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뢰즈 이후의 정치 내재성과 초월 재고 (2/2)

Peter Hallward, “Politics after Deleuze: Immanence and Transcendence Revisited”

 

2.

제가 고찰하고 싶은 마지막 두 번째 점은 첫 번째 점에서 곧바로 나옵니다. 들뢰즈의 비주의주의에 정치적인 억양을 붙이기 위한 길은 하나뿐입니다. 그것은 비주의주의에 의해 촉진되는 리얼리티와 직접 융합되거나 리얼리티로의 침례가 그 자체로 뭔가 전복적이고 해방적이며 혁명적이기도 하다고 논하는 것입니다.

정말로 그런 침례는 정의상 매개의 형태들을 전복하기는 합니다. 그런 심리적·사회적·제도적·기술적인 매개는 활동가가 리얼리티로부터 일정한 전략적 거리를 두도록 허락하며, 수단과 목적을 (융합시키지 않고) 숙고하여 통합하려고 하는 그 과정 속에서 상황의 양상들에 관여하는 것을 허용합니다만, [아무튼] 그러한 매개를 전복하기는 합니다. 그렇지만 어떤 의미에서 해방적이기도 한 이 전복의 자격은 말하자면, 그것이 설득적인 것은, 들뢰즈가 활동가를 기각하는 것을 우리가 인정할 때뿐이며, 또 의지적 행위를 촉진하는 조건들 그 자체가 억압적이라고 인정하고, 리얼리티가 어떤 의미에서 본래적으로 창조적이고 생기 있다고 하는 들뢰즈의 기본 주장을 인정할 때뿐입니다. 이것은 다른 곳에서 자세하게 다룬 논점이므로, 나머지 시간에는 들뢰즈가 형이상학을 초월성보다는 내재성에 투입함으로써 무엇을 위태롭게 할 수 있을지를 간단하게 소묘할 작정입니다.

내재성은 내부에 머물다를 의미합니다. 그리고 잘 알다시피, 창조자-신에 대한 일체의 초월적인 구상을 배제하고 존재의 내재적인 구상을 긍정한다는 점에서 들뢰즈는 둔스 스코투스와 스피노자를 그대로 좇고 있습니다. 그때 신은 존재를 넘어 서서 외부로부터 존재에 개입하는 활동이 아니라, 고스란히 존재에 내재적이며, 자연 전체와는 구별할 수 없게 됩니다. 이리하여 내재적 존재론은, 신 없는 자연의 무신론적 주장이라고 독해되거나, 반대로 (그리고 이쪽이 스피노자 자신의 지복으로의 경도에 적합합니다만) 범신론의 한 형태라고, 전체적으로 신격화되고 영화霊化[정신화]”된 자연의 긍정이라고 독해되는 것입니다. 스피노자를 철학이 화신(化身)한 인간으로서 포용하는 들뢰즈의 관점에서 본다면, 스피노자주의란 유보없이 내재성과 범신론의 위험’”을 포용하는 것입니다(EP, 333; cf. 67). 여기서의 출발점은 자기-원인과 자기-필연화로서의 신의 절대적인 자기-충족입니다. 스피노자는 씁니다. “존재하는 것은 무엇이든”,

 

신 안에 존재하고, 신의 바깥에는 아무것도 존재할 수 없고 아무것도 인식될 수 없는 신의 지고한 힘, 혹은 무한한 자연으로부터, 무한하게 많은 사물이 무한하게 많은 양태로, 모든 사물이 필연적으로 나오는 것이며, 게다가 삼각형의 자연 본성으로부터, 영원에서 영원에 이르기까지, 삼각형의 내각의 합이 두 개의 직각과 마찬가지라고 하는 것이 나오는 것과 동일한 방식으로, 그것과 동일한 필연성으로, 모든 사물이 항상 나오는 것이다.[각주:1]

 

들뢰즈가 주석하듯이, 모든 유한한 존재자는 이런 자기-원인의 위력(force)을 결여하고 있으며, “자기의 힘에 의해 실재시키지 못하고, 자기의 힘에 의해 유지[보존]되지 못하고, 그 실재와 유지를, 자기를 유지하고 자기에 의해 실재할 수 있는 존재자에 의존하고 있다. 이리하여 유한한 존재자가 그것에 의해 실재하고 유지되고 활동하는 바의 힘은, 신 그 자체의 힘이다”(EP, 89-90). 이리하여 실재하는 모든 것은, 실재하고 활동하는 유일한 무제한적 힘을 표출하는 다각형의 면切子面, 크건 작건 활동적이고 크건 작건 힘을 가진 다각형의 면切子面이다. 우리 같은 유한한 존재자를 결정하는 원인으로서의 힘은 그 결과가 그 힘 안에 존재한다는 의미에서 내재적이다. 이때, 물론 그 힘의 안이란, 다른 별개의 것의 안이기도 하지만, 역시 [후자도] 그 힘 안에 존재하고 머문다.” 그것은 신의 양태 또는 피조물이 신의 내부에 머무는 방법에 의해서이다(EP, 172). 그런 내재성은, 자기에만 내재적이며, 따라서 모든 것을 파악하고, 전부이자 하나인 것을 흡수하고, 그것이 내재할 수 있는 그 무엇도 남겨두지 않는다”(WP, 45). 그때, 임의의 주어진 양태를 이해하는 것은, 그 양태가, 존재자 전반의 무한한 전체성또는 무제한의 하나-전부를 만들어내는 원인의 위력의 기구의 일부인 그 방식을 이해하는 것이다(WP, 35, 38; cf. DR, 37). 위와 같은 내재적인 방향성으로부터, 들뢰즈 자신의 존재론의 시차적(示差的)인 특징의 대부분이 일의성, 직접성, 표상[재현]의 거부, 주관-대상 관계의 거부 등이 곧바로 나옵니다.

잠시 들뢰즈는 옆에다 두고, 위와 같은 입장의 정치적 함의에 대해 일정한 실마리를 얻기 위해, 전적으로 별개의 이론적 맥락에서의 전개를 상기해봅시다. , 아도르노에게서 비롯됐다고 간주되고, 맑스 경제학의 독해를 통해 모이셰 포스턴에 의해 더욱 전개된 비판이론입니다. 아도르노가 내재적 비판의 방법을 옹호했을 때, 그의 염두에 있던 것은, 그 대상의 내부에 머무는비판이었습니다. 동일화 사고의 억압적 귀결에 대한 비판은, 동일성과 그 개념화의 자원을 그 자체에 반하는 방식으로 사용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부정적으로라고 해도 다른 삶의 방식을 암시하게 될지도 모르는 것은, 어디까지나, 우리의 손상된 삶이 견뎌내고 있는 고뇌에 대해 반성하는 것을 통해서입니다. 아도르노의 논의에 의한다면, “만일 우리가 하이데거의 존재의 철학 자체의 구조를 떠맡지 않고, 그 위력을 그 자체로 향하게 하지 않고, 그 바깥쪽으로부터 전반적으로 거부해버린다면”, 하이데거의 존재의 철학에 대한 비판은, 그 대상에 대해 아무런 힘도 갖지 않습니다.[각주:2] 마찬가지로, 자본주의의 내재적 비판은, 맨 처음에 그 대상의 자기-충족성을 인정해야 합니다. 자본주의는, 자연의 모든 것과 인간 경험의 모든 것의 양상을 상품화의 그립으로 에워쌉니다. 그것을 인정하고, 그 후에, 자본주의의 내적 모순의 흔들림(play)을 추적하는 것을 시도해 보고, 내적 모순이 언젠가 뭔가 다른 것으로 통하는 문을 열지도 모른다고 희망하는 것입니다.

누가 그 문을 열 것인가라는 물음, 어떻게 문을 열 것인가라는 물음은, 아도르노의 관심사의 목록의 상위에는 놓이지 않습니다. 그런 물음들은, 맑스의 자본주의 분석에 대한 포스턴의 획기적인 연구에도 표면화되어 등장하지는 않습니다. 포스턴의 연구는, 내재적 비판의 범례로서 크게 칭찬 받았습니다만, 포스트-자본주의 사회의 추상적 가능성을 다소간 고집하는 방향에서, 아도르노의 비관적인 사회 분석을 수정하고 있을 뿐입니다. 포스턴에 따른다면, 맑스의 자본 분석에 힘이 부여되는 것은, “그 관점이 고찰되는 구조의 외부에 있는 것이 아니라”, “구조 자체가 발생시키는 내재적 가능성이기 때문입니다.[각주:3] 포스턴은 가치형태가 발생시키는 강제와 가치형태가 명령하는 추상적 노동으로부터 자유로워진 사회의 가능성을 되풀이하여 언급합니다만, 그의 책은, 이 가능성을 리얼리티로 바꾸는 활동들에 대해 아무것도 말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듣는 것은, 이 활동가는 프롤레타리아트 그 자체가 아닐 수 있다는 것뿐입니다. “프롤레타리아트는 자본의 대상이자 부속물이며”, 그런 한에서, “이 계급역사의 <주체>”나 자본에 대한 자기-해방적인 적대자가 아니며,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 관점에서 보면, 프롤레타리아트의 유일한 역사적 과제는, 그 강화나 자기주장이 아니라, 오히려 자기 폐기입니다.[각주:4] 아무런 변명도 이뤄지지 않은 채, 그 성과는 이렇습니다. “인간의 통제를 넘어선 역사적 역동으로서, “사회적 활동가의 배후에서, 그들의 의지로부터 독립하여 작동하는 위력이 구동하고 있는 자본주의의 분석이라는 것입니다.[각주:5]

어느 정도 맑스 자신은 비주의주의적인 선을 따라 읽을 만한가라는 복잡한 문제는 옆에 두었는데요, 들뢰즈와 가타리에 의한 자본주의의 반성적 고찰은, “비판적이라는 것은 그다지 강조되지 않았기 때문에, 확실히 비주의주의적으로 읽어도 마땅합니다. 아주 간단하게 말합니다만, 안티 오이디푸스의 진단으로는, 자본주의 과정이란 상품화의 항상적-가속적인 기구에 의해, 사회적 실재의 모든 다각형의 면탈코드화되고, 전의 복잡한 사회관계가, “탈코드화된 흐름의 결합을 통해 구성된 단일한 내재성의 장으로, “모든 초월성의 부정으로 평탄화되는 과정입니다. 점차 그 탈코드화가 다른 노예에게 명령하는 노예만”(AO, 254)을 남기는 비할 데 없는 노예제를 제도화한다고 하더라도, 이 지옥의 복종의 논리를 유지하는 경계를 돌파할 수 있는 유일한 활동가는 들뢰즈와 가타리가 스키조프레닉[분열증자]”이라고 부르는 바의 범례적인 비-활동가입니다. 드뢰즈와 가타리의 스키조자본주의의 극한을 탐구하거나 구현합니다. “스키조는 자본주의의 내적인 경향성의 실현이며, 자본주의의 과잉 생산물, 자본주의의 프롤레타리아트, 자본주의의 살육의 천사이다”(AO, 35; cf. 255). 자본주의와 분열증2권에서 마찬가지의 기능이 프롤레타리아트에게 귀속됩니다만, 그것은 소수자-되기로의 도관(導管)으로서, 혹은 서양사회에서의 노마드의 후계자”(TP, 558 n.61), 철저하게 탈영토화된 후계자로서 프롤레타리아트가 도움이 되는 한에서일 뿐입니다.

자본주의적 생산관계로 채워지는 제도에서도, 탈영토화와 분자화의 선이 새로운 성격과 새로운 종류의 혁명적 잠재력을 얻을여지가 있다고 들뢰즈와 가타리가 제언하는 것은 다분히 정당합니다.[각주:6] 그렇지만 쉽게 엿볼 수 있습니다만, 여기서 해방적이고 혁명적인 것으로서 등장하는 것은, 그런 탈영토화의 운동뿐이며, 특히 자본주의 자체가 구동하는 형태의 절대적인 탈영토화입니다. 자본주의적 착취를 숙고를 갖고서 단절하고 자본주의의 부불 노동의 명령에 승리하는 과제를 스스로 설정하는 활동가에게 요구되는 형태의 힘이나 역량을 고찰하기보다는, 들뢰즈와 가타리는, 도주라는 의심스러운 대가를 우리에게 남기는 것입니다. 이 도주선은, 현실적일 수밖에 없는 임의의 역사적·정치적 과정과 더불어 작용한다기보다는, 절대적이고 매개 없는 자기-원인적인 필연성(causa-sui)과 공통되는 시공간을 따라 작용합니다. 프롤레타리아트와 그 특정한 정치적 역량을 대신해, 들뢰즈와 가타리는, 우리가 노마드적인 전쟁기계에게 믿음을 가지라고 유혹합니다. 전쟁기계는 절대적인 속도로 작용할 것이며, 그것은 속도와 동의어로 간주됨으로써, “순수하고 계량 불가능한 다양성 , 찰나의 침입, 변신의 힘의 침입”(TP, 386, 352)으로서 작용하는 것 같습니다.

결국 우리가 자본주의의 역동의 극한[한계]”에 관해 들뢰즈와 가타리가 조립하는 것에 가까워짐에 따라, 그 모든 현실적인 역량의 탈조직화나 용해를 넘어서 살아남을지도 모르는 유일한 활동가는, 오로지 잠재적이고 초-역사적인 활동가이며, 노마드적 또는 분열증적 주체, 현실성 자체의 종언에 상응하는 주체인 셈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자본의 한계를 넘어서, 분열증은 역사의 종언입니다(AO, 130). “탈영토화의 가장 먼 한계에 손을 대려고 노력함으로써, 들뢰즈와 가타리의 아직 보지 못한 분열증자는 자본주의의 바로 한계를 찾아낸다. 분열증자는 자본주의의 내적 경향성의 실현이다.” 그리고 그 조건에서, 분열증자는 리얼리티의 생성변화그 자체를 구현[受肉]한다(AO, 35)는 셈입니다.

말할 것도 없이, 여기서, 우리는 멀리 있습니다. 자유와 정치에 대해서 더욱 명백한 관심을 품은 철학자들, 예를 들어 사르트르, 파농, 시몬느 드 보봐르가 제안한 내재성과 초월성을 정면에서 대조시키는 설정으로부터는 멀리 있습니다. 이들 사상가들에게 인간의 자유의 실천적인 기초는, 주어진 상황을 초월하는 상대적인 역량과, 자기의 선택에서 유래하는 적극적인 목적으로 자기를 기투하는 상대적인 역량에 존재합니다.[각주:7] 그런 초월성을 빼앗기는 것, 보봐르의 표현으로는 자기의 내재성 안에 응고되는 것, 자기 자신의 미래를 만들기 위한 자기의 힘으로부터 분리되는 것입니다. 그때, 전제(專制)사람을 그 사실성의 내재성으로 가둬버리는힘으로서 정의할 수 있습니다. 그 경우, 사람은 이제 사물들의 한복판의 하나의 사물 이상의 것으로는 나타나지 않고, 다른 사물의 집합으로부터 공제[뺄셈]된다고 하더라도, 그 부재의 어떤 흔적도 지상에 남기지 않고 공제[뺄셈]될 수 있다.”[각주:8] (이것은 들뢰즈와 가타리가 생성 일반의 우주적인 공식이라고 한 지각할 수 없는 것으로-되기에 대해 좋은 근사치라고 할 수 있을 겁니다).

시몬느 드 보봐르가 사르트르와 파농과 똑같이, 또한 이 점에서는 라르드로(Lardreau)와 똑같이, 어떤 자유의 옹호이든, 복종으로부터 해방으로 이끌어갈 어떤 집단적 동원이든, 적어도 최소한의 초월성을 전제로 해야 한다고 주장한 것은 옳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 초월성은 사르트르의 표현으로는, “우리로부터 만들어지는 것을 활용하는 것을 우리에게 허용하는 것입니다.[각주:9] 보봐르가 논하듯이, 여러분이, 있는 그대로의 세계에 대해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고, 그로부터 자기를 찢어내고”, “구체적인 목적과 특정한 기획의 실현을 향해 자기를 기투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면, “자기는 자유라고 주장할수 없습니다. 물질적 원인과 내재적 필연성의 흐름을 중단하는 역량이 없으면, 지각과 재-활동[-] 사이에 아무런 거리감이 없다면, 생리의 수준에서도 사회의 수준에서도 활동을 자극으로부터 분리하고 그리하여 숙고적인 의지 작용이 자동적 또는 기계적인 반사보다 우세하도록 촉구하는 거리가 없다면, 자유는 없는 것입니다. 개인적이든 집단적이든, 그런 간극을 기초로서 자기를 구성할 수 있는 활동가만이, 자유로운 자기-결정을 할 수 있을 겁니다. 그리고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들뢰즈 철학에는 그런 활동가의 장소가 없는 것입니다.

 

  1. Spinoza, Ethics IP 15, IP 17 S1. [본문으로]
  2. Adorno, Negative Dialectics(Routledge), 97. [본문으로]
  3. Moishe Postone, Time, Labor and Social Domination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93), 255. [본문으로]
  4. Postone, Time, 276n 41. “요컨대 맑스에 의한 자본의 궤도 분석은, 사회주의 사회 속에서 프롤레타리아트가 역사의 <주체>로서 자기 실현할 가능성을 어떤 방식으로도 가리키지 않는다”(357). [본문으로]
  5. Postone, Time, 215n 109, 295, 390. 그리고 들뢰즈 : “운동은 항상 사고하는 자의 배후에서 일어나거나, 사고하는 자가 눈을 깜빡이는 순간에 일어난다. 바깥으로 나오는 것은 이미 달성되었다. 그렇지 않다면 결코 달성되지 않을 것이다”(Dialogues II, 1). [본문으로]
  6. WP, 93; cf. TP, 345; DI, 270. [본문으로]
  7. 예를 들어 다음을 보라. Simone de Beauvoir, Ethics of Ambiguity (Citadel Press, 1948), 25-27; cf. Hallward, “Fanon and Political Will”, Cosmos and History 7:1 (2011), 104-127. [본문으로]
  8. Beauvoir, Ethics of Ambiguity, 102, 100. [본문으로]
  9. Sartre, Situations vol. 9, 101 [사르트르, 『문학이란 무엇인가』] ; cf. ;cf. Lardreau, L’Exercice différé de la philosophie, 52. 반대방향으로 지나가는 리스크도 있으며, 로트레아몽과 플라톤을 따르는 바디우처럼, 사고할 수 있는 활동가에 관해 사고의 절대적 초월성을 고집하는 리스크도 있다. 바디우에게서 수학이 “참인” 사고의 범례적 사례인 것은, 수학이 가장 명백하게 주체로부터의 “권외(圈外)”의 거리를 나타내기 때문이다. 다만 그 어떤 “진리의 초-인간적인 도래”도 그것을 떠받치는 주체를 “유도”하고 “구성”해야 한다. “수학적 영원성”의 “얼음같이 차가운 반인간주의”는 수학에 의해 부과되는 “개조”의 연성과 “지성의 소원화”에 복종하는 규율훈련된 사유자에게만 이해 가능하다(Badiou, “Mathematics and philosophy”, Theoretical Writings, 10-14; cf. Badiou, Logics of Worlds, 173-174). 이렇게 전담함으로써 바디우는, 들뢰즈나 알튀세르나 푸코의 손에서 배제된 주체의 범주를 회복할 수 있지만, 한쪽에서의, 바디우에 있어서의 진리의 유발 효과로서의 주체의 이론과, 다른 쪽에서의, 활동가와 그 역량에 대한 주의주의적 구상 사이에는, 여전히 큰 거리가 있다(cf. Hallward, “Sujet, décision et volonté dans la philosophie d’Alain Badiou”, in Autour d’Alain Badiou [Paris: Germina, 2011], 303-331). [본문으로]
Posted by 상겔스 상겔스

도래할 생명권력론을 위해


사상, 2013년 2

2부 2장. 

인간과 동물의 문턱

조르조 아감벤에게서의 생명 개념 

히가키 타츠(槍垣立哉)

들어가며

생명정치의 장래를 향해 무엇을 써야 할까? 후기 푸코로 거슬러 올라가는 관리[통제]사회의 문제들, 즉 개인의 자유의지가 이미 문제거리조차도 안 되는 비참한 삶을 톺아내고, 거기서 희미하게 뭔가의 전망을 찾아내야 할까? 들뢰즈=가타리가 물론 어둠을 간직하면서도 보다 분명하게 미래의 생명을 그려냈듯이, 현재의 인간이나 그 사회의 해체를 함의하기도 하는 생명의 밝음을 부각시켜야 할까? 생명정치학의 개념이, 항상 이런 양면을 갖추고 있는 것은 사실일 것이다. 원래 미래가 어두운 것인가, 밝은 것인가라는 물음 자체가 무의미하기도 하다. 미래를 살아가는 것은 나도 아니고 우리도 아니다. 미래에서 그 가치를 판단하는 것은 지금 여기를 살아가고 있는 이 삶이 아니다. 미래라고 하면서 뭔가가 말해질 때, 나나 우리는 그것을 가치 판단할 능력을 전혀 가질 수 없다.

그런 물음에서 시작하지 않아도 좋을지도 모른다. 혹은 그런 몽상 같은 철학자의 말은 생명정치학이 현실적인 정치의 물음과 연관되는 한, 아무 쓸모도 없다고 생각될지도 모른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 인간의 신체와 생명을, 그 자연사적 깊이를 지닌 시계(視界)에서 재파악하는 것, 말하자면 법, 제도, 윤리, 말 등을 고작 2000년부터 3000년 정도로만 거슬러 올라갈 수 있을 뿐인 근원을 훨씬 뛰어넘어, 더욱 멀리 생명 자체에 뿌리를 내려 파악하려고 시도하는 것, 이것이 바로 생명정치학의 독자성 그 자체를 이루는 것이 아닐까?

이런 방향성에서 생명정치학의 광대함을 확실하게 파악하고 있는 사상가가 이탈리아의 조르조 아감벤이다. 아감벤이 세계적 사상의 무대에 등장한 것은 20세기도 끝나갈 무렵이다. 아우슈비츠의 남은 것(1998)호모 사케르 : 주권권력과 벌거벗은 생명(1995)이라는, 푸코의 생명정치학을 이어받아 쓴 작품군과, 거기서 제시된 벌거벗은 생명(la nuda vita)’이라는 개념은, 세간의 큰 주목을 받았다. 하지만 아감벤의 저작의 전모가 알려짐에 따라, 그와 생명정치학 자체의 관련이 결코 단순한 것은 아니라는 것이 여러 가지 논점에서 분명해졌다(일본에서는 우에무라 타다오(上村忠男), 오카다 아츠시(岡田温司), 다카쿠와 가즈미(高桑和巳) 등에 의한 이탈리아어로부터의 빼어난 번역과 해설이 극히 중요한 역할을 맡았다. 이탈리아라는, 철학지리학에서는 변방적인 사상가의 논의가, 프랑스 및 미국과 거의 동시에 일본에 영향을 주었던 속도성에서도, 위의 번역자들의 작업은 돋보이는 것이라 할 수 있다). 특히 거기서 감안되어야 할 것은 아우슈비츠의 남은 것호모 사케르만으로는 헤아릴 수 없는, 그의 고전적 소양의 광대함과, 종교나 법에 관련된 지식의 풍성함이다. , 하이데거의 세미나에 참석하면서도 벤야민을 애호하고(시대를 공유하는 이 두 사람의 사유는, 상식적으로는 거의 양립할 수 없을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도 기독교 역사도 곱씹으면서, 현재적인 정치의 논의에도 깊이 헤집고 들어가는, 그 독특한 사유법 자체이다(벤야민이 말하는 이질적인 것과의 접합이야말로 그의 모토인 듯하다).

확실히 오카다 아츠시가 아감벤의 종교신학을 강조하듯이,[각주:1] 특히 금세기에 양산된 작품군(세속화 예찬(2005), 왕국과 영광(2007), 벌거벗음(2010))은 생명정치라기보다는 종교성과의 연관이 매우 깊다. 그 때문에 아감벤을 생명정치학의 개념만으로 파악하는 것은 부당하다고 생각될지도 모른다. 철학의 영역에 한정해도, 푸코나 들뢰즈를 언급하는 논의는 어느 일정한 시기에 이뤄진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래도 굳이 아감벤의 논의를 생명정치학의 관점에서 독해하는 것은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우선 그가 주장하는 벌거벗은 생명이나 잠재력(potenza)’이라는 개념이 설령 우연의 결과일지라도 푸코나 들뢰즈가 논하는 유사 개념에 매우 접근하기 때문이다. 전자는 벤야민의 폭력비판론에서 (그것도 벤야민의 텍스트를 읽는 한 상당히 미묘한 논맥에서) 끌어낸 용어이다. 그래도 아감벤의 독창성은 벌거벗은이라는 개념을, 생물적 신체가 정치적 과제이게 되는 푸코의 논의와 관련시키고 벤야민적 논맥으로부터는 벗어난 의미를 끄집어냈던 것에 있다. ‘잠재력에 관해 말하면, 아감벤의 고찰의 원천은, 일관되게 아리스토텔레스적인 뒤나미스 분석에 있다. 그러나 이것도 잠재성(virtualité)을 논하는 들뢰즈와, 스피노자를 매개로 맺어지고 생명을 그러내는 주요한 위상에 놓인다. 양자 모두와 더불어, ‘생명신체를 사고하는 키워드 자체로서, 아감벤에 의해 강하게 부각되는 것이다.

 

하지만 동시에 아감벤은 푸코와도 들뢰즈와도 다른 생명정치학을 전개하고 있기도 하다. 그것은 법이나 말에 강하게 천착하는 데에서도 간파할 수 있다.

말할 것도 없지만, 아감벤은 생명정치학을 탐구하는 데 있어서 법과 언어를 중시한 논의를 펼친다. 그것은 푸코가 기본적으로 정신분석 비판을 염두에 두면서, 혹은 들뢰즈(들뢰즈=가타리)가 시니피앙 중심주의적 언어론에 대한 반발로부터 생명 개념과 그 질료성에 시선을 돌렸던 것과는 명확하게 대조적인 자세라고도 할 수 있다. 그러나 거기서 아감벤은 푸코 등이 비판했던 정신분석이나 법이라는 초월성을 회복시키는 것이 결코 아니다. 그는 생명에 파묻혀 있는 법이나 언어, 달리 말하면 생명을 반사하고 생명으로부터 반사되는 법이나 언어의 위상을 솜씨 좋게 세세하게 집어냄으로써, 생명정치학의 개념을 더욱 전개시키는 것이다. 이런 시도는 아렌트와 푸코 쌍방의 부족분을 연결시키는 호모 사케르의 서두 부분 등에서[각주:2] 두드러진 성과를 보이고 있다. 아감벤은 법과 언어의 경시 때문에 푸코도 (나아가 들뢰즈도) 비판하지만, 그러나 그들이 비판했던 대상의 의표를 찌르는 방식으로 논의를 전개하는 것이다.

여기서 생각해야 할 것은 생명정치학 속에서 꺼내진 언어와 법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생명과 어떻게 결부되어 있는가이다.

아감벤은 매우 견실한 지식으로 뒷받침된 역사학자로서 행동하면서도, 거기서의 종교의 파악 방식은, 앞서 말했듯이 시공을 종횡무진 횡단하고, 현대의 첨단적인 장면과 고대세계를 결부시킨다. 그의 자세는 역사를 논하면서도 역사 자체를 원리로 삼지 않는, 말하자면 근원을 논하면서도 근원자체를 허공에 매다는[중지시키는] 감각으로 넘쳐난다. 이는 오히려 푸코가 고대를 다룬[문제 삼은] 그 방식에, 혹은 레비스트로스가 신화를 분석하는 그 방법에, 나아가 들뢰즈(와 가타리)가 생태계적인 자연사를 그려내는 그 시각에 매우 가까운 것이 아닐까? ‘중지하다[허공에 매달다]라는 말이 아감벤의 핵심어의 하나이듯이, 거기에는 근원을 탐구하면서 근원을 탈근거화하는 지식의 방식이 모색되고 있는 것 같다. 그리고 그 행동 방식 자체가 생명정치학의 시도와 강하게 겹쳐진다.[각주:3]

이렇게 제시되는 아감벤의 독자적인 영역이란 바로 애매함이며 회색지대라고 할 수 있다. 거기서 아감벤은 생명에 독자적인 존재를 인정하는 동시에, 그 방식을 항상 언어와 연관시키고, 벌거벗은 질료성이 법이나 제도의 막간[틈새]으로서 기능한다는 것을 밝힌다. 이와 같은 이중의 방법에 의한 중간성이나 문턱의 존재가, 앞의 중지라는 방법론과 포개져 있다.

그러면 여기서 아감벤에게 생명 그 자체란 어떤 개념이었을까? 이 물음에 대답하기 위해 다루고자 하는 테마가 바로 인간과 동물의 관계이다.

아감벤에게서의 이 주제에 관해서는 열림(2002)이라는 저작, 특히 거기서 다뤄지는 하이데거의 동물론이 중요하다. 하지만 동물과 인간이라는 주제가 겨냥하는 것은 그것만이 아니다. 동물론은 절대적 내재성(사유의 역량, 2005년 수록)이라는 들뢰즈와 푸코의 관계를 논한 텍스트의 귀결이, 하이데거와도 맞물린 이 주제에 의해 도출됐다는 것과도 관련된 것이다.

여기서 아감벤은 들뢰즈의 생명 개념과 푸코의 생명 개념을 대립시키면서 생명론이 향하는 곳을 탐색한다. 그런데 약간 희화화되어 그려진 최후의 생명론의 계보도에서, 푸코와 들뢰즈는 대립되기는커녕 내재성의 라인에 똑같이 배분되고, 다른 쪽의 초월의 라인에 데리다나 레비나스 등을 적은 뒤, 굳이 하이데거를 그 중간 영역에 배치하고 있다. 이는 매우 기묘한 것이기도 하다. 생명을 논할 때, 그 중간적인 위상에 있어서도, 하이데거를 내재의 방향에 위치시키는 것은 꽤 모험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그는 해석학적 존재론과 존재의 언어를 논하는 자로서, 흔히 어디까지나 초월의 라인에 위치시켜야 할 사상가로 간주될 것이다. 아감벤은 하이데거의 어디에서 내재적 생명론에 대한 공헌을 보는 것일까?

더 나아가 이런 도식을 그려내는 아감벤은 자신의 시도를 어디에 위치시키는 것일까? 이것들을 생각할 때 문제가 되는 것이 푸코와도 들뢰즈와도 관련된 동물이라는 주제가 아닐까? 그것이 생명정치학의 사고에 있어서 새로운 문턱으로서 두드러지는 것이 아닐까?


아감벤에게서의 생명

논고 절대적 내재성은 푸코와 들뢰즈 둘 다의 생전의 마지막 텍스트가 각각 생명을 둘러싼 것이었음을 속시원하게 지적하는 것에서부터 시작된다. 양자에게 생명을 논하는 것은 유언의 차원에 속하는 것이었다고 한다.

그 텍스트란. 푸코의 경우 생명 : 경험과 과학[각주:4]이라는 캉길렘을 다룬 비교적 긴 논고이며, 들뢰즈의 경우 내재성 : 하나의 삶 …」(1995)[각주:5]이라는 아주 짧은 문서이다. 아감벤의 논의는 들뢰즈의 글 제목과 스타일 등에 대한 주석으로 시작되지만, 기본적으로는 솔직히, 푸코와 들뢰즈에 대한 아감벤의 사유의 위상이 제시된다. 아감벤의 벌거벗은 생명이 무엇인지를 두 사람과의 대비에서 서술하는 것이다.

이 텍스트를 검토하기 전에, 아감벤에게 벌거벗은 생명이 무엇이었는지를 잠시 다시 살펴보자.

호모 사케르의 서두에서 아감벤은 비오스조에라는, 이제는 주지의 바가 된 말을 사용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조에는 살아 있는 모든 존재(동물이든 인간이든 신이든)에 공통된, 살아 있다는 단순한 사실을 표현했다. 그에 반해 비오스는 각각의 개체나 집단에 특유한 살아가는 형식, 삶의 방식을 가리켰다.”[각주:6]

여기서 조에로서 말해지고 있는 것은 아리스토텔레스가 논한, 살아 있다는 사실과 관련된 잠재적인 힘이다. 그리고 후자인 비오스란 이른바 정치적인 삶,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는) 폴리스적인 삶을 모델로 한 것이다.

조에비오스라는 생명에 관련된 말하기 방식을, 현대정치와 관련시켜 얘기하는 아감벤의 주장은 그리 어려운 것이 아니다. ‘벌거벗은 생명과도 강하게 관련되는 조에가 그대로 정치의 주제로 간주되는 것, 혹은 말을 사용하여 행하는 폴리스적 사태에, 다만 살아 있을 뿐인 생명성인 조에가 침입해 오는 것, 이것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이런 사정이 18세기 이후의 근대사회의 성립에 있어서, 푸코가 생명정치학으로 논했던 것과 겹쳐진다.


폴리스의 영역에 조에가 진입한 것, 즉 벌거벗은 생명 자체가 정치화됐다는 것은 근대의 결정적 사건을 이루며, 고전적 사유의 정치적-철학적 범주가 근원적으로 변용했음을 부각시키고 있다.[각주:7]


이것에 덧붙여 중요한 것은, 이런 범주의 변용은 모종의 회색지대를 산출한다는 것이다. 거기서는 삶과 죽음, 공과 사, 우파와 좌파, 절대주의와 민주주의라는 대립 도식으로 말하는 것이 불가능한 정치적 장면이 형성된다.[각주:8]

, 생명정치학과 벌거벗은 생명의 정치화는 겹쳐 있지만, 근대에 특징적으로 현현한 독자적인 방식에 있어서, 근대를 지배했던 기존의 정치적 범주가, 모두 회색지대로 내몰리게 된다는 것이 아감벤의 주장이다.

아감벤이 아우슈비츠의 남은 것에서 살아 있으나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비참한 신체, 혹은 생물학적 인체 실험을 겪은 생체를 예로 든다는 것, 더 나아가 호모 사케르에서도 국가라는 법의 규제로부터 벗어난 난민, 삶과 죽음 자체를 규정할 수 없는 뇌사자를 대표적인 예로 들고 있다는 것으로부터, 이런 논의들이 근대 후기라는 시대성과 강하게 관련된 것으로 읽히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아감벤이 푸코와 의견을 달리하는 것은, 이런 회색지대가 현재화하는 것이 근대 후기였다고 해도, ‘조에비오스와 얽혀 있는 착종된 사정 자체는 정치적인 것이 출현하는 원리로서 당초부터 숨어 있었다고 하는 점에 있다.

그것은 호모 사케르의 모델 자체가 공동체로부터 배제된 방식으로 그것에 포함되는 신체를 다루는 로마 시대의 처벌에 있는 것으로부터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호모 사케르란 신성화된 사람들이지만, 그 신체는 살해 가능하지만, ‘희생물로 될 수 없다는 양의성을 갖추고 있다. 흔히 이 두 개의 특징은 병치될 수 없다. (뭔가의 형벌을 받은) 살해 가능한 신체(법으로부터의 폐기)는 손쉽게 희생화되지만(종교로의 포함), 여기서는 살해 가능성은 희생이라는 형식을 취할 수 없는 것이다. 그 때문에 거기에는 살해 가능성과 희생화 불가능성의 교점에 있어서, “인간의 법으로부터도 신의 법으로부터도 배제된 신체가 출현하게 된다. 이 신체가 벌거벗은 생명의 원상原像인 것이다.[각주:9]

그래서 이것은 법에 있어서 모든 의미에서의 예외이기도 하다. ‘은 신성화되지 않지만 죽여도 좋다는 의미에서, 스스로가 포함할 수 없는 것을 배제된 것으로서 포함해버린다. 그리고 주권이란 칼 슈미트가 말했듯이 예외상태에 대해 결정을 내리는 자라고 한다면, 이런 신체를 다루는 것 자체가 법을 주권적인 법으로 만드는 원리라는 것이다. 스스로가 배제하는 것은 배제로서 포함하는 것, 이것이 법을 성립시키는 원점에 있다.

배제와 포함이 서로를 맞아들이는 이런 사정이 바로 아우슈비츠로 나타나는 비참한 신체의 전형이라는 것이 아감벤의 주장이다. 그것은 법의 원리이면서도, 현실적인 무엇인가로서 출현하는 것이다. “호모 사케르의 벌거벗은 생명은 이리하여 우리와 관계가 있는 것이 되며 시민의 생물학적 생명과 일치하고자 한다[각주:10]는 시대 진단이 거기에 포개지게 된다.

여기서 우선 논의되는 것은 법이 초월적인 기관을 경유하지 않고, 생명 자체를 포함한다는 사정이다. 바타유적 살해가 초월화된 신성성을 묻는다면, 이것과는 정반대의 관점이 여기서 드러난다. 여기서 법은 시니피앙이 아니며, 또한 명령하는 것일 수도 없다. 법은 법이 포함할 수 없는 것을 배제함으로써 포함한다. 거꾸로 말하면, 법 자신이, 벌거벗은 생명이라는 예외상태에서의 규정 불가능성을 들이대는 것으로부터 성립한다는 것이다. 그런 한에서 아감벤에게서의 벌거벗은 생명은 그 벌거벗은이라는 방식에 있어서, 규정 자체를 가능케 하는 규정 불가능성이라는 것이다. 거듭 말하지만, 이것이 법의 원리라고 하는 것이다.[각주:11]

거기에는 조에비오스의 연관에 관해서도, 단순하지 않는 사태가 출현하게 된다. 살아 있는 신체란, 물론 조에인 동시에 비오스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것은 해당 신체의 특정한 동물적, 식물적 기능이 조에이며, 특정한 인간적 기능이 비오스라는 것이 아니다. ‘비오스비오스인 한에서 항상 조에를 기반으로 하는 것인데, ‘비오스에 있어서 조에란 어디에도 없는 것이며 또한 어디에도 있는 것이기도 하다. 말과 신체, 로고스와 물질, 이것들도 마찬가지의 배치에 놓이게 될 것이다. 이들 중에서 후자는 전자에 의해 배제됨으로써 포함되는 바로 그것이다. ‘예외상태라는 외부를 보여줌으로써 질서를 규정하는 것, 이것이 양자의 관계성이다.

벌거벗은 생명예외상태의 관점에서 보면, 그것들은 아감벤의 발상의 기본이라고 할 수 있는 이중관계를 이루는 것인 비오스조에는 마치 단순히 이층화되는 것이 아니다. 이것들도 배제와 포함을 둘러싸고 서로 얽혀 있는 것에 다름 아니기 때문이다.

이렇게 아감벤에게서 생명은 법이나 언어가 규정할 수 없는 예외성인데, 동시에 그것에 의해 법이나 언어를 가능케 하는 것이라고도 그려진다. 생명 자체가 아리스토텔레스적 식물적 생명이나 동물적 생명이라기보다도 언어화할 수 없는 것에 의해 언어를 떠받치는 무엇인가로서 제시되는 것이다. 이리하여 아감벤은 푸코나 들뢰즈가 법적, 언어적 위상의 초월성을 비판하는 것으로부터 생명의 위상을 끄집어낸 것과는 대조적인 위치에 선다. 그리고 마찬가지로, 법과 언어를 시니피앙적 초월로서가 아니라, 생명과의 역접적 관계에서 끌어내게 된다.


들뢰즈 및 푸코 비판

그러면 여기서 절대적 내재성의 논의로 돌아가보자. 이 글에서 아감벤은 푸코와 들뢰즈의 생애 마지막 텍스트가 모두 생명을 다뤘다는 기묘한 부합을 강조하면서, 두 사람이 논하는 내용을 다양하게 검토한다.

대부분이 들뢰즈를 향한 이 논고의 처음 소소한 부분에서 아감벤은 푸코를 언급한다. 그 소재가 되는 푸코의 캉길렘론은 푸코의 최후기의 다양한 사유, 즉 프랑스 철학에서의 인식론과 영성주의(spiritualism)라는 두 개의 계보의 구분이나, 계몽의 논의의 재검토를 이루고 있다는 점에서 극히 흥미롭다. 하지만 아감벤은 특히 푸코의 서술의 마지막에 눈길을 돌린다. 거기서는 생명의 중심에는 잘못[착오]이라는 문제가 있다고 써져 있지 때문이다.


생명의 가장 근본적인 수준에서 코드와 해독의 작동[기능]은 우연히 주어져 있다. 그것은 질병이나 결함이나 기형이 되기 이전의, 정보 시스템의 변조나 잘못 취함[오용]같은 것이다. 극단적으로 말하면, 생명이란 잘못할 수 있는 것이다.[각주:12]


그리고 그 후에 푸코는 이런 캉길렘의 생명에 관한 견해를, 시대적으로 그다지 멀지 않은 니체의 그것과 결부시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진리는 생명의 기나긴 연대기에 있어서 가장 새로운 잘못이다. 더 정확히 말하면, 참과 거짓의 분할이나 진리에 부여된 가치는 생명이 발명했던 가장 특이한 삶의 방식을 형성하고 있기 때문이다.[각주:13]


아감벤은 생명과 오류라는 주제는 푸코가 성의 역사1권 이후에서 보여줬던 논의의 흔들림에 영향을 줬을 것이라고 말한다(그것은 들뢰즈의 견해이기도 하다). 그러나 아감벤은 또한 푸코의 이런 생명에 대한 사유는 새로운 경험과도 같은 무엇인가, 생명이라는 지면에 뿌리내린 별도의 주체성을 향하기 위한 무엇인가를 끌어내는 것이기도 하다고 평가한다. 거기서는 그저 생명과 생명의 일탈과만 상관관계를 가진 인식[각주:14]이 진리를 향하는 것이 아니라 탐구되기 때문이다.

이것은 들뢰즈가 푸코(1986)에서 지식과도 권력과도 구분되는 3의 축으로 간주했던 것과 결부되어 있다고 아감벤은 지적한다. 이리하여 아감벤은 푸코의 최후기의 시도를 들뢰즈의 그것과 교차시킨다. 들뢰즈가 그려내는 생명의 권역으로부터, 새로운 주체의 모습을 (바로 최후기의 푸코가 행했듯이) 끌어내는 것이야말로 생명정치의 향후 과제라고 아감벤은 생각했던 것이다. 그 자신 아감벤의 고찰과 깊이 관계가 있을 것이다.

그러면 아감벤은 들뢰즈의 생명 개념에 관해서는 어떻게 평가하고 있을까? 그것을 감안한 다음, 푸코적인 주체의 논의를 구성해가는 라인은 어떻게 그어짓는다는 것일까?

아감벤은 들뢰즈 최후의 텍스트 내재성 ; 하나의 삶 …」의 표제에 있는 콜론에 강하게 집착한다. 여기서 중간에 배치된 콜론은 단순한 동일성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바로 생명과 내재성, ‘거리도 동일성도 아닌 일종의 통과, 아무런 공간적 변동도 없는 이행임을 나타내는 것이라고 한다. 내재성과 생명은 각각이 다른 것에 열려 있으면서, 생명은 생명에 내재한다는 형태로 그것과 관련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생명이 내재성이라기보다는 내재성을 불러일으키는 것이 생명이라는 것이다. 이런 일련의 논의는, 바로 들뢰즈의 내재성과 아감벤이 잠재력으로 말하는 것을 결부시킨다.

여기서 아감벤이 증거로 삼는 것은 철학이란 무엇인가(1991)의 들뢰즈이다. 이 저작에서의 내재성또는 내재평면(plan d’immanence)’의 논의야말로 여기서의 포인트가 된다. 이 텍스트에서 들뢰즈는 내재성이란 그저 자신에 대해 내재하는것뿐이며, “무엇에 대해 내재하는것이 아니라고 논한다(사르트르의 자아의 초월성에 대한 의미의 논리에서의 높은 평가를 여기서 참조하고 있다).[각주:15]내재성이란 의식에의 내재성도 자아로의 내재성도 아니다. 그것은 내재하는 것에의 내재인 것이며, 바로 자기 완결적인 운동성이다.

  

후기 들뢰즈의 텍스트를 여기서 끄집어내는 것에는 충분한 의미가 있다. 그것은 아감벤이, 여기서의 내재평면을 바로 (현실화한 생명체를 상정하는 베르크손적인 잠재성이 아니라) 스피노자적인 일의성으로 끌어당겨, 거기서 내재 그 자체를 해석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내재원리란, 존재의 초월을 모두 배제하는 일의성의 존재론을 일반화하는 것에 다름없다. 하지만 일의성을 절대화하면, 존재의 모든 점에서 존재 자체와 동등한 것이 되며, 관성과 부동성이 존재 위에 짓눌러오는 것 아닐까? 그런데 스피노자가 말하는 내재적 원인이라는 사유는, 행위자 자신에 대해서는 행위자 자체의 수동성이라는 것이며, 이 사유에 의해 존재는 그 의심에서 해방된다.[각주:16]


내재성은 바로 초월을 거부하면서 내재성자신이 내재하는 운동으로서 작동하는 가운데 있다고 간주된다. ‘내재성이 그 자체로, 초월이 아니라 작동을 갖는다는 것, 이것에 아감벤은 들뢰즈가 생명이라고 말하는 것의 원상을 보고 있다.

하지만 이에 대해 아감벤은 전면적으로 찬성하는 것은 아니라며, 다양한 반론을 가한다. 그것은 아감벤과 들뢰즈의 사유가 닿을락말락할 정도로 접근하고 있기 때문에 분간하기 어려운 것이지만, 그러나 결정적인 비판이기도 하다.

그 비판 중 하나는 들뢰즈가 이 텍스트에서 디킨스의 소설을 다루는 장면과 관련된 것이다. 그곳에서는 죽음에 처한 어떤 악당이 묘사된다. 죽어가고 있는 그에 대해, 주위의 누구나 상냥함을 드러낸다. 그에게 발견되는 것은 바로 벌거벗은 생명과 비슷한, 순수한 내재로서의 신체이다. 그런데 병에서 회복되면서, 악당은 단순한 생명이기를 그치고 다시 악당이 되며, 나쁜 짓과 욕지거리를 하기 시작한다. 주위 사람들도 다시 그에게서 멀어진다.

여기서 묘사되는 비인칭의 삶[생명]’은 바로 순수한 생명의 모습에 가깝다. 삶과 죽음의 협간에 있는 이런 중간지대의 묘사에 아감벤은 공명한다. 하지만 들뢰즈는 죽음에 가까운 이 장면에서, 삶을 개체 속에 가둬버리는 것을 거부한다. 들뢰즈는 또한 거의 분간되지 않는 아기의 웃음이라는 비인칭성도 언급한다. 비인칭적인 아기의 웃음은 아기가 개체화되면(, 거기에 개성이 출현하면) 사라지는 것, 개체에 속하지 않는 것이다. 그것은 죽어가는 인간에게서 나타나는 벌거벗은 존재방식과 평행적인, 원초적인 생명의 형상이며, 아감벤이 진술하는 중간영역 자체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에 대해 아감벤은 이렇게 논한다. , 여기서 제시되는 벌거벗은 생명이란 바로 아리스토텔레스가 영양섭취의 생명이라고 부른 것, 혹은 비샤가 우리에 갇힌 동물이라고 지목한 것, 즉 생명적 신체가 지닌 동물적인 혹은 식물적인 기능 방식에 매우 가까운 것이 아니냐고. 그러니까 여기서 질문되고 있는 것은 일면에서는 인간과 동물의 불분명함 아니냐고. 그 때문에 이들의 논의는, 정말로는 (들뢰즈 자신이 하고 있지는 않은) 이런 방향에서 생각되어야 하는 게 아니냐고. 그런데 이렇게 읽을 수 있는 서술이란, 내재를 생명이라는 영역으로 비켜 놓는 것에 관해서, 매우 위험한 토지속으로 들어가는 것이라고 아감벤은 말한다.

아감벤은 여기서 들뢰즈와 푸코의 차이도 선명해진다고 한다. 들뢰즈는 푸코가 성의 역사 1 : 지식의 의지에서 묘사한 권력론을 제대로 이해하기는 했다. 그러나 푸코가 생물학적인 실존이 정치 속에 들어온다는 것을 생명정치로서 파악한 반면, 들뢰즈는 푸코에서 이런 생명 자체란 무엇인가, 권력과의 관련에서의 그 의의는 무엇인가를 캐묻지 않고, “생명은 권력에 대한 저항이 되는바로 그것이라고 단적으로 정리해버린다. 하지만 그래서는 생명정치적인 갈등의 양의성을 논하기 위해서는, 충분한 논의의 방향을 제시하는 것이 되지 않지 않을까?[각주:17]

아감벤은 들뢰즈가 거론하는 내재의 생명에 실제로는 생물학적 요소가 거의 없다고 논한다(이것도 푸코에게서의 생명의 구체성과 대비를 이루는 사태이다). 최종적으로는 스피노자적인 내재의 지복에 이르는 들뢰즈의 에 있어서, ‘하나의 삶이란 절대적으로 무매개적이면서, 모든 생명에 깃든 무엇인가로서, ‘인식 없는 순전한 관조가 되고 만다. 그것은 들뢰즈 자신이 생기론에 두 가지 길을 찾아내려고 하면서도, 그 한쪽인 행동하는 이데아가 아니라 [다른 한쪽인] 순전한 내적 감각을 선택하는 것과도 포개져 있다. 들뢰즈가 논하는 것은 인식의 모든 대상주체의 저편에 있어서의 순전한 관조이며, 행동하지 않고 보존하는 순수한 잠재력이 아닐까.[각주:18]

이에 반해 아감벤은, 다음과 같은 의문을 던진다. 그렇다면 벌거벗은 생명, 생명이 깃든 불분명성의 지대에서가 아니라, 내재 자체의 위상에 가둬두는 것 밖에 안 되는 것 아니냐고 말이다. , 거기에는 아리스토텔레스적인 영양섭취의 생명과 반대의 것 밖에만 발견되는 것 아니냐고 말이다. 아리스토텔레스적(혹은 비샤적)인 생명이란 식물적인 생명/관계의 생명, 바깥의 동물/안의 동물, 식물/인간, 조에/비오스, 벌거벗은 생명/정치적인 삶이란느 다양한 구분선을 가능케 하는 것이었다(그리고 생명에 의거하는 푸코도, 아감벤과 간극이 있기는 하지만, 이 구분을 전제로 생명과 정치의 관계를 사고했을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들뢰즈의 생명이 절대적 내재에 이르는 것이라고 한다면, 이런 계층성이나 분리를 전혀 예상할 수 없는 것이다(그것이 일의성이 지닌 의미이기 때문이다). 들뢰즈의 생명 논의는, 스피노자적인 지복으로서의, ‘내재속의 운동에 머물러 버린다.[각주:19] 이것은 생명에 대한 취급방식으로서 정당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그리고 그것은 푸코가 말하는 생명정치학적인 상황에, 어떤 길을 제시하는 것일까?

아감벤은 바로 중간지대의 사상가로서, 다음과 같이 말하며 논의를 수습하려 한다.


푸코의 사유와 들뢰즈의 사유가 둘 다 극단적인 유언으로서 남긴 생명이라는 개념은, 도래하는 철학의 테마가 될 것임에 틀림없다고 우리는 서두에서 단언했는데, 어떤 의미에서 이런 단언을 할 수 있는가는 이제 분명하다. 이로부터 문제가 되는 것은 한편으로는 생명권력과 주체화 과정에 관한 최후의 푸코의 얼핏 보면 음울한 고찰과 다른 한편으로는 절대적 내재지복으로서의 하나의 삶에 관한 들뢰즈의 얼핏 보면 명랑한 고찰, 이 두 개의 고찰을 함께 읽어보는 것이다.[각주:20]


함께 읽어본다는 것은 물론 양자를 평균화시킨다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양측을 양측의 걸림돌로서 읽는 것, 양측을 양측에 대항시켜 읽는 것을 의미한다. 들뢰즈가 논하는 비인칭성의 일의성에는, 아감벤은 그 위상의 의미를 인정하면서도, 명확하게 이의를 제기하고 있다. 푸코의 주체화에 관해서도 최후기의 그것에 아슬아슬할 정도로까지 찬성하면서도 배제와 포함에 관한 논의의 부재를 계속 묻는 것이다.

그러면 이런 일련의 고찰을 마무리하는 데 있어서 아감벤은 앞서 말한 도식을 별다른 설명도 없이 제시한다. 일련의 논의가 푸코와 들뢰즈의 생명에 관한 개념의 애매함을 논의한 반면, 마지막에 놓인 이 도식에서는, 한편으로 푸코와 들뢰즈가 동거하는 내재의 선이 그려지고(그것은 스피노자와 니체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것에 대립시키듯이, 레비나스와 데리다의 초월의 선(후설이나 칸트로 거슬러 올라간다)이 설정된다(앞의 153쪽의 그림을 참조).

들뢰즈와 푸코의 유사성과 대비에 의해 전개되는 논의가, 완전히 다른 방향으로 나아가는 점은 여기서 따지지 말자. 이것 이상으로 문제인 것은, 이 양자의 선의 중간에 하이데거가, 아무런 설명도 없이 배치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 이상으로, 마치 하이데거를 축으로 초월과 내재라는 두 개의 선이 배치 가능한 것처럼 그려져 있다. 하지만 생명의 철학의 탐구의 마지막에, 왜 하이데거가 중요한 의미를 갖고 갑자기 도입되게 되는 것일까?

또 하나 생각해야 할 것은, 이 도식에서, 아감벤의 호모 사케르의 사유 자체는 어디에 놓이는가이다. 이에 대해서는 답변은 아마 한 가지밖에 없다. 아감벤은 항상 자신의 사유를 중간지대로 설정하려 한다는 것이리라. 그런 한에서, 여기서 아감벤은 자신과 하이데거를, 생명의 사유에 있어서 분명하게 포개놓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아감벤과 하이데거의 관련 : 동물과 인간

하이데거는, 여기서 이른바 아무런 예고도 없이, 생명의 문제의 초점을 맞추기 위해 끌어내지고 있다. 아감벤은 법이나 초월을 자명시하는 것은 아니지만, 법이라는 주제로 끌어들이고 생명을 논하는 한, 중간지대에 자신의 입장을 설정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아감벤이 본래 자신을 두어야 할 위치에, 하이데거의 이름이 적혀 있다. 그렇지만 하이데거는 바로 해석학적 현상학으로서 존재론을 구상하고, 언어에 존재가 깃들어 있다고 한 점에서 초월의 선을 대표하는 철학자가 아닐까? 하이데거의 어디에서 생명의 논의가 발견되는 것일까?

절대적 내재의 텍스트에서 하이데거의 이름이 제시되지 않은 것은 아니다. 들뢰즈의 내재와 사르트르의 논의의 가까움을 논하는 부분에서, 아감벤은 하이데거에 관해 다음과 같이 언급한다.


이렇게 들뢰즈는 의식이 가졌던 가치들을 정산하고 있는데, 이것은 어떤 철학자의 몸짓을 계속하는 것이 된다. 그 철학자의 작업을 들뢰즈는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으나, 20세기 현상학의 대표자 속에서는, 이 철학자가 적어도 이 점에 있어서는 들뢰즈에게 가장 가깝다는 것은 확실하다. 그 철학자란 하이데거, 그 멋들어진 알프레드 자리론에 등장하는 파타퓌직한 하이데거이다.[각주:21]


하지만 이것만으로는 설명이 충분하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파타퓌직으로서의 하이데거(들뢰즈, 하이데거의 알려지지 않은 선구자 알프레드 자리, 비평과 임상 수록)를 토대로 했다고 해도, 생명론적인 위상에는 아직 이를 수 없었을 것이다.[각주:22]

오히려 아감벤 자신의 하이데거론인 열림이 여기서의 논의와 더 깊은 연관을 갖고 있는 것으로서 검토해야 하지 않을까?

아감벤의 저작 열림으로 넘어가자. 이 책에서 아감벤은 인간과 동물이라는 부제에서 드러나듯이, 동물성을 둘러싸고 하이데거의 생명론이라는 문제계를 추적한다.

말할 것도 없으나, 존재와 시간(1927)에서의 하이데거는 생물학이나 생명의 철학에 대해 매우 엄격한 견해를 제시했다. 거기서는 자신의 존재론을, 당시 융성을 뽐냈던 생명의 철학으로부터 구분하는 것이나, 현존재의 논의가 생물학적인 생명의 주장과는 전혀 다른 것이라는 것을 확실하게 적고 있다.

하지만 이 단계에서의 하이데거도, ‘세계세계성의 개념에 이르는 직전에서라고는 하지만, ‘환경세계(Umwelt)’라는 윅스퀼의 술어에 중요한 지위를 부여한다. 윅스퀼의 환경세계론, 하이데거의 도구 존재로서의 세계를 묘사하기 위해 커다란 의의를 가진 것이었다.

그리고 이 테마를 생각할 때, 존재와 시간이상으로 중요한 것은 하이데거의 1929-30년의 강의록 형이상학의 근본개념들[각주:23]이다. 이 방대한 강의록에서는, 그 전반부에서 권태(Langeweile)’라는 (‘불안과는 다른) 정동성이 논의되고, 또한 후반부에서는 윅스퀼을 축으로 한 생물학적 논의가 주제화되며, 동물성을 둘러싸고도 상당한 서술이 이뤄진다. 거기서는 동물적인 생명은, “세계가 가난하다(Weltarmut)”고 규정되며, 돌이 세계를 갖지 않는 것(Weltlos)이나 인간이 세계(Welt)를 살고 있는 것과 대비되어 묘사된다.

이 하이데거의 강의록 자체가 수많은 문제를 포함하고 있을 것이다. 이 책의 전반부에서는 시간성을 노정시키는 근원적인 정서로서, 존재와 시간에서는 불안에 할당되었던 역할이, ‘깊은 권태[지루함]’로 대체된다(‘깊은 권태는 특정한 지루한 대상을 갖지 않는다는 점에서도 불안과 겹칠 것이다). 거기서는 불안이 죽음에의 선취로 현존재를 움직이게 하는 것과는 달리, 순간과 시간의 오랫동안(Langweile)의 관계가 논의되는 것이다.[각주:24] 심지어 이 깊은 권태(die tiefe Langweile)’의 논의가 전단계가 되어, 동물적 생명을 다루는 후반부로 향할 때, 현존재가 동물과 다른 것으로서 규정되게 된다. 이른바 하이데거 자신이 2년 전에 간행된 미완의 저서 존재와 시간, 다른 종류의 시각에서 재검토하는 것이다.

아감벤은 하이데거의 이 텍스트를 소재로 삼아, 열림의 논의를 밀고 나간다. 아감벤이 주목하는 것은, 특히 인간이 시간을 살아가는 형태로서의 깊은 권태라는 정동성과, 동물이 환경세계에 사로잡혀 있는 가난함사이의, 역설적인 결합 자체이다. 이 두 가지는 유사하지만, 인간(현존재)의 본질과 동물의 본질로서, 완전히 다른 종류의 사태이기도 하다. 하지만 아감벤은 하이데거의 논의에 있어서의 이 두 개의 착종된 관계에, 앞의 도식에서 초월과 내재의 선이 교차하는 지점을 찾아내고 있다.

아감벤은 다음과 같이 적는다.


하이데거에게서 초미의 과제는 동물의 세계의 가난함(Weltlos)’, 인간이 세계를 형성하다(weltbildend)’의 관계를 통해서, 현존재 세계--존재 라는 근본 구조 자체를 동물에 대해 위치짓게 되며, 그렇게 함으로써, 인간의 등장과 더불어, 생물 속에 나타나는 개시의 근원과 의미를 탐구하게 되는 것이다.[각주:25]


그렇지만 인간과 동물의 관계를, 예를 들어 이성적 동물이라는 방식으로, 동물적 생명에 무엇인가가 부가되도록 묘사하는 것은, 바로 존재와 시간에서의 하이데거가 계속 거부했던 것이었다. 여기서도 생물학적인 논의가 이뤄지지만, 그런 거절이 보이지 않는 것은 아니다. 달리 말하면, 여기서는 오히려 존재와 시간에서는 몇 줄로 처리되고 말았던 생물학과의 대결재부상하는 것으로 간주되어야 한다.[각주:26] 동물과 인간의 연관을 차이에 있어서 파악하는 것이, 현존재의 규정에 있어서 중요하다는 것이다.

하지만 왜 그럴까?

아감벤은 하이데거가 동물은 환경세계를 억지해제(das Enthemmende)한다고 표현하고 있는 것에 주목한다. 그것은 동물이 각각의 환경세계에서 고리를 이루면서도, 이로부터 열려져 있는 존재방식을 갖추고 있다는 것을 드러내는 것이다. “억지해제에 있어서는 동물이 그것에 에워싸여 있는 고리로부터 열려 있다.”[각주:27] 하지만 그런 동물의 존재방식은 또한 사로잡혀 있다=방심(Benommenheit)”고 말해진다. “사로잡힘=방심도 또한 환경세계 속에서, 열려지고 있으면서도, 몽롱한 상태에 있다는 것을 가리킨다. 존재 자체로의 열림(Offenbarheit)이 있는 것은 아니다.

이러한 사로잡힘=방심에 있어서, 동물은 어떤 지각을 행하는 것은 아니다. 꿀벌이 꿀을 빨고 있을 때에는, 오로지 그 대상 자체에 사로잡혀 있다[푹 잠겨 있다]. 거기서 자신의 신체가 절단돼도, 꿀벌은 꿀을 계속 빨고 있다.[각주:28] 이것은 주어진 환경성의 규정에 대한 사로잡힘=방심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동물의 행동거지는 억지해제로서, 열림에 대한 양의성을 갖추고 있다고 하이데거는 말한다. 그것은 하이데거의 다음의 문장에서 엿볼 수 있는 것이기도 하다. “방심 속에서는 존재자는 열려 있는(offenbar) 것이 아니며, 개시되는 것도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로 그 때문에, 닫혀져 있는 것도 아니다.”[각주:29]

동물은 존재자에게 열려있지만, 그런 존재자는 존재로서 노정되어 있는 게 아니다. 이런 매우 양의적인 사태가 여기서 강조되는 것이다.

그런데 동물이 환경세계 속에서 억지해제고리를 이루며 살고 있기 때문에 열림의 방향성을 갖는 것과, 그것이 사로잡힘=방심하고 있는 것 사이의 양의성은, 하이데거가 이 강의록의 전반부에서 논한 깊은 권태의 논의로 결부된다. 하이데거 자신이 동물의 사로잡힘=방심, 인간이 지닌 깊은 권태이라는 테마를, 그대로 연관시키고 있는 것이다.


이 점에 이르러서 하이데거는 강의의 1부에서 다뤘던 깊은 권태에 관한 논술을 불러일으키며, 동물의 방심과 깊은 권태라고 불렸던 근본적인 정서를 뜻밖의 형태로 공명시킬 수 있다.[각주:30]


깊은 권태란 하이데거에게서 인간적인 것이 동물적인 것으로 연결되는 장면 자체를 가리킨다. 하지만 그 방식은 어떤 것일까?


하이데거의 깊은 권태

이로부터 아감벤의 논의는 형이상학의 근본 개념들에서의 깊은 권태를 주제로 하는 것으로 향한다. 그것은 동물의 사로잡힘=방심과 매우 유사하지만, “사로잡힘=방심이 세계에 열려 있으면서도 스스로에 머물 수밖에 없는 것인 반면, ‘깊은 권태는 바로 인간이 시간을 살아가는 것의 근본에 있는 정동성이며, 그 때문에 닫혀 있으면서도 그 한가운데서 열려 있다는 점에서, 그 방향성을 정반대로 하는 것이다.

이러한 깊은 권태는 두 가지 특징을 갖는다고 말해진다. 우선 거기서는, 현존재가 거절되고 있는 존재자에게 건네지고[넘겨지고] 있다는 것이다. 이 계기는, 동물성이 지닌 억지해제고리’, 즉 닫혀 있으면서도 열려 있다는 존재방식과 흡사하다. 현존재는 보통은 존재자의 존재에 접근할 수 없다. 하지만 권태라는 존재방식 속에서, 그 닫힘 자체에 있어서, 인간은 존재자에게 건네지고 있다(ausfeliefert)는 것이다.

그리고 또 다른 깊은 권태의 특징은, “허공에 매달린 채로 있다[중지된 채로 유지된다](Hingehaltenheit)”는 것이라고 말해진다. “허공에 매달린 채로 있다[중지된 채로 유지된다]”는 것은 거기서 비활성인 채로 체류하는 것(brachliegende)이기도 하다고 얘기된다. 그것은 손에 넣지 못한 채 방치되고 있는 경작지를 의미하는 농경용어이기도 하다.

이것은 가능성을 가지면서 어떤 가능성도 현재화시키지 못하는 것으로서, 모든 가능성을 눈앞에 두는 것이기도 하다. 이런 사정은 아감벤이 잠재력에 의해 말했던 것과 강하게 겹친다. ‘깊은 권태특정한 구체적 가능성 전부를 중지시키고, 탈취하는 가운데, 근원적인 가능성(즉 잠재력)이 그 가치를 드러내는 체험[각주:31]이기 때문이다.

하이데거의 권태론은 특히 불안과의 연관에서 많은 논의해야 할 테마를 포함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당장은 아감벤의 논의에만 초점을 맞춘다면, 아감벤은 여기서의 논의에, 자신의 잠재력과 매우 가까운 어떤 것을 보고 있는가가 중요할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동시에 들뢰즈의 잠재성이나 내재라는 사고와의, 강한 결부를 시사하는 것이다. 거부함으로써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것. 거꾸로 아무것도 하지 않음으로써 가능성을 계속 갖는 것. 그것은 아감벤도 들뢰즈도 논의하는 바틀비(허만 멜빌), “하지 않는 편이 좋습니다[안 하는 게 좋습니다=안 하는 걸 좋아합니다](I would prefer noto to)라는 말과도 결부되면서, 무한한 가능성을, 모종의 무능력을 축으로서 끄집어내고 있는 것이다.[각주:32]

그러면 이런 깊은 권태는 동물성과 연관될까? 어떤 의미에서는 그럴 것이다. 이것은 현상적으로는, 동물이 환경세계속에서 사로잡힘=방심하는 것과 매우 가깝기 때문이다. 그리고 바틀비적인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는 무능력은, 들뢰즈라면 곧바로 bêtise=어리석음이라는 주제로 이어지며, 동물적인 무력함에 연관시키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감벤은 동물의 방심과 인간의 깊은 권태를 아슬아슬하게 접근시키면서 이것들을 동일시하지는 않는다.


방심에 있어서 동물은 억지해제하는 것과 직접 관계를 맺으며, 억지해제하는 것 속에 노출되고 마비됨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그런 것으로서 들통나게 하는 것은 결코 할 수 없었다. 바로 특정한 억지해제 영역과의 관계를 중지하고 비활성적인 것으로 하는 것을 동물은 할 수 없는 것이다. 그에 반해 깊은 권태는 세계가 가난하기 때문에 세계로, 동물환경으로부터 인간세계로 이행이 실현시키는 형이상학적인 조작인 것처럼 생각된다.[각주:33]


그래서 인간이란 동물성의 억지해제에 의해 성립하는 것이 아닌 것이다. 오히려 동물에게는 결코 할 수 없는 권태를 살아감으로써, 시간성의 무한의 가능성에, 그 비활성의 존재방식에 그칠 수 있는 존재자로서 그려질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인간은 동물에게는 불가능한 세계가능성을 찾아낼 수 있게 된다.

아감벤의 고찰의 귀결은, 이런 동물과 인간의 관계를 중립적으로 화해시키는 것이 아니다. 거기서 이뤄지는 것은 오히려 반대로, 이런 사정을 그대로 중지의 중지에 두는 것이다.


타원의 두 개의 초점

그러면 이런 형이상학의 근본개념들에 관한 논의는, 절대적 내재성에서의 아감벤에 의한 들뢰즈나 푸코의 독해에 무엇을 덧붙이는 것일까?

거기에서 하이데거가 맡는 역할은 명확하다. 하이데거가 생명의 사유의 계보 안에서 초월과 내재의 중간지점에 놓여 있다는 것의 의미는 열림에서 깊은 권태를 둘러싸고 제시된 매우 들뢰즈적인 내재성의 모습을 전제로 할 때에야 명확하게 드러날 것이다.

게다가 아감벤은 이렇게 파악되는 하이데거의 이중성, 즉 동물성에 있어서의 열림이면서도 돌파는 하지 않는 사로잡힘=방심, 인간에 있어서의 무능력으로서의 가능성인 깊은 권태, 대립하면서도 접하는 지점으로서 간주하는 것이다. 이렇게 묘사되는 타원 속에서, 들뢰즈와는 달리, 동물과 인간에 관해 생명 속에서의 본질적인 구분선을 탐색하는 것이 가능해진다. , 아감벤이 (들뢰즈적인 삶의 일의성에 반하여) 요청하는 벌거벗은 생명의 탐구의 다양성이 확보되는 셈이다. 이런 의미에서 아감벤이 해석하는 들뢰즈적인 내재가 갖추고 있는 불만이, 여기서 동물/인간의 분할선을 둘러싼 방식에서 다시 설정되고, 생명정치학적인 장면으로서 재파악된다.

여기서 아감벤은, 정당한 독해인지는 제쳐놓더라도, 하이데거의 생물론에서 배제와 포함을 둘러싼 자신의 논의와 가까운 것을 보고 있다. 그것은 내재를 둘러싸고 이루어지는 것인데, 인간적 초월의 편으로도, 다른 방향으로도 자리매김 되는 것일 수밖에 없다. 벌거벗은 생명은 동물성과 아주 가깝더라도, 하이데거의 권태쪽에 강하게 겹쳐진다. 무위가 지닌 가능성이 여기서는 논의의 요점이 된다.

포함과 배제를 둘러싼 아감벤의 사고는, “벌거벗은 생명을 생물학적인 논의로서 파악하는 것은 아니나, 하지만 거기서 생물성과 인간성을 역접적 연관 속에서 억누르려 하는 한, 하이데거의 시도와 아주 가깝다고 말할 수 있다. 언어나 법이라는 영역을 인정하면서, 중지에 있어서 깊은 권태를 노출시킨다는 전술은, 아감벤적인 양의성에 그대로 겹치는 것처럼 보인다. 다만 거기서 하이데거는 본래는 삶의 계보학의 중간이라기보다도 어디까지나 초월과 내재를 분할하는 선의 초월 쪽으로 기운 것으로 묘사되어야 할 인물이 아닐까? 그리고 아감벤은 하이데거와 똑같은 타원 내부에서 동거하면서도, 들뢰즈적인 내재에 가깝다는 점에서, 하이데거에 대해 약간 내재에 기우는 곳에 놓여야 할 것이다.

그러나 아무튼,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동물이라는 테마이다. 동물성을 고찰함으로써 가능해지는, 생명 속에서의 인간과 이것 이외의 존재자 사이의 분할선이다. 거기서는 동물과 인간이, 둘 다 생명이면서도, 배제와 포함을 반복하는 그 접점이 제시된다. 생명정치학의 논의가 인간의 동물화와 동시에 동물의 인간화(권리부여)와도 교차되면서 말해지는 의의도 여기에 있다.[각주:34] 인간과 동물을 둘러싼 타원, 하이데거와 아감벤이 동거하면서 두 개의 초점을 그리는 타원, 여기에 생명정치학의, 혹은 생명의 철학의 새로운 형상을 보는 것도 가능해지지 않을까? 아감벤의 들뢰즈 독해가 끄집어내는, 최대의 논점이 아닐까?


  1. 생명정치학의 측면에서는 얘기되지 않은 아감벤의 저술의 다양성에 대해서는 岡田温司, 『アガンベン読解』, 平凡社, 2011을 참조. [본문으로]
  2. Cf. Giorgio Agamben, Homo sacer : il potere sovrano e la nuda vita, Einaudi, 1995, pp.6ff. [본문으로]
  3. 푸코의 ‘고고학’ 및 ‘계보학’의 서술이 일관되게 단선적인 시간 배치에 의거하고 있지 않다는 것, 또한 ‘중지’라는 관점은 벤야민의 「역사의 개념에 대해」에서의 ‘중지상태의 변증법’에, 혹은 들뢰즈=가타리가 『철학이란 무엇인가』에서 논한 ‘부감俯瞰’이라는 관점 없는 관점과 매우 가깝다는 것 등을 고려해야 한다. 생명을 논하는 생명정치란 이런 “현실적인actual 관점”의 포기에 의해 바로 현실성이 될 수 있는 게 아닐까? [본문으로]
  4. Michel Foucault, «La vie: l’expérience et la science», in Dits et écrits, 1954-1988. tome IV, Gallimard. 1994. pp.763-776. [본문으로]
  5. Gilles Deleuze, «L’immanence: une vie …», in Deux régimes de fous : textes et entretiens, 1975—1995, Minuit 2003, pp.359-363. [본문으로]
  6. Agamben, Homo sacer, p.3. [본문으로]
  7. ibid., pp.6—7. [본문으로]
  8. ibid., p.7. [본문으로]
  9. 『호모 사케르』 2부를 참조. [본문으로]
  10. Ibid., p.127. [본문으로]
  11. 그러나 동시에 바타이유의 사유가 현대적 정치학 속에서 반복해서 다뤄지고 있다는 것을 봐도, 이런 초월을 목표로 할 뿐만 아닌 방향성, 즉 바타이유 자신이 “저열한 유물론”이라고 부른 영역을 어떻게 생각할 것이냐는 중요한 문제이기를 계속한다. [본문으로]
  12. Foucault, «La vie», p.774. [본문으로]
  13. ibid: p. 775. [본문으로]
  14. Giorgio Agamben, La potenza del pensiero: saggi e conferenze, Neri Pozza, 2005, p.386. [본문으로]
  15. Gilles Deleuze et Félix Guattari, Qu’est-ce que la philosophie?, Minuit 1991, pp.49-50. [본문으로]
  16. Agamben, La potenza del pensiero, p.393. [본문으로]
  17. ibid., pp.401ff. [본문으로]
  18. ibid., p.404. [본문으로]
  19. 그렇지만 이것에 이어진 「산보하다(pasearse)」라는 절에서, 이런 스피노자적 내재 자체에 있어서의 운동성에, 아감벤이 모종의 찬성을 보여주지 않는 것은 확실하다. 순수한 관조에 상응하는 ‘산보’에, 아감벤이 벤야민적인 산책자의 그림자를 보지 못했을리도 없다. 이 점은 아감벤 자신의 ‘애매함’을 잘 드러낸다. [본문으로]
  20. ibid., p.410. [본문으로]
  21. ibid.. p.392. [본문으로]
  22. 오히려 이 논고에서는 알프레드 자리를 끌어들여 기묘한 언어 사용으로서의 하이데거가 찬양된다. 하이데거에 관해서는 물론 『차이와 반복』에서의 각주(Gilles Deleuze, Différence et répétition, PUF, 1968, p.188) 등의 검토 재료가 있는데, 이 양자에서의 ‘생명’을 둘러싼 관계성은 아감벤에 의한 매개를 거치지 않으면 역시 사고하는 데 어렵다고 생각된다. [본문으로]
  23. Martin Heidegger, Die Grundbegriffe der Metaphysik : Welt, Endlichkeit, Einsamkeit, in Gesamtausgabe, Bd. 29/30, Vittorio Klostermann, 1983. [본문으로]
  24. 본 논고에는 직접 관련되지 않으나, 이 강의록에서의 시간론은 하이데거의 문맥에서도, 또한 그것 이외의 맥락에서도 많은 문제를 품고 있다. 특히 『존재와 시간』에서 논의되는데, 그 존재방식이 면밀하게는 기술되지 않은 “순간=찰나(Augen-blick)”이라는 주제가 “깊은 권태”라는 “시간의 사이가 길어지는 것”의 논의에 관련되어 재파악되고, 그것이 “순간의 첨단이 도망쳐 들어오는” 것으로 그려지는 점(33, 34절 등)은 시간과 순간, 현재의 본래성과 비본래성이라는 테마를 고찰할 때 간과할 수 없을 것이다. [본문으로]
  25. Giorgio Agamben, L’aperto: l’uomo e l’animale, Bollati Boringhieri. 2002, p.53. [본문으로]
  26. ibid., p.53. [본문으로]
  27. Heidegger, Die Grundbegriffe der Metaphysik, S.370-371. [본문으로]
  28. ibid., S.352. [본문으로]
  29. ibid., S.361. [본문으로]
  30. Agamben, L’aperto, pp.64-65. [본문으로]
  31. ibid., p. 70. [본문으로]
  32. 들뢰즈의 논의란 『비판과 임상』에 수록되어 있는 「바틀비 또는 상투어」이다. 아감벤은 이 책의 이탈리아어 번역본에 긴 해설을 붙여서 한 권의 책으로 냈다(Gilles Deleuze et Giorgio Agamben, Bartleby: la formula della creazione, Quodlibet, 1998). [본문으로]
  33. Agamben, L’aperto, pp.70-71. [본문으로]
  34. 인간의 동물화와 함께 동물의 인간화라는 반대 방향의 움직임도 발생하고, 거기서 ― 바로 아감벤식으로 말하면 ― 인간과 동물의 동일성과 차이의 문제가 다시 물어지고 있다는 것은, 삶을 다루는 여러 가지 논의의 구체성에 있어서 ― 동물윤리, 환경문제, 생물다양성 등 ― 이것들을 재차 형이상학적으로 사고하기 위해서도 필요한 것이리라. 이 점에 대해서는 小泉義之, 「人間の消失、動物の消失」, 『現代思想』, 2009년 7월호. ; 市野川容孝, 「動物の人間化、人間の動物化──バイオポリティクスの一断面」, 『現代思想』, 2009년 7월호를 참조. 두 논문 모두 양자의 구분이 애매해지는 교차점을 묘사한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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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 재장전 또는 긍정과 도주

: 들뢰즈·가타리의 우발성 유물론 소묘

マルクス・リローデッドまたは肯定逃走

ドゥルーズ/ガタリの偶発性唯物論素描

마츠모토 준이치로(松本潤一郎)

情況第三期第四券第十一号, 150-179

 

실체의 속성 각각은 그 자체에 의해서 사고되어야 한다.

스피노자, 윤리학1부 정리10

 

 

모순에 의하지 않는 자본주의의 서술

역사를 다시[고쳐] 쓰는 <역회전(revolution)> 

혁명적 잠재력이 어떻게 현행화되는가를 설명하는 것은 전의식적 상태에서 작용하는 인과성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어떤 정확한 순간에 실제로 발생하는 <리비도에 의한 절단>이다. 이 절단은 욕망을 유일한 원인으로 하는 분열이며, 인과관계의 단절을 의미한다. 이 단절은 실재하는 것에 밀착한 역사의 다시 쓰기를 강요하고, 모든 것이 가능해지는 기괴하게도 다의적인 순간을 산출한다(AO, pp.453-4).

* 한국어판 : 혁명적 잠재력의 현행화는 이 잠재력이 물론 포함되어 있는 전의식적 인과성의 상태보다는 어떤 정확한 순간에 리비도적 절단의 실효성에 의해, 즉 욕망을 그 유일한 원인으로 지니고 있는 분열의 실효성에 의해, 말하자면 심지어 현실계에 역사를 다시 쓰도록 강요하고 모든 것이 가능한, 이상하게 다의적인 이 순간을 생산하는 인과성의 단절에 의해 더 잘 설명된다.

L'actualisation d'une potentialité révolutionnaire s'explique moins par l'état de causalité préconscient dans lequel elle est pourtant comprise, que par l'effectivité d'une coupure libidinale à un moment précis, schize dont la seule cause est le désir, c'est-à-dire la rupture de causalité qui force à réécrire l'histoire à même le réel et produit ce moment étrangement polyvoque où tout est possible.

 

기괴하게도 다의적으로 모든 것이 가능해지는”, “인과관계로부터 단절순간이라는 혁명의 잠재력이 우리에게 강제하는 역사의 다시[고쳐] 쓰기.” 질 들뢰즈와 펠릭스 가타리의 이런 미증유의 <실험> 시도의 제1탄인 안티 오이디푸스의 근본적 주장 중 하나는 이것이리라. 그리고 이 기획은 천 개의 고원에 이르기까지 일관한다. 그렇다면, 그러나 이 어떤 정확한 순간이란 도대체 무엇이며, 언제 어떻게 우리에게 도래하는가? 여기서의 혁명(revolution)”이란 무엇을 가리키는가?

우선 다음의 것을 명심해야 한다. 여기서 얘기하는 혁명으로서의 어떤 정확한 순간이란 프롤레타리아트라는 자본주의 사회 내부의 모순을 체현하는 계급의 한 쪽이, 그 모순의 최고 단계에 도달했을 때 저절로 찾아오는 필연적 순간이 아니라는 것을. , 단적으로 말해서 여기서의 혁명의 담지자는 프롤레타리아트가 아니다. 왜냐하면 안티 오이디푸스에서 먼저 계급은 기성의 모든 신분제·계층으로부터 탈코드화된 것으로 파악되고 있으며(AO, p.303), 그 다음으로 자본주의 사회에서 이런 계급이 되는 것은 단 하나밖에 존재하지 않으며(AO, p.302), 그리고 그 이름은 부르주아”(AO, p.303)라고 간주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여기서의 혁명의 담지자는 계급의 바깥에 있는 사람들, “계급-바깥(hors-classe)”이어야 한다(AO, p.303)고 간주된다. 그렇다면 여기서 말하는 혁명의 내실은 이렇게 될 것이다, “혁명이란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정권탈취라기보다는 오히려 자본주의 사회 그 자체로부터의 자본그리고 노동도주라고.

이리하여 혁명은 이 말이 기존에 품고 있던 필연사관에 의해 뒷받침되는 뜨거운(쓰라린) 코노테이션(connotation, 함의)나중의 천 개의 고원의 화법을 구사한다면 마이너스 1”(MP, p.31)하고 있다. 즉 여기서 채용되는 입론 구성은 기본적으로 모순혁명의 원동력을 맡기는 노동자 본체론적 구상, 더 나아가 묵시록적 내지 목적-종말론적인 혁명구상에 대해 비판적인 거리를 두고 있다. 이로부터 들뢰즈·가타리를 읽는 것에 있어서는 주지의 논의, 즉 기존의 균일화된 노동자상 또는 계급상에는 포함되지 않았던, 오히려 이로부터의 일탈로 규정되는 마이너리티도주로서의 혁명의 잠재력 맡기는 논의 구성이 대척적으로 발견된다. 따라서 여기서의 혁명(revolution)”, 앞에서 인용한 인과관계로부터의 단절 = 역사의 다시[고쳐] 쓰기라는 의미에서, 역사의 역회전(revolution)”의 뉘앙스를 전면화시키게 되며, 그렇기에, 거기에 있어서는 기괴하게도 다의적으로 모든 것이 가능해진다고 얘기된다.

안티 오이디푸스의 위와 같은 논점을 감안하여, 천 개의 고원에서는 역사의 인과관계로부터 해방된 무수한 사건이 이것임 hecceite”에 기초하여 개체화”(MP, p.318)하는 양상이, 거꾸로 스스로를 확립한 상태가 고원이라고 불리게 될 것이다(MP. p.32). 그것은 역사를 구성하는 질료-소재로서 생성변화의 질료-소재를 사용하는 것(MP, p.428)에 의해 역사로부터 누출-일탈해가는 을 측량하기 위해, 질료에 형상을 덧씌우는 형상-질료도식으로부터 질료-소재의 연속적 변화에 순종하는 질료[소재]-도식으로의 논점의 이행이기도 하다(MP, pp.509-12).

이렇게 매우 중요한 물음, 모순이라는 어휘를 사용하지 않고, 어떻게 자본주의를 기술할 수 있을까?라는 물음이 도출된다. 왜냐하면 들뢰즈·가타리에게 혁명을 담당하는 사람들은 계급-바깥으로의 누출-도주선상의 벡터에 있어서 역사에로 사건적으로 출현하는 이상, 그런 사람들의 도래는 사회 내부의 모순에 의해 담보되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사회가 그 [내부] 모순들에 의해 정의된다는 주장은 잘못됐다(특히 맑스주의의 경우). 그러나 거대한 척도로 볼 때에만  그것은 참이다 [그것이 옳은 것은, 커다란 척도로 사물을 본 경우에 한정된다]. 미시정치의 관점에서 보면 사회는 그 도주선에 의해 정의되는데 이 도주선은 분자적이다”(MP, pp.263-4) On dit à tort ( notamment dans le marxisme ) qu'une société se définit par ses contradictions. Mais ce n'est vrai qu'à grande échelle. Du point de vue de la micro-politique, une société se définit par ses lignes de fuite, qui sont moléculaires.

그렇지만 이러한 맑스주의자에 대한 강한 비판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른바 맑스주의자가 동요할 필요는 전혀 없는 것 같다. 왜냐하면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이로부터 곧바로 도출되는 맑스주의자에 의한 반문은, “그러면 모순에서 유래하지 않는 자본주의(분석)란 무엇인가?”라는 대척적인 질문이어야 하며, 그리고 들뢰즈·가타리는 바로 이 물음에 응답하려고 하는 미증유의 <실험>을 시도하려 들기 때문이다. , 안티 오이디푸스, 천 개의 고원에서는 모순이 아닌 우발성”이라는 어휘로 자본주의 그리고 자본주의 하의 노동자가 기술되기 때문이다. 거기에 재생-이전된[재장전된] 맑스(Ma[t]r[i]x reloaded)가 있다. 모순이 아니라 우연에 자리잡고 자본주의 분석을 <실천>하는 맑스, “자본주의의 메커니즘에 흠뻑 빠진자라고 들뢰즈가 규정한 맑스가 있다. 또한 그렇다고 한다면, 앞의 가차 없는 비판에도 불구하고, 들뢰즈는 나중에 또 다른 어떤 인터뷰에서, “안티 오이디푸스천 개의 고원은 맑스와 맑스주의에 의해 완벽하게 가로질러진 작품입니다. 현재 저는 저를 완전히 맑스주의자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라고 말했다. 혹은 또한 인과관계로부터의 단절 = 역사의 고쳐 쓰기라는, 거기에 있어서 기괴하게도 다의적으로 모든 것이 가능해지는역사의 역회전-혁명(revolution)”을 향해서, 이런 우발성의 견지에서 행하는 자본주의 분석이, 맑스로부터 논리 필연적으로 계승되지 않으면 안 된다고 말해도 좋을 것이다. 왜냐하면 자본주의의 빛에 비춰서 모든 역사를 소급적으로 파악하는 것은 정당하며맑스가 정식화한 규칙들을 정확하게 따른다는 조건에서, 역사 전체를 자본주의의 조명 아래 회고적으로 이해하는 일은 정당하다”(AO, p.163), 또한 자본주의는 모든 사회구성체의 음화(陰畵)이다”(AO, p.180)고 간주되기 때문이다.

또한 앞서 언급한 도주와도 밀접하게 관련되어, “욕망을 유일한 원인으로 하는 분열이라는, “인과관계의 단절로서 발생하는 <리비도에 의한 단절>”, “실재하는 것에 밀착한 역사의 고쳐 쓰기를 강제하고, “모든 것이 가능해지는 기괴하게도 다의적인 순간을 산출한다는 논점을 상기한다면, “인과관계의 단절<우연성>으로서의 세계사를 기술하기 위한 조건으로서 자본주의 분석이 불가피해진다는 것도 지적해두어야 한다. 왜냐하면 무엇보다, 세계사는 우발들의 역사이지 필연의 역사가 아니며, 절단들과 극한[경계선]들의 역사이지 연속성의 역사가 아니기”(AO, p.163 et passim) 때문이며, 그리고 무엇보다 우선 자본주의 그 자체가 <우발성> 내지 <조우>라는 <사건>에 의해 생겼다고 간주되기 때문이다(AO, p.265 et passim). 혹은 초기의 자본주의는 노동자와의 조우를 기다리고 있으며, 거기에 노동자가 선행하는 시스템으로부터의라는 형태에 있어서 합류한다. 이른바 본원적 축적이란 이런 사태를 의미하는 것입니다라고 앞에서 인용한 인터뷰에서 들뢰즈가 말할 때, 안티 오이디푸스, 천 개의 고원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바로 우연-조우의 견지에서 행하는 자본주의의 작동 양태의 기술이었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아까의 역사 ()기술의 문제와 관련해, “인과관계의 단절로서의 이 절단은 욕망을 유일한 원인으로 하는 분열이라고 서술됐다는 것도 상기한다면, “욕망은 마음속의 <우발>적인 것이라는 것도 거기에는 함축되어 있어야 한다. “자본주의가 얼마나 욕망의 교차점이며, 그 하부구조, 그 경제 자체가 얼마나 욕망이라는 현상과 밀접하고 불가분한가를 알려면, 자본주의의 기원에 있는 우연성의 총량을 생각하는 것으로 충분하죠라고 들뢰즈가 말할 때,우연성욕망”, 더 나아가 자본주의의 밀접한 관계가 드러나 있을 것이다.

이리하여 점차 밝혀지게 된 것은, “모든 것이 가능해지는 기괴하게도 다의적인 순간에 의한 강제적인 역사의 다시 쓰기라는 역회전-혁명적인 사태가 발생하기 위한 평면이 이미 안티 오이디푸스에 맹아적으로나마 준비되어 있었다는 것, 또한 그 근저에 자본주의그 자체의 우발적인 탄생이 가로놓여 있으며, 이 우발성과 욕망은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다는 것, 그리고 천 개의 고원에서는 이러한 우발적 조우가 발생하는 평면이 내재평면혹은 공립평면이라고 불리며, 더 나아가 이 조우가 이른바 사건론으로서, “이것임이나 개체화같은 개념을 열쇠로 하여 세련된다는 것이 대략의 그 흐름으로서 떠오르게 될 것이다. 이러한 전체적 전망 하에서 이 글에서는 모순의 어휘가 아니라 우발성그리고 조우에 의거한, 들뢰즈·가타리의 자본주의의 작동양태, 나아가 그것에 평행선을 그리는 우발적인 세계사의 기술을 위한 준비를 하고 싶다.

그러나 그 전에, 이러한 들뢰즈·가타리에 의한 <실험>의 전단계로서, 실험에는 가설이 불가결한 이상, 그들이 세운 <가설> 혹은 <실험>에 대한 일별이 필요하다. 그리고 그때, 미셸 푸코를 경유하지 않으면 안 된다.

 

우발과 허구

 

생명의 가장 근본적인 수준에서 코드와 탈코드의 게임은 우연에 맡겨져 있다. 그것은 질병이나 결함이나 기형을 겪기 이전에 있는, 정보 시스템의 변조[교란] 내지 오인이다. 이러한 우발성 때문에 돌연변이와 진화 과정은 도출된다. 마찬가지로 이러한 우발성 때문에, 생명은 인간의 출현과 더불어, 결코 자기의 장소를 찾아낼 수 없는 생[명]체에 도달한다. 그것은 방황하고 잘못되도록 운명지어지고 있으며, 그렇기에 문제가 되어야 할 것은 특이하고 유전적인 이 잘못이다. 푸코, 생명 : 경험과 과학

Au centre de ces problèmes, il y a celui de l’erreur. Car, au niveau le plus fondamental de la vie, les jeux du code et du décodage laissent place à un aléa qui, avant d’être maladie, déficit ou monstruosité est quelque chose comme une perturbation dans le système informatif, quelque chose comme une < méprise >. À elle aussi qu’il faut demander compte des mutations et des processus évolutifs qu’elles induisent. Elle également qu’il faut interroger sur cette erreur singulière, mais héréditaire, qui fait que la vie a abouti avec l’homme à un vivant qui ne se trouve jamais tout à fait à sa place, à un vivant qui est voué à < errer > et à < se tromper >.

 

들뢰즈·가타리가 안티 오이디푸스, 천 개의 고원에서 시도한 미증유의 <실험> 및 그 준비로서 세운 <가설> 내지 <허구>를 이해하기 위한 보조선으로, 여기서 푸코가 살아 생전에 마지막으로 인쇄 허가를 내주었다고 하는 생명 : 경험과 과학의 논의를 경유하자. , 이 시점에서의 푸코의 논의로부터 소급적으로 들뢰즈·가타리의 안티 오이디푸스, 천 개의 고원의 논의 쌍을 우발-조우및 그것에 밀접한 <실험-가설>허구라는 관점에서 되돌아보는 것이 중요하다. 왜냐하면 그의 스승이라고 말해도 좋은 과학사가 조르주 캉길렘의 과학인식론의 동시대적 의의를 논한 이 논고의 끝 부근에서, 푸코는 이번 절의 서두에 인용한 대목에서, 삶이란 오인에 다름없다, 생명이란 잘못일 수도 있는 것, “오인에 맡겨져 있는 것이라고 말하기 때문이다. 생체는 우발성에 의해 횡단되고, “오류의 역량을 부여받았다. 오류가 진리와 짝을 이룬다기보다는, 오히려 이러한 짝을 창조-발명하는 것을 우리 인간이라는 삶이 어찌할 수 없는 운명으로서의 우발성이라는 점의 이해가 긴요하다. 그래서 진리를 이 근원적 오류로부터의 파생이라고 이해해야 한다. “개념이란 생명 자신이 이 우발성에 대해 주는 해답이라고 인정한다면, 오류는 인간의 사고 및 역사를 형성하는 것의 근원에 있다고 생각되어야 한다. 진위의 대립, 진위에 부여되는 가치, 사회들이나 제도들이 이 분할에 연결되어 고려하는 권력의 효과 같은 것은 모두, 생명에 고유한 잘못될 가능성에 대한 뒤쳐진 응답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오류는 약속된 완성의 망각이나 뒤늦음이 아니라, 인간의 생명이나 종의 시간에 고유한 차원을 형성하고 있을 것이다.” ‘오류로서의 우발성에서 진리의 원천을 발견하는 이러한 관점은, 물론 니체의 계보학적 사고의 연장선상에 위치되어 있을 것이다. 푸코 자신이 이 텍스트에서 니체를 인용하고 있다. 그렇지만 니체에서 보이는 이러한 진리에의 부정적인 뉘앙스가 불식된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진리란 더없이 깊은 거짓말이라고 니체는 말했다. 니체에 가까운 동시에 먼 캉길렘이라면 이렇게 말할 것이다. 진리란 생명의 긴 연대기에 있어서의 가장 새로운 오류라고 말이다. 더 정확하게 말한다면, 진위의 분할이나 진리에 부여된 가치는 생명이 발명하고 얻은 가장 특이한 삶의 양식을 형성하고 있다, 생명은 그 궁극적인 기원 이래, 오류의 가능성을 자신 속에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말이다. 캉길렘에게 오류는 생명 및 인간의 역사가 뒤얽히는, 항상적인 우연이다.” “오류-우발성을 겪고 진리를 생산하는 것이야말로 생체가 지닌 역량이다. “인간은 오류-우발성에 의해 삶을 촉발되며, 이 삶의 특이성을 해방할 수 있도록, 오류-우발성으로부터 그 삶에 있어서의 진리혹은 개념을 생산하고 벼려나간다. “오류란 생명 및 인간의 역사가 뒤얽히는, 항상적인 우연이다.” 이 말을 들뢰즈·가타리의 <실험>에 대한 헌사로 고쳐 읽는다면, 들뢰즈·가타리가 안티 오이디푸스, 천 개의 고원에서 감행한 <실험>을 준비하는 <가설> 혹은 <허구>의 필연성이 이해될 것이다. 삶은 마음속 오류-우발성에 흠뻑 젖어 있으며, 그 때문에 근저에서부터 진리-허구이다. 그리고 그 일을, 그것을 측량하는 개념과 더불어, 절대적으로 긍정해야 한다. 이 뜻을 잃어버리지 않고, 들뢰즈·가타리의 <실험>을 뒤쫓아가는 것이 중요하다.

들뢰즈·가타리로 돌아가자. 안티 오이디푸스에서 조우의 문제계로서 초점화되는 것은, 이미 언급했듯이 자본주의에서의 조우, 사유재산상품생산”, 혹은 자본가가 소유하는 변환 가능한 재화의 몇 가지 흐름자신의 노동력밖에 소유하지 못한 노동자들의 하나의 흐름”(AO, p.164), “노동자자본”, “생산자들의 흐름화폐의 흐름”(AO, p.266) 등 다양하게 표현되는 두 가지의 조우에 다름없다. 그리고 이런 두 가지 요소가 조우하는 역사적 조건으로 들뢰즈·가타리는 다음과 같은 사정을 열거하고 있다. , “생산내지 자유로운 노동의 흐름 쪽에서의, “전제군주(야만) 기계”(통사적으로는 이른바 봉건제 사회”)로부터 문명(자본주의) 기계”(이른바 자본주의 사회”)로의 누출의 과정에 있어서의, 사기업화에 의한 토지의 탈영토화, 사적 소유에 의한 생산수단들의 탈코드화, 가정과 조합의 분리에 의한 소비재의 사적 사용, 노동으로도 기계로도 사용 가능한 노동자의 탈코드화가 그것에 해당된다. 다른 한편 자본의 쪽에 있어서는, 추상적인 통화에 의한 재화의 탈영토화, 상인자본에 의한 생산의 다양한 흐름의 탈코드화, 금융자본과 공공부채에 의한 국가들의 탈코드화, 산업자본의 형성에 의한 생산수단의 탈코드화가 관찰될 것이다(AO, p.267).

최종적으로는 노동자본의 두 개의 계열로 정제할 수 있는, 이상의 다양한 흐름의 변화 탈코드화 및 그 조우에 의해 생기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나타나는 자본가, “전제군주와는 그 지위status를 달리 한다. 이 점을 들뢰즈·가타리는 전제군주 기계는 공시적이지만 자본주의 기계의 시간은 통시적이다. 자본가들은 이른바 역사를 창조적으로 구축해가는 일련의 과정에 속속 등장한다”(AO, p.264)고 표현하며, 이것은 이른바 시계열적인 역사, 즉 진보나 발전 같은 19세기적인 역사관이 자본주의에 의해 생겨났다고 하는, 그 자체로서는 항식에 속한다고 말해도 좋을 사태를 의미한다. 그러나 여기서 미셸 푸코가 말과 사물에 있어서 제시한, 인간을 가로지르는 시간”, 유한성에 기초한 노동”, “생명”, “언어의 변용의 틀 안에, 즉 푸코가 말하는 의미에서의 역사, 들뢰즈·가타리가 자본주의 그 자체를 기입하려고 하는, 또는 고쳐 쓰려고하는 안티 오이디푸스<실험>의 사정거리가, 엿보이게 될 것이다.

, 푸코에게 <역사>는 결코 시계열적인 사태의 계기(繼起)-전개가 아니라, 오히려 표(tableau)[굳이 번역한다면 표-] 내지 공간에 있어서의 미세한 균열의 발생이었음을 상기한다면, 서두에 인용한 들뢰즈·가타리의 역사의 고쳐 쓰기, 이른바 진화-발전의 시계열상에 필연적으로 발생한다고 하는, 목적론적 의미에서의 혁명을 가리키지 않았으며, 오히려 공간 내지 평면 ― 『천 개의 고원에서의 존립평면내지 내재평면 위에 있어서의 자본노동이라는 두 개의 요소의 우발적인 조우를 가리키는 것을 이해할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들뢰즈·가타리는 푸코의 뜻을 계승하고 있을 것이다. 천 개의 고원에서 비판되는 이른바 역사와는 별도의 푸코적인 의미에서의 우발적인 <역사> , 천 개의 고원에서의 사건, 여기서 이미 문제되고 있으며, 또한 그렇기에, 들뢰즈·가타리는 앞서 말한 자본주의 발생역사적 조건중 하나인 노동의 탈코드화를, 이른바 통역사적 구분에 있어서의 로마 시대에서 보는 것이라고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 로마 시대에 있어서도, 재산의 사유화로 인한 부동산의 흐름의 탈코드화, 거대한 재산의 형성에 의한 통화의 흐름의 탈코드화, 상품생산의 발전에 의한 상업의 흐름의 탈코드화, 재산 상실이나 프롤레타리아화에 의한 생산자들의 탈코드화 등의 사태가 보이는 데도 불구하고, 그것들은 전제군주 기계의 체제화에 있기 때문에 노예제를 산출하는것에 불과했다(AO, p.264)는 논점이 그것이다 그리고 이 논점에 대한 각주에는 명백히 맑스에 대한 참조가 제시되고 있다. 다른 한편 자본의 계열에 있어서의 자본주의 발생의 역사적 조건은 통역사적 시대 구분에 있어서의 봉건제시기에 이미 갖춰져 있었다고 간주되고, 사유 재산, 상품 생산, 통화들의 합류, 시장의 확장, 도시의 진전, 금납 지대·계약 임금의 출현 등 사태가 열거되고 있으며, 그리고 이것들도 또한, 오히려 봉건적 하중·연관의 강화, 더욱이 원시적인 봉건제 단계 내지 노예제의 재건조차 산출하고 있는 등 사정을 이유로서, 그 자체로서는 자본주의 기계의 등장과는 반대의 결과를 이끌고 있다고 여겨진다(AO, p.264). 이런 통역사적 원근법으로부터 이탈된 지점에 있어서 천 개의 고원에서의 고원개념이 확립되는 것은 명백하며, 이런 의미에서도 안티 오이디푸스에서 얘기되는 고쳐 써진 역사, 이른바 역사와는 다르다는 것도 명백할 것이다.

이렇게 들뢰즈·가타리가 계획하는 필연성의 역사가 아니라, 여러 가지 절단과 경계선으로 이루어진”, 비연속적인 여러 가지 우발적 사건의 역사로서의 세계사의 기술이라는 미증유의 <실험>을 준비하기 위한 <가설>적 틀이 보일 것이다. 그것이 곧 안티 오이디푸스에서의 욕망하는 기계들이 편력하는 기관 없는 신체위에서의 야만기계”, “전제군주 기계”, “문명 자본주의 기계의 서로 얽힘-접합 양식의 가설적 모델이며, 천 개의 고원에서의 영토화-재영토화-탈영토화의 한 쌍의 개념에 의해 기술되는, “추상기계의 기계적 및 집단적인 이중의 어레인지먼트에 의한, 정주/유목, 포획/도주, 국가장치/전쟁기계, 홈패임/매끈함 등등의 서로 얽힘-접합 양식의 가설적 모델이다. 또한 안티 오이디푸스에서 제시된 모델과 천 개의 고원의 그것 사이의 최대의 차이점을, 전자가 생산의 양태에 중점이 놓인 반면, 후자에서는 예술·인문과학적인 분야를 넘어선 사회·정치적인 분야, 더 나아가 광물이나 동식물, 생물의 분야도 관통하여, 넓은 의미에서의 교통내지 번역의 양태로 역점이 이동하고 있다 다만 이것은 들뢰즈·가타리가 자본주의 분석에 있어서 생산 측면에서부터 유통 측면으로 논점이 전면적으로 이동한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고 하는 점에서 찾아질 것이다. 이렇게 제시된 <가설>적 모델을, 그것이 이른바 역사<실험> 재료-소재(matériaux)로 하고 있다 그리고 그것들을 갖고서 다름 아닌 역사바깥혹은 계급-바깥으로의 누출-도주선을 찾아내려고 하는 <실험>이다 라는 점에서, 오히려 <허구> 내지 우화 만들기(fabulation)”라고 부르는 것이 적절한 것 같다. 역사는 허구따위라는 것이 아니라, <가설>로서의 <허구>를 세움으로써 이뤄지는 <실험>에 있어서, 역사 속에 무수한 조우-우발성, 혹은 고원이 발견된다는 것이, 여기서는 중요하다. , 푸코에게 개념은 우발성에 의해 생기는 <허구>였지만, 들뢰즈·가타리에게 그것은 동시에, 우발성과 조우하기 위한 <허구>이기도 하다. 우발-오류에 의해 촉발되고 세워지는 가설-허구에 의해, 거꾸로 우발적인 세계사야말로 이른바 역사의 도처에서 스캔[주사]될 수 있다고 하는, 이 상호적 관계 속에서 허구와 우발은 포착되어야 한다. 그리고 이미 말했듯이, 자본주의가 그런 세계사를 가능케 하는, <조우>로서의 출신을 갖고 있게 될 것이다.

 

노동과 자본의 조우 : 몇 가지 이론적 <가설>

방법론으로서의 질적 분할

그렇다면 이 노동과 자본의 <조우>에는, 어떤 우연성이 발견되는가? 그것에는 자본의 축적에 밀접하게 관련되며, 다음의 두 가지 시기의 존재, 즉 우선 재화가 가치를 갖지 않고 그것을 모으는 데 유리한 기회”, 구체적으로는 재산-토지의 권리증서의 축적이 이뤄지는 시기, 이어서 이러한 재화의 가격이 오르고, 산업투자에 유리한 조건 아래에서 재화를 매각하는시기의 존재가 언급되며, “산업투자에 유리한 조건으로서 “‘가격혁명’, 노동자의 과잉비축, 프롤레타리아트층의 형성, 원료자원[]에 대한 접근성, 도구·기계적 생산에 대한 호조건등이 있었다고 여겨진다(AO. pp.267-268). 따라서 여기서는 명백하게 맑스의 자본에서의 이른바 본원적 축적노동자의 과잉비축, 프롤레타리아트층의 형성에 관련하여 노동자의 상품화<역사>적 우연성의 양상에 밀접하게 논해지고 있다고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이리하여 다음의 말은 결정적이다. , “모든 우연적(contingentes) 요인이, 이러한 조우적 연결들(conjonctions)에 유리하게 작동한다. 이런 사태의 형성에 있어서 얼마나 많은 조우(rencontres)가 있었는가, 이렇게 명명할 수 없는 사태[의 형성에 있어서]! 그러나 이 조우적 연결의 효과-결과는, 바로 자본주의 생산의, 점차 깊게 미치는 통제이다”(AO, p.268). 이리하여 자본주의는 근저에서부터 우발적이며, “그러나그 생산양식을 침투시켜간다. 이런 그러나라는 이상한 접속이야말로, 자본주의는 오작동에 의해만 만사가 순조롭게 작동한다(les choses ne marchent bien qu’condition de draquer)”(AO, p.274)라는 원리를 알고 있다는 안티 오이디푸스에 있어서의 저명한 정식의 ()작동 양태에 다름없다. 그러나 그런 지적 이상으로 중요한 점은, 따라서 앞서 열거한 노동과 자본이라는 두 가지 요소의 <우발-조우>를 집요하게 강조하는 안티 오이디푸스에서의 이런 논의는, 맑스가 자본에서 논한 산업자본주의에서의 노동력의 상품화를 명백하게 내포하고 있다는 점에 있다. 달리 말하면 자본주의의 빛에 비추어 모든 역사를 소급적으로 파악하는 것의 정당성이라고 얘기될 때의 자본주의, “산업자본주의를 가리킨다고 이해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자본주의 혹은 그 절단의 정의, 즉 탈코드화하고 탈영토화한 모든 흐름의 조우적 연결은, 상인 자본에 의해서도 금융 자본에 의해서도 정의될 수 없고, 그것들은 탈코드화나 탈영토화와는 다른 흐름, 다른 요소에 지나지 않는 그런 것이기 때문이다”(AO, p.268). 그러므로 앞의 그러나 이 조우적 연결의 효과-결과는, 바로 자본주의 생산의, 점차 깊이 미치는 통제이다산업자본주의가 성립하는 역사적 <우연성-조우> “이른바 본원적 축적, “그러나필요-필연적으로 하고 있다고 말하고 있다고도 이해되지 않으면 안 된다. , 세계규모에서 반복되는 자본축적의 양태가, 아시아 등의 논의를 감안하여 본원적 축적은 자본주의의 여명기에 단 한 번만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항상적이며 또한 끊임없이 재생산된다고 명쾌하게 말해지고 있으며(AO, p.275), 이 관점은 물론 천 개의 고원에도 일관하고 있다. 안티 오이디푸스에서는 반복되는 본원적 축적이라는 논점은 기계에 의한 잉여가치인간에 의한 잉여가치이 두 가지 잉여가치가 코드가 아니라 흐름 flux’의 잉여가치를 구성한다 사이의 영원한 불일치 나중에 보는 끝없는 이윤율저하경향라는 관점에서 분석되며(AO, pp.270-6), 게다가 이러한 자본주의의 작동의 핵심에 이윤율 저하 경향을 영원화하는 반생산”(anti-production)이 기입되어 있다 따라서 반생산주의로서의 무위(des-paevrement)의 공동체”(Jean-Luc Nancy)의 비판적 재검토를 요청한다 라는 논의가 이뤄지며, 천 개의 고원에서는 이 본원적 축적이라는 폭력이, “포획장치또는 국가에 의한 이중적 폭력폭력을 겪는 대상을 산출하면서 그 폭력을 자본제의 비가시의 전제-메타수준으로 밀어 올린다 의 기제와 밀접하게 논의되고 있다(MP, pp.558-9)이라는 점을 확인해두자. “이른바 본원적 축적에 대해서는 마지막 절에서 역사와의 관계에서 다시금 논하기로 하고, 지금은 앞으로 더 나아가기로 하자.

아무튼 이렇게 여기서는 철학자질 들뢰즈의 18번이라고 해도 좋은, 본성상 상이한 두 가지 요소가 혼합되어 있는 상태를 질적으로 분할하는 기예가 가타리와의 공동작업에서도 완전하게 발휘되고 있을 것이다. 마조흐와 사드 사이에 아무런 필연적 결합관계도 발견되지 않은 듯이, 혹은 스피노자 윤리학이 서술 체계에 있어서 개체 사이에 나쁜 조우가 발생하는 일이 없었던 것처럼, 여기서도 자본제 사회에 있어서 자명하다고 간주되는 노임(salaire)” 관계에 있는 두 가지 요소, 노동력화폐-자본, “본성상의 차이를 갖고 있기 때문에 그러나 우발-조우하는 양태가 <실험>적으로 분석되고 있다고 말해도 좋다. “노동력(이라는) 상품이 가진 우발성에 기생하는 자본주의를 구성하고 있는 두 가지 요소 노동력자본을 떼어내고, 각각을 그것 자체로서 파악함으로써, 모순에 기대는 것 없는 질적 분할에 의해 자본의 맑스가 여기서 재장전되고 있다. 거기서의 맑스는 이른바 유물사관에서 해방되고, “우발성의 세계사에 있어서 자본주의를 기술하는, 나중의 천 개의 고원에서 얘기되는 의미에서의 <역사가>이다. 따라서 맑스가 어떻게 재장전되어 있는가를 보기 위해, 질적으로 분할되어 각각 독자적으로 논의되는, ① 『안티 오이디푸스에서의 코드의 잉여가치가 아니라 흐름의 잉여가치에 정위하는 자본주의의 공리계를 표현한다고 여겨지는 이윤율 저하 경향 법칙”, “화폐의 이원성의 논의를 경유한 자본-화폐”, ② 『천 개의 고원에서의 형상-질료도식이 아니라 소재-도식에 기초하여 논의되는, 들뢰즈·가타리에 의해 재장전된 맑스의 생산력과 생산관계도식의 반복으로서의 노동력을 둘러싼 논의를 일별할 필요가 있다. 이 두 가지 점을 감안한 위에서, 우발성 유물론에 기초한 재장전된 유물사관천 개의 고원에 있어서 논의되는 비신체적 형상으로서의 어레인지먼트”, “명령어등의 논점을 경유하여, “내재평면을 확립하기 때문이다.

 

1. “자본주의의 공리계의 표현으로 해석된 이윤율저하경향과 화폐의 이원성

맑스가 빠져 있는 예언”?의 하나로서 저명한(악명높은) “이윤율 저하 경향 법칙안티 오이디푸스에 있어서 들뢰즈·가타리는 자본주의의 공리계를 표현하고 있는 것으로 해석하는 것을 제창한다 이 방침은 천 개의 고원에서도 일관하고 있다(MP, pp.578-9) . “공리계란 단적으로는 코드에 있어서의 잉여가치흐름에 있어서의 잉여가치로 변용사키는 장치, 다시 말하면 자본의 출신형태로서의 화폐의 이원성(dualité de l’argent)”이며(AO, p.273), “자본주의는 화폐가 화폐를 낳고, 가치가 잉여가치를 낳을 때 출신-친자 자본이 된다”(AO, p.269). , 통념과는 반대로, “이윤율의 경향적 저하가 끝나지 않는[=일치-해소되지 않는] 것은 명백하다”(AO, p.271). 왜냐하면 자본과 노동력 사이에는, 그 어떤 공통 척도도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며, 그런 척도는 만약 그것이 있다고 하더라도 <가설>로서의 순수한 허구이다(AO, p.273). , 우선은 자본주의가 이러한 <허구> 혹은 오작동에 의한 만사형통의 기예를 속속들이 알고-이용했다는 점이, 나중에 말해지듯이 중요하다. 어쨌든 들뢰즈·가타리는 이 기괴한 사정 말하자면 영원한 이윤율 저하을 설명하기 위한 문자()”로서, 미분의 비(Dy/Dx)를 제시할 것이다. , ‘Dy’가 노동력 혹은 가변자본의 유동을, ‘Dx’가 자본 그 자체, 혹은 불변자본의 유동을 구성하고, 자본의 출신-친자 형식으로서의 <x+dx> 즉 잉여가치는, ‘Dy’‘Dx’조우적 연결(conjonction)”에 의해 생긴다고 간주된다(이상은 AO, p.270). 그래서 자본주의의 근본적인 우발성 및 그 생산양식을 침투시키는 공리계로서의 작동이, 미분의 비에 있어서 완전히 표현되고 있다고 이해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다음의 인용이 결정적이다. “경향적 저하는 극한(terme)을 갖지 않는다. 문제가 생산고의 견지에서 하는 생산의 흐름의 변화의 한계(limite)라면 미분의 몫은 계산 가능하지만, 문제가 잉여가치가 생기는 생산의 흐름과 노동의 흐름[의 변화의 한계]인 경우에는 그렇지 않다. [잉여가치], difference de natur...”(AO. p.273 강조는 인용자). 이로부터 유명한 테제, 자본주의는 자신의 끝-극한을 갖지 않는다혹은 극한을 스스로 치환함으로써 이 극한을 재생산한다라는 주장이 맑스에 대한 참조를 촉구하면서 도출된다(AO, p.273)는 것은 주지의 것이지만, 그러나 여기서도 그것의 확인 이상으로 중요한 점은, 따라서 자신의 한계를 재생산하는 자본주의 공리계의 작동으로까지 관철되는 노동과 자본이라는 두 개의 요소의 <우발-조우>, 맑스에 의한 이윤율 저하 경향을 재장전시킨/에 있어서 읽어 들였다는 점에서 찾아야 한다 이 두 가지 요소 사이에는 그 어떤 공통의 척도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그 한에 있어서, 이 두 가지 요소는 정신분석에서 말하는 바의 잘못된 만남을 하고 있다 . 문제는 지양이라는 공통척도, “‘모순이 아니라 우발성”, ‘본성의 차이에 준거한 위에서 이뤄지는 자본주의의 출신의 서술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본성의 차이에 근거함으로써, 생명으로부터 무기물에 이르기까지 관철되는 소재-도식의 연속 변화로서의 노동자의 역사가 기술 가능해진다. 그러나 그 논점으로 이동하기 전에, 이상에서 개괄한 공리계의 구체적 작동양태의 아주 짧게나마 이해하기 위해서, 계속해서 들뢰즈·가타리에 의한 포획장치로서의 화폐를 둘러싼 논의를 일별해야 한다.

노동가 자본 사이에 본성의 차이가 있다는 것의 증거로서의 두 가지 요소의 우발적 조우가, 잉여가치의 [종말]없는 발생으로서의 저하경향에 있어서도 발견되는 것으로부터 예상되고 있으며, 화폐도 또한 이러한 이원성을 표현하고 있다. , 탈코드화되고 생산수단을 갖지 못한다는 의미에서 이중으로 자유로운노동자를 노임관계 즉, 앞에서 본 미분의 비의 하나의 항인 <Dy>에 체류시키겠다는 ― 『천 개의 고원에서의 규정을 이용한다면 재영토화의 기능을 갖는 동시에 코드들의 잉여가치를 흐름(flux)”의 잉여가치로 ― 『천 개의 고원에서의 규정을 이용한다면 탈영토화하는 기능을 가진다. , 잉여가치 내지 이윤은 노동력의 가치와 노동력에 의해 창조된 가치의 차이에 의해서가 아니라 이 두 가지 흐름 사이의 통약 불가능성 그렇지만 서로에게 내재하는 이 두 가지 흐름을 표현하는 화폐(monnaie)의 두 측면 사이의 어긋남에 의해 정의된다(AO, p.283). 이러한 이원성을 들뢰즈·가타리는 한편으로는 교환가치의[/라는] 무기력한 화폐의 기호들, 소비재들이나 사용가치들에 관련된 지불수단의 흐름, 화폐와 공정구역의 생산물 사이의 11 대응관계”, 다른 한편으로는 자본의 강력함의 기호들, 융자의 흐름, 지금 여기에서는 실현될 수 없는 장기적인 어림셈 내지 예측 능력을 나타내는, 추상량들의 공리계로서 기능하는 생산미분계수의 시스템과 구별하고 있다(AO, p.271). 물론 이 재영토화의 기능, 가 탈영토화의 기능에 대응한다. 어쨌든 여기에 주지의 안티 오이디푸스의 자본주의에 대한 양의적 평가를 간파할 수 있다는 것은 명료하다. , 자본주의는 탈영토화와 동시에 재영토화를 행하는 것이며, 에 그 공리계의 작동이 제시되어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런 이원성의 장치로서의 화폐를 통제하는 것이 국가― 『천 개의 고원에서는 더 추상적으로 포획장치라고도 불린다 이며, 안티 오이디푸스에서의 이 관점은, 천 개의 고원에서의 화폐의 기원을 국가에 있어서의 세금징수에서 찾는 논의까지 일관하고 있다(MP, pp.552-3). 이러한 화폐의 이원성에 의해, 유통 측면 또는 시장에서의 이른바 교환은 반드시 화폐가 아닌 통화로서, 즉 국가라는 포획장치에 있어서 실현된다는 점에 둔감해서는 안 된다. 사족인데, 이른바 전지구화현황 분석을 위해서도, 이 논점의 파악은 최소한의 전제로 여겨진다. 거기서의 문제는 맑스의 등가교환론 내지 가치형태론을 착취(exploitation)”수탈(expropriation)” 중 어느 쪽에 밀접하게 연결시켜 이해하는가라는 양자택일로 집약되지만, 지금은 이 점을 젖혀 둔다. 자본제 내부에서는 교환은 항상 합법혹은 등가라고 (표상)된다는 점을 이해한다면, 들뢰즈·가타리가 화폐-교환을 수탈론으로서 전개하고 있는 것은 명료하다. 자본제 내부에서의 교환에 정위하는 착취론은 자본제 그 자체의 성립이라는 -바깥의 폭력의 수준에 정위되는 수탈의 측면을 간과하기 쉬운 반면, 들뢰즈·가타리의 화폐론에서는 화폐의 이원성이 고려되기 때문이다.

또한 구매력으로서의 소비재와의 11 대응의 기능만 담지할 뿐인 통화는 탈영토화된 흐름flux”회귀-환류(reflux)”로서도 파악되고 있다. , “돌연변이의 역능을 가진다(a pouvoir mutant)”라고도 형언되는 이 화폐의 이원성,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른 한편으로 통화는 환류를, 즉 이 통화의 노동자나 생산요인들(이른바 반노동일半労働日에 상당하는 소비재 인용자)에 대한 배분에 의해 구매력을 이 통화가 획득하자마자 수많은 재화와 맺는 관계를 표현하고 있다”(AO, p.282). 흐름과 환류의 서로에게 내재하면서도 통약 불가능한 관계에도 우발적인 조우가 표현되고 있다는 것은 말할 것도 없다. 이 논점은 천 개의 고원13고원 포획장치에서 일종의 집합론적 조작 마술 또는 신비라고도 불린다 으로서 다뤄지고 있는데, 거기서은 단적으로 분배나 보수로 여겨지는 한에서의 노임[급여(salaire)]은 구매라고도 말할 수 없다. 반대로 구매력은 노임으로부터 생긴다On ne peut donc même pas dire que le salaire, conçu comme répartition, rémunération, soit un achat ; c'est au contraire le pouvoir d'achat qui va en découler”(MP, p.556)고 서술될 것이다. 안티 오이디푸스에서는 이 마술무로부터(ex nihilo) 창조라고 불리며, 자본제 내부에서는 잉여가치는 완전히 합법적인등가교환으로서 나타나기 때문에 누구도 훔치지 않는다”, “누구도 소외되지 않는다, 맑스주의자를 도발하는 글귀가 적혀 있다(AO, p.283). 즉 여기서도 앞에서 언급한 포획장치에 의한 이중의 폭력이 작동하고 있으며, 그래서 들뢰즈·가타리에 있어서의 이상에서 살펴본 화폐론이 수탈에 정위하여 이뤄진다고 하는 점이 다시금 확인될 것이다. 따라서 이윤들은 수입[구매력 인용자] 창조의 흐름의 재가에 있어서가 아니라, 그로부터의 일탈(déviation)에 있어서, 그것과 나란히(côte à côte) 유출한다”(AO, p.283). 이와 같은 화폐의 이중성을 둘러싼 논점을 바탕으로, 이어서 천 개의 고원에서의 소재-도식에 기초하여 논의되는 노동력을 살펴본다.

 

2. ‘소재-도식으로 쇄신된 생산력과 생산관계

우선 들뢰즈·가타리가 완전히 맑스 다만 재장전된 주의자이며, 따라서 교환주의자가 아니라는 것(AO, pp.224-6 et passim)의 확인이 긴요하다. 거기에는 또한 악명 높은(?) 맑스의 노동가치설특히 자본13절대적 잉여가치의 생산에 있어서의 절대적 잉여가치설에 충실한 들뢰즈·가타리가 있고, 이 맑스에 대한 충실성(fidelité)”(Alain Badiou)가 겉보기에는 맑스에 대한 준거가 상대적으로 안티 오이디푸스보다 적다고 생각되는 천 개의 고원에서도 여전히 유지되고 있는 점이 강조되지 않으면 안 된다. 왜냐하면 안티 오이디푸스에서도 중요한 규정을 부여받았던 코드화, 탈코드화의 양태가, 천 개의 고원에 있어서는 이른바 좁은 의미의 인간적 틀을 넘어선, 무기물도 포함한 생명에서조차 발견된다고 여겨지는 잉여가치개념에 의해 ()규정되기 때문이다. , 생명의 돌연변이 현상을 논한 3고원 도덕의 지질학에서의 어떤 코드도 자유롭게 변이할 수 있는 다양한 보조물을 가질 뿐만 아니라, 동일한 하나의 분절적 단편(ségmentarité)[코드의 구성요소 인용자]은 두 번 복제되며, 두 번째의 복제는 자유롭게 변이할 수 있는 것이 된다 거기서 행해지는 것은 어떤 코드에서 다른 코드로의 번역이 아니라 오히려 코드의 잉여가치 혹은 파생적 커뮤니케이션이라고도 부를 특이한 현상이 생기고 있다non seulement tout code a des suppléments capables de varier librement, mais un même segment peut être copié deux fois, le second devenant libre pour la variation. sans qu'il y ait traduction d'un code à un autre (les virus ne sont pas des traducteurs), mais plutôt phénomène singulier que nous appelons plus-value de code, communication d'à-côté”(MP, pp.69-70), 혹은 또한 이른바 예술론으로서 이해되면서 11고원 리토르넬로에 있어서의, “코드 변환이 행해질 때, 거기에 있는 것은 단순히 부가가 아니라, 항상 새로운 [코드로서의] 평면 그리고 잉여가치가 성립하고 있다Chaque fois qu'il y a transcodage, nous pouvons être sûrs qu'il n'y a pas une simple addition, mais constitution d'un nouveau plan comme d'une plus-value”(MP, p.386), “생명의 장에는 아마 존립성의 이득 즉 잉여가치가 포함되고 있다Or, s i nous nous demandons quelle est l a « place de l a vie » dans cette distinction, nous voyons sans doute qu'elle implique un gain de consistance, c 'est-à-dire une plus-value (plus-value de déstratification)”(MP, p.414), “영토의 어레인지먼트는 탈코드화를 동반하며, 어레인지먼트를 촉발하는 탈영토화와 불가분하다(새로운 유형의 두 가지 잉여가치)L'agencement territorial implique un décodage, et n'est pas lui-même séparable d'une déterritorialisation qui l'affecte (deux nouveaux types de plus-value)”(MP, p.414) 등등이, 간과되어서는 안 된다. 또한 이러한 생명현상에 있어서의 코드화와 탈코드화의 착종이, “자신의 지층 위에 있어서조차 유기체는 탈영토화된다. 유기체는 유기체의 자립성을 보증하고 유기체를 이끌도록 제반 내부 환경을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다Sur sa propre strate, un organisme est d'autant plus déterritorialisé qu'il comporte de milieux intérieurs assurant son autonomie, et le mettant dans un ensemble de relations aléatoires avec l'extérieu”(MP, p.70)라고 기술되어 있는 점에도, 앞에서 언급한 푸코의 오류-우연성으로서의 생명과도 밀접하고, 생체의 이른바 근원적인 우발성이 함의되어 있다는 점의 이해가 중요하다. 왜냐하면 이러한 이른바 생명의 영토에 있어서의 잉여가치에 밀접하는 “()코드화영토화의 양태의 규정은, 더 나아가 언어나 기호계 같은 이른바 인간적 영토에까지 연속적으로 확장되어가는, 거기에서는 이러한 생체의 우발성이, “비신체적 변형으로서의 언표행위의 집단적 어레인지먼트신체의 기계적 어레인지먼트”(MP, p.112)와의 조우라고 규정되는, “날짜-사건이라는 형태에 있어서 모습을 나타내고 있기 때문인데(MP, pp.103-12), “우발적인 세계사를 기술하기 위한 우발성 유물사관에 관련된 이 점에 대해서는 나중에 논하기로 한다.

아무튼 맑스에 있어서 인간이 존재하고 노동한다는 것 자체에 있어서의 과잉을 의미했던 절대적 잉여가치, 이리하여 “()코드화영토화개념에 의해 재규정된다는 점을 확인한 뒤에, “생명으로부터 무기물까지를 관통해 연속적으로 변화하는 소재-도식에 충실하게 전개되는 들뢰즈·가타리에 의한 재장전된 생산력과 생산관계론이 이해될 것이다.

우선 어떤 코드도 자유롭게 변이할 수 있는 다양한 보충물을 가질 뿐만 아니라, 동일한 하나의 분절적 단편은 두 번 복제되고, 두 번째의 복제는 자유롭게 변이할 수 있는 것이 된다에서 분명한 것처럼, 코드의 구성요소로서의 분절적 단편은 그 자체로 변이하는 내용이며 또한 표현이다. 내용은 이미 형성된 소재 내지 질료, 표현이란 실질로서의 힘이며, 또한 각각이 그 하위 구분으로서 형식-실질의 이중분절을 겪고 있기 때문에, 내용의 형식이란 표현의 실질, 표현의 형식이란 내용의 실질이며, 따라서 소재와 힘은 서로 구성하는, 그러나 대응도 부호도 갖지 않은불가분한 것이다(MP, pp.58-9). 천 개의 고원에서의 유물론의 재장전은, 이런 이중으로 분절된 표현과 내용의 동형성에 기초하여 <실험>된다. 따라서 내용과 표현이 구별되는 경우, 그것은 형태적 내지 형상적이지 않고 ‘distinction reelle’(MP, p.59) 현실적인 구별은 스피노자 윤리학1부 정리 10 및 그것에 붙여진 비고로부터 채용되고 있다 . 생산력의 발전이 기존의 생산관계를 질곡에 빠뜨리고 생산력이 반전하여 새로운 생산관계를 내재적으로 생기게 하듯이, 표현과 내용은 존립성의 집합”, 존립평면에 있어서는 서로 반전-생성변화할 것이다. 존립평면의 집합이라는 표현은, 매우 비등질적 성분이 모여 강화되며, 형상-질료의 규칙적 연속으로 바뀌어 계층의 단락短絡, 혹은 역회전의[역전된] 인과관계가 일어나고, 이질적인 소재와 힘 사이에 포획관계가 성립하는 경우에 성립한다. 마치 기계적 계통류(un phylum machinique)[물질의 흐름에 내재하는 어레인지먼트의 연속변화 인용자], 그리고 탈지층화적 횡단성이 요소, 차원, 형상과 질료, 몰적인 것과 분자적인 것을 관통해 질료를 해방하고 힘을 포획하듯이On parlera au contraire d'ensembles de consistance quand on se trouvera devant des consolidés de composantes très hétérogènes, des courts-circuits d'ordre ou même des causalités à l 'envers, des captures entre matériaux et forces d'une autre nature, au lieu d'une succession réglée formes-substances : comme si un phylum machinique, une transversalité déstratifiante passait à travers les éléments, les ordres, les formes et les substances, le molaire et le moléculaire, pour libérer une matière et capter des forces”(MP, p.414). 거기에 있어서 소재 내지 질료는 형식 또는 형상이라는 주괴[주형]에 집어넣어지게 되는 부정형의 것이 아니라, 소재 각각이 지닌 이것임자신의 특이성에 기초한 개체화 를 따라서 형식-실질을 형성하고, 따라서 그 자신에 있어서 표현-내용의 상호 반전을 내재적으로 담당하고 있을 것이다. “중요한 것은 법칙에 복종하는 질료보다도 노모스[질서 인용자]를 가진 물질성을 뒤따르는 , 질료에 특성을 부과할 수 있는 형상보다도 다양한 정서를 구성하는 표현의 물질적 특징을 뒤따르는 것이다il s'agit de suivre le bois, et de suivre sur le bois, en connectant des opérations et une matérialité, au lieu d'imposer une forme à une matière : on s'adresse moins à une matière soumise à des lois, qu 'à une matérialité qui possède un nomos”(MP, p.508). 그리고 이른바 인간/물질의 구분, 혹은 이른바 인간의 역사를 훨씬 넘어선, 생산관계의 형상을 정초짓는 생산력의 사례로서, 매우 아름다운 금속의 역사를 말하는 대목을 반드시 인용해야 한다. 야금술은 물질을 재용해하고 재이용할 가능성을 갖고, 그래서 물질에 주괴[주형]라는 형식을 부여한다 금속의 역사는 스톡과도 상품과도 다른 이 특별한 형식과 불가분하며, 화폐가치는 이로부터 생긴다. 더 일반적으로 말한다면, ‘환원적이라는 야금술의 관념은, 준비된 물질로부터 물질성의 해방 및 구체화되어야 할 형상으로부터의 변형의 해방이라는, 이중의 해방을 표현한다 거기에는 다양한 형상의 계기로 바뀌어 연속 발전하는 형상이, 다양한 물질의 변화로 바뀌어 연속 변화하는 물질이 있다Et pour finir, la métallurgie a la possibilité de refondre, et de ré-employer une matière à laquelle elle donne une forme-lingot : l'histoire du métal est inséparable de cette forme très particulière, qui ne se confond ni avec un stock ni avec une marchandise ; la valeur monétaire en découle. Plus généralement, l'idée métallurgique du « réducteur » exprime la double libération d'une matérialité par rapport à la matière préparée, d'une transformation par rapport à la forme à incarner. Jamais la matière et la forme n'ont paru plus dures que dans la métallurgie ; et pourtant c'est la forme d'un développement continu qui tend à remplacer la succession des formes, c'est la matière d'une variation continue qui tend à remplacer la variabilité des matières”(MP, p.511, 강조는 인용자). 생산력, 혹은 잉여가치의 변주로서의 “()코드화영토화에 기초한 이런 금속-화폐형태론적 관점이, 물질/인간의 구분을 넘어서, 자본과의 우발적 조우를 준비하는 이중으로 해방된노동자에 관해서도, 연속 혹은 일관되어야 한다. 이로부터 임금노동자의 기원, ‘국내의 노동자에게 정위하는 정주혹은 트리[나무]적 관점과는 상이한, ‘이민혹은 유목의 리좀적 관점으로부터 논해져야 할 것이다.

 

우리는 항상 이 정의로 되돌아간다 기계적 계통류는 자연인공[의 구별 인용자]과는 무관한 인공적인 동시에 자연적인 물질성이며, 특이성과 표현 특징을 담지하는 한에서, 운동하고 흐르며 변이하는 물질이다. 이 정의로부터 다음과 같은 명백한 귀결들이 생긴다. 즉, 이런 흐름으로서의 물질만을 뒤따를[추적할] 수 있을 뿐이다. 필시 따르다[좇다]라는 동작은 그 장소에서도 가능하며, 대패질을 하는 장인은 자리를 바꾸지 않고서도 나무와 나무의 섬유를 뒤따른다. 그러나 이런 뒤따르기 방식은 더 일반적인 과정의 특수한 시퀀스일 뿐이다. 왜냐하면 장인은 또한 다른 방식으로 뒤따르도록, 즉 필요한 섬유를 가진 나무를 그것이 있는 장소에까지 찾으러 가도록 강제되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으면 그것을 가져오게 하는 수밖에 없지만, 이 경우는 상인이 반대방향에서 궤적의 일부를 담당하기 때문에 장인은 스스로 그 궤적을 만드는[이동하는] 것을 절약했을 뿐이다. 그러나 장인은 동시에 재료를 채집하는 것이 아니라면 장인으로서 불충분하다. 재료 채집자와 상인과 장인을 분리시키는 조직[분업체제의 확립 인용자]이란 이미 장인을 지체장애로 해서 노동자로 만드는 것이다. 그래서 장인은 물질의 흐름 즉 기계적 계통류를 뒤따르도록 정해졌다고 정의할 수 있을 것이다. 장인이란 물질의 흐름이다. 물질의 흐름을 뒤따라가는 것은 이동하는 것, 방랑하는 것이다. (MP, pp.509-10).

Nous retombons toujours sur cette définition : le phylum machinique, c'est la matérialité, naturelle ou artificielle, et les deux à la fois, la matière en mouvement, en flux, en variation, en tant que porteuse de singularités et de traits d'expression. Des conséquences évidentes en découlent : c'est que cette matière-flux ne peut être que suivie. Sans doute cette opération qui consiste à suivre peut-elle se faire sur place : un artisan qui rabote suit le bois, et les fibres du bois, sans changer de lieu . Mais cette manière de suivre n'est qu'une séquence particulière d'un processus plus général . Car l'artisan est bien forcé de suivre aussi d'une autre manière, c'est-à-dire d'aller chercher le bois où il est, et le bois qui a les fibres qu'il faut. Ou, sinon, de le faire venir : c'est seulement parce que le commerçant se charge d'une partie du trajet en sens inverse que l'artisan peut s'épargner de faire lui-même le trajet. Mais l'artisan n'est complet que s'il est aussi prospecteur ; et l'organisation qui sépare le prospecteur, le commerçant et l'artisan, mutile déjà l'artisan pour en faire un « travailleur ». On définira donc l'artisan comme celui qui est déterminé à suivre un flux de matière, un phylum machinique. C'est l'itinérant, l'ambulant. Suivre le flux de matière, c'est itinérer, c'est ambuler.

 

여기에서는 이른바 자본주의 하의 노동자와 구별되는 장인, ‘이동체로서 물질에 순종한다고 정의된다. 물론 이런 자본주의 이전以前의 상태는 자본주의의 빛에 비추어 소급적으로파악될 수 있는 우발적 세계사에서 발견된다. 그런 한에서 여기서의 장인은 소급적으로 그리고 소급적으로만 파악된 노동자의 전신前身이다. 이로부터 물질의 흐름에 순종하는 것으로서의 장인의 이동과는 상이한 두 번째 이동이 구별될 것이다. , “농민 또는 목축민이 계절이나 토지의 빈곤화에 부응해 토지를 바꾸는” “이동”, “그러나 계절이 바뀌고 숲이 재생하고 토지가 회복되면 출발점으로 회귀하도록 미리 정해진 회전을 행하는듯한 이동을 행하는 이동목축민이 그런 두 번째 이동을 담당한다고 간주되며, 그리고 상인도 또한 상품의 다양한 흐름들이 출발점과 도착점의 회전에 종속하고 있는 한에서 이동목축민les flux marchands sont subordonnés à la rotation d'un point de départ et d'un point d'arrivée ( aller chercher-faire venir, importerexporter, acheter-vendre)이라고 간주된다(MP, p.510). 여기에서는 자본주의의 기원상인자본에서 찾아내려고 하는 관점에 대한 비판이 내포되어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이미 인용했듯이, 세계사를 소급적으로 파악하는 것을 가능케 하는 자본주의 산업자본주의에 의해 정의된다라는 <가설>로부터 들뢰즈·가타리는 논의를 개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안티 오이디푸스에서의 이 관점은, 천 개의 고원에 이르기까지 틀림없이 일관하고 있다는 것을 강조해두자. 여기에서는 모든 것이 소재-의 상에 있어서 파악되어야 한다. 그리고 이 상의 파악에 기초하여, “이동목축민이 진정한 이동자가 되는 것은, 토지나 목초의 회로가 피폐하고, 회로가 너무도 확대됐기 때문에 회로로부터 흐름이 일탈해갈 때뿐이다Le transhumant n'est donc itinérant que par voie de conséquence, ou ne le devient que quand tout son circuit de terres ou de pâturages est épuisé, et quand la rotation est tellement élargie que les flux échappent au circuit”(MP, p.510)가 이해되어야 한다. 즉 이 회로가 자본제에 있어서의 생산-소비-분배의 회로의 알레고리라는 것은 명료하다. 따라서 여기서 얘기되는 진정한 이동자상인이다, 자본주의라는 회로너무 확대된때에 이 회로로부터 일탈’, 심지어 도주해가는 생산력으로서의 흐름혹은 기계적 계통류-물질로서의, 자본주의 하에 있는 프롤레타리아트일 것이다. 말하자면 진정한 노동자란 물질의 흐름의 한복판에 있는 이동체라고 하는 정의가, 앞의 인용으로부터 논리적 혹은 오히려 <비정확>하게(MP, p.31) 도출되어야 한다. “회로가 너무 확대됐기 때문에 회로로부터 흐름이 일탈해간다는 것은 바로 흐름으로서의 물질에 대해이뤄지는 장인의 정의에 다름 아니기 때문이다.

또한 이런 이동체라는 의미에서의 프롤레타리아트의, 현재에 있어서의 자본제라는 결과로부터 볼 때 여전히 상실된 채인 다름 아닌 <가설> 혹은 <허구>로서의 기원, 들뢰즈·가타리는 이른바 전쟁기계와도 결부시켜 이해하고 있다. 유목론 혹은 전쟁기계라는 제목의 12고원에서의 국가의 전쟁을 총력전으로 하는 요인은 자본주의, 즉 전쟁에 관련된 자재·산업·경제에 투자되는 고정자본 및 육체적 정신적 인구로서 투자되는 가변자본과 밀접하게 결부시킨다”(MP, p.524)고 하는 구절 및 그것에 덧붙여진 폴 비릴리오의 속도와 정치에의 참조를 촉구하는 각주(101)에서 그것은 명백하다. 그러나 그것에 덧붙여 14고원 매끈함과 홈패임에서의, 맑스 자본의 자본주의 하에서의 이른바 추상노동, ‘전쟁기계홈패임혹은 국가장치로의 회수로서 논의되고 있는 점이 중요하다. 거기에는 명백하게 맑스의 절대적 잉여가치가 숨쉬고 있다. ,

 

추상노동, 그 효과의 배가, 그 분업화 같은 문제가 최초로 출현하는 것은 핀공장에 있어서가 아니라 공공사업의 작업현장 혹은 또한 군대의 조직화(인간의 규율훈련뿐만 아니라 무기의 공업생산에 있어서도) 등에 있어서이다. 전쟁기계는 아마 최초로 홈패임화되고, 효과에 있어서는 배가하며, 분업화 가능한 추상적 노동시간을 산출하는 것이 됐다. <노동>의 물리적 사회적 모델이 국가장치의 발명으로서 국가장치에 속하는 이유는 두 가지이며, 우선 첫째로 노동은 어떤 잉여의 성립에 의해서 처음으로 출현한다, 즉 스톡으로서의 노동만 존재할 뿐이며, 노동은 (엄밀한 의미에서) 이른바 잉여노동과 더불어 개시된다는 것, 둘째로 노동은 시공간의 홈패임화라는 보편적인 조작·자유활동의 예속화·매끈한 공간의 폐절 등을 행하는 것이며, 국가의 본질적 기획인 전쟁기계의 정복이 노동의 기원이며 수단이 된다는 것이다. (MP, pp.611-2).

Ce n'est pas dans la fabrique d'épingles que se posent en premier lieu les problèmes du travail abstrait, de la multiplication de ses effets, de la division de ses opérations : c'est d'abord sur les chantiers publics, et aussi dans l'organisation des armées (non seulement discipline des hommes, mais production industrielle des armes). Si bien que la machine de guerre a peut être été la première à être striée, à dégager le temps de travail abstrait multipliable dans ses effets, divisible dans ses opérations. Le modèle physico-social du Travail appartient à l'appareil d'Etat, comme son invention, pour deux raisons. D'une part, parce que le travail n'apparaît qu'avec la constitution d'un surplus, il n'y a de travail que de stockage, si bien que le travail (à proprement parler) commence seulement avec ce qu'on appelle surtravail. D'autre part, parce que le travail effectue une opération généralisée de striage de l'espace-temps, un assujettissement de l'action libre, une annulation des espaces lisses, qui trouve son origine et son moyen dans l'entreprise essentielle de l'Etat, dans sa conquête de la machine de guerre .

 

이리하여 맑스의 자본에 의한 자본제에서의 추상노동으로서의 과잉노동론은, 이른바 매끈한 공간에서의 자유로운 활동홈패임화하고, (과잉)노동을 전인격적으로 착취 즉 수탈하는, 혹은 오히려 포획하는 양태 앞서 본 이중으로 발휘되는 폭력, “전쟁기계의 홈패임화에 입각해 얘기된다. 이로부터 대차적対遮的으로 전쟁기계는 맑스/엥겔스의 독일 이데올로기에서의 교역·전쟁을 포함한 이른바 <교통(Verkehr)> 형태를 담하는 탈코드화와 탈영토화의 첨단에 의해 정의되, ‘소재-도식에 구현되는 구체적인 어레인지먼트로서 작동하는 추상기계’(MP, p.636)이다.

이런 관점에서 자본136불변자본과 가변자본에 있어서 맑스가 전개한 기계론이, 앞서 언급한 기계도 또한 잉여가치를 산출한다라는 안티 오이디푸스에서 이미 논의됐던 사태(AO, pp.275-8)의 연장선상에서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거기에서 기계과거의 / 죽은 노동의 보존과 전송을 관장하는 장치라고 맑스는 말했다. 이것에 현재 시점에 있어서의 인간-노동자의 산 노동”(이라는 원래부터 잉여일 뿐인 노동)이 부가됨으로써, 잉여가치가 산출된다. ‘산 노동에 의해 과거의 / 죽은 노동억지로 되살리거나, 혹은 산 노동죽은 노동의 접속에 의해 잉여가치가 생긴다. 과거의 죽은 시간 혹은 노동을 재생시키고 착취하기 위해서만 산 노동은 동원된다. ‘산 노동은 그래서 그 자체로는 무가치하다고 말해도 좋지만, 다른 한편 그것 없이 착취는 수행될 수 없다, 다시 말하면 잉여가치는 어디에서 생기는가라는 위치 결정이 불가능하다는 사태가 생긴다. 천 개의 고원에서는 이 논의를 받아, 맑스의 근본적 성과는, 잉여가치는 위치 결정 불가능하다는 점의 해명 및 기계가 그 자체 잉여가치를 산출하고 자본의 유통이 가변자본과 불변자본의 구분을 무효화한다는 예지, 이렇게 두 가지 점에 있다고 평가하고 있다(MP, p.613). 또한 이런 맑스를 바탕으로 하여, 이제 산 노동은 더 이상 필요치 않으며, “기계에 의한 잉여가치만으로 자본주의가 매끈한 공간을 창조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상태, 즉 자본이 절대속도에 도달한 상태가 찾아왔다고 하는 것이 천 개의 고원에서의 현황 인식이다(MP, p.614). 거기에서는 이른바 냉전붕괴 이후에 전면화된 감시사회’, ‘전지구화’, ‘남북전쟁이나 걸프전’, 나아가 동시다발테러같은 사건에 대한 예언적 서술이 엄청나게 발견되지만, 그것들은 모두 사후적으로만 속속들이 알게 되는 것이며, 여기서는 젖혀 두고 묻지 않는다. 여기서 문제시 되어야 하고 소급적으로 ()기술되는 우발적 세계사, 아래에서 개괄한 자본과 노동의 조우에 잇어서 성립하는 것이며, 이로부터 <재장전된 유물론사관> 구상이 전망된다.

 

긍정과 도주 : 우발성의 유물사관을 위해 

각각의 속성의 양태는 그것이 양태가 되고 있는 속성 하에서 신이 생각되는 한에 있어서만 신을 원인으로 하고, 신이 어떤 다른 속성 하에서 생각되는 한에 있어서는 그렇지 않다.

스피노자, 윤리학2부 정리6

 

노동력을 포함한 여러 상품들의 생산-유통-()생산이라는 자본주의의 원환을 완결한 것으로 보지 않고, 이 원환을 자본과 노동의 우발적인 조우를 기점으로서 기술하는 것. 이러한 안티 오이디푸스, 천 개의 고원에서의 기획에, 『『자본을 읽자에 수록된 에티엔 발리바르의 역사유물론의 근본 개념에 대해논문이 크게 기여하는 점이 우선 확인되어야 한다. 이미 본 이윤율의 영원한저하 경향 법칙자본주의의 공리계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으로 해석된 한에서의 으로서의 코드의 잉여가치흐름의 잉여가치로의 변용이라는 논의 그 논거는, ‘노동력자본사이에는 공통 척도가 없다는 점에서 찾아졌다 도 발리바르에 의거하여 이뤄진 것이었지만(AO, p.271), 이것에 덧붙여 “<잠재적으로는(virtuellement)> 별개로 존재하고 있자유로운 노동화폐-자본이라는 두 개의 요소의 조우는 일어나지 않을 수도 있을 것이다(aurait pu ne pas se faire)”라는, 본고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문장에 이어서 곧바로 이뤄지는 두 요소에 대한 언급, 요소의 한쪽은 낡은 사회 신체를 구성하는 농지구조의 변용에, 다른 한쪽은 이 낡은 신체의 무수한 모공 속에 난외-여백적으로(marginalement) 존재하고 있는 상인과 고리대금을 경유하는, 완전히 다른 계열에 의존하고 있다”(이상은 AO, p.266)가해진 각주(76)에서 인용되는 발리바르가 결정적이다. 이하에서 보는 들뢰즈·가타리에 의해 인용되는 발리바르의 논문의 해당 대목은 물론 4. 이행의 이론을 위한 요소들“1. 본원적 축적, 한 가지 전사(前史)”에서의, 자본과 노동의 조우를 둘러싼 맑스의 고찰에 대한 주석의 일부분이다.

 

자본주의의 구조가 지닌 통일성은, 한번 구성되면 자신의 배후에서는 찾아낼 수 없다[배후로는 되돌아가지는 않는다](ne se retrouve pas en arriere d’elle) (필요한 것은) 이것들의 조우적 연락(leur conjonction)의 결과에서 출발해 [소급적으로] 규정 [한에서의] 요소들과, 이런 결과들과는 그 개념에 있어서 무관한 왜냐하면 결과는 다른 생산양식의 구조에 의해 정의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요소들 각각의 역사를 그 한복판에서 사고되어야 하는 역사 분야와의 사이의 조우(la rencontre)가 이미 산출되고 있으며, 또한 엄밀하게 사고되고 있는 것이다. 선행하는 생산양식에 의해 구성된 이런 역사 영역에 있어서는, 그 계보가 추적되는 이런 요소는, 정확하게는 난외-여백적 상황, 즉 비결정적인 상황만 갖고 있을 뿐이다. [‘(필요한 것)’은 들뢰즈·가타리에 의한 보충. ‘조우’, ‘조우적 연결의 강조도 들뢰즈·가타리의 것 인용자]

 

여기서 발리바르가 말하는 것은 자본주의의 구조는 자신의 통일성을 자본주의의 전사에서는 갖지 못하고, 통일성은 자본과 노동이라는 두 개의 요소조우적 연결이 요소들과 이런 요소들 각각의 역사를 사고해야 할 역사 영역과의 사이의 조우에 있어서 획득됐지만, 다만 이런 요소들은 이 조우적 연결의 결과로부터 소급적으로 찾아낼 수 있는 것이며, 또한 결과와 이것들 각각의 역사를 지닌 요소들은 개념적으로는 아무런 관계도 없기 때문에 노동자본자본주의의 구조에 있어서 파악되는 것이기 때문에 , 이런 요소들은 역사적으로 비결정적인 상황밖에는 갖지 못하며, 따라서 자본주의의 전사로서의 이른바 본원적 축적자본주의의 구조의 통일성이 부여되고 있는가에서 보이는 현재에 있어서도 부단하게 재생산되고 있다는 것이다. 즉 이 전사는 자본주의의 통일성에 있어서 필요하고 불필요한, 배제되기 위해서만 소환되는 난외-여백이며, 난외-여백으로서의 전사혹은 비결정적 상황, 노동과 자본의 <조우>가 발생하는 역사의 영역일 것이다. 그리고 들뢰즈·가타리는 이 <조우>, ‘자본주의의 구조로부터 소급적으로 발견되는 세계사속의 도처에서 발견하려고 한다. 그리고 이런 <조우>가 발생하는 상황을 구조에 있어서 소급적으로 파악하려고 하는 관점의 제시에 있어서, 발리바르와 들뢰즈·가타리에 있어서 공유되는 것은, 스피노자의 이른바 인과성여기서는 필연사관 내지 목적론적 사관을 가리킨다고 생각해도 좋다 비판이며, 주지하듯이 그것은 알튀세르파에 있어서는 칸트파 정신분석의 무의식과 관련해서 무의식은 그 효과-결과에 있어서 실재한다고 하는 테제로 변주되고 있으며 무의식의 징후가 구조에 있어서의 전사의 발견으로서, 계급투쟁-개입의 계기가 된다 또한 들뢰즈에 있어서는 표현표출도 유출도 아닌 표현에 기초한 종합적 방법의 문제계에 있어서 정제되는데, 여기서는 들뢰즈·가타리의 우발적 세계사와 관련되는 한에서의 스피노자를 언급하고자 한다.

윤리학1부 정리 10 “실체의 속성 각각은 그 자체에 의해 사고되어야 한다비고에서는, 속성 각각이 그 자체에 의해 사고되는 것이 현실적인 구별이다 이미 말했듯이 이 현실적 구별천 개의 고원에 있어서 표현내용의 구별로서 나타난다 라고 규정되고 있다 속성 각각이 그 자체에 의해 사고되는영역이 천 개의 고원에서의 내재평면이다 . 속성자본노동이라는 자본주의의 구조를 구성하는 요소로 파악하는 것이 허용된다면, 이런 요소각각의 현실적인 구별에 의해, (아직 그것이라고 동일시[규정]되지 않는 그런 요소들의) <조우>의 소급적으로 동일시[규정]되는 역사적 요소가, 그런 요소들에 있어서 파악됨으로써, “자본주의의 구조가 갖는 통일성, “이런 요소들 각각의 역사를 그 한복판에서 사고해야 하는 역사 영역과의 사이에 있어서만 성립한다는 것이 제시될 것이다. “자본주의그것에 비추어 세계사가 소급적으로 파악될 수 있다 를 성립시키는 노동자본전사<조우>로부터 뒤집어서, 더 소급적으로 세계사의 전역에 이런 전사<조우>를 찾아낸다는 구상에 들뢰즈·가타리가 말하는 우발적인 세계사는 기초하고 있으며, 그렇기에 들뢰즈·가타리가 천 개의 고원에 있어서 집요하게 비판하는 이른바 역사, 이런 의미에서의 전사와는 구별되어야 하는, 그리고 이 전사, 단서로부터도 목적으로부터도 일탈한 강도의 상태를 가리키는 고원’, 혹은 사물 각각의 이것임에 기초한 개체화-사건이 발생하는 내재평면이라고 불리는 것이라고 풀이되어야 한다. 그것은 인과성에 근거한 시계열적인 사태들의 연쇄가 아니라, 안티 오이디푸스에서 서술된, 자본주의에 의해 소급적으로 파악되는 우발적인 세계사이다. 거기에 있어서 특히 중시되는 것이 비신체적 변형행위로서 상황에 개입하는 명령어이며, 이런 명령어들은 날짜혹은 사건으로서, 역사상에 출현한다 19231120일 독일에서의 신화폐교부 포고, 혹은 레닌의 191774. 이 집단-언표적 어레인지먼트, 혹은 사건, 이른바 자본제사회에 내재, 혹은 평행적으로 일어나는