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린 인간과 동물

L’aperto

L’uomo e l’animale

 

 

조르조 아감벤

김상운 옮김

영어판으로 1.

인용은 금함


11. 진드기

 

동물은 기억을 갖고 있으나 기록은 갖고 있지 않다.

하이만 슈타인탈

The animal has memory, but no memories.

Heymann Steinthal

 

 

윅스퀼의 책들은 때때로 도판들illustrations을 담고 있는데, 이것들은 고슴도치, 꿀벌, 파리, 개의 관점에서 인간 세계의 절편segment이 어떻게 보일 수 있는지에 대한 힌트를 주려고 한다. 비인간[인간이 아닌 것]의 눈으로 가장 친숙한 장소들을 갑작스럽게 보도록 강제되면, 이것은 독자에게 편치 않은disorienting[방향상실의] 효과를 산출할 것인데, 실험은 이런 효과를 거두기에 유용하다. 하지만 이런 편치 않음disorientation[방향 상실]은 윅스퀼이 진드기라는 이름으로 좀 더 널리 알려진 진드기류(Ixodes ricinus)의 환경을 묘사할 때 부여할 수 있었던 조형적인 힘figurative force[표현력]에는 결코 도달하지 못할 것이다. 윅스퀼의 서술은 확실히 위뷔 왕(Ubu roi)테스트 씨(Monsieur Teste)와 나란히 읽혀져야 할, 근대적 반인간주의의 극치를 이룬다.

서두는 목가적인 어조를 띠고 있다.

 

[길들여진] 개를 데리고 자주 숲과 덤불을 돌아다니는 시골주민이라면 반드시 그렇다고 말해도 좋을 정도로, 한 마리의 작은 동물과 친숙해지지 않을 수 없다. 이 작은 동물은 작은 가지에 매달려 인간인지 동물인지를 묻지 않고 먹잇감을 기다리며, 머리 위로 뛰어내려 그 피를 빨아먹는 것이다. 알에서 막 부화한 시점에서는 이 작은 동물은 아직 완전히 성충이 되지 않는다. , 다리 한 쌍과 생식기가 결여되어 있다. 그러나 이미 이 단계에서 이 놈은 풀잎 끝에서 매복해 있으며, 도마뱀 같은 냉혈동물을 습격하는 방법을 알고 있다. 탈피를 몇 번이나 되풀이하고, 부족했던 기관을 얻게 되면, 오로지 온혈동물을 사냥감으로 삼아 사냥에 나서게 된다. 암컷은 산란기에 들어가면, 알맞은 높이에서 재빠르게 아주 작은 포유동물 위에 뛰어내리거나, 아니면 더 큰 대형 동물에 의해 부딪치게 되는 것, 여덟 개의 다리를 사용해 잔가지의 끝에까지 기어오르는 것이다(Uexküll, 85-86).

 

윅스퀼의 지시를 따르면서, 여름의 어떤 갠 오후에 덤불에 매달린 진드기를 상상해보자. 사방팔방이 형형색색의 들꽃이 내뿜는 향기, 꿀벌과 다른 곤충들이 윙윙거리는 소리, 새들의 지저귐에 둘러싸이면서 햇볕을 쬐고 있는 듯하다. 하지만 여기서 목가(牧歌)는 이미 끝났다. 진드기는 이런 모든 것을 전혀 지각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눈이 없는 이 동물은 빛에 대한 껍질의 일반적인 감각만의 도움을 빌려 매복하는 방법을 찾아낸다[이 동물에는 눈이 없다. 그래서 매복하는 장소는 밝음에 대한 몸 껍질의 감각만으로 찾고 있는 것이다]. 이 눈멀고 귀먹은 강도는 후각을 통해서만 사냥감이 접근하는 것을 알아챈다. 모든 포유류의 피지모낭sebaceous follicles에서 발산되는 낙산(酪酸)butyric acid 냄새가 진드기에게는 신호로서 작용하며, 그리하여 매복한 장소를 뒤로 한 채 먹잇감을 향해 운에 맡긴 채blindly 낙하하게끔 야기한다. 만일 (정확한 온도를 감각할 수 있는 기관에 입각해 진드기가 지각하는) 따뜻한 뭔가에 낙하할 수 있을 정도로 충분히 운이 좋다면, 진드기는 먹잇감인 온혈동물에 착지했다는 것이며, 이후에는 촉각에만 의지하여 가급적 몸에 털이 없는 지점을 찾아내고 먹잇감의 피하조직에 머리부터 깊숙이 파고들어갈 수 있다. 이제 진드기는 따뜻한 피의 흐름을 천천히 빨아들일 수 있다(ibid., 86-87).

 

이 지점에서 우리는 진드기가 피 맛을 좋아한다고, 혹은 적어도 피 맛을 지각할 수 있는 감각을 소유한다고 당연하게 기대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윅스퀼이 전하는 바에 따르면, 연구실에서 모든 종류의 체액으로 채워진 인공적인 막membranes을 사용해 실험한 결과는 진드기가 모든 미각을 절대적으로 결여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진드기는 적절한 온도를 갖고 있다면, 즉 포유류의 혈액 온도에 대응하는 섭씨 37도를 갖고 있다면, 어떤 체액이든 열심히 빨아들인다. 아무튼 진드기가 벌이는 피의 잔치는 장례의 만찬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이제 진드기에게는 땅바닥에 내려와서 산란하고 죽는 것 말고는 해야 할 것이라고는 이제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기 때문이다.

진드기의 예는 모든 동물들에게 고유한 환경이 지닌 일반적 구조를 보여준다. 특히 이 경우 환세계는 세 가지 의미[작용]의 담지자 혹은 표식(Merkmalträger)’의 담지자로 환원될 뿐이다. (1) 모든 포유류의 땀에 포함된 낙산(酪酸)butyric acid 냄새. (2) 포유류의 혈액과 똑같은 섭씨 37도의 온도. (3) 일반적으로 체모를 갖추고 있고 모세혈관으로 뒤덮여 있는 포유류에 특징적인 껍질의 유형. 하지만 진드기는 이 세 가지 요소들과 강렬하고 열정적인passionate 관계로 직접적으로 통일되어 있다[불가분한 관계로 직접 연결되어 있다]. 인간의 세계가 외견상 아무리 풍요롭게 보이더라도, 그 세계와 인간을 묶는 관계는 아마도 이와 비슷하게 강렬한 관계일 수는 없을 것이다the likes of which we might never find in the relations that bind man to his apparently much richer world. 진드기는 이런 관계이다. 그리고 진드기는 이런 관계 속에서만, 이를 관계를 통해서만 살아갈 뿐이다she lives only in it and for it.

하지만 바로 이 지점에서 윅스퀼은 우리에게 다음의 얘기를 알려준다. 로스톡Rostock[발트해 연안의 독일의 한자도시]의 실험실에서는 18년 동안 먹이도 없이, 즉 환경으로부터 완벽하게 격리된 조건에서 진드기 한 마리가 살아 있었다고 한다. 윅스퀼은 이 특이한 사실에 대해 전혀 설명을 제시하지 않으며, 진드기는 기다리는 기간 동안우리가 매일 체험하고 있는 것과 유사한 수면 비슷한 상태에 있었을 것이라고 추측했을 뿐이다. 그런 다음 윅스퀼은 살아 있는 주체 없이는 시간은 존재할 수 없다without a living subject, time cannot exist는 유일한 결론을 끌어낸다(ibid, 98). 하지만 18년 동안 지속된 이런 중지상태에서 진드기와 그 세계는 도대체 어떻게 되는가[세계에는 도대체 무엇이 일어났는가]? 환경과의 관계에만 전적으로 놓여 있는 생물a living being that consists entirely in its relationship with the environment이 그런 환경의 절대적인 결핍 속에서 살아남는 것은 어떻게 가능한가? 그리고 시간도 없고 세계도 없이 기다린다고 말할 수 있다는 것은 도대체 무슨 의미인가?

 

 

Posted by 상겔스 상겔스


SOUSTRACTION ET CONTRACTION

À PROPOS D’UNE REMARQUE DEDELEUZE SUR MATIÈRE ET MÉMOIRE

Àlamémoirede François Zourabichvili

Quentin Meillassoux


quentin-meillassoux-soustraction-et-contraction-a-propos-dune-re


Soustraction et contraction - à propos d'une remarque de Deleuze sur Matière et Mémoire


Soustraction et contraction - à propos d'une remarque de Deleuze sur Matière et Mémoire. 2007, French. Revue Philosophie n°96


Posted by 상겔스 상겔스

* 읽고 나니 그다지 영양가는 없다고 생각. 그러나 관련 문헌들을 보자는 차원에서 업로드. 


질베르 시몽동과 질 들뢰즈의 특이성개념

정보를 형이상학적으로 다시 묻기 위해

ジルベール・シモンドンとジル・ドゥルーズの特異性概念

― 「情報形而上学的しのために

The notion of “singularity” in Simondon and Deleuze:

A way of rethinking “information” metaphysically

호리에 이쿠토모(堀江郁智)

 키워드 : 질베르 시몽동, 질 들뢰즈, 특이성, 전개체성, 정보

 

들어가며

질베르 시몽동(1924-1989)20세기 후반에 가장 중요한 프랑스 철학자의 한 명이며, 그 기술철학과 개체화론에 의해 이름을 알리고 있다. 한편으로 시몽동의 철학은 기술철학의 영역에서 일정하게 수용되고 있으며, 그 주요한 업적은 1958년에 국가박사논문의 부논문(이하 박사 부논문으로 약칭)으로 제출되고 나중에 기술적 대상의 존재양태에 대해Du mode d’existence des objets techniques라는 제목으로 출판된다. 다른 한편으로, 시몽동의 철학의 또 다른 축으로서 개체화론이 존재하며, 그 철학은 같은 해에 국가박사 논문의 주논문(이하 박사 주논문으로 약칭)으로서 제출되며, 사후에 간행된 형태와 정보 개념에 비춰본 개체화L’individuation à la lumière des notions de forme et d'information에서 결정(結晶)한다. 본고에서 질 들뢰즈(1925-1995)의 철학과의 관계에서 거론되는 것은 후자의 박사 주논문이다.

지금까지 질 들뢰즈에 의한 찬양을 주된 예외로 하면, 시몽동의 개체화론은 오랫동안 과소평가됐다. 그러나 오늘날 시몽동의 개체화론은 다양한 인접 영역에서 관심을 끌고 있다. 특히 인식론, 존재론, 정치철학, 자연철학, 그리고 기술철학 분야에서 시몽동의 재평가는 착실하게 진행되고 있다. 실제로 이 재평가를 거쳐, 시몽동 사후, 시몽동의 저작과 강의록, 혹은 시몽동 연구의 저작이 잇달아 출판되기 시작한다.[주1] 이런 프랑스 철학계에서의 시몽동 복권의 조류는, “시몽동 르네상스라고 일괄로 불리기도 한다.[주2]

[주1] 시몽동의 사후에 출판된 주요 저서는 20149월 시점에서 다음과 같다. 우선 단행본으로 시몽동의 박사 주논문을 수록한 형태와 정보 개념에 비춰본 개체화가 제롬 미용(Jérôme Millon)사에서 2005년에 출판됐다. 이어서 강의록으로 엘리프스(Ellipses)사에서 2004년에 동물과 인간에 관한 두 개의 강의(Deux leçons sur l’animal et l’homme), 쇠이유(Seuil)사에서 2005년에 기술에 있어서의 발명 : 강의와 강연(L’invention dans les techniques : Cours et conférences), 트랑스파랑스(Les Éditions de La Transparence)사에서 2006년에 지각 강의(Cours sur la perception (1964-1965)), 2008년에 구상력과 발명(Imagination et Invention), 그리고 2010년에 커뮤니케이션과 정보 : 강의와 강연(Communication et information : Cours et conférences)이 출판됐다. 게다가 2014년에는 미간행 논고, 강의록, 강연원고, 대담록 등을 집성한 기술에 관하여(Sur la technique)가 프랑스대학출판국(PUF)에서 간행됐다

[주2]  Cogburn질베르 시몽동 : 존재와 테크놀로지의 서평에서, “시몽동 르네상스가 영어권에서도 시작될 가능성을 시사하고 있다(Cogburn, “Gilbert Simondon: Being and technology”, http://ndpr.nd.edu/news/41310-gilbertsimondon-being-and-technology/)(2014922일 확인). 

본고의 목적은 특이성 singularité” 개념에 초점을 맞춤으로써, 시몽동의 개체화론과 들뢰즈의 개체화론 사이의 차이를 명확하게 하는 것이다. 본고에서 들뢰즈의 논의를 경유해 시몽동의 논의를 검토하는 이유로서, 다음의 세 가지가 꼽힌다. 우선 앞서 말했듯이, 그는 당시부터 시몽동의 철학의 중요성을 이해했던 몇 안 되는 철학자라는 점, 다음으로 둘 다 당시의 자연과학들의 첨단적 논의에 다대한 영향을 받았다는 점, 더욱이 둘 다 형이상학적 색채가 강한 개체화를 둘러싼 논의를 전개하고 있는 점이다. 마지막 점에 대해서는, 사실, 들뢰즈의 차이 철학이 스피노자, 라이프니츠, , 칸트, 니체, 베르그손 등 메이저 철학자뿐만 아니라, 시몽동, Raymond Ruyer(1902-1987), Albert Lautman (1908-1944) 등 비교적 마이너 철학자들로부터도 영향을 받고 있다는 날카로운 지적이 존재한다.[주3] 이런 가운데, 들뢰즈의 시몽동 독해에 주목하는 움직임은 최근에는 영어권에서도 확산되고 있다.[주4]

[주3] 米虫正巳 ドゥルーズ哲学のもうつの系譜について小泉義之鈴木泉檜垣立哉 (). ドゥルーズガタリの現在, 東京, 平凡社, 2008, 490-512.

[주4] 예를 들어 Williams은 들뢰즈의 개체화론에 대한 시몽동의 개체화론의 중요성을 그동안 과소평가했던 것을 인정한 뒤, “이제 시몽동과 함께 들뢰즈를 읽는 것이 중요하다고 독자에게 호소하고 있다(Williams, Gilles Deleuze's Difference and repetition: A critical introduction and guide, Edinburgh: Edinburgh University Press, 2003, pp. 231-232). 또한 이 점에 대해서는 시몽동의 독자로서의 들뢰즈상을 부각시킨 Bowden의 논고가 참고가 된다(Bowden, “Gilles Deleuze, a reader of Gilbert Simondon” Boever, Murray, Roffe and Woodward (dir.), Gilbert Simondon: Being and technology, Edinburgh: Edinburgh University Press, 2012, pp. 135-153). 

더욱이 본고가 특이성개념에 주목하는 것은 이 개념이 양자의 개체화론을 연결시키는 관절의 위치에 있는 동시에, 양자의 논의의 차이를 판명하게 비추는 데 있어서 중요한 역할을 맡는다고 생각되기 때문이다.[주5] 실제로 들뢰즈는 질베르 시몽동 : 개체와 그 물리-생물학적 발생(Gilbert Simondon, L’individu et sa genèse physico-biologique)이라는 제목의 1966년 서평에서, 시몽동의 주장의 중요성은 특이성개체성individualité’을 엄밀하게 구별한 점에 있다고 말했다.[주6] 들뢰즈에 의한 이런 시몽동 독해는 오랫동안 박사 주논문의 전체가 간행되지 않았던 시몽동의 개체화론의 해석을 일정한 범위에서 방향지었다고 생각된다.

[주5] 예컨대 Bardin은 시몽동과 들뢰즈의 차이성개념 사이에 차이가 있음을 지적한 뒤, 전자의 정보의 차원에 있어서의 특이성역사적측면을 갖는다고 주장한다(Bardin, «De l’homme à la matière : Pour une « ontologie difficile ». Marx avec Simondon» Barthélémy (dir.), Cahiers Simondon n°5, Paris: Harmattan, 2013, p. 39, note 1). 또한 특이성개념을 통한 시몽동과 들뢰즈의 개체화론의 비교에는 히로세 코지(廣瀬浩司)의 논고가 참고가 된다. 히로세는 들뢰즈가 시몽동보다 어긋남[齟齬]의 존재론적 근원성을 인정하고 있다고 지적한다(廣瀬浩司, 個体化作用からアナーキーな超越論的原理――シモンドンとドゥルーズ」 『情況3, 4巻第3, 2003, 209-224). 

[주6] Deleuze, « Gilbert Simondon, L’individu et sa genèse physico-biologique » Lapoujade (dir.), L’île déserte et autres textes : Textes et entretiens 1953-1974, Paris: Éditions de minuit, 2002, p.121. (ドゥルーズ ジルベール・シモンドン 個体とその物理-生物的発生三脇康生訳 無人島 1953-1968前田英樹監修, 東京, 河出書房新社, 2003, 181)

그 때문에 본고는 들뢰즈의 이 서평에 의거함으로써, 들뢰즈가 시몽동에 의한 특이성에 대한 설명을 어떻게 이해했는가를 고찰한다. 본고에서는 맨 먼저, 시몽동의 개체화론에 있어서 -개체적인 것특이성개념이 중심적 역할을 맡는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어서 들뢰즈의 서평의 기술(記述)에도 불구하고, 시몽동은 박사 주논문에서 특이성개체성을 명확하게는 구별하지 않는다는 가설을 제시한다. 마지막으로, 들뢰즈가 -개체성préindividualité으로서의 특이성에 논의의 중점을 놓음으로써 새로운 문제계를 열고 있는 반면, 시몽동의 논의에는 정보information로서의 특이성이라고 불릴 것이 존재하며, 정보 개념을 형이상학적으로 되묻기 위한 중요한 관점을 제공하고 있다고 시사하는 것을 가지고 이 글의 결론으로 한다.

 

 

1. 시몽동의 개체화론에 있어서의 -개체적인 것특이성개념

1.1 ‘-개체적인 것을 출발점으로 한 개체화의 작용

시몽동은 그의 박사 주논문의 첫머리에서 개체로서의 존재의 실재réalité에 접근할 수 있는 두 개의 수단[]이 있다[Il existe deux voies selon lesquelles la réalité de l'être comme individu peut être abordée][주7]고 말한다. , 원자론적 실체론substantialisme atomiste과 질료형상론hylémorphisme이라는 두 개의 학설이다. 그런데 직후에 이어진 논술에 의해 분명해졌듯이, 시몽동에 따르면, 이 두 개의 학설은 개체로서의 존재의 실재를 파악한다는 당초의 목적에 있어서 불충분하다. 왜냐하면 전자에 있어서는 모든 사물이 원자atome”의 불가분하고 통일적인 미립자의 우연에 가득 찬 마주침으로 환원되기 때문이며, 후자에 있어서는 개체화의 작동[작용] opération d’individuation”형상forme”질료matière”라는 양극적인 두 개의 항의 결합으로 환원되기 때문이다.[주8] 확실히 개체화의 원리principe d’individuation”, 전자에 있어서는 원자의 우연의 마주침의 결과로부터 거슬러 올라감으로써 발견되는 반면, 후자에 있어서는 질료혹은 형상에 미리 포함되어 있다는 차이가 있다.[주9] 그래도 전자는 원자’, 후자는 질료 결합체라는 구성된 개체에 존재론적인 특권을 부여한다[accorde un privilège ontologique à l’individu constitué][주10]는 공통점이 있다(강조는 원저자). 따라서 이 두 개의 학설에서는 존재의 그것 자신에 대해 상()을 어긋나게 하고 또한 상을 어긋나게 하면서 스스로 해결하는 능력[それ自身してをずらし, またをずらしながら解決する能力; une capacité que l’être a de se déphaser par rapport à lui-même, de se résoudre en se déphasant]”,[주11] 개체발생ontogénèse”의 능력을 파악할 수 없다고 간주된다.

[주7] Simondon, L’individuation à la lumière des notions de forme et d’information, Grenoble: Jérôme Millon, 2005, p.23.

[주8] Ibid., pp.23-24.

[주9] Ibid., p.24.

[주10] Ibid., p.23.

[주11] Ibid., p.25.

반면 시몽동은 개체에서 출발해 개체화를 인식한다기보다는 오히려 개체화를 통해 개체를 인식한다[connaître l’individu à travers l’individuation plutôt que l’individuation à partir de l’individu][주12]는 것을 목적으로 삼는다(강조는 원저자). , 시몽동은 앞서 말한 두 학설처럼 어떤 개체화의 원리에 기초하여 개체화의 작용[작동]”을 설명하는 게 아니라, “개체화의 작용[작동]”의 중심에서 개체발생의 역능을 파악하는 것을 학적 자세로 한다. 또한 이때, 시몽동은 구성된 개체에 주어진 특권적인 지위를 상대화하기 위해 -개체적인 실재réalité préindividuelle”라고 불리는 것을 전제한다.

[주12]  Ibid., p.24.

 

우리는 개체가 존재하기 시작하는 출발점이 되는, 그리고 개체가 그 성질들 중에서 전개, 체제(régime), 마지막으로 양태들을 반영하는 개체화의 작용을 제일의적인[가장 중요한] 것으로 간주함으로써, 개체화의 원리의 탐구에 있어서 일을 일변시킬 필요가 있음을[급변을 작동시켜야 한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다. 이때, 개체는 상대적인 실재réalité relative로서 파악될 것이다. , 개체는 그 이전에 전-개체적인 실재를 전제하며, 개체화의 이후에도 단독으로는 현존[혼자서는 실존]하지 않는 존재의 특정한 상(phase)으로서 파악될 것이다.[주13]

われわれは, 個体存在める出発点となる, そして個体がその諸性質のうちに展開, 体制, 最後諸様態反映する個体化作用第一義的なものとしてなすことで, 個体化原理探究において一変させる必要があることをしたいその, 個体相対的実在réalité relativeとしてえられるだろうつまり, 個体, それ以前-個体的実在前提とし, 個体化以後であっても単独では現存しないような存在特定としてえられるだろう

Nous voudrions montrer qu’il faut opérer un retournement dans la recherche du principe d’individuation, en considérant comme primordiale l’opération d’individuation à partir de laquelle l’individu vient à exister et dont il reflète le déroulement, le régime, et enfin les modalités, dans ses caractères. L’individu serait alors saisi comme une réalité relative, une certaine phase de l’être qui suppose avant elle une réalité préindividuelle, et qui, même après l’individuation, n'existe pas toute seule.

[주13] Ibid.

 

이리하여 시몽동은 개체화의 원리의 탐구를 처음부터 다시 하려고 한다. 그 탐구에 있어서는 개체화의 작용이야말로 가장 중요한 것이다. 그리고 그 탐구의 출발점이 되는 것이, 개체 이전에 -개체적인 실재가 있고, -개체적인 것le pré-individuel’이 실재하며, ‘개체화의 작용이후에도 개체와 그 상관항으로서의 환경milieu’이 공존한다는 전제이다.[주14] 거기에서는, 개체는, “존재의 특정한 상일 수밖에 없으며, 그것 단독으로는 결코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서 파악된다.[주15] 확실히 시몽동은 준안정적 평형, 포텐샬 에너지, (), 좋은 형태, 송신기, 수신기 등의 용어를 비롯해서 열역학, 분자생물학, 게슈탈트 심리학, 사이버네틱스, 정보이론 등의 당시에 융성했던 과학들의 어휘를 사용함으로써, 야심적으로 물리, 생명, 심리, 사회의 네 가지 영역에 걸친 장대한 개체화론의 구축을 시도하고 있다.[주16] 그러나 얼핏 보기에 대규모적인 이론의 기반에 있는 것은, 서양의 형이상학에 있어서 긴 계보를 지닌, “개체화의 원리에 근거하여 개체를 파악하는 입장에 대한 철저한 비판이다. 최종적으로, 시몽동은, 두 개의 전통적인 개체관이 빠져 있는 공통의 아포리아를 선명하게 지적하고, 그 아포이라를 넘어서는 것으로서 -개체적인 것과 개체의 조()가 생성되는 개체화의 작용이라는 사고방식을 제시한다.

[주14] 앞의 인용 대목에 덧붙여, 시몽동은 개체가 상대적인 실재인 이유로서, 개체화는 한 번에 -개체적인 실재의 포텐샬을 다 써버리는 것이 아니라, 이로부터 개체-환경milieu’의 쌍(pair)이 출현한다는 것을 꼽고 있다(Ibid., pp.24-25.)

[주15] 게다가 시몽동은 통일성unité과 동일성identité은 존재의 수많은 상들 중에서 하나에만, 개체화의 작용의 이후의 상에만 적응될 뿐이다고 말한다(Ibid., pp.25-26). 또한 통일성 이상이고 동일성 이상인plus qu'unité et plus qu'identité -개체적인 체제(règime)”라는 표현도 존재한다(Ibid., p.26).

[주16] 시몽동의 이런 광범위한 개체화론의 구성의 배경을 이루는 것은 19602월 강연에 따르면, 인간과학들과 심리학에 있어서의 일반이론의 부재에 대한 위기감이다(Simondon, « Forme, information et potentiels » Bulletin de la société française de philosophie, séance du 27 février 1960, tom. 54, 1960, p.143; L’individuation à la lumière des notions de forme et d'information, p.531).

 

1.2. ‘내적 공명의 발단으로서의 특이성

또한 시몽동의 개체화론을 특징짓는 또 다른 핵심 개념으로서, ‘특이성 singularité’이라는 용어가 있다. 이 용어에 대해 구체적인 설명이 이뤄지는 것은, 박사 주논문의 제11장에서이다. 시몽동은 이 대목에서, 벽돌 주조의 사례에 주목함으로써, “날것의 질료(la matière brute)”기하학적 형상이라는 추상적인 것을 대신해, “준비된 소재 matière préparée”물질화된 형태forme matérialisée”라는 구체적인 것을 사고하는 데 이른 그 과정을 자세히 밝히고 있다. 벽돌 주조의 사례는, 3극 진공관의 사례와 결정화(結晶化)의 사례와 더불어, 시몽동의 물리적 개체화individuation physique”에 관한 논의에서 중심적 위치를 차지하는 사례 중 하나이다. 또한 이런 세 개의 사례 중에서도, 벽돌 주조의 사례는 기술적 조작에 의한 성형(成型) prise de forme[형태를 취함]’의 사례이기도 한 점에서, 박사 부논문에서 전개된 기술철학의 내용과도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기 때문에 중요하다. 시몽동은 구체적인 하나의 벽돌이 하나의 개체일 수 있기 위한 조건을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구체적인 벽돌은 찰흙의 조형성(plasticité, 可塑性)과 평행육면체의 결합에서 생기는 것이 아니다. 평행육면체의 한 개의 벽돌이, 현실에[실제로] 존재하는 하나의 개체가 있을 수 있으려면, 효력이 있는 기술적 조작opération이 찰흙의 명확한 덩어리masse와 평행육면체의 통념notion 사이에 어떤 매개médiation창설할 필요가 있다[설립해야 한다](강조는 원저).[주17]

具体的なレンガは, 粘土可塑性平行六面体結合からじるのではない平行六面体1つのレンガが, つまり現実存在する1つの個体がありうるためには, 効力のある技術的操作opéation, 粘土明確masse平行六面体観念notionにある媒介méiation創設する必要がある(強調, 原著者).

La brique concrète ne résulte pas de l’union de la plasticité de l’argile et du parallélépipède. Pour qu'il puisse y avoir une brique parallélépipédique, un individu existant réellement, il faut qu’une opération technique effective institue une médiation entre une masse déterminée d'argile et cette notion de parallélépipède.

[주17] Ibid., p.40.

 

이 대목에서 처음으로 찰흙의 덩어리와 평행육면체의 통념을 연결시킨 매개가 문제화된다. 달리 말하면, 구체적인 벽돌을 사고하려면, 기술적 조작에 의해 수립되는 매개를 고려해야 한다. 그러나 이 매개는 어떤 사태를 가리키는 것일까? 그것은 시몽동에 따르면, ‘찰흙의 준비주형의 구성처럼, “날것의 찰흙과 부과될 수 있는 기하학적인 형상 사이의 능동적 매개une médiation active entre l’argile brute et la forme géométrique imposable이다.[주18]

[주18] Ibid.

동시에 이 능동적 매개에 의해, ‘날것의 찰흙은 단순한 날것의 찰흙이 아니게 되며, ‘평행육면체의 통념은 단순한 기하학적 형상이 아니게 된다고 한다. , 시몽동은 전자를 준비된 소재(matière préparée)”, 후자를 물질화된 형태(forme matérialisée)”로 재파악하고 있다.[주19]

[주19] Ibid., p.45.

이런 이유를 이어받고, 성형成型(prise de forme)의 기술적 조작이 축적한[쌓아올린] 진정한 관계는 날것의 질료와 순수한 형상 사이가 아니라 준비된 소재와 물질화된 형태 사이에 확립된다ces relations ne sont pas établies entre la matière brute et la forme pure, mais entre la matière préparée et la forme matérialisée[주20]고 주장된다.

[주20] Ibid.

게다가 이 기술적 조작에 의해 구체화된 관계는, 실체적이고 불가분한 항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이질적인 크기의 차원ordre de grandeur”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생각된다.[주21] 시몽동은 이질적인 크기의 차원사이에 상호작용이 발생하는 상태, 바꿔 말하면 준비된 소재물질화된 형태를 획득하는 상태를 내적 공명 résonance interne이라고 부른다(강조는 원저자).[주22]

[주21] Ibid., p.40. 또한 다른 대목에서 시몽동은 준비된 소재물질화된 형태를 두 개의 하프체인(half-chain)에 빗대고 있다. “기술적 조작은 두 개의 정교화된 대상이 양립 가능한 성질들을 갖고 있는 똑같은 단계에 있을 때, 특정한 점에서 마주치는 두 가지 변형의 하프체인을 준비한다[L’opération technique prépare deux demi-chaînes de transformations qui se rencontrent en un certain point, lorsque les deux objets élaborés ont des caractères compatibles, sont à la même échelle]”(Ibid., pp.41-42).

[주22]  Ibid., p.45.

또한 시몽동에 따르면, 내적 공명을 기동(起動)시키는 인자라고 알려진 것이 특이성singularité”이다.[주23] 다시 말하면, 시몽동은 성형(成型)의 기술적 조작의 발단이 되는 것은 두 개의 크기의 차원의 중간에 있는 특이성이라고 한다. 그리고 특이성은 중간의 차원에 있어서 두 개의 크기의 차원을 교류시킨다. 게다가 시몽동에 따르면, 이 중간의 차원에 있는 특이성구체적인 지금 여기hic et nunc의 특이성 또는 특이성들[주24]이다. 요컨대 시몽동의 개체화론에서 벽돌주조의 사례를 비롯한 개체화의 작용에는 두 개의 이질적인 크기의 차원을 내적으로 교류시키는 구체적인 지금 여기의 특이성이 동반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주23] 공명은 일정한 울타리 안에서의 에너지와 운동의 교환이며, 위상학적으로 규정된 중간 차원의 특이성을 출발점으로 한 미시물리학적인 질료와 거시물리학적인 에너지 사이의 교류이다[la résonance est échange d’énergie et de mouvements dans une enceinte déterminée, communication entre une matière microphysique et une énergie macrophysique à partir d’une singularité de dimension moyenne, topologiquement définie]”(Ibid.).

[주24] Ibid., p.48.

 

2. 들뢰즈에 의한 시몽동의 개체화론의 독해

2.1 질베르 시몽동 : 개체와 그 물리-생물학적 발생

그런데 들뢰즈는 시몽동의 박사 주논문의 전반부가 수록된 개체와 그 물리-생물학적 발생 L’individu et sa genèse physicobiologique에 대한 서평을 1966년에 발표했다. 질베르 시몽동 : 개체와 그 물리-생물학적 발생이라는 제목이 붙은 이 서평에서 들뢰즈는 시몽동의 작업의 중요성이 개체화의 아주 독창적인 이론을 제시한 것에 있다고 지적하고 있다.[주25]

[주25Deleuze, op. cit., p.120 (ドゥルーズ, 前掲論文, 179).

서평의 내용은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들뢰즈에 따르면, 시몽동의 비판은, 첫째 전통적으로 개체화의 원리가 개체화를 이미 구성된 개체에 관련시킨다는 것, 둘째 개체화가 개체화 이후, 개체화 이전, 개체화의 상위 등 모든 곳에 놓여 있다는 것을 향한다.[주26]그리고 들뢰즈는 시몽동에 응하면서, 실제로는 개체는 그 개체화와 동시에만 존재할 수 있을 뿐이며, ‘개체화의 원리는 진정으로 발생론적인 것génétique’이어야만 한다고 한다.[주27]게다가 들뢰즈는 시몽동을 따르면, 개체화의 전제 조건은 적어도 두 개의 이질적인 크기의 차원으로 구성된 준안정적인 시스템 système métastable’이 존재하는 것이라고 밝힌다.[주28]

[주26Ibid. (同上).

[주27Ibid. (同上, 180).

[주28Ibid., p.121. (同上).

또한 들뢰즈는 개체화란 포텐셜 에너지를 현동화(現働化)하고, 여러 가지 특이성들을 통합함으로써, 객관적으로 문제성을 안고 있는 시스템의 해결을 조직화하는 것이라고 바꿔 말한다.[주29]계속해서 말하길, 이 해결은 내적 공명으로서, 정보로서 고찰될 필요가 있다고 덧붙인다.[주30]더욱이 시몽동의 분석이 두 개의 중심의 언저리에서 전개된다고 한다.[주31]그것들은 첫째로 물리나 생명 등의 개체화의 다양한 영역의 연구가 있다는 것, 둘째로 전-개체적인 것이 미래의 준안정적인 상태의 원천인 개체와 계속 관련되어야만 한다는 것이다.[주32]들뢰즈는 시몽동에 의해 확립된 새로운 개념들이 매우 중요하며, 시몽동이 다듬어낸[가다듬고 벼려낸] 것은 바로 하나의 존재론ontologie에 다름 아니라고 결론 내린다.[주33]

[주29Ibid., p.122. (同上, 182).

[주30Ibid. (同上, 182-183).

[주31Ibid., p.123. (同上, 183).

[주32Ibid., pp.123-124. (同上, 183-184).

[주33Ibid., p.124. (同上, 185).

이처럼 들뢰즈의 서평은 시몽동의 개체화론의 단순한 소개나 주석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 이미 들뢰즈 독자적인 해석이 나타나고 있다. 달리 말하면, 거기에는 들뢰즈가 시몽동의 개체화론의 역점을 이동시키고, 자신의 철학 안에 짜 넣으려고 하는 자세가 이미 보인다.

 

2.2 ‘특이성개체성의 엄밀한 구별에 대해

들뢰즈의 서평의 전체상을 파악한 뒤에, 본고에서는 그 서평의 전반부에 나타나는 다음의 기술(記述)에 초점을 맞춘다. 거기서 들뢰즈는 시몽동의 식견[知見]의 중요성을 요약한다.

 

시몽동은 개체화의 전제조건을 발견함으로써, 특이성과 개체성을 엄밀[엄격]하게 구별하고 있다. 왜냐하면 준안정적인 것은 -개체적인 것으로서 정의되며, 현실 존재와 포텐셜의 재분배[-개체적인 것으로서 정의되는 준안정적인 것은 포텐셜의 실존과 재분배]에 대응하는 특이성들을 완전하게 갖추고 있기 때문이다. 개체적이지 않고 특이한 것, 그것은 전-개체적 존재의 상태이다.[주34]

シモンドンは個体化前提条件発見することで, 特異性個体性厳密区別しているというのは, 準安定的なものは, -個体的なものとして定義され, 現実存在とポテンシャルの再配分対応する々の特異性完全えているからである。[...個体的であることなく特異であること, それは-個体的存在状態である

En découvrant la condition préalable de l'individuation, il distingue rigoureusement singularité et individualité. Car le métastable, défini comme être pré-individuel, est parfaitement pourvu de singularités qui correspondent à l’existence et à la répartition des potentiels. Singulier sans être individuel, tel est l'état de l'être pré-individuel.

[주34Ibid., p.121. (同上, 181).

 

, 들뢰즈는 시몽동의 식견의 중요성이 개체성특이성을 엄밀하게 구별한 것에 있으며, 개체적인 존재를 결여한 특이성-개체적인 존재의 상태라고 지적한다. 달리 말하면, 들뢰즈에게서 시몽동의 개체화론의 탁월성은, 그가 특이성개체성으로부터 날카롭게 분리한 것, 그가 특이성을 -개체적인 것이라고 본 것에 있다.

그렇지만 실제의 기술(記述)에서는, 시몽동 자신은 -개체적인 것특이성의 지위를 명확하게 부여하는 것이 아니며, 오히려 시몽동은 개체의 수준에서 발생하는 개체화라는 매개적인 현실에 특이성의 지위를 부여하고 있는 것처럼 읽힌다. 실제로, 앞 절에서 다룬 벽돌 주조의 사례에 대한 주석에서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현동화하는] 에너지는 상태의 에너지인데, 요소 사이의 시스템의 에너지이기도 하다. 특이성의 비호 아래서, 크기의 차원들 사이의 교류, 형상의 원리, 개체화의 실마리[시초]는 바로 개체의 수준에 있어서의 힘들의 마주침으로서의 두 개의 크기의 차원들의 상호작용에 있다. 매개하는 특이성은 여기서는 주형이다.[주35]

この現働化するエネルギーは状態のエネルギーではあるが, 要素間のシステムのエネルギーでもある特異性庇護のもとで, きさの諸次元交流, 形相原理, 個体化糸口, まさに個体水準における諸力出会いとしての2つのきさの諸次元相互作用している媒介する特異性, ここでは鋳型である

Bien que cette énergie soit une énergie d'état, une énergie du système interélémentaire; c'est en cette interaction des deux ordres de grandeur, au niveau de l'individu, comme rencontre de forces, que consiste la communication entre ordres de grandeur, sous l'égide d'une singularité, principe de forme, amorce d'individuation. La singularité médiatrice est ici Je moule.

[주35Simondon, op. cit., p. 44, note 5.

 

이 대목에서 시몽동은 특이성의 비호아래서, 개체화의 실마리가 개체의 수준에 있어서의 두 개의 크기의 차원사이의 상호작용에 있다고 말한다. 게다가 그는 그런 특이성매개하는 특이성이라고 부르며, 그것은 벽돌 주조라는 구체적인 사례에 있어서는 주형이라고 덧붙인다. 여기서는 개체화는 발생하기 이전의 -개체적인 것특이성이 있다기보다는 바로 개체의 수준에 있어서, ‘특이성이 두 개의 크기의 차원의 중간에서 양자를 교류시키고, 내적으로 공명시킨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다만, 여기서 말하는 개체의 수준이란 이미 구성된 개체가 아니라 관계의 활동activité de la relation’으로서의 개체라는 것에 주의할 필요가 있다.[주36]

[주36]  무엇보다 관계의 항으로서가 아니라, 관계의 활동으로서 개체를 파악할 수 있는 관점을 찾아내야 한다il faut trouver d’abord le point de vue à partir duquel on peut saisir l’individu comme activité de la relation, non comme terme de cette relation”(Ibid., pp.62-63).

이렇게 시몽동의 실제의 기술(記述), 시몽동의 논의가 들뢰즈의 서평에 있어서의 특이성의 정의에 반드시 들어가는 것이 아님을 시사한다고 말할 수 있다. 달리 말하면, 들뢰즈에 의한 시몽동은 개체화의 전제조건을 발견함으로써, 특이성과 개체성을 엄밀하게 구별하고 있다[주37]고 하는 명제가 반드시 참이라고는 말할 수 없는 것 같다. 만일 그렇다면, 거짓 명제가 포함되어 있는 이상, 들뢰즈의 서평은 시몽동의 실제의 진술에 있어서 충실한 소개나 주해라고는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주37]  Deleuze, op. cit., p.121. (ドゥルーズ, 前掲論文, 181).

 

3. ‘정보로서의 특이성비인칭적이고 전-개체적인 특이성

3.1 시몽동에게서의 정보로서의 특이성

그럼에도 불구하고, 들뢰즈의 시몽동 독해를 오해에 기초한 것이라며 손쉽게 물리치는 것도 또한 피해야만 한다. 오해에 기초한 것임은, 그 독해에 결실이 풍부한 발전 가능성이 없음을 반드시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존재의 일의성을 둘러싼 들뢰즈에 의한 둔스 스코투스 독해는, 오독이라고 말해지는 한편, 뛰어나고 창조적인 오독이라고도 말해진다.[주38]  만일 들뢰즈의 시몽동 독해가 오독이었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결과적으로 시몽동의 철학의 가능성을 최대한 끌어내는 것인 한, 그것은 들뢰즈 연구뿐 아니라, 시몽동 연구에 대해서도 중요한 단서가 되는 것 같다.

[주38]  熊野純彦 西洋哲学史 古代から中世東京, 岩波書店, 2006, 246

문제의 소재지를 명확하게 하기 위해, 시몽동의 논술을 보다 자세하게 검토하자. 앞서 말했듯이, 시몽동은 박사 주논문의 제11장에서 구체적인 지금 여기의 특이성 혹은 특이성들에 대해 언급했다. 그 전후의 맥락은 다음과 같다.

 

개체화의 원리는 포텐셜 에너지의 현동화를 통한 소재와 형태에 공통된 알라그마틱한 작용opération allagmatique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작용은 구체적인 지금 여기의 특이성 혹은 특이성들에 의거했으며, 이것들을 감싸고[에워싸고] 증폭된다.[주39]

個体化原理, ポテンシャルエネルギーの現働化じての素材形態共通したアラグマティックな作用opération allagmatiqueであるとうことができるだろう。[...この作用, 具体的なココトイマの特異性あるいは々の特異性にしており, それらを, 増幅している

On pourrait dire que le principe d'individuation est l’opération allagmatique commune de la matière et de la forme à travers l’actualisation de l’énergie potentielle. Cette opération s’appuie sur la singularité ou les singularités du hic et nunc concret ; elle les enveloppe et les amplifie.

[주39]  Simondon, op. cit., p.48.

 

여기서 알라그마틱이라는 단어는 변환(変換)’이나 변천[추이]’을 의미하는 그리스어 ‘allagma’에서 유래하는 시몽동의 용어이다.[주40당장은 개체화의 작용의 구체적인 지금 여기에서의 변이(変移)적인 측면을 강조한 것으로서 이해해두면 좋겠다. 특히 여기서 특필해야 할 것은 시몽동이 이 구절에 대해 다음과 같이 주석을 달고 있다는 것이다. , 시몽동에 따르면, “이 현실의[실제적] 특이성들, 즉 공통의 작용의 기회를, 정보 information라고 명명될 수 있다Ces singularités réelles, occasion de l'opération commune, peuvent être nommées information.”[주41]여기서는 앞서 말한 특이성의 매개적인 성질이 더 개념적인 수준에서 생각되고 있다. , 이들 대목에 따르면, ‘특이성들은 구체적인 지금 여기에서의 개체화의 작용에 있으며, 이런 특이성들정보라고 불릴 수 있다. 따라서 우리는 이런 특이성들정보로서의 특이성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주40]  遠藤繁行 シモンドンの個体化論する研究ノート――個体化操作および個体化探究方法としての転導」 『古典力対話力論集, 1, 2010, 43, 12

[주41] Simondon, op. cit., p.48, note 8.  

정보에 대해 본고의 맥락에서는 다음의 점도 중요하다. 시몽동이 정보개체화의 작용의 구체적인 지금 여기의 특이성인 것과 마찬가지로, “등장하고 있는 중인 개체의 차원에 있어서의 순수한 사건événement pur[événement pur à la dimension de l’individu en train d'apparaître]”이기도 하다고 말하는 점이다.[주42]이 기술(記述)정보가 두 개의 측면을 갖는다는 것을 시사한다. 그 중 하나는 구체적인 지금 여기에 관련되는 측면이며, 다른 하나는 순수하고 추상적인 사건에 관련되는 측면이다. , 한쪽은 현실적인 측면이고, 다른 쪽은 이념적인 측면이다.

[주42]  Ibid., p.51.

 

3.2 들뢰즈에게서의 비인칭적이고 전-개체적인 특이성

이때 시몽동에게서의 정보로서의 특이성은 들뢰즈에게서의 특이성이라는 단어의 용법과 관련되어 있는 것처럼 보인다. 다른 식으로 말한다면, ‘특이성에 대한 시몽동의 철학은 들뢰즈에 의해 오해된 것이 아니라 특이성에 대한 다른 문제계로 변환된 것일 가능성이 높다.

이 연관 혹은 변환을 이해하는 열쇠는, ‘사건개념이라고 생각된다. 왜냐하면 의미의 논리의 제1계열의 첫머리에서 들뢰즈는 다음과 같이 쓰고 있기 때문이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거울나라의 앨리스에서는 매우 특수한 사물의 범주가 문제이다. 즉 사건, 순수한 사건vénements purs이다.[주43]

 [주43]  Deleuze, Logique du sens, Paris: Éditions de Minuit, 1969, p.9. (ドゥルーズ 意味論理学 ().小泉義之訳, 東京, 河出書房新社, 2007, 13).


이 구절에서는, 시몽동의 논고에서도 보이는 순수한 사건이라는 단어가, 다른 맥락에서 거론되고 있다. , ‘순수한 사건앨리스가 더 커지며 그리고 더 작아지는 것이다. 그것은 생성변화의 동시성과 상관한다.

물론 이 대목만으로는 들뢰즈의 철학에 있어서의 사건또는 순수한 사건개념을 명확하게 할 수 없기에, 본고는 동서의 제9계열에도 초점을 맞춘다. 이 계열에서는, 들뢰즈는 노발리스를 언급하면서, 두 개의 사건을 이념적 사건현실적이고 불완전한 사건으로 분명하게 구별한다. 전자는 이념적인 프로테스탄티즘처럼 본성적으로 이념적인 사건événement, par nature idéal”이다. 이와 대조적으로 후자는 현실의 루터주의처럼 사물의 상태 속에서의 공간-시간적 실현effectuation spatio-temporelle”이다. 다만 들뢰즈는 곧바로 후자를 우발사고偶発的事故 accident”라는 단어로 바꿔 말한다(강조는 원저자). 요컨대 들뢰즈는 전자만을 진정한 사건으로 인정한다. 게다가 들뢰즈는 전자를 “<유일하고 동일한 사건Evénement>에 있어서 교류하는 이념적 특이성singularité idélles”이라고 바꿔 말한다.[주44]다른 대목에서 그는 이 특이성비인칭적이고 전-개체적인 특이성singularité impersonnelles et préindividuelles”이라고도 부른다.[주45]

[주44]  본 단락의 지금까지는 다음의 대목을 참조하고 있다(Ibid., p.68. (同上, 106)). 

 [주45]  Ibid., p.178(同上, 265). 다만 차이와 반복에서는 비인칭적인 개체화-개체적인 특이성이 구별되고 있음에 주의해야 한다(Deleuze, Différence et répétition, Paris: Presses Universitaires de France, 1968, p. 355(ドゥルーズ 差異反復 ().財津理訳, 東京, 河出書房新社, 2007, 283)).

결국, 들뢰즈의 비인칭적이고 전-개체적인 특이성에 대한 논의는, “사건개념을 통해, “정보로서의 특이성으로 두 가지 측면을 인정한 시몽동의 논의와 확실히 연관되어 있다. 들뢰즈는 현실적이고 구체적인 지금 여기의 특이성에 대한 시몽동의 논의를 물리친 뒤, 이념적이고 추상적인 특이성에 대한 시몽동의 논의를 비인칭적이고 전-개체적인 특이성으로서 해석하고 있다고 생각된다. 달리 말하면, 들뢰즈는 정보로서의 특이성에 대한 시몽동의 논의의 두 가지 측면 중 하나를, 순수한 사건에 관한 측면을 자신의 철학 속에 받아들이고 듯이 보인다. 공교롭게도, 의미의 논리의 제15계열의 각주에서, 들뢰즈는 시몽동을 비인칭적이고 전-개체적인 특이성에 대해 합리화된 최초의 이론을 제출한다[주46]고 평가한다. 이렇게 해서 들뢰즈는 시몽동의 논의 속의 일부를 부연함으로써 비인칭적이고 전-개체적인 특이성의 문제계를 열었다고 생각된다.

[주46] Deleuze, Logique du sens, p.126, note 3. (ドゥルーズ 意味論理学 ().196-197, 3).

 

마치며

본고에서의 논의의 요점은 특이성개념에 관한 시몽동의 개체화론과 들뢰즈의 개체화론의 차이였다. 우선 본고는 시몽동의 박사 주논문을 검토함으로써, 시몽동의 개체화론이 원자론적 실체론과 질료형상론이라는 두 개의 전통적인 개체관에 대한 비판 위에서 성립된 것임을 확인했다. 또한 시몽동의 저작에 대한 서평에서, 들뢰즈는 실제로 시몽동의 식견의 커다란 중요성을 인정했다. 들뢰즈에 따르면, 그 중요성은, ‘특이성개체성사이의 엄밀한 구별에 있었다. 그러나 시몽동의 실제의 논술을 검토함으로써, ‘특이성관계의 활동으로서의 개체의 수준에 있어서 두 개의 이질적인 크기의 차원을 매개하는 것으로서 생각되고 있는 대목이 있음을 알았다. 그리고 이 대목은, 시몽동의 주장이 반드시 들뢰즈의 서평에서의 정의에 들어맞는 것은 아님을 시사했다. 이 점을 검토함으로써, 한편으로 시몽동의 기술(記述)에는 현실적인 측면과 이념적인 측면이라는 두 가지 측면을 포함하는 정보로서의 특이성이 보인다는 것, 다른 한편으로 들뢰즈는 후자의 측면을 부연함으로써 비인칭적이고 전-개체적인 특이성의 문제계를 연다는 것이 짐작됐다.

최종적으로 본고는 시몽동과 들뢰즈의 논의의 차이를 검토함으로써, 들뢰즈가 시몽동의 논의의 특정한 부분, 정보로서의 특이성의 추상적이고 이념적인 측면을 일반화함으로써 비인칭적이고 전-개체적인 특이성의 문제계를 열었다고 결론 내린다.

이런 들뢰즈에 의한 추상적이고 이념적인 측면을 강조하는 독해의 방향성은, 들뢰즈가 펠릭스 가타리(1930-1992)와 함께 전개한 추상기계machine abstraite”의 논의에서도 계승되고 있다고 생각된다.[주47]들뢰즈의 시몽동 독해의 독자성은, 들뢰즈/가타리의 추상기계에 대한 이론과 시몽동의 기술적 대상의 구체화concrétisation’에 대한 이론과의 차이에 관련되어 있는지도 모른다.[주48]

[주47]  Deleuze et Guattari, L’anti-OEdipe, Paris: Éditions de Minuit, 1972(ドゥルーズガタリ アンチ・オイディプス宇野邦一訳, 東京, 河出書房新社, 1986). 또한 들뢰즈/가타리도 천 개의 고원에서 시몽동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Deleuze et Guattari, Mille plateaux, Paris: Éditions de Minuit, 1980, p.508(ドゥルーズガタリ のプラトー ().宇野邦一他訳, 東京, 河出書房新社, 2010, 123)). 

[주48]  시몽동에 따르면, ‘구체화된 기술적 대상은 자연적 대상과 과학적 표상 사이를 매개하는 위치에 있으며, 더욱이 구체화됨에 따라 기술적 대상은 자연적 대상과 유사해진다(Simondon, Du mode d’existence des objets techniques, Paris: Aubier, 1958, pp.46-47). 

또한 시몽동의 개체화론에 있어서 정보의 개념은, “개념들의 변혁속에서도 중심적인 위치를 차지하는 것과 더불어, 독자적인 의미내용이 부여되고 있다.[주49]시몽동은 정보개념이 형태개념을 대체하는 것이며, 더욱이 공학적인 용법으로 환원되는 것이 아님을 강조한다.[주50], 시몽동에 따르면, ‘정보를 정의하려면 클로드 샤넌(1916-2001)의 정보이론에서의 신호와 같은 양으로서의 정보, 게슈탈트 심리학에서의 좋은 형태와 같은 질로서의 정보도 아니고, ‘강도intensité로서의 정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주51]이런 시몽동의 학적 자세는, ‘정보개념을 개체화론의 관점에서 근본적으로 재파악하기 위한 단서를 제공한다고 생각한다.[주52]정보개념의 형이상학적 재질문을 위해서도, 시몽동의 개체화론의 추가적 연구의 진전이 기다려진다.

[주49] Simondon, L’individuation à la lumièe des notions de forme et d’information, p.31.

[주50]  Simondon, op. cit., p.35. 또한 타치바나 신이치(橘真一)는 시몽동의 information 개념의 유래를 베르그손의 창조적 진화에 있어서의 제작의 주제로, 그 속에서도 informer(형태를 부여하다)라는 동사의 사용 맥락에서 보고 있다(橘真一 ジルベール・シモンドンにおけるinformation概念について――ベルクソン受容という背景かららした考察中心」 『年報人間科学, 33, 2012, 99-113)(Cf. Bergson, L’évolution créatrice, Paris: Presses Universitaires de France, 1907, p.184(ベルクソン 創造的進化合田正人松井久訳, 東京, 筑摩書房, 2010, 232-233)).

[주51] Simondon, op. cit., p.242. 부언하면 이렇게 이해된 정보는 소여의 항이 결코 아니고, 통일성과 동일성도 아니다. 반대로, “정보는 두 개의 부조화스런 현실 사이의 긴장이며, 두 개의 부조화스런 현실이 시스템으로 될 수 있는 차원을 개체화의 작용이 발견할 때에 나타나는 의미작용이다”(Ibid., p. 31). 또한 박사 주논문에서의 정보의 논의를 보완하는 것으로서, 시몽동 자신의 손에 의한 다음 논고가 특히 중요하다(Simondon, « L’amplification dans les processus d’information » Communication et information : Cours et conférences, édition établie par Nathalie Simondon ; et présentée par Jean-Yves Chateau, Chatou: Éditions de la Transparence, 2010, pp.157-176). 

[주52  이 점을 노버트 위너(Norbert Wiener)인간기계론에서의 정보의 전송논의 속에서 하나의 개체의 물리적 개체성”, “생물학적 개체성”, “정신의 개체성을 논하고 있다는 것은 시사적이다(Wiener, The human use of human beings: Cybernetics and society, New York: Da Capo Press, 1988, pp.101-102(ウィーナー 人間機械論鎮目恭夫池原止戈夫訳, 東京, みすず書房, 2007, 105)). 

 

감사의 말

본고는 201467일에 오사카대학에서 열린 제2회 들뢰즈 스터디즈 아시아 국제회의(ドゥルーズ・スタディーズ・アジア国際会議)에서의 발표 “On the notion of "singularity" in Simondon and Deleuze: Pre-individual and information”에 대폭 가필수정을 가한 것이다. 적절한 조언을 해준 도쿄대학 石田英敬 교수, 影浦峡 교수, 青山学院大学 스테파니 쿱ステファニー・クープ 준교수, 동료 평가자들께 깊이 감사드립니다.

 

 

참고문헌

Bardin, Andrea. « De l'homme à la matière : Pour une « ontologie difficile ». Marx avec Simondon » Jean-Hugues Barthélémy (dir.)., Cahiers Simondon n°5, Paris: Harmattan, 2013, pp. 25-43.

Bergson, Henri. L'évolution créatrice, Paris: Presses Universitaires de France, 1907.(アンリ・ベルクソン 創造的進化合田正人松井久訳, 東京, 筑摩書房, 2010). 국역본

Bowden, Sean. “Gilles Deleuze, a reader of Gilbert Simondon” De Boever, Arne; Murray, Alex; Roffe, Jon and Woodward, Ashley (dir.), Gilbert Simondon: Being and technology, Edinburgh: Edinburgh University Press, 2012, pp. 135-153.

Cogburn, Jon. “Gilbert Simondon: Being and technology”, http://ndpr.nd.edu/news/41310-gilbert-simondon-being-and-technology/.(参照2014/09/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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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상겔스 상겔스

스피노자와 분열분석적 사고

: 그 세 가지 철학적 문제군

スピノザと分裂分析的思考

: そのつの哲学的問題群


** 이 글은 일본어판을 그대로 직역했다. 따라서 원문대조를 통한 용어의 변경은 이뤄지지 않았다. 가령 '비급'이라는 단어는 '투자, 투여'로 옮겨져야 하고, 감정과 정서를 구별해서 표기해야 하지만, 그런 것은 하지 않았다. 이런 점을 감안하기 바란다[2017년 3월 23일].


에가와 다카오(江川隆男)

情況3期第5巻第720047(情況出版)

 

우리는 이 삶에서, 특히 유아기의 신체를, 그 본성이 허용하는 한, 또한 그 본성에 도움이 되는 한, 다른 신체로 변화시키려고 노력한다.

스피노자, 윤리학5

 

스피노자는 모든 정상병자(正常病者)”를 적으로 돌린다.[각주:1]  따라서 이 정상병(正常病)에 대한 비판의 실재적 경험이 실제로 <분열분석적 사고>를 형성하는 유인이 될 것임에 틀림없다. “정상병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목적론, 다의성, 유비(analogy), 가능성, 부정, 의식, 선악, 표상, , 슬픔, 가족적 관계, 커플관계 등등에 매달리는 것, 실재성의 모든 것을 이것들 속에 에워싸는 것, 말하자면 메이저리티에 고유한 불치의 병이다. 그런데 정신분석은 확실히 사람들 속에서 기능해 왔으며, 현재에도 충분히 그 유효성을 갖고 있다. 다만 그것은 모든 것을 환상에 의해, 표상상과 말의 언어에 의해 해결하고, 그런 가운데 우리의 정신을 고정하는 한에서, 혹은 정신이라는 비물체적인 우주를 다의성과 유비로 가득 채우는 한에서만 기능하고 있는 것에 지나지 않는 것 같다. 달리 말하면, 일의성의 철학의 퍼스펙티브에서 말하자면, 정신분석은, 역시 어디까지나 <존재의 유비><이마주의 사고>에 대응하고, 또한 이것들을 분유하는 예를 들어 전이나 대상 a 등등의 정신분석의 개념들이 얼마나 엄밀한 비례성(상이한 항들 사이를 전이하기 위해 전제가 되는 관계=())의 사고 아래서 성립하는가 의식의 형이상학적 무의식에 관한 상징적인 행위라는 것이다. 사실, 정신분석적 사고는 반드시 유비나 다의성, 이마주의 사고나 말의 사고와 대립하지 않으며, 더욱이 그런 사고들에 대해 새로운 문제제기를 하는 것도, 이것들을 파괴하는 것도 아닐 것이다. 이에 반해 들뢰즈/가타리가 안티 오이디푸스안에서 제기하는 분열-분석”(schizo-analyse), 정상병과 이것을 전제로 한 광의의 정신장애, 그리고 특히 이것들을 이용하는 사람들을 비판하는 동시에, 바로 <존재의 일의성>(혹은 <인식의 일의성>)을 형성하는 것, 달리 말하면, 현실에 이 일의성을 산출하고 배분하는 정신의 초월론적 무의식을 형성하는 것에 있다. 특히 가타리가 도입한 이 분열분석에 의해 들뢰즈는, 정신분석과 일치하지 않으나, 그러나 그것과 화해 가능한 결과들을 산출한 그 이전의 철학적 사고를 철저히 하고, 바로 정신분석과 결코 화해할 수 없는 지점에서의 사고를, <분열분석적 사고>를 획득한 것이다. 한마디로 말하면, 그것은 스피노자주의와 분열증의 위대한 종합 실재적인 것[현실계]의 일의성혹은 무의식에 대한 스피노자주의 [각주:2]이다. 이 경험, 즉 분열분석적 경험은, 실재적인 생산적 무의식의 발생의 요소이며, 각개의 양태, 그 생존의 양태 속의 혁명적 마이너리티의 부분들에 있어서 성립하는 것이다.

 

1. 무의식의 형성 : 욕망하는 평행론

<분석하라>, 그리고 <형식화/이론화하라>, 결정적으로 쇠약한 사고, 모든 면에서 스콜라화된 현대의 죽어가는 분석적 사고여, 죽어가는 정신분석이여. 그러나 분열분석의 작업은 이것과는 아주 다르다. 그것은 분석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완전히 종합이다. 그것은 <파괴하라>, <생산하라>이며, 이 두 가지 활동=동사의 종합이다. 들뢰즈/가타리는 이 <파괴하라>라는 제1의 부정적인 작업이, <생산하라>(, 각개의 욕망하는 기계들의 존재의 양태를 찾아내는 것, 사회적 영역을 투자[투여][각주:3]하는 것, <강도=>을 투자[투여]하는 것)는 제2의 적극적 작업과 떼어낼 수 없다고 말하지만, 그것은 여기서 생산이 파괴의 충동을 의식한 욕망의 생산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스피노자에게는, 사실 정신분석의 대상이 될 수 있는 정신이나 그 심적 과정으로부터 분열분석적 사고로의 실재적 이행과정이 존재한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스피노자 속에 프로이트적인 마음의 심층으로서의 무의식을 찾아내려고 하는 노력이 항상 헛수고로 끝나는 것은, 스피노자에게서의 무의식이 의식을 넘어선 정신의 무의식이며, 그러므로 동시에 신체라는 무의식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개념 적용의 질서 속에서 찾아내는 것도, 주어진 것도 아니며, 형성되고 산출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사람은 신체가 무엇을 할 수 있는지, 또한 단순히 신체의 본성을 고찰하는 것으로부터 무엇이 도출될 수 있는지를 모른다.” [각주:4]이 유명한 문장이 나타나는 긴 비고(備考)에서 스피노자는, 바로 정신은 의식으로 환원될 수 없으며, 또한 우리의 의식에 정위한 인식도 신체가 무엇을 할 수 있는지를 모른다(바꿔 말하면 의식은 <신체가 무엇을 할 수 있는지>조차 모른다)는 것을 동시에 나타내고 있다. , 신체에 있어서의 결정‘(determinatio)이 정신에 있어서의 결의‘(decretum)와 본성상 동시라는 것, 달리 말하면 우리의 활동은 의식 속에서 자각된 자유로운 결의 스피노자는 이것을 눈을 뜨면서 꿈을 꾸는 것 같다고 말한다 를 바탕으로 이뤄지는 것이 아니라, 신경증적인 의식과 코기토의 철학을 넘어선, 정신의 결의=신체의 결정에 의해 이뤄진다고 한다. 이것에 의해 바로 스피노자에게 고유한 무의식의 문제가 제기될 것이다. , 이 평행론 자체가 <윤리학>에서의 무의식의 형성이다[각주:5]

들뢰즈의 스피노자론의 최대 특징은 스피노자에게서의 경험주의적 측면을 실천 철학으로서 개념들의 형성의 질서 아래서 밝힌 것에 있는 것이다[각주:6] 스피노자의 일의성의 철학은 단순히 철학사에 있어서의 존재의 일의성의 계보 속에 자리 잡은 정위치를 부여받는 것이 아니라, <일의적 존재> 개념의 경험론적 형성 아래서만 사고될 수 있을 뿐인 하나의 결정적 사건, 모든 사건에 대한 유일하게 동일한 사건으로서 파악되어야만 한다. 그렇지만 오늘, 스피노자의 실천철학으로부터, 특히 그 평행론으로부터 이런 과격한 비판성이 거의 간과되고 있는 듯하다. 평행론은, 실제로 그렇게 존재하는 정신과 신체 사이의 관계를 단순히 더 잘 설명하는 개념 따위가 아니라, 모든 의미와 가치의 변혁의 개념, 이것들의 새로운 형성에 관한 개념이어야만 한다. 그것은 들뢰즈가 말하는 이른바 존재론적 평행론에서 인식론적 평행론으로, 그리고 우리의 구체적 심신관계를 규정하고 있는, 인식론적 평행론의 개별적 사례인 심신평행론, 정신적-물리적”(psycho-physique) 평행론 [각주:7]으로 그 해상도를 올렸다고 해도 결코 감지할 수 없는, 형성의 차원 아래서 사고되는 평행론, 양태의 결정의 차원에서 생산되는 평행론이다. 바꿔 말하면, 그것은 경험주의적 평행론, 욕망하는 평행론이며, 그 어떤 비례성도 전제하지 않고, 이것들 일체의 기존 관계성에 대한 절대적 원근법주의를 동반한, 파괴와 생산을 조건으로서 전이하는 평행론, <정신적-물리적>을 대신하는 <분열적-신체적>(schizo-corporel) 평행론이다(가타리 등은 더욱이 이 평행론 자체는 완전히 긍정적인 의미에서 비물체=비신체적이라고 말할 것이다). [각주:8] 내가 여기서 제기하는 이 욕망하는 평행론은 정신에 있어서의 <비판의 문제>와 신체에 있어서의 <임상의 문제> 사이의 평행론이며, 여기서는 표현보다도 오히려 생산이 문제가 된다. 클레르 파르네가 비판과 임상은 엄밀하게 동일시되어야 할 것이다라고 말하는 것은 완전히 옳다. 다만, 엄밀하게란 어디까지나 이것들이 평행론을 이룬다고 하는 의미로 이해할 필요가 있다. 여기서의 비판의 문제는, 표상상과 언어로부터, 혹은 상상적인 것과 상징적인 것으로부터, 생성과 강도를 내용에 기반한 관념으로 정신의 사고 능력의 수준을 변형하는 것이며, 임상의 문제란 <거울> 자체 예를 들어, 라캉의 거울상 단계를 산출하는 거울, 타자로서의 거울, 라이프니츠에 있어서의 형이상학적인 살아 있는 거울, 반사 혹은 표현하는 거울 등등 의 파괴 작업인 동시에, 어떤 유기적인 신체로부터 다른 신체로 변화하는 것이다. 그래서 메이저리티의 언어인 분절 언어, 말의 언어로의 비판 없이 이 임상의 문제는 있을 수 없고, 이와 동시에 다른 어떤 비물체적인 것을 산출하는 신체를 문제화하는 것이 아니라면, 비판의 문제는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각주:9] 이런 의미에서의 평행론은, 단순히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형성하는 것이며, 욕망 속에서 원하는 내재적 실체를 구성하는 것, 즉 무의식이다. 이렇게 생각하면, 스피노자에게서의 이 실천적인 <욕망하는 평행론>이라는 개념을 제기함으로써, 우리는 분열분석적 사고의 철학적 문제들을 분명히 할 수 있을 것이다.

우선 첫째로, 불완전성이나 부정 등의 개념을 배제하고, 신체를 긍정하는 비판적 관계(혹은 더 적극적으로 말하면, 실재성의 <정도의 차이>의 관점)가 이 평행론 속에서 생각된다 , 우리는 언제 어떻게 실재의 영역을 정립하는가? 스피노자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나는 정신이 혼란된 관념에 의해 자기의 신체 혹은 그 부분에 대해, 전보다 큰 혹은 작은 존재력을 긍정한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물체들에 대해 우리가 지닌 모든 관념은, 외부의 물체의 본성보다도 우리의 신체의 현동적인 상태를 더 많이 표시하지만, 감정의 형상을 구성하는 관념은, 신체 혹은 그 어떤 부분의 활동 역능 혹은 존재력이 증대하거나 감소하기도 하는, 즉 촉진되거나 저해되기도 하는 것에 의해, 신체 혹은 그 부분이 드러내는 상태를 지시 혹은 표현해야만 하기 때문이다. [각주:10] 여기에는 부정이나 불완전성의 개념은 없다. 뿐만 아니라 여기서 말해지는 완전성은 불완전성과 대쌍을 이루는 개념이 아니다. 더 적은 완전성은 더 큰 완전성의 결여나 부재를 결코 의미하지 않는다. 슬픔이 있더라도, 그것은 단순히 기쁨의 결여가 아니라, 하나의 적극적인 이행상태(활동역능의 감소)를 나타내며, 사건으로서의 <슬퍼하는 것>에 고유한 강도를 지니는 것이다. 긍정하는것은 동일한 신체의 두 가지 상태 사이의 비교나, 이것들의 관념 사이의 비교를 통한 행위도 아니라면, 그런 비교의 결과를 기다려서 결정되는 활동=동사도 아니다. “긍정한다는 것은 그 자체로, 실재성을 포함한 어떤 것의 영역을 정립하는 것이다. 바깥에서부터, 스피노자에게서의 정신을 의식으로, 혹은 관념을 지향성으로 환원하거나, 특히 스피노자의 관념을 관념론에 직결되는 것으로 생각하거나 하는 한에서, 형성의 질서에 있어서 평행론을 구성하는 두 개의 요소는 결정적으로 어긋난 것으로 파악할 수 있을지도 모르지만, 그러나 그 내적인 이유가 오로지 어느 한쪽의 요소라고 할 의식 쪽에 있는 것도 사실이다. 왜냐하면 의식은 신체가 할 수 있는 것에 결코 따라잡을 수 없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평행론에 있어서, 분명히 신체가 정신에 대한 지도적 모델이 되는 장면이 있다는 점을 아는 것이다[각주:11] 신체가 <할 수 있는 것>은 의식에 의한 자각의 울타리 바깥에 있으며, 그것을 넘어서지만, 그러나 이것이 드러내는 것은 단순한 신체의 정신에 대한 우월성 따위가 아니며, 의식의 자각을 넘어서, 이 신체의 활동 역능에 대응한 정신의 <할 수 있는 것?, 그 사고 역능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스피노자가 말하듯이, 비록 표상상과 표면의 언어의 본질이 신체적 운동에 기초한 것이라고 하더라도, 이런 본질들을 습관과 기억의 질서를 지탱하는 실질로서 사용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정신 혹은 의식 쪽이다. 왜냐하면 신체는 신체이기 때문이다. 아르토는 만년의 텍스트에서 표상의 언어를 찢어버리는 말의 블록을 발하고 있다 신체는 신체다 / 신체는 그것만으로 존재한다 / 기관은 필요 없다 / 신체는 반드시 유기체인 것이 아니다 / 유기체는 신체의 적이다. [각주:12] 기관들, 혹은 기관들로 이루어진 유기체는, 기억이나 습관이 부착된 신체이다. 그러나 신체는 신체이며, 그저 그뿐이다. , 신체는 <더 큰> 혹은 <더 작은> 실재성을 포함한 존재를 긍정하고 있을 뿐이며, 이런 한에서 신체는 끊임없이 <더 유능>하다. 여기서 내가 말하는 <더 유능>하다는 것은 신체는 항상 <할 수 있는 것의 존재>에 다름 아니라고 하는 것이며, 더욱이 이런 신체의 본성을 바로 대상의 본성으로 하는 것이, 정신을 구성하는 관념들이다. 이 신체의 가치에 의해서만 이런 관념들의 가치가 평정되고, 이것에 의해 그 긍정적인 표현형태의 수준이 결정된다[각주:13] 이 신체의 존재, <할 수 있는 것의 존재>에 대응하도록, 관념의 표현활동은, 그동안 쉽게, 무비판적으로 결부된 표상상이나 표면의 언어와 연을 끊고, 형성의 평행론 아래서 그 사고활동 전체의 준위(準位)를 바꾸도록 결정된다. 그러나 이것은 평행론 이전의 <간극> 이것은 심신 사이에 실재적인 인과관계를 상정하는 것도 포함해 모두 의식에 고유한 착각이다 을 수정하려고 하는 조화에 대한 의지에 의한 것이 아니라, 무의식으로서의 평행론 자체가 지닌 욕망에 있어서의 결의=결정이며, 그때 바로 실재의 영역은 정립되는 것이다. 스피노자에 있어서의 무의식은, 들뢰즈가 특히 강조하는 공통 개념의 형성의 질서에 고유한 평행론과 관련된 것이다. 이런 경험주의적 평행론에 있어서의 두 가지 요소, 두 가지 계열 사이에는, 단순한 <간극>이 있는 게 아니며, 오히려 신체와 정신의 <할 수 있는 것>을 동시에 정의하고, 이것들 사이에서 실천의 문제를 제기하는 미지의 한 가지 적극적인 부조화가 있다고 말해야 할 것이다. , 무의식의 형성의 차원이 밝힌 것, 스피노자의 실천철학을 더 급진적으로 정의하는 것, 그것은 두 가지 계열의 <부조화적 일치>서의 욕망하는 평행론이다.

모든 양태의 현동적 본질(코나투스)은 내재적 실체의 본질을 구성하는 속성=부정법의 동사(형상)의 일정한 정도 또는 강도를 가진다. 그러므로 실체는 양태와 절대적으로 존재의 방식을 달리 하는 이상, <강도=>이라는 존재의 방식으로 이 내재적 실체를 표현할 수 있다. 부정법의 동사가 가진 강도는 결코 그 동사의 부정형을 인칭 변화시킴으로써 생기는 사태, 그것은 더 이상 그 동사가 귀속될 것의 본질을 구성하는 것이 아니며, 그 사물의 단순한 속성=특성이 되며, 그 사물의 양이나 질을 오로지 표시할 뿐이게 될 것이다. 그렇게 되면, 곧바로 사람들은 다시 목적론이나 부정성의 우위를 뒷받침하는 표상의 언어에 빠지게 된다. 부정법의 동사(형상)의 다양한 강도 이것들은 <강도=>과의 사이의 어떤 일정한 내포적 거리에 있는 역능에 의해 제시되는 것이다. 욕망 속에서 결정되는 비판의 문제는, 예를 들어, 생활의 형식과 합치한 간주관적인 언어사용(공통감각과 양식에 의해 정의되는)에 종속된 감성을 철저하게 능가하는 <감각 블록>과 이 언어사용에 대응하는 의미와 가치를 변형하고, 이 변형의 표현을 구체적으로 산출하는 <사고의 파라-그래프>, 즉 모든 가치의 가치 전환을 향하는 분자적 실천을 산출하게 된다. 아무튼 여기에 있는 것은, 우리의 사고 활동 속의 어떤 부분에 있어서 생성하는, 표상상과 말의 언어에 의한 판단의 적용 차원으로부터 관념의 언어활동이라는 표현의 형성으로의 이행이다. 경험주의적 평행론에 있어서 신체를 모델로 하는 것은 무엇보다 이런 결의로 우리의 정신을 결정하는 것이다.

욕망, 그것은 바로 실재적인 것의 정립과 종합의 원천이다. 스피노자는 욕망은 의식을 동반한 충동이다고 말하고, 더욱이 이 의식의 원인을 동시에 드러내는 욕망의 실재적 정의를 다음과 같이 규정한다. “욕망은 인간의 본질이 주어진 그 각각의 변양에 의해 어떤 것을 이루도록 결정된다고 생각되는 한에서, 인간의 본질이다.” 의식은 이 결정의 단순한 결과로서 생기는 것이며, 또한 이 결정은 무엇보다도 신체를 통해 경험되는 활동 역능의 증대감소라는 실재적 이행 속에서 말해지는 것이다. 욕망이 <실재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을 제기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욕망은 자신의 외부를 따라야 하는 범형 따위를 갖지 않는 이상, 결코 이런 물음을 제기하지 않는다. 또한 욕망은, 이런 물음을 따르고 이것에 응답하려고 하는 <()의 양태> 따위가 결코 아니다. 그것은 항상 <무엇이 실재인가>, <어떻게 실재를 생산하는가>라는 문제의 양태이길 계속한다. 달리 말하면, 욕망은 판단에 선행하며, 그 때문에 그 어떤 욕구도 없이 실재의 영역을 정립하는 생산의 질서에만 속할 뿐이라고 한다. 우리는 여기서 다양성과 유비가 소용돌이치는 영역 , 부정성을 매개로 한 <복수>의 생산이 있어도, 차이가 긍정되는 <다양>이 존재하지 않는 영역 과는 완전히 외재적인 관계에 있는 듯한 실재의 영역을 정립했다. 이 영역 전체는 바로 <기쁨의 지식><욕망의 지혜>로 가득 찬 정동군들에 의해 성립하는 평면 이외의 아무것도 아니다. 그러나 주의해야 한다. 이것은 단순한 낙관주의가 아니다. 오히려 이것은 현상태와, 단순히 지나가는 현재로서만 도래할 뿐인 미래에 대해 몇 안 되는 비관적 시선을 기울이기 때문에, 지금에 영원으로서 도래하고 있는 미래를 조건으로 한 어떤 삶을, 혹은 그 퍼스펙티브를 어떻게든 긍정하려고 하는 활동의 평면이다. 일개의 양태 속에서 작동하고 있는 욕망, 혹은 욕망하는 평행론이 어떤 것이며, 그것이 어떻게 작동하고, 무엇을 생산하는가를 찾아내는 것. , 분열분석의 제1의 적극적인 임무, 혹은 스피노자에게서의 개념들의 형성은, 감정 속의 어떤 적극적인 것을 이용해, 어떻게 일개의 양태 속에서 욕망하는 기계들이 작동하는가를 찾아내는 것이며, 이것이 동시에 혁명적 무의식의 형성과정이 되는 것이다.

2의 문제로서 생각할 필요가 있는 것은, 실제 속에서 어떻게 부정적인 것이나 결여나 무능력이 생기는가이다. 왜 이 문제를 다시금 제기하느냐 하면, 스피노자가 파악했듯이, 모든 개념의 형성은, 인간 신체의 활동 역능의 두 가지 상태(그 증대인가 감소인가) 중 어느 한 쪽에 관련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 문제를 전개하려면, 악의 개념에 의한 제2의 비판적인, 그러나 더 효과적인 방법론적 관점(혹은 활동 역능의 증대감소라는 실재적 이행과정의 <본성의 차이>의 관점)을 생각할 필요가 있다. 이 방법론적 관점은 제1의 비판적 관계 이상으로 비판적, 즉 더 창조적이며, 생산적이다. “나는 이하에서 선이란 우리가 제기하는 인간 본성의 틀에 점점 접근하기 위한 수단이 된다는 것을 우리가 지각하는 것이라고 풀이한다. 이에 반해 악이란 우리가 이 똑같은 틀에 일치하는 것의 방해가 되는 것을 우리가 지각하는 것이라고 풀이한다. 더욱이 우리는 인간이 이 틀에 더 많이 혹은 더 적게 접근하느냐에 의해서, 그 인간을 더 완전 혹은 더 불완전이라고 부른다.” [각주:14] 중요한 논점은, 정립된 실재의 외부에 다의성 혹은 유비의 사고와 세계를 방치해두는 것이 아니라, 이 실재의 일의성과 이런 존재들의 다의성의 영역을 두 개의 다양체의 유형으로서, 혹은 체제의 차이로서 관계짓는 것이다. 헌데, “인간 본성의 틀에 점점 접근하는것이란 그 본질과 존재가 더 많이 일치하게 되는 것, 즉 개체로서의 인간의 존재가 더 많이 스스로의 본질과의 관계에서 규정되게 되는 것이며, 따라서 여기서의 선은 더 많이 <좋은/나쁜> 실질을, 즉 더 많은 완전성을 갖게 될 것이다(인간 본성의 틀이란 그 본질과 존재 사이의 일치이며, 존재 속에서 그 본질의 변양을 효과적으로 전개하고 실현하려 하는 것 욕망의 윤리학 이다). 이에 반해, 그 본질과 존재가 더 적게 접근하는 것은, 예를 들어 우리가 개물의 존재를 그 본질로부터 떼어내고 그 존재에만 관심을 기울임으로써, 우리 자신이 하계나 무능력 같은 부정적 사항을 좇아 그 사물을 평가하게 되는 것, 그 때문에 그만큼 자기의 정신이 부정이나 결여에 의해 더 많이 형성되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이 경우의 악이란, 초월적 가치로서의 </>에 의해 규정되는 더 불완전한 것으로 채워진 상태를 나타낸다. 이런 의미에서 악=결여체는 항상 비교를 자신의 발판으로 삼는 것이다. 이렇게 우리의 활동 역능의 증대와 감소로부터, 즉 동일한 역능의 상이한 두 가지 사용으로부터, 실재의 일의성과 존재의 다의성이라는 두 가지 본질적으로 상이한 체제, 다양체를 발생시킬 수 있는 것이다.

완전성=실재성은 일정한 방식으로 존재하고 작용하는 한에서, 사물의 본질이라고 풀이된다고 스피노자는 말한다. 사물의 본질과 존재는 불가분하지만, 그러나 이것은 양태로서의 사물의 본질에는 그 존재가 포함되지 않는 이상, 그 본질과 존재가 무비판적으로 동일시되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오히려 모든 사물은 자신의 존재를 갖기 시작하는 것과 동시에 그 존재 속에 작용하는 힘으로서의 코나투스를, 목적으로서가 아니라, 작용 원인으로서 갖는 것이다. 그리고 다양한 정도로 이 힘이 존재하기 시작했을 때와 동일한 힘으로 발휘된다는 점에서, 모든 사물은 동등”(aequales)하다. 바꿔 말하면, 이것은 모든 코나투스에 대해 말해지는 신의 본성의 강도적인 <분유의 일의성>이다(거꾸로 말하면, 이것은 무한하게 많은 다양한 방식으로 내재적 실체를 실재적으로 정의하고, 더 말한다면, 이 내재적 실체인 기관 없는 신체의 <강도=>을 비급하는 것이다). 본질에는 절대적인 정도로서의 완전성=실재성이 속하지만, 그러나 현실에서의 존재에 의해, 즉 지속에 의해 이 본질의 상태만으로는 결코 생길 수 없는, 우리 자신의 활동 역능의 증대와 감소가 이행 방향 방향성으로서 우리에게 보이는, 실재성의 실질적 변이 의 본성의 차이로서 포함된다[각주:15] 기쁨의 수동적 종합(예를 들어 마주침의 조직화)은 하나의 퍼스펙티브를 산출한다. 자신의 신체와 적합하는 다른 물체=신체와 마주쳤을 때, 우리 속에 곧바로 수동적 감정으로서의 기쁨이 생기고, 이로부터 이 두 개의 신체=물체에 공통적인 일반성의 가장 철저한, 그러나 더 창조적이고 특이한 공통(일의적) 개념이 형성된다. 여기서는 내 신체의 활동 역능은 더 증대하지만, 이것은 단순히 내 신체라는 하나의 관계항 속에서 생기는 <사물의 상태>의 변화가 아니라, 관계하는 이런 두 개의 신체=물체들 사이에서 생기는 생성변화이다. 이에 대해 활동 역능의 감소를 보여주는 슬픔에 있어서, 나의 신체는, 거꾸로 기존의 불변적 관계 그 때문에 여기서는 더욱 더 가능성이나 우연성이 유효한 개념이 된다 를 대전제로 한 그것들의 단순한 관계항으로 한없이 빠지고, 마지막에는 거기에 완전히 흡수되어 버린다(사실 동일성이 소리 높여 외쳐지는 것은, 이런 슬픔의 상태에서이다). 공통 개념은 <사이> 개념이다. 따라서 이 개념이 만들어지는 한, 그것은 관계라는 비물체적인 것의 변형을 필연적으로 표현하게 될 것이다. 바꿔 말하면, 공통 개념의 형성의 유인이 되는 기쁨에는, 다른 신체=물체와 더불어 기존의 관계의 변형 자체에 대한 마주침과 욕망이 있다. “마주침/만남이란 <관계=연관>(relation)이 외재화된 가운데서의 생성변화이며, 항을 정한 목적론적 배치 속에서 생기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본성 이것은 오히려 <관계=>(rapport)에 의해 표현된다 의 필연성에 의한 기존의 관계들=연관들의 파괴변형을 이끌 수 있는 것이다. 스피노자에게서 실체이든 양태이든 존재가 말해지는 모든 것은 필연이라는 존재의 양상밖에는 없다. 그러나 이 필연성은, 존재의 외부에 있으며, 그 존재가 따라야 할 법칙이나 범형에 있는 것이 결코 아니다. 그것은 자기의 본성에 속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관계의 외재성, 마주침의 조직화, 관계의 변형, 이런 세 가지 사건은, 생산적 욕망 아래서 공통 개념의 형성으로 향하기 위한 불가결한 요소들이다.

헌데, 이런 내 신체의 활동 역능의 증대, 즉 내 신체(corps)와 다른 물체=신체 사이에서의 나의 신체의 생성을, 예를 들어 퐁주의 사물 놀이[대상놀이]혹은 오히려 사물 기쁨[대상기쁨]이라는 말을 사용해 «objoie c»라고 부르기로 하자[각주:16] 들뢰즈가 말하는 마주침의 조직화는 관계의 외재성 속에서의 기쁜 물체=신체 사이의 결합인 이상, 단순히 우연에 의지하는 게 아니라, “불확정적 관계들속에서의 요소들의 편성화이다. 그것은 기계적 욕망이며, 우연성이 아니며, 오히려 필연성을 존재하는 양태들 자신의 본성으로 삼고자 하는 노력이기도 하다. “왜 에베레스트에 오르는가”, “거기에 그것이 있기 때문이다.” 사람과 산 사이의 언어 내적인 일반적 관계가 문제인 게 아니다. 여기서는 그 어떤 관계도 없다. 비관계 속에서의 <결합-생성>이 문제인 것이다. <어떤 맬로리 [각주:17]에 있어서 거기서 에베레스트가 되는 것>이 발생할 뿐이다(부정법(不定法)의 동사, 고유명, 부정관사 혹은 대명사에 의해 구성된 욕망의 표현). 어떤 맬로리의 신체와 다른 물체, 에베레스트와의 사이에는 이 신체의 생성변화를 나타내는 «objoie c»가 있을 뿐이다. 이것은 하나의 특이한 사건의 선을 긋는 형태로, 욕망을 내실로 한 어떤 <그것>(il)으로서의 무의식의 생산을 나타내고 있다. 이 문답, 혹은 동성애자 맬로리의 이 말은, 결합의 부재 속에서 어떻게 실재적으로 구별되는 요소들이 기계적인 결합을 이루어 작동하는지를 잘 나타내고 있을 것이다. 이제 인간은, 세계를 대상적으로 구성하는 주체도 아니라면, 스피노자가 말하는 자연의 공통의 질서속에서, 혹은 모든 기존의 불변적 관계의 가능성의 조건들 속에서 우연에 몸을 맡기는 정상병자도 아니고, 현실에서 구별되는 요소들이 불확정적인 관계 아래서 필연적으로 연결되어 작동하는 욕망하는 기계의 한 부품이다. <-등산가>, <사자-조련사>, <인간--> , 모든 것은 기계적으로 작동 편성된 생산적 욕망이며, 그런 한에서 욕망은 자기의 본성의 법칙들을 가장 잘 포함한 것이다.

 

2. 강도 : 죽음의 분열증화

그런데 관계의 외재성은 실체주의와 관계주의에 대한 제3의 입장인데, 그러나 그것 이상으로 이 외재성이, 실체 개념과 함수 개념을 파괴하는 동시에 모든 관계들의 현실적인 비물체적 변형을 수반할 때, 그것은 더 이상 대부분 부정적으로만 작용할 뿐인 현행의 조건들의 한복판에서, 이야기화된 인물론적 무의식도, 구조화된 기호론적 무의식도 아닌, 반시대적인 초월론적 무의식을 형성할 것이다. 예를 들어 아르토는 이곳에 잠들다에서 다음과 같이 썼다. “, 앙토냉 아르토는 나의 자식이며, 나의 아버지이며, 나의 어머니이며, 그리고 나이다.” [각주:18] 아르토는 자식, 아버지, 어머니, 그리고 그 자신의 계열을 편력하는데, 그러나 그것은 내포의 가혹한 변형의 여행이지 결코 그 각각으로의 동일화의 여행이 아니다. 여기에는 그 어떤 동일화도 존재하지 않는 이상, 이 내포의 여행은 방랑의 여행이다. 실제로 고정된 관계들 속에서, 욕망이 혁명적이었다는 것은 결코 없다. 여기서의 문제는, 제반 불변적인 <관계>(친자관계, 부부관계 등등) 개념의 동일성 속에서의 미리 정해진 관계항(자식, 아버지, 어머니, )으로 단순히 이행하고 그것과 동일화하는 것이 아니라, 이런 관계들 자체를 변형하는 것 없이는 생성변화할 수 없는 강도적 양태로서의 자식, 아버지, 어머니, 나이다. 그렇다면 이 내포의 여행, 이 강도의 흐름은, 어떤 이동경로를 취하는가? 달리 말해보자. 나는 나의 원인이며, 나의 결과이다. 그리고 이와 아주 똑같은 의미에서, 나는, 원인으로서의 아버지로부터 결과로서의 자식으로 향해간다. 가장 중요한 것은, 이 이행과 동시에, 원인결과의 관계(혹은 친자관계) 자체가 잔혹할 정도로까지 일그러지고 변형되는 것이다. 이 혹한과 작열의 이동 경로야말로 비물체적인 관계를 형성하는 길이며, 이 길을 걷는 것 자체가 하나의 초월론적 경험, 즉 분열분석적 경험이다.

아르토라는 이름을 지닌 이 경련하는 존재는, 이런 불변적 관계들과 그 개념에 대한 투쟁, 비물체적 변형 이것은 정확하게 말하면, 비물체적인 것의 물체적 변형이다(비물체적 유물론의 첫 번째 입장) 없이는 신체로서 실재할 수 없는 존재이다. 신체가 발하는 レクトン[각주:19]의 증기, 비역사적 구름이라는 것은 바로 이 변형이다. 이 신체의 존재에는 기존의 그 어떤 관계도 귀속하지 않으며, 또한 거꾸로 이 존재를 그 어떤 관계들로 환원할 수도 없다. 주의해야 할 논점은, 이 변형은, 이른바 정적 발생을 정확하게 정의할 수 있는 물체=신체에 대한 비물체적 변형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며, 물체=신체처럼은 결코 변형도 파괴도 될 수 없는 것, 즉 의미나 가치나 관계 같은 비물체적인 것에 관한 물체적=신체적 변형이라는 것이다. 이 의미에 있어서만 비물체적 변형은 신체에 귀속한다고 말하지 않으면 안 된다. 잠재적인 것의 현동화가 구체적인 것에 대해 그 힘들을 발휘한다면, 그것은 현동화가 이 비물체적인 변형의 물상화와 하나가 될 때이다(들뢰즈에게서의 잠재성의 철학이 맑스의 문제들을 구성하는 장이 여기에 있다). 혹은 관계의 물상화로부터 그 비물체적 변형의 현동화로. 아버지를 살해하고(살인소망), 어머니와 하나가 된다(성적 소망)는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의 형식을 해석장치로 삼았다고 하더라도, 이 욕망 속에서는 친자관계, 부부관계라는 관계 자체는 이전과 다를 바가 없으며, 여전히 보존된 채로 있다. 오이디푸스 콤플렉스 아래서 상정된 소망, 욕망, 질투, 증오, 해석, 관계에 대한 의지는, 그 어떤 의미에서도 우리가 주장하는 빗물체적 변형에 대해 무차이이다. 그러나 기존의 관계를 보존한 채로는 욕망이 혁명적일 수는 없다. 따라서 혁명적인 욕망하는 무의식은, 이런 일반적인 특정한 관계들 자체를 변형하고, 이것들의 불변적인 개념의 동일성의 효력을 잃게 만드는 것에 의해서만 형성될 수 있을 뿐이리라. “잔혹이란 바로 이 변형의 과정이다. 그것은 인간의 마음의 고뇌가 아니라 오히려 동물의 신체의 고통에 가까운 것이다. 아르토는 바로 이 빗물체적 변형의 고아이며, 사건 속에서 욕망하고 있는 독신자이다.

셋째로, 스피노자에게서의 신체의 탈-유기체화라는 형성 차원 아래서만 사고되는 임상의 문제(환언하면, <강도의 차이>의 본성)가 존재한다. “우리는 이 삶에 있어서, 특히 유아기의 신체를, 그 본성이 허용하는 한, 또한 그 본성에 도움이 되는 한, 가장 많은 것에 유능한 다른 신체, 그리고 자기와 신과 사물에 대한 가장 많은 것을 의식하는 정신에 관계하는 다른 신체로 변화시키려고 애쓴다”[강조는 인용자]. [각주:20] 여기에는 어떤 일정한 기관들로 구성된 유기체적 신체로부터 다른 신체, 기관 없는 신체 로의 변질변신의 문제, 혹은 현동적인 현재의 상으로부터 바라본 유기체적 신체의 존재로부터 영원의 상 아래서 바라본 비유기체적 신체의 본질로의, 즉 기관을 갖지 않은 신체로의 변화형성의 문제가 제기되고 있다. 유아기의 신체로부터, 달리 말하면 거울에 비친 기관들의 총체로서의 유기체적 신체로부터, 타자가 개재하지 않고 그 결의=결단이 모두 강도로서 생겨나는 기관 없는 신체, 거울상 단계를 갖지 않은 실재적 신체, 거울에 비치지 않은 충실한 신체로. 다만 주의해야 한다. 이것은 스피노자가 말하듯이 어떤 본질 혹은 형상(예컨대 말)을 다른 본질 혹은 형상(예컨대 인간 혹은 곤충)으로 바꾸는 것이 아니라, 어떤 신체의 본질 혹은 형상의 강도의 문제이며, 역시 그 본성과 하나가 된 양상의 문제, 필연성의 문제이다. 이것은 형성의 질서에 있어서의 비판의 수준과 완전히 평행을 이루는, 스피노자에게 고유한, 그리고 내가 여기서 강조하고 있는 생산적 무의식 자체로서의 욕망하는 평행론에 있어서의 임상의 문제이다.

스피노자는 분명히 신체를 하나의 새로운 모델로 삼았다. 그러나 들뢰즈/가타리가 주장하듯이, 그것은 동시에, 혹은 필연적으로 신체를 <죽음의 모델>로 삼는 것이다. 그렇다면 신체를 <죽음의 모델>로 한다는 것은 무슨 소리인가? 그것은 초월성을 띤 부정이나 결여를 신체에 가져오는 것도, 혹은 양과 질에 관련된 죽음을 모델화하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신체가 단순히 가멸적인 것이기 때문에도, 우리에게서 신체가 가장 절실한 가멸성을 갖는 것으로서 존재하기 때문도 아니다. 그런 것이 아니라 오히려 신체가 모든 가멸성을 그것과는 완전히 다른 실재성을 드러내는, <강도=>으로의 점근적 하강소멸로서 파악되기 때문이다. 그것은 오히려 죽음을 양과 질로부터 해방하는 것, 혹은 죽음을 둘러싼 양과 질의 관점을 무효로 하는 것이다. 그런 신체는 무엇인가? 기관 없는 신체는 결코 우리의 경험의 가능성의 조건이 아니다. 기관 없는 신체는 아무것도 가능케 하지 않는다. 그것은 오히려 아무것도 가능케 할 수 없는 소진된 것의 절대적 조건이며, 더 충분하게 말한다면, 모든 강도가 발생하기 위한, 즉 절대적 낙하소멸하기 위한 강도가 내포량으로부터 구별되고, 바로 강도로서 파악되기 위한 하나의 무조건적 원리이다[각주:21]기관 없는 신체는 <죽음의 모델>이다. [각주:22] 칸트는 분명히 지각의 예측予料속에서 이 낙하, 소실을 파악했다. <부정성=>과의 관계 아래서만 규정되는 양, 즉 이 <부정성=>과의 내적인 긴장관계 속에서만 규정되는 양, 그것이 내포량이며, 점근적으로 이 <부정성=>으로 낙하해가는 한에서만 그 정도에 고유한 수준을 나타내는 양이다. 이런 의미에서 칸트는 이미 근대 시민사회의 인간상 속에서, 혹은 새로운 형이상학, 새로운 합리주의 속에서, 혹은 이성의 자기 비판 속에서 간신히 죽음의 욕동을 언뜻 본 것인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죽음은 결코 부정적인 것으로도, <부정성=>으로도 환원되지 않는다. 죽음에 걸맞는 것은 강도이며, <강도=>이다. “죽음을 분열증화하려, 무엇보다도 양과 질로부터 죽음 자체를 해방하는 것이 필요하다. 하지만 그것뿐이 아니다. 평행론으로부터 말하자면, 그것은 죽음의 표현을 발산시키는 것, 모든 <강도-생성><강도=> 위에서 경험되는 죽음의 생성으로 하는 것이다.

분명히 스피노자는 타자 없는 세계에서 살고, 그래서 타자의 욕망에도, 타자의 변증법적 스토리에도 종속되지 않은 자유로운 인간을 생각했다. 그리고 이 자유로운 인간은 무엇보다도 죽음에 대해 생각하는 것이 가장 적다. 그리고 그의 지혜는, 죽음에 대한 성찰이 아니라 삶에 대한 성찰이다.” [각주:23] 그러나 여기서 성찰되는 삶은, 실재 속에서 형성되는 삶이며, 그러므로 여기서 성찰되지 않은 죽음이란 상상과 상징 아래서 표상될 가멸적인 차이, 혹은 적용의 질서에 있어서의 잠재적 다양체의 현동화의 끝에서 취소되는 가멸적인 차이에 대응한 죽음, 부정이나 결여로 환원되는 죽음, 주체로서 고정된, 한 명의 타자로서의 <>의 죽음이다. 따라서 여기서 성찰되지 않은 삶도 존재하게 될 것이다. 그것은 이 성찰되지 않은 죽음에 의해 잃는 것이 최대가 된 듯한 삶이다. <>는 이런 삶의 별명이다. 그러나 <죽음의 경험> 기관 없는 신체라는 <죽음의 모델> 위에서 발생하는 (즉 낙하하는) 강도를 감각하는 것 에 대해서는 이런 <>에 대해 말해지는 삶과 죽음 사이의 경계선은 완전히 그 의미를 잃는다. 이것이야말로 스피노자가 말하는, “죽음이 그만큼 덜 해로워지며”, “죽음을 거의 두려워하지 않게 된다는 것이다[각주:24] 왜냐하면 이 경험에 있어서 하나의 삶은, 죽음에 의해 잃는 것이 더 적을 뿐, 그만큼 더 많은 영원을 느끼고 경험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삶과 죽음 사이에 그어진 경계선의 탈근거화야말로 영원으로 회귀하는 것이다. 그것은 동시에 자기<>로부터 해방하는 것이다. 욕망하는 기계들 속에서는, 기관 없는 신체는 결코 차이화하지 않는 차이이며, 이에 반해 차이화하는 것만 할 수 있을 뿐인 차이라는 필연성 속에서 이 신체의 비분할적인 내포 부분을 생각한다면, 그것은 이 <강도=>에 대해서만 존재하는 어떤 강도의 차이 <e é>이다. 자유로운 인간의 지혜의 모든 것은 욕망의 지혜이다.

영원을 느끼고 경험하는 것, 그것은 욕망하는 평행론에 있어서의 미래의 힘들, 분열분석적인 <-실현>의 경험이다. 이 경험이 빗물체적 변형의 물상화 = 현동화의 실재적인 발생의 요소가 될 때, 처음으로 이 <물상화=현동화>론은 혁명의 힘들을 획득하는 것이다. 그러나 주의해야 한다. 이 미래의 원인을 결코 목적인의 일종으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목적인은 그 과정을 이루는 편이 좋다고 생각하고, 나쁘다고, 즉 실현의 결여라고 생각하고 그것을 부정해야 할 대상으로 삼는데, 그러나 이 새로운 작용원인=자기원인은 과정을 결코 부정하지는 못할망정, 그 자체로 오히려 질료적인 <과정인>으로서만 불릴 수밖에 없을 뿐이기 때문이다. 바꿔 말하면, 문맥이 아니라, 또 문맥과는 전혀 관계없는 비통시적인 과정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이곳을 통과하는 자는 결코 통과한 공간을 산출하지 않는 걸음걸이를 하는 자들이며, 분열자의 산보(혹은 그 사고)란 그런 것이다. 사회적 영역은 오히려 이런 과정에 의해 끊임없이 적극적으로 산출되는 실재의 영역이다. 들뢰즈/가타리가 말하듯이, 바로 분열증적 과정은 혁명의 잠재력이다.” [각주:25] 욕망은 이 과정만 알 수 있을 뿐이다.

분열분석적 경험은 하나의 실재적 경험이며, 항상 <죽음의 경험>을 동반한 경험이다. 이런 의미에서 분열분석은 오히려 하나의 종합이다. 모든 피분석체의 그 현동적 조건들을 파괴하는 것, 변형하는 것, 이와 동시에 기관 없는 신체로서의 <강도=>을 비급하는 것, 이것이 그대로 분열분석적 경험을 형성하게 된다. 그러므로 처음부터 이 경험은 파괴와 동시에생산적이다. [각주:26] 이렇게 해서 분열분석적 경험은 그 사고가 비물체적인 것의 물질성임을 찾아내는 것이다. 이 사고의 물질성 ― 비물체적인 것을 물체적으로 변형하는 강도 가 자기 속에서 사회적 영역을 실재적으로 정의하고, 또한 이 흐름을 만들어내는 것이 실제로 사회를 생산하는 것이며, 이것이 <강도=>을 비급하는 것의 의미이다[각주:27] 분열분석은, 따라서 유물론적이고 초월론적이다. 그것은 욕망의 과정인을 찾아내어 긍정한다는 의미에서 빗물체적 유물론이며, <강도=>을 비급한다는 강도의 완전한 본성을 찾아내고 긍정하는 한에서 초월론적이다. 스피노자와 분열분석의 가장 적극적인 임무, 그것은 어떻게 이 <강도=>을 자기 속에 비급하느냐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은, 무의식으로서의 욕망하는 평행론을 어떻게 형성하는가와 관련되어 있따. 무의식의 형성, 즉 욕망하는 평행론에 의해 들뢰즈/가타리가 제기한 분열분석은 더 급진적으로, 더 많은 강도를 수반한 사고와 경험의 행사 속에서 그 임무가 전개되는 것이다.

 

에가와 타카오 : 도쿄도립대학(철학). 저서로 존재와 차이 : 들뢰즈의 초월론적 경험론(存在差異ドゥルーズの超越論的経験論)(知泉書館), 번역서로 베르그손 강의록 3(ベルクソン講義録III)(공역, 法政大学出版局)

  1. ‘정상병자‘(normopathe)는 라 보르도 정신병원의 창설자이며, 거기서의 가타리의 좋은 파트너였던 장 우리가 만든 말이다(Cf. Felix Guattari, Chaosmose, Galilee, 1992, p.103). [본문으로]
  2. Gilles Deleuze, Pourparlers. Minuit, 1990, pp.197-198 / cf. Note pour l’edition italienne de Logique du sens, in Deux regimes de fous, Minuit, 2003, p.60. [본문으로]
  3. [옮긴이] 일본 문헌에서 읽을 수 있는 '비급'이라는 단어는 한국어로는 투자, 투여로 옮기는 편이 좋다. [본문으로]
  4. 스피노자, 『윤리학』, 3부, 정리 2 비고. [옮긴이] 원문 및 국역본을 참고하지 않았다. [본문으로]
  5. Cf. Gilles Deleuze, Quatre propositions sur la psvchanalyse, in DF, pp.73-74. “무의식, 당신은 이것을 생산해야만 한다. 무의식을 생산하라. 그렇지 않으면 당신들의 정신증후군, 당신들의 자아, 당신들의 정신분석가와 함께 있어라. … 무의식을 생산하기.” [본문으로]
  6. 개념의 적용의 차원에 있어서의 “사변적 관점”과 개념의 형성의 위상에 있어서의 “실천적 기능” 사이의 차이, 그리고 이 후자의 경험론적 의의 ― 이런 논점들이야말로 경탄해야 할 일의성의 사상을 제기한 혁명적 이분자異分子로서의 스피노자를 부각시키게 된다 ― 에 대해서는 Gilles Deleuze, Spinoza et le problème de l’expression. Minuit, 1968, pp.134-136, 259-262(이하, SP로 표기) / Spinoza-philosophie pratique, Minuit, 1981, pp.27-43, 127-129, 160-161(이하, S으로 표기)를 참조하라. 미뉘사에서 출판된 『스피노자 : 실천철학』은 그 11년 전에 PUF에서 나온 『스피노자』를 바탕으로 대폭 증보∙가필된 것인데, 안타깝게도 이 구판에 있었던 「텍스트 발췌집」 부분(세 개의 구분, 전체 26쪽)은 신판에서는 완전히 생략되어 버렸다. 그래서 아래에서 각각의 발췌에 붙여진 들뢰즈 자신에 의한 간단한 표제와 발췌 대목을 참고로 번역해둔다. 텍스트 발췌집 (A) 비판 1. 의식에 대한 비판 : 놀랍게도 신체는 … (『윤리학』 3부 정리2 비고). 2. 왜 우리의 관념은 본래적으로 비완전한가(『윤리학』 2부 정리28, 증명과 비고). 3. 법에 대한 비판 : 아담의 오해(『신학정치론』 4장). 4. 우리는 비완전한 관념에 따른 두 종류의 감정을 갖는다(『윤리학』 3부 정리 11 비고 / 정리 39 비고 / 감정의 일반적 정의). 5. 슬픔의 감정과 이 감정을 이용하는 사람들에 대한 비판(『윤리학』 4부 정리 45 비고 / 정리 63 비고 / 부록 13 / 5부 정리 10 비고). 6. 종교에 대한 비판과 종교의 의미 : 복종하는 것(『신학정치론』 13장) (B) 완전한 것의 획득 7. 방법 : 어떤 진정한 관념에서 출발하여 우리 자신과 신과 다른 물체에 대한 완전한 인식을 산출하는 것(『지성개선론』 37-40). 8. 왜 공통개념은 우리에게서 완전한 관념인가(『윤리학』 2부 정리 39 정리와 증명과 계). 9. 어떻게 우리는 공통개념에 도달하는가: 기쁨의 감정에서 출발해 외적 사물과 우리 자신에게 공통적인 것에 대한 관념을 형성하는 것(『윤리학』 5부 정리 10 정리와 증명과 비고). 10. 공통 개념에서 신의 관념으로(『윤리학』 2부 정리 46 증명 / 정리 47 비고). 11. 신의 관념의 첫 번째 측면 : 속성에 의한 유일한 실체(『윤리학』 1부 정리 8 비고 2). 12. 신의 관념의 두 번째 측면 : 모든 속성에 대한 유일한 실체(『윤리학』 2부 정리 10 증명과 비고). 13. 원인의 일의성 : 자기원인과 똑같은 의미에서 말해지는 모든 사물의 원인인 신(『윤리학』 2부 정리 3 비고). 14. 속성들의 일의성 : 여러 가지 속성들이 신의 본질을 구성하고 여러 가지 산출물들의 본질 속에 포함된다(『윤리학』 2부 정리 7 비고) (C) 양태의 상태들 15. 존재하는 개체(『윤리학』 2부 정의 보조정리 4 5, 6, 7 비고). 16. 죽음이 의미하는 것(『윤리학』 4부 정리 39 증명과 비고) 17. 영원의 특이한 본질(『윤리학』 5부 정리 23 증명과 비고). 18. 악은 본질에 관해 아무것도 표현하지 않는다(완복서한집』 편지 13[스피노자가 블뤼엔베르크에게 보낸 편지]. 19. 제3종의 인식과 본질들 : 나와 사물과 신(『윤리학』 5부 정리 25 증명 / 정리 31 증명). 20. 개체의 사멸 후에 본질적으로 남는 것(『윤리학』 5부 정리 38 증명과 비고)(Cf. Gilles Deleuze, Spinoza, PUF, 1970, pp.101-26). [본문으로]
  7. Cf. SP p.100. [본문으로]
  8. 가타리는 초기 스토아학파의 이 “비물체적”(incorporel)이라는 말을 들뢰즈 이상으로 많이 사용할 뿐 아니라, 그것 이상으로 새로운 의미를 그것에 부여한다. <비물체적인 것>의 개념을 쇄신하고, “비물체적 우주”를 입안한다는 의미에서, 가타리는 21세기의 사상가이기 전에 그 과격함에서 말하더라도 오히려 20세기의 크리시포스가 아닐까? 예를 들어 스피노자와 라캉을 관계시켜서 다음과 같은 결정적인 형태로 <비물체적인 것>의 개념이 사용되고 있다. “스피노자를 달리 말해서 나는 비물체적 세계에는 본질적으로 그 자체에 의해 존재하는 것이 속한다고 말할 것이다”(Felix Guattari, Cartographies schizoanalytiques, Galilée, 1989, p.196((『分裂分析的地図}作成法』、宇波彰・吉沢順 訳, 紀伊國屋書店, 1998년). “언어 표현의 실질과 비언어 표현의 실질은 미리 만들어진 유한한 세계(라캉적인 대문자 〈타자〉의 세계)에 속하는 담론의 연쇄와 무한한 창조적 잠재성을 지닌 비물체적 역치閾値(이는 라캉적과 ‘숫자집’과는 아무 관계도 없다)가 교차하는 지점에서 확립된다”(Chaosmose, p.43). “그러나 라캉은 … ‘욕망하는 기계들’ ― 그는 이 이론에 착수했는데 ―을 적절하게 비물체적인 잠재성의 권역에 위치시키지 않았다”[강조는 인용자](Chaosmose, p.132). 또 장 우리도 가타리의 영향을 받았는지 다음과 같이 말한다. “관료적 기준의 틀은, 응축된 질의 차원에 있는 것을 측정할 수 없으며, 스토아학파가 말하는 의미에서의 비물체적인 차원에 있는 것을 측정할 수 없다”(ジャン•ウリ序文, 『精神の管理社会をどう超えるかーー制度論的精神療法の現場から』, 松籟社, 2000년, 16頁). 다만 스피노자는 당연한 것인데, 이 “비물체적”(incorporeum)이라는 말 자체의 사용에 대해서는 부정적이다(『지성개선론』 88-89頁 참조). [본문으로]
  9. 예를 들어 아르토의 「언어에 대한 편지」에는 문법적으로 분절된 “말의 언어”에 대한 비판과 고차적인 연극적 “관념”에 대한 철학적 주장이 있다(Cf. Antonin Artaud, Œuvres Completes IV, Gallimard, 1978, pp.101-117(『アントナン・アルトー著作集 I 演劇とその分身』, 安堂信也 訳, 白水社, 1996년). “한마디로 연극의 가장 높은 관념은 우리를 철학적으로 <생성>과 화해시키는 관념이며, 모든 종류의 객관적 상황을 통해서 단어 속에서의 감정들의 변화나 충돌에 대한 관념보다도 사물 속의 관념들의 통과와 변질에 관한 한순간의 관념을 훨씬 우리에게 암시하는 관념처럼 생각된다”(Ibid., p.105). [본문으로]
  10. 스피노자, 『윤리학』, 3부 「감정의 일반적 정리」 [옮긴이] 다시 말하지만, 일본어 문서를 그대로 직역했다. 따라서 '감정'을 '정서'로 바꾸지 않았다. [본문으로]
  11. 스피노자, 『윤리학』, 2부, 정리 12, 비고 참조. [본문으로]
  12. cf. Gilles Deleuze, Felix Guattari, Mille plateux. Minuit, 1980, pp.196-197(『千のブラトー』, 宇野邦一・他訳, 河出書房新社, 1994년), 또한 森島章仁, 『アントナン• アルトーと精神分裂病』, 関東学院大学出版会, 1999년, 「第五章 : 重さをひらく」のなかのとりわけ「三寸断化された身体/器官なき身体ーー性, 分身, 機械」를 참조. [본문으로]
  13. “그 대상의 본성을, 즉 인간 신체의 본성을 인식하는 것 …”(스피노자, 『윤리학』, 2부 정리 13 비고) 및 “왜냐하면 관념의 탁월함[가치]과 그 현동적인 사고 역능은 대상의 탁월함[가치]에 의해 평가되기 때문이다”(『윤리학』 3부 「감정의 일반적 정의」). [본문으로]
  14. 스피노자, 『윤리학』, 4부, 서문 참조. [본문으로]
  15. Cf. S. pp.54-58. [본문으로]
  16. 프랑시스 퐁주의 ‘사물 놀이’(objeu) ― 더 나아가 이것은 ‘사물 기쁨’(objoie)으로 이어진다 ― 에 대해서는 安部良雄, 『ポンジュ人・語・物』(筑摩書房, 1974년)을, 또한 라캉의 ‘대상 a’를 대신해 가타리와 장 우리가 제기하는 제도론적인 ‘대상 b’에 관해서는 예를 들어 三脇康生, 「精神医療の再政治化のために」(『精神の管理社会をどぅ超えるか』 수록)을 참조. [본문으로]
  17. [옮긴이] 등반가, 산악가인 George Herbert Leigh Mallory를 가리킨다. [본문으로]
  18. Cf. Antonin Artaud, Ci-git, in Œuvres Completes XII, 1974, pp.75-100. [본문으로]
  19. [옮긴이] 렉튼이라고 읽는데, 무엇을 가리키는지 확인하지 못했다. [본문으로]
  20. 스피노자, 『윤리학』, 5부, 정리39, 비고. [본문으로]
  21. Cf. Gilles Deleuze, L’Epuise, Postface a S. Beckett, Quod, Minuit, 1992, p.97/ “이마주는 사라지는 것, 소진되는 것, 하나의 낙하이다. 그것은 그 높이에 의해, 즉 0 이상의 그 수준에 의해 그 자체로 정의되는 순수 강도이며, 이 강도는 그저 하강하는 것에 의해서만 그 수준을 묘사하는 것이다.” Cf. Gilles Deleuze, Felix Guattari, L’Anto-Œdipe, Minuit, p.395[이하 AOE로 약칭]. “모든 강도는 그 고유한 삶 속에 <죽음의 경험>을 초래하며, 또한 <죽음의 경험>을 포함한다. 아마 모든 강도는 마지막에는 사라지고, 모든 생성은 그 자신 <죽음의-생성>이 되는 것이다.” [본문으로]
  22. Cf. AOE, pp.393-398. [본문으로]
  23. 스피노자, 『윤리학』 4부, 정리67. [본문으로]
  24. 스피노자, 『윤리학』, 5부, 정리38, 정리와 비고, 정리 39, 비고를 참조. [본문으로]
  25. AOE, p.408. [본문으로]
  26. Cf. AOE, pp.384-385. “[분열분석의] 두 가지 작업은 반드시 동시에 이뤄진다.” [본문으로]
  27. Cf. AOE, p.394. “각각의 강도가 무한하게 많은 정도 아래서 증감하는 것으로서 어떤 순간에 산출되는 것에서 출발해서, 자기 자신 속에 <강도=영>을 비급하는 것은 강도에 고유한 것이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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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크 데리다 사후 10



 

0. 들어가며 

...................................................................................................................................................................西山雄二


1. 민주주의의 항상성과 일관성 (Constance et consistance de la démocratie) 

....................................................................................................... Jérôme LÈBRE (일역 松田智裕横田祐美子)


2. 데리다와 랑시에르에게서의 민주주의와 타자의 물음 (La démocratie et la question de l’autre chez Derrida et Rancière)

.............................................................................................................................................................. 亀井大輔


3. 들뢰즈와 데리다두 사람의 운동은 같지 않다 (Deleuze et Derrida, ce n’est pas le même mouvement)

.................................................. Jean-Clet MARTIN (일역 大江倫子西山雄二)


4. 최후의 유대인’ : 데리다유대교와 아브라함적인 것 (« Le dernier des juifs » : Derrida, le judaïsme et l’abrahamique)

........................................................................................................................ Gisèle BERKMAN (일역 佐藤香織)


5. 희생된 동물의 두 개의 신체 자크 데리다의 철학에 있어서 동물-정치 개념에 대한 고찰 (Les deux corps sacrifiés de l’animal. Réflexions sur le concept de zoopolitique dans la philosophie de Jacques Derrida)

............................................................................................................................. Patrick LLORED (일역 吉松覚)


6. 자크 데리다동물성의 시학 무인간적인 것에 관해 (Jacques Derrida. Une poétique de l’animalité. Sur l’anhumain)

..................................................................................................................... Gérard BENSUSSAN (일역 桐谷慧)


7. 고양이눈빛그리고 죽음 (The Cat, the Look, and Death)

............................................................................................................................. Darin TENEV (일역 南谷奉良)


8. 대린 테네브고양이눈빛그리고 죽음에 대한 응답

..................................................................................................................................... 大杉重男南谷奉良山本潤


9. 데리다에게서의 증여와 교환 (Gift and Exchange in Derrida (Derridative)

....................................................................................... Darin TENEV (일역 横田祐美子松田智裕亀井大輔)

 

이하 몇 편의 글이 더 있으나 생략.

 

 

首都大学東京人文科学研究科

2015년 6






자크 데리다 사후 10


프랑스어본 :  Deleuze-et-Derrida-ce-nest-pas-le-même-mouvement....pdf


일본어 번역본 : 

20012-511-04 - 들뢰즈와 데리다, 두 사람의 운동은 같은 게 아니다 일역본.pdf



* 한국어 번역본은 조만간...


Posted by 상겔스 상겔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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