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무공화국의 종언


우리는 언제부터 노예가 됐나

 

 

債務共和国の終焉 

 

 

이치다 요시히코오우지 겐타,

고이즈미 요시유키나가하라 유타카


2013년 9월 30일 초판발행



목차

1경제를 둘러싼 현재

1. 심리 전쟁이 된 경제

2. 경제적인 것의 <신체>

3. 금융-채무혁명

 

2. 세계공화국

1. 지속을 요구하는 공화국

2. 문화 좌파에서 공공성 좌파로

3. 유럽 공화국의 출현

4. 민주주의의 병과 공화주의

5. ‘새로운 인터내셔널이라는 유령

 

3렌트 자본주의

1. 렌트에 의한 생산의 침식

2. 렌트/스톡 원리론

(1) <()>, 렌트스톡

(2) 화폐순환

(3) 이윤의 재정의

3. 렌트에 의한 채무의 확대혹은 투자의 행방

4. 희소성을 둘러싼 역전과 파산관리의 소비에트

 

후기 이치다 요시히코

 

본문 속의 외국어 문헌 중 일본어 번역본이 있는 문헌에 관해서는 번역서의 쪽수를 주에 붙였으나 번역문은 적절하게 변경했다.


2. 세계공화국

5. ‘새로운 인터내셔널이라는 유령


* 데리다의 책 등의 원본 및 국역본을 대조하지 않았다. 일역본의 번역이다. 

이것은 사상적인 귀결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이 문제라면, 대답은 어떤 의미에서 처음부터 데리다 자신이 제시하기 때문이다.

 

그것[=새로운 인터내셔널]은 반시대적이고 신분규정이 없는 유대이며, 제목도 이름도 없는 유대이며, 설령 비합법은 아니라고 해도 힘겹게 공적인 유대이며, 계약도 없이, «out of joint»이며, 공동투쟁 조직도, 당파도, 조국도, 국민적 공동체도 (그것은 어떤 국민적 한정에도 선행하고, 그것을 통해서, 또한 넘어선 인터내셔널이다), 공통의 시민권도, 어떤 계급에 대한 공통의 소속도 없는 유대이다. 여기서 새로운 인터내셔널을 자처하는 것은, 제도 없는 동맹의 우정으로 다시 불러들이는[소환하는] 무엇인가이다.

 

새로운 인터내셔널에는, 조직도 규약도 프로그램(‘강령이라고 번역해야 할까)도 없이, ‘우정의 유대만 있다. 거기에 어떤 정치성이 있단 말인가라며 어이가 없어하고, 혹은 이 나이브함에 감동하여 책을 덮는 것은 쉽지만, 철학자 자신의 의도나 의식을 넘어선 곳으로, 여기에는 하나의 명확한 정치의식이 있다. , ‘간주권적’(인터내셔널 혹은 코스모폴리탄이라고 해야 할까) 지평에는, 정치가 아니라 윤리가 있다. 그곳은 탈구축 불가능한정의의 관념의 장소이며, 맑스주의의 정신을 결코 포기할 작정이 없는데리다에게 있어서는, 동시에 또한 해방을 목표로 하는 메시아적 긍정으로 임해야 할 장소인 것이다. 주권과 불가분한 한에서 자기면역적 과정으로 탈구축 가능했던 민주주의도, 주권과 주권 사이로 나오자 갑자기 도래할것으로 바뀌어 버리고, 탈구축을 옆으로 치워버린다. ‘우정의 윤리가 아니라 친구-’(칼 슈미트)리얼 폴리틱스이며, 윤리도 또한 정치일 것이라고 하는 이의는 이 깊은 구별 앞에서는 이의제기로서 성립하지 않는다. ‘친구-의 구별은 무엇을 정의라고 하는가의 논의의 틀 안에 수납 가능하며, 윤리나 정치의 관념은, 여기서는 탈구축 가능한가 여부의 구분에 적극적으로 환원 가능한 것이 정치, 불가능한 것이 윤리 된다. 윤리도 정치도, 이 환원에 종속한다. 우리가 정치가 아니라 윤리가 있다고 말할 때에도, 이 근본적인 구분을 존중하고 있다. 다만 이렇게 덧붙이자. 탈구축 가능한가 여부를 구별하는 것이 탈구축의 정치이며, 그 구별은 주권과 주권 사이, 그래서 실질적으로는 국내 정치와 국제정치의 구별과 겹친다. 이것은 국제정치에 관해서는 강한 정치적 함의를 가진 구분일 것이다. 그곳은, 혹은 그곳 도래할 민주주의의 장소로서 메시아[그 장소를] 내주는[비워주는] 것이다. “모든 교양체계나 모든 형이상학적-종교적 규정으로부터, 게다가 모든 메시아주의로부터도 자유롭게 되는 것이 시도되는 한에서의(강조는 원문) “메시아적인 긍정이다. ‘메시아타자로 바꿔 말하면, “타자를 그 타자성에 있어서 상호 존중하는민주주의에 대해서는 랑시에르의 다음 지적이 합당하다. “탈구축은 궁극적으로 신의 병사에 의한 군사 작전을 뒷받침하는 근본적인 타율의 법을 주장하거나, <타자>의 모든 -취적인 규정(identification)을 말소한다는 무한한 임무를 강조하거나, 둘 중 하나인 것이다.” “새로운 인터내셔널은 사상적으로는, “둘 중 하나를 선택한다/선택하지 않는다고 하는 양자택일에, 국제정치를 옴짝달싹 못하게 못 박아 둔다. 대항 국제정치는 그러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주지하듯이, “새로운 인터내셔널은 프랜시스 후쿠야마의 역사의 종언에 맞설 수 있도록 제창됐다. 이념으로서는 이제 자유민주주의만 있으면 되며, 나머지는 경험적으로 처리 가능하다고 하는 후쿠야마에 의한 진단과는 달리, “의회제 형식을 갖춘 자유민주주의가 전례 없이 전 세계에서 소수파이고 고립되어 있다고 하는 민주주의의 위기의 인식을, 데리다는 출발점으로 삼는다. 현시점의 일반성을 그러한 위기로서 규정한 후, 그는 마모의 너머의 마모의 묘사를 더욱 거무칙칙하게 하고”, 10개의 신세계 질서의 상처를 꺼낸다. 이것들을 인류 공통의 과제로서 담당하기 위해서 새로운 인터내셔널은 제창됐다. 이런 10개의 상처야말로 새로운 인터내셔널이 필요한, 메시아적이지 않은 세속적인 근거이다. 열거해보자.

실업. 그렇지만 전통적인 유형의 실업은 아니다. ‘새로운 시장이나 규제 완화가 초래하는 새로운 실업이며, “그 경험과 그 계산의 형태 그 자체에 있어서, 너무나 실업을 닮지 않았다.” 일본의 경험에 비춰보면, 비정규고용의 증대라고 바꿔 말하면 이해하기 쉽다. 간헐성의 고용 형태까지 거기에 집어넣어 세어야 할 실업이다.

노숙인. 거기에는 엄청난 숫자의 망명자, 무국적자, 이민도 또한 포함되며, 대체로 국경이나 국민적 혹은 시민적 정체성[동일성]의 새로운 경험을 고하고 있다.”

국가 간의 경제전쟁.’ 이 전쟁은 다른 전쟁을 필두로 하는 모두에게 지시를 하고 있다.”

자유시장모순을 제어할 수 없는 무능력.” “여러 가지 사회적 기득권을 지키라고 칭하면서, 세계시장에서의 자신의 이익을 어떻게 추구해야 하는가?” 임금수준과 사회보장을 둘러싼 기득권과, 대외시장에서의 자국제품의 경쟁력을, 어떻게 조정하느냐라는 문제일 것이다.

대외채무. 본서에 있어서는 일부러 여기에서 많은 말을 요구하는 문제는 아니지만, 데리다는 특히, 채무 문제가 인류의 상당 부분을 배제한다는 점을 강조한다.

무기산업과 무기무역, 게다가 마약거래.

핵 확산.

공동체, 국민국가, 주권, 국경, 땅과 피에 관한 고답적인archaïque 개념과 환상.” 이것들에 의해 인도되는 에스닉 사이의 항쟁.” 전지구화 현상에 수반되는 장소 해체의 과정에 대한 반동이다. 그러나 이 과정 자체는, ‘차연’, ‘-정위치화 déplacement’의 하나이며, 오히려 안정화의 적극적인 조건이라고 여겨진다.

거의 유령국가로 변하고 있는 마피아와 마약 카르텔. 이것들은 사회적-경제적 조직, 자본의 일반적 유통에 침입할 뿐 아니라, 국가적 제도들 및 국가간 제도들에도 침입하고 있다.”

국제법 및 그것에 관련된 국제제도의 한계. “보편성을 자칭하는 이 법은, 실행에 옮겨지는 경우, 특정한 몇 가지 국민국가에 의해 계속 지배되고 있다.”

이것들이 역사는 끝나지 않는 증거이며, ‘신세계 질서의 상처이다. 민주주의의 마모 너머의 마모를 나타내는 문제들이며, 현실의 사회주의가 끝나도 여전히, 맑스주의의 정신에 기초한 새로운 인터내셔널이 요청되는 근거이다.

이 중에서 무기에 대해서는, 2006년에, 117개국의 공동제안에 의해, ‘무기거래조약을 요구하는 결의안이 유엔총회에 제출되고(미국은 반대), 유엔에서의 논의가 시작되며, 20134월에, 조약안은 정식으로 채택됐다(미국도 찬성). ‘마약’()에 대해서는 이미 1990년에, “마약 및 향정신선 의약품의 부정거래 방지에 관한 국제연합조약이 발효되었다. 핵확산에 대해서는 1970년 이후, “핵확산금지조약이 발효되었으며, 조약 회원국과 유엔 산하의 국제원자력기구(IAEA)와의 협력 체제가, 이 지적하는 한계에 직면하면서도, 유일한 실효성 있는 장치로서 기능하고 있다. “국민적 또는 시민적 정체성[동일성]의 문제라고 총괄되는 에 대해서는, 유엔 난민 고등 판무관실(UNHCR)의 역할을 확대 강화함으로써 국제적으로 대처한다는 합의가 상당 정도로 완성됐다고 한다. UNHCR인간의 안전보장생활정체성의 안전이라고 덧붙이면 좋을 것이다 구상에 있어서 중심적 역할을 맡고 있다. 도 무엇보다 인터폴을 필두로 하는 국제기관이 관할-대처해야 할 문제로 여겨지고 있는 것이다. 나머지인 , , , EU, IMF, 세계은행, G20 등등의 경제를 둘러싼 국제기관(EU를 거기에 포함시켜 세어도 나쁜 이유는 없다), 이것도 이 지적하는 한계에 직면하면서 실제로 씨름하고 있는 문제들이며, 또한 그것들에 대한 간주권적인대처법은, 현실적으로는 그런 국제기관을 경유하지 않으면 실효성을 갖지 않는다. 일본에 관련해서는, TPP가 이 국제체제에 추가되려고 한다.

~새로운 인터내셔널의 근거라면, 새롭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와는 별개로, ‘인터내셔널은 충분히 실재하지 않았는가? 국제기관들의 전체는, 세부적인 신분규정계약얼마나 서로 정합성이 있는가와는 별개로 갖춘, 실재하는 공동투쟁조직이 아닐까? ‘새로운 인터내셔널은 이런 기존의 인터내셔널을 대신하기는커녕, 근거의 부터 그 한계를 돌파하기 위해 작업을 해야 할 것이다. “‘새로운 인터내셔널장기적인 전망에 섰을 때, 국제법, 국제법의 개념들, 국제법의 적용의 장소가 경험할 수 있는 깊은 변화를 가리키고 있다고 간주된다. ‘지시의 대상은 우선, 실제로 인터내셔널활약일 것이다. ~이 세계정치의 문제라면, ‘맑스주의의 정신, 마르크스의 유령들이전부터, 이후에는 훨씬, 대항노선은커녕 세계정치의 주류파 노선이 되고 있다고 말해야 한다. 데리다의 기준에 비춰보면, 우리는 모두, 상당히 이전부터, 사회주의자였던 셈이다. 그러나 범죄를 둘러싼 국제협력()맑스주의의 정신은 필요할까? 아니면 여기서는 스탈린의 비밀경찰이 참고되어야 할까?

게다가 원래, “자유민주주의가 전례 없이 전 세계에서 소수파이고 고립되어 있다라는 사실 인식은, 낮게 추산해도, “다수파이지만 제대로 기능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정도로 고쳐져야 할 것이다. 특히 아랍의 봄이후의 현재는. 1993년의 시점에서도, “소수파이며 고립됐다고 한다면, 후쿠야마설이 그 정도의 반향을 부를 수는 없었을 것임에 틀림없다. 데리다의 사실인식은, 거꾸로 선 역사의 종언설처럼 보인다. “마모 너머의 마모검붉게그리고 자유민주주의의 유토피아를 반전시키려고 하는데, 묘사되는 세계는, 후쿠야마라면, 역시 역사는 끝났다, 마르크스의 유령들이후의 역사가 다시금 그것을 증명했다, 이제 경험적으로만 맞으면 된다고 판단할 수 있는 정도에 희망의 거처를 나타내고 있는 것 같다.

우리에게 특히 흥미로운 것은 , , , 라는 경제문제이다. 데리다에게서는 이것도 정의의 문제이겠지만, 이미 봤듯이, 공화주의는 그것을 단순히 문제로서 지목하는 단계를 넘어서, ‘해결법을 제시했다. 공화주의의 자기그 자체라기보다는 오히려 해결법이라는 것이었다. ‘새로운 실업경제전쟁사회적 기득권과 대외시장에서의 자국 이익의 조정, 그리고 채무, ‘확장=성장에 의해서 어떻게든 할 수밖에 없다, 할 수 없으면 부담의 배분을 공공화할 수밖에 없는 문제라고, 공화주의는 경제학을 동원해서 주장했다. 탈구축의 정치가 그것들을 정의의 영역에 위치시키고, 언제든 정치적으로 탈구축되어 정당성 문제(‘주권’)로부터 구별하려고 하는 반면에, 공화주의는 정의와 정당성 둘 다를, ‘확장=성장부담의 연속선(그 이름이 이다)이 경계를 이루는 공공공간에 포섭하려고 한다. 악과 관련된 범죄뿐 아니라, ‘정체성에 관련된 까지도, 이른바 ‘2급시민의 자격문제로서 그 속에 흡수하려고 한다. 는 단적으로, 공화국의 바깥, 야만인들이 거주하는 세계의 문제일 것이다. 공화국은 그것을 정복해야 한다. , 공화주의에 있어서는, 모든 것이 공공공간의 구성-유지-확대 문제이며, 데리다가 인터내셔널의 본질적 임무로 삼은 국제문제는, 탈구축 불가능한 절대적 원리인 정의메시아적인 것에 의해서가 아니라, 어디까지나 세속적인 공화주의의 경험에 의해 처리되어야 할 것이다. 데리다는 이 세속주의를 참을 수 없는 것일까? 10개의 상처의 열거는, 국제문제를 경험의 영역으로부터 정의의 영역으로 이관시키라, ‘경제문제를 더 이상 경제문제로 보지 말라는 호소일까? 그렇다고 말할 수 없는 것은, 데리다는 다음과 같이 민주주의의 위기를 정의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미 제1차 세계대전 후, 유럽에서, res publica, 즉 공공공간과 여론의 토폴로지적 구조를 격변시켜온 기술적, 과학적, 경제적인 수많은 변화를 되짚어보자. 이것들의 변화는, 단순히 이 토폴로지적 구조에 작용을 미치는 것이 아니라, 토포그래픽한 것이 존재한다는 추정 그 자체, 그리고 발언, 공적인 사태 혹은 대의에 대해 하나의 장소가 있으며, 즉 규정(identification)할 수 있고 안정화할 수 있는 하나의 신체가 있다는 추정을 문제시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것이 자유주의적인, 의회제의, 자본주의적인 민주주의를, 흔히 말해지듯이, 위기에 빠뜨리고, 그 후 무수한 형태로 동맹하고 서로 싸우고 조합된 세 가지 전체주의로의 길을 연 것이다.

 

한나 아렌트를 방불케 하는, 공공공간의 흔들림, 변질, 소멸이 파시즘을 도래시켰다고 하는 인식이다. 하버마스도 완전히 동의할 것인, 공공공간의 불안정화=민주주의의 위기라는 도식이다. 이런 독일과 프랑스의 철학자의 하나 됨을 토대로, ‘간주권적영역만을 정의에 배정하는 것, 그 영역을 경험으로부터 떼어내는 것은 가능할까? 허용될까? 정의와 경험이 위기라는 토대를 공유할 때, 정의는 왜 자기면역성을 면한다고 말할 수 있는가? 민주주의와 공화주의는 데리다에게 있어서도 위기에 있어서 연결되어 있는데 (그래서 그는 공동문서에 서명하게 됐다) 구제의 방식은 각각 다르다고 주장하는 걸까? 무엇의 위기이든, ‘위기에는 어디까지나 메시아적인 긍정에 의해 임하고, 신의 약속의 실행을 기대할 수밖에 없다면, 랑시에르의 진단 신의 병사가 될 것인가 아니면 신의 대리인인 새로운 타자를 무한하게 찾아 나설 것인가 이 옳게 된다. 그렇지 않다면, 데리다는 정의경험, ‘도래할 민주주의의 자리를 어디선가 공화주의에 넘겨주고 있는 셈이다. 둘 중 무엇이 됐든, 혹은 둘 중 어떤 것인지를 결정할 수 없는 한에 있어서, 단적으로 편의주의[기회주의]일 것이다. ‘새로운 인터내셔널의 실천은, 세계공화국 엘리트들의 기관들을 응원하는 것, 공화국 시민의 자격을 위태롭게 한다고 간주되는 사람들의 목소리를 그들에게 닿게 하는 것이었는가? 오늘날의 공화국 새 시민들에게는, ‘부담을 나눈다고 하는 정의’-‘기다리고 있다는 것이다. ‘새로운 인터내셔널은 메시아의 강림을 기다리는 사람들의 우정의 유대가 되려고 욕구하고, 기나긴 공화주의의 경험을 일부러 유령으로 지어낸 것이다. 그러나 2011년의 하버마스를 필두로 한 현대의 낭만파는, 오늘날 이미, 그럴 필요는 없었다고 깨달았을 터이다. 현존하는 인터내셔널을 어떻게든 강화하면 되는 걸까? ‘상처의 치료에는 대학 속에 새로운 강좌를 만들 듯이, 유엔 산하의 특별조직을 만들면 좋을 것이다. ‘새로운 인터내셔널NPO로서, 그것에 협력하면 좋을 것이다. 유령은 속제로 회귀함으로써 유령이지만, 완전히 소생했을 때에는 새로운 신체corps를 손에 넣는다. 이것도 유령의 숙명일 것이다. ‘공공공간의 신체가 의문에 부쳐지더라도, 국제기관은 틀림없이 단체corps이다.

2011년의 그리스 위기가 폭로한 것은 이런 부담의 분담, ‘채무의 상환 문제가 되자, ‘간주권적이든 주권 내적이든 민주주의적 토의의 의제에 올려질 수 없다는 사태였다. 토의 과정에 올려지게 되면 위기의 폭발에 때늦지 않기 때문에, 공화주의의 차례가 됐다. 사태는 고전적이다. 전쟁의 결단을 민주주의에 맡길 수 있을까? “메시아적인 긍정은 결코 토론 과정에 올려져서는 안 되기 때문에, 국민투표의 회피는 정의의 입장에서 보면 좋은 것이 아니었을까? 현대에서는 이렇게 민주주의와 공화주의는 경합을 피하면서 서로 공존하고 있다. ‘채무에 의해, 그렇게 분절되어 있다. 데리다는 채무인류의 상당 부분을 배제하는정의 문제, ‘노숙인현상과 똑같은 시민의 자격 문제로 번역함으로써, 이 분절의 견본을 제공한 것이다. 그러나 우리에게서는 매우 의미가 크다고 생각되지만, 그는 이미 1980년대 말, 우정의 정치에서 정의을 구별 없이 논했다. 그래서 그 역자는, 책을 도래할 민주주의에서의 덕의 물음”(강조는 인용자)이라고 요약할 수 있었다. 세속의 동년배사이에 작용해야 할 과 메시아이든 이데아이든, 천상과의 관계에 있어서 인간이 [받들어] 모셔야 정의, 데리다에게 있어서는 처음부터 번역되었던 것이다.

 

Posted by 상겔스 상겔스

채무공화국의 종언


우리는 언제부터 노예가 됐나

 

 

債務共和国の終焉 

 

 

이치다 요시히코오우지 겐타,

고이즈미 요시유키나가하라 유타카


2013년 9월 30일 초판발행



목차

1경제를 둘러싼 현재

1. 심리 전쟁이 된 경제

2. 경제적인 것의 <신체>

3. 금융-채무혁명

 

2. 세계공화국

1. 지속을 요구하는 공화국

2. 문화 좌파에서 공공성 좌파로

3. 유럽 공화국의 출현

4. 민주주의의 병과 공화주의

5. ‘새로운 인터내셔널이라는 유령

 

3렌트 자본주의

1. 렌트에 의한 생산의 침식

2. 렌트/스톡 원리론

(1) <()>, 렌트스톡

(2) 화폐순환

(3) 이윤의 재정의

3. 렌트에 의한 채무의 확대혹은 투자의 행방

4. 희소성을 둘러싼 역전과 파산관리의 소비에트

 

후기 이치다 요시히코

 

본문 속의 외국어 문헌 중 일본어 번역본이 있는 문헌에 관해서는 번역서의 쪽수를 주에 붙였으나 번역문은 적절하게 변경했다.


2. 세계공화국

4. 민주주의의 병과 공화주의


민주주의의 존엄을 구하라!보다 약 8년 전에, 하버마스는 유럽을 둘러싼 또 다른 인상 깊은 정치문서를 발표했다. 인상 깊음의 절반은 그가 초고를 쓴 그 우리의 전후 부흥 : 유럽의 재생(20035)에서, 그와 오랜 논적이었던 자크 데리다가 공저자로서 이름을 올렸다는 점에 있지만(데리다가 초안 작성에 관여하지 않았던 이유는, 주로 건강문제에 있었던 것 같다), 오늘날의 눈에서 볼 때, 이 문서는 민주주의의 존엄을 구하라!와의 거리에 있어서야말로 인상 깊다. 정치 문서의 안목으로서의 상황적 주장을 비교했을 때, 정반대의 것을 호소하고 있다. 2011년의 문서에 관해서는 이미 봤던 대로이다. 국민투표가 타국의 정치가의 압력에 의해 중지됐고, 그리스인은 주권을 행사할 기회를 빼앗겼다. , EU의 상황은 주권의 존재를 위태롭게 한다. 그것이 민주주의의 위기다.

이에 대해 2003년의 문서는 주권이 EU를 재생이 필요할 정도로 빈사瀕死의 상태에 사로잡혔다는 진단을 기조로 하고 있다. 문제의 발단은 스페인의 총리가 독주하여 부시의 이라크 전쟁에 대한 지지와 가담을 공공연하게 표명하고, 내심 전쟁에 흥미를 가지고 기웃거리던정부들의 등을 떠밀고, ‘불량배불량배의 전쟁에 EU 전체를 끌어들인 데에 있다. 그 표명은 유럽의 공동 외교를 좌절에 몰아넣고, 매파 미국과 비둘기기파 유럽, 신적인 칼과 인도주의의 윤리적으로 허용하기 힘든 일련의 분업체제를 완성시켰다. 이라크의 (대량살상무기를 소유했을 거라던) 주권, 미국의 (전쟁 개시 결단을 내린) 주권, 스페인의 (누구에게 정의가 있는가, 누구를 퇴장시켜야 하는가를 선택하고 그것을 표명하는) 주권을 앞두고, “차이들을 승인하는 것, 타자를 그 타자성에 있어서 서로 승인하는 것정체성/동일성이라고 해야 하며, “유럽적 공공성은 패배했다. “국가폭력의 행사를 통제하기 위해서는, 전지구적 수준에서도, 주권의 행동 범위를 상호적으로 제한하는 것이 필요하다라는 “EU의 간주권적 통치원리는 일국의 총리의 배반 이것도 주권의 행사일 것이다 때문에 좌절한 것이다. 그래서 전후에 기대를 걸었던 재생의 호소이다.

데리다가 좀 더 살았더라면(2004년 사망), 이 대조contrast를 어떻게 평가했을까? 그가 서명한 2003년의 공동문서에서 민주주의라는 단어는 거의 무게를 갖지 않았으나, 차이나 타자성을 승인하는 것, 그리고 간주권적 통치를 이 문서의 민주주의개념으로 간주한다고 본다면(그렇게 봐도 나쁜 이유가 데리다에게 있을까), 그 대답은 생전의 저작에서 충분하게 추측하여 헤아릴 수 있다. 2002년의 불량배들이다. 거기서는 민주주의가 깊은 자기면역성의 병을 앓고 있다고 간주됐다(앞의 책, 3. 민주제의 타자, 대신하다 : 대체와 교체). 이를 테면, 민주주의는 자기 자신을 적으로 간주하고 공격하는 경향이 있다. 그것은 자기 파괴적, 자살적이다 등등. 예를 들어, 이슬람 원리주의 정당의 승리를 눈앞에 둔 선거과정을 군부가 정지시킨 알제리. 정지시키지 않으면, 알제리의 민주주의는 확실하게 하나의 끝을 맞이했을 것이다. 정지는 실제로 민주주의의 이름으로 행해졌다. 그러나 선거과정의 정지는 민주주의의 정지이다. 게다가 이라크. 불량국가를 쫓아내지 않으면 중동에 민주주의는 찾아오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 무력 공격을 받지도 않은 국가들이 하나의 주권국가에 선제공격을 가한 것은 주권국가 간의 민주주의에 반한다.

EU를 둘러싼 두 개의 정치문서를 염두에 두면서, 민주주의의 자기면역성을 패러프레이즈해보자. 주권자를 실정적으로 성립시키는 것은, 그 주권자가 누구든 민주주의이며, 데모스의 지배로서의 민주주의는 지고적인 지배권으로서의 주권의 존재를 전제로 해야만 하나의 통치 이념일 수 있다. , 주권이란 민주주의의 자기일 것이다. 그 주권이 민주주의의 타자가 되어 버린 사태를 두 개의 문서가 보여주는 대조contrast는 부각시키고 있다. 맨 먼저, 주권과의 일체성으로부터 우리를 주권적 공공성으로 조금 떼어낸 민주주의는 주권으로부터 공격을 받는다(2003). 그 다음으로, 자립적이고 자율적인 그 민주주의가, 바로 간주권적 공공성의 이름으로, 주권의 공격에 착수하는 것이다(2011). 하버마스적 어휘인 간주권적 통치나 그것에 일치하는 개념으로서 사용되는 공공성불량배들의 데리다는 이렇게 표현한다. “보편적인, 심지어 국민국가적 구조로부터 독립한 민주주의의 이런 세계정치적(=코스모폴리탄적인) 차원”(강조는 인용자). 두 사람의 어휘가 이렇게 상통한다고 상정해야만 2003년 문서에 데리다가 서명한 것을 납득할 수 있다(이 상통으로부터 무엇을 독해할 수 있는가는 나중에 보자). 아무튼 주권과 민주주의의 분리는 아무리 민주주의 개념을 주권 개념에 구속되지 않는 차이나 타자의 승인으로 확장하더라도 이는 자기자기의 분리에 다름 아니며, 그 확장 자체에 의해서 민주주의의 자기면역성을 높여버릴 것이다. ‘민주주의의 타자란 우선 민주주의의 자기라는 것을 주권으로부터의 민주주의의 해방은 깨닫게 해줄 것이다. 시민사회의 수세기 동안의 역사적 성숙과, 홀로코스트를 정점으로 하는 그 비참한 이면(裏面)이 가능케 하고 또 요구하기도 한 민주주의 개념의 확장, 주권을 넘어선 지평으로의 그 이동이, 민주주의에, 스스로 뿌리치고 달아났을 터인 과거의 제약, 이로부터 스스로를 해방했을 터인 뿌리를 썩게 하고, 스스로를 공동화(空洞化)시키는 것이다. 이런 상황을, 2011년의 문서는 비통한 외침 민주주의의 존엄을 구하자!” 에 의해 증언하고 있다. 불량배들의 논리는 이런 진단을 이 문서에 내린 내릴 수 있는 것이다.

랑시에르가 민주주의에 대한 증오에서 도마에 올린 베니 레비(목자의 살해)나 장-클로드 밀네르(민주주의적 유럽의 범죄적 경향), 혹은 앞 절에서 우리가 거론한 레지스 드브레 등의 논자들의 프랑스적 공화주의(주권주의적 공화주의)는 이런 민주주의의 자기면역성에 대한 바로 면역 반응일 수도 있다. ‘자기면역성을 참을 수가 없기 때문에 민주주의그 자체를 타자화해버리는 것이다. ‘공화국의 타자로 말이다. 그들은 전체주의자나 신권정치의 옹호자로 전향한 것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본질적인 민주주의자로서, 공공정신을 시들게 하고 사적 개인의 사회생활의 양식으로 전락한 민주주의의 현재를 증오하고 있다. 그리고 그 본질적인 민주주의에 공화주의의 이름을 준다는 공통성에 의해 하나의 사상 조류를 형성하고 있다. 토크빌 이후의 민주주의 비판을 프랑스 혁명의 옹호 요체는 프랑스의 과거와 현재의 옹호 와 공존시키는 특수한 프랑스적 이데올로기이다. 데리다에게 자기면역성은 분명히 민주주의의 결함 본성적 역설paradox 에 불과하지만, ‘불량배이라크를 처벌하고 쫓아내려고 하는 미국도 불량배라고 간주할 수 있는 근거를 제공하는 한에서, 역설은 자기파괴 경향뿐 아니라 재생의 계기도 포함했다. 두 사람의 불량배는 모두 민주주의의 자기라고 하는, 견딜 수 없는 현황 인식의 그 견딜 수 없음은 자기의 내부로부터만 나오는 것은 아닐 것이다. ‘자기의 내부에 있기 때문에, 전쟁은 그 자체가 윤리적으로 허용하기 힘든 분업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것도 또한 자기면역적 반응이며(타인의 전쟁이라면 방치해두면 된다, 어처구니없다고 한탄할 뿐이어도 된다), 바로 그것이 정의의 계기이라고 데리다는 자기를 완전히 타자화하여 문제를 어영부영 넘어가려고 하는 공화주의자들을 나무랐을 것이다.

여기에 이르러서, 우리가 이용했던 공화주의 개념의 특성을 세 가지 차이를 통해 더 명확하게 할 수 있다. 우선 프랑스 이데올로기로서의 공화주의는 국가주권과 민주주의의 괴리에 대한 거부에 의해 특징지을 수 있는데, 우리의 공화주의 개념에는 원래 공화국의 주권이 필요 없다. 그것은 이미 봤듯이, 군주에게도 귀족에게도 민중에게도 주권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에서부터 출발하는 체제의 개념이며, 주권이 아닌 현실권력 (real power) 사이의 차이, 경합, 모순을 집합체의 권력의 확장으로 변환하려고 한다. 이 점에서, 헌법에 주권 규정을 포함하지 않고서도, 원리적으로 얼마든지 State(=국가)를 연방에 환영하며 맞아들일 수 있는 미국은, 우리가 말하는 공화국의 한 가지 모델일 것이다. United States를 하나의 주권국가로 만드는 것은 국제관계’(하버마스의 간주권적지평)일 뿐이다. 공화국의 내적 구성에 주권은 필요 없으며, “자유의 구성 Constitutio Libertatis”으로서의 공화국 헌법은 사회계약이 아닌 개인 간 동맹이어도 전혀 상관이 없다. 국가 간 조약과 마찬가지로 간주권적인 맹약이며, 맹약에 의해 성립된 사회에 개인이 본질적으로는 아무것도 특히 주권은 넘겨주지 않는 특수한 사회계약 경제인(호모 에코노미쿠스)들의 사회설립계약 같은 이다. 아무튼 주권과는 다른 지평에 서서, 혹은 그 지평으로 나가려고 하는 정치적 의지에 있어서, 우리가 말하는 공화주의는 데리다-하버마스가 말하는 민주주의와 이념을 공유하고 있다.

이 공통성을 좀 더 뒤쫓아보자. 데리다가 말하는 민주주의의 자기면역성이란, 정체로서의 민주주의(의회제)를 특징짓는 것이라기보다는, 모든 정체의 밑바탕에 있으며, 특정한 현재의 정체(군주정, 귀족적, 민주정), 그것에 대한 면역 반응으로서/에 의해 유지시키는 메커니즘이다. 게다가 정체의 창설은, 그 자체가 민주주의의 자기면역적 과정의 일부를 이룰 것이다. 어떤 새로운 정체도, 민주주의의 자기인 주권자(국가 그 자체여도 신이어도 상관없다)의 이름에 의해, 현재의 정체에 의한 이 자기에 대한 공격에 맞선 방어=대항공격으로서 수립된다. 쿠데타조차도 근본적으로 정확하게는 근본에 있어서만 민주주의적이다. 이런 자기면역성이란, 우리의 용어법으로는, 세 정체 모두가 품고 있는 부패로의 경향이며, 또한 그 부패에 맞서는 이며, 정체의 순환을 출현시키는 정체 일반의, 혹은 정치라는 것의 본성적 위기에 다름없다. 자기면역성은 우리가 말하는 공화정체의 특성이기도 하다[주].

[주] 우정의 정치(1988-89년도의 데리다 세미나 기록을 정리한 저작. 鵜飼哲大西雅一郎松葉祥一 訳, みすず書房, 2003)에는 민주주의와 정체들의 관계에 대해 아리스토텔레스에 기초한 약간 뉘앙스가 다른 서술이 있다. 군주정, 귀족정, 민주정은 각각 부친적 관계, 남자와 아내의 관계, 형제 사이의 관계에서 유래한다는 것이다. 그런 한에서는, 세 개의 관계 사이에는, 파생은 성립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본래적으로 정치적’(이것은 많은 경우 민주제적이라고 번역된다)은 형제 사이의 관계이며, “정치적인 것 그 자체, 형제애, 민주주의, 이것들 사이에 있는 상호적 포함 관계, -속적 관계는, 거의 동어반복적=동일의 논리에 입각한 것이다(2, 九頁)라고 말한다. , ‘정치적인 것 그 자체는 민주주의적이며, 세 정체의 구별은 (근원적?) 민주주의에 선행한다고도 읽을 수 있다. 데리다에게서, 이윽고 형제 간의 관계에, ‘자기면역성이 발견될 수 있을까? 형제들의 유산상속을 둘러싼 혈육 간의 싸움 민주주의의 자기면역성일까

그러나 데리다에게 자기면역성은 결코 그 자체의 정체를 갖는 것이 아니다. ‘자기면역적 과정차연의 운동의 하나로 여겨지며, ‘도래할 민주주의가 결코 미래의 현재의 민주주의가 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 자체의 신체 corps’를 갖는 것이 아니다. ‘자기면역성은 항상 도래할것에 머무는 민주주의()바닥 그 자체이며, 정치에 있어서의 시간(‘시대’)과 공간(각 정체)의 차이를 산출하면서, 그 차이 속에 ()장소를 차지한다. 그렇다고 한다면, 우리로서는 이렇게 물을 수 있다. ()본질주의는, 근대에 있어서는 특히 마키아벨리가 정치 노선화한 현실의 공화주의를 무시하지 않을까? 또한 삼권분립의 사상조차 파악하지 못한 게 아닐까? 마키아벨리는 데리다 식으로 바꿔 말한다면, 세 정체 각각의 부패경향을 상호적으로 공격시키는 자기면역시스템으로 공화국을 구상한 것이다. 그것은 로마에서조차 자기파괴했듯이, ‘자기면역성의 병인 부패로부터 쾌유할 수는 없으나, 민주주의의 자기면역성이 재생의 계기를 간직하고 있었듯이, ‘부패에 맞서는 도 또한 갖추고 있으며(‘부패 부패에 다름 아니다), 그 혼합정체는 부패의 상호공격을 의 생산시스템으로 변환하려고 한다. 공화국의 확장으로 대체하려고 한다. 민주주의의 자기 면역 과정에 끝이 없듯이, 공화국은 지속한다. ‘도래할 민주주의가 결코 현실화되지 않듯이, 공화국의 확장에는 목적goal이 없으며, 확장의 지속 속에서만 부패를 능가한다. 목표goal가 없는 것은, 반드시 언젠가 우연의 앞을 가로막으며, 확장 과정을 어디선가 자기파괴 과정으로 반전시키기 때문이다. 아무튼 마키아벨리적 공화국은, 언젠가는 끝이 온다는 것을 받아들인, 뒤집어보면 도래할 민주주의가 도래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는, ‘자기파괴’-‘부패재생’-‘의 균형 시스템이다. 근대의 삼권분립은 그 후계였을 것이다.

즉 우리의 공화주의는 데리다의 민주주의도래할 민주주의자기면역 과정으로서의 민주주의 둘 다 와 달리, 정체로서 실재한다. 뭐랄까, 우리는 어디까지나 실재하는 시스템을 공화주의의 이름에 의해 규정(identification)했다. 이것이 두 번째 차이이다. 이 공화주의는 그러므로, 그 점에서는 우리와 마찬가지로, 데리다와 프랑스적 공화주의 둘 다에 대해 거리를 취하려고 하는 랑시에르의 제비뽑기노선과도 다르다. “아무나=누구든 좋은 누군가 le n’importe qui”가 정치를 담당하는, 이 플라톤에서 유래한 민주주의적 공화주의와도 다르다. 세 번째 차이이다. 플라톤은 그런 체제가 실현되면 자유와 존엄을 깨달은 말[]이나 당나귀가 길을 양보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부닥치게 된다고 하는 이유로 그것을 배척했다. 즉 플라톤에게 제비뽑기민주주의는 단적으로 정치 질서 랑시에르는 그것을 정치가 아니라 치안이라고 부르는데 의 부재이며, 랑시에르는 이 아나르시アナルシ=무질서를 하나의 긍정성으로 뒤집어버리고, 데리다의 도래할 민주주의와 비슷한, 결코 미래의 현재의 민주주의가 되지 않는 체제로 위치시킨다. 그러나 우리가 말하는 공화주의는 어디까지나, 역사상 거의 어디에서도 있으며 그리고 언제든 있는 n’importe où et n’importe quand 체제의 호칭이다. 랑시에르의 제비뽑기민주주의는 주권의 거처를 둘러싼 고찰 끝에 주권을 삭제하지도 않고 특정한 어딘가에 존속시키지도 않는, 더 정확하게는 주권의 존재와 부재를 균형 혹은 일치시키는 체제이며, 그 있을 수 없는 도래 가능성에 의해 도래할 민주주의의 일종이며, 또한 그 부정적 보편성, 보편적 부정성에 의해, 민주주의와 주권의 일치를 목표로 하는 프랑스적 공화주의의 일종 또는 극한(limit)를 형성한다. 프랑스적 공화주의가 일치의 순수한 긍정성=실정성을 추구하는 반면, 랑시에르의 공화주의는 똑같은 일치를, 데리다의 자기면역성과 마찬가지로, 바닥 없는 바닥에 두고 있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게다가 그것들에 대해, 우리가 말하는 공화주의, 이른바 그 평범함, 흔해빠진 착상에 있어서 강력한 사상이며, 주권 개념이 데리다-랑시에르-프랑스적 공화주의를 하나의 에피스테메로 결합시키고 있다고 한다면, 있는지 없는지를 포함해, 주권을 아무래도 좋다고 생각해온 또 다른 에피스테메를 이룬다. 그것은 주권을 아무래도 좋은것으로 한다는 문제 관심에 의해서 정체의 제도를 실제로 설계해온 에피스테메이다.

그러나 이런 차이는 정치적으로 봐서, 어디에 효과를 나타내는 것일까? 어디까지나 주권을 자기로 하는 민주주의의 추구와, 주권의 보류에 의해 성립하는 공화주의를 가상의 적으로 하는 노선은 어디에서 갈라지는 것일까? 그것은 자명하지 않다. 그런 공화주의에 대해서, ‘도래할 민주주의노선에 더 저항한다는 입장도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포콕이 꼼꼼하게 계보를 추적하고, 네그리가 그것을 전제로 그의 구성적 권력의 개념사를 그려낸, 근대의 공화주의는 마키아벨리적 계기로서 이탈리아에서 영국으로, 게다가 미국으로 계승되며, 지정학적으로는 오늘날 세계정치에 있어서 앵글로색슨 동맹의 확장을 요구하는 커먼웰스에 사상적 주형[거푸집]을 계속 제공하고 있으며, 전지구적 자본주의노선에 대해, ‘민주주의를 기치로 내세우고, EU에 기대를 걸면서 저항하는 자세는 현대의 양식을 거의 대표하고 있다는 감이 있다. 그것은, 얼마간의 효과를 낳는다고 하는 의미에서는 분명히 객관적인 대항축을 형성하고 있으며, 진행 중인 투쟁의 귀추를 전망하기에는 너무 빠른 감도 있다. 예를 들어 아랍의 봄에는 민주주의파의 승리라고 정리해버릴 수 없는 요인이 너무도 많다. 무엇보다 그것은 반란의 전지구화라고도 불러야 할 과정 속에 있으며, 과정을 가속시키고, ‘주권원리의 세계적 후퇴를 우리에게 고한 것이다. 그래도 이라크 전쟁과 그리스 위기 후에도 아직, 하버마스를 필두로 하여 EU간주권적 통치를 체념하지 않았으며, 미국의 이라크로부터의 철수를 단적인 특징으로 하는, 공화국의 군사적 확장노선의 분명한 후퇴 경향에 동반된 이 대립축은 점점 더 많은 기대를 모을 수도 있다.

그러나 바로 그렇기에 물어야 한다고 우리는 생각한다. ‘민주주의공화주의에 대한 유효한 맞수(counter)가 될까? 대립축이 실제로 만들어내는 효과들은 당사자가 기대하는 그대로일까? 우리가 민주주의의 존엄을 구하자!”라는 정치 문서에서 간파한 것은, 채무 문제가 양자의 차이를 실질적으로 소거하고 있다는, 기대와는 거꾸로 나아가는 경향에 다름 아니다. 본서가 무엇보다도 경제를 문제 삼는 까닭도, 똑같은 질문이 관련되어 있다. 그러나 그런 경제로 한걸음 더 내딛기 전에, 1993년에 데리다의 마르크스의 유령들에서 처음 등장한 이후, ‘도래할 민주주의노선이 어떻게 되어 왔는지를 확인해야 할 것이다. 프랑스를 대표 선수로 하는 민주주의’ vs 영미가 인솔하는 공화주의라는 도식이 형태를 이루는 데에는 맑스의 유령들이 적잖은 역할을 해 왔을 터이다. “우리는 오늘날 모두 사회주의자이다라고 주류 언론이 말할 정도로. ‘도래할 민주주의를 기치로 내세운 새로운 인터내셔널은 주권국가를 광신적으로 지키려고 하는 공화주의와 확장을 요구하는 커먼웰스”(전지구적 자본주의) 양자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는 입장을 사상적으로 지목했을 것이다. ‘경제라는 바닥을 참조하여 그 파탄을 주장하는 것과는 별개로, 고유하게 정치적인 수준에서, 혹은 간주권적이고 세계정치적인 차원에서, 이미 20년의 역사를 지닌 새로운 인터내셔널의 현재가 어떤지는 확인해 두어야 한다.

 

Posted by 상겔스 상겔스

Jacques Rancière, “The Thinking of Dissensus: Politics and Aesthetics”, Reading Rancière, eds., Paul Bowman and Richard Stamp, Continuum, 2011, pp.1-17.


* 아래의 글은 <말과 활> 9호에 수록된 것으로, 각주 등 잡지에서 삭제되거나 축약된 것을 그대로 옮긴 것입니다. 원래 <이미지의 운명> 후속 작업으로 예정됐던 것이다. http://multitude.co.kr/363 빨간 색은 위의 영어판 쪽수이다. 

주요 번역어에 대해 미리 알려둔다. dissensus(불어도 dissensus)disagreement(불어로는 mésentente)는 각각 불일치와 불화로 옮긴다. 두 개념의 차이에 대해서는 옮긴이의 말을 참조. sensesensory, sensible, sensibility 등에 대해 : 하나의 글에서 sensesensation이 같이 쓰일 경우, 전자는 대체로 의미, 후자는 감각(작용)으로 옮겨질 수 있다. 그러나 이 글에서 랑시에르가 사용하는 sense는 대체로 의미와 감각이라는 두 가지의 의미를 모두 가지면서도 의미를 포괄하는 감각이라는 뜻이 강하다. 따라서 sense를 일관되게 감각으로 옮긴다. 그리고 다소 편의적으로, sensory는 감각적, sensible는 감성적, sensibility는 감성능력(감수성) 등으로 옮긴다. sensory는 감관적, sensible는 감각적이라고 번역할 수도 있다. distributionpartition : distributionpartage의 영어 번역어인데, partage는 공유와 분할이라는 뜻을 둘 다 가지고 있다. 따라서 여기서 distribution은 대체로 두 가지 의미를 모두 갖고 있는 나눔으로 일관되게 옮긴다. 반면 partition분할로만 옮긴다. 그리고 영어의 divisionseperation과 마찬가지로 분리로 옮긴다. (re)framing‘(다시) 틀을 짜다라는 의미에 준하여 다양하게 번역했다. (re)configure, (re)configuration()배열하다, ()배열형태, 배열을 다시 하다, 배열을 다시 짜다 등으로 옮겼다. place(s)는 일관성 때문에 자리로 옮겼지만, 때로는 장소라는 말이 더 어울릴 수 있다. 읽을 때 참고하기 바란다

* 주요 번역어 중 incorporation은 '체내화'로 옮긴다(2017년 4월 14일 추가).




불일치를 사고하기 : 정치와 미학[주1]

자크 랑시에르

[303]

정치와 미학을 불일치라는 개념 아래에서 사고한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 분명히 불일치는 정치와 미학이 무엇에 관한 것인가에 관한 개념이다. 뿐만 아니라 불일치 개념은 정치와 미학 자체를 사유할 수 있는 이론적 무대를 설치하는 동시에, 정치의 대상과 미학의 대상들을 한데 묶는 관계의 종류도 설치한다. 가장 추상적인 수준에서 불일치란 감각과 감각 사이의 차이를 뜻한다. , 동일자 안에서의 차이를, 대립자의 같음을 뜻하는 것이다. 여러분이 정치를 불일치의 한 형태라고 간주한다면, 이것은 여러분이 불일치를 공동체의 어떤 본질에서도 연역해낼 수 없다는 것을 뜻한다. 여러분이 이 본질을 의사소통적 언어와 같은 공통적 특성의 성취[발휘]에 입각해 긍정적[304]으로 연역하든(아리스토텔레스), 아니면 만인에 대해 만인이 설정하는 파괴적 본능에 대한 응답에 입각해 부정적으로 연역하든(홉스) 말이다. 공통적인 것이 분리[분할]됐기 때문에, 정치가 있다. 이제 이 분리[분할]는 수준의 차이가 아니다. 감각과 감각 사이의 대립은 감성적인 것과 지성적인 것 사이의 대립이 아니다. 정치적 불일치는 기저에 깔린 사회적·경제적 과정을 현시하는 외양이나 형태가 아니다. 마르크스주의적인 개념규정을 참조한다면, 계급전쟁은 정치의 현행적 실재(actual reality)인 것이지 그 감춰진 원인이 아니다.

[주1] 이 텍스트는 2003916-17일 런던의 골드스미스 칼리지에서 영국정치학회의 포스트구조주의 및 급진정치와 마르크스주의전문가 집단이 조직한 컨퍼런스인 불화에 충실하기 : 자크 랑시에르와 정치적인 것(Fidelity to the Disagreement: Jacques Rancière and the Political)에 발표된 글을 약간 수정하여 옮겨 적은 것이다. 나는 이 컨퍼런스를 조직한 Benjamin Arditi, Alan Finalyson, James Martin에게 감사드린다

첫 번째 점에서 시작하자. 나는 불화에서 정치적 동물이란 말하는 동물이라는 저 오래된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의를 재검토했다. 어떤 비판가들은 이를 고전으로의 복귀라고 봤다. 그들에게 이것은 데리다의 탈구축이나 리오타르의 쟁론(differend)’을 무시하고 낡은 언어관과 낡은 주체 이론으로 회귀했음을 뜻했다. 하지만 이런 견해는 우리를 오도한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말하는 동물에서 출발한다는 것은 인간들이 정치적 삶에 대한 기질을 갖고 있다는 인간학적 정의로 회귀한다는 뜻이 아니다. 정치는 말하고 토론하는 인간 능력에 기초를 두고 있다는 관념으로 회귀하는 게 아니라는 얘기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런 능력을 쾌락과 고통을 표현하는 목소리라는 단순히 동물적인 능력에 대립시켰다. 아무튼 이와 반대로 나는 이 공통의능력이 아주 처음부터 균열되어 있음을 보여준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일러주는 바에 따르면, 노예는 언어를 이해하고 있으나 이를 소유하고 있지 않다. 불일치가 뜻하는 게 바로 이것이다. 말하는 것이 말하는 것과 똑같지 않기 때문에, 한 감각이 뜻하는 바에 관한 합의조차도 없기 때문에 정치가 존재하는 것이다. 정치적 불일치는 자신들의 이해관계와 가치를 놓고 대결하는 말하는 인간 사이의 토론이 아니다. 정치적 불일치는 말하는 자와 말하지 못하는 자에 관한 갈등이며, 고통의 목소리로서 들려야 하는 자와 정의에 관한 논증으로서 들려야 하는 자에 관한 갈등이다. 그리고 이것은 또한 계급전쟁이 뜻하는 바이기도 하다. 대립된 경제적 이해관계를 지닌 집단들 사이의 갈등이 아니라, 어떤 이해관계가 있는가에 관한 갈등, 스스로를 사회적 이해관계를 경영[관리]할 수 있는 자로서 수립하는 자들과 그들의 생명을 재생산할 수 있을 뿐이라고 추정된 자들 사이의 투쟁인 것이다.

[305]나는 정치란 공동체를 향한 인간의 소질을 발휘하는 것이라고 정의하는 철학자들로부터 [논의를] 시작했다. 왜냐하면 나는 이런 식으로 연역해내는 것이 불가능함을, 공통의 감각적 성질이 이미 불일치의 단계임을 보여주고 싶었기 때문이다. 이것은 내가 방법론적 언급을 하도록 이끈다. , 불화는 내 이론화의 대상일 뿐만 아니라 방법이기도 하다. 내게 어떤 저자나 어떤 개념을 제시한다는 것은 우선 불화를 위한 무대를 마련한다는 것을, 차이의 조작자[연산자]를 검증한다는 것을 뜻한다. 또 이것은 나의 이론적 조작이 항상 어떤 문제의 배열형태(configuration)의 틀을 다시 짜는 것을 목표로 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내가 고전으로 복귀한다고 의심하는 똑같은 비평가들은 내가 불화정치에 대한 열 가지 테제[자크 랑시에르, 정치에 대한 열 가지 테제, 정치적인 것의 가장자리에서, 양창렬 옮김, 도서출판 길, 2013(전면개정판)]에서 정치와 치안을 구별한 것이 정치의 순수성에 대한 탐구에 해당한다고 생각한다.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정치와 치안의 구별을 조직화 대 자발성이라는 포퓰리즘적대립의 잔여물로 간주하고, 해체론자들은 이 구별을 동일성의 낡은 형이상학으로의 무비판적 복귀라고 간주한다. 하지만 마르크스주의자나 해체론자들은 모두 내 논증이 갖고 있는 논쟁적 맥락을 놓치고 있다. ‘정치란 무엇인가에 관한 내 분석은 그런 순수성 관념에 도전하고 이것을 전복하는 것을 전적인 목표로 삼고 있었다. 내가 한 분석은 1980년대의 프랑스에서 우리를 거의 압도했던 이른바 정치적인 것의 복귀나 정치로의 복귀에 대한 응답이었다. 이 당시 우리는 도처에서 다음과 같은 모토를 들을 수 있었다. , 우리는 이제 정치적인 것이 사회적인 것에, 사회적 이해관계에, 사회적 갈등과 사회적 유토피아들에 종속되는 것으로부터 잘 빠져나왔다고 말이다. 그래서 우리는 정치의 진정한 의미란 공적 무대에서의 행위이다, ‘함께 있음의 현시이다, 공동선에 대한 탐구이다 등등으로 보는 견해로 복귀했다. 이런 복귀의 철학적 기반은 주로 두 명의 철학자들, 즉 레오 스트라우스와 한나 아렌트에게서 나왔다. 이 두 사람은 모종의 방식으로 그리스 철학의 유산을 근대의 통치적 실천에 끌어들였다. 두 이론가들은 공적 행동과 공적 말하기의 정치적 영역과 경제적·사회적 필연성[필요]의 영역 사이의 대립을 강조했다. 이들의 논점은 강력하게 부활했다. 심지어 이들은 경제주의자생주의라는 낡은 마르크스주의적 대립을 진정한 혁명적 실천으로 대체할 수 있었다.

이런 결합은 프랑스의 1995년 파업 동안에 명백해졌다. ‘노동조합주의에 대한 낡은 마르크스주의적 비난과 정치적인 것과 사회적인 것 사이의 혼동에 대한 아렌트적 비난이 한데 합쳐졌고, [이런 결합은] 파업가담자들이 옹호했던 낡은 특권에 맞서 공동선과 공동체의 미래를 담당하는 정부의 정치적 용기에 대한 하나의 동일한 지지의 담론이 되었다. 그러므로 정치적인 것의 순수성으로의 복귀는 사실상 정치적인 것을 국가 제도와 정부[통치]적 실천과 동일시하는 것으로 복귀를 뜻한다는 게 드러났다. 결과적으로, 내가 정치의 특정성[종별성]을 정의하려고 시도한 것은, 무엇보다 우선, 순수 정치로의 복귀라는 주류의 관념에 도전하려는 시도였다.

순수정치란 없다. 나는 정치에 대한 열 가지 테제(이하 열 가지 테제)를 주로 특정한 정치적 영역과 정치적 삶의 방식이라는 아렌트적 관념을 비판하기 위해 썼다. 열 가지 테제는 정치에 관한 그녀의 정의가 악순환을 이루고 있음을 증명하려 했다. 하지만 궁극적으로 볼 때, 이것은 그네들의 삶의 방식이 그네들을 정치로 이끌 운명에 처해 있던 자들의 삶의 방식을 정치와 동일시한다는 것을 뜻한다[옮긴이: 이 문장은 랑시에르가 곧바로 얘기하듯이 순환논법이다]. 그것은 아르케의 순환이며, ‘시작의 권력에 있어서, 권력을 행사할 소질이나 자격에 있어서 권력의 행사의 예상이다. 문제의 핵심은 바로 소질이나 목적지라는 관념에 놓여 있다. 정치적 삶과 비-정치적 삶 혹은 벌거벗은 생명사이의 대립이라는 관념에 놓여 있는 것이다. 내가 치안이라고 부른 것의 전제가 바로 이런 나눔[분배]이다. , 집단과 개인에게 특정한 능력에 따라 할당된 자리와 기능들을 갖고서 집단적 신체로서의 정치공동체를 배열(configuration)하는 것이다. 권력은 지배할 자격이라고는 아무것도 갖지 못한 자들에게 속해 있다고 단언함으로써 이런 전제가 깨질 때, 거기에 정치가 있다. 이것은 권력의 행사를 위한 기반이란 전혀 없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 정치를 위해 태어난 자들과 경제적·사회적 필연성의 벌거벗은생명을 위해 태어난 자들을 분리하는 경계선이 의문에 부쳐질 때, 거기에 정치가 있다.

이것은 정치적 삶이란 없으며 정치적 무대가 있다는 것을 뜻한다. 정치적 행동은 사회적’, ‘경제적혹은 가정적이라고 간주되었던 것이 정치적임을 보여주는 데 있다. 정치적 행동은 경계선들을 흐릿하게 만드는 데 있다. ‘가정적행위자들(가령 노동자나 여성)이 자신들의 다툼(quarrel)을 공통적인 것과 관련된 다툼으로 재배열할(reconfigure) 때마다, 즉 어떤 자리가 그것에 속하[307]는지 속하지 않는지에 관련된 다툼으로, 그리고 누가 공통적인 것에 관해 언표행위를 하고 시위를 할 수 있는지 혹은 없는지에 관련된 다툼으로 재배열할 때마다, 정치적 행동은 일어난다. 그러므로 분명해져야 하는 것은, 정치란 무엇인가에 관한 불화가 있을 때, 정치적인 것을 사회적인 것에서 분리하거나 공적인 것을 가정적인 것에서 분리하는 경계선이 의문시될 때, 정치가 있다. 정치는 정치적인 것을 비-정치적인 것으로부터 재-분할하는 방식이다. 이 때문에 정치는 일반적으로 자리를 벗어나서”, 정치적이라고 간주되지 않았을 터였던 자리에서 일어난다.

이 분석에서 몇 가지 귀결들을 끌어내보자. 첫째, 이것은 나의 정치관이 가치중립적이라는 것을 뜻하지 않는다[주2]. 확실히, 이것은 정치를 공통적인 것의 윤리적 관념 위에 정초하기를 거부한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이것은 행동 일반의 가치나 원리를 선언하는 심급으로 간주된 윤리가 일련의 실천들로서의 정치를 규제해야 한다는 관념을 의문에 부친다. 이런 관념에 따르면, 정치를 윤리 속에 정초하는 것을 잊어버리면 재앙과 공포가 생겨날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나는 거꾸로 말하고 싶다. 조지 부시와 오사마 빈 라덴의 시대에는 윤리적 갈등이 정치적 갈등보다 훨씬 더 폭력적이고 훨씬 더 과격하게 일어났다. 그러므로 정치는 윤리적 갈등의 폭력을 누그러뜨릴 수 있는 적대(antagonism)의 특정한 실천이라고 이해될 수 있다.

[주2] 이 점에 관해서는 Thomson, 2003을 참조

하지만 나는 정치를 단순한 경합적 도식(agonistic schema)으로 환원하지 않는다. 이 도식에서는 내용이 뭔가는 아무 상관이 없기 때문이다. 나는 적대에 관한 슈미트적 정식화와는 멀리 떨어져 있다. 정치는 자신의 보편을, 자신의 고유한 척도를 갖고 있는데, 그것이 바로 평등이라고 나는 주장한다. 척도는 결코 직접적으로 적용되지 않는다. 그것은 잘못(wrong)의 상연·연출을 통해서만 적용된다. 하지만 모든 잘못이 필연적으로 정치적인 건 아니다. 내가 제시한 테제에 맞서서, 피압제자들 사이에는 종교적 광신이나 민족적 동일성주의(ethnic identitarianism)와 불관용에 의해 형성된 반-민주적인 시위 형태들도 있다고 주장된다. 에르네스토 라클라우는 이것이 불일치에 관한 나의 개념규정이 갖고 있는 맹점이라고 지적했다(Laclau, 2005, p.246~). 하지만 내 견해에 따르면, 잘못이 정치적 행동의 토대를 상연·연출[주3]할 때, 잘못이 정치적이라는 점은 명백하다. 이때의 정치적 행동이란 평등의 단순한 우연성이며, 이것은 분명히 [308]피의 순수성이나 종교의 권력 등등을 요구하는 포퓰리즘적(popular)’ 운동에 해당되지 않는다. 하지만 나는 그 어떤 형태의 시위에 대해서도 포퓰리즘(populism)’이라는 이름의 낙인을 찍으려는 널리 퍼진 경향을 거부한다. ‘포퓰리즘이라는 개념은 구-마르크스주의자들과 젊은 자유주의자들이 복지[국가]체제를 유지하기 위한 투쟁과 인종적 혹은 종교적 폭동을 한 바구니 안에 한꺼번에 집어넣을 수 있게 해주는 꿀꿀이단지이다.

[주3] 이하 enactment는 상연·연출, enact는 상연·연출하다로 옮긴다. 이 영어 단어는 불어의 acte(r)에 해당된다. 따라서 법적 인정이나 법의 제정 등을 뜻한다. 그러나 랑시에르가 이 단어를 이런 의미로 사용하는 경우는 거의 없는 것 같다. 이는 특히 정치적인 것의 가장자리에서의 영역본에 자주 등장하는데, 대체로 상연, 공연이라는 뜻에 가깝다

인민은 두 개의 대립된 것들, 즉 데모스(demos) 혹은 에트노스(ethnos)에 대한 이름이다. 에트노스는 똑같은 기원을 갖고 똑같은 땅에서 태어나거나 똑같은 신을 숭배하는 사람들의 살아 있는 신체와 동일시된 인민이다. 다른 신체들에 대립된 신체로서의 인민이다. 데모스는 공동체의 부분들(parts)에 대한 보충(supplement)으로 이해된 인민이다. , 내가 셈해지지 않은 것의 셈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데모스는 여기나 저기에서 태어났다는 단순한 우연성의 기입이다. 이 기입은 지배하기 위한 그 어떤 자격부여와도 대립된다. 또 데모스는 그런 평등의 입증(verification) 과정을 통해, 불일치의 형태들의 구축을 통해 출현한다. 이제 분명한 것은, 차이가 단번에 주어진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데모스의 삶은 에트노스로부터의 그 점증적인 분화(differentiation)의 과정이다.

둘째, 이것은 내가 정치를 봉기라는 예외적이고 사라지는 순간들로 환원한다는 뜻이 아니다. 정치적 원칙의 단순한 상연·연출은 (순수성이 설령 있다손 치더라도) 그 순수성으로는 거의 나타나지 않는다. 오히려 정치는 많은 혼동된문제와 갈등 속에 존재하며, 정치는 기억, 역사 쪽으로 향해간다. 정치의 역사적 동학이라는 것이 있다. , 시간의 정상적과정을 깨뜨리는 사건들의 역사, 주체화의 기입과 형태들의 역사, 약속의 역사, 기억의 역사, 반복의 역사, 예견과 시대착오의 역사가 있다[주4]. 예외를 과정에 대립시키는 지점은 하나도 없다. 과거를 어떻게 개념규정할 것인가가 논란거리이다. 내가 그렇게 보듯이, 정치의 역사는 경제적·사회적 발전과 더불어 진행되는 연속적인 과정이 아니다. 정치의 역사는 그 어떤 운명적인[이정표적인]’ 플롯이든, 이런 플롯들이 펼쳐지는 것이 아니다.

[주4] 열 가지의 테제에 관한 논의에서 내가 믹 딜런(Mick Dillon)에게 한 응답을 보라(Rancière 2003a).

셋째, 정치와 치안의 대립은 정치가 그 어떤 고유한대상도 갖고 있지 않으며, 정치의 모든 대상은 치안의 대상과 뒤섞인다는 진술에 딱 들어맞는[309]. 예전에 쓴 어떤 텍스트에서 나는 정치의 과정과 치안의 과정의 마주침(혼동’)의 장에 정치적인 것이라는 이름을 부여하자고 제안했다(Rancière 1995를 보라). 내가 명백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어떤 상황의 틀을 다시 짜는 정치적 개입의 가능성은 그런 식으로 이해된 정치적인 것의 일정한 설정으로부터 취해져야 한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나는 마르크스주의가 실질적 민주주의와 형식적 민주주의를 대립시키는 것에 맞서서, 민주적 과정이 기입되어 있는 모든 것들, 즉 헌법전들에, 국가의 제도들에, 여론 기구들에, 언표행위의 주류 형태들 등등에 기입되어 있는 이 모든 것이 행하는 몫[부분]을 강조했다. 이것이 나를 몇몇 급진적인 정치사상가들과 명확하게 변별시켜주는 한 가지 점이다. 이들은 [정치를] 국가제도의 운용과 혼동하는 그 어떤 것으로부터도 정치의 근본성을 따로 떼어내고 싶어 한다. 민주주의를 우리네 서구 사회의 국가 형태와 삶의 방식으로 간주할 뿐인 알랭 바디우는 내가 그런 합의적 견해를 고수하고 있는 것 아니냐고 의심한다. 슬라보예 지젝은 급진적인 정치적 행위의 리스크를 다수파의 민주적 법에 의해 제공된 초월론적 보증인의 법률주의적 논리에 대립시킨다[주5]. 하지만 나는 민주적 과정을 우리 국가들의 기능과 결코 동일시하지도, 혹은 다수파의 법에 의해 제공된 기회주의적인 보험’(지젝)과 동일시하지도 않았다. 나는 민주적 과정을 정치적 보충과 동일시했는데, 이 보충은 이런 기능을 아무나(anyone)의 권력과 대결시킨다. 국가의 기능을 와해시키는 대가를 치르더라도 국가의 기능을 정초하는 아무나의 권력과 말이다. 불평등한 질서는 그 평등주의적 전제 없이는 작동할 수 없다. 거꾸로 평등주의적 투쟁 자체는 종종 공통적인 것에 관한 치안의 서술을 무기로 사용한다. 예를 들어 페미니스트적 투쟁에서 성적 상호보완성(complementarity)이라는 의학적·도덕적·교육적 표준이 맡았던 역할을 생각해보자. 혹은 노동자들의 투쟁에서 노동의 소유에 대한 참조가 했던 역할을 생각해보자. 평등은 자신의 고유한 어휘나 문법을 갖고 있지 않으며, 그저 시학만을 갖고 있을 뿐이다.

[주5] 알랭 바디우는 메타정치(Metapolitics, 2005)에서 나에 대해 이렇게 지적했다. ‘민주주의적 덫이라는 지젝의 비판은 정치에서 생명정치로 그리고 되돌아가기(From Politics to Biopolitics . . . and Back)(2004)라는 글에서 가장 명료하게 이뤄졌다

정치는 치안의 바깥에 있는 자리에서 유래하지 않는다. 이 점에서 나는 나에 대한 몇몇 반론가들과 견해를 같이 한다(Thomson 2003 참조). 치안의 바깥에는 [정치가 들어설] 그 어떤 자리도 없다. 하지만 그것이 할당하는 자리들을 가지고 뭔가를 행하는 갈등적인 방식이 있다. 자리들을 다른 곳으로 옮기거나 재형성[310]하거나 강화하는 것이 그것이다. 내가 열 가지 테제에서 상기시켰듯이, 그리스에서 민주주의의 공간은 이런 자리 옮김(displacement)에 의해 열려지게 됐다. 처음에는 구역을 의미했던 데모스가 정치의 주체의 이름이 되었을 때 말이다. 지리적으로 분리되어 있었던 세 개의 데모스들을 클레이스테네스가 하나로 합쳐서 아테네 부족들을 재형성했을 때, 그렇게 됐음을 우리는 알고 있다. 이것은 두 가지를 한꺼번에 하는 조치이다. , 그것은 정치적 공간의 자율성을 구성했던 동시에 귀족계급에게서 지역 기반의 권력을 빼앗았다.

여러 논평가들이 강조했듯이, 이것은 내가 공간적 범주들이나 은유들을 사용한 것에 관해 더 말할 기회를 제공한다[주6]. 민주주의의 공간에 관해 말하는 것은 단순한 은유가 아니다. 데모스의 경계획정은 물질적인 문제인 동시에 상징적인 문제이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그것은 물질적인 것과 상징적인 것 사이의 (분리)접속의 새로운 형태이다. 민주주의의 설립이란 새로운 위상학의 발명을 의미한다. 토지소유자의 물질적 특권을 전통의 상징적 권력과 접속시켰던 귀족제적 공간에 맞서서, 분리접속된 자리들로 이루어진 공간의 창출을 의미한다. 이런 분리접속이 정치와 치안의 대립의 핵심에 놓여 있다. 그러므로 공간이라는 쟁점은 나눔[분배]에 입각해 사유되어야 한다. 자리들의 나눔, 안에 있는 것이나 바깥에 있는 것의 경계선의 나눔, 중심적이거나 주변적인 것의 경계선의 나눔, 가시적이거나 비가시적인 것의 경계선의 나눔이 그것이다. 이것은 내가 감성적인 것의 나눔이라고 부른 것과 관련된다(Rancière 2004b를 보라). 이 말은 내게 위계의 상징화의 추상적이고 자의적인 형태들이 지각적인 소여로서 구현되는 방식을, 사회적 목적지가 지각적 우주, 존재방식, 말하기와 보기의 명증성에 의해 예견되는 방식을 가리킨다. 이런 나눔은 시간과 공간에 관한 어떤 틀짜기이다. 누구나 자신의 고유한 자리에 있기를 원한 플라톤의 국가공간적폐쇄는 시간적인 분할 자체이다. , 장인은 애초부터 그들의 자리와는 다른 곳에 있을 시간을 갖고 있지 않은 자들로 형상화되었다. 나는 해방의 핵심이 사회적 종속을 떠받치는 시간의 분할 자체로부터 이탈하려는 시도였음을 강조하기 위해, 노동자의 해방에 관해 내가 쓴 책을 프롤레타리아의 밤이라고 불렀다. 노동자들은 낮 동안에는 노동을 하고 밤 동안에는 잠을 잔다는 명백한 분할이 존재했다. 그러므로 밤을 정복하는 것은 사회적 해방의 첫 단계였으며, 사물의 주어진 상태를 [311]재배열하기 위한 최초의 물질적이고 상징적인 기초였다. 노동자들 자신이 공통의 세계를 공유하고 있고 그런 공통의 세계의 대상이자 참여자를 명명할 수 있다는 것을 말하기 위해서 노동자들은 자신들의 개인적생활을 재배열해야 했다. 모든 개인들에게 공통적인 것을 돌보도록 예정된 사람과 예정되지 못한 사람 사이의 분할을 예견했던 낮과 밤의 분할을 재배열해야 했다. 그것은 역사가들이 주장하듯이 재현의 문제가 아니었다. 그것은 감각경험의 문제였으며, 지각 가능한 것의 분할의 한 형태였다.

[주6] 2003년에 열린 골드스미스 컨퍼런스에서 Mustafa DikecMichael Shapiro의 기고문을 참조.

달리 말해서, 내가 공간에 관심을 가진 이유는 내가 미학에 관심을 가진 것과 똑같다. 나는 이미 역사와 정치에 관한 내 작업과 미학에 관한 내 작업 사이에서 일어났던 이동, 몇몇 논평가들이 지각했던 이동이 하나의 장에서 다른 장으로의 이동이 아님을 설명하려고 노력했다. 내가 정치에 관해 작업한 것은 정치를 미학적 사태로서 보여주려는 시도였다. 이 말로 내가 말하려는 것은 벤야민이 예술의 정치화에 대립시켰던 정치의 미학화[심미화]’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내가 말하려는 바는 권력의 행사나 권력을 위한 투쟁이라기보다는 정치가 특정한 세계, 특정한 경험 형태의 배열형태라는 것이다. 이런 특정한 것들 속에서 몇 가지는 정치적 대상으로 보일 수 있고, 몇 가지 질문은 정치적 쟁점이나 논점으로 보일 수 있으며, 몇몇 행위자는 정치적 주체로 보일 수도 있다. 나는 정치를 특정한 하나의 세계가 아니라 갈등적 세계로 설정함으로써 정치의 이런 미학적본성을 재정의하려 노력했다. , 경쟁하는 이해관계나 가치의 세계가 아니라 경쟁하는 세계들의 세계로서 재정의하려 한 것이다.

만일 내가 [먼저] 했던 작업의 그런 부분이 정치의 미학을 다뤘다면, 내가 나중에 한 작업은 미학의 정치를 다뤘다고 말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나는 미학의 정치라는 말로 예술과 정치의 관계에 대한 물음을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지각 가능한 것의 정치적 나눔에 있어서 어떤 특정 영역(미학의 영역)의 배열형태가 지닌 의미와 중요성을 이해한다. 내가 한 정치적작업에서 이미 나는, 정치적인 것의 실존과 미학적인 것의 실존이 어떻게 강하게 상호 연결되어 있는지를 증명하려고 노력했다. 플라톤의 국가에서는 공적인 무대로부터 데모스의 배제와 연극적 형태의 배제가 엄격하게 상호 연결되어 있다. 자주 말해지는 것과는 달리, 이것은 플라톤이 정치에 이[312]익이 되도록 예술을 배제했다는 뜻이 아니다. 플라톤은 정치 예술을 배제했다. 플라톤은 장인들이 그네들의 고유한작업장과는 다른 곳에 있을 수 있는 능력이라는 관념과 시인이나 배우들이 그네들의 고유한정체성과는 다른 정체성을 수행할(play) 수 있는 가능성, 이 둘 다를 배제했던 것이다.

또 나는 근대 민주주의와 근대 혁명이 어떻게 감성적인 것의 이 새로운 나눔과 연결되어 있는지를 보여주려고 노력했다. 이 새로운 나눔은 예술에 특정한 자리를, 미학적 감정이라고 불리는 특정한 감정을 묘사한다. 이것은 프랑스 혁명 당시에 미술관을 출현하게 만들었던 것과 단순하게 일치하는 것이 아니다. 또한 그것은 특정한 미학적 상태라는 실러의 관념에서 새로운 감각혁명이라는 횔덜린의 관념으로, 더 나아가 마르크스주의적인 생산자들의 혁명으로 나아가게 했던 단순한 현사실적 영향도 아니다. 근대 민주주의는 미학적인 것의 출현과 동시대적이다. 내가 미학적이라고 부른 것은, 다른 경험 영역들을 통치하는 지배의 형태들을 중지시키는 어떤 특정한 경험 영역을 가리킨다. , 그들의 감각경험의 구성 자체로부터 변별되는, 지배의 근거를 두 인류의 대립에 두는 형상과 질료, 이해와 감성(sensibility)의 위계를 가리키는 것이다. 경험 영역들의 이런 재-분할은 자리들과 몫들 일반의 물음을 재형상화하는(refiguring) 가능성들의 부분(part)이다. 우리가 알고 있듯이, 그것은 애매한 방식으로 그렇게 했다. , 인과적 이유 때문이 아니라 미학의 예외성 때문에 정치의 역설적 예외성을 복제했던 것이다.

정치의 예외성은 그 어떤 특정한 자리도 갖고 있지 않다. 정치는 사회적 쟁점, 치안 문제 등등을 고쳐 말하고 무대에 다시 올림으로써 치안의 공간에서 발생한다.’ 반대로 미학적 자율성은 특정한 자리들을 갖고 있다. 하지만 이 특정한 자리가 무엇인가에 관한 정의는 예술의 어떤 형태와 삶의 어떤 형태를 등치시키는 것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미학적 경험의 고독은 예술이나 정치가 더 이상 분리된 경험 영역들이지 않을 미래의 공동체의 약속과 처음부터 묶여 있었다. 이것은 미학이 처음부터 자신의 정치를, 내 용어로 말하면 메타정치를, 정치가 하는 것과는 다르게 정치를 하는방식을 갖고 있다는 뜻이다. 미학은 정치적 불일치의 실천과 국가권력의 변혁을 감각공동체의 메타정치적 기획과 대립시킨다. [메타정치로서의] 미학은 단순한 정치적혁명에 의해서는 항상 놓쳐지게 될 것, 즉 사유와 감각적 세계 사[313]이의, 신체들과 그 환경 사이의 새로운 관계 속에, 살아 있는 태도 속에 체내화된(incorporated) 자유와 평등을 성취하는 것이다.

이 기획은 아주 다양한 형태를 띠었으며, 결국에는 그 역전으로 이어졌던 많은 변형들을 겪었다. 이런 변형들에는 다음과 같은 것이 포함된다. 실러의 미학교육, 헤겔과 셸링과 횔덜린이 꿈꿨던 새로운 신화, 청년 마르크스의 인간혁명, 소비에트 예술가들과 건축가들의 구성주의적 기획, 뿐만 아니라 초현실주의적 전복, 아도르노의 근대작품의 변증법, 685월이 수동혁명이라는 블랑쇼의 관념, 드보르의 표류’, 혹은 리오타르의 숭고한 것의 미학 등.

여기서 나는 내가 리오타르의 후기 저작을 논할 때 무엇이 관건인지를 분명히 밝혀야겠다. 어떤 점에서 이것은 불화에서는 명료하게 제시되지 않았고, 그래서 후속 글들에서 이를 좀 더 개진하려고 했다(Rancière 2003b, 2004a, 2004d를 참조). 관건은 불일치에 관한 이해이다. 리오타르는 숭고한 것의 범주를 통해 불일치를 절대적 잘못의 새로운 형태로 전환시켰다. 쟁론(Le différend)[주7]에서는 그런 절대화가 드러나지 않지만, 그 다음에 발표된 책들에서는 이것이 점점 더 분명해진다. 리오타르를 포스트구조주의와 포스트모더니즘 개념을 통해 수용한 영미권에서는 이런 전회가 모호해졌다. 분쟁과 잘못에 관한 리오타르의 사고는 포스트구조주의적 주체 비판은 물론이고, 거대서사의 종언이라는 포스트모던적 지각과 너무도 쉽게 결합되었기에, 결국 언어와 문화의 다양성이라는 상대주의적 관점으로 귀결되었다. 그런 지각은 리오타르의 이론에서, 그리고 불일치를 사고하는 방식에 있어서 무엇이 관건인지를 감춰버린다. 리오타르의 후기 책들이 이런 점들을 전형적으로 보여주는 데도 말이다. 물론 그의 후기 책들은 내가 미학과 정치의 윤리적 전회라고 부른 것을 훨씬 더 폭넓게 특징짓고 있다[주8].

[주7] [옮긴이] 장 프랑수아 리오타르, 쟁론, 진태원 옮김, 경성대학교출판부, 2015. 

[주8] 2003년 골드스미스 컨퍼런스에서 한 발표문에서 Sam Chambers는 리오타르적 분쟁에 맞서서 내가 아리스토텔레스적 언어관을 지지했다고 주장했다. 이런 언어관을 취했기 때문에 나는 리오타르를 이해할 수 없게 됐을 뿐 아니라, 정치를 재사유하려는 나 자신의 기획도 완성할 수 없었다고 한 것이다. 하지만 내가 아리스토텔레스를 언급한 것은 인간/말하는 동물/정치적 동물이라는 고전적 등식의 핵심부에 놓여 있는 간극 혹은 잘못을 보여주기 위해서였다. 전체 문제는 우리가 이 잘못을 어떻게 인식하는가이다. Chambers, 2005를 참조

잘못의 절대화는 프롤레타리아가 보편적 희생자, 거대서사의 주체였던 근대 시대와 미시서사 혹은 국지적 서사라는 포스트모던적 시대 사이의 단[314]절이라는 이른바 포스트모던적 긍정과 더불어 사실상 시작됐다. [그러나] 이 단절에는 역사적 증거가 결코 없다. 나의 모든 역사적 탐구가 목표로 삼은 것은 이런 전제를 파괴하고, 사회적 해방의 역사란 항상 작은 서사들, 특수한 발화행위 등으로부터 만들어졌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러므로 거대서사와 보편적 희생자의 시대로부터 단절해야 한다는 논점은 내가 보기에 요점을 벗어난 것 같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이것이 사실상 절대적 잘못의 또 다른 서사 속에 내장되지 않는 한, 요점을 벗어난 것이었다. 그리고 내가 추정하기에 이렇게 내장시키는 것이 [리오타르의] 요점이었다. 리오타르가 했던 것은 희생자의 거대 서사로부터 단절하기가 아니었다. 그것은 희생자의 거대 서사를 새롭게 활용하기 위해 회고적인 방식으로 희생자의 거대 서사의 틀을 다시 짜려는 것이었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리오타르의] 하이데거와 유대인들(Heidegger and “the jews”, 1990)은 어쩌면 거기에 없었을 수 있고 확실히 시작에서는 명백하지 않았던 어떤 의미, 즉 서사의 대체라는 의미와 희생자의 대체라는 의미를 이른바 포스트모던적 논증에 제공하는 전환점으로 사고될 수 있다. 이 텍스트에서 <유대인들>은 근대성의 새로운 서사의 주체, 서구 세계의 새로운 서사의 주체가 되었다. 그것은 더 이상 해방의 서사가 아니었으며, 약속의 완수라는 일방통행식의 플롯도 아니었다. 오히려 그것은 또 다른 일방통행식의 플롯이었다. , 절대적 범죄의 서사인데, 이 서사는 서구 사유의 변증법 전체의 진리로서, <타자>, <길들여질 수 없는 것> 혹은 <갚을 길이 없는 것>[주9]과 관련된 사유의 근원적 부채를 잊으려고 하는 거대한 시대의 최종 결과로서 나타난다.

[주9] [옮긴이] ‘길들여질 수 없는 것‘the Untameable’의 번역어이다. 한편, ‘the Unredeemable’은 속죄할 수 없는 것, 죄의 사함을 받을 수 없는 것, 따라서 어떤 부채나 빚에 대해 갚을 길이 없는 것, 그리하여 구원될 수도 없는 것 등등을 의미한다. 이미지의 운명에서와는 달리 여기서는 갚을 길이 없는 것으로 일관되게 옮긴다

갚을 길이 없는 부채라는 관념은, 우리도 알다시피, 미학적 상태의 예외성의 변형에 있어서 마지막 단계이다. 리오타르는 미학적 예외성을 칸트적 숭고의 격자를 통해 해석한다. , 무능의 경험으로서 해석하는 것이다. 미학적 상태의 예외성은 감각과 사유의 근본적 불화를 뜻한다. <이성>의 관념을 제시하는 데 있어서 <상상력>이 무능하다는 칸트의 견해는 사고의 힘을 탈피하고 원초적 재앙을 증언하는 감각(aistheton)의 힘으로 뒤집힌다. 타자성의 법칙에 대한 정신의 먼 옛날부터의 의존, 정신의 노예화.’ <타자성>의 처음 이름은 ‘<사물>’, 즉 프로이트-라캉적 의미의 <사물Das Ding>이다. 그 두 번[315]째 이름은 <>이다.

이런 식으로 <>에 대한 유대인의 복종은 정신의 재앙이나 무기력화의 원초적 경험에 대한 복종과 똑같다. 그러므로 나치가 유럽의 유대인들을 절멸시키려 한 것은 원초적 재앙을 부인하는 데서 귀결되는 재앙으로 해석될 수 있다. <사물Das Ding> 혹은 <>을 제거하려는, 타자성에 대한 먼 옛날부터의 의존을 제거하려는 기획의 최종적인 달성으로 해석될 수 있는 것이다. 적합하게 말하면 이것은 미학적 경험을 윤리적 경험으로 해석한다는, 해방의 모든 과정을 금한다는 뜻이다. 이런 플롯에서는, 해방의 모든 과정은 정신을 타자성에 예속시키는 재앙을 부인하려는 재앙적인 시도라고 지각된다. 새로운 종류의 근본악에 관한 이런 사고는 오늘날 (적어도 프랑스 지식인들 사이에서는) 정치와 관련된 두 종류의 태도로 이어진다. 하나는 기권이고 다른 하나는 잘못의 다른 종류의 절대화를 지지하는 것, <>의 군대가 <>의 축에 맞서 벌이고 있는 현재의 전쟁을 지지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정치에 관한 내 연구에서 관건이고 또 이 관건을 미학에 관한 연구와 묶어주는 것은 불화로서의 정치의 특정성을 사고하려는 시도이며, 불일치를 잘못이나 재앙으로 절대화하려는 것에서 벗어나는 미학적 이질성의 특정성을 사고하려는 시도이다. 이것은 그런 예외성을 순수성의 플롯 바깥에서 사고하려는 시도이다. 리오타르의 마지막 작업에서 관건은 분명히 미학적 분리성에 관한 아도르노의 해석의 변형이다. 아도르노에게서 미학적 경험은 미학적 약속의 순수성을 지키기 위해서 분리되어야만 했다. 리오타르에게서 작품의 미학적 순수성의 본질은 <길들여질 수 없는 것>의 순전한 증언이라는 지위에 있다.

마찬가지로 정치적 삶과 벌거벗은 생명의 분리라는 아렌트적 관념은 예외상태에 관한 아감벤의 이론화에서 거꾸로 뒤집혔다. 예외상태는 정치적 삶을 벌거벗은 생명아래로 포섭하는 <근대성>의 거대서사가 된다. 이 포섭은 홉스의 이론뿐만 아니라 <인간의 권리들>에 대해서도, 프랑스 혁명의 인민의 주권이나 인종청소도 설명한다. 정치의 순수성이라는 관념은 그 반대로, 즉 그 애매한 행위자들을 일소함으로써 정치적 개입의 무대를 텅 비게 만드는 것으로 나아간다. 그 결과, 정치는 압도적인 역사적-존재론적 운명으로서 등장하는 권력의 행위와 동일시되기에 이른다. , 우리 모두는 처[316]음부터, 수용소의 동질적이고 편재하는 공간 속에 있는 난민들이며, 벌거벗은 생명과 예외의 상호보완성 속에 사로잡혀 있다(Agamben 1998; Rancière 2004c를 참조).

만일 1990년대 초에 내가 정치적인 것의 복귀라는 표준적인 이론들을 제기했었다고 한다면, [지금의] 나는 예외의 논리의 이런 무한화에, 정치적인 예외성과 미학적 예외성의 이런 이중적인 역전(reversal)에 점점 더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그리고 이 두 가지 예외성의 결합이 윤리적추세를 구성한다. 나는 이런 윤리적 추세에 대해, 순수성 관념과는 별개로 미학적·정치적 불일치성을 사고하는 하나의 방식을 대립시키려고 한다. 정치의 예외성이란 [정치가] 자신의 고유한 장을 갖고 있다는 것이 아니라 치안의 장에서 자신의 무대를 건설하는 실천의 예외성을 뜻한다. 그리고 미학적 체제에서 예술의 자율성은 그만큼 타율성이다. , 예술은 특정한 경험에 귀속되는 특정한 영역으로 설정되지만, 그 대상과 절차를 다른 경험 영역에 속하는 대상과 절차로부터 분리시키는 경계선은 전혀 없다.

내 작업의 전반적 논리는 순수 정치와 순수 미학이 무한한 잘못이나 무한한 악의 급진화 속에서 함께 전복될 수밖에 없음을 보여주는 것을 목표로 삼는다. 나는 불화를 해소될 수 없으나 그럼에도 불구하도 처리될 수 있는 잘못이라고 사고하려고 노력한다. 이것은 내가 예외, 잘못 혹은 초과에 관한 개념규정을 그 어떤 종류의 존재론과도 별개로 유지하려고 노력한다는 것을 뜻한다. 정치의 원리를 존재론적 원리로 거슬러 올라가지 않는 한, 정치를 사고할 수 없다는 것이 오늘날의 추세이다. 이런 것이 하이데거적인 차이, 네그리가 개념규정한 스피노자적인 <존재>의 무한성, 바디우의 사유에 있어서 존재와 사건의 극성(polarity), 아감벤의 이론에 있어서 잠재성과 현실성 사이의 관계의 재분절 등등이다. 내가 취하는 가정은, 이런 요구사항들이 어떤 역사적-존재론적인 운명적 과정을 위해서 정치의 해소로 나아간다는 것이다. 이것은 상이한 형태를 띨 수도 있다. 정치는 존재의 법칙에서 해소될 수도 있다. 마치 형식이 그 내용의 현시에 의해 찢겨져버리듯이 말이다. 하트와 네그리의 제국에서 <다중>은 제국을 폭파하게 될 제국의 진짜 내용이다. 공산주의는 승리할 것이다. 왜냐하면 이것이 존재의 법칙이기 때문이다. , <존재><공산주의>이다. 그렇지 않으면 모든 정치적 잘못은 기원적 잘못의 결과로서 등장할 것이며, 그리하여 <>만이, 혹은 어떤 [317]존재론적 혁명만이 우리를 구할 수 있다.

처음부터 내가 가진 첫 번째 관심사는 형이상학적 목적지[이정표]에 입각해 정치적 문제들을 분석하는 모든 분석들을 옆으로 치워버리는 것이었다. 이렇게 하기 위해 나는 그 어떤 시간적 목적론도, 차이·초과 혹은 불일치의 그 어떤 기원적 결정도 일축해버리는 것이 필수적이라고 생각한다. 이 때문에 나는 항상 초과, 차이, 혹은 불일치의 특정하고 제한된 형태를 정의하려고 노력했던 것이다. 나는 그 어떤 셈도 불가능하게 만들 수 있을 <존재>의 초과에 정치적 불일치를 정초하지 않는다. 나는 정치적 불일치를 특정한 계산착오와 연결한다. 데모스는 <존재>의 초과를 구현하지 않는다. 데모스는 무엇보다 우선 텅 빈 이름이다. 한편으로, 데모스는 어떤 필연성도 갖고 있지 않은 보충적 셈에 대한 이름이며, 다른 한편으로 이 자의적인셈은 불평등의 정당화 자체에 고유한 평등주의적조건을 상연·연출한다. 그 어떤 존재론적 간극도 없고, 평등의 우연성과 불평등의 우연성을 하나로 묶는 교착(twist)이 있다. 데모스의 역량은 존재의 그 어떤 원초적 초과도 상연·연출하지 않는다. 그것은 그 어떤 명명의 과정에도 고유하게 있는 초과를 상연·연출한다. , 이름들과 신체들을 한데 묶는 관계의 자의성을 상연·연출한다. 이름을 부여받고 공통적인 것에 관해 말하도록 운명지어지지 않은 자들이 이름과 신체들을 이용할 수 있도록 만드는 이름들의 초과를 상연·연출하는 것이다. 내게 차이란 항상 특정한 관계성, 통약 불가능한 것의 특정한 척도를 뜻한다.

바로 이 때문에 나는 분명히 데리다가 씨름했던 것과 똑같은 종류의 쟁점과 씨름해야만 했지만, 데리다의 유령성(spectrality)과 어느 정도 거리를 두게 된다. 예를 들어 유령들과 유령성이라는 데리다식의 문제틀은 두 개의 쟁점을 함께 묶는데, 이렇게 묶여진 매듭은 내게도 중요하다. 두 개의 쟁점이란 탈정체화와 시대착오의 지위이다. 그것은 내가 직면한 것과 똑같은 문제를 다룬다. , 우리는 비실존자(the inexistent)의 실존을 어떻게 사고하는가, 우리는 초감성적인 것-감성적인 것을 어떻게 사고하는가? 하지만 내가 보기에, 데리다는 비실존자에 너무 많은 현존을 부여하고 너무 많은 육신(flesh)을 부여한다. 정체성[동일성]을 탈구축하면서도 그는 항상 이타성(異他性)의 동일성이나 부재의 현전을 과장함으로서 동일성을 복귀시키려고 하기 직전에 있다. 그가 [318]마르크스의 유령들에서 말했듯이, 우리는 유령의 실재성(reality)에 관해서는 아무것도 모른다. 하지만 우리는 유령이 우리를 쳐다본다는 것, 유령이 우리를 보고 있고 우리에게 말을 한다는 것을 안다. 우리는 유령의 정체성은 모르지만, 유령의 시선을 견뎌내야 하고 유령의 명령에 복종해야 한다.

나는 우리를 우리 자신으로부터 분리시키는 타자성의 무게를 충분히 깨닫고 있다. 내가 거부하는 것은 타자성에 어떤 시선을 부여하는 것이고, 그 목소리에 어떤 윤리적 명령의 힘을 부여하려는 것이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나는 이타성의 형태들의 다양체를 <타자성>의 인격화를 통해 실체로 전환시키는 것을 거부한다. 이것은 궁극적으로 초월의 한 형태를 복귀시킨다. 똑같은 것이 시간적인 분리-접속(dis-junction)이라는 쟁점에도 해당된다. 또 나는 시대착오, 반복 등등의 쟁점도 다루었다. 하지만 나는 이런 쟁점들을 이음매에 어긋난 시간이라는 관념으로 통일시키는 것을 거부한다. 오히려 나는 이것들을 시간성의 형태들 및 선()들의 다양체들에 입각해 사고한다. 내가 그렇게 보고 있듯이, 불화의 논리에서 여러분은 분리-접속의 존재론을 구축하는 대신에 분리-접속을 접속(junction)의 특정한 형태로서 사고한다(그리고 접속을 분리-접속의 한 형태로서 사고한다).

나는 이 논점의 이면(裏面)을 잘 알고 있다. 만일 시간적 분리접속의 원초적 구조가 없다면, 어떤 해방적 완수의 지평을 생각하기란 어렵다. 달리 말하면, 만일 유령이 없다면, 메시아도 없다. 내가 메시아적 명제를 세속적(prosaic) 용어로 번역한다면, 다음과 같은 질문이 뒤따를 것이다. , 정치를 그 고유한 논리 위에 정초하는 것이 가능한가? 우리는 정치적 주체화의 과정에 의미를 부여하기 위해서 특정한 시간성의 틀을, ‘비실존적인 것의 실존의 시간성의 틀을 짜야 하지 않는가?

나는 어떤 미래의 틀을 짜는 것이 미래의 가능성의 조건이라기보다는 정치적 개입에 뒤이어 일어난다고 말함으로써 논점을 뒤집고 싶다. 혁명가들은 인민의 미래를 발명하기 전에 인민을 발명했다. 게다가 우리의 논의 맥락인 정치적인 것의 윤리화라는 맥락에서 우리는 우선 미학의 정치의 특정성에, 정치적 개입의 특정성에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데리다가 유령들을 효과성이념성의 이항대립과 대립시키면서 유령들에 관해 말했을 때, 나는 픽션[허구]에 관해 말하기를 더 좋아[319]한다. 내가 보기에 픽션이라는 이 용어는 똑같은 역할을 하지만 비실존자의 부분[]을 실체화하는 것을 막는다. 내게 비실존자는 무엇보다도 말들, 텍스트들, 픽션들, 서사들, 등장인물들이다. , 유령들의 삶이나 정신Geist의 삶이 아니라 종이의 삶(paper life)이다. 그것은 눈에 안 보이는 것(the unapparent)의 현상학이라기보다는 특정한 외양의 시적인 틀짜기이다. 그러므로 데리다가 존재론(ontology)보다 더 넓고 더 강력할 수 있는 유령론(hauntology)’의 틀을 짜자고 제안할 때, 나는 시학에 입각해 말하기를 더 좋아한다. 존재론 혹은 유령론은 어떤 정치적 개입이나 한 편의 시(poem)만큼이나 픽션적이다. 존재론은 정치, 미학, 윤리 등등에 어떤 기반을 제공한다고 주장하는 반면, ‘유령론은 이런 포부(pretension)를 탈-구축한다고 칭한다. [그러나] 내가 보기에, ‘유령론은 근본주의적 기획을 무너뜨리는 타자성을 실체화하는 것을 대가로 그렇게 한다. 이제 <타자성>의 실체화는 윤리적기획(enterprise)의 핵심에 있다. 나는 주류의 윤리적 추세와 이것의 명백히 반동적인 정치로부터 데리다를 분리시키는 거리가 무엇인지를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우리가 이 추세에서 [진정으로] 탈출하길 원한다면, 나는 타자성이 탈-실체화, -존재론화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것 덕분에 나는 내 작업의 의미나 내 담론의 지위를 둘러싼 몇몇 질문에 대답할 수 있게 됐다. 정초하거나 탈구축하는 대신에 내가 언제나 하려고 노력했던 것은 담론의 장르와 수준들을 분리시키는 경계선들을 흐릿하게 하는 것이다. 나는 역사의 이름들(1992)[주11]에서 지식의 시학이라는 개념을 제안했다. 지식의 시학이 기성의 지식(역사, 정치학, 사회학 등등)을 시적인 조작(묘사, 내레이션, 은유화, 상징화 등등)으로 거슬러 올라가 추적하여 이런 조작의 대상을 나타나게 하고 이런 조작의 명제에 의미와 적실성을 부여하려고 하는 한에서, 지식의 시학은 일종의 탈구축적 실천으로 보일 수도 있다. 과학적 담론을 시적인 계기로 이렇게 환원한다는 것은 과학적 담론을 말하는 존재들의 평등으로 환원한다는 것을 뜻한다는 점이 내게는 중요하다. 내가 자코토에게서 빌려온 지능의 평등이 지닌 의미가 이것이다. 그것은 지능의 모든 현시가 다른 무엇인가(any other)와 평등하다는 뜻이 아니다. 무엇보다도 이것은 똑같은 지능이 시적 픽션을, 정치적 개입을, 혹은 역사적 설명을 행한다는 것을 뜻한다. 똑같은 지능이 문장들 일반을 만들[320]고 이해한다는 것을 뜻한다. 정치사상, 역사, 사회학 등등은 그들의 대상을 가시적으로 만들기 위해, 그리고 그 대상들 사이의 연결을 창출하기 위해 언어적 혁신이라는 공통적인 힘을 사용한다. 철학도 그렇게 한다.

[주11] Jacques Rancière, Les noms de I'histoire: Essai de poetique du savoir, Paris: Seuil, 1992. [The Names of History: On the Poetics of Knowledge, H. White & H. Melehy (trans.). Minneapolis, MN: University of Minnesota Press, 1994. ; 역사의 이름들, 안준범 옮김, 울력, 2011.]

내게 이것은 철학이란 담론의 다른 형태나 합리성의 다른 영역을 정초하는 담론이 아니라는 것을 뜻한다. 모든 분과학문들은 경계선 내부에서 자신들의 객관성의 장의 특정성에 걸맞은 특정한 방법론이라는 가정 위에서 자신들의 권위를 진술하는데, [내게] 철학은 이런 경계선들을 해체하는 담론이다. 나의 철학 실천은 정치에 관한 내 생각과 나란히 이루어진다. 그것은 분과학문들과 담론적 능력의 특정성을 언어적 능력과 시적 발명의 평등주의적수준으로까지 거슬러 올라간다는 의미에서, -아르케적이다. 이런 실천은 내가 철학을 특정한 전쟁터로 받아들인다는 것을 함축한다. 아르케아르케를 탈은폐하려는 힘겨운 노력이 단순히 그 반대로 이어지는 장, 다시 말해 모든 아르케의 우연성이나 시적 성격을 탈은폐하는 것으로 이어지는 그런 장으로 받아들인다는 것을 내포한다. 만일 내가 한 작업의 상당수가 플라톤에 대한 재독해로서 정교화됐다면, 그것은 플라톤의 작업이 이 전쟁터의 가장 정교화된 형태이기 때문이다. 국가는 목적지의 불평등이 고귀한 거짓말이라고 말하며, 장인이 다른 곳에 있는 것을 막는 시간의 부족다른 곳 자체의 금지임을 이해할 수 있게 해준다. 파이드로스는 기록의 금지와 민주주의의 금지가 연결돼 있음을 보여준다. 그것은 매미-철학자들의 공간-시간과 노동자들의 공간-시간을 분리하는 근본적인 선을 그으며, 우리에게 <진리>에 관한 진리를 말해주겠다고 약속한다. 하지만 <진리>에 관한 진리는 신화로서 말해질 수 있을 뿐이다. 우화의 평등이 담론들과 입장들의 위계 전체를 뒷받침한다. 만일 철학의 특권이라는 게 있다면, 그 특권은 <진리>에 관한 진리가 허구임을 우리에게 일러주고, 또한 철학이 세우는 바로 그 위계를 해소하는 그런 솔직함에 놓여 있다.

내가 이해하는 바로는 철학의 평등주의적 실천이란 아르케아르케, 권위의 권위를 구성할 수 있는 시적 행위의 필연성인 정초의 아포리아를 상연·연출하는 실천이다. 나는 내가 이 과제에 헌신한 유일한 사람이 아님을 잘 알고 있다. 그렇다면 내 입장의 종별성[특정성]은 무엇일까? 그것은 내가 아포리아의 원리를 존재론화하기를 거부한다는 것이다. 어떤 사상가들은 [321]초월이라는 유령을 떠올리게 할 위험을 무릅쓰고 그것을 차이라고 말한다. 다른 사상가들은 그것을 <존재>의 무한성이나 <존재>의 다양체와 동일시한다. 나는 지금 하트와 네그리의 다중이나, <존재>란 순수 다양체라고 하는 바디우의 이론을 염두에 두고 있다. 네그리와 바디우 둘 다 권위의 해체(unbinding)[주12]를 해체(unbinding)로서의 <존재>의 법칙에 정초하려고 한다. 하지만 이런 지점에서, 내가 보기에 이 두 사람은 권위의 원리를 회복하는 몇 가지 교묘한 속임수를 대가로 해서야 실천의 특정한 영역들에서 해체하는(unbinding) 권력의 상연·연출을 완수할 수 있다. 나는 아포리아의 원리를 수립하거나 <평등>아르케로 삼고 싶은 것이 아니라, <평등>을 계속해서 입증되어야 하는 전제로 삼고 싶다. , 평등의 특정한 무대를 여는 입증이나 상연·연출로 삼고 싶은 것이다. 이 무대는 경계선들을 가로지름으로써, 그리고 담론의 형태 및 수준과 경험의 영역들을 상호 연결함으로써 세워진다.

[주12] [옮긴이] 이 글에서 의미가 석연치 않은 단어 중 하나가 이것이다. 영어를 최대한 불어와 가깝게 연결한다면 탈연결이나 탈유대(déliason)를 뜻하는 것이 아닌가라고 추정할 수 있을 뿐이다

내가 불일치를 사고하는 논리를 재구축하려 한 것은 우리가 어떻게 사고해야 하고 행동해야 하는가를 말하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나는 그저 내가 왜 그런 길을 걸었는지를 설명하려고 했을 뿐이다. 나는 나의 철학 실천이 내 작업에 대한 독해를 어렵게 만든다는 점을 깨닫고 있다. 이 때문에 나는 이에 대해 논의할 수 있게 나를 받아준 사람들에게 감사드린다. 마무리 할 겸, 요점은 내가 무엇을 썼는가를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강조하고 싶다. 오히려 요점은 오늘날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쟁점들에 관한 논의에서 우리가 함께 나아가고 있다는 점이다. 합의적 사고와 잘못의 윤리적 절대화 사이에 새로운 길을 엮어내려고 하는 사람들에게는 토론의 여지가 훨씬 더 많이 있다.

 

인용문헌

Agamben, Giorgio (1998), Homo Sacer: Sovereign Power and Bare Life, trans. Daniel Heller-Roazen, Stanford: Stanford University Press. [조르조 아감벤, 호모 사케르 : 주권 권력과 벌거벗은 생명, 박진우 옮김, 새물결, 2008.]

Badiou, Alain (2005), Metapolitics, trans. Jason Barker, London: Vers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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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존재론화로서의 랑시에르의 정치철학

 

이 글은 2003년에 발표된 것임에도 불구하고 시의성을 잃지 않고 있을 뿐 아니라, 오늘날의 이론 지형을 감안하면 그 중요성이 더 커지고 있다. 제목을 보면 미학과 정치에 대해 다루는 것처럼 보이나 사실은 정치에 대한 자신의 사유에 대해 가해진 비판에 대해 응답하고 아렌트, 아감벤, 리오타르, 데리다, 네그리, 바디우 등을 비판하면서 이들과 어떻게 다른지를 적극적으로 제시하는 글이다. 그리고 이 비판에서 핵심적인 것이 존재론이라는 쟁점이다. 이 중에서 아렌트, 아감벤, 리오타르에 대한 비판은 다른 여느 글보다 여기에서 분명하게 전개되고 있고, 또 아감벤에 대한 비판의 적실성은 다른 글에서 이미 검토한 바가 있기에 여기서는 이 존재론과 관련시켜 네그리(와 라차라토)의 랑시에르 비판의 적실성과 데리다에 대한 랑시에르의 비판적 논의를 검토해보려 한다.

네그리에 대한 랑시에르의 비판은 여러 곳에서 이뤄졌다. 2008년 한국을 방문했을 때의 강연인 동시대 세계의 정치적 주체화 형태들도 그렇고, 인권의 주체는 누구인가?라는 글, 인민이냐 다중이냐라는 글 등도 그렇다. 그렇다면 여기서는 네그리 등의 역비판을 살펴보는 것에서 출발하자. 네그리 등의 주장은 표현은 달라도 대체로 이렇게 정리할 수 있다. , 자신들은 현대 자본주의에서 우세한 노동형태가 인지노동이며, 주된 생산수단은 일반지성이며, 랑시에르에게 지능(지적 능력)의 해방을 뜻하는 모두가 모든 것을 말한다는 것은 자본의 명령 아래에 있는 노동으로서 현대자본주의에서 이미 실현되고 있음을 드러냈다. 그런데 랑시에르는 모두가 모든 것을 말한다는 것에서 정치를 발견하고 만족해버린다. 따라서 랑시에르에게는 자본주의나 노동에 대한 분석이 결여되어 있다. 이를 네그리는 랑시에르에게는 마르크스가 없다고 표현한다.

이런 네그리 등의 비판은 몇 가지 점에서 재고돼야 한다. 먼저 랑시에르에게 정치란 모두가 모든 것을 말한다(tout parle de tout)’는 것에 있는가의 문제이다. 이 글에서 랑시에르는 자신의 작업이 고전으로의 복귀가 아니라고 강조한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말하는 동물에서 출발한다는 것은 인간들이 정치적 삶에 대한 기질을 갖고 있다는 인간학적 정의로 회귀한다는 뜻이 아니다. 정치는 말하고 토론하는 인간 능력에 기초를 두고 있다는 관념으로 회귀하는 게 아니라는 얘기다.” 그런데도 네그리 등은 여기서 불일치불화의 문제를 제거함으로써 랑시에르가 하려는 바와는 정반대의 것을 읽어낸다. ‘모두가 모든 것을 말한다는 전제를 랑시에르가 갖추고 있다고 지적하는 것이다. 이는 랑시에르의 기획의 근본을 제대로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것을 뜻한다.

다음으로, ‘마르크스의 결여라는 지적에 대해서 재고해야 한다. 이는 두 개로 쪼개지지만 서로 연결되어 있다. 하나는 자본주의나 노동에 대한 분석의 결여와 관련된 사회적인 것의 지위에 대해서이고, 다른 하나는 역사적-존재론적 분석의 문제이이다.

전자와 관련해, 라차라토는 부채인간 등에서 이렇게 주장한다. “랑시에르와 바디우에게 정치는 경제에 대해 독립적이다. 이는 그들이 경제및 자본주의 일반으로부터 만들어낸 이미지가 경제학자들 스스로가 고안해 낸 희화적 이미지이기 때문이다. 이들의 혁명·정치 이론이나 단순한 경제 이론이 언급하는 바와는 정반대로, 자본주의의 힘은 경제’(및 커뮤니케이션, 소비, 복지국가 등)를 다양한 측면에서 주체성의 생산과 결합시키는 능력에 있다.” 따라서 랑시에르처럼 “‘정치적 주체화를 경제로부터 연역할 수 없다고 말하는 것은 이른바 순수정치의 환상을 보여준다.” “어떤 것에도 연결되어 있지 않은 주체화는 자신의 존재를 위한 필연적 정합성에 결코 도달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와는 달리 정치적 주체화와 경제 사이의 역설적 접합 과정에 의문을 제기하는 것이 필요한데, 이것은 정치적 구성 및 실험을 위한 다양한 장을 열어주며”, “이는 주체화의 지속 및 이에 필요한 일관성의 획득을 위해서는 경제, 사회, 정치를 다시금 횡단하고 재배치하는 작업을 통한 일정한 단절이 요청되기 때문이다.”

이 글에서 랑시에르는 거듭 “‘순수정치란 없다고 말한다. 그런데 라차라토는 랑시에르가 거꾸로 순수 정치의 환상을 보여준다고 한다. 랑시에르가 순수정치란 없다고 말할 때, 그것이 겨냥하는 표적은 아렌트이다. 사회적인 것으로부터 절연된 정치 자체의 고유성을 찬양하는 것, 국가제도와 통치적 실천이 정치(적인 것)의 전부라고 보는 견해이다. 그런데 라차라토는 랑시에르가 아렌트와 동일한 문제점, 순수정치의 덫에 빠져 있다고 지적한다.

바디우와 랑시에르에게는 정치적인 것은 있으나 자본주의가 없습니다. 정치적인 것은 있으나, 그건 전-자본주의적입니다. 마르크스 대신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가 있습니다. 생산이 없는 거죠. 공장이 없는 겁니다. 여기서 공장은 인간, 기계, 기호의 배치물(assemblage)의 현동화(actualisation)를 뜻합니다. 이것들은 오늘날 생산과 마주칠 뿐 아니라, 모든 사회적 관계에 있습니다. 또한 복지국가에도 있고 이것의 다양한 현시형태에도 있습니다. 저는 바디우와 랑시에르에게는 기계개념이 없다는 사실을 항상 지적했습니다. 단어만 없는 게 아니라, 기술이나 과학에 대한 언급도 없습니다. (사회적 기계와 기술적 기계라는 두 가지 의미 모두에서) 기계는 다른 비판적 이론들에서도 사라지고 있습니다. 기계가 오늘날 도처에 있고, 우리의 일상생활의 모든 몸짓, 표현, 행동을 수반하는 데도 말입니다. 저는 언어 개념, 그리고 분석 철학에서의 언어적 전회 개념이 큰 문제를 낳았다고 생각해요. 왜냐하면 이것들은 제가 보기에는 유물론적이지 않은 주체화의 과정을 가리키기 때문입니다. 자본주의에서 주체화는 항상 기술적이고 사회적인 기계 때문에, 또 이것들과 더불어 일어납니다. 자본은 사회적 관계이며, 권력관계입니다. 하지만 사회적·기술적 기계들에 의해 조력을 받는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자본주의의 특정성입니다. 자본은 인간들사이의 단순한 관계가 아닙니다. 아렌트에게서처럼 (혹은 랑시에르에게서처럼) 상호주체적인 관계인 것이 아닙니다. 이런 관계에서 행동은 물질의 어떤 요소도 결여합니다. 우리는 마르크스의 기계에 관한 단장충실해야 합니다. 이런 이유 때문에 저는 바디우와 랑시에르에게서 발견되는 정치적 주체화가 관념론적이라고 생각합니다. 바디우에게 계급투쟁은 추상적인 용어로 사유됩니다. 수학이 그의 작품집(anthology)입니다. 바디우와 랑시에르는 경제가 마치 정치의 다른 것인 양 말하는 반면, 정치적인 것은 항상 경제에 의해 재정의됩니다. 자본주의는 오직 이것뿐입니다. ‘우리의 운명은 경제이다.’ , 권력관계인 것이고, 권력을 관리하는 자들과 권력에 종속된 자들 사이의 관계인 것이며, 종속된 자들이 상황을 전복하고 뒤집어버릴 수 있는 가능성이 있는 그런 관계인 것입니다. 주체화는 주어진 것으로서의 민주주의를 둘러싸고 일어나는 게 아니라, 투쟁을 통해 민주주의적이 되는 착취와 지배의 기계적 과정에서 출발합니다.” 그런데 이 문제 혹은 비판은 다음의 모습으로도 변주된다. 가령 랑시에르에게 영화와 회화의 차이는 무엇에 있는가, 과연 이런 차이를 랑시에르의 틀을 통해 제시할 수 있을 것인가 등이 그것이다. 그리고 이런 비판은 모습은 달리하지만, 옮긴이도 대체로 공감하는 바가 있다.

그런데 이 논의는 랑시에르가 이 글에서 지속적으로 반대하는 존재론의 문제와 연결된다. 존재론()에 대한 랑시에르의 불편한 심기와 반대편에 놓여 있는 비판은 랑시에르가 이른바 치안과 정치를, 혹은 적대를 역사 속에 존재론적으로 자리매김 할 수 없다는 비판과 관련된다. 네그리는 이렇게 말한다. 랑시에르에게 해방적 행위는 모든 역사적 규정(determinazione)으로부터 스스로를 떼어내는 것, 구체적인 시간성으로부터의 독립을 선언하는 것이다. 랑시에르에게 정치는 역설적인 행위이다. , 정치는 주체를 역사·사회·제도들로부터 분리시키는 행위이지만, 실제로 역사·사회·제도들에 대한 참여 없이는 정치적 주체에 관해 아무런 말도 할 수 없기 때문이다(이것은 근본적으로 모순적이다).” , 랑시에르는 적대를 초역사적인 차원에서 상정하기 때문에 정치를 구성하는 역량을 존재론적으로 조건 짓지 못하며, 바로 이 때문에 이런 역량을 그 집단성(공통적인 것the common)에서 포착할 수도 없다는 비판이다. “랑시에르의 연구에서 노동의 해방에 대한 전망은 실제로 의식의 본래성의 차원에서 전개되는 것이며, 따라서 주체성은 어디까지나 개인[주의]적 차원에 있는 것으로 위치지어지기에, 여기에는 주체성의 생산을 공통적인 것으로서 포착할 가능성이 애초부터 들어설 자리가 없다.” 그러나 네그리가 보기에 해방의 담론은 존재론에 입각하지 않으면 한낱 유토피아에, 개인의 꿈에 머물 수밖에 없으며 사물을 있는 그대로 내버려두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네그리는 여기서 번지수를 잘못 짚었다. 네그리에게 존재론은 칼 마르크스를 가리키지만, 랑시에르에게 존재론이란 실체화를 가리킨다. 데모스, 인민, 민중, 노동계급, 프롤레타리아트 등등을 모두 실체화하여 다루는 것이 랑시에르에게는 문제이다. 랑시에르에게 이것들은 모두 텅 빈 이름들이다. 이것들을 실체화하지 않고 이렇게 다룰 때에야, 계산착오의 문제, 그것도 구체적이고 특정한 계산착오들을 드러낼 수 있다. 그렇지 않으면, 정치적 불일치를 논의할 장 자체가 사라져버린다. 이는 결국 부르디외 식의 사회계급론이 되어버리며, 치안과 정치를 내재성의 평면에서 논의할 수도 없게 되어 버린다. 그러니까 랑시에르는 네그리의 비판과 달리 적대를 초역사적인 차원에서 상정하지 않는다. 네그리가 내세우는 다중이 랑시에르에게 불편한 이유는, 이 다중이 인민이나 노동계급과는 또 다른 실체로서 자리매김 되기 때문이다. 더욱이 네그리가 다중을 모던-포스트모던이라는 직선적 시간축을 그대로 받아들여 논의를 전개하는 것이 랑시에르에게는 불편한 것이다.

그리고 바로 이 지점에서 랑시에르에게 데리다는 네그리보다 더 높은 지위를 차지한다. 두 가지 때문이다. 먼저 네그리는 시간론을 논의했음에도 불구하고 구체적인 분석에서 이런 시간론은 실종되고 (라차라토와 마찬가지로) 상당히 단선적 시간관을 보여준다. 이에 반해 데리다는 시대착오’, 즉 시간의 뒤얽힘이라는 측면을 중시한다. 알다시피 랑시에르의 예술의 세 가지 체제는 이런 직선적 시간론의 탈구축이다. 그렇지만 랑시에르는 데리다가 시대착오, 반복 등등의 쟁점을 여전히 “‘이음매에 어긋난 시간이라는 관념으로 통일시킨다고 비판한다. 그런데 여기서 문제가 생긴다. 이에 대한 논거가 부족하다는 것이다. 어찌보면 랑시에르의 시간관은 (말과 사물에서의) 푸코의 시간관과 일치하는 면이 있다. 그렇다면 이것의 논거는 아마도 푸코의 시간관과 데리다의 시간관의 연결-차이에서 찾을 수도 있겠으나, 현재로서는 그 실마리가 상당히 부족하다. 따라서 이것은 향후 더 고민해야 할 지점으로 남을 것이다.

높이 평가하는 두 번째 이유는 존재론의 문제와 관련된다. 랑시에르가 보기에 데리다는 (마르크스의 유령들에서) 존재론 대신 유령론을 내세우면서 실체화의 위험을 피하려고 했기 때문이다. 이는 특히 타자성의 문제와 불가분하다. “나는 우리를 우리 자신으로부터 분리시키는 타자성의 무게를 충분히 깨닫고 있다.” 여기서의 타자성은 비실존자(the inexistent)’, 정체성[동일성]을 탈구축하는 것, 어떤 의미에서는 우리외부의 타자성, 우리라는 동일성을 깨뜨리고 위협하는 타자성이다. 여기서 문제는 이 타자가 정치의 외부, 민주주의의 외부에 놓여 있는 것인가 아닌가에 있다. 데리다가 보기에 민주주의에 부족한 것은 타자성이며, 이는 외부에서 올 수밖에 없다. 내가 제기하는 이의는 간단하다. 타자성이 외부로부터 정치 안으로 도래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정치는 자신의 고유한 타자성, 즉 자신의 고유한 이질성의 원칙을 지니고 있다.” 랑시에르가 정치와 치안은 둘 다 외부가 없다고 말할 때 의미하는 바는 바로 이것이다. 그에게 모든 것은 내재성의 평면 안에서 작동된다. “내게 민주주의적 실천이란 아무런 몫도 없는 자들(이는 배제된 자들이 아니라 아무나 혹은 누구나를 뜻한다)의 몫을 기입한다는 것이다. 이런 기입은 신참자들에 해당되는 주체들에 의해 이루어진다. 신참자들은 새로운 대상들이 나타나 공공의 관심사가 되고 새로운 목소리가 출현하고 들리는 것을 허용한다. 이런 의미에서 민주주의는 타자성을 다루는 많은 방법들 중 하나이다.” 반면 환대를 논하는 데리다에게 타자(유령이든 아브라함의 신이든)란 무엇보다 책임·응답 가능성(responsibility)과 관련된다. 이것은 “‘타자성에 어떤 시선을 부여하는 것이고, 그 목소리에 어떤 윤리적 명령의 힘을 부여하려는 것이다. 따라서 데리다의 유령론 역시 타자성을 실체화하는 데 머물고 있다는 점에서 크게 다르지 않다. 더욱이 이 타자성(레비나스 식의 것과는 다르지만) 윤리적 기획으로 자연스럽게 이동한다. “그가 마르크스의 유령들에서 말했듯이, 우리는 유령의 실재성(reality)에 관해서는 아무것도 모른다. 하지만 우리는 유령이 우리를 쳐다본다는 것, 유령이 우리를 보고 있고 우리에게 말을 한다는 것을 안다. 우리는 유령의 정체성은 모르지만, 유령의 시선을 견뎌내야 하고 유령의 명령에 복종해야 한다.” 그래서 랑시에르는 줄구장창 “‘타자성이 탈-실체화, -존재론화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렇다면 내 입장의 종별성[특정성]은 무엇일까? 그것은 내가 아포리아의 원리를 존재론화하기를 거부한다는 것이다. 어떤 사상가들은 초월이라는 유령을 떠올리게 할 위험을 무릅쓰고 그것을 차이라고 말한다. 다른 사상가들은 그것을 <존재>의 무한성이나 <존재>의 다양체와 동일시한다.” 앞의 것이 데리다를 겨냥한 것이라면 뒤의 것은 각각 바디우와 네그리를 겨냥한다. 그러면서 다시 자신의 원칙을 피력한다. “나는 아포리아의 원리를 수립하거나 <평등>아르케로 삼고 싶은 것이 아니라, <평등>을 계속해서 입증되어야 하는 전제로 삼고 싶다. , 평등의 특정한 무대를 여는 입증이나 상연·연출로 삼고 싶은 것이다. 이 무대는 경계선들을 가로지름으로써, 그리고 담론의 형태 및 수준과 경험의 영역들을 상호 연결함으로써 세워진다.”

랑시에르는 이렇게 글을 마친다. “요점은 내가 무엇을 썼는가를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강조하고 싶다. 오히려 요점은 오늘날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쟁점들에 관한 논의에서 우리가 함께 나아가고 있다는 점이다. 합의적 사고와 잘못의 윤리적 절대화 사이에 새로운 길을 엮어내려고 하는 사람들에게는 토론의 여지가 훨씬 더 많이 있다.” 그러나 랑시에르가 원하는 바가 실현되기 위해서는 여전히 이해하는것이 중요할 것이다


Posted by 상겔스 상겔스

Jacques Rancière, “Contemporary Art and the Politics of Aesthetics”, Communities of Senses : Rethinking Aesthetics and Politics, Duke University Press, 2009


현대예술과 미학의 정치


Jacques Rancière, “Contemporary Art and the Politics of Aesthetics”, Communities of Senses : Rethinking Aesthetics and Politics, Duke University Press, 2009, pp.31-50.


저는 감각의 공동체라는 문구를 몇몇 공통의 감정에 의해 형성된 집단성을 뜻하는 것으로 사용하지 않습니다. 저는 이 문구를 사물이나 실천을 똑같은 의미 아래에서 묶어내는 가시성과 이해 가능성의 틀[프레임]로 이해합니다. 그러니까 공동체의 어떤 감각을 형성하는 것 말입니다. 감각의 공동체는 가시성의 실천들, 형태들과 이해 가능성의 패턴들을 함께 묶는 공간과 시간을 오려내는 것입니다. 저는 이런 오려내기와 이런 연결을 감각적인 것의 나눔이라고 부릅니다.

그림을 그리고 퍼포먼스를 하고 춤을 추고 음악을 연주하는 것과 같은 무수한 기술의 산물들이 가시성의 특정한[종별적] 형태로 파악되는 한에서(이 형태는 이런 기술들을 공통에 집어넣으며, 이런 연결로부터 공동체의 특정한[종별적] 의미를 틀짓습니다), 예술이 존재합니다. 인류는 수천년 동안 조각가, 댄서, 음악가를 알고 있었습니다. 인류가 단수이자 대문자 예술자체를 알게 된 것은 고작 2세기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공간의 어떤 분할로 알려졌습니다. 먼저 예술은 회화, , 멜로디 등으로 이루어져 있지 않습니다. 무엇보다 그것은 극장, 기념물, 혹은 박물관 같은 어떤 공간적 설정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현대예술에 관한 논의는 노동의 비교가치에 관한 것이 아닙니다. 그 논의들은 모두 공간화의 문제에 관한 것입니다. , 그림을 벽에 거는 것이 아니라, 바닥에 뿌려진 아이템들의 잡동사니나 조각을 대신해 비디오 모니터들을 설치하는 것에 관한 것입니다. 그 논의는 그림의 프레임이 전달하는 현전의 의미에 관한 것이자 그 자리를 대신하는 스크린이 전달하는 부재의 의미에 관한 것입니다. 그 논의는 벽이나 바닥, 프레임이나 스크린에서의 사물들의 분배를 다룹니다. 그것은 하나의 공간설정과 다른 공간설정, 혹은 현전과 부재 사이의 그런 변동에서 관건인 공통적인 것의 의미를 다룹니다.

물질적인 분할은 언제나 동시에 상징적인 분할이기도 합니다. 극장이나 미술관[박물관]은 주어진 어떤 것과 주어지지 않은 어떤 것 사이의 공존과 양립 가능성의 형태들을 형성합니다. 이것들은 가시적인 것과 이해 가능한 것 사이의, 혹은 공동체의 형태들이기도 한 현전과 부재 사이의, 내부와 외부 사이의, 또한 그 공간에서 세워진 공동체의 의미와 다른 경험 영역들에서 틀지어진 공동체의 다른 의미 사이의 공동체의 형태들을 형성합니다. 예술과 정치공동체들(polities) 사이의 관계는 의미의 두 공동체들 사이의 관계입니다. 이것은 예술과 정치가, 이것들이 서로 연결되어야 하는지 아닌지에 관해 우리가 논의해야만 하는 두 개의 영구적인 리얼리티들이 아니라는 것을 뜻합니다. 사실 예술과 정치는 둘 중 어떤 것이 우위를 차지하는 것이 아닌 공통적인 것의 우발적인 배치입니다. [대문자] 예술이 항상 있는 것이 아니듯이(비록 항상 음악, 조각, 춤 등등이 있겠지만), 정치공동체들이 항상 있는 것도 아닙니다(비록 항상 권력과 합의의 형태들이 있겠지만). 정치는 의미의 특정한 공동체들 사이에서 존재합니다. 그것은 인간 군집의 다른 형태들에 대한 불화적 대체보충으로서, 대상과 주체의, 자리와 정체성들의, 공간과 시간의, 가시성과 의미의 논쟁적 재분배로서 존재합니다. 이런 점에서 우리는 그것을 미적[감성적] 활동(aesthetic activity)’이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이때의 미적 활동은 국가 권력이 집합적 예술작품에 체내화incorporation되는 것, 발터 벤야민이 정치의 심미화(aestheticization)라고 불렀던 것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예술과 정치의 관계는 감각적인 것의 두 가지 나눔 사이의 관계입니다. 그것은 두 용어가 그 자체로 동일시된다는 것을 전제합니다. 예술이 그 자체로 존재하기 위해서는, 예술은 가시성의 실천, 형태와 이해 가능성의 패턴들을 함께 묶는 특정한 식별 체제 내에서 식별되어야만 합니다. 예술이 그 체제 아래에서 우리에게 존재하는 이 식별 체제는 하나의 이름을 갖습니다. 2세기 동안 그것은 미학이라고 불렸습니다. 예술과 정치의 관계는 더 정확하게는 정치의 미학과 미학의 정치 사이의 관계입니다. 미학의 정치라는 이 개념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요? 이 질문은 앞의 질문에 의존합니다. , 미학이라는 이름으로 우리는 무엇을 이해하는가?

미학이라는 이 용어는 어떤 종류의 의미의 공동체를 정의할까요? 이 화두에 관해서는 저명한 주인 서사(master narrative)가 있습니다. 그 주인 서사에 따르면, 모더니즘적 패러다임으로 알려진 미학은 자율성의 영역의 구성을 의미한다고 합니다. 그것은 예술작품들이 다른 경험 영역들에는 이질적인 제 나름의 세계 속에 고립되어 있다는 것을 뜻합니다. 이 세계에서 예술작품들은 형식, , 혹은 진리에서 매체에 이르기까지 타당성(validity)의 내적 규범에 의해 가치 평가됩니다. 이로부터 예술의 정치성에 관해 다양한 결론들이 끌려나올 수 있습니다. 첫째, 예술작품들은 순수 미의 세계를 형성하며, 이것은 아무런 정치적 관련성(relevance)도 갖고 있지 않다. 둘째, 예술작품들은 정치적 갈등을 넘어서 설정된 의미의 공동체들이라는 공상적인 꿈을 키우면서 일종의 이상적 공동체를 틀짓는다. 셋째, 예술작품들은 제 나름의 영역에서 근대적 기획의 핵심에 있는 것이자 민주적 혹은 혁명적 정치들에서 추구되는 것과 똑같은 자율성을 성취한다.

이런 서사에 따르면, 예술, 자율성, 근대성 사이의 식별(identification)20세기의 지난 몇 십년 동안 붕괴해 버렸습니다. 그것은 사회적 삶과 상품문화의 새로운 형태들이, 제작·재생산·의사소통의 새로운 테크닉들과 더불어, 예술적 제작과 테크놀로지적 복제, 자율적 예술작품과 상품문화의 형태, 고급 예술과 저급 예술 사이의 경계선을 유지하는 것을 불가능하게 만들었기 때문에 붕괴했습니다. 경계선을 이렇게 흐릿하게 만드는 것은 미학의 종언에 해당되어야만 합니다. 그 종언은 예를 들어 80년대에 핼 포스터(Hal Foster)가 편집한 반미학(현대미학사, 2002)이라는 책에서 강력하게 주장되었습니다. 이 책에는 중요한 논문들이 수록되어 있는데요, 더글러스 크림프(Douglas Crimp)가 쓴 미술관의 폐허에 관하여(On the Museum’s Ruins)라는 논문도 있습니다. 여기서 폐허가 된 미술관은 앙드레 말로의 벽 없는 미술관(museum without walls)’을 가리킵니다. 크림프는 말로의 미술관에서 사진이 이중적으로 사용되는 것에 대한 분석에 의존해 논증을 펼칩니다. 한편으로, ‘벽 없는 미술관은 사진 복제에 의해서만 가능해졌습니다. 사진만이 카메오[바탕색과 다른 색깔로 보통 사람의 얼굴을 양각한 장신구]가 원형 그림과 돋을새김 무늬의 다음 페이지에 자리를 잡게 해줍니다Photography alone allowed a cameo to take up residence on the page next to a painted tondo and a sculpted relief[사진술에 의한 재생에 의해서 카메오’[보석이나 조가비 등에 새기는 양각]는 색칠한 톤도’[원형 그림]와 조각한 부조의 다음 페이지에 자리잡게 된다, 92]. 혹은 사진만이 말로가 앤트워프에 있는 루벤스의 디테일을 로마에 있는 미켈란젤로의 디테일과 비교할 수 있게 해주었습니다. 사진은 예술의 정신을 현전시킴으로써 작품의 경험성을 대체할 수 있게 해주었습니다. 불행하게도 크림프는 말로가 치명적인 오류를 저질렀다고 주장했습니다. 말로는 책의 끝부분에서 사진이 더 이상 예술작품의 복제가 아니라 그 자체로 예술작품이라고 인정했습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말로는 미술관의 동질성을 구성했던 동질화하는 장치를 그 이질성으로 다시 던져버렸습니다. 미술관의 핵심부에서 이질성이 재수립되었습니다. 그러므로 미술관의 감춰진 비밀은 열림 속에서 전시될 수 있습니다. 이것이 로버트 라우센버그(Robert Rauschenberg)가 몇 년 후에 했던 것입니다. 라우센버그는 디에고 벨라스케스의 Rokeby Venus를 모기와 트럭 그림을 담은 캔버스의 표면에다, 혹은 헬리콥터 무리나 물기둥에다, 혹은 심지어 조지 워싱턴의 동상의 꼭대기와 자동차 열쇠에다 실크 스크린으로 인쇄했습니다. 사진을 통해서, 라우센버그의 모든 작품의 표면 위로 미술관이 퍼져나갔습니다. 말로의 꿈은 라우센버그의 농담이 되었습니다. 약간 충격적인[골치 아픈] 것은 라우센버그 자신이 분명히 농담을 알아듣지 못했으며 «인간»의 의식이라는 보고(寶庫, treasury)에 대한 말로의 케케묵은 구식 믿음을 도리어 긍정했다는 사실이었습니다Just a bit disturbing was the fact that Rauschenberg himself apparently did not get the joke and affirmed, in turn, Malraux's old-fashioned faith in the treasury of the conscience of Man.

 

<벨라스케스, Rokeby Venus>


<Robert Rauschenberg: Persimmon, 1964.

크림프의 글에 수록된 도판>


<Robert Rauschenberg: Break-Through, 1964.

크림프의 글에 수록된 도판>



저는 우리가 이렇게 질문한다면 방해[교란, 골치 아픔disturbance]에 대해 더 말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 논증이 증명한 것은 정확히 무엇인가? 만일 말로의 꿈이 라우센버그의 농담이 될 수 있다면, 왜 그 반대는 안 될까요? , 라우센버그의 농담은 말로의 꿈이 될 수 있을까요? 실제로, 이런 역전turnaround은 몇 년 후에 나타날 것입니다. , 80년대 말에, 저명한 우상파괴자이자 영화감독인 장-뤽 고다르는 포스트모던적 실천의 원형을 격찬했으며, 모든 것을 아무거나와 혼합했습니다. 그가 영화의 역사()에서 했던 것은 말로의 종이 미술관의 정확한 등가물이었습니다.

요점을 말하겠습니다. , ‘상상의 미술관에는 모순이 있습니다. 미술관이 동질성(homogeneity)과 등가를 이루는 것이라고, 미술관이 예술작품의 유일무이함에 바쳐진 사원이라고 여러분이 우선 가정할 때에만 그 모순은 포스트모던적 단절에 대한 증언입니다. 둘째, 이와 반대로 사진은 이질성(heterogeneity)을 뜻한다고, 사진은 무한한 복제의 사소함triviality[무한한 복제가 사소한 문제라는 것]을 뜻한다고 가정할 때에만 그 모순은 포스트모던적 단절에 대한 증언입니다. 셋째, 사진만이 우리가 카메오를, 스키타이식 명판(Scythian plaques), 미켈란젤로를 똑같은 페이지에 집어넣고 Rokeby Venus를 자동차 열쇠나 급수탑(water tower)과 더불어 캔버스에 놓을 수 있게 해준다고 가정할 때에만 그렇습니다. 만일 이 세 진술이 참이라고 입증된다면, 여러분은 사진술을 통한 상상의 미술관의 실현이 미술관 자체의 붕괴를 뜻한다고, 이런 실현이란 미학적 동질성을 산산조각 내는 이질성의 승리를 표시한다고 결론내릴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 요점들이 모두 참이라는 것을 우리는 어떻게 알까요? 우리는 우선 미술관이 동질성을 뜻한다는 것을, 미술관이 예술작품의 유일무이함과 아우라적 고독에 바쳐진다는 것을 어떻게 알까요? 우리는 이 아우라적 고독이 19세기와 20세기에 예술관을 길러냈다는 것을 어찌 알까요? 이 문제를 고급 [대문자] ‘예술에 대한 최고의 찬양의 시대인 대략 1930년대로 거슬러 올라가 추적해 봅시다. 그 당시에 헤겔의 제자들은 그의 미학강의를 출판했습니다. 동시에 프랑스에서는 <마가쟁 피토레스크> 같은 대중잡지들이 세계 예술의 보물들을 더 넓은 독자층에게 제공하기 위해서 석판인쇄술에 의한 복제를 사용하기 시작했습니다. 또한 동시에 오노레 드 발자크는 그의 이름을 알린 첫 번째 소설 야생 나귀 가죽(The Wild Ass’s Skin)을 출판했습니다. 소설의 도입부에서 주인공인 라파엘은 골동품 상점의 전시실에 들어가는데, 그가 본 것은 이런 것입니다.


악어, 원숭이, 배가 잔뜩 부른 보아뱀이 스테인드글라스 창문을 보고 활짝 웃었다. 이것들은 조각된 반신상에 막 달려들고 옻칠한 제품을 쫓아다니거나 샹들리에로 기어오르려고 하는 것처럼 보였다. Jaquetot 부인이 나폴레옹을 그려 넣은 세브르의 꽃병은 세소스트리스[Sesostris, 그리스 전설에서 아시아-아프리카의 여러 지역을 정복했다고 전해지는 고대 이집트 제12왕조의 왕]에게 바친 스핑크스 옆에 세워져 있었다. 라투르는 드 바리 부인을 머리 위에 별이 있고 벌거벗은 채 구름에 감싸여 있는 것으로 그렸는데, 인디언의 긴 담뱃대를 욕정에 휩싸여 물끄러미 쳐다보는 것 같았다. 위풍당당하고 미동도 하지 않은 채로 있던 아우구스투스 황제의 눈앞에 공기 기계가 쑥 내밀어졌다. 평생 동안 무감각한 잉글랜드 부시장과 네덜란드 시장의 몇몇 초상화들은 이토록 엄청나게 많은 골동품들에 굴하지 않고, 이것들을 냉담하고 탐탁찮게 쳐다봤다.

Crocodiles, apes and stuffed boas grinned at stained glass-windows, seemed to be about to snap at carved busts, to be running after lacquer-ware or to be clambering up chandeliers. A Sevres vase on which Madame Jaquetot had painted Napoleon was standing next to a sphinx dedicated to Sesostris.... Madame du Barry painted by Latour, with a star on her head, nude and enveloped in cloud, seemed to be concupiscently contemplating an Indian chibouk. . . . A pneumatic machine was poking out the eye of the Emperor Augustus, who remained majestic and unmoved. Several portraits of aldermen and Dutch burgomasters, insensible now as during their life-time, rose above this chaos of antiques and cast a cold and disapproving glance at them.'1


이 서술은 라우센버그의 콤바인 페인팅Combine paintings을 완벽하게 예견한 것처럼 보입니다. 서술은 상점과 미술관, 민속학적 박물관과 예술적 미술관, 예술작품과 일상적 소재들 사이의 비구별의 공간을 틀짓습니다. 그 모든 경계선들을 흐릿하게 만들기 위해서 그 어떤 포스트모던적 단절도 필요치 않습니다. 그것에 의해 산산조각 나기는커녕, 미학은 정확하게 이런 흐릿함을 의미합니다. 만일 사진이 문학으로 하여금 상상의 미술관을 성취하도록 도울 수 있었다면, 그것은 문학이 이미 그 페이지 위에서 사진이 나중에 캔버스 위에서 섞었던 것을 섞었기 때문입니다. 사진의 이 문자적 과거야말로 사진과 회화의 결합이 캔버스를 인쇄로 전환시켰을 때 일어난 것입니다.

 이것이 두 번째 요점입니다. , 사진이 이질성, 무한한 복제 가능성, 아우라의 상실과 등가적이라는 것을 우리는 어떻게 아는가? 크림프가 논문을 발표했던 같은 해에는 사진에 관한 중요한 논문이 출판되었습니다. 롤랑 바르트의 밝은 방이 그것입니다. 이 책에서 바르트는 사진에 관한 주류의 주장을 공개적으로 뒤집었습니다. 그는 사진을 유일무이함에 대한 증언으로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다음 해에 사진은 포스트모던 콜라주에 가장 적합한 인공물로 받아들여진 후에, 일종의 성 베로니카의 상징으로, 순수하고 유일무이한 현전의 아이콘으로 간주될 수 있었습니다.

 이것은 논점이 뒤집힐 수 있다는 것을 뜻합니다. 미술관은 동질성과 이질성을 동시에 의미합니다. 사진은 복제 가능성과 유일무이함을 모두 의미합니다. 사진적 복제 가능성은 제 나름의 힘에 의해 의미의 새로운 공동체로 향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더 넓은 가시성의 형태 안에서, 더 넓은 이해 가능성의 플롯 안에서 파악되어야만 합니다. 그것은 그 가능성을 현전의 한 형태나 의미의 한 절차의 증강이나 가치 저하에 적합하게 해야 합니다. 라우센버그의 사진 활용은 예술의 새로운 시대를 여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그저 평평함을 자율적 예술과 동일시하는 모더니즘적 동일시에 맞서는, 회화의 자족성에 맞서는 부가적인 증거를 제공할 뿐입니다. 그것은 스테판 말라르메의 순수시의 독자가 이미 알고 있는 것을 강조합니다. , 평평함은 매체의 종별성[특정성]을 의미하지 않으며, 그것은 교환의 표면을, 시의 시간과 공간 속에서의 선긋기 사이의, 행위와 형식 사이의, 텍스트와 드로잉이나 춤 사이의, 순수 예술과 장식 예술 사이의, 예술 작품과 오브제 사이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