존 루이스는 맑스 연구자 중에서 그다지 유명하지 않지만, 왜 알튀세르가 그를 거론했느냐 하면, 이런 속류적인 인물을 거론함으로써 맑스주의의 본질을 폭로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참고로 알튀세르는 이 존 루이스에게 답함을 사용해 이듬해의 강의를 합니다만, 그 강의의 내용에 대해서는 아까도 이름을 거론한 랑시에르가 알튀세르의 교훈(1974)을 씁니다. 이 존 루이스가 맑스주의적 휴머니즘의 전형이며, “맑스주의는 휴머니즘이다고 주장한다. 반면 알튀세르는 맑스주의가 휴머니즘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만일 맑스주의가 휴머니즘이었다면, 철저한 인간주의이고, 맑스의 자연관은 여기서 무너져버린다. 학위논문이나 경제학철학수고의 글을 잘 읽어보라고. 인간은 자연에 작동을 가하지만, 자연도 인간에게 작동을 가한다. 자연과 인간은 일체가 되어 있으며, 인간이 자연에 일방적으로 영향을 주는 인간주의일 뿐인 게 결코 아니라 서로 영향을 준다. 이를 맑스가 몰라서 인간주의에 빠졌다고 한다면, 맑스의 저작들은 설명되지 않는다. 잘 읽으면 그런 것을 알 수 있지만, 많은 사람들이 휴머니즘이라는 말로 인권 등의 사상을 맑스주의 속에서 읽어내고 싶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맑스주의는 휴머니즘을 극복하겠다는 더욱 큰 관점을 갖고 있으며, 자연 속에 인간을 두고 또한 인간을 자연 속에 포함시킴으로써 지금까지의 근대주의가 빠져 있었던 아포리아를 극복하려고 생각했기 때문에, 만약 맑스주의가 휴머니즘이었다면 이렇게 시시한 사상은 없는 것이라는 형태로 비판합니다.

이런 양동작전으로 전후의 사상을 만든 맑스주의와 휴머니즘이라는 양대 조류에 대해 한 방을 먹였다. 이것이 만약 완벽한 비판이 됐다면, 사르트르를 하나의 대표로 한 전후의 많은 사상이 결여하고 있고 이로부터 노도(怒濤)처럼 68년을 향해 새로운 사상이 나올 가능성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알튀세르는 기본적인 부분에서 그런 방향으로 나갈 준비를 했을 뿐이었습니다. 아마 그 작업은 푸코나 데리다에게로 이어졌던 것입니다.

 

3. 휴머니즘과 맑스에게서의 자연

나카마사 : 현재에는 데리다 등이 서구적인 인간성개념 자체가 문제라는 입장을 분명하게 표명하고 있습니다. 인간성의 유형을 만든 뒤, 이를 지키려고 하는 논의를 전개하는 휴머니즘의 한계를 지적하고 있습니다. “데리다가 말하기때문에 별다른 저항감이 없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만, 현대사상에 있어서는, 보통 얘기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70년대 전후의 시기에 인권사상이나 인간성이라는 생각 자체를 해체하는 방향을 노골적으로 내세웠다면, 아마 상당히 떴을 겁니다. 당시에는 이런 주장이 맑스주의의 맥락에서는 매우 통하기 힘들었다고 생각합니다만, 그것을 알튀세르는 굳이 한 겁니다. 일본에서는 아마 그 면이 수용되지 않았다고 생각합니다만.

 

마토바 : 그렇다고 생각해요. 지금도 그렇습니다만, “나는 휴머니스트가 아니다라고는 말하기 힘드네요. 마찬가지로 맑스주의 안에서 맑스주의는 휴머니즘이 아니다고 말하는 것도 어렵네요. 그것은 휴머니즘 안에는 보편적인 것이 있다는 환상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 환상이 깨지는 것은, 자연환경 문제에서 보이듯이, 자연에 대해 인간의 힘이 너무 커지는 가운데, 인간 자체가 지닌 자연성이 강조되기에 이른 시대, 구체적으로는 70년대 이후군요, 그런 시대가 되어서 처음 말한 것입니다. 그 전에는 대놓고 말하지는 못했습니다. 또 스탈린이 한 격렬한 탄압에 대해 인간으로서 용서할 수 없는, 소련인들은 인권을 빼앗기고 있다는 비판이 있고, 그에 대해 소련인들은 자신들도 인간주의를 취하고 있다고 말하고, 둘 다 인간주의가 기본이 됐으며, 그 안에서는 반인간주의를 말하기 힘들었다고 생각합니다. 그 안에서 인간을 넘어서 자연으로. 과거의 학위논문이나 초기논문의 독해에서는 인간주의가 암묵적인 전제가 되고 있으며, 맑스의 자연 개념을 슈미트가 써서 일본에서도 그것이 자주 읽히고 있습니다만, 어떤 의미에서는 놀랍고 새로운 발견이었습니다. 맑스의 인간 개념에 관한 책은 지천에 널려 있고, 그것이 일반적이었다. 반면 맑스의 자연 개념이 이해되기에 이른 것은 70년대 이후부터입니다. 이것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는지가 현재의 맑스주의자 속에서 문제가 된다. 이것을 잘 이해할 수 있는지가 알튀세르의 문제틀problematique을 이해할 수 있느냐 아니냐의 관건이 되지 않는가 싶습니다.

 

나카마사 : 그때의 자연이란 이른바 객체로서의 자연이 아니라, 우리의 인간적인 시야를 통해 인식할 수 있는 부분으로 회수될 수 없는, 대문자의 자연이죠. 그 부분도 여전히 그다지 이해되지 않았네요. “자연이라고 하면, “객체로서의 자연이라고 지레 짐작되고, 곧바로 노동과 결부됩니다. 인간이 자연으로서인식하고 있는 것은 사실상 자연이 아니며, 인식할 수 없는 외부에 있는 것이 자연이며, 그것과 어떤 식으로 우리가 관계를 맺고 있느냐 하는 것이 경철수고에서도 문제가 됩니다만, 그런 부분이 길다는 것, 그때까지도 인식되지 않았다. 그러나 알튀세르는 눈여겨보고 있었다.

 

마토바 : 저는 그것을 부재”absence, 혹은 침묵”silence이라고 말합니다. 알튀세르가 확장한 영역의 하나는 정신분석입니다. 그는 정신분석에 흥미를 갖고 있고, 에콜 노르말을 나와 거기서 강사(사감, 비서)를 하고 있을 때 처음으로 영향을 받은 것은 폴리체르(Politzer)라는 정신분석학자입니다. 그리고 몽테스키외에 관한 책을 쓴 몇 년 후에 에콜 노르말에 라캉을 불러와서 정신분석 강의를 하게 합니다(1963-4). 알튀세르가 문제 삼은 것은 정신분석이라는 학문은 성립하느냐 아니냐?”라는 문제입니다. 정신분석은 우리가 의식하지 못한 부분, 즉 인간이 갖고 있는 우리가 전부 알고 있다라는 곳에서부터 누락된 부분, 즉 무의식을 문제 삼는다. 이 부재의 부분을 학문으로서 성립하게 만드는 것은 큰 일입니다. 그래서 프로이트는 오해됐다, 프로이트는 19세기에 그것을 예감했지만, 당대 사람들은 자신들이 인식할 수 있는 수준에서만 논의를 하고, 인식할 수 없는 학문은 학문이라고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에, 프로이트가 쓴 것은 학문으로서 간주되지 않는다, 이른바 사이비학문이라고 생각됐다. 이 사이비라고 생각됐던 것을 학문으로서 인식할 수 있게 한 것은 라캉이며, 바로 라캉에 의해 부재 문제가 학문적인 것으로서 제기될 수 있게 됐다. 그런 곳에서 라캉을 매우 높이 평가하는데, 또 다른 선구자로서의 프로이트에게도 의의가 있다. 우리가 인식할 수 있는 것과는 다른 수준의 문제로서 이 세계에는 우리에게는 알 수 없는 것이 있다. 그 안에서 우리는 홀로 뒹굴고 있을 뿐이다. 뒹굴고 있는 우리의 주위를 에워싸고 있는 우리의 알 수 없는 것이 자연이죠. 이런 사고방식이 알튀세르에게 떠올랐던 이유는 정신분석의 영향입니다. 그것은 푸코에게도 도착한 1950년대에 에콜 노르말에서 배웠던 사람들의 방향이었던 거죠. 다만 이런 것은 우리가 처음으로 알튀세르의 책을 읽었을 때에는 이해 못했던 겁니다.

 

나카마사 : 마르쿠제도 프로이트의 정신분석을 꺼내들었습니다만, 마르쿠제 본인이 그렇게 주장했는지 여부는 별개로 치고, 마르쿠제를 경유한 맑스와 프로이트의 결부에 있어서는, “무의식이라는 것이 어느새 자연충동같은 것이 되어버려서, 자연과학적으로 인식할 수 있는 인간의 숨은 욕망으로 해석되었습니다. 프로이트 자신에게도, “무의식을 자연과학적으로 기술하는 곳도 있기 때문에, 하는 수 없었는지도 모릅니다만, 그것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는 프로이트 이해였다고 생각합니다. “억압된 자연충동해방한다는 형태로, 맑스주의적 객체결정론의 맥락에 올라탄 것입니다. 이것이 독일, 미국을 경유해 일본에도 들어왔습니다. 알튀세르의, 라캉을 경유한 프로이트 이해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자아에게 있어서 완전히 이질적인 타자라는 것을 전면에 내세우면, 마르쿠제 경유의 이해와는 완전히 다르죠. 이것이 구조개념에도 반영되어 있습니다.

 

마토바 : 그렇군요. 프로이트가 오해된 부분은 또한 프로이트가 살아남을 수 있는 부분이기도 합니다만, 리비도 즉 억압된 성, 잠재의식은 새로운 인간이 재구성되기 위한, 승화되기 위한 수단이 된다. 그러한 잠재의식을 극복함으로써 인간은 성장한다. 억압된 잠재의식을 해방한다는 방향을 향하는 프로이트 해석에 대해, 그런 것은 해방도 뭣도 아니고 마치 바다처럼 우리 속에 확산되고 있는 부재의 영역에 지나지 않는다는 생각도 있다. 그 부분이 스피노자와 관련되는 대목입니다. 인간이 모르는 지식은 많이 있고, 그 속에서 우리는 그 일부만을 알려고 한다. 그것에 의해 이 세계를 해석한다. 그러나 실제로는 모르는 영역이 많이 있다. 그런 영역이 있다는 것을 이해해야만 한다. 여기에 알튀세르와 스피노자가 상통하는 대목이 있는 게 아닐까.

그런 발상의 계기로서 프로이트가 있었던 것과 동시에 마키아벨리가 있습니다. 마키아벨리의 고독(마키아벨리의 고독, 1998년 수록)이라는 논문이 있는데요, “왜 마키아벨리는 고독한가?” 문제설정으로서는 방금 전의 것과 같습니다만, 마키아벨리는 군주제 국가의 모습이 일반적인 국가의 모습이라고 생각됐던 시대에 군주제 국가를 넘어서는 일반적인 국가를, 군주제 국가도 잘 되고 있지 않은 이탈리아에서 생각하려고 했다. 군주는 국가를 만들었을 때, 거기에서 민주제를 실현하고, 마침내 군주는 그로부터 떠나지 않으면 안 된다. 1400년대부터 1500년대에 걸쳐 마키아벨리가 생각하는 이런 국가를 이해할 수 있는 군주는 없었다. 바로 마키아벨리는 군주로부터도 포기되고 고독했다. 17세기의 스피노자도 마찬가지로 새로운 지평을 엶으로써 고독했다.

이런 분석 패턴은 알튀세르의 인물 연구에서 공통적으로 보이는 패턴입니다. 각각 그 시대의 획을 긋는 사상가의 사상은 그 시대에서는 이해되지 않는다. 이해되지 않는 것을 썼기 때문에, 그 사상을 이해하는 것은 다음 세대의 사람들이다. 그 사상가가 말하려고 했던 것은 그 시대의 말로는 표기할 수 없는 것, 즉 쓰이지 않은 것, 쓰고 있는 것 속에서는 보이지 않는 것, 쓰고 있는 데도 그 시대에는 독파되지 못한 것이다. 행간 속에 있는 부재의 부분을 읽어내는 것이 새로운 시대의 사람들의 작업이며, 이 독해를 한 손으로 받아들인 것이 알튀세르라는 그 사람 아닐까요.

 

4. 징후적 독해의 고독

마토바 : 알튀세르는 맑스 속에서, 맑스가 썼지만 읽히지 않았던 것을 오로지 읽고자 했다. Pour Marx(1965), 옛날의 일역본 제목은 되살아난 맑스(るマルクス)였습니다만 정확하게는 역시 맑스를 위하여이죠. 알튀세르는 바로 맑스를 위해 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 있다고 선언하기 위해 이 책을 썼으니까요. 독파되지 못한 부분이 앞서 말한 부재의 부분입니다. 많은 사상가는 까닭 모를 것을 많이 남겼으며, 그 부분이 이해되기를 기다리고 있다.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우리는 지금까지 인식하지 못했다. 인식할 수 있는 것을 인식하고 이것으로 맑스를 이해했다는 기분이 들었다. 문제는 그로부터 넘쳐흐르는 것을 어떻게 해야 하느냐라는 알튀세르의 문제틀입니다.

 

나카마사 : 맑스 자신도 보통의 주체의 의식으로는 인식할 수 없는 부분을 이데올로기라든가 하부구조라는 개념을 갖고 설명하려 했습니다. 다만 그런 맑스 자신도, “그의 시대의 문제계를 질질 끌고 있었기 때문에 딱 잘라 표현할 수 없었다. 표현할 수 없으며, 맑스 자신도 몰랐던 부분, 바로 무의식의 부분이, 그가 쓴 것=에크리튀르 속에 나오는 것을 알튀세르가 징후적 독해로 읽어낸다. 알튀세르는 맑스의 의도를 재구성한다는 맑스 이해는 부정합니다만, 그렇다면 거기에서 읽어내야 할 것을 읽어낸다는 생각은 과연 있었을까? 데리다라면 읽어내야하는지 여부는 아무래도 좋고, 이쪽이 멋대로 읽어냈다는 것이 됩니다. 알튀세르는 거기까지는 가고 있지 않는 것 같습니다.

 

마토바 : 징후적 독해(lecture symptomale)『『자본을 읽자(1965)의 서두에 있는데요, 이것은 지금도 사용하는 말로, 1960년대부터 활발해진 언어학의 영향을 받은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징후적 독해에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어떤 것을 비판할 때, 그 사람이 말하려고 하는 것을 그 사람 자신이 알지 못하고 그것을 꺼내든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그 사람이 말하고자 한 것이나 말하고자 하지 않은 것도 포함해, 전혀 그것과는 관계가 없이, 요컨대 그 사람이 전혀 알고 있지 못한 것(그 사람에게 부재한 것)을 우리가 읽어 들인다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후자이며, 저자가 말하고 싶은 것과 말하고 싶지 않은 것을 넘어가서 새로운 시대에 태어난 독자가 그 본질을 끄집어내려고 하는 것입니다. 바로 장인의 기술입니다만, 문제는 알튀세르가 맑스의 작품에 관해 각각 세세하게 했느냐 하면, 의문입니다. 공산주의자 선언에 대해서도, 독일 이데올로기에 대해서도 징후적 독해를 한 것은 아니다. 유일하게 자본뿐입니다. 그것도 징후적 독해라는 추상적인 방법론을 제시했을 뿐입니다. 독일 이데올로기경철수고에 대해 징후적 독해를 하면 어찌 되느냐를 알고 싶습니다만, 결국 그 언저리를 빙빙 돌고 있을 뿐이고 내용까지 들어가지는 않았습니다. 그런 의미에서는 알튀세르는 새로운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만, 다른 한편으로 맑스의 개념들에 대한 그의 독해방식으로서는 징후적 독해를 살리지 못하고, 그 시대의 맑스주의자들과 다르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나카마사 : 알튀세르는 사상적철학적 에크리튀르와, 문학이나 일반인이 쓴 것을 구별했습니다. 데리다는 공산주의자 선언속의 Gespenst요괴가 아니라 유령이라고 읽을 수 있다는 것에서부터 논의를 전개합니다만, 데리다가 하고 있는 것을 맑스 자신이 의식했다고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습니다. 데리다는 맑스의 시대에 Gespenst라는 말이 어떤 사회적 외연을 갖고 있었는가라는 곳까지 문맥을 넓혀가고, 그로부터 자기 나름의 독해를 확대해 간다. 그에 비해 알튀세르는 그런 독해방식에 대한 아이디어를 냈지만, 스스로는 그런 읽기를 실천할 수 없는 바가 있네요. 견딜 수 없기 때문에, 중요한 곳에서 해묵은 논의를 또 다시 꺼낸다. 가장 중요한 점이 이해되기가 어렵다는 것인 양 스스로 고안해내고 있는 부분이 있네요.

 

마토바 : 알튀세르는 맑스의 개별 저작에 대한 독자적인 해석은 없습니다. 알튀세르는 맑스를 1845년까지의 초기 맑스, 그 이후 경제학비판까지의 성숙해지고 있는 맑스, 그리고 성숙한 맑스, 이렇게 셋으로 나눕니다. 이 나누는 방식은 매우 당연한 분류입니다. 만일 우리가 알튀세르를 위해하려고 한다면, 그것은 그의 문제제기를 맑스의 세 가지 시기구분에 한정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19세기의 맑스가, 19세기를 갑자기 뛰어넘어 21세기, 22세기까지 가서, 새로운 방법론을 제기하고 스스로도 까닭을 알 수 없게 되어버린 것을 발견한 알튀세르를 이해하는 것이다. 이런 것은 맑스주의자들이 논하기보다는 훨씬 더 넓게 철학자가 논의하는 편이 좋다. 세세한 부분에서 맑스의 저작에 대해 알튀세르가 새로운 전개를 했다고는 말할 수 없습니다. 그러니까 거기에 알튀세르를 위치시켜도 의미가 없다. 굳이 그의 인식론적 단절을 비약하여 해석하고, 인식론적 절단 이후의 맑스는 공산주의자 선언이나 자본이라는 수준에 머물러 있지 않았고, 더욱 날아올라, 21세기나 22세기에 있어서 새로운 문제설정을 하고 있는 맑스라고 말해 본다면 어떨까? 이쪽이 더 살아있죠.

 

나카마사 : 그 부분이 좀체 이해되기 어렵네요. 알튀세르는 절반은 맑스 해석자의 틀을 넘어 새로운 문제계를 세우고 있지만, 기존의 맑스주의의 스타일을 채용한 탓에, “새로운부분이 좀체 이해하기 어렵다. 또한 자주 얘기되듯이, 그 자신이 공산당에 집착하고, 공산당 주류파와 그토록 대립했지만, 공산당에 계속 남았다. 68년 혁명 이후, 그토록 데데하고 시시하다고 말해지는 공산당에 힘썼기에 그가 스탈린주의적으로 이해되고 말았다. 반드시 실제의 정치적 행동이 스탈린주의가 아니었다고 생각합니다만, 당과의 관계에서 그렇게 파악되어 버렸다, 그렇게 처신해버립니다. 그가 당에 집착한 것은 그의 맑스주의관에서 도출된 것인지 아니면 그런 수준에서의 얘기가 아니라 단순히 정치적인 인간관계인지, 그 언저리를 알기 어렵습니다만,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마토바 : 어려운 부분이네요. 미래는 오래 지속된다(1992)에서 그는 자신의 인생을 얘기한다. 오랫동안 수용소 생활(1940-5)을 보내며, 여기서 돌아와서 에콜 노르말에 복학하고, 거기서 엘렌느라는 여성과 서로 알게 됩니다. 그 전에 가톨릭의 어느 쪽이냐 하면 우파에 가까운 운동에 참여합니다. 1946년 로마로 가서 당시의 교황 피우스 12세를 알현하기도 합니다. 그것은 특별한 얘기가 아니고, 조금 전의 세대에게는 악시옹 프랑세즈같은 단체에 들어가면서, 오른쪽으로 가거나 왼쪽으로 가거나 하는 사람들이 있어서 특별한 일이 아닙니다. 이 무렵 엘렌느에게 듣고서 공산당에 갑니다만, 꽤 흔들리는 부분이 있다. 이 부근은 부땅의 알튀세르 전기(1992)에 자세하다. 그의 공산당 입당은 어느 정도 확신적이었는지는 모릅니다. 거꾸로 들어감으로써 그의 당에 대한 충성은 그것을 정당화하기 위해, 현실 수준보다도 이론 수준에서 순화하고 있다. 이론 수준에서 귀의해간 것이 아닌가. 그러나 그것도 문제인 것은, 그 자신이 말하고 있듯이 사람의 보이지 않는 부분을 어떻게 이해하는가입니다. 30년 전과 달리 현재에서는 알튀세르의 인생에 대해 많이 알게 됐다. 예전에 저는 너무 강조했습니다만(알튀세르와 맑스アルチュセールとマルクス, 情況, 11월호, 1999), 그에게는 겉의 세계와 속[]의 세계가 있고, 속의 세계란 복잡한 여성의 문제이며 겉의 세계란 공산당의 문제입니다. 거기에 중층적인 구조가 있으며, 이 구조 속에서 알튀세르를 보면, 무엇하나 결정할 수 있는 것이 없다. 남녀관계를 보면, 기존의 도덕으로 보면 괘씸한 남자로, 흔들리고 있다. 한편으로는 당으로의 귀의라는 대목에서는 매우 성실하게 오랫동안 당원생활을 보낸다. 이 낙차이죠. 에콜 노르말의 수업도 할 때에는 확실히 하지만, 갑자기 정신병원에 들어가거나 애인한테 간다. 발리바르 등이 본 교사로서의 그는 뛰어난 교사인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잘 하느냐 하면 갑자기 어딘가로 가버리는 변해버린 교사였다. 이런 이중성 속에서 그의 공산당을 자리매김해야 한다. 이론적으로 생각하면, 본래는 떠나가고 있고, 흔들리고 있는 인간상에서 봐도 떠나가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마지막까지 떠나지 않았다. 그것이 인간이겠고, 바로 그가 말하는 불확정적인 유물론, 불확정적인 요소이겠죠. 이 사람만큼 사후에 겉과 속이 사라지고, 모두 폭로되어 버린 학자는 없다고나 할까, 바로 불확정적인 부분이 없고, 유물론적인 결정을 할 수 없는 인물은 없다. 이상하게 표현하자면, 삶의 방식 자체가 포스트모던적입니다.

 

나카마사 : 알튀세르는 국가나 문화의 이데올로기성을 논하는 대신, “이 어떤 것인지를 직접적으로는 논하지 않고, 이것과는 별도의 틀에서 다루는 것 같아요. 이것이야말로 은 그에게 있어서 비가시적인 구조였는지도 모릅니다만, 당에 대해 종교적으로 귀의하고 있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습니다.

 

마토바 : 그에게는 에콜 노르말에 있었을 때에 푸코 등을 공산당에 넣은 책임이 있습니다. 푸코 등은 나갑니다만, 알튀세르는 머물러 있었습니다만, 그런 의미에서는 책임을 다하고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그와 동시에, 60년대부터 70년대에 걸쳐 중국의 문화대학명이 있었습니다만, 소련은 안 되지만 중국에는 아직 미래가 있다고 함으로써 중국에 접근한다는 움직임이 있었습니다. 중국에 지나치게 접근하면 공산당에서 벗어나게 된다. 그런 급진적인 방향으로 향하면서, 중요한 부분에서는 당에 머물러 있다고 하는 불가해한 부분이 있다. 나는 이렇게 생각합니다만, 알튀세르는, 육체를 초월한 지성이라는 세계가 있다고 믿고, 이 세계에 완전하게 살려고 한 인간이 아닌가라고. 지성의 세계 속에서는 현실을 일단 무시하고, 머릿속에서 완벽하게 구성할 수 있는 것이 있다고. 그가 쓴 것은 분명히 말하면 이치에 맞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몽테스키외도 마키아벨리도, 그 시대에 살면서도 그 시대를 뛰어넘는 사상을 머릿속에서 만들고, 이 머릿속에 게임 같은 완벽한 세계를 만들었다. 이 게임의 세계에 들어가면 좋습니다만, 들어가지 않는 인간으로부터 보면, 이것은 보통의 사람들이 한 것이 아니다. 그러나 이 게임의 세계야말로 그에게 진짜 실재라고 한다면, 이 게임 속에 그가 생각한 공산당이나 공산주의가 있다면, 그에게는 만족이며, 현실과의 낙차는 없다. 보통의 인간은, 자신의 이론에 대해 현실이 다르다면 이상하다고 느낍니다만, 그에게는 머릿속으로 도망치는 핑계거리가 있었던 게 아닐까 생각될 가능성이 있습니다. 자신의 고독한 생활 속에서 점차 증식되는 머리의 세계가 있다. 보통의 인간도 그런 것은 있습니다만, 그의 경우, 지성은 이 세상에서 무엇보다 멋진 것이라는 것을 알고, 그것에 특화되어 간 사람인지도 모릅니다.

 

5. 알튀세르의 신체

나카마사 : 그가 보고 있는 문제계가 너무 앞서 나가고, 실제의 그의 행동 형태와 괴리가 생기고, 행동면의 기반이 되는 것에 대해서는 중층적 구조로서 분석할 수 없게 된다. 당초 나치즘에 존재자체의 발생을 봤던 하이데거가 현실의 나치즘이 자신이 생각한 나치즘과 다르다는 것을 알고서도 좀체 헤어나오지 못했다는 것도 비슷한 바가 있습니다. 마토바 씨가 말씀하신 것은, 알튀세르가 평가되는 면도 있습니다만, 비판되어야 할 면도 있습니다. 본인의 신체성에 대한 고찰이 분명히 결여되어 있다. 알튀세르 안에는 자신은 신체를 갖고 있고 세계 속에 편입되어 있다는 의식이 없는 듯한 느낌이 듭니다. 현대사상이라면, 인식의 수준을 바꿔도 결국은 자신도 신체를 갖고 세계에 편입되어 있다, 그러한 자신의 신체성을 메타 관점에서 보지 않으면 안 된다는 얘기가 곧바로 나옵니다. 그런 관점이 알튀세르로부터는 좀체 보이지 않고, 신체를 갖고 있지 않은 투명 인간처럼 현실 속에 있는 것 같군요.

 

마토바 : 그는 아내를 죽이고 그 재판에서 정신병이라고 함으로써 책임능력이 없게 되어 죄를 면합니다만, 그것에 대해 그 자신이 얘기한 대목에서, 자신은 책임능력이 없다non lieu, 세상의 것이 아니다가 됐다고 말합니다. 그것을 자기 정당화하기 위해, 나는 옛날부터 있지 않았던, “루이Louis”라는 자신의 이름도 옛날 자신의 어머니의 애인의 이름이다. 그리고 프랑스어로 루이는 그lui입니다. 어머니는 자신을 죽은 애인처럼 키웠다. 나는 어머니 속에서는 존재하지 않는다, 나는 오랫동안 non-lieu였다. 그런 나는 여성에 대해 줄곧 늦깎이이고, non lieu였다. 사귀는 여성에 대해서도 가벼운 형태로 흘러갔다. 그래서 그에게 있어서 현실은 신체성을 잃은 존재하지 않은 것이었다. 물론 이것은 자기정당화이며, 그런 인간은 이상적이라고 하더라도, 최종심급이 실재라면, 실재란 그에게 있어서는 파리의 현실 생활입니다. Non-lieu라는 것은 그의 이론을 부정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가 혼처럼 존재할 뿐이라는 것은, 그의 바로 모든 학문 자체가 현실과의 접점을 잃어버리게 된다는 것이다. 최종심급이라는 위태로운 곳에 접점은 있지만, 그 최종심급을 빼면 둥실둥실 날아가 버리게 된다. 그러나 날아가는 내용은 매우 아름답다. 그래서 이 아름다운 것으로부터 우리는 물려받는 바가 있지만. 이 이론은 화제는 제공합니다만, 사회를 바꾸는 힘이 될 수 없는 것은 지면에서 떨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알튀세르는 나름대로 맑스를 마음대로 읽은 것입니다만, 마음대로 읽는 것은 상관없으나, 알튀세르의 신체가 보이지 않는다. 그 언저리는 벤사이드가 절대적 사상의 세계에서 행했던 알튀세르 비판의 부분이라고 생각합니다(논문집 アルチュセール, 1999).

 

나카마사 : 달리 말하면, 최종심급 자체는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울려 퍼질 뿐이며, 이쪽은 그것을 듣고 있을 뿐입니다만, 심급이니까 어떤 판결을 내는 것입니다. “마음대로 들렸을 뿐이다고 말한다고 생각하면 말해버린다. 그리하면 모든 것은 탁상공론이 될 수 있다. 알튀세르 자신은 제대로 전개하고 있지 않습니다만, 최종심급을 심급답게 하려면, 개개인이 마음대로 듣고 있는 것만으로는 심급으로서 기능하지 않기 때문에, 그렇게 기능시키는 장치가 필요할 것입니다. 알튀세르에게 그런 장치로 통하는 뭔가의 아이디어가 있고, 그것을 우리가 징후적으로 독해할 수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어떤 양상을 띠는 것일까요?

 

마토바 : 알튀세르는 혁명에 대해 두 개의 서로 모순된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최종심급의 목소리가 들려서, 그것을 혁명으로 끌고 가려면, 그것만으로는 할 수 없다, 어떤 주체의 작동이 필요하다고. 그 주체란 지식인의 지도, 이른바 전위인지도 모릅니다. 그것에 의해 민중을 이끌어 혁명으로 나아간다고 말합니다. 그렇게 말하면서 한편으로 그것은 잘못이라고 말하고, 민중 쪽에서부터의 목소리가 있고, 그것에 지식인은 끌리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아마 알튀세르처럼 자기 변호에 능한 인간들이 본다면, 인텔리에 대한 숭배가 있으며, 그것은 볼셰비키적 혁명으로 이어집니다만, 지식인이 혁명을 추진하고 민중은 그것을 따라가면 된다고 하는 부분이 있습니다만, 그렇게 말하면서 그것을 부정하고 있고, 자기 모순되어 있습니다. 어느 쪽이냐? 그러나 어느 쪽인지 말하지 않습니다. 이런 자기모순은 어떤 사상가에게서도 있을 수 있습니다만, 다만 지식인이나 전위가 혁명을 수행한다는 방향에 내기를 걸었다는 면에, 오히려 그의 지성주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그가 레닌과 철학(1969)에서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만, 레닌이 이탈리아로 망명했을 때, 이탈리아에 있는 러시아인이 카리브섬에서 의회를 하고 있으니까 그 장소로 와서 철학에 대해 떠들어달라고 고리키가 레닌에게 부탁합니다. 레닌은 거기로 가서 철학에 대해 지껄일지 고민합니다. 레닌은 자신은 철학을 실천하려 하고 있고, 그렇다면 철학에 대해 지껄인다는 것은 이상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지껄이는 수준을 넘어선 곳에 있는 철학을 목표로 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 철학이 있다면 묵과하지 않았다는 겁니다. 그래서 결국 레닌은 가지 않았습니다. 가지 않았던 것이 레닌의 뛰어난 부분입니다. 맑스주의에 있어서의 철학은 사실은 철학이 아니다. 철학이라면 하나의 합리적인 논의로서 민중에게 이야기되는 일종의 게임이 된다. 그러나 맑스의 철학은 그런 것을 넘어선 현실을 바꾸는 뭔가이다. 철학을 부정하고 있기 때문에 레닌은 철학에 대해 얘기할 수 없다. 그것을 레닌은 이해하고 있다, 그러니까 레닌은 뛰어나다는 게 됩니다.

이처럼 알튀세르의 사고 패턴은 항상 정해져 있습니다. 어떤 인간이 위대하다고 말할 때에는, 그 위대한 인간은 그 시대의 인간들의 사고의 지평을 뛰어넘어 역설적으로 물음을 역전시키는 인간인 것입니다. 이런 패턴은 알튀세르의 가장 알튀세르적인 부분입니다. 모든 뛰어난 인간들은 미래에 자신을 맞이하고 있는 인간들에게 신호를 보내고 있으며, 그를 돕는 것은 미래의 인간뿐이다. 살고 있는 시대에는 누구 하나 이해하는 친구를 갖지 못하고, 친구는 미래에만 있을 뿐이다. 이 미래의 친구와의 연관, 예를 들어 마키아벨리와 스피노자 등의 5세기에 걸친 이해의 우정 연합이 친구를 만들고, 그것 이외에는 전혀 친구가 아닌, 맑스도 마키아벨리도 스피노자도, 그리고 레닌도 그런 의미에서 고독하다.

 

나카마사 : 너무 고독해졌을 때, 어떻게 대중의 목소리를 듣나요? 어딘가에서 대중의 목소리를 들어두느냐면, 맑스주의라고는 말하기 어려운 곳이 있네요. 네그리는 구성적 권력이라는 것을 끈질기게 말하고 있습니다만, 지식인이나 혁명가가 자신의 머리로 구성하는 권력이 아니라 다중(multitude)으로부터 저절로 구성되는 것을 찾아내지 않으면, 진정한 혁명으로는 안 되니까요. 알튀세르의 최종심급도, 자신의 머릿속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대중이라고는 직접적으로 말하지 않더라도, “외부로부터 끌고와야 할 것이 아닐까요? 알튀세르의 제자인 발리바르 등은, 스피노자의 다중의 얘기와 결부시키고, 대중적인 것으로부터 끌고 온다는 유형의 논의를 하고 있습니다만, 알튀세르 자신은 그런 인식은 전개하지 않는 것처럼 보입니다.

 

마토바 : 알튀세르는 중세의 수도사 같은 생활을 하고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사감으로서 에콜 노르말에 입주하면서, 학생들에게 철학을 이야기하고, 바로 현실과의 접점을 갖지 않은 곳에서 그는 우위성을 가진다. 이렇게 말하면, 그것을 너무 강조하고 있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만, 일종의 이상적인 세계에서, 연구를 위한 연구를 할 수 있는 환경 속에서, 이치를 가득 채워 일을 밀고 나간다. 그렇기 때문에 현실과의 접점이 상실되고 있다. 이 현실과의 연결을 어떻게 갖는가가 50년대부터 60년대에 전개하는 그의 여성 문제가 아니었을까. 그것이 바로 보이지 않는 세계입니다. 그가 숨지고 전기가 나오기 시작함으로써 비로소 우리는 알 수 있게 된 것이고, 나오지 않았으면 알 수 없었다. 에른스트 만델이 제4인터내셔널의 대빵이라는 것은 알려져 있으며, 그의 말투도 포함해 운동가로서의 카리스마성이 있다. 그러나 글쓰기로서의 카리스마성은 없다. 그에 반해 알튀세르는 오로지 글쓰기로서카리스마성을 획득할 수 있었던 희소한 인물입니다. 그 자신이 그런 자신을 만들어내고 있고, 그것을 연기하고, 현실과의 접점을 갖지 않는 곳에 이지적인 곳에서 구축했다. 프랑스의 인구 5천만 명 중에 뛰어난 지성을 지닌 인간이 몇 명 있고, 그 몇 명만을 소중히 하고, 그 몇 명은 미래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 그런 생각이 프랑스에는 있습니다. 그런 선택된 인간으로서 스스로를 연기하고, 모두에게 그것을 납득시킬 수 있는 인물이었는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카리스마성이 있다.

 

나카마사 : “철학으로서는 그 편이 철저한 것인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알튀세르 이후의 세대가 되면 그것은 좀체 주장하기 어려워졌다. 역시 알튀세르는 마토바 씨가 말씀하시듯이, 자신 이외의 타자로서, 눈에 보이는 현실의 인간을 설정하지 않는다. 그의 시야에 있는 것은, 아득한 옛날의 역사적 인물이라든가, 미래의 위대한 인물이네요. 위대한 지성 연합 속의 타자인 것이며, 이른바 아래로부터나타나는 타자라는 이미지에는 아무래도 연결되지 않는다. 그것이 알튀세르의 좋은 부분이기도 하고 한계이기도 하다.

 

마토바 : 알튀세르는 초엘리트라는 것을 자인하고, 그것을 연기했습니다만, 그것을 뒷받침해주는 프랑스의 국토가 있었다. 프랑스의 철학자는 대개 엘리트입니다. 베르그손도 프랑스에서 대대로 이어져온 엘리트이며, 사르트르도 엘리트이지만 베르그손보다 떨어진다. 알튀세르는 사르트르보다 더욱 떨어지는 셋째, 넷째의 엘리트입니다만, 삶의 방식으로서는 더욱 엘리트 같다. 알튀세르처럼 에콜 노르말의 조수가 되는 것은 상책이 아니다. 오히려 파리대학의 선생이 되고, 장차 콜레주드프랑스의 선생이 되어, 아카데미에 들어가는 쪽이 좋은 것입니다. 확실히 우수한 인간은 에콜 노르말에 몰려듭니다만, 여기서는 교사로서의 지위는 오르지 않는다. 중세의 수도사처럼 여기에 있던 인간은 어딘가 어긋나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 어긋난 태도를 승인해주는 지적인 분위기가 당시의 프랑스에는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

 

 

 

 

Posted by 상겔스 상겔스
마토바 아키히로(的場昭弘)*1)가나가와(神奈川) 대학 교수/ 사회사상
번역: 장화경 성공회대학교 교수/일본학과
진보평론

1. 들어가며

일본에서의 맑스 연구에 관해 이야기하는 것과 일본에서의 맑스주의 운동에 관해 이야기하는 것은 상당히 다르다. 바로 그 점이 일본에서의 맑스주의 연구의 커다란 특징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20세기 초에 출판된 『공산당선언』의 일본어역은 일본의 맑스주의 운동, 정확히 말하면 아나키즘 운동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었다. 가타야마 센(片山潛), 고토쿠 슈스이(幸德秋水), 오스기 사카에(大杉榮) 등이 초기 일본의 맑스주의 도입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그러나 1917년 러시아 혁명과 함께 시작된 제3인터내셔널의 영향은 그 당시까지의 맑스주의 운동을 근본적으로 변화시켰다. 제3인터내셔널과 일본공산당은 그 영향력을 무산대중뿐 아니라 전위인 지식인들, 구체적으로는 대학인에게 확산시켜 나갔기 때문이다. 다이쇼(大正) 데모크라시라고 불렸던 시대에 대학이라고 하는 제도 속으로 맑스주의가 침투해 가서 이미 1920년대에 정치나 운동으로부터 분리된 맑스 연구라는 아카데믹한 분야가 만들어졌다. 물론 1930년대부터 1945년까지 총력전 상황 속에서 공개적인 맑스주의 연구는 금지되어 있었지만, 학생과 교사에게 미친 영향력은 전후에 개화하게 된다. 전후에 맑스주의 강좌는, 공산주의 탄압(red purge)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면면히 이어져서 대학이라고 하는 공적인 장소에서 맑스 연구는 오랫동안 매우 융성하게 된다.

대학에서의 연구와 맑스주의를 표방하는 정치집단 및 학생운동 집단에 의한 연구는 어느 면에서 중첩되는 것이기도 했지만, 일단은 분리된 형태로 전개되어 갔다. 전후 맑스주의 연구에서 화제의 중심이었던 맑스의 가치론을 둘러싼 논쟁은 당초에는 '전후 일본의 경제성장이 민주적 사회를 실현시킬 것인가' 라는 폭 넓은 현실 문제에 비추어서 전개되어 널리 세상의 주목을 받았으나, 많은 맑스 연구는 그러한 문제로부터 동떨어진 『자본론』의 훈고학적 연구였다.

훈고학적 연구는 한편에서 학계에 맑스 연구라는 분야를 만들어 갔다. '『자본론』 성립사' 라는 훈고학적 연구 분야는 맑스의 초기 저작에 관한 문헌적 연구, 나아가서는 맑스에게 영향을 준 헤겔, 헤겔 좌파, 포이에르바흐 등에 관한 연구로 파급되어 갔고, 17세기·18세기의 존 로크, 홉스, 스미스 등과의 연관(context) 분석, 19세기 동시대의 사회주의자 푸르동, 푸리에 등의 연구로 파급되어 갔다.

그러나 사회운동과 분리된 맑스 연구는, 그 연구자들이 의식했든 아니든 관계없이, 맑스주의를 표방하는 소련과 동유럽 여러 나라의 존재에 의해 규정되었던 것도 사실이다. 그 때문에 지상의 낙원이라고 생각되었던 대학에서의 맑스주의의 극도로 치밀한 문헌해석학 연구는 베를린 장벽과 소련의 붕괴와 함께 우르르 한꺼번에 소멸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에서의 맑스 연구의 오랜 전통은, 소련과 동유럽 사회주의 국가가 소멸된 오늘날에도, 사회운동으로서보다는 그 아카데믹한 방법에서 국제적인 위치를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하긴 맑스 연구를 하고 있는 대학인도 사회운동과 전적으로 분리되어 있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맑스 연구는 사회운동과의 연결고리를 유지하면서도 과거의 아카데믹한 문제를 견지하면서 전개되어 왔고, 지금도 그렇게 전개되고 있다. 이 글은 이러한 사회운동의 배경에 관해서도 언급하겠지만, 기본적으로는 학술적인 맑스 연구에 관하여 다루기로 하겠다.

접어두기..

2. 최근 일본에서의 맑스 연구

1) 1991년까지의 이단파의 맑스 연구
여기에서 '최근'이라고 하는 경우, 그것은 맑스 연구에 있어서는 자동적으로 소련 붕괴 이후를 의미한다. 그만큼 연구 조건, 연구의 방향이 변해 버렸기 때문이다. 우선, 그 당시까지 세력이 있던 맑스 연구자의 다수가 침묵하거나 다른 분야로 옮겨갔다. 많은 대학의 경제학부에는 맑스 경제학을 가르치는 '경제원론'이란 강좌가 있는데, 그 강사의 다수가 전공을 바꾸거나 침묵을 지켰던 것이다.

그 결과, 당시까지 이단시되어 그늘에 숨어 있던 맑스 연구자가 한꺼번에 양지에 나오게 되었다. 이단이란 일본공산당계의 입김이 미치지 않는 통칭 신좌익이라고 불리는 사람들을 말한다. 1960년 안보투쟁을 앞두고 일본공산당에 비판적인 사람들이 동맹(Bund)을 만들었는데, 1970년 안보투쟁까지의 과정 속에서 다양하게 분화되어 간다. 맑스 연구자 가운데 당시에 주목을 끈 사람으로는 우노 코조(宇野弘藏), 히라타 키요아키(平田淸明), 히로마츠 와타루(廣松涉), 라치 치카라(良知力) 등이 있었다. 그들은 모두 이미 사망했지만 1991년 이후 맑스 연구를 이끌어가는 연구자의 다수는 대부분 그들의 제자들이다.

우노 코조는 이미 1950년대부터 우노파라는 독자적인 파벌을 도쿄대학 사회과학연구소와 경제학부를 중심으로 펼치고 있었다. 『자본론』을 경제원론으로 순화시키고 정책론이나 역사적 단계론을 거기(『자본론』: 역자)에서 삭제하는 우노의 접근방식에 대해 정통파 맑스 경제학자로부터 혹독한 비판이 전개되었다. 우노파는 제자인 후리하타 세츠오(降旗節雄), 야마구치 시게카츠(山口重克), 다쿠미 미츠히코, 이토 마코토(伊藤誠) 등을 중심으로 학파를 형성해 갔다.

히라타 기요아키는 개체적 소유론이라는 독자적 사회주의를 전개하고 시민사회와 사회주의 사회의 접합을 시도하였다. 사적 소유가 아닌 개체적 소유의 부활은 사회주의 사회에서의 비민주적인 정치를 비판하는 의도를 가지고 있었고, 서구적 전통에서 맑스를 해석하는 방향을 만들어 나갔다. 히라타는 요코하마국립대학, 나고야대학, 교토대학, 가나가와대학을 전전했는데 만년에는 조절이론, 그람시 연구 등을 전개하였고 많은 제자를 키웠다. 특히 우치다 히로시(內田弘), 야마다 토시오(山田銳夫), 야기 키이치로(八木紀一郞) 등이 애제자다.

히로마츠 와타루는 1970년 학생투쟁의 영웅이었다. 히로마츠 와타루는 『독일 이데올로기』의 편집문제를 계기로 『엥겔스론』(1969)을 발표하였다. 1845-6년에 쓰여져서 초고인 채로 방치되었던 『독일 이데올로기』의 편집상의 의문점, 특히 맑스와 엥겔스의 필적을 분석하여 초고가 쓰여진 당시까지는 엥겔스 쪽이 맑스보다 앞서 있었다는 '엥겔스 제1 바이올린설'을 주장하였다. 도쿄대학 교양학부로 옮긴 히로마츠의 주위에는 히로마츠파라고 불리는 그룹이 형성되어, 커다란 맑스 연구집단이 형성된다.

위에서 살펴본 세 사람에 비해 라치 치카라는 두드러진 존재는 아니었다. 그의 연구 스타일이 소박했기 때문이다. 라치 치카라는 호세이대학(法政大學)에서 히토츠바시대학(一橋大學)으로 옮긴 다음에도 초기 맑스의 치밀한 문헌 연구를 계속했다. 동독에 유학했던 라치 치카라는 할레(Halle) 부근에 있는 메르제브르크(Merseburg)의 경찰 자료를 세밀하게 조사하여 맑스와 당시의 노동자 운동의 관계를 극명하게 분석하였다. 라치 치카라계(系)인 오츠카 긴노스케(大塚金之介)의 학문 스타일은 서구 연구는 서구의 세밀한 문헌자료를 사용하여 해야 한다는 것으로서 라치 치카라뿐 아니라 『엘레노아 맑스』를 영국에서 출판한 츠즈키 츄시치(都筑忠七)를 포함한 히토츠바시학파의 한 특징을 이루고 있다.

1960년대 후반부터 1970년대 전반에 일어난 맑스붐을 유지시켰던 것은 정통파 사람들이 아니라 우노, 히로마츠, 히라타, 라치 등 이단파였던 것이 1991년 소련 붕괴 후 이단파의 약진으로 이어지고 있다. 하지만, 여기에서 거론한 사람들은 모두 이미 사망했다. 1898년생인 우노는 물론이거니와 라치 치카라는 1985년 55세에 암으로 쓰러졌고, 히로마츠 와타루와 히라타 기요아키는 1991년의 소련 붕괴를 직접 보긴 했지만, 히라타는 1995년에 73세로, 히로마츠는 1994년에 61세로 타계했다. 흔히 일본에는 초기 맑스 연구자는 일찍 죽는다는 말이 있다. 정통파의 이데올로기와 정면으로 대결했던 사람들은 확실히 젊어서 세상을 떠났다. 정통파가 힘을 잃은 가운데 그들이 차례로 죽어간 것은 얄궂은 일이라고 해도 좋을 지 모르겠다.

2) 소련 붕괴 후의 맑스 연구
이렇게 해서 '최근'의 연구는 어떻든 크게 바뀌었다. 4월에 간행된 책으로 내가 편집책임을 맡고 있는 『아소시에』(アソシエ)6호는 "21세기 맑스로부터 무엇을 볼 수 있는가"라는 표제를 달고 있다. 이 표제는 역설적이지만 또한 "21세기 맑스로부터 무엇을 볼 수 없는가"라는 의미이기도 하다.

『아소시에』는 '아소시에' 그룹의 기관지이기도 하다. 회원수가 650명이고 매년 4회 잡지를 간행하고 있다. 참가자의 다수는 신좌익계지만, 급진적인 시민과 학자도 참가하고 있다. 『아소시에』는 1990년에 생긴 '포럼 90'을 계승한 것이다. '포럼 90'은 히로마츠파와 우노파 사람들, 그리고 신좌익계 활동가 등에 의해 형성된 시민조직이었는데, 1990년에 분열되어 '아소시에'가 탄생한다.

『아소시에』에 게재된 15편의 논문을 보면 먼저 집필자의 문제의식이 확산되어 있어서 하나로 수렴되고 있지 않는다는 점이 눈에 띈다. 히라타 시민사회론이나 히로마츠 와타루론 등도 있긴 하지만, 급진적 민주주의, 정보론, 페미니즘론, 아나키즘론, 분석 맑스주의론 등 다양하다. 권두의 대담(야마노우치 야스시[山之內靖] 對 마토바 아키히로)에서 히로마츠 와타루와 동세대의 중진인 야마노우치 야스시는 맑스주의가 재생할 가능성은 근대사회의 현실을 직시하는 수밖에는 없다며 맑스주의 속에 빠져 있는 자연 개념을 포에르바흐(Feuerbach)와의 관계에서 소급해 고찰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특히 맑스가 『경제학ㆍ철학 초고』의 제3 초고에서 포이에르바흐를 높이 평가하고 있는 것으로부터, 히로마츠나 프랑스의 루이 알튀세(Louis Althusser)가 1960년대, 70년대에 주장했던 초기와 후기의 단절은 자연과 인간사회의 관계가 위기에 놓인 현재 전혀 무의미하다며 '『경제학ㆍ철학 초고』로 돌아가라'고 주장하고 있다.

야마노우치의 이러한 주장의 배경은 현재 급속하게 진행되고 있는 인간에 의한 자연의 재생산 시스템 파괴로부터 몸을 지키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이다. 자본주의 사회는 지리적 공간을 완전히 상품화한 후에, 자연의 재생산 메커니즘의 상품화와 가상적인(virtual) 인간정신의 세계에서의 상품화를 진전시키고 있다. 이러한 세계를 먼저 인식하고, 그러한 문제을 이해한 위에서 맑스를 재인식해야 한다는 것이다.

테마의 확산 현상은 단지 『아소시에』에만 국한된 것은 아니다. 1999년에 역시 내가 편집한 아사히신문사의 『아에라 무크』의 특집 '맑스를 알다'도 마찬가지의 문제의식에 의한 것이었다. 계급투쟁, 변증법, 공황론과 같은 종래의 언설(言說) 대신에 문화 연구, 오리엔탈리즘, 니체, 베버, 프로이트 등의 테마가 다루어진 것도 그러한 현실의 급속한 변화에 대응할 수 있는 맑스 사상의 편제 개편을 의도했기 때문이다.

3) 엥겔스 사후 100년
1991년 이후 맑스 연구는 일단 한풀 꺾였다. 그러다가 새로운 기운으로 재등장하기 시작한 것이 1995년이다. 1995년은 엥겔스가 1895년에 서거한 지 꼭 100년이 되는 해로서 엥겔스 특집이 그 계기가 되었다. 스기하라 시로(衫原四郞)와 후루하타 세츠오가 편집한 『엥겔스와 현대』(御茶の水書房)는 엥겔스에 관한 연구 논문 15편을 게재하고 있는데, 맑스와는 별개의 인격체로서의 엥겔스를 본격적으로 다룬 최초의 논문집이라고 할 수 있다. 일본에서도 맑스는 독립적으로 다루어졌지만, 엥겔스를 별도로 취급한다는 습관은 이제까지는 없었기 때문이다. 물론 히로마츠 와타루의 『엥겔스론』(盛田書店, 1968)이 있긴 했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초기 엥겔스를 다루고 있는 데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같은 해 영국의 카버(Carver)의 『맑스와 엥겔스의 지적 관계』(山之內弘 역, 世界書院, 1995)가 번역되었는데, 카버는 만년의 엥겔스에 이르기까지 맑스와는 완전히 다른 인물로 엥겔스를 그리고 있다.

그 해에 나온 조금 색다른 책으로는 나카무라 세이지(中村靜治)의 『엥겔스 찬가』(信山社, 1995)일 것이다. 나카무라는 1970년 이후의 주요한 맑스 연구자들을 철저하게 비판하면서 맑스와 엥겔스는 일체라는 정통파의 언설을 부활시킨다. 여기에서 비판의 대상이 된 것이 히로마츠 와타루와 스기하라 시로 등이다. 스기하라는 『월간 포럼』(포럼 90' 편, 社會評論社)의 1995년 7월호 특집 「엥겔스 사후 100년」에서 나카무라의 이 책을 거론하면서 비판한다. '포럼 90'이 엥겔스를 특집으로 한 것 자체가 새로운 맑스 연구의 변화를 의미하고 있다. 맑스 연구에서 터부가 없어진 것이다.

나는 그 해에 『파리에서의 맑스』(御茶の水書房, 1995)와 『프랑스에서의 독일인』(御茶の水書房, 1995)이라는 두 권의 연구서를 출판했다. 이것은 1986년에 낸 『트리어의 사회사』(未來社, 1986)와 마찬가지로 맑스에 관한 내용인데, 맑스의 동시대 인물과 역사로 하여금 말하게 하는 수법을 취하고 있다. 이러한 방법은 소련으로부터 예전에는 부르주아적 '맑스학'이라는 비판을 받고 있었다. 그 비판의 의미가 무언가 하면, 아무렇든 상관없는 소소한 맑스의 스캔들을 들어 맑스를 비방하는 학문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판단은 맑스 연구에 어떤 종류의 터부가 있었던 때에 성립하는 것으로 이제 그러한 비판은 효력이 없어진 것이다. 당연히 나카무라는 『「자본론」과 「논어」』(信山社, 1996)의 첫머리에서 나와 같은 입장을 비판하고 있다.

4) 1998년 『공산당선언』 150주년
1995년에 시작된 맑스 연구는 1998년 『공산당선언』 150주년부터 기세를 더해 간다. 별책 『정황』(情況社)은 7월호에서 「『공산당선언』과 혁명의 유훈」이라는 특집을 조직했다. 정통파를 제외하고 신·구 맑스 연구자가 모두 모인 기획에는 수십 명의 연구자가 참가하였다. 1998년은 1848년 혁명의 150주년이기도 하였다. 여기에서는 『공산당선언』과 1848년 혁명 연구라는 두 가지 논점에서 논문이 편집되었다. 그 해 이시즈카 마사히데(石塚正英), 시노하라 도시아키(조原敏昭)가 편집한 『공산당선언 - 해석의 혁명』(御茶の水書房)과, 마토바 아키히로와 다카쿠사키 코이치(高草木光一)가 편집한 『1848년 혁명의 사정(射程)』(御茶の水書房)이 출판되었다. 이 두 권의 책은 19세기 고전독서회가 다듬어서 내놓은 연구서인데, 맑스를 19세기의 역사 속에서 재확인한다고 하는 작업 속에서 이루어졌다.

그 해에는 오무라 이즈미(大村泉)의 『신 MEGA와 『자본론』의 성립』(八朔社)이나 시부야 다다시(澁谷正)가 편집한 『초고완전복각판 독일 이데올로기』(新日本出版社) 등의 이색적 서적도 출판되었다. 1991년 소련 붕괴 후에 신메가(『새로운 맑스 엥겔스 전집』)는 소련의 손을 떠나서, IMES(국제 맑스 엥겔스 재단)으로 옮겨갔는데, 편집 작업에 일본인 연구자도 적극적으로 관여하게 되었다. 오무라 이즈미는 『자본론』 2권의 초고 편집에 참가하고 있는데, 그러한 편집 작업에서 이 책이 태어난다. 시부야의 책은 맑스의 『독일 이데올로기』의 새로운 판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일본에서는 히로마츠 판의 뒤를 잇는 본격적인 판이다. 오무라 등은 『맑스 엥겔스 맑스주의 연구』(八朔社)라는 잡지를 매년 간행하고 있다.

1998년에는 각 잡지에 맑스 특집이 마련되었다. 전통 있는 철학잡지인 『사상(思想)』(894호, 岩波書店)은 '『공산당선언』 150주년'을, 『이상(理想)』(662호, 理想社)은 '맑스, 지금' 이라는 주제로 특집을 짜고 있다.『사상』특집에서는 '공간론'으로 유명한 하비(Harvey)의 논문이나 벤사이드(Bendsaid)의 논문이 게재되어 있는데, 이것은 2000년 이후 맑스 연구의 방향을 파악하는데 중요한 논문이었다.

1995년 이후 특징적인 것은, 1980년대까지 중심을 이루었던 맑스 경제학 쪽으로부터의 접근이 전혀 없다는 것이다. 서적의 수가 적을 뿐 아니라 특집으로 짜여지는 횟수, 나아가서는 맑스 경제학을 특집으로 하는 경제 잡지의 소멸이다. 일본 공산당계의 『경제(經濟)』(新日本出版社)는 남아 있지만 시판되고 있는 맑스 경제학 잡지는 아주 적어졌다. 그런 가운데 『경제와 사회(經濟と社會)』(時潮社)가 1998년 겨울호에 '특집 『공산당선언』 150주년'을 조직했다. 그러나 여기에서도 실질적으로는 경제학자의 논문은 적었고 역사가와 사상가의 논문만이 두드러졌다. 이 잡지는 그 후 소멸되었다.

맑스 사상에 대한 특집이 그동안 비교적 마이너(minor)한 잡지에 치우쳐 있었던데 반해서 판매부수에서는 6,000부 가까이 팔리고 있는 종합지 『대항해(大航海)』(新書館)가 '맑스의 고고학'이라는 특집을 마련한 것은 큰 의미가 있다. 여기에서는 새로운 일본사를 개척하고 있는 아미노 요시히코(網野善彦), 미야타 노보루(宮田登)를 비롯하여 현대사상의 이마무라 마사시(今村司), 프랑스 문학의 가시마 시게루(鹿島茂), 경제학자인 가네코 마사루(金子勝)와 같은 논단의 영향력 있는 인물이 맑스론을 이야기한 것이다. 이것은 그 당시에 다쿠미 미츠히코의 『'대공황형' 불황』(講談社, 1998)이 항간에서 많이 읽혀졌던 것과 무관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맑스를 대망하는 소리는 반쯤 혐오하면서도 조금씩 나오고 있었던 것이다.

5) 『맑스를 알다』와 『맑스의 현재』
1999년이 되어 3만 부를 발행하는 『아에라 무크』가 '맑스를 알다' 라는 특집을 짰다. 맑스 연구자가 격감해 가는 것과는 반대로 세상 사람들은 조금씩 맑스에 마음이 끌리기 시작했다고도 생각되었다. 실제로는 약간 예상이 빗나갔음은 알지만, 『아에라 무크』중에서도 1, 2위를 다툴 정도로 팔렸던 것도 사실이다. 마침 그것과는 반대로 아주 마이너한 출판사인 '돗데모벤리출판부'에서 예전에 뉴아카데미즘의 기수라고 불렸던 아사다 아키라(淺田彰)와 문예적 맑스론으로 고정 팬을 가지고 있는 가라타니 코진(柄谷行人)이 쓴 『맑스의 현재』가 출판되었다. 기획자는 교토대학(京都大學) 학생이었는데, 이 책은 아사다, 가라타니의 명성에 더해 네그리 등과의 재미있는 대담으로 판을 거듭하게 된다.

1999년에 두 권의 책이 순간적이긴 했지만 베스트셀러가 됨으로써 매일 800만부를 발행하는 거대 신문인 『아사히신문(朝日新聞)』 학예부의 주목을 받게 된다. 1999년 11월에 아사다와 가라타니의 '오사카 아소시에 대회'에는 300명에 가까운 사람들이 모였고, 같은 달 도쿄 에서의 발표자로 우치다 히로시(內田弘), 강상중(姜尙中), 요네타니 마사후미(米谷匡史), 사회자 마토바 아키히로의 '맑스를 알다'라는 모임의 토론회에도 100여 명이 참가했다. 11월 18일에는 '세기 말에 맑스를 묻는다' 라는 특집이 『아사히신문』에 게재되어, 지금 맑스가 계속 읽히고 있다는 기사가 실리게 되었다.

물론 이것은 일부는 사실이고, 일부는 오해였지만, 젊은이들이 맑스를 읽고 싶다고 생각하는 것도 일면은 진실이기도 하다. 마침 같은 해에 역시 『아시히신문』에 의해 문화 연구가 불붙여진 것과 매우 비슷하다. 단지 독자 중에는 종교적인 열광을 찾아서 맑스에게 온 사람도 있고, 데리다나 푸코와 같은 포스트모던의 관점을 통해 맑스를 접한 사람도 있어서 천차만별이었다.

6) 『맑스 카테고리 사전(事典)』과 『신맑스학 사전(事典)』
맑스 연구의 부활과 새로운 방향의 시작은 잡지나 신문만의 문제만은 아니다. 맑스 사전을 편집하는 작업이 이루어져 1998년과 2000년에 완성된 것을 들 수 있다. 사전을 만든다는 기획은 오랜 편집 작업과 또 사전의 가격을 감당할 수 있는 수요라는 점에서 출판사로서는 상당히 위험한 도박이다. 맑스주의의 쇠퇴가 주장되는 가운데 오츠키출판사(大月書店)는 『맑스ㆍ엥겔스 전집』의 증쇄를 중지해 버렸고 오츠키문고(大月文庫)의 맑스·엥겔스의 저작도 품절 상태가 계속되고 있다. 이와나미문고(岩波文庫)에서조차 상품 부족 상태가 계속되고 있다. 그러나 현재 맑스ㆍ엥겔스 선집의 번역[梵摩書房], 헤이본샤(平凡社) 라이브러리의 맑스 선집의 계획이 진행되고 있다. 그러한 가운데 사전 출간은 커다란 도박이었다.

『맑스 카테고리 사전』(靑木書店, 1998)과 『신맑스학 사전』(弘文堂, 2000)은 완전히 취지가 다른 사전이다. 사전의 규모와 집필자는 거의 같지만, 의도와 내용은 상당히 다르다. 먼저 큰 차이로 들 수 있는 것은 『맑스 카테고리 사전』이 현대에서 본 맑스주의를 중심으로 항목 수를 엄선하고 한 항목에 6000자라는 대항목주의임에 비해서, 『신맑스학 사전』은 맑스를 19세기에서 보았을 때에 관련되는 항목을 고르고 그다지 맑스주의를 언급하지 않은 것이 특징이다. 두 사전은 거의 같은 시기에 시작되어 완성 시점도 2년밖에 차이가 나지 않는데도 편집 개념이 이처럼 다른 것은 놀랄 만한 일이다.

그러나 오히려 이러한 차이가 있는 사전이 나온 것 자체가 현재의 일본의 맑스 연구의 자유로운 점인지도 모른다. 『맑스 카테고리 사전』도 맑스의 현대성을 설명하면서 그다지 당파적인 측면을 강조하고 있지 않다. 오히려 엄선된 항목을 살펴보면 추상적인 개념이나 역사적 항목이 많다. 또 한편에서 『신맑스학 사전』 쪽도 19세기에 맑스를 말한다고 하면서 그 분석 방법, 자료 분석, 아날학파적 접근 등 현대 역사학의 수준에서 접근하고 있다. 맑스와 관련된 사전으로서는 『자본론 사전』, 『맑스주의 사전』 등의 제목으로 지금까지도 여러 가지가 나와 있는데, 각각 매우 당파적인 색채가 강하게 나타나 있었음에 비해서 이 두 사전은 말하자면 사전을 읽을 거리로 해서 맑스를 재구성해 간다고 하는 방향에서 쓰여 있다. 독자에 의해 다양한 맑스상(像)이 나타난다고 하는 것은 1991년 이후의 맑스 연구의 변화의 한면을 나타내는 것이라고도 생각된다.

3. 이후의 맑스 연구

1) 과거 연구의 곤란: 시스템론의 등장
21세기를 막 시작한 오늘날에 맑스를 연구한다는 것은 얼마나 의의가 있는가? 그 답은 각자가 처한 상황에 따라 다르다는 것은 새삼 말할 필요도 없을지 모른다. 하지만 20세기 말에는 급속한 세계화(globalization)가 진행되고, 각 나라나 지역은 역사적으로 발전단계가 다르고, 각각의 발전 유형이 있고, 그에 상응해 각자의 맑스 이해가 있다는 사고가 상당히 흔들리기 시작하였다.

전후는 소련에 의한 맑스주의의 확대 시대, 1950년대는 냉전에 의한 적대의 시대, 1960·70년대는 후진국의 독립과 혁명의 시대였다. 1980년대 말이 되어 소련 및 동유럽의 붕괴와 함께 세계의 개별적 현상은 상호관련이 더욱더 강해져서 한 나라나 한 지역의 자유로운 전개가 억제되어 가는 시대가 시작된다. 1980년대에 왈러쉬타인(Wallerstein)의 세계체제론이 화제가 되었던 것은 그러한 시대적 배경의 영향을 받은 것이었다. 자유주의 경제와 소련이라는 대항도식은 본래 허구이고, 현실적으로는 세계시장을 견인하는 중앙과 주변밖에 없어서 선진자본주의 국가와 그 주변(소련도 주변에 들어간다)이라는 대항관계는 19세기로부터 20세기까지 전혀 바뀌지 않았다는 지적이다. 이 지적은 개발독재나 사회주의가 선진자본주의 국가에 대한 주변의 반응으로 나올 수 있으나, 후자가 전자를 대신하는 일은 없다는 측면도 가지고 있다. 유럽과 미국을 제외한 거의 모든 지역은, 공산주의이든 개발독재이든 간에, 주변이라는 점에는 변함이 없다는 것이다.

나아가서 이 지적에서 또 하나 중요한 것이 나온다. 그것은 선진국과 후진국의 대항관계, 즉 중앙과 주변의 대항관계는 전자가 후자의 미래가 아니라는 점을 의미하고 있다. 중앙이 언제나 주변을 필요로 하는 이상, 두 개는 역사적으로 동시대에 의존하고 있는 것으로, 미래도 아니고 과거도 아닌 현재의 모습이라는 것이다. 세계시장이 언제나 착취하는 자와 착취당하는 자를 동시에 만들고 있는 이상, 주변은 항상 주변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2) 계급투쟁과 변증법적 유물론 시대의 종언
전후의 맑스주의는 소련을 중심으로 여러 후진국으로 만연해갔다. 그것은 소련을 중심으로 한 새로운 중앙-주변과 관계를 재구축하는 것이기도 하였다. 결과적으로 스탈린을 중심으로 한 맑스주의에 대한 신앙을 각국에서 만들어 갔다. 혹시 그렇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중국이라는 새로운 중앙의 재편성이었다. 1980년대의 자본주의의 글로벌화는 소련이나 중국도 휩쓸어 넣어서 중앙과 주변을 재편하는 과정이었다. 이리하여 미국을 중심으로 하는 중앙의 주변에 소련이 편입됨으로써 사회주의권이라는 환상은 무너졌다.

그런 가운데 맑스주의 연구는 새로운 변화를 요구받았다. 1960년대·70년대까지의, 소련을 중심으로 한 사회주의권의 구축(構築)에 의한 새로운 중앙과 주변으로의 분할이 붕괴됨으로써 소련형 맑스주의가 효력을 상실했던 것이다. 코민포름의 명령을 기초로 소련의 명령을 받아서 각지에서 혁명을 일으킨다는 전략, 소련형 사회주의의 건설이라는 발상은 근본에서부터 무너져 버렸다. 서구의 여러 나라에서는 1956년의 스탈린 비판 무렵에 매듭이 지어졌지만, 민족독립운동에 불타던 나라들의 다수는 이러한 소련형 맑스주의를 받아들였다. 이 때 소리 높여 주장된 것이 계급투쟁과 경제공황이다.

맑스주의의 기본 테제로서 자본주의 경제에서의 계급 대립을 파헤쳐내고, 그 철저한 대항관계로부터 다음의 역사를 만들어 내는 프롤레타리아트에게 기대를 건다. 최종적으로는 혁명에 의해 자본주의로부터 이탈하는 데에는 경제공황이라는 경제적 계기가 필요하고, 많은 맑스주의 경제학자들은 경제공황이나 임금노동을 분석의 대상으로 삼았다. 물론 '변증법적 유물론'이라는 스탈린의 조어는 맑스의 그럴 듯한 언설로서 당시의 맑스주의자들에게 채용되었다.

그런데 계급투쟁은 고도성장에 의한 임금상승으로 점차 효력을 상실하고, 계급투쟁은 표면상의 방침으로 하고 오로지 임금 상승만을 생각하는 노동조합 운동으로 변모해갔다. 물론 후진국가들 중에는 한 때는 절대적 궁핍화에 의한 빈곤화에 맞서기 위해 철저한 항쟁과 계급투쟁론이 반영된다. 그러나 개발독재가 끝날 무렵이 되면 그러한 나라들에서도 고도성장이 일어나서 민중은 그러한 운동에서 이탈해간다. 이리하여 계급투쟁과, 자본주의의 멍에에서 벗어나기 위한 혁명은 점차 사람들의 관심을 불러일으키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일본의 맑스주의도 전후 거의 1960년대까지 그러한 방향을 취했는데, 그것은 나라에 따라 조금씩 차이가 있지만, 별반 다르지 않을 것이다.

3) 시민사회의 형성과 맑스주의의 변용
맑스주의에서 계급투쟁과 변증법적 유물론이란 개념은 점차 사라지기 시작하고, 그 대신에 시민사회의 형성이 문제로 대두된다. 히라타 기요아키의 '개인적 소유의 재건'이라는 말이 주장되어 학생과 시민이 이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 것이 1960년대 말이다. 고도성장에 의해 중산계급이 확대되어 가고 사람들의 관심은 마이홈을 갖는 것으로 이동해간다. 그러한 가운데 국유나 사회적 소유라고 하는 개념에 비판이 가해지고, 개인적 소유의 완성이야말로 사회주의라고 말해지게 된 것이다.

히로마츠 와타루와 라치 치가라의 맑스 연구의 새로움은 이러한 시민의식을 19세기 노동자계급 운동의 배후에 흐르는 지하수맥으로서 파악하려 한 점이다. 맑스의 초기 작품에는, 소련식으로 말하자면, 부르주아적 요소가 흐르고 있다. 그것은 당연한 것으로 맑스는 휴머니스트나 개혁주의자였기 때문이다. 『경제학ㆍ철학 초고』와 『독일 이데올로기』를 연구함으로써, 맑스의 사회주의적이지 않은 부분을 분석했고, 이를 통해 맑스의 사상 속에 있는 시민사회적 요소를 추출하려 했던 것이 그들의 공적이었다. 그러므로 그들이 지향했던 운동형태는 노동운동이 아니라 생활협동조합운동이나 시민운동이었다. 변용돼 가는 세계에 대해서 맑스 연구는 시민사회적 요소를 도입하는 것으로, 계급투쟁과 혁명이란 표어로부터 이탈하고 살아남게 된다.

이러한 가운데에서 환경문제, 페미니즘 등도 차례로 편입되어 좌익연합군으로서 맑스의 연명이 이루어져 간다. 그런데 시민사회론의 최대의 약점은 자본주의의 진짜 무서움을 모르는 데에 있다. 자본주의는 중산계급의 형성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중산계급은 선진국이 후진국의 노동자를 착취하는 가운데 생기는 것이라고 한다면, 후진국의 노동자로부터 잉여가 생기지 않게 되면 선진국은 자국의 중산계급으로부터 착취할 수밖에 없다. 후진국이 완전히 자본주의 시장에 편입되기 시작한 1990년대가 되어 선진자본주의 국가는 공장을 후진국으로 이전시키고, 따라서 선진국에서도 고도의 노동이 아니면 살아남을 수 없다는 현상이 일어나고 있다. 구조조정이라는 현상이 그것인데, 일본에서의 1억 총중산 계급이라는 꿈의 붕괴와 함께 시민사회의 신화도 붕괴되어 간다.

시민사회라는 발상은 원래 1920년대·30년대의 포드주의의 선물이다. 자동차를 팔기 위해서 먼저 임금을 올리고 임금의 상승에 의해서 경기를 부양시켜 간다는 장미빛 세계는 국가가 다른 나라의 노동자나 상품과 경쟁하지 않는 시대에 만들어져 간다. 국가가 경제적·군사적·정치적으로 다른 나라를 이기기 위해서 국가 전략으로서 국민의 복리후생을 향상시켜 간다는 것은 이른바 '총력전체제'라고 불리고 있다. 연금이나 보험제도 등 복리후생제도는 거의 이 시기에 완성되었다. 이러한 이유에서 시민사회 역시 국가주의의 한 형태였다고 할 수 있겠다. 일본에 있어서도 시민사회의 논의가 활발해지자 사람들의 관심은 국내 문제로 향했다.

4) 자본주의에 의한 공간의 정복
자본주의는 지구의 지리적인 정복을 완성했을 뿐 아니라 인간의 신체, 나아가서는 정신의 정복까지 임박해 있다. 앙리 르페브르(H. Lefebvre)는 『공간의 생산』(La production de l'espace, 1974)에서 자본이 공간을 균질적인 것으로 바꾸어 간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공간의 균질화란 자본에 의해 공간의 정복이 완성되는 것이다. 자본은 그 다음에 우리의 신체까지도 균질적인 것으로 만들어간다. 전세계에서 팔리고 있는 맥도날드 햄버거는 거의 같은 지역으로부터 원료인 소고기가 보내져 오고 같은 조리법으로 만들어지고 있다. 이러한 소를 대량생산하기 위해서 다시 소의 사료도 균질화하고 호르몬을 투여하고, 소의 고기를 소에게 먹이는 일을 하고 있으며, 이것이 광우병의 원인이 되었다고 하기도 한다. 요컨대, 자본이 진행시킨 신체에 대한 침략은 우리들 신체의 재생산 기능까지 파괴해간다.

신체의 관리는 푸코(Foucalt)가 말한 바와 같이 18세기 후반부터 일어난 현상이다. 결국 신체의 상품화 및 균질화는 현대의 특징일지도 모른다. 신체의 균질화는 지리적 공간의 정복을 끝낸 자본에게 있어서 가장 가능성이 있는 미개척지이기도 하다. 유전자 공학, 복제 인간이라고 하는 것은 가까운 장래에 거대한 수익을 가져다주는 산업이 될 것이고, 이를 둘러싸고 자본은 새로운 단계로 나아가고 있다고 생각된다. 그러한 가운데 자연으로서의 인간은 계속 파괴되고 있다.

더욱이 자본은 인간의 가상적인 세계로 진출했다. 인터넷의 세계에서 볼 수 있는 공간은 아직 자본이 완전하게 공간적 정복을 하지 못한 영역이다. 그러나 IT혁명에 의한 네트 사회의 실현은 허구가 가치를 낳고 한 순간에 거대한 부를 획득하기도 하고 잃기도 하는 공간을 만들어 내고 있다. 세계의 어디에서나 네트 공간에 들어감으로써 그 역사성이나 민족성을 잃는다고 하는 것은 이제까지 국가나 민족이 지니고 있던 후진성이나 선진성을 파괴해간다. 맑스주의가 지금까지 가장 강조해 왔던 사적유물론이라는 발상은 가상적 공간 속에서는 전혀 의미를 갖지 못한다. 사람들의 역사의식이 희박해지고 공간적 의식도 희박해지기 시작하고 있는 것은 이러한 가상적 공간의 출현에 의한 바가 많다는 측면에서도 생각할 수 있다.

5) 맑스 연구의 가능성
현대 자본주의는 20세기에 생각된 것으로부터 현저하게 변용되고 있다. 그러한 변용을 인식하지 않고 맑스주의의 과거의 테마를 말하는 것은 점차 어려워지고 있다. 확실히 구조조정에 대해서 노동조합에 의한 철저한 항쟁과 파업, 그것을 후방에서 지원하는 계급투쟁론도 단기적으로는 의미를 가질지도 모른다. 다만 경영 효율이 나쁜 회사에는 세계시장에서 살아남을 기회가 없는 것도 사실이다. 패쇄경제에 의해서 생을 부지할 가능성은 있지만, 현실적으로는 무리일 것이다. 또한 경제공황과 그에 따른 사회주의의 실현의 견지에서 볼 때는 공황은 다시 일어날지도 모른다. 아니 디플레이션 현상과 경제의 마이너스 성장은 이미 공황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공황이 일어났다고 해서 사회주의 혁명이 일어나는 것도 곤란하다. 소련형의 국유화와 통제경제밖에 나오지 않는다면, 도저히 사람들의 신뢰를 얻지 못할 것이고, 이것도 조만간에 붕괴된다.

여기에서 문제로 삼을 테마를 좁혀 보자. 우선, 크게 말해서 인간과 자연의 관계 문제를 생각해 보자. 예를 들어 우리들은 자연 속에 있는 불문율을 지킬 수 있는 것일까? 이는 맑스의 자연관에 관한 문제인데, 맑스의 자연 개념에 관해서는 독일의 슈미트(A. Schmidt)가 행한 연구 외에 거의 연구된 바가 없다. 이는 환경과 맑스라는 협소한 주제가 아니다. 눈에 보이는 환경파괴가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환경파괴에 어떻게 대응할까를 맑스 속에서 읽을 수 있는가의 여부이다.

여기서 눈에 보이지 않는 파괴란 자본의 대량생산이 만들어내고 있는 유전자 조작 등과 어떻게 싸울 것인가 하는 것이다. 1998년에 남프랑스에서 일어난 맥도날드 습격 사건은 하나의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 맥도날드가 호르몬 주사를 놓은 소를 수입하는 것을 반대하는 운동이 자연적 식품을 원하는 운동으로서 세계에 파급된 것이 그것이다. 인간은 유기농법의 식품을 먹을 권리가 없는 것인가? 맑스가 『경제학ㆍ철학 초고』에서 쓰고 있는 소외론은 바로 그러한 주제를 다루고 있다. "인간의 노동은 자연의 하나에 불과했지만 그것이 사적 소유의 원인이 됨으로써 독자적 행보를 하게 되었고, 인간은 자연으로부터 소외되어 갔다." 맑스는 대체로 이러한 내용을 제3 초고의 첫머리에 쓰고 있다. 진보적이어야 할 고전경제학은 자연을 망각함으로써 근대사회를 만들어냈다. 그러나 근대사회를 피할 수 없다는 데에 소외의 어려움이 있다.

그러나 맑스는 "자연으로 돌아가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그것대로 운명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운명을 받아들인 다음에 그것을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에 관해서 맑스는 해답을 주고 있지 않지만, 옛날로 돌아가는 것만으로는 안된다고 말함으로써 시대의 변화에 대응하여 인류가 지혜를 발휘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맑스와 같이 유대인인 스피노자(Spinoza)도 인류가 자기 멋대로 세계를 변혁할 수는 없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세계를 마음대로 바꿨을 때 인류는 불행에 빠진다. 신(神), 곧 자연이 명령하는 대로 움직일 때 비로소 인류는 진정한 자유를 얻는다고 말하고 있는데, 맑스의 의도도 의외로 그러한 곳에 있는지도 모른다. 야마노우치 야스시를 중심으로 한 그룹은 이러한 견지에서 초기 맑스의 재검토를 꾀하고 있다.

다음으로 맑스와 역사의 문제가 있다. 자본이 공간과 신체를 점차 균질화함으로써 인간사회는 더욱더 균질화되고 역사의 차이가 느껴지지 않게 되어가는 현상이 실제로 일어나고 있다. 역사의 종언이라고 불린 현상은 자본주의 사회가 초래한 필연적인 모습이기도 하다. 인간사회에서 차이는 불필요한 것일까? 차이라고 하면 국가나 민족이 가장 먼저 떠오른다. 아시아에서 살고 있는 우리가 서구화된다고 하는 것은 서구에 의해 강요된 결과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것이 자본주의다. 이제 세계사는 하나이고, 아시아 국가의 역사 등은 무의미한 것일까? 오리엔탈리즘론이나 문화연구론은 그러한 것을 문제로 삼고 있다.

하지만, 오리엔탈리즘론이나 문화연구론 역시 아시아 등의 마이너 문화의 의의를 설명할 뿐이고 해결하는 것은 아니다. 자본주의 세계라는 편제 속에 편입되어진 것이라고 쉽게 비판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중앙의 문화에 의한 압력과 그에 대한 선망은 맑스 시대에도 있었다. 헤겔(Hegel) 및 청년 헤겔파가 품었던 프랑스나 영국에 대한 선망은 오히려 독일의 사회변혁의 역사적 의미를 이끌어 내게 되었다. 자본주의, 구체적으로는 서구문화의 세계 지배가 역으로 아시아·아프리카에 역사의식을 창출했음은 분명하다. 균질화와 차이화는 오히려 상호보완적이기도 하다. 서구화가 강요되는 가운데 아시아란 것이 자각됨으로써 종속이 강요된다. 헤겔 좌파 및 독일 역사학파는 그런 의미에서 프랑스나 영국의 압력에 대한 독일이 취한 반응의 하나이기도 했다.

헤겔 좌파는 뒤쳐진 독일이야말로 역으로 역사의 발전을 인식할 수 있다는 역전의 발상으로 역사의 세세한 사실보다는 사변적인 역사이론의 구축으로 나아갔다. 맑스가 「포이에르바흐에 관한 테제」의 11번째 항에서 말한, "이제까지의 철학자들은 세계를 단지 해석해 왔을 뿐이다. 중요한 것은 그것을 변혁하는 것이다"라는 문장은 추상적 논의를 버리고 현실적인 논의를 하라는 말이 아니라, 추상적으로 다듬어져서 확고하게 된 이론을 실천에 옮김으로써 현실이 변하는 것이라는 자신이 숨겨져 있다. 먼 장래에 변혁을 기대한다고 하는 의식이 현실에서 구축된다고 한다면, 변혁은 독일이 아니라 프랑스나 영국에서 일어나야 했을 것이다. 그런데 그 말이 독일에서 소리 높여 외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뒤쳐진 나라이기 때문에 미래를 내다볼 수 있다는 직감이 있기 때문이다. 자본의 균질화에 대한 대항으로서 맑스류의 유토피아를 생각해 보는 것도 좋을지 모른다. 블로흐(Bloch)나 데리다(Derrida)의 논의는 뜻밖에 그런 점에 있다. 일본에서도 이러한 시점은 특히 젊은 연구자들에게 공유되어 있다. 포스트모더니즘 사상에 영향을 받은 젊은이 중에는 맑스와 포스트모더니즘을 연결시키는 가운데 데리다의 『맑스의 망령』(Spectres de Marx, 1993)에 관심을 갖기 시작하고 있다.

4. 글을 마무리하며

우리가 지금까지 고찰한 맑스 사상에 대한 관심은 일본 고유의 문제를 빼고 논해진다면 내용은 공허해질 것이다. 사상은, 해외와의 교류 없이 말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 자체의 풍토를 빼고는 말할 수 없다. 맑스 연구가 일본에서 그 나름대로 오랜 전통을 만들어온 배경에 맑스 연구와 일본사회의 변용이 밀접하게 결부되어 있었던 점이 있다. 전후의 생산력 논쟁, 가치 논쟁도 일본의 경제 부흥과 밀접하게 결부되어 있었고, 시민사회론도 고도 경제성장과 결부되어 있었다. 맑스 연구의 변화도 일본사회의 커다란 변용, 나아가 세계의 커다란 변용을 빼고는 말할 수 없다. 유토피아론도 유대교나 그리스도교적 전통이 없는 사회에서 어떻게 구성해 갈 것인가, 또한 자연과 인간의 소외 문제도 일본의 불교적ㆍ유교적 도덕관과 어떻게 관련시켜 나갈 것인가 하는 문제를 제기하지 않고는 일본사회에서 맑스 연구에 기여하는 바는 적을 것이다.

하지만 현대의 일본사회 및 세계는 그러한 문제를 제기하고 문제로 삼는 측면을 가지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맑스 연구자가 계급투쟁론이나 공황론, 변증법에 흥미가 없다고 해서 탄식하는 것도 우스운 일이다. 사회의 변용과 동시에 맑스 연구도 변하고, 그리고 나아가서는 맑스 연구도 사회의 변용에 어느 정도의 영향을 미치는 것이다.


<참고문헌>
『マルクスの現在』(とっても便利出版部), 1999年
『朝日新聞』 一一月一八日, 1999年
「マルクスの考古學」, 『大航海』(新書館) 一二號, 1998年
『アエラムック マルクスがわかる』(朝日新聞社), 1999年
「『共産당宣言』??革命の遺訓」, 『別冊 情況』(情況出版), 1998年
「『共産당宣言』一五○周年」, 『經濟と社會』(時潮社) 一二號, 1999年
「共産당宣言特集」, 『思想』(岩波書店) 一二月號, 1998年
「マルクスをどうする」, 『情況』(情況社) 三月號, 2000年
「エンゲルス沒後 100年」, 『月刊フォ??ラム』(社會評論社) 七月號, 1995年
『新マルクス學事典』, 弘文堂, 2000年
『マルクス·カテゴリ 事典』, 靑木書店, 1998年
「21世紀マルクスからなにがみえるか」, 『アソシエ』(御茶の水書房書房) 六號, 2001年

<미 주>
* 1952년 생. 경응의숙대학 경제학과 박사과정 수료. 현재 가나가와 대학 정경학부 교수. 주요저서로는 『トリ??アの社會史』(未來社, 1986), 『パリの中のマルクス』(御茶の水書房, 1995), 『フランスの中のドイツ人』, (御茶の水書房, 1995) 등이 있다.
Posted by 상겔스 상겔스

노동의 종말
세계 경제는 노동의 본질이 급진적으로 변하는 한가운데에 놓여 있으며, 이는 미래 사회에 유의미한 결과를 가져온다. 산업화시기에 대규모의 인간 노동력은 기계와 더불어 기본적인 제품과 서비스를 생산하였다. 접속의 시대에는 컴퓨터 소프트웨어, 로봇, 나노 테크놀로지, 생명 공학 등과 같은 형태의 지능적 기계들이 농업, 제조업 및 서비스 부문에서 사람의 노동력을 점차 대신하고 있다. 농장, 공장 및 다수의 화이트칼라 서비스 산업 부문은 빠른 속도로 자동화되어 가고 있다. 21세기에는 반복적인 단순 업무에서부터 고도로 개념적인 전문 업무에 이르기까지 점점 더 많은 육체적, 정신적 노동이 값싸고 보다 효율적인 기계에 의해 이루어지게 될 것이다. 세계에서 가장 값싼 노동자라고 할지라도 이들을 대체하는 온라인 기술만큼 저렴하지는 않을 것이다. 21세기 중반까지 상거래 부문에서는 현재 고용된 인력의 일부만을 운용하여 제품과 기본적인 서비스를 제공하기 위한 기술적 수단과 가용 능력을 가지게 될 것이다. 아마도 2050년쯤이면 전통적인 산업 부문을 관리하고 운영하는 데 전체 성인 인구의 5퍼센트 정도밖에 필요하지 않게 될 것이다. 모든 나라에서 노동자가 거의 필요치 않는 농장, 공장 및 사무실이 일반화될 것이다.
물론 다가올 시기에는 전혀 새로운 종류의 제품과 서비스가 나타날 것이며, 새로운 직업적 능력, 특히 보다 정교화된 지식 분야의 능력이 요구될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새로운 노동 부문은 엘리트 지향적이고 그 수에 있어서도 제한적이다. 우리는 수천 명의 노동자들이 회사 정문과 서비스센터에서 쏟아져 나오는 20세기의 일상적인 장면을 결코 다시는 보지 못하게 될 것이다.
고도로 전문화된 직업들 역시 기술적 대체 앞에서는 점차 취약해지고 있다. 정교한 진단 기술은 이전까지만 해도 의사, 간호사, 기술자들이 실험실에서 사용했던 방법을 대체하고 있다. CAD(Computer Aided Design)는 많은 제도사와 기술자들을 없애버렸다. 예전에는 회계사들이 했던 전형적인 업무의 대부분은 새로운 소프트웨어 프로그램에 의해 이루어진다. 매우 유능한 전문가들이 아직까지는 필요하지만, 대부분의 영역에서 쉽게 찾을 수 있는 전문가들은 지적 기술이 보다 적합하고, 빠르고, 저렴한 대안으로 판명됨에 따라 도태될 것이다. 미래의 노동력은 점차 소규모 대행업자처럼 될 것이다.
산업화 사회는 노예 노동의 종말을 이끌었다. 접속의 시대는 대량 임금 노동을 끝낼 것이다. 이는 지적 기술의 새로운 시대로 접어 들어감에 따라 세계 경제가 직면하고 있는 기회이자 도전이다. 다음 세대가 고생스러운 장시간 노동으로부터 해방됨에 따라 인류는 두 번째 르네상스 시대로 진입하게 되거나 또는 엄청난 사회적 분열과 변화를 겪게 될 것이다. 여기에서 다음과 같은 의문이 제기된다. 점진적으로 자동화되는 세계 경제 속에서 쓰임이 적거나 아니면 전혀 쓸모가 없는 수백만의 젊은이들을 어떻게 할 것인가?
고용의 미래에 대응하기 위한 몇 가지 선택안이 우리 앞에 놓여 있다. 이러한 각각의 대안은 사람의 상상력을 필요로 한다. 예를 들어 노동의 본질을 다시 한 번 생각해 보거나 다가올 미래 사회에서 인간이 어떤 역할과 공헌을 할 수 있을지에 대한 대안을 탐색해야 한다.

블루칼라의 종말
미국 최초의 위대한 노동운동가인 곰퍼스는 그의 자서전에서 노동자를 위한 그의 평생의 노력을 형성하는 데 있어 심대한 영향을 미친 어린 시절의 한 경험을 다음과 같이 술회하였다. “나의 어린 시절에 있어 너무나도 생생한 기억 중 하나는 기계가 발명되어 견직물 직공의 기술을 대체해 버리고 그들의 일자리마저 빼앗아 갔을 때 그들에게 닥친 커다란 어려움이었다. 자신의 일을 빼앗긴 사람들에게는 어떤 방법도 없었다. 불행과 공포가 마을을 온통 죽음의 무거운 공기로 감싸 안았다. 좁은 거리엔 일자리 없이 무리를 지어 걸어가는 발자국 소리만이 울려 퍼졌다.”
산업혁명의 시작부터, 기계 및 무생명의 에너지가 생산을 촉진하고 제품을 만드는 데 필요한 노동력을 줄이기 위해 사용되었다. 기계들은 인간의 손길이 필요 없었고 많은 상품을 거의 자동적으로 만들어냈다. 노동자들은 단순히 재료를 기계에 넣고 기계가 제품을 만들고 포장하게 하는 것이었다.
1881년 제임스 본색은 인간의 노동 없이 담배를 자동으로 마는 담배 기계를 특허냈다. 그 담배 기계는 순환식 테이프 위에 있는 담배를 잡아내어, 둥근 모양으로 압축시키고 테이프와 종이로 감아 담배 모양을 만들고 종이에 풀칠을 한 다음 긴 담배 막대를 적절한 담대 길이로 자르는 덮개 튜브로 옮겨 놓는다. 1880년대 말 경, 연속 공정의 기계가 매일 12만 개의 담배를 만들어냈다. 대부분의 숙련공은 하루 기껏해야 3000개의 담배를 만들 수 있었다. 새로운 기계는 너무나 생산적이어서 30대도 안 되는 기계가 소수의 노동자만을 이용해 1885년 전국의 담배 수요를 충당할 수 있었다.
연속 공정 기술로 제조업은 새롭고 급진적인 접근법을 도입하게 되었다. 인력 요소를 거의 투입하지 않고 또는 전혀 투입하지 않는 상태에서 자동화에 의한 기계적 생산 방식은 더 이상 이상주의적인 꿈이 아니었다. 오늘날에는 새로운 정보와 통신 기술로 훨씬 더 정교한 연속 공정 생산이 가능하게 되었다.
사실상 모든 주요 제조 활동에서 인간의 노동력은 기계에 의해 서서히 대체되어 왔다. 오늘날 전 세계 수많은 노동자들은 경제적 격변기 사이에서 옴짝달싹 못하는 자신들을 발견하고 기술의 도입으로 점점 밀려나버린다. 다가오는 21세기 중엽쯤이면 블루칼라는 역사에서 사라져 버리는, 제3차 산업혁명과 보다 높은 기술 능률을 향한 끊임없는 행진의 희생물이 될 것이다.

최후의 서비스 노동자
40년 이상이나 서비스 산업은 제조업의 일자리 손실을 흡수해왔다. 최근까지도 대부분의 경제학자와 기업의 지도자들은 그러한 추세가 계속되리라는 확신에 차 있었다. 그들의 희망은, 새로운 정보 기술이 서비스 산업 자체에 진입하여 생산성을 높이고 서비스 관련 전 산업에 걸쳐 인력을 대체함에 따라 희미해지고 있다.
AT&T는 6000명 이상의 장거리 교환수를 컴퓨터화된 음성 식별 기술로 대체 중이라고 발표했다. 장거리 교환수의 1/3을 없애는 것 이외에도 이 회사는 11개 주의 31개 사무소를 폐쇄하고 400명의 관리직을 줄였다고 발표했다. 뉴저지에 있는 AT&T의 벨 연구소에 의해 새로이 개발된 신형 로봇 기술은 핵심 단어를 구별하여 통화자의 요청에 답변할 수 있다.
새로운 실리콘 교환수는 AT&T가 최근 들어 40퍼센트나 적은 인력으로 50퍼센트 이상이 증가한 통화를 처리할 수 있게끔 하였다. 1950년 과 1980년대 초 사이에 AT&T는 노동력을 대체하는 기술을 도입하여 서비스 산업을 주도해왔다. 이 기간 중에 회사는 전국적으로 14만 명 이상의 교환수를 없애버렸다. 남아 있는 교환수의 상당 수도 1990년대 말경이면 해고 통지서를 받을 운명이다.
광섬유 케이블 네트워크, 디지털 교환 시스템, 디지털 전송, 위성 통신 및 사무 자동화를 포함한 최근의 기술 혁신은 연간 약 5.9퍼센트의 생산성 향상을 유지해 통신 산업이 새로운 첨단 기술 경제의 중요한 속도 조절자 중 하나가 되게끔 하였다. 생산성의 극적인 향상으로 전화 산업의 거의 모든 분야에서의 일자리가 사라지게 되었다. 1981년과 1988년 사이에 고용이 17만 9800명이 줄어들었다.
실업자 중의 많은 사람들이 최근의 기술 혁신의 결과로 해고된 설치공 및 수리공이었다. 이미 조립된 모듈식 장비의 도입으로 수리가 한결 편해졌고 유지 관리도 덜 필요하게 되었다. 플러그 내장형 전화기는 설치를 위해 항시 방문해야 하는 필요성을 없앴다. 신속한 접속 기능을 가진 매설된 전화선은 수리의 필요성을 줄이고 신속한 수리가 가능하게 했다. 첨단의 컴퓨터와 소프트웨어를 사용한 디지털 교환 시스템은 전화의 서비스 양을 대폭 늘리는 한편 단위당 소요 노동력을 현격히 줄였다. 이는 중앙 사무실에 보다 적은 수의 설치공 및 수리공이 필요하다는 것은 의미한다. 중앙의 수리 사무실에 있는 근로자 수는 2000년 경이면 20퍼센트 이상 감소할 것으로 전망된다.
초기 형성 단계이기는 하지만 제3차 산업혁명은 농업, 제조업 및 서비스 부문에 종사하는 수천만 명의 사람들을 밀쳐 내고 있다. 새로운 기술은 재화와 용역을 생산하는 데 필요한 전 세계적 노동력 감소와 함께 첨단 기술을 따라 세계 경제 시스템을 혁신하는 길을 열어 놓았다. 아직까지, 현재의 리엔지니어링과 자동화의 물결은 다가올 시대에 있어 생산성을 가속화하는 한편 더욱 더 많은 수의 노동자가 세계 경제에 있어 불필요하고 관련이 없게끔 만드는 기술 혁신의 바로 시작에 불과한 것이다. 미래에 있어 첨단의 계산기와 로봇 공학, 지구를 감싸안은 통합 전자 네트워크가 더욱 더 많은 경제적 과정에 적용되어 만들고, 움직이고, 팔고, 서비스하는 데 있어 직접적으로 인간이 참여할 여지를 더욱 더 적게 만들고 있다.

첨단 기술의 승자와 패자
사실상 모든 기업의 지도자와 대부분의 주류 경제학자들은 제3차 산업혁명의 극적인 기술 진보가 확산효과(Trickle-down Effect)를 지녀 제품의 원가를 싸게 하고 소비자의 수요 증대를 촉진하는 한편 새로운 시장을 만들어 냄으로써 보다 많은 사람들이 더 나은 보수를 주는 새로운 하이테크 직업 및 산업에서 일하게 될 것이라는 주장을 계속해왔다. 그러나 일자리를 잃거나 일자리를 찾기가 힘든 많은 노동자들에게 있어서 기술의 확산 개념이란 어떠한 위안도 주지 못한다.
주주들은 신기술과 생산성 향상으로 커다란 이익을 보았지만 그 혜택이 보통의 노동자들에게 흘러들어 가지 못했다. 1980년대에 제조업 부문의 시간당 임금액은 7.78달러에서 7.69달러로 줄어들었다. 1980년대 말에는 미국 노동력의 거의 10퍼센트가 풀타임 일자리가 없어서 실업, 반실업 상태에 있거나 시간제 노동을 하고 있었다.
1989년과 1993년 사이에 180만 명 이상의 노동자가 제조 부문에서 일자리를 잃었는데 이들 중 많은 사람들은 자동화의 희생물로, 미국의 고용주 및 외국 회사에 의해 해고되었다. 외국 기업의 고도로 자동화된 공장과 보다 값싼 운영비로 인해 미국의 기업은 업무를 축소하고 노동자를 해고해야만 했다. 자동화로 일자리를 잃은 사람들 가운데 1/3만이 서비스 부문에서 그것도 20퍼센트나 삭감된 임금으로 새로운 일자리를 구할 수 있었다.
더욱 더 많은 통계가 사실상 모든 부문에서 노동력이 감퇴하고 있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한편으로는 지구상의 노동력과 경쟁해야 하는 미국의 노동자들은 자신들이 그 어느 때보다 더 가깝게 경제적 생존의 한계 지대로 밀려나 있다는 것을 발견한다. 1979년 미국의 주당 평균 임금은 387달러였다. 1989년에는 그 임금이 335달러로 떨어졌다. 1973년과 1993년간의 20년 동안 미국의 블루칼라 종업원은 15퍼센트의 구매력을 상실했다.
많은 노동자에게 있어 린 생산은 비참한 환경으로 몰락하는 것을 의미한다. 1994년의 보고서에서 조사 통계국은 풀타임으로 일하면서 4인 가족 기준 최저 생계비 수준인 연간 1만 3000달러를 벌지 못하는 사람이 1979년과 1992년 사이에 50퍼센트가 증가했다고 한다. 조사 통계국이 놀라운 것으로 부른 이 보고서는 미국 노동력의 몰락에 대한 또 다른 극적인 증거를 제시한다. 경제학자들은 그와 같은 몰락을 제조업 일자리의 감소와 세계 경제의 국제화에 그 탓을 돌린다. 미국 노동자로부터 빼앗은 부를 기업의 경영자나 주주들에게 강제적으로 배분함으로써 보수적 경제학자인 번스와 같은 이는 “1980년대에는 평범한 노동자들에게 강압된 복종심을 주입시키기 위해 기업에 대한 충성심이 이용되는 한편 미국의 기업 엘리트들은 호화롭게 살기 위해 더 높이 올라가기만 했던” 살찐 고양이의 시대로 기록될 것이라고 말한다.
수백만의 도시 및 농촌의 사람들이 가난으로 고생하고 점점 더 많은 교외의 중산층 임금 소득자들의 리엔지니어링의 상처와 기술 대체의 충격을 느끼고 있을 때, 소수의 엘리트 미국 지식 노동자와 기업가 및 회사의 경영자들은 첨단의 새로운 국제 경쟁의 혜택을 거두어 들이고 있다. 그들은 그들 주위의 사회적 혼란에서 멀리 떨어져서 풍족한 인생을 구가하고 있다. 미국이 발견한 놀랄만한 새로운 환경은 라이시 노동부 장관으로 하여금 “이제 더 이상 똑같은 경제생활을 영위하지 않는 동일한 사회 구성원으로서 우리가 서로에게 빚진 것은 무엇일까?”하는 질문을 던지게 했다.

새로운 사회계약
고정된 지형과 공간적 근거를 갖고 있는 민족국가는 너무 둔해서 세계 시장의 재빠른 속도를 주도하거나 그에 대응할 수 없다. 반면에 세계 기업들은 본질적으로 공간적이라기보다는 시간적인 제도이다. 세계 기업들은 특정 사회나 특정 공간에 근거를 두지 않는다. 세계 기업들은 새로운 준정치적 제도로서 정보와 통신의 통제에 입각하여 사람들과 공간에 대해서 거대한 권력을 행사한다. 유연성과 이동성을 자랑하는 세계 기업은 모든 나라의 통상기관을 효과적으로 통제하면서 생산 거점과 시장을 재빠르고 손쉽게 한 장소에서 다른 장소로 이전할 수 있다.
정부와 기업 간의 변화하는 관계는 새로운 국제 무역 협정들을 보면 점점 더 명확해진다. 이 협정들은 점점 더 많은 권력들을 민족국가로부터 세계 기업들로 이전시키고 있다. 관세와 무역에 관한 일반협정(GATT),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 마스트리트 협정(Maastricht Accord)은 지구촌에 있어서 권력 패턴의 변화 지표들이다. 이러한 무역 협정 하에서 다국적 기업들의 자유로운 무역에 대한 타협이 이루어진다면 민족국가의 통치권과 관련된 수백 개의 법률들이 무효화된다. 따라서 10여 개의 국가에서 유권자들의 격렬한 공식적인 항의가 있었다. 그 이유는 무역 협정으로 인해서 애써 획득해 놓은 노동, 환경, 건강 등과 관련된 법률들이 일거에 무효화되기 때문이다.
민족국가의 지역 정치적 역할이 감소되는 것과 동시에 고용주로서의 국가의 역할도 감소한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장기 부채의 누적과 증대하는 재정 적자로 인하여 정부는 일자리 창출과 구매력을 촉진시키기 위한 야심적인 공공 지출에 점점 인색해지고 있다. 세계의 모든 산업 국가에서 중앙 정부는 ‘시장의 보증자’라는 전통적인 과업 수행을 점점 꺼려하고 있다. 동시에 다국적 기업에 대한 경제적 영향력도 줄어들고 있으며 자국 시민들의 복지에 영향을 미치는 힘도 감소하고 있다.
노동자 대중과 중앙 정부의 시장에서의 역할 감소는 사회 계약에 대한 근본적인 재고를 강요할 것이다. 돌이켜 보건데 산업 시대를 통틀어 시장 관계가 전통적 관계를 대체했고 인간의 가치는 거의 전적으로 상업적 관점에서 측정되었다. 그러나 ‘시간 판매’의 가치가 줄어들기 때문에 이를 토대로 확립된 상업적 관계의 총체적 연결망도 위협받게 된다. 시장 보증자로서 중앙 정부의 역할이 감소하기 때문에 정부 제도들도 시민 생활에 의미 있게 살아남기 위해서 자신들의 사명을 재정립해야 한다. 지구촌 모든 국가들의 긴급한 과제는 정치 기구들을 엄격한 시장 중심적 지향으로부터 탈피시키는 것이다.
일상사에 있어서 시장 부문과 정부가 아주 작은 역할을 수행하는 사회를 상상한다는 것은 누구에게나 당혹스러운 것이다. 두 제도는 우리 생활의 모든 측면을 지배해왔다. 그러나 100년 전만 해도 사회생활에 있어서 그 역할은 몹시 제한되어 있었다. 결국 기업과 민족국가는 산업 시대의 산물인 것이다. 금세기를 통틀어 기업과 민족국가는 이전에 수천 개의 지역 공동체가 협력해서 수행해오던 기능과 역할을 대체해왔다. 그러나 지금은 더 이상 사람들의 근본적인 욕구를 보장해 줄 수 없게 되었다. 따라서 시민들은 세계 시장의 물리력과 미약하고 무능한 중앙정부의 권위에 대항할 활기 있는 공동체를 스스로 만들어 나가야 한다.
향후 수십 년 이내에 시장과 정부의 역할 축소는 두 가지 방식으로 노동자들의 생활에 영향을 미칠 것이다. 취업자들은 노동 시간 단축과 함께 보다 많은 레저 시간을 갖게 될 것이고 이를 대중오락과 소비 생활에 투자할 것이다. 반면에 증가하는 실업자들과 잠재적 실업자들은 하층 계급 속으로 마주비하게 내던져지는 자신들을 발견할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생존을 위해서 비공식 경제에 의존할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임시직에 종사할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도둑질과 범죄를 저지를 것이다. 사회가 더 이상 필요로 하지 않지만 건강한 육체를 지닌 사람들이 증가함에 따라서 마약과 매춘이 계속 증가할 것이다. 정부는 이들의 호소를 묵살할 것이다. 정부의 투자 우선순위는 북지와 일자리 창조가 아니라 경찰력 강화와 감옥 건설이 될 것이다.
많은 산업 국가들이 처해 있는 이 경로가 불가피한 것일 수는 없다. 제3차 산업혁명에 의한 기술적 희생의 충격을 완충시키는 다른 선택이 가능하다. 취업자들의 노동 시간이 단축되고 실업자들의 유휴 시간이 증가함에 따라서 사적 부문 및 공적 부문 바깥에서 수백만 명의 미사용 노동력을 건설적으로 이용할 기회가 주어진다. 이들의 재능과 에너지는 수천 개의 지역 공동체의 재건과 시장 및 공공 부문과는 독립적으로 번창하는 제3의 힘을 창출하는 데 효과적으로 사용될 수 있다.

제 3부문
미국 정치에는 공동체에 기반을 둔 강력한 제3의 힘의 토대가 이미 존재하고 있다. 근대에 접어들면서 공공 부문과 사적 부문에만 협소하게 주의가 집중되었지만 미국인의 생활에는 제3부문이 존재하고 있다. 이것은 국가 형성기에 역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녔으며 지금은 21세기의 사회 계약 재형성에 도움을 줄 명백한 가능성을 제공하고 있다. 제3부문은 독립적 또는 자원적 부문으로도 알려져 있다. 이 부문은 공동체 연대가 금전적 장치를 대체하고 ‘자신의 시간을 남에게 주는 것’이 자신과 자신의 서비스를 타인에게 판매하는 데 근거한 인위적인 시장 관계를 대체하는 영역이다. 한때는 국가 수립에 핵심적이었던 이 부문은 최근에는 시장과 정부의 지배에 의해서 계속 침식당해 왔고 공공 생활의 주변부로 전락해 왔다. 최소한 이용 가능한 노동 시간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다른 두 부문의 중요성이 점점 감소하고 있다. 따라서 제3부문의 부흥 및 변형 가능성과 이것을 활기찬 탈시장 시대의 창조를 위한 견인차로 이용할 가능성을 신중하게 탐색해야 한다.
제3부문은 이미 사회에 널리 침투해있다. 공동체 활동은 사회 서비스, 건강, 교육과 연구, 예술, 종교, 변호 활동 등 전 범위에서 수행되고 있다. 공동체 서비스 조직은 고령자, 장애자, 정신병자, 불우 아동, 무주택자와 빈민들을 지원하고 있다. 자원 봉사자들이 낡은 아파트를 보수하고 저소득층용 새 주택을 세우고 있다. 수만 명의 미국인 자원 봉사자들이 공공 병원에서 에이즈 환자를 포함한 환자들을 돌보고 있다. 수천 명이 양부모로 봉사하거나 혹은 고아원과 자매 결연을 맺고 있다. 가출 소년 또는 고민이 있는 소년들에 대한 카운슬링의 제공이나 문맹 퇴치 운동을 위한 교사로 활동하고 있는 사람들도 많다. 주간 혹은 방과 후 탁아 센터에서는 가난한 아이들에게 급식도 제공한다. 점점 많은 미국인들이 위기 센터에 자원봉사자로 활동하면서 강도 및 강간 피해자와 부인 및 아동 학대의 피해자들을 돕고 있다. 수천 명의 사람들이 공공 보호소에서 자원봉사를 하고 있고 필요한 의류품을 제공하고 있다. 많은 미국인들이 알코올 혹은 약물 중독자의 갱생 프로그램에 참가하고 있다. 변호사, 회계사, 의사, 경영자 등 전문가들이 자발적 조직에 지원하고 있다. 수백만 명의 미국인들의 자원 재생 활동, 에너지 절약 활동, 반공해 운동, 동물 보호 등 환경 보호 운동에 자발적으로 참가하고 있다. 불만 처리와 대중의 인식과 법률 개선을 위한 조직에 참가하고 있는 사람들도 있다.
미국의 경제 활동 행위의 구성을 GNP 구성으로 보면 기업 부문이 80퍼센트, 정부 부문이 14퍼센트임에 비하여 제3부문이 6퍼센트 이상을 차지하고 있다. 또한 제3부문은 총 고용의 9퍼센트를 차지하고 있다. 이 부문의 피고용자는 건설, 전기, 수송 또는 섬유나 의류 산업보다 더 많다. 제3부문의 자산은 현재 연방 정부의 약 1/2에 해당된다. 1980년대 초반 예일 대학교의 경제학자 루드니에 의한 연구에 따르면 미국의 자발적 조직들의 지출이 7개국만 제외한 나머지 국가의 GNP보다 더 많다고 한다. 비록 제3부문이 총고용과 총수익 면에서 정부 부문의 절반밖에 안되지만 최근에 정부나 사적 부문보다 2배나 더 급속하게 성장해 왔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공동체 서비스는 전통적 형태의 노동에 대한 혁명적인 대안이다. 노예, 농노, 임금 노동자와 달리 강제성도 없고 금전적인 관계로 환원되는 것도 아니다. 이것은 도움 행위이자 타인에게 베푸는 행위로서 스스로 원해서 하는 행위이며 금전적인 보상을 기대하지 않는다. 이런 의미에서 고대 경제에서의 선물 주기와 유사하다. 공동체 서비스는 세상만사의 상호 연관성에 대한 깊은 이해로부터 나오며 개인의 부채 의식에 의해서 동기화된다. 이것이 종종 수혜자와 후원자 간의 경제적인 결과를 낳기도 한다. 그러나 이것은 본질적으로 사회적 교환이다. 이 점이 공동체 서비스와 물질적 내지 금전적 교환이자 경제적 손익이 사회적 결과보다 우선시되는 시장 행위와의 차이이다.
자발적 조직들은 다른 나라들에도 존재하고 있고 중대한 사회적 힘으로 급속하게 성장하고 있지만 미국만큼 잘 발달되어 있지는 않다. 미국인들은 자발적 조직들을 개인적 관계가 풍요롭게 되고 지위가 성취될 수 있는 피난처로 생각해왔고 따라서 공동체 의식이 창출될 수 있었다. 제 3부문은 다양한 이해를 지닌 미국인들을 응집력 있는 사회적 일체감으로 결집시켜 주는 결속력이자 사회적 접착제이다.

Posted by 상겔스 상겔스


티스토리 툴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