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뢰즈 이후의 정치 내재성과 초월 재고 (2/2)

Peter Hallward, “Politics after Deleuze: Immanence and Transcendence Revisited”

 

2.

제가 고찰하고 싶은 마지막 두 번째 점은 첫 번째 점에서 곧바로 나옵니다. 들뢰즈의 비주의주의에 정치적인 억양을 붙이기 위한 길은 하나뿐입니다. 그것은 비주의주의에 의해 촉진되는 리얼리티와 직접 융합되거나 리얼리티로의 침례가 그 자체로 뭔가 전복적이고 해방적이며 혁명적이기도 하다고 논하는 것입니다.

정말로 그런 침례는 정의상 매개의 형태들을 전복하기는 합니다. 그런 심리적·사회적·제도적·기술적인 매개는 활동가가 리얼리티로부터 일정한 전략적 거리를 두도록 허락하며, 수단과 목적을 (융합시키지 않고) 숙고하여 통합하려고 하는 그 과정 속에서 상황의 양상들에 관여하는 것을 허용합니다만, [아무튼] 그러한 매개를 전복하기는 합니다. 그렇지만 어떤 의미에서 해방적이기도 한 이 전복의 자격은 말하자면, 그것이 설득적인 것은, 들뢰즈가 활동가를 기각하는 것을 우리가 인정할 때뿐이며, 또 의지적 행위를 촉진하는 조건들 그 자체가 억압적이라고 인정하고, 리얼리티가 어떤 의미에서 본래적으로 창조적이고 생기 있다고 하는 들뢰즈의 기본 주장을 인정할 때뿐입니다. 이것은 다른 곳에서 자세하게 다룬 논점이므로, 나머지 시간에는 들뢰즈가 형이상학을 초월성보다는 내재성에 투입함으로써 무엇을 위태롭게 할 수 있을지를 간단하게 소묘할 작정입니다.

내재성은 내부에 머물다를 의미합니다. 그리고 잘 알다시피, 창조자-신에 대한 일체의 초월적인 구상을 배제하고 존재의 내재적인 구상을 긍정한다는 점에서 들뢰즈는 둔스 스코투스와 스피노자를 그대로 좇고 있습니다. 그때 신은 존재를 넘어 서서 외부로부터 존재에 개입하는 활동이 아니라, 고스란히 존재에 내재적이며, 자연 전체와는 구별할 수 없게 됩니다. 이리하여 내재적 존재론은, 신 없는 자연의 무신론적 주장이라고 독해되거나, 반대로 (그리고 이쪽이 스피노자 자신의 지복으로의 경도에 적합합니다만) 범신론의 한 형태라고, 전체적으로 신격화되고 영화霊化[정신화]”된 자연의 긍정이라고 독해되는 것입니다. 스피노자를 철학이 화신(化身)한 인간으로서 포용하는 들뢰즈의 관점에서 본다면, 스피노자주의란 유보없이 내재성과 범신론의 위험’”을 포용하는 것입니다(EP, 333; cf. 67). 여기서의 출발점은 자기-원인과 자기-필연화로서의 신의 절대적인 자기-충족입니다. 스피노자는 씁니다. “존재하는 것은 무엇이든”,

 

신 안에 존재하고, 신의 바깥에는 아무것도 존재할 수 없고 아무것도 인식될 수 없는 신의 지고한 힘, 혹은 무한한 자연으로부터, 무한하게 많은 사물이 무한하게 많은 양태로, 모든 사물이 필연적으로 나오는 것이며, 게다가 삼각형의 자연 본성으로부터, 영원에서 영원에 이르기까지, 삼각형의 내각의 합이 두 개의 직각과 마찬가지라고 하는 것이 나오는 것과 동일한 방식으로, 그것과 동일한 필연성으로, 모든 사물이 항상 나오는 것이다.[각주:1]

 

들뢰즈가 주석하듯이, 모든 유한한 존재자는 이런 자기-원인의 위력(force)을 결여하고 있으며, “자기의 힘에 의해 실재시키지 못하고, 자기의 힘에 의해 유지[보존]되지 못하고, 그 실재와 유지를, 자기를 유지하고 자기에 의해 실재할 수 있는 존재자에 의존하고 있다. 이리하여 유한한 존재자가 그것에 의해 실재하고 유지되고 활동하는 바의 힘은, 신 그 자체의 힘이다”(EP, 89-90). 이리하여 실재하는 모든 것은, 실재하고 활동하는 유일한 무제한적 힘을 표출하는 다각형의 면切子面, 크건 작건 활동적이고 크건 작건 힘을 가진 다각형의 면切子面이다. 우리 같은 유한한 존재자를 결정하는 원인으로서의 힘은 그 결과가 그 힘 안에 존재한다는 의미에서 내재적이다. 이때, 물론 그 힘의 안이란, 다른 별개의 것의 안이기도 하지만, 역시 [후자도] 그 힘 안에 존재하고 머문다.” 그것은 신의 양태 또는 피조물이 신의 내부에 머무는 방법에 의해서이다(EP, 172). 그런 내재성은, 자기에만 내재적이며, 따라서 모든 것을 파악하고, 전부이자 하나인 것을 흡수하고, 그것이 내재할 수 있는 그 무엇도 남겨두지 않는다”(WP, 45). 그때, 임의의 주어진 양태를 이해하는 것은, 그 양태가, 존재자 전반의 무한한 전체성또는 무제한의 하나-전부를 만들어내는 원인의 위력의 기구의 일부인 그 방식을 이해하는 것이다(WP, 35, 38; cf. DR, 37). 위와 같은 내재적인 방향성으로부터, 들뢰즈 자신의 존재론의 시차적(示差的)인 특징의 대부분이 일의성, 직접성, 표상[재현]의 거부, 주관-대상 관계의 거부 등이 곧바로 나옵니다.

잠시 들뢰즈는 옆에다 두고, 위와 같은 입장의 정치적 함의에 대해 일정한 실마리를 얻기 위해, 전적으로 별개의 이론적 맥락에서의 전개를 상기해봅시다. , 아도르노에게서 비롯됐다고 간주되고, 맑스 경제학의 독해를 통해 모이셰 포스턴에 의해 더욱 전개된 비판이론입니다. 아도르노가 내재적 비판의 방법을 옹호했을 때, 그의 염두에 있던 것은, 그 대상의 내부에 머무는비판이었습니다. 동일화 사고의 억압적 귀결에 대한 비판은, 동일성과 그 개념화의 자원을 그 자체에 반하는 방식으로 사용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부정적으로라고 해도 다른 삶의 방식을 암시하게 될지도 모르는 것은, 어디까지나, 우리의 손상된 삶이 견뎌내고 있는 고뇌에 대해 반성하는 것을 통해서입니다. 아도르노의 논의에 의한다면, “만일 우리가 하이데거의 존재의 철학 자체의 구조를 떠맡지 않고, 그 위력을 그 자체로 향하게 하지 않고, 그 바깥쪽으로부터 전반적으로 거부해버린다면”, 하이데거의 존재의 철학에 대한 비판은, 그 대상에 대해 아무런 힘도 갖지 않습니다.[각주:2] 마찬가지로, 자본주의의 내재적 비판은, 맨 처음에 그 대상의 자기-충족성을 인정해야 합니다. 자본주의는, 자연의 모든 것과 인간 경험의 모든 것의 양상을 상품화의 그립으로 에워쌉니다. 그것을 인정하고, 그 후에, 자본주의의 내적 모순의 흔들림(play)을 추적하는 것을 시도해 보고, 내적 모순이 언젠가 뭔가 다른 것으로 통하는 문을 열지도 모른다고 희망하는 것입니다.

누가 그 문을 열 것인가라는 물음, 어떻게 문을 열 것인가라는 물음은, 아도르노의 관심사의 목록의 상위에는 놓이지 않습니다. 그런 물음들은, 맑스의 자본주의 분석에 대한 포스턴의 획기적인 연구에도 표면화되어 등장하지는 않습니다. 포스턴의 연구는, 내재적 비판의 범례로서 크게 칭찬 받았습니다만, 포스트-자본주의 사회의 추상적 가능성을 다소간 고집하는 방향에서, 아도르노의 비관적인 사회 분석을 수정하고 있을 뿐입니다. 포스턴에 따른다면, 맑스의 자본 분석에 힘이 부여되는 것은, “그 관점이 고찰되는 구조의 외부에 있는 것이 아니라”, “구조 자체가 발생시키는 내재적 가능성이기 때문입니다.[각주:3] 포스턴은 가치형태가 발생시키는 강제와 가치형태가 명령하는 추상적 노동으로부터 자유로워진 사회의 가능성을 되풀이하여 언급합니다만, 그의 책은, 이 가능성을 리얼리티로 바꾸는 활동들에 대해 아무것도 말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듣는 것은, 이 활동가는 프롤레타리아트 그 자체가 아닐 수 있다는 것뿐입니다. “프롤레타리아트는 자본의 대상이자 부속물이며”, 그런 한에서, “이 계급역사의 <주체>”나 자본에 대한 자기-해방적인 적대자가 아니며,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 관점에서 보면, 프롤레타리아트의 유일한 역사적 과제는, 그 강화나 자기주장이 아니라, 오히려 자기 폐기입니다.[각주:4] 아무런 변명도 이뤄지지 않은 채, 그 성과는 이렇습니다. “인간의 통제를 넘어선 역사적 역동으로서, “사회적 활동가의 배후에서, 그들의 의지로부터 독립하여 작동하는 위력이 구동하고 있는 자본주의의 분석이라는 것입니다.[각주:5]

어느 정도 맑스 자신은 비주의주의적인 선을 따라 읽을 만한가라는 복잡한 문제는 옆에 두었는데요, 들뢰즈와 가타리에 의한 자본주의의 반성적 고찰은, “비판적이라는 것은 그다지 강조되지 않았기 때문에, 확실히 비주의주의적으로 읽어도 마땅합니다. 아주 간단하게 말합니다만, 안티 오이디푸스의 진단으로는, 자본주의 과정이란 상품화의 항상적-가속적인 기구에 의해, 사회적 실재의 모든 다각형의 면탈코드화되고, 전의 복잡한 사회관계가, “탈코드화된 흐름의 결합을 통해 구성된 단일한 내재성의 장으로, “모든 초월성의 부정으로 평탄화되는 과정입니다. 점차 그 탈코드화가 다른 노예에게 명령하는 노예만”(AO, 254)을 남기는 비할 데 없는 노예제를 제도화한다고 하더라도, 이 지옥의 복종의 논리를 유지하는 경계를 돌파할 수 있는 유일한 활동가는 들뢰즈와 가타리가 스키조프레닉[분열증자]”이라고 부르는 바의 범례적인 비-활동가입니다. 드뢰즈와 가타리의 스키조자본주의의 극한을 탐구하거나 구현합니다. “스키조는 자본주의의 내적인 경향성의 실현이며, 자본주의의 과잉 생산물, 자본주의의 프롤레타리아트, 자본주의의 살육의 천사이다”(AO, 35; cf. 255). 자본주의와 분열증2권에서 마찬가지의 기능이 프롤레타리아트에게 귀속됩니다만, 그것은 소수자-되기로의 도관(導管)으로서, 혹은 서양사회에서의 노마드의 후계자”(TP, 558 n.61), 철저하게 탈영토화된 후계자로서 프롤레타리아트가 도움이 되는 한에서일 뿐입니다.

자본주의적 생산관계로 채워지는 제도에서도, 탈영토화와 분자화의 선이 새로운 성격과 새로운 종류의 혁명적 잠재력을 얻을여지가 있다고 들뢰즈와 가타리가 제언하는 것은 다분히 정당합니다.[각주:6] 그렇지만 쉽게 엿볼 수 있습니다만, 여기서 해방적이고 혁명적인 것으로서 등장하는 것은, 그런 탈영토화의 운동뿐이며, 특히 자본주의 자체가 구동하는 형태의 절대적인 탈영토화입니다. 자본주의적 착취를 숙고를 갖고서 단절하고 자본주의의 부불 노동의 명령에 승리하는 과제를 스스로 설정하는 활동가에게 요구되는 형태의 힘이나 역량을 고찰하기보다는, 들뢰즈와 가타리는, 도주라는 의심스러운 대가를 우리에게 남기는 것입니다. 이 도주선은, 현실적일 수밖에 없는 임의의 역사적·정치적 과정과 더불어 작용한다기보다는, 절대적이고 매개 없는 자기-원인적인 필연성(causa-sui)과 공통되는 시공간을 따라 작용합니다. 프롤레타리아트와 그 특정한 정치적 역량을 대신해, 들뢰즈와 가타리는, 우리가 노마드적인 전쟁기계에게 믿음을 가지라고 유혹합니다. 전쟁기계는 절대적인 속도로 작용할 것이며, 그것은 속도와 동의어로 간주됨으로써, “순수하고 계량 불가능한 다양성 , 찰나의 침입, 변신의 힘의 침입”(TP, 386, 352)으로서 작용하는 것 같습니다.

결국 우리가 자본주의의 역동의 극한[한계]”에 관해 들뢰즈와 가타리가 조립하는 것에 가까워짐에 따라, 그 모든 현실적인 역량의 탈조직화나 용해를 넘어서 살아남을지도 모르는 유일한 활동가는, 오로지 잠재적이고 초-역사적인 활동가이며, 노마드적 또는 분열증적 주체, 현실성 자체의 종언에 상응하는 주체인 셈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자본의 한계를 넘어서, 분열증은 역사의 종언입니다(AO, 130). “탈영토화의 가장 먼 한계에 손을 대려고 노력함으로써, 들뢰즈와 가타리의 아직 보지 못한 분열증자는 자본주의의 바로 한계를 찾아낸다. 분열증자는 자본주의의 내적 경향성의 실현이다.” 그리고 그 조건에서, 분열증자는 리얼리티의 생성변화그 자체를 구현[受肉]한다(AO, 35)는 셈입니다.

말할 것도 없이, 여기서, 우리는 멀리 있습니다. 자유와 정치에 대해서 더욱 명백한 관심을 품은 철학자들, 예를 들어 사르트르, 파농, 시몬느 드 보봐르가 제안한 내재성과 초월성을 정면에서 대조시키는 설정으로부터는 멀리 있습니다. 이들 사상가들에게 인간의 자유의 실천적인 기초는, 주어진 상황을 초월하는 상대적인 역량과, 자기의 선택에서 유래하는 적극적인 목적으로 자기를 기투하는 상대적인 역량에 존재합니다.[각주:7] 그런 초월성을 빼앗기는 것, 보봐르의 표현으로는 자기의 내재성 안에 응고되는 것, 자기 자신의 미래를 만들기 위한 자기의 힘으로부터 분리되는 것입니다. 그때, 전제(專制)사람을 그 사실성의 내재성으로 가둬버리는힘으로서 정의할 수 있습니다. 그 경우, 사람은 이제 사물들의 한복판의 하나의 사물 이상의 것으로는 나타나지 않고, 다른 사물의 집합으로부터 공제[뺄셈]된다고 하더라도, 그 부재의 어떤 흔적도 지상에 남기지 않고 공제[뺄셈]될 수 있다.”[각주:8] (이것은 들뢰즈와 가타리가 생성 일반의 우주적인 공식이라고 한 지각할 수 없는 것으로-되기에 대해 좋은 근사치라고 할 수 있을 겁니다).

시몬느 드 보봐르가 사르트르와 파농과 똑같이, 또한 이 점에서는 라르드로(Lardreau)와 똑같이, 어떤 자유의 옹호이든, 복종으로부터 해방으로 이끌어갈 어떤 집단적 동원이든, 적어도 최소한의 초월성을 전제로 해야 한다고 주장한 것은 옳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 초월성은 사르트르의 표현으로는, “우리로부터 만들어지는 것을 활용하는 것을 우리에게 허용하는 것입니다.[각주:9] 보봐르가 논하듯이, 여러분이, 있는 그대로의 세계에 대해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고, 그로부터 자기를 찢어내고”, “구체적인 목적과 특정한 기획의 실현을 향해 자기를 기투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면, “자기는 자유라고 주장할수 없습니다. 물질적 원인과 내재적 필연성의 흐름을 중단하는 역량이 없으면, 지각과 재-활동[-] 사이에 아무런 거리감이 없다면, 생리의 수준에서도 사회의 수준에서도 활동을 자극으로부터 분리하고 그리하여 숙고적인 의지 작용이 자동적 또는 기계적인 반사보다 우세하도록 촉구하는 거리가 없다면, 자유는 없는 것입니다. 개인적이든 집단적이든, 그런 간극을 기초로서 자기를 구성할 수 있는 활동가만이, 자유로운 자기-결정을 할 수 있을 겁니다. 그리고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들뢰즈 철학에는 그런 활동가의 장소가 없는 것입니다.

 

  1. Spinoza, Ethics IP 15, IP 17 S1. [본문으로]
  2. Adorno, Negative Dialectics(Routledge), 97. [본문으로]
  3. Moishe Postone, Time, Labor and Social Domination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93), 255. [본문으로]
  4. Postone, Time, 276n 41. “요컨대 맑스에 의한 자본의 궤도 분석은, 사회주의 사회 속에서 프롤레타리아트가 역사의 <주체>로서 자기 실현할 가능성을 어떤 방식으로도 가리키지 않는다”(357). [본문으로]
  5. Postone, Time, 215n 109, 295, 390. 그리고 들뢰즈 : “운동은 항상 사고하는 자의 배후에서 일어나거나, 사고하는 자가 눈을 깜빡이는 순간에 일어난다. 바깥으로 나오는 것은 이미 달성되었다. 그렇지 않다면 결코 달성되지 않을 것이다”(Dialogues II, 1). [본문으로]
  6. WP, 93; cf. TP, 345; DI, 270. [본문으로]
  7. 예를 들어 다음을 보라. Simone de Beauvoir, Ethics of Ambiguity (Citadel Press, 1948), 25-27; cf. Hallward, “Fanon and Political Will”, Cosmos and History 7:1 (2011), 104-127. [본문으로]
  8. Beauvoir, Ethics of Ambiguity, 102, 100. [본문으로]
  9. Sartre, Situations vol. 9, 101 [사르트르, 『문학이란 무엇인가』] ; cf. ;cf. Lardreau, L’Exercice différé de la philosophie, 52. 반대방향으로 지나가는 리스크도 있으며, 로트레아몽과 플라톤을 따르는 바디우처럼, 사고할 수 있는 활동가에 관해 사고의 절대적 초월성을 고집하는 리스크도 있다. 바디우에게서 수학이 “참인” 사고의 범례적 사례인 것은, 수학이 가장 명백하게 주체로부터의 “권외(圈外)”의 거리를 나타내기 때문이다. 다만 그 어떤 “진리의 초-인간적인 도래”도 그것을 떠받치는 주체를 “유도”하고 “구성”해야 한다. “수학적 영원성”의 “얼음같이 차가운 반인간주의”는 수학에 의해 부과되는 “개조”의 연성과 “지성의 소원화”에 복종하는 규율훈련된 사유자에게만 이해 가능하다(Badiou, “Mathematics and philosophy”, Theoretical Writings, 10-14; cf. Badiou, Logics of Worlds, 173-174). 이렇게 전담함으로써 바디우는, 들뢰즈나 알튀세르나 푸코의 손에서 배제된 주체의 범주를 회복할 수 있지만, 한쪽에서의, 바디우에 있어서의 진리의 유발 효과로서의 주체의 이론과, 다른 쪽에서의, 활동가와 그 역량에 대한 주의주의적 구상 사이에는, 여전히 큰 거리가 있다(cf. Hallward, “Sujet, décision et volonté dans la philosophie d’Alain Badiou”, in Autour d’Alain Badiou [Paris: Germina, 2011], 303-331). [본문으로]
Posted by 상겔스 상겔스

* 피터 홀워드가 2015년 3월 15일부터 일본을 방문해서 두 번의 강연을 벌였다고 한다. 간단한 정보는 여기를 클릭. http://www2.gensha.hit-u.ac.jp/TransA/lecture20150315.html

* 이 두 번에 걸친 강연 내용이 최근 일본에서 발간된 잡지 『다양체』에 수록되었다. 이미지를 클릭하면 목차를 볼 수 있다. 이것들을 독서의 습관으로 틈틈이 옮겨적을 예정이다. 우선 두 번째 강연에 해당되는 <들뢰즈 이후의 정치>부터 옮긴다. 일본에서 이 강연의 제목은 「ジル・ドゥルーズと政治(”Politics after Deleuze: Immanence and Transcendence Revisited”)」였으나, 아래의 잡지에는 다음의 제목으로 수록됐다. ドゥルーズ流の政治/ドゥルーズ後の政治|ピーター・ホルワード|小泉義之訳. 일본과 한국에서는 번역어, 문장 구사 등이 다르기 때문에 홀워드의 원문을 구해서 대조해야겠으나, 지금으로서는 굳이 그렇게 할 이유가 없다고 판단해서 구태여 따로 연락을 취하지 않았다. 


* 아래의 본문을 보면 나오는 주라비슈빌리[주라비크빌리]의 글은 정독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 블로그에 게재하다가 중단한 이치다 요시히코의 <혁명론>에서도 그의 이름이 등장하는데, 어떻게 언급하고 있는지를 홀워드와 교차하면서 읽어도 흥미로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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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뢰즈 이후의 정치 : 내재성과 초월 재고 (1/2)

Peter Hallward, “Politics after Deleuze: Immanence and Transcendence Revisited”

 

최근 25년 동안, 아무래도 질 들뢰즈는 넓은 의미에서의 이른바 대륙철학이나 프렌치 씨어리에서는 가장 영향력이 있는 유일한 인물이기를 계속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특히 최근 10년 동안, 들뢰즈 저작의 양상들을 둘러싸고, 이채로운 수의 책과 논문이 넘쳐나는 것이 눈에 띕니다. 실제로 들뢰즈에 관한 전문연구서와 들뢰즈를 주요 대상으로 하는 책을 도서관의 빠른 검색으로 검색해보면, 이제 1200건 아래로 내려가지 않습니다. 에딘버러대학에서 나오고 있는 시리즈 Deleuze Connections, 들뢰즈와 디자인, 들뢰즈와 건축, 들뢰즈와 교육, 들뢰즈와 인종, 들뢰즈와 공간, 들뢰즈와 그 밖에도 머리에 떠오르는 한에서 무엇이든 될 수 있는 것처럼, 이제 25권을 채웠고, 앞으로도 늘어날 예정입니다.[각주:1]

* 각주1에 달려 있는 주소는 다음으로 변경되었다. https://edinburghuniversitypress.com/series-deleuze-connections.html

이 일련의 제목이 반영하고 있듯이 들뢰즈에 대한 관심은 넓은 범위에 걸쳐 있다는 것에 주의해야 하지만, 그곳은 차치하더라도, 유럽과 앵글로색슨의 근처에서도 많은 독자가 들뢰즈에게 매료되어 온 주된 이유 중 하나가, 정치사상가로서의 그 중요성임을 보여주기란 그리 어렵지 않습니다. 오늘, 파리나 런던의 대학에서 현대유럽철학이나 비평이론의 어떤 연구과정을 전공하려고 해도, 어김없이 들뢰즈와 공저자인 펠릭스 가타리에 관련된 정치적 모티프의 한 쌍과 다소간 직접 마주치게 될 것입니다. 사실 제가 만나온 이론 지향의 학생들의 거의 대부분이라고는 하지 않더라도, 그 상당수에게는 미시정치, 탈영토화, 노마돌로지, 도주선, 전쟁-기계, 소수자로의 생성변화[소수자-되기], 자연스레 입에서 나오는 정치적 어휘의 대부분을 이제 뒤덮고 있는 몇 안 되는 용어의 고작 몇 개의 예입니다. 이런 학생들은 많은 것에 대해 논합니다만, 대부분의 학생들이 일치하는 바로는, 들뢰즈는, 정치활동의 현대적 형태와 그들이 직면한 속박의 다양한 형태를 이해하기 위한 필수적인 참조처이기를 계속하고 있습니다.

이 상황을 둘러싸고 금세 깨닫게 되는 것 중 하나는, 들뢰즈 자신은, 통상적인 의미에서의 정치에 대한 관심을 명시하지 않고, 굳이 말하자면 그것을 결여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정의, 평등, 자유, 해방 등과 같은 주요한 정치적 개념은 그의 고려 바깥에 있으며, 자본주의와 분열증[안티 오이디푸스천 개의 고원]에서 제출된 국가 비판을 별도로 하면, 별의별 정치제도, 통치의 기구, 입법대표정부의 기구에 대해 그는 그 이상의 논의를 거의 제시하지 않습니다. 거대 신문용으로 작성된 몇 개의 논설(유명한 것은 팔레스타인 해방운동에 관한 것입니다)을 빼면, 들뢰즈가 정치의 경위나 혁명에의 동원에 대해 일부러 자세하게 논의하는 것은 역시 드뭅니다. 들뢰즈나 들뢰지안이 정치로 무엇을 의미하는가는 역시 전적으로 불분명하며, 현재 이용 가능한 들뢰즈 사전의 종류가 한결같이 소수자 정치”, “미시정치”, “혁명의 논의를 등재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정치의 토픽에 대해 특별한 항목을 결여하고 있는 것은 우연이 아닐 겁니다.[각주:2]

이렇게 되면, 아무래도 제 자신의 정의를 부여해둘 필요가 있습니다만, 저로서는 오랫동안 전통에 맞춰서, “정치란 인간의 경험에 있어서의 다음과 같은 집단적 차원을 지시하는 것이라고 제안하겠습니다. , 1. 무엇보다 기본적으로 자연적인 조직이나 상호행위(예를 들어 친족, 민족, 지리, 언어에 기초를 둔 형태들)로 환원할 수 없는 집단적 차원이며, 2. 다른 것과 구별하여 정치적집단성이나 공민적집단성을 구성하는 참가자들은, 평등과 포함을 기초로 상호관계를 맺으며, 다른 생활영역으로부터 따온 계층성을 기초로 하여 (예를 들어 군사명령을 기초로 하거나, 가정경제종교 권위를 기초로 하여) 상호 관계를 맺는 일은 없다는 것을 원리 원칙으로서 전제로 하는 집단적 차원입니다.[각주:3] 더 한정해서 강조해 둡니다만, 데모크라시의 정치는 보통의 인민의 힘에, 즉 그 어떤 형태의 특권단체나 지배계급과도 싸워 이기는 인민 일반의 힘에 바탕을 둔 것입니다. 다른 곳에서 논했는데요, 민주주의와 여러 가지 형태의 과두제나 재산제(plutocracy)(그 대부분은 ‘(다른) 민주주의라고 자칭합니다)를 가장 간편하고 명백하게 구별하는 방식은, 루소(로베스피에르와 생-쥐스트 등의 자코뱅파가 감복해서 계속 인용하는)가 주권의 기초를 인민의 의지에 둘 때의 논리, 일반의지 혹은 인민의지[의 논리]에 입각하면서, 인민주권의 우위를 견지하는 것입니다.[각주:4] 이러한 집단의 실재의 기초는 자기가 결정하고 자기에게 짐을 지우는 그 역량, 그렇게 해서 적대적이고 타율적인 결정의 형태들에 (단지 저항한다기보다는) 승리하는 그 역량에 직접적으로 놓여져야 합니다. 거꾸로, 이 일반 역량의 기초는, 서로 강화하는 집단적인 능력들과 역량들, 특히 집회·교육·정보·토의(deliberation)·조직화·결의·실행의 역량들에 놓입니다.

* 각주 4에 붙은 주소는 여기를 클릭. https://www.radicalphilosophyarchive.com/wp-content/files_mf/rp155_article1_willofthepeople_hallward.pdf

정치에 대한 위와 같은 노골적으로 주의주의적인 구상은 들뢰즈와의 정면충돌을 야기하는데요, 오늘 여기에서는, 바로 이 충돌을 저는 정밀조사하고 싶습니다. 들뢰즈의 저작에 인민이 어떻게든 어떤 방식으로 정치적으로 출현하더라도, “도래할 인민[민중]”이라는 순수하게 잠재적인 형상으로서 출현하는 것이며, 그것은 그가 스피노자가 말하는 영적인 자동기계를 집단적 형태로 개조했던 것은 아닐까요?[각주:5] 무의식, 욕망의 기계적이고 사실은 자동기계적인 성질, 경험의 분자적 혹은 하위-개체적인 차원을 강조하는 철학은 정치적 의지와 의지적 활동으로부터 가장 먼 것은 아닐까요? 저는 들뢰즈의 최초의 가장 열심인 독자의 한 명이었던 프랑수아 주라비슈빌리에게 진심으로 동의합니다. 그런 그가 1996년의 중요한 논고에서 엄밀하게 강조했던 것처럼, 정치적 좌파는 일반적으로 주의주의를 참조축으로 하여 자기를 정의하지, “들뢰즈는 상상할 수 있는 한에서 가장 주의주의적이지 않은 철학을 전개했다. 항상 들뢰즈는 진정한 사고와 생성하는 모든 근본적으로 의지적인 성격을 주장했다. 그리고 어떤 계획에 입각해 세계를 바꾼다거나, 어떤 목적을 실현하기 위해 세계를 바꾼다는 등의 일처럼 그에게는 인연이 먼 것은 없었던[각주:6] 것입니다.

들뢰즈적인 정치가 있다면, 물론 그것은 비주의주의적이라고 기술되는 것이 가장 적절하며, 널리 유럽철학에서 좌파현대정치분석으로서 통용되고 있는 것의 실로 상당수가 일반적으로 이런 의미에서 바로 들뢰즈적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은 쉽다고 생각합니다. 예를 들어, 주권과 그 동족어에 대한 유행의 산만한 비판을, 특히 그것이 무엇이든 지도 주체나 주권적 주체”(그런 것이 있었다면, 그것은 괴물적인 혼란입니다!)에 대한 거절을 보세요. 자크 데리다에 의한, 무조건적인 윤리적 책임을, 적극적 자유의 그 어떤 구상으로부터도, “, 지배, 폭력으로서 규정되는 자유, 나아가 기능으로서, ‘나는 할 수 있다의 가능성으로서 규정되는 자유로부터도 분리하려고 하는 미수에 그친 기획을 계승하는 유산을 생각해 보세요.[각주:7] 조르조 아감벤을, 그리고 또한, 대륙-철학계에서는 최근 들어 일정한 견인력을 갖춘, 티쿤(Tiqqun), 보이지 않는 위원회(the invisible committee), 공산주의이론(Théorie communiste) , 다양한 공산화가속주의의 주장을 생각해 보세요. 이것들에는 차이가 있다는 것도 분명하지만, 이것들에 공유되고 있는 것은, 활동가와 그 현실적 정치 역량을 합병하는기능을 수행할 수도 있는 모든 것에 대한 아감벤에 의한 비판, 숙려[토의](deliberate) 단계와 스텝step을 밟아나가도록 틀이 부여될 수도 있는 활동의 전략적차원 모두에 대한 아감벤의 거절입니다. 모든 구성적권력[]의 거절에 의해 우리에게 남겨져 있는 것이라면, 중지[허공에 매달림]와 외톨이로 틀어박히기라는 위로, 그저 결핍시키는힘에 의해 약속되는 저 순수한 비-잠재성의 림보뿐입니다.[각주:8]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저는, 그것은 20년 이상 전에 처음으로 학위논문의 1개 장에서 소묘했던 것인데요, 들뢰즈에 대한 저의 비판적 결론의 입장에 계속 서 있는 것입니다. 푸코가 21세기는 들뢰즈의 세기가 될 것이라고 축하의 말을 건넨 것은 유명하지만, 그 정치적 의의에 관한 한, 그것은 금세기가 시작되자마자 곧바로 끝났다고 생각합니다. 아니 오히려, 그 기간이 계속된 것은 (혹은 시각에 따라서는 아직 계속되고 있는 것은) 그 이름에 값하는 모든 민주주의에 있어서는 인민의 의지, 그것에 대항하는 어떤 저항에도 불구하고, 우세한 것이어야 한다는 신-자코뱅적 주장으로부터, 정치적 사고가 철수하고 있는 동안뿐입니다. 달리 말하면, 들뢰즈가 정치적 사고에 있어서 중심적인 참조점으로서 부상한 것은, 어떤 기간, 대략적으로는 신자유주의의 승리의 기간, 1970년대 초기에 시작되고 일련의 현저한 인민의 패배를 특징으로 하며, 19세기와 비교하고 싶어지는 불평등·항복·복종의 형태의 부활을 결과로 하는 기간에, 들뢰즈가 퇴각의 입장을 위해 부족함이 없는 철학적 견해를 제출한 한에서인 것입니다.

주의주의적정치구상과 비주의주의적정치구상은, 적어도 두 가지 점에서 부딪칩니다. 한편으로, 정치활동가에 대한 구상, /녀의 의지적 활동의 역량에 관해서, 다른 한편으로 활동가와 활동가가 살아가는 상황 사이의 관계에 관한 이해방식에 관해서입니다. 아래에서는 이런 두 가지 점을 순서대로 쫓습니다.

 

1. 루소와 로베스피에르에서부터 레닌과 그람시를 거쳐 프란츠 파농과 체 게바라에 이르는, 넓게 -자코뱅적인 전통은, 정치적 의지의 행사를 목표·의도·동기 등의 고전적인 심리적요인과 연합시키는 것을 늘상 해왔습니다만, 이와 동시에 의지의 실행과 행사를 단순한 소망과 변덕의 표현이 목적에 동의하는 자는 그 수단을 거부할 수 없다”(루소)라는 클리셰, 달리 말하면, “목적을 진정으로 의지하는 자는 누구든 그 수단도 의지해야 한다”(그람시)라는 클리셰에 입각하고 있더라도, 단순한 소망이나 변덕의 표현과는 구별하고 있습니다.[각주:9] 루소 이후, 의지(vouloir)(pouvoir)은 서로 맞바꿀 수 있으며, 목적을 의지하는 것 그 자체가, 목적을 실현하기 위해 필요한 수단을 획득하고 사용하는 활동가의 역량에 의해 매개되는 것입니다. 활동가의 역량이 높아질수록, 활동가가 교육되고 의식적이고 유덕해지고 단련될수록 그 활동의 영역이나 그 의지의 권역은 점점 더 일반적이게 되고 원대해지는 것입니다.

활동가[배우]에 대한 들뢰즈의 구상 일반에서 곧바로 눈에 띄는 것은, 그것이 활동을 위한 본래적 역량을 전적으로 결여하고 있다는 것, 즉 자신의 기획과 사업을 숙고하고 의식적으로 정식화하고 개시하기 위한 역량을 전적으로 결여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예컨대, 들뢰즈가 전투의 사건을 고찰할 때, 그의 관심은, 누가 승리하고 누가 패배하느냐에도, 군사적인 전략의 방식이나 이유에도 쏟아지지 않았습니다. 또한 그의 관심은, 활동가로서의 병사, 상황에 응답하여 결정을 내리고 개별 목표를 추구하는 개인에게도 향하지 않습니다. 그 대신, 잠재적 사건 그 자체로서의 전투의 무차별적이고 익명적인 성질에, 활동이나 퇴각의 역량의 모든 것을 상실하고 포기한 자에 의해서만 파악될 수 있는 성질에, 들뢰즈의 특별한 관심이 쏠리는 것입니다. 여기에서는 진정한 활동가, “더 이상 용감도 비겁도 아니고, 더 이상 승자도 아니고 패자도 아니며, 오히려 그것을 넘어서, <사건>이 현전하는 그 장소에서, 그렇기에 그 가공할 정도의 비정함에 참여하는 치명상을 입은 병사”(LS, 100~101)인 것입니다. 전투의 위쪽으로, 전투를 넘어서, 전투를 통과하여 존재하는 자만이, 전투를 사건 또는 본질로서 파악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동일한 이유로, 사무엘 베케트의 범례적인 등장인물이 사물의 잠재적 리얼리티에 대해 적격이게 됩니다. 그들은, 스스로가 소진하고, 그저 가능적일 뿐인 것의 영역을 소진했기 때문입니다. “소진한 인물만이 가능적인 것을 소진할 수 있다. 모든 욕구need, 선호, 도달목표, 의의를 체념해버렸기 때문이다. 소진한 인물만이 충분히 이해관심을 떠나고 있다.” 소진한 인물만이 재차 올라가 돌아가는 것을 하지 않는 것은 확실하다(CC, 154-155). 그 조건 하에서 그/녀는, /녀가 그 일부인 리얼리티를 진정으로 수 있다. 소진한 인물은, 그들을 흡수하는 환경에 일체의 주도권을 버리고 맡겨버린다. “거친 대해를 떠다니는 코르크처럼, “그는 이제 움직이지 않고, 움직이는 경계 속에 존재한다”(CC, 26).

들뢰즈가 물색한 다수의 시나리오 중 어떤 것을 취하든, 숙고적이고 목적론적인 자유는 그저 반응적이고 제한적인 편견이라며 기각되고, “더 심층의 형태의 강제, 자동조작, 용해가 지지되고 있습니다. 주체 자신의 결정이 진정한 귀결을 가질 수도 있다는 견지, 요컨대 전략의 견지는, 들뢰즈의 사고의 구상과는 철저하게 무관합니다. 예를 들어 영화에 관한 그의 두 권의 책의 궤적을 아주 간단하게 대층 그려보면, 등장인물이 지각과 활동을 조절하는 역량을 계속 갖고 있는 (전쟁-전의) 상황으로부터, 감각-운동역량을 탈취당해 무엇인가에 홀려 있는 모양의 사람이 반응하지 못하고, 반응을 의지하지도 않는상황으로의 이행에 있게 됩니다. “감각-운동의 결합이 상실되었기 때문에, 구상공간은, 긴장과 그 해소에 따라서, 목표, 장벽, 수단, 우회에 따라서 조직화되기를 멈춘다.” 활동의 모든 가능성으로부터 분리되어, 지각은, 압도적이고 환각적이고 견디기 힘들 정도로 강렬하게 된다. 이러한 결정(結晶)을 통하는 듯한 직관을 통해서, 인물은 수동적인 보는 자가 되며, 무엇이든 현재적이거나 현실적이거나 할지도 모르는 것에는 무관심해지며, 반사적 반응에 대해서조차 무감응해진다. “그토록 그 인물에게 있어서는, 정확하게는 무엇이 상황 속에 있는 것인가를 보는욕구need가 크다는 것이다”(C2, 126-128). 이런 통찰의 비용은 전적으로 명명백백합니다. 그것이 요청하는 것은, 활동가의 카타스트로피적인 마비이며, 유기체의 문자 그대로의 분해, 혹은 이것에 준하는 분해입니다. 전투를 지각하면서 죽어가는 병사를 철저하게 넘어서 사납게 날뛰는 전투처럼, 이제 사건은, 사건을 선동하고 사건에 반응하는 인격에 관계없이, “부동성, 석화작용, 반복”(C1, 207; C2, 103)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똑같은 구도가, 들뢰즈가 문학을 참조할 때 특권적으로 끄집어내는 많은 점을 지배하고 있습니다. , 베케트의 소진시키는 자동기계, 카프카의 절대적인 분자적 탈영토화”(K, 58), 나아가 멜빌의 바틀비이며, 그 비타협적인 나는 하지 않고 싶은데요, 변함없이, “말과 활동을 절단하고, 더욱이 사물, 이유, 목표에의 지시를 언어로부터 분리한다는 것입니다.[각주:10] 이 점을 조금 자세하게 예를 들어 풀이하기 위해(또 다시 들뢰즈의 저작=신체corpus에 이어서는 통상적인 정치적 맥락이 그 관계에서 누락되어 있는 것을 보완하기 위해) 들뢰즈의 프루스트 독해를 간단하게 고찰해봅시다. 들뢰즈가 프루스트와 기호1972년판의 짧은 서문에서 요약하고 있는데요, “이 책은 프루스트의 작품 전체가, 비의지적인 것과 무의식적인 것을 움직이는 기호의 경험에 의해 지배되고 있다고 보고 있다”(PS, vii)는 것입니다. 프루스트의 화자가 학습하는 것은, “진리는 계시되는 것이 아니라, 진리는 누설되는 것이다라는 것입니다. 진리는 의지되는 것이 아니라, 진리는 비의지적이다. 다시 얻어진 <시간>의 최대 테마는, 진리의 탐구는 비의지적인 것에 특징적인 모험이라는 것이다. 사유를 강제하고 사유에 폭력을 가하는 무엇인가가 없다면, 사유는 아무것도 아니다. 다시 얻어진 <시간>의 라이프모티프는 단어 강제력이다. 우리에게 보도록 강제하는 인상, 우리에게 해석하도록 강제하는 조우등등(PS, 61).

일반적으로, 들뢰즈가 논하는 바에 따르면, 우리의 지각, 기억, 상상, 지성, 사고 같은 능력들은, “의지적으로 행사되는 한에서는 우발적으로만 행사될 뿐이며, 그것 때문에, 우리가 지각하는 것을, 그저 똑같이 우리는 기억하고 상상하고 인식하고, 그 반대도 그렇다.” 이것과 대비적으로,

 

어떤 능력이 그 비의지적인 형태를 걸칠 때마다, 그 능력은 자신의 한계를 발견하고 그곳에 도달하고, 초월적인 행사로까지 상승하고, 다른 것으로 치환 가능한 그 힘과 자신의 필연성을 이해한다. 능력은 교환 가능하기를 멈춘다. 비의지적인 행사는, 각 능력의 초월적인 한계이며 그 사명이다. 의지적인 사고를 대신해, 모든 것이 우리에게 사고하도록 강제하며, 모든 것이 사고하기를 강제당한다. (PS, 62-63).

 

그때, 비의지적인 사고란, 필연성의 완전한 강제력과의 조우입니다. 혹은 오히려, 조우의 우발성을 필연성의 무심한 운명과 제휴시키는 경험입니다. 여기에서, 비의지적인 기억에 대한 프루스트의 유명한 몰두가 어떻게 되는가 하면, 활동가의 진행성 마비와 활동가의 세속적 기획과 낭만적인 기획 모두의 용해를 다시 요구하는 듯한 그런 내러티브의 도정, 그 최초의 열약(劣弱)한 단계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이리하여 하자의 감각-운동 시스템은 소모시키고, 활동과 반응에 있어서의 그저 현실적인시간성에 대해 무관심한, 순수하게 수동적인 관객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으로써 그가 학습하는 것은 말하자면, “순수상태의 시간에 입력하고, “아무것도 보지 않고, 아무것도 듣지 않는증언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는 기관없는 신체이며 미소한 기호에 반응하는 것만으로는 아무것도 관찰되지 않으며”, 그가 조우하는 다양한 인물을, “그 자신의 망상의 똑같은 수의 마리오네트에, 그의 기관없는 신체의 똑같은 수의 강도적인 힘에, 그 자신의 광기의 똑같의 수의 프로파일로 환원하는 것입니다.[각주:11]

프루스트의 화자가 따라가는 궤적과 영화론이 끄는 궤적은, 대체로 비슷한 호[孤]를 그리고 있습니다만, 그것은 또한, 들뢰즈의 작품 전체를 통해 상이한 형태로 되풀이되고 있습니다. 그 지도에 배치되는 것은, 활동가의 진행성의 무-능력화, -현실화, 대항-현실화, 활동가의 용해이며, 그것은 무엇 때문인가 하면, 그런 리얼리티의 절대적 필연성과 충족성 안에서의 직접적이고 불가항력적인 침례[전신을 물에 담그는 세례](immersion) 때문입니다. 현실성에 대한 우리의 일상경험이 활동에 대한 관심에 의해 뒷받침되고, 감각-운동 메커니즘을 통해 감각과 활동을 결부시키는 신체에 의해 조절되고 있다면, 진정한 통찰을 위해서는 그런 관심의 정지와 그 메커니즘의 탈구가 요청될 겁니다. 현실적인 것은 유기체의 기능[함수]이라고 한다면, 잠재적인 것은 전반적인 탈-유기체화로 이끌 겁니다. , 글자 그대로 탈조직화된 신체, 그 생물로서의 통합성과 정합성을 박탈당한 신체, 들뢰즈와 가타리가 아르토를 좇아 부르는 바의 저 유명한 기관 없는 신체를 설정하도록 이끌 겁니다. 그런 신체는, 조우하는 사건에 의해 강제되는 것을, 이해, 목표, 계획의 매개 없이 즉석에서 이루는 것입니다. 가능한 미래로 향하는 모든 기획은, 존재하는 것, 존재할 터인 것의 내재적인 필연성 속에서 무너집니다. 이것이 운명애입니다.

프랑수아 주라비슈빌리는 이 비주의주의적궤적을 아주 잘 요약했습니다. 그의 서술에 따르면, 그 궤적은, “가능적인 것과 필연적인 것이 동일한 지점에, 의지가 허위 문제이게 될 뿐인 지점, 허위문제가 아니라고 한다면 의지가 사건의 자기-긍정으로서 사건 자체로부터 생겨나는 지점에 도달하는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우리는 기묘하고도 철저하게 스피노자적인 세계의 지각에 도달하고, “산소가 우리를 억압하는 것이었음을 마지막에 이해하게 되며, 산소 없이 호흡하려고 하는 지점에 손을 대는[노력을 기울이는][각주:12] 것입니다. 이렇게 제언해도 크게 과장이 되지는 않을 테죠. , 들뢰즈에게서는, 활동을 가능케 하는 활동가의 기운을 돋우는 것은 모두, 그대로, 우리가 그로부터 도주하려고 해야 할 억압이며, 동시에, 동일한 이유로, 우리는, 우리를 자기 자신으로부터 자유롭게 하고, 우리를 바로 그 자유의 개념으로부터 자유롭게 하고, 우리가 필연성의 유일한 흐름의 지각할 수 없는양태가 되는 것을 허용할 수도 있는 도주선을 물색하고 있다고 말입니다. 들뢰즈가 고찰하는 다양한 생성변화 혹은 되기”(예를 들어 여자-되기, 동물-되기, 노마드-되기)의 상대적인 가치가 어찌 될 것이냐 한다면, 그 가치는, 되기가 탈영토화한 형태 없는 질료를 위해활동하는 정도에 따라서, 또한, “지각할 수 없는 것은, 되기의 내재적인 목적이며, 그 우주의 공식이다라는 무자비한 텔로스에 입각하면서 활동하는 그 정도에 따라서 변화하는 것입니다.[각주:13]

주라비슈빌리 같은 독자가 들뢰즈의 방향성에 있어서의 가차 없는 스피노자주의를 강조하는 것은 완전히 정당하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러나 독자가 들뢰즈의 이 방향성에 막연한 혁명적억양을 불어넣고자 하는 꽤 어설픈 시도는, 천박한 속임수가 되기 십상이고, 어떤 종류의 정치활동에도 포함되어 있는 다양한 실천적 곤란들에 대해 결단코 무관심해지기 십상입니다. 들뢰즈의 형이상학에 대해서 마찬가지의 스피노자주의적 이해에서 출발하면서도, -마오이스트의 철학자 기 라르드로는, 들뢰즈의 다른 독자에게는 실질적으로 아무런 영향력(impact)도 주지 않았던 것처럼 보이는 소책자에서, 들뢰즈의 형이상학의 정치적 함의를 더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만, 그것을 -스토아학파로서, 그리하여 평화주의와 영적 달관[諦観]의 처방전으로 특징지어집니다.[각주:14]

  1. Harvard University Library system, HOLLIS search, 9 March 2015. ‘Deleuze Connections’, ed. Ian Buchanan, University of Edinburgh Press, http://www.euppublishing.com/series/delco [본문으로]
  2. Cf. Adrian Parr, ed. The Deleuze Dictionary (2010); Eugene Young, ed., The Deleuze and Guattari Dictionary(2013) ; François Zourabichvili, Le Vocabulaire de Deleuze (2003). [본문으로]
  3. 표준이 되는 참고문헌은 Aristotle의 Politics이다. [본문으로]
  4. Cf. Hallward, The Will of the People: Notes Towards a Dialectical Voluntarism, Radical Philosophy 155(May 2009), 17-29. online at https://www.radicalphilosophyarchive.com/wp-content/files_mf/rp155_article1_willofthepeople_hallward.pdf [본문으로]
  5. Cf. C2, 263 ; EP,131, 158, 160. [본문으로]
  6. François Zourabichvili, “Deleuze et le possible (de l’involontarisme en politique)”, in Eric Alliez et al, eds., Gilles Deleuze : Une vie philosophique (1996), 335. [본문으로]
  7. Derrida, Rouges[2002], Stanford University Press, 2003, 40. [본문으로]
  8. cf Agamben, “From the State of Control to a Praxis of Destituent power”, Athens, 16 November 2013 ; cf. Agamben, “From Limbo”, The Coming Community(1993) [본문으로]
  9. Rousseau, Discours sur l’économie politique, Œuvres complètes, vol. 3(Pléiade), 263; Gramsci, Worker’s Democracy (1919), Pre-prison Writings, 99; cf. Trotsky, Terrorism and Communism(1921), Verso ed., 25. [본문으로]
  10. CC, 73-74. 주라비슈빌리의 비주의주의적 독해에 있어서, 바틀비가 “들뢰즈적 정치의 상징적 인물”로서 등장하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Zourabichvili, “Deleuze et le possible”, 349). Cf. Agamben, Bartleby, or on Contingency, in Potentialities (1999). [본문으로]
  11. PS, 117-118; AO, 69; PS, 181-182; cf. RF, 30-31, 38-39; NP, 103-110; DR, 147. [본문으로]
  12. Zouravichvili, “Deleuze et le possible”, 356-357. [본문으로]
  13. K, 13; TP, 279; Cf. DC, 45; C2, 190. [본문으로]
  14. Guy Lardreau, L’Exercice différé de la philosophie: à l’occasion de Deleuze(Verdier, 1999), 51. 특히 어떻게 최선의 방식으로 필연성에 적응하는가, 어떻게 “흐름을 타는”가, 혹은 상황의 내재적 “생성”에 따라서 자기를 방향짓는가를 탐구하는 사상가(스토아학파, 스피노자, 흄, 베르크손 …)에 이끌려서, 라르드로는 이렇게 논한다. “푸코와는 달리 … 이성의 존엄[을 지킬] 만한 것에 대항하여 들뢰즈가 떨쳐 일어난 것은 한 번도 없었다”(ED, 45; cf. 72). 물론 라르드로 자신은 중립적인 독자가 아니라, 과거, 이른바 “신철학” 논쟁 무렵, 드물게도 들뢰즈 자신이 비난을 폭발시켰을 때의 표적 중 한 명이었다. 다음을 보라. Deleuze, “A propos des nouveaux philosophes et d’un problème plus général”(1977), in RF; Guy Lardreau and Christian Jambet, Une derniere fois, contre «la nouvelle philosohie», La Nef 66(January 1978), 35-40.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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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 재장전 또는 긍정과 도주

: 들뢰즈·가타리의 우발성 유물론 소묘

マルクス・リローデッドまたは肯定逃走

ドゥルーズ/ガタリの偶発性唯物論素描

마츠모토 준이치로(松本潤一郎)

情況第三期第四券第十一号, 150-179

 

실체의 속성 각각은 그 자체에 의해서 사고되어야 한다.

스피노자, 윤리학1부 정리10

 

 

모순에 의하지 않는 자본주의의 서술

역사를 다시[고쳐] 쓰는 <역회전(revolution)> 

혁명적 잠재력이 어떻게 현행화되는가를 설명하는 것은 전의식적 상태에서 작용하는 인과성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어떤 정확한 순간에 실제로 발생하는 <리비도에 의한 절단>이다. 이 절단은 욕망을 유일한 원인으로 하는 분열이며, 인과관계의 단절을 의미한다. 이 단절은 실재하는 것에 밀착한 역사의 다시 쓰기를 강요하고, 모든 것이 가능해지는 기괴하게도 다의적인 순간을 산출한다(AO, pp.453-4).

* 한국어판 : 혁명적 잠재력의 현행화는 이 잠재력이 물론 포함되어 있는 전의식적 인과성의 상태보다는 어떤 정확한 순간에 리비도적 절단의 실효성에 의해, 즉 욕망을 그 유일한 원인으로 지니고 있는 분열의 실효성에 의해, 말하자면 심지어 현실계에 역사를 다시 쓰도록 강요하고 모든 것이 가능한, 이상하게 다의적인 이 순간을 생산하는 인과성의 단절에 의해 더 잘 설명된다.

L'actualisation d'une potentialité révolutionnaire s'explique moins par l'état de causalité préconscient dans lequel elle est pourtant comprise, que par l'effectivité d'une coupure libidinale à un moment précis, schize dont la seule cause est le désir, c'est-à-dire la rupture de causalité qui force à réécrire l'histoire à même le réel et produit ce moment étrangement polyvoque où tout est possible.

 

기괴하게도 다의적으로 모든 것이 가능해지는”, “인과관계로부터 단절순간이라는 혁명의 잠재력이 우리에게 강제하는 역사의 다시[고쳐] 쓰기.” 질 들뢰즈와 펠릭스 가타리의 이런 미증유의 <실험> 시도의 제1탄인 안티 오이디푸스의 근본적 주장 중 하나는 이것이리라. 그리고 이 기획은 천 개의 고원에 이르기까지 일관한다. 그렇다면, 그러나 이 어떤 정확한 순간이란 도대체 무엇이며, 언제 어떻게 우리에게 도래하는가? 여기서의 혁명(revolution)”이란 무엇을 가리키는가?

우선 다음의 것을 명심해야 한다. 여기서 얘기하는 혁명으로서의 어떤 정확한 순간이란 프롤레타리아트라는 자본주의 사회 내부의 모순을 체현하는 계급의 한 쪽이, 그 모순의 최고 단계에 도달했을 때 저절로 찾아오는 필연적 순간이 아니라는 것을. , 단적으로 말해서 여기서의 혁명의 담지자는 프롤레타리아트가 아니다. 왜냐하면 안티 오이디푸스에서 먼저 계급은 기성의 모든 신분제·계층으로부터 탈코드화된 것으로 파악되고 있으며(AO, p.303), 그 다음으로 자본주의 사회에서 이런 계급이 되는 것은 단 하나밖에 존재하지 않으며(AO, p.302), 그리고 그 이름은 부르주아”(AO, p.303)라고 간주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여기서의 혁명의 담지자는 계급의 바깥에 있는 사람들, “계급-바깥(hors-classe)”이어야 한다(AO, p.303)고 간주된다. 그렇다면 여기서 말하는 혁명의 내실은 이렇게 될 것이다, “혁명이란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정권탈취라기보다는 오히려 자본주의 사회 그 자체로부터의 자본그리고 노동도주라고.

이리하여 혁명은 이 말이 기존에 품고 있던 필연사관에 의해 뒷받침되는 뜨거운(쓰라린) 코노테이션(connotation, 함의)나중의 천 개의 고원의 화법을 구사한다면 마이너스 1”(MP, p.31)하고 있다. 즉 여기서 채용되는 입론 구성은 기본적으로 모순혁명의 원동력을 맡기는 노동자 본체론적 구상, 더 나아가 묵시록적 내지 목적-종말론적인 혁명구상에 대해 비판적인 거리를 두고 있다. 이로부터 들뢰즈·가타리를 읽는 것에 있어서는 주지의 논의, 즉 기존의 균일화된 노동자상 또는 계급상에는 포함되지 않았던, 오히려 이로부터의 일탈로 규정되는 마이너리티도주로서의 혁명의 잠재력 맡기는 논의 구성이 대척적으로 발견된다. 따라서 여기서의 혁명(revolution)”, 앞에서 인용한 인과관계로부터의 단절 = 역사의 다시[고쳐] 쓰기라는 의미에서, 역사의 역회전(revolution)”의 뉘앙스를 전면화시키게 되며, 그렇기에, 거기에 있어서는 기괴하게도 다의적으로 모든 것이 가능해진다고 얘기된다.

안티 오이디푸스의 위와 같은 논점을 감안하여, 천 개의 고원에서는 역사의 인과관계로부터 해방된 무수한 사건이 이것임 hecceite”에 기초하여 개체화”(MP, p.318)하는 양상이, 거꾸로 스스로를 확립한 상태가 고원이라고 불리게 될 것이다(MP. p.32). 그것은 역사를 구성하는 질료-소재로서 생성변화의 질료-소재를 사용하는 것(MP, p.428)에 의해 역사로부터 누출-일탈해가는 을 측량하기 위해, 질료에 형상을 덧씌우는 형상-질료도식으로부터 질료-소재의 연속적 변화에 순종하는 질료[소재]-도식으로의 논점의 이행이기도 하다(MP, pp.509-12).

이렇게 매우 중요한 물음, 모순이라는 어휘를 사용하지 않고, 어떻게 자본주의를 기술할 수 있을까?라는 물음이 도출된다. 왜냐하면 들뢰즈·가타리에게 혁명을 담당하는 사람들은 계급-바깥으로의 누출-도주선상의 벡터에 있어서 역사에로 사건적으로 출현하는 이상, 그런 사람들의 도래는 사회 내부의 모순에 의해 담보되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사회가 그 [내부] 모순들에 의해 정의된다는 주장은 잘못됐다(특히 맑스주의의 경우). 그러나 거대한 척도로 볼 때에만  그것은 참이다 [그것이 옳은 것은, 커다란 척도로 사물을 본 경우에 한정된다]. 미시정치의 관점에서 보면 사회는 그 도주선에 의해 정의되는데 이 도주선은 분자적이다”(MP, pp.263-4) On dit à tort ( notamment dans le marxisme ) qu'une société se définit par ses contradictions. Mais ce n'est vrai qu'à grande échelle. Du point de vue de la micro-politique, une société se définit par ses lignes de fuite, qui sont moléculaires.

그렇지만 이러한 맑스주의자에 대한 강한 비판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른바 맑스주의자가 동요할 필요는 전혀 없는 것 같다. 왜냐하면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이로부터 곧바로 도출되는 맑스주의자에 의한 반문은, “그러면 모순에서 유래하지 않는 자본주의(분석)란 무엇인가?”라는 대척적인 질문이어야 하며, 그리고 들뢰즈·가타리는 바로 이 물음에 응답하려고 하는 미증유의 <실험>을 시도하려 들기 때문이다. , 안티 오이디푸스, 천 개의 고원에서는 모순이 아닌 우발성”이라는 어휘로 자본주의 그리고 자본주의 하의 노동자가 기술되기 때문이다. 거기에 재생-이전된[재장전된] 맑스(Ma[t]r[i]x reloaded)가 있다. 모순이 아니라 우연에 자리잡고 자본주의 분석을 <실천>하는 맑스, “자본주의의 메커니즘에 흠뻑 빠진자라고 들뢰즈가 규정한 맑스가 있다. 또한 그렇다고 한다면, 앞의 가차 없는 비판에도 불구하고, 들뢰즈는 나중에 또 다른 어떤 인터뷰에서, “안티 오이디푸스천 개의 고원은 맑스와 맑스주의에 의해 완벽하게 가로질러진 작품입니다. 현재 저는 저를 완전히 맑스주의자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라고 말했다. 혹은 또한 인과관계로부터의 단절 = 역사의 고쳐 쓰기라는, 거기에 있어서 기괴하게도 다의적으로 모든 것이 가능해지는역사의 역회전-혁명(revolution)”을 향해서, 이런 우발성의 견지에서 행하는 자본주의 분석이, 맑스로부터 논리 필연적으로 계승되지 않으면 안 된다고 말해도 좋을 것이다. 왜냐하면 자본주의의 빛에 비춰서 모든 역사를 소급적으로 파악하는 것은 정당하며맑스가 정식화한 규칙들을 정확하게 따른다는 조건에서, 역사 전체를 자본주의의 조명 아래 회고적으로 이해하는 일은 정당하다”(AO, p.163), 또한 자본주의는 모든 사회구성체의 음화(陰畵)이다”(AO, p.180)고 간주되기 때문이다.

또한 앞서 언급한 도주와도 밀접하게 관련되어, “욕망을 유일한 원인으로 하는 분열이라는, “인과관계의 단절로서 발생하는 <리비도에 의한 단절>”, “실재하는 것에 밀착한 역사의 고쳐 쓰기를 강제하고, “모든 것이 가능해지는 기괴하게도 다의적인 순간을 산출한다는 논점을 상기한다면, “인과관계의 단절<우연성>으로서의 세계사를 기술하기 위한 조건으로서 자본주의 분석이 불가피해진다는 것도 지적해두어야 한다. 왜냐하면 무엇보다, 세계사는 우발들의 역사이지 필연의 역사가 아니며, 절단들과 극한[경계선]들의 역사이지 연속성의 역사가 아니기”(AO, p.163 et passim) 때문이며, 그리고 무엇보다 우선 자본주의 그 자체가 <우발성> 내지 <조우>라는 <사건>에 의해 생겼다고 간주되기 때문이다(AO, p.265 et passim). 혹은 초기의 자본주의는 노동자와의 조우를 기다리고 있으며, 거기에 노동자가 선행하는 시스템으로부터의라는 형태에 있어서 합류한다. 이른바 본원적 축적이란 이런 사태를 의미하는 것입니다라고 앞에서 인용한 인터뷰에서 들뢰즈가 말할 때, 안티 오이디푸스, 천 개의 고원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바로 우연-조우의 견지에서 행하는 자본주의의 작동 양태의 기술이었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아까의 역사 ()기술의 문제와 관련해, “인과관계의 단절로서의 이 절단은 욕망을 유일한 원인으로 하는 분열이라고 서술됐다는 것도 상기한다면, “욕망은 마음속의 <우발>적인 것이라는 것도 거기에는 함축되어 있어야 한다. “자본주의가 얼마나 욕망의 교차점이며, 그 하부구조, 그 경제 자체가 얼마나 욕망이라는 현상과 밀접하고 불가분한가를 알려면, 자본주의의 기원에 있는 우연성의 총량을 생각하는 것으로 충분하죠라고 들뢰즈가 말할 때,우연성욕망”, 더 나아가 자본주의의 밀접한 관계가 드러나 있을 것이다.

이리하여 점차 밝혀지게 된 것은, “모든 것이 가능해지는 기괴하게도 다의적인 순간에 의한 강제적인 역사의 다시 쓰기라는 역회전-혁명적인 사태가 발생하기 위한 평면이 이미 안티 오이디푸스에 맹아적으로나마 준비되어 있었다는 것, 또한 그 근저에 자본주의그 자체의 우발적인 탄생이 가로놓여 있으며, 이 우발성과 욕망은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다는 것, 그리고 천 개의 고원에서는 이러한 우발적 조우가 발생하는 평면이 내재평면혹은 공립평면이라고 불리며, 더 나아가 이 조우가 이른바 사건론으로서, “이것임이나 개체화같은 개념을 열쇠로 하여 세련된다는 것이 대략의 그 흐름으로서 떠오르게 될 것이다. 이러한 전체적 전망 하에서 이 글에서는 모순의 어휘가 아니라 우발성그리고 조우에 의거한, 들뢰즈·가타리의 자본주의의 작동양태, 나아가 그것에 평행선을 그리는 우발적인 세계사의 기술을 위한 준비를 하고 싶다.

그러나 그 전에, 이러한 들뢰즈·가타리에 의한 <실험>의 전단계로서, 실험에는 가설이 불가결한 이상, 그들이 세운 <가설> 혹은 <실험>에 대한 일별이 필요하다. 그리고 그때, 미셸 푸코를 경유하지 않으면 안 된다.

 

우발과 허구

 

생명의 가장 근본적인 수준에서 코드와 탈코드의 게임은 우연에 맡겨져 있다. 그것은 질병이나 결함이나 기형을 겪기 이전에 있는, 정보 시스템의 변조[교란] 내지 오인이다. 이러한 우발성 때문에 돌연변이와 진화 과정은 도출된다. 마찬가지로 이러한 우발성 때문에, 생명은 인간의 출현과 더불어, 결코 자기의 장소를 찾아낼 수 없는 생[명]체에 도달한다. 그것은 방황하고 잘못되도록 운명지어지고 있으며, 그렇기에 문제가 되어야 할 것은 특이하고 유전적인 이 잘못이다. 푸코, 생명 : 경험과 과학

Au centre de ces problèmes, il y a celui de l’erreur. Car, au niveau le plus fondamental de la vie, les jeux du code et du décodage laissent place à un aléa qui, avant d’être maladie, déficit ou monstruosité est quelque chose comme une perturbation dans le système informatif, quelque chose comme une < méprise >. À elle aussi qu’il faut demander compte des mutations et des processus évolutifs qu’elles induisent. Elle également qu’il faut interroger sur cette erreur singulière, mais héréditaire, qui fait que la vie a abouti avec l’homme à un vivant qui ne se trouve jamais tout à fait à sa place, à un vivant qui est voué à < errer > et à < se tromper >.

 

들뢰즈·가타리가 안티 오이디푸스, 천 개의 고원에서 시도한 미증유의 <실험> 및 그 준비로서 세운 <가설> 내지 <허구>를 이해하기 위한 보조선으로, 여기서 푸코가 살아 생전에 마지막으로 인쇄 허가를 내주었다고 하는 생명 : 경험과 과학의 논의를 경유하자. , 이 시점에서의 푸코의 논의로부터 소급적으로 들뢰즈·가타리의 안티 오이디푸스, 천 개의 고원의 논의 쌍을 우발-조우및 그것에 밀접한 <실험-가설>허구라는 관점에서 되돌아보는 것이 중요하다. 왜냐하면 그의 스승이라고 말해도 좋은 과학사가 조르주 캉길렘의 과학인식론의 동시대적 의의를 논한 이 논고의 끝 부근에서, 푸코는 이번 절의 서두에 인용한 대목에서, 삶이란 오인에 다름없다, 생명이란 잘못일 수도 있는 것, “오인에 맡겨져 있는 것이라고 말하기 때문이다. 생체는 우발성에 의해 횡단되고, “오류의 역량을 부여받았다. 오류가 진리와 짝을 이룬다기보다는, 오히려 이러한 짝을 창조-발명하는 것을 우리 인간이라는 삶이 어찌할 수 없는 운명으로서의 우발성이라는 점의 이해가 긴요하다. 그래서 진리를 이 근원적 오류로부터의 파생이라고 이해해야 한다. “개념이란 생명 자신이 이 우발성에 대해 주는 해답이라고 인정한다면, 오류는 인간의 사고 및 역사를 형성하는 것의 근원에 있다고 생각되어야 한다. 진위의 대립, 진위에 부여되는 가치, 사회들이나 제도들이 이 분할에 연결되어 고려하는 권력의 효과 같은 것은 모두, 생명에 고유한 잘못될 가능성에 대한 뒤쳐진 응답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오류는 약속된 완성의 망각이나 뒤늦음이 아니라, 인간의 생명이나 종의 시간에 고유한 차원을 형성하고 있을 것이다.” ‘오류로서의 우발성에서 진리의 원천을 발견하는 이러한 관점은, 물론 니체의 계보학적 사고의 연장선상에 위치되어 있을 것이다. 푸코 자신이 이 텍스트에서 니체를 인용하고 있다. 그렇지만 니체에서 보이는 이러한 진리에의 부정적인 뉘앙스가 불식된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진리란 더없이 깊은 거짓말이라고 니체는 말했다. 니체에 가까운 동시에 먼 캉길렘이라면 이렇게 말할 것이다. 진리란 생명의 긴 연대기에 있어서의 가장 새로운 오류라고 말이다. 더 정확하게 말한다면, 진위의 분할이나 진리에 부여된 가치는 생명이 발명하고 얻은 가장 특이한 삶의 양식을 형성하고 있다, 생명은 그 궁극적인 기원 이래, 오류의 가능성을 자신 속에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말이다. 캉길렘에게 오류는 생명 및 인간의 역사가 뒤얽히는, 항상적인 우연이다.” “오류-우발성을 겪고 진리를 생산하는 것이야말로 생체가 지닌 역량이다. “인간은 오류-우발성에 의해 삶을 촉발되며, 이 삶의 특이성을 해방할 수 있도록, 오류-우발성으로부터 그 삶에 있어서의 진리혹은 개념을 생산하고 벼려나간다. “오류란 생명 및 인간의 역사가 뒤얽히는, 항상적인 우연이다.” 이 말을 들뢰즈·가타리의 <실험>에 대한 헌사로 고쳐 읽는다면, 들뢰즈·가타리가 안티 오이디푸스, 천 개의 고원에서 감행한 <실험>을 준비하는 <가설> 혹은 <허구>의 필연성이 이해될 것이다. 삶은 마음속 오류-우발성에 흠뻑 젖어 있으며, 그 때문에 근저에서부터 진리-허구이다. 그리고 그 일을, 그것을 측량하는 개념과 더불어, 절대적으로 긍정해야 한다. 이 뜻을 잃어버리지 않고, 들뢰즈·가타리의 <실험>을 뒤쫓아가는 것이 중요하다.

들뢰즈·가타리로 돌아가자. 안티 오이디푸스에서 조우의 문제계로서 초점화되는 것은, 이미 언급했듯이 자본주의에서의 조우, 사유재산상품생산”, 혹은 자본가가 소유하는 변환 가능한 재화의 몇 가지 흐름자신의 노동력밖에 소유하지 못한 노동자들의 하나의 흐름”(AO, p.164), “노동자자본”, “생산자들의 흐름화폐의 흐름”(AO, p.266) 등 다양하게 표현되는 두 가지의 조우에 다름없다. 그리고 이런 두 가지 요소가 조우하는 역사적 조건으로 들뢰즈·가타리는 다음과 같은 사정을 열거하고 있다. , “생산내지 자유로운 노동의 흐름 쪽에서의, “전제군주(야만) 기계”(통사적으로는 이른바 봉건제 사회”)로부터 문명(자본주의) 기계”(이른바 자본주의 사회”)로의 누출의 과정에 있어서의, 사기업화에 의한 토지의 탈영토화, 사적 소유에 의한 생산수단들의 탈코드화, 가정과 조합의 분리에 의한 소비재의 사적 사용, 노동으로도 기계로도 사용 가능한 노동자의 탈코드화가 그것에 해당된다. 다른 한편 자본의 쪽에 있어서는, 추상적인 통화에 의한 재화의 탈영토화, 상인자본에 의한 생산의 다양한 흐름의 탈코드화, 금융자본과 공공부채에 의한 국가들의 탈코드화, 산업자본의 형성에 의한 생산수단의 탈코드화가 관찰될 것이다(AO, p.267).

최종적으로는 노동자본의 두 개의 계열로 정제할 수 있는, 이상의 다양한 흐름의 변화 탈코드화 및 그 조우에 의해 생기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나타나는 자본가, “전제군주와는 그 지위status를 달리 한다. 이 점을 들뢰즈·가타리는 전제군주 기계는 공시적이지만 자본주의 기계의 시간은 통시적이다. 자본가들은 이른바 역사를 창조적으로 구축해가는 일련의 과정에 속속 등장한다”(AO, p.264)고 표현하며, 이것은 이른바 시계열적인 역사, 즉 진보나 발전 같은 19세기적인 역사관이 자본주의에 의해 생겨났다고 하는, 그 자체로서는 항식에 속한다고 말해도 좋을 사태를 의미한다. 그러나 여기서 미셸 푸코가 말과 사물에 있어서 제시한, 인간을 가로지르는 시간”, 유한성에 기초한 노동”, “생명”, “언어의 변용의 틀 안에, 즉 푸코가 말하는 의미에서의 역사, 들뢰즈·가타리가 자본주의 그 자체를 기입하려고 하는, 또는 고쳐 쓰려고하는 안티 오이디푸스<실험>의 사정거리가, 엿보이게 될 것이다.

, 푸코에게 <역사>는 결코 시계열적인 사태의 계기(繼起)-전개가 아니라, 오히려 표(tableau)[굳이 번역한다면 표-] 내지 공간에 있어서의 미세한 균열의 발생이었음을 상기한다면, 서두에 인용한 들뢰즈·가타리의 역사의 고쳐 쓰기, 이른바 진화-발전의 시계열상에 필연적으로 발생한다고 하는, 목적론적 의미에서의 혁명을 가리키지 않았으며, 오히려 공간 내지 평면 ― 『천 개의 고원에서의 존립평면내지 내재평면 위에 있어서의 자본노동이라는 두 개의 요소의 우발적인 조우를 가리키는 것을 이해할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들뢰즈·가타리는 푸코의 뜻을 계승하고 있을 것이다. 천 개의 고원에서 비판되는 이른바 역사와는 별도의 푸코적인 의미에서의 우발적인 <역사> , 천 개의 고원에서의 사건, 여기서 이미 문제되고 있으며, 또한 그렇기에, 들뢰즈·가타리는 앞서 말한 자본주의 발생역사적 조건중 하나인 노동의 탈코드화를, 이른바 통역사적 구분에 있어서의 로마 시대에서 보는 것이라고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 로마 시대에 있어서도, 재산의 사유화로 인한 부동산의 흐름의 탈코드화, 거대한 재산의 형성에 의한 통화의 흐름의 탈코드화, 상품생산의 발전에 의한 상업의 흐름의 탈코드화, 재산 상실이나 프롤레타리아화에 의한 생산자들의 탈코드화 등의 사태가 보이는 데도 불구하고, 그것들은 전제군주 기계의 체제화에 있기 때문에 노예제를 산출하는것에 불과했다(AO, p.264)는 논점이 그것이다 그리고 이 논점에 대한 각주에는 명백히 맑스에 대한 참조가 제시되고 있다. 다른 한편 자본의 계열에 있어서의 자본주의 발생의 역사적 조건은 통역사적 시대 구분에 있어서의 봉건제시기에 이미 갖춰져 있었다고 간주되고, 사유 재산, 상품 생산, 통화들의 합류, 시장의 확장, 도시의 진전, 금납 지대·계약 임금의 출현 등 사태가 열거되고 있으며, 그리고 이것들도 또한, 오히려 봉건적 하중·연관의 강화, 더욱이 원시적인 봉건제 단계 내지 노예제의 재건조차 산출하고 있는 등 사정을 이유로서, 그 자체로서는 자본주의 기계의 등장과는 반대의 결과를 이끌고 있다고 여겨진다(AO, p.264). 이런 통역사적 원근법으로부터 이탈된 지점에 있어서 천 개의 고원에서의 고원개념이 확립되는 것은 명백하며, 이런 의미에서도 안티 오이디푸스에서 얘기되는 고쳐 써진 역사, 이른바 역사와는 다르다는 것도 명백할 것이다.

이렇게 들뢰즈·가타리가 계획하는 필연성의 역사가 아니라, 여러 가지 절단과 경계선으로 이루어진”, 비연속적인 여러 가지 우발적 사건의 역사로서의 세계사의 기술이라는 미증유의 <실험>을 준비하기 위한 <가설>적 틀이 보일 것이다. 그것이 곧 안티 오이디푸스에서의 욕망하는 기계들이 편력하는 기관 없는 신체위에서의 야만기계”, “전제군주 기계”, “문명 자본주의 기계의 서로 얽힘-접합 양식의 가설적 모델이며, 천 개의 고원에서의 영토화-재영토화-탈영토화의 한 쌍의 개념에 의해 기술되는, “추상기계의 기계적 및 집단적인 이중의 어레인지먼트에 의한, 정주/유목, 포획/도주, 국가장치/전쟁기계, 홈패임/매끈함 등등의 서로 얽힘-접합 양식의 가설적 모델이다. 또한 안티 오이디푸스에서 제시된 모델과 천 개의 고원의 그것 사이의 최대의 차이점을, 전자가 생산의 양태에 중점이 놓인 반면, 후자에서는 예술·인문과학적인 분야를 넘어선 사회·정치적인 분야, 더 나아가 광물이나 동식물, 생물의 분야도 관통하여, 넓은 의미에서의 교통내지 번역의 양태로 역점이 이동하고 있다 다만 이것은 들뢰즈·가타리가 자본주의 분석에 있어서 생산 측면에서부터 유통 측면으로 논점이 전면적으로 이동한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고 하는 점에서 찾아질 것이다. 이렇게 제시된 <가설>적 모델을, 그것이 이른바 역사<실험> 재료-소재(matériaux)로 하고 있다 그리고 그것들을 갖고서 다름 아닌 역사바깥혹은 계급-바깥으로의 누출-도주선을 찾아내려고 하는 <실험>이다 라는 점에서, 오히려 <허구> 내지 우화 만들기(fabulation)”라고 부르는 것이 적절한 것 같다. 역사는 허구따위라는 것이 아니라, <가설>로서의 <허구>를 세움으로써 이뤄지는 <실험>에 있어서, 역사 속에 무수한 조우-우발성, 혹은 고원이 발견된다는 것이, 여기서는 중요하다. , 푸코에게 개념은 우발성에 의해 생기는 <허구>였지만, 들뢰즈·가타리에게 그것은 동시에, 우발성과 조우하기 위한 <허구>이기도 하다. 우발-오류에 의해 촉발되고 세워지는 가설-허구에 의해, 거꾸로 우발적인 세계사야말로 이른바 역사의 도처에서 스캔[주사]될 수 있다고 하는, 이 상호적 관계 속에서 허구와 우발은 포착되어야 한다. 그리고 이미 말했듯이, 자본주의가 그런 세계사를 가능케 하는, <조우>로서의 출신을 갖고 있게 될 것이다.

 

노동과 자본의 조우 : 몇 가지 이론적 <가설>

방법론으로서의 질적 분할

그렇다면 이 노동과 자본의 <조우>에는, 어떤 우연성이 발견되는가? 그것에는 자본의 축적에 밀접하게 관련되며, 다음의 두 가지 시기의 존재, 즉 우선 재화가 가치를 갖지 않고 그것을 모으는 데 유리한 기회”, 구체적으로는 재산-토지의 권리증서의 축적이 이뤄지는 시기, 이어서 이러한 재화의 가격이 오르고, 산업투자에 유리한 조건 아래에서 재화를 매각하는시기의 존재가 언급되며, “산업투자에 유리한 조건으로서 “‘가격혁명’, 노동자의 과잉비축, 프롤레타리아트층의 형성, 원료자원[]에 대한 접근성, 도구·기계적 생산에 대한 호조건등이 있었다고 여겨진다(AO. pp.267-268). 따라서 여기서는 명백하게 맑스의 자본에서의 이른바 본원적 축적노동자의 과잉비축, 프롤레타리아트층의 형성에 관련하여 노동자의 상품화<역사>적 우연성의 양상에 밀접하게 논해지고 있다고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이리하여 다음의 말은 결정적이다. , “모든 우연적(contingentes) 요인이, 이러한 조우적 연결들(conjonctions)에 유리하게 작동한다. 이런 사태의 형성에 있어서 얼마나 많은 조우(rencontres)가 있었는가, 이렇게 명명할 수 없는 사태[의 형성에 있어서]! 그러나 이 조우적 연결의 효과-결과는, 바로 자본주의 생산의, 점차 깊게 미치는 통제이다”(AO, p.268). 이리하여 자본주의는 근저에서부터 우발적이며, “그러나그 생산양식을 침투시켜간다. 이런 그러나라는 이상한 접속이야말로, 자본주의는 오작동에 의해만 만사가 순조롭게 작동한다(les choses ne marchent bien qu’condition de draquer)”(AO, p.274)라는 원리를 알고 있다는 안티 오이디푸스에 있어서의 저명한 정식의 ()작동 양태에 다름없다. 그러나 그런 지적 이상으로 중요한 점은, 따라서 앞서 열거한 노동과 자본이라는 두 가지 요소의 <우발-조우>를 집요하게 강조하는 안티 오이디푸스에서의 이런 논의는, 맑스가 자본에서 논한 산업자본주의에서의 노동력의 상품화를 명백하게 내포하고 있다는 점에 있다. 달리 말하면 자본주의의 빛에 비추어 모든 역사를 소급적으로 파악하는 것의 정당성이라고 얘기될 때의 자본주의, “산업자본주의를 가리킨다고 이해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자본주의 혹은 그 절단의 정의, 즉 탈코드화하고 탈영토화한 모든 흐름의 조우적 연결은, 상인 자본에 의해서도 금융 자본에 의해서도 정의될 수 없고, 그것들은 탈코드화나 탈영토화와는 다른 흐름, 다른 요소에 지나지 않는 그런 것이기 때문이다”(AO, p.268). 그러므로 앞의 그러나 이 조우적 연결의 효과-결과는, 바로 자본주의 생산의, 점차 깊이 미치는 통제이다산업자본주의가 성립하는 역사적 <우연성-조우> “이른바 본원적 축적, “그러나필요-필연적으로 하고 있다고 말하고 있다고도 이해되지 않으면 안 된다. , 세계규모에서 반복되는 자본축적의 양태가, 아시아 등의 논의를 감안하여 본원적 축적은 자본주의의 여명기에 단 한 번만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항상적이며 또한 끊임없이 재생산된다고 명쾌하게 말해지고 있으며(AO, p.275), 이 관점은 물론 천 개의 고원에도 일관하고 있다. 안티 오이디푸스에서는 반복되는 본원적 축적이라는 논점은 기계에 의한 잉여가치인간에 의한 잉여가치이 두 가지 잉여가치가 코드가 아니라 흐름 flux’의 잉여가치를 구성한다 사이의 영원한 불일치 나중에 보는 끝없는 이윤율저하경향라는 관점에서 분석되며(AO, pp.270-6), 게다가 이러한 자본주의의 작동의 핵심에 이윤율 저하 경향을 영원화하는 반생산”(anti-production)이 기입되어 있다 따라서 반생산주의로서의 무위(des-paevrement)의 공동체”(Jean-Luc Nancy)의 비판적 재검토를 요청한다 라는 논의가 이뤄지며, 천 개의 고원에서는 이 본원적 축적이라는 폭력이, “포획장치또는 국가에 의한 이중적 폭력폭력을 겪는 대상을 산출하면서 그 폭력을 자본제의 비가시의 전제-메타수준으로 밀어 올린다 의 기제와 밀접하게 논의되고 있다(MP, pp.558-9)이라는 점을 확인해두자. “이른바 본원적 축적에 대해서는 마지막 절에서 역사와의 관계에서 다시금 논하기로 하고, 지금은 앞으로 더 나아가기로 하자.

아무튼 이렇게 여기서는 철학자질 들뢰즈의 18번이라고 해도 좋은, 본성상 상이한 두 가지 요소가 혼합되어 있는 상태를 질적으로 분할하는 기예가 가타리와의 공동작업에서도 완전하게 발휘되고 있을 것이다. 마조흐와 사드 사이에 아무런 필연적 결합관계도 발견되지 않은 듯이, 혹은 스피노자 윤리학이 서술 체계에 있어서 개체 사이에 나쁜 조우가 발생하는 일이 없었던 것처럼, 여기서도 자본제 사회에 있어서 자명하다고 간주되는 노임(salaire)” 관계에 있는 두 가지 요소, 노동력화폐-자본, “본성상의 차이를 갖고 있기 때문에 그러나 우발-조우하는 양태가 <실험>적으로 분석되고 있다고 말해도 좋다. “노동력(이라는) 상품이 가진 우발성에 기생하는 자본주의를 구성하고 있는 두 가지 요소 노동력자본을 떼어내고, 각각을 그것 자체로서 파악함으로써, 모순에 기대는 것 없는 질적 분할에 의해 자본의 맑스가 여기서 재장전되고 있다. 거기서의 맑스는 이른바 유물사관에서 해방되고, “우발성의 세계사에 있어서 자본주의를 기술하는, 나중의 천 개의 고원에서 얘기되는 의미에서의 <역사가>이다. 따라서 맑스가 어떻게 재장전되어 있는가를 보기 위해, 질적으로 분할되어 각각 독자적으로 논의되는, ① 『안티 오이디푸스에서의 코드의 잉여가치가 아니라 흐름의 잉여가치에 정위하는 자본주의의 공리계를 표현한다고 여겨지는 이윤율 저하 경향 법칙”, “화폐의 이원성의 논의를 경유한 자본-화폐”, ② 『천 개의 고원에서의 형상-질료도식이 아니라 소재-도식에 기초하여 논의되는, 들뢰즈·가타리에 의해 재장전된 맑스의 생산력과 생산관계도식의 반복으로서의 노동력을 둘러싼 논의를 일별할 필요가 있다. 이 두 가지 점을 감안한 위에서, 우발성 유물론에 기초한 재장전된 유물사관천 개의 고원에 있어서 논의되는 비신체적 형상으로서의 어레인지먼트”, “명령어등의 논점을 경유하여, “내재평면을 확립하기 때문이다.

 

1. “자본주의의 공리계의 표현으로 해석된 이윤율저하경향과 화폐의 이원성

맑스가 빠져 있는 예언”?의 하나로서 저명한(악명높은) “이윤율 저하 경향 법칙안티 오이디푸스에 있어서 들뢰즈·가타리는 자본주의의 공리계를 표현하고 있는 것으로 해석하는 것을 제창한다 이 방침은 천 개의 고원에서도 일관하고 있다(MP, pp.578-9) . “공리계란 단적으로는 코드에 있어서의 잉여가치흐름에 있어서의 잉여가치로 변용사키는 장치, 다시 말하면 자본의 출신형태로서의 화폐의 이원성(dualité de l’argent)”이며(AO, p.273), “자본주의는 화폐가 화폐를 낳고, 가치가 잉여가치를 낳을 때 출신-친자 자본이 된다”(AO, p.269). , 통념과는 반대로, “이윤율의 경향적 저하가 끝나지 않는[=일치-해소되지 않는] 것은 명백하다”(AO, p.271). 왜냐하면 자본과 노동력 사이에는, 그 어떤 공통 척도도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며, 그런 척도는 만약 그것이 있다고 하더라도 <가설>로서의 순수한 허구이다(AO, p.273). , 우선은 자본주의가 이러한 <허구> 혹은 오작동에 의한 만사형통의 기예를 속속들이 알고-이용했다는 점이, 나중에 말해지듯이 중요하다. 어쨌든 들뢰즈·가타리는 이 기괴한 사정 말하자면 영원한 이윤율 저하을 설명하기 위한 문자()”로서, 미분의 비(Dy/Dx)를 제시할 것이다. , ‘Dy’가 노동력 혹은 가변자본의 유동을, ‘Dx’가 자본 그 자체, 혹은 불변자본의 유동을 구성하고, 자본의 출신-친자 형식으로서의 <x+dx> 즉 잉여가치는, ‘Dy’‘Dx’조우적 연결(conjonction)”에 의해 생긴다고 간주된다(이상은 AO, p.270). 그래서 자본주의의 근본적인 우발성 및 그 생산양식을 침투시키는 공리계로서의 작동이, 미분의 비에 있어서 완전히 표현되고 있다고 이해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다음의 인용이 결정적이다. “경향적 저하는 극한(terme)을 갖지 않는다. 문제가 생산고의 견지에서 하는 생산의 흐름의 변화의 한계(limite)라면 미분의 몫은 계산 가능하지만, 문제가 잉여가치가 생기는 생산의 흐름과 노동의 흐름[의 변화의 한계]인 경우에는 그렇지 않다. [잉여가치], difference de natur...”(AO. p.273 강조는 인용자). 이로부터 유명한 테제, 자본주의는 자신의 끝-극한을 갖지 않는다혹은 극한을 스스로 치환함으로써 이 극한을 재생산한다라는 주장이 맑스에 대한 참조를 촉구하면서 도출된다(AO, p.273)는 것은 주지의 것이지만, 그러나 여기서도 그것의 확인 이상으로 중요한 점은, 따라서 자신의 한계를 재생산하는 자본주의 공리계의 작동으로까지 관철되는 노동과 자본이라는 두 개의 요소의 <우발-조우>, 맑스에 의한 이윤율 저하 경향을 재장전시킨/에 있어서 읽어 들였다는 점에서 찾아야 한다 이 두 가지 요소 사이에는 그 어떤 공통의 척도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그 한에 있어서, 이 두 가지 요소는 정신분석에서 말하는 바의 잘못된 만남을 하고 있다 . 문제는 지양이라는 공통척도, “‘모순이 아니라 우발성”, ‘본성의 차이에 준거한 위에서 이뤄지는 자본주의의 출신의 서술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본성의 차이에 근거함으로써, 생명으로부터 무기물에 이르기까지 관철되는 소재-도식의 연속 변화로서의 노동자의 역사가 기술 가능해진다. 그러나 그 논점으로 이동하기 전에, 이상에서 개괄한 공리계의 구체적 작동양태의 아주 짧게나마 이해하기 위해서, 계속해서 들뢰즈·가타리에 의한 포획장치로서의 화폐를 둘러싼 논의를 일별해야 한다.

노동가 자본 사이에 본성의 차이가 있다는 것의 증거로서의 두 가지 요소의 우발적 조우가, 잉여가치의 [종말]없는 발생으로서의 저하경향에 있어서도 발견되는 것으로부터 예상되고 있으며, 화폐도 또한 이러한 이원성을 표현하고 있다. , 탈코드화되고 생산수단을 갖지 못한다는 의미에서 이중으로 자유로운노동자를 노임관계 즉, 앞에서 본 미분의 비의 하나의 항인 <Dy>에 체류시키겠다는 ― 『천 개의 고원에서의 규정을 이용한다면 재영토화의 기능을 갖는 동시에 코드들의 잉여가치를 흐름(flux)”의 잉여가치로 ― 『천 개의 고원에서의 규정을 이용한다면 탈영토화하는 기능을 가진다. , 잉여가치 내지 이윤은 노동력의 가치와 노동력에 의해 창조된 가치의 차이에 의해서가 아니라 이 두 가지 흐름 사이의 통약 불가능성 그렇지만 서로에게 내재하는 이 두 가지 흐름을 표현하는 화폐(monnaie)의 두 측면 사이의 어긋남에 의해 정의된다(AO, p.283). 이러한 이원성을 들뢰즈·가타리는 한편으로는 교환가치의[/라는] 무기력한 화폐의 기호들, 소비재들이나 사용가치들에 관련된 지불수단의 흐름, 화폐와 공정구역의 생산물 사이의 11 대응관계”, 다른 한편으로는 자본의 강력함의 기호들, 융자의 흐름, 지금 여기에서는 실현될 수 없는 장기적인 어림셈 내지 예측 능력을 나타내는, 추상량들의 공리계로서 기능하는 생산미분계수의 시스템과 구별하고 있다(AO, p.271). 물론 이 재영토화의 기능, 가 탈영토화의 기능에 대응한다. 어쨌든 여기에 주지의 안티 오이디푸스의 자본주의에 대한 양의적 평가를 간파할 수 있다는 것은 명료하다. , 자본주의는 탈영토화와 동시에 재영토화를 행하는 것이며, 에 그 공리계의 작동이 제시되어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런 이원성의 장치로서의 화폐를 통제하는 것이 국가― 『천 개의 고원에서는 더 추상적으로 포획장치라고도 불린다 이며, 안티 오이디푸스에서의 이 관점은, 천 개의 고원에서의 화폐의 기원을 국가에 있어서의 세금징수에서 찾는 논의까지 일관하고 있다(MP, pp.552-3). 이러한 화폐의 이원성에 의해, 유통 측면 또는 시장에서의 이른바 교환은 반드시 화폐가 아닌 통화로서, 즉 국가라는 포획장치에 있어서 실현된다는 점에 둔감해서는 안 된다. 사족인데, 이른바 전지구화현황 분석을 위해서도, 이 논점의 파악은 최소한의 전제로 여겨진다. 거기서의 문제는 맑스의 등가교환론 내지 가치형태론을 착취(exploitation)”수탈(expropriation)” 중 어느 쪽에 밀접하게 연결시켜 이해하는가라는 양자택일로 집약되지만, 지금은 이 점을 젖혀 둔다. 자본제 내부에서는 교환은 항상 합법혹은 등가라고 (표상)된다는 점을 이해한다면, 들뢰즈·가타리가 화폐-교환을 수탈론으로서 전개하고 있는 것은 명료하다. 자본제 내부에서의 교환에 정위하는 착취론은 자본제 그 자체의 성립이라는 -바깥의 폭력의 수준에 정위되는 수탈의 측면을 간과하기 쉬운 반면, 들뢰즈·가타리의 화폐론에서는 화폐의 이원성이 고려되기 때문이다.

또한 구매력으로서의 소비재와의 11 대응의 기능만 담지할 뿐인 통화는 탈영토화된 흐름flux”회귀-환류(reflux)”로서도 파악되고 있다. , “돌연변이의 역능을 가진다(a pouvoir mutant)”라고도 형언되는 이 화폐의 이원성,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른 한편으로 통화는 환류를, 즉 이 통화의 노동자나 생산요인들(이른바 반노동일半労働日에 상당하는 소비재 인용자)에 대한 배분에 의해 구매력을 이 통화가 획득하자마자 수많은 재화와 맺는 관계를 표현하고 있다”(AO, p.282). 흐름과 환류의 서로에게 내재하면서도 통약 불가능한 관계에도 우발적인 조우가 표현되고 있다는 것은 말할 것도 없다. 이 논점은 천 개의 고원13고원 포획장치에서 일종의 집합론적 조작 마술 또는 신비라고도 불린다 으로서 다뤄지고 있는데, 거기서은 단적으로 분배나 보수로 여겨지는 한에서의 노임[급여(salaire)]은 구매라고도 말할 수 없다. 반대로 구매력은 노임으로부터 생긴다On ne peut donc même pas dire que le salaire, conçu comme répartition, rémunération, soit un achat ; c'est au contraire le pouvoir d'achat qui va en découler”(MP, p.556)고 서술될 것이다. 안티 오이디푸스에서는 이 마술무로부터(ex nihilo) 창조라고 불리며, 자본제 내부에서는 잉여가치는 완전히 합법적인등가교환으로서 나타나기 때문에 누구도 훔치지 않는다”, “누구도 소외되지 않는다, 맑스주의자를 도발하는 글귀가 적혀 있다(AO, p.283). 즉 여기서도 앞에서 언급한 포획장치에 의한 이중의 폭력이 작동하고 있으며, 그래서 들뢰즈·가타리에 있어서의 이상에서 살펴본 화폐론이 수탈에 정위하여 이뤄진다고 하는 점이 다시금 확인될 것이다. 따라서 이윤들은 수입[구매력 인용자] 창조의 흐름의 재가에 있어서가 아니라, 그로부터의 일탈(déviation)에 있어서, 그것과 나란히(côte à côte) 유출한다”(AO, p.283). 이와 같은 화폐의 이중성을 둘러싼 논점을 바탕으로, 이어서 천 개의 고원에서의 소재-도식에 기초하여 논의되는 노동력을 살펴본다.

 

2. ‘소재-도식으로 쇄신된 생산력과 생산관계

우선 들뢰즈·가타리가 완전히 맑스 다만 재장전된 주의자이며, 따라서 교환주의자가 아니라는 것(AO, pp.224-6 et passim)의 확인이 긴요하다. 거기에는 또한 악명 높은(?) 맑스의 노동가치설특히 자본13절대적 잉여가치의 생산에 있어서의 절대적 잉여가치설에 충실한 들뢰즈·가타리가 있고, 이 맑스에 대한 충실성(fidelité)”(Alain Badiou)가 겉보기에는 맑스에 대한 준거가 상대적으로 안티 오이디푸스보다 적다고 생각되는 천 개의 고원에서도 여전히 유지되고 있는 점이 강조되지 않으면 안 된다. 왜냐하면 안티 오이디푸스에서도 중요한 규정을 부여받았던 코드화, 탈코드화의 양태가, 천 개의 고원에 있어서는 이른바 좁은 의미의 인간적 틀을 넘어선, 무기물도 포함한 생명에서조차 발견된다고 여겨지는 잉여가치개념에 의해 ()규정되기 때문이다. , 생명의 돌연변이 현상을 논한 3고원 도덕의 지질학에서의 어떤 코드도 자유롭게 변이할 수 있는 다양한 보조물을 가질 뿐만 아니라, 동일한 하나의 분절적 단편(ségmentarité)[코드의 구성요소 인용자]은 두 번 복제되며, 두 번째의 복제는 자유롭게 변이할 수 있는 것이 된다 거기서 행해지는 것은 어떤 코드에서 다른 코드로의 번역이 아니라 오히려 코드의 잉여가치 혹은 파생적 커뮤니케이션이라고도 부를 특이한 현상이 생기고 있다non seulement tout code a des suppléments capables de varier librement, mais un même segment peut être copié deux fois, le second devenant libre pour la variation. sans qu'il y ait traduction d'un code à un autre (les virus ne sont pas des traducteurs), mais plutôt phénomène singulier que nous appelons plus-value de code, communication d'à-côté”(MP, pp.69-70), 혹은 또한 이른바 예술론으로서 이해되면서 11고원 리토르넬로에 있어서의, “코드 변환이 행해질 때, 거기에 있는 것은 단순히 부가가 아니라, 항상 새로운 [코드로서의] 평면 그리고 잉여가치가 성립하고 있다Chaque fois qu'il y a transcodage, nous pouvons être sûrs qu'il n'y a pas une simple addition, mais constitution d'un nouveau plan comme d'une plus-value”(MP, p.386), “생명의 장에는 아마 존립성의 이득 즉 잉여가치가 포함되고 있다Or, s i nous nous demandons quelle est l a « place de l a vie » dans cette distinction, nous voyons sans doute qu'elle implique un gain de consistance, c 'est-à-dire une plus-value (plus-value de déstratification)”(MP, p.414), “영토의 어레인지먼트는 탈코드화를 동반하며, 어레인지먼트를 촉발하는 탈영토화와 불가분하다(새로운 유형의 두 가지 잉여가치)L'agencement territorial implique un décodage, et n'est pas lui-même séparable d'une déterritorialisation qui l'affecte (deux nouveaux types de plus-value)”(MP, p.414) 등등이, 간과되어서는 안 된다. 또한 이러한 생명현상에 있어서의 코드화와 탈코드화의 착종이, “자신의 지층 위에 있어서조차 유기체는 탈영토화된다. 유기체는 유기체의 자립성을 보증하고 유기체를 이끌도록 제반 내부 환경을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다Sur sa propre strate, un organisme est d'autant plus déterritorialisé qu'il comporte de milieux intérieurs assurant son autonomie, et le mettant dans un ensemble de relations aléatoires avec l'extérieu”(MP, p.70)라고 기술되어 있는 점에도, 앞에서 언급한 푸코의 오류-우연성으로서의 생명과도 밀접하고, 생체의 이른바 근원적인 우발성이 함의되어 있다는 점의 이해가 중요하다. 왜냐하면 이러한 이른바 생명의 영토에 있어서의 잉여가치에 밀접하는 “()코드화영토화의 양태의 규정은, 더 나아가 언어나 기호계 같은 이른바 인간적 영토에까지 연속적으로 확장되어가는, 거기에서는 이러한 생체의 우발성이, “비신체적 변형으로서의 언표행위의 집단적 어레인지먼트신체의 기계적 어레인지먼트”(MP, p.112)와의 조우라고 규정되는, “날짜-사건이라는 형태에 있어서 모습을 나타내고 있기 때문인데(MP, pp.103-12), “우발적인 세계사를 기술하기 위한 우발성 유물사관에 관련된 이 점에 대해서는 나중에 논하기로 한다.

아무튼 맑스에 있어서 인간이 존재하고 노동한다는 것 자체에 있어서의 과잉을 의미했던 절대적 잉여가치, 이리하여 “()코드화영토화개념에 의해 재규정된다는 점을 확인한 뒤에, “생명으로부터 무기물까지를 관통해 연속적으로 변화하는 소재-도식에 충실하게 전개되는 들뢰즈·가타리에 의한 재장전된 생산력과 생산관계론이 이해될 것이다.

우선 어떤 코드도 자유롭게 변이할 수 있는 다양한 보충물을 가질 뿐만 아니라, 동일한 하나의 분절적 단편은 두 번 복제되고, 두 번째의 복제는 자유롭게 변이할 수 있는 것이 된다에서 분명한 것처럼, 코드의 구성요소로서의 분절적 단편은 그 자체로 변이하는 내용이며 또한 표현이다. 내용은 이미 형성된 소재 내지 질료, 표현이란 실질로서의 힘이며, 또한 각각이 그 하위 구분으로서 형식-실질의 이중분절을 겪고 있기 때문에, 내용의 형식이란 표현의 실질, 표현의 형식이란 내용의 실질이며, 따라서 소재와 힘은 서로 구성하는, 그러나 대응도 부호도 갖지 않은불가분한 것이다(MP, pp.58-9). 천 개의 고원에서의 유물론의 재장전은, 이런 이중으로 분절된 표현과 내용의 동형성에 기초하여 <실험>된다. 따라서 내용과 표현이 구별되는 경우, 그것은 형태적 내지 형상적이지 않고 ‘distinction reelle’(MP, p.59) 현실적인 구별은 스피노자 윤리학1부 정리 10 및 그것에 붙여진 비고로부터 채용되고 있다 . 생산력의 발전이 기존의 생산관계를 질곡에 빠뜨리고 생산력이 반전하여 새로운 생산관계를 내재적으로 생기게 하듯이, 표현과 내용은 존립성의 집합”, 존립평면에 있어서는 서로 반전-생성변화할 것이다. 존립평면의 집합이라는 표현은, 매우 비등질적 성분이 모여 강화되며, 형상-질료의 규칙적 연속으로 바뀌어 계층의 단락短絡, 혹은 역회전의[역전된] 인과관계가 일어나고, 이질적인 소재와 힘 사이에 포획관계가 성립하는 경우에 성립한다. 마치 기계적 계통류(un phylum machinique)[물질의 흐름에 내재하는 어레인지먼트의 연속변화 인용자], 그리고 탈지층화적 횡단성이 요소, 차원, 형상과 질료, 몰적인 것과 분자적인 것을 관통해 질료를 해방하고 힘을 포획하듯이On parlera au contraire d'ensembles de consistance quand on se trouvera devant des consolidés de composantes très hétérogènes, des courts-circuits d'ordre ou même des causalités à l 'envers, des captures entre matériaux et forces d'une autre nature, au lieu d'une succession réglée formes-substances : comme si un phylum machinique, une transversalité déstratifiante passait à travers les éléments, les ordres, les formes et les substances, le molaire et le moléculaire, pour libérer une matière et capter des forces”(MP, p.414). 거기에 있어서 소재 내지 질료는 형식 또는 형상이라는 주괴[주형]에 집어넣어지게 되는 부정형의 것이 아니라, 소재 각각이 지닌 이것임자신의 특이성에 기초한 개체화 를 따라서 형식-실질을 형성하고, 따라서 그 자신에 있어서 표현-내용의 상호 반전을 내재적으로 담당하고 있을 것이다. “중요한 것은 법칙에 복종하는 질료보다도 노모스[질서 인용자]를 가진 물질성을 뒤따르는 , 질료에 특성을 부과할 수 있는 형상보다도 다양한 정서를 구성하는 표현의 물질적 특징을 뒤따르는 것이다il s'agit de suivre le bois, et de suivre sur le bois, en connectant des opérations et une matérialité, au lieu d'imposer une forme à une matière : on s'adresse moins à une matière soumise à des lois, qu 'à une matérialité qui possède un nomos”(MP, p.508). 그리고 이른바 인간/물질의 구분, 혹은 이른바 인간의 역사를 훨씬 넘어선, 생산관계의 형상을 정초짓는 생산력의 사례로서, 매우 아름다운 금속의 역사를 말하는 대목을 반드시 인용해야 한다. 야금술은 물질을 재용해하고 재이용할 가능성을 갖고, 그래서 물질에 주괴[주형]라는 형식을 부여한다 금속의 역사는 스톡과도 상품과도 다른 이 특별한 형식과 불가분하며, 화폐가치는 이로부터 생긴다. 더 일반적으로 말한다면, ‘환원적이라는 야금술의 관념은, 준비된 물질로부터 물질성의 해방 및 구체화되어야 할 형상으로부터의 변형의 해방이라는, 이중의 해방을 표현한다 거기에는 다양한 형상의 계기로 바뀌어 연속 발전하는 형상이, 다양한 물질의 변화로 바뀌어 연속 변화하는 물질이 있다Et pour finir, la métallurgie a la possibilité de refondre, et de ré-employer une matière à laquelle elle donne une forme-lingot : l'histoire du métal est inséparable de cette forme très particulière, qui ne se confond ni avec un stock ni avec une marchandise ; la valeur monétaire en découle. Plus généralement, l'idée métallurgique du « réducteur » exprime la double libération d'une matérialité par rapport à la matière préparée, d'une transformation par rapport à la forme à incarner. Jamais la matière et la forme n'ont paru plus dures que dans la métallurgie ; et pourtant c'est la forme d'un développement continu qui tend à remplacer la succession des formes, c'est la matière d'une variation continue qui tend à remplacer la variabilité des matières”(MP, p.511, 강조는 인용자). 생산력, 혹은 잉여가치의 변주로서의 “()코드화영토화에 기초한 이런 금속-화폐형태론적 관점이, 물질/인간의 구분을 넘어서, 자본과의 우발적 조우를 준비하는 이중으로 해방된노동자에 관해서도, 연속 혹은 일관되어야 한다. 이로부터 임금노동자의 기원, ‘국내의 노동자에게 정위하는 정주혹은 트리[나무]적 관점과는 상이한, ‘이민혹은 유목의 리좀적 관점으로부터 논해져야 할 것이다.

 

우리는 항상 이 정의로 되돌아간다 기계적 계통류는 자연인공[의 구별 인용자]과는 무관한 인공적인 동시에 자연적인 물질성이며, 특이성과 표현 특징을 담지하는 한에서, 운동하고 흐르며 변이하는 물질이다. 이 정의로부터 다음과 같은 명백한 귀결들이 생긴다. 즉, 이런 흐름으로서의 물질만을 뒤따를[추적할] 수 있을 뿐이다. 필시 따르다[좇다]라는 동작은 그 장소에서도 가능하며, 대패질을 하는 장인은 자리를 바꾸지 않고서도 나무와 나무의 섬유를 뒤따른다. 그러나 이런 뒤따르기 방식은 더 일반적인 과정의 특수한 시퀀스일 뿐이다. 왜냐하면 장인은 또한 다른 방식으로 뒤따르도록, 즉 필요한 섬유를 가진 나무를 그것이 있는 장소에까지 찾으러 가도록 강제되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으면 그것을 가져오게 하는 수밖에 없지만, 이 경우는 상인이 반대방향에서 궤적의 일부를 담당하기 때문에 장인은 스스로 그 궤적을 만드는[이동하는] 것을 절약했을 뿐이다. 그러나 장인은 동시에 재료를 채집하는 것이 아니라면 장인으로서 불충분하다. 재료 채집자와 상인과 장인을 분리시키는 조직[분업체제의 확립 인용자]이란 이미 장인을 지체장애로 해서 노동자로 만드는 것이다. 그래서 장인은 물질의 흐름 즉 기계적 계통류를 뒤따르도록 정해졌다고 정의할 수 있을 것이다. 장인이란 물질의 흐름이다. 물질의 흐름을 뒤따라가는 것은 이동하는 것, 방랑하는 것이다. (MP, pp.509-10).

Nous retombons toujours sur cette définition : le phylum machinique, c'est la matérialité, naturelle ou artificielle, et les deux à la fois, la matière en mouvement, en flux, en variation, en tant que porteuse de singularités et de traits d'expression. Des conséquences évidentes en découlent : c'est que cette matière-flux ne peut être que suivie. Sans doute cette opération qui consiste à suivre peut-elle se faire sur place : un artisan qui rabote suit le bois, et les fibres du bois, sans changer de lieu . Mais cette manière de suivre n'est qu'une séquence particulière d'un processus plus général . Car l'artisan est bien forcé de suivre aussi d'une autre manière, c'est-à-dire d'aller chercher le bois où il est, et le bois qui a les fibres qu'il faut. Ou, sinon, de le faire venir : c'est seulement parce que le commerçant se charge d'une partie du trajet en sens inverse que l'artisan peut s'épargner de faire lui-même le trajet. Mais l'artisan n'est complet que s'il est aussi prospecteur ; et l'organisation qui sépare le prospecteur, le commerçant et l'artisan, mutile déjà l'artisan pour en faire un « travailleur ». On définira donc l'artisan comme celui qui est déterminé à suivre un flux de matière, un phylum machinique. C'est l'itinérant, l'ambulant. Suivre le flux de matière, c'est itinérer, c'est ambuler.

 

여기에서는 이른바 자본주의 하의 노동자와 구별되는 장인, ‘이동체로서 물질에 순종한다고 정의된다. 물론 이런 자본주의 이전以前의 상태는 자본주의의 빛에 비추어 소급적으로파악될 수 있는 우발적 세계사에서 발견된다. 그런 한에서 여기서의 장인은 소급적으로 그리고 소급적으로만 파악된 노동자의 전신前身이다. 이로부터 물질의 흐름에 순종하는 것으로서의 장인의 이동과는 상이한 두 번째 이동이 구별될 것이다. , “농민 또는 목축민이 계절이나 토지의 빈곤화에 부응해 토지를 바꾸는” “이동”, “그러나 계절이 바뀌고 숲이 재생하고 토지가 회복되면 출발점으로 회귀하도록 미리 정해진 회전을 행하는듯한 이동을 행하는 이동목축민이 그런 두 번째 이동을 담당한다고 간주되며, 그리고 상인도 또한 상품의 다양한 흐름들이 출발점과 도착점의 회전에 종속하고 있는 한에서 이동목축민les flux marchands sont subordonnés à la rotation d'un point de départ et d'un point d'arrivée ( aller chercher-faire venir, importerexporter, acheter-vendre)이라고 간주된다(MP, p.510). 여기에서는 자본주의의 기원상인자본에서 찾아내려고 하는 관점에 대한 비판이 내포되어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이미 인용했듯이, 세계사를 소급적으로 파악하는 것을 가능케 하는 자본주의 산업자본주의에 의해 정의된다라는 <가설>로부터 들뢰즈·가타리는 논의를 개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안티 오이디푸스에서의 이 관점은, 천 개의 고원에 이르기까지 틀림없이 일관하고 있다는 것을 강조해두자. 여기에서는 모든 것이 소재-의 상에 있어서 파악되어야 한다. 그리고 이 상의 파악에 기초하여, “이동목축민이 진정한 이동자가 되는 것은, 토지나 목초의 회로가 피폐하고, 회로가 너무도 확대됐기 때문에 회로로부터 흐름이 일탈해갈 때뿐이다Le transhumant n'est donc itinérant que par voie de conséquence, ou ne le devient que quand tout son circuit de terres ou de pâturages est épuisé, et quand la rotation est tellement élargie que les flux échappent au circuit”(MP, p.510)가 이해되어야 한다. 즉 이 회로가 자본제에 있어서의 생산-소비-분배의 회로의 알레고리라는 것은 명료하다. 따라서 여기서 얘기되는 진정한 이동자상인이다, 자본주의라는 회로너무 확대된때에 이 회로로부터 일탈’, 심지어 도주해가는 생산력으로서의 흐름혹은 기계적 계통류-물질로서의, 자본주의 하에 있는 프롤레타리아트일 것이다. 말하자면 진정한 노동자란 물질의 흐름의 한복판에 있는 이동체라고 하는 정의가, 앞의 인용으로부터 논리적 혹은 오히려 <비정확>하게(MP, p.31) 도출되어야 한다. “회로가 너무 확대됐기 때문에 회로로부터 흐름이 일탈해간다는 것은 바로 흐름으로서의 물질에 대해이뤄지는 장인의 정의에 다름 아니기 때문이다.

또한 이런 이동체라는 의미에서의 프롤레타리아트의, 현재에 있어서의 자본제라는 결과로부터 볼 때 여전히 상실된 채인 다름 아닌 <가설> 혹은 <허구>로서의 기원, 들뢰즈·가타리는 이른바 전쟁기계와도 결부시켜 이해하고 있다. 유목론 혹은 전쟁기계라는 제목의 12고원에서의 국가의 전쟁을 총력전으로 하는 요인은 자본주의, 즉 전쟁에 관련된 자재·산업·경제에 투자되는 고정자본 및 육체적 정신적 인구로서 투자되는 가변자본과 밀접하게 결부시킨다”(MP, p.524)고 하는 구절 및 그것에 덧붙여진 폴 비릴리오의 속도와 정치에의 참조를 촉구하는 각주(101)에서 그것은 명백하다. 그러나 그것에 덧붙여 14고원 매끈함과 홈패임에서의, 맑스 자본의 자본주의 하에서의 이른바 추상노동, ‘전쟁기계홈패임혹은 국가장치로의 회수로서 논의되고 있는 점이 중요하다. 거기에는 명백하게 맑스의 절대적 잉여가치가 숨쉬고 있다. ,

 

추상노동, 그 효과의 배가, 그 분업화 같은 문제가 최초로 출현하는 것은 핀공장에 있어서가 아니라 공공사업의 작업현장 혹은 또한 군대의 조직화(인간의 규율훈련뿐만 아니라 무기의 공업생산에 있어서도) 등에 있어서이다. 전쟁기계는 아마 최초로 홈패임화되고, 효과에 있어서는 배가하며, 분업화 가능한 추상적 노동시간을 산출하는 것이 됐다. <노동>의 물리적 사회적 모델이 국가장치의 발명으로서 국가장치에 속하는 이유는 두 가지이며, 우선 첫째로 노동은 어떤 잉여의 성립에 의해서 처음으로 출현한다, 즉 스톡으로서의 노동만 존재할 뿐이며, 노동은 (엄밀한 의미에서) 이른바 잉여노동과 더불어 개시된다는 것, 둘째로 노동은 시공간의 홈패임화라는 보편적인 조작·자유활동의 예속화·매끈한 공간의 폐절 등을 행하는 것이며, 국가의 본질적 기획인 전쟁기계의 정복이 노동의 기원이며 수단이 된다는 것이다. (MP, pp.611-2).

Ce n'est pas dans la fabrique d'épingles que se posent en premier lieu les problèmes du travail abstrait, de la multiplication de ses effets, de la division de ses opérations : c'est d'abord sur les chantiers publics, et aussi dans l'organisation des armées (non seulement discipline des hommes, mais production industrielle des armes). Si bien que la machine de guerre a peut être été la première à être striée, à dégager le temps de travail abstrait multipliable dans ses effets, divisible dans ses opérations. Le modèle physico-social du Travail appartient à l'appareil d'Etat, comme son invention, pour deux raisons. D'une part, parce que le travail n'apparaît qu'avec la constitution d'un surplus, il n'y a de travail que de stockage, si bien que le travail (à proprement parler) commence seulement avec ce qu'on appelle surtravail. D'autre part, parce que le travail effectue une opération généralisée de striage de l'espace-temps, un assujettissement de l'action libre, une annulation des espaces lisses, qui trouve son origine et son moyen dans l'entreprise essentielle de l'Etat, dans sa conquête de la machine de guerre .

 

이리하여 맑스의 자본에 의한 자본제에서의 추상노동으로서의 과잉노동론은, 이른바 매끈한 공간에서의 자유로운 활동홈패임화하고, (과잉)노동을 전인격적으로 착취 즉 수탈하는, 혹은 오히려 포획하는 양태 앞서 본 이중으로 발휘되는 폭력, “전쟁기계의 홈패임화에 입각해 얘기된다. 이로부터 대차적対遮的으로 전쟁기계는 맑스/엥겔스의 독일 이데올로기에서의 교역·전쟁을 포함한 이른바 <교통(Verkehr)> 형태를 담하는 탈코드화와 탈영토화의 첨단에 의해 정의되, ‘소재-도식에 구현되는 구체적인 어레인지먼트로서 작동하는 추상기계’(MP, p.636)이다.

이런 관점에서 자본136불변자본과 가변자본에 있어서 맑스가 전개한 기계론이, 앞서 언급한 기계도 또한 잉여가치를 산출한다라는 안티 오이디푸스에서 이미 논의됐던 사태(AO, pp.275-8)의 연장선상에서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거기에서 기계과거의 / 죽은 노동의 보존과 전송을 관장하는 장치라고 맑스는 말했다. 이것에 현재 시점에 있어서의 인간-노동자의 산 노동”(이라는 원래부터 잉여일 뿐인 노동)이 부가됨으로써, 잉여가치가 산출된다. ‘산 노동에 의해 과거의 / 죽은 노동억지로 되살리거나, 혹은 산 노동죽은 노동의 접속에 의해 잉여가치가 생긴다. 과거의 죽은 시간 혹은 노동을 재생시키고 착취하기 위해서만 산 노동은 동원된다. ‘산 노동은 그래서 그 자체로는 무가치하다고 말해도 좋지만, 다른 한편 그것 없이 착취는 수행될 수 없다, 다시 말하면 잉여가치는 어디에서 생기는가라는 위치 결정이 불가능하다는 사태가 생긴다. 천 개의 고원에서는 이 논의를 받아, 맑스의 근본적 성과는, 잉여가치는 위치 결정 불가능하다는 점의 해명 및 기계가 그 자체 잉여가치를 산출하고 자본의 유통이 가변자본과 불변자본의 구분을 무효화한다는 예지, 이렇게 두 가지 점에 있다고 평가하고 있다(MP, p.613). 또한 이런 맑스를 바탕으로 하여, 이제 산 노동은 더 이상 필요치 않으며, “기계에 의한 잉여가치만으로 자본주의가 매끈한 공간을 창조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상태, 즉 자본이 절대속도에 도달한 상태가 찾아왔다고 하는 것이 천 개의 고원에서의 현황 인식이다(MP, p.614). 거기에서는 이른바 냉전붕괴 이후에 전면화된 감시사회’, ‘전지구화’, ‘남북전쟁이나 걸프전’, 나아가 동시다발테러같은 사건에 대한 예언적 서술이 엄청나게 발견되지만, 그것들은 모두 사후적으로만 속속들이 알게 되는 것이며, 여기서는 젖혀 두고 묻지 않는다. 여기서 문제시 되어야 하고 소급적으로 ()기술되는 우발적 세계사, 아래에서 개괄한 자본과 노동의 조우에 잇어서 성립하는 것이며, 이로부터 <재장전된 유물론사관> 구상이 전망된다.

 

긍정과 도주 : 우발성의 유물사관을 위해 

각각의 속성의 양태는 그것이 양태가 되고 있는 속성 하에서 신이 생각되는 한에 있어서만 신을 원인으로 하고, 신이 어떤 다른 속성 하에서 생각되는 한에 있어서는 그렇지 않다.

스피노자, 윤리학2부 정리6

 

노동력을 포함한 여러 상품들의 생산-유통-()생산이라는 자본주의의 원환을 완결한 것으로 보지 않고, 이 원환을 자본과 노동의 우발적인 조우를 기점으로서 기술하는 것. 이러한 안티 오이디푸스, 천 개의 고원에서의 기획에, 『『자본을 읽자에 수록된 에티엔 발리바르의 역사유물론의 근본 개념에 대해논문이 크게 기여하는 점이 우선 확인되어야 한다. 이미 본 이윤율의 영원한저하 경향 법칙자본주의의 공리계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으로 해석된 한에서의 으로서의 코드의 잉여가치흐름의 잉여가치로의 변용이라는 논의 그 논거는, ‘노동력자본사이에는 공통 척도가 없다는 점에서 찾아졌다 도 발리바르에 의거하여 이뤄진 것이었지만(AO, p.271), 이것에 덧붙여 “<잠재적으로는(virtuellement)> 별개로 존재하고 있자유로운 노동화폐-자본이라는 두 개의 요소의 조우는 일어나지 않을 수도 있을 것이다(aurait pu ne pas se faire)”라는, 본고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문장에 이어서 곧바로 이뤄지는 두 요소에 대한 언급, 요소의 한쪽은 낡은 사회 신체를 구성하는 농지구조의 변용에, 다른 한쪽은 이 낡은 신체의 무수한 모공 속에 난외-여백적으로(marginalement) 존재하고 있는 상인과 고리대금을 경유하는, 완전히 다른 계열에 의존하고 있다”(이상은 AO, p.266)가해진 각주(76)에서 인용되는 발리바르가 결정적이다. 이하에서 보는 들뢰즈·가타리에 의해 인용되는 발리바르의 논문의 해당 대목은 물론 4. 이행의 이론을 위한 요소들“1. 본원적 축적, 한 가지 전사(前史)”에서의, 자본과 노동의 조우를 둘러싼 맑스의 고찰에 대한 주석의 일부분이다.

 

자본주의의 구조가 지닌 통일성은, 한번 구성되면 자신의 배후에서는 찾아낼 수 없다[배후로는 되돌아가지는 않는다](ne se retrouve pas en arriere d’elle) (필요한 것은) 이것들의 조우적 연락(leur conjonction)의 결과에서 출발해 [소급적으로] 규정 [한에서의] 요소들과, 이런 결과들과는 그 개념에 있어서 무관한 왜냐하면 결과는 다른 생산양식의 구조에 의해 정의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요소들 각각의 역사를 그 한복판에서 사고되어야 하는 역사 분야와의 사이의 조우(la rencontre)가 이미 산출되고 있으며, 또한 엄밀하게 사고되고 있는 것이다. 선행하는 생산양식에 의해 구성된 이런 역사 영역에 있어서는, 그 계보가 추적되는 이런 요소는, 정확하게는 난외-여백적 상황, 즉 비결정적인 상황만 갖고 있을 뿐이다. [‘(필요한 것)’은 들뢰즈·가타리에 의한 보충. ‘조우’, ‘조우적 연결의 강조도 들뢰즈·가타리의 것 인용자]

 

여기서 발리바르가 말하는 것은 자본주의의 구조는 자신의 통일성을 자본주의의 전사에서는 갖지 못하고, 통일성은 자본과 노동이라는 두 개의 요소조우적 연결이 요소들과 이런 요소들 각각의 역사를 사고해야 할 역사 영역과의 사이의 조우에 있어서 획득됐지만, 다만 이런 요소들은 이 조우적 연결의 결과로부터 소급적으로 찾아낼 수 있는 것이며, 또한 결과와 이것들 각각의 역사를 지닌 요소들은 개념적으로는 아무런 관계도 없기 때문에 노동자본자본주의의 구조에 있어서 파악되는 것이기 때문에 , 이런 요소들은 역사적으로 비결정적인 상황밖에는 갖지 못하며, 따라서 자본주의의 전사로서의 이른바 본원적 축적자본주의의 구조의 통일성이 부여되고 있는가에서 보이는 현재에 있어서도 부단하게 재생산되고 있다는 것이다. 즉 이 전사는 자본주의의 통일성에 있어서 필요하고 불필요한, 배제되기 위해서만 소환되는 난외-여백이며, 난외-여백으로서의 전사혹은 비결정적 상황, 노동과 자본의 <조우>가 발생하는 역사의 영역일 것이다. 그리고 들뢰즈·가타리는 이 <조우>, ‘자본주의의 구조로부터 소급적으로 발견되는 세계사속의 도처에서 발견하려고 한다. 그리고 이런 <조우>가 발생하는 상황을 구조에 있어서 소급적으로 파악하려고 하는 관점의 제시에 있어서, 발리바르와 들뢰즈·가타리에 있어서 공유되는 것은, 스피노자의 이른바 인과성여기서는 필연사관 내지 목적론적 사관을 가리킨다고 생각해도 좋다 비판이며, 주지하듯이 그것은 알튀세르파에 있어서는 칸트파 정신분석의 무의식과 관련해서 무의식은 그 효과-결과에 있어서 실재한다고 하는 테제로 변주되고 있으며 무의식의 징후가 구조에 있어서의 전사의 발견으로서, 계급투쟁-개입의 계기가 된다 또한 들뢰즈에 있어서는 표현표출도 유출도 아닌 표현에 기초한 종합적 방법의 문제계에 있어서 정제되는데, 여기서는 들뢰즈·가타리의 우발적 세계사와 관련되는 한에서의 스피노자를 언급하고자 한다.

윤리학1부 정리 10 “실체의 속성 각각은 그 자체에 의해 사고되어야 한다비고에서는, 속성 각각이 그 자체에 의해 사고되는 것이 현실적인 구별이다 이미 말했듯이 이 현실적 구별천 개의 고원에 있어서 표현내용의 구별로서 나타난다 라고 규정되고 있다 속성 각각이 그 자체에 의해 사고되는영역이 천 개의 고원에서의 내재평면이다 . 속성자본노동이라는 자본주의의 구조를 구성하는 요소로 파악하는 것이 허용된다면, 이런 요소각각의 현실적인 구별에 의해, (아직 그것이라고 동일시[규정]되지 않는 그런 요소들의) <조우>의 소급적으로 동일시[규정]되는 역사적 요소가, 그런 요소들에 있어서 파악됨으로써, “자본주의의 구조가 갖는 통일성, “이런 요소들 각각의 역사를 그 한복판에서 사고해야 하는 역사 영역과의 사이에 있어서만 성립한다는 것이 제시될 것이다. “자본주의그것에 비추어 세계사가 소급적으로 파악될 수 있다 를 성립시키는 노동자본전사<조우>로부터 뒤집어서, 더 소급적으로 세계사의 전역에 이런 전사<조우>를 찾아낸다는 구상에 들뢰즈·가타리가 말하는 우발적인 세계사는 기초하고 있으며, 그렇기에 들뢰즈·가타리가 천 개의 고원에 있어서 집요하게 비판하는 이른바 역사, 이런 의미에서의 전사와는 구별되어야 하는, 그리고 이 전사, 단서로부터도 목적으로부터도 일탈한 강도의 상태를 가리키는 고원’, 혹은 사물 각각의 이것임에 기초한 개체화-사건이 발생하는 내재평면이라고 불리는 것이라고 풀이되어야 한다. 그것은 인과성에 근거한 시계열적인 사태들의 연쇄가 아니라, 안티 오이디푸스에서 서술된, 자본주의에 의해 소급적으로 파악되는 우발적인 세계사이다. 거기에 있어서 특히 중시되는 것이 비신체적 변형행위로서 상황에 개입하는 명령어이며, 이런 명령어들은 날짜혹은 사건으로서, 역사상에 출현한다 19231120일 독일에서의 신화폐교부 포고, 혹은 레닌의 191774. 이 집단-언표적 어레인지먼트, 혹은 사건, 이른바 자본제사회에 내재, 혹은 평행적으로 일어나는 비결정적인 상황혹은 전사의 영역에 있어서, 따라서 자본제사회의 언제 어디서든 일어난다. 자본주의에 있어서 잉여가치가 어디서 생기는지가 결정 불가능하다라는 것과 평행하여, 사건혹은 앞서 인용한 혁명적 잠재력의 현실화는, 언제 어디서 생기는가를 모른다 = 언제 어디서든 생길 수 있기 때문이다(AO, p.454). 그리고 그것이 자본주의 공리계로부터의 도주내지 누출의 선분의 하나일 것이다. 또한 이런 명령어를 구성하는 분절적 단편이, 광물로부터 생물을 거쳐 언어, 더 나아가 인간의 집단적 어레인지먼트에까지 이르는, 이중분절을 겪고 표현에서 내용으로 혹은 그 반대로 연속적으로 변화하는 소재-도식에 관통되고 있음을 상기한다면, 들뢰즈·가타리에 의해 사적 유물론우발성 유물론으로 재장전된 것이 이해될 것이다 그때 <matérialism>물질주의라기보다는 소재-도식에 있어서 내용과 표현이 서로 연속 변화한다는 의미에서, ‘소재주의로 번역된느 것이 적절하다 . 여기서의 역사는 목적론으로부터도 필연성으로부터도 누출-도주한 고원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고원으로서의 역사로, 이제 자본주의 그 자체를 도주시켜야 한다.

물론 이런 자본주의 성립을 위한 필요하고 불필요한 전사는 자본주의의/라는 결과의 안쪽에 있어서만 발견될 수 있다. 그러나 이 결과, ‘전사라는 자본주의의 원인혹은 오히려 조건이 내재 혹은 평행주행하고 있다는 점이 중요하다. 이미 말했듯이 요소 각각의 현실적인 구별, 자본노동<조우>의 결과로부터 소급적으로 규정[식별]되는 역사적 요소 각각의 파악에 의해, 이것들 사이에는 그 어떤 필연적인 결합관계도 발견될 수 없다는 것 비결정적 상황, 따라서 또한 이런 결합에는 우발적으로 조우하지 않는 한 부단하게 알력이 생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자본<> 노동의 각각을 그 자체에 의해서긍정적으로 파악하는 것, 현실적인 구별에 있어서, <>에 의한 접속 그 자체가, 단서도 목적도 갖지 않는 것으로 해석된 한에서의 역사의 영역에 있어서의 우발적인 연결(conjonction)이었음이 제시된다. 이런 ‘conjonction’<> 또는 본성의 차이에 다름 아니다. 그리고 이런 <> 그 자체를 그 자체에 의해 긍정적으로 파악한다면, 거기에는 무수한 <조우>의 가능성, “모든 것이 가능해지는” “기괴하게도 다의적인 순간이 무수하게 열릴 것이다. 그때 자본주의의 성립에 있어서 발생한 저 우발적 조우, 자본주의의 빛에 비추어 소급적으로 파악되는 세계사를 가득 채운다는 것을 소급적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이 자본주의 그 자체를 도주시킨다고 하는 명제의 내실이어야 한다.

이리하여 천 개의 고원에서의 상호 구성하는 <소재-> 도식에 근거한 내용-표현의 <유물론>적 구별을, 내재평면에 있어서의 사물들의 각각이 그 자체에 의해 파악된다는 스피노자적인 의미에서의 현실적 구별과 들뢰즈·가타리가 상정한 것의 의의가 이해된다. 안티 오이디푸스에 있어서 제시된, “혁명적 잠재력을 현실적인 것으로 하는” “인과관계의 단절로서의 절단실제로 발생하는” “어떤 정확한 순간이란, <>의 출현의 순간을 가리킨 것이며, 따라서 구별은 오히려 ‘~한 절단이다. 그리고 이 단절은 실재하는 것에 밀착한 역사의 고쳐 쓰기를 강제하고, 모든 것이 가능해지는 기괴하게도 다의적인 순간을 산출한다. 이것이 들뢰즈·가타리에 있어서 재장전된 우발성 유물론사관이다. 거기에서는 현실적 구별에 있어서, 우발적으로 혁명의 잠재력이 현행화actualize된다. 내재평면에 있어서 무수한 어레인지먼트를 담지하는 표현과 내용은, 상호 연속 변화한다는 의미에서 똑같은 것이며, 따라서 형태적으로가 아니라 현실적으로구별된다. 스피노자가 윤리학2부 정리 6에서 말한, “각각의 속성의 양태는 그것이 양태가 되고 있는 속성 아래에서 신이 생각되는 한에 있어서만 신을 원인으로 하고, 신이 어떤 다른 속성 하에서 생각되는 한에서는 그렇지 않다고 할 때의 내재평면으로 풀이할 때, 현실적 구별의 함의는 훨씬 명료하다. , 내재평면에 있어서는, “만일 세계사를 소급적으로 파악시키는 자본주의 그 자체가 자본과 노동의 우발적 조우에 있어서 성립한 것이라고 한다면, (그렇다면) 세계사의 도처에 이러한 조우가 똑같이 발생한다고 하는 만일 ~라면(si), 그것들은 ~이다(donc)”의 논리가 작동하고 있다. 내재평면에 있어서는 자본주의(라는 원인)가 세계사(라는 결과)를 낳았다고 하는 인과성은, 세계사 앞서 말한 전사의 의미에서의 라는 여기서의 결과에 있어서, 자본주의라는 여기서의 원인의 성립 조건, <조우>가 발견되고, 뒤집어 자본주의라는 결과에 그 원인을 찾아내는 것을 가능케 하는 것이다. 앞서 인용한 안티 오이디푸스자본주의의 빛에 비추어 모든 역사를 소급적으로 파악하는것은 원인(자본주의)에서 결과(세계사)”라는 인과관계로 고쳐 써질 수 있다. 이 관계가 결과(자본주의)에서 원인(세계사)”으로 ()전도시킨 다음에, 다시금 원인(세계사)에서 결과(자본주의)”로 나아간다. 이때 은 자본주의에 의한 스스로에 대한 오인-전도였다는 것이 나타난다. 이리하여 노동력을 포함한 상품들의 생산-유통-소비-()생산이라는 자본주의의 원환을 완결한 것으로 간주하지 않고, 자본과 노동의 각각이 그것 자체에 의해 긍정적으로 파악되는 것에 있어서, 이 원환을 자본과 노동의 우발적인 조우를 기점으로서 기술하는 것, 따라서 자본과 노동의 조우를 필연으로서가 아니라 무수하게 가능한 다른 조우와 더불어 기술하는 것에 의해서, 자본주의를 역사 앞서 언급한 푸코가 말한 의미에서의 로 귀환시키는 것, 그것이 안티 오이디푸스, 천 개의 고원에서의 들뢰즈·가타리의 미증유의 <실험>이었다. 그리고 이런 “sidonc의 논리를, 들뢰즈·가타리는 다름 아닌 맑스에서 찾아내고 있다(AO, p.266). 즉 맑스의 이른바 1844년의 경제학과 철학세 번째 초고 욕구, 생산, 분업이라는 절에서 나타난, <만일 라면, 그것들은 네게 c‘est donc à toi si>(원문에서는 라틴어 ‘conditio sine qua non’)라고 말한 산업 환관産業宦官의 악마의 계약이 그것이다. 환관宦官즉 자본제 사회에 있어서의 생산자, 이웃을 향해서 네가 바라는 것을 나는 네게 주겠다, 그러나 너는 sine qua non의 조건을 알고 있네, 즉 만일 네가 원한다면, 그렇다면 이라고 속삭인다, 이미 봤듯이 폭력을 겪는 대상을 산출하면서 그 폭력을 자본제의 불필요하고 불가결한 전제로 추켜세우는 국가장치, 혹은 미리 스톡되는 것으로서만 과잉이라고 지목한 뒤에 노동을 수탈하는 포획장치와 상동적인 폭력을 행사하는 자본주의의 첨병으로서의 이른바 개념인물이다. 따라서 이 일화를 언급하는 들뢰즈·가타리는 자본주의의 공리계가 이런 ‘si donc 의 논리를 재빨리 활용하는 기예를 터득하고 또한 맑스도 그것을 깨달았다는 것을 주장한다고 풀이해야 하며, 더욱이, ‘si donc 의 논리는 바로 자본주의 자체에도 적용되어야 할 것이라고 생각한 들뢰즈·가타리는 매우 정당하다고 말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자본<> 노동은, 이것들이 본성의 차이에 있어서 질적으로 구별될 수 있는 우발적으로 조우한 것이다.

 

결말을 대신해 : 원환의 파쇄

이리하여 역사를 자본주의에 봉사-동원시키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자본주의를 역사로 귀환시키는 시도의 준비가, 여기서 정비됐다. 그리고 자본주의는 영원히 불멸이 아니라는 것을 나타내기 위해서도, 노동<> 자본의 쌍방이 자본주의라는 결합-어레인지먼트로부터 도주하는 사태를 조직화해야 한다. 노동<> 자본이 서로 잡아당기는, 즉 각각이 그 자체에 의해 긍정적으로 파악됨으로써, ‘억지를 부린결합에서 도주-누출하는 계기가, ‘우발적인 세계사속에 깃들어 있다. , 자본주의의 원환은 파쇄되어야 한다, 혹은 이것들은 원래 파쇄되고 있는 두 개의 원환의 <이음매 joint>를 찾아내어야 한다.

자본주의의 원환을 형식적으로만 파악한다면, 원환은 닫힌 구조로서 나타날 수밖에 없다. 이 자본 축적의 원환에는 이른바 본원적 축적의 원환이 반드시 나란히 달리고 있으며, 이런 의미에서 이 자본주의의 원환은 초점을 두 가지 갖는 타원이라고 표현되어도 좋다. 원환의 중심은 하나가 아니며, 그렇게 보였다고 하더라도 또 다른 중심이 거기에 겹쳐져 있는 것이다. 이 타원을 찾아내어 두 개의 원환을 찾아내기 위한 <가설> 혹은 가정명제가, “만일 자본과 노동의 조우가 우발적이었다고 한다면이다. 이제 이 두 가지 원환의 결합을 푸는 기예가 탐구되어야 한다. 이 결합은 필연이 아니기 때문이며, <이음매 joint><벗어나는(out of)> 것은 <유물론>적으로 적어도 형식주의에 대한 비판에 있어서 가능하기 때문이다. 이제 두 개의 원환을 지혜의 고리처럼 <벗어나고>, 그리고, 만일 있을 수 있다면, 결합의 새로운 관계를 모색해야 할 때이다. 그렇게 말하면 들뢰즈는 천 개의 고원에 대해서, “이 책은 각 고리가 다른 고리로 결합할 수 있는 파쇄된 고리의 집합이라고 생각하고 싶다고 말했다. 이제 이런 파쇄된 고리의 ‘떼어냄이음의 기예(operation), 자본주의의 원환에 대해서도 시행되어야 할 때이다. 그런 떼어내는 방식-이음매 없는 방식out of joint의 조사에 대해서는, 그러나 뒷날을 기약하고 싶다.

 

Posted by 상겔스 상겔스


SOUSTRACTION ET CONTRACTION

À PROPOS D’UNE REMARQUE DEDELEUZE SUR MATIÈRE ET MÉMOIRE

Àlamémoirede François Zourabichvili

Quentin Meillassoux


quentin-meillassoux-soustraction-et-contraction-a-propos-dune-re


Soustraction et contraction - à propos d'une remarque de Deleuze sur Matière et Mémoire


Soustraction et contraction - à propos d'une remarque de Deleuze sur Matière et Mémoire. 2007, French. Revue Philosophie n°96


Posted by 상겔스 상겔스

들뢰즈와 시몽동

―개체화의 작용에서 아나키한 초월론적 원리로


* 출  처 : 『情況』 제3기 제4권 제3호

* 글쓴이 : 히로세 코지(廣瀬浩司)

* 서지정보 : http://iss.ndl.go.jp/books/R000000004-I6564888-00


들어가며

“주체 뒤에 누가 올 것인가?”―이 물음에 답하는 형태로 쓰인 소론 「철학적 개념」에서 질 들뢰즈는 여태까지의 주체의 기능은 ‘보편화’와 ‘개체화’였다고 말한다.1) 보편적인 ‘나’(je)와 개체적인 ‘자기’(moi)라는 고전적 주체의 두 측면이 항상 결합되어 있었던 것은 아니나, 흄에서 칸트를 경유해 후설에 이르는 주체의 철학은 이 두 가지 측면의 갈등과 그에 대한 해결책 제시의 역사였다.

들뢰즈는 이 ‘나’의 보편성을 ‘전개체적인 특이성’으로, ‘자기’의 개체성을 ‘비인칭적인 개체화’로 대체해야 한다고 말한다. 이 글에서는 이 개념들의 의미에 관한 일단(一端)을 명확하게 할 것인데, 이러한 논의의 배경에는 철학에서 전통적으로 ‘개체화의 원리’라고 부르는 것에 대한 탐구가 있다.

물론 개체화 문제를 제기했던 것은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에 나온 ‘질료형상론’이다.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개체는 질료와 형상의 결합체로 이루어져 있다. 그리고 이 논의를 단서로 삼아 ‘개체화 원리’에 대한 물음, 즉 개체적인 실체를 개체이게 하는 원리에 대한 물음이 어떻게 하여 둔스 스코투스의 ‘존재의 일의성’, 라이프니츠의 ‘모나드론’, 스피노자의 ‘양태론’, 그리고 니체의 ‘영원회귀’로 계승되었는가를 추적하는 존재론적 논의가 들뢰즈의 초기 사상의 핵심을 형성했다는 것은 잘 알려져 있다.2)

하지만 여기에서 검토하고 싶은 것은 철학사적인 계보에서의 개체화론이 아니라 들뢰즈에게 직접 영향을 준 것으로 보이는 질베르 시몽동의 개체화의 사유와 들뢰즈가 맺는 관계이다. 1924년에 태어난 질베르 시몽동은 ‘기계학’mechanology을 전개한 기술론의 고전인 『기술적 대상들의 존재양태에 관하여』(1964)로 알려져 있는데, 거의 같은 시기에 출판되었던 『개체와 그 물리적․생물적 발생』(1964)에서는 아리스토텔레스적인 질료형상론을 철저하게 비판하면서 ‘개체화의 작용opération’을 기술성과 밀접한 관련 속에서 사고했다.3)

이 중에서도 들뢰즈에게 큰 영향을 준 것은 후자의 개체화론이다. 들뢰즈는 대부분의 저작, 특히 『차이와 반복』,4) 『의미의 논리』에서 시몽동의 개체화론을 참조하고 있다. 예를 들어 『의미의 논리』에서 시몽동은 ‘비인칭적이고 전개체적인 특이성’의 이론가로, 또 ‘초월론적인 것’에 관한 사고를 쇄신한 사상가로 소개되고 있다.5) 그리고 위에서 서술한 ‘개체화’나 ‘특이성’의 문제만이 아니라 들뢰즈가 자신의 것으로서 사용하고 있는 ‘문제적인 것’problématique, ‘변조’modulation, ‘잠재적인 것virtual의 현재화(顯在化, actualization)’라는 중요한 주제는 모두 시몽동의 것이며, 또 『시네마』 2권에서 제시된 ‘결정(結晶) 이미지’에 이르러 전개된 ‘결정’의 생성에 관한 고찰, 게다가 ‘막(膜)’이라는 ‘위상학적 표면’에 관한 고찰 등도 시몽동에게서 대개 그대로 차용된 것이다.

『차이와 반복』(1968)이 출판되기 약간 전인 1966년, 들뢰즈는 위에서 언급한 시몽동의 개체화론에 대한 서평을 썼다.6) 이 글에서는 이 서평을 실마리로 하여 시몽동과 들뢰즈 이 두 사람의 공통 테마를 확인한 후에, 『차이와 반복』의 들뢰즈가 그것을 ‘가역적이고, 아나키적이며, 노마드적인 원리’로 첨예화/급진화하고 있는 과정을 추적하면서 그 의미를 검토한다.


질료형상론 비판

시몽동은 개체의 실재성을 설명하는 데에는 두 개의 전통적 입장이 있다고 말한다. 하나는 원자론적 실체주의이고, 다른 하나는 아리스토텔레스적 질료형상론이다. 하지만 시몽동에 따르면 두 입장은 모두 ‘이미 구성되어 있는 개체’에 존재론적인 우위를 부여한다는 전제 위에 세워져 있다고 말한다.(IG, Introduction)

원자론적 실체주의는 복합체의 성립을 설명하기 위해서, 복합체를 결합하는 확고한 원리로서 개체화의 원리를 요청한다. 다른 한편, 질료형상론도 그것이 질료든 형상이든 간에, 이 둘에 개체화의 원리를 놓지만, 개체화는 단순히 이 원리를 적용한 것으로 간주된다. 이렇게 두 입장 모두 ‘이미 구성된 개체’로부터 출발하며, 이를 설명하기 위해 ‘개체화의 원리’를 탐구한다. 그리고 이 원리를 개체화의 ‘이후’(원자론적 실체주의)나 ‘이전’(질료형상론)에 상정하기 때문에 이 두 입장은 개체의 ‘생성’의 작동을 파악하는데 실패해 버리고 만다.

반면 시몽동은 이미 구성된 개체로부터 출발하는 대신 ‘선(先)개체적인 것’으로부터 ‘개체’를 생성시키는 ‘개체화의 작용’에서 출발할 것을 제창한다. 이 개체화의 작용은 질료와 형상의 대립에 한정되는 것이 아니라 양자의 공통의 작업으로서만 서술된다.

우선 구체적인 예를 들어 보자. 시몽동이 특히 질료형상론의 한계를 지적하기 위해 거론하고 있는 예는 벽돌의 제작이다.(IG, 38~43) 벽돌이라는 ‘개체’의 성립을 주형이라는 ‘형상’과 점토라는 ‘질료’의 결합에 의한 것이라고 생각하는 고전적인 사고를 내부로부터 해체하기 위해 시몽동은 이 기술적인 모델을 상세하게 분석하면서 질료와 형상 사이에 있는 매개적인 작용을 명확하게 하고자 한다. 이 예는 시몽동의 기술론 중에서도 가장 소박한 것이자, 이른바 ‘질료형상론’과 타협했던 논의이지만, 들뢰즈=가타리가 나중에 자세히 분석하고 있는 것이기에7) 이를 간략하게 소개하도록 하자.

시몽동에 따르면, 벽돌이라는 하나의 개체를 순수한 형상(주형)과 순수한 질료(점토)의 결합의 결과로 생각할 수는 없다. 실제로는 주형이든 점토든 둘 다 세심한 정성을 들여 준비된 것이며, 이 두 가지 계열이 어떻게 하면 잘 매개되게끔 할 것인가에서 ‘기술성’이 발휘된다. 우선 점토의 경우, 틀에 넣어 잘 굳게 하기 위해서는 적당한 균질과 습기 등이 갖추어져야만 한다. 질료는 단순히 형상을 수동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암묵적인 형상’으로서, 개체의 성립을 능동적으로 준비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이 준비를 가능케 하는 것이 질료에 축적되어 있는 ‘잠재적 에너지’potential energy라고 불리는 것이다.

다른 한편, 형상인 주형의 경우, 이 점토에 잠재되어 있는 에너지를 잘 ‘현실화’actualiser시키게끔 만들어져야만 한다. 그를 위해서 바깥으로부터 형상을 내리누르는 것이 아니라, 점토가 품고 있는 잠재적 에너지를 잘 ‘한계짓고’limiter, ‘내적인 공명’이 생겨나게끔 해야만 한다고 시몽동은 말한다. 점토의 내부에서 서로 다투듯이 경합하고 있는 에너지를 평형상태로 변환시키는 것처럼 ‘경계’limite를 수립하는 것이 주형의 역할이다. 바꿔 말하면, 형상이란 질료의 수준을 변환시키는 것이며, 그 수준 변환 자체가 개체화라고 불리는 것이다.

따라서 개체의 성립을 질료와 형상이라는 두 항의 결합으로 간주하는 대신, 에너지적 조건과 위상학적 조건의 교환으로 생각해야만 한다. 전통적으로 질료라고 불리는 것은 에너지적 조건이다. 그것은 여러 힘들이 서로 다투는 과잉의 상태로서, 잠재적으로 개체의 생성을 준비한다. 그에 반하여 형상이란 질료에 의한 형상의 선취를 재차 받아들여 에너지를 현재화시키고, 거기에 일반적인 평형상태를 성립시키는 ‘위상학적 경계’이다. 그 경계는 질료를 어떤 틀에 주입하는 것이 아니라 그 잠재적 에너지를 ‘변조’시킨다.8) 질료와 형상간의 차원을 변조하는 것이 개체화의 작용인 것이다.



준안정적인 시스템과 그 ‘경계’

시몽동에 따르면 질료형상론을 비롯하여 여태까지의 사유가 개체화의 작용을 충분히 사고할 수 없었던 것은 평형상태를 사고하려고 할 때조차도 ‘준안정’métastable이라는 개념을 결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준안정’이란 에너지 확립이 이미 일정한 한계를 넘어서고 있는데도 겨우겨우 이전의 평형을 유지하고 있는 과포화 상태를 말한다. 종래의 사유는 안정과 불안정, 평형과 비평형을 양자택일적으로 사고해 왔기 때문에 개체화의 작용을 포착하기 힘들었던 것이다.

이것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질료형상론과 타협했던 벽돌의 예가 아니라, 역시 들뢰즈가 자주 차용하고 있는 ‘결정화(結晶化)’의 예를 검토하는 편이 좋을 것이다. 결정이 처음으로 생겨나기 전의 용액은 에너지론적으로는 과포화상태, 즉 준안정상태에 있다. 하지만 결정의 생성은 이 에너지론적인 조건만으로는 불충분하며, 따라서 ‘핵’이 도입되어야만 한다. 이 최초의 불연속성의 도입이 기점(起點)이 되어 결정이라는 개체가 서서히 생겨나게 된다. 개체화는 개체와 그 매체의 끝없는 교환으로서 드러나게 된다.

따라서 결정이라는 개체의 생성은, 항상 그 ‘경계’에서 행해진다. 이것을 설명하기 위해 시몽동은 개체란 ‘유한한 존재’étre limité(IG, 91)이라고 말한다. ‘유한한 존재’란 내부에 잠재적 에너지를 갖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를 한정시켜 버리는 존재이다. 예를 들어 질료형상론에 따르면, 개체의 성립은 질료와 형상의 순간적인 마주침으로서 설명되며, 질료는 형상 속에 밀어넣어져 버린다.

이에 반하여 ‘한계지어진 존재’로서의 개체화의 작용에는 원리적으로 끝이 없다.9) 예를 들어 결정의 무제한적인 성장에 있어서는, 생성의 결과가 다음 생성의 핵으로 된다. 이것은 중계relay처럼 연결되어 있고, 더욱 더 많은 양의 부정형적인 에너지를 동화시켜 간다. 이처럼 개체의 내부와 외부의 경계는 이른바 ‘구성적’이고 ‘능동적’인 관계 자체이다. 그것은 외부를 한없이 개체화하는 동시에 그 부분적인 성과로서 내부를 점점 더 복잡화하게 된다. 개체란 연속적인 에너지론적인 조건(용액)과 불연속에서 생성하는 시스템(결정)의 무한한 교환의 장인 것이다.10)

이것을 시몽동은, 개체는 ‘그 자체의 경계에서 구성되며, 그 자체의 경계에서 존재한다’고 표현한다. 개체는 ‘질료’와 ‘형상’이라는 두 항의 결합으로 설명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양자의 경계가 우선 능동적으로 작동하고 있고, 개체는 그 작동의 매개자 역할을 담당한다. 개체화란 경계의 활동 자체인 것이다.

이것을 다른 각도에서 생각해 보면, 개체화란 단독적인 개체의 성립이 아니라, 오히려 개체와 그 ‘환경’의 짝짓기couple의 성립이다. 이러한 환경을 시몽동은 ‘연합환경’11)이라고 부른다. 연합환경이란 어떤 개체가 성립할 때, 동시에 그 개체에 포함되어 있는 전개체적인 분야인 것이다.

이 전개체적인 분야는, 한편으로는 개체화의 조건 자체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개체에 선행하여 미리 주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개체에 의해 발명되어야만 하는 것이다. 따라서 양자의 관계는 순환적이지만, 바로 이러한 자기순환을 매개로 개체는 자신의 환경을 갱신하고 외부와의 새로운 관계를 창설한다. 개체의 그 자신에 대한 관계가 동시에 새로운 외부와의 관계로 되는 것이다.

따라서 개체화의 작용이란, 개체가 자신의 조건이나 규범을 스스로 창출하는 것과 같은, 자기매개적인 동시에 발명적인 작용으로 간주된다. 이것을 시몽동은 개체란 이러한 능동적인 관계의 ‘무대’에서도 ‘동작주(動作主)’이기도 하다고 표현한다.(IG, 60) 개체화의 작용이란 전개체적인 지평과 이미 개체화된 지평을 내적으로 매개하고 그리하여 개체화라는 ‘사건’을 일으키게 하는 작용인 것이다.



불균등성disparité의 근원성

결정(結晶)이란 준안정적인 시스템이다. 이 준안정적인 시스템의 특징에 관해 들뢰즈는 시몽동을 따라 두 가지 점을 강조한다. 첫 번째로는 ‘불균등성disparité’의 근원성이라는 문제이다. ‘불균등성disparité’, ‘불균등화disparation’, ‘불균등을 초래하는 것[계속되는 불일치, dispars]’라는 일련의 용어는 『차이와 반복』의 기본용어 중 하나이다.

시몽동에 따르면 개체화는 시스템 내의 ‘불균등성’을 실마리로 발동한다. 준안정적인 시스템은 적어도 두 개의 커다란 차원이나 수준 사이의 ‘불균등화’의 존재를 전제로 하며, 이것이 개체화의 동력이 된다. 이 ‘불균등화’를 들뢰즈는 ‘그 자체에 있어서 차이’[즉자적 차이, différence en soi]라고 다시 취급한다. ‘그 자체에 있어서 차이’란 시스템이 품고 있는 잠재적 에너지라는 것, 정확하게 말하면 잠재력의 내적인 차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주지하다시피, 들뢰즈는 이 ‘즉자적 차이’를 ‘내포량’ 개념과 관련짓는다.

아주 단순한 예를 들어 보자. 들뢰즈가 『차이와 반복』의 5장에서 시몽동 등을 의식하면서 자세히 논하고 있는 ‘심화’profondeur의 예. 원래 ‘불균등성’이라는 시몽동의 용어 자체는 이른바 ‘심원한 지각’이라는 심리학적인 문제와 관련되어 있다.(IG, 221, n. 30) 가령 좌우의 눈에 비친 부조화의 망막상이 통합되어 부조relief가 입체적으로 지각되는 예를 생각하면 좋을 것이다. 심화란 지각 영역의 불균등성이 해소될 때 보여지는 것이다.

고전적으로는, 심화된 지각은 대상과의 ‘거리’, 그 외관상의 크기, 좌우의 눈에서 본 각도의 차이, 지각 분야의 질감의 차이로부터 ‘설명’된다. 하지만 들뢰즈에 따르면 그러한 설명에서는 ‘심화’가 연장으로 환원되어 버린다.

이것에 대해 들뢰즈는 일찍이 메를로-퐁티가 『눈과 정신』에서 강조하고 있듯이, 심화를 연장과는 근본적으로 이질적인, 첫 번째 차원이라고 생각한다. 그것은 세 번째 차원이 아니라 오히려 ‘연장의 매트릭스[matrix, 모체(母體)]’이며, 이로부터 연장이 출현하는 궁극적인 차원이다.

이미 메를로-퐁티가 몇 번이나 강조했듯이, 우리들이 멀어지기도 하고 가까워지기도 하는 사물을 지각할 때, 그 사물은 일정한 크기로 지각되지만, 그때 우리들은 ‘외관상의 크기’의 변화 등으로부터 거리의 변화를 계측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우선 깊이와 두께를 지닌 공간이 있고, 거기에서 사물은 측량가능한 ‘외관상의 크기’를 초월한 ‘절대적인 크기’로 우리 앞에 다가오거나 멀어지기도 한다. ‘거리’나 ‘크기’는 그 추상적인 요소에 불과하다. 메를로-퐁티에게 있어서 세잔이야말로 이러한 ‘절대적인 크기’의 캔버스에서의 공존을 그린 화가였다는 것은 잘 알려져 있다.

마찬가지로 들뢰즈는 깊이는 외관상의 크기로부터 계산될 수 있는 대상과의 ‘거리’로부터 판단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우선 깊이 자체가 내부에 여러 가지 ‘거리’를 포함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접혀진’(impliqué) 거리가 ‘외관상의 크기’로서 펼쳐지기도(expliqué) 하며, 공간의 ‘질’로서 지각되기도 하며, 연장으로서 전개된다고 들뢰즈는 생각하는 것이다.(DR, 297/346)

깊이의 공간이란 이러한 여러 가지 거리나 관점이 경합하고 ‘불균등한disparité’ 장이다. 이 상호간에 불균등한 것이 내적으로 공명하며, ‘연장’으로서 스스로를 펼치게 될 때, 어떤 하나의 깊이가 지각된다. 이런 의미에서는 불균등이란 ‘출현’의 감추어진 조건이다.


“우리들이 <불균등>이라고 부르는 것은 무한하게 이중화하고 무한하게 공명하는 차이의 상태이다. 불균등성, 즉 차이 또는 내포성=강도(내포성=강도의 차이)는 현상의 충족이유이며, 출현하는 것의 조건이다.”(DR, 287/334)


불균등이라는 내포성은 ‘출현하는 것의 조건’이다. 하지만 그것 자체는 경험적으로는 확실하게 지각될 수 없다. 그것은 스스로를 감추면서도 출현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다. 들뢰즈는 이것을 깊이란 ‘지각될 수 없는 것’이지만 ‘지각될 수밖에 없는 것’이라고 표현한다. 그것 자체는 결코 그것으로서는 나타나지 않지만, 우리들은 지각을 통해서만 깊이를 접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깊이나 내포량은 ‘감성에 고유한 한계’(DR, 305/354-355)를 형성한다. 이 ‘감성의 한계’가 어떠한 ‘초월론적인’ 의미를 지니는가는 7절에서 검토하게 될 것인데, 그 전에 준안정적인 시스템의 두 번째 특징을 설명해야만 할 것이다.




전개체적인 특이성

준안정적인 시스템의 두 번째 특징은 전개체적이면서도 특이성을 갖추고 있다는 것이다. 개체적이지는 않으나 특이하다는 것, 이것이 전개체적인 존재이다.

시몽동에 따르면 이 ‘전개체적인 특이성’은 준안정적인 시스템의 내적 변환과 관련된다. 원래 잠재적 에너지라는 것은 실체로서 선재(先在)하는 카오스가 아니다. 그것이 준안정적인 시스템에 있어서 현재화하는 것은 시스템 전체의 수준이 불연속적으로 변화하는 임계점에 있어서만 그럴 뿐이다.

바꿔 말하면, 잠재적 에너지의 ‘현재화’라는 사건은, 그것이 시스템의 어떤 특이한 점에 있어서 국지화localise되는 것과 동시적이다. ‘개체는 특이성으로부터 출현한다.’(IG, 60) 따라서 진정한 개체화의 원리는 ‘지금 여기’에 있어서의 특이성 자체인 것이다.

동일한 것을 ‘전개체적인 것’의 관점에서 보게 되면, 개체란 전개체적인 것이 이중화하며, 이것에 대한 비틀기를 산출하며, 이른바 자기 자신을 내부로 말려들게 함으로써 자기 자신을 변용시키는 특이한 매개적 장에 다름 아니다. 개체화라는 ‘사건’이 산출하는 불연속성은 시스템 내부의 균열을 낳을 뿐만 아니라 동시에 그 이면인 전개체적인 것을 현재화시키며 시스템 전체를 변환시키기 때문이다. 개체화란 시스템의 ‘내적 차이’를 전개체적인 지평으로 매개하는 작용인 것이다. 따라서 전개체적인 지평은 항상 특이성과 결합되어서만 나타난다. 이것이 ‘전개체적인 특이성’이라고 불리는 것이리라.

이것을 받아들여 들뢰즈는 여러 곳에서, 잠재적인 것은 ‘차이화=미분화(différentié)이지만, 이화=분화(différencié)하는 것’(DR, 276/323)이라는 명제를 반복한다. 베르그송의 독해에서 말해진, 이처럼 잘 알려진 명제에 관해 여기에서 깊게 파고들어갈 필요는 없을 것이다.12)

그 대신 강조해 두고 싶은 것은 들뢰즈의 잠재적인 것의 사유에서는 전개체적인 것의 존재론적 탐구와 시스템론적인 발상이 교차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미 지적했듯이, 전개체적인 것은 실체로서 선재하는 것이 아니라 시스템의 변환과의 관계에서만 특이성으로서 현재화한다.

거기에서는 이 ‘전개체적인 것’에 어떠한 위치를 부여하면 좋을까? 여기에서 시몽동이 도입하고 『차이와 반복』이나 『의미의 논리』의 들뢰즈가 자신의 것으로서 상세하게 전개하는 것이 ‘문제적인 것’이라는 개념이다.


문제적인 것problomatique과 기호

들뢰즈에 따르면 ‘문제적인 것’이란 인식이 중단된 상태에서도 그저 주관적인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이념의 고유한 대상’이자 객관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말한다.13) 이 절에서는 이것의 의미를 탐구하고자 한다.

시몽동에게 이 개념이 도입된 것은, 예를 들어 생물이 외부 세계의 갖가지 문제에 직면할 때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자기 자신의 신체를 통합과 분화를 반복하면서 행동을 변용시켜 나가는 과정을 기술하기 위해서이다. 시몽동에 따르면 이것은 ‘적응’이나 ‘학습’으로는 설명하기 힘들다. 오히려 그것은 외부 세계와의 관계에서 생겨나는 ‘불균등성disparité’을 출발점으로 하여 생물이 불균등성을 해결하는 새로운 수준을 창설하고 내부와 외부에 ‘내적인 공명’을 수립하려는 과정으로 생각되어만 한다. 이것은 적응이나 학습이 아니라 ‘삶이라는 구조적인 개체화에 참가하는 것’(IG, 207)이다. 개체화 자체가 생물의 신체나 행동의 통치와 분화를 기반으로 하고 있는 것이지 그 역은 아니다. 오히려 개체화란 통합과 분화가 동시에 행해지는 역접적인 작용이다.

여기에서 시몽동이 배격하는 것은, 예를 들어 게슈탈트 심리학의 ‘좋은 형태’라는 개념이 전제하는 긴장 완화에 의한 평형상태의 확립이라는 모델이다. 개체화 과정에서는 긴장이 결코 해소되지 않으며, ‘불균등’은 결코 ‘종합’되지 않는다.

깊이 있는 지각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좌우의 망막상의 ‘불균등’은 지각에 대한 문제제기이다. 깊은 지각의 성립은 이러한 좌우 망막상의 ‘종합’이 아니라 양자가 상호 계속 어긋나면서 내적으로 공명하는 새로운 준안정적인 시스템의 창설에 다름 아니다.(IG, 203-9) 마찬가지로 생물의 발달과정에서도 불균등이나 긴장은 해소되지 않고 오히려 새로운 행동이 가능한 긴장의 시스템을 발명하게끔 동기를 부여한다.14) 이런 의미에서 ‘문제적인 것’은 주체적인 정지상태가 아니라 개체화의 ‘객관적인’ 조건이다.

더 중요한 것은 이 ‘문제적인 것’이 ‘객관적인 의미’의 출현과 관계를 맺고 있다는 것이다. 문제적인 것의 개념은 새로운 의미의 이론을 요구한다.

시몽동에게 ‘의미’의 문제는 당시의 사이버네틱스의 정보이론을 채용하여 고찰되었다. 오늘날 이것을 자세히 검토할 필요는 없지만, 여기에서도 시몽동은 ‘불균등’의 개념을 중심에 놓고 있다는 것에 주의를 해야 할 것이다. 이 경우 불균등이란 예를 들어 신호를 기계로 수신할 때, 보내진 신호와 수신기에 이미 포함된 형식(=형상)과의 불균등이다. 정보란 서로 불균등한 두 개의 요소 사이에 커뮤니케이션을 수립하는 특이성이다. 주형과 점토의 예를 들어 말하자면, 주형을 갖춘 형상과 점토의 분자가 어긋난 결과, 최종적으로 어떤 모습으로 생성할 때, 거기에 정보가 개입한다. 또한 깊이 있는 지각의 예를 들어 말하자면, 좌우 망막상의 불균등의 해결로서, 어떤 깊이의 지각이라는 정보가 지각 공간의 의미로서 확정된다.

따라서 정보란 특이성 자체이며, 이미 주어진 것이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시스템의 변환을 보증하는 것으로서, 시스템 내의 이질적이고 과잉된 요소로서 나타난다. 또한 그것은 ‘관계적’인 것이기도 하며, 시스템 내의 계열들의 ‘사이’에서 출현하며, 그 사이에는 ‘내적인 공명’을 수립하여 시스템을 재조직함으로써 ‘의미’로서 고정화되는 것이다.

그런데 들뢰즈가 ‘기호’라고 부르는 것은 확실히 시몽동의 의미의 이론의 연장선상에서 도입된다. 그것은 시스템 내의 계열 간에 ‘내적인 공명’을 수립하는 것인 동시에, 전개체적인 것이 특이한 장에 있어서 현재화할 때에 일어나는 ‘섬광’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모든 현상은 ‘신호=기호’의 시스템에 있어서 번득인다. 우리들이 신호라고 부르는 것은 적어도 두 가지 이질적인 계열, 커뮤니케이션 가능한 두 가지 불균등한 차원에 의해 구성되며, 치장되는 시스템이다. 현상이란 하나의 기호의 것, 즉 불균등한 것의 커뮤니케이션 덕분에 시스템에 있어서 번득이는 것이다.”(DR, 286/333)


‘기호’란 관계적인 것으로서 현상하는 특이성이다. 그것은 상호 이질적인 계열 간의 커뮤니케이션의 설립인 동시에, 전개체적인 것이 섬광처럼 반짝이고 나서 꺼져간다는 ‘사건’의 기호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전개체적인 것은 특이성을 기호로서 발신함으로써 시스템을 변환한다.


바닥-없음(sans-fond)과 추상적인 선

들뢰즈는 지금까지의 서술에서, 기본적으로 시몽동의 개체화론을 뒤따르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렇지만 그는 시몽동 이상으로 불균등의 작용의 존재론적인 근원성을 강조하며, 그것을 ‘개체화 과정과 동시적인’ ‘초월론적 원리’로까지 끌어올린다.(DR, 56/72) 그것은 개체화의 작용을 모든 ‘유사’나 ‘유비’로부터 분리하여 “모든 것이 불균등에 토대를 둔 세계, 모든 것이 무한으로 울려 퍼지는 여러 차이의 차이에 토대를 둔 세계”(DR, 311/361)를 해방하기 때문일 것이다. 이러한 관점은 인간학적 관점으로 기운 시몽동의 사상에는 부재하다.

이것을 확인하기 위해서 깊이 있는 지각의 예로 돌아가자. 내포량으로서의 깊이란 ‘지각될 수 없는 것’임과 동시에 ‘지각될 수밖에 없는 것’이며, 감성에 고유한 ‘한계’를 형성하는 현상의 근거였다. 들뢰즈는 이 경험적으로는 볼 수 없는 한계를 ‘볼 수 있게’ 함으로써, ‘감각될 수 있는 것의 존재’에 다가서고자 한다.

그 때문에 필요한 것은 이 ‘한계’로서의 ‘내포량’을, 이른바 그 장소에서 직접 파악하는 초월론적 관점을 획득하는 것이다. 이 때 ‘경험론’은 ‘초월론적이 된다.’ 여기에서 도입되는 것이 유명한 ‘초월론적 경험론’이라고 불리는 것인데, 이것은 하나의 입장이라기보다는 불균형으로 촉진된 사유의 운동으로서 생겨나는 것이라는 것에 주의를 해야만 한다. 경험론은 이른바 그 현장에 있어서 초월론적인 것으로 생성한다.


“감각될 수밖에 없는 것, 감각될 수 있는 것의 존재 자체, 즉 차이, 포텐셜이라는 차이, 질적으로 잡다한 것의 이유로서의 내포량=강도라는 차이, 이것을 우리들이 감각될 수 있는 것 속에서 직접 파악할 때, 분명히 경험론은 초월론적으로 되며, 감성론은 필연-당연한 학문 분야가 된다. 현상이 번뜩이고, 기호로서 전개되는 것은 … 확실히 차이에 있어서이다.”(DR, 80/99-100)


경험론이 초월론적인 것으로 될 때, ‘깊이’ 자체가 ‘그것 자체로서 전개한다’(DR, 367/425)고 들뢰즈는 말한다. 한편으로는 깊이는 단순히 ‘연장’의 배후에 있고 ‘출현’을 가능하게 한 감추어진 원리였다. 하지만 그것이 ‘그것 자체로서 전개’할 때, 그것은 모든 개체성을 해체해 버릴 것이다. 그것은 더 이상 ‘바탕’(fond)이 아니라 ‘바탕-없음’(sans-fond)으로서 나타난다.

‘바탕-없음’이 그것 자체로서 전개할 때, 그것은 결코 ‘형상’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이미 개체화하는 것 사이에 미끄러져 들어가며, 우리들의 지각 시스템을 파괴한다. “그것은 거기에 있으며, 우리들을 응시하지만, 눈을 갖고 있지 않다.”(DR, 197/236)고 들뢰즈는 말한다.

이러한 맥락에서의 ‘초월론적 원리’는 더 이상 단순히 ‘출현하는 것의 조건’일 뿐만 아니라, 동시에 ‘조형적이며 아나키적이며, 노마드적인 원리’(DR, 56/72)로 된다. 그것은 개체화를 가능하게 함과 동시에 파괴한다. ‘바탕-없음’이 전개될 때, 그것은 질료와 형상이라는 가면을 쓰면서 모든 수준을 횡단하여 그것을 결합시키면서 재편성한다.

그 때 ‘불균형’이라는 ‘그것 자신에게 있어서의 차이’는 ‘감성의 한계’일 뿐만 아니라 우리들에게 감각해야만 할 것을 부여하며 과거 자체의 기억을 불러일으키며, 더욱이 사고를 폭력적으로 강제하는 원리가 된다. 바로 그렇기에 특이성 자체로서의 ‘정보’는 우리들에게 무한한 해석을 재촉하면서 항상 스스로를 변용시켜 가는 ‘기호’로 바뀐다.

이것은 중대한 귀결점을 포함하고 있다. 앞의 논의에서는 개체화는 어디까지나 질료와 형상 사이, 또는 상이한 수준이나 계열 사이에서 작동하는 것으로서 기술되어 왔다. 마치 일반적이고 형식적인 개체화의 분야 일반이, 여러 가지 수준이나 종에서 작동하고 있는 듯이 기술될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논의는 수준 사이의 계층구조를 암묵적으로 전제하고 있다. 그렇지 않아도 ‘전개체적인 것’에서 ‘개체적인 것’을 경유하여 ‘초개체적인 것’에 이르는, 새로운 계층구조를 날조해 버릴 위험을 품고 있다.15)

하지만 오늘날 ‘바탕-없음’이 그것으로서 전개할 때, ‘초월론적 원리’는 여러 가지 수준에서 개체화의 작용을 행하는 것만이 아니다. 이제 여러 가지 수준에서의 개체화의 작용 등은 메아리처럼 서로 번갈아가며 부르며, 모든 수준을 관통하는 하나의 ‘사건’(Evénement)으로 수렴한다.16) 그 때 ‘초월론적 원리’는 단순히 수준의 ‘사이’에서 작동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거기에서 그 때마다 ‘전체적이고 전체화하는 것’(totale et totalisant)으로 된다.

마찬가지로 ‘특이성’이나 ‘문제적인 것’도 그 의미를 변용시킨다. ‘바탕-없음’이 그 자체로서 전개할 때, ‘문제적인 것’은 단순히 특이성이나 그 계열 사이에 ‘내적인 공명’을 촉진시키는 것일 뿐만 아니다. 각각의 특이성의 계열은 다른 특이성의 계열에 있어서 ‘반복’되며, 각각이 ‘상호 간 응축된다.’

이리하여 ‘그것 자체에 있어서의 차이’는 들뢰즈의 다른 하나의 테마인 ‘반복’과 접속한다.


“반복이란 무수한 특이성을, 항상 반향 속으로, 공명 속으로 투척하는 것이다. 이 반향, 이 공명에 있어서 각각의 특이성은 서로 다른 분신이 된다.”(DR, 257/304-305)


이 ‘반향’에 있어서 ‘특이성’은 더 이상 하나의 ‘문제적인 것’으로 분배되는 것이 아니라 ‘물음’(question)에 있어서 공존한다. ‘물음’이란 유일한 사건에 있어서 갖가지 문제 속에 어떤 것을 배분하는 ‘존재론적인’ 것이며, 항상 새로운 문제화의 분야를 창출하는 것이다.

이리하여 들뢰즈는 확실히 ‘반복’의 테마를 도입함으로써 ‘깊이’를 ‘바탕-없음’에, ‘정보’를 ‘기호’에, ‘문제’를 ‘물음’에 접속한다. 그리하여 그는 시몽동의 ‘휴머니즘’에 잔존해 있는 계층론적인 발상마저 내던지고, “일체가 불균형에 토대를 둔 세계”를 구상하게 된다.17)

앞의 물음으로 돌아가 보자. “주체 이후에 누가 올 것인가?” ― 들뢰즈가 ‘표상 = 재현전화’라고 부른 전통적인 주체(‘보편성’과 ‘개체성’)는 이 ‘바탕-없음’을 단순히 ‘차이 없는 보편’, ‘차이 없는 암흑의 문턱’으로 간주하고자 한다. 그리고 이 ‘바탕-없음’의 ‘공포와 매력’을 통제하기 위해서 ‘나’라는 형상과 ‘자아’라는 질료에 개체화의 작용을 얽어매고자 한다. 이리하여 ‘인칭적 개체성’과 ‘개체적 특이성’이 필요하게 된다.(DR, 354/411)

“주체 이후에 무엇이 올 것인가?” ― 이 물음에 들뢰즈가 ‘비인칭적 개체화’와 ‘전개체적인 특이성’이라고 답할 때, 그가 목표로 한 것은 ‘자기를 다수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나를 약하게 하는’ 것도 아니라, ‘더 이상 자기도 나도 없는 별종의 영역’에 이르는 것이다. 거기에 있어서 ‘개체화의 카오스적인 지배가 시작된다.’(DR, 332/385) ‘자기’와 ‘나’란 개체화에 의해서, 그리고 개체화에 있어서 그때마다 새로운 ‘개체화하는 요인factor’(아나키적인 초월론적 원리)으로 넘어가야만 한다.

사유는 이 ‘바탕-없음’에 어떻게 대처하면 좋을까? 질료형상론의 비판의 철저화의 끝에서 들뢰즈가 발견한 것은 ‘추상적인 선’이라고 불리는 것이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질료와 형상의 커플couple은 한정의 메커니즘을 기술하기에는 대체로 불충분하다. … 형상, 질료와 그 결합의 충족이유로서 힘과 토대의 상보성을 끄집어내는 것은 이미 하나의 진보이다. 하지만 더욱이 깊이 놀라야 할 것은 추상적인 선과 바탕-없음의 커플이다. 바탕-없음은 질료를 해소하고, 살이 붙은 형상을 해체한다. 사유는 순수한 한정으로서, 추상적인 선으로서, 이 비한정적인 ‘바탕-없음’에 직면하야만 한다.”(DR, 353/409)


‘바탕-없음’에 직면한 ‘추상적인 선’이 왜 ‘선’이라 불리는가는 확실하지 않지만, 이것은 ‘능동적인 경계’(시몽동)가 ‘조형적이고 아나키적이며, 노마드적인 원리’로 변화했다는 것이 어쩌면 확실할 것이다. 들뢰즈는 이후 이 ‘추상적인 선’을 여러 가지로 변용시키는데, 예를 들어 『푸코』론에서는 권력에 선행하고 그것을 변동시키는 ‘저항의 선’이나 ‘야생의 특이성’으로서의 ‘생명의 선’ 등에 관해서 말하게 된다.18)


마치며 ― 들뢰즈의 기술론을 향하여

지금까지 들뢰즈의 시몽동의 개체론의 해석을 검토함으로서 명백하게 된 것은 들뢰즈가 시몽동의 ‘전개체적인 특이성’의 현재화로서의 ‘개체화의 작용’이라는 사고방식을 기본적으로 이어받으면서 개체화를 가능하게 한 초월론적 원리를 해방시키기 위해서 니체=클로소프스키적인 ‘반복’의 사고에 접속시킨다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서 오늘날 우리들이 물어야만 할 것은 이러한 방향만이 유일하게 해방적인 방향인가 하는 것이다. 들뢰즈의 시몽동 독해의 최대 특징은 그 개체론에서도 이미 명백하게 읽혀질 수 있었던 기술론적 측면을 어쩌면 의도적으로 사상시켜버리고 있다는 것일 것이다. 이미 1958년에 출판되었던 『기술적 대상의 존재 양태에 관하여』는 내가 아는 한 초기 들뢰즈의 작품에서는 전혀 언급되지 않았다. 그것이 언급 된것은 1980년의 『천개의 고원』의 「유목론 ― 전쟁 기계론」에서이다. 하지만 시몽동의 이 저작은 ‘개체화의 작용’의 문제를 ‘기술성’의 문제로서 구체적으로 재파악한 것이며 개체화론과는 표리일체를 이루고 있다.

그렇다면 사유에서 폭력적으로 작동되는 ‘차이’나 ‘기호’의 문제는 이른바 사유의 ‘근원적인 기술성’이라고도 말해야 할 문제로 들뢰즈를 이끌어 가는 것이다.19) 하지만 들뢰즈의 초기 조작에서는 기술성의 문제가 클로소프스키적인 ‘시뮬라크르’의 개념하에 감추어져 버린다. 그리고 ‘아나키적인 초월론적 원리’의 해방의 방향은 기술보다는 오히려 협의의 예술작품이나 병리학적인 것으로 수렴되어 간다고 생각한다.(DR, 371-6/430-4)

들뢰즈의 개체화론이 기술론으로서 전개되기 위해서는 『기계적 무의식』의 저자 가타리와의 마주침을 기다려야만 했기 때문일까?20) 시뮬라크르 개념의 폐기는 여기에 있어서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이러한 관점에서 우리들이 씨름해야만 하는 것은 초기 들뢰즈의 개체화론(및 시몽동에 대한 거리)의 연장선상에서 들뢰즈적인 기술론을 구상해 보는 것일 게다. 사유에서 폭력적으로 작동되는 ‘그 자신에 있어서의 차이’를 기술성의 문제로 재파악하는 것, 그것은 어떤 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